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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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포로병>>에서 표현된 김철시인의 언어마술 댓글:  조회:1414  추천:10  2009-04-17
<<포로병>>에서 표현된 김철시인의 언어마술 김철시인은 중국조선족시단의 저명한 시인일뿐만 아니라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있는 시인이다. 몇해전에 필자는 김철시인의 대표작을 론할 때 <<대장간 모루우에서>>를 평한적이 있다. 오늘은 그 시와 쌍벽을 이룬다고 생각되는 <<포로병>>을 언급해 보고저 한다. 이 시에서 김철시인은 포로병과 사랑을 비교하면서 시적흥을 뿜고있는데 과시 절창이라고 할만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철시인이 대장간모루우에서 인생의 수양을 노래했다면 이 시에서는 사랑을 노래하면서 언어의 마술을 부리고 있는데 어떻게 마술을 부리가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는것은 우리의 시 창작을 발전시키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시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포로병 김철 나는- 사랑의 포로병 달콤한 창 끝에 찔린 나의 상처에선 피가 흐른다 천사에게 끌려가는 나의 마음은 리정표가 없는 거치른 광야 그래도 행운의 포로병은 황금마차를 타고 별밭을 달려본다 꽃밭을 헤집는 아이처럼 사랑이란 생가의 판가리싸움 고삐를 늦춰다오 발목을 풀어다오 사랑의 멍에만은 씌우지 말아다오 우리의 생명이 합쳐지는 날 너도 내 마음에 둥지를 틀고 너의 불타는 신음 내 한 마리 락타가 되어 머나먼 사막길을 업고 가리라 그림은 선과 색깔의 예술이고 무용은 몸의 예술이고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고 한다. 시인이란 언어로 시의 집을 짓는 작업을 하는 신근한 로동자라고 할수 있다. 언어는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쓰는 벽돌이나 세면트나 철근이나 자갈이나 모래와 같은 재료로서 시인의 집을 짓는 재료이다. 언어는 시인의 령혼의 활동을 보여주는 재료로서 언어를 떠나서 시는 존재할수 없고 언어를 떠나서 시인도 존재할수 없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이며 시는 언어의 마술에 의하여 태여나는 생명체이다. <<포로병>>은 김철시인의 언어마술이 비교적 집대성된 시라고 필자는 인정하면서 어떤 마술을 부리고 있는가를 말씀들이려고 한다. 시적작업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둔갑시키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심조룡에도 비와 흥이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시란 사물과 사물을 비기면서 일어나는 감흥을 쓰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엘리어트도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고, 김춘수도 시는 짝을 찾아쓰는 작업이라고 통속적으로 결론을 내린바 있다. 필자의 리해에 의하면 이러한 시적작업을 한마디로 규납하면 변형이라고 생각된다. 변형이란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둔갑시키는 일이다. 시에서 사물과 사물사이 둔갑이 없다면 다시 말하면 변형이 없다면 시와 다른 장르의 문학을 변별하는 핵심이 없어진다고 필자는 알고 있다. 변형은 시적사유의 근본방법이며 시의 핵심적인 예술기교이다. 김철시인은 이 근본방법과 핵심으로 포로병이란 시를 구축하고있다. 우리가 포로병이라 하면 포연이 울부짖는 전쟁을 생각하게 되고, 날창이 붉어지는 번뜩임을 떠올리게 되며, 처절한 살육마당을 생각하게 된다. 김철시인은 포로병에서 이런 전쟁을 떠올린것이 아니라 사랑을 떠올리고 있다. <나는- /사랑의 포로병> 하고 간결한 필치로 시작하면서 시는 사랑과 전쟁을, 사랑과 포로병을 아무런 주저도 없이 병치시키고있다. 신성하고 위대한 사랑과 사악한 전쟁과 너절한 포로병, 사랑은 전쟁이고 포로병이고 전쟁과 포로병은 사랑이라는 엄청 괴상한 사유로 시를 시작하고있다. 이 돌발적인 비유는 독자를 경악스럽게 하고 쑈크를 당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경악과 쑈크속에서 시인의 참신한 사유를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전쟁은 인간악의 최고의 표현이고 사랑은 인간성의 최고의 표현이다. 량자는 두 개극단으로서 어울릴래야 어울릴수 없는 물과 불같은 관계인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전혀 악만 있는것이 아니다. 거기에 인간의 최고의 사랑도 있는것이다. 애국전쟁이 바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아니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을 작탄으로 삼아 적진으로 돌진하는것은 이세상 사랑의 첨단이라고 필자는 단언하고싶다. 사랑과 전쟁- 이 두 사물은 대립물의 통일체이다. 바로 시인은 이런것을 파악하고 사랑과 전쟁, 사랑과 포로병을 조화시켰고 융합시켜 시라는 한책상에 앉히였다고 생각된다. 시는 바로 이렇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사물을 서로 련계시키고 변형시키는것은 시를 시로되게 하는 불가결의 도경이며 요소라고 하겠다. 여기서 필자는 김철시인이 시창작에서의 기발한 상상력에 탄복하게 된다. 이런 기발한 상상력으로 시를 쓰기에 김철시인은 우리 시단의 코기러기로 되는것이며 대표시인으로 되는것이 아니랴. 김철시인은 <<포로병>>에서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로부터 출발하여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변형시키는 변형술을 슬기롭게 다루었다면, 다음으로 일상적인 문법구조화 론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언어를 창출해내는 슬기로운 언어기교를 보아낼수 있다. <<달콤한 창 끝>>,<<별밭>> 등 언어들의 조합은 성질이 다른 언어의 조합이다. 창끝에 피나게 찔렸는데 달콤한 창끝이라 한 언어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의 맞추기이다. 달콤하다와 창끝은 일상적인 문법규례와 론리를 뛰여넘어 어울린것으로서 언어의 치밀성과 시어의 탄력을 생동하게 현시하는 례문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별밭은 별과 밭의 합성어로서 별은 하늘에 있고 밭은 땅에 있다. 시인은 두 사물의 공간과 시간을 제로로 메꿈으로써 새로운 언어 별밭을 창출해내고 있다. 우리는 시를 론할라 치면 한수의 시에 새로운 언어가 없으면 어찌 좋은시라 하랴 고 한다. 이런 새로운 언어들의 조합을 읽게 되면 우리는 시인의 달필의 싱싱한 향기를 맡게 된다. 김철시인은 <<포로병>>에서 새로운 개념 , 이제까지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새로운 론리적언어를 떠올림으로써 시에다 생신한 언어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사랑이란 명제를 그는 <<생사의 판가리싸움>>이라고 명명하는가 하면 <<생명의 합치>>되는것이라고 명명하고있다. 우리는 보통 감정이 융합이나 하나의 마음이라는 명제를 일상적으로 떠올리며 시에 써먹기도 한다. 이런 명제들은 가변성을 피면할수 없는 언어의 구성이다. 감정이나 마음은 환경, 장소, 시간의 변경에 따라 변할수도 있는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변할수도 있고 이동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포로병>>에서 변할수 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의 개념을 떠올리고 있다. 그것은 <<생사의 판가리싸움>>이며 <<생명의 합치>>라는것이다. 생사판가리 싸움에서 승부는 영원한것으로 되며, 생명의 합치도 영원한것으로 된다. 마음이나 감정은 변할수 있지만 생명은 변할수 없는것이다. 시는 일반적으로 개념의 등장을 제한하는 쪽으로 가지만 이런 새로운 개념의 삽입은 시에 새로운 생기와 약동을 불어넣는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것이다. 김철시인은 <<포로병>>에서 많은 언어를 해방시키고 방류하고 있다 . 시는 언어를 해방하고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어 언어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쉬게 하는것이 아주 중요하다. 시의 언어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기위한 수단으로 쓰이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창의하에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시에 등장한다. 그러기에 시는 시밖에 뜻이 있고 시밖에 말이 있다고들 하게 된다. 시인이 채용한 언어는 원의미를 떠나 새로운 의미로 쓰이기에 원래의 뜻을 버리고 새롭게 태여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김철시인은 <<포로병>>에서 일상적언어의 내함을 축출해버리고 새로운 내함을 부여하여 언어의 탈태환골을 완성시키고 있다. 고삐, 발목, 멍에, 등 언어들이 실은 고삐는 고삐가 아니고 발목은 발목이 아니며 멍에는 멍에가 아니다. 이러한 언어들은 껍데기만 가지고 있을뿐이지 시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영원한 사랑을 얽어놓은 어떤 사슬같은 의미를 가진것들이다. 마지막련에 나오는 둥지, 락타, 사막, 등 언어들도 마찬가지이다. 둥지는 사랑의 보금자리의 대용이고, 락타는 영원한 사랑의 표상이며, 사막은 사랑의 길에서의 애로를 일컫는 말이다. 시에서 원래의 의미로 쓰인 언어들은 시어의 자격이 미달된 언어들로서 이런 언어들은 산문화를 도출해내게 되며 시를 시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작용밖에 일으키지 못한다. 김철시인의 <<포로병>>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시인의 창의가 다분히 슴배여 있어 우리들에게 시적언어사용의 본보기를 보여주고있다. 이런 시어야 말로 갈고 닦아 빛이 반짝이는 언어라겠다. 이로써 김철시인의 <<포로병>>에서의 시어의 마술을 다섯가지로,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이 글을 보아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61    시란 어떤것인가 <문심조룡>은 이렇게 말한다 댓글:  조회:1330  추천:22  2009-04-17
<<문심조룡>> 어록 최룡관 편집 글쓰기에 정통하려면 반드시 창작의 방법을 훌륭하게 터득하여야 한다. -615쪽에서 작가가 기교를 장악하여 작품을 다루는것은 바둑명수가 바둑두는 기술을 정통하고 있는것에 비유할수 있다. 기교를 포기하고 주관적인 생각에만 따르는것은 마치도 도박군이 노름에서 요행수만 바라는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617쪽에서 문학의 사상에는 정해진 규범이 없을지 모르나 창작의 원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것이라네 -621쪽에서 문학적사색을 잉태함에 있어서 그 요체는 허심함과 조용함에 있으며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버리는데 있다. 바로 이렇게 해야만 정신이 순수하고 깨끗해지게 할수있다. 또한 학식을 쌓음으로써 진귀한 보물들을 저장하고 사리를 분명히 가리는것으로 재능과 학식을 풍부히 하고 경력을 연구하는것으로 철저한 관찰을 진행하고 문학적사색을 따라 아름다운 문학적언어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비로소 신묘한 도와 깊게 통한 심령으로 하여금 성률에 맞춰 문학적언어를 안배하게 할수 있는데 , 이는 마치도 식견이 있는 장인바치가 심상(意像)에 의존하여 창작을 진행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문학적사색을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작품의 구성에서의 중요한 발단이다. - 377쪽에서 (제26장 신사(神思)에서 심상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제 36장 비흥에서 심상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방법을 이렇게 론술하고 있다. ) 비란 비부(比附)이고 흥이란 기흥(起興)이다. 비부 즉 사물의 리치를 련결한다는것은 비유를 사용하여 사물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기흥은 즉 사물에 의탁해서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것은 어떤 의미를 아주 은근하게 내포하고 있는 사물에 감정을 맡긴다는 뜻이다... 비란 격분의 감정을 품은 채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고 , 흥이란 완곡한 비유를 사용하여 그것에다 숨겨진 의도를 의탁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의 추이에 따라서 감정과 생각은 변하게 마련이니, 시인들이 지향하는 표현수법에는 항상 그 두가지가 포함돼 있었다. -5001쪽에서 흥의 수법에서는 말은 분명하게 하나 그말의 의도된 뜻은 잘 드러나지 않아서 거기에 관한 주를 보아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리해하게 된다. 이어서 비라고 부르는것에 대해 설명하면 사물을 묘사하여 비유하는것으로서 자신의 의도를 명백하고도 정확하게 설명하는것이다. 그러므로 금과 석으로 아름다운 품덕을 비유하였으며, 나나니벌이 명령을 양육하는것을 례로 들어 자식을 깨우치는것을 비유했고, 매미이 울음소리를 례로 들어 시끄러운 웨침에 비유했고, 때묻은 옷을 마음의 근심에 비유했고, 자신의 마음이 말아놓은 돗자리와 같지 않음을 말함으로써 굳건한 자신의 의지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503쪽에서 비유의 수법에 있어서 비유의 대상이 언제나 일정하지 않다. 어떤것은 소리로 비유하고 어떤것은 형상으로 비유하고 , 어떤것은 심정의 유사함으로 비유하고 , 어떤것은 사물로 비유하기도 한다. -505쪽에서 비유된 두 사물이 비록 북방의 호인과 남방의 월인들 만큼이나 서로 관련이 없더라도 그것들이 일단 합쳐지면 간과 쓸개처럼 가깝게 된다네 기흥은 외부의 형상을 묘사하여 그뜻을 뽑아오므로 말의 사용은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하리라 다양한 종류의 비와 흥의 사물들을 노래속에 모아놓은니 문학적언어는 마치 강물의 흐름처럼 생동하도다 -509쪽에서 형상을 넘어선 추상적인것을 도라하고 형상이 있는 구체적인것을 기물(器物)이라 한다.신묘한 도리는 묘사하기 어려운것이라서 아무리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의 극진한 부분까지는 설명할수 없으나 구체적인 기물을 묘사하기 쉬운것이여서 유력한 언어적표현을 동원하면 능히 그것의 진상을 드러낼수 있다... 높은것을 묘사하는 경우에는 <산이 높아 하늘과 맞닿아있다.>고 하였고, 협소함을 묘사하는 경우에는 <황하에 쪼각배 한척을 띄울수 없다>고 하였고, 많음을 묘사하는 경우에는 <자손 천억이나 되었다 >하였고 적음을 묘사하는 경우에는 <나라에 백성이 한명도 남지 않았다> 하였고... -511쪽에서 표현(과장수법)들은 마음속의 깊고도 신비한것들을 펼쳐보이면 울적한 마음을 날려보낼수 있으니 안맹한 소경으로 하여금 눈을 뜰수있게 하는 빛남을 갖고있고 ,귀머거리로 하여금 소스라쳐 놀라게 할 소리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517쪽에서 과장의 수법은 쓰임새에 달려 있나니 ...... 바다를 기울려 말려서 진주를 찾아내고 곤륜산을 넘어뜨려 보옥을 채취하라 함의는 넓고 크지만 지나치지 말도록 하고 언어는 과장하되 결점이 없도록 하라. -521쪽에서 작품을 다 써놓고 보면 흔히 처음에 자신이 생각했던것을 절반밖에 표현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왜 이런가? 그것은 문학적구상은 흔히 상상에 의존하기에 아주 쉽게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지만 언어는 비교적 실재적이여서 교묘하게 구상하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379쪽에서 문학적사색이 ... 빠름과 느림, 어려움과 쉬움은 비록 같지 않지만 모두 학식수준과 기교의 숙련정도에 의존하는것이다... 광법위한 학식과 폭넓은 경험은 내용의 빈곤을 해결해 주는 유일한 자양분이며, 일관성과 통일성은 혼란을 치유해주는 유일한 약처방이다. - 33쪽에서 문학적사색이외의 미묘한 뜻이나 문학적언어를 초월하는 존재로서의 은밀한 정취는 언어로는 표현할수 없는 것들이다. 오직 가장 정미한 (정밀하고 자세함) 경계에 도달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그 오묘한 점을 해석할수 있고 , 가장 미묘한 변화를 파악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그 기교를 리해할수 있는것이다. -35쪽에서 각종 표현양식들을 분명하게 장악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새로운 의미라 할지라도 그것이 표현 양식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할것이다. 창작과정에 나타나는 변화를 통달하라. -405쪽에서 재능은 문학창작이라는 무궁한 길을 질주할수 있게 하며, 고갈되지 않는 문학창작의 샘물을 마실수 있게 한다. 작가가 두레박의 줄이 너무 짧아서 갈증을 참아야 하고 다리의 힘이 부족해서 그 길을 포기해야만 하게 되는것은 ,창작방법에 어떤 제한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창작방법의 융통성있는 적용에 대하여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409쪽에서 시인들 사이에서 서로 뒤엉키기는 하지만 반드시 각자 나름대로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계승도 있고 혁신도 있어야만 비로소 변통의 방법이라고 할수있을것이다. -415쪽에서 문학창작의 법칙은 멈춤이 없이 운행하나니 자신의 성취를 나날이 새롭게 바꾸네 변화에 능숙해야만 비로소 오래동안 지탱할수 있고 전통에 능숙해야만 비로소 궁핍을 면할수 있네 -419쪽에서 사람들의 감정과 취미는 천차만별이므로 창작수법 역시 그 변화가 다단하기 마련이다. -421쪽에서 작품에 담긴 뜻이 옅어서 드러나거나 작자의 원래의 뜻과 너무 가까운 작품은 함축성이 모자라며, 언어적 표현이 간결하고 분명한 문장은 대체로 풍부함이나 다채로움과 거리가 멀다. -423쪽에서 부(賦), 송(頌), 가(歌), 시(詩) 등의 경우에는 청려함을 규범으로 삼아야 하고 -427쪽에서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에 무늬가 없다면 그것은 개나 고양이 가죽과 다르지 않을것이며 , 코뿔소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려면 거기에 붉은색을 칠해야만 한다. 이는 내용이란 형식을 필요로 한다는것을 보여준다. -437쪽에서 문채를 구성하는 방법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다섯가지 색조로 구성된 형문(形文)인데 그것은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이다. 둘째는 다섯가지의 음으로 구성되는 성문(聲文)인데, 그것은 궁(宮), 상(商), 각(角),징(徵), 우(羽)이다. 셋째는 정문(情文)인데 그것은 인(仁),의(義) 례 (禮),지(智), 신(信)이다. 다섯가지 음을 배합해 놓으면 소하(韶夏)라는 악곡이 되며, 다섯가지 성정을 묘사하면 문장이 되는것이다. 이는 선천(先天)에 의하여 형성되는 사물의 복잡한 현상이라 하겠다. -439쪽에서 문채의 아름다움은 성정의 진지함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정리(情理)는 문학작품의 날실이며, 언어적표현은 씨실이다. 날실이 올바르게 배렬되여야 비로소 씨실이 제대로 오가면서 천을 짤수 있듯이 , 정리가 확정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문장이 류창해질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작품구성의 근본이 되는것이다. -443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고관대작과 높은 봉록을 탐하면서도 공허하게 전원의 은거생활을 노래하며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번거롭고 바쁜 정무를 걱정하면서도 세상밖의 탈속한 정취에 대해 공허한 말을 한다...언어로써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는것을 근본으로 삼는 문학작품에 있어서 입으로 말하는것과 지향하는것이 서로 상반된다면 어찌 그것을 신뢰할수 있겠는가? -447쪽에서 언어란 문채에 의하여 비로소 세세대대로 전해질수 있나니 ....... 말에 아름다운 수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결여돼 있다면 자세히 음히해 보고나면 반드시 싫증나게 되리 -451쪽에서 내용으로 하여금 규범에 부합되도록 하는것을 가리켜 용이라 하고 , 불필요한 글자나 단어 그리고 구절들을 삭제하는것을 가리켜 재라한다...문학작품에서의 사상의 반복은 내용의 군더더기에 해당할것이고 , 동일한 단어나 문장의 중복은 수사상의 군더더기에 해당할것이다. -453쪽에서 문학작품을 훌륭하게 완성하자면 우선 고려해야 할 세가지 기준을 설정하여야 한다. 그 첫째는 정리에 근거하여 제재를 결정하는것이고, 두 번째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된 사례들을 선별하는것이고, 세 번째는 중요한 문제들을 충분하게 부각시킬수 있는 강력한 언어의 형식을 창조하는것이다. 그런 다음에라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수 있고,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남기고 , 또한 문채를 조절할수 있게 된다. -455쪽에서 문학작품은 가옥의 창문과도 같아서 오른 쪽과 왼쪽이 알맞게 배합되여야 하네 언어는 강물의 흐름과 같아서 가득 차게 되면 범람하게 되는 법 뺄것과 보탤 내용을 가늠하고 짙게 처리할 부분과 옅게 처리할 부분을 고려하며 쓸모 없는 부분은 잘라버려 군더더기의 누를 피해야 한다. -461쪽에서 문학작품들 가운데서 정화라 꼽힐만한 명작들에는 은과 수가 있기마련이다 은(蘟)이란 글밖에 함축된 말밖의 뜻을 가리키며, 수(秀)란 작품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을 가리킨다. 은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의미의 복잡함과 미묘함을 통해 그 섬세함을 획득하고, 수는 한 작품안에서 여타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음을 획득한다... -551쪽에서 은의 특질은 글밖에 뜻을 갖고있는것이다. 그것은 마치 은밀한 음향이 옆에서 들려오는것 같고, 숨겨진 문채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것과 같은데 이는 효상의 변화가 호체안에 포함돼있는것에 비유될수 있고 흐르는 강물속에 주옥이 숨겨져 있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즉 호체안에서의 효상의 변화가 사상(四象은 사물의 음, 양, 강, 유를 표시)을 이루고 , 주옥이 강물속에 길이 감추어져 있기에 물결이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것과 같다. -553쪽에서 단정하게 시작해서 기발하게 끝을 맺는 문장은 마치도 강물속에 숨겨진 진주의 아름다운 빛이 밖으로 드러나서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여운을 남기고 그것을 맛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싫증나지 않게 하는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553쪽에서 작품속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물결을 가리켜 수라고 한다. 그것은 민첩하고 교묘한 손이 아름다운 악곡을 연주하여 표일한 자태가 밖으로 드러나고, 또 먼산에 구름과 노을이 피여 오르고, 미녀들이 예쁜 용모를 드러내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555쪽에서 작품의 주제를 세우는데 능란한 사람은 반드시 기발하고 특이한 주제를 창출하고자 하기에 흔히 지극히 깊고 섬세하고 현묘한 경계(境界)를 상상하게 되는 법이고 , 언어를 다듬는데 능한한 사람은 반드시 아름다운 언어를 만들고자 하기에 그 깊은 생각이 항상 언어적표현이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령역에로 생각이 미치게 되는 법이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심장과 쓸개를 토해내는것 같다는 이 표현도 그 창작에서의 고심을 설명할수 없다. 오랜 세월동안 달련하고 반복적으로 추고하는 이 로고를 어찌 말로 다 형용할수 있으랴? 그러므로 작품의 언어적표현속에 어떤 광채를 숨기게 되면 안광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할것이고, 어떤 예리함이 언어적표현곳에 드러나게 된다면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될것이다... 만일 작품전체에 함축적인 의미가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마치 노유(老儒)에게 학문이 없는 것과 같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단 한번의 질문에 그 밑바닥이 드러나게 되고 , 숱한 구절들에 경구가 없다면 그것은 마치도 고대광실에 진귀한 보물이 없는것과 같아서 몇 번 묻게 될 경우에는 얼굴색이 질리게 된다 -557쪽에서 한 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知音)을 만날수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음은 확실히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있을가말가한 일이다 -685쪽에서 어찌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탓을 하랴? 문제는 식견과 감별력이 천박한데 있을 따름이다... 마음의 눈으로 작품의 사상과 감정을 관찰하는 일은 육안으로 사물의 형체를 관찰하는것에 비유할수 있다. 아주 밝은 눈으로 보면 분간할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듯이, 예민한 마음의 눈으로 보면 리해되지 않는 상상과 감정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오직 심원한 인식능력과 감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작품의 심오함을 포착해 낼수 있고 그로인해 마음깊은 곳에 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695쪽에서 문학적 함양을 갖춘이들은 치밀하고 함축적인 작품을 보면 기뻐할것이고, 경박하고 화려한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기이하고 화려한 작품을 보면 마음이 움직일것이고 , 신기한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기이한 작품을 보면 어깨를 으쓱거릴것이이다 -689쪽에서 자연스러움이 정교함과 합치되여야만 하는데 이는 마치 초목의 꽃이 빛을 발하는것과 같다 -563쪽에서 날개 없이도 여러곳으로 날아갈수 있는것이 말이요 , 뿌리없이도 굳게 맺어지는것이 감정이다 -567쪽에서 자신의 문장에 다른 사람의 문장과 동일한 부분이 있으면 마땅히 삭제하여야 한다. -577쪽에서 항상 사색의 칼날을 방금 숫돌에 갈아놓은것처럼 유지해야 한다 -595쪽에서 지엽적인 것의 세밀함을 포기하더라도 전체의 완미함을 쟁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작품구성에서의 총적안배의 원칙이다. -601쪽에서 문장의 사상과 감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가지 사항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그 여섯가지란 첫째는 작품의 전체적인 체제의 안배를 볼것, 둘째는 문장이나 말의 배치를 볼것, 셋째는 작품에서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변화의 추구를 볼것, 네째는 표현수법상의 정아(正雅)함과 기이함을 살필것, 다섯째는 사류(事類)의 운용에 대해 살필것, 여섯째는 성률(聲律)을 살필것 등이다. -693쪽
60    대립의 조화로 길러낸 시 <<빈자리>> 댓글:  조회:1182  추천:27  2009-03-30
대립의 조화로 길러낸 시 <<빈자리>>   <<연변문학>> 제3기 안표지에 실린 김영건의 시 <<빈자리>>를 한번 읽어 볼만한 같다. 시인은 대립통일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시를 구축하고 있는데 우리들 시창작에 일정한 계발을 준다고 할수 있겠다. <<빈자리>>에서 자리를 규정하는 <<빈>>자는 심원한 력사적의의와 현실적의의를 함께 지니는 테마이다. 비운다는것은 불교사상의 핵심의 하나로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는 학술테마이다. 영건시인은 바로 이 중대한 테마를 시로써 다루어보고있다. 해살은 내려앉아도 비여있다 어둠조차 길을 감추어도 투명하다 나뭇가지가 바람을 답새겨도 흔적이 없다 물은 골짜기를 채워도 천지가 들어있다 산과 바람과 조약돌과 물고기 서로를 그리워하고있다 바위속에 해살로 들어가 보아도 화산의 정열과 이끼의 작은 사랑과 간 밤 별자리가 돋아있다 비워서 가득한 하늘 넘쳐서 흐르는 강물 어데라 없이 강물소리 넘친다 세상 모든 자리는 비여서 우주가 출렁인다 이 시가 <<빈자리>>의 전문이다. 시인은 필을 대자마자 대립통일의 시각으로 사물을 분해하고 련결시키면서 이미지를 추출해내는데로 촉을 달리게 한다. 비여있는 하늘과 앉아있는 해살, 어둠과 투명. 때리는것과 무흔적. 골짜기물과 천지 이러한 대비속에서 시는 시작되여 흘러내려오고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대립적인 측면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이러한 대립면은 한측면이 다른 측면을 떠날 수 없다. 세계가 음양의 결합으로 되어있는것에 대한 시인의 지적이고 창의적인 추출이다. 여기까지 시는 하나의 내용인데 한사물의 대립적측면으로 비움을 노래하는 시의 총적인 구도를 해석하는 첫작업이다. 이 첫작업에서 시인은 한개 사물의 움직임속에서의 대립되는 측면의 화합을 일구어내고있다. 시의 5-6행에서 영건시인은 한사물운동의 대립면을 읊조리던데로부터 사유의 범위를 확장하여 부동한 사물들의 관계를 노래하고있다. 산과 조약돌과 바람과 물고기들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것이다. 산, 조약돌, 바람, 물고기 등 사물들은 각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로서 자기의 존재적 가치를 현시할수 있는 사물들이며 서로 어떠한 련계도 가지지 않아도 이 세상에 그들 자리가 충분히 차례지는것이다. 산이 없다하여 조약돌이나 바람이나 물고기가 살수 없는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못하는것도 아니고, 조약돌이 없다하여 산이나 바람이나 물고기가 죽는것도 아니고, 바람이 없다하여 산이나 조약돌이나 물고기가 존재할수 없는것도 아니고, 물고기가 없다하여 조약돌이나 바람이나 산이 소실되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들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한다. 왜 그리워한다고 시인은 말하고있을가 .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사물의 존재는 어떤 유대를 가자고있기때문이다. 어떤 유대인가. 우선 지구라는 이 대지우에서 공존하는 사물들이며 하늘이라는 이 사물아래에서 공존하는 사물이다. 시인은 여기서 공존을 말하는데 공존하는 자체가 바로 비우는것이고 비우는것은 공존에 의하여 성립된다는 철리를 성립시키려고 시도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비움과 존재의 대립되는 측면의 통일을 노래하고있겠다. 그다음 석줄의 시는 세번째 내용으로서 시인은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고있다. 그날음은 환상적이다. <<바위속에 해살로 들어가>> 본다. 해살이 되어 바위속으로 들어간다는 환각적인 시구는 상당한 매력과 시적비약의 운치를 현시한다. 앞에서 읊조린 이미지들이 형이하적이였다면 시인은 이 짧은 시구로 형이상학적인 비약을 이룩하고있는것이다. 바위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보아냈는가? 시인이 보아낸것은 바위속에 돋은 화산의 정열. 이끼의 작은 사랑 그리고 간밤의 별자리란다. 여기에서 <<돋아있다>>는 언어의 사용이 이색적이다. 앞에서 렬거한 <화산의 정열>>도 <<이끼의 작은 사랑>>도 <<간밤의 별자리>>도 돋을수 없는 추상적인 현상이지만 시인은 돋아있다는것으로 우리들에게 그것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꾀한다. 이것이 바로 시어와 일상어의 구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언어작업이라겠다. 시인은 형이하적인 작업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인 작업으로 도약을 한다음 시를 마무리짓고있다. 비워서 가득한 하늘 넘쳐서 흐르는 강물 어데라 없이 강물소리 넘친다 세상 모든 자리는 비여서 우주가 출렁인다 시인은 마지막 세행의 시줄로 시를 마무리짓고 있다. 이 마무리가 바로 우의 흐름에 대한 총화이며 시인이 말하고저 하는 핵심이다. 비움과 참의 대립면의 통일이나 련결 및 그 동일성을 아로새기였다. 비여서 가득한 하늘과 비여서 출렁이 우주라는 이 대립적존재가 바로 사물의 생명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이 세상에 만물이 존재할수있는 리유이며, 또 사물들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게 되는 바탕이리라. 총적으로 이 시를 두가지 각도로 살펴볼수 있다.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면으로 확장되다가 환상의 수법으로 다시 해부한후 결말을 도출해내는것이 한가지 방법이라면 방법이고 . 형이하로 출발하여 형의상학으로의 전환을 이룩한후 철리적 마무리를 추출해 내는것이 또 한가지 방법이라면 방법이겠다. 언어사용면에서 한가지 지적할것이 있다. <<물은 골짜기를 채워도 천지가 들어있다>>는 시구인데 필자의 생각에는 <<물은 골짜기서 실오리 늘여도 천지가 들어있다>>로 하면 큰것과 작은것의 대립통일이 더 강조될같은 감이 든다.
