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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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今天是人民英雄纪念碑落成60周年,你对它了解多少? 댓글:  조회:2132  추천:0  2018-05-01
  据中国之声《新闻纵横》2018.5.1报道:《中华人民共和国英雄烈士保护法》今天起开始实施,当中明确“矗立在首都北京天安门广场的人民英雄纪念碑,是近代以来中国人民和中华民族争取民族独立解放、人民自由幸福和国家繁荣富强精神的象征。”今天同样也是人民英雄纪念碑落成六十周年。你对它了解多少?   今天起,人民英雄纪念碑开始受法律保护   今年4月27号,十三届全国人大常委会第二次会议通过《中华人民共和国英雄烈士保护法》,自2018年5月1号开始施行。法律通过后的第二天,负责法律起草工作的全国人大常委会法制工作委员会的同志们,瞻仰人民英雄纪念碑,在天安门广场面向人民英雄纪念碑向逝去的人民英雄报告了英雄烈士保护法的立法情况。全国人大常委会法工委立法规划室主任岳仲明说:“我们怀着对英烈先驱和革命先行者无比崇敬的心情,来到人民英雄纪念碑前,既是向你们报告英雄烈士保护法立法情况,告慰英灵;也是为了不忘建立人民英雄纪念碑“纪念死者、鼓舞生者“的初衷。”   英雄烈士保护法规定:矗立在首都北京天安门广场的人民英雄纪念碑,是近代以来中国人民和中华民族争取民族独立解放、人民自由幸福和国家繁荣富强精神的象征,是国家和人民纪念、缅怀英雄烈士的永久性纪念设施。人民英雄纪念碑及其名称、碑题、碑文、浮雕、图形、标志等受法律保护。   人民英雄纪念碑在开国大典前一天奠基   1949年9月30号,开国大典的前一天。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第一届全体会议决定,为了纪念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在首都北京建立人民英雄纪念碑。   那次会议上决定了国旗、国歌、首都等一系列国家象征和标志。中央美院教授、《永恒的象征,人民英雄纪念碑研究》的作者殷双喜介绍:当天下午六点左右,投票决定以后,全体政协委员就坐车到天安门广场举行奠基典礼:“奠基典礼选在10月1号新中国建国的前一天,是非常有纪念意义。表明新中国成立的一开始就没有忘掉我们的人民英雄和先烈。正是由于他们的奋斗和奉献,才有新中国。”   奠基典礼上,毛泽东朗读了由他起草的碑文:这篇碑文从1946年开始的人民解放战争,上溯至1919年五四运动以来的新民主主义革命,再上溯至1840年鸦片战争以来的整个中国近代史。   “三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们永垂不朽!三十年以来,在人民解放战争和人民革命中牺牲的人民英雄们永垂不朽!由此上溯到一千八百四十年,从那时起,为了反对内外敌人,争取民族独立和人民自由幸福,在历次斗争中牺牲的人民英雄们永垂不朽!”   纪念碑浮雕上没有著名人物,都是人民群众   从1949年9月30号奠基开始,到1952年8月1号正式动工,这当中三年时间,负责建造工作的北京市都市计划委员会向全国征选建造方案。到1951年时,就收到了140多件方案。当时,有方案提出加大加高纪念碑下面的大平台,并开三个门洞,做成类似于城门的形状。   为此,建筑学家梁思成还专门给当时的北京市市长彭真写信,说“人民英雄纪念碑是不宜放在高台上的,而高台之下尤不宜开洞。”殷双喜介绍,主要是这样的设计既不符合建筑学的原理,又不能达到纪念碑的审美要求:“梁思成带病给彭真写信,说这个方案不妥,一个它跟天安门重复,另外一个在广场上远远的有一个这样带着门洞的碑搁在那,就显得很不合适。最后还是重新来弄,确定要选高耸挺拔的方案。”   方案大致确定了,但建造过程中仍然有分歧出现在建筑家和雕塑家之间。建筑家希望把人民英雄纪念碑塑造成高耸挺拔的样子,这就要求碑身不能太宽,而雕塑家则希望能有更宽的碑身,这样就可以创作更多的浮雕来展现人民英雄的形象。   最后,选择了一个折中的方案,碑身仍然保持挺拔,底座部分适当加宽。最终放下了10幅浮雕,其中包含了两幅装饰浮雕。这10幅浮雕反映了“虎门销烟”、“五四运动”等8个重要历史事件。浮雕上塑造的172个人物形象中,没有一个具体的历史人物或英雄人物。   殷双喜说:“就说历史是人民创造的,人民是历史的真正的主人,整个纪念碑的设计思路,突出毛主席提出的人民这个主题。所以就把英雄人物和一些著名的这些历史人物去掉了,就是这上面都是人民群众!”   纪念碑历时9年建成,中间还调整过方向   建造中的人民英雄纪念碑   “人民英雄永垂不朽”这八个大字统领了纪念碑的设计和建造。可这八个大字要究竟是朝向南边的正阳门还是北边的天安门又是一道需要反复推敲的选择题。按照中国建筑坐北朝南的传统,这八个大字应该朝向南方,而今天我们看到的则是朝向北方。曾任天安门地区管理委员会副主任的贾英廷介绍,纪念碑在建造时进行过一次朝向的调整:平时的人流都是集中在广场北半部,说大家都建议毛主席的题词要向北。54年国庆以后,就把它改成了坐南朝北。当时,这个纪念碑的碑心石60多吨,是按照设计方案是搁在了纪念碑的南侧。接到这个通知以后,就要赶紧的想办法,要把它调到北边来。   历时9年,人民英雄纪念碑终于在1958年5月1号正式落成。人民英雄纪念碑碑文和浮雕,清晰展现了自鸦片战争以来中国人民浴血奋斗的艰辛历程,折射出实现中华民族伟大复兴的坚强意志。在过去的60年间,人民英雄纪念碑矗立在天安门广场上,承载着整个国家和民族对英雄先烈的纪念与缅怀。2014年8月31日十二届全国人大常委会第十次会议通过关于设立烈士纪念日的决定,将9月30日人民英雄纪念碑的奠基日确定为烈士纪念日,也是为了充分体现“国庆勿忘祭先烈”的情怀、突出国家褒扬英烈的主题。   在贾英廷看来,这次把纪念碑入法,具有重大的现实意义和深远的历史意义:“在天安门广场这个纪念碑是目前咱们国家和人民群众的纪念缅怀英雄烈士的一个永久性的纪念设施。这把纪念碑上升到一个法律的层面来保护它,我觉得是很有意义的。说明大家对纪念碑的重视,也是对英雄烈士的一种重视。同时,对广大人民群众弘扬社会主义核心价值观,坚定文化自信,我觉得很有现实意义。”   记者:王颜欣   编辑:齐逸凡
197    5대 성인 중 유일 관직 진출한 공자 댓글:  조회:2524  추천:0  2015-07-01
【논어명장면】벼슬에 임하는 공자의 자세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가 나라를 이끄는 공직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소임을 중히 여기고 백성들이 그를 믿을 수 있게 한다.    물자를 아끼고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백성을 부릴 때는 순리를 따른다.   -‘학이’편 5장         1. 공자, 벼슬을 얻다 공자와 더불어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등은 인류 최고의 성인으로 꼽히는 사람들이다. 공자는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관리 생활을 경험했다. 성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를 생각하면 관리 생활은 조금 특별한 ‘경력’이 아닐까 싶다. 과연  공자가 몸소 겪은 ‘벼슬살이’는 어떠했을까? 관리, 나아가 정치라는 직업 체험이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 이생이 전해들었던 장년의 공자는 열렬히 벼슬을 원했다. 누군가의 벼슬을 사는 것을 천분으로 여긴 골수 사인(士人)의 시기였다. 학숙의 제자들에게도 열과 성을 다해 사관(仕官)의 길을 가르쳤다. 군자가 되어 벼슬을 얻어 인(人)과 민(民)을 더 높은 인격의 사람-선생님은 신분이 낮은 인민도 수양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본 중국 최초의 지식인이다-으로 이끄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토록 추구하는 벼슬도 명분이 없는 것이라면 그 또한 가장 경멸하는 바이기도 했다. 군자를 자임하는 공자에게 벼슬이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 아니면 안되는 그 무엇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40대가 시대와의 불화로 일관했던 것은 정당한 방식으로는 벼슬을 얻을 수 없는 시대였다는 겁니다. 불혹(不惑)은 그 유혹을 견뎌낸 자신에게 수여한 훈장이고요.”   벼슬을 하고 싶은데, 주겠다는 쪽은 불의(不義)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세월만 흘러 노인 반열(당시에 나이 50은 장로를 의미했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운(時運)이란 것이 그에게도 찾아왔다.   “선생님이 그토록 권도(權道)를 나누길 꺼린 양호 정권이 자멸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이 열린 겁니다. 겨우 정권을 회복한 귀족들은 때묻고 불신받는 자신들을 대신해  민심을 수습해 줄  참신한 신진세력이 필요해졌습니다.”   귀족들의 눈에 공자는 그 ‘신진그룹’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공자 역시 기꺼이 ‘시대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가슴 속에서만 그려왔던 새정치의 청사진을 세상에 펼쳐보일 때가 왔다.’   공자가 전율처럼 느낀 ‘지천명’(知天命)은 이 출사(出仕)의 선택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이후 그가 걸어간 환로(宦路)를 따라가보면 공자가 기꺼이 받아 안은 이 천명이 공자 자신의 영달만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안락을 꿈꾸는 사람은 선비라고 할 수 없다(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헌문’편 3장①   벼슬길에 나간 공자는 일개 관리에서 어느덧 ‘정치가’로 도약할 때에 이르자, 안주(安住) 대신 개혁의 험로를 선택했다. 망명은 그 험로의 결과이자 새로운 고난의 출발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출사는 출세의 길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웅지(雄志)의 깃발을 든 것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영화 중에서   2. 공자가 맡은 벼슬  공자는 서기전 501년 그의 나이 51살 때 관직에 나가 56살에 국외로 망명할 때까지 약 5년간 벼슬살이를 했다. 공자는 이 기간동안 중도재(中都宰·중도라는 읍의 읍장)라는 지방장관급 직책으로 시작하여, 건설부장관에 해당하는 사공(司空)을 거쳐 오늘날의 사법부 수장에 해당하는 사구(司寇)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일설에는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국정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공자세가’)   공자의 관직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나, 이생이 들은 바는 이러하다. 공자는 중도재로 약 1년간 일하다가 임금이 참석한 국제회의에서 공을 세워 사구로 승진했다. 그런데 이때 공자가 임금에게 받은 사구의 직위는 조정대신인 사구가 아니라 공실(公室) 직할령의 사법권을 담당하는 사구직이었다. 당시 조정 3대 요직인 사마(司馬·국방부장관), 사구, 사공은 귀족 가문의 세습직이었다. 사공직은 삼환의 한 축인 맹의자가 맡고 있었고, 사구 자리는 계손씨와 가까운 종족인 장(臧)씨 가문이 세습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자가 사공과 사구직을 잇따라 맡았다는 것은 당시 노나라 실정을 잘 몰랐던 후세 사람들의 와전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공자가 사공이 되었다는 설도 공자가 중도재로서 사공인 맹의자를 보좌해 수행한 어떤 사업(중도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공실묘지에서 벌인 대규모 토목 공사일 가능성이 크다.)에 근거해 생겨난 전설이었을 개연성이 높다.② 또 춘추시대에는 ‘대사구’라는 벼슬이 없었는데도 사마천이 ‘사구 중에 가장 높은 사구’라는 의미로 "대사구 운운"한 것 역시 잘못된 전승을 반영한 사료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5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공자의 관직생활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중도재에서 사구에 이르는 2~3년의 목민관 시절이다. 공자는 중도를 잘 다스리고, 예교전문가로서 국제회의에 참가해 공을 세워 임금의 주목을 끄는데 성공했다. 목민관으로서 예법을 정비하고 사구가 되어 민생을 보살폈다. 사구 또는 대사구로서 보낸 후반부는 임금을 보좌해 국정개혁을 시도한 ‘정치의 시기’였다. 참주(僭主)의 권한을 삭감하고 군주권(君主權)을 부흥시켜 궁극적으로는 귀족 대신 사대부 관료가 중심이 되는 군주정을 꿈꿨다. 원대한 그 ’플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시기는 개혁가의 면모가 여실했던 ‘정치적 공자’의 절정기였다.   3. 인간 공자의 황금시대 세속적 의미에서 이 때가 인간 공자의 황금기였다. 한미한 무사(武士)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고아나 다름없이 성장한 사람이 조당에서 경대부(卿大夫) 귀족들과 나란히 국정을 논하는 지위에 이르렀으니, 지금이나 당시나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할만한 ‘출세’였다. 특히 일정 규모의 학단을 이끌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포부를 벼슬을 통해 현실에 적용해 볼 기회를 가졌고, 그 상당부분이 성공적-귀족들의 반격이 있기 전까지는-이었으니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던 때였다. 상당한 규모의 녹봉은 자신 뿐 아니라 공문(孔門) 전체에 물질적 여유와 정신적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가난한 제자에게 많은 봉급을 줄 수 있게 된 공자의 흐뭇한 심정을 상상해 보라.    제자 원헌이 공자가 준 녹봉이 너무 많다며 사양하자 공자가 말했다. “사양하지 말아라. 너무 많다고 여겨지면 형편이 어려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되지 않겠느냐?(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毋 以與爾隣里鄕黨乎)” -‘옹야’편 3장③   집에 불이나 적지 않은 재산을 잃었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마굿간에 불이 났다. 선생님께서 조정에서 돌아와 이를 듣고 ‘사람이 다쳤느냐’고 물으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廐樊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 ‘향당’편 12장④   당시에 말 한필은 노예 몇 명의 몸값에 해당하는 큰 재산이었다. 높아진 신분에 존중과 존경이라는 명예 급부도 따랐다. 공자도 그런 자신이 뿌듯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은근히 새어나오는 기쁜 감정을 감추지 못해 그만 제자들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였으니….    공자가 나이 쉰여섯(정확히는 쉰다섯이다)에 대사구로서 상국의 일까지 대리하게 되자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문인들이 물었다. “듣건대, 군자는 화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이 찾아와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만…” 공자가 겸연쩍게 말했다. “그런 말이 있지. 그러나 사람이 귀해지는게 즐거운 때도 있지 않을까?” - ‘공자세가’   공자도 사람인 이상, 벼슬이 국정을 대리하는 지위에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소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오늘을 보았더라면, 하는 감상이 어찌 일지 않겠으며, 미천한 시절을 겪어본 사람이 노력을 다하여 지위를 얻은 감회가 어찌 남다르지 않겠는가? 공자도 한 사인(士人)으로서 적어도 한번쯤은 그런 기분에 젖어보았을 것이라고 나, 이생은 생각한다. 그렇다해도 그런 기분을 남의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낸다는 것은 공자같은 대인격에게는 흠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어렵게 얻은 출세를 대의를 위해 던져버리기도 했기에 그 뜻밖의 흠결은 ‘성인’ 공자의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예외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리라.   4. 목민관, 공자 나, 이생이 고제들로부터 들은 말을 종합하면, 공자는 맹의자가 집정인 계환자에게 추천하는 방식을 통해 벼슬길에 나갔다. 맹의자는 쌍둥이 동생 남궁경숙과 함께 어릴 때부터 공자의 문하에서 배웠다. 양호의 난을 평정할 때 맹손씨의 수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삼환 중 가장 세력이 작은 집안의 젊은 수장임에도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높았을 때였다. 계환자는 그런 맹의자를 무시할 수 없어서 공자의 등용을 수락하기는 했는데, ‘맹씨 사람 ’인 공자에게 선뜻 조정의 대부 벼슬을 주기는 꺼름칙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정과 귀족들에 대한 공자의 처신도 살펴볼 겸 임금인 정공에게 공실 직할령인 중도재 자리에 공자를 천거했던게 아닌가 싶다. 중도(中都)는 현대의 중국 산동성 문상현 부근 지역으로, 가까운 감 땅에 공실 묘역이 있었다. 중도는 아마도 공실 묘역을 관리하면서 유사시에는 수도의 기능도 맡는 공실의 본읍 같은 도시로 추정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중도재는 공자 자신이 내심 원했던 벼슬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공자는 정치적으로 삼환의 참주정치를 혐오하고 있었으므로, 삼환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인 지방직에 있으면서 임금의 ‘근신(近臣)’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벼슬을 공자도 내심 환영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공자가 나중에 사구가 되자 공실묘역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하여 정공과 정치적 공감대를 이룬 뒤 삼환을 상대로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선 것을 보면 이 시나리오는 나름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공자는 중도재가 되자 그동안 자신이 준비해온 정책들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중도의 재가 되자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례 지내는 절차를 제정(制爲養生送死之節)했다. 어른과 아이는 먹는 것을 다르게 하며(長幼異食),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할 일을 달리 하며(强弱異任), 남녀는 각기 길을 달리 다니도록 하며(男女別途),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게 하며(路無拾遺), 그릇에 조각을 하거나 거짓되게 만들지 못하게(器不雕僞) 하였다. - ‘상로’   중도의 백성은 공실의 영지에서 농사를 짓는 일반 백성과 노역을 담당하는 야인과 노예계층이 있었다.  공자는 이들 신민(臣民)들을 예로써 교화한다면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만들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맨 먼저 사람의 예, 즉 산 사람을 위하고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도리를 가르쳤다. 어른을 공경하고 노약자를 보호하게 하였으며, 남녀를 구별하여 풍속의 문란을 막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 이웃간에 믿음을 쌓는 것이 더 큰 이익임을 알게 했다. 기물(器物)에 사사로운 표시를 할 수 없게 하여 백성들 사이에 차별과 파당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했다. 나, 이생이 그때의 일을 고제들에게 상세히 물었다.  “이런 정책이 바로 성과가 있었나요?” “어떤 사람들은  ‘서쪽 지방 제후들까지 선생님의 정책을 본받았다’⑤고 말하지만, 1년여란 짧은 재임 기간을 생각하면 이는 부풀려진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일찌기 노나라에서 지방수령이 이와같이 예(禮)에 입각한 교화 정책을 펼친 적이 없었으므로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의 높은 식견에 놀란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5. 선비가 벼슬을 얻고자 할 때 공자는 벼슬을 시작할때부터 자신이 세운 명분과 원칙을 잊지 않았다. 정당하지 않은 벼슬살이는 진실로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창 벼슬할 나이를 벼슬을 거부하며 보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그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공자가 그 때의 의지를 단호하게 표현한 말이 있다.     세상에 도가 있을 때는 몸을 드러내고, 세상에 도가 사라지고 없을 때는 몸을 숨긴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태백’편 13장⑥   주변 사람들이 벼슬운이 없다며 때를 만나지 못하는 공자를 안타까워하자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자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그 자리에 서야 하는 지를 걱정합시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탓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를 사람들이 인정하게 할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 ‘이인’편 14장⑦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당부했다.     모름지기 군자란 자기의 능력없음을 괴로워하는 법이지,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따위의 사람이 아니다.(君子 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 ‘위령공’편 18장⑧   후세의 맹자는 이 시절의 공자를 염두에 두고 선비가 어떤 태도로 벼슬에 임해야 하는 지를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한 적이 있다. “남녀가 서로 짝을 맺는 것은 인간이라면 모두 원하는 바이오. 그렇다고 해서 부모와 중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을 뚫어 서로 들여다보고 담장을 넘어 서로 쫓아다니는 일은 부모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는 바이오. 옛사람들이 벼슬을 살고 싶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정당한 도리에 따르지 않는 것을 싫어하였소. 정당한 도리에 따르지 않고 벼슬하러 나가는 것은 구멍을 뚫는 따위나 다름없는 일이오.” - ‘등문공 하’ 편.   6. 벼슬에 임하여  공자가 중도재에 이어 사구의 자리에 오르자 공문의 수많은 문도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아침마다 조정에 나가는 공자의 모습은 공문의 미래가 활짝 열렸음을 상징하는 듯 했다. 공문의 연찬회도 자연스레 벼슬살이에 관한 실질적인 궁금증들이 자주 주제가 되었다. 그때를 전후하여 공자와 문도들이 나눈 출사의 도에 관한 문답들이 어록에 남아 전하고 있다.    “벼슬하는 자로서 맨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신(正身)이다. 자기부터 바르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바르게 닦지 않고서 어떻게 남을 바르게 이끌 수 있겠느냐. (목민관으로서) 그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을 내려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자로’편 6장⑨  진실로 그 몸가짐이 바르면 행정을 펴는데 무슨 망설임이 있겠으며, 자기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어찌 다른 사람을 바르게 이끌수 있겠는가.(苟正其身矣 於從政乎 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 何) - ‘자로’편 13장⑩    “벼슬하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천승의 나라를 이끌고자하는 공직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소임을 중히 여기고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물자를 아끼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백성을 부릴 때는 때를 살펴 해야 한다.(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학이’편 5장⑪     “무엇으로 백성을 이끌어야 합니까?”   예(禮), 의(義), 신(信)이 아니겠느냐. 윗 사람이 예를 좋아하는데 백성들이 어찌 공경하지 않으며, 윗 사람이 정의를 좋아하는데 백성들이 어찌 본받지 않겠으며, 윗사람이 믿음을 보이는데 백성들이 어찌 마음으로 따르지 않겠느냐. 무릇 이와 같이 하면 사방에서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싸업고 찾아올 것이다.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자로’편 4장⑫      “임지에 있을 때의 자세를 말씀해 주십시오.”  벼슬을 가진 자는 백성의 눈과 귀 속에서 사는 사람임을 명심하라. 일상 생활에서는 공손하고, 일에 임하여는 정성을 다바쳐라. 다른 사람과 일할 때도 진심을 다하라. 이 세가지는 설사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된다.(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자로’편 19장⑬     “어떻게 해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까?”   서둘지 말고 작은 이익에 구애받지 마라. 빨리 성과를 내려고 하면 오히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얽매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니.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 ‘자로’편 17장⑭     “어떻게 해야 과오를 줄일 수 있습니까?”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신중하게 말하면 허물이 적어질 것이다.  많이 듣되 위태로운 것은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신중하게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벼슬이야 늘 그 안에 있는게 아니겠느냐? (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위정’편 18장⑮    “어떻게 하면 벼슬하는 사람답다고 하겠습니까?”    선비는 무엇이 부끄러운 짓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또한 어디가서든 나라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가히 벼슬할만 자라고 할 것이다.(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그 아래 벼슬아치는 어떻습니까?”  안으로는 효자 소리를 듣고, 밖으로는 우애가 깊다고 칭송받는 사람이다.(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   “그 아래도 있습니까?”  말을 바꾸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고지식한 소인이란 소리를 듣기는 해도 차선의 벼슬아치는 될 수 있다.(言必信 行必果 갱갱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 -이상 ‘자로’편 20장      “함께 일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끌어야 합니까?”   누군가와 같이 일할 때는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한다. 군자는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 이이고, 소인은 다른 사람을 탓한다.(君子 求諸己 小人 求諸人) -‘위령공’편 20장  일을 하다 잘못이 생기면 자신부터 엄중히 꾸짖고 남의 잘못은 가볍게 질책한다. 그래야 원망이 쌓이지 않는다.(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위령공’편 14장    “부하에게 좋은 상관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완성시켜주고, 남의 나쁜 점을 가려준다. 소인은 반대로 한다.(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 -‘안연’편 16장     “선생님은 어떤 사람과 더불어 하고 싶습니까?”  중용을 알며, 말과 행동을 중도(中道)로서 하는 사람을 얻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반드시 뜻이 높아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 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고 싶다. 뜻이 높은 사람은 거침없이 나아갈 줄 알고, 절조를 아는 사람은 금도를 지킨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견乎 狂者 進取 견者 有所不爲也)-‘자로’편 21장    “그런 사람과 같은 줄이 되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군자란 모름지기 자부심을 가지되 그것으로 남과 다투지 않으며, 더불어 함께 일을 도모하되 편을 가르지 않는 자이다.(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위령공’편 21장      “백성이 모두 좋아한다면 좋은 관리가 된 것이지요?”  그럴 순 없다. 고을 사람 중에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자로’편 24장   *영화 중에서     7. 법만으론 선정(善政)을 이룰 수 없다 공자가 사구가 되어 업무를 시작하자, 제자들이 다투어 말했다. “우리 선생님이라면, 무슨 송사든 잘 처결하실 거야.”그 말을 들은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난들 특별히 다를 것이 있겠느냐. 나는 송사를 잘 판단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송사 자체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싶구나.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안연’편 13장     “판관으로서 어찌해야 밝다는 소리를 듣겠습니까?”   옷이 물에 젖듯이 은근히 헐뜯는 말과 뜨거운 물이 살갗에 닿듯이 절박하게 호소하여 오더라도 그가운데 진실을 간파하여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면 밝다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가히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遠也已矣) -‘안연’편 6장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오르셨으니 법으로 이끄시렵니까?”  이끌기를 법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법으로 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할 수는 있으나 부끄러워 함이 없을 것이다. 이끌기를 덕으로 하고, 가지런히 질서를 세우기를 예로써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또한 스스로 바른 마음을 갖고자 할 것이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편 3장     “선정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모름지기 백성은 공평한 명분을 가지고 이끄는 것이지, 지도자의 야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덕있는 지도자는 백성들이 자기의 교화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난다면 이미 선정이 아니겠느냐.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태백’편 9장   8. 벼슬하는 자, 마땅히 역사를 두려워하라  선비에게 벼슬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재앙의 근원이다. 무엇이 좋은 벼슬이며, 어떤 자가 훌륭한 벼슬아치인가? 공자에게도 늘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화두였다. 누군가가 공자에게 벼슬아치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바를 물었다면 공자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가 군자라면 마땅히 역사를 두려워 할 것이다.’ 말년의 공자에게 손자뻘되는 제자가 있었다. 이름이 증참(曾參)인 그는 뒷날 공자의 학통을 계승하였기에 증자로 존숭되었는데, 그가 한 말이 선생님의 어록에 남아 있다. 벼슬길에 들어선 전후 무렵의 공자 모습을 그대로 닮은 듯하여 여기에서 함께 전한다.    벼슬하고자 하는 선비는 뜻이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맡은 일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을 소임으로 여기는 자이니, 또한 (그 책임이) 무겁지 않겠는가? 죽어서야 비로소 끝나니 어찌 장구한 임무가 아니겠는가?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태백’편 7장   만년의 공자께서 노나라에 돌아와 노나라 사서인 를 편찬했다. 맹자는 그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이 쇠퇴하고 정도가 미약해져서 괴이한 학설과 난폭한 행위가 또 생기어, 신하가 제 임금을 죽이는 일이 있고, 자식이 제 아비를 죽이는 경우도 있다. 공자께서 이런 세상을 두렵게 여기시어 춘추를 지으셨는데, 춘추는 천자가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도 이 춘추를 볼 것이고, 나를 책하려는 사람도 이 춘추를 볼 것이다.’ - ‘등문공 하’.             *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이재호 정해,솔)와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헌문편 3장  子曰 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자왈 사이회거 부족이위사의)  이-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비이면서도 편안하게 거주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선비가 될 수 없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사(士)라면서 ‘편안한 생활(居)’을 염두에 두면, 이미 ‘사’라고 이를 수 없으리라.     L-The Master said, “The scholar who cherishes the love of comfort is not fit to be deemed a scholar.”    ②중도의 위치 및 도시 기능에 대해서는 현대의 여러 전문학자들이 다각도로 고증하고 있다. 글쓴이는 중도가 공실의 직할령이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감땅의 공실묘역을 관리하는 업무도 겸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③옹야편 3장  (…)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毋 以與爾隣里鄕黨乎(원사위지재 여지속구백 사. 자왈 무 이여이린리향당호)  이-원사(원헌)가 공자의 가신이 되었는데, 공자께서 봉급으로 곡색 9백을 주니 이를 사양하므로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사양하지 말고, 그대의 이웃 마을과 고을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여라.”  배-원사가 선생님의 비서가 되었다. (녹봉으로) 곡식 9백을 주었는데, 사양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아서라! (받지 않을 양이면) 네 이웃과 고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무나.  L-Yuan Sze being made governor of his town by the Master, he gave him nine hundred measures of grain, but Sze declined them. The Master said, “Do not decline them. May you not give them away in the neighborhoods, hamlets, towns, and villages?”    ④향당편 12장   廐樊 子退朝曰 傷人乎不問馬(구분. 자퇴조왈 상인호불문마)  이-마구간이 불에 탔는데, 스승께서 조회를 마치고 물러나와 말씀하셨다. “혹시 사람이 다치지는 아니했는가?” 그런 다음에 말에 대해서 물으셨다.  배-마굿간이 불탔다. 선생님, 퇴청하여 말씀하시다. 사람이 상하였느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다.  (*이재호는 일반적인 독법인 ‘傷人乎, 不問馬’ 대신  ‘傷人乎不, 問馬’로 끊어 읽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L-The stable being burned down, when he was at court, on his return he said, “Has any man been hurt?” He did not ask about the horses.    ⑤ ‘공자세가’ 중  (…)“정공은 공자를 중도의 재로 삼았는데, 일년 뒤에 사방의 각 제후들이 모두 공자가 다스리는 방법을 따라했다. 이로말미암아 공자는 중도의 재에서 사공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가 되었다.”    ⑥태백편 13장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천하유도즉견 무도즉은).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방유도 빈차천언 치야 방무도 부차귀언 치야)  이-천하가 태평하면 나가서 벼슬하고, 천하가 문란하면 숨어서 살아야 한다. 나라가 태평할 때에 가난하고 비천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가 문란할 때에 부유하고 귀달(貴達)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배-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 것.