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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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년의 전승(傳承), ‘왕조’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댓글:  조회:1936  추천:0  2017-07-26
 누군가는 이 이야기가 첫마디부터 거짓말이라고 했다. 주인공의 출생지라고 하는 그 건물은 소설처럼 꾸며서 만들었다는 것. 그러나 김씨는 그가 분명히 용정의 시정부청사 동북쪽 귀퉁이의 그 관사(官舍)에서 태어났다고 고집하듯 말하고 있었다. “집에는 집무실과 화식실(火食室)이 따로 있었고 수세식 화장실이 놓여 있었지요.” 부친이 집을 샀던 1945년 경 관사는 벌써 우물을 긷지 않고 수돗물을 쓰고 있었다. 그때는 물론 그 후 오랫동안 시가지에서 뜨르르했던 호화판의 건물이었다. 관사의 북쪽 ‘영국더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관사의 마당 앞을 지나고 있었고 또 시냇물 기슭에는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자라고 있었다는 것. 용정은 예전에 조선인 이주민의 중심지였으며 정부청사는 한때 악명이 자자했던 간도 일본총영사관의 유적지이고 ‘영국더기’는 지난 세기 초 외국인 선교사 등이 살고 있던 ‘치외법권’의 조계지이다. 관사는 마치 그 무슨 상징물처럼 여러 명소를 한데 아우르고 있었다. 사실상 관사는 오래전에 벌써 철거되었다. 시냇물도 오래전에 벌써 사라졌다. 실제 현지의 토박이가 아니면 전부 거짓말로 치부할 듯하다. 1940년대, 부친 김봉구(金鳳九)는 흑룡강성 목단강 지역에서 생활, 그때로서는 드물게 중서의를 결합한 의사였으며 남다른 의술로 현지에 명망이 높았다. 1945년 여름, 김봉구는 조부가 계시는 용정에 이주했다. 관사는 그때 부친이 사재를 털어서 산 가옥이었다. 관사는 시초에 총영사관의 어느 일본인 간부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의 기억은 관사와 더불어 김홍선(金弘善)의 머리에 한 채의 성을 쌓고 있었다. 조부는 그 무렵부터 손자를 손에 잡고 다니면서 가족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시조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金傅)라고 전합니다.” 김부 즉 경순왕(敬順王)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비운의 왕으로 935년 고려에 귀부(歸附)한 후 고려 초의 문신으로 살다가 978년에 생을 마쳤다. 그때부터 약 천년이 지난 김인상(金仁象)의 세대는 더는 왕족과 인연이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김인상은 또 다른 왕조의 시조 ‘국왕’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1800년대에 있은 일이다. 김홍선(金弘善)은 현조부(玄祖父) 김인상이 가문의 제1대 전승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부님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과 길주 지역의 명의였다고 하는데요, 의술과 점술에서 동네방네 소문이 났다고 가문에 전하고 있습니다.” 김인상이 언제부터 또 어떻게 가문의 침구 비방을 보유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문에서 몇 대를 내려 전승하던 옛 의서, 사진, 기록물 등 실물은 ‘문화대혁명’ 때 일부 소각되었거나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어찌됐거나 가문의 제4대 전승자인 조부 김장욱(金長郁) 역시 젊은 나이에 벌써 재간 있는 ‘침쟁이’로 고향인 명천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장욱은 30대에 두만강을 건너 용정시 용신향으로 이민을 단행했다고 한다. 그때 그 시절이라고 하면 일제 치하에 고향을 등지던 이민의 애절한 행렬을 떠올리지만 적어도 김씨 가문에 전하는 조부의 이주 역사는 살길을 찾아 떠난 나그네의 행보가 아니었다. “조부님은 중의학(中醫學)을 더욱 깊이 공부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한의학(韓醫學)만 배워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거지요.” 얼마 전 김홍선은 의학총서 《조선족의약학발전사》에서 조부 김장욱이 1915년 4월 연길현 제8구 용천촌에서 중의를 배웠다는 진기록을 찾는다. 약 50년 전 저 세상으로 떠나간 조부를 문자로 다시 만난 것이다. 김홍선은 작은 초가에 늘 병자들이 몰려와 한 구들을 채우던 정경을 다시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단박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병자는 수레에 실려서 왔다가 며칠 후이면 닭 모가지를 잡고 떡 대야를 멘 채 두 손으로 씽씽 걸어오고 있었다. 백발의 조부는 마법사처럼 은침으로 하나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자그마한 침통에 요술 막대기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언제인가 조부처럼 마법의 그 주인으로 되고 싶었다. 