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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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한국을 떠나며 댓글:  조회:2378  추천:1  2012-08-16
조선족으로 산다는 것은 (1) 한국을 떠나며 서언 올해는 중한수교 20주년을 맞는 해이다. 내가 처음 한국에 간 것은 바야흐로 중한수교가 맺어지던 1992년 5월이었으니 중한수교 20년 세월을 몸소 체험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에서 조선간첩들이 살포한 삐라를 주어들고 아연실색하던 일이며 멋모르는 조선족들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러 경찰에 연행되던 일이며 ‘불법체류 강제추방 반대’운동과 조선족사회의 말초신경을 건드렸던 ‘국적회복운동’등 사건을 지켜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과거가 오늘 이글을 쓸 수 있는 밑거름으로 되었고 그 과거가 오늘 조선족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온 지 벌써 3년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연변도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고 사람들의 정신세계도 일사천리로 내달리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 또 중한동포지간에는 여전히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중국에 살면서도 여전히 해외조선족의 입장과 견해를 버리지 못하고 산다.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해외조선족들의 마음이 내가 쓰는 글의 관점으로 통하는 것도 의심할 바가 없다. 1,인천으로 ‘이민가방’을 끌고 버스정류소로 향하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말 그대로 한국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다. 바래주는 사람도 작별할 사람도 없지만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니 외롭지도 원망스럽지도 않다. 며칠 전에 8년 가까이 한국생활을 하면서 손때 묻은 물건들을 원룸 앞에 내 놓으며 이웃들에게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나 버렸다. 그러고 나서 동대문과 남대문 명동과 종로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딸애와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교보문고에 들려서 중국에서는 살 수 없는 책들을 한 아름 안고 나오니 ‘이민’ 준비가 완료되었다. 텅 빈 방에 돌아와 이민가방을 마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일치감치 인천에 가서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다음날 귀향길에 오르는 것이 좋을 법했다. 시간을 보니 아직 막차가 남아 있는 시간대다. 버스정류소에 도착하니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나 되었다. 이맘때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저녁회식자리에서 술을 거친 사람들이라 나처럼 멀쩡한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 둘씩, 셋씩 끼리끼리 모여서 저녁에 못다 나눈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지간에 얽힌 오해소지를 해명하느라고 모두들 바쁘고 바쁘다. 한국은 술 취하는 것이 흉이 아니다. 그렇다고 술 안 마신 사람들이 너그러워서도 아니다. 그저 훗날 자기가 취할 때를 대비해서 선심을 쓴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아저씨, 몇 시요?” 아까부터 만취해서 혼잣소리로 중얼대던 아저씨 한 분이 나를 응시하면서 더듬더듬 물어온다. 버스정류소 팻말에 간신이 기댄 몸이 큼직한 가랑잎처럼 흐느적거린다. “버스 올 때가 다 됐어요.” 그렇게 말 한 마디를 내 뱉은 것이 고주망태아저씨랑 인연이 되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이민가방’을 버스 트렁크에 넣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이미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빼곡했다. 버스가 자국을 떼자 고주망태아저씨가 사단을 일으켰다. 손잡이도 잡지 않은 채 여자들 속에 서있던 아저씨는 차가 흔들리자 이 여자를 ‘안아’주고 저 여자를 ‘업어’주다 보니 여자들이 덴 겁을 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그녀들의 남자일행이다. 소리를 질러보고 손으로 밀쳐 봐도 소용이 없자 멱살 잡기로 이어졌다. 당황한 것은 고주망태 아저씨다. 가뜩이나 몸 건사가 안 되는데다 주변사람들이 단합하여 덤벼들자 당황망조한 아저씨는 고의가 아닌데 왜 난리들이냐며 맞받아 주먹을 날린다. 버스 안은 금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긴 아저씨한테는 술을 과음하여 몸을 주체 못한 죄 뿐이다. 더 물을 것이 있다면 그 몸으로 택시를 잡지 못하고 발디딜자리 없는 버스에 올라탄 불운일 것이다. 옆에서 보노라니 아저씨는 여자들을 ‘안아’주고 ‘업어’주었지만 음흉한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집에 도착하여 골아떨어지고 싶은 초조함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다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만해!” 나는 급기야 아저씨를 낚아채며 젊은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던 싸움이었는지라 금시 조용해 지면서 나의 뒷말을 따를 심산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태수습의 기대를 자기들보다는 선배벌이고 고주망태아저씨의 ‘편’을 들어주는 나한테 걸어온 것이다. 이럴 때 나 몰라라 하는 한국인은 없다. 물론 나 몰라라 하는 조선족도 없다. 가끔 고향에서 한국인들이 도움을 청해올 때면 한국에서 당한 것이 하도 쌓여 모르쇠를 댈가하다가도 결국은 도움을 주고 만다. 한국인들로부터 받은 모욕과 비하, 속된 인간취급을 받은 세월을 생각하면 한국인이 눈앞에서 죽어나간다고 해도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가도 어느 순간 봄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젠장.......)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아저씨를 어디에 처치할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때 눈치 빠른 아주머니 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아저씨를 끌어다 그 자리에 눌러 앉히고는 옆에 지키고 섰다. 그런데 뒤늦게 얼굴에 긁힌 피자국을 발견한 아저씨는 분통이 터진다며 벌떡 일어났다. 간신히 아저씨를 자리에 눌러앉히니 아저씨는 다시 용을 쓰며 일어난다. 그렇게 일여덟 번을 제압했더니 아저씨는 그제서야 주눅이 들어 버렸다. 좀 뒤에는 아예 그 지저분한 얼굴을 나의 몸에 묻고 곤히 잠들어버렸다. 그때야 주변의 젊은이들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말 한마디 없이 광기를 부리는 아저씨를 제압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존경어린 눈매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평온을 찾는다. 혹자는 끄덕끄덕 졸고 혹자는 소곤소곤 일행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버스가 정류소에 정차할 때마다 젊은이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고마움을 표하고는 하차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생활에서 한국인들이 내가 조선족임을 의식하지 못하던 때가 가장 살맛났던 시간들이었다. (mora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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