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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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세상에서 보기드믄 웨딩드레스 댓글:  조회:6103  추천:47  2014-01-13
                    세상에서 보기드문 웨딩드레스       지난 10월2일,신부 방미선씨와 그의 남편 박송림은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렸다. 일생에서 한번 뿐인 결혼식 날이다. 그들을 축복하는 래빈들의 마음은 물론이지만 그보다도 또 다른 바램이 있었으니 그것은 새 신부가 입은 특별한 웨딩드레스 모습이였다.     경쾌한 음악선률과 더불어 신랑신부가 례식장에 등장하자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대번에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었다. 엄마가 딸에게 준  평생의 선물,  눈부시게 하얀 아마실로 1년나마 정성들여 한뜸 한뜸 코바늘로 떠서 지은 보기드문 웨딩드레스였다. 세상에 이런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또 어디에 있을까?  너무도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꽃무늬로 이어서 둥그렇게 부푸른 치마폭에 짤룩한 허리맵시, 윗쪽은 약간 어깨를 들어내 보이고 반팔에 이어 손등까지 살짝 덮은 모양새가 참으로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코바늘 무늬무늬 사이에 엿보이는 새하얀 살결은 또한 얼마나 귀염스러운지 하객들은 이구동성으로《참 예쁘구나!》,《진짜 세상에서 보기드문 웨딩드레스를 입었구나!》하고 탄성을 올렸다.     지난날 그 신부 엄마 김민애씨가 결혼 할때에는 아버지가 암투병으로 오늘 래일 하는 때라서 할수없이 그냥 돈 30원으로 첫날 새 의상을 사 입고 결혼식을 올렸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기억이다.  그런데 그 엄마가 오늘 자기 딸의 결혼식 선물로 이런 특별한 웨딩드레스를 설계하고 손수 지어줄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이 정성어린 결혼선물을 한코 한코 떠 내려 가면서 그 엄마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남들은 딸이 시집 갈때면 가전제품을 사준다, 자가용을 사준다, 심지어 돈 몇십만까지 준다고 하는데《나는 무엇을 해줄까?》수도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딸을 대학도, 석사연구생도 졸업시켰으며 지금은 독일에 보내서 예비박사과정까지 하고 있으니 부모로선 할만큼 했지 않을가…》 하는 자아위안의 생각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런저런 생각 끝에 오래전부터 웨딩드레스를 엄마 손으로 직접 떠서 선물하기로 마음을 다진 것 같다.     지난세월, 우리 조선족 녀성들이 즐기던 코바늘 뜨개 하면 이불보, 탁상보, 침대보, 햇대보 ... ... 등등이 떠오르는데 딸에게 웨딩드레스를 떠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생각이였다.     직장인 엄마로 주텔레비죤대학에 매일 출근을 견지하면서 그바쁜 일상에도 밤마다 휴일마다 짬짬이 틈새를 타서 한코 한코 늘여갔단다. 딸의 몸에 알맞게 뜨려고 얼마나 많이 설계하고, 풀었다 떴다를 거듭했는지 모른다.  일년 300여일의 기나긴 나날을 기계도 아닌 손으로 몇십만번이나 떠 내려 가면서 손끝이 달아 터지고 손목이 아파나고 목덜미가 뻣뻣해 나도 엄마가 딸에게 주는 사랑의 그 마음은 단 하루의 쉼도 없이 엮어내려만 갔다.         그 한줄한줄 신고의 코바늘 뜨개속에 가득 담은것은 오직 엄마만이 딸에게 줄수 있는 무한한 기대와 진심어린 마음 뿐이였을 것이다. 위대한 모성의 심혈이 듬뿍 담긴 드레스, 사랑과 정성이 가득찬 드레스, 남들이 흔히 입는 몇천원, 몇만원짜리 드레스보다 더 값지고 멋진 드레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랑의 웨딩드레스였다.     지금 세월에 결혼식 하면 신랑신부 모두가 마치 남들과 경색이나 하듯이 최고로 좋은것, 고가의 명품, 그리고 최고의 대우를 요구하는 이때,  이런 엄마가 손수 뜬 정성어린 웨딩드레스를 흔쾌히 받아 기쁘게 입어준 신부 방미선씨도 얼마나 기득하고 예쁜지 모른다.     지난 9월, 이 특수한 웨딩드레스는 전국적으로 전개된《제7차중국창의설계경색(第七次中国创意设计大赛)》에 입선되여 우수상《优秀奖》을 수여 받았다. 참으로 자랑할만한 사랑의 웨딩드레스이다.                                                                                               (자료제공: 연변대학 심혜숙 교수)                                           2014년 1월 13일                                                         
