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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련군의 조선족장병들(남만편)ㅣ중공반석현위 제1임 서기 박근수 - 1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3월9일 16시23분    조회: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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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
 
본지는 올해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5돐을 경축하면서 2년반 동안 련재했던 항일전문연구가 리광인 선생의 <중국혁명 속의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을 이어 <항일련군의 조선족 장병들(남만편)>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저 한다. 본편은 당년 가렬처절했던 남만의 항일무장싸움터에서 피흘려 싸운 조선족 당공작일군들과 장병들의 영웅형상을 처음으로 전방위적으로 체계적으로 부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의 뜨거운 지지와 관심을 기대한다.
 
 
동북항일련군의 조선족장병들(남만편)
 
중공반석현위 제1임 서기 박근수
 
1
 
1930년 6월 반석현 반동구 곽가점(磐东区郭家店)에서 박봉을 책임자로 하는 중공반석현림시위원회가 탄생하였다. 림시현위는 중공만주성위의 비준과 성위 민족사업조 조장 료여원의 지도로 조직되면서 현위서기를 따로 선출하지 않고 성위 민족사업조의 지정으로 조선족 박봉을 책임자로 내세웠다. 림시현위 산하 반동(磐东), 반북(磐北) 2개 구위와 40여명 당원동지들은 모두 조선족이였다. 그렇다면 반석 림시현위와 40여명 당원동지들을 이끄는 책임자 박봉인가, <항일련군의 조선족 장병들(남만편)>은 련재의 첫편을 요즘 처음으로 정리한 박봉 전기로 하면서 나름대로 박봉의 발자취부터 추적하여보기로 한다.
 
박근수의 둘째 사위, 연변대학 전임교수 최후택(崔厚泽) 교수의 관련 제공자료에 따르면 박봉은 원명이 박근수(朴根洙, 1903-1970)이고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阿吾地)에서 태여났다. 박근수는 아버지 박시겸(朴时谦, 1854-1923)과 어머니 김종해(金钟海, 1874-1948)의 넷째 아들로 이 세상에 오면서 철모르던 어린 시절을 고향 아오지에서 보내였다.
 
 
박근수 사진(1942년, 최후택 제공)
 
박시겸은 결혼 이듬해인 1887년에 맏이 박근성(朴根星, 즉 박영)을 안고, 1887년에 둘째 박근춘(朴根春)을 보게 되였다. 그 아래로 줄줄이 딸이 넷인데 가난한 살림살이는 그중 셋을 휘몰아가고 겨우 박진신(朴真信) 하나만을 남겨주었다. 후에 넷째 박근만(朴根万)이, 다섯째 박근수가 태여나고 그 아래로 막내 박근하(朴根夏)까지 아들 부자를 이루니 아들애만 다섯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지럽기만 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게 시해된 을미사변이 터지더니 1904년에는 중국 동북 최남부에서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독립국가 대한제국(1897년 10월-1910년 8월)은 일제놈들의 철제 아래 허덕이기 시작한다. 이듬해 1905년에는 일제에 의해 통감부 설치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강압적인 <을사륵약>이 체결된다. 반도의 반일감정은 고조되면서 전국적인 의병투쟁이 곳곳에서 터져 오른다.
 
두만강변의 반도 최북단지구도 무사하지 않았다. 그 때 18살이고 사숙에서 한학을 배우던 박영은 결연히 학업을 팽개치고 의병항쟁에 나섰다. 그렇게 박영은 경흥주둔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하는 두차례 전투에 뛰여들고 의병모금활동에 나서다가 적들의 주의를 끌게 된다. 1908년에 박영은 아버지 박시겸과 같이 일경에 체포되여 두달 동안 옥살이하면서 갖은 시달림과 고초를 겪어야 했다.
 
2
 
나중에 건덕지를 잡지 못한 일제가 그들 부자를 풀어주지만 감시는 따라붙었다. 뒤미처 1910년 8월 22일 또 강제적인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고만다. 박영은 아버지 박시겸과 토의하고 일제통치가 닿지 않는 두만강 북안으로 이사하기로 결단한다. 그때가 1910년 초겨울, 박시겸과 맏이 박영은 박씨네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가만히 고향땅을 벗어나 북행길에 올랐다. 그 때 아버지 박시겸이 56세라면 박근수는 겨우 7살내기 어린이다.
 
