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남의 소설 읽기와 내 소설 쓰기
― 소설가 정세봉과 평론가 김호웅이 본 우리 소설
정세봉 (소설가)
《문학과 예술》지에서 우리 조선족소설을 두고 김호웅 교수와의 대담을 해달라는 요청에 수락은 했었는데 정작 임(臨)해 보려니까 생각이 많아짐을 어쩔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과연 내가 나설 자리인가 하는것이고 둘째는 만약 나설 경우, 내가 과연 뭘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사려(思慮)입니다.
하나는 구설수(口舌數)가 싫고 다른 하나는 만약 진행할 경우, 책임성이라는 부담감이 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며칠을 내내 고민, 고민을 하다가 일단은 솔직한 생각들을 진솔하게 나누어보기로 마음을 잡았고, 진행해 보다가 안 되면 《투항》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가 싶었음을 우선 말씀 드립니다.
소설편집을 10여년 해보는 과정에 항상 느끼면서도 무심했던 것인데 지난해부터 소설가학회의 카페(홈페이지)에다 우리 문단 작가들의 《대표작 모음집》을 꾸미는 일을 시도, 진척시켜보는 와중에 우리 작가들의 문학(작품)이 많이 유치하고 서툴다는, 예전에 무심했던 사실이 하나의 《문제》로 집요하게 머리속에 눈 뜨는 것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하긴 수십년을 《갇힌 세상》에서 살았고 또한 《표현의 자유》의 한계성 등 여러 외(外)적인 원인으로 그렇게 될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것도 당연하다고 할수가 있겠지요.
반성해 보면 나 자신도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서툰 문학에 만족을 하고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리유가 될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치 사회적, 력사적 환경과 여건 등 외적인 요소들때문에 수준 높은 문학을 할수가 없었다는게 합리적인 또는 절대적인 리유로 될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지요.
지구촌의 여러 대륙, 수많은 나라, 수많은 민족들의 개개의 력사와 삶도 무겁고 고단하고 처절하기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과 그런속에서 오히려 수준 높은 문학, 큰 작가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련관시켜 보게 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더군요.
김교수님께서도 당연히 이러한 문제, 또는 이런 문제들을 포함한, 우리 소설문학과 작가들에 대한 더 넓은 안목과 견해들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많이 궁금합니다.
김호웅 (평론가)
이렇게 인터넷으로 만날수 있다니 세봉 선생님과 제가 서로 다른 별나라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드네요. 한편 달리 생각하면 이렇게 만나는것도 좋은것 같네요.
세봉 선생님은 커피를 즐기시고 저는 술을 좋아하고, 세봉 선생님은 운치 있는 다방을 찾고 저는 서민적인 술집을 드나드는 사람이니, 공연히 돈 팔고 서로 체면 때문에 일방이 손해를 보는 만남을 가질것 있습니까.
앞으로 며칠은 메일로 세봉 선생님의 구수한 소설이야기를 듣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세봉 선생님은 저의 큰형과 동갑이고 저보다 열살 손우 어른이니 허물없이 호웅씨라고 불러주기 바랍니다.
저는 대학교시절에 소설을 좀 써본적 있지만 아직 소설에 입문을 못한 사람입니다. 좋은 시를 쓰기도 힘들지만 좋은 소설을, 그것도 중편이나 장편 편폭의 소설을 쓰기는 더욱 어려운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시는 단란한 신방을 꾸미는 작업이요, 소설은 호텔을 짓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대학교 교단에 서서 남의 자식을 가르치는게 주업이라 집구석에 들어앉아 느긋하게 소설을 볼 새가 없어요. 다행이 몇 년간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소설부분 심사를 본의 아니게 “독점”을 하다 보니 자타가 좋다고 하는 후보작들은 더러 읽어본 셈입니다. 또《조선족문학사》와 《문학비평방법론》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문학의 흐름과 현황 및 바람직한 방향 등에 대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세봉 선생님에게서 많은걸 공부하게 될것 같습니다.
요컨대 우리문학이 좀 유치하고 우리 이웃인 중국 주류문학이나 한국문학에 비해 많이 뒤처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대체로 동감이지만 우리 조선족문학이 모두 낟알은 없고 쭉정이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 자신의 삶과 고뇌, 우리민족의 실존과 몸부림을 형상화해서 중국 주류문학과도 다르고 한국문학과도 다른, 그러면서도 세계문학과 대화할수 있는 새로운 싹들이 보이고 있다고 봅니다.이런 문제는 이제 마지막에 좀 의견을 나눌 문제이고 이번 대화에서는 한 문제, 한 문제씩 세봉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한 가지 문제만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 문학의 독자적인 성격과 특징을 드러내자면 조선족문학 전체를 념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일단 1990년대 이후의 소설들과 그 문학적경향을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세봉 선생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1990년 좌우에 쓴《엄마가 교회로 가요》, 《빨간 크레용 태양》과 같은 소설들은 그 이전의 《하고싶던 말》, 《볼쉐비크의 이미지》와 같은 소설과는 완판 달라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가의식의 변화는 세봉 선생님의 경우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라 최홍일, 리혜선, 허련순 등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1990년대 이후 소설문단의 지각변동과 새로운 경향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세봉 선생님은 요즘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고 어떤 작가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까?
