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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9)-서전서숙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8월16일 00시00분    조회: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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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서숙 옛터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쪽 구석에 두아름 되는 비술나무 한그루가 름름히 서있다. 비술나무에는 ‘서전서숙 기념나무’라는 패쪽이 걸려있는데 패쪽에는 이런 패문이 씌여져있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 재래의 구학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학교교육에로 첫걸음을 떼였는바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조선족 신학교육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 뿌리 내린 이 나무는 력사의 견증으로 리상설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해가고 있다.

1906년 룡정에 설립된 서전서숙

기념나무 곧바로 뒤에 정자가 있는데 정면 웃모서리에 ‘리상설정(李相卨亭)’이라는 네글자가 새겨져있다. 정자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 쏘련홍군동북해방 기념탑과 심련수 시비가 세워져있고 그 중간에 바로 자연석으로 다듬은 서전서숙 옛터 유적지 기념석비가 세워져있다. 석비정면에 ‘서전서숙’이라는 네글자가 한자(汉字)로 새겨져있고 반듯이 놓여진 다른 돌에 아래와 같은 비문에 새겨져있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요 민족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開塾 하였다.

1995년 4월 15일

룡정 3.13기념사업회

오른쪽 첫 사람 김약연

4월 4일(2004년). 일요일이면서 청명날이여서 그런지 교정은 유난히 조용했다. 조무래기 몇이 운동장 저쪽에서 무슨 장난에 심취되여있는지 쪼크리고 앉아 재잘거릴 뿐이였다. 정자의 콘크리트바닥에 아무렇게나 터버리고 앉은 전임 룡정시 문련주석 김재권선생은 고즈넉한 교정을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다가 자신이 펴낸 룡정시 관광지점 안내서 제1권《유서깊은 해란강반》을 펼치더니 당시의 서전서숙을 찍은 사진을 가리킨다.

깔끔한 초가 앞마당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총총히 걸어나오는데 포도넝쿨로 보이는 바자 기둥에 ‘瑞甸书塾’이라고 새긴 간판이 보기 좋게 걸려있는 사진이였다.

김약연의 가족사진

“서전서숙은 중국 조선인 지역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신학 사립학교인데 비문과 패문에 새겨진 바와 같이 1906년 ‘헤그밀사사건’ 때 ‘돌아오지 않은 밀사’로 이름을 떨친 저명한 반일 민족지사 리상설선생과 갈라놓고 말할 수 없지요. 리상설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조선 충청북도 진천고을 덕산에서 태여났는데 조선 왕조의 부승지(副承旨)로 리조참의(吏曹参议)를 지낸적 있는 리룡우의 양자로 들어가 리희영, 리시영, 려조현 등과 리제촌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후에는 류린석에게서도 학문을 배웠습니다.”

김재권선생은 박 밀듯 리상설 지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일지사 리상설

리상설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1905년 ‘을사매국조약’ 이 강제로 체결될 때 리조 의정부의 참찬이였다. 그는 고종(高宗)의 고문인 헐버트박사와 사귀면서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고 구미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지식도 습숙(习熟)했으며 천주교, 불교, 유교 등 종교 철학과 천문학, 지리, 고등수학, 법학 등도 습득하여 당시 학계의 권위자로 되였다. “20세 때 벌써 비범한 재주를 보여주어 ‘문행남하위관(文行南下蔚官)’이라는 찬송까지 듣게 되였다. 그 후 그는 승정원 비서감, 비서랑, 성균관교수, 성균관 관장, 탁지부 재무관 등 관직을 지냈다. 그는 고종에게 일제의 침략을 배척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였다. 그래서 당시 ‘광무가지(光武嘉之)’ 라는 말까지 세상에 전해여진 반일의사였다.”(일목《조선족지구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반일학교 서전서숙》)

1904년 6월, 리상설은 동지들과 함께 대한협동회를 조직, 회장 직무를 맡았다. ‘대한협동회’의 회장단은 탄탄한 독립의사들로 무어졌는데 부회장은 ‘헤그밀사사건’ 때 화란 헤그에서 일제의 작간으로 제2차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거절당한 후 이에 격분하여 자결(화병으로 사망했다는 일설도 있다) 한 리준이였다. 총무에 정운복, 평의장에 리상재, 서무부장에 리동휘, 편집부장에 리승만, 지방장에 량기탁, 재무부장에 허위였다.

1910년 룡정 보통학교에서 수업하고 있는 학생들

“일제가 조선을 강박하여<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던 1905년 11월에 리상설선생은 의정부 참찬으로 발탁되였는데 곧바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옥에 갇히기도 했지요. 일제는 이등박문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통감부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이 망국의 위기를 만회할 수 없다고 생각한 리상설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만회해보려고 민족 독립의사들을 모이게 한 후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김재권선생은 정자의 천정에 그려져있는 리상설선생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말끈을 계속하여 풀었다.

