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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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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의 현황에 대하여
2015년 01월 07일 18시 52분  조회:2011  추천:3  작성자: 김은철
문학작품의 현황을 론해본다
                           김은철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조선족사회를 바탕으로하여 산생되였다. 그러하기에 중국조선족문학은 산생초기부터 내용과 풍격, 취미와 사상등 모든 면에서 중국조선족사회의 현실 반영을 기본 사명으로 삼아왔다.

문학에서 주되는 장르는 시와 소설이다. 때문에 어떤 시와 소설이 창작되여 나오는가 하는 문제는 문단의 흥망에 관계되는것으로서 자못 중요하다.

중국조선족문학은 개혁개방전까지 줄곧 현실주의창작방법으로 씌여졌기에 단순하게 보이는것이 객관사실이였다. 게다가 건국이후 줄곧 정치에 얽매여 왔기에 문학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사명을 지닌 선전에 불과한 작품들이 많았다는것도 사실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시기 창작한 문학작품들을 전부 정치선전물로 볼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치에 얽매여 창작되긴해도 조선족사회의 생활을 작품의 제재로 하여 썼기에 읽어보면 조선족사회의 생활을 실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던 작품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건 지난날 창작된 문학작품들이 잘 씌였건 못 씌였건 작품소재의 출처가 대중속에 있었고 또 현실주의 창작방법으로 썼기에 리해하기 쉬워 대중들의 애대를 받고있은것도 사실이였다. 그러했기에 대중속에서 문학잡지를 보는 독자들도 많았고 문학잡지에 실린 소설을 놓고 이렇군 저렇군하며 시비를 하고 쟁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족 집거지방에는 어느 마을에 가든지 어느 단위에 가든지 문학잡지들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띄우군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중들속에 문학잡지를 청해보는 사람들이 거의나 없고 문화관이나 학교같은 문화,교육계통의 단위에서마저 청해 보지 않고있다. 지어 작가라는 명색을 띤 작가협회 성원들마저 문학잡지를 보지 않고있으니 서점에 가보면 오로지 문학잡지에만 먼지가 끼여있는 상황이다.

어이하여 문학잡지가 이토록 독자들의 외면을 당하게 되였는가! 혹자는 텔레비죤이나 컴퓨터같은 전자제품의 보급으로 인해 사람들이 더는 책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않기때문이라고 본다. 또 혹자는 마작이나 트럼프같은 도박놀이가 성행하여 사람들의 취미가 거기에 쏠렸기때문이라고 보고있다. 또 혹자는 문학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감상능력이 너무 낮기때문이라고 본다. 

문학잡지가 독자들의 외면을 당하는 원인을 어떻게 보든 필자는 수선 문학작품의 본체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지난세기 개혁개방을 시작한80년대 중기부터 우리의 문학잡지는 크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똑 마치 지나치게 아름다움을 추구한 어떤 녀인이 너무 급하다 보니 얼뜨기 수술의사한테 얼굴을 맡겨  본래의 면모마저 잃어버린 격이 돼버렸던것이다. 그러니 어찌 독자들의 애대를 받을수 있었겠는가

개혁개방을 하자 중국조선족문학은 한국문학을 우수한 현대적문학으로 보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라배우기 시작했던것이다. 

한국문학은 각가지 문학학파들이 공존하며 이루어진 문학이라고 필자는 보고있다. 하기에 씌여진 문학작품들에는 향기를 풍기는 꽃과 구린내를 풍기는 꽃이  공존하고있다. 이런 문학을 현실주의문학으로 일색된 중국조선족의 문학에 비하면 실로 풍성한 화원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단의 실권작가들은 한국문단의 화원에서 구린내 풍기는 꽃씨를 받아왔다는 주장이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 꽃을 보니 아마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이 꽃이 바로 현대시요, 몽롱시요하는것들이 였는바  이런 시들이 귀감이 되여 소설마저 그 너울을 쓰기시작했던것이다.

아무리 읽어도 내용을 파악할수 없는 글, 필자는 이런 문학작품들을 인상주의 문학, 혹은 그 변종들이라고 보고있다. 왜냐하면 인상주의란 현실주의와는 반대로 작자의 주관적인 순수한 인상을 작품에 나타내기에 작자를 제외한 모든 독자들은 작품의 문의(文意)를 파악할수 없기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작품의 내용 주제등 제 면에서 현실주의 작품과는 정 반대로 독자들의 심미에 이무런 공적인 감응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읽어보면 어느 정신환자의 생각을 써낸것 같은 이런 인상주의 작품들이 개혁개방후 한시기 문학잡지에 대량으로 발표된건 사실이였다. 게다가 문학평론가들중에는 현실주의문학을 부정하면서 로신의 창작방법도 시대적으로 떨어졌다고 고아댔다. 그러면서 인상주의작품들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평론가들이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는데도 독자들의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문학잡지는 결국 밥먹고 죽벌이도 못하는 오늘의 갸날픈 지경에 이른것이다.

그렇다면 개혁개방후 중국조선족문단에는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현대시나 현대소설을 대량으로 창작할수있는 작가군이 형성되여 있었던가? 필자는 0의 상태였다고 본다.  필자가 알고있는 어떤 작자는 외래어수준은 0의 상태였으나 사전을 뒤지면서 외래어를 찾아 억지로 작품에 끼워넣었고 단어사용에서마저 고유된 단어의 형태를 마스고 음소까지 밝히면서 써대는 치들도 있은것이다. (례하면’노란’을 ‘노오란’으로 쓰는페단) 작품의 내용은 물론 언어에서 마저 독자들의 구미에 어울리지 않는 외래어를 람용했고 우리 말 단어들까지 제나름대로 각을 뜯어쓰는 격이 됐으니 솔직이 말하면 우리의 문학은 밥을 지으려다가 죽밥을 만들어 놓은 꼴이 되였던것이다. 이러니 문학작품이 독자들의 외면을 당하는것은 천만 지당한 일이였다고 본다.

