조글로로고
발해 대조영 후손들이 경북 경산에 모여사는 이유는…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5월25일 07시35분    조회:135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태씨 집안 남성 142명의 얼굴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대조영 후손들은 머리 앞과 뒤가 발달해 있는 등 특징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6일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태재욱(75)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이 60㎡ 남짓한 건물 앞에 섰다. 지금은 터만 남은 사찰 상현사에서 쓰던 낡은 토담집이다. 단청을 수놓은 벽과 기둥, 서까래엔 금이 쩍쩍 갈라져 있고 깨진 기왓장 사이에선 잡초가 자라 있었다.

태 회장이 자물쇠를 풀고 창호문을 열어젖히자 어두컴컴한 방 안에 영정사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해시조 대조영 황제(?~719)의 영정. 영정의 크기는 170㎝가 넘었지만 건물이 너무 좁아 영정은 제삿상 뒤에 놓여 있는 처지였다. 제삿상 위로는 제례에 쓰이는 술잔과 촛대가 올려져 있었다.
발해 대조영의 표준영정이 모셔진 사당에서 후손인 발해왕조제례보존회 태재욱 회장이 분향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차지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던 고대국가 발해. 그곳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대조영을 기리는 재실은 황제 영정을 모셨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했다. 영순태씨 43세손인 태재욱 회장은 창호문의 자물쇠를 다시 걸어 잠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전해 내려오는 족보로 보나 발해왕궁터에서 발굴되는 유물로 보나 발해는 우리 역사가 분명한데도 발해의 유산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은 처참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앞장서 발해마을을 알리기 위해 벽화도 그리고 홍보물도 만들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태 회장은 "황제 영정을 시골 구석의 낡고 좁은 건물에 모셔놓아 후손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조영의 영정이 봉안된 곳은 '발해마을'이다.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 집안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만주와 연해주를 지배하던 발해의 후손들이 이주한 지역 치고는 꽤나 남쪽이다.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 발해가 멸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세기 후반 멸망했다. 발해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대장군 태금취(太金就)를 중시조(中始祖)로 삼은 영순태씨 일족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피난하면서 경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 바로 국내 유일의 태씨 집성촌인 발해마을이다. 지금은 40여 가구에 60여 명 정도가 산다. 주민 중 80%가량이 태씨 집안 사람이다.
지난 16일 주민들이 마을회관 옆 대조영 벽화 앞에 모였다. 프리랜서 공정식

영순태씨가 어째서 대씨인 대조영의 후손일 수 있느냐는 의문도 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영순태씨의 태(太)는 큰 대(大)와 서로 통용되는 글자"라고 했다. 크다의 의미인 '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획을 하나 추가해 '태'로 썼다는 설명이다. 태 회장은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했다"고 말했다.

태 회장은 "1592년 송백리에 터를 잡으신 분이 태순금 할아버지다. 주역을 공부해 세상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던 태순금 할아버지는 송백리가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하면서 터를 잡았다"면서 "여러 차례 일어난 국란에도 이곳은 멀쩡했고 태풍 사라와 매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도 피해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 발해마을엔 곳곳에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대조영이 말을 타고 들판을 누비는 벽화도 3군데에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집집마다 봉황이 그려진 문패도 걸어뒀다. 해동성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의 작품이다. 

태영철(63) 송백2리 이장은 "마을 알리기에 나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관과 역사공원을 반드시 조성하고 마을에 풍부한 대나무를 활용해 산책길도 만들어 사람들이 여행 오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태 이장은 "역사관에는 발해의 역사를 알리고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삼으려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의 허점에 대해 지적하는 자료를 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5년부터는 춘분과 추분에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도 지내기 시작했다. 제사를 지내는 날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순태씨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 영순태씨와 협계태씨 등 태씨는 전국적으로 6000명쯤 된다고 전해진다. 태 회장은 "대조영 후손들이 고려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왕조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시조 제사로 작아졌다"면서 "지금이라도 시조에게 직접 제를 지내는 왕조 제사 형식을 갖추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 발해마을에서 태씨 후손들이 대조영 황제의 향사를 지내는 모습. 안쪽에 대조영의 표준영정이 보인다. [사진 경산시]

