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한창 중임을 떠메고 있는 80후, 그들은 산아제한정책의 영향 하에 독신자녀들이 많고, 사회에 진출한 후 ‘내집마련’에 아득바득하고 있다. 이제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그들은 또 ‘한 가정, 네 로인’이라는 부담과 육아의 부담을 동시에 짊어져야 한다. 등골 휘는 80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조카에게 기대는 외삼촌
■정춘란(가명, 35세, 연길)
올해 설은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 같아서 다시는 되돌이키고 싶지도 않다.
음력설 분위기가 가장 짙은 그믐날 저녁,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외삼촌의 전화번호였다. 심상치 않은 기분 속에 전화를 받아보니 낯선 사람이였다. 전화의 주인이 계단에 쓰러져있는데 빨리 와달라고 했다.
외삼촌이 밖에서 쓰러진 적이 이미 한두번이 아닌지라 면역이 생겨서 너무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그믐날이 아닌가! 남편과 함께 외삼촌댁으로 향하는데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외삼촌은 곁에 가족이 없다. 20년 전에 리혼하고 가족과 련락두절한 지 오래됐다. 게다가 10년 전에 진단받은 뇌종양, 그 후유증 때문에 정신도 흐려지고 말투도 어눌해졌다. 젊었을 때야 그럭저럭 자기 몸을 챙기면서 홀로 지내왔지만 나이가 들고 운신이 어려워지자 자취가 힘들어졌다.
외삼촌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외지에 계시고 조카도 유일하게 내가 연길에 살고 있다. 외삼촌에게 일이 생기면 자연히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180센치메터가 넘는 남편이지만 쓰러진 외삼촌을 혼자 다루기엔 힘에 부쳤다. 외삼촌이 고분고분 몸을 맡겨주면 좋으련만 설상가상으로 자꾸 우리 손길을 뿌리치고 고집을 피워서 애를 먹었다. 구급실에 실려가서도 란동을 부리고 밤새 집에 보내달라고 소리를 질러서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일찍 형제자매들이 경비를 모아서 양로원에 보내기도 했었지만 양로원마다 다루기 힘들다고 거부하는가 하면 겨우 찾은 양로원도 거퍼 1개월도 참지 못하고 집에 보내달라고 매일 떼를 써서 할 수 없이 집에 다시 모시기도 했다.
집에 모시면 반시간에 한번씩 조카인 나에게 전화해서 “일으켜달라, 화장실 가야 한다.”, “내복이 두꺼워서 불편하니 얇은 거로 사달라” 등등 갖은 요구를 제기한다.
너무 힘들어서 설날 낮에 친구에게 전화로 하소연했더니 공교롭게 그 친구도 구급실에 있었다. 혈육이 가까이 없는 큰아버지가 혈압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혈압약 10알을 한꺼번에 삼키는 바람에 구급실에서 그믐날 저녁을 보냈다고 하는 것이였다.
조카가 외삼촌을 돌보는 건 응당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창 일을 해야 하는 젊은이가 늙은이를 매일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어머니가 나서야 하니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힘을 내야 한다.
나의 부모도 이제는 년세가 많아서 내가 돌봐드려야 할 립장이다. 앞으로 돌봐드려야 할 사람은 점점 많아질 텐데… 고민스럽다.
사기를 당한 어머니
■김매화(가명, 38세, 소주시)
어머니가 사고를 쳤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것도 한고향 사람에게. 지난해 여름에 2만원을 빌리라고 하길래 용도를 묻지 않고 빌려드렸는데 년말에 또 몇만원을 있는 대로 꾸어달라고 한다. 이상해서 따져물었더니 한고향의 친구가 한국에서 힘들게 지내는데 마냥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그런다는 것이였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알아봤더니 선후하여 몇만원씩 도합 30여만을 사기당한 것이였다. 그것도 지인, 친척, 친구에게서 빌린 돈을 다 그 사기군에게 처넣은 것이였다.
당장에서 어머니 손을 잡아 끌고 파출소에 가자고 했더니 어머니는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하고 “우리가 신고하면 그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라며 나를 말리는 것이였다.
어머니의 마음이 너무 착한 건지, 아니면 남을 너무 쉽게 믿는 건지… 어머니가 사고를 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도 비슷한 사건이 터져서 온 가족이 함께 벌어서 갚은 전례가 있다.