1910년 초겨울 박씨네 일가가 자리를 잡은 곳은 두만강 북안의 화룡현 사광사 삼동포(三洞浦). 삼동포는 청 광서년간(1875~1908)에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고 해방후 원 연길현 광개향 광종촌(光开乡光宗村)과 선구(船口)촌 사이 서북으로 올리 뻗은 광종촌(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의 한 골짜기로 한개 마을이 아닌 상동포, 중동포, 하동포 3개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박씨 일가가 자리잡은 마을이 이 3개 마을중 어느 마을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박씨네 가족사를 보면 박영은 화룡현 삼동포에서 사립학교(박근수는 사립광종학교 출신)를 꾸리며 반일활동에 나섰고 1915년 왕청현 봉오동에 가서 반일활동에 뛰여들기도 하면서 줄기찬 반일무장투쟁에 나선다. 그 사이 박씨가족은 박영의 뜻에 의해 왕청현 대감자에 이사했다가 남봉오동(오늘의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의 고려툰)과 화룡현 덕신사 화전자(오늘의 룡정시 동성용진 구룡촌) 광지바위로 옮겨 앉게 된다. 박근수도 가족을 따라 대감자와 남봉오동, 광지바위 등지에 생의 발자취를 남기였다.
 
맏형 박영은 봉오동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최진동이 꾸린 반일무장단체─군무도독부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1920년 6월 7일의 봉오동전투의 지휘관중 한명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1920년 10월말 이후에는 군무도독부와 더불어 왕청현과 북만의 밀산현을 거쳐 원동의 이만시(자유시라고도 함)로 전이했다가 러시아 볼셰비키당에 가입하여 조선인홍군지휘관, 극동민족쏘베트위원회 위원과 주석으로 활동한다.
 
1923년에 박씨일가는 화전자 광지바위를 떠나 다시 화룡현 삼동포로 돌아왔다. 그해 박근수의 아버지 박시겸이 세상을 뜬다. 아버지의 후사를 마친 후 박영의 네동생들인 박근춘, 박근만, 박근수, 박근하는 맏형 박영을 따라 맏형이 활동하는 원동지구로 활동지대를 옮기였다. 그들 박씨형제들이 원동으로 간 시간은 서로 다르다. 박씨가족사는 박근춘은 1923년 이전에, 박근만은 1924년에 원동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후택 교수가 제공한 박근수 친필자서전에 따르면, 박근수는 21세부터 22세 시절 조선에 가서 농사일을 하다가 23세 때 쏘련 이만신농평(伊万新农坪)으로 가서 계속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여기 21세와 22세는 1923년과 1924년을 가리키고, 23세는 1925년을 가리킨다. 1925년은 쏘련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시기였다.
 
3
 
쏘련 원동지구로 간 박씨형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박영을 보면 러시아 볼셰비키당 당원이고 조선인홍군부대 지휘관으로 조선인 군사총지휘 리용과 더불어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 7차례 쟁탈전에서 불멸의 위훈을 세운 영웅인물이다. 1922년 10월 백파군이 원동지구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일본군이 전부 물러간 후 박영은 신생한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 즉 쏘련의 극동민족쏘베트위원회 위원, 주석으로 활동한다.
 
그러던 1924년 6월 중국 광주에 황포군관학교가 창설되고 혁명군대가 조직되였다는 신선한 소식이 전해졌다. 광주는 중국민주주의혁명의 중심지, 책원지로 부상했다. 1926년 가을에는 이미 광동으로 가서 국민혁명군 포병대 대장으로 뛰고 있는 전우 리용의 편지를 받고 쏘련에서 만난 두번째 안해 류성희와 두 동생들인 박근만, 박근수를 데리고 광주에 가 황포군관학교에 들어선다. 박근수는 자기의 친필 자서전에서 그들 삼형제는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 편입되여 몇개월의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밝히였다.
 
