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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효자도 있는지
2015년 11월 14일 18시 31분  조회:1277  추천:1  작성자: 바다
        나를 아는 모든 친척, 친구들과 이웃들은 나를 대단한 효자로 본다.
        그도 그럴것이20년도 넘게 해마다 자기의 생일을 안쇠고 대신 아버지 로친네 생일을 쇠여 드렸으니깐.
        엄마가 운신하기 힘들어 하고 사유가 좀 흐트러지기 시작하니 나는 엄마를 모시고 안해가 법인인 경로원에서 6년나마 동무해 드리느라 했다.
        87세 되여 엄마는 치매에 걸려 뒤가 흐트러지는것도 몰랐다. 뒤를 검질해주는 나의 안해를 되려 욕한다. 목욕시켜 드리자 해도 한바탕 전투를 해야 한다.
        “어제 금방 했다. 이 아매하구 물어봐라. 너네 나를 머저리로 보재? 시끄럽다. 시끄럽다…”하면서 마구 욕지거리를 해댄다. 때로는 한방에 있는 할머니의 옷을 자기것이라 하며 빼앗기도 하고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위문오면서 가져온 맛갈스러운 음식을 곁에 할머니를 드리면 눈을 부릅뜨고 불만을 토한다. 남은 음식은 기어코 이불밑에 감추어 놨다가 증손들을 주라고 하면서 나에게 떠맡긴다. 받아서 옆에 할머니(치매할매)에게 드리면 또 욕지거리다. “그 로친네 그리 곱으믄 콱 데리구 살아라. 제 새끼들도 돌볼줄 모르는게…”나는 밸을 참지 못하고 맞받아 욕지거리를 한다. “엄마는 왜 자기밖에 모르오. 에잇, 아부지도 고생했겠다…”
        정신이 흐트러진 엄마와 싸움질 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엄마는 젊어서부터 제집 욕심밖에 차릴줄 몰랐다. 생산 대장인 아버지가 식량이 곤난한 이웃들에게 쌀을 좀 주어도 욕지거리, 시내에 있는 친척이나 신세진 친구들에게 맛보라고 햇입쌀을 퍼주어도 욕지거리다.
        이 나라가 가장 곤난할 때 일이다. 도살장에 친구가 있는 아버지가 시내 사촌 형님네한테 돼지 대가리를 얻어준적이 있다. 며칠후 엄마가 사촌형님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이것이 큰 화근이 되여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사흘동안 절식하면서 숟가락도 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두돐이 되여 내가 한창 젖을 파먹을 때 아래 동생을 덜렁 낳아서 젖도 맘껏 못먹고… 내가 어릴 때에는 아버지하고 싸움하고는 나한테 분풀이 한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제 에미 맞아대도 말릴줄 모르는 쌔끼. ”비자루를 찾아 쥐고 패댄다. 내가 누나를 때려도 나를 뚜드려주고 내가 동생들을 때려도 나를 혼찌검 내주고. 나는 엄마가 때리려고 비자루를 쳐들기만 하면 제꺽 앞마당의  물도랑을 살짝 뛰여건너 건너쪽 도랑뚝에 걸터 앉는다. 때리지 못하니깐 또 욕지거리로 성풀이를 한다. “조고 조고 보리만티(내가 똥똥하다고) 같은게…”
        나는 해쭉해쭉 웃으면서 “못 때리겠지, 못 때리겠지…”하고 골려준다.
        듣자니 다른집 엄마들은 맛있는것이 있으면 맏아들부터 준다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큰것들은 먹지말아. 쪼꼬만 아이들이나 주게”라고 한다. 그덕에 어려서부터 사탕, 과자의 맛이 어떤지 모른다.
        한창 진보도 전쟁때 군대가는 나를 보내면서 성격이 강하기로 소문난 아버지도 돌아서서 눈꿉을 찍는데 엄마는 “영광스러워서” 그렇게 기분 좋아했다.
내가 제대하여 돌아와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니 아버지가 닭알 한소래를 가져다 기름에 틔워 먹여라 하였다. 엄마는 한꺼번에 큰 사발 하나씩 틔워주었다. 아마도 동생들과 나눠먹으라는것 같았다. 그때 고모가 나를 몸춰세우라고 씨암탉 한마리를 가져왔다. 남의 엄마같으면 제꺽 닭곰이라도 해서 먹이겠는데 온집식구가 먹기에 성차지 않는지 그냥 내버려 뒀다가 족제비 체메에 든적이 있다.
        나이를 처먹고 서방비위가 나서 동창생녀자(지금 안해)를 데려왔더니 빽 돌아앉아서 인사도 안 받았다. 그가 간 다음 “무슨 새기가 없어서 저런 떼놈간나 같은걸 데려왔니? 서방 못갈가봐 걱정이야.”하면서 또 욕지거리다.
        그통에 아버지가 없지 동생들이 넷씩이나 도는 내 처지에서  요행 장가 갔다.
        안해가 들어온 후에는 안해가 퇴근하기전에 밥하는 법이 없었다. 불만 때고…
        두번째에도 딸을 나으니 한이틀 시중하더니 모르는척하였다.
        나는 평생 엄마를 아니꼽게 보았다. 남들에게 소개할 때도 엄마라 안하고 아버지 앙까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리숭하게 나마 좋은 인상도 좀 있다. 우리 마을 나보다 힘쎈 나먹어리 애들이 나를 때려본적 없다. 내가 싸움질 할때면 어느새 달려와서 역성들어 준다. “개새끼 같은 아새끼들아, 어째 쪼고만 아를 때리자하니. 털끝하나 다쳐봐라. 다 죽여 치운다.”
        나를 감동시킨적도 있다. 문화혁명 때 연길시에서 8.2, 8.4대폭란이 일어났다. 나는 제딴엔 혁명하느라 련 며칠째 전투판에서 떠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댔다.
        엄마는 나를 찾아 연변일중, 하남당교, 주정부, 주위, 빈관… 온시내를 걸어서 참빗질 한다. 어떻게 찾았는지 주빈관에서 나를 찾아내서 집으로 끌고갔다. 그덕분에 그번 전투에서 같이 한칸에서 자던 세 친구가운데 한 전우는 “희생”되고 한 전우는 부상당했지만 나는 멀쩡하였다. 친구들한테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엄마덕분에 우리집 촌놈자식 6남매중 대학생이 4명이 나오고 박사도 나오고 퇀장급 간부도 나왔다. 나도 그 엄마 성격을 닮았는지 항상 약자들편에 서고 어느 친구가 누구한테 맞았다하면 기어코 찾아가서 복수하여준다. 내 동생들과 자식들에 대한 요구도 대단히 높고, 좀 출세한후에는 하급들을 구별없이 대해 줄줄도 알았다. 
        한평생 미워하던 엄마가 2년전 령감보러 갔다.  나는 자식구실 하느라고 친척, 친구 120명도 넘게 청하여 평범한 생산대장의 로친네 장례를 좀 굉장하게 치뤄드렸다. 때늦게나마 효성하느라고.
        지금도 장마당을 돌다가 감자떡을 보면 “엄마가 좋아했는데…”또 싱싱한 풋파를 보고도 “엄마를 사주었으면…”구운 고구마를 봐도…늦게 나마 셈이 드는지…
         나를 효자로 보는 분들에게 미안하다. 이세상에 나처럼 엄마에게 불평 많은 효자도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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