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그 날의 그 ‘거칠은 손’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1월7일 09시10분    조회:136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0)

◇박철원(연길)

필자 박철원 부부 오늘도 당교에서 함께 ‘충전’하며 나란히

1973년 28살에 결혼한 나는 올해 73세로 45년 혼인생활 남들의 부러움 속에서 오누이를 출세시키며 ‘잉꼬’라 불릴 만치 탄탄한 혼인생활을 이어왔다.

우리가 변치 않는 부부로 살아오는 데는 비방 하나가 있는데 바로 잊을 수 없는 추억- 그 날의 그 ‘거칠은 손’과의 악수이다.

1972년 음력설, 돈화은행에서 사업하던 나는 설 쇠러 조양천 부모집으로 나왔다. 휴가가 끝나기 전날 옆집아주머니가 자기네 가문에 훌륭한 처녀가 있다며 무작정 나를 끌고 동불사로 갔다. 인물도 체격도 마음도 다 좋은데 집이 너무 가난한 것이 흠이라며 맏아들 노릇하는 김봉선이라는 처녀와 대면시켜주었다.

처음 그녀와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나는 감짝 놀랐다. 마치도 나무뿌리를 잡아쥔 감각이였다. 온몸이 ‘찡’해났다. 은행에서 붓을 놀리는 28살 총각의 두부살 같은 손과는 너무나도 큰 대조였다.

‘고생을 많이 했구나!’

그 손이 그녀에 대한 소개를 실증해줬다.

‘고생을 많이 했기에 행복을 읽을 줄 알 것이고 돈만이 아닌 사랑을 앞세울 녀자이구나.’

그리하여 나는 그 손부터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그녀와 사귀였다. 그 ‘찡’하던 자극이 우리를 이어놓았다.

한번은 그녀가 간단한 선물을 부쳐왔는데 코바늘로 뜬 목깃이였다. 그 손으로 떴다고는 믿기 어렵게 곱게 뜬 것이였다. 그리고 그 뒤 날아오는 편지마다에는 고운 글발이 꽉 차군 하였는데 ‘그 손으로 썼을가?’ 하며 나는 읽고 또 읽군 했다.

봉선의 그 손도 또박또박 글공부할 때는 포동포동했을 터이고 가늘고 기다랗게 바이올린을 켤 수 있는 손가락이였을 테고 곱던 그 손을 탐내는 총각도 많았을 것이다

학교를 나와 농촌단련을 할 때부터 그 손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단다. 부녀주임이다 보니 새벽에 일어나 밥 지으라고 종을 치고 집집이 깨워주어야 했고 기운 장갑 얻어끼고 대채식 농사일에 언 흙덩이 다루어야 했으니 그 손부터 변하게 되였다.

맏딸이다 보니 아버지 병구환에 애쓰다가 여의고, 다섯식솔의 호주 노릇을 하며 겨울에는 소수레를 끌고 산에 올라 땔나무를 찍어오던 손이다. 곱게 자리잡아야 할 처녀의 손이 때이르게 생활의 세파를 겪으며 남자들 손 넘치게 억세게 자리매김하였다.

1년간의 련애생활을 거쳐 1973년 1월 나는 나를 ‘찡’하게 만든 ‘미운 손’ 가진 봉선이를 안해로 맞아들여 그 손이 내 손으로 되였다. 뭇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자고 다짐하며, 마음도 돈도 더 큰 고생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결혼 후 안해는 돈화의 식료품상점에서 그 손으로 5키로그람짜리 작두칼을 다루며 언 돼지고기를 찍어 팔았고 생활보탬을 위해 엄동설한에 눈 속의 사탕무우 다듬기도 하다 보니 그 손이 사탕무우보다도 더 험하게 거칠어졌다. 식료품공장의 종이사탕 감기 부업 때에도 손은 거칠어도 솜씨만은 너무 재여 수십명 녀성들 중 제일 많이, 제일 빨리, 제일 곱게 감는 사람이 되여 “조선족녀성이 다르다”는 평판도 받았다. 그러나 손가락끝이 사탕에 닳아 피가 터지는 고통까지 겪었다.

안해는 생활에 보태려고 밤시간을 타 세멘트공장의 세멘트포대 나르는 일도 찾아하였다. 50키로그람 되는 뜨거운 세멘트포대를 창고로 옮겨다 쌓는 일을, 뜨거운 열에 땀범벅, 세멘트먼지에 눈알만 판들거리는 먼지범벅이 되여 한포대에 10전을 버는 일, 남성들도 당해내기 어려운 일을 자식을 위해, 동생들을 위해, 남편의 부담을 덜려고 해내였다.

