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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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불타는 수용소-금희
2019년 07월 17일 10시 21분  조회:375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금희

불타는 수용소  
 
 
이상하게 더운 여름이였다. 쌀쌀한 초봄이 되돌아오듯 기온이 뚝 떨어졌다가 문뜩 예고도 없이 콜타르를 녹일 정도의 고온 날씨가 덮쳐오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여름이 시작되였다. 하얀 재빛의 태양은 마지막 열기를 내뿜는 상상불가 고온의 숯불덩어리 같았다. 철선공주가 머물던 화염산의 해볕이 이렇듯 지글거렸을가. 사람들은 모자나 양산, 그것마저 가지지 않았을 때엔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 혹은 가방 따위로 이마를 덮고서 징그럽게 쏟아지는 불볕의 열기를 차단해보고자 했다.
혹간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습기가 조금도 묻혀있지 않는 건조한 열풍이였다. 그것을 들이킬 때마다 페가 바싹바싹 타들어가다가 마침내 내장 전체가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다. 에어컨을 빵빵하니 틀어놓고 고객들의 지갑을 노리는 대형백화점이나 마트, 그리고 사시장철 어두운 얼굴로 우중충 서있는 정부청사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어느 곳이나 속절없는 무더위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포위했다.
매년 이맘때면 이 고장에서 흔히 겪는 더위였지만 올해는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아무리 더워도 자정을 넘기면서부터 아침까지는 사그라있던 열기였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온기 없는 물로 샤와를 하고 얼음을 띄운 랭수를 마시고, 대나무자리를 깐 침대에 누워도 더위는 금세 다시 기승을 부렸다. 새벽녘이면 오히려 오슬오슬 한기 때문에 침대구석으로 차던졌던 홑이불을 다시 끄당겨 덮군 하던 여름이 아니던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가. 아남은 흐리멍텅한 머리로 애써 그가 기억하고 있던 여름을 떠올려보았다.
안해는 입을 반쯤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속으로 곯아떨어져있었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한줄기의 바람도 날아들지 않았다. 무더위가 지속된 며칠간 밤잠마저 제대로 잘 수가 없어 아남은 배변을 시원히 보지 못한 아이처럼 본인이 능히 조절할 수 없는 불쾌감과 짜증에 휩싸였다. 머리속은 텁텁하고도 짙은 연기에 싸인 화산마냥 혼잡한 가운데 언제 터질지 모를 스트레스의 압력으로 꽉 차있었다. 얼마나 이 상황을 더 견뎌낼지 알 수 없었다.
안해는 끙 돌아누우며 맨다리를 아남의 배우에 천연덕스럽게 올려놓았다. 친정집에서도 잠버릇이 심했던 모양, 매일 밤 안해는 이불이며 베개를 혼자서 다 차지하고 나서도 성차지 않은지 꼭 다리를 아남의 배우에 올려놓고 자려고 했다. 가무잡잡한 피부는 어스름달빛에 가리워서 그닥 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다. 앞으로 툭 튀여나온 이몸과 생쥐처럼 판들거리는 작은 두 눈도 지금은 선명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안해는 그런대로 보통의 녀자가 갖출 수 있을 만큼의 몸매는 가지고 있었다. 큰 만두처럼 불거져나온 가슴도 제법 컸고 삼각의 팬티 아래로 거반 드러나 있는 엉덩이도 둥그스름하니 굴곡이 있었다. 차라리 지금같이 흐릿한 조명 아래서라면 아남도 얼마간 적극적으로 욕정을 태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안해는 항상 불을 켜고, 것도 있는 대로 환하게 켜놓고 그 일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그 거무튀튀하고 거칠거칠한 피부하며, 크고도 허연 입술, 도무지 귀염성스런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한심스러운 오관의 조합을 마주보면서 일을 치러야 하는 것이 제 남편에게 얼마나 큰 고역인 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아남은 거의 매번마다 눈을 질끈 감거나 차라리 안해의 몸우에 누워서 목을 어긋맞고 베개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베개우에서는 아남이 알고 있던 녀배우들의 얼굴이 쉬임없이 떠올랐다. 일을 마치고 나서 아남은 급급히 일어나 샤와를 했다. 끈적거리는 땀냄새도 싫었거니와 그 상태로 한동안 더 껴안기고 싶어하는 안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남은 사실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멀끔한 미남자였다.
일곱살때 배속에 물이 들어차는 병(간암복수)으로 돌아가신 아남의 생모가 보기 드문 미인이였다. 그녀는 M구역의 공사병원에서 일하던 큰오빠의 연줄로 그 곳에 청소부로 취직했다. 진한 청색의 품너른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녀는 항상 예뻤다. 피부는 분을 칠한듯 뽀얗고 알릴듯 말듯 머금은 홍조는 누가 봐도 귀여웠다. 눈섭은 그린듯 선이 고왔고 꿈꾸는 듯한 맑은 눈망울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게다가 패션이라는 개념마저 있다고 할 수 없는 시절, 학생복이면 학생복, 군복이면 군복, 작업복이면 또 작업복 대로 어떤 옷을 입든 간에 도무지 말살할 수 없는 경쾌한 맵시가 났다.
아남은 어머니가 남긴 여러장의 사진속에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수도 없이 확인했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사진속에만 있을 뿐 아남의 머리속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란 부드러운 목소리와 숨막힐 듯한 따듯한 포옹, 귀가를 간지럽히던 기분 좋은 숨결과 볼에 짓눌려오던 말캉한 젖무덤 같은 것뿐이였다. 아남네랑 오래동안 이웃에 살아온 아빠트 사람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혀를 찼다. “쯧쯧, 불쌍한 것! 어떻게 저 녀석은 저렇게 제 어미를 똑 빼다 닮았을꼬? ”
아남은 어느 정도 철이 들 때까지 그들이 왜 자신을 볼 때마다 슬픈 기색을 짓는지, 왜 도리머리를 흔들며 혀를 차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보육원에서 돌아온 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진치고 있는 2층의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1층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에 아남은 할머니에게 허리를 잡히고 말았다.
“착하지, 우리 남이. 할미가 눈깔사탕 사줄게. 할미랑 같이 가자…”
그래서 아남은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하여 불과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남은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울지 않았다.
