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가을 같은, 저녁 같은… 이재무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9월20일 06시10분    조회:8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를 출간한 이재무 시인./사진=헬스조선DB
서해의 온 바다가 한꺼번에 저물면서 빛날 때 저녁은 대낮보다 아름답다. 술 없이도 불콰한 그런 저녁에 무슨 심통 나는 일을 겪으셨나. 시집들 사이로 귀하게 내는 산문집에 ‘괜히 열심히 살았다’란 제목을 붙였다. 이재무 시인의 가을 같은, 저녁 같은 산문이다.

알록달록 홀가분한 책을 받고서 심통의 연원이 궁금해 표제 산문부터 찾아 펼쳤다. 네 쪽에 걸친 산행기다. 정상에 집착하신 적이 있던가. 정상에의 강박 때문에 한때 고행과 다름없는 산행을 했다,는 고백이 앞선다. 그 세월이 얼마였는지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언젠가부터 시야에서 정상을 지웠고 걸음은 가벼워졌다. 이후 ‘선율처럼 굽이치는 등고선을 밟아’ 가는 산행이 시작되는데, 시인의 눈에 펼쳐진 풍광과 절경이 두어 쪽에 걸쳐 눈부시다.

계절로 치면 봄에서 여름까지, 젊은 시절의 한가(閑暇)와 완상(玩賞)을 놓친 게 아쉬웠을 수 있겠단 생각은 해본다.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한 마디에 담긴 회한의 깊이를 타인이 잴 수 없으니 잠시 요량만 할 뿐이지만…. 그리 짐작할 일이 아니라, 흐릿한 주점에서 얼마간이라도 집요하게 청문할 일일라나.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를 숙이고
표제를 잊고 목차를 훑다가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 숙인다’는 제목이 숭고해 다시 책을 펼쳤다. ‘밥이 하늘’이라는 동학 교주 최시형(또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의 파격 선언을 공유하며 시작하는 글을 찬찬히 읽고 있자니 시인의 말마따나 밥 앞에 송구하다. 나의 밥과 남의 밥이 모두 하늘인데, 어느 쪽에도 신심을 보이지 못했다. 내 밥엔 탐욕했고, 남의 밥엔 질투했다. 안팎으로 불경했다. 시인의 관찰대로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늘 고개든 채로 좌고우면하며 흘기고 탓했다.

밥은 하늘이기 전에 생명이다. 생명이었다가 하늘이니 더하고 뺄 것 없이 그 자체로 우리 삶이다. 그러나 그런 암시를 파악하고 안심하는 순간, 시인은 밥상을 엎는다. 숟가락을 엎고, 밥그릇을 엎어 놓고는 둘 다 무덤 형상이라 귀띔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불이(不二)의 경구가, 깜깜한 새벽 절간의 차디찬 쇠문고리 촉감으로 마음에 예리한 충격을 안긴다.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시인의 촌철이 매서워 흠칫한다. 그 앞에서 숭고와 송구가, 삶과 죽음이, 밥과 무덤이, 번뇌와 열반이 한 끗 차이를 버리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시인의 문장 깊숙한 곳마다 연한 먹물처럼 그리움이 고였다. 정상이 사라진 산에서 낮은 풍경에 반한 뒤 밥상으로 내려와 무덤을 읽는 시인에겐 뜨거웠던 대낮의 지난 세월이 아득하다. ‘나는 저녁이 좋다’ 제하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지난 삶을 간결한 서정으로 추상하며, 따스했던 시골 부엌 같은 저녁의 품에 안기려 한다.

슬픔과 허기의 가을, 그리고 저녁이지만…
수천의 시(詩)를 풀어내고도 서글픈 게 인생일까. 밤샘의 방생처럼 40년에 걸쳐 시를 펼쳤으니 허기질 수 있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가을 저녁의 허기 끝,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시인의 푸념이 독자들에겐 신새벽의 한줄기 바람처럼 성찰의 잠언들이다. 적요한 에세이의 숲에서 너와 나의 지난 일들이 물안개로 피어오른다. 산문 속으로 녹아든 시의 언어들은 홀연한 사유로 거듭나, 저녁노을의 진경(眞境)을 보여준다.

