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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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부지몽 罗浮之梦 댓글:  조회:1096  추천:1  2018-06-30
수필 나부지몽(罗浮之梦) 김영분   4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호적은 한 사람의 좌표로 통했다. 호적부 하나면 이 사람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물론 하고 있는 일까지도 알 수가 있었다. 농촌호적이면 땀 흘리며 흙을 뚜지는 농사군이고 시내 호적이면 깨끗한 옷차림에 책상 머리에 앉아서 놀고 먹는 쌍발쟁이라고 했었다. 그만큼 직업도 단순했고 할 수 있는 일도 단조로웠다. 그 시절 쌍발쟁이는 더없이 빛나는 광환이였다. 개혁개방전 날씨 눈치를 살피며 농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매달 봉급을 현금으로 받는 시내 사람은 샘이 나도록 부러운 존재였다. 탈곡이 끝나고 공량을 다 바친 후 조금 남은 여유의 쌀로 두부도 바꿔 먹고 애들 옷견지도 마련해야 하는 농민들에게 현금을 쥐여 보기란 하늘에 별따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에 있는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식을 출세시켜 시내사람으로 만들어보겠다는 각오가 철석같이 견고했다. 그 시기에 농촌을 벗어나기 위해 자식을 대학을 보낸다든지 아니면 군대라도 보내서 신분세탁을 하려고 애썼고 처녀들은 조금은 못났더라도 공량을 먹는 시내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시내에서 살게 되기만 하면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질 것 같았고 고상하고 우아한 생활이 펼쳐질 것 같았다. 도시인이 된다는 것은 비가 새는 초가집이 아닌 차곡차곡 정연하게 개여져 있는 아빠트에서 살 수 있고 흙투성이가 아닌 깨끗한 시멘트 길에서 걸을 수 있다는 버젓한 꿈이였으며 달과 별을 지고 다니며 허리 구부려 땅과 씨름해야 했던 고달픈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그러다가 세상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개혁개방의 물살이 빠르게 퍼지며 시내로 진출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마른 목을 추겨주었다. 90년대가 되자 전란을 피해 만주벌판으로 이주하여 투박한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이삭을 춤추게 했던 농민들의 발걸음은 연해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족 농민들은 한국기업이 중국 연해도시로 대거 진출하는 보폭에 맞춰 홍수처럼 도시로 몰려왔다. 가뜩이나 배고픈 살림에 갑작스레 홍수에 떠밀려 오다나니 변변한 옷견지 하나 준비를 못하고 빈 주먹만 쥐고 도시복판에 턱 하니 뻗쳐 서있게 되였다. 소망하던 도시 생활이였지만 꿈에서만큼 버젓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농촌에서 뒹굴면서 투박스레 커온 덕에 매집이 좋아서 그나마 닥쳐오는 천만가지 시련을 용케도 이겨냈다. 민들레 씨앗처럼 뿌려지는 곳을 탓하지도 않고 아무리 으슥진 곳이라도 해빛이 조금이라도 비추면 파란 잎을 피우고 거센 비바람이 불어치면 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우리는 물과 같이 세계 각곳으로 스며들었다. 연해도시는 물론 해외 진출도 서슴없었다. 청도는 이미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가 되였다. 곳곳에 우리 말소리가 들려오고 한국인이 청도에 오면 중국가이드가 필요없이 한국말이 통할 정도이다. 