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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이 본 압록강은 어땠을까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8월29일 13시43분    조회: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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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에서 변문, 단동까지 박지원을 따라가다

[오마이뉴스 이정희 기자]

▲ 요양의 백탑 박지원의 <열하일기-요동백탑기>에 나오는 바로 그 탑이다. 그는 이 탑의 유래를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 세운 것이라고 쓰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광우사 이다.
ⓒ 이정희

기행단의 둘째 날, 요양의 아침이 밝았다. 지난밤 야시장으로 북적이던 창문 밖 공원을 내다보았다. 어제 밤에는 보지 못한 거대한 탑이 보인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바로 그 요동의 백탑이다. 230여 년 전 박지원 일행이 머물며 보았던 요양의 백탑을 보게 되다니, 오늘 박지원의 일정을 따라 가게 될 기행단의 하루가 기대되는 아침이다.

<열하일기>는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 박지원이 그의 나이 44세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오면서 쓴 기행문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압록강을 건너 이곳 요양에 이르는 15일간의 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는 일은 1780년 6월 24일 신미일에 시작하여서, 같은 해 7월 9일 을유일에 끝마쳤는데, 그 여정은 '압록강'으로부터 '요양'에 이르기까지, 모두 15일이 소요되었다. ...(중략)... 관제묘를 나와 5마장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이 보이는데, 이 탑은 8각 13층에, 높이는 70길이라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는, '당나라'의 '을지경덕'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 <열하일기-서문과 요동백탑기 中>

오늘 우리 기행단은 이 곳 요양을 출발하여 연암 박지원이 사신단과 함께 걸어 왔을 요동벌판 연행길을 거꾸로 되짚으며 압록강까지 갈 예정이다. 비록 하룻길이지만 그 옛날 연행사들이 수백 년에 동안 지나갔던 길을 걸으면서 조상들이 느꼈던 심경을 다시 한 번 찾아보는 하루가 될 듯하다. 아무튼 오늘 아이들은 박지원과 함께 여행 할 것이다.

동경성에서 요동 벌판을 내려다보고 싶었으나
▲ 동경성 요양의 동경성은 요양시 문성구 중화대가 동쪽에 있다. 1621년(후금 시대)에 도성으로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 39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성곽의 한 쪽이 물을 향하는 높은 언덕에 지었으며, 벽돌과 다진 흙 구조로 만들어졌다.
ⓒ 이정희

숙소를 나선 인문학 기행단은 첫 일정으로 요양의 동경성으로 향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익숙지 않은 2층 버스가 층고 제한으로 4차선 대로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좁은 길을 바꿔 타며 30여분을 돌아 동경성에 도착하였다.(이후에도 버스는 차 높이 때문에 길을 통과 못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이곳은 잠시나마 청나라의 수도였던 곳으로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가 이곳 요양을 함락하고 심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년간 도성으로 머문 곳이라고 한다. 그들은 군사적 요충지였던 동경성을 교두보로 명을 대신할 중원의 새로운 통치자가 될 것을 표방했다.

지금으로서는 예전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남아있는 동경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 안내문의 자료에 따르면 성의 주변은 3,514미터 이며 그 중 남쪽 벽이 900미터, 북쪽 벽이 896미터, 서쪽 벽이 832미터로 모든 면에 2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아놓아 올라가 볼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한때 고구려가 주인이었던 이 넓은 요동벌을 성루에 올라 내려다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남긴 채 성문 밖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다음 목적지인 봉황산성과 변문으로 향했다.


 
▲ 개발되기 전 동경성 현지 안내판에 나와 있는 개발되기 전의 동경성문 밖의 모습이다. 지금은 주변의 민가와 마을이 모두 철거된 상태로 깨끗하고 넓은 유적지로 변모해 있다.
ⓒ 이정희

너무 더운 날씨, 봉황산성 내성까지는 못가고...

