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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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극비문서에 기록된 한 조선인 생체실험 희생자 댓글:  조회:2715  추천:0  2014-05-05
가제: 극비문서에 기록된 소련 "간첩' 이기수 (길림성 문서보관국에서 공개한 이기수 관련 헌병대문서) (길림성 문서보관국 문서보관실 일각) (헌병대 문서에 잔존한 이기수 사진) (731부대 본부 옛터) (731부대 동력부 옛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일부의 옛 사진)   1941년, 이기수(李基洙)는 체포된 후 하얼빈 일본군헌병대에 "특별이송(特別移送)"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헌병대의 극비문서에서 심문기록은 물론 사진이 발견된 극소수의 인물이다. 이런 기록과 사진은 이기수가 세상에 남긴 제일 마지막 흔적일지 모른다. 올해 4월, 길림성 문서보관국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시기의 증거자료로 관동(關東)헌병대 사령부의 문서 87건 등 도합 89건의 극비문서를 전격 공개했다. 이때 이기수는 조선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다시 수면위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실은 2001년에 이미 이기수의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길림성 문서보관국 도연(陶然) 연구원은 이렇게 문서를 공개한 경과를 밝혔다. 도연 연구원은 문서보관국에서 일본군 731부대 "특별이송인원" 과제와 관련하여 연구가 깊은 관원(館員)이다. "그때 공개된 문서는 지금처럼 구체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이기수가 체포된 후의 심문자료, 신병처리 의견 등 문서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1945년 8월, 관동헌병대는 자신들의 만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대량의 문서를 소각했으며 미처 소각하지 못한 문서는 비밀리에 땅에 파묻었다. 이 문서는 그로부터 8년 후인 1953년 관동헌병대 사령부 옛터의 도관매설 시공현장에서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그때 발굴한 문서는 트럭 한 대 분량이나 되었지만 대부분 훼손되어 부동한 정도로 결여된 상태였다. 그 후 공안국과 문서보관국은 오랜 시일동안 이 문서에 대해 계통적인 복구와 정리 작업을 진행했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이기수의 문서기록은 상당히 완전하며 이 때문에 그의 불행한 인생의 여정을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소화(韶和) 16년(1941) 9월 16일자 연길헌병대 제752호 보고(통보)이다.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길헌병대 아베 키키치(阿部起吉) 대장이 관동헌병대 하얼빈헌병대에 이 보고(통보)를 보냈다. 그는 세 나라 국적을 소유한 "조선인"이었다 보고(통보)에는 첫 장부터 약간은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기수의 국적 기입란에는 나라 이름이 일시에 세 개나 등장한다. 처음에 문서 작성자는 분명히 국명을 "만주국(滿洲國)"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왠지 그 위에 줄을 그어 지워버린다. 그리고 다시 옆에 "일본"이라고 기록하며 또 그것도 부족한 듯 괄호를 치고 "조선"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뒤의 본적지의 신고란에는 분명히 "조선 함경남도 신흥군 동흥면"이라고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름지기 연길헌병대의 보고(통보) 작성자는 국명을 한꺼번에 세 개나 적을 정도로 우왕좌왕 했던 것이다.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기수는 두살 때 부모를 따라 강을 건너 중국 동북에 이주했다. 1941년 9월, 즉 연길헌병대에 의해 하얼빈에 특별이송 되던 당시 이기수는 28세였다. 이에 따르면 그가 출생한 연대는 1913년경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기수가 출생할 무렵인 1910년 조선은 이미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편입 되어있었다. 이기수는 이주한 후 통화현 장백현에서 15살까지 농업에 종사, 그 후 이 현의 대북두리(大北斗里)라는 고장에서 결혼한다. 그의 결혼을 전후한 시기 중국 동북지역은 만주국(滿洲國)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만주국은 일본이 동북지역에 세운 괴뢰국가이다.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1931년 "9.18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을 점령한 후 1932년 "만주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청나라의 폐위된 선통(宣統)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 자리에 앉혔다. 만주국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으로 관동군이 패퇴하면서 무너졌다. 그러고 보면 이기수의 최종 정착지는 만주국이지만 태를 묻은 본적지는 조선이다. 또 그가 동북으로 이주할 때 조선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있었다. 