59    씹으면 고소한 글.2 댓글:  조회:1414  추천:33  2009-03-09
    [문화산책]스승과 제자     정이랑(시인)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스승이 없는 사람보다 스승이 있는 사람이 더 복되지 않을까. 특히,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이 있다면 더없이 하늘은 푸르러 보일 것이며 나무의 잎새는 싱그럽게 느껴질 것이다. 예부터 스승을 부모 위의 서열에 두고 있는 것도 인생에 있어서 그만큼 비중이 크게 자리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중학교 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어 학교 도서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거기서 한 시인을 스승으로 만났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든 시골에서 문학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신 분이 스승이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아직도 가끔씩 뵙고 시를 넘어서 인생철학까지 배우고 있다. 그 분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시인이 되어있고 시가 원동력이 돼 삶의 고단함을 이겨나가고 있다.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다 맘대로 되는 것은 없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죽을 고생 다하여 노력해도 내가 뜻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보다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복잡한 것이어서 스스로초래하는 일은 아니지만,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 줄 때도 있다. 맑은 날이 있으면 비오는 날이 있듯이 말이다. 아무리 보잘 것 없다고 해도 나를 낳아준 부모를 부모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남들이 스승을 시기하고 음해해도 나의 스승은 나의 스승인 것이다. 스승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우러러볼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믿고 따라야 할 존재다. 하지만 최근 이런 스승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스승이라는 존재가 갖는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흐트러짐없는 자세로 스승, 더 나아가 모든 사람에 대해 신뢰, 신념을 가질 때 진짜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또 스승은 제자를, 제자는 스승을 아껴주고 사랑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아름다워지리라. 집 나간 아이처럼 떠돌다 보면, 우선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추위가 닥쳐왔을 때 누가 바람막이가 돼 주겠는가.   ◇ 정이랑 △시인. 본명 정은희. △\'불교문학상\' 수상. △1997년 \'문학사상\' 신인상,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98년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 500만원 수혜시인 선정. △현재, 대구시인학교 사림시, 시원 동인.
58    씹으면 고소한 글 댓글:  조회:1265  추천:19  2009-03-09
  mail_con p {margin: 0 0 2px 0;}   [영남일보/문화산책]고은시인이 하신 말씀- \"니네 스승 잘 모셔라\"  [영남일보/문화산책]고은시인이 하신 말씀- \"니네 스승 잘 모셔라\"    [영남일보]<문화산책>이은림시인-\'K에게\'           [문화산책] K에게  고은시인이 하신 말씀- \"니네 스승 잘 모셔라\"   *이은림 시인 K, 며칠 전 설악산 백담사엘 다녀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산과 바다 곳곳에서 문학행사가 펼쳐지는 데, 제가 다녀온 백담사에서는 만해의 짙은 흔적에 걸맞게 한 계간문예지가 매년 \'만해시인학교\' 를 개 최하고 있습니 다. 아직도 시는 건재했습니다. K, 어린 학생부터 나이 지긋하신 분들까지 스스럼없이 먼길을 달려가게 만 들 만큼 강한 흡인력을 지녔더군요. 대구에 서부터 일행들과 함께 12시간을 소요해서 찾아간 그곳이 저 역시 만족스러 웠습니다. 온산을 휘감던 엷은 구름떼, 흐느적거리는 물안개의 몸짓하며, 사방으로 줄기 차게 튀어 오르던 물소리... 그리고 3박4일의 일정 내내 마 치 시에 처음 매료된 듯한 눈빛을 가진 사람 들과 스치고 부딪고 마주치느 라 마냥 즐거웠지요. K, 시라는 것은 비단 문학성뿐 아니라 인생이라든가 종교, 문학 전반의 모든 깊이를 두루 갖추어야 한다 는 것, 이미 잘 알고 있겠지요. 때문에두 귀, 두 눈은 무조건 열어두어야 하는 거지요. \"백담사 계곡물은 부지런 히 흘러서 인제 원통을 지나 동해 바다로 뛰어들었을텐데 여러분들은 왜 아직 여기 남아있습니 까\" 하던 \'만해시인학교\' 교장 고은시인의 말은 참 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시에 대 한 집착을 안고 앉 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던진 화두(話頭)였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더 절실히 와닿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고은시인의 말 인데 다른 어떤 말보다 악센트가 강하더군요. \"니네 스승 잘 모셔라\" 는 한 마디. 그래요, K,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핵심의 말 아닐까요. 스승, 아니 부 모조차 필요없는 시대에 도대체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든든 한 버팀목이 없다면 넝쿨식물들은 땅바닥에 맥없이 쓰러졌을 겁니다. \'문 학 이전에 인간성\' 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잊지 말아야 할 건 절대 잊지 말아야지요.   <이은림시인>
57    박수. 열반. 시 댓글:  조회:1105  추천:22  2009-03-08
박수. 열반 . 시 장백산 제 1기 시들을 읽고 최흔 소해의 <<장백산>> 첫기에 실린 료녕작품집에 실린 시들을 보면서 박수. 열반. 시라는 글제목이 떠오른다 . 박수란 당연히 료녕의 숨결이 보이는 시들에 환영을 보내는 것이고 , 열반이란 새로운 시의 탄생을 말하는 말로서 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는 소설이나 수필에 대하여서는 아는것이 없으니까 시에 대해서만 말하려한다. 여러 시인들의 시가 열아홉수가 떠올라서 료녕의 시모습이 보인다. 로시인도 등장하고 새세대들로 등장하여 자신의 인기를 자랑하는데 필자가 여기서 진맥해 보고싶은 시들이 따로 있다. 김옥화의 <<달맞이꽃>>, 박경상의 <<10월>>, 정란의 <<밤의 언어>><<가을 풍경>> 등이다. 이 몇수의 시들은 열반의 풍경이 보인다. 시로서의 텍스트를 다룸에 있어서 이런 시들은 우리가 알고있는 사유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시인자신의 새로운 생명체험을 시로 번지고있다. 김옥화시인은 <,달맞이꽃>>에서 잊혀진 기억들을 넝쿨로 이미지화하면서 새로운 생명의 탄새을 그리고 있고, 박경상의 <<10월>>에서는 가을이란 녀인이 걸어가는 풍경을 사진사답게 몬따쥬수법으로 모저모를 그리면서 슬픈계절의 새희망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란시인은 <<밤의 언어>>에서 죽어가는 시간들의 아름다움과 그속에 탄생하는 기의한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가을 풍경>>에서는 떠나가는 가을의 잃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이건 물론 필자이 나름대로이 생각이다. 이러한 시들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러 가지로 풀이해 볼수있는 현대적기법이 비교적 잘 익어있는 시들이라고 해야 할것같다. 이런 시들은 독자들에게 무수한 의문을 던져주어 독자들도 시를 생각하면서 시인과 함께 나름대로 시를 완성해 보게한다. 얼핏 보기에는 모를 말과 넋두리같은 감이 들지만 음미할 가치가 있어서 시를 다 읽은 다음에도 시인이 왜 이런 시를 썼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며, 시인이 하려는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탐구해 보게 한다. 사실 시인은 이 우주에서 자신만이 찾은 령혼의 새로운 세계를 독자들앞에 보여주면서 엉큼하게도 제 견해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달맞이꽃>>을 보면서 버려진 기억들이 넝쿨로 돋아난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넝쿨은 무었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으며, 내몸은 가볍게 반짝이며 날아올라 한송이 달맞이 꽃으로 피여난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10월>>을 읽으며 녀인과 함께 걸어가노라면 노란 랑만으로 온거리를 뒹구는 바이올린 연주곡이며, 익은 속살이 비집고 나오고 탕녀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붐비는 정거장의 남자들이며, 해산의 진통을 감내하는 녀인의 아픔이며...가 무엇을 의미하며 나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으며, <<밤의 언어>>에서는 이러저러한 검은것들이 나의 관속에는 왜 누우며, 비인곳에서 새로태여나는 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으며, <<가을풍경>>에서는 유방잃은 라체들의 유혹과 메마른 입술들이 갈구하는 찬송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모든것을 정란시인이 말한것처럼 불안 (佛眼)의 눈길, 혜안의 눈길로 찾아보고 답안을 나름대로 내리는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러노라면 나름대로의 느낌에 닿을것이다.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면 되는거지 어떤 공통적인 답안을 얻는것이 아니다. 공동한 답안이 나오는 시는 벌써 진부함이 따라서게 된다. 답안이 확연하게 다 나오면 더는 흡인력이나 매력을 잃을것이 아니겟는가, 수확문제를 푸는것처럼 답을 맞추면 더 추구할것이 없는것이다. 이미지속에 어떤 답이 있을 때 그것이 시로서의 참신성을 확보하는것이 시지 한번 읽어보면 인차 이런거였구나 하면 다시 흔상할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에 시들을 보면 시언어가 어떤 고정된 관념으로 쓰인것이 아니라 시인이 일상어를 시의 언어로 갈고 닦아서 쓴것들이라겠다. 시에 나타난 언어들은 새로운 의미로 시에 등장하여 시인의 내면의 자아갈등을 보여주고있을뿐만 아니라 시인의 새로운 추구와 창견을 보여주고있다. <<달맞이꽃>>에서의 세포마다 아프게 파고드는 지꿎은 넝쿨이라든가, <<10월>>에서 만월의 풍만한 곡선을 가르는 진통이 지상꼭대기에서 하얗게 내려앉는것이라든가, <<밤의 언어>>에서의 나의 검은 관속에 누워보는 검은 시간들이라든가, <<가을 풍경>>에서의 맥빠진 꼬리를 흔들다가 숨을거둔 개라든가, 하는 언어들로 직조된 이미지들은 미상불 우리앞에 시의 언어의 새로움을 맛보게 하고있을뿐만아니라 우리앞에 이제까지 보지 못햇던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고있다. 이런 언어와 이미지들은 우리의 사유의 령역을 넓히는데 활력소를 부어넣어 주고있으며 시의 공감대를 천천히 뜨겁게 우려내고있다. 시는 열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반은 시를 예술품으로 만들며 열반은 글을 시로 만들것이라고 생각한다. 료녕시인들의 새로운 정진을 기대해본다. 2009.2.12
56    김일량시인의 새로운 한 발자국 댓글:  조회:1125  추천:32  2009-03-05
김일량시인의 새로운 한발자국 어제, 2009년의 연변문학 제 2기를 보았다. 표지 안에 김일량시인의 <<눈 내리는 밤>>라는 시를 실어서 이채로운 감을 느끼였다. 이번 기에서 <<눈내리는 밤>>의 시가 아마 수준작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같다. 시의원문은 이러하다. 눈이 내린다/하늘이 옷을 하얗게/벗는다//밤은 쫓기여 /넘어지고 엎어지며/끝없는 깊이로/빈우물에 드레박처럼 떨어지고//푸실푸실/하늘이 옷벗는 소리를/하얀 눈이 /조용히 부려놓는 밤//땅은 꽃가슴 열고/부드러운 비단바람 접어보던/속살 간지러운 그 물소리 추억하며/보슴털이 쏙쏙 돋는 꿈 꾸는데//머리 긴 시인은/싸구려 소주로/가슴에 숯불을 벌겋게 지피며/하늘이 하얀 속살 깎아내는 소리를/ 그 아픈 소리를 찾아가고있다 부드럽고도 아름다운 선률이 밤이 가는줄 모르고 흐르고있는 시이다. 각련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같다. 1련 눈은 하늘이 옷벗는것으로. 2련 눈내리는 밤은 깊어가고 있다. 3련 하얀 눈은 옷벗는 소리를 땅에 부려놓는다. 4련 땅은 지난 봄날을 그리며 새봄을 생각한다. 5련 시인도 희망의 봄을 찾아간다. 시는 시작이 중요하다. 어떤 사유로 시를 시작하는가 하는것은 시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아주 관건적인 문제이다. 새로운 사물의 창출로 시를 시작하는가 아니면 선입견으로 시를 시작하는가 하는것은 시가 시로 될수있는가 아니면 시가 시형태를 취하거나 비시로 되는가 하는 시금석이다. 김일량시인은 창의적인 사유로 시를 시작하여 시의 새로움을 획득하고 있다. 밤에 눈이 내리는것을 보고 하늘이 하얀옷을 벗는다고 한다. 색깔에 의한 그의 시적창출이 새롭고 신비롭다. 이런 시적이미지의 창출은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를 눈이 확 뜨이게 펼쳐 주고있으면 왜 눈을 하얀 옷이라 하였겠는가 하는 의문도 묻어준다. 제목이 눈이 내리는 밤이여서 실상 첫행을 불필요한 행이여서 조금 아쉽다. 2련에서는 밤이 깊어가는것을 쓰고 있는데 밤이라는 이 정적인 사물을 동적으로 표현하고있으며 밤이 깊어가는것을 드레박이 떨어지는것으로 씀으로써 추상적인 의미를 시각하고있어 우리들 눈앞에 하나의 그림을 펼쳐주고있다. 그런데 2련이 문제가 있는것 같다. 처음에 옷을 벗는것으로 멋있게 시작했는데 밤을 쓰고있으니 처음에 떠올린 변형과는 별로 큰 관계가 없는 곳으로 시는 달아나고있는것이다. 하긴 밤이 깊어갈수록 눈은 더 큰 눈잎으로 내릴수도 있는데 이것을 쓴다면 필자가 보기에는 혹같은 감이 없지 않다. 만약 기어코 쓴다면 아주 간략하여 한줄의 이미지로 1련이나 3련에 붙였더면 하는 생각이 든다. 3련은 다시 1련을 깊이있게 형상화하고있다. 옷벗는다로부터 옷벗는 소리를 땅에다 부리우는것을 썼다. 여기서 푸실푸실이 2중적의미를 가지는것이 고소하다. 한가지는 눈이 내리는 표현이고 다른 한가지는 눈이 내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려놓은 밤>>이란 시구의 참신함을 보여주고있다. 다시말하면 <<하늘이 옷벗는 소리>>를 <<조용히 부려놓는 밤>>은 어색한 같지만 새로움을 떠올리고 있다. 소리란 청각적인 감각으로서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 사물이지만 시인은 부려놓는다는 시각적인 언어와 흐름을 맞춤으로써 시적이미지를 기묘하게 부여하고있다. 4련은 눈이 오는 겨울에 땅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고있는데 <<꽃가슴 열고>> <<비단바람>><<속살 간지러운 그 물소리>>등 언어들이 추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는 족하다. 마지막행 (보슴털이 쏙쏙 돋는 꿈 꾸는데)이 과시 시적언어의 한 절창을 이루는 같다. 보슴털이란 다름 아닌 새싹이다. 시인은 이 새싹을 보슴털이라 하지 않고 새싹이라고 했더라면 아마 시맛을 잃었을것이다. 이 보슴털은 변형된 시적언어로서 새봄을 상징하는 표현인데 세부로 전반을 표현하는 시인의 시적솜씨가 잘 발휘된 언어라 하겠다. 마지막련은 눈오는 밤과 시인의 감수를 련계시키는 작업이다. 시인의 마음에도 보슴털이 어떻게 일렁이고 있는가를 시인은 밝히고 있다. 눅거리 소주로 눈오는 밤의 흥취를 섭렵하면 서 <<숯불을 벌겋게>> 달구고있는 시인의 모습이 확연성을 획득하고 있는데 여기서 숯불이란 새봄을 맞는 시인의 열정과 희망을 표현하기에 걸맞는다고 할수있다. 아래의 두줄에는 문제도 있고 묘미도 있다. <<하얀 속살을 깎아내는 소리>>가 일량시인으로 말하면 문제이다. 언어표현은 아주 좋은데 아마 그전에 달을 쓸 때 하얀 속살이란 언어를 써서 시의 맛을 돋군 명구가 있은 같은데 오늘 다시 중복하니 아쉬운 감이 든다. 이언어는 하얀 옷을 벗는다와도 련결이 잘 되지 않아서 별로이다. 시인이 아픈 소리를 찾아간다고 하는데 이 아픈소리라는 언어는 반어로 쓰인것으로써 잘 쓰인 언어라겠다. 눈내리는 밤을 읊어보면 차분한 기분과 새로운 의미지의 창출로 하여 새로운 시맛이 다분히 안겨온다. 아마 김일량시인이 이 시로부터 새로운 시의 세계로 한 발자국 내디딘 감이 든다. 이제 더 힘차게 걸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9.3.5
55    의미의 테두리와 시인의 상상 댓글:  조회:1126  추천:20  2009-02-23
의미의 테두리와 시의 상상력 최흔 시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가야하는가? 기성의미의 테두리안에 있을것인가? 기성의미의 테두리밖에서 자유로의 날아다녀야 하는가. 2009년 <연변문학> 첫기에 나온 시들을 보고 이런생각이 떠오른다. 지영호, 김춘희, 김선희, 백진숙 등 시인들의 시가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시란 일상적인 사유의 울타리를 짓부시고 새로운 사유를 부여하는것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것을 꾀하는 일이라겠다. 이들의 시가 남다른 이미지 창출을 하면서도 울타리 안에서 그냥 놀고있다는 감이 들어 서운한 감이 없지 않다. 착중해서 지영호시 두수를 보기로 하자. 영호시인은 <고독>과 <비방>이라는 두수를 올리고있다. 고독의 전문은 이러하다. 내가 고독의 노예로 되던날 리성을 잃은 고독은 밤새도록 나를 벗겨놓고 처참하게 유린했다 내가 고독의 주인이 되던날 나의 보잘것 없은 필 한자루는 고독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비수로 되었고 내가 쓰는 나름대로의 시는 고독을 지배하는 주문이 되었다 시는 고독의 노예로 될 때와 고독의 주인이 될 때의 두가지 경우를 가지고 이미지를 추출하고있다. 시인은 1련에서 고독의 아픔을 쓰고 2련에서는 고독의 즐거움을 쓰고 있으면 전반을 통하여 고독이 인간에게 주는 존재가치를 나름대로 설파하고있다. <밤새도록 나를 벗겨놓고/처참하게 유린했다>는 고독의 혹독성을 말하는 이미지로써 비교적표현이 괜찮다고 할수있겠다. 고독의 주인행세를 하던날은 필이 비수로 변형되면서 시의 문을 열어주고 그비수로 쓴 시는 <고독을 지배하는 주문이 되었다>고 한다. 고독의 성과를 말하는 이것도 시적으로 비교적 잘된 표현에 넣어도 되리라. 고독의 아픔과 고독의 환희를 노래한 이 시는 우리에게 일정한 계시를 준다, 즉 고독은 고통스럽지만 고독에 시달리면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고. 여기서 말하는 시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겠다. 말 그대로를 풀이하면 시는 일종 고독속에서 령혼의 몸부림으로 씌여진다는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시란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생명체라고도 할수 있는데 이런 새로운 사물이나 생명체는 미상불 고진감래의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그런데 이 시에는 아래와 같은 부족점을 안고있는같다. 첫째: 시를 고독의 반면과 정면 두가지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런 수법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써먹은 수법으로써 노래의 절가처럼 고독자체의 깊이를 파는되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것이다. 둘째: <리성을 잃은 고독>이라는 시구와 <처참하게 유린했다>는 시구는 시적표현으로 되기를 거부하는 감이 든다. 모든 언어가 추상적언어로 조합된것이여서 시적으로 되기에는 좀 부족한것 같다. 시구는 될수록이면 형상성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시구들은 추상에서 추상으로 가고있어서 독자의 머리에 아무런 형상도 떠올리지 못하고있다. 지영호시인의 시 <비방>을 더 보자. 한 사람의 혀는 인간의 옷을 홀랑 벗긴다 두사람의 혀는 인간의 목에 개머리를 의식한다 세 사람의 혀는 살아 숨쉬는 인간을 화장터에 운반한다 <비방>은 <고독>보다 개념화적인 언어가 없이 이미지적으로 첨부터 잘 끌어내려갔다고 할수있다. 이것이 비방이 거둔 성과라면 성과다. 시인은 세가지 층차로 비방의 참혹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지막에는 죽음을 초래한다면서 비방자들을 질타하고있다. 여기서 <혀>라는 언어를 잘 택하였다고 하리라. 한사물의 어느한 세부를 틀어쥐고 전반 사물을 말한다는것은 시쓰는 사람마다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혀는 인간의 한 개 구조로서 옹근 인간을 대용한 언어겠다. 이 시의 치명적인 약점은 시를 구상하는 상상력이 차하단데 있겠다. 기성의 울타리에서 시인의 사유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머저리 셋이 모이면 똑똑이를 머저리로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시인의 사유는 여기에서 맴돌고 있는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자면 사유의 울타리가 넓어야 한다. 시인의 상상은 어떤 사물의 성질에서 일탈하여 만리창공을 날수있으며 고금중외를 메주 밟듯할수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비방의 나쁜점울타리에 갇혀서 헤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미지는 잘 흘러 내려갔지만 사유의 빈약과 상상의 빈약을 초래하게 되었다. <문심조룡>에서는 시를 쓸 때 먼저 기성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영호시인은 <고독>과 <비방>에서 고독과 비방이라는 언어의 기성의 관념을 지워버리는 힘이 아직은 미약하게 나타나서 아쉬움을 남기고있다. 전번에 한족노래를 듣는데 가사 한줄이 매우 인상적이였다. <써레질로 온 하늘에 노을을 일구네>. (犁耙耕出滿天霞) 기성관념으로 말하면 써레질로는 밭을 갈지 절대 하늘을 갈수 없으며 또 간다해도 노을을 만들어낼수는 없는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써레질로 하늘에 노을을 일군다고 하였다. 이런수법은 시인이 한껏 상상을 펼치면서 아름다운 환영을 추출해낸것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런 수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가. 이런 수법은 기성의 관념을 무시하고 시인의 상상을 펼치는 작업인것이다. 앞으로 지영호시인은 이러한 시적사유에 공력을 들이면 보다 훌륭한 시를 쓰리라 생각된다.