요양을 출발한 아이들은 고속도로를 두 시간여를 달려 봉황산성 인근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 청나라 시대 국경의 관문이었던 변문 기행을 시작하였다. 연암 박지원 일행이 연행길에 청나라 입국을 위해 머물던 지역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출입국 관리소나 세관쯤으로 생각되는데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곳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멀리 봉황산을 바라보니,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이,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며,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하늘가에 뭉게뭉게 떠도는 여름 구름의 기이한 자태와도 같아서 무어라 형용키는 어려우나 다만 윤택한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다. <...중략...> 넓은 들판이 질펀한데, 비록 개간은 안 되었지마는, 가는 곳마다 나무 찍어 낸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소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리가 풀 섶에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책문이 가깝고, 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무시로 이곳을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이날은 30리를 이동하였는데 압록강으로부터 1백20여리 떨어진 곳이다. 여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문(柵門)'이라고 부르며, 이곳 사람은 '가자문(架子門)'이라고 부르며, 중국 사람들은 변문(邊門)이라고 한다." <열하일기 ? 책문에서 만난 중국인들 외>
▲ 봉황산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하늘가에 뭉게뭉게 떠도는 여름 구름의 기이한 자태와도 같아서 무어라 형용키는 어려우나 다만 윤택한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다”라고 표현했다.
ⓒ 이정희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이 30도 후반을 넘는 푹푹 찌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고구려의 옛 산성 봉황산성을 찾아 걷기 시작하였다. 30여분을 걸었을까. 예전 박지원이 말했던 사람 북적이던 그런 길은 아니었다. 산성 입구에는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길을 지나 다다른 작은 마을에는 몇몇 민가가 있고 계곡에 모여 맥주와 음식을 차려놓고 피서를 즐기는 중국 사람들만이 보일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한참 만에 현지 마을에 사는 노인을 만났는데 봉황산성 입구를 지나왔을 뿐 내성은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게다가 가는 길은 풀 섶에 덮인 시골길이었다. 결국 너무 무더운 날씨에 아이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여 가는 중간에 가이드에게 산성의 역사에 대해 듣고 다시 걸어 내려왔다. 너무 무더운 날씨에 봉황산성 내성까지 올라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컸으나 봉황산 산성 안내표지석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변문으로 향했다.

이정표만 남은 변문진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변문에는 그 옛날 북적이던 국경의 출입국 관리소나 세관의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철도 건널목 입구에 세워진 변문진(???)이라는 표지판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곳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말을 몰아 7~8리를 가서 '책문' 밖에 닿았다. 양과 돼지가 산에 널려있고, 아침 연기가 푸른빛으로 둘러싸고 있다. 나무쪽을 목책을 세워서 겨우 경계를 밝혔으니, 이른바 버들가지를 꺾어서 울타리를 만든다는 말이 곧 이것인 듯싶다. 책문에는 이엉이 덮여있고, 널판자로 된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온갖 되놈들이 목책 안에 늘어서서 구경을 하는데, 대부분이 민머리 바람에 담뱃대를 물고서 부채를 부치고 있다." <열하일기-책문에서 만난 중국인들 中>

▲ 변문진 역사의 흔적 이라곤 도로에 세워진 표지판에만 남아있을 뿐 오고가는 사람들로 흥청거렸을 자취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기행단 일행이 때마침 지나가는 기차를 배경으로 변문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이정희

▲ 변문진 마을 조선 사람들로 가득했던 주막집이 있던 변문의 마을 이었을까? 지금은 한적한 시골마을 이다.
ⓒ 이정희

이곳은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로 들어갈 때 입국심사를 받기 위하여 봉황성에서 중국관리가 내려오는 며칠 동안 동안 머물던 곳으로, 의주나 개성에서부터 따라온 조선의 상인들이 중국 상인들과 무역을 하던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다.

아이들은 마침 지나가는 기차를 배경으로 변문진의 사진을 찍었으며, 국어교사이며 기행단을 이끌고 있는 이석우 단장(충남 논산중 교장)은 아이들에게 조선시대 사신단이 오고갔을 당시의 상황과 변문진의 내력에 대해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홍순학의 연행록에 나와 있는 내용을 곁들여 설명하였다. 