정세봉
씨(氏)로 말을 낮추어달라는 요청은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오히려 저한텐 부자연스러우니 그럼 그냥 호웅선생으로 호칭을 하겠습니다.
우리 소설문학이 그래도 낟알은 있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은 당연히 옳은 평가이고 저도 그렇게 자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의 소설문학은 말씀 그대로 《지각변동》이 있었다고 보아지며 그 전 시기에 비해 확실히 깊어지고 많이 세련되여 가고있는것도 역시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지요. 구체적으로 여러 작가와 작품 및 그 경향성 같은것들에 관해서 갑자기 리론적으로 언급을 한다는것은 솔직히 자신이 없는 일이라 생략을 하는바이지만요.
그런데 스스로도 늘 그렇게 《충분히 긍정》을 해놓고서도 그 뒤끝이 개운치 못한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소설문학이 뭔가 답답하고 심하게 표현을 하면 《눈이 감긴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한 번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쪽에 무게를 많이 두고 접근을 해보는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겁니다.
물론 그것은 세계문학의 구석구석을 고추장 맛보기로나마 기웃거려 보면서 느끼고 떠오른 생각인데 우선 세계 유명작가들의 단편들이 충격적이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호헤르 루이스 보르헤스거나 프랑스의 르 클래지오, 오스트리아의 아르투어 슈니츨러 등 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지요.
쿠바 작가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가는 려행》을 실례로 든다면 마르시알이라는 주인공(대농장주)이 죽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마치 필림이 거꾸로 돌아가듯이 이야기가 역으로 진행이 되며 무척 빠른 템포속에 주인공의 옹근 인생과정이 그려지면서 어머니의 자궁속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것이 《근원》으로 돌아가지요.
야생마처럼 거친것 같으면서도 마력이 붙은듯 흥미진진한 문장력으로 숨돌릴 사이 없이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무서운 속도감을 지닌, 짧디짧은 그 단편소설을 읽고나면 저도 모르게 경이로운 미소가 그려집니다.
그러면서 자연 나 자신(혹은 우리들)의 소설문학을 되돌아보게 되고 비교를 해보게 되는거죠.
따라서 세계문학의 큰 흐름과 그 문학사적 흐름속에 무수히 부침해 온 어떤 법칙같은것들을 살펴보면서 충분히 소화해내고 세계문학을 구석구석 널리 섭렵을 하는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절박하다는 느낌입니다.
김호웅
요즘 세계문학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워낙 세계문학은 방대한 령역이고 언어 장벽이나 자료 부족으로 말미암아, 더더구나 일상에 쫓기다 보니 저는 과문입니다만, 우리문학을 정리하고 살찌게 하기 위한 참조계로 일본, 미국, 로씨아에 살고있는 해외조선민족문학에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있습니다. 재일조선인문학의 경우에는 김사량, 김달수, 김학영, 김석범, 리회성, 리양지, 유미리 등 1, 2, 3대 작가들 모두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변형, 승화시켜 적어도 일본 주류문학에서 인정하는 작품들을 량산하고있지요.
미국적한국인 작가의 경우에도 리창래(1965~ ) 같은 작가는《원어민》이라는 작품으로 헤밍웨이상까지 받았습니다. 해외 화인문학(華人文學)도 디아스포라 글쓰기(離散寫作)라는 형태로 좋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어 중국 본토 문학인들의 부러움을 사고있습니다. 1990년 대 이후《백년고독》을 쓴 마르케스를 비롯해 남미, 그리고 구라파와 아시아, 구라파와 아프리카 경계 지대에 살고있는 작가들도 두각을 나타내고 노벨문학상을 독점하다싶이 하고있는 형국입니다. 미국의 흑인작가들도 노벨문학상을 탔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디아스포라의 주제, 소외와 인간의 보편적 해방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광(光)을 치고있지요. 물론 이는 우리 작가들이 군침만 흘렸을뿐 리념, 제도적인 한계때문에 감히 다루지 못했던 주제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1996년 허련순의 장편 《바람꽃》이나 요즘 히트를 치고있는 그녀의 장편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와 같은 작품은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루고 있어 세계문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조짐을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소설을 먼저 진맥한 후, 다시 세계적인 거장들의 기교나 기법들을 어떻게 우리 소설에 접목시킬것인가 하는 문제를 론의하기로 하죠. 먼저 1990년 이후 우리 소설가들의 새로운 의식전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진맥해보고 분류해 보는게 순서인것 같은데요.