34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10 댓글:  조회:3553  추천:16  2013-12-21
                                  (14) 한 소녀의 세계우승의 꿈                                            --- 녀자유도선수 김향란        수집은 꽃망울을 터뜨리며 싱그러운 향기를 피워 올리는 한떨기《란초》-- 그는 매트우에만 척 올라서면 소녀의 부끄러움이란 전혀 찾아볼수 없는 맹호가 되어버린다. 그가 바로 인기의 시선을 한몸에 모았던 제13차북경아세아경기 61kg급 녀자유도종목의 금메달 주인인 김향란이다.    1990년 9월 29일 소조예선에서 인도네시아, 대만, 일본선수를 가볍게 누르고 결승전에 오른 향란이는 세계유도권에서 3등을 굳히고 있는 실력선수 일본팀의 고바야시 나가꼬와 금메달 최후 쟁탈에 나섰다.    경기장은 긴장한 분위기로 굳어 있었다. 붉은띠를 허리에 질끈 동여맨 김향란이 성원에 받들려 미소를 지으며 매트우에 나섰다. 심판의《시작!》하는 소리와 함께 둘은 자석같이 한데 엉켜붙었다.    절묘한 다리잡기와 덧걸이가 특기인 향란이는 몸 중심을 최하로 낮추고 조심스레 진공챤스를 엿보고 있었다. 고바야시 나가꼬는《하이, 하이!》하고 맵짠 소리를 지르며 맹공격을 들이댔다. 찰라《여차!》하는 향란의 챙챙한 소리와 함께 고바야시 나가꼬는 두 다리가 허망 우로 들리웠다. 향란의 다리잡기가 성공되였던 것이다.    향란이는 련속동작으로 몸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대방을 힘껏 옆으로 잡아챘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고바야시 나가꼬는 통나무 넘어가듯 넘어졌다. 52초의 판전승이 확정된 것이다. 이렇게 빠른 승전은 세계유도사에서도 보기 희소한 것이다.    향란이는 두팔을 쳐들고 퐁퐁 뛰였다. 바라고 바라던 번쩍이는 금메달이 목에 걸리고 오성붉은기가 게양되는 순간 향란이의 두 눈에서는 맑은 이슬이 반짝이였다.    향란이는 1972년 12월 길림성 영길현 구전에서 태여났다. 그는 50년대에《8.1》팀 력기선수로 활약했던 아버지 김영식의 영향을 받아 열두살되는 1984년부터 유도라는 이 초행길을 걷기 시작했다.    13세때부터 김향란은 체육학교에서 정식유도선수로 훈련받게 되었는데 하루에 10여시간씩 매트에서 몇백번이고 엎어지고 넘어지며 딩굴어야 했고 눈뿌리가 아찔해날 지경으로 기초훈련을 련속해야 했다. 포동포동하던 손은 거칠게 변해버렸고 다리와 몸에는 여러곳에 흉터가 박혔다. 이러는 사이 향란이는 튼튼한 기초기능과 기량을 닦아냈고 강훈련을 받아내는 의력도 키웠다.    1985년 향란이는 드디어 길림성체육학원 유도팀에 뽑혔고 1987년에는 성을 대표하여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5전5승1패의 성적으로 영예의 금메달을 받아 안았다. 향란이의 실력은 차차 전국 61kg급유도의 무적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발돋움을 보여주었다.    1989년은 그의 실력이 해외에까지 과시된 해였다. 그해 2월 그는 국가집중훈련팀《기둥》선수로 벌가리아에서 개최된 국제초청경기에 뛰여들어 일본팀의《녀귀신》에사끼 사이꼬선수와 61kg급 금메달 쟁탈에 나섰다. 3판 득점우세를 따올린 향란이는 국제경기의 첫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그의 뚜렷한 전과에 대해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해 주었으며 영예도 함께 안겨주었다. 길림성부녀련합회에서는 그에게《3.8》붉은기수 칭호를 주었으며 공청단길림성위에서는《새장정 돌격수》로 명명하였고 전국부녀련합회에서는 그에게 전국《3.8》붉은기수라는 최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미 따낸 성적은 인젠 저의 력사로 흘러갔어요. 선수라면 응당 선수생활 마지막까지 분투와 승리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봐요.》   이것이 바로 향란이의 인생 추구이다.          이상으로 열번에 나누어 우리민족 녀성들의 본보기이며 우리 민족의 자랑인 탁월한 녀성인물들의 사적 일부를 몇 번에 나누어 련재하였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빛나는 업적,그리고 아름다운 품덕은 오늘날 우리들의 인성교육과 도덕교양에 훌륭한 교과서로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훌륭한 어머니, 언니들을 본받아 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며 열심히 배우고 부단히 진보하며 힘과 지혜를 키워 선배들처럼 리상과 포부를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 분투해야 할것이다. 