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움이요, 나라에 도가 없을 적엔 넉넉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움이니라.  L-When right principles of government prevail in the kingdom, he will show himself; when they are prostrated, he will keep concealed. When a country is well-governed, poverty and a mean condition are things to be ashamed of. When a country is ill- governed, riches and honour are things to be ashamed of.    ⑦안연편 14장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자왈 불환무위 환소이립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벼슬자리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벼슬자리에 설 수 있는가를 걱정할 것이며,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이 나를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자리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서지 못하는 까닭을 근심하라.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알 수 있게 되기를 구하라.  L-The Master said, “A man should say, I am not concerned that I have no place, I am concerned how I may fit myself for one. I am not concerned that I am not known, I seek to be worthy to be known.”    ⑧ 위령공편 18장  子曰 君子 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자왈 군자 병무능언 불병인지불기지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기에게 재능이 없는 것을 근심하고, 남이 자기 재능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통으로 여길 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은 병통으로 여기지 않느니.  L-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is distressed by his want of ability. He is not distressed by men’s not knowing him.”     ⑨자로편 6장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자왈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면 백성들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명령이 시행되고, 자기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명령하더라도 그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그 행실(身)이 바르다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질 터이나, 그 행실이 바르지 않다면 명령한들 좇지 않으리라.  L-The Master said, “When a prince’s personal conduct is correct, his government is effective without the issuing of orders. If his personal conduct is not correct, he may issue orders, but they will not be followed.”    ⑩자로편 13장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 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자왈 구정기신의 어종정호 하유 불능정기신 여정인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자기 몸을 바르게 한다면 정사를 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와 반대로) 자기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정녕 자기 행실이 올바르다면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또 제 행실도 바로잡지 못하는 주제라면 남은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L-The Master said, “If a minister make his own conduct correct, what difficulty will he have in assisting in government? If he cannot rectify himself, what has he to do with rectifying others?”    ⑪ 학이편 5장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천승(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일을 신중히 처리하면서 백성에게 믿도록 하며, 나라의 제반 용도를 절약하고서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사역할 적엔 제 때에 맞게 해야 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천승의 나라를 다스림에는 일을 어렵게 여기고 미쁘게 하며, 쓰임새는 맞춤하게 하고, 사람을 아끼며, 때에 맞춰 백성을 부려야 하느니.  L-The Master said, “To rule a country of a thousand chariots, there must be reverent attention to business, and sincerity; economy in expenditure, and love for men; and the employment of the people at the proper seasons. ”    ⑫자로편 4장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상 호례즉민막감불경 상 호의즉민막감불복 상호신즉민막감불용정. 부여시즉사방지민 강부기자이지의.)  이-윗사람이 예절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리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성심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방에 있는 백성들이 어린애를 포대기에 싸서 등에 지고 모여들 것이다.  배-윗 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이 공경하지 않을 리 없고, 윗 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을 리 없으며,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는데 백성이 마음 주지 않을 리 없다. 대저 이렇게만 하면,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애는 들쳐업고 세간은 짊어지고 몰려들 것이다.  L-If a superior love propriety, the people will not dare not to be reverent. If he love righteousness, the people will not dare not to submit to his example. If he love good faith, the people will not dare not to be sincere. Now, when these things obtain, the people from all quarters will come to him, bearing their children on their backs.    ⑬자로편 19장  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번지문인 자왈 거처공 집사경 여인충 수지이적 불가기야)  이-번지가 인에 대해서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몸을 지키는 도리는 공손해야 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공경(근신)해야 하며, 사람들과 같이 일할 때는 성실할 것을,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 가더라도 (이 세가지 일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배-번지가 인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일할 땐 조심스럽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땐 진심을 다하는 것이다. 비록 야만의 땅에 가서라도 버려서는 안되느니.  L-Fan Ch‘ih asked about perfect virtue. The Master said, “It is, in retirement, to be sedately grave; in the management of business, to be reverently attentive; in intercourse with others, to be strictly sincere. Though a man go among rude, uncultivated tribes, these qualities may not be neglected.”    ⑭자로편 17장  子夏爲거父宰 問政 子曰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자하거보재 문정. 자왈 무욕속 무견소리 욕속즉부달 견소리즉대사불성)  이-자하가 거보 고을의 장관이 되어 정사에 대해서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일을 빨리 하려고 서두르지 말아야 하고, 작은 이익을 보고 일을 시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빨리 하려고 서두르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작은 이익을 보고 일을 시작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배-자하가 거보 땅의 책임자가 되어, 정치를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빨리 이루려고 서둘지 말고, 소소한 이익에 연연하지 말아라. 빨리 이루려고 서둘면 끝을 보지 못하고, 소소한 이익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나니.  L-Tsze-hsia, being governor of Chu-fu, asked about government. The Master said, “Do not be desirous to have things done quickly; do not look at small advantages. Desire to have things done quickly prevents their being done thoroughly. Looking at small advantages prevents great affairs from being accomplished.”    ⑮위정편 18장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자장학간록 자왈 다문궐의 신언기여즉과우 다견궐태. 신행기여즉과회 언과우 행과회 녹재기중의)  이-자장이 (벼슬을 하여) 녹봉을 구하는 방법을 물으니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많이 듣고서도 의심나는 것은 빼놓고 그 나머지만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과실이 적을 것이며, 많이 보고서도 미심(未審)한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만 조심스럽게 시행한다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니, 자기의 한 말에 과실이 적고 자기가 행한 일에 뉘우침이 적으면 녹봉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배-자장이 벼슬 구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많이 듣고 미심쩍은 것은 제쳐두고 나머지를 조심스레 말하면 허물이 적으리라. 널리 보고 위태로운 것은 제쳐두고 나머지를 조신하게 행동으로 옮기면 뉘우칠 일이 적으리라.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있느니.  L-Tsze-chang was learning with a view to official emolument. The Master said, “Hear much and put aside the points of which you stand in doubt, while you speak cautiously at the same time of the others:-- then you will afford few occasions for blame. See much and put aside the things which seem perilous, while you are cautious at the same time in carrying the others into practice:-- then you will have few occasions for repentance. When one gives few occasions for blame in his words, and few occasions for repentance in his conduct, he is in the way to get emolument.”    자로편 20장  子貢 問曰何如 斯可謂之士矣. 子曰 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曰 敢問其次 曰 宗族 稱孝焉 鄕黨 稱弟焉. 曰 敢問其次 曰 言必信 行必果 갱갱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 曰 今之從政者 何如 子曰 噫 斗소之人 何足算也(자공 문왈 하여 사가위지사의. 자왈 행기유치 사어사방 불욕군명 가위사의. 왈 감문기차 왈 종족 칭효언 향당 칭제언. 왈 감문기차왈 언필언 행필과 갱갱연소인재 억역가이위차의. 왈 금지종정자 하여 자왈 희 두소지인 하족산야)  이-자공이 물었다. “(처신을) 어찌 해야만 이를 (벼슬할 수 있는) 선비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야 하며, 사방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않는다면 (벼슬할 수 있는) 선비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그 다음에 대해 물으니,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족(친족)들이 효성이 있다고 칭찬하고, 향당(고을)에서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인물이니라.” 자공이 그 다음에 대해 다시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말은 반드시 믿음있게 하고 행실은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딱딱해서 주변성이 없는, 즉 견식과 도량이 좁은 소인이지만, 그래도 그 다음은 될 것이다.” 자공이 말하였다. “요즈음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아아. 기량이 작은 사람들을 어찌 낱낱이 셀 수가 있겠는가?”  배-자공이 여쭈었다. 어찌해야 ‘사(士)답다’고 할 수 있을는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자기 행실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않으면, ‘사답다’고 이를 만하리라. (자공이) 말하였다. 감히 그 다음을 여쭙습니다. 말씀하시다. 온 집안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온 마을이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지. 말하였다. 또 그 다음을 여쭙습니다. 말씀하시다.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하니) 믿음직스럽고, 업무상에는 반드시 끊고 맺음이 분명한 사람이지. 꼬장꼬장해서 소인배라고들 하겠지만, 억지로 또 그 다음은 될 게야. 말하였다. 오늘날 정치에 종 사하는 사람들은 어떤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아이고! 한 말 닷 되나 될까 말까 한 놈들을 어찌 셈에 넣는단 말이냐.  L-Tsze-kung asked, saying, “What qualities must a man possess to entitle him to be called an officer?” The Master said, “He who in his conduct of himself maintains a sense of shame, and when sent to any quarter will not disgrace his prince‘s commission, deserves to be called an officer.” Tsze-kung pursued, “I venture to ask who may be placed in the next lower rank?” And he was told, “He whom the circle of his relatives pronounce to be filial, whom his fellow-villagers and neighbours pronounce to be fraternal.”  Again the disciple asked, “I venture to ask about the class still next in order.” The Master said, “They are determined to be sincere in what they say, and to carry out what they do. They are obstinate little men. Yet perhaps they may make the next class.” Tsze-kung finally inquired, “Of what sort are those of the present day, who engage in government?” The Master said “Pooh! they are so many pecks and hampers, not worth being taken into account.”    위령공편 20장   子曰 君子 求諸己 小人 求諸人(자왈 군자 구제기 소인 구제인)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신에게서 (과실이 있는가를) 찾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과실이 있는가를) 찾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스스로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구하고, 소인은 남으로부터 구하더구나.  L-The Master said, “What the superior man seeks, is in himself. What the mean man seeks, is in others.”    위령공편 14장  子曰 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자왈 궁자후이박책어인 즉원원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많이 책망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적게 책망한다면, 사람들의 원망에서 벗어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저 자신은 몹시 꾸짖고, 남 탓하기는 가볍게 한다면 원망을 멀리할 수 있으리라.      L-The Master said, “He who requires much from himself and little from others, will keep himself from being the object of resentment.”     안연편 16장   子曰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자왈 군자 성인지미 불성인지악 소인 반시)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도와 이루어 주고, 남의 나쁜 점을 도와 이루어 주지는 않는데, 소인은 이와 반대되는 행동만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남의 장점을 이루게 하지만 단점은 고쳐준다. 소인은 그와 반대로 하나니.    L-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seeks to perfect the admirable qualities of men, and does not seek to perfect their bad qualities. The mean man does the opposite of this.”    자로편 21장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견乎 狂者 進取 견者 有所不爲也(자왈 부득중행이여지 필야광견호 광자 진취 견자 유소불위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 일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를 택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성이 있는 사람이고, 견자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언행에 적실한 사람(中行)’을 얻어 함께 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광견한 사람(광견)’을 얻으리라! 광자는 진취하고, 견자는 (차마)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지.   L-The Master said, “Since I cannot get men pursuing the due medium, to whom I might communicate my instructions, I must find the ardent and the cautiously-decided. The ardent will advance and lay hold of truth; the cautiously-decided will keep themselves from what is wrong.”    위령공편 21장  子曰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자왈 군자 긍이부쟁 군이부당)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남과 다투지 아니하며, 여러 사람과 같이 어울리면서도 편당을 만들지는 않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자부하되 다투지 않으며, 어울리되 패를 짓지는 않는다.     L-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is dignified, but does not wrangle. He is sociable, but not a partizan.”    자로편 24장  子貢問曰 鄕人 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 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자공문왈 향인 개호지 하여. 자왈 미가야. 향인 개오지 하여. 자왈 미가야. 불여향인지선자호지 기불자오지)  이-자공이 물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저를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옳지 못한 일이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저를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도 옳지 못한 일이다. 고을 사람들 중 착한 사람은 나를 좋아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    배-자공이 여쭈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충분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면 어떻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충분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자가 싫어함만 못하느니.  L-Tsze-kung asked, saying, “What do you say of a man who is loved by all the people of his neighborhood?” The Master replied, “We may not for that accord our approval of him.” “And what do you say of him who is hated by all the people of his neighborhood?” The Master said, “We may not for that conclude that he is bad. It is better than either of these cases that the good in the neighborhood love him, and the bad hate him.”    안연편 13장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자왈 청송, 오유인야, 필야사무송호)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송사를 판결하는 것은 나도 남들처럼 할 수 있으나, (먼저)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해야 하겠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송사를 듣는 것이야 나도 남만 못하지 않겠지만,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해야 하리라.  L-The Master said, “In hearing litigations, I am like any other body. What is necessary, however, is to cause the people to have no litigations.”    안연편 6장  子張問明 子曰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讒 膚受之소 不行焉 可謂遠也已矣(자장문명 자왈 침윤지참 부수지소 불행언 가위명야이의. 침윤지참 부수지소 불행언 가위원야이의)  이-자장이 명철함에 대해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물이 차츰 젖어 스며드는 듯한 참소와 살결에 와 닿는 듯한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명철하다고 할 수가 있다. 물이 차츰 젖어 스며드는 듯한 참소와 살결에 와 닿는 듯한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먼 장래를 본다고 말할 수가 있다.”  배-자장이 투명성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가슴에 젖어드는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에 초연할 수 있다면 ‘투명하다’고 이를 수 있으리라. 정녕 가슴에 젖어드는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에 초연할 수 있다면, ‘멀리 보는 안목을 가졌다’고 이를 수 있으리라.  L-Tsze-chang asked what constituted intelligence. The Master said, “He with whom neither slander that gradually soaks into the mind, nor statements that startle like a wound in the flesh, are successful, may be called intelligent indeed. Yea, he with whom neither soaking slander, nor startling statements, are successful, may be called farseeing.”    위정편 3장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을 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형벌은 면하여도 부끄러운 마음은 없어지게 된다. 백성을 도덕으로써 인도하고 예의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운 마음도 있게 되고 또한 선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정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려 들면, 백성들은 면하려고만 하지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반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뿐 아니라 또 (스스로) 바로잡는다.  L-The Master said, “If the people be led by laws, and uniformity sought to be given them by punishments, they will try to avoid the punishment, but have no sense of shame. If they be led by virtue, and uniformity sought to be given them by the rules of propriety, they will have the sense of shame, and moreover will become good.”    태백편 9장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자왈 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에게 지사(指使)할 만한 일은 지령(指令)을 따르게 하고, 지사할 수가 없는 일은 (가르쳐서) 알도록 해야만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백성들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까닭을) 알게 할 수는 없더구나.  L-The Master said, “The people may be made to follow a path of action, but they may not be made to understand it.”    태백편 7장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 인이위기임, 불역중호. 사이후이, 불역원호)   이-증자가 말하였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되니 책임이 무겁고 앞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았으니 책임이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책임이 끝날 것이니 앞길이 또한 멀지 않겠는가.”  배-증자가 말하였다. 사(士)는 뜻이 넓고 굳지 않아서는 안 되리라. 맡은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으로써 자임하였으니 또 무겁지 아니한가! 죽어서야 마칠 것이니 또 멀지 아니한가!  L-The philosopher Tsang said, “The officer may not be without breadth of mind and vigorous endurance. His burden is heavy and his course is long. Perfect virtue is the burden which he considers it is his to sustain;-- is it not heavy? Only with death does his course stop;-- is it not long?”   한겨레 휴심정 이인우  
196    공자, 노자를 만나다<상> 댓글:  조회:2398  추천:0  2015-03-27
【논어명장면】공자, 노자를 만나다 이인우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자왈 무위이치자 기순야여 부하위재 공기정남면이이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다스린 이는 순임금이시라!    대저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 시어 임금의 자리를 지키셨을 뿐이다! -‘위령공’편 4장           1. 공자의 스승 공자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묵묵히 이해할 뿐(默而識之-술이편 2장), 결코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지식은 저절로 밖으로 드러났다. 수십년을 함께 한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 아닐까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이 타고난 재능을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자주 이렇게 말했다.    열 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성실하고 신의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①) -‘공야장’편 27장.    나는 결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하는 자일 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술이’편 19장.   어떤 이들은 공자의 학문적 배경과 교수법의 원천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의문을 가진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그대들은 내가 감춰놓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 구(丘)의 본모습일세.(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술이’편 23장.   공자에게는 따로 계통을 지을만한 스승이 없었다는 사실을 종내 믿으려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공자 자신도 이런 질문이 종종 지겨웠던지, “어려서 비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줏어들은게 많았지(吾少也賤 故多能鄙事-‘자한’편 6장)”라고 말하며 웃어넘기곤 했다. 누군가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있는 법, 좋은 점을 보면 본받아 배우고 나쁜 점을 보면 반성하면서 배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②)-‘술이’편 21장.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③)-‘위정’편 11장.   훗날 제자 자공은 공자가 학문적 문파가 없음을 의아해 하는 어떤 자와 이런 대화를 남겼다.    위나라 대부 공손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배웠습니까?”(仲尼焉學)  “문왕과 무왕의 가르침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 가운데 큰 것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작은 것을 배우게 되지요. 위대한 성현의 도가 없는 곳이 없는데, 왜 선생님이 배울 곳이 없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따로 스승이 없으셨습니다.” (子貢曰 文武之道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자장’편 22장.   *영화 중에서   2. 노자는 공자의 스승인가 자공의 분명한 회고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공자에게 스승이 있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공자에게 예(禮)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사람은 노자(老子)라고 존칭되는 어떤 인물이다. 훗날 도가(道家)에 의해 자신들의 비조(鼻祖)로 추앙된 바로 그 철인(哲人)이다. 노자가 공자의 스승이었다는 설은 노자를 높이고 공자를 낮추려던 도가우위 시대의 산물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사상투쟁이 낳은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자가 ‘공자의 동시대인으로 실존한 인물’이라는 믿음은 매우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설화가 생겨나 수천년을 전승할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실체적 진실’이 계기가 되었기 마련이다. 나, 이생도 그 ‘설화의 실체적 기원’이 궁금하여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전설의 진원(震源)과 진위(眞僞)를 추적한 적이 있다. 동양사상의 양대 거봉인 공자와 노자는 정말로 조우한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노자는 역사와 설화가 공히 전하는 ‘노담(老聃)’이라는 바로 그 인물인가? 이 이야기는 이런 궁금증을 좇아 중원 일대를 떠돈 한 늙은 순례자의 기록이다.   3. 공자가 존경한 노팽 공자가 따로 스승이 없이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공자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경이롭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자의 어록과 행적을 근거로 공자가 영향을 받았음직한 사람들을 꼽아보기도 했다. 공자가 고대 관제(官制)에 밝은 것은 젊어서 담(炎+방)자에게 배운 탓이고, 음악에 정통한 것은 장홍(장弘)과 사양자(師襄子)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또 공자가 존경한 현자로는 주(周)나라의 노자(老子), 위나라의 거백옥(거伯玉), 제나라의 안평중(晏平仲·안영),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나라의 자산(子産), 노나라의 맹공작(孟公綽) 등( ‘중니제자열전’)이 꼽혔다. 이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사람이 ‘노자’이다. ‘노자’는 열거된 ‘현자’ 가운데 유일하게 실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사람임에도, 공자에게 직접 ‘예(禮)를 가르치고, 일종의 도덕적 각성까지 촉구한 언술을 남긴 사람’으로 사서(史書)에까지 올라 있다. 게다가 유가와 쌍벽을 이룬 도가(道家)의 비조로 추존되고 있으니, 만약 그가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사상을 교류하였다면 이는 인류문화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후대 사람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생님의 어록에는 노자라는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에는 이름이 비슷해 후대의 일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바로 노자가 아닐까 추정한 노팽(老彭)이라는 사람이 딱 한번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서술하되 짓지 않음은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니, 나는 이를 몰래 우리 노팽과 견주어보노라.