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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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바람구멍-금희
2019년 07월 18일 09시 21분  조회:301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금희  
바람구멍
 
 
며칠동안의 고민 끝에 수한씨는 A시로 자리를 옮겼다. 그럴 만한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였다. 중학교를 나온 뒤 잠간 머물며 일을 했던 곳이였고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는 동창 서넛이 살고 있다는 도시일 뿐이였다.
A시의 역전은 붐볐다. 땀에 삭은 티셔츠를 입은 수한씨의 행색은 람루했다. 누르끼레한 머리카락은 귀를 덮었고 해볕에 그을린 피부는 놋쇠같이 어두웠으며 끼니를 등한히 챙겨먹인 몸은 바싹 말라있었다. 역을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내뻐스를 타고 수한씨는 무작정 H구역으로 왔다. 뻐스로선지도를 보고 대충 중간 쯤이라 싶은 곳에서 내린 것이였다.
수한씨가 내린 지역은 이 도시에서 번화한 곳에 속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구석진 곳도 아니였다. 2차선대로가 쭉 뻗어나간 길옆으로 큰 식당이며 높은 상가들이 번듯하니 줄서있었고 좀더 안쪽 좁은 길로는 여러 레벨의 아빠트단지들이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수한씨는 베낭을 메고 끌신을 탈탈 끌며 채색 타일이 깔린 인행보도를 걸어갔다. 뻐스정류장이나 전보대, 슈퍼의 유리창 혹은 아빠트의 바람벽에 붙여진 세방광고들을 까근하게 훑어보면서. 아직 해는 중천에서 얼마 더 기울지 않았다. 운만 좋으면 저녁내로 고만고만한 세방 하나 쯤은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저녁밥을 먹기전까지 수한씨는 스무통이 넘는 전화를 했다. 광고지중의 어떤 번호는 이미 없어진 전화번호였다. 서너번의 통화에서는 세방이 다 나갔다는 소식만 전해들었다. 직접 가본 경우는 세번이였다. 첫번째 집은 꽤 멀끔한 아빠트단지의 3층에 있었다. 새 아빠트는 아니였고 관리사무소도 눈에 띄우지는 않았지만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이 반반한데다가 복도에 쓰레기도 없었다. 수한씨는 그곳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세집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드러난 늙은 남자는 팔짱을 끼고 눈망울을 희번득이며 마뜩찮은 표정으로 수한씨를 참빗질해보았다. “우리 집에는 세방이 두갠데, 지금 있는 청년은 꽤 체면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네, 자네는… 아무래도 다른 데 가서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뭔 말인지 알아먹겠지?” 그 사람은 수한씨를 월세도 내기 힘든 빈민가의 막로동자나 소위 ‘농민공’으로 취급하는게 틀림없었다. 남자가 말해준 ‘체면 있는 직장에 다닌다는 청년’을 수한씨도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잉크색 넥타이에 브랜드가 의심스러운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젊은 남자는 두고 간 서류를 찾으러 왔는지 옆구리에 누런 봉투를 끼고 총총히 그들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총총히 계단으로 내려가버렸다. 십중팔구 그런 인간은 부동산 중개소의 직원일 것이였다. 진짜 엘리트들이 하고 다니는 것보다 명찰의 줄부터가 허름해보였으니까.
두번째 세방주인은 현관문을 빠끔히 열고 얼굴만 내밀었다. 깨끗이 소제된 문앞에는 빨간색의 네모난 융단이 깔려있었고 그 곁에는 림시로 신발을 올려두는 간이 신발장까지 비치된 집이였다. 잠옷 바람에 머리띠를 두른 채 화장기 없는 얼굴을 내민 녀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방을 찾는다구요? … 근데 우리 집은 녀자들만 들인답니다. 딴데 가서 알아보시죠.” 아무래도 그 녀자는 수한씨의 개인청결상태가 께름직했던 것일 것이였다. 녀자가 둔중한 방범철문을 쾅 닫아버리자 수한씨도 그 집의 알른알른한 복도 앞에다 찍 침을 뱉어버렸다. “뭐? 녀자만 들인다구? 통화할 때는 남자인 줄 몰라서 오라 했을까? 누구를 아주 거지 취급하네, 썩은 무우처럼 재미없게 생긴 녀편네 같으니라구…”
수한씨는 눈높이를 더 낮추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세방은 금방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길고 긴 여름해가 북방도시의 저편 너머로 다 기울어가고 나서도 한식경이 지나서야 수한씨는 세번째 세방으로 들어가볼 수 있게 되였다. 외벽은 오랜 시간 바람을 맞고 비물에 씻기면서 애초의 모습을 련상하기 어려웠으며 창틀마다 진득한 기름때와 녹쓴 자국이 훤히 보이는 아빠트단지였다. 얼마되지 않는 잔디밭은 뙈기뙈기의 파밭 혹은 배추밭으로 란도질되여있었고 그 가운데를 질러가는 오솔길 돌판 사이로는 무릎까지 치고 올라오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낡은 아빠트단지에는 쓰레기통이 비치돼있지 않아 골목귀퉁이에 야트막이 쌓인 세멘트담 안으로 갖가지 오물봉지들이 진물 흐르는 주검처럼 악취를 풍기며 쌓여있었다. 먹다 남은 수박껍질, 빈 음류수통, 주방 씽크대에서 건져낸 음식물 쓰레기, 말라죽은 화분식물 따위와 택배포장박스… 가장 꼴불견인 것으로는 갈색 혈흔마저 알아볼 수 있는, 생리대가 삐죽이 튀여나온 화장실 쓰레기였다. 그야말로 온갖 것을 집어삼킨 상어의 위속마냥 지리멸렬한 풍경이였다.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한번씩 나면 쓰레기더미 우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파리들이 윙― 징그럽게 날아올랐다.
세방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수한씨는 아빠트아래 대문앞 공지에 베낭을 벗어놓고 그 우에 앉아 다리쉼을 하면서 그런 쓰레기를 버렸을 인간들을 생각했다. 추잡한 인간일수록 버리는 쓰레기도 지저분한 법, 여기 이곳 인간들하고는 대체 얼마만큼 같이 지낼 수 있을가? 북방도시가 남방도시보다 청결치 못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더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수한씨는 내심 바랐다.
세방주인은 허리가 곱은 늙은 할망구였다. 그녀는 큰길 건너편의 마트 앞 광장에서 춤구경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였다. 광장무의 음악에 한창 빠져있을 때였던지 로인네는 수한씨의 전화를 티나게 귀찮아했다. “뭐라? 누기? 세방? 세방을 보겠단 말이여? 그러니까, 울 집에 세들어 살고 싶다 이 말이제?…” 요란한 노래소리가 들리는 속에서 로인네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몇번이나 확인을 했다.
수한씨는 한 손으로 하루살이떼들을 홰홰 쳐내면서 걸어오는 할망구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할망구는 베낭 우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수한씨를 본체만체 지나쳐버렸다. “에그 에그 허리야, 다리야, 늙으면 거저 죽어야제…” 수한씨는 할망구가 자신의 앞을 그대로 지나쳐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할망구의 모습이 사라진 컴컴한 계단입구 쪽에서 삐리리 전화벨소리가 심상찮게 울려퍼졌다. “여보세요? 네, 저 아까 전에 전화한… 네, 그 세방 보려고 온 사람인데요…” 수한씨는 베낭을 둘러메고 할망구의 뒤를 쫓아 헐씨근 올라갔다. 로인네는 겨우 2층까지 오르고는 헐떡헐떡 숨을 톺으며 멈춰섰다. “에그 에그, 요 다리만 덜 아프면 딱 살 것 같두만…”
할망구의 집에는 세를 놓는 방이 세개였다. 원체 크지 않은 두칸짜리 집이였는데 거실 한구석을 합판으로 막아 방 하나를 더 만들어서 세를 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거실이였고 왼편에는 주방, 그 너머에 방 하나, 맞은켠에는 화장실, 오른편에 방 두개(거실의 간이방까지)가 나란히 있었다. 좁고 습기찬 주방에는 잡동사니 가득 쌓여있어서 발 들여놓을 곳조차 마땅치 않았는데, 식탁 놓는 자리에는 간소한 상 하나와 각양각색 거죽의 이불들과 보따리들이 무져있는 침대 하나가 있었다. 상 우에는 반쯤 마른 삶은 옥수수토막, 말라붙은 요구르트병, 바퀴 떨어져나간 장난감 자동차…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얹어져있었고 누더기 보를 편 침대 우에는 등과 목이 훤히 드러난 런닝에 삼각팬티만 입은 아이가 아이패드로 만화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이는 흥분된듯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발딱 일어나 침대에서 뛰여내렸다. 그 참에 아이 엉덩이에 깔려있던 기름기 묻은 얇다란 비닐봉지가 함께 나풀나풀 날려 내렸다.