33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9 댓글:  조회:3581  추천:13  2013-12-12
                                                                         (13)   겨레의 구슬                                       중국1급무용예술가 -- 최옥주        대형무극《춘향전》은 북경아세아경기예술축제에 나가 세인을 놀래웠다. 첫 공연에서 성공한건 물론, 문화부 하경지부장대리께서는《약간만 세절수정을 거치면 우리나라에서 1류로 꼽히는 무극으로 될수 있습니다.》라고 칭찬까지 하셨다.    그럼《춘향전》무극은 누가 창작한 것인가? 바로 국가1급안무가인 연변가무단의 최옥주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민족 무용을 한층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릴 뜻을 품은 최옥주는 1986년부터《춘향전》무극구상을 무르익히다가 1988년부터는 본격적인 창작에 투입하였다. 무려 4년동안이나 심혈을 몰부었던 것이다.    1988년 최옥주는 일본무용가협회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가서 반년동안 있었다. 그사이 그는 진종일 창작실에 붙박혀 창작에 몰두하였다. 한편 동양무용, 인도무용, 일본무용 등에 관한 리론연구저작들을 구해다 열독하고 연구하였다.    그 기간 서울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고전무용도 많이 보고 해외인사들의 후원도 받았다. 10월에 귀국하여《연변문학예술련합회》에 무극《춘향전》기금회를 세우고 국외에서 무극에 쓸 복장천 29필을 지원받고 국내에서도 전 민족적 자금후원활동을 벌려 30여만원의 자금을 모았다.    드디여 길림성과 연변주정부 그리고 겨레의 뜨거운 마음에 받들려 무극《춘향전》은 한송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여나 우리 중국조선족 무용예술사를 새롭게 장식하였다.    사람들은 무용가는 타고난 천재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옥주는 중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교무용대에도 들어보지 못했다. 우연하게 연변가무단 무용배우모집에 호기심에 끌려 응시했는데 춤출줄 모른다고 하니 시험관은《도약》이라도 해보라 하였다.    옥주는 올리뛰기를 자꾸 하였다. 뜻밖에도 춤을 멋지게 춘 아이들은 하나도 못 뽑혔는데《체조선수》옥주가 뽑혔다. 가무단에 가서도 옥주는 춤출줄 몰라 몰리웠고 몇 달후엔 되돌아 가라는 통령까지 받았다.    마침 배우들이 두달 순회공연을 나가버리자 홀로 남은 옥주는 그동안 배운 무용동작들을 반복적으로 련습하였다. 북풍이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도 추운 련습실에서 밤마다 혼자서 뛰고 돌며 수없이 련습하였다.    두달만에 각지로 순회공연 나갔던 가무단배우들이 돌아왔다. 언녕 집에 간줄 안 옥주가 달려나와 공연단을 마중하니 김희태단장은 눈이 둥그래졌다.    《여태 돌아가지 않았어?》《네, 선생님, 그사이 저 혼자 련습했는데... ...》옥주는 울음섞인 소리로 말했다.《그럼 한번 춰봐.》김단장이 이렇게 말하자 옥주는 용기를 내여 여러 선생님과 배우들 앞에서 그간 련습한 무용동작들을 진지하게 췄다. 모두들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옥주가 이처럼 몰라보게 진보할줄 생각지도 못한것이다. 단장은 드디여 그를 가무단에 남기는데 동의하였다.    그래도 1년나마 옥주는 군무에도 끼우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고 구석에 서서 남들이 하는 건 독무건, 쌍무건, 지어는 남성무용까지 빼놓치 않고 닥치는 대로 배우고 련습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한번 소수민족참관단 환영공연이 있게 되였는데 쌍무배우가 갑자기 앓아서 할수없이 미답지 않은대로 옥주더러 춰보라고 했다. 생각 외로 옥주는 아주 잘 췄다. 그날 멋지게 춤을 춘 옥주는 자치주지도자들의 칭찬까지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옥주는 뒤늦게야《무대의 꽃》으로 피여나게 되었다.    그가 한창 무대에서 소문을 놓고 있을 때 조직에서는 그에게 창작이란 새로운 과업을 주었다. 그는 창작의 길에서도 무용배우로 될 때처럼 노력하고 분투하였다. 그가 생활속에 들어가 체험하면서 창작한 무용《쌀함박춤》은 영사막에까지 올랐고 재 창작한《왕가물과 싸워이긴 녀인들》은 전국과외무용콩클에서 북경무대를 진동하였다.    문화혁명때《잡귀신》으로 몰리우고《5.7간부학교》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하면서도 옥주는《사양원처녀》를 창작하였는데 몇해 후 이 무용은 미국 등 나라에서 공연되였으며 단행본으로 출판까지 되었다. 무용《논물관리원》은 16년동안 수정, 재 창작하여 1979년 10월 국경헌례작품으로 북경무대에 올라 창작1등상을 받았다.    그는 길림성로력모범으로 되었으며 1982년 9월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건국35주년맞이 대형음악무용서사시 창작조 20명 안무가중 옥주는 유일한 소수민족전문가로 참가하여 영예상을 탔고 1983년 7월에는 일본의《제3차 세계비단의 길 음악회》초청을 받고 한달간 출국공연까지 하게 되였다.    최옥주가 창작한 무용작품들은 모두 시대맥박이 약동하고 생활정취가 짙고 서정적 정서가 그윽하고 랑만적이고 해학적이다. 하여 그의 작품은 다년간 국가1급상 6개, 성급1등상 6개, 영예상 4개를 따냈고 국내 20여종 신문잡지에 그의 작품과 사적이 70여편 실리고 영화와 텔레비죤 종목에도 30여차례나 소개되였다.    그는 중국무용가협회주석단위원, 중국소수민족무용가학회 부회장, 길림성무용가협회 부주석, 연변무용가협회 주석 등 번중한 직무를 역임하였었고 중국1급무용예술가의 신분으로 나라를 대표하여 수차 미국, 오스트랄리야, 일본, 한국 등 나라들에 가서 예술교류를 하였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이런 영예와 직위 앞에서 최옥주는 하냥 만족을 모르고《현대의식과 시대감을 더많이 민간무용에 융화시켜야 한다》면서 부단히 새로운 창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회: 한 소녀의 세계우승의 꿈 -- 녀자유도선수 김향란)
32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8 댓글:  조회:3361  추천:12  2013-12-05
