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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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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돌배골의 봉기 (김학철)
2008년 06월 13일 09시 59분  조회:1669  추천:67  작성자: 조글로문학
                                                     
돌배골의 봉기
                                                    
장편《범람》의 일부분


김학철






1. 안개 낀 야밤

짙은 안개가 낀 야밤, 배사공 태명(泰明)은 낚시대를 메고 초롱불을 켜들고 강뚝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오고있었다. 거의 배말뚝앞까지 왔을무렵, 뜻밖에 들려오는 소리에 태명은 깜짝 놀라고말았다. 태명은 주춤 멈추어서서 어둠속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얏?》
안개속에는 대답소리는 없고 다만 거친 숨소리만 들려올뿐이였다. 태명이 다시 한번 소리를 쳤으나 대답은 여전히 없다.
《대답하지 않으면 대갈통을 까버릴테다!》
태명은 초롱불을 땅에 내려놓고 낚시대를 한옆으로 비스듬히 거머쥐였다. 태명은 공격의 자세를 취하면서 버럭 소리는 쳤지만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아, 배사공이구만요!》
초롱불빛이 환히 비추고있는 까닭에 저쪽에서는 태명이쪽을 똑똑히 볼수 있었다. 안개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는것 같았다. 태명이 물었다.
《어찌 할건가?》
《아니요. 난 당신을 해치러 온게 아니오. 다만 한가지 자그마한 부탁이 있을뿐이요.》
《어쨌든 손은 움직이지 말구 이 초롱불앞으로 나와보시오! 서로 얼굴을 보면서 말을 합시다.》태명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명령을 했다.
짙은 안개속에서 웬 사내가 한다리를 질질 끌며 초롱불앞에 나타났다.          
《아!》
그 사람을 보는 순간 태명은 목구멍으로 나오는 소리를 겨우 삼키며 또 한발 물러섰다.
눈앞에 나타난 이 낯선 사나이는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져있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있었다. 시퍼렇게 멍이 든 눈두덩과 축 처진 한쪽 팔, 그리고 질질 끌고있는 다리에서는 흥건하게 피가 흐르고있었다.
《나는 경찰놈들에게 쫓기는 사람이요. 미안하지만 나를 도와 강을 건널수 있겠소? 나는 절대 강도나 살인범은 아니외다. 감옥문을 부수어버리고 탈주한 사람일뿐이요.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지만 만약 살수만 있다면 이후 꼭 당신의 은혜에 보답할거요. 제발 좀 도와주시오.》
자기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사나이는 얼마간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하지만 사나이는 조급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짙은 안개속을 휘둘러보았다. 이제 막 경찰들이 들이닥칠 판이였다.
태명은 이 《불청객》의 솔직한 표정을 미루어 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뒤에는 늑대같은 경찰들이 쫓아오고 앞에는 사품을 치며 흐르는 강물이 가로막고있으니 어찌 절망에 빠지지 않을수 있으랴. 그 어떤 결의로 이글거리는 사나이의 눈빛, 마치 명령을 내리는듯한 태도,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으면 그 억센 주먹으로 배사공을 때려눕히고 배를 빼앗아가지고 강을 건널것이였다. 하지만 젊은 배사공은 또 한발 물러서면서 분명히 거절을 한다.
《당신의 딱한 사정은 동정할만 하지만 어찌됐든 나는 당신을 도울수 없소. 당신을 배에 실어 강을 건너가게 하면 내 모가지가 떨어진단 말이오. 만약에…》
《그렇다면 배를 빌려만 주시오!》
탈옥자는 급히 태명의 말허리를 끊으면서 청을 드는데 도대체 명령을 하는지, 아니면 사정을 하는지 알수 없었다.
《여긴 물살이 아주 급하오. 나는 어릴적부터 노를 저어 밥을 먹어왔지만 한손으로 노를 저어 강을 건너간적은 없소…당신이 외팔로 어떻게?》
태명은 가까스로 터지는 코방귀를 참았다.
《괜찮소. 그저 배만 빌려주시오!》
《아이 참, 이런 소고집이라고야! 외팔로 노를 젓는건 부질없는 짓이요… 물살에 밀려 도로 강기슭으로 되돌아오게 될거요…》
잠시 머뭇거리던 태명은 어쩐지 사나이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였다. 그래서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한다리를 끌고 강을 건넜다 하더라도… 또 산을 톺아올라가야 하지 않겠소?… 혹시 강건너에 숨을 곳이라도 있소?》
태명이 살고있는 고장, 락동강(洛東江) 지류의 하나인 이 강은 서쪽은 그야말로 옥야천리이지만 동쪽은 돌배골이 자리잡고있었는데 태백산줄기가 강변까지 뻗어 내려와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루고있었다. 그래서 태명은 다리에 부상을 입은 이 사나이가 어떻게 그 험악한 산발을 타고올라 경찰들의 추격에서 벗어날수 있을런지 적이 근심이 되였다. 그렇다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가 무작정 낯선 촌락에 들어갈수도 없지 않는가!
《그건 당신이 근심할바가 아니오.》
부상당한 사나이는 자신감을 가지고 맺고 끊듯이 말했다. 이어서 그는
《이 나루터 맞은쪽이 돌배골이지요. 내가 잘못 본게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태명은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하지만 몸을 숨길만한 곳은 아니지요!》
하고 적이 조바심을 쳤다.
《강을 건너게만 해준다면 나는 살수 있소. 공연한 근심을랑 말고 빨리요!》
사나이는 고집스럽게 같은 말을 곱씹었다.
마침내 태명은 결심을 내리게 되였다.
《좋소! 그럼 건너가 봅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태명은 낚시대를 메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일분후, 젊은 배사공은 녀동생을 데리고 달려왔다. 스물한두살쯤 되여보이는 날씬한 처녀였다.
《덕실(德實)아, 넌 내 대신 이 어른을 배에 싣고 강건너에 가거라. 강을 건너가면 배는 그곳에 묶어두어라. 그리고 너도 당분간 돌아오지 말기 바란다.》
처녀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낯선 사람을 보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래게 뛰여가 배를 비끄러맨 바줄을 풀고 배에 올라 삿대를 잡았다.
《물론 이 어른을 장손(長孫)형님한테로 데리고가야 하겠지. 다른 곳은 전혀 마음이 놓이지를 않으니까…》
태명이 이렇게 녀동생에게 부탁을 하는데 한쪽다리를 막 배에 올려놓던 사나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뭐요? 장손? 장손이라구요? 박장손을 말하는게 아니요?》
이번에는 태명이 놀라서 물었다.
《옳소! 바로 박장손이요. 아니, 우리 장손형님을 어떻게 알고있소?》
사나이는 배에 오르자 손을 흔들면서
《빨리, 그 초롱불을 꺼주시오!》
하고 말을 잠간 끊었다가
《내가 숨을데가 바로 박장손네 집이요. 그럼 안녕히. 감사하오, 친구!》
하고 맥없이 주저앉았다.
처녀는 익숙한 솜씨로 삿대를 잡고 배를 저어갔다. 배가 좌우로 흔들거렸지만 그것은 부상당한 사나이에게는 그야말로 요람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얼마후였다. 덕실이가 말없이, 그러나 힘차게 노를 저어 급류를 타고있을 때 두 자매의 즐거운 웃음소리로 넘치던 태명이네 초가집은 마치 아무도 없는듯이 텅 빈것만 같았다. 태명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어렴풋이 잠들었다. 이때 예상했던 추격자들의 거칠고 무리한 《방문》을 받게 되였다.
경찰들이 험상궂은 얼굴을 해가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바람에 태명이는 선잠에서 깨여나 한손으로는 바지춤을 추어올리고 한손으로는 두눈을 비볐다. 그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여난것처럼 휘청휘청 문밖으로 걸어나왔다.
《배는 어디로 가져갔어?》
배사공이 문밖으로 나오자 경찰 한놈이 와락 달려들어 그의 가슴에 총부리를 바싹 갖다대며 잡아먹을듯이 노려본다.
《이 사람아, 좀 좋은 말로 물어보지!》
서너발치 떨어져있던 경관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무지막지한 부하를 질책했다. 이어서 경관은 경찰들에게 급급히 무슨 지시를 하는것 같았다.
태명은 부하를 훈계하는 경관이 바로 가장 나쁜놈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 경관은 신유성(申維成)라는 자인데 일제통치시기에 고등계(일본경찰서에서 전문 정치범을 다루는 부문) 형사로 있었다. 이놈은 수많은 죄를 저질렀기에《신염라왕》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였다. 이자는《죄인》을 무섭게 다루어 소문이 났기에 이 무렵 이 지역(현급에 상당함-역자) 경찰소 부소장으로 되였다. 신유성은 태명의 이쁜 녀동생에게 눈독을 들이고있었다. 이놈은 태명의 녀동생을 첩으로 들여앉히려고 벌써 두세번이나 찾아와 위협도 하고 유혹도 하였었다. 그래서 태명은 이놈의 목소리에 아주 익숙했다. 헌데 이 개같은 놈이 짐짓 친절을 베푼다. 태명은 불쾌하고 구역질이 났다.
《배, 배말이요? …강가에 묶여있겠지요. 강을 건너려고요? 대관절 몇분인데요? …한밤중에 정말 수고가 많으시우!》
태명은 천연덕스럽게 대답도 하고 묻기도 했으며 슬쩍 치살려주기도 했다.
이때 헛물을 켠 경찰들을 물리치고 신유성이 불쑥 나섰다. 턱 왼편에 험상궂게 칼자국이 나있었다.《8.15》광복되던 해 겨울밤, 이놈이 좁은 골목길에 들었을 때원한을 품은 한 청년이 비수로 내리찍었던것이다. 얼굴에 비수를 맞는 바람에 이놈의 흉악한 몰골은 더더욱 사람들을 무섭고 떨리게 했다.
《잘 지냈는가, 덴상(田樣)?(《상》은 일본말로 《군》이라는 뜻을 갖고있는데 이 파렴치한 일제의 주구는 태명을 보고 일본식으로  불렀던것이다 ― 역자) 나 신유성이요, 알겠지요?》
신유성은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 참! 어서 집으로 드시지요. 이 깊은 밤에 무슨 일로…》
태명은 구역질이 나는것을 겨우 참으며 웃음으로 맞았다.
《덕실이가 배를 가지고 강을 건넌건 아니겠지요?…안방에는 사람이 없고 나루터에는 배가 없으니 당연히 의심할수밖에 없지만…헤헤… 설마…》
놈은 이렇게 말하면서 짐짓 태명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오?》
《빨갱이 한놈이 감옥을 뛰쳐나와 경관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망을 쳤답니다.》
《그래요? 어이구, 어쩌면 그런 일이…》
《그놈은 총알을 맞고 분명히 이쪽으로 도망쳐왔거든요…》
《어디로요?》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직이 물었다.
《덕실이는 어디로 갔죠?》
《좀 일이 생겨서 어제 아침 일찍 영천(永川)에 있는 큰고모네 집에 갔지라우.》
《틀림이 없겠지요?》
《그럼요…》
《좋소, 좋소. 내 당신 말을 믿을게요… 그렇다면 그놈은 분명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넜구만요… 여봐요! 요즘 덕실이가 생각을 많이 했겠지요? 마음을 돌리지 않던가요? 참으로 덕실이의 마음을 알수가 없구만… 하하… 덴상! 아무튼 당신만 믿겠으니 힘 좀 써주시오! 오늘 난 많이 바쁩니다. 다음에 또 오지요. 덕실이가 돌아오면 의중을 좀 떠보시지요. 자, 그럼 잘 부탁할게요!》
녀색에 미친자였다. 이놈은 좀 더 선색을 찾을수 있었지만 어쩐지 유야무야 해가지고 돌아갔다. 태명은 한가슴 막혔던 숨을 후  내쉬였다. 하지만 석고상처럼 그자리에 굳어져있었다.
안개속에서 신유성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봐라! 모두 집합!》
일분후, 한참 강을 건널지 모를 배를 향해 추격자들은 한줄로 서서 어지럽게 총을 쏘아댔다.
총소리는 고요한 나루터를 찢으며 짙은 안개장막을 헤가르고 멀고 가까운 산골짜기에 각각 다른 울림으로 퍼져나갔다.