“얘야, 이제 네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갔단다. 멀고도 먼곳이지. 거기는 너무너무 멀어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란다. 알겠지?” 어른들은 그 얘기를 해주면서 아남의 눈치를 살폈다. 아남은 그들이 모두 긴장된 얼굴로 자신을 주시해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초조해하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무슨 연극을 련습하듯, 자신들의 대사가 끝나고 나서 아남의 대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남은 자신이 말해야 할 대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게 뭘가? 뭐라고 해야 옳은가? 저들은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결국 아남은 연극 따위를 포기하고 약간 김빠진, 아니,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서 집을 나갔다. 그 자리에 더 머물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아남은 문밖을 나서기 바쁘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등뒤에서 어른들이 나직이 한숨 짓는 소리, 혀를 차는 소리,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뭔가 넉두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상한 여름의 공기가 바로 그때와 흡사하게 불쾌했다. 하지만 아남에게 있어서 사실 행복한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그냥 살아지는 대로 쭉 살아왔고 불행이 공격해올 때마다 고스란히 당해주었다. 사람의 인생라는 것이 워낙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지 않지 않는가. 어쩌다가 그에게도 기쁘고 벅차고 감동 넘치는 날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어온 수많은 외롭고 막막하고 두렵고 아팠던 날들에 비할 바가 못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힘든 나날 속에서도 아남은 한번도 그 유쾌하지 않는 생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더 아름답고 활기차고 행복한 생이 펼쳐질 기적 같은 것을 바란 적도, 그런 역전의 생을 위해 나름대로의 피타는 노력을 해본 적도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는 사정이 허락하는 만큼 공부를 했고 학교를 나와서는 여기저기서 일을 했으며 혼기가 꽉 차자 주위의 불안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먼 친척이 소개해준 대로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어머니가 하던 병원 청소부의 일을 계속하게 된 것은 퇴직을 앞둔 큰외삼촌의 배려였다. 그 병원은 이제 거대한 몸집으로 자라난 도시에 비해 아주 작고 낡고 허름한 곳으로 되여버렸다. 몇년전부터 리모델링을 다시 한다는 풍문이 나돌았지만 하루에 얼마 되지 않는 환자들의 수를 보아해서는 오히려 직원들의 봉급을 걱정해야 할 소문이였다. 아남은 매일 그 어두침침하고 생기 없는 곳에서 다른 청소부 두명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처가에서 마련해준 한칸짜리 낡은 아빠트에 신혼방을 차린 것은 불과 3~4개월전의 일이였다.
 
침대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늑장을 부리는 안해 대신 아남이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그녀가 주방에 들어서기를 기다리다가는 둘 다 지각할 것이 뻔했다. 향긋하게 대파를 볶다가 도마도를 넣고 익혀서 물을 넉넉하니 부어 아남은 도마도 계란면을 끓여냈다. 도마도계란면은 결혼 뒤 안해에게서 배운 것이였다. 안해는 잘할 수 있는 료리가 몇 종류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도마도계란면이였다.
고중을 나와서부터 번번이 바뀌던 일자리를 따라 전전긍긍 돌아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만한 아침식사는 더없이 훌륭한 것이였다. 깔끔하고 균형 잡힌 몸가짐에 황금비률의 오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남은 심한 말더듬이였다. 아남은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사준 양복을 입고 구두공장의 림시직원, 식당의 잡부, 광천수회사의 물배달원 등 일들을 했었다. 그의 상전이나 동료들은 그가 양복을 입고 일하러 나온 것에 대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도시의 하층인에 속한 사람이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양복이냐 하는 것이였다. 게다가 그 일들은 전부 몸을 많이 쓰며 쉴새없이 자세를 바꾸어줘야 하는 직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양복은 편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남은 출퇴근할 때만 양복을 입고 근무할 시에는 직장의 작업복을 착용함으로 그 문제에 대해 타협했다. 여름에는 하얀 샤쯔와 까만 양복바지만 입었고, 봄, 가을에는 샤쯔우에 단추가 네개 달린 조끼를 걸쳐입다가 좀더 추워지면 그 우에 양복을, 더 추운 겨울이면 코트를 걸쳐입었다. 그렇게 정장을 입고 가다듬은 자세로 걸어가는 아남의 모습은 가히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어머니와 짝지을 만한 것이였다. 실제로 아남은 출퇴근길을 혼자 걸으면서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아남의 팔짱을 낀 채 그와 함께 보조를 맞추며 걷는 어머니는 소녀처럼 머리를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기도 하고 열렬한 사랑에 빠진 련인처럼 속 깊고 정겨운 눈빛으로 그를 흐뭇이 올려보기도 했다. 안해와 결혼하기 전까지 아남은 그런 식으로 어머니와 자유로이 만나 때때로 함께 출퇴근했다. 아남은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해의 푸석한 얼굴이 거실문곁에 나타났다. 싸구려 물감을 들인 노란색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한 광주리만큼이나 부풀어올랐고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채 가시지 않은 졸음기로 덮여있었다.
“몇신데? 벌써 일어나 밥 먹어?”
M시의 교구에 살던 농민출신의 부모에게서 자란 안해는 그 억양에 동북 사투리의 흔적이 많이 있었다. 툭 튀여나온 상악골 때문에 발음이 항상 얼마간 먹히우기까지 해서 아남은 그녀의 말을 잘 리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처가집에서는 아남을 한번 보고 혼사를 서둘러 준비했지만 정작 결혼식 날 안해는 시아버지가 보내준 한복을 입지 않았다. (그녀는 웨딩샵에서 빌린 드레스와 빨간 봉황이 그려진 치파오를 입었다.)
아남은 부지런히 놀리던 저가락을 내려놓고 김이 문문 나는 냄비안에서 면발을 건져 국물과 함께 국그릇에 담아 안해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안해는 커다란 입술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고 나서는 그 참에 눈귀로 밀려난 눈물과 눈곱을 같이 닦아냈다.
