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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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
2015년 02월 17일 11시 17분  조회:4632  추천:0  작성자: 김정룡



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

 

가. 선비의 유래

선비는 곧 ‘사(士)’이다. 조선시대 사회계층을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농공상이며 여기서 사가 곧 선비를 뜻한다. 사의 계층은 사대부와 구분된다. 사람들은 흔히 사와 사대부를 구분 못하고 혼용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사는 공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고 대부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공부하여 권력을 갖게 되면 곧 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사(士)는 어떻게 생겨나고 대부(大夫)는 또 어떻게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대략 4천 년 전 은나라 때 문자가 생겨났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귀신을 섬기고 길흉화복을 점치고 점의 결과를 거부기 껍데기에 새겨놓는데서 상형문자가 탄생되었고 그것을 역사에서는 갑골문이라 부른다.

문자를 만들고 새기고 하였으니 공부한 사람이 있긴 하였으나 극히 드물었을 것이고 전반 사회가 귀신을 섬기는 기풍에 의해 삶을 영위하는 풍토에서 문화를 중시했을 리가 만무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공부한 사람이 사회 하나의 계층을 이룰 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시기 사(士)가 어떻게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다.

중국에서 사(士)가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주나라시기였다.

은나라 때는 청동기를 제작할 만큼 수공업이 굉장히 발달하였고 따라서 상업도 굉장히 발달하였다. 그런데서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며 장사업을 상업(商業), 장사치를 상인(商人)이라 부르는 관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은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주왕(紂王)이 타락하고 정사를 바로 돌보지 않아 힘을 잃은 틈을 타 주의 민족이 궐기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3천 년 전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정복하고 중원에 주나라를 세웠다. 중국역사학자들은 은(殷)에 대한 주(周)의 승리는 곧바로 농경문화가 경상(經商)문화에 대한 승리이고 문화의 숭배가 귀신숭배에 대한 승리였다고 평가한다.

주무왕은 은을 정복하여 얻은 땅을 친척과 전쟁에 기여한 장군들에게 나눠주어 경영하게 되었는데 땅을 분봉 받은 자를 제후라 부르고 제후가 또 자신의 토지를 친척들에게 분봉하였는데 이들을 대부라고 한다. 즉 주나라 왕은 자신의 통치범위를 천하라 여기고 자신을 하늘에서 내린 아들이란 뜻으로 천자를 자칭하고 나섰다. 제후가 분봉 받은 토지의 영역을 국이라 하는데 제후는 국왕에 해당된다. 제후는 왕이고 국과 가의 구체적인 경영은 대부가 맡아 한다. 대부 밑에 사가 있는데 사는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한다. 사가 공부하여 수양을 쌓는 것이 수신(修身)이고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하는 것을 제가(齊家)라 한다. 사는 또 춘추시대까지 전쟁이 일어나면 일선에 나가 싸워야 한다. 전사(戰士), 병사(兵士)란 말이 이렇게 생겨났다. 당시 백성은 싸울 자격이 없었고 싸움의 주체는 사의 계층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은 상대를 멸망시키고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패권을 이루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전국시대에 전쟁이 더는 패권의 목적이 아니라 겸병, 즉 상대를 먹어치우는 싸움이기에 백성들도 전쟁에서 싸우는 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주나라는 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농후하여 공부하는 자가 많아 졌고 이들이 사회 하나의 계층으로 등장하였으며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이들은 혼란스런 천하를 구제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자, 공자, 묵자, 맹자, 장자, 한비자 등등의 유명 인물들이 눈부시게 역사무대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제후와 대부는 자신들의 영지가 있었으나 사는 영지가 없이 마치 중국현대사에서 집단화 농업체제에서 가가호호 자류지(自流地)를 조금씩 남겨 채소나 심어먹을 수 있을 만큼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는 그 조그마한 땅을 믿고 생계가 어려워 대부나 제후한테 붙어먹고 살지 않으면 연명이 어려웠다. 쉽게 말하자면 사는 털과 같은 존재로서 가죽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춘추전국시대 각 학파 배운 사의 집단이 이 나라 저 나라 천하를 주유하면서 감투를 얻기 위해 몸부림친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공자라는 것을 세인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자를 비롯한 사의 집단이 단순히 감투에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학문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건립하고 대대손손 이어 내려가 영광을 빛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 선비가 진나라 천하통일에 기여

