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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권력 대결'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735  추천:0  2018-05-14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근 7백 년간 막후 정치를 해왔다. 그 막후의 최고 관위는 한낱 '정이대장군(征夷大将军'에 불과하다. 이들은 천황의 권리는 빼앗아가도 누구나 천황을 밀어내고 자신이 그 보좌에 오르려고는 하지 않는다. 2차세계대전 때, 천황은 실제상 장병들에게는 ‘정신지주支柱’이었다. 절대 비정의 침략군을 두둔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중국이나 조선시대에서 야심 품은 권력자가, 처음 생각하는 것이 황제나 왕을 밀어 내고 자신이 그 보좌에 오르려고 했다. 또 잔혹한 수단으로 이미 권력을 상실한 제왕을 사경에 몰아 넣기 까지 한다.   그래서 중국이나 조선 왕조시대 정치제도하의 제왕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을 느끼는 자들이었다. 포악한 제왕들은 야심가들의 속내를 간파하면 가차없이 처단한다. 유약한 군주는 공포 심리로 하여, 국가의 금고, 서민의 혈세를 갉아먹는 많은 탐관오리들을 온상 시켰다. 그 탐오는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졌다. 그것은 제왕들이 의식적으로 묵과하고 ‘배양’했기 때문이다. 높은 권력자들이 탐오에 정신을 팔다 보면 권력을 찬탈하려는 욕망이 사그라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양심 있는 지식인, 분노한 사람들이 탐욕자의 일관된 비리를 적발하고 폭로 시킬 때, 드디어 제왕은 민간의 힘을 빌어 탐욕자들을 일거이 제거해 버린다. 그러면서 자신의 권좌를 굳건히 지켜왔다. 오늘 세계는 고도의 문명 시대에 들어섰다. 옛날의 잔인하고 무능한 치국(治国) 수단이 사라졌다. 허나 권좌 지속, ‘권력 쟁탈전’은 여전히 과거 못지 않다. 오히려 방법과 수단이 얼마나 무섭고 영악해졌는 지 모른다. 지난 역사는 피를 흘리며 하는 ‘권쟁权争’이었다면, 지금은 피를 말리는 ‘정쟁政争’이다. 여느 정당이나 자기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자유민주국가에서 당파들의 정권재탈전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아주 기이한 정치를 연출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분단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 평화로 가는데, 보수 야당 강경파는 적극 반대해 나선다. 김대중, 노무현 집권 때, 북한이 약속을 저버렸다는 말을 반복하며 북한을 절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종북프레임을 들고 나와 저들의 보수 지지층 결집에 사활을 건다. 한국인에게 피해를 준 북한을 생각하면 많은 국민들이 치를 떨고있다는 점을 잘 포착한 것이다.   또 지금 보수 꼴통에 ‘용맹 투사’도 많다. 어떤 보수정치인들은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도 험담과 막말까지 마구 해댄다. 이런 자들의 막말은 한마디로 ‘증오’의 폭발이다. 북한을 증오하다니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대통령까지 죽도록 미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가슴속에 서린 ‘증오’는 잘 통하지 않고 있다. 우리 국민이 현명하고,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한반도는 영원히 화해와 통합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주류다. 진보 여당은 이런 주류 생각을 잘 부흥하려고 뚜벅뚜벅 자기 갈 길을 걷고 있다. 또 남북 협치도 아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니 언제나 북한을 적대시 하면서, 국가 안보를 ‘철저히’ 해 왔던 보수당으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진보정권하에서는 저들의 마음대로 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 정권을 다시 빼앗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쓰고있다.   대한민국은 언론, 표현, 인권의 민주국가이다. 국민의 직접 선거 제도로 나오는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 선거- 이것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헌법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 국민의 염원을 위배하는 정치인은 배제되고 버림을 받는다. 지금 절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 여당은 실로 뒷심이 튼튼하다는 것을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동북아신문
20    컬링과 마음의 ‘비질’ 댓글:  조회:710  추천:3  2018-03-09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값진 은메달을 땄다. 짧은 컬링 역사에서 거둔 대단한 성과다. 컬링은 빗자루 모양의 솔을 이용하여 닦아서 스톤(돌)진로와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목표 지점에 최대한 가깝게 멈추도록 한다. 스톤이 움직일 때마다 목 터져라 외치는 “헐”은 “빨리 비질해라! ~” 는 뜻이다. 컬링 경기를 TV에서 보면서 “헐”하는 동작이 참 멋있었다. 필사적으로 빡빡 문질러 스톤이 원하는 곳에 놓아야 점수가 올라간다. 이번 컬링에서 최대 유행어는 ‘영미’의 ‘탄생’이다. 세계 컬링 스포츠의 ‘유행어’로 남을 것 같다. 문체부장관이 주도한 회식 축주사祝酒 에서 “건배” 대신 “영미!”하고 외쳤 다니, ‘영미’ 가 인기를 끌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 대표팀의 스킵(주장) 김은정(28)이 경기중 “헐”대신 동료 영미(김영미 27)를 향해 외친 말이다. 음성 전문가 조동욱교수(59. 의료 전자 전문가) 는 ‘안경 선배’로 불리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연승 행진을 이끈 김은정의 목소리는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나를 믿고 한번 해보자는 신뢰가 담겨 있다.’ 는 진단이 나왔다.  컬링에서 “헐”- 승패를 거는 그 ‘비질’이 참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수선 ‘비질’에서 그비자루帚에 대해 조금 알아 둘 필요가 있겠다. 글자 풀이를 보면, 며느리 부妇, 부인妇가 오른쪽 변(帚)이 빗자루다. 며느리나 부인이 빗자루 들고 일만 하는 여자라는 뜻이 아니다. 고대 중국에서는‘부妇’는 최고 작위 (爵位)였다. 왕비에게 내리는 작위였다. 유럽 농촌에서도 주부는 빗자루를 상징한다. 주부가 집을 비울 때면 빗자루를 문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표시했다. 또 가난한 농촌에서 혼례를 올릴 때, 하객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 빗자루를 가로 놓고 신랑신부가 뛰어 넘는다. 여기서 빗자루는 정조의 상징인 셈이다. 그저 지저분한 것만 쓸어내는 하찮는 존재- ‘빗자루’가 부인의 고귀함, 여인의 순결함과 연결 되다니, 아이러니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일상에서 이런 빗자루를 쥐고‘비질 한다’고 하는 그 뜻에 더 놀라운 것이다. 인간의 영혼, 마음의 ‘잡질杂子’을 쓸어내는‘비질’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얘기다.“일체 잡 귀신을 모조리 쓸어내자横扫一切牛鬼蛇神”는 인민일보 사론으로부터 중국‘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새로운 정부, 국회에서 적폐 청산이란 카드를 들고, 국익을 해치고 있는‘좀 벌레’들을 쓸어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중국‘문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위법자나 낡은 ‘강경파 보수’들은 적폐 청산이란 강력한‘비질’에 쓸려 나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댄다. 그 모습을 보면서 씁쓸해 지기도 한다. 이시기 자신들의 범죄, 과오를 한번 뼈저리게 반성만 해도 국민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컬링의 리더 김은정의 믿음과 신뢰가 쌓인 “영미”하고 뿜어내는 음성이 지금도 귀가에 울리는 것 같다. 사력을 다 하여 빡빡 비질하며 스톤을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두‘맹장猛将’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소리와 모습이 어쩌면 우리 한국 사회를 똑바르게 인도하려는 새 정부의 노력을 방불케 한다. 사력을 다 해‘사회 오물’을 빡빡 닦아 내고‘비질’하는 우수한 정치인, 진보와 정의를 주장하는 우수한 국민으로 비추어 보인다. 다른 한편 일반 평민들도 자성하고, 반성하며,‘마음의 비질’을 하고 있다는 뉴스도 많이 접하게 된다. 한 국민의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있다. 본인의 이해관계, 본인의 득실을 생각해서 한 투표는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를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 성공적으로 개최한 평창 동계올림픽,‘남북단일팀구성’은,‘남북 평화’의 불씨를 세계인에게 심어주었다. 열심히 노력한 한국 컬링 선수단의 모습도 세계인을 감동시켰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런 인심을 격앙하게 한 동계 올림픽 정신에 힘입어‘적폐 청산’이 더 훌륭하게 추진될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불결한 것들을 말끔히‘비질’해가는 데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더 밝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북아신문 2018.3.8
19    '쇼'에 살기도 하는 인생 댓글:  조회:928  추천:0  2018-02-22
'홀린다' 하면 정신을 못 차리게 남을 현혹시키는 말로, '쇼' 하면 일부러 꾸며서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으로 많이 안다. 사람은 사는 동안 시시 때때로 ‘홀리고 쇼’ 하는 모습을 본다. 어떤’쇼’ 는 정말 그럴 듯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기분을 주기도 한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쇼’를 본 기억이 있다. 그것은 빛 바랜 사진처럼 기억의 창고에 오래 남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91년 7월30일 새벽, 내가 처음 살았던 무단장 시 북부 우스훈하乌斯浑河 하류에 특대 홍수가 범람했다. 연속 사흘 동안 비가 퍼붓더니 제방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나갔다. 제일 낮은 지대에 위치한 동네 60호(동서 마을)가구가 물에 잠겼다. 거기서 내 집을 포함한 여남은 집이 가장집물과 함께 밀려나갔다. 그래서 나에게는 진짜 옛날 사진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족 학교 한쪽 사무실이 뭉텅 물에 끊게 나갔고, 운동장이 깊게 파여 들어 갔다. 사람들은 전날 저녁, 연발 총소리를 듣고, 안전지대로 대피 했기에 인명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우스훈하 강역 4백 헥타르의 수전과 밭이 물 피해를 입었다. 그 번 홍수는 우스훈하 상류에 있는 중산양저수지둑이 무너지면서 더 심했다. 그 저수지를 시찰하러 나왔던 현(군) 선전 부장이 배가 침몰하면서 40대의 아까운 젊은 목숨을 잃었다. 그 번 홍수로 목숨 잃은 사람도 여럿이 된다. 내 집 일곱 살 큰 남자애도 홍수 지나서 세번째 날, 깊게 패인 학교운동장 물 구덩이로 샌들凉鞋씻으러 내려갔다가 질식사 할 번 했다. 때마침 감자를 씻으러 나온 학교 숙소 아줌마가 머리카락을 쥐여 당기는 바람에 액운을 면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고마웠 어도 그 집 아저씨를 불러 식사 한끼 대접하고, 며칠 전에 현 우수 교사가 되어 받은 옷감 한 벌을 선물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은 가슴 깊이 새겨 두었다.       60년 만에 있은 특대 홍수다. 우스훈하는 만족어로 '흉포한 강'이라는 뜻이다. 무단장 시 북부에 있는 제일 큰 하천이다. 38년 가을, 세인을 놀라게 했던 항일 녀 영웅- "8녀투강" 八女投江이 바로 이 강의 하류에 있는 조령刁翎 의 작목강柞木岗에서 있었던 일이다. "8녀투강"을 각색한 영화, 드라마도 여러 개 된다.   홍수가 지나 2개월 후, 시 현의 쟁쟁한 인물들이 우리 학교를 찾았다. 방송국 기자들도 동행했다. 학교 교실에서 회의(会议를 가지고, 민정보험금을 촌민(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사진기자들이 밀착카메라촬영 (录像)에 분주했다. 촬영이 끝난 후, 손에 쥐었던 현금을 다시 회수했다. 오늘의 말을 빌면 방송에 내보내려고 '쇼' 한 것이다. 수재가 일어난 뒤, 재빠르게 보험처리를 했다면 그것은 '쇼' 가 아니다. 뒤에서 "홀리웠네~~" 하며 하품같은 웃음을 짓는 분들도 보였다. 사전에 설명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한 '형식' 이어서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던 게다. 기실 상급에서 내려 보낸 건축 물자를 미리 받아서 간이집间易房을 지은 상황이다. 헌데 현금을 쥐고 건축자재를 샀다면, 더 좋은걸 샀을 걸 그랬다고 조금은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볼멘소리 내는 사람도 있었다. 시멘트, 목재 같은 것을 모두 현에서 통일적으로 내려 보냈다. 시멘트는 질이 떨어져 사흘 지나도 잘 굳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촌장이 시현 간부들을 데리고 유일하게 내 집을 방문했다. 그때 집안 벽을 바르고 시멘트바닥을 한지 마침 사흘째 되던 날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민정 보험 없이, 재해 지원금 천 위안만 가지고 집을 짓자니 참 어려웠고, 또 시멘트는 질이 못해 사흘 되는데도 이렇게 잘 굳어 지지 않는다고 이실직고했다. 간부들이 살펴보면서 진지하게 메모를 했다. 시 인대  (지방의회 의장 해당) 주임(汉族)은 내가 말한 것을 잘 검토해 보겠노라고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당시 나는 그렇게 '높은 사람' 인데 틀 거지 하나 없이 마음이 참 따뜻한 분이라는 감촉을 받았다. 그 후 집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상급에서 일천 위안 보상금을 더 내려 보냈다. 내가 말해서 그렇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 현 간부들이 돌아간 이튿날, 성(도), 시 TV 신문방송국에서 그 전날 본 학교에서 촬영한 영상을 보도했다. 우스혼하 홍수피해 상황은 북경 중앙 TV 제1채널에서도 방송되었다고 한다. 그날 큰 아들애가 학교 옆에 붙은 촌사무실에서 방송을 보고 와서 깡충 대며 달려 와서 "땐스(텔레비젼)에서 아버지 봤어요."하고 천진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 출근 하면서 간이집을 짓는데 신경 쓰느라 두 달째 방송을 못 봤다. 사실대로 말해 나는 그 처절했던 홍수에 관한 방송을 보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당시 사람들은 TV 방송도 조금은 '꾸미고 있구나' 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되 정부가 수재민에 대한 관심과 지원만은 잊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정치, 여론 방송에 '쇼' 가 없다고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연출 무대도 마찬가지다.  '쇼' 가 없는 무대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쇼 공연" 토크쇼도 있는 것이 아닐 까. 모든 연기 자체가 '쇼'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되 ‘쇼’가 현실 감각에서 과장되거나 너무 ‘허구적’ 이라면 공감이 떨어진다. 나는 드라마에서 “본 극은 순전히 허구” 라는 자막이 나오면 덮어버린다. 물론 초상권, 저작 권 분쟁을 고려해서 그렇게 한다고 알고는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지만, ‘허구’ 가 아닌 그런 인물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믿고 극을 보는 나다. 사실에 조명하고 역동적이면서 감동적인 '쇼' 가 사람을 웃기고, 울리게 한다고 고집하는 나다. 영화나 극에서 주인공들이 (출연자) 고초를 겪으며 죽는 장면을 보면, 슬퍼하고 눈물을 자제하지 못한다. 평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진정 주인공의 불후한 운명, 아픔이 곧 자신의 불행과 아픔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도 "아니, 이것이 출연자의 '연기 쇼' 인데, 너무 비참 할 것 까지는 없지." 하고 자아 안위하면서 슬픈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그러니 인생은 ‘쇼’ 에 넘어 가기도 하고,  ‘쇼’ 하며 살기도 한다. 연세가 많이 드신 분이 "아직 대단히 젊어 보입니다" 하는 말을 들으면, 대뜸 만면에 희색이 돈다. “예전에 참 예뻤는데, 예전에 날씬 하기도 했지. 너도 세월을 비켜 가진 않았구나!" 고 하면 듣는 친구는 기분이 ‘더러웠을 게’다. 실제로 그런 것이다. 지금 회의 장소, 무대아래에서 치는 박수에 가면과 ‘쇼’가 많다고 보는 심리학자들의 분석 결과가 있다. 박수소리에 따라 현장 분위기가 열 띠고 고조에 오른다는 인간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어쩌면 사회와 각자 인생 행로는 ‘쇼’ 에 그려지는 그림 인지도 모른다. 도화지가 아니라 입으로 두 발로 그리는 그림이다. 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동북아신문/2018.2.19  
18    독서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778  추천:0  2018-02-01
세상은 갈수록 변해간다. 책 읽기 '독서'라는 단어가 더욱더 생소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지금 독서하는 사람은 대개 '글쟁이' 아니면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도서관에 가면 노인층이 즐겨서 하는 독서가 되어버렸다. 눈에 띄는 학생들은 대부분 입시공부를 위해, 조용하고 아늑한 도서관을 찾는 것이다. 직장인이 되면 하루 일과 피로에 짓눌리는데, 웬만한 사람이라면 책 한 권을 사서 읽을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더 자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휴일에 시간이 생기더라도 피곤에 찌들린 탓에 손에 책이 가지 않을 터, 독서처럼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것 보다는 회식이나 다니고, 긴장감을 확 날려버릴 수 있는 취미(등산운동, 헬스장)를 찾는다. 책(신문포함)이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것이 갑자기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책 판매 부진으로 중국 출판업계는 30년 전부터 몸살을 앓았다. 도서 매출 감소로 자금이 딸려 정상적인 책의 출판운영이 어려워졌다. 고민 끝에 학생 교과서 요금을 미리 내게 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학교에서는 다음 학기 학생 교과서 비를 예약금으로 앞당겨 거뒀다. 이렇게 되면서 교과서 외에 참고자료도 함께 찍어 내려 보내 수금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출판계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되면서 학부모들의 반발을 야기시켰던 일도 있었다. 왜 이런 '금단현상'이 일어났을까? 당시 물가가 뛰어오르고, 종이 값이 껑충 오르면서 서적 값도 엄청 올랐던 것이다. 또 집집 마다 TV가 보급되면서 자연히 책이 외면당하고, 책을 사서 보는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현대 통신도구가 얼마나 더 눈부시게 발전했는지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테블릿 pc로 내용물을 찾고, 온라인 게임을 하는 학생이나 젊은 층이 자연히 독서와 더욱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워낙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살다 보니, 간편한 휴대용 기기로 영상 매체물을 즐겨 찾고 있는 거다. 그것이 무조건 부정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기기 영상을 통하여 우리가 얻어 가는 메시지도 많다. 하지만 독서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집집 마다 TV의 각종 오락프로그램, 각종 생활건강상식프로그램을 선호하다 나니, 정신이 그 방면으로 쏠리는 현상이 늘어났다. 책을 사도 건강상식, 생활상식 같은 책이나 사서 눈요기를 한다. 인문학, 소설책 따위를 사서 보는 사람은 쌀에 늬 밖에 되지 않는다. 나의 아내는 일에 아무리 힘들었어도 밤 늦게까지 , , 등 건강상식프로는 빼놓지 않고 본다. 보면서 메모를 잊지 않고 하는데, 메모를 한 필기책만 다섯 권이 된다. 그런데 책보기는 아주 싫어한다. 옛날에는 열정적으로 잡지도 많이 주문해놓고 책 읽기를 즐겼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발표한 글도 남이 읽어 줘야지, 한번도 제 눈으로 보는 것을 못 봤다. 오늘 우리 인간을 돌아보면, 본질이나 욕구가 마음의 수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 관리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책보다 거울을 훨씬 자주 보며, 여가 시간 거의 제 몸을 가꾸고 다듬는데 쏟아 붓는다. 심지어 의술을 이용하여 타고 난 용모까지 바꾼다. 지금 세계의 일반적 현상이지만, 인구비례로 본 이발소, 미용실, 목욕탕, 찜질방, 헬스장, 운동기구, 성형외과 등 몸을 씻고 가꾸고 다듬는 시설과 업체의 숫자는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한다. 반면에 1인당 독서량은 OECD 최저 수준이다. 이렇게 책은 사람들한테서 소외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책을 사서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출판업계의 고민이 깊어만 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는 독서를 홀대해서는 안 된다. 독서는 여러모로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독서로 인해서 성장하고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독서는 정신적으로 충실한 사람을 만든다. 오늘 대한민국 정치계를 비롯한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는 숱한 '말썽'들을 보면, 흔히는 독서를 하며 스스로 수양을 쌓지 않은 데서,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을 잘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현상들이 수두룩하다.  문제에 대한 사리 분별력을 키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해박한 독서가 이를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독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전문가들의 경험과 지혜를 책으로 전수해 주기 때문이다. "책을 사느라고 돈을 들이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훗날 만 배의 이익을 얻을 것이다." 이는 중국 송나라의 문필가이자 정치인 왕안석의 명언이다. 어서 책장으로 가서 죽어있는 책의 먼지를 털어주자. 책도 많이 사서 보면서, '위대한 독서가'가 되기에 망설이지 말자.  동북아신문 2018.1.31
17    언어, 외래어 잡담... 댓글:  조회:767  추천:1  2017-12-29
  이 세상에 언어가 없다면 거의 소통이 불가능하고, 세계의 기억장치가 황폐해 질 것이 뻔하다. 언어는 민족과 국가가 생존하는데 뿌리와 초석과도 같다. 언어는 나라환경 영향을 받으며 편향적인 ‘극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국은 93%이상이 한어(汉语)를 사용하는데, 소수민족은 한어를 잘 못해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사업과 생활에서 한어가 짧아 자기 의사 표달이 잘 안 되어 갑자르기도 한다. 한때는 우리민족이 인근에 민족학교가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자식을 한족학교로 떠미는 현상이 많았다. 자식 출세를 위해선 한족학교로 보내는 것을 당연한 줄로 알았고, 적어도 중국에서 자기 앞의 말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때는 한족학교에 나와 한어로 꽝-꽝 말하는 사람을 흠모하기 까지 했다.    그렇게 조선어가 밀리다가 천지극변이 일어난 것이다. 92년 중한수교로 많은 인파가 한국행을 하면서 한국어(조선말)의 위상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한국기업이 중국대륙 진출로 한국말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더욱이 2007년도에 출범 된 무연고동포 한국어능력시험 전산추첨으로 하여, 한국어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원들이 신이 나 했고, 배우는 학생들이 자부심을 얻게 되었다. 한족들까지 한국어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그런 기류속에 성년이 다 된 자식들은 자기를 한족학교로 떠밀었던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헌데 직접 한국에 와 보면 한국말을 알고 쓸 줄 안다고 으시대다간 큰코를 다칠 수도 있다. 한국 땅을 디디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거리 마다 촘촘하게 붙은 간판이다. 한국어로 된 간판과 영어발음으로 된 간판이 반반을 차지 한다. 영어발음 공부를 하지 않고선 눈 뜬 소경과 다를 바 없다. 하이마트니(전자품상점), 모텔(큰 여인숙)이니, 인테리어(실내 장식)요 하는 것들은 묻지 않고선 모른다. 미국사람도 이런 간판을 보고는 어리둥절 할 게다. 발음은 영어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 문자는 한글로 씌어져 있기 때문이다. 발음만 영어로 되었어도 미적 감각을 주는 훌륭한 '디자인'으로 보는 것일까. 아마 이 나라 사람, 디자인 설계사들은 자기 나라 한글명사로 달면 촌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낙후하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보는 것 같다. 기실 한국 농촌은 신선하다. 구시대적인 원양(原样)에서 벗어 났다고 할 수 있다.    7년 전, 내가 한국 와서 처음 찾은 일이 식당 숯불장치었다. 식당이름이 “모이세 돼지갈비”인데 첫날 사장한데 물었다. “‘모이세’ 는 무슨 영어 단어입니까?” “그저 ‘모이세요’ (모두어라)하는 한국말이지요.” 허참, 영어 간판으로 된 이름이 하도 많기에 무엇이나 외래어로 착각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대화에서도 외국어 발음이 빈번히 튕겨 나온다. 삼성반도체에 갓 출근했을 때 일이다. 그때 한 반장이 “와이프 왔어요?” 하는 말에 나는 옆의 친구를 툭 치며 누구 와이프를 말하는가고 물어 본 일이 있었다. 나는 아내를 영어로 와이프라고 한다는 것을 김성종 추리소설에서 본 기억이 났다. 친구로부터 아까 반장이 말한 ‘와이프’는 비닐에 포장한 고급스런 물걸레(물티슈)란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하품 같은 웃음이 나왔다. 우리 동포들이 건설현장에서 영어로 된 장비이름을 몰라 상사들한테 야단을 맞는 일은 보통 일이다. 동포들이 사투리를 많이 쓴다고 따가운 눈총을 받을 때도 많다.    한국인은 미국을 좋아하며, 미국 영어에 친숙하다. 일상 대화나 발언에서 보면, 생소한 영어단어를 살살 끼워 넣으며 유식함을 드러낸다. 조선족이 말을 하다보면 습관적으로 중국 단어(单词)발음을 입에 그대로 올리는 것과는 다르다. 실지 한국은 세종이 우리 한글을 창제하기 전 까지는 중국 한자(汉字)를 써왔다. 지금도 지식인, 학자들은 한자로 뜻풀이에 많이 활용한다. 그러니 중국한테는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실지는 그렇지 않다. 외래어를 잘 모르고 조선말 사투리를 한다고 폄하된다. 그리고 적지 않은 한국인은 자기네 나라에 와서 3D종 같은 허드레 일을 하며 돈을 버는 동포들을 시답잖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실지 한국인은 중국 동포 보다는 재미동포들을 더 곱게 바라 본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온 동포들은 영어도 잘 하고, 돈도 많고 ‘문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옛날 어르신들이 자주 했던 말이 적중 할 것 같다. “잘 사는 집 애는 밥을 복스럽게 먹고, 못 사는 집 애는 밥을 게걸스레 먹는다.”    많은 한국인이 영어 발음에 치중하면서 미국을 지고 지순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친미감정’에 조금은 얄미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반도체에 출근 할 때, 휴식시간에 한국인 친구와 북한(조선) 얘기를 꺼냈다. 그때 나는 뜬금없이 불쑥 질문을 하나 던졌다. “북한과 국군이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국군이 이기지요. 한국에는 미군이 있잖아요.” “그러니 북한방송이 자꾸 한국을 ‘남조선00집단’이라 하지 않아요!” . ‘익살스레’ 한 말이기에 이 친구는 덤덤하게 나를 쳐다 보기만 했다. 나는 이 한국인 엘리트친구하고는 스스럽없이 아무 대화나 주고받는 처지라,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도 막 던지군 한다.    한국이 미국을 믿고 좋아하고, 중국을 멀리 하는 것 쯤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그들을 도와 싸웠고, 휴전시기엔 미국의 경제적 협조를 많이 받았다. 이것을 한국인은 잊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인(일부)이 순전히 미국에 편향하고 중국을 싫어한다고 보면 안 된다. 사실 한국인들이 중국을 부러워 하는 측면도 있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땅덩어리도 엄청나게 큰 것을 부러워 한다. 실지 한국은 조선반도가 작은데다 두 동강으로 짝 갈라진데 서운해 하고,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중국이 국방,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놀랍게 바라 보고 있다. 만일 중국이 더 큰 경제성장을 가져 와 우리 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을 때, 진정 한국은 중국을 부럽고 보기 좋게 바라 볼 수도 있다.    당면 문재인 정부가 들어 서면서 사드배치로 인한 중국과의 갈등빙하가 풀리고 있다. 아울러 이전보다 더 좋은 경제협력파트너로 이어지는 전망이 눈앞에 다가 온다. 한국인이 미국과 그 영어를 좋아하듯이, 급격히 부상하는 중국과도 가까워지려 하고 중국어도 더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높아진다.  길림신문 해외판 2017.12.25
