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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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상)
2013년 05월 11일 12시 02분  조회:5329  추천:19  작성자: 김문학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상)


1.
2010년 2월 20일 새벽 4시경에 깨어난 나는 유난히 흥분돼있었다. 40대에 들어서서 10대같은 마음의 설레임을 느끼기는 처음이다.그럴만한 큰 이유가 있다. 왜냐면 오늘 나는 우리 민족의 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진 영웅 안중근의사의 친필 유묵과 곧 대면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본서 살아 온지 벌써 20년이 된 나는 “국제안중근기념협회” 총회 부회장 겸 일본 지회장직을 맡은 지도 어언 수년이 된다. 이 같은 영광스러운 사회직을 맡으면서 나는 나름대로 일본에 있는 안중근 관계 자료를 발굴, 수집하면서 안중근사상연구를 해오고 있는 중이였다. 원래 고서수집과 서화괴집벽이 있는 나는 동아시아비교연구와 함께 관련 역사인물 서화자료를 꽤 많이 수집했는데 근대 조선의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같은 개화파리더나 중국의 손문, 리홍장, 원세개나 일본의 이토ㆍ히로부미, 타나카 카쿠에이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명 인사들의 유묵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금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100주년기념활동의 일환으로 우리 “국제안중근기념협회”에서 최고로 완성도가 높은<<안중근 의사 기념화첩>>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화첩편집위원회의 멤버로서 나는 일본에 산재돼있는 안중근 관련 사진, 자료를 적극 발굴, 수집하여 제공해왔다. 그러므로 이번 안중근의 유묵친필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 유묵은 일본인이 다수 소장하고 있지만 사진이나 화첩에서나 보았지 한 번도 친필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나에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몇 시간 후면 소중한 안의사의 친필유묵과 대면하게 되니 어찌 가슴이 설레이지 아니하랴!

그리고 안의사 순국 100주년기념으로 나는 이곳 히로시마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동아평화를 기원하여”라는 주제로 곧 특별강연을 갖게 된다. 주최 측의 강연광고가 나가자마자 일본인들의 반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며칠 전, 나의 책을 애독하고 있다는 히로시마 모 중소기업의 회장인 이시마루(石丸)씨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가 사는 집 근처에 간센지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그 절의 주지 시다라씨가 안중근의 친필유묵 “독립”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와는 친한 사이여서 유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시다라씨 역시 내 책을 읽었고 수년전 히로시마시내 호텔서 나의 비교문화특강을 청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도 간센지에 유묵이 소장돼있다는 정보는 오래전부터 입수했지만 무슨 방법으로 주지와 접촉할까 하고 고민 중이었다. 나는 하늘이 돕는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2.
아침식사를 대충 끝낸 나는 10시 JR히로시마역에서 미요시행 열차를 잡아탔다. 10시 55분경 무카이하라(向原)역에 하차하니 이시마루회장이 자가용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간센지는 역에서도 승용차로 20분 달려 아주 한적한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토진종파에 속한 8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란다.

주지 시다라 사미즈(設樂)씨는 82세의 고령 이였지만 60대쯤으로 보이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반기면서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전에 김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나이 드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40대 젊은 분이시네요. ”하면서 시다라씨는 부인이 내놓은 오차를 권했다.

이어서 시다라씨는 곧장 안의사의 유묵으로 화제를 옮겼다. 그가 간직해온 유묵은 약 10년전에 논픽션작가 사이토씨의 권유로 매스컴에 사진으로 공개한 적 있지만 한국에서 전시되기는 한번뿐이라고 한다.

안중근의 유묵은 전부 려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게 휘호를 해준 것 인데 그 수자가 근 200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독립”이란 글이 있는 유묵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한다. 두말 할 것 없이 한국에 반환되면 국보급 문화재다.

한국정부는 이 귀중한 유묵을 긴 시간 소중히 보관해온 시다라씨에게 감사의 뜻으로 한국 서울에 초대하여 안중근기념식전에 참석시키기도 하고 국빈처럼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 생전에 시다라씨를 한번 뵙자고 초청 한 적이 있는데 시다라씨는 완곡히 거절했다는 에피소드를 피력했다. 왜냐면 안중근을 숭모하여 우리 집의 가보를 소중히 모시는 것은 우리 집안의 범사(凡事)이므로 대통령의 접견을 받을 만큼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다라씨는 겸손한 인품이었다.

“어떻게 안중근의 유묵이 이곳 간센지에 남아있게 됐습니까?” 나의 새삼스런 질문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의 작은 할아버지 시다라 마사유키가 당시 대련구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안중근의사와 동년 동월 생 이였다고 합니다. 두 분은 잦은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백년전의 지금쯤이 됩니다. 안중근이 사형당하기전인 1910년 2월 려순감옥에서 이 ”독립“ 두글자를 써서 저의 작은 할아버지께 주셨습니다.

나는 또 궁금했다. “왜 독립”이란 휘호를 한국인이 아닌 일본에게 써주었을 가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역시“하면서 대답했다.
“한국인들로부터 늘 받는 질문입니다. 일본인에게 주면 안중근님의 본인의 뜻이 일본인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아닐까요.”

