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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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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⑨
2007년 05월 27일 18시 04분  조회:3020  추천:61  작성자: 김성룡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⑨

    풀벌레소리 자리러지고 바람이 소슬한 1935년 가을, 국민당의 통수 장개석은 우울한 심정으로 아미산을 내려왔다. 산수가 수려한 사천의 명산 아미산도 그의 울적한 심정을 달래줄수없었다. 수십만 국민당 주력이 중국대지 절반을 추적하면서 홍군을 죽음의 수렁인 설산과 초지에 몰아넣었지만 홍군은 절경에서 벗어나 지금 곧바로 섬북 쏘베트혁명근거지로 향하고있었던것이다.

    아미산 기슭에서 장개석은 머리를 들어 흰구름이 감도는 산봉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갖은 심리적 압력을 이겨내면 6년 고생하였는데 결국 공산당과 홍군을 전멸시키지 못했구려.”

 그도그럴것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전반 동북을 삼켜버리고 호시탐탐 하북과 전반 중국을 노려보고있는 상황에서 고집스레 홍군을 정벌하는데만 정력을 기울려왔던 장개석은 끝내는 실패를 승인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착취와 압박에 허덕이는 만백성들은 물론 자산계급과 소시민들까지도 이른바 외적을 물리치려면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는 장개석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장개석은 급급히 장학량에게 전보를 보내 성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장개석 대신 동북을 잃어버린 죄명을 쓰고 외국에 망명해있던 장학량은 착잡한 심정으로 장개석을 만났다. 그는 조속히 옛 부하들인 동북군을 이끌고 일제와 싸우려하고있었다. 오직 일제와 싸워 이겨야만이 그는 일제에게 짓밟히는 동북백성들에게 미안하지 않고 동북군 장병들에게 미안하지 않을수있었으며 또 실패의 치욕을 씻을수 있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장학량을 서북 공산당토벌 부총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장학량은 새로운 임명에 탐탁치 않았지만 잠자코 숨어있기보다는 그래도 옛부하들인 동북군을 다시 거느릴수있다는것이 반가웠기 때문에 명령을 접수하였다.

 

    한편 이때 홍군은 급촉한 걸음으로 섬북을 향해 전진하고있었다. 죽음의 수렁으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승리적으로 정복한 홍군은 랍자구천험을 돌파하고 합달포에 이르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다시 조직된 홍군 간부퇀과 더불어 단호히 모택동의 군사로선을 따라 북상하였다.

    합달포에서 홍군은 간만에 편한 잠을 잘수있었다. 전사마다 동전 한잎을 분여받았다. 당시 동전 두잎이면 살진 양 한마리를 살수있었고 한잎이면 닭 다섯마리를 살수있었다. 홍군 장병들은 모두 기꺼운 심정으로 거리에 나갔다. 모욕을 하고 리발을 했고 맛나는 음식을 사먹었다. 합달포에서 모택동은 국민당 당국의 신문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장악하게 되였다. 신문에는 섬북에 강서의 중앙쏘베트지역만큼 큰 혁명근거지가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악예환근거지로부터 장정을 시작한 서해동의 부대가 이미 섬북의 류지단부대와 회합했다고 보도되였다.

    모택동은 홍군 퇀급이상 간부대회를 열고 북상로선의 정확성을 강조하고나서 이제 홍군은 섬북으로 진출하여 그곳의 류지단, 서해동의 홍군과 합쳐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갈것이라고 했다. 회의에서는 홍군을 재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앙종대와 홍군 1방면군 주력을 정식 중국로농홍군 섬감지대로 합병하고 팽덕회를 사령원으로 모택동을 정치위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홍군 1군단을 섬감지대 1종대로, 3군단을 2종대로 중앙종대를 3종대로 편성하였다. 양림이 소속한 간부퇀은 섬감지대 3종대로 되였다.

    재편성을 거친 홍군은 8천여명이였다. 장병들은 경건한 걸음으로 섬북을 향해 전진하였다. 섬북이 어떤 곳인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사람마다 희망으로 가득찼다. 그들은 물이 줄어든 위하를 순조롭게 통과하고 소규모의 동북군을 물리치고 륙반산을 넘었다.

 

    홍군 섬감지대는 드디어 꿈속의 천당에 들어섰다. 눈앞에는 일망무제한 황토고원이 펼쳐졌다. 고원에는 수많은 황토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고 또 비바람에 씻기고 패여 깊은 골짜기를 형성해 놓았다. 메마른 서풍은 모래먼지를 날리며 몰아쳤고 흙먼지가 전사들의 옷속으로 날아들었다. 드넓은 황토벌에서 이따금 귀가하는 양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군 하였다. 이 모든 정경은 남방에서 온 홍군장병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홍군전사들은 기꺼운 심정으로 노래를 부리며 행군하였다. 대오는 앞뒤가 보이지 않을정도로 길게 늘어서있었다. 게다가 먼지가 자욱하여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고있는 전사들은 뒤에서 후근부대가 적과 조우한것조차도 몰랐다.

