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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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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1편 밤중의 총소리 댓글:  조회:1889  추천:1  2014-02-08
     나의 동년이야기는 전설과도 같았다. 이건 모두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1933년 어느 날 밤,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웬 일이여?”  동네사람들이 골목으로 뛰쳐나왔다.  “몰라 마을을 털러 온다더니…”  “며칠 전 촌장집에 기별이 왔는데 돈을 갖춰 놓으라고, 주지 않으면 귀를 떼간다나…”  “그럼 우린 어쩌나?”  “어쩌긴 무조건 피해야지.”  그래서 사람들은 허겁지겁 논밭으로 몰려갔다.  이 때 잠결에서 놀라 깨어난 어머니는 한 살난 나를 업는다는게 베개를 업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동네사람들은 따라 논밭으로 내뛰었다.  그떄 우리가 살던 마을은 봉림동, 연길에서 서남쪽으로 약 20리가량 떨어지 조그만 산간 마을이었다.  논밭으로 몰려간 동네사람들은 모두 물위에 반드시 누었다. 벼 포기가 두어뼘 자란 논벌은 사람이 누우면 인체가 보일랑 말랑해서 어둠이 깃들면 일시 피신하기는 알맞춤하였다.  베개를 업고간 어머니는 논판에 가서야 애기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 마을로 되돌아 오려고 했으나 그 때는 벌써 늦었다.  그 때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단잠에 골아빠져 있었다 한다.  이 날 우리 가문에는 큰 불행이 뚝 떨어졌다. 사랑방에 누어있던 나의 아버지가 너무도 요란한 총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서 우리집 뒤 배자를 뛰어넘다가 유탄에 허벅다리를 맞은 것이다.  그 해 용정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팔도 경찰서 순사로 가라는걸 거절하고 고향에 돌아와 벼 재배 실험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성중학교에서 민족독립사상의 영향을 받은 아버지는 일제의 개다리질을 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다 피신하는데도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뱃심으로 논밭에 나가지 않고 누워있다가 총소리가 너무 요란하니 견딜 수가 없어 뒤늦게야 배자를 뛰어넘다가 그만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이 때 한 아줌마가 아버지가 쓰러진 곳을 지나갔다.  “아줌마 날 좀 살려주오.”  아버지가 애원했으나 그 아줌마는 자기도 한 목숨 구하려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그 때 누가 총 맞은 아버지 허벅다리를 꾹 동여매주었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습격자들이 돌아간 뒤 아버지는 소수레에 실려 연길병원 쪽으로 가던 중 시내물을 건너다가 물을 찾았다. 총상을 입고 피 흘리는 사람한테 물을 먹여서는 안된다는걸 모르는 동네사람들은 물을 퍼주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출혈과다로 운명하고 말았다. 스물여섯 살 아까운 나이에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저 세상에 가시고 나는 하룻밤 사이에 아버지를 잃은 신세가 되었다.   
63    해마다 설날이 오면 댓글:  조회:2334  추천:2  2014-01-29
     또 설이 왔네요. 설이 오면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인 지금도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겨울철 과일 하나가 있습니다. 그 과일이 뭔가 하면 언감입니다. 노란 감을 그냥 얼궈놓은 건데 이발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인 언감을 조금 녹이고 먹으면 사각사각하면서도 꿀맛같은 그 맛, 상상만해도 군침이 돕니다. 제가 어릴적 설이 오면 할아버지는 언감을 사왔습니다. 그 시절 겨울철 과일이란 언감, 언배, 찔광이를 사탕물에 발라 얼군 삥탕쿨러 정도였습니다.  어느해인가 저는 언감을 너무 먹어 배탈이 나서 배침까지 맞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언감을 먹지않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설이 오면 그냥 언감을 사왔습니다. 언젠가 제가 할아버지에게 왜 언감만 사오는가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해 설에도 할아버지는 또 언감을 사오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왜서 해마다 설이면 언감을 사가지고 오셨는지 그 까닭을 저는 어른이 다 돼서 할아버지 고향을 찾아서야 알게 됐습니다.  1989년 저는 할아버지 고향인 한국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를 찾았습니다. 할아버지 고향집 뒤 뜰에는 감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늦가을이라 잎이 떨어진 감나무에는 까지밥으로 남긴 감 몇 알만 대룽대룽 달려있었습니다. 그 감을 보는 순간 저는 왜서 할아버지가 해마다 설이면 언감을 사오셨는지 알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18살 엿판을 메고 고향을 떠난 뒤로 일본, 대만을 전전하다가 중국 대륙에 정착했습니다. 광복이 나서 고향으로 가려던 할아버지는 조선반도 분단 비극으로 귀성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타향살이 근 반세기가 흐르는 속에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에겐 눈을 감아도 지척에 다가서는 것이 고향이랍니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한스러움만 남는다고 시인인 저의 아버지는 “고향이 원수인 줄을 미처 몰랐네”라고 고향에 대한 애수를 읊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선 감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겐 감 맛은 그대로 고향의 맛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할아버지는 고향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언감으로 손자에게 못 잊을 고향을 맛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도 차례상에 올릴 과일로 언감을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청명, 추석, 설에는 저는 차례를 지냅니다. 조상들의 명복을 빌고 새해의 소망을 가져봅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께서도 올해가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시고 건강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62    음력설 유래 댓글:  조회:3913  추천:1  2014-01-24
 중국인들에게 있어선 음력설은 봄의 명절입니다. 하여 음력설을 춘절이라고도 합니다. 음력설의 유래는 유구합니다. 전한데 의하면 중국인들의 음력설은 4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춘절이라고 하지 않고 고정된 날짜도 없었습니다. 기원전 2천백여년에 와서 목성이 한 바퀴를 도는 시간을 인년으로 하여 춘절을 설로 하였습니다. 기원전 천여 년 전 사람들은 해로 춘절을 표시하였습니다. 그 당시 해의 뜻은 오곡이 풍작을 이룩한다는 뜻입니다. 풍작을 거두면≪유년(有年)≫라 하고 대풍작을 거두면≪대유년(大有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민간 관습에 따르면 춘절은 음력으로 12월 23일부터 새해 정월 15일 원소절까지인데 앞뒤를 합치면 석주일이나 됩니다. 이 기간 12월 30일 그믐날 저녁과 정월 초하룻날은 가장 성대한 날입니다. 고대에 음력설을 ≪원일≫, ≪원단≫, ≪신년≫이라고 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 후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음력설로 명명했습니다.   음력설을≪과년(過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년(年)≫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다주는 상상속의 동물입니다. 옛날 설법에는≪년≫이 오면 초목이 말라죽고 만물이 소생하지 못합니다. 예로부터≪년≫이 가면 만물이 소생하고 백화가 만발한다고 전해내려 왔습니다. 하여 재난을 가져다주는≪년≫을 쫓기 위해 폭죽을 터트려 왔습니다. 때문에 폭죽을 터트리는 것은 중국인들이≪년≫을 쫓는 설날의 풍속으로 되었습니다.   지금 음력설 행사에는 하늘과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내용은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생활정취가 다분한 내용들, 예하면 춘련과 년화, ≪복≫자를 붙이고 물만두를 빚고 폭죽을 터뜨리고 세배하는 것이 음력설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음력설전 사람들은 자기 집 문 양쪽에 붓으로 쓴 새해 기원을 담은 춘련을 붙입니다. 문이나 창문에 행운을 기원하는 그림을 붙입니다. 춘련과 년화를 붙이는 것은 지금도 중국의 농촌과 일부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력설 행사의 하나입니다. 춘련과 년화를 붙이는 행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춘련과 년화는 폭죽을 터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신을 쫓고 액막이는 하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춘련과 년화외에도 대문이나 등롱에 써 붙이는≪복≫자나 재물 신 그림도 역시 중국인들이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는 행사입니다. 복자는 보통 거꾸로 붙이는데 그 뜻인즉 복이 왔다는 뜻입니다.   음력설은 가족,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입니다. 이 점에서 크리스마스를 쇠는 것과 비슷합니다. 타향에 있던 사람들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막론하고 음력설에는 부모님을 찾아 귀향길에 오릅니다.   음력설 전날인 그믐날은 가족이 모이는 날입니다. 그믐날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데 이 음식을 묵은해를 보내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믐날밤 음식을 나눈 후 보통 물만두를 빚어 먹습니다.   중국에는≪맛 나는 음식은 그래도 물만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만두를 빚자면 먼저 밀가루를 이기고 물만두소를 여러 가지 야채와 고기로 만듭니다. 밀가루를 이기는 것을 중국어로≪허맨≫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음은 모인다는≪합(合)>이라는 말과 음이 같습니다. 물만두는 중국어로≪죠즈≫라고  하는데 여기서≪죠>는 교류라는≪교(交)≫자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밀가루를 이긴다는≪허맨≫이라는 허자와 음이 같은 모인다는≪합>과 물만두를 일컫는 ≪죠즈≫라는≪죠≫자와 음이 비슷한 교류라는≪교≫는 함께 모여 교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믐날에 한 가족이 모여 물만두를 빚어 먹는 것으로 가족의 단란한 화합을 기원했습니다.   그믐날에 밤을 새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음력설을 쇠는 가장 중요한 행사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믐날밤에 남녀노소가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고 덕담을 하면서 날을 샙니다. 새날이 밝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새 옷을 갈아입고 가장 연세가 많은 분한테 세배를 드립니다. 그담 친척집이나 친구 집이나 이웃집에 가서 새해의 축복을 드립니다.   중국에서는 음력설 명절분위기가 약 보름동안 지속됩니다. 음력설후 보름이 지나면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날도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명절의 하나인데 원소절이라고도 합니다. 원소절이 지나면 음력설 명절행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61    어머님 자서전 안내 말씀 댓글:  조회:3012  추천:5  2014-01-19
 오늘부터 저의 어머님의 자서전을 연재합니다. 어머님이 쓰신 자서전 은 2008년 넌픽션부문 최우수 당선작으로 뽑혔습니다. 어머님의 자서전을 올리기앞서 편집자의 소개글을 선보입니다.                                                             한국 편자의 말  이 공모한 넌픽션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방채봉 여사는 중국 북경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이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주석을 거쳐 현재 중국 55개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을 주필이며 시인으로 널리 알혀진 김철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일본헌병대의 숱한 매질과 고문을 당하던 아버지의 비극적인 운명,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진 오빠 등, 연이은 수난의 가족사를 겪으면서 할머니 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이후 배고픔과 고난을 겪었고, 중국의 문화혁명 때에는 남편과 함께 억울하게 구속되었다가 명예회복이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의 드라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서전에서 방채봉 여사는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민족의 수난사는 내가 겪은 재난과 흡사하다고 할까.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내 일생의 수난사는 우리 민족의 혈투사의 축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어디 가서나 피도 많이 흘렸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도탄속에서 허덕이던 나의 겨례, 그 속에 한 사람으로서 나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갸냘픈 여인으로 극복하기 힘든 수많은 역격과 좌절을 딛고서 일어선 오뚝이 같은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극기와 인내로서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는 등,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본지는 총 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아울러 맞춤법이나 표기 등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원문을 살려 싣기로 했음을 밝혀둔다.       