박영을 선두로 하는 박씨가문의 네사람은 황포군관학교내에서 소문이 나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눈길을 받았다. 그 시절의 박씨 삼형제를 두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박씨네 이들 4인조와 깊이 사귄 김산은 <아리랑 노래>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들 삼형제는 모두 새까만 눈과 기다랗고 짙은 속눈섭을 가지고 있었다. 박진(필자주: 박영이를 말함)은 말할 때면 눈을 깜박깜박 깜짝이여 상대방에게 진지한 인상을 주었다. 세사람은 다 우수한 북방 동양사람다운 타이프(타입, 类型)로서 모두 풍채도 좋고 건장한 체격과 소탈한 풍모를 가진 사나이들이였다. 그들은 동토대에서 불어오는 씨비리(시베리아)의 광풍마냥 위력과 활기의 분위기를 온 실내에 흘러넘치게 하였다.
 
어느 날 김산과 박영 사이에 이런 허물없는 말이 오갔다.
 
"당신네는 네분이 같이 계시면 퍽 행복하실테죠… 지금까지 그렇게 험난한 투쟁 속에서 살아오셨는데 어째서 아직도 평화스런 생활을 하고 싶어하시지 않습니까?"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에는 평화는 나에게 있어서 고통으로 밖에는 될 수 없네."
 
박영의 진심어린 발로였다. 박영이 걸어온 자욱자욱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1927년 4월 12일, 북벌군 사령 장개석이 상해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한 후 박씨가문의 네사람ㅡ박영, 류성희, 박근만, 박근수는 중공당조직의 지시로 상해로 전이하였다가 다시 무창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 분교로 불리우는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 훈련부에 편입되여 군사 및 정치 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조선인혁명가들은 200여명에 달하였다.
 
4
 
1927년 5월, 박씨네 네사람과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의 학생들은 중앙독립사로 편성된 후 반동군벌 하두연, 양삼이 반혁명무장을 동원하여 국민정부가 자리잡은 무한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박씨네 삼형제도 조선인전우들과 더불어 반혁명과의 생사박투에 뛰여들었다. 토지당전투, 악서전투의 세례를 거쳐 박영의 두 동생들인 박근만과 박근수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박근수의 친필 자서전은 입당시간을 1927년 10월 7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후 박씨가문의 네사람은 국민혁명군 제4군 교도퇀에 들어갔고 교도퇀 퇀장 엽검영을 따라 광주 사표영에 진주, 박영은 교도퇀 교도대 대장을 맡았다. 1927년 12월 11일, 박씨 삼형제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위대한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는데 박영은 광주 관음산전투에서 진지의 100여명 돌격대동지들과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중 조선인전사들만 50~60명에 달하였다.
 
광주봉기가 실패한 후 봉기에서 주도 역할을 했던 교도퇀 1,000여명은 광동 해륙풍쏘베트근거지로 전이하여 중국로농홍군 제4사로 개편되였다. 엽용을 사장으로 하고 오성륜을 참모장으로 하는 이 홍군부대에는 오성륜, 김산, 박근만, 박근수를 비롯한 10여명의 조선인혁명가들이 포함되여있었다. 적들과의 사활을 건 전투끝에 1927년 4월과 5월 해륙풍을 철거할 때 이들 10여명은 또 오성륜, 김산 등과 박씨 두형제 등 여러 갈래로 헤여져야 했다. 퇴각 도중 박근만과 박근수 등은 처녀 네사람을 포함한 다른 20명 전우들과 함께 가까스로 해변까지 탈출하게 되였다.
 
김산의 회고에 따르면 박씨네 두 형제는 끝내 해륙풍에서 탈출한 뒤 한동안 향향에 머물다가 상해행 륜선으로 상해에 이르러 오성륜, 김산 등 조선인전우들과 기쁘게 상봉하게 되였다. 상봉시간은 1928년 여름의 일로 알려진다. 그 때 상해에는 조선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로부터 중공조선인지부로 넘은 한패의 조선인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해에서 활동하는 중공중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중공중앙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1928년 8월 박근만, 박근수 두형제는 오성륜, 진공목 등과 더불어 중공중앙의 파견을 받고 동북으로 파견되여 재만주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중국공산당 가입을 주도하게 되였다. 어떤 글과 자료들에선 이들이 동북으로 온 시간이 1929년이라고 밝히지만 이는 진실한 력사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동북에 이른 그들은 봉천(심양)에 자리잡은 중공만주성위와 련락을 취한 후 만주성위 산하에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오성륜, 진공목, 박윤서가 소수민족위원회 사업위원으로 임명되여 각기 남만, 북만, 동만의 순시원을 맡았다.
 
