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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봉(Lermont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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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칼럼]소설, 그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 댓글:  조회:612  추천:0  2019-07-08
소설, 그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 정세봉   아침에 걸려온 전화 오늘 아침, 멀리 삼아三亚에서 료양 중인 ‘토템시인’ 남영전선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반가운 목소리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남선생이 갑자기 엄숙한 화제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정형兄, 《볼쉐위크의 이미지》 발표 전후의 얘기를 쓰라구. 27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꼭 필요한 글이라구요. ‘문단유사’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구…” “글쎄요, 일단 봅시다!…” 전화를 끊은 뒤 담배를 피워물고서 잠간 생각을 굴려보니 그렇게 간단히, 쉽게 필을 댈 일이 아니였다. 이미 나의 창작담도 나갔었고 또한 ‘닉명고발신’ 사건으로 촉발된 일장풍파와 그에 따른 찬반론란이 치렬했던 쟁명, 《볼쉐위크의 이미지》관련 칼럼, 에세이, 인터뷰, 평론 등 문장들도 자그만치 20 여편이 발표되여있는 상황이다. 새삼스러운 일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고민, 고민을 하던 끝에 급기야 오래전부터 숙고해왔던, 어쩌면 소설가와 소설 관련, 심히 원론적인 얘기일 수도 있는 ‘발언’을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발상의 불꽃 및 ‘구성원리’  작동의 메카니즘 창작담에서 이미 얘기한 바가 있지만 나의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의 발상은 우연히 목격하게 된 일상의 한 장면에서 점화가 되였다. ‘호도거리’ 농사가 시작되였던 1984년의 어느 여름 날 ‘야바哑巴’라고 불리우는 지주성분의 한족 촌민이 촌 당지부서기네 건조실 불을 때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부서기네와 ‘련계호’를 맺어가지고 서로 품들이를 한다는 것이였다. 여직껏 수십년을 ‘독재’해왔던 지주성분의 ‘야바’를 그 장본인인 지부서기가 서로 도와줄 내기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 충격적인 격세지감이 머리 속에 발상의 불꽃과 치열炽热한 모티브를 준 것이다. “두뇌 없는 ‘순복도구’”!… ‘인간’으로서의 기층당원들의 그 력사적인 곤혹과 울분!… 이 때 작가의 소설사유는 뜨거워지면서 긴 고민이 시작된다. 날카로운 갈등선을 타고 나갈 인물들이 설정이 되고 기저에 깔려 흐를 빠뽀스와 슈제트의 륜곽이 잡혀지며 ‘집필행위’ 과정에서 작가 나름의 독특한 기법과 문장력 및 핍진하고 섬세한 디테일화를 거쳐서 하나의 작품이 탄생을 고(告)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그렇게 진통을 겪으면서 ‘무심히’ 세상에 나왔었다.   소설, 그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1991년 《장백산》 2호에 등재, 이른바 ‘개혁개방’이 선포되여서부터 정확히 12년째가 되는 시점이였다. 발표 뒤의 상황이 나를 슬프게 하였던 것은 그 때까지도 ‘문단사회’의 의식이 크게 ‘돌아서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학이(소설이) 지나온 력사를 이렇게 엄청나게 비판을 할 수도 있단 말인가?”… 모두들 화들짝 경악을 하는 풍경이였고 ‘닉명고발신’ 사건으로 촉발된 찬반론란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 걸가? 소설이, 그 경이로운 유기체가 본연의 생리에 좇아 탄생이 되여서 어떤 질문, 어떤 ‘진실’을 세상을 향해서 던지고 웨치게 되는 것인데?… 이런 안타까움과 의문에 휩싸일 때마다 매양 떠오르는 련상이 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는 자연인(혹은 생명)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을 했을 뿐인데 그것이 세속의 어떤(종교적, 정치적, 법률적) 법규와 틀에 맞추어져서 ‘죄인’이 되고 ‘이방인‘이 된 뫼르소!… 최근 년간 나는 세계문학, 특히는 중남미문학과 동구권 작가들의 문학을 읽으면서 소설이라는 창조된 ‘허구의 세계’를 “국경 너머 저 멀리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이라고 이름한, 사뭇 경이로운 상징적 표현을 접하게 되였다. 그리고 “내 소설에서 인물들의 행위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루어지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중략) … 나는 언제나 보헤미아라는 낡은 언어를 쓴다.”라고 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도 같은 맥락의 의미로 리해해야 할 것이다.  그 ‘소설의 땅’엔 모든 ‘경계’가 허물어져있으며 오로지 그 땅에서만이 인간적 삶의 딜레마와 세상의 부조리를 정시할 줄 아는 작가의 ‘특출한 눈’이 존재하는 것이며 ‘문학본연’의 분출이 가능한 것이다. 콜롬비아 작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꿈의 궁전》 등 거작들 모두가 그렇게 탄생된 것이 아니겠는가. 주제 넘는 단언이지만 나의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도 바로 그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에서 진통을 겪으면서 태여난 것이였음에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나 자신에게 새삼 질문을 해본다. - 소설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웨칠 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수필   시간, 그 긴 흐름선상(线上)에서의 “우정쏘나타”   정세봉     1. 어떤 “만남”   나는 37년 전, 그러니까 1980년 초겨울의 어느날  늦은 오후를, 무심히 흘러가버린 그   60분 정도의 시간을 잊지 못하고있다. 그날 손님 한 분이 불쑥 우리 농촌집을 찾아오셨다. 보통 키에 안경을 낀, 얼핏 느낌에도 지성적인 매력을 지닌 낯선 분이였다.   초가집 정주간에 마주 앉자 손님이 자기소개를 했다. “장정일입니다. 연변일보사의......” “......평론을 쓰신?” 나는 내심 꿈쩍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한 나의 표정을 읽었던지 손님은 무척 솔직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작을 쓰신 작자(者)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룡수평에 출장 나왔던 김에....” 하고 말끝을 생략했다. “아이구, '명작'이라니!.....” 어렵사리 수줍음 잘 타고 순진한 농민이었던 나자신의 몸둘바를 몰라했을 그 순간의 표정을 나는 지금도 미소를 머금으며 그려보군 한다.   “연변문예” 1980년 4월호에 발표되었던 나의 단편소설 “하고싶던 말”이 수많은 독자들의 눈물을 쏟아내면서 바야흐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있던 와중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승리”라는 제목의 문학평론이 7월호에 게재되었다. 나의 소설에 대한 아낌없는 격찬과 그 세련되고 명쾌한 문장의 마력(魔力)에 가슴 뜨거워서 며칠 내내 불면의 밤을 보내야했던 평론의 필자를 나는 적어도 50대의 원숙한 지성인일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새파란 나이 38세, 나와 꼭 같은 동갑내기라니!.....   문학평단의 신사ㅡ장정일씨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흘러가버린 “60분”이라는 시간의 선상(线上)에서 시작되었다.   2. 두개의 에피소드   잠간 이야기 방향을 다른 곬으로 틀어보기로 한다. 역시 과거와 현재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생성시키면서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외줄 위에서 연출된 두개의 에피소드이다 1984년 4월 4일, 역시 늦은 오후에 일군(一群)의 상상불가의 손님들이 우리 농촌집에 들이 닥쳤다. 주당위 김성화부서기 님께서 10여명의 수행인원들을 주루루 거느리고서 “농민작가” 아무개를 방문하러 오신 것이였다   바로 그 이틑날, 4월 5일 “연변일보” 제1면에 “주당위 부서기 김성화동지, 농민작가 정세봉동무를 방문”.....이렇게 소식이 금방 발표가 되어서 세상이 다 알게 되었던 것이지만, 더욱 놀랍고  충격적인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수십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서 달갑게 쓰고다녔던 “농민모자”가 눈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날라가버리고 마침내 민머리 바람으로 푸른 하늘을 떠이고 이 풍요로운 땅위를 활개치며 다니게 돠었던 것이니, 알고보니까  김성화서기 님께서 나의 “문제”를 일괄 처리하셨던 것이다.   두번째 에피소드는 그로부터 15년 뒤에 일어났다. 1999년 3월 어느날, “연변문학” 편집부에 난데없는 “초청장”이 서울서 우송되어왔던 것이다. “신세림출판사” 이시환발행인이 4월 2일에 개최 예정인 “재중동포작가 정세봉 초청포럼”에 초청한다는 간단한 문안(文案)도 곁들여져 있었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있는, 무형(无型)의 어떤 “경계”를 넘어서서 세상과 문학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는 충격과 경이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3. “사변적”이라는 낱말의 의미   최근 년간, 나는 가끔씩 장정일씨와의 “인연”에 대한 생각에 잠겨보게 되군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변적(思辨的”이라는 낱말을 떠올리군 한다. 얼핏 느낌에도 너무 엄청나고 거창한 매혹적인 언어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처럼 거창한, 어쩌면 억지일 수도있는 그 언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위에서 언급을 한 두가지 에피소드 화제로 다시 돌아오기로 한다. 나는 내 인생력정의 굽이굽이에서 몇 분의 “귀인”을 만났다. 거기에 생각이 미칠 적마다 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사뭇 진지한 “운명론자”가 되군 한다. 말하자면 그런 귀인들을 점지해주는 “운명의 신”이 필경 존재해 있는  것이라고 철저히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그런 “운명의 신”이 현실에 “실존”하고 있었다면 믿을 수가 있을 것인가?......   지난 4월 18일 오후 2시,  평론가 장정일씨와 소설가 김옥희씨와의 퍽 오랜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나의 편저(编著)로 된 평론집 “문학, 그 숙명(宿命)의 길에서”의 출판 건(件)으로 서울 갔다가 금방 귀국을 한 이튿날이였고, 평론집에 수록된 30명 문사중의 2인(人)이였기 때문에  뜨거운 화제가 기대되는 만남이었다.  "나쟈까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주문해놓고 셋이 둘러앉으니까 커피 마니아들 특유의 어떤 향수에 금방 젖어들었다. 