그렇게 수한씨는 A시에서의 첫 세방을 잡았던 것이였다. 수한씨의 방은 거실을 합판으로 막아 만든, 바로 그 ‘잉여’의 방이였다. 문을 달아줄 여력까지는 없었던지 그 방의 출입구는 기다랗게 드리운 꽃천으로 대체했다. 물론 방안의 가구 또한 매우 간소했다. 철제 1인용 침대 하나, 버려진 옷장 같은데서 떨어져 나온 듯한 상자 겸 밥상(또는 상), 그리고 강렬한 해볕에 색이 다 날아버린, 좀만 무거운 짐을 얹으면 폴싹 바스러질 것 같은 플라스틱 수납장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수한씨는 베낭을 멘 채 그 방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18년 동안의 떠돌이 생활 중 이보다 못한 방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옛날 얘기였고, 근년에 살던 방들은 거개가 이보다는 넓고 깨끗하고 조건이 좋았다. 꽃천 뒤에서 할망구의 탁한 목소리가 세입자에 대한 경멸의 어투로, 하지만 사실은 애원의 감정이 섞인 것인지도 모르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세는 다른 방보다 30원이 싸야, 이만큼 싼 방은 근처에 눈 씻고 봐도 없제. 집도 절도 없는 놈이니께 눕고 일어날 자리만 있으면 됭거 아닌겨?” 할망구는 아이가 앉았던 침대에 올라가서 그 주위를 한바퀴 빙 두를 수 있는 카텐을 죽 잡아당기고는 그 뒤에 누웠다. 샤와는 가능하지만 자주 할 경우(일주일에 세번 정도) 추가비용을 들여야 하며 밥은 일절 해먹을 수 없다고 할망구는 쐐기를 박았다.
친절한 주인은 결코 아니였다. 그래도 최악은 아닌상 싶었다. 일단 쉬고, 일자리부터 찾고 나서 보리라고 수한씨는 생각했다. 어찌됐든 오늘 밤 잘 자리는 생겼군 그래 라는 생각이 드는 다음 순간, 무지막지한 피곤이 수한씨를 향해 성난 곰처럼 사납게 덮쳐왔다. 수한씨는 베낭을 벗어 침대 밑에 쑤셔넣은 뒤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수한씨는 깊은 잠 속에 빠져 이튿날 점심까지 내처 잤다. 다른 세입자들은 모두 출근 나가고 아이는 동네 유치원으로 가고 늙은 할망구는 불안한 손길로 수한씨의 꽃천을 여러번 가만히 펼쳐들었다 놓았다.
 
어두웠다. 느낌이란 것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였는지, 의식이란 것이, 자아라는 존재가 어떻게 태여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에 그 어두움은 고요했다. 아니, 사실은 그 자체가 들리지 않는 아우성이였을지도 모른다. 기억도 없었고 느껴지는 것도 없고,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이 영원히 공허한 우주 속에 부유하고 있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잠 자는 것도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그 상태를 삶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뭔가 고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이 있다는 것을, 그 주변이 크고, 더 크고, 무한히 크다는 것을, 그 속에는 무엇인가 존재하고, 또 존재하고,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것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매우 혼란스럽게 관계하고 있는 듯했는데 사실은 오히려 상상초월할 정도로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끼리의 일이였다. 그것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돼여 서로 관계하게 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아무도 관계 속에 초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로움에는 소외감이 덧씌워졌다. 누군가 공들여 써놓은 씨나리오 속에 원체 존재하지도 않았던 캐릭터로 덜컥 등장을 해버린 것 같았다. 이건 무엇인가? 어떻게 발생한 일인가? 의문은 메아리쳐서 우주 끝까지 퍼져나갈 뿐이였다. 시초의 기억은 아무리 해도 복구할 수 없었고 고독을 느낀 뒤로부터 불가사의하게도 초읽기의 시간이 저절로 가동되였다. 당혹스러웠고 불안하고 두려웠다.
자꾸자꾸 란할이 되더니 그다음에는 더 복잡하고 더 커졌다. 안과 밖이 생기고 우와 아래가 구분되였다. 많은 칸들이 생겨나고 그 칸들 하나하나에 각기 다른 것으로 채워져갔다. 그것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꾸준히 분렬되였으며 스스로 제 령역을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그것들은 최초의 순간에 느낀 그 무한한 것을, 무수히 많은 것들을 정교하게 다루고 있는 그 공허한 것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그것들을 통해 소리도 듣고 빛도 느끼고 양분과 그렇지 않은 것을 흡수하거나 내뱉기도 했다. 그런 방식으로 주변을 의식하는 일은 매우 미련하고 서툴고 느리며 불완전한 것이였다. 그에 비해 시초도 알 수 없고 의지를 마음대로 온전히 조종할 수도 없는 자아는, 그럼에도 그런 한심한 방식보다는 훨씬 빠르고 정확하며 통찰력 있게 주변의 인격을 인식할 수 있었다.
심장이 뛰고 뇌세포가 늘며 간과 콩팥이며 위와 장과 혈관들이 생겨났다. 온 몸에 솜털이 덮이고 손톱과 발톱이 자라나고 발차기를 할 수도, 손가락을 빨 수도,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게 되였다. 이젠 밤이구나, 낮이구나, 이건 엄마 목소리, 좋은 음악이로구나… 기관은 더욱 세밀해졌고 느낌은 더욱 섬세해졌다.
38개의 주일, 266번의 저녁, 6384시간이 지나갔을 즈음 자아는 이제 제법 사람모양의 육체를 갖추게 되였다. 양수중에 표류하고 있어서 공기를 직접 들이마실 수 있는 페만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종일 꾸르륵꾸르륵 장이 움직이는 소리, 졸졸졸 쿨쿨쿨 혈액이 흐르는 소리, 씨익쌔액 공기가 페를 거쳐 드나드는 소리, 쿵쾅쿵쾅 심장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소리,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 차소리와 청소기 소리를 들었다.
육체가 거하는 공간은 좁아져서 돌아누울 틈도 많지 않았다. 육체는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과 련결된, 자신의 숙주이자 그를 품고 있는 모체에게 명령에 가까운 신호를 보냈다. 모체의 육체도 같이 반응하도록, 그가 탈출할 수 있는 길과 타이밍을 만들 수 있도록, 그가 독립되여 분리된 다음에도 당분간 그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양분의 생성을 위해 준비하도록. 그동안 자아가 인식한 대로라면 모체를 완전히 신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 일은 모체 말고 다른 어느 개체에게도 명령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자아는 물끄러미 육체의 바쁜 움직임을 주시했다. 바깥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위험하며 각처에 추악과 잔혹이 도사리고 있는지 자아는 알고 있었다. 나와봤자야 더 좋을 것도, 더 나쁠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육체는 웅크리고 앉아서 잠시 동작을 멈췄다. 자아가 의식하고 있는 것을 육체도 느꼈던 모양이였다. 그러다가 그는 울분을 토하듯 폭발적인 힘을 일으켜 몸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읽기의 시간처럼 한번 분렬이 시작되고 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앞으로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였다. 육체는 사방이 죄여드는 캄캄한 통로로 접어들어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혼신의 에너지를 깡그리 쏟아부었다. 죽음과 삶이 엇갈아 육체를 압박했다. 육체를 돕기 위해 자아는 죽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 대소천문 (대천문과 소천문: 신생아의 이마와 정수리 사이 뼈 없이 마름모꼴의 물렁한 부위. 세모꼴 모양의 뒤 숨구멍)을 닫아주었다. 곧바로 자아에게도 흑암이 잠시 찾아왔다. 한번도 분리되여본 적 없던 육체와의 소통이 찰나에 끊겨버린 것이였다.