    대오의 마지막에서 달리던 양림과 간부퇀 전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동북군 기병부대의 습격을 받았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양림은 즉각 전사들을 이끌고 응전하였다. 그는 신속히 골짜기속으로 달려가서 몸을 은페하고 적 기병을 저격하였다. 전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모두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말을 탄 적들은 골짜기로 들어올수없었고 또 말우에서 사격하려면 명중률도 낮았다. 양림과 전사들은 정확한 사격으로 많은 적들을 사살하였고 또 일부 부대를 나누어 적의 배후를 급습하여 끝내 적의 기병부대를 물리쳤다.

   

    만수천산을 지나 중국 10여개 성을 전전한 홍군은 드디여 섬북의 오기진에 이르렀다. 홍군전사들은 어린이들마냥 오기진으로 뛰여갔다. 석양이 붉게 물들어있었고 길가의 흙담에는 어슴푸레 중국공산당만세!”라는 표어가 씌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오기진 거리에는 행인들이 별로 없었다.

    이때 머리에 흰수건을 두른 몇사람이 달려와 홍군전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속에는 향당지부서기가 있었고 쏘베트 향정부 주석도 있었다.

    쏘베트! 쏘베트정부!”

    홍군전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마중나온 사람들을 얼싸안았다. 그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1935 10 19일 섬서성 오기진, 강서성 중화쏘베트를 떠나 장정을 시작한 당중앙과 홍군은 일년하고도 9번째 되는 날에 섬북쏘베트혁명근거지에 도착했던것이다.

 

모택동은 쏘베트 향정부 당정책임자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근거지의 상황을 료해하였다. 섬감쏘베트혁명근거지는 1927년부터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섬서성 당위원회의 지도하에 청간, 위화 등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봉기실패후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 중국로농홍군 섬감유격대가 설립되였고 이 부대는 후에 홍군 26군으로 개편되였다. 1934년에 이르러 류지단이 령도한 이 부대는 섬북에 혁명근거지를 형성하고 섬감변구 쏘베트정부와 혁명군사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습종훈이 정부주석을 맡고 류지단이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이시기 또 각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홍군 27군으로 개편하였다. 류지단이 홍군 26군과 27군을 거느리고 국민당군과 간고한 전투를 계속하고있을무렵 악예환근거지로부터 장정을 했던 홍군 25군이 섬북에 도착하였다. 홍군 25군은 악예환근거지에 남겨진 부대였다. 이 부대는 제4방면군 주력의 이동을 성공적으로 엄호한후 하남, 호북, 섬서, 감숙 등지를 전전하였다. 군장 장자화, 부군장 서해동이 거느린 이 부대는 1935 7월 국민당당국의 신문에서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이 회합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고 당중앙과 홍군주력은 꼭 북상할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였다. 이해 9 15일 제25군은 섬서성 연천현 영평진에서 류지단의 제26, 27군과 회합하였고 영편진에서 중국로농홍군 제15군단을 조직하였다. 서해동이 군단장을 맡고 장자화가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류지단이 부군단장 겸 참모장으로 있었다.

 

모택동과 중앙홍군은 오기진에서 추격해오는 감숙군벌 마홍빈의 기병부대를 소멸하고 하사만(下寺) 으로 진격해 홍군 제15군단 주력과 회합했다. 15군단은 총과 탄약, 의복, 약품을 중앙홍군에 주었을뿐만 아니라 동전 5천원을 지원하였다. 중앙홍군에서는 양림과 주사제, 왕수도, 송시륜, 황진, 오수권을 비롯한 많은 주요간부들을 15군단에 지원 보냈다.

1935 11 3일 당중앙회의가 하사만에서 소집되였다. 회의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는 모택동을 주석으로하는 중국로농홍군 서북혁명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번호를 회복하기로 하였다. 홍군 제1방면군은 팽덕회가 사령원을 맡고 모택동이 직접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원 1군단과 3군단을 제1군단으로 합병한후 림표가 군단장을 맡았고 서해동이 계속 제15군단 군단장을 맡았다.

15군단 산하에 제75사와 78, 81사를 두었다. 양림은 홍군 25군으로 편성된 제15군단 제75사 참모장을 맡게 되였다. 홍군 제1방면군 총병력은 만 6천여명이였다.