저는 우리문학도 세계사적인 패러다임과 중국 주류문학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다고 봅니다.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흔들리고 《88》서울올림픽을 거쳐 중한수교가 이루어짐으로써 중국 조선족사회도 세계에 대해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존이 리념과 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수 있게 된거지요. 볼세비크의 리념적경직화에 가장 큰 비애를 느꼈던 작가들이 오히려 지배적인 리념과 사상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보통 인간의 생명의 숨결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거대서사를 기피하고 자질구레한 인간사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러한 이미에서 세봉 선생님의《빨간 크레용 태양》이나 리혜선씨의《병태네 빨래줄》 같은 작품이 시사(示唆)하는바가 크지요. 문학의 세속화, 다중심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주류문학에서는 이를 신사실주의라고 명명하고있습니다.
아마도 두 번째 경향은 김관웅 박사가 말한바와 같이 민족적사실주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 경우, 민족의 현실을 정시하고 민족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민족구성원의 몸짓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있습니다. 이 계렬에 속하는 작?걋막? 김훈의 《또 하나의 》, 최홍일의 《흑색의 태양》, 최국철의 《제5의 계절》 과 같은 작품을 들수 있겠지요. 이러한 작품들은 현실고발을 거쳐 주체적인 자각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에 기대고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흑룡강의 하늘에 별처럼 떠오르고 있는 박옥남씨의 소설 《둥지》, 《목욕탕에 온 녀인들》, 《마이허》 등은 성급한 대안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생존상황과 타민족과의 공존공생의 숙명을 리얼하게 그리고있어 오히려 더욱 강한 공감대를 획득하고있습니다.
그 외에도 페미니즘소설, 생태주의소설들이 나와 한결 다양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최홍일의 《눈물 젖은 두만강》과 박선석의 《쓴웃음》 같은 장편은 우리민족의 근현대사와 당대사를 형상화한 큰 스케일의 작품으로 알고있습니다.
세계문학의 잣대로 볼 때 또 어떤 주제경향을 주시해야 한다고 봅니까? 혹시 이외에 세봉선생께서 특별히 중요시하고 있는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세봉
역시 호웅박사시군요. 1990년대, 우리 소설문학의 흐름을 길을 틔워놓듯이 금방 열어주시니까 일목료연하군요. 솔직히 소설 쓰는 사람들은 대개 소설의 생리에만 몰두를 하게 되니까 비평(리론) 쪽엔 많이 어둡답니다.
우리 소설문학의 경향성적인 흐름도 세계문학과 중국 주류문학의 사조적인 흐름에 궤를 맞추어 그렇게 정리를 하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는군요.
사실 김훈의 단편 《또 하나의 나》, 최국철의 중편 《제5의 계절》, 이 두 소설은 제가 편집을 했던 작품들인데 어떤 경향의 작품으로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특히는 문학사적인 흐름이라는 선상에서 《민족적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으로 분류를 시켜놓고 거론을 할수 있다는것이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을 합니다.
호웅선생이 해외조선인문학권(圈) 쪽에 눈길을 돌리고 살펴보고있음에 저도 크게 공명을 합니다.
우리 《민족문학》이 리념이라는 벽때문에 반세기 넘게 서로를 알지 못한채 시간을 죽여왔던 그 깊은 단절의 곬을 이제라도 메우고 교류의 폭을 넓혀가야 하는 그 당위성과 절박성을 저도 잘 알고 있기때문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원인과 여건으로 인해서 여러 갈래의 동포문학속에 아직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오히려 모르기때문에 더욱 강렬한 호기심을 갖게 되는거죠.
러시아의 김 아나똘리는《사할린의 방랑자들》, 《아버지의 숲》, 《신의 플류트》 등 장편대작들을 낸 작가로 죽음의 문제, 인간 내부에 사려있는 동물적인 본성, 력사와 개인의 운명간의 상호관계, 혈족관계 등등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룸과 동시에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문제를 다루는 작가로 알고있고 박미하일의 작품도 일부 단편들은 읽었지만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든가 《천사들의 기슭》과 같은 장편들은 읽지 못했지요.
소개 글들을 통해서 《작은것으로 큰것을 의미하게 하는것》이 그의 창작적지향이라는 정도로 알고있습니다.
