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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등산가족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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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마안산에서 길 따라 사라진 그 사람 댓글:  조회:2140  추천:23  2009-01-30
글 이슬 빛 사진 김성길  시작하는 말     우리가족산악회 회원 22명이 함께 한 산행이 6년에 나지만 별사고 없어서 마음이 편안하였다. 산행이란 여럿이 야산에서 하는 산행이여서 안전이 첫째이다. 산이란 비슷한 산과 길이 쌍둥이 같이 많이 있어서 길을 오낄 기회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산행하면서 길을 오낀 일은 몇번 있어도 큰 사고를 본 일은 없었다. 내가 맨앞에서 길을 찾고 안내한다. 뒤 사람들은 따라온다. 난 솔직히 산행할 떄 방향에 무척 신경을 쓴다. 지남침을 보면서 방향을 판단하기보다 산행경험과 산의 지세를 자세히 관찰하고 산을 오를때 산을 내릴 방향과 산맥을 시야속에 기억해둔다.  지도를 사용한지도 이자 일년정도다.  솔직히 하루 서너시간 하는 산행에서 산정상에 올라 보면 지도가 필요없이도 무난하게 하산할수 있는 때가 많다.    산은 아래에서 올리쳐다보기보다 정작 올라보면 판국이 딸 때가 많다. 우리의 작은 키가 어찌 거인보다 엄청큰 산위의 지세를 한눈에 볼수 있을가? 한걸음두걸음 올라가보아야 알수 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올라야 할 산정상을 눈에 두고 내려갈 방향을 파악해두면 길을 오끼는 사고는 피할수 있었다. 산정상의 좋은 점은 제일 높은 곳이기에 그 산에 올라서 내려갈 방향과 산아래 모습을 한눈에 파악할수 있어서 하산로선을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있다. 문제는 하산하다가 나무숲속에서 산정상에서 보아두었던 산맥이 숲속에 가려서 이겐가 저겐가 하면서 잘못타면 딴곳으로 갈수 있다. 이런 일은 몇번 있었다. 그래도 별탈이 없은 것은 길은 틀려도 우리모두 다 함께 있었기에 다른 인명사고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산에서 큰 걱정은 길을 잃어도 여럿이 함께 있으면 서로 궁리를 합치고 서로 도우면서 종국에는 안전지대에 도착할수 있지만 한 사람이 길을 잃었을 때는 십분 위태로운 것이다. 바로 그 한사람이 잃어지는 일이 2008년도 11월 28일 연길시삼도만에서 왕청으로 가는 도중 마안산(马鞍山)에서 발생했다. 정말로 그때의 긴장하고 조마조마하고 위급한 상황은 우리가족산악회산행력사에서 처음있는 위기의 하루였다.  그 사람이 잃어졌다    그날 산행은 원 주등산협회판공실주임으로 일하던 김주임과 삼인행산악회회장 산무가 한 뻐스에 다 앉을 사람만큼 여러개 산악회에 통지하여 자원으로 이루어진 산행이였다. 목적지는 연길시 삼도만에서 왕청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안산이였다. 일행 38명이 아침 8덠시좌우에 연길시 중우호텔문앞에서 뻐스에 올라 목적지로 향하였다. 약 한시간 더넘게 달려서 마안산아래 태평촌에 닿았다. 일행은 뻐스에서 내렸다.     그날 따라 날씨가 추웠다. 4-5급의 찬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가 많이 떨어졌다. 일행은 김주임이 알려주는 대로 산맥을 타기 시작하였다. 첫 시작부터 가파로왔다. 나는 맨 앞서서 첫산등성이에 올랐다. 다음은 목적한 산을 향해 산등성이를 타고 걸어갔다.  산등성이를 타고 한시간정도 걸었는데도 김주임이 소개하던 산모양이 나타나지 않았다. 산맥을 타면서 우에 이어져 있는 저산인가고 하면 아니였다. 아무튼 그냥 걸었다.  과연 마안산정상이 시야에 나타났다.    " 저산이 분명 주봉이겠구나!"     나는 걸음을 다우쳤다. 주봉 바로 밑에 닿으니 경사도가 아주 가파로운데다가 발밑표면은 작은 자갈들과 부식토들이 얼지 않고 엉켜있어 디디면 아래로 미끌어지였다.  그래도 올라야 했다.  나는 악쓰고 발끝에 힘주고 우로는 듬성듬성 서있는 나무가지들을 잡으면서 네발걸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맨 먼저 오른 것이다. 내뒤로 승희가 나타났다. 다음 다른 산악회의 두분도 나타나고 그 뒤에 우리가족산악회의 녀걸 리미화가 나타났다. 그러니 제일 먼저 오른 강팀 다섯 사람속에 셋이 우리가족산악회회원이였다. 나는 가슴이 뿌듯해왔다. 산정상에서 산아래가 손금보듯 환히 보여왔다. 우리가 타고온 뻐스가 있는 쪽 큰 길도 보이였다.  뒤에 사람들은 한참 떨어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이 산꼭대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올라오기는 불가능했다. 정상에서 땀을 들이면서 미화가 꺼내놓는 과일을 여럿이 나누어서 먹었다. 찬바람은 더 세찼다. 좋이 반시간이 지나서야 산중턱 허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였다. 그들도 산정상에 서있는 우리를 보았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소리치고 손을 저었다.     “저 사람들은 빠르기도 하다. 어느 새 산꼭대기에 가 서있니?”     주봉아래 대원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산정상으로 헐레벌떡 박근할 때 우리는 안전한 하산길을 더듬어 반대방향으로 내려갔다. 산행은 막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는 산을 오르던 길로 되돌아 가지 않는다. 이는 산행하는 사람들의 규칙이기도 하다. 우리가 산정상에서 상중턱까지 내려왔을 때 산을 오를수 있는 사람들은 다 정상에 올라있었다. 그들은 우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소리치고 손을 흔들었다. 정상에 오르는 시간적 순서는 다르지만 누구나 다 정상에 올라 정상의 쾌감을 맛보는 심정은 꼭 같았다. 먼저 하산한 우리는 뻐스가 서 있는 큰 길까지 내려왔다. 그때는 오후 한시가 되였다. 산에서 먼저 내려온 우리는 멜가방을 열고 과일이며 과자며를 꺼내놓고 요기를 하였다. 점심은 이미 오늘 산행을 조직해온 분들이 팔도 어느 식당에다 마련해 놓고 있었었다. 체력순서대로 하나둘 산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뻐스에 앉아서 우리가족산악회회원들을 지켜보았다. 모두 8명이 갔는데 7곱명이 제시간에 내려와 뻐스에 올랐다. 한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성호가 나타나지 않았다. 