“독립이야말로 안중근의사의 절절한 소원이 푹 슴배인 글자니까요.” 나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의사의 일본인에 대한 유언 그 자체라고 생각이 되었다. 시다라씨는 또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은 이토를 격살하고 이 '독립'이란 글발을 통해서 이토의 직접적인 상전인 천황에게 조선독립을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인물이지요. 31살의 청년이 이런 장대한 스케일과 예지와 용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존경스럽지요.”

실제로 안중근과 접촉이 있은 일본인들이나 지금의 일본인들 속에서도 안중근의사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이 있다.

“우리는 원수가 쓴 것이라면 피하거나 버리고 싶어 한다. 안중근은 일본의 적 일터 이므로 그것이 버려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 많은 것이 남아있고 또 대접받고 있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안중근은 일본을 좋아한 것 같다. 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가려다 갑신정변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을 만큼 일본의 신문화에 흥미가 컸다. 그러나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까지 하는 극력한 반일투사가 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조선 독립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이며 안중근 자료 발굴 및 연구의 제일인자인 최서면선생이 최근 “안중근의사의 유물전시회에 붙여”에서 쓴 말이다. 노숙한 연구자다운 의미심장한 말이다.

3.
어느새 시다라부인이 “유묵이 준비 되었습니다”.하고 우리를 불렀다.

최고급 일본견사로 특제한 포장 커버 속에서 시다라부인은 조심스럽게 안중근의 유묵액자를 꺼냈다. 사진에서 익히 보아왔던 “獨立”이란 박력 있는 두 글자가 한눈에 확 안겨왔다. 종횡 33X66센치의 일본화지에 박아쓴 글씨였다.

“대한국인 안중근. 여순감옥에서”

화지는 열화 되어 시누렇게 변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먹 글씨나 장인은 너무나 선명히 박혀있었다. 안중근의 유묵 중에서 이 손 바닥 인이 가장 뚜렷하다고 한다.

나는 방안 중앙에 있는 큰 테이블위에 유묵액자를 정중히 모셔놓고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형언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물결이 팽배하면서 어느새 눈물이 앞을 흐리였다.

나는 유묵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유묵으로부터 받는 특유의 기(氣)에 나는 무한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였다. 유묵은 나에게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다. 절절히 또한 침통하게.

“독립” 두 글자는 순간 안중근의사의 얼굴모습으로 변하여 다가왔다. 순국 당시 31세의 청년의 안중근. 얼굴은 대형 영사막의 영상처럼 클로즈업된다. 독립자주 평화사상을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부르짖고 있었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과 함께 자여기인(字如其人)이라 글씨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듯이 이 글씨자체가 안중근의 인격의 결정체이며 등신대(等身大)의 안중근 그 자신인 것이다.

침착하고 육중한 그 글씨의 뿌리는 아마 한국 근대유학자 선비들의 기풍이 슴배여있다고 본다. 어디 그뿐이랴. 단정하고 명쾌하고 중후한 본인의 인격을 남김없이 발로하고 있는 것이다.

4.
문득 나는 안중근의 그 선명한 먹으로 찍은 장인에 네 손바닥을 갖다 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910년 6월, 12인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으로 왼손의 약지를 절단했기에 새끼손가락 사이즈와 같다.

천생 여자의 손같이 작은 내 손이였지만 안의사의 손은 의외로 내손만큼이나 섬세하고 작았다는 발견에 나는 다시금 놀랐다. 163센치의 신장인 안의사가 손이 항우의 왕손만큼 클 리는 만무했다. 그의 손은 분명 크고 투박한 무인(武人)의 손이기보다는 작고 섬세한 선비, 문인의 손 이였을 것을 나는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 역시 피아니스트나 화가의 손처럼 가늘고 긴 편이였다.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의 유학경전을 익혔던 그가 붓을 쥐였어야 할 손에 총을 쥐고 적장을 저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시대배경에는 바로 그 참담했던 역사와 민족의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안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역시 161센치의 왜소한 체구였다. 며칠 전 야마구치의 이토기념관에 전시된, 그가 입었던 조선통감복이나 속내의 실물을 보면서 그가 몸이 작았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기(奇)하게도 안중근과 이토의 생일은 모두 9월2일 똑같은 날 이였다. 이토는 1841년 9월 2일, 야마구치현(山口) 하야시(林)씨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뒤 이토가문의 양자로 되어 성이 이토로 됨)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순흥(順興)안씨 안태훈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했다. 할빈에서 사망 당시 이토는 만 68세노인, 안중근은 만 30세 청년 이였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결은 한일양국 민족의 대결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생일을 같이 공유했을 뿐 만 아니라 서로 원수이긴 했지만 그 인물의 성품 면에서는 모두가 양국의 위인으로서 공통점이 많았다고 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일본의 지한파 지식인의 한 사람인 교토대학 이토 유키오교수(이토 히로부미와 아무런 친척관계가 없음)는 작년 11월 600페이지의 대형전기<이토 히로부미>(코단샤 간행)를 집필했는데 그는 이토와 함께 안중근연구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이토와 안중근의 관계를 논하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기묘한 느낌이지만 이토의 전기를 집필하는 작업과정에서 안중근의 성품을 알게 되면서 입장이야 달리 하지만 강한 정의감, 의지 등 면에 있어서 이토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토 암살자인 안중근에게는 굳은 신념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토와 공통한 친절감 마저 들었다.

그렇다. 후세의 일본인 학자들까지 안중근에게서 자신들의 위인과 같이 동일한 위치에 높이 올려놓고 높이 평가하고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확고한 신조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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