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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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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경원:전자상거래산업으로 제2차 창업을 꿈꾸다 댓글:  조회:1442  추천:0  2016-11-18
글/ 김향덕 “1980년대말 1990년대초의 산동성 위해시는 아주 보잘것없는 곳이였어요. 그러나 한창 대외개방의 돌풍이 불고 있던 터라 연해도시는 젊은이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차마련해주었지요.” 연길에서 전자상거래관리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경원씨의 말이다.   1964년 연길에서 태여난 그는 길림대학 행정관리학과를 나왔고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했다. 1988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산동성 위해시의 수출입무역공사에 배치 받았다.    당시 국가적으로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지 10년이 되였다. 연해도시는 대외개방의 교두보인 만큼 수출입무역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덕분에 김경원씨는 직접 대외무역과 관련된 지식을 착실히 습득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안해가 있는 청도시로 전근하여 계속해서 대외무역사업에 종사하다가 드디어 1996년에 복장회사를 꾸리면서 자주창업에 나섰다. 오래동안 쌓아두었던 무역경험에 의거하여 그의 회사에서 생산한 복장은 순리롭게 유럽과 카나다로 수출되였다.   이로부터 김경원씨는 창업후의 첫 수익을 올렸고 복장회사는 날로 규모가 확대되여 종업원이 가장 많을 때는 680명에 달했다. 그러나 필경 로동밀집형산업인만큼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인건비 상승, 시장환경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소의 종합적인 영향으로 인해 결국 김경원씨는 복장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다.   2015년에 이르러 김경원씨는 고향인 연길을 찾아 전자상거래산업으로 제2차 창업을 꿈꾸기로 했다. “연변의 독특한 지역자원, 인력자원 그리고 정책자원은 제가 돌아오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물론 고향건설에 투입하려는 개인정감도 일부 동력이 되긴 했습니다만.”   2014년 7월, 연변신통택배(申通快递)회사 윤기천 총경리는 북경에 있는 김경원씨를 찾아 연길에 돌아와서 함께 전자상거래산업을 해보는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해왔다.   마침 2015년에 중한자유무역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되면서 연변의 지역우세가 더욱더 충분히 발휘될것이라 판단하고 김경원씨는 흔쾌히 승낙했다.   2015년 5월, 김경원씨는 윤기천씨와 함께 전자상거래관리회사를 창립하였고 총경리직을 맡았다. 그들이 투자한 연길첨단기술개발구에 위치한 전자상거래빌딩(延吉电商大厦)이 운영되면서 예상대로 연길시의 록색산업발전 및 산업구조조정에 중요한 추진역할을 일으키게 되였다.   현재 김경원씨는 연변의 지역적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한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한 국제상품물류중심지를 건립하는것을 분투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자상거래산업방면의 전문인재를 배양하는것이 급선무였다.   지금까지 그의 회사는 무료로 800여명의 전문인재를 배양시켰고 일부 귀향하여 전자상거래산업에 종사하는 대학생들에게 기술적인 지지나 기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2015년 11월에 김경원씨는 연변대학과 손잡고 대학생창업기지를 건립하고 대학생들에게 직접 창업을 경험해보고 실습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현재 연길전자상거래빌딩에는 35개의 기업이 입주하고 300여명의 인원들이 전자상거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경원씨의 전자상거래관리회사는 연길뿐만 아니라 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자상거래교육기지로 거듭나고 있다.   귀향창업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김경원씨는 “귀향창업하려거든 첫째는 튼튼한 기술력을 장악하고 제일 좋기는 어느 한 방면의 전문가가 되는것, 둘째는 목표가 명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향의 여러 가지 실제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에 실천에 옮길것”이라고 조언했다.▣   중국민족 2016년 5월호
8    연길 음식배달시장의 달인 박세봉 댓글:  조회:1247  추천:0  2016-11-18
글/ 한동준 국내의 음식배달시장에 삼총사가 있다면 사람들은 대개 바이두배달(百度外卖), 메이퇀배달(美团外卖), 그리고 어러마(饿了吗) 등 브랜드를 떠올릴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도시의 음식배달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인 연길시에 가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필자가 만난 과과왕회사(呱呱网)의 CEO인 박세봉은 조선족사회 소비문화의 특점을 잘 파악하고 연길 현지의 음식배달시장을 공략한 일인자이다.    10년간의 상해생활, 창업의 기초를 닦다   박세봉은 어릴적부터 취미가 명확했다. 방과후 친구들이 숙제를 완성하고 과외수업을 받을 때 그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할아버지가 연변에서 이름난 화가인 리유로 부모들은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에 접어들어 박세봉은 학업을 그만두고 만화 그리기에 올인하였다. 그리고 차츰 회화기초를 토대로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는 2000년초, 인터넷은 속도가 느렸고 PC방이 점차 보급되는 시점이라 국내에는 아직 디자인에 관한 교과서가 매우 적었다. 