중국왕조역사는 하나라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라 시기 제후의 수는 1만이었고 은나라에 이르러 절반 이상으로 줄어 3천이었고 주나라 초기엔 8백의 제후가 있었다. 춘추시기에 서로 패권을 다퉈 제후의 수가 줄어들더니 전국시대 말기엔 7웅이 남았고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왜 역사가 흐를수록 제후의 수가 줄었고 이윽고 하나의 국가만 남았을까?

인류역사는 혈연으로 이뤄진 씨족공동체→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부족→부족연맹→부족국가→부족국가연맹→방국→제국으로 흐르는 패턴이었다. 중국역사의 경우 하나라 시기는 부족연맹, 은나라 시기는 부족국가, 주나라 시기는 서주 때 부족국가연맹, 동주에 이르러 방국형태에서 최후 제국으로 과도되었다.

이 공식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체에서 매우 분산된 분권사회로 이행되었고 그 분권이 점차 하나의 권력으로 집중되는 중앙집권제 제국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분권은 봉건을 의미하는데, 봉건이란 ‘봉토건국(땅을 나눠주는 것이 봉토이고 그 땅과 그 땅에서 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제후를 세우는 것이 건국임)’이며 주나라 왕은 천자로서 천하의 주인이지만 제후국의 치국에 관여하지 않아 허수아비 같은 존재이다. 각 제후국에 왕이 따로 있고 세금징수, 군대양성, 인사권까지 모두 행사하는 권력과 권리를 갖는다.

제국이란 권력집중과 관원대리제도를 실행하는 중앙통일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국역사는 분권사회로부터 어떻게 통일집권(統一集權)사회인 제국으로 이행되었을까?

전국시기인 기원전 4세기까지 진나라는 7국 중 별로 볼꼴이 없는 촌놈의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도 낙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도 없어 그저 그런 후진국이었다. 그러던 데로부터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 진나라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종국적으로 천하통일을 이루어냈다. 진이 천하통일 할 수 있었던 내막에는 진영정 썩 전에 상앙이란 선비가 이미 국력을 부강 시키고 군사를 가강하여 토대를 잘 닦아놓은 덕분이었다.

진효공 때 성은 공손이고 이름이 앙(鞅)이란 선비가 위나라에서 왔다. 그래서 처음엔 그를 ‘위앙(衛鞅)’라 불렀는데 효공이 그에게 상(商) 지역에 봉하여 그때부터 상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앙은 법가계열의 인물이다. 당시 법가는 이른바 진보파로서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초, 위, 한, 제 등 나라들에선 획기적인 개혁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앙은 후진적인 진나라를 선택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로 맘먹었다.

상앙의 변법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제반 분야의 개혁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개혁의 핵심내용으로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한다. 먼저 귀족 영주의 지위와 특권을 몰수하여 일반 백성가운데 지주나 부자 정도로 강등시킨다. 군공이 있는 종실의 경우라도 후(後)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후는 조세만 징수할 뿐 백성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기존의 영주에 부속된 신민은 재편하여 지방관이 관리토록 한다.

둘째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한다. 모든 관원은 국군이 임명하는데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하고 더 이상 작위가 세습되지 않도록 한다. 능력과 재능이 있는 자는 진나라 사람인지 여부를 떠나 정책을 결정하는 영도자가 될 수 있다.

당시 관직은 대부와 사 출신들이 맡았으며 대대로 세습되어 가는 귀족들이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리세습제를 타파하고 임명제를 실행한 것은 큰 혁명이었다.