필자가있던 학교에서는 본래 조선문 문학잡지는 모두 청해서 도서실에 라렬해 놓았는데 현대시,현대소설이 범람한 후부터 보는 사람이 없게 되자  학교지도부 에서는 아예 모든 문학잡지를 청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더구나 문학잡지에 사용된 언어나 문법적표현마저 교과서에서의 언어나 문법에 비하여 규범화되지 않았기에 학교의 교수내용과도 어울리지 않았것 역시  사실이였다.

그릇됨은 언젠가는 꼭 옯바름에 굴복되거나 밀리우게 되는법이다. 근 20여년이나 범람하던 현대시 현대소설이 지금은 기가 꺽인것 같다.

모든 문학작품은 해당된 쟌르의 기본요소에 맞게 쓰는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인상주의 변종이라고 볼수있는 우리의 소설중에는 읽어도 이야기할 내용이 없고 인물의 개성도 희미한 소설들이 많다. 소설이란 본래 이야기에서 산생된 문학장르가 아닌가.

하여 필자는 이런 소설에 대하여 다음 몇가지로 규납하여 피력한다.

첫째, 소설을 씀에 있어서 소설의 기본요소와는 관계없다. 작자 나름대로 쓴다.

둘째, 독자들이 알수있게 쓸수있는것도 몽롱하게 써서 독자들로 하여금 수수께끼 풀이를 하게 하도록 한다. 독자들이 읽고 즉시 파악하게 쓴다면 그건 시대에 떨어진 30년대 작품과 다를바 없다. 독자들이 읽고 “이건 어느 정신환자의 생각을 쓴것 같구나.”하는 느낌을 주어 그 느낌중에서 발효두부(臭豆腐)에서만 맛볼수있는 최고의 달콤한 맛을 보게 해야한다. 그맛이 바로 작자가 높은 수준으로 써낸 작품의 진미라는것이다.

세째, 작품속에 오래어를 많이 써넣어야 한다. 우리 말로 쓸수 있는것도 외래어로 바꾸어 쓸수만 있다면 외래어로 써야한다. 만일 작자가 오래어에 무식하다면 외래어사전을 뒤져서라도 써야 한다. 이건 작자의 유식을 과시할수도 있고 작품의 현대맛을 풍기는데 없어서는 안될 미용술이다.

네째, 될수록 일반독자들이 리해하기 어렵고 모르는 어휘들을 찾아 작품에 등장시킴으로써 작품의 파악에 애로를 주어야 한다.
이상 몇가지 견해는 필자가 난해소설에 대한 감수이고 난해소설을 써내는 작자들이 이에 준하여 난해소설을 쓰고 있지않느냐하는 주관적생각이다.

그리고 현대시와 몽롱시에 대해서는 정신환자의 생각을 쓴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런 시는 오로지 작자자신만이 시의에 만족하여 향수를 느끼는 홀아비의 자위라고 본다. 필자는 솔직한 느낌을 그대로 피력하는바 현실주의 문학을 시대에 떨어진 문학으로 보는 인상주의 작자들이 필자에 대하여 어떻게 보든 개의치 않게 여긴다. 단지 느끼는 그대로의 관점으로 탄하고 픈 마음에서 이 글을 쓸뿐이다.

개혁개방후 우리가 한국의 문학을 따라배우느라고 애쓴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문학창작이 불건전하게 된 원인을 한국문학에 탓하는것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확실이 한국문학은 백화원으로서 중국조선족문학의 귀감이라고 본다. 단지 그 백화원에서 아름답지 못한 꽃씨를 받아 우리의 화원에 너무 많이 심은것에 반기를 들고있을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문단에서 난해소설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소설의 기본요소를 갖춘 현실주의소설만을 창작하자는 견해도 아니다. 난해소설이 필자가 밉게 보는 소설이기는 하나 백화원에 피여있을 자격이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 역시 한송이의 꽃으로서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다. 련애란 본래 남녀간의 일인데 세상에는 동성련애를 선호하는 사람도있고 국법으로 동성련애를 합법화하고 있는 나라도 있지 않는가! 인상주의 문학에 대하여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는만큼 필자는 그것의 합법적 존재와 흥기에 칼을 들지 않는다. 단지 우리 문단을 인상주의 문학으로 일색시키려는것에 반기를 들뿐이다.

중국조선족문단은 중국조선족백성들의 문단이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문학창작은  조선족백성들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 일부 인상주의 문학을 부르짓는 작자들이 문단에서의 자기들의 실권을 람용하여 발효두부만 음식상에 올려놓으려하는데는 절대 동의할수없다. 그리고 그런 실권파작자들의 주위에 뭉치여 대중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흥취만 고집하면서 난해작품들을 써내는 작자들에 대하여 한번 문학창작에 깊은 연구를 해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쓰는것이다.

필자가 본 중국문단에서의 소설들은 모두 소설의 기본요소를 지키면서 썼기에 볼멋이 있고 읽은 후에도 구수하게 이야기를 엮을수있어 독자들의 심미에 안겨온다고 본다. 그런데 조선족문단의 소설만은 소설의 기본요소들이 여지없이 무시되면서 창작되고있다. 이 문제는 마땅히 조선족문단에서 주의를 돌려야 하고 깊이 연구되여야하는 문제라고 본다.