60    가장 소중한 재산 댓글:  조회:3188  추천:10  2014-01-14
   요즘 항간에 화제로 되고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부동산개발과 주택개혁 붐을 타고 상품주택이 많이 팔리고 있는데 상품주택을 산 주인 이름이 어린이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않아 항간의 화제로 되고 있다. 지금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상품주택을 사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실례로 한 사업가는 유치원에 다니는 5섯살 난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몇 백만 원을 고가 하는 호화주택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 부모는 《우리 세대가 지금 고생하는 목적은 후대에게 재산을 물려주려는데 있다》고 하면서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호화주택을 마련한 그 이유를 밝혔다.   7살난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주택을 마련한 다른 한 부모는 중국에서 유산세를 징수하지 않고 있는 지금 미리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주택을 마련하는 현상을 두고 교육학자들은 깊은 우려를 보이고 있다. 한 아동 심리학자는 어린 자식의 이름으로 수십만, 지어는 몇 백만 원을 고가하는 주택을 사두는것은 어린이한테 조금도 이로움이 없으며 오히려 어린이 성장에 해를 끼칠 뿐이라고 지적했다. 해외에서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 온 한 부모는 자기는 비록 몇 백만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가지고 있고 승용차도 두 대나 있지만 자식에겐 엄하게 요구하여 매일 공공버스를 타고 다니게 했다. 그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능력으로 자식한테 남들보다 월등한 물질 조건을 마련해줄 수 있지만 앞으로 자식이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은 부모가 키워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무엇이 자식에게 남겨줄 가장 값있는 재산일가? 이 문제는 예로부터 제기 되어 온 심각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선인들이 좋은 본을 보여 준 실례가 많고도 많다. 그 중 한가지 이야기만 예 들가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이 뭔가를 말해 주는 이야기다.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즐기고 있었다. 배를 탄 사람들 중 허름한 옷을 입고 책 한 권만 손에 든 사람을 내놓고는 모두 큰 부자들이었기에 호화로운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집이 얼마나 크고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를 서로 뽐내고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은 부자들의 말에 끼여들지 않고 한켠에 조용히 앉아 책만 읽고 있었다. 부자들 중 한 사람이 책만 읽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아까부터 말없이 책만 읽고 있는 것을 보니 재산이 없는 모양이군. 그래 그 책에서 재산이라도 나오는가?》 그러자 책을 읽던 그 사람이 말했다. 《저에게도 재산이 많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보다 더 큰 재산이 있지요.》 《그래 당신의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그 허름한 옷을 보니 재산이 있기보다도 거지 신세나 겨우 면한 것 같은데.》 부자들이 조소하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내 재산을 공개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당신들도 내가 얼마나 큰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자들은 그 사람이 정신이 잘못된 사람이라고 치부했다. 배가 육지를 멀리 떠나자 해적들이 나타나 부자들이 가지고 있던 보석이며 집문서이며 저금통장이며 입은 옷까지도 죄다 빼앗았다. 유독 해적들이 빼앗아가지 않은것은 허름한 옷을 입은 그 사람이 읽던 책이였다. 배는 더 이상 항해 할 수 없어 가까운 낯선 항구에 닻을 내렸다. 해적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거지로 된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짐꾼이 되거나 남의 심부름이나 해주면서 근근득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던 그 사람은 낯선 고장이지만 학교를 꾸리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로부터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책을 읽던 그 사람은 지난날 함께 여행을 했던 부자들을 만났다. 그 젯날의 부자들은 모두가 비참한 가난뱅이가 되어 하루하루를 굶지 않고 먹고사는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거지 신세나 면한 사람으로 깔보던 그 사람 앞에서 고관대작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뉘우쳤다. 《당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입니다. 지식은 누구에게 빼앗기는 일없이 안심하고 지닐 수 있는 가장 값있는 재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식을 가진 것은 이 세상 모든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도리를 뒤늦게야 깨우친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거액의 돈을 들여 어린 자식에게 주택을 장만해주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충고가 될 가싶어 다시 떠올려 봤다.
59    새해 덕담 댓글:  조회:3883  추천:4  2013-12-31
 설 세시풍속에서 중요한 풍속의 하나가 덕담을 나누는 것입니다. 덕담이란 말그대로 새해 축복입니다. 지금은 전화, 연하장, 메일, 미니 블로그, 웨이신, 카카오톡을 이용해 축복을 전하지만 제가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네들은 그냥 집집을 돌면서 서로이 새해 축복을 나누셨습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설 인사를 나누고 기분나면 술잔을 들면서 덕담을 나눈데 비해 지금 덕담을 주고받는 방식이 조금은 인정이 말라간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 나누든 덕담은 어디까지나 최고의 측복입니다. 설날 아침, 할아버지 뒤를 따라 다니며 보면 어르신네들이 나누는 새해 덕담은 대체로 건강장수, 다자다복, 소원성취였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절 인사 드리면 그때는 세배돈보다 사탕, 과자가 많이 차려졌습니다. 어르신네들이 우리한테 하시는 말씀은 대개 “부모님 공경하고 선생님 존경하고 공부 잘해라”였습니다.  지금은 덕담이 아주 다양해졌고 의미도 깊어졌습니다. 시대적인 변쳔이라고 할가요. 유행되는 덕담 몇 개 골라봤습니다. “새해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새해 선물이 희망의 선물, 사랑의 선물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새롭다는것입니다. 해는 어제와같이 떠올라도 해빛은 어제의 해빛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맞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미래가 좋은것은 그것이 하루하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당신에게는 하루하루가 사랑과 행복으로 채워지길 기원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것은 참 행복한 일인것 같습니다. 새해도 변함없이 함께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새해 덕담입니다. 저의 덕담은 아주 간단한데 해마다 변함없이 써오고 있습니다.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58    디즈니랜드에서 받은 크리스마스 축복 댓글:  조회:2310  추천:4  2013-12-24
57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6편) 댓글:  조회:4107  추천:0  2013-12-12
                                              링컨 기념관   링컨 대통령 하면 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미국 연방을 지키고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앞선다. 링컨 대통령 역시 미국인들에게는 워싱톤, 제퍼슨, 케네디 대통령들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의 한 분이다.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을 가는 길목에는 꼭 들러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전 참전 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다.   기념비는 검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는데 거기엔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 2500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앞 파란 잔디밭에는 우비를 입고 성조기를 향해 V자 대열로 나가는 한개 소대 병사들을 형상한 조각상이 있었다. 숫자를 헤어보니 19명이었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19개 조각상이 검은 대리석 기념비에 비치면 38명으로 되는데 군사분계선인 38선을 상징한다고 했다. 성조기 아래 비석에는 《조국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기념비 아래에는 《자유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는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기재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전에 150만 명이 참전했는데 그 중 5만 4천여 명이 전사,  11만여 명이 부상,  8천여 명이 실종되었다. 참전 대가가 엄청난 것이다. 기념비는1995년에 한국정부가 출자해 새운 것이라고 했다. 전쟁은 정의 전쟁이든 비정의 전쟁이든 전사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가장 비정하고 종국적으로는 비극이다. 필자는 기념비를 향해 묵념으로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링컨 기념관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다. 링컨 기념관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하얀색의 건물인데 기념관안에는 링컨의 대리석 좌상이 있었다. 가이드 소개로는 대리석 좌상을 만드는데 4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뒤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성은 그에 의해 구원된 미국인들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에 영원히 간직 될 것이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좌상의 왼쪽 벽에는 링컨의 명언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1층 왼쪽에 설치된 전시관에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관련해 링컨 대통령이 연설한 연설문이 대리석에 새겨있었고 링컨 대통령 관련 역사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전시관 영상자료실에는 자유를 웨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장중한 음악이 흐르는 속에 비쳐지고 있었다.     링컨 기념관 안에는 세계 각국에서 발매된 링컨 초상화가 찍힌 우표가 전시되었는데 우표만 보아도 링컨 대통령이 세계적으로 널이 알려진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 중 불멸의 연설이라고 하는 연설이 많은데 그 중 《갈려서 싸우는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 없다고 믿는다.》는 노예 해방 관련 연설도 유명하고 게티즈버그 묘지 설립 기념식에서 한 《민주주의가 없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야말로 국가를 위해 죽어간 군인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연설은 자유의 대명사로 지금도 세계가 기억하고 있는 명언으로 되고 있다.   링컨 기념관은 워싱턴 기념탑, 국회의사당과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는데 가이드는 근엄한 표정을 한 링컨 대통령이 지금도 국회의사당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제퍼슨 대통령은 백악관을, 링컨 대통령은 국회의사당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셈이군요.》    필자의 말에 가이드가 역시 유머로 받았다.   《맞죠. 한 분은 현직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하는가를 서서 지켜보고 있고 한 분은 국회의원들이 맨날 다투기만 하니 너무 걱정스러워 잠을 못자고 이렇게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거죠. 그래서 링컨 기념관은 문이 없고 24시간 내내 개방되어 있습니다.》   링컨 기념관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도합 36개인데 당시 미국의 주(州) 수를 뜻한다고 했다. 링컨 기념관을 오르는 계단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도 꿈이 있다》는 명언이 새겨져 있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링컨 기념관 계단에서 25만명 시위자들을 향해 《나에겐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날 집회는 미국 역사의 한 폐지를 수록한 《워싱턴 대행진》으로 이어졌다.  36살 젊은 나이에 노벨상을 수상한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은 《정의가 강처럼 흘러 흘러》 모든 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모든 국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미국에서 함께 누리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을 반대한 그도 링컨 대통령처럼 암살당했다. 링컨 대통령은 1865년 4월 14일 저녁 워싱턴 포드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라고 하는 남부출신인 배우에게 저격당해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링컨 대통령을 순교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암살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었듯이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말한다.      