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④)-‘술이’편 1장.   내가 노팽이라는 사람에 대해 고제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유사(儒士) 출신의 제자들은 대개 이 노팽이라는 ‘고대인’을 알고 있었다. “노팽은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고대 무축(巫祝;원시 제정일치 사회의 군장이자 제사장. 무당의 원류이다)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열명의 대무(大巫) 중 네번째 서열을 가진 무팽(巫彭)이란 분이며⑤,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전승하는 집단인 사무(史巫)의 원조격이다. 고천의식(告天儀式)을 치를 때 훌륭한 무사(巫史)는 하늘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뿐, 사사로히 의미를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저 위대한 현자에 당신의 구도(求道) 정신을 견주어 겸손하게 자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노팽(老彭)의 노는 무팽(巫彭)의 존칭인가요?” “노(老)란 나이가 많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 남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을 뜻하지. 주 왕실에서도 임금의 스승을 ‘삼로’(三老)라 했다. 여러 제후국에서도 주나라의 예를 따라 종종 ‘나라의 삼로(三老)를 존중한다’며 고을의 현명한 노인들을 우대하였는데, 이때의 ‘삼로’ 역시 ‘나이 많은 현자들’을 가리켰다. 민간에서도 농사 경험이 많은 지혜로운 농부를 `노농'(老農)이라 했는데, 선생님께서도 그런 표현(子曰 吾不如老農 -`자한'편 4장)을 쓰신 적이 있으셨지."   그럼 노팽이 노자가 아니라면 노자는 그러면 누구를 가리키는가?   4. 사실(事實)과 사실(史實) 선생님의 어록에 언급이 없음에도, 노자라는 사람이 존재하여 공자에게 예를 전수했다는 이른바 ‘문례(問禮)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공인’된 데는 역사가 사마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마천은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인물. 그가 자신의 사서에 노자를 실존인물로 다룬 후부터 사마천을 신뢰하는 후학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따랐다. 만약 사마천이 문례설화를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공자와 노자의 조우(遭遇)설은 필시 하나의 ‘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나라의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낙양)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 ‘공자세가’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 ‘노자·한비열전’   이를 종합하면, 노자는 주나라 사관(史官)을 지낸 사람으로, 공자가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아 주나라 낙양에 갔을 때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는 이 ‘문례(問禮) 설화’는 매우 유명하여, 역사가 사마천이 생존했던 시대에도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말하는 사람치고 한두번 화제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주(莊周;의 저자. 서기전 369~289?)를 비롯한 후대 사상가들이 공자와 노자의 대화를 내세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게 되면서 사상사의 측면에서도 노자의 실존이 확고해졌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쟁명을 거쳐 진한(秦漢) 시기의 통치이념 수립 과정에서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치열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고, 공자 사후 3백여년 뒤의 사람인 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양립불가(兩立不可)의 세계로까지 여겨졌다. 사마천은 당시 두 학파간의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 지를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世之學老子則출(물리칠출 絲+出)儒學 儒學亦출老子 道不同不相爲謀 豈謂是邪) - ‘노자· 한비열전’⑥   그러나 나, 이생이 공문의 일꾼이 되어 여러 문도들과 생활할 때 그 누구로부터도 노자라고 존칭되는 현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공자보다 나이가 많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노자라는 저명한 현자가 있어서 공자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전수하였다면, 민간 학숙으로서 학생들을 유치해야 하는 공문(孔門)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텐데 말이다. 선생님 생전이든 사후이든 노자라는 인물이 존숭되거나 혹은 폄하된 흔적이 선생님의 어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노자가 후대에 도가 사상의 비조로 떠받들어졌을지라도, 적어도 이 시기에 노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런 현인이 있었다 해도 그는 ‘여러 현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상도 당시에는 공자 사상과 대립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호적인 통섭의 관계였을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이 논구한대로 공자가 살던 시기는  여러 사상들이 아직 완전히 분화되기 전이었다. 유가와 도가는 후대로 가면서 점차 사상적 분화과정을 밟았지만, 한동안은 자신들도 어쩌지 못할 동출이명(同出異名;이름이 다르지만 연원을 같이 함)의 ‘혈통’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사마천이 에서 말한 노자는 도가의 원조가 된 노자, 바로 그 사람이지만, 도가의 원조인 노자라는 사람이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며, 공자에게 예를 교수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는 사마천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마천은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를 산 주나라 사관 노담이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는, 어쩌면 초나라 사람 노래자, 혹은 훗날의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일지 모른다는 식(周太史 담…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상동)의 여운을 남겼다. 사마천의 시대에 벌써 노자는 그 실존 여부를 규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해야 할 사가로서 노자라 불리는 대사상가의 생몰조차 적시할 수 없자, 그를 그냥 은군자(隱君子), 즉 ‘숨어사는 군자’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이상 ‘노자·한비열전’)   나, 이생의 추적 결과, ‘최초의 노자’는 분명 노담이었다. 내가 여러 고제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공자가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갔을 때 노담을 만났으며, 그가 훗날 노자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록 사마천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노자의 실체를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노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창조된 ‘역사화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에 실존한 노자’는 ‘최후에 완성된 노자’가 아니지만, 노자라는 인물의 기원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란 것이 나, 이생의 결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담=노자’라는 등식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성립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며, 공자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경쟁자들이 노담의 존재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활용하지는 않았으리라.   노담이 ‘최초의 노자’일 것이란 ‘물증’도 있다. (이라고도 한다)라는 5천 자의 짧은 책의 존재이다. 이 책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공자보다 훨씬 후대에 여러 사람의 참여로 형성된 위작(僞作)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책의 기본 뼈대나 원천 사상의 표현방식은 한 사람의 일관된 관점이나 집필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적어도 이 책이 최초에 쓰여질 때는 단일 저자의 작품으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그 ‘최초의 저자’가 바로 ‘최초의 노자’라면, 그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현재까지 노담을 제외하고는 달리 상정할 만한 인물이 없다.(김용옥, )   그렇다면 노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공자를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공자는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한 사서의 언급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유가의 경쟁자들이 남긴 진술은 일방적이어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나는 두 사람이 나눈 육성이 궁금해 한동안 잠을 못이룰 지경이 되었다. 견디다 못해 어느날 부터인가는 자로와 안연 등 당시 낙양에 함께 갔던 고제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고제님들, 공자님과 함께 낙양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도 낙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군요.” “선생님과 함께 주례를 수입하려고 갔던 주나라 낙양에서의 일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나요?”   *영화 중에서   5. 공자, 낙양에 가다 다시, 사마천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노나라의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 ‘공자세가’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이 제시하는 역사적 장면들을 꼼꼼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에서는 특정되지 않았으나 공자 일행이 낙양에 간 시기가 언제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시점에 따라 공자와 노자의 나이 차이, 학문적 수준 정도 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상의 전수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분석 조건이다.   “저, 이생이 듣기로 선생님이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가서 노자를 만난게 17~30살 사이거나, 34, 35살 때의 일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다. 선생님이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유(儒)의 일원으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상례(喪禮)를 수집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낙양에도 들렀을 수 있겠지만, 남궁경숙과 함께 낙양을 공식방문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 선생님이 34살 때는 맹손씨의 수장인 맹희자의 3년상이 치러지던 때라 그의 아들인 남궁경숙이 먼 여행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나, 이생이 고제들의 여러가지 증언과 당시 시대적 상황, 공자의 행적 등을 종합해 보건대, 선생님이 주례를 배우러 낙양을 방문한 시기는 노정공 4년 즉 서기전 506년 즈음이었다. 이때는 선생님이 제나라 망명에서 돌아와 곡부에 학숙을 다시 연지 4년째 되던 해로, 선생님의 나이 45~46살 때였다.⑦ 서기전 507년 노정공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 노나라는 각종 국가의식을 치르기 위한 예법과 시설물을 다시 상고(尙古)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노나라 집권당인 계손, 맹손, 숙손씨 등 삼환(三桓)은 내부 논의 끝에 주나라 왕실이 비전(秘傳)하고 있는 주례(周禮)에 관한 고례전장(古禮典章)을 구해 올 사절단을 낙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일을 자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조정과 삼환은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소공께서 7년을 망명해 있는 동안 조정과 공실의 예법이 많이 망실되거나 흐트러져 있었고, 임금 자리에 세자 대신 소공의 동생인 금상(노정공)이 계씨의 손에 옹립되면서 임금의 정통성도 많이 취약해져 있었다.” 염백우가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정공이 즉위한 이듬해 궁궐 남문의 양관(兩觀)이 불에 탔지.( 노정공 2년) 알다시피 궁궐의 남문인 치문 양쪽에 망루가 있지 않은가. 양관은 국법과 조정의 정령(政令)을 게시하는 곳인데 이곳을 방화했다는 것은 명백한 반체제 시위였지. 게다가 임금께서 진(晉)나라에 조공을 갔다가 황하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삼환도 더 이상 이 상황을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 삼환 세력은 민심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취약해진 공실의 정통성을 조속히 안정시킬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 방책의 하나가 국가 예법의 복구였던 것이다. 주례(周禮)를 다시 전수해 옴으로써 주공(周公)의 아들 노공(魯公;이름이 백금이다)이 봉건된 나라라는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나라로서도 노나라 사절의 방문은 환영할 일이었다. 주나라는 십여년 전 왕실 내란에서 패배한 서왕 세력이 주나라 왕실의 고대 전적들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하는 바람에 예법시행에 중대한 공백을 맞고 있었다. 주왕실은 내란이 수습되고 낙양이 안정되자 동성(同姓)의 제후국들이 소장한 주왕실 관련 전적들을 왕실도서관에 바치도록 했다.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 보면 주공의 봉국으로 유일하게 왕례(王禮)로 제사하고 있는 노나라의 사례는 가장 밀접한 상고 대상이었을 것이며, 삼환의 입장에서도 노나라 역사서인 와 천문·역법을 담은 등 노나라가 개찬한 전적을 바쳐 주나라 왕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리라.   “아, 그렇게 되어 노나라 사절단이 주나라 도읍 낙양에 가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그 일을 남궁경숙과 공자가 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때 집정대신인 계평자는 낙양사절단의 임무를 삼환의 큰집인 맹손씨에게 일임했다. 맹손씨가 대대로 사공(司空)의 벼슬을 세습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이지. 사공(오늘날의 건설부장관과 상공부장관 정도를 겸직하는 벼슬이다)은 국가 주요시설들인 궁궐과 성곽, 조정의 묘당과 묘역 등의 건설과 보수를 담당했으므로, 그에 따른 예법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업무와도 무관할 수 없었다. 맹손씨가 주례를 수집하는 일을 맡은 것은 이런 연유때문이지.” “정공 원년(서기전 509년)에 낙양의 성주(成周) 성을 새로 쌓을 때 여러 제후국들이 역부(役夫)와 물자를 바쳤는데, 우리 노나라에서는 사공인 맹의자가 이 일을 맡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지.” “선생님이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맹의자와 남궁경숙은 쌍동이 형제로 이때 나이가 25~26살이었습니다. 맹의자는 이 중요한 임무를 동생 남궁경숙에게 맡겼는데, 아직 예법 전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만큼, 사절단을 자문하고 지도할 예악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분이 스승님 말고 누가 있었겠습니까?” 안연이 조용히 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맹의자·남궁경숙 형제는 일찌기 아버지 맹희자가 임종하면서 자식 교육을 공자에게 맡길 것을 유언( 노소공 7년)한 바로 그 형제이다. 즉 공자는 이들 형제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맹손씨가 주도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인연( 노양공 10년)으로 두 집안이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도 공자가 정부 공식사절단의 자문관으로 선발되는데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맹의자 형제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공문의 참가를 정공에게 보고하자, 임금께서 선생님의 참가를 격려하시기 위해 특별히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선생님에게 하사하기도 하였지.” 자로가 안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어린 시종이 바로 저 사람 안연일세. 하하하.” 공자는 낙양 사절단에 공문의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이때 공자를 수행한 제자로는 자로를 비롯해 염백우, 안연의 아버지 계로(안로) 등 초기 제자들이 있었고, 안연이 시종 자격으로 이 여행에 참가했다. 안연은 이때 나이가 15,16살로 곡부의 사족(士族) 사이에서는 이미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공자는 공문의 미래이자 자신이 아들처럼 사랑한 안연을 데리고 가 낙양의 높은 문물을 직접 보고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안연의 후학들이 유가의 여러 유파 중 가장 ‘철학적’인 학단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안연이 이 여행에서 노담을 만났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6. 공자, 노담을 만나다 노나라의 문례사절단이 낙양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506년 공자 46살때였다. 낙양은 이때 동왕(東王)과 서왕(西王)간의 왕위 다툼이 동왕의 승리로 일단락된 지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이 진화되고 성주성 등 왕도의 주요 시설들이 재정비되는 등 전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사절단의 선발대로 먼저 낙양의 동정을 살펴본 자로가 보고했다. “우리의 임무 상으로 볼 때 낙양에서 꼭 만나보아야 할 인물은 장홍이라는 대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사(太史)로서 천문과 귀신의 일에 능통해 3대에 걸쳐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남궁경숙이 말했다. “장홍이라면 3년 전 형님이 낙양 성주성 축성에 참가했을 때 축성 책임자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니, 그를 잘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이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장홍은 음악 분야에도 뛰어났는데, 이때 공자는 장홍에게서 주나라의 궁중음악과 주나라가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수집한 시(詩)에 대해 많은 견문을 얻을 수 있었다.   “장홍이 현직에 있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라면, 재야 인물로는 노담이란 전직 태사가 으뜸이라고 합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따로 말하였다.  “제가 낙양에 먼저 와보니 일반 사관들이 한결같이 노담을 대석학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편찬한 책들을 주왕실이 소장케 하는데는 노담의 감수가 지름길이라고들 합니다.” 공자도 낙양에 들어와 여러 경로로 노담에 대해 더 알아본 뒤  남궁경숙에게 말했다. “낙양의 재야에 노담이라는 노사(老師)가 계시다는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가 옛 일을 넓게 알고 지금 일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예악의 근원에 능통하고 도덕의 귀추에 밝다고 말합니다. 사절단이 가르침을 받을만 한 듯 하니, 노담과 따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 ‘관주’편   노담은 태사를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은 이래 자신도 그 존칭을 물려받아 ‘노담’이라 불리었다. 노담은 일찌기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와 절연한 뒤 주왕실도서관장으로서 오직 고도(古道)를 지키고 전승하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얼마전에 60여세의 나이로 은퇴했다고 한다. 훗날 자로가 회상하기를 “노담을 만나보니 석학이 따로 없었다. 선생님의 박학이야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노담의 박학 또한 대단했다. 나이많은 철인답게 사물을 초월적 경지에서 인식하는 심미적 직관도 빼어났다. 사관으로 오래 재직하면서 여러 정치적 사건을 경험한 탓인지, 치술治術)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는 듯 했다.”(김용옥, 에서 인용하여 각색)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시종인 관계로 스승과 노담과의 대화를 곁에서 들을 수 있었던 안연도 노담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제가 보기에 노사(老師)께서는 궁정생활을 경험하고 또 동시에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여 정치의 양면에 대해 깊은 철학적 통찰을 얻은 듯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분을 뵈었을 때는 이미 깊은 명상생활의 묘리를 체득한 듯 했습니다. 마치 끝모를 해저를 유영하는 바다용처럼, 구만리 장천을 나는 천룡처럼 도의 심연을 노니는 듯 했습니다.” 공자 일행은 노담과의 만남이 주선되자, 노담이 살고 있다는 낙양의 북망산 아래 초옥으로 찾아갔다. 공자와 노담은 이때 나이차가 20살 안팎⑧이었다. 이때 나눈 대화의 내용이 후세의 서책( ‘공자세가’와 ‘노자한비열전’, 외편 등)에 실려 전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가탁(假託)의 흔적이 농후해 진위 자체가 의심스럽고, 어떤 것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전후 맥락을 알기 어려워 후대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나, 이생이 가장 궁금했던 것도 바로 그 공백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주제와 내용이었다.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 받았을까? 일행의 수레가 북망산 아래 대나무숲에 이르자, 멀리서 시동이 일행을 맞이하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낙양의 아침 해가 정오를 향해 가던 어느 날이었다.                   *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 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이재호 정해,솔)와 (배병삼 주석 ,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 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공야장’편 27장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10호쯤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기가 나, 구와 같은 사람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열 가구의 작은 고을에도 나만큼 ‘자신에게 충실하고(忠)’ 또 ‘남에게 성실한(信)’ 사람이야 반드시 있을 터이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 않을게다.  L-The Master said, “In a hamlet of ten families, there may be found one honourable and sincere as I am, but not so fond of learning.”    ② ‘술이’편 21장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행동할 때면 반드시 그 가운데 나의 스승이 있는 법이니, 그 중 착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그 사람을 따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ㅅ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 그 가운데 잘난 것은 골라서 좇고, 잘못된 것은 고칠 일이다.  L-The Master said, “When I walk along with two others, they may serve me as my teachers. I will select their good qualities and follow them, their bad qualities and avoid them.”     ③ ‘위정’편 11장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듣고 배운 것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만하리라.   L-The Master said, “If a man keeps cherishing his old knowledge, so as continually to be acquiring new, he may be a teacher of others.”    ④ ‘술이’편 1장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자왈 술이부작 신이호고 절비어아노팽)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전술(傳述)하면서 창작(創作)하지 않으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믿고서 옛것을 좋아하기를 내 스스로 노팽에게 견주어 본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서술하되 짓지 않고, 옛것을 믿고 좋아함이여! 삼가 우리 노팽에게 견주련다.  L-The Master said, “A transmitter and not a maker, believing in and loving the ancients, I venture to compare myself with our old P’ang.”    ⑤ 일본의 저명한 한문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는 노팽이 고대의 유명한 무축이었다고 주장한다. 시라카와는 노팽이 ‘대황서경’에 등장하는 고대의 십무(十巫) 중 네번째 서열인 무팽일 것으로 본다. 무팽은 축도문의 낭송과 전승을 담당하는 사무(史巫)의 원조이다. 참고로 에서 십무는 열 개의 태양의 신을 뜻하는데, 무함(巫咸), 무즉(巫卽), 무분(巫분(月+分), 무팽(巫彭), 무고(巫姑), 무진(巫眞), 무례(巫禮), 무저(巫抵), 무사(巫謝), 무라(巫羅)를 말한다.     ⑥ ‘공자세가’, ‘노자·한비열전’ (김원중 옮김)     ⑦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예를 배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이때를 공자 17~30세 사이의 일로, 는 34,5세 때로, 역도원의 는 17세 때로, 사마정의 은 34세의 일로 주장한다. 허동래의 는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이때를 공자 나이 46세의 일이라고 주장한다.(김학주, ) 나는 허동래의 설을 지지한다.      ⑧ 근대 중국 철학자 호적(胡適·1891~1962)의 주장이다.     ⑨ ‘공자, 노자를 만나다’편(상·하 2편)은 등을 비롯한 전적들과 후대 학자들의 연구서를 기본 토대로 스토리를 구성하되, 이야기 전개상 필요한 부분에서는 지은이의 상상력이 가미되었다. 전거가 있는 것은 괄호 등의 방식으로 그 출처를 모두 표기하였으며, 지은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라고 여기는 부분과 지은이의 독자적인 견해(또는 추정, 해석 등)는 따로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한겨레  
195    사랑의 힘이 기적을 창조했다 댓글:  조회:7016  추천:0  2012-01-20
      2011년 1월 15일 새벽 3시경에 삼협대학 녀학생기숙사에서 갑자기 핸드폰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고요한정적을 깨뜨렸다. 핸드폰주인 륙려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남자친구 담완의 간질병이 발작했다는 소식이였다. 급해난 륙려는 허둥지둥 담완이 있는 남학생기숙사로 달려갔다. 담완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숙사바닥에서 버둥거리고있었다. 륙려와 동학들은 힘을 합쳐 담완을 의창시중심병원으로 호송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담완은 이미 혼미상태에 빠져있었고 체온도 40도나 되였다. 륙려는 담완의 부모한테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렸다. 한참후에 장양현에 살고있는 담완의 부모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검사결과 담완은 비루스성뇌막염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위독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담완의 부모들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륙려도 눈앞이 캄캄해났다.       1989년에 호북성 장양토가족자치현 자구진에서 태여난 담완은 2007년에 장양시삼협대학에 입학했고 학교에서 문예부 부장으로 활약하며 녀학생들로부터 “백마왕자”로 불리웠다. 1990년에 호북성 효감시의 한 상인가정에서 태여난 륙려는 2008년에 장양시삼협대학에 입학했고 학교학생회 문예간부로 활약했다. 륙려는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생문예간부선발회의에 참가했다가 담완을 알게 되였다. 서로에 대해 첫인상이 좋았던 둘은 후에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담완은 공부를 하는 여가에 품팔이를 했는데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여난 륙려는 그런 담완의 모습에 홀딱 반했다.       2009년 8월초에 담완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로 의창시의 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0월말에는 인터넷가수시합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륙려는 소비돈을 아껴 힘들게 일하는 담완한테 영양품을 사다주었다. 륙려의 정성에 감동된 담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로부터 둘은 달콤한 사랑에 빠졌다. 사랑의 힘을 입은 담완은 2010년에 “누가 도전하겠는가”라는 노래시합에“2010년우승자”로 뽑혔다. 그는 성도시의 한 연예인기획사와 대학을 졸업하는 즉시 가수로 발전하겠다는 계약까지 맺었다.       계약을 맺던 날에 담완은 륙려한테 “조금만 기다려주오. 난 안정된 수입만 생기면 곧 당신 부모님한테 인사드리러 가겠소”라고 약속했다. 그 순간에 륙려는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녀의 사랑이 부모의 허락을 받기전에 날벼락을 맞을줄을…       사실 담완은 병으로 쓰러지기 며칠전에 고열감기로 몹시 앓았다. 하지만 감기약만 복용하며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 륙려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담완이 2011년 1월 15일에 갑작스럽게 간질병증세를 보였던것이다.       담완이 의창시중심병원에 호송된후 그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였다. 병원측에서는 환자의 고열증상지속과 페부분손상을 막기 위해 두가지 수술을 했다. 장기간의 피로와 허약한 체질때문에 담완은 수술후에도 여전히 혼수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아무런 감각도 없는 “식물인”이나 다름없었다.       수술결과에 실망한 담완의 부모와 륙려는 동시에 기절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륙려가 말했다.       “아지미, 제가 꼭 담완을 살려낼거예요.”       “너희들은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없다. 넌 그만 돌아가거라.”       륙려는 울면서 말했다.       “그럴수 없어요. 전 끝까지 담완의 곁을 지킬거예요. 절 믿어주세요.”       어느새 담완의 어머니의 눈가에는 맑은 이슬이 맺혔다.       그날 저녁에 륙려는 남자친구의 치료비를 이어댈 방법을 생각하느라 온 저녁을 뒤치락거렸다. 이튿날에 륙려는 인터넷에 “사랑의 마음으로 인터넷가수를 구해주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담완의 사연을 올리고 담완이 출근하던 술집에 찾아가 불행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학교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그녀가 애쓴 덕분에 며칠사이에 몇만원의 의연금이 모아졌다. 3일후에 륙려는 의창시의 보도매체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며칠후에 수많은 시민들이 사랑의 의연금을 보내왔다. 한편, 륙려는 오후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중환자병실로 찾아가 남자친구한테 《신화》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남자친구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깨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2011년 1월 25일부터 륙려는 치료비를 이어대기 위해 저녁마다 병원부근의 한 술집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밤낮으로 팽이처럼 돌아치면서 남자친구가 깨여날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남자친구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륙려의 소행에 감동을 받은 단골손님들은 직접 의연금을 건네주었다.       이런 정성때문일가? 1월 31일에 담완의 고열, 페염증세는 완전히 통제되였다. 하지만 담완은 여전히 깨여나지 못했다.       2011년 2월 5일은 음력설휴가 세번째 날이였다. 륙려는 아침 일찍 남자친구의 병실로 찾아갔다. 그날 저녁에 륙려는 남자친구가 평소에 즐겨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바싹 여윈 담완의 모습을 보노라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륙려의 뜨거운 눈물이 담완의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에 담완의 오른쪽 눈까풀이 움직였다. 오른쪽 눈을 반쯤 떴다 감은 담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깜작 놀란 륙려는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순간적인 의식회복이라면서 륙려의 노래를 듣고 의식을 찾은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는 “만약 환자가 국가1급병원에서 전면적인 치료를 받는다면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을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희망이 보이는것같아 륙려와 담완의 부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또다시 거액의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는 압력에 눌리우게되였다. 륙려는 희망을 포기할수 없었다. 2월 12일에 륙려는 동학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가 도움을 청했다. 시민들은 나어린 륙려의 정성에 깊은 감동을 받고 호주머니를 털었다. 덕분에 약간의 치료비를 마련할수 있었다.       3월 22일 오후에 담완은 부모와 륙려의 호송하에 북경시인민병원 신경내과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튿날에 륙려는 다시 의창시로 돌아와 의연금활동을 이어갔다. 눈코뜰새없이 바쁜 륙려였지만 날마다 오후 4시가 되면 핸드폰으로 담완한테 노래를 불러주군 했다.       3월 24일에 뇌막염증상이 기본상 통제된 담완은 다시 무한시로 돌아와 치료를 받게 되였다. 하지만 여전히 혼미상태에 빠져있었다. 의사는 “빨리 깨여날 가능성도 있지만 영원히 깨여나지 못할수도 있다”는 애매한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륙려와 담완의 부모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4월 30일에 륙려는 그동안 모아온 의연금을 지니고 무한시로 향했다. 이때 담완은 이미 40여만원의 치료비를 썼다. 대부분은 륙려와 동학들이 사회, 학교의 도움으로 마련한것이였다.       한참후에 륙려는 남자친구가 입원해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담완은 혼수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이때 꼬부랑할머니 한분이 병실로 찾아와 “치자꽃을 사시우”라고 말했다. 륙려는 할머니가 가여워 치자꽃을 몽땅 샀다. 륙려는 꽃다발을 만들어 담완의 침대머리에 놓고  《치자나무 열매맺었네》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중간쯤 불렀을 때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눈까풀을 쉴새없이 움직이던 담완이 두눈을 번쩍 떴던것이다. 눈을 뜬 그의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담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륙려…”라고 불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마침내 륙려의 정성이 빛을 발산하게 되였다. 병실의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내왔다.       5월 13일에 병세가 안정되자 담완은 호북성 장양현인민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 담완은 언어장애가 생겨 정상적으로말을 번지기 힘들어했다. 그바람에 담완의 정서는 몹시 우울했다. 이를 눈치챈 륙려는 틈만 나면 남자친구를 고무격려해주었다.       한달후 담완의 병세는 일정한 호전을 가져왔다. 타인의 부추김없이 자립할수 있게 되였고 간단한 대화를 나눌수 있게 되였다. 의사는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는다면 1년뒤에는 건강을 회복할수 있을것이라고 장담했다.       오늘도 담완은 녀자친구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열창할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며 재활치료에 땀을 쏟고있다.       사랑의 힘으로 사선에서 헤매고있던 남자친구를 구원해낸 한 처녀의 용기는 (1990년대 출생자) 젊은이들의 본보기로 떠오르고있다. 《지음》