박세봉은 한국에서 출판한 디자인 교과서를 구입하여 자체로 배웠다.  일정하게 실력을 쌓은 박세봉은 연길의 한 IT기업에 취직을 하였는데 설계를 아는 직원은 전 회사에 그 혼자뿐이였다. 당시 회사 사장은 한국에서 IT산업의 성황을 보고 곧바로 연길에 돌아와 회사를 차렸던것이다. 그곳에 있는 몇년간 박세봉은 인터넷 쇼핑몰, 꽃배달 전문사이트 등을 만드는데 참여하였고 명함, 화첩 심지어 고추장 포장까지도 설계했다. 그 당시 모방할 선례가 없다보니 그의 작품은 가장 좋고 훌륭한것으로 평가됐다. 박세봉은 회사에서 능력쌓기의 한계점에 다달았음을 느끼고 더욱 높은 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고 싶었다.  2003년, 19세의 나이에 박세봉은 단돈 1500원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부모님은 그를 적극 지지해 나섰다. “부모님은 18세를 넘기면 스스로 독립해야 된다고 여러번 얘기하셨습니다. 연길에 있기보다 외지에 나가 단련받는것이 자립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였습니다.”  상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중한 합작회사인 모 게임회사에 입사하였다. 중국어와 한국어에 능통하고 게임과 설계도 잘 안다는 점이 회사 책임자에게 어필되였던것이다.  “사실 그때 회사에서는 본과졸업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학력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이런 학위를 갖고 있는 관련 인재들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이중언어를 알고 IT산업에 종사하면서 게임까지 만들수 있는 조선족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취직후 박세봉은 중한 부서간의 통역을 하면서 게임설계, 웹사이트 설계업무도 맡았다. 그 시기 웹사이트 설계분야는 한국이 앞서고 있어 그는 한국에서 보내온 요구대로 설계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몇년간 그는 꾸준히 경험과 아이디어를 쌓았다. 그후 또 일본게임회사와 한국게임회사에서 2~3년간 근무하였고 수중의 자원을 리용하여 친구들과 창업도 해보았다. 상해에 간지 10년을 넘길 무렵, 박세봉은 연길을 떠날 때 10년만 상해에서 분투하다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는 예상대로 연길에 돌아와 창업준비를 시작하였다. 박세봉(좌1)과 회사기술책임자    귀향창업, 음식배달시장 공략   정식으로 연길에서 창업하기전, 박세봉은 여러번 돌아와 시장조사를 하였다. 집을 따로 세맡아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그는 하루세끼를 배달음식으로 해결하였는데 연길의 음식배달시장이 상해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시기 연길의 음식배달방식은 아주 전통적이였다. 고객이 배달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면 배달회사에서 이를 적은 후 해당 식당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고 다음 배달회사에서 소형 무전기를 통해 심부름아저씨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배달해야 된다고 통지하는 방식이였다. 이렇게 음식을 주문하는데 전화를 두번씩이나 들고 놓고 또 심부름 아저씨도 직접 통지해야 하니 많은 시간이 소모되였고 또 주문 고봉기에 전화가 아예 안되거나 식당에서 식재가 없어 만들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하여 음식주문 자체가 변수로 충만되여있었다. “그때 디디택시(滴滴打车)가 연길에서 차츰 보급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디디택시의 고객이 주문을 어플에 내걸면 기사들이 자유로 수주(接单)하는 이러한 모식을 음식배달시장에 도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곧바로 집행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웹사이트가 바로 과과왕닷컴이다. 고객들이 과과왕 사이트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심부름 아저씨들은 어플을 통해 이를 자유로 수주하고 다음 해당 식당에 전화를 걸어 음식을 주문하고는 시간내에 배달하는것이였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혁신적인 배달방식만을 가지고 음식배달업계의 삼총사가 도사리고 있는 현지시장에서 발목을 굳히기란 약간 부족했다. 고심끝에 그는 과과왕의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삼총사와 차별화되는 전략을 생각해냈다.  우선 그는 각 식당에서 제공한 이중언어 메뉴판을 근거로 사이트에 등록된 모든 료리에 한어와 조선어로 이름표기를 하였다. 이는 고객들이 음식을 검색하는데 편리를 제공하고 또 한족이 대부분인 심부름꾼 아저씨들이 각양각색의 료리이름에 구애없이 무난하게 식당에 전화를 걸어 주문할수가 있게 되였다. 이중언어 메뉴검색은 전국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배달업계 삼총사의 어플이 제공할수 없는 기능이였다. 다음 그는 차별화된 주문 메뉴를 선택했다. 보통 배달업계 삼총사가 연길에서 주문량이 많이 들어오는것은 마라탕과 같은 중저가 음식들이였다. 박세봉은 이와 반대로 비싸지만 질과 량이 보장되는 양식, 일식, 조선족 및 한국음식 그리고 고급중식 등 중상권 가격의 료리들을 사이트에 등록했다.  고향이 연길이고 여기서 자라난 박세봉은 그를 포함한 조선족들의 소비심리를 잘 료해하고 있었다. 조선족 고객들은 비싼 가격이라도 맛있고 즐거움을 줄수 있다면 기꺼이 돈을 쓰는 특점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충동소비의 심리에 “통”까지 크다는것이다. 그리하여 가격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이트에는 고객들의 주문이 끊기지 않고 있다. 박세봉의 소개에 따르면 현재 과과왕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가운데 90%이상이 조선족이라고 한다.  