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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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북경동계올림픽과 조선족; 한복 사태 유감 댓글:  조회:434  추천:0  2022-02-14
곽승지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정치학박사) 본지는 최근 북경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한복 논란 관련 중국 동포사회 지성인들의 칼럼을 몇 편 실었다. 너무 중국 동포사회의 입장만 보여준 것 같아 이번에는 한국인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칼럼 한 편을 싣는다. 이번 칼럼의 초대 저자는 연합뉴스의 전 기자로서, 중국에 가서 체류하며 중국 조선족 연구에 매진을 해온 곽승지 박사다. 그는 "이 논란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한국 사회와 조선족 사회가 좀 더 성숙된 자세로 문제를 풀어가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있다"며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그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대중을 설득하는 등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렇게, 상호 입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화합을 이끌어내는 노력이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동북아신문 편집자 주 - 곽승지(郭承志) 프로필 : 정치학 박사, 아시아발전재단(ADF) 자문위원.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전 연합뉴스 기자, 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저 서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 등. 북경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지 10여 일이 훌쩍 지났다. 20일에 열릴 폐회식까지는 이제 불과 1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올림픽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인의 축제의 장이다. 그러나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미국 등 일부 국가들이 선수단은 파견하면서도 정부사절단을 파견하지 않는 ‘외교적 보이콧’을 꾀함에 따라 시작 전부터 다소 김이 샜다. 코로나 19 때문에 외국인 관람객이 직접 경기를 관람할 수 없는 것도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겨울스포츠를 좋아하는 수 많은 사람들은 TV를 통해 베이징 설원에서 펼쳐지는 겨울축제를 만끽하고 있다. 미국에서 조차 1천500만 명 정도가 개막식 장면을 시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조선족 동포들만은 이 축제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개막식 당일 불거진 ‘한복’ 논란과 쇼트트랙 경기에서의 심판 판정 문제로 한국과 중국 사이에 여러 가지 불편한 글들이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과 중국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데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의 논란으로 이러한 분위기가 고조될 것에 대한 염려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한민족의 일원이면서 중국의 공민인 조선족으로서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당면한 상황을 속편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문제가 발단된 이후 안타까운 심정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관련 뉴스를 살펴왔다. 그러나 필자가 조선족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중국에 있는 조선족 지인들은 물론 일부 한국인 지인들 조차 은연중에 이 상황에 대한 의견을 청하여 왔다. 일부 지인들은 아예 대 놓고 글을 쓰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래도 애써 글 쓰는 수고(?)를 외면했다. 실은 수고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잦아들 것이기에 굳이 논쟁거리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생각을 바꿔 펜을 들게 된 것은 조선족사회와 관계를 맺어온 한국인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즉, 중국사회도 경험해 본, 조선족 동포들이 겪고 있을 답답한 마음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상황을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상황과 관련한 많은 글들을 접했지만 뉴스 류의 글 이외에 한국인이 쓴 글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렇듯 서론이 장황한 것은 여전히 이 글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 제위께서는 그런 점을 헤아려 읽어 주실 것을 미리 부탁드린다.     필자는 이번 한복 논란은 한국사회가 과민반응을 보여 문제가 확대된 것으로 이해한다. 먼저 이 논란이 불거진 장면을 정리하면 이렇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 겨울축제도 모든 민족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소수민족 대표들을 개막식에 초청했다. 당연히 조선족 대표도 초청되었고 민족 전통의상인 한복을 입고 참가했다. 조선족 대표는 다른 소수민족 대표들과 어우러져 한복의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을 나름 잘 알고 있는 필자는 개막식 장면을 이렇게 이해했다. 적어도 개인적 시각으로는 특별히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언론과 논객들은 이를 중국의 문화공정, 심지어는 한복공정으로 주장하며 문제시하였다. 네티즌 사이에서는 더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서도 표를 의식해 전후 배경을 살피지 않은 채 중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더욱이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뜬금없이 조선족을 끌어들여 화살을 겨누었다. 7일 열린 쇼트트랙 1000미터 준결승에서 심판 판정 논란이 불거진 것은 불 난데 기름을 부은 형국이 됐다. 공교롭게도 한국선수가 피해자이고 중국선수가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일단 쇼트트랙 판정과 관련한 문제는 논외로 하자. 굳이 말하자면 이는 경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복 논란과 관련해 조선족사회의 논객들은 대부분 한국측의 반응을 일반화하는 가운데 그 반응에 대한 비난을 쏟아 냈다. 일부 논자들은 한국의 무지와 편협함을 꾸짖으며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약자콤플렉스인 언더도그마(underdogma) 현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한국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을 견지하고 다른 문화를 포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덧붙이기도 했다.     한국인인 필자로서는 부분적으로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수긍이 갔다. 이번 논란이 조선족 동포와 관련되어 촉발됐을 뿐 아니라 동포들의 중국에서의 삶과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논란을 통해 한국사회가 조선족사회를 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인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물론 조선족 동포들의 중국에서의 삶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한복 논란을 촉발시키고 부추긴 일부 언론인과 정치인들도 이번 상황을 조선족 동포들의 입장에서 헤아리지는 못한 듯하다. 따라서 조선족 동포들로부터 이런 비난과 지적을 받는 것은 뼈아픈 일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조선족 동포들은 한복 논란과 관련해 한국사회가 다음과 같이 인식하여 주길 바랬을 것이다. “한복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의상이니 당연히 한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의 전통의상이기도 하다. 중국이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소수민족 대표들을 초청함에 따라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온 조선족 대표도 전통의상인 한복을 입고 참여하였다. 개막식에 참여한 조선족 대표가 입은 한복이 유난히 돋보여 이번 개막식은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되었다.”     기실 중국의 조선족사회에서는, 한국과는 달리, 한복을 즐겨 입는다. 명절 때는 물론 결혼식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일가친척들이 한복을 입고 나와 춤 추고 노래하며 흥을 돋구곤 한다. 중국내 동포사회에서는 세월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복에 대한 사랑이 변함이 없다. 따라서 조선족 대표가 올림픽 개막식에 한복을 입고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번 논란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젊은 조선족 여인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면 한국사회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에 대해 왜 이렇듯 과민한 반응을 보였을까. 중국과 조선족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사람들 입장에서 헤아려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과거 중국에 의해 촉발된 역사 및 문화 갈등이 재현될 것에 대한 염려를 들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은 중국의 문화정책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왔다. 동북공정과 무형문화재의 등재 등과 관련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에는 김치와 관련한 논란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염려에 기름을 붓는 일이 미국발로 전해졌다. 미국의 패션전문지 ‘보그’가 개막식 이틀 전 인스타그램에 한복을 입은 여성모델 사진을 게재했다. 이 잡지는 한복을 중국 발음인 ‘한푸’로 소개하는 가운데 “한족이 통치하던 시대의 의복 양식으로 중국 젊은 층 사이에서 열풍이 불고 있다”고 사진을 설명했다. 특히 사진 속 모델은 지난 2년간 ‘한복은 한푸의 영향을 받았다’는 등의 영상을 수 차례 올렸던 중국의 유튜버였다. 굳이 덧붙이자면 한국이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도 한복사태에 과민하게 반응한 또 다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복과 관련한 이번 논란이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번 논란 자체보다 이 논란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좀 더 성숙된 자세로 문제를 풀어가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의 일부 언론과 논자들이 섣부른 주장을 펼친 것도 문제지만 조선족 논객들이 이번 논란을 일반화하여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입장인양 평가하고 비난한 것도 문제이다.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그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대중을 설득하는 등 노력을 하여야 한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혐한과 혐중(조선족)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선 지식인들이 절제된 언어로 보다 큰 역할을 하여야 한다.   동북아신문 
91    중국 동북지역의 미래 가치와 조선족 댓글:  조회:2534  추천:2  2015-08-18
중국 동북지역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곳이다. 애써 고중세의 역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곳엔 근현대 한민족 슬픈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일제강점기 선열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항거했으며 광복 후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정주한 사람들은 역내(域內) 질서의 재편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지금은 그 후손인 조선족 동포들이 이 지역 곳곳에 터 잡고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동북지역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의미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지역의 지정학적·지경제적·지문화적 가치를 고려하면 중국 동북지역은 향후 한반도 혹은 한민족의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한반도와 맞닿아 있는 이 지역은 냉전과 탈냉전이 공존하고 있는 한반도 주변 정세의 이중구조 해체를 견인할 심장지역(heartland)이며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내용과 범위 모두 제한적이다. 이 지역과의 적극적인 관계 맺기도 탈냉전시대가 도래하고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뒤에야 시작됐다. 관계 맺기의 시간적 지체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관심의 내용은 과거 이 지역과의 인연을 되새기거나 이곳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연민과 관련된 것이 주를 이룬다. 관심의 범위 역시 과거 지향적이거나 감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광복 70주년에 즈음해 우리는 과거의 인연이나 조선족 동포와의 연관성 속에서 중국 동북지역을 바라보던 한계를 넘어 이곳이 한반도의 정세 변화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견인할 더 의미있는 곳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 지역의 지리적 가치를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조선족 동포들의 가능한 역할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미래에 도래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공동체의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 지금 중국 동북지역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뒤 세계는 이전과 확연히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세계화, 인터넷 세상, 다문화 등의 말에서 그 다름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서 지리학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미국의 지리학자 하름 데 블레이는 지리학이 현시점은 물론 미래까지도 바라보게 한다며 지리학적 통찰이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임을 강조한다. 중국 동북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미래가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선족 작가 유연산은 중국 동북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삶을 조명하기 위해 두만강 1천리, 압록강 2천리, 송화강 5천리, 흑룡강 7천리를 답사했다. 과 이 그 결과물이다. 1994년부터 4년여 기간 동안 온갖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진 답사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조선족의 역사와 그들의 생활상이 다가 아닐 것이다. 유연산은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조선족의 역사를 통해 이들의 질긴 생명력, 이 지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 그리고 한민족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했음이 틀림없다. 광복 70주년이 주는 역사의 무게가 특별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난 70년을 돌아보며 지나간 일들을 성찰하는 것 못지않게 앞으로 도래할 70년을 준비하는 것이다. 지난 역사에 대한 말은 넘치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은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 동북지역의 가치를 평가하고 조선족 동포들의 역할을 제고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곽승지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교수, 정치학박사 한겨레 2015-08-17 18:38