내 주변에도 부모님이 다단계에 빠져서 돈을 날리거나 전신사기를 당한 사례가 몇몇 있다. 나는 그나마 부모를 가까이에 모시고 살지만 그 친구들은 멀리 한국이나 일본에 있어서 부모의 일을 해결하러 나서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가까이에 모시고 산들 어찌할 도리가 없다. 파출소에 가 자문을 구했더니 우리 같은 사례는 사기당할 돈을 되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다. 1:1로 소통해서 그쪽에서 돈을 되돌려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였다.
언니가 힘들게 벌어서 모아놓은 돈도, 오빠가 지금껏 아껴모은 돈도 다 빌려다 날렸고, 지어 어머니의 친구는 집을 보증으로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은 지금 당장 갚아주지 않으면 집이 날아가게 생겼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여기저기서 돈을 꿔다가 그 지인의 돈을 먼저 돌려드렸다. 앞으로 이 빚더미에서 헤매야 할 우리 가족 생각을 하면 힘에 부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객들이 설기간 배송이 늦어진 것을 갖고 자꾸 태클을 건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자존심을 버리고 굽어들기는 싫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한바탕 고객에게 쏟아냈다.
내가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으니 우리 아이들이 그 영향을 받아 행동장애가 오기 시작했다. 여러 병원을 다니다가 행동장애 판정을 받은 그날, 어떤 타격에도 끄떡없던 나는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무너져도 눈물을 닦고 일어나야 한다. 감정이 섬세한 언니는 요즘 우울기를 보인다. 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꿋꿋이 이 가정을 영위해나가야 한다.
딸에게 기대는 어머니
■방홍매(가명, 33세, 연길)
임신 막달에 나는 어머니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애는 못 봐준다, 알아서 해라.”
어머니에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서운함을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남편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기에 시어머니는 안 계신다. 애를 돌보려면 내가 일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육아 7개월에 접어들었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이 끝이 안 보이는 육아생활이 힘들기만 하다.
주변 친구들 가운데도 애를 못 봐준다고 선언한 어머님들이 꽤 된다. 하지만 대신 육아에 보태라고 경비는 조금씩 지원해준다.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우린 가족이 아닌가? 내가 힘들 때 한번쯤은 부모에게 기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내가 벌지 못하니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위챗 모멘트를 보면 남들은 한달에 몇만원씩 한다는 산후조리원에서 요가도 하고 갓난 아기 조기교육도 시키건만 나는 푼돈이라도 벌려고 모멘트에 광고만 줄창 올린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가끔씩은 나도 잘사는 집에서 태여나 돈걱정 안하고 푹푹 쓰고 살면 어떨가 상상을 하군 한다.
나는 부모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기는커녕 나에게서 받아가려고만 하는 어머니에게 지쳤다. 낳아주고 키워준 것도 감사하고 내가 부모님에게 잘해드리는 것도 응당한 것인데 문제는 어머니의 사고방식이다. 임플란트를 해야겠는데 5000원 보태달라, 동창들 려행가는데 려행경비 2000원 보내달라 등 상론할 여지가 없는 명령이다. 싱글일 때는 될수록 어머니가 해달라는 것을 다 만족시켜드렸는데 이제는 나도 엄연히 내 가정이 있고 남편의 눈치를 봐야 되는 상황이다. 남편은 얘기를 안하지만 싫어하는 기색이 력력하다. 더불어 우리 부부관계에까지 마이나스 영향을 끼치는 어머니가 더 싫어진다.
가장 힘든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이다. 어머니의 요구를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만족시켜드리지 못하면 내가 큰 불효를 저지른 듯이 푸념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모색하구나, 이제는 전화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고는 전화를 콱 끊어버리는데 그럴 때면 기분이 말이 아니다.
차라리 남이면 영원히 안 보고 살 작정으로 관계를 단절해도 되는데 하필이면 어머니이다. 싫고 힘들어도 잘라낼 수 없는 관계이다.
앞으로 애가 점점 크면 지출도 많아질 텐데 언제까지고 어머니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다. 어머니가 갓 예순을 넘기셨으니 애가 대학에 붙을 때까지 줄창 어머니의 시중을 들어드려야 하나, 내 청춘은 어디에 가 돌려받나…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연변일보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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