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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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백호랑이팀 “동산재기”의 돌파구 찾자면? 댓글:  조회:3028  추천:26  2011-06-19
  장백호랑이 “동산재기”의 돌파구 찾자면?                               □ 김철균       중국축구 갑급리그는 이미 제13륜까지 제1단계의 경기가 끝났다. 지금까지 연변장백호랑이팀은 2승 4무 7패로 마지막 두번째 순위까지 추락돼있다. 이는 애당초의 짐작보다 더 험하게 이그러진 모습이며 2005년 연변축구가 갑급리그에 들어선이래 가장 큰 위기라고 할수 있다. 그럼 장백호랑이팀이 왜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이렇듯 모든 팀들의 “제물”로 되였을가? 그 원인을 제대로 찾아야 이에 대한 대비책이 나오기마련이다.       공격조직자의 부재 득점력 부진의 원인     올시즌 장백호랑이팀의 부진은 외적용병영입의 실패로 인기된것이 많다는것은 모든 축구전문가들의 공동으로 지적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원에 시야가 넓고 패스감각이 뛰여난 공격조직자가 없는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보아진다. 외적용병영입을 놓고보면 우리 연변팀이 지난해외 거의 어느 시즌도 외적용병의 “덕”을 크게 본적이 없다. 허나 공격조직자가 잘 활약하면 그 허점을 미봉할수 있었다. 바로 공격망을 강화하는것이다. 즉 공격수만이 득점하는것이 아니라 미드필더 혹은 수비수도 득점할수 있는 시스템을 응용하는것이다. 이러자면 반드시 지난해의 박성같은 공격조직자가 있어야 할텐데 올해는 그런 선수가 없었으며 시즌초반 전반 공격선을 누비던 리광재마저 옛상처가 도지자 장백호랑이팀의 공격선은 그야말로 “이발 빠진 호랑이”에 가까울수밖에 없었다.         변선돌파, 쾌속침투, 대인마크 그리고…     이전에 연변팀으로 말하면 천학봉의 변선돌파, 허파의 쾌속침투, 강홍권의 대인마크 그리고 한청송의 수비감각 등은 갑급권에서는 물론 슈퍼리그무대에 내놓아도 별로 짝지지 않을 일품이였었다. 헌데 최근들어 천학봉이 퇴역하면서 천학봉같은 변선돌파기능을 가진 선수를 볼수 없는가 하면 올시즌 들어 허파, 강홍권과 한청송한테서도 예전과 같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수 없었다. 이들도 나이가 들어 “한물 간것”인가? 아니면 그 어떤 정서파동이라도 생긴것일가? 총체적으로 올시즌들어 보면 상대방 선수들보다 늘 한발씩 늦은 감과 노상 상대방의 전술에 끌려다니는듯한 감이 들군 했다.            감독의 책임감 두고 한마디     제9륜 장백호랑이팀이 상해동아한테 0 : 1로 패하자 관중석에서는 “감독사퇴”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구단의 부진을 두고 감독한테 모든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되며 또한 현재 연변에 장백호랑이팀의 사령탑을 맡을 적임자가 과연 있는가 하는것도 문제시된다. 하지만 구단의 부진에 대해 감독도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함은 마땅하다. 감독의 책임감이란 다만 기전술운영뿐이아니다. 우선 감독진구성을 잘 해야 하고 감독진과 전반 구단의 단결을 강화해야 하며 매 선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굴해야 한다. 감독의 기전술을 두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변화무쌍한 기전술을 도입하고 그 기전술이 선수들의 몸에 배기게 해야 한다. 오죽하면 “선수들은 땀에 절지만 감독은 피가 마른다”는 말이 다 나왔겠는가?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장백호랑이팀의 감독석은 절대 “벼슬자리”가 아니라고 봐야 할것이다.                ×            ×              ×    후반단계에 들어 연변장백호랑이팀에서는 아프리카 말리국가대표팀에서 뛴적이 있는 쏘메라 쿠리바리를 영입해 팀에 합류시키게 된다. 거기에 한국적 리광재선수의 상처도 거의 완쾌되여가는 상황, 팀 전력이 크게 개선될 조짐이다. 또한 누군가 공격하프로 공격조직을 잘해주기만 하면 장백호랑이팀의 중상위 부상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구단현황을 볼 때 “슈퍼리그진출”은 이미 지나간 물이나 마찬가지인만큼 선수들한테 지나친 압력을 주지 말고 기량껏 경기에 림하게 하는것이 가장 명지한 전략이라고 생각는다.