조부는 호기심이 많은 손자에게 경맥을 짚어주고 약초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부의 이 형상은 혈위(穴位)처럼 김홍선의 기억의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전통적인 침술 혈위는 몸에 361개 정도 된다고 하지요. 기혈(氣穴)은 오늘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저는 조부님으로부터 대부분의 혈위와 그 사용법을 익혔습니다.” 혈위는 인간의 몸에 생리나 병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특정 부위로서 혈 자리라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희미한 그림자 같은 존재의 이 혈위는 오래 전부터 김홍선에게 한 장의 생생한 그림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병이라고 하면 김홍선의 눈앞에는 금방 그 어느 혈위의 부위로 둔갑하고 있었다. “조부님은 환자에게 우선 기순혈삼침법(氣順穴三針法)으로 침을 놓고 이어 비방의 탕약을 곁들였는데요, 피부병이나 중풍 후유증의 병자는 대개 6일이면 증상이 확연하게 호전이 되었지요.” 알고 보면 기순혈은 실은 아시혈(阿是穴)과 비슷한 말이다. 아시혈은 일찍 당(唐)나라 때의 의학자 손사막(孫思邈)의 침구법에서 유래된 혈위이다. 정식 경혈의 자리가 아니지만 침구에 의해 기혈이 소통되고 병이 낫는 혈 자리라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침구에 입문한 침술사라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혈 자리이다. 이 아시혈을 국부(局部)에 나타난 동통 자리라고 하면 기순혈은 병변 반응으로 나타난 동통 부위이다. 꼭 만져야 발견되는 피하 결절(結節)과 변색된 피부반점, 피부껍질이 벗겨지거나 피부 표면이 오목하게 들어가며 또 특정 부위에만 기포가 생기고 붓기며 마비되고 저리는 등 현상은 모두 기순혈의 범주에 속한다고 김홍선은 설명하고 있었다. 김홍선의 말에 따르면 김씨 가문의 선인들은 여러 병의 원인을 풍수가 조화되지 않은데서 찾고 있었다. 여러 병적 변화에 의하여 생긴 몸 표면의 위치와 형태에서 각종 반응 자리를 찾고 그것을 ‘기순혈(氣順穴)’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 “기순혈을 정확히 찾고 거기에 양혈(陽穴)과 음혈(陰穴)에 각기 일침을 가하여 삼침(三針)을 놓으면 대뜸 효과가 생깁니다.” 한마디 빠뜨린 게 있다. 침을 찌르기 전에 조부는 먼저 명문(命門)과 신궐(神闕) 두 혈위를 안마했다고 한다. 남녀 음양설의 원리에 따라 명문과 신궐 두 혈위를 안마하는 순서도 달랐다. 안마와 침술, 탕약을 망라한 일명 ‘음양기순(氣順)의 삼침’ 요법은 김씨 가문에만 전승되는 민간요법이었다. 조선민족의 민속 문화로 형성된 이 비법은 현재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학이라는 이 마법의 성에는 백년의 전승은 백년의 고독을 잇고 있었다. 부친 김봉구는 단지 제5대 전승자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조부처럼 30대의 나이로 홀로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넜다. 일본 오사카의 전문학교에서 반공반독으로 이른바 양학(洋學)이라고 하는 서의학을 배웠다. “가문의 전승에만 그치고 싶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새로운 의학인 서의학을 배우고 싶은 거죠, 그때로서는 한의와 서양 의약을 결합시킨다는 게 큰 혁명이었습니다.” 한의학과 중의학, 동의학과 서의학은 미구에 하나의 ‘성’에서 만나고 있었다. 동양 음양오행과 풍수설의 문화는 복음을 앞세운 서양 복의(福醫) 문화와 물처럼 한데 어울리고 있었다. 종국적으로 ‘김씨 왕조’의 가보(家寶) ‘음양기순의 삼침법’에는 천지인(天地人)이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김봉구는 동북지역에서 한의와 서의를 겸비한 첫 의사로 등극하고 있었다. 그가 발전시킨 가문의 비법은 제6대 전승자인 김홍선에게 이르러 어섯걸음부터 새롭게 전수되고 있었다. 1971년, 김홍선은 중의학의 기초이론부터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 무렵 조부가 세상을 뜨면서 부친은 가문에 대를 이어 전하는 민간요법을 외동아들에게 빨리 전승해야 할 긴박성을 느낀 것 같았다. “부친님은 늘 의서(醫書) 공부는 만 번, 천 번은 못되더라도 백번 소리를 내면서 읽고 외우라고 주문했지요.” 정말이지 소학교 시절의 조무래기로 다시 돌아간 듯 했다. 집구석에 앉아 고서를 와글와글 읽었고 종종 방을 기웃거리는 부친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김홍선은 의술과는 한동안 멀어지는 듯 했다. 선후로 연길시과학기술연구소 소장과 연길 시정부 공무원으로 있었던 것. 이 20여 년 동안 김홍선은 시종여일하게 가문의 의술 전승 과정을 답습하고, 의술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와중에 의사가문의 전승자이며 의학지식이 해박하고 침술에 능하다는 소식은 입소문을 타고 주변에 널리 전하고 있었다. 