그번 모임에서 민족 독립의사들은 해외에다 민족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할 것을 결정, 구체 지방을 북간도 룡정촌으로 하기로 했다. 룡정은 조선인들이 집결된 곳이기에 반일 교육을 진행하기 편리할 뿐만 아니라 북으로는 로씨야와 가까이 있어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편리했고 조선과는 두만강 하나를 사이 두고 있어 조선과 래왕하기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리상설 등을 선봉으로 해외로 나가기로 했다. 1906년 4월 18일(음력) 리상설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가산을 처리하고 리동녕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청도에 도착, 그 길로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리상설과 리동녕은 정순만(즉 왕창동), 황달영(즉 전공달), 김우용(즉 김동환), 려조현(즉 려준), 박정서(즉 박무림), 홍창섭등을 만나 연변에 나가 교육진흥사업을 밀고 나가기로 협상했다.

그들은 그 해 10월에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나 룡정촌에 와서 자리 잡은 후 리상설의 자금으로 룡정 기독교 회장 최병익의 새로 지은 8간집을 사서 ‘서전서숙’을 창립하게 되였다.

반일민족 교육의 요람

학교 경비의 대부분은 리상설선생이 개인재산을 털어 해결하였다고 한다. 초대 숙장은 리상설이 맡고 교원으로는 리상설, 려조현, 김우용, 황달영이 맡았으며 정순만, 리동녕 등이 구체 운영을 맡았는데 제일 처음 학생22명을 받아들이고 반일을 취지로 한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숙에서는 학생을 갑, 을 두반으로 나누었는데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급반이였다.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들로는 력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등이였다. 리상설은 직접《산술신서》상, 하권을 편집하여 갑반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황달영은 력사와 지리과를, 김우용은 초급반의 산술과를, 려준은 한문, 정치학, 법학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다 열렬한 반일 민족운동가들이였기에 모든 수업에서 반일 애국사상을 관철하는 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 반일투쟁중심의 하나인 명동학교

서전서숙의 교육이 일제에 대한 비할 바 없는 증오로 충만되였음을 1907년 9월 16일 통감부 간도파출소 소장사이또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황제가 양위하였다는 소식이 이곳(연변)에 전하여오자 교직원들과 년령이 많은 학생들은 모두 슬피 울었다. 그중 왕창동(정순만교원)이 더욱 심하였는데 그는 옷을 찢고 모자를 땅에 팽개치면서 분개해하였다.”

《간도 서전서숙과 산실록》에도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헤그 만국회의에 조선대표들을 참가시키지 않기로 하였다는 비보가 우리 학교(서전서숙)에 전하여오자 전교의 교직원, 학생들은 대성통곡하였다.”

현규환선생은 자신의 저서에서 서전서숙의 교육정신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동척간행〈간도사정(间岛事情)〉기사중에 당시 통감부는 1907년 봄 륙군 중좌 사이또스에지로와 사무관 시노다지사꾸 등을 밀행케 하여 간도파출소의 예정지 및 기타의 정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행은 룡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의 주도자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리상설은 산책을 하려고 문을 나서려 하다가 이 자들의 온 뜻을 묻게 되였는바 일행은 상업시찰도중에 들렸다고 하였다. 때는 점심시간이였으므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더운 물과 그릇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교위원들은 빌려줄 수 없다 하여 랭랭히 이를 거절하고 리상설의 경위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일행은 할 수 없이 강역에 가서 강물로 목을 추겨가며 식사를 끝냈다. 당시 이들의‘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하였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간도문제의 회고>를 쓴 사이또의 수행 사무관 시노다지사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청사를 앉힐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하여 한 학교에 들렸는데 교장으로 보이는 조선인 신사가 불손한 태도로 우리 일행이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불손한 태도를 취하던 신사가 바로 우리 나라를 놀래우고 또한 리태왕의 퇴위를 반대하던 리상설임이 판정되였다.”

1907년 4월 고종왕의 밀서를 갖고 리상설의 동생 리상익과 리준이 리상설을 찾아왔다. 밀서의 내용은 5월에 열리게 되는 화란의 수도 헤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리준, 리위종(로씨야 주재공사 리범진의 아들)과 함께 수석 특사로 참가하라는 것이였는데 고종의 친필밀서였다. 리상설은 리준, 리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로씨야에 가서 로씨야 주재 공사 리범진과 상의한 끝에 로씨야의 니꼴라이황제와 련계하여 로씨야 대표의 알선으로 만국회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헤그에 이른 이들은 일제의 작간으로 회의 참가를 거절당했다. 이에 격분한 리준은 자결로 반항했다.