재일동포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리회성이나 김석범 등 작가들의 문학이 민족정체성이라는 《핏줄 테마》를 가지고 치렬하게 고뇌하고 쓰는 작가들임은 알고있지요.
양석일의《피와 뼈》라는 장편에서 큰 충격을 받은바가 있습니다.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의 력사를 다루면서 민족정체성이 담긴 민족인상(民族人像)을 그려낸, 그야말로 《악마적인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주는 걸작이지요.
재미동포문학도 백여년 걸어온 문학사까지 정리되어있음에 크게 놀랐던것이지만 여러 갈래의 동포문학들을 알고 깊이 료해하는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며 우리 자신의 문학을 되돌아 볼수 있는 계기로 될수가 있다는 점에서도 크게 유조하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상호 교류가운데서 우리 중국조선족문학도 자기의 《중국적인 얼굴》을 가지고 그들 문학과 만날수 있게 되었다는것은 사뭇 가슴 설레는, 사변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기회에 소설가들의 작은 규모의 모임이라도 조직해 놓고서 호웅선생을 모시고싶은 욕심도 생기는군요.
세계문학의 잣대로 볼 때 어떤 주제적경향을 주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거창하게 론의할수도, 또한 간단명료하게 언급을 할수도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문학이 다루어야 할 수많은 문제가운데 크고 중대하고 보다 절박한 문제(주제적 경향)들은 언제나 있는것이지요.
저는 지금도 그 첫자리로 권력의 독재와 횡포, 그 부조리를 꼽고 싶습니다. 지난 20세기만 보더라도 쏘련의 블가꼬브, 나보꼬브, 솔제니친, 파스테르나크… 동구권의 임레 케르테스(헝가리), 밀란 쿤데라(체코), 이스마일 카다레(알바니아) 등 사회주의권(圈) 작가들과 중남미의 호헤르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 그들 모두가 그런 문제를 깊이 있게 포괄적으로 다뤄냄으로써 세계문학의 거장들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김학철선생도 당연히 그들 반열에 세우셔야죠.
이른바 《디아스포라적 삶》을 문학이 다루는 문제도 중국조선족 작가들앞에 새삼 첨예하게 떠오른 테마라 할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디아스포라적인 삶이란 어떤 의미에선 지구촌의 모든 민족(혹은 온 인류) 구성원들의 숙명이라 말할수가 있는 것이지만 어느 때보다도 우리(중국조선족) 모두가 아프게 껴안고 나가야할 현실이기때문이지요.
그리고 제가 작가로서 피부로 느끼는것이지만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생리속에 아직도 완명(頑暝)하게 뿌리 내려있는 《이데올로기의 벽》 을 허무는 문제도 작가들이 치열(熾熱)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문학의 흐름을 보면 로씨아(쏘련)고 동구라파, 말하자면 사회주의권(圈) 쪽 흐름이 대개 공통성을 가지고있고 우리보다 많이 앞서가고있지요. 로씨아만 보더라도 1990년대부터는 1980년대 후반의 《복권문학》, 《망명문학》의 자리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대신 차지하고 하리또노브, 프레빈, 쏘꼴로브 등등의 쟁쟁한 젊은 작가군(群)이 등장을 해가지고 기존의 창작방법과 전통을 거부하고 암호화, 상징화, 적라라한 성적표현, 변칙적이고 과장된 어휘들을 사용하면서 개혁, 개방기의 혼란과 암운을 뚫고 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있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문학의 경향적(혹은 사조적) 흐름이라는것이 필경은 그 어떤 법칙성을 지니고 있는것인만큼 궁극적으로는 따라가게 되어있겠지만 굳이 련련하거나 본따려 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름대로, 우리가 안고있는 시대적, 현실적 고민과 근본적이고 절박한 문제들,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욕망과 부조화의 세계, 힘없는 백성들과 소외된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사투(死鬪)를 연출하고있는 삶의 현장에 무수히 숨어있고 깔려있는 글감들을 각자 나름대로의 《특출한 눈》과 력량대로 캐내고 다뤄내면 참문학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 소설문학의 실상으로부터 보건대 무엇을 쓰는가 하는것이 우선은 중요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가 훨씬 절실하게 다가와있다는 느낌입니다.
무엇을 쓰든지간에 잘 써야만 문학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것이고 아무리 작고 가벼운 제재를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그 어떤, 남들이 보아내고 말한적이 없는, 깊은 철학과 신선하고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작품이라면 십분 중대한 제재를 다룬것으로도 되는것이기때문이지요.