                                                                     (12) 리론수학교수 리증숙      1932년 일제의 통치하에 허덕이던 시기 리증숙은 화룡 서성구 고성촌의 한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증숙이가 일곱 살 나던 해에 고생스레 살아오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혼자 간신히 끌고 나가는 집생활은 그야말로 째듯이 가난했다. 신이 없어 맨발로 다니고 옷이 없어 기워 입었으며 월사금을 제때에 내지 못하여 몇 번이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럴때면 증숙이는 아버지와 같이 낮이면 남의 집 삵일을 하고 밤이면 등잔밑에서 배우지 못한 과목을 자습하였다. 이처럼 이악스레 공부하여 최우등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돈있는 집 애들은 우등생이 못되여도 룡정에 있는 중학교에 척척 갔지만 증숙이는 돈이 없어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도 할수 없었다. 그는 묵묵히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하였다. 14살밖에 안되였지만 집안의《어머니로》되여 밥짓고 옷도 빨고 꿰맸으며 아버지 버금으로 가는《주요로동력》으로 되어 벼모도 내고 기음도 매고 가을도 했다.    어려운 가난속에서도 그가 품은 뜻은 굳었다. 그는 삯일로 한푼두푼 모이고 또 모여 학비를 준비하여 가지고 룡정으로 갔다. 때는 1947년, 2년동안이나 공부를 못하고 일만 했으니 붙지 못할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는데 딸은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증숙이는 헐망한 집 한칸을 얻어가지고 집에서 가져온 쌀과 콩, 옥수수로 번갈아 죽을 쒀 먹으면서 공부하였다. 증숙이가 3학년이 되었을때 기진맥진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모없는 고아로 된 그는 하늘이 금시 무너져내려 앉는것 같았다.    의지가지 없게 된 증숙이는 단임선생님을 찾아 서럽게 울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가겠다고 말하였다. 단임선생은 어떤 방법을 대든지 중퇴해서는 절때 안되며 공부 잘하는 증숙학생은 꼭 대학에 가서 나라의 인재가 되어야 한다면서 그를 고무 격려하였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곤난한 학생들에게 조학금을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증숙이는 1등조학금을 받게 되었다. 해방된 나라가 그에게 베풀어준 첫 은혜였다. 학급에서도 구제활동을 벌려 선생님은 좁쌀 20근, 동학들은 입던 옷과 신, 그리고 소비돈까지 모아주었다.    증숙이는 나라의 은혜, 그리고 선생님과 동무들의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공부에 더욱 힘썼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을 졸업하였으나 가정형편에 인차 고중에 진학할수 없었다. 그는 할수없이 룡정식량공급소에 들어가 출납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고중과목을 이악스레 자습하였다.    아홉달이 지난 어느날 증숙이는 결연히 사직하고 길립고중으로 찾아갔다. 그때 학교에서는 한창 학기말시험복습을 하고 있었는데 증숙이가 입학하려 왔다니 교장선생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했다. 글쎄 어느 학교에서인들 한학기를 못배운 학생을 받으려 하겠는가?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증숙이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돈이 없어 인제야 왔으니 시험쳐보고 합격이 안되면 물러가겠다고 재삼 사정하였다. 학교에서는 그의 지성에 감동되여 시험칠 기회를 주었는데 고중이라고는 하루도 못다녀 본 증숙이가 시험에서 85점이라는 높은 성적을 따냈다.    정말 기적이다! 선생님들은 눈이 둥그래졌고 증숙이는 입학에 성공했다. 남보다 늦게 왔기에 곱절 노력해야 하였다. 수업시간에는 정신을 가다듬었고 하학후엔 기본개념을 거듭 복습하고 어려운 참고서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그는 각별히 수학을 즐겨 항상 학급의 1.2등을 쟁취하였다.    1952년 증숙이는 영예롭게 우리나라의 최고 학부인 북경대학 수학력학학부에 입학하였다. 그해 증숙이는 전 학부의 유일한 조선족 신입생이였다.    나라의 수도 북경, 우리나라 최고 학부인 북경대학에 들어서고 보니 마치 다른 별세계에 날아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박한 지식을 소유한 교수들, 사고력이 비상한 동학들, 무진장한 지식의 보물고--북경대학도서관 ... ... 증숙이는 이 많은 책으로 어서 빨리 자기의 머리를 무장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이 많은 교수들의 지식을 하루빨리 배워내지 못하는 것이 조급해 났다.    그는 1분1초를 아끼면서 공부하였고 시간만 있으면 도서실에서 수많은 세계의 저명한 수학가, 과학자들의 저서와 명작, 전기들을 읽었다. 수학에 대한 취미, 탐구욕은 날따라 굳어지고 깊어졌다.    1956년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대학을 졸업한 그는 결연히 변강도시 연길시에 와서 우리민족 지식인들을 양성하는 대학교단에 올랐다.    35년간 리증숙은 연변대학에서 수학분석고들수학, 미분방정식, 수학물리방정식 등 과목을 3천여시간 강의하였으며《상미분방정식》,《상미분방정식정성리론》등 몇십만자에 달하는 대학교 교재를 써냈고 련속 3년간 수학학부 주임공작도 맡아 하였다.    1978년도에 부교수로, 1988년도에는 교수로 되었으며 그가 쓴《다-빙 방정식의 주기해》,《례나드방정식령해의 전국안정성에 관하여》등 론문들은 성,주 우수론문상을 탔으며 학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로 리념과 포부가 굳고 간난곡절을 맞받아나가는 패기가 있으며 부단히 신념에 박차를 가하는 강의한 의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길림성수학학회 상무리사, 연변조선족자치주과학기술협회 부주석을 역임했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길림성, 그리고 전국의《3.8》붉은기수 영예도 받아 안았다. 연변대학 수학학부 교수 리증숙은 인생의 붉은 노을을 여전히 과학탐구와 인재양성의 성스러운 사업에 바쳐나가고 있다.                      (하회: 겨레의 구슬 -- 국가1급 안무가 최옥주)   
31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7 댓글:  조회:3662  추천:13  2013-11-28