내가 사인을 해서 드린 평론집을 받아들고서 장정일씨가 먼저 감동을 표시했다. "책을 참 잘 만들었구만, 그리구 이런 류형의 평론집은 아마 처음일 것이오!" “창밖, 아득한 야공엔 새벽별이 빛난다!“ 김옥희씨가 권두언 제목을 소리내여  읊으며 감탄을 했다.   평론집을 화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장정일씨가 전혀 예상밖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소. 그러니까 30여년 세월이 흘렀구만....84년도에 내가 연변일보 부총편으로 일을 보게 되었는데, 마침 김성화서기가 연변주위에 부임돠어온지 얼마안되는 시점이였소. 하루는 수행기자로 김성화서기의 짚차에 동승를 해서 훈춘으로 들어가게 돠었는데, 감성화서기가 문학예술 발전에 관심을 보이시는지라, 그때에 당신 얘기를  했지. 아무 농촌에 정세봉이라는 농민작가가 있다구....그 며칠 뒤, 감성화서기의 방문이 전격 이뤄진 거라우...후훗....“ “아니, 그런 얘기를 왜 이제사?.....”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말이 났으니 하는 예긴데, 99년도의 신세림'출판사 초청 건도 후에 이시환씨의 평론을 읽고서야 알았다우. 당신이 몰래 작용한 걸...." “의식있는 작가, 한 리얼리스트의 외로움과 용기”라는 제목의 이시환씨의 평론 첫 단락은 이렇게 되어있다. "중국 연길에 살고있는, 동포 작가 정세봉씨와는 문학적 인간적 교류도 없었다....그런데 지난 해 1998년 12월 ‘연변일보’ 부총편집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정일씨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그의 인품과 문학적 역량에 대해 호의적인 평을 들을수 있었다.“......   “들어보니, 장선생님이 귀인 중의 귀인임다 예...” “귀인중의 귀인도 맞고, 그보다도 ‘귀인’을 점지해준 나의 ‘운명의 신’이요.” 김옥희씨의 감동먹은 대사(台词)에 내가 한 술 더 뜨는 바람에 우리 셋은 간만에 즐겁게 웃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게 되었다.   4.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사색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니까 가장 비애스럽게 절감되는 것이 이른바 “사회성” 반경의 축소이다. 쉽게 말하면 모든 인연들이 멀어지거나 끊기고 그렇게 믿지 않았던 마음, 마음들이 멀리 떠나가는 것이다. “연극이 파할 때 인간의 자아 말고는 무엇이 확실한가!”라는 월터 휘트맨1)의 싯구도 있지만, 한 인간의 인생사가 한방울의 허무로 막을 내릴 때에는 “나의 자아”말고는 확실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에겐 마지막까지의 길동무, 친구, 또는 동지(同志)들 몇몇은, 또는 일군(一群)의 마음, 마음들이 류사(流砂)의 세월속에서 부대끼고 걸러져서 남아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삶이란 “시간”이라는 흐르는 외줄위에서의 다재다난한, 어쩌면 위험천만한 곡예와도 같은 것일진대, 거기에서 현란한 추락을 할 때, 그 마지막 인연들의 눈물과 축복속에서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5. 평론가와 소설가, 그 우정의 하모니(harmony)   두말할 것도 없이 장정일씨는 내 인생의 길동무, 친구이고 동지이며 스승인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세계”, 그 본연의 생리속에서의 “인연”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문학 밖”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 우리 두 사람은 우선 문학을 많이 읽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장정일씨도 로씨야문학 “중독자”이다. 지난 세기 50년대, 소년시절부터 로씨야문학과 서구문학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던 “열혈문학소년”이었다는 얘기다. 지금도 “문학공부는 끝이 없다”라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공통된 신조이다. 폭 넓게, 끝없이 읽는다. 그래서 장정일씨를 만날 적마다 가슴이 설레인다. 까페에서 커피 한 잔 주문해놓고서 문학 얘기를 끝없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로씨아문학부터 서구문학을 넘나들고, 최근 년간에는 중남미문학이 화제로 되고있다. “보르헤스전집” 다섯 권을 장정일씨도, 나도 다 읽었다. 읽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는 그 난해하고 어려운 페이지, 페이지들을 자신과의 싸움과도 같은 인내력(忍耐力)으로 다 읽어내였다. “보르헤스와 나”, “원형의 폐허”, “두갈래 오솔길이 나있는 정원” 등등 작품들에 대한 서로의 리해와 소감들을 나누고있는 사이에 담배 재떨이를 몇 번씩 바꾸어야 한다. 우리 둘 다 정평이 나있는 애연가들로서 겨끔내기로 담배를 끝없이 피우기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보르헤스문학의 혼돈의 세계와 룰이 없는 게임과도 같은 기법의 절묘함이 이런 담론가운데서 모름지기 터득이 되는 것이다. 솔직한 고백이지만, 장정일씨는 문학(예술)에서 나보다 “한 수, 위”이다. 나는 농촌에서 닥치는대로 문학을 읽었고, 장정일씨는 연변대학 중문학부에서 “문학개론”과 “세계문학사”를 배운 사람이라는 점도 있지만 문학을 통한, 수 십년 세월의 교감과 소통속에서 형성된, 문학평론가 장정일이라는 “인격체”를 마주한 나자신의 내면의 진솔한 느낌이며 자세이다. “리론의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니”2)지만 문학비평가 장정일씨의 문학세계는 소설분야까지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수 십년간 그의 문학평론들을 읽으면서의 나의 깊은 감오(感悟)이다. 우선 그의 평론언어들은 입맛이 간다. 딱딱하고 건조한 언어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수필식 평론문장들은 읽는 이들의 마음을 금방 사로잡는다. 장정일씨는 문학을 진짜로 아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유기체로서의 소설의 구조, 그 본연의 생리를 투철히 터득한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야말로 “득도(得道)”의 경지이다. 어떠한 작품(소설)도 그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 그만큼 평론가적안목이 예리하다는 뜻이다. 또한 아무리 난해하고 그 주제적의미를 깊이 은폐시킨 소설이라 하더라도 금방 핵심메시지를 짚어낸다.  그리고 평론에서의 “상투적인 관례”로 되어있는, 소설의 부족점(혹은 결함)을 언급을 함에 있어서도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함부로 허튼소릴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장정일씨는 또한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그래서 가끔씩 음악예술평론에도 손을 대군하지만, 특히는 합창단 지휘를 할라치면 전문지휘가를 뺨친다. 김학철선생이 오죽하면 ‘연변의 카라얀“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겠는가! 그는 문학평론에서도 음악언어를 곧잘 도입을 해서 이채를 돋구군 한다. “령혼의 현대적갱생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평론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있다.   그가 18년 전에는 (하고싶던 말로서) “비창(悲愴)의 운명쏘나타”를 썼다면, 그 후에는 력사의 광장에 거문고를 세워놓고 인간성과 그 심령의 애환이 담긴 “운명교향곡”을 품위있게 연주함으로써 그는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큰 문학가의 반렬에 올라선 유능한 소설가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장정일씨는 나의 첫 히트작인 단편 “하고싶던 말”로부터 신작단편 “고골리 숭배자”에 이르기까지 나의 옹근 소설들을 평론을 했다, “문학비평가 장정일” 앞에서 나의 문학은 홀딱 벗기운 라체상태, 철저히 해부된 상태인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를 한다면 사르트르의 “독자론”도 있지만, 나의 작품(소설)들은 장정일 문학비평가의 평론을 통해서 재해석되고 재창조가 되어서, 또한 그렇게 독자들한테까지 읽힘으로써 궁극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평론가와 소설가, 그 우정의 쏘나타는 이렇게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에필로그    이렇듯 장정일씨는 나의 문학에 깊은 애정을 기울여왔을 뿐만아니라, 나의 개인적삶의 고뇌와 생활적질고에도 남모르는 관심을 보여왔다. 오, 70고희를 넘은 이 나이, 이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한 친구의, 한 문학비평가의, 한 인간의 가치와 소중함을 절감하게 된다는 이 비애(悲哀)여, 환희여, 경이(驚異)여!   우리는 앞으로도 각 자(者), 자신의 “독서의 왕국”에서 일상(日常)을 즐길 것이다. 때론 상상속에서 고골리와 네크라쏘브를 그리면서 뜨로이까를 타고서 눈덮인 로씨야대지를 질주해보기도하고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드 플로르” 까페에 마주앉아 발자크와 졸라를 론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문학의 끝없는 미로속을 함께 방황해보기도 할 것이다.   글을 맺으려는 이 순간, 뜬금없이 아이헨돌프의 싯구3)가 떠오름은 웬 일일가?   끊임없이 꿈꾸고 있는 모든 사물들 속에 노래가 잠들고 있어,   그대가 마법의 말 한 마디만 잘 건네면 이 세계도 노래하기 시작하리라.   (2017년 7월 18일) --------------------------- 1). 미국 시인. 2).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3). 시 "꿈꾸고있는 모든 것에게" --------------------------- [연변일보 2017년 7월 28일 登載]      
32    창밖, 아득한 야공(夜空)엔 새벽 별이 빛난다/정 세 봉 댓글:  조회:1315  추천:0  2017-03-02
  ​ *권두언*   창밖, 아득한 야공(夜空)엔 새벽 별이 빛난다   정 세 봉​​ ​ ​ 문학평론집 "가 2017년 2월 24일, 서울 "신세림"출판사에서 전격 출판이 되었다.​ 평론집에는 정세봉의 인생과 문학에 대한 칼럼, 수필, 인터뷰, 문학비평 등 문장들이 도합 40편이 수록되어있다.​         나의 호(號) 묵주(墨晝)는 일종의 메타포이다. 먹칠한 듯 캄캄한 낮.....밤을 하얗게 밝혀야만하는 형벌-불면증에 시달리고있는 나 스스로에 대한 객기어린 작명(作名)이다. 기발한 역설(逆說)이 아닌가! 덕분에 나에게는 새벽 야공(夜空)을 무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창문너머 아득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있노라면 불가사의하게도 수많은 “인연”들이 눈앞에 스치고 머릿속에 명멸한다. ​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나는 평생에 수많은 인연들을 만났다. 그 실루엣 같은 얼굴 얼굴들, 그 군상(群像)들의 역동적인 행진......그렇지만 필경은 덧없기 짝이 없는 그 행렬들은 “한 밤중에 흐르는”1)시간의 강물을 따라 속절없이 사라져가고 있고 또한 그 자리를 새로운 인연들이 생명의 경이와 환희를 한껏 예찬을 하며 이어가고 있다. 나도 그 흐름속에 끼워서 부대끼며, 때론 몸부림도 쳐가면서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   나의 운명에 대해서 점쟁이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역마살(驛馬煞)이고, 둘째는 80(歲)이 한명(限命)이라 했다. 그리고 셋째는 문학이 숙명(宿命)이라 했다. 