문서 작성자가 이기수의 국적을 뭐라고 기입해야 할지 딱히 확신이 서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그야말로 문서의 행간에는 그 시기 나라를 잃고 이역 땅으로 이민을 했던 조선인들의 고달픈 삶의 주소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기수는 결혼한 후 안해와 부모와 함께 계속 대북두리에서 농사를 지었다. 22살 나던 1935년 이기수는 마침 통화 지역을 경유하던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을 만난다. 이 제2방면군은 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으며 그 지휘관은 바로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김일성이었다. 연길헌병대의 문서 역시 이를 의식한 듯 제2방면군이라는 이름 뒤에 괄호를 치고 "김일성비적단"이라고 특별히 주해를 달고 있다. 이때 이기수는 제2방면군 참모장 임우성(林宇城)을 만나 그의 인도를 받으며 뒤미처 이 조선인부대에 입대한다. 그는 소련 이름을 가진 "간첩"이었다 이기수는 입대한 후 장백(長白), 몽강(濛江), 안도(安圖), 화전(樺甸), 돈화(敦化) 등 지역을 주름 잡으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연길헌병대는 이 시기의 전투를 비적단(항일연군)이 (일본)토벌대의 토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기수는 1940년 7월 연대의 정치지도원 한택수(韓澤洙) 이하 11명과 함께 훈춘현(琿春縣) 청룡암(靑龍岩)으로 갔다. 이듬해 7월 20일 23시 30분, 이기수는 훈춘 춘화촌(春化村) 태마구(抬馬溝)에서 연길헌병대 파견대에 체포되며 이어 훈춘분대(琿春分隊)로 이송되었다. 이때 문서에 기록된 이길수의 신분은 "소련 간첩"이며 공작명은 "미츠치엔이"라는 소련이름이다. 실제로 이길수가 부대원들과 함께 훈춘 청룡암으로 이동하기 전인 1940년 초, 동북의 항일투쟁은 제일 어려운 시기에 맞닥뜨리고 있었다. 일제는 동북항일연군을 상대로 잔혹한 토벌을 시작했으며 동북항일연군은 초기의 10만여 명으로부터 불과 3천여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부득불 전략적 이동을 진행하며 일부 부대가 여전히 현지에 남아 전투를 견지하고 대부분의 부대는 육속 소련 원동지역으로 철수한다. 이기수가 일본군에 체포된 시기나 소련 이름으로 미뤄 볼 때 그는 원동지역에 철수한 후 소련 정보부문의 지령을 받고 훈춘지역에 다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솔직히 문서의 기록에 의거하여 이기수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헌병대의 보고(통보)에 따른 신상정보 자체가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 공개된 문서도 파손 등 원인으로 전부가 아니며 누락 부분이 있다. 이기수가 극비문서에 남긴 4매의 사진만 보더라도 윤곽이 똑똑한 것은 단지 1매의 사진뿐이다. 그러나 잔존한 기록물의 곳곳에서 여전히 이기수를 만나 그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다. "물방울에 우주가 비낀다."는 속담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다른 건 잠시 제쳐놓고서라도 체포된 후의 이기수의 마음가짐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이기수가 사진에서 아주 안온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티끌만치의 두려움도 나타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이기수의 심문결과는 일본헌병대에게 별로 이상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길헌병대 아베 키키치 대장은 문서에 "이자는 원래 공비(共匪)이며 사상적으로 완전히 이용가치가 없다."고 적고 있다. 헌병대는 이기수에게 약 두 달 동안이나 심문과 고문을 자행했지만 그들이 바라던 것을 끝내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이기수는 헌병대에 의해 하얼빈으로 "특별이송" 되는 극단의 조치를 받는다. 현재 길림성 문서보관국의 소장품가운데서 이런 "특별이송" 내용의 문서는 약 200점이며 이와 관련된 인물은 277명으로 대부분 중국인이다. 와중에 이기수는 현유의 보관문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특별이송" 조선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731부대의 "마루타(통나무)"였다 이른바 "특별이송"은 일본군 내부에서 사용되던 전문술어이다. 그때 이기수 등 수감자가 "이송"된 곳은 단 하나로 바로 악명이 자자한 731부대이다. 731부대는 일본군의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하얼빈에 주둔하며 생체해부, 인간냉동, 세균감염, 독가스 실험 등을 자행했다. 인간 생체실험을 하기 위해 731부대는 관동헌병대와 결탁했다. 관동헌병대는 체포한 간첩과 항일전사 등을 심판을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731부대의 특설감옥에 이송하여 사용하게 했다. 이기수처럼 "특별이송"된 사람들은 731부대 부대원들에게 "마루타(原木)"로 불렸다. "마루타"는 일본말로 "통나무"라는 뜻이다. 인간 아닌 "마루타"로 인식된 생체실험 수용자들은 더는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으며 숫자로 기록되었다. 731부대의 규칙상 이런 "마루타"는 살아서 절대 731부대의 마굴을 떠날 수 없었다. 731부대는 1945년 8월 철거직전에 실험현장을 대거 파괴하고 관련문서를 파기, 은닉하였다. 그리하여 731부대의 생체실험 대상자가 도대체 얼마 있었는지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가 731부대에서 복역했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최소 3천여 명이 여러 가지 생체실험 대상자로 되어 살해되었습니다." 