정작 동네방네 소문을 놓은 것은 김홍선이 퇴직을 한 후였다. 그맘때 김홍선은 암에 걸려 수술대에 오르려다가 병원을 나섰다. 가문의 침술과 탕약을 연구하여 사용하고 조제, 종국적으로 조기암 치료에 성공했다. 병실에 함께 있던 다른 두 명의 암 병자는 수술을 선택했지만 나중에 암세포 확산으로 사망되었다. 뒷이야기이지만, 몸으로 직접 실험한 비법을 문자로 정리한 김홍선의 “항암 면역 증강제-CHAGA”는 나중에 전국민족 민간 전문병 학술협회의 우수논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고 보면 가문의 백년 비법은 제6대에 이르러 또 하나의 마법의 ‘성’을 쌓은 것이다. 이 ‘성’을 찾아 병자들이 찾아왔다. ‘삼침법’은 뒤미처 ‘음양’의 ‘기순’ 요법을 마법처럼 현시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버리고 보행으로 귀국한 좌골신경통의 사나이, 관절막염으로 고생하다가 팔을 번쩍 추켜들며 문을 나선 아줌마, 중풍 후유증이 심했다가 어눌한 말을 고친 할머니… 이번에는 병자가 아니라 금기(錦旗)가 우승기처럼 김홍선을 찾아와 벽에 걸렸다. 김홍선은 현재 모 중의진료소의 침구강사로 있으면서 침구인재의 양성과 조선족 민간요법의 수집, 집필 작업에 정진하고 있다. 참고로 2017년 새로운 중의법(中醫法)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 이에 따라 민간의 중의와 민족의약 유산을 보호, 전승하는 사업은 갈수록 탄력을 받고 있다. 일명 조의(朝醫)의 조선족의학은 일찍 2011년부터 대륙에서 자격증 시험을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음양설을 기초로 하고 풍수설에 이르기까지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체질의 사상(四象)의학을 연구하는 조선족의학은 아직도 중국에서는 잘 모르며 연변에서도 별반 알려지고 않고 있다. 조선족의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김씨 가문의 비법은 더구나 중국에서 거의 소실될 위기에 처한 ‘궁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의학 인재가 희소하고 또 후속 인재가 더 희소한 현 주소에서 더구나 희귀한 무형의 실증자료로 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김홍선은 이 비법을 연변 무형문화재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신청했다. “김씨 ‘삼침법’은 가문의 전승 방식으로만 유전(流轉)되고 있지요. 그래서 자칫 유실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김홍선은 결코 거기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들 김성무(金星武)와 조카 김영관(金永冠)은 제7대 전승자로 되어 오래전부터 벌써 김홍선의 수하에서 가문의 비법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2백년을 이은 그 ‘마법의 성’ 이야기는 이로써 또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것. “가문의 김씨 ‘삼침법’이 저의 세대에 와서 끊어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건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지요.”*
2    수중인(水中人), 그림으로 읽는 이야기 댓글:  조회:1865  추천:2  2013-08-16
  웬 사람이 물속에 잠겨 있다. 화면은 일색으로 온통 분홍색이다. 넥타이와 와이셔츠 차림으로 미뤄 도시인인듯하다. 그런데 그가 왜서 물에 있는 걸까, 혹여나 물에 빠진걸가… 수중인(水中人)의 얼굴에 비낀 공포와 실망, 단호함에서 뭔가의 답을 읽을것 같기도 한다.   “일부러 물속에 모델을 넣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백 박광섭은 그의 작업실을 가득 채운 분홍색의 수중인(水中人) 그림들을 이렇게 해석했다.   몇년전 그는 작업실 뒤쪽의 마당에 각기 2미터 높이와 길이, 너비의 수조(水槽)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실내 수영장을 임대해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단다.   “물밑의 세계는 눈을 뜨기 어렵지요. 그래서 어쩔바를 모르고 발버둥을 치게 되는거지요.”      박광섭은 지난 세기 70년대 연변 왕청현의 대흥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우리는 공산주의의 후계자라네.”라는 우렁찬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의 계몽단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뒤미처 시작된 개혁과 개방은 그에게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낯선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박광섭은 동년배와 더불어 하늘아래 만화경 같은 삶의 행로에서 방황하고 몸부림을 했다.   