90    올해 ‘3.13만세운동’ 기념행사가 갖는 의미 댓글:  조회:2594  추천:3  2015-03-23
올해 ‘3.13만세운동’ 기념행사가 갖는 의미   곽 승 지 (정치학박사/ 연변과기대 교수)   역사는 흐른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로 이어진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이를 되새기는 것은 단지 그 사실을 들추어내어 당시를 회상하려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다. 현재는 물론 미래를 위해 그로부터 더 큰 교훈을 얻으려는 적극적 행위이다. 3월 1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 위치한 ‘반일의사릉’ 앞에서 열린 ‘3.13만세운동’ 96주년 기념행사는 지난 역사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면면이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날 행사에 참가한 250여명의 대중은 한 마음으로 96년 전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무참히 쓰러진 영혼들의 넋을 달래며 그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3.13만세운동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혹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연변 땅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조선인들이 서울에서 열린 3.1운동 소식을 접하고 분연히 일어선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연변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 2만여 명이 참여해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을 외친 이 운동은 이 지역 조선인들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알리고 이후 지역 내 독립운동을 견인한, 항일 독립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정표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3.13만세운동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서울에서의 3.1운동이 중국에서 일어난 반일운동인 5.4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5.4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진독수(陳獨秀)는 북경에서 발행되던 주간지 매주평론(每周評論)을 통해 3.1운동은 세계 혁명사상 신기원을 열었다고 격찬했다. 5.4운동을 이끈 한 학생대표는 북경대학 학생 잡지에 게재한 글 에서 3.1운동을 크게 평가하는 가운데 중국 국민과 학생들이 3.1운동에서 새 교훈을 얻어 총궐기하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따라서 3.13만세운동이 3.1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면 3.13만세운동이 연변에서 조선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하여 이를 연변지역과 조선인에 한정하여 평가하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서울에서의 3.1운동이 연변지역에 까지 확장된 의미를 헤아리고 이러한 열기가 중국 전역에서 반일운동의 불길을 지피게 되는 과정이었음을 직시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반파쇼 전쟁 승리 및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는 중국과 한국 정부가 3.13만세운동 기념행사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그 의미가 부각되었다. 일본이 현재까지 동아시아 침략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와 같이 중국과 한국이 함께 반일운동의 역사를 되새긴 것은 일본의 각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도 특별히 의미있다. 이는 중국과 한국 정부가 앞으로도 3.13만세운동 기념행사에 함께 나서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1박2일 간 일본을 방문해 일본이 동아시아 침략 역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데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메르켈 총리는 같은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인 일본이 독일과 달리 과거사를 정리하지 않은 채 역내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는데 대해 독일의 철저한 반성과 비교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의 행보에 대해 고마워하고만 있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않았다는데 대한 민망함 때문이다.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한 아픈 역사를 가진 중국과 한국이 그 역사를 함께 되새기는 것도 지금 해야 할 일의 하나이다.
89    중국인의 꿈 그리고 조선족의 꿈 댓글:  조회:3305  추천:5  2014-06-18
"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화민족의 근대 이래 가장 위대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꿈(中國夢)'에 대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처음 한 말이다. 2012년 11월 29일 베이징 천안문광장 옆 국가박물원에서 열린 부흥지로(復興之路)란 전시회를 참관한 직후 행한 시 주석의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국 또는 중국인의 미래를 점치는 단서가 되고 있다. 시 주석은 이듬해 3월 제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中國夢에 대해 재차 언급함으로써 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중국은 1970년대 말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경제발전을 추진한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역대 지도자들은 다양한 표현을 통해 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 대한 비전을 말해 왔다. 후진타오(胡錦濤)의 조화사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비전을 넘어 중국인의 꿈(희망)에 대해 최고지도자가 언급한 것은 시 주석이 처음이다. 시 주석의中國夢에 대한 말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시 주석이 말한中國夢의 핵심은 '다 같이 부유해 지는 것'이다. 청화대 리시광(李希光) 교수는 시진핑의中國夢의 핵심내용이 다 같이 부유해지는 것으로 다수의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취지로 한다고 말한다. 중국공산당이 절대다수 인민대중들의 강렬한 요구인 '다 같이 함께 부유해지는 개혁발전의 길'로 나아가 인민대중들이 진심으로 공산당을 옹호하게 만드는 것이中國夢이라는 주장이다.   주목되는 것은 시 주석의中國夢이 미래의 중국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양적 화합과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홀로 7%대의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이 더불어 잘사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중국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中國夢은 중국인의 화합과 조화를 넘어 전 세계의 화합과 조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시 주석의 결의에 찬 표정에서中國夢이 꿈을 넘어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 믿음은 중국인들 스스로 그 꿈을 향해 전진하도록 추동할 것이다. 그래서 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말 또한 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미래는 다르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물론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꿈을 향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갈 때만 현실이 된다. 그러나 당장은 꿈을 꾸고 그 꿈을 말해야 한다. 꿈을 이루는 방법의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꿈을 말하며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막연하나마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을 꾸며 살아간다. 비록 당장의 삶이 고단해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아갈지라도 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면 조선족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꿈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조선족의 진취적 기상과 적극성으로 볼 때 중국공민으로서 조선족 개개인의 미래는 창창할 것이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서는 기회론과 위기론이 맞서고 있다.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급변하는 시대상황 하에서 조선족 개개인만 있고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꿈(비전)을 그리지 못한 탓은 아닐까? 흑룡강신문 2014년 6월 18일자
88    교양, 교양과목 그리고 교양 있는 사람 댓글:  조회:2637  추천:2  2014-03-24
서둘러 인생 1막을 정리하고 연변에서 그 2막을 열며 학생들에게 ‘교양(敎養)’을 가르치는 일을 새롭게 시작했다. 금년 3월부터 연길에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양학부에 소속돼 이른바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개강 첫날, 처음 만나는 ‘신입’ 교수에 대한 호기심 가득찬 학생들에게 교양학부 소속 교수로서 교양과목이 전공과목보다 더 중요하다는 등 일방적으로 내 주장을 늘어놓았다. 학생들이 내 생각을 읽어주길 바라면서....   학생들 역시 교양과목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을 터인데 되풀이해 강조한 것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개인이 갖춰야 할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소학교 및 중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하지만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소 다르다. 대학이 교양학부를 두고 이미 성인이 된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이들이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함양해 사회에 보다 잘 적응하며 모범적인 생활을 하도록 돕는데 목적이 있다.   교양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이다. 이는 “사회생활을 품위 있게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폭넓은 지식” 정도로 재정리할 수 있다. 이를 확장하면 대학은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춘 품위 있는 생활을 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교양과목을 가르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사회에 나가 올바른 사회인이 되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화되고 사회가 분화된 오늘날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개개인만을 생각하며 타인에 대해 배려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교양을 앞세우는 것은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이 거듭되면 성인군자도 “교양이 밥 먹여 주냐”며 생각을 바꿀지 모른다. 세계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배우고 익혀야할 지식이 넘쳐나 교양을 쌓는 것이 지난한 일이 되고 있다. 교양과목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넘쳐나는 지식을 어떻게 다 배우고 익힐 수 있냐고 푸념할 만하다.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 누구나 교양 없는 사람(?) 때문에 기분 잡친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의당 뒤에서 그 사람의 교양 없음을 나무랐을 것이다. 상황을 바꾸어 누군가 나의 교양 없는 행동(?)에 기분 나빠하며 험담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교양 없는 사람 때문에 기분을 잡쳤을 때보다 더 기분 나쁘지 않을까?   교양을 갖추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각하고 삶을 풍성하게 하여 세상을 보다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교양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발전을 통해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여 사회 안에서 진정한 자기 실현을 완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양 있는 사람의 가장 큰 덕목은 타인을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가짐 일 것이다. 흑룡강신문 3월 24일자
87    연변 발전을 조선족사회 발전에 활용해야 한다 댓글:  조회:3200  추천:24  2011-09-06
