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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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야 제비야 (상)
2012년 08월 13일 15시 51분  조회:1521  추천:0  작성자: 김금희
제비야 제비야


김 금 희


ㅡ 제비 두 마리가 날아왔었지비. 하고 할머니가 얘기했었어.
ㅡ 그래서요?
ㅡ 한 눔은 둥구리에 토라앉었고, 한 눔은 바께로 휘여 ㅡ 날아 가삐더만. 그렇게 말했었지.
ㅡ 나참, 그런데요?
ㅡ 태몽이래. 느이 막내 삼촌이랑 오빠랑.

그순간 나는 어두운 허공에 대고 핏 웃어버렸었다. 신문지로 도배를 한 두꺼운 흙벽에 네모난 뙤창문이 움푹 꺼져있고, 노란 전등불빛이 나즈막한 천정아래의 구들장을 기웃거릴때, 그 좁다란 구들장위 허름한 대나무장농앞에서 허연 목천의 요를 깔고 나란히들 누워있는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거기다가 똑같이 언덕처럼 솟아오른 배라니? 얼핏보면 두마리의 단봉낙타가 나란히 꿇어앉아 있는것 같지 않았을까? 엄마는 핏핏거리며 코웃음치는 나를 흘겨보고나서 계속 주접을 떨었었다.
ㅡ 그때는 어느 애가 날아간 제비일까 참 궁금도 했었지. 속으론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만 느이 할머니는 그 애가 오빠일거라고 꼭 덧붙이더라.
그래서 나는 헛헛거리며 센불에 데쳐진 새우처럼 허리를 꼬부러뜨리고 웃었었다. 이렇게 오래동안 할머니네와의 연락이 썩뚝 끊겨버린 마당에, 무슨놈의 “제비 두마리 같은”, 구질구질 냄새나는 옛말을 꺼내는 엄마의 저의가 갑자기 나를 웃겨서였다.
아직 할머니네와 화해를 하지 못한 시점에서, 아니, 그렇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조차 하지 못한 때에 엄마는 뭐하러 그 얘기를 꺼내고 싶어했을까. 그런건 더 나중에 가서,확실하게 뚜껑을 열어본 다음에야 들먹이는게 아니던가. 엄마는 나의 경망스런 웃음때문에 흥기가 싸악 가셔버렸던 모양인지 ㅡ그래, 다 지나간거 뭐하러 자꾸 꺼내겠니 하시면서 결국 쌩하니 돌아누웠었다.
그럴때는 아무리 엄마라지만 참으로 어이없어질수도 있어 나는 금방에 지쳐버렸 던것 같았다. 할머니라면 어찌하였을까. 아마도 ㅡ이노무 가시내! 으른말이 모가 우끼나? 하면서 단박에 달려들어 내 뒤통수를 털썩 후려쳤을 가능성이 아주 많지 않았을상 싶지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욕설과 미처 막아볼새 없이 빠른 매질때문에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할때가 많았다. 젊은 시절에 심양시내에서 버스를 운전했다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얘기지만) 할머니는 툭하면 영광스런 과거지사를 들먹이면서 머리가 다 커버린 아들들과 딸들과 며느리들과 사위들의 기를 죽여놓군 하였었다.
ㅡ 내 오날 또 노펜즈를 돌려야 쓰겄다. 으이? 이것들아… 할머니는 이러루한 서막의 형식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는데 무슨 옛날 자작거리에서 이야기꾼들이 수호전 1장1회를 시작할때처럼 두마디 안짝에 한번씩 탁! 하고 밥상이나 구들장을 내려치군 하였었다. 삼촌들과 고모들과 숙모들과 고모부들은 그런 놀래킴따위에는 이제 아주 익숙해졌는 모양인지 태연스레 밥을 먹거나 담배를 빨거나 가려운 목덜미를 긁으면서 편하게들 앉아 듣고 있었지만 나는 그 탁! 내려치는 갑작스런 동작과 소리에 움쩍 놀라서 팔딱 일어나 자리를 고쳐 앉으며 몸을 단단히 도사리고 눈까풀을 반뜩거리군 하였었다.
무섭다고 여긴적은 없었다. 온 조선족동네에, 아니 인근의 한족동네들에까지 쫘악 알려진 할머니의 사나운 암펌기질이 장손녀인 내게는 도무지 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를 감싸주고 위해주는 방패라는 사실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것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유약하고 나긋했던 내게 얼마나 든든하고 다행스런 일이였던지 몰랐다.
아버지가 없다는 구실을 대고 어린 나는 늘 무의식중에 자신을 위축시켰는데, 나의 그런 자아위축은 다시 친구들의 조소나 동정같은 건강치 못한 태도를 불러왔었다. 참 재밌는것은 그런 자아위축이 할머니네에 가서는 언제 그랬냐싶게 말끔히 사라진다는 것이였다.