음식배달 외에 박세봉은 과과왕닷컴에 24시간 온라인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심부름 아저씨가 수주하여 배달하는 식으로 운영되는 슈퍼는 연변특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류 및 간식 등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주말에 축구경기가 있으면 맥주가 불티나게 팔립니다. 수입산이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또 쉽게 저의 사이트를 통해 구매할수 있고 여기에 배송비도 낮아 많이들 찾고 있습니다.” 연길시장을 겨냥하고 제정한 박세봉의 차별화 전략은 배달업계의 삼총사를 따돌리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현재 그는 과과왕닷컴의 상업모식을 진일보 발전시켜 향후 북경의 왕징, 청도의 청양구, 상해의 민항구, 광주의 백운구 등 조선족 집거지까지 넓힐 계획이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귀향창업의 가장 좋은 발전방향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글/ 김향덕 연길시내에서   “룽마트” 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일찍이 한국상품을 전문 판매하는 마트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여년간 “룽마트”는 줄곧 안전한 상품과 성실한 경영으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아왔다. “룽마트”의 사장은 고향이 왕청현인 박철남씨였다. 그는 어릴적 부모님을 따라 흑룡강성으로 이사하여 줄곧 거기서 자랐다. 1980년대말, 할빈공업대학이라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던 박철남씨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당시 개혁개방정책의 추동으로 사회적으로 창업의 열조가 일어났다. 여느 청년들처럼 박철남씨도 마음속으로 상업계에 발길을 들여놓고 무언가를 자신의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이 그는 선후로 전자연구소와 기계공장을 꾸려보았지만 실패를 거듭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1999년에 이르러 식품회사를 꾸리고 주로 패스트 소비품(快速消费品)을 판매하게 되였다. 올바른 경영리념과 투철한 관리방식으로 박철남씨는 신속히 흑룡강성에서 패스트 소비품시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후, 우연한 기회로 연변을 찾은 박철남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기전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번영발전해가는 연변의 현재 모습이 옛날과는 퍽 달랐기 때문이다.   전기의 시장고찰을 거쳐 2005년에 박철남씨는 드디어 연길시내에 식품소매상점을 꾸리게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길은 조선족들의 집거지인 만큼 한국상품소비가 많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박철남씨는 전문 한국상품을 판매하는 마트를 꾸리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룽마트”였다. 예상대로 한국상품은 연길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룽마트”의 매출액도 날로 상승하였다. 따라서 박철남씨는 경영규모를 확대하여 현재 연길에 13개의 매장, 할빈에 2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최근 년간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소비자들의 소비방식이 크게 변화되였다는것을 박철남씨는 일찍이 감지하였다. “룽마트”는 매장을 통하여 직접 상품을 판매하는 동시에 인터넷에서도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인터넷에서 “룽마트”의 상품을 주문하면 즉시로 배송 받을수 있다. 현재 박철남씨는 새로운 물류중심지를 건설하여 1400평방메터의 사무구역과 5000평방메터의 물류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꿈은 이제야 첫 걸음을 뗀 셈이다. 왜냐하면 박철남씨의 최종목표는 단순히 한국상품을 들여다가 중국에서 판매하는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연변특산품을 한국, 일본 등 해외로 수출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념대로라면 고향 연변의 특색을 살려 연변상품을 내다파는것이 진정한 재능이다. “연변은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으로 이름났지요. 특히 연변의 농산품들은 대부분 록색 유기농제품으로서 앞으로의 발전전망이 크다고 판단됩니다.” 2014년에 연길시 정협위원으로 당선된 박철남씨는 연변의 농업산업화 발전에 관련된 제안을 내놓았다. 앞으로 박철남씨는 연변의 농산품개발에 주력할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그는 식구들을 모두 할빈에서 연길로 데려옴으로 진정으로 귀향한 셈이 된다. 그의 말대로라면 번잡한 대도시 생활도 좋지만 그래도 산 좋고 물 좋으며 인정이 넘치는 고향에 되돌아와야만 진정으로 살맛을 느낄수 있다는것이다. 박철남씨는 정부차원에서 더욱 많은 기회를 창출하고 더욱 많은 우대정책을 내놓아 더욱 많은 인재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창업할것을 희망했다. 고향에 돌아와서 창업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단순히 누군가에게 의지하는것보다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자신만의 재간으로 꾸준히 실천해나가는것이 성공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글/ 김향덕  1995년 리경희씨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고향 연길을 떠나 심수로 향했다. 당시 그들의 선택은 누가보기에도 다소 모험적이고 과감했다.  심수에서 리경희씨에게 차례진 첫번째 직장은 향항기업이였다. 영어를 조금 알고 한국어가 가능했기에 그는 한국과 관련된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할수 있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국기업에 전근하여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재무부 부장자리까지 올랐다.  