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저명한 항일민족영웅 조상지장군이 희생되기전에 사용했던 권총이다. 이 권총은 미제 콜트식 자동권총인데 총기번호는 80292이며 길이가 20.5센치메터, 너비가 13센치메터, 무게가 1.2키로그람이며 전체적으로 상태가 온전하다.
조상지는 1908년에 료녕성 조양현에서 태여났다. 1925년, 그는 할빈 허공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혁명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했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도에 조상지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1931년 ‘9.18'사변후 그는 항일투쟁에 투신했는데 중공 만주성위 군위서기, 주하 반일유격대 대장,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군장,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부총지휘 등 직무를 력임했다.
동북항일투쟁초기, 그는 오상포, 빈현, 방정의 공격전투와 소전지(肖田地)포위돌격전,빙탕즈(冰趟子) 매복전 등 저명한 전투들을 지휘하였다.이런 전투들은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였으며 동북항일유격전쟁의 발전을 크게 추동했다.
1938년 초, 조상지는 북만 림시성위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가서 항일투쟁 중대 사의(事宜)를 상담했는데 의외로 쏘련측에서 무리하게 억류했다.이때 동북항일유격전쟁은 이미 극단적으로 간고한 단계에 들어갔는데 항일련군부대는 전략적인 전이를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륙속 쏘련경내에 들어와 야영정돈훈련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부단히 소부대를 동북에 파견하여 계속 항일투쟁을 진행했다.
1941년 10월, 조상지는 4명의 동지들로 무어진 소부대를 이끌고 쏘련에서부터 동북의 학립현(지금의 흑룡강성 학강)북부 산간지역에서 활동했다. 당시 조상지는 보총 한자루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와 함께 돌아온 장봉기는 자기가 차고 있던 콜트식 자동권총을 조상지에게 선물해 사용하게 했다.
1941년 년말, 조상지가 소부대를 거느리고 학립, 탕원 북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적들이 렴탐해 알게 되였다.적들은 음모궤계를 꾸미고 갖은 방법을 다해 조상지를 체포,학살하려 했다. 위 학립현 흥산경찰서에서는 25명을 파견하여 7일동안 산을 수색하였지만 아무런 단서와 종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1942년 1월 상순, 적들은 재차 조상지를 유인해 체포할 계획을 세우고 괴뢰 오동하채금주식회사 경무대에서 소대장일을 했던 류덕산에게 조상지를 유인체포할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2월초,류덕산은 산에서 나는 물건을 수매하는 손님으로 위장하고 조상지를 따르는 강립신(일찍 류덕산과 알고있던 사이)의 소개로 급히 대오를 확장하려고 서두르는 조상지 부대에 잠입해 들어왔다.또한 다른 한 특무인 장석울도 조상지 소부대에 들어오게 했다. 외래침략자를 때려부시던 영웅은 집안의 못된 개가 사람을 해친다는 것을 그만 망각했다.조상지가 받아들인 이 두명의 대원은 바로 그의 신변에 잠복해 들어온 2명의 특무자객이였던것이다.
1942년 2월12일 새벽, 조상지는 특무 류덕산의 간계에 속히워 학립현 위 오동하금광국 경찰분주소와 경비대를 습격하려고 준비하고 구체적인 포치를 진행했다. 특무 장석울은 사전 정찰을 핑게로 적들에게 달려가 정보를 알려주었다. 대오가 무릎을 넘는 큰 눈을 헤치며 경찰분주소와 2키로메터쯤 떨어진 려가채원자 부근에 이르렀을 때 류덕산은 오줌누러 간다 해놓고 조상지의 뒤에 물러 섰다가 돌연히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 조상지는 미처 막아낼 새도 없이 허리와 복부에 총탄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류덕산은 흉악한 낯짝을 드러내고 또 전사 왕영효에게 총을 쏘았다. 이때 땅에 쓰러졌던 조상지는 극심한 아픔을 억누르고 련속 두방을 쏘았는데 류덕산의 머리와 허리를 명중하였다. 류덕산은 당장에서 뒈지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강립신 등 사람들이 인차 달려와 조상지를 려가채원자의 작은 원두막에 업어갔다. 조상지는 자신의 상처가 심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서류와 활동경비가 든 멜가방을 신변의 전사에게 넘겨주면서 그들더러 신속히 전이할것을 명령하였다.
조상지가 몸에 중상을 입고 포로된 후 적들은 그의 입에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하여 현장에서 심문을 진행했다.조상지는 의연히 극심한 아픔을 억누르면서 적들과 최후의 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는 괴뢰경찰을 꾸짖으면서 “너희들도 중국사람이 아니냐? 너희들은 조국을 팔아 먹었다. 이후 인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 한사람이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죽게 되였는데 무슨 물을 말이 있단 말인가?”하고는 입을 다문채 적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8시간후 조상지는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당시 34살밖에 안되였다.
조상지가 희생된 후 권총을 적들이 가져 갔는데 위 학립현 경무과에 보관했다가 후에 괴뢰 경찰들이 사용하였다. 1948년 동북렬사기념관을 세울 때 당지 공안인원들이 이 총을 찾아내 동북렬사기념관에 바치였다. 후에 조상지의 옛 전우인 장봉기의 감정으로 이 총이 조상지장군이 생전에 사용하던 무기임을 확인하였다.
출처 학습강국/편역 길림신문 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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