좀 있으면 나타나려니하고 기다렸는데 그냥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연변유선텔레비죤방송국 국장 성룡철이 나에게 말하였다.     “김성호가 처음부터 급작스레 산을 오르는 통에 바빠하더라구. 나도 마지막행렬에 서 있었는데 김성호가 자기 뒤에 있어서 기다렸다가 같이 올라갔댔소.”     그러자 우리가족산악회의 김성길과 윤혜자가 토설하였다.     “오늘 김성호가 이상하게 우리말을 듣지 않고 길따라 내려가더라이.”     "어디서?"     "주봉아래에서"     "주봉까지 다 올라갔소?"     "야, 올라갔소. 내려올 때 우리따라 산맥을 타지않고 주봉바로 아래에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갔소. 거 길로 가면 안된다고 소리쳤는데두 그냥 가더라이."     우리는 생각해보았다. 김성호는 산에서 방향감각이 뛰여난 사람이다. 산의 지세와 위치를 정확히 분석하고 하산길을 옳게 선택하는 속에 수자가 있는 밈음직한 분이였다. 허나 산행하면서 보면 백번산행에서 99번은 옳게 길을 선택하다가 한번은 틀릴때가 있는 분이였다. 오늘이 한번 틀리는 산행이 되지 말았으면 했다.  헌데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게 문제였다. 오후 두시가 넘었다. 오후 네시가 넘으면 해가 넘어간다. 산속에서는 해가 더 빨리 진다. 그러니 남은 시간이 두시간 정도였다. 그저 김성호가 내려오려니하고 기다릴순 없었다. 그날 산행조직자도 당황해났다. 나도 당황해났다. 우리가족산악회 성원이 잃어지면 회장인 나에게도 책임이 컸다. 나는 일어섰다. 사람을 찾아야 한다. 혹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빋디뎌 쓰러져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김성호는 혈압이 높고 혈탕이 높고 혈질이 높은 분이다. 이미 의사로부터 술을 금하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였다. 나는 우리가족산악회의 체력이 있고 산에 파악이 있는 김성길, 리승희, 김춘동이를 불러 산을 올라 찾기로 하였다. 오늘 산행조직자 김주임과 산무도 산에서 유리한 통화기를 들고 두조로 나뉘여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나와 김성길, 산무가 직접 산으로 올랐다. 리승희, 김춘동, 김주임이 아래쪽으로부터 훑기 시작하였다. 나는 우리가 올랐던 산정상 바로 밑까지 올라갔다. 갑자기 하늘이 더 음침해지면서 눈보라가 흩날리였다. 눈이 많이 왔더라면 발자욱을 따라 사람을 보다 쉽게 찾을수 있으련만 산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거기서 김성호가 걸어갔다고 짐작되는 길도 발견하였다. 이때 리승희도 나타났다. 우리는 길따라 추적하면서 김성호를 애타게 불러댔다. 몇십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한참가다 보니 그 길은 더 깊은 산속으로 뻗어있었다. 김성호가 깊은 산속으로 그냥 들어갈수가 있을가? 김성호의 사유대로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허나 김성호는 길은 꼭 큰길과 이어져 있을 것이라고 이 길따라 가면 꼭 뻐스가 서 있던 큰길까지 갈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냥 산속길로 걸어갔던 것이다.  김성호가 걸어 들어간 산 풍경    우리는 인가가 없고 더 깊은 산속으로 김성호가 들어갈리 없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가능하게 산에서 내려가다가 발목을 접질러 지금 어디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릴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산골짜기를 샅샅이 살피면서 소리쳤다.     “김성호”     "......"    얼마나 목빠지게 소리쳤는지 모른다. 골짜기 홈채기를 다 훑어도 김성호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결국 길역까지 나왔다. 산에서 핸드폰 통화도 안되였다. 신호가 통하지 않는 벙어리지대였다. 나와 승희가 큰길까지 나오니  뻐스가 서있던 거리까지 5리는 잘 되였다. 사람을 찾지 못하고 불어치는 동서풍을 맞받아 뻐스가 서있던 태평촌으로 향하였다. 태평촌에 향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였다.   길잃은 그 사람의 몸부림     김성호는 그냥 길따라 걸었다. 그는 산에서 길에 대하여 무척 선행하고있었다. 산길은 꼭 큰길과 이어져 있다는 리념으로 길에 대한 신심이 남보다 무척 강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길따라 한시간 넘게 걸었는데 앞에 나타나는 마을도 없고 큰길도 없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더 높은 산과 골짜기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한참을 깊숙히 들어온 후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뒤로 돌아설 것인가? 허나 이미 자기가 선택하여 들어선 길을 되돌아가자면 숨이 가쁜 거리였다.     “가보자 조금만 더 가보자"    김성호는 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기 싫었다. 그렇게 조금조금 하면서 걸어가다 종국에는 서버리였다. 자기가 선택하여 걸어 들어온 길이 다시 높은 산으로 이어져 있으니 말이다. 생각대로 이 길이 종국에는 아까 뻐스타고 온길과 이어져 있다고 확신했었는데 그게 아니였다. 김성호는 맹랑해서 힘이 빠지였다. 완전히 잘못들어섰음을 의식했다. 그때 보니 해도 산에 막혀보이지 않았다. 골짜기는 급기야 어두워 오기 시작하였다. 가슴이 쿵당거리였다. 식은 땀이 등골에 쫙 배여났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은 똑바로 차리라고 했다. 김성호는 주위산들을 살피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고 높은 산을 정하였다. 낮은 산은 산위에 올라가도 다른 산에 막히여 정확한 하산 방향을 확립할수 없으니 말이다. 반드시 가까이에 있고 제일 높은 산 정상에 올라야 했다. 방향을 정확히 판단할 시간도 노루꼬리만치 남았다. 성호는 산을 기여오르기 시작하였다. 단말마적으로 기여올랐다.      산 정상에 올라 초모자산을 찾았다. 바로 저멀리에 초모자산의 륜곽이 우렷이 안겨왔다. 지난해에 한번 다녀온적 있는 초모자처럼 생긴 초모자 산이였다. 그 초모자 산아래에 마을이 있고 국도가 있는 것이다. 그 방향으로 가면 틀림이 없다. 혹시나 해서 김성호는 핸드폰을 꺼내였다. 부회장 김성길에게 전화하니 통화가 안된다. 다시 주인사국 윤혜자한테 전화하니 신호가 통하였다. 김성호는 숨찬소리로 말하였다.      “윤혜자, 나…나를 기다리지 말고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먼저 돌아가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귀로가 지체되게 해선 안되오!”     윤혜자는 목이 꺽 막히였다. 추운겨울 저물어가는 산속에서 길잃고 헤매는 김성호가 구원을 바라지 않고 먼저 가라고 한다. 자기때문에 함께 온 다른 산악회 사람들까지 귀로가 지체되여선 안되기 떄문이였다.     이게 사람의 소린가? 정말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남부터 생각하고 배려하는 착한 마음의 고상한 령혼셰계일수 밖에 없다. 빛나는 아름다움이였다. 산을 감동시키는 소행이였다.        그때는 이미 우리가족산악회 김성길, 리승희, 김춘동, 오늘 산행조직자 김주임과 내가 남아 있고 기타분들은 먼저 뻐스타고 귀로에 올랐었다.     그때 김주임은 길역 농부의 집에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여러가지로 작전방안을 짜고있었다. 어두워도 소식이 없을 경우 마을 촌민들을 동원하여 산을 훑는 방안이였다. 그런데 이때 이미 뻐스타고 떠난 윤혜자가 김성길이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김성호와 방금 통화가 있었는데 초모자산을 마주보면서 그쪽으로 하산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 농부의 집에 들어선 나와 리승희는 그 반가운 소식을 듣고 코가 쩡해났다. 소식이 있으니 되였다. 헌데 그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사위가 동굴속처럼 어두워 진후였다. 산에서 어떻게 하산할가? 앞이 보이지 않은 산에서 말이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산아래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면 어쩔가?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말짱 나쁜 생각부터였다. 김성길이가 뻐스를 보내고 자기 사업터에 전화를 걸어 남돕는일에 적극 나서고 차운전기술도 좋은 황광훈을 불렀다고 했다. 나는 농부의 집에서 앉아 기다릴수 없었다. 농부하고 손전지를 빌려가지고 길역에 나가서 원모양으로 흔들었다. 손전지등불을 보고 김성호가 정확히 하산 방향을 판단하라고 말이다. 손전지를 든 손이 얼어드니 다른 손을 바꾸어 그냥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길따라 삼도만쪽으로 그냥 손전지를 흔드면서 걸었다. 꼭 마치 김성호가 그 쪽에서 하산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때 다가오는 차소리가 났다. 차는 나의 앞에 와서 멈춰섰다. 바로 김성길이 부른 황기사였다. 나는 기사한테서 더 큰 배수의 손전지를 얻어들고 차뒤좌석에 앉아서 창문을 열고 흔들어대고 황기사는 차를 천천히 몰면서 차나발을 밤하늘에 련신 울리였다.      손전등이 그냥 원모양으로 흔들고 차나발소리가 그냥 띠띠띠 울린다. 그렇게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농부네 집으로 들어갔다. 문떼고 들어서자 김성호가 무릎을 꿇고 앉아 더운 물에다 과자를 자시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그저 김성호를 꼭 끓어않았다. 무슨 말을 할수가 없었다. 살아온 그가 반가왔다. 탈없이 나타난 그가 반가왔다.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애탔다고 당한 사람은 더구나 힘들었을것이 아닌가? 탓할수 없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이게 어느 땐가?       “그래도 혜자의 김치지지미와 리미화가 준 도마도를 먹고 배고픔을 이겨냈소. 정말로 기진했소. 이제 산을 더 넘어야 한다면 나는 탈진해서 쓰러졌을거요. 길은 꼭 큰길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사 그 산길이 다시 산우로 올라가지 않겠소? 그때에야 난 잘못들어섰음을 자각하였소. 억울했소.”     그가 믿어온 대개는 리치에 맞는 길은 꼭 큰길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 길에 대한 리념이 현실앞에서 부정되는 순간이였다.      아무튼 탈없이 김성호가 안전히 내려왔으니 시름이 놓이였다. 우리일행은 귀로에 올랐다. 까막세계에서 차한대가 차불빛으로 어둠을 가르면서 연길로 질주하고있었다. 우리가족산악회의 리미화며 윤혜자가 걱정이 되여 전화를 걸어왔다. 사람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큰 시름놓으면서 김성호에게 전화를 바꿔달라고 해서는 위로를 해주었다. 정말로 한번 크게 놀란 사고였다. 김성길이는 자기의 말로까지 생각해놓고있었다.  일단 김성호가 사고나면 자기는 사업터의 령도자리에서 물러않겠다고 말이다. 나도 역시 그랬다. 정말 인명사고가 나면 나부터 문초를 당해야 했다. 우리가족산악회는 내가 이끄는 산악회이다. 나부터 책임을 져야 했다. 책임감은 정말로 태산처럼 무거웠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김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한번 더 위안해주고 싶어서였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그의 안해였다. 연변병원피부과 교수로 있는 착하고 현숙한 안해였다. 김성호의 안해는 전화를 받자 잠간 기다리라고 하면서 “여보, 전화왔어요”라고 하였다. 그 소리에 나는 가슴이 쭝해 왔다. 김성호가 탈없으니 망정이지 정말로 사고가 났다면 김성호의 처가 나하고 가만있겠는가고 말이다. 사고를 피면하고 아직도 어떤 사고가 났는지 영문을 모르는 김성호의 안해였다. 김성호역시 자기가 길잃어 산에서 헤맨 일을 부인에게 실토한 것 같지 않았다. 워낙 말수가 적은 그고 할말 하지 말아야 할말을 분촌있게 잘 알고 있는 수양있는 분이니 말이다. 건강을 위하여 그냥 산행을 해야하는 그로서 산행에 불필요한 말은 금물이였다.  김성호가 전화를 받자 나는 한마디 했다.     “나요."     우리는 가까운 친구라 소리만 듣고도 상대를 알고 있었다.     "오늘 푹 휴식하오!”     느낌으로 하지 않은 맘속말도 깊게 알아듣는 사람하고 긴 잔설은 필요없었다.         “고맙소.!”     정말로 함께 6년을 산행하면서 가족같은 사이로 지내는 친밀한 동지가 길잃어 자칫하면 큰 인명사고까지 날번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였다. 산행은 장난이 아니다. 안전산행이 첫째였다.  내가 이끄는 산악회가 산에서 사고가 난다면 책임은 우선 나부터이다. 함꼐 산행하는 회원들의 안전을 념두에 두고 체력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앞선 사람과 뒤떨어진 사람, 방향을 잘 판단하는 사람과 오끼는 사람, 백번 잘하다가 한번 실수하는 사람, 산에서의 이모저모, 이구석 저구석을...처음부터 끝까지 안전한 귀가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념려하고 과학적으로 조직하여 모두가 자기집으로 안전히 돌아가겠끔 주도세밀해야겠다는 생각이 뼈속까지 파고드는 하루였다.                                                                                                                                               2009년 1월 30일
