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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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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옷단장은 인격이고 례절이다 댓글:  조회:1206  추천:1  2019-11-20
옷단장은 패션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선보이는 행위문화이다. 인간의 품위가 높고 낮음을 첫눈에 알아보는 비결이 패션문화에 담겨져있다. 일전 어느 결혼식장에 가보니 녀성들의 옷단장은 봄날의 꽃처럼 흐드러지게 화사한 반면 남성들의 옷차림은 모두 약속이나 하듯 등산복차림새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위상이 한풀 꺾였다. 곁에서 왜 정복차림을 싫어하느냐 묻자 편하지 못하다는둥, 멋피울 때가 지났다는둥 하며 미안한 기색이 없이 오히려 갖가지 피탈만 렬거했다. 거리에서 정복차림의 남성을 보자면 가물에 콩나듯 희소할 정도이다. 옷단장은 자신을 보여주기 앞서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다. 옛날에는 옷단장을 계급이나 계층에 따라 평소 엄격히 구분했고 조경사를 비롯한 가정행사마저 례의준칙을 어기면 큰욕을 보았었다. 량반더러 갓을 벗어던지라는 말은 죽으라는 소리 만큼 듣기 싫었다. 왜냐하면 도포를 걸치든 두루마기를 입든 인격이 안받침되여 있기 때문에 외출시 체신을 지키려는 례의범절이 사회교제에서 점차 법속화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사람은 사회교제를 하면서 누구나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쓴다. 첫번째 만남이 더욱 그러하다. 악수를 나누고 한담하면서 바라본 느낌에는 상대방의 체격과 용모와 더불어 사회속성을 띤 신분, 직업, 수입 ,애호 등 대체적인 함의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때와 장소에 맞춰 가장 적합한 옷차림을 착용한 매력은 대화무드를 절반 익힌 셈이라 첫만남에 벌써 상대방이 자석에 끌려드는 초두효과를 얻어낸다. 그래서 아마 깔끔한 의상을 두고 문호 쉑스피어는 고상한 인격이라 표현했고 영국의 소설가 새커리는 정보를 담은 신용의 자모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상품의 부가가치를 끌어올리려면 포장을 잘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의 품위를 인정받으려면 옷단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두 청년이 회사에 면접보러 갔다가 공교롭게 소낙비가 쏟아져 반듯하던 옷매무시가 쭈글쭈글 헝클어졌다. 면접장소에 이르러 급해진 한 청년은 머리며 팔소매의 비물을 대충 훌훌 털어버리고 입장했으나 다른 청년은 정갈한 사무실을 어지럽힐가봐 옷차림을 다시 정돈하고 신발에 발린 진흙까지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버리고 나서 등장했다. 이 거동을 지켜본 사장은 두말없이 두번쩨 청년을 채용하기로 했다. 환경을 애호하고 자신의 형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교양이 있고 례절이 밝으며 맡은바 일을 깨끗하게 책임감이 넘치게 완성한다는 리유가 큰 점수를 획득했던 것이다. 남자들의 용모는 녀성들과 비해 상대적으로 고정된편이다. 화장대에 마주앉아 바르고 문지르는 번거로움을 잊고 사는 남자들은 흔히 학문이나 기술력을 앞세워 자신의 부족점을 보완하는 데 주력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덕지체를 겸비한 데다가 매력을 물씬 풍기는 차림새라면 말그대로 룡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된다. 성공한 남자의 스타일은 항상 멋지다. 빌게이츠가 그렇고 스티브잡스도 그랬다. 젊어서는 직성에 알맞은 티셔츠나 청바지 같은 생기발랄하고 활약이 넘친 캐주얼 차림새로 자신감을 떨쳤고 나이 지숙히 들어서는 듬직하고 사려깊은 기성복을 선호하여 온당하고정중한 형상을 통해 세계적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천재적인 기업가, 연설가, 활동가들의 풍채름름한 재질이 태여날 때부터 완벽하게 갖춰진 것이 아니다.가끔 엔트로피 리론을 적용해보면 뭔가 가만히 내버려두면 깨끗해질 대신 더 불결해지는 도리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살아가면서 생활의 세절적인 면에 각별히 품을 들여 갈고 닦고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남보다 돋보이는 형상을 수립할 수 있다. 인생은 예술이고 생애는 작품이라고 했다. 각광받는 인물의 출연이 단지 훌륭한 내용과 표현력으로만 부족할 뿐더러 시야에 확 안겨와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색다른 복장과 화장술이 필수이다.  남성의 튼튼한 골격, 드넓은 흉금, 비범한 재질과 능력이 탐탁하고 근사한 옷차림을 빌어 새로운 성숙미를 도출해낼 경우 폭넓은 남성의 활동범위가 눈부신 스펙트럼의 극치를 이룬다. 물론 남자로 생겨 옷차림에 지나친 사치와 랑비는 금물이다. 담판석에 나서는 외교관처럼 상대방의 차림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깐깐히 훑어보고 전략을 짜는 열성이 일반 남성의 생활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즘은 럭셔리한 옷차림보다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시대이다. 건축거장 미스반데어로에는 “적은 것이 곧 많은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소박하고 단순한 옷차림이 복잡하고 화려한 패션을 릉가함을 강조한 리념스케치가 패션문화의 륜곽을 서서히 드러낸다. 옷이 날개란 말도 멋쟁이 초월한 신사의 인기라고 할가, 시체멋과 마음속 깊이 간직한 진선미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사람에게 호용성이 있으나 무위도식, 부화방탕한 얼뜨기한테는 한낱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류행을 따르는 취향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개성과 인격을 충분히 선보이는 라이프스타일이 진짜 안드르쎈동화속 ‘백조’처럼 생활의 역경 속에서도 매몰된 우세를 한껏 되살려 금시찬탄과 흠모가 용솟음친 리더로 떠오른다. 연변일보 
49    건전한 음주문화의 품위 댓글:  조회:1304  추천:0  2019-09-24
연변에 술고래가 많다고 소문이 자자해진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간밤에 3차, 4차까지 신나게 돌았다며 평소 늘 어깨에 힘을 싣던 어느 량반이 덜컥 시한부 신세가 되여 뒤늦게나마 참회하는 말 “당초 마누라말을 들었겠는걸…” 불쌍하다 해야 할가, 슬프다고 해야 할가, 행차 뒤 나발 같은 짓이여서 론할 가치가 없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는 있는것 같다. 무덤에 핑게가 있듯이 술판에도 갖가지 구실이 따른다. 동창생모임이요, 직장동료모임이요 거기에 결혼, 생일까지 합쳐 매일이다싶이 연분과 친분을 앞세운 관계망 술파티에 사람이 녹는다. 무슨 일을 할라 치면 먼저 술대접 해야 든든하다고 상식처럼 믿는 사람들이 명절 때면 가벼운 선물은 팽개치고 비싼 술상자를 안고 다니는  걸 볼 적마다 기분이 개운치 않다. 술로 맺은 인연이 포도넝쿨처럼 얼키설키 뻗어 왕성함을 자랑해도 일단 술만 끊으면 울창한 숲은 월동을 맞는 식물처럼 통채로 칭칭 감겨져 땅믿 깊숙히 묻어야 되는 판국이라 진작 술과 담을 쌓아야 할 사람도 인맥이 끊길가봐 주저주저한다. 자고로 세상을 휘여잡은 영웅은 많았어도 술잔을 이긴 호걸은 없었다고 했다. 병원근처에 가보면 매일이다싶이 배를 움켜쥐고 우거지상이 된 남성환자들중 대부분 과음탓으로 인기된 것이다. 의사가 정중히 타이르면 그 때뿐이지 며칠 지나면 그새 장새다. 오죽하면 거짓말중 술맹세가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라고 했겠는가. 기쁜 일은 크게, 슬픈 일은 작게 만드는 술의 신비한 힘을 빌어 우리 조상들은 모든 경조사에 술을 빠뜨리지 않고 꼭꼭 챙겨올렸다. 솔솔 풍기는 술향기를 맛보며 덕담을 나누는 분위기가 월등히 좋겠지만 한도를 벗어난 일방적인 술재간은 백해무익이라 화를 좌초하기 십상이다. 춘추시기 초나라장군 자반이 전쟁터에서 술을 마신탓에 패전의 쓴맛을 본걸 감안하면 술이란 존재가 낯과 밤이 다른 야누스 얼굴처럼 사람을 때론 천재와 바보, 만능과 제로 사이를 오락가락 거닐게 하는 ‘요물’인 듯싶다. 오늘까지도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그 ‘요물’에  매료되여 중대한 항목 또는 인사문제를 ‘된다’ ‘안되다’를 술상에 앉아 의론하는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아 사회빈축을 사기도 한다. 리백이 한잔술로 시 백수를 읊었다는 표현을 곧잘 활용하면서도 애주가 도원명이 쌀 다섯말 내놓을지언정 술자리를 단호히 거절한 고사는 망각한 듯싶다. 술잔을 바라보는 엇갈리는 시선을 근근히 주량의 차이로 여기고 자제력을 상실하다 보면 몸과 마음을 죄다 망가뜨리고 만다. 요즘은 술자리의 품위를 바둑이나 장기판의 선수들처럼 ‘초단자’요, ‘고단자’요 하는 명칭으로 구분하는 세상이다. 푼수없이 마구 퍼마시는 초단자와 달리 고단자의 술잔에는 인격이 포함되여있다. 술의 진미를 깨닿는 차원이 높아갈수록 산속의 청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는 느낌과 같은 맑고 투명하면서도 묘하게 흔들리는 경지에 이른다. 고급술이든 보통 술이든 량이 아니라 흠상에 무게를 두는 스타일은 보통 만끽과 절제를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는 능동성이 탁월하다. 옛날부터 술을 년장자 앞에서 배우라는 뜻인즉 한계와 도를 장악하여 신사의 체면을 지키라는 뜻이였다. 그러찮아도 가끔 술파티에서 인명사고까지 발생하여 뜻밖에 법정놀음의 곤혹을 치르는 오늘날, 음주문화의 실태를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해서야 어이 될말인가, 우수한 사업가들의 술문화를 살펴보면 거개가 자아절제 능력이 뛰여나 술잔을 나누는  장소에서 자유롭게 어울리지만 추호의 흔들림과 혼선을 빚지 않는 자세가 유난히 돋보인다. 솔잎연구에 조예가 깊은 연변장백솔잎연구유한회사 조경수 원장은 2000년 초반에 솔잎술을 제작하여 한때 술시장의 인기를 끌었어도 평소 필요 이상의 술판은 회피했고 꼭 마셔야 할 경우엔 흔쾌히 참여하되 주량을 공제하는 습관이 몸속에 배여있었던 까닭에 20년의 노력을 거쳐 국가급특허 4종류에 18가지 솔제품을 생산하는 큰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술을 절제하는 생활 속의 작은 일마저 용단을 못내려 어물거리는 타입에게 더 큰 성공을 기대하는 일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헛된 욕심일따름이다. 술이 벙어리도 말을 시킨다고 흥겨워 할수록 독하고 역한 술이 피여낸 얼굴의 웃음기는 몸속의 세포가 아리고 쓰리다 못해 피멍이 들어 갈라터진 흔적을 고스란히 떠올린 굴절된 표현이 아닐가싶다. 이 세상에 부모가 준 생명 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돈도 명예도 직위도 모두 그다음 차례이다. 몸은 컨디션이 좋을 때 지키는 것이 명지하다. 술을 철저히 깨끗하게 끊기보다 어떤 생각과 습관을 갖고 마주 앉느냐 하는 자세가 음주문화를 바꾸는 원초적인 문제해결의 급선무이다. 건전한 음주문화를 앞장서 실천할 때 사회기풍과 더불어 인간의 품위도 잇달아 좋은 상승선을 타게 됨을 명심해두자. 연변일보 