54    시에 대한 대가들의 론술(3) 댓글:  조회:898  추천:39  2009-01-31
낮과 밤쥬네트시의 작업은 시의 일반적인 노력이 언어를 자연화하고 사물화하려고 하는만큼, 지적인 동기를 지워버림으로써 더 물리적인, 따라서 상상력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매혹적인 련상을 가능하게 하려는데 있다시행이란 여러말들을 가지고 , 언어에는 낯선 새롭고 전체적인 그리고 주술같은 한마디 의 말을 재창조하는 것인것이다어떻게 읽을것인가                  트베랑 토도로브만약 문학연구가 과학이 되려고 한다면 방식을 그 유일한 주역인물로인정해야 할것이다. 시학의 대상은 개별적인 작품들로써 보다는 더 훨씬 더 문학의 <방식>들, 즉 문학적언술의 작용태를 묘사하는 개념들로써 이루어질 것이다.새로운것은 조합일뿐, 조합들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규칙들은 변함없이 남아있고, 오직 그것들의 적용순서가 다를 뿐이다...새로운 텍스트는 그것을 산출한 조합틀자체를 변모시키며, 규칙들의 적용순서만을 변화시킬뿐 아니라 그것들의 성격마저 변화시키는것이다. ...작품이 그것을 산출시킨 체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묘사할 수단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묘사는 모든 작품들이 대중문학에 속한다고 암암리에 주장하는 셈이다. 문학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과학적인 변이를 전복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공격하는 바로 그 언어의 도움으로 문학을 완전히 읽어낼수있다고 주장하는것은 지극히 모험스러운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것은 문학의 실패를 전제하는것과도 같은것이다.<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의 서문                 이용 베라발(프랑스)상징의 원천은 무의식속에 있다.우리는 작가도 무질서속에서 출발하고 그것을 고치고 지우면서 그이 질서를 쟁취한다고 말할수 있다.비평가는 질서에서 출발하여 그가 만약 그 질서에 만 충실한다면 그는 이본이나 혹은 다른 자료들을 통해 무질서로 거슬러 올라갈수도 있다. 반면 분석자는 무질서에서 시작하나 그는 거기에만 머물러 있을 권리가 없다. 그는 무질서의 혼란을 비밀스럽게 제시하고있는 질서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인간과학중심담론에 있어서의 구조와 기호놀이                               자끄 데리다(프랑스 유태인)하나의 변형결과로 인해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단계로 부터 모든것이 의미를 갖는 단계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모양과 모양 만들기   장 보드리야르(프랑스)이미지의 계기적 3단계는 다음과 같다1. 그것은 근본적현실의 반영이다2.그것은 근본적 현실을 감추고 도착한다3. 그것은 근본적현실의 부재를 감춘다4. 그것은 어떠한 현실에도 관계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자체의 모형이다문학의 부권      샌드라 길버트(녀)언어는 의미를 낳은 발화의 측면과 그 언어의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주고의 측면으로 나우어 생각할수 있다. 전자는 언어가 무엇을 기리키느냐는 지칭에 대한 문제고 후자는 그언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하는 구조문제이다.19세기에는 언어의 발화적측면을 보았으니 이제 구조의 측면을 보자. 언어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언어는 기표와 기의 혹은 지시체와 지시물로 이루어졌다 . 그리고 이들은 한조직체내에서 자의적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 짝이다...기표와 기의는 신이 아닌 인간이 자의적으로 붙여놓은 짝이여서  그틈새가 그리 견고하지 못하다... 전달되는 조건에 의해 같은 언어의 의미가 다르게 되는것도 기표와 기의가 자이적관계이기 때문이다구조주의 역시 소쉬르 언어학에서 비롯된 학문이다. 차이에 의해 변별력을 지니는 언어는 그 구조가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졌다. 은유는 대체요 환유는 인접성 혹은 연속성이다. .. 은유는 여분없이 똑 떨어지게 바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상징이요 환유는 옆집문으로 쑥 들어가는것이니 자꾸만 여분을 남기게 되는 어긋남이다.
53    시에 대한 대가들의 론술(2) 댓글:  조회:981  추천:24  2009-01-30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제라르 쥬네트(프랑스)문학비평은 그  대상의 언어로써 말을  하는것이다. 그것은 메다언어 즉 <<언술에 대한 언술>>이다.어떤 텍스트도 그것이 차라리 관상물로 받아들여지는가, 또는 차라리 전언으로 받아들여 지는가에 따라 문학일수도 있고 문학이 아닐수도 있다비평작업의 재료는 안닌게 아니라 작품들이 일단 분해되여 얻어지는 테마 , 모티브, 핵심적단어, 강박적은유, 인용, 자료,카드, 인용출처 등등... 바로 <<인간 소작들의 잔여물들>>인것이다.원초의 대상작품은, 마치 림기응변적 수선가가 모든 목질에 유용할 요소들을 추출하기 위해 파괴하는 그 원래의 전체적인  구조물들처럼 하나의 구조물이다작가가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면 비평가들은 문학 즉 기호의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야콥슨 자신은 1936년에만 하여도 푸슈킨의 어느 시작품을 론하면서 이미지 없는 시의 존재를 론한바 있다. 1958년에 그는 이문제를 다음과 같이 거론하였는데 강조점을 두드러지게 옮겨놓고 있다. <<개론서들은 이미지 없는 시작품들의 존재를 믿고있지만 그러나 실상 어휘적전의에 있어서의 빈약은 화려한 문법적전의와 문채들로 벌충(모자라는것을 대용)되여있다.>>의미의 애매함은 자체에 중심을 둔 모든 전언의 본질적이고 제거될수 없는 특성이다. 요컨대 그것은 시의 필연적인 규결점인것이다. 우리는 엠프슨과 더불어 , 의미의  애매함의 조작은 시의 뿌리 자체에 있다는것을 되풀이해 말하고자 한다. 오늘날 문학연구에 열려있는 가장 새롭고 가장 풍요로운 길의 하나는 문장의 테두리 - -언어학자체의 경우에는 뛰여 넘을 수 없는--를 넘어 언술의 대단위들의 구조를 연구하는 것일것이다. 문학의 가장 높은 효률성은 독자들의 기대와 <세계의 모든 기대를 릉가하는> 기대리탈의 놀라움, 독자들이 바라고 예견한 <<진실임직한것>>과 창조의 예측 불능적인것, 이 둘사이의 미묘한 작용에 놓여있다. 하지만 예측불능적인것 자체가 , 위대한 작품들의 무한한 충격자체가 그 온 힘으로 진실임직함의 은밀한 심층에서 반향하는게 아닌가?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대한 시인은 창조하는 자이기보다 발견하는 자이다.>>아리 스토 텔러스에서  라 아르프에게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 이미 이젠 우리들은 믿지 않고 있으며 고전주의자들이 무엇보다도 훌륭한 류사성을 추구햇던데 반해 우리들은 반대로 근본적인 독창성과 절대적인 창조를 주장한다.
52    시에 대한 대가들의 론술(1) 댓글:  조회:1026  추천:32  2009-01-30
시에 대한 대가들이 문장을 단편적일지라도 공부하면 많은 계발을 받으리라 생각되여  아래에 필자가 공부한 대가들의 일부 문장들을 절록하여 공개한다. 독자들이 사고하면서 열심히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구조주의 활동                                     롤랑 바르트모든 구조주의 활동의 목적은, 그것이 사유적이든 시적이든간에, 하나의 대상을 재 형성하여 그재형성가운데서 그 대상이 작용태의 규칙들(기능들)이 나타날수 있게끔 하는것이다. 따라서 구조는 기실 대상인셈인데,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지향되고 관심이 표현된 모식이다 왜냐하면 모사로 이루어진 대상은 자연적인 대상속에 보이지 않는것, 또는 차라리 리해불가능한 것으로 머물러있던 어떤것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인간은 현실을 취해서 분해하고 그런다음 재구성한다.이것은 겉보기에는 아주 대단찮은 일이다.(이 때문에 혹자들은 , 구조주의작업이 무의미하고 흥미없으며 무용하다...운운)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다른한 관점에서 본다면 , 그 대단찮은 일이 결정적인것이다. 왜냐하면 구조주의 활동의 그 두 대상, 또는 두 단계사이에  새로운것이 산출되는데 , 그 새로운것이야 말로 바로 일반적인 리해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모사란 대상이 지능이 덧붙여진것이며, 그 덧붙임도 , 그것이 바로 인간자체, 인간의 력사, 상황,자유이고 인간의 정신에 대립해오는 자연의 저항자체라는 점에서 인류학적인 가치를 가지는것이다.... 이경우 창조 또는 사유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상>이 아니라, 정녕 그것과 닮은 한세계를 제작하는것이고 그것은 전자의 세계를  복사하기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리해가능한것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본질적으로 모사활동이라고 말할수 없고 , 바로 이점에 있어서 엄밀히 말해, 한편으로는 학문의 구조주이와 다른 한편으로 특수하게는 문학, 일반적으로는 예술사이에 어떤기술적인 차이도 없는 것이다. 량쪽 모두 실제의 유사성에 토대를 둔게(사실주의라고 하는 예술에서 처럼) 아니라, 기능의 유사성(레비스트로수가 상동성(相同性)이라고 부르는)에 토대를 둔 그런 모사속에 속하는것이다.  투루베츠코이가 음성적 대상을 변양태들의 체계의 형태로 재구축할때, 조르쥬뒤메질이 가능적인 신화학을 수립할때..바로 구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대상을 조립해 낼때에 행하는것과 다른 어떤것을 하는것도 아닌것이다. 모사활동을 당하게 된 원초의 대상이 세계에 의해서, 이미 모야져있는것채로 주어진것이든(이미 형성되여있는 언어, 사회,작품에 대해서 행해지는 구조적분석의 경우), 또 아직 흩어져있는채로 주어진것이든( 구조주의적인 (구성)의 경우) 또 그 원토의 대상이 사회적현실에서  취해진것이든, 상상적인 현실에서 최해진것이든,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다. 예술을 정의하는것은 복사적인 대상의 성격이 아니라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실주의 끈질긴 편견인데) 인간이 그것을 재형성하면서 거기에 덧붙이는것이다. 기술이야 말로 모든 창조의 존재자체이다. 그러므로 구조주의가 다른 양식의 분석이나  창조에 대비되여 특징적으로 존재하는것은, 구조주의적 활동의 목적이 불가해소적으로  어떤 기술과 관련되여 있다는 한에서 그러한것이다. 대상을 재구성한다는것은 기능들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이며, 말하자면 방법이 작품을 만들어내는것이다. 구조주의적 작품이라기보다는 활동이라는 말을 해야하는것은 바로 이때문이다.구조주의적작업은 전형적으로 두가지 조작을 포함하고있다. 재단과 배렬, 모사의 활동에 주어진 원초의 대상을 재단한다는것은 , 거기에서 이동가능한 단편들을 발견한다는것인데, 그 단편들이 반드시 차이가진 상황이 어떤 의미를 태여나게 한다. 단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의 외형에 가해지는 가장 작은 변양이라도 전체의 변화를 불러오게끔 되여있는 그런것이다....모든 단위체들은 ... 그것들의 경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경계에는 ,그것들을 언술에 나타나고있는 다른 단위체들과 가르는 경계가 있고 (그것은 배열의 문제이다), 또 그것들은 다른 잠재적인 단위체들과 가르는  경계가 있는데 그 잠재적인 단위체들과 그것들은 하나의 분류항(그것을 언어학자들은 계합체계라고 부른는데)을 이룬다. 이 계합체계라는 관념은 구조주의적 비전이 어떤것인가를 리해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것이라고 여겨진다. 아주 제한된것일수 있을지라도 대상들의 예비부분을 말하는것으로 , 거기에 인용의 행위에 의해 문제의 대상 즉 단위체를 불러내게 되는데, 그 단이체는 현재(显在)하고있는 뜻을 부여 받을수 있는 그런것이다. 계합체계대상을 특징짓는것은, 그것이 같은 분류항에 속하는 다른 대상들과 어떤 유사관계와 상의관계에 놓여있다는것이다.작은 계합체계에 속하는 두 단위체는 비슷한 점을 약간 가지고 있으므로써 , 그들을 가르는 차이가 확연한 명백성을 나타내게 되는것이다... 동일하면서 동시에 다양해야 , 그래야, 그모든 언술들과 작품들이 리해가능한것이 되는것이다. 이리하여 재단의 조작은 모사에 있어서 최초의 분산된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구조의 단위들은 결코 무질서한 게 아니라, 구성의 지속가운데서 배치되고 삽입되기 전에도 각각의 단위체는 제고유의 잠재적인 예비분들과, 가장 작은 차이라고 하는 지고한 원동력적원리의 지배를 받는 지적인 조직체-결합체를 형성하는것이다....우선 구조주의는 현실적인것도 아니고 리성적인것도 아닌, 가능적이라고 하는 , 대상의 새로운 범주를 나타내게 하며, 그리하여 정보현상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하는중에 있는 여러과학들이 복합체에 그 일부분으로 참여한다. 다음 특히는 그것은, 인간들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유하게 인간적인 과정을 확연히 밝혀준다..구조주의 대상은 어떤 의미들을 풍요롭게 가지고있는 인간이 아니라 의미들을 제조하는 인간이라고 말할수 있다.....그것들의 현재이 존재는 그것들의 현재를 존재하는것으로 서 과거의 행위이다. 그것들은 과거로 넘어간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예술가와 분석가는 의미의 길을 다시 걸을뿐 , 의미를 지칭할 필요는 없다. 그의 기능은 헤겔의 례를 다시 취한다면 하나의 점술이다. 고대의 점장이처럼 그는 의미의 장소를 말할뿐 의미를 명명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특히 문학이 범술이기  때문에 , 그것은 하해가능한 것인 동시에 의문적인것, 말하는것인 동시에 침묵하는것이며,그것이 세계와 더불어 다시 걷는의미를 통하여 세계에 참여되여 있으면서도 , 세꼐가 가다듬어내는 우연적인 의미들에서 해방되여 있기도 한다, 그것은 완성하는 이에 대해서는 대답이지만, 자연에 대해서는 언제나 질문이며, 질문하는 대답이고 대답하는 질문이다도대체 어떻게 구조주의적인 인간이 , 때로 그에게 건네지는 비현실주의라는 비난을 받아들이수 있겟는가? 이 세계에 형식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형식은 개입되여 있지 않는가?>               롤랑바르트: 불란서(1015-1980) 신비평가, 구조주의에 자리잡은 기호학자
51    한국에서 필자를 주목하고 있다 댓글:  조회:1079  추천:35  2009-01-23
새해를 잡으면서 뜻밖으로 필자의 글들을 주목하고 있다. 상관물변형(다른 곳도 있음)이란 검색을 해보면 조글로에 실린 필자의 글을 전부 퍼다가 자기네 사이트를 장식하였다 . 싸이트에서만 중시하는것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시인협회 신세훈회장님이 꾸리는 <<자유문학>>이란 잡지에서 필자의 <<이미지시창작론>>(조글로에< 현대시 쓰는 방법>이라고 올렸음) 새해의 첫기부터 련재하기 시작하였다.한국에서 시론같은 리론문장을 련재하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것이다신세훈 회장님과 필자는 인사나눈 일도 없었다. 일년전 <<시향>>시집출판기념식에서 나의 <이미지시창작론>을 다른 사람을 통하여 드렸더니만 돌아간후 나의 메일에 시기를 봐서 내주겠다고 하였었는데 드디여 련재가 되기 시작하였다.
50    변형과 상관물에 대한 한국시인의 글 댓글:  조회:1456  추천:34  2008-12-27
  시 창작이란 무엇인가김기택 (시인)시는 일상적인 언어의 말하기와는 달리 ‘창작’이라고 말한다. 창작이란 이전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왜 일상적인 언어는 창작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시는 창작이라고 하는가. 시를 쓰면 이전에 없던 무엇이 새로 있게 되는 것인가? 즉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로 바뀌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가 일상적인 어법, 산문적인 문장과 다르기는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거기에 창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행갈이나 연 구분, 리듬이나 비유, 상징, 반어, 역설 등을 사용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나 문장이 생기는 것인가?요즘 텔레비전에서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방영한다. 거기 보면 어느 유명한 식당의 요리라든가 또는 어느 지방의 특별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음식들이 소개되기도 하고, 어느 음식이 맛이 있는지 경쟁하기도 한다. 공중파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청자는 시각과 청각으로만 그 음식을 대하면서 상상할 수 잇을 뿐, 그것을 먹어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청자들에게 일일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음식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 출연자가 대표로 맛을 본다. 맛을 봤으면 시청자들에게 그 맛이 어떤지 말로 설명을 한다. 그 설명이란 것이 고작 ‘담백하다’, ‘깔끔하다’, ‘쫄깃쫄깃하다’, ‘고소하다’ 이런 정도인데,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출연자가 직접 먹어본 맛의 경험 그대로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즉 맛에 대한 감각 체험을 시청자가 비슷하게라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출연자가 하는 말은 ’직접 먹어봐야 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시청자는 출연자의 그 빈약한 말보다는 영상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데 훨씬 유리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의 맛을 체험적으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수천 년간 말을 써왔고, 단어나 표현법이 계속 생겨서 말이 계속 발전을 해왔는데도 말이다. 맛 뿐만 아니라, 소리는 어떤가? 처음 듣는 새 소리,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노래나 연주, 말로 그 느낌이나 감동을 실제 체험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을까? 냄새, 향기는 어떻고, 몰래 좋아하던 애인의 손을 처음 만졌을 때의 촉감은 또 어떤가? 또 감정이나 정서는 어떤가? 내가 이성에게 반해서 온몸이 그 사람에게 강력하게 끌리는 것을 느낄 때, 그 생생한 느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체험한 그대로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이 그 체험의 실감과 질감을 그대로 나타내줄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 그 느낌을 ’슬픔‘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실제의 느낌과 얼마나 가까울까? 어렸을 때의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떠오르는, 다시 체험하고 싶은 추억들은 또 어떤가? 이것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우리 몸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듯 생생하게 표현해 줄 마땅한 단어나 문장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우리 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실체가 느껴지는 생명체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생 내내 나와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체를 체험한 그대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내면에서 꺼내어 언어에 옮기고자 하는 순간, 그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은 개념으로 변하고 만다. 짜다, 달다, 아름답다, 곱다, 사랑, 슬픔, 괴로움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개념은 의미를 압축시켜 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가 체험한 것에서 몸의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빼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것은 몸의 생생한 체험을 머리가 처리할 수 있는 의미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슬프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이 체험한 그대로 느끼는 대신에 머리로 이해하고 만다. 그때 그 의미는 머리로 처리하는 정보라는 점에서 교통 상황이나 뉴스 같은 정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현대는 정보의 시대이고 개념화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여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게 됩니다. 정보는 곧 권력이며,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물이 되어 세계를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감이나 감정, 정서 등으로 체험한 살아있는 느낌,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도 없지만, 분명히 실체가 느껴지는 그 생명체(이것을 편의상 ‘이름 없는 생명체’라고 부르자)는 언어에 담는 순간 죽어버리게 된다. 체험이 개념으로 바뀌는 순간 의미라는 뼈다귀는 남고 체온과 떨림과 호흡이 있는 피와 살은 거의 다 제거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관습은 대부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거나 정보를 전달할 때 대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화한다. 그래서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우리가 체험한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 언어에서 주로 개념만 남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제거되고 나면, 그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 아마도 그 대부분은 언어를 통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에 기억으로 무의식으로 축적될 것이다. 저장되었다가 어느 순간 잠깐씩 단편적으로 환기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슬픔, 분노, 괴로움 등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숙변처럼 몸에 쌓여 무의식의 정신 작용으로 몸에 잠재하면서 왜곡된 형태로 행동이나 말이나 꿈에 나타나고 종종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심한 경우, 눈에 드러나는 정신 장애를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나 보이지 않는 이 생명체를 몸 밖으로 꺼내고 싶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 작용과 같이 그것들을 연민이나 공포를 통해 배설시키기고 싶을 것이다. 몸에서 꺼내는 방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그것을 말에 실어 내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감이나 감정, 정서와 같이 그 살아있는 체험은 개념화된 언어에 잘 담겨지지 않는다. 언어에 담는 순간, 살과 피와 체온인 체험, 감정, 정서 따위는 새어버리고 뼈다귀인 개념만 언어의 그물에 걸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 언어에 담겨지지 않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어떻게 산 채로 언어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환의 「깃발」의 첫 행,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자. 여기서 “이것”은 깃발을 지시하는 대명사다. 즉 “깃발”이 “아우성”이라는 말이다. 왜 깃발이 아우성일까? 깃발은 긴 막대기 위에 매단 사각형의 천 조각인데 왜 이 시각적인 사물이 청각적 이미지인 아우성이 되었을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깃대에 매달린 깃발을 상상해 보자. 깃발은 사각형의 천조각이다. 그 천조각은 얇고 가벼워서 바람이 세차게 불면 쉽게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깃발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천조각의 두 모서리는 깃대에 단단하게 메어있다. 바람의 힘에 의해 날아가려는 힘과 말아가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는 힘 사이에서 그 연약한 깃발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물론 펄럭이는 것이지만, 그 펄럭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떨기도 하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뒤틀리기도 하고 천조각의 물질성 때문에 물결무늬가 생기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몸짓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난폭한 힘과 깃대의 고집불통의 힘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천조각의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애타게 호소하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떨기도 하고 대단히 절박하게 용을 쓰고 있는 “아우성”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소리가 없다. 마치 벙어리의 몸부림처럼 그 아우성은 소리 대신 온몸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속에서는 울음 같은 격렬한 외침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소리는 나오지 않는 이 답답한 상황이 깃발의 격렬한 뒤틀림을 더욱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치환이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깃발의 몸짓이 무엇인가는 비교적 쉽게 환기된다. 현실의 제약을 뚫고 광대한 세계와 우주를 향해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억누르는 현실의 여러 가지 고집 붙통의 여건들 사이에서 유치환의 내면에 있는 깃발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미친 듯이 허공을 향해 격렬하게 떨고 뒤틀며 움직이는 깃발의 몸짓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시의 후반부에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그런 내면의 모습을 ‘깃발’이라는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깃발이 환기하는 ‘체험’과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의미하는 바를 비교해 보라. 시인이 그것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만 표현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몸속에 있는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개념적인 언어가 된다. 슬픔, 애달픔, 마음 따위와 같은 개념만 남고 시인의 몸속에 있는 생명체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개념’ 대신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제시한 것이다. 깃발의 격렬한 떨림과 뒤틀림, 날아갈듯 날개처럼 넓고 가볍지만 하늘을 앞에 두고 날아가지 못하게 두 모서리가 단단하게 묶여있는 모습, 그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는 연약한 천조각의 몸짓, 그러나 아우성을 들리지 않고 벙어리처럼 온몸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시인의 몸속에 있는 살아있는 감정이나 정서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 깃발이 독자에게 주어지는 순간, 독자는 깃발의 움직임 속에서 시인이 갖고 있었음직한 마음을 즉각적으로 환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개념적인 언어에 담아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개념 대신에 사물을 빌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깃발의 저 움직임과 유사한 마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깃발’은 바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에 해당하는 ‘객관적상관물’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찾는 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경험과 관련 있는 외부 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감각 경험과 유사한 사물을 통해서 감정이나 정서를 일시에 환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 언어 관습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버리고 그 개념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상관물이란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와 등가를 이루는 사물을 제시하고 그 사물을 통해 감정이나 정서가 환기되도록 고안된 일종의 폭발장치 같은 것이다.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에 뇌관을 만들어 놓고 그 뇌관을 건드려 그것들과 등가를 이루는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는 순간 그 폭발물이 폭발하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객관적상관물을 통해 표현된 시적 언어는 두 가지 면에서 일상 언어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첫째는 몸속의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머리로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객관적상관물은 개념의 뼈다귀만 남은 언어에 살과 피와 체온이 있는 살아있는 몸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형체 업         소리 없고 만질 수 없는 감정이나 정서를 마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변형시키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아는 것으로 끝나지만, 체험은 몸이 떨리거나 호흡이 가빠지거나 오싹해지거나 후련해지거나 흥분되는 것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로 객관적상관물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통해 체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는 단지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도록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만 제시하는 것이고, 독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 속에서, 자기 몸의 감정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체험은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된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깨워 만들어낸 체험이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한 것이 된다. 시인의 창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독자의 몸속에서 독자의 경험과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재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상관물은 시라는 장르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상 언어의 관습으로는 생명체를 언어에 담아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의 관습을 고의적으로 비틀어 사용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유치환의 시 구절은, 시인의 내면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깃발로, 깃발이라는 시각적인 사물을 청각적인 아우성으로, 그 아우성이은 소리가 없다는 모순 어법으로, 세 번이나 뒤튼 문장을 사용했다. 살아있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언어를 이렇게 뒤튼 것이다. 그래서 박이문은 시를 “언어를 통해서 언어에서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이라고 했으며,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지 않는 언어”는 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시는, 일상 언어 문법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전달하려는 특별한 언어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상 언어 관습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죽이기 때문에, 그것을 산 채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언어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창작이라고 할 때, 시가 만드는 것은 일상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 형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관습이기 때문에 많이 경험해온 소재나 이야기라도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고 경험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시를 창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없는 언어 관습, 처음 보는 언어 형식을 만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의 형식을 답습한다면 거기에 ‘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이렇게 볼 때 시라는 새로운 언어 관습은 앞에서 언급한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특성 외에 몇 가지 슬픈 운명을 더 타고 났다. 그 하나는 일상 언어와는 달리 오나성된 형태의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만들어 불완전하게 끝낸다는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라 반제품으로 독자에게 내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시인이 제시한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들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나 감정, 정서, 경험 등을 깨워 환기하여, 시가 설치해 놓은 ‘체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시는 독자가 참여하여 어떤 환기 작용을 통해서 체험을 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된 독자가 아니면, 이 환기 장치는 무용지물이 된다. 일상 언어관습에만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외국어 같은 모국어이다. 따라서 시는 그것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시적 언어에 훈련된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폐쇄적인 말하기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생계에 지장을 받거나 생활에 그다지 불편을 얻는 일이 없으므로 안 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시라는 말하기의 관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다수가 쓰지 않는, 마치 사멸되어 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처럼 슬픈 소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시가 가지고 있는 슬픈 운명은 창작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상 언어처럼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쓰면 그것은 더 이상 창작이 아닌, 모방이나 복제가 된다.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어 사용하는 말하기이다. 그리고 한 번 사용된 말은 다시 만들어서 쓸 수 없다. 많은 시가 창작되어 읽히면 더 소통이 풍요로워야 하는데, 시인은 고의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말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유치환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은 단 한 번만 창작될 수 있으며, 같은 문장은 물론 비슷한 문장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의사소통이 주용 목적인 말의 특성상 이러한 소통 방법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말을 쓴다면 대단히 생산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다. 시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실제로 시 읽기의 괴로운 경험을 상기해 보라)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쓰지 않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는 대단히 이상하고 특별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난해성과 소수만이 소통하는 폐쇄성과 기존에 있는 말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 말을 만들어 쓰는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3천년 이상 시를 쓰고 즐겨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the Poetics)은 기원전 330년 전에 씌어졌다. 시학에는 이미 호머(Homer, 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s)\'와 \'오디세이(Odysseia)\'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기원전 800년 전에 씌어진 것입니다. 중국의 공자가 엮은 ‘詩經’에는 305편의 작품이 있는데, 가장 늦은 것이 기원전 600년의 작품이고,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1115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가 3000년 이상 생명력을 유지해온 것은 그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특별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 즐거움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시는 사라져도 벌써 옛날에 사라졌을 것이다. 언어에 담겨지지 않은 이름 없는 생명체를 산 채로 언어의 그물로 잡을 때, 우리는 그 생명체를 밖으로 꺼내낼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이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는 씻겨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언가가 충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삽날이 목에 찍히자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피가 떨어지는 호스가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뱀은 쏜살같이어딘가로 떠난다가야 한다가야 한다잊으러 가야 한다- 이윤학, 「이미지」 전문농촌에서 삽을 들고 밭일을 하다가 뱀이 나타나면 일어날 법한 장면이다. 이 시는 삽날에 목이 잘린 뱀이 도망하는 사건을 객관적상관물로 제시하였다. 이 시는 독자에게 목이 잘린 뱀이 되어 그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1연은 그런 상황의 제시이다. 이 시의 백미는 2연이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는 것은 뱀이 머리가 없어 세상이 캄캄한데, 몸속의 살아있는 본능은 강렬하게 움직이는 상황의 묘사이다. 세차게 물이 나오는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세차를 하다가 놓친 상황을 상상해 보자. 호스에서 분출하는 물의 압력은 큰데, 물이 나아갈 방향을 굳게 잡아줄 손이 없으면 호스는 요동친다. 몸에서 삶의 본능은 세차게 밀고 올라오는데 세상은 캄캄하고 가야할 방향이 없는 뱀의 모습이 ‘목이 잘린 뱀’과 ‘호스’라는 확장은유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묘사는 머리가 없는 몸이 살아서 어딘가로 간다는,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체험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그 고통이 근원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삶의 어느 국면에서 몸과 마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고통을 경험했을 때의 화자의 심리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마음으로 크게 의지하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의 죽음이나 이별을 경험했다거나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큰 사고가 났다거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병의 진단을 받았거나 등등 자신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는 좌절을 겪었을 때의 심리상태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겪는 고통을 일상 언어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해도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시는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꺼내는 과정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 즐거움은 이미지를 통해 부정적인 정서의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경험이다. 끝으로 객관적상관물이 보여 주는 다른 효과는 그것이 시작과정에서 분출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데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읽어 본 이윤학의 시는 감정을 격정적으로 드러내기가 쉬운 시이다. 그러나 목이 잘린 뱀의 비유는 그런 감정의 분출을 적절하게 차단하고 있다. 시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려면 감정이 한껏 분출되어야 하는데 왜 그것을 억제해야 할까? 감정은 시 쓰기에 있어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시작 과정에서는 감정이 마음껏 분출되어야 시작 과정의 체험도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타서 없어지는 것이다. 즉 감정은 시작 과정에서는 극적인 체험을 하도록 마음껏 분출되지만 정작 시에서는 모두 연소되어 없어지게 되는데, 객관적상관물이 바로 그런 역할을 돕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가 겪었음직한 극도의 절망감은 목 잘린 뱀의 체험으로만 제시되어 있다. 그 외의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객관적상관물은 폭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가 감춰진 감정이나 정서를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환기했을 때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뇌관을 장치하는 것이다. 그때 시의 겉모양은 모양은 차갑고 단단하고 표면이 매끄럽고 광채가 나는 유선형의 쇳덩어리뿐이다. 어디에도 물기가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강력한 폭발물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뇌관을 건드린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감정이 노출된다는 것은 정작 폭발해야 할 폭발물이 겉으로 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경우에 결국 속이 텅 비게 되므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한 시에서는 독자가 시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오직 폭발작용만 일어난다. 그 폭발은 독자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시인은 오로지 뇌관만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시는 시인이 독자의 시 읽기에 계속 참견을 한다. ‘나는 이렇게 슬프니까, 너도 같이 슬퍼해 줘.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너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거야. 당연히 내가 우는 목소리만큼 너도 고통스러워야지.“ 라고 독자에게 감정을 구걸하거나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독자의 몸속에 있는 감정이나 경험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인 자신의 감정, 정서, 체험을 독자가 수용하고 거기서 체험을 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 경우 자발적이고 강력한 폭발작용은 없고, 억지 체험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해 정도에서 그치기 십상이다. function re_send(){ if(!document.re_form.cmt.value) { alert(\'내용을 입력하세요!\'); document.re_form.cmt.focus(); return false; } else { var f = document.re_form; if(l_cnt.value >600) { alert(\'600bytes 까지 입력 가능합니다.\'); f.cmt.focus(); return false; } document.re_form.submit(); }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세요. /600bytes     [3강] 수필 그 30초 전쟁   다음 강의가 없습니다.