제사에 내걸리는 표준영정엔 독특한 사연도 숨어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태씨 집안 남성들의 얼굴이 이 영정에 스며 있어서다. 표준영정을 만들 때 모두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특징을 분석해 영정에 녹여냈다. 이 작업엔 석 달 정도가 걸렸다. 우선 182㎝ 떨어진 거리에서 105㎜ 망원렌즈로 정면과 측면, 45도 비스듬히 기울여 얼굴 사진을 찍었다. 한 명당 5장씩 142명을 찍어 모두 710장의 사진을 자료화했다. 이 사진들을 계량화해 한국인 남성 표준얼굴과 300~500군데 기준을 놓고 대조했다. 

그렇게 표준얼굴에서 벗어나는 특징들만 추출해 얼굴을 만들고 이를 민두상으로 조각했다. 태씨 가문 남성은 평균 한국인 남성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얼굴박사'라고 불리는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 소장이 진행했다. 서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낸 조용진 소장은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해부학 권위자다. 조 소장은 "대조영의 실제 생김새가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대조영 후손들의 얼굴 특성을 분석해 표준영정을 만들었다"면서 "태씨 집안 남성 후손들의 얼굴을 종합 분석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걸 기초로 권희연 숙명여대 교수가 영정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현재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조 소장은 "용모를 만드는 유전자는 그 수가 적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잘 물려진다"며 "이런 방식으로 얼굴을 만들면 그 가문 사람들도 대부분 수긍한다"고 말했다.
발해 대조영의 흉상을 후손인 발해왕조제례보존회 태재욱 회장이 닦고 있다.프리랜서 공정식
장군복을 입은 대조영 흉상과 태재욱 회장. 경산=김정석기자

발해마을 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태형준(22)씨는 "마을 주민 모두가 발해의 옛 전통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발해마을은 앞으로 대조영 왕릉을 마을 안에 재현할 계획이다. 태 회장은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 5월 2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발해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한 되 퍼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태 회장은 "몇 해 전 대조영 황제 추모 향사를 지낼 때 한 유림이 '영정이 좁은 건물 안에 갇혀 제삿상 위로도 못 올라가고 있으니 국가 기운이 떨어져 온갖 악재가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며 "앞으로 대조영 황제가 좋은 곳으로 모셔져 이 나라에도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산=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월리 발해마을 위치. 자료: 네이버지도


태씨 집안 남성 142명의 얼굴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대조영 후손들은 머리 앞과 뒤가 발달해 있는 등 특징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6일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태재욱(75)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이 60㎡ 남짓한 건물 앞에 섰다. 지금은 터만 남은 사찰 상현사에서 쓰던 낡은 토담집이다. 단청을 수놓은 벽과 기둥, 서까래엔 금이 쩍쩍 갈라져 있고 깨진 기왓장 사이에선 잡초가 자라 있었다.