731부대 가와시마 기요시(川島淸) 전 생산부장이 예전에 소련 백력(伯力) 국제군사법정에 출두하여 기술한 내용이다. 오늘날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최종적으로 신원이 확인된 731부대 생체실험 대상자는 1467명에 달한다. 이 희생자들의 이름은 그제 날 그들이 특설감옥으로 이송할 때 통과하던 731부대 본부 건물의 중심복도 "순난자 명부"에 전시되어있다. 와중에 지금까지 밝혀진 "특별이송" 조선인은 이기수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더 있다. 이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한성진(韓成鎭, 조선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43년 6월 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 조선 함경북도 길주면 출생, 1943년 7월 31일 체포) 고창률(高昌律, 조선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출생, 1943년 7월 25일 체포) 이청천(李淸泉, 1944년 체포) 심득룡(沈得龍, 1943년 10월 1일 체포) 지금까지 발견, 정리된 "특별이송" 문서에 따르면 상기 조선인들은 모두 항일 혹은 반파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이기수 등 2명은 "특별이송" 문서에서 드물게 사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이기수가 731부대에 "특별이송" 된 후 구경 어떤 형식의 생체실험을 당했으며 또 언제 어떻게 숨졌는가 하는 것은 혹여 영원한 미스터리가 될 수 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이지만 731부대의 유적지에는 여전히 음침한 한기가 떠돌고 있는 듯하다. 어디선가 맴돌고 있는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이 시공간의 터널을 지나 계속 찌릿찌릿한 공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3    옛 무사들의 숨결이 흐르는 태권도마을 댓글:  조회:2888  추천:1  2014-04-04
연수원을 나서는데 웬 일인지 찬바람처럼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길가의 나무 우듬지에서 청승맞게 들리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에 비로소 찜찜한 느낌의 진원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는 까마귀가 많아요. 옛날에 피가 많이 흘러서 그렇다고 해요." 안내자로 나섰던 김희욱 씨가 우리 방문단 일행의 화제에 이렇게 한마디 끼어들었다.       "이 고장의 무주라는 이름은 바로 '피바다'라는 의미이라고 전해요."       김희욱 씨는 전라북도 체육관원인데, 연수원을 망라한 무주 태권도원(跆拳道園)은 그들의 관리 범주에 들어있다. 그는 언제인가 태권도원 설립, 관리와 관련하여 해당 전문가들을 수행하면서 무주의 역사에 대해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격렬한 싸움으로 계곡물이 항상 피로 물들어서 우거질 무(茂), 붉을 주(朱) 자를 넣어 이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라와 백제를 잇는 라제통문       무주는 한반도의 허리로, 신라와 백제의 경계 관문이 있었다.       사실상 무주에서 무사들의 등장은 삼국시기를 지나 멀리 삼한(三韓) 시대에 이른다. 무주 구천동은 옛날 9,000명의 호국무사가 수련을 하면서 살았다고 하며 둔지(屯地)라는 의미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고 불렀다는 조선시대의 기록이 있다. 이 9,000명의 호국무사가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눈 같이 하얀 내(川)를 이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설천면(雪川面)이라고 한다.       옛 지명에서 볼 수 있다시피 무주는 무사들이 수련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무주가 국책사업인 태권도원 프로젝트를 유치할 때 관련한 심사위원들의 각별히 높은 점수를 받을 법 한다. 태권도원의 원래의 출발 이름은 '태권도공원', 하지만 '공원(Park)'이 주는 어감이 태권도의 '도(道)'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나중에 '태권도원(園)'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이때 따라 삼한시대 그리고 그 후의 삼국시대 무사들이 닦은 무예가 바로 이 태권도가 아닐까 하고 묘한 생각이 갈마든다.       과연 천년의 시공간을 가로지른 옛 무사들의 그 무슨 예시(豫示)였을까?…   태권도에 숨은 천년의 비사(秘事)       실제 무주의 땅을 휩쓸었던 옛 무사들의 화려한 발차기는 태권도의 무술동작이었을 수 있다고 한다. 태권도는 그 기원이 멀리 고대 부족국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등 고조선 때부터 있은 조선민족의 전통무술이기 때문이다       "상고시절 치우(蚩尤)를 태두로 한 우리 동이족의 대표적인 무술이라고 할수 있어요." 오춘성교수는 이렇게 말의 끈을 풀었다.       오춘성교수는 대학교 시절부터 태권도를 전공, 태권도 역사에 대해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이다. 그는 왕조의 교체에 따라 국명이 변하듯 태권도도 다른 예외가 아니었다고 소상하게 설명했다.       