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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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서유럽려행기 [14] 댓글:  조회:3780  추천:0  2020-01-20
서유럽려행기 [14] 독일연방공화국퓌센으로 가다 오후 4시에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떠나 독일의 퓌센을 향해 떠났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독일과 퓌센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독일의 정식 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德意志联邦共和国 )이고 략칭으로 독일이라 하며 중앙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독일령토는 357,021㎢ 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2011년 기준 80,219,695명으로 유럽 련합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공용어는 독일어이다. 여러 개의 독립국이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普-法战争)을 거쳐 독일은 최초로 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였으나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 영국, 프랑스, 쏘련의 4개 련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렇지만 랭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 영국, 프랑스 관리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부독일)이, 쏘련 관리지역에는 독일민주주의공화국(동부독일)이 성립되여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였다가1990년에 통일되여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였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였다. 독일과 주변 국가들   독일연방공화국은 16개의 주가 각자 헌법, 정부, 재판소를 두는 련방 국가로서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고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로서 실질적인 정치는 총리에 의해 이루어지며 총리에게는 상당한 독립적 권한이 부여되여 있으며 정부 정책을 주도한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다. 독일은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 G8, G20,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무역기구, 유럽연합의 회원국이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자동차와 철, 강철 제품을 수출한다. 오후 4시에 인스브루크에서 떠나 110km를 두시간 달려 저녁 6시에 독일의 퓌센에 도착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가는 길에 국경을 넘을 때에도 길옆에 오스트리아계, 독일계란 국경표시가 있을 뿐 국경검사가 없이 차가 거침없이 내달렸다. 퓌센(菲森) 퓌센은 독일남부 바이에른주(拜恩州)에 위치한 도시로서 면적은 43.52㎢, 인구는 15,265명(2015년 12월 31일 기준)이고 행정 구역상으로는 슈바벤 현에 속한다.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5km 정도이고 레히강(莱希河)을 끼고 있으며 알고이 알프스 산맥의 동쪽 기슭에 있으며 뮌헨(慕尼黑)에서 100km 떨어져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新天鹅堡 )바이에른주 퓌센의 동쪽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新天鹅堡)은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路德维希二世1845년 ~ 1886년) 가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罗马式. 10세기 말부터 12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로마식 둥근 아치, 두꺼운 벽, 높은 탑 따위의 특징을 보인다)의 성이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루트비히 2세(路德维希二世,1864~1886년 재위)는 18세에 바이에른왕국(巴伐利亚王国,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오늘날의 바이에른 주 및 팔츠 지방을 지배하였던 나라)의 왕이 된지 2년 만에 프로이센왕국(普鲁士王国, 1701―1918년, 독일 동북에 있는 왕국, 강국으로 성장하여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 후에 독일 제국을 성립시켰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권을 잃고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되였다. 이러한 정세로 인한 압박감에 본래 심약한 성품이 더해져 그는 고결한 왕들과 강인한 게르만족 신화속의 신들이 사는 바그너 풍의 몽상의 세계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理查德德瓦格纳, 1813~1883, 독일의 가극 작곡가)를 뮌헨으로 불러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작곡가 바그너는 빈 체제(1814년에 빈 회의에 의하여 성립한 정치 체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면서 유럽의 현상 유지를 꾀한 국제적 보수적 반동 체제)에 반발하며 혁명에 가담했다가 반역자로 락인 찍혀 10년 넘게 해외를 전전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이런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다. 어렸을 적부터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던 루트비히 2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그너를 바이에른의 뮌헨으로 초청해 곁에 있도록 했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면 뮌헨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바그너 축제극장’을 건설하고 싶다고 루트비히 2세에게 털어놓았다. 밤에 본 노이슈반슈타인 성   하여 루트비히 2세는 1868년에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교권(종교에서의 권리나 권위)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정치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광적으로 건축에 몰두했다. 그는 단순히 중세의 성을 충실히 재건한 것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비잔틴건축(拜占庭建筑, 4세기경에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발달한 건축 양식. 큰 돔을 얹은 집중식 교회 건축이 특색이고, 내부는 모자이크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고딕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치게 하였다. 모든 방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特里斯坦与伊索尔德, 바그너가 지은 오페라), 그리고 그 밖의 바그너 주제를 묘사한 조각과 프레스코(湿绘壁画,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의 하나. 새로 석회를 바른 벽에, 그것이 채 마르기 전에 수채로 그린다)를 볼 수 있으며 성 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중세의 성배전설(圣杯传说, 중세 유럽 전설의 하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성배를 사용하였고, 요셉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를 성배(圣杯)에 받아 영국으로 가져왔다는 전설.)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계속]
80    서유럽려행기[13] 댓글:  조회:3369  추천:0  2020-01-12
서유럽려행(13)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가다   이딸리아의 유람을 마치고 16일 아침 7시50분에 우리는 이딸리아의 베로나를 떠나 오스트리아(오지리) 인스브루크로 떠났다. 가이드와 운전수는 아마 려정을 단축하려고 그랬던지 고속도로로 달리지 않고 갈지之자로 알프스산을 톱아 오르고 있었다. 한시간 넘어 달려 산중턱에 거의 다달았을 때 앞에서 도로수리중이라고 차량통행을 금지시켰다. 우리는 할수 없이 원래의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그러다니 길에서 2시간를 랑비한 것이다.     이딸리아 주요 려행지점       이딸리아의 북부에서 중부까지 려행을 하면서 여러곳에서 포도재배를 하는 것을 많이 봤지만 특히 북부에서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평지나 구릉지대에서 포도재배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두만강역에서 조선을 건너다보면 경작지가 없어서 산을 뚜지여 밭을 일구는 것처럼 일딸리아 북부에서도 산에다 밭을 일구어 포도재배를 하는 곳이 많았다. 북위 42°인 우리 연변은 10월 중순이면 나무잎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지만 이딸리아는 우리 연변보다 위도가 4, 5°나 더 높은 곳이지만 지중해의 해양성기후로 하여 11월 중순인데도 중부와 남부는 산에 나무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었고 포도넝쿨의 잎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어 산야의 경치를 한결 아름답게 물들였다. 이딸리아의 최 북부에 와서는 나무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노랗게 물든 포도밭   오후 1시 30분에 이딸리아의 북동부의 도시 볼차노(博尔扎诺)를 지나서부터 오후 3시에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알프스산맥의 산골짜기로 차가 달렸는데 골짜기의 량 옆의 산들이 아츨하게 높이 보였다. 뻐스가 이 알프스산맥의 골짜기를 달릴 때에 가이드는 알프스산맥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알프스산맥은 유럽의 중부에 있는 산맥으로서  유럽 중남부에 장벽처럼 우뚝 솟아 있으며 남서쪽 지중해의 제노바 만에서 북동쪽의 빈까지1,200㎞의 활 모양으로 뻗어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서부(프랑스 남동부와 이딸리아 북서부), 중부(이딸리아 중북부와 스위스 남부), 동부(독일,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의 일부) 알프스로 나누어지며 각각 여러 개의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은 프랑스와 이딸리아의 국경에 있는 몽블랑산(勃朗峰, 해발 4,807m)이며 해발 4,478m의 마터호른马(特洪峰)을 비롯한 지역 대부분은 높은 봉우리와 급경사진 비탈이고 석회암 지역은 거대한 낭떠러지와 협곡이 많다. 산맥의 평균 높이는 1,800~2,400m이며 높은 고산지대(3,000m 이상)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암석과 만년설이 덮여 있다고 한다. 뻐스가 오스트리아 경내에 들어서면서 산꼭대기에 흰 눈이 보이는데가 많았다. 해발 2,700여m의 장백산에서도 여름이면 눈을 볼 수 없는데 이 알프스산에서 눈을 볼수 있다는것은 이 산의 높이가 장백산보다 많이 높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가면서 본 알프스산의 설산   뻐스가 2시반에 오스트리아경내 들어섰는데 국계를 지날 때에 세관도 없었거니와 차량과 사람에 대한 아무런 통관검사도 없이 차는 계속 달리였다. 가이드가 길옆의 패쪽을 가르키며 저것이 바로 국계를 표시하는 패쪽이라고 하였다. 마치 연길과 룡정사이의 연룡도로를 달릴 때에 연길과 룡정의 경계를 표시하는 연길계(延吉界), 룡정계(龙井界)표시한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저 영어로 이딸리아계, 오지리계라고 표시하였을 뿐 아무런 구속이 없이 차는 마음대로 달리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유럽련합내에서는 국경지대에 세관도 없고 차나 사람이나 아무런 검사도 없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든다고 하였다.     오스트리아(奥地利)   뻐스가  오스트리아경내에 들어서자 가이드는 오스트리아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중앙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며 면적은 83,879㎢이고, 인구는 약 875만명이다. 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서 시민을 위해 수준 높은 복지를 하는 나라이며 수도  윈은 수년 련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였다고 한다 . 오스트리아는 중세기말부터 제1차세계대전 결속되기까지는 줄곳 유럽에서는 대국의 하나로 되였으며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왕가(哈布斯堡家族,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최대의 세력을 가졌던 명문 왕가)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15년 오스트리아제국을 위수로한 독일련방을 성립하였으며 1866년에 해체되고 1867년 웽그리아(匈牙利)와 련합해 오스트리아-웽그리아제국으로 되였다가 제1차세계대전에서 해체되여 1918년에 오스트리아공화국을 건립하고 1938년 독일에 합방되였으며 1945년 동맹군의 점령을 거쳐 1955년 독립주권을 회복했다. 주민의 91.1%가 오스트리아인이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인 등이 3%이며 공용어는 독일어를 사용한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유엔회원국이 되였으며 1995년에는 유럽련합(EU)에 가입하였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창립국이다. 인스브루크 (因斯布鲁克) 아침 7시 50분에 떠난것이 273㎞의 거리를 길을 잘못들어서 두시간을 랑비하다니 7시간 넘어 달려 오후 3시에야 오지리의 인스브루크에 도착하였다. 인스브루크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주(蒂罗尔州)의 주도(州都) 이며 오스트리아에서 다섯번 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는2016 추계로 130,894명 이며 언어는 독일어이다. 인스브루크는 알프스의 풍경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겨울 스포츠 관광지이다. 1964, 1976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1984, 1988년 동계 국제 장애인 올림픽운동회가 2회 련속 개최되였으며 2012년에는 제 1회 동계 청소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되였다. 인스브루크는 바로 알프스산 밑에 있었다. 뻐스에서 내려서 알프스산을 바라보니 산에 구름이 꽉 껴 있었고 구름우로 신기루와 같이 산봉우리가 보였다. 신기루와 같이 구름우에 보이는 산봉우리   인스브루크에서 우리는 황금지붕을 보러 갔다. 황금지붕은 인스브루크 구 시가지에 있는 후기 고딕양식의 건물의 베란다를 덮고 있는 지붕이다. 1420년 티롤(蒂罗尔, 오스트리아 서부의 주) 군주의 성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 1,500년, 당시 이곳에  거소(居所)를 두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马克西米利安一世1832~1867)는  바로 앞의 광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이 베란다가 만들어졌고 그 우에 황금지붕이 얹히게 되였다.  이 지붕에는 황금으로 도금된2,738개의 동판기와가 엊혀있다고 한다. 황제이니 광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이 베란다를 만들었다는 것 까지는 리해가 되나 황금으로 도금한 지붕까지 얹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리해가 되지 않은 일이였다. 이 베란다에는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두 안해, 재상, 궁중의 광대,  무희들의 모습과 문장이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이 집은 1996 년부터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로서 오스트리아의 려행은 끝이 났다. 그저 이딸리아에서 독일로 가는 길에 들러 본거나 다름없었다.   황금지붕   [다음계속]  
79    서유럽려행기[12] 댓글:  조회:3512  추천:0  2020-01-09
