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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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연길-카스 2만리 기행.5 댓글:  조회:1785  추천:40  2008-11-07
  31.신비한 명사산(鸣沙山)과 월아천(月牙泉)    돈황의 성남으로 20리를 가면 신비한 명사산과 월아천이 있다. 산을 미끄러져 내리면 소리가 난다고 명사산이라 부르고, 호수가 쪼각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월아천이라 부른다. 우리는 점심술을 놓기 바쁘게 택시를 타고 그리로 달려갔다. 택시에서 내려 표를 사들고 출입문을 넘어서니 락타무리가 나타났다. 이 사막의 배들은 손님을 태우고 명사산과 월아천으로 가는 배들이였다. 지금은 려행기 비철이라 별로 이 배들을 리용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앞을 바라보니 하늘을 찌르고 솟은 명사산이 길을 막고있었다. 명사산이란 바로 우리의 눈앞의 길을 막고있는 모래산을 말하는것이다. 명사산기슭에  뼈만 앙상한 나무가 몇그루 장승처럼 서있다. 명사산의 허리에서는 사람 둴이 개미처럼 꼼지락거리고있었다. 우리는 사진도 찍을겸 배를 버리고 걸어서 사막의 바다로 들어갔다. 좁쌀알보다도 작은 보드라운 모래로 형성된 이 사막은 동서길이가 80리이고 남북으로 40리란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고비사막에 있는 작은 섬이렸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언덕을 넘어서자 숲이 보이고 물이 보이는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조철호형은 사진을 찍느라고 바삐 돌아치고, 나는 사막의 신비한 경상에 도취되였다. 머리에 털이 나서 처음보는 사막인데다가 오아시스를 스쳐지나가는 마음이 황홀하다. 사막인것이 아니라 자연이 조각한 예술품이였다. 부드러운 산들은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발산하고있었다. 여기에다 목석을 세워놓아도 아-하고 감탄할만큼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였다.    명사산을 오르는데는 새닥다리를 만들어 놓고 한사람한테서 10원씩 받아먹는 장사군이 있었다. 나와 조철호형은 새닥다리를 디디며 산으로 올랐다. 중간턱을 좀 넘어서 올라가 앉았다. 앞에는 살결부드러운 미녀의 라체같은 산이 마주하고있고, 그 산이 휘돌아서 우리를 지나갔다. 오른편을 내려다 보니 량옆에 파아란 못을 끼고 마을이 앉아있고, 우리쪽 마을기슭에는 난전들이 널려있었다. 희한한것은 왼쪽이였다. 모래산의 옹위하에 쪼각달같은 월아천이 있었다. 월아천가에는 옛집들이 두세채가 오붓하게 자리잡았다. 모래산과  물이 천년을 서로 범하지 않고 다정하게 살아가고있는 신화같은 고장이였다.    사막의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에 와서 기울어진 저녁해살이 비낀 명사산을 둘러보는것은 황홀한 향수였다. 더는 부드러울수 없는 명사산은 여러 가지 황홀경을 이루었다. 어찌보면 바다가를 휘돌아나간 장성같은 기세였고, 어찌보면 노란 파도가 갈기를 날리며 일어섰다가 물앉지 못하고 응고된 아름다움이였다. 산의 언저리를 따라 룡이 구불구불 기여오르는 같은데 산발은 미인의 허벅지같은 부드러움과 아릿다움으로 눈뿌리를 집요하게 빼앗아가고 , 크고 작은 봉우리들은 소녀의 봉긋한 젖무덤같아서 현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와락 끌어안고 몸을 비비고 싶었고, 산중턱에 가서 네각을 펴고 누워 영원히 돌아오지 않고 누워있지 못하는것이 한스러웠다. 풀 한포기 없고 나무 한그루 없고 물한방울 없는 산이지만 산중에서 명사산보다 더 아름다운 산이 이 세상에 더는 없으리라.    아니, 뭘 그렇게 바라보오 하고 조형이 소리쳐서야 나는 명사산의 매혹에서 깨여났다. 야!- 정말 명사산이 아름답습니다! 나의 모든 세포가 저들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우리는 돈황에 있는 지질공원을 향하여 떠났다. 가도가도 끊없는 고비사막이다. 무한무한 또 무한! 하늘도 위에 펼쳐지다 못하여 추욱 처져내린 무한이다. 차는 그냥 내리막길을 달려가고 있는 감각이다. 지평선 저 앞은 멀리서 보는 바다처럼 하얀데 차가 아무리 달려도 바다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까지 왔는지 목표가 어데인지도 모르고 그냥 달리고 달리는것만 같다. 무수한 지평선을 넘어 우리는 돈황에서 유명한 자연지질공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마귀성으로 왔다.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마귀성이란 이름을 가진 곳에 왔을 때는 점심때였다. 동서길이 50여리 남북너비 36리인 마귀성이 우리앞에 나타났다. 해발 810-970메트구간이란다.    마귀성의 모래는 새까만 모래였다. 려행차를 타고 가다가 세우고 몇 개 지점을 돌아보는데 새까만 모래우에 새노란 흙무지, 실은 바위라 말하자니 바위가 아니고 흙이라 말하자니 흙도 아닌것들이 기기괴괴하게 여러 가지 모형으로 서있었다. 그것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서 부감하면 검은 바다우로 무한히 많은 선박들이 달리고있는 장관이다. 수억만년을 달리고 달렸지만 아직도 뭍에 닿지 못하여 그냥 줄기차게 달리고 있는 선박들의 무리. 가까이서 보면 서있는것도 있고, 누워있는것도 있고, 불쑥 솟았는가하면 구불구불 기기도 하고, 저마다 생김새도 각각이여서  말로써는 그 경상을 표현할길이 없다. 세상에 이런  신비한 세계도 있는가. 나무도 없고 풀도 없고 물도 없는 세계! 곤충도 없고 동물도 없는 세계. 그곳은 반고가 하늘을 열었을 때 탄생한 세계였다. 거기는 구석기시대 이전, 아니 류인원시대도 아닌 땅이 금방 태여난 세계였다. 땅이 금방 태여났을 때 어떤 모습이였던가를 보려면 아마 마귀성으로 와봐야 할것만 같았다. 와보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상하여 낼수도 없는 기이한 세계. 자연의 신비에 머리가 숙어지는 아아 마귀성이여... 32. 기이한 투루판   11월 28일 우리는 중국에서 유명한 곳인 투루판에서 아침을 맞이하였다. 투루판은 옛날에는 고창이라 부렀고, 또 서주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유구한 력사를 품고있는 투루판은 지금도 대량의 문화유물을 보존하고 있는고장으로서 천연박물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자연적인 모든것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고장이여서 투루판은 중국서부에서 신비한 색채가 가득한 고장으로서 소문이 나있다.    여기의 아침은 출근시간이 열시였다. 점심시간은 북경시간으로 오후 두시부터 4시사이였고, 퇴근시간은 오후 8,9시였다. 여름에 무더울 때는 오후 네시부터 일곱시반까지 출근하는 고장이였다. 예날에 이곳을 내지와 다른 서역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여기는 딴 세상 같았다. 아이들과  로인들은 한어를 모르기에  말부터 잘 통하지 않았고, 음식이란 거개가 양고기여서 돼지고기를 먹자하여도 신경을 써야 하는 고장이였고, 우리가 좋아하는 개고기는 근본적으로 있는것같지 않았다. 밥대신 밀가루로 만든 빵이였고, 국이란 양고기국이였고, 속을 넣은 빵이라해도 양고기속이였다. 빵을 굽는것도 솥에다 붙혀서 굽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빚은 항아리를 달구면서 그속에다 척척 붙혀서 구워내였다.   아침에 양고기국에 만든 칼국수를 먹고 화염산을 향하였다. 투루판에서 유명한것이 화염산이다. 화염산은 평균해발이 500메트좌우되고 제일 높은 봉우리라야 851메트밖에 안된다. 산의 길이는 200리를 넘지않는다. 택시창문으로 들어오는 화염산은 눈을 떠서 첨보는 산이였다. 나무 한 대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였다. 차가 산줄기사이를 지나가는데 좌우에 줄기를 뻗친 화염산은 누우런 색갈이다. 산발엔 내리 주름이 가득하였다. 여러층으로 높이 솟은 층층마다 패인 주름은 각각이였다. 직선으로 내리뻗은 주름은 하나도 없고 죄다 구불구불하였다. 우리가 간 때는 겨울이여서 찬 바람이 불었지만 여름이면 섭시 70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막에서 달걀을 굽고 고비사막에서 대병을 굽는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닐것이였다. 여름의 태양이 비추면 산이 열을 내면서 붉은 빛을 반사하기에 산이 산으로 본이지 않고 산이 불길로 보이고 불덩어리로 보여서 화염산이라는 이름을 가지였다고한다.    중국고대의 서적 <<산해경 (山海经)>>에서는 화염산을 염화지산(炎火支山)라고 밝히였고, 수당시기 력사서적에는 적석산(赤石山)이라고 밝히였다. 오늘 화염산이라고 쓰는것은 명나라때의 유명한 려행가 진성(陈诚)이라는 사람이 1414년에 서역을 돌아보고 <<서역행정기>> (西域行程记)라는 기행을 쓸 때 화염산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떠올린후부터 내려온 이름이다. 화염산은 당지의 위그르족말로 하면 키질라타크인데 우리말로 하면 붉은 산이라는 뜻이다. 버즈커리커석굴에 도착하여 화염산을 바라보니 하늘을 찌르고 높이 솟아있다. 산골짜기로 물이 흘러내리는데 자갈한알 보이지 않고 맑은 물이 그냥 흙위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흙골짜기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였다. 황토고원의 최고 흙두께가 200메트라던 말이 실감나는 화염산골짜기였다.    투루판에는 유명한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이 있다. 화염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고창고성으로 갔다. 고창고성은 투루판에서 동으로 40키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창고성은 비단의 길에서의 번성한 상업성시였다. 고대서역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 일어섰다가 14세기에 페기된 고창고성은 서한의 군사요지였다. 한나라, 위나라, 진나라에서도 무기교위를 고창에 파견하여 주둔시켜서 일면 무기교위성이라고도 불렀다. 동진때에는 고창군으로 되였다가 후에는 고창왕성으로 되였는데 당년의 허다한 중대한 사건이 고창왕성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서북의 중요한 정치중심이였다. 당나라때에는 서주치소(西洲治所)라 하였고, 10세기 중엽후에는 서주회골왕성(西洲廻鹘王城)으로 되었다. 13세기에 40여년간 병재를 입은 고창성은 번화하던 번성기를 잃어버렸을뿐만 아니라 지면의 건축물들도 여지없는 파괴를 입어 우리 앞에 나타난것은 시누런 흙으로 된 성과 흙으로 된 유적들뿐이였다.    당년에 왕궁도 있고, 관서도 있고 절당도 있고, 술공장도 있고, 동병기공장도 있었건만 지금은 그 자리조차 알아볼 길이 없고 흙벽들의 잔해들만 여러 가지 형태로 어마마하게 널려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노라면 당년의 왕궁에서 호령하던 황제의 모습이 보이는듯하고, 병장기를 만드느라고 치던 메질소리가 들리는듯도 하고, 술공장에서 솔솔 날려오는 포도주 냄새가 풍기는듯도 하고, 절당에서 경을 읽는 소리가 들리는듯도 하다. 하지만 흙무지들이 우중충하게 서있을뿐 력사의 풍운은 여기의 모든것을 휩쓸어가서 쓸쓸한 흙성과 흙벽들만이 처량하다.    베제클리클석굴에 가봐도 그렇고 소공탑에 와봐도 그렇다. 흙으로 만든 것들이 바람과 비를 맞으며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모색이 변하지 않고 창연하다. 소공탑은 청나라 건륭 42년에 흙으로 빚어세운 44메트높이를 가진 꽃병같은 뾰족탑이였는데 그 모습이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산하고 있었다. 투루판의 기후는 고맙게도 흙을 빚어 세상에 남겨놓은 모든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습관이 있었다.    투루판의 시장에 가면 제일 눈에 뜨이는것이 건포도이다. 건포도는 색갈도 여러 가지이다. 붉은것 , 파란것, 노란 것, 하얀것, 갈색... 시장의 포도가 여러 가지 색갈이지만 포도를 말리우는 시설은 한모양이였다. 집집마다 건포도 건조실이 있는데 거개가 구워내지 않은 흙벽돌로 쌓은 건조실이였다. 벽돌장과 벽돌장사이에 공간을 내여 바람이 잘 통하게 하고 너비보다 길이가 더긴 장방형건조실. 투루판의 포도는 국내외에 소문이 자자한 유명한 포도인데 기막히게 단것이였다. 우리가 연변에서 먹는 포도는 거기 포도처럼 그렇게 단것같지 않았다. 투루판에서는 해마다 8월이면 3만여명이 동원되는 포도절을 새면서 국내외의 손님들을 끌여들여 흥성흥성한 나날을 며칠씩 보낸다고 한다. 포도라는 식물의 원산지는 지중해연안의것인데 지금부터 2000여년전부터  투루판에도 포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누가 가져왔는가는 아직도 비밀로 되여있다. 장건이 가져왔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도 어떤 확연한 증거가 없단다. 투루판에는 지금 놀랍게도 100여종의 포도가 나고있고 포도골이라는 곳도 있다.  투루판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포도의 산지이다. 어찌보면 투루판은 포도과원이라고 해야 할것만 같다. 유서깊은 투루판, 유서깊은 포도 이것이 투루판에서 받은  깊은 인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33.꿈처럼 바람처럼 대사막을 횡단   12월 1일. 우리는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가기 위하여 룬타이(轮臺)에서 새벽 8시전에 운수소앞마당에 나섰다. 그런데 룬타이로 가는 버스가 나타나지 않을줄이야. 택시들은 우리를 싣겠다고 아우성을 지르고, 우리는 일반차를 타고 사막을 넘어보겠다고 싱갱이질하였다. 기다리다못하여 우리는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나가는 길목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비 20원을 내고 동쪽의 쿠처(库车)와 서쪽의 룬타이에서 사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가서섰다. 희뿜히 밝아오는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는 아무 차나 잡아타려고 하였다. 쿠처와 룬타이 사이로 차들은 이따금씩 나타지만 우리쪽으로 오는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몇대가 지나가면서 세워주는것도 있었지만 사막으로 들어가는 차는 없었다. 날이 다 밝아서야 트럭두대가 쌍을 지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거이 길을 막다시피하고 차를 세우라고 손을 들었다. 웬놈이냐는듯 우리옆을 스치던 차가 삐익하고 멈추어섰다. 운전수만 앉은 기름을 나르는 기름통차였다. 나는 달려가서 인사를 하고 민풍차구(民豊岔口)로 가는데 실어줄수 없느냐고 물었다. 지도에서 보면 민풍차구는 타클라마칸사막의 중간에 있는 작은 향진이였다. 우선 그곳까지만이라도 가고 보자는 우리였다. 고맙게도 운전수는 우리더러 한차에 한사람씩 타라고 하였다. 나는 앞차에 앉고 조형은 뒤차에 앉았다. 안고보니 그차가 타클라마칸사막의 남단에 있는 민풍을  지나 카스(客甚)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화전까지 간다고 하지 않겠는가. 천만다행으로 하늘에서 복이 떨어진셈이였다.   우리가 가는 길은 국도는 아니였지만 포장길이여서 차가 달리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차가 달리는 2,3백리 구간에는 사막이라 하지만 키작은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있었다. 운전수의 말에 의하면 이 구간은 개간하여도 된다는것이였다. 순간 나는 중국에는 아직도 땅에 비하여 인구가 작다는 감이 들었다. 여기에 인가가 들어앉으면 적어도 1억은 용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38세인 운전수는 20년이나 신강에서 차를 몰았다고 한다. 집은 하남성정주에 있는데 자식은 딸이 하나라고 한다. 한달 로임은 3000원이란다. 돈버는 재미에 가족과 멀리 떨어져있으면서 일년에 한두번씩 정주로 다녀온다고 한다. 정주에 그의 회사가 있는데 안해는 회사에 출근한단다. 인제는 견우와 직녀 생활에 적응되였다나.    차가 둬시간 남짓이 달리자 이상한 환경이 나타났다. 길 좌우에 수림이 나타났던것이다. 나는 눈이 확 뜨이였다. 한아름이 넘는 나무들의 밀림이였다. 나무들의 키는 굵기에 맞지 않게 작은편이였지만 진짜 사막에 뿌리를 박고있었던것이다. 밑뿌리 두리에는 빨간단풍잎들이 양산을 펼친듯이 동그랗게 내려앉아있었다. 천녀의 치맛자락을 방불케 한는 단풍잎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를 처음 보는지라 가만히 앉아서 볼수만 없었다. 괴춤에 차고 다니는 사진기를 꺼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괴춤에는 홀죽한 사진기를 넣는 주머니만 있고 사진기가 없었다. 정신없이 사진기를 찾았다. 사진기는 나지지 않았다. 마침 차가 한 마을에 들어섰다. 나는 차를 세우고 부랴부랴 달려가서 뒤에서 오는 조형의 차를 세웠다.   <<무슨일입니까?>> 조형이 차문을 열고 나에게 물었다.   <<사진기를 잃어먹었습니다. 돌아가서 찾아가지고 다시 옵시다.>>   <<안 됩니다. 그냥 갑시다. 잃어버리면 버렸지 이제 어디라고 다시 간단말입니까.>>    조형의 강렬한 주장에 나는 숙으러드는수밖에 없었다. 참 아까운 사진기를 여기 사막에 외롭게 두고간다는것이 가슴 저린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형은 그 놀라이섹스 사진기를 가지고 전 세계를 유람하며 기념을 남기였다. 아무리 눅거리로 값을 쳐도 인민페로 3000원은 넘는 사진기였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호텔에서는 확실하게 갖고 나온 사진기, 차를 기다리는 길목에서 뒤를 볼 때 떨구었음이 분명하였다. 사막을 넘는 온 하루 나는 사진기 때문에 배를 앓았다. 조형에게 너무 미안을 끼치는것도 있지만 사진기보다 귀중한것은 그안에 스물대여섯장이나 되는 현장사진이다. 중도에서 점심을 먹고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판공실은 판자집이였다. 거기서 룬남진파출소전화 0996-4954-110에 련락하여 이틀이나 씨악질하였으나 사진기는 영영 나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기를 잃어먹었다고 일깨워준 고르라크수림은 그냥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차창옆을 스쳐지나고있었다. 물한방울 없는 사막에서 모래로 밥을 지어먹으며 아름다운 록음을 펼치며 살아가는 고르라크.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신비한 존재로 나의 가슴에 자신의 도안을 각인시켜주고있었다. 인간세상에서 잘 싸우는 사람을 용사라하고 공을 세운 사람을 영웅이라 부른다. 고르라크야말로 사막의 용사이고 영웅이다. 오늘 이 영웅들의 대오를 검열하는 행운을 가진것으로 하여 행복하다.    운전수는 나에게 고르라크는 천년을 죽지 않고 천년을 넘어지지 않고 천년을 썩지 않는 나무라고 말한다. 저 작은 고르라크라도 몇천년을 살았는지 알수 없단다. 보통은 5000년을 살았을것이고, 제일 나많은 나무는 아마 10000살은 되었을거라고 한다. 그러니 저 수림속의 어느 고르라크는 100세기 년륜을 아로새기고 있을것이 아닌가. 바위도 아니고 벼랑도 아닌 나무가 100세기 풍상을 헤치면서 100세기 사막력사를 증언한다는것은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시인인 조형은 후에 이런 시를 써내였다. 고르라크를 위한 회상               조철호 누가 그대에게 살아서 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누가 그대에게 죽어서 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누가 그대에게 스러져서 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질기고 질긴 목숨 3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모두 찬탄과 부러운 눈길 주어도 그대는 자랑스럽지 않네 오늘은 별이 떴어라 모래바람을 뚫은이들은 죽음의 바다라고 시인은 목이 말라도 아름다운것을 감출수 없는 녀인의 알몸이라고 여행자는 구도자의 길이 여기 있노라고 저마다 사막을 말하지만 그대는 알고있네 사막은 찾는이의 마음에 따라 지옥도 되고 궁전도 되는곳 천년을 살지 않아도 사막을 지키는건 말 없이 지평을 넘어가는 락타라는것을 그리고 그대 나이를 부러워하던 뭇사람들은 그 빈자리에 목을 추기는 문명을 따라 떠나가고 늙은 락타의 눈망울속에만 고르라크 그대의 모습 선연함을 나는 알겠네 그렇다. 이 망망한 사막의 대해속에서 서로의 선연함을 아는것은 오직 락타와 고르라크일것이다. 그들만이 사막의 진정한 주인이고, 그들만이 사막을 자기의 고향이고 살만한 곳이라는것을 피부로 알고있을것이다. 그들의 눈길만이 사막이 아름다움을 보아낼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지금 넘어가고있는 곳은 타클라마칸사막 천리횡단이다. 조형이 어찌 넘으랴고 태산같이 근심하던 길이다. 차는 그냥 90-100키로의 시속으로 달리지만 굼벵이처럼 기여가는것만 같다. 가도가도 아득하기만 한 사막의 바다다. 그런데 이 사막을 개조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해마다 2000만원을 투자하고있었다. 길량쪽으로 관개용 우물이 4키로메트에 하나씩 있는데 우물우에는 빨간 기화에 람색벽을 가진  작은 집이 있다. 우물집과 집사이에는 100메트에 하나씩 물을 분배하는 작은 물땅크가 있고, 천리사막을 가로 질러 10여갈래(어떤 곳은 20갈래도 넘는다)의 물줄이 줄줄이 늘여져있다. 물줄사이에는 마른 풀들이 심어져있었다. 우리가 간 시절이 겨울이여서 그렇지 여름이면 물줄에서 물이 뿜어나오면서 풀들에게 젖을 먹인다고 한다. 어떤 구간에다는 모래가 날리여 길을 엄습하는것을 방지하느라고 갈대같은것으로 바자를 엮어서 모래를 방지하고 있었다. 천리길에 한메트도 빼여놓지 않고 이런 시설이 있으니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기 위하여, 살아가기 위하여 모지름을 쓰고있는 정경이 눈물겹게 안겨오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조화는 한입으로 다 말하기 어렵다. 저 멀리 산줄기처럼 뻗어나간 모래산맥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좌우의 어떤곳은 묘지를 방불케 하기도 하고, 련줄련줄 밀려오는 노란 바다의 파도를 방불케 하기도 하고, 밋밋한 산우의 무한한 등판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사막의 조화의 주인공은 바람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발자국자리는 아름답다. 잔주름은 잔잔한 물무늬요 물무늬를 지나면 백사장에 널려있는 조개무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때론 금사주단을 펴놓기도 하다가 장성을 쌓아놓기도 한다. 바람은 여기서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그려보기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재앙을 엮어보기도 한다. 우리는 모래의 왕국 바람의 왕국을 온 하루 달리였다.   해질녁에야 우리앞에 초지가 나타났다. 망망한 초지에 이따금 집들이 보이였다. 석양이 비낀 초지마을엔 집이 많아야 서너채. 어떤 집은 아예 망망한 대해의 일편엽주처럼 홀로 떠있었다. 운전수는 차를 몰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여기 사람들은 호적이라는것이 없고 법이라는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살며 어떻게 사는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들은 근친 결혼은 물론 한 남자에 여러자매나 한녀자에 여러형제가 엉키여 산답니다. 확실히 그런지는 모르지만 끔직스러운 이야기다. 집들이 몇채있는 마을에도 사람은 본이지 않고 양만 몇마리 보이는 이런 고장은 아직도 원시적인 생활이 영위되고 있을것만 같아서 바라보는 내 마음이 쓸쓸하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였다. 34. 위그르족의 풍속도    하루사이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타클라마칸사막의 1200여리를 꿈처럼 바람처럼 횡단한 우리는 민풍에서 하루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화전으로 향하였다. 민풍과 화전사이에 있는 우전이라는 곳에서 아침을 먹게 되였다. 길가에 있는 식당이다. 식당이래야 어머니와 아들이 경영하고있었다. 마당에다 천을 쳐놓고 상두어개를 놓고있었고, 간편한 부뚜막을 만들어놓았다. 나는 초맨(炒糆)을 시켜놓고,  위그르족이 사는 집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집안은 장방형 단간방이였다. 벽에다는 주단을 치고, 주단방석을 깐 쏘파가 벽밑에 놓여있었고, 한쪽에는 침대가 있었다. 창문쪽에 놓여있는 그릇에는 밀가루반죽오리가 흰 뱀처럼 따발을 틀고있었다. 음식을 주문 받자 아들이 어디론가 달려가 양고기 한덩이를 가져다가 한줌만큼 잘라내여 채칼에 친것처럼 자잘하게  쏠았다. 그는 배추와 고추도 잘게 쏜후 채가마에다 먼저 양고기와 파를 넣고닦는다. 양고기가 익자 배추와 고추를 넣어닦는다. 채가마를 흔들 때마다 붉은 불길이 펄펄 일었다. 그후 도마도 하나를 썰어서 넣고 또 불길이 펄펄 일게 흔들어댄다. 그런 다음 물 네국자를 넣고 마늘 네알을 칼등으로 짓쫗아넣는다. 그리고는 시금치 한줌을 넣고 잠간 끌인다음 간을 맞추었다.     어머니는 한발쯤되는 하얀 떡오리를 잘라내다가 두세겹으로 접은다음 칼판에 대고 납작하게 꾹꾹 눌렀다. 그것을 왼쪽팔목에 걸고나서 남비에서 끓고있는 물에다 뜯어던지였다. 큰 손가락마디만큼한 떡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남비안으로 나비처럼 날아갔다. 떡이 다 익자 구멍이 숭숭한 양철광주리에 담아 물을 빼였다.   떡이 익고 국이 끓자 떡과 국을 함께 버무려서 네사발에 나누었다. 떡하나도 국물 한방울도 남지 않는 네그릇이였다. 초맨은 달큼,시큼한 맛이 났고 떡은 쫄깃쫄깃하였다. 값은 한그릇에 5원이였다. 남보다 일찌기 20원을 챙겼다고 식당주인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리였다.    화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들은 고마운 운전수들과 갈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20원짜리 택시까지 잡아주면서 안녕히 가라고 하였다. 조형이 한국에서 가져온 스타킨 한쌍씩 그들에게 주었다. 운전수들은 외제품 한국스타킨이라고 얼굴이 벙글벙글 했다. 조형은 연도에서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내주겠다며 그들의 주소를 수첩에 적어넣기도 하였다. 35. 중국에서의 최고 옥      화전(和田)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옥이 나는 옥의 산지다. 대단히 큰 시내는 아니고 진쯤되는 고장이였다. 2003년 8월 3일 북경에서 오림픽휘장공개회를 열었다. 오림픽휘장은 가치가 10억딸라에 달하는 옥으로 만든것인데 그 옥이 신강의 화전옥이였다. 이 소식이 공포되자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고, 화전옥이라는 이름이 중국과 세계에 쫙 퍼지였다. 따라서 화전옥은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옥으로 부상되였고 값이 껑충 뛰여올랐다고 한다.   화전에 이른 우리는 시내구경을 하면서 옥상점에 가보았다. 옥상점거리가 있었다. 백옥, 흑옥,청옥, 홍옥 여러 가지 옥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일품이였달. 백옥은 그 이상 더는 흴수 없는것이였고, 흑옥은 그이상 더는 검을수 없는 옥이였고, 청옥은 더 이상 푸를수 없는 옥이였다. 옥을 보는 순간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지고 차분해 지였다. 가격을 둘러보니 콩알 반쪽만한 백옥 한알에 50원이고, 크고 비싼 것은 몇만딸라씩 하기도 하고 몇십만 딸라짜리도 있었다.   중화민족은 예로부터 옥을 보물로 신봉해왔다. 옥은 돌이지만 력래로 돌중의 왕으로 추대되여 사람들의 심목에 보물로 되어왔고, 재부로 되어왔으며, 부유의 상징으로 되여왔다. 옥은 물질적이기보다는 사회적문화적인 관념이 더 강하다. 중국의 어느 조대때의 사상가들부터 그랬는지는 알수 없으나 옥에다 인(仁),지(智), 의(义) ,례(礼), 락(樂), 충(忠), 신(信), 도(道), 덕(德) 등 9가지 개념을 부어넣어 옥은 사회도덕의 상징으로 되여 풍부한 정신내함을 배태하게 되었다. 옥은 또 고귀하고 순결하고 친선적이고  화평을 표현할뿐만 아니라 훌륭한 길상물이고, 화사한 장식품이여서 인간세상의 아름다움의 집중적표현이라고도 할수있다.    옥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공하여 상품으로 개발하였는데 그 내함이 대단히 풍부하다. 류협이 쓴 유명한 고전 <<문심조룡>>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아름다운 옥에는 꼭 정채로운 무늬가 있다>>.류협의 명언처럼 화전옥에는 여러 가지 정채로운 무늬가 있어서 그 뜻이 심오하다.    옥은 무늬를 가짐으로써 여러 가지 식물로 다시 태여나면서 새로운 생명체로 발족한다. 매란죽국(梅兰竹菊)은 꽃중의 4군자라고 하면서 미인들의 고상한 품성을 나타내고, 소나무는 사지장철 푸르름을 나타내고, 복숭아와 락화생은 건강장수를 나타내고, 목단은 부귀영화를 타나내고, 석류는 백자(百子)라 가문의 흥성을 말하고, 련꽃은 진흙속에서 살지만 때가 묻지 않아 청렴하고 순수한것을 나타내고, 령지는 하는 일이 뜻대로 됨을 나타낸다...    옥은 무늬로  여러 가지 동물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내함을 가진다. 말옥은 하늘을 찌르는 호기를 나타내는가 하면 성공을 나타내고, 사슴옥은 작록(爵禄)을 상징하고 , 룡옥은 존귀를 표현하고 , 봉황옥은 고귀한것을 상징하고, 원앙새옥은 사랑과 부처간의 화목을 표현한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문인묵객들이 동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그런 의미들은 옥으로 만든 동물에서도 나타나고있는것이다.   옥은 무늬로 하여 신선이나 인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여러 가지 뜻을 표현한다. 석가모니, 관음보살이 있는가 하면 미륵불, 라한, 여덟신선등이다. 보나마나 종교신앙을 표상한것들이다. 민간영웅인물들이 많은데 그들은 모두가 력사상에 위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나 신화전설중의 인물들이다. 보통인물들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부터 아름다운 축복을 보낼만한 인물들이다. 아이들은 천진란만한것을, 로인들은 만년장수를 축원하는 바람을 표현한것들이 그 일례로 된다.    그 외에도 추상적으로 무늬거나 글자를 쓴것들도 있다. 그 무늬와 글자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옥에 패말을 새겨 걸어도 평안무사하다는 표현이니 옥의 뜻은 이루다 헤아릴길이 없다. 가공한 옥의 뜻들은 조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른다음 사람들이 제련해낸 사상의 정화들로 된다. 하나의 도안 하나의 언어는 모두 사람들의 마음속의 심정을 표현한것이다. 화전옥은 그 하나하나가 중화민족의 자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다겠다. 그리하여 생명이 없는곳에 생명이 약동하고 소리가 없는 곳에 거대한 진동이 있다.   36.맨 서쪽의 도시 - 카스(喀甚)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변두리를 밟고 우리가 탄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린다. 카스는 중국에서 제일 서쪽에 있는 도시이다. 천산이 이따금 머리를 내밀고 보다가 멀리 사라질뿐 무야평지이다. 동안뜨게 나타나는 이름모를 마을들은 백양나무숲에 가리워져있다. 신강의 집들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억새나 풀로 벽을 엮고 흙을 발라서 지은 집들이다. 집들은 모두 성냥갑처럼 생겼는데 널판자로 만든 출입문들에는 무늬들을 새겼다. 나는 연도의 한 고장을 지나가다가 가슴이 섬찍한 일을 목격하였다. 이슬람교를 믿는 그곳의 사람들은 대낮에 밖에서 수백명이 모여서 하늘에 절을 올리고있었다. 신강위르족의 신앙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광경을 처음보는 나였다. 두번째로 놀란 것은 영길이라는 곳을 벗어나자 하얀 소금의 바다가 백여리에 펼쳐지였다. 땅소금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제눈으로 보기는 이번의 처음이였다. 옆의 사람과 물어보니 그 소금은 식용으로는 쓰지 못한다는것이였다. 서운했다. 카스에 도착한 날은 12월 3일이였다.    카스의 호텔들은 광장과 멀지 않는 십자로에 집중되여 있었다. 카스의 광장은 어찌보면 천안문광장을 상기시키는 광장이였다. 천안문이 없을뿐이지 천안문광장처럼 생기였다. 천안문대신 광장에는 거대한 모택동주석의 동상이 모셔져있었다. 모택동주석은 거기서서 오른팔을 추켜들고 있었는데 오늘도 홍위병들을 접견하고 있는것만 같았고, 앞길을 가리키고 있는것만 같았다. 모택동주석의 동상은 백색화강암으로 쌓아올리고 뒤에 휘연히 펼쳐진 담벽에다 모택동시사 심원춘 <<눈>>을  새겨놓았다. <<북국의 풍광 천리에 얼음 얼고 만리에 눈 날리네>>라는 글발이 시인의 친필체로 새겨져 금빛을 뿌리고있었다. 모택동동상은 서안에서 보고 여기와서 보았는데 참 잘 보존하였다고 생각되였다. 당년에 전국 어디서나 동상을 모시였는데 한때 전국 어디서나 허물어버리였다. 하지만 서안과 카스에서는 허물지 않고있었다. 남들이 허물 때 허물지 않고 력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는것은 력사에 대한 존중이며 아름다움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마음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것이였다. 새로운 <<홍위병>>들이 길을 막고있었다. 낮에도 밤에도 그냥 지키고있어 야릇한 감이 없지 않았다. 보존했으면 응당 아무 사람들이나 마음대로 가까이서 보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모택동동상앞에서 아이러니컬한 희극 제2막이 공연되고있었다. 기다란 붉은 프랑카트를 동상의 앞에 띄웠는데  프랑카트에는 이런 글발이 씌여져있었다. 카스를 에이즈병을 방지하는 선진구역으로 건설하자. 에이즈병 예방 방지 표병으로 되자는 따위의 구호가 숭엄하고 위대한 정치가의 동상앞에서 펄럭이였다. 동상의 어깨와 머리우에는 이따금 비둘기들이 날아와 않아서 구구거리며 똥을 싸고있었다. 이러한것들이 카스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눈에는 참 안스러운것으로 보이였다.    광장은 천안문광장처럼 정방형이였는데 사위에는 고층빌딩들이 줄느런히 들어섰다. 광장두리에는  궹장히 큰 붉은 등불이 한면에 여섯개씩 걸려있고, 자잘한 등불들은 몇개인지 헤아릴수 없게 많았다. 동상 맞은켠에다는 좌우에 천안문앞의 금수교와 같은 다리를 두쌍씩 세웠는데 그쪽으로 광장을 나가려면 그 다리를 건너는것이 멋으로 보이였다. 중국서쪽의 막 끝에 있는 서울이라는것을 련상시키는 카스광장이였다.    카스에는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청진사(清真寺)가 있다.청진사는 1442년(이슬람교력 862년)에 건설한 이슬람교례배당으로서 1955년에 전면적으로 수건하고, 1962년에는 신강자치구 문화유물보호단위로 되었고,  1983년에는 국가에서 돈을 내여 다시 수건하였고, 2001년에는 드디여 국가 중점문화유물보호단위로 된 청진사이다.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호기심으로 청진사에 들어간 우리는 적이 실망이 갔다. 사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주단만 깔려있었다. 종래로 례배당이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나는 그안에 무슨 굉장한것이 있으려니 했던것이다. 이슬람교에 대하여 백치인 자신이 유치하고 우스운 존재였던것을 실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형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돈을 받고 관람시키는 자체가 대동강물을 팔아먹는놈과 똑 같애 하고 비양거리였다.    카스에는 유명한 향비묘가 있다. 우리는 인민광장에서 20번 버스를 타고 그리로 갔다. 이묘를 위그르족말로 아바허쟈마짜라고 부른다. 마짜란 묘지란 뜻이다. 묘지는 록색의 류리벽돌로 쌓아올리였고 간벽사이는 하얀벽이여서 조형이 온건하고 간결하였고 색채가 선명하였다. 두터운 벽의 네귀는  탑식으로 고정되여 집모양이 특별하고 전형적인 이슬람교건축풍격을 현시하고있었다. 둥그런 지붕의  꼭대기에 탑식덧붙이를 하여 여자의 젖무덤을 방불케 하였다. 해빛에 눈부신 묘지건물은 칠색의 눈부신빛을 뿌리였다. 문에다는 아름다운 도안을 그리였고 량쪽의 벽은 미황색의 석고로 장식하였는데 조각이 섬세하였다. 주요한 묘실은 네개의 아치형천정이 가운데의 커다란  궁륭식 천정을 받들고있었다. 1640년에 건축한 이 묘지안에다는 아바허쟈의 5대의 시체 72인이 묘셔져있다. 관우에는 여러 가지 도안의 천이 덮혀있고 벽은 하얀 색이여서 묘실안은 아늑하고 정숙하였다.    이 묘지를 사람들은 향비(香妃)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향비는 청나라 건륭년간에 청나라를 반대하는 회부추장의 안해였다. 용모가 빼여난 미인인데다가 몸에서 향기로운 향기가 풍기는 녀인이여서 사람들은 향비라고 불렀다. 청나라 군사가 회강에 들어왔을 때 정변장군 조혜장이 향비를 포획하였다. 그는 향비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가 건륭황제 홍력에게 헌납하였다. 건륭황제는 향비를 입궁시켰으나 복숭아처럼 생긴 향비는 서리찬 눈길로 황제를 대하였다. 그녀는  옷소매속에 늘 비수를 여러개 감추고 있으면서 기회만 있으면 황제를 죽이고 남편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도스르고 있었다.    건륭황제는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기이한 향기를 풍기는 향비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리면서 머리도 빗겨주고 화장도 도와주었지만 일년이 넘도록 향비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처량한 나날을 보내였다.    하루는 건륭이 천단에 가서 제사를 지내였다. 그때 황태후가 향비를 불러다 놓고 죽음을 하사하였다. 향비는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태후께서 저를 그렇게 하라니 정말 그 은혜가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두껍나이다. 제가 죽은후 구중천에 가서도 황후께 감격할거외다>> 실은 죽지 못해 살아가던 향비였던것이다. 소식을 듣고 황제가 달려왔을 때는 한발자국 늦은 시간이였다. 금방 숨을 거둔 향비의 얼굴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있었다. 건륭은 후하게 관을 만들어 신강에 가져다 안장하게 하였다. 향비가 서울에 와서 황비로 되었을 때는 27세였고 그가 죽을 때는 35살였다. 그녀의 관을 북경에서 카스까지 옮겨오까지는 3년이걸리였다고 한다. 꽃처럼 피여났다가 이슬처럼 사라진 향비였다.    카스에서 유명한 날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은 바짜날인데 우리 말로하면 장날이다. 이 장날은 지금도 외국사람들이 많이 와서 장사를 하는 날이란다. 우리는 이 장날을 보기위하여 민풍으로부터는 걸음을 늦추면서 왔다. 일요일(12월 5일)날 해는 열시가 되여솟아올랐다. 우리는 열시반에 장마당으로 갔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거리는 발을 옮겨디딜자리가 없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하였다. 장에는 고양이 뿔외치 없는 것이 없었다. 값도 연길에 비하면 죄다 눅거리였다. 마늘접을 목에 걸고있는 사람에게 물으니까 한접에 (50쪽)에  3원이라고 한다. 구두파는 곳에 가서 물으니 겨울에 신기 좋은  양가죽구두가 20원이란다. 신강지구의 옷종류와 먹거리, 일상용품이 총동원되여 전시되고있었다. 버스와 택시들은 련이어 장거리옆에다 사람들을 물처럼 쏟아붓고있다. 장보러 온 사람들이 수만명이 되여 끓는 가마물처럼 흥성거였다. 나와 조형은 갈라지면 찾지 못한다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였다. 37.그날의 남방항공은 마스락 비행공사.    12월 5일, 카스에서 기차에 오른 우리는 29개의 턴널과 새까만 고비사막, 그리고 무수한 구릉지대와 산악을 넘어 6일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신강의 수부 우루무치는 우람스러운 대성시였다.     7일 새벽 8시에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8시반쯤에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공항에 닿으니 9시가 될가말가한 시각이였다. 두루 수속을 밟고 북경행 휴식장소로 갔다. 비행장으로 슬밋슬밋 안개가 기여들고있었다 .이윽하여 온 비행장이 안개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런 날엔 비행기가 뜨기 어려워요.>> 조형이 창밖을 내다보며 근심하였다.    <<안개때문에요?>>    <<그래, 내가 구라파 갔다가 안개 때문에 하루를 갇힌적이 있어요. 안개 앞에서 비행기는 맥을 못써요.>>    비행기를 몇번 타보지 못하였고, 비행장과 안개가 씨름하는것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나는 안개가 비행기를 눌러서 뜨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크게 실감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안개가 사라지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였다. 간대루야 비행기가 못뜨랴 하는 일념뿐이였는데 방송이 나왔다.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는 안개로 하여 열두시에 출발합니다 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카스에서 비행기표를 뗄 때 우루무치-북경, 북경-연길 비행시간을 두시간 차를 놓고 떼였는데 안개가 훌떡 나의 비행시간을 두시간이나 잡아먹지 않았는가. 우루무치에서 10시 40분에 떠나 오후 2시 5분에 북경공항에 내리고 네시에 연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가려던 우리였다. 12시에 떠나면 오후 3시에 북경에 도착하겠는데 까딱하면 연길로 간다는것이 랑패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나는 공항일군들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여러곳에 여러사람과 물어보았으나 대답은 하나였다. 북경에 가서 다른 비행기를 타는 수속을 하라는것이였다. 무슨 용빼는수가 있는가? 그렇게 하는수밖에. 그래도 다른 비행기 수속을 할수있다니 한시름이 놓이였다. 카스 사람들이 북경에서 연길로 가는 비행기가 오후 4시, 6시,7시 세번있다고 하였으니깐.    뜻밖에도 11시가 되였을 때 안개가 퍼그나 사라지여 우리는 등반하게 되었다. 게시판에 열한시반에 떠난다는 메시지가 나오더니 아마 그러는 모양이라고 기뻐하였다. 열한시반에 떠나면 오후 두시반에 북경에 내릴수 있으니까 연길행 네시 비행기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였다. 그런데 11시 20분이 되어서야 손님들이 비행기에 다 올랐는데  반이 지나도 비행기는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40분이 지났는데도. 나의 마음은  안달아났다. 할수 없이 아가씨를 찾아서 물었더니 한사람이 오르지 않아서 못떠난단다. 웬놈이 무슨 지랄이 나서 제때에 오르지 않고 어디가서 번들거리는가 하는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다. 한놈 때문에 백놈이 눈이 펀들펀들해서 속을 태우며 기다려야 한다. 나의 앞에 앉은 손님은 오후 세시에 하르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완전히 미역국을 마신거야. 실은 한놈을 나무랄것도 못되였다. 비행기가 열두시에 떠난다고 방송하였으니까 그전에 비행기에 오르면 되지 않는가. 그 시간이 되자면 아직도 시간이 있다. 앞에서 와야하고 환성이 터지였다. 특별석을 지나 한 사내가 입이 헤써해서 들어서고있었다. 보통키에 50좌우되는 사내였다. 인젠 떠나겠구나 하고 한시름이 놓이였다.    12시가 되자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갑자기 선자리에서 부릉거릴줄이야. 한식경이나 부릉거리던 비행기가 구렁텅이에서 기여나오기라도 했을 때에 절망을 안겨주는 방송이 나왔다.    <<손님 여러분, 비행기가 고장나서 수리해야 합니다. 량해하여 주십시오>>   아니, 비행시간이 연착되였을 때 왜 검사수리하지 않고 떠나다가 고장을 발견하고 이따위야. 뭣들하고 밥처먹는 놈들인가 하는 불만이 가슴속에서 마구 솟구쳐올랐다.    결국 다섯시가 넘어서야 북경공항에 내린 우리였다. 나는 백사를 제하고 비행기표부터 수속하였다. 그런데 복무원이라는 자식들이 어느놈도 수속하는 곳을 딱부러지게 알려주지 않아서 땀을 벌벌 흘리며 여러곳을 찾아다니게 하였다. 마지막에는 한바탕 성을 내는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야 겨우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일곱시에 떠난다던 비행기가 일곱시가 지났는데도 아직  연길에서 떠나지도 않았다는것이 아니겠는가. 기가 딱 막히였다. 재수 없는 놈이 장날에 가루 팔러나가면 바람이 분다더니 우리 팔자가 그러하였다. 언제 떠나는지도 모르는 판이였다. 공항에서는 할수 없이 우리를 버스에 싣고 호텔로 향하였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하고 나는 맥을 버리고말았다. 새벽 두시가 되여 비행기가 따난다고 소식이 왔다. 잠을 설친 손님들이 끄신끄신 호텔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비행기 타러 나가는데 앞에서 술렁거리였다. 한사람한테 손해비 100원씩 나누어주고있었다. 그때 한사람이 지나가면서 고까짓 100원이 뭔가. 우리는 전번에 400원씩 가졌다고 하였다. 그럴법도 하였다. 여섯시간이나 연착된데다가 밤잠도 자지 못했는데 그까짓 백원이 뭔가. 한번 문의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의하였더니 상급의 문건이 그러하다는것이였다. 우리는 문건을 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문건을 내놓지 못하였다. 이렇게 티각태각하였으나 손해비를 더 받을 싹수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연변가무단의 안무 리승숙이 우리와 함께 걸고 들었다. 말해서는 아니 되겠으니까 리승숙이 전국정협상무위원 공작증을 내들고 당신들의 문건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들은 대뜸 얼굴빛이 변하였다. 리승숙이를 제일 특별석에 모실테니 어서 오르라고 하였다. 그에 동의할 리승숙이 아니였다. 나도 기자증이라도 지니고 갔더라면 승세해 주겠는데 그렇지 못하여 서운하였다. 한참 기다려도 문건이 오지 못하였다. 공항측에서는 할수 없이 200원씩 줄테니까 비행기에 오르라고 하였다. 손님들이 그만하면 되였다고 하나 둘 오르기 시작하였다. 리승숙녀사도 오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모두 오르기로 하였고, 먼저 오른 손님들한테도 100원씩 보충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연길에 와 내린 시간이 이튿날 네시가 퍼그나 넘은 때였다. 그날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내내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에 못박히였다. 이런 비행기를 타고 다니다가 사고 나면 뼈도 추리지 못할것 같았다. 그날 우리를 실은 비행공사는 마스락 비행공사였다. 갈 때에는 웃으면서 기쁘게 갔는데 올 때에는 숱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왔다.    첫맛이 달고 후맛이 쓴 나와 조형의  려행은 이렇게 끝을 마치였다.                                     2005。3。24 -- 2005。8。11
41    현대시와 정치, 시대 및 기타 댓글:  조회:1292  추천:32  2008-11-07
  시와 정치, 시대 및 기타                                            최룡관                    시와 정치 시와 정치는 어떤 관계일가? 어떤 사람은 시는 정치의 부속물이라고 하고 시는 정치의 반영이라고 한다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내가 금방 시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에 시는 정치의 부속물이며 시는 정치의 반영이라고  생각하였다 뿌시낀도 12월 당의 가수라고 칭송되지 않았던가 <<카프>>도 그렇게 시를 쓰지 않았던가 이것이 나의 주요한 리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후에 보니까 그런것이 아니였다. 정치는 사람을 다스리고 사회를 다스리는 일이고 시는 시인의 령혼을 그려내는 일로서 량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것이다. 물론 정치를 반영하는 시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시들은 한때의 흐름일뿐이다. 정치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의하여 대체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떠한 정치를 반영한 시던지 그 정치집단의 운명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게 되여있다. 한 정치집단이라 하여도 로선, 방침, 정책이 개변되면 시는 또 자신의 운명을 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멀리 내다보고 쓰는것이 좋다. 소위 멀리란것은 정치가 바뀌여도 읽힐수 있는 시를 쓰는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시가 그런 시인가? 이것은 시인의 앞에 놓여진 하나의 근본적인 과제로서 시인마다 탐색하여 볼 일이다. 아무튼 정치는 정치의 특성이 있고 시는 시의 특성이 따로 있다. 시는 정치의 부속물인것이 아니라 정치와 떨어져있는 독립물이다. 시는 시의 자률성이 있다. 우리는 시의 자률성을 존중하여야 한다. 그럼 정치에 관계되는 시를 쓰지 말아야 하는가? 쓸수도 있다. 하지만 쓰더라도 시의 자률성속에서 씌여져야 할것이다.                         시와 시대 시를 분석할 때 많은 사람들이 시대성을 론한다. 시는 확실히 일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시인이 쓰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시대에 대한 생각은 각자 나름이다. 어떤사람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사회의 조류가 시대성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후자를 많이 고려한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어떤 형세의 흐름은 시대의 한 반영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것이다. 어떠한 사건 어떠한 형세나 조류는 시대의 본질적인 반영이 아닐수도 있는것이다. 시로 보는 시대란 매우 긴 력사시기를 말하는것이지 눈앞의 일같은것을 두고 말하는것이 아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시는 변하지 않을수도 있으며 시대와 시는 완전히 다른 표현일수도 있는것이다. 중국은 지난세기 <<5.4>>운동이후부터 신시시대를 맞이하였는데 지금도 시의 시대는 그냥 신시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간에  정치시대와 형세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신시시대는 아직도 그냥 흘러가고 있으며 발전하고 있다. 물론 형세나 어떤 조류를 반영하는 시들은 일시적으로 베스트셀레로 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시적인 이미지는 가지지 못한다. 중국의 왕궈전시가 한때 대학계를 휩쓸었지만 문학사적으로 말할 때 왕궈전의 시는 유감스럽게도 자리가 없고 왕궈전이란 자체도 시인의 명함에 오르지 못하고있다. 또 한시기 얜치라는 시인의 시가 베스트셀러가 되여 굉장하였지만 얜치도 왕궈전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시인은 인류가 읽는것이여야 한다. 총통이 읽으나 도적놈이 읽으나 그누가 읽으나 어떤 새로운 심미가치를 부여할수 있는 시일때만이 시가 생명력이 강하다고 하여야 할것이다. 한국 30년대의 명시들은 어느것이든 식민지사회를 <<카프>>처럼 정면으로 안고 반영하느라고 애쓴것이 없다. 모두 시적으로 노래한것들이다. 우리는 과거에 형세를 반영하고 명절을 노래하고 계절을 노래하면서 쓴 시들이 많았는데 거기서 시라고 말할만한 시를 고르자면 마치 바다에서 바늘줍기와 같은 감을 가지게 되는데 이건 아주 침통하고도 심각한 교훈이다. 지금 적지 않는 시들이 그때의 변종으로 나타나는데 모름지기 주의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대라는것은 그릇이 큰것인데 눈앞의 어떤 사건이나 형세에 매달려서 그것을 직접반영하느라고 시를 쓰는 경향은 모름지기 극복하는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현실을 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상 이러한 여론은 문학의 본체 시의 본체를 거부하는 일이다. 문학은 문학의 시대가 있고 정치는 정치의 시대가 있다. 문학에 어제날의 랑만주의시대와 오늘의 현대주의시대가 있는데 이 두시대속에 얼마나 많은 정치변화가 있었는지 모른다. 20세기전반에 걸쳐 세계문학은 오늘까지도 현대주의시대인데 이 100여년기간에 세계의 정치변화와 각국의 정치변화는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았지만 문학의 현대주의시대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고 아직도 왕성한 위력을 과시하고있다. 하지만 우리는 봉페된 시기를 거치면서 20세기 현대주의문학의 성과를 아직도 낯선상태로 마주하고있으며, 무엇을 발양하고 무엇을 극복할것인가에 대하여 리론적으로 실천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도 많이 우리앞에 나서고있다. 시인들은 반드시 부단히 사상을 해방하고 20세기 현대주의시기교를 받아들여 봉페된 우리 시를 활성화하여야 출로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시와 반영과 표현 시는 인간생활의 반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모멘트를 틀어쥐고 잘 반영하면 좋은 시가 된다고들 한다. 시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사진을 찍듯 문자로 잘 그려낸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무엇을 쓰고있구나 하는 감은 주지만 시로서의 사명은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있는 시이다. 시는 복사가 아니고 사진찍기가 아니다. 이런 시는 아직 시적소재에 머무른 시다. 시와 시가 아닌 본질적인 구별은 문구를 별행하였거나 안 한것으로 나위여 지는것이 아니라 상징과 은유가 시의 기본으로 되였는가 안 되였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변형이라는 기법으로 씌여지였는가 안 지였는가로 구별하게 된다. 변형으로 씌여졌다면 문장으로 써 놓아도 시라고 할수 있지만 변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별행을 시켜도 시의 성격을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직설적인것이  아니다. 직설로 쓴 시도 있지만 그것은 엄격한 의미로 따지면 좋은 시라고 할수 없다. 이러한 시는 가사에 가까운것이지 시에 가까운것이 아니다. 시는 시대에 따라 쓰는 방법이 달랐다. 지금의 시대는 모방의 시대가 아니라 표현의 시대이다. 표현이란 무엇인가? 우선 사물이나 사실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체험이야 하며 그 체험을 시로서 반영할 때 변형의 수법을 리용하여 간접적으로 사물에 접근하는것이다. 시는 감정을 북받치는 그대로 발로하는것이 아니라 감정을 억제한 예술적발로인것이다. 시의 존재성을 확인하는것은 객관사물의 존재를 실재적으로 반영하는것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상상적으로 반영하는것으로서 시의 이미지는 허상이다. 즉 시인이 창조하여 내놓은 사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상상과 허구 더 나아가서는 환상적인것이 없으면 결코 좋은 시라고 말하기 어려울것이다. 님의 눈썹을 곱게 닦아서 하늘에 심어놓았다는 서정주의 대표작 <<동천>>도 환상으로 충만된 시라는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시와 언어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시의 언어는 일상적인 관습적인 언어의 의미를 떠나서 쓰인다. 그래서 시어는 다의적이라고 한다. 시에서 돌이라고 쓰면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돌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돌인것이다. 언어는 시의 재료로서 시의 공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공구나 재료가 어떻게 씌여지는가에 의하여 시가 달라지게 되며 시에서 표현하는것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례하면 사람들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물쇠가 잠가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나의 자물쇠를 열수있는 열쇠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씌여진 자물쇠나 열쇠가 현실사물인것이 아니라 현실사물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사물로 변하여 버린것이다. 시적언어는 이렇게 변화의 양상을 지니는데 그것도 시인에 따라서 천만가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것이다. 이런 언어의 변화는 현실의 사물보다 이질적이면 이질적일수록 시적값이 비싸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인을 언어의 창조자라고 말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여기서 말하는 이질적이란 말은 성질이 다르면 다를수록 좋다는 말이며 비교되는 대상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는 말이다. 시인을 언어의 요술사 혹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는것은 자물쇠처럼 왕청같은 의미로 언어를 쓰기때문이다. 과거에는 언어와 실체가 불가분리 관게에 있었지만 지금은 언어와 실체를 갈라놓고 쓰고있는 경우가 항간에도 많이 류행되고 있다. 시는 력래로 이러한 갈라짐을 중시하여 왔다. 사실 언어는 껍데기뿐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인은 이런 언어의 껍데기로 여러가지 새로운 시를 쓴다. 다시 말하면 이 껍데기로 이 세상에다 시인령혼의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는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시인이 혼자서 완성하는것이 아니라 독자도 시에 참여하여 언어의 껍데기로 된 새로운 사물을 관찰하고 해석하면서 나름대로 시를 완성해 보게 되는것이다.                             시와 전통  전통이란것이 시에서 어느만큼 작용하는가 하면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다. 전통에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의식과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시의 기법이 있는것이다. 어느 유명한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시는 아버지 죽이기라고. 시란 자체가 새로운 창조를 말하는것이니 아버지 죽이기라는 말도 과언은 아니다. 시는 전통을 중시하지만 전통을 부정하기도 한다. 과거시인들이 창조한것들은 왕왕 전세대의 시의 전통을 부정하면서 새롭게 뜻을 세우고 새롭게 언어를 닦은데 있는것이다. 시에서 전통은 영구불변한것이 아니다. 한시기 전통은 다음시기의 창조에 밑거름이나 바탕으로 될뿐이지 그대로 옮겨놓는 일이 아니다. 그대로 옮겨놓으면 창조가 없는 복사일뿐이다. 새로운 창의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시는 전통을 부정하는데서 산생하게 된다. 전통은 토양이고 시는 땅우에서 자라는 수초거나 동물이거나 미생물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땅의 영양분을 먹고 생명활동을 진행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땅에서 태여난 새로운 생명체로서 땅이 아니다. 이러한것들은 생명을 다하면 땅이 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전통에 의거하여 산생하지만 전통이 아니며 좋은 시들은 또 전통을 부단히 보완하고 전통을 완선화하고 살지게 한다. 전통과 시와의관계는 씨앗과 새싹의 관계와 같은것이다. 새싹은 씨앗에서 나왔지만 씨앗이 아니다. 새싹은 씨앗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물로 씨앗에서 나온것이다. 이때의 씨앗도 새싹이라고 말할수 없다. 씨앗은 새싹을 낳고 자신도 사멸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전 세대의 전통에서 나왔지만 새싹처럼 전통을 지킬수 없으며 또 지켜서는 안되는것이다. 전통만 말하면서 변혁이 없고 새것이 없는것은 실은 전통을 말살하는것이다. 전통은 과거이지 오늘이 아니며 미래는 더욱 아니다. 전통은 바탕이지 새로운 탄생이 아니다. 오늘의 시인은 어제의 전통에 누워 낮잠을 잘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혁신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전통을 개척할 의무가 있는것이다. 소위 찌거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한다고들 하는데 알맹이도 그대로 취한채로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알맹이를 다시 갈고 닦아서 새로운 차원에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시인의 시가 새로워지고 시인의 세계가 새로워지게 된다. 마치 줄기에서 잎이 나오고 잎에서 꽃이 나오고 꽃에서 열매가 나오고 열매속에 알이 나오는것처럼 시인은 전통이라는 씨앗에서 새로운 잎이 나오게 하여야 하며, 잎에서 꽃이 나오게 하여야 하며, 꽃에서 열매가 나오게 하여야 하며, 열매에서 새로운 씨앗이 나오게 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개혁과 변혁과 발전이 없는 전통은 죽은 송장을 우상처럼 모시는 격이라고 할수 있다.                         시와 민족 시와 민족의 관계는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복잡하다는것은 시는 민족성이 있어야 하고 민족을 위하여 복무하여야 한다는 관점이 있기때문이다. 실상 시는 계급도 민족도 국가도 초월하는 각도에서 쓰는것이 좋다. 시를 어떤 언어로 쓰는가하는것이 시와 민족관계에서 핵심으로 나서는 문제이디. 한민족의 언어는 해당민족의 문화의 핵심이며 얼굴이며 전통이며 미래이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어로 쓰는것이 가장 민족적인것이다. 조선어로 어떠한 풍격의 시를 쓰든 좋은 시만 쓰면 그것은 민족성이 강하다고 할수 있다. 소위 말하는 민족정서나 민족의식이나 민족풍격과 같은것들을 중시할 필요는 있지만 그대로 옮겨서는 안 된다. 중요한것은 좋은 시를 쓰는가 못쓰는가가 중요한것이다. 시를 쓸 때에 시밖의 일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시인은 시를 쓸 때 이러한 따위를 고려하지 않게 된다. 시의 텍스트를 잡은다음 어떻게 하면 그 시를 잘 쓰겠는가를 고려하지 어떻게 민족정서며 민족의식이며 민족풍격을 살리겠는가를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로 어떻게 시인자신의 상상을 표현하며 어떻게 언어의 표현을  새롭게 하겠는가에 골몰하게 된다. 이렇게 써놓은 시에는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이나 민족풍격이나 민족정서같은것이 녹아서 슴배이게 마련되는것이다. 황차 다르더라도 그것은 별문제인것이다. 시인의 시에서 새로운것이 탄생하였다면 그것은 더 좋은 일이다. 이제까지 없던 의식, 없던 풍격, 없던 정서를 쓰면 그만큼 새로운 령역을 개척하는것으로 되기에 그것이 바로 민족을 위한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발전이며 새로운 풍격이 되는것이다. 시인자신은 민족의 일원이므로 구태여 민족의 정서요 의식이요 풍격이요 하는데 따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시인의 정서, 의식, 풍격이 해당민족의 정서, 의식, 풍격의 한부분이니까. 시인자신의 정서, 의식, 풍격은 특수할수 있는데 이는 특수하면 특수할수록 좋다. 특수성속에 보편성이 있는것이지 보편성속에 특수성이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남선. 김소월. 정지용. 리상 등등 좋은 시를 쓴 시인들은 다 그렇게 하였던것이다. 그들의 당대의 시들의 전대의 시들과 달랐다고 하여 정서, 의식, 풍격이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가의 것이라고 나무람할 수가 없었던것이다. 물론 일부 시인이나 학자들이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것은 한시기 일이였다.  지금은 경제가 다국화시대이며 문화가 다원화 시대이며 정치가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정치, 경제, 문화가 호상침투하고 호상 견제하고 호상 발전하는 시대이다. 시인도 가슴이 열려야 한다. 협착하게 한민족의 무엇을 고집할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우수한것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피와 살로 만들어야 하는 때이다.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것만이 출로가 있는것이다. 황차 연변의 시들은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비하여도 너무 차이가 있으며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더구나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감이 없지 않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라는 말은 일정한 일리는 있지만 절대적인것은 아니다. 지금은 이런 구호를 부르짖을 때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디지털시대이다. 디지털시대는 국계를 넘어 지구를 한개의 동네로 만들어가고 있고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을 이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혼합되자면 아직 멀고도 멀었지만 문화와 문화의 어울림과 시와 시의 어울림은 국가나 민족을 초월하여 먼저 될수도 있는 일이다. 교학악이 서양의 고급문화였지만 연변에서도 지향하고 있는것이 바로 살아있는 증명이 아니랴. 서양사람도 현대시를 쓸수 있고, 한국사람, 일본사람도 현대시를 쓸수 있고, 우리 연변사람도 현대시를 쓸수 있지 않는가. 시인은 자신을 어느한 울타리에 가두어 놓지 말고 열린 사색을 하여야 하며 열린 시풍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된다. 디지털은 모든 울타리와 한계를 짓부셔버리면서 세계의 문화를 융합시키고 있으며 새롭게 발전시키고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여기에 적응하는것이 바람직할것이다.                       시와 명예주의 시인은 명예주의자이다. 시는 아무나 쓰는것이 아니다. 시는 개인주의 산물이며 시는 개인의 창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말들은 틀리는것 같지만 맞는 말들이다. 시를 왜 쓰는가 시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명예가 없다면 누구나 시를 쓰지 않을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말하면 명예주의자이다. 산골의 농민도 그로서의 명예를 중시하며 명예를 생명으로 간주한다. 각자는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아무런 명예심도 없다면 허황하게 되며 염세주의자로 될것이며 자살을 선택하게 될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나 다 그로서의 자존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명예주의의 핵심인것이다. 황차 시인임에랴. 명예주의의 밑바닥에는 개인주의가 웅크리고 있다. 개인주의를 없애버리면 사람을 분투할 필요성이 없게 된다. 개인주의는 본질상에서 생명체의 원초적인 욕망인것이다. 개인주의를 말살하면 인간개성이 말살되는데 누가 동의하겠는가. 사람들이 추구하는것은 개인주의와 사회가 어울릴것을 바랄뿐이지 개인주의를 없애는것을 바라는것은 아니다. 집단주의를 요구하지만 그 집단주의에 참여하는 모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집단의 구호가 일치되기때문이지 개성을 말살하고 개인욕망을 말살하면서 집단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당파들이 존재하고 여러 가지 집단이나 무리가 존재하는것도 이때문인것이다. 소위 마음 맞는 사람끼리 집단을 조직하고 당파를 조직하는것도 실질을 따지면 욕망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끼리 모임이다. 시에서 동인회가 나오는것도 바로 이런 현상이다. 어찌보면 비슷한 선호를 가진 개인주의자들의 모임인것이다. 동인회는 모여서 비슷한 예술추구를 하다가도 맞지 않으면 갈라질수도 있다. 갈라지는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장이 다른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어떤것을 주장한다는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의 개성이며 개인주의표현인것이다. 시창작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주관주의 산물이라고들 한다. 주관주의란 객관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주대를 세우는 일이라고도 할수 있다. 바로 시창작이 이러한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시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다르게 생각하기때문에 시가 나오게 되는것이다. 같게 생각하면 시 한수만 나오면 된다. 그런데 시인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여러가지 시가 씌여지게 되고 여러 풍격의 시가 씌여지게 되여 시의 다양화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문학은 언제나 백화만발 백가쟁명이라는 구호를 제창하게 되는것이다. 한가지 꽃만 피여서는 봄이라고 할수 없고, 한종류의 새만 울어도 봄이라고 할수 없듯이 시의 화원이라는 이 요람에 여러가지 꽃이 피여야 하고 여러가지 새가 울어야 풍성한 수확이 있게 됨은 자명한 일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시인은 내 개성으로 시를 쓴다고 고집할수는 있지만 다른사람의 풍격도 존중해야 한다. 비평가는 시를 해석할 자격은 있어도 이런 시는 오도요 하고 매도할 자격은 없다. 세계의 모든 사물이 각자존재인것처럼 시인도 시도 각자 존재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독재도 필요하지 않다. 시는 자유만 요구할뿐이지 어떠한 계률의 지배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전통시를 쓰다가도 현대시를 쓸수도 있고 현대시를 쓰다가도 전통시를 쓸수도 있으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다른 시를 쓸수도 있다.                        시와 과거의 몇가지 구호 과거에 우리는 예술지상주의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자산계급의 주장이라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구호를 다시 반성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우리문학은 계급투쟁공구로 충당되여 문학이 문학같지를 않는 세월을 살아왔다. 문학은 실제상 일종 예술이다. 시는 문학의 핵심쟝르로서 당연히 예술이다. 예술이 예술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것이다. 시는 시로서의 예술특점이 따로 있는것이다.  시는 시적예술을 떠나면 시가 제대로 된다고 생각할수 없다. 무엇무엇해도 시가 우선 시로 되어야 함은 시적예술품으로 되어야 한다는것과 같다. 시가 어떠한가를 론한다는것도 시가 시로 된다음의 일이다. 시로 되기전의 글을 놓고 시니뭐니하고 시야비야하는것은 공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시가 시로 되자면 우선 시적예술이 시에 있어야 하는것이다 . 그러므로 예술지상주의를 무턱대고 반대한것은 미상불 틀린것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예술지상주의를 어떻게 대할것인가를 다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시적예술이란 무엇인가 시를 쓰는 여러 가지 방법과 기교를 시적예술이라고 필자는 보고있다. 시적방법이나 기교가 없이 씌여진 시, 시적장치가 없이 씌여진 시를 결코 좋은 시라고 할수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최고기교는 무기교라고 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기교를 득달한 시인들의 말이지 기교를 모르고 시를 써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시 기교를 모르고 시를 쓴다는것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다. 왜 어떤 사람은 시를 쓸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시를 쓸수 없는가? 그것은 시적기교를 아는것과 모르는것과의 차이이다. 왜 어떤 사람은 좋은 시를 많이 쓸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좋은 시를 많이 쓰지 못하는가 그것은 시적기교에 득달한것과 못한것의 차이를 나타내기때문이다. 그래서 문심조룡에서는 드레박줄이 짜르면 물을 길어올릴수 없다고 하였다.  기교에 대한 성숙이 있어야 좋은 시를 많이 쓰게 되지만 기교에 대한 숙달이 없으면 우연하게 좋은 시를 쓸수 있지만 경상적으로 좋은 시를 쓸수는 없는것이다. 류협이 말한것처럼 도박을 모르면서 도박을 놀면 우연히 돈을 딸수는 있지만 그냥 돈을 딸수는 없는것이다. 사실 저명한 시인들은 기교를 득달하여 잘 영위하기 때문에 늘 좋은 시를 쓴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지상주의를 부정한다는것은 기실은 시를 모르면서 시를 써도 된다는 말과 같으며 글을 써놓고 시라는 이름을 붙여놓으면 시가 된다는 말과 같다. 무릇 좋은 시는 기교의 예술을 떠날수 없다는것을 명기할 필요가 있을 같다. 과거에 우리는 자유 평등 박애를 자산계급 구호라고 죽도록 반대하였다. 사실 자산계급은 나쁜 면도 있지만 좋은면도 있는것이다. 자산계급은 락후한 봉건제도를 뒤업고 생산력을 대대적으로 해방하였으며 인류력사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로를 세웠다. 자산계급이 탄생함으로 하여 인류의 정치 경제 문화가 류례없던 발전을 가져온것도 객관사실이다. 이런 자산계급이 제출한 자유 평등 박애는 지금도 인류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이다. 지금 우리가 조화로운 세계를 요구하는것도 따지고 보면 자유 평등 박애와 련관성이 없는것이 아니란것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수 있다. 인류는 자유를 추구하고 평등할것을 요구하며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것이 왜 나쁘다고만 할수 있는가 모택동도 대동세계를 요구하였다. 이 대동세계란 필자의 나름대로 판단하면 자유 평등 박애의 세계이다. 모종의미로 말하면 자유 평등 박애는 어느 령역에서나 모두 필수적인 사상이다. 정치도 그렇다. 자유 평등 박애가 있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자유로아지고 경제건설과 문화건설이 잘 될수 있다. 군사도 그렇다. 해당국가의 자유 평등 박애를 지키는 무력이라고 할수 있다. 군사는 전쟁을 요구하여 필요한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면하기 위하여 필요한것이며 종국적으로 세계가 군사를 요구하지 않는 세계로 발전하기 위한것이다. 문화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자유가 없고 평등이 없고 박애가 없다면 이 세상은 전쟁으로 충만될것이며 나라는 포화에 시달리고 백성은 전쟁에서 죽어갈것이다. 비록 자유 평등 박애는 자산계급이 제출한것이지만 시인이 요구하는것이며, 모든 계급과 계층이 요구하는것이며, 인류가 요구하는 구호이며 사상이라고 할수 있다. 과거에 우리는 계급에 따라 요구하는 예술이 다르다고 하였다. 무산계급예술은 혁명이라는 기계의 치륜이나 나사못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예술은 국계와 민족이 따로 없이 모두가 요구하는것이다. 자산계급이 예술이라고 하여 다 나쁜것은 아니고 무산계급이 예술이라 하여 다 좋은것은 아니였다. 자고로 예술은 경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쎄르반테스의 동키호테나 단테의 신곡은 어느나라 어느 민족이나 다 명작이라고 하는것이고, 교향악은 다 고급예술로 치는것이고, 다빈치 그림은 다 명작이라고 말하게 되는것이다. 우리는 봉건황궁의 예술은 무턱대고 나쁘다면서 배격해 버리였는데 이것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향악명작들은 거개가 황궁의 예술이였다. 우리 나라 봉건황궁에도 섭취할만한 예술적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며 그것을 발굴하여 오늘에 리용하는것은 나쁜 일이 없다고 생각된다. 중국고대의 녀성문학은  모종의미에서 기생문학이였다. 이 기생문학을 빼놓으면 중국의 녀성문학연구가 완정하다고 할수 없을것이다. 조선반도의 황진의 문학이 기생문학이였는데 그녀는 얼마나 좋은 시조를 썼는가는 주지의 사실이다. 력사가 유구한 중국의 기생문화도 이와같은 명주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땅이 두텁고 비옥하여야 농사가 잘 되듯이 고금중외의 예술을 잘 연구하여 우리의 바탕으로 삶아야 새로운 멋들어진 창작을 이룩할것이다.                   시에서의 10가지 구별 전통시와 현대시가 어떻게 다른가. 이 과제는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학자가 연구해야 할뿐만 아니라 비평가도 연구하여야 하며 시인도 연구하여야 한다. 물론 시인은 비평가나 학자보다 심도가 깊게 광도가 넓게 요구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개략적인것에 대하여서는 판별할줄 알아야 되는것으로 알고있다. 아래에 열가지 방면이로 우리가 말하는 전통시와 현대시의 구별에 대한 졸견을 말하려 한다. 1)제재를 다스리는 방면에서 전통시와 현대시는 엄격한 구별이 있다. 전통시는 시적대상을 잡으면 그것을 직접적으로 정면적으로 노래하지만 현대시는 그것을 간접적으로 외둘러 노래한다. 2)주제를 표현하는 방면에서 전통시는 드러내고 말하지만 현대시는 감추기를 하면서 이미지로 말한다. 3)시를 쓰는 기법에서 전통시는 모방을 중심으로 하지만 현대시는 표현을 중심으로 한다. 소위 모방이란 시적대상을 보는대로 있는그대로 느끼는 대로 쓰려는것이고 표현이란것은 시인이 보고 느낀것을 원래의 사물과 다른 사물운동으로 이미지를 만드는것이다. 4)비유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전통시는 직유를 쓰기 좋아하지만 현대시는 은유나 상징을 쓰기 좋아한다. 현대시에서 직유는 금물로 되여있다. 전통시는 어떤 비슷한 점을 강조하면서 비유를 만들려 하지만 현대시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사물사이의 균형을 잡으면서 비유를 조직한다 5)시적효과를 론함에 있어서 전통시는 교육적목적을 중시하면서 실용주의 공리주의 경향을 보이지만 현대시는 심미적목적을 내세운다. 이리하여 전통시는 한번 보면 무엇을 썼다는것이 인차 알리지만 현대시는 몽롱미가 있어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6)언어사용에서 전통시는 언어의 원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애쓰지만 현대시는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전통시언어는 기성문법과 론리를 지키지만 현대시언어는 기성문법과 론리를 도외시하고 폭력적조합으로 언어를 새롭게 창출하고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한다. 7)사유방면에서 전통시는 현실을 정시하는 현실적사유를 주장하면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있지만 현대시는 초월적사유를 숭상하면서  사유의 공간을 부단히 확장하고 환상으로 가상현실을 기도한다.   8)시를 시작할 때 전통시는 현재의 의식에서 시작하지만 현대시는 현재의 의식을 밀어버리고 무의식속에서 새로운 사물이나 사실을 떠올리려고 시도한다. 9)시의 흐름에서 전통시는 시를 단선구조로 끌고 내려가려하지만 현대시 특히 초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하이퍼텍스트와 같은 시들은 다선구조로 시를 만들기 위하여 애쓴다. 10)문체응용에서 전통시는 련결을 강조하고 순순히 풀려내려갈것을 원하지만 현대시는 의식의 흐름을 중시하면서 이미지와 이미지, 행과 행, 련과 련사이의 단절을 추구하며 분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외에도 시와 소설과 평론의 관계를 말할수 있지만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시와 소설은 문학의 근본이고 우선이면 평론은 시나 소설에 붙어서 사는 기생과 같은것이다. 시와 소설이 없음 평론은 할 말이 없게 된다. 창작자는 평론을 중시하여야 하지만 평론의 말을 우상처럼 받들 필요는 없다. 중요한것은 자신의 시나 소설을 잘 쓰는 일이다. 문단에서 창작을 리드하는것은 시나 소설 그자체이지 평론인것은 아니다. 시나 소설은 창작에서의 교과서라 한다면 평론은 참고문건에 지나지 않는다. 평론이 나쁘다고 하여 좋은 작품이 나빠지는것이 아니고 평론이 좋다고 하여 나쁜 작품이 좋아지는것은 아니다. 작품의 질은 작품자체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지 평론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 아니다.                           08.11.