장난처럼 웃어넘겼던 그 말들을 철석 같이 믿게 되었던 것은, 그 세가지가 이미 그려져 있었듯이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어느 순간 소스라치듯 깨달았던 것이다. ​   비록 "물리적"으로는 많이 떠돌아다닌 건 아니지만 정신(령혼)적으로 엄청 방황을 하였던 것이고, 소시적부터 배고픔과 고된 육체적 노동에 시달리기도 했고 흡연 경력이 자그만치 60년, 매일 커피 열 잔씩 마시는 "커피 중독자"이지만, 지금껏 병원 문앞에 가본 적이 없고 대체로 무탈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소년시절부터 문학에 미쳐서, 암담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책없이 옹근 인생을 송두리채 투척시켰던 무모함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 짝이없다.   어쨌거나 내 인생은 문학이라는 숙명에 코를 꿰워서 심히 우울한 “운명쏘나타”를 연주해왔던 것만은 사실이라 하겠다.     각설하고, 내 나이 일흔 다섯 고개에 올라선 새해 벽두의 어느날 새벽, 컴퓨터 속의 내 “문학 정원”2)을 심심파적으로 산책을 하다가 “문학비평” 코너의 목록을 흝어보게 되었다. 거기엔 나의 인생과 문학에 대한 칼럼, 인터뷰, 작가일화, 문학비평 등 문장들이 정확히 50편이 올라있다. 그 목록들을 차례로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그 면면들을 떠올려보면서 나는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내 문학도 “문학”인가?......   늘 그래왔지만 나는 지금도 자신의 천재성과 문학적 역량에 대해서 회의(懷疑)를 품고 있다. 한마디로 자신이 없다. 그래서 매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아프게 느껴야만하는 “형벌”3)을 겪군 한다.​   그런데 이들의 내 문학에 대한 평론문들을 보고있노라면 내 문학도 “문학”으로 인정받고있구나 하는 어떤 위안과 이른바 “숙명(宿命)”이 정해준 내 인생도 너무 헛된 것은 아니로구나 하는 자호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문장들에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고 또한 혹평(酷評)들도 있지만 진정 “문학”이 아니라면 혹평을 할 값어치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설사(史)의 장(章) 밖”4)에 버려질지라도 그런 건 괘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스쳐지난 수많은 인연들도 다 소중하지만 문학을 통한, 치열하고 애정어린 문장들로 교감을 하고 소통해온 이 경이롭고 감격어린 인연들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인생도 인젠 슬슬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군하는 시점이다. 그래서 나의 문학에 대한 평론들을 책으로 묶어보는 것도 어떤 총결(總結)이 될 것이다. 그렇다해서 자신의 문학에 대해서 과시를 하거나 그 무슨 “기념비(碑)”를 세우고 싶은 허황한 욕망 같은 것은 꼬물만치도 없다. 모든 것이 덧없고, 한방울의 허무(虛無)로 끝나는 것이 인생의 “진실”임을 너무나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의 존경스럽고 소중한 인연들에 감사하고 싶을 뿐이다. 그 모든 이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한번 술 한 잔 나누고싶을 뿐인 것이다. ​   만약 책이 출판된다면, 성대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은 근사한 파티를 열고싶다. 열고서, 워드까도 한 잔씩 권하고 샴페인도 터뜨리리라.   오로지 그분들께, 모든 소중한 인연들에 경의와 축복을 드리리라.   분위기에 따라서는 레르몬또브의 “시인의 죽음”도 읊어보고, “우크라이나의 넓고넓은 들판....”도 한 번 멋드러지게 불러보는, 객기어린 퍼포먼스도 연출해 보리라!....​   지금도 창밖, 아득한 야공(夜空)엔 새벽 별이 빛난다.   2017년 1월 17일 새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영국 시인 테니슨의 싯구 2)블로그 공간. 3)잉게보르크 바하만(오스트리아) 4)밀란 쿤데라(체코) ***----------------------***---------------------------*** 문학평론집​ ​ 문학, 그 숙명(宿命)의 길에서 -정세봉과 그의 문학     * 권두언   -정세봉 [축하신] 남영전선생 메시지   1. 칼럼, 인터뷰, 작가 일화, 창작담....   [칼럼] 구태의연(外4篇)-김학철 [수필] 우리 문단의 자랑, 정세봉-리상각 [작가일화] 소설가 정세봉-정판룡 [인터뷰] 정세봉의 -김철호 [축사] 조선족문학의 금자탑을 쌓아올리는 소설가-림승환 [수필] 또다른 화려한 시작-김옥희 [수필] 소설 《의 이미지》의 풍파-조성일 [창작담] 진실만이 보석처럼 빛을 뿌린다-정세봉 [창작담] 《나는 어떻게 되여 를 쓰게 되였는가?》[발췌]-정세봉   2. 중단편소설집 출간에 즈음하여   [평론] 우환적인 영혼-김원도 [평론] 작가 정세봉과 그의 소설세계-조성일 [평론] 령혼의 현대적갱생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장정일 [평론] 정세봉과 그의 문학세계-김호웅 [평론] 의식 있는 작가, 한 리얼리스트의 외로움과 용기-이시환[한국]   3. 정세봉의 단편소설에 대한 평(評)   [평론]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승리-장정일 [평론]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농촌의 인간관계-김봉웅 [평론] 終于說出的心底話-庹修明 [평론] 시대의 락오자의 형상-장정일 [평론] 정세봉과 그의 단편소설에 대하여(발췌)-김호근 [심사평] 만화적인 진실-조윤호, 장정일(글) [평론] 숭배사상과 본능적인 욕망의 경계-김춘택 [평론] 중국 반사문학의 문맥에서 본 조선족의 반사문학-김관웅, 허정훈 [평론] 정세봉의 단편 「빨간 크레용태양」론-심종숙[한국] [평론] 정세봉의 문제작 「고골리 숭배자」를 읽고서-이시환[한국] [평론] 추락을 향유하다-장정일 [평론] 고골리의 그림자-허승호 [평론] 프로이드의 인격구조로부터 본 "빨간 크레용태양"-우상렬​   4. 중편소설 에 대한 비평(批評)   [평론] 정세봉의 야심작 에 대한 評-허승호 [평론] 력사를 마주선 작가적 사명감-한광천 [평론] 력사 현실 인생-최웅권 [평론] 력사외 현실 그리고 인생-최삼룡 [평론] 력사적착오, 문화적반성-방룡남 [평론] 의 이미지-리종섭 [평론] 연변문학의 민족성과 시대성-임규찬 [한국] [평론] 정세봉의 중편소설 『볼셰비키 이미지』에 나타난 대립과 화해의 구도-심종숙[한국] [평론] 역사의 천사와 직업으로서의 작가-이혜진[한국]   5. 대학생 론단   [평론] 정세봉소설의 예술적특성에 대하여-김 영 [평론]《〈볼쉐위크〉의 이미지》의 문화적반성-조영욱 [평론] 정세봉의 “하고싶던 말”과 진국개의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를 비교하여-리 영   * 정세봉 연보(年譜) ​    ​ 
31    맛을 돋구는 문제 댓글:  조회:1311  추천:0  2016-10-03
작가: [ 정세봉 ] 래원: [ 한국문학도서관 ] 발표: [ 2002-9-29 ]     맛을 돋구는 문제   ----을 읽고.  정세봉         작년 봄에 김학철선생께서 나에게 장편거작 (상,하)를 증송하신 일이 있는데 지난 번에는 또 새로 출판 된 을 보내주셨기에 또 한번, 감격의 순간을  가져보게 되였다.             초야에 묻혀사는 나 같은 이름 없는 문학도에게 있어서 김학철선생과 같은 분의 저서를 증송받는다는 사실!---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감동이요, 영광이 아닐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고마움에 무엇인가 량심적으로 보답을 해야 하리라는  생각에서 자연 증송받은  그 저서를 우선 성의껏 읽어보게 되였다.           를 련며칠 밤을 패면서 읽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백사를 젖혀놓고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 9편, 잡문과 수필 20편을 쭉--독파를 하였다.         그런데 다 읽은지 수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책을 손에서 놓지를 못하고 있는 나다.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잡문과 수필들이 자꾸만 구미를 당기는 것이여서 짬만 있으면 다시다시 들여다 보게 된다. 참말이지, 보면 볼수록 재미가 나고 열번 읽어도 도무지 싫지를 않다.   옛말도 소설도 아닌 잡문, 수필들이 그토록 재미가 있는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가? 여러모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다가 역시 글의 임을 깨닫게 되였다.                      이것은 작품집에 수록된 수필 의 첫머리이다. 뜻인즉 어떠한 쟝르의 문학작품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맛이 있고 재미가 나야 독자들이 즐겨 읽는 것이지 것이라 하더라도 , 즉 예술성이 부족하면 는 말이다.           김학철선생의 잡문, 수필에는 바로 그 예술적인 이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 맛 또한 진수성찬마냥  다양하다.           , , ,,     , , ,  갑자기 가슴을 쓰라리게 만드는 강한 , 꿋꿋한 지조에서 느끼게 되는 , .....거기에는 굉장하고 화려한 언어로 허장성세를 부리거나 억지감정의 황홀한 의상을 입혀가지고 독자들에게 명작인 듯한 인상을 던져주려는 졸렬한 심리 같은 것은 찾아볼수가 없다. 모든 것이 그렇듯 진실한 것이다.              하긴 글 쓰는 이들치고 작품이 재미가 있어야 독자들을 끌수 있다는 도리쯤은 다 알고있을  것이다. 일부러 재미 없게 만들어서 독자를 골탕먹이려는 작가는 실제 있을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기의 작품에 을 돋굴줄 아는가 하는데 있다. 내가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바도 바로 그 문제인 것이다. 김학철선생이 자신이 무릅써온 무수한 인생고초와  풍부한 인생체험이 없었던들, 게으름없이 꾸준히 고금중외의 서적들을 널리 섭렵하고 문학수업에 고심참담 진력해오시지 않았던들 그처럼 값진 글들을 써낼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진실로 글다운 글을 써내고 진실로 작가다운 작가로 되려면 많이 읽고 많이 배우고 고심히 예술기량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 것이긴 하겠지만 때론 심각한 고민과 좌절, 벼랑 끝에 선 듯한 극한상황을 겪어보는 것도 작가로선 다  유익한 일일 것이다.             특히 나와 같은, 배운바 없는 운학도들은 신문, 잡지에 이름을 푸슬히 내는데 도취되거나 거기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할것이다.            작가의 일생은 작품의 편수거나 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것만큼  한두해 작품을 내지 못하더라도 심지어는 몇 해를 깊이 침잠해 있더라도 자신을 다시한번 정비하고  진실로 을 돋힌 작품을  써내기 위한 고초를 겪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가 맥이 진하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거나 폭탄처럼 작열해버리면 되는 것이다.거기에 그 무슨 미련과 유감이 있겠는가!...            김학철선생의 작품집을 읽고 나면 우리의 문단에서 진정 고매한 성품과 높은 작가적인격을 갖춘 이가 과연 누구인가를 알게 돨 것이다. 우리 문단의 진두에 거연히 서 계시는, 진실로 작가다운 작가가  정녕 어느 분이신가를  알게 될 것이다.            여러모로 깊이깊이 깨닫는바가  있게 될 것이다.                                                                            추운 새벽, 닭 울음소리 들으며....                                                                          [연변일보] 1988년 3월 26일, [해란강]부간.      