자아는 무수한 개체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거대한 뇌속 회로 같은 세상 속으로 육체가 기어이 미끄덩 나오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죽음을 통과한 육체가 억울함도 희열도 아닌 목소리로 으앙― 첫 울음을 바스러지게 터뜨리며 첫번째 페호흡을 시행하는 것을 보고 자아는 침묵했다. 이제 단순 무식하던 육체는 나날이 소위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겠지만 자아의 힘은 현저히 약해갈 것이였다. 어쩌면 그 것은 이미 프로그래밍 된 시초의 설계, 그들의 숙명이였을지도 모른다.  
 
수한씨는 검색 끝에 세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인력시장 위치를 알아냈다. 회사이름을 붙인 손잡이 달린 패말을 들고 있거나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책상에 마주 앉거나, 혹은 A4용지에 굵은 매직펜으로 몇글자 적어들고 서있는 사람들 속에 수한씨도 련 며칠을 함께 있었다. 오전 열시경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정오가 되면 가장 붐볐다. 오후에는 북적거리던 인파가 많이 빠져나가고 세시 쯤부터는 오가는 이 얼마 없이 한산해지는 것이였다. 수한씨는 그곳에 나온 회사들을 일일이 둘러보았다. 거개가 대졸을 원했고 최소한 고졸을 받으려고 했다. 그들은 수한씨의 행색을 보고 나선 말조차 섞기 싫어했다. 그렇다고 식당이나 좀 규모있는 점포의 청소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그들도 수한씨를 고려해볼 만한 대상 안에 넣지 않았지만) 택배 배달원이나 메이퇀(美团)배달 따위를 해볼가도 잠시 생각했지만 종일 전동 오토바이를 운전해야 되는 일이라 안전상 위험했다. 아니, 사실은 방향감각이 치명적으로 약한 수한씨에게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였다. 아무런 학력도 기술도 필요치 않는 건축현장의 운반공 같은 일은 더욱 할 수 없었다. 그런 노가다를 하기에 수한씨는 너무 허약했으니까.   
남방도시에서 하던 것처럼 공장 직원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A시에는 공장이 그렇게 많지 않은 탓으로 구인광고가 희소했다. 운전면허증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곳에 와서 기사를 찾는 이는 드물었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도록 아무 진전이 없다가 드디여 수한씨는 마루자재 도매업자를 만나게 된 것이였다. A시에서 규모 있는 인테리시장에 가게들을 여럿 가지고 있는 오십대 초반의 중년 남자였다. 수십종의 마루자재들을 분별하고 정확하게 수자를 세며, 예매된 물건들을 단골집에 배송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남자는 수한씨를 맘에 꼭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사정이 긴박한지 당장이라도 가게에 같이 가봤으면 했다.  
A시에서의 첫 직장은 그렇게 정해졌다. 일은 쉽지 않았지만 너무 어려운 것도 힘이 드는 것도 아니였다. 마루자재는 벽돌보다 가벼웠고 종일 메고 날라야 하는 것도 아니였다. 창고에 쌓인 수십종의 자재들을 분간하는 것, 그리고 배송해주어야 할 단골가게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창고와 가게마다 녀자 직원들이 한명씩 앉아 상담업무를 맡고 있었고 트럭을 운전하는 기사 두명과 그보다 작은 전동차로 배송하는 직원이 셋 있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잔심부름에 가끔 전동차로 배송을 돕기도 하는 직원이 한명 더 있었다. 일거리가 적은 날에는 이미 있던 직원들로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좀만 일거리가 많아지는 날에는 일손이 현저히 부족했다. 수한씨의 일이 바로 그런 것이였다. 그중 일거리가 가장 많은 가게에 출근하면서 잡일들을 돕기도 하고 가끔 배송도 하다가 다른 가게에 빠지는 일손이 있다거나 갑자기 일거리가 많아지면 바로 그쪽으로 차용되여야 하는 립장이였다. 여느 사장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그 중년남자도 수한씨가 웬만큼 눈치 빠르고 엉덩이 가볍고 쾌활한 성격에다가 성실했으면 하기까지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남자의 바람일 뿐이였다. 수한씨가 아니라 그 전의 어느 한 직원도 남자의 바람을 만족시켜 본 일은 없었다. “그니께 거저 제 모에 띄운 일만 잘 허고, 사람이 너무 얌체짓 말고 성실하기만 한다면야 난 만족이요.”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매일 아침 수한씨는 6시반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가서 아침밥을 사먹은 다음 뻐스를 타고 가게로 출근했다. 다른 세방살이 남자들은 그보다 늦은 시간에 기상을 했다. 농촌에서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나어린 애들이였는데 전에는 둘이 같은 식당으로 출근했던 모양이였다. 그들하고는 부딪치는 일이 많이 없었다. 그들이 퇴근하여 돌아오는 시간이면 수한씨는 이미 자리에 누워있었다. 머리카락을 바짝 밀어버려 거의 대머리 수준의 아이는 집에 한 사람이 더 늘어난 것이 좋은 모양이였다. 수한씨가 화장실에서 벌컥벌컥 발을 씻거나 침대 우에 누워 핸드폰으로 뉴스를 볼 때 아이는 가끔 장난기어린 눈으로 수한씨를 가만히 훔쳐보다가 도망가군 했다. 아이의 부모는 리혼을 한건지 돈 벌러 외지에 나간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나 늙은 할망구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도 없었다. 할망구는 매일매일 자신의 허리와 다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세개의 세방 요금을 받아 근근득식 살아가고 있었다.
할망구의 집으로 자주 마실 오는 친구 할머니가 있었는데 언제 봐도 친절한 미소를 가득 띄운 얼굴이였다. 그 할머니의 표정은 수한씨의 주인 할망구와 너무 대조되였다. 둘 사이의 대화도 아주 웃겼다. “오늘 오전 큰길 앞 마트에서 오이를 1원 50전에 팔더라구…” 하고 친구 할머니가 먼저 운을 떼면 주인집 할망구는 찌뿌둥한 얼굴로 “뭬야? 1원 50전이라구? 어디서 시들시들 말라빠진 팔아먹다 나머지 치가 아닝가?” 하고 답을 했다. 친구 할머니가 그렇지 않다고, 본인이 가서 샀는데 좀 자름하고 약할 뿐이지 먹을 만은 하더라고 해명을 하면 주인집 할망구는 전날까지 비싸게 팔아먹다가 갑자기 20전을 내려서 파는 마트의 직원들을 욕했다. 한번 욕설이 터지면 끊임없는 불평이 그 뒤를 이었다. 비닐봉지 하나를 더 주라 했는데 못들은 척한다느니 그 뜨거운 해빛 아래서 로인네가 문 열기를 기다리는 걸 보면서도 5분 쯤 먼저 열어주지 않는다느니 접때의 휴지는 포장만 뜯었을 뿐 한장도 쓰지 않았는데 물러주지 않았다느니 하는 따위의 비난이였다. 어떤 것은 억지라는 것을 할망구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언짢아진 주된 원인은 그저 전날에 이미 오이를 1원 70전에 사버렸다는 사실 때문이였다.
매사가 항상 그런 식이였다. 친구의 어떤 화제도 할망구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고 할망구의 어떤 불평도 친구 할머니 얼굴의 미소를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매일같이 만나 그 코미디 장면들을 시리즈로 연출하군 했다. 친구분은 참 여유 있게 행복하게 사시는가 봐요, 하고 수한씨가 할망구에게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는데 할망구는 그 말에 채머리를 달달 떨었다. “여유는 개뿔?” 할망구는 수한씨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픽 랭소하며 돌아섰다.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거나, 현재 일하고 있는 가게에서 짤리게 되면 수한씨는 곧 세방을 옮길지도 몰랐다.