40    링크의 사랑(시) 댓글:  조회:2183  추천:22  2008-11-03
사탕 한알을 먹다   사탕 한알을 입에 넣었다 침방울 호수에서 빨간 잉어 한 마리 꼬리를 흔든다 찰싹찰싹 박수를 치며   아래위층 하얀 옥들이 주르르 포옹하면 유연한 양금소리   들들한 노란 배암이 목구멍을 기여넘어간다 조개살이 머리를 쳐드는 순간           -9.15   새의 꿈   새의 꿈은 먹는것이다 새는 먹기위하여 난다 새는 날개로 바람을 낳고 바람은 구름을 낳고 구름은 비를 낳고 눈을 낳는다 탄생한다와 죽는다는 같은 말이고 량자의 중간에 먹는다는 다리가 있다 새도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날개를 젓고 풀은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비방울과 바람을 뜯어먹는다 사람도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두눈에 쌍불을 켜고 먹거리 사냥한다 제길 망태기 하이퍼시를 쓴다는게 얼토당토 않는 론설가가 되다니 이것도 다리를 건너는 방법인가                  9.16   물고기   강에 그물을 늘이고 물고기잡이 한다 구물에 걸리는 물고기들은 은빛 열매 하나둘 열매를 따서 장국에 끓이면 보약이 나온다 술잔을 기울이며 보약을 먹으면 다리에서 이는 바람이 내 팔을 흔들어 승무조각상을 빚는다          -9.16.   기중기    기다랗고 땅땅한 좆대를 하늘자궁에 꾹 박고 흔들어댄다 으르르 흥분으로 휘저으며 빨간 정자 뿌연 정자를 쏜다 하늘자궁의 란자들이 넓적넙적 받아먹는다 어느날 갑자기 거대한 아이를 뚝 낳는다 아들도 딸도 아니다 아빠도 엄마도 닮지 않은 아이 구멍이 숭숭한 아이속을 쉴새없이 나들면서 보금자리를 보듬는 아이의 아이들                       -9.17   잠이오지 않던 9.17   가둑나무숲에  거미가 둥그런 그물을 늘여놓고 무엇이 걸리기를 노린다   우뢰가 울며 비가 내린다 비줄기속을 걸어가는 뿌연 뒤모습의 내가 길게 보인다     나는 구름을 몰아다 판도라상자에 넣고 문을 꾹 닫아버렸다   쏟아지는 해살속에 나는 말뚝처럼 박혀있다   지금은 9월 18일 아침 6시 20분 환각이 떠오르던 그 침대가...               -9.18   마가을의  정오   하늘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비행기의 아츠러운 소리 근육속에서 무수한 송충들이 바글거린다 돌개바람에 휘말린 송충들은 희뜩거리는 나무눈알을 물고 하늘에 올라가 산산히 찢어진 하늘을 한장두장 땅에 내려놓는다 비행기는 사라지고 찢어진 하늘은 발밑에서 할딱거린다                  -9.21.   간판의 알레로기   태여나기전부터 아이를 낳는 간판 태여나면 무수한 아이를 낳는다 간판아이들이 사람코를 꿰여가지고 다니다 사람들은 간판아이들의 먹거리 싸구려 기생 페기물 노복...   칼라.1 시꺼먼 손사이 오가는 빨간 뭉치   칼라.2 방아찧기를 하는 두라체 엉덩이   칼라.3 비수 번뜩번뜩 피피 뜨거운 피   칼라.4 대낮 은행안에서 권총 아우성   칼라.5 총무리 뚜르르 꽝꽝 폭탄   간판애들보다 먼저 관속에 누워 두눈을 말똥거리는 백골이 ...         9.23.   오솔길. 룡. 나   길을 간다 오솔길을 간다 길이 땅을 버리고 하늘로 들린다 연줄처럼 10도각 20도각 50도각... 나 길을 따라 하늘을 걷는다 길대가리가 무지개처럼 머리뒤로 휘여든다 나는 하늘에 꺼꾸러 달려 걷는다 길이 흔들거린다 머리끼가 곤두선다 나는 길을 다리사이에 끼고 두팔을 벌려 꼭 끌어안는다 눈을 감는다 길이 몸부림치다가 잠잠해진다 눈을 뜬다 룡등이다 룡은 하늘 한바퀴 돌고 땅으로 날아내린다 상경룡천부 장성을 스치며 룡은 사라지고 장성우에 내가 선다 바람이 코트자락을 자꾸 잡아당긴다                      -9.23.     바드민톤 경기   그물 경계선을  늘이고 경기가 붐빈다   서로 그물총을 쏘아댄다   총구멍으로  하얀 비둘기 한 마리 포르릉 날아나와 그물을 넘나든다   온 몸에서 소나기가 쏟아지진다   서슬 푸른 은빛검이 내 가슴에 박히였다   뿜어나오는 붉은피 방울방울 장미꽃으로 란만하다   복제의 스토리   진달래는 항시 진달래를 복제하고 바위는 하냥 바위를 복제하고 토끼는 그냥 토끼만 복제하고 요즘은 인간들도 자신을  복제하고   복제를 거부하는 인간은 황당한자다 황당한 인간은 발자국이 있다 그 발자국에 물이 고이면서 구름이 뜨고 한점꽃이 피여난다               -9.23   나의 시비에   신선이 빚어놓은 선경대기암에 나의 황금옥이 있다네 황금옥 황금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네 집안은 텅텅 비여있네 지하층층계를 내려가니 밑바닥에 초가집 한 채 어머님이 뜨락에서 닭모이 주시고 옆에서 강아지가 꼬리 젓네 어머니 무사합니까 어머니는 먼산만 볼뿐 말이 없으시네 아버지 찾아 승강기를 타네 내린 곳은 망망한 하늘 아버지- 나의 부름소리에 앉아 아버지가 눈앞에 나타나시네 소경막대기를 짚고 오셨네 어디서 굴러온 놈이냐 꺼져 소경막대기가 나를 향하여 몸부림치네 나는 뒤걸음치다가 허망공중에 떨어지네 불이 몸에 달리네 하나의 불덩어리가 공중락하를 하네 별찌는 별이 아니데             -9.24.     첫 아지랑이   첫 아지랑이가 살그머니 하릉하릉 춤을 추자 수류탄이 꽝꽝  폭탄이 쿵쿵 겨울궁전이 와르르 무너진다 혀, 혀를 내민다 나무도 풀도 땅도 파란 혀들이 따슨 볕을 빨아먹는다 아나운서의 빨간 입이 봄발가락 물어다 진열한다 TV스크린 가아득히                -9.24.  수개      평형목우의 ...   경기가 눈부신 날에   학이 살랑 날개를 접는다 토끼 폴삭 뛰여 오른다 동그라미가 또르르 구분다 팽이가 팽그르 돌아간다 왜가리 다리가 껑충거린다 비행접시가 떨어져서야    선 수 가  보 인 다              -9.24 수개     시인의 령혼   시인 령혼의 전당에 여러가지 악기가 현란합니다 북 가야금 새장구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베...... 바람이 와서 북을  붑니다 나무가 와서 피아노를 붑니다 나비가 와서 트럼베를 두드립니다 쥐가 와서  노을이 와서 별이 와서 ... 부드럽고 경의로운 음악이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무지개 비낍니다 시인은 무지개위를 걸어갑니다 구름같은 록음속에서 새소리 향기로운 곳에는 백골의 노래만 출렁입니다               -9.24 수개     잠자리   선들 바람속에서 날아다니는 잠자리 그림 그린다 동그라미 삼각형 사각형... 나는 오른손 중지로 톡 동그라미를 튕겼다 붉은 기와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하얀 벽에 고추다래 여람개 걸려있고 하얀 할머니 키로 보리쌀을 다듬고 고양이가 담장우에서 볕쪼임 한다 그담 삼각형을 톡 튕기였다 숱한 렌즈들이 번쩍번쩍 번뜩이는 화면 갑자기 악어가 솟구쳐 물소의 목을 문다 사자가 얼룩말을 쫓아 총알처럼 달린다 칼고기가 주둥이로 돛배이물을 쿵 박는다 그다음 사각형을 톡 튕기였다 가없는 사막 그 노란 물결속에 미이라 락타뼈 옛성터 장성쪼각 별들이 미친듯이 우물속으로 쏟아진다 잠자리가 그림 그린다는건 잡소리 사실 잠자리는 움직이는 한점 ...                  -9.24.   이깔장대가 지휘한다   길섶에 버려진 이깔장대 하늘로 뛰여가 붓을 휘두른다 하늘종이에 고층건물 설계도가 태여난다 장대는 온 몸에 꽃을 달고 내려와 퐁퐁퐁 댄스를 춘다 몸의 꽃들이 날아난다 서산이 꽃을 받아 노을을 펼치며 운명교향곡을 연주한다 기다란 이깔장대가 몸을 흔들어 교향곡을 지휘한다 땅거미가 발볌발볌 다가온다                 -9.25   기발    나는 펄럭이는 기발 몸을 펄럭이며 등불을 낳는다     빨간 등불을 낳으면 아우성 삿대질 흔들리는 담장   파란 등불을 낳으면 땅에는 먼지구름 하늘에는 검의 물결 만마의 노도   등불이 깨여지면 나는 또 새등불 낳는다   청마처럼 묻고싶어라 제일 먼저 기발을 추켜든이가 누구였던가             - 9. 27.   수자놀이   짝짝짝 짝짝짝 수자놀이 하자야 짝짝짝 일 더하기 오는 짞짝 아들 구 덜기 륙은 짝짝 딸 삼더하기 륙은 짝짝 남자 사 더하기 사는 짝짝 여자 사더하기 삼은 짝짝 재신 구 더하기 팔은 짝짝 최고 구 더하기 구는 짝짝 맹탕 일 덜기 일은 짝짝 뺑꼴 령 더하기 령은 짝짝 무궁               -9. 30.   콩의 스토리   소설은 콩탈곡을 하면 되고 시는 콩알만 노랗게 닦으면 되고 수필은 콩껍질에 알살이 쬐꼼 붙음 되고 극은 콩알과 껍질이 싸우면 되지          -9. 30.   익은 고추밭   가을 고추밭에 널린 불똥이 황황 불길로 타 오른다   불을 한입 베여먹었더니 노란 탄알을 쏘아서 창자속에서 너펄거리는 검은 귀신들을 다 쫓아내는것이 아니랴 그리고는 샘물을 대여 주어 내 몸의 생기들은 축구시합을 한다    지금은 컴에 들어와 삿대질하며 내가 시다 하고 소리친다              -9. 30.     빌딩의 다른 이름   빌딩은 지구에 박힌 엄청 큰 대못이데. 내가 땅속으로 들어가서 대못을 볼라니까 글쎄 대못끝에서 잘칵잘칵 소리가 나더라구. 무슨 소리지. 찬찬히 살펴보니까 대못이 시한탄이 더란 말이다. 용서할수 없지. 메로 쳐서 마사버리려 했는데 움쩍도 안하더라. 어쩌지. 터지면 뼈도 못 추리는데. 가슴이 떨려서 뺑소니쳤지.             -9. 30.   가로등     발은  저승에   몸은  이승에   하느님  눈동자   어둠  뜯어먹고   길혀가 빛을 핥는다        -10. 1.   페지산조   페지가 굴러간다 나무통이 굴러간다 수림이 설렌다 물이 돌돌 흐른다 꽃이 생글 웃는다 열매가 반짝- 반짝인다 내 눈이 현미경 속으로 들어가 꼼지락거리는 열매싹을 쏘아본다              -10. 1.   갈꽃들의 산데리아   하얗게 갈꽃들이 피였다 하아얀  안개가 산을 오른다 하얗게 파도가 솟구치며 하아얀 은어떼들이 뛰논다 하얗게 머리 센 할머니들 하아얀  빨래를 넌다 하얗게 닦은 새 길 따라 하아얀 월궁으로 바람 먼저 스쳐간다             -10. 2     꽃병의 동화   꽃병이 온 몸으로 간다 누런 풀잎들이 이지러진 초행길 가면서 배암처럼 껍질을 벗는다 껍질을 벗어서 꽃길을  늘인다   따슨 볕이 반짝이는 꽃길에 까치가 상수리에 둥지를 틀고 모란꽃 송이송이 향기로운데 금붕어 한들한들 꼬리 흔든다   시인이 꽃병을 직관하는 사이 꽃병이 쪼르르 껍질을 벗어서 시인을 도르르 감는다 어느새 시인도 꽃병이 된다   두 꽃병이 어깨 나란히 향기로운 껍질을 벗어놓는다             -10. 3.   솔방울   솔솔 바람이 솔방울을 노크하면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 울창한 수림에게 편지를 쓴다   솔개가 편지를 나르노라면 방울소리 잘랑잘랑 하늘 흔들고 울님의  치맛자락 바람이 운다   솔대문 어디 있나 달려가는 님아 방초인들 네 애환 풀어주랴 울상이 그대로 푸른 별로 여문다              -10. 3. ************************************** 장미꽃과 나   빠알간 장미꽃이 너무도 황홀하여 나는 뽀옥 입을 맞추었다. 장미꽃은 삽시에 나의 살과 뼈와 내장을 죄다 빨아먹고 후-불었다. 얇다란 거죽만 남은 나는 휙 하늘로 날리여갔다. 나는 소리쳤다. 임마, 곱다고 키스해 주었는데 네가 내 살이며 뼈며 내장을 다 뽑아가짐 난 어떻해. 장미꽃이- 너도 날 가지렴. 그리고는 자기의 살과 뼈와 내장을 나한테 뿌리였다. 나는 장미가 주는 대로 넙적넙적 받아먹었다. 하늘에서 다시 땅에 내려온 나는 너무도 기뻐서 장미꽃을 포옹하였다. 거울을  보는 순간 나는 깜작 놀랐다. 아니 글쎄 내가 나를 안고 장미꽃은 장미꽃을 안고있었지 뭐야!               10.7. 새벽 다섯시   어느 가을날   어느 가을날 나는 풀밭에 가서 허리를 굽혔지. 피가 다 빠진 풀들이 누렇게 익어서 보기가 안스러웠지. 그래서 풀에다 록색을 올려주었지. 갑자기 풀밭에서 구렁이가스르륵 기여나와서 온 몸이 으스스 떨렸어. 그래서 푸른색을 지웠어. 그런데 뿌드등하고 장꿩이 날아나는 바람에 나는 넘 놀라서 와당탕 뒤로 넘어졌어. 엉덩이를 툭툭 털고일어나니 진땀이 등허리에 흥건했지. 참...                      10.7.다섯시 16분.   퉁소를 불다   파란 잔디밭에 앉아 퉁소를 분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따라 하늘의 구름이 내려와 나를 싣고 하늘로 올라간다. 나는 구름우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신나게 퉁소를 분다. 구름속에서 꽃사슴이 나타나 나를 태우고 구름을 밟으며 어디론가 뛴다. 도착한 곳은 소월전당이다. 소월시인은 갓을 쓰고 앉아계신다. 나는 선배님께 절을 올리며 귀체건강 하옵니까. 허허, 최시인이 왔구만. 이게 어느때라고 나처럼 시 쓰며 돌아다니나. 내가 여기 온지도 백년이 되여오는데. 나는 얼굴이 빨개나며 몸둘바를 몰라서 허둥지둥 전당을 달려나왔다.                    10.7.     보청기 기습   가는 귀먹은 나는 보청기를 끼였다. 새소리, 물소리, 짐승소리, 바람소리, 우뢰소리...어이구! 헤아릴수 없이 많은 소리가 겨끔내기로 귀를 비집고 들어와 귀청을 갈갈이 찢는다. 머리가 뗑하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나는 도망친다.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다. 바위문을 열고 뛰여들어간다. 떨리는 가슴을 달래면서 바위창문으로 대다본다. (밖에서는 바위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나를 따라 오던 온갖 잡소리들이 바위를 스치며 사라진다. 나는 보청기를 바위속에 던지고 나온다.                   10.8.   색안경의 괴기   색안경을 낀다. 갑자기 해괴스러운 세상이 닥친다. 털보숭이 물고기, 비늘투성이 짐승,  뿔 난 새들 죄다 아수라. 해괴스러운 그 세상으로 나를 들여보낸다. 뿔새들은  나를 보고 -귀신이다-아우성치며 땅속으로 사라지고, 털보숭이 물고기들은 나를 보고 -도깨비다- 하늘로 날아오르고, 비늘투성이 짐승들은  나를 보고 -괴물이다- 줄행랑. 당하는 꼴이 넘 해괴망측하여 나는 색안경을 벗었다.               10.9.   가대기 뉴스   우리가 왜 땅만 뚜지겠니 맞아 하늘로 가자 그래 구름밭을 갈자 씨잉 가대기들이 하늘로 날아갔다 가대기들은 구름밭을 갈고 보리 심을가 안돼  콩 심을가 안돼  어디선가 들려오는 금지령 이걸 심어 하는 소리와 함께 구중천에서 계수나무묘목 한다발이 내려왔다. 가대기들은 계수나무를 심었다. 눈깜박할사이 계수나무는 푸른 수림을 이루었다. 구름밭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가대기마을로 날아내리였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가대기들이 우쭐했다. 이튿날 일간지에 붙은 광고 계수나무 한그루에 천만원씩 팝니다.                10.9.   다락이 꿈을 사다   옥수수의 노란 꿈 채우던 다락 이 여름 뚜걱뚜걱 꿈사러 나섰다. 들과 청을 들었다 네 꿈을 좀 팔아 안돼, 그럼 난 소소리 솟구쳐. 산과 말했다. 싫어. 그럼 난 납작해져. 강과 말했다 싫어. 그럼 난 바다로 못가. 뚜걱뚜걱 서성거리는데 제비가 내 꿈을 사겠니? 얼마? 천원. 좋아. 다락은 다리 네개인 괴조로 변신하여 하늘로 하늘위로 날아갔다.             10.10.     굴토기와 공룡의 헌화(獻花)   굴토기가 흙을 파서 밀어낸다 억만년 빛그물을 갈갈이 찢으며 억만년 바람성을 무니우며 푸른 공룡이 먼지를 털며 일어난다 억만년 구축한 비의 혈맥을 짓뭉개며 억만년 다져놓은 눈의 뚜껑을 짓부시며 컴을 치던 나는 눈이 둥그래진다 왜 남의 잠을 설쳤어 이 자식아 공룡이 노한 발로 굴토기를 차서 가랑잎처럼 날려보낸다 컴이 폭발하는 천둥소리 누우런 흙구름이 컴을 삼킨다               10.11.   가랑잎의 서비스   스륵사륵 가랑잎이 발밑에서 운다 장끼울음 노루울음 다람쥐울음도 보인다. 우뢰빛에 바람빛에 비빛에 이슬이 아롱진다. 가을시간이 울음을 머리우에 추켜든다. 재빛 깨까치들이 나뭇가지의 갈색기발로 부리를 닦는다. 골물이 하늘에다 마가을 풍경화를 띄운다. 스륵사륵 가랑잎이 부서진다. 바람이 엽서를 지고가도 말리는 사람은 없다.         10.15.   꿈새   꿈새가 포르릉 날아가며 푸른 그물을 느린다. 그물속으로 해가 날아들고 달이 날아들고 별이 날아든다. 바람이 산이며 들이며 강이며 호수를 등에 지고 그물속으로 들어온다. 그물속에 들어온 만물들이 저마다 빛을 뿌린다. 시인이 호각을 불면  황홀한 빛들이 줄을 서서 행진을 한다. 채색기발을 날리는 행진대오는 한편한편의 시로 살아서 우리들 앞을 지나간다.                10.15.(이상열수 도라지)   지하파이프의 전화   나는 지렁이꾸마 땅속의 흙이랑 바위랑 먹고 사꾸마 내가 땅속을 꿰지르면 땅속에 빛이 생기꾸마 하늘이 생기꾸마 하늘속에는 거울이 있으꾸마 빛속에서 무수한 해어들이 날아나와 지느러미를 하릉거리며 거울에 뽁뽁뽁 입을 맞추고 돌아가꾸마                 10.16.   시간의 유희   시간의 유희란건 신선의 부채질이다. 부채를 펴면 미국, 중국, 오스트랄리야 , 독일. 브라질... 메뚜기처럼 톡톡 뛴다. 부채를 흔들면 지구, 해, 달, 별이 유리쪼각처럼 반짝인다. 부채를 거두어도 인간은 감분알같은 존재라 시간의 코김에 천리를 날려간다. 그런데 신선이 어제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있다. 지금은 시간이 혼자서 유희를 논단다.                     10.16.   가야금을 뜯으면   가야금을 뜯으면 가슴을 우려내는 소리가 눈초리에 구슬 한꿰미를 단다. 원시림속의 시내물이 고목의 뿌리를 적시며 도란거리고, 잠자리가 련꽃에 앉아 고요를 펼친다. 하늘에 은하수가 소용돌이치며 빛발이 눈부시다. 설레는 빛물결속에서 노란 빛덩어리가 총알처럼 나오다가 빵 터진다. 빛오징어다. 여러가닥의 다리를 너울거리도 하고 가두었다 펴기도 하면서 상하좌우로 왔다갔다 한다. 무엇이 또 생성되나 가슴 조이는데 둥그런 토색지구가 왼쪽으로부터 나타나며 내 눈길을 다 먹어버린다.                 10.17.   지퍼를 열어라     지퍼를 열어라 령혼이 썩어서 구데기가 바글거린다 지퍼를 열어라 네 뼈잠을 뚫고 신선한 바람을 넣어주겠다 지퍼를 열어라 꽃잎이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겠단다 지퍼를 열어라 나비가 지퍼속에서 숨이 막혀 할딱러린다 지퍼를 열어라 나에겐 지퍼가 없는데 무엇을 열란 말이니   창밖에서 보슬비가 수런거리고 있다           10.17.   소나기   구름속에서 번뜩이는 불칼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낮달이 목욕하는 사이에 어느 선녀가 흰 치맛자락을 펄럭거린다 지붕이 북을 두드린다 나비는 창살에 갇히워 나오지 못한다 호수에 피여나는 꽃들의 아우성           10.19.   매화 사과 그리고 나(70)    눈이 푸실푸실 오는날 그녀는 꽃을 피우며웃었습니다 그녀의 웃음을 타고  사과가 쏟아집니다 잎이 파랗고 빨간 사과입니다 그녀의 나무에 사과가 가득 달립니다. 그나무와 가지런히 서있는 나의 나무도 사과가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나의 나무에는 아니 열린답니다 그녀 나무의 사과는 해가 되여 눈부신 빛을 나한테 직사합니다 나는 눈이 시리여 눈을 감습니다 새까만 나의 눈앞에서 해들이 축구경기하듯 뛰여다닙니다 내가 손을 내밀어 사과를 따려합니다 해는 불로 내 손이며 얼굴이며 가슴이며를 마구 찌져댑니다 나는 따가와 견딜수 없는데 나의 나무는 추워서 바르르 떱니다               10.19.   봉투속의 서한   봉투가 날아갑니다 나비가 되여 꽃을 찾아 날아갑니다 새가 되여 하늘을 열며 날아갑니다 비가 되여 새싹을 키우러 날아갑니다 시가 되여 새길을 열려 날아갑니다 나는 날아가는 봉투를 잡아 봉인을 뜯습니다 봉투는 비여있었습니다 아니 봉투에는 꽉차있었습니다 한글자도 없는가 하면 글이 꽉 차있고 글이 꽉 찼는가 하면 한글자도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글이 차있고 눈을 뜨면 글이 보이지 않는 봉투랍니다 어떻게 하면 눈을 뜨고 글을 볼수 있을가 아무도 이 매듭은 풀지 못하고 있답니다                  10.19.   지렁이기 기여간 자리   여름비 촉촉한 자리에 지렁이가 기여간 흔적이. 가는 나뭇가지가 꿈틀거린다 불이 달린다 동굴속에서 나온 원시인들이 고기를 굽으며 와짝거린다 우레소리가  비를 쏟는다 학교가는 길에서 우산들이 도란거린다 오리들이 걀걀 뒤뚱뒤뚱 돌아와서 몸에 비를 턴다 무지개가 살짝 비꼈다가 사라진다 지렁이가 기여간 흔적속에서  아직도 드라마가 흐른다           10.20.(이상ㅇ열한수 오진현)   탑   소림사에 가면 탑림이 있다 당나라때부터 현대에까지 석가모니 자손들이 모록이 앉아있다   탑속에 산들이 올망졸망 들앉아있는데 산사이로 시내물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수림속에 새들이 날아다니며 노래부른다 산은 산마다 하얀 수건처럼 구름을 날리고 구름사이로 는 엷은 해빛이 아롱거린다 몽롱한 말씀들 이 해빛속에서 폴딱폴딱 줄넘기를 하고있다   탐림을 나와 돌아보면 탑은 보이지 않고 측백나무들만 푸르다        10.21.   두보동상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두보가 서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질척이는 길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뒤모습에 물안개마저 애처롭다   함박눈이 내린다 눈잎은 동상을 스치며 나비가 된다 하얀 노란 파란 나비들이 솔솔 내려 꽃잎이 쌓인다   비줄기를 타고 눈줄기를 타고 두보는 하늘로 올라가 시간의 물결위에 앉아있다 시간은 그이의 엉덩이밑에서 그냥 흘러간다 영원한 빛덩어리                         10.21.   리백의 풍치   다리를 토시고 흰 구름우에 앉아있다 바람 미는대로 동서남북을 떠 다닌다 옆에는 주(酒)자를 거꾸로 붙인 술독이 있고 조롱박으로 퍼서 후룩후룩 술을 마신다 왼팔을 흔들며 촉도난을 읊조리는 소리 박재가 되여 황궁의 기와장을 두드린다 조롱박술잔에 해를 떠마시고 달을 떠마신다 해와 달이 고래가 되여 배속의 술바다에서  헤염치면 하하하 앙천대소를 한다                10.21.                 [출처:조글로문학 www.zoglo.net] [조글로 www.zoglo.net 공지: 저작권자(c) 제공사&저자. 무단전재-재배포금지] 
39    금단의 열매.2 (미성년 불가) 댓글:  조회:1657  추천:30  2008-11-03
골.1 각일각 날아드는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처에서 진땀을 흘린다 컴퓨터 한대로 동서남북 정보 수집에 구라파경제권에서 크린턴이 연설 강택민주석이 메히꼬 사절회견 오늘 장에서 배추 한근에 일원 상점에서 눅거리 천 팜 이웃 똥돌이가 싸우다가 코피 터짐 둘째놈 신발이 구멍 빠짐 배나무집 양반이 옥이와 사통함 굴암돼지가 죽을 먹지 않음 꽃시장에 가짜 꽃이 나짐 연길에서 녀자살인사건 파안 올망졸망 정보까지 컴퓨터에 차곡차곡 가려놓고 필요할 때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대천소식이나 관방소식보다 뒷골목 소식이 더 재밋다              1996.5.3. 골.2 명령이다 명령 아침에 출근할 때 연한 화장을 할것 여유시간에 백화점에 가서 아이신을 살것 털보와 치근덕거리지 말것 저녁에 된장에 부추쌈을 준비할것 밤에 진한 화장으로 남편을 맞을것 보이지 않는 사령부 보이지 않는 명령 소리없이 전달된다 명령에 따라 귀가 벌쭉해지고 눈이 돌아가고 입이 움직인고 손이 놀고 발이 가고 옷색이 변한다 이 사령부 명령은 황제의 칙지보다 에누리 없이 집행된다 범보다 더 무서운 짓을 치라해도 사령부하나는 언제나 추려야 한다 눈.1 한줄은 양전기 한줄은 음전기 닿기만 하면 찡찡 온 몸 저리다 두눈 감고 전기줄 닿기만 기다리는 미련한것아 땀 흘려! 땀! 전기는 수분이 있어야 잘 통해 눈.2 잘칵잘칵 오늘도 사진을 찍네 흑백사진 천연색사진 천장 만장 사진이야 네 맘대로 찍겠지만 기념사진 한장 고를 때 분이야 내 사진 골라 응 눈.3 뱀한테 홀리워 금과를 따먹고 눈을 떴지 뭐야 홀리워서 뜬 눈 홀리기만 하네 정말 그럴내기냐? 호호호... 멀쩡도 하네요 내가 홀렸나요 절로 매혹되고서 눈 .4 하나는 겉눈 하나는 속눈 겉눈으로 웃음 띄우고 속눈으로 셈평을 따진다 눈을 맞추려면 속눈으로 맞춰야 하리 눈.5 밤새도록 별들이 연마한 맑은 이슬 별하나에 이슬 한방울 별둘에 이슬 두방울 가벼운 이슬은 고무풍선 솔솔 바람에도 풀잎에서 똑 떨어진다 무거운 이슬은 천근 함마 한번 떨어지면 성벽도 박살난다 함마에 맞아 박살날지언정 고무풍선 끈 잡고 허우적이지 말라 눈.6 두자루의 붓이 새치스러운 붓이 그림 그린다 범을 범으로 그리기도 하고 범을 토끼로 그리기도 한다 쥐를 쥐로 그리기도 하고 쥐를 사자로 그리기도 한다 범을 토끼로 그렸다가 진땀을 뽀질뽀질 돋히기도 하고 쥐를 사자로 그렸다가 웃음거리를 사기도 한다 수줍음을 밟히고 그린 그림은 한생 보짐으로 되고 수줍음을 머금고 그린 그림은 평생에 웃음이 된다 재내비는 종래로 잘 그려지지 않는 모양이지 재내비에겐 평생 따스한 가마목이 차려지지 않는다 눈.7 자력선 한마당 펼쳐놓고 쇠붙이를 끌어당긴다 어떤 자석은 전문 망치에 맞은 못난이만 끌어당기고 어떤 자석은 전문 녹이 쓴 페철만 끌어당긴다 어떤 자석은 전문 은빛이 뛰는 강철만 고른다 나쁜 쇠붙이만 욕심내는 자석은 강철을 끌어와도 인차 녹이 쓸게 한다 몸매가 추한 자석은 하나도 없어 어느것이 나쁜 자석인지 강철들은 잘 몰라 금도금하려다가 똥물에 빠진다 눈.8 수림이 병풍처럼 둘러선 곳에 아늑한 호수가 있다 맑다 못해 푸르러진 호수 물 푸른 물이 들라 모두 겁낸다 흰구름이 살금살금 건너가 본다 해님이 살금살금 건너가 본다 산들은 가만히 들여다 본다 하맑아 호기심난 달은 밤마다 살금살금 건너가 본다 싱숭생숭한 별들은 하나 둘 내려와 장밤을 실컷 놀고서 새벽이면 슬금슬금 뺑소니친다 풀수 없는 야릇함 가득 고인 호수여 뉘 속을 말리자고 오늘도 푸르렀는가 [출처:조글로문학 www.zoglo.net] [조글로 www.zoglo.net 공지: 저작권자(c) 제공사&저자. 무단전재-재배포금지]  
38    금단의 열매 .1 댓글:  조회:1594  추천:19  2008-11-03
  에 대한 한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시학연구가이신 문덕수 선생의 말씀은 이러하다 연변의 작품은 그저 그런 작품들이 아니야 .  그런 생각이였습니다 . 그쪽 작품은 수평이 높은 작품이 아니지 않는가. 최시인의 시집을 보니 수평이 굉장히 높아졌다 . 신체의 각부분을 가지고 시를 썼다. 신체의 언어시집이다. 신체의 언어를 썼다. 알기쉽고 깊이가 있다. 한국에도 이런 시집이 없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문덕수                                           1999년 5월 22일 . 구레 시랑송모임에서 서시 아담과 이브는 뱀한테 홀리워 금과를 따먹고 눈을 떴다. 나도 금과를 따먹고싶었다. 그런데 고놈의 뱀이 있어야지. 뱀이 있어야 금과를 알텐데. 1996년 2월하순의 어느날 오후 라체사진 명작을 보았다. 문득 아름다운 뱀 한마리 사진첩속에서 기여나와 나에게 금과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제꺽 금과를 따먹었다 그랬더니 눈을 다시 떴다 어떻게 따먹고 눈을 떴는가 시로써 대답을 올리노라 제1부 머리편 머리.1 새까만 기발이 출렁인다 향긋한 향기가 출렁인다 싱싱한 청춘이 출렁인다 연연한 부드러움이 출렁인다 뒤로 뒤로 엎어지듯 달려간다 푸른 물 자르르한 울바자 출렁이는 기발 따라 천리만리 하얀 백조떼 너울너울            (1996.4.28) 머리.2 우중충한 검은 수림이 우거진 그 속으로 하얀 오솔길 한오리가 기여 갔다 .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결에 숲이 웅웅 울며 몸부림쳐도 오솔길은 그린듯 하다. 오솔길 따라 팽팽한 시위를 벗어난 화살 한대가 날아온다. 금빛이 반짝이는 화살에 가슴을 맞아 구멍이 뚫어진다.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나와 금빛 화살을 벌겋게 물들인다. 박혀 영원히 빠지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화살이                                  (1996.4.23일) 머리. 3 태초의 수림속에서 온 숯이다 태초의 흙속에서 온 숯이다 태초의 불속에서 온 숯이다 이글거리는 불을 가슴 가득 안고 검게 검게 온 숯이다 마음 내라 마음 내라 나처럼 까맣게 까맣게 구워줄게            (1996.2.29) 머리.4 까만 쪽문을 열고 들어서십시오 아늑한 방이 나진답니다 창턱에는 붉은 장미 댓송이 피고 등대에는 등잔불이 가물거립니다 원앙침이 마련된 잠자리앞에 소담한 주안상 마련한 명기 황진이 놋잔에다 청주를 부으며 시조 한수 읊습니다 오동추야 밝은 밤에 숯불을 피웠나니 활활 타는 불길로 화로를 달구었네 그까짓 송곳쯤이야 열개라도 녹이리. 머리.5 빨간 꽃을 꽂았다가 노란 꽃을 꽂아본다 노란 꽃을 꽂았다가 파란 꽃을 꽂아본다 파란 꽃을 꽂았다가 하얀 꽃을 꽂아본다 하얀 꽃을 꽂았다가 까만 꽃을 꽂아본다 까만 꽃을 꽂았다가 꽃잎을 꽂아본다 꽃잎을 꽂았다가 꽃줄기를 꽂아본다 꽃줄기를 꽂았다가 꽃뿌리를 꽂아본다 꽃뿌리에는 흙이 더덕이졌다 머리 .6 둥둥 흰구름 뜬다 한들한들 잔풀이 춤 춘다 우뚝우뚝 산이 솟는다 출렁출렁 강이 흐른다 닭이 알을 낳는다 돼지와 키스를 한다 개를 안고 뒹군다 소다리 되여 터벅터벅 똥구덩이에서 노는 오리[출처:조글로문학 www.zoglo.net] [조글로 www.zoglo.net 공지: 저작권자(c) 제공사&저자. 무단전재-재배포금지]  
37    고구려의 돌 댓글:  조회:1675  추천:13  2008-11-03
고구려의 돌   서시   미처  미처 몰랐다 돌이 나의 조상인줄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 그이의 부름 소리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다 그이의 성스러운 모습을   돌의 세월은 우리의 혼을 키워주었고 돌의 시간은 우리의 피를 뛰게 하였나니 돌의 비바람은 우리의 애환이였다   부끄러움은 어제까지였다 고로한 고향 돌의 나라에서 돌의 신성을 홰불로 추켜들고 간다   어둠은 사라지고 밝음이 일어선다   돌.0   나의 시는 돌의 언어이다 나는 돌에서 언어를 캐내는 시인 돌의 언어는 생명이요  빛이요 넋이다 언어는 마음에 앙금되여 피속의 불순물을 씻어버리고 내가 돌의 한 언어임을 증언한다 돌이 있는 한 언어도 숨쉴것이다 이 밤도 별빛이 돌을 닦는다   돌.1   범의 심장과 곰의 슬개가 모이고 엉키여 돌이 되었다 돌의 몸에서 불이 타올라 빛이 되었다   불과 빛이 어우러져 공기를 낳고 물을 낳고 쌀을 낳고   아리랑은 돌에 뿌리 내려 색이 바래지 않는가 가야금은 돌의 말씀 전해서 우리의 피로 흐르는가   너는 너로 되어도 나는 나로 되어도 다 같이  돌숨을 쉬는 것을   돌. 2   우리 눈이 별랗다 어쩜 돌눈 같은가 우리 귀가 별랗다 어쩜 돌귀같은가 우리 코가 별랗다 어쩜 돌코같은가 돌의 입이 별랗다 어쩜 우리 입같은가 돌의 목소리 별랗다 어쩜 우리 목소리같은가   몸도 팔도 다리도 어쩜 죄다 우리 같은가 숨결도 피도 혼도 어쩜 죄다 우리 같은가   우리는 돌의 딸 우리는 돌의 아들 번개가 두려우랴 폭우가 두려우랴   소나기 지나가면 곱절 빛이 나는 것을   돌.3   지구의 둘레를 빙빙 돌며 돌시간이 강물 되여 하늘 빧으며 소리솔솔 흐릅니다 그 물결에 나무들이 흐릅니다 풀들이 흐릅니다 짐승들이 흐릅니다 새들이 흐릅니다 사람들이 흐릅니다 소리 없이 흘러가는 물결에는 별무리처럼 반짝이는 소용돌이 나무도 풀도 새도 짐승도 사람도 만나기만 하면 익사하는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에서 연두빛 수초가 다시 나오고 애기 동물이 다시 나오고... 물결을 따라 모든 것이 돌고돕니다 유유히 흐르는 돌시간의 물결속에서 우리도 살다가 눈을 감습니다 감았다가 다시 뜹니다 눈을   돌. 4   산에 가면 돌의 가슴이 보인다 들에 가면 돌의 눈이 보인다 강에 가면 돌의 손발이 보인다 저 하늘 푸른 별도 돌이다 꼬꾸라져도 엎어져도 돌은 돌이다 깨여져도 부서져도 돌은 돌이다   돌. 5   바람이 어디서 생기나 알아보려고 바람을 거슬러 가보았다 가고 가고 또 가고 가보니 바람은 돌의 입김이였다   나무가 어디에 뿌리를 박았나 파보았다 뿌리들은 돌품에 안겨있었다 돌은 그렇듯 따스하게 자애로운 손길로 쓰다듬고 있었다   비가 어째서 오나 실실이 내리는 비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보았다 하늘에는 비를 내려보내라는 돌의 편지가 있었다   돌은 산위에 앉아있어도 돌은 땅밑에 누워있어도 왜 그리 편안하고 성스러운지 이제 조금 알것 같다   돌.6   골짜기마다에서 우는 시내물은 돌이 흘리는 눈물이더라 달이 조요로운 밤 내물의 흐름은 구슬퍼 그 눈물은 감로수 토끼 개미 호랑이들이 마시며 자라고 그 울음은 자장가 새들을 보금자리에서 꿀잠을 자게 하고 수초들은 귀기울이며 숨을 죽인다 땅에 자르르 기름 돌게 하고 인간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돌의 눈물이여 눈물의 노래여   돌. 7   조약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약돌도 하나의 큰 세계   옛날 옛적 할아버지까지 줄느런히 앉아계시는 세계 여러 색깔이 출구를 빠져 세상으로 나가는 세계 보리 콩 기장 조 벼...씨앗들이 밭으로 나가는 세계 가야금 젓대 북...겨레 속으로 나가는 세계   거기엔 내 자리 당신 자리도 있다 언제 그리로 가는가는 누구도 모르지만 자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도 걸상도 거개가 폭신폭신하였지만 혹시 못이 박혀있는것도 있었다   당신 왜 여기 왔소 빨리 나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축객령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황망히 대문을 빠져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나의 얼굴을 만지였다   돌.8   사람은 사람을 버리지만 돌은 돌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은 돌을 모른체 하지만 돌은 사람을 사랑한다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돌은 깨여져도 부서져도 말하지 않는다 황제도 거지도 가리지 않고 죽기만 하면 묘지앞에 반듯한 제돌로 앉는다 영원히 지키여   돌. 9   돌은 말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돌은 글이 있어도 읽지 않고 돌은 그림이 있어도 펼치지 않고 돌은 셈을 알아도 계산하지 않는다 돌의 언어는 침묵이고 돌의 노래는 바람이 불러주고 돌의 시간은 눈과 비가 알려주고 돌의 마음은 나무와 풀이 그려주고 돌의 희망은 노을이 짜준다   돌. 10   돌은 물밑에서 몸으로 물을 다독이여 아침마다 물안개를 만든다 돌은 입김으로 물안개를 불어 구름을 만든다 구름은 하늘의 먼지를 닦는 비자루 해의 얼굴을 씻어주는 수건이다 번개는 돌이 마주쳐서 일어난 불이요 우뢰는 돌의 아우성 비는 돌의 감로수 우리는 돌의 아들   돌.11   먼지속에 돌의 분신이 있다 공기알에 돌의 입김이 있다 물방울에 돌이 소망이 있다 나뭇잎에 돌의 사랑이 있다 새의 혀끝에 돌의 노래가 있다 이슬방울에 돌의 착함이 있다 비인 곳에 돌의 얼이 있다   돌. 12   나는 돌입니다 돌 섬김을 위하여 태여난 돌입니다 모기도 섬기고 쥐새끼도 섬기고 제비도 섬기고 구데기도 섬깁니다 풀도 섬기고 나무도 섬기고 해도 달도 별도 섬깁니다 섬기는것이 욕망이요 천직이기에 두쪽 세쪽 열쪽으로 깨여져도 아니 산산이 부서져도 섬길수만 있다면 영광으로 압니다 섬기니까  내 마음에 세상만물이 있고 세상만물속에 내가 있습니다 세상만물밖에도 내가 있습니다   돌. 13   태양의 살점이 떨어져 돌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태양은 돌의 어머니 돌은 태양의 신   이 땅에 빛이 오면 돌도 빛을 따라 하늘에서 내려오고 이 땅의 빛이 가면 돌은 빛을 타고 하늘로 간다   빛과 함께 사는 돌 해가 떠오르면 은빛 새무리 날린다 금빛 새무리 날린다   태양의 살점이 떨어져 돌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태양은 돌의 어머니 돌은 태양신   돌. 14   누가 돌을 만들었을가 누가 돌의 영광을 누리게 했을가   하늘의 시작도 끝남도 돌에서 시간의 시작도 끝남도 돌에서 계절은 돌의 속살에서 노래부른다   하늘의 높이로 돌의 지혜  채울길  없어 땅의 깊이로 돌의 흉금을 재일수 없어   돌에서 왔다고 얼굴이 붉어질 일이 없고 돌로 돌아가 마음에 주름 질 일이 없어라   누가 돌을 만들었을가 누가 돌의 영광을 누리게 했을가   돌. 15   당신의 동굴은 신비한 자궁 그 자궁에서 태여났습니다 바람 번개 우레 불... 물 나무 원숭이 파리...   당신의 동굴은 신비한 자궁 그 자궁에서 태여났습니다 산신 천신 지신... 그리스도 야꼽 나자로...   당신의 동굴은 신비한 자궁 그 자궁 천궁으로 통하는 길 신들이 날아날아 땅으로 내려오고 중생들이 날아날아 천궁으로 가고   당신의 동굴은 신비한 자궁 탄생의 원천이여 영생의 무지개여   돌. 16   당신은 봄의 시간 버들가지 속을 차오르는 물입니다 당신은 아침 빛을 주는 찬란입니다 당신은 바람 꽃망울을 헤쳐주는 사랑입니다 당신은 물레 제 제몸의 실오리를 뽑아 나를 가두어두는 그물을 떴습니다 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그물속에서 자유로이 헤염치고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그물속의 보금자리에서 노래 부릅니다   돌. 17   하늘은 당신의 눈이오이다 해와 달은 당신의 눈동자 구름은 당신의 눈을 닦아주는 손수건 별들은 당신의 눈빛이오이다   돌. 18   아스라이  추켜들고 무너지려는 하늘을 받쳐든 것이 당신의 팔이 아니오리까   그래서 하늘과 땅사이에서 바람은 자유로이 오가오이다 그래서  물은 흐르고 싶은대로 흐르고 바다는 자유롭게 출렁이오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사시절의 노래가 넘치고 빛은 색깔이 영원히 바래지 않나이다   이따금 그대가 손벽을 치기에 번개 일고 우레 울고 소나기가 쏟아지오이다 이따금 그대가 팔을 휘젖기에 광풍이 쏟아지고 눈보라가 사납나이다 이따금 그대가 주먹을 휘두루기에 바다에서 파도가 하늘을 핥고 대지에서 모래폭풍이 하늘을  삼키오이다   자연의 차고 더움을 인간의 흥망성쇠를 모두 손바닥에 담고있어 때론 자람이 때론 죽음이 때론 희망이 때론 절망이 이슬이 되어 떨어지지 않겠나이까   당신은  하늘의 주재자 땅의 주재자외다   돌. 19   돌이 따스해지면 살구나무에 꽃이 피여납니다 돌이 뜨근해 지면 강물은 소리높이 줄달음 칩니다 돌이 시원해하면 풀벌레들 노래 달빛을 닦습니다 돌이 추워하면 하늘에서 나비떼들이 내려옵니다 돌은 사계절의 지휘관 그의 지휘를 따라 오늘도 계절은 행진합니다   돌. 20   태여날 때 어머님은 내 손을 당신의 맥박에 대여주었습니다 당신의 맑은 피가 내 몸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천고의 울림을 들으며 나는 자랐습니다 태양의 맥박도 달의 맥박도 내 피줄에서 함께 뜁니다 당신의 맥박에서 내 손이 떨어지면 눈이 감기는 순간이란걸 알고있습니다 우박이 쏟아져도 땅이 얼어 터져도 나는 당신의 맥박에서 손을 떼지 아니 합니다   돌. 21   돌이시여 하고 불렀더니 내 귀가 다시 열리여 돌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꾸마 시내가에서 꼬리를 촐삭이며 물새우는 소리가 들리꾸마 산에서 꽃들이 망울을 열며 하늘을 안는 소리가 들리꾸마 호박잎의 이슬이 구슬 굴리는 소리가 들리꾸마 개구리 울음소리가 제일 명창으로 들리는것이 아니겠슴둥   돌이시여 하고 불렀더니 내 눈이 다시 환히 열리꾸마 하늘에서 칠색의 종소리 쏟아기고 산신 수신 지신 우신 풍신...옹위하에 아홉 마리 룡이 끄는 수레에 앉아 그 무슨 군이라는 신선이 내려오꾸마 안개가 끼였다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선왕이라는 사람이 련꽃돌에 앉아 살구꽃부채를 저으며 하늘로 오르고 있지 않겠슴둥   돌이시여 하고 불렀더니 내 가슴의 문들이 활짝  열리꾸마 아니 글쎄 내 가슴속으로 산이 날아들어오고 들이 날아들어오고 강이 날아들어 오고 하늘이 날아들어오지 않겠슴둥 그래 거짓말 같습지유 당신도 경건한 맘으로 돌이시여 하고 한번 불러봅소   돌.22   새벽이면 새벽마다 돌은 가슴속에서 열두가지 색깔을 뿜어냅니다 세상만물은 자기에게 맞는 색깔을 몸에다 바릅니다   하늘은 람색을 가져다 바르고 구름은 하얀 색깔을 가져다 바르고 까치는 검은 색과 흰 색을 가져다 바르고 맨드라미는 빨간 색깔을 가져다 바르고 그리고 나비 노루 클락새 호랑이 물고기 누에 공작새 아...   돌의 색깔은 세상을 울긋불긋 장식하고 돌의 색깔은 생명을 키우고 돌의 색깔은 세상에 정기가 돌게 하고 돌의 색깔은 세상을 살이지게 하고 돌의 색깔은 만물에 령기를 불어넣습니다   돌의 가슴에는 신비한 열두 가지 색깔이 있습니다   돌. 23   돌의 족속임을 확인한 그 날 밤 나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별자리마다에서  선인들이 사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북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고 상모를 돌리며 둥그런 원을 지어 빙빙  돌고있었습니다   선인들을 보고 나니 마음 때가 다 지워집니다 뼈가 꿋꿋해지고 눈앞이 환해지였습니다 새까만 밤인데도   돌.24   하늘 신선이 내려와 비돌이 되었나니   비돌은  오늘도 숨을 쉬고 있습니다 신선의 숨을 오늘도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신선의 피가 오늘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선의 음성으로 오늘도 살아서 어제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을 달리던 족속의 말갈기가 나붓깁니다 잉어의 묘기를 부리던 지혜가 펄럭입니다 물고기를 쫓던 수달 꿩을 덮치던 매가 보입니다   바람 천년 눈비 만년이였어도 비돌은 오연히 오늘도 신선으로 서있습니다   돌.25   대지는 바다 산악은 파도 하늘을 치닫는 파도를 가르고 천년을 달려온 함선 장군총이여   계절바람이 반만년 지나갔어도 이물은 날이 상하지 않고 계절 눈비가 반만년 내렸어도 색깔이 추호도 바래지 않고 반만년의 차고 더움속에서 실주름 한오리 묻지 않아 이제 억년을 달려도 오늘의 위용 눈 시리리   그대를 못 보았을 때 나는 한알의 먼지 그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대를 따르는 매생이 만경창파 태질해도 함선이 길을 열어 유리판위를 달리는 듯   푸른 태양이 솟아오른다 내 마음의 어둠을 가셔주며 찬란한 갈매기 울음소리 해살처럼 하늘에서 쏟아진다   돌.26   화약으로 엉킨 불씨 응어리   첫 불씨를 받아 불을 지른 자는 누구   그 불로 달을 구운자는 누구   그 불로 고기를 구운자는 누구   그 불로 굴뚝연기를 낸 자는 누구   그 불로 쇠를 녹인자는 누구   눈을 다시 띄워주고   하늘을  다시 열어주고   인간을 다시 조립해   군주로  세웠어라   그것은 죄 그것은 공   그것은 희망 그것은 절망   공과 희망으로만 탈수 있는 불이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느해 어느날 어느 시각에 나는 당신의 맥박에서 손을 떼지 아니 합니다   27돌의 말씀       돌.28   물속의 돌들은 저마다 악기를 다룬다   어떤 돌은 피리를 뜯고 어떤 돌은 북을 켜고 어떤 돌은 거문고를 두드리고 어떤 돌은 새납을 치고 어떤 돌은 피아노를 불고 어떤 돌은 색스폰을 치고 어떤 돌은 꽹과리를 불고...   돌의 흐름을 위하여 물은 연주를 하고 물의 연주를 위하여 돌은 흐르며 아름다운 경음악을 그린다   돌. 29   나는 소리를 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메아리   어디서 날가   돌무덤에서    나는 깜짝 놀라 발길을 멈추려했다   발은 메아리 황홀에 빠졌다   아니야 하고 소리쳤지만   하늘은 돌무덤을 품고 있었다 그렇듯 인자하고 자애롭게   서자서자 다짐했으나 발은 몸 먼저 가고있었다   하느님께 애원했다 내 발을 묶어주시우   허허허 하느님은 흰 수염을 쓰다듬을뿐   돌. 30   돌에다 귀를 대였습니다 까르르 웃음소리 보입니다 향기로운 웃음소리가 둥둥둥 북소리가 보입니다   누군가 뜨거운 윤디로 마음의 갈피갈피를 번져봅니다 아야 가갸 글소리 을보륵*이 징을 칩니다   온 몸이 달아 새빨간 쇠덩어리 됩니다 그 쇠덩어리로 나는 궁전을 짓습니다 황금의 궁전  을보륵:고구려때의 어학자로서 조선어 자모음의 원 창제자 그후 세종대왕이 그 원본에 의거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한다   돌.31   당신은 거울입니다 천년의 사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천년의 자취를 수놓은 거울입니다 당신은 책입니다 천년 드라마를 공연하고있습니다 천년 눈물이 슴배여있습니다   당신은 피를 뽑아 대지에 강물이 솟구치게 합니다 당신은  뼈를 쌓아 이 땅에 산이 흘러가게 합니다 당신은 살을 바수어 이 대지에 흙이 있게 하였습니다   아 당신의 혼을 열면 우주가 보입니다   종시   가슴에 총총총 돌별이 떴다   시의  오리로 별들을 꿰여   찬연한 목걸이를 만들었다   목걸이를 거는 순간 나도 그대도 돌이 되노라     (2006.8.5-2006.9.23초고-12월 수개) [출처:조글로문학 www.zoglo.net] [조글로 www.zoglo.net 공지: 저작권자(c) 제공사&저자. 무단전재-재배포금지]  
36    《문심조룡》의 화려한 부활-현대시 댓글:  조회:1528  추천:33  2008-11-02
《문심조룡》의 화려한 부활 - 현대시                          나는 1500여년전에 중국의 류협이 쓴 <<문심조룡>>을 읽고 깜짝 놀랐다. <<문심조룡>>은 동양문학의 고전의 하나이며 정수의 하나이며 우리 전통의 하나이기도 하다.          <<문심조룡>>은 모종의미에서 말하면 동양문학의 뿌리의 하나로서 우리 문학의 뿌리라고도 할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의 많은 명제들이 <<문심조룡>>과 같은 감이 들었다. 어찌보면 현대시는 <<문심조룡>>의 화려한 부활이라고 함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하는 결론에 도착하는것을 부정할수 없었다. 아래에 몇가지 방법으로 <<문심조룡>>과 현대시 - 현대시와<< 문심조룡과의>> 관계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현대시의 사유와 <<문심조룡>>에서 말하는 시적사유방식이 일치하다는것이 첫째 인상이다. 시를 어떻게 사유하는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시적사유가 다름에 따라 부동한 시의 유파가 산생하게 되며 시가 어떻게 씌여지는가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사실 필자는 시적사유는 시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언어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의 언어는 시의 발상에 의존하여 산생되게 되고 나아가서는 시의 발상과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 영향이 어떤때에는 시로 되는가 안되는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대시는 감정에서 도피하고 개성에서 도피하고 지어는 시인의 자아마저도 부정하면서 언어의 집을 지으며 언어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현대시는 기성의 감정, 기성의 사물의 개성, 시인의 갖고있던 윤리들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키면서 씌여진다고 한다.     그래서 말라르메는 까잘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래동안 무에 깊숙이 내려가 본 경험이 있어 단언하지만 <그 밑에는> 오직 아름다움이 있을뿐이요-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완벽한 표현은 하나밖에 없소 . 시뿐이요.>> (시의 리해- 한국민음사 1983,7월 발행- 이하 <리해>로 줄임 235쪽)    랭보는 또 <<언어의 련금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소박한 환각에 길들었다...나는 단어들의 환각으로써 나의 신비한 궤변들을  설명하였다! 나는 마침내 내 정신의 혼란을 신성시하게 되었다.>>(동상 228쪽)    <<상상력만이 창조적인 천채이다...그 최고의 업적은 추상에 있다>>라고 월리스 스티븐스는 <<가치로서의 상상력>>에서 말하였다. (리해 156쪽)    무에 깊숙이 내려가 보면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의 완벽한 표현은 시밖에 없다는 말라르메의 말이나, 환각에 길들여진 랭보가 단어들의 환각으로 신비한 자신의 궤변을 설명하고 그 환각을 신성시하게 되었다는 론이나, 상상력의 최고의 업적은 추상이라고 말한 스티븐스의  지적이나 모두가 시는 현실속에서 받은 감각을 그대로 라렬하는것이 아니라 시인은 기성의 세계에서 무의세계로 들어가 시를 떠올려야 한다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이라겠다. 이러한 시리론들은 우리로 말하면 낯설지 않은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리론이 <<문심조룡>>에 있다는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생소한 말처럼 들리는 이 리론이 1500여년전에 중국에서 탄생하였다는 기적을 우리는 승인하지 않을수 없으며 놀람을 금할수 없는것으로 우리앞에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문심조룡>>이라는 이 언어 자체가 이점을 말하여 주기도 하지만 류협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적사색을 잉태함에 있어서 그 요체는 허심함과 조용함에 있으며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내는데 있다...그런 다음에라야 비로소 신묘한 도와 길게 통한 심령으로 하여금 성률에 맞게 문학적언어를 안배하게 할수 있는데>> (연변인민출판사 조선문 출판 <문심조룡> 377쪽. 다음 인용부터는 페지만 밝힘)라고 하였다. 류협의 말처럼 <<허심하고 조용하고>>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내면>> 그것은 바로 말라르메가 말하는 무의 세계이고 랭보가 말하는 환각의 세계이고 스티븐스가  말하는 <<추상>>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문심조룡>>이라는 말도 그렇다.  글 쓰는 사람이  마음으로 룡을 조각한다는 뜻이다. 룡이란 세상에 없는 사물로서 력래로 누구도 본 사람이 없는 환상적 토템물이다. 이 말이 바로 세상에 없는것을 이미지 즉 한어로 말하면 의상으로 창조해 내라는 말인것이다.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내면>> 무의식세계인데, 무의식세계에 들어가서 어떻게 시를 떠올리는가? 이 무의식세계는 바로 시성의 세계로서 시인은 이 세계에서 시적자각으로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여야 한다는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무의식세계에는 현실과는 다른 의식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시적정신 혹은 시성 혹은 시적자각 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문심조룡>>은 그것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남다른 식견이 있는 장인바치가 심상(意象)에 의하여 창작을 진행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문학적사색을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首術)이며 작품의 구성에서의 중요한 발단이다.>>(동상)     류협은 무의식세계에서 심상창조 즉 이미지를 창조해내는것이 첫째 방법이며 시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류협의 이 관점은 천년의 중국문학을 연구분석하여 낸 결론으로서 중국문학사에서 오늘까지도 인정을 받는 관점이다. 소유의 문학사가들과 문학리론가들은 류협의 이 리론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왔다. 그럴뿐만 아니라 현대시인들도 이미지라는 언어를 문학에 도입하고 이것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개화시켜 왔다. T.E흄, E.파운드, S.크레인등을 대표로한 영미의 시인들이 일으킨 이미지 시운동은 심상창조를 현대시의 핵으로 삼았던것이다. G. 바슐라르의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J.P. 사르트르의 <<상상심리학>>, 그 외에도 많은 시론과 철학과 미학들이 <<문심조룡>>의 <<선입견>> 버리기며 심상론과 천갈래 만 갈래의 련계를 가지고 있는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연구하고 창작한 이미지 리론과 시들은 그 원천이 <<문심조룡>>이 아니라고 말할수 없다. 특히 파운드의 어머니가 중문학자였고 파운드도 중국문학을 연구한 사람이여서 그는 서양시와 동양시의 교차점을 찾고 그 발전방향을 이미지시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2    선입견을 버리고 정신을 깨끗이 정화시키고 이미지를 창출해내야 하는것이 첫째 방법이며 시의 시작이라고 한 이 결론에서 이미지가 중요하고도 중요하다는것이 밝혀지였다. 어떤것이 이미지이며 어떻게 이미지를 창출하는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 류협은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그것은 <<비흥>>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비란 비부(比附)이고, 흥이란 기흥(起興)이다. 비부 즉 사물의 리치를 련결한다는것은 비유를 사용하여 사물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기흥 즉 사물에 의탁해서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것은 어떤 의미를 아주 은근하게 내포하고있는 사물에 감정을 맡긴다는 뜻이다.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서 정서가  발생하기 때문에 흥을 리용하는 수법이 성립되며 비유를 통해서 사물의 리치를 드러낼수 있기 때문에 비의 수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란 격분의 감정을 품은 채로 잘못을 지적하는것이고 ,흥이란 완곡한 비유를 사용하여 그것에다 숨겨진 의도를 의탁하는것이다...시인들이 지향하는 수법에는 항상 그 두가지가 함께 포함돼 있었다.>> (501쪽) 비와 흥은 이렇듯 중요한것으로서 이 두가지는 결합되여 이미지를 창출할뿐만 아니라 시의 뜻도 만든다. 이것은 시를 쓰는 핵심적방법으로서 비와 흥을 떠나선 시에 대하여 운운할수 없다는것을 말한다.  비와 흥에서 비교가 우선이다. 사물과 사물과의 비교가 없으면 흥이 산생할수 없다. 비는 흥의 기초이며 흥은 비의 비약이다. 흥은 시의 감정으로서 시의 뜻이며 사상이며 골격이지만 비에 의하여 산생하므로 비는 흥의 탯줄이며 모체이다. 시의 뜻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것도 아니고, 이미지밖에서 개념을 부여하여 만들어지는것도 아니다. 시의 뜻은 사물을 비교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산생하게 되며 이미지에 용해되여 있는것으로서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것이다.    류협은 어떻게 비교를  하는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아래와 같이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비유된 두사물이 비록 북방의 호인과 남방의 월인들만큼이나 서로 관련이 없더라도그것들이 일단 합쳐지면 간과 쓸개처럼 가깝게 된다네. 기흥은 외부의 형상을 묘사하여 그뜻을 뽑아오므로 말의 사용은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하리라>>(509)하였다.    여기서 두가지 문제에 류의할 필요성이 있다. <<서로 관련이 없더라도 >> <<그것들이 일단 합쳐지면 간과 쓸개처럼>> 친밀해진다는것이다. 그러기에 과감하게 언어를 구사하여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비교되는 두 사물이 성질이 다르거나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도 비교할수 있으며, 비유를 산생시킬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결론은 지금도 우리가 시에서 발휘시켜야 할 훌륭한 명제인것이다.     이미지에 대한 현대시인들의 시도 많거니와  론술도 많다. 그중 한두가지 관점만 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리처즈는 상상력을 론하면서 상반되는 성질이나 불조화한 사물의 성질에 대한 밸런스(균형) 혹은 화래로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통합적 마술적 힘이라고 하였고, 코울리지도 서로 반대되거나 또는 불일치한 성질들을 균형하거나 또는 타협시키는 힘이라고 하였다.   사물과 사물을 비긴다는것은 시적상관물을 설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적상관물에 대하여 엘리어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적상관물을 찾아내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특별한 정서의 공식이 될 일련의 대상들, 어떤 상황, 사건의 연쇄를 찾아내는 일이다.>> (세계명언대사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735쪽)엘리어트가 시적상관물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처즈와 코울리지의 말이나 엘리어트의 이 말은, 심상에 기대여 창작을 진행하는것은 첫째방법이며 글의 시작이라는 류협의 말과 일맥상통할뿐만 아니라 리처즈나 코울리지나 엘리어트가 류협의 말을 복창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가지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서의 공식이 될 일련의 대상들, 어떤 상황, 사건의 련쇄를 찾아내는 일>>이 바로 심상을 만드는 작업이며 시를 쓰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시창작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이 핵심의 중요성에 대하여 파운드는 이렇게 강조한다.    <<많은 량의 작품을 내놓는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것이 낫다.>>(리해 138쪽) 파운드의 이 말은 현대시에서 이미지의 중요성에 대하여 너무도 확연하게 말하여 변론을 할여지가 없다.                                 3    시는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의 결실이다. 언어를 떠나서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어라는 이 언어는 특종언어이며 외포와 내함이 다른 언어로서 어떤 개념을 전달하기 위하여 씌여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하여 씌여지는 언어이다. 우에서 시적사유, 이미지에 대하여 현대시와 << 문심조룡>>과의 관계를 고찰하여 보았다. 그 기초상에서 시의 언어구사에서 현대시추구와 <<문심조룡>>의 추구가 어떤점이 같은가를 살펴보는것도 주요한 방면이라고 생각된다.    류협은 <<정리는 문학작품의 날실이며 언어적 표현은  씨실이다. 날실이 올바르게 배렬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씨실이 제대로 오가면서 천을 짤수 있듯이,정리가 확정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문장이 류창해질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작품구성의 근본이 되는것이다.>>(443쪽)고 하였다. 류협은 시는 두가지 근본으로 이루어진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하나는 정리이고 즉 뜻이고 하나는 언어이다. 정리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지도(自然支途)혹은 천도(天道)이다.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들이 자연지도를 말하였으므로 정리는 공맹지도에 부합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도 자연지도는 맞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시의 뜻은 성인의 도에 부합되는것이여야 한다고 한것은 100%로로 맞는다고 할수 없을것 같다.  아뭏든 시의 뜻은 비와 흥을 통하여 산생된다고 한것은 지금도 맞는 위대한 결론이였다고 하겠다.  말이 좀 빗나가는 같다. 시는 언어가 세련되여야 하고 간결해야 하고 함축되여야 하고 더 보탤것도 없고 삭제할것도 없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방면에서의 관점은 예로부터 시어에 대한 일상적인 요구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아주 주요한 면에서 <<문심조룡>>과 현대시가 같은 주장이 있다는것이다.    첫째: 언어를 시의 재료라고 보는데서 량자가 같은 주장이다.    문심조룡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짐승이나 새들의 발자국을 식별하는데로부터 시작하여 문자를  창출해냈는데 그것은 언어의 부호이고 문장을 구성하는 재료료 되었다.>>(537쪽)    얀 무카로브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언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각의 금속이나 돌과 같은, 또 미술에서 도료와 화판같은 재질과 재료이다.>>(현대시의 리론 -한국지식산업사출간 이하 <리론>으로 략칭54쪽)    류협은 짐승의 발자국과 새의 흔적을 분별하기 위하여 쓰는 문자를 부호라고 하기도 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재료라고 하기도 한다. 얀 무카로브스키는 조각이나 미술에 쓰는 여러 가지 도료와 화판같은것을 재질과 재료라고 한다. 서로  딴 것으로 례를 들었을 뿐이지 언어가 시나 문장을 만드는 재료라는 되데서는 완전히 일치한 관점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둘째: 시적언어를 점괘의 일종으로 보는데서 관점이 같다.    문심조룡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말은 역괘의 호체안에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마치 역괘중에 변효가 있는것과 같네 >>(565쪽)    말라르메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치 주문과도 같이 세속언어와는 별개의 새롭고 온전한 언어를 재창조하는 싯귀는 말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한다.>> (리해 238쪽)말라르메만 이런 말을 하는것이 아니다. 구조주의 활동을 주장하는 롤랑 바르트도 <<문학이 점술>>(현대문학 비평론-한신출판사)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이 산 년대가 다르고 입은 각각이지만 모두 시적언어는 점치개들이 말하는것과 마찬가지라는것이다. 류협은 시는 자연지도를 전달하는것이라고 했다면 서구현대시인들은 시인은 신선이 뜻을 전달한다고 하였다. 그들 모두가 점쟁이들의 언어는 령혼의 언어라고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전달하는것으로 알고 있었던것이다. 시는 령혼이 말하는것으로서 시어는 주술적인 언어라는 관점에 그들 소리가 모아지고 있는것이다. 그것은 시는 꼭 창의적이고, 창의적이기 때문에 언어도 일반 언어와 달리 <<예측 불가능>> 언어로 씌여져야 한다는 의미라겠다.    셋째: 량자가 모두 시언어의 다의성을 중시하였다.    류협은 <<사람들은 글자에 얽매여 말의 뜻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하고, 말의 뜻에 구애되여 작가의 의도를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513쪽)는 맹자의 말을 빌기도 하고, <<교묘한 말로써 만물을 섬세하게 새긴다>>(441쪽)는 장자의 말을 차용하기도하면서  <<심각한 언어적표현은 함축적이면서도 다채롭고, 말밖의 여미는 드러나지 않게 내포되여 있네>>(565쪽) 라고 지적하였다.    얀무카로부스키는 <<시적언어는 감정의 표현을 드러내는 언어인 정서적언어와 다르다. ...예술작품에서 언어 또한 다듬어지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것이다.>>(리론 44쪽)  맹자가 말한 언어의 뜻에 구속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것이나 장자가 말한 교묘한 언어나, 류협이 언어밖의 여운이 곡절적으로 포함되여있다는 지적들은 시인은 시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같은 말이라도 새로운 뜻으로 쓸수 있다는것으로 풀이 된다. 새로운 뜻으로 쓰일수 있는  언어는 원래의 언어의미와는 다른것일수 있는것이다. 언어의 외연은 같지만 언어의 내함이 다르다는 말로 해석하게 되는것이다. 일상적인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에 쓰이지만 시적인 언어는 의상을 창조하기 위한데 쓰는것이므로 류협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류협의 의도를 해석해보면 얀무카로브스키의 말의 정당성을 알수 있고, 얀무카로브스키의 말을 곰곰이 새겨보면 시언어에 대한 류협의 정당성을 알수 있다. 비가 온다 라고 시에 씌였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오는 비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위한 이미지로 쓰인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비는 하늘에서 오는  비인것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되여 나온 메타포인것이다. 이 비라는 사물은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원래의 뜻과는 틀리는 위치에 있게 된다. 즉 다시 말하면 비는 실제의 비인것이 아니라 슬픔이나 기쁨, 그리움이나 아픔같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용으로 쓰이게 되는것이다. 이 비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것이 아니라 감정을 감추기 위해 쓰인것이며, 일상적인 언어그대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쓰인것이 아니라 <<다듬어지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친>> 이미지를 그리기는데 충당된 재료이다.    <<붉은 살구나무가지에서 봄이 떠든다>> <<비파줄에서 꾀꼬리 운다>> 당송시기에 송기와 위장이 쓴 이런 시구들은 언어의 다양한 의미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봄이 떠든다>> <<꾀꼬리 운다>>는 바로 언어의 의미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시인들은 성질이 부동한 언어, 일상적인 례대로 하면 결합될수 없는 언어들을 강압적으로 련결시켜서 참신하고도 특이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 없는것을 보게 하고 없는 소리를 듣게 하고 청각을 시각으로 교체시키거나 시각을 청각으로 교체시키는 외에도 기타  공감각을 리용하여 교묘하게 언어의 운치를 살리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실로 말 그대로 주술적인 진술이라 아니 할수 없다.                                     4    현대시만 몽롱성이 있는가? 아니다. 고대시도 몽롱성이 있다. 현대시에서만 몽롱성을  론하는가? 아니다. 고대시에서도 몽롱성을 론하였다. 현대시만 몽롱성이라는 특성이 있는가? 아니다. 고대시에도 몽롱성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류협은 <<문심조룡>>에서 시의 몽롱성에 대하여 대서특필하였다.   <<문학작품들 가운데서 정화라 꼽힐만한 명작들에는 은(隱)과 수(秀)가 있기마련이다. 은이란 글밖에 함축된 <말밖의 뜻>을 가리키며 , 수란 작품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을 가리킨다. 은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의미의 복잡함과 미묘함을 통해 그 섬세함을 획득하고, 수는 한 자품안에서 여타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획득한다>>(551쪽)    <<은의 특질은 글밖에 뜻을 갖고있는것이다. 그것은 마치 은밀한 음향이 옆에서 들려오는것 같고,  숨겨진 문채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것과 같은데, 이는 효상의 변화가 호체안에 포함돼 있는것에 비유될수 있고, 흐르는 강물속에 주옥이 숨겨져있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즉 호체안에서의 효상의 변화가 사상을 이루고, 주옥이 강물속에 깊이 감추어져있기에 물결이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것과 같다>>(553쪽)    <<작품속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물결을 가리켜 수라한다. 그것은 민첩하고 교묘한 손이 아름다운 악곡을 연주하여 표일한 자태가 밖으로 드러나고 , 또 먼 산에 구름과 노을이 피여오르고 , 미녀들이 예쁜 용모를 드러내는것에  비유될 수가 있다>>(555쪽)    <<작품의 언어적표현속에 어떤 광채를 숨기게 되면 안광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둥절 해 할것이고, 어떤 예리함이 언어적표현속에 드러나게 된다면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될것이다.>>(557쪽)    <<뚜렷하게 드러난 나뭇가지들은 태양을 향해 뻗어올라 가지만 함축적인 나뭇가지들은 어두운 그늘밑에 모습을 숨긴다>>(601쪽)   <<훌륭한 작품은 책궤에 가득 차 우수한 흔상자라야만이 평할수 있다.>>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할수있다는것은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가! 음은 확실히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 말가한 일이다.>>(685쪽)    류협은 이렇게 개탄하면서 노나라의 신하는 기린을 사슴으로 여겼고, 초나라사람은 꿩을 봉황이라 하였고, 위나라사람은 야광주를 괴석이라 하였고, 송나라사람은 연나라의 돌을 보석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만큼 인용하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이번에는 말을 바꾸어 현대시를 어떻게 말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시적창조는 해독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리해 108쪽)라고 가르시아 로르카는 말한다.   <<시는 모르는것 속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리해 115쪽)하고 옥타비오빠스는 말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하여 산 언어에 영향을 끼친다.>>(리해 151쪽) 하고 엘리어트는 말한다.   <<불가사의한것이란 언제나 아름답고 ,그 어떤 불가사의도 아름다운것이며, 불가사의 가운데는 아름다운것만이 있을 따름이다.>>(리해 252쪽) 하고 앙드레 부르통은 말한다.    <<말을 예측 불가능으로 한다는것, 그것은 바로 자유를 닦는게 아니겠는가!>>(리해 290쪽) 하고 가르통 바슐라르는 말한다.    어느때에 몽롱하지 않았다는 시리론이 없었던가? 1500여년전에도 있었고 현대에도 있다. 1500여년전의 <<문심조룡>>과 현대시의 시론들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같은 소리를 했다는것이 이로서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시를 이미지로 쓰게 되면 당연히 몽롱하게 되는데 이는 시의 본능이자 기능이  아닐가. 시는 몽롱하기에 아름답고 시는 몽롱하기에 시가 되는것이 아니랴. 시는 몽롱하기에 읽을수록 고소하고 읽을수록 향기로운것이리라. 시를 아무나 쓰지 못하는것은 바로 시의 몽롱성에 있는것이고, 시를 아무나 읽어서 다 알지 못하는것도 시의 몽롱성에 있는것이리라. 시가 몽롱한것은 시의 장점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 장점을 버릴수 없다. 이 장점을 버리면 좋은 시를 쓸수 없고, 차원이 높은 시인으로 될수 없기 때문이다.   시가 몽롱해야 한다는것은 현대시의 특징의 하나일뿐만 아니라 우리 시의 전통이다. 현대시인들은 우리 시의 전통을 가져다 현실에 맞게 연구하고 세부화시키면서 한단계 더 발전시켰을뿐이 아닐가.   류협은 참 재미있는 말들을 많이 하였다. 날개가 없어도 사방으로 날아다니는것이 언어요 뿌리가 없어도 탄탄하게 응결되여 있는것이 감정이니라 하였고, 기교가 모자라는것을 일컬어 드러박줄이 짜르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길어올릴수 없어 갈증을 달랠수 없고, 발에 맥이 없으면 중도에서 멈추게 된다고 하였다.  편견만 중시하면 뜰안에서 말을 타고 도는것과 같거늘 어찌 만리길을 달린다고 하랴고 하기도 하고,  만약 범의 털이 색깔이 없고 무늬가 없다면 그것들의 가죽은 개나 양과 무엇이 다르랴고 하였는가 하면 기교를 포기하면 도박군이 운수를 바라고 도박을 노는격이라고도 하였다. 시적기교를 따지면 <<문심조룡>>과 현대시의 동일성에 대하여 할 말이 많지만 이만큼하면 <<문심조룡>>과 현대시와의 혈연적관계를 알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생략한다. 총적으로 말하면 현대시는 <<문심조룡>>의 화려한 부활이다. 시를 수십년 써오고 시리론을 10여년 연구해 온 필자는 <<문심조룡>>앞에서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감을 금할수 없고, 또 벌써 1500여년전부터 우리에게 훌륭한 시교과서가 있었다는것으로 하여 한없는 자호감을 느낀다. 참고서:        (1)문심조룡 -연변인민출판사.         (2)현대시 리론 -한국 지식산업사.         (3)시의 리해- 한국 민음사.        (4)현대문학비평론-한국한신문화출판사        (5)세계명언대사전-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2007.4-6