왕조의 교체에 따라 국명이 바뀌듯 태권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태권도의 얼굴은 권박(拳搏), 수박(脚戱), 상박(上搏), 수박(手搏) 등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태권도라는 이름에 근접한 "태껸"은 삼국시대에 등장한다고 한다. 삼국은 모두 말 타기와 궁술을 비롯하여 맨손 격투의 무예를 장려했다. 특히 신라에서는 화랑도(花郎道)가 존재하여 청소년 집단 교육의 도구로 태껸 같은 무예 수련을 강조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고분벽화와 문헌의 기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기 고분의 벽화, 태권도 품새모양을 하고 있는 무술인이 있다       태권도의 이름은 1954년 처음으로 "태권도"라는 제정된 후 1965년 정식으로 현재의 태권도로 명명한다. 1972년 국기원(國技園)의 설립을 계기로 체계적인 지도자양성과 교육체계를 수립하며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의 창설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며 이어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연속 상승세를 긋는다.       잠깐, 일화가 있다.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박사는 영어에 능숙한 인물로, 옛 이름 태껸을 우리말로 옮길 때 늘 "태권"이라고 발음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어설픈 발음이 나중에 "태권도"라는 이 멋진 이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국 국회의사당 대청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조각상       "태권도의 태(跆)는 태풍처럼 거세고 힘 있게 뛰어 차는 발을 뜻하고, 권(拳)은 주먹을 의미하며, 도(道)는 '인간이 가야할 길'을 수련한다는 것을 뜻하죠."       오춘성교수는 태권도는 체력과 정신이 혼합된 모든 운동의 기본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 도리를 지키는 호신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 이처럼 태권도는 다른 운동과 달리 "정신과 인격수양을 통한 체력단련"이 병행되는 특징적인 운동이다.       옛 무사들의 천년의 혼은 태권도라는 이 이름에 물처럼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무사들의 마을 태권도원       태권도원은 흰 구름이 감도는 백운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태권도원은 관중석 4540석 규모의 태권경기장을 비롯해 체험관, 연수원, 연구소, 한옥 명인관, 명예의 전당, 전망대 등으로 이뤄진다. 외국의 태권도 연수생들이 오더라도 얼마든지 그들이 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수 있다고 한다.       와중에 주축으로 되는 연수원은 흡사 당금이라도 머리를 들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싶은 한 마리의 용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우리 태권도원은 중국 쿵후의 상징인 소림사나 일본 사무라이의 고향인 무사마을이 부럽지 않아요." 태권도원 관계자의 신심에 젖은 말이었다.       정말이지 그럴 법 한다. 관계자의 소개에 따르면 올해 4월 말 개원하게 되는 태권도원은 투입비용만 해도 민간자본을 포함하여 총 6000여억원(한화)이며, 부지가 231만㎡ 넓이에 달한다. 이는 한국의 국책사업인 동시에 전라북도가 1시군 1프로젝트로 육성하는 사업으로, 무주군의 가장 큰 성장 동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무술을 닦는 사람들이 중국에 가면 소림사를 찾듯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우리 무주를 찾게 될 겁니다."   태권도 연수원에서 훈련하고 있는 어린이들       연수원의 수련장에는 어린 수련자들이 한창 주먹 지르기, 발차기 등 공격과 방어 기술의 연결동작을 이은 품새를 훈련하고 있었다. 수련장에 간간이 울리는 앳된 목소리의 외침은 바야흐로 용의 꿈틀임을 할 태권도원의 미래를 떠올리는 듯싶었다.   남대천 강가에서 수련하고 있는 태권도 수련자들       태권도원의 앞을 흘러 지나는 남대천(南大川)에는 오른쪽의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흰색의 다리, 노란색의 다리, 청색의 다리… 검은색의 다리가 아홉 개 놓여있었다. 태권도의 품새에 따른 띠 색깔을 순서대로 하나씩 다리에 색감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제일 위쪽의 검은색 다리 부근에는 마침 고단자들이 명상수련을 끝내고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이 사범들은 이른 새벽부터 여기에 나와서 수련을 하고 있어요." 태권도원 관계자가 소개하는 말이다.       산과 물과 나무와 하나로 어우러진 수련자들은 하늘 아래에 태권도의 남다른 풍속도를 그리고 있었다. 최고의 수련의 경지에 이르는 데는 추호의 멈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상기시키는 대목이었다.   한국 용인대학 태권도 사범들의 시범공연 한 장면       "우리 태권도원은 바로 한국이 세계 태권도 수련자들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배종신 태권도진흥재단 이사장은 태권도원 소개사의 서두를 이렇게 떼고 있었다.       무주 태권도원을 태권도 수련자들이 자신의 심신을 닦는 성스런 장소로 만들겠다는 것. 그는 태권도를 이젠 단순한 무도(武道)를 뛰어넘어 하나의 한류문화로 승격할 것이라고 거듭 말한다. 