서유럽려행(12)   력사가 유구한 문화유산의 옛도시 베로나(维罗纳)로 가다 4시에 우리는 베니스의 유람을 마치고 출성(出城)하여 우리의 관광뻐스를 갈아타고 베로나를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 가이드는 또 베로나의 개황에 대해 소개르 하였다. 베로나는 이딸리아 북부 베네토주 (威内托州) 아디제강(阿迪杰河)류역에 있는 도시이며 전통 미술품과 건축물, 공연예술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이딸리아북부의 주요 관광지이다. 면적은206.63 km2, 인구는 2015년 기준 약 26만 명이다. 베로나는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였고 5세기에 동고트인(东哥特人, 고대 게르만 민족의 한 갈래),  6세기에 롬바르드인(伦巴德人, 고대 게르만 민족의 한 갈래), 그리고 774년에 샤를마뉴(夏尔马涅, 800-814 서로마 제국의 황제)에 의해 점령되였으며 12세기 초에 독립 자치제가 되였다. 그후 1405년에 베네치아에 넘어갔고 1797년부터는 오지리 제국의 일부가 되였으며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였다.     에르베광장(百草广场)   5시 반에 베로나에 도착하여 먼저 에르베광장으로 갔다. 에르베광장은 로마제국시대의 공공집회 장소였으며 지금은 정치, 행정의 중심일 뿐만아니라 상업의 중심지로 광장주변에는 큰 상점들이 들어 서 있었다. 광장에는 또 식료품과 의료품들을 파는 로점상들이 많이 들어차 있었다. 이 광장에는 시청사로 사용하였던 종탑이 있는 바로크양식(巴洛克风格,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류행한 예술 양식)의 마베이 궁전이 있다. 종탑의 높이는 84m로 1172년에 처음 짓기시작하여 1464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종탑에는 네개의 종이 걸려 있으며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가 1779년에 붙여졌다고 한다. 광장에는 마돈나분수와 유명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상들이 있었다.     마돈나분수   줄리엣의 옛집(朱丽叶故居) 에르베광장유람을 마치고 우리는 줄리엣의 옛집으로 갔다. 줄리엣은 이딸리아 베로나의 한 부유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섹스피어(1564-1616. 영국의 극작가, 시인)의 명작 ㅡ 《로메오와 줄리엣》희곡 중의 녀 주인공 인물이다. 섹스피어가 1594년에 쓴 희곡 ㅡ《로메오와 줄리엣》은 서로 적대적인 두 가문에 대한 이탈리아 전설을 기초로 하여 극본을 썼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력사 속에서 지금까지 쓰인 가장 훌륭한 사랑이야기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였다고 한다.  줄리엣의 옛집은 에르베광장에서 남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줄리엣의 옛집은 13세기에 지은 오랜 건축물이다. 아치형의 굴처럼 생긴 통로(门洞)으로 들어 서면 2층으로 된 줄리엣의 옛집이 있다.  줄리엣의 옛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로메오와 줄리엣이 만남을 약속한 베란다이다. 당년에 줄리엣은 이 베란다에서 오래동안 서 있었고 로메오는 그 아래에서 줄리엣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며 베란다로 올라가서 절세미인과의 사랑이 시작되였다.   줄리엣과 로메오의 사랑으로 이어졌던 베란다   우리가 갔을 때에 그 베란다 아래와 붉은 벽에 글을 써놓은 종이장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외국어를 모르른 나로서는 너무도 이상하여 가이드와 물어보니 젊은 유람객들이 로메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자기의 애정과 충성의 마음을 사랑하는 련인 혹은 안해에게 전달하는 내용을 담아서 써 붙인 것이라고 한다. 더욱 많은 것은 마음속에 가장 완미하고 사랑하는 사람 ㅡ 줄리엣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라고 한다. 당지 정부에서는 날로 늘어나는 편지가 전반 벽에 덧 붙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줄리엣구락부”란 조직을 내와 세계 각국에서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내 온 사람들에게 줄리엣의 회답편지를 받도록 지원자들이 전문 줄리엣을 대리하여 회답편지를 써 보낸다고 한다. 해마다 련인절이면 “사랑하는 줄리엣"이란 가장 우수한 사랑의 편지 징집활동도 벌리는데 그 영향력이 매우 넓다고 한다. 줄리엣 옛집 정원에는20세기에 제작된 줄리엣의 전신 동상이 있는데 관광객들이 수없이 조각상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는 관습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너무 어루만지여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모두 줄을 서서 기다리여 줄리엣의 동상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는데 우리도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려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줄리엣의 옛집참관으로 이딸리아의 유람은 끝났다. 나는 섹스피어가 쓴《로메오와 줄리엣》의 사랑이야기가 어떻게 되여 이렇게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가 하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으나 중문이나 조선문로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쓴 것을 찾지 못하여 매우 유감스럽다.   줄리엣의 동상   [다음에 계속]
78    서유럽려행기[11] 댓글:  조회:3682  추천:0  2020-01-05
서유럽려행[11]       산 마르코 광장(圣马可广场)  다음으로 우리는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갔다. 산 마르코광장은 베네치아의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베네치아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하던 광장이며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건물이 광장의 3면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이여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고 찬사했다고 한다. 광장에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다는 99m의 종루와 베네치아의 상징인 사자상이 서 있다. 이 종루의 전망대에서 광장 주변은 물론 멀리 아드리아 해(亚得里亚海)까지 보인다. 종탑에서 저 멀리보이는 아드리아해 광장 주변의 건축물들은 모두 베네치아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해 온 력사적인 건물들이다. 광장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과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두칼레 궁전이 있다. 두칼레 궁전 맞은편에는 건축가 산소비노(圣索维诺 1486~1570, 이딸리아 문예부흥시대의 건축가, 조각가)가 설계한 16세기 건물인 마르차나 도서관이 있다. 귀중한 고문서를 포함해 90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이다. 광장 서쪽에는 코레르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의 회화관에서 조반니 벨리니(乔凡尼•贝利尼, 이딸리아의 화가1430년∼1516 )의 (聖母子, 성모 마리아와 어린 예수를 아울러 이르는 말)와 카르파초(卡尔帕乔, 1460~1525 이딸리아의 화가)의 를 볼 수 있다. 산 마르코 광장 설명조   광장에는 유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거기에 비둘기와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예거나 광장에 내려 사람들과 아무런 거림감이 없이 주의를 맴돌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먹이를 주면 우르륵 몰켜드는데 그야말로 조류와 인간의 조화로운 공생관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조류와 인간의 조화로운 공생관계      산 마르코 대성당(圣马可大教堂)     산 마르코 대성당은 서기 828년, 성인(圣人) 마르코(신약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도의 한 사람)의 유골을 애급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와 도시의 수호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납골당으로 세워진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대성당이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864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10세기 후반에 일부가 불에 타 버린 것을 11세기에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부는 13세기와 15세기에 증축한 것으로서 산 마르코 대성당은 864년부터 15세기 사이에 점차적으로 완성되였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물로서 건물이 웅장하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장식되여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 건축의 장점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베네치아건축(베네치아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시기의 건축. 처음에는 고딕 건축이였으나 후에는 정면에 울퉁불퉁함이 없이 평탄하며 우미하고 경쾌한 양식으로 변하였다.)이란 새로운 건축 양식이다. 다섯 개의 거대한 돔과 입구 정면의 화려한 모자이크, 여러 가지 색상의 기둥과 대리석 조각상은 콘스탄티노플(君士坦丁堡, 지금의 토이기 이스탄불)과 애급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건축 기법과 재료를 리용한 것이고 정문 우에 세워진 성 마가의 말 조각과 입구를 장식한 조각은 로마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성당제단 뒤에는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제단 오른쪽 앞에 있는 보물관에는 동방침략 때 략탈해 온 보물과 전리품이 전시되여 있고  성당 안에 장식된 여러 조각상은 로마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에서 구입하거나 전쟁 때 빼앗은 것이고 모자이크 벽화는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 계속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산 마르코 대성당은 토이기, 애급을 비롯한 동양의 건축과 로마, 지중해의 건축이 혼합되여 있는 동서양의 건축 기법과 장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웅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하여 후날 서유럽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总督宫)     두칼레 궁전은 산 마르코 대성당과 함께 베네치아 관광의 중심지다. 베네치아의 권력과 영광의 상징인 이 궁전은 9세기에 베네치아 통치자의 관저로 세워졌는데 몇 차례 화재로 여러 차례 개축을 거친 후 1309~1442년에 완성되였다고 한다. 다른 건물과는 달리 외관을 흰색과 분홍색의 아름다운 대리석 문양으로 장식되여 산뜻하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이 궁전은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9세기에 처음 건설되였고 현재의 외관은 14~15세기에  형성되였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내부가 공개되고 있다. 두칼레 궁전   두칼레 궁전내부에는 총독의 방과 접견실, 평의회, 원로원(元老院 ,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립법, 자문 기관. 실질적인 지배 기관으로 내정과 외교를 지도하였다.), 재판소, 감옥, 무기고가 있다. 1층은 사법기관으로 해군 사무실, 배의 설비 사무소 등이 있으며 2층은 총독의 거주지였다. 두칼레 궁전의 호화로운 내부에는 베네치아파 화가들의 회화가 전시되여 있다. 그중 3층 대평의회의 방에 있는 틴토레토(丁托列托, 1518~1594, 이탈리아의 화가)의 벽화 (그가 죽은 후 아들 도메니코에 의해 완성되였다)이 유명하다. 가로 24.65m, 세로 7.45m 크기로 한쪽 벽을 가득 채우며 분위기를 압도하는 이 벽화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평화에 관한 알레고리(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가 돋보이는 베로네세(保罗•委罗内塞, 1528~1588이탈리아의 화가)의 등 수많은 그림들이 있다. [다음에 계속]
77    서유럽려행기[10] 댓글:  조회:3555  추천:0  2019-12-31
서유럽려행(10)   수상도시 베니스(威尼斯)로 가다 15일 아침 8시에 우리는 피렌체에서 이딸리아 북동부에 있는 베니스로 향해 떠났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또 베니스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영어로는 베니스(Venice), 이딸리아어로는 베네치아(Venezia)라고 하는데 이딸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베네토주 베네치아 광역시에 속하는 도시로서 베네토 주(威内托州)의 주도(州都)이다.  베니스는 중세시대에는 이딸리아 최강의 공화국이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14~15세기에는 동방과의 향료 및 비단 무역을 통해 부유한 해상 무역 국가로서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1866년 이딸리아 통일왕국에 합병되면서 지금은 수상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로 아름다운 관광 도시로 유명하다. 베니스의 인구는 2006년 집계 당시 26만 9천명이고 원도심은 륙지로부터 약 3.7 km 떨어져 있으며 베네치아 만(湾) 안쪽의 석호(潟湖, 모래불에 의하여 바다와 막혀있는 바다가의 호수) 안쪽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가 378개의 다리로 련결되였고 그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가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여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운하의 공공 교통수단인 수상뻐스는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수상뻐스   뻐스는 세시간에 260㎞를 달려 11시에 베니스에 도착하였다. 베니스에 도착하니 외부의 차들은 일률로 입성(入城)이 금지되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땅이 작고 인구가 많은 이 도시에서 교통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차량제한으로 외부의 차량은 일률로 입성이 금지되고 입성하려면 그 도시의 뻐스를 갈아 타야 한다고 하였다. 하여 우리도 우리의 뻐스에서 내려 그 도시의 뻐스를 갈아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시내에 들어 가서 점심을 먹고 12시부터 유람선을 타고 도심밖의 바다이면서도 호수인 량안의 풍경을 구경하였다. 유람선은 저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 오는데 도심쪽에는 이딸리아 풍격의 각양각색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바다쪽은 드문드문 가다가 여러가지 건물들이 있었지만 울긋불긋 당풍든 여러가지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유람객들로 하여금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도록 하여 “야! 경치좋다.  야! 아름답다.” 하며 저마다 감탄사가 튀여 나왔다. 그러면서 너도 나도 카메라며 핸드폰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야단이였다. 유람선에서 본 베니스       한시간 가량 걸려 유람선이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4명이 한조로 작은 뽀트에 앉아 수상도시를 유람하였다. 수상도시는 그야말로 집들이 물우에 지어졌고 집과 집사이는 륙로로 이어진것도 있었지만 수로로 이어진것이 많았다. 우리가 뽀트를 타고 유람할 때에 아빠트에서 내리 손을 저어 유람객들에 향해 우의를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도 올리 손을 흔들어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뽀트가 아치교 밑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로 다리우에서 우리를 향해 내리 손을 저어 우의를 표시하면 우리도 올리 손을 흔들어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간단한 손흔들림으로 하여도 당지 사람들과 유람객들 사이, 유람객들과 유람객들 사이에는 백색, 황색, 갈색, 흑색의 서로 피부색갈이 다른 인종, 언어가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른 민족이지만 하나의 지구촌 인류운명의 공동체내에서는 모두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바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상도시 베니스(1)     나는 뽀트를 타고 이렇게 베니스 수상도시를 유람하면서 2012년에 동남아 여러개 나라와 지구를 유람할 때에 오문의 베니스휴가촌에 갔을 때의 정경이 다시 떠 올랐다. 오문의 베니스휴가촌에서도 이딸리아의 수상도시를 모방하여 집과 집사이에 세 갈래의 소운하를 만들고 유람객들이 뽀트를 타고 베니스휴가촌을 유람하도록 하였다. 그때의 심정이야 말로 이딸리아의 베니스락원에 와 본다는 느낌에 흥분에 들뜰었는데 ‘오늘은 직접 이딸리아의 베니스의 수상도시에 와서 뽀트를 타고 베니스의 수상락원을 유람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수상도시 베니스(2)        우리는 반시간 넘어 뽀트놀이를 하고 륙지에 올라와서 륙로를 따라 아치다리를 건너면서 베니스수상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며 우리도 다리아래에서 뽀트를 타는 유람객들에게 손을 들어 우의를 표시하니 그들도 역시 손을 저으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베니스는 이런 아름다운 수상도시로 하여 세계 각지의 유람객들을 끌어 들이고 베니스의 수입은 대부분 이 유람업으로 온다고 한다. 수상도시 베니스(3) [다음에 계속]
76    서유럽려행기[9] 댓글:  조회:3412  추천:0  2019-12-28
서유럽려행[9]   〈천국의 문〉산 조반니 세례당(圣若望洗礼堂) 다음으로 우리는 “천국의 문”이라고 불리우는 산 조반니 세례당을 참관하였다. 산 조반니 세례당은 피렌체대성당 앞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건축으로서 현재의 건물은 4세기경에 건조되였던 소성당이 1060∼1150년경에 재건된 것으로서 피렌체의 수호 성인 산 조반니(로마 교황 ‘실베스테르 3세’의 본명)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이 세례당은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아 일반 성당보다 격이 높은 성당이다. 원래는 피렌체의 구대성당이였으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건립된 뒤에 세례당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 세례당은 팔각형으로 지은 집인데 그 우에  둥근 지붕을 올려 팔각지붕을 덮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罗马式, 고딕에 앞서 서유럽에서 성행한 기독교 미술 양식. 10~12세기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지배적이였던 종교미술양식. 천정은 궁륭식으로 하고 내부에 매우 둔중한 굵은 기둥들을 많이 세웠으며 벽체는 두껍게 하고 거기에 날개벽을 덧붙여 보강하였다. 창문은 좁고 길며 벽, 기둥, 아치 등에 벽화 또는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이라고 한다. 산조반니세례당   외벽은 백색과 록색의 대리석에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였는데 전형적인 토스카나 지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례당 자체보다 부조(형상이나 무늬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김)가 새겨진 3개의 청동문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제1문 (남문1336년에 완성)은〈세례자 요한의 이야기〉와 가톨릭의 충(忠), 효(孝), 인(仁), 의(義)를 나타내고 제2문(북문1404~1424년에 완성) 에는〈그리스도전〉,  〈사복음서(마태오복음서马太福音, 마르코복음서马可福音, 루카복음서路加福音, 요한복음서约翰福音)기자〉, 〈성자전〉(중세 유럽에서, 기독교 신자를 위하여 주로 운문韻文으로 쓴 전기)을 나타내고 제3문(동문1425~1452년에 완성)에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로렌초 기베르티(洛伦佐•吉贝尔蒂, 이탈리아의 조각가1378~1455)가 제작한 동쪽 출입문은 미켈란젤로(米开朗琪罗, 米开朗琪罗,1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가 '천국의 문답다'고 극찬했다고 하여〈천국의 문〉이라고도 한다. 내부장식은〈최후의 심판〉( 세계의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인류를 심판한다는 사상)의 대구도를 중심으로 해서 9계단의 천사군天(使群), 〈창세기〉(기독교 모세 오경 가운데 첫 번째 책. 50장으로 구성되여 있으며 천지 창조의 시작, 죄의 기원, 락원 상실, 이스라엘 족장들의 생애 따위가 수록되여 있다.)의〈천지창조에서 대홍수까지의 이야기〉, 〈요셉(约瑟 ,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으나 그곳에서 오히려 크게 출세하여 후에 곤궁에 몰린 아버지와 형들을 맞아들였다. )의 이야기〉, 〈그리스도전〉, 〈세례요한( 십이 사도의 한 사람)전〉을 나타낸 모자이크( 여러가지 색갈의 돌, 유리, 수지, 나무쪼각, 조개껍질 같은것을 박거나 붙여서 만든 미술작품.)