셋째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 전국에 31개 현을 설치하고 현령과 현승(縣丞:부현장)이 다스리도록 한다. 이후 새롭게 얻은 땅에도 군현을 설치하고 더 이상의 봉국은 개설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정전제’를 폐지하였다. ‘정전제’는 일정한 토지를 아홉 등분한 것인데 분할된 농지가 우물 정(井)자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농가 8호가 각기 한 곳씩 맡아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한다. 하지만 농부들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농토는 열심히 경작하지만 공전을 가꾸는 데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다. 또 정전제는 가로 세로 길이 너무 많아 개간농토를 점하고 있는 면적이 많아 생산이 비효율적이다. 정전제를 폐지한 이후에는 새로 생긴 땅을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끔 허락하고 관은 세금을 징수하면 그만이기에 관과 개인 모두 좋아하는 개혁이었으며 생산량이 현저히 제고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전공에 따라 상벌제도를 실시하여 귀족계층도 전공이 없으면 기존의 권력을 내놓아야 했다. 전투에 나서는 모든 장군과 병사들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죽기 내기로 싸우니 전투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에 의해 임금의 권력이 확대되고 군사력이 가강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장하여 부국강병을 이뤄 천하통일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서서히 제국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진영정에 이르러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앙이란 한 선비가 변법을 통해 진나라를 부국강병 시켜 천하통일을 이뤄내는데 토대가 되었고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제국의 출현에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다. 진시황은 법가에 의해 성공하고 법가 때문에 망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된 것은 법가의 덕분이었다. 이미 상앙과 같은 법가 선비가 있어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도 있거니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인재를 긁어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법가계열의 인재를 모시기 위해 아무리 큰 대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재모시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비자를 데려오기 위해 한나라와 전쟁도 불사하고 한을 정복하고 나서 한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한비자는 대표적인 법가인물이며 제왕통치술을 집필한 인물이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을 많이 섭취하였고 또 한비자와 동문이었던 역시 법가계열의 인재인 이사(李斯)도 신변에 두었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 출신이었다. 말단관리직이 성차지 않아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구학(求學)의 길에 나섰고 순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가장 앞날이 창창한 진나라에 갔다. 그는 객경(客卿) 출신이라 본토 배기 관료들과 마찰이 심해 아슬아슬하게 쫓겨날 위기에도 처했으나 기민한 술수로 남아 진시황의 통일대업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통일 후에는 진시황에게 분서갱유를 권장하여 황제의 권력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이사는 또 진시황이 천하통일 집권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화폐를 개혁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심지어 거동륜(車同輪)에까지 신경을 써 모든 분야에서 통일된 하나의 기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인 진나라가 강대하고 천년만년 이어갈 것처럼 보였으나 이사와 같은 법가의 강력한 밀어붙이기 조치에 의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모순이 격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분서갱유를 통해 지식인 선비들을 부들부들 뜰게 만들고 강력한 법제도는 백성들을 숨을 못 쉬게 만들어 도처에서 곪고 있었다.

그리고 법가 문화는 너무 삭막하여 인간사회 정을 메마르게 하여 사람 살기 굉장히 피곤한 사회를 조성하였다.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쩍하면 죽임을 당하는 사회, 게다가 연좌죄를 실시하여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시름 놓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각박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전반 사회에서 모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이상하리만치 폭정이 삭막하여 재빨리 망하는 길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역사에서는 진승, 오광 농민봉기에 의해 진나라가 망했다고 서술한다. 허나 필자는 그 강대했던 첫 제국인 진나라가 15년이란 극히 단명한 수명을 맞게 된 것은 농민봉기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법가문화가 유가와 도가를 비롯한 기타 문화에 대한 패배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물론 진승, 오광 농민봉기가 이미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 도화선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라. 한무제 덕분에 유생들이 2천년 동안 천하를 지배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이었던 진나라는 비록 15년이란 단명으로 끝났으나 그 후 모든 왕조들이 진제국의 정치제도를 2천년 동안이나 지속하여 실행하여 왔다.