56    겨울의 명상 댓글:  조회:2065  추천:1  2013-12-01
완연한 겨울입니다. 고향에는 첫 눈으로 폭설이 내렸다네요. 설경을 그냥 사진으로만 보는 유감만 씹을 뿐입니다. 그 유감 달래려고 언젠가 아버님이 쓰신 시 한 수 "겨울의 명상"을 떠올렸습니다. 눈은 땅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몸에선 하-얀 피가 흐르고 있다   이제 돌풍이 일면 그는 또다시 비상할거야   잿불에 감자를 굽던 만보 할배가 광복 전 한겨울 지독하게 추웠던 밤 이야기를 사랑방 새끼줄처럼 꼬아갈 적에 밖에서 문뜩 함성이 들린다 어허, 눈이 다시 잠을 깼나봐…  
55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5편) 댓글:  조회:3903  추천:2  2013-11-27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  미국 정부 부처에서 쌍 날개라고 하는 사법성과 상무성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 있는 백악관(White House)은 명실 공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관저이자 집무실이다. 백악관이란 이름은 1814년 대영전쟁 때 불에 그슬었다가 재건 후 외벽을 하얗게 칠한 데서 비롯된 것이란다. 《겉보기엔 아주 작은 건물 같지만 방이 132개가 있고 2층과3층은 대통령 일가가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입니다. 8개의 방을 볼 수 있는 무료 가이드투어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에 운영됩니다. 한국의 청와대는 접근 불허지만 백안관은 언제나 국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의 청와대는 고압적인 모습이라면 백악관은 서민적인 인상을 준다고 할가요. 워낙 인기가 좋은 곳이라 한 달 전 부터 근처에 있는 백악관 방문객 센터에서 투어 신청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우리 팀은 사전 신청을 하지 않아 백악관관내 관광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한 번 유감을 씹는 순간이었다.  관광버스가 정차한 곳은 백악관 북쪽인데 백악관과 마주한 광장에는 프랑스인 라파예프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시기 스스로 군대를 모집해 미국을 위해 참전한 그를 기려 세운 동상이란다.  《프랑스인으로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해서 공을 세웠지만 인디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이드 소개로는 라파예프 장군은 미국 독립전쟁시 사단장, 후에는 버지니아 군 사령관으로 활약하면서 큰 공을 세웠지만 인디언 토벌작전에서 악명을 남겼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지속적으로 동상철거를 요구해왔지만 그 요구가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다.  백악관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가까운 곳에서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에 시선을 주니 한 중년 남성이 백악관을 마주 보며 혼자서 색소폰을 열심히 불고 있었다. 일명 《거리의 악사》라고 불리는 구걸자인줄로 알았는데 가이드 말로는 백악관을 상대로 항의 시위를 하는 분이라고 했다.  백악관 앞거리에서 종종 항의 시위가 벌어지는데 보통 시위자들은 질서 있게 백악관 주변을 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텔레비전에 종종 비쳐지는 경찰과의 대치 상황이거나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장면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성숙한 미국인들의 시위문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이드가 길옆에 있는 노천 매장 같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은 노천 매장이 아니라 백악관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여사의 거처입니다. 한번 가 보시죠.》  햇빛이나 비를 가리게 검은 비닐로 지붕을 한 곳에서 연세가 많이 들어 보이는 부인 한 명이 반갑게 웃으면서 우리를 맞았다. 그는 우리가 한국 관광팀인줄 알고 얼른 한국어로 된 표어 판을 내들었다. 거기엔 한국어로 《안녕! 반핵시위!》라고 씌어져 있었다.     《이 분이 바로 로 널리 소문이 난 분입니다. 이 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시장철 백악관을 바라보면서 침묵시위를 하신 분입니다.》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 이름은 콘셉션 피시노트, 스페인 출신이다. 1963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뉴욕복지사업단, 국제 연명, 스페인 영사관에서 일하다가 1979년부터 워싱턴DC에 와서 정치활동에 종사했다. 냉전시대 미국의 군비증강을 우려해 미 연방의원들을 만나는 등 로비활동에 종사하다가 혼자서 하는 정치활동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1981년부터 반핵 내용을 담은 간판을 들고 백악관 앞에 거처를 옮겼다. 그 때로부터 그녀의 하루 24시간 침묵시위가 시작되었다. 간판에는 히로시마, 나가사끼 원폭 피해자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매일 마다 백악관 앞에는 관광버스가 정차하는데 관광객들은 이미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를 먼저 찾는다고 한다. 하여 각국 여행사 가이드들은 그녀가 《백악관의 명물》로 떠올랐다고 한다. 《백악관 앞의 반핵 아줌마》는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반핵을 호소하고 싶었는데 여기 있으니 내가 직접 돌아다니지 않아도 세계를 대상할 수 있다》고 했다.   백악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도 핵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핵무기 폐기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면서 지금까지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식사는 근처의 빵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이나 지원자들이 가끔 사주는 것으로 해결한다. 백악관 주변은 텐트나 침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그녀는 밤에는 간판을 깔고 잔다. 겨울이면 두터운 외투 한 벌을 덥고 잔다고 한다.   그녀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세상은 궁극적인 정의가 필요하다》이다. 얼굴이 볕에 타서 새까맣게 된 그녀는 우리에게 밝은 미소를 선사했다. 그 미소가 지금도 나의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시각에도 그녀는 그냥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백악관을 바라보면서 외롭게 침묵시위를 하고 있겠지.      