16    멀리와 가까움의 희비(喜悲) 댓글:  조회:603  추천:1  2017-10-30
                       최세만 사람과 사람지간에 상생과 어울리며 지내는 것도 일종의 학문이다.   이것을 잘 해결하기에는 그렇게 쉽지도 않다. 사람 대함에 있어 감정거리를 멀리 쯤 하면 차가운 사람으로 락인 찍히기 쉽고, 지나칠 정도로 다가 서서 섬세하고 쫀쫀한 관심을 가지며 살갑게 대하면 정과 원(情和怨)이 동시에 몰려 온다. 학식이나 자격이 넘치는 사람의 멀리 쯤 하는 냉정한 태도는 교만스럽고 정나미 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명인'이나 일반인이 익숙하거나 초면인 사람에게 냉냉한 태도, 정열적인 태도는 좋든 나쁘든 말밥에 오르기 마련이다. 거만하다는 둥, 붙임성 좋고 인간적이라는 둥, 가볍고 경박하다는 둥 별의별 잡음이 다 들린다. 멀리 쯤 서서 보면 더 좋아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깝게 다가 갈 수록 실망스럽고 역겹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이것 역시 인지상정이 아닐까.   "고슴도치법칙"에 관한 서방 우화가 떠오른다. 아주 매서운 겨울날,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서로 온기를 취하려 한다. 처음에는 가깝게 몸을 밀착시켜 체온을 유지하려다가 서로의 몸가시에 찔려 피투성이 된다. 그래서 자세를 고쳐 최적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니 상호간 온기를 주면서 상대방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가까워지면서 사랑을 살 수도 있고 , 오해와 미움을 살 수도 있다. 오히러 거리를 두고 지켜 볼 때 미각(美觉)을 주는 일도 가끔 발생한다. 7년전 한국 오기전만 해도 나는 한국을 민주와 자유, 문명, 경제강국으로 믿어 왔다. 그것도 한국 브로크한테 인민페 6만위안을 떼우고서도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체감하면서 내 고유 인식에 금이 실리기 시작했다. 개인 인간관계를 떠나서 일국 경제를 말 할 때, 한국은 중국동포들에게 경제이익을 주는 고마운 나라다. 언론인권 자유 시스템 가동은 세계 일류에 속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언론자유개방 편의를 이용하여 언론매체에 격한 분노를 분출해대는 점에는 참으로 유감이다.   SNS, 트위터, 페이스북에 댓글을 살펴 보면 실로 가관을 이룬다. '진보, 보수' 할 것없이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누리군들의 어떤 댓글은 정말 소름을 끼칠 정도다. 또 어떤 '상욕'은 아주 재밋게 묘한 말로 야유적으로 토해 내는데, 나 혼자 웃음을 참지 못 할 때도 많다. 상스러운 댓글, 사실과 외곡 된 보도기사는 '동방례의지국' 이란 대한민국 이미지가 무색할 정도이다.   전번 동포사회를 강타했던 영화 "청년경찰"은 재한동포들에게 '중형폭탄'을 날렸다. 그것으로 동포들의 항의시위가 반발하고 있다. 영화감독, 제작진이 동포들에게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 가고 조사연구를 했더라면 동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그런 일은 일어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이 중국(사드배치반대)과 조선족동포간의 멀어진 감정거리가 이런 부당한 일을 조작시킨 것은 아닐까. 조선족가운데도 중대 범죄행위, 위법행위를 저지른 인간들이 있다. 그렇다고 전반 동포밀집구역을 '범죄의 소굴'로 보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절대 다수 동포들은 착하고 한국법률을 지키면서 열심이 일해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 실지 한국인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동포사회에 접근하면 동포사회의 다른 진지한 모습도 발견 할 수 있다.   문화예술, 섬세한 댓글속까지 다가 서다 보면, 집필자들의 부당한 작법에 '무서움'도 생기고,  속으로 미워나기 까지 한다. 그렇다 하여 '문자폭력' , 언어공갈을 보고 너무 기가 죽고 한탄 할 필요까지는 없다. 기차역에 가면 세상은 여행하는 사람으로 꽉 차 있는 것 같고, 병원에 들어 서면 환자들로 득실거리는 것 같고, 화장터에 가면 세상이 죽어가는 사람으로 메우는 것 같다. 댓글 바다에 들어 서면 악플도 무지무지하게 많을 수 있는 게다. 그렇다고 전반 한국사회를 부정하거나 미워하고는 싶지 않다. 그래도 정의를 주장하는 네티즌들이 훨신 더 많다고 본다. 좀 더 갇힌 공간에서 벗어나 넓은 범위내에서 한국인과 접촉해 보다 나면 거기에는 정이 많은 사람,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계속 멀리에서 기분 좋게 바라보았던 한국인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아도 문명하고 세계일류 우수민족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울러 차분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고슴도치법칙"처럼 최적한 거리를 두면서 인간을 바라 볼 때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맛이 나는것이다. 동북아신문 2017.10.27
15    국가와 민족, 이념에 대하여 댓글:  조회:811  추천:0  2017-02-06
표 나게 꼼꼼히 따지고 원칙과 법에 충실한 것이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들어가는 데도 닫혀있던 문은 반드시 닫고 들어간다. 금방 다시 나오니까 열어놓은 채로 들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대로 조금 비뚤어진 집안의 거울을 보고도 얼굴만 보면 되지 하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는 식이 몸에 밴 우리와는 사고방식이 크게 다르다. 한국인은 사소한 문제에서도 음성을 높여 가며 논쟁을 벌인다. 불거져 나온 사회 이슈에서는 가차 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1인 시위’, 집단데모를 벌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이 인권수호이고 애국이라고 이들은 자랑스럽게, 용기 있게, 목청 높여 말한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시위, 결사, 출판언론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을 잘 활용 해 나가고 있다. 이들은 정권을 비판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오인하지 않는다. 국가와 정권 구분이 잘 되어 있다.  지난 촛불집회 때다. 나도 서울 촛불데모에 나가려고 했는데 와이프의 반대로 단념했다. 대통령이나 정부비리 시위에 나섰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자칫 추방될 수 있다는 아내의 수다이다. 외국인으로서 그런 시위행렬에 끼어들지 않는 것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12차례의 애국평화문명 촛불데모를 TV생중계로 시청했는데, 정말 세계의 열광적인 칭송을 받을 만도 했다. 이처럼 한국국민들은 잘하고 있다. 하지만 큰 ‘사변’이 있을 때면 ‘언론방송’, SNS에서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옴니암니 따질 때 불쾌한 생각이 든다. 애국과 국가 안보는 보수, 보수는 저들이 한국의 원조(原祖), 한국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통 한국인이 아닌 ‘이국 사람’, ‘타민족’으로 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국가와 정권 구분은 잘 하는데 국가와 민족을 잘 구분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닐까 내 나름대로 생각 할 때도 있다. 실지 노란 머리, 파란 눈, 검은 머리와 곱슬머리도 한국의 국민이 될 수 있다. 황차 피치 못한 사정으로 다른 나라에 갔다가 모국에 돌아 온 한인 동포들이야 더 말 해 뭘 하랴. 한국 원주민이나 한국국적 받은 모든 한(韩)민족, 타 민족은 모두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 제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안 되기를 바라고, 교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있는 거대한 나라이다. 그래도 중국인은 국가와 민족을 잘 구분한다. 정부도 소수민족에 대해 우대정책을 많이 쓰고 있다. 국가에서는 민족사업 단위에 재정을 한족(汉族)에 비해 가급적으로 더 많이 지급하는 것이 규례로 되었다. 이런 우수한 민족정책이 세계 많은 나라의 인정을 받고 있다. 중국의 여러 형제 민족이 혜택을 누리며, 포용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한민족(韩民族)이 그럴 수 있으랴. 특히 우리 한겨레 민족은 조선시대에는 원래 한 나라 사람이었던 것이다. 국가가 빈부격차가 심하면 외면되고, 왕따를 당하기 쉽다. 형제간, 친인척간도 잘 살아야 따르고 ‘귀여움’을 받는 것과 같은 도리이다. 요즘 조선도 시장문을 빠금히 열어가고, ‘이념’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움직임이 보인다고 한다. 1984년, 5월 중순부터 약 한달반동안, 김일성 수상이 소련(러시아)과 동구(동유럽)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돌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구의 인민생활은 뒤떨어진 것으로 듣고 있었는데,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경제적, 기술은 외국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 그러면서 인민들의 생활이 유복하지 않은 데도 부지런히 일하고 불평불만 없이 잘 한다고 보고를 올린 당 간부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당시 수령으로서 가슴 아픈 고충이다. 그렇다고 그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장기간 이념사상, 체제개혁의 변화를 가져 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으면서 노동자들은 궁핍화에 내몰리게 된다는 ‘극좌적’ 이론이 빗나갔다. 실지로 공산주의를 ‘표방’한 나라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중국이 특색 있는 사회주의를 확립하고 개혁개방을 시도해 부유의 길로 나가고 있으니 천만 다행인지 모른다. 헌법에 따른 국민의 정부에 향한 갈구, 이념전변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행복시대를 열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동북아신문
14    문학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1104  추천:1  2016-12-21
문학이란 막막(漠漠)한 길 위에서 막막(寞寞)해질 때 ‘지표(地标)’를 찾는 일이다. 그 표식은 내 밖이 아닌 내 안에 있다.그야말로 자기 감성과 판단으로 본연의 모습을 찾는 간고한 작업이다. 한 주일 전, 한 문우가 ‘한중문화교류의 밤’에서 우리가 받은 ‘문인협회 우수회원’ 수상사진을 SNS에 올렸다. 거기에 축하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엘리트 친구는 표창장에 수필가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며 이것저것 묻기까지 했다. 어떻게 상을 받았고,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될 수 있었던 내력도 물었다. 작가가 되려면 작품도 많이 나오고, 데뷔작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아는 친구였다. 그에 나는 아무런 답변도 주지 못했다. 그렇다 할 내놓을 ‘자랑거리’가 없었던 게다. 또 작가니 수필가니 하는 것에 그렇게 연연하지도 않았다. 표창장에 ‘수필가’로 찍혀 있어도 그것은 상대방에 준한 존칭으로 여겼다. 한국에 오니 귀맛 당기는 존칭이 너무도 많다. 사장님,사모님은 입버릇처럼 옮겨진다. 명함을 쥐어보면 열 개 중 일~여덟 개는 모모의 회장, 사장, 부장, 대표, 이사이다. 그런데 명함에 소설가요, 시인이요, 수필가요 하는 칭호는 없다. 아마 그런 칭호는 타인에 의해 불러지는 것 같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는 항상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하는가 보다. ‘삼류작가’라도 문학등단은 필수다. 나 자신의 작품데뷔를 꼭 집어서 말하라고 하면 부끄러운 대로 조금은 입 뻥긋 할 수 있다. 헤룽장성 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은하수’잡지(2001년 4기)에 수필을 필명으로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처녀작이 될 수 있다. 그 후 ‘송화강’ 잡지, 헤룽장성 조선말방송에 수필, 수기를 여러 편을 발표했다. 한국에 와서는 동포신문, 동포문학에 수필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잡지에 수필 한 편을 보냈는데 그것이‘주변인과 문학’(2016년 여름호)에 실렸다. 그러니 성과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던 것이다. 신문사에서 신문학, 문학통신공부를 1년 하고, 성교육학원에서 조선언어문학을 수료한 자신이 자괴감이 들 때가 많다. 그나마 조글로 포럼에 칼럼니스트로 등록되어 있으니 스스로 위안이 되곤 한다. 한국에 와서 ‘계급장’이 더 올라간 느낌이다. 고향학교에 있을 때 오피니언, 사회기사, 논문기사를 신문에 내곤 했다. 한국 와서도 동포신문에 주로 칼럼을 많이 써왔다. 나 스스로는 미진함을 번연히 알지만. 칼럼은 신문지상에 독창적인 주견, 주장을 하고, 시사 정평을 하는 글이어서 예술성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는 소설이나 수필 같은 글은 필자의 문학적 감수성을 전제로 한다. 이전부터 칼럼은 주로 전문지식을 갖춘 ‘학자’가 주도해 왔다. 그런데 칼럼은 기타 문학 장르의 작품처럼 상을 주는 행사는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교육문화칼럼을 집필하는 동아리끼리 서로 질투하고, 서로 경멸하는 ‘못 된 버릇’ 노출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물을 보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작품을 보면 작자의 심경을 알 수 있다. 모든 작품은 예술적 매력뿐만 아니라 작자의 인격과 수양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니 문학의 길은 결코 쉽고 순탄하지 않다.특히 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문학을 하고, 글을 쓰는데 더 애로를 겪는다. 학자나 높은 직위에 있는 공직자들은 보고 듣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넓기에, 작품의 소재도 봇물처럼 터져 나 올 수 있으니 말이다. 허나 산전수전을 겪으며 글을 쓰는 일반문인들이 자격지심을 버리고, 취미를 본능으로 하면서 좋은 작품을 써내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다. 독자들에게 사상, 취미, 정감을 전달하는 표현형식은 똑 같기 때문이다. 문학은 살아 온 만큼의 인생탑을 쌓는 게으름 없는 작업이다. 나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견해, 기발한 상상을 필묵에 담는다. 삶에 대한 낯섦과 익숙함, 미진함과 뿌듯함, 절망과 희망을 담아 그려낸다.그로부터 사람들에게 쉽고 흥미롭게 사회, 주위의 사물을 새로운 차원으로 판단, 사색 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이 문학인이 바라는 포인트다. 문학창작은 인간을 연구하고 인간을 그려내는 인간수업이다. 문학인들이 세상 눈길을 끌자면 세상 사람들의 복잡한 정감세계에 눈길을 돌려야 할 터. 문학글이든 칼럼이든 언제나 기성도덕에 대한 도전이고, ‘상상력의 모험’이기도 하다. 앞으로 진정한 위기는 ‘금융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위기이다. 또한 미래 세계는 정직하고, 지혜롭고, 자기 책임을 다 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공감대를 형성하여 나갈 것이다. 이 의미 있는 작업을 수행하는데 문학이란 이 위대한 매개체를 떠날 수 없다. 동북아신문 2016-12-19
