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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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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2013년 10월 27일 10시 30분  조회:1769  추천:1  작성자: 한동국

감자꽃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국시인과 연변 한 여인이 중한문화교류의 오작교를 놓은 이야기-
 
     감자는 감자의 열매가 아닙니다. 감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망각의 열매입니다. 감자는 열매로 번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인공 한국의 시인과 중국의 여인의 드라마틱한 피눈물의 사연으로 감자꽃을 피우고 보석같은 진중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가 오늘 중한문화교류의 번영과 찬란한 미래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996년12월, 중국 연길시의 한 식당에서는 조촐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시인 이상규선생의 연변조선족 문학계간지인 “아리랑” 발간 후원금 전달식이었다. 그 한 옆에서는 한 달 전에 사망한 조선족 여인의 추모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씨와의 짧은 인연을 연변 문인들과의 긴 인연으로 이어주고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정신자 씨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작은 사업을 꾸리며 개인적인 관심사에만 머물러 있었던 이씨에게 보석같은 마음을 열어 커다란 가치에 눈뜨게 해준 정씨는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안타깝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이씨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갑작스레 기운 가세 때문에 고려대 생물학과 3년 수료가 최종 학력이 됐다. 졸업장이 없어 취직도 포기하고 귀향하여 특수작물을 재배하다가 6년간 손해만 보던 농사꾼 생활을 접었다.
    몇몇 회사를 전전한 끝에 차린 것이 유업회사 대리점, 그러나 그마저 십년지기의 배신으로 위기에 몰리게 된다. 연일 술로 세상에 대한 원망을 키우다 어느 순간부터 술병 대신 시집을 집어 들었다. 마흔을 넘길 때까지 문학 언저리에도 안 가본 그였지만 이제부터 김소월, 한하운, 한용운, 정지용… 등의 시들을 탐독했다. 한 편의 시를 수백 번도 더 읽었다. 희한하게도 구절구절이 실연 후에 듣는 유행가 가사처럼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렇게 수백 번씩 읽는 동안 문학의 토대를 쌓은 이씨의 심령에서 서정시의 운율을 타고 내면의 앙금처럼 쌓인 감성이 시로 토해졌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기억속에 가라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향수가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드디어 89년 “동양문학”지에 ‘석류’라는 시로 데뷔하고 90년 말에 첫 시집 “사랑의 비문”을 묶어냈다. 애초 비매품으로 내놨던 그 시집이 의외로 찾는 사람이 많아 4만 부나 팔리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이후, 4권의 시집을 가진 중견시인이 되었지만 먹고 사는 직업은 따로 가져야만 했다. 종업원 10여 명을 둔 식품판매회사를 차려 냉혹한 생존현장을 뛰면서 삶의 허망함과 상실의 그리움을 시로 옮겼다.    92년 6월, 그 날도 이씨는 팔당 인근의 금남리를 찾아 시작(诗作)만큼이나 공을 들이는 취미가 수상스키, 사업시작 이후 쌓이는 스트레스를 주말이면 북한강의 세찬 물결로 씻어내군 했다.
   수상스키를 끝내면 이씨는 10년째 애용해 온 “숲속의 집”이란 단골식당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낯 설은 아줌마가 서툰 솜씨로 일을 하고 있었다. 식당일이 처음인듯 했다. 이씨는 새로 온 아줌마에게 말을 걸었다. 짤막한 대화속에서 이씨는 이북 출신 시골아줌마로만 생각했던 그 녀가 중국 연길시 연남소학교의 국어교사 정신자라는 여인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었다. 남편은 검찰원이라 상류계급에 속했지만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엔 봉급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생각다 못해 그 녀도 한국행을 결심하고 석 달 비자로 입국하여 ‘불법취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시작한 일이 이 식당의 일이었다.
   이씨는 정씨가 국어교사라는 것을 알자 시집 두 권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자신과 딸의 작품을 함께 묶은 시집과 자신의 데뷔 시집이었다. 사업가인 줄만 알았던 그가 시를 쓴다는 사실에 정씨는 몹시 호감을 느꼈다. 그 후부터 그는 늘 정씨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며 많은 배려를 베풀었고 정씨도 유일하게 터놓고 의지하는 한국인으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정씨의 석달 비자 기간도 끝나고 귀국하였다. 그렇게 정씨를 보내고 그는 다시 예전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정씨와의 만남도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95년 4월 말, 신문 한 부와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겉봉에 씌인 ‘정신자’ 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3년 전의 일이 되살아 났다.
    그 사이 정씨는 길림신문사를 통해 한국 시인 이상규선생과 그의 딸 이지은 양의 시 몇 편을 ‘길림신문’에 실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 신문과 함께 보내온 편지였다.
   그 후, 편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통화가 이어졌고 좀 지나 연변인민출판사에서도 정씨의 소개로 그의 시집을 중국에서 출판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꽤 문필을 날리는 사람이 중국신문사에 돈까지 투자하고도 신문에 글 한 편 못 올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일개 초등학교 교사의 힘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정씨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던 빽이 있었다. 북경의 정씨 이모는 주은래의 비서였던 황옥금씨. 그러니까 금남리의 식당에서 일을 하던 가난한 중국 아줌마 정씨의 본연은 중국 최 상류층의 인물이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씨는 시집출판에 관련된 자료를 중국에 보냈고 이어 그의 중국행이 이어졌다.
   연길에 도착해 보니 정씨는 며칠 전에 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 때만 해도 그는 정씨가 무슨 병인지 몰랐다. 숱한 사람들이 문병을 다니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부인병이려니 싶어 민망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정씨는 그에게 백두산 관광을 안내하겠다면서 길 떠날 채비를 하기에 이씨는 펄쩍 뛰었다. 정신 있느냐고, 몸조리나 잘 하라고. 하지만 정씨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정씨 부부와 함께 백두산 관광길에 올랐다.
    백두산 가는 길 도로변에는 감자꽃이 지천으로 새하얗게 피어 있었다. 정씨는 감자꽃을 가장 좋아한다면서 감자꽃을 주제로 시를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꼭 써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백두산 관광이 끝나고 북한과 러시아, 중국, 3국 접경지의 관광까지 안내한 뒤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뜨거운 북경의 여름 땡볕속을 마다 않고 만리장성을 돌아보고 자금성까지 열심히 안내하던 정씨는 어느 날 갑자기 북경병원에 드러눕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온 이씨는 2, 3일에 한 번씩 북경으로 연락했다.
   그가 정씨의 병을 알게 된 것은 귀국 후 이십여 일이 지나서였다. 병동을 옮겨가며 검사를 받던 정씨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 소식을 전하며 정씨의 남편은 아내가 위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암세포가 전신에 확산되었다고 알렸다. 금남리 식당에서 일할 때 그 녀가 위가 아프다고 호소한 적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정씨의 체내에서 암이라는 병마가 자라고 있었던것이었다.
    이씨의 내외 두 분은 정씨에게 감사와 사죄를 전할 방법으로 정씨가 완쾌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면서 생필품과 주방용기, 정씨의 옷가지 등 60kg가 넘는 선물을 마련해 정씨의 연길 집으로 보냈다.
   서울에서 선물이 도착했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보따리 절대 손대지 말고 그대로 놔 둬라. 내가 살아서 집에 돌아가 직접 풀어야 하는 물건이니까” 
   그러나 정씨는 끝내 그 보따리를 풀지 못했다.
   선물 고마웠다는 정씨의 목소리를 들은지 열흘만에 그 녀 남편의 전화가 왔었다.
   정씨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은 그 날 이씨는 눈물을 흘리며 밤새 한 편의 시를 썼다.
   백두산 가는 길에 정씨가 부탁했던 감자꽃을 읊은 시, 제목은 "감자꽃"이였다.
 