2. 돌배골

나루터에서 쭉 뻗어올라간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따라 약 2리정도 가다가 산코숭이를 에돌아가면 왼편에 돌배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이 골의 원래 이름은 이렇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돌배골이라고 불렀는지 이 고장 사람들도 잘 모른다. 아무튼 지금은 모두가 돌배골이라 부른다. 아마도 이 골짜기 주변에 돌배나무가 많이 자라고있는 까닭일것이다. 양춘 4월이면 농가집 배나무들은 하얀 구름같이 결백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금세 후둑후둑 떨어져 이를 보는 이들에게 처량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 마을의 초가지붕들은 마치 사탕과자에 붙어있는 땅콩을 련상케 한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초가집들 사이에 고래등같은 기와집 두채가 서있었다. 그것은 마치 중아세아산(産) 락타의 잔등을 련상케 했다. 바로 이 두채의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둘러싼 그 주변의 초가집들은 세세대대로 조심스럽게 령주의 시중을 들고있는 노예들을 방불케 했다. 이 두채의 기와집은 그 외면적인 위풍에 걸맞게 이 돌배골 수백명 농사군들의 목숨을 틀어쥐고있었다.
이 마을을 쥐락펴락하는 두 지주(地主)네 집이였다. 하나는 최진점(崔進點)이라는 지주인데 어찌나 욕심이 사나운지 마을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뒤에서 모두 《최돼지(崔肥猪)》라고 불렀다. 또 하나는 편수달(片守達)이라는 지주인데 그는 편깍쟁이(片剝皮)이라는 별명을 갖고있었다. 그는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자인데 이 마을의 툰장을 맡고있었다. 그는 비둥비둥 살이 찐 최돼지에 비해볼 때 왜소하고 바짝 마른편이였다. 이들 두 지주는 동맹자이기도 하지만 또 서로 상대를 거꾸러뜨리려고 안달을 떠는 무서운 경쟁자이기도 했다.
최돼지의 상통은 마치 도끼목수가 만든 장롱처럼 투박하게 생겼는데 그는 그 자신의 생김새처럼 사리를 판단하고 일을 처리할 때 좀 거친 점은 있어도 패기와 과단성이 있었다. 편깍쟁이는 최돼지와 달랐다. 편깍쟁이는 속이 좁고 철두철미한  자린고비였다. 그는 족제비처럼 눈치를 잘 보고 꾀가 많았다. 그는 남과 거래할 때 옴니암니 따지기를 좋아하고 천방백계로 리득을 챙겼다.  
두 지주에 대한 최돼지네 소작인들의 평판은 이러했다.
만약 최돼지가 지주가 아니라면 꼭 소도둑이 되였을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꼭 흉기를 들고 산속에 숨어 오가는 행인들을 터는 산적(山賊)이 되였을것이다. 최돼지에 비할 때 편수달은 대단히 얌전한 편이라 하겠다. 그는 최돼지처럼 큰소리를 치고 제자랑을 하는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살 기여드는 목소리로 말하고 몸조심, 입조심을 잘했다.  아무리 큰일이 닥쳐도 그는 유태인 상인과 같이 무서운 인내심을 보여주고 꾀를 부려 난국을 타개했던것이다.
돌배골의 이 두 통치자는 일찍 서로 리해관계가 맞지 않아 아옹다옹 싸운 일이 있어 속으로는 서로 미워하고있었지만 겉으로는 이럭저럭 손잡고 사이좋게 지내고있었다.
일제통치시기에 있었던 일이였다.  어느 흉년이 든 가을, 삼남평원(三南平原)의  소작농들이 감조투쟁(減租)의 불길을 지폈다. 이 투쟁의 불길은 돌배골까지 번져왔고 소작농들의 함성은 두채의 기와집 기둥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때 두 지주는 약삭바르게 머리를 굴렸다  뒤주에 있는 량곡이 열석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을 몽땅 그들의 뒤심이 돼줄 일본인들에게 보내주었다  결국 두 지주는 큰 덕을 보게 되였다. 애초에 무서워 벌벌 떨던 두 지주는 마침내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되였고 그 위세를 등대고 소작농들과 맞설수 있었으며 끝끝내 소작농들을 이길수 있게 된것이다.
그러나 그번 폭동을 진압한후 그들 둘의 사이는 다시 예전처럼 버성기게 되였다. 편가네는 최가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보루를 만들었고 최가네도 문을 단단히 닫고 두주먹을 부르쥐고있었다. 서로 기회를 잡아 상대를 삼켜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었다.
그런데 돌배골의 태평세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작농들이 바람 만난 강물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여 서로 얼굴을 돌리고있던 두 지주는 또다시 손을 잡게 되였다.
평소에 지주에 대한 원한을 가슴속에 묻어만 두고 감히 터놓지 못했던 소작인들은 자신들도 투쟁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만약 다른 놈들의 간섭이 없다면 그들은 정말로 두 지주를 엎어놓고 한껏 두들겨주었을것이다.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을 이루는가! 소작농들이 본때를 보여주자 두 지주는 속으로는 앙앙불락하고 개 벼룩 씹듯 하면서도 이제는 감히 예전처럼 소작농들을 업신여기지 못했다. 두 지주는 터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소작농들이야말로 자기들의 막강한 적수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 날 오후, 소작농들이 또 술렁거리는 조짐을 보이자 편깍쟁이는 최돼지를 기다리다 못해 오래만에 최돼지네 집을 찾아가게 되였다. 《8.15》광복후인 1945년 가을부터 소작농들이 덮어놓고 3.7조로 소작료를 낸 이래 편깍쟁이는 처음으로 최돼지네 집을 찾은것이다.
《최주사님, 계신지요?》
최돼지는 찾아온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느긋하게《어험!》하고 헛기침을 떼고 문도 열지 않은채 머슴들에게 오만한 어투로 물었다.
《누구야?》
편수달은 벌컥 화가 동했지만 참을수밖에 없었다.
《나요. 편가라니까.》
편수달은 두 음성이나 높은 불쾌한 소리로 대답했다.
《아이고, 어…어떻게…어떻게…》
삐꺽 소리와 같이 문이 펄쩍 열렸다. 두 지주는 서로 대충 인사를 나눈후 자리에 앉았다. 편깍쟁이가 먼저 찾아온 사연을 자초지종 여쭈었다. 그랬더니 최돼지는
《글쎄 말이우? 이 일때문에 나두 편령감을 찾아가 보려던 참이였소… 참 잘 오셨수!》
하고 대꾸했다. 최돼지의 유들유들한 얼굴에는 분명 어두운 그늘이 비꼈다.
두 지주는 잠시 묵묵히 앉아있었다. 두 지주의 머리속에는 잊을수 없는 한가지 일이 떠올랐다. 14년전의 일이였다. 경찰은 잡아간 소작농들가운데서 소작쟁의의 주모자인 박을룡을 3년 판결에 언도했다. 후에 박을룡은 탈옥을 하다가 다시 붙잡혀 심판을 받게 되였는데 2년형이 더 추가되여 5년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였다. 그런데 4년 남짓이 옥살이를 하고 이제 일곱달만 지나면 만기석방이 될무렵에 박을룡은 무슨 병때문인지 덜컥 감옥에서 죽고말았다.
《이 개같은 자식들아, 내가 너희들을 침대에서 편안히 죽게 할줄 아느냐?》      
손에 수갑을 차고 끌려가던 박을룡이 이젠 이겼노라고 뒤짐을 지고 서있는 두 지주를 향해 입술을 깨물고 분노에 찬 눈길을 날리면서 하던 말이다. 그 무서운 장면이 오늘 또 두 지주의 머리속에 떠오르는것이였다.
박을룡의 아들 장손은 그때 겨우 16살밖에 안되는 소년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지역에서 이름난 힘장사로 성장하였다.
장손은 그때나 지금이나(아니, 14년간의 비바람을 맞아 더욱 볼품없이 낡아버렸다) 그냥 오두막에 살면서 최돼지의 땅을 맡아 소작하고있었다. 최돼지는 소작농들의 여론과 반항이 두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을룡이가 소작을 맡았던 땅을 여전히 그의 아들 장손이 다루게 하였다.
해마다 단오절이 되면 장손은 군청의 씨름장(우승한자는 황소 한마리를 상으로 받을수 있다―역자)에 나가 황소를 타가지고 돌아와 음식을 장만해 마을사람들을 대접했다. 그러면 배를 곯던 마을사람들은 허리띠를 풀어놓고 먹을수 있었다.
그는 호쾌한 성미에 욕심을 부릴줄 몰랐고 언제나 남의 일을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그런 정직한 사내였다. 그래서 장손은 마을사람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있었다. 장손은 최지주와 편지주를 제외한 모든 돌배골 사람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했다. 그 까닭에 마을사람들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일만 있으면 장손을 찾아가곤 했다.
아버지가 옥사한후 장손은 더욱 과묵해졌다. 그는 아버지의 말만 나오면 아예 철문처럼 입을 다물고있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기의 원한과 슬픔을 내비치지 않았다.  
장손은 묵묵히 농사만 짓고있었지만 그 건장한 모습은 미상불 최돼지와 편깍쟁이에게는 점점 공포의 대상이 되였다. 과거도 지금도 승자(勝者)로 자부하던 최돼지와 편깍쟁이였지만 가끔 그들의 머리속에는 장손의 우람찬 모습이 섬뜩하게 떠올랐던것이다. 두 지주는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을수 있는 상팔자를 타고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 불길한 그림자 장손의 형형한 눈동자와 건장한 체구를 떨칠수가 없었다.
14년전, 그 비장한 생사판가름을 할 때 박을룡을 내놓고도 또 한사람이 죽었었다. 전칠성(田七星)이라는 사내였다. 그는 혼자서 쫓아오는 경찰을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사정없이 찌른후 사품을 치며 흐르는 강물에 뛰여들어 평생의 원한을 풀지 못한채 죽고말았다.
그때로부터 의지가지없는 두 남매 13살 먹은 태명과 어린 덕실이는 나루터에 있는 숙부네 집에 얹혀살게 되였다.
이무렵 돌배골의 두 지주는 장보러 가거나 한가하게 나들이를 할 때면 강을 건너곤 했다. 특히 편깍쟁이는 강을 건널 때마다 우람지고 영준하게 생긴 청년―얼굴에 구레나룻이 검실검실한 전태명과 마주치면 어쩐지 어색해져서 슬그머니 딴전을 피우곤 했다. 더우기 물살이 센 강심에 이르면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만약 저 거센 강물때문이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배가 뒤번져진다면…이런 생각이 든 편수달은 후들후들 떨면서 죽기내기로 배전을 틀어잡곤 했다.
《허지만 문제는…》편깍쟁이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눈앞에 얼른거리는 젊은 배사공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는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제는?…》최돼지도 번대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도 가만히 엿듣는 사람이 없건만 편수달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장손이를 매수합시다요… 말하자면 우리 편으로 끌어당겨야죠.》
편수달이 오래전부터 생각한 간교한 계책이였다.
《장손? 음, 좋긴 좋은데… 말을 들을가? 그눔이…》
최돼지는 한편 찬성하면서도 한편 의심쩍은 눈빛을 지었다.
《왜 안 듣겠어요?…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지 않습니까?》
편수달은 제법 신이 올라  
《그놈이 나이는 어리지만 위신은 대단하단 말씀이예요. 또 엄청난 힘장사지요… 만약 장손이란 놈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면…아무렴, 돌배골이 그야말로 천년만년 무사태평해지고말고요.》
하고 헐값으로 장손을 매수하기로 하고나서 이젠 살았구나 하고 코노래를 불렀다.
최진점도 편깍쟁이 말에 얼마간 마음이 동했다.
이리하여 박장손을 매수하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는 손쉽게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실제문제를 놓고는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약아빠진 편수달은 장손이 분명 최돼지의 땅을 부치고있는것만큼 장손을 매수하는데 드는 비용은 반드시 최돼지가 전담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최진점에게 먹혀들리 만무했다. 땅주인은 모든 소작농들의 원쑤로 되는셈이니 너나 할것없이 폭동을 진압할 의무가 있고 여기에 드는 비용은 골고루 분담해야만 한다는것이 최돼지의 주장이였다.
어느덧 땅거미가 들었다. 편깍쟁이는 하는수 없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3대7의 비례로 분담하자는것이다. 하지만 최돼지가 이를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그는 편깍쟁이가 어물어물하는 기회를 틈타 장죽으로 재떨이를 탕 치면서 더욱 맹렬한 반격을 가해왔다.
밤이 깊었다… 최돼지가 한사코 버티는 바람에 5대5의 비례로 끝을 본 편수달은 락태한 고양이상을 해가지고 최돼지네 집을 나섰다.