혹자는 그래도 우리 문단의 작품들을 높이 평가할수도 있다고 본다. 00작가의 작품이 전국00의 우수상을 탔고 또 00작가의 자품은 한국00잡지에 실렸고….등등의 실례를 근거로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중국의 실정을 놓고 보면 우수작품들이 유관부문에서 내려보낸 명액에 따라 선정되는 경우도 있는것이다. 필자의 소설도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을 받은바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소설이 한어로 번역되여 중국문단에 소개된건 아니였다. 이건 순 명액에 근거하여 선정된 우수작품이였던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이 한어로 번역되여 중국문단에 소개되여도 우수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낼수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의문이다. 우리 문단에는 이런 명액에 의하여 선정된 우수작품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우수작품은 우리 문단내에서의 우수작품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

그러니 문학작품으로서의 질적기준을 놓고 평가한다면 과연 우리의 문학작품들중 전국문단에서 진정 우수작품으로 선정될 작품들이 얼마나 될가? 필자는 의심뿐이다.

이 문제는 우리 문단의 지도부로부터 일반 작가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문학창작 현황을 넓은 범위에서 검토하고 깊이 연구한후 대책을 세워야할 문제라고 본다.

                      2015년 1월 6일

电话:1351433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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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5 ]

25   작성자 : 수필회
날자:2015-01-15 22:27:59
연변에는 단풍수필회도 있고 여성수필회도 있고 뭐 어머니수필회던지 하는 것도 있고 한데 요즘 수필을 많이 요구하는 분위기속에서 수필같은 수필이 너무 적은게 참 가슴이 아픈 일이다. 많은 협회와 간행물들에서는 수필리론탐구와 수필강좌같은 것은 조직하지 않고 많이 발표만 해주니 수필은 제고를 가져오지 못한다. 좀 한국수필과 중국인 수필들을 많이 싣고 연변수필은 좀 수준있는 것만 골라서 실었으면 좋겟구만...아무 수필이나 막 실어주니 정말 그것이 수필이 옳은가 착각하고 그냥 그렇게 써내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때론 어떤 수필은 발표는 되였지만 다 읽어보고 시간낭비를 했구나 하고 반감을 느낄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수필은 수필다와야지 수기나, 이야기나, 칼럼이나, 학생작문이 되여서는 아니된다고 본다.최균선선생님의 수필이나 한춘선생의 수필들을 찾아 읽었으면 좋겠구만.최룡관것도 한두편은 괜찮은 수필이 있더만.
24   작성자 : 수필가
날자:2015-01-11 12:35:53
리화숙, 양은희, 강정숙, 김순희, 김옥희, 김양금, 김홍란, 구호준, 최룡관, 한춘, 석화, 서영빈, 홍군식, 정호원 등등 작가들의 수필은 그래도 우리 문단에서는 괜찮던데 기타의 수필들은 별로다. 진짜 많은 수필들은 중학생작문 수준이다...혹시 나의 이 견해가 틀릴수도 있다...하지만 나는 이렇게 보고있다...
23   작성자 : 이률배반
날자:2015-01-11 09:11:25
현대문학과 전통문학은 문단에 이률배반현상이니 둘다 부정하지 말하야 한다는 취지의 말인데 진심은 오독하고있다. 거두절미하고, 평론은 해당글에 대한 평판이여야지 그 작자를 폄하 하는 어조로 수준이하부터너 금그으면 공정성을 잃을수밖에 없다. 연변문단에는 진심이 내세우는 사람 하나밖에 없다는것은 어불성설이다.매사, 매사람은 이분법으로 보아야 한다. 세상에 절대란 없으니까, 이분법은 이률배반현상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식이니까,
그리고 고중수준의 이상의 글을 척척 내놓는 명필은 절대 수백명 작가들을 함부로 한몽 둥에 때려 18층지옥에 처넣으려 하지 않는다. 문여기인이 절대적이 아니지만 글을 쓰는 자 세는 그의 인격의 거울은 된다.
일언이페지하고, 자화자찬하면 보기가 민망하고 자고자대하면 꼴불견이고 과대망상증에 걸리면 망본으로서 구제불능이다. 고중수준의 글밖에 안된다고 먼저 선언한 사람이 본보기 를 내놓는게 순리인데 저저 내노라 하는 작가들을 고중학생정도밖에 안된다고 생각 하는 대가인것같으니 이신작칙해야 평판이든 폄하든 론리가 서고 근거가 설게 아닌가? 공 자가 가로사대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긴 세상에 남의 말을 하지 않으면 할말이 없는 우리 인간들이니까 남의 말을 해야 하겠으나 마른 강대나무 한두대를 보고 옹근 수림이 다 말랐다고 하는것은 편견이 아니라 무시각이다. 자중하자.
22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1 01:17:50
다음은 온고지신을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곰곰히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조선족문학 내지 문단의 수준. 과연 이대로가 정상이며?
계속 이런 수준으로 나아가서 옳겠습니까?
시기심이 일고 질투심에 붇박히시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요.
과연 시창작에서 최룡관 시인만큼이나 변화하려고 하고 창신하려고 하고
탐구하는 시인이 과연 더 있으신지요?
그가 핵심이 되여 일으키고 있는 시의 혁명은 적어도 먼 뒷날에 조선족의 문단사상에서
큰 획을 긋는 력사로 자리매겨지게 될것이 뻔합니다.
그가 배양하고 있는 제자들이 먼 뒷날에 문단 적어도 시단의 중추가 되리라는것도
의심할바 없는 일입니다.
시는 그렇더라치고 소설과 수필에서도 최룡관같은 작가가 또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없습니다. 겨우 최룡관이 하나 있는것도
김관웅 조성일 등 제씨들은 그를 아주 죽이지 못해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를 공격해오고
있습니까!
그런데 지켜보니 그런다고 최룡관의 시 혁명이 스러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왕성하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중국의 시에 이런 현상을 표현한 시구절이 너무 유명한것이 있습니다.
野火烧不尽,春风吹 生



