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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6)-독립사의 출격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14일 08시55분    조회: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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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건립 일만군 ‘토벌’ 분쇄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승리적으로 항일무장력량 보존

능지영회의

두차례의 일본군 ‘토벌’을 이겨낸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더 한층 발전장대해졌다. 1934년 봄, 동만의 유격대는 900여명으로 발전하였으며 적위대 등 군중성 자위무장도 1,000여명이 되였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이러한 항일무장대오는 이미 동만지구의 항일무장의 골간력량으로 대두하게 되였다.

1934년 3월말, 중공동만특위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유격대는 중공중앙의 ‘1.26’ 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동만의 4개 현 유격대를 토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건립하라”는 지시정신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항일유격근거지에서 중공동만특위와 4개 현 유격대 책임자들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동만항일유격투쟁 력사상 한차례의 중요한 회의였다.

 

 
김일성이 유격대 창건을 선포하였다고 하는 소사하 무주툰 전경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 연길현유격대 대대장 주진, 정위 왕덕태 등 15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독립사 사장에 주진, 정위에 왕덕태가 선발되였다.

독립사는 4개 퇀으로 편성, 제1퇀은 원 연길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고 제2퇀은 원 화룡현유격대로서 아래에 5개 련을 두며 제4퇀은 원 훈춘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기로 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지휘부는 잠시 삼도만 동구에 앉히였다.

회의에서는 반일부대와의 통일전선을 강화하고 항일유격구를 확대시키며 항일유격전쟁을 벌리기 위하여 길동반일련합군과 남만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하여 동만과 길동에 분산되여있는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할 방침을 확정했다.

주동적으로 적을 타격

독립사가 건립된 후 일제의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단부락’ 건설은 더욱 다그쳐졌다. 때문에 로항일근거지에서의 독립사의 활동은 날따라 곤난해질 수 밖에 없었다. 독립사는 “한곳을 고수하면서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진공책략을 취하라”는 중공만주성위의 유격전술을 채택하고 죽도록 산골을 사수하면서 적들과 소모전만을 펼치던 국면을 타개하고 적극적으로 적의 점령구에 진격해 들어가 활동하기로 했다.

4월 1일, 동북인민군 제2군 독립사의 일부는 항일의용군과 련합하여 연길현 팔도구금광을 습격하여 일만군과 3시간 동안의 접전을 하였다.

4월 7일, 독립사 일부는 왕청현 배초구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일만군 경찰들을 습격하고 ‘집단부락’ 수건작업을 파괴했다.

4월 18일, 독립사 제1퇀 30여명은 왕청현 배초구 신안툰의 자위단을 습격하고 총 20여자루를 로획했다.

4월 22일, 독립사 일부는 연길현 차조구를 습격한 후 명월구로부터 증원 오는 일만군 한개 부대를 소멸했다.

4월 23일, 독립사 제3퇀은 ‘집단부락’을 한창 수건하고 있는 화룡현 우심촌을 습격하였다.

5월 2일, 독립사 제3퇀은 안도현에서 련속 4일간의 격전을 벌려 안도 대전자를 점령하고 일만군 30여명을 격살했다.

5월 9일, 독립사 제1퇀은 산림부대와 련합하여 연길현 사도만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위만군을 습격하여17명을 투항시키고 총 11자루를 로획했다.

7월에는 독립사 제2퇀 일부가 산림부대와 련합하여 300여명 병력으로 안도 대전자를 밤낮 11일 동안 포위공격하였다.

8월 상순, 독립사 제2퇀과 항일의용군은 안도현 대사하를 진공하여 위만군 30여명을 소멸하고 70여명을 포로했으며 100여자루 총을 로획했다.

8월 중순, 독립사 제2퇀은 기타 반일부대와 련합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점령, 위만군 300여명을 봉기하게 하였고 그 일부를 인민혁명군에 참가시켰다.

안도현에서 독립사는 10개 반일무장부대와 련합작전하면서 왕덕태를 총지휘로 하는 항일련합지휘부를 건립하였는데 그 병력이 1,000여명이 되였다. 련합부대는 련속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처장즈, 대전자, 태평구 등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게 되였다.

독립사 제3퇀과 제4퇀 주력도 왕청현, 동녕현, 녕하현 일대에서 유격전쟁을 주동적으로 벌리였다. 왕청의 각 근거지는 적들의 장기적인 ‘포위토벌’로 하여 크게 파괴되였다. 하여 제3퇀은 적들의 주력부대를 피해 왕청과 녕안 변계 일대로 전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4년 5월 7일, 독립사 제3퇀은 구국군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위만군부대를 진공하여 많은 총과 탄약을 로획했다. 제3퇀은 또 소왕청 마촌 등지에서 일만군과 전투를 벌려 일만군 25명을 소멸했다.

독립사 제4퇀은 훈춘으로부터 왕청, 동녕 변계로 전이해 활동했는데 그 일부는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동녕현 이도하구의 위만군 장정단을 진공하여 100여명을 포로하고 보총 30여자루를 로획했다. 6월 23일에는 라자구공격전을 벌리였다.

적들의 기재에 따르면 1934년 4월부터 10월 사이에 동만항일련합부대가 일만군을103차나 주동적으로 습격하였는데 참전병력은 연인수로3,537명이였다. 그중 2군 독립사가 53차 단독 출격, 참전병력은 연인수로 1,350명이였다고 한다.