이를 듣는 아이들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공부는 교과서 밖으로 나와서 눈으로 보고 느낄 때 감동과 효과가 크구나 하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잠시 변문진에서 머문 일행은 그 옛날 조선의 사신단이 의주를 떠나 압록강을 건너 도착했을 단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변문에서 단동으로 가는 길 양옆으로 수킬로미터를 늘어선 버드나무가 인상적이었다. 혹시나 이것이 박지원이 말한 버들가지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었다던 그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압록강에서 분단의 현실을 보다

▲ 단동의 압록강 단교 1911년에 일본이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건설한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던 다리이다. 6?25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쪽으로 다리 중간이 끊어졌으며, 현재는 중국쪽 절반만 남아있다. 기행단이 단교 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끊어진 다리 뒤쪽에 보이는 곳이 북한의 신의주이다.
ⓒ 이정희

책문을 떠난 기행단은 압록강이 있는 단동으로 향했다. 단동으로 이동하는 동안 기행단의 김가은(용남고?1) 학생과 신나영(천안여고?1) 학생이 1일 가이드로 나섰다.

김가은 학생은 <우리만 갈수 없는 북한>이라는 주제로 단동에 대한 설명을 하고,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변화된 남북관계와 이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 발제를 하였다. 이어서 신나영 학생은 <압록강을 통해 보는 북한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압록강의 유래와 생태 및 지리적 환경을 설명하고 "오늘 여행에서 북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열하일기>에서는 압록강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의주를 떠난 박지원 일행이 드디어 압록강을 마주하고는 "이렇게 물살이 거센 것은 대체로 압록강이 먼 곳에서 발원하는 까닭이다"라고 하면서 장마철 압록강의 거센 물살과 크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한창 장마철인지라, 나룻가에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으며, 강 중류의 모래톱마저도 흔적이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를 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 그리하여 일행 중 통역원들은 다투어 옛일을 끌어대며, 날짜 늦추기를 강력히 요청하고, 의주 부윤 '이재학' 역시 하급 관리인 '비장'을 보내어서 며칠만 더 묵도록 만류 했으나, 사신의 우두머리인 '정사'는 기어이 니날 강을 건너기로 결정하여서, 임금에게 보낼 보고서인 '장계'에 이미 날짜를 써 넣었다." <열하일기-장마철의 압록강 中>

단교(??)에 오른 기행단은 지척에 보이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강에서 고기를 잡는 북한사람들, 한창 건설 중인 공사장의 인부들, 어렴풋이 보이는 길가의 사람들을 관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아쉽고 슬픈 분단의 현실을 실감하였다.(이 학생들은 다음날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북한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통일교육 체험을 했다. 그 내용은 < "안녕!" 북한 아이들 인사에 눈물 터진 아이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오늘 하루 기행단의 그 옛날 박지원 걸었던 압록강에서 요양까지의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학, 지리, 민족의 염원을 창의적으로 융합하는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붙인 기행단 이름처럼 말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신의주가 마주 보이는 압록강 가운데 한 섬에 있는 숙소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내일은 압록강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며 다시금 분단의 현실을 느끼고 고구려 유적을 찾아 환인과 집안으로 향한다.
▲ 기념 촬영하는 사람 압록강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 한복을 빌려 입은 것으로 보아 재중동표(조선족)인 듯하다. 압록강 단교는 조선족은 물론 다른 중국인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라고 한다.
ⓒ 이정희

▲ 공사 중인 신의주 건물 압록강 건너 신의주 강변에 공사 중인 고층 건물, 생김새로 보안 호텔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건물 상단을 자세히 보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 이정희

▲ 북한을 오가는 관광버스 북한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국인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철교를 지나고 있다. 단교를 관람하는 1시간여 동안 10여대의 버스를 목격하였다.
ⓒ 이정희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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