보잘것없던 농민이 대형 공장을 운영하는 대표가 되여 있는가 하면 음식체인점 사장이 되기도 했다. 매년 우리만의 운동회가 열릴만큼 사회활동도 활발하다. 자체로 예술단을 묶어 자선공연을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쯤이면 20여년 사이에 농촌 사람으로부터 시내 사람으로 화려한 변신을 이룬 셈이다. 번데기는 자기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나방으로 다시 태여난다. 그만큼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은 많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그래야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었다. 노력하는 과정은 얼마나 눈물겨웠을가. 듣지고 보지도 못했던 회사 관리를 하려니 본토배기 직원들의 반발은 밥 먹듯 했고 열에 아홉은 모르는 현지 행정업무를 뛰여 다니려니 공무원들의 오만방자함은 주먹으로 한대 치고 싶은 심정이였다. 건물주의 행패도 잠에서 자다 벌떡 깨나게 했으며 현지 운전기사들의 잔꾀는 또 얼마나 속이 부글부글 끓게 했는가. 중국 수나라에 조사웅이 나부산(罗浮山)에 이르니 소복담장한 (素服淡妆)미인이 반갑게 영접을 하였다.아릿다운 미인의 향기에 취해 술을 마시고 마음껏 즐겼는데 이튿날 깨여나보니 활짝 핀 매화나무를 끓어 안고 자고 있었다.우리가 꿈꿔왔던 세련된 도시생활은 그야말로 나부지몽과 같았다. 비온 뒤의 땅이 더 굳다. 이러한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우연히 뿌려진 민들레는 더 아름답게 피여날 수 있었다. 요즘 청도는 현지에 집을 산 사람이면 호적을 떼여올 수 있다는 새로운 정책을 펴냈다. 그러자 파출소 앞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20여년전 농촌에서 올라와 도시인으로 살아 남으려고 아득바득 발버둥 친 사람들은 이젠 서류상으로 명실공히 도시인이 되였다. 수십년의 인생길에서 어린 시절은 가장 비옥한 농촌 땅에서 튼실하게 자랐고 울바자가 듬성듬성 세워져있는 산간마을을 탈출하는 꿈을 수없이 꾸어왔다.제일 불타는 청춘은 타향에서 도시인 행세를 하면서 몸부림을 치며 호적에 적혀있는 툰이라는 동네 이름이 창피하게 느껴져 하루 빨리 번듯한 시가지 주소가 적혀있는 시내호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아슬아슬한 절벽에 가냘프게 붙어서 능금을 따는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은  덕분에 나도 툰이 아닌 도로 번지수가 적힌 호적을 거머쥐였다. 어릴 때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너무 흥분하지도 즐겁지도 않다. 담담할 뿐이다. 도시인은 도시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우직한 중년이 된 지금은 향수에 젖어있다. 고향의 눈 내리는 사진 한장에 목메이고 가로수 심어져 있는 동네길이 그립다. 어릴 때 뛰여놀던 학교 마당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찰랑이는 도랑에 헤염치는 버들개치가 사무치게 보고싶다. 툰이 적혀져 있던 곳의 추억을 파먹으며 도시에서 살아갈 새로운 힘을 얻군 한다. 늦가을의 황소처럼 게으른 볕쪼임을 하던 농촌의 리듬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호적은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할만큼 중요한 좌표가 아니란 걸 알았다.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꽃이 피고 희망을 품으려는 의지와 실천하는 노력만이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좌표라는 것을 알았다. 세월의 변화를 온 몸으로 맞으며 내가 딛고 있는 길에 내 삶이 펼쳐진다.  