                           (11) 광명을 안겨주는 천사      사람들은 귀중한 것이면 눈동자를 보호하듯이 보호하라고 한다. 또 《온 일신에서 눈이 팔백냥》이라는 말도 있다. 눈이 이렇듯 중요하기에 아픈 눈을 고쳐주고 앞못보는 눈을 띄여주는 원연변병원 안과주임이며 주임의사인 심옥진녀사를 《광명의 천사》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1937년 12월, 길림성 룡정시에서 태여난 심옥진은 1961년 9월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연변병원 안과에 배치 받았다. 사업에 참가한 첫 시작부터 그는 《힘으로 하는 일이면 몰라도 의술로 하는 일인데 왜 남자들에게 뒤지겠는가!》하는 도전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섰다.    그는 사업심도 높았고 탐구성도 강하여 빠른 시일내에 독자적인 사업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그였기에 병원지도부에서는 자주 그를 국내외 의학연구진에 보내여 연수하게 하였다.    70년대에 벌써 광주 중산대학 안과병원에 가서 연수하였는데 수술에 필요한 시각막재료를 얻기 위하여 공포와 두려움도 무릅쓰고 사체실에서 몇 번이고 시체를 다루군 하였다. 책임교수는 그의 탐구욕에 감복되여 각별히 잘 지도해 주었다. 연수하는 기간 심옥진은 수십차에 달하는 시각막 이식수술을 하면서 기능을 익혔다.    광주에서 돌아온 후 그는 평소는 물론 휴식일이나 명절에도 환자만 있으면 집일을 제쳐놓고 병원에 달려갔다.    1986년 6월의 어느 일요일이였다. 집일을 보던 심옥진은 찾아온 환자가족에게 끌려가 눈에 타박상을 입은 한 한족녀인의 눈을 수술해 주었다. 일을 끝내고 늦게야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는데 또 다른 환자가족이 시각막재료가 생겼으니 수술해 달라고 찾아왔다. 그는 두말없이 또 병원에 나갔다.    오후 4시부터 시작한 수술은 밤 10시에야 끝났다. 하루종일 긴장히 보낸데다가 그때까지 저녁도 먹지 못한 그는 그만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이튿날도 또 왕청의 왕청산농민, 천교령진의 리조춘어린이, 룡정의 한 환자까지 련속 3명의 눈을 수술하느라 밤 1시까지 고도의 긴장속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인간의《팔백냥》을 책임진 의무감, 광명을 안겨주는 사명감은 그로하여금 이렇게 수많은 휴식일과 명절을 긴장한 수술실에서 보내게 하였다. 헌신적인 사업정신은 조직의 신임과 인민의 존경을 받아왔으며 1981년 12월 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당원된 자각을 안고 사업을 더 깐지게 해 나갔다.    심옥진의 드높은 사업열정과 과학적인 연구정신으로 하여 병원령도에서는 또 그에게 미국 위스콘 신주대학 안과병원에로 연수갈 기회를 주었다. 나이 50에 영어관을 넘기 위해 그는 밤이면 외국어학습반에서 영어를 배웠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 12시까지 계속 복습을 견지하였다. 그 나날 밥을 지으면서도 영어책을 읽느라 밥과 반찬을 몇번이나 태웠는지 모른다.       1989년초, 심옥진은 드디여 미국으로 갔다. 이국땅에서 말못할 갖가지 고생을 씹어 삼키며 끈질기게 노력한데서 점차 영어로 말할수 있었고 환자와 면담도 하며 병도 볼수 있었다. 그는 진일보로 새로운 기계검사법, 전자계산기 사용법 등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백내장으로 실명한 환자들에게 인공수정체 주입수술을 하여 눈을 뜨게 하는 최신기술을 배우기 위해 수술실에서 꼬박 12시간 서 있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 기간 그는 최신안과의술을 익혔고 또 미국안과잡지에 《부동한 민족과 성별에 인한 각막직경》등 론문까지 두편이나 영어로 발표하였다.    귀국후, 그는 배워온 새 의술로 많은 환자들게 광명을 찾아 주었는데 그 수는 이루 해아릴수 없다. 100분의 1의 희망이라도 놓치지 않고 세번이나 수술하여 잃을번 했던 한쪽 눈을 되찾은 리영학운전수, 대여섯살난 아들애의 손에 이끌려 의사앞에 나타난 맹인 김명순에게 두눈을 뜨게 한 기적, 광명을 찾은 환자의 기쁨과 광명을 안겨준 《천사》의 희열이 하나로 엉켜 심옥진을 더 높은 과학의 고봉에 톱아 오르도록 촉구하였다.    심옥진은 의술도 높지만 자기의 보귀한 림상경험을 리론화 하는데도 정력을 몰부었다. 그는 이미 30여편의 론문과 경험문을 성급, 국가급 간물에 발표하였다. 심옥진의 사적은 신문잡지와 라디오텔레비를 통해 널리 보도되였고 당과 정부는 그에게 《우수공산당원》,《우수의사》, 주와 성의 《3.8붉은기수》,《연변10대녀걸》 등 많은 영예를 안겨 주었다.    40여년간 심옥진은 자기의 청춘과 정열, 지혜와 의술을 고스란히 인민에게 바쳤다. 오늘도 그는 해놓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면서 그제날의 그 열정, 그 의력을 식히지 않고있다.                                    (하회: 리론수학교수 리증숙)
30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6 댓글:  조회:3618  추천:15  2013-11-22
                                                       (10)  한 혁명가의 발자취              -- 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련회 제1임주임 김찬해       김찬해는 1905년 4월, 조선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면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2년 가을에 서울 동덕녀자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 학교의 진보적인 교원 권태희는 학생들에게 녀성해방과 사회주의 사상을 비밀리에 선전하였다. 이것은 김찬해가 처음으로 접수한 공산주의 사상이였다. 권태희교원의 지도하에 김찬해는 점점 각성하기 시작했으며《녀성동지회》,《녀자청년동맹》등 진보적 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봄에 서울 동덕녀자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8년 봄까지 2년동안 동덕녀자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이 기간에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초기 혁명활동가였던 고광수였다.     