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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08] 이세상 제일 아름다운 우리 엄마 손 (박영옥)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7월20일 21시16분    조회: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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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동생이 이쁜 장갑을 끼고 엄마집에 왔다. 엄마는 그 장갑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 오른손에 껴보시는 것이였다. 
 
“엄마, 욕심나시면 끼세요. 수박색이여서 환하지도 않아 엄마 얼마든지 낄 수 있어요”
 
동생의 말에 엄마가 급히 거절하셨다. “내가 이런 장갑 어떻게 낀다고 그래?”
 
7년전 83세 때의 엄마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박영옥
 
엄마가 거절하자 나는 인차 무슨 뜻인지 알게 되였다. 엄마는 왼손 무명지가 없다. 그런 탓에 손가락이 있는 장갑을 끼지 않는다. 기실 껴도 무방한 데 무명지가 비여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무명지가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오라지 않아 90세를 바라보는  엄마인데도 신체적 결함에 신경 쓰시는 엄마다.  
 
내가 일곱살 때의 일이다. 그 때 엄마는 스물아홉 살이였다. 그날 엄마는 다른 집에 일보러 가다 방아간을 지나게 되였는데 동네 명희엄마가 혼자서 방아를 찧으며 엄마를 불렀다.
 
“다른 일 없으면 나를 도와 방아 홈의 쌀을 좀 께끼여주오” 방아 일은 적어도 두 사람이 해야 한다. 한 사람이 방아채를 디뎠다 놓고 하면 다른 사람은 쭈크리고 앉아 홈의 곡식을 골고루 저어야 한다. 그런데 그날 명희엄마는 혼자서 방아채를 디뎠다가 놓고는 또 방아에서 내려 홈 안에 있는 옥수수를 께껴내고 있었다. 여간 쉽지 않아 보여서 엄마는 제꺽 홈 앞에 쭈크리고 앉아 일손을 도왔다. 그런데 조금 후 엄마 왼손이 홈 안에서 미처 나오기도 전에 방아채가 공중에서 “쿵” 하고 떨어져내려왔다. 순간 홈 안이 빨갛게 물들었고 엄마의 무명지가 내리치는 방아채에 맞아 뼈가 부서졌다. 그 길로 인차 향병원에 달려갔지만 연변병원에 가라는 것이였다. 병원에서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해서 그냥 자르는 수 밖에 없었다. 무명지가 없다고 생활 상의 불편함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 꽃다운 나이에 손가락 하나를 뭉텅 잘리웠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엄마 손가락은 가늘고 길게 쭉 뻗은 데다가 피부색도 희여서 어데가서나 남들이 부러워했던 손이였다.
 
집에 돌아온 엄마의 고통은 극치에 달했다. 통증이 어찌나 심한지 엄마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깨 저쪽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 나도 엄마와 함께 눈물샘을 터뜨린 적이 얼마인지 모른다. 밤이면 집식구들이 깨여날가봐 그처럼 심한 고통을 이불 속에서 참아냈다.  
 
명희엄마는 몇번이나 엄마를 찾아와서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엄마 앞에 내밀고는 죽어가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서 내 손가락을 잘라서 가져다 붙이오. 그날 내가 자네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정말 다 내 탓이요.” 
 
명희엄마의 눈에서도 눈물이 좔좔 흘러내렸지만 얼어붙은 엄마의 가슴을 녹아내지 못했다. 마음이 여린 엄마건만 그 순간만은 참지 못하고  명희엄마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렇게 엄마가 한바탕 울분을 토해낼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의 상처도 차차 아물어가고 명희엄마에 대한 미움도 조금씩 사라지면서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엄마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손 자랑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원래 밝은 성격의 엄마인지라 엄마 얼굴은 봄날을 맞는 듯 차차 환해졌다. 
 
어느 한번 다른 마을의 초청으로 엄마는 정월대보름 행사인 윷놀이를 가게 되였다. 엄마네 조가 다른 조에게 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왼손으로 윷을 치라고 했다. 엄마는 그냥 오른손으로 치겠다고 우겼더니 안된다고 해서 엄마는 절단한 손가락을 감추느라 애를 썼지만 결국 엄마 옆에 앉은 금실이 엄마한테 발각되였다.
 
“어마나, 여태껏 같이 놀면서 손가락 하나 없는 걸 몰랐네. 대체 무슨 일로?”
 
두 눈이 화등잔이 된 금실이 엄마의 말에 다들 엄마의 손에 눈길을 돌렸다. 그 시각 엄마는 뭘 잘못한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고 인츰 그 자리를 떴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건데 엄마는 사람들의 의아한 눈길이 싫었다. 그 아픈 추억을 다시 떠올리기 싫었던 것이다.  
 