30    고민과 감동의 10년/정세봉 댓글:  조회:1098  추천:0  2016-07-21
[권두언] 고민과 감동의 10년 -“연변소설가학회” 창립 10주년에 즈음하여   정 세 봉   2015년-올 해는 “연변소설가학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십년이란 세월은 어쩌면 속절없이 흘러간 것이겠지만 우리들한테는 문학을 고민해보는, 남모르는 열정과 어떤 회의와 긴 고뇌의 시간들이었음에 스스로 감동을 하게 된다.   그동안 학회는 과 지 6호까지 도합 일곱 권의 학회지를 발간하였고 문단사상 처음으로 전문장르인 “소설문학상”을 설립하여 다섯 회(回)의 시상식을 개최, 10명의 국내외 소설가들에게 “대상 수상자”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여기서 “다섯 회”라 함은 을 포함시켜서이다.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그 명칭이 으로 바뀌었지만, 역시 학회 문학상이고 그 취지도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연변소설가학회” “소설문학상”의 곡절 많은 메카니즘이라 하겠다.   문학상의 의미는 한 작가의 천재성과 문학적 역량을 높이 평가해주고, 격려하고 기리는 데에 있으며 그 영광과 경이를 함께 누리는 데에 있는 것이다. 아울러 한 민족, 한 국가 문학의 존재감을 세상에 드러내는, 성스럽고 치열한 깃발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프랑스어권에 이 있고 스페인어권에 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사실은 웅변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은 하련순작가와 박옥남작가가 수상하였고, 제1회 은 최국철작가와 한국의 윤석원작가,  제2회는 박초란작가와 러시아의 공령희작가, 제3회는 김금희작가와 지구 반대편 쪽, 미국의 박경숙작가가 수상을 하였으며 제4회는 조룡기작가와 한국의 신사명작가가 수상을 하였다.   특히“해외상”을 설치한 것은 우리들의 자존이요, 빛나는 발상이라 하겠다. “해외상” 수상자들 모두가 중국 연변에는 처음 와보는 사람들이였는데,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문학상 수상에 진심으로 감격을 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격리시키고 있던 어떤 무형의 경계와 벽이 금방 허물어지고 교감과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점.....다시 말하면 우리 문학이 밖으로 나가야 하며, 특히는 세계속의 여러 나라 문학과의 교류와 교호(交互)의 물고를 틔여야 한다는, 연변소설가학회의 원래의 취지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없이 움츠러들고 왜소해진 우리들의 “꿈”의 실체, “변두리작가”, 작은 “지역세계”에 갇혀사는 작가라는 열등의식과 콤플렉스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이다.   뿐만 아니라 “연변소설가학회”는 손룡호, 홍천룡 등 소설가들의 “작품집출간 기념회”와 “청년작가 소설세미나” 등 여러가지 형식의 문학세미나와 심포지엄을 10여 차례 개최함으로써 문단사회의 교감과 소통의 분위기를 활성화하는 데에 일조를 하였다. 특히는 2015년의 끝자락-12월 23일, “한국추리문학관 문예교육연구회”와 “연변소설가학회” 공동주최로 열린 “‘김성종문학 중국에서의 영향' 연구세미나”는 어떤 통념으로 되어있던 추리소설문학에 대한 편견과 김성종문학의 중국에서의 막대한 영향과 충격을 재확인해보는 세미나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연변소설가학회는 그 설립을 공표할 때에  감히 “역사의 뱃길‘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썼다. 어쩌면 허무맹랑한 침몰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한 노파심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문학 본연의 존엄성과 치열함 및 그 진정성에 충실하면서 ”연변소설가학회“의 보다 확실한 권위와 위상을 꿈꿔본다.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상해의 젊은 기업인 하원철 님, 청도조선족녀성협회 김미정회장님, 연변오덕된장술유한공사 리동춘회장님,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 리영숙회장님, 한국에 체류중인 김련화경리님, 연길 제2병원 주임의사 황영찬선생님, 조선족의 유명한 배우 문혁선생님, 대한민국의 고마우신 분들인 박영규선생님, 배상호사장님, 유재목목사님, 충북 옥천군 “가산사”의 정지승스님 그리고 이번 6호 출간에 도움을 주신 심양 “신생활집단” 안창락회장님께 머리 숙여 숭고한 경의와 감사의 뜻 전한다. 그리고 늘 지지 성원을 보내주신 문단의 여러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2015년 12월 29일.   [연변소설가학회 창립 10주년 기념특집 6호]  
29    김성종작가, 까페에서 팬을 만나다 /정세봉 댓글:  조회:1235  추천:0  2016-01-12
 [수 필] 김성종작가, 까페에서 팬을 만나다   정 세 봉       2015년 12월 23일 오후, “한국추리문학관 문예교육연구회”와 “중국연변소설가학회” 공동주최로 연길서  “'김성종문학의 중국에서의 영향' 연구세미나”가 열렸었다. “류경호텔”에서의 저녁연회 뒤끝에 나는 무작정 한국측에서 오신 김성종작가 일행 5명과 소설가학회 멤버들을 이끌고 애단로 소재(所在), “흠전빌딩(鑫田大廈)”으로 향하였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리자 “C.E.O(西艺欧)”라는 까페간판이 몽환적인 빛을 발산하면서 유혹하듯이 명멸하고 있었다.   까페에 들어서자 “마담(madame)” 김금복씨가 나를 보고 “아, 선생님!”하고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다. 나는 내심 어떤 음모(陰謀) 같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우선 마음에 드는 좌석을 골라 손님들을 착석(着席)을 시켰다. 그리고는 마담을 불러서 우선 손님들에게 소개했다. “까페 마담 김금복씨인데, 제가 살았던 ‘룡수평’ 시골, 말하자면 저의 ‘고향 후배’이지요.” “아~하!......” 모두들 일제히 이 까페로 “끌고온” 리유를 알겠다는 표정들이였다. “이 분이 누구신지 아나?.....” 나는 마치 수수께끼를 출제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마담에게 손님을 소개했다. “이 분이 바로 금복이가 그처럼 숭배해마지 않던 김성종작가님이시다.” “아, 그러세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김성종작가님의 팬(fan)이랍니다!.....중학교 때, ‘제5 사나이’, ‘일곱송이 장미’를 밤을 새며 읽었지요.” “아, 그러신가?....반가워요, 반가워!....” 김성종작가도 몹씨 놀래는 표정이였다. “작가”와 “팬” 두 사람의 열정적인 악수장면에 금방 박수갈채(拍手喝采)가 터졌다.   몇해전의 어느날 나는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C.E.O(西艺欧)” 까페에 들린적이 있었다. 김금복 마담은 나를 금방 알아보았고, 25년 전 어느 여름날 오후의 기억을 떠올려주었다. 시인 현규동선생, 소설가 차룡순선생, 나, 이렇게 셋이서 “룡수1중”에 가서 학생들한테 “문학강연”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저도 그날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던 학생이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C.E.O” 까페의 단골손님으로 되었던 것이고, 김성종작가의 팬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터였다.    아무튼 나의 “깜짝쇼”는 성공한 셈이었다. ‘작가“와 ”팬“은 물론이고 좌중일동(座中一同)이 덩달아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저녁 ‘뒤풀이(2차)’는 제가 쏩니다!” 마침내 연변대(大) 우상렬교수가 이렇게 선언하고 나섰다.   까페 마담과 녀종업원 둘, 이렇게 셋이서 종종걸음을 치면서 주문받은대로 커피를 주루루 올리고 잇따라 버드와이저(白威小甁) 맥주와 안주들이 푸짐하게 올려졌다. 12명이 둘러앉은지라 거창한 술자리였다. 소설가학회 회장 우광훈씨가 먼저 건배를 제의했다. “사실 재중동포들 가운데에 김성종작가님을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습니다. 'C.E.O' 까페에 오니까 여기도 팬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개막사에서 얘기했지만, 김성종작가님의 작품이 보여준 세계는 참으로 참신하고 현란한 창밖의 세상이였지요. 오늘저녁, 김성종작가님의 새로운 팬과의 만남을 축하하여 건배!“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고, 화제는 자연스레 추리소설문학으로 이어졌다. 김성종작가님 곁에 앉았던 나는 세미나 연단에서의 김성종작가의 강연에 매료되었던 소감을 이야기 하였다. 추리문학이 홀대받는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시면서 김성종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 그럼 영국문학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문학을 홀대할 수가 있는가?!....실제로 16세기 쉑스피어의 4대비극(‘햄리트, 오쎌로, 리어왕, 막베스)도 다분히 추리문학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것.......   “그렇지요. 이를테면 에드가 앨렌 포우를 미국문학에서 홀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보르헤스의 말이 생각납니다 ‘포우가 없었다면 우리 시대의 문학은 존재하지도 않거나 아니면 적어도 지금의 문학과는 아주 다른 문학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저는 아까 선생님 강연에서 일본엔 추리소설가가 1천명, 한국엔 10명밖에 안된다는 숫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여기엔 단 한명도 없지요.....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연변 문학평단의 “신사” 장정일씨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듯이 대화에 끼여들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김금복 마담이 버드와이저 맥주 한 티(6병)를 들고 나타났다. “제가 술 한잔씩 올려도 될까요?” “아, 좋지!” 소설가 손룡호씨가 물개박수를 짝짝 치면서 환성을 올렸다.   김성종작가님부터 시작을 해서 차례순으로 한잔씩 부어올리고나서 김금복 마담은 잠간 주저주저하더니 “김성종작가님께 한가지 청(請)이 있사온데, 사인을 해주셨으면......) 하고 수줍게 웃는다. “허허.... 사인지(紙)를 가져와요.” 김성종작가의 흔쾌한 수락에 김금복씨는 아이들처럼 방방 뛰었다.   자신의 배낭에서 여러가지 색깔의 화필을 꺼낸 김성종작가는 사인지(紙)에다 얼핏 들여다 봐서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그림을 속사를 하고서 정성껏 “김성종”이라는 함자(銜字)를 사인을 하는 것이었다.       마침 뒤늦게 쫓아와서 동참을 한 윤운걸기자가 사인을 하시는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김성종작가, C.E.O 까페 마담 김금복 팬에게 사인을 해 드리다.(윤운걸기자 찍음)   “제가 한잔 제의를 하겠습니다.” 김성종작가는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우연히 C.E.O 까페에서 팬을 만나니 감개무량합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연변에 와봤는데, 여러모로 인상이 깊습니다. 앞으로 자주 내왕하면서 교감을 나누고 소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 여름쯤, 저희들 쪽에서 초청을 하렵니다.” 저녁연회 때부터 적잖은 량의 술을 마셨지만 김성종작가님은 흔쾌히 잔을 비우셨다.   어느새 시간은 밤 열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쉬움과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서 우리는 급기야 김금복 마담의 배웅을 받으며 까페문을 나섰다. 김성종작가님 일행은 래일 연길을 떠난다. 밤추위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무심히 밤하늘을 아득히 바라보고있노라니, 갑자기 슬퍼졌다. - “문학의 길은 멀다!......”       (2015년 12월 24일 새벽)    [ 2016년 1월 6일부 登載]  
28    못나고도 슬픈 “패배자”의 초상(肖像)/정세봉 댓글:  조회:1170  추천:0  2015-11-25