태 회장이 자물쇠를 풀고 창호문을 열어젖히자 어두컴컴한 방 안에 영정사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해시조 대조영 황제(?~719)의 영정. 영정의 크기는 170㎝가 넘었지만 건물이 너무 좁아 영정은 제삿상 뒤에 놓여 있는 처지였다. 제삿상 위로는 제례에 쓰이는 술잔과 촛대가 올려져 있었다.
발해 대조영의 표준영정이 모셔진 사당에서 후손인 발해왕조제례보존회 태재욱 회장이 분향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차지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던 고대국가 발해. 그곳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대조영을 기리는 재실은 황제 영정을 모셨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했다. 영순태씨 43세손인 태재욱 회장은 창호문의 자물쇠를 다시 걸어 잠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전해 내려오는 족보로 보나 발해왕궁터에서 발굴되는 유물로 보나 발해는 우리 역사가 분명한데도 발해의 유산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은 처참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앞장서 발해마을을 알리기 위해 벽화도 그리고 홍보물도 만들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태 회장은 "황제 영정을 시골 구석의 낡고 좁은 건물에 모셔놓아 후손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조영의 영정이 봉안된 곳은 '발해마을'이다.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 집안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만주와 연해주를 지배하던 발해의 후손들이 이주한 지역 치고는 꽤나 남쪽이다.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 발해가 멸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세기 후반 멸망했다. 발해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대장군 태금취(太金就)를 중시조(中始祖)로 삼은 영순태씨 일족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피난하면서 경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 바로 국내 유일의 태씨 집성촌인 발해마을이다. 지금은 40여 가구에 60여 명 정도가 산다. 주민 중 80%가량이 태씨 집안 사람이다.
지난 16일 주민들이 마을회관 옆 대조영 벽화 앞에 모였다. 프리랜서 공정식

영순태씨가 어째서 대씨인 대조영의 후손일 수 있느냐는 의문도 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영순태씨의 태(太)는 큰 대(大)와 서로 통용되는 글자"라고 했다. 크다의 의미인 '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획을 하나 추가해 '태'로 썼다는 설명이다. 태 회장은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했다"고 말했다.

태 회장은 "1592년 송백리에 터를 잡으신 분이 태순금 할아버지다. 주역을 공부해 세상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던 태순금 할아버지는 송백리가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하면서 터를 잡았다"면서 "여러 차례 일어난 국란에도 이곳은 멀쩡했고 태풍 사라와 매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도 피해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 발해마을엔 곳곳에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대조영이 말을 타고 들판을 누비는 벽화도 3군데에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집집마다 봉황이 그려진 문패도 걸어뒀다. 해동성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의 작품이다. 

태영철(63) 송백2리 이장은 "마을 알리기에 나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관과 역사공원을 반드시 조성하고 마을에 풍부한 대나무를 활용해 산책길도 만들어 사람들이 여행 오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태 이장은 "역사관에는 발해의 역사를 알리고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삼으려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의 허점에 대해 지적하는 자료를 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5년부터는 춘분과 추분에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도 지내기 시작했다. 제사를 지내는 날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순태씨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 영순태씨와 협계태씨 등 태씨는 전국적으로 6000명쯤 된다고 전해진다. 태 회장은 "대조영 후손들이 고려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왕조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시조 제사로 작아졌다"면서 "지금이라도 시조에게 직접 제를 지내는 왕조 제사 형식을 갖추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 발해마을에서 태씨 후손들이 대조영 황제의 향사를 지내는 모습. 안쪽에 대조영의 표준영정이 보인다. [사진 경산시]

제사에 내걸리는 표준영정엔 독특한 사연도 숨어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태씨 집안 남성들의 얼굴이 이 영정에 스며 있어서다. 표준영정을 만들 때 모두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특징을 분석해 영정에 녹여냈다. 이 작업엔 석 달 정도가 걸렸다. 우선 182㎝ 떨어진 거리에서 105㎜ 망원렌즈로 정면과 측면, 45도 비스듬히 기울여 얼굴 사진을 찍었다. 한 명당 5장씩 142명을 찍어 모두 710장의 사진을 자료화했다. 이 사진들을 계량화해 한국인 남성 표준얼굴과 300~500군데 기준을 놓고 대조했다. 

