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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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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③
2007년 05월 27일 17시 47분  조회:3008  추천:65  작성자: 김성룡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③

강남의 명산 무이산(武夷山) 서쪽기슭의 풍요한 평지에 위치한 서금은 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혁명의 중심지였고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서금은 강서성 동남부의 주요도시로서 강서, 복건, 광동 세개 성을 이어주고있다. 고대에는 서금을 양주역(州域)이라고 불렀으며 진시황(秦始皇) 전국을 통일한후 구강군(九江郡) 귀속시켰다. 그후 953 이곳에 현을 설치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서금은 1994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20세기 30년대가 시작될때 전반 세계는 공포와 불안에 떨고있었고 중국은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고있었다. 미국의 실업인구는 천 5백만명에 달했고 쏘련에서는 집단농장을 하고있었으며 나치스 돌격대는 대규모의 검열을 진행하였다. 한편 이딸리아의 무쏠리니도 오지리국경에 18만 병력을 포진하여 팽팽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있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는 중국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중국은 련속되는 자연재해와 인위적인 군벌할거로 도탄속에 빠져있었다. 장강류역의 홍수로 하여 20만명이 숨지고 수원, 산서, 섬서의 지진으로 7만명이 숨졌으며 빈곤선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5 7백만명에 달했다. 게다가 전란까지 끊기지 않았다. 장개석을 반대하는 풍옥상, 염석산, 리종인의 싸움은 중국 10여개성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며 농민들은 막중한 군비부담으로 사경을 헤매야했다. 수천만 인구가 전란을 피해 류리걸식하게 되였고 50만 도시 실업인구가 나타났다. 하지만 중국동남부의 한구석에 위치한 서금지역만은 이시기 즐거운 노래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금낟가리에서 풍년의 기쁨을 노래했고 씩씩한 전사들은 우렁찬 구호소리를 높이 웨치며 대렬을 지어 다녔다. 적위대는 농가를 도와 가을에 바삐 돌았고 녀성들은 저녁밥을 지어 밭에 가져갔고 황금낟알을 가득 지고 귀가하였다. 사람들은 중화쏘베트중앙정부를 옹호하고 홍군을 노래하였다. 이곳에는 맑스레닌주의를 신앙하는 수많은 문인, 철학가, 교육자, 직업혁명가, 학생, 상인들이 모여왔다. 당시 서금은 쏘베트지역의 수도였다. 40여만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천여만 인구를 가진 중화쏘베트공화국정부가 서금에 있었던것이다.

중화쏘베트공화국에서는 철저한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빈곤한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홍군 장병들도 토지를 분여받게 되였다. 그들은 토지를 현지 농민들에게 경작을 맡겼다. 대다수 빈곤농민들과 홍군 장병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토지를 가지게 되였다는것은 모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였다. 사람들은 무한한 열정을 안고 빈곤농민과 무산자들의 정부인 중화쏘베트정부를 옹호하였다.

 쏘베트란 로씨야어의 대표회의이라는 말을 음역한것이다. 지금도 중화쏘베트제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가 강서성 서금시 성북쪽 엽평촌에 자리하고있다.

서금시에서 323번 국도와 206번 국도가 접하는 곳으로 빠져 나가 약 3킬로메터쯤 가면 일찍 홍군시기 쏘베트정부 설립지였던 엽평(叶坪)에 도착하게 된다. 마을에 도착하면 잘 보수된 화쏘베트 1차전국대표대회 유적지를 쉽게 찾을수있다.

아담한 정원에는풍적인 3진원 구조의 건물이 있다. 당지 대지주네 사당으로 사용되였던 건물은 사씨사당(氏祠堂)이라고 한다. 사당은 2층으로 되여있는데 건물은 중심부분의 공간을 둘러싸고 축조되여있었다.

1931 11 7, 쏘련의 10월혁명기념일을 맞으면서 이곳에서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쏘베트 림시중앙정부를 내오고 모택동을 주석으로 선거하였다. 대회장으로 사용되였던 강당 정면 벽에는 붉은기와 모택동, 주덕의 초상이 걸려있다. 강당에는 수십명이 앉을수 있는 나무걸상이 있었는데 서서 방청하는 사람까지 합쳐 수백명가량 용납할수 있다. 강당 량켠에는 널판자로 막은 작은 칸들이 있고 칸마다 천으로 문발을 쳐놓았다. 침대 하나와 책상, 걸상을 하나씩 놓을수 있을 정도인 이러한 방들이 바로 쏘베트림시중앙정부의 각 부서 집무실이다. 외교인민위원회, 군사인민위원회, 재정인민위원회, 로동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각 부서들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던것이다.

 

쏘베트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쏘베트지역 군민들과 함께 사람마다 평등하고 함께 일하며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쏘베트생활을 마음껏 느끼고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혁명가 최정무가 조선인대표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에 참가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고 또 대회에서 발언까지 하게 되였.

최정무의 부모는 일찍부터 로씨야 우쑤리스크에 이주하였고 최정무도 1910그곳에서 태여났다. 로씨야 10월혁명이후 자유를 얻고 해방을 받은 최정무일가는 토지까지 분여받았다. 최정무는 우쑤리스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청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제놈들에게 짓밟히는 조선과 일제 수탈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기 그지없었다.