35    현대시를 쓰는 방법.7 댓글:  조회:1878  추천:54  2008-10-30
  제7장 이미지와 시적상관물   이미지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시적상관물을 리용하는것은 현대시를 잘쓸수있는 하나의 중요한 도경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미지시작시법을 시적상관물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로 이야기하려 한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란 글에서 루이스는 <<시는 항상 사물과 사물을 비교한다>>고 지적하였다.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는것은 시의 제일 기초적인 작업이라겠다. 어떠한 시를 쓰나 비유요, 상징이요, 은유요, 제유요 하고 여러가지 수사법들을 거들지 않으면 안된다. 수사법들의 리용은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기 위한데 있다는것은 중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의 시적대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미지시는 그것을 표현할수있는 사물이나 사실을 대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물이나 사실을 일컬어 시적상관물이라고 한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시를 쓰는것은 현대시를 잘 쓸수있는 기본고리라겠다. 사물시를 쓰든 관념시를 쓰든 형이상시를 쓰든 시적상관물을 떠나서 쓴다는것은 현대시의 예술을 떠나서 쓴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것이라고 하겠다. 시적상관물을 떠나서 시를 쓰면 <<사물과 사물의 비교>>를 하는것이 못되고 이미지 작업이 안되고 낯설기에 도달할수 없고 직설의 배설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적상관물을 발견하는것이다>>고 엘리어트는 <<해믈릿론>>에서 점을 찍어놓았다고 한국의 문덕수는 말하고있다. 현대시를 읽어보면 엘리어트가 한 말이 하나의 진리임을 심심히 느끼게 된다. <<예술이라는 형식>>으로서의 <<유일한 방법>>, 둘도 아닌 딱 하나인 이 방법은 이미지시 창작수법의 핵이며 기본이라고 말할수있겠다.   말라르메는 정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서서히 대상을 환기할것이라고 하였고,  리처즈는 이질적사물의 <<밸런스 (균형)>>라고 하였고, 루이스는 <<은유는 일종 지름길>>이라고 하였고, 김춘수는 <<리상적인 짝을 찾아주는것이 상상>>이라고 하였다. <<대상의 환기>>, <<밸런스>>, <<지름길>>인 <<은유>>, <<리상적인 짝>> 들은 모두 시적상관물에 대한 결론성적인 정확한 말이라고 하여도 무방하겠다. 대상의 환기도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 일이고 밸런스도 이질적인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것이고 , 은유도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 일이고 리상적인 짝도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 일이다. 시적상관물은 간단한 언어들의 련계로도 표현될수있고 시구로도 표현될수있고 한편의 시로서도 표현될수있다. 시적상관물은 모든 수사법을 집대성한 예술적기법이라 해도 좋고 예술을 생성하는 오작교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박진환은 <<사물-변용-대용-이미지>>라는 그라프적인 방법을 제공하고있는데 이것은 시적상관물의 도해를 그린것이라 해도 좋고 이미지 탄생의 순서를 배렬한것이라 해도 좋겠다.   <<나는 내 생애를 커피 숟갈로 되질해 버렸다>>   <<수술대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저녁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있는 지금>>   엘리어트가 <>에서 창조한 세계적 명성을 가진 이러한 이미지들은 시적상관물의 전범이라 하겠다. 하루하루 그럭그럭 허송하는 생애를 <<커피 숟갈로 되질해 버렸다>>는것으로 대용하였고, <<저녁하늘을>> <<수술대위에 마취된 환자>>로 변용하였고, <저녁하늘>>과 <<사지를 뻗고있는>> <<수술대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는 <<지금>>이라는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즉 얼빤하고 흐리마리한 사회상황을 예술화한 시적상관물이라겠다.  <<진리의 청혼자-그대는?>>. 이렇게 그들은 비웃었다- <<아니다! 한 사람의 시인에 불과하다! 간교하고 약탈군이고 몰래 접근하는 짐승이다 속이지 않으면 안되는 알고서 일부러 거짓말하는 짐승이다 먹이를 노리고 화려한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도깨비로 만드는 스스로 수확물이 되는 짐승이다.   니체의 시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 불과하다!>>의 한 대목이다. 시인을 <<진리의 청혼자>> <<략탈군>>, 여러가지 <<짐승>>이라고 한것은 현대시, 시인을 표현하는 시적상관물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현대시 시인들이 전통을 부정하면서 전문적으로 낯설게 하는데서 얻어진 칭호라겠다.   시적상관물은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추구하여(어떤 때는 그 미비한 동일성도 관계하지 않고) 이미지화하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바로 <<짝>>을 맞추는 <<지름길>>이며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겠다. 이 <<지름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법으로 걸어갈수 있다고 필자는 모색해 보았다. 색깔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움직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소리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속성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의인(의물)화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이 여섯가지 시적상관물 설정을 한가지 한가지씩 풀어보기로 하자 제1절 색깔에 의한 시적적상관물   색깔, 우리들의 눈을 흥분시키고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주는 색깔이다. 색깔, 이 세상의 단조로움을 극복해주는 천사이다. 모든 시각적사물은 색깔을 지니고있다하겠다. 하늘은 하늘의 색깔이 있고 해는 해의 색깔이 있고 달은 달의 색깔이 있고 별은 별의 색깔이 있다. 대지에서 살고있는 모든 사물들도 색깔이 있다. 산은 산의 색깔, 강은 강의 색깔, 흙은 흙의 색깔이 있다. 개구리도 파리도 모래도 풀도...죄다 자기의 색깔이 있다. 색깔은 특정된 사물의 특성을 나타낼뿐만아니라 존재를 나타내기도 한다.   사물들은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색깔이 변하기도 한다. 제일 잘 변하는 것은 인간의 색깔이라 하겠다. 백색인종, 황색인종, 흑색인종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사람마다 때에 따라 수요하고 추구하는 색깔이 달라 련속부절히 옷을 갈아입으며 색깔을 변화시키고있다. 예로부터 색깔은 인간의 장식의 수단이였고 희로애락 발로의 징표이기도 하였다. 색깔의 함의는 한없이 풍부한 것으로서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다.   색깔은 시라는것이 탄생한 날부터 시인의 추구의 대상이였을것이다. 현대시인들도 례외가 아니다. 현대시인들은 색깔의 근사성으로부터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이미지 만들기를 즐긴다고 하겠다. 색깔은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현대시가 탄생되는 하나의 샘이라겠다. 시인들은 이 샘을 파서 맑은 샘물에다 구름도 띄우고 새도 띄우고 나무도 그려보고 산도 그려보고 바람도 스치게 하고 얼굴도 비춰본다.   색깔로 찾은 시적상관물은 막강한 에네르기를 갖고있으며 현란한 이미지를 그려주고있다겠다. 바다는 자신을 마신다 바다는 자신을 먹는다 바다의 창백한 피는 생각하는 피이다 바다는 스스로 변화를 꾀하며 춤추는 영웅을 위해 자신을 풀어헤친다 바다는 포말속에서 뒹군다 그런가 하면 눈을 뜨지 않은 채로도 바다는 바다의 노예를 죽도록 괴롭힌다 바다의 노예들에게 자신을 떠맡긴 후에 나는 이와 같이 실감나는 파멸을 경외한다 클레오파트라도 살로메도 결코 이와 같이 파란 드레스를 걸쳐보지 못했을걸 이토록 증오에 고무된 심장은 갖지는 않았을걸 바다는 큰 술통을 갖고 있다 거둬들인 포도로 그 큰 술통이 가득하다 바다는 청록의 눈을 가졌으며 각빛깔을 뜬 눈을 가졌다 바다는 스스로 마신다 바다는 자신에게 먹힌다 심지어는 포도재배자들도 먹어치울 태세다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후 <<시는 비밀의 무기이다>>고 선언한 장꼭도의 시 <<바다>>의 전문이다.   <<자신을 마시고 자신을 먹고>> <<자신에게 먹히는 바다>>에는 무슨 비밀이 뭍혀있는가? 그 바다는 <<큰 술통을 갖고있는>> 바다이며 <<거둬들인 포도로 그 큰 술통이 가득한>> 바다다. 이제 비밀이 열리였다. <<포도재배자들까지도 먹어치울 태세>>를 가진 바다는 다름아닌 포도주의 시적상관물이다. 이 포도주의 시적상관물이 어찌하여 바다로 설정되였는가? 색깔의 비슷함에 의하여 설정된 것이다. 바다도 푸르고 포도주도 푸르다. 그러니깐 <<짝>>이 무어진것이다. <<바다는 자신을 마신다 바다는 자신을 먹는다>>는 첫 시구를 얽었을 때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자신을 마시고>> <<먹는>> 바다도 있단말인가? 하는 의문이 불쑥 뛰여나온다. 하지만 이 <<바다>>가 포도주의 시적상관물이라는 단정이 내렸을 때 시인의 기발한 착상에 깜짝 놀라게 된다.   놀람보다 심각한 것은 이 시의 내함이라겠다.   술의 마술을 쓴것같은 <<바다>>는 파멸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시인의 심정의 발로가 아닐가. 자신을 마시고 먹히우고 먹어버리는 <<바다>>는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피>>이다. 이 피는 <<춤추는 영웅을 위해>> <<자신을 풀어헤칠>>뿐만 아니라 자신을 <<노예들에게>> 내맡기고 <<노예들을 죽도록 괴롭히기>> 위하여 거대한 파도로 <<뒹군다>>. 이집트 프롤레아오스의 최후의 녀왕이며 재치와 미로로 유명했던 녀왕인 클레오파트라도 <<걸쳐보지 못했던>> 귀중한 <<파란 드레스>>, 헤룻왕의 이붓 딸로 왕의 생일잔치에 황홀하게 춤추고 요한의 머리를 베여가지는 소원을 이룩했던 실로메도의 증오보다 더 <<증오에 고무된 심장>>을 가지고있는 바다, 그 푸른빛 바다의 눈은 죽은 눈이 아니라 원본을 들여다보는 <<각빛갈을 띤 눈>>이다. <<눈>>은 보고있다. 자신만 먹히우는것이 아니라 <<포도재배자들까지도 먹어치울 태세>>를 가진 바다를. 이 세상의 모든것을 파멸하고있으며 파멸에로 몰입시키고있는 바다를 <<눈>>은 보고있는것이다. 바다-포도주, 포도주-바다 그것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다. 어쩔수 없이 파멸에로 치달아 오르고있는 세상을 시인은 포도주-바다를 통하여 각인시키고 있다하겠다. 은행나무그늘엔 노란 음부들이 떨어진다 은행잎파리에도 내 귀여운 어휘들을 적어본다 적어놓은 어휘들도 제법 노란 발음을 한다   양영문의 <<은행산조>> 전문이다. 깔끔한 맛이 나는 이 시는 단조로운 같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는 시라겠다.   가을 은행나무잎들은 노란 물이 들어 가을의 시간을 타고 한잎 두잎 땅에 떨어진다. 이러한 노란 은행나무잎을 시인은 <<노란 음부>>로 변형시키고있다. 시인은 음부라는 청각적언어에 비실재적인 노란색을 올리여 <<노란 음부>>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있으며, 색깔을 맞추어 노란은행잎의 시적상관물로 떠올리고있다. 시인은 일반적인 어휘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귀여운 어휘>>들을 <<적어놓는다>>. 그러면 <<어휘들이>> <<제법 노란 발음을>> 하면서 떨어진다. 시인의 기지와 묘미가 황홀하게 안겨오는 색갈에 의한 시적상관물설정이라 하겠다.   시인은 간결하고 깔끔한 <<은행산조>>로 회귀의 아름다움이라는 엄청난 뜻을 깔아두었다하겠다. 설쇠는 날에 애들이 터지운 폭죽이 어쩌면 4월의 비속에서 또  불꽃을 튕길가 떨리는 연분홍치마에 차분히 스며드는 비의 이미지 살짝 화장한 예쁜 웃음이 어줍게 떠오른다 비속에서  어떻하면 즐거울수 있을가 눈부신 색조로 어색하게 그리는  풍경 비가 멎으면 아름다운 해님앞에서 수집음을 머금고 사라지리    김학천의 시 <<진달래>> 전문이다. 시인은 진달래의 색깔을 고리로 잡고 놓지 않으면서 <<폭죽>>으로, <<불꽃>>으로, <<살짝 화장한 예쁜 웃음>>으로, <<어색하게 그린 풍경>>으로 연해연방 변형시키고있다. 시인은 진달래를 통하여 비와 진달래의 교감을 노래하고있는것이다. 어찌보면 남녀의 사랑의 장면을 스케치한것인지도 모른다. ........................ 정녕 하늘이 알아본게다 억만개 진주가 낟알로 맺혔구나 --오, 사막의 태양 이 세상 망각의 한 끝에 억만개 태양을 걸어놓고 하늘과 마주 웃는 내다, 사막의 주인이다 그 예날 누구는 해를 쏘아 떨궜다지만 해를 심어 떨구는 그 재간 20세기 신화의 주인- 아무렴, 장수 왔다 울고 갈테지! 하늘의 해가 못닿는 구석 하루길에 지쳐 잠들제 나의 태양은 야직을 선다 하늘땅이 바꾸는 그 대거리 삭막한 이 세상에서 아예 밤은 썩 지워버리자 진주농사 해농사- 빛으로 적어보는 아름찬 소출 이제 줄줄이 고압선따라 해살처럼 뻗어갈 힘의 원동력 홰치며 일어서는 이 사막에서 거짓 아닌 전설도 만풍년이다! 아무렴, 나는 - 해를 심는 -감농군!                           호방한 정서와 격정으로 끓어번지는 김철시인의 <<해를 심는 감농군>>의 앞부분 세개련을 잘라버린 시문이다. <<화력발전소실기>>라고 부제를 달고 씌여진 이 시는 발전소창업자들에 대한 극찬으로 가득 찬 서정시이다. 발전소창업자들의 노력의 성과인 전등불을  해라고 읊으면서 해의 창조자들을 감농군이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 김철시인은 어찌하여 전등불을 해라고 지칭하였는가가 문제이다. 전등불을 해로 둔갑시킨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한가지는 전등불빛과 해빛의 빛이 비슷한 색깔에서 류추되였다고 할수있고 다른 한가지는 전등불도 동그랗고 태양도 동그란 모양이기때문이다. 이 두가지 리유중 주요한것은 빛이다. 그러므로 가히 색깔로 찾은 시적상관물이라 하여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전기불이 해로 되었으니까 화력발전소로동자들은 전기를 만드는것이 아니라 해를 만든다고 할수있다. 그럼 해를 심는 감농군이라는 언어는 어떻게 탄생하였을가가 문제로 나서게 된다 이 시의 주인공들은 화력발전소로동자들인데 시인은 감농군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질에 의하여 변형되는것이므로  다섯번째를 잘 새기면 저절로 풀릴 문제이기에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쯤하면 관심있는 독자라면 시를 다시 읽어보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알수있으리라 믿는다. 제2절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   사물의 색깔처럼 사물의 모양도 시인의 눈길을 끈다하겠다. 시인은 누구보다 사물의 모양과 친하려하며 사랑하려 한다. 사물의 모양은 시인을 흥분시키며 시인의 령혼을 자극한다. 사물의 색깔처럼 사물의 모양도 시인에게 있어서는 신비한 존재이다. 천차만별의 사물의 모양을 보고 시를 쓴 시인도 헤아릴수 없이 많거니와 시의 수량은 더욱 헤아릴수 없이 많을것이다.   모양은 사물의 특성의 하나이며 존재방식의 하나라겠다. 모양이 없는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양은 각각으로 자기 독특한 생김새를 갖고있으며 나름대로의 미를 발하고있다. 길고 짜르고 둥글고 넙적하고 두텁고 얇고 삼각형, 릉형, 장방형...규칙적이기도 하고 불규칙적이기도 한 모양의 종류와 양상은 끝이 없으리라. 모양은 색깔보다 상대적으로 고착성이 강하고 변화가 적다하겠다.   사물의 모양의 상사성은 시인이 시적상관물을 포착하고 끌어내는 또 하나의 원천이라 하겠다. 한밤중 고요한 부두위 밧줄 드리운 높은 돛대 끝에 달이 걸렸고, 그렇게 먼 것은 놀다 잊은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   이미지시에 철학적 뒤심으로 나섰다는 흄은 생전에 시험작 다섯편을 썼다고 하는데 이 <<부두위>>의 전문은 그중의 한편이다. 정서적인 표현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미지만 떠올렸다하겠다. 간결한 넉줄의 시속에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을 찾아놓은것으로 시는 끝을 내고있다. <<돛대끝>>에 높이 걸린 달이 장난에 미쳐서 놀다간, 그만 잊어버리고 간 <<어린아이의 풍선>>이라는것이다. 달도 모양이 둥글고 풍선도 모양이 둥글다. 두 사물이 다 모양이 둥글다는것으로부터 시적상관물을 설정한것라겠다. 혹자는 이런 시도 시인가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런것도 시이다. 시일뿐만 아니라 이미지시의 하나의 전형으로 될수있는 시이다. 시란 길어서 시인것이 아니고 짧아서 시가 아닌것이 아니다. 우리는 파운드가 7년이란 긴긴 시간에 <<지하철 정거장에서>>라는 두줄의 시를 써낸것을 앞에서 읽어보았다. 흄의 <<부두위>>라는 넉줄의 시를 읽으면 바람이 잦은 아늑하고 아름다운 그림같은 바다가의 부두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 풍경속에서 부두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게 된다. 또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추구하여 <<서서이 대상을 환기>>시키는 묘미가 어떤것인가를 터득하게 된다. 특히 청년도 아니고 장년도 아닌 어린아이, 그 천진한 어린아이의 풍선은 순수성의 추구라겠다. 이 한장의 풍경화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아있을것이다.   릴케의 <<눈물단지>>라는 시를 읽어보자. 다른 단지라면 술을 담겠네 다른 단지라면 기름을 담겠네 벽이 그리는 텅 빈 배에 말일세 나는 치수야 더 클것도 없지만 호사는 으뜸이라 쏟아지는 눈물을 받을가해서 패인 몸일세 술이라면 단지에 더 괴겠지 기름이라면 더욱더 맑아지겠지 하지만 눈물은 어찌되는가ㅡ 눈물덕분에 내 몸 무거워지고 앞이 더 안 보이고 굽은 등에서 반짝이다가 필경은 깨질것만 같더니 텅 비고말았네   장미의 시인이라 불린다는 릴케는 <<눈물단지>>란 무엇가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채 종지부를 찍고있다. <<술단지>>도 아니고 <<기름단지>>도 아니고 <<벽에 그리는 텅 빈 배>>이고 <<패인 몸이고>> 눈물이 <<굽은 등>>에서 반짝거리며 <<몸>>을 무거워지게 하는, 종당에는 <<텅 비고>>마는 사물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눈확이라겠다. 얼굴에 패여들어간 타원형의 눈확과 속이 비인 <<단지>> 는 모양에서 비슷한 점이 없다고 할수 없다. 그리고 푸른 바다에 떠있는 빈 쪽배와도 상사성이 없다고 할수 없는 생김새다. 눈확은 몸의 일부분이며 <<패인 몸>>의 일부분이다. <<굽은 등>>은 눈확의 언저리, 휘우듬한 눈확의 언저리, 휘우듬한 등, 여기에 바로 동일성의 초점이 있다하겠다. <<눈확>>의 시적상관물로 <<술단지>>, <<기름단지>>, <<텅 빈 배>>가 등장하고 <<눈언저리>> 시적상관물로는 <<굽은 등>>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적상관물들은 모양에 의하여 설정된것이라 하겠다. 시인은 이런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면서 눈물로 인한 <<호사>>의 <<으뜸>>과 <<몸>>의 <<무거워짐>>을 진술하는것으로 눈확의 희비극과 인간 또는 인생의 희비극을 노래하고 있다하겠다.   한국의 최선령시인이 쓴 <<아침>>이라는 시도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의 설정이 잘된 시라하겠다.                    아침                    리선령 암흑의 물결을 타고 선인장의 비장한 가슴으로 이어서는바다 뱃길을 잃은 마녀 해심에서 나와 암초위에서 백기를 든다 차가운 정적의 쟁반위로 구근(球根)처럼 내미는 지구의 여린 얼굴 황금의 수레바퀴는 알몸의 부끄러운 그림자를 벗기는 하늘의 손거울 간밤에 신음하던 참새의 꿈이 금붕어비늘이 되어 반짝이는 나의 바다여    시 <<아침>>에서는 모양으로부터 초점을 맞춘 시적상관물이 련마다 나타나고 있다. 1련에서의 <<선인장 가슴>>은 모양과 색깔로 혼용된 파도의 시적상관물이고, 2련에서 <<백기>>도 모양과 색깔이 혼용된 파도의 시적상관물이고, 3련에의 <<쟁반>>은 모양으로 인한 바다의 대용이고, <<구근>>과 <<여린 얼굴>>은 둥그런 모양에 의한 <<아침해>>의 대용이고, 4련에서의 <<황금의 수레바퀴>>와 <<하늘의 손거울>>은 또 모양에 의한 태양의 대용이다. 마지막 5련의 <<금붕어비늘>>은 모양과 빛으로 찾은 파도의 대용 즉 시적상관물이라겠다.   이러한 변용, 대용, 이미지화는 모두 모양의 동일성으로부터 떠올린 시적상관물들의 흐름을 이루고있다. 그 흐름속에 장쾌한 아침바다를 노래하는 시인의 사랑과 숨결이 합류하고 있겠다하리.     이번에는 리상각시인이 어떻게 모양을 리용하여 변형하는 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리상각시인은 <<아침에>>라는 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아침에  리상각 산이 아침에 커다란 초불을 켜들고 기도를 드린다 새들이 젖은 날개를 털며 짙푸른 숲에서 합창을 한다 축복받은 이들이 산마루를 바라고 새삶을 창조하고 있을 때 산은 그 초불을 하늘에 띄운다.     김철시인은 전기불을 해라고 하였는데 리상각시인은 아침해를 초불이라고 한다. 김철시인이 색깔로 변형을 하였다면 리상각시인은 모양으로 변형을 하였다고 하겠다. 아침에 동산에서 금방 솟아오른 태양이 둥그렇다는것을 우리들은 다 알고있다. 밤에 초불을 켜놓으면 둥그스럼한 불이 빛을 뿌린다는것도 우리는 알고있다. 어상사한 이 둥그스럼한 모양을 시인은 변형의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는것이다.     리상각시인의 시 <<아침에>>서 우리는 한가지 생각해 볼봐가 있다는것을 알아야겠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한다음 어떻게 전개시키느냐이다. 리상각시인은 아침과 관계되는 사물 새와 기도를 떠롤리면서 새는 숲과 관계있으므로 숲과련계시켜 쓰고, 기도는 축복받는 사람들과 관계있으므로  축복받은 이들을 시에 끌여들이고있다. 그것들의 관계를 시인은 새롭게 해석하고있다고 하겠다. 제3절 움직임에 의한 시적상관물   움직인다 해도 달도 지구도. 움직인다 강도 산도 바다도. 움직인다 나무도 풀도. 움직인다 바위도 모래도 바람도. 세상 사물이 모두 움직이였고 움직이고 있으며 영원히 움직일것이다. 일상적인 눈길이라면 벼랑은 움직이지 않는 전형이라겠다. 허나 벼랑도 움직이고있다. 벼랑밑에 가보라, 바위사태 돌사태를 만나지 않는가. 이것들은 벼랑의 움직임속에서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져나은 벼랑의 산물이며 부스러기이다. 바람이 스치고 비에 씻기고 세월의 가고옴에 따라 벼랑이 움직인 증명물이다. 우리들의 가녀린 시력으로 보아내지 못할뿐이지 벼랑이 움직이지 않는것은 아니다. 사물은 운동하며 운동속에서 존재한다하겠다.   사물의 움직임은 예로부터 문학가들이 몰라서는 안되는 현상이였다. 어느 한 사물의 움직임에 대하여 어느만큼 알고있는가는 문학인들의 소질을 가늠하는 자대라고도 할수있겠다. 움직임을 많이 알수록, 움직임에 대한 상식이나 견식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해박하고 학식있고 조예가 깊다하겠다. 소설가도 좋고 시인도 좋고 극작가도 좋고 그들 모두가 사물의 움직임을 주시하고있으며 사물의 움직임속에서 무엇인가 터득하고 깨우치려 한다. 글을 쓰는 자체도 움직임의 표현이라겠다. 모든 작가는 사물의 움직임을 그리워하고 사물의 움직임을 사랑한다.   현대시 시인은 사물의 움직임을 새롭게 보아냈을 때 시를 쓰지 않고는 잠들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움직임도 색깔이나 모양처럼 현대시를 낳는 원천이라겠다.   사물들의 움직임은 이미지시가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 될 한가지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사물의 색깔이 표현되지 않은 경우와 사물의 모양이 표현되지 않는 경우의 시는 있을수있으나 사물의 움직임이 표현되지 않는 경우의 시는 있을수 없다하겠다.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찟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정지용의 시 <<바다.2>>의 앞부분이다. 바다의 썰물을 노래한 시이다.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가고있는 상황을 <<푸른 도마뱀떼>>라고 하였다. <<재재 발리여>> <<꼬리가 이루/잡히지 않는>> <<도마뱀떼>>, <<흰 발톱에 찢기여>> 생기는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썰물이 밀려가는 모습을 세세하게 이미지화하고있다.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는 밀려간 썰물에 의하여 드러난 모래와 자갈이 깔린 바다가이고, <<흰 발톱>>은 이런 바다가에 와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의 물결이라겠다. 이 시에서 주역을 일으키는 시적상관물은 <<푸른 도마뱀떼>>이다. 기타 시어들인 잡히지 않는 <<꼬리며>>, <<흰 발톱>>이며 <<생채기>>며는 <<푸른 도마뱀떼>>에 의해 파생된 시적상관물이며 이미지라겠다. 밤의 파도-바다의 양과 돌고래가 히아신스의 가벼운 짐을 지고 장미 월계수와 트래배 어린이 텅 빈 으스트리아 궁전의 둘레에 바람을 일으킨다 밤의 파도-두개의 조개가 물살을 헤치고 바위위로 떠오르며 화려한 머리띠며 자주빛덩이를 억수로 퍼붓는다 바다의 중앙으로 흰 진주는 다시 굴러간다    독일 벤의 시 <<밤의 파도>의 전문이다. 밤의 파도의 시적상관물을 <<양과 돌고래>>(2련)로 설정하고있다. 파도가 해안을 향하여 하얀 갈기를 나붓기며 퍼렇게 솟구치며 무너지며 또 솟구치는 것을 <<양과 돌고래>>라고 하였고 물결이 해변의 바위로 치달아오르는것을 <<두개의 조개>>라고 은유하고있다. <<희아신스의 가벼운 짐>> <<화려한 머리띠며 자주빛덩어리>>, 그리고 <<흰 진주>>는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빛깔에 의하여 잡은 시적상관물이라겠다.   정지용과 벤은 다 같이 바다를 쓰고있으며 파도를 쓰고있다. 하지만 두시인의 눈길은 다르다. 정지용은 바다의 시적상관물을 <<푸른 도마뱀떼>>로, 벤은 <<양과 돌고래>>로 각각 설정하였고 정지용은 부서지는 파도의 시적상관물을 <<잡히지 않는>> <<꼬리>>와 <<흰 발톱>>으로 설정하였지만 벤은 <<히아신스의 가벼운 짐>> <<화려한 머리띠며 자주빛덩이>>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였다. 정지용은 종적인 추구를 하였고 벤은 횡적인 추구를 하였다. 정지용의 시야는 한사물에 머물러있지만 벤의 눈길은 여러 사물을 휩쓸고있다.  정지용의 이미지는 하나를 파고들지만 벤의 이미지는 폭을 넓히기 위하여 이미지를 자주 바꾸고있다. 정지용은 화폭의 묘미를 추구하는데로 몰입한다면 벤은 거창한 화폭을 펼치는데로 돌입한다고 할가 감별없는 노란 부화상 자연산 가을 병아리떼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록음의 철망을 빠져나와 날개짓 종종 걸음으로 길을 읽고 헤매는 집단탈출    한숙희의 <<은행나무잎>>이다. <<노란 부화상>>은 단풍든 은행나무를 색깔로 찾은 시적상관물이고(혹은 은행나무잎이 모록이 떨어진것을 보고) <<가을 병아리떼>>는 가을바람에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노란 잎들의 시적상관물이라겠다. <<록음의 철망>>은 은행잎들이 푸르렀을 때를 변용 형해서 대용한것이라겠다. 이쯤하면 내용을 리해할만한 수수께끼는 모두 풀어놓았다고 하겠다.     푸르른 벼개봉밑에서 푸르른 뱀 한 마리 푸르르게 기여나온다 수억만번도 더 떨어진 락엽을 헤치였건만 아직도 푸르른 꼬리가 다 나오지 않았다 푸르른 뱀은 그냥 푸르르게 기여가고 당신이 꼬였던 이브는 어디로 가고 이브가 속였던 아담은 어디로 갔는가 푸르르게 기여가는 푸르른 뱀이여 태초에 잘못한것은 아니였던가 한여람쯤되는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였어도 푸르르게 열였던 하늘에 푸르르게 열였던 땅에 오늘처럼 때자국이 어룽거리지 않았을수도 당신도 언녕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며 휴식의 향연을 맛보았을수도 있었으리 이제 또 어디 가서 이브를 찾으랴 푸르르게 푸르르게 기여가는 뱀이여 아직도 꼬리가 다 나오지 못한 푸르른 뱀이여    움직임으로 시적상관물을 찾은 필자의 졸작 <<해란강>>이다. 해란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흘러가는것을 보고 <<푸르른 뱀>>이 그냥 기여가고있다고 필자는 상상하고 움직임으로 해란강의  시적상관물을 <<푸르른 뱀>>으로 설정한 것이다. 형용사 <<푸르른>>을 자주 반복한 것은 <<푸르른>>이란 이 언어가 물과 뱀의 색깔에 대한 표현도 있겠지만 언어의 부드러움과 률동에 대한 추구에서 였다. <<푸르름>>과 <<때자국>>은 완전히 상반되는 뜻을 가진 언어표현으로서 세상이 깨끗했으면 하는 바램을 표현한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시를 쓸 때 같은 제목을 쓰더라도 내용과 형식이 이미 쓴것보다 꼭 달라야 하고, 제목의 가지고있는 기성적함의와 이미지가  꼭 달라야 한다는것을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시인만이 발견한 세계를 써야 하는것이다. 해란강에 대한 시는 많지만 해란강을 <<푸르른 뱀>>이라고 한 시인은 아마 없는것으로 알고 이렇게 시적상관물을 설정하고  나름대로 한번 노래해 보았다.     시적상관물의 부동한 설정에 따라 감각이 다르고 감수가 다름을 확연히 느끼게 된다. 현대시는 무엇을 썼는가보다 어떻게 썼는가를 더 중시함을 알아야겠다고 생각된다.   이미지시는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시하겠다고 하겠다. 형식의 새로움으로부터 내용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도 한다. 새로운 형식은 기필코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시를 낳게 마련이다. 이미지자체가 내용이고 이미지자체가 시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꼭 새로운것이여야 한다. 새로운것이 아니면 내용을 중복하게 되고 새 내용이 없으면 언어장난을 치게 된다.                 제4절 소리에 의한 시적상관물 검은 A, 흰 E, 붉은 I, 초록의 U, 청색의 O 모음들이여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내밀한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변을 윙윙거리는 굉장한 파리떼들의 털투성이의 검은 코르셋 자랑스러운 빙하의 창 백인왕 산형화의 흔들림 I, 적색, 내 뿜는 피, 화가 났을 때나 회개의 감흥을 느낄 때 아름다운 입가의 미소 U, 원형, 록색 바다의 신성한 전율 동물들로 씨뿌린 방목장의 평화 O, 이상한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찬 지고의 나팔세계 와 천사가 가로지르고 있는 고요함 -오, 신의 눈의 보라빛 광선 오메가여    랭보의 시 <<모음들>>의 전문이다. 랭보자신도 위대한 발견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적이 있다는 <<모음들>>이다.    A가 어덯게 검은 색갈이 되고, E가 어떻게 흰색갈이 되고, l가 어떻게 붉은 색깔이 되고, U가 어떻게 초록색갈이 되고, O가 어떻게 청색이 되는가? 랭보는 무엇이라고 답변할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 모음들의 시적상관물을 찾을 때 발음에 초점을 멎추었겠다고 생각된다. 구라파시인들은 운률을 특별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운률의 새로운 조합도 시라는 견해가 있는 구라파이다. A, E, l, U, O, 하고 소리를 내면서 그 소리로부터 색채를 끌어내였다고 함이 적당하리라고 맏어진다.   랭보는 모음소리의 시적상관물로 색채들을 떠올린 다음 그 색채들로부터 다시 새로운 사실들을 떠올리고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중 삼중의 시적상관물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있다 하겠다.   A를 검은색상으로, 검은 색갈로는 털투성이 파리들의 <<검은 코로셋>>을, E는 하얀 색갈로, 하얀 색갈로는 <<물거품>> <<천막의 순진함>> <<빙하의 창>> <<백인왕>>  <<산형화의 흔들림>> 등 여러가지 시적상관물을 연해연방 라렬하였고, L는 적색으로, 적색으로는 <<피>>와  <<아름다운 입가의 미소>>를 찾았고 ,U는 초록색갈로, 초록색으로는  <<바다>>의 <<전률>>과 <<동물들로 씨뿌려진 방목장의 평화>>를  찾았고 , O는 청색으로, 청색으로는 울부짖는 <<지고의 나팔세계>> 와 << 천사가 가로 지르고 있는 고요함>> 과 <<신의 눈의 보라빛 광선의 오메가 (끝이라는 뜻)>>를 찾았다. 전반시가 파편문체라겠다. 모음들의 소리를 통하여 <<파리떼>>로부터 시작하여 동물, 식물, 강, 바다, 인간, 천사, 신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세계를 굉장하게 그려놓았다하겠다.   현대시는 이질적인 사물들의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은유적인수법라렬만으로 훌륭하한 시가 태여나고 있음을 보아낼수있다고 하겠다.    소리는 현대시가 시적상관물을 찾는 또 하나의 중개자임을 랭보의 시를 통하여 보아냈다. 세상사물은 모두 소리가 있으며 그 소리는 색깔이나 모양이나 움직임처럼 그 사물의 특성의 하나로서 존재를 알리는 신호이다.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소리를 내는 사물을 보지 않고도 번개가 치는구나 새가 우는구나 개가 짖는구나 강물이 흐르는 구나........ 하는 여러가지 판단을 정확하게 내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움직이면서 여러가지 소리를 내고있는데 어떤 소리는 우리가 들을수있고 어떤 소리는 우리가 듣지 못하고있다. 듣지 못하는것은 소리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귀가 부실하기때문이다. 의사들이 청진기를 끼고 가슴을 대보는것은 귀로 들을수 없는 가슴속의 소리를 들어보려는데 있으며 그 소리에서 가슴속에 있는 기관들의 모병을 확인하려데 있는것이다. 시인도 <<청진기>>를 끼고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소리에 의하여 설정되는 시적상관물은 어떤 류사성의 추구라기보다 시를 쓰는 시인의 나름대로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겠다. 다시 말하면 어떤 확실한 근거에 의거하는것이 아니라 시인이 하고싶은대로 설정하면 되겠다고 함이겠다. 종소리 눈이 부신 강물로 흐르네 내 안을 따라 나즉이 흔들리는 목선에 가락 높낮음 결의 교응마다 파도는 일렁이네 해지는 수면은 억만사금파리 뜨는 눈   (두련삭제) 구름처럼 흐르는 여백을 벗어 다가앉는 쾌청의 산수화 치마빛 진달래 개나리 내음 이랑진 기와집 따라 가슴마다 알맞게 피여오르는 아지랑이의 살아야 할 우리 그 노래의 흐름은 하나의 강물로 흐르데     이병기의 시 <<환희>>다.     우선 <<환의>>의 시적상관물을 <<종소리>>로 찾았고 <<환희>>의 대용에 쓰인 이 <<종소리>>의 시적상관물을 <<강물>>로 설정하였다. <<환희>>의 대용에 쓰인 이 <<종소리>>는 진짜 종소리인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의 표현이거나 어떤 절대자에 대한 표현이라겠다. 이병기시인은 <<종소리>>에 대한 시적상관물을 <<강물>>로 떠올린후 내내 강물에 대한 진술을 하고있다하겠다. 이 <<강물>>도 <<종소리>>처럼 마음속의 강물이며 상상속의 강물로서 <<환희>> 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비실재적 대상물일뿐이다. 시인은 강물을 통하여 이미지를 한장한장 번져보고있으며 <<강물>>의 의미를 <<흔들리는 목선>>으로부터 <<억만사금파리의 뜨는 눈>>을 거쳐  <<쾌청의 산수화>>, <<치마빛 진달래>>, <<개나리 내음>>, <<아지랭이>>로 확충시킨다. 이러한 확충은 실은 시인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설계라고 하겠다. 이 리상국에 도달하자면 <<강물로 흐르며>> <<살아야 할 우리>>다. 현대시인의 리상은 언제나 지평선이다. 바라볼수는 있지만 도착할수 없는 현실로  하여 그리움과 사랑을 안고 꿈만 꾸어야하는 슬픈 족속이 현대시인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 시단의 현대시 대표의 한사람이라고 불리는 한춘씨의 <<낡은 타악기>> 한편을 더 보자. 숨가쁜 기차가 산모퉁이를 넘는다 두갈래 레루장을 흔들며 모든 것이 낡은대로 소리내는 타악기가 굴러간다 큰 딸의 기별을 받고 빈 손으로 찾아가는 할머니 들고 갈것은 모성애 하나뿐 이빠진 사기그릇처럼 말이 없다 해거름 실어 여위여지면서 한줌의 한숨을 손으로 질러넣고 시름을 풀지 못하고있는데 바람개비 도는 동구역 질러 어둠속에 묻히는 기차 인고가 침전된 각질속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없다     한춘씨는 낡은 타악기를 달려가는 기차로 상상하면서 이 시를 써내려가고 있다. 타악기가 기차로 탈바꿈하는데는 레루장우로 굴러가는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이다. 타악기소리와 덜컹거리는 기차의 소리는 소리의 음색과 률동에서는 별로 같은 점은 없겠지만 소리라는 면에서는 같은 사물이라고 할수있는것이라겠다. 한소리를 다른 한소리로 옮겨놓는것도 소리로 찾는 시적상관물의 한가지 설정방법이고 소리를 통하여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이동시키는것도 한가지 방법이라겠다. 한춘시인은 이 시에서 이 방법들을 능란하게 구사하고 있는것이다.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인고가 침전된 각질속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없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오케스트라라하면 자연히 웅위롭고 화려한 음악세계이겠지만 렬차에 앉은 할머니한텐 그런 세계가 차례지지 않았다.  인고가 쌓이고 쌓여 단단한 껍데기로 되었는데 그 깨여지지 않는 인고의 껍데기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밑바닥에서 밟히며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사람들의 축도가 아닐가. 익어가는 달빛이 아플가 차마 못밟아 가던 길 멈춰선 나무 한그루 흐르는 달빛에 흐느적거려 해묵은 심사를 파아랗게 젖힌 한포기 물초 한가닥 피리소리 휘휘 저어서 감아올린 옛꿈은 언제면 저 달속에 하아얀 들국화로 눈이 시게 피여볼가    <<추억>>으로 우리 시단의 현대시문을 열었다고 하는 김정호시인의 시 <<아리랑>>의 전문이다.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전통가요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력사의 한 장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정서이며 문화이다. 이 노래소리를 김정호시인은 두가지로 변형시키고 있다. 첫째로는 소리를 사물로 변형시키고 둘째로는 소리를 다른 소리로 이동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달빛을 밟기를 저허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서있는 <<한그루 나무>>가 아리랑이라 하고 달빛에 몸을 저으며 옛날의 마음을 파랗게 펴놓은 <<한포기 물초>>를 아리랑이라고 한다. 이 두가지 사물로의 변형은 소리를 사물로 둔갑시킨것이라겠다. 하늘을 저어서 옛꿈을 감아올리는 <<한가닥 피리소리>>로 변형시킨것은 두번째에 속하는 변형이라겠다. 소리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겠는데 김정호시인은 이 두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여 아리랑을 노래하면서 <<하얀 들국화>>(이것도 리상을 표현한 시적상관물)로 눈부시게 피여날 미래를 동경하고있다. 제5절 속성에 의한 시적상관물    세계는 사물로 구성되였고 사물들은 죄다 자기의 속성이 있다. 사물의 속성은 5관을 통하여 뇌에 반영된 감각을 종합, 분석, 추리하여 내린 사물성질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물의 색갈, 모양, 소리, 움직임들은 5관을 통하여 뇌에 반영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사물의 속성의 외적 표현이라 하겠다. 외적표현이 있으면 내적표현이 있기마련이다. 내적표현은  외적표현처럼 감각할수있게 드러나는 표현이 아니다. 내적표현은 드러남을 고찰한후 내린 추상적인 판단이나 관념이다. 이런 판단이나 관념을 속성이라고 하겠다.    <<봄이면 꽃이 핀다>>는 개념은 봄의 속성의 한가지를 표현한것이라겠다. 이 개념은 <<봄>> 이나 <<꽃>>을 지시하는 언어인 것이 아니며 <<봄>>과 <<꽃>>이라는 언어는 봄의 속성을 나타내는 언어의 재료로 충당되였을 뿐이다. 한 사물에는 한가지 속성이 있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속성이 있기마련이다. 속성은 한류형의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반영하지만 한사물의 속성의 표현은 여러가지 형태라겠다. <<물은흐른다>>하고 물의 속성을 한마디로 나타낼수 있지만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유유히 흐르기도 하고 세차게 흐르기도 하고 잔잔히 흐르기도 하고 물결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결은 하얗게 부서지기도 하는데 그 부서지는 표현도 천태만상이다.    현대시는 속성을 중시하며 속성으로부터 시적상관물을 설정하기를 즐긴다. 색깔, 모양, 움직임, 소리 등은 일반적으로 은유에 의하여 시적상관물을 드러내지만 속성으로부터 착안하여 설정된 시적상관물은 일반적으로 상징에 의하여 표현된다. 때문에 속성으로 찾은 시적상관물은 상징적상관물이라고 하여도 틀린다고 할수는 없겠다. 한편의 시가 태여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 숱한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숱한 사랑하는것을 사살하고 암살하고 독살해야 한다 보라 사천의 날과 밤하늘에서 한마리 새의 떨리는 혀가 탐나서 사천의 밤의 침묵과 사천의 날의 역광선을 우리들은 사살했다. 들으라 비내리는 모든 도시 용광로 한 여름의 방파제와 탄갱에서 굶주린 한 아이의 눈물이 있어서 사천날의 사랑과 사천의 밤의 련민을 우리들은 암살했다 기억하라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것을 보고 우리들 귀에 들리지 않는것을 듣는 한마리 들개의 공포가 탐나서 사천밤의 상상력과 사천날의 차가운 기억을 우리들은 독살했다.    일본의 다무라류이지의 시 <<사천의 날과 밤>>의 전문이다. 니체의 시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불과하다!>>에서 시인을 <<짐승>> 이라고 표현한것과 일맥상통하다 하겠다. 다무라류이지는 <<짐승>> 이라는 언어를 쓰지 않았을뿐이다. 오히려 짐승보다 더한 도깨비를 현대시라고 노래했다고함이 더 어울리리라 , 어찌하여 이런 무시무시한 언어로 현대시를 말하게 되는가?    현시대는 <<죄악>>이 많고 크다겠다. 현시대는 전시대의 랑만주의시도 동시대의  사실주의시도 모두 부정한다. 현대시는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나고, 현실을 떠나서 자기의 궁전을 건설한다. 이 궁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궁전이며 낯선궁전이며 현실과 모순충돌을 일으키는 불협화궁전이다. 이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표를 떼야지 아무나 들어갈수있는 곳이 아니다. 표는 누가 파는가? 현대시가 판다. 현대시를 알면 표는 스스로 생기게 된다.    다무라류이지의 <<사천의 낱과 밤>>은 바로 이런 현대시의 상징주의시 가편이라겠다. <<사천>>이라는 수자의 등장은 다무라류이지가 현대시를 10여년간 탐구하면서 써왔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질것 같다. <<사살>>, <<암살>> <<독살>>이라는 언어는 다른 류파와의 철저한 결렬을 표현한것이라고 하겠다. 2련의 <<한마리 새의 떨리는 혀가 탐나서>>는 새로운 이미지 탐구에 대한 현대시의 추구를 상징한것이고,  3련의 <<굶주린 한 아이의 눈물>>은 이제까지 성취와 창조에 추호도 만족하지 않고있는 시인의 초상화라고 하면 될것이고, 4련의 <<한마리 들개의  공포가 탐나서>>는 보이지 않는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것을 듣게 하려고 애쓰는 시인의 불타는 노력과 진지한 탐구의 상징이라고 리해하면 좋을것 같다. 이쯤하면 시의 모든 내용이 풀리리라 믿어진다. <<사천의 날과 밤>>은 현대시에 대한 다무라류이지의 굳센 믿음과 그속에서의 열광적인 분투를 표현했다 하리라   은유의 수법으로 기술한 현대시는 무엇이 무엇이라는 명백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상징적인 시적상관물로 시를 관통시킨 현대시는 그런 딱딱한 맛이나는 문체격식이 아니다. 이것도 속성으로 찾은 시적상관물의 특점이라면 특점이겠다.    한국 신세훈시인의 <<목쉰 연가>>를 보자.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천번을 만번을 찍었거니 결국 사랑하는 나무는 비참히 쓰러졋네 섰던 세월의 태양이 아무리 그리워도 누워서 밤이슬을 맞게 되는것은 누워서 어둠안으로 죽어가는것 나도 사랑하는 나무옆에 넘어져 오랜 잠들 때까정 넘어져 한 천년을 한 만년을 하늘의 별에 대고 얘기할련다    관념을 이미지한 관념이미지시라 하겠다. <<열번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없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홍윤기 비평에 의하면 이 시의 부제를 <<사랑하는 나무>>라고 달았는데, 시인은 자기의 시세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초부가 거대한 나무를 찍어넘기는 식으로 천번만번, 아니 무수한 각고를 거듭하여야 한다는것으로 해석하고있다. 이 외에도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이미지화한것이라겠다. 노력은 천재를 낳는다는 말이 있다. 찍어서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있다한들 <<천번을 만번을  찍어서 >>넘어지지 않는 나무야 어디에 있으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고 또 하면 꼭 성공한다는 의미겠다. 문제는 그런 끈질긴 노력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다. 태산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지>> 않는가.    1련의 마지막줄 <<결국 사랑하는 나무는 비참히 쓰러졌네>>는 노력 끝에 일이 성공되였다는것을 나타내는 아이러니적 시구이며 성공의 기쁨을 상징적으로 반어적으로 노래한것이라겠다. 2련의 마지막줄 나무가 <<누워서 어둠안으로 죽어가는것>>이라는것은 완성을 의미한다. 넘어진 나무는 썩어서 흙이 되여야 한다. 흙이 되는것이 바로  <<어둠안으로 죽어가는것>>이다. 흙이 되여야 나무는 사물적 한생을 종결짓고 영혼의 영생을 획득하게 된다. 흙이 되는 것은 자연속에서 나온 사물이 자연이 부여한 최후의 의무을 가장 성스럽게 완정하게 완성한 표징이다. 그런 뜻의 실현을 위하여  <<나도 사랑하는 나무옆에 넘어져 오랜 잠들 때까정 넘어져서>> <<하늘의 별에 대고>> <<천년을 만년을>> 얘기하려 하는것이다. 최후의 완성을 위한 시적화자의 정진정신을 보여준것이라겠다.   성질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쓴 우수한 시들은 우리의 시에서도 흔히 볼수있다. 지난 80년대 중반으로부터 립체시라는 기발을 들고 시창작에 정진해 왔던 김파의 시 <<항로>>를 살펴보기로 하자 항로 김파 물속에 누워있던 파도들이 거울을 깨고 일어선다 갈피에 끼인 녹슨 시간이 죽은 비늘로 뒤로 밀려간다 바람이 돛폭 안고 갈 때 하늘이 찢어지며 신음하고 어둠이 아픈 기침을 한다 땀에 절은 쩝절한 항로 지금쯤 얼마나 달려왔는가 피안의 저쪽 물새의 하얀 울음소리가 멀리 화살로 날아가는데, 벌써 머리칼에 가을서리 물들고 내 숨결이 조금씩 흰빛으로 증발하고 있다     김파의 시 <<항로>>는 인간이 어떻게 태여나고 어떻게 살아가고있는가를 고요한 항구에서 떠난 배가 어떻게 달리고 있는가와 비교하면서 두사물의 성질에 모를 박고 시를 구사하고 있다. 시인은 살아가는것이란 배가 항구를 떠나서 달리는것과 같다고 증언하고있다겠다. 첫두행은 인간의 탄생을 그린것이고, 3,4행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 밀려나는 낡은것의 사멸을 그리였고, 5,7행은 일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간난신고를 그리였고, 2련에서의 첫두행은 인생의 간난신고를 극복하며 억차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였고, 나머지는 한생을 바쳐 리상을 추구하여 왔으나 그에 닿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져야 하는 슬픔을 쓰고있다. 배는 태여난 그날부터 파도를 헤치다가 일생을 마치고 인간도 태여난 그날부터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가다가 소원은 있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모든것을 접어야만 한다. 이면에서 배와 인간은 비슷한 성질이 없다고 할수 없는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와같은 류사성을 착안하고  <<항로>>를 썼으리라 추측해 본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알찬 이미지들로 시를 엮어내려가서 독자의 가슴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있다. 시에 씌여진 언어 거개가 거듭나이를 하면서 새롭게 태여나고 새롭게 조합되면서 다각적인 양상을 보이고있어 이미지의 새로움이란 어떤것인가를 보여주고있다고 하겠다. 강아, 흰가슴 여미지 못한채 죽어서 얼음이 되었던 강아 쫓겨갔던 물새들 기슭으로 돌아오고 앙상하던 버드나무 새움이 트는구나 또다시 나는 본다 너의 파도의 장쾌한 옛모습을 또다시 나는 듣는다 너의 출렁이는 환락의 노래소리를 승냥이떼처럼 불을 털며덮쳐들던 미친 눈보라 자취를 감추고 죽어서도 쩡쩡 짜개지던 너의 가슴 비단결 새살로 아물어 푸르구나 어제날 두꺼운 얼음밑에서 도란도란 누구와만 나누던 귀속말 오늘은 와-와- 가슴 터져 말하며 하늘아래 자유로이 흘러가누나 나는 안다 강아, 네속에 가득차 끓으며 사품치는 그 많고많은 말을 나는 안다, 풀려내리는 해빙기의 강아 너는 정녕 반짝이는 무수한 눈물방울 지금 내 가슴속에 흘러들어 가슴벽 세차게 때리며 너는 우는구나 강아! 너는 웃는구나 강아!    우파에 걸려 청춘을 잃어버렸던 조룡남시인이 해방을 받고 토해낸 감격의 시편이다. <<해빙기강변에서>>라는 시제목부터 빼았겼던 인생을 다시 찾는 기쁨을 떠올릴수있는 심상치 않는 내함을 포함하고있다. 얼음속에 갇혀 한겨울을 소리 한마디 쳐보지 못하고있다가 봄을 맞아 얼음을 깨고 다시 자신의 활력을 펼치게 되는 물!  사회의 잔학을 엄청나게 받으면서 살다가 자유를 획득한 시인의 생명! 이 두사실 사이에 속성으로 말할 때 비슷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바로 여기에 시적상관물의 설정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 시에서 물과 물에 대한 모든 묘사와 언어는 억울했던 사람을 지칭하는 상징물이고  겨울에 대한 모든 묘사와 언어는 훌륭한 사람에게 반혁명이라는 모자를 씌우고 다스리던 가혹을 상징한다. 르네르상스의 시대가 이 세상에 군림한지도 수세기가 지난 20세기중기를 넘어서면서 우리나라에 신을 모시는 유치한 년대가 있었다. 특징적인 환경에서 억울했던 사람들의 해방된 심정을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토해낸 <<해빙기의 강변에서>>이다.   제6절 의인(의물)에 의한 시적상관물   의인(의물)화의 수법은 우리 몸에 젖어있는것이라겠다.   의인(의물)법을 기초로 시적상관물이 설정되여 이미지를  구성하는것은 문구에서 동안뜨게 나타나는 의인적수사법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전자는 대상물을 가리키는것이고 후자는 이미지시의 수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순한 마음은 자연과 자연물과 인간의 평등을 요구하고 서로의 사랑을 요구한다. 요구한다는것은 평등이 되지 않고 사랑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겠다. 현대인간은 인간과 다른 모든 자연물과의 평등과 사랑을 너무 무지하게 짓밟고있는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서양의 예수나 중국의 유가는 세상만물은 이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이간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불가나 도가의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연의 몸에서 사는 <<이나 써개>>라고 하면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인간과 기타 자연물과의 평등과 사랑을 주장하였다. 오늘의 인간은 탐욕으로 팽창되여있다. 인간은 자연의 파괴자 략탈자, 통치자로 추락되여 자연의 원쑤로 활약하고있다겠다. 한 인간이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것처럼 인류도 공룡과 같은 훼멸을 향하여  걸어가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점에서 의인(인물)에 의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이미지를 만드는것은 의의가 작거나 가볍다고는 할수 없겠다. 현실과 현실인간을 떠난다는 이미지가  의인 (의물)적인 시적상관물을 설정함으로써 인간으로 다시 회귀하는것인지도 모른다.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밖을 나섰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붉으레한 달이 울타리너머를 보고 있다. 나는 말을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주위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어 도회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희였다.    흄의 시험작 5편중의 한편 <<가을>>의 전문이다. 달을 <<얼굴이 붉은 농부>>로 별을  <<얼굴이 흰>> <<도회의 아이들>>로 변형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마들고 있다. 기운 썩 좋은 낯 붉은 아이들 아우성치며 벼랑 타고 오르는 소리 성대 썩 좋은 아이들 온통 산에 불 지르는 함성이다. 아니 온 몸 속속들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이윽고 분출하는 화산이다 불타는 산속에서 나도 불 붙어 고래고래 웨친다    홍윤기의 시<<단풍>>의 전문이다. 시각적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호상 전의되고 교차되면서 씌여진 이 시를 정한모시인은  <<단풍>>의 이미지를 멀리 정관하는 눈이 아니라 안에서 용솟음치며 끓어오르는 힘 즉 역동적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였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한국의 30년대에 홍윤숙과 함께 녀류시인의 쌍벽을 이루었다는 노천명의 <<사슴>>이다. 인간을 의물화한 우수작이라겠다. 노천명은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보낸 시인이라며 <<사슴>>에다 자신의 <<고고한 모습>>을 투영시켰다고 홍윤기는 평하고 있다.    의인(의물)화에 의하여 설정된 시적상관물의 이미지시는 리해에 큰 장벽이 없으므로 세세한 해석을 가하지 않는다. 의인화에 의하여 씌여진 이미지시는 그속을 파보기전에 우선 마음이 통하는 감이 든다. 그만큼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대화하는것이라 하겠다. 의물화는 의인화와 틀린다. 의물화는 의인화보다 암시성과 몽롱성이 더 강하다고 하겠다. 어떤 경우에는 난해성까지 초래할수 있겠다. 특히 어떠한 감정의 편린을 의물화 하였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제 우리 시들에서 한수를 뽑아 이미지작업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비는  하루밤사이에  손가락이 잘리웠다 비는  하루밤사이에  두다리가 끊기웠다 비는 하루밤사이에 옷을 몽땅 벗기웠다 비는  하루밤사이에 머리 하나만 댕그라니 남았다 손가락을 자른이는 바로 자신이 적셔주던 수풀이였다 다리를 끊은이는 바로 자신이 키워주던 삼림이였다 옷을 벗긴이는 바로 자신이 가꿔오던 초원이였다 비는 한바탕 울고싶었으나 비는 눈물이 다 말라버렸다 비는 부른다 비는 처절하게 부른다 초원에서  삼림에서  사막에서 망그러진 세계와 마주하고 그의 손가락을 부른다 그의 다리를 부른다 그의 옷을 부른다 소리소리 그 부름소리 사람의 마음을 잡아비튼다    남영전씨의 <<비>>의 전문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는 그 무슨 손가락이요 다리요 옷이요 머리요 하는것들이 없다는것은 코풀레기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학에서 의인화수법이 이채를 돋굴뿐만아니라 시에서는 한가지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고있는것이다. 우리는 비를 통하여 불상한 인간을 보기도 하고 인간에게 파괴당한 자연의 참상을 읽기도 하면서 동정과 사랑 련민 등을 감수하기도 한다. 2련을 통하여 비가 겪는 참상은 환대를 받아야 할 사물들한테서 곡경을 당하는것을 읽으면서 격분과 슬픔이 동시에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인류력사에 흔히 있는 일들이며 우리들 주위에서 심심잖게 볼수있는 일이 아닌가! 마치 우리주위에서 불상하게 살아가고있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자매의 누구인것만 같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참상을 격지 않고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아갔은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게 된다. 의인화에 의하여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시를 쓰면 다른 이미지시보다 친절하고 감동적인 감을 주게 되는것도  설정된 사물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때문이리라.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이 여섯가지 방법을 착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 여섯가지 방법은 어떤 근거를 잡으면서 한 방법이다. 그러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것들이 있다. 이미지시란 현실을 초월하여  쓰는것이 중점의 하나인데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 말은 맞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지적인 지위를 삭감해 버리는것으로서 우리들이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당대 영미 초현실주의 시들은 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이미지를 제작해 내고 파편문체를 많이 쓰는데  필자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너무 천박하여 여기에서 피력하지 못하는것을 과제로 남기면서 독자들이 량해하기 바란다. 제7절 령감에 의한 시적상관물   령감에 의한 시적상관물의 설정은 감각의 물화와는 다르다. 감각은 아직 리성화되지 않는것을 물화는것이으로서 상징어나 상징구에 속하는것이라고 할수있지만 령감에 의한 시적상관물의 설정은 한수의 시를 어떻게 쓰는가에 관계되며 령감을 어떻게 시로 만드는가와 관계되는 중요한 고리라고 생각된다.     령감은 고층차사유의 표현으로서 어떤 사물의 필연적인 느낌일수도 있고 우연한 떠오름일수도 있다. 량자중에서 필연보다 우연이라고 함이 그래도 더 적절할것 같다. 우연히 떠오른 령감을 두가지 부류로 나눌수있다. 한가지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르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 관념으로 떠오를 때가 있다. 관념으로 떠오른 령감을 그대로 써놓으면 현대시가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을것으로 알고있다. 관념으로 떠오른 령감이란 사물의 이미지가 새롭게 떠오른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에 대한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 추상적개념으로 떠오른것을 말한다. 이 추상적개념이 아무리 새롭고 철리적인것이라 하여도 그대로 써놓으면 좋은 시가 안된다. 그것을 이미지로 다시 가공하여 써놓았을 때 비로소 좋은 시가 되는것이다. 아래에 주요하게 이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가을에 오곡이 무르익고 과일이 주렁지는것은 하느님의 은덕이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릴케는 <<가을날>>이라는 시를 이렇게 쓰고있다.  가을날   릴케 주여, 때입니다. 여름에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에서 결실을 명하십시오. 열매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여 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송이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것입니다. 잠자지 않고, 책을 잃고, 긴 편지를 쓰고 그리하여 락엽이 뒹구는 가로수길을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헤맬것입니다.    가을의 풍성함은 하느님이 은총이라는 주제를 담은 릴케의 시이다. 이 시는 령감이 관념으로 떠올라서 쓴 시라고 할수있다. 이 시를 쓸 때 릴케의 뇌리에 떠오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산생하고 발전하고 사멸하는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이런 주제를 표현하는것이 가을철이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되여 내용을 가을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복합이미지의 수법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노래하고있다. 릴케는 령감을 씀에 있어서 관념에서 관념으로 간것이 아니라 관념을 이미지화하고 있는것이다. 시는 이렇게 어떤 관념적인것을 쓸 때 론리적으로 전개하는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으로 시의 집을 짓는것이라겠다   겨울이라고 하자. 눈보라 휘날리는 겨울에 춥다는 생각쯤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눈보라치는 겨울추위가 봄을 만든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할수있는 상상이 아니다. 추위가 봄을 만든다는것은 시적령감에 속하는것이며 새로운 관념에 속하는것이다. 눈보라에서 받은 관념을 어떻게 이미지시로 만들것인가? 아래와 같이 시를 썼다고 하자. (A) 눈보라 눈보라     윙윙 울부짖는다     바위도 얼어터진다     털모자 없이는 한걸음도 내 디딜수 없다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눈보라를     아, 눈보라여 봄을 만들어내는 사랑이여 (B) 눈보라 너는 겨울의 왕자     너는 봄의 남편     초봄의 언덕에서 신부를 맞을제     신랑의 말등에서 보이지 않을 슬픔이여 (C) 눈보라 펄럭이는 날     겨울나무 숲에 가면     풀무소리 들린다     줄기속에서 불길이 펄펄 일고     망치소리 뚱땅뚱땅     웃도리 벗어부친 신동들     땀을 벌벌 흘리며     푸른 잎을 벼리고있다.   우의 A, B, C에서 A보다 B가 좋고 B보다 C가 좋다는것을 우리는 알수있다. A가 제일 차하다고 생각되는것은 눈보라라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써놓았기때문이다. 특히 제일 마지막행 <<아, 눈보라여 봄을 만들어내는 사랑이여>>는 관념적으로 떠오른 령감을 직설적으로 써놓았기 때문에 루이스가 지적하였던것처럼 <<불순물>>이 되었다. 이미지시는 이런 <<불순물>>이 나타나는것을 용허하지 않는다. B와 C는 그렇지 않다. 시인이 받은 관념적인 느낌을 상징과 은유 즉 이미지로  표달하였기때문이다. C가 B보다 낫다는 리유는 C는 B보다 더 셈세한 필치로 감성이 강하다는데 있겠다. 아무리 좋은 령감이래도 물질운동으로 재구성되지 않고 섬세한 필치가 따라서지 못하면 피와 살이 없는것이 되거나 여윈것이 된다.   령감을 이미지화한다는것은 령감을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사건으로 재구성하는것으로서 모름지기 중시를 돌려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총적으로 령감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이미지를 만드는것은 중요한 기법의 한가지이므로 능숙하게 장악하여야 할것으로 알고있다.                      종언    종합해보면 아주 간단한 도리인것 같다. 이미지시란 현대시다. 현대시는 이미지다. 이미지시의 핵심은 변형이다. 이 변형을 위하여 사유와 언어가 따라서야 한다.    사유는 새로운 짝을 맞추는 작업이다. 짝을 맞춘다는것은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이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에는 색깔, 모양, 움직임, 소리, 속성, 의인화, 령감  등 일곱가지가 있다.    언어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재료이다. 이미지시의 언어다룸은 주요하게 아홉가지로 한다. 성질이 다른 언어조합이 첫째요, 두사물의 공간과 시간 줄이기가 둘째요, 두사물의 짝을 바꾸기가 셋째요, 추상어와 구상어 결합이 넷째요, 은유적언어사용이 다섯째요, 색갈올리기가 여섯째요, 공감각이 일곱째요, 감각의 물화가 여덟째요, 류의미와 종의미가 아홉째이다. 사유와 언어는 서로 침투하고 융합되여 변형을 이룩하면서 이미지시를 제작한다고 하겠다.  참고서 까마귀-리상각시집 별들의 울음소리-종합시집 중국조선족문학선집(시선집) 금잔디-김성휘시집 무지개는 뿌리내릴 곳을 찾는다-한춘시선집 하얀 메아리새-김파시집 두사람의 풍경-리삼월시집 달빛의 언어-김정호시집 청자기의 꿈-김동진시조집 고향마을 동구앞에서-조룡남시집 그리움 삼만리-김응준 미국기행시집 나, 진짜 바보이고싶다-김철시집 뻐꾸기는 철없이 운다-김철시집 백의 넋-남영전작품집 꽃의 의미-석화시집 20세기 마지막 밤-김학송시집 사랑, 그리고 바보들의 이야기-리임원시집 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최룡관시집 푸른 종소리-박화시집 중국고전문학작품선집-허룡구               ++++++ 시론-문덕수 오늘의 시작법-문덕수 현대시학-홍문표 시론-김준오 도시시와 해체시-김준오 현대시작법-오규원 시의 리해와 작법-김춘수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박진환 한국현대시해석-홍윤기 한국현대시해설(상,하)-조남익 조선고전문학선집3-시조집 한국명시집-김희보편저 달과 자유-정지용시수필집 타는 호소-굴원시집 적-한춘섭시조집 사라지는것들을 위하여-문덕수시집        +++++++ 현대시리론-서양론문종합집 현대시구조-후고.프리드리히 알바트로스-보들레르등 언론종합집 문예비평의 원리-I.A.리처즈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릴케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루이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훗살 문심조룡-류협        ++++++ 세계명시선-김희보편저 축제의 노래-로르까시집 이보다 더 쓸쓸할 때는 없다-G.벤시집 고요한 시-G.벤시집 지옥의 격언-블레이크시집 안개-샌드버그시집 삶-엘뤼아르시집 몽마르뜨르의 축제-j. 꼭도시집 지하철정거장에서-E.L파운드시집 이국여인에게 바치는 시-S.J페르스시집 태양-니시자키 준자부로시집 누가 사랑에 관해서 말하리-랭보시집 나는 한 개의 별입니다-헤세시집 고독-릴케시집 방랑자-니체시집 겨울에-클라클시집 밤의 찬가 -노발리스시집 깨여진 약속-하디시집 악의 꽃-보들레르시집 황무지-엘리어트시집 태양-니시자키 준자부로시집 비라보다리아래 세느강이 흐른다-아폴리네르시집 농부-무라노 시로오시집 나르시스는 말한다-발레리시집 디종의 영광-로렌스시집 유예된 시간-바흐만시집 시월의 노래-토마스시집 시간의 흐름-크롤로우시집 애니벌리-포우시집 목신의 오후-말라르메 당대구미시선-왕가신 등 편집    