그렇게 표준얼굴에서 벗어나는 특징들만 추출해 얼굴을 만들고 이를 민두상으로 조각했다. 태씨 가문 남성은 평균 한국인 남성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얼굴박사'라고 불리는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 소장이 진행했다. 서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낸 조용진 소장은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해부학 권위자다. 조 소장은 "대조영의 실제 생김새가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대조영 후손들의 얼굴 특성을 분석해 표준영정을 만들었다"면서 "태씨 집안 남성 후손들의 얼굴을 종합 분석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걸 기초로 권희연 숙명여대 교수가 영정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현재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조 소장은 "용모를 만드는 유전자는 그 수가 적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잘 물려진다"며 "이런 방식으로 얼굴을 만들면 그 가문 사람들도 대부분 수긍한다"고 말했다.
발해 대조영의 흉상을 후손인 발해왕조제례보존회 태재욱 회장이 닦고 있다.프리랜서 공정식
장군복을 입은 대조영 흉상과 태재욱 회장. 경산=김정석기자

발해마을 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태형준(22)씨는 "마을 주민 모두가 발해의 옛 전통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발해마을은 앞으로 대조영 왕릉을 마을 안에 재현할 계획이다. 태 회장은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 5월 2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발해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한 되 퍼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태 회장은 "몇 해 전 대조영 황제 추모 향사를 지낼 때 한 유림이 '영정이 좁은 건물 안에 갇혀 제삿상 위로도 못 올라가고 있으니 국가 기운이 떨어져 온갖 악재가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며 "앞으로 대조영 황제가 좋은 곳으로 모셔져 이 나라에도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산=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월리 발해마을 위치. 자료: 네이버지도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08
  •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일본에 맞서 법적 투쟁을 벌였던 '불령선인(不逞鮮人)', 2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았던 한 의사(義士)의 이야기다.   &...
  • 2017-05-30
  • 태씨 집안 남성 142명의 얼굴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대조영 후손들은 머리 앞과 뒤가 발달해 있는 등 특징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6일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태재욱(75)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이 60㎡ 남짓한 건물 앞에 섰다. 지금은 터만 남은 사찰 상현사에서 쓰던 낡은 토담집이...
  • 2017-05-25
  • 머리에서 '보물급' 고려 불경이 나왔다   남원 실상사 건칠불좌상 머리 부분에 있었던 불경.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전북 남원 실상사 극락전에 안치된 조선시대 건칠불(乾漆佛) 좌상의 머리 안에서 14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불경이 발견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와 불교문화재연구소는...
  • 2017-05-24
  • [동아일보] 5세기 월성 성벽서 인골 2구 출토… 발치 끝에선 제기 추정 토기 4점 간지 ‘병오년’ 적힌 목간 나와… 법흥왕때인 526년 확인되면 삼국시대 最古 목간으로 기록 터번 쓴 서역인 모양 토우도 발견 경북 경주시 월성 서쪽 성벽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인골 2구(위쪽 사진). 5세기 신라인들은...
  • 2017-05-17
  •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흑룡강신문=하얼빈) 나무 수(樹)는 그의 이름에 들어있는 돌림자의 글자였다. 박씨 마을에서 전하고 있는 돌림자는 도합 20자, 박수붕(朴樹鵬, 53세) 씨는 열한 번 째 항렬이었다. 박씨 마을의 생존자 항렬에서 가장 윗세대라고 한다. 마을의 박씨는 현재 14대손으로 ...
  • 2017-05-05
  • 문화재청, 도난 사실 공개…소재 확인된 국새는 7점뿐 [태조 금보]고궁박물관이 소장 관리하고 있는 태조금보. 2011.01.11 [문화재청 제공] 최근 도난 사실이 공개된 '조선왕보'(朝鮮王寶)의 이미지. 거북이 모양이며, 은으로 만든 뒤 도금했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옛 국새(國璽...
  • 2017-02-28
  • 【서울=뉴시스】함안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 출토 목간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경남 함안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 23점이 보존처리를 마쳤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1991~2016년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을 발굴, 목간 308점을 출토했다. 17차 조사는 2014~2016년 이뤄졌다. 이들 목간은 신라...