그 후 엄마는 아버지 단위에서 림시공으로 20여년 일했다. 단위에서 복리로 나눠주는 손가락이 있는 장갑은 엄마의 소유로 되지 못했다. 엄마는 늘 자기 돈으로 ‘벙어리 장갑’을 사서 꼈다. 종업원 가족들로 무어진 일터에서 십여명이 매일이다 싶이 같이 일을 했건만 엄마는  그 흠집을 얼마나 깊숙이 감추셨는지 한두 사람이 아는외에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하루하루, 한해 또 한해를 특별히 왼손에 신경을 쓰시면서 살아왔다. 그 후 손군들이 생기고 어느 날 여섯살짜리 손자의 눈에 들키우게 되였다. 
 
그날 외지에서 사는 손자와 외손녀가 엄마 집에 놀러왔다. 엄마는 손자한테 가감법을 배워주면서 “이렇게 두 손가락을 합하면 몇개니?” 엄마가 두 손을 쫙 펴고 쳐들었다. 그런데 손자가 “할머니, 우리 엄마 손가락은 열개인데 할머니 손가락은 왜서 아홉개인가요?” 고 했다.
 
엄마는 제꺽 오른손으로  손군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저쪽에서 놀던 외손녀가 어느새 그 말을 듣고 제꺽 다가왔다. 두 손군이 엄마 손을 보겠다고 매달렸다. 그 순간 엄마의  얼굴에는 부자연스러운 빛이 흘러나오며 왼손은 등뒤로 감추고 오른손으로는 손군들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엄마는 자식 앞에서는 흠집을 감추지 않았지만 손군들한테는 꽁꽁 감추려고 무등 애를 쓰셨다. 
 
향진에서 오십년 세월을 보내시던 엄마가 2004년도에 명월진으로 이사갔다. 사회 활동을 좋아하시는 엄마는 흥화사회구역 독보조에 들었다. 매주 독보 후이면 오락판이 벌어진다. 춤 노래를 잘하시는 엄마는 노래를 하라 하면 거절하지 않았는데 춤을 추시라하면 절대 추지 않았다.
 
“자네 엄마가  춤을 잘 추신다해서 춤을 추라하면 안 춰, 말 잘 안 들어”. 독보조 회장님은 몇번이나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특별히 춤을 추기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아름다웠다. 어데 가서 배운 적은 없지만 텔레비죤에서 나오는  춤을 본 따서 추는데 정말 그럴 듯 했다.  
 
70세 때 엄마는  만보진의 어느 한 촌에서 조직한 ‘3.8절’ 모임에 가셨는데 그 때 엄마가 추는 춤을 보고 금희네 집에 온 한 친척이 도전장을 던졌다.
 
“할머니, 춤 실력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요. 한번 나하고 도전해볼내요?”
 
그 남자는 40대로 보이고 키도 컸다. 어느 한 도시에서 왔노라고 조금은 우쭐거렸다. 엄마는 에라, 두 눈을 한번 뒤집혀놓아야 겠다는 식으로 훌쩍 앞으로 나섰다. 
 
“우리 마정숙 할머니 최고다…”
 
촌민들이 엄마 이름까지 부르며 응원했고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록음기에서 음악이 울리자 두 사람은 마주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젊은이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더니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둘은 한참 추더니 젊은이가 먼저 두 손을 쳐들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계속 몸을 돌리며 쉴새없이 춤동작을 바꿔가며 췄는데 구경군들의 찬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튿날 아침 엄마는 날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어제밤에 내가 무슨 정신으로 춤을 그렇게도 오래 췄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가 손가락이 없는 걸 보아내지 않았을가?”
 
나는 살며시 엄마의 왼손을 잡아주면서 “그래도  엄마 손이 얼마나 아름답다고요.”
 
세월이 흘러 엄마의 섬섬옥수도 서서히 아름다움을 잃어갔다. 얼기설기 잔주름이 가득 메워지고 여기저기에 로인 반점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어느 때 봐도 가장 아름다운 엄마 손이다.
 
무명지 없는 엄마 손에는 힘든 인생살이가 적혀있다. 그  손으로 자식 여섯을 키웠고 그 손으로 봄이면 산에 가서 산나물을 캐고 가을이면 산열매를 따고 이삭을 주어 끼니를 보탰다.
 
자식들이 갑자기 북받치는 설음 때문에 눈물을 쏟을 때마다 엄마는 무명지 없는 손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다. 눈물이 날 때 엄마 손이 얼굴에 닿으면 눈물이 멈춰지기도 했고 아픈 머리에 손을 대면 아픔이 사라지기도 했던 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위안이 되는 그런 아름다운 엄마의 손이였다.  
 
무명지가 없다한들 뭐라나? 그 손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맛이 좋아 동네방네에 소문났다. 엄마는 특별히  여러가지 밀가루 음식을 잘했는데 밀가루 음식을 잘한다는 한족들도 엄지손을 내밀었다.  
 
60년 동안 엄마는 잃어버린 무명지 때문에 가담가담 마음 한구석에 그늘이 졌다. 90세가 다 된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엄마가 마음의 그늘을 몰아내고 마음껏 그 손을 사람들 앞에 내놓으시면 좋겠다.  
 
/박영옥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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