말없이 수걱수걱 살아가는 엄마와 달리 주위 사람들을 무참히 압도하는 할머니의 드센 기가 엄연한 그녀의 장손녀인 나를 치료하였으며 심지어는 약간의 허세까지 부추기였었다. 나는 진정으로 호가호위의 진맛을 아는 사람이였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하면, 이런 장면을 떠올리기를 즐겨한다. 칼날같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삼촌들을 따라 올라 탄 낡고 붐비는 버스, 툴툴툴툴 뒤뚱뒤뚱 논길을 달리는 삼륜차의 딱딱한 나무판자, 하얗고 텅 빈 논밭 저머너로 올망졸망 늘어선 초가집들, 허름한 초가지붕아래 빙 둘러싼 싸리나무 울바자, 그리고 납작돌들이 깔린 마당과 헝겊이불로 겉을 싸버린 정지문, 내가 아직 문고리를 잡아 당기기도 전에 그것을 박차며 뛰쳐나오는 혈기넘치는 할머니…
“어이구 내 새끼…”할머니는 꼭 이렇게 나를 부르곤 하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 호칭보다 더 듣기에 좋은 다른 부름을 들어보지 못했던것 같다. 할머니가 나를 품에 꼭 그러안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커다랗고 툭박진 손으로 내 가냘픈 등허리를 썩썩 쓰다듬어 내리던 기억도 도무지 잊혀지지가 않았다. 나는 어미왕의 등에 업힌 새끼 원숭이처럼, 할머니의 품에 온전히 안겨서 이런 역사적인 감동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마실왔던 이웃집 아줌마와 울바자구멍으로 빠끔히 넘겨보던 조무래기들을 거만하게 둘러보군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였던가. ㅡ 으잉, 우리 김씨네 장손녀야. 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나를 알리고 싶어하는 할머니때문에 정말 “장손녀”는 특별한 신분인가보다 하고 착각했던 시절이 말이다. 피줄의 원리대로 따지자면야 “장손녀”보다는 아무래도 오빠의“장손”이 권위가 있겠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장손이든 장손녀든 세상에 태여난 순서를 알리는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실제로 있기나 했던것일까. 이것은 내가 꺼내기 오래전에 엄마가 벌써부터 의심했던 일이였다.
거기다가 반드시 남자의 성을 이어받는 피줄의 원리에서, 정작 당사자인 남자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말이다. 과연 그것은 얼마나 오래동안 유효한것이 될까. 여자는 왜 그 의무를 짊어져야 하며 또 실제로 그것을 짊어질수 있기나 했던것일까.

그것은 엄마와 할머니의 첫 만남이였다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12년만의 만남이였다고 하였다. 반백이 넘은 아버지와 한창 정력이 북받치는 아들, 그리고 둘다 해산달을 맞고 있던 아내들,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였을까.
ㅡ 고등학교 2학년때 중퇴했었지. 늘 집밖을 겉돌던 아버지가 끝내 돌아오지 않기로 했으니까.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기 전, 아버지는 엄마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해주었다고 하였다.
ㅡ경상도 출신이였고, 어렸을때 우쑤리로 건너가서 중학교를 마쳤었대. 조선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였다가 중국지원군쪽에 편입이 되였던 모양이야. 워낙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때문에 전쟁에는 요긴하게 쓰였겠지, 메달이며 휘장같은것이 꽤 있었으니까. 전쟁이 끝나고 심양에서 살때에는 풍족한 편이였어, 뭐 늘쌍 겉돌다보니까 자식한테는 풍족하게 보태줄 사이가 없었겠지만.
아버지는 그때까지 할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던것 같았다고 하였다. 하긴 그즈음 시절의 조선족가정에서는 흔해빠진 얘기였지만 말이다. 철부지 시절에 부모가 매듭지어준 혼인, 반도와 열도와 대륙의 사람들사이에서 도무지 그치지 않는 전쟁, 한치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생사 불분명한 인생, 어느 곳에도 누구에게도 존속되지 못하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무의미한 삶… 그 시절 동북에 살았던 여느 집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의 할아버지도 가정다운 가정을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잠시 잃었던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가정을 지켰든 버렸든 그것과 상관이 없이 아기였던 아버지는 그 사이에 하루하루 자라가고있었던것이였다. 철이 들어가면서부터 전쟁터에 나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며, 그저 건강하게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소년이 되였고, 정작 무사하게 건강하게 돌아온 아버지앞에서 눈물 한번 제대로 흘려보지 못하고 다시 집밖으로 다른 여인들의 품으로 떠나보내야 했으며, 언제 그 허전한 마음을 접고 돌아오겠지 외로운 엄마와 지겹게 기다리다가 어느새 청년이 되였던것이였다.
학교 중퇴이후로 두 부자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가슴 한가득 끓어오르는 울분을 안고 용감한 홍위병이 되여서 반혁명분자들을 투쟁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할아버지는 여자관계가 복잡한데다가 술버릇마저 좋지 못하여 국가와 인민을 모독하는 주정을 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당하고 길림쪽의 소도시로, 또 거기서 더 작은 진으로, 진에서 그 농촌동네로 미끄럼을 타듯 어찌해볼길 없이 술술 밀려내려갔다고 하였다.
ㅡ넌 그때 잘 나간다고 하지 않았냐? 다 장성한 아들과 술상을 마주하고 할아버지가 물었다고 하였다.
ㅡ처음에는 그랬죠. 근데 사람 인생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점점 이상해지더라니 까요. 어쩌구 저쩌구 해서 내가 반혁명이 되였지 뭡니까. 3년을 옥에 있었지요. 허허 하고 만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고 하였다.
ㅡ그려, 그랬구나. 참, 사람 사는게 거시기하제? 그기 인생이다. 인생이 별건줄 알았더냐? 할아버지는 웃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이나 비슷한 액체같은것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할아버지곁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마주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보다 열댓살남짓 어린 할머니는 그때도 미인의 흔적을 살리고있었는데 까맣고 긴 머리를 가르마 내여 곱게 뒤로 쪽지고, 하얀 저고리 검정치마차림을 한채 커다란 배를 그러안고 대나무장농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서 아버지의 눈길을 당당하게 받아 안았다고 하였다.