가 둥근천장을 장식했다.  시뇨리아 광장(领主广场) 시뇨리아 광장은 시정청사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접해 있는 광장으로 13~14세기에 조성되였으며 중세 이후 지금까지 베키오 궁전과 더불어 력사 깊은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산책코스이자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시민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던 곳이다. 베키오 궁전 앞의 대광장에는 코지모 데 메디치( 1389~1464,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주인. 1434년 이래 피렌체를 독재적 권력으로 지배하면서 문인과 예술가를 보호하여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의 이  있다. 코지모 데 메디치 청동 기마상 시뇨리아 광장에는 또 수십 개의 조각상들이 유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유명한 미켈란젤로(米开朗琪罗, 1475~1564이딸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의 작품인〈다비드〉(1748~1825, 프랑스의 화가, 나폴레옹의 궁정宮廷 화가로 나폴레옹의 업적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렸다.)의 모조품과 첼리니(切利尼, 이딸리아의 조각가)의 작품인 메두사(美杜沙,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고르고 세 자매의 막내로, 원래는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아테네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는데 머리카락은 모두 뱀이고 메돼지의 엄니와 황금의 날개를 가졌으며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돌이 되였다고 한다.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려서 죽었다.)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珀耳修斯,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청동상, 잠볼로냐(플랑드르 출신의 조각가)의〈사빈 여인의 강간〉 등  문예부흥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조각상1   조각상2 조각상3 조각상4   광장 중앙에는 한때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萨沃纳罗拉, 1452~1498, 이딸리아의 종교개혁자. 교회의 부패와 메디치가의 전제에 반대하고 신권정치를 단행하였고 로마 교황과 대립하여 처형되였다.)의 처형지임을 알리는 화강암이 서 있다. 나는 이러한 조각품들을 보며 시뇨리아광장은 누구나 편안하게 르네상스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야외전시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베키오 궁전(维琪奥王宫)     시뇨리아 광장을 상징하는 건물은 94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 있는 베키오 궁전이다. ‘옛날 건물, 혹은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의 베키오 궁전은 1314년에 완성된 것으로 오랫동안  관공서로 사용되였으며 지금도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웅장한 외관은 전형적인 중세풍으로 무척 딱딱하고 어둡지만 건물 안은 여러 예술가의 수많은 작품으로 장식되여 있어 부드러움과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궁전 2층에는 ‘500인의 살롱’이란 넓은 방이 있는데 실제로 500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방으로 천장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꽉 차 있었다. 이 방에는 천장화 외에도 바사리(瓦萨里, 1511~1574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의 작품과 미켈란젤로(米开朗琪罗, (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ㆍ조각가ㆍ건축가ㆍ시인)의 〈승리〉 상 같은 그림과 도나텔로(多纳泰洛, 1386~1466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대표적 조각가)의 조각상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관광객의 눈길을 끌었다. 또한 3층에는  마키아벨리(马基亚维利, 1469~1527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외교가, 역사학자)가 일하던 방이 보존되여 있었다. 산지미냐노의 건축과 피렌체의 건축은 다 중세에 시작하였는데 산지미냐노의 건축은 그 시기의 건축으로 머물러 있어 아주 낡고 어두운 감을 주었지만 피렌체의 건축은 하나의 건물에 대하여 몇백년 내려오면서 보완하였기에 맑고 현시대 건물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베키오 궁전   [다음 계속]
75    서유럽려행기[8] 댓글:  조회:3649  추천:0  2019-12-23
서유럽려행(8)   문예부흥의 발원지 - 피렌체(佛罗伦萨)를 가다 14일 아침 우리는 로마를 떠나 문예부흥의 발원지인 피렌체를 향해 떠났다. 달리는 뻐스에서 가이드는 피렌체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피렌체는 이딸리아 토스카나주(托斯卡纳州)의 주도(州都)이고 피렌체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인구는 38만2천800명(2015년통계) 면적은102.41 km2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명으로서 토스카나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阿诺河)변에 위치해 있으며 력사상 중세, 문예부흥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이탈리아 문예부흥시대의 본 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메디치(梅迪奇,1389~1464. 1434년 이래 피렌체를 독재적 권력으로 지배하면서 문인과 예술가를 보호하여 피렌체를 문예부흥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가문이 다스렸고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딸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피렌체(佛罗伦萨1)   피렌체는 로마의 도시로 기원을 하였으며 번영한 무역업과 중세시대 코무네( 12세기부터 13세기에 이딸리아 북부와 중부에 있던 주민의 자치 공동체. 영주권을 배제하고 주변의 농촌지역까지 지배하는 도시 공화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금융업의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 이딸리아 문예부흥의 탄생지가 되였다. 피렌체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과 전세계의 도시들 중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핵심도시 중 하나라고 말한다. 피렌체(佛罗伦萨2)   피렌체는 1865년에 토리노(都灵, 이딸리아 서북부 포강기슭에 있는 공업 도시. 한때 이딸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자동차공업의 중심지로 피에몬테주皮耶蒙特州의 주도州都이다.)를 대신해 이딸리아의 수도기능을 대신하였으며 이탈리아 귀족 력사상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여 매년 수백만이 넘는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였다. 로마에서 아침 8시 반에 떠난것이 3시간반 북으로 270㎞ 달려 오후 1시에야 피렌체에 도착하였다. 피렌체 대성당(圣母百花圣殿) 점심을 먹고 우리는 피렌체 대성당을 참관하였다. 피렌체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13세기 말, 이미 900년 정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점점 붕괴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 시기에 인구가 급증하는 피렌체에서는 원래의 성당이 너무 작았다. 점점 번영하던 피렌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圣彼得大教堂)이나 세인트 폴 대성당(圣保罗大教堂), 세비야 대성당(塞维利亚大教堂), 밀라노 대성당(米兰大教堂)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다. 하여 피렌체 정부는 산타 레파라타 성당자리에 피사와 시에나의 성당보다 더 큰 새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피렌체 대성당은 1296년에 짓기시작해서1349년 대성당 종탑을 완성하고 중심부는 1380년 완성되였고 8각형 돔(圆屋顶)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여 1436년에 완성되였는데 이 돔(내경內经 42m)은 력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서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졌고 그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였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며  문예부흥시대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 성당은1469년 8각돔 꼭대기에 구리로 된 구를 설치하면서170여 년간 여러 세대의 피땀의 노력으로 기본상 완성되였으나 전면은 그때까지도 아직 미완성이였다고 한다.   피렌체 대성당(1)     1864년 대성당의 새로운 전면에 대한 현상설계가 열렸고 공사는 1876년 시작되였으며 1887년 완공되였다고 한다. 실외는 하얀색으로 륜곽선을 두르고 초록색과 분홍색의 대리석판으로 된 이 고딕 양식(哥特式, 12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생긴 건축 양식)의 전면으로 대성당과 종탑, 세례당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전면이 과도하게 장식되였다는 비판도 있다고 한다.   세개의 거대한 청동문은 1899년에서 1903년 사이의 것이다. 이 문들은 성모 마리아의 삶에서 따온 장면들로 장식되였다고 한다. 전면 우에는 열두 사도(예수가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특별히 뽑은 열두 명의 제자)가 있는 틈새(벽감, 조상 등을 두기 위해 벽이 움푹 들어간 곳)가 있는데 가운데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있다. 정문 우에는 거대한 시계가 있는데 시계의 네 모서리에는 파울로 우첼로(保罗•乌切洛1397~1475 이탈리아의 화가)가 1443년에 그린 네 명의 복음사가(福音史家, 신약 성서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에 관해 기록한 복음을 기록한 네 명의 사람, 즉  마태오马太, 마르코马可, 루카路加, 요한约翰)의 초상화가 있다. 피렌체 대성당(2)   바늘이 하나인 이 전례 시계는 24시에 해가 질 때 끝나는 시간 주기인 “이딸리아 시각”의 24시간을 보여준다. 이 시간표는 18세기까지 사용되였으며 당시 만들어져 아직도 작동하는 몇개 안 되는 시계 가운데 하나이라고 한다. 피렌체 대성당은 특히 44개의 채색유리창으로 유명한데 이것을 만드는 것은 14세기와 15세기 이딸리아의  채색유리 제조가운데 가장 큰 사업이였다고 한다. 측랑(교회당 건축에서 측면에 줄지어 늘어선 기둥의 밖에 있는 복도) 안과 익랑(侧廊, 대문의 좌우 량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 안의 창들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인들이 묘사되여 있다. 한편 돔의 원통형 안과 출입구 우에 있는 둥근 창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묘사되여 있다. 이들 작품은 당시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라고 하다. 이 대성당은 길이153m, 폭이 38m에서 90m에 이르는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측랑에서 아치까지의 높이는 23m이고, 바닥에서 돔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90m에 이른다.
74    서유럽려행기[7] 댓글:  조회:3501  추천:0  2019-12-19
서유럽려행 (7)   가이드는 성 베드로 대성전 오른쪽에 있는 사도궁전을 가르키면서 평상시 교황은 저기에서 자신의 집무를 수행하고 외국에서 온 사절을 맞이하며 바띠까노 시국내에는 하나의 직승기 비행장이 있는데 출국할 때에는 그 비행장에서 직승기를 타고 로마비행장에 내려 거기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출국방문을 한다고 하였다.   방첨탑과 사도궁전   현재의 제266대 교황(2013년 3월 19일 재위)은 남반구, 아메리카 출신인 프란치스코이다. 교황청은 교황을 중심으로 바띠까노시국과 로마 성청을 다스리며 세계 가톨릭 교회 및 교도를 통솔한다.  바띠까노 시국은 독립국가인 만큼 당연히 독자적인 통신, 금융기관, 화폐, 방송국, 군대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바띠까노시국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졌고 군대는 사도 궁전의 치안을 포함해서 교황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데 100명의 스위스 근위대(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립장을 지켜 왔지만 과거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높은 임금 때문에 용병으로 지원하는 국민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스위스에서 용병을 파견한다고 한다.)를 용병으로 쓰고 있다. 중국과 바띠깐과의 관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로마교황청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여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없다. 그 중요한 원인은 바띠깐노시국은 지금도 대만과 외계관계를 갖고 있으며 중국은 중국대륙내의 종교를 중국정부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천주교애국회라는 관영단체 산하의 공동체만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로마교황청 측에서는 중국내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를 교황청 관리하에 두어야만 수교가 가능하다는 립장을 보이고 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도 립장을 굽히지 않아 현재까지도 바띠깐노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론의는 진전없다 바띠깐노시국은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중국 교구의 주교 임명권을 바띠깐노시국이 행사하는 것을 중국이 인정할 것 △종교의 자유를 좀 더 폭넓게 허용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중국 정부는 △대만과의 외교관계 단절 △종교를 명분삼아 중국의 내정에 간섭 못한다는 립장이다.    중국정부는 중국 대륙 내의 주교 임명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주도하고 있으며 교황청은 이렇게 임명된 주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정부는 " 바띠깐노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종교를 내세워 중국의 내부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바띠깐노시국과 수교할 준비가 되여 있다"고 하였다. 바띠깐노시국은 교황이 거주하는 사도궁전을 중심으로 성 베드로 광장이 있는 남동쪽을 제외하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6개의 입구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 베드로 광장, 대성당 정면의 종탑 아치, 북쪽 성벽에 있는 바띠깐노 박물관 입구 등 3개의 입구만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여 있다. 그나마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중국과 바띠깐노시국과의 외계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원인으로 중국관관객들에게는 성 베드로 광장만이 개방되였다고 한다. 하여 우리는 이 광장에서 사도궁전, 대성당 등 건물과 광장내에 있는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方尖塔) 등을 볼수 있었으며 여기에서 놀고 사진도 찍었다. 성 베드로 광장(圣彼得广场) 성 베드로(예수를 따르던 열두 명의 제자가운데의  첫번째 제자) 광장은 산피에트로광장이라고도 하는데 바띠깐노시국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바로 앞에 있는 광장인데 최대 5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광장은 이탈리아 바로크양식(巴洛克风格,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류행한 예술 양식)의 거장인 화가, 조각가 베르니니(1598~1680,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가 1656년 설계해 12년 만인 1667년 완공하였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하면서 가톨릭교회가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는 뜻으로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圆屋顶)을 머리로 상징하고 반원형의 회랑(回廊) 두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전과 방첨탑   회랑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좌우로 타원이며 좌우 반원씩 서로 대칭을 이루고 좌우 너비는 480m이며 정면 끝은 성 베드로대성당의 입구이다. 성 베드로 광장 량켠의18m 높이의 회랑은 각각 네 줄로 늘어선 284개의 원기둥과 88개의 방주(方柱)로 주랑(柱廊)을 이루고 있다. 주랑 우에는 140명의 대리석 성인상(圣人像)이 조각되여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加利古拉, 재위 37~41년)가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기원40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방첨탑 (方尖塔.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기념비. 네모진 거대한 돌기둥으로서 우로 갈수록 가늘어지고 꼭대기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되여 있으며 기둥면에는 상형문자로 국왕의 공적이나 기타 도안이 그려져 있다.)가 우뚝 서 있다. 이  방첨탑은 로마로 옮겨진 뒤 경기장에 세워졌으나 후에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西斯都五世, 제227대 교황,  재위: 1585년 - 1590년 )의 지시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방첨탑 꼭대기에 알렉산데르 7세(历山七世, 제237대 교황, 재위: 1655년 4월 7일 - 1667년 5월 22일) 가문의 문장(紋章. 국가나 단체 또는 집안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징적인 표지를 도안한 그림이나 문자로 되여 있다. )과 십자가가 장식되여 있는데 높이는 25.5m, 무게는 320t이다.  이 거대한 물체를 그때의 기술로 지중해 동남쪽 이집트에서 지중해 서북쪽 로마까지 어떻게 운반해 왔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 베드로 광장   하지만 이 탑을 세우는데는 이런 에피소스가 전해지고 있다. 이 탑을 세우는 작업에 수백 필의 말과 수천 명의 근로자가 동원되였고 굵은 나무와 바줄, 안전목 등이 사용되였다. 무게가 320톤이나 되는 이 거대한 돌덩이를 세우는 것은 무척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였기에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한 마디라도 소리를 낼 경우엔 바로 큰 벌을 내리겠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하자 바줄과 바줄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불이 붙었다. 그대로 작업을 계속하면 바줄도 끊어지고 탑도 넘어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모두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리를 내면 그 자리에서 벌을 내리겠다는 엄명 때문이였다. 그때 한 사람이 “바줄에 물을 부으시오!”라고 외쳤다. 선원이였던 그 남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해결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라 즉시 바줄에 물이 부어졌고 근로자들은 아무 사고 없이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고함을 지른 용감한 선원은 처벌받을 대신 교황으로부터 성지주일(부활절 바로 전의 주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 종려나뭇잎(성지가지)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을 상으로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특권을 누리고 있다. 방첨탑 좌우에는 2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으며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자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73    서유럽려행기[6] 댓글:  조회:3586  추천:0  2019-12-15