출근을 시작한 첫날부터 수한씨는 직원들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였다. 직원들은 거개가 돈도 절약하고 시간도 아낄 겸 해서 점심 도시락을 싸왔는데 수한씨는 당연히 준비하지 못했다. 가게마다 돌면서 장부를 관리하는 사장 부인이 ‘특허’를 내려, 수한씨는 부근의 식당가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오도록 지시를 받게 되였는데 그만 방향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두시간이나 지체해버렸다. 직원들이 대충 가리켜준 방향으로 가다가 마라탕집을 만나고 란주국수집을 지나고 물만두집과 햄버거가게를 지나쳐서 계속 우로 우로, 그담엔 맘에 드는 가게가 없어서 좌로 좌로, 그러다가 다시 우로 우로 돌다보니 마침내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였다. 딤섬이며 죽을 파는 집에 들어가 점심은 먹었다만 다시 돌아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돌아가면 모두들 언짢아하겠구나, 하고 수한씨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서른다섯이나 먹은 사내가 방향을 잃어버려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가. 과연 가게에서는 갑자기 ‘실종’된 수한씨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이였다. 사장 부인은 억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고 상담 녀직원 왕군은 그게 아니겠지 하는 눈초리로 수한씨를 곁눈질해보았다. 기사 정씨의 얼굴에서는 빙글빙글 미소가 돌고 있었고 가장 년장자인 김씨는 못들은 척 자기 일만 했다. 첫날의 실수는 그쯤해서 넘어가주기로 했다.
련이은 두날은 최선을 다해 심부름을 하고 배송도 다녀왔다. 아직 자재를 정확히 분간하기까지는 믿음직스럽지 못해 왕군이나 김씨가 물건을 찾아주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단골집이라 배송도 어렵지 않았다. 전동차가 가벼워서 굽이를 틀 때마다 살짝 위험해질 번한 적도 있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하게 일을 마쳤다. 점심은 김씨가 가리켜준 대로 국수집에 배달을 시켜 창고문턱에 걸터앉아 먹었다. 면은 붇고 육수는 짜고 조미료 냄새가 심해서 아주 맘에 들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쪽걸상이며 포개놓은 벽돌장, 파손된 마루자재 우에 앉아 제마끔 도시락을 퍼먹었다. 점심 뒤에는 각자 자신이 가져온 차물로 입가심을 했다. 그들은 몇가지 화제를 놓고 심심풀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담배 한대씩 피우기도 했다. 그들 사이의 동료애도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다는 것을 수한씨는 느꼈다. 가정마다 어려운 문제들이 있고 지금 이 직업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힘들게 사는 이들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기를 원하는 법, 그래서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주의력을 수한씨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였다. 수한씨는 그들 중의 약한 고리, 모두들 그의 앞에서 고참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하는 기색이 력력했다. 다행히 사장이 들려 서 큰 실수가 없었는지만을 묻고 갔다.
그러나 그 다음 다음날 아침 수한씨는 늦잠을 잤다. 흐린 날이였고 련 며칠동안의 육체로동 때문에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오전 열시가 넘어 겨우 눈을 뜬 것은 배가 아파서였다. 몇년동안 잠잠하던 장염이 또 도진 것이였다. 일어나기 바쁘게 설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가 나왔다. 하늘은 찌뿌둥한 채 멈출 기미도 없이 면면한 비줄기를 드리우고 있었고 수한씨는 위속의 액까지 게워버려 기진맥진했다. 이렇게 늦은 마당에 전화를 해서 아프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겠지, 하고 수한씨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수한씨는 사장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솔직하게 말했다. 아침 하늘이 흐려서 늦잠을 잤는데, 일어나고 보니 설사와 토가 나오더라, 아무래도 수년동안 잠잠하던 장염이 도진 것 같다, 이 상태로 일 나가기는 힘들고 우선 병원에 가봐야겠다, 오늘 하루 일단 병가를 맡겠다… 라고. 전화기 저쪽에서 한참 대답이 없었다. 한심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이 전달되였다. 주인집 할망구보다는 쪼끔 더 친절한 사장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수한씨, 이제 정식 출근하기로 했고, 다른 직원들 눈도 있는데 하늘이 흐려서 늦잠 잤다는건 말이 안돼요. 일어나기가 피곤하면 알람을 해놓고 자세요. 오늘은 몸이 그렇게 아프다니 일단 병원에 가보고, 결과는 다시 얘기해주세요.” 그 녀자는 지금 많이 참고 있다는, 본인으로서 할 도리는 하고 있다는 억양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 때 곁들이는 표정이니까.
그날 수한씨는 병원에 갔다. 사장 부인은 그가 세방 근처의 작은 진료소에 들려서 빨리 처방을 받고 오후에라도 가게에 나오기를 원했지만 수한씨는 작은 진료소 따위를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비교적 가까운 큰 병원을 찾아갔다. A시에서 내노라 하는 큰 병원중의 하나였는데 진찰실마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게 하도록 많았다. 의료시설이 빈약한 교구나 농촌에서 올라온 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벌써 시간이 많이 늦어 오전중으로는 절대 의사를 만날 수 없었고 또 큰 병원인 만큼 혈액검사니 대변검사니 하다 보면 오후 퇴근하기까지도 처방을 받을 수 있을가 하는 것이 의심되였다. 게다가 그 몇시간동안을 약도 먹지 못하고 정신력으로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비인간적으로 생각되였다.
결국 수한씨는 사장 부인의 말대로 아빠트구역의 보건소에 가보았다. 예상대로 장염이였고 먹는 약과 더불어 링게르 하나를 꽂아주었다. 그날의 치료가 끝난 다음 의사가 그랬다. 그리 심한 장염이 아니라서 래일부터는 약만 먹어도 괜찮다고, 음식을 조심하고 될수록이면 한 닷새 푹 쉬는 것이 좋다고. 수한씨는 의사의 진단과 조언을 그대로 사장 부인에게 전했다. 뻐스를 타고 세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울다가 잠이 든 아이처럼 하늘은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울먹거리고 있는 중이였다.
“그래, 병원에서는 뭐라 하던가요? 주사는 맞았나요?” 녀자가 물었다.
성실한 수한씨가 전달한 의사의 조언을 듣고(한 닷새 푹 쉬는 게 좋다는) 녀자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였다. “수한씨…”하고 녀자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정도면 진짜 꽤 착한 녀자였다. 수한씨는 전화를 들고 가만히 서서 녀자가 말을 이어주기를 기다렸다. 조금 지나 용기를 내여 녀자가 계속했다. “수한씨, 일단 오늘은 나오지 말고 집에 들어가 푹 쉬여요. 약 드시고, 죽 같은 거 사 드시고, 찬물은 피하시고… 그래요, 수한씨, 래일 다시 봅시다.” 전화를 끊고 나서 수한씨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였다. 바위 같은 짐이라도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 녀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였다. 그 녀자는 수한씨와의 대화를 아주 힘에 겨워하곤 했으니까.
그 다음날 수한씨는 출근시간 한시간 뒤에 가게에 도착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속은 한결 편했다. 의사 말대로 심한 장염은 아니였던 모양이였다. 토도 나오지 않았고 좁쌀죽이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수한씨는 사장 부인의 전화를 생각하면서 가게에 나갔다. 녀자는 수한씨를 보고 의외라는듯이 웃었다. 꽤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잘 나왔어요, 수한씨! 내 맘 같아서는 하루 이틀 쉬라고 하고 싶지만, 여기도 엄연히 직장이고, 일도 많고, 또 다른 직원들 눈도 있으니까…” 녀자는 점심시간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앉아있는 수한씨에게 살짝 말했다.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된다는듯이. 녀자는 꽤 괜찮은 사람이였지만 역시 그 것을 이미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한씨는 해쓱한 얼굴로 그저 핏 웃어보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면서 수한씨와 사장 부인이 걱정하던 ‘직원들’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갔다. 그전에는 다른 직종에 있어서 몰랐는데, 이 일을 하면서 보니 수한씨는 약간의 색맹도 있는 것 같았다. 정상인이라면 며칠동안의 훈련에 걸쳐 이제는 구분이 되여야 할 마루자재의 색갈들이 수한씨에게는 그렇게 어려웠다. 아무리 얘기해도 이게 저거 같고 저게 이거 같았다. 수한씨는 또 꼼꼼한 성격이 아니였다. 그 부분은 전의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여러번 지적받았었다. 굉장히 성실한 것 같은데 일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일솜씨도 날렵하지 못했다.