ㅡ이번달이… 해산달이라고요?… 우리 집사람도6월인데… 아버지는 원래 다른 말을 하려던것 같이 보였다고 하였다. 마당에서 놀던 올망졸망 삼촌들 셋이 뛰여들어와 땅콩볶음과 계란볶음을 올린 술상앞에 오구작작 모여서서 똘망똘망 까만 눈들로 아버지를 마주보며 때국이 흐르는 입술을 감빨았다고 했었다. 처음으로 보는 동생들에게 매서운 눈빛으로 겁을 주는 할머니를 보면서 아버지는 그렇게 말머리를 돌릴수 밖에 없었던것 같았다고 하였다. 게다가 코흘리개 고모들은 더 형편없었다고 하였다. 반에 반웅큼도 되지 않는 수적은 노란머리를 대충 빨간 게실로 묶어매고서 양볼에 말라붙은 코딱지를 그린채 고모 둘이 시끌벅적 쳐들어왔다고 하였다.
ㅡ엄마, 빨리 와봐! 명주가 달갤 먹었다!
ㅡ곰방 난거 둥구리서 꺼내 깨먹었다! 먼지 낀 창살밖으로 꼬꼬댁 닭들이 똥을 밟으며 퍼덕퍼덕 도망다니고있었고, 그 서슬에 무슨 양재기들이 왈라당 절라당 부딪치는듯 하였으며, 명주가 누군가에게 된욕을 당하고 있는듯한 소란소리며가 잡음을 걸르지 못한 녹음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고 하였다. 명주의 꼬락서니를 구경하려고 누가 먼저 운을 떼였는지 와아ㅡ 하고 고함을 지르며 삼촌들과 고모들이 오구작작 바깥으로 뛰쳐나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애들이 이렇게 비좁은 집에 이렇게 소란스레 모여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구경한 새각시의 엄마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금방 퍼머를 한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버지곁에만 붙어앉아있었다고 하였다.
ㅡ이 놈의 자슥들을 그냥…! 윽 하고 일어서려던 할머니는 얌전히 앉아있는 엄마의 커다란 배를 보고나서 후ㅡ 한숨을 쉬더니 복주야ㅡ!하고 큰 고모를 불렀다고 하였다.
ㅡ나둬, 오늘은 걍 넘어가제. 하고 느긋이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술 한잔 더 따랐다고 하였다.
ㅡ크으, 좋다! 미느리가 사온 술이 별나게 달다야! 할아버지는 얼근히 기분좋게 취하셔서 눈을 지긋이 감고 머리를 흔들면서 밥상 언저리에다 놋쇠저가락을 두드리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사람은 , 어데로 갔~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 ~나
에서부터 시작하여 “타향살이 몇해던가,”에로, 그리고 엄마의 러시야어 실력으로 겨우 간간히 알아들을수 있는 러시야 민요도 두 마디 불렀으며 나중에는 아버지와 같이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도 불렀다고 하였다. 두 사나이는 낮다막한 구들위에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올방자를 틀고 마주앉아, 어깨를 들썩이면서 저가락으로 박자를 쳐가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소리 노래를 하였다고 하였다.
ㅡ그만 하소. 색이지도 못하는 술을 와 죽자고 퍼먹노… 할머니의 푸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술상앞에서 밑둥 잘려진 통나무처럼 뒤로 푹 쓰러지셨다고 하였다.
ㅡ으이구, 죽일놈의 영감탱이, 내 이럴줄 알았지. 간이고 뭐고 다 썩어 문드러져야 정신차릴까나… 아버지는 취중에도 할아버지의 쓰러짐이 보였던지 저가락장단을 그치였고 엄마는 배를 그러안고 뒤뚱거리며 다가가서는 어찌할바를 몰라 했다고 했었다.
그렇게 그날의 연회는 단락을 고했는 모양이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양 겨드랑이 안쪽에 팔목을 집어넣고 어깨를 감아 잡고서 질질 끌다싶이하여 윗목의 이불속에 밀어넣었다고 하였다. 큰 고모 복주가 와서 할머니를 거들어 상을 내가고 아버지는 어린 동생들과 잠깐 마당에서 장난을 치셨다고 하였다.
그날 밤, 한 다리만큼의 사이를 두고 북쪽 구들에는 고모넷과 엄마와 할머니가 나란히 누웠으며 남쪽 구들에는 삼촌셋과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누웠다고 하였다.
ㅡ참 이상도 허지, 기별도 몬받고 했는데 꿈이 보이더라. 하고 할머니가 누워서 그 태몽얘기를 엄마한테 해주었다고 하였다.
ㅡ큰 사람이 참말로 고상 많았데이. 허긴, 저 영감탱이도 속 다 문드러짔제. 그 속은 무신놈에 속이갔나? 그 말을 들으면서 엄마는 푸르스름한 달빛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할머니의 눈망울을 보았다고 하였다. 천정을 향하고 반듯이 누운 할머니였기에 엄마의 시각에서는 반얼굴의 윤곽만 보였다고 하였다. 평평하고 말끔한 이마와 그 아래 오뚝 선 코날이 그런 밤의 달빛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ㅡ에미는 손이 참말로 곱더라. 하고 할머니가 엄마의 배위에 올려져있던 손을 잡아서 꾹 힘을 넣어 쥐여주었다고 하였다. 훤칠하고 건장한 할머니곁에 누워서 단아한 체격의 엄마는 꺼끌하면서도 힘있는 시어머니의 그 손을 잠잠히 느껴보았다고 하였다.
사범을 나오고 시골 초등학교서 교직을 지내던 엄마는 그때까지 수줍음을 많이 타서 처음 보는 시부모님과 더 많은 말을 나누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하고 길을 나설때에도 엄마는 눈웃음만 지어 보일뿐 다른 인사를랑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ㅡ그려, 가 봐. 잘~ 살고. 축 내려앉은 쌍겹의 눈꺼풀을 슴벅거리면서 희슥머리의 할아버지가 아들 며느리를 향해 거친 손등을 두번 앞으로 떠밀어보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린채 경례자세로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땅에 떨구었던것이 눈물이였는지 다른 것이였는지는 아무도 보아낼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것이 부자지간의 마지막 만남이 되였을줄 그때는 아무도 알수 없었다고 하였다. 동구밖 홰나무뒤로 할아버지네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갈때 할머니가 문뜩 ㅡ고맙데이, 에미야! 하고 소리질렀다고 했었다.