 

    홍군 제1방면군이 섬북에 도착한 사실은 국민당군을 크게 놀래웠다. 국민당은 많은 병력으로 섬서서부를 봉쇄하고 동북군 4개사를 동원해 홍군을 공격하게 했다. 선진적인 무기로 무장한 동북군은 전투력이 강했다. 만약 이들이 홍군을 포위한다면 홍군과 혁명근거지는 엄중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전투의 승부는 제1방면군이 섬북에 발을 붙일수있는가에 직접 관계되였다. 만약 동북군이 근거지에 진입하면 홍군은 다시 부평초같이 이곳저곳 전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홍군은 반드시 이 전투를 이겨야했다.

    하사만 대회가 있은후 모택동과 팽덕회가 제15군단 지휘부로 찾아왔다. 그들은 제15군단 각부대 지휘원들과 함께 적정에 대해 주밀하게 토의한후 섬북의 홍군을 집중하여 직라진 부근에서 적을 유인, 소멸하기로 결정했다. 양림은 15군단과 75사가 맡은 임무를 자상히 연구하고 직접 현지에 가 보았다.

    직라진은 주민이 백세대도 안되는 작은 진이였다. 세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작은 길 하나가 진을 가로질러 뻗어있었다. 진동쪽에 돌로 에워싸인 작은 산채하나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강 하나가 흐르고있었다. 양림은 나무 하나, 언덕 하나를 빠짐없이 살펴보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진동쪽의 산채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전사들을 보내 산채를 허물어버리게 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의 포치에 따라 홍군 제1방면군 각부대는 직라진 부근으로 진격하였다. 1군단은 북쪽의 석취와 봉황두에 매복하였고 15군단은 동남쪽의 한 마을에 매복하였다. 15군단의 백여명 홍군이 양림의 지시에 따라 산마루에서 적을 유인하였다.

11 20, 동북군 57군의 선봉을 맡은 109사가 직라진으로 공격해왔다. 우원봉이 거느린 이 부대는 유인하는 홍군과 접전하면서 쉽게 직라진에 들어왔다. 우원봉은 626퇀과 627퇀을 진 량쪽고지에 포치하고 지휘부를 진 가운데 설치했다.

모택동은 직접 홍군지휘부에 찾아와 적들을 깨끗히 소멸할것을 각부대 지휘원들에게 요구했다.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의 요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양림은 직라진부근의 적들을 전부, 철저히 섬멸하기로 작심했다.

밤이 깊어지자 홍군은 신속히 직라진쪽으로 접근하여 철통같이 포위하였다.  21일 새벽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홍군은 밀물처럼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1군단과 15군단은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양림은 작전계획에 따라 부분적인 전사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진중심부로 돌진하였다. 2시간의 격전을 거쳐 그들은 적지휘부를 점령하였으며 많은 전략물품을 로획하였다. 109사 사장 우원봉이 급급히 패잔병들을 이끌고 진동쪽의 산채에 들어가자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산채를 철통같이 포위하였다. 산채의 돌담과 물길을 이미 끊어놓았기 때문에 적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것이라고 판단한 양림은 공격을 잠시 멈추라고하였다.  

홍군 기타 부대는 직라진의 적들을 소멸하고 적 지원병을 격퇴하였다. 직라진의 적들은 잠을 채 깨지 못한채 대부분 격살되거나 생포되였다. 626퇀 퇀장은 자살하고 627퇀 퇀장은 중상을 입고 퇴각하다가 숨졌다.

산채에서 지원군을 기다리던 우원봉은 포위를 뚫기로 결심하였다. 양림은 전사들을 시켜 한쪽 포위를 조금 틔우게 하였다. 우원봉은 급급히 수백명 병졸들을 이끌고 틈을 타서 도주하였다. 적들은 싸울렴을 하지않고 모두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다. 이때를 기다리던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10여리를 추격해 적을 전부 소멸하였다. 109사 사장 우원봉도 격살되였다.

직라진 전투에서 홍군 제1방면군은 적 천여명을 격살하고 5 3백여명을 생포하였으며 수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기전 두대도 로획하였다.

직라진 전투는 홍군 제1방면군의 전환점이라고할수있다. 1년간 간고한 장정을 진행해온 홍군들은 드디어 발붙일 곳이 있게 되였고 새로운 발전을 위한 근거지가 있게 되였다. 이무렵 중국력사도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고있었다.

 

1935 12 9일 북평의 6천여명 학생들이 거리에 떨쳐나와 반일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하게 항일할것을 소리높이 웨쳤다.

간고한 로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한 홍군전사들은 추운 겨울 북평에서 발생한 이 사건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민감하게 이를 파악하고있었으며 수많은 역경을 이겨온 홍군에게 새로운 력사적 기회가 도래했음을 감지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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