54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4편) 댓글:  조회:3493  추천:1  2013-11-15
                                       미국 수도에서 일본 벚꽃 축제?!  벚꽃은 일본의 국화이다. 일본에서는 벚나무를 신수(神樹》라고 한다. 해마다 벚꽃이 만개하는 3월말이 되면 일본에서는 벚꽃축제가 벌어진다. 그 벚꽃축제가 미국의 수도에서 벌어졌다고 하면 그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이다.  《여러분들이 일주일전만 오셨어도 미국의 수도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벚꽃축제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감이지만 지금은 벚꽃이 거의 다 지고 몇 그루 벚나무만 아직 꽃이 지지 않았습니다.》  제퍼슨 기념관 관광이 끝나자 가이드는 우리 일행을 제퍼슨 기념관과 붙어있는 포토맥공원 안으로 안내했다. 포토맥 강가를 따라 펼쳐진 공원 안에는 벚나무가 수없이 많았다. 꽃은 거의 다 지고 간혹 가다 몇 송이 벚꽃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한 곳을 가니 가이드 말대로 벚꽃이 만개한 몇 그루 벚나무가 있었다.  로신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벚꽃축제를 보고 《벚꽃이 만발한 계절이면 마치 분홍빛 구름이 드리운 것 같다》고 묘사했다. 벚꽃이 거의 지고 몇 그루만 남았으니 《분홍빛 구름이 드리운 것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벚꽃이 만개한 몇 그루 벚나무로도 로신 선생이 그린 황홀한 그 광경을 그려보기에는 족했다.  《미국 수도에서 벚꽃축제가 열린다는 게 이상하죠? 여기에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인즉 이러하다. 워싱턴DC에 벚나무가 심어진 것은 스키도모어(Mrs.Scidmore)라고 하는 한 부인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1885년 오빠 만나러 일본에 간 이 부인은 일본 벚꽃을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일본 벚꽃을 미국에 들여올 것을 정부에 청원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그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20여 년 동안 부인은 계속 정부에 청원했다.  1909년 3월 미국 27대 대통령으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대통령이 취임하자 스키드모어 부인은 대통령 부인인 헬렌 태프트(Helen Taft) 여사에게 청원서를 보낸다. 태프트 부인이 《자신도 일본에 산 적이 있어 일본 벚꽃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다》는 답신을 보내면서 일본 벚꽃나무의 워싱턴 이식 작업이 본격화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 부인까지 참여했다는 것을 안 당시 일본 도쿄 시장이 1910년 벚나무  1500그루를 기증했다. 하지만 이 나무들은 워싱턴 토양과 일본 토양의 차이와 해충 때문에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해 소각 처리됐다. 2년 뒤인 1912년 다시 일본 측이 기증한 벚나무들이 워싱턴 포토맥 강가와 주요 거리에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이를 기념한 행사가 지금의 벚꽃 축제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처럼 황홀한 벚나무들도 전쟁피해를 입었습니다. 1940년에 와서 벚나무가 4천 그루로 늘었는데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이 있은 후 그 사건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부모들이 도끼를 들고 워싱턴 DC.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벚나무를 찍어버리고 나무 그루터기에 팻말을 달아놓았습니다. 그 팻말에 무슨 글이 씌어졌겠습니까?》  가이드는 잠깐 뜸을 들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전사자 부모들은 벚나무를 찍어버리고는 그 나무 그루터기에 이라고 쓴 팻말을 달아놓았습니다. 일본인들의 운명이 바로 밑동 잘린 벚나무와 같다는 뜻이죠. 그처럼 황홀한 꽃을 피우던 벚나무가 전쟁 때문에 도끼에 찍혔을 뿐만 아니라 로 되였으니 개탄할 일이 아닙니까. 다행히도 당시 벚나무 몇 그루가 요행 화를 면해 말하자면 지금의 벚꽃축제의 씨앗으로 되었습니다.》  가이드는 벚꽃축제가 미국 수도에서 펼쳐지게 된 데는 대통령 영부인의 공로가 컸다고 하면서 허나 당시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첫 협약인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일본과 체결한 장본인이라고 했다. 이 밀약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1905년에 체결되었는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를 묵인한다는 내용의 계약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에게는 태프트 대통령은 별로죠. 지나간 역사는 접어둡시다. 자, 그럼 한 가지 물음을 제기하겠습니다. 벚꽃의 본산지는 어딥니까?》  우리 일행 중 대부분이 일본이라고 했다.  《아닙니다. 본산지는 한국의 제주도입니다. 벚꽃의 원조는 제주도의 왕벚꽃입니다. 일본인들이 그 꽃을 일본에 가져다가 사꾸라라고 이름을 달고 벚꽃의 원조라고 건방을 떤 겁니다.》  꽃나무에도 역사가 있고 나라간 갈등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가이드는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53    작가의 “직장” 댓글:  조회:3634  추천:1  2013-11-03
 직장을 갖고 있으면 직장인이다. 몸 담고 있는 곳이 직장이라면 나도 직장을 여러번 바꾸었다. 중국의 근무년한 규정에 따르면 나의 첫 직장은 “광활한 천지”다. 왜냐하면 당시 농촌으로 간 지식청년은 귀향지식청년과 달리 농촌에 간 그날부터 근무년한이 시작된다.  첫 “직장”은 참으로 거창한 “직장”이였다. 당시 유행된 말로 간추리면 “광활한 천지”라고 이름지은 나의 첫 “직장”은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고” 호미로 땅을 긁으면서도 “지구를 다스리는” 곳이였다. 그렇게 3년반을 “세계를 내다보며 지구를 다스렸다” (집체호 식구들)    그담 이어진 “직장”은 꿈많던 학창시절이였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마치고 배치받은 곳은 연길현문공단(후엔 룡정시예술단이라고 명칭) 창작실이였다. 그 뒤로 북경영화학원 시나리오작가반, 연변문예창작실, 연변텔레비전방송국을 전전하다가 지금의중국국제방송국에 눌러앉았다.  15살에 “직장인”으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난 나 자신을직장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다. 직장인이라면 우선 직장인으로서의 긍지감이 있을거고 잇따라 따라오는것이 수없이 겪게되는 갈등과 고뇌, 거기에 겹치는 가정, 명예, 승진 등등 요인으로 받게되는 스트레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술한 직장인으로서 받아야 할 그런 갈등,고뇌,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고 말하자면 “멋대로” 살아왔기에 나 자신을 직장인 계열에 세우고 싶지않다. 한것은 나에겐 또 다른 나로서의 “직장”이 있었기 때문. 그 직장이 바로 작가로서의 “직장”이다.  15살에 어쩔수없이 몸담게 된 “광활한 천지”는 나의 처녀작이 “탄생”한 곳이다. 당시 아버님은 “반동학술권위”, “간첩” 루명을 쓰고 수감돼 있었고 난 “개자식”으로 몰려 농촌에 가서도 당시 그 많던 회의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그냥 수걱수걱 일만 했다. 밭갈이부터 김매기, 후치질, 가을걷이, 겨울엔 소 사양원, 못해본 일이 없었고 어느 한해는 내가 최고 공수를 벌었다. 405공, 그러나 한 공에 38전, 그것도 현금이 없어 그냥 장부책에만 기록만 되였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하늘의 별만 쳐다 보고, 그러다가 어쩌다 쓴 글이 소 사양원이 어떻게 소를 잘 키워 생산대의 살림을 한몫 떠멘다는 시같지도 않은 시였다. 생각밖에도 그 시가 1972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화혁명기간 처음으로 펴낸 시집 “태양의 빛발아래”에 수록되여 나의 창작생애에서 처녀작으로 된것이다.  연변대학 학창시절은 작가의 꿈을 꾸던 시절이였다. 그러나 당시 작가는 “고린내나는 아홉째”에 속했다. 첫 학기를 마치며 한반에 있는 학우와 술 한잔 나누면서 난 후에 작가가 될거야 하고 했는데 그 학우가 내 말을 선생님한테 “회보(고자질)”했다. 그 이튿날 담임선생님이 하는 말이 이랬다.   “우리 반에 아직도 자산계급 명리사상에 물젖어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은 자아반성을 잘해야 될것 같소.” 당시 감옥에서 풀려나온 아버님은 나에게 “작가는 항상 먼저 얻어맞는 사람이기에 절대 작가가 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사내가 한번 칼을 빼들었으면 잡초라도 베라”는 말과 같이 나는 “한번 빼든 칼”을 휘둘러 보기로 결단했다. 지금도 이 말은 나에게는 좌우명이다.                                                                        연변대학 학우들(1973년)  어쨌든간 대학에서 작가가 될 꿈을 무르익혔고 그 꿈을 현실로되게 한 곳이 연길현문공단이였다. 가사, 연극, 소설에 두각을 내밀었는데 당시 최고의 히트작은 연극 “두부장사”, “시름거리 웃음거리”, “울고웃는 사람들”이였다. 단막극 “두부장사”는 제1회 연변연극제 1등상을 수상했고 장막연극 “시름거리 웃음거리”는 수상은 물론 당시 공연차수에서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연길현문공단은 나에겐 명실공히 작가의 첫 “직장”이였다.  그후로 나의 작가생애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일년에 집에있는 시간이 명절까지 합해서 두달 밖에 안되였다. 온 사회가 나의 무대였고 모든 사람들이 나의 주인공이였다. 사회 전체가 나의 “직장”이 된것이다. 중국 전역에서 티베트와 해남도를 내놓고 거이 다 “답사”했다. 얼마나 나돌아 다녔으면 나의 안해가 “난 생과부와 같아”라고 했을가.                                       연변대학 출신 원로작가님들과 (조성일, 김태갑, 리상각)함께    사실 나의 안해는 내 작품의 첫 독자, 아니 “검열관”이다.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나는 무조건 안해한테 작품 “검열”을 맡긴다.안해가 “괜찮아” 하면 그 작품은 꼭 “해빛”을 봤다. 헌데 딱 한번 안해의 판단이 빗나갔다.  중국국제방송국에 전근된후 10년동안 필을 놓았다가 다시 들어 쓴 소설이 “또 하나의 나”였다.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쓴 소설이기도 하다. 새벽녘까지 자판을 두드리다가 잠간 잠을 청했는데 눈을 뜨니 안해가 컴퓨터앞에 앉아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을 보고있었다.  “어때?” 내가 물었다.  여느때 같으면 “괜찮아”해야 할 안해가 하는 말. “당신 오랫동안 필을 놓아서 그런지 흐름이 좀은 이상하네요.”  당연히 다를수 밖에. 북경에 전근되여 10년동안 소설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항상 현대소설의 흐름을 읽으면서 재래의 “나”를 탈피하고 “또 하나의 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모지름을 써왔던것이다. 그 소설이 나중엔 “윤동주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당시 윤동주문학상 평심위원이였던 김호웅교수는 나의 작품평을이렇게 했다. “‘서울양반’이 된 김훈씨가 드바쁜 북경인의 일상에 빠져 영영 사라지는가 했더니 요즘 ‘또 하나의 나’, ‘수도권의 촌놈들’, ‘거미의 이야기’, ‘수렁 속 깊은 곳에’, ‘마지막 한 수’ 등 단편들을 연거푸 펴내고 있다. 하여 원고난에 허덕이는 우리 문학지의 편집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또 하나의 나’는 현시대 중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실업인구의 증대와 그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인간의 고뇌와 사회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것만큼 우리는 우선 김훈 씨의 작가적 사명감과 치열한 현실 참여의식을 긍정해야 할 것이다.”  