66    새 그물망에 걸려든 참새와 콩새 댓글:  조회:2421  추천:26  2009-01-28
글 이슬 빛     오늘은 기축년 춘절 휴가일 사흘째다. 1월 28일 수요일이다. 우리가족산악회는 오늘 왕청현 백초구 가마밉군산으로 산행하기로 계획하고 아침 9홉시에 새로 지은 연길로뻐스정류소에서 뻐스에 올랐다. 우리일행은 7곱명이였다. 모두다 춘절후 사흘째에 만나는지라 모두다 열정적으로 악수하면서 새해에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하였다. 뻐스는 한시간 달려 백초구진정부소재지에서 멈추었다. 우리일행 7곱명이 내리니 올라타는 분들에게는 앉을 자리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가마밉굽산을 향해 곧추 걸었다.       가마밉군산은 백초구구역내에서도 제일 높은 산이다.  해발이 800을 넘는다. 먼데서 보아도 산이 근사하다.  산으로 올라가는 산맥은 여러갈래였다.  2005년도 여름에 우리가 이산을 올랐다가 내려올때 길을 오껴 북쪽 서위자골안으로 20리나 걸어간적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겨울이여서 발자욱을 남길수 있기에 길잃을 념려는 없었다.  마을들을 지나니 앞에 눈덮힌 논밭이 나타났다. 우리는 목적지를 눈저울질로 직선거리를 잡아 논밭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작은 도랑물이 얼어붙은 곳을 지나니 논밭머리에 집한채가 있는데 개들이 멍멍 짖어댔다. 오리도 닭도 있었다. 우리는 개가 싫어서 멀리 피해서 걸었다. 그렇게 산정상까지 두시간을 할애하였다. 산에서 내려올 때 새로 만든 콩크리트 털렁다리를 건너 바로 아래쪽 마른 숲속을 지나 봄과 여름에 논물을 대는 꽤나 큰 도랑밑바닥에 미끄러져 내리는데 새들을 잡기 위해 나무막대기에다 새가 통과할수 없는 그물을 쳐 놓은것을 발견했다. 새두마리가 걸려 있었다. 나는 죽었거니 하고 보았는데 두 놈다 대가리를 움쩍거리고 있었다. 한 놈은 참새였고 다른 한놈은 콩새였다. 두놈이 그물에 걸려 많이 애를 쓴 모양이였다. 이대로 놓아두면 낙제없이 죽을 것이였다. 아직도 살아있는 놈을 죽게내버려둘수 없었다. 나와 춘동이 미화가 그물에서 새를 풀어내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주먹만도 안되는 새가 실같은 그물에 얼기설기 감겨있었다. 날칠수록 더 감겨든 것이다. 그 가는 실같은 그물을 우리는 춘동이 휴대하고 있는 칼로 하나하나 끊어다. 참새와 콩새는 우리손에서 그물에서 해방되였다. 나는 참새를 위로 올리뿌렸다. 날아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참새는 날지 못하고 떨어졌다. 나는 다시 참새를 주먹안에 담아 쥐였다. 이놈 날아가라는데도 왜 다시 떨어져? 춘동이가 말하였다. 새가 그물에 걸려 맥이 진해 그런것같다고 말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참새는 내 손에서 가만히 있었다. 날아날 궁리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자기를 구해준 은인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나의 손안이 따뜻해서인지? 그런데 콩새는 은인을 몰랐다. 미화의 손에서 구원데고도 그냥 주둥이로 미화의 손을 찍어댔다. 참새는 아주 얌전했다. 나는 참새를 집까지 가지고 가서 길러볼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논밭에 들어앉은 개가 짓는 집주위에 도착하였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도랑에 늘여놓은 새그물에 여러가지 새들이 십여마리나 걸려있었다. 죽은 놈도 있고 산 놈도 있었다. 집주인도 밖에  나와서 우리를 지켜보고있었다. 우리는 마음이 아팠다. 새도 생명이다. 인간처럼 똑같이 살 권한이 있다. 추운 겨울 먹이 찾아 농가집을 찾아내리는 새를 농가집주인은 그물을 쳐서 잡는다. 잡아서 털을 뽑고 구워서 먹을 것이다. 혹은 시장에 내다가 팔수도 있을 것이다. 눈덮힌 하늘과 땅이 떵떵 언 논벌에서 살기 위하여 여기저기 먹이를 찾아 날아예는 새들은 농가집주인이 공간에 쳐놓은 새그물에 언제 걸려들어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 새들은 새그물을 의식못하고있다. 그저 먹이찾아 그곳을 지나다가 걸려들어 죽게 된다. 안타까웠다. 사람의 손에서 사람과 같은 권력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새들이 새그물에 걸려 하나둘 사라지는 현실은 좋은 일이 아니였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자연을 능동적으로 개조할줄도 알지만 또는 능동적으로 파괴할줄도 안다. 나와 미화의 손에 쥐인 참새와 콩새는 백초구큰길가에까지 우리손에 들려 왔다. 이제 뻐스가 오면 우리는 백초구를 떠나야 한다. 새도 놓아주어야 했다. 나의 손에 있는 참새는 그냥 떠날념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새가족과 형제들은 백초구에 있을 것이였다. 정든 고장을 떠나면 외로운 것이다. 내가 가져다 길러도 좋치만도 그래도 가족이 있는 고향이 더 좋치 않는가? 나는 다시 새를 놓아주었다. 새는 낮게 날아갔다. 내손에서 좀 쉬였는가부다. 미화손에 쥐여있는 콩새는 그래도 운수좋게 촬영가 김성길의 사진에 모델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사진을 찍는 사이에도 그냥 주둥이로 미화의 손을 찍어댔다. 참 명을 구해준 은인을 모르는 콩새였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떻고? 콩새는 육감적으로 알고있었다. 그물에 걸려 날수 없을 때도 애나서 주둥이로 그물을 찍어댔을 것이고 미화의 손에서 모델로 촬영할 때도 자기가 누군가의 손에 잡혀있다고 의식했을 것이다. 그러니 살겠다고 단말마적으로 그냥 결사항전을 한 것이다. 콩새에 비하면 그래도 내손에 있던 참새가 정이 있었다. 내가 놓아주지 않으면 그냥 내 손안에서 연길 우리집까지 춘절손님으로 동행했을 것이였다.    자유를 얻은 참새와 콩새, 우리는 그들이 다시 그 새 그물망에 걸려들지 말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2009년 1월 28일    