48    참된 우정은 거리감에서 생긴다 댓글:  조회:1346  추천:0  2019-07-17
[두만강칼럼] 요즘 보약같은 친구에 대해 많이 들먹인다. 낮에도 친구, 밤에도 친구 마치 친구가 없으면 세상사가 멈춰설 것처럼 섬기고 바치며 극성을 부린다. 친구가 많아야 만사형통이란 말을 생활의 신조로 믿고 교제활동에만 열중하다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치게 된다. 풋면목에 만나 “형님”, “동생” 하는 호칭이 이제는 귀에 못 박힐 정도라 그 진정성을 가늠키 어려울 때가 많다. 더우기 정보화시대를 맞아 가상공간을 통해 익힌 채팅방 얼굴이 기수부지인 데다 놀음까지 겹쳐 허우적거리는 추태를 두고 사회의 일각에서 날리는 시선은 쌀쌀하고 매섭다. 하지만 겉으로 못마땅해 이마를 찡그리던 사람도 때론 친구모임을 찾아 서성거린다. 그만큼 친구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방증이겠지만 너무 많아도 걱정, 없어도 걱정인 것이 친구다. 사람 인(人)자를 살펴보면 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양상이여서 한일자로 혼자 곧게 서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을 독방에 가둬놓고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산다는 건 섬나라에 표류한 ‘로빈손 크루소’처럼 사회속성을 잃어버린 생물학적인 삶을 의미하게 된다. 인간사이(人间)는 상징성을 띤 거리와 비움의 합성어이다. 우주의 들쑹날쑹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활동공간 속에는 모름지기 지켜야 할 엄격한 ‘룰’이 있다. 아무리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친분일지라도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질서를 잡는 데는 보이지 않는 ‘가드레일’(시설물)이 마음의 흐름선을 절제하여야 가능하다. 고슴도치의 일화가 있다. 엄동설한에 제각기 멀리 서있으니 춥고 부둥켜안은 채 체온을 나누려 하니 돋친 가시가 찔리여 나중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서야 딜레마(진퇴량난)가 해소된다. 가까운 친구가 혹간 귀찮고 낯설어지면서 웬 일인지 뜸한 사이가 오히려 흡인력을 갖는 까닭은 뜨거워진 흥분을 랭정히 식혀낸 거리와 공간이 교제의 천평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의 지켜야 할 례절을 무시하고 제 나름 대로 횡설수설하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뿐더러 신뢰가 무너져 결국 품을 들여 키운 소중한 정마저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인생드라마내용이 달리 씌여질 수도 있다. 성인 공자는 일찍 좋은 친구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견식이 넓어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만 나쁜 친구는 권세에 빌붙어 아부아첨하고 거짓말을 밥먹 듯하며 삐뚤어진 행세를 거리낌없이 하여 백해무익하다고 점찍었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이 적용됐는지 몰라도 어진 사람을 만나면 착해지고 악한 사람을 만나면 불량배가 된다는 설법에 힘을 입어 선인들이 줄곧 교제의 비움과 간격에 대해 많이 치우쳐온 것만 사실이다. 단마르크 심리학자 루빈의 〈꽃병과 두 얼굴〉이 흥미롭다. 마주 향한 두 얼굴의 짜임새가 먼듯 가까운듯 팽팽하면서도 느슨한 여백 속에 현란한 꽃병이 우렷이 떠오른다. 랭철하고 리지적인 인간교제를 한번 느긋하게 음미할 수 있는 걸작이다. 크고 작은 고리로 련결된 인맥이 활시위처럼 하냥 긴장해있기보다는 칭칭 감긴 탕개를 이따금씩 풀어놓고 여유를 갖는 지혜가 사슬의 이음새를 더 튼튼하게 만든다. 친구 끼리 사귄 시간이 길든 짧든, 서열이 높든 낮든 접촉이 잦을수록 잠간 쉬여가는 여유를 갖고 정감의 배터리를 재정비, 재충천 하는 현명성이 맞물린 치차에 좋은 윤활제가 된다. 한낱 옛정에 매몰된 감성을 승화시켜 자신의 이미지를 항상 새롭게 돋보이게끔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가 친구간 거래를 한층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자신의 활동능력을 과시하느라 일부러 친구의 수자에 올인하면 흔히 알맹이 빠뜨리고 껍데기만 덩그렇게 남은 관상용 패키지로 밖에 되지 않는다. 방송드라마 《김학철》을 들으면서 감회가 깊었다. 파란만장한 인생담과 비범한 문학재질이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겠지만 인간교제의 원칙성을 드팀없이 지켜 생의 마감까지 몇몇 문우의 이름만 적힌 종이장을 내놓으면서 상주가 조문객의 부의금을 받지 말며 추도회를 열지 말라는 당부를 유언으로 남겼다. 실로 우리 민족의 고상한 도덕적 풍모와 정신세계를 지닌 희세의 본보기이다. 하여 지금도 문학애호가들은 그 분의 작품을 애독하며 기리는 마음을 달랜다. 평생 얼굴 맞대고 지냈어도 아리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번 만난 연분인데 오래동안 기억 속에 남는 사람도 있다. 매력적인 카리스마도 아닌데 자석같이 끌리는 리유가 무엇일가? 듬성듬성 자란 나무가 무성한 가지를 펼치듯 자신의 령역기준을 철저히 지키는 마음의 터전에서만 아름드리 거목이 푸르싱싱 자랄 수 있고 두줄기 레루장도 턴넬을 뚫고 벼랑을 뛰여넘는 멋진 꿈을 키워내지 않을가 싶다. 일생에 속생각을 마음껏 터놓을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산다는 자체가 하나의 행운이고 기쁨이다. 살아가노라면 매사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을진대 만수받이 찬성을 떠나 서로 허술한 틈은 충실히 메워주고, 휘여든 곳은 똑바로 잡아주는 아량이 생활의 대하에서 튕겨나온 수많은 오해와 불신의 트러블을 화해와 믿음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물망처럼 촘촘히 얼키고 설킨 이름들 사이를 비집고 스톱을 상징하는 쉼표를 적재적소에 척― 찍을 줄 아는 스타일이 진짜배기 수준급 딱친구임을 명심해두자. 길림신문
47    상업의식이 경쟁력이다 댓글:  조회:1383  추천:0  2019-04-11
고전소설 "허생전"의 주인공인 남산골샌님이 마누라 꾸중을 못이겨 난생처음 부자집돈을 빌어 횡재한 사실이 과연 소설가 붓끝에서가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태여났더라면 후날 모든 장사군들이 두고두고 혀를 내둘렀을것이다. 돈다발을 굴러서 갑부가 되기보다 허생처럼 빈손으로 졸부가 되는 재간이 훨씬 지적인 흡인력이 있는까닭에 요즘 사람들은 어쩐지 상업테스트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부채살같이 쫙 펼쳐보이는 아이큐로 본때있게 돈벌려는 과시욕이 우쭐우쭐 키돋음을 하지만 돈 하나로 세상사가 척척 풀리는 신통성도 역시 사람이 주도하는 노릇인것만큼 감각이 무딘 사람에게 돈을 맡기며 막힌 곳을 좀 틔여달라고 부탁해봤댔자 돈만 허투루 쓰고 되는 일이 없다. 결국 사람의 령활성에 의하여 일이 맺혔다 풀렸다 하며 돈의 힘을 뽐내는 양상이다. 어느 부도맞은 경영인이 당시 힘들 때 곁에서 조금만 보태주었던들 파산은 없었을텐데 하며 자신의 상업의식의 부족함을 애써 덮어감추고 오히려 제쪽에서 세상인심이 야박하다며 한탄했다. 요즘 길손끼리 나누는 대화도 상업의식은 대충 뭉그뜨리고 결과물인 돈에 열정을 몰붓는다. 어쩌면 만물의 령장답지 않게 돈에 굽실거리는 맹목적인 배금주의가 곳곳에 가부좌를 틀고앉아 허세를 부리는통에 고향사람들 주눅이 들어 뿔뿔이 흩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외국이든 대도시든 정착했으면 뭔가를 배웠으면 좋으련만 태반 머리를 틀어박고 수걱수걱 일만 하는 처지에 그치고만다. 동창생부부가 한국에 정착한지 어언 20년이 되였다. 무슨 일을 하느냐 물으면 " 배운게 없으니까 식당, 건설장 일밖에 더 있겠는가"다. 그래도 잃은것 비해 얻은것이 크다며 가슴뿌듯해 이런저런 자랑을 늘어놓았다. 물론 돈을 벌어 아들딸을 공부 시키고 시집장가를 보내면 이를데없이 좋겠지만 혹자는 돈 쓸줄 모르고 궁리없이 하루건너 술판이요,경마장까지 다녀 빈털터리가 된 이들은 빛좋은 개살구같은 신세라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은 보람이 없다. 재부의 축적은 사람이 갖고있는 생각의 높이와 정비례관계를 이룬다. 유태인은 어려서부터 상업의식을 키우는데 모를 박지만 우리 민족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공부를 잘해 나라의 기둥감이 되라는  당부밖에 없다. 영화거나 스포츠 아이돌에 흥미진진한데 반해 상업스타는 감감부지이다. 결국 큰 인물을 따라배워야 큰 일을 하고 째째한 장사군같은건 나중에 아무나 할수 있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는것 같다. 기회를 포착하기란 평소 활발한 상업의식를 키운 준비과정이 없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령감이 떠올라 시를 쓰듯이 팔소매를 걷어붙이는 작업이 아니다. 