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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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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우 사진작가, 취미가 프로를 낳는다
2016년 08월 05일 15시 21분  조회:1191  추천:0  작성자: 중국민족

글/리호남



사진작가 신승우


    흔히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직업이 있다. 의사, 변호사 등을 실례로 들수 있는데 사진작가도 이 범위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젊은 사진작가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나이가 지긋한 사진작가에게 신뢰가 가기 마련이며 그만큼 사진작가로서 성공하려면 10년, 20년 지어 30년 이상 오랜 기간의 단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올해 70고개를 바라보는 신승우 선생(辛承佑,1946.10)은 사진기를 만진 시간만 해도 어림짐작으로 근 50년이 되는 로장 사진작가이다. 여간한 노력가가 아닌 그는 일찍 길림신문사 촬영기자로 20여년간 근무해오면서 선후로 “중국우수사진작가”, “제1회 중국문예금작상”, “제1회 세계민간예술가 금비웅상”, “2008중국예술년도인물” 등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자기 “자랑”을 할줄 모르는 연고로 그의 경력은 남들한테 잘 알려져있지 않다.


 

어릴적의 꿈은 화가로 되는것
 
    길림성 교하시의 평범한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신승우 선생은 어렸을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림책에 나오는 인물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그의 그림소재로 되였다. 한편 어렸을 적 꿈이 바로 화가가 되는것이였다. 초중 때부터는 호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미술출판사에 편지를 써서 미술책을 구입했다. 고향의 신화서점에서는 미술책을 살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학교에 미술선생이 없다보니 미술공부는 자습이 위주였습니다. 고중에 들어가서야 미술선생의 지도를 받을수 있었습니다.”신승우 선생은 이처럼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견지해왔으며 끈질긴 노력 끝에 미술수준이 놀랍게 제고됐다. 고중 때 그는 학교공청단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교내 선전란과 표어를 도맡았다. 후에 하는 얘기지만 그의 이러한 미술재능은 촬영기교의 제고에도 아주 유용한 요소로 작용했다. 원인인즉 촬영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구도와 색채는 미술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창 화가꿈을 무르익히고 있을 때 “문화대혁명”을 맞이했다. 대학진학길은 꽉 막혔으며 이불짐을 둘러메고 고향인 강밀봉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도 신승우 선생은 농사는 별반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각 지방마다 모주석초상화와  “문화대혁명” 선전화를 그리는게 류행이였는데 신승우 선생은 이곳저곳 불리워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강밀봉에서는 신승우를 향에 남겨두기 위해 1970년 11월 향문화소 간사로 받았다. 그는 문화소에서  대외선전을 책임졌으며 사진도 많이 찍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1982년에는 영길현문화관에 전근되였으며 1983년 년말에는 영길현선전부 간사로 자리를 옮겼다.      



 
길림신문과 맺은 인연
 
    지난 1984년 “길림신문”이 정식으로 창간되면서 촬영기자가 급히 수요됐다.  길림신문사에서는 신승우 선생이 사진을 잘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으며 현지 선전부와 어려운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1985년 8월에 끝내 신승우 선생을 길림신문사 기자로 데려갔다.
    길림신문사에 입사해서 퇴직할 때까지 신승우 선생은 줄곧 길림신문사 길림지사 지사장으로 있으면서 길림시 조선족들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당시 신문사에 촬영기자가 그를 내놓고는 전무한 상황이였으므로 중대한 행사 때마다 사진을 도맡아 찍군 했다.
“한달에 한번은 연변에 출장을 가군 했습니다. 그때 침대권을 사는게 무척 힘들었으므로 흔히 좌석에 앉아가지 않으면 밤새도록 서서 연변까지 가야 했습니다.”
    신승우 선생은 이렇게 길림시와 연변, 장춘을 제집나들듯이 다녔다고 한다. 1년에 밖에 나가있은 시간이 집에 있은 시간보다 훨씬 많았다. 길림지사를 혼자 맡고 있는지라 취재도 나갈라니 기사도 쓸라니 사진도 찍을라니 지어 사진현상도 자체로 해야 하는 상황으로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야 했다. 하지만 한번도 일에 싫증을 낸 적이 없었으며 항상 일욕심이 북받쳤다고 한다.
    그는 기사를 써 본사에만 보내는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한문판 신문에도 투고하여 영향력을 넓혔다. 길림신문사에 입사한지 얼마 안되여 그는 만창진 차로하향 관개수로 부실공사를 길림신문 조선문판에 보도한 한편 이 기사를 《강성일보》에 보도하여 길림시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길림시에서는 이 일을 갖고 즉각 전문회의를 소집하고 해결대책을 마련하는데 총출동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신문의 여론감독역할을 절실히 느낀는 신승우 선생은 그후에도 언론매체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고 여론감독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기에 노력했다. 그는 여태까지 길림신문 이외에도 《인민일보》, 《중국청년보》, 《중국환경보》, 《중국교육보》, 《길림일보》, 《연변일보》 등 수십종 간행물에 기사를 발표했으며 《중국환경보》, 《길림일보》(한문판), 《강성일보》 등 언론매체의 특약통신원으로도 활약했다.
    신승우 선생은 지난 2006년 퇴직수속을 밟았지만 사업의 수요로 4년간 길림신문사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2010년에야 비로소 길림신문사 촬영기자직을 그만두었다. 은퇴한후 그는 자신의 취미와 애호인 사진, 전각, 미술 작품의 정리에 모든 정력을 몰부어왔으며  “신승우사진미술전각작품집” (2006년, 중국화보출판사),  “신승우사진판화작품집”(2009년, 중국민족미술출판사), “중국사진작가가 보는 세계-신승우사진작품집”(2013년, 중국촬영출판사), “국가예술-전국실력파예술가 신승우 특집”(2015년, 중국문련국제출판사) 등 11권의 작품집을 이미 출판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계속 정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한편 시간이 나는대로 작품집을 출판하지 못한 주변의 예술가들을 도와 그들의 작품집을 내주는 일에 진력할것이라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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