65    찬 바람 불어치는 901고지 댓글:  조회:3195  추천:36  2009-01-11
글 이슬 빛 사진 박창호, 손룡호     기축년 1월 10일 토요일, 낮 날씨최고온도 령하 10도, 4-5급의 서북풍이 있음.  날씨가 이틀전부터 뚝 떨어졌다. 쌀쌀한 날씨는 얼굴을 따갑게 때린다. 대개 추운 날씨에는 산행하는 회원이 줄어든다. 몸이 오싹 떨려 바깥출입도 하기 싫다. 그래서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오늘 여차여차한 일이 있어서 산행을 갈수 없다고 말이다. 실은 추워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 리해가 가는 일이다. 사람들은 추운 것을 싫어하고 따스함을 바라는 것이 본능적 욕구인것 같다. 1 출발지점에서 만난 여섯 사람     내가 시가지 중심에 있는 서시장뻐스역에 도착하니 8덟시가 금방 넘었다. 우리가 타고가야 할 뻐스의 출발시간은 8시 20분이다. 짐작에도 오늘 몇사람이 안되리라고 생각했다. 누구누구는 올거라고 짐작하고 기다렸다. 일년 365섯날을 그냥 모아산 산행과 토요일마다 우리와 함께 산행해온 리미화는 꼭 나타날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과연 저 멀리에서 빠알간 옷에 빠알간 꼭다리모자를 쓴 리미화가 손을 저으면서 나타났다. 미화는 지난해 말 한국으로 방문가서 두주일 머무르고 오다보니 거의 25날을 못본 셈이다. 반가웠다. 지난해 우리가족산악회의 우수회원이고 천사같은 녀자였다. 다음에 윤혜자가 나타났다. 사실 윤혜자는 체력이 약한 분이고 휴가일이면 할일이 많은 녀자였다. 오늘같이 날씨가 추울 때 몸을 옹송그리고 집에 눌러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였다. 그는 문을 차고 나섰다. 그대로 산행을 선택한 것이다. 뻐스가 떠나기 일분전에 우리회원 김성호가 뻐스문을 밀고 올라탔다. 역시 우리산악회에서는 체력이 약한 분이였다. 우리는 그의 거동이 할아버지 거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길아바이"라고 우스개로 곧잘 부르군 하였다. 연길아바이도 이 추운 날 산행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남자 둘에 녀자 둘이였다. 이때 뻐스문이 열리면서 산인행산악회의 올해 60살에 나는 박창호 선생과 회원 북경아가씨도 올라탔다. 그들이 가고저 하는 목적지가 901고지였다. 그러니 목적지가 같은 것이다. 참 즐거웠다. 산행할때는 우연하게 같은 산으로 가거나 산에서 다른 산악회회원들과 만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수 없었다. 같은 산행리념을 가지고 같은 산에서 만난다는 것은 우리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데서 마음의 배가 부르기 때문이였다. 우리 여섯은 같은 뻐스에 앉아 출발하였다. 2 소나무 풍경    우리가 가는 곳은 연길서 백리떨어진 오도저수지 발원지가 가까운 곳 해발 901메터되는 곳이였다. 지난해 마지막 날 마지막 날이 너무 아쉬워서 뭔가 뜻깊은 일로 채우고 싶어서 달려간 산이였다.      멀리서 보아도 소소리 높이 솟아있는 산과 산중간 산턱에 울뚝불뚝 솟아 있는 바위와 그 바위우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소나무 군체, 정말 한번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였다. 뻐스는 한시간 십분을 달려 9홉시 30분에 901고지산아래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도착지점에서 집체사진을 찍고  피줄처럼 기슭까지 뻗어내린 여러갈래 산맥중에서 소나무가 일매지게 올리자라면서 산정상까지 뻗어 오른 산맥을 선택하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소나무는 항상 바위가 있는 곳에서 자라기에 풍경이 좋을것이니 말이다. 첫시작부터 가파로왔다. 산을 오를수록 4-5급의 찬바람이 사정없이 갈겨대여 모두가 나름대로 마스크로 수건으로 얼굴을 막아대였다. 입으로 뿜겨 나오는 더운 김은 수건과 마스크밖에서 서리가 되여 얼어붙고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땀은 머리칼끌에서 고드름이 되여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올해 산행치고 이렇게 찬 날씨와 인정사정없는 찬 바람은 처음인 것 같았다. 산을 오르면서 바위위에 뿌리내리고 이악스레 자라나는 소나무의 굴강한 형상에 모두가 입을 벌리였다. 처음으로 만난 소나무는 원줄기가 번개에 맞았는지 밑둥부터 잘려나가고 없었다. 희귀한 것은 그 밑그루 옆으로 가지가 뻗어나가 잘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족산악회 리미화  우리가족산악회 윤혜자 산인행 산악회 북경아가씨  산인행산악회 박창호   우리가족산악회 김성호  우리가족산악회 손룡호 두팔 사이로 보이는 곳이 901고지이다    녀자 셋이 순간을 기억해본다 바람을 등지고 간식을 먹어야 했다   산위에서 내려다 본 오도저수지 물길     좋은 풍경을 놓칠수 없는 리미화, 박창호, 김성호, 북경아가씨는 박창호선생의 디지털 사진기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흠모한다. 아름다움은 독특한 개성이다. 다른 것과 다른 형태로 자신감있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런 아름다움에서 자기의 정신적 소망을 내비치게 된다. 자기가 하고저 하고 아직은 실현못하고 있지만 꼭 실현하고픈 그런 리념이 담긴 대상물에서 현실적실현감을 느껴가는 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흙이 아닌 바위위에 솟아있는 소나무가 동안뜨게 나타났다. 정말로 소나무는 특수한 나무였다. 나무중에서 아주 생명력이 강한 나무였다. 전문 바위틈새에 뿌리내리고 꿋꿋이 살아가니 말이다. 산에서 바위가 솟은 곳은 대개 정상이 아니면 험한 곳이다. 험한 곳은 바람이 세찬 곳이기도 하다. 방정맞게고 소나무는 바로 이런 험하고 모험이 많은 바위를 골라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맵짠 찬바람의 세례를 받으면서 바위위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보면서 정말로 소나무같은 굴강한 의력과 강한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오늘 산행을 하는 우리 여섯명은 찬바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소나무성격을 조금은 구비한 셈이다. 3 소나무와 잔디풀     우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걸었다. 산등성이 한쪽은 바람맞이였다. 