성지(聖地)로 거듭날 그 날은       현재 전 세계 태권도인구는 약 200개국에 걸친 70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해외의 태권도장에서 배출한 초단 이상의 유단자만도 8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웃한 중국에만 공식 등록된 태권도 도장이 10만개, 비공식적 집계로는 무려 40만개에 이르는 현 주소이다.       태권도 수련자의 꿈은 모두 언제인가 종주국 한국에 가서 당당하게 태권도 수련을 해보는 것. 하지만 종주국에서 도복을 입고 마음껏 발차기를 할 만한 전당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다들 가는 곳마다 실망하기 일쑤였던 것. 오죽하면 해외 도장의 태권도 사범들이 "낯이 뜨거워 제자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할까.   백운산 기슭의 태권도원 연수원       "태권도원은 사범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될 수 있어요." 월간 "아이러이브 태권도" 편집자 윤영용 씨는 이렇게 자기의 일가견을 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태권도원은 앞으로 연수나 관광지 이상으로 세계 태권도 수련자들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 태권도는 일찍 세계화에 성공한 한국 최초의 문화상품으로 그럴 가능성을 한껏 부풀리고 있다. 더구나 전 세계 태권도 수련자의 엄청난 규모를 감안할 때 성지화(聖地化)의 가능성은 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미상불 무사들의 옛 수련의 마당이었던 무주는 애초부터 용의 화려한 춤을 어디인가 숨기고 있은 게 아닐까…        국제방송 4월 4일자  
2    주몽의 화살에 뚫린 구렁이산 댓글:  조회:3667  추천:76  2009-09-09
주몽의 화살에 뚫린 구렁이산 김호림   두만강은 도문시 양수진(凉水鎭) 경영(慶榮)촌 부근에 이르러 활등처럼 크게 휘어진다. 조선반도 최북단에 있는 마을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가 바로 경영촌의 강남에 위치한다. 경영촌의 동쪽에는 활등을 타고 앉은 바위산 하나가 있으니 구멍이 많다는 뜻의 굴륭산(窟窿山)이라고 불린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활을 쏜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 굴륭산, 그래서 굴륭산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유난히 많은 게 아닐까?   주몽은 일곱 살 때 벌써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목표물을 정확히 맞혔으며 이로 하여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린 이름이라고 「삼국사기」가 전한다. 그러나 전설은 항간에서 부풀린 게 많아서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렇든 말든 굴륭산에 화살이 뚫은 흔적인지는 몰라도 구멍이 많다는 건 현지에서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여름철이면 이런 구멍에는 뱀이 유난히 많아서 굴륭산은 일명 구렁이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걸 다시 한자 이름으로 만들어서 굴륭산은 또 구룡산(九龍山)이라고 불린다. 아무튼 확실한건 굴륭산에서 고대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마을에서 물도랑을 팔 때 옛날 물건이 많이 나왔다고 하던데요…” 현지인 조만길(40여세)씨는 아리송한 기억의 끈을 가까스로 잡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마을 부근에서 유적지 표식판을 보았다고 말한다. 나중에 보니 표식판은 경영촌 북쪽을 지나는 도문-훈춘 철길과 도로 교차로 부근의 둔덕에 있었다.   지면의 유물은 주요하게 굴륭산 서쪽 산기슭과 경영촌 부근에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지의 면적은 길이 1,500m, 너비 250m로 알려지고 있는데, 출토된 유물은 토기와 석기, 골기, 자기, 건축자재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이런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은 1957년 겨울철이었다. 물길 공사를 하면서 마을 남쪽의 두만강 기슭에서 많은 유물이 나왔고, 굴륭산 서쪽 기슭의 공사현장에서도 석기와 골기와 발견되었다. 연변지역 원시사회 유적지에서 유일하게 삼족 기물의 밑 부분 유물 2점이 발견되어 학계의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가치와 재부의 상징인 조개껍질의 화폐도 출토되어 한때 화제가 되었다. 그때 벌써 화폐로 교환할 정도로 거래가 몹시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적지에서는 건축자재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는데, 연꽃무늬의 막새, 압지무늬의 평기와 등이었으며 이런 기와에는 천 무늬가 있었고 대부분 홍갈색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런 유물이 모두 굴륭산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학계에서는 이 유적지의 이름을 굴륭산유적지라고 지었다.   학자들은 또 강물의 충격으로 생긴 단면 그리고 마을의 웅덩이 단면에 대한 고찰을 거쳐 유적지를 상, 하 두 문화층으로 나눈다. 