“언제 끓인거야? 이런, 면발이 다 풀어졌네…”
아남은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의 식사를 계속 했다. 저가락으로 두어번 면발을 휘저어보던 안해는 못마땅한 대로 면을 건져 후르륵 먹기 시작했다. “망할 놈의 날씨, 아침 대바람부터 이렇게 덥다니…” 하고 안해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온밤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아무 소용 없지 않아? 젠장, 날씨 때문에 밥맛까지 도통 없네. 우리 이따가 저녁에는 뭐 좀 맛있는거 해먹자…” 안해는 쉴새없이 지절거리며 아남을 건너보았다. 아남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깨끗이 비운 자신의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안해의 수많은 잔소리와 쓸데없는 수다와 억지가 대량 섞인 넉두리에 관해서는 일절 대꾸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외모와 정비례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안해는 변덕도 엄청 심했다. 안해가‘무심히’거는 말에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가 난데없는 꼬투리를 잡힌 적이 어디 한두번이였던가.
수세미에 퐁퐁을 약간 묻혀 그릇과 저가락과 냄비를 닦은 다음 아남은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결혼식때 새로 마련한 하얀 샤쯔가 아남의 얼굴을 환히 빛나게 했다. 넥타이는 아버지가 사서 보내준 것과 아남의 ‘정장사랑’을 알고 있는 주위 친지들한테서 얻은 것 중에서 흰줄과 청색, 푸른색 줄이 규칙적으로 배렬된 것을 선택했다.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다음에는 가는 빗으로 까맣고 숱 많은 머리도 가지런히 빗어넘겼다. 숱진 눈섭은 한일자로 얼굴 한가운데 맞춤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아래 정기있는 두 눈은 검은자위 흰자위가 또렷했다. 조각가가 다듬은 듯한 코날, 다른 오관과 잘 조화되는 륜곽 선명한 입술… 이제 거울속의 아남은 영국 황실의 황자만큼이나 름름한 신사가 되였다. 아남은 앞뒤 좌우로 돌아가며 혹여 머리카락이나 먼지 같은 것이 붙어있지 않나 꼼꼼히 비춰보고 나서 드디여 흡족한 얼굴로 전동자전거의 열쇠를 벗겨내여 손가락에 걸고선 집문을 나섰다. 무슨 낌새를 용하게나 알아챘는지 안해는 예나 크게 다르지 않는 남편의 일거일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곧 돌아온다는 소식을 아남은 아직 안해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온다, 래일이나 모레, 곧 우리 아빠트로 들어올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아남은 그 장면을 상상하며 기괴해했다. 여러 진찰실을 돌아다니며 빈 링게르, 일회용 주사바늘, 알콜을 묻힌 솜뭉치와 환자들이 쓰던 피자국진 깔개 같은 쓰레기를 수거하면서 아남은 아버지에 관한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계단 아래쪽을 합판으로 막은 삼각의 작은 창고로 들어가 마스크를 잠간 벗고 대걸레며 비자루, 물통 따위 청소도구들이 오구구 몰려쌓인 중에 비집고 앉아쉬면서도 아남은 계속하여 생각했다. 이상해, 이상해, 아버지라니, 아버지가 나의 집에 온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다른 청소부들이 담배를 피운다거나  물병 가득 채워온 록차를 마시는 동안 아남은 맥심 믹스커피를 마시기 좋아했다. 그 커피는 아버지가 한국에서 다른 선물들과 같이 거의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것이였다. 프림과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는 뉴스를 보고 나서부터 아남은 커피봉지를 찢어 자신이 들고다니는 유리병속에 넣기 전에 먼저 손바닥에 그 안의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하얀 가루분말들은 되도록 쓰레기봉지속에 버리고 갈색의 작은 덩어리들만 손바닥안에 남겨두려고 노력했다. 그런 다음 아남은 유리병속에 뜨거운 물을 가득 따랐다. 아무도 아남의 그 연갈색 액체를 맛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남은 그것을 ‘커피국물’ 이라고 스스로 명명했다. 어딘가 탄내 나는 숭늉 같은 맛이 느껴지는 ‘커피국물’이였다.
‘커피국물’을 두모금 들이키는데 아남의 눈앞으로 홀연히 한 남자아이가 불쑥 나타났다. 가로로 쭉 째진 눈에서는 날카롭고도 차거운 눈빛이 뿜어나왔다. 이렇게 오랜 세월 지났는데도 그 아이의 모습이 그렇듯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남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 아이는 아남을 경멸의 시선으로 쏘아보다가 휙 돌아서 사라져버렸다. 아남보다 다섯살이 더 큰 그 아이는 늘 그런 눈빛으로 아남을 보았었다. 그 아이를 뒤따라 나가 같이 놀고 싶었던 아남은 단 한번도 그 소원을 이뤄본 적이 없었다. 아남은 눈을 둬번 껌적거리고 나서 다시 ‘커피국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아버지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그 왜소하고 볼품없는 인간 대신 다른 한 녀자가 냉큼 아남의 눈앞으로 뛰여들었다. 좀전의 남자아이와 꼭 닮은 눈에 아남을 흘겨보는 경멸의 시선마저 똑같았다. 녀자의 얇은 입술이 여닫히며 뭐라고 말들을 총알같이 내뱉는 순간, 아남은 움칠 놀라며 몸을 떨었다.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어두운 산처럼 그를 짓눌렀다. 오래전의 과거가 둥그렇게 입을 벌리고 다시 아남을 그 속으로 빨아들이려고 마력을 쓰고 있었다. 온몸이 따끔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고 마음은 납덩이를 매단 잠수부처럼 어떤 불쾌한 심연 속으로 축 가라앉고 있었다. 아남은 머리를 흔들었다. 예전의 기억은 현재의 그의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날의 상처와 아픔이 되살아나 생생하게 느껴질 때면 그는 그 몹쓸 감정에 휘둘려서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다른 사람과의 얘기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삽시간에 격해진 억양으로 더욱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분노를 목표도 없이 이리저리 마구 표출했다. 그러나 만약 혼자만의 상념중에서라면 분노를 쏟아부을 상대가 없어 부르르 제 몸을 떨다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는 수도 있었다. 사정이 어찌됐든 이런 행동은 사람들이 반길 만한 것이 못되였다. 아남이 분노할수록, 침을 튕기며 말을 더욱 급히 더듬을수록 그들은 침착한 눈초리로 아남을 쏘아보군 했다. ‘저 대책 없는 얼간이 같으니라구.’ 그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남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표준에 따른다면 자신이 영낙없는 ‘얼간이’라는 것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니 과거 따위가, 그 녀자와 남자아이, 그리고 아버지 같은 인간이 대체 아남과 무슨 상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커피국물’을 다 마시고 나서 아남은 다시 일어나 대걸레로 복도를 닦기 시작했다. 아남에게 있어서 가장 낯선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나 돌아갔을 때, 그리고 그 녀자(계모)가 들어와 살림을 했을 때에도 항상 아남과 한집에서 살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아남에게 무심했던 사람이였다. 아버지는 M시의 크지 않은 국영기업에서 출근하던 로동자이였다. 그는 특징적인 부분이 거의 없는 평범한 사람이였고 생활을 대함에 있어서는 정취라고 꼬물만치도 모르는 재미없는 인간이였다. 본인의 무능력과 시대의 암울함 등 리유가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갔을 것이였다. 아남의 기억속에 아버지는 항상 입을 꾹 다물고 량미간을 찌프린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정말로 무엇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였다. 그는 늘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먹었고 밥상을 물린 뒤에는 가타부타 아무 말없이 이불을 펴거나 출근을 나갔다.