재일동포작가 유미리의 경우만 봐도 전문적으로 파편화된 가정, 가정의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루고있지만 그의 문학이 큰 주목을 받고있지 않습니까.
비교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우리 소설문단에 이미 나온 장편소설이 수십 부가 되고 내가 직접 취급을 했던 장편만도 십여 부가 됩니다. 예전에도 그 문학성이 안타까웠지만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보니 소설의 기법 쪽에 력점을 두고 고민을 해보는것이 절실하다는 느낌입니다.
최근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 작가의 평생의 글쓰기 작업이란 어쩌면 타고난 문학적 천재성을 스스로 확인을 하는, 또한 세상사람들한테서 최종 인정을 받는, 길고도 처절한 과정이라는…
그리고 그 이른바 천재성이라는것이 재창조적인 언어를 통한, 말하자면 소설을 《문학》으로 만드는, 예술적기량에 있는것임을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루이스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를로스 푸엔테스, 이사벨 아옌데 등 일군(一群)의 중진들이 유럽문학의 정전을 감연히 거부, 《몽환적사실주의》라는 생경한 기치를 들고나와 중남미문학을 일약 세계문학의 중심에 폭발적으로 떠오르게 한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였습니다. 그들은 도전적이고 탐구적인 실험과 진통을 무수히 겪으면서 소설기법상의 일대 혁명을 이뤄냈던거지요.
게다가 호헤르 볼피, 이그나시오 빠디야, 차베스 카스타녜다, 우로스, 페드로 앙헬 팔로우 등 멕시코?? 젊은 작가 5명이 《크랙선언문》이라는 엄청난 도전을 내걸고 기존문단에 저항, 하나의 새로운 문학사조를 창출해낸 사실은 또 하나의 흥미롭고도 경탄스러운 충격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비평가의 안목으로 우리 소설들을 살펴보건대 사조적경향, 소설언어, 소설의 여러 기법상 어떤 변화들이 있고 어느 작가, 어느 작품에 실험적인 몸짓이 보인다든가 하는데 대한 호웅선생의 간단한 견해와 인상을 듣고싶군요.
김호웅
정년을 한 후 많은 편집들이나 작가들은 하루아침에 착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는게 오늘의 현실이지요. 우리 대학교 교수들중에도 정년을 하면 책장을 덮고 낚시터나 산으로 소풍만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허지만 세봉 선생님은 오히려 정년을 한 후 많은 책을 읽은것 같군요. 구소련과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문학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군요. 참 부럽습니다.
저희처럼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살다보면 자기 전문분야밖의 세계는 돌아볼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좋은 교수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론문을 쓰고 여러가지 평가나 검사에 응부해야 한답니다. 결국 귀한 세월을 다 흘러보내게 되죠. 물론 여러 분야의 교수들이 모여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학생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게 되는거지요. 아무튼 세봉 선생님처럼 내 시간을 내가 지배할수 있는 여건은 아직도 10년을 기다려야 마련될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우리 소설문단에서 기대를 걸어볼수 있는 작가들을 감히 줄을 세워보겠습니다. 리원길, 정세봉, 최홍일, 김훈, 우광훈, 리여천, 김재국, 허련순, 리혜선, 조성희, 량춘식, 박옥남과 같은 작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문학상 심사관계로 여러 문학지, 신문에 실린 소설들을 보았습니다. 허련순, 리혜선, 박옥남 등 녀성작가들의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았고 우리 소설문학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허련순씨의 소설에 대해서는 요즘 김관웅 박사가 상세하게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약하기로 하고 박옥남과 리혜선의 일부 작품들을 보기로 하죠.
박옥남의 《둥지》라는 작품은 작년 4월 목단강시에 가서 《2005년 조선족우수작품집》에 실을 작품을 보다가 우연히 읽게 되었죠. 세봉 선생님의 말씀처럼 문학은 천재성이 없이는 아니 되는가 보아요. 후에 알아본데 의하면 박옥남씨는 오상사범학교 일본어학과를 나와 상지조선족중학교에서 일어교사로 근무하고있는 녀성인데, 우리 말과 글을 너무나 잘 다루고 있더군요. 화롯불에서 파낸 감자나 고구마처럼 구수하단 말이에요. 오히려 산재지구 작가들의 소설에서 리기영의 작품을 읽는 그런 구순한 언어미를 맛볼수 있었습니다. 1980년 연변문단에 리원길이라는 언어의 귀재가 불쑥 나타났을 때 받았던 그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옥남씨는 2006년에는 《목욕탕에 온 여자들》, 올해 벽두에는 《마이허》라는 단편을 발표했죠. 《둥지》는 도데의 단편소설《마지막 수업》의 구조를 배운것 같고 《목욕탕에 온 여자》는 일본 근대소설의 총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는데, 아무튼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예리하고 언어가 일품이에요. 《마이허》에서 개미허리와 같은 강 하나를 사이를 두고 살고 있는 중국인 마을과 조선족 마을의 색다른 풍속을 아주 생동하게 그렸죠. 이 소설은 민속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보아요.