34    연길-카스 2만리 기행.4 댓글:  조회:1188  추천:39  2008-10-30
  22. 섬서의 풍경과 도가    11월 21일 아침일직이 진시황릉으로 가는 길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길이였다. 오늘은 진시황릉과 병마용 및 청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며 조형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좋은것은 세계가 다 같고 나쁜것은 각기 다르다. 쓰레기통은 문명국일수록 바퀴가 달리여 가볍다. 비문명국일수록 쓰레기통이 견고하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택시운전수가 우리를 살갑게 대하며 섬서의 열가지 특점을 이야기 한다. 나는 필기장을 꺼내여들고 하나하나 이렇게 적었다.    첫째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의 절반은 높이를 낮추어 빗물이 될수록  뜨락에 떨어지게 한다. 떨어진 빗물은 뜨락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물이 귀하기땜에)    둘째는 칼국수의 국수가닥은 허리띠처럼 넓고도 길게 한다. 보통 국수가닥의 너비가 2센치메트나 된다.    셋째는 기름, 시금치, 고추만 있으면 훌륭한 료리가 된다.    넷째는 처녀가 외지로 시집가지 않는다. 그것은 섬서보다 더 좋은 곳이 없기때문에.    다섯째는 베개가 있어도 베지 않고 람전옥을 벤단다. 람전옥은 섬서의 람전에서 나는데 중국의 사대명옥의 하나란다. 신강화전옥, 섬서의 람옥, 동북의 수옥, 운남의 전옥이 중국의 4대옥이라는가.    여섯째는 섬서사람은 앉아있기를 즐기여 의자가 있어도 앉지 않고 칼국수를 먹어도 문어구에 무릎을 꿇고 앉아먹는다.    일곱째는 밥사발이 커서 밥상에다 다 놓지 못한다. 이것은 량식이 많다는 자랑이라는가.   여덟째는 흰수건을 머리에 맨다. 이것은 산서, 섬서의 풍속.   아홉째는 대화할 때 극을 노는것처럼 높은 소리를 친다.   열 번째는 기름떡이 솥뚜껑만큼 크다.    길에서 운전수가 위하기슭에 도가의 명성궁이 있다고 하여 피뜩 들렀다. 당조중기로부터 명성궁이 있었는데 1400여년의 력사가 깃든 곳이였다. 중국에는 도가가 유명했고 유가가 유명했다. 도가는 고대의 로자가 창시인이고 유가는 공자가 창시인이다.  로자의 성은 리씨이고 이름은 이(耳)이고 자는 담(聃)이고 춘추시대의 사상가이고 철학가이고 대학자이다. 공자의 성은 공(孔)씨이고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며 춘추시대의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며 교육가이다. 공자는 34살 때 로자를 방문하고 그의 학설에 감복하여 로자를 구름속의 룡 (运中支龙)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평등하므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는것이 도교의 사상이다. 도교는 사람과 모든 자연물은 평등하다고 하였으며 사람과  써캐도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세상사물은 모두 산생, 발전, 사멸의 길을 걷는다고 한것도 도가였다. 유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공구의 사상을 따랐고,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이 인간을 인(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지만 도가는 세상사물과 인간은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명성궁을 돌아보며 도교의 계승자였던 장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자 자연의 법칙을 따랐다고 장자는 통곡치며 울대신 뜨락에 나가 장단을 두드리며 축하하였단다.     우리가 본것들은 모두 불교사찰이거나 석굴이였지 유가나 도가의것은 보지 못하였는지라 명성궁을 본다는것은 의미가 있는것이였다. 명성궁은 지금 한창 수건중에 있는 절이였다. 인민페 400여만원을 투자하여 수건하는데 큰 공정은 마무리 지은 셈이고 잔손질이 한창이였다.    뜨락에는 준도귀덕비(遵道贵德碑)가 집벽만큼이나 커다랗게 세워져있고, 전내에는 기다란 명주필이 드리워져있는데 공봉도교 선조사영등(供奉道教 仙祖谢映登)이라는 글발이 씌여져있었다. 글발 좌우에는 작은 옥상이 있고 벽에는 자름자름한 칸이 수백개나 있었다. 칸마다 불이 켜져있었는데 그 불은 행객의 길을 밝혀주는 불이라고 한다.    운강석굴이며 룡문석굴이며를 보고난뒤라 별로 볼것은 없었지만 조촐하게 차린 명성궁이였다. 명성궁을 돌아서 진시황릉으로 가면서 조형은 좀 우스웠던지 이런 말씀을 한다. 시장경제는 뜯어먹기 경제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뜯어먹으며 살고있습니다. 명성궁은 아직도 시공중이지만 한사람한테서 40원씩 뜯어먹고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돈벌이 골이 텄습니다. 조형의 말씀은 간단했지만 의미심장하였다. 북경에서, 짠제에서, 쑈랑디에서 우리는 피부로 뜯어먹는 경제시대의 아픔을 당하지 않았던가. 23. 진시황릉은 산이였다    진시황, 중국의 초대황제. 진시황의 성은 영(嬴)씨, 이름은 정(政).기원전 243년에 조나라의 큰 상인 여불위(呂不暐)의 돈과 지략에 의하여 태여난 기생의 아들이며, 진나라 왕위에 오른 장양왕의 양아들이였다. 부왕이 즉위 3년만에 죽자 13세때인 기원전 246년에 영정왕이 되었다. 황제의 혈통도 아닌 사람이 황제로 된일은 중국력사에서 영정왕이 첫기록이였는지도 모른다.영정왕은 한(韩),위(魏),초(楚),연(燕),조(赵),제(齐)를 선후로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한후 스스로 진시황이라고 봉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진시황은  중국력사의 찬란한 창조자였다. 그는 6국을 통일한후 처음으로 문자,도량형, 화페를 통일하고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고 중앙집권제도를 실시하였고, 법령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진시황은 중국력사의 가장 잔혹한 황제이기도 하였다. 그는 도로망을 건설하면서 전국의 부호 12만호를 강제로 이주시켰고, 분서갱유를 단행하여 천고의 죄악을 빚어내였고, 만리장성쌓기, 아방궁건설, 여산수릉등 공사를 벌리고 백성들을 혹사시켰다. 그는 하루에 30키로그람의 문서에 결재를 하면서 다섯차례나 전국을 시찰하였는데 마지막시찰에서 얻은 병으로 50세(210년)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진시황릉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릉이 아니라 산이였다. 릉에는 수풀이 무성하고 릉의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있었다. 릉으로 오르내리게 층층계길이 가리마처럼 곧추 뻗어있었다. 꼭대기에 있는사람은 달걀만큼하게 보이였다. 움직이니 사람이라 하지 움직이지 않으면 누가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나와 조형은 서슴없이 릉꼭대기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길가에는 석류나무들이 가담가담 많이도 있었다. 석류는 다 떨어지고 이따금 몇알씩 달려있는것이 보이기도 하였다. 우거진것은 소나무였고 잡목들도 끼여있었다. 꼭대기에는 초가집뜨락만큼한 평지가 있었는데 장사군 몇이 난전을 벌리고있었다. 그리고 진시황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 비문이 서있었다. 사위를 바라보니 서안시내가 멀리 운무속에 아른거리였다.    진시황은 13세에 등극해서부터 자기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36년이란 시간을 허비하였다. 이 공사에 동원시킨 민부만 하여도 무려 72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려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고 려산원이라고도 부르는 이 릉은 운전수의 말에 의하면 크기가 옥문의 두배나 된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비밀은 40여년간의 탐사를 거쳐 기본상 밝혀졌는데  도읍을 본따서 평지에다 흙을 4층으로 쌓아만들었다. 릉을 중심으로 내성과 외성이 있고 외성밖에 또 성이 있다. 릉의 앉음새는 서에서 동으로 향하였고, 남이 높고 북이 낮은 도성(都城)으로서 남북의 락차가 87메트다. 지하의 궁전과 내성사이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배장건축들이 많이 분포되여있다. 성내의 남반부에 궁성외의 침실이며 말과 수레의 의장대며 배장갱이며가 집중되여있고, 북반부의 서쪽구역에는 궁전의 부속건물이 분포되여있고, 동쪽구역에는 후궁인원들의 배장구역이다. 외성의 서쪽구역에는 지면과 지하시설이 가장 밀집된 곳이다. 마구간도 있고, 짐승우리도 있고, 관리들의 숙사유적지가 있다. 외성동남부에는 대형돌갑옷배장갱이 있다. 외성밖에는 병마용갱, 돌다듬장, 벽돌기와 굽는 굴, 려산의 홍수를 방지하는 제방 등등 건축물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기구들이 있다.    내성이나 외성이나 모두 回자모양으로 되었다. 성벽의 총길이가 12000메트이고, 릉원점지면적이 56250평방메트이고, 성내면적이 2130평방메터이고, 병마용갱과의 거리는 1500메트다. 문헌에 따르면 원래 릉의 높이는 115메트였는데 지금은 81메트로 낮아지였단다. 외성에는 문이 다섯개인데 북에 문이 두개이고 내성에는 문이 세개인데 북문이 없다. 진시황이 누워있는 무덤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짜른 달걀형모양이다. 진시황릉의 흙은 무덤과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과 려산의 흙을 합하여 쌓아올린것이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의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3층이나 되는 샘을 뚫고 구리를 녹인 물을 부어 틈을 막은후 자신의 외관을 그곳에 두었다. 또한 궁관, 백관에게 명하여 진기한 보물들을 가져다 그곳에 가득 채워넣었다.  게다가 기술책임자에게 명하여 기관부가 달린 활을 만들게 하여 만약 어떤자가 도굴을 하려고 이곳에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맞아죽게 했다. 또한 수은으로 백천강하 대하를 본떠서 만들고, 기관부를 리용하여 이들이 서로 보고 지킬수있도록 하였다. 분묘위는 해와 달 등 천문도안으로 장식하고, 그아래로는 산이나 강 등의  지리도형으로 배치했다. 이 내부를 밝히기위하여 도룡뇽의 기름으로 초불을 오래도록 꺼지지 않도록 하였다.>> 여기서 거대한 왕릉의 용의주도하고 세세한데까지 알힘을 들였다는것을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1987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시황릉꼭대기를 밟아보고 기슭으로 내려오는데 북과 징을 두드리며 한떼의 고대복장을 차린 인마가 올라오고있었다. 검은 기발을 든 좌우에는  황색기발이다. 머리에다는 흰꽃을 꼽고 붉은 목수건을 두르고 누런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다. 50여명 병사들이 저마다 기다란 병기를 들고 반시간가량 장군의 지휘에 따라 북소리를 울리며 여러 가지 행렬도 지어보고 고함도 지르면서 당년의  훈련인지 뭔지 모를 표현을 하였다. 아마 황제근위군들의 행색을 재연하는것 같았다. 24.세계 8대기적 -병마용갱    진시황릉을 돌아보고 병마용갱으로 향하는 길에서 조형은 진시황이 위대하긴 위대합니다. 죽어서도 후세들에게 돈을 벌어주니까요. 라고 우스개를 하여 조형도 나도 하하 웃음보를 터치였다. 사실 서안은 12조대 도읍으로 되어있던 도시라 전문적으로 송장이며 고대건축이며를 가지고  돈을 벌어먹는 도시이다. 그것도 투자가 적고 떼돈을 버는것이다. 중국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서안에 가서 중국고대를 읽어보려하고 있으며, 세계도 서안에 와서 진시황릉이며 병마용갱이며를 돌아보고싶어한다. 아마 서안에서는 관광수입을 굴지의 산업으로 치고있을것이다.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구지에 큰 장마당이 있었는데 장마당에는 고물모사품으로부터 현대의 상품에 이르기까지 없는것이 없었다. 귤을 사먹어보았는데 귤맛이 달콤하기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시장을 지나면 인공송림이 나지였다. 인공송림을 지나니 병마용갱이 넓다란 광장을 끼고 나타나는데 우람한 층집들이 광장둘레 에 어깨를 비비며 서있었다. 유네스코에 든 세계적인 유적지는 어디로 가나 문표가 120원인데 병마용갱은 99원이였다. 100원도 아닌 99원이라 조형의 말대로 하면  고것들이 참 애교있게 표값을 받고있었다. 국가에서는 15억을 투자하여 오늘의 병마용갱을 중심으로 전람관이며를 꾸려놓았다. 사시장철 관광객이 들어오는데 해마다 300만 이상이란다. 일년수입이 3억정도가 된다. 5년이면 15억투자를 메꿀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돈벌이가 또 어디에 있으랴. 하물며 세월이 가면갈수록 관광객이 늘어나는데야.    세계 제8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병마용갱은 지난 1974년, 밭에다 우물을 파던 양지발이란 농민에 의하여 발견되였다. 왕이 죽으면 그를 섬기던 가신이나 근위병사 등을 함께 묻는 구덩이인 이 부장갱은 모두 3개의 갱으로 구분된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당시의 관념으로 보아 국왕의 죽음과 함게 측근신하들이 따라 죽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국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진시황이 실제 인물이나 말의 모습을 똑같이 만들어 대신 묻도록 명을 내렸으며 , 자신이 묻힐 려산릉원옆인 이곳에 갱을 만들었을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사들의 모습이나 출신지역이나 계급이나 소속이나 생김새가 모두 실제인물이였을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있다.    지금 발굴된 병마용갱의 면적은 2만평방메트나 된다. 실내에 도용이 8000여건이고 전차가 수백승이고 병기가 수십만건에 달한다. 병마용갱은 진시황 생전에 전국을 통일한 호호탕탕한 군사장면을 우리 앞에 펼쳐보이고있다. 병마용갱은 우리나라 고대예술의 보물고로서 진나라때의 오체르크예술의 완미한 체현이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20세기 제일 중요한 발견이며  세계에서 8번째 대기적의 탄생이였다.   병마용갱의 3대갱은 품(品)자형으로 배렬되였는데 깊이는 5메트이다. 1호갱은 1975년부터 발굴되였는데 동서 길이는 230메트,남북너비는 62메트, 면적이 1만 4620평방메트이다. 갱에는 6400개 병마용이 있는데 보병을 중심으로 장방형진을 치고있는 모습이다. 무사와 전차들은 실전 정예군의 전쟁행군대형으로 선봉 3렬에 횡대본대 38렬이다. 청동검, 구리창 ,화살, 쇠뇌 등 실전무기가 완정하게 보존되여있다.    2호갱은 6000평방메트로서 인마용 1000여점이 발굴되였는데 전차와 기병을 위주로 여러가지 병종이 련합으로 진을 친 모습이다. 3호갱은 통수부로서 1,2호갱의 지휘부이다. 통수들은 전차를 타고 73명 전사들이 무기를 잡고 호위하고있다. 출토된 도용들의 키는 모두 1.81-1.97메트로서 키골이 장대하고 몸구조 비례가 알맞고 형상이 생동하다. 천사람의 얼굴모습이 각각이여서 살아있는것 같이 진실하다. 근래에 2호갱에서 채색도용이 출토되였는데 그 색깔은 천연광물염료였다. 그중 자색은 규산동(硅酸铜)바리움이다. 이것은 20세기 80년대 초도체(超导体)연구에서 처음으로 합성생산한것이다. 2200년전의 병마용의 몸에서 이런 색깔이 나왔으니 누구도 그 비밀을 알길이 없다. 앞으로 2호갱에서 또 사람을 놀래우는 어떤 기적이 발견될지는 ...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여러차례 관광한 조형은 자기의 기행문에다 이렇게 그 감회를 쓰고 있다. ...2000년전 진시황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며 역사한 무모한 행위가 이제는 관광지로 둔갑하여 후대들의 돈주머니를 불려주고있으니 력사의 아이러니에 쓴 웃음이 난다. 중국정부는 이곳이 세계적인 관심의 초점이 되자 최근 이 일대에다 십년이상된 소나무를 수백그루 식재하는 등 조경사업부터 일체 정비사업을 서둘러 가볼적마다  그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25.화청지(华清池)- 황제들의 목욕하던 곳     병마용에서 멀지 않는곳에 왕들의 놀이터 화청지라는 곳이 있다. 출입문안으로 들어가자 고색이 창연한 집들이 려산을 끼고 가득 들어앉아있었다. 이곳이 바로 온천물이 따스한 곳이기도 하지만 천고의 풍류가 성행한 황제들의 목욕하던 곳이다.    화청지는 화청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000년의 황가의 원림사와 6000년의 온천리용사로 중국은 물론 세상에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라 지금도 사람들이 발자국이 무리로 찍히고있었다. 제일 먼저 화청지에 발을 들여놓은 왕은 주유(周幽)왕이였다. 그는 여기에다 려궁을 짓고 국사를 보며 비빈들과 환락을 누리면서 려산에다 봉화대를 만들고 일이있으면 봉화로써 제후들을 불러들이였다. 진나라는 려산탕을 짓고, 한나라는 리궁을 지었다. 청화지라는 이름은 당현종(唐玄宗)이 지은 이름이다. 당대에 와서 산기슭에다 선후로 당천궁, 온천궁 등 궁전을 짓고 궁전을 에워싼 성벽을 쌓고 그 이름을 화청지라고 하였다. 화청지가 유명해진것은 당현종과 양귀비가 여기서 전기적인 애정생활을 엮은 때부터일것이다. 양귀비의 원이름은 양옥환(杨玉环)이였는데 당현종의 열여덟번째 아들의 첩이였다. 그녀의 빼여난 이쁨과 뛰여난 가무에 홀딱 반하여 당현종은 아들의 첩을 빼앗아다가 자기의 첩으로 만들고 청화지에 데리고 와서 방탕한 일로를 걸었다. 기재에 의하면 기원 745-755년 10년사이에 당현종은 해마다 10월이면 여기에 와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3,4월에 장안으로 돌아갔다한다. 당현종은 화청지에 와서 겨울나이를 하면서 양귀비의 자매들을 데리고 와서 너무 도를 넘는 방탕을 누리면서 국사는 보네마네 하였다. 당현종의 방탕한 생활은 마침내 안사이란을 일으켰고, 그는 사천으로 피난가는 도중 마외파라는 곳에서 호위병들의 핍박을 못이겨 양귀비를 목을 달아 죽이는 비극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후에 화청지의 흥성은 깨여지였지만 송,원,명,청 등 조대뿐만아니라 근대에 와서도 원래의 궁전은 보수하고 새로운 궁전도 지어서 오늘의 규모에 이르렀다. 현대에 와서는 국민당 애국장령인 장학량과 양호성이 장개석의 매국로선을 반대하여 서안사변을 일으켜서 유명해지기도 한다. 장개석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팬티바람으로 창문을 뛰여넘어 려산에 가 숨었으나 포박을 면치 못하였다. 주은래가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제일차 국공합작을 실현하여 단결항일의 새국면을 개척하였던것이다.    중국에는 2700여곳에 온천이 있다지만 청화지의 온천처럼 물이 따뜻하고 향기롭고 건강에 좋은 곳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주유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시황, 한무제, 북주무제, 당고조, 당태종, 당현종, 당대종, 당헌종, 당숙종, 당경종, 후진고조,송인종,원세조,청승조강희,청인종가경, 청덕종광서, 청순제부 등 력대의 황제들이 여기 와서 몸을 씻고 국사도 보고 주색잡이도 하였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하던 련화탕(莲花汤)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문으로 들어가면 목욕탕은 눈아래 본인다. 가로 6메트, 세로 10메트되는 련꽃모양의 욕조에는 량쪽에 화강암으로 된 층층계길이 나있다. 양귀비와 당현종이 어떻게 욕조에 들어가서 어떻게 목욕을 하였을가를 떠올는지 여기 온 사람들은 한참씩 서서 구경을 하며 떠들어댄다. 두 개의 층층계는 한쪽으로 들어오고 한쪽으로 나가는 걸거야. 아니야 량쪽으로 함께 들어와서 만났을거야. 아니야 양귀비가 당현종을 업고 들어왔을 거야. 별소리가 다 많다. 련화탕옆에 있는 자그마한 구룡호에는  살이 포동포동진 양귀비의 누드 미녀상이 백옥으로 세워져 있었다. 몸을 비틀고 서있는 모습이 요염하였다. 실제는 이보다 엄청 더 예뻤다고 한다. 당대의 대시인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의 요염함을 이렇게 읊고 있다. ......... 부드러운 온천물에 고운 살결 씻고나니 시녀에게 부축되는 날씬한 그 몸매 황제의 사랑을 한몸에 끌었다네 검은 머리 고운 얼굴 한들한들 금목걸이 련꽃무늬 휘장속에 봄밤을 지새울제 봄밤이 너무 짧다 아쉬워 원망하며 조회 받는 시간조차 이때부터 늦어졌네 군왕이 즐기도록 잔치마다 모시였고 봄놀이도 따라하고 밤자리도 독차지 후궁에 아릿다운 3천궁녀 있었건만 3천궁녀 받을 사랑 제 한몸에 받았네 ........    당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하던 곳은 련화탕만이 아니라 해당탕, 성진탕, 상식탕, 태자탕 등 다섯곳이였다. 그것들이 지금 모두 원모양대로 보존되여 그날의 이야기를 하고있다.    9룡호옆에 있는 궁전에는 여기를 다녀간 황제들의 사진이 줄느런히 걸려있고, 련화탕옆의 오간청에는 장개석이 사무를 보던 사무실이다. 9룡호 못가에 서있는 양귀비 옥상너머에는 온수가 쏟아지는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고, 굽이굽이 돌아간 얕은 물에서는 금붕어들이 욱실거리였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애정생활은 당대의 많은 시인들의 필묵에 올랐다. 백거이는 장한가(长恨歌)라는 장시를 지어 그들의 부화타락을 비판하고 구들의 사랑의 비극을 애석해하기도 하였다. 두목은 <<화청궁을 지나며>>에서 <<말탄 사람 달려오니 귀비가 반기나니/려지를 가져온줄 그누가 알았으랴>> 하고 남방에 있는 과실-려지를 가져다먹는 양귀비의 사치를 질타하였다. 두보는 화청궁의 썩어빠진 생활을  <<주홍문에선 술고기 썩어나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백골이 뒹구누나 >> 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3.3만평방메트되는 고로한 황가원림은 옛날에는 황제들의 극락세계였지만 오늘은 관광명승지로 탈바꿈하였다. 지금은 일반백성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람을 올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귀빈들이 다녀가기도 한다. 1990년 6월 12일에는 강택민주석이 다녀갔고 1995년 1월 21일에는 호금도 주석이 다녀갔고, 1988년 8월 28일에는 일본수상이 다녀갔고, 1985년 11월 13일에는 미국 국무경 기신거가 다녀갔고, 2001년 6월 8일에는 멕시코 총통 부커스(福克斯)가 다녀갔다.     화청지를 떠나 호텔로 돌아오면서 당현종과 양귀비 생각이 그냥 머리에서 맴돌이쳤다. 양귀비야 당현종에게 붙어서 먹느라고 아양을 떨며 요염한 자태를 배배탈며 당현종을 삶았겠지만 당당한 황제인 당현종이야 왜 그런 비극의 길을 걸었을가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누구한테나 욕망이 있는것이다. 이 욕망은 한이 없는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한이 없는 욕망을 한이 있게 펴야 한다. 당현종에게는 세상에 부러울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이 없는 욕망을 한이 있게 절제하지 못하였다. 많이 먹으면 배가 터지게 되고 주색에 너무 빠지면 사업을 그르치고 명예를 휘두르면 반항이 온다. 자기 처신과 신분에 맞게 입고, 먹고, 쓸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것이다. 황제라 하여도 욕망을 억제하지 않으면 비극을 면치 못하는데  황제의 신하들이나 일반 관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당현종은 언녕 우리에게 반면으로 훌륭한 거울을 제공하였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것은 삶을 깨끗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비결이 아닐가. 26.안마풍파    저녁에 술한잔 마시고 침대에 누워서 잡담을 하는데 전화벨소리가 따르릉 울리였다. 안마를 청하는 아가씨의 전화였다. 호텔의 저녁에는 어디로 가나 오는 전화이다. 우리는 번마다 오는 전화요청을 밀막아 버리였다. 오늘은 서안구경도 하고 빨래할것도 없고 술한잔 마셨으니 피로를 잘 풀기 위하여 안마를 한번 받아보기로 하였다.    전화를 놓기 바쁘게 안마사 아가씨 둘이 웃으며 들어왔다.    진짜 안마를 할줄 압니까.    알고 말고요 안마가 직업인데요    진짜 안마를 못하면 내보내겠습니다.    그러세요    아가씨 둘이 안마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를 안마하는 아가씨 솜씨가 맹물이였다. 연길에 있는 나의 외조카가가 그전에는 안마사였다. 광주집단공사에서 연길에다 제일 처음으로 사우나를 꾸리고 안마사 3명을 배양하였는데 그중의 한 아이가 나의 외조카였다. 그에게서 안마를 받으면 진짜 피곤이 풀리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안마사를 불렀고 진짜로 하는가고 다짐까지 받았는데 어깨를 안마하는것이 안마가 아니라 물떡물떡하게 주물기만 하였다.    너 안마할줄 모르는구나.    알아요.    그렇게 주무르지만 말고 진짜로 해라.   우린 이렇게 해요.    그애들은 캐득거리며 좋아하였으나 나는 만족되지 않았다.    조형, 어때요 그애는 안마할줄 압니까.    그저 그렇소.    조형도 시들한 소리다.    너, 안되겠다. 안마할줄 모르는구나. 넌 나가고 딴애를 들여보내라.   아가씨는 눈빛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할수 없었다. 주물기우자고 돈을 파는것이 아니라 안마를 받자고 하는 일이니깐.    딴 안마아가씨가 들어와서 안마를 했다. 그런데 이 애도 망태기 안마사일줄이야. 나는  또 당했구나 하는 불쾌한 생각밖에 없었다.    얘, 돈을 줄테니 너 그만해.    예? 안마아가씨는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아직 멀었어요.    됐다. 이런 안마는 안마가 아니야. 내가 잘라 말하였다.     다른 서비스도 얼마든지 할수 있어요.    우린 그런건 안 한다.    안마를 한다는것이 몸이나 팔고 돈을 벌려는 애들임이 틀림없었다.    그때다. 갑자기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또 누가 오니.    아니 안 와요.    그럼 누가 문을 두드리니.    몰라요.    이런 대화를 하는데 경찰이 불쑥 들어섰다.    뭘하고 있는가 말씨부터 거칠다.    당신들은 뭘하는 사람이요. 왜 남의 침실에 함부로 뛰여듭니까.    난 경찰이요. 공무를 집행합니다.    경찰은 경찰증을 내보이였다.    나는 경찰증이 진짜인가고 받아보았다. 진짜는 진짜인것 같았다.    내가 경찰과 맞서는 사이에 아가씨들은 뿔뿔이 밖으로 나갔다.    신분증을 내놓으시오.    나는 신분증을 주었다.    저사람것도.    조형, 려권을 보잡니다.    조형이 려권을 내놓았다.    나는 조형보기가 안스러웠다. 별일은 없겠지만 경찰이 걸고 들면 시끄러울것은 불 보기다.     이때 뒤로 한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경찰을 불러내갔다. 이윽고 그사람이 신분증과 려권을 들고 들어와서    손님들을 놀래워서 참 미안합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하면서 신분증과 려권을 돌려주는것이였다.    안마는 호텔에서 경영하는것이 아닙니까 왜 경찰들이 지랄입니까 하고 나는 따지고 들었다.    오해입니다. 미안합니다.하고 무마하는 사람은 자기가 호텔의 안전을 책임진 보안인원인데 잠간 나갔다오는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 연신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쓰거워서 더 말이 나가지 않는데다가 조형이 옆에서 말리는바람에 더 따지지 않았다.    외부경찰이 우리가 안마를 하는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들은 서로 짜고 들어서 손님의 등이나 짜먹는 놈들이였음이 분명하였다. 미쳐도 한심하게 미친놈팽이들이였다. 남자 둘이 한방에서 함께 안마를 받으면서 어떻게 애들의 바지를 벗기며 놀리라는 생각을 한단말인가.    이튿날 나는 카운터에 가서 거짓말로 분명하게 쏘아주었다. 당신들이 어제밤에 추태극을 노는바람에 한국인이 여기 투자하러 왔다가 기분이 상해 돌아간다고. 27.천수시 맥적산에서 발이 떨려   감숙성의 천수시에서 차를 타고 60리가량 달려와서 차에서 내리니 우리가 찾아가는 맥적산(麦积山)이 한눈으로 들어온다. 기슭으로부터 산중턱을 훨씬 넘어까지는 깎아지른 벼랑이고 그위에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산의 생김새가 밀낟가리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의 이름을 밀낟가리 같다고 하여 맥적산이라고 불렀단다.   가을 가랑비가 내린다. 흐리터분한 날씨이다. 바람 한점 없다. 집을 떠나서 처음으로 맞는 비다. 하늘이 국수를 누르는것만 같다. 가는 국수국수오리를 무수히 드리우고 있다. 우리는 그 가는 국수오리들이 싫지 않아서 국수오리들 속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 먼산들은 몽몽한 안개속에서 보일듯말듯 헤염치며 몸을 씻고 있었고 가까운 곳 사람들은 가을의 가랑비를 그대로 맞고 있다. 한참 가는데 길이 두갈래로 갈라지였다.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맥적산에 빨리 닿을것 같아서 그리로 발걸음을 잡았다. 산밑에 작은 집이 나타났다. 그곳이 표를 파는 곳이려니 했는데 아니다. 수림속에 아담한 집은 손님들이 짐을 보관하거나 화장실이있는 집이였고 안에는 휴식실도 딸려있었다. 그 집을 둘러싼 울바자를 빠져나가 조금 올라가니 맥적산 석굴입구가 나지였다.    이곳 맥적산의 석굴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4대석굴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미 운강석굴 룡강석굴을 보았고 오늘은 맥적산석굴을 본다. 이제 하나가 남았는데 돈황석굴이다. 맥적산석굴은 후진 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산에다 불상을 조각하고 절간을 세웠다. 위문제의 황후가 죽자 맥적산 벼랑에다 감실을 만들고 매장하였다. 북주 보정, 천화년간에 진주대도독 리윤신이 사망된 아버지를 위하여 칠불각을 수건한곳도 이 맥적산이였다.    해발 2000메트되는 맥적산을 올려다 보니 산밑에서 20-30메트되는 곳에서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70-80메트되는 높이까지 석굴이 층층이 덥히여 벌둥지를 방불케 한다. 어찌 벌둥지처럼 보이지 않으랴. 여기에는 북위, 서위, 북주, 수나라, 당나라, 오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 청나라 등 여러 조대의 크고 작은 동굴이 194개나 있고 돌조각상과 흙조각상이 7200여개나 있고 벽화 1300평방메트나 보존되여 있는 곳임에랴. 불상은 조각공예가 아주 정교하고 생동하고 큰 불상의 높이는 16메트이고 작은 불상은 10센치메트도 안 된다. 석굴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맥적산석굴은 돈황의 장경동석굴과 비슷한 석굴이라고 거론하고 있는데 축성년대로 보면 돈황의 막고굴보다는 20년가량 늦고 대동의 운강석굴이나 락양의 룡문석굴보다는 반세기 앞서 완성된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맥적산 석굴이야말로 <<동방조각의 궁전>>이라고 할수있다고 기술돼있을만큼 그 가치를 높게 보는 이들도 있다.    가파른 산의 오솔길을 톺아올라서 단김을 뽑으며 입구를 지나려하는데 문지기가 앞을 가로 막는다. 그때에야 나는 표를 떼지 않았다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어디서 표를 떼는가 물으니 저쪽이라고 가리킨다. 표값이 한사람당 60원이란다. 문지기가 가리키는 대로 바라보니 표떼는 곳이 너무 멀었다. 여기다 표값을 내고 들어가자니 아니 된단다. 표떼려 갔다올 일이 아득하다. 문지기가 한사람인지라  내가 돈 50원을 줄테니 우리 둘을 올라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딱 잡아떼는것이였다. 그래서 어디서 표를 파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때 한무리 손님들이 표를 보이며 다가서고있었다. 그는 손님들이 오는데 길을 비키고 좀 기다리라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어느 고양이가 쥐고기를 싫어하고 어느 사람이 돈을 싫어하랴. 돈 50원은 여기서 큰 돈이다. 온 하루 표를 받았대야 그에게 공짜로 차례지는 이 50원돈보다 적을것은 뻔하였다. 조형이 왜 표사러 가지 않는가고 하였다. 나는 좀 기다리라고 하였다. 한무리 손님들이 다 들어간다음 나는  50원짜리 한장을 문지기손에다 쥐여주면서 문안을 넘어섰다. 조형도 나를 따라 넘어섰다.그래서 엉터리 입장을 한번 해보았다.    맥적산석굴은 깎아지른 벼랑에다 수건한것이여서 올라가는것은 철란간을 잡고 층층계를 요리조리 에돌아 올라가게 되여있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불상들은 운강석굴이나 룡문석굴의것과는 완전히 다른 불상들이였다. 선이 부드럽고 살이 보동보동한  불상들이였는데 불상들마자 생생하게 살아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대패로 나무를 밀어놓은것처럼 하였을가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여러 가지 색깔을 올린곳도 색이 날지 않아 선연한 그대로 였다. 닫집들을 하나하나 지나면서 세심하게 뜯어보다가 여기의 불상들은 진흙으로 만든것이라는것을 발견하였다. 속에다는 갈대같은것을 넣고 그우에다 진흙을 발라놓은것이였다. 수천년간 비를 맞지 않아 말라 굳어진대로였다. 인물자태가 감동적이고, 선이 류창하고, 표정이 살아있는 같고, 색채도 중복되는 곳이 없고, 진흙으로 일매지고 부드럽게 만들어놓아 질감이 확연하게 안겨왔다. 16메트나 되는 제일 큰 불상앞에 섰다. 몸의 형태가 풍만하고 얼굴이 자애로운 수나라 작품이였다. 칠불각의 천정의 벽화는 희한하기 그지없는것이였다. 마차와 사람을 그린것으로서 조형이 독특하였다. 어느 각도로 보나 그림속의 말들이 가는 방향이 각각이여서 경의로왔다.    최초의 맥적산불상들을 보면 복장에서 인도의 정조가 은은히 내비치고 만년에 만든 불상들에서는 중국과 외국의 풍격이 융합되여 새맛이 풍기였다. 전문가들의 감정에 따르면 제일 값진것들은 비굴(飛窟),우아당(牛儿堂), 마불당( 万佛堂), 천당동(天堂洞), 123굴, 84굴이란다. 최근에 와서 새롭게 장비동(藏碑洞)을 발견하였는데 123굴이다. 굴안에는 21개의 돌로 만든 조상비(艁像碑)가 있는데 18개가 완정한것이고 3개가 엄중한 손상을 입은것이였다. 이 18개의 조상비는 불교를 전달하는 이야기와 천불설법도 들이다. 부동한 시대 부동한 장인들이 만든 조상비였는데 많은것은 북위중기와 말기 그리고 서위시대의 풍격이다. 전문가들은 이 조상비들은 돈황의 장경동과 맞먹는 가치를 갖고있다고 평하고있다.    한참 구경하다가 돌아서서 바라보니 산발들은 내가 서있는 석굴앞을 막으며 뉘연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수림이 울창하였다. 푸른 소나무가 많아서 산은 푸른 산이다. 그 푸른 수림에 안개덩어리 서너개가 여기 저기서 혼곤히 취한채로 잠을 자고있어서 하늘의 선경을 방불케 하였다. 소나무숲과 안개가 만든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있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아찔하였다. 아스라하게 깎아지른 벼랑에 나홀로 달려있는것만 같아서 두발다닥이 전기에라도 닿은듯이 찡찡 저려났다. 철판으로 만든 길이 한사람이 겨우 통하게 되여있는데 란간을 붙잡고 왜 이러나 떨어안져 하고 속으로 되뇌이며 앞으로 걸어나갔지만 발바닥은 그냥 찡찡하다. 평평한 곳으로 갈 때는 괜찮은데 한층계 또 한층계 내려갈 때면 더구나 찡찡거려서 나는 구경이고 뭐고 란간을 꼬옥 잡으며 먼저 내려오는수밖에 없었다. 내 심장과 내 담이 왜 이렇게 작아지는지는걸가? 올라올 때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게 뒤문치기를 하여서 하느님이 징벌하는것일가?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들었다. 불교란것은 사심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림해야 도에 득달하는것이 아닌가. 불교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보면 때가 여러겹으로, 땅땅한 조개껍질처럼 나의 온 몸을 휩싸고있을것이다. 속세를 벗어나야 이런 조개껍질들이 없어지련만 나에게는 속세를 벗어날 용기가 아직은 없다. 속세는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돌아가면 될수록이면 모든것을 관용적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뇌리를 잠식하고있었다. 28.란주의 풍경    란주(兰州)에서 하루밤을 잔 이튿날, 허동식시인이 우리가 든 호텔인 금관대주점으로 찾아왔다. 어제밤에 란주에 온 우리를 마중하고 저녁까지 한상을 잘 차려주었던 시인이다. 키꼴이 훤칠한 허동식시인을 마나기는 란주에 와서 만났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가이드였다. 리임원시인의 소개로 허동식시인과 우리는 언녕부터 련계가 있던터였다. 우리가 대동의 운강석굴이며 산서의 오대산이며 정주의 소림사며 락양의 룡강석굴에 든 관광코스는 모두 허동식시인이 가리켜준것이였다. 그러니까 서안으로 가기전까지의 우리 려행의 막후지휘자가 허동식시인이였던것이다. 금관대주점은 4성급호텔인데 숙박비가 250원이 넘는다. 그런데 란주에서 한 려행사의 부문경리로 사업하고있는 그가 우리 요구대로 120원으로 들게 하였던것이다. 그는 화룡고중을 졸업하고 북경의 재무학원을 졸업하고 련인을 따라 란주로 간 사람이다. 나와는 한 고향인 셈이고 선후배 관계여서 우리 사이는 인차 무람없는 사이로 되여버리였다. 게다가 그도 시를 쓰고 나도 시를 쓰니까 서로 오가는 말이 우리사이의 장벽을 지워버리였다.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젊은이였다.    허동식시인은 란주에 가있지만 연변문단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사람이였다. 어쩌다 연변으로 오면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 서점이고 사는 책은 연변시인들이 출판한 시집이란다. 그에게는 연변시인들이 시집이 기본상 다 있단다.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연변시인, 아니 중국조선족시인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에 대한 견해도 밝았다. 시를 보는 그와 나의 관점은 대동소이하여 우리둘 사이에 말이 잘 통하였다. 특히 그는 김정호시에 대하여 력점을 두고 그의 시가 기법이 새롭고 신선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미 시집 한권을 출판한 그는 중국에다 한국시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위하여 많은 시를 번역하였고 지금도 번역하고있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출판할 예정이란다. 리임원시인과 막역한 사이인 그는 리시인의 시집도 번역하여 놓고 출판기회를 기다리고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오지에 가 있으면서 우리 말과 언어를 살리겠다고 애쓰는 그의 마음에 나는 심심한 감동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어제 저녁에 술을 많이 마셨으니 란주에 와서는 칼국수로 해정을 해야 한다며 택시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우리가 택시에서 내린 곳은 작은 음식점들이 오롱조롱 두줄로 모여있는 작은 골목이였다. 그는 우리를 마자록우육면관으로 안내하였다. 여느 음식점들은 손님이 한사람도 없는데 이 우육면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있었다. 벌써 상마다 사람들이 만원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손님이 매표구에서 표를 떼고 우육면은 손님절로 받아다먹게 되여있었다. 한 20명 줄을 섰는데 우육면을 받으려고 선 줄이였다. 우육면 한그릇 값은 3원이였다. 네댓씩 앉을만한 상들이 여람개 있는 작은 식당이지만 흥성흥성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 식당은 이른 아침부터 온 하루 손님이 흥성거리는데 점심저녁에는 늦게 오기만 하면 반시간쯤 기다리는 손님들이 가득하단다.    마자록우육면이 인기를 끄는데는 그 맛이 특별한데 있었다. 칼국수가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소고기 국물인데 매콤한 맛이 겻들어서 시원하기도 하고 따끈하기도 하여 먹으면 기분이 나고 속이 편안하였다.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은 해정이 잘 되고 입맛이 떨어진 사람은 입맛을 돋구어주기에 안성맞춤이였다. 그래서 300만이 살고있는 란주사람치고는 이 식당에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고, 한번 와서 먹어보고는 다시 찾아오는 사람이 헤아릴수 없이 많단다. 먹어보니 실로 란주의 명물로 되기에 손색이 없을것 같았다.    이 식당주인 마자록은 80대 령감인데 지금도 꼭 주방에 나와서 일을 보고 계신단다. 100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이 식당음식은 마자보라는 조상이 만들어 퍼뜨린것인데 오늘까지도 란주시에서는 이 가보를 초월하는 사람이 없다는가. 마령감은 우육면 한그릇에 3원씩 팔아서 아들 6형제를 어려움 없이 공부를 시켜 외국에까지 내여보냈다니 얼마나 많이 팔았겠는가를 어찌 상상할수 있으랴. 의사가 병을 떼는 밀방이 있으면 떼돈을 번다는 말은 들었어도 조상이 물려준 한가지 음식으로 떼돈을 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였던 나는 세상이 넓다는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였다.    마자록우육면관에서 황하는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여기의 황하는 누런 물이 아니라 푸른 물이였다. 백탑산으로 올라가려면 황하대교인 중산다리를 지나야 하였다. 이 다리는 황하에 제일 처음 놓인 다리다. 명나라 홍무년간(1368-1398)에 놓은 다리인데 백은 30만 6000냥을 들였다고 한다. 천여년의 력사를 지니고 있는 황하의 첫다리를 밟아본다는 의미가 있어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 한결 상쾌하였다. 무한장강대교를 걸어 중간에 가 서니 약간씩 상하로 진동하는 감각을 느낄수 있었는데 란주황하대교는 무한 장강대교보다 짧아서 그런 감각은 없었다. 지금은 란주지역에 24개의 황하다리가 있어 황하다리 박물관을 이루고있다겠다.    백탑산은 란주시의 황하북안에 우뚝 솟아있다. 산우에 백탑이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을 백탑산이라고 부른다. 산아래에 금성관과 옥질관이 있는 백탑산은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였다. 산의 지세에 따라 건축군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대루각이 웅위롭다. 패방, 라한전, 백탑사, 삼궁전, 삼성전, 영욱객각 등 건물들이 백탑산의 기개를 돋구기도 한다. 산은 수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수려하다. 동,서,북 세봉우리에 동풍정, 회우정, 목단정이 있어 이채롭다.    백탑산봉우리에 올라가니 란주시가 한눈에 안겨온다. 해발 1500메트나 되는 고지대에 자리잡고있는 란주시는 황하를 끼고 동서로 35키로메트나 기다랗게 앉아있다. 너비가 제일 좁은 곳은 1키로메트다. 300만이 살고있다는 란주시는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벽돌과 세멘트로 지은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가까운 곳은 잘 보이지만 먼곳은 매연에 잠기여 보이지 않았다. 옥문유정이 개발되면서 일어선 도시였는데 옥문유정이 맥을 추지 못하게 되자 어제날의 산업도시로부터  지금은 고신기술도시로 탈바꿈하느라고 모지름을 쓰고있단다.    백탑산우의 백탑은 말과 같이 새하얀 탑이다. 8각모양으로 둥근 탑인데  일곱층우에다 푸른 지붕을 얹어놓았다. 높이는 17메트다. 멀리서 보면 하얀 빛이 눈부시고 가까이서 보면 하늘을 찌르고 우뚝 솟아 만리창공을 받치고 선 기둥을 방불케 한다.    백탑옆에는 이름도 신비한  조롱박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안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롱박공예품들이 가득 진렬되여 있는데 조롱박에다 좁쌀알만큼한 글씨를 새겨 놓았는가하면 그림을 그려놓은것도 있다. 눈으로 보기에는 무슨 글을 써놓았는지 알수 없지만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의 글자가 인쇄한것처럼 똑똑하다. 인간의 섬세한 기교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러 가지 모양의 앙징스러운 벼루돌들도 조롱박박물관의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있다. 란주의 도화석은  안휘성의 흡현석과 광동의 단계석과 함께 중국에서 유명한 3대벼루돌이란다.    란주의 황하가에는 공원을 꾸려놓았다. 우리는 강변을 거닐면서 서유기를 형상한 조각도 보고 어머니와 아기 조각상도 보고 물레방아전람관도 돌아보았다. 아기가 어머니 배우로 기여올라가는 조각상은 란주의 상징의 하나라고 하고, 물방아전람관에는 엄청 큰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중국에서 유명한 곳이란다. 황하에서는 시베리아에서 온 오리들이 두셋씩 노일고있었다. 백탑산, 황하 , 철교, 강변공원은 란주의 자연경관을 이루어 유람자들의 휴식의 한때를 보내기에는 족한 곳이였다.    허동식시인이 갑자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였다.    골동품 세개가 있는데 유태인, 중국인,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면 어떻게 장사를 하는지 압니까?    그래 어떻게 한다오? 내가 물었다.    유태인과 중국인은 하나씩 가진것을 높은 값으로 팔려고 하고 한국인은  한 열개쯤 모조품을 만들어 판답니다.   왜서라오?   유태인과 중국인은 진품의 가치를 받으려고 하고 한국인은 개수를 늘구어서 눅게 빨리 팔려한답니다.    우리 모두가 하하하 웃었다. 은근히 큰것을 노리는 유태인과 중국인, 약빠른 한국인을 형상한 이야기랄가. 나는 조형에게 이야기가 맞는가고 물었다. 조형은 시무룩해서 확연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허동식시인은 또 큰 웃음을 토했다. 날씨가 맑아 하늘이 상쾌하고 웃음을 웃어서 마음도 상쾌한 하루였다.    백화상점을 돌아보면서 동식시인은 또 엄청난 이야기를 하였다. 얼마전에 란주의 한 상점에서 텔레비죤을 저울에다 근을 떠서 팔았단다. 5000원씩하는 텔레비죤 한대를 저울에 달아파니까 1900원쯤 되더라는가. 그날 그 상점에는 텔레비죤 사러간 사람들로 부글부글 끓어번지였단다. 그 기이한 판매가  한때 란주의 충격적인 화제로 되여 사람마다  흥분하였다나. 29. 천하웅관 가욕관(嘉峪关)     감숙성의 서남에 자리잡고 있는 가욕관호텔에서 밖에 나서니 맵짠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날씨가 령하 20도로 떨어지였던것이다. 손이 시려나고 얼굴이 시려났다. 길을 떠난후 처음으로 당하는 추운 날씨여서 몸이 오싹오싹해났다. 바람은 죽을 놈은 나오라고 소리치지만 우리는 호텔에 처박혀있을수가 없었다. 조형은 있는 옷들을 다 주어입었다. 옷이래야 두벌밖에 안되였던것이다. 나는 겨울추위를 그냥 겪으며 난 사람이니까 별문제로 생각되였지만 조형이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랴싶어 은근히 근심스러웠다.    가욕관은 우리나라 만리장성의 종점이 있는곳이다. 가욕관은 기련산 설봉과 마종산 여러 봉우리들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지세가 험난하고 건축이 웅위로와 예로부터 천하웅관이라고 불러왔으며 고대 비단의 길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관액이였다. 가욕관은 명홍무 (明洪武)5년부터 명정덕 (明正德)년까지 건설한 옛도시이다. 시초에는 층집이라곤 없었던 고장이였다. 성을 쌓고 성루를 만들었다. 점지면적이 33500평방메트이고 둘래의 길이가 733메트, 성루높이가 10메트, 성벽높이가 1.7메트인 성을 쌓았었다. 동서로 문을 내였는데 동문은 광화문이라 불렀고, 서문은 유원문이라 불렀다. 문마다에 성루가 있었는데 그 높이가 17메트. 삼층으로 처마를 내였는데 처마들은 정교하고 령롱하였다. 관성의 네 귀에다 누각을 건설하고 남북량면성에다도 적을 대체하는 성루를 앉히였다. 성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가욕관 시내에 널따란 길이 가로세로 시원하게 뻗어있었다. 멀리 바라보면 고비사막에 쌓아놓은 장성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아련하다. 서쪽에는 옥문유정의 시추기들이 수풀처럼 바라보이고 북산기슭에서는 등호의 푸른 물결이 아른거린다. 성남쪽의 기련산의 면면한 봉우리들이 새하얀 눈속에 잠겨있는데 은뱀들이 구불거리는것만 같아 그림처럼 아름답다. 서쪽문으로 나와 돌아서서 보면 가욕관이라는 세 글자가 성을 덮었는데 이 문이 바로 옛가욕관의 정문으로서 고대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였다. 동쪽성밖에는 문창각, 관제묘, 교예루들이 있는데 모두 청나라때에 건축한 건물들이다.   서쪽문안에는 가욕관장성박물관이 있다. 1989년에 건축한 이 박물관은 장성형식으로 건축되였고, 력대의 장성건축사를 펼쳐보이고 있다. 박물관의 점지면적은 1.1헥타르이고 건축면적은 2813평방메트다. 박물관안은 주요한 진렬청과 보조진렬청 다섯개가 있다. 박물관출입구에 가서 박물관을 보면 웅위롭고 호한한 감이 든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거리에는 락타조각상들이 줄을 지어서서 서북의 풍경을 이루고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장성이 끝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득한 고비사막의 한곳에 노란 자갈과 흙으로 다져진 장성 마지막 토막이 우뚝 솟아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토막을 장성제일돈(长成第1墩)이라고 부르고 있다. 장성제1돈의 남쪽은 사오십메트깊이로 패여있었는데 시내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장성토막은 명나라때 쌓은것인데 수백년 세월이 지나갔건만 고비사막에서 력사를 견증하고 있었다.  장성제일돈에서 시내로 들어온 우리는 시장에 나가서 양가죽털수갑을 사고 계도실로 뜬, 눈만 내놓을수 있는 모자를 샀다. 수갑이 연길에서는 몇십원을 줘야 살것이였지만 거기서는 한컬레에 14원 헐값이였다.    오후에 버스를 타고 돈황으로 떠났다. 머리에 털이 나서 처음으로 보는 고비사막은 광활하고 무한하다는 말이 고비사막에서 나왔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득히 먼곳에서 기련산맥의 산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데 기본상 산이라는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때론 새까만 색갈의 고비사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누런 색갈의 고비사막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띠염띠염 있는 풀들은 모두 고슴도치 같기도 하고 물우에 뜬 부표같기도 하였다. 가도가도 아득한 고비사막, 가도가도 인적이라곤 없는 황량한 고비사막... 30.꿈에도 그리던 돈황(墩煌)의 막고굴     돈황! 돈황으로 간다는것은 오매에도 그리던 일이다. 그것은 돈황에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막고굴이 있을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유명한 조선족화가 한락연이 돈황벽화를 그려내여 지금도 중화 그림력사의 한자리를 빛내고있다. 수십년간 돈황이라는 곳이 어떤곳인가 한번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난적이 없었다. 이번길에 그 숙원을 풀게 되어 마음은 적이 격동되기도 하였다.    돈황은 감숙성의 하서주랑의 서쪽에 있다. 돈황의 옆으로 당하가 흐르고있다.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돈황은 요순시기에는 선민들이 방목하던 고장이고 춘추시기에는 농업이 발전한 곳이다. 돈황이라는 이름은 휘황한 고장이라는 뜻이다. 한나라때에 돈황군이라 불렀고 동진시기에는 서량국도(西凉国都)였고, 수나라때에는 과주(瓜州)라 불렀고, 당나라때에는 사주(沙州)라 불렀고, 송나라때에는 서하에 속하였고, 청나라때부터 다시 돈황이라 불렀다. 돈황은 고대에 아세아주와 구라파주를 련결하는 교통요충지였고 비단의 길에서의 서쪽의 중진이였다. 돈황은 석굴이며 옛무덤이며 한나라때 성이며 옛역전등 고대 문화유물이 241곳에 별무리처럼 널려있는 고장이다. 돈황의 동남쪽에 있는 막고굴은 중국의 4대석굴의 으뜸으로서 4세기로부터 14세기까지의 천년의 벽화와 조각예술품들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돈황을 인류문명의 서광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있다. 성남에는 또 수려한 명사산과 월아천이 있어 려행가들은 이 려행도시를 언제나 눈박아본다.    돈황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리에 가로등불빛이 환할 때였다. 란주에 있는 허동식시인이 돈황에 가면 아무개를 찾아보라고 하여 우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고 인차 달려왔다. 보통키에 시원시원한 말씨였다. 그런데 하마터면 그에게 걸리여 골탕을 먹을번할줄이야. 그의 안내하에 한 호텔로 들어갔는데 호텔비가 250원이란다. 비철인데 내리워 달라해도 딱 잡아떼고 내리우지 않는다. 돈황은 유명한 곳이여서 아직도 유람객이 붐비는 모양이다 하고 드는수밖에 없었다. 짐을 부리우고 저녁먹으러 나왔다가 나는 슬그머니 옆에 있는 림업호텔을 찾아가서 방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90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조선족가이드라고 믿었다가 하마터면 깜때에 넘어가서 2,3일숙박에 호텔비만 하여도 몇백원이나 되는 헛돈을 팔번하였다. 하긴 그도 우리처럼 멋도 모르고 뛰여드는 관광객을 붙잡고 팁이라도 받아먹어야 이 겨울을 날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크게 밉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짐을 림업호텔로 옮기였다.   돈황의 동남쪽으로 50리가량 떨어진 막고굴로 아침 일찍이 떠났다. 막고굴앞에는 골동품을 파는 시장이 여러개있었다. 남북으로 1600메트되는 막고굴은 상하 다섯층으로 되어있지만 무성한 나무들이 앞을 가리워 출입문을 들어서지 않고서는 그 굉장함을 볼수 없었다. 출입구에서는 보위일군들이 사진기며 록화기며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단속하고있었다. 출입구를 지나자 높고 낮은 천불동이 층층이 줄지어있었다. 막고굴은 우리나라 석굴예술에서 최대의 규모를 갖춘 석굴로서 내용이 제일 풍부하고, 예술적가치가 제일 높고,  4대석굴중에서 명성이 제일 높아 1987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에다 이름을 적어놓은 문화유물이다.   한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흉노를 전승한후 내지의 이민들을 동원하여 여기에 와서 개간하게 하면서 돈황등 여섯개현을 건설하였는데 이곳을 옛날에는 하서주랑이라고 부르면서 600키로메트 장성을 쌓고 군사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때 돈황서쪽부터 지중해까지 서역이라고 하였다. 비단의 길이 여기서 신강으로 들어가는데는 세갈래길이 있었다. 이 세갈래길이 모두 돈황이 출발지점이였다. 그리하여 돈황은 교통요충지로 되었고 불교를 동방에 전파하는 제일역으로 되었다. 그래서 돈황석굴이 산생하게 되었던것이다.   막고굴은 전진건원(前秦建元)2년으로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세월의 풍화작용과 인간의 파괴로 인하여 많은 손상을 보았지만 지금도 16국, 북위, 서위, 북주, 수,당, 5대, 송, 서하, 원대 등 력대의 석굴들이 492굴이 있다. 굴내에는 벽화가 도합 45000평방메트가 있고, 채색조각이 2400여개가 있다. 또 당송목조건물이 5좌가 있고, 련꽃석주와 꽃벽돌이 수천개가 있다. 돈황의 막고굴은 건축, 회화, 조각 세가지가 결합된 종합예술의 보물고이다.   청광서 2년(1901년)에 막고굴은 우연하게 발견되였다. 도사 왕원록(王圆菉)이가 동굴앞의 모래를 청리하다가 굴을 발견하였다. 굴안에는 만으로 헤아리는 경서며, 필사본이며 문서며, 수놓이 방직품이며가 있었는데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 의하여 하나도 썩지 않고 완정하게 보존되여있었다. 그 굴이 지금의 제17굴 장경동이다. 이 굴을 사람들은 <<중고시대의 백과전서>>라고 한다. 왕원록도사는 이 사실을 당년의 감숙학정  엽창치(叶昌炽)한테 보고한다. 엽창치는 국가의 보물이므로 봉하라고 한다. 굴은 봉하였어도 소문은 봉하지 못하여 1908년에는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A스타인이 찾아와서 6000점의 고대미술품을 락타 40마리에 싣고 갔고, 그후 7년뒤인 1914년에 다시 찾아와서 경서류 600권을 더 가져갔다. 스타인이 왕원록에게 던져준것은 마제은 (马蹄银) 40개였다.이 유물들은 지금 영국의 대영도서관과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고 한다. 영국의 뒤를 이어 이듬해인 1908년에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막고굴을 찾아왔다. 당시 베트남의 하노이에 있는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그는 신비한 세계였던 동양에 대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하다가 스타인의 횡재소식을 듣고 달려왔던것이다. 그는 한달동안이나 막고굴을 누비다가 고대문서중 6600점을 선별하여 가져갔다. 조형의 말씀에 의하면 6600점중에 신라의 혜초(慧超.704-787)가 쓴 필사본 <<왕오천축국전>>도 끼여있었다고 한다. 펠리오가 가져간 막고굴유물들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기메미술관에 소장되여있다고 한다.   유럽학자들의 뒤를 이어 1910년에 일본의 오타니 고이즈가 탐험대를 조직하여 돈황에 파견한다. 오타니 탐험대는 서안에서 락타를 타고 2000여 키로메트를 걸어 88일만에 겨우 돈황에 도착한다. 천신만고 끝에 온 오타니탐험대는 왕원록을 설득하여 경서류 1000점을 빼내는데 성공한다. 그들이 빼내간 귀중품들은 일본도꾜국립박물관과 류코크대학에 소장되였는가하면 중국려순 박물관에도 소장돼있고, 한국국립박물관에도 소장돼있다. 그후 1915년에는 로씨야탐험대가, 1925년에는 미국의 탐험대가 달려들어 나름대로 수단을 아끼지 않고 가져갔다.    돈황의 마고굴력사를 소급해보면 왕원록은 국가의 보배를 팔아먹은 놈이다. 일본은 동북과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였으니 영원한 자기네 땅인줄로만 알았던 유치한 침략자였다는것을 알게 된다. 조철호형은 기행문에다 <<우리는 그나마 쓴웃음이라도 지을수있으나, 일본은 울며겨자먹기여서 돈황유물말만 들어도 분통이 터질일일것이다>> 라고 피력하고 있다.    막고굴 불상의 특점은 모두 진흙을 발라서 만든다음 채색을 올린것이다.불상의 량측에는 제자, 천왕, 보살, 힘장사들이 시립하여있는데 적으면 셋, 많으면 11명까지이다. 제일 큰 불상은 높이가 33메트이고, 제일 작은 불상은 10센치메트이다. 북위와 서위때 작품이 조형이 간결하고 선이 분방하고, 몸체가 뚱뚱하고, 색갈사용이 대담한것이 특점이다. 제259굴의 불상의 모습은 표정이 밝고 치켜든 입술에는 회심의 미소가 흐르고있어 사람들은 동방의 몬나리자라고 한다. 수나라때의 불상들은 인물풍도를 추구하여 얼굴모습이 호화롭다. 당나라때의 조각예술은 정묘하고 청신하여 보살이 숙녀같고 천왕은 용맹한 무사같다. 제45굴의 관세음보살은 성당때에 채색진흙으로 만든것인데 외표가 아름답고, 마음과 체형의 조화가 잘 되여 속세를 벗어났다. 웃는가 하면 웃지 않고 기뻐하는가 하면 기뻐하지 않고 인간세상의 여러 가지 심리표현이 융합되여있어 돈황조각예술의 으뜸으로 친다.   막고굴의 벽화는 돈황의 예술에서 수량이 제일 많고 성취가 제일 큰 벽화이다. 벽화의 내용 대부분이 불교를 전수하는 제재이다. 나머지는 당년의 각계각층의 생활을 반영한것들이다. 고기잡이, 농사짓기, 도자기 만들기. 곡식을 찧느라고 매돌을 돌리는 등 여러 가지 생산활동이 그려져있다. 수레, 선박, 농구, 물레, 베틀은 물론 궁정, 성시, 정자, 루각, 탑, 사찰, 점포, 부두 등 고전건축모습이 여러면이 보인다. 여러조대의 벽화들중에서 당대의 벽화수준이 제일 높다. 당대의 벽화는 종교와 현실생활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궁전시녀들로 모델을 삼고, 서천불국의 정경을 표현하여 인물이 숨쉬는 듯 생생하고 형상이 아름답다. 례하면 112굴의 벽화의 서방정토변(西方净土变) 중의  락무(樂舞)에는 피파를 치는 모습이 그려져있는데 자태가 아름답고 무녀의 형상이 생동하여 사람들은 돈황예술의 상징이라고들 한다. 막고굴의 벽화에는 많은 그림이 가무를 표현한 그림들인데 거기에 나오는 천녀들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여 비천이라고 일컫는다. 화가들은 간결한 필묵으로 천자락을 날리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천녀들을 그려내여 그 형상이  절묘하다. 그녀들은 채색구름을 타고 머리를 추켜들고 날아다니기도 하고, 구름우에 편안하게 앉아서 북을 두드리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하고, 공중에 꺼꾸러 서서 손을 들어 피파도 치고, 무리를 지어 춤을 추면서 꽃을 날리기도 한다. 실로 천백만 모습의 천녀들이 하늘을 달아다니여서  꽃들이 만발한 화원을 이루었다. 이러한 비천의 형상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재현되여 건축물들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용품들에도 많이 나타나고있다. 285굴은 서위시대의 작품의 정화로서 녀와로부터 화생동자에 이르기까지, 비천으로부터 선사에 이르기까지, 그 배치로 보나 색채로 보나 인물의 세절이 생생하고, 실감이 짙고 화려하면서도 속되지 않고, 아름다우면서도 경박하지 않아서 보는 사람마다 놀라게 한다.    막고굴의 장경동에서는 5세기로부터 11세기에 이르는 10개조대의 경서, 문서, 그림, 동상 등 문화유물이 6만여점이 발굴되였다. 이는 우리나라 고대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종교, 과학, 예술, 민족, 력사, 대외교류 등 각종분야를 연구하는데에 귀중한 연구재료를 제공하였다. 지금 이재료들은 세계적으로 돈황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큰 중시를 받고있다.    막고굴은 신비한 세계이며 기의한 세계이다. 여건이 허락되면 누구나 한번쯤 가본다는것은  삶의 질을 풍부히 하는 향수라고 아니할수 없다.  