194    남자친구의 과거까지 사랑한 처녀 댓글:  조회:5951  추천:0  2012-01-20
2009년 11월, 하남성배원직업학교 의 학생 림혜방은 자신이 짝사랑해온 류준봉이 딱친구 리효리와 사랑에 빠졌다는것을 알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혜방과 효리는 고중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둘도 없는 딱친구였다. 내성적인 혜방은 준봉에 대한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다. 친구의 마음을 알턱이 없는 효리는 주동적으로 애정공세를 들이대 준봉의 사랑을 얻었던것이다.       혜방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효리와 준봉의 행복을 빌었다. 2010년에 졸업을 앞둔 효리와 준봉은 학교부근에 세집을 맡고 동거를 시작했다. 얼마후에 효리와 준봉은 장사시로 떠났고 혜방은 광주시로 향했다. 그후 세사람은 련락을 자주 주고받지 않았다.       장사시에 발을 붙인 준봉은 2010년 4월에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를 받아보았지만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다. 준봉은 림시구급으로 남성호르몬분비촉진약물을 복용했다. 통증은 어느 정도 완화되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가슴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커져갔다. 효리는 처음에는 남자친구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처로 돈을 꾸러 다녔지만 “온실화초”처럼 자란 그녀는 얼마를 못버티고 백기를 내들었다. 결국 효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수 없으니 헤여지자”고 말하고는 며칠뒤에 광주시로 훌쩍 떠나버렸다.       녀자친구가 떠나간후 준봉은 고통속에서 몸부림쳤다. 실련의 아픔과 망측할 정도로 커져가는 가슴때문에 준봉은 외출을 꺼려했다. 그바람에 우울한 정서는 지속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10년 7월 19일 저녁에 준봉은 집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내쫓겼다. 달랑 30원을 몸에 지닌 준봉은 차거운 거리를 헤매다가 강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에 뛰여들어 자살할 생각이였다. 그가 몸을 날리려할 때 마침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흠칫 놀란 준봉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혜방이 걸어온것이였다. 전화에서 혜방은 관심조로 준봉의 안부를 물었다. 준봉은 북받치는 설음을 겨우 참으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준봉의 말을 듣자마자 혜방은 “좀만 기다려줘, 곧 너한테 달려갈게…”라고 말했다. 그날 밤에 혜방은 준봉한테 “삶의 용기를 잃지 말라”는 메시지(短信)를 쉴새없이 보냈다. 끊임없이 보내오는 그녀의 메시지에 용기를 얻은 준봉은 결국 자살을 포기했다.       이튿날에 혜방은 회사에 사직서를 낸후 장사시로 달려갔다. 바싹 야윈 준봉과 마주한 혜방은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저녁에 혜방은 돈을 내여 객실 하나에 방 2개 달린 세집을 맡은후 준봉을 데려왔다. 혜방은 날이 밝을 때까지 “치료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며 준봉을 설득했다. 그날 저녁에 혜방은 준봉곁을 영원히 지켜주리라 속다짐했다.       며칠후에 혜방은 백화상점의 판매원으로 취직했다. 팽이처럼 바삐 돌아쳤지만 날마다 준봉한테 “삶의 용기를 잃지 말라”며 고무격려를 해주었다. 그녀의 관심하에 준봉의 정신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병세는 아무런 호전도 가져오지 못했다. 2011년 음력설에도 혜방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준봉의 곁을 지켜주었다.       2011년 2월말에 한가닥 희망이라도 놓치고싶지 않았던 그들은 지인의 소개로 유명한 성형외과병원으로 찾아갔다. 뜻밖에도 성형미용과 범붕흥박사는 준봉이 남성유방비대증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렸다. 의사는 “내분비치료가 효험을 보지 못하였으니 수술을 받으면 건강을 회복할수 있다”고 말했다. 혜방은 기뻐서 준봉을 부둥켜안고 “드디여 치료방법을 찾아냈어. 이젠 희망이 생겼어!”라고 소리쳤다.       그때까지 달마다 4000여원되는 로임에서 생활비와 치료비를 떼내고나면 혜방의 수중에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이튿날부터 혜방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처로 뛰여다녔다. 친척, 친구들은 다 찾아다녔고 직장상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딱한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친척과 친구들은 1만여원의 돈을 꾸어주었고 직장에서도 먼저 1만여원의 로임을 지불해주었다.       3월초에 치료비가 마련되자 준봉은 유방지방흡입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준봉의 유방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지방 및 붓기혼압액을 빼내는 수술을 해주었다. 2시간을 거친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였다.       2011년 3월중순에 일주일동안의 치료를 받은 준봉은 퇴원할수 있게 되였다. 집에 돌아온 준봉은 거울앞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며 “래일부터 더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는구나. 정말 꿈만 같다. 모든게 네 덕분이야”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혜방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혜방아, 정말 고맙다. 내 목숨은 네가 구해준거야. 나한테 이 은혜를 갚을수 있는 기회를 달라. 널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할게.”       혜방은 짝사랑하던 준봉의 사랑고백에 눈물범벅이 되였다. 그 순간에 그녀는 온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에 빠졌다. 그때로부터 그들은 서로를 격려해주면서 달콤한 사랑에 빠졌다. 혜방의 따뜻한 관심속에서 준봉의 마음속 상처도 점점 아물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5월 23일 저녁에 준봉은 갑자기 걸려온 리효리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서 효리는 울먹이면서 “중요한 일이 있으니 꼭 한번 만나보자”고 사정했다.       이튿날에 준봉은 이 일을 혜방한테 알린후 효리와 한 차집에서 만났다. 효리를 마주한 준봉은 확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효리는 초췌한 모습에 남자아기를 안고있었다. 준봉을 보자 효리는 울면서 1년동안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1년전에 효리는 준봉과 헤여진후 광주시의 한 회사 판매원으로 취직했다. 2010년 7월 28일 저녁에 효리는 영업부 경리 효만홍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 저녁 10시경에 만취한 효만홍은 인사불성이 된 효리를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갔다. 결국 둘은 관계를 발생했다.       이튿날에 술이 깨자 효만홍은 무릎꿇고 효리한테 용서를 구했다. 효리는 행동을 자제하지 못한 자신의 탓도 있는지라 침묵을 지켰다. 뜻밖에도 두달후에 효리는 임신된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만홍의 아기라고 추측했다. 혹시 준봉의 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효리는 아기가 만홍의 피줄일것이라고 믿고싶었다.       임신했다는 효리의 말에 만홍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혼 4년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아 전처와 리혼한 만홍이였으니말이다.       2010년 10월에 효리와 만홍은 결혼수속을 밟았고 아기가 첫돌을 쇤후 결혼식을 올리자고 약속했다. 2011년 4월 20일에 효리는 건강한 남자아기를 낳았다. 일주일후에 아기는 대량의 피를 수혈받아야 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였다. 효리와 만홍은 혈액검사를 받았고 모두 B형이였다. 그런데 아기는 A형이였다. 그제야 아기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된 만홍은 다짜고짜 효리의 멱살을 잡고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말해봐. 이 뻔뻔한년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효리는 고개를 수그린채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그제야 효리는 아기가 준봉의 피줄이라는것을 알았다. 효리는 아기 첫돌생일을 쇠준후 만홍과 리혼수속을 밟았다. 그리고 준봉을 찾아온것이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준봉은 그만 할말을 잃었다. 효리가 자신의 피줄을 낳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것이다. 그가 멍해있을 때 혜방이 나타났다. 효리는 혜방이 준봉곁에 딱 붙어앉는것을 보고서야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다. 그순간에 효리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울었다. 혜방은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물었다. 준봉은 침묵을 지키다가 “효리, 정말 이 애가 내 피줄이란 말이요?”라고 물었다. 뒤늦게야 사실을 알게 된 혜방은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준봉이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그날 저녁에 준봉은 효리 모자를 부근의 한 려관으로 데려간후 혜방을 찾아갔다. 준봉은 무릎꿇고 “혜방, 내가 널 볼 면목이 없구나.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혜방은 흐느껴울기만 했다. 두 사람은 온 저녁을 뒤치락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혜방은 두눈이 충혈된 준봉을 보자 가슴이 쓰려났다. 그녀는 책임성이 강한 준봉이 피줄을 버리지 못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혜방은 세 사람이 만나 결단을 내릴것을 요구했다. 그날 오후에 세 사람은 아기를 안고 DNA친자감정을 해보았다. 아기는 틀림없는 준봉의 피줄이였다.       혜방은 준봉과 효리를 앉혀놓고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사실 난 학교때부터 준봉을 짝사랑했댔어. 하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했어. 그사이 너희들은 사랑에 빠졌어. 난 가슴이 아팠지만 너희들의 행복을 빌었어. 내가 다시 준봉을 만났을 때 난 영원히 함께 할것을 다짐했어.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아이한테 무슨 죄가 있겠니? 내가 물러설게. 부디 너희 세식구의 행복을 빌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준봉이 혜방을 와락 끌어안았다.       “혜방아, 정말 미안하다. 못난 나때문에 네가 상처를 받게 되였구나… 리기적인 내 생각이지만 난 정말 사랑하는 너와 아빠책임을 포기할수 없구나. 난 오늘에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너라는것을 알게 되였어. 효리는 그저 가슴아팠던 내 과거였어. 혜방아, 너만 원한다면 난 너와 함께 살면서 아기한테 아빠책임을 다하고싶구나.”       어느새 혜방의 눈가에는 맑은 이슬이 맺혀져있었다. 그 순간에 혜방은 사랑하는 준봉의 과거까지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음》
193    있지도 않은 “련인”에게 30만원 협잡당한 녀인 댓글:  조회:5392  추천:0  2012-01-16
      범죄혐의자 손리는 4년동안이나 허구해낸 영급간부라는 신분의 남자와 자기의 련적 왕설을 “련애”시키면서 왕설한테서 선후로 182차에 거쳐 30여만원을 협잡했다. 그녀는 자신이 엄마가 되여서야 내심의 가책을 느끼고 왕설을 찾아가 사실의 진상을 털어놓았다.       2011년 4월 13일에 기자는 검찰기관으로부터 사기혐의자 손리가 이미 검찰기관에 의해 기소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왕설의 친구들은 일자리가 든든하고 생활이 편안한 왕설을 모두 부러워했다. 옥에 티라면 언니가 시집가고 동생도 장가를 들었지만 그녀만이 의연히 로처녀로 남아있는것이였다.       2005년 9월에 부모의 독촉에 못이겨 30살인 왕설은 리룡이란 남자를 만났다. 첫대면에 왕설은 리룡한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그녀는 리룡과 결혼하려는 마음을 먹고 련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리룡은 그녀를 덥지도 않고 차겁지도 않게 대했다. 두달후 한 낯선 처녀의 전화를 받고서야 그녀는 꿈에서 깨여났다.       상대방은 손리라고 자칭하면서 자신은 리룡과 련애한지 4년이나 된다고 했다.       “난 리룡과 다투고나서 헤여지자고 말한후 외지에 나가 일했어요. 그러다가 임신한것을 발견했어요. 아이의 아빠는 리룡이예요.”       전화에서 손리는 자신과 리룡의 련애생활에 대해 조금도 숨기지 않으면서 주동적으로 왕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왕설은 공원에서 손리를 만났다. 손리는 왕설이 입을 열기전에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나와 리룡은 진짜로 헤여진것이 아니예요. 게다가 난 그의 아이까지 임신했으니 우리는 결혼하게 될것은 뻔한 일이예요. 그러니 당신이 물러나세요.”       첫대면에 왕설도 만만하게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두 녀인은 쟁론하다가 결국 리룡더러 누구를 선택하는가를 결정짓게 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두 녀인은 곧 전화로 리룡을 불렀다. 얼마후 리룡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공원으로 달려왔다. 그는 주저없이 4년이나 련애를 한 손리를 선택했다.       그후 왕설의 눈앞에는 자꾸만 리룡과 손리가 손을 잡고 떠나던 정경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결혼할 남자를 다른 녀자가 순식간에 빼앗아간 사실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녀는 리룡을 다시 빼앗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왕설은 손리에게 전화를 걸어 리룡과 절대 헤여질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헤여질수 없다니? 왜? 아직도 미련이 남았어요?”       손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왕설은 마디마디에 힘을 주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기때문이예요!”       이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예상밖의 말에 손리는 말소리를 낮추어 “나와 리룡은 꼭 결혼하게 될지 확실하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도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살자요”라고 요청했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왕설의 진심을 은밀하게 알아보려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다른 마음을 가진 세 사람은 한집에서 살게 되였다. 심지어 그들은 한침대에서 잤다. 그러나 며칠도 안되여 왕설이 임신했다는 거짓말이 드러났다. 왕설을 하루빨리 쫓아내기 위해 손리는 당장에서 련애를 못해본 로처녀에게 남자를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싸움끝에 정이 든다는 말처럼 왕설은 처음에는 련적인 손리한테 적의를 느꼈지만 다투면서 정이 들기도 했다. 원래 친구가 없어 고독했던 왕설은 점차 손리를 속마음까지 털어놓을수 있는 친구로 여기게 되였다. 손리는 왕설과 리룡이 다시 련애관계를 회복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왕설의 련애고문으로 되였다.       2006년초에 손리는 몸이 좋지 않아서 북경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6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해결할수 없었다. 그녀는 친척,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돈을 꾸지 못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왕설에게 기탁했다. 생각밖에도 왕설은 그녀의 전화를 받자마자 통쾌하게 돈을 꿔주겠다고 대답했다. 나이는 먹었지만 세상물정을 모르는 왕설은 손리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의 연분을 맺어주는 중매군으로 생각하면서 이런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 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왕설은 손리의 치료가 지체될가봐 한달음에 달려가 6만원을 손리의 은행카드에 넣어주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병치료를 잘하라고 위안해주었다.       그러나 왕설의 이런 도움은 손리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 손리는 리룡과 자신의 감정생활에 뛰여든 왕설을 줄곧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그녀는 기회를 보아 왕설에게 보복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린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병들었다고 하니 조급해하는 왕설을 보면서 돈을 벌 구멍수를 생각해냈다. 그녀는 있지도 않은 군관남자를 허구해내여 왕설한테 소개해주었다.       2006년 6월에 손리는 왕설을 보고 말했다.       “언니가 나한테 잘해주니 나도 언니한테 보답해야죠. 나한테 외사촌오빠가 있는데 언니한테 소개해주려고 해요. 오빠의 이름은 백위국인데 부대에서 비밀사업을 하고있어요. 영급간부인데 잘 생기고 기질도 좋아요.”       어릴 때부터 군인을 흠모해오던 왕설은 그 말을 듣고 단번에 귀가 번쩍 뜨였다. 왕설은 손리를 붙잡고 빨리 백위국을 만나게 해달라고 재촉했다. 손리가 단시일내에 백위국을 만날수 없다고 하자 그녀는 상대방의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손리는 자신도 아직 외사촌오빠의 전화번호를 모르기때문에 이모한테 물어보겠다고 대답했다.       며칠후에 손리는 왕설에게 “외사촌오빠 백위국”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왕설은 너무도 기뻐서 그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가 끊기면서 “난 지금 회의중인데 일이 있으면 메시지(短信)로 련계하시오”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후의 4년동안 정에 미친 왕설은 백위국의 목소리를 전화에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핸드폰메시지로만 련애했다. 점차 왕설은 백위국이 보내온 메시지에서 돈을 구해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인것을 발견했다. 사건이 드러날 때까지 그녀의 핸드폰에는 백위국이 보내온 메시지가 저장되여있었다.       “날 도와 다시 2000원을 보내주오…”       “귀염둥이, 우리 정위의 돈은 쓸수 없게 되였소. 당신이 또 2000원을 부쳐줘야 하겠소. 난 지금 급해서 죽을 지경이요. 여기서는 12시전에 반드시 돈을 바치라고 하오.”       “5000원, 나에게 5000원이 모자라오. 난 급해 죽겠소. 그 정위는 나의 편이기에 일을 덮어놔야 하오. 난 속이 타오. 난 당신도 어렵다는걸 알고있소.”       “골치아픈 일이 생겼는데 한마디로 똑똑히 설명할 일이 아니요. 2000원이 수요되오.”       “사랑하는이, 나에게 2000원을 보내줄수 없겠소? 지금 당장 수요되오.”       “우리 아버지가 일부분 자금을 해결해주었고 나도 8000원을 모았소. 그한테 줄 돈이 모두 2만원인데 난 당신에게 페를 끼치고싶지 않소. 그러니 1만원만 부쳐주오.”       2006년 6월부터 2010년 6월까지 4년동안 “련애”하면서 왕설은 백위국에게 모두 182번이나 돈을 부쳐주었다. 2008년 3월에는 왕설이 선후로 백위국한데 17번에 거쳐 4만 5900원을 부쳐주었다. 하루에 두번씩 부쳐줄 때도 있었다. 이렇게 그녀는 4년동안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하고 목소리 한번 들어보지도 못한 “남자친구”한테 모두 30만원이나 부쳐주었다. 백위국이 메시지에서 “난 군인이기에 개인명의로 은행카드를 내기 불편하오”라고 알려주었기에 이 돈은 고스란히 “외사촌녀동생”인 손리의 은행구좌에 들어갔다. 손리는 이 돈으로 친구들을 청해 먹고 마시기도 했고 고급옷을 사입기도 했다.       돈이 그치지 않고 계속 입금될 때마다 손리는 가끔씩 마음속에 량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왕설이 백위국때문에 부모와 싸우면서 초췌해지는 모습을 볼 때면 그녀는 이제 더는 백위국의 명의로 왕설한테서 돈을 사기치지 말자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심지어 직접 전화를 걸어 “우리 오빠가 다시 돈을 요구하면 절대 그한테 빌려주지 말어”라고 말하고싶었다.       4년동안에 왕설은 여러번이나 백위국과 만나겠다고 요구했지만 번마다 상대방이 피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왕설의 가족들이 만나게 하지 않으면 결판을 내겠다고 최후통첩을 내서야 방법이 없게 된 손리는 2009년 4월에 림시로 사람을 찾아서 백위국으로 위장하여 왕설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사실 4년동안 “련애”하는 과정에 왕설도 백위국과의 감정에 동요한적이 있었다. 부모가 반대하고 번마다 만나는것을 거절당한데다가 영급간부가 날마다 돈을 꿔달라고 하지…그러나 이 모든것은 “백위국”의 달콤한 말에 무색해지고말았다.       손리는 사기친 돈이 많아질수록 마음속의 죄의식도 그만큼 쌓여갔다. 특히 년로한 부모와 부지런히 일하는 남편 그리고 “엄마”라고 부르며 안겨드는 딸애를 볼 때마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서 손에 쇠고랑을 채울가봐 겁났다. 죄의식에 시달리던 그녀는 마침내 2010년 7월 11일에 왕설이네 집에 찾아가서 왕설과 왕설의 부모앞에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2011년 4월 13일에 기자는 검찰기관으로부터 사기혐의자 손리가 이미 검찰기관에 의해 기소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하보》
192    대리남자친구로 나섰다가 당한 봉변 댓글:  조회:5827  추천:0  2012-01-16
      1989년 1월 1일에 청해성 서녕시에서 출생한 왕소동은 2008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서안의 한 중점대학에 입학했다.       2010년 2월말에 그녀가 연구생시험준비를 하고있을 때 갑자기 인터넷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습니다”란 게시글이 올라서 그녀의 인생을 뒤집어놓았다.       내가 사랑하는 처녀의 이름은 왕소동입니다. 나는 천진에 있고 그녀는 서안에 있는데 우리는 련계를 잃었습니다. 그녀의 행방을 알고있는분들이 나한테 그녀의 주소거나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100개의 QQ화페를 주는것으로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이 인터넷게시글이 학교에 파다하게 퍼져 왕소동은 “인기인물”로 되였다. 화가 난 왕소동은 이틀동안이나 기숙사에 박혀있으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게시글을 올린 사람이 자신이 QQ의 검은 명단에 넣었던 고중시절 동창생 위연림이란것을 알았다.       위연림은 천진공업대학 학생인데 고중시절에 왕소동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한테 련애편지를 쓴적이 있었다. 왕소동은 단마디로 거절할수 없어서 “지금 우리는 학생이니 공부가 제일 중요해요. 련애는 대학에 붙은후 해도 늦지 않아요”라고 회답했다. 그후부터 위연림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1년후 왕소동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위연림은 락방되고말았다. 위연림은 다음해에 다시 대학시험을 쳐서야 천진공업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간후 위연림은 QQ로 날마다 왕소동에게 사랑의 편지를 날려보냈다. 왕소동은 그의 미친듯한 사랑을 단마디로 거절할수 없었다. 그러다가 방학에 동창생모임을 가지면서 그들은 여러번이나 만났다. 왕소동은 그때에야 위연림이 말수가 적고 성격이 괴벽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녀가 찾는 리상적인 남자는 그런 남자가 아니였다. 그후 그녀는 위연림에게 우리는 보통동창생사이에 불과하기에 다시는 련애편지를 보내지 말하고 했다. 위연림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수 없다면서 날마다 그녀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 “나의 어느 면이 마음에 들지 않니? 내가 고칠게”라고 애걸했다. 왕소동은 귀찮아서 핸드폰에 위연림의 핸드폰번호를 검은 명단에 넣었고 QQ에도 위연림의 이름을 검은 명단에 넣었다. 그렇게 되자 위연림은 인터넷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게시글을 올렸던것이다.       인터넷게시글을 통해 왕소동의 전화번호를 알게 된 위연림은 매일 저녁마다 왕소동한테 전화를 걸어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기숙사의 녀학생들은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었다. 기숙사의 녀학생들은 왕소동을 보고 “네가 가짜로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그가 저절로 물러날거야”라고 알려주었다. 다음에 위연림의 전화가 왔을 때 마침 남학생 셋이 왕소동의 기숙사에 놀러 왔었다. 왕소동은 “연림아,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으니 다시는 전화를 걸지 말아”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연림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왕소동은 남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믿을수 없다구? 나의 남자친구는 바로 우리 학교의 동창생이야. 그는 지금 바로 우리 기숙사에 놀러 왔어.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나의 남자친구를 바꿔줄가?”라고 말했다. 세 남학생은 서로 누가 전화를 받겠는가고 상의하다가 남자대장부답게 생긴 종성이란 남학생이 나서서 전화를 받았다.       청해성에서 출생한 종성은 키가 크고 잘생겼을뿐만아니라 학교롱구팀의 주력선수이고 학습성적도 우수했다. 왕소동한테서 전화를 넘겨받은 종성은 호기있는 목소리로 “난 소동의 남자친구요. 당신이 이전에는 어떻게 소동이를 추구했건 난 상관하지 않겠소. 하지만 오늘부터 다시는 소동이한테 전화를 하지 마오. 이후 다시 소동이를 시끄럽게 굴면 내가 가만놔두지 않겠소”라고 경고했다. 그 말을 들은 위연림이 인차 전화를 끄는것을 본 남학생들은 종성을 보고 “이후부터 네가 위연림의 앞에서 계속 소동의 남자친구인척해라. 좋은 일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 하지 않겠니? 그 녀석이 낌새를 차리지 못하게 연극을 잘 놀아야 한다”고 말했다. 종성은 “그럼 내가 끝까지 소동의 가짜남자친구역을 담당할게”라고 말했다.       왕소동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에 위연림은 미칠것만 같았다. 그는 여러번이나 천진에서 서안까지 찾아와서 왕소동을 보고 “난 널 사랑해. 제발 마음을 돌려줘”라고 애걸했다. 위연림은 2010년 3월에 또 서안으로 찾아와서 왕소동의 기숙사앞에서 “난 왕소동을 사랑해”라고 쓴 패쪽을 높이 쳐들었다. 이때문에 왕소동은 그에게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였다. 마침 종성이 와서야 위연림은 물러갔다. 그러나 그후에도 그는 달마다 한번씩 찾아왔다. 그때마다 종성이 나서서 그를 돌려보냈다.       2010년 6월 14일에 위연림은 또 왕소동을 찾아왔다. 왕소동이 피해가자 그는 저녁 9시까지 기숙사앞에서 기다렸다. 그는 저녁 9시에 왕소동이 나타나자 달려가서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왕소동이 쏜살같이 달려가고 남학생들이 마주오는 바람에 위연림은 또 그녀를 놓치고말았다. 위연림은 기숙사앞의 돌의자에서 하루밤을 지새우고 오전 10시까지 그곳에서 왕소동을 기다렸다. 왕소동은 하는수없이 종성을 데리고와서 위연림을 돌려보냈다.       위연림은 시장에 가서 칼을 사다가 려행가방에 숨긴후 신성호텔에 들었다. 2010년 6월 16일 오전 9시에 그는 수업을 받고있는 종성한테 전화를 걸었다.       “난 왕소동한테 더 매달리지 않고 오늘 밤차로 서안을 떠나려고 하오. 벌써 기차표까지 다 끊었소. 난 떠나기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왕소동을 만나 하고싶던 말을 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소동이를 데리고와주기를 바라오!”       종성은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여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후 그는 왕소동을 만나서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왕소동은 “위연림이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 기숙사의 정진정한테 전화를 걸어 이후 다시 날 찾아오지 않겠으니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자고 하더래요. 하지만 난 혼자서 가기 무서워요”라고 말했다. 종성은 “소동이가 가려고 한다면 내가 함께 가겠소”라고 말했다.       2010년 6월 16일 오후 2시에 왕소동과 종성은 위연림이 기다리고있는 신성호텔에 들어섰다. 그들은 진짜련인처럼 나란히 앉았다. 위연림은 종성을 보고 말했다.       “내가 소동이와 단둘이 얘기할게 있으니깐 당신은 좀 나가있소. 10분동안만.” 종성은 방안이 문만 닫으면 달아날데가 없는것을 보고 즉시 “당신이 소동이와 10분동안 말하는건 되지만 집안에서는 안되오. 밖에 나가서 말하고 내가 먼곳에서 지켜봐야 하겠소”라고 말했다. 위연림은 “내가 소동이와 10분동안만 말하겠다는데 당신에게 무슨 말릴 자격이 있소”라고 말했다. 종성은 “난 소동의 남자친구이니깐 얼마든지 자격이 있소”라고 힘있게 대답했다. 위연림은 밖이 덥다는 리유로 집안에서 소동과 담화하겠다고 했다. 왕소동과 종성은 안된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자 위연림은 왕소동앞에 무릎을 꿇고 “종성이를 먼저 나가있게 해줘. 5분동안만. 난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제발 빈다”라고 애걸했다. 왕소동과 종성은 “남자라는게 이게 뭐야? 혼자서 정서를 좀 눅잦혀”라고 말하면서 나가려고 했다.       “잠간만!”       위연림은 급히 일어나며 종성을 불렀다.       “담배 한대 피우고 가라!”       위연림은 려행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종성은 그가 담배를 꺼내는줄 알고 “난 담배를 피우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위연림은 어느새 칼을 꺼내 손에 들고있었다. 종성이 피할새 없이 칼은 그의 복부에 와서 꽂혔다. 위연림은 “네가 감히 나의 소동을 빼앗아?”라고 하면서 련속 종성의 복부를 5~6번 들이찔렀다. 종성의 복부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나오는것을 본 왕소동은 너무 놀라서 문을 열고 “사람 살려요”라고 고함치는 한편 “종성은 나의 남자친구가 아니야. 그를 해치지 말아”라고 소리쳤다. 왕소동이 종성의 편을 드는것을 본 위연림은 화가 나서 왕소동을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왕소동이 피하는 바람에 칼은 그녀의 어깨와 팔을 찔렀다. 종성은 피가 솟아나오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연림을 꽉 붙잡고 “소동아, 날 관계하지 말고 빨리 도망쳐라”하고 소리쳤다. 왕소동은 그제야 문을 열고 정신없이 아래층으로 달려내려갔다. 호텔사장이 왕소동한테서 소식을 듣고 위연림이 든 호텔방으로 달려갔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연림한테서 칼을 빼앗았다…       얼마후 종성과 왕소동은 병원에 호송되였다. 왕소동은 요해처를 찔리지 않았기에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종성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때문에 구급효과를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2011년 2월 10일에 서안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1심에서 피고인 위연림을 고의살인죄로 무기도형에 처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고 판결했다.     