아래 문화층은 약 2천년 전의 시기를 좌우하여 이곳에서 살고 있던 북옥저인들의 마을 자리이며, 윗 문화층은 발해와 요․금시기를 아우른 고대 문화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한편 동명왕 10년 즉 B․C 28년에 고구려가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하고 책성을 세워 북옥저지역을 다스렸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감안하면 굴륭산 유적지의 연대표에 고구려시기도 망라해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학계에서는 유물이 풍부하고 또 상대적으로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미뤄 여기를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인구가 조밀하고 경제가 번영했던 중요한 성새로 보고 있다. ‘경영고성’이라고 이름한 이 성새는 발굴된 유적으로 미뤄 장방형 모양이며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굴륭산 유적지는 물론 고분들도 농가와 경작지, 과수원, 못, 대로 등에 파괴되어 원래의 형태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강기슭에 나뒹구는 조약돌에는 이름 못할 애수만 파릇하게 젖어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굴륭산유적은 외따로 고독한 게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유적은 굴륭산 동쪽에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굴륭산 동남쪽으로 약 3㎞ 되는 곳에는 높이가 30m 정도인 자그마한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언덕이 두 개 있는데 남북 양쪽에서 보면 그 모양이 똑 마치 강가에 엎드린 한 마리의 거북과 같다. 이 산은 형국이 거북인 데다가 다른 산들과 평지를 가운데 두고 홀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고산자(孤山子)’ 혹은 거북이라는 뜻의 ‘왕팔산(王八山)’이라고 부른다. 유명한 고산자 유적은 바로 이 산 위와 산 부근에 있다.   두만강 기슭에 위치한 고산자는 북쪽의 도문-훈춘 도로와 수십미터 길이의 길쭉한 언덕길로 이어져 있다. 조씨에 따르면 고산자는 두만강 기슭의 천연적인 초소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산 북쪽기슭의 바위에는 배기통 모양의 네모난 구멍이 패어 있었다. 지난 세기 60년대 말, 중국에서 전시준비를 하면서“방공 굴을 깊이 파던” 때의 흔적인 것 같았다.   이전에 고산자산과 부근의 경작지에는 토기와 자기 조각이 수두룩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때 고산자에서 채석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이 유적지에서는 돌로 만든 창날과 도끼 등이 출토되었으며 또 원주형의 돌절구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산자 부근의 밭에는 강돌이 드문드문 박혀 있을 뿐 토기나 자기 조각은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었다.   “뭘 보시려는데요?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조씨의 권고를 뒤로 하고 기어이 산마루에 기어올랐다. 사실 서쪽 산꼭대기의 화강암에 인공으로 뚫은 흔적이 있다는 기재 때문이었다. 「훈춘현문물지에」 따르면 이 화강암은 둘레 60㎝, 두께가 15㎝나 되는 큰 돌덩이였다. 그런데 진짜 발품만 들인 셈이었다. 이 무거운 화강암마저 누군가 건축자재로 실어갔는지 종적을 찾을 길 없었다. 키 넘는 무성한 수풀은 2천년 전 북옥저인들의 흔적을 모조리 어디엔가 파묻어버린 것 같았다.   굴륭산 부근에는 이 시기의 옛 무덤 유적들도 적지 않은 걸로 알려진다. 굴륭산 서쪽기슭과 남쪽기슭은 물론이고, 양수진을 위시한 양수평원 주위에도 옛 무덤떼가 여럿이나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들은 흙구덩이 무덤, 돌무덤, 석관무덤 등 여러 가지 유형이며 모두 2천년전 좌우의 무덤인걸로 판정되고 있다. 양수평원 일대는 책성으로 비정되는 온특혁부성과 서쪽으로 불과 수십㎞ 상거, 북옥저인들이 활약하던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굴륭산은 또 훈춘 옛 장성의 서쪽 끝이라는 주장이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훈춘 옛 장성은 ‘변장(邊墻)’, ‘변호(邊壕)’ 또는 ‘고려변(高麗邊)’이라고 불리며 훈춘평원의 북부 산간지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훈춘 옛 장성은 일찍 1920년대부터 고찰이 시작된다. 학자들의 고찰에 따르면 장성 성벽은 죄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며 일부 구간은 돈대나 망루, 봉화대로 이어진다. 이 장성은 훈춘하 하류의 훈춘평원을 중심으로 평원의 북쪽 산지대에 쌓여졌는데 이것은 훈춘평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옛 장성은 자연과 인위적인 파괴로 원래의 형태가 남아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못하다.   훈춘의 옛 장성 축성연대를 두고 학계에는 고구려설, 발해국설, 동하국설, 고려설 등 서로 다른 4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때 북으로 내려오는 읍루의 남침을 막기 위해 북옥저인을 동원하여 쌓은 군사방어시설이라고 보는 게 제일 합당하다는 주장이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 후 발해시기와 동하국 시기에 계속 이 장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성 서쪽 끝머리로 추정되는 굴륭산 부근의 유적지에 고구려의 ‘도장’이 찍히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굴륭산에서 고구려의 ‘도장’을 확실하게 찾는다는 건 주몽의 화살구멍을 찾는 것처럼 정말로 쉽지 않았다. 