상투적인 언어, 비유만 되풀이한다면 영원히 자기의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만들어낼 수 없죠. 《물 찬 제비요》, 《억대우 같은 사내》 와 같은 상투적인 비유는 《죽은 비유》지요. 묘사, 비유, 은유, 상징 등은 새롭게 개발되어야 하고 참신해야 합니다. 여기에 작가의 첫째가는 사명이 있는 게 아닐가요. 기업에 비유하자면 새록새록 신제품을 개발하지 못하면 도태되는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새로운 묘사, 비유, 은유, 상징, 아이러니, 역설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독자를 잃게 되죠. 이런 의미에서 저는 박옥남 작가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있고 큰 기대를 걸게 됩니다.
리혜선씨야 우리 문단의 중견 소설가이지요. 최근 몇 년 간 단편 《병태씨네 빨래줄》, 장편 《빨간 그림자》와 같은 실험적인 소설들을 썼고 그러한 실험정신에 평단의 찬반이 엇갈렸죠. 저는 좀 실망을 가졌던 편인데, 이태 전《도라지》 잡지에 실린 《매니큐어》라는 수필을 보고 리혜선씨의 문학적 재치를 다시 긍정하게 되었다가, 작년 《장백산》에 실린 중편 《터지는 꽃보라》를 보고 우리 문단의 사라졌던 재녀(才女)를 다시 찾은 느낌을 받았어요.
김학철 선생님의 말마따나 소설은 뭐니 뭐니 해도 읽을 재미가 있어야 하죠. 소설은 결코 약이 아니거든요. 몇 년 간 《터지는 꽃보라》와 같이 재미가 있는 소설을 처음 읽게 되었거든요.
이 소설의 작중인물들은 모두 진짜 이름을 쓰지 않고 익명이나 별명으로 통합니다. 오늘의 대중사회에서 개개인은 익명으로, 기호나 수자로 존재함은 더 말할것 없습니다. 저도 가끔은 현금인출기에서 비밀번호를 넣고 돈이 나올 때마다 익명으로만 통하는 저희 실체를 실감하게 되죠. 세봉 선생님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작품의 경우에도 작중인물들은 《오징어파티》에 《고구마》, 《별난 녀자》, 《안니》, 《제이》로 통하죠. 이러한 익명의 조건에서 이들은 자기의 욕구를 거침없이 분출합니다. 천사가 악마로 변하죠. 모든 탈을 벗어던지고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게 되지요. 황차 《3.8》절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익명의 네 중년녀인들이 쏟아내는 성적 기갈과 음담패설은 읽는이들을 포복절도케 합니다. 기실 그들은 가정을 위해 한국에서 10년씩이나 허둥대면서 일했지만 일단 귀국하자 자식과 남편, 사회에 의해 소외되고 마는 이방인들이죠. 그래서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눈물 어린 미소를 짓게 되는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진통과 해체, 그리고 소외의 주제를 익명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미있게 풀이했다고 봅니다.
물론 한국의 양문길이라는 소설가가 1970년대 《익명의 여인들》(, 1973.3)이라는 소설을 쓴바 있는데, 이 소설은 생래(生來)적인 이름은 필요가 없고 묘한 수자로 된 번호로만 불리워지면서 하루살이처럼 그날그날을 술집에서 팁으로 살아가는 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이 소설을 리혜선씨가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보고 썼더라도 《터지는 꽃보라》는 십분 자기 창조성을 가미한 완전히 다른 작품이에요,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봅니다.
먼저 두 녀성작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세봉 선생님은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을 좋게 보고 있는지요?
정세봉
박옥남과 리혜선, 두 녀류작가의 근황과 근작들에 대한 호웅선생의 솔직한 견해와 소상하면서도 간결명쾌한 분석 및 긍정적인 평가를 흥미있게 읽고나니까 저도 기분이 좋군요. 우리 문단에 이런 작가적고민과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소설가들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동문서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느 한 작가의 어떤 작품에 대해서보다는 우리 문단 소설 일반을 놓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요즘 미국 L.A 소재, 《해외문학》지의 조윤호시인님이 이메일 서신에서 우리 문단의 소설에 대한 견해를 얼핏 내비치였습니다. 미국 쪽은 단편일 경우, 《짧으면서도 재미있게 쓰는것이 추세인데 연변의 소설들은 별로 재미도 없으면서 터무니없이 긴것이 문제…》
재미만 있다면 좀 긴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데 있는것이지요.