서유럽려행(6)   트레비 분수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저녁 6시에 우리는 바띠까노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갔다. 바띠까노 시국(Vatican 市國)은 략칭으로 바띠까노이고 이딸리아의 로마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령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도시국가이다.  바띠까노시는 바띠까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띠까노 평원을 포함하며 면적은0.44km2  즉 북경 천안문광장의 면적과 같으며  인구는2016년의 통계로 842명이다.  바티칸시국의 지도   바띠까노 시국의 령토는 로마의 북서부에 있는 바띠까노 언덕과 그 앞 린근에 성 베드로 대성전, 사도 궁전과 시스티나 경당 그리고 바띠까노 미술관 등의 건물들이 세워진 평원이다. 이 지역은 1929년까지 로마의 보르고 지구의 일부분이였다. 로마시와 분할된 것은 레오 4세(利奥四世,  제103대 교황, 재위: 847년 4월 10일 ~ 855년 )가 테베레 강 서쪽연안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길게 성벽을 쌓아 올린 때부터이며 이후 레오 4세의 벽을 포함하여 바오로 3세(保禄三世, 제220대 교황, 재위: 1534년-1549년), 비오 4세(庇护四世, 제224대 교황, 재위: 1559년~1565년), 우르바노 8세(乌尔巴诺八世, 제235대 교황, 재위: 1623년 -1644년)가 새로 쌓아올린 성채 덕분에 면적이 더 확장되였다. 1929년 라테라노조약(拉特拉诺条约,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 왕국과 바띠까노시국 량국이 라테라노 궁전(拉特朗宫)에서 체결한 조약)을 맺으면서 이탈리아 정부가 바띠까노의 령토를 환상선에 의해 둘러싸인 구역을 경계선으로 명시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였다. 일부 국경 지역은 벽이 없는 대신 어떤 건물들로 선을 긋는 것으로 대신하였으며 국경의 작은 일부분에는 현대식 벽을 건설하였다. 바띠까노의 령토에 포함된 성 베드로광장은 로마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탈리아 정부와  바띠까노시국은 대체적으로 성 베드로광장 밖의 비오 12세 광장 구역을 가상의 경계선으로 보고 있다. 또한 라테라노조약에 따라 교황청은 이딸리아 령토안에 일정한 소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카스텔간돌포(冈多菲堡)와 대주교좌 성당들 그리고 로마와 이딸리아 전역에 산재한 교황청 소속의 관청이나 사무소 등으로 이러한 소유지는 외국대사관의 지위와 류사한 치외 법권(다른 나라의 령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국제법에서의 권리)을 누리고 있다. 성 베드로광장은 일반적으로  바띠까노시국과 이딸리아 량국이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한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띠까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되였으며 성 베드로(예수를 따르던 열두 명의 제자가운데의  첫번째 제자, 나중에 로마에서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尼禄의 박해로 순교하였다)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맞은편에는 비아 코르넬리아를 경계로 삼아 고대 로마시대의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4세기 초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 언덕은 다신교의 각종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과 무덤, 비문 등이 지어졌다. 이러한 고대의 잔재들은 수세기에 걸쳐 문예부흥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사를 할 때 빈번하게 발견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대규모적인 발굴작업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君士坦丁, 중기 로마 황제, 재위 306년 - 337년)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우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진 것이 기원이며 5세기 초에 대성전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은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전 건물은1506년에착공되여 1626년에 준공되였으며 초기 르네상스식의 대표적 건축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과 그 앞의 광장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커져갔으며 19세기 중반에 신흥국가인 이딸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천년동안 로마와 그 주변 지역들을 장악해 교황령(教皇国,  로마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령역. 1929년 라테란 조약 체결 이후  바띠까노시국을 이르는 말이다.)이란 이름 아래 다스렸다. 이 시기의 대부분 동안 교황들의 거주지는  바띠까노가 아닌 라테라노 궁전(拉特朗宫 )이였으며 아비뇽유수기(1309년 - 1377년)를 제외한 최근 세기 동안에는 퀴리날레 궁전(奎里纳尔宫)이였다. 19세기 중엽 이딸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창궐하면서 교황청은 차츰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1870년에는 마침내 수도인 로마마저 점령당하면서 교황의 소유지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되였다. 1861년부터 1929년까지 60여 년 동안 이러한 로마 문제라고 불리는 상태가 유지되였다. 이로 인해 천년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하고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상층부들은 바띠까노로 대거 피신했다. 이후 교황들은 로마 및 기타 지역에 대한 이딸리아 국왕의 권한을 인정하라는 이딸리아 정부의 주장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요구라며 항의했고  바띠까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교황령이 이딸리아에 병합된 이후에도 이딸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교황청의 이딸리아로부터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다. 이딸리아는  바띠까노 안에 있는 교황청에 대한 무력행사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퀴리날레 궁전(奎里纳尔宫)을 포함하여 교회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해갔다.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庇护九世)는 로마를 잃은 이후 스스로를 ‘바띠까노의 포로’라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은 1929년 2월 12일 이딸리아정부와 교황청 간에 라테라노조약을 체결되면서 종식되였다.     바띠까노 박물관   라테라노조약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알바니아의 군주, 1869년~1947년)와 교황 비오 11세(이딸리아 출신 교황, 1857년 ~ 1939년) 량측으로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에 의해 각각 조인되였다. 이 조약으로 이딸리아는  바띠까노 시국을 독립국가이며 교황청의 소유와 국제법상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이딸리아의 국교로 삼았다.  바띠까노 또한 로마를 수도로 한 이딸리아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더불어 량측은 라테라노 조약에 반대되는 이전의 모든 법들을 페기하였다. 라테라노 조약은 파시즘 정권이 물러나고 1947년 이딸리아 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그대로 채택되였다. 다만 1984년 량측 합의로 가톨릭교회를 이딸리아의 국교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 새로운 정교 협약으로 수정되였다. 바띠까노 시국은 교황이 통치하는 일종의 신권국가(神权国家)로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 본부이다. 교황은 직무상 바띠까 시국의 국가원수이자 바띠까노 시국의 정부 수뇌자이며 법적으로 교황은 절대 군주에 해당하며 바띠까노 시국의 립법권, 행정권, 사법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 교황은 유럽에 남은 유일한 절대 군주이다. 교황은 콘클라베(教宗选举, 교황을 뽑는 전 세계 추기경들의 모임. 교황이 사망하거나 물러나면 16~19일 사이에 교황청의 시스티나 성당西斯廷小堂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한다.)에서 여든 살 이하의 추기경들이 선출한다.  
72    서유럽려행기[5] 댓글:  조회:3643  추천:0  2019-12-13
서유럽려행(5)   콜로세움 (斗兽场)  콜로세움(斗兽场)은 로마제국 시대에 높이57m, 둘레 527m, 직경이188m, 156m의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인데 고대 로마 유적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경기장으로서 로마의 제5대 네로황제(尼禄黄帝)의 황금궁전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다고 하는데10만 명의 노예가 동원되였으며 노예들은 로마에서 20km정도 떨어진 채석장에서 돌을 옮겨 왔고 콜로세움은 목재, 응회암, 석회암, 콘크리트, 타일과 같은 재료로 지어졌는데 당시의 건축물 가운데 최대의 건축물이였으며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维斯帕西安) 황제가 착공해 10년 뒤인 서기80년에 아들인 티투스(提图斯) 황제때에 준공되였다고 한다. 경기장이 준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가 100일 동안 계속되였으며 축제에서 티투스 황제가 개회를 선포하였다고 한다.     콜로세움(1)   콜로세움은 5~6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고 4층으로 되여 있으며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관중들이 입장하는데 30분, 퇴장하는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한다. 콜로세움은 각 층마다 각기 다른 양식으로 꾸며진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1층은 도리아 양식(多立克柱式, 도리스 인들이 창시한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 기둥이 굵고 주춧돌이 없으며 기둥머리 장식이 역원추 모양으로 간소하나 장중미가 있다. ), 2층은 이오니아 양식(爱奥尼柱式,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건축양식. 아테네 전성기 때에 이오니아지방에서 발생하여 1세기가량 성행하였는데 우아하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 3층은 코린트 양식(柯林特风格,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발달한 건축양식.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머리에 아칸서스 잎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의 기둥과 원형에 가까운 아치로 장식되여있다. 이 경기장에서는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으며 1층은 황제가족과 귀빈, 2층은 기사계급, 3층은 일반서민,  4층은 천민 계급들이나 노예들의 좌석으로 나위여졌다.     콜로세움(2)   이 경기장은 여러가지 경기도 하고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였다고 한다.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剑斗士)와 맹수가 싸우거나 검투사끼리 결투를 벌이는 경기가 주로 열렸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때 콜로세움에서 죽어나간 맹수가 5,000마리가 넘었고 맹수와 싸움을 하거나 검투사끼리 결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중요한 기념일이나 행사 때는 경기장에 물을 채운 뒤 벌이는 해전게임 같은 특별한 경기도 열렸는데 배를 타고 바다에서 많은 전투를 벌였던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서도 실제 전투에서처럼 서로 죽이는 경기를 펼쳤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였으나 검투사가 되면 리득도 있었는데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대접을 받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경기장에서 3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검투사들의 경기가 계속되다가 450년 호노리우스(霍诺里乌斯) 황제가 이것이 너무 야만적이라는데서 경기를 중지시켜 그러한 경기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후 콜로세오는 지진의 피해를 입기도 하고 부자들이 저택과 궁전을 짓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콜로세움의 대리석과 장식물을 가져다 사용하면서 내부와 외벽 많이 뜯기게 되여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는 못해 아쉽지만 2,000년 전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지금은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 명소로되여 매일 수천명의 관광객이 모여 든다고 하니 그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었다.     콜로세움(3)   트레비분수(特雷维喷泉) 우리는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의 유람을 마치고 로마시내에 있는 트레비분수로 갔는데 이때는 이미5시가 넘어 어둠이 깃들었다. 트레비분수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딸리아에는 한 처녀가  로마제국의 제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奥古斯都)가 명한 ‘처녀의 샘’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목마른 병사들에게 물을 준 전설이 있는데 트레비분수는 이 처녀의 샘을 수원으로 분수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트레비분수의 중앙에 있는 근엄한 모양의 조각상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波塞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 강, 샘을 지배하는 신)이며, 량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이다.   분수 왼쪽에 날뛰는 말은 풍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포세이돈’ 옆에 있는 두명의 녀인은 각각 건강과 풍요의 녀신을 상징하고 건물 우부분에 4개의 녀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1)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은 오랜 전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예전 로마제국에서는 전쟁터로 간 남편이나 아들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이곳에 동전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어져 지금은 로마려행 중 꼭 거쳐 가야 하는 동전 던지기 장소로 유명하다.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하나 던져 들어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고 두 개가 들어가면 운명의 사랑을 만나고 세 개가 들어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던져진 동전은 매일 3,000유로 정도가 트레비 분수대 바닥에 쌓이는데 로마시에서는 매일 밤 이 동전을 수거하여 로마시내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쓰고 있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2)   트레비 분수는 높이가 25.9m, 너비는 19.8m로서 로마에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분수라고 한다. 바로크양식(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는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에 분수 주위에는 숫한 사람들이 둘러 싸여 있었는데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뿌리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일행가운데서도 동전을 뿌리는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동전을 뿌린다 하여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로마에 와서 한번 이런 재미를 보자는데서 뿌렸다.     트레비 분수(3)  