연변은 여전히 거침없는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채 10개월도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았는데도 달라진 모습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두드러졌다. 주도인 연길시는 물론 지방의 중소도시, 그리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 및 도시 외곽의 다양한 건설현장 등 연변지역 곳곳에서 그런 모습은 쉽사리 확인할 수 있었다. 연변지역의 경제성장률을 통해서도 그곳의 발전이 다른 지역에 비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금년 상반기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7.9% 증가했다. 이는 금년 상반기 중국의 GDP 성장률 9.6%를 크게 웃도는 것일 뿐 아니라 중국의 31개 성·시·자치구 가운데 1위를 차지한 천진의 16.6%보다도 높은 수치다. 조선족동포들에게 있어서 발전하는 연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실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해외에서 연간 1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돈을 송금하며 연변의 발전을 견인해온데 대한 자부심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갖가지 아픔과 설움을 견디어 냄으로써 숙명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는 기쁨을 확인하는 실증적 사례로도 받아들여 질 것이다.         ▲ 번화한 연길시 로짠버스터미널 지역   이는 연변 출신이든 아니든 모든 조선족동포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일 것으로 생각한다. 대부분의 조선족동포들은, 연변이 지리적으로 중국 동북지역의 변방을 지칭하지만 지문화적으로는 조선족동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연변과 비연변으로 나누어 서로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지만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에게 있어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인 것은 분명하다. 이방인인 필자 역시, 단지 조선족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러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연변은 하나의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조선족동포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삶의 터전으로서 조선족사회를 지탱해온 핵심지역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이 그런 감정에 기여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필자에게는, 연변의 이러한 가치를 생각하면 할수록, 연변의 급속한 발전에 가려진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더 크게 느껴진다. 연변의 발전 속도에 비례해 조선족동포들의 위상과 역할이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연변의 발전은 그 자체로도 마땅히 평가받아야 하지만 조선족동포들이 그 중심에 서 있어야만 의미있다.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의 발전은 당연히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추동하고 조선족동포들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연변을 방문하는 동안 발전하고 있는 연변의 모습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조선족동포들의 위상은 작아지고 역할 또한 위축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연길시 신축천지교   창지투선도구개발계획과 연룡도일체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족동포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크지만 대부분의 동포들은 아직 적극 나서지 않는 것 같다. 어디를 가도 사람은 넘쳐났지만 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시에서 조차 전체인구의 57% 이상을 차지한다는 조선족동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조선족동포들은 이미 소수자로 전락한 듯했다. 실제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동포의 수가 호구를 근거로 한 인구조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던 염려가 기우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인식하면서도 대안을 마련하는데 소홀히 하며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조선족동포 중에는 연변과 특별한 인연이 있고 그동안 연변의 발전을 견인했기 때문에 연변의 발전은 응당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보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조선족동포들은 연변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연변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변지역의 지경학적 가치와 중국의 정책을 보면 이곳은 앞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할 것이 분명하다. 조선족동포들은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연변의 발전이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여야 한다.
86    조선족 J형에게,신묘년 새해 인사에 붙여 댓글:  조회:3620  추천:34  2011-01-03
J형에게, 신묘년 새해 인사에 붙여 곽승지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정치학박사J형! 다시 한해가 저물어가고 사람들은 습관처럼 새해맞이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누구는 아쉬움 속에 한해를 돌아보며 새해에는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다잡는가 하면 누구는 입가에 미소 지으며 새해에 이루려는 또 다른 계획들을 글로 적어 책상머리에 붙여놓습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연례 의식과도 같은 이런 일들에 우리들은 너무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면 뭔가 허전하고 마치 새해를 맞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 양 스스로 위축되기도 하지요. 저 또한 새해맞이를 위해 황망한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J형에게 편지를 씁니다. 느닷없이 쓰는 편지여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J형이 당황스러워하지는 않을까 저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J형과의 소통을 늘리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기를 바라며 J형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담아 2011년 신묘년(辛卯年)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J형! 어느 시인은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세월은 그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지요.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세월에 경계를 그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구분하고 가는 해와 오는 해를 나누어 놓았지요. 인위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편리한 규칙이 있어 사람들은 세월을 가늠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가늠해 보면 제가 J형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덧 10여 성상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 세월을 보낸 지금에 이르러서야 J형이 한국사회에서 또는 한국사람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힘들고 아픈 날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인생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말하며 위로한들 J형의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가 쉽게 풀리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오늘은 용기를 내어 J형이 새해에는 지난 세월에 겪었던 아픔은 물론 그로 인한 원망마저도 모두 내려놓음으로써 의연하게 세월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J형이 조상 대대로 이어온 백의민족의 선함과 연변의 푸른 하늘보다 투명하고 순수한 성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려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J형이 행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J형! 저는 당신이 겪은 아픔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픈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J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아픔을 이겨내고 상대에 대한 원망을 거두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마음의 문제인 동시에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J형이 한국사회는 물론 한국사람과 보다 좋은 관계를 맺기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민족이 겪은 슬픈 역사로 말미암아 오랜 기간 떨어져 다른 제도와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지난 역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모든 문제는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능히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힘을 합해 우리들의 좋은 관계맺기를 방해하는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다시 한민족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J형이 보다 밝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흔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현재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무엇보다 현재가 중요하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미래지향적 동물입니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하여 현재에 안주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로 나아갈 때 더 큰 행복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기실 어느 누구도 과거의 흔적을 온전히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에 겪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용서를 통해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자신을 힘들게 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와 관련된 사회적 현상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레드 러스킨이 말한 것처럼 용서는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새로운 열쇠를 제공할 테니까요. J형! 새해를 맞이하여 더 큰 용기로 과거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을 거두세요.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만끽하세요.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더 큰 행복을 찾아 미래를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용기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고 또 진정한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J형! 신묘년 새해에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당신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에 놓인 산적한 과제를 생각하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못지않게 미래를 준비하는 것 역시 힘겨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시작이듯 이제는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혹여 무엇을 먼저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J형이 중국동포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 앞장서 그들을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렵니다. 지도자 없는 대중은 불행하니까요. 2011년 새해에는 J형이 보다 많은 꿈을 꾸고 그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동북아신문
85    조선족사회는 당신의 리더쉽을 원합니다 댓글:  조회:3399  추천:67  2009-11-12
조선족사회는 당신의 리더쉽을 원합니다 곽승지1. 왜 지도자가 필요 한가 - 우리의 모습이 제각각이듯이 사람마다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릅니다. 누구는 작은 일에도 만족하며 즐겁게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세상만사 모든 것을 귀찮아하며 온통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는 가난하지만 베풀면서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부유하게 살면서도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삶의 모습이 이렇듯 다양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 개인적 차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적 현상도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과거와 비교할 때 현대인들이 더 복잡하고 각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한 예입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은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깁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환경은 필경 타인을 배려하거나 전체를 생각하게 하기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져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럴 경우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기 보다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21세기 정보시대에는 무엇보다 박애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주위의 이웃들을 돌아보며 그들과 함께 사랑을 가꾸어 가지 않는다면 21세기가 그 어느 시대보다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좋든 싫든 주위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하는 운명을 타고 낳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야만 합니다. 역으로 내가 행복하여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 지겠지요.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망각하면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불행해 지니까요. -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분명한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는데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까요. 어떻게 하면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에 사랑이 넘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들 스스로가 자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에 눈떠야 합니다. 