“리상설은 그 길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각국을 역방하다 다시 울라지보스또크로 돌아가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습니다. 1910년 권업회를 설립하여 사업진흥에 애쓰면서 하바롭쓰크로 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여 사무쳐오는 통분으로 침식을 잃고 지친 끝에 병든 몸을 코디스크로 옮겨 신음하다가 1917년 음력 2월 9일, 눈을 못 감고 천추의 원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재권선생의 비통에 찬 목소리다.

리상설은 서전서숙을 떠나면서 숙장을 려준에게 맡겼다. 려준은 김우용, 황달영, 박정서 등과 함께 계속하여 서전서숙을 운영해나갔다.

그 해 8월,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룡정에 세워졌다. 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는 곳 마다에서 간섭, 저애했다. 지어는 회유정책으로 보조금을 지불하겠으니 합작하여 운영하자고 하기도 했다. 이에 서전서숙에서는 단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련이어 들이닥치는 경제난과 일제의 부단한 간섭으로 1907년 9월 경 페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로씨야로 갈 목적으로 룡정을 떠나 훈춘현의 탑도구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에서 1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비장한 졸업식을 올린 후 3개반 74명을 졸업시켰다.

각지의 반일학교들

서전서숙 운영자들은 합작하여 학교를 운영하자는 사이또의 제의를 단연 거절하고 학교 교사를 팔아버렸다. 1908년 사이또는 방매한 서전서숙을 사들여 친일학교인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서전서숙의 졸업생과 일부 교원들은 연변 각지에 흩어져 근대 과학문화와 반일 민족사상을 전수하는 사립학교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친일교육을 반대하고 수구적인 구학서당을 개혁하면서 일제의 문화침략에 대항해나섰다.

1930년 12월 명동학교 졸업사진

1908년 서전서숙 교원 박정서와 졸업생 김학연, 최기학 등은 명동에 가서 김약연 등을 설복하여 구학 서숙인 규암재(圭岩斋)를 개혁하고 명동서숙을 설립하였으며 국자가 서쪽과 룡동에서는 서전서숙 출신인 리병휘 등이 교편을 잡으면서 창동서숙을 창동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리동춘, 김하석, 김립, 윤해, 구춘선, 계봉우, 장기영 등에 의하여 소영자에 길동기독학당이 설립되였다. 길동학당은 원래 반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정법과와 중학부 그리고 부속소학교와 녀자야학부를 설치하였는데 학생은 모두 100여명이였고 합숙제를 실시하였다. 나중에 경제난으로 정법과와 중학부를 페지하고 속성 사범과로 개편하였다. 길동학당은 그 후 1914년에 광성학교로 개칭되였다. 1907년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리진호, 김리택, 송창회, 서성권, 문경 등은 창동학교를 설립하였다. 연길시 소영향 민흥촌 와룡동에는 1935년에 창동학교를 기념하여 세워진 ‘사은 기념비’가 지금도 건재해있다. 1912년 화룡현삼개사(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후저동에서 김성래, 김윤승에 의해 사립 정동중학교가 설립되였다.

1912년 전후 북간도 지방에서는 사립 청파학교(화룡현 호천포), 사립 덕흥학교(지신사 영암촌), 사립 장동학교(덕신사 장동촌), 사립 영신학교(룡정촌) 등 반일 사립학교가 우후죽순마냥 설립되였다. 1916년 일본측 조사에 따르면 그 시기 조선인 학교수는 182개였고 총학생수는 3,836명이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928년에 북간도 지방에는 사립학교가 211개나 있었는데 은진중학교(1917년 7월에 설립되고 1920년 후에 중학부를 증설), 명신녀자중학교(1920년 6월), 일광학교(1920년 8월), 동흥학교, 동흥중학교(1921년 4월), 영신중학교(1921년 6월), 해성소학교(1921년 8월), 대성중학교(1921년 10월) 등이름난 학교들도 이 시기에 설립되였다.

“서전서숙은 페교되였지만 서전서숙에서 양성해낸 매 한점의불꽃들은 그 후 연변 각지에 흩어져 이 같이 반일 민족학교를 설립하면서 연변의 광범한 청소년들에게 근대 과학지식과 반일민족사상을 전파하는 중견인물로 되였지요.”

김재권선생은 서전서숙 기념석비와 서전서숙 기념나무를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 말한다.

길림신문/《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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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백산‘정계비’ 청나라 강희황제는 일찍부터 《청일통지(淸一統志)》를 편찬하여 청나라경역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물론 청나라—조선 변계가 두만강, 압록강이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상류지역은 지형이 복잡한 데다가 인가까지 없어 그 분계가 명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두 강 상류에서 조선사람들이 청...
  • 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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