수중인(水中人)은 바로 개체의 생존경험과 사회의 문화형태 사이의 제일 민감한 마찰부분을 포착, 이런 모순을 물속의 한 장면에 고착시키고 정련(精練)하여 사진처럼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화백이 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화필에 담은 “물속의 아름다움”은 금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작품은 “당대유화전시회” 등 중국 대륙의 유수의 전시회는 물론 대만과 한국, 싱가포르 등 지역과 나라의 전시회에 등장했다. 2005년부터 유럽에 진출, 각종 그림전시회에 10여차 참가했다. 박광섭의 작품은 세계 정상급의 그림의 향연인 스위스 바셀화랑박람회에도 두번이나 얼굴을 내밀었다. 수중인(水中人), 물에서 헤엄을 치는 사람   어 느날 지인의 안내로 작업실을 구경하러 왔던 한 외국인은 그림을 보자마자 놀란 소리를 하더란다.   “이 화백의 이름이 뭐죠? 중국에서 대단한 화백이 아니예요?”     그는 외국의 그림전시회에서 수중인(水中人) 그림을 보았으며 그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분홍색은 단일한 색채로 여느 그림보다는 달리 좀처럼 지울수 없는 강력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색은 일명 “중국 색깔”이라는 의미의 “중국홍(中國紅)”이라고 불린다. 박광섭이 소꿉시절을 보냈던 “문화대혁명”시기 온 중국은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방곡곡에서 휘날리는 붉은 깃발, “홍위병(紅衛兵)”의 붉은 완장, “홍소병(紅小兵)”의 붉은 넥타이… 그 시기를 장식했던 광란의 붉은색이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개혁, 개방이 실시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기존 개념의 붉은색 환경에서 차츰 탈피하게 되었다.   박광섭은 그래서 짙은 붉은색이 아닌 옅은 분홍색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연장선에서 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은 자아의 본성을 참모습 그대로 드러내게 되지요.”   박광섭은 약 10년전부터 “수중인(水中人)” 계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생에 대한 그의 사색과 추구는 그림에 그대로 점점이 묻어나고 있었다.   미국 평론가 데비드 깁슨의 박광섭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한두단락 적어본다.   “사람들은 물이 통제하는 환경에서 생활한다. 물은 그들을 기르고 또 그들을 보호한다. 지어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박광섭의 그림에서 여러번이나 그림과 련관된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박광섭의 인물화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심미와 의식의 추구를 만족시켰을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을 훨씬 초월했다. 이 계렬은… 정신세계와 현실계세 사이에 직접적인 련계를 구축했다.”   박광섭의 그림에서 물은 분홍색과 마찬가지로 시대적인 락인이 찍혀있었다. 아니, 화백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의 환경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무대로 되고 있었다. 박광섭은 그를 포함해 사회의 격변기를 겪는 사람들의 진통과 고민, 리상 등을 세부적인 화상(畵像)에 담으려고 했다.   “물속에 둥근 기포가 보이죠? 또 그림은 원형에 들어 있죠? 원형은 자궁, 래원, 시초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박광섭은 물에 잠긴 련꽃 계렬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맥없이 시들고 또 일부 찢어진 련꽃은 화판에 떠올라 어디론가 멀어진 아름다움에 깊은 동정을 자아낸다. 여기서 찢어지고 훼손되었다는 의미의 잔(殘)은 참선한다는 의미의 선(禪)과 동음이의어이다. 화백은 이 련꽃을 통해 낡은 사고방식을 깨버리고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람은 물속에 잠겨 있었지만 화백의 마음은 결코 물에 갇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화중인(畵中人), 그림속의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   박광섭은 어릴 때 그림책에 미치다시피 했다. “수업시간에는 그림책을 교과서로 가려놓고 보았지요.”   실은 책속의 주인공 운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인물 자체가 바로 그의 타깃이었다. 룡상에 기대인 황제, 말 잔등에 올라탄 장수, 밭머리에 걸터앉은 농부… 그림책에 나오는 각양각색의 인물은 거의 날마다 그의 연필에 묻혀 공책위에 비뚤비뚤 옮겨졌다.   소학교 4학년때 박광섭은 지인의 소개로 연길에 가서 연변예술학교 미술교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을 배운다. 