목기공장에 다닐 때에도 그 손은 여느 남자 못지 않게 막히는 일 없었다. 통나무 굴리기, 널판자밀차 밀기, 나무구슬 깎기… 림업국 묘포장에서 나무 심기, 나무 뽑기를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돼지풀도 한임씩 이고 왔다. 돼지풀 진에 ‘미용’된 거칠은 손은 색갈마저 변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보일러 석탄재 속의 콕스를 주었으며 겨우내 식량보탬으로 10포대의 감자를 깎은 손이다. 식솔이 많고 로임이 적다 보니 생활난은 컸지만 그 날의 그 ‘찡’하던 추억이 나에게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힘을 주고 또 주었다.

지난 세기 70년대, 그 손은 이처럼 험한 일들을 면치 못했다. 그토록 험하게 당하는 손이건만 그 세월에는 저녁에 20전짜리 ‘조개약’을 쓱 바르면 그만이였다.

남편을 살리려고 김이 나는 태반을 구해다 그 손으로 씻고 삼복의 찜통에서 화로불을 피워놓고 가공했으며 밤 새우며 식구들 털실옷 떠입히고 자기 아이들 옷은 기워입히며 친척집 아이들이 놀러 오면 새 옷견지 사입혔다. 시동생의 생일에 3원을 부쳐주라고 하였는데 안해는 그 손으로 5원을 부쳤다.

그 손으로 회계실무를 배워내였기에 은행구좌행표를 떼거나 로동자들의 로임 발급으로 많은 돈을 다루었지만 한번도 차실이 생긴 일이 없었다.

그 손으로 1986년에 입당지원서을 썼고 주먹을 굳게 쥐고 당기아래에서 선서하였다.

거칠은 그 손으로 아이를 문질러주면 너무너무 시원하여 곧잘 잠들었고 그 손으로 나와 애무하면 나도 너무너무 즐거웠다. 고무장갑 한짝 없어 맨손으로 양념을 다루어 열 나는 손을 밤새껏 찬물에 불구며 담근 김치는 해마다 일찍 거덜났고 그 손으로 주물러 만들어주는 안주는 그렇게도 맛있었다.

그 손으로 시어머니 등 밀어드렸고 미음을 떠넣어드렸으며 대소변 시중도 알뜰히 하였다. 또 그 손으로 며느리 출산간호를 하여주고 사위가 좋아하는 료리도 즐겨 볶았다.

그 손이 있었기에 아들딸 출세하고 손군들도 총명하게 잘 자란다. 그 손의 보살핌에 남편이 나이보다 젊게 살아가며 고부간 소문 높게 화목했으며 형제들이 다정하고 사돈간에 형제처럼 지내고 동네에서도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산다. ‘찡’하게 놀랍도록 ‘거칠은 손’과의 악수가 언제나 우리 삶의 힘이 되였다.

우리 둘은 두 손 마주잡고 사교무를 배워냈으며 금강산 유람길도 손잡고 함께 톺았고 조선 원산 앞바다에서 물장구도 쳤다. 일본 아까와온천에서 둘이 두 손 꼭 잡고 1박2일의 귀족대우생활의 즐거움도 만긱하였다. 무거운 짐에는 언제나 함께 내미는 우리 두 사람의 두 손이다.

안해가 지역사회 주임 겸 당지부서기 사업을 하는 7년간 그 손은 더욱 쉴 새 없었다. 손은 거칠어도 마음만은 부드러워 서민들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동분서주하며 상급에 보고서를 써올리고 그 손으로 길가에 쓰러진 로인을 인중 안마하며 구급하고 전국 문명도시건설에서‘5호문명가정’의 영예를 따냈으며 거칠어진 그 손으로 ‘자치주민족단결진보모범’ 상패를 받아안았다.

지금도 안해의 손은 쉴 새가 별로 없다. 빨래질, 장판 닦기, 밥짓기… 손에 물 마를 새가 없고 아직도 해야 할 일 많다며 두 손을 비비며 자아안마한다. 영원히 퇴직휴양할 줄 모르는 안해의 ‘거칠은 손’은 행복을 키우고 재부를 모으며 기적을 쌓는다. 인젠 험한 일은 없으니 손바닥 장알은 풀어졌어도 굳어진 손마디는 그루박았고 손등에는 때이르게 불청객이 찾아와 고운 검버섯이 내리여 수놓아졌다.

지금도 때때로 고단히 잠든 안해의 그 거치른 손을 살며시 잡아볼 때면 처음 잡아보던 그 날의 그 ‘찡’함이 생생히 감각된다.