      [작가 노트]   못나고도 슬픈 “패배자”의 초상(肖像)   정 세 봉      세상이 열려서 한국문학을 본격적으로 접촉할 수가 있게 되었던 1990년대 초, 나는 문자 그대로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과 맥빠지는 실의를 절감했던 바가 있었다. 황석영, 조정래, 한승원 등 작가들이 1943년(계미생, 양띠) 생으로, 나와 동갑내기들이였다는 사실!....... 그들은 이미 문단에서 거대한 “산맥”으로 치솟아 있었는데, 우리는(나는) 중학생이 작문을 짓듯이 단편이나 끄적거리고 있다는 그 참담한 “뒤늦은 깨달음”이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어릴적부터 꾸어왔던 “문학의 꿈”을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버려지지가 않아서) 나름대로 글을 써왔던 것이고, 우리들의 “중국적 진실”은 우리만이 쓸 수가 있다는 오기(傲氣)서린 신조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역할을 해왔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한 편, 두 편 써서 발표를 하면서 창작적 희열과 문학적 감동을 맛보는 순간도 있었지만, 지난온 길을 되짚어보면 번마다 겪어야만 했던 “고민(문학적)”의 괴로운 순간들과 그 감질나는 시간들이 아픈 상흔처럼 되살아나군 한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새로운 소설을 쓰려고 원고지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빈 듯이 막막하기 짝이 없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천재성”과 문학적 력량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는데, 잉게보르크 바하만(오스트리아)의 체험담처럼 그것은 “형벌” 그 자체인 것이다.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퍽 오래전부터 역사(役事)를 해온 소설을 아직도 탈고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엄청난 테마이고 잘 다루기만 하면 틀림없이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있는 제재이지만, 힘겹게 썼다가는 마음에 들지를 않아서 뒤엎어버리고 또 뒤엎어버리기를 몇 번째.......그러다가 그만 지쳐서 쓰는 행위를 잠간 접고서 독서를 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었다.   처음에는 동구권(같은 사회주의圈) 작가들은 어떻게 쓰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임레 케르테스(헝가리)의 “운명”, 이스마일 카다레(알바니아)의 “꿈의 궁전”, 밀란 쿤데라(체코)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비톨트 곰브로비치(폴란드)와 이보 안드리치(유고슬라비아)의 소설들을 읽었고 중남미문학에 깊이 매료되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럼비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 이사벨 아옌데(칠레) 등 수많은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소설들을 읽었다.   특히는 보르헤스 전집 다섯 권을 읽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워낙 심오한 글인데다가 페이지마다에 있는 깨알같은 글자의 주해들까지 밑줄을 그으면서 찬찬히 읽다보면 그 속도가 그야말로 거북이 걸음이다. 보르헤스문학의 의미체계와 그 기법의 신묘함에 넋을 빼앗기다보면 어떤 가능성이 보이는 듯해서 공연히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 년간에는 유럽 소설가들의 페이소스적인 정서를 거부하는 담담한 문체와 그 기법이 흥미를 유발하고 있는데, 외젠 이오네스코(프랑스)의 “외로운 남자”,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등 소설들이 그런 경향의 작품들이라 하겠다.   나는 그렇게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서 느긋하게 명작들을 읽는 “독서의 즐거움”을 늘어지게 누려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피와 살이 되었는지 다행히도 점차 머리속도 정비가 되어서 다시 작업을 시작은 하였지만 소설의 성패여부는 기약할 수가 없다. 내 앞에는 자신의 한계를 깨뜨려나가는 싸움을 끝없이 해야만 하는 버거운 시간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문학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문학이(나의 문학이) 세계속에 나가야 한다는, 그렇지 않고서는 문학의 가치성 운운은 무의미하다는 그런 주제넘는 “눈높이”.   나의 단편소설 “고골리 숭배자”의 주인공 니꼴라이 유가 바로 그런 “눈높이”의 소유자라 하겠다. “소설사(史)의 장(章)” 밖에 버려질 가치성 없는 글을 쓰느니, “절필”을 감행하고 “현란한 추락”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만용(蠻勇)과 객기(客氣)........ 오, 지지리 못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가엾는 “패배자”의 초상(肖像)이여!   (2015년 9월 18일)     [ 2015년 6호 登載]  
27    남의 소설 읽기와 내 소설 쓰기[대담]/정세봉, 김호웅 댓글:  조회:1418  추천:0  2015-02-15
[대담] 남의 소설 읽기와 내 소설 쓰기     ― 소설가 정세봉과 평론가 김호웅이 본 우리 소설    정세봉 (소설가) 《문학과 예술》지에서 우리 조선족소설을 두고 김호웅 교수와의 대담을 해달라는 요청에 수락은 했었는데 정작 임(臨)해 보려니까 생각이 많아짐을 어쩔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과연 내가 나설 자리인가 하는것이고 둘째는 만약 나설 경우, 내가 과연 뭘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사려(思慮)입니다.     하나는 구설수(口舌數)가 싫고 다른 하나는 만약 진행할 경우, 책임성이라는 부담감이 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며칠을 내내 고민, 고민을 하다가 일단은 솔직한 생각들을 진솔하게 나누어보기로 마음을 잡았고, 진행해 보다가 안 되면 《투항》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가 싶었음을 우선 말씀 드립니다.     소설편집을 10여년 해보는 과정에 항상 느끼면서도 무심했던 것인데 지난해부터 소설가학회의 카페(홈페이지)에다 우리 문단 작가들의 《대표작 모음집》을 꾸미는 일을 시도, 진척시켜보는 와중에 우리 작가들의 문학(작품)이 많이 유치하고 서툴다는, 예전에 무심했던 사실이 하나의 《문제》로 집요하게 머리속에 눈 뜨는 것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하긴 수십년을 《갇힌 세상》에서 살았고 또한 《표현의 자유》의 한계성 등 여러 외(外)적인 원인으로 그렇게 될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것도 당연하다고 할수가 있겠지요.    반성해 보면 나 자신도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서툰 문학에 만족을 하고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리유가 될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치 사회적, 력사적 환경과 여건 등 외적인 요소들때문에 수준 높은 문학을 할수가 없었다는게 합리적인 또는 절대적인 리유로 될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지요.     지구촌의 여러 대륙, 수많은 나라, 수많은 민족들의 개개의 력사와 삶도 무겁고 고단하고 처절하기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과 그런속에서 오히려 수준 높은 문학, 큰 작가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련관시켜 보게 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더군요.     김교수님께서도 당연히 이러한 문제, 또는 이런 문제들을 포함한, 우리 소설문학과 작가들에 대한 더 넓은 안목과 견해들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많이 궁금합니다.      김호웅 (평론가) 이렇게 인터넷으로 만날수 있다니 세봉 선생님과 제가 서로 다른 별나라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드네요. 한편 달리 생각하면 이렇게 만나는것도 좋은것 같네요.    세봉 선생님은 커피를 즐기시고 저는 술을 좋아하고, 세봉 선생님은 운치 있는 다방을 찾고 저는 서민적인 술집을 드나드는 사람이니, 공연히 돈 팔고 서로 체면 때문에 일방이 손해를 보는 만남을 가질것 있습니까.    앞으로 며칠은 메일로 세봉 선생님의 구수한 소설이야기를 듣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세봉 선생님은 저의 큰형과 동갑이고 저보다 열살 손우 어른이니 허물없이 호웅씨라고 불러주기 바랍니다.    저는 대학교시절에 소설을 좀 써본적 있지만 아직 소설에 입문을 못한 사람입니다. 좋은 시를 쓰기도 힘들지만 좋은 소설을, 그것도 중편이나 장편 편폭의 소설을 쓰기는 더욱 어려운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시는 단란한 신방을 꾸미는 작업이요, 소설은 호텔을 짓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대학교 교단에 서서 남의 자식을 가르치는게 주업이라 집구석에 들어앉아 느긋하게 소설을 볼 새가 없어요. 다행이 몇 년간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소설부분 심사를 본의 아니게 “독점”을 하다 보니 자타가 좋다고 하는 후보작들은 더러 읽어본 셈입니다. 또《조선족문학사》와 《문학비평방법론》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문학의 흐름과 현황 및 바람직한 방향 등에 대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세봉 선생님에게서 많은걸 공부하게 될것 같습니다.      요컨대 우리문학이 좀 유치하고 우리 이웃인 중국 주류문학이나 한국문학에 비해 많이 뒤처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대체로 동감이지만 우리 조선족문학이 모두 낟알은 없고 쭉정이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 자신의 삶과 고뇌, 우리민족의 실존과 몸부림을 형상화해서 중국 주류문학과도 다르고 한국문학과도 다른, 그러면서도 세계문학과 대화할수 있는 새로운 싹들이 보이고 있다고 봅니다.이런 문제는 이제 마지막에 좀 의견을 나눌 문제이고 이번 대화에서는 한 문제, 한 문제씩 세봉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한 가지 문제만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 문학의 독자적인 성격과 특징을 드러내자면 조선족문학 전체를 념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일단 1990년대 이후의 소설들과 그 문학적경향을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세봉 선생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1990년 좌우에 쓴《엄마가 교회로 가요》, 《빨간 크레용 태양》과 같은 소설들은 그 이전의 《하고싶던 말》, 《볼쉐비크의 이미지》와 같은 소설과는 완판 달라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가의식의 변화는 세봉 선생님의 경우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라 최홍일, 리혜선, 허련순 등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1990년대 이후 소설문단의 지각변동과 새로운 경향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세봉 선생님은 요즘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고 어떤 작가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까?    정세봉 씨(氏)로 말을 낮추어달라는 요청은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오히려 저한텐 부자연스러우니 그럼 그냥 호웅선생으로 호칭을 하겠습니다.    우리 소설문학이 그래도 낟알은 있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은 당연히 옳은 평가이고 저도 그렇게 자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의 소설문학은 말씀 그대로 《지각변동》이 있었다고 보아지며  그 전 시기에 비해 확실히 깊어지고 많이 세련되여 가고있는것도 역시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지요. 구체적으로 여러 작가와 작품 및 그 경향성 같은것들에 관해서 갑자기 리론적으로 언급을 한다는것은 솔직히 자신이 없는 일이라 생략을 하는바이지만요.     그런데 스스로도 늘 그렇게 《충분히 긍정》을 해놓고서도 그 뒤끝이 개운치 못한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소설문학이 뭔가 답답하고 심하게 표현을 하면 《눈이 감긴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한 번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쪽에 무게를 많이 두고 접근을 해보는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겁니다.     물론 그것은 세계문학의 구석구석을 고추장 맛보기로나마 기웃거려 보면서 느끼고 떠오른 생각인데 우선 세계 유명작가들의 단편들이 충격적이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호헤르 루이스 보르헤스거나 프랑스의 르 클래지오, 오스트리아의 아르투어 슈니츨러 등 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지요.    쿠바 작가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가는 려행》을 실례로 든다면 마르시알이라는 주인공(대농장주)이 죽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마치 필림이 거꾸로 돌아가듯이 이야기가 역으로 진행이 되며 무척 빠른 템포속에 주인공의 옹근 인생과정이 그려지면서 어머니의 자궁속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것이 《근원》으로 돌아가지요.     야생마처럼 거친것 같으면서도 마력이 붙은듯 흥미진진한 문장력으로 숨돌릴 사이 없이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무서운 속도감을 지닌, 짧디짧은 그 단편소설을 읽고나면 저도 모르게 경이로운 미소가 그려집니다.     그러면서 자연 나 자신(혹은 우리들)의 소설문학을 되돌아보게 되고 비교를 해보게 되는거죠. 