3. 부상자

박장손네 집뒤에는 두길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마치 작두로 썩둑 자른것 같은 낭떠러지였다. 그 낭떠러지밑에 돌배나무며 풀이며 벼짚들로 교묘하게 가린 작은 땅굴입구가 있었다.
이 땅굴의 비밀을 알고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장손 한사람밖에 없었다. 퍼그나 오래전의 일이지만 소작농들이 소작쟁의를 할 때 타곳에서 파견되여온 지도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미 저세상으로 간 박을룡과 칠성이 비밀리에 파놓았던것이다.
이 땅굴을 얼마나 귀하게 썼던가. 무릇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장손의 보호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 땅굴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숨어있다가 깊은 밤이 되면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지군 했다.
이무렵 땅굴안에서 가느다란 등잔불빛이 새여나오고있었는데 웬 사람이 삿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그는 목침을 베고 헌 탄자를 덮고있었다. 깊은 잠이 들었는지 두눈을 꼭 감고있었다. 그 옆에는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있었고 젖은 수건이 얹혀져있었다. 문득 웬 그림자가 조용히 들어온다. 죽을 담은 그릇을 든 덕실이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꿇어앉아 죽사발을 내려놓고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리니 그녀의 머리에 붙어있던 하얀 배꽃이파리가 눈을 감은 사나이의 눈섭에 사풋이 떨어진다. 사나이가 눈을 떴다. 까맣고 반짝반짝 빛나는 덕실이의 눈망울이 보인다. 그는 안깐힘을 써가면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난 김승하(金承夏)라고 합니다.》
사나이는 말을 마치고 또 힘없이 눈을 감았다.
덕실이는 직접 배를 저어 이 사나이를 실어왔고 또 2리도 넘는 가파른 길을 부축해 땅굴까지 오는동안 어쩐지 이 사나이에게 호감을 갖게 되였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후 사나이가 돌연히 자기의 이름을 밝히면서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어쩐지 계면쩍은 생각이 들었다.
사나이는 너무나 허약하고 피로해보였다. 상처가 욱신거리고 불덩이같이 열이 올라 가끔 까무러쳤다가는 깨여나곤 했다. 그는 가늘게 신음소리를 내다가는 또 까무러쳤다.
이 며칠동안 순진한 덕실이는 혼자서 사나이의 시중을 들고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 낯선 사나이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감을 느꼈다. 지어는 이 사나이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온것처럼 그의 나이나 성격, 그리고 경력까지도 속속들이 알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름할수 없는 따뜻한 감정에 휘말려들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나이가 마치 천리밖에서 문득 찾아온 낯선 손님처럼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고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가. 덕실이는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사실 나는 이 사나이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은가? 아주 먼 곳에서 바람처럼 왔다가 언제든지 가고싶을 때는 또 바람처럼 갈 사람이 아닌가?… 덕실이는 어쩐지 슬퍼지고 우울해졌다. 마음의 샘물에 재가루가 날리는것만 같았다.  
덕실이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다가 살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어찌됐든 의원을 불러오는게 좋을것 같아요.》
그녀는 근심스러운듯 한숨을 내쉬더니 뜰에 앉아 도끼자루를 손질하는 장손에게 땅굴에 있는 환자의 병세를 두고 의견을 내놓았다.
《의원을 모셔온다?…어데 가서 의원을 모셔온단 말이냐? 총상을 입은 상처를 치료해달라면 경찰에 고발하지 않을 의원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장손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밭갈이를 한다거나 씨름장에 나선다거나 하는 일은 더 말할것 없고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어도 장손은 절대로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성미였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는데는, 특히 외상(外傷)을 치료하는데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덕실이를 집에 가지 못하게 붙잡아둔것도 그때문이였다.
《그럼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한대요?》
《이젠 죽도 넘기지 못하는데…》
《……》
장손은 대답이 없다. 그는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는지 머리만 긁적거렸다. 슬쩍 고개를 들고보니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돌배나무꽃잎사이에 덕실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눈가에는 맑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장손은 바삐 일어났다. 도끼자루에서 깎은 나무찌끼들이 부스스 몸에서 떨어졌다.  


4. 교섭

최돼지가 쌀 한자루를 박장손네 집으로 보내왔다. 이런 희한한 일이라고야,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였다.
장손은 쌀자루를 메고 온 머슴에게 물었다.
《쌀은 왜 가져왔지?》
《모르지요… 난 가져가라니 메고왔을뿐인걸요.》
머슴은 쌀을 보낸 까닭도 모르고있었다.
《도로 메고 가시우!… 수고스럽게 가져온걸 돌려보내서 죄송하지만 난 뒤가 켕기는 일을 할수 없단 말이우. 얼른 도로 메고가시우. 》
《어이구 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우! 도로 메고가는건 큰일이 아니지만 그 어르신이 노발대발한다면 난 어떡하우?… 괜히 쇤네를 욕보게 하지 말구 어서 받으시우!》
장손은 벌벌 떠는 머슴의 상통을 보니 한편 우습고 한편 가련했다.
《그럼 거기 놓게. 흥, 정말 재수가 없군…》
장손의 말이 떨어지자 머슴은 벽에 기대놓은 지게에서 제꺽 쌀자루를 내려놓더니
《어이구 고마워라. 그럼 조금 있다가 오시우. 쇤네는 먼저 주인집으로 가보겠수다. 군말 없이 받아주더라고 말씀을 드리죠. 그럼 잘 부탁하겠수다. 난 먼저 가오다.》
하고 부랴부랴 빈 지게를 지고 자리를 떴다.        
장손은 머슴의 구접스러운 몰골을 보니 가련하기도 하고 역겹기도 했다. 하지만 최돼지의 흉물스러운 상통을 떠올리니 그럴법도 하였다. 최돼지가 머슴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루고있는가! 순간 장손의 가슴속에서는 최돼지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울뚝 치밀어올랐다.
장손은 최돼지가 보내온 쌀자루를 지고 일어섰다. 등에 실린 쌀자루를 가늠해보니 실제로 다섯되쯤 적은것 같았다. 장손이는 최돼지가 편깍쟁이를 속이고 가만히 둘이 합의를 보고 내기로 한 쌀 한자루에서 다섯되를 덜어낸줄은 전혀 모르고있었던것이다.
쌀자루를 지고 장손은 최돼지네 집으로 씨엉씨엉 걸어갔다. 마을어귀에 이르렀을 때(장손네 집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산기슭에 있었다) 시커먼 초가지붕아래의 주저앉은 흙마루에 웬 아낙이 퍼더버리고 앉아있었다. 등에 업은 애를 달래느라 웅얼거리면서 힘들게 캐온 산나물을 다듬고있었다. 이 집도 겨와 풀뿌리로 겨우 살아가고있음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피기 한점 없는 아낙네의 퉁퉁 부은 얼굴에는 검버섯들이 어지럽게 돋아 보기에도 흉했다. 이 아낙의 집에 있는 쥐들도 달아나지 않는다면 모두 굶어죽을것 같았다.
《장손오빠, 지고 가는게 뭐요?》
아낙네는 퍼렇게 풀물이 든 손으로 등에 업은 어린애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장손은 차마 대답을 할수 없었다. 쌀이라고 말한다면 이 아낙에게는 너무나 참혹한 일이 될것이였다. 그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어물해버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낙은 장손이 듣지 못했는가 해서 또다시 캐물었다.
《지고 있는게 뭐유?…좀 쉬다 가시지?》
장손 자신은 툭 털면 먼지밖에 없는 홀아비요, 소작농이 아닌가. 헌데 가을철도 아닌데 백주에 쌀자루를 메고 마을을 지나고있으니 어찌 보는이들이 묻지 않겠는가. 일이 이 지경이 되고보니 장손은 조금은 설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장손은 지게를 내려놓고 막대기로 받친후 흙마루에 걸터앉으며
《쌀이요.》
하고 대답을 하고나서 담배쌈지를 꺼내 무릎에 놓고 주머니에서 담배종이를 더듬었다.
《쌀?》
아낙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더니 옆에 앉은 사람과 지게에 묵직하게 실려있는 쌀자루를 번갈아보았다.
순간 아낙의 우묵한 두눈은 이상하게 빛났다. 겨와 풀뿌리로 겨우겨우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쌀은 얼마나 큰 감동을 줄수 있으며 또 얼마나 큰 유혹으로 되는것인가?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쌀에 의거해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런 생각이 든 장손은 와락와락 쌀자루를 풀고 한바가지 푹 퍼내서 굶주림에 지친 불쌍한 아낙의 치마에 쏟아놓고싶었다.
장손은 온 마을사람들에게 소리치고싶었다.
《여보시오! 모두 오십시오! 여기 쌀이 있으니 모두 와 맘대로 가져가십시오!》      
하지만 장손 자신도 언제 쌀알구경을 했던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장손은 불같이 타오르는 욕망을 리성의 찬물로 눌러버릴수밖에 없었다. 장손은 다시 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내가 바라는건 쌀 한자루가 아니다. 수백수천만자루의 쌀을 얻어 돌배골의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을수 있게 해야 한다. 농사군들의 쌀뒤주마다 쌀이 넘치게 하자면 이따위 쌀 한자루에 발목을 잡혀서는 아니 된다.
장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달음박질하듯이 마을로 들어갔다. 그는 최돼지네 집 대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너무도 놀란 최돼지는 한달음에 달려나와 마루에서 한쪽 신을 신더니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까닭없이 보내온건 절대로 받을수 없수다… 한톨도 다치지 않고 그대로 지고 왔수다.》
장손은 지게를 벗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저쪽 벼짚무지 뒤쪽에서 한걸음 먼저 온 머슴이 흘깃흘깃 눈치를 보고있었다.
《뭐, 뭐, 뭐라구? 그, 그렇다면 자네가 내 호의를… 》
최돼지의 상통은 새빨간 감처럼 달아올랐다가 금시 배추이파리처럼 푸르죽죽해졌다.  최돼지가 길길이 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데 벼짚무지 뒤에 숨어있던 머슴은 자라처럼 모가지를 움츠리고 두손으로 귀를 막고있었다. 최돼지로 놓고말하면 근년에 처음으로 당하는 수치였다.
《이 마을에 배를 곯고있는 집이 어찌 우리 집뿐이겠수? 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우. 아직 힘이 있고 눈앞에 닥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할수 있기때문이외다. 이 마을에는 저보다 더 어려운 분들이 많고도 많수다. 모두들 두눈을 멀쩡하게 뜨고 배를 곯고있는 모양은 차마 눈 뜨고 볼수가 없수다. 이런 사실이야 어르신도 잘 알고있지 않수? 아무튼 저 혼자만 배부르게 먹을수는 없수다! 죄송하지만!》
장손의 름름한 자태는 그야말로 광풍폭우에도 끄떡없는 큰나무를 방불케 했다. 그는 조금도 꿀림이 없었다. 그는 치솟는 분노를 눅잦히면서 자기의 생각을 또박또박 털어놓았다.
《이건 자네를 특별히 생각해서 보낸건데…》
최돼지는 큰소리를 쳐도 장손이 움쩍하지 않자 슬쩍 목소리를 낮추어 구슬렸다.
《저를 특별히 생각해서라구요? 참으로 소 웃다 꾸러미 터질 일이군요. 왜 저만을 특별히 생각해주시죠?… 아무 까닭없이 받아먹으면 마음이 불편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리구 할 말도 못하게 되구요. 그런게 아닙니까?》
《허허…괜한 근심을 하고있군… 아무려면 내가 자네에게 청을 들 일이 있어 그러겠는가? 아니면 내 청을 들어줄 방법이 없어 그러는건가? 천만에, 그런 근심은 말게. 난 그런 각박한 사람이 아닐세.》
《저에게 청을 든다고요? 이 사람의 집은 서발막대기 휘둘러야 거칠게 하나 없수다. 그러니 근심걱정이 없수다. 허지만 밤마다 머리맡에 방망이를 놓고 문을 열어놓고 자고있지요. 혹시 도둑놈이 들어온다면 그놈의 주머니를 털려구요. 하하 하…》
《그렇다면 무서울게 뭔가? 자넨 공연한 의심을 하고있네…》
최진점은 슬쩍 마당에 내려서더니 큰 인심이나 쓰듯이 냉큼 쌀자루를 들어 장손이 지고온 지게에 올려놓으려 했다.
《안되우!》
장손은 잽싸게 한손으로 지게를 들고 주춤 물러서면서
《당당한 사내가 되기 위해 거절하는거웨다… 이젠 가볼테니 안녕히 계시우!》
지게를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멘 장손은 막대기로 다가드는 사나운 개를 쫓아내면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장손의 뒤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최돼지는 분을 이기지 못해 쌀자루를 든채로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자식!》
최돼지는 쌀자루를 땅에 내팽개치더니 두눈을 부릅뜨고 코구멍을 벌씬거리면서 윽별렀다.
《편깍쟁이야, 너에게 닷되 쌀을 돌려줄것 같으냐?》