13    말 한마디의 효과 댓글:  조회:827  추천:0  2016-11-21
“입에서 화를 불러 올 수 있고, 한 치의 혀가 몸을 베는 칼이 될 수 있다. 입과 혀를 조심하면 안신(安身)처사 할 수 있다.” 한마디 말이 예리한 비수가 되어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한 마디 말이 긍정적인 힘이 되어 사람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 2008년10월2일, 자택에서 자살한 탤런트 최진실도 악성 댓글이 문제였다. 연예인에게 루머는 철창 없는 감옥이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갈 수 있는 게다. 댓글, 악플 역시 사람의 생각과 말을 짧은 글로 적어 놓은 언어형식이 아니겠는가. 부모자식지간에도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썩 오래 전에 서울에서 아들이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부모는 연세대, 서울대 교수였다. 이 아들은 키가 작고 못생겼다. 그래서 부모는 친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자극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너 키 작고 못생긴 놈이 공부까지 못하면 살길이 없어.” 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고려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통지서를 받아 쥐고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나한테 사과해, 쪼꼬맣고 못 생겼다는 말은 사과해.” 엄마가 “그래, 미안해, 수고했다” 하고 한마디 말이면 다인 것을 “야, 너 어디에 대고 그런 소리야, 쪼꼬맣고 못생긴 놈이!” 하고 푸념질 했다. 남편이 들어오자 아들이 한 말을 일러바쳤다. 남편이 “뭘 됐어”하면 그만이겠는데 “야, 이 쪼꼬맣고 못 생긴 놈아, 감히 부모한테 대들어, 버르장머리 없이!” 하고 호통쳤다. 그날 아들이 아버지, 엄마한테 감쪽같이 수면제를 먹이고 집에 불을 질러 부모를 살해하는 끔직한 비극이 발생했다. 탤런트 최불암 선생은 대학에서 연기를 배울 때, 교수가 늘 그에게 할아버지 역을 맡겼다. 그는 이에 불만을 먹고 하던 연기를 집어치우고 소품이나 다른 역할로 바꾸려고 했다. 교수가 알고 말했다. “불암아, 넌 노인 역을 너무너무 잘해. 니가 장차 세계에서 최고 할아버지 역 인기 스타가 될 것 같아.” 교수의 이 말에 최불암 선생은 다시 용기를 얻었다. 대학 나와 연기 생활에서 그는 주로 나이 많은 인물 배역, 할아버지 역을 맡았는데 최고 인기를 끌었다. 신경숙 작가는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구로공단에 가서 방직공으로 일했다. 그런데 하루는 몸이 아파서 결석했다. 선생은 그더러 반성문을 써오라고 했다. 선생이 그가 써온 반성문을 보더니 희색이 돌며 말했다. “너 글을 참 잘 쓴다, 글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가봐, 글 한번 써봐.” 후에 그는 글 쓰는데 애착심을 가지면서 정말 훌륭한 작가가 된 것이다. 내 큰 아들녀석은 중학교 올라가면서 공부하기를 싫어했다. 그럭저럭 중학(4년제 초중)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한번은 얘가 후회하고 낙심하는 모습을 가지기에 우연히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학력과 지식이 최고인 것만은 아니다. 인격, 수양을 잘 갖춰도 성공할 수 있는 거란다.” “아, 참말 그래요? “ 이날따라 아들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것이었다. 이후 아들녀석은 인격수양을 갖추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어사립학교에 가서도 반장이 되었고, 2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3위권에 들었다. 심천에 가서 일본 회사에 취직해서 1년만인 2006년2월, 일본 사장과 함께 사업차로 목단강에 온 일이 있었다. 일본 사장은 우리 애가 일본 대화는 둘째 치고 인격품질까지 아주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부모 된 마음으로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다. 사람 품질 품(品)자도 입 구(口)자가 세 개인데 사람이 하는 말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한 마디 말이 긍정적이 되어 사람을 훌륭하게도 만들 수 있고,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어 한 사람을 고통 속에 빠뜨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은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말을 배우는 데는 2년 걸렸고, 듣는 것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경청(倾聽)기술’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남이 하는 말을 잘 들으며, 말하는 사람의 심리파악을 잘 해서 적시에 적절한 말 한마디씩 던질 때 그 말은 무게 있고 힘이 있고 공감을 주는 것이다. 언어 한 마디에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 운명이 바뀐다는 이 천리를 항상 명심해 둘 필요가 있겠다. 동북아신문 2015-9-18
12    평등과 음양화합 댓글:  조회:945  추천:1  2016-11-14
[서울=동북아신문]여자영수가 나왔고 여성장관도 나왔다. 오늘 여성지도자, 여성박사, 여성사업가들이 용솟음쳐 나오는 전성기를 맞고 있다.   여성들의 사회지위, 정치무대에서의 호황을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여자들이 큰 정치는 못한다는 신화가 깨뜨려진 것이다. 여성을 기시하고 배척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던 역사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녕 ‘남녀평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녀평등은 법적인 평등, 신분의 평등이다. 손가락 놀리고 입술을 놀리는 부드러운 직업영역에선 여성선택이 우선순위다. 현대에는 여자들이 남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똑 같은 교육을 받기에 그럴 만도 하다. 지금 허다한 분야에서 여성강자, 여성호걸이 출현되면서 사회가 여성을 보는 안광도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여성들의 지위개선, 화려한 성과로 하여 남성들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가정안에서도 가뜩이나 ‘음성양쇄(여자가 세고 남자가 약하다는 뜻)’로 기를 못 펴고 있는 남자들이 눈을 멀뚱멀뚱 굴리며 부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확실히 요즘 보건데 집안에서 부인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허파 빈 남정들은 부인네들에게 치살리고 발라 맞추는 소리가 고양이 소리처럼 들려온다.   ‘풍류남아’들은 밖에서 아가씨, 젊은 여인을 껴안고 ‘테면우(帖面舞, 얼굴을 붙이고 추는 춤)’를 추고 집에 들어와서는 금시 부인들의 눈을 슬금슬금 보면서 갖은 은연함을 다 보인다. 좀 더 ‘담대한’ 남정들은 집에서 야금야금 모아 둔 ‘비상용(非常用)’돈을 살그머니 꺼내 가지고는 쌍나위(搡拿欲, 사우나)나 ‘홍등가’에 나가 아가씨를 보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루저녁에 돈을 가랑잎처럼 뿌려가며 즐거움을 향수한다. 그러니 이러한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부인에게 불평불만을, 이 ‘좋은 세월’을 탓할 자격도 없다.   이러한 탈선행위는 남정 자신의 도덕적 타락, 희신염구(喜新厌旧, 새 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한다는 뜻)의 노출인데 부인들도 한 번 쯤 반성할 필요도 있겠다. 부인이 사회에서 잘 나가고 성공했지만 가정안에서 부부생활이 엉망이라는 말들도 간간히 들려온다. 여성들이 결혼생활 몇 년 하고는 권태를 느끼고 젊은 심장이 고동치던 격정도 사라졌다. 우아하고 다정다감하던 그 옛날 모습도 까맣게 잊은 듯싶다. 이런 것이 자제력이 약한 남편들을 엉뚱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아내가 외간 남자를 보면 남편이 무능하고 멍청하다고 뭇 사람들의 삿대질을 받는다. 하얼빈시교에 있던 내 친구의 얘기다. 그 친구는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대에서 입당까지 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체구도 작고 천성이 어질고 고지식하다. 안정된 직업도 없다. 스물여섯 살에 타동네서 다른 사람의 소개로 키가 미끈하고 얼굴도 이쁜 처녀를 맞아들였다. 미모의 친구아내를 보는 사람마다 한 번 쯤은 뒤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수근수근 거리기도 했다.   “갸 뭐 볼게 있어~~당원간판을 가졌다구.”   “갸를 보고 왔겠나, 친 형이 부대에서 영급간부니 가문보고 왔겠지…….”   그래도 처음 친구부부는 아기자기한 결혼생활을 했다. 아들 둘씩이나 보았다. 수 년 지나 동네에서 제일 처음 큰 칼러 텔레비전을 갖추었다. 시교에다 제일 먼저 벽돌집도 지었다. 하지만 시시한 추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돈 많고 잘 생긴 남자들과 바람피워 새 집을 지은 것이 들통 났던 것이다.   소문이 한 입 두 입 건너 친구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하지만 이 친구는 모르쇠 했다. 싸워봤댔자 본인이 이득 될 건 하나도 없고 또 ‘인물 고운’ 아내가 탈출이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생활은 변화가 크고 윤택해졌지만 엉클어진 친구의 가슴은 녹이지 못했다. 그 후로 술을 더 크게 들면서 찌들어 갔고 결국 간암으로 죽었다. 얼굴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한 결혼의 비극,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친구의 나약함을 보여준 결과이다.   요즘 세월은 여성들이 신랑 당사자의 외모 신장(身长)을 보고, 신랑 쪽의 경제력과 능력을 보는데서 남자, 총각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오늘 남자들이 신부를 데려오자면 최대의 힘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돈이 없고 능력마저 모자라면 신부 얻을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한다.   옛날 ‘고추달리개’를 낳으면 온 집안이 경사나 난 듯이 좋아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아들자식을 보고 좋아하던 옛날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아들이면 대를 이을 수 있어 좋다는 생각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게다. 아들 둘을 가지면 동네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야겠네.” 하고 입버릇처럼 외운다.   정말 ‘여성숭배’, 여성 상위 시대다. 모든 면에서 미국 풍속을 좇아 움직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설사 어떤 모순으로 이혼하고, 심지어 아내가 바람을 피워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남자가 위자료를 줘야 할 날이 곧 도래 할 것 같다. 남자가 무능하고 또 아내를 사랑해 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아내가 바람을 피우게 됐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남녀평등’이요, ‘부녀해방’ 운동만이 아니라 ‘남성해방운동’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무시당하고 너무 기가 죽어 음양(阴阳)의 조화가 깨어지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여성의 성적 침해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   확실히 인권에서 남녀평등 시스템 작동은 잘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돈, 물질 면에서는 평등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장가가는데 남자가 더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한다.   역대로 여자는 ‘팔리고’ 남자가 ‘사는’ 이 의식과 관습에서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며 처녀가 ‘상품’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프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여성이 자연, 풍속습관의 순리를 잘 따르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지금도 남자가 키 크고 힘도 세야 좋은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키 크고 얼굴 잘 생긴 남자를 선호한다. 예쁘고 우월한 여성들은 신랑의 인물체격을 보는 동시에 학벌과 능력, 경제력을 본다. ‘남자동포’들이 장가가기 힘든 주원인이 되기도 하다.   아무리 남녀평등이 잘 되어가는 민주 사회도 남자의 위엄, 존대감은 계속 발양되어야 한다. 남자 절대 다수가 흉금이 여성에 비해 너르고, 키도 크고 힘도 더 세다. 물론 덩치 크고 드살 센 아내한테 매 맞고 사는 남편도 많다. 또 지구력에 있어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고 수명도 더 길다. 여성은 명예욕이나 허영심, 질투가 남자들보다 얼마나 더 강한지를 모른다. 이것이 여성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명예욕’은 그래도 배우고 노력하고 향상하려고 하는 것이 있어 좋다. 하지만 허영심, 질투는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남까지 해치게 된다.   아울러 여성이 지나치게 정신적 행복으로 되는 명예추구, ‘벼슬 욕’에 집착하면 다른 희생이 잇따를 수 있다. 그로 인해 부부의 육체적 쾌락은 멀리하게 되고 부부감정 위기를 맞을 수 있다. 허영심, 과욕은 부부감정뿐만 아니라 기타 방면에서도 큰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러니 남자들이 모든 면에서 여자를 초월해야 한다. 여성을 잘 ‘지배’하고 잘 리드해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학식과 재능을 닦고, 도덕문명에서도 언제나 수양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만 ‘대천세계’, ‘큰 방향’을 향해 질주할 수 있고, 결혼생활에서도 가정의 질서와 평화가 오래 유지 할 수 있다.