두 사람이 꼭같이 리모델링 업체에서 일했는데 그중 한 사람은 고향에 돌아와 인차 장식회사를 꾸려 돈을 벌었지만 다른 동료는 아직도 옛날 사장밑에서 곱삭곱삭 일하며 로임을 받는 신세를 면치 못한 원인은 무었일가, 돈을 단순히 사고팔고의 매개물로 바라보는 시선때문에 돈을 세는 재미만 알뿐 돈버는 비법과 요령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몫인줄만 여긴다. 천만다행이랄가, 근간 우리 주변사람들의 사유가 변화의 조짐을 보여 외국에 다녀와도 편히 쉴념을 하지 않고 뭔가 머리속에 열심히 새기며 부지런히 뛰여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얼마전 음식업에 30년간 몸을 담그고 있는 한 녀사장을 만난적이 있다. 한때 실패의 문턱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그녀가 무슨 비법으로 동산재기했느냐 하는 물음에 " 해묵은 셈법을 믿고 무작정 내밀어서야 실패밖에 더 있겠나요." 하며 경력담을 진지하게 피력했다. 독특한 메뉴를 개발하고저 무릇 우수한 경험이라면 어디든 죄다 찾아다니며 혼신을 불태웠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음식맛 하나로 사회경쟁에서 립지를 굳혔다는것은 천방야담에 가까운 일이였다. 하여 그녀는 새롭게 동업자들을 가맹점에 편입시키면서 그들과 끈끈한 협업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하여 경영법위를 넓혀나갔다. 영향력으로 돌파구를 찾고저 연변을 벗어나 심양, 사평같은 도시에도 자신만의 경영모드를 전파하여 지명도를 높이는데 힘썼다. 인젠 연길에서 2천여평방 영업규모에 6개  가맹점까지 갖췄다고하니 그녀의 담찬 패기와 실천력에 두손을 번쩍 들게 된다. 금싸락같은 창의력이 생산성을 쏟아낼 때 돈은 떼놓은 당상처럼 옆낭에 슬슬 들어오게 되여있는법이다. 세상과 통하는 길은 많고도 많지만 자신의 발밑에 놓여진 그 길을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결과는 분명히 달라진다. 돈벌려는 단순한 욕망을 한층 뛰어넘은 고차원의 의식을 가질 때 행로가 아무리 험하고 고달파도 고진감래의 결실이 걸어온 자욱마다 탐스럽게 맺혀져 있기마련이다. 누군가 의식이 경쟁력이란 말을 잘했다. 돈은 잠시 없다가도 생길 가능성이 있지만 상업의식이 결핍하면 평생 남의 눈치를 보며 건네주는 떡에 만족을 표시하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치렬한 시장경쟁의 비등점에서 반짝이는 패러다임을 연출해낼줄 아는 사람이 세인의 흠모를 자아내는 선구자이다. 이 시각 어쩌면 상업의식을 갖춘 수많은 현시대의 "허생"들이 욱-하는 배짱을 부려 멋진 스타일차림새로 길바닥에 척 나설것같아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다. 연변일보 
46    땅의 참된 주인들 댓글:  조회:1457  추천:0  2019-04-09
연변은 풍요롭고 살찐 땅이 있어 자랑 많은 고장이다. 시커먼 옥토에 감자 심으면 떡호박처럼 자랐고 무우가 웬간한 성인의 베개 만큼 커서 조상들은 초창기에 ‘월강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와 움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엄동설한에도 끼니를 거를지언정 밭의 거름만은 잊지 않고 삼태기로 날라 펴던 선조들의 거쿨진 두손이 세전벌, 평강벌의 전설을 엮어냈다. 강덕‘황제’의 수라상에 오른 개산툰진 하천평마을 어곡전, 모아산 굽이굽이 펼쳐진 만무과원, 현재는 인삼재배기지, 검정귀버섯생산기지 등 갖가지 브랜드를 창출하여 연변의 이미지를 적극 부추기고 있다. 이랑이랑 풍기는 구수한 땅냄새와 달빛에 곡식마디가 우썩우썩 소리치며 자라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지난날 선조들의 웃음이 해란강 여울에 비껴흐르는듯 싶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헌데 수난의 력사를 딛고 논농사의 왕으로 자랑하던 그 소중한 땅기운이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맥을 잃어가고 있다. 때 아닌 된서리 같은 화학비료, 살충제의 세례를 받아 ‘땅살’은 볼품없이 멍들고 듬성듬성 돋아난 시뿌연 알카리성이 바람만 몰아치면 뽀얀 흙먼지로 타래쳐오른다.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는 땅에 자꾸 강한 화학제품을 쓰는 농촌의 현실이 마치 영양보충과 운동관리로 몸을 추스러야 할 사람이 무턱대고 독한 주사약에 의존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 안타깝고 민망스럽다. 화학비료와 농약이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한다는 것이 요즘 농민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화학품의 독성을 등한시하고 그저 쉽게 농사하려는 일념을 갖고 선택한 화학농사의 결말이 우리의 밥상에 이런 저런 문제점을 야기시켰을뿐더러 앞으로 대대손손 먹고 살아야 할 땅의 존재가 오염이란 짙은 그림자에 눌리워 허위허위 가쁜숨을 몰아쉰다. 높은 수확량에 잠시 어깨가 으쓱할지 몰라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상히 뒤를 살펴보면 잇달아 닥쳐올 ‘자연의 보복’이 몸서리치게 두렵다. 한치보기식 농법이 오늘날 우리 연변 뿐만 아니라 지구촌 방방곡곡의 농토를 급속히 퇴화시켜 인류는 전례없던 위기와 도전에 직면했다. 인젠 물러설 자리도 없고 또 물러서면 더욱 안되는 준엄한 시련 앞에 전반 지구촌은 추호의 흔들림없는 자세와 대응책 마련이 급급한 실정이다. 가령 지구 땅속의 석유가 4, 50십년 후에 완전히 고갈된다는 과학자들의 예견이 적중하다면 후날 화학비료생산은 물론 농기계도 작동을 멈추는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대비해 농업분야가 전화위복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모지름을 쓰고 있는중이다. 중국은 19차 당대회에서 ‘록색혁명’이란 중대한 결정을 당장에 명시함으로써 대륙농업의 확고부동한 방향을 제시함과 아울러 과학적 발전관을 실천하는 새로운 무대를 마련하였다. 그 무대에 용약 뛰여오른 주인공들 속에는 나이 지숙한 촌서기가 있는가 하면 심장의 피가 펄펄 끓는 수천수만의 귀향청년들도 있다. 일전 필자가 한 귀향청년을 만났다. 훤칠한 키에 정열이 빛나는 눈매를 가진 그에게는 리일룡이란 이름 그대로 하늘에 날아예는 한마리 룡이 되고 싶은 웅심이 있었다.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대도시행차에 몸을 실었다가 이태전 왕청현 천교령진을 찾아온 그는 목축업유한회사를 꾸리고 130여헥타르에 달하는 산에 대량의 홍송 묘목을 심었고 20여헥타르 묵정밭을 개량하기 위해 지렁이로 유기비료를 만드는 2백평방메터의 실험장을 앉혔다. “참, 훌륭한 사업을 하십니다.” 필자의 칭찬에 “뭘요, 아직 첫시작이니까 가을의 실험결과를 지켜봐야지요.” 약간 수줍은 미소로 응답하는 그의 얼굴엔 확신이 넘쳐있었다. 확신 그것이 곧 희망이다. 시대의 벅찬 숨결을 담은 희망이 현재 저기 60리 평강벌에 새하얀 벼꽃으로 피여난다. 습근평 주석이 다녀간 영광의 땅 광동촌은 록색농업의 맨 앞장에서 달리고 있다. 23년전부터 농가비료를 밭에 뿌려 몇년씩 묵여 땅힘을 굳건히 키운 보람으로 영양소가 풍부한 무공해 입쌀이 국가의 인정을 받아 전문 북경에 공급되고 있다. “록색입쌀이 은을 냅니다.” 촌민들이 흥겨워 너나없이 하는 말이다. 땅을 아끼는 농민의 본색을 지키며 과학영농의 길을 걸어야 치부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친 좋은 실례이다. 록색농업은 옛날 돼지우리를 청소하여 비료를 얻는 단순한 방법을 되풀이하는 모식이 아니다. 마을마다 통일망을 구축하여 비료원천을 발효, 숙성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전문화, 산업화의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도약식 기술혁명이다. 비록 첫시작의 템포가 느릴지라도 그 길 우에 우리 민족의 발전과 미래가 약속되여있다. 땅의 생기를 되찾고저 오늘도 밭머리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미더운 주인공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우리 삶의 터전이 보다 넓고 기름지고 무성해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길림신문
45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댓글:  조회:1257  추천:0  2019-02-14
인간은 누구나 생각의 한계를 갖고산다. 가끔 뭔가 좀 부족하고 막히고 답답한듯한 느낌속에 인간의 한계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꼼지락꼼지락 변수를 놓는다. 무슨 일에 신속히 결단을 내릴 대신 우유부단해 기회를 놓쳐버려 후회하는 사례가 생활의 태반을 차지한다. 말썽이 많은 부동산시장을 해부해보면 한계로 얼룩진 가장자리가 고스란히 들어난다. 어느 경제학을 전공한 대졸생이 결혼전부터 집을 산다고 사처로 뛰여다녔어도 출생한 아기가 유치원 다닐 때까지 세집에 눌러산다. 리유인즉 집값이 배워둔 상식과 거리가 멀어 살가말가 좀자르다 가격이 갑자기 솟구치는 바람에 인젠 은행대출로 사야하는 처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시장이 매정해 그럴가 아니면 센스가 무뎌 그럴가, 너나없이 철썩 무릅치며 하는 소리 "아뿔사, 왜 진작 이렇게 오를줄 몰랐을가" 행차뒤에 후회한들 이미 꿩 구어먹은 자리라 파장뒤끝처럼 썰렁하다. 손끝이 딸리는 사람이나 유족한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것이 소비자들이 몸에 배인 관습인것 같다. 지난 80년대 중반 연길시부동산 가이던스가격이  287원이였는데 실제 시장거래 가격은 400원정도였고 90년대 중반 가이던스가격이 750원이였는데 실제 시장거래가격은 1,000원을 웃돌았다. 간혹 내릴듯 주춤하다가 또다시 반등하는 그래프를 두고 항간에서 앉으면 부동산화제로 말끈을 풀었다."집값이 또 올랐다오." "걱정도 팔자지, 오르면 내리게 되여있어요." 반응은 각양각색이라 의심이 절반 근심이 절반, 마치 안달증에 시달린 소비자들을 비웃기나하듯 지난해 여름사이에 연길시부동산가격이 껑충 솟았다. 부르하퉁하 북쪽 연선일대가 앉은자리에서 큰소리 떵떵 치며 판다. 이를 두고 의연히 기형적이라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닭알 노란 자위같은 지역인데 당연한 일이라고 과열에 은근슬쩍 부채질하는 사람도 있다. 소비계층의 부류와 차원이 틀리는만큼 터득하고 해석하는 몸가짐에 알게 모르게 경제적 락인이 깊숙히 찍혀져있다. 