남들 눈에는 작가란 아주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비춰지겠지만사실 작가에겐 고충과 비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장막연극 “망각된 인간들”을 실례로 든다. 1987년 연변연극단에서 무대에 올린 이 연극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일반인들의 운명과 흘러온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 사회에 조성한 위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호소한 작품이다.   이 연극은 3회 공연밖에 못하고 금연당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11년이 지난 1987년이었지만 “좌경” 사조는 남아있었다. 당시 이 연극에 “사회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모독하고 현대인을 죄다 정신병환자로 치부했다”는 루명을 뒤집어 씌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은 그 이듬해 “중국소수민족제재연극창작” 은상을 수상했다. 이 연극을 연극 평론가들은 “김훈의 연극에서 가장 연극다운 연극”이라고 평했고 “중국연극진흥상”까지 안겨주었다.  예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직장”에도 “색안경”을 쓴 “상사”의 독단이 있다. 그런 “상사”의 독단에 머리를 수그린다면 작가가 아니다. 그때 내가 한 말은 이랬다.  “연극을 금연시키고 내 공직까지 박탈할 수 있지만 단 한가지만은 박탈할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손에 쥐여진 필입니다. 말하자면 작가의 권리입니다.”                                             2011년 겨울, 일본 기타큐슈시 작가박물관 "중국작가관"에서  한번은 작가란 어떤 사람이냐는 엉뚱한 질문을 받은적이 있다. 지금까지 줄곧 글을 써오면서도 난 작가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본적이 없다. 질문엔 답을 해야 한다. 내 답은 이렇다. 작가는 모든 것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물론 삼라만상과 대화가 가능하다. 하늘의 태양, 지어 꽃잎에 맺힌 이슬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영혼과도 또한 하나님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니 작가의 “직장”은 어디까지 확장되여야 하나.  얼마전 한 후배가 나하고 선생님은 “자유를 만끽하는 분”이라고 했다. 누군가 “따분하고 지겨운 직장생활의 탈출구는 스스로의 탈바꿈”라고 했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또 하나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그 공간이 바로 작가의 “직장”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분” 보다 더 기막힌 호칭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 영혼의 소유자”!. 얼마전 영국의 귀족정신을 론한 글을 본적이 있다. 글은 돈, 명예, 지위가 있다고 해서 귀족정신을 가졌다고 볼수 없다고 쓰면서 귀족정신을 세가지로 귀납했다. 첫째, 문화적인 자질, 물욕, 향락을 인생의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고 도덕, 정조를 겸비한 문화정신, 둘째, 사회에 대한 책임감, 셋째, 자유 영혼의 소유자, 글은 자유 영혼의 소유자는 독자적인 의식이 있고 권력과 금전앞에서도 과감히 “노”를 부를수 있으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자주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풀이했다.   “자유 영혼의 소유자”, 나의 바램이다.  중국민족 2013년 제5호
52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3편) 댓글:  조회:5069  추천:0  2013-10-30
                          제퍼슨 기념관과 루즈벨트 공원  워싱턴DC에는 역대 대통령 기념관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독립선언서 작성자인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16대 대통령 링컨 기념관이다. 우리 일행이 먼저 찾은 곳은 포토맥 강가에 자리 잡은 제퍼슨 기념관(Thomas Jefferson Memorial) 이였다.  지붕이 원형으로 된 로마 신전을 본 따서 만든 기념관안에 청동으로 만든 제퍼슨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데 대륙회의에서 연설하는 제퍼슨 대통령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이란다. 대리석으로 된 벽에는 그가 대통령 취임식에서 한 연설 일부와 독립선언서의 일부 대목이 새겨져 있었다. 제퍼슨 대통령의 얼굴모습은 상당히 근엄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모습인데 가이드는 제퍼슨 대통령은 지금도 기념관 반대쪽에 있는 백악관에서 사무를 보는 현직 대통령을 지켜본다고 했다.  기재에 따르면 제퍼슨 대통령은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대통령 외에도 원예가, 법률가, 건축가, 과학자, 고고학자, 고생물학자, 작가, 발명가, 농장주, 외교관, 음악가, 버지니아 대학교 창립자였다. 폭넓은 지식과 교양, 재능으로 그는 줄곧 벤저민 프랭클린과 더불어 18세기 미국 최대의 르네상스식 인간으로 평가되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는 직접 쓴 묘비명에서도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잊지 않았다.   《여기에 제퍼슨이 안장되어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안의 기초자이고 또 버지니아 대학의 건립자이다.》  제퍼슨 대통령에게는 일화도 많고 명언도 많다. 인권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 기본 원칙인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를 주장해온 제퍼슨의 명언에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명언이 많다. 《나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국민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에 대항해 영원히 투쟁할 것을 맹세하노라》      이는 국회의사당내에 있는 제퍼슨 기념비에 새겨져있는 제퍼슨의 명언이다. 《국민은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신뢰의 바탕이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미루지 말라.》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돈이나 명성이 아니라 평안과 함께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일이다.》 《공직을 맡은 자는 스스로를 공공재산으로 생각해야 한다.》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는 제퍼슨의 명언을 다시 되새겨보는 시간을 제퍼슨 기념관에서 가진 것이 필자에게는 더없는 행운이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제퍼슨 대통령은 파산으로 가난에 시달리다가 미국 독립 50주년이 되는 해인 1829년 7월 4일 조용하게 생을 마쳤다. 그가 가난에 시달릴 때 거리에 나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또 그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세상인심이 바뀌어도 크게 바뀐 것이다.   제퍼슨 대통령 기념관을 나와 푸른 잔디 사이로 난 길로 올라가면 루즈벨트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은 워싱턴DC에서 유일하게 기념관이 아니고 공원으로 대통령을 위업을 기리는 곳이다. 호숫가에 위치한 공원은 조각공원 같이 꾸며졌는데 조각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어록이 새겨져 있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미국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20세기 위인으로 칭송받는 루주벨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 직에 네 번 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한 장기 집권자로 기니스북에도 올라있는 인물이다.  조각상 중 루즈벨트 대통령이 애완견과 함께 자리를 한 조각상이 퍽 인상적이었다.    
51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제2편) 댓글:  조회:3777  추천:0  2013-10-19
                                                        자연사박물관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이날 관광은 첫 코스부터 차질을 빚었다. 려행사를 통한 관광이란 여럿이 팀을 무어 하는 관광이니만큼 가이드와의 시간약속을 철같이 지켜야 하는데 한국에서 온 한 가족이 첫 코스인 자연사박물관 관광에서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가이드는 박물관이 큰 데다가 관광객까지 많아 사람찾기란 거의 불가능이니 꼭 30분 후에 버스를 세워둔 곳으로 모이라고 했는데 국민학교를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온 한국인 부부는 아들에게 박물관에서 자연공부를 시키느라고 한시간 뒤에야 박물관에서 나왔다.  일행의 따끔한 눈총을 받는 한국인 부부 사정에 필자는 이해가 갔다. 세계 최대의 자연사박물관은 어린이들의 천국이나 다름없으니까.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게되는것이 박제된 거대한 코끼리이다. 이 코끼리는 지금까지 발견된 코끼리중에서 가장 큰 아프리카 코끼리라고 한다. 1억 2400만점의 소장품을 전시된 자연사박물관은 자연계와 인류 역사를 테마로 하고 있다. 동물관만 봐도 공룡으로부터 사자, 호랑이, 기린 늑대, 물소 하여간 모든 동물들이 다 박제되어 있어 어린이들은 떠날념을 하지 않는다.   자연사박물관에 한국전시관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전시관은 한국의 유명인물, 한글, 혼례, 풍습, 그림 등을 통해 한국을 소개하고 있었다. 중국전시관도 있는가 해서 한참 돌아보다가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이 다돼가고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이 얼마나 큰지 자세히 돌아보려면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워싱턴 DC는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워싱턴기념탑을 중심으로 박물관과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회도서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국립자연사박물관, 국립항공우주 박물관, 미국역사박물관, 국립아프리카박물관, 허시혼박물관, 우편박물관, 국립미술관, 프리어미술관, 세익스피어도서관, 산업예술관, 미처 다 열거할 수 도 없이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도서관을 갖고 있는 워싱턴DC는 정치 수도라기보다 문화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 코스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였는데 가이드는 자연사박물관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기에 시간상 관계로 돌아볼 수 없다면서 소개만 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영국인 과학자 제임스 스미손(James Smithson)의 기부금으로1846년에 설립된 종합 박물관입니다. 정작 본인은 미국에 온 적도 없고 연고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미국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만 그는 고 하면서 1829년 당시 돈으로 거액인 410만 달러를 미국에 기증했습니다. 당시 그 돈이면 중등 규모의 도시 하나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스미스소니언 협회는 6천명에 달하는 직원을 가지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 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협회는 워싱턴에서는13개의 박물관과 갤러리, 국립 동물원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소장품은 1억 3천 9백만 개에 달하는데 지금 그 중 단지 1%만 전시되고 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잠깐이나마 돌아볼 기회를 놓친 것으로 하여 필자는 국회의사당앞에서 받은 유감을 또 한번 씹을 수밖에 없었다.         