한국기업에서의 근무는 조선족 직원들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할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당시 한국기업들은 세계화의 물결속에서 해외시장공략에 주력하였고 비교적 완벽한 업무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여 조선족 직원들은 대부분 경력이 부족한 햇내기들로서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특히 학창시절 주로 일본어를 외국어로 배운 조선족들은 한국상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영어에서 나온 외래어를 잘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따라서 의사소통문제로 조선족 직원들은 한국상사들의 지적을 받기가 일쑤였다.  1996년 리경희씨는 심수에서 전자기기공장을 세우고 직접 재무관리를 비롯한 제반 경영에 참여하였다. 4년간의 실천으로 그는 풍부한 관리경험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직업기술교육의 시급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4년간의 분투로 저는 일정한 자금축적을 하게 되였다. 그러나 심수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났습니다. 특히 연변에서 온 조선족청년들중에서 낮은 학력과 부족한 기술력으로 랭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경희씨는 고중에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사회에 들어서면 여러 방면에서 오는 압력을 받기가 쉽다고 말한다. 특히 한가지 장끼라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대도시에서 생존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는 마음속으로 장차 고향에 돌아가 학원을 꾸려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영어, 컴퓨터, 재무기술 등을 전수하기로 다짐했다. 고향의 젊은이들이 재능을 넓혀 조금이나마 쉽게 사회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2000년 리경희씨는 다년간 모았던 자금과 실천경험을 갖고 연길로 돌아왔다. 꿈을 실현할 시각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리경희씨는 곧바로 연길시 유관부문을 찾아가 민영직업학교를 꾸릴 생각을 털어놓았다. 교육을 공립학교가 아닌 민간인이 꾸린다는 발상은 그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유관부문의 반대가 있었으나 리경희씨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민영직업학교설립이 허가를 받았다.   얼마후 리경희씨는 연길시현대인재양성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직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재무경력에 의거하여 “현대기업회계”라는 교재를 편찬하였고 직접 학생들에게 재무지식을 전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어, 컴퓨터, 전자상거래 등 다양한 전공을 개설하고 교육부에서 인증하는 학력증서를 발급할수 있게 되였다.  리경희씨는 심수에서의 경력이 없었더라면 연길에서의 성공이 있을수 없다고 말한다. “2000년에 연길에 돌아왔을 때 친지들은 제가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냥 단순한 외모의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과 사무처리능력의 진보에 모두 감탄했지요.” 리경희씨는 한술에 배불릴 생각보다 꾸준한 노력과 적극적인 사고가 귀향창업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을 하였다.▣
5    조용철: 조선족표 김치로 세상에 자리매김하고 싶다 댓글:  조회:1314  추천:0  2016-11-18
연변금강산식품유한회사(조용철 사장)에서 생산하는  “금강산”표 김치는 대형마트, 슈퍼, 대리점, 소매점 등을 포함한 1000여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동북3성뿐만 아니라 전국에로 뻗어나가면서 대표적인 조선족 특색의 식품 브랜드로 되였다. 1990년대초, 조용철씨는 로씨야로 건너가 국제무역에 종사했으며 6년간의 분투를 거쳐 일정한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장기간의 외국생활은 그의 마음을 안착시키지 못했으며 돈이 모아지면 꼭 고향에 돌아가 창업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1996년 조용철씨는 손에 창업자금을 쥐고 고향인 연길로 돌아왔다. 그는 그동안 쌓은 국제무역경험만 믿고 창업으로 크게 성공하리라 확신하였다. 그는 선후로 복장무역, 료식업, 유흥업 등 여러 분야의 창업을 시도해보았지만 모두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실패원인을 고향의 우세 또는 특색을 살릴수 있는 분야를 찾아내지 못하고 무턱대고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을 때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조선족이나 한족이나 모두 우리 민족 김치를 즐겨 먹는것을 보고 그 분야에 대해 시장조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연변의 김치는 모두 재래시장의 개인매대에서 판매하고 있었으며 대규모화 생산기업이 극히 적었다. 연해도시를 보아도 대부분 한국기업들이 입주하였고 조선족기업은 거의 찾아볼수가 없었다.  2003년 4월 조용철씨는 연변금강산식품유한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김치생산에 들어갔다. 다년간의 모색과 실천 끝에 그는 김치생산도 반드시 자주적인 특색을 살려야 함을 깨달았다. “집집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이 우리도 조선식 또는 한국식이 아닌 조선족식의 김치를 생산해야겠다는것을 확신했습니다.” 조용철씨는 선진적인 김치생산설비를 도입하는 동시에 제품의 연구개발에 각별히 중시를 돌렸다. 