11    사라지는 희열의 만남 댓글:  조회:917  추천:0  2016-10-08
사람은 살면서 수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것을 통상적으로 ‘접촉’이라고도 한다. 애수에 잠긴채 이별의 슬픔을 안고 이별했던 친인, 친구, 연인과의 희열적 상봉은 통상적 접촉을 벗어 난 ‘접속’이라 할 수 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려면 플러그를 먼저 전원에 꼽아야 한다. 접속이 되지 않으면 물은 절대 끓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도 서로 입맞춤을 통해 ‘접속’을 시작한다. 마치 주전자에 전원을 꽂은 것처럼 온 몸이 금시 뜨거워진다. 그래서 남녀가 사랑을 느끼는 순간을 전기가 통한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요즘 현대화한 교통수단으로 만남의 빈도도 높아졌다. SNS, 위챗의 접속으로 소식이 번개같이 오간다. 인터넷, 스마트폰이 발달해 음성이 전파되고 얼굴모양이 찍혀나간다. 직접 만남 못지 않은 효과를 내고 있다. 인터넷글, 스마트폰글도 너무 쉽게 너무 자유분방하게 분수마냥 배설해지고 있다. ‘전 지구적인 작가시대’ 가 온 것이다. 이처럼 만나는 폭과 오고가는 목소리나 문자가 과거 비해 크게 확대 되었다. 하지만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어도 깊이는 얕아졌다. 남녀의 사랑도 동전의 양면 바뀌듯 경박해지고 있다. 접촉은 모래알처럼 많으나 ‘접속’은 황금처럼 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조조가 교활해도 마음 주는 친구가 있었고 유비가 착해도 원수를 피하지 못했다. 오늘의 만남은 마음 주고 보듬어 주고 사랑을 주는 그런 만남이 고갈되고 있다. 세상이 행복해지도록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럼 만남이 사라지고 있다. 서로 배척하려 들고 손해 볼까봐, 자기것 이 더 나갈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오히려 많아졌다. 그나마 왕래, 전화 없다가도 결혼식이요, 생일잔치요 하는 축하연이 생기면 재빠르게 ‘스티커’를 날려 보내 만나는 기회를 주어 천만 다행인걸로 생각한다. 이와는 다른 부류의 친구들도 있다. 달포 전에 오래 못 본 친구의 전화를 받은 일이 있다. 식당에 나와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나는 연속 출근으로 가지 못했다. 후에 그의 딸 결혼식에 초대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며칠 후 친구는 또 한 번 술을 샀다. 이 친구는 돈 계산보다는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성실한 친구였다. 이와 같은 친구의 만남으로 마음까지 후련해졌다. 형제간도 친척간도 만나지 않으면 남이 된다. 그래서 이웃이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사촌, 육촌으로 내려가면 거의 남남이 되기도 한다. 거의 만나지 않는 까닭이다. 왜 만나는 걸 꺼려할까? 과거의 만남은 형제 혈육 간 서로 마음이 와 닿는 기꺼운 상봉이었다. 요즘의 만남은 그렇지 않다.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형제, 친척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만나는 걸 꺼려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 내가 어려울 때 너희들 얼굴짝 한번 내밀었어”하며 냉정하기 짝이 없다. 도움을 청하는 친척의 애로사정을 해결해 주려는 도량을 가졌다면 이럴 수야 없을 것이다. 멋진 아파트, 고급외제차를 가진 부자들한테서 인심을 보기가 힘들어지는 현실이다. 이 산 가면 저 산이 높은 듯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오늘의 주조(主潮)입니다. 부자들한테서 ‘어질 인(仁)’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인(仁)’의 형상은 등 뒤에 짐을 진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다. 남의 짐을 대신 진 자가 어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깊은 물에 고기가 모인다.” “쌀독에서 인심난다.” 이런 말은 벌써 진부해졌다. 가진 자의 비인자(非仁慈)와 부도덕성, 없는 자의 아부와 비굴함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지금은 일부 사람들은 형제나 친척, 친구가 명성이 높고 돈이 많고 기업을 하면 그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나 자신이 못 난 것도 많겠지만 이 것만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18년 전, 미친 듯한 한국수속에 큰돈 8만5천위안을 날린 적이 있다. 그때 그 엄청난 경제타격에도 형제들한테 손을 내밀지 았다. 내 외사촌형제들이 한국, 일본진출로 부유해졌다는 말을 이미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형제들을 만나고 도움을 바라보려는 생각을 티끌만치도 가져보지 않았다. 한국에 오니 이 외사촌형제들이 나를 찾았고 나를 만나려 했다. 만나서 대하는 눈길부터 달랐다. 미안해하면서도 역 경을 디디고 일어선 나를 극구 치하까지 하였다. 오늘 우리의 만남은 정이 감돌고 서로 소통하고 서로 고충을 덜어주는 그런 만남이 되어야 할것이다. 서로 뜻을 같이 하고 마음을 나눌 때 우리의 삶이 진정 빛을 뿌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오늘이다. 2016년 10월 6일 동북아신문 2016-10-8
10    작용과 반작용이 주는 교훈 댓글:  조회:821  추천:0  2016-09-12
       (흑룡강신문=하얼빈) 총을 쏠 때 총신이 뒤로 움찔 밀린다. 두 물체가 서로에게 미치는 힘은 항상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된다고 일찍 뉴턴은 그의 ‘반작용법칙’을 고안하고 실증했다. 로켓이 자체 추진력을 얻는 원리도 작용과 반작용법칙을 이용한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이런 ‘반작용법칙’을 널리 활용하고 있고 인간사회생활에도 작용과 반작용이 주는 역할도 매우 크다. 그 작용이 때론 적극적 요소로, 때론 소극적인 반면적 요소를 불러올 때도 많다. 사람들은 흔히 좋은 의도로 ‘작용’했는데 그것이 엉뚱하게 나쁜 일면으로 흘러가게 되면 그것이 역효과로 ‘반작용’을 일으켰다고 곧 잘 말한다. 또 반면으로 불리하게 될 ‘반작용’에 힘을 얻고 인생에서 좋은 동력으로 되었다고도 말한다.   알다시피 영국의 42대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인생초년에 지독한 부진아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꼴찌를 도맡아 했다. 사관학교 시험에선 두 번이나 낙방했다.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계단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지나가면 ‘어머, 저기 꼴찌가 지나가네’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회고담이다.   이런 구제불능이 세계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처칠이 세계영웅으로 일어서게 된데는 그가 모든 경멸, 인격모욕을 동력으로 삼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한테서 받은 기시, 차가운 눈총이 그에게 자비, 소침, 실망으로 더 큰 ‘반작용’으로 이어질 것 같았지만 그는 거기에서 기가 죽지 않았다. 치명적 일격을 가한 그런 풍자적인 말은 오히려 그를 앞을 향해 달리게 하는 크나큰 동력과 추진력이 되었다. 후에 처칠은 분발하여 체계적인 독서에 진입했다. 매일 5시간 이상 서양철학사, 역사,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부진아는 이러한 꾸준한 노력을 통해 나중에 ‘제2차세계대전회고록’을 집필해 노벨문학상까지 타게됐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부작용, 반작용은 동력으로 될 수 있고, 어떤 작용은 반작용으로도 될 수 있는 게다.   오늘 트위터, 모바일, 페이스북, 그룹채팅에 난무하는 글, 댓글을 보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많지만 혐오감을 주는 것도 적지 않다. 그의 의사,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반작용적 역할을 주는 것이 적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현재 사회에서 반영되고 일어나는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논쟁·화제꺼리 등으로 모바일메신저 같은 그룹채팅이 시끌벅적대고 있다. 왜곡된 인식, 비리를 두고 질타하고 특수한 인물, 사적을 놓고 선전하고 고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격에 맞지 않는 일가견과 선양(宣扬), 겸손이 바닥을 치며 남이 몰라 줄까봐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에 대한 홍보, 자랑은 실로 사람을 질식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도리어 그의 인격에 손상을 주며 다른 사람의 평온하고 잔잔한 마음까지 흩으러 버리는 ‘반작용’역할도 해제할 수 없는 일이다.   좀 더 사고의 영역을 넓혀보기로 하자. 인간은 원래 이기적 본능을 지닌 존재이다. 하지만 자기 주관, 견해주장, 학식을 뽐내며 명예를 위주로 생각하는 본능만으로는 공동체의 존속은 불가능하다. 자기에게 맞춰진 생각의 방향을 타자에게 옮길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남에 대한 배려이고 글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다. 우리가 쓰는 볼펜 뚜껑 끝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공기가 통하면 잉크가 빨리 말라 수명이 단축될 텐데 왜 굳이 구멍을 뚫었을까, 그것은 이 뚜껑을 삼킨 아이들이 기도가 막혀 숨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프랑스 제조사인 BIC가 1991년 처음 시행한 이래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볼펜 뚜껑이 담긴 배려의 정신이 매년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하고 있다.   배려정신을 가지자면 항상 자신을 비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비운다는 말은 바로 자신을 덜 나타내고 전체적인 생각, 다수 사람의 이익과 속생각을 존중한다는 말이다. 종도 안쪽이 비어 있기에 맑은 소리를 내고 바이올린의 울림통도 속이 비어 있기에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게다. 자신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타인의 존경과 사랑, 타인과의 즐거운 공유를 받을 수 있게 ‘액션’(행위, 활동)작용을 취하는 것이다. 훌륭한 ‘작용’이 있으면 꼭 훌륭한 ‘반작용’이 잇따를 수 있다. 9월 12일자
9    우리 세대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댓글:  조회:836  추천:1  2016-06-13
한 중년 사나이가 사는 것이 힘들고 사업압력이 너무 커 승려를 찾았다. 승려는 그에게 빈광주리를 넘겨주었다. 저 앞을 걸어가면서 보이는 돌멩이를 하나하나 광주리에 주어 담으며 어떤 느낌이 오는가 생각해보라고 했다. 사나이는 시키는 대로 돌멩이를 하나하나 주어 담았다.광주리는 채울수록 당연히 무겁기만 했다. 이때 승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올 때는 빈 광주리처럼 홀몸으로 왔소.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나 하나하나 주어 담다보니 그처럼 무겁고 힘든 것이요.” “그럼 무슨 방법으로 부담을 덜 수 있습니까?” 사나이가 물었다. “사람이 진정 부담을 덜려거든 자신의 명성, 재부, 허영, 권력 따위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하오.” “스님은 살아오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겼습니까?” 승려는 크게 웃고 나서 말했다. “내가 버린 것은 몸밖에 것이요. 얻은 것은 깨끗한 마음뿐이라네.” 사나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었다. 조선족은 일찍이 90년대부터 거액의 장리 돈을 써가며 해외진출을 강행했다. 그것이 위험천만한 일인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뭉칫돈을 벌기만 하면 도시에다 아파트도 살 수 있고 자식 대학등록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푼 희망에 둥둥 떠 있었다. 이들은 아슬아슬한 단속을 피해가며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다. 이렇게 피와 땀을 흘리며 돈을 버는 부모의 고통을 모르는 자녀들이 많다. 물론 고생스레 일하며 돈을 버는 부모를 아끼고 불쌍히 여기는 자식들도 있다. 지난 달 중국 고향에 다녀왔다. 고향에 가서 외사촌처제네 집에서 며칠 묵은 일이 있었다. 처제 남편은98년도 한국에 가서 십여 년간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 보람으로 도시에다 새 아파트도 샀다. 후에 처제도 한국 나가 5년을 벌다가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돌아와서 또 아파트 한 채를 사서 한족처녀와 결혼한 아들 녀석한테 주었다. 그런데 처제 남편의 건강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하루 종일 무기력해 있는 상태다. 처제는 남편이 일에 지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했다. 남편이 저렇게 된 데는 아들딸이 속을 썩이고 있는 것과 무관할 수 없다고 했다. 처제는 이전부터 나하고는 아무런 말이나 솔직하게 말하는 그런 타입이다. 원래 공부 잘하던 처제아이들은 한족초중을 마치고는 공부하기 싫다며 일찍 사회로 나왔다. 사회로 나온 후 사립학교에 보내 영어공부, 기술공부를 시켜봤지만 모두 시작만 떼놓고는 끝을 보지 못했다. 후에 처제가 한국 나가면서 아들딸에게 집에서 놀기만 하는 것보다는 청도나 천진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신신 당부했던 것이다. 딸 녀석은 그래도 옷 장사 같은 것을 조금씩 하는데 아들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식당일 같은 것도 며칠 해 보고는 힘들다고 집으로 꽁무니 뺏다. 그 뒤 한국에서 부모가 벌어서 보낸 돈을 넙적넙적 받아먹기만 하고 마작이나 놀면서 허송시간을 보낸 것이다. 아들 녀석이 한국에 가니 부모 속은 더 타들어가기만 했다. 처제부부가 한국에서 돌아온 후 세 번째 되는 해에 장가든 아들 녀석이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 추첨에 당첨되어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입국 3년이 됐지만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중국에 가서 있는 시간이 절반이 넘는다. 그러니 부모가 아들 녀석으로 하여 기분이 엉망이고 아들 녀석의 돈을 바란다 것은 소가 웃다 꾸러기 터질 일이다. 처제부부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가정을 위해서 아껴 먹고 아껴 쓰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남편은 몇 십 년을 피워 온 담배도 건강보다는 돈이 아깝다며 떼여버렸다. 한 달에 쉬는 날이 별로 없이 시골에서 하루 12시간이상의 강노동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파트 두 채도 살 수 있었던 게다. “아무리 많이 벌었어도 잃은 것이 더 많다는 기분이에요.” 남편의 병든 모습을 보고 아들 녀석이 하는 꼬락서니를 두고 한숨을 짓는 처제다. “아글타글 피땀 흘리며 일해 온 나 자신이 부끄럽소.” 처제 남편도 긴 한숨을 뿜었다. 처제는 아들 녀석이 누굴 닮아 저런지 모르겠다며 눈꿉을 찍었다. 그러면서 아들 녀석이 저렇게 된 데는 부모책임도 크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남편이 돈을 벌어 집으로 척척 보내니 자식들은 호의호식했다.자식들이 ‘왕자’, ‘공주’로 바뀌어 버렸다. 배부른 고양이는 쥐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근심 걱정 없이 돈을 쓰게 되면서 공부하려는 의욕, 일하려는 욕망마저 사라졌다. 부모가 골병들게 돈은 벌었지만 자식은 자기밖에 모르며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부모는 돈 벌고 재부 쌓는 욕심에만 급급해 말고 자녀를 염두에 두고 자녀교양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가 잘나가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모아 둔 재산도 ‘공중누각’이 되고 마는 법. 우리 5~60대 세대는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께 효도했다. 오늘 자식한테 효도는 받지 못 할지언정 자식이 자립하며 지나친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가정을 영위해 나갔으면 하는 것이 오늘 부모들의 선량한 기대이다. 오늘 세대에 자식농사 망쳐먹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럼 다음 세대는 이런 비운이 재현되지 말아야 한다. 자식이 계속 게으르고 불효, 불충으로 나간다면 자식의 자식도 그대로 본받을 확률이 높다. 유전이 100%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한 것만큼 그대로 돌아온다’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는 똑 같으며 불가항력적이다. 동북아신문 2016-6-7  