그의 직접적인 교양하에 김찬해는 1926년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 가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맑스-레닌주의를 알게 되었고 쏘련 사회주의혁명을 리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직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독서회와 웅변모임을 조직하였으며 이련 모임에서 청년들과 특히 녀성청년들에게 반일민족독립에 관한 선전활동을 적극 벌리였으며 쏘련 10월사회주의혁명에 대해 많이 선전하였다. 하여 그는 점차 공산주의 혁명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8년 겨울의 어느날, 조선조선공산주의청년회의 책임자 고광수는 김찬해를 찾아 담화하였다.    《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서는 동무를 모스크바동방대학에 보내여 학습시키기로 하였소. 모스크바는 우리들이 동경하는 무산계급의 서울이요, 그곳에 가서 학습을 잘하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혁명사업을 본때있게 벌리기를 희망하오. 》     이 말을 들은 김찬해는 몹시 격동되였다.    《 꼭 조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혁명의 진리를 학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그는 고광수의 손을 굳게 잡았다. 조직의 희망과 기대를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기고 그는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스크바동방대학은 제3국제에서 동방 각국의 혁명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간부학교이다. 이 학교에서는 주로 동방 각국 공산당에서 추천한 우수한 혁명가들에게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가르치고 지하공작에 필요되는 각종지식과 기술을 배워주었다 .     김찬해는 1932년까지 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 기간 동만지구에서 들어간 청년혁명가 림민호동지와 한 반급에서 공부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1929년 겨울에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     1932년 9월, 김찬해와 림민호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조선의 함흥과 흥남지구에 나가 적색로동조합을 조직하라는 비밀임무를 맡았다. 조선에 진정한 맑스-레닌주의 당을 건립하자면 우선 그 기초로 될수 있는 로동운동이 일어나야 한 다.     김찬해와 림민호는 먼저 조선에 나가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동지들을 지도하여 이 과업을 완수하여야 했다. 1933년 2월, 김찬해는 한살 반 밖에 안되는 첫 애를 국제고아원에 맡기고 모스크바를 떠나게 되었다.     3월 22일 김찬해는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련락부로 사업보고를 왔던 남편 림민호를 만났다. 그때 김찬해는 자기 이름을 최성려로 고치고 농민차림을 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함흥과 흥남지구로 들어갔다. 림민호의 지도하에 함흥과 흥남지구의 적색로동조합의 조직사업은 활기를 띠였고 그 대오도 크게 확대되였다.     이처럼 사업이 항창 진척되고 있을때 한 반역자의 밀고로 림민호는 일본경찰서에 체포되였다. 김찬해는 울라지보스또크로 들어가 련락부에서 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다시 조선에 나가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 1월 그도 한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경찰서에 체포되여 4년징역 언도를 받았다.     1939년 만기석방된 김찬해는 그 이듬해 만기석방된 림민호와 함께 중국 길림성 화룡현 등지에서 생활하면서 당조직과 항일유격대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있다가 해방의 날을 맞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김찬해와 림민호는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쏘련군이 연변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일본침략자들이 망할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감격과 흥분에 넘쳐 해방의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때 그들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 8월 12일 밤, 돈화의 일본헌병대놈들이 김찬해네 집에 뛰여들어 그들 부부를 체포하여 돈화감옥에 가두었다. 그놈들은《전시치안법》에 근거하여 이른바《위험분자》들을 구류한다는 것이였다. 그때 세 살밖에 안되는 둘째아들 혈우도 어머니와 함께 류치장에 구류되여 고생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은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였다. 이날 감옥에서 나온 김찬해와 림민호는 쏘련홍군이 돈화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쳐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그들 부부는 몇몇 진보적 인사들과 함께 쏘련홍군을 환영하는 활동을 벌리고 돈화 중심거리에다《위대한 해방자 쏘련홍군 만세!》,《쓰딸린 만세!》등 구호를 로어로 써서 붙이였다.     8월 19일 쏘련홍군이 돈화에 들어오자 김찬해와 림민호는 쏘련군사령부에 찾아가 자기 소개를 하고 쏘련군을 협조하련다는 의향을 표명하였다.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일찍 모스크바동방대학에서 학습하였고 로어를 잘하는 김찬해와 림민호에게 사령부의 번역원 겸 연락원 직무를 맡겼다. 이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쏘련홍군을 협조하여 일본군과 위만군부대의 무장해제, 치안유지, 토비숙청 등 사업에 바삐 보냈다.     