진제국의 정치제도는 군현제와 관원임명제 실시를 통해 지방 귀족들이 관리하던 토지와 백성을 모두 황제의 소유로 귀속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와의 초`한전에서 승리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자 어떤 정치제도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제국이 재빨리 망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일부 신하들은 진제국이 빨리 망한 것은 잘못된 정치제도 때문이라면서 아예 군현제를 포기하고 본래 주나라 후기 방국제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일부 신하들은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인지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군현제가 선진적인 정치제도이므로 이를 도입해야함이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유방은 두 부류의 주장을 절충하여 장안과 그 주변 즉 경기지역은 군현제를 실시하고 지방은 방국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일국양제(一國兩制)’이다.

이렇게 정치제도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무슨 이념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또 풀어야 하고 통치이념과 사상을 수립해야했다.

진제국처럼 법가의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또 급속히 망할 것 같아 아예 포기해버렸다. 진제국 시기 백성들이 지친데다 후기 농민봉기와 또 초`한전을 겪고 나서 더구나 백성들이 지쳐 있기 때문에 충분히 맘 놓고 편하게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자는데 입을 모았다. 그렇게 하려면 도가의 ‘청정무위’ 이념을 도입해야 했다. 이렇게 되어 한나라 초기 제국통치이념으로서 도가가 선발되었다.

백성을 닦달하지 않고 들볶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해져 문제와 경제 때 성세를 이루어 그 후 세대들이 본받을 만한 ‘문경지치’를 남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제국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이 없어 흉노를 비롯한 주변 오랑캐들이 집적거리고 제국 내에서도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무제 때 오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군사재정의 뒷돈을 조사해보니 염전(鹽田)과 제철(製鐵)이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무제가 염전과 제철의 사유권을 몰수하고 국가소유로 귀속시켜 그때부터 중국역사에 국영기업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무제는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흉노를 제압함으로써 내유외란(內揉外亂)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풀어야 할 과제로서 남은 것은 한나라 초기엔 도가의 이념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았으나 이젠 강력한 제국의 통치이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하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수립하기로 맘먹었다. 바로 이때 유생그룹의 대표이사 격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 동중서가 나타나 한무제와 흥정을 붙였다. 결과 한무제는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삼을 것을 동의하였다. 이렇게 동중서는 황제와의 흥정에서 얻을 것을 모두 얻어 승자가 되었고 그 후 2천 년 동안 유생들이 천하의 권력중심에 자리하게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마. 유교가 2천년 제국역사의 통치이념으로 선택된 이유?

중국문화는 선진(先秦)시대에 이미 기본 틀을 다 갖췄고 이미 완성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앞선 사례이다.

선진시대 각 학파의 이념을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도가는 ‘청정무위’를 주장하는데 전후(戰後) 백성을 숨 돌리게 만드는 데는 일정한 효력이 있으나 통치이념으로 지속하여 써 먹기는 너무 물렁해 보인다. 법가는 진나라가 도입하여 천하통일에 성공하였으나 지나치게 형벌을 중시하여 사회를 너무 삭막하게 만들고 민심이 지나치게 각박해져 왕조가 단명을 맞을 위험이 굉장히 크다. 묵가의 ‘겸애’사상은 좋은 것이나 전반 사유재산이 등장한 이후 인간사회는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이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삼기엔 부적격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힘을 강력하게 만드는 통치이념은 유가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가는 사회 각 영역에서 모두 질서를 추구한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군군신신(君君臣臣),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부부자자(父父子子), 연령에 따라 아래 위가 있어야 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 또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처강(夫爲妻綱)은 국가적으로 집안에서 모두 강력한 질서가 서기를 바라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 각 영역에서의 질서는 결국 따지고 보면 황제가 최고의 존재로 군림하는 것을 각인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유가는 또 예와 효를 매우 중시하는데 이는 농경문화에서 경험을 우선으로 받드는 풍토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것을 무기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유가는 또한 도덕과 윤리라는 무기로서 인간사회를 속박하고 질서를 지키고 공공의식을 키우며 인간의 됨됨이를 만들어간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함으로서 제국은 돈과 힘을 들이지 않고도 관료집단을 바르게 서게 할 수 있고 백성들도 따라서 사회 룰에 따르도록 만들 수 있어 수지가 가장 맡는 장시임에 틀림없다.