191    귀족학교 가난뱅이교원의 일그러진 부자꿈 댓글:  조회:5283  추천:0  2012-01-12
        2011년 2월 24일 밤, 절강성금화시의 한 중학교에 의문의 학생실종사건이 발생했고 실종자는 뒤늦게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그리고 하루만에 덜미를 잡힌 랍치 및 인질살해범은 놀랍게도…       1975년에 절강성 란계시에서 태여난 호보평은 농사군이였던 량부모밑에서 항상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 했다. 2002년에 대학을 졸업한 호보평은 란계시실험중학교의 어문교원으로 취직했지만 결혼과 함께 딸애가 태여나자 고작 2000원의 월급으로 세 식구가 생활하려니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릴수밖에 없었다. 2007년 6월, 금화시의 한 귀족중학교에서 교원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은 호보평은 주저없이 초빙시험에 응시했다.  귀족학교란 이름에 걸맞게 교원대우가 우월할뿐더러 월급만해도 1만원이 훌쩍 넘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던것이다. 그번 교원응시에서 호보평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등의 성적으로 순조롭게 1학년어문교원으로 채용되였다. 호보평은 학교주변에 작은 세집을 얻고 기러기아빠생활을 시작했다. 귀족학교는 역시 달라도 많이 달랐다. 출근한 며칠후 한 학부모가 벤츠표승용차를 몰고 호보평을 찾아왔다. 뜨르르한 귀족차림의 학부모가 면전에서 90도경례를 굽석이며 연신 부탁의 말을 늘여놓는가 하면 호보평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뢰물꾸러미를 안겨주고는 힝하니 자리를 떴다. 선물꾸레미속에는 비싼 중화표담배와 값비싼 특산물이 들어있었는데 얼핏 따져봐도 어마어마한 값어치였다. 한학기가 끝날무렵에는 거의 모든 학부모들에게서 정도부동하게 뢰물을 받을 지경으로 호보평은 뢰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2008년에 호보평은 금화시에 120평방메터되는 집을 저당대출로 구매했다. 선불금은 대부분 학부모들로부터 받은 현금과 뢰물을 판 돈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안해와 딸을 금화시에 데려다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고 학교부근에 십여평방메터의 상가를 세맡아 학습용품상점을 꾸리고 안해가 직접 경영하게 했다. 2008년 년말의 어느날, 한 학부모가 급한 일이 생겨 애를 데리러 오지 못하는 바람에 호보평이 그 학생을 집에까지 데려다주게 되였다. 그 학생의 집은 금화시의 교외에 자리잡고있었는데 1500평방메터나 되는 호화로운 별장이였다. 넋을 잃은채 별장을 바라보는 호보평의 가슴속에는 이름모를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호보평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자신을 찾아 뢰물을 건네주던 부자학부모들의 모습과 1500평방메터의 호화별장이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교수외에는 내세울만한 능력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호보평의 생활에는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벼락부자를 꿈꾸며 그가 시작한 일이 바로 인터넷도박과 주식판매였다. 1년남짓한 기간에 호보평은 주식판매와 인터넷도박을 통해 선후로 수만원의 빚을 지고말았다.        2010년 9월, 새로운 한학기가 시작되였다. 호보평이 맡은 1학년에는 오예(가명)라고 부르는 한 남학생이 있었다. 깔끔하고 도시적인 외모를 가진 오예가 그의 관심을 잡아끈것은 단순 외모뿐이 아니였다. 오예의 아버지 오국주가 부동산개발유한회사의 회장이라는 사실과 재산이 당지 부자들가운데서도 열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것이였다. 그후부터 호보평은 의식적으로 오예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아부었다. 9월의 어느날, 오국주는 벤츠하이야를 몰고 학교로 찾아와 호보평에게 함께 식사할것을 권했다. 그번 식사자리를 계기로 두 사람은 교원과 학부모사이를 넘어 친구처럼 무랍없는 사이로 되였다.       “호선생님, 얼마 안되는 교원로임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담하려면 많이 힘들겁니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오국주부부는 빈번하게 호보평을 찾아와 식사를 대접하고 례물을 안겨주었으며 외국려행을 다녀올 때마다 값진 선물을 사다주는것을 잊지 않았다. 호보평이 학부모들로부터 받은 뢰물과 대우는 점점 걷잡을수 없이 치달아오르는 그의 욕망을 채워주기에는 력부족이였다. 벼락부자의 꿈에 젖은 호보평은 도박밑천을 구하기 위해 학부모들을 찾아다니며 이런저런 구실로 1만원, 3만원, 5만원씩 꾸기 시작했고 한번 또 한번 도박에 밀어넣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빚은 눈덩이굴리듯 커져만 갔다. 12월중순의 어느날, 교수를 마치고 교무실에 돌아간 호보평은 뒤늦게야 만년필을 교실에 두고왔음을 알고 다급히 교실로 향했다. 하지만 호보평의 발길은 교실문앞에 못박힌듯 굳어지고말았다. 교실안에서 몇몇 학생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던것이다.       “저녁에 신나게 전자유희를 놀고싶은데 어문숙제가 너무 많아서 짜증나.”       “호선생님이 너네 아버지한테서 큰돈을 꿨다며? 그러면 숙제를 안해도 선생님이 감히 너를 훈계하지 못할거야.”       아이들의 대화소리에 호보평은 온몸에 전률을 느꼈다. 그날 저녁, 그는 또다시 실면했다. 학생들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목표달성을 위해 그는 큰맘먹고 두눈을 질끔 감았다. 몇달후 호보평은 집을 산다는 리유로 또한번 오예의 어머니로부터 5만원을 꿨다. 학부모를 찾아다니며 돈을 꾸는 그의 행보도 점점 가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2011년 음력설즈음, 호보평은 그동안 잃었던 도박밑천을 한꺼번에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한꺼번에 30만원을 빌려다 도박판에 밀어넣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하루아침에 또다시 30만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추가로 안게 된 호보평은 그제야 더럭 겁이 났다. 빚쟁이는 매일같이 빚재촉을 해댔고 호보평은 단가마속에 든 개미마냥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느날, 부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을을 배회하며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뇌리속에 순간적으로 오예를 념두에 둔 치밀한 랍치극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을 친구처럼 따뜻이 대해주던 오예 부모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며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죄책감과 미안함은 어느새 구중천으로 사라지고 무서운 음모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월 24일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호보평은 조용히 오예를 불렀다. 그리고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학교에서 지금 비밀리에 흥미있는 활동을 진행하는중이란다. 즉 어떻게 학교내의 감시카메라를 교묘하게 피하느냐 하는 유희란다. 한개 학급에서 한명씩만 참가하는데 우리 학급을 대표해서 네가 참가해야겠다. 절대 다른 학생들한테 알려줘서는 안되니깐 저녁에 감시카메라를 잘 피해서 기숙사밖에까지 나오너라. 알겠니?”       오예는 신비스런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저녁 8시 20분경, 오예는 호보평의 말대로 감시카메라를 요리조리 피해서 용케도 학교밖으로 빠져나왔고 그곳에서 대기하고있던 호보평을 만났다. 호보평은 좋은 말로 오예를 구슬려서는 학교부근의 산비탈로 향했다. 오예가 물었다.       “선생님, 왜 저를 이곳에 데리고왔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보평은 사전에 준비했던 끈으로 오예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오예야,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이러는거니깐 날 리해해다오.”       호보평의 손아귀에 힘이 더해갈수록 오예의 몸부림은 힘을 잃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가? 드디여 오예가 숨진것을 확인한 호보평은 사전에 미리 봐뒀던 건축공사장에 구뎅이를 파고 오예의 시체를 묻었다. 날이 밝아 건축공사장에서 일을 시작하면 오예의 시체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될거라고 그는생각하였다.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밤 9시였다. 뒤늦게 오예의 실종을 발견한 학교내부는 발칵 뒤집혔고 호보평은 아무일도 없었던듯 태연한 모습으로 오예를 찾는 사람들속에 끼여 “애타게” 오예의 이름을 불러댔다…       사건발생 이튿날, 호보평은 며칠전에 타인의 신분증으로 미리 구입해뒀던 핸드폰으로 오예의 어머니에게 련이어 두통의 협박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의 아들이 지금 내손에 있습니다. 현금 200만원을 준비하시오.”       “현금을 금화성 북쪽켠에 있는 한 정자에 놓고 가십시오.”       그날 오후 2시경, 호보평은 200만원을 손에 넣기도전에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덜미를 잡히였다. 랍치범을 잡았다는 소식에 오국주부부는 한달음에 공안국으로 달려갔다. 범죄혐의자와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부부는 그 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오국주가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혹시 잘못 잡은건 아닙니까?  저 사람은 우리 아들의 어문선생님입니다.”       하지만 호보평이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범죄과정을 진술해서야 학교령도들과 오국주부부는 믿을수 없는 사실이 금찍한 현실임을 확인했다. 더욱더 모두를 경악케 한건 오예의 죽음이였다. 아들의 죽음앞에 오국주부부는 실신하고말았다. 모범교원이 살인마로 둔갑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제야 호보평이 수많은 학부모들로부터 거액의 빚을 졌음을 알게 된 학부모들과 학교령도측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들잃은 고통을 애써 떨쳐낸 오국주부부는 개인재산에서 400만원을 기부해 빈곤학생과 빈곤교원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기금회를 설립했다.       “비극은 이미 발생했습니다. 아들잃은 고통은 저와 안해에게 있어서 평생 아픈 기억으로 남겨질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겪었던 비극이 다른 아이들의 신변에서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심에 우리는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였습니다. 사회에 이같은 비극이 두번 다시 발생하지 말았으면 하는것이 저희들이 기금회를 설립한 취지입니다.”       누구보다 피끓는 열정으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호보평은 결국 도덕방선을 지켜내지 못하고 한보한보 타락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호보평을 기다리는건 법의 엄한 징벌뿐이다. 《지음》
190    교통사고배후에 숨겨진 피비린 살인극 댓글:  조회:4356  추천:0  2012-01-12
2010년 6월 7일 깊은밤, 호남성 영주시 령릉구 주산진에서 음식업에 종사하는 범여리는 남편 류효군으로부터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 빨리 와주오. 차사고가 났는데 사람이 죽었소.”       범여리는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는 다급히 몇몇 친구들과 함께 사고발생지점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두려움과 놀라움에 어쩔바를 몰라했다. 자가용차를 운전하고 동안시의 사거리를 지나던 류효군의 차가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하던 오토바이와 심하게 충돌했는데 오토바이 운전수가 당장에서 사망됐던것이다. 당지 교통부문에서는 충분한 조사를 거쳐 사건발생당시 양위국이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신호등을 무시한 경향이 뚜렷해 엄중한 규칙위반행위에 속하는 반면 류효군은 안전운전에 속했기에 사망자 양위국이 주요책임을 지며 류효군은 일부분의 책임만 안아도 된다고 했다. 교통경찰측의 조해하에 류효군과 범여리는 사망자가족에 10만원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사망자의 안해 리민상과 기타 유가족들도 합의에 동의했다. 이튿날, 부부는 10만원의 현금을 가지고 직접 사망자의 집을 찾아가 거듭 사죄하는 한편 양위국의 안해 리민상의 손에 현금을 건네주었다. 헌데 뜻밖에도 리민상은 얼굴에 오묘한 웃음을 짓더니 돈을 홱 뿌리치고는 범여리를 향해 랭소했다.       “이까짓 돈으로 뭘 어떻게 미봉하겠다는거예요? 남편잃은 고통을 당신도 한번 당해보실래요?”       순간 범여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의 눈에서 차디찬 멸시와 비웃음을 보아냈던것이다.        집으로 돌아온후 범여리는 남편의 정서에 큰 변화가 있음을 발견했다. 하루종일 불안에 떨면서 집밖에 나가기를 꺼려하는가 하면 잠을 자면서도 알수 없는 잠꼬대를 하면서 괴로움을 호소하군 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효군씨,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우리도 할만큼 했으니깐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거예요. 이후에 그쪽 집에 힘든 일이 생기면 우리가 적극 도와주면 되잖아요.”       안해의 말에 남편은 묵묵히 머리를 끄덕이였다. 2010년 국경절 전날, 류효군은 회사일때문에 상해로 출장을 간다며 부산을 떨었다. 남편이 못내 걱정된 범여리가 동행할 의사를 밝혔지만 류효군은 완곡히 거절했다.       “이번 출장에 조명성회장도 함께 가오. 당신을 데리고가면 내 체면이 뭐가 되오?”       범여리는 걱정스런 눈길로 멀어져가는 남편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편이 떠난 3일후에 범여리는 한 커피숍에서 우연히 조명성을 만났다.       “조회장님, 저희 남편이랑 함께 출장가신다고 하던데 벌써 돌아오셨어요?”        “출장이라니요? 저는 류효군이랑 같이 출장간적이 없는데요? 그리고 회사일로 류효군을 출장보낸적도 없구요.”       범여리는 순간 머리속이 하얗게 되면서 할말을 잃었다. 서둘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꺼져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범여리의 뇌리를 쳤다. 10일후, 드디여 돌아온 남편은 얼굴에 피곤기가 력력했다. 안해의 추궁에 류효군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사실은 개인일때문에 출장을 간거요. 목돈을 벌어서 전번에 차사고때 입었던 손실을 조금이나마 미봉하려고…”       범여리는 당황한 기색이 력력한 남편의 태도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있음을 직감했다. 그날이후로 류효군은 범여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범여리의 핸드폰으로 한통의 문자메시지(短信)가 날아왔다.       “당신의 남편은 이미 당신한테서 마음이 떠난지 오라다. 자존심이 있다면 주동적으로 남편과 리혼해라.”       범여리는 남편이 외도하고있음을 알아챘다. 11월의 어느날, 류효군은 안해에게 리혼을 선포했다. 더이상 남편의 마음을 돌릴수 없음을 잘 알고있던 범여리는 결국 리혼에 동의하고 지체없이 리혼절차를 밟았다. 뜻하지 않던 리혼으로 인해 범여리는 한동안 고통에서 헤여나오질 못했다. 그는 음식점사업도 접은채 매일 친구들과 도박을 즐겼다.       11월말쯤, 범여리는 전에 류효군과 합작해 사업을 하던 한 친구를 만나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범여리와 리혼한 류효군은 얼마 안돼 30살가량의 한 녀인과 결혼등록을 마친후 령릉구의 한 고급아빠트를 구입하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신부는 다름아닌 리민상이라는것이였다. 범여리는 그 친구가 핸드폰으로 찍어두었던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보고서야 남편의 재혼을 믿는 한편 심한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문득 범여리는 “남편잃은 고통을 당신도 한번 당해보실래요?”라고 말하며 랭소를 짓던 리민상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온몸에 전률을 느꼈다. 범여리는 즉시 류효군에게 전화를 했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할수 있나요?”       “미안하오. 사고이후 줄곧 량심의 고통에 시달렸소. 그래서 자주 찾아가 도와주다가 그만 정이 들어버렸소.”       문득 얼마전에 받았던 문자메시지가 뇌리에 떠오른 리민상은 다급히 인터넷을 통해 남편의 통화기록을 조사했다. 지난 반년동안 남편과 가장 빈번하게 통화한 전화번호와 문자메시지를 보낸 의문의 전화번호가 일치했다. 범여리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친구에게 부탁해 메시지를 보내온 핸드폰주인을 조사해본 범여리는 경악했다. 다름아닌 리민상이였다. 범여리는 그자리에 폴싹 물앉고말았다. 반년전부터 빈번하게 통화할 정도로 두 사람이 깊은 관계였다면 교통사고는 과연 우연이였을가? 우연이였다면 왜 두 사람은 그동안 서로 모른척 연기를 했던걸가? 범여리는 생각할수록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교통사고의 배후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있는것일가? 교통사고로 위장한 한차례 치밀한 살인극이 아닐가? 사고직후 남편이 “나를 탓하지 마시오. 나도 그럴수밖에 없었다구…”라고 하던 잠꼬대가 떠오르면서 범여리는 자신의 추측에 무게를 실었다. 이튿날, 그녀는 조용히 동안현공안국에 찾아가 사건을 제보했다.        경찰들은 즉시 전문조사조를 내오고 비밀리에 조사를 펼쳤다. 반년전에 있었던 교통사고였기에 재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범죄행각은 결국 경찰의 예리한 눈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조사하던 경찰들은 사건발생 보름전쯤부터 류효군이 운전하는 도요다표 승용차가 여러차례에 거쳐 신호등위반기록을 남긴 점을 발견했다. 게다가 류효군이 신호등을 위반한 위치는 마침 양위국이 자주 경과하는 지점이라는 점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수사에 속도가 빨라졌다. 사고당일, 양위국이 친구들과 함께 들렀다는 백마오락성부근의 감시카메라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포착됐다. 양위국이 오락성에서 노래부르며 즐기던 2시간동안 류효군의 자가용이 부근에서 줄곧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2011년 1월 12일, 류효군에게 중대한 살인혐의가 있다고 판단한 전문조사조에서는 신혼집을 급습해 당장에서 두 범죄혐의자를 나포했다. 4시간만에 리민상은 결국 심리방선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범죄사실을 이실직고했다. 비밀련인의 살인계획       2년전인 2009년 년말, 술집접대원과 손님으로 만난 두 사람은 얼마 안돼 비밀련인으로 되였다. 두 사람 모두 유부남, 유부녀였지만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비밀련애를 즐겼다. 그 과정에 류효군은 리민상이 남편으로부터 경상적으로 폭행당하고있음을 알게 되였다. 워낙 리민상의 남편 양위국은 4년전에 공금탐오죄로 붙잡혀 2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얼마전 에 출옥했는데 자신이 복역기간에 안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다고 의심하며 쩍하면 폭력을 휘둘렀던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2010년 5월에 또다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호텔을 나서던 두 사람은 진작부터 기다리고있던 양위국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리민상이 남편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늘어진 사이에 류효군은 꼬리빳빳이 도망쳤다. 그후 리민상에 대한 양위국의 만행은 더욱더 심해졌다. 2010년 5월중순, 리민상은 류효군에게 무서운 제안을 했다. 언제든 맞아죽을것 같으니 차라리 먼저 양위국을 죽이자는것이였다. 그말에류효군은 기겁했다. 하지만 리민상이 매일같이 울며불며 호소하는 바람에 류효군은 점차 동요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손놓고있는 사이에 양위국이 먼저 우리를 죽일거예요. 사내대장부라면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선손을 써야 해요! 당신이 계속 우유부단하면 당신의 행방을 양위국에게 말해버릴거예요.”        류효군은 소름이 끼쳤다. 결국 그는 서서히 양위국을 죽일 계획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양위국이 오토바이택시일을 하면서 신호등은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빈번이 교통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효군의 머리속에는 그럴듯한 계획이 떠올랐다. 그후 며칠동안 류효군은 차를 몰고 시시각각 양위국의 뒤를 미행하면서 기회를 엿보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6월 7일 오전, 류효군은 양위국이 친구의 생일축하모임차 동안에 갔다는 리민상의 전화를 받고 지체없이 동안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양위국을 주의깊게 살피며 십자거리에 이르렀을 때 마침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류효군의 예상이 적중했다. 양위국은 차를 세우기는 커녕 신호등을 무시한채 왼쪽으로 굽어들었고 이때다 싶었던 류효군은 속도를 내 양위국의 오토바이를 들이받았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양위국은 저만치 뿌리워나갔다…       사고발생후, 리민상과 류효군은 완벽한 연기로 모두의 눈을 속이고 순조롭게 결혼까지 했다. 두 사람만 입다물고 있으면 모든 죄가 가려질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였다. 2011년 1월 13일, 류효군과 리민상은 고의살인죄로 정식으로 체포됐다.        (본문중 범죄혐의자 류효군과 리민상을 제외한 기타 인물은 가명임) 《지음》
189    살인극으로 바뀌워버린 출국꿈 댓글:  조회:4692  추천:1  2012-01-10
      2003년 추석전야, 모두다 즐거운 마음으로 명절분위기를 만끽하는 가운데 왕은화만은 홀로 상념에 잠겼다. 신나게 자식의 외국류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녀동생의 모습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면서 방은화는 16살된 아들 방초의 류학문제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두 녀동생에 비해 생활형편이 쪼들리는것때문에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더욱더 그녀를 자극하는건 바로 아이들의 류학문제였던것이다. 큰녀동생의 아들 류강은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작은 녀동생의 아들 강위위는 미국으로 류학을 가는 바람에 매년 명절때마다 식구들이 모이면 화제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류학생활에 집중되였다. 그럴 때마다 방초는 부러운 눈길로 두 외사촌동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껴야 했고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왕은화는 가슴이 아려 견딜수가 없었다.        “가정형편이 못하다고 아이의 앞길을 망칠수는 없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꼭 외국에 류학보내야겠어요.”       남편 방성공 역시 안해의 말에 동감했다. 류학을 보내려면 최소한의 경제보장이 있어야 하지만 년로임이라야 고작 6만원정도였던 두 사람이였기에 마음만 앞설뿐이였다. 2003년 년말, 왕은화는 한국에 이민간 친구 강효혜로부터 한국으로 진출할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즉 남편 방성공과 리혼하고 거간군을 통해 한국남자와 가짜결혼을 한 다음 한국에서 3년간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국적을 취득할수 있고 한국인남편과 리혼하고 다시 중국에 있는 아들과 남편을 한국에 데려다 함께 살수 있는 방법이였다. 안해의 이같은 계획에 남편은 신중해야 한다고 거듭 설득했지만 이미 굳게 결심한 안해의 마음을 돌려세울수는 없었다. 2004년 10월 하순, 부부는 결국 합의하에 “가짜리혼”수속을 밟았다. 리혼장을 받아든 왕은화는 지체할세라 현금 3만원을 꾸어다가 한국거간군에게 송금했다. 하지만 일은 꼬여만 갔다. 거간군이 한국의 부산경찰측에 잡혔던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시간은 또다시 흘러만 갔고 방초는 국내의 한 무명대학에 진학했다. 아들을 류학보내려던 계획이 하루하루 멀어져만 가는 현실에 왕은화와 방성공은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였다.        9월의 어느날 저녁 9시무렵, 늦은시간에 퇴근한 방성공은 피곤한 몸을 끌고 회사승강기에 올라탔다. 승강기가 10층에서 멈춰서자 미모의 젊은 녀인이 합승했다. 다시 동작하던 승강기가 갑자기 덜컹하는 아찔한 소리와 함께 10층과 9층 사이에 멈춰서버렸다. 깜깜한 어둠속에서 녀인의 비명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급히 긴급구조단추를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핸드폰도 신호가 없었다. 방성공은 겁에 질린 녀인을 달래며 말했다.        “괜찮을거니깐 걱정하지 마오. 여기 승강기안에서 하루밤정도 기다리다보면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올거요.”       녀인은 방성공의 위안에 다소 안정을 찾은듯했다. 대위화라 부르는 그 녀인은 건물 맞은켠에 위치한 가원술집 사장의 처제였는데 빚받으러 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봉변을 당했던것이다. 30분후, 다행히 건물보안일군이 달려왔고 두 사람은 무사히 구조되였다.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방성공에게 마음을 빼앗긴 대위화는 그날이후로 주동적으로 방성공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구했다. 방성공은 대위화에게 자기의 가정사에 대해 많이 언급했고 아들의 출국을 위해 가짜리혼하게 된 경과까지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의 솔직함에 마음이 끌린 대위화는 더욱더 방성공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불태워갔다. 며칠후 근사한 서양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친후 대위화가 신비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출생비밀에 대해 늘어놓았다. 즉 친어머니가 미국에 살고있는데 계부가 시카코대학의 자연과학원교수라는것이였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함께 미국에 가서 살자고 제안했었지만 대위화가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거액의 돈만 남겨두고 떠난 상태라고 덧붙였다. 대위화에게 이처럼 거대한 출생배경이 숨겨져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성공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래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위화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위화, 나의 평생 소원은 바로 아들을 외국에 류학보내는것이요. 위화의 어머니에게 말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안되겠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저의 어머니한테 우리 사이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죠?”       방성공은 대위화의 말속의 뜻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못할것이 없다고 생각한 방성공은 대위화를 와락 껴안고 키스세례를 퍼부었다…그후부터 대위화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는 수시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2006년말 에 대위화는 큰 돈을 들여 청도의 번화가에 집을 세맡고 두 사람을 위한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2007년 7월, 한해가 지나도록 아들의 출국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방성공은 부단히 대위화를 닥달했다. 대위화는 윌리엄이 동의하지 않아 류학이 힘들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 말에 방성공은 크게 실망했고 대위화에 대한 열정도 급속도로 랭각되여갔다. 대위화를 떨쳐버리기 위해 그는 아예 산동성을 떠나 항주로 가서 새로운 시장개척에 나섰다. 9월초, 방성공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대위화는 윌리엄이 드디여 류학문제를 해결주겠다고 답복했다며 빨리 돌아오라고 전화를 했다. 아들의 출국문제가 해결될수 있다는 희망에 방성공은 아들의 성적표를 포함한 모든 서류들을 챙겨가지고 대위화를 찾아갔다. 서류를 받아든 대위화는 “흥”하고 랭소를 짓고는 서류를 침대에 홱 던지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랑 결혼등록을 마치면 그때 정식으로 류학수속절차를 밟을거예요.”       하지만 더이상 대위화의 롱간에 놀아날수 없다고 생각된 방성공은 대위화와 한바탕 말다툼을 벌린 뒤 집을 나와버렸다. 얼마후,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된 대위화는 아이를 빌미로 방성공을 다시 붙잡기 위해 꿍꿍이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걸림돌같은 전처만 없어진다면 방성공이 자기곁에 돌아올거라 굳게 믿고있었다.        2008년 1월 11일 밤 22시경, 방초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아들아, 너의 류학문제가 해결이 된듯싶구나. 아버지가 사람을 통해 너를 미국의 한 대학에 류학보내기로 했단다. 그쪽에서 나더러 래일 오전 9시에 출국요청장을 가지러 오라더구나.”       방초는 뜻밖의 희소식에 밤잠마저 설쳤다.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시작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들의 출국요청장을 받으러 간다고 떠난 어머니 방은화는 며칠이 지나도록 종무소식이였고 핸드폰도 줄곧 꺼져있었다. 1월 14일, 방초의 핸드폰에 두통의 문자메시지(短信)가 들어왔다.       “아들아, 나는 친구와 함께 대만으로 간다. 절대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좀 있으면 비행기가 리륙할거다. 전화를 꺼버려야 할것 같구나.”       그렇게 두통의 메시지를 끝으로 방은화는 또다시 잠적해버렸다. 방초는 즉시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방은화의 아버지 왕신국은 다년간의 정찰경험으로 비춰보아 일이 상서롭지 않다며 즉시 제보하라고 했다. 경찰조사가 시작되자 얼마 못가서 대위화가 수면우에 떠올랐다. 대위화는 자신의 죄행에 대해 순순히 탄백했다.       워낙 대위화의 모든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였다. 그에게는 미국에 거주하고있는 친어머니도 없었고 시카코대학의 교수계부도 없었다. 그는 4명의 언니, 오빠들과 마찬가지로 농사군부모를 둔 평범한 녀인이였다. 2006년, 1년간 사귀던 남자친구가 그를 배신하고 다른 녀인과 결혼하는 바람에 그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줄곧 혼자 살았으며 그런 와중에 방성공을 만났고 그뒤로 방성공의 남자다운 매력에 푹 빠져들었던것이다. 대위화는 왕은화만 없으면 방성공이 자신에게로 돌아올거라고 착각한 나머지 왕은화에 대한 살의를 불태웠다. 그는 왕은화에게 아들의 출국요청장을 받으러 집에 오라고 련계를 한뒤 무방비상태로 온 왕은화에게 마수를 뻗쳤다. 언니 성위영이 먼저 달려들어 수건으로 왕은화의 목을 조였고 대위화가 합세해 수건과 침대깔개까지 동원해 왕은화의 목을 조였다. 성위영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왕은화를 향해 걸상을 들어 힘껏 내리쳤고 대위화는 펄펄 끓는 물을 가져다 왕은화의 머리에 쏟아붓는가 하면 쇠몽둥이로 피못이 되도록 치고 또 쳤다. 사후, 대위화는 오빠 성련명을 불러들여 왕은화의 시체를 유기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태연자약하게 왕은화 대신 방초에게 두통의 문자메시지를 발송한 뒤 핸드폰을 꺼버렸다.       2008년 9월 2일, 청도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대위화에게 살인 및 시체유기죄로 사형에 언도하고 즉시 집행하도록 했다. 공범인 성위영은 무기도형에, 성련명은 유기도형 1년 6개월에 언도되였다. 대위화는 불복하고 2차에 거쳐 상소를 제기했지만 2009년과 2010년에 산동성고급인민법원과 최고인민법원에서는 그녀의 상소를 기각하고 원판결을 유지한다고 판결했다. 《지음》