새롭게 설립된 회사의 연구개발중심은 8명의 연구인원과 10명의 기술인원 그리고 6명의 품질감독인원을 두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연변대학에서 식품생산 관련 전문가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았다. 그는 앞으로 연변대학 식품학과와 합작하여 최초로 되는 중국조선족 김치과학기술연구중심을 설립하고 한국의 김치생산기업과 전면적인 기술교류를 거쳐 조선족 특색의 김치를 진일보 발전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저희는 13억 인구를 대상으로 한 국내시장을 겨냥하고 있으니 멀지 않은 장래에 국내의 일부 대도시뿐만 아니라 로씨야, 몽골 등 나라에 가서 김치공장을 세울 계획입니다.” 이 회사는 김치생산에 소요되는 배추를 모두 연변에서 구입함으로 현지 농민들의 수입을 증가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5년 상반년에 부지면적이 3.2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새로운 구역에 입주하면서 생산규모와 수준을 진일보 제고시켰다.  올해 3월, 유정성 전국정협주석이 연변에서 조사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연변금강산식품유한회사를 찾았다. 당시 조용철씨는 연변의 지역특색을 활용하여 김치를 비롯한 조선족 음식문화를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주력하겠다고 뿌듯하게 회보하였다.▣ 
4    400년과 만나다 댓글:  조회:753  추천:0  2016-08-05
글/김홍란       한국행 출국을 앞두고 마음이 설레였다. 경기도 오천리라는 시골마을에 있는 400년의 나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것만 같아 괜히 마음이 급해졌던것이다.     령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동북의 엄동설한, 그 긴 겨울나기가 두려워 따뜻한 한국을 찾은 나는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추위에 떨었으며 습도 높은 한국의 기후에 한껏 옹송거린 몸은 후회와 불안속에 잔뜩 위축되여 있었다. 보일러가 있는 방에서 전기장판까지 고온으로 켜놓고도 모자라 이불 네채나 덮고서야 밤을 지낼수 있었으며 두터운 옷을 두겹세겹 껴입고 실내화에 모자로 무장하고도 춥다는 소리를 노래처럼 했다. 그렇게 2,3일을 고투해서야 내 몸은 겨우 이곳 기후에 조금씩 적응하는 조짐을 보였다.     겨울만이 아니다. 지난 여름에도 같은 일을 겪었다. 한여름인 7월에 한국에 도착한 처음은 역시 오한이 든 사람마냥 덜덜 떨었다. 그리고 두달간의 체류가 끝나고 중국에 돌아와서도 또다시 열흘간 고생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내 몸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낯선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고 거기에 새롭게 적응하느라고 몸살을 앓아왔다.      그렇게 몸살을 겪고 설명절을 쇠고 하느라 20일을 훌쩍 보내고 오늘에야 나는 400년의 나무를 찾아 나섰다.     지난 여름, 여기 오천리 마을 한끝에 자리잡은 놀이터에서 처음 고목을 만났었다. 낮은 산에 기대여 있는 놀이터는 가파른 산자락에 울창하게 서있는 나무들이 그늘을 둥그렇게 만들어주어 서늘하고 아늑했다. 놀이터에는 간단한 운동기구들이 줄지어있고 한켠에 400년의 나무가 긴 가지들을 부채살마냥 휘우듬하니 펼치고 서있다. 덩실허니 큰 고목이 할아버지마냥 수염 어루쓸며 허허 웃는듯 하는데 그옆에 방석 펴고 점잔하게 앉아있는 정자와 졸졸졸 흐르는 시내물이 고목을 400년 벗해온듯 유정해보였다. 그 옛날 정자우에서는 시쓰기 경합이 벌어지고 고목에 매단 그네 타고 아녀자들은 하늘우로 날아올랐을 그림 같은 풍경.     그러나 겨울이 한창인 지금은 어떤 풍경도 읽을수 없다. 놀이터에는 썰렁하니 눈만 덮여있었고 놀이기구들은 누가 찾아주는 이 없이 차갑게 얼어있었다.     드디여 400년의 고목을 마주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고목을 다시 읽었다.     보호수-     수종: 느티나무 / 수고: 20메터 / 나무둘레: 6.0메터 / 수령: 400년 / 지정일자: 1982.10.15 ... ...     엄격하게 말하면 82년도로부터 30년을 넘긴 현재 수령은 430년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고목은 온 겨울 추위에 떠느라 경직된듯 하다. 나는 오랜 지우를 만난듯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고목을 어루쓸었다. 430년이라, 그 오랜 수자앞에 마음이 숭엄해진다. 우리가 몇세대를 거쳐오는 동안 고목은 촌보의 움직임도 없이 이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킨것이 아닌가.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자리를 옮겼는데…할아버지가 남부녀대하여 낯선 곳에 가서 일군 새 터전을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는 너무 쉽게 버리고 또다시 류랑의 길에 올랐다. 거퍼 100년도 안되여 삶의 터전을 잃고 있다. 아니, 버리고 있다. 기후차에 몸이 적응하기 힘들어하듯 새 정착지에 적응을 못해 몸살을 앓으며 우왕좌왕하면서도 말이다.     내 손의 온기가 나무에게 전달되였을까? 6메터 둘레에 내 키의 10배도 훨씬 넘는 나무앞에서 나는 너무 왜소했다. 내 체온의 전부를 준다 해도 고목에게는 간에 기별도 안갈것 같다. 한 나무앞에 선 한 인간이 이처럼 초라할수 있다니. 나무는 내가 반가울가? 나무를 닮고 싶어하는 나를 거부하지 말았으면.     400년 나무의 두리에는 그만한 수령은 안되여도 300년, 200년, 100년은 되였음직한 느티나무 몇그루가 더 있다. 400년 나무의 후대들이고 가족들임이 틀림없다. 수백년동안 느티나무 가족은 흩어지지 않고 한자리에 뿌리내리고 살며 서로 힘이 되고 격려가 되였을것이다. 그들에게는 나처럼 여기저기 옮겨다니느라 기후에 적응 못하고 환경에 적응 못해 겪어야만 하는 몸살 같은건 필요가 없다. 그들은 가족이 같이 하면서 튼튼해져 어떤 추위도 재난도 쉽게 견뎌냈을것이다. 혈육의 정을 나누며 행복했을것이다.     400년의 나무가 말해온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고, 자기네처럼 한곳에 모여 살아보라고, 한곳에서 뿌리 박고 오래오래 살아보라고.     그래, 어디든 좋으니 이 고목처럼400년이고 800년이고 한번 내린 뿌리 살찌우며 오래오래 살고 볼판이다. ▣
3    문학으로 보는 조선족사회의 정착과 리산 댓글:  조회:860  추천:0  2016-08-05