50    중양절 단상 댓글:  조회:3348  추천:1  2013-10-12
  음력으로 9월 9일은 중양절입니다. 중양절을 중구절이라고도 합니다. 중양이란 양수가 겹친 날이란 뜻이고 중구란 홀수 9가 중복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중양절은 양수중복일 풍속의 하나로 가을의 정취에 취해 수확의 계절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날로 되어 왔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중양절이나 단오, 3월 삼짇날처럼 홀수(양수)가 두 번 겹치는 날을 큰 명절로 여겨 왔습니다. 음력으로 3월 3일인 삼짇날이 제비가 강남에서 날아오는 날이라면 음력으로 9월 9일 중양절은 제비가 도로 강남으로 날아가는 날이라고 합니다.    중양절의 세시풍속을 보면 이날 가을의 꽃인 국화구경을 하고 중양절 시절음식의 하나인 국화주를 마시며 산에 올라 단풍놀이를 즐기는 풍속이 행해집니다. 중양절에는 또한 추석 때 성묘를 못한 사람들은 조상의 선산을 찾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한대(汉代)로부터 중양절의 세시풍속이 행해졌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기재에 의하면 당(唐), 송(宋)대 와서는 중양절은 관리들이 휴가를 즐기는 명절로 되었다고 합니다.      중양절 세시풍속에는 또한 시주(诗酒)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시주란 술 마시며 시를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시인, 묵객들은 중양절에 술과 음식을 마련해 국화꽃잎을 술잔에 띄워 마시며 시를 주고받으며 즐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중양절전통은 가을 소풍이나 단풍놀이, 국화구경, 등산으로 지금까지 이어내려 오고 있습니다.       옛날에 비해 다른 점이라면 지금의 중양절은 노인절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중양절은 자식들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날입니다. 지금 이날이면 부모님들을 모시고 가을소풍을 떠나거나 선물을 들고 부모님들을 찾아가 효도를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로부터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에서 으뜸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효도에 대해 해석이 수없이 많지만 그 많은 해석들을 모두어 보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거창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께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단적인 실례로 인터넷에 오른 한 어머니가 맏아들에게 띄운 메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첫 자식이란 이유하나만으로 제일 많이 사랑했고  또 제일 많이 매로 꾸짖고 혼내준 큰아들이어서 그렇게 한 만큼 기대와 바램도 커, 늘 엄마의 짧은 생각에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을 보는 것 같아 늘 화가 나고 섭섭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제 너도 40세가 되어 가는 한 가정의 아버지요, 남편으로써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대견스럽고 부모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효자인 셈이다.   늘 너희 곁에는 이 어미가 있다는 것 염두에 두고 살아가면서 도움의 말이 필요하다면 찾아 주고 이 어미를 소외된 늙은이로 만들지 말아 다오. 하는 일 마다 잘 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으니까 건강이 우선임을 명심해라. 큰아들에게 엄마가 씀》  어머니는 편지에서 오히려 자식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고 있습니다. 편지에 쓰인 대로 부모님들은 자식이 열심히 살아가는 삶 자체를 세상에 둘도 없는 큰 효도로 보고 있습니다. 다음은 아들이 병환에 계신 아버님에게 보낸 메일입니다.  《아버님 새벽 1시와 3시 사이 어김없이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가족들을 잠에서 깨웁니다. 오늘도  아버님은 잠을 이루지 못하시며 심하게 기침을 하십니다. 언제부턴가 아버님께서는 말을 하기조차 힘들어하십니다.   아버님 왜 이렇게 힘들어하세요. 언제나 너무 강해 자식들로 하여금 다가설 수 없던 아버지 왜 이리 나약해 지셨나요. 〈남에게 피해주지 말아라〉,〈언제나 건강해라 〉 하시던 나의 아버님, 얼른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예전처럼 무섭던 아버님의 모습을 보여 주세요. 얼른 돌아와 주세요 예전에 무섭던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 사랑합니다 아버님...》   언젠가는 자식에겐 호랑이 같은 무서운 존재였지만 무섭던 그 옛 모습을 회복하라고 기원하는 자식의 마음에 아버님은 병석에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실 효도는 대를 이어 내려가기 마련이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그것이 은연중 교육이 되어 내 자식이 또한 훗날 나에게 효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효도가 바로 그런 윤리이다.   중양절과 관련해 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효도의 윤리를 새삼스럽게 떠올려 보았습니다.        
49    가을 서정 댓글:  조회:2721  추천:1  2013-10-10
{아버님이 계절을 읊은 시입니다.)     계절소묘            김 철 땅에서 관내가 날 때 매미가 따갑다고 몸살 나게 울어쌌는다   소나기 지나가며 북치는 소리 어디서 날아왔나 빠알간 고추잠자리 물어온 불씨 하나 뚝 떨구니 불이야! 가을이 놀라서 불 끄러 간다
48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DC (제1편) 댓글:  조회:4132  추천:0  2013-09-30
  보통 미국 동부관광은 세계 정치의 1번지로 불리는 미국 수도 워싱턴DC, 세계 경제 중심으로 불리는 뉴욕, 캐나다와 공유하고 있는 나이가라폭포 순으로 이어진다.                                                      국회의사당    미국 동부 관광은 미국 수도 워싱턴DC로 부터 시작되는데 워싱턴DC 관광은 국회의사당이 첫 순에 꼽힌다. 우리 내외는 아내 친구가 사는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에서 이틀 동안 지내다가 아내 친구 차로 워싱턴DC에 도착하자바람으로 곧추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우리 내외가 속한 관광팀은 만남의 장소로 약속된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로소 팀을 구성했다. 한국에서 곧추 날아온 분들이 있는가 하면 미국 각지에서 날아온 분들도 있었다.   가이드는 인사말을 마친 후 왜서 미국의 수도를 워싱턴DC(Washing tom, D.C)라고 하는가 부터 설명했다.  《지금도 워싱턴 주와 워싱턴DC를 혼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워싱턴 주는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고 워싱턴DC는 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워싱턴 DC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자를 그대로 따온 것이고 DC는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입니다. 워싱턴 DC는 미국의 50개주 중 그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된 행정구역입니다. 1800년에 아메리카합중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는데 인구가 약 65만 명이고 위성 도시와 교외 인구를 포함하면 400만 명입니다.》  미국의 수도 관광이 국회의사당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지만 운이 나쁘게 우리 일행은 국회의사당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그냥 밖에서 사진만 찍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간 날이 마침 국회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가이드는 회의가 열리면 국회의사당 참관을 참관할 수 없다고 했다. 《국회의사당은 워싱턴DC의 상징입니다. 1793년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대통령 때 착공되어 1800년부터 의회 회의장소로 되었는데 1814년 영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가 그 후 여러번 증축, 개축을 거쳐 16대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 때에 현재 모습으로 완공되었습니다. 국회의사당 높이는 94미터이고 너비는 250미터입니다. 돔을 기준으로 우측은 하원의 회의실이 있고 좌측은 상원 회의실이 있는데 국회의사당 안에는 방이 모두 540개가 됩니다. 회의 중일 때는 양쪽 회관위로 깃발을 올립니다. 보이죠 저 기발, 지금 한창 회의 중이라는 거죠.》   지금도 미국을 가보지 못한 분들 중 많은 분들은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을 구분 못한다. 필자도 자주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국회의사당이 백악관인줄 알았다. 왜냐하면 백악관은 미국의 대명사처럼 되어왔는데 보통 뉴스에서 《백악관측은 어쩌고 어쨌다》 할 때 항상 나오는 화면은 국회의사당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미제국주의》라고 규탄하던 시절에도 《백악관 호전광들은》 하는 식으로 성토하는 보도가 나올 때면 으레 화면에 비치는 것이 국회의사당이었다. 하긴 국회의사당도 미국의 상징이니까. 가이드는 한국으로 말하면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맞먹는 것이 지금 보는 워싱턴DC 국회의사당이고 대통령 관저이자 집무실인 백악관은 한국의 청화대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 중국 경우엔 국회의사당은 인민대회당이고 백악관은 중남해라고 할 가.    국회의사당 앞은 말 그대로 시민광장이었다. 공원이나 전원 같은 분위기를 주는 넓은 잔디밭이 국회의사당 앞에 펼쳐져 있고 그 앞에는 남북 전쟁 시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Grant) 장군의 동상과 기념 조각상이 있다. 동상 좌우로 남북 전쟁시 기병대와 포병대 모습을 형상한 조각상이 그랜트 장군의 동상을 옹위하고 있었다.  링컨 대통령과 함께 국가 분열을 막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그랜트 장군은 19대 대통령으로 되었지만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그랜트보다는 북군 사령관으로서의 그랜트 장군으로 더 유명했고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의 50달러 지폐에 찍힌 주인공이 바로 그랜트 장군이다. 그러나 다른 대통령처럼 기념관 같은 특정 건물은 없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미국 수도 상징인 국회의사당 앞에 서있다. 워싱턴 기념탑, 링컨 기념관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랜드 장군이 미국 역사와 미국인들 가슴속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알 수 있다.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자유로이 사진을 찍고 난 후 가이드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워싱턴 DC 관광은 힘든 강행군이라고 하면서 관광 일정을 통보했다. 가이드는 워싱턴DCD엔 미국의 정치, 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명소들이 많아 여행을 하면서도 배울 수 있다고 하면서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무료 혹은 매우 저렴한 입장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워싱턴 여행의 가장 큰 혜택이라고 했다.   최대 자연사 박물관,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워싱턴 대통령, 제퍼슨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 링컨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탑, 기념관, 공원, 미국인들한테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인 케네디 대통령 묘소가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세계 최강 대국의 대통령의 관저이자 집무실인 백악관, 미국 육, 해, 공 3군 지휘부인 펜타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비쳐져 유명해진 미 연방수사국 FBI 본부, 이상 워싱턴DC의 대표적인 명소들을 하루 낮 시간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라기보다 불가능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그냥 잠깐 둘러보고 사진 찍고 이동하고 또 잠깐 들려보고 사진 찍도 또 이동, 이런식으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려면 연세 드신 분들은 중도 포기하든지, 어떤 명소는 아예 볼 생각 말고 버스에서 내리지도 말아야 한다.    당시 필자는 전해에 결장암 제거 수술을 받고 항암제를 복용중이였다. 방사선 치료와 화학 치료에 비해 항암제 복용은 신상에 주는 영향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극약이라 지문이 다 지워지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고 발바닥에 종기까지 생겼다. 워싱턴 관광이 강행군이지만 다시 올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 이를 악물고서라도 워싱턴 관광을 마무리하겠다고 마음을 도슬러 먹었다. 사실 강행군은 나한테는 너무나 무리였다. 종기가 난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필자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47    추석 유래 댓글:  조회:4086  추천:2  2013-09-19