5. 밤중에 찾아온 사람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돌배골 논밭사이 길에 웬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마치 유령처럼 밭둔덕을 따라 재빠르게 걸어갔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는 낮아지거나 아예 들리지 않았다… 마치 하늘의 구름이 잠시 전야에 그림자를 던지고 지나듯이 그도 들판에 띄염띄염 이상한 정적을 남기고 지나고있었다.
그는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개들을 따돌리고 요리조리 둔덕길을 에돌아 돌배골 어귀에 들어서더니 잠간 멈추어서서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감쪽같이 장손네 집뒤에 나타났다.
그는 집안의 동정을 살피는것 같았다. 그는 살그머니 처마밑에 다가가 문창에 귀를 갖다대였다.
이때 집뒤 낭떠러지 아래에 웬 사람이 별안간 나타나더니
《꼼짝 말엇! 움직이면 대갈통을 박살낼테다!》
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무서운 경고를 했다. 깜짝 놀라 돌아서보니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집주인 장손이였다.
《아니, 장손형님이 아니오?…》
그 이상한 남자는 반가운 어조로 알은체를 하면서 태연스럽게 장손한테로 두어걸음 다가섰다.
《도대체 누구시우?…》
장손은 마치 팽팽한 화살시위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재차 물었다.
《아니, 날 모르겠소?》
《목소리는 좀 귀에 익은데… 》
《혹시 기억하고있을는지요… 심권(沈權)이라는 사람을요…》
《심권?》
《이 집 땅굴에서 저의 수염을 깎아주었지요…》
《아, 알겠소.》
《수염을 깎고 나왔다》는 그 한마디 말에 장손은 기억의 쪽문을 열수 있었다.
일순간 장손은 한단락 옛일을 떠올리게 되였다.
9년전 늦은 가을, 그때도 오늘밤처럼 어두웠다. 장손은 경찰의 추격을 받던 정치범을 며칠동안 남모르게 집뒤에 있는 땅굴에 숨겨주었다. 더부룩하게 얼굴을 덮은 구레나룻을 깎아주니 여나문살이나 더 젊어보이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 텁석부리는 비록 땅굴에 숨어 며칠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남몰래 장손과 자주 만났다. 그는 농사군에게 땅을 주지 않는 불합리한 현실과 제도에 대한 증오의 씨앗을 이 순박한 소작농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그런데 바람처럼 떠나간후 그는 전혀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장손의 가슴에 심겨진 증오의 씨앗은 어느 껍질을 터치고나와 건실한 싹으로 자라났다. 장손은 너무도 반가워서 솥뚜껑같은 손으로 심권의 손을 으스러지게 부여잡고 흔들었다.
《잘 왔어요. 정말 오기를 잘했어요!》
여름내 뼈가 빠지게 일하고도 쌀밥 한번 배불리 먹을수 없는 세월이였다. 돌배골 사람들은 실망에 잠긴채 힘든 모내기를 겨우 끝마쳤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더욱 큰 울분과 피로에 휩싸이게 되였다! 이제는 밀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황금색 밀파도가 출렁이는 계절이지만 욕심꾸러기인 최돼지와 편깍쟁이에게 거두어들인 밀을 모조리 빼앗겨야 했던것이다. 그리고 특무나부랭이들이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서 마구 곤봉을 휘두를것이였다. 그러면 다 찌그러진 문틈사이에 보이는 농군들의 눈빛에 아물거리던 한가닥 희망은 마치 춘삼월의 봄눈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질것이였다. 마치 서리 내린 이른 아침에 소여물을 끓이는 솥뚜껑을 열었을 때 더운 김이 확 일듯이 농군들의 집안에 불만과 원한이 괴고있었다. 이렇게 부글부글 끓고있는 불만과 원한의 도가니에 불 달린 성냥가치만 던진다면 돌배골 십리안팎은 단번에 불길이 치솟을것 같았다. 이름 못할 그 어떤 힘이 자라고있었던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탁월한 조직력을 가진 지도자 심권이 나타난것이다. 밤중에 온 손님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김승하동지는 그냥 이 마을에 숨어있겠지요?》
《네… 그건 어떻게 알고있습니까?》
심권은 대답이 없다. 심권은 당에서 파견한 사람이였다. 그는 묵직한 배낭을 벗어 땅에 내려놓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똥 하나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으며 떨어지고있었다.