71    서유럽려행기[4] 댓글:  조회:4034  추천:0  2019-12-07
서유럽려행(4)        이딸리아수도 로마로 가다     우리는 이 천공의 성을 다 유람하고 오후 1시에 이딸리아의 수도 로마를 향해 떠났다. 로마로 가려면 120여 ㎞의 거리를 가야 하므로 가는길에 가이드는 먼저 로마명칭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로마신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아직 로마라는 도시가 형성되기 전에 지금의 로마린근 지역에는 알바-롱가(Alba-Longa)라는 도시국가가 있었고 그 곳의 왕은 누미토르(Numitor)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왕의 동생인 아물리우스(Amulius)가 왕인 형을 페위시켜 멀리 내쫒아 버리고 스스로 왕이되였다.     왕이 된 아물리우스는 전왕의 공주 즉 자기의 질녀인 리아 실비아(Rhea Silvia)를 협박해서 신녀( 불교를 믿는 녀자)가 되게 하였다. 신녀가 되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후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군신 마르스(Mars)가 공주에게 나타나나 실비아와 정을 통한 후 공주는 임신하게 되였다. 후에 실비아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로물루스(Romulus), 둘째아들을 리무스(Remus)라 이름지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아무리우스왕은 질녀인 실비아에게 “쌍둥이 아들들을 상자에 넣어 티베르강台伯河에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겁을 주었다. 실비아는 아들을 상자에 담아 강에 버렸다. 아이들을 담은 상자는 물결따라 떠내려가다 강가로 밀려나왔다.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를 들은 새끼낳은지 얼마되지 않은 늑대가 그리로 지나다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였다. 얼마후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온 한 목민이 상자에 담겨있는 아이들을 본다. 그는 아이들을 자기집으로 데려가서 아내와 의론후에 자신들의 아들로 키우게 되였다.     그 쌍둥이 아이들이 다 성장한후 어느날 형의 꿈에 마르스가 나타나 그들의 배경을 말해 주며 “쫓겨난 네 할아버지를 복위시켜라”고 말한후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로물루스는 자기 부모에게 자신의 출생비밀을 묻는다. 대략의 이야기를 들은 쌍둥이 형제는 아물리우스 왕을 죽이고 페위된 누미토르를 복위시킨다.     그후 쌍둥이 형제는 현 도성이 좁다고 티베르 강을 중심으로 더 넓고 아름다운 새 도시를 지으려고 나섰다. 그러나 장소선정 문제로 형제의 의견이 대립되면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 형이 동생을 살해 하였다. 이후 형은 7개의 언덕이 펼처져있는 티베르강변에 도성을 건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신도시를 ‘로마’라고 명명했고 한다.      1960년 제17회 올림픽운동회가 로마에서 개최되였을 때 로마올림픽을 상징하는 휘장이 바로 암늑대가 두 남자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였다.  제17회 올림픽운동회 휘장      가이드는 다음으로 수도 로마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로마는 이딸리아의 수도이자 라치오주拉齐奥州의 주도로서 테베레 강 연안에 위치해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km2, 인구는 290여만명(2014년)이다. 로마는 2,5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력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영원한 도시’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였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教皇国. 로마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령역. 1929년 라테란 조약 체결 이후 바띠까노 시국을 이르는 말이다. )의 수도가 되였다고 한다. 이딸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딸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딸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바띠깐노는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띠깐노 시국은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로 로마시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력사, 종교, 문화적으로 이딸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오후 한시에 바뇨레조 진에서 떠난 것이 124㎞의 거리를 2시간 달려 오후 3시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콜로세움 斗兽场으로 갔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君士坦丁凯旋门 콜로세움 앞 광장 서쪽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다. 이 개선문은 로마의 마지막 비 기독교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君士坦丁大帝1세가 312년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황제 막센티우스(马克森提乌斯306~312년 재위)와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315년에 세워졌으며 팔라티노 언덕과 콜로세움의 중간에 당시 승리의 환호성을 올리던 군인들이 점령했던 비아 트리움팔리스에 자리 잡고 있다. 개선문은 영원히 남을 기념비로 세워지며 정치적 위력의 과시로 보이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특히 그 기하학적 비례로 눈길을 끈다고 한다. 이 개선문은 높이 21m, 너비 25.7m, 폭은 7.4 m에 달하며 모두 세 개의 아치가 있는데 중앙 아치는 높이가 12 m, 량옆의 아치는 7 m 이다. 이 개선문은 고대 로마 1200년 력사에서 로마의 심장부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현재 로마에 남아 있는 세 개의 개선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가장 량호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다음호에 계속)
70    서유럽려행기[3] 댓글:  조회:4012  추천:0  2019-12-05
서유럽려행[3]     산 지미냐노(圣吉米亚诺) 피사에서의 유람을 마치고 오후 4시반이 되여 인류문명의 유산도시 산 지미냐노(圣吉米亚诺)로 향하였는데 갈지 (之) 자로 높은 령을 톱아 오르고 또 갈지 (之) 자로 그 높은 령을 내려오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아슬아슬하였다. 그러다니78㎞의 길을 2시간 반이 걸려 7시에야 산지미냐노에 도착하였다. 산지미냐노는 이딸리아의 중서부에 있는  토스카나주(托斯卡纳州) 시에나(锡耶纳)현에 있는 천년되는 작은 도시인데 중세기에 번창했던 곳으로서 중세기 건축풍격이 농후한 작은 도시로서 해발 324 m, 면적은 138 km2 , 인구는 7,800명이다. 11세기에서 13세기 무렵, 산 지미냐노는 로마를 왕래하는 순례자들이 거치는 프란치제나 길의 중요한 련결지점으로 되여 농업 생산물, 주로는 건위제, 진정제, 향료, 염료 따위로 쓰이는 사프란(藏红花) 무역과 성지순례길로 번성했다고 한다. 이 도시에는 교황을 지지하는 아르딩헬리(Ardinghelli) 가문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살부치(Salvucci) 가문이 있었는데 이 두 가문이 이 도시를 지배하였으며 서로 경쟁하는 이 두 가문사이에는 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였다고 한다. 이 귀족가문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약 72채의 고층 주택을 세웠는데 이 중 몇몇은 높이가 50m에 달했다고 한다.  중세 시대가 끝날 무렵 귀족들은 저마다 요새화 된 탑건물을 지어 70m가 넘는 72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하여 이 도시를 탑의 도시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이 높은 성곽을 짓는 경쟁은 마침내 의회가 팔라초 코무날레(지금의  산지미냐노의 시청)보다 높게 짓지 못하게 명을 내리면서 자제되였다고 한다. 지금은 14개 탑과 궁전, 교회 등 건물만 보존되여 있지만 봉건시대의 분위기와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중세기 이딸리아 예술의 걸작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였다고 한다. 우리가 본 이 건물들은 다 8, 9백년전의 건물들이였는데 아직도 완전한 형태를 보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때의 기술로 어쩌면 이렇게 견고하게 지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 지방의 건물과 비교 할때 나로서는 리해를 할수 없었다.     밤에 본 중세기 건물   밤에 보다니 이렇게 천년되는 옛도시의 야경은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전반 도시의 경치를 보지 못하는것이 유감이였다. 그래도 이튿날 뻐스를 타고 이 도시를 떠날 때에 전반 도시를 볼수 있어서 좀 유감을 풀수 있었다.     이튿날 이 도시를 떠나면서 본 산지마냐노   천공의 성(天空之城)치비타    13일 8시 반 우리는 산 지미냐노를 떠나 역시 이딸리아의 중서부 바뇨레조(巴尼奥雷焦)진에 있는 천공의 성(공중도시) 치비타(奇维塔)로 향해 떠났는데 178㎞의 길을 3시간 달려 11시 반에야 바뇨레조 진에 이르렀다.  천공의 성 치비타(Civita)는 이딸리아 라치오주(拉奇奥州) 비테를보현에 위치한 인구가 2,000여 명되는 작은 진인 바뇨레조(巴尼奥雷焦)에서 동떨어져 있는 작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고대의 작은 마을이다. 이 천공의 성은 로마로부터 120㎞ 떨어져 있는데 몇백년간 황페한 유령도시로 불리우다가 1986년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감독이 애니메이션 (그림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之城拉普达)〉를 찍을 때 이천공의 성으로부터 령감을 찾았다고 하여 이 작은 마을이 다시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 잃으키면서 지금은 관광명소로 되였다고 한다.   공중도시(天空之城1)   이 마을은 사면이 깍아지르듯 한 산꼭대기의 응회암(화산이 터질 때 뿜어나온 재와 모래, 자갈과 같은 화산물들로 이루어진 암석)우에 집들이 촘촘히 들어 앉아 있었는데 지금 보존되여 있는 집들은 2~3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대부분 중세기에 지은 집들이라고 한다.       공중도시(天空之城2)   이 마을과 바뇨레조 진과의 련계는70m 높이에 약 300 m길이의 다리로 되였는데 다리가 좁고 중량감당제한으로 하여 큰 차는 다릴수 없지만 승용차는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다리로 이 공중도시를 건너가기 전에 구름이 이 도시 아래에서 흐르고 있어 이 공중도시가 마치 신기루마냥 구름우에 떠 있는것 같았다. 우리가 다리를 건너면서 사방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20~30분정도 걸어 이 공중도시에 올랐을 때에는 산아래에 약간한  구름이 흐르고 있어 마치 하늘나라에서 천하세상을 내려다 보는 듯 하였다. 위챗에서나 텔레비죤에서 아츨한 절벽우에 집들을 지어놓은 것을 봤는데 이 곳에 와서 직접 제눈으로 그러한 그림같은 것들을 보니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야! 경관이다.” “야! 멋있다.” “야! 정말 하늘공중에 떠있는 도시구나!”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면서 서로서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공중도시(天空之城3)   마을의 집들을 보면 대부분 2~3층으로 된 살림집이였으며 마을 복반에는 세인트 도나토 성당(圣多纳托教堂)이 있었는데 큰 마을은 아니지만 성당은 꽤 커 보이였다. 성당 서쪽벽 옆에는 3층 높이의 두배로 되는 성당종루가 공장굴뚝처럼 높이 서 있었다. 그리고 성당앞은 작은 마을 치고 꽤 넓은 광장이 있었다. 이것을 봐도 옛날에도 많은 집회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도나 토 성당   성당안에는 6세기의 순도자(殉道者) 세인트 도나토 (圣多纳托)의 유체를 모시고 있으며 이 지구에서 널리 존경을 받고 있는 3세기 순도자 세인트 빅토리아(圣维多利亚)의 유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당 오른쪽은 문예부흥시기에 건축된 아레마니궁전(阿勒曼尼宫)인데 몇년전에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력사는 선사시대(史前时代)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 마을 지하의 큰 무덤에서 발굴한 문물로부터, 2,000여 년전에 트루리아 (이탈리아 중서부에 있던 옛 나라)인들이 이미 여기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마을은 또 보나벤투라(波拿文都拉, 1221 ~ 1274.이탈리아 성인으로 중세 최대의 스콜라 철학자의 한 사람)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이 섬같은 작은 마을에는 장기적인 주민호는 10여 가구가 있고 대부분의 집들은 별장으로 사용되여 여름이면 피서도 하고 관광성수기에 부근의 주민호들이 올라와서 숙박업도 하고 교회당도 문을 열고 례배활동도 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에 교회당도 문을 열었고 유람객들가운데서 예배를 하는사람들도 있었으며 거리 량켠의 여러 집을에서는 관광상품 가게를 꾸리고 관광상품을 팔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69    서유럽려행기[2] 댓글:  조회:4392  추천:0  2019-12-01
   서유럽려행(2) 갈릴레이 고향 피사를 찾아서       피사(比萨) 의 개황   밀라노대성당을 다 참관한다음 10시 20분 우리는 피사로 향했다. 이탈리아는 대부분 산지와 구릉지대라고 하지만 밀라노에서 피사로 가는데는 끝없이 펼쳐진 일망무제한  대 평원으로서 기차를 타고 중국의 동북평원을 달리는 듯한감이 들었다. 뻐스로 4시간에 280㎞달려 오후 2시 반에 피사에 도착하였다.   피사는 이탈리아중서부의 아르노 강(阿诺河)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이탈리아 토스카나주(托斯卡纳州)에 있는 도시로서 피사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면적은185,18㎢, 시의 인구는 약 9만명이다.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热那亚•威尼斯)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노바에 패하였으나 그 후에도 활발한 상업중심지었으며 예로부터 문예의 중심지로 번창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伽利略伽利莱, 1564~1642, 이탈리아 르네상스 말기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철학자)의 출생지로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이 곳에서 대학공부를 하였다.    파사의 대성당광장   피사의 대성당광장은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성벽안에는 잔디로 깔린 넓은 록지로 된 피사의 대성당광장이 있는데 광장에 들어서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념물인 세례당, 대성당, 종탑(사탑)이 차례로 있고 대성당 북쪽에 교회묘지(납골당) 등 대리석으로 된 네 건축물이 있는데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앞으로부터 세례당, 대성당, 사탑   1)  세례당 이 건축물은 이탈리아의 세례당 중 가장 큰 세례당으로서 둘레 107m, 지름 34m의 거대한 원형 건물로서 1063년에 시작하여 1350년에 준공하기까지 무려 3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처럼 건축기간이 길었던 만큼 이 세례당은 두 시대 양식, 즉 전반기에 제작된 아래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罗马式,10~12세기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지배적이였던 종교미술양식. 천정은 궁륭식으로 하고 내부에 매우 둔중한 굵은 기둥들을 많이 세웠으며 벽체는 두껍게 하고 거기에 날개벽을 덧붙여 보강하였다. 창문은 좁고 길며 벽, 기둥, 아치 등에 벽화 또는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이고 후반기에 지어진 웃부분은 고딕양식(哥特式,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나타난 건축 양식 즉 뾰족한 지붕과 둥근 천장)이라고 한다.     세례당       2)  대성당 피사의 대성당은 중세를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부스케토의 지휘아래 1118년에 완공된 것으로 중세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은 +자가모양 3층으로 지었는데 +자가 중심 교차점 3층 꼭대기에  또 원통형으로 한층 더 지어 4층으로 되었으며 4층 지붕은 반구형으로 되었다.   이 성당에서 피사 출신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성당의 천장에 매달려 있던 등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흔들이)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했다고  한다. 진자(振子)의 등시성이란 진자가 운동하는 시간은 진폭이나 진자의 질량에는 관계없이 진자의 길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대성당   3)  사탑 피사대성당에 부속된 사탑(종탑)은 갈릴레이와 함께 피사의 사탑으로 매우 유명하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사탑은 고르지 못한 지반 상태 때문에 기울어진 건축물로 유명하다. 1173년에 착공하여 137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약 200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제1차가 1173년~1178년, 제2차가 1272년~1278년, 제3차가 1360년~1372년으로 공사기간 간격이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제1차 공사때에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전체 높이 58m의 약 3분의 1에 불과한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기울어짐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계속하여 제2차 공사에서는 기울어진 각도에 맞춰 수정을 가한 뒤 건설을 재개했으나 기울기를 멈추지 못하고 제3차 공사를 맞이하여 7층까지 완공하였다. 사탑은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최대 높이는 58.36m나 된다. 속이 빈 원통의 주변을 기둥들로 두른 라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8층의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다.     사탑은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게는 14,500톤이며 기단은 직경이 19.6m이다. 탑은 1년에 약 1mm 정도씩 기울어져 현재 5.5도 정도 기울어져 현재는 꼭대기 층이 중심위치에서 4.5m(어떤 자료에는 5.3m)나 벗어나 있다. 이를 우려한 이탈리아 정부는 1990년에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해 기우는 쪽의 암반에 약 700톤에 달하는 납을 심어 두었고 한다.    이 사탑에는 갈릴레이가 물체가 자유낙하하는 시간은 낙하하는 물체의 질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법칙을 인증하기 위해 사탑 꼭대기에서 중량이 다른 크고 작은 두개의 철구를 동시에 떨어뜨려 두 철구가 동시에 땅에 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이 일화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비비아니(Viviani)가 지어낸 것이라는 속설도 있다.  피사의 사탑이라고 하면 그전에 책에서도 많이 보았고 텔레비에서도 여러번 보면서 세상에 저렇게도 신기한 일이 있는가? 어쩌면 저렇게 기울러진 것이 600년이 많이 넘도록 넘어지지 않고 저렇게 서있을가? 한번 직접 가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오늘 직적 현지에 와서 제눈으로 직접 실물을 보고 사탑을 배경으로 사진까지 찍으니 마음이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사탑       4)  납골당 피사 납골당은 대성당 북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피사의 력사적인 인물들이 묻혀 있고 한다. 유람객들은 모두세례당, 대성당, 사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야단이였지만 누구나 납골당에는 가지않았다. 나는 피사의 건축물들을 보고 우리 나라의 도시 건축물들을 보면 지은지 30~40년이 되면 허물어버리고 다시 짓는것이 많은데 이 건물들은 모두 중세기에 지은 것으로서 지은지 1,000년 거의 된 건물인데 아직도 이렇게 완전하게 보전되여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성당광장 성 밖에는 많은 관광상품상가들로 줄지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러가지 실용적인 상품들을 샀지만 나는 6유러(유러와 인민페 환률 1:8)를 주고 이딸리아에서의 상징적인 기념품으로 되는 사탑모형을 샀다.   [다음 계속]    