이때에야 박광섭은 인물을 그리는데도 인상의 파악, 세부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운동감과 명암감, 해부학 등의 회화적 표현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박광섭은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났다. 날마다 반복되는 따분한 선 그리기도 그에게는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듯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림에 대한 깨달음과 집착은 화판에 한점 또 한점의 그림으로 변신했다.   방학 한달의 시한이 차서 작별을 고할 때 스승이 어린 박광섭에게 남긴 부탁은 단 한마디, 장차 꼭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나이 또래에서 박광섭의 그림은 물위에 피어난 한떨기의 꽃처럼 두드러졌다. 훗날 중학교의 미술교원도 약속이나 한듯 부친에게 이런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아버님, 이 애더러 꼭 그림을 그리게 하십시오.”     중학교를 졸업할때 박광섭은 유명한 동북사범대학 미술학부에 지망을 한다. 이때 미술과목의 2천여명 응시자가운데서 그는 전문과 성적이 단연 네번째 순위에 올라 주변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미술에만 너무 집착한 탓으로 다른 과목의 성적이 부진해서 미역국을 먹어야 했다. 이듬해 그는 연변예술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며 대학을 졸업한후 또 북경 중앙미술대학 유화연수반에서 계속 그림기예를 닦는다.   이 무렵 북경 동쪽의 “송씨 마을(宋庄)”에 화백들이 모여 더는 송씨의 마을이 아닌 화백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나중에 화백마을에는 화백 등 예술인이 1만여명 운집하며 또 화랑과 전시실 등이 무려 100여개 일떠선다. 이름 그대로 화백의 전당으로 둔갑한것이다. 이에 따라 집값이나 임대비가 천정부지로 솟구친건 물론이요, 현재로서는 마을에 발을 비집고 들어설 틈도 찾기 어렵다.   박광섭은 화백마을의 초기 입주자이다. 그래서 다들 그를 유복한 화백이라고 말한다. 실은 그가 화백세계의 흐름을 미리 읽을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아직 남들이 좌표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때 벌써 “송씨 마을”에 발길을 돌렸던것이다.   “‘이 마을은 예술인들끼리 만나서 수시로 교류를 할수 있는 좋은 장소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때부터 박광섭은 “송씨 마을”에 작업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오로지 그림에 전념하게 되었다. 현재 그는 지인들과 함께 손잡고 “송씨 마을”에 화랑도 운영하고 있다. 그림을 전시하는데 스스로 무대를 마련한 셈이다.   박광섭은 “송씨 마을”의 입적은 그의 그림생애에서 밑그림을 그려준것과 같다고 말한다.   “‘송씨 마을’의 존재적 의미는 돌파와 혁신입니다. 절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지요.”   그는 늘 지인들과 함께 모여앉아 그림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남의 말에서 독특한 계발을 받기도 하며 아이디어를 주제로 잡아서 함께 전시회를 갖기도 한단다.   쾌적한 환경은 그림속의 사람들을 언제나 그와 함께 숨을 쉬게 하고 있었다.   무제(無題), 화백의 제목 없는 그림   아직은 남들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지난해부터 박광섭은 분홍색의 수중인(水中人) 그림을 한 단락 접고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쟁 주제의 그림인데요, 작품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지금까지 밖에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백의민족의 력사에 비운의 그림자를 드리운 “조선전쟁”이였다. 지금도 종전이 아니라 정전 상태인 조선반도는 언제 불이 확 달릴지 모르는 “화약통”으로 되고 있다. “조선전쟁”은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인것이다. 그러나 당대 미술영역에서 “조선전쟁”을 주제로 삼은 그림은 별로 없다.   박광섭은 “조선전쟁”을 그리기 위해 대량의 문헌자료를 찾아 읽었고 영상자료들을 무더기로 수집했다.   “‘조선전쟁’ 하나를 놓고 전쟁 당사자인 중국과 조선, 한국, 미국은 서로 다른 시각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쟁의 성격을 두고 “항미원조”, “조국해방”, “침략” 등 각이한 주장이 존립하고 있었으며 또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두고 시야비야의 론쟁에 휘말려 있었다. 아예 “조선전쟁”이요, “한국전쟁”이요, “6.25전쟁”이요 하는 등 전쟁에 붙인 이름마저 달랐다.   