6. 화 합

밀을 거두어들이기전인데 일여덟명의 마을청년들은 거의 매일 밤마다 박장손네 집에 모여들어 회의를 했다. 장손, 심권, 그리고 비록 상처는 다 나았지만 여전히 얼굴이 창백한 김승하(심권은 상처를 치료하는 의료도구와 약품을 갖고왔을뿐만 아니라 몸소 김승하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더우기 장손이 극진하게 보살펴주고 덕실이가 정성을 들여 간호해준 덕분에 김승하의 상처는 빨리 나아지게 되였다)도 참가했고 강 건너 마을에 있는 태명이네 남매 둘도 번갈아 참가했다.
승하는 피기 없는 얼굴에 홍조를 띠우고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북조선의 새로운 변화들이며 김일성장군에 대한 이야기며 쏘련홍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토지개혁과 번신한 농민들의 기쁨에 대해서도 말했다.
심권은 신문지로 초담배를 말아 입에 물고 구새통처럼 연기를 내뿜고있었는데 그의 눈은 천정만 쳐다보고있었다. 이야기를 듣고있는 장손도 적이 격동되여 주먹을 쥐였다 폈다 하기도 하고 근육이 울뚝불뚝한 팔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덕실이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저도 모르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았다. 청년들은 기침소리 하나 없이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도정신해서 듣고있었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가 먼 곳도 아닌 이 북녘땅에 존재하고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뿐이였다.
깊은 밤이 돌배골에 깃들었다. 돌배나무가지에 앉은 부엉이의 불길한 울음소리가 고즈넉한 마을의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모여앉은 사람들에게 어서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고 경고하는것만 같았다.
승하는 선전고동사업을 책임졌고 심권은 조직사업을 책임졌다.
승하는 마을사람들의 가슴속에, 허구한 세월 소작농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온 마을사람들의 가슴속에 반항의 불씨를 심어주었고 심권은 그들을 단합시켜 해방의 길로 나가게 하였다. 승하는 불같은 열정으로 마을사람들을 대했고 심권은 강철같은 의지로 마을사람들을 묶어세웠다.
사람은 어머니의 품에서 태여날 때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 않는다. 농사도 하지 않는자들이 어떻게 땅을 가질수 있단말인가? 지주의 땅을 몰수하는건 마구 빼앗는게 아니다. 그건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오는것이다. 땅을 가지게 된다는 그러한 새로운 관념은 마치 오랜 가물에 말라버린 땅에 한바탕 소나기가 내린것처럼 돌배골 사람들의 머리속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애초에는《그렇게 될수 있을가?》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두 선구자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당연한 도리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였다.
앞길에 어떤 적수들이 있는가? 그놈들을 무찔러버리자면 또 무엇이 필요한가? …이젠 소작농들도 이러한 물음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명확한 대답을 줄수 있었다. 리승만, 최돼지, 편깍쟁이는 같은 통속이다. 경찰과 암살단도 그놈들과 같은 무리다. 이 개같은 놈들을 타도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굳게 뭉쳐야 한다.
쏘련인민들이 파쑈강도들과 투쟁하는 가운데서 불멸의 위력을 과시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도 신민주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쏘련을 비롯한 세계의 신민주주의국가와 단결해 멀지 않은 장래에 전쟁과 비애, 착취와 압박이 없고 오직 평화와 행복, 자유와 광명만 있는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조선도 북조선과 같은 로동법령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개혁을 이룩하자면 미제와 그 주구 리승만 매국역적을 타도하고 민주주의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리승만을 반대하는 투쟁과 그 정권을 넘어뜨리는 투쟁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
그렇다면 돌배골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봉기에 일떠선 수백수천개의 부락들이 서로 호응해 무기를 잡고 용감히 일어나야 할것이다.
돌배골의 투쟁은 결코 고립된것이 아니다. 돌배골 폭동의 불길은 꺼지지 않을것이다. 리조봉건시기 잔혹한 압박을 받았던 농민들이 일으켰던 폭동과 같이 돌배골의 사람들은 무장으로 무장을 대처해야 한다는 도리를 알게 되고 또 그들에게는 심권의 지도가 있다.
돌배골 사람들은 자기의 목표를 잘 알고있었다. 무수한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천만갈래의 시내물은 강을 이루고 다시 넓은 바다로 흘러가는 법이다. 30년전 위대한 쓰딸린이《첫째도 무장, 둘째도 무장, 셋째도 여전히 무장》이라고 말씀했거늘 그이가 가르쳐준대로 용감히 전진하면 되는것이다.


7. 전날밤

경찰서 부서장 신위성(申維成)은 두 지주의 요청을 받은데다가 관할구역내에 있는 마을들의 하곡징수(夏穀徵收)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무장한 두개 분대의 경찰을 거느리고 나루터로 왔다. 배에 앉아 떠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먼빛으로 신유성을 보자 눈을 찡긋거리면서 귀속말로 욕을 했다.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신유성은 배사공을 저만치에 있는 버드나무아래로 데리고가서 낄낄 웃으면서 쓸데없는 말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덴상! 한평생 배사공을 하고싶다면 몰라도…하하…》
얼핏 들어도 신유성이란 놈이 태명이를 보고 꿍꿍이를 치는것 같았다.
신유성이란 놈에게 있어서 강박과 권유는 같은 목적에 쓰이고있었다. 이를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일단 권유를 하다가 거절을 당하면 에누리없이 지독하게 보복을 했던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은근히 침묵을 지키면서 자기의 발끝만 내려다보고있는 나젊은 배사공을 동정하고있었다.
《범은 뭘 먹고 사는지? 왜 저런 악당을 물어가지 않는지?… 》
《뉘가 아니라나, 개같은 자식이지…》
《덕실이를 욕심내는거지 뭐겠어…》
《흥! 그렇게 쉽지 않을걸…》
《쉬! 듣겠어…경찰들이 이쪽으로 오고있어.》
두 경찰이 제 마음대로 배사공의 집에 들어가더니 부엌에서 물을 퍼마시고는 손수건을 꺼내 입과 이마빡을 뻑뻑 닦으며 나왔다.
한편 신유성은 젊은 배사공을 보고 다짐을 딴다.
《…벌써 점심이 지났군. 아무튼 래일은 생각을 굳혀야 해요. 아니지,  모레 오전에 강을 건너 돌아올터이니… 잘 생각해보시오. 그땐 덕실이를 데려갈수 있게 만들어주시오. 옛날부터 좋은 일은 서두르라고 했거늘…》
신유성은 말을 마치고 손목시계를 보더니 량미간을 찌프렸다.
태명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오더니 말뚝에서 바줄을 풀어 배우에 던졌다.
그날 밤, 최돼지네 사랑방에서 신유성을 모시고 술상을 차렸다. 하곡징수에 동원된 면의 직원과 청년단원(무고한 농민들을 때리고 공갈과 공포를 일삼는 살인단원)들이 밤늦게까지 큰 사발로 술을 마셔댔다. 그들은 취흥이 도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면서 일본춤을 추어댔다.
한편 편깍쟁이는 래일 저녁 자기네 집에서 여기 모인 사람들을 청해야 했다. 그래서 편깍쟁이는 어떻게 하면 최돼지보다 더 잘 차릴수 있을가 생각하느라고 자기에게 차려진 술은 마시는척 할뿐이였다. 그의 눈알은 차려놓은 음식가지수를 헤느라고 뱅글뱅글 돌아갔다.
지주들의 술상을 보면 가랑이 째지게 가난한 소작농들의 밥상과는 달리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왔건만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배를 곯았다. 하지만 지주들은 기름진 음식을 배가 터지게 먹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집집마다 모기불을 피워놓고 마당에 둘러앉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피와 땀으로 거둔 량식을 아무 일도 하지 않은자들이 질탕스럽게 먹고 마셔대는 소리를 듣고 앙상하게 야윈 자기들의 얼굴을 매만지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한편 낡은 바지를 오리오리 찢어 짚신을 만들고있던 장손도 최돼지네 집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있었다.
《큰일 났소. 장손형님, 빨리 와보우!》
누군가 허둥지둥 달려오면서 소리를 친다. 장손은 깜짝 놀라 일손을 놓았다.
《아이구, 우리 집 선돌이녀석이 최돼지네 집 연회 보러 갔다가 개한테 물려서 죽게 되였소!》
《어떻게 된 일이요?》
장손은 허리에서 짚신을 만들던 끈을 풀고 벌떡 일어났다.
《그놈들이 보지 못하게 애를 쫓았건만…애가 기를 쓰고 숨어서 보다가 발각된 모양인데 청년단놈들이 호랑이같은 개를 풀어 물게 했지우…》
《에끼, 이 자식들이!》
장손은 번쩍 낫을 쥐려다가 (참아야 한다! 이제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눅잦혔으나 낫을 쥐려던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했다.
강뚝을 따라, 태백산맥에서 뻗어내린 산코숭이를 따라 한갈래 오솔길이 있었는데 그리로 승하와 덕실이가 나란히 걸어가고있었다. 바람도 최돼지네 사랑방에서 나는 질탕한 소리를 실어오지 못했다. 승하는 덕실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있었다.
《아무튼 그놈은 꼭 구실을 대서 날 붙잡아갈거예요!》
《뭐가 무섭소. 그놈이 하자는대로 따르면 될게 아니요?…》
《아니?》덕실이는 너무 놀라 반짝 고개를 쳐들고 승하를 노려보았다.
《덕실이가 곱게 생기지만 않았던들 그놈이 그렇게 나쁜 마음을 품을수 있겠소. 영광이요, 영광.》
승하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아이 참, 무슨 롱담을 그렇게 하세요?》
《무작정 잡혀가기보다야 낫지 않소.》
《아니예요. 그냥 롱담을 한다면 난 가겠어요.》
《맘대로 하오…허지만 코앞에 닥친 일은 어떻게 하겠소?》
《상관하지 말아요…》
《상관하지 않아도 될가?》
《달아나면 될게 아니예요.》
《어디로?》
《먼 곳으로요. 》
《혼자서?》
덕실이는 대답을 못한다.
《그럼, 누구와 함께 가겠소?》
승하가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는 달빛이 반짝였다.