68    서유럽려행기[1] 댓글:  조회:4406  추천:0  2019-11-30
 서유럽려행기   주청룡 (2018년 11월 11일~23일)   머리말    기행수필은 수기보다 문학적 차원에서는 더 높다고 하겠지만 문학인이 아니고 일반 독자들이라고 할 때에는 기행수필보다 려행사를 따라 어떻게 돌아다니고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을 려행코스 그대로 돌아보고 듣고 자기가 느낀점을  써야 자기도 려행사를 따라 려행을 하는 감이라며 려행수기를 수필보다 더 즐겨 읽는다. 동남아의 몇개 나라와 지구 그리고 대만기행문도 수기로 써서 길림신문, 동북아신문, 조글로에 련재로 발표하였는데 나의 친척, 친구들이 그것을 보고 이번에도 그렇게 써달라는 것이였다. 기행수필을 쓰자면 나의 문학수준의 제한도 있겠지만 친척, 친구들의 요구에 의해 이번 서유럽려행도 려행수기로 썼다.     이번에 려행한 몇개 나라들이 지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딸리아 (남유럽)를 제외하고는 다 서유럽에 속하고 정치학적으로 이딸리아도 서유럽련합에 속하기에 이번의 려행을 《서유럽려행기》이라고 하였다.     서유럽려행기(1) 이딸리아로   호북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이 나의 생일선물로 유럽려행을 하라고 돈을 부쳐와 우리 부부는 지난해(2018년) 룡정화풍(华丰)국제려행사의 수속으로 본부가 심양에 있는 상업국제려행사에서 조직한 서유럽려행을 하게 되였다.    그 전에 동남아, 대만 등 여러 나라와 지구를 려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번에도 서유럽려행을 떠나기에 앞서 학생들이 수업을 받기전에 교과서를 예습하는 것처럼 관광명소에 대한 기본지식을 더 깊이 장악하기 위해  려행사에서 찍어 준 려행코스에 따라 먼저 매개 명소(景点)에 대하여 인터넷검색을 하여 초보적으로 지식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면 의문되는 점들이나 더욱 호기심이 끌리는 점들은 직접 려행을 하면서 관찰하면 남들보다 리해가 빠르고 관광효과도 좋게된다. 통일적인 출발지점이 북경이기에11월 11일 모두 북경수도공항에 모이기로 되여 있었다. 연변에서는 우리 부부와 연길의 한 중년녀성이 가게 되였는데 그날 우리 셋은 비행기를 타고 수도 공항에 도착하여 보니 이번 우리 려행단체는 모두 인솔자를 포함하여 17명이였는데 연변, 길림, 장춘, 심양, 안산, 호로도(葫芦岛) 등 곳으로부터 모이게 모이게 되였으며 조선족으로는 우리 부부뿐이였다. 12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2시반에 비행기가 이딸리아를 향해 떠나 장장 10시간을 날아 로마시간(동1표준시간대)으로 5시반에 이딸리아의 북부도시 밀라노(米兰)에 도착하였는데 북경시간(동 8표준시간대)으로는 12시 반이였으므로 이미 중국은 오후에 들어섰는데 미란은 아직 먼동도 트지않은 새벽이였다. 비행기가 해뜨는 방향을 등지고 날다니 장장10시간 밤으로 날았다. 입경수속을 하고 공항을 나와서 우리의 인솔자가 이제부터는 모든 행사는 로마로마시간으로 한다면서 시계를 로마시간에 맞추어 놓으라고 하여 시계바늘을 뒤로 7시간 늦추어 놓았다. 오늘의 려정은 처음으로 밀라노대성당을 참관하는 것이였는데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7시반에 뻐스로 밀라노대성당을 향해 떠났다. 뻐스에 앉아 가이드는 이딸리아와 밀라노시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어디로 려행을 가나 나는 가이드가 그곳의 개황이나 관광명소를 소개할 때에는 미형록음기를 켜 놓는 습관이 있다. 하여 나는 미형록음기부터 켰다. 이딸리아 개황 이딸리아의 공식 이름은 이딸리아 공화국이며 이딸리아의 북쪽은 알프스 산맥이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로서 북동쪽으로는 아드리아 해(亚得里亚海), 남동쪽으로는 이오니아 해(爱奥尼亚海), 남서쪽으로는 티레니아 해(第勒尼安海), 북서쪽으로는 리구리아 해(利古里亚海)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이딸리아는 산지와 구릉이 많고 평야는 전국토의 약 1/5이다. 이딸리아는 산지가 많은 편이어서 해발700m 이상의 산지가 35%를 차지하며 구릉지대가 42%, 나머지 23% 정도가 평지이다. 이딸리아 국토 면적은 301,338 km²이며, 인구는 2018년 추계로 5천 9백 30만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수도는 로마로서 수 세기 동안 서유럽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이딸리아는 1955년에 서유럽련합의 창립 성원국으로 되였으며 1957년 유럽공동체의 창립 회원국이였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련합이 되였다. 밀라노 개황 밀라노는 이딸리아의 북부에 있는 최대 도시로서 롬바르디아(隆巴迪亚)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강(波河)의 지류인 티치노강과 아다강 사이의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고 있다. 밀라노는 이딸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이며 이딸리아 최대의 산업 도시이자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이다. 인구는2016년도의 추계로1,349,426명, 면적은81.67㎢이다. 밀라노 시민들은 1870년 이딸리아의 통일국가 성립 이후 밀라노가 경제, 문화, 사상의 분야에서 선두적 역할을 했다고 하며 이딸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 주장한다. 밀라노가 로마에 밀려 제2의 도시로 된데는 로마의 력사적, 신화적 상징성, 피렌체(佛罗伦萨)를 중심으로 한 문예부흥의 흡수, 통합, 고전적 도시경관을 선호하는 경향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밀라노의 대성당(米兰大教堂) 뻐스가 한시간 달려 밀라노대성당에 도착하였다.   밀라노의 대성당 밀라노상징으로서의 밀라노대성당은 독일의 쾰른(科隆大教堂) 대성당과 함께 세계에서 제일 오랜 고딕양식(哥特式, 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나타난 건축 양식 즉 뾰족한 지붕과 둥근 천장)의 건물이자 바띠깐노의 성 베드로 대성당(圣彼得大教堂)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塞维利亚大教堂) 다음으로 가톨릭 대성당(天主教大教堂)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건물로서  미술사적으로는 가장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알려지고 있다.   백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지어진 이 건축물은  1386년 밀라노 령주(领主)였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해 건축을 시작하여 때로는 재정상의 문제로, 때로는 설계상의 문제로 큰 진척 없이1500년에 아치형천장을 완성하였으며 1774년에 제일 높은 고딕양식의 탑에 황금으로 도금한 성모마리아조각상이 완성되였고 1805년에 나뽈레옹이 여기에서 대관식을 가졌으며 정초식으로부터  500년이 지난 1897년에야 최후로 준공되였다고 한다. 그 결과 건물의 외양은 시각적 모순투성이가 되여버렸다. 육중하면서도 섬세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령감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첨탑(尖塔)에  공부타(拱扶垛, 대형 건물 외벽을 떠받치는 반 아치형 벽돌 또는 석조 구조물), 복잡한 격자무늬(바둑판처럼 가로세로를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이 되게 만든 무늬) 창살로 장식한 프랑스 고딕양식, 17세기 양식의 복도, 18세기 양식의 뾰족탑, 거기에 신고전주의 외관. 가고일(큰 사원의 지붕 등에 있는 날개달린 괴물의 상), 대리석상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지붕은 도시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1965년에 성당의 정면에 최후의 동문(铜门)이 안장되여 일각에선는 이것을 최후로 준공되였다고도 한다.   높이 157m, 폭 66m, 장랑의 길이 92m로 고딕양식의 진수(真髓)를 보여주는 이 건축물 외부 벽면은 3,159체의 정교한 명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여 있어  화려한 느낌을 준다. 하늘을 찌르는 135개의 탑 하나하나의 정상에도 성인(圣人)의 상이 장식되여 있고 그 중심인 108.5m의 가장 높은 첨탑에는 도시의 수호신인 황금으로 도금된 성모마리아동상이 솟아있다. 성당 내부는 4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있는데 외부의 다채로움에 비하면 장식이 거의 없어 오히려 소박한 모습이 경건함을 더해준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리용해 옥상으로 올라가면 작은 첨탑(尖塔)들로 숲을 이룬 화려한 모습을 볼수 있는데 가관이다. 수많은 첨탑과 함께 성자, 사도들의 조각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밀라노의 전경를 감상할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는 알프스 산맥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좀 안개가 끼여 알프스 산맥까지 보이지 않았다.   대성당 정면에는 넓다란  광장이 있는데 유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维托里奥•埃马努埃莱二世, 통일 이딸리아 왕국 최초의 왕)의 기마동상이 서 있어 유람객들은 대성당과 이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고 광장에는 또 수백마리의 비둘기들이 날아예다가도 땅에 내려앉고 또 날아예다가도 사람들이 먹이를 주면 와르륵 날아와서 먹이를 쫗아대고 있었다. 그러면 유람객들은 그 장면을 렌즈에 담기에 여념이 없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마동상  
67    동녕요새유적지 문화기행 댓글:  조회:5764  추천:1  2016-07-22
 동녕요새유적지 문화기행 주청룡   10월 3~5일,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와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성원들이 함께 세계반파쇼전쟁승리 및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며 동녕요새유적지 대한 문화기행이 있었다. 동녕요새유적지 동녕요새(东宁要塞)는 일본관동군이1933년, 동녕을 강점한 후 중쏘국경선을 마주하여 쏘련홍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쏘련을 진공하는 기지로 만들려고 1934~1937년 사이에 중국 로역군과 중국군포로 17만명을 끌어다가 동녕현 경내에 수축한 군사요새다. 일본군은 여기에 세개 사단 13만명을 주둔시키고  비행장10곳(그중 림시착륙장 4곳), 야전진지45곳, 진지구축물 400여 개, 야전탄약고 84개, 영구성 화력발사점 402곳, 토목화력발사점 511곳, 철갑보루 4곳, 영구성 지하무기고 79동, 지상무기고 235개, 여러 갈래의 반땅크참호(反坦克壕), 지휘소와 관찰소 111곳을 구축하여 대쏘련작전 일체화를 형성한 아세아에서 가장 큰 군사요새로서 일본관동군은 동녕요새를 동방의 마지노방어선이라고 자칭하였다.   동녕지하요새  지금 개방한 동녕요새는 일제가 동녕에 구축한 《승홍산요새》,   《훈산요새》, 《삼각산요새》, 《마달산요새》, 《남천산요새》, 《조일산요새》, 《십팔반요새》,《북천산요새》, 《출환산요새》, 《409고지요새》, 《236고지요새》등 11개 요새군(群)가운데의 하나인 훈산요새다. 훈산지하요새는 이미 개방한 통로가 1,163연장메터라고 하는데 우리는 요새 남쪽입구로부터 참관을 시작하였다. 지하요새는 상,중,하 세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주요 통로는 대략 높이 1.8m, 너비 1.5메터이고 어떤 곳에는 포탄을 운송하는 레루가 있었다. 통로의 좌우측에는 군관침실, 병사침실, 목욕실, 발전실, 탄약고, 취사실, 작전지휘실 등 크고 작은 방이 21곳이나 되고 가장 큰 방의 면적은 300m²나 되며 지하통로가 가로세로 뻗어 잘못 들어섰다가는 도로 나오기 힘든 미궁이였다. 동녕지하요새입구   지하요새를 돌아보고 북문으로 나오니 남쪽으로 돌아오는 유람길이 있었는데 길 량켠에 차례로 로역군초막, 엄페호, 고사기관총진지, 방공엄페호, 폭격맞은 또치카, 고사포진지, 기관총진지 등 지상 진지구축물유적들이 있었다. 1945년 8월 8일 쏘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 0시, 3개 방면군 174만의 병력으로 우리나라 동북에 진입하여 대일 작전을 개시했다.  8월 15일 일본천황이 투항을 선포하였지만 동녕요새의 일본관동군132려단 783대대는 쏘련홍군에 의해 통신시설이 전부 중단되여 일본의 투항을 모르고 계속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하여 쏘련홍군은 이미 포로된 일본관동군 제3군 후근 참모장 고노사다오(高野定夫)를 붙들어다 요새내의 관동군에 향해 일본천황의 투항서를 전달하여서야 8월 30일 요새내의  일본군이 투항하였다. 하여 동녕요새는 제2차세계대전의 최후전장이라고 한다.     동녕요새유적박물관 동녕지하요새 남쪽에는 동녕요새유적박물관에 있는데 박물관에는 540여건의 문물, 3,000권의 책, 400여장의 사진이 있었다. 동녕요새군유적박물관    박물관은 5개 부분으로 되여 있었는데 제1부 《중국침략일본군 아세아주 최대군사요새》에는 우리가 동녕요새를 참관한 내용들이였고 제2부 《일본군 중국침략죄증》에는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9.18사변》을 일으켜 전 동북을 점령하고 1932년에 위만주국괴뢰정권을 건립하였으며 1933년 1월 10일 전반 동녕이 함락된 내용들이였다. 제3부 《동녕에서의 항일투쟁》에는 저명한 항일장령, 왕덕림(王德林), 주보중(周保中), 김일성(金日成), 시세영(柴世荣), 리청(李青), 공헌영(孔宪荣), 오의성(吴义成). 고준봉(高俊凤) 등이 부대를 령도하여 동녕에서 일본침략자를 타격한 내용들이였다. 제 4부《최후의 싸움》에서는 중국인민들이 14년의 항전을 벌려 마침내 일본침략자를 중국에서 몰아 냈다는 내용이였다.   제5부《평화적 우호래왕》부분에는 모택동동지가 북경에서 김일성 주석을 접견하는 사진, 김정일 동지가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연회석상에서 호금도주석이 환영사를 하고 김정일동지가 답사를 하는 사진, 2002년 3월 조선 해당부문의 요청으로 중국의 항전로병들과 그의 가족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만수대에서 조선의 로전사와 그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가운데 원 흑룡강성 정협 부주석 리민(李敏:조선족)동지도 있었다. 다른 사진에는 원 흑룡강성 성장 진뢰(陈雷)와 그의 부인 리민이 조선을 방문하여 로전우인 조선 륙군차수 리종산(李宗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문물전시관에는 540여건의 일본군이 중국침략죄증유물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일본군이 사용하던 보총, 싸창, 권총, 작탄, 탄알상자, 군도, 철갑모, 방독면,  물뽐프, 밥가마, 밥곽, 물주전자, 복장, 등  무기와 생활용품들이 진렬되여 있었으며  중국 로역군들이 사용하던 괭이, 삽 등 도구와 로역군들을 우마와 같이 부려먹으며 쓰던 채찍도 있었다.  사진전시관에는 400여 폭의 진귀한 력사사진들이 있었는데 동녕항일련군 영렬명록에 17명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조선족이 9명, 한족이 7명이 있었고 일본군도 1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복건일부(福建一夫)로서 항일련군가운데의 유일한 일본사람이다.   그리고 김일성주석의 청년시절 사진도 있었는데 왕청항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련군을 령도하여 항일투쟁을 벌린 사적, 쏘련홍군과 함께 원동전역에 참가한 사진들이 있었다. 사진전시관에는 또 생매장을 당한 중국로역군들의 해골을 파낸 사진이며 행운스럽게 살아남아 광복을 맞이한 로역일군들의 사진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사진들을 보고 일본제국주의가 감행한 남경대학살을 련상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중국침략만행에 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사진전시관에는 또 쏘련원동군 독립보병 제 88려에서 영예롭게 붉은기훈장을 받는 장사(將士)들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가운데는 김일성(金日成), 주보중(周保中), 리조린(李兆麟), 왕명귀(王明贵), 강자화(江子华)가 있었으며 쏘련사람 이완노부(伊万诺夫)도 있었다. 사진전시관에는 또1945년 8월 일본관동군이 무조건 투항하면서 일본국기와 만주국 국기가 내리고 쏘련국기가 오르는 사진, 9월2일 일본의 도꾜만에 정박하고 있는 미군 미주리호 군함에서 일본이 투항서에 조인하는 사진, 중국주재 일본파견군 총 참모차장이 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하응흠(何应欽)에게 투항서를 넘겨주는 사진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번이 동녕요새에 대한 참관을 통해 전세계 반파쑈전쟁은 마침내 승리하였고 중국인민은 14년이란 간고한 투쟁을 벌려 마침내 일본침략자들을 몰아내고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정의의 전쟁은 기필코 승리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본 우익분자들은  철같은 력사사실을 부인하거나 지어는 합법화하고 미화하면서 헌법을 개정하여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기로 하고 일본을 전쟁의 길로 끌고 가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조어도를 저들의 령토라고 우기면서 국제 상호 신임을 파괴하고 지역긴장을 초래함으로써 중국인민들을 포함한 전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질책을 불러 일으키고있다. 우리는 이번 동녕요새문화기행을 통하여 일본침략자들의 중국에 대한 침략력사를 명기하고 선렬들을 기리며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항전의 위대한 정신을 고양하는 것으로 후대들에게 애국주의 교육을 진행하여 우리나라가 영원히 외래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국방교육을 진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       - 송화강집지 2016년 제 5기에 발표