2    제가 한상 차릴게요 댓글:  조회:1755  추천:1  2018-06-30
수필 제가 한상 차릴게요 김영분   오디오 북에서 명절마다 시댁에서 고된 주방일로 쓰러져 눕게 되는 한 어설프게 착한 며느리의 삶을 듣게 되였다. 손이 커서 장을 많이 봐오는 년로한 시어머니 덕분에 다리가 붓도록 서서 음식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 준비가 다 끝나갈 무렵이면 곱게 차려 입은 손우 동서가 두손 가득히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사뿐히 나타나서는 도울 일 없냐고 상냥히 안부를 물어온다. 식사내내 다른 식구들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유하는 시어머니와 잔심부름만 시키는 남편은 전혀 그녀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착하게 보이고 싶은 며느리는 웃으면서 불만을 쏙 숨기고 가족내 행사를 원만히 치른다. 쓰러진 며느리 때문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녀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바보천치같다는 생각에 얄밉기까지 하였다. 곰처럼 미련하게 일만 할줄 알았지 자기 자신은 억울해도 그냥 참고 지나는 무심함이 너무 한스러웠다. 한편 나자신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였다. 설이 되면 우리 식구들은 바리바리 큰형님네 집으로 모인다. 회사일을 하는 관계로 그믐 전날에야 시댁에 도착한다. 그러면 설 장은 물론 웬만한 음식은 다 준비되여 있다. 시어머니와 큰 형님이 바쁜 와중에 다 준배해 놓은 것이다. 막내 며느리인 나는 애들 손을 잡고 멋내기 코트를 차려 입고 나타나서 설인사를 깍듯이 해왔을 뿐이다. 설준비 때문에 힘들어 하는 며느리를 보니 새삼스럽게 해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잘해주시는 시어머니와 큰형님에 대해 숙연히 고마워지는 한편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손님처럼 살며시 맛있는 음식만 얻어먹고 돌아오는 자신이 갑자기 사연속의 동서처럼 느껴져 죄스러운 마음이 갈마들었다. 하지만 설 쇠는 내내 몸이 편하다고 마음마저 가벼웠던 건 아니였다. 앉는 자세도 서성이는 모양도 어색하기만 하다. 평소에 우직스럽다가도 시댁에만 가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주방일이 서툰 나로서는 마늘 바르고 설겆이 같은 허드레 잡일을 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일을 하는 며느리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느라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치지만 나처럼 얻어먹기만 하는 며느리는 왜 마음이 송구방석일가.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작은 며느리라고 내리 사랑을 받기만 했지 어떻게 돌려드려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당연지사로 번잡한 식구들에게 갈비를 찌고 닭을 삶아 대접하는 일은 지레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놀고 먹는다는 인상을 남길가봐 은근히 걱정이 되였다.그래서 주방에 큰 일은 맡아서 할수는 없지만 과일 깎아서 돌리는 일이라든가 맛있게 먹고 편안한척 하고 같이 오락하고 웃고 노는 것은 잘 할수 있었다. 좀 편안하게 해드려야겠다 짐을 좀 덜어드려야겠다 이런 생각은 잠자리가 물 차듯 잠시 스쳐지났지만 주인공 의식이 결핍했던지 어떻게 처사할줄을 몰라 늘 웃고 있으면서도 긴장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또 내 집이 아니니 지레 음식 장만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에 설겆이에만 눈독을 들여 나도 설을 쇨 때 일을 좀 했노라고 자기위안을 하기도 했다. 항상 받는 립장에서 신세를 크게 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에도 남의 신세를 지기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라 도움을 받으면 꼭 보답을 하는 습관이 있는데 아둔하게 설에는 왜 손우 동서에게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가 하는 후회가 절로 생겨났다. 일이 사랑이라고 봉투보다는 팔소매 걷고 나서는 모습이 진정 보답이였을텐데 말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주어들은 기억이 있어서 미안한 마음을 감사하다는 말로 메우려고 애쓴다. “정말 맛있어요. 이 많은 음식 장만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 “올해도 얻어먹기만 하네요. 항상 고마워요.” 헌데 이런 인사말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배처럼 하면 할수록 더 미안한 감이 더 든다. 시어머니와 형님이 괜찮다고 연신 손사래를 쳐도 자신은 한없이 미안하고 작아진다. 내 집이 아니더라고 십여년 넘게 설 쇠는 동안 한번쯤은 내가 여러 식구들을 대접하겠노라고 한상 차렸을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념불에는 마음이 없고 제사상에만 성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고맙다는 말보다는 서툴더라도 한번쯤은 음식을 장만해봤어야 했다. 일 때문에 그믐날에야 시댁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어찌보면 얌전히 얻어먹기 위한 자기 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주인공의 마음으로 다가갔더라면 훨씬 더 편안하고 행복한 설이였을 것이다. 설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시어머니와 형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되새겨보면서 올해 설에는 나도 팔 걷어부치고 씩씩하게 한상 차리리라 다짐해본다. 갓 배운 감자탕에 생선도 굽고 오이도 시원하게 무치고 소고기 불고기도 하련다. 십여년동안 루적되었던 미안함과 그분들에 대한 사랑을 따뜻한 밥상에 담아보련다.  