말하는 사람은 항상 계모였다. “오늘도 월급이 밀렸다구요? 뭔 놈의 공장은 맨날 월급을 미룬대? 혹시라도 당신이 딴데 빼돌린건 아니구요?”, “뭐라구요? 아남이 학비 낼 돈요? 월급을 타쓴 지가 언젠데 그 돈이 남아있겠어요?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못 벌어오면서…”, “아니에요, 이번엔 정수 신발을 사줘야 돼요. 그 애는 달리기시합에 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아남이 신발은 아직 신을 만하잖아요. 당신 혹시 정수가 제 몸에서 난 애가 아니라고 차별하는건 아니죠…”, “당신은 맨날 밖에서 일하다 나니 무슨 수로 알겠어요? 아남이 얘 고집이 정말 장난 아니라니깐요. 뭔 애가 심술은 얼마나 많은지, 정수 거라면 무조건 샘을 내고 눈독을 들이는 게 나참, 그만큼 욕심 많고 마음 비뚤어진 애가 없어요…” 아버지는 계모의 말에 토를 달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계모의 말처럼 정수를 차별하지도 않았고 아남을 더 귀해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는 후처나 그녀의 아이, 또는 자신의 아이까지 모두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죽을 수가 없어서 살아가는 사람이였다. 
아남이 소학교 2학년이나 3학년 쯤이였을가. 50전어치 월표를 사서 뻐스를 타고 학교를 다닐 적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로 이사한 집은 학교에서 더 멀리 떨어졌었다. 15분을 걸어 정류장에 도착하고 다시 뻐스를 40분 남짓 타고 가야 했다. 금방 1학년생이 되였을 때만 해도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 같이 뻐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2학년이 되여서 계모가 들어오면서부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시골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아침 일찍 다른 뻐스를 타고 출근하고, 정수는 언제나 먼저 떠나갔고… 그래서 아남은 혼자 뻐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뻐스안은 사람이 많아 공기가 아주 나빴다. 아남은 사람들 틈에 비집고 서서 차가 급정거를 할 때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깐힘을 다 해 의자 등받이를 꼭 붙잡았다. 그래도 차가 멈칫하는 사이 다른 사람의 몸우에 넘어지거나 어른들의 신발에 밟히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뻐스를 타는 긴 시간동안 자리가 나는 기회는 자주 있었지만 번번이 힘센 다른 어른들에게 앉아갈 기회를 빼앗겼다. 어느 여름날의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뻐스에서 어쩌다 앉아가게 된 아남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어 밖을 내다보니 내려야 할 정류장에 이미 도착했다. 뒤문쪽에는 다음 역이나 그 다음 역에서 내릴 사람들이 빽빽이 몰려있었고 뻐스는 벌써 치익-- 문을 닫으며 떠나려고 움직이는 중이였다. 한 정류장 더 가게 되면 20분은 족히 걸어서 되돌아와야 했다. 더이상 생각할 사이가 없이 아남은 반쯤 열려있는 유리창을 힘껏 밀어제끼고 책가방을 둘러멘채 의자에 올라가서 그 유리창으로 훌쩍 뛰여내렸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나니 발목이 시큰거렸다. 뻐스 기사가 백미러로 그 장면을 보았는지 빵빵 경적을 두번 울렸다. 차장을 비롯한 차우의 사람들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아남을 멍하니 내려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아남을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아남은 발목을 조금 주무르다가 이내 책가방을 주어메고 일어섰다. 반바지를 입은 무릎의 살갗이 벗겨져 검붉은 피가 배여나왔다. 손바닥으로 피방울을 쓱싹 닦은 다음 앞으로 몇발자국 걸었는데 바로 그곳에 아버지가 서있는 것을 아남은 보았다. 아남은 주춤 그 자리에 서버렸다. 방금전 자신이 차에서 뛰여내리는 모습을 아버지가 전부 보았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는 책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죽이고 아버지의 얼굴표정을 훔쳐보았다. 그날에도 아버지는 아무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두침침한 얼굴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잠간 바라보았다. 차라리 욕지거리라도 했더라면 와-- 하고 반가운 울음을 터뜨릴 수 있으련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서서 뚜벅뚜벅 집쪽으로 길을 잡아 걸어갔다. 자신을 따라 오라는 신호였다. 뚜벅뚜벅, 뚜벅뚜벅… 아버지의 등은 그렇게 높고 크고 두꺼워보였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남의 마중을 나온 날이였다. 그 뒤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었다.
그 녀자가 죽고, 정수가 집을 나간 다음 아버지는 고중을 금방 나와 공장에서 견습공 노릇을 하는 아남을 혼자 둔 채 한국으로 떠났다. 그것도 벌써 십년전의 일이였다. 처음 5~6년 동안은 거의 소식이 없다가 최근 3~4년에 들어서야 아버지는 련락을 했다. 편지는 없었지만 속옷이나 양말, 시시한 생활용품과 중국에 없는 먹거리들 따위는 서너달에 한번씩 모아 상자로 보내주었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는 짧게 통화를 하기도 했는데, 주로는 부쳐준 물건에 관한 얘기였다. 어떤 게 좋았냐, 어떤 게 더 필요하냐, 이 외에 혹시 갖고 싶은건 없냐… 등등. 아남이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서 주숙하며 건강상태는 어떤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두마디로 끝냈다. ‘잘 있으면 됐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자신의 상황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다. 아남 역시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아남은 아버지의 구체적현실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그가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언젠가 아버지가 죽으면 다시는 선물상자를 받지 못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남은 상자속의 과자와 커피를 먹었다.