188    두 아기를 우물에 처넣은 계모 댓글:  조회:4366  추천:0  2012-01-10
5월 4일 저녁 8시경, 강서성 신풍현공안국지휘중심에서는 서우진 천룡천의 한 촌민으로부터 제보를 받고 즉시 현장에 출동해 한 촌민집의 우물속에서 두 아이를 구출했다. 3살난 장려는자는 다행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갓 1살을 넘긴 장진은 가석하게도 이미 익사한 뒤였다. 경찰들은 즉시 조사를 전개, 얼마 안돼 범죄혐의자를 나포했다. 놀랍게도 범죄혐의자는 다름아닌 두 아이의 계모 강홍이였다.        올해 25살난 강홍은 서우진중심소학교의 교원으로서 세 아이의 아빠인 장군과 결혼한지 얼마 안된 녀인이였다. 장군은 전처 라모와의 사이에서 아들, 딸을 둔 아버지였고 리혼당시 안해가 임신중이였다. 라모는 장군과 리혼한후 장군의 부모집에 얹혀살다보니 강홍과 자주 대면하게 되였고 두 녀인은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있었다.       2011년  5월 4일 저녁 18시경, 강홍은 퇴근후 집에서 텔레비죤을 보다가 시어머니의 집에 가 두 아이를 데려와 집울안에서 놀게 했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씻던 강홍이 무심코 장려에게 물었다.        “넌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하니?”       “아지미라 부를거예요.”       “나는 너의 엄마야. 누가 너더러 나를 엄마라 부르지 말라고 시켜줬니?”       “엄마랑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아지미를 엄마라고 부르면 진짜엄마가 화나서 나를 때릴거라고 했어요.”       강홍은 장진을 불러다가 같은 질문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강홍은 화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그 녀인이  더 우쭐렁거리는거야. 그녀의 아이들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야겠어.”       생각을 마친 강홍은 곧장 두 아이곁으로 다가선 뒤 다짜고짜 아이들을 들어 우물에 처넣었다. 그리고는 우물뚜껑까지 닫아버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마침 아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당도했고 우물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사람들을 불러다가 아이를 구조했던것이다. 우물속에서는 물을 뽑아올리기 위해 설치된 물뽐프가 있었는데 우물속에 떨어지는 순간 장려는 행운스럽게 뽐프의 관도를 잡았기에 죽음에서 벗어날수 있었지만 강진은 그대로 우물에 던져지면서 익사했던것이다. 강홍은 법에 의해 체포됐다. 그녀를 기다리는건 법의 엄한 징벌뿐일것이다. 《중신넷》
187    가정행복을 지키기 위해 칼부림한 소년 댓글:  조회:4759  추천:0  2012-01-04
      2009년 9월 5일 점심, 하남성 신정시의 한 주민아빠트에서 피비린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3명의 미성년자들이 피못에 쓰러져있었는데 구급을 거쳐 한명은 죽고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제일 나어린 피해자는 겨우 5살이였다. 경찰조사를 통해 피비린 참극을 빚어낸 장본인이 밝혀졌다. 범죄혐의자는 바로 3명중 한명으로 피못에 쓰러져있던 16살 주천이였고 남은 2명은 그의 사촌동생들이였다. 주천이는 왜 동생들에게 마수를 뻗쳤던것일가? 부모의 혼인을 쥐락펴락한 이모       주천의 어머니 원수평은 중학교 교원이였는데 녀동생 원수운과 관계가 특히 좋았다. 1992년, 24살난 원수평은 신정시 정부기관 간부였던 25살 주명뢰와 결혼하고 이듬해 아들 주천을 낳았다. 미혼이였던 원수운은 언니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언니를 도와 어린 조카를 보살펴주군 했다.       “형부, 저의 언니같은 녀인이 형부에게 시집가서 자식까지 낳고 사는것에 대해 감지덕지하게 생각하세요.”       주명뢰는 처제의 가시돋친 말에 멋적은 웃음만 지어보였다. 2007년초, 원수평은 학교의 부교장으로 승진했지만 주명뢰는 줄곧 일반과원직에 머물러있었다. 어느날 저녁, 텔레비죤을 시청하고있던 주명뢰는 안해의 불호령에 화들짝 놀랐다.       “남자가 집구석에서 텔레비죤만 보고있을거예요?”       “설겆이도 했고 집정리도 마쳤잖소?”       “그게 자랑이나요? 아들한테 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란 말이예요. 우리 아들이 당신처럼 무능하게 성장하길 바라나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부부의 말다툼은 점점 거세졌고 원수평은 급기야 울고불고 행악질하면서 집을 뛰쳐나가 곧장 동생의 집으로 달려갔다. 12살과 3살짜리 두 아이를 둔 엄마였던 원수운은 반년전에 원수평의 집 부근에 술집을 개업했는데 장사가 잘돼 눈코뜰새없이 바삐 보내고있었다. 언니의 눈물섞인 하소연에 화가 난 원수운은 주명뢰한테 전화해 으름장을 놓았다.        “형부의 마음속에 안해라는 존재가 있나요? 언니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을거예요.”       주명뢰는 말문이 막혀 말없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주천은 자기 집 일에 사사건건 참여하며 아버지를 닥달하는 이모를 리해할수 없었다. 이튿날 저녁, 주명뢰는 할수없이 아들과 함께 원소운의 집에 찾아가 백배사죄한후 안해를 데려왔다. 주명뢰는 안해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작심하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돼 20여만원의 현금을 허망 날려버리고 빚더미에 나앉고말았다.        “재간이 없으면 집에 가만히 들여박혀있어요. 당신같은 남자랑 결혼한 내가 바보지.”       원수운도 어김없이 형부를 책망했다.       “어떻게 언니 몰래 그런 일을 저지를수 있나요? 정말 너무해요.”       “처제, 어서 집으로 돌아가오. 그리고 이후부터 우리 부부일에 작작 삐치란 말이요.”        “가야 할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라 당신이예요.”       안해의 말에 주명뢰는 얼굴이 지지벌개지더니 쾅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어른들의 다툼소리와 붙는 불에 키질하는듯한 이모의 비아냥소리에 주천은 화가 나 미칠것만 같았다. 그후에도 부부싸움은 멈출줄을 몰랐고 따라서 주천의 성적도 내리막질하기 시작하더니 2008년 고중입학시험에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직업고중학교에 진학했다. 교장이였던 원수평은 아들의 부진을 남편에게 뒤집어씌웠다. 원수평과 주명뢰의 혼인생활은 점점 파국에로 치달아올랐다. 상처입은 소년       2008년 10월, 주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결국 협의리혼장에 도장을 찍었다. 15살 소년은 부모의 리혼을 이모탓으로 돌리고 이모에 대한 원한에 치를 떨었다. 리혼후 원수운은 아예 언니의 집에 두 아기를 맡기고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모가 두 아이와 같이 희희덕거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주천은 엄마아빠와 함께 살던 행복했던 시간을 돌이키며 엄마아빠의 재결합을 이뤄주리라 마음먹었다. 12월의 어느날, 원수평은 느닷없이 하수도가 막히는 바람에 쩔쩔 맸고 주천은 기다렸다는듯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주명뢰가 손을 대자 하수도는 언제 그랬냐는듯 깨끗이 수리되였다. 원수평은 남편의 능력에 은근히 놀란 눈치였고 이를 지켜보는 주천부자는 웃음집이 흔들거렸다. 워낙 이는 주천이 벌린 선의의 “사기극”이였던것이다. 그후에도 주천은 수도관이 파렬됐고 조명등선로가 고장났다는 리유로 빈번이 아빠를 불러들였고 아빠가 엄마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낼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2009년 5.1절전야, 주천은 미리 아버지와 북경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엄마에게 북경에 놀러가자고 막무가내로 졸라댔다.        “아들아, 차라리 이모랑 두 사촌동생이랑 락양시에 가서 모란꽃을 구경하자꾸나.”       “그래 주천아, 엄마 말대로 해. 너는 절대로 아빠를 닮지 마.”        이모가 한켠에서 거들자 주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이모가 생각한것처럼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예요. 엄마아빠가 다시 재결합하면 나도 사촌동생들처럼 행복한 가정에서 살수 있어요.”       “아들아, 바보같은 소리 집어치워. 어른들 일에 상관하지 말고 너는 공부나 잘해.”       주천은 더이상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그후에도 원수운은 원수평의 집에서 살다싶이했다. 어느날, 주천은 무심결에 엄마와 이모가 소곤거리는 대화를 엿들었다.        “언니, 그 남자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요. 래일 염황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소.”       주천은 무슨 뜻인지 알것 같았다. 이튿날, 주천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엄마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오전 10시쯤 엄마가 집문을 나서자 주천은 몰래 엄마뒤를 미행했다. 엄마가 염황광장에서 웬 중년남자를 만나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본 주천은 참다못해 달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 엄마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것을 절대 동의할수 없어요.”       원수평은 상대방에게 거듭 사과한 뒤 주천의 손을 잡아끌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원수운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왜 이리 일찍 돌아왔냐고 따졌다.        “이모는 제발 우리 집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왜 엄마를 다른 남자한테 시집보내려고 해요?”       “너의 아버지가 이러라고 시켜줬니?”       원수운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다신 아버지를 그런식으로 험담하지 마세요. 차라리 이모가 이모부랑 리혼하고 동생들에게 새아빠를 찾아주세요.”       원수운은 조카의 말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주천은 분노가 이글거리는 두눈으로 이모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울분을 금치 못했다. 오늘날 자신에게 찾아든 불행은 모두 이모의 리간질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모가 죽도록 미웠다. 무고한 생명을 도려낸 소년의 복수       2009년 9월 5일,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주천에게 엄마가 말했다.        “아들아, 엄마는 지금 출근한다. 너는 큰오빠이니깐 동생들을 잘 데리고놀아야 한다.”       (오늘은 토요일인데 엄마가 왜 출근하는거지? 혹시 또 이모가 소개해준 남자를 만나러 가는건 아닐가?) 주천은 덜컥 겁이 났다. 엄마가 금방 집을 나서자 5살난 사촌동생 동동이가 울며불며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얼리고 닥쳐도 막무가내였다. 화가 치밀어오른 주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울고 입 닥치란 말이야!”       “형은 나빠, 형의 아빠도 나쁜 사람이야.”       어린 동생의 입에서 아빠를 모욕하는 말이 나올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주천은 눈이 뒤집혔다. 그는 과일칼을 들어 동생을 마구 찔러댔다. 14살난 영영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자신의 몸으로 동생을 막아나섰다. 하지만 이미 리지를 상실한 주천은 이모에 대한 오랜 미움과 원망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두 사촌동생을 향해 미친듯이 칼을 휘둘렀다. 과일칼이 저만치 뿌리워가자 한달음에 주방에 달려들어가 식칼을 들고나온 주천은 또다시 무차별적인 칼부림을 시작했다. 온몸으로 동생을 보호하느라 영영이는 얼마 안돼 피범벅이 되였다. 두 사촌동생이 드디여 피못에 쓰러지자 주천은 주방에 들어가 액화가스관도를 끊어버리고 스위치를 켠 뒤 불을 달았다. 그리고는 옷가지들과 이불을 끌어다 주방에 던져넣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고는 인사불성이 된 사촌동생들을 끌어다 주방에 가둬넣고 주방문을 잠가버렸다.        모든 일을 끝낸 주천은 칼을 들어 자신의 손목과 목을 그었다…매캐한 연기에 의식을 찾은 영영이는 미친듯이 주방문을 흔들었다. 얼마후, 주방문이 드디여 열렸고 영영이는 어린 동생에게 생명의 통로를 열어준 뒤 다시 쓰러졌다…뒤늦게 110경찰들이 당도해 문을 박차고 실내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눈앞의 참경에 아연실색하고말았다…구급을 거쳐 주천이와 동동이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영영이는 과다출혈로 끝내 숨을 거두고말았다. 주천이의 칼부림에 오른손손가락이 뭉청 잘려나간 동동이는 오른손이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는 바람에 7급장애판정까지 받았다.        2009년 9월 6일, 주천은 고의살인죄로 신정시공안국에 형사구류되였다. 2010년 9월 25일, 정주시중급인민법원에서 주천을 고의살인죄로 무기도형에 언도했다. 조카의 만행이 자신때문이였음을 안 원수운은 후회했지만 모든것은 이미 늦은 뒤였다. 《지음》
186    엄마의 애인으로부터 류산테로 당해 댓글:  조회:4724  추천:0  2012-01-04
지난 6월 10일, 11살된 남자아이 소동은 친아버지의 가게에서 느닷없이 들이닥친 괴한의 류산테로에 의해 전신 32%가 화상을 입는 끔찍한 봉변을 당했다. 아들애의 처참한 모습에 소동의 엄마 아옥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소동은 사후 경찰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나한테 나쁜일을 한 사람은 그 아저씨예요. 그날 그 남자가 파란색반팔적삼을 입고있었는데 전에 단아저씨가 그 적삼을 입은걸 본적 있어요.”       아이가 말하는 그 “아저씨”는 구경 누구일가? 왜 죄없는 아이에게 이같은 만행을 저질런던것일가?       2005년, 소동의 엄마 아옥은 남편 좌씨와 감정불화로 협의리혼했다. 리혼후 좌씨는 광동에 가 창업을 시작했고 아옥은 아들딸과 함께 호남성 빈주(湖南 州)에서 생활했다. 련통회사의 업무원이였던 아옥은 사업상관계로 42살 단모를 알게 되였다. 아옥은 아이들에게 지극히 잘해주는 유부남 단모에게 호감이 갔다. 2009년에 단모는 짐을 싸들고 아옥의 집에 이사와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보안일군이였던 단모는 동거후 아옥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아옥이가 남자고객과 전화통화를 하거나 상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단모는 늘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아옥이를 닥달했다. 일때문에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아옥은 아이들을 돌볼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점포를 세맡고 부식물상점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모순도 더 커져만 갔다. 남자고객들이 가게에서 담배를 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단모는 아옥에게 새 남자가 생겼냐며 따지고들었다. 아옥이가 헤여질것을 요구할 때마다 단모는 늘 위협조로 말했다.       “ 나를 떠나면 당신의 어머니와 아들을 죽여버릴거야!”       2011년초, 아옥은 단모를 떼여내기 위해 두 아이를 데리고 불산에 있는 전남편을 찾아갔다. 하지만 3월초,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단모때문에 아옥은 울며겨자먹기로 다시 빈주에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모의 의심은 끝날줄을 몰랐다. 밑도 끝도 없는 단모의 의심과 행패질에 참을수 없었던 아옥은 또한번 말도 없이 가출을 했다. 아이들을 전남편에게 맡겨놓고 전화번호를 바꿔버린 뒤 친구의 집에 숨어버렸다.        6월 10일, 아버지의 가게에서 전자유희에 빠져있던 소동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괴한을 발견했다. 옷으로 머리와 얼굴까지 꽁꽁 감싼 그 남자는 손에 두개의 유리병을 들고있었지만 소동은 한눈에 바로 단모임을 알아보았다. 아이가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남자는 손에 들고있던 유리병을 들어 아이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단모는 병속의 액체를 남김없이 아이의 몸에 털어부은 뒤 몸을 돌려 황급히 도주했다. 얼마후 소동의 아버지가 달려와 아들을 급히 병원으로 호송했다. 워낙 사건발생 몇시간전에 14살난 소동의 누나는 한 친구와 함께 집부근을 지나다가 우연히 단모가 뒤를 미행하는것을 발견하고 골목을 돌고 돌아 단모를 따돌린후 곧장 아버지를 찾아가 “아저씨”의 행적을 알렸던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든 아버지가 다급히 가게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어린 아들이 참혹한 봉변을 당한 뒤였다. 아들이 당한 봉변에 가슴이 찢어질듯이 아파난 아옥은 단모가 나타나 아들에게 또다시 몹쓸짓을 할가봐 두려움에 모대겼다.       “아이에게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루속히 단모가 법망에 걸려들기만을 바랄뿐이예요.”       남해경찰측은 현재 범죄혐의자 단모의 추적에 힘을 기울이고있다. 《광주일보》
185    형제간에 한녀자를 양보하다가 벌어진 비극 댓글:  조회:4665  추천:1  2011-12-31
      대학생이였던 려연리와 전량은 서로에 대한 사랑하나만으로 결혼전동거에 들어갔고 얼마 안돼 이들의 딸이 출생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전량의 변심으로 인해 파국에로 치달았다. 절망에 빠졌던 려연리에게 전량의 형인 전휘의 진심어린 사랑이 빛이 되여주었다. 행복에 도취돼 미래를 꿈꾸던 려연리와 전휘, 하지만 하늘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려연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전휘는 려연리에 의해 무참히 망가지고말았다…       1985년, 섬서성 위남시 합양현에서 태여난 려연리는 11살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간후 아버지가 재혼하는 바람에 계모의 눈치밥을 먹으며 성장했다. 2007년, 위남직업기술학교를 졸업한 려연리는 서안의 한 화학공장에 판매원으로 취직했고 얼마 안돼 전량을 알게 되였다. 그해 11월,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이듬해 9월에는 결혼등록도 하지 않은채 예쁜 딸을 낳았다. 세 식구는 미래를 동경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9년 4월, 전량이 급작스레 마음이 변하면서 다른 녀인과 결혼을 서두르는 바람에 려연리는 하루아침에 락동강오리알신세로 돼버렸다. 전량의 어머니 조문영은 전량에게 다른 녀자가 생겼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그녀더러 하루속히 다른 남자를 찾아 시집을 가라고 권고했다.       “그렇게 쉽게 헤여질수 없어요. 우리 사이에는 딸이 있어요.”       “네가 이런다고 전량이 다시 너의 곁에 돌아올줄 아느냐?”       려연리는 종적을 감춰버린 전량을 만나기 위해 전량의 부모집에 얹혀살기로 했다. 아들이 다른 녀인과 결혼을 다그치는 판에 려연리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집에 묵고있으니 전량의 부모는 려연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5.1절이 되자 함양에서 막일을 하던 전량의 친형 전휘가 휴가차 집에 돌아왔다. 전량보다 세살 이상인 전휘는 동생과 려연리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나서 부모를 나무람했지만 오히려 된꾸중을 들었다. 리유인즉 전량이와 결혼할 녀자 풍청청은 당지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부자집 외동딸이고 풍청청의 아버지는 결혼후 막대한 사업을 전량에게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는것이다.        “려연리에게 미안한짓임을 잘 알지만 전량의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도 어쩔수 없구나. 효도하는셈치고 너도 이쯤에서 눈감아주      렴.”       부모의 말에 전휘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꿔온 보리짝신세가 돼버린 려연리모녀의 처지가 내심 안스러웠던 전휘는 동생을 대신해 이들을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려연리는 그런 전휘가 고마울따름이였다. 큰아들이 려연리를 각별하게 대하는 모습을 주의깊게 살피던 조문영의 뇌리에 문뜩 좋은수가 떠올랐다.       (전휘와 려연리를 배필로 무어주면 전량은 더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우리 손녀도 낯선 사람보다는 큰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는것이 좋지 않을가?)       조문영은 전량을 찾아 자신의 뜻을 전했다. 전량도 흔쾌히 동의했다. 동생뿐만아니라 부모들까지 옆에서 동을 다는 바람에 전휘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려연리처럼 착하고 심성이 바른 녀인이라면 그의 사랑을 남김없이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지만 필경 동생과 미래를 약속했던 녀인이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날 저녁, 조문영은 려연리를 찾아 이같은 결정을 전하면서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당신들끼리 나를 마음대로 주고받을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그렇게 싸구려물건이 아니예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잘 고려해보오. 연리만 동의한다면 우린 집문서와 재산을 모두 연리에게 주겠소.”       려연리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며칠후, 전휘가 그녀를 찾아 쑥스러운듯 말문을 열었다.        “우리 부모의 말을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오. 내가 어찌 연리같은 녀인을 감히 넘볼수 있겠소. 걱정하지 마오. 난처하게 굴지 않을테니깐.”       순간 려연리는 눈앞의 순박하고 착실한 전휘로부터 따스한 온정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전휘라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녀는 점차 전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며칠후, 전휘가 려연리를 찾았다.        “연리, 계속 여기에 눌러있는것은 방법이 아니요. 기분전환도 할겸 나와 함께 려행을 떠나기요.”       려연리는 두말없이 전휘의 뜻에 따랐다. 전휘와 려연리는 락양과 삼문협 등지를 전전하면서 려행을 즐겼다. 하지만 전휘는 려연리와 시종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며칠후 려연리는 전휘와 함께 자기의 집으로 갔다. 전량과 함께 살던 집이였다. 7월초의 어느날,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던 려연리는 도중에 갑작스레 물이 끊어지는 바람에 다급히 전휘를 불렀다. 전휘는 인차 물을 끓여 려연리의 머리를 마저 감겨주었다. 풋풋한 녀인의 육체가 얇은 잠옷사이로 보일락말락 전휘를 유혹했다. 전휘는 자신의 감정을 더이상 통제하지 못한채 와락 려연리를 품에 안으며 사랑을 고백했다. 려연리도 기다렸다는듯이 얼굴을 붉히며 전휘의 품을 파고들었다… 려연리는 자신의 행복이 꿈만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영원한 행복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행복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09년 12월, 출세욕에 눈멀었던 전량과 풍청청의 결혼이 결국 파탄되면서 모든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던것이다. 아버지가 전휘에게 사실의 자초지종을 알려주면서 말했다.        “알고보니 풍청청이가 사귄 남자들이 한두명이 아니라더구나. 온순하고 착한 려연리와는 대조도 안되지…”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우며 전휘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전휘는 머리속이 삼검불처럼 헝크러졌다. 아버지의 숨은 말뜻을 알수 있었던것이다.        “아버지 걱정마십시오. 저와 연리는 아무사이도 아닙니다. 그동안 처지가 딱해서 도와줬을뿐입니다. ”       전휘의 말에 식구들은 서로를 번갈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밤, 전휘는 실면했다. 이미 려연리에게 모든 감정을 쏟아부었는데 이제 와서 려연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동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 전휘는 결심을 굳힌듯 려연리에게 헤여질것을 요구했다.        “미안하오, 연리. 우리 헤여지기요.”       “네? 무슨 말이예요? 저한테 왜 이러는거예요?”       전휘는 전후경과를 그녀에게 들려주면서 다시 전량과 재결합할것을 부탁했다. 려연리는 울면서 행악질했다.        “당신도 저를 물건취급하는거예요?”       “그런게 아니요. 나는 형이니깐 동생에게 뭐든 양보해야 한단 말이요.”        “듣기 싫어요. 더이상 꼴보기 싫으니깐 썩 물러가세요.”       전휘가 묵묵히 떠날 준비를 하자 려연리가 울며 애원했다.        “가지 마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예요. 당신이 떠난다고 제가 다시 전량의 곁으로 돌아갈수 있을것 같아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예요.”        그녀의 눈물섞인 하소연에 전휘도 마음이 약해졌지만 동생이 하루종일 려연리모녀의 사진만 뚫어지게 보며 그리워하고있다는 부모의 말에 전휘는 동생이 안스러워 견딜수 없었다. 자기때문에 동생의 행복이 이뤄지지 못한다는 죄책감까지 밀려들었다.  며칠후, 전휘는 려연리가 잠든 틈을 타 미리 준비해둔 짐을 들고 조용히 집을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동생에게 자신의 행보를 알리면서 하루빨리 려연리를 찾아가 백배사죄하고 재결합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전량은 기다렸다는듯이 려연리에게 문자메세지(短信)를 보내 사과의 뜻을 전했지만 돌아온 답은 랭정한 거절이였다. 이에 안달아난 전량의 어머니는 큰아들 전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휘야, 연려가 너에게 철저히 마음을 접을수 있도록 네가 나서야겠다.”       전휘는 이불속에서 숨죽인채 오열했다. 2010년 1월 13일, 전휘는 사촌동생 리미려를 데리고 려연리를 찾아갔다.       “연리, 보다싶이 내가 새로 사귄 녀자친구요. 그러니깐 나를 잊고 어서 전량의 곁에 돌아가오.”       려연리는 전휘가 미운 나머지 복수할 결심을 굳혔다. 14일 아침, 려연리는 시장에서 몰래 쥐약을 사온 뒤 전휘에게 전화했다.        “전휘씨, 새로 사귄 녀자친구와 함께 점심에 우리 집에 오세요. 함께 식사합시다. 마지막 부탁이예요.”       오후 5시경, 전휘와 리미려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려연리의 집에 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식사를 하던 전휘와 리미려는 얼마 안돼 복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뒤늦게야 덜컥 겁이 든 려연리는 120구조전화를 건 뒤 아기를 안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리미려는 구급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었고 전휘는 신체가 건강했던 덕에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소뇌가 엄중하게 손상되는 바람에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시신경이 손상되면서 시력이 급격히 저하돼 앞을 분별할수 없을 정도로 되였다. 려연리는 이튿날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뒤늦게 병원에 달려온 리미려의 부모는 딸애의 차거운 시신앞에 서 정신을 잃었고 전휘의 부모는 아들의 참담한 현실앞에서 통곡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전량 역시 심한 자책에 시달렸다.        2010년 12월 1일, 서안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고의살인죄로 피고인 려연리를 사형, 집행유예 2년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했다. (문장속 려연리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가명임) 《지음》