스스로 못한다면 올바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인도해줄 누군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누군가를 가리켜 리더(지도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지도자를 애타게 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행복한 삶을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누가 지도자인가 - 저는 한때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지도자 없음을 한탄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 없음을 탓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직시하며 혁혁한 지도자가 나올 때까지 당분간 조선족동포 모두가 지도자 후보가 되어 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하자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 그런데 지도자의 역할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도자는 이러이러해야한다고 정해져 있지도 않습니다. 단지 지도자는 이러이러하면 좋겠다는 정도의 바람직한 지도자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스스로 지도자 후보가 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과 그것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 또 지도자의 범주도 다양합니다. 국가적‧민족적 차원의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작은 집단의 지도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자라는 말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며 그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지도자의 반열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 역할의 막중함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어 자신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도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지도자로서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자세란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소임을 다하려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당신은 이미 훌륭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지도자에게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 그러면 지도자는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지도자는 우선 세상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가치있게 만들어가려는 긍정적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역사의 발전은 사람들의 긍정적 힘이 가져온 결과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지향적 사고를 통해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보다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꿈과 희망, 또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지도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또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더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타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로 추앙해온 사람이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상황을 접하면 더 없이 슬퍼지는 것도 지도자에게서 이타적인 행동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소통의 기술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회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이룰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또 배려하여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상대의 주장에 귀 기울이면서 동시에 상대를 설득할 줄 아는 소통의 기술을 지녀야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지도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지도자 부재를 말하는 것은 지도자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도자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그 길을 가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는 지도자연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만 믿고 따를 만한 진정한 지도자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선족사회에 지도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평가하고 따를만한 훌륭한 지도자가 없다는 말이지요. - 지도자는 다수의 사람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대중의 희로애락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도자는 대중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그들과 함께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파트너쉽). 또 대중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서번트쉽). 이런 일은 나를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야만 가능합니다. 대중에 대한 사랑과 자기희생이 전제되어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과거 권위적이고 수직적 사회에서 지도자는 대중 앞에 서서 이들을 이끌어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과거의 지도자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탈권위적이고 수평적 사회인 오늘날 지도자는 옆에서 도와주고 뒤에서 미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당연히 권력과 권위보다는 화합과 소통의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21세기 정보시대가 가져온 새로운 시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흔히 탈권위주의를 말합니다. 탈권위주의란 정보와 권력이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라 다수의 일반 대중에게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대중이 지도자에게 힘을 부여하게 됩니다. 과거의 지도자는 혼자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오늘날의 지도자에게는 세속적 힘이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힘과 지혜를 모아 그들과 함께 하나하나 차근차근 일해 나가야 합니다. - 오늘날을 정보시대 및 소통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정보시대는 정보가 넘치는 세상일 뿐 아니라 정보가 중요한 세상임을 말하며, 소통의 시대는 소통이 원활히 될 수 있는 세상일 뿐 아니라 소통하는 것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1차적 정보는 상식에서 시작됩니다. 상대를 포용해야만 소통할 수 있습니다. 소통이 중요한 만큼 오늘날의 지도자에게는 소통의 수단으로서 컴뮤니케이션(대화)의 능력이 특별히 요구됩니다. 아울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안철수 교수가 지도자의 모델로 제시한 A형인재의 덕목으로 전문성 및 상식과 포용력에 컴뮤니케이션을 포함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저는 오늘날의 지도자상으로 A형인재에 비전(꿈/ 희망/ 꿈너머꿈)을 더하고 싶습니다. 현재를 너머 미래를 지향하여야 현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그러한 비전을 통해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역사 속에서 보는 지도자 상 - 지도자의 이런 덕목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혁혁한 지도자들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대의를 위해 개인적 욕심을 과감하게 떨쳐버린, 이타적 대승적 위인으로 불립니다. 영국식민지 상태에서 미국을 건국한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워싱턴은 대통령을 연임한 후 주변의 강력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미국정치사에서 단지 연임만 허용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과 현 미국대통령 버락 오바마로부터 우리는 지도자 개인의 꿈이 집단적 꿈으로 승화되어 꿈이 아닌 현실이 되는 현상을 목도하였습니다. 킹은 1960년대 초 흑백차별이 엄중했던 미국사회에서 약자인 흑인들이 강자인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꿈은 곧 수많은 흑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흑인 모두의 꿈이 되었고 드디어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를 백인중심사회인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지도자의 꿈이 40여년의 세월을 거쳐 현실이 된 것입니다. - 세종대왕이 세계적 발명품인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화합을 위한 소통의 리더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쉽게 글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마음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지도자의 따뜻한 품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재필 박사의 삶을 통해서는 지도자 개인의 꿈이 자라나 대를 이어 확장됨으로써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안중근의사로부터는 자기희생의 리더쉽을 배울 수 있습니다. 5. 조선족 지도자로 살아가기 - 조선족사회는 전환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환기에는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중첩되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족사회는 모든 면에서 전환기적 현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선족사회의 미래와 관련해 불확실성에 따른 위기론이 제기되는가 하면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며 이를 반박하기도 합니다. 90년대 초까지 95%이상의 조선족동포가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에 집거해 살아왔으나 지금은 이 지역에 실제 거주하는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정도로 줄었습니다. 조선족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돈을 좇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면서 가족해체 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당연히 부모의 슬하에서 벗어난 아이들의 사회적 일탈현상도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족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전환기적 현상은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일부에서 기회론을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 조선족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중국의 거주지 내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이미 전체 조선족동포들의 3분의 2가 기존 거주지에서 벗어나 중국내 개방도시와 한국, 미국, 일본 등 타국으로 이주해 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합니다. 이 경우 새로운 거주지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동포들의 내부 문제, 적응문제, 새로운 관계맺기 등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조선족동포 또는 조선족사회의 미래와 관련된 거대담론에서부터 소집단 내에서 나타나는 미시적인 문제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엄중하고 또 복잡하지만 지혜를 모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회론을 말하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합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누가 나서서 어떻게 답을 찾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야 합니다.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지, 문제해결을 위한 어떤 방법이 있는지 등등.... 다음은 조선족동포들 모두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하는 일입니다. 어떤 이는 문제라고 하는데 어떤 이는 문제가 없다고 하거나, 어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어떤 이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한다면 문제해결은 지난할 겁니다. -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조선족동포사회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절박한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로 갑론을박하거나 일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사례는 매우 제한적인 것 같습니다. 말과 글 또는 개별적 주장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을 통한 실천이 중요한데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문제를 앞장서 풀어가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은 아닌가요. 저는 이와 함께 조선족동포들 스스로 지도자가 되지 않으려는 데서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조선족 지도자로 살아가야하는 고단함을 회피하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 이제 여러분 모두가 조선족사회의 지도자 또는 지도자 후보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서,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지도자로 나서십시오. 그런 다음 주변의 유사한 집단들과 연대하여 관심의 범위를 넓히십시오. 조선족동포들 모두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포사회의 미래를 위해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면 조선족사회의 미래는 창창하게 빛날 것입니다. 흔히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적어도 조선족사회에는 그렇습니다. 조선족동포들 중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역사가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그때 거기서 무엇을 하였느냐?”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본 글은 지난 8일 오후 2시, 귀한동포연합총회의 초청을 받고 연합뉴스 곽승지 영문팀 팀장이 '조선족 사회는 당신의 리더십을 원합니다'란 제목으로 행한 특강의 전문이다.