 
얼음을 띄운 랭면을 먹던 저녁, 아버지가 아남네 아빠트 현관문을 두드렸다. 아버지가 탄 비행기는 오후나절에 M시 공항에 내렸는데, 그는 아남에게 전화를 넣지 않고 아들이 위챗에 남긴 주소만 가지고 혼자 찾아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 언녕 아남네 아빠트를 찾아냈지만 젊은 내외간의 퇴근시간을 기다리느라 부근의 놀이터 벤치에 여태 앉아있었다. 아남은 소고기를 조금 넣고 끓여서 식힌 육수에 미리 얼려놓은 얼음을 부셔넣었다. 냄비안에서는 면이 부글부글 거품을 일며 끓고 있었다. 가스불앞에 선 아남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연신 팔뚝으로 훔쳐댔다. 누런 기름때가 끼여있는 창살바깥으로 마라탕의 노린내가 끊임없이 풍겨 올라왔다. 아남네 아빠트 바로 아래층이 작고 꾀죄죄한 마라탕집이였다.
노크소리가 몇번 울리자 안해가 뒤뚱거리며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세이야?!(谁呀?)” 안해는 높고 칼칼한 목소리에 짜증을 섞어서 문뒤의 불청객에게 물었다. 갑자기 아남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 하고 생각하는 순간 문이 열렸고 안해가 미지의 손님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 니 자오세이야?(谁? 你找谁?)…” 그러나 손님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황당하고도 어색한 침묵. 아남은 그 손님이 아버지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저가락으로 면발을 젓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면발은 맞춤하니 익었다. 더 놔두면 탄력을 잃을 것이였다. 아남은 급히 불을 끄고 행주로 남비 손잡이를 싸서 그대로 싱크대안에 넣으며 수도물을 틀었다. 현관으로 달려가고 보니 저가락을 든 채로였다. 아남의 기척소리를 듣고 안해가 몸을 돌이켰다. 그제야 아남은 아버지를 보았다. 챙이 있는 하얀 모자아래로 희슥희슥 머리카락이 드러난 작고 여윈 늙은이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끌고 온 한개의 짐가방과 그 우에 얹어왔을 두개의 상자와 함께 계단어귀에 나란히 서있었다. 아들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피끗 안도의 미소 같은 것을 지었다. “그래, 내가 잘 찾긴 찾았네…” 아버지는 입귀를 두어번 실룩거렸지만 더이상의 감탄사는 말하지 못했다. 십년동안 훌쩍 커버려 거뭇한 어른이 다 된 아들을 그저 경탄의 눈길로 바라볼 뿐이였다.
“아부지, 미리 전화를 하시지 그랬어요?…”하고 아남이 그에게 말했다. 만약 길가에서 만났더라면 아남은 도무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였다. 아버지는 아남의 상상 속의 그 사나이가 아니였다. 아버지를 안내하여 거실로 들이고, 그의 짐들을 하나하나 옮겨주면서도 아남은 혹시 자신이 낯모를 사나이를 아버지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늙은이는 아남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안해와 결혼한 일자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는 지어 안해에게 떠듬거리며 사돈식구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아남은 먼저 끓인 면발을 소쿠리에 건져놓고, 남비에 새 물을 받아 면을 좀더 삶았다. 육수가 부족하여 얼음을 있는 대로 더 넣고 나눠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남은 안방안에 세워두었던 선풍기를 꺼내 거실에 놓고 돌렸다. 식탁에는 플라스틱 걸상을 하나 더 가져다 놓았다. 끈적하고도 무더운 선풍기 바람이 윙윙 식탁을 향하여 불어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더없이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가운데 첫번째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아남은 생각끝에 아버지를 위해 거실 한쪽 구석에다 간이 침대를 펴주기로 했다. 아남이야 어디서 자든 상관이 없었지만 안해는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였으니까. 안해는 맞춤한 두께의 이불을 찾는 아남을 붙들고 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묻기 시작했다. “뭐에요? 아버지라구요? 당신 아버지?… 나참, 결혼때도 못 오던 아버지가 갑자기 웬 일이래요? 그래서, 얼마나 있을건데요? 뭐하러 오셨대요?…” 아남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 모른다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남의 태도가 시원찮은 것을 보고 안해는 더욱 소리를 높여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남은 아무 대꾸도 없이 이불을 들고 거실로 나와버렸다. 간이침대는 아남이 전에 혼자 살림을 할 때에 쓰던 것이였는데 결혼하면서 혹시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하여 사용하려고 남겨두었다.
“아부지, 좀 불편하시겠지만 먼저 여기다 자리를 봐드릴게요. 창문을 열면 여기가 안방보다 더 시원해요.”
아버지는 작은 쏘파에 앉아 안절부절하면서 아남이 이불을 깔아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 알았다. 괜찮다.” 하고 아버지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남이 그 일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부시럭거리며 상자를 뜯어 여러가지 주방용품들과 건조시켰거나 진공포장한 먹거리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아들 내외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듯한 화장품세트가 그 중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보였다. 아남이 아버지의 침대자리를 다 깔고난 동시에 아버지도 상자속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 진렬을 마쳤다. “이거, 어디다 둘까?” 하고 아버지는 아남을 올려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부모의 선처를 바라는듯 애원에 가까운 눈빛이였다. 아남은 그것들을 보면서 저도 몰래 한숨을 쉬였다. 그것들은 모두 아남이 즐겨먹는 것이였지만 안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였다. 아남은 주방용품들만 골라내고 먹거리들은 다시 상자속에 집어넣었다. 아버지가 말없이 지켜보는 속에서 아남은 상자를 주방의 선반우에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짐가방을 풀어 개인 물건들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버려도 아깝지 않을 낡은 컵을 하나 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자신의 치솔을 꽂고는 침대아래에 두었다. 품 너른 하얀 런닝을 갈아입고 침대에 음전하게 앉은 아버지는 흡사 고동색의 거죽아래 마른 뼈만 남은 꼭두각시 같았다. 그는 이튿날 새벽 일찌감치 일어나 전기압력밥솥에 아침밥을 지었다. 그 밥솥도 아버지가 가져온 것이였다.