호웅선생이 우에서 언어의 상투성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지만 소설발상의 상투성부터 깨는 일이 우선 중요하지요. 새로운 발견이라곤 없는, 사회의 통념과 일상의 관습에 대한 깨뜨림이 전혀 없는, 남들이 백번도 더 써먹고 말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엮어본대야 그게 신선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만 사람이 서쪽 달을 쫓는 때에 홀로 동쪽으로 향하는 사람!…"-최서해의 《혈흔》의 이 한 구절을 저는 창작에서의 신조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왕왕 진실(혹은 진리)은 반대쪽에 있는것이기 때문이며 뭔가에 대한 끝없는, 도전적인 깨뜨림에 새로운 세계(작품)가 창출되는것이기 때문이지요.
저의 단편 《빨간 크레용 태양》을 호웅선생도 평론을 하셨지만 제 스스로도 제일 자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발상 자체가 엄청난 《깨뜨림》을 잉태하고 있는 소설이기때문이지요.
《태양》으로 추앙 받던《위인》이 서거되어 온 대륙에 추도곡이 깔려흐르고 온 대륙이 눈물바다로 되어있는 그 장엄하고도 슬픈 날(력사적인 순간)-그날에 벌어졌을수 있는, 또는 연출되었을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작가들은 많은 소설들을 써낼수가 있을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날, 언감생심 처녀총각이 섹스(사랑)를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또한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외쳐질 엄청난 메시지(주제)에 대해서 작가마다 다 생각이 미칠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제 소설에 대한 자랑 같아서 좀 쑥스럽긴 하지만 일단은 소설발상의 상투성 깨기란 한 작가가 자신의 창작행정에 걸음마다 부딪치고 껴안고 고민을 해야만 하는 두통거리임을 짚고 넘어갑니다.
일전에 문학비평가 허승호씨의 《낭떠러지에 선 중국조선족 소설문학》이란 글을 읽었는데 문제점의 첫번째로 역시 《재미 없다. 이야기가 지루하고 서술이 따분하며…》를 지적을 하였더군요. 그렇게 되는 리유를 저는 두번째로 우리 소설가들의 소설의 구성기법문제로 보고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을 《비극의 혼》이라 하였지만 실제 소설작품의 성패는 구성에 달려있는것이라고 말할수가 있지요. 이른바 《구성》이라는것이 단순히 얽음새를 엮는 일이 아니고 소설 첫 머리에서부터 독자를 금방 사로잡아 흡인해버리고 소설속에 몰입시킬수 있는 이야기구조의 마력(魔力)성을 창조해내는 일인 것만큼 역시 구성의 상투성은 실패작밖에 양산할 수가 없는것이지요.
현시대, 세계의 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소설기법에서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실험을 끊임없이 하고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것입니다.
특히 단편소설일 경우, 절묘하고 파격적인 구성기법을 요하며 한 작가의 소설가적인 력량과 번뜩이는 천재성을 보여줄수 있는것이지요.
우에서 언급을 했던, 이야기를 거꾸로 진행시키는 쿠바 작가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가는 려행》도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단편《비밀의 기적》은 더구나 기막힙니다. 주인공은 탄환이 발사되고 그것에 맞을 때까지의 찰나 동안, 자신의 관념속에서 1년에 달하는 시간의 삶을 누리지요. 물론 그것은 구성기법에만 국한되는것은 아니고 그가 도전적으로 탐구를 했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환몽적사실주의적 기법인것이지만은.
한마디로 우리의 소설문학이 여러 기법상에서의 환골탈태적인 변혁이 없이는 희망이 어두우리라는 전망입니다. 우리 소설문학의《침체의 늪》에 충격의 돌멩이라도 던져야 할것이라는 생각을 떼쳐버릴수가 없네요. 물론 그것은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아픈 자성의 돌멩이이기도 한것이지요.
다음번엔 소설의 언어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싶군요. 나 자신이 지금 고민을 겪고있는 문제이기때문이기도 합니다.
김호웅
세봉 선생님께서 잘 지적해 주셨지만 우리 작가들의 소설적인 발상, 배경설정, 플롯, 인물창조의 기법, 언어 등에 모두 참신성이 결여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문제는 적잖은 작가들이 소설미학에 관한 공부가 없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문단은《소설창작론》 하나 나와 있지 않은 어설픈 상황입니다. 연변대학교에서 현동언 선생이 쓴 《소설창작론》이 프린트 본으로 쓰이다가 이젠 씨가 말랐고 현룡순 선생이 평생 쓰던 강의안이 최근 한국에서 출판됐는데 연변에서는 구해 보기가 힘듭니다.