 중국 음력으로 8월15일, 즉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적인 명절인 추석입니다. 이날이면 중국사람들은 함께 달을 감상하고 서로 행복을 축원합니다. 추석은 달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음력으로 8월은 가을철의 중간에 처해있으며 15일은 또 8월의 중간쯤에 있으므로 8월15일은 중추, 즉 추석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음력은 달이 지구를 에돌아 한바퀴를 돌때 한달로 합니다. 매달 보름이면 사람들은 지구에서 제일 둥근 달을 볼수 있습니다. 가을철에 하늘이 높고 공기가 씨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추석에 본 달은 가장 밝은 달입니다. 중국민간에서 추석을 쇠는 활동도 달을 둘러싸고 진행되는데 달에 제사를 지내고 달에 세배를 올리며 달을 감상하는것 등입니다.  추석의 유래에 관해 많은 고전적 전설이 있습니다. 그중 (嫦娥奔月)가 제일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상아의 남편인 후예(后羿)는 영웅입니다. 둘은 장생불로하여 영원히 다정하게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여 후예는 천신만고를 겪어 천후에게서 장생불로의 신선약을 얻었습니다. 후예의 제자가 이것을 알게 된후 8월15일날 후예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신선의 약을 내놓으라고 상아에게 협박하였습니다. 상아는 핍박에 의해 약을 삼켜버렸습니다. 약을 삼켜버린 상아는 가벼운 연기마냥 하늘로 날아올라 월궁에 자리잡은 선녀로 되여 후예와 영영 갈라지게 되였습니다. 후예는 집에 돌아간후에야 사정을 알게 되였으며 더없이 슬퍼 뜨락에 과일과 식품을 차려놓고 상아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겼습니다. 마을사람들은 후예와 상아간의 감정을 귀중히 여기고 분분히 후예를 모방하여 달에 세배를 올렸습니다.   사실 추석은 제일 먼저 중국에서 옛날 달에 제사를 지내는데서 비롯되였습니다. 중국 고대서적의 기재에 의하면 일찍 2천여년전 고대 제왕들속에서 이미 봄에 해에 제사를 지내고 가을에 달에 제사를 지내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고대사람들은 달이 이슬을 베풀지 않으며 달의 차고 이즈러움에 의해 농사철을 계산하지 않으면 풍작을 이룩할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베이징의 유명한 건물인 월단이 바로 명나라때 황실에서 달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습니다.   추석에 달을 감상하는 활동으로 전변된것은 7세기 당나라때부터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재능이 있는 풍류인물인 당명황제는 달을 감상하기 좋아했습니다. 어느 해 8월 15일 당명황제는 달을 쳐다보다가 갑짜기 달나라로 한번 올라갔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선술을 의해 달나라에 올라 라고 씌여있는 궁전앞에서 선녀들이 아름다운 선률에 따라 너울너울 춤을 추는것을 보았습니다. 당명황제는 이에 도취되고 말았습니다.인간세상으로 돌아온후 그는 달나라에서 들은 음악을 아름다운 (霓裳羽衣曲)으로 지어 전세의 명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풍류하고 우아한 이야기가 전해지자 민간에서도 분분히 이를 모방하여 달이 찰때면 한자리에 모여 인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엄숙한 제사가 가벼운 달 감상 명절로 전변되였습니다.   가을이 농민들의 수확의 계절이여서 농민들에게 있어서 추석은 실제에 있어서 추수절입니다. 이날이 오면 농민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서 즐겁게 풍작을 경축합니다. 왕공귀족들과 문인서생들은 추석을 랑만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잔치를 차리고 가무를 감상하며 시를 읊어 밝은 달을 빌어 감정을 토로합니다.하지만 귀족이건 서민이건 할것없이 모두 달을 감상하는것을 즐거운 일로 여깁니다.중국 각지에 지금까지 (拜月壇)과 (拜月亭) ,(望月樓)과 같은 많은 유적이 보존되여있습니다.   추석은 또한 중국사람들 마음속의 깊은 정감을 담아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둥근달을 모임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추석에 달을 감상하고 달에 세배를 올릴때 집안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행복을 기원하기 를 즐깁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추석을 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날 집안식구들의 주요한 활동은 월병을 먹는것입니다. 월병은 둥글게 생긴 다과로서 둥근 달을 상징할뿐만 아니라 단원을 의미합니다. 월병안에는 설탕과 깨,계화,땅콩, 팥 등을 넣고 월병표면에 달과 상아 등 정밀한 도안, 또는 과 같은 글자를 새겨두어 밝은 달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집안의 좌상은 월병을 집안식구에 따라 칼로 베여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 나누어준다면 집에 없는 사람에게도 남겨 집안의 단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타지방에 간 사람들은 추석날이면 더없이 친인들을 그려 분분히 밝은 달로 그리운 정을 표달합니다.   당나라시인 장구령의 시로 이 글 마무리합니다.
46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5편) 댓글:  조회:4425  추천:0  2013-09-08
                                                           《불굴의 투혼》 살아있는 도시   솔트레이크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중적인 이미지를 가진 도시로 다가온다고 한다. 하나는 부유하고 질서정연하고 자연 친화적인 도시 모습이고 다른 한 모습은 계율이 많고 금욕적이며 깊은 상처를 감추고 있는 모습이다. 도시 역사와 종교적인 이미지 하고도 많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음주 차원에서 맥주를 즐기는 내가 받은 감수를 적는다면 솔트레이크는 술 문화를 아예 거부한 좀은 《멋없는》 도시다. 솔트레이크에 술집이 아주 적은 데 술은 21살 이상만 마실 수 있고 알코올 도수 3.2도 이상인 술은 지정된 비싼 술집에서만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 3.2도이면 거의 물과 같다는 얘기가 아닌가. 알코올 도수 56도인 북경 《이과주》 술을 한 병 마시는 수준이라고 하면 철저하게 금주 계율을 지키기 위해 술집을 만나면 에돌아간다고 하는 독실한 몰몬교 신도들은 아예 기절초풍할 것이다. 맥주 도수도 유타 주에 납품되는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다른 주에 납품되는 맥주보다 낮다고 한다. 비록 마셔보지는 못했지만 듣기만 해도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 개최를 위해 솔트레이크 시장이 사상 처음으로 몰몬교 신도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한 파격적인 시정부 결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바로 《동계 올림픽 개최와 도시의 다양한 삶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도심 공원 내에서 맥주 판매를 허용한다.》이다. 가령 이 결책을 다른 도시에서 내렸다면 실로 우리말 속담같이 《소 웃다 꾸러기 터질 일》이겠지만 솔트레이크에서는 이 결책으로 150년간 지켜온 실외 주류 판매를 금지한 전통이 깨졌다고 하니 아주 《획기적인》 결책이 아닐 수 없다. 술 얘기는 가볍게 웃고 넘어갈 얘기고, 비록 제약과 규제가 다른 도시에 비해 많다고 하는 솔트레이크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습은 첨단으로 가는 새 도시 모습이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솔트레이크가 일약 공업도시로 변모된 것은 동과 은광이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솔트레이크에는 지금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노천 동광인 빙감동광(Bingham Canyon Copper Mine)이 가동 중에 있다. 솔트레이크 관광에서 마지막 코스가 바로 이 노천관광이다. 솔트레이크에서 동남쪽으로 약 40㎞에 위치한 노천 동광에 도착하니 우리들 앞에 크기가 어마어마한 구덩이가 나타났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중국의 만리장성과 솔트레이크의 노천광산을 꼽는다고 한다. 1906년부터 구리광석을 채굴하느라 파들어 간 것이 깊이가 무려 1200m에 달하고 그 주변에는 사석(구리 등의 성분을 채취하고 버린 돌)이 도처에 큰 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큰 인공에 의한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원광석을 싣고 나선형으로 되어 있는 길을 따라 올라오는 3층 높이의 적재량 300톤 초대형 트럭이 성냥갑보다 작게 보인다. 그냥 파내려 가면 지구를 아예 구멍 내지 않을 가 싶은 우려를 자아낸다. 구덩이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에 광산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장이 있는데 그 마당에 초대형 트럭 바퀴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바퀴 크기가 사람의 보통 키 한배가 된다. 그렇게 큰 트럭 바퀴를 처음 본다. 바퀴 하나 값이 2만 5천 달러라고 해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하루에 동 32만 톤을 생산하는 동광은 1년 365일 가동된다고 한다. 노천 동광은 미국의 산업발전 역사와 오늘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되고 있다.    솔트레이크는 광산업으로 공업도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기에 첨단산업의 발전은 광산공학과 크게 관련이 된다. 현재 세계적 IT기업과 그 연구소, 벤처기업 등이 밀집해 있다. 솔트레이크의 가장 큰 수입원은 관광업과 첨단공학이라고 한다. 솔트레이크는 1998년 11월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첨단 신도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밖에 투자전문지인 《배런스(Barron’s)》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7개 도시를 뽑았는데 솔트레이크는 미국의 주피터와 캐나다의 밴쿠버,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 일본의 후쿠오카와 함께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선정되었다. 선정된 도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주변 지역으로의 이동이 편리하고 범죄율과 물가가 비교적 낮으며 좋은 기후와 다양한 레저, 문화 시설을 갖추고 있는 등 삶의 질이 높은 것이다. 쾌적한 주거환경을 가진 장수 지역으로 소문난 솔트레이크는 최근 미국 부유층이 선호하는 지역의 하나로 되었다.  유타 주를 미국의 다른 주들과 비교한 통계로 보면 유타 주는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기록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것》 중에는 가장 높은 교육률, 가장 젊은 도시 인구, 가장 높은 고등학교 졸업자 수, 가장 높은 초급대학 졸업자 수, 가장 높은 대학 졸업자 수가 들어있고 《가장 낮은 것》 중에는 가장 낮은 사망률, 가장 낮은 암 발병률, 가장 낮은 심장병 발병률, 가장 낮은 술 소비, 가장 낮은 담배 소비, 가장 낮은 범죄율이 포함된다. 이상 통계로만 봐도 솔트레이크가 첨단 과학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고급두뇌들과 쾌적한 주거환경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솔트레이크만의 자랑이자 자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상 약 90%에 달하는 언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다. 솔트레이크의 인재 요람으로 되고 있는 유타 주립대학, 유타대학, 브리검 영 대학 등 3개 대학의 대학생들은 대학 2학년 때부터 2년간 해외 선교에서 다양한 언어능력을 키운다. 특성상 세계 다양한 인종이 몰리는 첨단업종에서 그 어떤 언어도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있다는 자체가 높은 경쟁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직원들의 안정된 생활이 중요한 요인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곳이 또한 솔트레이크다. 몰몬교 신도들은 가정을 하나님이 준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타 도시에 비해 이혼 가정, 결손 가정 비율이 아주 낮다. 가정과 교육을 최고 덕목으로 여기는 몰몬교 신도들은 《가족관계는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내세까지 이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매주 월요일 밤에 어김없이 갖게 되는 가족 행사가 있다. 그 행사 이름이 《가족의 밤》이다. 혼외 연애는 물론 술, 담배, 커피까지 금하고 대부분 시간을 가족과 즐기는 그들이지만 가족의 밤이라는 날을 따로 두고 그 날은 전화도 자동응답으로 해놓고 받지 않고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채 가족들과 재미나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에게는《그 어떤 사회적인 성공도 가족을 떠나서는 운운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의 가치가 행복의 원친임을 알려주는 명언이라고 봐야겠다. 근면, 성실, 정직, 낙관, 정절, 검소, 봉사, 가족중심, 상호부조는 몰몬교 신도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계율이다. 이 계율은 지금 가장 미국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여 엄격한 심사를 받아 채용된다는 미국연방조사국(FBI) 요원에 몰몬교 신도들이 잘 발탁된다고 한다. 미국에서 굴지의 재벌 기업인 유니온 퍼시픽 철도, 델타 에어라인, 웨스턴 항공, 콜케이트 치약, 샘스마켓, 월마트 체인, 펩시콜라 등은 모두 몰몬교의 소유 기업체다.   《갈매기 기적》과 함께 기적을 낳은 솔트레이크,《불굴의 투혼》이 살아있다는 솔트레이크는 지금 대자연의 원시성과 첨단 대도시의 정연함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도시로 친근하게 다가서고 있다.     