따라서 세계문학의 큰 흐름과 그 문학사적 흐름속에 무수히 부침해 온 어떤 법칙같은것들을 살펴보면서 충분히 소화해내고 세계문학을 구석구석 널리 섭렵을 하는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절박하다는 느낌입니다.    김호웅 요즘 세계문학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워낙 세계문학은 방대한 령역이고 언어 장벽이나 자료 부족으로 말미암아, 더더구나 일상에 쫓기다 보니 저는 과문입니다만, 우리문학을 정리하고 살찌게 하기 위한 참조계로 일본, 미국, 로씨아에 살고있는 해외조선민족문학에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있습니다. 재일조선인문학의 경우에는 김사량, 김달수, 김학영, 김석범, 리회성, 리양지, 유미리 등 1, 2, 3대 작가들 모두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변형, 승화시켜 적어도 일본 주류문학에서 인정하는 작품들을 량산하고있지요.    미국적한국인 작가의 경우에도 리창래(1965~  ) 같은 작가는《원어민》이라는 작품으로 헤밍웨이상까지 받았습니다. 해외 화인문학(華人文學)도 디아스포라 글쓰기(離散寫作)라는 형태로 좋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어 중국 본토 문학인들의 부러움을 사고있습니다. 1990년 대 이후《백년고독》을 쓴 마르케스를 비롯해 남미, 그리고 구라파와 아시아, 구라파와 아프리카 경계 지대에 살고있는 작가들도 두각을 나타내고 노벨문학상을 독점하다싶이 하고있는 형국입니다. 미국의 흑인작가들도 노벨문학상을 탔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디아스포라의 주제, 소외와 인간의 보편적 해방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광(光)을 치고있지요. 물론 이는 우리 작가들이 군침만 흘렸을뿐 리념, 제도적인 한계때문에 감히 다루지 못했던 주제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1996년 허련순의 장편 《바람꽃》이나 요즘 히트를 치고있는 그녀의 장편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와 같은 작품은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루고 있어 세계문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조짐을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소설을 먼저 진맥한 후, 다시 세계적인 거장들의 기교나 기법들을 어떻게 우리 소설에 접목시킬것인가 하는 문제를 론의하기로 하죠. 먼저 1990년 이후 우리 소설가들의 새로운 의식전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진맥해보고 분류해 보는게 순서인것 같은데요.    저는 우리문학도 세계사적인 패러다임과 중국 주류문학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다고 봅니다.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흔들리고 《88》서울올림픽을 거쳐 중한수교가 이루어짐으로써 중국 조선족사회도 세계에 대해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존이 리념과 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수 있게 된거지요. 볼세비크의 리념적경직화에 가장 큰 비애를 느꼈던 작가들이 오히려 지배적인 리념과 사상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보통 인간의 생명의 숨결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거대서사를 기피하고 자질구레한 인간사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러한 이미에서 세봉 선생님의《빨간 크레용 태양》이나 리혜선씨의《병태네 빨래줄》 같은 작품이 시사(示唆)하는바가 크지요. 문학의 세속화, 다중심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주류문학에서는 이를 신사실주의라고 명명하고있습니다.    아마도 두 번째 경향은 김관웅 박사가 말한바와 같이 민족적사실주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 경우, 민족의 현실을 정시하고 민족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민족구성원의 몸짓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있습니다. 이 계렬에 속하는 작?걋막? 김훈의 《또 하나의 》, 최홍일의 《흑색의 태양》, 최국철의 《제5의 계절》 과 같은 작품을 들수 있겠지요. 이러한 작품들은 현실고발을 거쳐 주체적인 자각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에 기대고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흑룡강의 하늘에 별처럼 떠오르고 있는 박옥남씨의 소설 《둥지》, 《목욕탕에 온 녀인들》, 《마이허》 등은 성급한 대안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생존상황과 타민족과의 공존공생의 숙명을 리얼하게 그리고있어 오히려 더욱 강한 공감대를 획득하고있습니다.    그 외에도 페미니즘소설, 생태주의소설들이 나와 한결 다양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최홍일의 《눈물 젖은 두만강》과 박선석의 《쓴웃음》 같은 장편은 우리민족의 근현대사와 당대사를 형상화한 큰 스케일의 작품으로 알고있습니다.    세계문학의 잣대로 볼 때 또 어떤 주제경향을 주시해야 한다고 봅니까? 혹시 이외에 세봉선생께서 특별히 중요시하고 있는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세봉 역시  호웅박사시군요. 1990년대, 우리 소설문학의 흐름을 길을 틔워놓듯이 금방 열어주시니까 일목료연하군요. 솔직히 소설 쓰는 사람들은 대개 소설의 생리에만 몰두를 하게 되니까 비평(리론) 쪽엔 많이 어둡답니다.    우리 소설문학의 경향성적인 흐름도 세계문학과 중국 주류문학의 사조적인 흐름에 궤를 맞추어 그렇게 정리를 하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는군요.    사실 김훈의 단편 《또 하나의 나》, 최국철의 중편 《제5의 계절》, 이 두 소설은 제가 편집을 했던 작품들인데 어떤 경향의 작품으로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특히는 문학사적인 흐름이라는 선상에서 《민족적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으로 분류를 시켜놓고 거론을 할수 있다는것이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을 합니다.    호웅선생이 해외조선인문학권(圈) 쪽에 눈길을 돌리고 살펴보고있음에 저도 크게 공명을 합니다.      우리 《민족문학》이 리념이라는 벽때문에 반세기 넘게 서로를 알지 못한채 시간을 죽여왔던 그 깊은 단절의 곬을 이제라도 메우고 교류의 폭을 넓혀가야 하는 그 당위성과 절박성을 저도 잘 알고 있기때문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원인과 여건으로 인해서 여러 갈래의 동포문학속에 아직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오히려 모르기때문에 더욱 강렬한 호기심을 갖게 되는거죠.    러시아의 김 아나똘리는《사할린의 방랑자들》, 《아버지의 숲》, 《신의 플류트》 등 장편대작들을 낸 작가로 죽음의 문제, 인간 내부에 사려있는 동물적인 본성, 력사와 개인의 운명간의 상호관계, 혈족관계 등등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룸과 동시에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문제를 다루는 작가로 알고있고 박미하일의 작품도 일부 단편들은 읽었지만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든가 《천사들의 기슭》과 같은 장편들은 읽지 못했지요.    소개 글들을 통해서 《작은것으로 큰것을 의미하게 하는것》이 그의 창작적지향이라는 정도로 알고있습니다. 재일동포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리회성이나 김석범 등 작가들의 문학이 민족정체성이라는 《핏줄 테마》를 가지고 치렬하게 고뇌하고 쓰는 작가들임은 알고있지요.    양석일의《피와 뼈》라는 장편에서 큰 충격을 받은바가 있습니다.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의 력사를 다루면서 민족정체성이 담긴 민족인상(民族人像)을 그려낸, 그야말로 《악마적인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주는 걸작이지요.    재미동포문학도 백여년 걸어온 문학사까지 정리되어있음에 크게 놀랐던것이지만 여러 갈래의 동포문학들을 알고 깊이 료해하는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며 우리 자신의 문학을 되돌아 볼수 있는 계기로 될수가 있다는 점에서도 크게 유조하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상호 교류가운데서 우리 중국조선족문학도 자기의 《중국적인 얼굴》을 가지고 그들 문학과 만날수 있게 되었다는것은 사뭇 가슴 설레는, 사변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기회에 소설가들의 작은 규모의 모임이라도 조직해 놓고서 호웅선생을  모시고싶은 욕심도 생기는군요. 세계문학의 잣대로 볼 때 어떤 주제적경향을 주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거창하게 론의할수도, 또한 간단명료하게 언급을 할수도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문학이 다루어야 할 수많은 문제가운데 크고 중대하고 보다 절박한 문제(주제적 경향)들은 언제나 있는것이지요.    저는 지금도 그 첫자리로 권력의 독재와 횡포, 그 부조리를 꼽고 싶습니다. 지난 20세기만 보더라도 쏘련의 블가꼬브, 나보꼬브, 솔제니친, 파스테르나크… 동구권의 임레 케르테스(헝가리), 밀란 쿤데라(체코), 이스마일 카다레(알바니아) 등 사회주의권(圈) 작가들과 중남미의 호헤르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 그들 모두가 그런 문제를 깊이 있게 포괄적으로 다뤄냄으로써 세계문학의 거장들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김학철선생도 당연히 그들 반열에 세우셔야죠. 이른바 《디아스포라적 삶》을 문학이 다루는 문제도 중국조선족 작가들앞에 새삼 첨예하게 떠오른 테마라 할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디아스포라적인 삶이란 어떤 의미에선 지구촌의 모든 민족(혹은 온 인류) 구성원들의 숙명이라 말할수가 있는 것이지만 어느 때보다도 우리(중국조선족) 모두가 아프게 껴안고 나가야할 현실이기때문이지요.    그리고 제가 작가로서 피부로 느끼는것이지만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생리속에 아직도 완명(頑暝)하게 뿌리 내려있는 《이데올로기의 벽》 을 허무는 문제도 작가들이 치열(熾熱)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문학의 흐름을 보면 로씨아(쏘련)고 동구라파, 말하자면 사회주의권(圈) 쪽 흐름이 대개 공통성을 가지고있고 우리보다 많이 앞서가고있지요. 로씨아만 보더라도 1990년대부터는 1980년대 후반의 《복권문학》, 《망명문학》의 자리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대신 차지하고 하리또노브, 프레빈, 쏘꼴로브 등등의 쟁쟁한 젊은 작가군(群)이 등장을 해가지고 기존의 창작방법과 전통을 거부하고 암호화, 상징화, 적라라한 성적표현, 변칙적이고 과장된 어휘들을 사용하면서 개혁, 개방기의 혼란과 암운을 뚫고 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있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문학의 경향적(혹은 사조적) 흐름이라는것이 필경은 그 어떤 법칙성을 지니고 있는것인만큼 궁극적으로는 따라가게 되어있겠지만 굳이 련련하거나 본따려 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름대로, 우리가 안고있는 시대적, 현실적 고민과 근본적이고 절박한 문제들,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욕망과 부조화의 세계, 힘없는 백성들과 소외된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사투(死鬪)를 연출하고있는 삶의 현장에 무수히 숨어있고 깔려있는 글감들을 각자 나름대로의 《특출한 눈》과 력량대로 캐내고 다뤄내면 참문학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 소설문학의 실상으로부터 보건대 무엇을 쓰는가 하는것이 우선은 중요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가 훨씬 절실하게 다가와있다는 느낌입니다.    무엇을 쓰든지간에 잘 써야만 문학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것이고 아무리 작고 가벼운 제재를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그 어떤, 남들이 보아내고 말한적이 없는, 깊은 철학과 신선하고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작품이라면 십분 중대한 제재를 다룬것으로도 되는것이기때문이지요.    재일동포작가 유미리의 경우만 봐도 전문적으로 파편화된 가정, 가정의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루고있지만 그의 문학이 큰 주목을 받고있지 않습니까.      비교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우리 소설문단에 이미 나온 장편소설이 수십 부가 되고 내가 직접 취급을 했던 장편만도 십여 부가 됩니다. 예전에도 그 문학성이 안타까웠지만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보니 소설의 기법 쪽에 력점을 두고 고민을 해보는것이 절실하다는 느낌입니다.    