현재 연길시는 분명 부동산시장 량극화의 싹수가 움트기 시작했다. 새 살림집과 낡은 살림집, 중심지역과 변두리 사이의 가격차가 한배가량 커진 가운데 선도 아빠트가 오르면 기타 주변 아빠트도 잇달아 오르면서 이른바 틈을 메우고 키를 맞추는 가격상승원칙을 반복하는 양상이다. 정보비대칭이란 경제학술어가 있다.아주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허구한 날 자신의 비좁은 울타리에 갇혀 나름식 소비관념에 집착하면 결국 까막눈이 되고만다. 팔고사고 흥정에 앞서 부동산의 기대치를 한사코 의심하며 주관적인 의도에 따라 "비싸다" "떨어진다" 한두마디 결론으로 덮어버리고 뭇 도시들의 침체현상을 거론하면서 어차피 연길시의 집값이 호황기가 끝났다고 장담하는 타입들도 있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하게 엇박자칠 때가 많다. 과거 부동산가격이 단순히 교통과 환경을 치중했다면 현재는 앞으로 도시발전방향과 재산증식을 념두에 두고있다. 같은 돈을 주고 몇년후 한쪽은 증식변화를 바라기 힘들고 다른 한쪽은 재산이 큰 활보로 상승선을 탈경우에 시세는 유리한 쪽으로 변곡점을 꺾기 마련이다. 너도나도 흡인력 있는 지역의 매물을 찾아 분주히 뛰여다녀 "베블런효과"를 극대화한다. 이런 자연발생적인 현상을 그저 다욕스런 행위 또는 투기행각으로만 여겨 난색을 짓기보다 일종 투자전략으로 평가하는 편이 오히려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주택시장 5분위로 거래량을 분석하면 상위 20%층은 하위 20%층에 비해 항상 동적이고 적극적인 요소로 전반 흐름을 리드하다. 거주환경개선을 념두에 둔 소비층과 상품투자를 념두에 둔 소비층의 활동폭이 올해에도 더 넓어질 전망이다. 시장은 안개속에 가려진 늪처럼 수시로 빠져들 위험성이 있다. 매물에 유혹되지 않고 랭철하게 시장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감성보다 리성적인 마인드로 재처리, 재구성하는 창의적인 노력이 좁은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는데 필수적인 과제이다. 변화무쌍한 시장동태를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이 불가사이한 리스크를 줄이는 한편 재산의 기대치를 훨씬 높혀주는 효과를 거둔다. 육체적 한계를 이겨낸 사람은 막강한 체력의 소유자가 되듯이 생각의 한계를 극복하고저 한층한층 계단을 밟고 꾸준히 오르는 사람은 어느덧 지적으로 점차 성숙되여 시세에 정통한 달인의 지혜를 갖게 된다. 고정불변의 방정식을 세우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할세라 걸음마다 확인하고 검토하며 좀자르다보면 남들이 고대광실을 쌓아올릴적에 귀틀집도 짓기 어려운 궁지에 몰리기 십상이다. 사사건건 확실성, 합리성을 내세우는 고집보다 유연한 능동성, 원활성으로 활력이 넘친 적극적인 자세가 생활의 주동권을 잡는다. 한낱 시장동태에 굿이나 보고 남의 풍에 휩쓸리는 타입은 틀에 얽매인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돈만 있으면 무엇을 못하랴식의 객기를 부리지 말고 사회의 발전템포에 페이스를 맞추려면 어르이든 젊은층이든 허심히 배우면서 연구해야 한다. "죽은 글 읽지 말고 산 공부를 하라" 옛날 스승들의 가르침이다. 부동산시장흐름을 훤히 읽을줄 아는 자격은 오로지 자아 생각을 여유롭게 지배하는 사람에게만 차려지는 특허인줄 믿는다. 연변일보 
44    걱정도감은 사회 본보기 댓글:  조회:1336  추천:0  2019-01-03
키 큰 사람이 싱겁다는 말이 있다.연길시 하남가두에 거주한 봉창선 로인은 워낙 직통배기성격이라 퇴직하고서도 카메라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골목길정보를 수집해 해당 부문에 반영했다. 한번은 뻐스종착역에 휴계소가 없는 걸 보고  곧장 시건설국에 전화를 걸어 반영했더니 인차 문제를 해결하고 표창까지 받은 적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삐칠 일 안 삐칠 일 약국의 감초처럼 일일이 참견하는 봉로인한테 ‘걱정도감’이란 별명을 붙였다. 기실 우리 사회는 봉로인 같은 ‘걱정도감’이 옛날 암행어사 만큼 귀해져 큰 문제거리다. 교통경찰이 거리의 질서를 유지하고 원예사가 도시를 산뜻하게 록색단장을 시켜준다면 ‘걱정도감’은 인간의 머리속에 병들고 썩어버린 종기 같은 몹쓸 물건을 핀센트로 콕 집어내여 혹평하는 무명 순라원이다. 거리에서 늙은이가 미끄러워 넘어져도 못본 체 덤덤하고 불량배가 행패를 부려도 강건너 불구경하고서야 어찌 문명시대의 일원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왜 관계치 않는가?” 물으면 대답은 항상 “오물은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 피하겠는가”다. 한사코 자신의 총명함을 내세워 하찮은 일에 개입했다가 랑패를 볼가봐 ‘방안에 코끼리’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문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명철보신을 ‘명심보감’처럼 믿지만 그것이 독이 되고 해가 끼치는 줄을 모른다. 어찌보면 ‘걱정도감’과 엇박자를 치는 옹졸한 리기주의 문화양상의 발로인 듯싶다. 잘못을 타이르고 시정하게끔 압력을 행사하는 일은 공민의 신성한 의무이고 직책이다. 뒤골목에서 비리현상를 두고 그럴듯이 분개하며 ‘장훈’을 치다가도 앞에서는 비실비실 물러서는 나약성 때문에 사특한 기운이 점점 기승을 부려 공공연히 가짜 저질상품을 제멋대로 생산하고 자연생태환경을 파괴하여 인민들의 안전과 리익을 엄중히 침해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승객을 태운 공공뻐스가 장강에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하여 세상이 깜짝 놀랐지만 이상할 것 없다. 야료와 횡포 앞에 용감히 나서서 제지할 대신 나 몰라라 모두 왼고개를 틀었으니까 참사가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사회책임의식의 높낮음은 저마끔 오랜 세월 속에 침투된 낡은 전통관념과 사회문화환경의 영향력에 의해 형성된다. 아무리 하늘에 비행기 날고 땅우에 고속철이 달리는 도시에 산다고 어깨를 으쓱해도 만약 무지몽매가 활개치는 길바닥에서 정의가 주눅이 들어 기를 못편다면 문명은 한낱 텅빈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사회책임의식은 시민들의 문명자질정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때 정부차원에서 뢰봉 따라배우기, 다섯가지를 말하고 네가지를 아름답게 하고 세가지를 열애하는 (五讲四美三热爱)활동을 벌렸다. 요즘은 또 연길시에서는 ‘새시대문명실천중심’을 세워 시민들의 적극성을 격려하고 있다. 사회문명을 지키는 사람이 영광스럽고 어기는 사람이 수치스럽다고 써붙인 구호판에 모름지기 사회인으로서의 강렬한 정의감과 책임감이 깃들어있고 온갖 불의와 사악에 맞서 싸우려는 부굴의 의지가 담겨있다. 평화롭고 화목한 생활을 지향하는 시민들의 삶이 평등한 플랫폼과 정당성의 론리를 떠나 이뤄질 수 없을 뿐더러 경제인, 기술인, 문화인을 포함한 제반 분야의 사회활동도 공평성과 투명성를 상실한다면  결국 경쟁력을 잃게 된다. 이처럼 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규범과 행위준칙이 사회에 던지는 파장이 상상밖의 결과를 초래하는 까닭에 자신의 편리와 안위만 생각하고 공중도덕을 무시하는 행위는 사회여론의 질타를 받아 마땅하다. 정치생활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듯이 사회생활에도 너나없이 용약 뛰여드는 자세와 의지력이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아주 큰 의미를 갖는다. 근간 연길시에서는 한 정의로운 청년이 부르하통하에 빠져 위급해진 녀인을 구하여 무한한 감동을 주었다. 시지도자가 선참 영웅을 방문하여 헌신정신을 극구 찬양하며 현시대의 귀감이라 힘주어 널리 선전했다. 무슨 일이든 정부의 힘이 막강한 에너지효과가 있는 법이다. 정의에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비리에는 따가운 눈총을 퍼붓는 애증이 분명한 분위기가 밝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사회와 집단을 열애하고 주인공다운 드높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앞세운 실천적 행동은 그 크나작으나를 떠나 시대 숨결의 흐름을 이끌어주는 룡두마차 같은 출중한 견인역할이 있다. 사람마다 제 집안 일을 깐깐히 살피 듯 도시의 령역을 살피는 ‘걱정도감’이 되여 뿌듯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기쁨을 찾을 때 우리 사는 고향이 말 바른대로 살맛이 나는 문명한 도시로 거듭날 것이다. 연변일보 2019년 1월
43    [두만강칼럼] 상술을 바꿔야 운이 트인다 댓글:  조회:1417  추천:0  2018-07-24
옛날 어느 부부가 잣장사를 했다. 잣나무의 풍년주기가 7년에 한번씩인지라 부부는 기회를 놓치기 아까와 친척 친구들의 리자돈을 빌려쓰면서 잣을 대량 사들였다. 잣값이 보다 눅을 때 비축했다가 나중에 저자거리에 내놓을 타산이였다. 곁에서 미심쩍어 도리질했지만 부부의 판단이 적중하여 이듬해부터 잣이 흉년이 들고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나중에 큰 부자가 되였다고 한다. 재래식 ‘기화가거(奇货可居)’의 상술을 훌륭히 답습한 실례라겠다. 장사란 대체로 그렇다. 타인이 쉽게 흘러버린 것 또는 보아내지 못한 것을 주어서 껍질을 바르고 알맹이를 취해 크게 부풀리는 창조형 로동이다. 땅속 깊숙이 흐르는 수맥을 용케 짚어내는 달인같이 마음속에 숨겨둔 내역을 금전의 무게로 타진해볼 줄 아는 경상지수야말로 부자의 멋진 꿈에 금상첨화가 된다. 지난 2천년도 초반 부동산시장이 고요한 늪처럼 평온세를 유지했다. 누구도 오늘의 집값을 상상하지 못했을 때 인파가 도시에 대거 몰려드는 기회를 포착한 약삭바른 상인들이 일약 부동산 개발에 뛰여들었다. 결과 분양가격이 삼단 뛰기 하듯 련속부절 폭등하는 호황을 누려 짧은 십여년 사이에 엄청난 투자효익을 거뒀다. 큰 가마가 끓으니 작은 가마도 끓기 마련인지라 그 서슬에 연길시 부동산시장도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한때 야단법석했다. 한국에서 돈을 부친다, 공적금대출을 받는다 하면서 지어 한국행을 포기하고 집거래에 매달려 십여채씩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에라, 돈은 쉽게 벌어야지!’