할머니는 무슨 예감이 있었던것일까. 왜 갑자기 엄마에게 고맙다고 했을까. 고달픈 나그네인생을 마감하기전의 할아버지께 아직 화해하지 못한 아들과 태속의 손자를 보여주러 온것이 고마웠던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비명에 저세상으로 가버린 아버지에게 이런 기회를 잡아주었던것이 고마웠던것일까.


2

4살위인 오빠에게는 그나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슴츠레 남아 있었겠지만 나의 기억속에는 애초부터 아버지에 대한 기억따위가 조차마저 없었다.
문혁때 책을 잡혔던 할아버지의 작풍문제는 여전히 해결보지 못한 상태여서 정부의 보조금은 시종 심사중에 있었으며, 농사일에 문외한인 할아버지와 오롱조롱 딸린 애들의 머리수가 많았던 이유로, 그 많은 전공의 메달과 휘장이 무색할 정도로 할머니네의 궁색한 살림은 계속 되였던것 같다고 하였다.
궁색하긴 엄마의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군인말고 다른 일을 더 알지 못했던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생산대에서 공수를 버는 일에 영 신통치 못했다고 하였다. 게다가 요즘으로 말하면 취미생활도 웬간히 다양하셔서 열심히 일을 나가도 시원찮을 마당에 걸핏하면 산고개 두개를 넘어가 진에 가서 새로 개봉된 영화를 보는가 하면, 장마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날에 차라리 집에 눌러앉아 수묵화를 그리거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하루를 떼우기도 하였다고 했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아버지도 집을 나가 며칠씩 떠돌다 오기를 즐겨하셨는데 때로는 강줄기를 따라 저수지에 가서 막을 치고 이틀씩 묵으면서 물고기를 잡아오셨는가 하면 때로는 다른 도시나 조선족농촌을 들낙거리면서 고추가루, 미역, 신발, 심지어 밀방약재와 홍송목재 등등의 돈이 될법한 장사도 닥치는대로 하셨다고 하였다.
장마비에 뚝이 터져서 온 동네가 물난리를 겪던 그 전날밤에, 아버지는 아래배에 얇게 헤여진 수건을 두르고 쌔근쌔근 잠이 든 오빠와 나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엄마에게 불쑥 말했다고 하였다.
ㅡ여보야, 우리 떠날까? 산도 있고 물도 있고 풀밭도 있는데 찾아서 애들 데리고 떠나버릴까? 열흘만에 돌아온 아버지는 늘 그랬던것처럼 그 기간동안 생산대에서 벌수 있는 만큼의 먹거리를 벌어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낱 여자의 월급으로 온 식구가 먹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인 아버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던 모양이였다.
할아버지처럼 가정에 무책임한 가장이 되지 않겠다고 굳게 내렸던 맹세, 주체할수 없는 끼를 가졌지만 한번 피여보지 못하고 꺾이여버린 허황한 꿈들, 결국 그토록 원망했던 할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걷고있는 자신을 보면서 아버지는 더없는 무기력함과 낭패감을 느꼈을것이였다. 그래서 그날밤의 아버지는 유난히 슬퍼보였다고 하였다. 한 팔로 뒤머리를 고이고 반듯하게 누워서 다른 한 팔에 엄마의 머리를 눕히우고 아버지는 가느다란 한숨을 푸우 내쉬였다고 하였다.
열어놓은 창문바깥으로 얄포스름한 달빛이 마당앞의 백양나무를 고느적이 감싸안고있었고 백양나무 뒤쪽의 길가 풀숲에서는 이름모를 벌레들이 쓰르락 쓰르락 울고있었다고 하였다. 두번 다시 들어본적 없는 평화로운 밤이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아버지가 떠나갔다. 이른 아침, 엄마가 아직 오빠를 데리고 시골학교로 출근을 하기전에, 두돌배기였던 나를 봐주던 이웃집 모르지아매가 봉창을 두드리기전에, 아버지는 또다시 떠나갔다고 하였다. 구질구질 지겹게도 내리는 비줄기를 맞으며 바자문을 걸어나선 아버지는 다시 그 문을 걸어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장마비는 온종일 시름시름 끊어질듯 말듯 이어져서 내리다가 드디여 저녁을 먹고 자리에 들었을맘때에 가서는 굵직한 장대비로 커져서 자그만 동네를 사정없이 휘갈겼다고 하였다. 그렇게 한시경쯤 지난지 싶었는데, 동네 한가운데를 흐르던 강물이 윗목 저수지에서 예고없이 방류되는 바람에 갑자기 불어나버렸고 기세등등하니 흘러내려오다가 급기야 뚝이 약한 곳을 넘어뜨렸다고 하였다. 느슨히 닫겨졌던 정지문이 벌컥 열리면서 봉당에 누런 흙물이 거품을 물고 쳐들어 왔다고 하였다.
ㅡ 넌 애기였으니까 기억이 없지. 하고 후날 오빠가 얘기했었다.
ㅡ 자다가 갑자기 깨였는데, 다행이 물이 많지 않아서 봉당에서만 넘실거리고 구들까지는 올라오지 못했어. 엄마는 앙앙거리며 울고있는 너를 품안에 그러안고있었고, 나는 엄마곁에 꼭 붙어앉아서 아무 소리도 못내고 바들바들 떨었었지. 무슨 일인지 몰랐으니까.