아침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텁텁한 공기를 헤가르며 거실과 주방, 화장실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밥솥이 뿜는 하얀 수증기도 집안의 온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가져온 마른 미역으로 국을 끓이고 엊저녁 먹다 남은 오이를 채 썰어 랭채를 무쳤다. 아버지의 기척소리에 아남은 더 오래 누워있지를 못하고 일어나 세수를 했다. 그러나 안해는 베개밑에 머리를 파묻고 뒤척거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아버지는 식탁우에 밥을 떠놓고 젊은 내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밤잠을 량껏 자지 못한 아남은 그닥 달갑지 않은 얼굴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부지, 먼저 드세요. 저네는 언제 일어날지 몰라요.”하고 아남은 아버지에게 식사를 권했다. 아버지는 아들내외의 반응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랑패를 당한 모습으로 수저를 들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신하면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아남은 되도록 천천히 먹으려고 애를 썼다. 안해가 좀 일찍 일어나 같이 먹어주기를 바래서였다. 안해는 그들 부자가 거의 먹어갈 때에 휙-- 하니 방에서 나오더니 자기를 위해 차려놓은 그릇 앞에 턱 주저앉았다. 그녀는 야들야들한 미역들이 담긴 국물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조금 떠서 맛을 보는 척하다가 덜렁 내려놓고 저가락으로 오이랭채를 집어 깨작거리며 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 밥도 절반이나 공기안에 남겨둔 채 량미간을 찌프리며 일어섰다. 아남은 조바심을 내며 아버지의 표정을 건너보았다. 아버지는 눈을 내리깔고 그만 식탁에서 물러나 그릇을 부시러 주방에 들어갔다.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 않는 늙은이는 설겆이를 하는 내내 채머리를 연신 부들부들 떨었다. 공기와 국사발이 쟁그랑 쟁그랑 부딪치는 소리가 싱크대안으로부터 울려퍼졌다. 아남은 늑장을 부리는 안해 먼저 치솔을 하고 샤쯔를 갈아입었다. 어김없이 더운 날이였고 예나 다름없는 시간에 출근을 해야 했다.
 
아남이 수거하는 쓰레기는 무더위가 지속될수록 더욱 악취를 풍겼다. 마스크는 그 기분 나쁜 냄새를 차단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몇시간동안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온몸에 열이 나서 자신의 입안에서마저 쓰레기와 비슷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잠시 쉬는 사이 아남은 병원 바깥으로 나와 문어귀에 기대섰다. 그곳에서는 썩은 냄새는 덜했지만 열기는 더 심했다. 바로 앞골목에서 공사가 진행중이라 차가 지나가면 뽀얀 흙먼지가 한참씩 연막처럼 일어났다. 매캐한 먼지가 확 덮쳐오는 것을 보면 아남은 다시 마스크를 끼고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쓰레기수거옆으로는 진저리가 나서 다가설 념을 못하고 복도에 있는 걸상에 걸터앉아 유리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공사구간을 피해 빙 에둘러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덤덤했다. 안전모를 쓰고 느릿느릿 벽돌을 나르는 인부들도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얼굴이였다.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면에 걸린듯 수걱수걱 제 할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비밀스런 명령을 받은 것처럼 똑같은 보조로 걸어가고 있었다. 매일마다 보는 광경이였지만 아남은 문뜩 왠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남도 알 수 없었다. 수상해, 뭔가 수상해… 이게 뭐지? 아남은 도무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렸다. 엉뚱하게도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익숙한 화면중에 자신이 빨려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하늘,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온도와 분위기… 아남은 멍해졌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입은 작업복을 내려보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더 압도적으로 들었다. 갑자기 하얀 승용차 한대가 급정거를 했다. 끼익-- 하는 아츠러운 소리가 귀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차를 피해 빙 둘러가면서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틈너머로 작고 날렵한 몸집의 까만 것이 훌쩍 뛰여 도망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남이 이 부근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길고양이였다.
아버지는 벌써 일주일간을 아남의 집에 머물렀다. 결혼식에는 오려고 했지만 운 나쁘게도 려권을 잃어버려서 날자에 맞춰 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근간에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졌다고 하면서 지금 막 하던 일을 사직하고 잠간 쉬였다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안해는 그 말을 듣고 판들거리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흡떴다. “뭐요? 잠간 쉬였다 간다구요? 얼마나 오래?” 아남도 그것이 념려스러웠다. 아버지는 정확한 일자를 짚어 말하지 않았다. “그냥 상황 봐서…” 하고 아버지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자신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그는 덧붙였다. “아직까지 내 앞가림은 할 만한 정도니까.” 하지만 그의 말에는 확신이 들어있지 않았다. 아남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매일같이 장을 보아주었다. 처음에는 아들 내외의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밥까지 지어놓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중국식으로 료리를 볶았지만 좀처럼 며느리의 입맛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안해는 그 슴슴하고도 맛없는 료리를 더이상 먹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아남은 아버지에게 정 원한다면 장만 봐달라고 요청을 했다. 저녁 료리는 안해와 아남 두 사람이 번갈아했고 아침은 아남과 아버지가 번갈아했다.
새벽마다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소리를 죽이고 핸드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봤다. 어떤 날은 안해가 너무 짜증을 부려서 조용히 아침시장에 나가 파 한단을 사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오면서 집안은 더욱 더워졌다. 그러찮아도 비좁은 집안에 어른 한명이 더 불었으니 그 체온만 해도 족히 내실온도의 상승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였다. 아남은 이제 밤일 같은 것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때문에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너무 더워서 사람의 곁에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더 싫어서였다. 안해는 그 상황을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안해의 외모와 지능상태를 보고는(그녀는 사람들한테서 ‘좀 덜 떨어진 녀자’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였지만 그녀는 그 일을 진심으로 즐겨했다. 그녀는 일단 흥분이 되면 창문이 활짝 열려져있다는 것, 그들의 집은 2층 높이 뿐이 안된다는 것, 또는 벽이 얇아 방음이 잘되지 않는다는 것 등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남은 흥분중의 그녀가 가끔 짐승처럼, 말 그대로 본능밖에 모르는 한마리의 짐승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안방문을 활짝 열어놓아 아버지의 기척소리마저 모두 들을 수 있는 환경에서 안해는 그 일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아남에게 화를 냈다. 그녀는 잠옷을 훌떡 벗어버리고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은 알몸으로 아남에게 추근거렸다. 아남은 머리를 외로 꼬고 그녀를 피해 이쪽저쪽으로 옮겨누웠다. 그녀가 가까이 올 때마다 그녀 몸에서 뿜어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아남을 몹시 괴롭혔다. 아남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시원하게 있고 싶을 뿐이였다.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한 안해는 앵돌아져서 두 다리로 아남의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를 마구 차댔다. 아남은 아버지가 이 추잡스런 소리들을 모두 듣고 있을가봐 속을 졸였다.