3    항일가요와 황정일할머니 댓글:  조회:3022  추천:30  2011-06-10
항일가요와 황정일할머니 □ 김철균   혁명을 찾아서 암초많은 바다로/ 감옥살이 두려우랴 혁명대렬 앞으로// 어느곳의 감옥이 내집으로 되든지/ 단두대에 오른대도 겁날것 없어라 적은 무리 잘살고 많은 대중 못사는/ 자본주의 노예된 그 설음이 원통해// 일어나라 로동자 농민과 녀성들/ 불평등한 자본사회 때려나 부시자 … 지난해 여름, 본편집부에서 조직한 통신원원고평의 모임에서였다. 경치가 아름다운 연길공원 뒤산이라 원고평의가 끝나자 자연히 술파티와 더불어 오락이 시작됐다. 통신원들이란 거개가 60-70대가 되는 로인들인지라 그 오락모임에서 나는 로인들의 정서에 알맞게 항일가요 몇수 불렀다. “적기가”, “결사전가”, “연길감옥가”, “메데가”,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청년돌격대”, “인민주권가”… 그러자 로인들은 젊은 나이인데 진짜 항일가요를 아는것이 많다면서 어디에서, 누구한테서 배웠느냐고 했다. 로인들의 그 물음에 나는 즉각 떠오르는 인물 한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녀성항일투사 황정일할머니였다. 내가 황정일할머니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것은 할머니의 친구였던 나의 셋째 고모에 의해서였다. 1972년 내가 16살이 되던 해의 여름이였다. 그때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살던 셋째 고모가 훈춘으로 오게 되였는데 어느날 내가 고모의 손목에 이끌려 황정일할머니네 댁으로 가게 되였다. … “이보게 동갑이, 얘가 부모없이 형님의 집에서 얹혀자라는데 동갑이 아들삼아 자래우면 랑패가 없을걸세.” 이에 황정일할머니는 “앞으로 얘가 뭐 나같은 늙은이하고 함께 있고싶어하겠나?” 이러면서도 은근히 기뻐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후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훈춘시복장공장에 출근하면서 18살 되는 견습공을 딸 삼아 집에 두고 보살펴주다가 20살을 넘기자 시집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같은 남자애를 아들삼아 두고싶은 마음이 많을상싶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나를 키워두던 형님이 “형인 내가 퍼렇게 살아있으면서 왜 동생을 남한테 주겠수”하고 거절하는통에 그 일은 그렇게 무산되고말았다. 이렇게 내가 황정일할머니의 양아들로 되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할머니댁으로 놀러다니군 했다. 홀로 살기에 생활적여유가 있어 내가 가면 맛있는 음식을 해주기에 다닌것도 있지만 더우기는 할머니와 함께 있노라면 많은 옛말을 들을수 있어서였다. 그러던중 한번은 내가 조선영화 “영원한 전사”에서 배운 삽곡을 코노래로 흥얼거렸더니 할머니가 대뜸 그것을 받아 부르시는것이였다. 나가자 마중가자 밝은 동이 튼다/ 싸우자 총과 칼로 우리의 길 닦자// 용감히 걸음도 굳세게 청년들 모두다 나서자/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청년돌격대… “어머님께서도 이 노래를 아시나요?” “그래 내가 아마도 너보다 더 옛날사람이니 조금은 더 알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할머니는 “녀성해방가”, “혁명가”, “인민주권가” 등을 거침없이 줄줄 부르시는것이였다. 그속에는 지금 대한민국의 국가로 불리우는 “태극가”도 망라되여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지금와서야 비로서 알게 되였지만 그 옛날 전체 조선인들이 부르던 “애국가”로서 동북항일련군내의 조선인병사들이 불렀는가 하면 태항산의 조선의용군들도 불렀으며 중경의 한국독립군 병사들도 부르던 노래였다. 다르다면 곡이 지금의 한국국가의 곡이 아닌 외국곡에 가사를 붙여불렀다는것뿐이였다. 한편 할머니를 통해 나는 많은 항일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대황구항일유격구의 이야기, 연통라자항일유격구의 이야기…그외 일본의 이또히로 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는데 놀랍게도 중국내 안중근의 활동을 동조한 사람중에는 황정일할머니의 부친인 황병길선생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모친인 김숙경녀사와 언니인 황정신, 남동생인 황정해 등도 모두 항일혁명에 투신하였는데 특히 남동생 황정해는 항일련군 패장으로 항일련군 제1로군 위증민 부총사령의 경위원으로 임무를 집행하다가 24살 일기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기도 했었다. 