84    [31]공생지혜 모아 갈등 극복해야 댓글:  조회:4381  추천:47  2009-08-31
<조선족동포에게 고함>-31(끝) 공생의 지혜를 모아 갈등을 극복해야 합니다                              곽 승 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지구상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살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관계맺기를 도모합니다. 살아가야할 무대로서 생태계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지요. 종(種) 간 혹은 집단 간 경쟁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며 만들어내는 이들의 관계를 생태학자들은 대체로 여덟 가지 정도로 구분합니다.(<숲 생태학 강의> 참조) 하지만 이 같은 구분의 기준을 확장할 경우 중립과 경쟁 그리고 공생 등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중립은 말 그대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관계로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경쟁은 생태계의 가장 일반적인 관계로서 두 종 혹은 두 개체군, 또는 같은 종 내에서 서로 다른 개체 사이에 발생하는데 서로 억제하거나 부정적 영향을 주는 관계입니다. 공생은 경쟁의 대척점에 있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공생을 절대적인 관계인 상리공생과 임의적인 관계인 협동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한쪽만 이익이 되거나 한쪽만 손해가 되는 형태의 편리공생과 편해공생의 관계도 있습니다.   생태계 뿐 아니라 사람이나 국가 간의 관계 역시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입니다. 국제관계의 행위 주체인 국가 간의 기본관계에 대해 통상 적대관계와 공존관계로 나누는 것이 한 예입니다. 적대관계는 전쟁상태를 포함해 갈등이 진행 중인 상태를 말하고 공존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를 지칭합니다. 공존관계 중에서 대립적 상태에 있는 경우를 적대적 공존으로, 대립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은 상태를 중립적 공존으로, 그리고 상호의존적인 우호적 관계를 동맹적 공존으로 세분하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은 상호의존적 동맹을 통해 국가 간의 공존을 모색함으로써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데 힘써왔습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세계 평화가 유지되고 인류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공존을 희망하며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갈등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공존의 필요성을 익히 알고 있으며 이를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 왔다는 것이지요.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그런 만큼 갈등의 원인 또한 특별한 것 같습니다. 민족적 차원에서 보면 지난세기 한민족이 겪은 슬픈 역사에서 비롯된 민족 내부의 요인이 갈등을 촉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족 동포들이 중국 국민인 점을 감안하면 국가 간 관계의 범주에서 갈등요인을 헤아려야 합니다. 관계의 특수성 및 복잡성이 갈등요인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관계맺기는 생태계에서 종 간 혹은 집단 간 관계맺기 유형이 복합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특수하고 복잡한 갈등요인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생태계에서 절대적인 공생관계를 형성해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체의 지혜(?)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더욱이 생태계의 일부 공생관계는 관계 당사자에게는 물론 생태계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콩과 식물에 해당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기 단백질의 3분의 1이 질소고정 박테리아와 식물과의 공생관계의 결과라는 것은 공생의 긍정적 가치를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보잘 것 없는 미물들마저 공생을 통해 자신은 물론 주변을 이롭게 하고 있음은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 공생의 긍정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 범위와 수준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생을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는 나를 너머 우리를 확장함으로써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제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갈등 극복을 위한 공생의 지혜를 모으는데 함께 나서야 합니다.
83    남북통일과 조선족의 역할 댓글:  조회:3388  추천:54  2009-07-29
남북통일과 조선족의 역할 곽 승 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Ⅰ)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역사를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초자연적인 것과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구분하여 인식해 왔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초자연적인 역사적 현상을 제외하면 역사는 인간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믿어왔지만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않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헤겔의 ‘이성의 간지,’ 칼 맑스의 ‘인간 소외론’ 등이 그것이다.    한 달 후면 남북한이 분단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64주년이 된다. 남북한이 각각 단독정권을 수립해 정치적 분단의 길로 들어선 지도 61년째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마무리하기 위한 휴전협정을 조인한지도 56년째를 맞고 있다. 남북한은 이렇게 긴 분단의 역사를 살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한민족이 20세기에 겪은 슬픈 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기약 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 슬픈 역사를 끝내지 못하는 것도 단지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않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대립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며 여기에도 인간의지가 일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이 분단되는 과정에서 인간의지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 역사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강한 의지가 역사를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의지 부족이 역사를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Ⅱ)   <단상 1> = 북한 노동신문은 6월 14일 새삼스레 ‘사회주의 동방초소’를 강조하고 나섰다. 이 표현은 냉전시대 북한과 동독이 각각 동방과 서방의 최전선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맞서고 있음을 강조하며 연대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이다. 북한은 이 시점에서 왜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일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남북관계를 다시 냉전시대로 되돌리려 한다는 의구심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서방초소로 역할했던 동독은 이미 통일을 이루어 이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올해는 동유럽에서의 민주화 도미노를 가져온,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11.9)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단상 2> = “천리 밖까지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한 층을 더 오른다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후진타오 중국 당총서기가 지난 5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본토를 방문하고 있는 우보슝 대만 국민당 주석과 만나 읊은 당나라 시인 왕즈환(王之煥)의 시구다. 후주석은 지난해 분단 60년 만에 처음으로 가진 중국 공산당-대만 국민당 간 영수회담 이후 양안관계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양안관계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눈높이가 높아야 한다며 이 시구를 인용했다. 중국과 대만은 이제 사회적 통합을 넘어 경제통합을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이미 위안화와 대만달러는 공히 대만과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2007년 대만의 대중국투자는 100억달러에 이르렀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중국과 대만간 경제통합화에 관한 한 보고서에서 양안관계의 개선으로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남북경협의 확대 필요성을 제기했다. 중국과 대만의 이 같은 관계진전은 좋은 관계맺기를 위한 30년여 간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임을 주목해야 한다. 독일통일 역시 오랫동안 서로 신뢰를 쌓으며 통일을 준비한 결과이다.      <단상 3> = 남한의 민주평통 자문회의가 지난해 11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국민통일의식 조사에 따르면 국민 55%가 북한을 ‘포용하고 함께 살 상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함께 살 상대’로 인식하는 응답자도 28.8%나 됐다. 북한을 ‘함께 살 상대’로 인식한 국민이 83.8%에 이르렀다. 민주평통이 금년 3월에 실시한 또 다른 조사는 국민의 80.4%가 남북통일을 ‘중요한 국가현안’이라고 응답했다. 남북 간 관계가 경색되고 남한사회의 보수화 경향이 확산되고 있지만 국민은 여전히 북한을 함께 살아갈 통일의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분단 64주년을 맞으며 그래도 위안이 되는 대목이다.    (Ⅲ)    분단 64주년을 앞두고 다시 통일문제를 생각한다. 통일은 무엇인가. 통일은 왜 해야 하나. 통일은 가능한가. 그럼 왜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나. 기초적인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남북통일 과정에서 조선족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토대가 될 것이다.   ▢ 통일은 무엇인가 = 올해는 남한정부가 통일문제를 제도권 내에서 논의하기 위해 최초의 정부기구인 국토통일원을 설립한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이 기구는 1990년대 초 통일부로 명칭을 변경하며 부총리급 기구로 격상됐다가 현재와 같은 장관급 기구로 정착되었다. 정부기구의 명칭 및 위상 변경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사회에서는 통일문제와 관련한 부침이 거듭되어 왔다. 통일에 대한 인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국토통일원이라는 명칭에서 엿볼 수 있듯이 초기에는 북한이라는 실지(失地)를 회복한다는 의미의 국토통일의 관점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했다. 즉, 통일의 개념을 분단 이전 상태로의 복원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통일을 단지 국토회복의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갖는 문제를 인식, 보다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통일을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미래의 새로운 비전으로 확장하려 한 것이다. 이른바 민족통일의 개념이다. 이것은 아직 유효할 뿐 아니라 북한지역 외의 동포들까지를 포용할 수 있도록 더 확장되어야 한다.   ▢ 통일은 왜 해야 하는가 = 통일은 남북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통일은, 작게는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문제이지만, 크게는 한민족의 슬픈 역사를 극복하고 그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는 한편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평화와 번영을 꾀하기 위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즉, 남북통일을 이루어야 민족문제를 극복하고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냉전과 탈냉전이 공존하는 유일한 지역이다. 또한 페르시아반도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다. 따라서 남북통일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안정성을 제거함으로써 역내에 새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 통일은 가능한가 = 한국민 80% 이상이 북한을 함께 살아 갈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통일을 국가적 현안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다. 통일을 위한 토대와 명분은 이미 확보된 셈이다. 그러나 통일은 원한다고 되고 원하지 않는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트렌드(추세)에 비추어 보면 통일은 필연이다. 언제 어떤 통일을 맞을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다 간절히 염원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간절함과 적극적 노력 여하에 따라 통일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왜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나 =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된 민족국가는 6개이다. 그 중 4개 국가는 이미 통일을 이루었다.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한 나라는 남북한과 중국-대만이다. 그런데 중국-대만은 이미 경제통합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있다. 사실상의 통일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남북한만이 아직 통일의 전도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6.25전쟁을 경험하는 등 분단이후의 극단적 갈등을 경험한 것이나, 분단구조의 복잡성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남북한 공히 진심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며 경쟁하여 온 상태에서 이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진심을 다함으로써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데 남북한은 지금껏 스스로 반성하는 데 인식한 반면 상대를 탓하는 데는 너그러웠던 것 같다. 상대를 탓하게 되면 좋은 관계맺기를 할 수 없다. 당연히 주변을 활용하려는 노력도 소홀하게 된다. 통일을 위해 남북한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진심을 다해 적극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맺기를 하여야 한다.    (Ⅳ)   조선족은 한민족에게 있어서 역사적 현실적 측면에서 모두 특별한 존재다. 이들은 20세기 우리민족이 겪은 슬픈 역사를 온 몸으로 견뎌 냈을 뿐 아니라,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의 변방에서 살아가면서도 민족 문화와 전통을 오롯이 지켜왔다. 그들은 모진 세월을 견디며 중국 동북지역에서 당당하게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다. 조선족의 이러한 역사적 현실적 의미는 남북관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족은 지난 역사의 결과로 심정적으로는 북한과 가깝다. 그러나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에서는 남한과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와 같이 남북한 모두와 특별한 인연을 만들어 온 조선족은 남북한 주민들 간 소통을 위한 매개자이다. 