21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1 01:06:59
밑에 친구에게:
원래 세상만사란 이률배반입니다.
그것에 너무 심각하게 의문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하는데 이 자체 또한 이률배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게 두개가 되여 나타나면
그현실에서는 그것이 당연지사일수가 없습니다.
정답은 이률배반입니다.
조선족문단의 수필들이 고중학교 학생들의 작문수준에서 맴돌고 있다는데 대한
반론으로 그러면 "고중학생수준을 훨씬 초월한 수필대작을 실명으로 내놓아보라"고 하시는데,
이 또한 이률배반입니다.
대방보고 내놓아보라고 할것이 아니라 굳이 그것에 반론하고싶으면
반록하고 계신 친구가 다문 몇편이라도 들고나와서 (물론 본인의 수필작품이 아닌
다른 작가들의 아주 잘되였다는 작품을 제목이라도 소개하여주시면서)
봐라, 이런 작품들이 그래 과연 고중작문수준밖에 안되느냐고
해야합니다.
이쪽에서 배구공을 던졌으면 그 공을 받아야하는데
댁은 그 공은 왕청같은 곳에 차던지고는 이률배반이다. 다시 던져라고 하는격입니다.
이럴때 재판이 어떻게 점수를 매기는지 아십니까?
20   작성자 : 이률배반
날자:2015-01-10 21:05:08
전통문학과 이른바 전위문학ㅡ현대파문학현상은 문학마당에서 이률배반현상이다. 현대파문학의 특점인 파격적,몽롱성을 고정적관념으로 전부 부정하는것도 편파적이지만 현대파문학으로 과거의 일체 문학, 작가, 시인들을 단선이니 하고 완죤 부정해버리는것도 편협하다. 한극단에서 다른 한극단에로 나가는것은 전방위적인 사색이 못된다.
존재가 리유라면 이률배반현상을 무시하고 한곬으로만 파고들고 우겨대는것은 궤론이 아닐수 없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하지만 난 당신이 그 의견을 말할수 있는 권리를 위해 죽을때까지 싸울것'이라는 말이 명창이라고 승인한다면 남의 글을 두고 수준이하니 뭐니하고 도끼질부터 하는것은 문인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잘 알고있겠지만도 남의 말을 중복해두자.
《론어. 위정 편》에 나오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可以为师)” 라는 말은“옛것을 알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수 있다”라고 풀이되고있다. 옛것이나 새것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말고 전통적인것이나 새로운것을 고루 알아 신구지식에 대한 균형을 잘 이루어야만 남의 스승 노릇을 할수 있다는 뜻이다. “온고이지신”에서 옛것의 의미로 옛 고(古)’자가 아닌 까닭 고(故)가 사용되여“매사의 까닭을 탐구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라고 리해할수 있다. 추구는 모든 창의력의 출발점이다.‘왜?’는 기존지식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런 도전을 통해 ‘왜?’는 하달식, 주입식 지식전달을 거부하고 상향적, 창출적, 비약적지식을 창조한다. 그리고 ‘왜?’는 문제 해결에 착수하는 첫수단이기도 하다. 이와같이“온고 이지신”은 세상을 보는 사고의 틀을 원리중심적, 의미 중심적으로 설정하도록 제시 한다.
살을 먹였으면 활을 쏘아야 하고 말을 메웠으면 수레를 몰아야 한다는 말이 있던가? 반론의 칼을 빼들고 필마단창으로 종횡무진하는것은 장하지만 흰것은 희다하고 검은것은 검다하고 옳은건 옳다하고 그른건 그르다고 시비를 캐려면 문제아취급을 받는 현실이라도 선입견을 앞세우고 남을 무시하는것은 몰취미이다. 도끼질 세번에 성사하지 못하면 맥이 곧 빠져버리는 정교금은 중도에서 불쑥 잘 나타나는 특장이 있는데 장수는 장수로되 명 장은 못된다.
그리고 축구선수라 해서 다 교련감대기인것이 아니고 장군이라해서 곧 명사수라는 법 은 없다. 세상엔 소설을 쓰지 않고도 멋지게 평론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던가? 앉음뱅이 도 남이 걷는 걸음새의 흉은 잘 볼수 있다. 문제는 글을 가지고 반론해야지 인격폄하로 감촉될 언사는 대화에 리롭지 못한줄로 알고있다. 보통 아는게 많으면 여럿의 대화에서 독판을 칠수 있지만 아는것을 다 말하는것도 바람직하지 않듯이 수많은 수필작가들을 고중학생수준이라고 단언하면서 한몽둥이 때려눕히는것도 무단적이다. 무단적이 아니면 단 한편이라도 고중학생수준을 훨씬 초월한 수필대작을 실명으로 내놓아야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을게다.
보통 남의 글을 두고 무슨 수준이라고 금부터 긋는 사람이 명작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사람들이 잘 짐작하고 있는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서 <내>글만이 대학생글, 아니, 대문호의 글이라고 자화자찬하는것같은 느낌을 다분이 주니까말이다. 진심은 대방을 마구 찍어넘기는데서만 나타나는게 아니라 분촌을 가려서 말하는게 더 진심스럽고 그 진심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자신은 국외인처럼, 몇차원 높은 위치에 군림한 대가인양 모두의 글을 짓밟아버리려는듯한 어세는 공감을 사기어려운줄로 안다.이역시 이률배반이 되는것인지 잘 모르겠다.
19   작성자 : 거기는 누구?
날자:2015-01-10 08:27:23
거기 말대로라면 관웅이나 호웅이나 성일이가 뭐 장편소설이라도 쓰고 장편소설 평론을 냅다 해재낀건가? 대개는 아리숭한 기억과 인ㅅ간관계적인 감정상태에서 논 연극이란걸 누가 모르는가? 그렇게 평론을 해놓고는 찔러주는 돈이나 받아자시고 하는 학문이였는다는것을! 우리는 현황 김은철같은 분을 고무격려해야 하는줄로 안다. 김은철이도 거기가 코흘릴때 벌써 흑룡강"은하수"잡지에다 소설들을 줄줄이 발표해온 작가인줄로 안다.김은철잡품을 단한편도 못 읽은 분이 무슨 자격이있어서 여기나와 들이펄럭내펄럭거리는가? 무턱대고 한사람을 무시하지말기를 바란다. 모주석의 "백가쟁명"을 존중하시기를 바란다!
18   작성자 : 거기는 누구?
날자:2015-01-10 08:26:44
거기 말대로라면 관웅이나 호웅이나 성일이가 뭐 장편소설이라도 쓰고 장편소설 평론을 냅다 해재낀건가? 대개는 아리숭한 기억과 인ㅅ간관계적인 감정상태에서 논 연극이란걸 누가 모르는가? 그렇게 평론을 해놓고는 찔러주는 돈이나 받아자시고 하는 학문이였는다는것을! 우리는 현황 김은철같은 분을 고무격려해야 하는줄로 안다. 김은철이도 거기가 코흘릴때 벌써 흑룡강"은하수"잡지에다 소설들을 줄줄이 발표해온 작가인줄로 안다.김은철잡품을 단한편도 못 읽은 분이 무슨 자격이있어서 여기나와 들이펄럭내펄럭거리는가? 무턱대고 한사람을 무시하지말기를 바란다. 모주석의 "백가쟁명"을 존중하시기를 바란다!
17   작성자 : 김은철씨는 누구?
날자:2015-01-10 05:42:36
김은철씨의 이 글은 너무 수준이 없는 글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 김은철자신이 별작품같은 글을 못써냈기때문입니다. 저는 최룡관의 많은 작품을 아주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김은철씨의 작품은 단 한편도 여문 작품이 없다는것도 확실히 압니다. 최룡관을 평하기 먼저 자기자신의 글부터 좀 여물게 쓰는 련습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일 글같지 않은 글만 긁적이면서 자기도 문학인인가 착각하지 말구요...
16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0 02:17:38