밤이 깊었다.
심권은 승하가 들어오는것을 보고 보던 책장을 접어놓고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아마도 마지막으로 만난것 같습니다… 아무튼 속마음을 다 털어놓아요…》
승하는 목침을 가져오며 대답했다.
《허허, 자넨 언제든지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돼있구만… 참 대단하오…하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없을것 같소.》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너무 근심을 마오. 내가 책임을 질터이니까. 자, 이젠 잡시다. 래일 밤은 지새워야 하니까. 빨리 불을 끄오! 모든 일은 래일에…》
심권이 들은바로는 두 지주 집에서 진수성찬을 차린다고 했다. 또 래일 아침에는 군청에 사람을 띄워 신유성을 모셔들인다고 한다. 그래서 저녁에 특무들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회의를 소집하였었다. 회의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편깍쟁이가 술상을 차리는 날에 야음을 타서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각기 열집 혹은 스무집씩 책임지고  동원을 해서 폭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리고 한쪽으로는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안해들 가운데서 몇몇 령민한 녀성을 동원해서 대낮의 련락임무를 맡게 하기로 하였다. 태명은 몇몇 청년들과 함께 군청에서 오는 경찰들을 막기로 했고 덕실이는 지도부(땅굴), 나루터, 행동대 사이의 련락을 맡기로 하였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심권이 마지막으로
《전체 돌배골 촌민중 가장 성망이 높고 의리적이고 건장하고 용감한 소작농을 선출해 이번 폭동의 총책임자로 모십시다.》
하고 옆에 앉은 장손을 돌아다보았다.
이리하여 단 한사람의 반대도 없이 장손을 대장으로 선거했다. 모두들 장손을 우러러보고 신뢰했던것이다.  
래일의 거사를 앞둔 승하는 여러가지 생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옆에 누운 심권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가볍게 코를 골고있었다. 승하는 이 철도공장 주물공 출신의 선배가 가지고있는 호쾌한 성격과 듬직한 성품에 탄복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덕실이를 잡아가려는 자를 절대로 래일모레까지 살려두지 않을거야.》
승하는 덕실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 그러나 만일…바로 이《만일》이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고있었다.
《그놈을 놓치지 말라!》
옆에서 자고있던 심권이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인다. 두눈을 감은 승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바늘끝처럼 예민해지는 인텔리의 신경발작을 누르고 벽쪽으로 돌아누우며 잠을 청했다.


8. 봉 기

우울한 태양은 선홍빛 구름사이로 울적한 얼굴을 내밀고있었다. 초가지붕, 마당, 벼짚낟가리에서 참새들이 소란스럽게 우짖었다.
장손은 삽작문을 열고 나오면서 마치 활을 당기듯이 쭉 기지개를 켰다. 거사의 시각이 각일각 다가오고있었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묵묵한 표정으로 돌배골의 아름다우면서도 처량한 아침정경을 바라보고있었다.
최돼지와 편깍쟁이네 굴뚝에서는 역을 떠나는 기관차처럼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있었다. 그러나 다른 집들은 부뚜막이 썰렁하고 구새통에서는 시허연 연기가 흐느적거리며 올라가다가 맥이 진하였는지 바람에 산산이 흩어지고말았다.
장손의 입가에는 한가닥 미소가 흐르고있었다. 그는 그날 회의에서 승하가 힘차게 호소하던 일을 되새겨보았다.
《…두꺼비같은 지주와 함께 살아간다는건 사철 뼈가 빠지게 일하는 성실한 농민들에게는 분통이 터질 일이요! 이젠 지주놈을 위해서 더는 밭을 갈고 김을 매지 맙시다! 지주들의 기와집을 부수어버리고 흉악한 두꺼비들을 잡아냅시다! 시퍼런 호미날로 돼지처럼 살찐 놈들의 등허리를 찍어버립시다!》
이날 량곡징수는 전례없이 순리로웠다.
신유성은 자기의 위풍에 소작농들이 압도된 결과라고 생각하였고 군청에서 내려온 직원들은 소작농들의《애국》열정이 높은 결과라고 제멋대로 해석했다.
무엇보다 최돼지와 편깍쟁이를 기쁘게 한것은 장손의 일이였다. 그들은 장손이 소작농들과 갈라지고있다고 생각했다. 장손이 비록 쌀을 받지 않았지만 수월하게 가난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을 깨달을것이고 지주들이 자기를 중요시하고있기에 쉽게 출세할수 있으리라 생각하고있을것이다. 하지만 직접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기는 면구스러워서 먼저 군청에서 내려온 관리들을 도와나서는것이리라. 아무튼 장손이 량곡징수를 도와준다는것은 그가 천천히 지주들쪽으로 쏠리고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다. 최저한 두 지주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
돌배골 사람들은 장손을 무조건 신뢰했고 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손이 한 말이 아니오?…그대로 합시다.》
농군들은 떨리는 손으로 감추어두었던 보리쌀자루를 메고와서 군청 직원들 앞에 내놓았다.
《이걸 보시우. 내 진작 말씀드리지 않습디까. 이 자식을 매수해야 돌배골이 무사태평해진다고 말입니다.》
편깍쟁이가 흥이 나서  최돼지의 허리를 쿡 찌르자 최돼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편령감의 말이 맞았어…흐흐…》하고 두눈이 한일자로 붙어가지고 슬슬 자기의 번대머리를 어루만졌다.
오후 일은 원래 생각했던것보다 더 쉽게 풀려나갔다. 그래서 군청에서 내려온 직원들은 점심을 먹을 때 또 술 두어잔씩 마셨다. 그들은 흥이 절로 나서 걸어가면서 코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보리를 징수하던 군청 직원들은 찌그러진 오두막에 와서 그만 거절을 당하게 되였다. 어제 저녁 개한테 물린 선돌이네 집이였다. 선돌이는 구들에 누운채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고있었다.
《아이고 원통한지고! 장손이가 언제 이렇게 더러운 자식이 되였지? 애비가 잡혀가 감옥에서 죽은 일도 잊었단 말인가? 흥! 육시할놈 같으니라고… 보리를 내놓으라구? 무엇때문에? 내놓고싶으면 자기것만 내놓으면 되는거지 왜 다른 사람까지 못살게 구는거야?… 난 죽어도 내놓을수 없어! 내 아들놈이 개한테 물려서 다 죽게 됐는데 량곡까지 내놓으라고? 아이고, 난 땅주인의 간을 끄집어내 먹어도 시원치가 않겠어! 시끄러우니까 썩 물러가!…》
연거퍼 들이닥친 불행에 절반 정신이 나간 선돌이 엄마는 사립문을 가로막고 앙칼진 목소리로 장손을 꾸짖었다.
상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 아낙네가 순순히 량곡을 내놓을리 만무했다. 총을 든 경찰도 이 아낙네의 안중에는 없었다. 그러니《변절한》소작농들이 어떻게 이 아낙네의 마당에 들어설수 있겠는가?
《정말로 미쳤네!… 왜 이 모양이야? 저리 비켜… 이거 정말 미안하구려. 어서 들어오시우… 아, 임자는 저리 비켜! 자, 어서 들어오시구려!》