그리고 조선족들이 살아가고 있는 동북지역은 남북한 관계를 이어주는 새로운 통로이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조선족은 앞으로도 이 지역에서 남북한 주민 간 소통을 매개하고 동북지역은 남북한 관계를 이어주는 통로로서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조선족은 동북지역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남북통일 과정에서 조선족의 역할은 조선족의 문화적 특성과 중국 동북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함께 고려하여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족이 거주하는,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동북지역은 지정학적 요충지다. 이 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는 19세기 말 근대화 과정에서 열강이 이곳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였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와 맞닿아 있는 이곳은 한민족은 물론 일본 등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관문이다. 또한 중국 동북 내륙지역과 러시아 몽골 등이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출로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지만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경향을 감안할 때 이 지역은 새롭게 각광받게 될 것이다. 즉, 단절된 상황에서 변방은 말 그대로 변두리에 지나지 않지만 소통의 시대에 변방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소통을 위한 중심이 된다. 연변과 그 주변지역은 21세기 새로운 소통의 시대에 즈음한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부각될 것이다. 세계적인 지정학자 매킨더가 20세기 초 동유럽의 지정학적 가치를 언급하며 심장지역(heartland)으로 묘사했던 것에 견주어 볼 때 연변과 그 주변지역은 21세기 동북아시아의 심장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의 대가인 대산 김석진 선생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간동(艮東)으로 부르며 새로운 시대의 중심지역으로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남북통일 과정에서 조선족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보다 의미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조선족동포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민족이 추구하는 민족통일에 대한 당위성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어떤 통일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인식에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조선족동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심정적으로는 북한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남한중심의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내부에서 어떤 통일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통일을 위해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활력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연변을 포함한 동북지역의 지정학적 가치가 통일과정에서 조선족의 역할을 견인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조선족동포들의 확고한 위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조선족 동포들이 동북지역에 자리잡고 당당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이 지역이 남북한 관계를 잇는 새로운 통로가 되고 있기에 그러한 조건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가지 더한다면, 한민족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과 조선족동포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인과 조선족 간의 갈등이 고착화되고 구조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조선족동포들이 통일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과 조선족동포 간 갈등을 해소하고 민족애를 향유할 수 있는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조선족동포들은 통일 과정은 물론 통일 이후에도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우선 자본주의를 먼저 경험한 입장에서 북한사회에 시장경제를 확산시키는 것은 물론 북한주민들에게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대한 경험을 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통일이후 북한주민들의 사회화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족동포와 북한주민들 간의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개혁개방에 대한 북한사회의 불안을 불식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북한사회 내부에 이같은 변화가 추동된다면 동북아시아지역의 역내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이 현실화되면 조선족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활용해 남북관계를 넘어 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가교로서 새로운 차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상황이 만들어 질 때 조선족동포들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유대를 얼마나 견지하느냐 하는 점이 될 것이다. (끝)주: 이 글은 2009년 7월 17일 연길서 열린 GKFN 제2차 총회서 행한 발표문입니다.
82    [30]갈등은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만 해소됩니다 댓글:  조회:3699  추천:42  2009-07-07
<조선족동포에게 고함>-30 갈등은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만 해소됩니다                             21세기 정보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사람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말하곤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필연적으로 사람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할 뿐 아니라 대립하는 모습을 시시때때로 목격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있는 곳에는 갈등이 있게 마련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갈등을 야기하는 주체와 갈등의 이유도 다양하기 그지없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감안하면 갈등은 일견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며 그 광경을 그저 바라만 보는 뭇사람들의 모습이나,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역사가 발전하는 이치를 보면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따라서 갈등현상을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며 지나치게 문제시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갈등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갈등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을 넘어 구조화되거나 고착화되고 있다면 얘기는 조금 심각해집니다. 문제의 본질이 바뀌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싸움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좋은 것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작은 싸움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그냥 방치하다가는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기도 어렵게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갈등이 있다면 미리 이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는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본격적인 관계맺기를 시작했습니다. 어언 17여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양자 간의 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커졌지만 관계의 질도 그에 비례해 좋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갈등현상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공히 비슷한 진단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어쩌면 갈등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말해도 될 만큼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시간이 약이겠지요’를 되 뇌이며 저절로 치유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갈등은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감안할 때, 오늘날의 갈등현상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문제가 얼마나 더 심각하게 될 런지 가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마저 듭니다.   갈등이 저절로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는 치유 과정의 어려움을 미리 염려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가 먼저 치유에 나서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치유과정을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갈등현상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통해 갈등의 원인을 밝혀 이를 공론화하는 것만으로도 갈등의 치유는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상대를 이해하며 역사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를 탓하거나 상대가 먼저 행하기를 바라며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단할 수 없으며 또 예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역사적 소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류가 의도하는 바람직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함으로써 의도하지 않는 역사적 결과를 배격해야 한다는 대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조선족 당신이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갈등을 치유하는 역사적 소명을 다함으로써 바람직한 미래를 만드는 시대의 선구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1    [29]조선족만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댓글:  조회:3506  추천:43  2009-07-06
<조선족동포에게 고함>-29 조선족만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인문학에서는 ‘보편적인 것’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학은 역사성을 갖는 인간의식의 시스템(체계)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문학은 주로 어떤 현상에 대한 의미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의미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역사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는 개인과 집단에 대한 것으로 구별되는데, 각 개인은 서로 다른 역사를 갖기 때문에 동일한 집단 내에서도 개개인에 따라 역사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치’ 역시 의미의 문제이기 때문에 물리적 토대에 기초하지 않는 한 ‘보편적 가치’란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조선족의 보편적 가치’ 운운하는 것은 일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선족 개개인의 가치를 말할 수는 있지만 집단으로서 조선족 전체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모든 것을 논리로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특수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상황을 뛰어 넘는 파격이 통하기 마련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염원하고 또 지향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을 공유한다면 이는 파격일 것이고 결국은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될 겁니다.   난해하고 딱딱한 표현을 써 가면서 조선족의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것은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족동포 개개인은 21세기의 새로운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를 무대삼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주어진 상황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기도 합니다. 조선족 개개인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의 미래가 밝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조선족 개개인의 미래가 밝다고 해서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가 밝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개개인의 의미와 집단의 의미는 구별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새로운 환경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추동합니다. 조선족사회 역시 변화의 거센 파도에 휩싸여 있습니다. 조선족 동포끼리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80년대 초에는 90% 이상의 조선족동포들이 동북 3성 지역에 모여 살았으나 지금은 절반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해외로 또는 중국 연해지역의 개방도시로 거주지를 옮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쩔 수 없이 조선족 동포사회의 해체와 조선족동포 개개인의 탈조선족화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경제활동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지역공동체를 견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동포사회의 해체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탈조선족화는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탈조선족화를 막을 수 있다면 지역공동체를 정신공동체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동포사회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도 조선족동포 모두가 공유하는 조선족만의 보편적 가치를 서둘러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문제는 조선족만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조선족동포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로 만들어내느냐 하는 점일 겁니다. 조선족만의 고유한 가치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지니고 있는 가치의 조합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조선족은 같은 민족이지만 분명히 한국인과 다릅니다. 중국 국민으로서 중국의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왔지만 여타 중국인과도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조선족은 한국과 중국의 어느 극단을 쫓을 것이 아니라 양자를 동시에 취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1세기는 동북아시아시대라고 말합니다. 한국과 중국은 동북아시아시대를 추동할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족은 바로 한국과 중국을 아우를 수 있는 특별한 가치를 잉태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선족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도자와 지식인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들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도 조선족 개개인의 미래 못지않게 밝게 빛날 것입니다.