문학작품도 바로 그러합니다.
중국조선족의 문학의 수준이 왜 변화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하고있는것일가?
저는 적어도 시는 많은 면에서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면에서는 최룡관시인의 공로가 상당하게 큽니다.
우선 최룡관시인이 시인으로써 비교적 로시인이지만 젊은 시인못지않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시의 형식탐구에 대하여 많이 노력하는 시인입니다.
그래서 시의 수준으로 볼때 최룡관시인의 시는 중국조선족시단에서 가히 독보적인 아주 높은 위치에 올라서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인간 최룡관이 싫지만 시인 최룡관은 인정해야 하고 최룡관의 시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시를 배우고 더 수준 높은 시를 써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와 함께 문학의 가장 주요한 장르의 하나인 소설에서는 정말 유감스럽게도 최룡관시인과 같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창신하는 소설가가 없다는것이 유갑스럽습니다.
그리고 수필은 더 말할것도 없습니다.
기본상에서 고중학생들의 작문정도 수준에서 머물러있는것이 현실입니다.
김은철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김은철선생님의 이번 문장을 읽고 김은철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만은 않게 있다는것을 압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바로 김은철선생님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문단의 문학수준이 변화하고 발전하는것을 저애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또 다른데 있습니다.
누구보다 앞장에서 문학을 지도하고 가르쳐주어야하는 대학의 문학박사 교수나 학자 평론가들의
수준이 문제인것입니다.
아마 자세하게 모르긴 해도 김관웅이나 조성일같으신 학자 평론가들은
김은철선생님의 이번 문장을 굉장하게 반갑게 읽었고 구미에 딱 맞는다고 좋아했을줄로 압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문단내의 권위자들의 문학수준이 한차원 내지 몇차원 더 높아야만이
많인 작가들 문학도들을 옳바르고 가르치고 인도하고 또 지도할수도 있는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는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조선족의 문학이 더 좋은데로 더 높은 수준에로 변화하고 발전하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최룡관의 시를 인정해야 하고 최룡관이 주창하고 있는 현대시에 대한 부단한 탐구정신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야하는것입니다.
따라서 소설문학도 수필문학도 그의 형식과 기법면에서 절대로 현상태에서 답보만 하고있을것이 아니라
피타는 노력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고 창신해야 함을 역설해야 하는것입니다.