33    금단의 열매. 6(미성년불가) 댓글:  조회:1997  추천:91  2008-10-30
등.1밥내음 채내음 장내음에 그슬어참나무 자작나무 피나무에 그슬어까만 빛이 돋은 중도리에 못 박고벌들광주리를 달아매였다광주리속에 기저귀를 펴고담요위에 아기를 눕힌다기막힌 요람 하나엄마는 흥흥 노래 부르며요람을 밀었다당겼다요람이 흔들린다 아기가 흔들린다엄마가 흔들린다달같은 우리 아기 잠 잘 자거라한잠 자면 한뼘 크고 두잠 자면 두뼘 큰단다해죽해죽 웃는 아기엄마 맘에 해를 띄운다엄마 맘은 구석까지 환하다해님같은 우리 아기 무럭무럭 자라나서큰 사람 되여 산을 옮기지큰 사람 되여 바다 옮기지아기는 요람이 좋아서 웃고 엄마는 요람속 아기 귀여워 웃고요람은 서서히 흔들거린다등. 2폭신한 소파에 몸을 던지면새털손으로 애무해 준다부르튼 발을 찬물에 담그고온 몸에 싱싱함을 빨아올린다구름 수레 타고 구만리 하늘로부채를 슬슬 저으며  오간다찌지는 8월의 서늘한 그늘 베고드렁드렁 코를 곤다여무는 얼음 짱짱 금을 그으며 웨치듯실피줄마다에서 진동하는 맥바람에 멀리멀리 실어보낸다시래기처럼 너부러졌던 나를아무러한 람루를 걸치여도아무리 어츠러운 얼굴이여도항시 포근히 앉을수 있는 나의 소파여등.3쪼르르 미끄러져 내리면 꽃이 된다또르르 굴러내리면열매된다신비한 미끄럼대야불에 단근질해서 그리도 일매지나물에 담근질해서 그리도 매끄럽나내가 쪼르르 굴러 내려도꽃이 되나내가 또르르 굴러내려도열매되나등. 4어깨 홈은 눈눈으로 못보는 등뒤를 본다척추의 홈은 코코로 못 맡는 등뒤 냄새를 맡는다척추골아래의 능형은 입침묵은 너의 숙명이다능형좌우의 홈은 보조개누구 목을 추기자고자란자란 샘물을 고였는가등에 신비한 오관이 있어여성의 등뒤는 해맑은 날씨엉덩이 . 1먼길을 걸어간 레우를 받들고묵묵히 누워그 많은 짐들을 실은그 많은 인간들을 실은 기차를 떠나보내는 침목아해맑은 유리들이 알른거리는초가집 별돌집 아파트...머리 한오리 보이잖게 땅에 묻힌채이름없이 춘하추동 수십수백년 이고 선기초돌아한송이 꽃보다휘초리 먼저 알아야 하는 일 드문해도한마디 내비치지 않는다요 깜찍한 무골충아엉덩이 . 2하나의 쪽지에 달린 한쌍 복숭아팔월의 가지끝에서 대롱 익었다푸른 잎새로 붉직한 얼굴 가리고서늘한 가을 바람 배가 부르다군침을 삼키도록 못 견디게 구는 하얀 소살에 뽀얀 옷 입고세월의 흐름 뼈를 긁어 갔어도미래만은 고스란히 키워 낸하나의 쪽지에 한쌍 복숭아팔월의 둥근 달에 전화 친다어서 오세요 따갈 때가 되였어요엉덩이 .3거울에 비치면 임자에게 먼저 묻는다내가 곱니따라오는 사람에게 살작 묻는다내가 곱니만사의 부대낌에 헝클어져도물음만은 잊지 않아 내가 곱니누구도 응답 없어얄궂은 울음 운다 내가 곱니허리.1봄바람에 한들한들춤추는 버들가지한마디 꺾어다봄피리 만든다삐리리푸르른 소리아픈 설음 운다운다울려놓은 그 울음내 눈에도 그려져울음에 미치고울음에 지쳐서이 봄에 너를 따라서 울보가 되나보다허리.2홍실로 칭칭금실로 칭칭한 허리 감고감아무지개를 두른다한겨울 눈보라속에서도 선연한 무지개아름다운 무지개한끝을 베여베여어머님께 드리고아버님께 드리고나머지 큰 자락 베여정든 님께 드린다지정든 님 없다고코만 자꾸 찡그리여도한자락은 차란차란내 몸을 말리운다언제면 가져라 하고앙살을 부리겠나허리 . 3모가지가 짤룩한 꽃병어찌 보면 고상하고어찌 보면 우아하고어찌 보면 아담하고어찌 보면 얌전하고어머님 즐기는고향의 진달래를 갖다 꽂을가눈속의 매화를 갖다꽂을가그런 꽃은 안  된단다머리를 가로 젖는다아버지 즐기는 유월의 치자꽃을 갖다꽂을가꽃중왕 목단을 갖다꽂을가꽃병은 눈을 흘긴다바보바보바보절색박색 관계 없으니내 좋아하는 꽃을 갖다 꽂으라네아하-하!난 정말 바보바보!팔. 1그린 동그라미는 하냥 크지 않아크지 않은 동그라미속에하늘땅하늘에는해가 없고 달이 없어도따스함이 있고 밝은 빛이 있다땅에는 잔디도 없고 나둑나무도 없지만정기가 있고 향기가 있다그 하늘 그 땅을위해비에 젖고 눈에 얼고해살에 굽히고 별칯에 그슬고그래서 동그라미 속에 들어서면엄동에는 따스하고 염천에는 시원하다바늘구멍으로 소 들어가기라 할가비집고 들어만 가면한생을 편히 살 큰 세상팔.2복이 들라고 복자오래 살라고 수자복자 수자 살아 숨쉬는 베개복자쪽으로 누우면다리가 쭉 펴지고수자 쪽으로 누으면싱싱함이 가슴에 찬다비나 눈이 태질하는 날에복자는 화끈한 화로가 된다아무들이 아우성치는 날엔수자는 아늑한 고방이 된다하늘이 맑은 날엔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햇살이 짝자꿍 모여들어황홀한 무듸를 드른다베개를 베고 눕는다복이 제쪽으로 당긴다수가 제쪽으로 당긴다나는 어쩌면 좋아손.1따끈한 다리미는 다 구겨진 옷주름을 깔끔하게 펴놓는다한번 다리미질 하려면숯불을 마련해야 한다숯불을 마련하자면검둥이로 되여야 한다따끈한 다리미는 누구나 요구되지만검둥이로 되기는 누구나 좋아하는게 아니다손.2한쌍의 요술주머니아구리를 열었다 조였다 한다조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열기만 하면 굉장하다토끼 퐁퐁다람쥐 쫑그르고니 훨훨수리개 씽씽어느놈 잡아볼가토끼 다람쥐는 영물이여서인차 잡히지 않을거고고니 수리갠 하늘 날아서자칫, 닭쫓던 개 담장 쳐다보기지절로 내 품으로 뛰여들게 할수 없을가절로 내 품으로 날아들게  할수 없을가옳지 그렇지요술주머니 열릴 때제꺽그물주머닐 갔다 대야지손.3뚱뚱 땅땅띵띵 똥똥열개음이음악을 시작하네띠리리 따라라삐리리 빠라라노래소리하얗게 쏟아진다자갈들이 퐁퐁퐁나무들이 흔들흔들제 흥에 미친다어허, 이걸 어쩌나두라리 들썽들썽두어깨 으쓱으쓱 나도 미치는거 아냐손.4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가금전이 어디서 굴러오는가해님이 어느 곳에서 솟는가거울속에 보인다고 한다너무너무 거울이라기에손바닥을 펴들었다눈도 귀도  보이지 않고 입도 코도 보이지 않는다달밤에 물 떠놓고 손 비비며 곱삭이던할머니 등허리가 처연하다손.5돌이 되여 난다칼이 되여 번뜩인다가위가 되여 잘칵인다마치가 되여 내리친다방패가 되여 막는다묻고싶어라꽃잎이 탄알이 되는 리유를발바리가 미치는 이유를노루가 흉악스러워지는 리유를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 되여다 녹여 버리겠는데녹은것들 한덩어리 황강암이 되겠지어화라 한품에 안아주자절로 찧고 박고 하다가 말 잖으리손.6달고 쓰고시쿨고 짜고싱겁고 맵고삼삼한 정보를에누리 없이 전달한다그 향연에 축축히 젖어물도 되고 새도 되고풀도 되고바위도 되고바람도 된다손.7열개의 건반이 노래를 쏟는다슬픈 노래 기쁜 노래서러운 노래노래가락에 맞추어나는 울기도  웃기도 한다아, 어느새빨간 단풍물이 들었는가다리집게에 집히우고 싶다허리 끊어진 한이 있더라도집게에 집히우면한쌍 고니 되여하늘 훨훨 뜬다구름으로 둥둥 떠가며해와 입을 맞추고달과 입을 맞추고집게에 집히우면 미운 꿈 하나 없다무릎 .1하나는 해하나는 달해가 가면 달도 가고 달이 가면 해도 간다낮에도 해와 달밤에도 해와 달시간을 살리기도 하고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한쌍 쌍둥이먼먼 인생길에 고달프다무릎.2눈 내리는 초소에 너는 서있다비내리는 초소에 너는 서있다근엄한 자세 변함없이주인 명령 없이는황금 만냥에도 곁눈 팔지 않고황제가 가마를 타고 와도 열지 않는다 문을마가을 거치른 철에도너만은 비움없이 충실해봄에는 제비들 날아와 재잘 거리고겨울에는 함박눈이 곱게 내리는거다충성으로 밖에 살줄 모르는 초소를웬지 누가 짓밟을가 가슴이 조인다제발 자닝하게 만들지 마소제발 자닝하게 만들지 마소발. 1진창길에 옴폭하게 도레미눈길에 하얗게도레미미워서 솔라시들에 가면 도레미산에 가면레미파산과 들은 한대의 피아노한평생 눈물어린 노래만 짓다가주인과 함께발편잠 잔다발.2노예는 말이 없다노예는 말할줄 모른다노예는 거부란 말이 세상에 있는줄 모른다가라면 가고서라면 서고기라면 기고노예만 나서면무성한 풀 가리마  튀우고천길벼랑에 자국이 반짝인다노예만 나서면산이 열린다강이 열린다사람들은 다는 모른다노예를 해치면제눈이 머는줄발.3하늘과 물이 몸을 섞는 곳으로쪽배 하나 떠간다하얀 돛 하나 달고바람 자면 미끄러지고바람 일면 꽃잎처럼 뜬다아무리 뭍이 보이지 않아도서리맞은 배추잎이 되지 않는다끼욱끼욱 갈매기쪽배 따른다따르다 따르다가 지치고 지쳐하나 둘 뭍으로 돌아가고인제 한마리만 남아배위를 빙빙 슬프게 운다갈매기는 모른다쪽배가 좋아하는건갈매기가 아니라 물이라는걸물이 있길래 배가 있길래발. 4발은 길을 낳는다움직이기만 하면길을 낳는다발은 길을 깨운다길이 깨여나면산도 납작 엎드린다어리고 야윈 길은 늘강아지처럼발을 졸졸 따라다닌다나이 먹을수록 젊어지는 길은살이 피둥피둥해져도은혜를 잊지 못해엄마를 편하게 해준다세상에 제일 잊음 헤픈건 발이고세상에 제일 효성스러운건 길이다발. 5외씨같단 말의 의미를인제는 좀 알것 같다외씨 속에는 파란 잎이 있고자라는 넌출이 있고노란 꽃이 있다꽃속에는벌들이 먹는 꿀이 있고꽃밑에서는 고토리만한 외가 웨친다따지 말아요가시로 찌르겟어요외씨같단  말의 의미를인제는 좀 알것 같다발.6열송이 빨간 장미꽃을 피운다이른 아침 청신한 대기에 가슴을 목욕시킨다고리타분한 냄새를 말끔히 털어버린다실핏줄이 싱싱하게 살아나며천근 몸이 홍모처럼 가벼워진다앉아도 향기 서도 향기걸어도 향기누워도 향기빨간 장미 향기너는 신랑 나는 각시라며풀밭에서 코 흘리며 놀던 철민아요런 때 오지마네가 오면 내 볼에 장미꽃 핀다엄마 아빠도 보지마엄마 아빠 보면내 장미꽃이 다 죽어발. 7천년을 소급해 보면너는 한부의 력사야눈물 닦을 손수건 마련하지 않고서는읽을수 없는 력사야한생을 돌아보면 너는인생의 궤적을 그린 화가야파란 많은 수십년 길을걸어온 대로 이리비뚤 저리비뚤 그려놓은몸에 못이 박혀 피 터져도자신의 신성을 어지럽히지 않고한올 부끄럼 없는 척후병 네 뜻을 누가 알아준다던가눈물을 훔치며 땅을 떠나도설음을 달래노라 바다에서 뒹굴어도그, 그걸 왜 한마디도 뱉지 않느냐 떠들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저의 운명저의 숙명이얘요                        (련재끝)
32    괴짜괴짜괴짜(시) 댓글:  조회:1142  추천:36  2008-10-29
시어들의 환희수중기가 하늘에 올라가 무리를 짓자 산과  으쓱했다. 난 물도 아니고 수중기도 아니고 구름이야!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자가 제일 먼저 구름의 말을 듣고 머리가 팽글 돌았다. 산자가 웨친다. 내 뜻은 인제 산만 가리키는것이 아니야 산이란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의미가 없어 해방해방해방이야 나는 나 독립적인 나야 나도 생명이 있어. 이제부터 나는 요술쟁이란 말이야 나는 위인도 될수 있고 무골충도 될수 있고 허깨비도 될수 있고 사상도 될수있고 개 소 말 양도 될수 있고 굼벵이 신선 룡 파도 메뚜기 새 꽃 우산 투고 아유 너무도 많아 또 새것도 만들어 낼수 있어 장편소설을 써도 다 못쓰겠구나 . 얘 니 금방 뭐랬니 으응 알았다  어디 니만 그렇니 나도 그래 나도 그래 나도 그래 모든 체언들이 악마구리 터진듯 와짝 고아대였다. 용언이며 부사며 토들도 곁불에 무진장한 활무대가 생겼다고 부글부글 끓는다 북이 징이 가야금 새장구 젓대들이 저들도 좋다고 잎제히 아리랑 옹헤야 노들강변 가락을 줄줄이 뽑는다. 모든 글자들이 뛰쳐나와 덩실덩실 춤을 춘다  흥야라 붕야라 노래부른다 우야 와야 고함친다 하늘이 와르르 내려앉을 지경 짜장 경사로구나     단풍잎도 새로 만드는 하늘은 무궁하다현대시 이제 언어는 어머니 배꼽에서 금방 떨어진 영아 눈깜박할사이도 없이진짜 그럴사이도 없이 당당한 어른이 되여 기습전을 벌인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태여난다태여난다 태여난다  노주빨초 파남보 눈뿌리 아찔한 소용돌이 혼돈혼돈혼돈 신기신기신기 은유의 숲 상징의 숲 빙글빙글 빙글 돌아돌아돌아 사람은 하늘을 밟고 뛰여다니고 해는 개미가 똥 차올리고 구름은 뜰에 내려와 열두발 상모로 하늘을 휘휘 젓는다 감는다감는다 감는다 어제어제어제 뜬다뜬다 뜬다 래일래일래일어디 갔냐갔냐갔냐 오늘오늘 오늘 자식 현대시 정말정말정말 무무무 시시하다언어내가 부르면 상상의 나무가지에 파랗게 날아와  앉는 파랑새무리새들의 노래에 괜히 신들리는 나아야어여 가갸거겨한낮이면 구름 되고 한밤이면 별이 되는 너희들 내 몸에서 흐르는 방방울울 피다손가락끝에서 피빛만 보여도아아. 온 몸에 전률이 이는것을너의 채찍을 맞으며 상상이여 나의 막역지우겨 그대 언제 날 떠난적이 있었던가당신은 채찍이 되여 언제나 날 뚜드리였다피 터져야 정신을 춘적이 어디 한두번이였던가나는 평생너의 푸른 마차에 앉아너의 채찍을 맞으며무딘 칼을 갈아야 할 우스운 남자다시 언어누가 나한테 이리 고운 애들을 보낼가요 피리를 불면 양떼처럼 모여오고또 피리를 불면 해살처럼 흩어지는 애들을마음따라고운 노래를 튕겨주는 피아니스트푸른 하늘에 비둘기 날리는 보동진 손누가 나한테 이리 좋은 사랑을 주었을가요비속을 걸어도 젖지 않는 옷바위 튀는 찬 바람에도 항상 따스함만 느끼는 마음누가 나한테 이리 희한한 마술을 부여할가요내 옷소매속에서 나는 슬슬 만들어 내거든요 꽃이며 나비며 태양이며 궁전이며누구일가요 정녕 누구일가요상징. 1나는 너의 숲을 걸어가는 아이잎새들의 친절한 속삭임울긋불긋 웃고있는 꽃들의 향기향기새들의 날개짓에 오르내리는신비경 기의 경끝은 어디꿀벌을 타고 날아날아날아도 날아도 푸르른 바다아이는 망망한 바다에서 외로운 돛배를 타고 노를 젓는다상징. 2하얀 저 하늘끝에 깜장 별 하나 나는 그별을 따고 싶어 목이 마르다마침 하늘에서 줄사다리 하나 내려온다 파란 줄 누시린 은빛 가름대나는 총알처럼 달려가 사다리를 잡고 별따러 올라간다 이걸 어쩌지 두층게 오르면 한층게 떨어져 나가고 열층게 오르면 아홉층게 떨어져 나가고 아득한 구중천 깜장별에 목을 건 인생 어느새 물자루가 되다 드디여 깜장별을 잡았다 홀제 별껍질이 벗겨지면서 별이 황홀을 드러내다 나는 빛에 화뜰 놀라서 잡았던 손을 푼다 천야만야 떨어지면서 나는 한점 연기로 사라지고 푸른 하늘에 별 하나...다시 상상시의 위대한 어머니여 내 피의 꽃이여파편(문체)어디 갔다 인제 오니 요 각성받이 진주들아너는 풀이불 덮고 한잠 잤지너는 별의 코밑을 닦고 있었지너는 사슴을 타고 뛰여다녔지 너는 대돌밑에서 볕쬐임을 했지내 발톱밑을 살그머니 간질인것은 네지얘들아 저기저 가람을 봐그름등을 타고 흐르는 저 가람을유유히 날아예는 저 고니떼들누시린 은빛으로 물결을 희롱한다하늘이 진동하는구나자, 인제 진주팔찌나 만들어 가지고아가씨 구경이나 가볼가이미지 넌  내 손잡고 어디로 가니조물주야말짱 첨보는것들이구나진달랜가 하면 진달래가 아니고바윈가 하면 바위가 아니고강아진가 하면 강아지가 아니고죄다 이생저생에도 없는것들불과 물의 살놀이로 태여난 이쁨들아령감어쩜 요렇게 여위였나 앙상이들아무슨 피를 줄가 무슨 살을 줄가무슨 옷을 줄가음 넌 개구리가 제격이겠다푸른 피 푸른 살 줄테니논에 가 벌레나 잡아허허, 넌 뚝곰이 들어났어곰피 곰살 곰털을 줄테니산에 가서 밤알이나 주어먹어빼빼 말라도 넌 곱상이구나해가 되여 하늘이나 닦아미안해 네 상은 미친개상이구나몸둥이 찜질이 닥치겠으니미안해 아무것도 줄수 없구나예술이여 다시는 이런 밉상을 보내지 마소서열삭이나 잉태하였다 낳는건데괴물스러우면 얼마나 민망스럽다구요야 ,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상관물괴짜괴짜괴짜보들레르 몸에다 랭보옷 입고말라르메 안경에다 발레리 지팡이를 짚고로르까 장갑에다 준자부로 신을 신도뚜걱뚜걱뚜걱요귀요귀요귀하늘 천장에다 돌멩이를 붙여놓고함박꽃네 집이랬지어제밤 불과 물이 한 침대에서 꼬옥 끌어안고 잤다고 그랬지산파산파산파물속에 들어가 메새를 낳는바위속에 들어가 망아지는 낳는풀잎속에 들어가 궁궐을 지어내오는으하하 미쳐미쳐서 미쳐 사는 꽃이야또다시 상상누가 내 발을 묶으려 하는가누가 내 손을 묶으려 하는가나는 고삐 없는 말이다 바람이다모든 장벽을 물보라로 휘날리고모든 천정을 분수로 뿜어버린다썩는 묵밭을 쓸어버리고나이 오붓한 터전을 닦는다구리빛 팔에 안긴 아가씨 하얀 배가 뿜어내는울음소리무지개정글에서 무성하는 키스오, 나의 천사들이여 때려라 부셔라 낳아라시인 뒤에는 발자국앞에는 가시밭발자국에선 물 한방울 해를 모욕시키고가시밭엔 가시 우거져바람도 피 터질가 들어서기 저어한다시인은 잔혹한 짐승이라더라가마뚜껑같은 발바닥으로 가시밭을 쓸어버리고한뙈기 땅위에 찬란한 묘비 하나 세운다시인은 리스트라더라 언어의 피아노에 앉아짐승의 울부짖음에 청자빛을 반죽하여 아침 빛소리를  새긴다 나의 수의를 짜고있다시는 나의 수의를 짜고있다나는 씨실날실을 보내주어야 한다무릎에 빨간 꽃이 커다랗게 피여있다눈이 찡그러지게 손목이 아프다비비는 씨실이 고르지 않아 꼴불견이다그나마 바람이 숭숭 나들게 짜여져 어쩌는가나의 시신에 수의를 입히며 사람들은 말하리라무슨 수의 를 이따위로 지었는가발가락도 눈도 그것도 다 가릴수 없게 자식 못나게 살더니 수의도 못나게 갖췄네나의 노래 . 1사람들은 나를 시인이라고 한다나는 시인이 아니라 바람쟁이이다나는 언어와 바람을 피운다언어는 내 즙을 맛있게 쫄쫄 빨아먹고꽃을 낳는다언어보다 꽃은 얼마나 더 고운지 모른다그래서 나는 언어를 버리고 꽃과 바람을 피운다언어는 옆에서 낄낄거린다웃으라면 웃으라지나는 성난 짐승이 되여 꽃을 짓뭉갠다꽃잎은 나를 갈갈이 찢고 내 령혼을 말끔히쪼아먹고 황금열매를 낳는다나는 사리를 얻은 중이 되여땀을 훔치고 또 바람 피울 궁리를 한다
31    금단의 열매. 5(미성년불가) 댓글:  조회:1554  추천:50  2008-10-22
배.1찰랑찰랑 속삭이는물결위에은회색 고무배 한척배위에 만시름 털고 눕는다하늘이 흔들린다흔들리는 하늘 따라 나도 흔들린다깃도 없이 날아가는 물새울음을보라빛 구름이 받아먹고수평선에서 날아오르는 박쥐떼들이연분홍 물방울을 주르르 떨군다아하, 찰랑이는 물결 고무배 그리고 나.배.2천리 만리 멀고 멀어보이지 않더니눈앞에 다가와서귓바퀴에 앉아요한송이 꽃이사는 소리크는 소리환히 보여요눈속에서 웃은 매화일가요 비속에서 웃는 나리꽃일가요낙엽속에서 웃는 국화일가요너무 누르지 마세요꽃이 숨차 죽겠어요배.3폭신도 한 담요따스도 한 담요살가운 담요덮으면 둥둥 하늘을 난다깔면 동동 바다위를 노닌다발끝 살짝 가리워도고운 꿈자리배.4물 한방울 풀잎 하나개미 한마리없는 노오란 사막아름다운 사막바람 한올없다금빛은빛눈 시리다나 혼자샘물 파놓고푸른 풍막 짓고나혼자포옥폭자국을 찍고싶다아름다운 나의 사막이여배.5밤빛 낮빛의 빛평선에 솟아있는 별별줄기 타고바다에 내려서하얀 돛을 띄운다순풍을 만난 배는아리랑이요암초를 만난  배는스리랑일세아리랑 스리랑스리랑 아리랑아리랑이 복일지 스리랑이 복일지그뉘 안답데어허야 디허야  노를 저어라흥이 푸근한 배길이라네먼먼 수평선으로 사라지는  돛도  많지만뭍에서 첫 돛을 올리는 배는 더 많아아리랑 스리랑 빛평선에 또 하나 별이 뜬다옥문.1안개속을 헤치고 나오는 해랄가그름속을 헤치고  나오는 욱욱 달이랄가록음속의 일점홍 꽃망울아얼음속에 얼지 않고홍수속에 밀리지 않고아침 이슬의 축원을 받는산도 취해 가슴을 조이고 물도 취해 말씀을 죽인다뽕철에 뽕 못 따도배철에 배 못 따도오호 , 따고싶은 장미야옥문.2울퉁불퉁한 대지는 무연한 연빛 하늘은어머니 열어준첫문을 나선 다음 일이다문 열고 나온 삶이또 지나야 할 문은 어떤 문일가송진내음 푸르른 솟대문일가우뢰가 목을 맨 소나기문일가나무잎이 구르는 락엽문일가삭풍이 태질하는 눈보라문일가황토길로 갈가사막길로 갈가바위길로 갈가두번째 문뒤엔아리랑 고갤가세번째 문뒤엔 경양강일가네번째 문뒤엔문경고갤가아, 슬프고도 찬연한열두 대문 열두 고개여옥문.3바위처럼 드팀없어쇠덩이처럼 굳어누가 열지 뉘 알랴그속에는 으리으리한 궁전푸른 기와 맑은 창문고샅길 아카시아 꽃무리 무니우려고연못의 잉어떼 물보라 쏜다하늘거리는 치마자락향기가 폴폴 날리고은방울 굴리는 새소리에실피줄이 흐느낀다여기선돌도 녹아 물이 된다옥문. 4잎새들이 재잘거리는 잔디밭에서풀꽃들 하늘 깨운다고겨끔내기로 목을 빼 든다병풍처럼 둘린 록음속에서비비새 배배새비비비 배배배짙푸른 잔디밭에 앉아일년 사백날풀꽃들과 이야기 나누고싶다뭇새들과 노래를 나누고싶다해빛 달빛 별빛을 따서옷을 지어 입으며옥문.5은줄로 엮은 은초롱금줄로 엮은 금초롱초롱문이 열리면참새콩새연지새호륵호륵 날아나와정원숲에도 산야 수림에도노란 새소리하얀 새소리무지개로 비껴산은 안개속에서 꿈을 심고들은 해살속에서 꿈을 심고은초롱은 은빛꿈금초롱은 금빛꿈옥문.6깊다하면 한없이 깊어해빛 한오리도 비치지 못하는 우물얕다하면손바가지로 후룩후룩마실수 있는 샘깊은 우물은 절대길으려고 하지 말라두레질 하다가두레줄에 목이 매일라얕은 샘얕다고만 보지 말라재수 없는 놈종지굼굽 물에도 빠져 죽느니옥문. 7하뜰하뜰한 두부모처럼 네모 반듯한살 진 밭 한뙈기보습날 싱그러움 맛보지 못한처녀지소나기 몸부림쳐도  물서지 않고왕가물 아부재기쳐도 마를줄 모르는함치르르한 복지밀갈이 재갈이  알뜰히 하고이랑이랑 갖준히 짓고똥똥한 꽃씨 심으면봉선화 나팔꽃 장미꽃...심기만 하면 아릿다운 꽃이 피는땅땡땡 소리나는 나무씨 심으면백양 홍송 백송...잎새도 도란도란 쑥쑥 자란다한뙈기 살진 땅마라마라 올라서라옥문. 8이른 아침 노을빛 빨며보라빛 꽃잎이 빗장을 연다노란 꽃살들이 해시시 웃는다은날개 젓는 꿀벌 한마리꽃송이 주위를 뱅뱅 돈다어디서 저런 거무튀튀한 놈 굴러왔나꽃은 빗장을 지르려 한다꽃잎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꿀벌의 날개짓 감미로와꽃잎들은 저도 모르는 흥분에 바르르 떤다. 꿀벌이 꽃잎속으로 바람처럼 내려 않는다. 꽃은 눈앞이 아찔해난다허나, 그것은 순간의 순간. 꿀벌의 보드라운 발이 꽃살을간지르고 은날개가 꽃잎을 애무한다. 꽃은 무아의 흥분에전률한다. 꿀벌의 기이한 주둥이가 그렇듯 용감하게 꿀단지속으로 쑤욱 들어선다. 찰나, 꽃은 이름할수 없는 미묘한 꿈속에 떨어져  봄날의 잔디밭을 나는 바람이 된다. 파아란 실버들가지에서 그네를 뛰던 훈풍은 산위로 날아가구름과 논다꿀벌이 꿀을 캐가지고 붕- 날아난다. 꽃은 꿀을 빼앗기던감격을 앓는다. 꽃은 앓음을 녹여 꿀단지에 흘리며 꿀벌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애틋이 기다린다. 어디로 갔기에 오지않을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지친 꽃은 너부러진다. 꽃잎도 너부러지고 꽃살도 너부러지고 꿀단지도 너부러지는 꽃속에서 시나브로 자라나는 동그란 그리움
30    연길-카스 2만리 기행.3 댓글:  조회:1212  추천:43  2008-10-22
  15. 짠제(站街)의 봉변    우리가 오후 세시사십분에 소림사를 떠나 정주에 갔다가 공의(功义)라는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운 6시40분이였다. 소림사에서 부랴부랴 여기에 온것은 두보를 보기 위함이였다. 소림사로 들어가던 도중 오른쪽켠에 세워놓은 두보묘(杜甫墓)라는 작은 패말을 조형이 보았던것이다. 이 패말을 보고 조형은 퍼그나 흥분되였다. 그는 나에게 두보묘를 보지 못하였는가고 세번이나 물어왔다. 나는 딱히 보지 못하여 애매한 대답을 하였다. 조형은 차안의 손님들과 여러번 문의하였으나 두보묘가 있는 확실한 지점을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소림사를 다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여러사람과 물어보다가 마침내 두보묘가 공의라는 곳에 있다는것을 확인하였다. 조형은 너무 좋아서 두보묘를 보는것은 이번려행의 금덩이요 금덩이 하고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리였다. 그래서 지금 공의에서 내리였다.    마침 풍천을 씌운 택시 한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보묘가 있는곳을 압니까     알다마다요 생가가 있는곳이 짠제입니다.    여기서 멉니까    10원이면 갈수있습니다.    우리는 짐을 차에 싣고 올랐다.    귀따가운 소리를 부릉거리며 택시가 어둠을 가르며 달리였다.    짠제에 려관이나 호텔이 좋은곳이 있습니까    좋고 나쁘고 호텔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로 안내해주시오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어느덧 차는 호텔문어구에 와서섰다. 낮이면 5원이면 족할 거리였다. 5원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에 새길일은 아니였다. 북경에서 당하던 일에 비하면 꽃이였다.    우리를 2층으로 인도하는 호텔주인은 젊은 남자였다.    더운 물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구요    방이 따뜻합니다.    그럼요    내가 꼬치꼬치 캐여 물었다. 온 하루 길에서 씨악질하였으니 더운 물에 몸을 씻고 따뜻한 곳에서 자야 피곤이 풀린다. 더구나 조형은 이런 생활에 물젖은 사람이여서 호텔에 더운 물이 없으면 안되고, 방이 따스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다.    방안에 들어서니 방안이 썰렁하였다. 나는 짐을 풀어놓기 바쁘게 위생실에 들어가 온수가 나오는가고 보았다. 찬물이다. 그래서 복도에 나가 복무원을 불렀다. 복무원이 왔다.    왜 더운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잠간 기다리십시오.    방이 너무 썰렁합니다.    난로를 따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슴프레한 거리에 나가 저녁을 먹고 호텔에 오니 9시반이 다되였는데도 온수도 난로도 오지 않았다. 대답은 시원시원하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여러번 독촉하여서야 더운 물이고 뭐고 다 기계가 고장이 나서 안된다는 벼락이 떨어질줄이야.    조형 어쩌겠습니까. 이런 일은 앞으로도 많이 당할수 있습니다. 한번 중국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는셈치고 인제는 잡시다. 하고 나는 조형을 위안하였다.    털나서 처음이네 하고 조형은 기막혀 하였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더있으랴. 울며겨자먹기를 당하는 판인데야.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조형은 옷을 입은 채로 귀가리개가 붙은 모자를 쓴채로 앉아있었다.    아니 벌써 일어났습니까.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누웠는데 추워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까. 추울 때는 아예 옷을 벗고 자는게 더 좋은데요.    그런가 허허허...    조형은 허거프게 웃었다. 어제 온 하루 길에 지친 몸으로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조형을 나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중국이란 이 넓은 땅에 발전한 곳도 있지만 짠제처럼 어수선한 곳이 어찌 한두곳뿐이랴. 아직도 머나먼 길을 가야 하는 우리앞에 어떤 애로가 누워있는지는 누구도 알길이 없다. 나는 이러한 생활에 조금은 적응된 사람이지만 당당한 성보의 사장인 그야 언제 이러한 어려움을 겪어보았으랴. 2만불시대를 치달아오르는 나라에서 와서  천불시대도 안되는 짠제와의 차이를 그가 감내한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닐것만은 불보기처럼 뻔한 일이다.    려행이란게 사치인것이 아니라 전투입니다. 내가 말했다.    허허, 맞소. 전투요. 조형도 고개를 끄덕이였다.    아침을 먹자고 호텔문을 나서니 벌써 호텔뜨락에는 식전음식마당이 펼쳐져있었다. 만투, 타래떡,밀가루떡튀우기가 있는가하면 여러 가지 죽들이 있고 짠지가 있었다. 호텔에서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아침을 주는지라 우리는 공짜로 아침을 치렀다. 찬 곳에서 자고 뜨끈뜨끈한 아침을 먹으니 속이 좀 풀리는것 같았다. 나는 별로 큰 느낌이 없었으나 조형은 처음으로 이런 아침장마당을 보는지라 자기의 려행기에다 그날의 아침을 감명깊게  적고있다.    둘러보니 출근길의 사람부터 꼬마들까지 갈데없는 동네잔치 풍경이다. 학교를 가는 학생들이 책가방을 옆에 놓고 아침식사를 사먹는 모습이 이채롭다. 한쪽에서 빵을 굽고 한쪽에선 국을 끓이고 한쪽에선 고기를 튀기고...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해댄 주인 남자가 정문쪽에서 돈을 받고 거슬러주기에 분주하고, 그의 안해는 음식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고, 그의 딸은 국을 퍼주느라고 한눈 팔 시간도 없다. 숙박비를 계산하느라고 주인에게 다가서니 언제 거짓말을 했냐싶게 상냥한 표정이다. 온수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약속대로 30위엔을 받으라고 돈을 건네자 금방 안색이 달라지더니 세상에 하루밤자고 30위엔이 무슨 말이냐며 언성을 높인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과의 약속이 아니냐며 이 쪽도 버티자 그는 호텔이 잠값을 받는 곳이지 물값을 받는 곳이냐며 고집을 피운다. 그러나 우리는 단호하게 30위엔과 식사비 6위엔을 주고 나왔다. 다른 려행객들에게도 그런 경우 없는 서비스를 하면 결국 당신이 받을 돈을 제대로 못 받게 된다는것을 깨우쳐주기 위한 우리의 숨은 뜻을 알기는 하는지. 16 . 서글퍼라 두보의 생가     두보(杜甫)의 생가는 짠제의 한 변두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니 10분도 되지 않아서 큰길에서 차가 멈춰선다.    저기 땅굴이 보이지요.    녜?    두보가 탄생한 곳입니다. 운전수는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런 감동도 없는 어조였다.    두보(712-770)! 두보는 당나라 위대한 사실주의 시인이다. 리백은 당나라 위대한 랑만주의 시인이다. 두 시인은 당나라때의 쌍벽을 이루는 시성일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문학사에서 쌍벽을 이루는 시인이다. 그들은 다 당년의 잔혹한 봉건통치에 불만을 품고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많은 시들을 썼는데 오늘까지도 그들이 쓴 시는 사상성은 물론 예술상에서도 거울로 되고있다. 석호리와 매탄옹과 같은 두보의 시를 배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두보의 자는 자미이고 시인 두심언의 손자이다. 40살에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약간의 벼슬을 하였으나 강직한 탓으로 거기서 밀려나 한생을 섬서,사천, 호북, 하남 등지로 류랑생활을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류랑의 길에서 사망하였다. 지금 중국내에 그의 묘가 8개나 된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류랑생활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의 가세는 아이들을 굶겨죽일 정도로 가난하였고 자신은 포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쟁이 빚어내는 병사들과 인민들의 참화를 진지하게 그려내였으며 착취계급들의 썩어빠진 생활과 그 죄악을 신라라하게 폭로비판하였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위하여 힘차게 웨치였다.    두보가 탄생한 동굴은 하남성 정주시 공의현 강점진 남요만촌 짠제툰 필가산(笔架山) 밑에 있었다. 필가산이란 맨 흙으로 된 산이였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두보생가인 동굴앞에 다가섰다. 두보생가라는 편액이 쓸쓸하게 붙어있었다. 높이 11메트, 너비 3메트되는 동굴이였다. 출입문은 봉해있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니 일부 가장집물들이 보이였다. 집앞에는 두보비가 세워져있는데 1986년에 미국의 루이아이리(路易艾黎)라는 사람이 세운것이였다. 여기 사람들은 두보생가를 뚜푸꾸리(杜甫古里)라고 불렀다. 생가에서 조금 나오니  우물자리가 있었다. 지금은 콩크리트로 우물자리를 복원하였는데 들여다보니 깊숙한 곳에 물이 보이였다. 우물자리에 서서 다시 산을 바라보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낮다분한 봉우리가 셋인 흙산밑에 생가가 있었는데 왼쪽이 빗물에 패워서 그냥 놓아두면 두보생가가 없어질 위험이 확연히 알리였다. 세계적명성을 갖고있는 위대한 시인 두보생가를 이렇게 둔다는것은 얼마나 큰 실수일가 하는 생각이 그냥 뇌리에서 돌아갔다.    두보, 할아버지는 공현의 현령이였고, 아버지는 봉천현의 현령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최씨였는데 현숙한 녀인이였다. 지방관리의 집안에서 정월초하루날에 태여난 두보는 세살때에 글을 깨우쳤고, 일곱살에 처녀작을 썼는데 그 시제목은 <<봉황을 읊노라>>이다. 두보의 처녀작은 환상과 랑만이 풍부한 시이다.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아이들과 함께 물가에서 노는데 멀리서 날아오는 봉황을 발견한다. 아리들이 달려가니 봉황은 사라지고 오색찬연한 봉황의 알이있다. 시적주인공은 아이들에게 봉황알을 빼앗길가봐 얼른 봉황알을 입에 넣어삽킨다. 집에 와서 토해 놓았는데 그 알이 모래로 변하여 하나하나의 글귀로 되어 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로부터 두보의 천재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두보는 24살 때 과거를 보았으나 조정의 승상으로 과거를 주관하던 리림보( 李林甫)가 두보네 일가와 척진사이라 락방을 면할수 없었다. 억울함을 해결할길이 없는 두보는 평생을 떠돌이로 살다시피하였다. 그는 일생에 3000편의 시를 썼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이 2400편(1400편이라도함)이라고 한다.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두보는 양자강 (상강이라는 설도있음)수상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집도 아닌 배안에서 처참하게 돌아갔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234년전이다. 고향의 망산령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이 있었으나 지금 그의 무덤이 중국에 8개나 있으니 어느것이 진짜 두보무덤인지 누가 알랴.`    지금 500만원을 들여 두보생가를 복원련다고 한다. 그 면적은 23무인데 여기에다 기념관까지 세울예산이라고 이곳 문화유물관리일군이 우리와 말하고있다. 늦기는 하지만 다행이여서 이 한산한 두보생가가 하루속히 보건되기를 속으로 비노라니 적막강촌에 있을 때 자기집을 찾아온 손님 최령을 반기던 두보의 시가 떠오른다. 내 집의 남북쪽엔 봄물이 흘러흘러 날마다 갈매기만 떼지어 날아들뿐. 손님이 없는 꽃밭길 쓸어본적 없건만 오늘은 그대 맞아 사립문 열었도다. 거리에서 먼곳이라 안주상 스산하고 구차한 살림이라 술마저 남은것뿐. 이웃집 늙은이와 맞잔 들려 하거들랑 울너머로 불러다 남은 술 마저 하소.    그렇게 손님을 반기던 두보였으니 오늘까지 살아계셨다면 꼭 우리를 반기련만 그이는 여기에 없어 슬픔이 절로 난다. 그래서 나도 시 한수를 올린다.  천만리 먼곳에서 그대를 찾아왔건만 앙상한 나무우에 까치 한 마리도 없네 시성은 어디에 계시기에 비(碑)마저 외국인이 세웠는고 술 한잔 부어 그대의 명복을 비나니 인제 가면 언제 올지 알길이 없노라 그대생가 복원될 날 손꼽아보며 소조한 갈바람에 내 마음 띄우노라    두보의 생가를 떠나 강점진(康店鎭)에 있다는 그이 릉원을 찾아떠났다. 진정부에 있는 문화국의 일군들은 연변일보가 소개한 나의 소개신을 보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보를 전문적으로 관활하는 40세쯤 돼보이는 남자가 두보의 릉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시성 두보의 문화유물은 정주시의 문화유물보호단위다. 1987년부터 보호사업을 시작하였고 1990년도에는 정부에서 100만원을 투자하여 릉원건설을 완성하였다. 이제 두보의 생가를 문화유적지답게 꾸리는 일이 남았다. 23무의 토지 매입이 끝나고 기념관 설계가 나왔다. 1기공정에 500만이 투입될 예산이란다.    학교시절에 두보의 시를 읽었다는 조형도 흥분되였다. 그는 자기의 기행문에다 그때의 감정을 이렇게 피력한다. 그러면 그렇겠지.세상에 한시대를 뛰여넘어 동양시단의 큰 봉우리를 외면할수 있겠는가. 마음이 놓이면서도 그들이 검토중이라는 계획이 신중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게 부러웠다.   우리가 택시를 타고 두보릉원에 이르렀을 때는 릉원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에서 그한테 손님이 가니 잘 안내하라고 전화를 쳤던것이다. 그의 안내로 우리는 릉원을 돌아보았다.    정문안에 발길을 들여놓자 생가와는 완연히 다른 경상이 나타났다. 신작로만큼 넓은 사이를 두고 새파란 측백나무들이 나란히 서있는데 그 앞에 두보동상이 보이였다. 백옥을 다듬어세운 두보상은 해빛에 오색의 령롱한 빛을 발산하고있었다. 약간 굽은 자세로 서있는 두보시성의 전신상은 품격높은 위대한 시인의 분위기를 살려서 두보가 살아서 정원의 화초들을 살피고있는것만 같았다. 자애롭고 고결한 자태, 상냥하고 인자한 얼굴모습이 무던한 할아버지를 련상시키였다. 단아하고 고결한 백옥조각상 받침대엔 시성두보(诗圣杜甫)라는 네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시구처럼 깔끔한 네글자외에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시성이면 다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생전에 불후의 고전으로 남을 시 3000수를 지은 두보가 여기에서 시를 읊으며 현대인들과 담소를 하고있었다. 나는 그가 매탄옹을 읊는같기도 하고 석호리를 읊는같기도 하고 봉황대를 읊는같기도 하여 자꾸만 첨앙하였다. 조형은 대단하오 정말 동상의 극치오 하면서 연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중국 최고의 조각가로 소문난 류개집(刘开集)의 작품인 이 조각상의 높이는 7.7메트이고 두리에는 측백나무 월계화 파초수로 에워싸여 있었다. 상이 서있는 원형화단뒤에는 두보의 묘지가 있었다. 높이 11메트, 너비 15메트로 된 둥근 묘지에는 측백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고 사람들이 자주 올라가서 오솔길이 나있었다. 조형은 제조상의 무덤을 찾아왔다가 묘지우에 난 오솔길을 보기라도 한것처럼 분해한다. 어떻게 묘지우에 길이나게 사람들이 다닐수있는가. 시성의 묘지를 어떻게 저렇게 짓밟을수 있는가. 그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무덤이란 고인을 고이 모시는 후손이 마음이련만 저렇게 마구 밟아버렸으니 무례하기 그지 없다. 무덤옆에는 장남 종문(宗文)과 차남 종무(宗武)의 무덤도 있었다. 제일 왼쪽의 큰 봉분이 두보의 묘다. 두보의 묘소는 당초 평강현에 있던것을 그의 손자가 43년후인 813년에 고인의 유언과 집안의 뜻에 따라 여기로 옮겨왔다고 한다.    한생을 떠돌이로 재냈던 두보의 묘지는 호북남양,  호남내양, 섬서경주, 섬서 화주, 호남평강, 하남언사, 하남공현, 사천성도 등 여덟곳에 있단다. 두보가 머물렀던 곳마다에서 시성을 기리여 묘지를 만들고 사당을 지었다는 말이겠다. 사천성의 도읍인 성도에는 두보 초당이 있는데 완화초당이라고도 부른다. 이 초당은 두보가 48세때에 안록산의 란을 피하여 성도에 와서 3년간을 살았는데 거기서 그가 240편의 시를 쓴것을 기리여 세워진것이란다. 이 사당엔 두보의 모습이 그려져있고 세계각지에서 간행한 두보의 시집과 관련책자들이 진렬되여있다고 한다.    두보묘지의 왼쪽켠의 담장에는 력대의 시인들의 시비림이 있다. 제일 첫머리에 모택동의 시사 심원춘눈이 있어 경의롭다. 시비가 너무도 많아서 안쪽에다는 벽에 붙이지 못하고  장져놓은것들이 가득하다.   두보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내내 흠모의 정으로 설레였다. 17. 려로에서의 이야기    나와 조사장은 이 고장에서 저고장으로 갈 때면 여러가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중에서 향기나는 이야기를 몇가지 적어본다.   정주에서 소림사로 갈 때 이야기.   최선생, 연길에도 애인들이 많지요.   그런가 봅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사정이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남자들이 좀 난삽하였지만 지금은 표준이 있어요.   어떤 표준입니까.   한국남자들이 여자를 하는 표준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직장 녀자를 삼가합니다. 범도 굴앞의 짐승은 잡아먹지 않는다지 않습니까.   하하하. 참 그 말에 도리가 있습니다. 토끼도 굴앞의 풀은 뜯어먹지 않는다고 합데다. 그런데 우리 연길은 다르다고 합데다. 굴앞의 풀을 내가 먹지 않으면 딴사람들이 먹는다던데요   그래요.미국에서도 직장애를 못 다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70년대초까지 굴앞의 풀잡기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안 합니다.   하하하 거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둘째로 우리 한국에서는 유부녀를 삼가하고있습니다.   왜서요.   유부녀와 내통하면 꼭 소문이 나게 마련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눈치중에서 제일 눈치가 빨리 나는것이 그 관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말성이 대단합니다.   세 번째표준은요   셋째는 술집아이들을 안 다칩니다.   성병이 들가봐그럽니까 여럿이 빠진  우물이라 더러워 그럽니까   그것도 있겠지만 그애들의 뒤에는 건달들이 있습니다. 잘 못견드렸다간 큰 일이지요   들을라니까 한국에서는 간부들이 남녀관계만 발생하면 목을 떼운다고 합데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발견만 되면 그 자리에서 별을 떼지요    공의 역에서 버스를 타고 락양으로 들어가면서 조형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문명인은 사람을 대할 때 친절해야 합니다. 표정이 밝고 온화해야 친절성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할 때에는 조용조용히 해야 합니다. 공중장소에 가서 큰소리로 떠들어대는건 실례입니다. 대방에 대해서는 언제나 배려를 해주는 쪽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것이 배려입니까.    버스에서 남에게 발을 밟혔을 때 밟힌 놈이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는겁니다. 남의 발을 놓을 자리에 자기가 발을 놓았으니까 말입니다. 남에게 그런 불편을 주었으니 사과를 하는겁니다.     서안의 호텔에서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친것은 명분이 없는 침략이고, 테로를 반대한다고 미국이 떠들고있지만 실상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국가적테로 행각을 하고 있다는것에는 둘이 관점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형은 내가 깜깜이던 이야기를 하여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전 세계군사력을 다 합쳐도 미국군사력보다 약하다나. 설마 그럴수가 있는가하니까 어느 통계에서 발설한것인데 진짜라나. 그래서 미국이 세상에서 살판친단다. 사실 미국은 국제 헌병노릇을 하고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최강의 군사대국, 경제대국, 무역대국이여서 지금은 아무도 건드리기 어렵다는것이다. 미국은 한번 일본을 혼살먹였단다. 2차세계대전후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대적으로 밀가루를 공급하여 밥을 먹던 일본을 밀가루먹는 일본으로 만들었단다. 지금 일본의 청년들은 물론 장년들까지도 밀가루가 없으면 못산단다. 일본에서는 날마다 외국으로부터 엄청난 량의 밀가루를 수입해 들인단다. 일본을 밀가루먹는 나라로 만든것은 미국의 전략이였단다. 한번은 일본에서 세계에 향하여 자기들이 미국과 겨룰수 있는 경제대국이라고 공포한 일이 있었단다. 미국이 이 소식을 듣고 쪽발이같은것들이 으시댄다고 일본으로 들어가는 밀가루를 공제했단다. 밀가루가 들어가지 못하자 바빠난것은 일본정부였단다. 그렇다고 백성들한테 알릴 일도 못되여 최고급관리들만 속이 바질바질 탔단다. 할수없이 일본 외무장관이 미국에 가서 손이야 발이야 잘못했다고 빌어서야 겨우 밀가루문제를 풀었단다. 일본이 아세아에서 큰 소리쳐도 목줄이 미국에 쥐여져있어 미국말이라면 고양이 앞에 쥐신세란다.    미국은 지금 세계에서 패권을 쥐고 여러나라들을 쥐락펴락하고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법이다. 국가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러하고 개인도 그러하다.    이제 미국이 물앉는 날도 있을것이니 그때에 가서 또 이 세상을 쥐락펴락할 나라는 어느 나라일가 그것은 예측할수 없는 일이지만 어쩐지 동양아세아의 어느 나라가 아닐가? 만일 그렇다면 세계에서 제일 큰 대국인 중국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난다. 물론 세계가 무중심으로 될수도 있겠지만. 18.유서깊은 락양    18일 오후 한시기차로 락양에 떨어진 우리는 역전부근에 호텔을 잡기로 하였다. 짠제에서 하루밤을 혼난 조형은 호텔에 드는것이 절약이라고 연신 말한다. 우리는 하루에 120원 좌우를 하는 호텔에 들기로 하였다. 그만하면 설비가 괜찮으니까. 한 호텔에 가서 등기를 하고 들려니까 중국사람과 외국사람은 한방에 못든단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법이 있는 대도시가 있다니 억이 막히였다. 역전앞은 호텔이 주르르 서있는지라 우리는 짐을 끌고 나와서 건너편으로 갔다. 마침 거기에 숙비 50포인트를 받는다는 프랑카트광고가 있었다. 왕성호텔이였다. 그리로 들어가니 워낙 300원씩하던것을 120원에 줄수있단다. 한사람은 외국사람인데 어쩌느냐고 했더니 괜찮다는것이 아니겠는가. 거리 하나를 사이두고 호텔마다 다른 정책을 실시하고있다는것이 우스워났다. 아무튼 우리의 요구와 맞으니 행장을 풀었다.    호텔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었다. 천부수어(天府水鱼)라는 물고기국을 청해 먹었는데 얼벌하게 매운것이였다. 나는 먹기가 좋았는데 조형은 너무 맵다고 하면서 땀을 벌벌 흘리였다. 벌써 조형은 음식전투를 시작한 셈이다. 아직도 머나먼 길을 가야 하는데 음식이 맞지 않아 조형이 고생할 일을 생각하니 적이 불안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락양시 고분박물관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락양은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히는 유서깊은 력사의 성지이다. 북위 효문제 시기에 대동에 있던 도읍을 락양으로 옮기여왔다. 그때 조정에서는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투쟁이 격렬하였는데 효문제의 태자도 보수파였다. 효문제는 자신의 개혁을 완성하기 위하여 아들한테 독약을 먹이여 죽이였다. 그때 그의 아들은 15살이였다.    중국에는 20년의 중국을 알려면 심천으로 가고, 200년을 알려면 상해로 가고, 500년을 알려면 북경으로 가고, 1000년을 알려면 개봉을로 가고, 3000년을 알려면 서안으로 가고, 5000년을 알려면 락양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의 락양은 천하의 중심지나 다름이 없다. 이곳이 바로 중원이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하나로 황하중류의 중원을  꼽는데 그 중심이 바로 락양이다.    락양시의 한 십자로 복판에  탑이 우뚝 솟아있다. 락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탑이다. 원통형의 탑꼭대기에는 다리가 네개인  정(鼎)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산하고 있으면서 락양이 옛날의 서울이였다는것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원통형기둥으로는 9마리 룡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무늬가 새겨져있고, 그 높이가 30메트나 되여 웅장한 장관을 이루었다. 아홉 마리 룡, 그것은 락양에서 일어서고 무너진 서주,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후량, 후당 등 9왕조의 도읍을 상징하는것이였다. 탑주위에는 조명시설이 갖추어져있어 밤에도 그 정취를 느낄수 있는 굉장한 탑이다.    락양에는 일년에 1만여명이 나든다는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검은 기와를 옌 옛스러운 집인데 9개조대의 력사유물 진품들이 지하에 진렬되여 있다. 중국 최조의 마차가 있는가하면 2000년전  벽돌도 있고, 남녀가 같이 설 때 남자는 왼쪽이요 녀자는 오른쪽이라는 배렬이 있는가하면 옛날의 여러 가지 장례식이 있었는데  남자 한사람을 묻을 때 여자 셋을 함께 묻은것도 있고,  900년전에 밥을 먹는 장면 , 주방, 가무 등등 벽화들도 있다. 그 외에도 각개 조대의 도자기, 병장기,사치품, 벼라별  진품들이 그 수효를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그러한것들은 모두 락양은 중국고대의 문명의 발원지라는것을 증언하고있었다. 19. 불교의 인자함을 가르쳐준 룡문석굴     19일 아침일찍이 버스를 타고 락양시남쪽시교에 있는 룡문석굴(龙门石屈)로 갔다. 룡문석굴은 중국의 운강석굴 맥적산 석굴 돈황의 막고굴과 더불어 유명한 4대석굴에 속하는 곳이다.    시내와 13키로메트 떨어져 있는 룡문산은 향산과 마주 서있고 산사이로 이수가 흐르고 있었다. 룡문산에도 석굴이 있고 향산에도 석굴있는데 관광객들이 강사이를 나들며 석굴구경을 한껏하기에 편리하라고 아래우에 큰 다리가 놓여져있었다. 강변의 버드나무는 실실이 가는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고 강에서는 물안개가 피여오른다. 룡문산의 석굴은 운강석굴과는 달랐다. 운강석굴은 마애석굴이지만 룡문석굴은 청바위를 뚫고 까내고 다듬어만든 석굴이였다. 이제 세월이 억년을 더 흐른다 하면 운강석굴은 지워질지 모르지만 룡문석굴은 끄덕하지 않고 그대로 남을 석굴이였다.    룡문석굴은 북위 태화(北魏太和)18년(494년)에 착공하여 400여년동안이나 수건하였다. 석굴 1351개,  불탑 40여개, 조각 10만 3000여점이 있다. 이밖에도 또 석각과 제사가 3600여건이나 된다. 룡문석굴은 세상에 이름난 고대문화의 예술의 보물고로서 2000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였다. 대표적인것은 북위시대의 고양동, 빈양동, 련화동과 당나라 시대의 잠계사, 만불동, 봉선사, 간경사 등이다. 석굴안의 비천이 자태가 아릿다와 사람들을 경탄케 한다.    락양사람들은 이곳이 강물과 산세가 어우러져 빚는 경관을 룡문산빛이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락양8대경치의 으뜸으로 치고 있다. 그럴만도 하였다. 강북에 있는 룡문산의 석굴들은 모두가 남향작이여서 불상들은 아침부터 줄곧 저녁까지 해빛을 쪼이면서 따뜻이 지내고 있었다.    아침이라 날씨가 쌀쌀하고 비방울까지 뿌리였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여든다.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북산기슭을 따라 구경하였다. 그런데 나보다 조형의 속도가 매우 늦었다. 그는 무었인가를 살피고있는것이였다.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니 여기에 백제인이 만든 불상이 있다는 보도가 작년 11월에 한국신문에 실렸단다. 여기의 불상들은 모두 번호가 있는데 백제인이 만든 불상이 877번이란다. 정말 희귀한 일이였다. 하지만 관람객들이 환히 볼수있게 새겨진 번호가 아니여서 찾기가 여간만 힘든것이 아니였다. 이 불상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락양대 특임교수로 와있는 임성조교수란다. 당나라시대의 석굴에 백제인이 만든 불상이 있다는 발견은 금시초문으로서 한국의 유관부문과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소식이였다 .조형이 한시간이나 허비하면서 살펴보더니만 환성을 질렀다. 여기 있소 하고.  나도 달려가 보았다. 877번 불상 왼쪽좌불이 조각된 두 개의 감실아래에 부여씨(扶馀氏)라는 세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임교수는 부여씨라는것은  백제왕실의 성이므로 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백제멸망직후 당나라에 끌려온 백제인일것이라고 기사에다 밝히고있었다.    룡문석굴에서 제일 큰 불상은 17.4메트이고 제일 작은 불상은 2센치메트란다. 봉선사에 이르러 제일 큰 불상 로사나불을 보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첨앙하였다. 여기로 오기까지 수천개의 불상을 보았건만 이 불상을 보는것처럼 마음이 설레인적은 없었다. 바위를 파내고 모시였는데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것만 같았다.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인자하고 무엇이 참한것인가를 불상은 나와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 그래서 사람들은 불교를 믿었댔구나 하는 생각이 내 가슴에서 회오리치고있었다. 로사나불은 인간의 모든 악을 버리고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을 집대성한 축도였다. 이제까지 춥던 감각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의 얼굴은 열이 오르는것처럼 뜨끈뜨끈해났다.    당나라 함형3년(672년)에 수건하였다는 이 봉선사는 룡문석굴에서 규모가 제일 큰 로천감실이여서 굉장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당나라 조각예술의 대표작으로 인정 받는 이 감실은 남북으로 36메트이고 동서로 길이가 41메트나 된다.  감실에 있는 주불 로사나불의 높이가 17.4메트인데 머리길이가 4메트이고, 귀의 길이가 1.9메트이다. 얼굴이 넙죽하고 눈과 눈썹이 길죽하고 입귀가 약간 들리였는데 보는 사람마다 너무도 완벽한 예술품이여서 야! 야! 연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량쪽의 제자들인 가엽은 엄숙하고, 아난은 온순하고 경건하였다. 보살은 단정하고 소심하고, 천왕은 두눈을 부릅 뜨고 위풍이 당당하였다. 전반 조각군이 조예가 깊고 배치가 잘 어울려있었다. 이 석굴을 완성하기 위하여 무측천이 은전 2만냥을 하사하였고, 준공의식에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왔단다. 사람들은 이 불상이 무측천을 닮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알길이 없다. 봉선사로 눈길이 자꾸만 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를 보았지만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로사나불을 본다음부터는 다시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불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인자하고 선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참한 형상이 머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20. 관림(关林)의 슬픔    룡문석굴에서 돌아오는 길에 관림에 들리였다. 관림이란 사람들이 관제묘라고 부르는 관우의 묘지이다. 삼국시기 촉나라 장수 관우의 수급이 묻혀있는 곳. 건안 25년(220년)에 오나라와 촉나라가 형주를 쟁탈할 때 관우는 오나라의 당양에서 여몽에게 잡히여 살해당하였다. 오나라는 관우의 수급을 락양에 보내여 그 죄를 조조에게 씌우려했다. 그런데 조조는 도리여 황후의 례의로 관우를 성남에 묻었다. 그후 명나라때에 와서 관우의 묘를 세우고 청조건륭시기에 확대건축하여 오늘의 규모에 이르렀다. 락양의 사람들은 관우를 공자와 함께 2대 성인으로 받들기도 하고, 관제묘는 하남성의 문화뉴물로 지정되여있고 락양의 하나의 고대석각예술관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관림의 앞에는 운동장만큼 큰 광장이 있었다. 광장가운데는 벽돌로 쌓은 커다란 정자가 있다. 광장에 들어서니 비자루같은 큰 물붓을 들고 글자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서체도 쓰고 초서도 쓰면서 늙은이들이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정문입구에는 철사자 한쌍이 앉아있는데 이 철사자는 무쇠 3000근으로 만들어진것이다. 입구의 량켠에는 돌기둥이 서있는데 104마리의 사자를 조각해 놓았다. 옛사람들은 사자를 관우의 상징으로 삼은것같았다.    대문안에 들어서니 측백나무들이 푸르러있었다. 기상고고전(气壮高高殿)은 1593년에 건축한것인데 대우에는 인자한 모습의 관우가 패쪽을 들고 조용히 앉아있다. 광조일월전(光照日月殿)에는 관우가 가운데 위쪽에 앉아있고 오른쪽에는 주창, 왼쪽에는 관평이 앉아있었다. 관우는 류비가 준 옷을 입고있었다. 관우는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지만 눈빛이 부드럽고 자애로와 무서운 기운이 나는것이 아니라 인자하고 관용적인 상이였다.    관우묘는 제일 뒤에 있었다. 1765년에 수건한 관우묘두리에는 수림이 무성하고  높이가 20메트인 8각형무덤이였다. 무덤앞에 세워진 문에는 이런 글이 씌여있었다. 문설주우에다는 충의신무령우인(忠义神武灵佑仁)용무현관승대제림(勇武显关呈大帝林)라는 글발이 두줄로 가로 새겨져있고, 왼쪽문설주에는 내리글로 수재천중음수룡(首在天中阴睡龙)이라  새겨져있고, 오른쪽문설주예는 내리글로 신유상원승선학(神维上苑乘仙鹤)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관우를 룡으로 학으로 비기면서 의리가 있고 무예가 출중한 충신으로 보고있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알리였다. 관우가 쓰던 3메트나 되는 칼이 관림에 소장되여 있어 이채로왔다.    관림을 돌아보고 두보의 생가가 떠올라서 나는 서운한 감이 없지 않았다. 두보와 관우를 비기면 두보는 중국의 시성이요 관우는 촉의 한 명장이다. 그런데 관우는 이렇게 큰 관림을 세우고 기리는데 두보의 생가는 아직도 꾸려지지 않고있다. 관우보다 못한 두보란 말인가. 내가 문인이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눈안에 두보는 밝은 혜성이고 관우는 두보에 비하면 개똥벌레의 불빛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쉐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그러기는 중국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중국도 두보와 인도를 바꾸자면 아니 바꿀것이다. 중국에서 세계에 내여놓고 자랑할만한 력사인물이  두보인가 아니면 관우인가 하고 물으면 중국사람은 물론 온 세상의 문명인들도 두보라고 할것이다. 그런데 혜성이 떨어져 반디불이 되고, 반디불이 하늘에 올라가 혜성이 되었음은 누구를 탓해야 하며 전도된 이 력사는 누가 바로잡아야 하는가.    삼국연의소설에서 관우가 싸우던 장면들을 눈앞에 떠올리면서 관우묘를 나오는데 안녕하게요 한국에서 오셨죠라는 처녀애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리였다. 안경을 낀 처녀애가 하늘에서 떨어진듯이 우리를 보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있었다.    장백현을 떠난후 처음 보는 조선족이라 서로 기쁘기 그지 없었다.    뭘합니까    초를 팔고 있습니다. 한대 사세요. 여기 오는 사람들은 모두 향불을 피우고 간답니다.   우리는 그럴사이가 없거니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녜 그래요   이름이 뭐지   윤숙이얘요   몇 살이지   스물일곱이얘요 말띠얘요   어디서 왔지   흑룡강에서 왔어요   살아가기가 어때요   괜찮아요    초값이 얼마요    30원입니다    조형은 초를 사봤자 그에게 차례지는 돈이 얼마 안될거고 우리는 향불을 피울 사람도 아니니까 점심이나 사먹으라고 돈 10원을 윤숙이에게 주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애의 얼굴이 그냥 내머리에서 맴돌이쳤다. 나는 어쩐지 그 애가 가엽게만 생각되였다. 멀고먼 흑룡강에서 부모형제를 떠나 산 설고 물 선 타고장에 와서 돈을 벌겠다고 애쓰는 그 애 모습이 외국에 가있는 딸처럼 생각되였다. 나의 딸들도 외국에 가서 저렇게 일하겠지 하는 마음이 종시 내려가지 않았다. 윤숙아 제발 잘 되여라 하고 나는 속으로 빌고빌었다. 지금도 그 애가 다시 보고싶다. 올겨울을 무사히 보냈는지가 궁금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인가. 20. 쑈랑디(小浪底)의  변천    조형은 황하를 보지 않으면 중국동서횡단을 하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면서 황하를 꼭 보아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황하는 장강과 함께 중국의 상징이 아닌가. 황화가에는 80만년전의 류인원의 화석이 있고, 황하는 세계4대 문명발상지중 하나를 끼고 있으며, 황하는 중국력사의 왕조들의 도읍을 끼고있는 곳이 아닌가. 황하의 력사는 중국의 력사인것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어느 사변이 황하와 관계가 없는것이 있었던가. <<흐르는 물도 피로 물들고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있다네>> 안사이란을 겪은 리백이 <<부풍땅을 읊은 호걸>>에서 오죽하면 황하를 이렇게 읊었겠는가. 황하는 중국력사에서 피로 물든 강이였으며, 황하는 중국력사에서 전투의 붉은기도 날리였고 승리의 붉은기도 날이였던 강이다. 황하의 갈피갈피에는 중국의 력사가 적혀져 있어 중국을 알자면 황하를 읽어야 한다. 황하를 모르고서야 어찌 중국을 안다고 하겠는가. 우리가 가려는 길이 바로 이 황하를 읽는 길이 아니겠는가. 조형의 생각한 길은 백번 옳은 길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황하를 보러가기로 하였다. 락양에서 황하를 볼만한 곳은 여러곳이였다.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황하삼협으러 가는가 아니면 쑈랑디로 가는가 하고 망설이다가 그래도 거리가 가까운 쑈랑디를 택하였다. 쑈랑디는 락양역에서 40키로메트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다녀오기 편리한 곳이였다.    버스에 앉아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가 쑈랑디에 있다면서 우리를 반갑게 대하는 50대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자기 딸이 차를 모는데 차로 쑈랑디 구경을 시키겠단다. 한시간쯤 달리던 버스는 산기슭에 난 포장도로를 따라 쑈랑디를 넘어서고있었다. 여기의 황하는 누런물이 아니라 새파란 물이였다. 황하는 세차게 흐르고있었는데 생각보다 물이 많지 않았다. 훈춘시 방천에서 보는 두만강쯤되는 같았다. 물가에서는 자연산 오리들이 두어곳에서 몇마리씩 놀고있었다. 쑈랑디라는것은 땜의 이름이였는데 황하를 가로 지르고 웅위롭게 뻗어나갔다. 땜의 길이가 1667메트, 꼭대기 너비가 15메트, 높이가 154메트, 밑의 두께가 846메트, 이 어마어마한 땜에 저수지 물이 130립방키로메트 깔려있다 . 여기에 든 토방량을 너비 1메트, 높이 1메트로 늘여놓으면 지구를 한바퀴 돈다고 50대가 자랑이다. 땜에는 황하안란복택인민하산영고(黄河安澜福泽人民河山永固)라는 강택민주석이 쓴 제사가 새겨져있고, 쑈랑디라는 땜이름이 굉장하게 새겨져있다. 50대의 말에 의하면 그 글자들 한자에 만원씩 들었고 글자의 노란색 염료는 미국에서 수입한것이라고 한다.    오늘은 저렇게 황하를 다스리면서 인민들에게 복을 마련해 주고있지만 옛날의 황하가 인민들에게 들씌운 재난은 얼마였던가. 강을 건너가는 다리에 올라섰노라니 쏴아 울부짖는 황하의 물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면서 리백이 읊은 <<배끄는 노래>>가 귀전에서 맴돈다. 운양땅에 끌려왔더니 량언덕엔 장사치만 득실거리네 숨이 막히도록 더운 오뉴월에 배끄는 고생 한이 없어라 감탕물처럼 물흐려 마실수 없고 항아리에 넣으면 가라앉는 흙이 절반 이럴 때 배끄는 노래 부르면 마음 아파 눈물이 비오듯한다네 만사람이 모여서 파내는 돌 무슨 수로 강가까지 옮겨놓으랴 보시라 망탕가에서 실어내는 돌 천고의 피눈물로 무늬가 되었다네    배군들의 피눈물에 천고의 돌에도 무늬가 패여 어룽거리였단다. 그것은 어제의 황하의 축도가 아니랴. 강택민주석이 쓴 글발을 새겨안고 쑈랑디는 오후의 해빛에 찬연한 빛을 뿌리며 고즈너기 웅좌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 마을에 이르니 정말 장사치들만 득실거리는 마을이 나지였다. 50대네도 길가에다 상점을 벌리고 식당을 차리고 영업을 하고있었다. 손님 비철이라 상점도 식당도 한산하였다. 우리는 50대딸이 모는 오토바이차에 앉아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관광계절이 아니여서 문지기도 없었다. 한둔덕에 올라가니 쑈랑디가 눈아래 바라보이였다. 당나라때의 시인 왕지환이 <<황하는 아득히 구름가서 흘러오고 만길높은 산마루엔 성곽 하나 외로와라>>하고 황하를 노래한적이 있는데 오늘의 황하는 하늘가서 흘러 여기에 와 바다가 되었고 외롭게 서있던 산정의 성곽에서 유람객들의 노래소리 웃음소리 넘치는 경상이였다. 파아란 물이 산골안을 따라 아득히 펼쳐져있고 산굽이 물굽이마다에 유람선들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얼마전에 유람선사고로 배들이 항구에 정박한 채로 뜨지 못한다고 50대의 딸은 이야기하였다. 실은 뜬다고 하여도 배를 탈 사람이 나와 조형 두사람밖에 없었다.    내려와서 50대와 차비를 어쩌느냐 물었더니 딸과 상의 하란다. 올때에는 공짜로 태워줄것처럼 하던 50대였건만 제안속이 있어서 꽈다쳤던것이다차비 50원을 치렀다. 실은 또 좀 당한것 같았다. 연길이면 20원이면 족할것을 50원이나 물어야 했으니 말이다. 속이 아파도 별수 없는 일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아웅다웅할수도 없는 일. 현하 중국은 낯모르는 곳에 가면 뜯기게 마련이고 당하게 마련인데야. 두눈이 새똥그래서 남의 돈을 긁어내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연길에서 커피 두잔 먹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을. 길을 나서면 이와같은 아큐정신이 있어야 하는 세월이다.     차가 오려니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았다. 오늘은 버스가 쉬는 날이라고 오지 않는다나. 옆에서 손님을 노리고 있는 택시들이 제 차를 타라고 수선을 떨고있다. 재수 없는 놈이 가루 팔러 장마당에 나가면 바람이 분다더니 오다나니 이런 날에 올줄이야. 한시간 족히 기다리는데 차 한대가 와서 무엇인가 수리하고있었다. 나는 달려가서 그 차를 타려고 하였다. 마침 두사람이 돈을 내고 도거리한 차였다. 함께 차비를 내기로 하고 그 차에 올랐다. 그 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택시비 200원이나 팔번하였다.    차에 앉아오면서 들을라니까 쑈랑디에도 조선족이 몇이 있단다. 어느 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공정사로 있다나. 이런곳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는 그들이 이런 외진 곳에 와서 어떻게 살가고,  무슨 멋에 살가고, 어떤집에서 어떻게 살고있을가 하는 궁금증이 가슴속에서 자꾸 살아나 동행자들과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그들을 꼭 알아야 할 리유는 없었지만 무턱대고 묻고 싶었고 알고싶었고 만나고싶었다. 그들을 만나만 보면 매우 반가워할거야 하는 생각만이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면서 관림에 있는 윤숙이는 오늘도 무사한지 하는 부질없는 념려가 살아났다...                                                           21  열두조대의 서울 서안     19일 저녁에 락양에서 밤차를 타고 서안으로 떠난다. 서안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찬 곳이다. 서안은 중국의 력대의 조대가 서울을 정한 곳이다. 주, 진, 서한, 신망, 서진,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  수, 당 12개 조대가 서울을 정했던 고장으로서 1100여년의 서울력사를 갖고있어 도읍력사가 가장 길고 가장 고로한 도시이다. 게다가 서안은 황소의 대제(大齐), 리자성의 대순(大顺) 두개의 농민정권 소재지였고, 신민주주의 혁명시기에는 중국현대사에서 유명한 서안사변이 발생한 곳이다. 서안을 주나라때에는 호경이라 부르고, 진나라때에는 함양이라 하였고, 한나라와 당나라때에는 장안이라 불렀다.    중국을 와서 서안을 보지 못하면 중국을 보았다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서안은 유명한 력사의 도시이다. 도도한 위하가 서안을 지나 400여리를 흘러흘러 황하로 들어가는데  력사의 명성 서안은 강을 가운데다 끼고 앉아있다.  서안은 우리나라 6개 고도의 하나이며, 우리나라 서부교통의 요충지이며, 서북의 중요한 전략요지이다. 서안은 경하, 위하, 산하, 파하, 풍하, 호하 , 로하, 율하 등 여덟강에 얽혀있어서 팔수제왕도(八水帝王都)라는 명성을 가지고있다.    서안을 진나라때에는 장안향이라 불렀고 한고제 7년(기원전 200년)부터 도읍이 된곳이다. 그때에 거리가 문살처럼 교차되여있고, 성시가 발달하여 서양의 로마성과 아름다움을 비기는 도시였다. 당조때에 서안을 대대적으로 확건하였는데 동서길이가 9550메트였고 남북길이가 8470메트였다. 서안에는 집들이 바둑판에 바둑알처럼 많았고, 열두거리가 정연하여 당조때의 장안성을 일본에서도 모방하여 도시를 건설하였다. 한무제때엔 저명한 사자 장건이 서역으로 나들었고, 당조때엔 일본류학생들이 13차나 서안으로 왔는데 많을 때엔 20여명이나 되었고, 제일 많을 때에는 200여명이나 되었다. 당천보(唐天宝)20년 (기원 753년)에 일본에서 온 류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간다음부터 중국의 한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형이라는 한어이름을 가진 일본사람은 당조에서 관리질하면서 50여년이나 장안에 있었는데 일본에 갔다오다가 바다에서 익사하였다. 그와 친교가 깊었던 당나라시인 리백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명월이 바다에 가라앉아 돌아오지 않으니 그 슬픔에 푸른 오동나무도 흰구름이 되였다고 하였다.    렬차를 타고 서안에 와서 내리니 역전앞에 산줄기같은 장성이 눈앞을 가린다. 장성을 지나지 않으면 시내안으로 들어갈수 없게 되여있다. 우리는 옛날의 국경선을 넘어 시내로 들어갔다.   서안에서  이제까지 전투를 한 피곤도 풀고, 비단의 길을 답사할 준비도 하고, 서안고도에 대한 고찰도 하면서 서안에서는 며칠 묵기로 하였다. 호텔에 든 조형의 첫 작업은 샤와이고 빨래이다. 어디에 가나 짬만 있으면 빨래를 하는 조형이다. 짬이 적으면 양말같은것을 빨고, 짬이 많으면 옷견지들을 빠는 조형이다. 나는 또 빨래부터 합니까 조형은 정말 빨래선수라니까 하고 우스개를 한다. 이렇게 우스개를 하지만 조형의 빨래습관은 따라 배울만한것이였다. 몸을 빨래하면 피곤이 풀리고 옷을 자주 빨아입으면 길을 가는 마음도 몸도 다 가벼워진다. 조형은 아무리 먼길을 오래 다녀와도 집으로 갈 때에는 절대 빨래꾸러미를 가지고 가지 않는단다. 깨끗한 몸, 신선한 마음으로 려행도 하고 집에도 돌아간다는 조형이다. 그때 빨래하는 감정을 조형은 자기 려행기에다 이렇게 쓰고 있다.    ... 빨래를 하는데 왜 이렇게 행복감이 충만해지는가. 경험치 못한 이들은 모를 일이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세탁비누로 빨래를 한다는 당연한 일이 왜 이토록 새삼스럽게 고맙고 행복한가...    조형이 빨래를 끝낸다음 나도 조형을 본받아 몸도 빨고 옷견지도  빨았다. 하지만 조형처럼 새삼스럽게 고맙고 행복한 감은 느끼지는 못하면서...    이러저러한 한담을 하다가 조형은 또 들을만한 이야기를 하였다.    려행하는 사람이 돈가방의 돈을 깨낼 때는 꼭 돈가방에 돈이 어느만큼 들어있다는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게 손으로 가리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간 어느 도적놈이나 나쁜놈에게 발각되면 추궁을 당하거나 봉변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배낭에 물건을 많이 넣고 주머니는 가벼워야 합니다. 많은 돈을 한곳에 두지 말고 여러곳에 갈라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을 도적 맞히거나 잃어버려도 나머지가 있게 되며 큰 돈을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려행이라는것을 처음 해보는 나는 또 한가지를 터득하였다. 빨래를 하는것도, 돈지갑이나 돈을 잘 간수하는것도 모두 성숙한 려행자의 소행이였다.    700여만이 살고있는 서안 시내를 나서니 매연이 너무도 심하여 골칫거리였다. 락양에서도 매연 때문에 사진을 바로 찍지 못하였는데 서안은 그보다 더하였다. 디지텔칼라사진마저 찍을수 없어 조형은 매우 속을 태웠다. 사진은 기념물인데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하게 되니 서안시내에 있는 많은 문화유적지와 유물들을 생각대로 렌즈에 담을수 없다는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수 없었다. 어째서 매연이 이러냐고 물으니 나는 이런 대답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서안의 인구가 700여만인데 한집식구를 평균 넷으로 친다면 서안시에는 150여만채의 집이 있는셈이다. 거기에다 수천으로 헤아리는 기관이 있다. 그것을 따뜻하게 덮혀주기 위하여 수십만개의 굴뚞에서 아침저녁으로 모두 연기를 뿜는다. 지금은 잠풍한 계절이여서 연기들이 모두 서안시내의 하늘에서 떠돌게 되는데 어떻게 개인 하늘이 보이겠는가. 서안은 연기구름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우리는 목이 매캐해서 마스크를 사서 끼고 다니는수밖에 없었다.    조형은 서안사람들은 대단하오 이런 매연속에서 마스크도 끼지 않고 다니네 하고 연신 내뱉었다. 하긴 가스를 때는 한국사람으로서 매연의 맛을 보지 못하였겠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중국의 대성시 사람들은 겨울이면 석탄내굴을 먹으며 사는데 습관된 사람들이 아닌가. 중국사람들의 심장은 철심장이여서 매연이 침범 못한다는것을 조형은 모르고있었다.    서안에서 제일처음으로 가본곳은 서안시안의 남쪽에 있는 대안탑(大雁塔)이다. 대안탑은 고대서안의 독특한 풍경을 이룬 서안의 표징이였다. 하늘을 가르고 우뚝 솟아있는 대안탑은 멀리에서 보아도 웅위로운 고풍이 그대로 빛을 뿌리였다.    대안탑은 대자은사(大慈恩寺)내에 있다. 대자은사는 수나라때 세운 무루사(无漏寺)였는데 당나라 당정관(唐贞观) 22년(648년)에 다시 확건하고 대자은사라 그 이름을 다시 지었다. 