45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4편) 댓글:  조회:4002  추천:0  2013-08-17
                               《꿀벌》들이 개척한 도시   유타는 인디언 말로는 《산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유타 주에 별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벌집의 주(Beehive State)》다. 이 별명은 몰몬교 신도들의 사회적 협력의 상징으로 되고 있는 벌집에서 유래된 것이다. 미국인들은 몰몬교 신도들을 《말하는 꿀벌》이라고 한다. 《말하는 꿀벌》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근면성을 자랑하는 몰몬교 신도들은 근면, 성실, 정직, 낙관주의, 정절, 검소, 봉사, 가족 중심의 계율을 지켜나가며 관개 농업을 시작으로 삶의 터전을 닦았다. 캘리포니아에 골드러시가 시작되면서 솔트레이크는 중간 기착지이자 물자공급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관개농업의 성공에 이어 구리, 철, 은, 납 등 풍부한 광물자원을 1969년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면서 솔트레이크는 중서부 교역 집산지로 격상된다. 1896년, 솔트레이크의 기적적인 발전으로 유타가 마침내 미국의 45번째 주로 된다. 유타 주는 《말하는 꿀벌》들이 개척한 주가 틀림없다.   유타 주의 주도인 솔트레이크 주민들 중 몰몬교 신도가 70%를 차지한다. 몰몬교 본부가 있는 솔트레이크를 몰몬교 본산지라 할 수 있다. 사실 솔트레이크는 몰몬교 신도들에 의해 탄생한 도시이다. 때문에 솔트레이크와 그 부근의 대부분 관광명소가 몰몬교와 관련이 있다.솔트레이크 시 중심에 위치한 템플 광장에는 솔트레이크의 기념비적 건물들이 모여 있다. 몰몬교 역사와 몰몬교 신도들이 창조한 기적을 엿볼 수 있는 광장이기도 하다. 이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축조물은 6개의 첨탑을 떠이고 있는 솔트레이크 성전(Salt Lake Temple)이다. 높이가 64m, 정면 폭이 58m인 성전은 1853년부터 40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이 성전에서 교회의 침례, 성전 결혼, 조상들을 위한 구원의식 등 특별한 의식이 행해진다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관광지도 및 여행서적 출판사인 랜드 맥낼리(Rand McNally)는 1991년에 발간한 《세계적인 경이로움-인류문명의 걸작 안내》라는 책에서 파르테논 신전, 크렘린궁, 만리장성, 피라미드 등 고대 기념비적 축조물과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등 현대 축조물과 함께 솔트레이크 성전을 인류 문명의 100대 걸작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성전이 일반 예배를 보는 곳이 아니어서 관광객 입장을 금하고 있어 그냥 겉으로만 돌면서 사진만 남겼다.       성전 바로 옆에 둥근 돔형 모양을 한 이상한 건물이 있어 가이드에게 물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파이프오르간과 태버나클 합창단으로 유명한 태버나클(Tabernacle) 대 예배당이라고 했다. 다행이도 관광이 허용된 곳이었다. 1867년에 완공된 태버나클은 기둥 하나 없는 돔 형태로 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철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못, 생가죽, 고리, 흰 대들보 등으로만 축조되었다고 한다. 장내에서 종이를 찢는 소리나 못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음향장치가 잘 되어 있다고 해서 볼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관광객들의 잡담으로 환상적인 음향효과를 검증할 수 없었다. 무대 정면에 설치된 크고 작은 파이프로 이루어진 오르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1,623개 파이프로 된 오르간 중 가장 긴 것이 6미터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은 장중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태버나클 합창단은 가정주부, 회계사, 일반 사무원, 학생, 판매원, 비서직, 농업통계사, 은행가, 여급, 미용사, 대학교수, 목수, 물리치료사, 청부업자, 의사, 낙농가, 기사 등 50여 개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단원 수는 375명이란다. 세계적으로 단원 수가 가장 많은 합창단이다. 이 합창단은 1847년 8월 22일 개척자들이 솔트레이크에 정착한지 29일째 되는 날, 자그마한 교회 건물에서 교회 성가대로 고고성을 울렸다. 전원 모두가 자원봉사자들인 태버내클 합창단은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과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위상을 자랑했다. 이 합창단이 부른 노래가 두 번이나 그래미상을 수상했는데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태버나클 합창단은 미국을 대표하는 합창단》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솔트레이크의 주요 관광명소로 되고 있는 솔트레이크 성전과 태버나클 대 예배당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8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숫자다. 솔트레이크가 이미 단순한 종교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트레이크 시내 북쪽의 잔디와 꽃밭, 나무가 가득한 언덕 위에 유타 주 청사가 자리 잡고 있다. 1916년 완성된 이 청사는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건물 중앙에는 3층 높이의 원형 홀이 있다. 그 무게가 6.8톤이나 된다고 한다. 돔형 천장과 벽면에는 초기 이주민들의 역사를 기록한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고 하는데 관광 일정에 청사 내 관광이 들어있지 않아 아쉬움만 남겼다. 청사 주변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청사 앞에는 왐파노그(Wampanoag) 인디언 부족 추장인 메사소이트(Massasoit)의 동상이 서 있다. 메사소이트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인디언 추장이다. 메사소이트는 미국의 《추수감사절》과도 관련이 있다. 유래를 보면 이러하다.        102명의 청교도들이 1620년 9월 16일 종교 자유를 찾아 영국의 제2의 항구도시 플리머스를 떠난다. 60여 일의 항해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그 해 긴 겨울을 지내면서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으로 대부분의 아녀자들과 아이들이 죽고 겨우 50여 명이 살아남는다. 생존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인디언들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 인디언 부족이 왐파노그 부족이다. 인디언들은 청교도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옥수수를 키우는 법, 물고기를 낚는 법, 그리고 사냥하는 법 등을 가르쳤고 다른 인디언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청교도들을 지켜주었다. 그 해 가을 인디언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은 큰 풍년을 맞아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디언들의 도움에 감사하여 왐파노그 인디언 부족 95명을 초청하여 만찬을 베푼 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청교도들은 인디언의 도움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메사소이트의 동상을 세운다. 그러나 왐파노그 부족도 다른 인디언 부족과 마찬가지로 학살당하는 비극을 면치 못한다. 지금도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왐파노그 부족 후예들이 메사소이트 동상을 찾아와 조상을 추모하는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풍작을 경축하는 즐거운 명절이 인디언들에게는 눈물을 흘리는 날이 된 것이다. 메사소이트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어쩔 수 없이 언젠가 보았던 한 인디언 학자의 글을 떠올렸다. 그 학자는 인디언과 백인들 간의 관계를 다룬 글에서 이렇게 썼다.     《정부도 왐파노그 부족이 미국 땅에서 멸종되어 그들의 언어나 문화를 찾을 길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왐파노그 부족 추장 메사소이트는 오늘도 백인들이 배를 타고 들어온 바다를 향해 서 있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베풀어 준 사랑과 고마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까?》    여운을 길게 남기는 글이다. 미국 동부 해안에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메사소이트가 솔트레이크에도 정중히 모셔져 있는 까닭은 몰몬교 신도들도 정착 시 인디언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기회의 땅을 찾아 영국을 떠나 미국에 첫 발자국을 찍은 청교도나 역시 기회의 땅을 찾아 미국 동부를 떠난 몰몬교 신도들이나 다 종교 박해를 받았고 핍박에 의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그들의 운명은 같은 맥락을 했다. 종교 박해를 받은 그들과 인종 박해를 받은 인디언은 《동병상련》이랄 가, 뭔가 통하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인디언들이 베푼 사랑과 고마움을 유타 주는 그냥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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