1926 16살인 최정무는 혁명의 열기를 안고 중국 상해로 왔다. 로씨야에서 이미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한 그는 쉽게 중국내의 지하당조직과 련락을 취할수있었다. 상해에서 한동안 체류하던 그는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황포군관학교의 공식적인 자료에서는 아직 그의 이름을 찾아볼수없다. 그가 황포군관학교 몇기에 입학하였고 또 언제 졸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이 시기 1927년에 황포군관학교 기술주임으로 있던 조선인 교관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간적으로 보아 최정무는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을 못하고 1927년 장개석의 4.12쿠데타를 맞게 되였던것으로 보여진다.

1927 4 12일 장개석은 반동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이때 최정무는 학교병원에 몸을 숨겨 다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지 않았다. 그후 그는 광주봉기에 참가했고 봉기가 실패한후 도보로 상해 당조직을 찾아갔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앙혁명근거지인 서금에 와서 홍군 군사기계수리소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홍군 후방정치부 주임이였던 모택담() 지극한 관심을 받았으며 그와 매우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이 산간오지에 찾아온 조선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것이다. 모택담은 집에서 물만두를 빚는다거나 색다른 음식이 있을때면 늘 최정무를 청해다 대접하군 했다. 그는 모택동의 셋째동생이였다

1931 11 7 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소집되자 최정무는 600여명 대표의 한사람으로 대회에 참가했고 발언할 기회까지 가지게 되였다. 나어린 최정무는 몹시 격동되였고 몹시 긴장되여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하였던 말을 죄다 잊어버리고 대회축사를 하였던지 자기의 결심을 발표했던지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말을 하였다.

최정무가 연설대에서 내려오자 주석대에 앉았던 모택동주석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모택동은 당시 중화쏘베트공화국 주석이였다. 그는 최정무의 손을 잡고 이름이 무엇이며 나이가 얼마며 무슨 일을 하느냐고 자상히 물어보았다 한다. 모택동과 주덕은 모두 발언을 잘했다고 그를 치하하였고 모택동은 홍군대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추천해주기까지 하였다. 그후 최정무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홍군군정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후 학교 사무장으로 있다가 로농홍군 1군단 산하 22군의 부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3년 장개석 국민당은 40만 대군을 집중해 중앙쏘베트지역과 홍군에 대한 제4차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강서성 동남부의 모든 홍군부대는 집중적으로 적 포위토벌을 반대하는 치렬한 격전을 치르게 되였다. 홍군 제22군의 련 지도원으로 있던 최정무도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이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이동해 왔고 이들은 모험주의적인 전략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유격전에 풍부한 경험을 쌓았던 모택동도 이시기에는 홍군의 지도적 위치에서 물러나있었다. 중앙홍군은 이른바 선제타격의 전략으로 성곽이 견고하고 적의 병력이 방대한 남풍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치렬한 공격전에서 홍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때 적들은 다른 부대로 남풍성을 공격하는 홍군의 배후를 습격하려 계획하고있었다. 이 위기의 시각 주은래와 주덕은 과감히 공격부대를 철수해냈다. 그들은 주력부대를 려천방향으로 돌리고 잘 은페시켰다. 부분적인 공격부대를 추격해 오던 국민당군은 홍군의 매복에 걸려 황피, 곽원지역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어 홍군은 다시 초대강, 서장지역에 매복했다가 광창으로 공격해오는 적의 한개사를 섬멸했다. 집겁한 국민당 기타부대는 급급히 퇴각하였고 중앙홍군은 제4차 반포위토벌전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홍군 제4차 반포위토벌전에 참가한 최정무는 어느 한차례 전투에서 오른쪽 발목을 적탄에 맞았다. 부대를 따라 더 싸울수 없게 된 그는 홍군 3병원으로 호송되였다. 치료를 받아 탄알을 뽑았지만 그는 지팽이를 짚고 다닐수밖에 없었으며 다시 전선에 나가지 못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당조직에서는 그를 홍군병원에 남아 당총지부서기 지도원으로 사업하게 하였다.

 

1934 10 홍군은 끝내는 국민당군의 제5차 포위토벌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득이 중앙근거지를 떠나 장정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홍군병원에는 200여명 중상자들이 있었다. 최정무는 100여명 의료일군들과 함께 중상자들을 민가 숨겨두고 대부대를 따라 감주로 떠났다. 그러나 100여명이 한데 몰려 움직일수 없었기때문에 그들은 다시 소분대로 나누어 행동하였고 나중에는 모두 흩어지고말았다.

혈혈단신이 된 최정무는 앞길이 막막했다. 주력부대는 멀리 떠나갔고 적들은 도처에서 홍군을 수색하고있었다. 그는 호북의 농민으로 가장하고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을 찾아가기로 작심하였다. 그는 혼자서 멀고먼 장정을 시작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또 수시로 국민당군과 지주무장대를 피하면서 가야했다. 갖은 고생을 거쳐 그는 1936년에 드디어 도보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는 려운형과 기타 조선혁명가들을 찾지 못했다.

 

1937 로구교사변이후 최정무는 무한, 개봉 등지를 다니며 공산당부대를 찾았으나 역시 찾지 못하고 홍군은 장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단연 홍군을 찾아 섬북으로 떠났다. 하지만 가던 길에 그는 국민당군의 강제징병에 끌려가게 되였다. 국민당부대에서 그는 국민당 통신부대 두목을 설득하여 20여명 통신병을 이끌고 태항산의 팔로군을 찾아갔다. 팔로군을 찾은 최정무는 무정이 거느린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여 계속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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