당시 대자은사에는 전(殿)과 각(阁)이 줄느런히 들어섰는데 집이 도합 1897채였다고 한다. 절에는 벽화가 여러점이 있었는데 모두 당년의 유명한 화가인 염립본(闫立本), 오도자(吴道子), 위자을승(尉迟乙僧) 등이 그린것이라고 한다. 사를 건립한지 얼마 안되여 당태종은 홍복사(弘福寺)에 있는 현장을 대자은사에 이사와서 절의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특별히 역경원을 지어주고 국내의 연박한 고승들과 학자들을 불러들이여 현장이 인도에 가서 가져온 불교경전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게 하였다.    현장의 원성은 진이였고 하남 사람이였다. 현장은 우리나라 력사상의 유명한 고승이였고, 중국불교의 법상종의 창시인이였다. 그는 불교성전인 경장 (经藏),률장(律藏),론장(论藏)에 통달한 고승이라 삼장법사라고 칭하였다. 그는 정관 3년(629년)에 인도에 가서 불교를 학습하고 정관 19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에 불서 657부를 갖고 왔는데 선후로 홍복사, 자은사, 옥화사 등 절에서 74부의 불경을 번역하여 1335권을 만든 고승이였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라는 책을 써내였다. 이 책에는 인도와 서역각지의 산천, 성읍, 인문, 물산 등이 밝혀져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서부변강과 중아세아 및 인도 등 나라에 대한 고대력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대안탑은 현장이 인도에 가서 가져온 불경재료 657권을 보관하기 위하여 당고종영위 3년(652)에  인도의  건축형식을 모방하여 5층으로 세운 탑이였다. 무측천 장안년간(701-704)에 7층으로 다시 수건하기도 하였다. 대안탑의 평면은 정방형이다. 대안탑은 길이가 45메트이고 높이가 4메트인 기초대우에다 세워져있었다. 이 탑을 왜 대안탑이라고 이름 지었는가? <<천축기>>라는 책에는 인도에서 천석산에다 5층불탑을 세울 때 아래층을 기러기형태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를 본따서  대안탑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탑은 벽돌장을 엇물리게 쌓아서 비상히 견고하게 지은것이였다. 탑이 아래 두층에는 각각 9홉칸이고 3,4층은 7칸이고 제일 높은 층은 5칸이다. 탑내에는 층층계가 있다. 사람이 올라가려면 빙빙 돌아올라가게 하였고, 층마다 사면에 밖을 내다볼수 있는 동굴같은 문이 났다. 제일 아래층 사면에 난 돌문 문설주우에는 정교하게 새긴 불상이 새겨져있다. 그것은 당대의 화가 염립본이 몸소 그린것으로서 아미타불이 불교를 선전하는 도해이다. 탑남문 량켠에 지어놓은 감실에는 당조의 저명한 서법가 저수양 (褚邃良)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圣教序)와 <<술삼장성교서기>>(述三藏圣教序记) 라고 쓴 두개의 비문이 서있다.    당대말기의 전란으로 하여 지금은 대안탑만 우뚝 솟아있다. 오늘 보이는 사자리는 대개 명대이후의 규모이고, 절의 전당은 청대말년의 건축이란다. 당대시인 잠삼(岑參)은  해맑은 날 사각탑7층은 창공을 찌른다. 눈아래 새들의 날음이 보이고 귀기울이면 바람소리 들린다고 대안탑을 칭송하였다.    서안시 남북밖의 우의서로 남측에는 대안탑과 대칭되는 소안탑(小雁塔)이 있다. 당중종경룡년간(707-709)에 지은 이 탑은 모두 15층이였는데 명성화 23년(1487년)에 이렁난 대지진으로 탑꼭대기가 무너지고 탑에 금이 실리여 지금의 열두층으로 되었다. 평면이 정방형으로 된 이 탑의 지금의 높이는 43.3메트이고 밑변의 길이는 11.38메트이다. 이 탑은 당나라의 고승 의정(义净)이 당고종함형 2년 (671년)에 지금의 광주를 거쳐 인도에 갔다가 가져온 불교경전 400부를 저장하였던 곳이다. 소안탑에는 1193년에 주조한 종이 달려있었다. 이른 아침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몇리밖에서도 들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안탑도 장안 8경의 하나에 속한단다.    서안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있는 대안탑과 소안탑은 오늘도 유람객들의 발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며 웅위롭게 서있다. 그외에도 서안시에는 흥교사 현장탑이며 향적사 선도탑이며 남오대 승수사탑이며 ...여기저기에 탑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어 서안의 경관을 이루고있다.    종루를 걸어가는 길에서 나는 고구마 두 개를 샀다. 락양에서 고구마를 먹어봤으면 하던 조형의 말도 생각났지만 나도 고구마를 먹고싶었다. 황토고원의 고구마가 특별한 맛이 있겠다고 생각되여서가 아니라 조형은 한국 충북소재지인 청주에 있는 동양일보사 회장이고, 나도 연변일보사 기자이다가 지금은 작가협회 부주석이다 보니 조형은 한국에서 나는 연길에서 고구마같은것을 사서 질근질근 씹어먹으면서 거리를 흔들거리며 다니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길거리에서 구워서 파는 고구마란 연길에서는 아이들이나 아낙네들이 사먹는것인줄만 알고있는 나였다.    서안에 오니 아는 사람 하나도 없다. 고구마를 먹든 넝마주이를 하든 체면을 깎일 일이 없고 부끄러울것이 없었다. 서안에 있는 우리는 아무런 신분도 없는 무깍지들이였다. 모든 체면과 모든 허위적인 껍질들을 죄다 벗어던지고 둘이 마주보며 서로 웃으며 따끈따끈하고 달달한 고구마를 먹어본다는것은 어쩐지 대단한 향수가 아니랴. 종루길은 흐린날 줄지어가는 개미들처럼 사람들이 붐비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며 한차례의 향연을 누리는 기분이였다. 종루의 가까이에 가서는 아예 지하도문어구에 있는 콩크리트대에 걸터앉아서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 길손들은 어디서 저런 령감들이 나타나 애들처럼 고구마를 먹는가 하고 생각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달콤한 고구마를 껍질을 밝으며 맛있게 먹었다. 조형도 나도 처음으로 거리에서 구운 고구마를 먹다보니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과 기분이였다. 나는 너무도 맛있어서 고구마 껍질까지 다 먹어버리였다.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은 세가지를 위하여 살게 되는 같다. 하나는 의식주, 둘째는 성, 세째는 명예. 마음대로 먹고 입을수 있는 생활, 남녀의 사랑과 정 , 어디 가서나 남보다 못하지 않는 신분으로 사람들은 살고싶어한다, 그러한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가 일수이다. 하지만 이 세가지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차례지는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세가지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한이 없어 자기에게 차례진것에 대하여 만족하는 사람이 아마 이 세상에 별로 없을것이다. 이 세가지에서 만족을 보기위하여 사람들은 아웅다웅 질투하고 다투고 있으며, 이 세가지를 얻기위하여 사람무리들은 전쟁까지도 거리낌없이 하면서 살인마저 서슴치 않고있다. 그런데 고무마를 먹는 이 시각 우리는 이 세가지에 대한 남다른 추구가 추호도 없다. 그것은 진정한  해탈의 시간이며 자유의 시간이였다. 고구마를 먹는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그자체가  향수이고 행복일줄을 누가 알았으랴. 우리의 해탈과 자유를 경축하는듯 어디선가 떵떵하고 종소리가 야무지게 울리였다.    고구마를 다 먹고나니 개원상장(开元商场)이라는 커다란 간판을 단 둥근 층집이 우리 앞길을 막고있었다. 네거리 가운데 있는 상점빌딩이여서  차들이 빙빙 돌아서 제갈길을 가고있었다. 주위에는 종루술집이며 종루판점이며 종루시장이며 종루우전국이며... 빌딩들이 상점의 위세와 번영을 돋구면서 어깨를 겪고 서있었다. 그것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붉은 색칠을 한 상점은 둥글게 서있었다. 종루라는 간판들이 많이 붙었지만 거기에는 종루가 없었다. 겉모양이 둥글게 생긴것처럼 상점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빙빙 돌면서 둥글게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상점은 대단히 컸는데 고양이 뿔외의 상품은 모두 있었다..    종루는 서안성내의 동,서,남,북 거리 합수목에 있다. 홍명무 17년(1384년)에 건축한것이다. 원래는 서대가의 북광거리어구지에 건설했던것인데 명성종만력(明神宗万曆) 10년(1582년)에 순안어사(巡按御史) 공무현(龚懋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종루가 준공될 때에는 공씨가 사천으로 벼슬하러 가서 현지에 없었으므로 멀리에서 종루가 (钟楼歌)라는 글귀를 써보내여 그 이름을 종루라고 달았단다. 종건륭 4년(1739년)에 종루는 다시 보수를 거치였는데 국민당시기에 엄중한 파괴를 입었다. 해방이 되어 1953과 1958년에 두차의 보건을 거쳐 또다시 광채로운 오늘의 종루로 되었다.   종루는 면적이 1300여 평방메트이고 기초의 높이가 8.6메트이고 지면으로의 높이는 36메트이다. 정방형으로 된 종루는 안으로는 5칸이고 겉으로는 7칸이다. 루는 두층인데 처마가 3층이다. 처마의 네귀는 새가 나는것 같아서 건축술어로는 휘하식(翬下式)즉 다섯가지 색을 가진 꿩이 날아예는 식이다. 지붕은 푸른 류리기와요 벽에는 금빛그림이요 기둥에다도 그림을 새겨 집안은 금빛이 찬란하다. 지붕꼭대기는 금덩이를 얹어놓은것 같아서 해가 뜨면 황홀하다. 이 고대건물은 서안의 독특한 표징의 하나로서 기세가 우람하고 아름다워 늘 유람객들이 모여든다.    종루와 마주서 있는 고루(鼓楼)는 서안의 서대가 북원문의 남단에 웅위롭게 서있었다. 고루는 서안의 유명한 명승고적의 하나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고루는 면홍무(明洪武) 13년인 1380년에 지은 5층으로 된 고대건축이였다. 청강희(清康熙) 38년(1699년)과 건륭(乾隆) 5년(1740년) 두차례의 수건을 거친 고루는 명조때와 청조때에 저녁시간을 알리는 큰 북이 하나가 있었다하여 고루라는 이름을 붙이였다. 검은 벽돌을 쌓아지은 고루는 동서길이가 52메트이고, 남북의 너비가 37메트이고, 성대의 높이가 7메트이고, 면적이 1924평방메트이고, 지면으로부터 꼭대기까지 34메트이다. 성대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아치형문이 나있어 북으로는 북원문에 이르고 남으로는 서대가에 이른다. 장방형으로 생긴 고루는 상하 두층이고 처마가 세층으로 되어있고, 정면은 보기에는 일곱칸인것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세칸이다. 사면으로 복도가 통하면서 아홉칸으로 갈라져있어 건축언어로 말하면 <<7칸9>>라고 한다 .록색의 푸른 류리기와 아래의 남쪽과 북쪽에 편액이 둘이 달려있다. 남쪽것은 고루가 준공된후 청고종건륭(清高宗乾隆)의 어필을 모사한 문무성지(文武盛地)라는 글이 새겨져있고, 북쪽에것은 상전계함년 리윤관(相传係咸宁李允宽)이 쓴 성문어천(声闻于天)이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 두편액이 고루에 고로한 색깔을 짙게 하고있었다.    서안에는 종루와 고루같은 고색이 창연한 건물이 많은데 종루와 고루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22. 섬서의 풍경과 도가  
29    현대시를 쓰는 방법.6 댓글:  조회:1775  추천:37  2008-10-22
제6장 이미지와 언어  시는 언어를 떠날 수 없으며 시인은 언어의 련금사라고 한다. 시속에서 마술을 피우는 언어를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많이 만나게 된다.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는 테마에서 이미지와 언어와의 총체적인 관계를 더듬어보았다. 그것은 이미지와 언어간의 총적테마였다. 시인의 상상력이 언어를 다루는 기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시공부란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언어공부이다.   시는 새로운것을 창조한다고 한다. 창조한다는것은 시적발견이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누구도 체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것을 체험하고 누구도 보아내지 못한 새로운것을 보아내고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것을 듣고 누구도 써먹지 않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이미지시 즉 현대시의 성스러운 과업이며 천직이며 의무라고 하겠다. 이 과업, 이 천직, 이 의무에 충실하자면 새언어만들기 작업을 하 지 않으면 안된다.   제1절 성질이 다른 언어조합    이는 모든 문법규칙과 론리를 떠나 성질이 다른 단어의 강압적 결합을 이야기하는것이다. 성질이 다른 단어의 강압적결합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언어사용인것이 아니라 새롭게 언어를 사용한다는 말이겠다. 현대시의 리스트들은 이 작업에서 우리들한테 많은 유익한 전범을 남기였다.   일본의 다무라 류이지는 <<아름답게 미쳤다>> <<다갈색 운명>> <<꽃같은 상처>> <<참혹한 기쁨>> <<노을의 울림>> 등등 새언어만들기를 하였다. 스페인의 로르까는 <<달고드름>> <<활짝 열려오는 여자>> <<별들의 단검>> 등등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였고, 영국의 로렌스는 <<푸른 불빛>> <<장미가 매달리다>> <<황금빛 그림자>> <<검은 등불>> <<푸른 어둠>> 등등 새로운 언어조합을 해보았고, 미국의 포우는 <<달의 련옥>> <<별의 지옥>> <<달의 금빛 테두리>> <<달나라 산을 넘어>> <<빛이 펄럭인다>>...등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였다. 프랑스의 말라르메는 <<황금폭소>> <<멍청한 후렴>> <<황금빛 눈사태>> <<미소의 목동>>...등등의 새로운 언어조합을 떠올렸다.    언어들에 대한 일상적인 의식과 관습적인 관념을 떠나서 이 단어와 저 단어를 새롭게 조합해 냄으로써 언어의 보물고에 별처럼 반짝이는 진주들을 저장하였다. 일상적인 사유나 관념으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예기치 못했던 이러한 언어조합자체가 자연적이고도 펼연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됨은 자명한 일이라겠다. 아무리 좋은 령감도 이렇듯 신선하고 생신한 새로운 언어만들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시의 신선함을 맛보기 어려울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우리 시단에서 이미지를 중시한 시인들이 이런 언어조합을 많이 시험해보고있다. <<달빛의 언어>> <<살진 웃음>>(김정호) <<달빛이 펄럭이는 메산>> <<말씀의 시체>>(김학송) <<흙은 하늘>> <<해를 심는 감농군>>(김철) <<향기로운 깨침>>(박화) <<달의 사닥다리>> <<초원에서 질주하는태양>>(남영전) <<계절의 항구>><<젊은 장미가 불비를 쏟고>>(김파) 이외에도 많은 실례를 얼마든지 들수가  있다.     이런 새로운 언어조합은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특징이 있어 갑자기 숲속에서 이슬을 머금은 함박꽃을 발견한것 같다. 이런 언어조합은 팽팽한 긴장성을 가지고 있어 튕기면 쨍-울릴것 같다. 이미지의 참신성과 언어의 치밀성을 확보하는 이런 단어조합은 성질이 반대되는 언어들의 조합으로서 현대시언어의 정수이다. 새로운 언어의 조합은 상상력의 독재적인 강제수단에 기대여 이루어진것이라 하겠다. 언어에 대하여 독재를 실시할수 있는것은 현대예술이 시인에게 베푼 은총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2절 사물사이 공간과 시간 메꾸기  현대시 시인들은 새로운 단어조합이나 시구로써 두사물사이의 공간이나 시간을 가까이 하는 수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물속에서 금방 꺼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생명력이 약동한다.     <<하얀 별들의 내의가 물건을 나르는 어깨들을 연소시킨다>>(클라클), <<산의 몸뚱아리는 내 창가에 와 머뭇거린다>>(쉬페르비엘), <<별위에 바람이 일고 바람위에 돛이 있다>>(발레리), <<우리 둘이 그 안에서 잠자는 그대의 눈>>(엘뤼아르), 이러한 시구들은 두 사물사이의 공간을 제거해버림으로 하여 하나의 무대에서 두 사물이 동시에 운동하고 있다. 하늘중 높은 하늘 하늘중 푸른 하늘 사는 일 마음가짐 비춰보는 맑은 거울 새하얀  구름수건이 닦아놓은 청보석 한자락 가을 하늘 가슴벽에 걸어두면 해뜨고 달이 뜨고 별 또한 총총해 고운 꿈 살지워가는 청심이 머리든다.    <<거리의 울음소리>>로 독자를 격동시켰던 시인 김동진의 시조 <<가을하늘 한자락>>이다. 시인은 높은 <<가을하늘>>을 <<맑은 거울>>이라 변형하고 구름을 <<수건>>이나 <<청보석>>이라 변형하였다. 가을하늘 한자락을 <<가슴벽에 걸어두니>> 가슴벽에서 <<해뜨고 달이 뜨고 별 또한 총총>>하다고 변형한다. 하늘도 우리와는 먼곳에 있고 구름도 해와 달, 별도 우리와는 머나먼 곳에 있지만 거울이나 수건이나 가슴과 련계시킴으로써  아주 가까운 지척에 있는것으로 표현하고있다. 이 시조는 두사물사이의 공간을 축소한 전형적인 실례라겠다.    공간을 축소하는 방법이 있으면 시간을 축소하는 방법도 있다. 흔히 력사적제재를 시로 쓸 때 머나먼 옛날의 사물이나 사건을 현재의 사물이나 사건처럼 쓰거나 오늘과 련계시켜 쓰는 시들이 이 방법을 리용한다.   그네들의 살은 오늘의 흙이다 그네들의 뼈는 오늘의 바위다 그네들의 피는 오늘의 샘이다 그네들의 땀은 오늘의 강이다 그네들의 한숨은 바람이 되고 그네들의 눈물은 비가 되고 그네들의 분노는 우뢰가 되고 그네들의 웃음은 빛이 되고 ....... ....... 그네들은 우리의 땅 그네들은 우리의 하늘 그네들은 우리다     박화시인이 1000여년전의 고구려의 황성옛터를 찾아보고 읊은 황성교향곡이다. 1000여년전의 고구려사람들을 오늘의 여러 가지 사물로 변형시키면서  1000여년의 시간을 줄여버리고있는것이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시를 학습하면서 자기절로 찾아봐도 되기에 례를 더들고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생각된다.   제3절 시구의 짝을 바꾸기.    갑으로 묘사해야 할것을 을에 가져다 맞추고 을에 묘사되여야 할것을 갑에 가져다 맞춘다. <<고통에 찬 가지와 메마른 심장>>(히메네스), <<거대한 곰이여 내려오라 털이 더부룩한 밤>>(바흐만), <<슬픔에 잠긴 시계를 가진 황금의 로인>>(프레베르), 히메네스의 시구는 워낙은 <<고통에 찬 심장과 메마른 나무가지>>이고, 바흐만의 시구는 <<털이 더부룩한 곰이여 거대한 밤에 내려오라>>이고 프레베르의 시구는 <<슬픔에 잠긴 로인과 황금의 시계>> 혹은 <<황금의 시계를 가진 슬픔에 잠긴 로인>>이라고도 할수있겠다. 짝을 바꾸어 맞춤으로 하여 혼돈을 일으키며 그 혼돈속에서 새로운 감흥을 길어올린다.    짝을 바꾸어 맞추는 작업을 우리 시인들은 지금 시탐해보고있는중인것 같다. 시에서 쓰이는 례가 아주 적다. <<바다깊이 타오르는 불/하늘 가득 따사로운 물>> 하고 박화 시인이 <<정이여 정이여>>에서 한번 썼고 필자가 <<시간.2>>에서 <<시간이 핥아먹은 뼈와 시간이 뜯어먹은 피>>라고 한번 써보았다. 가능하게 필자가 본 것이 적은데다가 이런 시구의 수집에 소홀하였을수도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아무튼 대상의 짝을 바꾸어 맞추는 작업을 하는 우리 시인이 아직 많지 않는것은 사실이다.   제4절 추상어와 구상어화    추상어란 색깔도 모양도 없는관념적언어이고 구상어란 볼수도 만질수도 있는 시각적인 언어라겠다. 이미지시에서 추상적언어라렬은 아마 금물에 속하는것으로 알고있다. 이미지를 창조한다는것은 어떤 심상을 창조한다는 말인데 추상적언어라렬은 이미지를 창조하는것이 아니라 론리나 이론을 만들어내게 되기때문이다. 추상적언어와 구상적언어를 결합시켜 시문을 작성하는것은 시각성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새로운 맛과 멋 그리고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추출해는데 도움을 많이 준다고 하겠다. <<치욕의 새>>(생-종 페르스), <<변화가 너희들에게 손짓한다>>(벤), <<시든 애착이 바스락거림>>(쉐페르비엘), <<망각의 눈>>(엘리어트), <<희열의 가시>> <<차가운 꽃다발>>(노발리스), <<시간의 입술>>(토마스). 우의 례들에서 <<치욕>>, <<변화>>, <<애착>>, <<소리>>, <<망각>>, <<희열>>, <<차가운>>, <<시간>> 등 언어들은 모두 관념적인 언어이며 추상적인 언어이다. 그 뒤에 붙은 언어들은 모두 실물을 지칭하는 구상적 언어이다. 이런 묘사적인 동등한 배렬은 낯선 감각의 세계를 펼치고있다.    우리 시인들도 이 방면의 언어작업에 열을 올리고있다. <<사랑을 키질한다던 봄바람>> <<빨간 기폭같은 꿈이/바다우에 락엽마냥 널리면>>(리임원), <<언젠가는 이 소망 /석류알 터질 것을>> <<철학의 껍데기를 벗기며>>(박화), <<전설의 구름협곡을 건너/묵묵히 걸어온다>> <<새벽녘, 춘정의 그물에 당겨올 때>>(김파), <<풀어헤친 시간은 망아지가 된다>> <<우린 이 무의 언덕우에/씨를 뿌리자>>(김학송), <<또 하루의 이야기가 눈물처럼 익는다>>, <<어제 꿈의 나무가지/뼈아피 불태우는데>>(김정호), <<가난을 벌목한다>>(김응준), <<한쪼박 평화의 이삭을 줏고있다>>(김철)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심있는 독자라면 알수있을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추상어와 구상어를 동등하게 배렬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것은 시의 언어들을 베싼처럼 깡깡 마르게 다루는 것을 피면하고 우리 시언어들을 뼈가 있고 피가 흐르고 살이 지게 가꾸는 한가지 훌륭한 방법이라겠다.   제5절  은유적언어    현대시 자체가 상징과 은유를 기초로 한다고 많은 시인들과 비평가들이 념불처럼 외우고있다. 은유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쓰이고있다. 은유는 관습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가장 유력하게 몰아부치고 낯선 감정의 세계에로의 진출을 가장 간단하게 완성시키는 수법이라겠다. <<혀는 그대의 목소리그릇에 담긴 붉은 생선>>(아폴리네르), <<교회, 돌 같은 여인>>(주브), <<얼굴, 소리내는 조개>>(엘뤼아르), <<10월, 정확한 프로필의 섬>>(기옌). 은유는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장치이다. 우의 례문들은 은유를 통하여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이동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생성된다는것을 증명한다. 이런 비 실재적인 사물들은 허구적인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이미지의 새로움을 생신하고도 실감나게 안겨준다. 나의 시는 나의 얼굴이다 나의 얼굴은 당신들속의 하나 수천수만 농민형제들  마음에 내 얼굴의 거울이 있다 나의 시는 나의 거울이다 나의 거울은 당신들 마음의 한쪼각 쪼각이면 어떠하랴 나는 그것을 구걸하며 산다 내 거울을 찾아헤매이면서도 나의 거울을 보기는 싫어한다 초로한 거울에 비친것이 아직은 당신도 나도 제 몰골이 아닌것을    우리 사실주의시문학의 한봉우리를 이루고 작고한 시인 김성휘시인의 시 <<나의 시>>의 앞의 세개련이다. 시인은 <<나의 시>>를 은유적인 수법으로 <<얼굴>>과 <<거울>>로 변형시키면서 서정을 열렬하게 토로하고있다.      은유는 무엇은 무엇이다는 식으로 구사되는 언어조합으로서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이 간편한 방법이 이미지생성과 쇄신에서는 거대한 위력을 과시하는 수법이라겠다.     제6절 색갈 올리기.    추상적인 사물이든 구상적인 사물이든 색깔과 새롭게 결합시킴으로써 언어를 언어의 진부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감성을 획득하게 한다. <<청색전률>>(로르까), <<지구는 오렌지빛처럼 푸르다>>(엘뤼아르), <<산발을 한 기타들의 내는 록색침묵>>(디에고), <<록색의 태양 록색의 금>>(생-종 페르스), ...이러한 례들은 색채를 올림으로 하여 선명한 이미지, 생동한 이미지로 우리를 맞아주고있다. 사물에 색깔을 올린다는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써오던 색깔을 올린다는 말이 아니다. 시인이 새롭게 색깔을 올린다는 뜻이다. 진달래를 우리는 붉은색이 아니면 연분홍색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로부터 써오던 말인것이다. 이런 말들을 시인의 눈으로 다시 살펴보면서 새로운 색채로 표현한다는것이다. 진달래를 <<하얀 진달래>> <<까만 진달래>> <<파란 진달래>>라고 시인이 새롭게 진달래의 색깔을 규명하면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쓸수있는가 ? 필자는 쓸수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달을 은빛달이나 하얀 달로만 쓰지만 서양의 시인들은 파란달, 빨간달, 노란달, 까만달이라고도 쓰고있다.    우리 시단에서 언어의 새로운 색깔올리기작업도 비교적 활기롭게 진행된다고 하겠다. <<빨간 맛>> <<까맣게 타버린 태양>>(김파), <<검은 거짓말>>(김정호),  <<생각이 파랗게 >> <<연분홍 고운시>>(리임원), <<검게 푸르게 일어서는 아픔>>(김학송)노란 아타까움 (김응준) ......이러한 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수있다. 문제는 우리가 시적장치로써의 새로운 색깔올리기작업에 품을 들이는가 안 들이는가에 달려있을뿐만 아니라 시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을 깨달아야 한다는데 있다.   이미지와 언어는 물과 고기처럼 떨어져서는 안되는 관계이다. 진부한 언어 즉 항용적인 언어습관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유추해낸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겠다. 새로운 언어조합만이, 특히 강박성을 수용한 언어조합만이 새맛이 짙은 이미지 가공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얀 무카로브스키는 <<시적인 언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지적을 하고있다.   <<시적 언어는 감정의 표현을 드러내는 언어인 정서적 언어와도 다르다...표현이 정감성에서 리탈하는 것이 문학에서 계획된 요구사항이 되는 시대조차 있었다.>> <<시적 언어의 갱신은 앞서 지나간 발전에 대하여 또 표준적인 문어체 언어의 규준에 비해보면 언어에 대한 일종 왜곡으로 드러나고 있다>>   얀 무카로브스키가 점찍었듯이 <<표현이 정감성에서 리탈하는>> <<시대>>가 현대시의 시대이며 이미지시대라고 긍정하고싶고 <<언어에 대한 일종의 왜곡>>으로 쓰는 시가 현대시이자 이미지시라고 믿고싶다. 제7절 언어공감각.   시를 쓰는 모든 사람들은 늘 언어의 방벽에 부딪치군 한다. 모든 시는 언어의 집이라고 한다. 이미지시도 언어의 집이다. 이 언어의 집을 건축할 때 언어들의 공감각을 지혜롭게 다루는것을 이미지를 만드는 하나의 슬기라고 할수있겠다.   공감각이란 어떠한 것인가? 문덕수시인은 <<시론>>에서 이렇게 정의하고있다. <<한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하거나 둘 이상의 감각이 결합되는 현상을 공감각이라고 하고 또는 공감각적의미저리라고 한다.>> 이 정의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한가지는 <<한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하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둘 이상의 감각이 결합되는 현상>>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이미지를 만드는것은 감각을 풍부하게 하고 새롭고도 진하게 하려는데도 목적이 있으므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공감각을 중시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경우에 우리들은 감각이라 하면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다섯가지를 떠올리는데 문덕수는 이 외에도 <<통각, 냉각, 온각, 운동감각, 평형감각, 내부감각>>이라는것을 더 떠올리면서 여러 가지 감각중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을 특수 감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미지는 여러 가지 감각중에서 시각을 제일 중시하여 추구한다. 왜냐하면 <<언어로 그린 그림>>을 이미지라 하니깐. 그림이 보이자면 시각적이 아니고서는 안되기때문이다. 냄새를 표현하는 후각, 소리를 듣는 청각, 육체의 근육감각을 나타내는 촉각, 맛을 알아내는 미각은 뇌에 반영되여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때문이다. 백번 듣기보다 한번 보기가 났다는 말이 있는것처럼 시각성은 회화적이기에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는 제일 훌륭한 통로라 아니 할수 없다.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름을 우는 곳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정지용 <<향수>>에서 피아노에 앉은 녀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마리씩 스무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물꼬를 물고 쏟아진다              -전봉건 <<피아노>>에서   정지용의 <<향수>>는 이미지각도에서 그찰해보면 거리가 있지만 언어의 공감각 각도에서 보면 잘 쓰인 곳이 있다.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바람소리 말을 달리고>>는 청각을 시각화한 명구라 하겠다. <<울음>>은 청각이지만 <<금빛>>이란 시각적 색깔의 언어와 어울림으로써 이미지를 신선하게 만들었고 <<바람소리>>라는 청각적인것에다 <<말>>이 달린다는 시각적 언어를 붙임으로써 바람의 기세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주고있다.   전봉건의 <<피아노>>는 희한하다겠다. 피아노소리를 <<여마리씩/스무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물꼬를 물고/쏟아진다>>고 하였다. 청각을 시각화함에 있어서 너무 기발하고 낯설게 하여 읽는 사람의 감동이 <<물고기들>>과 함께 <<쏟아진다.>>    시는 상상의 감각화라고도 말하는데 공감각은 감각성을 강화하고 사상을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불가결의 요소라 하겠다. 그래서 공감각은 현대시인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보라빛 시간>>(엘리어트), <<진홍빛 기쁨>>(블레이크), <<황금폭소>>(말라르메), <<신음의 뿌리들이 썩고>>(엘뤼아르), <<공기의 물 빵의 고기>>(크롤로우). 서양의 시를 읽어가노라면 이러한 공감각언어들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떠있어 독자는 뭇별이 무성한 현란한 궁전으로 들어가는듯한 희한한 감회를 금할수 없다.    공감각은 여러가지 감각을 새롭게 교제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산생시키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감성의 농도를 높이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수단의 하나이며, 현대시의 주요한 기법의 하나라겠다.   아래에서 우리 시단의 공감각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여가고있는가를 보기로 한다.   청각---시각 소리소리 피가 듣는다 (남영전) 무반주 생음악으로 펄럭인다 (한춘) 시각---청각 지심깊은 혈맥의 아픈 종소리(박화) 먼 바다 철석이는 자장가(김파) 촉각---시각 아픔이 묻어나는 힘찬 열매(박화)  아리도록 애련한 하얀 선(정몽호) 시각---촉각 락엽 몇잎 발등 때린다 (김응준) 촉각---청각---시각 가려운 방울소리 바위에 돋힌 검버섯(김파) 후각---청각 풀내음 풍기네 귀뚜라미소리(정몽호) 후각---시각 젖내음 감아 올리네 뽀얗게(정몽호) 젖내나는 언덕(정몽호)    실례지만 례를 들지 못한 공감각조합을 자의로 몇가지만들어 보이고싶다. <<들큼한 배맛이 하얗게 번져온다>>(미각+시각), <<얼굴빛이 소태처럼 쓰겁게>>(시각+미각). 종합해보면 다섯가지 감각을 모두 서로서로 전이시킬수있는데 도합 20가지다. 이 20가지를 능란하게 다루는 솜씨를 시인들은 모름지기 터득해야 하리라 믿는다. 이런 작업은 시인의 언어자각이 없으면 안되는것이다.     시를 창작할 때 새로운 공감각을 획득한다는것은 기분나는 일이 아닐수 없다. 공감각은 시를 새롭게 만들고 신선하게 만들면서 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시의 생명이 발랄하게 운동하게 함에 있어서 불가결의 장치의 하나라고 하겠다.  제8절 감각의 물화   <<새로운 언어조합>>에서 감각의 물화문제를 간단히 짚고넘어왔다. 그것으로 부족한것 같아서 다시 이야기하고싶어진다. 감각의 물화문제는 이미지시를 쓰는가 아니면 다른 류형의 시를 쓰는가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기때문에 다시 취급해 보고저한다.   이미지스트선언의 첫째 조목 <<일상어를 사용하되 정확한 말을 고르며 모호한 말이나 장식적인 말을 배척한다.>>, 넷째 조목<<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다섯째 조목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견강하고 명확한 시를 쓴다>> 등은 감각을 물화함으로써만 이미지시에 도착된다는 요구라고 리해하여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것 같다.   한국의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시는 모방도, 재현도, 묘사도 아닌 창조적경로를 통한 문화적창조행위이다>>라고 하면서 현대시를 잘 쓰려면 물화(物化)작업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조선문학>>에 발표한 시론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는 감각의 물화라는 명제로 관통되였다고 하여도 별로 틀리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변용-대용-물화-이미지라는 시창작 그라프로 현대시를 말하고있다.   감각대상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사물이지만 감각은 실재물이 아니라 추상물이다. 감각은 뇌의 활동을 말하는것으로서 허상이며 존재하지 않는 영상이나 개념과 같은 추상물인것이다. 감각은 물질에서 받은 인상이다. 시를 쓸 때 다시 시각적인 물질로 환원되여 표현되여야 한다는것이 감각의 물화라고 하겠다. 시에서 모든 리념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들은 추방되고 그러한 언어들 대신에 눈으로 볼수있는 사물적인 언어들로 그 자리를 메꾸어야 한다. 시각으로 볼 수있는 물질적운동을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들은 이미지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어렵다. 자리를 차지하려면 물질적언어로 바뀌여야 한다. 사상, 리상, 희망, 아픔, 마음과 같은 추상적언어가 그러할뿐만 아니라 아름답다, 착하다, 곱다, 밉다와 같은 형용사들도 마찬가지로 이미지에서 자리를 내야 한다. 이러한 언어들이 자리를 차지하려면 가시적인 명사와 결합되여 가시적으로 표현되였을 때래야만이 이미지의 효능을 발휘할수있게 되는것이다. 아무런 결합도 이룩하지 않은 채 례하면 <<사상을 해방하자>> <<아름다운 리상>> 등으로 쓰인다면 실례를 면할수 없을것으로 알고있다.    앞에서 추상적언어를 구상적언어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한것이나 추상어에 색깔을 올려야 한다고 한것이나 추상어와 구상어의 결합이나 은유적방법들을 쓰는것들 모두가 관념의 물화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하여도 되겠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것은 감각이나 관념과 같은것을 가시적인 물질운동으로 대용하여 표현하여야 한다는것이다. 그러자면 상징으로 추상적 감각이나 관념을 대체해 버리는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겠다. 상징은 은유와 달리 표현하려는 대상은 나타나지 않고 표현해 놓은 대상만 나타난다. 우리는 <<꿈>>이라는 추상적언어를 <<꽃>>이나 <<노을>>이나 <<별>>이나 <<무지개>> 등으로 얼마든지 대용해 쓸수있다. 이렇게 대용해 쓰는 방법이 상징인데 대용해 쓰게 되면 확연히 다른 이중삼중의 감각을 얻게 된다. 문제는 죽은 상징을 쓰지 말고 산 상징을 쓰는데 있다. 죽은것이란 선인들이 만들어 써먹은것이고 산것이란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내는것이다. 새롭게 만들어내는것만이 바람직하겠다. 남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아류에 물젖게 되기마련이다.    제9절 종의미 쓰기.     류의미와 종의미는 복잡한 언어작업이 아니므로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류의미는 어느한 부류의 언어를 일컫는것이고 종의미는 고유명사를 일컫는것이라고 하겠다. 산이라고 하면 세상의 모든 산을 다 포괄하므로 류의미다. 하지만 백두산하면 장백산맥의 주봉 하나를 가리킨다. 나무하면 여러 가지 나무를 다 가리키지만 백양나무 하면 나무의 한종류 백양나무만 가리키게 된다. 시를 쓸 때 백두산이나 백양나무같은 종의미 언어를 골라서 쓰는것이 류의미를 쓰는것보다 열배는 더 좋을것으로 알고있다. 그것은 의미지시란것이 언어로 그린 그림이기에 눈에 똑똑히 보일수록 좋기때문이다. 이따라 더 이야기할것은 사물의 어느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탄낼수있는 언어를 쓰는것에 류의하여야 한다. 백양나무하면 백양나무의 가지나 이파리가 어떠한가를 쓰는것이 좋겠다. 언어는 세부적이면 세부적일수록 좋고 표현도 세부적인 표현일수록 좋은것이다. 모든 큰소리, 빈소리를 시는 싫어한다. 세찬 바람이 분다고 쓰기보다 바람에 아름드리 백양나무허리가 부러져 물앉았다 하고 쓰면 더욱 표현이 좋은것과 같은것이라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물방울에서 강이나 바다가 보이게 쓰는 수법이라겠다.     그외에도 <<해빛 한줌>>이나 <<노래 한마대>>와 같은 수량사의 새로운 사용이나 고유어사용 등을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이로써 마친다. 언어의 련금사란 말의 의미는 시인자신이 게으름 없이 시마다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출해 내야 한다는 뜻이라것을 명기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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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신세훈민조시론 댓글:  조회:1793  추천:61  2008-10-21
民 調 詩 論 (3. 4. 5. 6조) - 서 재 석(한국문인협회 민조시분과위원장) -▣민조시(民調詩) 작법요령을 중심으로 민조시 작법에 따른 주요요소라면 언어의 직조, 함축 ,간결 ,조화 ,가락 ,장단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어에 접목시켜 얼마만큼 뭉클하게 마음을 울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특정인이 주로 쓰는 제한적인 언어의 편중도 아니요, 일부 지식인이 쓰는 언어 또한 아니다. 「민조(民調)」의 단어 첫 글자인 국민 민자(民)에서 풍기는 예측대로 우리 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는 보통사람의 평범한 언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시작법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언어의 「음가수」구조를 이해하는 일이다. 「언어란」심중에 담고 있는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전해줄 언어의 직조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민조시」를 쉽게 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언어의 마디가 「3 ,4 , 5 , 6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즉, 언어의 음절과 가락 , 장단이 「3 ,4 , 5 ,6」글자 수에 접목 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수리학에 있어서 선천적인 수 「1 , 2 , 3 ,4 , 5 ,6 ,7 ,8 , 9」와 후천적인 수 「2 , 3 , 4 , 5 , 6 , 7 , 8 , 9 , 10」에서 선천적인 숫자의 중심축은 다섯 (5)이다. 반면, 후천적 숫자의 중심축은 여섯 (6)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향가 ,농요 ,가요 ,무가 , 민요 ,시조 등 분야 또한 다양하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민족의 뿌리인 「한사상」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사상이란」우리 민족이 생활 속에 담고 있는 우주본체사상인 자연사상을 말한다. 좀 더 이야기를 부연한다면 사물의 이치를 거슬리지 않고 자연의 이치와 진리를 조화롭게 다스리고, 이동하고, 포용하는 정신과 힘이 곧 한민족의 우수한 민족정신인 「한사상」인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가위/바위/보」문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놀이의 활용 면을 들여다봐도 용이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인 일이나 단체모임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물건 나르기, 편 가르기, 심부름, 기회부여, 물건의 선택 등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는 우리의 순수한 놀이 문화로서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놀이요, 강하고 약한, 높고 낮음이 없는 놀이요, 좋고 나쁨, 손해와 이익 등을 3가지 본체를 통해 포용하고 수용하는 놀이임에 틀림없다. 즉, 「가위」는 「보」를 이기지만 「바위」를 못 이기고, 「바위」는 「가위」를 이기지만 「보」를 못 이기며, 「보」는 「바위」를 이기 지만「가위」를 못 이기는 것을 보더라도 일의 진행과 기회를 아우르는가 하면 전체를 포용하는 이 놀이야말로 우리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혼 뿌리요, 정신사상이다. 그 밖에도 삼세번 / 원방각(○ ․ □ ․ △)사상 / 품앗이 / 두레 / 3 , 5 , 7 ,9 … 21 … 49제 / 9층탑 / 삼신사상 / 5행사상등 생활습관에 묻혀있는 가짓수 또한 다양하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언어 또한 이러한 사상에서 잉태된 의사 전달의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보다시피 우리의 언어는 가락 ,장단이 3/4또는 4/4박자인 트로트풍을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 사상의 기본 수치인「3」을 들 수 있다. 이「3」이야말로 한사상에서 연유된 중심 숫자이다. 반복 강조되는 말이지만 3세번 / 성과 이름의 석자 / 하늘 , 사람 , 땅의 삼신 사상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는 민족정신이 녹아있는 숫자로 마음의 넉넉함과 너그러움 , 기원 ,기회부여 등을 두루 내포하고 있는 숫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민족 혼 뿌리인 바람에서 기인된 「3 , 4 ,5 ,6」의 언어수치를 가지고 주도면밀하게 그리고 아름답고 맵시 있게 직조된 것이 「민조시(民調詩)」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조시」를 깔끔하게 그리고 마음에 들게끔 쓸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민조시인이라면 한 번쯤 고심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민조시」공부를 하는 사람의 공통적 심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민조시」하면 글자 수를「3 , 4 ,5 , 6」자 틀 속에 둔다는 점에서 우선 위축감 , 구속감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심적 제한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감과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언어의 직조 ,간결 , 함축 , 조화 ,가락, 장단 , 언어의 선택 ,창출 등 제한요소에서 많은 연구와 숙달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해소하며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하는 측면에서 몇 가지 핵심적 요소를 제시하고자 한다. • 첫째 : 「시어(詩語)가 풍부해야 한다.」 시어가 풍부하지 못하면 자 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설사 표현 한다 해도 글이 느슨하거나 글자 수에 어긋나는 현상 등 이런 저런 일로 고심이 많다. • 둘째 : 아름다운 언어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언어 또는 시어의 생상기법이 필요하다고 본다.」어떻게 보면 거창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조금만 연구하고 고심하면 쉽게 자기 생각에 맞는 언어를 창출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셋째 : 「시어는 남이 쓰지 않은 신선함이 배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글을 잘 쓰고 언어의 직조 그리고 가락 , 장단이 조화 된다고 해도 이는 한계가 있고 자신이 추구하고자하는 뜻을 부각시키지 못 하는 문제점을 낳는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는 방법을 구체적으 로 알아보기로 한다. 1.「합성어(合成語)」를 창출해야 한다. 합성어란 어근과 어근이 합쳐진 단어를 말한다. 예를 들면“물걸레”/“가죽신”등이다. 여기서「물+걸레」/「가죽+신」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다른 한쪽의 어근을 수식하는 합성어들은 언어의 맛을 더해주는 느낌이 크다. 뿐만 아니라 몇 가지 장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 언어의 의미와 폭을 확산시켜 준다. • 언어의 뜻을 명확하게 해준다. • 언어의 깊이 ,느낌을 확산시켜 준다. • 언어의 선택 및 활용 폭을 넓혀준다. • 가락 ,장단을 증폭시킨다. 2.「관용어(慣用語)」를 창출해야 한다. 관용어란 보통일반인들이 관습적으로 쓰는 말로서 문법이나 어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어근들이 완전하게 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바늘방석” / “바가지 쓰다” / “시치미 떼다”등이다. 즉, 「바늘+방석」/「바가지+쓰다」/「시치미+떼다」로 합성된어 다른 언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이 있다. 즉, 언어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합성어의 특징이다. 따라서 「관용어」는 단어와 의미부여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 오묘한 맛을 지니고 있는 분야로 은유 ․ 비유법에 기여도가 크며 언어의 표현 기법을 확산시키는데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파생어(派生語)」를 창출해야 한다. 파생어란 「접속어와 어근」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단어의 색다른 맛과 향기를 풍기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어(詩語)사용에 있어 시어의 맛과 향기 , 깊이 ,공간의 폭을 잘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풋사과” / “풋고추” / “검붉다”등이다. 즉 「풋+사과」/「풋+고추」로 이루어진 단어들이다. 특히 「파생어」는 언어의 색감 , 질감 , 감각을 돋보이게 하며 언어의 맛과 생동감을 확산 시키는데 적절한 단어들이다. 4. 명쾌한 이미지 부여가 필요하다. 「이미지」란 어떠한 사물의 이름을 듣거나 봤을 때 그 사람 머리에 떠오르는 모습 , 영상 ,심상 등을 말한다. 즉, 감각을 재현하는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은 각자가 지닌 오감(五感 : 시각 ,미각 ,청각 , 후각 , 촉각)이다. 예를 들면 「푸른 바닷가(시각) /뱃고동 소리 뚜우 (청각) / 비릿한 바닷냄새(후각) / 입맛 당기는 생선회 (미각) / 만져보니 미끈(촉각)」. 제시된 예문에서 보다시피 「이미지」표현은 보다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단일 감각적」인 표현보다는 「공감각(共感覺)적」인 표현이 시(詩)를 쓰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문 (1) ,(2)를 들기로 한다. • 예문(1) : 「나는 화가 났다.」를「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 포효하며」로 표현한 문장을 비교해보면 단일감각적인 시각적 표현에서 청각적 ,생동감을 추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예문(2) : 「종소리」를 「푸른 종소리」로 표현 했다고 하자. 본래의 종소리는 청각적이고 푸른 종소리는 시각적요소를 추가하고 있다. 즉, 「청각을 시각화」하는 것을 전이(轉移)라고 하는데 이러한 기법을 「공감각(共感覺)기법」이라 한다. 따라서 명쾌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는 수식어 선택은 물론 깔끔한 문장을 전개할 수 있는 문장기술 또한 중요한 요소요, 관건이라 하겠다. 이렇게 제시한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민조시」를 쓸려면 「글자수 제한이 있어 못 쓰겠다.」「시어(詩語)가 궁색해서 못 쓰겠다.」하는 것은 하나의 핑계이고 궁색한 답변 밖에 될 수 없다. 앞에서 제시한 「합성어 , 파생어 , 관용어 , 명쾌한 이미지 부여 , 문장전개」등의 요소를 깊이 연구하고 활용한다면 남이 쓰지 않은 새로운 시어창출은 물론 시의 맛과 향기 그리고 차원 높은 시 구상을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형식과 요소는 일찍 한자(漢字)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변문(騈文)」이다. 이 변문을 다른 말로 변려문(騈儷文) /사륙문(四六文)/사륙변려문 (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하는데 이 변려문은 후한(後漢)때부터 일어나 육조대(六朝代)에 와서 절정에 달했으며 송대 (宋代)초까지 이러졌다. 이 「변문」은 글을 쓰는데 있어 가급적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민조시에 있어서 글자 수를 「3 , 4 ,5 , 6조」에 제한을 두듯이 “한자”에 있어서도 통상 이러한 글자의 제한을 두고 있다. 즉 「4 ,6자」의 기본 틀인 것이다. 그리고 한 구(句)에는 4자 또는 6자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4-4-6-6」,「4-6-4-6」의 기본형식을 뜻한다. 하지만 4자와 6자만으로는 단조롭고 또한 아름다운 글과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1글자」또는 「2글자」를 추가하는 일, 그리고 6자를 「3 ,3」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리고 「변문」전체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4-4-6-6」의 형태에서 「4와4」「6과6」이 “대구” 이다. 또한 「4-6-4-6」에서도 1구씩 건너뛰어 대구를 형성한다. 따라서 변려(騈儷)의 뜻은 「짝」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정형시 만엽(와까/하이꾸)이 「5-7조/7-5조」로 구성되어 있고, 한자는 「변문」에서 보다시피 「4 ,6조」, 민조시는 「3-4-5-6조」로 구성되어 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어쩌면 한자의 「변문(文)」에서 「만엽」이 발전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지금가지 「민조시」를 보다 쉽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합성어 , 관용어 , 파생어 , 명쾌한 이미지부여」의 내용에서 주요 요점 및 장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합성어>내용 • 어근과 어근이 합쳐진 단어 -물걸레/가죽신(물+걸레/ 가죽+신) 장점 •언어의 의미를 증폭시켜 준다. •언어의 뜻을 명확하게, 그리고 구체화 시킨다. •언어의 깊이 ․ 느낌 ․ 공간을 확산시켜준다. •언어의 선택 및 활용폭을 넓혀준다. •언어의 리듬 , 가락을 완충시킨다.<관용어>내용 •어근이 완전하게 하나로 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바늘방석/ 바가지 쓰다/ 시치미 떼다.(바늘+방석/바가지+쓰다/시치미+떼다)•가락 , 장단을 더욱 매끄럽게 해준다. 장점 •은유 ,비유법 활용에 기여도가 높다. •언어의 표현기법을 확산시켜준다. •의미부여가 깊어진다.<파생어>내용 •접사어와 어근으로 이루어진 단어 -풋사과/풋고추 (풋+사과/풋+고추)장 점 •언어의 색감 , 감각을 돋보이게 한다. •언어의 맛과 생동감을 증폭시킨다. •의성어 ,의태어 활용에 기여한다.<이미지 부여>내용 •오감(五感)활용 •공감각(共感覺)적 표현장 점 •오감의 조화 및 공감각적 표현을 통한 언어의색감 ‧ 질감 ‧ 감각 ‧ 생동감등을 확산시키고 언어의 깊이 ‧ 느낌 등을 살릴 수 있다.다음은 「민조시 작법 요령」 및 장 ‧ 단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민조시」를 크게 나누어 보면 「단민조시/연민조시/장민조시」로 나눌수 있다. 이들에 대한 장 ‧ 단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단민조시 : 단민조시란 음수 즉, 글자 수가 「3 ,4 ,5 ,6조」로 종료되는 시, 다시 말해 기본자수가 18자로 마감되는 짧은 정형시를 말한다. 따라서 단민조시를 쓰려면 매「행」이나 「연」에 의미부여가 명확한 시어가 필요하고 글자의 함축미와 조율의 기교가 선행되어야 하며 시에서 풍기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는 간결성과 명확성이 뒷받침 돼야하는 부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간결함에 부담이 없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고, 조율되고 함축된 언어의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의미부여를 통한 느낌 ‧ 감동이 강하게 와 닿는 점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 단점이라면 사전에 함축된 시어준비 그리고 간결 ‧ 명확한 의미부여가 준비되어 있을 때, 시의 느슨함을 방지할 수 있고 시의 단조로움으로 인해 역사시나 과정전개시 같은 「장시」에는 자신이 담고 있는 뜻을 완벽하게 표출 시킬 수 없는 제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단점이라 하겠다. 2. 연민조시 : 연민조시란 단민조시가 2회 이상 4회 미만 연속되는 시를 의미한다. 즉, 18자로 종료되는 단민조시를 「1수」로 봤을 때 3수(18+18+18)이상 진행되는 민조시를 뜻한다. 이 연민조시는 단민조시에 비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의미가 자유로운 면이 있어서 「3, 4, 5 ,6조」의 시어(말마디)를 중첩 사용할 수 있어“의미부여의 강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더불어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부여와 결론”을 여유 있게 내릴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 단점으로는 여유로움으로 인해 참신한 시어대입과 행과 연의 직조 , 함축미가 느슨해 질 수 있는 단점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민조시」를 처음 접하는 자는 오히려 단민조시보다는 연민조시를 기본으로 삼아 숙달,연마, 연구하여 단민조시를 숙달시키는 것이 부담을 적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3. 장민조시 : 장민조시란 단민조시 (18자)한수가 4회(18+18+18 +18)이상 연속되는 시를 말한다. 따라서 장민조시는 작가의 작법숙달이나 쓰고자 하는 주제 ,제목 , 과정 ,의미부여 등의 요소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주로 역사적인 시 또는 긴 과정을 전개하는 詩 또는 여러 사건을 전개할 시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장민조시는 단민조시와 연민조시에서 표현 못하는 내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을 부여하고 행 ,연의 중복을 촌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세세히 표출할 수 있으며 어떤 사물을 대상으로 한 느낌 , 감정 , 깊이에 대해 공간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 단점이라면 언어의 조율 ,선택 , 함축성 등의 요소가 느슨해져서 자칫하면 산문식의 말장난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점이 있다. 지금까지 「단민조시 / 연민조시 / 장민조시」에 대해 개략적으로 장 , 단점을 알아봤는데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단 민 조 시>장점•「3, 4, 5 ,6조」종결에 따른 간결함이 덧보인다. • 시어의 단단함이 있다. • 행, 연의 신축성과 함축미가 있다. • 시의 의미부여가 강하다단점• 시어선택 , 함축성, 탄력성 , 조율에 대한 부담이 있다. • 은은하고 잔잔한 맛이 적다.<연 민 조 시>장점• 단민조시에서 표현 못하는 내용을 충족시킬 수 있다. • 행, 연 중복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조할 수 있다. • 사물의 느낌 , 감정 ,깊이 ,공간의 폭 등을 넓힐 수 있다. • 은은하고 잔잔한 맛이 있다.단점• 자칫 시의 간결함, 시어의 단단함 , 함축미 ,조율등을 상실할 수 있다.<장 민 조 시>장점• 계속적 전개를 요하는 역사시 또는 이야기가 긴 단계별 과정 전개시가 적절하다. • 단 , 연민조시에서 부여 못한 내용을 전개할 수 있다.단점• 장황한 이야기로 인한 언어의 조율 , 율조 , 직조 ,함축미가 상실될 수 있다.<민 조 시 공 통 점>장점• 가락 , 장단 ,리듬의 맛이 있다. • 간결함에서 풍기는 신선한 맛이 있다. • 시어의 조율 ,함축성 ,깊이 ,공간미 등이 덧보인다. • 글이 짧다는 점에서 심적 부담이 적다. 단점• 민조시작법(조율 ,언어선택 ,의미부여 등) 미숙시 시가 길어진다. 더불어 연과 연의 경중(輕重)이 심하다. • 언어직조, 조율 미숙에 따른 간결함 , 단단함 , 함축미등이 느슨해질 수 있다.다음은「민조시」작법요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민조시는 먼저 쓰고자 하는 글자 수에 따라 단민조시 / 연민조시 / 장민조시로 구분 짓고 또한 시의 선택에 따라서 시어 , 직조 , 조율 , 간결성 , 함축미 , 가락 ,장단 등 제반요소를 적절히 고려하여 전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튼, 민조시 작법의 기본 틀은「3 , 4 , 5 ,6조」이다. 작법 요령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문」을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제시하는 「예문」은 2007년 「문학저널」4월호에 실은 본인의 민조시 2편으로 예문 “1”「눈꽃」과 예문 “2”「春芽」이다. 예문“1”눈 꽃 雪花木 가짓살 白花滿開 一枝春*이다. 허울레, 겉치레 벌없는 바람 꽃. *一枝春 : 매화예문“2”春 芽 몸부림 産苦 끝에 몽울 몽울 봄을 낳는다 빨강 노랑 하양 봄꽃물 눈물빛 • 예문 : “1”은「눈꽃」이다. 이 시(詩)는 보는 바와 같이 2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 1연은 4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제1행 : 3 / 제2행 : 3 / 제3행 : 4 / 제4행 : 5의 글자 수로 종결 짓고 있다. •제2연은 3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행 :3 / 제2행 : 3으로 여섯 글자(3+3)를 이루고 있으며 제 3행에서 6글자로 종결짓고 있다. •예문 : “2” 는 「春芽」이다. 이 시(詩) 또한 보는 바와 같이 2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 1연은 4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제1행 : 3 / 제2행 : 4 / 제3행 : 4 / 제4행 : 5의 글자로 종결 짓고 있다. • 제2연은 12글자로 4행을 이루고 있다. 즉, 제1행 : 2 / 제2행 : 2 / 제3행 : 2글자로 1 , 2 ,3행(2+2+2)을 모두 합친 글자 수가 곧 6이 되는 것이다. 제4행 : 여섯 글자(6)로 종결짓고 있다. 예「“1”,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섯(6)글자로 종결짓지 않고 다시 한번 6(여섯 글자)을 거듭 쳐준 것이 두 예문 시(詩)의 특징이라 하겠다. 「예문 “1”과 “2”」의 두 작품에서 보는바와 같이 시의 문장 첫머리가 3(세 글자)으로 시작하여 6(여섯 글자)으로 종결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전체적인 시(詩)의 틀을 보면 행의 자수율이「3 ․ 4 ․ 5 ․ 6조」의 글자 수로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행갈이 / 연갈이」는 작자의 작법, 익숙도 또는 작가의 특성 등에 따라서 그 형태 또한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으나 보편적으로 시의 함축성, 조율된 시어와 의미부여 등의 연건에 따라 행과 연을 가르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의무부여 또는 강조를 위하여 반복적인 용어나 시어를 쓸 경우 행이 길어지고 늘어나서 결국 「연갈이」에 있어 연의 편중과 불균형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시의 무게 ․ 깊이 ․ 폭 ․ 공간 등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사전에 시의 제목, 시의 선택 (단민조시/ 연민조시/ 장민조시), 조율, 함축성, 행과 연의 숫자 구성 등을 잘 간파하여 균형 있고 짜임새 있는 글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더욱이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사람이나 작법에 익숙치 못한 사람은 연갈이 또는 행갈이를 하는데 있어 많은 고심을 하게 된다. 아무튼, 행과 연갈이는 일정한 형식이나 법칙 ․ 규정을 제한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글을 구성하고 있는 행 ․ 연의 독립적 요소를 갖추고 있거나 의미부여가 충족되었을 경우에 하는 것이 좋다. 시에 있어서 어떻게 행과 연을 가르느냐에 따라서 시의 균형과 신선함을 더해주는 요소이므로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다. 특히 연갈이에 있어서는 전체시 구성에 있어서 연과 연의 균형과 무게 ․ 공간미가 치우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밖에 시(詩)를 보다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준수해야 할 숫자 ․ 부호 사용 시 올바른 표기법, 시작법시 염두 사항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전통 율격을 계승한 민조시(民調詩) 개척 - 신세훈 시인 申世薰 시인의 연보 호는 一遇 1941년 2월 22일(음1.18.) 경북 의성에서 태어남 1953년 사곡초등학교 졸업 1956년 의성중학교 졸업 1959년 안동고등학교 졸업 1962. 1. 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당선(당선시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 1963. 朴利道 金源浩 시인 등과 ‘新春詩’ 동인 창립 주도(19집까지 참여). 1964년 중앙대학교 문리대 연극영화과 졸업1967. 6.30. 육군 중위로 예편(R.O.T.C. 2기)·‘한국일보’사 등 기자 생활 및 공무원 10년.1993. 11. 제58차 국제P.E.N. 대회(리우 대회) 한국 정대표.2001. 1.~현재. 제22대·23대 한국 문인 협회 이사장 피선. 2001~2005. 문협 제11차(남미·알헨티나) 제12차(하얼빈·아프리카) 제14차(타쉬켄트) 제15차(호주·뉴질렌드) 해외 한국문학심포지엄 및 문학기행 단장. ·2002~현재. 전국한자교육추진연합회 지도 위원. ·2004~현재. 동학농민혁명재단 고문. ·2004. 6. 14.~현재. ‘民調詩’ 동인회 창립-상임고문. ·2005 현재. 한국불교문인협회 상임고문 중앙대 총동창회 부회장 한국 상고사학회 부회장. 저서 시집 「비에뜨·남 葉書」(1965 토픽 출판사) 「江과 바람과 山」(3인 시집·1978 한겨레 출판사) 「뿌리들의 하늘」(1만행 장시집 제1부·1984 일월서각) 「사랑 그것은 落葉」(청소년 시집·1984 온누리) 「조선의 天平線」(1991 미래 문화사) 「꼭둑각시의 춤」(1993 도서출판 天山) 「체온 이야기」(시극·장시집·1999 도서 출판 天山) 「3·4·5·6 調」(2000 民調詩集 도서 출판 天山) 등 편저·역저·저서 23권. ·수상 제3회 詩文學賞(1978) 제1회 한국P.E.N. 공로상(1994) 제8회 한국自由詩人賞 본상(1994) 제10회 예총문화예술대상(문학 부문) 수상(1996) 인헌무공훈장(1966) 대통령 표창(2002) 등 포상. 『새정형시 民調詩(3·4·5·6調) 개척 선언문』 民調詩란 무엇인가? 우리 한민족의 민간 장단으로 흘러내려오는 율조의 소리마치를 문자의 뜻 위에 얹어 빌어 쓴 정형시가 곧 民調詩이다. 民調詩는 왜 새로운 정형시인가? 우리말의 소리마디를 3·4·5·6調의 정형률에 맞춰 쓴 새로운 시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 문학사에는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정형시이다. 民調詩의 정신인 사상 배경과 3·4·5·6調의 정형 율격 근원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가? 새정형시인 民調詩의 사상적 배경은 한민족 고유의 정신 문화 유산인 ‘’사상에 그 밑바탕을 펼쳐두고 있으며, 정형 율격 수리의 3·4·5·6調는 한민족의 철학인 수리학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民調詩의 새정형 자수율을 왜 3·4·5·6調에만 걸어둔 채 정형시로 정착시키려하는가? 한민족의 수리 철학은 허수와 실수의 1·3·5·7·9이며, 또 2·4·6·8·10의 10은 0(제로·+)의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1(하나)은 곧 3(셋)이며, 3(셋)은 끝수인 9(아홉)였다. 5는 1·3·5·7·9 중의 기둥수리이며, 6은 2·4·6·8·10의 중간 수리인 기둥수이다. 허수와 실수의 중심 수리인 5와 6다음은 7이지만, 이 7은 우리 민족의 3·4조 말마디가 합해져 되돌아와 모여친 덤의 수리가 7(서양의 럭키 세븐)이다. 그러므로 7을 율조로 잡아 다시 6뒤에 새삼스럽게 설정하지 않고, 3·4·5·6調로만도 충분히 우리의 정신 사상과 율조와 만상의 뜻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 수리 3에서 6까지만 정형 수리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다 ‘天符經’이나 ― ‘한단고기’보다 먼저 쓰인 ― 박제상의 ‘징심록’ 들에 나타난 한민족 고유의 수리학 원전에 근거한 것이다. 民調詩는 과거 우리 문학과의 정형 자수율 관계가 어떠한가? 신라 때의 향가나 고려 가요·가사 및 백제사람 왕인이 개척한 ‘和歌’(일본 정형시)나 우리 가요가 일본으로 건너가 ‘萬葉’이 된 가요(일본 정형시의 원형)나 조선조의 時調·가사·판소리에 이르기까지 다 그 소리의 장단·가락 음수율을 짚어보면 결국 3·4·5·6調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인들은 시조 부문 하나만 이 땅에 겨우 민족 정형시로 정착시켰을 뿐이다. 최남선 이광수 등은 일본 정형시(7·5조)의 영향(역수입)을 받아 ‘3·4·5調’를 이땅 정형시로 정착시키려고 애써 실험했지만, 그분들은 ‘天符經’ ‘징심록’ 들의 허수와 실수에 작용하는 수리 ‘6기둥수’를 발견해내지 못해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3·4·5·6調는 우연의 일치이지만, 바로 위와 같은 3·4·5調에 내가 ‘6’의 기둥 수리를 발견해낸 다음 다시 3·4·5·6調로 정착시킨 새정형시이다. 民調詩는 조선의 정형시인 時調와는 어떻게 다른가? 시조는 초·중·종장인 3장 6구(3·4/3·4//3·4/3·4//3·5/4·3)로 된 정형시이지만, 살펴보면 모두 3·4·5·6調로 집합 구성되어 있다. 처음 하나(1)인 3으로 시작해서 3으로 끝난다. 이 3의 수리는 ‘天符經’ 천·인·지(○△□)의 사상인 그 3신 사상의 3철학이다. 초·중·종장 첫머리도 3으로 시작하고, 구마다 첫머리 자수 3도 처음의 1(하나)인 3으로 시작한다. 초장 첫머리 3과 중장 첫머리 3도 합하면 6이요, 중장·종장 역시 6(3+3)에, 초·중·종장 첫머리의 합이 9(3+3+3=끝)이다. 초장 첫머리 첫구도 3이요, 둘째 구도 3이다. 종장 마지막 3수리와 만나면 6수리가 되고, 6은 다시 종·중·초장 첫머리 수리와 음악적으로 화합하면 각각은 9수리(끝)가 되는 수철학 구조다. 시조의 기본 음보인 3·4조와 종장의 5수리 구조가 곧 3·4·5조 율격 구성이며, 초·중장의 기본조인 3·4조를 합하면 7조가 된다. 결국 시조도 말마디 리듬을 분석하면 말머리의 위치만 다를 뿐 역시 3·4·5·6조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 民調詩와는 구성상 그 형식만 다를 뿐이다.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時調가 있는데, 왜 또 정형시 民調詩를 새로 개척하는가? 무릇 시의 형태는 시대가 지나면 변하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時調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3장 6구의 자수(약 43자 내외)가 일본 정형시에 비해 너무 글자수가 많을 뿐 아니라, 현대 문명·문화 언어를 이 시조에 수용했을 때는 시가 잘 되지않는 약점이 있다. 시조가 이러한 점들을 현대 감각적인 민족시로 소화시켜내기엔 그 형식에서만 보더라도 너무 벅찬 듯하다. 그래서 나는 향가·여요·판소리·가사·시조…… 들의 정형 율조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낸 컴퓨터칩(예:64KD램→64괘 4차원 수리학 응용 후 성공함)의 수리 집합·분산 원리처럼 우리말마디의 수리를 3·4·5·6調로 民調詩語群에 수용할 경우 자유로이 집합·해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이 새정형시를 개발한 것이다. 民調詩에는 아무리 어려운 현대의 문명·문화 비평 언어가 시어로 새롭게 끼어든다고 해도 하나 어색하지 않게 시적 효과를 나타낼 수가 있다. 民調詩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불과 18자로 시 한 수를 뽑아낼 수가 있다는 점이다. 日本의 짧은 정형시(17자)의 자수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각 말마디마다 얼마든지 거듭 우리의 소리말 장단에 추임새를 매겨 중첩으로 계속 쓸 수 있음도 그 형식에 매인 시조와는 다른 자유로운 언어 세계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27    시와 기호 댓글:  조회:1610  추천:30  2008-10-21