49    땅땅한 얼음 덩이 시 댓글:  조회:1652  추천:32  2008-12-13
  고성 신강에 누런 벽체가 둘러선 고성이 있다 바람이 옛벽에 부딧쳐 거문고를 울리고 채색기발들이 성벽우에서 펄럭인다 내 황제가 되여 호령하나니 병장기숲이 하늘을 찌르고 기생들이 쪼르르 줄지어 나온다 내 백성이 되여 엎디나니 우박이 머리우에서 쏟아지고 뼈가 얼어서 무릎을 펼수 없다 죽은 넋들이 나를 끌어다 성밖에 던진다 나는 순간에 천년을 넘어선다            10.22. 룡문의 석가모니 자애로움이 별비로 쏟아지고 인자함이 무지개로 선다 나는 포장을 훌훌 벗어버리고 그 별비를 한알 먹고 무지개를 몸에 두른다 청절한 알몸으로 팔을 추겨드나니 한송이 하얀 구름되여 바람 타고 가없는 하늘을 청정하게 닦는다 비는 그냥 내리고 눈은 그냥 온다              10.22. 막고굴 천녀맛 막고굴천녀들 하늘에서 날아내리고 있었어 내가 찬히 보노라니 한 천녀가 꽃뱀이 드라 어디로 가니 황제한테로  뭘하러 가니 황제의 룡포가 되려구요 나는 휘파람 불었어 꽃뱀이 스르르 나한테로  내려왔어  나는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넣었어 그날 밤에 불을 피우고 가만히 꽃뱀을 구워먹었어 고기가 기름지고 쫄깃쫄깃하고 참 달달하데                 10.23.새벽에 밀짚모자 하느님이 밀짚을 가려놓은것이 산이 됐다나 밀짚산에 밀짚으로 조각한 불상들이 념불을 외우고있다 두런거리는 념불소리가 안개속에서 몽롱하다 념불소리를 따서 코트를 지어 입으니 몸이 따스해났다 비가 온다 대웅전 석가모니가  밀짚모자를 씌워준다 비방울이 나를 피해서 날아내린다               10.23 벌집 운강의 닫집은 벌집이다 사람들은 거기 이르면 한 마리 벌이 되여 벌집을 드나든다. 벌집속에는 천년묵은 꿀이 있는데 꿀을 먹고 벌집을 나서면 벌은 다시 사람이 된다.                    10.23. 현장 서안의 한 광장에 까만 현장이 서있다 작달막한 키에 기다란 지팽이다 그의 지팽이끝에서 불꽃이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 불꽃을 주어다 화로에 놓고 불을 쪼인다 나도 집한채를 짓고 불꽃화로를 만든다 나의 집으로 거미며 범이며 나무며 물이며 새며 벌레들이 솔솔 들어온다 청신한 바람 구수한 수초냄새가 향기롭다 현장은 오늘도 지팽이로 불꽃을 나른다                   10.23 어느 이른 아침 누가 하늘에다 먹물을 가득 토했다 아빠트가 우멍눈을 가득 뜨고 쏘아본다 택시 한 대가 길을 핥으며 기여온다 무섭다 TV에서 주식이 폭락했다고 아우성이다 굴뚝이 하얀 다리를 하늘에 놓는다 고요한 함성에 무엇이 폭발할듯 내 옷이 칩다 해야 솟아라                 10.23. 고르라크 고르라크 그대는 전설이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쓰러져 천년 썩으며 천년 산다는 전설이여 고르라크 그대는 좌상이네 당신은 5000살이고 또 당신은 10000살이라죠 지구에 사는 동식물의 좌상이여 고르라크 그대는 절세의 가인 잎으로 지은 노란 드레스자락을 동그랗게 펼치고 서있는 절세의 가인이여 그대 배속에는 만년의 비와 바람과 눈이 쌓이여 있고  그대들속에서 삼황오제가 장기를 두고 화약의 작방이 돌아가고 공자맹자가 세미나를 열고 굴원은 시를 쓰고 있노라 사막은 그대의 규방 낮이면 해와 포옹을 하고 밤이면 달과 키스를 하며 두남편을 섬기는 서러운 미인이여           10.24. 기이한 산 수천수만대의 영화기가 모여서 이룬산 헤아릴수도 없이 많은 영화필림 풀어내며 오늘도 영화를 돌리고 있네 광활한 고비사막은 영사막 고금중외의 모든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네 나는 영사막에 들어가 말방울소리 들으며 비단의 길을 읽어본다                        10.24. 진시황릉 석류 진시황릉은 말그대로 산이다 산에 석류가 여물어가고 있다 배가 뽈록한 석류들은 무엇인가 낳을것 같지만 아직 양수가 흐르지 않는다 해살 한알을 렌즈로 만들어 꼭 다문자궁속으로 들여보낸다 석류알속의  화면이 흘러나온다 첫알의 화면 맹강녀의 울음소리에 800리 장성이 와르르문어진다 둘째알의  화면 사마천이 거세를 당하는 아우성이 하늘을 드렁드렁 울린다 셋째알의 화면 조비연이 호수속의 무대에서 제비처럼 날렵하게 춤을 추는데 당현종의 사타구니에서 여섯시를 알린는 종소리 울린다 넷째알의 화면 모택동이 천안문성루에서 백만홍위병 대오를 사열하면서 손을 흔든다 나는 손칼로 석류를 가르고 새빨간 알들을 씹어먹는다 24사가 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맹강녀 -진나라때 장성을 쌓으러간 남편이 소식이 없어 찾아떠났다. 그녀를 맞은것은 저승객이 된 남편이였다.그녀가 통곡하자 800리 장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사마천 -불후의 명작 사기를 쓴 작자 조비연 -중국고대 황궁의 걸출한 무용가 당현종 - 당나라의 황제                10.24. 화염산 버얼건 주름치마 입은 녀인머리에 불 불이 달린다 녀인은 불을 죽이려고 오줌을 싼다 오줌은 땅만 아츠랗게 파내리고 불은 끄지 못한다 새들이 넘으려다 몸에 불이 달릴가 돌아선다 불속에서 손오공이 금고봉 휘두르며 퐁퐁 뛰여다니고 저팔계가 양통구이를 하고있다 구수한 양고기냄새가 나를 끌어다 불길속에 처박는다 옷에 불이 달려도 따갑지 않다 나는 저팔계와 함께 구운 양고기 뜯어먹으며 손오공의 72변술 구경한다 벌건 주름치마 입은 녀인머리의 불은 땅거미가 내려와 먹어버린다                    10.25. 투루판에 있는 색이 붉은 민둥산 노을 노을물결이 설레인다 물고기들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통통배들 뭍으로 돌아오고있다 어느 배에 님 앉아있을가 하염없이 바라본다 해가 멍석말듯 노을물을 말아서 꽁무니에 찬다 물고기도 배도 님도 나도 노을물에 휘말려 해의 꽁무니가 된다 나는 여보 하고 부르지만 님은 내 소리 듣지 못한다 나와 님사이가 유리 한장 사이 같은데 님이 듣지 못하니 ...                   10.25. 연 하얀 연을 날립니다 하늘이 하얀 해오라기를 품에 안습니다 해오라기는 하늘품에서 날개를 펼치고 눈을 대록거립니다 기다란 룡이 하늘에서 몸을 꿈틀거립니다 하늘도 룡과 함께 몸을 꿈틀댑니다 나는 퉁소를 붑니다 나의 퉁소소리에 수리개와 룡이 나란히 날기도 하고  서로 쫓고 쫓기기도 하면서 푸른 하늘을 히롱합니다 나는 퉁소를 입술에서 뗐습니다 수리개와 룡이 하얀 풍선이 됩니다 뿡 깨여집니다. 함박눈이 펄펄 내립니다                   11.1. 지휘봉 악대의 지휘봉 한끝이 휙휙 휘파람을 불자 번게 우레 폭풍 파도... 성칼진것들이 몸을 흔들어댄다 지휘봉이 바르르 몸을 떨자 일망무제한 초원이 내 발밑에서 빠져 달아나고 자잘한 꽃들이 풀속에서 한들거린다 지휘봉이 슬슬 하늘을 휘감아 돌리자 내 마음의 감동이 산악처럼 일어서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지휘봉이 동작을 멈추었건만 감동의 물결은 내 몸에서 그냥 찰랑거린다                        11.1. 핸드폰과 손가락 손가락이 수자를 꽁꽁 누르면 천리밖의 그 입술이 귀에 와 속삭이고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도 나눈다 만리밖 손가락도 나의 수자를 누르면 나도 그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고 그의 앞에 가 앉아서 이야기도 나눈다 지금은 수자가 사람을 나르는 세월 인간은 수자의 놀이감 이제 또 무엇의 놀이감 될건가 추위는 점점 더 매짜진다                   11.3-28 도서관 일별 주루루 줄을 선 보살들 앉아도 있고 서도 있고 누워도 있다 다리 떨어진 보살, 팔이 떨어진 보살, 머리 떨어진 보살... 배는 모두 뚱뚱 저마다 웃음 먹음었네 욱실거리는 신들 천신, 지신, 강신, 바다신, 우뢰신, 소나기신. 나무신, 꽃신, 짐승신, 곤충신, 엄마신, 아빠신......신들도 보살처럼 온전한건 하나도 없었네 야밤이면 보살과 신들의 전쟁 주먹치기, 발차기, 몽둥이질, 활쏘기, 보총쏘기, 중기쏘기, 대포쏘기, 미사일쏘기 .....              11.8. 나의 안경 자전거에 나를  싣고 한쌍 전지불로 길을 밝히며 글나라 명승을 돌아본다 동물귀신 사람귀신 나무귀신 풀귀신 곤충귀신들...... 산놀이 물놀이 뽈놀이 차놀이 살놀이 ...... 가슴에 하얀 뿌리가 그물처럼 내린다 싹이 트고 잎이 패면서 나도 푸른 귀신이 된다                11.8.-14. 야밤경상 시계바늘이 12자에 모이고있다 연길시는 검은 보자기에 싸여있다 귀신 눈알들 신의 눈알들이 보자기속에서 란무한다 반짝인다 역을 지나는 기차의 아우성 보자기속에서 몸부림친다 동산의 거인이 발을 벋디디고 검은 보자기를 끌어당기고 똑딱이는 시계들이 날카로운 주둥이로 보자기를 쪼아먹고 있다 나는 지구의 축에 기름을 바르지만 빛의 발걸음 흩어지지 않는다               11.24. 창문 벽체속에 총총한 우멍눈 우멍눈속에 당신과 나의 꿈밭이 있지 뜨락의 오이가 두룽두룽 달리면 병아리 오리 강아지 노래 처마에 주렁지지   날마다 산도 그리도 구름도 그리고 해와 달 별도 그리지만 시간사장님한테 다 바치고 한장도 남기지 못하니 멍청한 화가이지 난초꽃도 피였다 지고 제비도 날아가 한산한 창문 나는 오늘도 늘어나는 주름살에 푸른 씨앗을 심어본다 그리운 난초꽃이 다시 피기를 바라 사랑스런 제비가 다시 날아오기를 바라              08.11.248. S가 사전속으로 .1 어허 광활한 전야여 운동장이여 창조의 노력으로 주렁진 포도원이여 세월의 폭풍이 잠든 온돌방이여 인류의 기적이 진렬된 전람관이여 S가 너의 문을 연다 강물이 저 멀리에서 출렁이며 흘러오고 산들이 우뚝우뚝 솟아있고 벌판이 뉘연히 누워서 숨을 쉬고있다 꽃들이 피여나는 숲엔 해살이 따사롭고 새들의 노래 구성지여라 귀신들의 노니는 동굴속에는 피에 주린 뼈다귀들이 어지러이 널리여 있어라 저 금빛무리는 무엇인가 저 은빛무리는 무엇인가 저 풀빛무리는 무엇인가 저 커피색무리는 무엇인가 아아 알수도 없는 무리들의 란무여 천년이 숨쉬고 만년이 걸어다니고 억년이 뛰여다니는 제우스여 석가모니여 꽃뱀이여 히드라여 독주 한잔을 마시고 S는 뻐드러진다 네각을 쭈욱 펴고 드렁드렁 코를 구른다 문밖으로 S를 들어내갈 사람은 누구인가 오오 사랑스러운 시간의 요정이여                   11.30. S가 사전속으로 .2 망망한 바다여 높뛰는 숨결이여 갈매기들의 노래여 뜨는 연이여 S는 노를 저어 바다에 들어가 그물치기를 한다. 바다의 심연속에서 하얀 호박 빨간 호박 파란 호박들이 나온다. 가오리도 상어도 고래도  꼬리를 푸덕이며 걸려나온다. 파도는 요람같은 배를 쓰다듬어주고 하늘은 진주를 가득 널어놓은다. 밤을 밝히는 등불들이 모여 서광을 맞으며 수평선에 붉은 태양을 안아올린다. 태양은 금빛그물을 늘이여 파도를 낚는다. 바람이 그물을 거두며 S까지 휘말아 둘러메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12.1. 빤질빤질한 달이 뜬 밤에 빤질빤질한 쪼각달이 뜬 밤에 쪼각달 모자를 달고 쪼각달 견장을 쓰고 쪼각달 수갑을 신고 쪼각달 신을 끼였다 칠성별이 된 나는 홍모처럼 가벼워지였다 걸음이 쭝쭝 나갔다 뫼를 지나 하늘로 쭝쭝 걸어올라갔다 구중천에 이르자 달눈이 휘둥그래졌다 너 어디서 왔지 세짜골에서 세짜골이란게 어디니 지구에 있죠 응 지구애냐 그래요 왜 내같은걸 일곱개나 달았니 달면 안되나요 땅에서 리귀가 리규질 했다더니 너도 그따위구나 얘들아 이리와 이자식 가짜 달을 다 뜯어 삽시에 별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나의 칠성을 죄다 뜯어갔다 앗-나는 고함을 질렀다 내 몸이 구중천에서 휘돌다가 곧추 떨어지였다 퉁 땅이 나를  받았다 아유 이게 어디냐                   12.3. 김치 새콤 달콤 싸한 맛을 뿜는 김치는 천년바람의 잠을 깨운다 천년해살의 꿈을 뿜는다 천년달빛의 잠을 깨운다 천년비의 꿈을 뿌린다 국화의 꽃잎의 정 무지개의 빛이 까치의 울음 낚지의 향기 시조의 멋까지 김치하늘이 파아랗고 김치땅에 기름이 흘러라  
48    한국명동시비평시리즈 .2 댓글:  조회:1358  추천:38  2008-12-02
                                    11    얘, 어떤 시를 보면 너무도 묘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피ㅡ어디 그런 시가 있니? 있다. 바로 김사림시인님이 쓴 시가 그래. [꽃비]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제목부터가 너무너무 아름다운 언어지 뭐야. 세상에 비라는 말과 꽃이라는 말은 있지만 꽃비라는 말은 없단말이다. 꽃비라는 말은 김사림시인님이 만들어낸것이 틀림 없어. 꽃이 너무너무 많이 피니까 그것을 꽃비로 표현한거지 뭐야! 언어를 새로 조합한것이 돋보인단  말이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것은 이러한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니. 꽃과 비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을 나타내는 언어이지만 하나로 묶어놓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그래 언어라는것은 워낙 어떠한것을 나타내는 표징이야. 고대로부터 흘러내려온 표징인데 우리는 지금 그 표징들을 쓰고있잖아. 너나 나의 이름도 그렇지. 우리가 금방 태여났을 때 네이름 순희를 해옥이라고 지었더라면 너는 지금 순희인것이 아니라 해옥일거야. 옛날에 제일 처음 지금의 아빠를 엄마라고 부르고 엄마를 아빠라고 불렀더라면 우리는 엄마와 아빠를 바꾸어서 부를거야. 그래도  아무런 불편함도 없을거야. 그러니까 사회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말이 생길뿐만 아니라 언어와 언어를 새로 조합하여 [꽃비]처럼 고운 언어들을 많이 만들어낼수록 좋단 말이다. 아야, 말이 너무 빗나가재. 이만큼하고 김사림시인님이 쓴 [꽃비]의 원문을 보자.     꽃비        김사림  먼산에 꽃비 비그르르 돌아 마을에 내려서 살구꽃 된다 살구꽃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아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    요렇게 깜직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울수가 없어. 언어가 물 흐르듯 조르르 흘러내려가재. 그것도 말짱 비단처럼 부드러운 언어가. 토라는게 ㄴ,ㄹ,ㅊ 세개가 있는데 [ㅊ]는 꽃이라는 명사에 붙은것이여서 할수 없지만 나머지 둘은 모두 유향자음이여서 기막히게 부드럽고 친절하단말이다. 첫두련을 먼저 보자. 첫두련은 한가지 내용을 표현하고 있어. 먼 산에 꽃비 비그르르 돌아 마을에  내려서 살구꽃 된다   봄이면 산에 하얀꽃, 빨간꽃, 노란꽃 벼라별 새갈의 꽃들이 가득 피는거야. 산은 꽃이불을 포옥 쓰고 있는거 아니겠니. 그런 오색찬란한 꽃들이 비그르르 돌면서 마을로 내려와 살구꽃이 된다하니 현실인게 아니라 아름답고 황홀한 동화세계지 뭐야. 그 꽃들이 또 어쩌지? 삼련과 사련을 보면 알아. 살구꽃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아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     꽃비는 살구꽃을 마을에 가득 피워놓고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고 돈 다음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는거야.  이것도 동화지뭐야. 동화래도 이렇게 아름다울수가 없어. [비그르르 돌아]를 발음할때 입안에서 사탕알이 사르르 녹는 같지 뭐야. 나비란 뭐겠니? 꽃잎이 떨어진거지. 꽃잎의 짝이 나비인거야. 꽃잎이 다 떨어져 나비가 되면 살구나무에 애기살구들이 가득 열리지. 얼마나 평화롭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니! 한번 이런 마을에서 살아보고싶잖니?                                  12     봄이요, 꽃이요 하는 봄에 대한 시들을 많이 보았는데 이번을 강에 대한 시를 보자. 강이란 어떤거니? 봄이면 얼음을 깨고 나와 마가을까지 흘러가는 놀이터야. 낮이면 해랑 구름이랑 와서 놀고 밤이면 달이랑 별이랑 와서 놀고. 어디 그뿐이야. 산도 제얼굴이 어떤가 비춰보고 새도 날아지나며 제모습이 어떤가 비춰보재. 물속에는 여러가지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염치고 가재랑 물벌거지랑 벌벌 기여다니재. 산에서 노루가 내려와 물을 마시며 빙그레 웃고 우리들은 물장구치며 목욕하재.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물을 떠나면 살수 없는거야. 물은 모든 사물을 낳고 키우는 어머닌거야.    이런 물이 흐르는 강을 어떻게 쓰면 재미있을가? 강현호시인님이 해답을 주고있는거야.어떻게? 보면 알거야.     강물      강현호 작은 고기들이 떼를 지어 강물의 겨드랑이를 간지르고 있다. 강물은 온 몸을 뒤척이며 깔깔거리고 있다. 이따금씩 입술사이로 은이발이 몇 개 반짝이고있다.    이렇게 모두 세개련이야. 리건호시인님이 [봄]을 쓸 때 제비를 가지고 쓰던것처럼 강현호시인님도 강을 쓰면서 물고기를 쓰고있지 뭐야. 그러니까 제목이 크더라도 그 제목에 포함되는 내용을 다 쓰는것이 아니라 자신있게 표현할수있는 한두가지 사실만 잘 쓰면 되는거야. 우리 함께 기억하자. 작은 물고기들 떼를 지어 강물의 겨들랑이를 간지르고 있다    첫련이야. 히히 고기들이 물에서 헤염치는걸 [강물의 겨드랑이를 간지르고있다]고? 매짜다! 땡땡 여물었지뭐야. 강물엔 겨드랑이라는것이 없지만 강물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겨드랑이가 있을게 아니야.  고기들이 몸을 흔들거리며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헤염치니까 겨드랑이를 간지른다는것이 자연스럽재. 겨드랑이를 간지르니까 어찌겠니? 웃지. 그럼  강물이 어떻게 웃는가 보자. 그건 2련에 썼거던. 강물은 온 몸을 뒤척이며 깔깔거리고 있다    이 2련이 강물이 웃는 모습이야. 그저 웃는것이 아니라 [온 몸을 뒤척이며/깔깔거리고] 웃는거야. 강물은 흐를 때 모든 물이 다 흐르는거야. 한방울도 정지상태에 있는건 없거든. 정말 온 몸으로 흐른단말야. 흐르느라면 몸을 마악 뒤번지게 되는거야. 흐르면서 소리를 내지 쐇솨ㅡ하고. 그것을 의인화해서 [깔깔]했지 뭐야. 강물이 대단히 간지러웠던 모양이야. 이따금씩 입술사이로 은이발도 몇 개 반짝인다    이것이 마지막 3련이야. 강물의 웃는 모습을 한번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것으로 시를 마치고있어. 은이발도 몇 개  반짝인다 했어. [은이발]이란게 뭐지? 그렇지. 물이 흐르면 물결이 일고 물결이 일면 하얗게 물이 부서지게 마련이지. 그 하얗게 부서지는 짝을 찾은것이 [은이발]이야. 강물이 흐를 때 온 강물이 단김에 물결이 부서지는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부서지거든. 그래서 [은이발이 몇개/반짝인다]고 한것이 아니겠니! 사람도 웃으면 이발이 보이니까 그렇게 한거지뭐야. 강현호 시인님은 강물을 쓰면서 강물이 어떻게 웃는가 하는 한가지를 표현하였고 리건호 시인님이 <<봄>>을 쓸 때도 바줄에 앉은 제비만 썼어. 한 사물에서의 어느 한 측면을 틀어쥐고 잘 쓰는 것이 동시를 잘 쓰는 비결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봐야겠어.                                      13   우리가 봄철의 동시를 어떻게 쓰는가를 보는 사이에 어느새 여름이 왔구나. 이제부터 그럼 여름에 대한 시들을 어떻게 썼는가 보자.    여름은 모든것이 무성하게 자라는 계절이야. 나무도 풀도 물도 곡식도,,,뭐나 다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계절이야. 시를 쓸것도 엄청나게 많은 계절이야. 먼저 리국재시인님이 쓴 [여름산]부터 보자.   여름산      리국재 여름산은  아직 덜익은 풋풋한 과일이다 한줄기  소나기 쏟아질 때마다 조금씩 익어가고 조금씩 커가고 얼마만큼 익었는지 한번쯤 두들겨 보고싶다 쪼개여 보고싶다        어때?, 참 멋있지. 시인의 상상이 대단하지 뭐야. 일련에서 여름산의 짝을 [아직 /덜익은/풋풋한 과일]이랬단말이다. 산을 어떻게 상상하면 [풋풋한 과일]이 되는거야? 정말 미치겠다  급해할것 없어. 벌판에 산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멀리서 보면 평평한 곳에 둥그런것이 아니겠니. 우리가 여름에 수박밭에 가보자. 큼직한 수박이 달려있는것도 평평한 곳에 둥그런게 아니겠니. 둘이 다 둥그런것이니까 산을 수박이라고 할수있고 수박을 산이라고 할수있는거야. 수박이 과일에 속하니까 산도 과일이라고 해서 안될거 없단말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모양으로 짝을 찾은거야. 문학적 언어로 말하면 이러한것을 모양으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였다고 하는거야. 또 산을 과일로 변형시켰다는거야.