한편 놀란 선돌이 아버지는 고추밭에 들어간 밉살스러운 병아리를 쫓아내듯이 자기의 마누라를 밀어붙였다. 그는 부랴부랴 삽작문을 열고 손님들을 집안으로 모셔들였다. 그는 한사코 달려드는 마누라와 함께 보리쌀자루를 군청 직원의 발밑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연신 팔소매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장손의 얼굴은 마치 탈을 쓴것처럼 무표정했다. 차마 그 광경을 볼수 없어 잠간 고개를 돌리니 울바자를 타고오른 노란 박꽃에 한마리 수벌이 빨려들어가고있었다. 탕녀에게 빠진 사내를 련상케 했다.
《어이고…이 망할놈의 녀편네가…》
사내는 버럭 고함을 질렀고 와당탕 밀어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사람 살려요! 》
아낙네가 당장 숨이 넘어갈듯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장손은 깜짝 놀라 돌아섰다.
주먹을 휘두른 군청 직원은 아낙네에게 뜯긴 손등을 주무르면서 무섭게 눈알을 부라렸다. 선돌이 엄마는 마당에 쓰러져있었는데 코구멍에서는 검붉은 피가 흐르고있었다. 선돌이 엄마에게 뜯긴자는 군청서기였다. 그는 시어머니 역정에 개배때기 찬다고 자루에서 보리쌀 한바가지를 퍼서 쫙 마당에 뿌렸다.
금시 선돌이 아버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입술을 악물고있었는데 두볼은 부르르 경련이 일었다.
당장 무서운 일이 벌어질것 같아 장손은 성큼 다가가 선돌이 아버지의 어깨를 잡으면서 눈을 찡긋해보였다. 이어서 장손은 부드러우나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를 데리고 들어가시오! …뒤일은 내가 다 처리하겠소.》
선돌이 아버지는 군말없이 입으로 피섞인 침을 내뱉으면서 치를 떨고있는 안해를 일으켜 세우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손은 천천히 돌아서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 근을 달아보시지요… 이게 몇되나 될가? 헌데 이 집에서 내야 할 량곡은 얼마더라…》
낮이 긴 여름인지라 태양도 지쳤는지 서산너머로 뉘엿뉘엿 지고있었다. 소란스럽게 량곡을 저울질하고 자루에 퍼서 담는 일도 기본상 끝났다. 서천자락을 붉게 물들이던 저녁노을도 사그라지고 서서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돌배나무가지에 하얀 달님이 걸리더니 점점 선명하게 떠오르고있었다.
편깍쟁이는 어제 저녁 최돼지네 집에서 있었던 연회 못지 않게 풍성한 술상을 차렸다. 박장손도 낮에 수고를 했다고 해서 특별히 초청을 받게 되였는데 그는 말석에 앉게 되였다. 신유성은 짐짓 장손의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요 몇년간 내가 장손씨를 잘못 보았군요. 오늘 보니 장손씨는 출중한 애국자로구만요! 자, 자, 어서 한잔 드시오.》
《그렇고말고요. 난 장손이가 자라는걸 옆에서 지켜보았지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장손이는 어릴 때부터 보통이 아니였지유!》
최돼지도 흐르는 장단에 맞추어 장손을 한껏 추어올렸다.
하지만 장손은 좌중이 칭찬해주는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저 무뚝뚝하게 앉아있을뿐이였다. 그는 자기에게 건네는 술잔을 받아 입술을 대는체하다가 슬쩍 품속에 쏟아버렸다. 그는 넌지시 술좌석의 분위기를 살폈다.
얼마후 모두가 술에 취해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떠들어댔다. 장손은 변소로 가는척하면서 슬쩍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는 헛간뒤에서 술안주를 받쳐들고 나오는 웬 아낙네와 마주쳤다.
《어떻게 됐소?》
장손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아낙네는 한손으로 앞치마를 만지면서 뒤를 돌아보더니 소곤거렸다.
《준비가 다 됐어요. 빨리 약속한대로 신호를 주세요!》
장손은 술좌석에 돌아와 앉자 신유성에게 술잔을 권했다. 장손은 마치 취한것처럼 두눈을 게슴츠레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청년단원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장손은 제법 저가락으로 밥상을 쿵작쿵작 두드려대면서 슬그머니 경찰서장의 허리춤을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저놈의 총을 잽싸게 빼앗을것인가? 어떻게 하면 심권이 가르쳐준대로 방아쇠를 당길것인가? 이처럼 긴박하면서 생소한 두가지 모험을 할 일을 생각하느라고 장손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신유성의 제의로 좌중은 술잔을 들고 트루만대통령의 건강과 리승만박사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축배가 끝나자 방금 헛간뒤에서 장손과 만났던 아낙네가 술안주를 받쳐들고 들어와 술상에 놓고나서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 다시 쓰더니 살짝 헛기침을 하고 나갔다.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있었다. 장손은 일분간의 시간이 하루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별안간 장손은 손에 잡았던 술병으로 옆에 앉은 부서장(副署長)의 얼굴을 들이쳤다. 술병이 깨졌다. 장손은 깨진 술병을 팽개쳤다. 부서장은 두손으로 피범벅이 된 얼굴을 가리며 악!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허리춤에서 장손은 번개같이 총을 앗아냈다. 장손은 벌떡 일어나 벽에 등을 대고 큰소리로 명령했다.
《조용들 해! 움직이면 쏜다!》
장손은 천정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땅!》 하는 총소리에 술군들은 귀가 다 멍멍했고 혼비백산을 했다.
손에 무기를 들고 편깍쟁이네 집 토성을 둘러싸고 신호만을 기다리고있던 십여명 장정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거센 물결처럼 마당에 뛰여들었다. 총소리, 고함소리, 접시와 사발들이 깨지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비명에 거친 숨소리도 뒤섞였다.  
사랑방과 마루에서, 마당과 헛간에서 두 패는 서로 몽둥이를 휘두르고 주먹을 날리고 이발로 물어뜯으면서 무서운 란투를 벌였다. 놀란 개들마저 바줄을 끊고 제멋대로 날치면서 마구 짖어댔다. 경찰과 특무단은 수적으로는 렬세에 처했지만 사력을 다해 맞섰다.  
신유성이 피투성이가 돼가지고 뺑소니를 치자 장손이 뒤를 쫓았다. 장손은 총을 다루는 솜씨가 시원치 않았으므로 벌써 총알을 다 쏘아버렸었다.
심권은 외양간에 숨은 편깍쟁이를 붙잡아냈다. 선돌이 아버지는 량곡창고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승하는 예비대 10명을 이끌고 최돼지네 집으로 달려가 창고문을 부수었고 집안에 들어가 장롱들을 들어냈다. 덕실이는 산처럼 쌓아놓은 장롱들을 뒤번지면서 토지문서와 빚문서를 들추어냈다.
전투는 장손이 첫 총소리를 울린지 반시간만에 끝났다. 소작농들은 완전히 승리했다.
그러나 경찰들이 쏜 총에 한사람이 희생되고 두 사람이 중상을 입었으며 일여덟명의 농군이 특무단원들의 몽둥이에 맞고 군견에게 물려 상처를 입었다. 그 대가로 당장에서 4명의 특무단원과 2명의 경찰, 3명 군청 직원, 두마리 군견이 맞아죽었다. 편깍쟁이는 농군들의 심판에 맡겨졌다.
신유성이란 놈을 놓친것이 아쉬웠다. 놈은 어깨에 총상을 입고도 죽기내기로 도망을 쳤으므로 잡지 못했던것이다. 더욱 이상한것은 최돼지의 행방을 알수 없는것이였다. 그 비대한 몸뚱이를 가지고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는지 도무지 알길 없었다.