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자 순대장사요, 떡장사요, 김치장사요 죄다 걷어치우고 부동산시장에 뛰여들어 집을 사놓고 언제 값이 오르나 기다리던 이들이 적잖았지만 돈벌기가 어디 땅 짚고 헤염치기일가. 뭐나 쉽게 생각하고 흥분하는 사람에게 와신상담의 쓴맛이 자주 차례지는 법이다. 흔히 자신의 머리 회전은 빠른 축인데 돈복이 없다고 한다. 하긴 상술이 수준급인들 코앞까지 치닿던 운세가 멈칫 돌아서는 불운은 재록신도 막무가내일 텐데 사람들 사이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전을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먼저 움켜쥐는가에 따라 실패냐 성공이냐가 결정된다. 요즘처럼 발전템포가 빠르고 변화가 무쌍한 정보화시대에 근근히 기존의 낡은 경험이나 노하우를 큰 밑천인 줄 알고 누가 뭘 해서 돈 벌었다면 두눈이 데꾼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잇달아 뛰여다니는 수동적인 자세는 삼가함이 좋을 상 싶다. 더우기 온라인 쇼핑몰이 급물살을 타면서 한국이나 연해도시에서 물품을 들여와 차익을 붙이던 짭짤한 맛도 인젠 유야무야하고 분양주택을 되넘겨 팔아 웃돈을 챙기던 재미도 흐지부지한 시점에서 노루 친 막대기 3년씩 우려먹는 재래식 상술이 막힌 물동량 거래를 열어제끼는 데 별반 도움이 없다. 너도 나도 인터넷 키보드를 한번 두드리면 세상의 구석구석을 일목료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편리성이 어느덧 생존공간을 문화, 기술, 그리고 상술을 하나의 축으로 통합시킨 경영모드가 등장했다. 연변장백솔잎연구유한회사 조경수 원장은 사평중의학원을 졸업하고 좋은 취직자리도 마다하고 십여년 동안 솔잎연구에 박차를 가해 네가지 국가발명특허를 가진 제품을 개발했다. 그중 솔잎장수베개가 인기 브랜드가 되여 방송프로가 나올 적마다 청취자들로부터 수많은 절찬을 받았다. 일상생활에서 떠날 수 없는 작은 베개에 인체건강을 돕는 기술함량을 높여 창의적 이미지를 극대화한 결과 이미 국내 어느 큰 기업이 눈독을 들여 중국대륙 뿐만 아닌 세계시장의 진출을 꿈꾼다고 한다. 그제 날 돈이 갖던 힘과 매력이 현대기술의 파워에 밀리워 고스란히 자리를 내줘야 하는 세상이다 보니 현재 우리 생활 곳곳에 기술을 떠난 사각지대란 없게 되였다. 가령 매대 아가씨의 엷은 미소에도 기술의 감동이 어려있을 때 상품에 얽힌 친절하고 상냥한 써비스가 일종 인간의 진선미를 안겨주는 기술이며 과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아감각이 뛰여난 보바리즘에 묻혀 항상 우리는 선천적으로 례의 바른 민족이라 자화자찬하기보다 치렬한 시장경쟁 속에서 갈고 닦고를 거친 세련된 처세술을 상업모식에 투영시켜 상품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성이 더욱 중요하다. 장사는 상술을 바꾸는 게임이랄가. 오로지 리익 하나만 따지고 정책의 틈바구니나 변두리를 위태롭게 돌면서 낌새를 살피는 행각은 상술이 아니다. 소비자의 리익을 념두에 두고 시장기류에 맞춰 폭넓은 경영공간을 펴보이는 일솜씨가 바로 재운을 불러오는 으뜸 가는 상술이다. 마봉의 소설 〈삼년 앞보기〉 주인공처럼 무슨 일이든 남보다 한발 먼저 생각하고 일찍 움직이는 자세가 체질화될 때면 누구든 황금더미를 쌓아올린 기쁨을 만긱할 수 있을 것이다. 길림신문 2018.7.24
42    상술보다 덕성을 앞세워야 더 커진다 댓글:  조회:1492  추천:0  2018-04-20
옛날 짚신장사를 하는 부자간이 있었다. 저자거리에 앉으면 어버지의 짚신은 불티 나게 팔렸으나 아들이 엮은 짚신은 묻는 사람조차 없었다. 아들이 고민 끝에 포기하려 하자 아버지가 한마디 충고했다. “검불을 털어버리라”. 아들이 금시 깨달은 바가 있어 무릎을 탁 쳤다. 후날 한오리 짚도 정성스레 다듬고 또 다듬어낸 보람으로 짚신장사가 잘되였다 한다. 지금 사람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장사할가. 혹 자는 자기 안속만 차리느라 물품의 만듬새는 제쳐놓고 겉치레 홍보를 일삼지 않는지, 또는 얄팍한 상술에 미립이 터서 인간의 초심마저 버리지 않았는지 주변을 두루 살펴보게 된다. 돈은 깨끗한 량심으로 벌면 자랑찬 일이 되지만 어둡고 비좁은 식견으로 벌면 수치스런 일이 된다. 가장 적은 대가로 큰 매출을 올리는 것이 상술의 핵이라고 열띤 소리 높여도 까다롭게 탈리는 소비심리와 시장흐름이 그걸 적극 호응해줄는지 의문스럽다. 경영자가 리윤을 추궁하면 소비자는 실리를 따진다. 한쪽으로 치우친 거래는 일시 흥할지라도 조만간 사회의 말밥에 올라 곤혹을 치르게 된다. 연변의 어느 개발상인은 구매층의 욕구를 무시한 채 제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 엄청난 부지면적를 차지하는 아빠트단지를 지었다. 아래층은 죄다 올망졸망한 상가들로 붐볐다. 상가란 지어서 될 곳, 안될 곳이 따로 있다. 돈이 된다 하여 주택수와의 비례관계, 한계효용의 법칙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빼곡이 지어놓고 팔자니 문제가 생겼다. 구매층이 도리질하며 나앉은 것이다. 상가의 내부구조 또한 소비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꼬물만큼도 없이 자기 리해타산을 앞세워 개밸처럼 좁고 길다란 모양새다. 추상적인 등가교환이 바뀌여서 인젠 가격 대 성능비를 론하는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업구도라 하겠다. 구매층은 자신이 지출하는 대가에 걸맞는 상품의 가치를 원한다. 상품의 신뢰감과 만족감은 생산과정에 몰부은 깔끔한 일본새에서 비롯된다. 어찌 보면 상품구매행위는 생산자의 얼굴과 됨됨이를 사는 일이다. 고객이 이것저것 고르며 자꾸 퇴짜를 놓는 까닭은 상품의 진정성에 회의를 품었기 때문이다. 백년대계의 집짓기를 대충 해놓고 “팔리지 않는다”, “동업자가 많아 수익이 떨어진다”고 일방적으로 아우성치지 말고 자신이 소비자라면 이 상품을 선택할 용의가 있는지를 역지사지로 한번 꼼꼼히 체크해봄이 바람직하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크다’. 소비층의 마음을 사려거든 먼저 자신의 품위 있는 덕성을 키우고저 힘써야 한다. 주름진 곳은 없는지, 옥에 티라도 생기면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 주도면밀한 검토가 중요할진대 서비스가 아무리 요란스러워도 소비자의 욕망과는 동떨어진 허례허식에 불과하다. 상품의 진정성이 확실시하고 시간이 지나도 부가가치로 실리를 얻는다고 판단할 경우 소비자는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것이 시장거래의 법칙이다. / 길림신문 
41    넓은 세상과 소통하며 살자 댓글:  조회:1497  추천:0  2018-04-12
울타리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누구도 모른다. 워낙 가축을 가둬 넣고 길들이는데 사용되였을 울타리가 살림집 주변에 설치되면서 뜻밖에 인간의 신분과 품위를 돋보이는데 일조했다. 봉건시대 한자리 벼슬하던 량반들은 거개가 울타리를 치고 살았은즉 높은 담장, 길손이 쉽사리 들여다 볼 수 없는 신비속에서 자신의 령역만을 집착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인젠 유적으로 남아있어야 할 담장이 오늘 현대사회 거리의 여기저기서 의연히 올망졸망 또아리를 틀고 있다. 어섯눈 떠서 처음 바라본 곳이 창밖의 담장이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선 학교의 공간 역시 소리 높은 철대문 울타리였다. 하여튼 외부의 침입을 막고 안전을 지킨다는 리유로 학교란 이름만 달면 무릇 소학교든 대학교든 담장을 치는 것이 사회관습으로 되여버렸다. 아파트단지도 례외가 아니다. 오히려 이웃과 철저히 단절된 봉페식을 입주자들은 마치 체코브의 ‘갑속에 든 사나이’처럼 체질화되여 무척 반기는 양상이다. 정부를 비롯한 봉사성 건물 둘레에 친 옹벽은 이미 십여년전부터 철거한 상태라 친민의 뜻을 어느 정도 내비쳤지만 진정 마음에 와닿는 거리를 좁히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울타리에 갇혀 살다보면 머리속에 어느덧 타인이 범접하기 힘든 성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작판의 투전군처럼 남의 속은 무등 알고 싶어하면서 자신의 속궁냥은 터놓기를 꺼리는 배타적 경향이 요즘의 끼리끼리란 류행어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인맥을 굳이 저마끔 분리시키고 돈 하나로 인간의 가치를 흥정하는 옹졸한 소시민성격이 우리 몸속 깊이 뿌리 박혀 참말로 안타까울뿐이다. 건전한 인간관계는 돈도 명예도 아닌 서로가 존중하는 순수한 관계일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한사코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긍정하면 동아리를 뭇고 부정하면 멀리하는 마이너스 사고방식이 개인이나 사회에 모두 백해무익이다 . 시대는 변했다. 먹자판에서 어울리는 ‘형님’,‘동생’보다 누군가 비뚤게 나아갈 때 따끔하게 귀띔해주는 친구, 분쟁과 갈등 속에서 자신의 견해와 립장을 분명히 밝힐 줄 아는 친구가 보석처럼 값진 것이 아닐가. 근간 열린문화로 향한 각계각층의 소통과 나눔의 활동이 봄물 터지듯 활발해지고 있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꿈의 크기를 재여보고 축하해주는 기분은 짱이다. 너와 나의 존재가 사회에 어떤 보탬을 주었는가를 항상 걱정하는 스타일을 짜는 멤버는 미래지향적이다. 도약을 꿈꾸는 기술혁명은 참신하고 투명한 인간관계를 선호한다. 빠금히 열린 뙤창문밖으로 내밀어 잡은 손과 활짝 트인 대문밖에서 잡는 손의 의미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비좁고 고리타분한 울타리를 떠나 사회의 넓은 광장에 나서서 수많은 눈길과 마주치며 화합과 협력의 통로를 닦는 적극성이 왕성한 생활력을 발산한다. 막힌 늪은 썩지만 흐르는 강은 생명이 약동한다. 이것이 곧 소통의 힘이다. 길림신문  2018.4.11