이때 박광섭은 중국인이자 또 조선족인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극심한 고민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림마다 모두 하나같이 제목이 없는것도 그의 이런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박광섭의 작품은 전쟁그림은 물론 예전의 수중인(水中人) 그림도 제목이 없는게 특점으로 되고 있다.   “그림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수 있습니다.” 박광섭은 그의 무제의 그림을 이렇게 설명했다.   “좋은 작품이라면 사람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남겨주어야 하지 않을가요.”*                                                                                                                      [중국민족] 제4기
1    얼굴이 바뀐 사람 댓글:  조회:3472  추천:150  2007-02-26
    서울에서 고향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김범진이라고 부르는 이웃동네의 사람으로 이전에 종종 내왕이 있었던 사이였다. 고향을 떠난 십여년만의 상봉이라 그렇게 놀랍고 기쁘지 않을수 없었다. 한참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옆사람이 그를 정모씨라고 부른다.   (분명 나와 같은 김씨인데 난데없이 정모씨라니?…)   그러나 김범진은 아주 담담한 표정이다.   “뭐가 그리 이상하니? 사실 난 몇해전에 언녕 이름을 바꾸었어.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 들어올수 없었으니까.”   나는 의아함을 떨쳐 버릴수 없었다.   “그건 왜요? 무슨 죄라도 지었어요?”   김범진은 서글피 웃었다.   “6년전에 한국신문에 요란하게 실렸댔어. 밀항선을 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해양경찰대에 잡혔거든. 그런 경력이 있으니까 감히 본명을 쓸수 있냐.”   6년전의 밀항선 이야기라니 어슴푸레 기억되는 것이 있었다. 중국신문에도 떠들석하니 실린 톱 뉴스였으니깐 말이다. 그 장본인이 고향사람이라니 참말 세상이 작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니까 무척 알고싶겠지?…” 김범진은 고향사람답게 그렇게 쉽게 말꼭지를 떼주었다.   90년대 중반, 중국에서는 려권 수속이 무척 힘들었다. 초청장이 동반해야 했고, 초청장이 있다고 해도 꼭 려권을 받을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때 돈만 두둑히 내면 밀항선을 탈수 있다는 고향사람의 소개에 김범진은 귀가 솔깃, 나중에 친지 4명과 함께 밀항을 단행한다.   김범진은 요녕성 심양에서 기타 밀항자들과 합류, 브로커와 함께 출발지인 장하(庄河)에 갔다. 브로커는 밀항선은 큰배라서 기슭에 닿일수 없다고 했다. 일행은 똑딱선에 몸을 싣고 약 2시간동안 검푸른 바다를 달렸다. 밤장막 아래 희부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길이 12메터, 너비 5메터짜리 나무배, 파도가 칠때마다 금세 자빠질 듯 기우뚱거렸고 그때마다 이음목이 무섭게 입을 반뼘씩 쩍쩍 벌리군 하였다. 목에 단박 오라 줄을 매더라도 그런 배에는 오르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는 이미 범의 잔등에 올라 탄 격이였다.   나무배는 가랑잎처럼 파도를 타고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난생 처음 배를 타는 시골사람들인지라 배멀미가 심했다. 여자들은 아이때 먹은 젖물까지 게워낼 심산인지 죽어라고 토악질을 하였다. 그렇든 말든 날이 밝아오자 선주는 20여명 되는 밀항자들을 비좁은 선창속에 떠밀어 넣었다. 창해속에서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배들에게 밀항선이라는게 발각될가 두려워서였다. 선창에는 빵과 물이 나름대로 충분히 실려있었다. 그러나 긴장감과 흥분, 배멀미 때문에 음식물에 손을 가져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내들은 애꿎은 술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바다위에 거밋거밋한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김범진은 기다렸다는듯 선창위에 올라갔다. 그때까지 배는 계속 공해를 달리고있었다. 선주는 배가 수시간후에 한국쪽으로 꺾어들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하루낮 하루밤을 자지 못한 선주의 눈에는 피발이 벌겋게 서있었다.    “성공할수 있어요?” 김범진은 아무래도 찜찜한 생각을 지워버릴수 없었다.   “근심말라 해.”   선주는 지도 한장을 꺼내 보였다. 한국 군산 앞바다의 지형도였는데 섬들의 위치, 레이더망 초소, 해양경찰대의 순라시간, 예정 항로 등이 자세히 적힌 첩보급의 지도였다.   “이래 봐도 여러번 군산에 가만히 드나들었다 해. 현지정보랑 일기예보랑 꼭꼭 챙긴다 해. 경찰에게 잡힌다거나 비바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해.”   드디여 나무배는 군산쪽으로 방향판을 돌렸다. 얼마를 갔을가? 