긴말을 두서없이 널어놓았습니다.
김은철선생님과의 대담이 아주 즐거웠습니다.
15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0 02:02:03
그리고 이제 다시 돌아와서 우리 조선족의 문단에 관한 김은철선생님의 문장과 관련한 이야기를 몇마디 더 하고 이 댓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리게된것이 바로 연변의 시단에서 하이퍼시(현대시)의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최룡관시인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에 대하여 가장 많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 김관웅 조성일 등 분들이였습니다.
최룡관시인의 많은 작법을 저도 아주 나쁘게 봅니다. 그가 여기저기서 문학상을 들여다가 벌려가고 있는 행태가 상당히 불미스러우며 그자신의 시인의 이미지에 엄청난 손상을 끼친다는것도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창하고있는 현대시는 우리가 그것을 반드시 인정하고 배울것은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시라고해서 김은철선생님의 문장에서의 주장처럼 그것에 반감하고 부정하는것은 옳지 않습니다. 최룡관시인의 제자들이 쓰고있는 하이퍼시를 수십편을 읽어보고 저는 최룡관시인은 참으로 문단에서 나쁜 짓거리들을 많이 펼치고있지만 그가 가르치고있는 시들은 정말 좋구나고 감탄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시부문 상을 많이 수상하는것도 원인이 있습니다. 확실히 그의 제자들이 쓰고 있는 시를 보면 그 시들의 수준이 장난이 아닙니다.
즉 연변의 많은 시인들 이름은 일일이 지적하지 않겠습니다. 최룡관시인 한사람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로시인들이 여기에는 실례하지만 김철 김성휘 리상각 김응준 리성비 등 시인들도 모두 포함합니다. 산이나 물을 시로 표현할 때 그냥 산과 물의 단선적인 사색으로 빠져서 표현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사색은 산이나 물이 형상하는 문학의 표현방법을 이야기하는것이 아니라 시를 창작하고 있는 시인의 현장의식을 뜻합니다. 즉 산과 물을 놓고 진행되는 시인의 현장의식이 그 산과 물에만 빠져있는 시인들의 사색은 단선인데 반해 최룡관시인과 그의 제자들의 사색은 단선이 아닌 복합적입니다. 더 나아가 그냥 복합적인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분포하면서 여러 층으로 사색하기 때문에 상당하게 입체감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는 보통 독자들이 그냥 아 아름다운 강산! 아 아름다운 시냇물! 아름다운 구름! 하고 웨치는 단선적 사색의 시인들이 지어내는 시를 아주 경쾌하게 쉽게 읽을수가 있는것과는 판판 다른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기 쉽게 말하자면, 즉 단선적인 사색은 눈앞에 산과 그 산을 감돌아 흐르고 있는 물만 보이는데 복합적인 사색은 산 넘어의 구릉이나 혹은 평원도 함께 떠올리게 하고 그 산을 감돌아흐르는 냇물이 그 산 뒤에 어느 구릉이나 또는 평원을 감돌고 누비고 가는 강물과 합류하는 모습까지도 함께 상상하게 만듭니다.
김은철선생님은 조선족문단은 조선족백성들의 문단이니 그러면 시도 조선족백성들의 시가 되여야 한다는 주장이셨는데 만약 그 주장에 맞춰서 조선족백성들의 문학감상의 수준이 보편적으로 다 낮으며 시를 읽을 때도 그냥 단선적 사색의 시를 읽고 터득하는 수준밖에 안되므로 시인들도 그냥 그런 수준의 시나 써야한다면, 조선족의 시는 영원히 변화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합니다.
즉 조선족백성들의 문학감상수준이 단선사색이 아닌 복합적사색의 수준으로 변화할때까지 기다려서 반드시 그때가서야 좀 더 수준높은 작품을 써야 된다는 주장이 되고마는것입니다.
다음은 말이 나온김에 난해한 작품도 그렇습니다. 보통 난해한 작품은 정권이 문학을 관제하고 심하게 규제할때 그 관제와 규제를 피해가기 위하여, 그러면서도 작가가 자기가 해야 할 말은 해야겠고, 그래서 아주 난해하게 그러나 아주 교묘하게 작가 자신의 본 의도는 숨긴채로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독자들이 미처 터득하지 못하게 될때 발생합니다.
난해한 작품을 싫어하십니까? 그것을 읽고 또 읽는 재미도 따로 읽고 다시 읽어가면서 그 뜻을 풀어가는 재미를 즐겨하는 독자들도 아주 많습니다. 왜서 호두시장에서는 껍질을 다 밝아서 팔고 있는 호두보다 껍질이 그대로 있는 호두가 더 많이 팔리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까서 하나하나 파먹는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먹는 호두가 더 맛있고 또 더 영양가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에 어느 댓글에서 말했던 추상화도 그렇습니다. 추상화를 감상하는 멋이 바로 카메라로 찍은 사진보다 얼룰떨룩하게 비뚤비뚤하게 그려놓은 수상한 그림을 가지고 이게 뭐를 뜻하는 것일가고 한참 궁리하고 고민하다가. 끝내는 알아볼수가 없을때 에라잇, 하고 팽개치는 경우도 아주 많지만 그래도 시간을 두고 언젠가는 다시 꺼내들고 종당에 가서는 아, 이게 이런것을 그린것이구나고 갑작스럽게 알게될때 받는 감동과 감탄, 이런것을 즐겨하는 독자들이 아주 많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이런 감동과 같탄이 혹은 김은철선생님의 주장대로 별로 가치가 없고 반감만 일으키는것이라면 지금같이 카메라 촬영기가 발달한 시대에 화가들이 세상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
디 있겠습니까. 샤타 한번만 눌르면 얼굴에 미소한 기미 하나라도 모조리 사진에 담겨질 판인에말입니다.