…▪ 아방가르드/시론 아방가르드에 관한 글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스크랩] 시와 기호(記號)/심상운 글쓴이: 글나무 조회수 : 11 var articleno = \"12400099\";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일반언어학강의>)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2007,7,30, \'시문학사\')에 게재한  대담형식의 시론「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化)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언어놀이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시문학>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디워>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디워>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디워>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비슷하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디워>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오늘의 시작법』2004, 개정판 )-   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 8, 30>
26    금단의 열매. 4 (미성년불가) 댓글:  조회:1314  추천:51  2008-10-14
볼.1물이 없는 우물천길만길 깊은 물해도 빠지려한다달도 빠지려한다별도 빠지려한다나도 빠지고싶다빠져서 깊이깊이 빠져서고이고이 잠들어서볼.2빨간 꽃일가파란 꽃일가 노란 꽃일가보는 눈길따라 색갈이 다르다꽃속의 단지속에평생 먹을 꿀이 있어호랑나비 나플나픞 날아든다왕벌이 붕붕 날아든다곰도 어정어정 다가든다그런데 꽃은 문을 단단히 걸고있다아무한테나 문을 열어주는게 아니다어떡하지볼.3맑은 물속에 잠긴 하얀 돌이다둥근 달만큼한 하얀 돌이다하얀 돌을 건지려고물을 다치면매끈한 돌에 주름이 간다얕은 물속에 환히 있어도건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깊은 물속에 잠겨있어도오라고 손짓하면절로 날아와 손바닥에 앉게 하는 사람이 있다잘못 건지면하얀 돌이 검은 돌 된다볼.4능금나무가지 한 끝에빨간 능금 하나 대롱대롱달콤새콤한 빛눈만 배부르다장대끝으로 슬쩍 걸어당겼다땅에 뚝 떨어진 능금 주워한입 뚝 떼여먹었다아갸갸!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능금언틀먼틀 돌이였다볼.5아침 노을 한자락이살그니 내비치면연분홍 물이랑이마음을 휘휘 젓는다일어서는 물결따라내 몸도 일렁거린다귀.1오동빛 반지르르앙증한 함지속에 무얼 담고 있을가섬섬한 손이 쉼없이 오고간다찰떡, 증편, 만두기...어느것 하나 맛 없는게 없네따끈한 두부는 남편상에 놓을건가손바닥 엿은 본가집에 보낼건가멀을것만 아니구나 조 놀이감비행기는 아들에게 줄 것이리연두색 리본을 딸에게 줄것이리쓸것만 소복히 담아 인 새각시걸음도 사뿐사뿐 아리랑이야귀.2보초병이 없는 터널이다문짝도 없는 터널이다얼싸 좋다고바람이 휘파람 불며 지나간다임자 없는 휘파람 소리에 앉아함박눈이 뽀얗게 지나간다빗방울이 아우성치며 지나간다민들레꽃이 줄을 지어 지나간다주먹같은 돌들이 날아날아 지나간다무엇이나 다 지나보내면서터널은 사리만 하나 골라둔다어떤 땐 가짜인줄도 모르고귀.3너를 꼭 쥐면 쟁반같은 해가 나를 향하여 온다해가 너무도 뜨거워사품치는 강에다 몸을 던진다손이 녹는다 발이 녹는다가슴이 녹는다오장륙부가 녹아녹아 물이 된다나는 물이 되여출렁출렁 산기슭을 핥으며출렁출렁 벌을 마시며낮은데로 낮은 데로만 기여기여서 바다! 무연한 바다로 들어간다강도 나도 모두 자기를 잃고바다가 된다너도 없다나도 없다바다!오직 바다만이 영원히 출렁인다목.1여기는 따스한 봄날이다한일자로 줄지은 기러기떼끼룩끼룩 하늘에 떠있다그아래 아이들 띄우는연들이 꼬리를 한들거린다요기는 따스한 봄날이다아지랑이  스믈거리는 땅에서종달새가 살같이 솟아오르고팔락이는 나비들 엽서를 나른다여기는 따스한 봄날이다우뢰소리는 들리지 않고보슬비만 마냥 소곤거려눈이란 낱말이 종래로 없다요기는 따스한 봄날이다슬픔이 나를한송이 꽃으로 피게 한다목.2꽃놀이도 여기서부터 시작되고배놀이도 여기서부터 시작되고백미터경주도 여기로부터 시작되고장거리경주도 여기로부터 시작된다백사의 첫 코스여죽은 애 배때기처럼 차면찬 바람이 가슴에 구멍 뚫는다장대처럼 꼿꼿하면우박이 머리우에 쏟아질 예고오동지달 강판이 지면따스한 봄빛이 언제 들랴석달 열흘 불 때도 녹지 않으면홀로 섰나니 그림자까지 둘이다첫 코스!누구나 멋있게 떼려하지만비틀비틀 갈지자 걸음 걸어야 한다어깨.1약해 보일 땐가는 실오리톡 다쳐도끊어질것만 같아가슴 조인다강해 보일 땐낏낏한 멜대천근짐을 들고 천리를 가도흔들흔들 춤 춘다그런데 왜술에 푹 취해야가는 실오리인가어깨 .2다섯마리 열마리 새가 어깨에 날아와 앉으면 나는 큰 산에 기댄듯하다. 바람도 막아주고 비도 막아주고 눈도 막아주는 옴폭한 자리에 앉으면 한없는 미더움과 포근함을 무엇이라고 말할까, 푸른 정기 넘치는것이 산이고 억만년을 까ㅡ떡없는것이 산일진대 산에 기대는것보다 더 배심이 든든해지는것은 없다. 승냥이 무서움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여우의 유혹도 속내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풀향기, 꽃향기, 나무향기 아무 때건 청신하고 싱그럽기만 한 산속이다. 숲위로 달려가는 바람이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는 소리, 수초들이 캐드득거리는 소리, 순한 짐승들이의 발자국소리가 발끝으로부터 손끝으로부터 가슴에 흘러들어 아름답고 미묘한 경음악이 자늑자늑 도돌이를 한다.나는 눈을 살그니 감고 속으로 빈다. 새야새야 날아가지마. 새야새야 날아가지마.어깨.3우악스런 집게에 꽉 집히여뼈가 쩌릿쩌릿한 맛이 좋아아픔속에서 일어서는 흥분휘우듬한 무지개 다리 놓는다발끝에서 산너머로저 산너머엔홍송백송을 바자로 두른이층집 한채가 있을거야뜨락엔 빨간 승용차 재빛 직승기 반짝이고뜨락옆을 스치는 개울물에서산천어가 우굴거리고실바람에 옷자락 날리며무지개다리 건너산너머를 가보고싶은데다리가 사라질가 옥조이는 가슴뱀혀처럼 홀락거리는 산너머 유혹아차라리 이렇게 포옥 취하는 편이 낫지야젖. 1빛이다 빨강, 노랑, 하양...빛이다별빛, 달빛, 해빛...빛이다물빛, 풀빛, 돌빛...빛이다산빛, 들빛, 하늘빛...오색빛 그물은 물속에 늘이여고기를 낚고칠색빛 그물은 산속에 늘이여곤충을 잡는다푸른 하늘 자유로이 나는수리개도빛그물에 걸려봤으면 한다젖.2넓은 길 사이두고 한쌍 신호등빨간 불 켰다길을 밝힌다눈이 오면 눈속에 비가 오면 비속에신호등 보고 눈이 멀어야 길이 보인다길이 보이면 밉상이 앞길에 달이 뜨고눈이 보이지 않으면 곱상이 앞길에 별마저 죽는다눈아 눈아 멀어라달길로 가자젖.3뽀오얀 분통이향기 풍긴다맡을수록 향기로움에목이 마른다흐르는 강물 다켜도갈증은 풀리지 않아미칠것만 같다메여쳐 박살내고싶다하지만 메여치지 못한다분가루가 산산히 흩어지면더 진한 향기가 쏟아져완연한 미치광이 될거야가슴. .1맑은 샘물이 조리졸졸 노래하며흘러흘러 흘러간다한굽이 돌아꽃밭에 흘러들어나리꽃 함박꽃 이스라지꽃 피우고또 한굽이 돌아돌아참나무 피나무 봇나무 키운다골짜기 돌고돌며토끼 노루 멧돼지 살지우고언덕을 돌고 돌며멧새 부엉이 수리개 키운다샘물이 도는 바람에산이 들이 돌며 자라고해와 달이 돌며 자란다가슴.2쿵쿵 방아 찧는다보리 방아 찧을가기장 방아 찧을가쿵쿵 방아 찧는다마늘 방아 찧을가고추 방아 찧을가쌀 방아 찧으면밥이나 지어 먹고요고추 방아 찧으면눈물이나 찔금 짜고요아무 방아 찧으나내 방아만 찧으면 돼쿵쿵 방아야찧어라 방아야울어라 방아야가슴.3망치소리 똑딱똑딱마치소리 뚝딱뚝딱울리는 사이속에 꽃잎이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린다풀숲을 헤치고 나오는 내물소리 들린다작은 새가 날아예는 깃소리 들린다물방아 돌아가는 찌걱소리 들린다사슴이 뛰여가는 발작소리 들린다소리소리 어울려 황홀한 메아리
25    연길-카스 2만리 기행.2 댓글:  조회:1412  추천:43  2008-10-14
7.북경은 이전의 북경이 아니여    중학생신문사 마룡덕사장님의 덕분으로 통화조선족중학교 선생들의 사주는 저녁을 먹고 차표을 가지고 렬차의 제일 고급좌석인 연석칸에 올랐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렬차는 어둠을 물어뜯으면서 달리기만 하였다. 드르렁드르렁하는 렬차의 차바퀴소리가 고르럽게 들리였다.    조형도 시인이고 나도 시인인지라 우리는 시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조형은 주요하게 말씀하는 위치이고 나는 가끔가다 한마디씩 께끼면서 듣는 사람이였다. 조형은 일찍이 20세기 70년대에 한국의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사업에 다망하다보니 시를 많이 쓰지 못하고 시집도 한권밖에 펴내지 못했지만  시에 대한 연박한 지식이 있는분이다. 앉은 자리에서 한국의 명시들을 수십편 술술 암송할수있어 기억력과 총명도 이만저만이 아닌 시인이다.    시는 예술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시는 노래말(우리가 말하는 가사를 한국에서는 노래말이라고 한다.)이나 웅변고와는 다르다. 노래말이나 웅변고는 예술을 떠나도 된다. 일본에 ‘일흔번째 맞는 봄’이란 시가 있는데 이는 제목만 하여도 시가 된다. 시인들이 왜 꽃을 자주 노래하겠는가. 꽃은 꽃잎도 꽃술도 락화도 모두가 시다. 도레미파는 모두가 음악이다. 시의 도레미는 언어이다. 음부가 표현의 다양한 통로로 여러 가지 명가곡을 만드는것처럼 시도 언어로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을 하여 여러 가지 아름다운 시로 되여야 한다. 연변시는 로쇠하다. 문제가 있다. 언어련금술이 아니 된다. 연변의 어떤 시인의 시는 시가 아니고 어떤 사람은 책을 찍으려 하는데 그런 책을 찍어서 무얼하느냐 하는 등등 연변문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연변은 50대 시인들의 시가 좀 괜찮다고 피력한다. 그러면서 미나리 하나로 비빔밥을 못 만든다는것이다. 료리사라면 여러가지 료리를 만들줄 알아야 진정한 료리사라고 할수있단다...     이튿날 오전 열시오십분에 우리는 북경역에 내리였다. 북경역은 사람들이 어찌도 많은지 조금만 내다보아도 사람들은 걸어다니는것이 아니라 출렁거린다고 할지경이였다. 우리는 산서성 대동시(大同市)로 가야 했다. 이번 려행의 주요 목적은 비단의 길의 중로를 견학하는것이지만 연도의 명승지들을 보면서 가자는것이다. 대동에는 우리가 중학시절 지리시간에 배운 중국에서도 유명한 운강석굴(云岗石屈)이 있다. 그래서 대동시로 꼭 가야 한다. 그런데 대동시로 가는 버스가 있을것인데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가? 조형은 물론 가이드라는 룡관씨도 그것은 감감하다.    한 70세도 넘어보이는 늙은이가 나타나서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산서성대동으로 간다니까 자기가 버스역을 안다고 한다. 우리는 곤색천가방을 들고 누런 군대용 솜외투를 입은 늙은이를 따라 역왼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쩐지 미심스러워났다. 마침 지나가는 역전경찰과 물었더니 모른단다. 왼쪽으로 나가다가 누런 이발 하나밖에 없는 이 령감이 다른 사람들과 대동으로 가는 버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얏, 속히우는것이 아냐? 나는 대뜸 이 늙은 두상한테 당하는 감이 들어 그를 뿌리쳤다. 딴곳으로 가려하는데 령감이 명함장을 내밀면서 그냥 자기가 안다고 하였다. 명함장에는 북경-대동 버스역 번호가 씌여있었다. 즉각 전화를 쳤다. 북경시 20선버스 출발역이라고 한다. 어떻게 찾느냐고 물으니 끊어지는 전화다. 잘못 결려들었다간 그 후과를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우리는 짐을 끌고 역전 오른편으로 갔다. 광장을 벗어나는 곳에 숱한 사람들이 장도버스가이드 패말을 들고 어디로 가는가고 앞을 다투어물었다. 나는 그들이 든 패말을 눈빛질하다가 태원이라고 쓴 패말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과 태원가는 차가 대동을 거치느냐고 물었더니 아니 거친단다. 그래서 지나가는 경찰한테 묻기도 하고 해방군병사를 보고 묻기도 하였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니 그냥 헛물을 켜는 판이였다. 깜짝이야. 역전앞에  김삿갓술집을 경영하는 정공산경리가 있지 않는가. 한때 우리와 합작하여 해란강문학상을 운영했던. 바라보니 집들이 헐리여 있었다. 그러는데 한 사람이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대동차가 있을것이라고 한다. 용빼는수가 따로 없었다. 우선 그리로 가봐야 했다.    짐을 끌고 가보니 진베이 소형버스 한대가 있었다. 사람 대여섯이 앉아있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대동손님 안내란다. 오후 한시십오분에 뜬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반이다. 공짜로 안내한단다. 왜 공짜일가? 공짜는 좋은데  믿고 기다리다가 헛물을 켜는 날이면 어쩌나 하는 위구심이 들었다. 내가 안달아 하는것을 보고 조형이 택시를 타잔다. 북경의 택시비가 쩍하면 50원을 넘는줄 아는 나는 감히 택시를 탈 엄두를 못내였다. 조형이 택시를 타자니 두세번 택시를 세워서 물어보았는데 모두 모른단다. 세상에! 택시도 모른다면 누가 안단말인가! 숨이 막혔다. 가이드로는 진짜 빵점이였다. 아무 택시나 아는놈이 있겠지 하고 또 한 대를 잡았다. 택시비 40원을 내면 간단다. 나는 다짐을 땄다. 찾지 못하면 택시비를 주지 않는다고. 운전수도 그러자고 하였다. 택시에 앉았다. 한식경이나 달려서야 한 장거리 버스역에 닿았다. 운전수가 차에서 내리면서 들어가 보겠다고 한다. 우리들은 차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야 운전수가 돌아왔다. 아니란다. 그는 차를 몰고 딴곳으로 가면서 꼭 찾아주겠으니 근심말란다. 또 한참 달리였다. 버스들이 서있는 곳으로 갔다. 운전수가 내려서 알아보더니 대동으로 가는 버스가 오후 두시에 여기에 도착한다면서 타고 가라고 한다. 나는 안된다. 당신이 버스가 서있는 곳까지 실어다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고 하였다. 거기에도 손님을 소개하고 돈 벌어먹는 놈들이 씨글씨글하였다. 나까지 나서서 이것저것 물었으나 심통한수가 없었다. 한놈이 나타나서 자기가 알고있으니 소식제공비 40원을 내란다. 호화버스가 떠나는 곳을 안다고 큰 소리친다. 거기서 대동버스가 떠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단다. 그를 택시에 싣고 또 떠났다.    나는 북경으로 여라믄번 온것같다. 문화대혁명때 서너번 북경으로 와보았고 기자 시절에 취재도 와보았고, 6.4운동때도 기자로 한번 다녀갔다. 기자 견학단일원으로 운남으로 가고 올 때도 북경에 들리였고, 재작년에 덴마르크에 있는 딸이 부모를 북경구경시킨다해서 왔다간적이 또 있다. 그때의 북경은 이렇게 복잡하고 돈을 버느라고 사람들이 지금처럼은 싸대던것 같지 않았다.북경사람들은 례절이 밝고 손님들을 따뜻이 대해주었다. 상품생산이라는것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서로 등을 쳐먹고 간을 뽑아먹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추호의 경각성도 늦출수 없었다. 대동으로 가는 버스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돈을 주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거이 반시간을 달려서야 대동버스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소학교운동장 절반만큼한 공지에 버스 한대가 서있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버스를 찾아가 대동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한쪽켠에 공공변소가 있고 변소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물어보니 모른다는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조형을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서성거리는 한 사람을 찾아 대동차가 여기서 떠나느냐 물었다. 그런단다. 그런데 왜 차가 없느냐고 하니 한시에 소형버스가 와서 손님을 실어가는데 자기도 그 차를 기다린단다. 그래도 나는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 언제 타보았느냐고 물었다. 전에도 타고 다녔단다. 시름이 놓이였다. 가이드한테 돈 30원만 주었다. 리유는 간단하였다. 호화차가 없다는것이다. 가이드는 울상이다. 택시를 타고가면 30원이 다 날아난다나. 나는 못듣는체  하였다. 자식 너도 코밥을 먹어봐. 차들을 보내고 보니 열두시가 좀 지났다. 그때 소형버스 한대가 왔다. 대동으로 가는 버스의 안내차란다. 오후 한시반에 떠난다는가. 대여섯이 차에 올랐다. 나는 점심을 아무렇게라도 외따져야겠기에 조형을 차에 있으라 하고 맞은켠으로 갔다. 가다보면 식당이 나질거라는 생각이였다. 한 200메터 가니 간이식당 하나가 나지였다. 마침 그 음식점에서 왠룽보를 만들어 팔기에 세주머니를 사고 샘물 두병을 사다가 먹었다. 배고픈 김에 먹는것이라 맛이 좋았다.   한시반이 되자 소형버스는 우리를 싣고 달리였다. 어느 지점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갔다. 거이 반시간을 달려서야 호화버스가 있는 아늑한 곳에 도착하였다. 대동으로 가는 차라고 갈아타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차였다. 장거리 차들은 모두 어디로부터 어디까지 간다는 글을 써붙이는데 이 차에는 그런것이 없었다. 등기도 하지 않고 벌어먹는 차임이 분명하였다.  그자식들이 통도 크구나. 수속이 있던 없던 우리는 관계할봐가 아니야. 대동으로 실어다 주기만 하면 만세야 하고 속으로 웃었다. 우리 나라 서울- 북경이 이러하니 이제 머나먼 길에서 오늘과 같은 일을 얼마나 겪어야 할지 알수 없는 일이여서 차를 타고 가면서도 가슴 한쪽구석에는 근심이 태산같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버스는 100키로 시속으로 산서성 대동시를 향하여 질풍같이 내달리였다. 북경사건을 겪고 조철호형은 기행문에서 이렇게 개탄한다. <<중국인들은 돈을 버는 일에는 참 기발한 사람들이다. 특히 북경은 800년 력사를 지닌 고도요. 16800평방키로메터의 면적을 지닌 매머드도시여서 예측을 뛰여넘는 일들도 줄을 서있는듯하다... 도시가 워낙 크고 사람이 많고 돈버는 궁량이 발달하다보니 이같이 정식을 벗어난 비공식적인 구조가 생겨나고, 그 빈구석에서 먹고 사는 일이 공식화돼 뿌리 내리고 먹이 사슬이 형성돼 북경의 또 다른 구조가 돼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음이 부끄럽지만 다행스럽기도 했다.>> 8.만리장성 - 피와 생명의 가치는 어디에    차가 팔달령 (八达领)에  이르기 시작하자 만리장성(万里长成)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거룡이 날아내리는가 땅우에서 거룡이 하늘로 꼬리를 흔들며 날아오르는가. 그런데  거룡은 한두마리가 아니다. 차를 삼키기라도 하려는듯 카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날아내렸다가는 삼키지 못하고 차길밑을 빠져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랬다가는 또다시 날아내리고 날아오른다. 길손들의 마음은 거룡들의 날음을 잡아타고 하늘을 날아오르기도 하고 하늘에서 날아 내리기도 한다. 날아오르고 날아내리는 거룡들의 등허리를 타고 우리를 실은 차가 질주한다.    만리장성은 우리나라의 고대의 유명한 건축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력사의 기적이다. 우리나라 고대의 로동인민들의 지혜의 산물이기도 하고 인내력의 산물이기도 한 만리장성은 고대건축기술의 위대한 성과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장성을 보고 부르기 쉽게 만리장성이라고 하지만 어찌 만리라고만 하랴. 력사의 기재에 의하면 20여개 왕조와 제후국들이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만약 여러 시대의 장성의 길이를 다 합쳐보면 그 길이가 십만여리가 된다고 한다. 지금의 신강, 감숙, 녕하, 산서 , 섬서, 내몽골, 북경, 하북, 천진, 료녕, 길림, 흑룡강, 하남, 산동, 호북, 호남 등 16개 성, 자치구, 시에 모두 길고 짜른 장성이 있다. 그중 내몽골자치구에만 하여도 삼만여리나 되는 장성이 있다.    이렇듯 웅위로운 공정의 공정량은 현대인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족하다. 압록강으로부터 기련산맥에 이르는 장성을 명나라에서 쌓았는데 그 길이가 12600여리에 달한다고 한다. 거기에 든 바위돌과 흙으로 두께 한메터, 높이 다섯메터로 계산하여 본다면 지구를 한바퀴 돌고도 남음이 있단다. 만약 그것으로 너비 다섯메터 , 두께 삼십오센치메터되는 길을 만든다면 지구를 서너고패 돌릴수 있다지 않는가. 그래서 우주비행원들이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제일 선명하게 보이는것이 중국의 장성이라고 한단다.    장성은 돌로 쌓은것도 있고 벽돌로 쌓은것도 있고 흙과 자갈로 쌓은것도 있다. 장성하면  진시황을 생각하는데 실은 진시황이전의 몇백년전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고대인들은 기원전 7세기 전후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제일 처음으로 장성을 쌓은 나라는 초나라였다고 한다. 초나라는 변경을 따라 수백리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는데 그 이름을 방성(方墭)이라고 불렀다한다. 그뒤를 이어 제나라,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 등 제후국들이 련이어 자기의 변경에다 장성을 쌓았다한다. 이러한 장성의 유적들은 없어진것도 있고 남아있는것도 있다. 그때의 장성은 황하와 장강류역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것도 있고 남북으로 뻗은것도 있었단다.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한후 처음으로 중앙집권제를 건립하고, 몽념이라는 장군을 파견하여 흉노를 막기위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군사 30만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진시황은 또 다시는 활거를 하지 못하게 제후국들이 쌓은 국내성을 허물어버리기도 하였단다. 그때 진시황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감숙성민현으로부터 동으로 료동의 만리장성까지 쌓았다고 한다. 력사상 명대의 규모가 가장 컸는데 100여년간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력사상 민부를 제일 많이 동원한조대는 북제였는데  450키로메터의 장성을 수축하기 위하여 한번에 180여만명이나  되는 군사와 백성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장성은 우리나라 여러민족인민이 공동의 피와 땀으로 쌓아진것으로서 위대한 공정이고 진귀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중점문화유물보호물로 되었다.    우리가 가는 길 어디에나 장성이 없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장성은 감숙의  가욕관(嘉峪关)에서였다. 황토와 모래로 쌓아진것이였는데 한토막이 웅위롭게 서있어서 그곳에서는 장성제일돈 (长城第一礅)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서안에는 시내의 한가운데에 명나라때에 벽돌로 쌓은 장성이 있었고, 산서성의 대동시로부터 하남성의 정주시로 남하하는데는 산발을 따라 쌓여진 장성이 심심찮게 보이였다. 옛날에 중국은 말그대로 장성의 나라였다.    장성을 쌓는 시대에 얼마나 많은 부모처자가 생리별하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던가! 장성은 한줌도 못되는 봉건통치배들의 리익을 보위하기 위하여 쌓아진것으로써 인민들의 피와 땀과 생명의 결정체이다. 장성은 중국력사의 위대한 건축물이기도 하고 중국력대의 통치배들의 죄악의 상징이기도 하다. 장성은 옛날에는 마음대로 드나들수 없는 국계의 상징이였지만 오늘은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드는 문화유물이 되어버리였다. 지금은 장성안도 우리나라요 장성밖도 우리나라다. 장성은 불가침범의 국계의 상징이였고 백성들을 가두어놓는 울타리였다. 장성이 장성노릇을 못하니 백성이 얼마나 자유로와지였는가.    장성이 인민들에게 가져다준 고통을 위나라 시인 진림은 이렇게 읊은 바 있다.  장성아래 샘물에서 말을 물 먹이니   장성아래 샘물에서 말을 물 먹이니 물이 너무 차서 말뼈가 얼어든다네 성쌓는 관리에게 내 말하노니 <<태원의 역군들은 오래 머물러두지 말게  .............   <<사나이 차라리 싸움터에서 죽을망정 ............. 수많은 장정들 여기 끌려왔으니 집에는 홀로 사는 안해들 그 얼마겠나  그네들 안해에게 보내는 편지 <<부디 딴데로 시집을 가서 서로 만난 시부모 잘 섬기고 사오 다만 원하기는 때를 따라 옛남편을 생각이나 해주오>>  변방으로 오는 그 답장 탓하였으되 <<그대의 말씀 왜 그리도 야박하오>>  <<이몸 이러한 곤난속에 있으니 남의 집 딸을 어이 남겨두리 사나이는 낳거든 반겨하지 말고 딸을 낳거든 고이 기르소 보구려! 장성아래 끌려온 사나이들 죽어서 해골들만 쌓이고 엉켰소>>  <<머리 올려 그대 안해 되여 마음속 사랑 굳이 다짐했다오 변방의 성쌓기 괴로움을 내 알거니 어이 이 한몸 딴 생각을 하겠어요>>      력사는 흘러갔어도 장성은 남아있고 진림의 시가 남아있다. 장성도 진림의 시도 장성이 낳은 처참성과 전쟁의 참혹성을 눈물을 머금고 공소하고 있다. 일당만의 장성을 쌓느라고 남편은 안해한테 재가하라고 다시는 아들을 낳으면 반겨하지 말고 딸만 낳으라고 소리치고 있다. 장성의 물은 말이 먹어도 뼈가 어는 물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한마디로 장성이 빚어낸 질고를 다 헤아리랴. 시의 밑바닥에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는 피타는 호소가 안받침되여 있다. 력래로 중국인민은 장성을 쌓으며 피를 흘리였고 장성을 허물며 평화와 안정을 획득하였다. 오늘의 안정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민은 얼마나 많은 장성을 허물었던가. 오늘의 안정을 보존하며 백성이 부유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장성을 허물어야 하는가. 장성은 국계였다. 국계는 어떠한 국계를 막론하고 전쟁의 참화를 도발할수 있는 가장 위험한 위험구이다. 인류는 이 국계들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래야 세계의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실현할수있다. 국계를 지워버리기 위하여 인류는 또 얼마나 많은 재앙을 입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겠는가.  9. 내가 만난 불교의 첫현장 - 운강석굴     우리는 아침 8시에 대동시의 구예호텔을 나와서 그리로부터 30여리 떨어져있는 운강석굴로 향발하였다. 산서성 대동시는 270여만이 살고있는 도시로서 북위(北魏)시대에는 100여년간이나 서울이였던 고장이다. 대동시에는 큰 자랑거리 두 개가 있는데 그하나는 운강석굴이고 다른 하나는 리화주(梨花酒)라는 술이다. 운강석굴은 중국고대 4대석굴예술의 하나에 속하는것으로서 2001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제정한것이고 리화주는 세계명주 500개를 뽑을 때 뽑힌 술로서 아마 중국에서 유일하게 세계명주로 된 술인것 같다. 웬일인지 우리가 대단하다고 하는 모태주는 세계명주에 들었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산서성의 리화주가 세계명주라니 믿어지지 않기도 하였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잠간 달리더니 무주산(武州山)남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운강석굴앞에 우리를 부리워놓았다. 차에서 내려 북을 바라보니 짙푸르게 서있는 측백나무들 너머로 운강석굴이 바라보이였다. 둔덕우에는 뱀장어가 꼬리를 치고 있는둣한 구불구불한 장성이 어디론가 헤염쳐갔는데 그밑으로 푸른 기와를 얹은 운강사목각건축물이 고풍을 현시하며 두채가 나란히 서있었고 좌우로 벌집같은 닫집들이 바라보이였다.    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 우리가 첫손님으로 도착하였음이 분명하였다. 어제 저녁에 한국에다 편지를 보내겠다던 조형의 말씀이 생각나서 나는 조형을 우전국으로 안내하였다. 주소를 쓰는 조형의 뒤모습을 바라보니 조형은 훌륭한 사업가이기도 하지만 가정도 잘 거느리는 모범남편이며 모범아버지라는 감격이 내 가슴을 적시였다. 우전국을 나서서 우리는 곧추 운강석굴로 슬적슬적 걸어갔다.    운강석굴은 동서로 2리나 펼쳐진 석굴인데 점유면적이 40만평방메트나 된다. 현존하고있는 동굴이 45개이고 부속동굴이 207개이며 크고 작은 불상이 51000여존이나 된다. 이 석굴은 기원 460년에 북위 문성제(文成帝)가 등극한후 주지승 탄요(昙曜)를 주도하게 하고 64년이란 시간을 거쳐 완성된 석굴이다. 탄요는 다섯곳에다 굴을 뚫고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제일 높은 것은 70자요 버금가는 것은 60자였다. 이것을 지금 탄요5굴이라고 부르는데 16-20굴이다.    운강석굴을 만드는것은 세차례의 대공정을 거친다. 첫공정은 465-494년 사이의 30년간인데 높이 30메터, 길이 600메터에 13개의 대형석굴을 만든다. 두 번째 공정은 494-524년까지의 30년간인데 불교신앙단체들이 달려들어서 벌집처럼 만들어 놓았다. 지금 현존하는 석굴은 210여개나 된다. 세번째공정은 당나라 초기에 이루어졌는데 운강 10사를 축조하고 1800여존의 불상을 수정했다. 그러나 료나라 말기에 전란으로 운강 10사는 불에 타고 명나라때에 와서는 운강석굴이 황페화되였다. 청나라 순치 8년 (1651)에 운강사원을 재건하여 북위시기 조각예술의 대표작이라는 칭호를 획득하였다. 운강석굴에는 당시의 건축, 복장, 음악, 무용, 불교흐름 등이 반영되여있어 그 문화적가치가 높은것으로 세상에 알려져있다. 운강석굴은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대공정이였다.   옛날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였다. 그들은 순 망치와 정으로 석벽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석굴을 만들었다. 우리 연변에는 이런 석벽이 있는것 같지 않았다. 진짜 청석바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흙도 아니였다. 모래와 돌로 다져진것같은데 대단히 딴딴한 석벽이였다. 이 누우런 석벽의 이름은 마애석벽이라 부른다. 난생 처음으로 이런것을 돌아보게 된 나는 너무도 대단하여 그저 혀만 끌끌 찼다.    운강석굴에는 많은 동굴이 있는데 제일 화려한 것은 5화동(5华洞)(9-13)이다. 오화동에서  9,10굴은 앞과 뒤로 련결된 한쌍의 굴이다. 굴앞에는 8각기둥이 네개가 서있는데 중국의 한대와 위대의 건축기술이 빛을 뿌리고있다. 9굴의 동서  서쪽벽과 북쪽벽 아래에다는 <섬자본생>(睒子本生) 이야기를 부각한것이 특징적이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가이국에 맹인 량주가 살고있었는데 늙도록 자식을 보지 못하여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보살자회(菩萨慈熙)가 이에 감동되여 아들로 들어가  그 이름을 섬자라 불렀다. 섬자는 삼림에다 풀집을 짓고 맹인 량주를 섬기였다. 섬자는 새와 짐승들과 친구로 사귀면서 여러가지 과실을 뜯어오고 샘물을 길어다 늙은 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하루는 국왕이 산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몸에 사슴가죽옷을 입은 섬자를 사슴으로  잘못 알고 화살을 쏘았다. 순간 하늘땅이 뒤흔들리우고 태양이 빛을 잃고 뭇짐승들이 슬프게 울었다. 국왕은 맹인량주를 찾아가 죄를 빌고 그 집의 아들이 되였다. 이에 하느님이 감동되여 섬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였다. 맹인량주가 이 소식을 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을 훔치니 눈앞이 환히 보였다.    이 이야기 부각은 수법이 소박하고 조형이 정확하여 조각가들의 심후하고 견실한 생활체험이 보일뿐만 아니라 높은 예술기량도 환히 보인다.    운강석굴의 제6굴에는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释迦牟尼)가 탄생한 경과를 부각하여 이채롭다. 이 굴은 부각내용이 풍부하고 아름다워서 운강제일위관(云岗第一 伟观)이라고 일컫는다. 석가모니는 금빛옷을 입고 오른손바닥을 보이며 맨발로 서있다. 귀가 어찌나 큰지 왼쪽귀가 어깨에까지 드리웠다. 석가모니의 키는 4.74메터이다. 머리에다 그물로 뜬것같은 모자를 쓰고있는 석가모니의 그 자애로운 모습을 언어로써는 표달할길이 없다. 량옆에 서있는 감실의 기둥은  9층으로 되였는데 층층의 면마다 보살이 셋씩 부각되여있다. 중심탑기둥의 아래와 남쪽벽에 석가모니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하는 전설을 이렇게 부각하였다.    고인도에 쟈피뤄위(迦毗罗卫)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왕비가 40이 다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국왕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지라 늘 수심에 잠겨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야왕비(摩耶王妃)는  보살님이 태를 얹어주는 꿈을 꾸고 임신하게 되었다. 마야왕비는 풍속에 따라 본가로 해산하러 왔다. 하루는 왕비가 화원을 지나다가 무우수(无优树)라는 나무를 잡고 한심 쉬는데 오른쪽겨드랑이밑에서  남자아이가 떨어졌다. 그날이 4월 8일이였다.    금방 태여난 태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일곱발자국 걸었는데 자국마다에 련꽃이 피여났다. 그는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하늘땅에 나만이 독존하리라>>     그때 9마리 룡이 하늘에서 날아내려와 입으로 성수를 뿜으면서 먼길을 다녀온 태자를 환영하는 환영연을 베풀었다. 왕이 태자를 맞으니 황궁에서는 노래와 춤이 넘치였다. 왕은 신선을 불러다 아들의 관상을 보게 하였다. 신선이 왕태자를 안고 보니 생김새가 뛰여났고 금강과 같은 몸에 32가지 기이한것이 있고 80가지의 훌륭한것이 있어서 이렇게 고하였다.    <<태자는 집에 두면 왕위를 계승할거고 내여놓으면 불도가 될것이옵니다>>    태자는  태여난지 일곱날만에 어머니를 잃고 이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국왕은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으로 날마다 100여명의 미녀를 동원하여 태자로 하여금 락을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늘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였다. 태자가 열일곱살먹은 해에 장가를 들게 하였는데 태자는 풍속에 따라 약혼힘을 검사하게 되였다. 태자는 활을 쏘아 한살로 일곱면의 쇠북을 꿰였는데 그 기술은 세상에 당할자 없었다. 태자는 부왕의 허락을 받고 궁전을 돌아보았다. 동서남북 네문에서 로인, 병자,주검, 승려를 만나면서 생명은 무상한것이여서 인생의 어려운 길에서 해탈되여야겠다고 태자는 속다짐한다. 태자가 가출하겠다고 하자 왕은 안된다고 하면서 성안에다 계엄령을 내리였다. 여섯째날밤에 안해가 벌떡 일어나서 꿈이야기를 한다. 밝은 달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이발이 다 빠지고 오른쪽팔이 끊어지더란다. 태자는 안해의 꿈이야기를 듣고 오늘저녁에 가출할 시간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밤만 지나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러면 모든것이 끝장나는 판이였다. 그는 안해를 달래여 잠들게 하고는 말을 타고 황궁을 탈출한다. 이때 사천왕(四天王)이 나타나서 태자와 말을 들어 성문을 넘게 한다.    산에 들어간 태자는 보리수(菩堤树)아래에 앉아 음식을 전페하고 마흔아홉날을 해탈을 꿈꾸다가 마침내 도를 깨닫고 부처님이 된다. 그날이 기원전 530년 음력으로 섣달 초여드래날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살(서른다섯이라는 설도있음)이였다.    운강석굴에서 제일 큰 불상은 제54굴에 있는데 키가 17메더나 된다. 이 석굴에서 제일 작은 불상은 몇센치메터밖에 안된다. 석굴마다 다 자기의 특색이 있는데 제12굴이 북위의 가무를 표현한 굴이다. 사람들은 이 굴을 음악굴이라고 부른다. 앞실의 북쪽벽문웃설주에 춤을 추는 무리를 새기여 놓았는데 바람에 날리는듯 가벼운 동작인가 하면 기음이 웅위롭고 동작이 련관되여 강열한 절주감을 주고있다. 제일 높은곳에 있는 천정의 닫집은 결구가 웅대하고 형식이 사치하다.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기악대가 배렬되였는데 불고 두드리고 뜯고 하는 여러 가지 기악합주가 한창이다. 퉁소가 있는가 하면 북이 있고 피파가 있는가 하면 징이있는데 무려 열대여섯가지 악기가 지휘를 따라 자기의 소리를 내고 있다. 당시의 태평성세를 노래하는 부드럽고 아름답고 웅위로운 음악소리가 귀전을 울리는것만 같다.    석굴을 돌아보고 버스역으로 나오니 추운 바람이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강물에는 유리판같은 살얼음이 덮히여있다. 홑바지바람으로 운강석굴에 온 조형의 얼굴이 찬바람에 빨갛게 얼어있었다.   10. 오대(五臺)로 가는 길    아득하게 펼쳐진 시누런 벌판, 이곳이 세상에 유명한 황토고원이다. 동으로 태행산, 서으로 일월산, 남으로 진령, 북으로 음산, 그 면적이 58만평방키로메트나 되고, 일반적으로 해발을 1000으로부터 2000메트로 헤아린다. 시누런 흙으로 이루어진 황토고원의 흙두께는  보통 100메트이상이고 제일 두꺼운 곳은 200메트도 넘어난다.    산이란 이름이 없는 시누런 벌판으로 소형버스 한대가 질주하고 있다. 나무도 보기드문 벌판으로 달리는 소형버스는 고속도로가 아닌 일반포장길로 100키로의 시속으로 남으로 남으로 달리고있다. 그 차에다 나와 조형은 몸을 실었다. 온기가 설핏한 날씨가 잉잉거리는 차를 어루만진다. 이따금 마을이 나타나는데 넓은 벌에 걸맞게  소학교처럼 기다란  집들이 벽돌담장을 두루고있다. 마을이 나타나면 나무들이 좀씩 서있다. 수백리를 달려도 물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곳엔 땅이 패워들어가 흙골짜기를 이루었다. 바닥에는 그래도 흙이 아니라 자갈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여긴 어디로 가나 흙의 나라였다. 차안에는 땀내와 손님들이 겨끔내기로 피워대는 담배냄새가 코를 찌른다.    얼마나 달렸는지 저 아득한 곳에서 아물아물하게 산이 나타났다. 오대산이란다. 우리가 가는 곳이 저 오대산이다. 오대산은 중국에서 4대불교명산중이 하나이다. 하나는 보타산(宝陀山)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蛾眉)산이고, 또 하나는 구화(九火)산이고, 나머지 하나는 오대산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중국에 살면서도 4대불교명산이 있는줄을 모르다가 조형이 말씀하는 바람에 알게 되였다. 오대산은 산서성동쪽에 있는 산이다. 오대산을 가기위하여 우리는 먼저 원평(原坪)이라는 곳으로 가서 오대로 들어가는 차를 타기로 작정하였다. 대동에서 오대로 가는 차는 여름에는 오전오후에 다 있는데 지금은 려행비철이여서 오전에 한번만 있단다. 그래서 할수없이 에돌아가는판이다. 래일아침까지 기다린다는것은 반날을 떼우는것이니까 그럴수가 없었다. 시간이 금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원평이라는 목적지만 있을뿐 어디로 해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길은 따분하기만 하다. 둬시간 잘 달려서 왼손편 멀리에 은빛 바다가 나타난다. 항구에는 선박들이 떠있다. 나는 너무도 희한하여 소리쳤다.    조형 저기에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어디오    저앞에   그건 바다인 것이 아니라 신기루요   아니 바다인데요    허허허    조형은 어처구니 없다는듯 사람좋게 웃었다.    그제야 나는 환각에서 깨여난듯 하다. 물 한방울도 보이지 않는 황토고원에서 처음으로 신기루를 보았다는 신비감이 가슴에서 설레였다. 어릴 때 사막에 신기루가 있다는것을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제눈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처음보는 신기루는 신기하고도 희한하고 아름다운것이였다.    산은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고 멀리 사라지기도 하면서 차와 무슨 경주라도 하고있는것 같았다. 산은 나무가 몇대 보이지 않는 라체였다. 이따금 보이는 나무라야 키가 작달막하고 뼈가 앙상한 꾸불떡 나무였다. 산이 가까이 올 때마다 흙으로 쌓은 옛날의 장성도 산과 함께 따라왔다. 산은 벌을 위하여 서있고 벌은 산을 위하여 누워있었다. 산서사람들은 어찌보면 벌이였다. 수레가 지나가도 차가 지나가도 찍소리 한마디 없이 엎디여있는 벌이였다. 이런 벌에 바람을 맞받아 눈비를 맞받아 웅위롭게 서있는 산이 중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후 한시반에 탄 버스는 네시반에 우리를 원평의 버스역에다 부리워놓았다. 마침 오대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그 자리로 갈아탔다. 25명 정원이 앉는 좌석에 무려 49명이 올랐다. 일찍 올라서 자리를 잡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서서 갈번하였다. 두시간이면 오대에 닿는다고 한다. 나는 사과랑 빵이랑 물이랑 한꾸러미를 차에 올리였다. 산서와 섬서는 귤과 사과가 많이 나는 고장이다. 제일 맛이 좋은 사과는 한근에 50전을 하는 사과이다. 이런 사과는 주인이 직접 따가지고 와서 파는 신선한것인데 어찌나 달고 시원한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이런 사과를 우연히 서안에서 만나 먹어보았는데 난생 처음 먹어보는 사과였다. 조형이 식전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라고 하는바람에 거기로부터 우리는 사과를 부지런히 사먹었다.    버스는 콩나물처럼 들어선 손님을 싣고 달리기 시작한다. 사람만 콩나물처럼 들어선것이 아니라 말소리도 콩나물처럼 들어섰고 담배연기도 콩나물처럼 들어섰다. 권연만 피우는것도 아니고 남자들만 피우는것도 아니다. 산서의 독초를 태우는 고약하고 독한 냄새가 말 그대로 코를 찔러서 조형은 이따금 코를 막는다. 차가 농촌으로 접어들자 밭에는 모두 옥수수 글거리만 보인다. 집집마자 옥수수대를 가득 무져놓은것을 보니 화목이 옥수수대였다. 여기도 물이 없는 강이 많기도 하다. 길은 차길인것이 아니라 수레길이여서 사람을 채로 치는것 같다. 차는 분기식 비행기가 연기를 뿜으며 하늘을 나는것처럼 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달린다. 산이란것도 죄다 나무가 보이지 않는 흙산이다.    차가 산골안을 지나간다. 둔덕이 있는 곳마다에 땅굴이 보인다. 여기저기에 땅굴은 많기도 하다. 문을 해단것도 있고 달지않은것도 있다. 어쩐지 그것이 해골에 패운 눈처럼 우묵해 보였다. 굴을 보면서 나는 문화대혁명때를 떠올린다. 진보도사건이 일어났다는 후다. 땅굴을 깊이 파서 량식을 저장하여 전쟁준비를 한다고 고아대며 내 고향 류신이라는 깊고깊은 시골에서도 땅굴을 팠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량식이 있다고 땅굴을 파며 전쟁이 나서 땅굴속에 들어가면 모두 한구덩이에서 굶어죽을것이 아닌가. 적들이 왔을 때 땅굴속에 들어갔다가 독가스를 쏘면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무리죽음을 당할것이 아닌가. 라는 불평들이 배에 가득 찼으나 누구 하나 입밖에는 내지는 못하였다. 한마디만 내비쳐도 반혁명이 되는판이라 벙어리가 제일 좋은 세월이였다. 산서에서도 땅굴을 많이도 팠구나.   <<저게 무슨 굴인가 물어봐요>> 조형이 궁금해 하였다.   나는 문화대명때 일은 말하기 싫어서 해석하지 않고 차에 앉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하는 대답이 뜻밖에도 내 생각과는 틀린다. 사과랑 귤이랑 저장하는 창고란다. 과일창고라는 말을 들은 나도 눈이 둥그래졌지만 조형의  눈에서는 신비감까지 내비치였다. 나야 연안 요동이요 갱도전이요 하는 영화를 본일이 있지만 조형이야 땅굴같은것은 처음 목격하는 일이였던 모양이다. 물론 한국에는 김치굴은 있어도 이런 땅굴이 없는것이다. 조형은 사진을 찍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차가 들추기는 바람에 초점을 맞출수 없어 끊내 한장도 찍지 못하여 무척 아쉬워하였다. 두시간이면 닿는다던 오대에 세시간반을 달려서 밤 8시에 겨우 오대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7시에 오대산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버스가 있다는 곳으로 갔다. 두시간이면 오대산에 도착한다는 소형버스를 만났다. 그 차가 좋겠다고 생각하고 언제 떠나느냐 물으니 당장이란다. 올라서 표를 끊으니 차가 떠날념을 하지 않는다. 떠난다떠난다 하면서 떠나지 않으니 속이 바질바질 탔다. 어제 저녁에 올 때도 중도에서 한시간이나 누구를 기다리면서 차가 머물더니 오늘아침 또 재수 없는판이 아니겠는가. 숱한 차들이 나와서 손님을 끌면서 어느 차도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택시를 탈수는 없다.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여야 글이 나온다고 하였지만 이런 밑바닥생활을 체험한다는것은 단가마의 개미처럼 매삼거리기다.    마침내 차가 자리를 떴다. 후  단김을 뿜었다. 그런데 한 40리가서 두촌(杜村)이라는 마을이 나타났는데 운전수들이 잠간 볼일을 본다고 차에서 내렸다. 한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옆에서는 택시들이 제 차를 타라고 손님을 꼬드긴다. 기다리다 못하여 조형이 시간이 금전이니 택시를 타자고 한다. 나도 간장이 다 탄지라 택시를 불렀다. 150원이란다. 나는 운전수와 100원이면 가겠다고 하였다. 잠간 싱갱이질을 하여 백원으로 흥정하고 차에 올랐다.  11. 사찰의 숲 오대산      한시간쯤 달린 차는 오대산에 접어들었다. 가파롭고 험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차가 산마루에 올라서니 오대산입구라는 대문이 나타났다. 길이 막혔다. 돈을 내란다. 운전수가 자기가 공짜로 들어가게 하면 두사람 입산비가 100원인데 30원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마했다. 운전수가 차에서 내려 문지기와 상론하였으나 실패. 우리는 100원을 내고 입산증을 떼였다. 이러면 오대산에 들어가서 참관만 하면 되오. 하고 나는 운전수에게 물었다. 50원을 입산비지 절보는 값이 아니란다. 중국에서 제일 비싼것이 이런 유람입장료인것 같다. 운강석굴입장료는 120원이였다. 후에 지불한 일이지만 돈황의 입장료도 120원이였다. 비싸지만 유모아적인 입장료는 진시황릉에 있는 병마용이였다. 1원이 모자라는 99원이였다. 려행하는데 소비되는 경비는 차비, 려관비, 식비 세가지로 계산하여야 하는데 제일 많이 드는것이 입장료이다. 돈이 적으면 눅거리 려관에 들어도 되고 먹는것도 일반 백성들이 먹는 눅거리 음식을 먹을수있지만 입장료만은 어디로 가나 요구대로 내지 않으면 안된다. 택시는 뱀처럼 구불구불 기여간 산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하얀 단장을 한  오대산봉우리들이 우리의 눈으로 뛰여든다. 하아 여기까지 찾아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모지름을 썼던가. 오대산, 둘레의 길이가 250키로메터이고 산봉우리 다섯이 빙 둘러있다고 하여 그 이름을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마다 꼭대기가 평평하게 넓다고 한다. 그 모양이 흙을 쌓아만든 대와 같아서 오대산이라는가. 오대산의 중심은 지금 우리가 가고있는 대회진이다. 오대는 제각기 딴이름이 있다. 동대는 바다가 바라보인다고 망해봉(望海峰)이요, 서대는 달을 보는 곳이라고 쾌월봉(快月峰)이요, 남대는 아름답다고 하여 금수(锦繡)봉이요, 북대는 풀입같다고 하여 엽두봉(叶头峰)이요, 중간에 있는 봉우리는 주위에 산봉우리들이 모여있다고 하여 취암봉(聚巖峰)이다. 5대가운데서 북대가 제일 높은 산봉우리인데 해발 3,058메터로서 <<화북의 지붕>>이다. 사람들은 동대에서 해돋이를 보고, 서대에서 달구경하고, 중대에서 별을 헤여보고, 북대에서 적설을 보고, 남대에서는 꽃구경을 한다고 말하고있다. 산우의 기후는 차다. 해마다 4월이 되어 해동이 되고 9월부터는 흰눈이 내린다. 한여름에도 시원하여 사람들은 청량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참 차를 타고 내려가노라니 사찰이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골짜기에도 사찰이요 산허리에도 사찰이요 산꼭대기에도 사찰이다. 이 고장에 47개나 되는 사찰이 있으니 사찰의 천국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기재에 따르면 오대산에는 동한 영평(永平)년간(58-75)에 벌써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위,제,수,당,명,청 시기에 많은 절을 수건하여 지금의 사찰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오대산의 사찰은 중국불교사에서도 유명하다. 당송이래로 일본, 조선, 인도네시아, 네팔 등등 나라의 승려들이 빈번히 오간곳이다. 현대에는 미국의 클린톤대통령도 왕림하여 오대산에 빛을 더해주었다.     오대산주위를 바라보니 수림이 울창하였다. 천여리길에 수림을 보지 못한 나는 너무도 신비하여 조형에게 물었다. 왜 절이 있는곳에는 수림이 무성합니까? 절이 서면 나무들이 따라와 자랄까요 아니면 주지들이 나무가 있는곳에다 절을 세웠을가요. 허허 글쎄요. 아마 풍수지리를 잘 보고 절을 세웠겠지요.     두루 이야기를 나누는데 차는 왼쪽에 보이는 새하얀 탑을 지나 잠간 내려가다가 서서히 멈추어섰다. 차에서 내려 돌아보니 둔덕우에 사찰 하나가 보였다. 룡천사(龙泉寺)였다. 룡천사의 뒷산은 구룡산이다. 절에 룡천이라는 샘이 있다고 하여 룡천사라 부른다 .운전수가 안내하는 대로 돌아보리라 작정한 우리는 룡천사로 올라갔다. 길좌우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길길이 서있고 숱한 난전들이 주인이 없이 줄느런히 서있었다. 려행계절에는 사람들이 붐비였겠으나 오늘은 우리 두사람밖에 없었다. 둔덕우에 올라서니 한족로파셋이 난전을 벌리여놓고 볕쪼임을 하고있었다. 들어서는 대문의 전각이 화사하였다. 푸른 자기기와를 얹은 2층대문인데 왼쪽에는 공동피안(共同彼岸) 오른쪽에는 회부룡안(会赴龙崋) 가운데 웃쪽에는 불광보조(佛光普照) 라는 글들이 네 개의 기둥사이의 하얀판에 푸른 글로 새겨져있고, 기둥의 중간에는 룡, 위쪽에는 사자비슷한 짐승이 새겨져있다. 세개의 출입문우에다는 숱한 꽃이며 보살들이 자질구레하게 가득 새겨져있는데 찬찬히 여겨보면 어찌도 섬세한지 살아있는것같아 찬탄이 절로 나간다. 룡마루에는 한쌍의 룡이 입을 벌리고 마주서있다. 처마밑에 총총하게 드러난 두겹의 서까래끝에도 살아있는 보살들이다. 2층의 가운데다는 련꽃모양의 도안속에다 숱한것들을 새겨놓았는데 선이 선명하고 도안이 깔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과 짐승과 룡과 구름이  꽃들이 만개한 동산에서 서로 어울려 자유로이 놀고있는 원융의 세계라  하겠다.   룡천사에서 나온 우리가 차를 타고 오리쯤 내려오니 두골짜기 합수목이였다. 사위를 둘러보았다. 왼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사찰이 줄느런히 줄지어 있고 오른쪽 산둔덕을 오르며 사찰마을이 환히 바라보였다. 오른쪽동켠산허리에도 사찰 여려개가 울쭉불쭉 솟아있었다. 47개의 사찰에 그이름이 다 있으련만 어느것이 어느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오대산의 웅장하고 장려한 사찰들의 면모를 둘러볼수있어 정말 장관이였다. 우리는 왼손편에 있는 층층계를 걸어올라가 한사찰을 들어가 보았다. 특별한 특색이 없었다. 그앞에는 북경의 북해공원에 있는 백탑처럼 웅장한 백탑이 하늘을 찌르고 솟아있는 금정백탑사(金顶白塔寺)가 서있다. 오대산 사찰의 대표로 되어있는 금정백탑사는 한창 수건중에 있는지라 파란 베일에 싸여있었다. 그런대로 손님이 나들어 그리로 들어가보았다. 층층계를 밟고 잠간 올라가니 복도가 나지였다. 복도에는 구리로 만든것인지 둬뽐 키를 가진 구부레가 총총히 서있었다. 그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구부레를 돌리며 지나갔다. 구부레를 돌리면 하느님이 돌봐준다나. 나도 하나를 돌려보았다. 사람들의 손에 다슬어 반들반들해진 구부레는 다치기 바쁘게 뱅그르르 돌아갔다. 대웅전(大雄殿)에 들어서니 희한하게 큰 보살초상화가 모셔져있는데 석가모니가 아니였다. 문수(文殊)보살이란다. 문수보살은 오대산에 불심을 심은 보살로서 이 고장은 그의 도장이여서 석가모니를 모시지 않고 모두 문수보살을 모시고있단다. 기재에 의하면 2000여년전 한나라의 명제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문수보살을 오대산에 보내여 불교성지의 터전을 마련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라진 동쪽의 산꼭대기에 있는 대리정에다는 동대천명문수, 서대사자문수, 남대지혜문수, 북대무구문수, 중대유동문수 등 다섯 개 문수상을 모시고 오대산의 다섯대를 대표하게 하였으니 오대산은 실제상 문수보살의 세상이다.   여기에는 북위효문제(北魏孝文帝) 시기(471-499)에 세운 500라한을 모신 불국사가 있는가 하면 당나라 건중3년(782)에 수건한 당조불상 18존을 모신 남선사도 있다. 이밖에도 오대산에 있는 사찰들의 이름을 들어본다면 현통사, 탑원사, 보살정, 수상사, 라후사, 금각사, 벽산사, 진해사, 대라정, 관음동, 연경사 , 존승사, 광인사, 죽림사, 보화사, 비밀사, 남산사, 광산사 ...    오대산의 사찰을 다 돌아보자면 적어도 열흘은 보아야 할것이라 말타고 꽃구경하듯 몇개를 돌아보았다. 새빨간 수박을 깨여놓고 몇쪼각을 먹어본 셈이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부랴부랴 태원으로 가는 소형버스에 올랐다. 주요 목적이 비단의 길이다보니 이만큼 수박맛을 보아도 족하였던것이다.   12. 조형의  점경    태원시에 도착하자마자 역전에 가서 하남성정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래일저녁 7시발행 침대표였다. 연길에서 침대표를 끊자면 사흘전부터 납다쳐야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끊을수있으니 재수가 좋았다. 래일 하루 태원시를 구경할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에 조형의 아들한테서 문자메시지가 또 왔다. 조형은 동양일보사 사장으로부터 지금은 회장이다. 33여년간 신문사업을 한 그이는 날마다 한국에서 오는 숱한 소식을 받는다. 소식을 받으면 전화로 지시도 내리고 이야기도 나눈다. 신강에 들어가서 통신이 안 되는 곳이 있을 때 단 가마의 개미처럼 맴돌이치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아버지 회사일이 잘 풀리네요。 몸 건강하세요 하는 아들의 메시지를 받은 조형의 얼굴에는 기쁨이 찰랑거린다. 그의 아들 조석준이는 애명이 조원형이다. 조형이 아들을 키운 방법은 특색이 있다. 그는 아들을 명문대학에 보내여 인재로 되게 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신체가 건강하고 지식이 연박한 쪽으로 택하였다. 체육권학교를 3등생으로 입학. 체육학교권을 다녀서 신체가 건장하단다. 석준이는 아버지 특별한 배양속에서 자라난 동양일보 기자인데 키는 178센치메터.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에 몰입한것이 아니라 아버지 가르침대로 날마다 영화 두편씩 보기를 하였단다. 3년동안 날마다 영화 두편씩 보았으니 그의 머릿속에 쌓인 여러가지 지식이 얼마랴. 조형은 이렇게 자기의 계승자를 영화로 탐탁하게 키워냈단다.    조철호의 집안은 충북의 량반가문이였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조벽암과 조명희가 그의 조부들인데 그들은 조선반도의 문학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문학가들이다. 특히 조명희 소설 <<락동강>>은 수십년동안 우리 고중교과서에 실리여 조명희라하면 연변사람들이 거이다 알고있는 유명인이다. 이 몇해사이에 연변에서 조명희포석회까지 활동하고 있어서 인기가 더 화려해지였다.    아들놈은 참 든든하다고 말하는 조형의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믿음과 아들로 하여 생기는 자호감으로 이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다는 기색이 완연하다. 청년시절에 고기소를 키워서 엄청난 돈을 번것으로 오늘의 동양일보를 경영하기까지 그의 일생은 분투의 일생이였으며 성공의 일생이였다. 세계각지를 다녀보지 않는 곳이 거이 없는 그는 33년만에 처음으로 맞는 휴가를 가장 뜻있게 쓰기위하여 택한것이 중국동서횡단 25000리(한국계산) 려행이였다. 어찌하여 이 길을 택하였는가를 그는 자기의기행문 프롤로그에다 이렇게 밝히고있다    <<려행을 해본 사람은 알고있다. 려행을 하기로 결정한후 어디를 갈것인가로 고민하는 행복감이란 첫사랑과 흡사하다는것을.    마음이 들뜨고 아름다운 환상에 빠져들게 하는 여행의 마력은 환갑나이를 소년기로 되돌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동안 몇차례 다녀온 아프리카에 가서 수개월 누벼볼가, 쇄빙선을 타고 알래스카 깊숙히 들어가 볼가, 러시아에서부터 세계를 밝힌 대문호들의 고향을 찾아 문학지도를 그려볼가, 아니면 차라리 한국이 강이면 강, 산이면 산을 몽땅 섭렵해볼가...그런 어떤날, 베르나르 올리비에 (1938-.프랑스기자출신 작가)의 <나는 걷는다>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동양인인 나는 조금 창피했다. 그는 1999년부터 4년간을 걸어서만 이스탄불에서 서안까지의 실크로드를 려행하였는데 그가 이 려행기를 출판한 나이가 62세였다.>> 신문에다 사진기행도 련재하고 문자기행도 련재하고 책으로도 만들어 베스트셀레를 꿈꾸는 조철호 사장님.   13.태원의 상징 쌍탑사   이튿날 아침, 그러니까 11월 16일 아침이다. 우리는 태원의 상징이라고 일컫는 쌍탑사로 갔다. 쌍탑사(双塔寺)는 영조사(永祚寺) 속칭이다. 영조사내에 있는 쌍탑이 유명하여 영조사는 쌍탑사로 불리고 있다. 태원시에는 180만 사람들이 살고있는데 그누구와 물어보아도 쌍탑사라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곧장 쌍탑사로 갔다. 두 개의 탑이 나란히 하늘을 용용히 찌르고 서있다. 진짜 한쌍의 쌍둥이였다. 8각기둥으로 세운 두탑은 모두 13층이였다. 층마다에 문이 여덟 개씩 난것도 같았고 키도 53메터라는데  둘이다 똑 같았다.벽돌을 쌓아올린 탑이였는데 쌍둥이가 틀림없었다. 태원역동남쪽에 있는 이 쌍탑은 1573년부터 1619년사이에 세운 탑이다. 쌍탑의 내부가 어떠냐고 우리는 한 탑으로 들어갔다. 탑속에는 가파르게 생긴 목조 층층계가 있었다. 한사람이 겨우 올라갈만한 너비로 된 좁다란 층층계. 한층을 올라가면 널따란 공간이 나지는데 공간을 지나면 또 층계가 나지여서 빙빙 돌아올라가게끔 층계가 이루어졌다. 6층까지 올라가 밖을 내다보려고 창문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앉은 걸음을 걸었다. 천정은 둥그런 천정이다. 창문앞에 가 쪼크리고 서니 태원시내의 고층건물들이  눈앞에 환하다.    쌍탑에서 나온 우리는 대웅전, 관음각, 객당, 선당을 에돌아 비림을 구경하였다. 이 절이 유명해진것은 쌍탑의 위용에도 있겠지만 명대의 문필가들의 글씨가 새겨진 비림이 있기때문이란다. 비림이라니 나는 시비처럼 만들어진것인가 하였는데 여기 비림이라는것은 벽에다 새까만 석재를 붙이고 그우에다 유명한 명시들을 새긴것이였다. 어떤 비는 색이 날고 글씨가 떨어져서 무슨 글자인지 알리지 않는것도 있어서 안타까왔다. 우리가 보는 제일 마지막에 새겨진 시는 소동파(북송시인소식)의 념뇨교.적벽회고(念奴娇. 赤壁怀故)였다.   동으로 동으로 흘러흐르는 도도한 장강이여 하늘치는 창파로 얼마나 많은 천고의 풍류들을 쓸어갔던고 .............. 인생은 꿈과 같거니 술잔을 들어 강에 달을 마시노라      소동파의 그 호방한 시구를 새김질하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닿은 곳은 뜨락에 있는 목단꽃밭이였다. 잎이 다 떨어진 목단꽃나무밭에서 늙은이 몇이 꽃밭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메터남짓한 키를 가진 꽃중의 왕이라 불리우는 목단꽃 나무들은 암갈색이였다. 명나라때의 목단꽃나무가 어느것이냐고 조형이 물었다. 그런것에는 감감한 나는 조형은 아는것도 많구나 하고 흠칫 놀랐다. 저 패말을 꽂은곳이라고 알려주는 로인은 목단꽃씨를 파니까 사가란다. 명나라때에 심었다는 목단꽃은 다른 목단보다 키가 더 큰것은 아니지만 더 실하였다. 돌아나오다가 나는 다시 목단꽃밭으로 갔다. 7.8년전에 꽃기르기를 좋아하는 집사람이 180원이나 주고 숱한 목단꽃묘목을 사왔다가 한가지도 살리지 못하고 돈만 처넣은 생각이 났던것이다. 씨앗을 얻어다가 심어보자는 생각이였다. 로인들에게 나의 의사를 말하였다. 조금만 기다리라더니 땅에 떨어진것을 주어서 나에게 주었다. 콩알보다 조금 더 큰  새까만 목단씨앗 여덟알이였다. 난는 진주라도 가진것만 같았다. 올봄에 그것들을 화분통에다 심어놓았는데 아직 잎주두리도 보이지 않는다.   태원에는 산서성의 고대문화유물을 년대별로 종류별로 진렬해 놓은 산서성박물관이 있어서 볼만한것들이 많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은 시내의 광장이였다. 조형은 한 도시의 광장과 조각은 그 도시의 문명정도를 나타내는 주요한 척도라고 한다. 광장은 소통의 공간이요 동상은 기릴 가치가 있는 위인과 그를 기릴줄아는 사회적환경이 보이기때문이란다. 넓다란 과장의 넓은 길쪽에 조각상이 있는데  우선 크기부터 웅장하다. 웬만한 조각상들에 비하여 엄청나게 더 큰 이 조각상은 한쌍남녀의 상이였는데 남자는 피리를 불고 여자는 풍만한 몸집을 남자에게 기대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있는 모습이다.   조형은 이 조각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한다. 조각솜씨가 훌륭하다. 라상남녀의 조화와 그 포즈가 평화롭고 예술적으로 완벽한 작품이다. 주변에 꽃사슴상도 곁들여 시민공원의 분위기도 살렸다. 공원내 화단의 손질도 허술한 구석이 없다고 과찬한다. 지구촌을 그어디나 가보지 않은 곳이 없는 조형이 이렇게 과찬할 때는 태원의 꾸림새가 확실하게 괜찮으리라.   피리를 부는 남자, 그에게 기대인 미인을 보노라니 피리의 미묘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내 귀전을 맴도는것만 같다. 피리소리는 공후소리로 변한다. 피리나 공후가 다같은 고대의 악기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무척 사랑하는 당나라 시인 리하의 <<리빙의 공후소리를 듣고>>라는 시가 나의 머리에 떠올라선지.   짙어가는 마가을날 은은한 공후소리 흘러가던 구름마저 산마루에 멎어서고  상아가 흐느끼고 소녀도 슬퍼하니 장안에서 리빙이 공후 타는 소리로다. 곤산옥돌 부서지나, 봉황새가 우짖느냐? 부용꽃이 흐느끼냐 란초꽃이 웃느냐? 열두성문 장안성에 찬 얼음 녹아지고 스물석줄 가락소리 하늘도 탄복하네 녀와가 돌을 불려 기웠다는 하늘이 놀래여 터지면서 가을비 쏟아지냐? 꿈속에서 성부인의 공후솜씨 듣는거냐? 물고기와 교룡조차 물결차며 춤추누나 달나라 옥토끼 밤이슬에 젖건만은 계수나무 기대여서 오강도 잠못드네.    공후소리같은 피리소리, 피리소리같은 리하의 시가 내 마음을 따스하게 휘젓는다.   14.백만 무술도가 자라는 소림사    다방도 없는 태원시, 한국영화를 좋아하고, 한국가수를 좋아하며, 한국에 가보고싶다고는 하나 한국사람을 처음으로 본다는 한국제려행사 아가씨 송씨양이 있는 태원시를 저녁차로 뒤에두고 하남성소재지 정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침 6시10분, 정주역앞에 있는 버스역은 굉장하였다. 렬차역정면은 물론 왼쪽면에까지 매표구가 수십개나 설치되여 표사기가 너무 편리한 버스부였다. 7시20분 소림사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려행계절이 아니여서 그런지 소림사로 가는 손님은 무려 셋이였다. 차는 우리를 싣고 가다가 딴차에 앉쳐보내고 돌아갔다. 글쎄 손님셋을 싣고 간다는것은 너무도 수입지출이 맞지 않는 일이였을것이다. 정주시내를 벗어나자 산서성과는 완전히 판이한 경상이 나타났다. 산서성의 밭은 발가숭이였지만 하남성의 밭은 새파란 밀밭세계였다. 산서성의 밭에서는 옥수수대무지를 태우는 들불이 일어났지만 하남성의 구릉에서는 손바닥만한 제전에도 밀이 파랗게 자라고 이따금 잎이 푸른 오동나무숲까지 나져서  우리는 여름의 세계로 달리는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소림사(少林寺)는 등봉현(登封县) 소재지 서북쪽과 15키로메트 상거한 소실산북쪽의  오유봉아래에 있다. 소실산은 등봉현 경내에 있는 숭산(崇山)중의 한 산이다. 숭산에는 소실산과 태실산 쌍둥이 산이 있다. 소실산의 주봉 옥채봉은 해발 1405메트이고 태실산의 주봉 준극봉은 해발1440메트로서 두주봉의 키가 별반 차이가 없고, 두산에  각각 36개의 봉우리가 있어 사람들은 숭산 72봉이라 부른다. 숭산은 중국 오악중의 중산으로서 북으로 황하와 락하를 끼고 남으로는 영수와 기이한 산이 있고 동서길이가 600여리나 된다. 소림사 경내엔 동서 석비방인 비록, 산문, 미륵불, 위타보살, 비랑천왕전, 종루와 고루, 탐림 등 25개의 경관이 있다고 한다.    등봉시내를 벗어나 먼저 들린곳이 영태사(永泰寺)이다. 태실산의 서쪽기슭에 탑을 두개나 안고 자리를 잡고있었다. 문어구에는 기념품을 파는녀인들이 여럿이 서있었다. 소림에는 니구절이 3개가 있다는데 영태사가 그중의 하나이다. 이 절의 원이름은 명련사(明练寺)였다. 당신룡2년(기원706년)에  효명제의 녀동생 영태공주가 입사한것을 기념하여 지은 절이다. 산문앞에는 당나라때의 팔각형경당 두채가 있었다. 절에는 비로전, 대웅전, 황고루 등 건물과 높이 20메트되는 당나라때의 탑과 명나라때의 탑이 있었다. 니구절인데 니구는 한명도 보이지 않고 탑도 보지 못하게 봉하고있어 별 흥취가 나지 않았다. 니구절이여서 여기에다 손님을 안내하는것  같았다. 듣자니 절에 니구는 셋밖에 없다고 한다. 밖에 나와서 기념으로 빨간줄에 달려있는 니구비닐제품 두개를 샀는데 그것이 이번 려행길에서 산 유일한 기념품이였다.     소림사 경내에 들어서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달랐다. 보이는것은 무술학교간판들이다. 층집마다에 무술학교간판들이 보란듯이 으시대고있었다. 무려 84개나 되는 무술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라니 그럴만도 하였다. 여기에서 탑구무술학교(塔沟武術学校)가 제일 크다는데 학생이 13000여명이다. 84개나 되는 무술학교의 학생수는 거이다 비슷하다니 무술학습생이 백여만이 집중된 곳이다. 백만무술대군,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학교에서는 정상적으로 글도 가르치면서 무술을 익힌다고 한다. 중국에 소림사가 7개가 있다고 하는데 모두가 등봉시의 소림사처럼 학교를 경영한다면 이에 종사하는 모든 일군까지 합치면 천여만으로 헤아려야 할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가는 왼쪽 운동장두리에는 여러 가지 의포단장을 한 학생들이 가득 모여 북을 잡아두드리며 응원을 하고있었다. 운동장복판에서는 무술경연이 한창이였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서 중앙tv에서 와서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무술표현을 본다음 소림사무술관으로 들어갔다. 관광객들을 위하여 소림사의 후대들이 무술표현을 하는곳이였다. 1988년에 지은 이 무술관에서의 표현은 이미 6개나라의 사절들이 관람하였고 중앙수장들이 관람하였다는 자랑을 기록한 곳이다. 손님자리가 300석이 되는 원추형무술관은 천정에다 불교의 상징인 련꽃식장식을 하였고 선녀넷이 구름을 타고 놀고있었다.     막이 열리니 불자들이 등장하는데 우뢰치는 채찍소리로 표연의 문을 여는것이였다. 모두 세막으로 된 표연이다. 칼도 쓰고, 몽치도 쓰고, 방패도 쓰고, 채찍도 쓰는데 차는가 하면 박고, 박는가 하면 돌고, 도는가 하면 날고, 나는가 하면 앉아 뛰기도 한다. 팔다리가 귀신처럼 돌아가고, 검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몽둥이에서는 서리발이 번뜩인다. 북을 잔잔히 치면,  고요하던 물이다가 몸을 쓰면,  갑자기 사품치는 강이되고,  험한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가 된다. 여럿이 등장하여도 동작이 일치하기가 이를데 없고, 기세가 사무칠 때는 하늘이 놀랄지경이요 동작이 부드러울 때는 선녀가 왔다가 울고 갈지경이다. 눈깜박할사이에 한시간이 홀딱 지나갔다.    무술관에서 나와 문어구로부터 아름드리 측백나무들이 나란히 대렬을 지은 절로 들어갔다. 나무들이 쌍쌍이 뿌리를 엉키고 나란히 자라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두나무중의 한그루는 암컷이고 한그루는 수컷이란다. 그렇게 서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손님들은 모두가 하하하 웃는다. 그 절이 바로 천하에 소문난 소림사였다.     소림사는 북위 (北魏) 태화 (太和)19년(495)에 소실산 북쪽수림속에 세운 절의 이름이다. 1400여년전에 세운 이 절의 면적은 3만평방메트인데 527년에 인도의 중 보제달마가 와서 선종을 창립하여 선종의 조종이 된곳이다. 보제달마를 력사에서는 초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후 7세기초에 이 절의 무승들이 당태종을 도와 당나라를 건립하는데 공로를 세워서 나라로부터 큰 상을 받았고, 천하제일명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로부터 무승들의 무술이 천하의 승인을 받고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다. 소림사에는 아름드리 측백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하여 태고연한 정글을 형성하였다. 절에는 산문 , 객당, 달마정, 백의전, 지장전과 천불전 등 고색이 창연한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천불전에는 화면이 300평방메트되는 대형벽화가 동쪽, 북쪽, 서쪽 세곳에 그려져있는데 인물표정이 생동하고 자세가 각이하였다. 땅바닥에는 깊이가 20센치메트되는 발자국이 넉줄로 나있다. 이는 소림사 무승들이 무예를 익힐 때 발을 굴러서 생긴 자국이란다. 백의전에는 13명 중이 당태종을 구원한 형상을 반영한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있고, 청나라시기 소림사 권술수풀이가 련환화로 펼쳐져있었다. 달마정은 2조 혜하가 문밖에서 달마를 기다리며 눈이 무릎을 넘을 때까지 차렸자세로 서있는 곳이라고 하여 림설정이라고도 한다. 절서쪽에는 탑림이 있고 서북쪽에는 초조암, 달마면벽동, 서남쪽에는 2조암, 부근에는 당나라 백여탑, 동광탑, 5대시기의 벽화탑, 원나라의 연공탑들이 줄느런히 서있어 이채를 돋군다. 절에는 당태종 리세민이 소림사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새긴 비석이며 소동파, 미비, 채경, 조맹부, 동기창, 일본중 소원의  석각 등 귀중품들이 300여개가  소림사의 력사를 자랑하며 서있다. 이곳에 있는 고양서원은 북송 4대서원중의 하나이며 주공 측영대(测影臺)와 원대의 시성대(视星臺)는 우리나라 천문사상의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한 곳이다. 유교의 집산지이도 한 소림사는 사원자체가 현존하는 한문화의 가장 오랜 걸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탑림으로 가는 기차같은 택시들이 렬을 지어 오고갔으나 우리는 택시를 타지 않고 구경을 하면서 탑림으로걸어갔다.    한참 가서야 탑림이 문을 열고 우리를 마중하였다. 탑림은 말그대로 탑들이 수풀처럼 일어선 곳이였다. 길길이 자란 측백나무와 탑들이 어울린 탑림은 소림사영화 화면에 나오던 그대로 우아하고 신비로운 자세로 손님들의 눈길을 끌고있다. 우리나라의 최대의 묘탑군으로서 당초에는 500여개로 헤아리였는데 현존하는 탑중에서 완전한것이 200개가 불쑥울쑥 솟아있었다. 첫눈에 띄는 문앞에 서있는 탑은 9층으로 된것이지만 제일 안에 있는 탑은 단층으로 된 낮다분한것이였다. 둥근탑도 있고 사각형 탑고 있고 6각형탑도 있어 모양도 여러 가지였다. 이 탑림에서 제일오랜 것은 당나라때 건축한것인데 제일 안쪽에 있는 사각형 난쟁이 탑이였다. 제일 늦게 세운 탑은 소희(素喜)탑인데 대문안의 오른쪽 첫머리에 세워진 둥근탑이다. 2002년 8월에 수건한 이 탑의 주인공은 살아있는 보살 소희이다. 소희는 금년에 80세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공적을 기리여 세운것이다.    탑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탑을 세우는데는 세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사리탑이고, 둘째는 고승들의 진품을 저장하는 탑이고, 셋째는 고승들의 덕을 기리는 묘지탑이다. 급방 세운 소희의 탑은 묘지가 아닌 살아있는 덕탑이다. 나는 소희의 덕탑을 저도 모르게 다시 우러러보면서 탑림을 나왔다.