그럼 할머니의 항일력사는? 말치 않아도 할머니 역시 그제날 항일련군 피복공장의 일군으로 유격대의 원호사업과 녀성해방사업에 투신한 항일투사였다. 다만 항일유격대와 떨어져 흑룡강성 동녕현 경내에서 활동중 일제에 의해 체포되였고 후에 항일유격대의 쏘련경내로의 이동으로 인해 더는 항일투쟁에 참여하지 못한것이 할머니의 생애에서는 가장 큰 오점이였다.  하긴 력사적원인으로 봐도 1940년초에 들어서는 일제의 가혹한 토벌로 동만경내의 항일근거지가 초토화로 된것도 사실이였다. 이 력사로 하여 해방후 할머니는 오래동안 항일간부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로 인해 억울해한적이 없었다. 오히려 공산당이 있었기에 못살던 만백성이 사회의 주인으로 될수 있었다고 말씀하시군 하였다. 할머니에 대해 탄복되는 다른 한가지라면 옛날로인들이라면 당연히 흘러간 옛노래인 “홍도야 울지 말라”, “나그네설음”, “번지없는 주막” 등에 잘 알고있었으련만 나한테 이런 노래에 대해선 일절 배워주지 않고 오직 항일가요뿐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 70년대까지만도 우리 중국조선족의 항일가요에 대해여 부르지 못하게 할 때 할머니가 나한테 많은 항일가요를 배워주었다는것은 우리 조선족의 항일력사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바라는 소망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 또한 할머니를 통해 항일가요를 배움과 동시에 우리 조선족의 항일투쟁사에 대해 알게 된것도 사실이였다. 나뿐만이아니라 정영석 등 많은 작가들도 항일제재를 다루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할머니를 통해 력사적제재를 제공받기도 했었는데 그중 채광춘선생의 회억록 “눈보라치는 밀영”에서의 많은 사실은 황정일할머니가 제공한것였다. 한편 할머니한테 자식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1930년대에 결혼한 할머니한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해방이 되자 동북민주련군에 입대시켰고 후에 조선에 나가 조선인민군으로 개변되였다가 조선전쟁중에서 전사했다. 이렇듯 할머니의 가정은 아버님 황병길선생으로부터 형제들인 황정신, 황정해 모두가 혁명투사였도 아들까지 혁명에 목숨을 바친 혁명가정이였다. 할머니는 1987년에 력사문제가 풀리여 그 이듬해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던중 고질병이던 고혈압, 관심병 등으로 사망하였다. 그때 할머니의 슬하에는 13살 때부터 키워주던 시동생의 딸 김련순이가 있었다.  할머니의 양자로 될번했고 또한 할머니를 통해 많은 항일가요와 항일력사를 알게 된 필자로서는 오늘 이 한편의 글로 할머니를 추모함과 아울러 할머니가 즐겨불렀던 “녀성해방가”를 적으면서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권리를 박탈한 자본사회에/ 청춘의 붉은꽃 못피는 원한// 아느냐 그대여 녀성동무들 남몰래 조용히 우는 눈물은/ 청춘의 고운 낯에 주름 생기고// 매맞아 얻은 병 정말 싫어요…     녀성들 우리 동무 다 일어나라/ 부르죠아제도를 없애버리고//동등한 권리 위해 총들을 들자…  
2    요즘의 고민거리- 자녀의 학교 붙이기 댓글:  조회:2682  추천:46  2011-06-07
    요즘의 고민거리- 자녀의 학교 붙이기           요즘 들어 나한테는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가지 고민이 생겼다. 