「훈춘고성고(琿春古城考)」에 따르면 굴륭산 꼭대기에 장성의 일부인 흙 둔덕이 있다고 하는데 이 둔덕은 수풀로 몸을 감춘 구렁이처럼 종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남쪽 벼랑기슭에 그제 날을 견증한 비석인양 우뚝 서있는 돌기둥만 눈에 아물거릴 뿐이다. 보아하니 옛 장성은 이미 굴륭산의 전설로 사라진 것 같았다.   굴륭산의 이름을 만든 구렁이 역시 전설 속의 기담(奇談)으로 되어 있었다. 오래 전에 현지의 농부들은 산의 석굴에서 죽어버린 구렁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구렁이가 굴륭산 북쪽의 채석장에서 울리는 남포소리에 놀라 죽었다는 게 항간의 속설이다. 그때부터 산 아래 마을에서는 장정들이 까닭 없이 죽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세간에는 굴륭산의 수호신인 구렁이가 죽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뒤숭숭한 추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산기슭의 경영촌을 원래 ‘용배미’라고 불렀다고 하니 산과 마을은 예전부터 그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굴륭산에 얽힌 천년전의 이야기는 산과 마을에 전하는 전설의 어디엔가 숨어있는지 모른다. 아쉽게도 굴륭산의 전설과 기담은 두만강 기슭에 엄청난 물음표만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하다면 이 물음표를 과녁처럼 명중하여 의문을 말끔히 떨쳐버릴 ‘주몽의 화살’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1    학원이 제일 많은 나라 댓글:  조회:3299  추천:143  2007-02-26
    어린 학생들을 싣고 서울의 밤거리를 달리는 버스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차체에 '00학원'이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학원생들의 셔틀버스인 듯싶었는데, 귀가 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새벽이었던 것입니다.   시골은 모르겠지만 도시에 살면서 학원 문턱을 밟아 보지 않은 학생은 제가 보기엔 단 한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영어학원은 기본이고, 보습학원(학교에서 공부하는 내용을 복습, 예습시키는 학원), 예체능학원(피아노, 발레, 미술, 수영 등을 가르치는 학원)까지 아이들은 하루에도 여러 학원을 전전한다고 합니다.   보습학원 같은 경우 주 5일, 날마다 수업시간이 1시간 반 내지 2시간 정도이니 말이 학원이지 학교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학교를 두세 개씩 다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학교 교육보다 학교 밖 교육의 비중이 큰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형적인 교육 현실은 물론 널리 알려진 한국인들의 교육열 때문입니다.   내 친구 하나는 딸애를 서울에 데려다 초등학교에 넣었는데, 반년 만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르칠 과목을 학원에서 미리 배우다 보니 정작 학교에서는 그리 열성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등학교는 중국에서 온 학생에게는 빈 껍데기였던 것입니다. 애들이 학교에서 배울 걸 학원에서 모두 배웠다니 학교에서는 도대체 뭘 하겠어요. 여자애들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마냥 꽃 그리기, 수놓기 같은 일과가 전부였습니다. 부부가 모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네는 그렇다고 아이를 학원에 보낼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는 아이를 하나도 아닌 여러 가지 학원에 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학원 한 군데 다니는 비용이 한달에 최소 7만~8만원, 또 교재비는 별도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한국에서 학생 1인당 연간 사교육비는 초등학생이 1백35만원, 중학생은 1백53만원, 고등학생일 경우 1백76만원, 대학생은 2백64만원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인들이 사교육에 들인 비용은 한화로 26조원, 국가 교육예산 21조원을 훨씬 뛰어넘는 액수입니다.   한국인들은 자녀교육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옛날부터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자녀를 공부시키던 미풍양속이 그대로 이어진 것일까요. 만만찮은 교육비용이지만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한달에 과외비로만 수백만원을 지출한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것을 잡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약과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신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대개 영어자모 'R'와 'L'의 발음을 구분하기 어려워합니다. 어릴 때부터 익혀 온 한국어 발음에 혀가 굳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이것이 선천적으로 혀가 짧은 탓이라고 우기면서 코흘리개 자식들의 혀 수술까지 단행하고 있다니 기겁할 노릇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집착이나 무지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영어를 잘하는 한국사람들을 만나면 그의 혀가 언제 입밖으로 나오나 말똥말똥 살피는 못된 버릇이 생겼습니다. 