9. 전투의 개시

승리한 소작농들은 삼삼오오 지주네 창고에 모였다. 그들은 군청에 실어가려고 가려놓았던 쌀자루를 몽땅 마당으로 메고나와 골고루 나누어가졌다. 사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물건을 도로 찾아가는것이였다.
두 지주네 집에서 들추어낸 토지문서와 빚문서 그것은 돌배골의 수백명 농군들의 목을 옥죄던 한스러운 쇠사슬이였다. 농군들은 토지문서와 빚문서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그러나 그 종이장들이 불길속에서 하나하나 재가루로 되여 날려갈 때 마을사람들은 마치 기도를 하듯이 묵묵히 서있었다. 무거운 침묵속에서 어디선가 가느다란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수십년동안 노예처럼 살아온 지난날이 한스러웠기때문이였다.  
편깍쟁이는 소작료의 절반만을 받을터이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마을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얼마 후 편깍쟁이는 주제넘게도  최돼지네 땅에서 거둔 곡물도 나누어가지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마을사람들은 홍소를 터뜨렸다. 결국 편깍쟁이는 돌배골에 영원히 웃음거리가 될《명언》한마디를 남기고 부들부들 떨면서 단두대에 올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인즉 이러하다.
《최돼지는 정말 아둔한 사람이지. 돈만 있으면 땅을 샀거든요. 하지만 나는 돈만 있으면 군청에 있는 은행에 저축해뒀단 말이우…》
태명과 나루터를 지키고있던 몇몇 장정들은 통쾌하게 싸우지 못한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했다. 그들은 하는수없이 울뚝불뚝한 팔뚝을 매만지며 씽씽 쌀자루를 메여날랐다.
짧은 여름밤에 칠흑같은 어둠을 몰아내고 승리의 려명을 맞이하게 되였다.
심권은 로획한 권총을 허리에 차고 수레채에 쌀자루를 고여만든 연단에 서있었다.
덕실이와 승하가 활짝 웃으면서 어깨나란히 서있었고 그 옆에는 한손에 보총을 잡은 장손이 철탑처럼 서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태명이도 있었고 키가 장손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선돌이 아버지도 있었다. 선돌이 아버지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마치 말뚝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농군들은 모두 낫, 도리깨, 도끼, 호미와 빼앗은 몽둥이 같은 무기를 들고 서있었다. 밤알처럼 촘촘히 박힌 얼굴들, 익숙한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심권은 사방을 휘둘러보고나서 갓 면도질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연단에 서서 김일성장군의 유격대가 조국에 개선한후 이 땅에 처음으로 생긴 인민의 유격대를 보았다. 또한 그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생겨날 공화국의 싹을 보았으며 아울러 괴뢰집단의 수치스러운 파멸을 보았던것이다.
심권은 밝아오는 동녘하늘을 바라보면서 이제부터 미제침략자와 그 주구이며 민족의 역적인 리승만도당과의 싸움을 시작한다고 엄숙히 선포했다.
끝으로 그는 높은 소리로 웨쳤다.
《다 함께 싸우러 갑시다!》



조선의《문학예술》에서
《인민문학 21》1951년 10월 1일 孫振峽 譯
2007년 6월 20일 김순녀 重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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