우리가 그 바람맞이 등성이우에서 위로 걷기에 전신이 바람에 로출되였다. 한발두발 쌩쌩거리는 찬바람을 등지고 위로 걸었다. 발밑에서 한뽐도 안되는 잔디풀군체도 바람에 사정없이 바르르 떨고있었다. 나의 시선은 그 풀을 살피고 있었다. 그 풀은 이상하게 바람받이쪽에 나 있었다. 반대편의 바람이 자는 쪽엔 하나도 없었다. 의식적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살자고 바람받이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있었다.  뜨개실같이 한오리씩 한뿌리에 붙어서 기발처럼 나붓기는 잔풀은 이미 겨울맞아 잎은 말라 노랗게 죽어있었지만 아직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풀을 살며시 잡아 당겨보았다. 풀은 끊어지지 않았다. 끈기가 있었다.  바람받이에 바위가 있고 바위틈새에 소나무가 뿌리내리고 서있고 그 아래에서 잔풀은 군체를 이루면서 가득 자라고있었다. 소나무를 동무하여 자라는 아주 작으나 강한 풀이였다. 또 바람이 불어쳤다. 소나무는 끄떡않고 서 있지만 풀들은 일제히 한쪽으로 쏠리면서 또 기발처럼 표표히 나붓기였다. 멋있는 장관이였다.      한국시인 김수영이 1968년도에 쓴 시 "풀"이 떠올랐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여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더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웆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년)"     풀의 완강성, 유연성, 생명력, 슬기로움을 형상적으로  철학적 깊이있게 잘 묘사한 명시였다. 더구나 한 여름의 파아란 풀이 아니라 이미 겨울맞아 엄동설한에 푸름을 거두고 색바랜  잎으로 그냥 뿌리에 이어져서 채찍같은 바람에 나붓기는 모습은 한 자리에 끄떡 않고 우뚝 서 있는 소나무와 너무나 대조적이였다.     그렇다. 험한봉엔 강한 소나무만 서 있는 것이 아니였다. 약하고 키작고 뼈없는 잔풀도 뿌리내리고 자라고 있었다. 잔풀도 소나무처럼 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강자였다. 소나무나 잔풀이나 다 바람세찬 산봉에서 생존하기 적합한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합리한 존재이리라. 키큰 풀들은 산위에서는 보기 드물다. 바람세찬 높은 곳은 키큰 풀들이 생존하기가 적합치 않은 곳이였다. 산기슭에는 키큰 풀들이 가득 자라고있다. 자연속의 소나무와 그 소나무밑의 잔풀, 체적대비에서는 아주 선명한 차이가 나지만 같은 높이에서 동무하여 자라고있다. 소나무의 다정한 친구로서 소나무 그늘밑에서 소나무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주면서 생을 함께하고 있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늘 체력이 좋은 나와 박창호, 리미화를 소나무에 비한다면 윤혜자, 김성호와 북경아가씨는 바로 그 잔약한 잔풀이리라. 허나 그 잔풀들은 목적지에 도착한 시간이 우리와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높이, 똑같은 로정을 다 함께 걸었다. 윤혜자는 무릎의 통증을 이겨내며 내리막길에서는 뒤걸음질치며 무릎의 압력으로 오는 아픔을 이겨냈고 북경아가씨는 발목관절과 체력소모로 인한 부담감을 한보한보 자기걸음에서 이겨냈다. 아픔을 이겨내고 목적지까지 도착한 사람은 다 성공한 사람이다. 소나무처럼, 잔풀처럼 말이다. 9홉시반부터 시작한 산행이 오후 두시가 림박하여 뻐스가 달리는 국도에 닿았다. 옹근 네시간 반을 산맥을 탔던 것이다.  왼쪽으로부터 박창호, 윤혜자, 리미화, 북경아가씨, 김성호 그리고 사진찍는 나였다. 3 맺는 말       찬 바람불어치는 901고지, 소나무와 잔풀, 우리에게 아주 소박하면서도 확실한 철학적사색을 던져주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아마 몇천년을 그렇게 그 자리에서 지고피고 했을 것이다. 그 숭엄한 모습과 웅숭깊은 이미지를 오늘에야 다시 되뇌이면서 남으로 뻗은 락타등같은 크고작은 산봉우리들을 20개 넘었다.    찬바람 불어치는 901고지, 바람맞이에서만 자라는 잔풀, 찬바람이 불어쳤기에 바람에 나붓기는 잔풀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었다. 한참이나 지켜보면서 철학적뿌리까지 캐보고 싶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그 풀을 한낮 흔한 잡초로 발밑에 짓밟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니 소나무, 잔풀, 바람과 우리, 다 자연의 식솔이였다. 자연의 산물이였다. 서로 의지하여 생존하는 불가분리의 물체였다. 인간은 그저 본 것을 음미하고 읊어대는데서는 자연보다 썩 발달하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산, 소나무, 잔풀, 바람 그리고 우리였다.   (2008년 1월 10일)
64    2008년도 유머사진 댓글:  조회:2671  추천:36  2009-01-07
글 이슬 빛 사진 김성길    2008년 52차 산행을 하면서 회원들에게서 자연히 흘러나온 유머동작들을 놓치지 않고 촬영한 김성길에게 감사를 드린다. 지나간 사진을 오늘 다시 보며 그때의 재밋는 순간과 폭소를 함께 그려보는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수 없다.                                        
63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사진도 아름답다 댓글:  조회:2728  추천:28  2009-01-04
글 이슬 빛 사진 김성길    그녀는 우리가족산악회에 가담하여 2008년을 함께 산행을 해왔다. 토요일마다 하는 산행차수가 일년 52날인데 그녀는 50날을 산행하였다. 그리고 매일 모아산산행을 하였으니 출국한 보름날을 빼고나면 350날을 산행한 셈이다. 그녀는 산행을 열심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에서 남들에게 넉넉하고 자상한 사랑을 선물하였다. 그는 먼저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였다. 먼저 남을 생각하고 남의 아픔을 생각하고 남이 챙기지 못한 점을 생각하고 적극 보듬어 주려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천사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당연히 올해 우수회원이다. 착한 마음은 착한 행동을 낳는다. 우리가 사진기로 촬영한 제한된 그녀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올려본다.                          