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이런 말은 리해하기 바쁘니까 짝이라고 한거지. 모양으로 짝을 찾는다하면 얼마나 알기 쉽니? 기억하자 꼭 알았지. 히히ㅡ알았다!! 한줄기 소나기  쏟아질 때마다 조금씩 익어가고 조금씩 커가고  두번째 련이다. 여기서는 과일이 소나기를 맞으며 익어가고 커간다고 하재. 수박이랑 여름에 커가고 익어가는데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재. 그러서 소나기 올 때마다 조금씩 익기도 하고 크기도 한다는거야. 세번째련을 보자. 얼마만큼 익었는지 한번쯤 두들겨 보고싶다 쪼개여 보고싶다    이 마지막련에서 과일이 익었는가 두드려보고 쪼개여 보고싶다고 하였어. 어째 요런 표현을 썼느냐고? 그래 고것이 문제지. 수박이나 참외밭에 가면 사람들은 수박이나 참외가 익었는가를 판정할 때 보통 참외나 수박을 두드려 보지 뭐야. 두드려 봐서 맑고 쟁쟁한 소리가 나면 익은거고 무겁고 둔중한 소리가 나면 그건 익지 않은 생거야. 산을 과일이라고 하였으니까 익었는가를 알기위하여 두드려본다는거지 뭐야. 그러나 수박같은것이 확실이 익었는가를 판정하는데는 속을 보아야 하는거야. 여름에 수박장사군들이 수박을 팔 때 수박을 칼로 쪼개여서 손님들한테 빨간 속을 보이는건 자기 수박이 잘 익었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시인도 과일을[쪼개여 보고싶다]고 한거야. 그럼 과일을 수박이라고 할거지. 그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렇다는건 수박이라고 하면 확실히 더 좋은것은 맞아. 아니라는건 과일상점에는 남방에서 나는 야자랑도 있을거야. 아마 야자랑도 익었는가를 판정할 때 두드려보는지 몰라.  전면성을 기하기 위해 그랬는지 몰라. 과일이라는건 류개념이여서 뻥뻥하재. 수박은 종개념이여서 인차 영상이 떠오르지 뭐야. 시를 쓸 때면 종개념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것이 제일이야.                                    14       얘, 시를 쓸 때 뭐가 제일 중요한건지 아니? 히히, 그걸 누가 모르게, 시적발견이지. 맞다.시적발견이란게 뭔지 아니? 같은 제목이라도 남보다 따게, 새롭게 쓰는게지. 맞다. 남보다 따게 새롭게 쓰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아니? 그야 남들이 못쓴것을 쓰면 되지. 맞다. 남들이 못쓴것을 쓰자면 어떤 방법으로 하지? 얘, 네가 날 심문하니? 글쎄 맞춰봐. 새로운 짝을 찾는거야. 맞다. 남들이 한번도 찾아내지 못한 새로운 짝을 찾아쓰는 시가 좋은 시고 그런 시인이 훌륭한 시인일거야. 시를 많이 쓰는게 시인인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를 쓰는게 시인이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새로운 시를 쓴다는건 쉬운일이 아니야. 그런 시를 봤니? 봤다. 누구걸? 문삼석시인님걸. 제목이 뭐야? [이슬]. 밝음을 토해내는 밝은 눈 맑음을 토해내는 맑은 눈.       요리 짧은거. 응, 짧아. 짧은게 시가 안되는것이 아니라 길어도 시적발견이 없거나 짝이 없는게 시가 안되는거야. 이슬에 대해서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썼지만 눈이라고 한 시인은 없었어. 모두가 구슬이요 보석이요 진주요 하고 썼지만 눈이라고 한 시인은 없었지 뭐야. 문삼석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이슬을 눈이라고 했을가? 두가지 원인이 있어. 한가지는 이슬이 눈처럼 밝기때문이고 다른 한가지는 이슬이 티 하나 없이 눈처럼 맑기때문이야. 또 한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어. 눈도 모양이 동그랗고 이슬도 모양이 동그랗기 때문이야. 이 시는 문삼석시인님이 모양으로 짝을 찾은 시야.   문삼석시인님은 모양으로 짝을 찾는 능수야. 전문적으로 코풀레기 애들을 대상한 시를 쓰기를 즐기면서 모양으로 짝을 찾는데는 이골이 튼 시인이거든. 원숭이라는 시 한수를 더 보자.  원숭이 원숭이는  날 때부터 할아버지래 주름살  오글오글  할아버지래   원숭이는 새끼원숭이래도 이마에 주름살이 쪼글쪼글해. 우리 할아버지들도 늙으면 이마에 주름살이 쪼글쪼글해. 문삼석시인님은 주름살이 쪼글쪼글한것이 같은것을 보아내시고 원숭이의 시적짝을 할아버지를 찾은거지 뭐야. 어때, 근사하니?   모양으로 짝을 찾는다? 전번에 말할 땐 좀 알빤하던게 인제 똑똑히 알려. 참 묘하구나! 세상 사물이 모양이 얼마나 많니? 생김새가 모두 다르거던. 우리들이 사는 집만 봐도 여러가지가 아니고 뭐야. 우리 친구들도 그렇지. 얼핏 보면 비슷한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백이면 백이 다 다른거야. 같은 사물도 이렇게 다른데 다른 사물사이이야 더 이를데 있니? 그래 세상 사물의 모양이 각각이여서 세상이 아름다운거야. 모양이 다 같으면 얼마나 따분하겠니.   시를 쓸 때 짝을 찾는것도 딱 같은것으로 찾으려하면 안돼. 모양이 비슷하면 되는거야. 그렇잖구. 어디에 백프로 같은게 있니? 아무데 다르나 조금씩 다르게 마련이지.   리건호시인님이 쓴 [봄]에서 제비를 [음표]라 한것도, 리국재시인님이 쓴 [여름산]을 과일이라 한것도, 문삼석시인님이 [이슬]을 눈이라 한것도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한것도 모두 모양을 보고 짝을 찾은거야. 그러니까 널반대기에다 못을 딱 박아놓는것처럼 기억해.  알겠니?                                  15 여름이 오면 나무랑 풀이랑 무성하게 자라고 시내물도 강물도 모두 자라지 뭐야. 시골애들이 학교를 다닐 때 뚝뚝 뛰여넘던 개울물도 비가 자주 오는바람에 뛰여넘을수 없게 됐지 뭐야. 그래서 어느 마음이 고운 애가 신을 벗고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개울물에 뛰여들어 돌다리를 놓았지 뭐야. 그런 돌다리 몇 개를 보고 시를 쓴 시인이 있어. 함께 볼가?  징검다리  리석장 개울물 오선지에 그려진  하나, 둘, 셋, 넷... 음표들 잠자리가 앉아서 무슨 음표일가 고개만 갸웃하다 그냥가고  앞산 소나무들이 들어보란 듯 몸까지 흔들며 솔솔솔 일곱 살 순이가 음표 하나씩 밟으며 도레미파... 팔짝팔짝 건너오며 도시라솔... 순이 친구 삽살이 따라부른다고  캉캉캉캉    얘, 동시란게 정말 재밋지. 읽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 1련부터 볼가. 개울물 오선지에 그려진  하나, 둘, 셋, 넷... 음표들     1련에서 리석장 시인님은 개울물에 놓여진 징검다리의 짝을 찾고 있지 뭐야. 개울물을 오선지라고 돌다리는 개울물에 그려진 음표라고 했지 뭐야. 비슷하재. 첫련에서 징검다리를 음표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음표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려 준거야. 아래의 련들은 음표에 대한 부동한 사물들의 반응을 표현한거야. 처음에는 잠자리가 앉아서 무슨 음표인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숑 날아간 것을 쓰고 , 두 번째는 앞산소나무들이 제가 안다로 몸까지 흔들며 솔솔솔솔 한다고 썼지 뭐야. 기실 소나무도 잠자리처럼 모르는거야. 시인이 바람이 불면 소나무가 흔들리는소리가  음표의 음 쏘처럼 소리난다고 생각되여 솔솔솔이라고  표현한거야. 세 번째는 순이가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건너갔다 건너왔다 하는 것을 음표를 하나씩 밟으며 도레 미파 하고 시창을 부른다고 썼지 뭐야. 네 번째는 삽살이가 순이를 따라서 도레미 소리를 낸다는게 캉캉캉캉 짓는다고 그랬지 뭐야.     호호호...우습지. 실은 음표를 알이는 순이 밖에 없어.  음표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치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은거니까 . 그런데 시인은 소나무며 삽사리며가 아는 것처럼 의인화를 하는바람에 재밋게 됐지야. 잠자리는 소리를 못내니까 고개만 갸웃거렸다는거야.    리건호 시인님이 <<봄>>을 쓸 때 전기줄에 앉은 제비들을 <<음표>>라고 표현한적이 있잖니. 이번에는 리석장 시인님이 또 징검다리를 <<음표>>라고 표현했단다. 부동한  사물에서 똑같은 짝을 찾은게 아니고 뭐니. 이래도 되니? 되고말고. 두시인님이 찾은 짝은 같지만 표현하려는 사물이 다르거든. 또 표현하는 내용도 완전히 다르단 말이다. 그러니까 괜찮은거야. 만약 비슷한 사물이거나 비슷한 내용으로 쓰면 그건 문제야. 그럴 땐 모방성이  있는거야. 시내물이 꼬불꾸불 흘러가니까 장난꾸러기라고 하고 오솔길이 꼬불꼬불 산으로 넘어가니까 장난꾸러기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은   삼가하는것이 좋아. 제일 좋기는 아무도 써먹지 않은 것으로 짝을 찾는거야. 그래야  최고 좋은거야.                16   여름에는 모든 것이 푸르다. 산도 푸르고 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해도 푸르고 달도 푸르다. 물도 푸르고 지어는 바위도 푸르다. 그래서 여름은 푸르른 계절인거야. 푸르른 계절을 노래한 시가 있어. 김종영 시인님이 쓰신 시야. 내가 한번 읽을게 들어봐 여름의 문을 열고 푸른 나라를 걸어간다 초록빛 바다가 우쭐대며 가슴에 들어서 출렁이고 어깨동무 푸른 산이 정답게 가슴에 앉아 날개친다. 길을 가도 푸른 눈 책을 봐도 푸른 마음 꿈을 꿔도 푸른 생각 나는 이 여름 사람들속을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빛 심는 푸른 나라 푸른 새 되련다.    어때? 특색이 있지. 그래 여름의 모든 것을 푸르게 표현한 것이 특색이야. 시는 그래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야. 생활에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새롭게 표현하는거야. 표현한다는게 어떤거지. 자기가 본것이나 느낀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본것이나 느낀 것을 표현할수  있는 새로운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실을 찾아서 쓴다는거야. 잘 알아 못듣겠다고. 제일 간단하게 말하면 짝을 찾아서 쓴다는거야. 그럼 그렇다고 할거지 왜 다람쥐 채바퀴돌 듯 뱅뱅 도니? 그건 왜 자꾸만 짝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도리를 강조하여 은이 배기에 하자는거야.  여름의 문을 열고  푸른 나라 걸어간다    첫련이야. 김종영 시인님은 처음부터 푸른 여름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지 뭐야. <<여름 문>>이니 <<푸른 나라>>니 뭐니 하고 있잖아. 어디에 여름이란게 문이 있고 나라라는게 있니. 여름의 문을 열고는 여름이 왔다는 뜻이고 푸른 나라를 걸어간다는건 여름철이 온통푸르다는걸 표현한거야 . 이 첫련은 시의 기승전결의 기에 속하는것이고 시의 계기로서 시인이 여름의 푸르름을 노래한다는 표징이지 뭐야. 초록빛 바다가 우쭐대며 가슴에 들어서 출렁이고 어깨동무 푸른산이 정답게 가슴에 앉아 날개친다     이 두 번째 련은 여름날의 움직임을 표현한거야. 두가지를 틀어쥐였는데 한가지는 벌이고 한가지는 산이야. 벌은 초록빛 바다 산은 어깨동무로. 벌은 바다니까 출렁거릴건 사실인데 가슴에 들어와 출렁거린다고 했지 뭐야. 산을 어깨동무라 한 것은 의인화한 것이야. 산이 가슴에 와 날개친다는 것은 또 다른 맛이야. 산이라는건 봉우리가 제일 높은것이고 봉우리밖의 줄기는 봉우리보다 낮게 멀리로 뻗어나간것인데 어찌보면 새가 날개를 퍼덕인다고 할수도 있는거야. 가슴에 들어와 바다가 출렁이고 가슴에 앉아 산이 날개친다는 것은 산이나 들과 가까이 노는 우리들 마음의 표현, 넓은 흉금의 표현인거야.   이 동시에서 2련은 승이고 3련은 전이고 4련은 결이야. 전에서 <<길을 가도 푸른길/ 책을봐도 푸른 책 / 꿈을 꿔도 푸른 꿈>>이라고 전개시키지 않고  <<눈>> <<마음>> <<생각>>등 언어와 길, 책, 꿈을 련계시킨 것은 여름의 푸르름을 우리와 더 가깝게 하고 친절하게 하기위한 표현이야. 이런 표현을 함으로써 여름이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거야.   4연은 결이니까 종결이지. 사람들에게 푸른 노래 푸른 빛을 심어주는 푸른 새가 되어 날아다니겠다고 했지 뭐야. 왜 새가 되겠다고 했을가 ? 왜 심어준다고 했을가 ? 절로 생각해봐.                      17 이런 시가 있어. 리동식 시인님이 쓰신  동시야. 제목은 <<개나리 노란 배>>야. 내가에 갔었다 바람 따라 물길따라  동동 개나리꽃 하나 떠내려간다 외나무다리밑으로 하얀 나비가 떠가는 꽃위에 사쁜 앉았다 개나린 개나린 노란 배가 되었다 나비는 나비는 노란 손님되였다 물길따라 떠간다 멀리 멀리 떠간다    얘, 이 시의 특점이 뭐야?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시제목이 짝을 찾은거야. <<개나리 노란 배>> 하고. 개나리 짝을 노란 배라고 설정했어. 그러니까 제목부터 의문을 주거던. 왜 개나리를 노란 배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을 말이다. 그래서 인차 독자를 흡인하고 있어. 한번 읽어보면 답은 풀리는거야. 으응, 노란 개나리가 다리밑으로 떠내려가니까 개나리를 노란 배라 하였구나. 노란 나비는 노란 개나리가 떠내려가는데 앉았으니까 노란 손님으로 되었구나. 물이 개나리꽃을 싣고 멀리 멀리 가니까 <<물결따라 떠간다/ 멀리 멀리 떠간다>>로 결말을 지었구나. 이러한 시의 내용은 인제 한두번만 읽어봐도 알수있는거죠? 그렇죠.     이 동시에서 배울점은 짝을 찾는것보다 다른 것이 있어. 한가지는 짝을 찾을 때 자연물의  짝을 인위적인 사물에서 찾는거야. 인위적인 사물이란 사람이 만든 것을 말하는거야. 개나리는 자연물이고 배는 사람이 만든 것을 말이다. 그러니 자연물의 짝을 인위적인  사물에서 찾은 것이 아니고 뭐야. 이렇게 짝을 찾으면 찾은 짝이 우리와 가까이 있는사물이여서 더 친절해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재.    두 번째로 배워야 하는 것은 이 시의 치명적인 결함이야. 결함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시를 잘 쓰려면 남의 쓴 시의 우점도 알아야 하거니와 그 시의 단점도 알아야 해. 우점은 따라 배워 자기가 시를 쓸 때 발양하고 단점은 시를 쓸 때 그런걸 범하지 않는 거울로 삼는거야. 시는 기승전결이 우에서 있다고 말했는데 이건 옛날 리론 같지만 매우 중요하단 말이다. 개나리 노란 배는 기에 문제가 있어. <<내가에 갔었다/ 바람따라 / 물길따라/동동/ 개나리꽃 하나/떠내려간다/ 다리밑으로>> 이것이 시의 1,2연인데 문제가 있어. 시란 가장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는거야. 언제 느렁뱅이처럼 천천히 할사이가 없어. 이 시를 쓰려는 것은 노란 개나리가 노란 배로 되고 노란 나비가 노란 손님이 되어 노란 배에 노란 손님이 앉아간다는 것을 쓰는거란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화자가 어떻게 강가로 갔는가하는 따위는 알릴것도 없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거야. 표현하려는 대상이 개나리와 나비인데 한 개련이나 할당해서 쓸데 없는 미사려구를 쓰고있단 말이다. 만약 내가에 간 것을 꼭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제2련의 <<동동>>의 앞에 <<내가에>>를 넣어서 <<내가에 동동>>하면 그만이지 뭐야. 이쯤만 하여도 큰 허물이 없이 시가 간결해 지였다고 말할수 있겠진만 더 엄격하게 따지면 이것도 안되는거야. 필요없어. 1연의 언어는 한마디도 필요 없다는거야. 1련을 통채로 뽑아던져도 시적표현에는 안무런 손상이 없지 뭐야. 2연부터 시작해 써도 이 시에서 표현하려는 시적대상이 나왔단 말이다. 2연의 내용이면 시적계기나 기승전결에서의 기가 충분하단 말이야. 그런데 1연을 해서 뭘 하겠니. 뱀을 기다랗게 그려놓고 뱀한테 발을 그려넣는거나 마찬가지야.                                    18   여름산에 가면 청포도가 두룽기두룽기 달려있지 뭐야. 콩알같은 포도알들이 오롱조롱 달려있는게 정말 희한하지 뭐야. 포도원에 가면 더 굉장하지. 열콩알같은 포도알들이 가득 달린게 보기만 해도 입안에 시쿤물이 확 돌거든. 우리 주먹 두 개만한  포도송이들이 두룽기 두룽기 드리워서 구경거리가 대단하단 말이다. 포도알들은 날때부터 고로로한게 정말 귀엽기도 하지. 이런 청포도를 정형택 시인님이 시로 썼어. 한번 읽어보자.   청포도 정형택 꼬오옥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동글동글  모나지 않은  마음 쉬엄쉬엄 꿈을  키워갑니다. 도란도란  꿈이 같은 애들끼리 초롱초롱  파아란 눈망울로 주렁주렁  꿈 엮어 매답니다.   동시는 재미있어야 하는데 이 동시도 참 고소한거야. 꼬오옥 고만곤만한 애들끼리    요게 첫련이야. <<꼬오옥>>이란 <<꼭>>자를 느려서 쓴거야. 크기가 비슷한 포도알들이 포도송이에 빽빽하게 달려있으니까 서로서로 끌어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꼬오옥 고만곤만한 애들이라고 묘사한거야.  작은 포도알들이니까 아이들이라고 의인화한거 아니겠니! 아이들이라건 포도알의 짝이야. 시는 짝을 찾은 다음 원래의 사물과 관계있는 사물들을 합리하게 결합시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단 말이야. 원 사물을 쓰는 것 같지만 짝을 쓰고 짝을 쓰는 것 같지만 원 사물을 떠나지 않게 말이야. 정형택 시인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시를 전개하고 있지 뭐야. 동글동글  모나지 않는 마음   이게 2련인데 동글동글은 두가지 의미가 있어. 한가지는 포도알이 동글동글 하다는 의미이고 다른 한가지는 애들이 마음이 모나지 않은 동그란 마음이라는거야. 왜 모가 나지 않는 동그란 마음이랬을가? 애들의 마음은 순하고 깨끗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야. 모가 나면 어떻겠니? 마주 치면 아프지. 애들이 마음은 동그래서 마주쳐도 아프지 않거던. 그래서 싸우다가도 다시 돌아서면 희희 웃지 . 언제 다퉜거나싶게  싸웠나싶게 금방 서로 마음이 통하는거야.   3,4련은 서로 련계된단다.   쉬엄쉬엄 꿈을 키워갑니다 도란도란  꿈이 같은 애들끼리    포도들도 천천히 크고  애들도 천천히 크니까 <<쉬엄쉬엄>> 했지 뭐야. 그들은 서로 자기의 꿈이야기를 속삭이며 쉬엄쉬엄  자라는거야. 꿈이란게 뭐냐고? 포도들은 커서 달콤하게 익을 궁리를 하고 아이들은 자라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거지. 청포도나 애들이나 다 창창한 앞날이 있는거야. 그게 바로 꿈인거야.   5,6련도 한가지 내용이니까 함께 보는 것이 옳아. 초롱초롱  파아란 눈망울로 주렁주런  꿈 엮어 매답니다    초롱초롱은 포도알을 가리키기도 하고 애들의 눈을 가리키기도 해. 포도도 동그랗고 애들의 눈도 동그랗단 말이다. <<파아란>>이라고 한건 포도알의 색깔도 나타내지만 희망찬 애들의 눈에 대한 표현이기고 한거야. 주렁주렁  꿈을 엮어 매답니다    마지막 련인데 참 잘 표현했어. 얼핏 보기에는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말한 것 같지만 실제상에서 는 애들을 표현한거야. 애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며 자기 절로 자각적으로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니! 어디서 그런 의미가 나타나느냐고? <<꿈을 엮어 /매답니다>>에서야. 자각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주렁주렁 꿈이 익어갑니다>>로 표현하였을 거야.                                    19                                 백두산 폭포를 본 기억이 나니? 얼마나 장쾌하고 어마어마한 폭포였니. 금벽과 옥벽사이로 하아얗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 하늘 땅을 울리는 장쾌한 폭포소리는 우리 민족의 발걸음 소리같고, 하아얗게 일어나는 물안개는 우리 할머니들의 치마자락을 날리는 것 같단 말이다. 우리는 또 조물주의 재간도 보는거야. 어쩜 이런 폭포를 백두산에다 만들어 놓아 수천수만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당기고 있는가. 폭포는 아무곳에 있으나 모두 자연의 경관을 이루기에  그곳은 자연적으로 유람지로 되는거야. 이런 폭포를 어린이들의 마음에 맞게 쓴 동시가 있어. 한번 읽어보자. 폭포 정춘자 떠밀지마! 겁먹은 소리로 애원을 해도   사정 없이 떠밀어대는 장난꾸러기들 으아아! 아이쿠!