살아오다 보면 고달플 때도 있었고 불쾌할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 ‘찡’하던 첫날의 악수에서 놀라던 일이 떠오르면 모든 일이 다시 사랑으로 변하군 한다. 그 날의 그 감각이 나를 45년 지켜주었고 우리의 혼인을 떠밀어주고 있다. 이 생애에는 사라질 수 없는 너무도 보귀한 ‘거칠은 손’ 추억이다. 그 추억이 우리 사랑의 시작이였고 그 추억으로 45년 손잡고 나란히 걸었으며 그 추억이 우리의 석양을 진붉게 진붉게 물들여가고 있다.

그 날의 그 추억 속에 우리는 꼭 잡은 두 손으로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며 금은보화를 관리하고 두 손 함께 내밀어 손군들의 명문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아보며 시대를 따르는 ‘잉꼬’부부로 살아가리라!

회혼례의 술잔도 함께 받아마시자는 약속을 지키며 이 세상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도록 열심히 풍요롭게 로후를 장식하며 오래오래 살리라!

언젠가 내가 이 세상 먼저 간다면 봉선이는 그 손으로 내 눈을 쓸어줄 것이고 만일 당신이 먼저 간다면 나는 우리 사랑이 시작되고 애정이 슴배여 굳어진, 나를 ‘찡’하게 놀래운 그 거치른 손부터 잡아주리라.

나는 인젠 손이 거친 녀자면 좋은 녀자라는 관념까지 선다.

나는 ‘거치른 손’에 반한, ‘거치른 손’을 가진 봉선의 남편이다.