  • 2017-01-04
  • 임진왜란 당시인 1594년 3월 명나라 칙사인 담종인이 왜군의 꾐에 빠져 조선군은 왜군과 싸우지 말라는 취지로 쓴 ‘금토패문’(禁討牌文)의 전체 내용이 확인됐다. 당시 명나라 군대는 평양성에서 왜군에 크게 패한 후 일본 측과 강화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이순신 연구가인 노승석 ...
  • 2016-12-28
  • [김경상의 고조선 단군루트를 가다(27)] 북진시 이성량 패루 글로벌이코노믹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경상의 '한민족의 시원-고조선 단군루트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한류문화인진흥재단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김경상 작가는 1990년부터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세계 100여곳을 방문해 지난 ...
  • 2016-12-09
  • 조선시대 갑옷 어땠을까  《‘부산행’을 택했다. 최종 목적지는 부산 금정구에 있는 ‘한국의 전통 갑주’(대표 최항복)였다. 한국의 옛 갑주(甲胄·갑옷과 투구)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택한 곳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 전시관에서는 조선 갑주를 볼 수는 ...
  • 2016-08-23
  • 진주 재령 이씨 종가 노비모임… 喪 부조 내용-계원 이름 기재 “피지배층 한글 널리 사용 입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경남 진주시 재령 이씨 종가의 고문서 더미에서 확인한 최초의 한글 계 문서. 이 집안 노비와 마을 평민들이 썼다. 부조 내용을 적은 치부(위 사진)와 계원들 이름을 적은...
  • 2016-06-28
  • 뼛조각 이용해 3D작업 거쳐 복원   6세기 초 신라시대 경주에 살던 여성의 얼굴 모습은 어땠을까.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는 "연세대·이화여대·성균관대·신라문화유산연구원 등과 공동으로 신라시대 여성 유골을 이용해 1500년 전 신라시대 여성의 얼굴 모습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8일 밝...
  • 2016-06-09
  • “남정네만 의병하면 무슨 수로 하오리까.” 의병활동에 앞장섰던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의사. 윤 의사는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896년 단발령을 발표하자 여성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야 한다며 ‘안사람 의병가’를 비롯해 ‘의병군가’ &...
  • 2016-05-06
  • 서울종로구 삼청동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진행하는 '하피첩, 부모의 향기로운 은택' 특별전.   하피첩은 전남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이 1810년 부인 홍 씨가 보내온 낡은 치마를 정성스레 잘라 만든 작은 서첩이다. 하피란 '붉은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다산이 부인의 치마를 아름답...
  • 2016-05-05
  •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이순신 장군 처럼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도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이번 편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장수 '김충선'의 이야기다.   김충선은 159...
  • 2016-04-29
  • 韓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日목조반가사유상 첫 공동 전시 5월 24일 국립중앙박물관서 개막 한국의 지존(至尊)과 일본 지존의 만남. 한·일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우리나라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 국보 주구지(中宮寺) 소장 목조반가사유상이 처음으로 함께 전시된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 2016-04-21
  •   일본이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고 공언하더니 끝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를 약탈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없애려 하였고 자유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나는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가지고 대한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는데 스티븐스가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천조하며 우리...
  • 2016-03-23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남창(南昌), 이 도시는 중국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고장이다. 남창을 모른다고 하면 수부로 소재(所在)한 강서성(江西省)은 물론이요, 중국 대륙의 사람이 맞느냐고 의심할 정도이다. 사서에 한 페이지로 기록될 만큼 아주...
  • 2016-01-19
  •      (흑룡강신문=하얼빈) 1,300년 전에 생긴 일이다. 복건성(福建省) 녕덕(寧德) 북쪽의 곽동산(霍童山)에 신라의 승려가 찾아왔다. 그의 법명은 원표(元表)였다. 원표는 훗날 반도에 선종(禪宗)이 처음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한 연기(緣起) 설화로 유명한 승려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에 따...
  • 2016-01-0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