 글/최학송           해방전, 동북지역에는 근 2백만명에 달하는 조선인(조선족이민 1세대)이 살고 있었다. 이중에는 적지 않은 문인들도 포함되여 동북조선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조선족문학의 전사(前史)라고도 할수 있는것으로서 흔히 재만조선인문학 또는 조선족이민문학으로 불린다. 이시기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의 하나로 “개척”을 들수 있다.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하여 낯설고 물설은 동북에 들어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의 어려움과 보람을 묘사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터전의 개척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고향의 건설과 련결되여 “북향(北鄕)” 즉 북쪽의 고향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널리 사용되였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북향회(北鄕会)”라는 문학동인회가 결성되였으며 이 동인회에서는 또 《북향》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북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안수길(1911-1977)을 들수 있다. 안수길은 동북 조선인들의 생활을 반영한 소설들을 묶은 그의 첫 개인창작집 제목을 《북원(北原)》(1944)이라 명하였으며 조선인들이 동북에서 리상촌을 건설하는 이야기를 다룬 그의 첫 장편소설의 제목을 《북향보(北鄕譜)》(1944)라고 달았다. 안수길의 말처럼 조선의 북쪽, 즉 동북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한다는것이야말로 이시기 동북에서 생활한 조선족이민 1세대의 삶에 대한 가장 형상적인 요약이 되겠다. 오늘날 동북에 있는 조선족집거지들은 이런 “북향”건설의 결과물들인것이다.      박옥남의 “둥지”(2005)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둥지”는 벽동툰이라는 한 조선족마을과 그 마을에서 생활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통하여 조선족공동체의 해체와 몰락을 보여준다.      송화강류역에 위치한 벽동툰은 평안북도 벽동에서 여덟가족이 이주하여 형성된 조선족마을로서 처음에는 팔가자(八家子)라 불렸으나 1954년 소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의 이름을 벽동소학교로 명명하면서 마을이름도 아예 벽동툰으로 바꿔버렸다. 벽동소학교는 학생수가 가장 많을 때에는 200여명까지 되였으나 현재는 전교생이 7명이며 끝내는 페교를 맞이한다. 페교된 교사는 이웃 마을의 한족이 사들여 양우리로 사용하며 운동장은 양들이 먹을 사료를 재배하게 된다. 마을이름의 유래에서도 알수 있다싶이 벽동소학교의 흥망성쇠는 곧 벽동툰의 흥망성쇠를 반영한다. 소학교의 페교처럼 벽동툰도 현재 몰락을 거듭하고 있다. 소학생인 진수는 다니던 학교가 페교되면서 이제부터 외가집에 가 생활하면서 현성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 한국에 돈벌이를 간 진수의 아버지는 현재 련락이 두절된 상태이다. 진수의 어머니는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고 매일 도박판으로 돌아다니다 촌장과 바람을 피운것이 들통나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오늘날 조선족농촌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우리는 이 작품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이 작품을 읽고 분석하다가 몇몇 학생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작품속에서 자신의 고향마을을 보았을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났다. 필자가 다니던 소학교가 현재 소우리가 되여 있고 운동장이 옥수수밭으로 된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을 보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김혜련의 “아빠트”(2011)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있다. “아빠트”는 연변의 한 조선족농촌마을에서 태여난 30살좌우의 네 조선족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철수는 연길의 한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는데 연길에 아빠트가 없다는 리유로 사귀던 녀자친구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아일랜드에서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 연길에 아빠트 한채를 사주겠다던 박연은 불법체류가 들통나 그사이 모은 돈을 모두 날리고 자기보다 7살 어린 당지 남성과 결혼하는것을 통하여 강체출국만은 면한다. 상해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미자는 량가 부모님들이 10여년 한국에서 번 돈으로 선불금을 내고 상해에 아빠트를 마련한다. 매달 6천원씩 20년간 은행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미자는 상해에서 대학 교수가 되여 “떠돌이 삶”을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겠다는 꿈을 안고 이악스레 살아간다.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영희는 사귀던 가난한 남자친구와 헤여지고 아빠트를 갖고 있는 한국남자와 결혼한다.      작품속의 인물들은 모두 “고향”을 등지고 도시에서 “아빠트”때문에 울고 웃는다. 도시에 아빠트를 가졌다는것은 도시에 정착하였다는것으로 리해할수 있다. 이로보면 작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도시지향적인 삶과 도시정착과정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반영한것으로 볼수 있다.      