그때 엄마의 나이가 몇이였던가. 아이 둘을 키우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바다 한 가운데의 외로운 섬에 갇혀버린것처럼, 물들이 뙈기만한 구들을 에워싸고 강도처럼 널름거릴때에, 마당과 봉당과 부엌칸에서 둥둥 떠다니는 싸리비자루와 요강과 앉은뱅이 나무걸상과 누구네집 오리새끼와 암탉이 들어앉아 병아리를 깨우던 닭둥지와 그리고 모든 땅바닥에 놓여있던 뜰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처럼 훌쩍 떠나고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엄마한테 물으면 당연한 대답을 들을수 있었다. ㅡ니들을 보면 어떻게 그런 지독한 생각을 할수 있겠니? 그것이 엄마와 아버지가 다른 점이였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에 대해 전혀기억을 하지 못하는데에 비해 엄마에 대해서는 얼핏얼핏 신기한 기억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물이 빠진 그 다음날, 흙탕범벅이 된 집안과 마당을 청소하던 엄마에게 이웃 한족마을의 남정네들 몇사람이 동네어른들 두어명하고 찾아와서 아버지의 익사를 알렸다고 하였다. 급히 부은 강물위의 위험한 나무다리를 건너서 다른 동네로 가는 길이였던지 아니면 엄마의 동네로 오는 길이였던지 그것은 알바가 없었으며, 노한 강물이 다리를 휩쓸어가기를 기다렸던것인지 아니면 휩쓸려가는 다리위에서 필사적으로 언덕을 향해 달려왔던것인지 그것도 알바가 없었다고 하였다.
무튼 그렇게 엄마는 정말 “김씨네 집안”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였던것이였다. 김해김씨네 장남의 대를 남겨준 사람, 엄마는 본의 아니게 바로 그런 사람이 되였던것이다.
갑작스런 장사를 치르고서 엄마는 한동안 묵묵히 지내셨다고 하였다. 마당 한구석에 흙으로 쌓은 아궁이앞에서 너덜거리는 파초부채를 부치면서 불을 지피다가 가끔씩 바깥으로 물씬 뿜어져나오는 독한 연기에 기침을 클럭거리며 눈물을 찔끔 짜내기도 하였다고 했다. 어쩌다 한번씩 정말 꺼무스런 연기가 매웁게 눈망울을 마구 덮쳐버릴때, 엄마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면서 할머니를 원망하군 하였다고 했다.
첫 만남에서 에미야 에미야 왜 그리 살갑게 불러주었으며 날아간 제비는 오빠일거라고 왜 그리 자신있게 말해주었으며 에미 손이 곱다고 왜 그리 부드럽게 만져주었으며 동구밖 홰나무뒤에서 고맙다고 왜 그리 애절하게 소리질러 주었을까 하고 엄마는 매캐한 연기속에서 할머니를 원망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참동안 끊겨진 할머니네와의 연락, 처음 한동안은 황당하여서 엄마쪽에서 소식을 띄우지 않았다고 하였다. 오빠와 내가 태여나고 자라는 동안 겨우 두번 엄마한테 들러 본 할머니, 엄마가 아는 사람을 통해 소식을 띄웠을때 할머니네는 벌써 그 마을을 떠났다고 하였다. 엄마는 할머니네 동네사람들에게 소식을 남겨두고 돌아왔으나 그후로는 의식적으로 다시 할머니네의 상황을 캐지 않았다고 하였다.
엄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였다. 자신한테 고마워해야 할 시부모님을 마음껏 원망하기 위하여 아무일없듯이 조용하게 기다리고 있었을것이다. 늦가을이 되여 날씨가 차져서 드디여 집안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필수 있을때, 확확 뜨겁게 당겨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엄마는 가슴속의 눈물을 바짝 말리웠을것이다.
눈물이 거지반 마르고 피마저 말라갈때 엄마에게는 그 슬픈 기억의 동네를 떠날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더 큰 운동장의, 더 많은 학생들이 있는 학교로 전근을 하게 된것이였다. 드디여 엄마에게 시부모님을 원망할 더 탄탄한 구실이 생긴것이였다. 나를 둘쳐업고 오빠의 손목을 잡아끌고, 유일한 형제였던 외삼촌과 함께 손잡이 트럭트에 올린 크고 작은 보따리들 틈에 앉아서 동네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엄마는 새 동네로 떠나갔다.
손잡이 트럭트가 쿨럭쿨럭 연기를 내뿜으며 할머니네 인근의 한족동네들을 멀리 에둘러 지날때에도 엄마는 그쪽으로 눈길 한번 돌려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고집스럽게 찌프린 눈섭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비장한 눈빛을, 도무지 속을 내보이지 않는 덤덤한 표정을 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고도 충분히 상상할수 있다.
ㅡ그래도 애들은 김씨네 애들인데, 알릴건 알려야지. 하고 외삼촌이 말했을 것이다.
ㅡ아니, 이제 이 애들은 우리 이씨네 애들이예요. 저 이순희의 애들이라고요. 엄마의 목소리는 차겁고도 단호했을것이다. 후우ㅡ 하고 외삼촌이 머리를 저었지 않았을까. 아직 너무 젊고 너무 고운 여동생의 구만리같은 인생을 생각하면 외삼촌의 가슴은 터질듯 미여져왔을것이다.
어떻게 김씨네 애들이 이씨네 애들로 될수 있겠는가. 그것은 철부지 여동생의 어리석은 미련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언젠가는 만나게 될 김씨네 사람들앞에서, 그 집 사람들의 한치의 도움없이 버젓이 키워낸 그 집 장손과 장손녀를 보여주며 ㅡ저 할만큼 했습니다 오로지 그 말 한마디를 못박아주기 위해 바득바득 버티고 싶어하는 철부지 여동생. 하지만 인생이란 그 숙엄한 단어를 어떻게 그런 한마디 말따위하고 바꿀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것이라고 외삼촌은 생각했을것이다. 살아보거라,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거라, 지금보다 더 힘든 날들이 너를 찾아 올거다, 그때 내 다시 오마. 하고 외삼촌은 떠나갔었다.