80    [28]고정관념 버려야 새 세상 만난다 댓글:  조회:3536  추천:34  2009-06-19
<조선족동포에게 고함>-28고정관념을 버려야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얼마 전 한 휴대폰 회사가 이 광고 문구를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사랑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세태를 풍자해 이를 광고에 접목시킨 것이지만 새로운 사회현상에 비추어 볼 때 나름 수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움직여 왔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그 움직임을 외면했을 뿐이지요. 사랑만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인데 움직임은 곧 변화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랑이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마음)이 변했음을 뜻합니다. 생각의 변화는 변절 혹은 변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이들은 나쁜 것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선비정신에 대한 향수에 젖어있든, 좌우로 나누는 편 가르기에 길들여져 있든 지난 세월이 우리에게 부여한 ‘규범’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 즉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유독 너그럽습니다. 초지일관하고 의리를 지키고 일부종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덕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보시대는 새로운 상황에 얼마나 빨리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변화의 폭과 깊이 그리고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움직여 대처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덕목으로 유연한 사고를 주문하는 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지요.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간부들에게 삼성의 비전을 말하는 가운데 ‘마누라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바꾸라’고 주문한 일화는 변화를 위한 유연한 사고가 얼마나 절실한 시대적 화두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자유로움을 전제로 합니다. 자유로워야 한 곳에, 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생각이 자유로워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자유로움은 정보시대의 중요한 트렌드(경향)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움직인다는 것은 힘의 작동을 수반합니다. 그 힘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로부터 분출되는 힘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힘입니다. 외부의 간섭과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결단에 의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행동에 책임이 따르듯 생각을 바꾸는데도 일정한 책임이 따릅니다. 변절과 변심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데 대한 책임 추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임 추궁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기존의 생각을 고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문제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삼성그룹이 모든 것을 바꾸려는 각오로 변화를 추구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외부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고의 유연성을 확장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또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욱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메여 살아간다면 결코 변화된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조선족 당신은 지금 21세기 정보시대가 초래한 변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겪고 있습니다. 변화의 물결은 이미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당신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겁니다. 이것은 일견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는 것과 같은 세상의 일반적 이치와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정보시대의 변화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더 많은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당신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고의 유연함이 당신을 새로운 세상의 주연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79    [27]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소통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댓글:  조회:3578  추천:33  2009-05-22
<조선족동포에게 고함>-27   21세기를 흔히 ‘소통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극단적 단절의 시대였던 20세기를 경험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한 인류가 새로운 세기를 맞아 이를 시대적 트렌드(경향)로 추동하게 된 것이지요. 소통의 시대가 도래하게된 것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염원과 함께 소통을 가능하게 한 정치사회적 및 과학기술적 변화가 뒷받침됐기 때문입니다. 탈냉전적 상황으로 이념적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세계화를 위한 환경이 마련됐고 인터넷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확보된 것이지요.   새로운 상황은 우리의 삶에 실로 엄청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를 구분 짓던 국경은 점점 느슨해져 더 이상 소통의 장벽이 아닌 상태로 변하고 있습니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 짐에 따라 다문화사회가 국제사회의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됐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전환은 미래에 대한 더 큰 희망을 품게 합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와 같이 소통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통을 가로막으며 갈등을 조장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그중에는 상대와의 서툰 관계맺기로 인해 빚어지는 무수한 갈등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소통의 기술을 익히지 못한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지는 않는지요. 소통의 시대에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관계맺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맺기를 위해 보다 정교하고 진지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소통의 기술을 익히지 못한 채 갑작스레 찾아온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부족한 소통의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소통이란, 관계맺기의 당사자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상호작용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소통의 기술이 부족한 것은 갈등 당사자 모두에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등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갈등의 책임을 떠넘기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를 믿으며 함께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소통의 기술을 구성하는 핵심은 ‘말하는 것’과 ‘듣는 것’ 입니다. 소통은 말하고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관계맺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잘 말하고 잘 듣기만 하여도 소통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말하고 듣는 것에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잘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절망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소통을 위한 말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한 종교인의 다음과 같은 글귀가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말을 할 때는// 지위로 말하지 말고/ 욕망으로 말하지 말고/ 화를 내면서 말하지 마십시오.// 자애로움으로 말하고/ 내용을 알면서 말하고/ 상대를 고려하면서 말을 하십시오.// 잘못했다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이 짧은 글 중에서도 특히 화를 내면서 말하지 말고 내용을 알면서 말해야 한다는 대목은 크게 공감이 갑니다.    듣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외부의 소리를 듣는 것과 자기 안으로부터 나오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그것입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귀를 열어야 합니다. 어떤 소리든 귀를 열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과 행동이 마음과 달리 표현되는데서 기인되는 많은 갈등사례가 이를 증명합니다.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갈등요인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소통의 기술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를 대할 때 화를 내면서 말하지 말고 내용을 정확히 알고 말하기만 하여도 갈등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마음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다보면 상대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소통의 기술을 익힘으로써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함께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섭시다.
78    [26] 행동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댓글:  조회:3640  추천:45  2009-05-08
<조선족동포에게 고함>-26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길 기다리지 말고, 뛰어나가 일을 저지르십시오. 최상의 삶, 당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강렬히 원하는 삶은 오직 당신의 선택, 확신, 그리고 행동에 의해서만 현실화됩니다. 당신이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은 매일 매일 당신이 가진 꿈을 조금이라도 키워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가 쓴 책 <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인간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던 바처럼 인생은 결국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현재의 삶은 오롯이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삶이 뒤틀릴 경우, 문제의 근원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로 돌리며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선택을 뒷받침할 적절하고 적극적인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선택도 소용없게 됩니다. 올바른 선택 못지않게 그 선택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여행자가 목적지를 정했으면 그 곳을 향해 부단히 움직여야 합니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농부가 추수하여 얻고자 하는 곡식을 선택했다면 그 곡식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토지를 찾아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씨앗을 뿌리지 않고서는 자신이 원하는 곡식을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하찮은 것일지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을 무엇하려고 말하냐며 책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일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동했냐는 질문을 받을 경우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생각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의 의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현자들이 지행합일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해온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지행합일, 즉 생각(아는 것)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은 지식인들에게 더 많이 요구되는 문제입니다. 지식인들은 여론을 이끌 뿐 아니라 대중들의 삶에 음양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일반대중에게 있어서 선택과 행동은 대체로 개인차원의 일인 경우가 많지만 지식인들의 경우 사회적 쟁점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일반 대중들이 지식인들을 주목하는 것 역시 자신들의 귀감이 되어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난세에 더 의미있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족 동포사회의 언로를 살펴보면 조선족이 처한 현실문제를 다룬 글이 넘쳐나는 듯합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인터넷을 이용한 다양한 글쓰기가 확산되고 있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 중에는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밝히는 매우 유용하고 의미있는 글들도 자주 눈에 뜨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글들이 구체적 행동에 의해 뒷받침되는 사례를 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선족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은 글을 쓰는데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문제를 드러내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무른다면 늑대가 다가온다고 소리치는 양치기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조선족 당신이 드러난 문제를 헤아리고 또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특히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 행동하여야만 조선족사회의 밝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습니다. 
77    [25] 당신의 성을 허물어 당신을 지키라 댓글:  조회:3706  추천:46  2009-04-24
 <조선족동포에게 고함>-25 당신의 성을 허물어야 당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너무나 복잡합니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이 가져온 다양한 문명의 이기와 세상살이를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갖가지 제도들은 온갖 형태로 사람들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 길을 찾아 우왕좌왕하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헤매기 일쑤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잿빛 하늘처럼 희미하고 침침하여 헷갈리기에 딱 좋습니다. 오늘날을 불확실성의 시대니 혼돈의 시대니 하고 이름붙인 것도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명료한 것을 찾기는 그만큼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기식대로 살아가는 고집불통의 기인들이 호감을 사기도 합니다. 스스로 중심을 잡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도 복잡한 세상을 사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데 동의하는 것이겠지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스스로 설정한 삶의 방식을 나침반 삼아 거리낌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세상살이처럼 보입니다. 삶이 간단하고 명료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살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희미하고 침침한 세상일지라도 그 속에서 밝고 명료한 빛을 찾기 위해 쉼 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살이이니까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성을 쌓으며 살아가는 것은 자폐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며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성장시킨다는 것은 자아의 성장을 말합니다. 자아의 의미는 자아의식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자존심이기도 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자아의식이 강한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아의 성장이란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사회정치적 환경이 복잡한 사람일수록 자아의 성장을 꾀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재일동포 최초로 동경대학교 정교수가 된 강상중 교수 역시 일본에서 나서 자란 재일동포로서 청년시절 정체성 혼란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갇혀 오랫동안 방황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서로 소통하지 않는 일방적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자기의 성’을 단단하게 만들고 벽을 높게 쌓으면 ‘자기’라는 것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역설적으로 자기의 성을 허물고 다른 사람의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자기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족 당신을 대할 때마다 당신이 지키려는 성이 너무 견고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소수자 또는 약자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그런 모습에서 자신의 입장과 생각만을 주장하는 자기중심주의의 한 단면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왜 일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무엇이 있다면 자기중심주의의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그와 소통해야 합니다. 강상중교수가 말한 바처럼 먼저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와 마주앉아야 합니다. 당신의 성을 허물고 상대를 진지하게 대하여야 당신을 오롯이 지킬 수 있습니다.