해방직후 시국이 혼란한 시기에 괴뢰만주국경찰과 그 주구 등 사회의 찌꺼기들이 돈화현 각지에서 토비무장을 조직하여 행패를 부리면서 국민당 중앙군이 돈화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위하고 혁명의 전취물울 보호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무장대오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지도할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한 그들은 진보적 인사들로 돈화에《해방동맹》이라는 혁명군중조직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1945년 9월 20일, 돈화영화관에서는 림민호의 사회하에 100여명 대표가 참가한 돈화현 민중대표회의가 열리였다. 대회에서는 림민호를 위원장으로 하는《돈화현해방동맹》의 성립을 선고하였다. 그때 김찬해는 해방동맹 산하의 녀성해방동맹의 책임자로 당선되였다. 그는 광범한 녀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토비숙청, 전선지원사업에 모든 심혈을 몰부었다.     1945년 10월, 김찬해는 상급의 지시에 의해 길림시에 들어가 길림성부녀동맹과 길림시 부녀동맹에서 지도사업을 맡고 부녀사업에 종사하였다. 1946년 11월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중궁길림성위와 길림성정부가 연길시로 옮길 때 김찬해도 연길로 조동되여 연변의 부녀사업을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1949년 12월, 그는 중국공산당 연변지방공작위원회 부녀공작회 부서기로 임명되였으며 1952년 9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연변조선족자치주부련회 주임사업을 맡았다. 하여 그는 연변주부련회의 초대주임으로 되었다.     이 기간 그는 중공연변지방위원회 지도하에 광범한 녀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을 지원하고 생산을 복구 발전시키고 증산절약운동을 하는 가운데서 연변녀성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하여 연변녀성들 가운데는 리옥금, 김신숙, 동정숙 등 이름난 녀성모범과 영웅인물들이 배출되였다.     그는 녀성해방사업을 위해 심혈을 기울렸는바 남녀평등을 쟁취하고 녀성들의 주인공적 의식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리였다. 1950년에 제1부 혼인법이 반포되자 그는 각급 부녀조직을 발동하여 혼인법을 관철하고 실시하는 가운데서 매매혼인, 일부다처제, 민며느리 등 봉건적인 속박에서 괄시받고 천대받던 많은 녀성들의 각성을 높혀 주었으며 그들에게 출로를 주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줌으로서 연변녀성들의 인격상 존중을 받고 남녀평등을 실시하는데 토대를 닦게 하였다.     그리고 각급 당조직과 정부에 의거하여 야학을 꾸리고 문명퇴치활동을 활발히 벌려 연변의 부녀사업이 활기를 띠도록 노력하였다. 오래동안 그와 함께 부녀사업에 종사해온 한 로간부는 이렇게 말했다.《김찬해동지는 녀성활동가로서 사업책임심이 강하고 공작작풍이 소박하며 많은 녀성간부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1955년 5월, 김찬해는 조직의 수요로 연변사범학교의 제1부교장으로 임명되였다. 이때 그는 벌써 50세가 넘었었다. 매일같이 한복 옷차림을 하고 학교로 출근할 때면 많은 교원과 학생들은 숭경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군 하였다. 한것은 그가 년세가 많은데다 또 덕망이 높고 사업을 빈틈없이 밀고나가 학교를 명실이 부합된《원예사의 요람》으로 꾸린데 있었다.     특히 그는 나젊은 교원과 학생들을 친 자식마냥 따뜻이 대해주고 그들의 애로를 제때에 풀어주어 많은 교원과 학생들은 그를《우리의 어머니교장》이라고 다정하게 불렀다.     김찬해가 사범학교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양성해 낸 학생은 무려 1000여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지금 연변은 물론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 각지에서 교육사업골간으로 활약하고 있다.     1960년 여름 그는 사업의 수요로 학교를 떠나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정처 부처장, 자치주 시찰실 시찰원 등 직무를 맡았다 이때 그는 벌써 60이 가까운 할머니였지만 당의 사업을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기층에 내려가 조사연구 사업을 하면서 걸리는 문제는 제때에 풀어주어 기층간부들의 환영을 받았다.    《문화대혁명》기간에 그는《반역자》,《쏘련특무》라는 얼토당토한 감투를 쓰고 박해를 받다가 1972년 12월 22일, 그 억울한 루명을 벗지도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전원회의 후 당조직에서는 그에 들씌였던 루명을 벗겨주고 장중한 추도회를 진행하였다. 추도회 후 김찬해의 유골은 림민호의 유골과 함께 화룡현 흥성촌 뒤산에 모셔졌다.                                                                                                     (하회: 광명을 안겨주는 천사 --연변병원 심옥진 안과의사) 
29    우리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5 댓글:  조회:3988  추천:14  2013-11-16
                               (8)  항일련군의《녀장군》허성숙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녀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 눞힌 한《녀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항일련군 제1로군 4사1퇀1련의 첫 녀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1915년 안도현 차조구 중안촌에서 태여난 허성숙은 열다섯살 때부터 항일지하공작원들과 접촉하였으며 그들의 교양과 방조하에 점차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영광스럽게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다.     《9.18》사변후 항일의 거세찬 물결이 동북 각지에 파급되였다. 이 거세찬 물결속에서 성숙이는 더욱 열성스럽게 혁명에 참가하였다.       1933년 공청단에 가입한 성숙이는 그해 가을에 연길현 유격대의 영광스런 녀전사로 되어 남성들과 같이 전투에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전투마다에서 남다른 용감성을 발휘하였다. 부대는 거의 매일과 같이 전투를 하여야 했으며 어떤 때에는 하루에도 몇백리를 강행군하기도 하였다. 그때 겨우 17세밖에 안되는 녀자애 였지만 그는 남달리 숙성했고 용감했다.        