66    하늘나라에 간 "기러기" 댓글:  조회:4779  추천:2  2016-02-17
하늘나라에 간 “기러기”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2-15 15:49:32 ] 클릭: [ ] -전국로력모범 고 리호천옹을 추모하여 2월 12일 오전, 뜻밖에 호천옹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놀라운 소식이였다. 무슨 청천벽력인가! 설날아침까지 서로 전화로 설인사를 나누지 않았던가! 비보를 접하고 황상박선생, 리광평선생과 함께 조문을 가니 11일부터 심장병으로 연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12일 아침 6시 27분에 돌아가셨다는것이였다. 년세가 많은 분들은 지난 세기 60년대에 상영되였던 영화 《기러기(鸿雁)》를 본 기억이 있을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우편배달부《리운비(李云飞)》의 원형이 바로 지난 세기 50~80년대 전국로동모범으로 이름을 날렸던 연길현(룡정시) 덕신우전지국의 리호천이다. 리호천을 원형으로 촬영한 영화 《기러기(鸿雁)》의 포스터. 어릴 때에 나도 이 영화를 보았기에 지금도 가끔씩 영화속의 장면들이 나의 머리속에 떠오르군 한다. 후에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이 영화를 dvd로 제작하여 호천에게 보내왔는데 호천선생이 나에도 시디롭(光盘) 하나를 선물하여 지금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며 가끔씩 그것을 텔레비에 련결하여 본다.   나와 그는 한 고향이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그는 벌써 전국로력모범이였다. 하여 우리 학교에서는 그를 초청하여 보고를 들었다. 보고를 들은지 이제는 50년도 많이 넘어 그때의 보고내용은 기억에 어슴프레 하나 북경에서 모주석과 중앙의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고 천안문 관례대에 앉았다는 내용만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우리는 어린심령에 “수도 북경”, “모주석”, “중앙령도” 등 이름들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이기에 우리는 호천선생을 몹시 흠모하였다. 나와 호천옹은 나이차이가 20살이나 되지만 어쩐지 각별한 인연이 있는것 같다. 그가 우편배달원으로 있을 때 그의 집과 우리집은 모두 덕신공사소재지인 숭민대대에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가 우편배달가방을 메고 다니는것을 보아왔으며 썩 후에 내가 공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에는 그의 딸이 내가 맡은 학급에서 공부하다보니 가정방문 등을 통해 그와 아주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그가 1980년도에 룡정시 우전국 부국장으로 전근한후 인연이 이어지자고 그랬는지 나도 이듬해 룡정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우리는 룡정에 와서도 자주 래왕하였다. 나는 그의 사적을 정리하여 신문, 방송에 투고하여 여러번 발표하였는데 이러다보니 그의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있는 편이다. 1932년 3월 5일, 연길현 지신구 성동촌에서 출생한 리호천옹은 1945년 8월 15일 연길현 덕신구 영동촌 중우동에서 해방을 맞았다. 생활난으로 1948년 16세 나던 해에 지신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52년에 소학교를 졸업한후 연길현 덕신우전지국에서 우편배달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7개 생산대대, 51개 생산소대의 우편배달을 책임졌는데 100근 넘는 짐을 메고 11갈래의 물을 건너고 4개의 령을 오르내리면서 매일 거의 왕복 100리 되는 길을 다녔다고 한다. 60년전 배달로정 답사에 앞서 당시정황을 소개하는 리호천옹(가운데)(2015.11.4). 1964년 내가 중학교(연길현10중)를 다닐 때였다. 어느하루 자전거를 타고 배달다니던 호천옹이 갑자기 적갈색의 말을 타고 우리 학교에 왔다. 말잔등에는 우편물이 가득했다. 학생들은 우편배달부가 말을 탄것을 처음 보는지라 신기하여 그를 둘러싸고 구경하였다. 원래는 비오면 자전거를 탈수 없는 덕신길을 념려하여 길림성 우전관리국에서 그에게 말을 장려했던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아주 쉽게 배달을 하였는데 그것도 호천에게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말은 잠잘 때에도 누워 자면 안 된다고 하는데 얼마 후에는 그 말은 잘 먹지도 않고 자주 누웠다. 그 말이 병이 있어 그런가 하여 성 우전관리국에서는 다른 말을 바꾸어 주었는데 그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침 인민해방군들이 덕신공사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말을 먹이는 군대들과 자기 말이 어째서 이러는가고 물어보니 그 해방군전사가 하는 말이 군대에서 통신원들이 타는 군마도 10리 길을 뛰고 다른 말을 갈아타야 하데 호천의 짐과 배달로정을 보면 말이 너무 지쳐서 그렇다는 것이였다. 하여 성 우전관리국에서는 오토바이를 바꾸어 주었다.   그때가 바로 1966년도 가을이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학생들이 전국적인 대교류(大串联)를 하던 때라 우리도 북경으로 가는 길에 장춘에 들렀는데 우연한 일치라고 할가 그이와의 인연이 이어지느라 그랬을가 신비스럽게도 쓰딸린대가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호천이와 마주쳤다. 우리가 너무도 반가워 그를 둘러싸고 어찌된 일인가고 물었더니 성우전국에서 지친 말대신 오토바이를 바꾸어 주어 지금 여기에서 오토바이련습을 한다는것이였다. 성 우전관리국에서 전국로력모범인 그에게 말과 오토바이를 장려하였지만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덕신길은 마른 날이면 길이 울퉁불퉁하고 비오면 참질땅이라 질척거려 오토바이를 타는 날이 매우 적었고 또 탄다 해도 매우 불편하였던것이다. 덕신중학교 교정에서 당년을 회억하는 리호천옹과 주청룡선생(2015.11.4). 호천옹은 “나의 일체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업적을 쌓았다. 하여 당과 인민은 그에게 수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1956년 4월 30일에 전국 로력모범표창대회에 참가였으며 5월 1일에는 전국로력모범메달을 달고 천안문 관례대에 앉아 5.1절 경축대회를 관람한 다음 모주석과 중앙위원들의 접견을 받았다.그때로부터 그는 모주석과 중앙령도동지들의 접견을 7차례나 받았다. 그가 모주석과 중앙령도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기념메달들은 지금 국가우전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 그의 집 벽에는 지금도 우전제복에 14매의 기념메달을 달고 찍은 사진과 모주석과 중앙의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을 때 함께 찍은 기념사진들이 커다랗게 확대되여 걸려있다. 전국로력모범이였지만 그도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주덕해보황파, 류소기 가짜로력모범, 조선특무 등으로 몰리여 비판을 받으면서 각종 회의에 참가할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다. 1967년 8월 2일, 나와 몇몇 동학들이 학교로 갈때 마침 리호천선생이 우편물을 싣고 우리옆을 지나고있었다. 이때 우리 앞에 몽둥이를 쥔 한 반란파가 길을 가로막으면서 오토바이를 내놓으라고 외쳤는데 그가 오토바이를 세우지 않자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다행히 사람은 맞지 않았으나 오토바이 전등유리가 박산났다. 그는 “내가 못 타면 못 탔지, 절대로 너희들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토바이를 분해하여 금곡마을의 개인집에 감추고 두발로 걸어다녔다. 그는 이 일때문에 반란파들에게 모진 매를 얻어맞았지만 오토바이는 끝내 내놓지 않았다… 리호천옹은 항상 “나의 일체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고 사업하여 오셨다. 비록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의 곁을 떠나셨지만 옹의 이름은 당신이 거둔 그 업적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을것이다. 기러기가 되여 하늘나라에 가신 리호천옹의 명복을 삼가 빌고 또 빈다! 2016년 2월 15일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김태국기자
65    훈춘시 팔련성부터 경주 반월성까지 댓글:  조회:4805  추천:6  2015-08-07
사학자 허성운선생의 요구에 의해 그의 연변지명과 방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훈춘시 팔련성부터 경주 반월성까지 한국지명과 연변지명 (4)     중국 길림성 혼춘시(琿春)에서 서쪽으로 약 7.5km 떨어진 삼가자향(三家子鄕)에 자리 잡고 있는 팔련 성(八連城)은 지세가 평탄한 혼춘하(琿春河) 충적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있다. 두만강이 팔련성 서쪽 1km 떨어진 지점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팔련성은 팔뢰성(八磊城), 팔루성(八壘城), 반랍성 (半拉城), 고토성(古土城), 반랍성자토성(半拉城子土城) 등으로도 불린다. 팔련성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 학계에서는 북대성과 7개의 성이 연결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조선의 고고학자인 주영헌 朱榮憲 선생은 팔련성이 8개의 내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르하퉁하와 세린하 합수목에 자리 잡은 패랑산 산성은 산 정상에 축성한 테뫼식 산성으로서 전략 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한자로 偏脸山城으로 표기하고 있어 사람들은 한자 의미에 따라 산 줄기가 기울어져 있어 그 명칭이 유래 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팔련성, 패랑산 지명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말 바람벽이라는 말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전을 펼치면 바람벽을 벽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언어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게 간혹 고유 어 바람(风)과 한자어 벽(壁)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추정하기 쉽다. 그런데 바람벽의 방언들을 살펴 보면 바름벽, 보름벽, 베름빡 등 다양한 소리로 나타나고 있어 이런 사투리들은 그 지역에 따르는 바 람 (风) 사투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바람은 벽(壁)의 고어로서 중세국어에서 (壁)람으로 나타난다. 어원을 따지고 보면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바람(壁)과 바람(风)을 구 별하기 위해 바람벽(壁)이라는 동의중복(同義重複) 낱말이 만들어진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우리 말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는 만주어를 살펴보면 벽(壁)을 빛랑 fajiran으로 새기고 있어 이에 대한 추론 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한국과 조선에는 반월성(半月城)이라는 명칭을 가진 유적들이 있다. 조선 개성 반월성은 도시성곽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반월성은 나성의 서쪽 성벽 눌 리문 부근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고려 성균관의 뒤 언덕을 지나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뻗어 있다. 남대문은 6.25 전쟁 때 부서진 것을 복구한 것이다. 성의 평면 모습이 마치 반달모양과 같아 반월성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벽을 말하는 바람벽이라는 어원 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야 정확하다. 한국 경주 반월성은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쌓고 그 위를 정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경주 반월성(半月城) 지명도 한국에서는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여 달 모양의 성으로 쌓여졌기에 붙여진 이 름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 한국 부여 금성산에 위치한 반월성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 된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바람(壁)은 한자로 八連城 半拉城 偏脸城 半月城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 말 바람은 본래 벽(壁)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언젠가부터 바람벽으로 단어가 바뀌면서 그 독립적 기능 이 상실되어 단지 지명용어로 쓰이는 말로 굳어졌다. 이런 지명들은 그 대부분이 토성으로 축성되어 있는 옛 산성 지명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바람(壁)은 오랜 세월동안 언어 변천을 거쳐 다른 파생적 지 명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세종시 부강면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금호리 마을에는 바람실이라 부르는 산 지명이 있다. 옛 날 주민들이 이곳이 마을을 지켜주는 산이라 믿어 왔기에 벽이 하는 기능을 이 산이 수행한다고 하여 바람실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금강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이 일대에 산성이 밀집하여 분포된 특징으로 보아 오래전에는 산성이 있었거나 원래 인근 산성에서 이주하면서 붙인 지명으로 추정된다. 몰론 우리의 지명에는 ‘바람고지’ㆍ‘바랑골’ㆍ‘바람들’ ‘바람말’ㆍ‘베랑모팅이’ㆍ‘베루바우’등 바람과 유사한 소리가 들어있는 명칭이 매우 많은데 이들 모두가 바람벽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 다. 여러 곳에 따라 바람 (风) 벼루 벼락 바랑(자루 같은 주머니)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드러 난다. 글 허성운
64    삼합 사물깨부터 경남 사천시까지 댓글:  조회:4268  추천:4  2015-08-07
사학자 허성운선생의 요구에 의해 그의 연변지명과 방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삼합 사물깨부터 경남 사천시까지   -한국지명과 연변지명(3)   《중국고금지명사전》(中国古今地名辞典) 기록에 의하면 두만강 명칭은 만주어 tumen sekiyen 한 자로 图们色禽에서 유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만주어 tumen sekiyen는 만 갈래 물줄기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를 우리말로 즈믄 (천 혹은 많다의 고어) 샴치(함경도 방언 샘물)라고 풀이 하면 그 해 석이 더욱 완벽하다. 수많은 샘물들이 두만강 양안에 모여 있는 까닭으로 이름이 붙여 진 것이다. 두만강 양안에는 말 그대로 샘물들이 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어 한 겨울에도 많은 구간이 완전히 얼어 붙지 않는다. 샘물 따라 물안개 보얗게 피는 곳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들어 앉아 마을 지명 들도 샘물둥지 샘물구파이 우물깨 약수동과 같이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 가운데 두만강 가에 자리 잡 은 삼합진에는 지명이 사물깨라는 동네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샘 줄기가 있는 바윗돌들이 군데군 데 자리해 있어 여러 갈래 샘물들이 사시장철 마르지도 않고 바위 밑에서 솟아 나왔다. 사물깨 마을 은 말 그대로 샘물이 주물러 자연 그대로 만들어 놓은 동네였다. 여기에서 사무깨란 말은 우물 샘 (새 미)의 받침소리 리을(ㄹ)이 탈락한 것이고 깨는 함경도 방언에서 지점 장소를 뜻한다. 연변 동불사 소재지에서 북으로 십리길 들어가면 사수(泗水)촌이 나타난다. 작은 하천을 끼고 마을 들이 이루어 졌으나 강물양이 적어 콧물처럼 흐른다 하여 콧물 사(泗)자를 사용해 지명이 유래 되였 다는 설과 이 마을 우물들이 골고루 안물(함경도 방언 뽀얀 샘물)로 되여 콧물 사(泗)자를 사용해 지 명이 유래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마을 노인들은 가뭄에도 마루지도 않고 뽀얀 우물이 시원하 게 솟아나는데 한여름에도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약수 물이었다고 한다. 한국 경상남도 서남부에 사천시(泗川市)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역사를 거슬러 사천시 지명을 뒤적 여 보면 조선 태종 때에 사천(泗川)현으로 고려 때에 사주(泗州)로 신라 때 사물현(史勿縣)이였던 명 칭을 경덕왕이 사수(泗水)현으로 개명 한 것으로 기록 되여 있다. 사실상 사천시의 최초의 지명을 따 지고 보면 사물현(史勿縣)으로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 연변 지명과 한국 지명을 바탕으로 사물(史勿)이란 이 지명을 꼼꼼 히 캐고 보면 결국 샘물(泉)이란 뜻을 지닌 동음차자(同音借字)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하 면 사물(史勿)은 원래 샘물을 뜻하는 우리 말 에 대한 한자음으로의 소리 옮김이고 사 수(泗水)는 그것에 대한 뜻 옮김이다. 샘물들이 흘러 내를 이루고 또 내가 흘러 강물이 되므로 샘의 뜻을 지닌 사물(史勿)이란 지명이 사천(泗川) 지명으로 이어 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연변 부처골 용진마을 사물깨, 조선의 장진호 연안 지명 사수(泗水), 전라도 만경강 옛 명칭 사수강(泗水江) 등 지 명들도 이런 맥락에서 해독 할 수 있다. 거기에 아득히 먼 고구려 지명 사물택(沙勿泽)과 인명 위사물 (位沙勿)도 이와 같은 흐름으로 풀이하여 나갈 수 있다. 여기에서 사(沙)는 사(史)로 바뀌어 졌으나 사(史)와 사(沙)는 같은 음독(音讀)으로서 물(勿)과 함께 묶어 놓고 보면 사물(沙勿)은 샘물을 뜻하는 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글누림에서 출판한에서 화룡에 있는 쓰렁바이 지명을 쓰렁바위로 착각하여 四人岩 四棱岩으로 새기고 인근 옥천동 지명을 충청도 옥천군 옥천동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허나 사실 쓰렁바이 지명은 만주어 seri 샘물과 ba 장소를 나타내는 의미로서 샘물터라는 뜻 이다. 옥천동 지명도 샘물로 이름난 이 고장 쓰렁바이 지명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해야 정확한 것이다. 한국어 샘과 만주어 seri는 비슷한 음을 띠고 있다. 한 자 표기 된 지명은 사실 이런 의미를 연결시키는 고리 구실을 하고 있다. 지명을 올바르게 해독하려 면 이런 한자 지명 속에 구겨 넣은 최초의 말소리를 정확히 찾아 끄집어내야 한다. 연변 지역은 고대로부터 동북아 역사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왔으며 발해시기에 들어와 도성 이 자리 잡을 만큼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학계에서는 기존 고고 학적 기록과 유적에 매달려 조사하고 있을 뿐 이 지역에서 오래 동안 이어온 고유의 문화 이를테면 지명과 방언에 대한 연구는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실정이다. 거기에 많은 마을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현지에 살던 토박이 노인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오늘날 이에 대한 조사사업 은 시급하게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옛날에사 대촌이었지. 인자 성 쌓고 남은 노인들만 남 아. 이래가지고 동네가 우찌 될견지 농촌 다 망하는 게라이.」 연로한 할아버지의 한숨석인 독백, 오 늘의 연변 농촌 마을에서 가끔 듣게 되는 말들이다. 글 허성운