8    죽음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746  추천:0  2016-04-08
정상적이고 성숙한 사람치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게다. 한국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1910-87)회장이 타계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24개 질문을 던졌다. 그 중 이런 질문이 있다.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이 죽지 않고,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 가는 것에 비유했는데,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위인이나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서 시간부인생 앞에서 쓸쓸하고 공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어쩌면 죄사함을 받고 영혼이라도 천국에 이르렀으면 하는 소망일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물질계를 초월하는 생명현상을 말한다고 한다. 두 번째 질의를 보면 부자들의 ‘나눔’에 대한 예수의 강한 메시지라고 보면 된다. 대체로 부자는 ‘과욕’의 대명사로낙인 찍혀있다. 그 과욕을 버리기에는 어렵고 극히 제한성이 있는 게다. 기실 부자라고 해서 100% 다 나쁘고 100% 다 좋은 것도 아니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는 게다. 사회, 인간을 자칫 미망(迷妄)속에 빠뜨리고 있는, “지구종말론적 신앙”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우리 인간을 냉철하게 반성하고, 사색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들이 자취를 감추었거나 멸종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인간만이 멸종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종말의 시간이 닥쳐오면 열심히 기도한 사람이든 안 한 사람이든 다 죽게 마련이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만이 “휴거현상”에 의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축복인 것이다.  천국은 둘째치고 무 종교인들이 죽음과 신에 대한 사색과 태도는 어떠 할까.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또한 물리적인 죽음을 경험하고도 살아남는 사람이란 것을 상상할 수도 없으며, 믿고 싶지도 않다. 유약한 영혼들이 두려움이나 터무니 없는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진 나머지 그런 사고를 전도한다.” 1931년 미국에서 상대이론을 주창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상식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한다.사람들은 살아 가고 있는 동안 실재로는 죽어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다가선다고 할수 있다. 죽음에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자기 삶이 그래도 뜻 깊고, 보람차다고 느낄 때 남은 인생을 보다 소중히 하려는 것이 인간의 섭리이다. 아무런 생각도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타락’한 인생인 것이다. 비록 타락된 인생일지라도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의식하고 다시 인간의참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할 때, 그것은 리지를 세웠다고 자부할 수있다. 그 후 삶을 재 정리하고정직하게 스마트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고 했다.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한국에 오니 삶을 소중히 대하는 한국인이나 동포들을 보다 절실히 느끼게 된다. 먹는 데서 영양과건강을 따지는 음식문화, 초기병 예방에 무척 신경을 쓰며 정기적 건강검진을 하는 한국인과 동포들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쾌적한 삶의 질과 오래 살려는 의욕, 사는 동안이라도 건강하게 살려는 의욕이 돋보이는 것이다. 또 일단 병이 나면 거기에 드는 엄청 난 의료비를 고려하지 않을 수없다. 건강을 위하여 음식에 신경쓰고, 약물치료하고, 운동으로 몸을 단단히 하는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마음’을 잘 다스리는 작업도 간과 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인간은 어찌 보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것이다. 하나는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얼굴, 부모가 준 얼굴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로 만드는 얼굴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내 얼굴도 착하고 아름다워 진다. 추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면 내 얼굴도 추하고 악해진다. 내생각과 내 수양이 내 얼굴을 형성시킨다. 착하고 올바르게 사는데 다른 보상이 없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그 보상이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바란다면 기쁜 마음이 사라진다. 마음이 기쁘고 편하면 신심이 후련한데 병마도 그런 마음에는 붙지 못하고 도망간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수련하는 것도 마음 다스리기를 위한 작업이 아닐 가고 생각 한다. 사욕을 버리고 마음을 닦으며, 자유롭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다. 또 죽음이란 대수롭지 않은 것같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이란 없고 내가 죽었을 때 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그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가고 필자는생각한다.          동북아신문/최세만  2016년3월30일                       
7    날 따라 변모해 가는 새 농촌 댓글:  조회:1121  추천:2  2016-03-31
지난 11월25~27일 2박3일간 “전국농업기술자협회”에서 주관한 중국동포 농업교육(제1기)을 수료했다. 나는 원래 농업(농사)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에서 농사만 해서는 치부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절대 다수 조선족들이 농경 일을 버리고 한국에 진출했다. 그들 대부분이 한국에 와서는 건설현장, 식당 업에 종사한다. 농사수입이 좋으면 이들이 이국타향에 와서 그처럼 고생스레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과 견해였던 것이다.    이번 교수, 학자, 농업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으며 농업에도 많은 애로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WTO, FTA시대”를 맞이하여 선진국행렬에 들어서는 농업은 이제 농사가 아니고 고도의 국제화한 기업경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머지않아 ‘농업기업경영’은 ‘공무원직’에 못지 않은 인기를 얻을 것이다. 학자들의 수준급 강의는 그렇다 치고, 농촌에 있는 촌장들의 강의를 경청하면서 이 분들이 대학강의에 나선 학자들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들의 열띤 강의를 통해 이들이 농촌을 변혁시켰고, 또 농촌에서 끊임없는 새 설계도를 펼쳐가고 있다는 것을 폐부로 느꼈다. 새 농촌을 사랑하고, 다종경영에서 피와 땀을 흘린 보람이 이들에게 지혜를 주었고, 풍부한 전업지식으로 꽉 찬 열변도 토해 낼 수 있었다. 이런 농촌 열성가들, 리더들이 농촌을 삶의 터전으로 풍요롭게 만들었다. 지세가 높고 평탄하지 않은 땅을  ‘립체화’(立体化)적으로 잘 활용했다. 과수나무를 재배하고, 건강식품을 재배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여러 가지 오락시설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시설들은 새 농촌을 홍보하고 상품판매 진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산포도를 많이 생산하는 그런 곳에 와인공장도 앉혔다. 거기서 나오는 경제수입도 아주 좋았다. 이와 같이 농촌들의 활성화한 경제수입, 멋지게 변모해 가는 시골로 하여 귀농귀촌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시골이지만 포장도로가 깔리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되었으니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2014년도만 해도 귀농귀촌 인구가 4만4682가구로 2013년 대비 1만2259가구가 늘어났다. 이런 현상은 중국 조선족 집거지구에서도 볼 수 있다. 처음 조선족 농민들은 농촌과 토지를 떠나 국외으로 나갔다. 지금 이런 농민들은 노무하여 벌어 온 돈으로 도시 외곽에 아파트를 사면서 농촌도시화를 가동 해가고 있다. 헤룽장성 무단장시 동안구 시교 강남조선족촌은 완전히 도시화 되었다. 무단장시 서안구 나고향 삼합촌은 국외나들이 해서 번 돈으로 촌에 포장도로를 깔았고, 집집마다 하수도를 놓았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도시생활환경도 울고 갈 정도다. 대도시속에 들어가 생활하던 사람들도 육속 자기 살던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많은 조선족 농촌마을들에서 포장도로를 깔았다. 이런 마을사람들은 마트를 개업하고 음식점을 하고 오락시설을 갖추면서 유람형 새 농촌을 건설하고 있다. 앞으로 녹색식품생산과 종합적 농작물가공에도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이 그들의 웅비의 마음이다. 이번 견학에서 본 쇠꼴마을처럼 다양한 식품재배, 산마루농원처럼 세인이 주목하는 촌공장도 세워 히트칠 산품을 생산 할 때 우리 조선족농촌마을도 더 휘황한 앞날이 있을 거다.   이번 동포 농업교육을 주관한 전국농업기술자협회와 성심껏 협조를 담당한 “동포세계신문”김용필 대표님과 김충정선생님께 충심의 인사를 올린다.     동포세계신문/ 최세만     2015년 12월5일       
6    공자의 삼십이립 …칠십이종심소욕 해독 댓글:  조회:719  추천:2  2016-03-28
성인 공자의 말씀은 무수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뜻이 쟁쟁하게 안겨 온다. 공자왈: “삼십이립”(三十而立), 서른 살이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얘기다. 나아갈 인생 목표와 발전계획을 단단히 세울 수 있다. 그러면서 인격수양을 갖추며 자신이 맡은 바 사업을 착실히 실행해 나가는 것이다. 공자의 “사십이 불혹” (四十而不惑), 마흔 나이는 광음세월과도 같이 빨리도 흐른다. 이 나이에 의혹과 방황 뒤에 홀연히 분발하고 심사(深思)하며 문득 크게 깨닫게 된다. 사십 나이에는 어디에도 미혹되지 않고 명석하게 깨어있다. 사회를 이해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안다. 이 나이에는 부모의 연세도 많다. 그래서 부모에 효도하고 또 자식교육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공자의 “오십이 지천명”(五十而知天命), 중국 고대철학은 하늘을 신으로 받들었다. 하늘이 인류를 좌우지 한다고 믿었다. 공자의 학설 중 뚜렷하게 ‘천명’의 관점을 보류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인과보응이다. 나이 오십에는 무엇이든 강요해서는 안 되며 하늘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쉰은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겼다. 본인의 학식, 경력도 최고치에 달했다. 그러기에 자기의 명운, 궤적을 잘 알며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의 책임을 묵묵히 여행하며 게을리 처신 하지 않는다. 나이 오십에는 인생의 가장 성숙한 단계이고, 성공과 ‘영예’도 한꺼번에 누리는 나이이고, 항시 압력도 동반하는 나이기도 하다. 공자의 “육십이이순”(六十而耳顺), 이 나이는 상대적으로 좋은 일, 궂은 일 다른 사람들이 처리하게 된다. 자기는 듣고 있으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흥분도 안 하고, 의연히 평온한 상태이다. 학자 호실(胡适)이 말했다. “이순(耳顺)은 귀에 거슬리는 것도 받아들이고, 거슬리는 말일지라도 거슬리게 들리지 않는다.” 이 나이에 누가 뭐래도, 또 그 어떤 곡절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냉철한 사고와 자기의 정서를 객관환경에 순응시킨다. 나이 육십이면 인생도 궤 뚫어 본다. 개개인 인생단계별에서 나타나는 생활특징, 성격특점을 속속 들이 맞춘다. 이 나이에 중요한 것은 건강과 쾌락이다. 그래야 자녀들의 부담도 덜 수 있다. 이 나이에 명예와 득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업할 때 처장이요, 과장이요, 주임이요, 공정사요, 교사요 하는 것이 퇴직 후에 하나의 호칭; “퇴직인원”에 불과하다. 이 나이는 인생의 늦가을이다. 생활의 발걸음이 늦어진다. 서서히 인생 여행길에서 갖가지 풍경을 흠상하고 감상한다.   공자의 “칠십이 종심소욕”(七十而从心所欲), 이 나이에는 아주 간단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생각대로 할 때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건강준칙만은 꼭 지켜야 한다. 이 나이에는 삶이란 극(剧)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한다. (장수하는 오늘 편차가 있을 수 있다)  병석에 누워 회상하는 동안 깨닫기도 한다. 자기가 방심했던 일, 실타래처럼 엉킨 잘못에 회한(悔恨)을 가지기도 한다. 수없이 잃어버린 물질적인 것들은 다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잃어버린 “인생”은 절대 되찾을 없다는 것을. 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희미해진다. 어둠 속에서 생명연장선의 녹색 빛과 윙-윙 대는 기계음을 들으며 죽음의 신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긴 인생을 살다 보면 희로애락이 반복된다. 그 가운데도 불행, 고충(苦衷), 무기력이 줄 차게 따른다. 사람은 짠 바닷물을 마시면 탈수현상이 생긴다. 심하면 세포가 오그라들어 생명까지 잃게 된다. 삼투(농도가 다른 두 액체의 합류현상)작용으로 세포 안의 수분이 세포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짠물을 마시는 물고기들은 어째서 탈수현상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것은 고기만의 독특한 노하우를 가진 덕분이다. 짠 물을 흡인한 물고기들은 염분을 바깥으로 배출해 담수만 체내로 공급한다. 삼투압이 발생 할 여지가 없다. 살아가면서 내 인생에서 왜 파란만장한 일들이 일어 날까, 라고 한탄하기 보다는 바다의 물고기처럼 ‘염류세포’를 작동시켜 나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바깥으로 펑핑하고 유익한 것들만 체내로 흡수하도록 노력 해 보자. 그러면 인생의 종점에서 근심걱정 없이 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동북아신문/최세만      2016년1월11일.  