안수길은 “북향” 건설을 제2의 고향건설이라고 하였다. “북향” 건설을 통하여 우리는“둥지”의 벽동툰처럼 농촌을 중심으로 집거생활을 진행하는 제2의 고향을 건설했으며 벽동소학교와 같은 민족학교의 건립을 통하여 우리의 언어, 문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왔다.     이런 새로운 도시조선족공동체의 건설을 우리는 “제3의 고향건설” 또는 “남향”건설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우리가 그토록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북향”을 건설했던것처럼 비록 당분간은 여러가지 현실적 어려움이 많겠지만 “남향”도 또 하나의 “고향”으로 잘 꾸려갈수 있을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남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을 반영한 보다 많은 작품이 나타나 우리 조선족문학을 풍성히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    주인공의식이 어느때보다 필요하다 댓글:  조회:903  추천:0  2016-08-05
글/정신철           이민으로 형성된 중국조선족은 유전이라할까 현재도 류동성이 강하다. 물론 류동은 현 시대의 중요한 상징의 하나로서 류동할수 있다는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것을 말한다. 류동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터전을 닦고 더 좋은 생존환경을 도모하며 삶의 질을 높일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것은  초창기에 우리 선조들이 쪽박을 차고 중국땅에 건너올 때의 생계유지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조선족의 대규모의 류동은 시대흐름에 맞는 움직임이고 새로운 재부를 창조하는 더 좋은 계기로 볼수 있다. 그리고 개척성이 강한 조선족들은 어디 가든 모두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기타 민족 부럽지 않게 자신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라고도 할수 있다.     문제는 조선족은 적응성, 개척성이 강한 한편  “안착의식”,   “뿌리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하며 “주인공의식”은 더욱 약해 보인다. 례컨데 우리 조선족은 누구보다도 시대흐름에 항상 앞서 새로운 터전을 잘 개척해 나간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 와서는 더 철저히 해보려는 의지보다 늘 현상유지 또는 새로운 류동을 도모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빈번한 류동때문에 그들에게는 주인공의식을 지니고 한 지역, 한 령역에 집착하여 지속적으로 원래의 기반을 더욱 넓게, 더욱 깊게 하려는 의지가 약해 보인다. 그 결과 조선족사회 전체를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것 같은데 아주 돌출한 인물들은 기타 민족에 비하여 많이 부족하다는것이다.     현 시대에 있어서 령활성을 띠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직업에 감히 도전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집착하고 꾸준히 밀고 나가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자면 먼저 무엇을 하든, 어디에 가든 거기에 애착을 갖고 당당한 주인공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 다음으로 자기가 하는 일, 생활하고 있는 곳에 집착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는 한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장인정신이 특별히 필요하다.     때문에 조선족사회 성원들은 무엇을 하나, 어디에 가나 당당한 주인공의식을 갖고 그 령역, 그 지역을 사랑하고 꾸준히 산을 옮기는 “우공”과 같은 장인정신을 키워야 한다.  ▣
1    열린 생각이 뿌리를 강하게 만든다 댓글:  조회:757  추천:0  2016-08-05
글/명호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은 잎이 무성하고 꽃도 류달리 아름답지만 뿌리가 깊지 못하며 어느날 창문가에 놓으면 작은 바람에도 쉽게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광활한 벌판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거센 비바람속에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     한 민족을 말하면 식물과 다를바 없다.     인구가 수천만명이 넘는 민족들이 허다한 이 세계에서 유태민족은 인구수도 많지 않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오랜 력사과정에 수많은 역경을 거쳤지만 굳건히 버텨냈고 현재는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흩어져 살면서도 체질적으로 갖게 된 열린 생각들과 모진 시련속에서 련마된 굳센 마음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 조선족 전통집거지가 허물어지고 민족구성원들이 중국 다민족문화권속으로, 세계속으로 흩어지는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날개를 더욱 굳건히 하고 우리의 뿌리를 더욱 든든히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싶다.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 전역 내지는 세계속으로 그 발자취를 넓혀가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내 여러 민족들가운데서도 인구분포가 가장 분산되고 개방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이라 할수 있다. 류례없던 민족류동과 거세찬 개방의 물결속에서 우리 민족의 앞날과 운명에 대한 불안과 우려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문제되는것은 인구의 분산이다. 조선족인구의 분산 현황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통계가 나온것은 없지만 현재 집계된 일부 수치들을 통해서도 대략적인 상황을 료해할수 있다. 2010년에 실시된 전국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조선족인구 183만명이다. 