저 사람도 어릴 때 붉은 혀에 얼음장처럼 흰 칼을 박아 보았던 것은 아닐까 해서요.   이런 일들은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지만, 과열된 교육열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부모들의 그런 열띤 기대 속에서 대학 입시를 앞둔 아이들의 노력은 말 그대로 아예 뼈를 깎는 처절함입니다. 어릴 때부터 너나없이 모두 그렇게 길들여진 터라 대학입시 때에는 더군다나 기를 쓰고 뛰어야겠죠. 남보다 한 걸음이라도 뒤지면 좋은 대학은 물 건너 간 것이 되겠으니 말이죠.   입시생들을 위한 보습학원의 경우, 밤 12시 심지어 새벽 1시에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이른 아침이면 또 감기는 눈을 비비며 등교하는 아이들이 정말 안쓰럽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들은 여린 몸으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웬만한 어려움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 제일로 꼽히는 서울대 등에는 모두 그런 뜀박질 끝에 입학한다고 합니다.   S대에 다니는 중국 유학생 김영화씨는 OO연구팀 팀장으로 여러 명의 석사, 박사연구원을 이끌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의 악착같음과 집요함으로 소문난 김영화씨도 한국 후배들에게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한국 학생들은 일단 실험을 했다 하면 밤을 여러 날 지새워도 끄떡없어요. 진짜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니까요"   하루 이틀도 아닌 며칠을 의지력과 집중력으로 조금의 실수도 없이 버텨야 하는 무수한 실험들이었습니다. 체력의 극한을 초월하는, 그런 어려운 순간들을 일상처럼 스쳐 보내는 후배들이 한순간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비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무한경쟁의 달리기 코스를 수없이 뛰었던 한국 학생들이라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대 진학은 아이들이나 부모들 모두 자나깨나 바라는 것입니다. 일류 대학이 일류 직장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일류 운명을 만든다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집착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좁다란 그 문에 들어서는 것은 사투에 가까운 노력의 대가가 없이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대학 진학을 꿈꾸는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그곳에 몰려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옛날과 달라 너나없이 공부에만 몰두하다 보니 대부분 높은 점수를 받기 때문에 1점이나 2점이라는 간발의 차이로 상위권 대학이냐 하위권 대학이냐 하는 승부가 판가름되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입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모의고사 같은 실전경험을 두둑이 쌓아 두는 게 좋은 결실을 맺는 지름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벽까지 쏟아지는 잠을 쫓으면서 쳇바퀴 돌 듯 집과 학교, 학원을 전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운명들인 것입니다.   무거운 멍에를 쓰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공부할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입시교육에 매달린 학교 역시 그들에게 별도의 공부장소를 마련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도서관이 있는 중학교는 겨우 1%, 도서실이 있는 중학교는  60% 안팎이라고 하는 집계가 있습니다. 본의든 타의든 교과서 외의 독서는 아이들과 멀리 떨어진 별나라 얘기가 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 거의 모든 중학교가 나름대로 도서실을 갖추고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학교들에서 마냥 백이면 백, 만이면 만으로 똑같은 '붕어빵'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대학교라는 허기만 채우면 되니까, 별미가 담긴 '빵'을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요. 확실히 창의력과 사고력은 아주 떨어지거든요." 김영화씨는 한국 학생들이 같은 세대의 중국 학생들과 비교할 수 않을 정도로 뒤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디어가 속출해야 하고, 나름대로의 분석력을 갖추어야 하는 실험대 앞에서 그런 격차는 금세 눈에 뜨인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 교육계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입시 과다경쟁이 부른 학생들의 창의력 부족에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교육계에 마침내 '적신호'가 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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