76    [24] 현재를 극복해야 행복한 미래가 있습니다 댓글:  조회:3433  추천:43  2009-04-09
[조선족 동포에 고함24-현재를 극복해야 행복한 미래가 있습니다.-곽승지(연합뉴스 기자)]사람들은 늘 행복을 말합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이며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쪼개 열심히 일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는 일도 서슴없이 행합니다. 그런데 그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무한한 욕망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부자인 구두쇠가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데만 급급해 어렵게 살아가는 것이나 9백99석을 농사짓는 부자가 천석꾼이 되기 위해 가난한 농부의 곡식을 탐한다는 이야기도 바로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역설적으로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속성을 간파한 선각자들은 욕심을 줄여야만 행복할 수 있음을 설파해 왔습니다. 플라톤은 일찍이 행복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조건을 제시하며 부족함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예컨대 살아가기에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에 약간 모자라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때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필가 김소운은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세태를 경계하며 ‘물 한잔의 행복’을 말한 바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하찮은 것에서조차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론자들에 따르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며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와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만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만 합니다. 자신이 구축해 놓은 작은 세상에 갇혀 그 너머의 넓고 의미있는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제시한 ‘인생에서 중요한 세 가지’는 우리가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한 이야기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현재)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접점인 현재를 살아가기에 항상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역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과 서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음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조선족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 당신은 현재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와 더불어 사랑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혹시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현재를 달가워하지 않거나 지금 만나는 사람을 원망하며 그에게 분풀이하며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또 자신의 생각과 관계의 범위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사랑을 말하지는 않는지요. 현재가 고통스럽다면 함께 하는 사람에게 충실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와 손을 맞잡을 수도 없겠지요. 그런 아픔은 또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범위를 제한하려 할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현재의 한계에 갇혀있는 한 당신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조선족 당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반드시 현재의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75    [23] 오늘의 선택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 합니다 댓글:  조회:3465  추천:47  2009-03-29
[조선족에게 고함23]“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한국 광고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던, 십 수 년 전 한 전자제품의 광고문구입니다.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 이 광고문구로 그 회사는 물론 갓 데뷔한 모델도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광고가 성공을 거둔 이유를 찾자면 열손가락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다시 한번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헤아리는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됐다는 점입니다.  세상살이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준 것이지요.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깨어있는 동안 끝임 없이 무엇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과정은 물론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조차 무심하기 일쑤입니다. 선택과정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따른 관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가벼운 선택도 심히 복잡하고 무거운 결과를 낳는 경우를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취하는 선택 중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순간의 선택이 모여 개개인의 삶이 되고 또 세상의 역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한 시인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선택하지 않았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한 것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엄중한 의미를 헤아렸기 때문일 겁니다. 더욱 유념해야 할 것은, 선택의 결과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야 드러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자신의 선택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순간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과 달리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기에, 최선의 선택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 완전하게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최선의 선택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동시에 자신의 선택을 존중함으로써 후회를 줄이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우선 세상의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중심을 잡고 자신만의 삶의 지표를 세워야 합니다. 여기에 정직과 성실, 상대에 대한 배려, 공공선의 추구 등과 같은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더해야 합니다. 최선의 선택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 선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의 감언이설을 쫓거나 세상이 흘러가는데 편승하여 어림잡아 선택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향은 특히 전환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상품을 선택하는 일이라면 그 상품의 가격과 수명의 범위에 한하여 영향을 미치지만 삶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결과는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미래를 결정짓게 된다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조선족 당신에게 잘못된 선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봅니다. 아마도 당신이 처한 전환기적 상황이 그 같은 선택을 부추겼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잘못이 아니라 지금부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잘못을 알고 이를 고치는 사람과 잘못을 덮기 위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조선족 당신의 삶이 헝클어졌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올바른 선택입니다.
74    [22] 존중받기 위해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댓글:  조회:3389  추천:37  2009-03-29
[조선족에게 고함22]오늘날 사회가 복잡해지고 또 다양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똘레랑스(관용)를 말합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만큼 그로 인한 갈등요인이 늘어나게 됨에 따라 이를 극복하여 너와 내가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염원하는데 따른 현상입니다. 똘레랑스란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너희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마라” 라는 똘레랑스를 위한 기본적 규율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국가 간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세상은 이제 그야말로 지구촌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피부색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그러나 소통이 원할해진 만큼 그로 인한 갈등도 늘어나 국제사회의 또 다른 골칫거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경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도전이 다시금 시험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똘레랑스는 그러한 상황을 치유할 새로운 묘약으로 각광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똘레랑스를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의 실천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람의 이기적 속성도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속성은 나아가서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 대한 맹목적 사랑을 낳습니다. 이는 결국 나와 너, 내편과 네편으로 나누어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화하도록 이끌게 됩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이 상대를 포용하는 것을 어렵게 하여 똘레랑스의 실천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누군가로부터 존중받고 또 이해받기 위해서는 상대를 존중하고 또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으면서 상대로부터 존중받고 이해받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똘레랑스의 실천은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보다 바람직한 것은 힘 있는 쪽이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힘 있는 쪽이 손을 내밀 때까지 상대를 원망하며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약자는 자신의 작은 아량만으로도 똘레랑스를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똘레랑스(관용)의 실천은 내가 먼저  조선족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특히 고국과 고국의 동포들로부터 존중받고 또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조선족동포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조차 견디지 못하고 금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곤 합니다. 반면 조선족동포에 대한 맹목적 찬사와 하찮은 인사치레에도 반기며 한껏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당신이 살아온 과정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움직이게 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러나 존중받고 또 이해받고 싶은 만큼 당신은 보다 현명해져야 합니다. 눈앞에서의 작은 관심에 일희일비하기 보다 조선족동포가 진정으로 존중받고 이해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조선족 당신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당신도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당신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 보다 당신이 존중받고 또 이해받고 싶은 사람을 더 존중하고 이해하려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신이 바라는 바를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간혹 당신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의 애정어린 충고에 대해서조차 섣불리 가시돋친 말을 쏟아 부어 상대를 불편하게 합니다. 당신의 어설픈 행동으로 당신이 존중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귀하게 만드는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73    졸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출간에 즈음하여 댓글:  조회:3891  추천:48  2009-03-19
졸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출간에 즈음하여 졸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이 나왔습니다. 오랜 동안 머릿속에 그리며 고민해 온 것을 글로 엮은 것이지만 집필을 마무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꼬박 1년 동안 공을 들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앞에 내놓으려니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 두려움을 견디며 이렇게 용기를 내는 것은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저의 어줍지 않은 생각에 대해 여러분들과 교감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겁니다. 한국사회는 감정적으로는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깊은 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책임을 논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조선족동포들을 탓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누구를 탓하기보다 그들을 포용하며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역사적 트렌드와 동북아시아 질서의 급격한 변화 양상을 볼 때 잘잘못을 따질 시간적 여유도 없습니다. 또한 굳이 책임을 따진다면 한국사회의 몫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삼스레 책 출간에 대해 알리는 것은 두 가지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인들에게 제가 요즘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에 대해 알리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그동안 직업으로서 북한 문제를 다루어오는 가운데 북한연구자로서 연구 활동도 겸해 왔습니다. 그러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관심의 지평을 민족문제 전반으로 확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번에 출간하는 책은 그 첫 결실인 셈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해 한국사회가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 그들과 함께 우리민족의 미래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 기인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20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온전히 치유하고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정치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짬을 내어 졸저를 읽어보시고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바랍니다. 아울러 저의 생각에 공감하는 바가 있다면 주변에도 일독을 권해 더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동포들과 함께 한민족의 미래를 열어 가는데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앞으로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지인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락처; ksj02@hanafos.com/ 010-7334-4713)                                 2008년 2월 26일                                          저  자   곽   승  지  올 림 지은이 곽승지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강원 평창 봉평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강릉고와 동국대(정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정치학)를 취득했다. 1985년 내외통신에 입사, 북한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국제부장을 역임했다. 1999년 1월 연합뉴스로 옮겨 현재까지 영문북한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것을 지켜보며 그동안 북한 및 남북문제에 머물러 있는 관심영역을 민족문제로 확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같은 관심의 일환으로 2002년 8박9일간 연변과 동북3성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 역사와 조선족동포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2004년 기자협회의 언론인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에 자리잡고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총장 김진경)에서 1년간 연수했다. 이 기간 동안 연변지역은 물론 동북3성지역에 산재해 있는 한민족의 역사적 편린과 조선족동포들의 삶을 살펴보며 연변과 조선족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 겸직교수로 있다. <북한사회의 이해>(공저), <북한의 국가전략>(공저) <북한의 사상과 역사인식>(공저), <현대 북한연구의 쟁점2>(공저) 등의 저서가 있으며 “김정일시대의 북한이데올로기: 현상과 인식” “남북한 사회문화분야 교류협력 실태”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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