5
 
중국공산당 당원들인 박근만, 박근수 형제는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남만의 반석현에 가서 반석 등지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 계렬 동지들을 중국공산당으로 받아들이는 비밀사업에 나섰다. 박근수의 부인 리정옥의 취재기록에 따르면 리정옥은 그들의 공개신분은 소학교 교원으로서 박봉(朴奉)으로 불리운 박근수는 반석의 소성자 양수박자(小城子杨树泊子) 조선인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형님 박근만은 반석현성의 조선인모범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박근수는 말이 교원이지 실상은 하루도 교학하지 않고 긴장한 혁명사업에 뛰여들었다(중국조선민족사학회 홍광정신교육추진회 편, 《철혈충혼 리홍광과 그의 전우들》, 료녕민족출판사, 2019년 8월 3차 인쇄, 제220페이지).
 

박근수 부인 리정옥(1985년, 최후택 촬영)
 
 
박근수가 교편을 잡은 고장 양수박자는 반석현 버리하투(玻璃河套)의 골짜기어구에 잡았고, 조선이주민들 마을인 데서 활동하기가 좋았다. 적정이 발견되면 인츰 버리하투골로 빠질 수 있어 비교적 리상적인 고장이였다. 리정옥의 회고담이다. 박근수 형제는 이 같은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혁명사업에 나서면서 재중국한인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지역국의 동지들을 만나 조사연구를 활발히 벌이였다.
 
그 때 남만에는 1925년 음력 10월 3일에 조직된 조선인 남만청년총동맹이 활동하고 있었다. 1928년 6월 하순에 이르러 남만청년총동맹은 북만청년동맹,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등 7개 조선인단체와 함께 '재중국한인청년동맹'으로 확대 개편되였다(1928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제2면 기사 - 재중국한인청년동맹조직).
 
남만에는 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지역국이 있었다. 이에 앞선 시기 1928년초 조공당만주총국은 엠엘파, 화요파, 상해서울파로 분렬된 데서 국제공산당은 1928년 12월에 지령, 즉 <12월 제강>을 내려 조선공산당 파벌조직을 해산하고 '일국일당(一国一党)'의 원칙에 좇아 통일된 조선공산당 건립을 요구하였다.
 
1929년 9월 동북경내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엠엘파 만주총국)은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제의 원칙에 따라 엠엘파 만주총국 해산을 결의하고 1930년 3월 20일에 정식으로 해체선언을 발포하였다. 이에 따라 반석에서 활동하던 박근수와 박근만 두 형제는 연변 훈춘현 대황구 출신이고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의 조직부장인 리동광 등 동지들과 배합하여 한패의 원 조선공산당 동지들과 일일이 담화하면서 엄격한 심사를 벌이였다(<중국조선민족사학회 홍광정신교육추진회> 편, 《철혈충혼 리홍광과 그의 전우들》, 료녕민족출판사, 2019년 8월 3차 인쇄, 제220페이지).
 
6
 
1929년 겨울(년말) 리동광 등 동지들이 박근수의 소개로 반석현에서 선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김창국 저 《동북항일유격근거지사연구》,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6월 출판, 제40페이지). 이듬해 1930년 3월 20일 이후에는 박근수와 박근만 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박윤서, 박한종, 김창근, 한호 등 한패의 조선공산당 동지들이 개별적인 수속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는 리동광 등에 이은 반석지구에서의 또 한차례 조선동지들의 입당으로서 1930년 6월까지 반석현에는 중국공산당 당원이 40여명으로 늘어났다(중국조선민족사학회 홍광정신교육추진회 편, 《철혈충혼 리홍광과 그의 전우들》, 료녕민족출판사, 2019년 8월 3차 인쇄, 제221페이지). 그들 모두가 20년대 후반시절 남만의 반석현을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했던 원 조선공산당의 선진분자들이요, 그후 남만 항일무장의 중추를 이룬 우수한 동지들이였다. 박근수와 박근만은 남만 당조직과 항일무장의 토대를 마련한 불멸의 공신자였다.
 