엿새가 지나가자 왕군이나 김씨, 그리고 다른 직원들은 더이상 수한씨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가게에는 일거리가 늘 산적해있었다. 자재는 사나흘에 한번 걸러 새로 들어왔고, 배송되여 나간 빈 자리는 계속 정리정돈을 해주어야 했다. 온 하루 배송일만 해도 눈알이 팽팽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가 반품이나 교통사고, 혹은 다른 문제라도 생기면 또 바로바로 해결책을 내야 했다. 직종의 특성상 문제거리와 시비거리가 자주 생기는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직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일거리를 나눠서 함께 감당해줄 수 있는 동료가 필요했다. 특별히 한가하지 않는 이상 수한씨를 챙길 여력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본능적으로 수한씨를 보는 처음 순간부터 공동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한씨의 어눌한 말투, 약간 멍청한 표정, 그리고 빠리빠리하지 못한 몸놀림 따위를 한눈에 파악하고 그런 부분에 혐오를 가졌다. 마치 닭들이 병든 동족을 쪼아놓기를 좋아하듯이. 수한씨가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그것들이 저들의 상식범위 내에 들어있지 않는다면  저들은 무슨 큰 비밀을 공유하듯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될수록 은밀하고 티나지 않게. 어떤 경우에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고 하지는 않았지만 저들의 마음은 이미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수한씨는 정말이지 그런게 몹시 싫었다.
그런 것은 수한씨가 인생 내내 겪어오던 것이였다. 동네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생활에서. 그런데도 수한씨는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적응되지 않았고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이런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였다. 즉 그들이 인정하는 상식범위내의 말과 행동을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관계를 맺는 것이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수한씨는 여태 노력했지만 그것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수한씨의 노력이 좀 모잘랐거나 더 유효한 방법을 찾지 못해서였을지도 몰랐다. 매번 수한씨는 이번엔 어떻게 잘해봐야지 마음 먹었다가 똑같은 문제에 부딪칠 쯤 되면 금방 두려움이 몰려와서 더이상 노력해볼 마음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두려움에 이어 초조함과 랑패감, 자괴감이 들다가 자기 련민이 오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마음이 더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모든 문제를 저들에게 돌리게 되는 것이였다.
이 가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 연출되였다. 이제 직원들은 모두 수한씨를 괴물 대하듯 했다. 녀자직원들은 수한씨와 눈길조차 마주치기를 꺼려했고 가장 입심이 센 기사들은 그를 대놓고 무시했으며 전동차 기사들은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는듯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수한씨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김씨만이 그런 짓거리에 관심이 없다는 듯 늘 자기의 일만 수걱수걱했다. 사장은 퇴근할 무렵이면 슬쩍 들려서 대충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는 직원들의 얼굴빛이 모두 수한씨를 향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눈살을 찌프리며 돌아갔다. 사장의 부인은 안스럽게도 몇번이나 수한씨를 불러 상담하려고 했다.
“수한씨, 전에 직장에서는 어떻게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뭐 우리 가게가 그리 큰 가게는 아닐지라도 엄연히 직장이고 직장내 동료들 사이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일단 일솜씨 얘기는 하지 않을게요, 근데 동료들 사이 관계는 잘됐으면 좋겠어요. 도무지 열명 뿐이 안되는 직원들이고 내가 변명하는 게 아니라 우리 직원들 정말 그 정도면 착한 축이거든요. 매일매일 얼굴 맞대고 일을 해야 하는데 서로 껄끄러우면 어떻게 일을 잘할 수가 있겠어요, 그찮아요?” 수한씨도 녀자에게 대꾸했다. “글쎄요, 동료들하고 잘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누군들 하지 않겠어요? 근데 그 인간들이 내게 그렇게들 대하니까 잘될 수가 없지요.” 녀자는 수한씨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녀자의 인식상으로는 수한씨가 ‘우리 가게 직원들’을 그녀만큼 알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수한씨가 얘기한 부분은 직원들의 총체적인 성품에 있어서 아주 작은, 별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에 속하는 것이였다. 한편 녀자가 봤을 때 직원들의 문제보다는 혼자 ‘따’를 당하고 있는 수한씨의 문제가 당연히 더 큰 것이였다. (서렬이 가장 낮은 수한씨에게서 다른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더 주동적으로 일을 찾아하려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녀자는 랭정한 얼굴로 수한씨에게 말했다. “무슨 얘긴지 알겠는데, 수한씨,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는 않잖아요, 우리 직원들 역시 모든 부분에 있어 다 훌륭하다는건 아니에요, 뭐 수한씨 느끼기에 좋지 않았던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겠죠.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례를 들어 백점 만점짜리 점수라도 매긴다면 어느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가요? 왕군도 그렇고 정씨도 그렇고…” 그 말에 수한씨는 아무런 계산도 없이 느끼는 그대로 솔직히 말해버렸다. “직원들이 그래도 괜찮은 축이라고요? 제가 느끼기엔 아닌데요, 그 사람들 안 좋아요, 정씨는 특히 나빠요. 점수요? 급제를 주기도 아까워요, 김씨이라면 모를까.” 녀자는 픽 어이없는 비웃음 같은 것을 웃었다. “그런가요? 그럼 수한씨는 어떤 것 같나요? 본인은 몇점이나 될 것 같나요?” 그래서 수한씨가 답했다. “저요? 저는 그래도 80점은 될 것 같은데요.” 그 대답을 듣고 녀자는 곧 얼굴이 굳어졌다. 이 사람은 도저히 자신을 모르는, 반성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완악한 인간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였다.
이제 이 가게에서 출근하는 것은 더이상 어려울 것이라고 수한씨는 예상했다. 녀자의 얼굴빛에서 수한씨는 그 녀자가 받아 감당할 만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아버렸다. 녀자는 급제선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 인간이였다. 수한씨는 그런 인간들과 그보다 못한 인간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었다. 인간들의 교만과 위선, 잔혹함과 추함에 대해서 수한씨는 구역질나게 보아온 사람이였다. 그들은 수한씨를 바보스럽게, 멍청하게, 무능력한 약골에다 자기 한몸도 먹여살리기 힘든 한심한 인간으로 인식할 것이였지만 수한씨 역시 그런 자신을 대하는 저들의 태도에서 저들 내면의 추함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다. 저들은 수한씨가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인 줄 착각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대했지만 인간들의 내면의 실체에 대해서는 저들보다 수한씨가 오히려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상담을 끝내면서 녀자가 그랬다.
“그러게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박하죠. 그런게 아닐까요? 수한씨…”
녀자는 수한씨에게 권해주고 싶은 말이 아직도 많은 표정이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 정도에서 멈춰주었다.
열이틀의 출근이였다. 사장은 혀를 쯧쯧 차며 그동안의 수당을 계산해주라고 지시했다. 수한씨는 녀자에게서 돈을 받고 나왔다. 또 하나의 감옥 속에서 탈출한 듯한 느낌이였다. 아주 맑게 개인 하늘이였다. 뻐스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출퇴근 시간이 아니였으니까) 모처럼 의자에 앉아왔다. 그런 기분이라면 종일 뻐스를 타고 달려도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수한씨는 내친 김에 종점까지 타고 갔다. 거기서 내려 먹거리를 사서 대충 끼니를 에운 뒤 아홉 정거장을 걸어서 세방으로 돌아왔다. 길거리에서 만난 녀자들은 여름 해볕을 피하기 위해 빨갛고 하얀 꽃양산들을 들고 걸어갔다. 몸이 좀 난 아줌마도 아직 늘씬하고 가녀린 아가씨들도 모두 보기 좋았다. 그날 수한씨는 A시의 녀자들을 원없이 많이 구경했다.
세방으로 돌아올 때에는 해가 열기를 잃고 기울어가는 중이였다. 수한씨는 끌신을 탈탈 끌며 낡은 아빠트를 향해 걸어왔다. 두어시간을 내처 걸었더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도 아파왔다. 이제는 그저 빨리 방으로 돌아가 침대 우에 편히 누워 한식경 쯤 쉬고 싶은 생각 뿐이였다. 파리떼가 윙윙 날아오르는 쓰레기 지대를 지났다. 열려있는 세집의 창문이 보였고 그 아래 쪽걸상을 놓고 주인 할망구가 한산히 앉아있는 모습도 보였다. 친구 할머니도 같이 쪽걸상을 놓고 앉아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소재의 코미디일가?