5    삼십년 하동 삼십년 하서 댓글:  조회:863  추천:1  2016-03-23
30년 하동 30년 하서(三十年河东三十年河西),이 격언의 유래는 이러했다. 옛날, 중국 황하의 물길(河道)은 불 고정했다. 어느 곳은 원래는 강 동쪽에 있었는데, 몇 년 지나서는 강줄기가 바뀌면서 갑자기 강 서쪽으로 변했다. 후에 사람들은 변화무쌍하고 추측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두고, 위의 격언을 빌어 말하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인생살이, ‘운수’도 정말 그러한 것이다. 인생여정에서 뜰 때도 있고, 내림 질 할 때도 있고, 일어 날 때도 있고, 곤두박질 할 때도 있다. 89년도 ‘대학생 민주운동’ 때 있었던 일이다. 이 운동은 그 해 5월부터 고조를 일으켰다. 신문, 언론방송에서도 대서특필했다. 객관적으로 이번 “절식운동”을 정면으로 평가했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농망가를 타서 둘째형의 모내기를 도왔다. 저녁에 술을 마시면서 TV를 보면서 학생운동을 예의주시 했다. 그때 둘째 형이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아무리 학생들이 들볶아도 학교 선생들한테는 먹을 알이 없어.”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불쾌했다. 당시 농민들의 농사수입은 아주 좋았다. 쥐꼬리마한 월급을 받는 교사들을 우습게 본 것이 사실이었다. 그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수술칼은 쥔 의사가 백정보다 못하고, 대학교수가 길거리에서 차단(茶叶蛋)을 파는 노파보다 못하네.’ 당시 교사나 공무원들의 월수입이 형편 없었고, 공장에서 실직하고, 하강(下岗)노동자가 엄청 많았다. 시초 학생운동은 불 공평한 사회 제도를 개진하고, 민주개혁을 촉진하려는데 있었는데, 후에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한테 이용되면서 있어서는 안 될 “6.4 천안문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후 수년이 지나면서 농민들의 쌀 가격은 오르지 않고, 쌀 판매난이 어려워지고, 생산자료물가가 껑충 오르기만 하면서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이 하락했다. 반면 공무원들, 교사들의 봉급이 들입다 오르면서 교원직업을 부러워하기 까지 했다. 30년 하동 30년 하서가 아니라 ‘십년하동 10년 하서’인 격이 되었다.  개인 운수에서도 참 신통한 일이 있었다. 81년도 겨울, 나하고 한족 대대 민병연장은 공사(公社)서씨란 선전간사를 협조해서 문화대혁명시기의 원가착(冤假错) 락실(落实)에 나섰다. 우리는 21일 동안 외지생활을 하면서, 4개 중점마을을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거기에서 우리는 문화대혁명시기 수 십 집의 ‘억울한 사건, 가짜 안건, 틀린 사건’을 해명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돈을 지급 받게 합의를 보았다. 그때 나는 서 간사한테서 한 공산당원의 고상한 풍격을 보았다. 서 간사는 웅변도 좋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제대 군인출신인 이 분은 원래 공사 중학 교장, 공사 농업은행 행장도 한 적이 있었다. 21일 조사연구를 하는 동안, 서 간사는 줄곧 팔 굽치와 무릅 굽치를 기운 옷을 입었다. 이 분은 문화혁명시기 부대에서 남처럼 ‘만세구호소리’를 웨치며 열광하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지나 나는 현성에 회의 하러 갔다가 우연히 다리 목에서 서 간사를 만났다. 그때 그는 이미 공사 비서로부터 발탁해서 현위 당안국 국장신분이었다. 깔끔한 중산복 차림한 이 중년 사나이는 참 멋져 보였다.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교장이었다. 이 교장은 원래 생산 대대 서기였는데 문화혁명 시기 중앙 “붉은기잡지”에  ‘계급투쟁의 장기성, 복잡성, 굴곡성을 인식하자’란 유명한 글을 발표했다. 이 문장은 후에 중소학교 정치 교과서에 까지 올랐다. 그는 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현의 부 현장 직책도 겸임 했다. 우리가 현 운동회에 참가 할 때면 우리 교장은 주석대위에 떳떳하게 앉아 있었다. 우리 선수단도 부 현장인 교장의 배려를 입어 언제나 주석단 옆에 자리를 정했다. 후에 ‘문화대혁명착오노선’이 시정되면서 이 사람은 어느 한 이름없는 탄광에 내려갔다. 내가 기차역에서 한번 본 일이 있었다. 조금 먼 발치에서 보았는데 그가 입은 옷은 남루했고 얼굴에 수심에 잠긴 듯 했다. 중학교 있을 때 이 분이 우리에게 직접 단과도 강의 한 일이 있었다. 하여 그 모습을 보고 내 마음도 짜르르 해졌다. 이 분 역시 ‘문화혁명의 피해자’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운수는 가늠키 어렵다. 부자운세, 출세벼슬은 본인의 능력, 의지, 자질과 수양에도 있겠지만, 복잡다단한 사회환경요소와 뒤엉키기 때문이다. 하여 가급적으로 좋은 “운수”를 오래 누리자면 덕망 덕목도 쌓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큰 경향’에 항상 명석하고, 머리가 뜨거워 서도 안되고, 무조건 순종해서도 안 된다. 한때 잘 나가고 부유하다고 해서 없는 자를 깔봐서도 안 된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동포타운신문               
4    신뢰에 따르는 힘 댓글:  조회:1443  추천:2  2016-03-10
    최세만 출판 언론자유가 열려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온라인이나 트위터에 난무하는 악성 댓글을 보고는 경악스러울 뿐이다. 조선족에 대해서도 많은 네티즌의 반발과 부정적인 태도에 안타깝고 마음이 허전하다.   한국인이 중국동포들에 대해 반목하고 불신이 커가는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요소, 이념적 차이, 현실 동포들의 처사로 인기(引起)된 것이 아닐까.   썩 거슬러 올라가 3~40년대 국민당 정부는 조선반도에서 건너 온 우리 민족을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화의 ‘대 가정’ 성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우리 민족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단합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족이 일제의 억압과 지주, 자본가를 반대해서 뛰쳐 나선 점에서 공산당의 주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영용무쌍하게 싸우면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그래서 공산당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자랑스레 중화의 당당한 일원으로, 주인공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또 ‘6.25항미원조’에는 선두에 나섰다. 이런 ‘사변’은 한국인에게 발목 잡힐 수밖에 없다. ‘빨갱이 물에 길들어진 자들’, ‘6.25전쟁에 진두에 선 자들’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념 갈등, 전쟁에서 온 대립정서는 엄청난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냉전시대 서로 반 세기 동안 긴긴 세월 빗장을 굳게 잠그고 있다가 ‘88서울 올릭픽’을 계기로 국문이 빠금히 열렸다. 조선족도 친인척 방문을 통해 약장사도 하면서 부를 쌓기 시작했다. 2007년, 방문취업제가 출현되면서 수십만 조선족이 대량 한국에 몰리게 되면서 허다한 사회문제와 마찰이 일어났다.   한국에 나온 대다수 조선족을 보면 ‘인민공사집체화’ 때를 경과한 사람들, 개혁개방후 개체농사를 했던 분들이다. 거기서 하던 일은 너무 빡세지도 않았고 두루 시간이나 맞추면 되었다. 또 단간(单干)때는 자기 농사만 다 지어 놓고는 할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한국 와서 고강도의 일, 지루한 연장근무에 잘 적응되지 않는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그렇지 않다. 일할 때 보면 아주 걸 싸다. 한국 일군들 중에는 너무도 많은 ‘노동모범’이 있다. 중국에서는 개방 전에 그런 ‘노모(劳模)’가 많았다. 지금은 그런 ‘노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유제로 넘어 간 기업에 그런 ‘노모’가 두루 있기는 하지만.   그러니 회사를 자기 집 일처럼 생각하고 책임감 높게 일하는 한국인관리, 매니저들이 누가 일에 서툴고 요령을 피우는 사람을 보기만 하면 고함지르고 ‘XX놈’이란 쌍말도 막 나간다. 불법체류시기엔 그런 모욕을 당해도 참고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런데 합법체류 비자인 지금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 된 욕을 당하면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달려드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과격한 행동이 한국인의 눈에 나고 한국인을 격노시킨다.   그리고 우리 일부 동포들이 자아 감각이 뛰어나고 고향 땅 충성심이 강한 듯싶다. 날로 강성해 가는 중국을 자랑하고 한국을 ‘폄하’하는 현상이 존재한다. 이런 것이 무의식적으로 한국인의 신경을 자극 주기도 한다. “너 나라가 좋고 잘 사는데 왜 한국에 와 ‘꿀’을 빨아 가니!”, “너 들은 동포가 아니라 중국 소수 조선족이야!” 온라인에는 이보다 더 험한 악플들이 올라와있다.   우리가 이국땅에 왔으면 ‘굴욕’도 좀 참아 가며 몸을 낮추면서 돈이나 벌어가는 것이 장땡이다. 한편 한국의 관리자 고용주들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 동포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 와서 저들도 피해가는 3D업종 일, 식당 일은 우리 동포들이 도맡아 한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 건설현장, 식당 일은 동포가 없으면 안 되지요.”   많은 한국인의 눈에는 중국동포들이 저들 나라에 와서 돈 버는 것만 생각하지 저들 한국인이 중국 와서 돈 버는 것은 잘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 중국 거주 한국인이 100만에 진입하고 있다. 베이징시에 20만 한인이 있는데 베이징 왕징(望京)에만 10만이 있다. 칭다오(青岛)에 10 만명, 상하이에 7만 명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기업인들이 중국에 들어오면 조선족이 통역을 서주면서 큰 몫을 한다. 한국인이 인건비 저렴한 대륙을 택해 그들의 경제이윤을 높인다. 또 중국 일군들은 한국 기업인이 투자해서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 일하면서 자기의 수입도 올리고 있으니 그 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한국인과 동포지간 모순은 옛날 이념 갈등과는 다르다. 지금은 한국 사업환경, 노동현장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주면 한국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밖에 강력 범죄, 쓰레기 무단투기, 공동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것은 한국인의 신뢰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사람지간 서로 믿고 신뢰를 쌓고 서로 아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음을 열고 화합의 길로 나가는 데 황금 열쇠를 쥔 거나 다를 바 없다. 일찍이 성인 공자는 신뢰를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꼽았다. 어느 날 제자인 자공이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식(食)’,‘병(兵)’,‘신(信)’을 들었다. 경제, 국방, 신뢰라는 얘기다. “부득이 셋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병을 버리라”라고 말했다. “만일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재차 묻자 공자는 “식을 버려라”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신뢰”이었다. ‘무신불립(无信不立)’,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신뢰가 그만큼 중요함을 시사해 준다.   한국에 나와 일하는 우리 동포들, 동포공동체가 한국인의 신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한국사람, 관리자, 매니저, 고용주들도 더 큰 그릇으로 저들 국가에 와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이해하고 믿어 주고 진심으로 헤아려 줄 때 존경과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게다. 그렇게 된다면 동포들은 보다 책임감 있게 보다 열정이 차 넘치게 일하고, 한국의 여러 가지 규제도 양호하게 준수하며 나갈 것이다.   사막을 건널 때 제일 좋은 동반자는 가족, 친구, 동료라 했다. 서로 믿고 돕고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야 험난한 고비 사막을 넘어 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나 중국동포들도 가족같이, 친구같이 하나로 융합될 때 그 힘이 막강한 것이다. 동북아신문 2016-3-9  