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파할 사이 없이 산이 떠나갈듯한 웃음 하아얗게 부서지는 웃음    제목은 <<폭포>>지만 지문에는 폭포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고 폭포의 짝으로 내세운 애들이 어떻게 장난질을 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을뿐이야. 이런 짝을 의인화수법으로 찾았다고 하는거야. 누구 말이지. 당연히 내 말이야. 의인화의 수법으로 짝을 찾을 때, 동시의 경우에는 그 짝을 아이들로 설정하는 것이 좋아. 왜냐하면 동시의 대상이 아이들일뿐만 아니라 동시는 아리들의 심미세계를 그리기 때문이야. 어른들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아.   구체적으로 시를 볼가. 떠밀지마  겁먹은 소리로 애원을 해도 사정 없이 떠밀어대는 장난꾸러기들       이것이 첫두련이다. 시인은 폭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장나꾸러기들의 떠밀내기를 쓰고있어. 밀지 말라는데 자꾸 밀어부치는거야. 남은 무섭다고 애원해도 상관 없어. 마구잡이로 사정 없이 민다는거야.  장난이 심해도 한심하게 심한거야. 애들의 이 장난이 바로 뒤물결이 앞물결을 밀며 물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의 폭포현상을 표현한거지 뭐야. 물은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마련이야. 낭떠러지는 낮은 곳에 있단말이다. 떨어지기 싶어도 떨어지고 떨어지고 싶지 않아도 떨어진단 말이다. 으아아! 아이쿠!   이 3련의 표현이 얼마나 새치스럽니! 갑자기 놀라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지만 그속에는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 환히 보이지 않고 뭐야.   4,련이야말로 정채로운 표현이야.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파할 사이도 없이    정말 그래 . 언제 떨어지며 아파할 사이가 있겠니! 뒤물결이 마구 앞물결을 밀며 쏟아져 내리는데야. 정춘자시인님은 마지막련에다 이렇게 쓰고있어. 산이 떠나갈듯한 웃음 하아얗게 부서지는 웃음     이건 절창이야. 폭포의 소리에서 웃음을 찾은거야. 폭포를 웃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나 구사해낼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세하게 말하겠어. 폭포가 어떻게 웃음으로 둔갑할수있는가는 잠시 비밀이야. 뭐 시뚝한다고. 아니야. 우선 여기서는 시인의 기발한 상상을 보아내는 것이 중요해. 기발한 상상이란 아무도 보아내지 못한 것을 보아내고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어내는거야. 폭포를 쓴 시를 적잖게 보았는데 폭포를 웃는다고 한시는 이번이 처음이지 뭐야. 제일 처음 글에서 우리는 시를 쓰려면 눈은 현미경이 되어야 하고 귀는 청진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어. 그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야.                                20 야, 요기 재밋는 시가 또 있다. 무슨 시야. 해바라기야. 누가 썼니? 서효석 시인님이야. 어떻게 썼나 보자. 해바라기     서효석 흙돌담위에  고개를 얹어놓고 빈 집을 지키는 해바라기 담 넘어로 얼굴 내민 빠알간 대추 누가 와서 따갈가봐 보살펴주고  추석 차례상에 올려질 홍시 행여나 떨어질라 쳐다봐 주고 하루종일 혼자서 살피느라고  눈알이 많아진 해바라기     어때 ? 특점이 있어. 사실 해바라기는 엄마랑 아빠랑 부탁을 받고 집을 지키고있는 아이로 되어있지만 서효석 시인님은 그렇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단말이다. 이런 뜻을 이미지로 밝히고 있는거야. 첫련에서부터 해바라기를 의인화시켜 놓아서 해바라기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되었지 뭐야. 나가 놀지도 못하고 대추랑 홍시랑 지키는 외로운 아이가 되어 뜨락에 갇쳐있는 불상한 애가 되었단말이다.     1령에서 서효석  시인님은 해바라기가 어떤 해바라기인가를 밝히고 있는거야.  홁돌담위에  고개를 얹어놓고 빈집을 지키는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절로 자라나는 해바라기인 것이 아니라 흙돌담위에   택을 고이고 빈 집을  지키고 있는거야. 집사람들은 모두  일하러가고 강아지도 없어. 닭들이 노는것도 보이지 않는 빈집에서 해바라기만이 외롭게 서있는거야. 무엇 하느라고 혼자서 있을가? 그건 2련에 해석 이 있어. 담 넘어로 얼굴 내민 빠알간 대추 누가 와서 따갈가봐 보살펴 주고 추석  차례상에 올려질 홍시 행여나 떨어질라 쳐다봐 주고 해해해...왜 웃니? 해바라기가 한다는 일이 우습지 뭐야. 담 넘어에 열려있는 대추를 누가 따가는가고 보초를 서고, 추석 차례상에 오를 익은 감이 떨어지는가를 쳐다본다재. 웃을게 아니야. 서효석 시인님은 추석전야의 시골의 풍요롭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우리들의 눈앞에다 그려주고 있는거야. 그건 그래. 하루종일 혼자서 살피느라고  눈알이 많아진 해바라기    마지막 련이 정채롭단 말이다. 해바라긴 열심히 일하고 있는거야. 하루종일 혼자서 대추랑 감이랑 지키지 뭐야. 그러는 사이에 눈알이 많아졌다는거야. 얼마나 묘하니. 눈알이 많아졌다는건 해바라기가 다 여물었다는 얘기야, 그런걸 눈알이 많아졌다고 했어. 꼭 여문 해바라기알을 알마다 집을 지키느라고 부릅뜬 눈이라고 한건 기막힌 절창인거야. 어찌 열심히 대추랑 감이랑 지켰으면 숱한 눈알이 생기였겠니.    동시를 배우면서 한가지 알아둘것이 있어. 시인은 자기의 의도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이미지속에다 용해시켜 넣어야 한다는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 시는 추석전의  시골마을의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을 쓴것이지만 그렇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는거야. 재간 없는 시인이라면 꼭 아름다운 시골이니 시골은 포근하다느니 하고 개념적인 말을 써넣었을 거야. 동시라는건 자기가 쓰려는 시적대상을 잘 그려놓으면 되는거지 의도적인 언어가 끼여들면 안 되는거야. 우리의 동시들은 개념을 끼워넣는 일이 너무 많단 말이야. 우리의 동시가 한국의 동시보다 재미 없는건 바로 이때문이기도 해. 우리의 동시는 애들이 시를 보고 저절로 무엇을 느끼게 하고 게발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자신이 나서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어떤 의도를 내리멕이려 하는거야. 선전을 하고 교육을 하고. 참 싱거운거지.                 
47    한국명동시비평시리즈 댓글:  조회:947  추천:33  2008-11-25
  시원하니 일등베옷 차거울때 입으면요 후꾼우니 일등베옷 늙은이가 입으면요 젊어지니 청춘베옷 가난뱅이 입이면요 부자되니 보내베옷 부자들이 입으면요 한평생을 복만받아 태평세월 흥타령에 천하복이 다온대요 한벌베옷 쌀한되라 눅거리오 막눅거리 어르신님 어르신님 우리베옷 한벌사소 일복이와 그의처는 호기심이 부쩍났네 쌀두되를 제꺽내고 신선베옷 사입었네 노란베옷 입은일복 빼빼여윈 황소되고 까만베옷 입은아낙 빌기먹은 돼지됐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말하는가 착하면요 복을받고 악하면요 벌받는다                 한국명동시 감상시리즈                                      1   시를 어떻게 쓸가? 시는 참 재미있는건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시가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시라하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앞이 새까매 나죠. 기실 시는 읽기도 재미나지만 쓰기도 재미나는거야.   시를 쓰자면 책을 많이 봐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시를 쓰게 되는가를 생각할줄 알아야 해. 마음 준비가 있어야 하는거야. 한국의 김완기 시인님은 이런 시를 썼단다. 시를 쓸 때면 김완기 시를 쓸때면 내 귀는 청진기가 된다 새이야기 꽃이야기 돌이야기 벌레들의 숨소리 나무들의 맥박소리 시를 쓸 때면 내 눈은 만원경이 된다 해이야기  별이야기 눈이야기 무지개가 보인다 옥토끼가 보인다   요 시가 시 쓰는 비결을 알려주잖니. 시를 쓸 때 귀는 청진기가 되고 눈은 현미경이 되여야 한다는 거야. 귀가 청진기가 되여 남들이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눈은 현미경이 되여 남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내는 거야. 자기가 새로 듣고 자기가 새로 본 것을 쓰면 시가 되는 거야.  피ㅡ 새가 울지 어디 이야기를 하니? 울지. 입도 없는 꽃이 또 어떻게 이야기를 하니? 그 땅땅한 돌이 무슨 말을 하니? 풀벌레들의 숨소리를 듣는 사람이 어디 있니? 나무가 뭐 동물이니? 피가 있니? 동물도 아니고 피도 없는데 어떻게 맥박이라는 게 있니? 맥박이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듣니? 피ㅡ 다 거짓말이야. 그리구 해며 별이며 눈이며를 보는거지 어떻게 하면 그것들의 이야기를 본다고 하니? 이야기라는 건 듣는 거 아니야. 무지개는 보이지만 옥토끼야 어디 보이는 거니? 옛말에 그저 그런게 있었다는 얘기지. 으음 알았다. 시라는게 그래 거짓말 할래기구나!    얘 봐라. 그게 어디 거짓말이니? 그게 상상이라는거다. 상상이라는게 뭐니? 생각한다는거야. 상상한다는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거면 거짓말이 아니고 뭐니? 거짓말이라는건 남을 깜박 속이기 위해 하는 나쁜 일이지만 상상한다는건 남들에게 아름다움을 주기 위하여 엉뚱한 생각을 해서 그것을 시로 쓴다는거야. 그러니까 거짓말과 상상은 완전히 성질이 다른거란다. 거짓말은 나쁜 습관을 배양하며 우리들을 잘못되게 만들지만 시를 상상해 낸다는건 우리들의 사고력을 키워주고 총명해 지게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해지게 하고 우리들을 훌륭한 리상을 추구하게 하고 분발하게 하고 우리들을 곱게 자라나게 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거짓말과 시적상상은 물과 불처럼 다른거야    야!ㅡ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상상이라는게 좋기는 좋구나. 나도 눈을 현미경으로 만들고 귀를 청진기로 만들어야겠다 해해해,,,,                                        2   얘, 내 눈을 현미경으로 만들고 하고 내 귀를 청진기로 만들었는데 왜 시가 보이지 않니? 해해해... 임마 웃기지마. 눈을 크게 뜨면 현미경이 되고 귀를 도사리면 청진기가 되는 줄 아니. 요 아담아를 써야 해. 그래 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이지. 시는 어디나 다 있는거야. 니게도 있고 내게도 있고 ,풀에도 있고, 돌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새에게도 있고, 하늘, 땅, 해, 달, 병, 바다, 강, 시내물, 하여튼 없는 곳이 없고 무슨 물건에나 다 있는거야 거짓말이라구? 신현득시인님이 시를 어떻게 쓰셨는가 볼가. 그분은 [시를 잡아라]는 시를 이렇게 쓰고있어.   시를 잡아라       신현득    풀잎에 파란색이 있듯이 풀에는 풀로 된 시가 숨었다 도랑물에 졸졸졸 소리가 나듯 물속에는 물로 된 시가 숨었다 꽃속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있듯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숨었다 아이들아 너희 눈으로 풀잎의 시를 잡아라 너의 귀로 물속의 시를 소리 들어라 꽃속의 시를 냄새 맡아라 아이들아!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        어때. 시가 어디 있는지 좀 알리지. 물에는 물로 된 시, 풀에는 풀로 된 시,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있다 그랬지 뭐야.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라고 했지 뭐야. 이건 어디나 어떤 사물에나 다 시가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왜 보이지 않지. 그건 우리 눈이 아직 현미경이 안 되였고 우리 귀가 아직 청진기가 못 되였다는거야. 어떻게 현미경이 되고 어떻게 청진기가 되냐고? 거기엔 문장이 많아. 많은 문장에서 가장 주요한것은 상상이야.    상상이란 일종 기억을 떠올리는거야. 지나간 일을 생각해 떠올리는거야. 강하면 자기가 알고있는 강의 색갈, 모양, 소리, 특성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뿐만 아니라 그 강의 위치, 흐름새 및 주위의 사물 그리고 주위사물들과의 관계랑 많구두 많다. 우린 이런걸 많이 생각해 낼수 있는데 그게 바로 상상이라는거야. 으응 그런거구나. 나도 그만쯤한 것은 생각할수 있는데 시를 쓰자면 안 되드라. 그래, 그런것을 생각할수 있으면 시가 되는것이 아니야. 그것들을 적당하게 잘 주어 맞추어야 하는거야. 다시 말하면 그런것들을 생각한 다음 상상을 더해서 새로운 느낌을 더 생각해내야 되는거야. 아무도 느껴보지 못한 니만의 느낌을 말이다    야야야, 골이 아프다. 무스게 그렇게 복잡하니? 야, 시 쓰는것도 학문인데 복잡하지 않겠니! 복잡하길래 누구나 다 시 쓰는거 아니야. 꽥꽥거리지 말고 참고 들어봐. 응, 듣는다. 말해. 기억해. 새로운 느낌이 떠오르면 그 느낌에 의하여 자기가 상상한것들을 다시 조합, 배렬하면서 수요되는 것은 쓰고 수요되지 않는 것은 버리는거야. 나두 단김에 똑똑히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시를 공부하노라면 차차 알게 될거야.                                       3   봄이 왔구나. 개학도 하고 참 좋구나. 따스한 봄날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다닌다는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니! 공부를 하고 들판에 나가면 아지랑이가 아롱거리고 들에도 나무에도 파아란 새싹들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따스한 바람이 머리를 살살 간지른다.  강물도 시내물도 새봄을 맞았다고 허리를 쭈욱 펴고 자유롭게 흘러가지. 이따금 노란 나비 갈색 나비들이 한들한들 하늘을 난다. 산기슭에 가면 다람쥐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고 쪼르르 달아다닌다 오늘은 뒤산으로 진달래 구경을 가고 래일은 앞산으로 살구꽃구경을 다고 짝자궁을 친다. 진달래가 활짝 핀 산에 가서 산아래를 굽어보면 아빠랑 엄마랑 봄일을 하는것이 환히 보이거든. 만물이 소생하고 생기를 띠는 이 봄이 어떻게 왔으며 누가 보냈는가를 생각하면 고마운 생각에 눈물이 날지경이야. 이런 봄을 시로 쓴다면 얼마나 멋지겠어. 얼결에 이런 생각이 들었지 뭐야. 또 멋진  시가 떠올랐어. 그런데 제목을 봄이라고 달지 않고 [온실]이라고 달았지뭐야 읽어보라구? 그래 읽을게 온실 김진태 봄이 큼직한 온실을 만들었다 집 보다도 공원보다도 산보다도 더 큰 온실이다 유리로는 덥개를 할수 없다 하늘도 파아란 뼁기칠한 하늘로 덮었다 때 맞추어 물을 준다 새순이 다치지 않게 고이고이 보슬비로 물을 뿌린다 엄마젖같은 단비물 촉이 솟는다 아가도 덩달아큰다   어디서 그런 시를 가져왔니? 야ㅡ멋있다! 그래 멋있지. 김진태선생님이 쓰신거야. 얼마나 잘 썼니 봄이 온 대지를 온상이라고 하였단말이다. 그렇지 집보다 공원보다 산보다 더 큰 온실, 그 온실유리는 파아란 뼁기칠한 하늘, 새싹에 내린는 비는 어머니 젖처럼 달콤한 비물, 풀싹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먹고 나무잎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머고 꽃봉오리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먹고 빨강꽃 노랑꽃 하얀꽃들을 히히 흐드러지게 피운단말이다. 새싹이랑 꽃이랑 얼마나 좋겠니! 그것들만 좋겠니 우리도 좋지, 그래 우리도 좋지. 그래서 [아가도 덩달아 큼다]고 했단말이다.    [봄이 큼직한 온상을 만들었다]는것도 멋있지만 온실이 너무 커서 덮을 유리가 없으니까 [파아란 뼁기칠한 하늘로] 온상을 덮었다는것도 상상이 묘하다야 하늘로 온상덮대를 하였다니까 우리 사는 대지가 온상이 되였단 말을 아니해도 온상이라는것을 금방 알수있지? 그렇지? 으응 어디 그뿐이니. 아빠랑 엄마랑 온상에서 새싹들에게 물초롱으로 물을 주는것을 생각하고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여 새순들에게 때를 맞추어 물을 준다고 하였재. 그것도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것처럼. 얘 그런데 [촉]이란게 뭐야? 만년필촉처럼 뾰족한걸 [촉]이라 하거든.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촉은 새싹을 말하는거야. 새싹도 뾰족하게 돋거던 .맞다 그러고 보니까 시라는게 결국은 비기며 쓰는게 아니야.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을  서로 비기면서 쓰는것같아. 글세 그런같기도 한데 잘 므르겠다. 이제 시를 많이 읽고 배우면 알게 될거야.                   4   얘, 봄에 대해서 세가지로 나누는 같다 이른봄 ,봄 ,늦은봄 이렇게 말야. 내게 봄에 대한 시가 네것보다 다른게 있단다. 보자 . [이른봄]. 그래 이른 봄도  있지.  어떻게 썼는가보자   이른 봄      최춘애  암탉이 알을 품듯  봄님이 온 세상을 품고 있다 안개 낀 아침 닭의 체온으로 보송보송 예쁜 병아리가 깨이고 봄님의 품안에서 병아리처럼 고렇게 예쁜 연두빛 새싹들이 깨일테지 조올졸 내리는 비는 새 싹의 젖줄 새 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젖줄을 빤다   야, 세상에. 김진태시인님은 봄을 [온실]이라던데 최춘애시인님은 이른 봄을 암탉이 알을 품는다고 했구나. 암탉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오는것처럼 봄이 대지를 품고있으면 병아리처럼 예쁜 새싹들이 나온다고 했구나. 정말 근사하구나. 맞아. 정말 근사하다. 참 묘하고 재밋다. 비를 쓰는것도 두시인님이 다 젖이라고 했는데 조금씩 달라. 김진태 시인님은 엄마젖같은 비물을 뿌린다고 했지만 최춘애시인님은 .아예 비를 새싹의 젖줄이라면서 새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빨아먹는다고 했재. 나는 춘애시인님이 쓴것이 더 재밋다. 강아지가 에미젖을 빨아먹는것처럼 새싹이 자기 어머니 하늘이 내려보내는 젖을 쫄쫄 빨아먹는것을 보는 것 같단말이다    옳지 그렇지! 뭐가 옳지 그렇지야? 전번에 우리 말한것이 맞단말이다. 시를 쓴다는것이 이사물과 저사물을 비기면서 쓰지 않았나 했지 뭐냐. 이제 보니 정말 그렇단말이다. [온실]에선 봄을 온실이라고 했재. 그리고 하늘을 온실덮개라 하고 새싹을 촉이라 했재. 이게 그래 두 사물을 비기면서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만들어 쓴게 아니고 뭐야. [이른 봄]도 그래 이른봄을 알을 까는 암탉에 비기고 병아리와 새싹을 비기면서 썼고 비와 젖을 비기면서 쓰고 싹이 비물에 젖는것은 강아지가 에미젖을 빨아먹는것과 비기면서 썼재.    그것만도 아니다. 또 있다. 뭐야? 상상으로 짝을 맞추어 쓰는거야. [봄]과 [온실]을 짝을 맞추고 [하늘]과 [온실덮개]를 짝을 맞추고 [비]와 [젖]을 짝을 맞추고 [새싹]과 [촉]을 짝을 맞췄다.  맞다. 그건 김진태시인님이 [온실]에서 짝을 맞춘거고 최춘해시인님은 [이른 봄]에서 [이른 봄]과 [암탉]을 짝을 맞추고 [새싹]과 [병아리]를 짝을 맞췄지뭐야. 그래 이러한 짝은 명사적으로도 짝을 맞출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실과 사실로도 짝을 맞추어 쓰고있는거야 [이른 봄]에 나오는 마지막이 그래,.  병아리 깨이듯이 [연두빛새싹]이 봄의 품속에서 깨여나온다는거나 새싹이 빗물에 젖는것을 [강아지처럼 젖줄을 빤다]고 한것들은 모두 사실과 사실을 짝을 맞추어 쓴거란말이다.     야!ㅡ 그럼 시 쓰기가 짝 맞추기라면 너무 틀리는것은 아니겠다. 그렇구말구. 짝을 맞추자면 짝을 찾아야 하고 짝을 찾자면 상상을 잘 해야 한다. 