그러고 보니 그녀들 곁에 한 사람이 더 서있는 것이 보였다. 지나가던 행인이 잠간 멈췄겠지 싶었지만 그게 아니였다. 두 손을 바지주머니 속에 지르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벌써 오래동안 그녀들 곁에 서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였다. 머리를 살짝 끄덕여 두 늙은 녀자에게 인사를 건네며 수한씨는 그 사람 곁을 지나갔다. 얼굴이 넙적하고 오관이 큼직하게 생기고 피부에 윤기가 도는, 수한씨 나이 또래의 체격이 아주 건장한 젊은 사내였다. 친구 할머니네 아들이구나, 추측하는 순간 수한씨는 사내와 본의 아니게 눈이 마주쳤다. 아주 투명하고 고집스럽고 멍한, 이 세상의 것들 하고는 별 관계를 가지지 않는 눈빛이였다. 갑자기 수한씨는 마음이 아파왔다. “여유는 개뿔”이라던 할망구의 한탄이 리해되려고 했다. 너무 멀쩡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내는 분명 정신이상자였다. 친구 할머니가 수한씨에게 예나 다름없는 그 친절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육체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입술에 닿은 것을 빠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육체는 악착같이 인간의 기능들을 갖춰나갔다. 많은 부분은 가르침을 받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육체는 최선을 다해 젖을 빨았고 양분을 섭취하여 자신의 기관들을 공급하는 한편 발전시켰으며 수천수만번의 실험을 감행하여 그 기관들의 사용법을 익혔다. 육체는 잘 때에도 쉬지 않고 뇌속으로 배운 것을 거듭 련습하며 기억에 새겨두려 했다. 그의 학습욕구와 학습능력은 실로 소름 끼칠 정도였다. 자신의 팔다리를 조종할 수 없어 목적 없이 허우적거릴 줄 밖에 모르던 육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엎치는데 성공했다. 그다음에는 머리를 들었고 혼자 곧게 앉아 버티다가 무릎과 손바닥을 리용해 기기 시작했으며 끝내는 스스로 서고 독립적으로 걸음마까지 탔다.
처음에는 울음으로만 단순한 의사를 표현했지만 점점 울음소리를 달리하여 더 많은 상황을 표현했다. 옹알이를 련습했고 특정 사물이나 사람을 지칭하는 음을 구분했으며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있게 되였다. 육체의 목적은 다른 성인 개체들처럼 목소리를 리용하여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였다. 처음엔 마마 빠빠… 그다음엔 한두 단어, 그러다가 토를 뺀 문장을 구사,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육체는 끝내 해냈다.
직립보행 할 수 있다는 것은 육체에게 굉장한 혁명이였다. 누워만 있던 육체의 내장기관들이 직립하면서부터 위치가 새로이 편성되였고 시야가 몇배로 넓혀졌을 뿐만 아니라 훨씬 다양한 자극을 경험하면서 사고능력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였다. 풍부하고 복합적인 자극들은 특히 뇌세포 뉴런과 시냅스간의 신경망 형성에 크게 기여를 했다. 뇌는 복잡하고 정교하며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소우주로 발전해갔다. 뇌가 점점 발달됨에 따라 육체는 자아를 통해 주변을 인식하기보다 뇌를 통해 인식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아와 뇌의 그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방식이였다.
자아는 슬펐다. 자아는 계속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육체와 교제를 지속하려 했지만 육체는 자아에게 집중하려고 하지 않았다. 육체는 3차원의 물질상태로 존재하는 만큼 그 립장이 자아와는 달랐다. 육체는 어떻게 하나 물질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렇게 되자면 생존의 기능들과 법칙을 처음부터 익혀야만 했다. 언젠가 모체랑 까꿍놀이를 하다가 육체는 문뜩 깨달았다. 까꿍― 까꿍― 모체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웠다 펼쳐보이면서 그 행위를 몇번이나 반복했다. 손등이 보이다가 모체의 얼굴이 보였고, 그러다가 다시 손등, 그 다음 순간에는 모체의 얼굴… 얼마나 반복했을가. 갑자기 육체는 그 행위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손등이 모체의 얼굴로 바뀌였다가 다시 손등으로 변하는 게 아니였구나. 얼굴은 그저 손등 뒤에 있었던 거였구나. 그것에 가리워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였구나. 세상에! 보이지 않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있었다니, 이렇게 놀라울 수가!
육체는 까르르 웃었다. 세상이란 참 묘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모체도 기쁘게 웃었다. 그치, 우리 아기. 재밌지, 재밌지롱, 까꿍―! 자아는 씁쓸했다. 시각신경이니 후두엽이니 그런 것으로 ‘보려고’ 하니까 그렇지. 어떤 것이 그 자리에 있는지, 어떤 것이 이미 사라진 건지, 혹은 곧 사라질 건지, 또는 더 오래 존재할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해서라면 자아의 직관이 신경세포들의 틀에 박힌 보고서보다 훨씬 정확한데.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육체의 기능을 믿으려 하다니… 
또 언젠가는 모체에게 안겨 거울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수없이 보았겠지만 그때에는 육체의 기관들이 그만큼 발달되지 않아 어떤 자극을 느낄 수 없었었다. 그날은 달랐다. 육체는 거울 속의 조그만 개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정도로 작은 개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였다. 육체는 그런 작은 개체들을 많이 보았었고 그것들을 만져보기도 잡아보기도, 혀를 내밀어 맛을 보기도 했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으며 모유와 땀이 섞인 냄새가 났다. 그런데 그날의 작은 개체는 달랐다. 그것은 육체가 안겨있는 모체랑 똑같은 성인 개체에게 안겨 있었다.
육체는 모체와 거울 속의 성인 개체를 번갈아보았다. 육체에게 입혀진 옷하고 거울 속의 작은 개체가 입고 있는 옷도 비교해보았다. 너무 비슷해서 분간이 도무지 가지 않았다. 육체는 흥흥 소리를 내며 거울을 손가락질했다. 모체는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며 육체를 안고 가까이 갔다. 아니, 작은 개체가 이렇게 딴딴하고 차겁다니. 아닌데, 이전에 만져본 작은 개체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거울 속의 성인 개체도 마찬가지였다. 잡히지 않았다.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그 안에서 자꾸 움직였다. 살아있는 것처럼. 혹시, 해서 거울 뒤로 가보았지만 숨박꼭질하던 때와 달리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체는 계속하여 말해 주었다. 이게 거울이야, 거울, 거― 울. 이 안에 이 아이가 누굴가? 누굴가요? 그렇지, 바로 우리 아기지― 우리 아기―, 이건 엄마, 이건 우리 아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그러다가 알게 되였다. 아, 저게 나, 저게 나라고? 저게?
육체는 태여나 처음으로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알게 되였다. 멋대로 자란 가는 머리카락, 동그랗고 살찐 볼에 박힌 눈, 코, 입과 짧은 목… 저게 나란 말이지? 저렇게 생긴 개체가? 그럼, 그전에 보았던 개체들은 모두 내가 아니란 말이겠군. 그렇지, 그럼 이 모체도 내가 아니고, 저 삐뚜름히 앉아 티비 보기 좋아하는 개체도 내가 아니였다는 말이란 말이지? 그 날 이후 육체는 자아와 더욱 교제를 멀리 했다. 배속에서는 거의 분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있다가 세상에 나와서는 꾸준히 자신만의 방식을 발전시키더니 그날 시각적으로 물리적인 자신의 육체를 알아본 이후에는 그 표상을 자신의 유일한 자아라고 인정하려 했다.
그러지 마, 니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야. 너의 진정한 자아는 나라구 하고 자아가 호소했다. 그러나 육체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글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내 몫이야. 그래, 내 몫이라구. 너의 방식대로 인식하는건 이 세상에서 도움이 별로 안돼. 난 여태 계속 실험해왔어. 너하고 공존하는 방식도 계속 탐구해왔어. 근데 점점 느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주위를 봐. 어느 개체가 그렇게 살든? 성인 개체일수록, 이 세상에서 강한 개체일수록 그 인간들이 어디 자아랑 친하게 지내는 걸 봤니?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나는 일단 살아야 하고, 더 잘 살아야 하니까.