유가는 종법사상으로 국가와 집안의 질서를 유지케 하였던 것이다. 황족의 직계는 대종이고 기타 가족은 소종이다. 가문에서는 맏아들이 대종이고 차남부터 전부 소종이다. 대종과 소종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대종이 가산을 이어받고 제사를 주관한다. 제국시대엔 제사가 매우 중요한 행사이므로 제사를 통해 대종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상기 여러 가지 유가의 이념과 사상은 제국의 힘을 키우고 유지하고 백성들을 전부 황제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데 가장 좋은 무기였다. 그래서 한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 후에도 여전히 통치무기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 과거급제제도가 유생들이 천하를 장악하게 만들었다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먼저 귀족세습제를 폐지하고 관료임명제를 실시하였고 이를 통해 군현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진시황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중국은 간부임명제를 실시하고 있다.

제국시대 관장(官場)은 관(官), 요(僚), 이(吏) 등 세 가지로 나눴다. 관은 정무관이라면 요는 관의 보좌관이며 이는 사무관(서기관)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관료와 관리라는 말은 있어도 요리(僚吏)라는 말은 없다. 보좌역할 하는 사람과 단순히 서기 일만 하는 사람만으로는 관장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관을 중심으로 요와 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제국시대 관원을 도대체 어떻게 임명하였을까? 황제가 그 수많은 관원의 내막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일면식 없는 자들을 어떻게 알고 관원으로 등용하고 임명하였는가 말이다.

한나라 시기엔 찰거제를 실시하였다. 찰거를 향거리선(鄕擧理選)이라고도 하였다. ‘효(孝)’와 ‘렴(廉)’의 유교적 덕목에 기초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대신이나 지방 장관의 추천을 받아 선발하는 제도이다. 선발 과정에서 향리(鄕里)에서의 평판과 세론(世論), 곧 향론(鄕論)이 중시되었기에 향거리선(鄕擧理選)이라고 한다. 대신(大臣)이나 열후(列侯), 주(州) 자사 등이 추천하는 ‘수재(秀才)’와 군(郡)·국(國)의 장관이 추천하는 ‘효렴(孝廉)’ 등으로 나뉘는데, 효렴 출신자의 비중이 높았다. ‘수재(秀才)’는 후한에서는 ‘무재(茂才)’라고 불렀다. 향거리선은 한(漢)이 향촌 공동체의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위진남북조시기엔 천거제(薦擧制)로서 찰거제를 대체하였다. 천거제는 찰거제 때와 같이 관원으로 등용되는 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비슷하였다. 천거제는 매개 주군 관원들이 몇 품 이상의 관원을 몇 명씩 추천하는 할당제를 실시하였다. 추천된 관원이 부정을 저지르면 추천한 관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 뒷문거래를 막기 위함이었으나 연대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죄를 덮는 사례가 많아 역시 부정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찰거제이든 천거제이든 이상적인 인물 적합한 자격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는데 폐단이 많았다. 그래서 수나라 때 생겨난 것이 과거급제제도이다.

과거급제제도는 말 그대로 공부한 자가 시험을 통해 합격되어 관원으로 등용되는 제도이다. 문제는 시험과목을 무엇을 기준으로 하며 무슨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가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도 포함되어야 하고 법가의 사상도 있어야 하고 더 멀리 주역도 끼워야 하며 역법지식에도 밝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사상이다. 유가사상은 사서오경을 위주로 한다. 그러니까 과거시험의 주요 내용 7할 정도가 유교경전이 차지하고 나머지 모두 합쳐 3할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소매가 길면 춤추기 좋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당연히 유생들이 과거시험 참여도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 혹시 도가나 법가에 심취한 선비라 할지라도 출세하려면 반드시 유가에 기울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급제제도를 통해 유생들이 대거 관장에 진출하게 되었고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역사는 조정에서 유생출신 관원보다 황제의 신변에서 맴도는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례로 당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을 때 환관인 고대력사(高大力士)가 황제를 대신해 윤허하고 재가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명나라 시기엔 10만에 달하는 환관도 모자라 조선에서 빌려다 썼다는 기록도 있다.