멀리 륙지에서 깜박깜박 점멸하는 전등불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배에서는 나지막한 환성이 터졌다. 그런데 야단이 났다. 감기에 걸린것처럼 콜록거리던 엔진이 무슨 성깔을 부리는지 느닷없이 멈춰버렸다.        “젠장, 물이 들어갔다 해.”   선주는 사람들을 시켜 선창의 물을 퍼내게 하였다. 모두들 마음이 급한지라 손길이 분주히 빨라졌다. 그러나 엔진은 한식경이 지나도록 요지부동. 갑자기 머리우로 하얀 섬광이 펀뜩 스쳐지났다. 탐조등 불빛이였다.   “어이구 발각된거야.”   누군가 나지막히 비명을 울렸다.   아니나 다를가, 불과 몇분후 눈앞에 집채같은 거물이 세개 나타나 나무배를 울바자처럼 둘러막았다. 한국 군함이였다. 밀항자들은 군인들에게 압송되여 옴짝달싹 못하고 군함에 올라탔다. 군함 갑판에서 내려다보니 그들이 탔던 나무배는 손바닥만큼 조그마하게 보였다.      “얏따, 그놈의 군함이 크긴 크구려.”    “포로”가 된 와중에도 밀항자들은 신기한 구경을 했노라 저마다 혀를 끌끌 찼다. 시골에서 군함이라곤 TV나 영화에서 얼추 눈요기를 했던 그들이였다. 그들은 인제 바다 밑으로 추락된 신세는 잊어버리고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한국 군인들은 그런 어이없는 군상에도 짜증을 내지 않고 라면을 끓여주는 선의를 보여주었다.   배가 군산 부두에 도착하자 한국 언론사들이 벌떼처럼 달려왔다. 카메라들이 눈을 뚝 부릅뜨고 있는데다가 질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머리가 막 어질어질해졌다. 밀항자들은 군산 교도소에서 약 2개월 쭉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인물사진을 찍고 중국 관련측에 전송하여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에 시일이 어느 정도 걸렸던 것이다. 그들은 나중에 중국 대련에 강제출국 된후 중국인들로부터 또 반역자라는 눈총을 받아야 했고 약한 다리에 찜질이라고 중국측에 또 인민폐로 벌금 5천원(원화 80만원)을 물어야 했다.   김범진은 밀항사건이 터진 이듬해에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지전장을 뭉치로 날려버린 한국 꿈을 종이장처럼 허망하게 접어 버릴수 없었던것이다. 밀항선을 함께 탔던 친지 4명도 공무와 연수, 결혼 등 명목으로 모두 한국에 다시 들어온다.   “본명을 사용하면 밀항 경력이 들통날 수 있잖아? 그래서 성도 이름도 몽땅 바꾸었고 생일까지 바꾸었어. 말하자면 변성명을 한거지. 어떤 때는 내가 정모인지 김모인지 진짜 착각이 되는거야.”   김범진은 이른 아침부터 서울역에 나가 기웃거렸다. 혹여 일감을 찾을수 있을가 해서였다. 그의 기색을 보고 한국인 하나 다가왔다.   “자네 노가다를 뛰겠나?”   “예.”   “그럼 뒤를 따라와.”   김범진은 그렇게 일산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당 3만원을 받고 잡부로 일하게 되었다. 문틀을 세우는 일이였는데, 오야지(팀장)는 물론 기타 일군도 김범진에게 내처 허드레 일만 시켰다. 도면을 들여다 볼려고 해도 그때마다 무슨 핑계거리인가 만들어서 자리를 함께 할수 없게 하였다. 김범진은 어깨너머로 목수일을 배우고, 눈어림으로 도면 보는것을 배우면서 4개월을 보냈다.   “그 다음 홀로 서기에 성공한거야. 먼저 돈내기를 했지. 문틀 하나에 7천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이때 김범진은 잡부에서 한 단계 승진을 한 셈이였다. 그후 일에 미립이 트고 돈지갑이 두툼해지자 김범진은 타카, 못주머니 등 도구를 사들였고 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원천 오야지(팀장)에게서 하청을 받고 또 아래에 일군 6명을 두는 등 명실상부한 오야지(팀장)로 둔갑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게 1년 푼히 걸렸지. 그동안의 고생이야 이루다 말할수 있겠나.”   김범진은 지난해 4월부터 모 아빠트 건설현장에서 문틀 2만개를 맡았다. 인건비만 한화로 1억원대의 돈이 쏟아지는 큰 일거리였다.   “1월까지 이 일을 끝낸다면서요? 그후에는 어떡할건데요?”   “글쎄 말이다.” 김범진은 약간 주저하는 모습이다.   “사실 인제는 예약이 많이 들어오고있어. 그런데 아무래도 찜찜한데가 있어서 미뤄놓고있는 사정이야.”   그럴 법도 했다. 지난해 5월, 한국정부가 불법체류자들에게 자진신고에 잇따라 허용한 “합법적” 체류기한은 올해 3월까지인데 그때 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수하 일군들이 혹여 강제출국 당하면 맡은 일들을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그럼 내년 3월에도 귀국을 안 하려는 타산인가 보죠.”   김범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돈만 좀 벌었어도 당연히 귀국할거 아니겠어?”   김범진은 지난해 추석전까지 그간 산더미처럼 쌓인 빚돈을 깨끗이 물었다고 한다.   “아니, 한국으로 온지 5년이 넘는다면서요? 인제 겨우 빚을 갚아요?”   “처 때문에 빚이 또 늘어났댔어.” 김범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1998년에 김범진의 안해가 입국하여 식당에서 일하였다. 