3

외삼촌의 말은 조금도 그른데가 없었다. 거짓말처럼 밭은 일하는 사람의것이 되였고 아버지처럼 떠돌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장사는 그제서야 정말 돈이 되는 시절이 되였지만 혼자 몸으로 아이 둘을 거느려야 했던 엄마에게는 역시 녹녹치 않은 세상이였다.
빈 털털이로 새 동네에 와서 새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엄마에게는 유한한 봉급을 쪼개쪼개 쓰는 방법뿐이 없었다. 탈곡장 보초막집 신세를 면하려고, 나와 오빠를 집같은 집에서 길러보려고 엄마는 악착같이 모았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엄마는 “리재”의 귀재였었다. 아껴먹고 아껴쓰고 티끌같은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일은 둘째라면 서러워할 엄마의 장끼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턱없이 부족했을것이였다. 예하면 오빠가 친구들에게서 좀처럼 넘겨받지 못하는 축구의 패스거나, 새로 사귄 친구들이 물을때 내가 도무지 당당히 대답해줄수 없는 우리 집 상황같은것이 말이다.
ㅡ 얘는 아버지가 없어, 얘건 적게 받자구. 마을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학비를 받을때마다 수군거리며 나를 돌아보던 그 눈길을, ㅡ느이 아버지는 어디 갔냐? 하고 능글거리며 내게 말을 툭툭 던지던 동네 부랑뱅이 아이들의 그 웃음을, 나는 평온하게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나만 그러했을까. 어스름 저녁녘에 돌아온 새침한 오빠의 피멍든 입귀는 무엇이였으며 담장너머로 엄마에게 실없는 농을 걸다가 자기 아내에게 끌려가는 동네 아저씨들은 또 무엇이였을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엄마는 외삼촌의 마음을 차차 알아갔을것이다. 할머니네가 아직 엄마를 찾아오기전에, 외삼촌의 “좋은 일”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었다.
ㅡ부인이 이태전에 병으로 돌아갔단다. 단위 좋고 집도 있고, 큰 시내 사람이여서 그쪽으로 전근도 될거다. 그만한 자리가 어디 흔겠냐? 그것이 외삼촌의 “좋은 일”이였다.
외삼촌이 자전거를 밀고 마당을 지나 바자문에 잠깐 멈추어섰을때 나는 한창 마을 어린이집에서 선생님께 격려상으로 받은 초록색 종이제비를 손에 들고 달려오는 중이였다.
ㅡ그쪽 애들은 다 컸다지만, 그래도 둘다 데리고 가기는… 하고 말하다가 외삼촌이 문뜩 나를 내려다보는것이였다.
ㅡ오라버니! 엄마가 화를 내듯 반짝 머리를 들며 언성을 높였었다.
ㅡ안다, 알어. 그게 아니라… 암튼 얘기는 해야지 않겠니? 내가 하마, 김씨네 집안에도 무슨 법이 있을게 아니냐? 외삼촌은 자전거핸들을 잡고 잠깐동안 여동생의 가엾은 어깨를 측은히 내려다보았었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자신의 살덩어리 둘을 데리고 재가를 결정해야 할때, 그 살덩어리들의 원천에게 알려야 할 의무와, 그 애들을 누릴수 있는 권리에 대한 허락을 받아내야 하는 동시에, 오라버니로서 여동생이 몇해동안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것에 대한 이해와 인정도 같이 받아내고 싶었을것이다.
외삼촌이 자전거에 몸을 훌쩍 태우고 떠나가고 나서 엄마는 묵묵히 내 손을 잡고 돌아섰다. 집을 에워싸고 쌓은 나즈막한 토담 귀퉁이에서 팔각 군대모자를 눌러 쓴 오빠가 불쑥 나타나더니 아무말없이 우리를 지나쳐서 쌩하니 집안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여느때와 같이 숙제를 깔끔히 완성하였고 엄마를 도와 이웃집 대장 할아버지네에 가서 물도 두 바게쯔 길어왔었다. 부뚜막곁에 세워진 배불뚝이 물독안에 찰랑찰랑 물을 부어넣으면서 오빠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ㅡ엄마, 시내에서는 이렇게 물을 길어먹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러고는 윗방으로 올라가 책을 펼치고 앉아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오빠보다 어렸고, 오빠처럼 철이 들지도 못하였다. 뭔가 심상치 않음과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것들이 다 무엇인지 알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궁이앞에서 불을 지필때 불빛이 어른거리던 얼굴만이 흑백의 예술사진처럼 내 기억에 남았다. 걱정과 수심이 가득 찬듯한 눈망울, 불안하게 고요한 표정의 얼굴, 미구에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는 그 눈빛. 엄마는 아무것도 알수 없고 아무런 결정도 내릴수 없는 내게 물어보고 싶어했다.
ㅡ새 집에 이사갈까? 불을 피우지도 않고, 구들에 연기도 나지 않는 시내집에. 거기 학교는 훨씬 더 크고, 친구들도 훨씬 더 많대.
ㅡ싫어, 하고 내가 대답했었다.
ㅡ왜? 엄마의 목소리는 나를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설득당하고 싶어 하는듯이 들렸다.
ㅡ큰 학교가 뭐가 좋아서? 친구 많다는것도 거짓말이야. 여기 있는 내 친구 봉순이는 어쩌라구?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였던가? 내 친구와 내 책상과 내 이불과 내 익숙한 모든것을 떠난다는게 싫어서 나는 무조건 싫다고 하였었다.