제3차 반‘토벌’투쟁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동만항일부대의 중견력량으로 장대해졌다. 독립사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지휘부를 건립하고 대일작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반일무장련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와 맞섰다. 일제는 반일력량이 장대해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1934년 가을, 일제는 3,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제3차 ‘대토벌’ 을 감행했다.

일제는 중국공농홍군을 ‘포위토벌’한 장개석의 경험을 따서 주요한 부대를 중요 도시와 교통요도에 배치하여 사수하게 하는 한편 정예부대를 집결시켜 ‘보보위영(步步为营)’ 작전방침을 펼치였다. 적들은 항일근거지를 포위한 후 ‘추격하면서 토벌’ 하거나 습격하는 등 전술로 독립사의 주력을 소멸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잔혹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여 인민군중과 항일부대와의 련계를 끊어놓아 항일부대가 기아와 추위 속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게 하려고 시도했다.

1934년 9월, 히로세사 단장을 총지휘로 하는 일본군 정예부대와 위만군 경비려, 정안군 등 ‘토벌대’는 비행기와 대포의 배합과 엄호하에 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와 각 유격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준엄한 형세에 직면한 독립사는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을 타격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이미 파괴된 유격근거지를 버리고 새롭게 개척한 근거지로 전이했다.

제1퇀은 연길현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 등 근거지에서 철퇴하여 안도현 경내와 남호두 등지로 전이하고 제2퇀은 화룡현 어랑촌에서 물러나와 안도현 처창즈로 옮겨갔다. 제3퇀은 왕청현 대황외, 대왕청, 소왕청에서 퇴각하여 요영구로 전이하고 제4퇀은 훈춘현 하남, 하북, 반가채에서 빠져나와 금창, 화소포 일대로 옮겨갔다.

독립사 각 퇀은 적들과 조우전, 습격전을 벌리면서 전이했다.

10월 8일, 독립사 300여명은 왕청현 대황외에서 이께다의 일본군 ‘토벌대’와 맞띄웠다. 독립사의 맹공격에 일본군은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사 제1퇀은 연길현 의란구 신흥동에서 일본군 무라다부대를 격퇴한 후 주동적으로 기와바야시 ‘토벌대’를 습격하여 놈들을 섬멸했다.

11월, 독립사 제3퇀은 왕청현 삼차구와 대황외에서 일본 노구찌부대와 교전을 벌리였다. 이와 동시에 제2퇀의 130여명 전사들은 적들의 등뒤를 돌아 위자구위만경찰서를 습격했다.

12월초 독립사 제3퇀 제4련, 제4퇀 제5련 파견대 150여명은 녕안현 석두하자에서 위만군과 맞띄워 격전을 벌려 적 30여명을 소멸했다.

1935년 1월, 독립사는 성공적으로 대전이하였다. 하여 독립사 각 퇀은 전투에서 주동이 되여 반‘토벌’투쟁에 림할 수 있게 되였다.

1934년 4월, 독립사 제2퇀은 동만특위와 사부의 통일적 포치에 따라 안도현 처창즈 쪽으로 진군했다.

4월부터 8월 사이에 제2퇀은 독립퇀과 함께 대전자를 두차례나 포위공격하고 반일부대와 공동으로 대사하부락을 습격하고 안도현소재지를 공격하는 등 일련의 전투를 벌려 처창즈, 대전자, 태평구 일대를 통제하고 유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는 처창즈에 유격근거지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1934년말부터 1935년초까지 삼도만근거지에서 기아와 엄한을 이겨낸 삼도만, 왕우구, 팔도구 유격근거지의 군민들이 안도현 신선동을 거쳐 처창즈에 들어갔고 화룡현 천수동과 머구령에 있던 어랑촌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처창즈로 들어갔다.

1935년 1월, 일제는 여러 갈래로 처창즈를 향해 진공해왔다. 아군은 도로를 파괴하고 적들의 통신력량을 끊어놓아 일군과 위만군이 련합작전을 못하도록 하였다. 하여 처창즈유격구보위전에서 적 40여명을 격살, 총 20여자루를 로획한 반면 아군은 몇명의 사망자만 냈을 뿐이였다. 제1퇀과 제2퇀은 처창즈를 근거지로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벌려 1935년 1월부터 5월 사이 30여차례 전투를 벌렸는데 적 600여명을 살상하고 360여자루의 총과 각종 군사물자를 로획했다.

1935년 3월 21일, 독립사 제4퇀은 훈춘 금창으로부터 왕청경내로 진군하던 도중 전쟁이 싫어 한개 련의 위만군 병사들이 대황구에 피해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였다. 4퇀 전사들은 인차 대황구 위만군병영을 포위한 후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강렬한 정치공세하에 위만군 련장은 82명 병사를 거느리고 인민혁명군에 참가했다. 정돈과 교양을 거쳐 새롭게 3개 련을 편성했고 훈춘퇀은 도합 7개 련으로 늘어났다.

1935년 4월말, 독립사 제1퇀과 제2퇀은 안도현 경내에서 위만군 1개 경비영을 매복습격하여 련장 2명을 포함한 50여명을 살상하고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제3차 반‘토벌’투쟁에서 동만의 각지 근거지는 엄중한 파괴를 당했으나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함으로써 승리적으로 항일무장력량을 보전하고 적들의 ‘토벌’를 타개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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