히히 시란건 사람의 상상이 쓰는거구나 상상을 잘 하는 애가 시를 잘 쓰겠구나.                                                                    5      얘, 짝이 아니 드러나게 쓰는 시도 있다. 어느 시나 다 짝이 드러나는것은 아닌거야. 짝을 맞춘다는건 상상을 하는 주요한 한가지 방법일뿐이야. 기어코 짝이 다 드러나야 된다는건 아니야. 피ㅡ 변작도 많구나. 우리가 이제까지 봄에 대한 시를 공부하였으니까 같은 봄이란 시를 례를 들어볼가 그럼 꼭 짝이 드러나게 쓴다는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돼. 보자     봄       허동인 누가 이처럼 세심하고 부지런 하리오 나무마다 풀마다 빠뜨리지 않고. 꽃 피우게 하고 잎 피우게 하고 땅속에 묻쳤던 씨앗들은 하나하나 움트게 하고 누가 이같은 엄청난 사랑을 지녔으리오 겨우내 잠들었던 곤충들의 알, 번데기 흔들어 눈뜨게 하고 땅속에 숨었던 뱀, 개구리들도 모두모두 일깨워주고     야ㅡ고게 재밋다. 그런데 정말 고게 누기야? 무르는가 해서. 고게 누긴 누구겠니? 고게 봄이지. 봄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입을 꼭 다물고 말한마디 하지 않지만 우린 알아. 봄이란걸.   봄이면 나무마다 풀마다 잎이 피여나고  꽃이 피여나고 흙에 파묻쳤던 씨앗들도 죄다 싹 튼다는걸 누가 모를라고. 봄이면 곤충들의 알이 곤충으로 깨여나고 번데기들은 살때가 왔다고 땅속에서 기여나오는걸 누가 모를라고. 봄이면 뱀이랑 개구리랑 겨우내 동면하던 많은것들이 잠에서 깨여나 밖으로 어정어정 나온다는걸 누가 모를라구. 웃기재이. 그외에도 많지 물새랑 옌지새랑, 개미랑, 기러기랑, 제비랑 다 겨울에는 보이지 않던것들이 봄이 되면 모두 다시 나타나서 봄은 생생 끓는단다.    이 시에 어느게 짝이 있니? 없다. 그래 없지.이 시에 나오는 나무도 짝이 업고 풀도 짝이 없고 씨앗도 짝이 없고 곤충의 알도 번데기도 뱀도 개구리도 모두 짝이 없는 외동고지들이야. 그런데 왜 재미 있지? 봄을 맞아 이러한것들이 살아나는것을 누군가가 부지런히 하고있다는바람에 재미가 무척 나게 된거야.  봄이 오니까 자연스럽게 되는걸 가지고 어떤 대단한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놓는것처럼 시인이 상상하는바람에 우리가 저도 모르게 시속으로 끌려들어갔지 뭐야    맞아 봄이란건 기후가 춥던데로부터 따스해지는것이 봄이거든. 기후가 따사로와지니까 얼었던것이 다시 살아나고 땅속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여 죽은체 하고 있던것이 다시 나오고 강남에 갔던 철새들이 다시 돌아오고 하지. 엄마랑 아빠랑 새해농사를 시작하지. 봄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멀리 갔다가 다시 온걸 우리들에게 알려주는거란 말이다   이 시가 참 묘하다. 시인은 짝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짝을 드러내지 않고있지 뭐야. 봄의 짝을 누군지 알수 없는 사람으로 설정했단말야. 이 짝이 뭘가? 기실 사람은 아닌데. 하늘일가? 땅일가? 아니면,,,                                                  6   한국에  오순택시인님이 봄비를 어떻게 썼는지 알아, 참 재밋게 썼어. 봄비라 하면 시인님들이 오금을 못쓰는가봐. 거이 모든 시인님들이 봄비를 쓰고 계시거든. 봄비야 좋기는 좋지 농민들이 밭에다 씨앗을 심어놓으면 싹이 나오지 않다가 하루밤만 봄비가 오면 밤사이에 밭이 새파랗게 되는거야 길가에 풀들도 파랗게 돋아나고. 그런날 아침은 기분이 나재.     왕청같은 말을 했재. 오순택시인님의 시를 본다하구선   봄비    오순택 나직나직 꽃의 말에 귀 기울이는 봄비 꽃잎에  고운  발자국 놓고 간다 알몸이 되어 푸르르 푸르르 떨고있는 풒잎에 앉으면 초록 구슬이 되는 봄비 연못엔 음표를 놓고 간다       야ㅡ요고야 정말 깜찍하네. 어떻게 요렇게 깜찍한 상상을 끌어냈을가? 이제 좀 따져보자 나직나직  꽃의 말에 귀 기울이는 봄비 꽃잎에 고운 발자국 놓고 간다    요 1,2련이 한개 내용이구나.  소곤소곤 나직이 속삭이는 꽃의 말을 듣고 봄비가 꽃잎에 고운 발자국을 놓고 간다는것이 기막히게 재밋재. 봄비와 꽃이 짝궁이 같단말이다. [고운/발자국 놓고 간다]는 발자국이란게 뭐겠니? 봄비가 꽃잎에 내리면서 떨어지다 남은 이슬이지. 그런데 그것을 사람이 걸으면서 남기는 발자국이라고 했지 뭐야. 정말 깜찍해. 고것들이 나직나직 말을 주고 받으며 하는짓이 시샘이 나! 두번째 내용이 어떤가 볼가 알몸이 되어 푸르르푸르르 떨고있는 풀잎에 앉으면 초록 구슬이 되는 봄비   첫두련은 봄비와 꽃의 사실을 표현하고 세번째련은 봄비와 풀의 사실을 표현한거야. 그래 비방울이야 옷이 따로 없으니까 알몸일수밖에 없지 [푸르르푸르르 떨고있는 풀잎]이라는것도 표현이 새롭재. 풀잎에 있는 비방울이 [초록 구슬]이 된다는것도 재미나게 짝을 찾은거야 이 세번째련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앞에 펼쳐주고있지 뭐야. 연못엔 음표를 놓고 간다    네번째련은 요렇게 두줄이지만 쟁쟁 소리가 나게 여물었지 뭐야. 비오는 날 연못가에 서서 비방울이 떨어지는것을 바라보면 비방울이 떨어지면서 숫한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연못물이  살작살작 튕기지. 그 동그라미와 튕기는 물을 도레미파솔라시를 펴현하는 음표라고 했지 뭐야. 시인이 관찰이 얼마나 세심하고 짝을 맞춘것이 얼마나 기발하고 재미있는지 모르겠어    얘, 이 시에는 짝을 맞추는것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재. 짝도 잘 맞추었지만 전반시에 등장하는 비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구나 [귀 기울이는 봄비]라든지 [발자국을 놓고 간다]든지 [알몸]이라든지 [풀잎에 앉는다]든지 [음표를 놓고 간다]든지 모두가 사람처럼 표현하였단말이다. 비를 사람처럼 만들어놓으니까 참 비가 친구처럼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친절해 보이재. 마치 네나 나의 짝궁이 같단 말야    그래 의인법이라고 배워주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뭐야. 의인화수법을 쓰면 말도 부드러워지고 재미도 난단말이다. 야, 이재 보니까 의인법을 잘 쓰면 재미나고 좋은 시가 되는거 아니야. 맞다! 마땅히 그래야 해. 우리와 세상 사물은 모두가 이 지구에서 함께 사는 친구거던. 사물을 의인화하는것도 히히 좋은 시를 쓰는 방법의 한가지야.                                  7   시가 어디 있는가? 누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지만 시는 우리들이 있는곳에는 다 있는거야. 문제는 시가 있는것을 볼줄 모르고 캘줄 모르는거야. 시인들은 시시한것같은 일상생활에서 무우밭에 가서 무우를 뽑아내는것처럼 시를 쑥쑥 뽑아내고 있는거야. 문제는 사물이나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와 관계된단 말이다.    이른 아침이나 비가 온뒤에 빨래줄에 비방울이 쪼르르 달리지. 그 빨래줄에 제비랑 참새랑 앉았다가 날아가면 물방울들이 주르르 떨어지지. 너 이런걸 보고 시를 쓸만 하니? 그게 어떻게 시가 되느냐고? 그래 우리는 못쓰거나 쓰기 바쁘지만 시인들은 우리가 보기에 시시한 이런 사건을 가지고 재미 있는 시를 썼단 말이다 김희정시인님이 쓴 시 [비 내린 아침]을 한번 읽어볼가. 비내린 아침 김희정    소리 없이 내린 이슬비 은빛 찬란히 빛난다 빨래줄의 수정구슬 하나하나에 작고 어여쁜 무지개가 선다 아침해살에  눈을 뜬 참새는 수정구슬 튕기며 포르르 날아간다      어떻니? 재밋니? 그래  재밋지. 무척 재미있는 시야. 그런데  이 시에는 특별한 언어도 보이지 않아. 그저 수수한 언어로 구수하게 엮어내려갔어 무기교가 기교라는 말을 이런 시를 두고 말하는걸거야 [비방울]을 [구슬]이라는것쯤은 누구나 다 할수있는 말이잖아 물방울 하나하나에 [무지개가 선다]는것도 모르긴 해도 김희정시인이 발견한건 아닐거야. 시를 보느라면 이따위들은 많고도 많지뭐야. 다 수수한데 어떻게 좋은 시가 되느냐고? 수수한것 같지만 수수하지 않은 곳이 있지. 그건 이 시의 제3련이야 다시 읽어볼가 아침해살에 눈을 뜬 참새는 수정구슬 튕기며 포르르 날아간다     어떻니? 보이는게 있지 않니? 그렇지. 시골의 아름다운 아침이 보이재. 해살이 부채살처럼 산으로부터 마을로 내리비치는데 빨래줄의 이슬들이 해빛에 반짝인다. 금방 잠을 깬 참새들이 빨래줄에 조롱조롱 앉았다. 내가 문을 열고나간다. 참새들이  포르릉 날아가며 째재잭 운다. 빨래줄에선 물방울이 아니라 구슬이 그것도 수정같이 맑은 구슬이 해빛에 찬란한 구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 아니 많이 주르르 떨어진다. 황홀한 정경이 아니고 뭐야!    참새! 고놈의 참새를 등장시키는것이 김희정시인님의 재치야. 참새가 날아가는 바람에 구슬이 떨어졌거던. 실생활에 이런 일이 많단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특징을 잡아서 표현하는가가 중요해.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시인자신만이 아름답게 체험한 생활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가져다 써먹는거야. 그러기만 하면 평소에 보기에는 아무리 수수한것일지라도 금빛 은빛이 반짝반짝 나지 뭐야. 고런 시는 한번 읽어보면 마음이 고소해 나고 두번 읽어보면 기억에 남는거야. 한두번 읽오봐서 아무런 느낌이나 재미가 나지 않는 시는 안돼.  여러번 읽어봐도 그저 그렇구나 하는 감정이 들면 그 시는 빵점이지 뭐야. 어디서 듣던 소리같은 시, 어디서 보던 같은 시, 한마디도 새로운 말이 없는시, 이러한 시는 아무리 말을 곱게 다듬어도 빵점이지 뭐야                                      8   봄이 오면 우리가 제일 감사하게 생각되는게 많지만 우선 봄바람이 감사하재.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겨우내 그렇게 지겹게 입고 다니던 솜옷을 활활 벗어서 팽개치는것만 하여도 거뜬한 심정이지뭐야. 봄바람이 솔솔 불면 아지랑이가 나울나울 춤을 춘다. 그러면 산골애들은 삽을 메고 밭으로 달려간다. 뭘 하냐고, 메를 파지. 삽으로 땅을 푹푹 파서 슬슬 엎어놓으면 하얀 메뿌리가 나오지. 실한것은 손가락처럼 실해. 흙을 싸악 털어버리고 꽁꽁 씹어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어. 봄바람은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과 생기를 줄뿐만 아니라 이 크나큰 자연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단말이다    리효선시인님이 쓴 시  [봄바람이]  어떻게 씌였는가를 한번 볼가 여보세요!여보세요! 그만 눈을 뜨셔요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흐든다 어서 파란 싹을 틔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만 잠을 깨셔요 봄바람이 개나리가지를 잡고 흔든다 어서 노란꽃을 피우라고 여보세요!여보세요! 내말을 좀 들어보셔요 봄바람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낼모레면 개나리가 필거라고   어떻니? 이 시의 내용에는 별로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 그렇지만 재미있는거야. 봄을 노래할 때 새싹이요 꽃이요 봄비요 하는것들은 누구나 다 쓰는 사물이니까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사실은 모두 수수한것들이야. 더구나 이 시에서는 상상으로 짝을 새롭게 맞추었거나 신비한 비유를 끌어온것도 없단말이다. 그런데 왜 요리 재미있을가?    왜 골을 빽빽 돌리니? 그렇지 바로 그게란말이다. [여보세요!여보세요!]하고 감동적으로 부르는거야. 요 언어가 참 매력이 기막힌거야.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흔들며 어서 파란 싹을 틔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개나리를 붙잡고 어서 꽃을 피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랠모레 개나리가 필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것이 얼마나 친절하고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한번 읽어보면 우리 가슴을 따스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소올솔 차분하게 러든단말이다 마치 누나가 따뜻하고 정다운 목소리로 말하는것 같잖아    비결이 어디에 있을가? 그렇지! 그래. 바로 그거야.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며 개나리 가지며를 다정하게 흔들며 직접 그들을 이깨워주기 때문이야 마지막련에서는 자기가 일깨워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처럼 랠모레 개나리가 필거라고 으쓱해서 속삭이기까지하지 뭐야      그러니까 시를 쓸 때 내용도 주요하지만 형식도 주요하단말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형식이 따라가지 않으면 감칠맛이 약하거나 없게 된단말이다. 그런데 형식을 면바로 리용하면 수수한 내용도 재미있게 엮어진단다. 그렇다고 형식만 부려서 된다는건 아니야. 텅빈 내용은 아무리 좋은 형식이래도 안돼. 재간 있는 색시도 쌀이 없으면 밥을 못짓는다재.    형식과 내용의 통일, 이게 바로 동시에서 추구해야 하는거야. 형식이란건 어떤 수법으로 시를 쓰는가 하는것이고  내용이란건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는거야. [봄바람]에서 리효선시인님은 [여보세요!여보세요!]하는 감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고있지 뭐야. 처음 [여보세요]를 읽어보면 전화를 거는것같은 감이 들지만 아래를 읽어보면 그런것이 아니지 뭐야. 친절하게 착각을 주었다가 독자를 내용에로 끌어들이는것도 이 시의 또 하나의 성공의 비결이야.   우린 이 시에서 의인화수법의 매력과 위력에 다시 한번 깊은 감동을 받지 뭐야. 동시는 그래 .외로 쓰던 모로 쓰던 시에 의인화수법이 용해되여 있어야 해. 그래야 친절하고 감동적이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목적에 도달되는거야.                   9       봄에 대한 시를 한수 더 볼가. 엉? 무슨 봄에 대한 시가 그리 많으냐고. 그래 봄에 대한시가 많아. 그건 시인마다 봄에 대한 느낌이 다르기때문이야. 같은 느낌이라도 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시가 되거든. 그럼 리건호시인님이 쓰신 [봄]이라는 시를 한번 읽어볼가   봄     리건호 한마리  두 마리 ,,,,,,,,,,,,, 전기줄에 제비가 앉는다 하나 둘 까만 음표가 늘어간다 오르며 찌지굴 내리며 쪼조글 음표보고 부르는 종달새 노래 보리싹이 큰다 살구꽃이 핀다.   얼마나 재밋니.? 우리  이제부터 한개련씩 어떻게 쓰였는가 보자. 모두 네개련인데 첫련은이렇게 썼어.  한 마리  두 마리 ,,,,,,, 전기줄에 제비가 앉는다    여기서 우린 두가지를 알수있어. 한가지는 시인이 봄을 쓰는데 제비를 노래하는것으로써 봄을 노래하려 한다는것을 알수있고 다른 한가지는 이 련에 있는 줄임표에서 한두마리 제비가 아니라 많은 제비를 노래하려 한다는것을 알수있단 말이다. 첫련은 한마디로 말하면 제비가 전기줄에 많이 날아와 앉는다는것을 쓴거야. 시인이 무엇을 쓰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표현했을뿐이야. 시적으로 말하면 이런것을 계기라고 해. 이런 시적계기는 시마다 다 한개련씩 차지하고 있는건 아니야. 시는 일반적으로 계기가 있지뭐야. 계기는 모두 첫련에 있는데 한줄이 될 때도 있고 한개단어가 될 때도 있는거야. 구체적인건 후에 말하자.   제2련은 이렇게 썼어.   하나 둘 까만 음표가 늘어간다     음표란게 뭐지. 제비야. 제비가 2련에 와서 음표가 돼버렸지 뭐야. 왜 제비를 음표로 둔갑시켰지. 짝을 찾은거야. 어떻게 찾은거냐고? 전기줄이 여러갈래가 쭉쭉 뻗어간것은 오선보와 비슷한거고 그 전기줄에 제비가 앉은건 도레미파 솔라시 하는 음표와 비슷한거야. 그러니까 전기줄에 앉은 제비를 음표라고 했지 뭐야. 야, 거 묘하다. 제비가 5선4간에 있는 음이 되였구나! 정말 근사하다.    오르며 찌지굴 내리며 쪼조글 음표 보고 부르는 종달새 노래    이것이 제3련이야. 2련에서는 전기줄에 앉은 제비를 음표라 하고 3련에서는 그 음표를 보고 종달새가 [찌지굴] [쪼조글] 노래를 부른다고 했지 뭐야. 제비는 음표가 되구 종달새는 그 음표를 보면서 노래를 부른다 얼마나 묘하고 재밋니!   리진호시인은 묘돌이야. 어쩜 이보다 더 재미있을수가 있겠니.봄이면 종달새가 봄이 왔다고 즐겁게 우는것을 보고 제비가 전기줄에 앉은것을 음표로 알고 노래한다는 상상이야말로 신비하고 독창적이재.    마지막 4련은 간단하면서도 참 잘 썼어.[보리싹이 큰다/살구꽃이 핀다] 하고 말이야. 화창한 봄날의 아름다움과 생기가 우리 눈앞에 한폭의 수채화로 확 안겨오잖아. 이젠 우리도 별로 봄같은 제목으로 시를 쓸것 같지. 돌아가 한번 써볼가. 정말 쓰자면 바쁠지도 모르겠지만 별로 쓸것만 같아.                                      10    봄이 오느라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리운것들이 많지. 그중에서도 제일 그리운것이 제비라고 할수있어. 폭발적인 새소식은 딴거야. 봄에 제비는 올 때 고작은 날개에다 봄을 가득 싣고 와서 산과 들에다 부리우거든. 제비가 오면 나무잎들이 앞장 다투어 피여나고 꽃들이 앞장 다투어 피여나는거야. 제비야말로 천사지. 봄을 실어오는 천사란말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우리는 은근히 제비를 기다리게 되는거야.   아이들의 이런 심정을 표현한 시가 있어. 서덕출시인님이 쓰신 [봄편지]야. 어떻게 썼는냐구? 한번 읽어볼가.     봄편지         서덕출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모두 여덟줄로  된 시야. 참새는 작아도 오장륙부가 다 있듯이 시는 짧아도 기승전결이 다 있어. 뭐? 기승전결? 듣지 못한 소린데. 그래 듣지 못한 소릴수도 있어. 이는 옛사람들이 시를 분석해 보던 방법이야. 기승전결을 사전에다 이렇게 해석했더라. 시를 짓는 격식인데 [시의 첫머리를 기, 이를 되받는것을 승, 중간에 뜻을 한번 바꾸는것을 전, 전편을 거두어서 맺음을 결이라함] 이것이 기승전결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투철한 해석이야. 이 방법으로 이시를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연못가에 새로핀  버들잎을 따서요   이 시의 첫련이야.  이 시에서 연못가의 새로 돋은 버들잎을 딴다는것이 시의 시작이지뭐야. 사전에서 말하는 첫머리이며 [기]에 속하는거야. 이것이 앞에서 우리가 말했던 시의 계기와 같은거야. 이 시에서 새로운 버들잎을 씁니다 하고 알려주는거란 말이다. 그럼 버들잎을 따서 뭘 할가 하는 의문이 들지 뭐야. 그것을 2련에 쓰게 마련돼 있는게 아니겠니? 그래 2련을 보자.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이것이 2련이야. 버들잎에다 우표를 붙여서 먼먼 남방으로 보낸다는거야. [기]를 받는것을 [승]이라고 했재. 2련이에서 버들잎을 편지로 만들어 강남으로 보낸대. 버들잎이 편지로 돼버린거야. 버들잎이 편지로 되였다는것이 [기]를 받은 [승]이란거야. 쉽게 말하면 기는 쓰려는 사물이나 사실을 제시하는거고 승이란 그런 사물이나 사실을 한보 발전시키는거야. 버들잎을 발전시켜 편지라고 한것처럼 우리가 앞에서 말한대로 하면 상상으로 짝을 찾은거야. 버들잎의 짝이 편지가 된거야.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이 제3련이 [전]이란거야. [전]이란 중간에 뜻을 한번 바꾸는것을 [전]이라 했재. 버들잎 편지를 보냈지. 편지를 보내면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할거 아니야. 그 받는 사람이 제비야. 편지던게 제비가 나왔으니까 내용이 바뀄지뭐야. 그래서 3련을 전이라고 해.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마지막련이지. 이 마지막련이 [결]이란거야. 결은 총결인데 작자의 뜻이 있거든. 이 시에서 작자의 뜻은 제비가 조선이 그리워다시 찾아온다는것을 통하여 제비도 조선을 그리워 하는데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조선을 그리워하지 않으랴 하는 애국주의 정신을 쓴거야. 결은 괘괄성이 있는거야. 일반적으로 결은 시의 전반 내용을 종합표현하는 작용을 한다고 할수있어.