ㅡ그래? 엄마는 이 집에서 사는게 힘이 드는데. 불이 잘 들지 않으면 구들을 뜯어야지, 이영 한번 올리자해도 동네 사람들 손을 빌려야지… 그래서 내가 약빠르게 대답했었다.
ㅡ엄마는 그게 힘이 들어? 이영이야 2년에 한번씩 올리는거고, 구들 뜯을때는 오빠랑 내가 도와주잖아. 내가 더 많이 할께, 그러면 되잖아.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얘기를 외우군 하였다. ㅡ너 때문이야. 어린것이 뭔 구실을 그럴듯이 조목조목 대여가면서 나를 설득하더라. 나는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어이가 없었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지 알수가 없는데 어른이였던 엄마는 왜 그것을 내게 뒤집어씌울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엄마는 새 아버지와 새 오빠들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던것 같았다. 물론 그 얘기를 꺼냈더라해도 나는 똑같이 머리를 흔들며 ㅡ싫어, 새 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아니고 나는 내 오빠가 있는걸 뭐. 하고 대답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엄마가 또 무슨 방법이 있어 나를 구슬릴수 있었겠는가. ㅡ그래, 그치만, 엄마는 남편이 필요하단다. 니들의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니들에게 약간의 그늘이 될수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단다. 하고 엄마는 내가 절대로 이해할수 없는 얘기들을 할수 있었을까.
그것은 애초부터 온전히 엄마 혼자서 결정해야 할 일이였다. 엄마가 해야 할것은 점을 치듯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선택을 맡기는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결정이 끝난후에 나와 오빠에게 그것을 통보하는 일, 그리고 우리가 새 생활에 적응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런것이여야 하였다.
엄마는 과연 엄마답게 기어이 그 책임을 내게 지우려고 애를 썼다. 얼떨결에 내가 엄마의 또 하나의 원망이 되였던것이다. 담장너머에 부리워놓은 작은 산같은 석탄더미를 보면서 그 다음날의 저녁녘에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는 내게 소리를 질렀다.
ㅡ 빨랑 가서 광주리 갖고 와라! 새 집에 가면 이런 고생 안해도 된다 그랬지! 멍청한 기집애! 엄마가 정말로 화가 많이 난것 같아서 나는 찍소리 한번 못내고 쪼르르 창고로 달려가 광주리를 내다 끌고 갔었다.
화가 나면 힘도 더 세지는것 같았다. 엄마는 광주리에다 석탄을 그득 퍼담았고 힘에 부쳐 어깨가 찌그러지는 오빠와 둘이서 각기 손잡이 한쪽씩 잡아들고 창고로 바지런히 날라갔었다. 나는 나대로 도운답시고 바닥에 구멍이 난 작은 양철소랭이에다 석탄을 조금씩 담아가지고 질질 끌어서 날라갔었다. 얼굴이며 손이며 옷섶마다에 석탄가루가 거뭇하게 묻어났었다.
몇번을 들락거리고 나서 나는 곧 숨이 턱에 닿아 헥헥거렸다. 오빠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여 땀을 줄줄 흘리며 비칠거리고있었다. 엄마만이 갈수록 힘이 더 생겨나는지 씨익씨익 숨을 몰아쉬면서 퍽퍽 힘차게 삽질을 해대는 와중에도 나한테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대고있었다. ㅡ 겨우 고깟거 담고서 빨랑빨랑 못가냐? 지집애, 옷소매에 검댕이 묻히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할머니와 큰 삼촌은 바로 그 때에 우리 집뒤 담장을 따라 보따리를 이고 나타난것이었다. 엄마와 오빠가 먼저 앞서서 창고로 들어갔고, 나는 한창 소랭이에 석탄을 담아서 낑낑거리며 밀고 바자문에 들어서려던 참이였다.
ㅡ 이 집이랬제? 하고 할머니가 삼촌에게 묻고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내밀고 땅바닥에 붙은 소랭이를 밀던 자세에서 기여 일어나 검푸른 어두움의 자락을 덮고 온 두 사람을 조심스레 올려다 보았다.
근육이 잘 발달된 건장한 체격의 청년과 아직 정정한 곧은 체격의 할머니였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두 사람의 얼굴은 자세히 들여다 볼수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깡마르고 작달막한, 아직 담장높이만큼도 자라지 못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은 느낄수가 있었다.
나는 갑자기 어딘가 부끄러워나서 꾀죄죄한 손을 옷섶아래에 감추고는 운동화로 석탄이 담긴 양철 소랭이를 슬쩍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들이 아직 뭐라고 말을 묻기 전에 기척을 들었는지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엄마가 빈 광주리를 들고 창고에서 오빠와 같이 스적스적 걸어나왔다. 내 앞 바자문곁에 서있는 두사람을 보았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곧장 그들의 앞에까지 같은 속도로 걸어나왔다.
할머니가 먼저 엄마를 알아보았던 모양이였다. 이고있던 보따리를 땅에 버리듯 던져내려놓더니 흠, 흑!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앞에로 한걸음에 다가서는것이였다. ㅡ 그려, 옳거이! 이 못된것아! 헉… 어이구 ~ 이 천하에 못된거!... 할머니는 쓰러지듯 엄마의 어깨를 부여잡고 엄마의 둥둥 소매를 거둔 맨 팔뚝을 주먹으로 퍽퍽 소리나게 내려치였다. 엄마의 광주리는 할머니의 주먹질때문에 땅바닥에 댕그렁 나동그라졌고 엄마의 어깨는 그제서야 우스스 떨리고있었다. 얼마나 지독하게, 얼마나 오래동안 참았던 울음이였을까. 할머니의 사정없는 주먹질때문에 엄마는 우리가 보는데서 처음으로 엉엉 소리내여 울었던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밤은 참말로 개운하고 기분좋은 밤이 되였었다. 오빠는 석탄 광주리를 씨엉씨엉 날라주던 삼촌의 힘있는 팔뚝이 좋았을거고, 나는 할머니가 이고 온 보따리속의 먹을것들이 좋았었다. 옛다 하면서 한줌 가득 사탕을 쥐여주며 할머니가 구슬리자 나는 단박에 지조를 잊고 넘어가서 “할머니!”하고 입에 설은 호칭을 불러주었었다. 그 한마디에 할머니는 다시금 끅 목이 메여하시더니 “오냐, 내 새끼” 하면서 나를 한품에 그러안고 숨이 막히게 안아주는것이였다. 나는 할머니의 품에서 간신히 코구멍을 벌름거리며 내게도 정말 할머니가 생겼다는 실감나는 기쁨에 겨워서 전에 없이 흥분되였던것 같았다.