40    옳바른 인생공부 희망을 부른다 댓글:  조회:1554  추천:0  2018-03-19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있다. 공부만 잘하면 어련히 높은 대접을 받을줄 알았는데 기대치가 허물어져나온 한탄 비슷한 소리라 하겠다. 꼭 같은 품을 들이고도 한 사람은 와신상담의 쓴맛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청운의 뜻을 이룬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가, 책갈피 번지는 일도 공부겠지만 어떤 생각을 갖고 번지느냐가 더 큰 공부다. 요즘 세상은 글로벌 시대이다. 길거리, 차안에서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아이, 어른 모두 핸드폰을 꺼내 들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찾으며 분주히 보낸다. 손바닥만한 핸드폰에 그처럼 넓은 세상이 담겨져 있고 또 손쉽게 그 지식을 공유한다니 신비스럽기만 한데 후날 학생이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세상이 될가봐 걱정스럽다. 갈고닦고를 반복하는 과정이 없이 값진 보석을 얻으려는 성급함은 조장발묘와 일맥 상통한 짓일 뿐이다. 통설 인간을 3차원의 존재라고 일컫지만 체통에 령혼을 불어넣으면 곧장 4차원 존재로 업그레이드한다. 그렇다면 타인과 구별되는 나만의 령혼은 구경 어떤 모양새일가, 둥글가 모날가 아니면 그릇의 형태에 따라 변하는 무변무각의 존재일가. 자신의 넋을 다듬지 않고 남의 태도나 행위를 흉내내는 우습강스런 인간은 아닌지 가끔 자신의 이마를 짚어본다. 혹시 잔꾀를 부려 여기저기 홈페이지 내용물을 둘러맞춰 자신의 것처럼 버젓이 내놓고 자랑하지 않았는지 또는 세상사 삐뚤어지게 해석하여 타인의 빈축을 사지 않았는지를 증삼이 하루 세번 성찰하듯 자주 거울에 비춰본다. 공부란 텅빈 머리속에 한점두점 금싸락을 집어넣는 공정이다. 금방 뭍에 올라와 펄떡펄떡 뛰는 생선같은 싱싱한 령혼이 창조물의 골격을 이루고 살을 붙여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형성한다. 무한정한 의식공간중심에 항상 엄숙한 철학이 기둥처럼 인간의 령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삼국연의》를 세번 읽어본 사람과 말을 걸지 말라는 설이 있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아는 총명보다 한가지를 투철하고 풍부하게 알고 있는 확신성이 풍운조화를 헤아리는 영웅의 지략을 낳았기때문에 그 앞에서 언감생심을 론하랴. 호반처럼 넓고 깊은 사색은 생명력이 왕성한 리론을 숙성한다. 오늘 굳잠에서 깨여난 사자의 표효가 중화민족의 우렁찬 함성이라면 시대의 부름앞에 어떤 자세로 다가 설 것인가가 우리 매개인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인생교과서에 어설픈 생략부호를 찍는 일이 없이 글줄마다 시종일관하게 꾸준히 참답게 탐구하는 사람이 멋진 답장을 써낼 것이고 오로지 자신의 령혼을 무르익힐 줄 아는 사람만이 풍요로운 가을언덕에 올라 향긋한 열매를 움켜쥐고 환히 웃는 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길림신문 2018.3.19
39    지금은 빈부격차 줄일 때다 댓글:  조회:1449  추천:0  2018-03-08
빈부격차는 언제부터 생겼을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본 문제이다. 가령 ‘갑’, ‘을’ 두 사람앞에 쌀 한포대씩 차려졌다고 하자. ‘갑’은 기근에 시달리던 차라 제꺽 먹어버렸지만 ‘을’은 절반을 생활용품과 교환하여 쌀 한포대 더 얻었다. ‘갑’이 쌀독이 바닥나서 굶주릴 때 ‘을’은 여유가 생겨 먹을 걱정 없다. 빈부격차가 아마 이때로부터 땅거미처럼 슬몃슬몃 찾아든 것이 아닐가? 물론 복잡한 사회문제를 제나름대로 억측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옛날 아프리카 사람들의 맨발차림새를 보고 신발장사는 글러먹은줄만 알고 돌아선 사람과 거대한 시장을 발견하고 공장을 세운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 사실이다. 그 차이가 가깝다면 벽 하나 사이둔 이웃이요, 멀다면 타고르가 묘사한 ‘새와 물고기’사이의 거리일 것이다. 그 이미지를 심리학자 매슬로는 피라미드 형태로 층층이 련결된 최저와 최고의 욕구단계구도를 그려내여 설명했다. 한 교실, 한 책상에 앉아 구구표를 외우며 성장했어도 후날 돈버는 셈법이 틀린 까닭에 ‘사장님’과 ‘종업원’이란 명칭으로 제 가끔의 운명을 맞는다. 보통 기발한 착상을 가진 사람이 사회의 적응력이 강해 부자가 되는 공산이 크고 그렇지 못한 경우 근근득식의 그늘에서 헤여나오기 힘든 존재로 머문다. 우리는 오랜 세월 빈부격차를 근근히 고용과 비고용 또는 사회의 부조리한 기제나 정책에서 근원을 찾으려 애썼지만 량자가 갖고 있는 펀더멘털(基本面)에 대해서는 항상 그러러니 식으로 해석하고 지어 묵인해 버린 결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불거져 사회의 구석구석이 불신과 불만으로 암울해졌다. 빈부격차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닌만큼 해결하는 데도 역시 일조일석의 열정보다 꾸준히 노력하는 견인분발의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줄탁동기란 말이 있다. 안팎의 힘을 모아 새 생명의 탄생을 기한다는 뜻이다. 현재 온 나라 상하가 떨쳐나서 빈부격차를 줄이고저 펼친 빈곤해탈 공략전에 발을 맞추어 수천수만의 귀향청년들도 전례없는 필승의 신념을 안고 팔소매를 걷어올렸다. 변혁의 세찬 소용돌이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아직 비록 규모가 작고 분산되고 기술력이 약한 부족점이 있다지만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옛날처럼 주저앉아 하냥 기다리고 쩍하면 손을 내밀던 고루한 라태성, 의뢰성과 철저히 결별하고 운명의 주인이 나 자신이며 문제해결의 주인도 역시 나 자신뿐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을 깨달아야 비로서 세세대대를 괴롭히던 빈곤의 모자를 벗어던 질 가망이 있다. 어찌보면 빈곤해탈 공략전은 커다란 중국의 꿈을 이루는 서막과도 같은 대형 서사시이다. 심금을 울리는 명곡은 지휘가와 연주가의 합심이 있어 가능하듯이 작은 꿈이 부풀어 큰 꿈을 이뤄내는데는 사회 제반 분야의 일심동체를 전제로 한다. 격랑을 헤치며 지칠줄 모르고 달리는 거대한 원동력, 바로 그 힘이 희열을 선사하고 격차의 두려움에 감히 엄두도 못내던 허들을 훌쩍 뛰여넘는 기적을 창조할 것이다. 길림신문 2018.3.6
38    참사람 참된 말 댓글:  조회:1580  추천:0  2018-01-15
예로부터 말은 아해 다르고 어해 다르다고 했다. 어떤 장소에 어떤 말과 체스처를 취하느냐에 따라 뉴앙스가 묘하게 변한다. 병시중 들던 로모가 타계하니 상주가 슬퍼 눈물을 흘리는데 곁의 사람이 위안한다는 말이 “인젠 영 시름 놓았소.”이다. 그 뿐인가, 어느 련인이 결혼식에 쓸 금품을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르는데 곁에서 액땜을 했다며 파재면재(破财免灾)란다. 본의 아니게 불쑥 내뱉은 말이 오해와 불신을 야기 시킨 나머지 오래동안 이 빠진 치차처럼 덜컹거려 사회 빈축을 산다. 문제는 이런 갖가지 어페가 아무런 꺼리낌없이 매일매일 사회교제에서 횡설수설 활용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말말속에 빠져 울며 웃으며 사는 존재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엄동설한을 녹이고 랭혹한 말 한마디가 오뉴월에 서리발 치게 한다. 심금에서 우러나오고 감동을 줄 수 있는 말을 질서정연히 배렬하는 일이 어찌 몇몇 어학자들만의 몫이겠는가? 오가는 말들이 반듯하지 못하고 주글주글하면 가뭄 든 논바닥을 들여다보듯 황량하고 쓸쓸하다. 하여 명지한 사람의 말은 간단명료하면서 영근 낟알처럼 탱탱하다. 시도때도 없는 장광설은 미숙의 표현이다. 친구에게 항상 배려하는 말, 충고하는 말로 커뮤니케이션(정보교류)을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보약 같은 선물로 되겠지만 반대로 절친한 사이를 턱대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은 유해물질이 되여 타인의 감정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보고 듣고 겪은 일이라 하여 모조리 발설할 쯤에 자신도 벌써 거칠게 번져 궁색한 처지를 피면키 어렵다. 그래서 입조심을 당부하는 삼사일언(三思一言)이란 사자성어가 생겼나부다. 우화 작가 이솝이 상류층 인물들인 철학가, 연설가들에게 전문 동물의 혀바닥으로 료리를 만들어 올린‘설두연’의 여운이 지금도 은은히 사회의 변죽을 울린다. 세치 혀끝을 잘 놀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실언의 대가로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는 까닭에 교육자의 첫 수업이 언제나 언어교육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도 옳바르게 표현할 줄 아는 인간을 육성하기 위해 밤을 패며 교수안을 짜고 또 짠다. 참으로 짧은 말이나마 선명한 관점과 확고한 립장을 표명하여 뭇사람들의 지지와 옹호를 받는 서술력이 얼마나 큰 리더십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 일찍 우리 선조들은 언어를 가리켜 음성적인 감정부호요, 령혼의 느낌이라고 했다. 좋은 말 한마디 천냥 빚을 갚는다 하여 대나무에 참기름 바르듯 듣기 불편할 정도까지 미사려구를 포장해내는 말재주나 요점이 없이 두리뭉실하고 미지근한 말본새 역시 오십보백보 그 노래에 그 장단이여서 흥미 잃은지 오래다. 소탈하면서 흐트러지지 않고 솔직하고 사리에 맞는 언어가 우리 생활마당에서 조만간 고운 향연으로 피여오를 성숙된 문화환경의 도래를 새해 벽두에 손꼽아 기대해 본다. 길림신문 1월 12일자
37    종자돈에 승부를 걸라 댓글:  조회:1482  추천:0  2017-11-28