한국에서 나온 소설창작론들을 참고할수 있는데 제가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것은 조남현의 《소설원론》입니다. 요즘 《소설신론》이란 책으로 새롭게 나왔지요. 소설의 원론적인 개념, 범주들을 가장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좀 평의하게 쓴 것으로는 전상국의《당신도 소설을 쓸수 있습니다》와 송하춘 선생의 《발견으로서의 소설기법》을 들 수 있지요. 전상국, 송하춘은 모두 한국의 이름난 소설가들이고 대학교 교수여서 소설쓰기 작법을 명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변에서 소설 쓰는 이들도 한 번 구해 볼만한 책이지요.
소설미학 공부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력사, 철학 관련 명저들도 두루 설렵하는 게 좋을것 같습니다. 우리 소설의 내용이 왜 빈약하고 촌스러운가 하면 우리 작가들의 지식이 빈약하고 자기의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있지 못한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박경리의《토지》 같은 소설을 보면 정치, 사회, 력사, 민속, 철학 등 분야에 있어서도 당대의 최고 학자들마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저는 재작년 가을에 한국에 갔다가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에서 박경리님을 뵙고 부근의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대접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철학적안목에 크게 놀랐습니다. 서울 청계천도 그분의 발상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연세대 출신의 두분 교수와 함께 갔더랬는데 그분의 《강의》만 듣다가 온 폭이 되고말았지요. 권연을 꼬약꼬약 피우면서 청사류수로 이야기를 엮어대는데 고금중외를 아우르는 그분의 박식함에 손을 들고말았지요. 소설가들이 소설만 읽어서는 살찔 수가 없어요.
소설언어에 대해 잠깐 저의 소견을 말씀 드리지요. 문학적 언어는 한 마디로 메타포입니다. 원관념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보조관념으로 말하죠, 은유, 상징, 아이러니, 패러독스입니다. 이 점에 대해 한국의 리어령 선생이 잘 비유했지요. 그는 과학적 언어는 꿀벌의 언어이고 문학적 언어는 나비의 언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미를 전달한다는 같은 목적이라 할지라도 와 는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문학적 언어는 나비처럼 복잡한 곡선을 긋고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문학적 언어의 특질을 너무 형상적인 비유로 갈파했다고 봅니다. 장인정신으로 부단히 새로운 비유를 개발하고 글을 윤택 있게 쓰는 법을 익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문단에서는 역시 김학철 선생이 모범을 보여주었지요. 김학철 선생의 《격정시대》를 보십시오. 재미있는 일화, 창조적인 비유들이 지천에 깔려 그야말로 곡선을 그으면서 날아가는 나비의 을 련상케 합니다. 1930년대 서울 종로거리의 야경을 묘사한 장면은 한국의 작가들도 절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 일부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사전도 보지 않는것 같고 편집들도 얼추 넘겨버리는것 같습니다. 지저분한 속어, 사투리, 상투적인 비유가 난무하고 있어 밥 먹다가 돌을 씹은 것처럼 가끔 낯을 찡그리게 됩니다. 녀성의 풍만한 가슴을 비유하는데《농구공 같은 가슴》이라고 했어요. 이건 소설적인 묘사가 아니라 항간의 잡배들이나 쓰는 비속한 비유입니다.
세봉 선생님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문학과 예술지에서 규정한 편폭을 벌써 넘어섰구만요. 저는 의연히 세봉 선생님의 력작을 기대하고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약해 주시지요.
정세봉
대화, 즐거웠습니다.
개인적으로 호웅선생과 처음 문학 관련,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어 보았다는 점이 기분 좋고 우리 소설문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을 해보았다는 의미에서 감격스럽습니다.
앞으로 가끔씩 만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고 또한 우리 문단에 이런 대화의 분위기를 점차 만들어가는 것이 십분 절실하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한가지 하고싶은 진언(眞言)이라면 21세기는 노마드시대란 말도 있지만 우리 작가들이 앞으로 연해지구에 가서 사업을 하면서 글을 쓸 수도 있고 해외에 나가 정착을 하면서 작가생활을 할수도 있지요. 그리고 세계속의 여러 갈래의 동포문학과 교류하면서 우리 문학이 인젠 세계를 향해 도전을 해야 하는 시점이 아닙니까?
굳이 내가 이런 말을 해야 하나?… 고려끝에 하는 얘기지만 《좁은 바닥》에서의 《갈등구조》에서 초탈을 하는 넓은 아량과 멋이 우리 문단 풍토에 점차 정착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07,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