한나절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침내 안해는 침대 저쪽 모퉁이, 창문밑에서 잤고 아남은 침대 이쪽 변두리끝에서 잤다. 간혹 잠버릇이 나쁜 안해가 이쪽으로 굴러올라치면 아남은 그녀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반쯤 벌린 안해의 입에서도 집안 온도를 높이는데 일조하는 열기가 생산되여 나오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한 집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가까이 올가 두려워하는 아남의 가족들. 이것은 틀림없이 이상한 여름, 기괴한 가족이였다. 밤중에 더위에 지쳐 일어나 혼자 괴괴한 어두운 집안을 둘러보면 아남은 대체 이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한 눈만 껌뻑거렸다. 그런 밤에는 머리속에 넣어두었던 모든 말들을 잊어버렸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한 것 같았다. 아남은 퀭하니 앉아서 죽은듯이 자고 있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오줌을 누러 화장실에 나왔다가는 거실에 멈춰서서 좁다란 간이침대에 누워 푸-- 푸-- 괴로운 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한참 지켜보았다. 어떤 날에는 쏘파에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있는 어머니를 보는 날도 있었다. 그것은 움츠리고 앉아있는 사람의 것 같은 희끄무레한 형상이였다. 아남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어머니란 것을, 그리고 어머니는 그닥 편안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떠나가기 전날, 아남은 출근중에 갑자기 어지럽고 메슥메슥해나서 쓰러질 번했다. 낮 최고기온은 40도에 육박했고 뉴스에서는 앵커들이 매일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 거품을 물고 떠들어댔다. 어느 지역 방송에서는 녀자 앵커가 얇게 썬 삼겹살을 가져다 아스팔트길우에 가지런히 배렬해놓았다. 잠시뒤 카메라화면에는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이 징그럽게 포착되였다. 아남은 여태 한번도 병가를 낸 적이 없었지만 그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 리주임이 집으로 돌려 보냈다. 아남은 물을 조금 마시고 정신을 차린 뒤에 병원을 나왔다. 파란 철판으로 인행보도를 길게 막은 공사구간을 지나 사거리를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인부들은 여전히 상통을 찌그린 채 아무 말없이 스적스적 일을 했다. 도대체 몇달이나 씻지 않았는지 얼굴이며 옷에 먼지와 때가 껍질처럼 붙어있었다. 공사구간을 거의 지나는데 전동자전거 바퀴 앞으로 까만 공 같은 것이 휙 지나갔다. 그것은 파란 철판 뒤쪽으로 숨어들고는 머리를 돌려 아남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눈이 노란 고양이였다. 아남은 점심 쯤에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한창 식탁에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침시장에 가서 조금 사온 것인지 벌건 고추물을 들인 후줄근한 짠지가 작은 비닐봉지속에 담겨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밥과 당신이 한국에서 가져온 순창 고추장이 곽채로 식탁우에 올려있었다. 아버지는 그 시간대에 갑자기 들이닥친 아들을 보고 좀 놀랐다. 큰 일은 아니고 잠간 쉬러 들어왔다는 말에 늙은이는 시름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얘, 미리 말하지. 밥이라도 새로 지어놓게.” 아버지는 서둘러 밥솥을 부시고 거기에 새 쌀을 씻어넣었다. 쾌속모드로는 15분이면 밥이 된다고 아버지가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남네가 퇴근하여 돌아오면 일러주려고 미리 짐을 싸두었다. G시에 있는 당신의 형네 집도 들르고 T시에 있는 누이동생네 집에도 들러보고 나서 한국으로 가련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의 짐가방은 창문아래 간이침대곁에 어머니를 잃은 어린애처럼 오도카니 서있었다. 아남은 그 가방을 보지 않으려고 눈길을 돌렸다. 매일 밤 아버지가 그 침대우에 앉아있는 모습은 “꿔온 보리자루” 그 자체였다.
 아남은 잠간 숨을 돌린 다음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는 급하게 지은 꼬들꼬들한 새 밥을 듬뿍 떠서 아남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료리는 없었다. 부자의 앞에는 꾀죄죄한 김치쪼가리와 고추장 뿐이였다. 아남은 얼굴이 붉어졌다. 오래전의 어느 점심, 새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남의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도시락을 하나하나 열어보던 일이 생각났다. 어린 아남은 입술을 꼭 사려물고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 선생님은 왜 도시락을 열어보려고 하는지 아무리 해도 리해되지 않았다. 도시락 뚜껑이 달그락 달그락 열리고 닫혀지는 소리를 들으며 아남은 숨을 죽였다. 수자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계속하여 머리를 수그린 채 연필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침내 선생님이 말했다. “…이건 김치랑 고추장 뿐이네. 누구야? 누구 도시락이야?…” 아남은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책상우에 엎드렸다. 애들이 킬킬 웃는 소리가 귀가에서 맴돌았다. 당장 그 도시락을 빼앗아 선생님 앞에서 멀리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정수는 한번도 김치와 고추장만을 싸간 적이 없다는 것을 아남은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아남은 살의를 느꼈다. 매일 아남을 ‘머저리’라고 욕하는 정수와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그를 달달 볶는 계모를 향해 시퍼런 칼을 찾아 겨누고 싶었다. “죽여버릴거야!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릴거야!…” 그 녀자는 아버지와 헤여진 뒤에 자궁암을 앓았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며칠간 술을 퍼마시다가 한번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같이 사는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이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었을가. 아버지는 애당초 그 녀자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이 만나 한마디라도 얘기를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평안을 찾으려고 애쓰기도 하니까.