1930년 봄 박근수는 청원 출신의 조선족처녀 리정옥(李贞玉)과 백년가약을 맺았다. 박근수는 1903년생이고 리정옥은 1914년생으로서 나이 차이는 있지만 두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리였다. 결혼후 그들은 박근수가 교편을 잡은 반석현 소성자(小城子) 남쪽의 양수박자에 집을 잡고 혁명활동에 나섰다. 그 때 리정옥은 지금으로 보아 10대 중반의 소녀라지만 남편의 식사와 바깥통신, 부녀활동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 시절의 리정옥은 공청단원이고 우리 당조직의 지하교통원이였다(김운룡, 항일투쟁이야기 녀교통원, 《장백산》 잡지 1984년 제14기).
 
(3월 11일 계속)

료녕신문(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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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7
  • 농민들 지주의 낟가리 허물어 ‘감조감식’실현 지주들의 창고문 열어 소작농들의 봄량식 해결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관동군은 심양의 북대영을 공격하고 동북을 침략하는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9.18’사변이 발생한 이튿날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 길흥은 한간이며 길림부사령관공서 참모...
  • 2019-04-10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1군―사급 이상 장령 류용국(劉用国, 1910—1933):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당위원회 서기 1910년에 출생하였고 중공만주성위에서 사업하였으며 1932년 11월 중공반석중심현위로 전근되였다. 12월, 중공반석중심현위 제2차 확대회의에서 현당위 위원이 되였으며 현당위 군...
  • 2018-11-26
  • 주동적으로 타격하면서 토벌계획 혼란시켜, 서부전선 전투부담 경감 아군의 철수 엄호 동부전선의 반일부대 “경신년 반‘토벌’전은 동부와 서부 두 전선으로 진행되였습니다. 그런데 사학계에서는 서부전선인 청산리전역만 말하는 페단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벌에 의해 반일부대주력은 연길현과 화룡...
  • 2018-11-01
  • 날랜 용사들 적들의 수송대 엄습 변절자에 의해 거사 물거품으로 원쑤를 갚자면 손에 무장을 연분홍진달래가 곱게 핀 나즈막한 언덕 아래에 15만원 탈취 거사 석비가 세워져있었다. 룡정에서 10리 쯤 떨어진 동량리어구이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夺取十五万元事件遗址’ 라고 새겨져있었다. 륙도하가 눈앞에서 ...
  • 2018-09-13
  •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무장단체들 무장투쟁 료원의 불길로 타올라   용감한 반일부대 장병들 무장한 적들과는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3.13'운동의 경험교훈이였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외교독립론'이거나 부패정부의 힘을 빈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것을 피...
  • 2018-09-05
  • 중국조선인근대문화의 발상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 1920년대 룡정시거리와 시장 명동의 5대 가족 선바위는 장려한 바위산이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이 이곳 땅을 차지하고 있을 때만 하여도 선바위는 비둘기바위로 불리웠다고 한다. 깎아지른 층암절벽 사이...
  • 2018-08-22
  • 서전서숙 옛터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쪽 구석에 두아름 되는 비술나무 한그루가 름름히 서있다. 비술나무에는 ‘서전서숙 기념나무’라는 패쪽이 걸려있는데 패쪽에는 이런 패문이 씌여져있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
  • 2018-08-16
  • 포산호의 억울함 태고연한 원시림과 잡목이 우거진 황지에서 흰옷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엄동의 눈보라를 가르며 괭이가 언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츠럽다. 조선족 간민들에 의해 황지는 차츰 밭모양을 냈으며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며 감자농사가 제법 잘되기 만했다. 한창 재미 나게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난데없는...
  • 2018-07-26
  • 장백산‘정계비’ 청나라 강희황제는 일찍부터 《청일통지(淸一統志)》를 편찬하여 청나라경역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물론 청나라—조선 변계가 두만강, 압록강이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상류지역은 지형이 복잡한 데다가 인가까지 없어 그 분계가 명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두 강 상류에서 조선사람들이 청...
  • 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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