63    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댓글:  조회:4564  추천:5  2015-07-19
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한국지명과 연변지명 (2)   지난세기 60년대 전까지만 해도 광지바위는 장대한 기상을 품고 연길현 동성공사 덕신공사 석정공 사의 경계지대에 우뚝 솟아있었다. 천년 풍상을 견디며 버티고 서있던 광지바위가 동란의 세월에 접 어들면서 꺼져가는 촛불처럼 힘없는 민초들의 슬픈 삶처럼 비참하게 쓰러져 갔다. 60년대 초에 연길 현 소재지였던 용정진에서 건축용 기초 돌을 전부 광지바위 돌을 캐서 날라 들이였는데 1965년에 이 르러 이미 바위 주변은 커다란 채석장으로 변하여 갔다. 바위를 폭파하는 발파소리, 망치와 징으로 돌 까는 소리로 광지바위는 걷잡을 없는 혼돈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천년동안 쌓아 온 광지 바위 기운이 꺾여서 일까 과거에 웃광지바위마을 아래광지바위마을 그리고 인근 개척기마을 사람들 이 어울러 삶의 터전을 가꾸어 오던 동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 앉아 지나가는 길손들의 발길을 붙잡던 정경도 그때로부터 차츰 그 자취를 감추어갔다. 먼 전설에 의하면 옛날 장재비라는 인색한 부자가 이곳에 살았는데 어느 날 스님이 시주를 청하니 장 재비는 소똥 한 바가지 퍼서 스님의 몸에다 부어 버렸다. 스님이 말없이 돌아가려 하자 장재비의 며 느리가 몰래 쌀을 시주하니 스님은 며느리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당부하였다. 며느리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섰는데, 이제 막 산 정상에 올 라 설 무렵 별안간 하늘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너무 놀라 스님의 말을 잊고 뒤를 돌아 보니 그가 살던 집은 땅속으로 함몰되고 그 자리는 커다란 늪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그 사이 광주리 를 인 자신도 아기와 함께 바위 돌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 커다랗게 광주리를 이 고 아기 업은 형상을 하고 서 있는 바위를 광지 바위라고 불렸다고 전하고 있다. 전라남도 장흥군 억불산 며느리바위는 멀리에서 바라만 보아도 신통히 중국 연변 광지바위와 꼭 닮 은 형상이다. 며느리바위도 광지바위와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명설화로서 이 광주리 바위 설화는 장자 못 설화와 함께 한반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함경북도 어랑군 장연호에 있는 광주리바위 ,강원도 판교군 광주리바위골, 평안북도 강계군 광 지암산, 평안북도 영변군 광주리 바위 고개 ,평안남도 북창군 광주리 바위산 등이 있다. 이제 우리는 광지바위 지명 풀이에서 하나의 관건적인 문제점과 부딪치게 된다. 즉 광주리바위 지명 에서 광주리가 지니고 있는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광지바위 전설이 불교설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광주리와 광지와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것이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일찍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 할 때 패엽(貝葉)이라는 나뭇잎에 부처 님 말씀을 새겨 보관하게 되었다, 우기 철이 오면 습기가 많아 부식이 잘 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 여 광주리에 경전을 따로 담아 보관하게 된 데서 대장경 大藏经 인 삼장三藏(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 論藏)을 ‘세 개의 광주리(筐)’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몽골어로 대장경大藏经을 ganzuur ,만주어로 ganjur로 표기되고 있는데 어원은 티베트 불교 최고의 성서로 꼽히는 깐주얼(甘珠尔)에서 유래 되었다. 그리고 불교와 관련이 깊은 ‘광지’의 어원적 의미는 단지 언어학적인 추론이 아니라 바위 돌에다 불경을 새기는 티베트불교 문화와도 부합 되여 있다. 티 베트의 파스타 승려가 쿠빌라이의 스승이 되면서, 원나라에 티베트 불교가 받아들여졌고 원나라 간 섭시기에 티베트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다. 함경북도 경원군의 옛 지명이 광주(匡州)로 적혀 있는데 이 지역에서 발견된 12세기 경원군여진서비 慶源女眞字碑가 불교 사찰을 세운 이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보면 광주라는 지명은 불교경전을 뜻하는 광주리 의미로도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육진을 설치 하고 조선인 농부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그 결과 이들은 그 지역의 여진족과 섞이게 되었 다. 이들 중 대부분 사람들은 관청에서 찾을 수 없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갔으며 이 지역 여진족 과 동화하는 과정에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1914년 이 지역에 대한 조사에서 일본 학자 이마니시 류 (今西龍)는 부령의 북쪽에서 발견된 재가승이라고 불리는 집단에 주목했다. 그들은 깊은 계곡, 산속 의 움집에서 살았는데 움집은 사원의 성격을 담고 있어서, 대부분의 재가승들은 경전을 읽을 줄도 몰 랐고 불상 앞에서 기도를 했으며 죽은 자들을 화장하고 姓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연변 광지바위 주변 가름산 절당께, 장남샘터 암자, 중평촌 사찰유지 그리고 이 지방 대부분 사람들 적관 (籍貫)이 함경북도 경원군과 경흥군으로 나오는 자료를 접하고 보면 광지바위와 경원군 옛 지명 광주 (匡州) 두 지명사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은 지명연구 시야를 넓혀주고 있는 것은 의심 할 바 없으나 정확한 사료가 부족하니 현재로서는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지금까지 광지바위를 왜 광지바위라고 하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또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 지 모르면서 그냥 광지바위라고 불려왔다. 해석이 어렵고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은 그만치 광지바위에 는 우리 역사의 오랜 비밀이 숨어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광주리바위 지명은 연변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변에서는 광지바위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광주리바위 또는 광지바위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며느리바위 부처바위 감투바 위와 같이 지명이 변종 되여 나타나고 있으나 전해 내려오는 설화는 유사하다. 중국 강서성의 불교 명산 려산(옛 지명은 匡廬山) 지명과 동일한 경상남도 창원 광려산(匡廬山) 지명, 충청남도 예산군 후 사리에 자리 잡은 광주리봉 지명도 불교지명으로 추정된다. 절이 있어 뒷절 또는 후사라 하여 후사리 지명이 생겨났다는 기록을 보면 광주리봉도 역시 불교문화와 연관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허나 지명풀이에서 유사한 설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밖에 서울 구로구 광주리물 혹은 광지廣池 라는 지 명도 마찬가지이다. 글 허성운
62    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댓글:  조회:3851  추천:6  2015-07-19
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 (1)   지명 속에는 그 땅에 정착하여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연모습들이 그대로 간직 되어 있고 우리문화 속에 스며든 외래문화의 영향이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 을 찾아낼 수도 있다. 최초의 地名을 적을 시기에 음운체계가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비슷한 음을 취해 적기도 했고 어떤 것은 뜻을 취해 적기도 했다. 그 가운데 허다한 지명은 철저 하게 소리를 취한 음차(音借))를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더욱 더 거리 가 먼 지명들이 생겨났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소영향에는 와룡동이 라는 마을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중소학교 도덕교양자 료집으로 편찬한《내 고향연변》의 해설에 따르면 1907년 국자가 서쪽 교외의 와룡동 마을에 창동 강습소가 세워졌고 1935년 학교 졸업생들이 와룡동 산비탈에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를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6년 연길시 지명위원회에서 편찬한 연길시 지명지에는 마을 서쪽 산세가 마치 누 워있는 용의 자세를 방불케 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허나 예로부터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왔다.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 的) 만주어 음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와룡동은 사실상 왜랑동으로서 돌이 많다는 만주어 음역이 다. 토박이 노인들은 어릴 때 상발원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돌들이 널려있어 숨바꼭질 하던 옛 이야기를 종종 꺼내 군 한다. 와룡동 서쪽에 위치한 소백석구(小白石)와 동쪽에 위치한 석마동(石 磨洞) 모두가 돌이 들어있는 지명으로서 와룡동의 지명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 된다. 사실 연변지명가운데 와룡동이라고 명명한 곳이 여러 곳이 보인다. 용정시 개산툰 부근의 와룡동도 밭에 돌들이 많아 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이 지역 노인들도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 왔다. 와룡 동에서 서쪽으로 5리쯤 올라가면 돌볏이 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예전에 돌볏마을은 웃 돌볏와 아래 돌볏로 나누어 지여 있었는데 60년대 초에 웃 돌볏가 폐촌으로 사라졌다. 웃돌볏 마을은 두만강 연안 에서도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옛 사람들은 갔어도 그 역사의 발자취는 그대로 살아남는다. 오래 전 에 이미 폐촌으로 된 웃돌볏 마을 뒤 산에는 아직도 커다란 너럭바위로 쌓여진 거대한 산봉이 돌탑처 럼 우뚝 솟아있다. 마치 수없이 많이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 주민들의 너럭바위처럼 무거운 삶들이 그대로 녹아내려 굳어진 듯이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잃어버 린 마을의 영원한 이정표로 남아 그 자리를 외로이 지켜 서있다. 연변의 화룡시 서성진 와룡촌은 산에 둘러싸여있는 꽤나 골이 깊은 산간마을이다. 지금은 마을들을 통합하여 와룡촌으로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와룡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어랑촌 이라고 부르는 자그 마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와룡(whe)과 어랑(olhe)이란 지명은 모두 바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 지역 지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주어에서 바위의 의미를 가지는 wehe는 여진어에서 olhe로 나타나고 있다. 돌과 바위로 유명한 함 경북도 명천군의 아감면과 경성군의 어랑면 지명은 모두 여진어의 olhe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새겨진 것들이다. 한국지명에는 언뜻 보면 만주어 wehe와 여진어 olhe라는 문자가 들어있지 않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 면 돌과 바위의 뜻을 지닌 지명에 숨어 들어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의 명칭은 에 백제 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조선시대는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 다고 적고 있다. ‘月奈>月生>月出’으로 변화했는데 두 번째 글자만 ‘奈>生>出’로 오랜 세월 두고 바뀐 것이다. 에 영암군 지명도 백제 때에는 월나군(月奈郡)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영암군(靈巖郡)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월출산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 지명 月奈郡은 만주어에서 바위 를 뜻하는 wehe 왜랑이란 음과 근접되여 있다. 에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개의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되여 있다. 이는 영암(靈巖)군이라는 지명은 이 신령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말로서 月奈는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과 근접하고 있어 바위의 의미를 지 니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옛 지명 月奈岳인 월악산은 기암괴석의 박물관으로서 사실 바위를 빼놓 고 월출산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전라북도 진안군 옛 지명도 옛 문헌들을 뒤적인 결과 희한하게도 월랑(月良 혹은 越浪)으로 적어 있 다. ‘월랑’은 백제시대에 부르던 월량(月良)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도 진안의 대표적인 경 관을 ‘월랑팔경(越浪八景)’으로 부르고 당지 주민들은 여전히 월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진안의 팔경을 꼽은 ‘월랑팔경’ 중에서 으뜸가는 마이산은 바위산으로서 진안군 지명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 으로 본다면 월랑은 만주어wehe 음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松月洞)은 송정동(松亭洞)의 「송」과 월암동(月岩洞)의 「월」자를 따서 송 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월암(月岩)동은 원래 워렁바위라 하였고 이 바위가 있는 동네를 워렁바위골, 한자로는 월암동月岩이라 적어 왔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한 에서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으 나 만주어의 wehe 라는 바위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명에 사용된 한자들은 그 본래의 뜻과는 관련이 없이 발음만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시의 지명을 의미로서가 아닌 소리에 따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역시 月 달이나 浪 파도의 한자 의미와는 무관한 당시의 바위 wehe라는 소리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마 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月을 달 어음 변이 돌로 추정하고 지명을 해석하여 왔지만 月奈 月 良 越浪 月岩의 소리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과 같이 옛 지명에 사용한 것 이 여럿이 발견되고 이들 사이에 소리가 일정한 공통점이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古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에 자리 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吐含山) 옛 지명 월함산(月含 山), 경기도 파주시 월롱역(月籠驛) 지명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東國與地勝覽(동 국여지승람)에 적혀있는 月良村面(경기도 이천부)이라는 지명,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월량골(月凉 혹은 月浪) 지명이 이에 해당한다. 여진어의 olhe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지명으로는 서울특별시 계남근린공원에 옮겨있는 우렁바위, 전 라남도 화순군 누렁바위이다. 한국에 어랑 만두라는 음식 이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랑이란 말은 산골을 말하는 뜻이고 어랑 만두는 그 지역에서 먹던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보다 더 정확한 뜻은 돌이나 바위가 많은 산간 지대 를 말하며 어랑 만두는 이런 깊은 산간 지대에서 먹던 음식을 뜻한다. 이와 같이 지명 어원을 꼼꼼히 따지고 보면 우리 언어의 밑바닥에 스며든 북방민족의 여러 언어요소 를 살펴보게 되고 여진족과 만족 거란과 몽고족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언어는 방대한 북방 언어계통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지류이다. 오늘 날에 와서 다시 돌 이켜 보면 많은 북방소수민족들의 언어는 치열한 언어전쟁에서 이미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함경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도 지명들은 그 지방의 언어와 더불어 거세찬 역사의 파도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우리 역사와 문화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잡하게 얽힌 지명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관건적인 실 머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글 허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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