뻐스를 타고 혹간 그 녀자가 사는 아빠트 부근 지역을 지나칠 때면 아남은 자신이 어림짐작한 방향으로 멀리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총총히 서있는 낡은 아빠트들만 보였지만 아남은 더럽고 습한 침대우에 누워있는 그 녀자를 상상했다. 아남은 랭담한 시선으로 생의 마지막 한때를 보내고 있는 그 추한 녀자를, 그녀가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을 쏘아보았다. 상상 속에서 아남은 계모가 참회를 하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아남아, 제발 나를 용서해다오. 나의 이 죽을병이 너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러니 제발 나를 그만 놓아다오. 그저 편히 갈 수라도 있게 해주렴…”
그 녀자의 뺨은 움푹 꺼졌고 눈은 빛을 잃었으며 갈쿠리 같은 손가락은 말라서 뼈밖에 남지 않았다. 매번 아남은 그녀가 힘없이 손을 내려뜨리며 숨을 거둘 때까지 꼼짝 않고 처음 자세 그대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후에야 아남은 온몸 가득 팽팽하니 품고 있었던 살기를 풀었다. 아남은 자신이 마침내 ‘살인자’가 되였다는 것을 알았다.
시장에서 사온 김치는 시고도 들큼했다. 고추장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들 부자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실로 오랜만에 두 사람만 먹는 밥이였다. 밥을 다 먹고 그들은 랭수를 컵에 따라 마셨다. 뭔가 대단히 어려운 미션 하나를 완수한듯한 만족스러움이 희미하게 아버지의 얼굴을 비껴갔다. 그는 그저 운이 없고 불행하며 무능한 사나이였다. 게다가 이제는 사나이라고도 할 수 없는 늙은이였다. 안됐지만 바로 이 사람이 아남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가. 아남은 아버지에게 며칠 더 놀다 가라는 따위의 만류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남의 집에서도, 큰아버지와 작은 고모의 집에서도 모두 짐덩어리일 뿐인 것이였다. 아버지는 다시 한국으로 갈 것이였고 괜찮은 일자리를 찾으면 한동안은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이 몹시 나빠질 수 있는 상황이 오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였다. 거기에 관해 아남이 지금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남에게 가만히 통장 하나를 보여주었다. 언젠가는 그 통장을 물려줄 것이라며 연필로 노트에 비밀번호를 적어주었다. 통장 속의 수자들은 바로 아버지의 삶을 악착같이 보슬보슬 갉아낸 인생의 부스레기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 수자들은 얼마간 남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그 다음날 새벽에 기차역으로 떠나갔다. 그는 전처럼 압력밥솥에 쌀을 씻어 안쳐놓고 김이 씩씩 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활짝 열려있는 안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남은 저만치 널부러져 자고 있는 안해에게 홑이불을 덮어주며 일어났다. “왜 이렇게 빨리 가세요? 표는 샀어요? ” 아남이 묻자 아버지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응, 어제 오후에 역전에 가서 미리 샀지. 아침 일찍 서둘러야 오후 나절에 들어가니까.” 아버지는 연신 채머리를 떨었다. 그럼 밥이라도 먹고 갈 것이지 빈속에 시장하지 않겠냐는 말에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역전에 가서 계란전병 같은 거 사먹을란다. 그런 걱정을랑 하지 말아.” 아남은 급히 정장바지를 꿰입고 전날 씻어 다려놓은 하얀 샤쯔를 걸쳤다. 대충 물을 묻혀 얼굴을 닦고 나서 아버지를 따라 현관을 나섰다. 아버지는 벌써 짐가방을 들고 뒤뚱뒤뚱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남은 문을 닫고 뛰여내려가 아버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들었다. 가방은 바싹 줄어든 아버지의 몸무게처럼 갑삭했다. 이른아침의 거리는 한산했다. 아버지는 종종걸음으로 어제 당신이 탔던 뻐스역을 찾아 앞장서 걸어갔다.
그들은 뻐스역에서 초조해하며 첫차를 기다렸다. “아부지,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다시 우리 집에 오세요…” 하고 아남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검버섯 같은 반점이 피부 군데군데에 돋아난 늙은이는 부시럭거리며 가방에서 잔전을 찾아 손안에 쥐였다. “응, 괜찮다. 너나 잘 살아라.” 뻐스가 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기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와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놨다.” 아버지는 뻐스에 올라가면서 아남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차창을 사이에 두고 멀거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뻐스는 떠나가면서 검은 매연을 아남의 하얀 샤쯔에 한가득 뱉어주었다.
아남은 집에 돌아왔지만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꼼꼼히 세수를 다시 한 다음 그대로 출근길에 나섰다. 전보다 좀 일찍한 출근이였다. 웬일인지 여느때보다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았다. 아남은 자전거를 천천히 몰았다. 바퀴살이 사르르 돌아가는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다시 불덩이 같은 해가 떠오르면서 아남의 등줄기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 기괴한 여름이 언제든 끝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란 철판을 길게 둘러놓은 공사구간이 저만치 보일 때 아남은 가쁜 숨을 헉헉 들이켰다. 아남은 아침부터 꾸뻑꾸뻑 일하고 있는 인부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초점 없는 눈으로 아남을 퀭하니 쳐다보았다.
갑자기 아남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파란 철판들이 활활 타고 있는 불길에 싸여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는 그대로였고 멀지 않은 곳의 병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파란 철판으로 둘러싸인 공사장은 이미 불타는 감옥으로 되여있었다. 시간이 찰나 아남에게서 사라진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검은 그림자처럼 불길속에 서있었다. 아남에게 익숙한 얼굴들도 여럿 보이고 있었다. 아남은 그들을 알아보았지만 다음 순간 바로 누구였던지 잊어버렸다. 좀더 오래 기억속에 남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들은 서로 마주친 눈빛에서 생전에 아버지와 아들로 맺어졌던 인연을 기억해냈다. 불길은 자꾸 밖으로 퍼져 어느새 아남과 아남의 자전거까지 삼켜버렸다. 질식할 만큼 더웠다. 아버지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러나 힘들기는 아남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불길속에 말라가느라 서로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런 도움이 돼줄수가 없었다. 사람들속에는 계모의 얼굴도 잠간 보였다.
아남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자전거에서 내렸다. 까만 길고양이가 아츠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자전거 앞으로 뛰여들었다. 아남은 자전거핸들을 부여잡은 채 땅우에 넘어졌다. 하늘과 땅과 불길과 사람들의 그림자가 빙빙 눈앞에서 소용돌이쳤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아남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가 지금 이 세상 현실인지, 아니면 꿈속 음부인지 아남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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