184    허위적인 라체사진에 목숨잃은 녀대학생 댓글:  조회:8404  추천:0  2011-12-31
      2011년 2월의 어느날 오후, 사천성 면양시의 한 주민집에서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신속히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속에서 한 녀인의 시체를 들어냈다. 숨진 녀인은 사천성 모 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19살난 대학생 리위였다. 그녀는 하반신이 발가벗겨진채 신체곳곳에 칼자국과 둔기에 맞은 피자국이 남아있었고 화재현장에도 대량의 피자국이 남아있었다. 경찰들은 리위가 거주하는 아빠트에 대해 주밀한 조사를 진행하던중 리위가 거주하던 바로 아래층인 5층집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계단과 마주한 유리창문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던것이다. 계단의 불빛이 워낙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수 없는 크기였지만 그 구멍으로 리위가 매일 오가는 계단을 훤히 내다볼수 있었다. 5층에는 소리견이라 부르는 남자가 살고있었는데 리위와 동갑이였다. 경찰들이 소리견의 집문을 수차 두드렸지만 기척이 없었다. 강제로 문을 뜯고 들어가보니 놀랍게도 실내에는 군데군데 피자국이 찍혀있는데다가 바닥에는 흉기로 짐작되는 뻰찌와 피묻은 식칼이 덩그러니 버려져있었다. DNA조사를 통해 흉기에 묻은 피자국과 살해현장에 남겨진 피자국이 완전히 일치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하지만 소리견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며칠뒤 소리견은 끝내 법망에 걸려들었고 드디여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졌다…       약 한달전, 리위가 갓 6층에 이사를 오자 소리견은 리위에게 무척 관심이 생겼다. 이쁘장한 리위의 모습에 혼을 빼앗긴 소리견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해 계단 맞은켠의 유리에 작은 구멍을 뚫고 리위가 드나드는것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소리견의 성이 찰리가 만무했다. 그는 야밤삼경에 리위의 아빠트를 몰래 엿볼 꿍꿍이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들이 거주하고있는 아빠트는 옛날식 아빠트였기에 도적방지란간도 헐망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리위가 거주하고있는 아빠트는 오랜 집이라 볼품없이 낡고 수리해야 할 곳도 많았는데 화장실쪽의 란간은 녹이 쓸대로 쓸어 살짝 다치기만 해도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생기군 했다. 밖에 있는 수도관은 마침 리위가 사는 아빠트창문가에 있었기에 수도관을 타고 손쉽게 6층으로 올라갈수 있었다. 어느 깊은밤, 이러한 지형을 이미 잘 파악하고있었던 소리견은 창밖에 있는 수도관을 타고 순조롭게 6층으로 기여올라간 뒤 헐렁해진 란간을 살짝 옆으로 밀어내고 리위의 집앞 베란다에 올라섰다. 마침 베란다로는 리위의 집 화장실을 훤히 들여다볼수 있었다. 리위는 평소 늦은 밤까지 인터넷에 접속하고 늦게야 샤와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는 소리견의 범행에 편리를 제공해준셈이 되였다. 그날 밤, 리위의 희디흰 알몸을 처음 본 순간에 소리견은 하마트면 6층에서 미끌어 떨어질번했다. 눈앞에서 생생히 살아숨쉬는 백옥같은 녀인의 알몸을 엿보면서 소리견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번 엿보기를 시작으로 소리견은 사흘이 멀다하게 수도관을 타고 6층으로 올라가 리위의 목욕하는 모습을 엿보군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어느날, 샤와중 갑작스레 몸을 돌린 리위는 눈한번 깜짝않고 자신의 라체를 엿보고있는 소리견을 발견했다. 리위는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에서 뛰쳐나갔다. 놀라기는 소리견도 마찬가지였다. 재빨리 자신의 방에 돌아온 소리견은 리위가 제보할가봐 겁이 나 아예 간단하게 짐을 꾸려가지고 친구의 집으로 도망가버렸다. 리위는 두려움에 혼이 빠질 지경이였다. 그동안 인터넷을 통해 류사한 일에 대해 많이 듣고 보았지만 정작 자신한테 그런 일이 발생하자 당황함을 감출수 없었다. 특히 녀학생들의 알몸을 몰래 촬영한 뒤 인터넷에 띄워 망신을 주는 불량배들이 많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던 리위였기에 더욱더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의 알몸사진도 언젠가 인터넷을 도배하는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온몸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리위는 인터넷 QQ에 접속한후 QQ친구들에게 자신의 조우를 친구의 조우라 설명하고나서 해결책을 물었다. 친구들은 분분히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들중에는 인차 제보해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사적으로 해결하는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 며칠동안 리위가 얼마나 심한 고민에 모대겼는지는 사후에 발견된 그녀의 일기장에서 충분히 알수 있었다. 경찰들이 리위의 불로그(博客)에서 비밀의 일기 한장을 발견했던것이다.       (류망, 망나니자식, 그놈은 오래전부터 계획했을거야. 그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그놈은 꼭 나의 라체사진을 인터넷에 퍼뜨릴거야. 부모와 친구들이 보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조언씨가 이 일을 알게 되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가?…)       며칠후 남자친구 조언이 외지로 출장가자 아빠트에 홀로 있는것이 두려웠던 리위는 학교기숙사로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날밤, 리위는 친구들에게 짐짓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듯 또다시 라체사진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친구들은 만장일치로 라체사진이 인터넷에 류포되기전에 막아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며칠동안 아무런 동정이 없자 소리견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간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구멍을 통해 리위의 동정을 살폈지만 리위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였다. 소리견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2월의 어느날, 고향에 돌아가 설을 쇠고 다시 세집에 돌아온 소리견은 급촉하게 문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리위였다. 소리견은 삽시에 잠기가 확 가시면서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리위는 평소의 도도한 모습이 오간데 없었다. 그녀는 소리견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날, 제가 샤와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혹시 사진을 찍었나요? 제발 소문내지 말아주세요.”       그제야 소리견은 며칠간 리위가 잠잠했던 리유를 알수 있을것 같았다. 소리견은 마음속의 흥분을 애써 감추며 오히려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소리견의 표정에 리위는 더욱더 애가 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소리견이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사진말이요? 물론 찍었지. 리위가 하는걸 봐서…”       리위는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소리견은 인터넷 색정사이트(色情 站)에 접속해 지루함을 달랬다. 저속한 환상에 빠져들어있을 즈음 마침 정전이 되는 바람에 기분이 확 잡친 소리견은 옥상에 있는 스위치가 내려졌나 확인하기 위해 웃층으로 올라갔다. 6층에 도착하자 소리견은 리위의 집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직감적으로 리위가 샤와하고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소리견은 리위의 육감적인 몸매가 눈앞에 얼른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흥분을 느꼈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도라이바와 뻰지를 가지고 다시 6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숙련된 솜씨로 리위집의 자물쇠를 연 뒤 집안에 들어섰다. 살금살금 욕실어구에 다달은 소리견은 반쯤 열린 문틈사이로 리위의 알몸을 몰래 감상하기 시작했다. 늘씬한 다리와 탄력넘치는 리위의 몸뚱이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기 힘들었던 소리견은 어느결에 저도 몰래 욕실문을 열고 들어섰다. 소리견을 발견한 리위는 경황실색한 나머지 다급히 알몸을 가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긴…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어서 썩 나가지 못해요?”       “왜? 재간이 있으면 나를 죽여보오.”       말을 마친 소리견은 주방에 달려들어가 식칼을 꺼내들고 돌아와서는 리위의 가까이에 놓으면서 징글스런 웃음을 지었다.        “리위가 허락하지 않으면 라체사진을 퍼뜨릴거요.”       소리견의 말이 채 끝나기 바쁘게 리위는 식칼을 들어 소리견을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하지만 소리견이 인차 몸을 피하는 바람에 손가락에 작은 상처만 입었다. 화가 난 소리견은 와락 덮쳐들어 리위의 손에서 식칼을 빼앗은 뒤 그녀를 향해 마구 휘둘러댔다. 리위는 얼마 안돼 욕실바닥에 쓰러지고말았다. 시간은 오후 3시를 넘고있었다. 소리견은 꼼짝않는 리위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온몸이 피투성이로 된 리위의 몸뚱이를 보는 순간 소리견은 야릇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리위를 간음하려고 달려들었지만 정작 성공하지 못한채 한바탕 리위를 성희롱했다. 소리견은 주방에서 가스통을 들고나온 뒤 스위치를 켜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점점 세차게 번져져가자 소리견은 황급히 집에 돌아가 피묻은 옷을 갈아입은 뒤 삼촌에게 전화해 약과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신강에 있는 친척집에 피신갈 심산으로 신강행기차에 올라탔다…하지만 그의 죄행은 결코 감출수 없었다. 2011년 3월, 감숙성의 한 세집에서 경찰들은 범죄혐의자 소리견을 성공적으로 나포했다. 소리견을 기다리는것은 법의 엄한 징벌뿐이다.        한편,  본 사건을 계기로 경찰들은 광범한 네티즌들과 청소년들에게 류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맹목적인 대처보다는 가장 빠른 시간내에 경찰에 제보해 상응한 처벌을 받게 하는것이 옳바른 선택이라고 말했다. 《지음》
183    잘못된 만남이 빚어낸 교훈 댓글:  조회:5781  추천:0  2011-12-26
      2010년 8월 1일, 항주의 한 호텔에서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고있었다. 6명의 남자들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알몸인 한쌍의 련인을 둘러싸고 성행위를 강요했다.남녀는 치욕과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고 6명의 남자들은 야욕을 억제하지 못한채 일제히 달려들어 알몸뚱이인 녀인을 한바탕 희롱했다…얼마후 사건의 주모자와 그의 일당이 나포되였다. 이 모든 사건의 주모자는 려배라고 부르는 녀인이였고 피해자는 그녀의 전남자친구 허항과 그녀의 학창시절 딱친구 우군매였다. 세 사람사이에는 구경 어떤 사연들이 숨겨져있었던것일가?       2007년 8월, 대학시험에서 락방된 려배는 항주시 문삼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기업가로 명성이 뜨르르한 아버지 려엄강의 장사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려매는 취직한지 얼마 안돼 10여개의 고정도매상을 확보하면서 수중에 100만원의 자금을 움켜쥐게 되였다. 2008년, 려배는 절강예술학원을 졸업하고 항주의 한 회사에서 일하고있는 허항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였다. 유모아적이고 남자다운 기질이 다분했던 허항에게 려배는 자신의 모든 사랑을 바쳤다. 2009년 2월, 허항은 려배의 도움밑에 광고회사를 세웠다. 광고회사는 개업과 동시에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2009년 9월말의 어느날, 려배는 고중동창생 우군매의 전화를 받았다. 대학시험에 실패한후 고향의 한 복장회사에 취직했고 남자친구까지 사귀며 행복한 생활을 동경하던 우군매는 남자친구의 갑작스런 변심때문에 고통을 호소하고있었다. 려배는 우군매를 위로하면서 차라리 항주에 와서 새롭게 시작하라고 권유했다. 10월 7일, 우군매는 려배의 뜻에 따라 항주에 왔고 려배의 거처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다. 려배는 우군매를 허항의 광고회사에서 도편제작하는 일을 하게 했다. 려배는 우군매의 생활을 이모저모 관심해주었고 생활비까지 빈틈없이 해결해주었다. 그런 려배에게 우군매는 거듭 감사함을 표했다. 하지만 그것이 한차례 잘못된 만남이 될줄 려배는 미처 알지 못했다. 우군매와 허항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싹이 꿈틀거리고있었던것이다.  부지런하고 온화한 성격이였던 우군매는 얼마 안돼 회사업무에 익숙해졌고 따라서 허항과도 어색함을 벗어나 허물없는 사이로 되였다.       “우군매와 함께 있으면 너무 편안하고 기분이 좋소.”       허항의 의미심장한 말에 우군매의 얼굴은 수수떡처럼 붉게 상기되였다. 대화로서는 마음을 나누기 부족했던 두 사람은 결국 인터넷가상공간에서 QQ를 통해 더욱더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허항은 간혹 키스, 포옹 등 친밀함을 뜻하는 문자와 그림을 우군매에게 띄웠고 우군매는 그런 허항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끼면서 행복에 젖어들었다. 허항은 날이 갈수록 우군매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리상형임을 깨달았다. 2010년 5월중순, 려배가 상해로 출장가자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한 뒤 려배의 집에서 영화감상에 빠졌다. 감동적인 장면에서 우군매가 눈물을 보이자 허항은 기다렸다는듯이 우군매를 품에 안아주면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날 밤, 허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후, 우군매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려배가 우리사이를 눈치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나는 려배와 함께 있을 때면 웬지 모르게 구걸받는 느낌이 든단 말이요. 려배와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수 없었소. 나와 려배는 아직 결혼전이니깐 얼마든지 선택할 권리가 있소.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소.”       려배가 상해에서 돌아오자 우군매는 려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려배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허항과 우군매의 위험한 동거가 시작됐다. 늘 이런저런 핑게로 만남을 회피하는가 하면 어쩌다 만나도 안절부절 못하는 허항을 지켜보면서 려배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2010년 7월 3일, 려배는 또한번 허항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하지만 허항은 곱대거리를 해야 한다며 랭정하게 거절했다. 우군매에게 전화를 했지만 우군매 역시 같은 구실로 거절했다. 덜컥 불길한 예감이 든 려배는 지체없이 허항의 광고회사로 달려갔다. 려배는 회사의 맞은켠에 몸을 숨긴 뒤 허항의 동정을 살폈다. 얼마후,  다정하게 마주보며 회사문을 나서는 우군매와 허항의 모습이 려배의 시야에 안겨들었다. 두 사람이 허항의 오토바이를 타고 자리를 뜨려하자 려배는 지체없이 택시에 올라탄 뒤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10여분후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우군매의 세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려배는 배반당한 느낌에 눈물이 솟아올랐다. 려배는 우군매가 살고있는 집문을 미친듯이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참뒤 드디여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허항이 려배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항씨, 당신이 어떻게 나를 배반할수 있나요?”       “미안하오, 려배. 사람의 감정이란 어쩔수 없는거요. 우리 헤여지기요.”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는거예요? 제가 우군매보다 못한게 뭔가요?”       “다 나의 잘못이니깐 나를 원망해주오. 대신 우군매는 욕하지 말아주오.”       마음이 상할대로 상한 려배는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혼자 술을 마시며 밤새 통곡했다. 허항을 잊으려고 무등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려배는 자신이 허항을 얼마나 사랑하고있었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려배는 허항을 다시 빼앗아오리라 다짐했다. 2010년 7월 13일, 려배는 우군매를 불러냈다.        “너를 용서해달라고 했잖아. 용서해줄테니깐 네가 주동적으로 허항씨와 헤여져줄래?”       “려배야 허항씨는 널 사랑하지 않아. ”       “너만 물러나준다면 허항씨는 내곁에 꼭 다시 돌아올거야. 군매야,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나의 부탁을 들어주면 안되겠니?”       우군매는 려배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시종 허항과의 관계를 끝내려고 하지 않았다.       려배의 사정을 알게 된 친구들은 분분히 격분을 표시했다. 그중 류동이라 부르는 친구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려배, 걱정마오. 내가 친구들을 불러다가 두 사람을 혼뜨검내줄게.”       8월 1일 오후 4시경,  려배는 호텔에 방을 잡은 뒤 허항과 우군매를 불러냈다. 그리고는 다시 류동에게 문자메시지(短信)를 보내 장소를 알려주었다. 려배는 마지막 한가닥 희망을 품고 허항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자살한다고 하면 내곁에 다시 돌아오겠어요?”       “려배, 왜 나를 이리 못살게 구오?”       “당신들이 먼저 저한테 몹쓸짓을 했잖아요.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거예요.”       얼마뒤 류동을 비롯한 6명의 사내들이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왔다. 황승이 허항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허항은 악 소리와 함께 저만치 뿌리워나갔다. 황승이 과일칼을 흔들면서 일행을 돌아보고 말했다.       “얘들아, 번갈아가면서 저년의 귀쌈을 갈겨라.”       로량과 오개가 달려들어 우군매의 뺨을 번갈아때렸다. 우군매가 울음을 터뜨리자 로량이 위협조로 뇌까렸다.       “계속 울면 입을 아예 막아버리겠어!”       우군매가 울며 사정했지만 려배는 랭정하게 뿌리쳤다. 류동이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량심없는 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처벌은 발가벗기고 망신을 주는거야. 또다시 다른 사람의 애인을 빼앗을 엄두를 못내게 말이야.”       우봉뢰가 달려들어 우군매의 옷을 와락와락 벗겨냈다. 우군매는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우악스러운 남자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얼마 안돼 알몸이 되였다. 허항이 눈물을 흘리며 려배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애원했지만 려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허항과 우군매의 나약한 모습에 류동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남의 눈을 피해 그런짓을 하지 말고 차라리 오늘 우리 앞에서 한번 사랑을 나눠보거라. 오래간만에 무료로 구경 좀 하자꾸나.”       일행이 맞장구를 쳤다. 려배는 말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려배가 자리를 피하자 류동일행은 더욱더 기세등등하게 두 사람을 몰아세웠다. 류동은 허항의 옷까지 홀랑 벗겨낸 뒤 강제적으로 허항을 우군매의 몸우에 엎드리게 했다. 허항이 주춤하자 또다시 한바탕 발길질이 이어졌다. 허항은 울며겨자먹기로 우군매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눈한번 깜박일세라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류동일행은 점차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허항이 시종 머뭇거리자 류동은 아예 허항을 한켠에 밀어낸 뒤 직접 나섰다. 그러자 모두들 우르르 달려들어 희희덕거리며 우군매를 희롱했다. 우군매는 치욕에 못이겨 기절하고말았다. 한바탕 우군매를 희롱하고난 뒤 류동은 우군매와 허항에게 절대 제보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황망히 호텔방을 빠져나갔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고있는 우군매를 보면서 허항은 내심의 죄책감을 억누를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핸드폰을 꺼낸후 110전화번호를 눌렀고 려배일행은 얼마 안돼 차례로 나포되였다. 이들을 기다리는건 법의 엄한 징벌뿐일것이다. (문장속 인물들은 모두 가명임) 《지음》
182    누가 살인 흉수인가? 댓글:  조회:5449  추천:1  2011-12-26
누가 살인 흉수인가?                                                                                                       ○ 리성욱       리씨와 후씨는 40대 중반의 중년부부였다. 개혁개방의 흐름따라 그들 내외는 너무 일찍 일자리를 잃고 사회양로보험에 참가하였다. 그후 그들은 대부금을 내여 택시차 한대를 사놓고 밤낮없이 서로 교대해가면서 택시차를 몰았다. 수입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남편인 리씨는 일욕심이 많아서 택시차를 모는외에 짬만 있으면 밖에 나가 닥치는대로 일하였다.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그들 부부는 아주 금슬좋게 지냈다.     2008년 12월초순의 어느날 저녁이였다. 리씨는 예전과 같이 낮일을 좀 찾아 하고는 일찌기 집에 와서 저녁밥을 다 지어고 안해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헌데 진작 집에 돌아올 사람이 오늘따라 늦도록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들애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배고픈지 밥을 먹자고 아버지에게 졸라댔다. 리씨는 아들에게 먼저 밥을 챙겨주고는 안해한테 전화를 걸었다. 헌데 안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웬일일가? 이상한 생각이 든 리씨는 련속  안해의 핸드폰번호를 눌렀으나 안해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것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안해는 여태껏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적이 없었고 또 일이 있어서 늦을 때에는 꼭 집에다 전화로 알려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것이 아닐가? 장도운행중인가 아니면 차사고?…        리씨는 근심으로 가슴이 막 갑갑해났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면목을 아는 택시차운전사들에게 안해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모두들 오후에도 차를 모는것을 보았다는것이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리씨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났다. 자정이 거의 되여도 안해의 소식이 없자 리씨는 생각끝에 공안파출소에 찾아가서 실종신고를 하였다.           당직경찰은 인차 이 정황을 소장에게 보고하였고 소장은 다시 현공안국장에게 보고하였다. 공안국장은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경찰력을 집중하여 먼저 사람과 택시차의 행방을 찾아낸후 사건조사에 들어갈것을 지시하였다. 한편 텔레비죤, 라지오 등 선전매체를 통하여 광범위하게 선전함으로써 군중들로 하여금 사건해명에 협조해나설것을 바랐다.        이튿날 오전 10시경, 경찰들이 한창 사건수사에 바삐 돌아칠 때 군중제보가 들어왔다. 바로 안도현 명월진 용산촌 앞 채석장부근에서 택시차 한대와 한 녀인의 시체를 발견하였다는것이였다.       사건현지에 경찰들이 들이닥치였다. 세밀한 조사를 거쳐 사망자는  리씨의 안해 후모이고 택시차 역시 그들의것임이 확인되였다. 택시차는 아무런 손상이 없는데 차안으로부터 차밖에까지 피흔적이 있었다. 사망자 후모의 허리에는 피로 물든 칼자국이 있었고 머리는 큰 돌덩이에 맞아서 두개골이 빠개졌고 뇌수가 밖으로 터져나와있었다. 후모의 호주머니속에는  핸드폰이 켜진 그대로 있었고 손가락에 낀 반지와 목에 건 목걸이도 그대로 걸려있었지만 현금만은 1전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살인사건은 어딘가 이상한데가 있었다. 차를 랍치한것도 아니고 금반지나 목걸이, 핸드폰 등 값진 물건은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오로지 돈만 가져간것을 보아 재물강탈 같지 않았다.       경찰들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애정문제살인? 보복살인? 그리고 살인흉수는 왜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서 살인하지 않고 하필이면 마을근처에 와서 살인을 하였을가? 이밖에 흉수는 왜 시체를 훼손하지 않고 차도 그대로 두었을가?        의문되는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도대체 누가 무엇때문에 살인했으며 또 살인흉수는 누구인가?        상급공안부문에서는 이 사건을 세밀히 조사하고 빠른 시일내에 살인흉수를 붙잡아낼것을 지시한 동시에 기술일군들도 보내오고 사건수사지휘부도 내왔다. 지휘부에서는 이번 사건의 특수성과 택시차 살인사건의 전례를 보아 수사중점을 돈을 빼았는데만 목적을 둔 20세정도의 청소년들에게 두고 조사하기로 하였다.       바로 그 다음 날12월4일 오후에 구룡공안파풀소 홍부소장과 김경관은 지휘부의 정찰요구에 따라 PC방, 장마당안의 간이음식매대, 사우나, 려관등 여러 곳을 은밀히 정찰하던중 흉수의 단서를 쥐게 되였다.        한 PC방 조사에서 몇달째 이 PC방에 다니는 한 남자애가 매우 수상하다는것을 알아냈다. 키가 약 170메터쯤 되고 나이가 어리며 옷도 허술하게 입은 그 남자애는 자주 찾아와서 게임을 놀고 가는데 본 시내안의 사람같지 않고 시교외의 어느 농촌 마을에서 사는것 같다는것이였다. 그는 여직껏 컴퓨터게임을 외상으로 논적이 없었는데 요즘에 와서는 련 며칠간 그냥 외상으로 게임을 노는가 하면 돈이 딸리는지 점심은 거의 먹지  않는다는 정황도 장악하였다. 그애가  PC방을 떠난 시간은 대개 전날 오후 2시경, 이날에는 놀러오지 않았다.       다른 수사소조에서도 나이가 20살정도 되고 보통키인 남자애가 어제 오후 2시 30분경에 현공상은행 부근에서 택시차에 앉았다는것, 또 어제 오후 3시전에 후씨녀인이  택시차에 한 남자애를 싣고 채석장쪽으로 가는것을 보았다는 목격자를 찾았다.       지휘부에서는 일련의 정보를 분석한후 살인현장 부근마을에서 더욱 심도있는 조사를 하는 한편 수사망을 점차 용산촌쪽으로 집중시켰다. 이윽고 살인흉수의 정체가 들어났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지휘부에서는 제일 믿음직하고 민첩하고 용감한 경찰들을 조직해가지고 흉수의 거동을 계속 은밀하게 감시하는 한편 적합한 나포시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날 밤 8시 30분경에 살인혐의범 박모는 자기 집안에서 경찰들에 의해 나포되였고 또 철같은 인증과 물증앞에서 죄행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박씨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난  박모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슬하에서 모든 집안사람들의 총애를 혼자서 받으면서 곱게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제대군인이였는데 부대에서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생산대의 경운기 운전사로 되였다. 지금의 농민들은 세월이 좋아 거의 집집마다 경운기나 다른 농기구들을 한두대씩 갇추고 살지만 지난 20세기 70년대 집체화생산을 할 때에는 경제상황이 좋다는 생산대에만 경운기가 겨우 한대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하기에 당시 경운기를 모는 전직운전사라고 하면 오늘날 큰 회사의 회장을 모시고 다니는 전용차운전사와 같았으며 걸어다닐 때에도 배를 내밀고 팔자걸음을 걸었는가 하면 남들의 앞에선 턱을 쳐들고 다니면서 우쭐하는 세월이였다.        박모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수준급의 사람이였다. 하여 온 마을 청년들은 모두 다 그를 부러워하였고 그를 따라다니는 처녀들도 한둘이 아니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박모의 아버지는 의외의 사고로 그만 한쪽손을 잃게 되였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경운기 운전은커녕 웬만한 농사일도 제대로 할수 없게 되였다. 게다가 80년대에 들어서자 농업생산 도급제도가 실시되면서 농촌집체화 혜택조차 받을수 없게 되였다. 오로지 자기 두손으로 벌어 먹어야 했다. 장애자로 된 그의 아버지의 신세는 말이 아니였다. 그렇게 많던 혼사말도 들어오지 않았고 좀 괜찮다는 녀자는 아예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늦게야 겨우 만나서 결혼했다는 녀자는 비록 장애자는 아니였지만 집살림을 남들처럼 알뜰하게 꾸리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살림살이가 구차한것은 물론 자기집 밭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 용산촌에서 제일 빈곤한 호로 되여버렸다.        