24    현대시를 쓰는 방법.5 댓글:  조회:948  추천:44  2008-10-13
  제5장 이미지의 특성   세상에 천차만별의 사물들이 존재하고있는것은 사물마다 각각 자기의 특성이 있기때문이다. 이미지도 존재하므로 자기의 특성이 있기마련이다. 이미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돌이나 나무와 같은 실물인것이 아니라 상상속에 존재하는 비실재적인 사물을 언어로 그려놓은 그림인것이다. 이 언어의 회화는 현실에 대한 파괴속에서 생겨나는 상상의 산물로서 그의 특성을 한마디로 규납하면 불협화 혹은 낯설기라고 할수있다. <<시는 친숙한 것을 고의적으로 낯설게 만들며 가까이 있는것을 먼곳으로 가져간다.>>(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그리하여 이미지는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나고, 현실을 떠나는 작업을 하고 문체도 때로는 파편문체라는 새로운 문체를 요구하기도 하기때문에 기성의 사상관념, 문체, 및 론리로서는 이미지시를 해석하기 어렵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제1절 이미지가 사물을 떠난다.   시인은 어떤 사물이나 관념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시를 쓰기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물을 보인 그대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보지 말고, 이렇게도 볼수있지 않을가하는 시각으로, 보이는 대로에서 있을수있는 사실로, 그리고 새로운 사실로 볼줄 아는 특수한 시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밝히고있다. 요약해보면 원물을 그대로 쓰는가 아니면 변형시켜 새로운 사실로 쓰는가이다. 새로운 사실로 쓰는것이 이미지이며 현대시이다. 새로운 사실로 쓰면 당연히 원물을 떠나게 되는데 소위 사물을 떠난다는 함의가 여기에 있겠다.   우리가 바위우의 소나무를 시로 쓴다고 하자. 그 소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쓰는것이 아니라 그 소나무로부터 상상하여 낸 새로운 사실을 써야 한다는것이겠다. 새로운 사실을 상상해 낸다는것은 변형을 시킨다는것이고 변형시켜 얻은 사실이 바로 새로운 사실이라겠다. 이 새로운 사실은 소나무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떠난다는 론리가 서는것이다. 시를 쓸 때 사물-관찰-변형의 길을 걷게 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은 변형으로 얻은 새로운 사물을 쓴다는 말이다.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사물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낯선것이다. 이 낯선것이야말로 시인이 창출해낸 이미지이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시는 그것들(사물이나 인간)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키는 작업이라고 한바있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한번 보기로 하자 작은 섬주위에 텅 빈 배가 서로 머리를 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일요일이든 평일이든 화가도 모파상도 산보하러 오지 않는다 앞가슴이 불룩한 바보같은 여자와 함께 두팔을 걷어부치고 배를 타러오지 않는다 작은 배여 이 섬가에서 너는 나를 슬프게 한다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가 쓴 <<개구리>> 전문이다. 보는바와 같이 제목은 <<개구리>>지만 시에서는 개구리라는 언어도 없고 그런 뜻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있다. <<개구리>>는 밀려나고 대신 <<텅 빈 배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있다>> <<화가>>도, <<모파상>>도, <<바보같은 녀자>>도, <<두 팔을 걷어부친>>남자도 오지 않고 작은 <<배>>가 <<작은 섬>>에 쓸쓸히 있으며 <<나를 슬프게 한다>>.   망망한 바다, 작은 섬, 섬가에 놓인 쪽배 두개 이렇게 상상해보면 섬과 쪽배가 한마리의 개구리, 두다리를 벌리고있는 개구리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개구리>>라는 제목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구리>>와 시적내용은 다른것으로 되여 시가 사물을 떠나고있음은 분명해졌다고 하겠다. 우리는 또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환경에 홀로 서있는 <<나>>, 고독한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독을 이미지화것이라 해도 너무 틀린다고는 할수 없으리라. 현대시가 사물을 떠난다는 의미는 시인은 시적대상을 정면으로 노래하는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다른 사물이나 사실로써 노래한다는것을 알수있겠다.   일본의 무라노시로오의 시 <<체조>>를 다시 보자 나에겐 사랑이 없다 나에겐 권력이 없다. 흰 셔츠속의것이다 나는 해체하고 구성한다 지평선에 와서 나하고 교제한다 나는 주위를 무시한다 하지만 외계는 정렬한다 내 목통은 피리 내 명령은 소리다 나는 보드라운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다 이때 내 형상에 꽂혀지는 한송이 장미    시적대상은 <<체조>>이지만 시의 내용은 무엇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체조란 몸과 팔다리를 흔들어대는것인데 시에는 구런 의미의 언어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동장하였다면 <<흰 셔츠속의것이다>>와 <<보도라운 신바닥을 젖혀>>이다. <<흰 셔츠속의것>>은 몸을 가리킬것이고 <<신바닥>>은 발을 가리킬것이지만 애매하다. 더구나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다>>하니 발로 호흡한다는 표현이 되고있다. 복합이미지로 구성된 <<체조>>는 <<체조>>와는 일만팔천리나 떨어진 형상을 구축하고있다.   무슨 의미인가? <<체조>>가 결국은 <<내 형상에 꽂혀지는 한송이 장미>>이다. <<체조>>와 <<한송이 장미>>를  어떠한 해석을 붙이면 명료해질가? 그것은 독자나름의 해석을 따르는수밖에 없을것이다.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있는것이 이미지시의 기능의 하나라고 할수있다. <<체조>>는 바로 이런 기능을 향유하고있다하겠다. 한편의 시가 무슨 뜻인가를 똑똑히 나타내던 시대는 랑만주의시의 결속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해체하고>> <<구성하고>> <<지평선>>과 <<교제하고>>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후에 <<한송이 장미>>로 태어난 이 성과물은 내함이 다채롭고 풍만한것이여서 한마디로 규정짓는다는것은 무리이며 불가능한것이라겠다.   이번에 한춘섭의 시조 한수를 보자 초이틀 서산마루 고운 이 은장도 봉긋한 젖가슴이 사려비칠 별빛같다 돌담에 들고난 물동이 희디흰 박꽃미소 떠난 사람 예전 일을 숯불 피고 보라한다 들길로 걸어가면 묏새알 잠들고야 촉촉한 천지 떠난채 잠이 들가 재촉하네    <<한 평생 단 한번만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들어보리라는 야심을 품고 데뷔 35년만에 펴낸 시조시집 <<적>>에 실린 첫수 <<초승달>>이다.   시조의 전편에 <<초승달>>>에 대한 직접적진술이 한마디도 없다. 있다면 <<초이틀 서산마루>>이다. 오라지 않아 천지간에서 사라질 <<초승달>>은 상징적의미로 쓰인것이다. <<초승달>>은 변형되여 <<은장도>>로 나타난다. 초장에서 나타났던 <<은장도>>는 중장에서 <<별빛같은>> <<봉긋한 젖가슴>>에 밀려난다. 종장에서 이 <<젖가슴>>은 <<물동이>>와 <<박꽃미소>>에 의하여 또 밀려난다. <<초승달>>은 연시조인데 두번째 시조의 초장은 <<떠난 사람 예전 일을 숯불 피고 보라한다>>고 쓰고있다. <<숯불>>에 의하여 <<물동이>>도 <<박꽃미소>>도 다 밀려난다. 중장에서 또 새로운 사물들에 잠든 <<묏새알>>이 나타난다. <<숯불>>빛에 의해 현현된것은 잠든 <<묏새알>>이다. 시인은 최후의 종장에서 <<잠이 들가 재촉하네>>로 끝을 맺는다. 왜 잠들지 말라는건가. 들의 <<묏새알>>이 묏새로 깨여나 자연속으로 날아가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았기때문이라고 할수있다. 이 일의 몫은 <<초승달>>한테 있는 같다. <<촉촉한 천지>>이니 이슬이 내리는 새벽으로 시간이 흐르고있다. <<초승달>>이 <<묏새알>>을 새로 만들수있겠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초승달>>은 60고개에 오른 시인일지도 모른다. 전반 연시조가 파편문체로 되여있어 시인 자신이 아니고서는 철저한 리해 가능성이 배제되고있다. 우리는 상태와 기분만을 수용하여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 인간이 걸어온 길은 빛나는 자국이였건만 아직도 할 일이 많아 자신을 채찍질하고있는 모습을 보는것쯤으로 받아들이면 어떠할가하는 사려를 굴려본다. 내 귀가에 얼음처럼 매달린 아버지 말소리를 뚝 따서 손바닥에 놓으면 숯처럼 검은 침묵이 된다 그것을 뜨겁도록 꽉 움켜쥐면 손가락새로 막 흘러나오는 피처럼 붉은 불길이 된다       최룡국씨의 시 <<아버지 말소리 >> 전문이다. 아버지 말소리는 아름답거나, 퉁명스럽거나, 귀청을 다치는 어떤 소리인것이 아니라 소리라는 사실을 떠나서 고드름이 되고 숯이 되고 붉은 불길이된다.시인이 쓰려는 사물을 떠나서 다른 사물로 표현된 이미지라겠다.   이미지시인은 일상적인 개념이나 관념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말한다. 이는 현대시의 근본이다. 시인은 시적대상을 잡은후 그 사물의 형상이나 의미를 떠나서 새로운 건축작업을 한다. 시인의 지적인 통제하에서 완성되는 이 건물은 시인이 홀로 기초를 파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만들고 타일을 붙이게 된다. 이 건물은 력사에도 없었고 현실에도 없었던 시인만의 궁전이다. 타인이 이 궁전속으로 들어가자면 출입구문을 찾아야 하고 문열쇠를 지녀야 한다. 그 열쇠를 누가 만들어주는것이 아니다. 독자 본인이 벼려서만들 일이다. 제2절 이미지가 관념을 떠난다   이미지가 시적대상인 사물을 떠난다는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관념을 떠나야 한다는 명제를 살펴보자. 사물을 떠난다는것도 어찌보면 관념을 떠난다는 하나의 류형으로 볼수있겠다. 관념이란 무엇인가? 한 사물에 대한 판단이며 견해이다. 관념은 감각적인것이 아니라 리성적인 것이다.   <<현대시는 종래 의미의 인간성, 체험, 감상 그리고 심지어 시인의 개인적 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고 후고 . 프리드리히는 밝히였다. <<종래의 의미, 인간성, 체험, 감상>> 및 <<개인적자아>>까지 버리면 무엇이 남는가? 남는것이 없다. 이 남는것이 없는 빈터에서 사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가 산생되고 새로운 인간성, 체험, 감상이 산생되고, 새로운 자아가 산생된다. 이런 새로운것들은 시인의 상상을 통한 재구성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시를 보면 관념을 떠난다는 명제가 명확해지리라.         밀턴은 우리를 위해 지옥의 문을 열어         우리로 하여금 보게 했다         단테도 동일한 일을 하였다         이 두 지옥은 각각 특징이 있었으며         하나는 밀턴의 지옥이며 또 하나는 단테의 지옥이였다         밀턴은 지상에 있는 지옥에 모든 것을 넣어두었으며         단테도 자기를 위해 지상에 있는 지옥에 모든것을 넣어두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 당신의 자물쇠를 연다면         나도 당신을 위해 나의 지옥의 자물쇠를 열어놓겠소         그러면 그 두지옥은 특징이 있지요         우리들 각자는 지상에 있는 지옥을 우리를 위해 보이겠지요         당신의 지옥과 나의 지옥은 각각 다른것이지요    미국의 샌드버그 <<우리의 지옥>>의 전문이다. 우선 여기에 관계되는 세 인물이 어떤 사람들인가 보기로 하자. <<세계의 명시집>>을 펴낸 김희보는 이 세 인물을 이렇게 소개한다. 샌드버그는 <<산업국 미국현실에도 비로소 완전한 표현을 부여하였다고 일컬어지는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서 <<세계명시집시리즈 69권>>에 <<우리의 지옥>>이 실렸다고 소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계가 알아주는 샌드버그라겠다. 단테나 밀턴은 우리도 조금은 안다. 14세기 이태리시인 단테, <<신곡>>을 써서 세계 4대시성의 한 사람으로 된 단테. 17세기 영국시인 밀턴, <<실락원>>이라는 세계명작을 쓴 밀턴, 위대한 시인.   샌드버그는 <<지옥>>이라는 무서운 언어로 단테와 밀턴을 론하고 당신과 나도 이런 <<지옥>>이 있다면서 <<열쇠>>이야기를 한다.   지옥이란 불교의 언어로서 중생들이 살아서 죄를 지면 죽은다음 땅속에 들어가 형벌을 받는다는 곳이 지옥이다. 단테, 밀턴, 당신, 그리고 내가 지상에다 이런 지옥을 세우고 <<모든 것을 넣어두었다>>는것이다. <<지옥>>이란 원관념이 변했다. 땅속의 지옥이 아니라 땅우의 <<지옥>>이다.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을 넣은 >> 창고이다. 이 <<지옥>>은 보여주는 <<지옥>>이지 중생의 죄를 다스리는 지옥이 아니다. 단테의 <<지옥>>에는 <<신곡>>이 있을것이고, 밀턴의 <<지옥>>에는 <<실락원>>이 있을것이고, 샌드버그의 <<지옥>>에는 그가 쓴 세계의 명시가 있을것이다. 이러한 <<지옥>>도 <<지옥>>인가? 아니다! 인류의 찬란한 문화가 있는 보물고라고 함이 적당할것 같다. 샌드버그의 <<지옥>>은 반어적,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함이 옳을 같다. <<지옥>>이란 관념을 떠났다. <<지옥>>이 관념을 떠났으니 <<열쇠>>도 잇따라 관념을 떠나게 되어있음은 자명하겠다. 샌드버그가 단테와 밀턴에게 <<지옥>>이라는 언어를 쓸수있은것은 <<신곡>>이나 <<실락원>>이 당시에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을수있을것이다.  사실 현대에도 아무나 읽어서 리해할수있는 책이 아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관념을 쓰지 않았을가 궁리해본다.  이 <<지옥>>으로는 중생의 죄인을 가둘수 없고 이 <<열쇠>>로는 어떠한 자물쇠도 열수 없다. <<지옥>>과 <<열쇠>>는 우리의 관념을 떠난 상상물이며 허상이다.   헤세의 시 <<사랑의 노래>>를 보자 나는 사슴 당신은 노루 당신은 새 나는 나무 당신은 태양 나는 눈 당신은 대낮이요 나는 꿈이로다 한밤에 잠든 나의 입에서 황금새 한 마리가 당신에게 날아간다 티 없이 맑은 새소리, 화려한 날개 당신을 위하여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당신을 위하여 나의 노래부른다   독일의 문호 헤세는 소설, 시, 수필, 평론, 우화 등 여러가지 쟝르의 문학을 다루어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현대작가이다.   시의 첫련은 은유의 숲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사슴>>도 되고, <<나무>>도 되고, <<눈>>도 되고, <<꿈>>도 된다. <<당신>>은 <<노루>>도 되고, <<새>>도 되고, <<태양>>도 되고 <<대낮>>도 된다. 서로 <<짝을 맞추는>> 일이 한번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네번씩이나 변하여간다. <<나>>는 <<사슴>>으로 변하였다가 <<나무>>로 변하고, 또 <<눈>>으로 변하였다가 <<꿈>>으로 변한다. <<당신>>도 <<나>>처럼 련줄련줄 변한다. 결국 등장하는 두 인물인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나와 당신이란 원관념을 떠난 <<나>>와 <<당신>>이다. 이런 <<나>>와 <<당신>>은 객관존재로서의 실상인것이 아니라 추상적존재로서의 허상이다. 모두 우리 관념밖의 인물이며 존재인것이다. 량자가 된다는 <<사슴>>, <<노루>>, <<새>>, <<나무>>, <<태양>>, <<눈>>, <<대낮>>, <<꿈>>들도 원관념을 떠난 상상속의 사물이지 실재적인 사물이 아니다. 모두 원관념을 떠났다. 이러한 사물들은 시적언어로 되는 순간에 자기의 의미를 버리고 새로운 상징적언어로 등용되여 시의 재료로 될뿐이다. 즉 새로운 관념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   2련은 더욱 신비스럽다. 1련에서 <<당신>>을 <<새>>라고 하였지만 <<새>>는 <<당신>>에게서 날아 <<나>>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잠든 나의 입에서 황금의 새가 당신에게로 날아간다>>. 날아가서는 <<티 없이 맑은 새소리>>로 <<화려한 날개>>를 푸덕이면서 <<노래를 부른다>>. 론리와 현실을 초월한 이러한 시구들은 실재를 모방하거나 재현한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직조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며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감정적 표현이다. 2련에서 <<황금새>>라는 황홀한 이미지를 떠올려 <<꿈>>에도 그리는 <<당신>>에게 보여주며 열렬한 사랑의 기분을 마련한다. 이 사랑은 누구와 누구의 일대일의 사랑이 아니라 <<사슴>>과 <<노루>>, <<새>>와 <<나무>>, <<태양>>과 <<눈>>과의 사랑이며, <<대낮>>과 <<꿈>>과의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가 확충되여 시에서 표현된 사랑은 일상적인 너와 나의 사랑이라는 것과는 완전히 틀리는 사랑이다.     한때 우리 시단의 청년시인의 대표라고 불리웠던 석화의 시 <<나의 장례식>>이 관념을 어떻게 떠났는가를 살펴보자 나는 나를 위해 구슬픈 장송곡을 목메게 부르며 나는 나의 무덤을 판다 나는 나의 홁묻은 괭이를 던지고 나는 나의 안식처 나의 무덤에 드러눕는다 시커먼 구덩이는 구슬픈 기도 읊조리고 서리찬 기운은 쓰다듬어 안아준다 그러면 내가 쌓아놓은 흙더미 내 몸을 묻어주고 그러면 무덤은 둥그런 무덤이 된다 그러면 파묻힌 내 몸에서 심장만이 살아 아, 그러면 심장만이 살아서 싹 터오른다 심장은 한그루의 나무가 되어 하늘을 찌르며 자란다 그 나무에선 주렁주렁 새심장들이 가득 열린다    석화시인이 쓴 <<나의 장례식>>은 장례식이 아니라 <<나의 행진곡>>이다. 이 시에 씌여진 모든 관념들은 실제적으로 합리한 관념인것이 아니라 반대로 합리성을 떠난 관념들이다. 인간이 자기절로 자기 무덤을 파고 죽어서 무덤을 만들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죽은 다음의 심장에서 그무슨 싹이 틀수도 없는 일이요, 심장이 나무가 될 일은 신화에서나 있을 일이요, 나무에 새심장이 주렁진다는것은 더구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 시는 대단히 훌륭한 가편이다. 모든 일상을 초월한 상상과 관념을 떠난 언어들로 기틀을 잡고 이룩해 놓은 시이기때문이라고 할수있다. 시인은 시속의 <<나>> 자신의 죽음까지 밟으면서 자신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한 끝에 풍성한 열매를 따내는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있다.    언어가 원관념을 떠나지 않으면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될수 없다는것을 현대시는 재삼 말하게 된다. 이런 도리를  잘 장악하고 능란하게 리용하는것은 이미지리스트의 지혜이다. 이런 지혜가 없는 시인은 결코 현대시에 득달한 시인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리라. 제3절 이미지가 인간을 떠난다.   이미지의 특성의 하나인 관념을 떠난다는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을 떠나는 일종 표현이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직접 인간을 떠나는 경향이 이미지특성의 하나로 되겠다. 허구 많은 현대시인들이 인간을 쓰지 않고 직접 사물을 이미지로 만드는것도 인간을 떠나는 표현이겠지만 여기서 살펴보려는것은 직접 인간을 쓰면서도 인간세상에서 인간을 따나게 한다는것이다. 즉 현실적 인간을 시속에서 축출해 버리고 새로운 인간을 내세우는 경향이라겠다. 시인들은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 도피>>이며 <<개성적 표현이 아니며 개성으로부터 도피>>라는 엘리어트의 말을 신주처럼 모시고 시를 쓴다. 이미지가 추구하는것은 심정의 지각인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지각이다.   현대시의 거장 랭보에 대하여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지적한바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떤 한도 가지고있지 않다는데 있다>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랑만주의시는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시였다면 현대시는 <<감정으로부터>><<개성으로부터>><<도피>>를 꾀하는 시라겠다. 이미지는 감정의 개입을 억제하여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한다. 현대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의 하나인 탈인간화를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정의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감정상태를 배제시키고, 인간을 이제 그 가장 낮은 단계로 밀려나게 하며 종래까지는 타당했던 사물과 인간사이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고 인간을 가능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시각에서 인간을 기술한다.>>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상태를 배제시키고>> 인간과 사물과의 타당했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면>> 인간은 당연히 원래의 위치에서 밀려나고 일상적인 인간이하로 쫓겨나서 희미한 인간으로 전락되게 된다. 시인이 만드는 이미지는 일상적인 인간의 사상, 감정, 관념 등 여러 가지 의식과는 담을 쌓고 새로운 사물, 새로운 사실, 새로운 언어를 제작해내여 비실재적인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내 지극히 사랑하는 녀인은 알몸이였고 내 마음을 알기에 오직 요란한 보석만을 지녀 그 호화로운 노리개로 행복한 나날의 모르오의 노예처럼 의기양양하도다 노리개 흔들리며 쟁쟁 소리낼 때 금속과 보석으로 찬란한 그 세계에 나는 넋을 잃고 황홀하여, 음향과 빛이 뒤섞이는 물건들을 나는 미친듯이 사랑하네                    -보들레르 <<보석>>1, 2련 황량한 골짜기로 피리 불며 내려가다 즐겁고 유쾌한 노래 피리로 불며가다 나는 보았네 구름우에 한 어린이 그 아이 웃으며 내게 말했네 어린 양에 관한 노래 피리로 불어주세요 그래서 나는 신나게 피리 불었네 피리아가씨, 그 노래 다시 피리 불어주세요 그래서 내 피리부니 그 아이 듣고 웃었네                  -w. 블레이크 <<서시>> 1, 2련 가을 안개속에 오막살이 몇채 다리 굽은 농부가 송아지새끼를 끌고 안개속을 천천히 걷는다 농부는 걸어가며 노래한다 사랑과 변심의 노래 부서진 반지와 심장의 뜻을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시들게 했다 안개속을 희미한 두 그림자가 걸어간다                    -아폴리네르 <<가을>>전문    우의 세수의 시는 모두 프랑스 시인들의 작품이다. 세수의 시가 모두 인간을 배제하는 각도에서 인간을 노래하고있다. 보들레르의 화자는 <<지극히 사랑하는 알몸>>의 <<녀인>>을 앞에 두고 <<그녀>>를 사랑하는것이 아니다. <<그녀>>의 <<요란한>> <<보석>>만을 <<미친듯이 사랑>>하고있다.   블레이크의 시에 등장하는 아이는 인간세상의 아이인것이 아니라 인간세상에서 추방된 <<구름위의 한 어린이>>이다. 그 아이가 듣고싶어하는 피리의 노래도 아빠나 엄마나 누이나 동생이나 친구에 관한것이 아니라 <<어린양에 관한 노래이다.>>   아폴리네르의 시에는 농부가 등장하는데 <다리 굽은 농부>>이다. 온전하지 못한 농부이다. 농부는 <<송아지새끼를 끌고 안개속을 천천히 걸어간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두곡인데 한곡은 <<사랑과 변심>>이고 다른 한곡은 <<부서진 반지와 심장의 뜻>>이다. 그런데 <<사랑>>을 부른다음 <<변심>>을 부른다. 그러므로 노래는 <<변심>>으로 끝난다. 그것은 <<부서진 반지>>이며 <<심장의 뜻>>이다. <<여름을 시들게 한>> 가을 안개속을 <<희미한 두 그림자가 걸어간다>>. 여기에 숙고의 가치가 있겠다. <<다리굽은 농부>> 자체가 완정하지 못한 인간인데 <<희미한 두 그림자>>로 변해버렸으니 양과 사람의 구분이 사라지였다. 사라진다는것은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고 존재의 상실은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보여준다.   이미지시에서 인간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서정시는 매우 희소하다. 있다면 어떤 상징이나 은유의 대상으로 쓰인것이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닐것이다. 허구에 의하여 각색된 인간이며 상상에 의하여 제조된 인간이며 예술에 용해된 인간이라겠다.   시는 일상적인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그대로 뿜기 위하여 씌여지는것이 아니다. 새로 지각되는 치렬한 극단에서, 쓰지 않고는 안되는 극한에서 변형의 작업을 하여 이미지화하는 일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론리적인 사유는 할수있겠지만 론리의 제한은 받지 않는다. 시인은 사물의 법칙을 존중하지만 사물법칙의 구속에서 시를 쓰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현존하는 모든 계률과 관계없이 자유자재로 달아다니며 이미지를 창조한다. 시는 시인이라는 인간이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인간의 상상력이 그것도 이미지를 창출해 낼수있는 상상력이 시를 쓴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시가 완성된 다음에 보면 시인의 원래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시가 되여나오는 경우를 시인은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상상력이 시인을 차버리고 제멋대로 알을 까놓았다고 하여 시인은 자기의 원래의상상을 초월했다고 비난할 대신 오히려 즐거워하게 된다.   시인을 물이라면 상상력은 수증기이다. 수증기는 물에서 태여나지만 물의 의도대로 날아가는것이 아니다. 물은 수증기를 만드는 모체일뿐 수증기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시인은 자기의 상상력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지만 상상력이 엉뚱하게 제멋대로 달려나가는 때를 늘 만나게 된다.   이미지가 창조될 때 상상력이 시인을 떠나는것은 최고의 아름다움의 산파라겠다 제4절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지가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난다는것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이미지특성과 기능은 모두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것들이 그렇게 표현되는 주요한 원인은 또 언어가 언어를 떠나기때문이라고 해도 틀린다고 할수 없을것이다.   옛날에는 언어이자 사물이였고 사물이자 언어였다. 세월의 흐름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언어도 발전해왔다. 이제는 언어가 사물을 떠날 수있을뿐만 아니라 언어가 언어를 떠날수있게 되였다. 시의 언어는 사물의 부착물인것이 아니라 독립적존재로 되었고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뜻으로 쓰이던데로부터 여러 가지 의미로 씌일수있는 자유가 있게 되었다.   상징과 은유의 시에서의 보편화는 언어가 언어를 떠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문법적규례와 론리적인 체계속에서 활동하던 언어는 현대시라는 이미지에 와서는 이런 규례의 사슬을 짓부셔버리고 자유자재로 조합되면서 새로운 사물을 제멋대로 생성해내고있다.   영국시인 하디는 <<지나침의 길을 걷노라면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는 시구를 쓴적이 있다. 언어가 이러하다. 지나치게 자유로와지면서 자신의 지혜로 새로운 궁전을 세우는것은 이미지시의 공로라 아니할수 없다.   잠시 머물러 하디가 언어조합을 한 것을 간략적으로나마 살펴보자. 시인 하디는 <<진홍빛기쁨>>, <<금빛눈물>>, <<황금의 쾌락>> 등등 언어를 자기 시에 부여하고 있다. <<기쁨>>이란 추상어로서 만질수도 볼수도 없다. 기쁨앞에다 <<진홍빛>>이란 규정어를 씀으로써 시각화를 꾀하여 기쁨을 우리 눈앞에 환히 떠올리고있다. 이런 조합은 정상적이고 일상적인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사물의 강박적인 얽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겠다. 뿐만아니라 기존의 문법이나 론리로서는 해석되는것이 아니다. 오직 시적인 기분, 예술적인 기분으로 받아들여지는 <<지나침으로 이루어진 지혜>>의 산물이라겠다. 그 뒤의 <<금빛눈물>>, <<황금의 쾌락>>도 같은 지나침의 지혜이다. 이미지시는 이런 <<지나침의 길>>을 달갑게 걷게 되는것이다.   처녀와 총각이 하번만 살놀이 하면 처녀는 더는 처녀가 아니고 총각은 더는 총각이 아니되는것처럼 언어도 일단 이미지의 재료로 충당되면 원래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고 돼지는 돼지가 아니고 모기는 모기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기의 본의미를 떠나서 다른 그 무엇을 표현하게 된다.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발레리의 시 한 단락을 보자. 그렇다! 광란을 타고난 커다란 바다여 표범가죽이여, 숱한 태양의 영상으로 구멍 뚫린 희랍외투여 침묵과 같은 소란속에서 반짝거리는 네 꼬리를 물어뜯는 너의 푸른 몸뚱이에 취한 단호한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폈다가 다시 접는다 가루같은 물결이 바위에서 솟아난다! 날아가거라 정말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즐거워하는 파도로 부숴라 돛단배들이 모이를 쪼고있던 이 고요한 지붕을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두련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 시를 의식과 존재의 싸움에서 <<바다는 이제 자연적인 이름을 되찾는데 (파도 해양) 이것은 의식이 자연의 실재앞에 자신을 되찾았다는 증거이다>>고 평한다. 후고.프리드리히의 비평에 의하면 바다는 바다라는 의미에 앞서 <<의식이 자연의 실재앞에 자신을 되찾은>> <<증거>>로 나선다. 즉 <<바다>>는 의식의 <<증거>>로 충당되였다는것이다. 주제적으로 살필 때 <<바다>>는 바다를 떠나 <<증거>>로 되었다고 하는데 문장을 더 깊이 파고들면 <<바다>>는 <<표범가죽>>이나 <<희랍외투>>로 될뿐만 아니라 절로 <<제 꼬리를 물어뜯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가리가 50개나 되는 괴상한 뱀-히드라가 된다. 결국 <<바다>><<표범가죽>> <<희랍외투>> <<히드라>> <<침묵>> <<꼬리>>...들은 모두 바다는 바다가 아니고, 표범가죽도 표범가죽이 아니고, 희랍외투도 희랍외투가 아니고, 꼬리도 꼬리가 아니고 침묵도 침묵이 아니고, 히드라도 히드라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들은 언어를 떠나 시인이 새롭게 구축하고있는 이미지의 재료로 되었다고 할수있다. 이쯤하면 <<해변의 묘지>> 아래련의 언어를 더 분석해 보지 않아도 되리라고 믿는다. 한 개의 원이 굴러간다 천사의 버린 지환이다 그 안팎으로 감기는 별빛과 꽃잎들... 금빛의 수밀도만한 세 개의 원이 천개의 원이 굴러간다 신의 눈알들이다 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 삼각형이 되어 쓰러진다 어떤 눈알은 가로 누운 불기둥이 되어 뻗는다 한 개의 원이 8월 한가위 달마큼 자라서 굴러간다             -문덕수 <<원>>전문   시인은 원을 쓴다고 했지만 실상은 <<천사가 버린 지환>>을 썼고, <<신의 눈알들>>을 썼다. 기하학적인 원의 도형이 반복적으로 변하면서 우리 앞에 기이한 이미지를 련발하고 있다. 가락지만한 원이 보름달로 자라기까지 치른 여러가지 고역이 생동한 이미지로 우리 앞을 지나면서 고행을 치러야 성공한다는 뜻을 알려주는 같다. 혹은 원이라는것은 속이 빈것이니까 비우는 신념의 아름다운 결과를 이룩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뜻의 해독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나름에 달린것이니까. 이시에 사용된 <<지환>><<별빛>><<꽃잎>><<원>><<신의 눈알>><<불기둥>><<한가위 달>>들은 죄다 시인의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들로서 결코 이 언어들의 관습적인 의미와는 완전히 틀린 표현이라는것은 자명하다.     지난 90년대초에 시어를 새롭게 태여나게 하였다고 말할수있는 김학송시인은 하늘에 뜬 두루미모양을 흰구름 한송이로 변형시키면서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청청한 거울속 흰구름 한점 부풀은 소망 그린 듯이 꽃바람을 몰고 가는 하아얀 치마 그리움을 불태우는 노을 한쪼각     간결한 필치로 깨끗하게 씌여진 한편의 시다. 맑은 하늘에 높이 떠있는 두루미, 하얀 두루미는 눈덩이같은 순수이다. 그 정갈한 아름다움을 우러르면서 시인은 두루미를 <<흰 구름 한점>>이라고 변형시키고있다. 흰 구름을 <<부풀은 소망>>과 <<꽃바람을 몰고가는 하아얀 치마>>로 승화시키고 그것을 다시 그리움이 사무치게 하는 <<노을 한쪼각>>으로 마무리를 짓고있다. 제목에 두루미라는 언어가 있을뿐 내용을 쓸 때에는 두루미에 대한 언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두루미에 대한 변형물들만 진렬되여있을뿐이다. 중요한 것은 두루미를 흰구름으로 변형시킨다음 그 변형물을 리용하여 새로운 변형물을 파생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흰구름 한점>>이나 <<하아얀 치마>>나 <<노을 한쪼각>>과 같은 언어들은 원래의 언어의 뜻을 떠나서 완전히 새로운 상징적의미로 우리앞에 새롭게 태여나고있다고 하겠다.    이만큼 살펴본다. 똑똑히 하여야 할것은 이미지특징의 하나가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는것만은 가슴에 각인시켜야 할 일이다.   제5절 이미지가 현실을 떠난다.          현실은 구체적인 사물속에 있지 않거니     말할수있는 공간에 가서 찾아야 하리     벽과 벽사이로 뻗은 바다의 백사장을      소리 없는 곳에서 소리 없는 바다의 음을    당대영국의 유명한 초현실주의시인 차르스. 터무린썬의 <<미>>라는 시다.  차르스의 이 시를 보면 시의 <<현실>>라는것은 구체적인 사물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말로 할수있는 <<공간>>에 있다는것이다. 말로 할수있는 <<공간>>이란 그 의미가 한이 없이 넓고 깊다. 그 공간은 상상의 공간이며 허구의 공간이다. 차르스 . 터무린썬이 말한것처럼 <<벽사이로 뻗은 바다의 백사장>>이나 <<소리없는 곳에서  소리 없는 바다 음>>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의 이미지는 현실자체 있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속에 문학적허구속에 있다는것이겠다.   우에서 우리는 이미지특성이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우리는 차르스. 터무린썬의 시를 통하여 이미지가 현실을 떠난다는 새로운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초현실주의시가 현실을 떠나 어떻게 이미지를 제조하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난 세기 5,60년대에 영국에서 중요한 비평가로 활약하기도 한 영국시인 아르와레스의 시 <<실>>(失)을 보자. 실 아르와레스 내가 잠속을 거닐면 착한 마음이 꿈을 꾼다 하늘은 푸르디 푸르다. 당신이  손을 펴면 손은 하늘의 시계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천천히 움직인다 같은 손목이 나의 얼굴에 놓인다 나의 손가락이 스치기만 하여도 같은 머리 하나가 내 가슴앞에서 가볍게 움직인다 나의 팔이  같은 몸을 안으면 같은 죽은  팔의 움직임을 느낀다 내 손가락이 죽은 머릿속으로 들어가면 같은 배가 죽은 허벅지를 움직인다 꿈은 때린다. 저며낸다 백주에 껌벅거리는 눈이 가볍게  움직인다 사랑하는 이, 그녀는 당신이 아니라 그녀요    아르와레스는 현실을 완전히 떠나서 괴상한 꿈을 쓰고 있다. 꿈을 쓰는것은 영미 당대 초현실주의시인들이 즐겨쓰는 제재이다. 아르와레스의 이 시자체가 현실을 떠났다. 초현실주의라는 언어자체가 현실을 떠난다는 말인것이다. 꿈속으로 들어가 추출해낸 이미지는 현실일수가 없다. 사실 아르와레스의 시를 보면 한 인간이 거울을 앞에 놓고 동작하면서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움직임을 시로 쓰고있는같다. 같은 손목, 같은 팔, 같은 배, 같은 몸 등 움직임을 보면 거울속의 나와 현실속의 내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것이 보인다. 첫련에서 하늘이 푸르디 푸르다고 한것은 맑은 거울을 말하는것이며 당신이 손을 들면 손이 시계속으로 들어간다는것은 거울속에 시계가 비치였는데 손을 드니까 시계의 일부가 가리워진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거울속에 비친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과 같은것이다. 아무렇게 따지여보나 이 시는 현실을 떠나서 이미지를 만들었다는것이 확연하다.    1927년에 미국의 뉴욕에서 태여나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전하다가 1968년도에 미국으로 돌아가 초현실주의 시운동에 몸을 담구면서 많은 시를 써서 미국의 국가도서상과 영국의 대통령상을 받은 우.에쓰. 머원의 시를 한수 보자. 4월 우. 에쓰. 무원 내가 돌을 떠나면 노래가 멎는다 4월 4월은 내 이름의 사막에 까라앉았다 미래의 나날들은 별 하나도 없이 음페되였다 당신이 안녕하게 기다린다면 당신은 거기에 있으리 당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리    머원의 시는 제목은 4월이지만 시의 내용은 4월이라는 감이 추호도 없다. 시인은 4월을 떠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있다. 이것은 이미지의 본질인 <<짝>>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것이며 성질이 다른 사물의 배럴에 의하여 생기는것이라고 하겠다. 이미지의 특성은 제목과는 다른 사물을 끌어다 쓰는것이며, 제목의 의미와는 관계 없이 시인이 자유로이 허상을 만들어 쓰는것이며 , 어떤 때에는 그어떤 지적인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미지가 현실을 떠나게 마련되여있다. 현실을 떠나지 않는 시는 이미지시에 와서는 용납되지 않는것이다. 우리의 시들에서도 영미당대 초현실주의 시에 비하면 아직은 좀 유치하지만 현실을 떠나는 시들을 얼마든지 찾아볼수있다. 새벽 김승종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은 ㅡ 남을 위한 종소리를      그렇게도 많이 쳐주셨소이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은 ㅡ 자신을 위한 종소리는      단 한번도 못쳐보고 가셨소이다 어머님 ㅡ    승종시인은 시제목은 새벽이라고 달았지만 그가 쓴 시내용은 새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머니를 쓰고있으며 어머니가 남을 위하여 종을 쳐주셨다는것을 쓰고있다. 시제목은 <<새벽>>이지만 시의 이미지에는 <<새벽>>이라는 현실은 없고 어머니의 행동만 나타나고있다. 현실을 떠난 이 시는 대공무사하게 남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다 바친 어머니 품성과 새날을 낳아주고 아무런 바람도 없이 사라지는 새벽에 등호를 치고있다.    이미지시가 현실을 떠나는것을 즐기는 원인은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사유가 자유로와지고 언어가 자유로와지고 이미지가 신기하고 새롭게 생성되기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는 현실 사물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속에 있는것이다. 그것이 이미지시이고 이미지의 예술이겠다. 제6절 파편문체가 일으키는 혼돈   이미지의 첫번째 특성-사물을 떠난다는것을 말할 때 한춘섭의 <<초승달>>을 살펴보면서 파편문체라는 개념을 떠올린적이 있다. 파편문체는 현대시문체론적 특성의 하나이며 파편문체로 하여 혼돈이 일어난다.   파편문체란 어떠한 개념인가? <<현대시구조>>에서 지적한 후고 프리드리히의 말을 들어보자.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연결대신에 병렬, 이것들의 내적 불연속성, 불가능의 경계선상에 있는 문체적특성이다.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정성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획득한다. 파편들은 리념들의 결혼징표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미학의 근본명제이기도 하다>>. 말라르메와 발레리의 시학을 거론할 때 프리드리히는 또 다시 파편문체를 말한다. <<파편개념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개념은 가시적인것 속에서 불가시적인것을 최대한 예술적으로 현현시키는것이다. 이러한 현현은 바로 그 파편적인 특성으로 인해 불가시적인 우월성과 아울러 가시적인것의 불충분을 보여준다.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파편문체의 중요성을 <<현대미학의 근본명제>>와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로 밝히고 있다. 필자는 현대시에 대한 살펴보기를 하므로 <<현대미학의 근본명제>>는 접어두고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는 명제만을 펼쳐보려고 한다.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고 했으니 이전에는 아니였는데 지금와서 되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즉 시가 현대시로 발전하기전에는 파편문체가 시의 특징이 아니였다는 뜻이라겠다.   후고. 프리드리히의 파편문체의 정의를 보면 핵심은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연결대신에 병렬>> <<내적인 불연속성>>과 <<불가능의 경계선상에 있는 문체>>이다. 이로 인하여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정성이라는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되고 <<리념의 결혼징표>>로 된다. 이로 인하여 파편은 <<불가시적인 우월성과 아울러 가시적인것의 불충분>>이 나타나게 된다. 더 풀이해보면 이미지와 이미지가 내용상으로 련결되지 않고 단절된 상태이며 서로 성격이 다른 이미지라겠다. 시적인 대상을 변형하여 그려낸 이미지이므로 보이지 않던것은 단편적으로나마 보이게 되었으니 우월해지고 보이는것은 더 구체적인 진술이 없기에 불충분해지게 된다.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초월성을 체현한 초현실주의적인 문체라겠다. 현대시자체가 초월의 성격이 다분한데 전형적인 파편문체로 된 시들은 몽롱한것이 아니라 완전히 해독하기 어려운 난해시에 속한다. 파편문체에 대한 전문지식과 파편문체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고 현대시에 대한 연박함이 없으면 이 낯선 세계를 해설하기 어려운것이다. 우리가 리상이나 조향의 시를 처음 만났을 때 해석의 오리무중에 빠져 해설을 읽지 않고는 알수 없었던것은 그들의 시가 파편문체로 구성되였기때문이라겠다. 리상이나 조향의 스승이 구라파의 초현실주의 시인들이였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신들이여 피투성이 신들이여① 채색되고 페쇄된 언론이여② 대낮같은 등화의 온상아래③ 가장 광대한 마음이 익는다④ 파도가 너의 페쇄된 덧창에 불어닥칠 때⑤ 기울어진 여름은 닻의 쇠사슬을 올리고⑥ 례배당의 유리를 향하듯 추분의 거대한 장비를 향해서 방향을 바꾼다⑦    생종-페르스의 시 <<이국의 여인에게 바치는 시>>에서 임의로 한 련을 절록하였다. 모두 7개의 이미지로 되였는데 이 일곱개의 이미지들은 아무런 련관도 없이 병렬적으로 배렬되여있다. 각개의 이미지들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뒤의 이미지가 앞의 이미지를 더 연장하거나 해석하거나 진술하지 못하게 밀어버린다. 출렁이는 물결이 흘러가듯 이미지들이 저마끔 흘러가면서 우리 눈에 스치운다. 생종 - 페르스의 시는 한 개 련에서 이러할뿐만아니라 련과 련사이는 더욱 이러하다.   성격이 다른 이미지들로 구성되여 리해의 접촉을 단절시킨다 하겠다. 이질적인 이미지군이 시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독자들의 용이한 해득에 빗장을 지르고 들여놓지 않는다.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락원>>처럼 <<지상의 지옥>>인것 같다. 그런데 이 <<지옥>>속에도 보물이 있는것이다. 이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기란 웬간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파편문체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생종. 페르스의 시에 대하여 이런 결론을 내린다.   <<모든 이미지구성부분들은 감각적이다. 이미지들 자체는 결합할수 없는 결합에 의하여 비실재적이다.>><<주문과 같은 시구들이 장엄하게 울리면서 지나가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운 새로운 이미지들을 조밀하게 전개한다.>>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 뽄 다리아> <마주르카> <디이젤 엔징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녀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전문     이 시에 대한 한국 비평가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파편문체에 대한 리해가 깊어지리라 믿어진다.   홍문표는 <<현대시학>>에서 리상, 리시우, 신백수 그리고 해방후의 조향, 김용구를 초현실주의 시를 실험한 시인들로 점찍으면서 조향의 <<바다의 층계>>는 <<우선 시행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를 주어 층계의 시각성을 보이고있거니와 여러 가지 사물들 즉 비둘기, 소녀, 기폭 등이 비론리적인 련결로 되어 강한 충돌감을 느끼게 한다>>고 하였다.   김준오는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낱말(이미지)이 자유련상대로 라렬됨으로써 문법적구문이 파괴되고 거의 모든 관련이 단절된다. 낱말이 <자유화> <절대화>되였다. 낱말의 인격과도 의미와도 아무런 관계없이 낱말이 지배한다는것이 그 구성원리이다>>고 하였다.   문덕수는 <<시론>>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이 시에서 <녀인+허벅지>와 같이 단어와 단어의 결합은 근접성에 의해 결합되여있지만, <모래밭에서+수화기>, <녀인의 허벅지+낙지 까아만 눈동자>와 같이 행과 행, 그리고 련과 련의 결합에서는 근접성이나 유사성을 찾아내기 어렵다. 이 경우는 근접성과 련결성을 고의로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언어요소들의 결합에 의해서 발생하는 의미의 맥락까지 차단하고 파괴하는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시적 언어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있다. 일종의 무의미시라고 할수 있다.>>   김춘수는 <<시의 리해와 작법>>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모래밭>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눈동자> 등이 이 시에서 차지하고있는 높이대로 강하게(짙게) 혹은 약하게(희미하게) 시인의 의식의 흐름속에서 명멸하는것을 활자배열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이런 경우 이들 네개의 물체를 그대로 받아들여 <개념에 때묻지 않는> 어떤 상태를 느낄수있으면 되는것이다.>>   작자 조향은 화가 보라크의 말을 빌어서 이렇게 해석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레델이 붙은 통조림이 아직 부엌에 있는 동안은 그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일단 쓰레기통에 내버려져서 그 의미와 효용성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나는 무를 발견한 후에야 미를 알게 되었다>>는 말라르메의 말과 통하는것이라 하겠다.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이렇게 평하였다.   <<기존의 시에서 볼수 없는 사물의 현실적배치가 아니라 자률적 이미지로 새로이 배치되는 전위와 변형의 수법에 의존되고있다. 그 때문에 이미지가 주는 인상의 피동적 수용에서 자률적이고도 내재적인 이미지가 외적사물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는 사고형태가 사물형태를 지배하고있다. 이러한 방식은 꿈과 무의식에 전능적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이미지의 결합의 이질화, 언어배치의 탐구성 등에 의해 사물을 완전히 현실위치에서 이탈시켜 현실에서는 있을수 없는 관계형태로 배치, 몽환상태와 같은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한국 비평들은 파편문체의 작품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사람(작가)들이 작품에서 손을 떼는 순간에 이미 독자의 어떠한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작품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말라르메의 견해와 맥을 같이하고 있겠다 하겠다.   파편문체의 상징들은 우선 현실과 재래의 의식에 대한 도전이며 파괴이다. 한편한편의 시가 비실재적인, 전례에 없던 창조물이기에 난해의 소용돌이를 몰고온다. <<몽환상태와 같은 전율>>(박진환)에서 <<어떤 상태를 느끼>>(김춘수)거나 <<강한 충돌감>>(홍문표)을 감수하면 되는것이다. 그것들은 <<인생론적의미가 없는>> <<무의미시>>이며 <<낱말들의 결합>>(문덕수)이며 <<효용성을 잃었을 때>>의 <<아름다움>>(조향)이다.     우리 시단으로 말하면 파편문체의 시는 공백상태나 다름이 없다. 청년시인 김승종씨가 파편문체의 경향을 띤 시들을 조금 시도해 보았을뿐이다. 파편문체로 성숙된 시인은 필자가 보기에는 아직  없다. 제7절 이미지는 암시의 예술   시는 암시의 문학, 암시의 예술이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미지시는 암시의 예술을 기치로 내세우고있다. 상징, 은유, 함축의 옷을 입고 그림으로 독자앞에 나타나는 이미지, 이러한 시야말로 진짜 암시에 속하는 시이며 가치가 있는 시가 아닐까.   이미지는 일상적인 개념, 사상, 감정, 리념을 모두 떠나서 낯선 땅 낯선 곳에서 자기의 그림을 그리고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영상을 떠올린다. 현대시 시조라고 불리우는 프랑스의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에서 이렇게 밝히였다.   <<근대적개념에 따른 순수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그리고 예술가의 외적세계와 예술가 자신을 동시에 내포하는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것이 <<순수한 예술>>이며 현대시라고 밝힌 시인은 보들레르만이 아니다. 엘리어트는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있다고 하였고 말라르메는 시의 목적은 사물을 암시하는것에 있다하였고 장꼭도는 <<시는 비밀의 무기>>이며 때로는 <<헤아릴수 없이 먼거리의 목표물을 향해서만 쏘아지는 무기이다>>(<<몬마르또르의 축제>>)고 하였고 얀 무카로브스키는 <<시란 무엇인가>>에서 시적 표현의 목적은 <<의사소통>>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암시는 현대시의 정수이며 이미지는 이 정수로 만드는 과업을 자각적으로 짊어지고있다. 암시란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자극하는 것이다. 깨우쳐주는것으로써 말한다는 의미이며 에둘러 말한다는 의미이다. 이미지시는 사물을 떠나서 관념을 떠나서 인간을 떠나서 언어를 떠나서 현실을 떠나서 이루어지므로, 일상의 냄새를 제거해 버리므로 이미지 자체가 암시의 잔치라 하겠다. 암시는 필연적으로 몽롱성을 초래한다. 몽롱성이 없는 시는 암시성이 희박한 시일것이다. 한번 읽고 다 알리는 시, 한두번 듣고 다 알리는 시, 그러한 시에서 암시성을 론한다거나 몽롱미를 론한다는것, 그리고 흔상의 가치를 론한다는것은 의미가 없을것으로 알고있다. 그러한 시는 일시적인 동감과 친숙성은 있으나 암시성이 없고 몽롱미가 없고 흔상가치가 없어 다각적, 다층차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늘엔 천사와 또 천사가 있다 장교복을 입은 천사 료리사 차림인 천사 노래하는 천사 하늘빛의 제복을 입은 장교님 성탄절지나 따스한 봄이 오면 당신은 빛나는 태양의        훈장을 달게 되겠지요 료리사는 거위털을 뜯는다          아 눈이 내린다 내려라 눈아          사랑하는 이 내 품안에서 멀어졌구나   프랑스 아폴리네르시인의 <<흰눈>>의 전문이다.   시에서 <<눈>>이 <<천사>>로 탈바꿈하고 <<천사>>는 또 <<장교>>와 <<료리사>>, <<가수>>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탈바꿈이 바로 사물에서의 일탈이며 관념에서의 일탈이며 언어에서의 일탈, 인간에서의 일탈, 한마디로 말하면 일상적인 현실에서의 일탈이라겠다. 이러한 일탈이 바로 암시성을 갖고있다 하겠다.   시는 <<장교님>>은 성탄절이 지나 봄이 오면 <<빛나는 태양의 훈장>>을 달게 될것이라고 한다. <<태양의 훈장>> 그것도 <<빛>>이 번쩍거리는 <<훈장>>이다. <<태양의 훈장>>이란 어떤것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상자에 따라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갑을론박할것이다. <<태양의 훈장>>이란 본 사람도 없고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도 아니다. <<태양의 훈장>>은 시인의 상상속의 산물이며 암시의 상징물이다. 유감스럽게도 시인은 말하지 않는다. 사실 말할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되것이 시인이다. 해석을 독자에게 맏기는것은 현대시 시인의 천직이니까. 료리사는 무얼하고있는가. <<거위털>>을 뜯고있다. 그뒤에 <<눈이 내린다>>고 하였으니 <<거위털>>은 <<눈>>을 표현하는 시적상관물이겠다고 생각되는데 시인은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하고있다. <<사랑하는 이/ 내 품안에서 멀어졌구나>>. 눈이 <<사랑하는 이>>인지 <<거위털이 사랑하는 이>>인지 아니면 료리사가 <<사랑하는 이>>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내 품>>이란 언어도 료리사의 품인지 하늘의 품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불투명, 불명확성이 바로 암시라겠다. 시 <<흰눈>>은 한보 더 나아가서 큰 암시를 파묻고 있다. <<장교님>>이나 <<료리사>>에 대한 진술은 있어도 <<노래하는 천사>>에 대한 진술은 한마디도 없다. 대담한 생략, 끝나지 않은 시로써 끝을 냄으로써 암시의 력도와 흔상의 가치를 높이고있다.   영국 로렌스 시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같다.       익은 열매 떨어질 때       그 대지의 혈관으로 달콤함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진다         온전히 산 사람들 죽을 때       그들 체험이 살아있는 현관의 공간으로       들어가 그 빛 더 한다.       원자에 죽지 않는 혼돈의 몸뚱이에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직이고       그 깃털 정제된 체험의 기름으로       비단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익은 열매 떨어질 때>>전문   한두번 읽어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러번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해독이 조금 가는 같다. 왜 그럴까? 시가 감정을 배설하지 않았고 언어들이 라체를 드러내지 않았고 이미지로 되었기때문이다. 얼핏 밑바닥이 보일듯 하지만 찬히 뜯어보고 사색해 보지 않으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우리는 1련에다 이런 의견을 들여본다. <<대지의 혈관으로 달콤함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진다>>고 하였는데 <<대지의 혈관>>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대지는 가장 낮은 곳인데 거기에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지는가? <<익은 열매가 떨어질 때>>의 <<익은 열매>>는 과일인가, 그때는 가을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2련에다는 이런 질문을 할수 있다.   <<온전히 산 사람>>은 어떻게 산 사람을 말하는가? <<체험의 살아있는 혈관의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혈관>>에 공간이 생기면 크게 생기면 생명이 위험한 것이다. <<빛>>, 혈관속으로 들어가는 <<빛>>이란 어떤 상징인가? <<원자에, 죽지 않는 혼돈의 몸뚱이>>는 어떤 사물을 가리킴인가?   3련에다 이렇게 묻고싶다.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지이고>>에서 그 공간은 <<혈관의 공간>>이겠는데 <<고니처럼 움직>>일수 있으니 무슨 비밀을 말함인가? <<고니>>의 상징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비단처럼 빛나는>> <<정제된 체험의 기름>>은 무엇이기에 고니의 <<깃털>>에 바를수 있는것인가?   시의 련마다에 시행마다에 주요한 언어마다에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는것이 암시가 있기때문이 아니랴. 의문을 제기한다는것은 비밀이 있기때문이며 소통이 잘 안되거나 안되기때문이다. 시를 읽은후에 그저 그렇구나 하는 감이 들면 <<친절>>은 있어도 <<암시>>가 없게 된다.   3련만 굳이 해설해 본다면 이런 의미가 아닐가 한다.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직>>이고에서 <<공간>>은 <<혈관의 공간>>으로서 생명이 활동하는 공간쯤으로 설계할수있고 <<살아있다>>는것은 이 공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겠다. <<고니>>는 작자의 리상적인 사물이라겠으며 아름다움의 징표라겠다. 우리의 생활속에서 백설같은 아릿다운 고니가 자유로이 날아옐수있는것은 <<정제된 기름>>을 바른 <<비단처럼 빛나는>> <<깃털이>> 있기때문이란다. <<정제된 기름>>은 생활이 주는 정면, 반면의 교훈이며 체험이라겠다. 그러기에 그것은 <<비단처럼 빛나는>> 인생을 가꿀수있는 <<깃털>>을 가진 <<고니>>를 떠올리는것이 아니겠는가! 필자 나름의 살핌이다. 아무튼 이미지시 해석은 수학이나 물리의 공식처럼 공식풀이를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미지는 감정이나 관념같은 것을 어떤 사물로 대용해버리기 때문에 이방인으로서는 100%의 완정한 해석의 가능을 배제해버리기가 일수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하는 낯선 작업, 에티오피아는 있어도 도착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내하여야 하는 이미지시다.   이미지는 어떤 의도에나 해석을 가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나 로출시키는 것을 꺼리는 암시의 시이다. 이제 우리는 루이스의 문장을 긴대로 참을성 있게 보기로 하자. 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도다! 울부짖는 폭풍속을 밤을 뚫고 날아온 보이지 않는 벌레 너의 분홍색 기쁨인 잠자리를 찾았도다 어둡고 비밀스런 벌레의 사랑 너의 생명을 멸망케 하리라                        -블레이크 살아있는 동안 노래도 모르던 은빛 백조 죽음이 다가왔을 때 닫혔던 목이 열려 갈대 무성한 강가에서 가슴을 떨며 처음이자 마지막인 오직 한마디 노래를 부른다 기쁨이여 아녕, 죽음이여 다가와서 나의 눈을 감겨다오 현자보다 바보가 더 떠들 듯이 거위가 백조보다 더 떠드네                 -엘리자베시대의 시(필자 불명)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란 문장에다 루이스는 상기한 두수의 시를 써놓고 의미심장하게 자신의 관점을 피력한다.   <<어느 누구도 블레이크의 시를 단순하다고 할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나에게 던진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이처럼 불가해한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는 마치 전류의 쇼크처럼 세찬 감정이 나의 몸을 뚫고 지나가게 합니다.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도 난 확실히 모르지만 그 다음의 시는 이에 비하면 조용하고 지극히 단순합니다. 거기에는 조그만한 수수께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블레이크의 시처럼 순수한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ㅡ이는 마지막 두행에서 이 시의 작자는 죽음에 림박한 백조의 입을 빌어서 생에 관한 인간적인 의견을 말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팔팔하고 기운 좋은 백조라도 사물을 생략하지 못한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ㅡ하물며 세상은 말세가 되었다. 거위나 바보 따위가 백조나 현자보다 더 뽐내고 행세하는 세상이라면 차라지 죽어도 아까울것이 없다ㅡ이런 내용의 말을 할리가 없습니다. 마지막 두행에 포함되여있는 인생에 관한 의견은 불순한것ㅡ말하자면 시의 체내에 섞여든 불순한것입니다. 이 시의 전체의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작자 자신의 이러한 의견을 시와 정서와 바탕속에 짜넣을수가 있었던것은 시인의 기교덕분입니다.   블레이크 시에는 이러한 불순물이 끼여있지 않습니다...시인이...판단을 말하거나 자기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사상을 짜넣는다는것을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루한 인용이지만 꽤 의미가 있다겠다. 백조를 의인화한것을 부정하는데는 무리가 좀 있다하겠지만 시는 <<자기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사상을 짜넣는다는것을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것은 모름지기 큰 계발을 주는것이고 <<불순물>>이라는 지적은 큰 충격으로 가슴을 울려주고있다. 사색의 가치가 있는, 두세번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견해라 겠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로만 야콥슨은 이렇게 쓰고있다.   <<만일 시인의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와 같음)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이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례컨대 정치적시)를 낳게 된다.>> 이미지시는 배타적인 시라 하겠다. 이미지시는 선전을 위한것도, 계몽을 위한것도, 교육을 위한것도 아니다. 이미지시는 예술로 존재할뿐이며 대중가요인것이 아니라 교향악이다. 이미지는 모호함과 불일치로 암시를 일으킨다. 모호하지 않고 모두 일치되여 있으면 무엇을 암시하겠는가. 암시할것이 없다겠다. 이미지시는 표현의 수법으로 흔상의 가치를 창출하는 시이다.  
23    금단의 열매. 3 (미성년불가) 댓글:  조회:1285  추천:46  2008-10-07
눈섭.1아가아가 아가가요놈의 가시야살속깊이 박히더니뼈를 쏙쏙 옥무네뽑을래 뽑을수 없는 욧요놈아아픔아눈썹.2살이 오른 언덕에서한무리 꽃으로 피다가검은 무리를 날뛰게 하는번개로 번쩍이다가청청한 하늘을 색칠하는산국화로 웃다가뼈만 남은것들을 포근히 얼싸안는따사론 눈송이다가눈썹.3하현달이 솟아오르면내 얼굴에 달맞이꽃이 핀다지렁이가 기여가면내 맘에 서리가 하얗다화살이 날리면내 얼굴에 호박잎이 덮힌다청우계야 너도 알지나의 달맞이꽃이 이쁜줄좀 청처짐해져쇠바줄도 너무 당기면 끊어진단다코.1언덕에 새가 울면나는 찾아가겠다언덕밑에서 귀 따가운 소리나면나는 정다이 달래 주겠다언덕에 이슬이 돋으면나는 노래를 부르겠다언덕에 불이 나면나는 소방차를 끌어오겠다언덕밭 이랑이랑에 꽃씨를 심어놓겠다그래도 언덕이 비뚤어지면나도 소리없이 오겠다코.2마음따라 해살속을 날던 흰구름찬 바람 만나비로 쏟아질 때슬프게 피여난 한송이 꽃아픔을 문다뼈저리는 그 울음 소리나도 울리여온 몸에서 비방울이 듣는다나는 아픔에 지쳐서꽃을 따먹었다몸에 비도 그쳤다코.3노란색파란색빨간색꽁꽁 다져넣은동그란 유리알손가락으로 튕기면때그르 구른다입안에 넣어 굴리자면쫑쫑 빠진다요리 굴려도조리 굴려도마냥 예쁘다요리 구르며 조리 구르며마냥 입안만 말린다입.1빨간 사탕 한알빨아도 영원히 녹지 않는 사탕 한알달다하면한없이 한없이 달아혼불이 빠지고 쓰다하면 황련처럼 쓰디써물었다도 뱉아버리는쓴 사탕은일전을 주어도 살수 있지만단 사탕은천금을 갖고 다녀도 만나기 어려워가을 논바닥 벼무지처럼 조롱진빨간 사탕어느 알이 내 입에 들어올가아아, 찾기 어려워입.2새가 포르르 날아오른다뱀이 스르르 기여나온다꽃이 방긋방긋 피여난다눈이 푸실푸실 내려온다미친 개가 왕왕 짖어댄다강아지가 한들 꼬리 젓는다사이벽이 슬슬 무너진다사이 산이 쭝쭝 자라난다입.3방울을 흔든다금방울 은방울퉁방울쇠방울금방울 자릉자릉은방울 따릉따릉퉁방울 떵떵떵쇠방울 뚱뚱뚱얘, 나에겐금방울 은방울만 울려입.4땅이 빵처럼 불어난다버들피리 삐리리고샅길에 무성하다해살무리에 빠진 쪼무래기들토끼뜀 뛴다뙤약볕에 찌지워매미들 자지러진 울음매매 하늘이 혀를 빼문다가방 멘 아이들소리소문도 없이 다가가 손을 내민다갑자기 찌르륵공중으로 뛰여갔다 소리는국화꽃이 망울을 열기 전날 밤돌밑에 숨은 귀뚜라미귀똥귀똥 울었다길 가던 나그네 말뚝이 되였다가눈물 훔치며어둠속에서 부지런히 발을 뽑았다아무리 뽑아도발에 묻은 어둠은 떨어지지 않았다입.5화가의 붓을 만나면살짝 하얀 종이 된다가수의 미묘한 음이 들리면귀바퀴를 빨죽 쳐든다의사가 흰 옷을 갈아입으면청진기 되여 호주머니로 쏙 들어간다경찰의 총이 보이면제깍 탄알이 되여 발끝에 떨어진다얼굴은 하나여도 가면은 열개 스무개 서른개가면 하나 잘 쓰면웃음 한다발가면 하나 잘 못쓰면흘깃 한그릇가면 하나 못쓰면쌍욕 한마대버려도 애잡짤하지 않을 가면을누가 쓰고싶어 쓰나요살진 밭에 물곬이 날가봐 쓰지요입.6피나무 꿀이 싸리꽃 꿀이 단지속에 꼴똑 차서아가리 노랗다나는국자로 떠서 마신다단지속에 꿀샘이 있는가봐아무리 떠내여도꿀은축나지 않는다혀.1뱀으로 둔갑하여 아스스하게 기다가호랑이로 둔갑하여 포악스레 덮치다가마녀로 둔갑하여 간을 뽑아먹다가부처님으로 둔갑하여 살살 어루만지다가여우로 둔갑하여 혼불을 빼았다가승냥이로 둔갑하여 아등아등 씹어먹다가오, 종잡을 수 없는 못된 둔갑쟁이\'혀.2한대의 만물제조공장날마다 강물처럼 쏟는다 제품을나무 , 풒, 돌, 생, 황련...흰술, 무명천, 텔레비, 비행기...쑥뿌리를 인삼으로 팔고참새를 부엉이로 판다괜히 꽃비를 뿌리며길 가던 나그네를 신들리게 한다어느 제품이 진짜이고어느 제품이 가짜인디당사자만 알고 있어까딱하면 발목 풀친다혀. 3빨간 커튼을 거두고 하얀 문 열면엿 하나창 하나목침 하나가지런히 잠 잔다누구도 모른다어느것이 엿가락인지어느것이 창인지어느것이 목침인지신호따라엿가락이 입으로 날아들수도창이 가슴으로 날아들수도목침이 먹먹해 있을수도신화 하나 잘 주라빨간 피 보겠다혀.4칼, 송곳, 메 어느것도 없는 백수건달날 허물겠다고토성은 코웃음쳤다물은 대꾸 한마디 없이토성을 에워쌌다숨차! 물러가!토성은 벌컥 소리쳤다물은 친절하게 토성을 머리끝까지 꼬옥 품어주었다아야야 그만해각이 물러난다나도 다 녹아 네가 된다고함 질러도 보이지 않는 소리물이 슬슬 물러가자토성이 납작해 지였다물은 못하는 짓이 없다혀. 5내가 너를 알면 안되는것을네가 나를 알면 안되는것을우리 서로 모를 때엔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자유로웠지내가 너를 알아서부터나는 모든 빗장을 열었다손 발 가슴 얼굴...내 몸의 어디에나 다 질려있던너도 나를 알면서부터모든 베일을 벗기 시작하였다수갑도 버선도 마스크도 속쪼끼도네 몸 어디나 다 가려주던네가 나를 알면 안된다내가 너를 알면 안된다은빛 그물 금빛 그물로 서로를 얽어옴짝 못하게 할것이니알지 말자 알지 말자알지 말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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