14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0 01:35:49
여기까지 말하면 문학의 흐름이 모종의 산맥을 이루면서 서구에서 시작하여 러시아와 일본에까지 뻗어왔으면서도 끝내 한국과 중국에로 이어지지 못하였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조금은 짐작하실수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한마디로 개관하면 이렇습니다. 중국문학이 서구문학의 기법을 받아들였고, 중국의 작가들이 문화대혁명 이후 서구 또는 남미 등 중국 이외의 타민족 문학의 기법을 과감하게 배워오고 그것을 자기 민족의 문학에다가 아주 성공적으로 도입하여낸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한마디 더 하고 넘어가자면, 막언의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작품은 붉은 수수와 같은 그런 작품의 덕이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한번 검색해보시고 그가 수상한 작품의 이름과 그 작품의 문학기법이 어떤것인지를 꼭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3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0 01:28:45
계속해서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한마디만 더 보충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렇다면 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문학이 왜 이때까지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였던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결코 일괄하게 문화대혁명 때문으로 밀어버릴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렇다면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중국의 문학이 어떠했는가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전에도 그렇고 국민당의 중하민국 때도 그렇고 또 청나라때는 물론 더 나아가 명나라때도 중국에는 상당하게 인류 력사에 영향을 끼치는 좋은 문학작품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삼국지 수호연의 료재지이 유림외사. 이러루한 작품들 모두가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도 이런 작품들이 세계적인 문학의 흐름에서 볼때 인류력사에서 하나의 문학적인 산맥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구경 뭐가 부족해서 역부족이였냐고 반문해볼만도 한 일입니다. 김은철선생님의 주장대로시라면 주재 소재 이야기 즉 문학작품의 '감'으로써 얼마나 뛰여나고 훌륭한 작품들입니까!
그런데도 역부족이였다고 말하는것은 바로 제가 아주 간락하게 쉽게 말하는 기법의 문제입니다. 즉 노벨문학상은 현대의 산물이지 고대의 산물이 아닌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에서의 문학에다가 우리가 현대문학이라고 이름지어 부를때 이 문학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즉 현대의 문학은 형식의 탐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줄곧 형식창조를 중요시해오고 있으며 이 형식에서의 창조가 떨어지는 작품은 백프로 점수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의 수상자들이 서구에서 아주 많이 나오고 다음은 러시아와 일본에서까지도 수상자가 탄생한지가 반세기가 넘었으면서 최근까지도(즉 막언이 수상하기 전까지도) 노벨문학은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등단하지 못하였던것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저는 적어도 기법때문이였다고 주장합니다. 즉 현대문학에서 형식의 탐구를 통한 형식창조에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였습니다.

12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0 01:17:18
밑에 김은철선생님 본인이신가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아는대로 한번 이야기 나눠봅시다. 막언이 노벨문학상을 타게된 작품에 대하여, 수상의 원인을 설명할때 노벨상위원회는 그가 어떤어떤 작품을 어떤어떤 기법을 이용하여 문학적으로 완성해냈다는데 모를 박아놓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굳이 그것이 어떤 기법이라느니 하고 혼자 아는것처럼 설명할 필요가 없이 막언의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기사들을 인터넷상으로 검색하셔서 읽어보시면 알게 될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설명하느냐면, 적어도 제가 알기에 문학작품이 과거에는 즉 우리 중국의 경우에는 문화대혁명을 겪어오면서 문학이 모조리 죽어버렸던 상황에서 무엇을 쓰느냐, 즉 어떤 소재를 가지고 쓰느냐고 상당히 주요했던 시기가 오래동안 있었습니다.
적어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 뒤에도 수십년이나 흐르지 않고 어쨌습니까!
그런데 현대의 문학은 결국 무엇을 쓰느냐도 주요하지만 그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쓰느냐가 더 주요한 시대를 아주 오래동안 경험해오고 있습니다. 기법이라는 이 말에 대하여 김선생님은 저의 주장이 아주 우습게 들린다고 하셨는데 기법이라는 말은 간략해서 쉽게 말한것입니다.
작품을 어떻게 더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는가 하는 방법을 가리켜 수많은 문학의 대가들이 이에 대하여 탐구하여 왔는데 그렇게 탐구해온 력사가 결코 중국의 문학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난 문화대혁명 이후의 3, 40년간의 력사에 머물러 있는것이 아니라 적어도 4, 5백년이상을 계속해오고 있는중입니다.
11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10 01:16:31
밑에 김은철선생님 본인이신가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아는대로 한번 이야기 나눠봅시다. 막언이 노벨문학상을 타게된 작품에 대하여, 수상의 원인을 설명할때 노벨상위원회는 그가 어떤어떤 작품을 어떤어떤 기법을 이용하여 문학적으로 완성해냈다는데 모를 박아놓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굳이 그것이 어떤 기법이라느니 하고 혼자 아는것처럼 설명할 필요가 없이 막언의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기사들을 인터넷상으로 검색하셔서 읽어보시면 알게 될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설명하느냐면, 적어도 제가 알기에 문학작품이 과거에는 즉 우리 중국의 경우에는 문화대혁명을 겪어오면서 문학이 모조리 죽어버렸던 상황에서 무엇을 쓰느냐, 즉 어떤 소재를 가지고 쓰느냐고 상당히 주요했던 시기가 오래동안 있었습니다.
적어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 뒤에도 수십년이나 흐르지 않고 어쨌습니까!
그런데 현대의 문학은 결국 무엇을 쓰느냐도 주요하지만 그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쓰느냐가 더 주요한 시대를 아주 오래동안 경험해오고 있습니다. 기법이라는 이 말에 대하여 김선생님은 저의 주장이 아주 우습게 들린다고 하셨는데 기법이라는 말은 간략해서 쉽게 말한것입니다.
작품을 어떻게 더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는가 하는 방법을 가리켜 수많은 문학의 대가들이 이에 대하여 탐구하여 왔는데 그렇게 탐구해온 력사가 결코 중국의 문학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난 문화대혁명 이후의 3, 40년간의 력사에 머물러 있는것이 아니라 적어도 4, 5백년이상을 계속해오고 있는중입니다.
10   작성자 : 김은철
날자:2015-01-09 03:56:06
진심선생: 막언이 로벨문학상을 탄것은 문학창작의 3돌출시기에 현실주의 수법으로 중국의 현실을 진실하게 썼기대문이라고 봅니다. 붉은 수수에서 토비두목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것은 그 당시로 놓고보면 일반 작가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였습니다. 여기에 바로 작가로서의 막언의 위대성이 보입니다.서구의 기법을 배워서 썼다는것은 좀 우숩게 들립니다. 학술적인 각도에서 선생의 주장을 피력해 줄것을 기대합니다. 저의 글에 대하여 수준이하의 글이라고 해도 저는 무방합니다. 글은 그 글을 쓴 작자의 얼굴이겠지요, 글을 보고 작자의 얼굴생김새를 알지요. 문학작품에 대한 선생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9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09 01:27:15
때문에 일언이폐지하면:
김은철씨의 이번 이 글은 정말 수준이하의 글이다.
자기절로 자기 얼굴에 대고 가래침뱉기다.
8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09 01:25:22
중국의 노벨문학상수상작가인 막언은 자신의 작품의 생활소재를 모두 중국의 농민들속에서 찾아 쓰고있지만 그의 표현기법은 중국 농민들의 생홀속에서 나온 기법이 아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의 생활소재에서 얻은 이야기를 서구에서 배워온 문학표현의 기법으로 그것을 잘 형상화하여 냈기때문에서 결국 서구문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게되였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위치에 올랐다.