46    똥구리(시) 댓글:  조회:1090  추천:24  2008-11-25
똥구리똥구리똥구리야동그란 해님동그란 달님굴려굴려서어디로어디로
45    제2차 시혁명을 위하여 댓글:  조회:1036  추천:30  2008-11-22
       제2차 시혁명을 위하여                     개혁개방이후 우리는 시의 제1차 혁명을 하였다. 제1차 혁명에서 우리는 맹목적인 가송의 시대로부터 자아표현의 시대로 전입하여 류례없던 풍성한 성취를 획득하였다. 당년의 중청년시인들이 제1차 시혁명의 생력군이였고 로일대시인들이 그들을 받쳐주었고 많은 신인들이 자라났다. 비평가들도 적극적으로 시인들을 밀어주어 시의 제1차 혁명에서 기꺼운 성과를 획득하였다.    우리 시는 어디에서 어디까지 왔기에 제1차 혁명이란 말을 하게 되는가? 시의 제2차 혁명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필자의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려 한다.    시의 제1차 혁명에서 우리는 지령적인 시의 제재를 쓰던데로부터 시인자신이  쓰고싶어하는 시의 제재를 다루었고, 빈소리와 구호를 란발하던 시로부터 이미지를 살리는 시로 전의발전하였고, 문법적이고 론리적이고 상습적인 시언어의 질곡을 제치고 언어의 자유로운 결합을 추진하였고, 단일한 시적주제를 추구하던데로부터 다양한 주제를 추구하는데로 발전하였고, 직설시로부터 상징시로의 이행을 기본상 완성하였고, 단일한 풍격으로부터 여러 가지 다양한 풍격을 추구하는데로 전의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가 시로 되여 비교적 풍성한 성과를 올리였다.    이러한 성과는 20세기까지에서 얻은 우리의 성과였다. 우리는 지금 21세기 초반에 살고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시의 탐구가 아직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제1차 시혁명에서 얻은 성취에 만족하여 더는 새로운 시적탐구를 하지 않고 있는 시인들이 적지 않은것 같다. 이런 시인들은 자기가 이룩한 성과에  만족하고 있으며 다른 시인들이 자기를 초월하는데 대하여 알게 모르게 저촉정서가 있다. 문하혁명까지의 시가 한때 시혁신의 담벽이 되어 당년의 청년시인들이 그것을 젖히기 위하여 일떠났고 그것을 젖히고 새로운 시를 많이 창출해 내였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제1차 혁명이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제1차 시혁명에서 가장 생기발랄하게 작품활동을 하였던 시인들은 김정호, 석화, 리임원, 김학송, 리성비 등 시인들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둔덕우에 세워놓은 금자탑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들은 제1차 시혁명에서의 네 마리 척후병들이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은 지금 답보상태에 처하고있는 감이 든다. 문화혁명전의 시가 그들의 장벽이 되었다면 오늘은 그들의 시가 새로운 장벽으로 나서고있다. 이것이 오늘의 연변시단의 상황이다. 이 상황을 극복하여야 하며 이 장벽을 젖혀야 한다. 이들의 시보다 더 생동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시들이 나와야 한다. 이것이 제2차 시혁명의 길이라면 길이겠다.    제2차 시혁명을 통하여 우리 시는 철저하게 연변이라는 울타리를 헤치고 나와 모국인 한국의 선진적인 시인들과 어깨를 겨룰만한 시인들이 나와야 한다. 현상태는 연변이 한국을 모방하고 연변의 시인들이 네 마리 척후병들을 따라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건 위험한 신호이다. 새로운 신생대가 나와야 한다. 네 마리 척후병보다 다른  새로운 척후병들이 나와야 새로운 시의 길을 개척할수 있다. 네 마리  척후병들이 제2차 시혁명에서 그냥 척후병이 되자면 이제까지의 자신을 이겨야 하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여나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간고한 작업이여서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것은 어찌보면 무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80년대의 청출어람이였다. 21세기에 와서는 그들을 바탕으로 하는 청출어람이 나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이와는 관계없고 세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필자는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들의 아래세대에 희망을 건다. 그들이 누구인가? 필자의 졸견으로 보면 한영남, 김승종, 김영건,  김현순, 김춘택, 김경희,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허련화 등 시인들중에서  덩지 큰 시인이 나올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누가 되는가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 모든 시인들이 아니고 다른 새로운 시인일수도 있다. 그들은 김정호의 <<추억>>을 넘어서야 하며, 석화의 <<나의 장례식>>을 넘어야 하며, 리임원의 <<바람에 길을 물어...>>를 넘어야 하며, 김학송의 <<예감의 새>>를 넘어야 하며, 리성비의 <<백두산>>을 넘어야 한다.     이 네개의 산을 넘자면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정리하여야 한다. 그들과 같은 관점으로 시를 생각하면 산을 오르다가 미끌어떨어진다. 시적사유가 그들과 달라야 한다. 시적언어가 그들과 달라야 한다. 시적제재가 그들과 달라야 한다. 그들보다 더 넓고 깊게 사회를 인식하고 시대를 해부하고 시대속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파고 들어가 새로운것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것을 다시 시적예술로 재가공하여 황금량이 있는 시를 써내야 한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제2차 시혁명은 이미 시작되였다. 누가 새로운 눈부신 장벽을 세울것인가! 장벽은 새로운 탐구자에게 속할것이며 새로운 실험자에게 속할것이다.                                                               우리의 거울을 옮겨야     ㅡ 제2차 시혁명을 위하여(2)                      문학이 정치의 종속물이였던 시대는 개혁개방과 함께 지나갔다. 이제 문학은 어떤 부속물이 아니며 도구가 아니며 독립체이다. 순수문학의 발전은 정치와 사회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받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시대의 순수문학이건 그에 걸맞는 새로운 문학사조가 탄생하여 문학을 리드하는것이지 그 시대의 정치가 문학을 리드하는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정치의 풍토는 문학을 문학사조가 리드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로 말하면 지나간 시대이다.    해방후 우리가 걸어온 시대를 보면 협의적인 의미에서 두가지 시대를 지나 세번쩨 시대에로 왔다고 할수 있다. 첫번째 시대는  문화혁명까지 시대로서 문학이 정치의 지령에 복종하는 공구시대였고, 두번째 시대는 개혁개방시대로서 문학이 정치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시대였고, 세번째 시대는  상품생산의 거족적인 범란과 함께 문학이 정치의 제약을 받지 않거나 미약하게 받는 시대 즉 문학이 진정으로 독립하는 시대라고 할수 있다. 문학창작은 전례없이 자유로와지고 활발해지였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들어옴에 따라 우리의 문학도 현대문학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현대문학은 우리에게 망각되였던 문학이였다. 정치종속물이였던 우리 문학은 현대문학과 장벽을 쌓았고 그것을 수용할수 없었다. 제1차 시혁명에서 우리 시는 현대시의 상징을 초보적으로 받아들여 성과를 올리였다. 사실 상징은 중국에 없었던것도 아니였다. 시가 심상으로 씌여야 한다는것은 중국고전이였다. 그런데 정치종속물로서의 우리 시는 심상을 버리고 전통을 버리였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사람들이 이미지라는 새로운 기치를 들고 우리 전통인 심상을 너무 현란하게 발전시키였다. 시의 제1차 혁명에서 우리는 이미지라는 한국의 시를 받아들여 우리 시를 초보적으로 상징의 궤도에로 끌어 올리였다. 상징수법으로 하여 생긴 이미지는 심상으로서 사실은 우리의것이였다. 서양에서는 이 상징이라는 류파가 나와 여덟신선이 바다를 넘는 다채로운 활극을 공연하면서 현대시를 구축하였다.    제2차 시혁명에서 우리도 여덟신선처럼 바다를 건너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국을 거울로 삼았는데 이 거울을 옮겨야 한다. 한국의 현대시는 서양의 거울을 보고 쓴것이다. 우리의 거울은 서양으로 가야한다. 서양의 거울을 직접보면서 한국과 겨루어야 한다. 서양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주류이다. 이 주류를 따라잡는것이 제 2차 시혁명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주류에서 여러 가지 분파가 있는데 필자가 보건대는 의식의 흐름과 초현실주의시를 받아들여야 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여야 함도 당연한 일인것 같다. 당신이 어떠한 제재의 시를 쓰는가와는 관계 없이 현대시의 최고봉을 이루었던 이러한 예술수법을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어 체질화하여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제는 파편문체도 들여올 때가 되었다. 파편문체는 이미지의 개성을 가강하고 립체성를 가강하고 흔상성을 가강하는 면에서 불가결의 요소가 아닐가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 시와 표현이 다른 모든 수법을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 지역적인것일수록 민족적인것일수록 세계적이라는 협애한 사유의 울타리에서 뛰쳐나가 우리가 써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의 모식을 실험하고 모색하고 탐구하여야 한다. 시험해보다가 나쁘면 돌아서면 되는것이다. 실천해 보아야 한다. 남의 실천을 막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나쁘오 저렇게 나쁘오 하고 비평가들은 랭수를 끼얹지 말고 편집부는 실천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제2차 시혁명에서 류파가 형성되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우리 시는 너무 한곳에 모여 오구작작인다. 시인마다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시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 지난날에 김파시인은 립체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박화시인은 주지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정몽호시인은 상징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조광명시인은 선시라는 기발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성과를 올리였는데 현시점에서 보면 남영전시인이 따낸 성과가 제일 대단하다. 지난 3월 28일 중국의 저명한 시비평가 쎄맨은 남영전시인을 <<조선족의 아들이다. 더욱히는 중화민족의 아들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제2차 시혁명에서는 새로운 남영전이 나와야 하며 남영전을 초과하는 시인이 배출되기를 바라는것도 희망사항이다. 시대는 발전하고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제2차 시혁명에 대한 절박감과 사명감을 가지는 시인이면 성공하는 시인으로 될것이다.  새로운 제재의 개발을    -제2차 시혁명을 위하여(3)          제2차 시혁명에서 새로운 시적제재를 다루는 문제가 나서게 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의 상품시대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이 박투를 하고있는 시대이다. 과학만능의 시대, 금전만능의 시대, 각종 비리만능의 시대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로하여 빚어지는 눈물겨운 이야기들은 많고도 많다.    시인은 이러한것을 주시하지만 이러한 것을 찬송하는 찬송가가 아니다. 시인은 요원한 인류의 리상를 생각하고 인류의 각도에서 력사에 의하여 파묻힌 인간성을 파내여 밝게 닦아서 빛을 뿌리게 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시인이 말하는것은 우주의 섭리이나 인성이지 어느 집단이나 어는 민족이나, 어느 국가의 한시기를 위하여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다. 천지인화(天地人화)나, 인본선 (人本善), 자연의 섭리 같은것을 새로운 이미지로써 새롭게 해석해 보는 작업이다. 시대의 국한성을 받으면서도 받지 않는것이 시인이다. 모종의미에서 말하면 당시대의 거역자가 우수한 시인이였다는것을 력사는 증명하고 있다. 굴원도 그랬고, 두보도 그랬고, 리백도 그랬고, 곽말약도 전기에는 그랬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나라의 오늘의 정치를  반대하여 시를 쓰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늘의 시대에 대한 종교적인 찬송가를 금하고 영원성을 가지는 시의 제재를 다루라는 말이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시가 그 보기의 하나라겠다. 그의 시적제재는 원시사회의 부락이나 씨족의 혈연관계나 친속관계로 되어있던 사물들을 시의 제재로 삼아 현대의식으로 새롭게 노래하였다. 시인은 그 노래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였다. 남영전시인은 새로운 제재발굴로 시적제재의 새로운 추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있다고 필자는 인정한다. 이 제재는 민족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고 인류적인 각도에서 다루어진것이라는데 연구가치가 큰 것이다. 제2차 시혁명에서 어느 시인이 새롭게 이런 제재를 발굴하면 꼭 성공하리하 믿는다.    지금 우리의 시적제재들은 아직까지도 농경문화의 울타리를 벗어못난것들이 많다. 현대의식과 현대시수법이 침투되지 않고 일상적인 사유로 고향이요, 진달래요, 산이요, 메주요, 매돌이요, 항아리이요, 초가집이요 하면서 어떤 현상의 라렬식으로 시를 쓰는 경향들이 그것이다. 이렇게 다룬 시들은 너무 단순하여 깊이가 없고 흔상가치가 없다. 남들이 보고 그저 그렇구나 하는 시들은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시들이다. 감정을 생각나는대로 느끼는 대로 보이는 대로 발설하여 시의 맛을 잃고있는것이다.    조성일선생이 언젠가 노래하던 시로부터 생각하게 하는 시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던 기억이 있다. 이건 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생각하게 한다는것은 시를 본다음 사고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환상하게 하는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현대시는 어떠한것에 대한 단일한 긍정보다 어떠한것에 대한 새로운 다각적인 사색을 불러일으키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시적제재를 실존적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상상적으로 다루느냐와 관계가 있다. 돌을 돌로만 다룰것이 아니라 돌을 물이나 불과 같은 이질적인 새로운것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이 노래하던 시로부터 생각하는 시에로 전의를 하게 되고, 반영으로부터 표현에로의 전의를 하게 된다.    시는 오늘의 현실을 위하여 나팔을 부는것이 아니라 미래의 지향을 위하여 나팔을 분다. 오늘도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다. 자연의 비밀은 끝이 없이 많으며 인간의 심리는 끊임없이 운동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명확하지 않다. 깊은 물은 바닥이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고기가 많이 논다. 우리 시는 돌돌 흘러가는 시내물이 될것이 아니라 시퍼렇게 고여서 고기들이 놀수 있는 깊은 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시에 앙금된 황금이 있게 된다. 상상과 환상으로 충만된 깊은 물 --시를 쓴다는것은 바로 이런 깊은 물을 만드는 일이다. 대담하게 순심미가치를  추구          -제2차 시혁명을 위하여(4)                     력래로 시에 공능에는  순심미공능, 오락공능, 교유공능, 인식공능, 실용공능 등 다섯가지가 있었다. 이 다섯가지 공능은 서로 침투되면서 대립도 되고 통일도 된다. 그러나 어느 공능이 주도적지위를 차지하고 우세를 차지하는가 하는것은 그 시대의 시의 발전상황에 의하여 결정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현대시가 나오면서부터 다섯가지 공능중에서 심미공능이 다른 공능보다 우세를 차지하였다. 이 우세는 지금까지 그냥 연장되여 오고있다. 해방후부터 문화혁명까지 우리 시는 실용공능의 울타리속에 갇혀있었다. 시가 시로 된것이 아니라 정치도구로 전락되었다. 제1차 시혁명에서 우리는 초보적으로  도구론을 짓부셨다. 왜 초보적이라고 하는가? 아직도 시의 실용공능을 주장하는 시인이나 비평가가 너무 많으며 우세일 정도이다.   중국의 <<세계명시흔상사전>>(1990년 북경대학출판사. 15쪽)을 편찬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순심미공능을 강조하는것은 20세기이래의 시가리론의 가장 돌출한 점이다. 이 리론을 강조하는것을 기초로 하여 건립된 시가리론이 조수처럼 밀려왔다. 우미주의, 상징주의 , 형식주의, 신비평가, 심상(意象)파 등은 모두 이 방면의 대표이다. 이 리론을 강조하는것은 시가 형식의 여러 인소의 고찰과 리용에 치우치는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종 시본체론으로서 시가내용의 여러 인소에 대한 중시이며, 외부세계와 련계시키는 그러한 시가리론에  대한 반발이다>> 필자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현대시는 순심미공능을 중시하며 돌출하게 내세운다. 시의 목적은 시이지 시밖에 다른 목적이 없다. 순심미공능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오락공능이나 교유공능이나 인식공능이나 실용공능들이 보조적으로 따라서는것이다. 또 어느 공능이나 기어코 따라서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도 없다.    제2차 시혁명에서 우리는 순심미가치를 산생하는 시를 많이 써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 이러한 시들이 없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수자가 적으며 질이 낮다. 시인들의 인식이 깊지 못하고 추구가 깊지 못하고 창작되여 나오는 시의 질이 높은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고있다. 우리는 현대시의 여러 가지 장치를 알고 시를 창작할 때 써먹을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루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시를 볼 때에도 우렬을 가릴줄 알아야 한다. 한국의 시라하여도 순심미공능을 위하여 쓴 시가 매우적다는것을 알고 통째로 삼키지 말고 우리에게 필요한 영향만 섭취하여야 한다.    시는 시인의 심미를 어떤 표상으로 표현하는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모를가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근심한다는 그 자체가 남에게 리용당하는것이다. 시인은 남에게 리용당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심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을 모른다고 시인자신의 심미관을 표현한 표상을 어떻게  어느 사람이나 다 알수 있으랴. 다 알면 그것은 당신의 심미관인것이 아니라 남의 심미관이거나 아류에 물젖은 심미관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상이란 이미지이다. 그러기 때문에 시는 시인의 주관적인 사유의 산물이지 어떤 무리의 공동작업의 산물이 아니다.    근대시와 현대시의 구별이 여러 가지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구별은 시가 표현으로 씌여졌는가 아니면 모방으로 씌여졌는가이고,  다음으로는 시의 공능이 순심미공능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실용공능을 추구하는 가이다. 실용공능을 위하여 모방으로 반영한 시는 현대에 존재할뿐이지 현대시라는 지칭을 달수는 없는 근대시이다. 순심미공능을 위하여 표현의 수법으로 씌여졌을 때는 근대시라는 지칭을 달수 없는 현대시이다. 제2차 시혁명의 목적은 근대시를 잘 쓰자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현대시를 잘 쓰자는데 있다.      충격적인 이미지작업을        -제2차 시혁명을 위하여(5)                         충격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것은 제2차 시혁명의 성패를 결정하는 고리이다. 새로운 형의 이미지를 창출하는가 못하는가에 의하여 제2차 시혁명이 성패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형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시인이 나오면 우리는 승리하고 그런 시인이 나오지 못하면 우리는 실패하게 된다.    시적으로 말할 때 이미지와 심상(意象)은 같은 함의이다. 심상은 중국시가의 핵심적인 전통이다. 시에서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는것은 실제는 전통을 버리는것이다. 20세기에 와서 현대시는 심상을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제2차 시혁명에서 우리는 이미지를 화려하게 발전시켜야 할것 같다. 발전시켜야 전통을 계승하는것이 된다. 발전이 없는 전통은 죽은 전통이다.    주요한 문제는 상상과 언어를 해결하는것이라겠다. 어떻게 상상하고 어떤 언어를 쓰는가에 의하여 이미지가 충격적이 되는가 안 되는가가 결정된다고 필자는 인정한다.    리처즈는 이렇게 말한바 있다.<<상상력을 적용하는 통합적 마술적 힘은 ...상반되는 성질이나 불조화한 성질의 밸런스(균형) 혹은 화해로 되어 나타난다.>> 김춘수는 상상이란 <<짝>>을 찾는것이라고 하였다. 조화되지 않고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사물을 짝으로 찾아서 밸런스하는것이 새로운 이미지, 충격적인 이미지라고 말하고싶다. 무엇이 조화되지 않고 반대되는 성질의 사물인가? 물과 불, 돼지와 돌, 사람과 나무, 산과 술, 눈썹과 잠자리.어머니와 벽돌... 일상적인 사유로 볼 때 이러한 사물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것이다. 시인은 이러한것들을 짝을 묶어주고 밸런스하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충격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 묘법이라면 묘법이겠다. <<상반되는 성질이나 불조화한 성질의 밸런스>>를 하자면 시인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사유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강압적인 조합을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실생활에서 물은 불이다 하고 짝을 맞추면 억지 공사이지만 시에서 이렇게 하는것은 예술이다. 강압조합은 현대시의 특점이며 기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압조합을 떠나서 새로운 이미지, 충격적인 이미지가 생성되려니 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시의 이미지는 일상을 떠나서 공개념을 떠나서 공동적인 감각을 떠나서 새로울수록 좋고 기이할수록 좋고 환상적일수록 좋다. 짝을 찾는데는 금구가 없고 국경선이 없다.    현대시 사유는 기성의 론리와 개념으로 해석할수 없는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속에서 산생하는 새로운 의식이다. 이 새로운 의식은 먼지나 때가 없는 정갈한 의식이다. 그 의식은 령(0)의 세계이며  령(灵)의 분출이다. 이런 의식에 기대여 이미지가 창출되였을 때라야만이 비로소 충격적인 이미지가 될 것이다. 이미지라는것은 제6감각 마음의 감각으로 만드는 것이며, 제3의 눈과 제 3의 귀로 들었을 떼라야 산생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들이 듣지 못한 소리를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한 사물을 보아냈을 때만이 산생되는 언어로 된 그림이다. 그래서 파운트는 일생에서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것을 목표로 시를 썼는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이미지 창출은 언어가 따라서야 한다. 시의 언어에서 나무라고 쓰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일상적인 나무를 가리키는것이 아니다. 시의 언어는 원래의 상징성을 떠나서 현대시의 재료로 전환된다. 기성문법의 속박을 받는 언어가 아니다. 새로운 의미를 내포하는 언어이다. 현대시인은 언어제련사이다. 언어의 광산에서 시어를 제련해 낸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런 새로운 언어는 시의 집을 짓는데 나무나 흙이나 세면트로 쓰이게 된다. 그것은 시인의 강압적언어조합의 산물이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문법적으로 론리적으로 어울려서는 아니 되는 언어들의 새로운 련계이며 새로운 배렬이며 새로운 표현이다.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한 강압조합과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기 위한 강압조합은 현대시의 두자루의 보검이다.    제2차 시혁명에 대한 말을 하자면 아직도 할 말은 많다. 하지만 주요한 것은 기본상 말하였다고 생각되여 마침표를 찍는다.
44    미니수필 나무-악기-형식(외5편) 댓글:  조회:1031  추천:25  2008-11-21
나무-악기-형식   나무를 깎거나 변져서 악기를 만든다고 하자. 나무를 주요한 재료로 삼아 만든 악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발풍금, 양금 , 피아노, 바이올린, 앵앵이...이런 악기들의 주요한 재료는 나무이지만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같지 않는 악기가 생성된다. 방법이란 곧 형식이다. 형식이 다름에 따라 부동한 악기가 탄생한다. 발풍금은 발풍금을 만드는 방법이 있고 양금은 양금을 만드는 방법이 있고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을 만드는 방법이 있고 앵앵이는 앵앵이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나무로 악기를 만드는 형식이 주요한것처럼 시도 시를 만드는 형식이 주요하다.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나무가 부동한 악기로 태여나듯이.    시도 부동한 형식에 따라 부동한 시가 나오게 된다. 형식은 어떤 악기를 낳는 모체이듯이 형식은 어떤 시를 낳는 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형식이 아니면 새로운 시가 탄생할수 없다. 그러므로 시는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 시는 내용에 의하여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의하여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형식결정론 이는 시의 생명이라고 하겠다. 암탉-달걀-병아리 암탉이 병아리를 생산하려면 석주가량 달걀을 품고 있어야 한다. 암탉의 품속에서 달걀은 하나의 고체덩어리로부터 빽빽거리는 생명체로 움직이는 동물로 태여난다. 시인을 암탉이라고 한다면 언어는 달걀이고 병아리는 시어이다. 시의 언어는 병아리처럼 숨을 쉬고 빽빽거리는 살아있는 사물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일반 언어와 시어는 달걀과 병아리처럼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 언어는 전통적이고 습관적이고 고정적으로 쓰이지만 시언어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이고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전통, 습관 , 고정은 언어의 외연이고 은유, 상징, 새의미는 언어의 내연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성을 떠나서 쓰일 때만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새로운 의미가 없는 시언어는 죽은 언어이다. 암탉이 달걀을 품는것은 병아리를 만들어 후대를 잇게 함이고 시인이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것은  언어가 병아리처럼 빽빽거리게 하기 위함이다. 언어가 빽빽거리지 않으면 시가 아니 된다. 쌀-밥-술    쌀은 밥과 술을 만드는 일상적인 재료이다. 쌀에 물을 맞춤하게 주어 삶으면 밥이 되고 쌀을 누룩으로 고아서 물을 빼내면 술이 된다. 글을 쓰는것도 이와 마찬가지 결과를 빚어내게 된다. 그래서 옛날의 문인들은  밥은 소설이고 술은 시다 고 했으리라. 밥과 쌀, 술은 성질이 완연히 다른 사물이다. 밥은 쌀에서 왔지만 쌀이 아니다. 술도 쌀에서 왔지만 쌀이 아니다. 쌀과 밥은 색깔과 모양에는 비슷한 점이 있지만 쌀과 술은 모양에서도 비슷한 점이라곤 없고 광의적인 의미로 말하여도 쌀은 고체인반면에 술은 액체이다. 쌀과 술, 고체와 액체의 차이가 시의 소재와 시와의 차이이다. 시인은 쌀로 밥을 만드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술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 술은 물같지만 먹으면 취한다. 취하면 뻥뻥해지고 기분이 난다. 물- 돌-이미지    물은 흐르는 움직이는 액체상태의 사물이고 돌은 일정한 모양이 다치지 않으면 파괴되지 않는 고체상태의 사물이다. 물과 돌은 이 지구덩어리우에서 함께 사는 사물이지만 그것들의 성질, 색깔, 모양, 동작...여러가지 방면에서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사물이며 표현형태가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시인은 상상에 기대여 이런 이질적인 사물들은 서로 전환하며 둔갑한다. 이런 마술적인 상상으로 시에서는 물이 돌로 되고 돌이 물로 되는 현상(现象)을 야기시되는데 이런 현상을 시에서는 이미지라고 한다.    이미지는 시적인 현실이지 생활의 현실이 아니다. 이미지는 순수한 정신적창조물이지 현질생활에 존재하는 실존적인 사물이 아니다. 추억.1    그 누군들 어릴 때 자란 고향에 가고싶지 않으랴. 언제나 목마르게 보고픈것이 동년을 보낸 고향이리라. 하지만 나는 가고싶어도 못가고 있다. 그냥 그리움에 겨워서 살고있다. 내고향은 화룡시 덕화향 로과촌 감장골이라는 곳이다. 리욱시인이 연변에 와서 첨으로 자리잡았던 곳으로서 연변문학사에서 빠뜨릴수 없는 고장이다. 연길에서도 먼 고장이긴 하지만 나는 그 골어구지를 지나면서도 감히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번만 들어갔다오면 내가 간직하고 있는 고향이, 아름다운 추억들이 말끔히 지워지는것이 두려워서 들어가지 못한다.    10여채의 초가집들이 오롯이 들어앉아있던 고장, 앞내가에는 돌쫑개를 잡느라고 배짤을 놓던 배짤터가 있었고 , 마을앞에는 돼지 오줌개를 뿔궈서 뽈을 차던 널직한 신작로가 있고 우리 윗집에는 석마칸이 있고... 뒤에는 나리꽃과 도라지 꽃이 만발하는 산이 있다. 학교로 가고 올 때의 수레길이 어느 곳에서 내물을 건너고, 어느 곳에서 나비가 놀고, 어느 곳에서 물새들이 우지짓는가 하는것들이 눈앞에 삼삼하다. 그리고 오봉이,생죽이,하택이 , 춘자...그들과 함께 보낸 동년시절이 두터운 그림책으로 나의 골속에 있다. 나는 이따금 그림책을 한 장한장 넘기며 아름다운 추억을 한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랑스러운 고장이 이깔밭이 되었다니 어찌 다녀올수 있으랴. 단 한번만이라도 다녀오면 나의 아름다운 그림책의 그림은 다지워지고 한 장의 백지로 남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향으로 가고싶어도 가지 못한다. 영원히 동년의 고향을 간직하고 싶어서. 추억.2   나의 어린시절, 봄이면 어디서 오는지 미친개가 우리 마을에 나타나군하였다. 꼬리를 누른히 드리우고 눈알이 빨간 미친개. 미친개만 나타나면 동네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쫓아다니였고 애들은 집안에 달려들어가 문을 꽁꽁 닫아걸었다. 왜냐하면 미친개에게 물리면 사람도 미치게 되고, 개들도 물리면 미친개가 되는것이다. 누구네 개가 미친개한테 물리면 인차 잡아먹었다. 지금도 동네사람들이 미친개를 쫓아다니던 일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온 동네를 부산하게 만들던 미친개. 남을 물려다가 자기의 죽음으로 끝장을 보는것이 미친개다. 미친개의 끝장은 죽음이기도 하고 마을의 안녕이기도 하였다.
43    시인 (외1편) 댓글:  조회:1130  추천:40  2008-11-14
  시인    눈보라 윙윙 윙크하는 거리로 웃동을 벗어부치고 주먹땀을 벌벌 흘리며 씨엉씨엉 걷는 사나이다.    푸른 소나무위에서 그름같은 날개를 활짝 펴고 맑디맑은 하늘을 금방 날아오르려는 학이다    몸은 무지개 갈무리속에서 눈시린 빛을 뿌리고 새싹의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시인의 피는 분수처럼 정열을 뿜으며 아름다운 무지개를 그리고 그리는 피이다.    시인의 언어는 살아움직이는 언어이다. 시인은 남이 써먹은 진부한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살아있는 언어를 만들어 쓴다. 시인의 언어는 나비이고 꽃이이고 우뢰이고 단비이고 해살이다.     시인은 독한놈이다. 남이 걸은 길을 시인은 답습하지 않는다. 시인의 걸음은 언제나 령으로부터 시작된다. 홀로 걷는 고독한 사람, 고독과 아픔은 시인의 밥이다. 이 밥을 지을줄 알고 먹을줄 아는 사람만이 시인이 될수있다.     시인은 시를 위해 살고 시를 위해 죽는다. 시인은 남에게 추파를 던지는 인간인것이 아니라 고니처럼 외다리로 서는 예지를 뿜는 예술덩어리이다.   시인은 집단이니 민족이니 하는 기발을 들고 목에 피대를 세우는 사람을 가소롭게 본다.    시를 쓰면 모든것은 시안에 있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연의 섭리이고 시인이  생각하는것은 인류이다.   시인은 교육가도 아니고 구세주는 더욱 아니다. 시인은 시인일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조대에서나 권세의 바람을 외면한 위인들은 시인이였다. 권세의 바람밖에서 사색하고 발견하고 씨앗을 찾아 꽃피우는 사람이 시인이였다.    만이 천이 백이 시인을 바라보다가 정말 시인이 되는 사람은 한둘이다. 이 한둘이 탄생하려면 백이 천이 만이 시를 향하여 걸어가야 한다    시를 모르는 민족은 문명한 민족이 아니다. 위대한 시인이 있는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위대한 시인이 없는 민족은 슬픈 민족이다.    시는 좋은 시는 값이 없다. 쉑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던 사연이 이를 증명하였다. 시인의 값은 그가 쓴 시와 정비례한다. 시인은 시를 쓴 력사로 말하지 못하고 시인은 벼슬로 말하지 못하고 시인은 오로지 시로 말할뿐이다.    영원한 명시 한수를 쓰면 별이 되고 영원한 명시 두수를 쓰면 달이 되고 영원한 명시 세수를 쓰면 해가 된다. 명시는 누가 명시라고 소리쳐서 되는일이 아니고 시인은 누가 북을 잡아두드리며 찬송가를 불러서 되는 일이 아니다. 시도 시간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시인도 시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시인을 판정하는것은  법관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니고 오로지 시간이고 세월이고 력사이다.    시인이 되는 조건은 간단하다. 시처럼 살고 시처럼 죽는 것이다. 우리 시단에 시를 쓰는 사람은 많은데  시인이라는 명칭에 부끄러움이 없는 시인은 몇이나 될고 문인의 불행     나무에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풀에 꽃이 피면 씨앗을 맺는다. 그러한 것을 나무들은 좋아하고 풀들도 좋아한다. 그런데 문인이 열매를 맺으면 불행해진다.     공자는 제자를 둔 교육가였고 시경을 편찬하고 우리가 하늘처럼 받드는 성인이지만 당년에는  있을자리가 없어 떠돌이를 하였다.     굴원은 불후의 시편 <<리소>>를 썼지만 멱라강에 뛰여들어 수중고혼이 되였다.     사마천은 천추에 빛나는 <<사기>>를 쓰는라고 거세를 당하였다.     류협은 <<문심조룡>> 썼지만 이리저리 밀리다가 마지막에 중이 되었다.     진나라때 유생들은 분서갱유을 당했다.     두보는 소나기 쏟아지는 풍파속을 헤매다가 객사하였다.     리백은 황궁에서 쫓겨나 방랑의 길에 올랐다.    청나라 왕국위는 <<인간 사화>>를 쓰고 곤명호에 뛰여들어 자결하였다.    이러한 일은 말하자면 끝이 없다.    위문제가 그래서 문인상경이란 말을 하였다. 좋은 글을 쓴다는것은 새것을 내놓는다는 말인데 엽공이 룡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들은 어느때나 있게 마련이고, 또 많이는 거인들이 엽공이 되는 일을 하기가 일수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야 하니까 다른 하나는 황제들이 넙적넙적 문인들을 잡아먹는다. 선비는 엉뚱한 사유를 하니까 좋은 글은 왕왕 왕도를 건드리게 된다.    현대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고린내 나는 아홉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따사로운 봄날이 왔지만 이따금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다. 나는 칩다.                               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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