요즘 돈 벌려면 투자해야 한다는 상식쯤은 모두 알고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작 어떤 곳에 어떤 방식으로 투자할 것인가를 두고 무척 고민하는 것 같다. 천만갈래 놓여있는 투자루트를 파악하기란 상술에 해박해야 되는 일이여서 태반은 우유부단끝에 집 한채 덜렁 사놓고 그치는 수준에 머문다. 근간 거리에서 우연히 옛 동창생을 만났다. 해외에서 영 돌아온 줄 알고 속으로 무등 기뻐했는데 이틀후 다시 한국으로 간단다. 원인인즉 벌어온 돈으로 집을 사고 장식까지 마치니 생활비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글타글 벌어서 근근히 시가지에 집 한채 마련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로 만족하는 한치보기 삶의 방식이 안타깝고 걱정스러울 뿐이다. 돈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천원지방의 원리대로 빙글빙글 돌아갈 때 큰 힘을 과시하는 속성이 있다. 하여 종자돈을 예견성 있게, 명지하게 활용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꼭 부자가 될 수 있는 개연성이 약속되여있는 법이다. 돈의 구심력을 읽지 못하고 무작정 팽이처럼 바삐 돌아쳐도 항상 돈에 쪼들리는 타입이라면 기회가 스스로 찾아와 노크해도 깜깜부지로 지나쳐 버리기가 일쑤이다. 돈 버는 생각을 꿈나무에 비유하면 한잎두잎 모은 종자돈은 진정 꽃피고 열매를 맺어주는 밑거름에 해당하다. 비상한 각오로 시작하여 천신만고 뒤에 이룬 욕망의 바다에는 태줄같이 련체를 이룬 종자돈의 위력이 룡처럼 뽐내며 꿈틀거린다. 그 때문에 농사군은 열흘 굶어도 종자만 다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사업가는 역경속에서도 투자를 위한 밑천을 잘 비축해 두는 것을 경제법칙으로 삼고 있다. 얼마전 《길림신문》에 한 조선족 농민이 한국로무 다녀 온 후 22만원을 무화과재배에 투입하여 수입을 톡톡히 올렸다는 기사를 보고 종자돈이 풍기는 매력을 느꼈다. 무엇이든 한번 본때 있게 해보려는 배짱이 돋보 일 뿐더러 종자돈을 쥐고도 이것저것 두려워 갑자르다가 결국 부동산구입에 발목 묶이는 부류층에 따끔히 일러주는 충고가 될 상 싶다. 자본의 축적이 중요하지만 더 큰 비전을 위해 새 령역에 과감히 투자하는 마인드가 현재 우리한테 어느 만큼한 공간의 널비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닭알을 매일 먹고 싶은데 암탉은 이미 잡아먹은 신세라 외국나들이 밖에 찾을 수 없는 가긍한 우리 모습이 언제쯤 바뀌여질가. 멋지게 살려면 목돈을 쥔 첫 스타트부터 잘 떼는 것이 기본이다. 장기나 바둑이 한수에 판가리가 나듯이 한번의 종자돈에 승부를 걸어 이기는 승자의 자부심은 빈자의 컴백을 부른다, 사람은 충족할 때보다 부족할 때 창의적인 발상이 앞선다. 인젠 부동산거래에 미립이 튼 난부자의 탈을 벗어던지고 값진 정보와 상상력을 능란하게 발휘할 줄 아는 든부자로 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한다.  길림신문  2017.11.27
36    자연을 앞세운 명소 끓는다 댓글:  조회:1460  추천:0  2017-11-02
지난 국경절, 추석 황금련휴를 맞아 연변의 관광지역마다 호황기를 누렸다. 그중 모아산 일대는 농부축제, 사과배축제 등 흥미롭고 다채로운 문화행사로 후끈 달아올랐다. 헌데 이상하리 만치 유독 모아산기슭에 자라잡은 해란강민속원만은 엄청난 부지면적에 어울리지 않게 잠자코 조용했다. 벌써 준공된 지 6년째, 찾는 이 물어보는 이 없다 보니 수십채 고색 짙은 전통 상가, 가옥이 즐비하게 일어섰건만 등골이 싸늘한 바람이 불어칠 뿐이다. 한때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던 민속원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을가? 연길시내 복판에서 바라보면 부르하통하 너머 멀리 남쪽방향에 위치한 모아산은 사철 푸른 소나무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여름에는 불볕을 식혀주고 겨울에는 삭풍을 막아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시민들의 좋은 쉼터다. 그런 산자락을 무턱대고 파헤쳐 생뚱같이 민속원이란 걸 앉혔으니 어쩌면 퍼덕이는 봉황의 날개를 찢은 형국이라 여직 민속원을 기대했던 민심이 아이러니 등을 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향항이나 오문 같은 도시는 평지가 부족해 산비탈을 깎아 집을 지었지만 연길시는 도처에 낡은 집터가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산자락을 파헤친 까닭이 무엇인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라 하겠다. 자연 앞에서 독선을 내세운 억지공사는 일시 산을 옮기고 바다를 막는 성취감이 도도해질지 몰라도 조만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여있는 것이 인과응보의 섭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의 주인이 되여 살고 싶어 한다. 그런 연고로 수천년 내려오며 사람들은 인간의 체취보다 자연의 정기를 우선시하면서 집주변에 잔디와 갖가지 화초를 심어놓고 애지중지 가꾼다. 연길시 동쪽 교외 소화룡촌을 보시라. 천년 묵은 나무를 에워싸고 빙 둘러앉은 마을의 풍치, 파아란 잔디가 물마루 이루는 골프장, 그리고 풀어진 바줄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강녘에 꽃양산을 받쳐든 정자들, 자연의 들숨날숨 그대로 이뤄진 마을이여서 길손들의 발목을 잡아 매일 명절 분위기로 흥성흥성하다. 관광객이 명소를 찾는 리유가 멋들어진 경관을 흔상하려는 면도 있겠지만 황홀한 절경과 인간의 존재가 어떤 통합을 이뤄가느냐를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인간애를 론할 자격이 없다. 주변의 생태환경을 살점처럼 아끼는 주인공적인 자세와 노력에 경주하라. 자연을 정복하려는 맹목적인 열성을 버리고 삼라만상의 순리를 터득하고 자연과 더불어 조화로운 극치를 꾸며가는 슬기로움을 보여줄 때 우리 연길시의 관광코스가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의 매력으로 활기 띨 것이다. 길림신문 2017.11.1
35    약속은 지켜야 떳떳하다 댓글:  조회:1499  추천:0  2017-09-23
사회교제를 하다보면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신세를 졌으면 고맙다고 깍듯이 인사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인데 원만히 해결되고 헤여질 무렵 멋적게 손을 맞비비며 입버릇처럼 “후날 다시 만납시다.”로 일을 끝내버리는 타입들이 적잖다. 워낙 ‘만납시다’를 꺼냈으면 약속된 것인데 태반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이 된다. 살펴보면 평소 거짓말을 밥 먹듯해서 친구도 잃고 직장도 떼운 사람이 심심찮게 눈에 띄운다. 고작 사흘만 쓰겠다고 꿔간 돈을 3년 남짓이 지나도록 갚지 못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사람, 백년해로 같이 살겠노라 숱한 하객들 앞에서 다진 충성의 맹세가 열흘도 안돼 파혼을 맞는 신혼부부들, 약속을 일종 유희로 착각하고 무책임한 행각들로하여 사회광장 모퉁이가 스산한 것만은 시실이다. 그저 너무 일상화 되여 모두 무표정일 뿐이다. 어느 량반이 한 단위의 령도로 부임되던 날, 종업원대회에서 단숨에 8가지 언약을 했지만 그 단위를 떠나는 날까지 한가지도 실천한게 없다 한다. 매일 상급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달하며 겉보기에는 팽이처럼 아주 바삐 돌아치는 것 같아도 산하 기업이 부도 나도 옳바르게 해놓은 일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무작위의 표현이 약속의 배신자임을 알아두어야 겠다. 공자는 일찍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멍에가 빠져버린 수레에 비유하면서 아무런 일도 성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질책한적 있다. 약속은 신용과 믿음이 있는 자의 인격이다. 인격을 지키는 사람은 약속을 항상 마음속의 빚으로 간주하고 시시각각 갚을 준비가 돼 있다. 말이 헤픈 사람의 약속은 리행이 어렵고 말문이 무거운 사람의 약속은 실천률이 백퍼센트다. 빈곤해탈공략전의 일환으로 된 농촌 위험주택 개조공사는 어렵고 힘든 방대한 임무이지만 정부에서는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저 6년째 해마다 수천채의 집을 지어 농민들의 생활질을 높여주고 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과 같이 연변의 농촌 마을 모습이 정부의 약속대로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변모해 가고 있다. 인간의 약속이 때론 자연의 약속과 흡사한데가 있어 흥미롭다. 대추는 꽃마다 꼭 하나의 열매를 맺는 약속으로 유명하고 밤은 땅속 깊은 곳에서 커가는 나무를 생각하며 썩을 줄 모르는 종속을 약속한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옛날부터 결혼과 제사 같은 중요한 행사에 대추와 밤을 빼놓지 않고 올렸다. 자연이 지켜내는 약속을 만물의 령장을 자칭한 인간이 어기는 우습꽝스러운 일은 더 없어야 할 것이다. 과장되거나 텅빈 약속은 그만하고 한번 손을 걸면 본때있게 해내는 진짜배기로 살자. 길림신문 2017-9-22
34    서글픈 효성의 그림자 댓글:  조회:1556  추천:0  2017-09-15
요즘 로인들 틈바구니에 끼여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늘그막에 돈이 있어야’가 주제이다. 자녀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감의 표출이랄가, 로후대책이 미흡한 로인일수록 맞장구 치며 론쟁에 열을 올리는 양상이다. 로인의 인격이 재산의 유무에 따라 인정받는 실정이여서 돈 없는 로인은 자식들한테 망가진 짐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 연고로 재산 많은 로인 앞에는 효성을 보이는 그림자가 자주 얼른거리지만 빈털터리 로인 옆에는 차거운 목침 베개 외 따뜻이 손 잡아주는 이 없다. 얼마전 앞뒤집 사이로 지냈던 두 로인이 양로원으로 갔다. 행차전 한 로인은 여직 모인 재산을 처분해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다른 로인은 집조문서를 꽁꽁 챙겨서 베개밑에 넣고 잠 잤다. 결국 자식들이 휴가일이면 빼놓지 않고 찾아와 시중을 들어주며 부산을 떨지만 저쪽 로인방은 자식들한테 다 파먹은 김치독 취급을 받아 마냥 한적하고 썰렁하다. 고기를 낚으려면 미끼가 필수인 것처럼 자식을 가까이 하려면 로인들 손에 돈이 있어야 될 상 싶다. 인젠 가난한 부친의 밥상을 열심히 챙겨올린 증삼의 효도나 심봉사 눈을 뜨게 하려고 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의 전설은 색바랜 포스터처럼 기억이 삭막하다. 제 자식을 낳아키우면서 어버이 은혜를 떠올려 봉양에 힘써야 할진대 어떤 자녀들은 로인을 모신답시고 로인의 높은 로임에 붙어살면서 배은망덕하게 삿대질하며 욕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로부터 효는 덕에서 비롯되고 인(仁)에 의해 베풀어진다고 했다. 효에 저의가 있어서는 안된다. 부모가 갖고 있는 재물과 돈을 탐내여 위선적으로 봉양하면 조만간 항간의 웃음거리로 남게 된다. 없으면 없는 만큼 진솔한 마음을 기하는 것이 효도문화의 핵이다. 연길천원평가회사의 김승일사장의 일이다. 지난 1994년도에 모친이 끔찍한 차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였다. 청천벽력 같은 불행 앞에 그는 오로지 모친의 생명을 살리려는 일념을 안고 사처로 뛰여다녔다. 신접살림에 약소한 로임을 타면서 언제 한번 짜증 섞인 말이 없이 여직껏 좋다는 약과 치료법을 일일이 써보며 정성을 몰부었다. 진짜 보기 드문 효자임이 틀림없다. 흔히 건전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옳바른 도덕륜리적 뜨거움이 오간다고 말하지만 돈지갑을 떠나 사랑을 운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부모는 앞날의 선택을 두고 많은 고충과 번뇌에 시달리게 된다. 풍을 맞았어도 돈 없어 보모를 청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자식 집은 한사코 거절하는 로인들 생활에 구경 어떤 애달픈 일들이 벌어지고 있느냐를 잘 살펴보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메말라가는 효도문화에 덕지덕지 기워맨 자국이 력력한들 어떠하리, ‘나무가 고요하고저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저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식으로서 뒤늦은 후회로 눈물을 찔끔 짜내는 불미스러움을 보이기보다 두번 다시 없을 부모생전에 충성에 효성을 더해감이 좋을듯싶다. 길림신문 2017-9-14