덕분에 1-2년만 맞벌이로 벌면 빚을 인차 갚겠다 싶었는데 때아닌 날벼락이 떨어졌다. 누군가 출입국사무소에 안해를 불법체류자로 신고하였던 것이다. 남편에게 아침상을 차려놓고 식당에 나간 안해는 그게 마지막 걸음이였다. 행방을 알리느라고 안해가 수용소에서 어렵사리 걸어온 전화에 김범진은 기가 막혀 한동안 할말을 잊어버렸다. 입국 4개월만의 일이였으니 입국비용 1천여만원을 또 고스란히 빚으로 만들어야 하였다. 김범진의 안해는 2년전에 변성명한 신분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이러니저러니 빚돈들은 수년동안 새끼를 치는 이자 때문에 원화로 약 5천만원, 인제 빚을 말끔히 갚아서 한 시름을 덜긴 했으나 그렇다고 냉큼 귀국할 수 없는 사정이다.   “고향에 돌아가 집 한채는 마련해야 하고 무언가 사업을 할 기반은 갖추야 할거 아니냐?…” 김범진은 어름 잡아 아직도 2년정도는 더 버티고 있어야겠다고 실토한다.   “뭐니뭐니해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거야. 중국에는 이렇게 좋은 돈벌이 기회가 없잖아. 우리 같은 사람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목돈을 쥐어 볼수 있겠어?”   김범진과 함께 일하는 일군들도 동감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우리들은 언제 강제출국당할지 모르는 신세잖아. 한푼이라도 더 모으려면 아득바득 일할 수밖에 없잖느냐.”    김범진은 지금 안해가 입국하여 한 지붕을 이고 살지만 사실 이름이 부부사이지 서로 이야기할 사이도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나는 오전 6시이면 일어나는거야. 건축현장에 7시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 저녁이면 12시가 넘어야 들어가기가 일쑤이지. 그런데 처는 저녁 10시에 들어와 오전 10시면 나가거든. 서로 잠을 자는 얼굴밖에 볼수 없단 말이야.”   핸드폰 벨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자주 끊어놓았다.   “또 술 먹자는 전화겠지.” 김범진은 시큰둥해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날마다 저녁쯤이면 의례 그런 주문이나 전갈이 들어온다고 한다.   “모두 고향사람들이야. 너도 잘 아는 이웃사람들이야.”   김범진은 한국에 고향사람들이 3-4백명 들어왔다고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한 가구에 거의 한명 꼴이니 불가사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고있는 중국조선족이 약 10만명, 그 엄청난 숫자를 피부로 느낄수 있는 순간이였다.   “우리 건축현장에 식당이 있는데 그저께 새로 들어온 아줌마가 글쎄 한고향사람이 아니겠어? 정말 서울이 작긴 작은 모양이야. 허허.”   김범진의 웃는 얼굴에서 금세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것만 같아 마음이 이상해진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 같기도 한 사람들이다. 서울 어덴가의 식당에서, 아니면 어느 건설현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불법체류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닿여오는것이리라. 사실 그들은 강제출국이 행하여지더라도 얼마후 또다시 달라진 얼굴로 입국할 터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정말 일을 많이 해. 돈만 된다면 어지럽고 위험한 일이라도 꺼리지 않아. 아마 조선족들이 없으면 금방 일손을 멈춰야 할 회사가 한두개만 아닐거야. 건설현장에서는 일군들이 거개 5-10명씩 함께 뛰거든.”    어덴가 호기가 넘쳤지만, 김범진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니였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일시적인 “인력 진공상태”가 이뤄질수도 있는 실정이다. 관련업계와 중소기업청 등에 따르면 외국인 근로자가 몰려있는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의 경우 지난해 5월이후 20%가량이 더 많은 임금을 주는 다른 회사나 인근공단으로 옮겨갔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기업들은 정상가동이 어려운 상황까지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말 자유왕래를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면 이처럼 맨날 마음 졸이고 살지 않을텐데. 우린 한 피줄이 아니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고국땅인데 왜 이렇게 남스럽게 피곤하지?” 김범진의 얼굴에는 한순간 그늘이 비꼈다. 그래서인지 가무스레한 그의 얼굴은 더군다나 흐릿해 보인다. 가물가물해지는 김범진의 얼굴에서 또다시 수많은 얼굴을 보는듯한 환영이 안개처럼 일어나 갑자기 머리속이 혼란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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