                      불귀(不归),불귀(不归)
                           내 설움
                           연변의 산자락 돌밭 틈에
                           흰 꽃으로 피었네

                           감자꽃 피는 유월
                           종일토록 쏟아 붓는
                           불볕 더위, 긴긴 장마는
                           시련의 채찍인가
                           한 맺힌 눈물인가
                           가난을 떨치려, 가난을 떨치려
                           비바람 매몰찬
                           산 설고 물 설은 금남리 강가에서
                           모진 고난 감내하며 지새운 긴 밤
                           병든 몸 내색 없이
                           고웁게 미소 짓더니…

                           불귀, 불귀
                           불여귀(不如归) 슬피 우는 밤
                           섧운 눈물 보일까
                           섧운 얼굴 보일까
                           산자락 돌밭 틈에
                           가만히 피었다가
                           가만히 떨어져 간
                           아련한 감자 꽃
 
    가만히 피었다가 소리없이 떨어진 감자꽃처럼 정씨의 뼛가루는 바람속으로 흩어졌다.
    정씨가 이 세상을 하직하기 한 달 전에 이씨의 시집이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순정의 고백”, 북경의 병상에서 정씨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그 시집으로 이씨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출판 시집을 가진 시인이 되었다…

    그 해 12월, 정씨의 추도회에서 이씨는 준비해 간 3천 달러의 절반인 천 오백 달러를 정씨의 두 아들의 4년치 대학 학비로 내놓았고 나머지 절반은 휴간 상태에 놓여 있던 연변인민출판사의 “아리랑”을 위해 내놓았다. 2년간 걱정없이 잡지를 만들 수 있는 돈이었다.
    행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이씨는 한국에서 연변 지식인 문화출판사업 후원금 모집에 두 발 벗고 나섰다…
   이로부터 중한문화교류의 새 장이 서서히 서막을 열게 되였었다.
2012년 10월.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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