ㅡ헛참, 어머이, 쟤들 좀 보세요. 피줄이 무엇인지… 하면서 엄마가 까르륵 뛰여 다니며 장난질 치는 나를 곱게 흘겼던것 같았다. 미구에 더는 졸음을 이길수가 없어서 할머니와 엄마의 가운데를 비집고 들어가 누워서 줄나게 하품을 하였던것 같았다.
ㅡ고상 많았제? 말 하믄 머 하겄나? 안해도 뻔하제. 까무룩 내가 잠들기전에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였었다.
ㅡ욕 많이 했제? 시집이 너무 무심타고. 그러나 엄마의 목소리는 시종간 들려오지 않았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나누었던지 할머니와 엄마는 그날 이후 다시 사이좋은 고부간이 되였었다. 엄마는 우리처럼 매년 겨울방학에 할머니네로 가서 설을 쇠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할머니네로 보내는 일에는 반드시 명심을 하군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빠와 나를 데리러 오는 큰 삼촌이나 둘째 삼촌을 따라 사람과 짐들이 붐비는 버스를 타고, 또 툴툴툴툴 뒤뚱뒤뚱 논밭길을 달리는 삼륜차를 타고, 한적한 시골인 할머니의 동네로 매년 겨울마다 갈수 있었던것이다.
악착같이 모아서 집을 사고, 책을 사고, 교육비용을 저금하며 살아가는 엄마와 달리 할머니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것도 그때부터 느끼기 시작하였다. 엄마는 수많은 위인전을 사주며 우리에게 읽히면서 부담스런 기대를 하고 사셨지만, 할머니의 양육이념은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한마디로 일축할수 있을만큼 소박하고 현실적이였다. 할머니는 종래로 자식들에게 싫어하는 공부를 강제로 시키는 짓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앞에서 책잡히지 말도록 예의바르고 눈치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도 않았다. 애들을 생겨먹은 그대로, 기죽이지 않고 키워내겠다는 것이 할머니의 신조인듯 하였다.
창고에 늘 풍족한 먹거리들도 우선 건강하게, 먹고 싶은건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변함없는 생각때문인것 같았다. 내가 갈때마다 설대목이였다는 것도 있었지만 동네 여느 집보다도 항상 풍성하게 먹었다는것, 당장 먹을것이 없으면 먼저 꿔서라도 먹고 본다는 할머니네 가풍은 굳이 광고를 내지 않아도 인근에서 다 알고있던 사실이였다.
이젠 칠칠한 청년들이 되버린 고모들과 삼촌들과 같이 노는 일도 무척이나 즐거웠었다. 자신의 상황에 너무 민감했던 나머지 스스로 친구들 중심에 서지 못하고 늘쌍 변두리에서 끄적거리던 답답한 우리 형제와 달리 또래들을 모아놓고 다짜고짜 호령을 하는 우락부락한 성격의 삼촌들 모습은 내게 참으로 신기한것이였다. 친구랑 늦게까지 돌아다녔다고 비자루를 거꾸로 잡아드는 할머니를 피해 쏜살같이 도망가면서도 킬킬 웃어대거나 칼칼거리며 한두마디 대드는 고모들의 모습도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였다. 아, 사람은 저렇게도 살아갈수 있는것이구나 하고 그때의 나는 어떤 의미에서의 자유를 느꼈던것 같았다.
아버지가 없다거나, 살림이 궁색하다는것 모두가 결국 자아위축의 구실이 될수 없다는것을 심심히 깨달았던것이다. 엄마가 알려주었었다. 나의 아버지가 익사하기 벌써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고.
화재였었다고 했다. 어지럽고 지저분한 마당과 부엌과 안방 윗방 할것없이 불이 잘 당기는 물건들로 널려있었는데다가, 곤드레 낮술에 취해서 미처 정신을 추스리지 못한 할아버지는 그 맹렬한 불길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ㅡ미리 연기에 취했던기라. 그라고 마이지 몬하게 했는데도 무신 소용이던가? 다ㅡ 지 팔자탓이제. 석탄을 날라주던 그날밤에 할머니가 엄마에게 얘기했었다고 했다.
ㅡ정신이 없는기라. 마, 넝감은 없고, 집은 다 태삐맀고, 철읍는 서나들은 찡찡 거려쌌고, 하늘이 노래지는기라. 그라도 어쩌갔나? 살아야제. 안 그렇나? 하고 할머니가 덤덤하게 말했다고 하였다.
그 순간 엄마는 문득 할머니가 가여워졌다고 하였다. 원망할 시집조차 없는 할머니, 위로받을 친정마저 없는 할머니, 할머니에게 있었던것은 부랑뱅이 남편이 남기고 간 일곱명의 자식들뿐이였다. 무슨 이유로 이런 시어머니에게, 그것도 남편을 낳지도 않은 새 시어머니에게 원망같은것을 할수 있단 말일까. 엄마는 아마 그 시각 할머니가 존경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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