김은철씨가 구구절줄 비난한것도 결국은 서구에서 유래한 문학의 수많은 기법들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것에 불과하지 않는데 어떤 작가들도 작품의 소재는 대부분 모두 자기의 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내고 형상화해는가하는 문제에서 현대시도 나오고 몽롱시도 나오고 또 난해소설도 나오고 (김은철씨의 본문내용대로라면) 하는것인데 ...... 이런 기법을 공부하지 않고 배우지 않고 또 먼저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싫어한다면 결국 이것은 문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것이 아니라 발전을 저애하고 방해하는 작용밖에 하지 못하는것이다.
7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09 01:18:57
그런데 몇백가지를 다 설명하지는 못하겠고 아주 간단하게 김은철씨의 수준에서 알아들을수 있게 한두가지만 설명해드리겠다. 우리 조선족의 백성들이 선호하는 김치 장국을 지금도 조선족백성들이 보편적으로 많이 드시고 있는데 이는 우리 조선족백성들의 주식이라고 해야할수도 있겠다. 그런데 젊은 조선족들이 해외로 나온 뒤에는 차츰 햄버거도 좋아하게 되고 커피에도 맛을 드리고 이제 조선족 젊은 층의 주식문화도 아주 많이 바뀌여버렸다. 그러면 그런 젊은 조선족백성들은 김은철씨가 운운하는 조선족백성들의 문단이 작품으로 표현해야 하는 생활의 범주에 들지 않는것인지? 조선족백성들의 문단이라서 계속 된장과 김치 이야기만 하는 문단이 되여야하는지? 물론 아니라고 할것이다. 백화원에 다른 꽃도 피는것을 김은철씨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우유와 커피 맛도 조선족백성들의 삶의 또 다른 문화로 바뀌여가고 있는데도 우유와 커피의 생활문화를 작품속에 형상화할때 꼭 된장과 김치의 생활문화를 형상화하는 방법이나 기교로 같이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실것이다. 김치와 된장생활을 표현하는 방식과 우유와 커피생활을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른것처럼 김은철씨가 현대시요 몽롱시요 하면서 그것들에 반감하는것 자체는 모순이다. 현대시는 현대시대로 몽롱시는 몽롱시대로 자기의 목적하는 바가 있고 그것들이 자체의 비중과 함량이 있는 법인데, 왜 조선족문학이 김치 된장과 다른 우유와 커피는 받아들여야 하면서 과거 우리가 몰랐고 또 현재도 잘 모르고 있는 문학의 새로운 기법에 대해서는 받아들여서 공부하지 못하고 배격해야 하는것인지 김은철씨가 한번 대답해보시기 바란다.
6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1-09 01:09:13
김은철씨의 총체적인 주장은 조선족문단은 조선족백성들의 문단인바 조선족백성들의 수준에서 조선족백성들이 알아듣고 알아보고 알아먹을수 있게 작품을 만들어야지 좀 더 수상한 문학의 기법으로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먹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신데, 그러면 결국 조선족문단은 조선족백성들의 수준과 동시동보해서 나가야 한다는 소리다.

이것은 과연 옳은 주장일가? 이것이 옳지 않은 주장이라는 리유와 원인을 몇백가지라도 댈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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