짜릿하던 그 날의 ‘거치른 손’ 잡던 추억은 우리 행복을 쌓아가는 비방이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명금 “늦은 나이에 이렇게 글을 쓰려니 너무 어렵습니다.”    12일, 룡정시에 거주하는 지체장애인 양명금(60세)은 불편한 몸을 지탱하고 앉아 글을 몇줄 적더니 힘든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적 공부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
  • 2021-01-28
  • 지난해 12월말 나는 북경에서 서울로 향했다. 당시 한국은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일 1천 명씩 발생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시기였다. 취재를 위해 나는 한국으로 '역행'하게 됐다.   북경 수도국제공항의 로비는 텅 비여있었다. 공항 면세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려객기의 좌석점유률은 절...
  • 2021-01-19
  • 새로운 한해인 신축년(2021년)을 맞으며 연길 두만강문화쎈터에서는 로인들을 위한 설날 떡국잔치를 열엇다. 이번 행사에는 약 백여명의 로인들이 참석해 명절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연길 두만강문화쎈터의 주최로 열린 떡국잔치는 오수화 사장이 직접 나서서 사회를 했다. 이날 행사는 어르신들께 떡국...
  • 2021-01-06
  • 원 연변연극단 배우 최금순의 연극 인생 수많은 연극 속의 인물형상과 텔레비죤드라마 《민들레할머니》 연기로 조선족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배우 최금순, 그의 70여성상 인생길에는 과연 어떤 달고 쓰고 신 사연들이 깃들어있을가. 필자는 그녀의 삶을 살펴보았다. 연극과의 만남 1946년 금순이가 13살 나던 해에 엄마...
  • 2021-01-06
  • [애심녀성컵]-더 미워질 데 없는 녀자 김경희   나는 스물여덟살 나던 해 언니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였다.   진한 눈섭에 정기 도는 쌍겹눈, 덩실한 코마루, 영준하게 생긴 얼굴에 중점대학 학력까지… 바로 내가 오래동안 마음속으로 그려봤던 리상형이였다. 평생 시집 갈 것 같지 않아 로심초사...
  • 2020-12-22
  • 고중 졸업할 때까지 매달 500원씩 지원키로 지난 4일, 연변봄비애심회 수재원 신입생 맞이 조학금 전달식이 연변제1중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5명의 신입생을 맞이한 연변봄비애심회 수재원은 신입생들을 포함하여 15명의 학생에게 인당 1000원의 조학금을 전달했다. 1999년에 설립하여 지금까지 259명의 학생을 지원해...
  • 2020-12-09
  •  우리나라 최동단, 중국 로씨야 조선 3국 국경선의 접점에 자리잡고 있는 방천은 현재 유명한 관광지로 위상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력사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방천이 사실 20세기 60년대부터 전국적인 군민공동방위의 본보기로 꼽힌 영예의 과거를 알 수 있다.       군민이 일심협력하여...
  • 2020-11-25
  • [수기] 방천에서의 아버지의 벅찬 나날들 김정일 10월 3일은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가신지 벌써 8년째 되는 날이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어디론가 외출 갔다가 얼마후면 돌아올 것이라며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럴 때면 아버지를 위하여 뭘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이야기며 내 눈으로 보았던...
  • 2020-11-17
  • [수기 59] 지지리도 운이 안좋은 나 리기준 나는 삼형제중 막내로 태여났다. 내가 네살 때 친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셔서 우리 집은 매우 어렵게 생활했다. 사람들은 쩍하면 우리를 ‘애비 없는 새끼’ 라고 놀려주었고 어머니는 이상한 남자들의 무시를 당하기가 일쑤였다. 2년 후 우리 어머니는 룡정시 금불사...
  • 2020-11-12
  • 80년대초기 중학교 1학년이였던 내가 쓴 동요 이 일본의 어느 한 국제교류협회가 조직한 글짓기콩클에서 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다. 상장과 선물들이 학교에 도착하여 업간체조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표창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그 시기가 바로 중국과 일본간의 친선관계 상징이였던 자이언트판다...
  • 2020-10-13
  • 올해 추석에도 어김없이 부모님 산을 찾아 고인들의 명복을 빈 박금석 형제분들 올해 추석에도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 조상들의 무덤 앞에 술을 붓고 제를 지내며 고인들의 공적을 기리는 박금석(76세), 박금룡(65세) 형제는 대소과수농장마을을 굽어보며 감회가 깊었다. 최근 들어 빈곤부축사업이 초요건설사업의 주요...
  • 2020-10-13
  •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하는데 왜 여자인 내가 단풍사랑에 빠졌을가? ...  가을정취가 다분한 국경절연후 막바지날, 가고싶었던 단풍구경 떠나는 기분좋은 날이다. 화창한 날씨에 쪽빛하늘이 하사한 따스한 해볓이 길 떠난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모임장소까지 가는 길은 신바람에 룰라라가 저절로 나온다.&nbs...
  • 2020-10-10
  • 새 집을 짓던 나날들 김삼철 요지음 나는 103평방메터의 화려한 아빠트에서 혼자 생활하느라니 가난했던 1970년대 연변과는 수천리 떨어진 길림성 동북쪽 맨 끝자락의 길림성 유수현 연화조선족향에서 근무할 때 내 손으로 초가집을 짓던 어려운 나날들이 추억의 쪽문을 열고 밀려나온다.   1970년 가을 나는 지인의 ...
  • 2020-10-04
  • 지난 9월4일 가목사조선족학교에서 진달래마을 장학금을 지급했다.  진달래마을 조선족장학단체(이하 진달래마을)가 9월 개학을 맞아 동북3성 8개 지역 14개 조선족학교들에 장학금을 전달, 오래만에 개학을 맞아 열기 띈 학교분위기에 활기를 더 하고있다.       흑룡강성, 길림성, 료녕성, 내...
  • 2020-09-18
  •     교육대계는 교사육성이 핵심   소외된 교사들 교육열기 재점화   현재 전통지역 학생래원의 급격한 감소와 고갈, 페교위기, 교사의 로령화와 청년교사의 부재로 전통학교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자평나 있다.   이러한 와중에 교육이 살아야 미래가 보인다는 사회풍조가 일면서 학교에 대한 사회적인...
  • 2020-09-14
  • 오승룡동지, 남, 조선족, 1972년 11월 출생, 1990년 10월 사업에 참가, 2005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대학학력. 왕청현사법국 선전과 과원, 인사국 중재과 과원, 인력자원및사회보장국 로임복리과 과장, 부국장, 2018년 7월 왕청현당위 조직부 부부장 겸 로간부국 국장. 선후로 '전 주 법률상식 보급 법에 따라 다스리...
  • 2020-09-11
  • 성송권                                                                                    ...
  • 2020-09-07
  • 위챗 수금기능 24시간 동안 마비되어       월드옥타 청도지회 김금란 회장을 비롯한 운영진이 김홍화씨에게 사랑의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8월 28일 본지에 “저희 남편 살려주세요” 란 기사가 발표된 후 한민족사회에 큰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수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 2020-09-02
  • 올해 85세인 엄마는 신문과 책 보기를 무척 즐긴다. 해마다 《길림신문》, 《종합참고》, 《장백산》, 《연변녀성》 등 신문 잡지를 주문하여 구독하고 도서 대여증으로 여러 면의 좋은 책들을 수시로 빌려보고 있다. 근년엔 엄마는 다년간 간행물을 읽으면서 배운 많은 지식을 “인젠 나 혼자만이 아닌 여러 사람들과...
  • 2020-08-27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