3    관리자의 화와 소통 댓글:  조회:1297  추천:1  2016-03-01
내가 한국에 와서 오래 다닌 회사가 있었다. 삼성반도체 청결회사인데, 그 회사에서 2년 4개월을 일했다.   이 회사에 오래 근무 했던 까닭은 월급은 적었지만 일이 좀 쉬운데 있었다. 그래서 막 노동을 안 해 본 사람, 공직에 있다가 퇴직한 사람들이 이 회사를 많이 찾았다. 라인 안에 들어가 반도체 고급장비 청소인데, 특근이 있을 때는 한 달 급여도 괜찮았다. 5일 근무로 들어가면서 급여가 낮았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주말에 이틀 쉴 때에는 다른 인력에 나가서 일당 돈을 벌 군 했다.   회사의 일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지만 느닷없이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가 많았다. 그것은 사장이나 반장들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사장은 칭찬에는 굉장히 인색한 편이다. 그런데 눈에 거슬리는 일을 보고 듣기만 해도 가차없이 꾸중하고 훈계하는 타입이다. 라인에서 좀 앞당겨 나와도, 부주의로 장비를 잘 못 건드려도, 누가 게으름을 피우면서 반 간부들의 작업지시에 순종하지 않아도 모두 사장의 야단을 맞는다. 몹시 격해 오를 때는 “이새끼, 저 새끼”란 쌍말도 막 나간다. 기실 사장은 입은 칼날 이여도 마음은 두부처럼 부드럽다.   사장의 ‘쌍말’이 나갈 정도로 사원에 대해 엄격한 것이 너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삼성전자는 정규직이든 비 정규직이든 사원관리제도에서 엄한 데는 이름이 있었다. 또 라인안의 메모리(计算机存储器)장비 한 대가 수 천 만원, 어떤 것은 수 억 만원의 가치에 이른다. 조심하지 않았다가 파손되는 날이면 그 후과를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사장뿐만 아니라 반장들까지 사원들에 대한 요구가 엄한 것이다. 그런데 때론 어떤 반장의 무리한 요구, 잔소리는 일군들의 불만을 초래하기도 했다.   나도 반장의 어떤 일에 대해서는 못 마땅하게 여길 때가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기계실 위의 천정에 올라 가서 작업 할 때다. 나는 그 쪽 켠에 있는 가는 파프(塑料管)가 부러 질 가봐 감히 그 위에는 올라 가지 못했다. 사장도 사고내기가 쉽고, ‘위험구’같은데 올라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A반장이 다가오더니만 고함지르는 것이었다.   “왜 저 위에 올라가지 않았어? 응~~”하며 버럭버럭 화를 냈다. 그러면서 보란 듯이 몸을 솟구쳐 올라간다는 것이 그만 균형을 잃고 뒤로 벌렁 넘어가면서 궁둥방아를 찧고 말았다. 기실 나는 반장들이 수위 높은 언행을 할 때 마다 꾹 참고 견뎌 왔다. 대신 반장들의 꾸중, 잔 소리 같은 것을 막아 보려고, 그들의 비유를 맞춰보려고 애를 썼다. 어느 반장이 회식(술 자리)을 좋아하면 적극 동참도 했다. 물론 회식은 보통 돈을 각자가 지불한다. 회식에 중국에서 조카들이 들고 온 고급 술을 가져갈 때도 있었다. 술을 나누면서 반장들과 소통하고 친해지려고 했다. 술을 마실 때 속에 담아두었던 말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총 반장님은 사원들에 대한 태도가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닌 가요?”   “내가 엄격하지 않다간 수 십 명 사원을 제대로 틀어 쥘 수 없단 말입니다.”   총 반장도 사원에 대해 너무 각박한 것 같지만 할 수 없이 그러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실 총 반장은 화는 잘 내도 뒤는 없다. 또 술을 마실 때는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그런데 어떤 반장은 좀 그렇지 못하다. 융통성이 없으면서 성격이 팩 할 때가 많았다.    한번은, 사원들이 원래보다 10분 먼저 라인에서 나왔다. 이것을 눈치 챈 사장이 B반장을 보고 이미 나간 사원들을 다시 불러 들이라고 엄포를 내렸다. 나는 통근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B반장의 전화를 받고 차에서 내렸다. 한참 회사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B반장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이십 여명의 사원이 앉아있는 접대실 안에서 B반장이 생 난리였다.   “어째서, 어제 돌아서지 않았어? 거짓말을 해 대면서 응! …”    앞으로 다가와 당장 멱살이라도 거머쥘 듯한 태세였다.   “뭐라고, 요즈음 내가 너무 착하게 놀았는가 보다! 너무 소동(小童)적으로 받아주었더니 이렇게 무리해도 돼!”   나도 이 회사에 들어 와서 처음으로 반장한테 음성을 높여 가며 맞짱을 떴다. 그날처럼 당돌하게 나 오리라고는 나도 생각 못했다. 옆에 있던 C반장도 화가 나서 말했다.   “왜 나하고 말할 것이지. 사원하고 화를 내! 어제 그 버스에 나도 앉아 있었어!” 그랬더니 B반장은 석연치 않음을 눈치 차렸는지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아마 B반장은 내가 통근버스에 오르지 않고 일부러 돌아서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었다. 후에 라인에 들어서면서 B반장은 나를 보고 자기가 오해 했다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일이 있은 후, 회사 관리들이 나에 대한 태도가 확 달라진 것을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실 회사에서 버럭버럭 화를 잘 내는 사장이나 반장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로부터 조선사람을 나무 목(木)에 비유했다. 불을 붙이면 확 타오르는 나무처럼 정열적이며 성미도 불 같다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70년대 ‘경제신화’는 그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타오르는 불 같은 애국열정, 주인공다운 책임감, 피와 땀을 흘린 보람이라 했다. 확실히 한국인은 이와 같이 열정도 높고, 성격도 급하고, 책임심도 강한 것이다. 70년대 열혈 청년이었을 60대 반장이나 사원들 몸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한편으로 한국인이, 고도의 책임감으로 모든 일을 대처하는 데서 오는 심리 중압감, 매니저들한테서 받는 스트레스, 극도에 달하는 정신불안정감은 다른 화근을 불러오기도 한다. 한국 세계자살 2위 라는 집계가 이를 설명하기 싶기도 한다. 지금 한국의 많은 사장, 매니저들이 강압적으로 일을 떠밀고, 독단전형적인 사업처리방법도 사라질 때라고 보아 진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나라풍격마저 흐릴 가봐 걱정이다. 우수한 관리자, 매니저들은 조폭하고 욕질보다는 온화한 마음으로 부하들과 소통하며 친절해진다. 사원어깨에 손을 얹어 놓거나 등을 토닥여 준다. 이런 피부접촉은 사원들로 하여금 회사를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하도록 자극한다. 긴장하고 불안할 때 보다 기분이 좋고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때 생산능률, 효과성이 더 올라가는 법이다.                                                                2016년1월21일                                                                  
2    글쓰기와 독서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283  추천:2  2016-02-17
신문, 잡지 독자층이 떨어진 것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TV보급, 뒤따라 인터넷증폭, 잇따라 스마트폰출현으로 활자화한 책이 사람들 시야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지금 글을 읽는 사람을 보면 그 대부분이 인테리, 학자나 “글쟁이”들이다. 일반인이  책을 보는 것이 하얀 입쌀밥에 뉘에 속하지 않는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몇 만부 기록을 냈던 “흑룡강신문”도 구독자가 떨어져 신음하고 있다. 흑룡강 조선민족 출판사에서 출판하던 “은하수”월간지가 ‘요절’한지도 십 여 년이 지났다. 목단강시조선족도서관 김성옥 관장은 “은하수”의 폐간은 독자층이 내려 간 것도 사실이지만, 기고작가가 없는 것이 주 원인이라 했다. 우리의 신문, 잡지(한족신문잡지포함)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파산도해(派山倒海)마냥 육박해 오는 인터넷디지털 온라인시대에 신문, 책이 외면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지식정보폭발시대’에 독자들의 공명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내가 흑룡강신문사 통신공부를 할 때, 신문사 이 장수(필명 이 묵)선생님의 논평 글을 몇 번 받은 적이 있다. 이 장수선생님은 서찰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뉴스가 아니고, 사람이 개를 물 때 그것이 바로 뉴스다. “ “사람은 모두 자기 생활체험이 있다. 관건은 이런 체험을 어떻게 남다르게 쓰는가에 달려 있다.” 이 장수선생님은 신문글의 인기성, 신빙성, 공명성을 제시한 것이다. 필자는 80년도에 흑룡강신문에 “언제 가야 재무제도가 바로 잡혀 지겠는가?”란 기사를 발표했다. 한 생산소대에서 현금출납원이 따로 있으면서도 대장과 회계가 현금을 틀어쥐고 남용한 사실을 까밝힌 기사이다. 그 기사에 편집자의 후기까지 붙여서 신문 1면에 냈다. 대개 글쟁이들은 시나 소설로 처녀작을 내놓는다고 하는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걸 모른다고 나는 첫 시작부터 ‘비판글’을 들고 나왔다. 선진 사적, 선진 인물 통신 글은 과장해도, 좀 불어도 그런대로 넘어 간다. 하지만 비평글은 사실근거에 약간 차이가 나도 반발이 일어 날 수 있고, 필자가 고초를 당 할 수 있다. 내가 쓴 기사는 철저히 사실에 입각했기에 아무 풍파도 일지 않았다. 도리어 대대지도부의 고도의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사원들은 자기네가 감히 웨치지 못한 것을 한 청년 교원이 터뜨렸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 이듬해 신문 주문호도 열 호가 불었다는 통계가 나왔다. 또 한번 이런 일도 있었다. 86년도, 마을이 시골이고, 청년들의 학력이 낮은 등 원인으로 마을처녀들이 도회지로 시집 떠나 농촌총각들이 장가가기 힘든 사정을 다룬 기사를 쓴 일이 있었다. 흑룡강신문사에서 내 기사에 “모 현”으로 된 것을 현의 실명을 밝히는 바람에 내가 필명을 썼지만 청년들의 ‘항의’를 피면 하지 못했다. 청년들은 내 집에 까지 찾아와 소동을 일으켰다. 또 촌지도부까지 불리워 다니며 ‘검사서’를 써야 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 후 10년, 나는 오피니언, 신문기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과외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은 글쓴이만은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도 신문, 잡지에 비판적, 자극적인 글을 쓰는 것을 될수록 피하려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극성이 없는 글은 독자들을 더 외면 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신문, 잡지에 나오는 기사, 수필, 칼럼에서 배금주의가 범람하고, 비도덕적이고, 이상과 신념이 추락하는 것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접하게 된다. 자연의 경물, 환경을 빌어 사회의 병폐를 수술하고,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글은 호감을 주어도,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만 한바탕 찬미하는 글들은 사람들한테 잘 먹히지 않는다. 컴퓨터만 열어놓아도 그런 ‘절승경’는 얼마든지 감상 할 수 게다. 사람들은 사회이슈, 역사적으로나 현실 사회의 폭발적인 사건전달에서 자기의 감수와 공감, 거기로부터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오늘 컴퓨터매체 모바일 미디어에 의존하면서도 사회정보, 인생행보철학 분류(分类)능력이 뛰어난 신문, 잡지를 보며 거기서 수요하는 금싸라기를 건져내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대뇌도 움직이며 상상력도 연마 할 수 있다. 아이슈타인은 지식보다 인간의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포타운신문/최 세만  2015년4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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