그게 아닌데… 그렇게 살면 더 강해질듯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게 아닌데… 자아는 갖은 방법으로 감정과 의식을 동원하여 메시지를 전했다. 육체의 기관들이 성인 개체와 닮아갈수록 자아의 힘은 쇠약해져 메시지는 육체에게 힘겹게 도달했다. 육체는 자아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끝내 중대한 결단을 하나 내렸다. 자아의 메시지를 가장 먼저, 직감적으로 접수할 수 있는 자아의 문― 대천문을 닫아버린 것이였다. 자아는 이제 그 문 바깥에 내쳐지게 되였다. 그제날 스스럼없이 그 문을 통해 육체를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말았다. 자아는 안깐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나 들어가게 해줘. 나는 너와 하나야. 너 없이 나는 내가 아니고, 나 없이 너도 너가 아니야. 우린 같이 있어야 돼. 같이 먹고 같이 보고, 같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구.
육체는 문을 열지 않았다. 한번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방법도 육체에겐 없었다. 어떤 알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의 숨결이 닿았던 곳, 령의 세상과 물질세상이 이어진 곳. 자아가 태여나고 육체가 시작되고 그들이 둘이면서 하나처럼 만나서 무람없이 얘기하던 곳, 그래서 속칭으로 숨구멍이라고도 불리우던 곳, 그곳 대천문은 이제 팽창된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을 감싸기 위해 자라난 두개골 조각들에 의해 가뭇없이 메워져 버렸다. 육체는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아와 령의 세상 따위는 잊어버리고 물질계에 대한 정보와 기억으로만 머리속을 채워나갔다. 육체는 다른 개체들을 부지런히 흉내 내였고 놀라운 속도로 그들을 따라갔으며 종내는 모체와 다른 성인 개체들의 독려하에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개체들과 함께 기차길 만드는 놀이에 성공했다.
어머! 대단하다! 우리 애들 이제 협동심이 뭔지를 알게 되였어요― 하고 성인 개체들이 하하 호호 웃어댔다. 그녀들의 웃음을 보니 육체도 뿌듯했다. 자아는 육체의 마음을 통해 육체에게 말했다. 협동심이라고 했니? 아닌데… 내가 아는 진정한 협동심하고는 뭔가 차이가 나는데… 자아는 시공간을 거스르며 보았던 것을 육체에게 전했다. 아주 오래전에도 인간들은 그렇게 말했었지.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 물론 육체는 그 환상을 거절했다. 다른 모든 육체들과 마찬가지로.
 
“이보세요, 잔 좀 쭉쭉 냅시다, 난 이런 자리에 와서 빼는 게 (얌체짓) 정말 싫어요… 그러지 말자, 우리. 어?…”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그 상에는 남자 혼자서 네명의 녀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서로 동창인 것 같았다. 남자는 벌써 불그레 취기가 오르고 있었고 녀자들은 맨숭맨숭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얘들아, 어제 니들 못 봐서 그렇지, 영철이 걔, 그치, 내 친구, 우리 정말 친했잖아… 걔 얼마나 밉살스럽게 놀던지. 다들 모른 척 들어주는데, 내가 한마디 했다. 그래, 한마디가 아니라 좀 다퉜지. 난 그런 사람 정말 싫어요. 허풍을 떨겠으면 장사치들하고 떨든가, 동창회에 와서 친구들하고 떨건 뭐냐? 안 그래?”
말끝에 남자는 또 술 한잔을 권하면서 먼저 쭉 들이켰다. 녀자들 네 사람 다 입에 대는 척하다가 그만 내려놓는 것이였다. 남자는 녀자들의 무성의한 표정을 보았는지 말았는지 계속하여 의분에 차서 떠들어댔다. “참 돈이 문제인 것 같더라. 돈을 좇아 살다 보니 사람이 변하는거 아니겠냐. 사회가 그러니 개인이 얼마나 청고하게 살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영철이 그 녀석은 너무하더라. 그렇게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고 마지못해 하는 짓도 아니고 그게 뭐 대단하고 자랑스러워 보이나 봐요. 나는 그 태도가 싫었어. 인간이 최소한의 반성도 없이 살아간다는 건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렸다는 거 아닌가?…”
녀자들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열심히 채팅을 하거나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소곤소곤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단발머리를 한 녀자가 듣다 못해 남자를 말렸다. “그래, 영철이 걔가 좀 그런 면이 있지. 그런 사람은 어디 가나 다 있잖아? 그니까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지, 넌 그걸 꼭 꼬집어 말해야 시원하니?” 량심이란 것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녀자였다. 정곡을 찔린 남자는 피씩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그렇지. 니가 정직하게 말해주는구나. 난 이렇게 실말을 해주는 사람이 좋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앞이라면 나는 한낱 우스운 인간 밖에 되지를 않거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어도, 동료들에게 비아냥을 받을 만큼 어수룩하더라도 그 남자는 진정한 엘리트였다. 수한씨는 그것을 느꼈다.
“그래, 직장은 아직이라고?”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수한씨의 동창 S가 무심하게 물었다. S는 지금 수한씨를 불러낸 것을, 술기분에 동창모임 위챗그룹에서 수한씨와 말을 걸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뭐? 김수한? 뭐냐, 항상 뒤자리 구석 쪽에 앉았던 그 수한이, 맞니?” 하고 S가 수한씨에게 문안했었다. S는 수한씨에게 “야, 이게 몇년 만이야? 20년 다 돼지 않았나? 너 이 자식 어디 숨어서 여태 채팅방에 올라오지도 않았는가?” 감탄하면서 지금은 어디냐고 물었었다. A시라는 말을 듣고 S는 제 흥에 겨워 “뭐? A시? 나도 여기 있는데… 그럼 자식, 우리 한번 만나 술 한잔 해야겠네.”라고 했다. S는 D와 C도 같이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A시에서 십여년을 살았고 이제는 웬만큼 자리를 잡은 모양이였다. S는 아우디를, D는 쉐보레를, 그리고 C는 제다를 운전하고 나왔다.
그들은 수한씨 말고 다른 사람 둘을 더 불렀다. 그중 한 사람은 모 은행의 부행장이라고 했다. 그들이 만든 자리는 수한씨를 위한 것이 아니였다. 부행장이라는 작자는 특히 특산품 무역 사업을 하는 S에게 중요한 사람이였다. S와 다른 친구들은 비굴할 정도로 그 대머리 작자에게 굽신거렸다. 학교때는 수한씨나 다름없이 성적도 형편없고 발언도 못하더니 지금은 언변이 청산류수였다. 눈동자는 민활하게 주위 상황과 상대의 얼굴빛을 감찰하고 있었고 술잔을 든 손은 언제든지 대머리 작자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각성되여 있었다. D와 C도 질세라 술을 권하고 마시고 했지만 S만큼 로련하고 강력하지는 못했다. 수한씨는 투명한 광천수를 한잔 부어 앞에 놓고 그들의 수작을 멀거니 구경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품이 나왔다. 그러다가 옆상 남자의 말을 엿듣게 된 것이였다.
취기가 오름에도 그 남자는 특유의 이상하게 투명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남자는 그것을 알고 있을가? 자신이 눈빛을 통해 주변에 방출하는 메시지가 말로 하는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녀자들은 이제 남자의 거창한 웅변에 기가 질렸다. 그녀들은 몇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남자는 여전히 흥분에 떨며 스스로 잔을 채워 혼자 마시다가 갑자기 말했다. “근데 너희들 얼굴이 그게 뭐니? 무슨 일이야? 넷이 꼭같이 뭐에 씌운 것처럼 시커매졌잖아.” 녀자들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닌데, 그대로인데, 어디가 시커멓다고 하는 거지?
그러다가 한 녀자가 과감히 말해버렸다. “미안한데, 나 먼저 일어나야겠다. 일이 좀 있거든. 너 A시에 이틀 더 있는다면서? 오늘만 날인가, 래일이나 모레 다시 보자.” 다른 녀자들도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우르르 함께 일어났다. 저마다 각자의 가방을 단단히 쥔 채로였다.
남자는 웃었다. “니들은 뭐가 그리 바쁘냐? 우리 지금 20년 만에 만난 거잖어. 오늘만큼은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고 순수하게 옛날 일 떠올리면서 그저 무담없이 얘기들 나누면 좀 좋니?” 남자는 어느 녀자도 그를 위해 남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녀자들의 반응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는 표정이였다. 아마도 그는 그러루한 상황들을 많이 겪어왔을 것이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한씨는 녀자들 속에 묻혀 혼자 비틀거리며 걷는 남자의 뒤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저 남자는 몇점이나 줄 수 있을가? 수한씨는 S에게 가만히 귀띔을 하고 그만 일어났다.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록 더 바보가 될 뿐이였다.