이런 가정에서 나서 자란 박모는 어려서부터 늘 자기는 남만 못하다는 생각뿐이였고 또 남들이 자기를 비웃고 업신여기는것 같아 마을 애들과도 접촉하기 싫어했다. 박모는 부모를 잘못 만난것이 원망스러웠고 자기네를 업신여기는 마을사람들이 미워났다. 그는 항상 자기가 어른이 되고 힘만 세다면 언젠가는 한번 크게 분풀이를 실컷 하고싶었다.       박모가 5살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40대미만의 나이에 병으로 불쌍하게 세상을 떠났다. 비록 장애자였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이 집안의 기둥이였었다. 헌데 이제와서 세대주를 잃은 그의 집 형편은 더 말할나위없이 어렵게 되였다. 먹고 사는 돈외에도 기타 여러가지 많은 비용들이 몹시 딸렸다. 나라에서 구제금이 내려오고 친척과 마음씨 착한 이웃에서 아무리 도와줘도 돈은 언제나 턱없이 부족하였고 생활은 갈수록 쪼들렸다. 더는 여기서 살아갈수 없게 된 박모의 어머니는 곁사람들의 권고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어린 아들을 친척집에 맡겨 두고는 돈벌이 간다는 핑게로 결혼수속을  하고 먼 한국으로 떠나가버렸다. 나어린 자식을 집에 혼자 두고 멀리 떠나가는 그 어머니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그는 불쌍한 아들을 마지막으로 품속에 꽉 껴안고 오열했다. 기구한 운명만을 통탄하면서…       하늘에선 잔잔히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산천초목도 서러워서 비속에 푹 젖어가고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결국 가야 할 사람은 가고야말았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떠나가버리자 박모는 고아로 된셈이였다. 친척집에 얹혀산다고 하였지만 모든것이 불편하여 결국 박모는 제집에 나와서 혼자 살아가게 되였다. 허나 그의 손에는 단돈 1전도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이젠 학교에 갈수도 없었고 아예 가고싶지도 않았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고파 죽을 지경이였고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해 춥기만 하였다. 밤이면 홀로 있는 시커먼 방안이 무섭고 싫기만 하였다. 그때마다 나어린 박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찬 구들우에 드러누워서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만 울면서 애타게 불렀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런 나날들이 나어린 아이에게는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였는지 어른들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것이다. 그런 나날들이 길어지면서 박모에게는 점차 정신적질환이 찾아오게 되였고 심리상의 변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허나 그의 곁에는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가까이 곁에 있다는 그의 고모나 삼촌들도 드문드문 그를 찾아보기도 하고 보살펴주기도 했다지만 어찌 제 친부모처럼 잘해줄수 있었으랴!        박모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싶지 않았고 누가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타이르는 말도 죄다 쓸데없는 잔소리로만 들리였다. 삼촌도 고모도 다 미웠고 말로만 걱정해주는 마을사람들도 싫어났으며 세상만사가 다 귀찮았다.        하여 그는 매일같이 자기 신세와 비슷한 애들과 휩쓸려다니면서 못된짓부터 배웠다. 어린 나이에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어른들앞에서도 담배대를 꼬나물고 다니는가 하면 남의 밭의 남새도 제것처럼 마음대로 따먹고 뽑아먹었으며 마음에 드는 물건만 보이면 거리낌없이 제집에 가져가기도 하고 애들과 무리지어 다니면서 싸움질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돈깨나 손에 좀 쥐면 무작정 시내 PC방에 찾아가 온종일 유희를 놀았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또 친척집들을 드나들면서 돈을 구걸하는가 하면 어머니가 부쳐주는 저그마한 생활비도 앞당겨 쓰기가 일쑤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돈이 너무나 그립고 수요되였다. 그렇다고 친척들이 제 친자식도 아니며 학교도 중퇴하고 건달짓만 하고 떠돌아다니는 그에게 매일과 같이 소비돈을 대줄수 있었겠는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친척들도 박모에 대한 관심이 점차 적어졌고 그저 못본체 내버려두었다. 그와 한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그저 수수방관하였고 혹간 당원들이 빈곤호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형식적으로 1년에 한두번씩 쌀이나 물건들을 모아서 가져다주었을뿐 평소에 박모가 무엇을 바라고 날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짓들을 하고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어데서 한 강도가 택시운전수를 죽인후 돈을 강탈해가지고 도망쳤다는 소문을 듣게 되였다. 매일 PC방에서 강탈과 살인을 하는 공포영화를 수없이 많이 보아온 그는 자기도 한번 영화에서처럼 모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하루 강아지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나어린 박모가 사람을 죽이고 돈을 강탈할 생각을 하고있을줄이야 누가 생각인들 했으랴!       2008년 12월 3일 오후 3시경, 박모는 택시차 운전수의 돈을 강탈할 마음으로 뾰족한 과일칼을 허리춤에 차고 명월구 시내안의 안도현공상은행부근 길옆에서 목표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미구에 녀자운전수가 모는 택시차 한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차를 불러세우고 녀운전수에게 자기가 급한 일이 있어서 채석장부근 용산촌에 가야 한다고 둘러댔다. 녀운전수가 쳐다보니 나이가 16, 7세 밖에 안되는 남자애라 딴 생각이 없이 차에 앉히고는 곧바로 채석장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박모가 차에 앉아 가만히 녀운전수의 거동을 살펴보니 자기를 경계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택시차가 채석장부근에 거의 다달았을 때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을길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때라고 생각한 박모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칼을 쑥 뽑아 녀운전수의 허리춤에 들이대며 마을앞 500메터 거리에서 차머리를 으슥한 골목길로 돌리라고 하였다. 예상외의 돌연사태에 깜짝 놀란 녀운전수는 그저 박모가 시키는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마을부근의 낡은 길로 들어가 으슥한 곳에 다닫자 박모는 칼을 휘두르며 돈을 내놓으라고 을러멨다. 돈 160원을 호주머니에 넣은 박모는 칼로 녀운전수의 옆꾸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는 차열쇠를 뽑아내고 칼에 찔려 허리도 펴지 못하는 녀운전수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급급히 자리를 뜨려던 박모는 녀운전사가 아직 죽지 않은것을 보고는 땅에서 큰 돌멩이를 찾아 집어들고 그 녀운전수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퍽! 두개골이 빠개져나갔다. 녀운전수가 숨진것을 확인한후  박모는 재빨리 살인현장을 떠나 가만히 마을로 들어갔다. 그는 제집에 들어간후 밤새 한번도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용산촌 마을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나어린 박모가 이렇게 끔찍한 살인사건을 빚어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것이다…       이튿날, 박모는 마을안의 상점에 가서 자기가 제일 사먹고싶었던 사탕과자들을 가득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실컷 먹었다. 그리고는 다음번 유희를 어떻게 재미있게 놀겠는가고 생각하면서 초저녁부터 일찌감치 꿈나라로 들어갔다가 불시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나포되였다.        이렇게 박모는 16살 새파란 나이에 죄인으로 전락되였다. [후기]       이 사건은 우리 신변에서 발생한 진실한 사실이다. 아직도 심사중에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적지 않은 독자들은 박모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되겠는지 궁금해할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아래에 미성년범죄란 어떤것이며 미성년이 지은 죄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17조에는 이렇게 규정되여있다. “형사책임년령이 만 16세인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응당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만 14세이고 만 16세가 되지 않은 사람이 고의살인죄, 고의상해로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거나 혹은 사망하게 한 죄, 강간죄, 강탈죄, 마약판매죄, 방화죄, 폭발죄, 독약투약죄를 지었을 때에는 마땅히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만 14세가 되였고 만 18세가 안된 사람은 마땅히 경하게 처리하거나 혹은 죄를 경한쪽으로 낮추어 처벌한다. 아직 만 16세가 안되여 형사처벌을 주지 않을 때에는 그의 집 부모 혹은 보호자에게 관리교육을 잘하도록 알려주고 필요할 때에는 정부에서 수용교양을 할수도 있다.”       이 사건은 다른 강탈사건과는 달리 박모가 단지 돈을 빼앗기 위하여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강탈죄만을 지었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박모는 자기가 지은 죄행을 감추기 위해 칼로 찌른후 아직도 살아있는 운전수를 다시 돌로 머리를 쳐서 죽게 하였기때문에 이것은 강탈죄외에 또 살인죄까지 지은것으로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263조에는 이렇게 규정되여있다. “강탈죄란 폭력, 협박 혹은 기타 방법으로 공(公)과 사(私)의 재물을 강탈하면 3년이상, 10년이하의 유기도형에 처하며 동시에 벌금처벌을 한다.       아래와 같은 상황중 한가지가 부합될 때에는 10년이상 유기도형, 무기도형, 혹은 사형에 처하며 동시에 벌급처벌 혹은 재산을 몰수한다.       1. 입실강탈.       2. 공공교통도구(公共交通工具)우에서의 강탈.       3. 은행 혹은 기타 금융기관 강탈.       4. 여러차례 강탈하였거나 혹은 거대한 액수의 강탈.       5. 강탈하면서 타인에게 중상을 입혔거나 혹은 죽였을 때.       6. 군대와 경찰로 가장하고 강탈하였을 때       7. 총을 들고 강탈.       8. 군사물자를 강탈하거나 위험방지, 재난, 재해 구제물자들을 강탈하였을 때.
181    녀자친구의 옛정부에게 목숨을 잃은 참극 댓글:  조회:6032  추천:0  2011-12-23
     1987년 흑룡강성 학강시에서 농민의 딸로 태여난 동영남은 할빈사범대학을 졸업한후 목단강시 한 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했다. 취직한지 한달만에 그녀는 2살 년상인 최개와 사랑에 빠졌다. 간부가정의 외아들로 태여난 최개는 이목구비가 번듯해 처녀들의 흠모를 받는 우수한 청년이였지만 동영남한테 푹 빠졌다. 동영남의 세집에 모기장이 없는것을 보고 손수 재료를 사다가 침대가에 모기장을 만들어주는가하면 여러가지 반찬들을 날라다주며 갖은 정성을 쏟아부었다. 이런 남자친구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동영남은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행복한 녀인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항상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다름아닌 옛 정부때문이였다. 바로 1년전에 대학졸업을 앞둔 동영남은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련속 실패했다. 그녀가 한숨을 짓고있을 때 친구가 원립지라고 부르는 전문지도원을 추천해주었다. 할빈시운전학교 지도교원인 원립지(38살)는 슬하에 5살짜리 아들을 두고있었고 안해와 별거중이였다.      운전지도가 시작되자 동영남은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 속다짐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붐비는 바람에 하루에 한번밖에 차를 만져보지 못했다. 그녀가 한창 속을 태우고있을 때 원립지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잠시 내 정부가 되여주면 운전면허는 물론 학비까지 면제해주겠소. 영남이 운전면허증을 따내는 날에 우리 관계도 끊나는거요.”      동영남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면허증을 따낼 간절한 마음때문에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활발한 동영남한테 홀딱 반해버린 원립지는 휴식날에도 그녀한테 운전기술을 가르쳐주었다. 2010년 5월에 “정부”의 세심한 지도하에 동영남은 순조롭게 운전먼허증을 따낼수 있었다.      2010년 6월에 대학교졸업이 눈앞에 닥쳐오자 동영남은 목당강으로 갔다. 목당강에서 그녀는 몇개 학교에서 면접을 본후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가 어찌 짐작했으랴, “정부”관계를 끊은 원립지가 뒤쫓아올줄을… 그녀한테 깊이 빠져버린 원립지는 “정부”관계를 계속 유지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제야 동영남은 경솔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일시적인 유혹에 사로잡혀 유부남과 불정당한 관계를 가졌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했다. 그녀는 다시 찾아오면 그의 안해한테 이 일을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랬지만 원립지는 “영남이한테 남자친구가 생기면 곧 떠나겠소”라고 맹세했다. 영남은 그의 요구에 응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처럼 일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그후 1년동안 원립지는 하루가 멀다하게 그녀한테 전화를 걸어왔고 쉴새없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동영남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원립지를 떼버리기 위해 아예 핸드폰번호를 바꿔버렸다. 그러나 원립지는 영남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계속 련락을 해왔다. 겁이 난 동영남은 집에 들어서면 핸드폰부터 꺼버렸다. 동영남은 원립지를 피하는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최개와 사귀는것을 알면 원립지가 복수할가봐 겁이 났던것이다.      한편 최개는 녀자친구의 마음속 비밀을 알턱이 없었다. 달콤한 그들의 사랑을 “감시”하는 한쌍의 눈이 있을줄을 그가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최개는 항상 불안해하는 녀자친구를 위해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12월 9일에 동영남과 최개는 부모한테서 결혼허락을 받았다. 결혼날자가 다가올수록 동영남의 “마음속고통”은 깊어만갔다. 결혼후에도 원립지가 괴롭힐가봐 불안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남자친구한테 “비밀”을 털어놓을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수업을 마친 동영남이 핸드폰을 열어보니 그동안 받지 않았던 수십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또다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동영남은 구석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다름아닌 원립지였다.      “우린 이미 아무런 사이도 아니예요.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동영남은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동영남은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일이 있소?”      관심조로 묻는 남자친구의 말에 동영남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후에야 감정을 추스린 동영남은 “낮에 학생들과 생긴 마찰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최개는 “괜찮아질것”이라며 서둘러 녀자친구를 위안했다. 자상한 남자친구를 보며 동영남은 심한 자책감에 모대겼다.      2011년 1월 16일은 동영남의 생일이였다. 동영남은 남자친구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할빈시스키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동영남은 기쁜김에 남자친구와 부둥켜안고 수십장의 사진을 남겼다. 하루종일 신나게 노느라 녹초가 된 동영남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한편 최개는 기뻐서 녀자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과 영남의 QQ공간에 올렸다.      그런데 원립지가 그 사진을 보게 될줄이야. 그때까지 원립지는 동영남이 언젠가는 자신한테 돌아올것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2011년 2월 26일에 철저하게 깨여져버렸다.      그날 아침 새벽 5시에 원립지는 영남의 QQ공간에 들어갔다가 46장의 사진이 새로 오른것을 발견했다. 사진을 보려 했지만 비밀번호가 있었다. 원립지는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동영남의 신분증번호, 핸드폰번호…하지만 하나도 맞지 않자 원립지는 새로 바꾼 동영남의 핸드폰번호를 입력해보았다. 결과 사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영남과 영준한 남자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순간 원립지는 눈이 뒤집혀졌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짜고짜 동영남한테 전화를 걸었다.      “동영남, 감히 날 속이고 남자친구를 사귀는거야?”      낯익은 목소리에 동영남은 식은땀이 쫙 났다. 피곤한 나머지 엊저녁에 미처 핸드폰을 끄지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졌던것이다. 상대방이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최개도 잠에서 깨여났다.      동영남은 핸드폰을 꺼버릴수도 받을수도 없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소리쳤다.      “그래, 남자친구가 생겼어. 그런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대방은 “만나서 얘기하자”고 소리쳤다. 동영남은 황급히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때까지 모든것을 듣고있던 최개가 입을 열었다.      “영남이, 무서워마오. 내가 있잖소. 우리 함께 해결해보기요.”      남자친구의 넒은 아량에 동영남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최개는 녀자친구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대처방법을 강구해보자”고 다독였다.      바로 그때 원립지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영남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한테 네 라체사진이 있어. 날 만나주지 않으면 전부 인터넷에 올려버릴거야.”      순간 영남은 머리속이 하얘졌다.      (언제 라체사진을 찍었다는거야? 그럴리가 없어. 하지만 혹시 그게 사실이라면…)      순식간에 공포가 밀려온 영남은 결국 원립지와 만날것을 약속했다.      전화를 끊은 동영남은 사시나무떨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중성을 보아낸 최개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녀자친구를 위안했다. 한편 대책마련에 머리를 짰다.      그날 오후에 최개는 사회경험이 풍부한 딱친구 리신량을 불러 셋이서 원립지를 만나러 갔다.      오후 1시경에 셋은 약속대로 원립지의 세집으로 찾아갔다. 최개를 보는 순간 원립지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QQ에 올린 동영남과 최개의 다정한 모습이 생각나 삽시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원립지는 품속에 간직했던 과일칼을 뽑아들고 최개를 향해 돌진했다. 뾰족한 칼날이 사정없이 최개의 가슴팍을 찔렀다. 지나치게 힘주는 바람에 칼날이 절반으로 끊어져 최개의 가슴팎에 꽂혔다.  리신량과 동영남이 원립지를 덮쳤다. 한동안의 박투끝에 리신량은 칼에 두곳이나 찔렸고 동영남도 중상을 입었다. 이때 최개는 가슴팍에 꽂힌 반토막의 칼날을 뽑아 원립지의 어깨를 찔러놓았다. 하지만 대량의 피를 흘린 최개는 인차 피못에 쓰러졌다.      원립지는 미친듯이 주방으로 달려가 식칼을 빼들고 동영남을 향해 휘둘렀다. 리신량은 온몸으로 원립지를 제압했다. 간신히 몸을 뺀 동영남은 즉시 경찰에 사건을 제보했다.      제보를 받은 경찰들은 신속하게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최개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동영남은 남자친구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했다. 원립지는 당장에서 붙잡혔다. 2     011년 8월 3일에 목당강시인민법원에서는 원립지를 고의살인죄로 사형집행유예 2년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어리석은 범죄자는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지음》
180    14살소년이 저지른 살인극 댓글:  조회:5548  추천:0  2011-12-19
         14살과 16살, 두 소년은 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카드놀이를 하던중 사소한 분쟁이 생겨 14살 소년은 화김에 16살 소년을 살해했다. 아들의 살인행각을 알게 된 아버지는 두말없이 아들과 함께 시체를 산굴에 옮겨갔다. 귀주성 륙반수시공안국에서는 사건제보 한시간만에 본 살인사건을 해명하고 범죄혐의자 부자를 나포했다. 동굴속에서 발견한 아들의 시체        7 월 25일, 륙반수시 종산구에 살고있는 축씨성의 한 중년남자가 며칠전에 실종된 아들의 행적을 찾던중 탄광부근의 한 산굴속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건제보를 접수한 경찰들은 즉시 시신과 시신발견현장에 대해 주밀한 검사를 했고 시신의 머리부위에서 둔기에 맞은듯한 상처를 발견했다.       시체가 발견된 산굴의 직경은 겨우 50센치메터정도로서 일반성인이 허리를 한껏 구부려야 겨우 출입할수 있는 정도였다. 해당 동굴의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동굴이 있었는데 그 동굴은 부근의 수성현 동지향으로 통해있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부터 비춰볼 때 경찰들은 범죄혐의자는 부근의 지리위치를 꿰뚫고있으며 피해자와는 익숙하게 알고있는 사이라고 단정지었다.       피해자 소병은 모 기술학교의 학생으로서 평소에는 학교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만 집으로 돌아가군 했다. 축모가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난건 지난 5월 30일이였다. 안해가 입원한 륙반수시 부유병원으로 아들이 잠간 다녀갔던것이다. 그리고 6월 2일에 학교측의 전화를 받고나서야 축모는 아들이 5월 하순부터 줄곧 등교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어 축모는 학교측으로부터 지난 5월에 학생들에게 두번에 나누어 1700원의 교육기금을 발급했음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아들에게서 700원밖에 전달받지 못했던 축씨는 아들이 1000원을 몰래 챙겨가지고 어딘가에서 신나게 놀고있을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한달이 되여가도록 아들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제야 축씨는 가족과 친척친우들을 동원해 아들의 행방을 찾아헤맸던것이다. 두 소년의 위험한 유희       경찰들은 조사를 통해 소병이 6월 2일에 친구 소민의 집에 간적이 있다는것을 알아냈다. 16살 소병과 14살 소민이 평소에 친한 친구로 지냈음을 알게 된 경찰들은 즉시 소민을 불러 심문했다. 경찰들의 예리한 질문에 소민은 결국 자신의 범죄사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6월 2일 저녁, 두 소년은 소민의 집에서 종이를 오리오리 찢어 돈을 대신한 뒤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몇분 안돼 소민이 “돈”을 모조리 잃자 소병은 가느다란 노끈으로 소민을 때리기 시작했다. 소병을 피하다가 쏘파에 넘어진 소민은 손에 쥐우는대로 가까이에 있던 쇠공을 집어 소병의 머리를 향해 냅다갈겼다. 소병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자 소민은 또다시 쇠공으로 소병의 머리를 쳤고 그 충격에 소병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친구의 죽음과 바닥에 뿌려진 피자국을 번갈아보던 소민은 그제야 더럭 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야간근무를 나갔고 계모도 외지에서 막일을 하고있었기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린 소민은 서둘러 바닥에 뿌려진 피자국을 정리한 뒤 주머니를 가져다 시체를 감쌌다. 그리고는 시체를 주방에 있는 낡은 물독에 숨겨두었다. 6월 3일 아침 6시경, 소민의 아버지 류경광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들로부터 모든 경과를 전해들은 류경광은 자수하라고 아들을 타이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아들을 위안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버지와 함께 어서 시체를 처리해버리자.”       6월 4일 새벽 1시경, 류경광과 소민은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를 동굴에 옮겨갔다. 그들은 그로써 자신들의 죄행이 감춰질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였다. 이들을 기다리는건 법의 엄한 징벌뿐일것이다.   《신화넷》 
179    인터넷으로 갓난애살해과정을 생중계한 19살 엄마 댓글:  조회:4417  추천:1  2011-12-19
      두달후이면 그녀는 만 20살이 되고 그의 아들은 한돌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방법으로 아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손으로 직접 아들의 목을 조이는 한편 QQ에 접속해 인터넷친구들에게 문자로 아들을 살해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생중계했다. 자신의 동작 하나하나와 아기의 순간적인 반응까지 세부적으로 중계하는 바람에 그녀는 일순간에 QQ군체의 주목을 받았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식의 생명을 앗아버린 그녀는 모든 일이 끝나자 결국 경찰에 자수했고 자신의 모든 죄행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녀의 살인목적은 단 하나 시댁과의 모순과 남편의 무관심때문이였다. 친엄마에 의해 목숨을 잃은 가련한 아기는 결국 한줌의 재로 남겨졌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퀭한 눈빛으로 연신 “그렇게 작고 예쁜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몹쓸짓을…”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건의 발단       추씨성을 가진 그녀는 장자향성 고당촌에 살고있는 안휘성사람이였다. 장주에서 막일을 하던 와중에 강서성태생인 21살의 계모(桂某)를 알게 되여 그와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다. 사건발생 20여일전에 계모를 따라 시댁에 온후로 그녀는 시댁식구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있었으며 계모와 말다툼을 벌리기도 했다.       8월 13일 오전 8시경, 남편 계모와 시아버지가 일하러 가느라고 집을 나설 때까지도 추모는 아들과 함께 잠을 자고있었다. 얼마후, 시어머니가 집을 나서면서 며느리에게 먹고싶은것이 있냐고 물었지만 추모는 응대하지 않았다. 반시간후에 시어머니가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손자와 며느리가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는 며느리가 손자를 안고 바람쏘이러 갔을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뒤인 오전 10시경, 추모의 시어머니는 뜻밖으로 경찰들에 끌려 집으로 돌아온 며느리를 보았다. 놀랍게도 며느리의 손목에는 쇠고랑이까지 채워있었다. 경찰들은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며 집에 있던 컴퓨터를 들어냈다.        그때까지도 웬일인지 몰라 벙벙해있던 시어머니는 경찰들의 입을 통해서야 며느리가 손자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 폴싹 물앉고말았다.   살인동기는 단순한 복수심때문       경찰의 말에 따르면 자수했을 당시 그녀는 직접 제보전화를 할만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경찰들이 의료일군들과 협력해 아기를 신속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아기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추모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줄곧 시댁식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남편마저 자신과 아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자 보복할 마음으로 이같이 미련한짓을 저지르게 되였던것이다. 이에 대해 추모의 시부모는 “가족들 모두 며느리를 잘 대해주었습니다. 한달후이면 며느리의 생일이라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가족들끼리 간단하게나마 생일축하를 해주려고 생각하고있었는데…”라며 눈물을 보였다. 또한 아들 계모는 아직도 안해에 대한 련민을 버리지 못하고 두번이나 교도소로 면회를 다녀올 정도로 추모를 깊이 사랑했다고 증언했다.       추모는 현재 고의살인죄로 경찰에 구속되였으며 본 사건은 진일보 조사중에 있다.       《동남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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