그 가운데 한국내 체류한 조선족인구가 60만명 이상에 달하는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중국내 북경, 산동, 천진, 상해 등 지역에 산재해 살고 있는 조선족인구수도 어마어마하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중국 전역과 세계 각지(한국 제외)에 산재된 조선족인구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인구수와 맞먹는것으로 추정된다. 다시말해 전체 조선족인구의 3분의 2정도가 전통적인 집거지인 동북3성을 떠나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2세, 3세가 여전히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우려는 일부러 누구를 놀래우려는 의도가 아니라 현재 진행중이며 그리고 향후 더욱 심각해질 동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타지역으로 이동한 조선족류동인구가 조선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현저하게 낮아지는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자녀들의 조선어 구사능력은 부모에 비해 훨씬 떨어지거나 심지어는 한마디도 할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동화이다. 이 추세대로 한세대, 두세대가 지나면 조선족이라고 자부할수 있는 특징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우려들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얻어낼수 있는 결론은 확연히 다를수도 있다.     우선 민족의 분산이 꼭 민족정체성의 약화와 소실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유태인을 례로 들면, 그들은 방방곡곡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분산거주로 인해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보다 글로벌한 정체성을 지닐수 있게 되였다. 외부요소들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이끌어가면서 다양한 도전들에 맞선다면 조선족의 정체성은 약화되거나 소실되는 대신 오히려 더욱 굳건해질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시도를 함에 있어서 우리 조선족은 리용할수 있는 외부자원들이 여러개 있다. 하나는 정부의 민족정책이 정체성 유지에 체제적인 보장을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우리 민족의 량호한 이미지와 중국이라는 다민족국가의 포용적인 문화환경속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족의 이미지가 대체로 부지런하고 문명하고 깨끗하다는 등 단어를 떠올려 쉽게 타민족에게 다가갈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조선족이 갖고 있는 창업기반이 지난날의 지역적 제한이 강한 벼농사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한국, 한국인들과의 끈끈한 문화적 뉴대관계도 조선족의 발전에 독특한 외적자원이 되고 있다. 정보기술의 발전 또한 민족정체성을 현실적으로 보장해준다. 과거에는 분산거주가 흔히 민족, 고향과의 단절을 의미했다면 오늘날 날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은 현지화와 민족뉴대관계의 통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의 정체성은 더는 자치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 전역에로,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다시 민족동화로 돌아오면 동화라는 말은 흔히 두려움을 앞세운다. 동화의 본질은 한 민족에 대한 생리적 도살이 아닌 문화적 의미에서의 민족의 소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류력사상 특히는 산업혁명이후의 수백년의 력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동화로 인해 소실된 민족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과감히 동화에 맞서고 동화의 위협을 이겨낸 민족이 더욱 활력을 갖게 되였다. 민족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그 어느 민족도 기존의 특징이나 특징적 요소가 영원불변하지는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극 자신의 포지션을 조절해야만 변화와 도전에 더욱 잘 대응하고 맞설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태인은 세계에서 가장 “림기응변”에 강한 민족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림기응변”은 유태민족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민족으로 성장할수 있게 했다. 앞에서 언급한 현대정보기술도 동화가 기존사회에서 지니던 의미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고향을 등지고 민족집거지를 떠난 민족구성원들은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기존과 비슷한 생활권을 만들수 있다. 이러한 생활권에서 일부 외적인 부분들이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변형된 부분도 있고 일부 민족적 특성이 약화된 부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민족의 내적인 소속감은 전혀 약화되지 않는다. 이국타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욱 민족자긍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양복을 입어도 마음은 중국”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것이 아니다.     개방된 환경속에서의 열린 생각과 시련에 맞서며 키운 굳건한 마음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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