서늘한 밤공기를 마시며 수한씨는 타박타박 걸었다. 겨우 서너개의 별이 보였다. 뻐스는 이미 끊겼다. 힘에 부치기전까지는 걸어보고 싶었다. 직장에서는 짤렸고 아직 새 직장을 찾을 마음도 없었다. A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별로라서 이곳에 계속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직장이 좀 온건해지면 집에 련락하리라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련락은 또다시 늦춰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였겠지? 나는 내놓은 자식이니까. 걸으면서 수한씨는 자신이 태여나서 자란 작은 시골동네를, 동네를 뛰여다니며 놀던 자잘한 추억들을 회상했다.
무던히도 애를 태웠지, 나 때문에 울 엄마는… 하고 수한씨는 잠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급히 머리를 털었다. 아니야, 이런 건 다 쓸데없어. 그저 내가 잘살아야 좋아하시는데…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통하의 다리를 건너면서 수한씨는 강변바람을 맞았다. 고흐가 본 밤하늘이 이랬을가.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누군가 별처럼 눈을 깜빡이며 수한씨를 내내 지켜보는 것 같았다. 누구지? 아버지의 혼령인가? 신인가? 아니면 내 마음인가? 그 이상 더 알 수는 없었다.
주머니 속의 지페를 확인해보고 수한씨는 택시를 잡았다. 할망구네 아빠트는 가로등도 없이 까맸다. 수한씨는 건너편 좀 큰 길목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다. 할망구와 아이와 두 세입자도 모두 잠이 들어있었다. 그들에게 방해가 될가 봐 수한씨는 치솔만 살짝 하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또 하루가 잘도 지나갔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안스럽다거나 동정을 해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말아요.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나를, 이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게 내 눈에 다 보이니까요. 그래요, 어쩌면 당신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항상 눈으로 나를, 이 세상을 보려고 하니까. 그 방법을 신뢰하니까. 그런 방식으로 보면 당신 눈에 비친 나는 참 불쌍하거나 형편없는 사람이겠네요. 나는 당신처럼 세상의 리치에 밝지 못하고, 세상의 유희법칙에 능숙하지 못하고, 세상을 잘 살아가게 하는 기술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적고… 그래서 세상의 순위 리스트에서는 하위중의 하위에 속했으니까.
그래요, 그런 면에서 나는 참 한심한 인간이죠. 이 세상에서 아웃되여도 조금도 안타깝거나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죠. 그런데도 무슨 미련이 있는지, 아니면 너무 겁쟁이여서 그런지 계속 이 세상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구요. 이 점이 더 웃기긴 하다만 그래도 될수록이면 순리대로 살아보려구요. 이런 것도 일종의 겸손이라 하더군요.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고,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노력해도 훌륭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존중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수긍한 상태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 말이예요.  
그런데 한가지는 말해주고 싶네요. 나는 당신이 보고 있는 세상외의 것을 볼수 있다고. 당신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내 눈에는 보인다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더 나아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예요. 당신들이 흔히 쓰는 그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은 반면, 나에게는 다른 종류의 기술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주려구요. 이 종류의 기술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이런 종류의 기술로 인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 쉽지 않기 때문이죠. 이 세상의 법칙은 이런 종류의 기술의 힘과 대치될 때가 너무 많고 그래서 이런 기술을 발전시키기에 매우 좋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니까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시도를 하다가 차차 방향을 전환하고 맙니다.(아마 당신도 그중의 한 사람일 걸요) 꼭 이런 기술을 보존해야 할 리유도, 그 결과에 대해서도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구요. 요즘에는 어린아이들마저 더이상 버텨볼 생각을 않고 일찌감치 포기해버리더군요. 그 대가로 전세대보다 더 빨리 세상을 알아갈 수 있지만요.
내가 당신보다 이 기술에 대해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으시대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당신네들처럼 하지 못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알게 된 것일 뿐이니까요. 마치 구뎅이에 빠진 이가 우연찮게 그 안의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죠. 아주 드물지만 그 보화를 가지고 다시 구뎅이 바깥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답니다. 내가 알기로 그런 사람들은 당신네들이나 나 같은 족속들에게나 모두 존중을 받고 있지요. 그럼요, 그런 사람들은 존중을 받을 만합니다.
나는 그렇지 못해요. 나는 이미 수없이 많은 당신네들 같은 인간들에게서 무시와 비웃음과 형편없다는 평판을 받았답니다. 이후로도 아마 수없이 많은 사람들한테서 정죄를 받으며 살아갈 거구요.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살아가는 걸가요?
누군가 내게 우리 인간들은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그러데요. 시초에 원인이 무엇이였던지,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 아는 이가 하나도 없으니까. 어떤 이는 우리가 빛으로부터 왔다 그러고, 어떤 이는 우리가 흑암으로부터 왔다 그러더군요. 무엇이 되였든 간에 우리가 빛이나 흑암에서 파생된 것이지 그 자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요, 나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당신을 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나는 마음이 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때로 나는 시각을 리용하지만 마음을 신뢰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나는 누가 내 마음을 감동시키는지, 어떻게 그런 메시지들을 내 마음속에 넣어주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 뒤에는 어떤 세상이, 내가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세상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구요. 어쨌든 나는 그런 족속이에요. 당신이 아주 습관적으로, 편하게 당신의 기술을 쓰며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아주 습관적으로, 편하게 나의 기술을 쓰면서 살아가지요.
내게 보이는 당신을 묘사해볼가요?… 아니, 싫은가요?… 한가지만은 분명히 알려드리지요. 내게 보이는 당신은, 이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 많이 다르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우며 얼마나 창피하고 지저분한지, 어느 정도로 뻔뻔스럽고 대책없고 잔인하고 부패한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많지 않습니다. 때로 그것은 순식간에 피여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추한 것으로 변해버리기도 하지요, 또한 어떤 아름다움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악의 틈사리에 끼워 불가사의하게 공존하기도 하구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 저편의 세상에서 더욱 인정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런 것을 만나면 슬프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당신들이 즐거워할 때 내가 웃지 않고 당신들이 비통해할 때 내가 슬퍼하지 않는 리유랍니다. 이렇게 되려고 마음 먹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만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대체 누가 내게 이런 마음을 주고 이렇게 생각하게 하는지 알 수도 없지만요…
 
다른 직장을 찾아볼 건지, 아니면 도시를 옮길 건지 수한씨는 고민 중이였다. 수한씨를 수한씨대로 받아줄 도시가 이 세상 어느 곳에 있을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였다. 다음 세방료금을 낼 때까지 수한씨는 일단 할망구네 집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다른 세방을 옮길 수 있는 처지도 되지 않았으니까.
매일 아침 늦잠에서 깨여나 수한씨는 죽집 혹은 국수집에 가서 조반 겸 점심을 먹었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인터넷을 뒤적거리는 날도 있었고 조반을 먹은 그 길로 뻐스를 타고 나가 저녁 무렵까지 시내를 돌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꿈, 행복한 가정, 안정된 직장, 웬만한 수입, 자기 명하의 작은 집, 자신을 닮은 아이 한명… 그런 것을 수한씨는 바라지 않았다. 수중의 돈을 다 쓰기전에 다시 일을 시작하여 다른 이들에게 너무 부담이 되지 않기를, 될수록이면 오래오래 아프지 않기를, 좀 더 늙고 아픈 시절이 오면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민페는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였다.
가끔 수한씨는 친구 할머니네 아들을 아빠트 아래 풀밭에서 만나군 했다. 그 친구는 좀처럼 입을 열어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먹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잘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웃을줄은 몰랐다. 아빠트단지의 사람들은 모두 그 친구를 꺼려했지만 주인집 할망구네 손녀 아이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언제나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지르고 서서 아이가 장난스레 던지는 공을 맞았다. 수한씨는 때로 다른 바람을 마시기 위해 세방의 창문을 열었다가 자신의 마음처럼 붉게 타오르는 석양 아래 검은 아빠트 건물을 배경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그들의 뒤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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