1    세상과 맞선을 보다 댓글:  조회:811  추천:1  2018-06-30
보름이라는 설연휴를 마치고 회사에 다시 만난 동료들은 그간 할 얘기들이 많았던가본다. 그 가운데서도 맞선보기 화제가 인기를 끌었다. 동료들은 산동지방 시골태생이 많았다. 아직 싱글인 친구들은 설에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들이 미리 맞선 상대를 여럿 포섭해놓는다고 한다. 만나보고는 직감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약혼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동료 중에는 그런 행운을 잡은 친구는 없었다. 꼬작꼬작한 시골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개구리가 왁자지껄 합창하는 동네를 벗어나 나름지기 크고 번화한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몇년은 도시인으로 살았던 그들이다. 혼기는 꽉 찼는데 도시의 약소군체로 근근득식 살아가는 그들은 우아한 교제도 그럴듯한 만남도 없다. 오로지 춥고 허줄한 공장에서 낮에는 박스를 옮겨가며 일을 하고 퇴근을 하면 핸드폰 게임이나 싸구려 야시장을 전전하며 여가시간을 보낸다. 비슷한 처지의 청춘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며 한쌍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내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 외톨이 문제를 효률적으로 해결하려고 휴가때 맞선을 봐서 빠른 시간에 결혼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짧은 시간에 맞선을 봐서 결혼을 결정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도 어떤 사람은 며칠을 사이두고 여러사람과 맞선을 본다. 본의 아니게 인신매매를 당해 팔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는 자신이 직접 이런 삶을 선택하고 있지 않는가. 실제로 몇해전 한 여직원은 설에 맞선을 보고 오개월 후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식날 친정어머니가 혼례금을 터무니 없이 요구하는 바람에 신랑쪽에서 결혼을 깨버렸다. 맞선 후 세번을 고작 만난 두 사람이 전화로 서로 연락하면서 준비한 결혼식이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여직원은 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정신이 혼미해서 다른 도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핸드폰이며 지갑을 잃어버렸다. 싸구려 여인숙에 들었다가 하마트면 변을 당할 번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제일 두려웠던 것이 다시 회사로 돌아와 마주할 결혼사탕을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의 눈길이었다고 한다. 질투를 하던 동료들은 쑥덕이기도 했고 친한 자매들은 위로에 위로를 거듭하니 그 녀는 숨을 쉴수가 없었다. 엄마는 설이 되면 또 맞선자리를 주선해 놓았다고 시름 놓으라고 자꾸 전화가 왔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작업사고도 여러번 내고 결국은 사표를 냈다. 어디로 떠나갔는지 여태 소식이 없다. 그때 그녀가 한없이 가여웠다. 혼기가 꽉 찼다는 이유로 섯불리 결정한 결혼은 얼마나 큰 상처로 그녀를 찌를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아주  본능적인 욕구이다.  그렇지만 이것조차 순리롭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와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설이 되면 맞선에 시간을 떼워야 하고 또 앞날이 어떨지도 모르는 도박같은 결혼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삶은 우리가 소망했던 것보다 더 줄수도 있고 적게 줄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의 눈길을 건네보자. 우리는 훨씬 많이 누리고 있으니 좀 나누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 주위 이웃들을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하자. 그리고 주어지고 누릴 수 있는 모든것에 경의를 표하고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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