어쩜 우리 모두는 괜히 열심히 살았으나 그 무의미한 최선과 탈진의 끝에서 가려운 듯, 뒤척이듯 조심스럽게만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빛바랬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붉은, 타오르는 중인 서해 바다의 낙조(落照)처럼. 천년의시작 펴냄, 260쪽.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사진=헬스조선DB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42
  • '인터내셔널 부문' 쇼트리스트 6편에 포함…번역가 김지영 함께 올라 심사위원회 "에너지에 휩쓸리는 작품,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고래'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 오른 천명관 작가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천명관(59) 작가가 영국 최고 권위 문학상인 부...
  • 2023-04-18
  • 까보 까보슈-다니엘 페나크 원작/그레고리 파나치오네 각색·그림/윤정임 옮김/문학과지성사/2만5000원- 그래픽노블로 재탄생한 동화 - 위태롭고 험한 삶 살던 유기견 - 다시 사람과 함께하기까지 여정 천진한 선명함, 우아한 단순함, 틀을 깨는 과감함. 또 뭐가 있을까. 절묘한 연출력? 인상깊고 기억에 오래 남는 그...
  • 2022-11-11
  •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를 출간한 이재무 시인./사진=헬스조선DB 서해의 온 바다가 한꺼번에 저물면서 빛날 때 저녁은 대낮보다 아름답다. 술 없이도 불콰한 그런 저녁에 무슨 심통 나는 일을 겪으셨나. 시집들 사이로 귀하게 내는 산문집에 ‘괜히 열심히 살았다’란 제목을 붙였다. 이재무 시...
  • 2022-09-20
  • 누구나 한번쯤은 ‘데미안’을 만나고 누구나 한번쯤은 ‘데미안’이 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불안한 젊음에 바치는 령혼의 자서전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이 소설은 잘 알려진 대로 ‘한 인간이 자...
  • 2022-07-27
  • 1922년에 제정된 뉴베리상은 매년 어린이 문학에 공헌한 작품과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어린이책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뉴베리상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어린이 문학상이라 할 수 있다. 매년 뉴베리상에서는 대상한 작품과 보통 우수상에 해당하는 아너상 3~4작품이 선정된다. 100년 력사의 뉴베리상에서 대상과 아...
  • 2022-07-27
  • 유발 하라리의 ‘인류 3부작’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그가 제안하는 거시적이고 통시적인 시야, 명료한 진단과 근본적인 해법은 불확실하고 복잡한 세계를 리해하고 삶을 지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태도이다. 이것이 ‘인류 3부작’이 수많은 독자의 선택을...
  • 2022-07-27
  • 4주 연속 NYT 베스트셀러 에세이 ‘한인마트에서 울다’ 저자 미셸 조너 서울서 태어나 9개월만에 美이주… 한국인 엄마-한국계 딸이 겪은 문화 충돌과 이해의 이야기 다뤄…“한인마트 가면 세상뜬 엄마 떠올라 미국인들 뜨거운 공감에 놀라”, 가수로도 활동… 내달 3집 앨범 내 작...
  • 2021-05-24
  • 결혼해도 '나답게' 사는 부부들 한국에서 레즈비언 부부로 사는 김규진씨 부부 일상의 성평등 위해 분투하는 페미니스트 신혜원씨 부부 "이대로 둘이 쭉 살아도 행복하다" 무자녀 최지은씨 부부 왼쪽부터 김규진씨 부부, 신혜원씨와 이은홍씨 부부의 책 『평등은 개뿔』, 최지은씨. ⓒ김규진씨·사계절&middo...
  • 2021-05-21
  • 책소개 『괴테 문학 강의』는 괴테의 다양한 문학과 사상을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은 크게 '사상 분야'와 '문학 분야'의 두 틀로 나뉘어 있다. '사상 분야'로는 괴테의 신화관과 문명관 그리고 역사관을, '문학 분야'로는 괴테의 시, 소설, 희곡의 분야를 다루었다. 괴테...
  • 2020-05-07
‹처음  이전 1 2 3 4 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