62    물이 똑똑 새여 흘러서 형성된 미녀의 형체 댓글:  조회:2522  추천:38  2008-10-21
 글 사진 이슬 빛     내가 근무하는 곳(연변인민출판사) 3층 난방시설에서 물이 새여 똑똑 떨어진다. 그 물이 다 고이면 고개를 다소곳이 앞으로 숙이고 두손을 마주 잡고 입을 살짝 열고있는 아름다운 녀성의 그림이 이루어진다. 물은 아래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다. 그러니 물로 형성된 녀성그림자체가 낮은 땅바닥이란 말이된다. 건축로동자들이 그렇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발견할수 있는것이다.                                                                (2008년 10월 21일)
61    从五道后山至八道2008.10.4 댓글:  조회:2624  추천:53  2008-10-09
从五道水库山门沿山脊上山,先后翻越855、849、687、670高地,从互助新介村西1千米处下山至高速路,再至八道,用时5小时。与绿叶情山岳会联合登山。
60    大五道-四方台山-808高地-五道山庄-小五道2008.9.30 댓글:  조회:2457  추천:42  2008-10-08
动感相册:
59    틈 타서 책 읽는다. 댓글:  조회:2495  추천:38  2008-10-01
사진 김춘동 글 이슬 빛  뻐스타고 산행 갈때 뻐스 뒤좌석은 책읽기에 편리한 장소다.    맨 앞에서 걷다가 뒤의 대원들을 기다리며 숲속에서 조용히 책꺼내들고 읽기도 즐겁다. (2008년 10월 1일)
58    우리가 준비한 먹거리풍경 댓글:  조회:2287  추천:30  2008-09-23
글 사진 이슬 빛    집에서 하루 세때를 챙길때 감수보다 산행하면서 점심한 때를 챙길때 감수는 비할바도 못된다. 산행하면서 전신의 피가 용용히 흐르고 창자의 찌꺼기가 소화되고나면 배는 항상 촐촐하다. 먹고싶다. 그래서 먹는 점심은 어찌나 맛있는지? 자기혼자 먹자고 챙겨오는 음식이 아니였다. 함께 산행하는 회원들과 맛을 나누고저 선물하는 마음의 꽃이였다. 오늘도 챙겨온 맛나는 음식꽃을 흠상해본다.      (2008년 9월 20일 연길이란향 석인룡산우에서)
연길의란 석인촌  9월20일 호박 보며 고향의 정취 느껴집니다 kobi  몰개  뿌레기  벌거지 낭기  taktu boo
小河龙   9.13   옥시다락  doohan 돗다리 조팝  이팝   보살    ile 겨릅등hashu ashan.ici ashan
봄이면 나물 뜯는 사람들    가을이면 버섯 따는 사람들  뱀장어  칠성고기 모새미치  붕어  버들개   쫑쫑개  boo hashan
54    [re] 연변주활협회성립 1주년경축 활쏘기경기대회 진행 댓글:  조회:2728  추천:77  2008-09-03
                                                                         글 사진 이슬 빛      9월 2일, 너무도 뜻깊은 날이다. 바로 어제같은 2007년 9월 2일 중국연변주활쏘기협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였다. 활쏘기협회발기자 리호성을 회장으로 모신 활쏘기협회는 성립되는 그날 한국서 증정한 련습용 활 두개를 가지고 연변민속박람회중한활쏘기경기대회를 진행하였었다. 그때로부터 빨리도 흘러간 1년, 활쏘기협회는 자기의 지정된 계획대로 하나하나 일들을 벌려왔다. 달달이 회원내 경기를 진행해왔고 중학교학생선수배양훈련에 정진해왔으며 7월중순에 열린 길림성삼익컵성인활쏘기경기대회에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싹쓸이 해왔다. 설비도 성주유관관리부문의 지지와 국내외동인들의 후원하에 원래의 두개로부터 열개로 늘어났으며 회원구조도 애호가들로 정착하면서 량과 질의 통일을 가져와 사람마다 선수다운 소질을 구비해가고있다.  활쏘기협회실외훈련기지도 나날이 실용화되면서 국제경기표준장소로 탈바꿈하고있다. 연변주활쏘기협회의 앞날은 주체육국과 민정국사단법인관리국의 정확한 지도와 령도밑에 활협회전체회원들이 일심으로 뭉쳐 앞에 놓인 하나하나의 곤난을 슬기롭게 극복해가면서 더 좋은 앞날을 당겨오고 더 희황찬란한 성적을 이룩해갈것이다.    그들은 협회성립 1주년을 맞으면서 《연변주활쏘기협회성립1주년 활쏘기경기대회》를 진행하였다. 국제표준경기규칙대로 사격거리는 30메터, 화살 6섯발을 6섯번 쏘아 36발의 성적을 합하여 총점수순위가 나오게 하였다. 그날 우연히도 훈련기지마을주위를 돌아보려고 내려왔던 주정법위원회 서기 고걸도 활쏘기훈련기지를 발견하고 호기심이 부쩍 동해 관심을 보이였다.  경기협찬은 회원-류재섭과 부인-전련화양이 좋은 토종개를 잡아 선물하여 활협회성립 1주년경축분위기와 자치주성립 9.3명절을 맞는 즐거운 축제분위기를 고조로 부상시키였다. 그럼 경기장면속으로 들어가본다.   성적표                                         순서       경기성적        성명               단위명칭                                         1             286점          류재섭      북경한국회사직원                                         2             278점          리호성      연변주활협회회장                                         3             277점          강일섭      연변제1고중교원                                         4             264점          정림호      연변제1고중교원                                         5             195점          리승희      연변텔레비죤방송국직원                                         6             182점          한신학      연변건축공사퇴직직원                                         7             170점          손룡호      연변주신문출판국직원                                         8             165점          안미란      연변주도서관직원                                         9             164점          김춘동      연변삼유헌유한회사직원                                        10             160점          리미화      우리가족산악회 회원 (아래 유관사진)    연변주정법위원회서기 고걸, 처음으로 활시위를 당겨본다.  "처음 그것이 시작이다."     1등 286점 류재섭, 동년시절부터 활쏘기에 애착을 가지고 자기절로 싸리나무로 활을 만들어가지고 훈련해왔던 소년, 그는 오늘 당당히 훈련용활을 들고 제1의 성적을 올리였다.  "동년의 꿈은 꿈으로 끝나는것이 아니였다." 2등 278점 리호성, 활협회성립의 꿈을 현실로 이루어놓은 사나이, 형제많은 가정의 맏이로 부득불 한국서 박사공부까지 마치고 배운것을 아프게 접고 장사길에 들어선 사람, 오늘 현재 형제들을 다 부자로 크게 하고 20여만원을 투자하여 땅을 사고 거기에 연변주활협회훈련기지를 선뜻이 선물하였다.  > "할일은 많고 래일은 밝다."    3등 277점 강일섭, 북경올림픽 연변주홰불기수, 그의 규범된 동작은 일푼도 틀림없다. 완미하다. 그는 사업도 인생도 틀림없이 밀고나가고있다. "아서라, 승리의 월계관은 완벽한 동작에 있다."    4등 264점 정림호, 오랜만이다. 드바쁜 교원사업때문에 몇달을 훈련현장으로 달려오지 못하였다. 10환이 어디냐? 숨죽이고 당겨본다. 노리는 속에 인생의 즐거움이 있다. "목표는 10환, 인생도 10환"    5등 195점 리승희, 사는 인생, 당기는 인생, 놓아주는 인생, 우리연변사람들에게 좋은 "고향의 아침"프로를 선물해주면서 달려온 사나이, 그는 다시 노린다. 더 좋은 프로를, 더 좋은 문화를! "좋은 아이디가 생산력이다."     6등 182점 한신학, 침착히 순서를 기다리면서 먼저 쏜 회원들의 과녁을 살펴보며 자기가 날려보낼 화살의 위치를 정해 본다. 자기를 알고 남을 알아야 우승방도가 잉태된다. 매일과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훈련현장에 와서 익혀온 솜씨를 조용히 과시할 때가 된것 같다.  오늘 경기에서 그는 여섯발을 겸손하게 쏘지 않았다. 그의 성적은 여섯발이 모자라는 상황에서의 성적이였다. "피타는 노력없이는 좋은 성적이 나올수 없다."     7등 170점 손룡호, 필명 리휘, 협회창시자의 한 사람, 우리가족산악회의 회장, 주신문출판국출판물시장관리처 책임자, 나이보다 머리가 홀랑 벗어져 겉늙어 보이는 사나이, 한쪽 눈은 철저히 감고 한쪽 눈은 부릅뜨고있다. 그가 창작한 아동소설 "피의 호소"가 올해 중한아동문학상을 수상, 단편소설 "울부짖는 성"이 제28회 윤동주문학상 소설본과상 수상, 활쏘기성적은 변변치 못하지만 인간생활의 구석구석에 두발을 깊숙히 빠지우고 세상 아픔을 진맥하며 생활의 진실을 예술의 진실로 승화시키기 위해 창작의 활시위를 놓치 않고 있다.   "세상은 내것이면서 아니였다. 세상은 내것이 아니면서 내것이였다."       8등 165점 안미란, 주도서관관 부관장으로 매일과 같이 우리민족문화의 력사성과 완전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국가1급활쏘기재판원영예까지 따낸 불굴의 녀사, 그가 노리는것은 우리민족문화의 뿌리였다.  뿌리의 보존이였다. 뿌리의 전람이였다. 뿌리의 재생산이였다. 뿌리의 활성화였다.  "문화가 깊은 민족이 세상을 장식한다. "     9등 164점 김춘동,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라 할가? 자기를 세상에 태여나게 씨를 뿌려놓은 아버지가 눈앞에 퍼렇게 살아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멀리하고 있는 아버지가 있는 고아다. 올해나이 사십중반, 그는 아버지가 없는 사랑속에서도 비뚤게 살아오지 않았다. 올곧게 살아왔다. 몇해전에 "연변기업가 대사전"을 출판했고 올해에는 "연변식품의약전문가위원회"성립에 중요한 책사역할을 하였으며 "왕청대기록색식품유한회사" 부총경리로 일했었고 지금은 "연변삼유헌문화전파유한회사"의 사장으로 일하고있다. 자기가 걸어온 고난많은 인생의 아픔을 딛고 자기의 총명한 지혜를 사회재부의 재창출에 몰붓고있다. "나는 나같은 고아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싶습니다."      10등 160점 리미화, 우리가족산악회의 투사, 화목한 가정주부, 훌륭한 어머니, 우리가족산악화의 "천사"다. 생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알고 인생의 가치를 절실히 알고 있는 그녀, 그는 매일 모아산산행을 하고있다. 건강한 몸으로 남을 돕는 자선사업에 자기의 시간과 정열을 쏟고있다. 자기리익챙기기에 혈안이 되여 부정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그녀의 천사다운 소행에 얼굴이 뜨거워지고있다. 오늘도 그는 오전부터 활쏘기현장에 와서 저녁식사준비로 정성을 다하였다. "남을 돕는것이 나의 일과예요. 저는 사람을 고르지 않아요. 일을 고르지 않아요."       오늘의 영웅 류재섭의 부인 전련화, 류소정의 어머니, "남편의 애호는 내 사랑의 일부예요. 우리남편이 성에가서 금메달을 따오고 오늘 또 일등을 하였어요. 나 우리소정이를 올림픽활쏘기금메달확보자로 키우겠어요. "어머니의 야심찬 소망이였다. 가능한 소망이였다. 축하를 올리고싶은 소망이였다. 이제 소정이가 우리주를 대표하여 아니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세계올림픽활쏘기경기에서 금메달월계관을 따올 그날을 즐겁게 그려본다. "어머니가 안은것은 금메달 딸애였다."        " 나도 소개해줍소! 나는 룡연7대 총각 방성희올시다. 올해나이 45섯, 아직도 장가를 못갔어요. 형님과 둘이서 녀자없는 초가집에서 지금도 살고있어요. 형님과 둘다 다 장가가고 싶은데  어째 안돼요. 활협회훈련기지에서 벌초도 하고 관리도 하고 회장님이 시키는대로 일하면서 살고있어요. 그래도 오늘은 즐거워요. 활쏘기시합을 구경하니까 재밋네요."   "인간이 응당해야 할 구실도 조건부족으로 리행해 못가는 우리농촌총각들의 아픔을 해결할 방도는?"    자기가 쏜 화살의 정확한 위치와 점수를 확인하는 강일섭     열심히 성적합계를 내고있는 재판원들 "성적은 자기절로 말하는것이 아니다. 항상 공정한 재판원들이 정확히 계산하여 공포하는것이다."   함께 남기는 기념촬영이다. 누가 빠졌을가? 사진에 얼굴을 못내비친 무명영웅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정(笑呈)아 잘 커!!!   저녁연회는 이제 시작이다. 이 상에서 벌어질 즐거운 화제거리에 궁금증이 간다. 명년 2주년에 다시 만나자!  "밥상의 주인은 사람이다. 긍정적 삶의 밥상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향기이다. " (2008년 9월 3일)
53    石岘东兴草帽顶子2008.08.30 댓글:  조회:2692  추천:42  200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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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帽顶子:从石岘东兴村山谷向东一里地过小溪向南沿山路登顶即可。homin 산디쌀  쉰 귀신       
51    延吉开发区荷花2008.8.24 댓글:  조회:2670  추천:51  2008-08-29
http://www.56.com/p48/v_NzM1OTI5NDE.html
50    大炮山2008.8.23 댓글:  조회:2602  추천:48  2008-08-26
http://www.56.com/p26/v_NzM0NjgzMTE.html动感相册
룡정 대포산   그리고  공농  I had no idea this was coming.물둥기 새비  새우  이웃 이붓  hvwa
48    西大顶子2008.8.17 댓글:  조회:2709  추천:37  200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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