33    진학축하연청첩장에 ‘NO’라고 말해보자 댓글:  조회:1622  추천:0  2017-08-30
요즘 진학축하연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사회기반이 발칵 뒤집어 질 지경이다.    얼마전 친구와 약속하고 어느 한 식당을 찾은 적 있다. 지정된 방문을 열려다가 옆홀에서 웅성거리는 광경에 저도 몰래 선자리에서 굳어져 버렸다. 홀문어귀에 길다랗게 줄을 선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빨간 돈봉투가 쥐여져 있었는데 그걸 받아쥔 주인은 연신 허리를 굽혀 “당신께서 이 장소를 빛내 주시여 영광입니다.” 를 중이 념불 외우듯 수없이 반복했다.   무슨 행사일가? 호기심에 끌려 홀안을 들여다보니 벽정면에는 아무개 진학축하연이란 글자가 큼직하게 써붙여있었고 40상 실히 되는 음식상은 청한 손님들로 꽉 찼다. 진학축하연에 여러 번 다녀봤지만 이처럼 성대한 규모는 처음이다. 초기 명문대 붙은 가족에서 벌리던 행사가 인젠 보통대학이든 전문대학이든 진학만 하면 죄다 청하는 판국이다.   언제부터인가 국수그릇에 고명이 얹혀 지듯 자식의 진학을 두고 앙큼한 수판알을 튕기기 사작하면서 부조바람이 전염병처럼 확산되여 사회의 파장을 일으켰다. 자식의 진학을 턱대고 엉뚱한 궁리를 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커녕 오히려 기세가 당당하다. 왜 남들이 다 청하는데 나혼자 손해를 보겠느냐 식으로 파티의 규모나 인원수가 갈수록 신기록을 쇄신하면서 식당주인은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저녁 퇴근길에서 길손들이 서로 건네는 말이 거의다‘진학축하연에 참가하러 갑니다.’이다.   세상에 돈을 싫어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챙기지 말아야 할 돈은 절대 금물이다. 연길시에서 복장업을 경영하는 최홍련 사장의 딸이 로신미술학원에 붙었다. 동료들이 축하의 의미에서 부조돈을 건네니 “축하메시지만 받아도 배가 부른데 왜 돈거래를 해요?” 하며 일절 거절했다.   명지한 사람의 일처리는 항상 해박한 법이다. 우리 모두 울바자를 넘어선 사악한 부조바람의 범람을 송두리 채 뽑아버리는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 이제부터 날아드는 진학축하연청첩장에‘NO’라고 떳떳이 말 할 준비를 하자.   길림신문 2017-8-29
32    고향의 새 전설 엮을 때가 왔다 댓글:  조회:1384  추천:0  2017-08-23
그 누구나 큰 떡을 먹고 싶은 욕심이 있다. 시골의 외할머니가 만든 감자지짐은 작고 볼모양이 없어 젊은이들은 대도시의 우유와 빵을 선호한 채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떠났다. 고향 떠나 10년, 20년, 타향에서 돌고돌며 지친 마음에 응어리가 맺혀 귀향길을 선택했다가도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고향을 떠난 그들 중 비즈니스로 이름도 나고 부자가 된 이들도 가끔 있겠지만 태반은 부평초처럼 떠돌며 품팔이로 사는 처지이다. 받는 로임이 많다 해도 세금을 떼내고 세집비, 교통비, 생활비를 지출하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젊은 부부 평생 벌어도 코딱지 만한 집 한채도 살 수 없는 현실앞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고충이 실로 가긍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현실은 이러함에도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어보려고 오늘도 남행렬차에 몸을 싣고 있다. 산밖의 산이 더 높아보이는 착시 현상이랄가, 고향마을은 말그대로 눈 내리는 들판, 달 없는 사막과도 같다. 사과배 따던 처녀들의 노래소리도 온데간데 없고 동구밖의 느티나무도 무겁게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그래 고향은 과연 성 쌓고 남은 돌, 무능과 패배자들 만이 모여있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다. 연변돈황환경예술회사 사장 송영학의 창업이야기가 이에 좋은 해답을 주고 있다. 2000년도에 대도시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연변을 찾아온 그는 단돈 백원으로 창업의 걸음마를 뗐다. 남들이 버린 묵정밭을 도맡아 도시록화용 묘목을 심었다. 뒤에서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접지 않고 완강한 의력과 투지로 밤낮없이 일했다. 교통사고로 두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헤쳐나온 그는 두려움을 웃음으로 막아내는 담력과 기질이 있었다. 고생끝에 그의 회사는 해마다 천만원을 웃도는 리윤을 창출하여 오늘 연변의 유명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고향—연변은 귀향창업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타향에서 기업을 성사시킨 기업인들을 부르고 있다. 근간에 만여명이 귀향하여 3천여종의 경제실체를 꾸리는 쾌거도 이루어냈다. 천만갈래 시내물이 모여 대하를 이루 듯이 너나가 고향에 머리를 돌리고 고향건설에 일조한다면 고향의 새 전설은 또다시 아름답게 엮어지게 될 것이다. 길림신문 2017-8-22
31    생일파티의 곤혹 댓글:  조회:1274  추천:0  2017-08-21
연변사람들 술판이 많기로 평판이 나있는 실정이지만 그 와중에도 생일파티는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다. 어린애든 성인이든 생일을 서로 다투어 쇠는데 일가친척에 친구들까지 빙 둘러앉으면 웬간한 결혼상을 넘본다. 옛날 가족의 축수를 받으며 조용히 쇠던 로인들의 생일파티가 언제부터인가 돌림식으로 변형되여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면서 명절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어떤 이들은 숱한 손님을 청해놓고 다음 날부터 부조받은 그 ‘ 빚’을 갚느라 때론 하루에 생일집이 두집, 세집 겹쳐 밤중까지 팽이처럼 돌아치며 분주히 보낸다. 생일축하의 말은 둬마디 건성해놓고 사촌 기와집 지어주 듯 한바탕 큰소리 탕탕 치는 대포쟁이들의 잡담이 또한 억이 막힌다. 서로 멋들어지게 살았노라 꼬챙이에 꿰여들고 겨끔내기로 목청을 돋구는 판국이라 말주변이 없고 고지식한 축들은 곁에 앉아 그저 술이나 따라올리는 들러리 신세가 되고 만다. 옛날 범을 때려잡은 무송이 혀를 끌끌 찰 지경이라 사물에 해박한 이들은 입이 쓰거워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끓어번지던 술판이 스산하게 깨지는 일이 비일비재다. 생일파티를 굉장히 차려 인격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요, 간소해서 랑패 보는 일도 별로 없다. 지난날 우리 선조들은 생일이란 개념을 모른 채 세파에 부대끼며 힘들게 살았어도 가정을 책임지는 버팀목의 역할만은 굳건히 지키며 살았다. 생일날자 기억하기 앞서 자신의 신성한 소명을 명기하는 것, 항상 겸손하고 흐틀어지지 않는 자세를 지키는 타입이라면 구태여 생일파티를 위해 여기저기에 구걸하다 싶이 초청장을 보낼 리유가 없을 줄로 안다. 연길에 사는 한 녀인은 일전 남편의 환갑생일날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갖가지 화초들을 사서 창턱 우에 올려놓고 이 꽃은 남편 꽃이요, 저 꽃은 안해 꽃이요, 파릇한 윤기가 흐르는 애나무는 연해도시에 있는 아들며느리 것이요 하며 재미있게 이름까지 붙여놓고 희망을 부풀렸다. 저녁에는 아들며느리 부쳐온 선물과 료리 두 접시를 차려놓고 케익에 꽂힌 초불을 밝혔다. 그리고 30여년전 처녀총각시절 서로 주고 받던 색바랜 편지들을 펼쳐보며 추억의 기쁨을 나눴다. 아픈 기억이 많을 수록 오늘의 생활이 더없이 소중해 보이는 법이다. 석전갱우 같이 부지런히 억세게 살아온 사람이 고진감래의 느낌과 희열을 숨기고 이슬 맺힌 눈만 슴벅이는 순박한 마음과는 달리 해놓은 일이 별로 없이 소금알을 좀 먹은 것이 큰 자본인양 어깨를 들썩이는 모양새가 어쩐지 어설프게 왜소해 보일 때가 많다. 신비한 판도라 상자마냥 한해에 한번씩 열어보는 생일상자 속에 한쪽은 맨날 빈둥거리며 질탕 먹고 마시며 놀았다는 원성이 가득차 있고 다른 한쪽은 로동의 탐스런운 결실을 칭찬하는 메시지가 듬뿍 차 있다면 제우스의 천평은 과연 어느 쪽에 넉넉한 량심의 무게를 실려줄가. 멋진 삶에는 생일날이 따로 없다. 서로 더 가까이 마주보며 미움을 용서로 바꿔주고 오해를 리해로 풀어주며 우정의 따뜻한 손목을 잡는 날이 진짜 생일날과 같은 기쁨일 진대 정해진 시간에 임무적으로 쇠는 생일은 어쩐지 곤혹스럽다. 하지만 평소 즐거운 일감에 올인하다가 며칠 후 잊혀진 생일날이 깜짝 떠오르는 순간 절로 생기는 말 못할 흐뭇함과 행복감이 이웃에 찐한 향기를 선사한다. 길림신문 201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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