환관들이 아무리 판쳐도 제국의 통치이념은 여전히 유가적인 것이며 유생출신들이 관장을 휩쓴 것은 사실이었다.

 

사. 천하위공과 관원대리

제국 이전, 예하면 주나라 말기까지 제후국들의 재산은 주나라 왕의 소유가 아니라 각 제후들 및 그 밑에 있는 대부들의 사유재산이었다. 당시 관원이라 말할 수 있는 계층은 대부와 사 두 계층인데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부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귀족세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재부가 사유재산이면 타락은 있을지언정 부패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사유재산인데 그 재산을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고 부패를 저지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시 대부와 사가 주색에 빠져 제가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을 경우 재부를 탕진하여 날려버릴 수 있는데 이는 부화타락이지 부패가 아니다.

부패는 제국시대부터 생겨났던 것이다.

제국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하늘 아래 전체 모든 재부는 공(公)가의 소유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드넓은 하늘 아래 황제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皇土)”고 표현하였다. 제국시대 혹시 사유 토지가 있어 매매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관원의 사유 토지를 황제가 몰수할 수 있고 지주 호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유 토지는 황제를 위해 일하는 아문에서 언제든 맘만 먹으면 몰수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천하의 모든 것은 공가의 소유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라 말한다. 이로부터 정부에서 사무에 관계되는 직종을 공직,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공무원, 정부에서 만든 문서는 공문, 국가재정에 의해 닦은 길은 공로라고 하였던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것이 공가의 것, 천하위공이기 때문에 국가의 구성원인 백성 개개인도 공민인 것이다. 그러나 제국시대 백성은 공민의 권리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공민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백성은 전부 황제의 신민(臣民)일 따름이었다.

어찌되었든 제국의 재부(땅과 백성)가 모양새로 천하위공이기 때문에 그 엄청난 재부를 황제 1인이 절대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를 대신하여 다스려 줄 사람이 필요하였고 그 사람들을 관원이라 부르고 황제가 임명하며 임명받은 관원은 황제를 대신하여 맡은 땅과 백성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황제를 대신하는 대리관원이 될 자격이 있을까?

우선 천하의 모든 것이 공가의 것이기 때문에 대리관원이 될 사람은 덕을 갖춰야 한다. 제국시대 겉으로는 유가, 내부적으로는 법가로 천하를 다스리는 외유암법(外儒暗法)이었으나 가장 강조한 것은 덕치(德治)였다. 중국인이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거나 조금만 상식에 어긋난 짓을 해도 ‘결덕(缺德)’라는 말을 곧잘 쓰는 것이 바로 2천여 년 동안 덕치사회를 걸쳤기 때문이다.

윤리치국이란 말도 있는데 이덕치국(以德治國)과 쌍둥이형제이다. 게다가 예치와 효렴을 빼놓을 수 없었다. 제국시대 이덕치국과 윤리치국 및 예치와 효렴의 실천자로서 가장 적합한 부류가 바로 유생출신들이다.

2132년의 중국제국역사에서 번진(藩鎭)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모를 꾸민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유생출신 관료들이 반기를 든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 조선왕조가 518년 지속된 비결

중국 수나라 시대 때부터 시작된 과거제가 한반도에는 788년(신라 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과’라는 형식으로 전래되었다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 시대 초기이다. 958년(광종 9년)에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했다. 이는 신분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던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과거제 대신 신분을 기준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음서제가 더 융성했다. 또한 문과(문관)와 잡과(기술관)만 시행되고, 군인을 뽑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와서야 과거제가 일반적인 관직 진출 수단이 되었고, 무과도 시행되었다.