최근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 작가의 평생의 글쓰기 작업이란 어쩌면 타고난 문학적 천재성을 스스로 확인을 하는, 또한 세상사람들한테서 최종 인정을 받는, 길고도 처절한 과정이라는…      그리고 그 이른바 천재성이라는것이 재창조적인 언어를 통한, 말하자면 소설을 《문학》으로 만드는, 예술적기량에 있는것임을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루이스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를로스 푸엔테스, 이사벨 아옌데 등 일군(一群)의 중진들이 유럽문학의 정전을 감연히 거부, 《몽환적사실주의》라는 생경한 기치를 들고나와 중남미문학을 일약 세계문학의 중심에 폭발적으로 떠오르게 한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였습니다. 그들은 도전적이고 탐구적인 실험과 진통을 무수히 겪으면서 소설기법상의 일대 혁명을 이뤄냈던거지요.    게다가 호헤르 볼피, 이그나시오 빠디야, 차베스 카스타녜다, 우로스, 페드로 앙헬 팔로우 등 멕시코?? 젊은 작가 5명이 《크랙선언문》이라는 엄청난 도전을 내걸고 기존문단에 저항, 하나의 새로운 문학사조를 창출해낸 사실은 또 하나의 흥미롭고도 경탄스러운 충격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비평가의 안목으로 우리 소설들을 살펴보건대 사조적경향, 소설언어, 소설의 여러 기법상 어떤 변화들이 있고 어느 작가, 어느 작품에 실험적인 몸짓이 보인다든가 하는데 대한 호웅선생의 간단한 견해와 인상을 듣고싶군요.    김호웅 정년을 한 후 많은 편집들이나 작가들은 하루아침에 착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는게 오늘의 현실이지요. 우리 대학교 교수들중에도 정년을 하면 책장을 덮고 낚시터나 산으로 소풍만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허지만 세봉 선생님은 오히려 정년을 한 후 많은 책을 읽은것 같군요. 구소련과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문학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군요. 참 부럽습니다.    저희처럼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살다보면 자기 전문분야밖의 세계는 돌아볼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좋은 교수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론문을 쓰고 여러가지 평가나 검사에 응부해야 한답니다. 결국 귀한 세월을 다 흘러보내게 되죠. 물론 여러 분야의 교수들이 모여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학생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게 되는거지요. 아무튼 세봉 선생님처럼 내 시간을 내가 지배할수 있는 여건은 아직도 10년을 기다려야 마련될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우리 소설문단에서 기대를 걸어볼수 있는 작가들을 감히 줄을 세워보겠습니다. 리원길, 정세봉, 최홍일, 김훈, 우광훈, 리여천, 김재국, 허련순, 리혜선, 조성희, 량춘식, 박옥남과 같은 작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문학상 심사관계로 여러 문학지, 신문에 실린 소설들을 보았습니다. 허련순, 리혜선, 박옥남 등 녀성작가들의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았고 우리 소설문학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허련순씨의 소설에 대해서는 요즘 김관웅 박사가 상세하게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약하기로 하고 박옥남과 리혜선의 일부 작품들을 보기로 하죠.    박옥남의 《둥지》라는 작품은 작년 4월 목단강시에 가서 《2005년 조선족우수작품집》에 실을 작품을 보다가 우연히 읽게 되었죠. 세봉 선생님의 말씀처럼 문학은 천재성이 없이는 아니 되는가 보아요. 후에 알아본데 의하면 박옥남씨는 오상사범학교 일본어학과를 나와 상지조선족중학교에서 일어교사로 근무하고있는 녀성인데, 우리 말과 글을 너무나 잘 다루고 있더군요. 화롯불에서 파낸 감자나 고구마처럼 구수하단 말이에요. 오히려 산재지구 작가들의 소설에서 리기영의 작품을 읽는 그런 구순한 언어미를 맛볼수 있었습니다. 1980년 연변문단에 리원길이라는 언어의 귀재가 불쑥 나타났을 때 받았던 그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옥남씨는 2006년에는 《목욕탕에 온 여자들》, 올해 벽두에는 《마이허》라는 단편을 발표했죠. 《둥지》는 도데의 단편소설《마지막 수업》의 구조를 배운것 같고 《목욕탕에 온 여자》는 일본 근대소설의 총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는데, 아무튼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예리하고 언어가 일품이에요. 《마이허》에서 개미허리와 같은 강 하나를 사이를 두고 살고 있는 중국인 마을과 조선족 마을의 색다른 풍속을 아주 생동하게 그렸죠. 이 소설은 민속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보아요.    상투적인 언어, 비유만 되풀이한다면 영원히 자기의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만들어낼 수 없죠. 《물 찬 제비요》, 《억대우 같은 사내》 와 같은 상투적인 비유는 《죽은 비유》지요. 묘사, 비유, 은유, 상징 등은 새롭게 개발되어야 하고 참신해야 합니다. 여기에 작가의 첫째가는 사명이 있는 게 아닐가요. 기업에 비유하자면 새록새록 신제품을 개발하지 못하면 도태되는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새로운 묘사, 비유, 은유, 상징, 아이러니, 역설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독자를 잃게 되죠. 이런 의미에서 저는 박옥남 작가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있고 큰 기대를 걸게 됩니다.    리혜선씨야 우리 문단의 중견 소설가이지요. 최근 몇 년 간 단편 《병태씨네 빨래줄》, 장편 《빨간 그림자》와 같은 실험적인 소설들을 썼고 그러한 실험정신에 평단의 찬반이 엇갈렸죠. 저는 좀 실망을 가졌던 편인데, 이태 전《도라지》 잡지에 실린 《매니큐어》라는 수필을 보고 리혜선씨의 문학적 재치를 다시 긍정하게 되었다가, 작년 《장백산》에 실린 중편 《터지는 꽃보라》를 보고 우리 문단의 사라졌던 재녀(才女)를 다시 찾은 느낌을 받았어요.    김학철 선생님의 말마따나 소설은 뭐니 뭐니 해도 읽을 재미가 있어야 하죠. 소설은 결코 약이 아니거든요. 몇 년 간 《터지는 꽃보라》와 같이 재미가 있는 소설을 처음 읽게 되었거든요.    이 소설의 작중인물들은 모두 진짜 이름을 쓰지 않고 익명이나 별명으로 통합니다. 오늘의 대중사회에서 개개인은 익명으로, 기호나 수자로 존재함은 더 말할것 없습니다. 저도 가끔은 현금인출기에서 비밀번호를 넣고 돈이 나올 때마다 익명으로만 통하는 저희 실체를 실감하게 되죠. 세봉 선생님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작품의 경우에도 작중인물들은 《오징어파티》에 《고구마》, 《별난 녀자》, 《안니》, 《제이》로 통하죠. 이러한 익명의 조건에서 이들은 자기의 욕구를 거침없이 분출합니다. 천사가 악마로 변하죠. 모든 탈을 벗어던지고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게 되지요. 황차 《3.8》절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익명의 네 중년녀인들이 쏟아내는 성적 기갈과 음담패설은 읽는이들을 포복절도케 합니다. 기실 그들은 가정을 위해 한국에서 10년씩이나 허둥대면서 일했지만 일단 귀국하자 자식과 남편, 사회에 의해 소외되고 마는 이방인들이죠. 그래서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눈물 어린 미소를 짓게 되는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진통과 해체, 그리고 소외의 주제를 익명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미있게 풀이했다고 봅니다.    물론 한국의 양문길이라는 소설가가 1970년대 《익명의 여인들》(, 1973.3)이라는 소설을 쓴바 있는데, 이 소설은 생래(生來)적인 이름은 필요가 없고 묘한 수자로 된 번호로만 불리워지면서 하루살이처럼 그날그날을 술집에서 팁으로 살아가는 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이 소설을 리혜선씨가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보고 썼더라도 《터지는 꽃보라》는 십분 자기 창조성을 가미한 완전히 다른 작품이에요,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봅니다.      먼저 두 녀성작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세봉 선생님은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을 좋게 보고 있는지요?         정세봉 박옥남과 리혜선, 두 녀류작가의 근황과 근작들에 대한 호웅선생의 솔직한 견해와 소상하면서도 간결명쾌한 분석 및 긍정적인 평가를 흥미있게 읽고나니까 저도 기분이 좋군요. 우리 문단에 이런 작가적고민과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소설가들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동문서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느 한 작가의 어떤 작품에 대해서보다는 우리 문단 소설 일반을 놓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요즘 미국 L.A 소재, 《해외문학》지의 조윤호시인님이 이메일 서신에서 우리 문단의 소설에 대한 견해를 얼핏 내비치였습니다. 미국 쪽은 단편일 경우, 《짧으면서도 재미있게 쓰는것이 추세인데 연변의 소설들은 별로 재미도 없으면서 터무니없이 긴것이 문제…》    재미만 있다면 좀 긴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데 있는것이지요. 호웅선생이 우에서 언어의 상투성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지만 소설발상의 상투성부터 깨는 일이 우선 중요하지요. 새로운 발견이라곤 없는, 사회의 통념과 일상의 관습에 대한 깨뜨림이 전혀 없는, 남들이 백번도 더 써먹고 말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엮어본대야 그게 신선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만 사람이 서쪽 달을 쫓는 때에 홀로 동쪽으로 향하는 사람!…"-최서해의 《혈흔》의 이 한 구절을 저는 창작에서의 신조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왕왕 진실(혹은 진리)은 반대쪽에 있는것이기 때문이며 뭔가에 대한 끝없는, 도전적인 깨뜨림에 새로운 세계(작품)가 창출되는것이기 때문이지요.        저의 단편 《빨간 크레용 태양》을 호웅선생도 평론을 하셨지만 제 스스로도 제일 자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발상 자체가 엄청난 《깨뜨림》을 잉태하고 있는 소설이기때문이지요.   《태양》으로 추앙 받던《위인》이 서거되어 온 대륙에 추도곡이 깔려흐르고 온 대륙이 눈물바다로 되어있는 그 장엄하고도 슬픈 날(력사적인 순간)-그날에 벌어졌을수 있는, 또는 연출되었을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작가들은 많은 소설들을 써낼수가 있을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날, 언감생심 처녀총각이 섹스(사랑)를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또한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외쳐질 엄청난 메시지(주제)에 대해서 작가마다 다 생각이 미칠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제 소설에 대한 자랑 같아서 좀 쑥스럽긴 하지만 일단은 소설발상의 상투성 깨기란 한 작가가 자신의 창작행정에 걸음마다 부딪치고 껴안고 고민을 해야만 하는  두통거리임을 짚고 넘어갑니다.    일전에 문학비평가 허승호씨의 《낭떠러지에 선 중국조선족 소설문학》이란 글을 읽었는데 문제점의 첫번째로 역시 《재미 없다. 이야기가 지루하고 서술이 따분하며…》를 지적을 하였더군요. 그렇게 되는 리유를 저는 두번째로 우리 소설가들의 소설의 구성기법문제로 보고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을 《비극의 혼》이라 하였지만 실제 소설작품의 성패는  구성에 달려있는것이라고 말할수가 있지요. 이른바 《구성》이라는것이 단순히 얽음새를 엮는 일이 아니고 소설 첫 머리에서부터 독자를 금방 사로잡아 흡인해버리고 소설속에 몰입시킬수 있는 이야기구조의 마력(魔力)성을 창조해내는 일인 것만큼 역시 구성의 상투성은 실패작밖에 양산할 수가 없는것이지요.    현시대, 세계의 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소설기법에서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실험을 끊임없이 하고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것입니다.    특히 단편소설일 경우, 절묘하고 파격적인 구성기법을 요하며 한 작가의 소설가적인 력량과 번뜩이는 천재성을 보여줄수 있는것이지요.    우에서 언급을 했던, 이야기를 거꾸로 진행시키는 쿠바 작가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가는 려행》도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단편《비밀의 기적》은 더구나 기막힙니다. 주인공은 탄환이 발사되고 그것에 맞을 때까지의 찰나 동안, 자신의 관념속에서 1년에 달하는 시간의 삶을 누리지요. 물론 그것은 구성기법에만 국한되는것은 아니고 그가 도전적으로 탐구를 했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환몽적사실주의적 기법인것이지만은.    한마디로 우리의 소설문학이 여러 기법상에서의 환골탈태적인 변혁이 없이는 희망이 어두우리라는 전망입니다. 