바로 이제 7월 달에 곧 소학교를 졸업하게 될 14살 짜리 딸애의 중학교 진학문제 때문이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는 연길시에서는 그제 날부터 자녀가 소학교를 졸업하면 자신이 거주하는 구역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전엔 연길에 호적이 없는 애들을 학교에 붙이려면 돈을 많이 써야 하거니와 무등 애를 먹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18년전 바로 내가 훈춘으로부터 금방 연길로 왔을 때 우리 가정은 한동안 연길에 호적을 옮기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 12살짜리 아들애는 훈춘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연길로 오게 됐는데 학교 붙이기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연길호적이 없는데다가 학교마다 애들이 넘쳐나 자리가 없었고 거기에 애의 공부성적마저 그닥지 않는지라 어느 학교에서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내가 근무하는 편집부의 부장님이 뛰어 다니며 인맥을 통해 아들애의 입학문제를 해결했는데 그때의 돈으로 약 2000원 가량 날려 보내고서야 아들애를 연길시 어느 한 모퉁이의 학교인 동산소학교에 붙일 수가 있었다. 그 때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이번에는 우리 부부가 연길에 와서 본 딸애가 이젠 중학교에 붙게 되었다. 18년이 지난 오늘날 14살 되는 딸애를 중학교에 붙이자고 보니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사연인즉 호적이 있는 구역에 따라 딸애가 붙을 중학교는 연길시 8중인데 애가 한사코 8중엔 가지 않고 13중에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부모로서 딸애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교가 학생이 많아서가 아니라 학생수가 너무 적어서 자기네 학교로 오게 되는 학생을 다른 학교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학교마다 눈이 “화등잔”만하게 되었다. 인맥을 통해서도 안되었고 돈을 아무리 쓴다 해도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딸애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13중에 보낼만한 능력도 없는 그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인맥과 돈을 내서라도 딸애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맞고 그름을 떠나서 중요한 건 18년 전엔 학교마다 학생이 넘쳐나서 모두들 배 부른 흥정을 하던 것이 요즘 와서는 왜 학교마다 학생수를 채울 수가 없어 안달복달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연길시로 놓고 말하면 그래도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서 조선족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조선족 학생의 래원이 고갈되면서 태평소학교와 중앙소학교가 합병했고 동산소학교는 한족반을 설치하여 한족학생을 받기 시작했으며 중학교 또한 11중과 8중이 합병된 상황이다. 연길시 상황이 이렇다 할 때 기타 시와 현, 더우기 농촌의 상황은 더구나 어떠하겠는가?! 그야말로 조선족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1998년 우리 부부가 둘째 아이를 출산할 때만 해도 웬간한 농촌의 남성 청년들 대부분이 장가를 갈 수 있었고 둘째 아이까지 낳는 현상이 가끔씩 있었으나 지금 농촌은 물론 도시의 남성 청년들조차 웬간한 재력이 없이는 장가들 엄두도 못낸다. 또한 애를 낳을 수 있는 가임기 여성들도 결혼을 거부하는 “싱글현상”이 점점 많아지는가 하면 설사 결혼해도 출산을 거부하는 현상도 가끔씩 있으며 두번 째 아기를 보는 부부는 진짜 가물에 콩나듯 드문 상황이다. 한 민족의 부강을 이끌자면 교육이 따라가야 하고 교육이 따라가자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많아야 할텐데 중국 조선족의 현상은 그렇치 못하고 있다. 이제 최근에 출산된 애들이 몇년 후에 학교에 붙을 때가 되면 우리 조선족 학교가 도대체 몇개 소나 남아 있을는지?
1    프로필 댓글:  조회:2515  추천:53  2011-06-07
김철균1959년 8월 26일 생대학문화메일: jinz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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