학자들은 고려시대 국가통치이념을 불교였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고려 초기부터 실시된 과거제에 의해 유가학설이 선비 층에선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 고려 말기 양대 산맥을 이룬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유생출신이며 가장 걸출한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목숨 걸고 반대하였는데 반해 정도전은 목숨 걸고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주도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따지고 보면 정몽주는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왕족은 대종이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으며 대체하여서도 절대 안 되는 일이다. 만약 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거꾸로 정도전은 고려가 썩을 대로 썩어 맹자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조선조를 창건하는데 일등공신으로 역할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몽주는 유가의 가장 보수적인 인물이고 정도전은 맹자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는 유가의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역사는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어 고려를 뒤엎고 조선조를 창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무장이고 정도전을 비롯하여 권력층에 포진된 인물들은 거의가 유생출신들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제약하려고 왕족의 정치참여를 금지시켰다. 단종 때 왕이 어린 탓에 김종서가 천하를 호령하였다. 수양대군이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금기를 깨고 정치에 뛰어들었고 결국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전체 조선조를 통 털어 수많은 역모와 반란이 있었지만 왕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은 단 하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원인이 바로 유생들이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생들은 왕도에 붙어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 목적만 달성되면 더 큰 욕망이 없다. 따라서 왕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게 되면 사서오경을 들먹이면서 왕에게 한 방 먹이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조선조를 통 털어 권력의 중심에는 항상 유생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조선조 초기인 1446년 세종대왕이 백성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자 유생집단이 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만약 백성이 눈뜨면 자신들의 권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학문을 독점함으로써 유생집단이 영원히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한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경우 본산지인 중국에서는 무릇 하자가 없는 양민이면 전부 시험응시자격을 부여받은데 비해 조선은 양반 자식만, 그것도 양반의 적자만 시험응시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는 권력을 소수양반층이 독점하여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왕권을 제한하여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현 관료집단에 불만을 품고 조선시대 선비들은 대쪽 같이 자신들의 할 말을 다 했고 정의를 주장하고 수호한 인물 또 청렴하고 도덕적이고 아무튼 한 입으로 자랑하기엔 모자라는 것 같다.

요즘 관료사회와 조선조의 관료사회는 차이가 엄청 크다. 우선 조선조의 관료사회에 진출하려면 도덕적이고 사리가 밝아야 한다. 요즘 세월엔 도덕을 우선시 하지 않는다. 무슨 학교를 나왔고 이력이 어떻고 무슨 공적이 있고 사회인맥이 어떻고, 이를 기준으로 선발한다. 또 예전엔 재부가 많지 않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청렴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지만 요즘은 경제시대라 금전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만치 재부가 중요한 사회로 변질하였기에 청렴을 크게 보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이니 윤리이니 하는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세상사가 동전의 양면처럼 절대적인 것이 없는 것처럼 조선조의 선비도 공부하여 과거제를 통해 관료사회에 진출하기까지 굉장히 도덕적이고 정의적이고 대바르지만 일단 관장에 발을 담그면 파벌정치에 휘둘리어 사리사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자신이 모시는 직접 상관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모른 체하다가 나중에는 한통속이 되어 함께 부정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매사에 너무 정직하고 정의적이면 정계 및 관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정치와 권력이란 본래 치사스런 것이다. 내가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것이 정치의 생리이므로 정치의 중심에 선 선비라 하여 마냥 정직하고 정의적일 수 없다. 개별적으로 해서(海瑞)와 같은 관원이 조선조에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고 또 다수 관원들이 본받을 우상도 아니었다. 선비출신의 다수 관원들은 역사가 평가하는 것처럼 대쪽 같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관장에서 권력을 부여잡고 생존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전반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마무리 지어 말하자면 선비는 털이고 권력은 가죽이다. 털은 가죽에 붙어야 생존한다. 털은 가죽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비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자신들의 생존무대가 사라질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글 가르치는 훈장 선비도 있고 모든 선비의 역할이 반드시 권력과 유착된 것은 아니지만 큰들에서 말하자면 한무제 이후 중국역사와 조선반도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선비사회가 권력과의 유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이와 같은 맥락을 짚어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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