우리 소설문학의《침체의 늪》에 충격의 돌멩이라도 던져야 할것이라는 생각을 떼쳐버릴수가 없네요. 물론 그것은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아픈 자성의 돌멩이이기도 한것이지요.    다음번엔 소설의 언어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싶군요. 나 자신이 지금 고민을 겪고있는 문제이기때문이기도 합니다.    김호웅 세봉 선생님께서 잘 지적해 주셨지만 우리 작가들의 소설적인 발상, 배경설정, 플롯, 인물창조의 기법, 언어 등에 모두 참신성이 결여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문제는 적잖은 작가들이 소설미학에 관한 공부가 없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문단은《소설창작론》 하나 나와 있지 않은 어설픈 상황입니다. 연변대학교에서 현동언 선생이 쓴 《소설창작론》이 프린트 본으로 쓰이다가 이젠 씨가 말랐고 현룡순 선생이 평생 쓰던 강의안이 최근 한국에서 출판됐는데 연변에서는 구해 보기가 힘듭니다.    한국에서 나온 소설창작론들을 참고할수 있는데 제가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것은 조남현의 《소설원론》입니다. 요즘 《소설신론》이란 책으로 새롭게 나왔지요. 소설의 원론적인 개념, 범주들을 가장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좀 평의하게 쓴 것으로는 전상국의《당신도 소설을 쓸수 있습니다》와 송하춘 선생의 《발견으로서의 소설기법》을 들 수 있지요. 전상국, 송하춘은 모두 한국의 이름난 소설가들이고 대학교 교수여서 소설쓰기 작법을 명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변에서 소설 쓰는 이들도 한 번 구해 볼만한 책이지요.        소설미학 공부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력사, 철학 관련 명저들도 두루 설렵하는 게 좋을것 같습니다. 우리 소설의 내용이 왜 빈약하고 촌스러운가 하면 우리 작가들의 지식이 빈약하고 자기의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있지 못한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박경리의《토지》 같은 소설을 보면 정치, 사회, 력사, 민속, 철학 등 분야에 있어서도 당대의 최고 학자들마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저는 재작년 가을에 한국에 갔다가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에서 박경리님을 뵙고 부근의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대접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철학적안목에 크게 놀랐습니다. 서울 청계천도 그분의 발상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연세대 출신의 두분 교수와 함께 갔더랬는데 그분의 《강의》만 듣다가 온 폭이 되고말았지요. 권연을 꼬약꼬약 피우면서 청사류수로 이야기를 엮어대는데 고금중외를 아우르는 그분의 박식함에 손을 들고말았지요. 소설가들이 소설만 읽어서는 살찔 수가 없어요.    소설언어에 대해 잠깐 저의 소견을 말씀 드리지요. 문학적 언어는 한 마디로 메타포입니다. 원관념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보조관념으로 말하죠, 은유, 상징, 아이러니, 패러독스입니다. 이 점에 대해 한국의 리어령 선생이 잘 비유했지요. 그는 과학적 언어는 꿀벌의 언어이고 문학적 언어는 나비의 언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미를 전달한다는 같은 목적이라 할지라도 와 는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문학적 언어는 나비처럼 복잡한 곡선을 긋고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문학적 언어의 특질을 너무 형상적인 비유로 갈파했다고 봅니다. 장인정신으로 부단히 새로운 비유를 개발하고 글을 윤택 있게 쓰는 법을 익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문단에서는 역시 김학철 선생이 모범을 보여주었지요. 김학철 선생의 《격정시대》를 보십시오. 재미있는 일화, 창조적인 비유들이 지천에 깔려 그야말로 곡선을 그으면서 날아가는 나비의 을 련상케 합니다. 1930년대 서울 종로거리의 야경을 묘사한 장면은 한국의 작가들도 절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 일부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사전도 보지 않는것 같고 편집들도 얼추 넘겨버리는것 같습니다. 지저분한 속어, 사투리, 상투적인 비유가 난무하고 있어 밥 먹다가 돌을 씹은 것처럼 가끔 낯을 찡그리게 됩니다. 녀성의 풍만한 가슴을 비유하는데《농구공 같은 가슴》이라고 했어요. 이건 소설적인 묘사가 아니라 항간의 잡배들이나 쓰는 비속한 비유입니다.    세봉 선생님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문학과 예술지에서 규정한 편폭을 벌써 넘어섰구만요. 저는 의연히 세봉 선생님의 력작을 기대하고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약해 주시지요.      정세봉 대화, 즐거웠습니다. 개인적으로 호웅선생과 처음 문학 관련,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어 보았다는 점이 기분 좋고 우리 소설문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을 해보았다는 의미에서 감격스럽습니다.    앞으로 가끔씩 만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고 또한 우리 문단에 이런 대화의 분위기를  점차 만들어가는 것이 십분 절실하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한가지 하고싶은 진언(眞言)이라면 21세기는 노마드시대란 말도 있지만 우리 작가들이 앞으로 연해지구에 가서 사업을 하면서 글을 쓸 수도 있고 해외에 나가 정착을 하면서 작가생활을 할수도 있지요. 그리고 세계속의 여러 갈래의 동포문학과 교류하면서 우리 문학이 인젠 세계를 향해 도전을 해야 하는 시점이 아닙니까?    굳이 내가 이런 말을 해야 하나?… 고려끝에 하는 얘기지만 《좁은 바닥》에서의 《갈등구조》에서 초탈을 하는 넓은 아량과 멋이 우리 문단 풍토에 점차 정착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07, 2호 
26    <노마드시대>와 <독자론>을 떠올리며/정세봉 댓글:  조회:831  추천:0  2015-02-15
  와 을 떠올리며 -- 출간을 축하한다.                                           정세봉       를 청탁받고 망설이기도 하였지만, 작가들의 이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21세기는 란 말이 있다. 우리 작가들이 어디에나 나가서 사업(혹은 생업)을 하면서 글을 쓸 수가 있고 외국에 가서 정착을 하면서 창작활동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실이 증명하듯이 중국경내, 청도를 중심으로 상해, 항주 등 연해지구에는 적지 않은 문인들이 나가있고 도 이미 구성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이번에 두 번째로 되는 까지 펴낸다고하니 경하할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책을 펴낸다는 것은 작가들의 작품이 독자들한테 마침내, 는 전제와 독자들에게 읽힌다는 의미를 지니고있다. 문학이란 작가와 작품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야우스의 말도 있거니와 는 것이 사르트르의 이다. 또한 이라는 명제를 남긴 보르헤스는 독서행위를 통한 텍스트의 무수한 재창조를 역설하지 않았던가! 작가의 작품은 읽히지 않으면 과 진배없으며 책이 누군가와 만나게 되면 찬란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를 통해서만 생명력을 얻게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출간은 축하할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에 별처럼 총총 빛나는 연해지구작가들에게 깊은 경의를 드린다.   2010년 1월 3일     Katjusa (카츄샤) / Anna German
25    “문학상”의 의미 및 그 영광과 경이/정세봉 댓글:  조회:902  추천:0  2015-02-15
  [권두 칼럼]   “문학상”의 의미 및 그 영광과 경이   정세봉      정세봉(鄭世峰) 약력; 1943년 12월 7일 중국 할빈시 도리구 신안가 24호에서 출생. 단편소설집 , 중단편소설집 , 중편단행본 등 출간. 제1회 중국소수민족문학상 등 수상. “연변문학”월간지 소설담당편집 역임. 현재 “사단법인 연변소설가학회” 회장.   이 출범을 한지도 어언간 3년 세월이 흘렀다. 살같은 시간의 속도는 정말 무섭지만 이 그 역사의 년륜을 새기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감사할 일이다. “문학상”, 하면 매양 세계문학거장들의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들이 상기되군한다. 그 연설들은 각 자, 나름대로의 내용과 특징을 지니고있지만 한결같은 치렬함과 공통성이 있다는 점은 새삼스런 충격이다. 알베르 까뮈는 “거짓과 탄압에 저항하라!”고 외쳤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우리들 역사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폭력과 고통”에 대하여 언급을 하면서 그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의 ”핵“이라고 억제된 울분으로 치열한 웅변을 풀어내었다. 헤롤드 핀터는 세계정치의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치면서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을 두고 슬퍼하였는가하면, 솔제니친은 “거짓과의 투쟁”에서의 문학(예술)의 궁극적인 “승리”를 불가항력의 진리로 확신을 하기도 하였다. 왜서 그들은 문학상을 수상하는 연단에서 “거짓”과 “탄압”과 “부조리”에 대해서 력설했던 것일가?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문학에 대한 언급은 겸연쩍어하면서 인류 보편의 고통과 인류역사의 대안에 대한 깊은 고민을 긴 여운으로 남겼던 것일가?.... 해답은 간단하다. 그것이 곧바로 작가의 “숙명적인 책무”인 것이고 문학의 치렬한 “존재이유”인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의 인류사회는 수많은 민족공동체들로 구성되어있다. 그것이 인류의 기본적인 존재방식이다. 창조주께서는 우주만물을 종종별별로 만들었듯이, 인류도 여러 인종, 여러 민족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이딸리아의 마치니의 명언을 빈다면 그래서 문학은 우선은 “민족문학”이다. 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로 혈통(血統)의 강물을 먹물로 찍어서 써내는 문학이다. 특히는 역사의 풍운에 휘말려서 고국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른바 “해외동포” 작가들은 자신이 서있는 특정된 자리(觀點)에서 그 “숙명의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고, 문학 본연의 진정성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뽑은 제3회 수상작 두 편은 빛난다. 박경숙의 단편소설 는 전쟁의 상흔(傷痕)을 다루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의 상처가 한 개인, 한 가족의 삶과 운명을 얼마나 암울하게 만들었으며 민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파편처럼 산산히 흩뿌려서 낯선 이국땅에서 방황과 혼돈과 고초를 겪게만들었는가를 고발하면서 알쭌하고 영롱한 언어와 글줄마다 여린 금선(琴線)과도 같은 감성의 울림이 있는 문체로, 궁극적으로는 영원의 시간속에서의 인생(생명)의 허무를 슬프게 풀어내었다. 김금희의 중편소설 도 역시 민족사회의 절박한 문제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생존을 위한 “꿈의 화신”들인 들이 펼치는 드라마는 눈물겹고 디아스포라적이고 엑서더스적인 민족사의 연장선상에서 깊은 사색을 던져주고 있다.   “두만강”이란 이름에 민족의 애환이 녹아있고 민족사의 숨결이 배어있듯이, 이라는 명칭은 하나의 상징적인 메타포임에는 틀림없다. 애초에는 문학을 고민하고, 우리 소설문학의 보다 깊은 원숙을 위한 단순한 취지였으나 그 진행행정에서 절실히 깨달은 바라면, 우리 문학이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것, 특히는 세계속의 여러 나라 해외동포문학과의 교류와 교호(交互)의 물고를 틔여야 한다는 것....그것이 “해외상”을 설치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국땅과 이민족 문화의 포위속에서 우리 언어와 우리 문자를 잃지 않고 민족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문학행위(창작행위)을 통한 “해외동포” 작가들의 의지와 몸부림은 민족사회의 통념속에 각인되어야하며 결코 무시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두 분 작가의 치열한 문학정신과 뼈를 깎는 창작의 노고는 존중을 받아야하며, 무서운 진통속에서 출산해낸 뛰어난 작품은 작가의 역량으로써 인정을 받음과 아울러 표창과 격려의 박수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은 역사의 뱃길위에 떠있다. 풍랑을 헤가르며 출항을 한, 문학의 등불을 켜든 함선이다. 두 분 수상자들께 영광을 드리며, 그 감격과 경이를 설레이는 마음에 미리 담아본다.   2011년 4월 20일 새벽. 우주의 적막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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