언제나 뜨거운 마음으로 허약한 전사들을 도와주었고 숙영할 때면 솔선적으로 화식반 동무들을 도와 나섰다. 밤이면 전사들의 옷을 기워주었고 행군할 때면 부상당한 전우들을 친 혈육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간고한 역경속에서도 성숙이가 있으면 전사들은 힘과 용기를 얻군 한다고 하였다.       어느 하루 허성숙은 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토벌대놈들과 맞띄우게 되었다. 그는 침착하게 다른 대원들을 수림속에 은페시키고 자기는 짐을 진채 전보대에 바라 올라갔다. 5-6명의 토벌대 놈들이 전보대 부근에 접근하자 허성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놈들에개 수류탄 불벼락을 들씌웠다. 이 일로 하여 부대의 전사들은 허성숙의 지혜와 용감성에 깊이 탄복하였다.       1936년 허성숙은 친밀한 전우이며 상급인 박관규련장과 결혼하였으며 투쟁의 한길에서 어께곁고 싸웠다. 박관규련장의 따뜻한 방조와 당조직의 배양으로 허성숙은 재빨리 성장했으며 그해 영광스럽게 위대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7년 허성숙의 남편인 박관규련장은 반석전투에서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희생은 성숙에게 형언할수 없는 비통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명랑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오직 철천지 원쑤 일제놈들에 대한 복수의 념원만이 불타올랐다.     《저에게 기관총을 맡겨 주십시요!》    허성숙은 상급에 간절히 요구하였다. 상급에서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허성숙은 항일련군 제1로군 4사1퇀1련의 첫 녀성기관총사수로 되었다.    1937년 6월 30일, 2000여명의 놈들이 짙은 안개를 리용하여 간삼봉을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들을 노려보던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내리기 바쁘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기세당당히 덮쳐들던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쳤다. 그러나 적들은 저들의 량적 우세를 믿고 재차 돌격해 왔다. 전연진지에서 놈들을 침착하게 접근시키고 있던 허성숙은 놈들이 턱밑까지 기여오르자 기관총을 안고 벌떡 일어섰다.     《동무둘! 희생된 전우들의 원쑤를 갚읍시다!》《이 강도놈들아, 복수의 불벼락을 받아라!》성숙의 웨침소리와 함께 기관총은 노호하였다. 승냥이같은 놈들은 개바자 넘어지듯 나자빠졌다. 그의 용감한 행동에 고무된 전사들은 련이어 적들에게 복수의 명중탄을 안기였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간삼봉전투 후 전사들은 허성숙의 용감성에 감탄하여 그에게 《녀장군》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주었다.    1939년 8월, 항일련군 제1로군의 지휘부에서는 적들이 추격해 올 것을 예견하고 허성숙과 한 전사를 동양툰에 파견하여 보초를 책임지게 하였다. 그들이 임무를 맡고 동양툰에 도착하여보니 때는 이미 늦었다. 놈들이 여섯대의 트럭에 꽉 차게 앉아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허성숙은 과단하게 같이 온 전사를 부대에 연락보내고 혼자 남아서 적들을 막기로 하였다.    첫 트럭이 마을어구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그는 즉시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놈들은 차를 멈춰 세우고 어쩔바를 몰라 하였다. 한참후에야 대방이 한사람임을 알아차린 적들은 포대에 대고 집중사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치렬한 맞불질은 한참동안이나 지속되였다. 불현간 한발의 적탄이 성숙의 다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적들을 향한 복수의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견지하자, 단 몇분간이라도 더 ... ...》    그렇지만 이미 목표가 드러난데다가 적들이 집중사격을 들이대는 바람에 얼마 후 그는 또 복부에 탄알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야 혼수상태에서 깨여난 성숙이는 죽어도 적들의 포로가 되지말고 기어이 부대로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포대에서 기여내려 왔다.    그러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끝내는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4세 밖에 안되였다.                               (9)  연안시절의 조선족녀성들                                   -- 허정숙, 란영, 조명숙 등에 대하여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가는 곳마다 항적의 노래 울려퍼지고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끓는 피 네 가슴에서 용솟음친다         ... ... ...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성벽은         철같은 항적의 전선 이루었나니         너의 그 이름 세월과 더불어         력사에 찬란히 길이 빛나리.》       이는 우리 민족의 천재적 성악가이며 작곡가인 정률성(1918.7--1976.12)이 스므살 때 창작한《연안송(가)》의 한 구절이다.    1938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 가장 많이 불리웠던《연안송(가)》!  장개석통치구의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국민당의 봉쇄선을 목숨걸고 뚫고 넘어 만난을 무릅쓰며 혁명의 성지 -- 연안으로 찾아왔다. 그중에는 우리 조선족의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연안성에서 동쪽으로 연하강을 따라 10여리 걷느라면 쵸얼거우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과 연하강을 사이둔 건너편엔 리가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교양하는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은 조선사람은 약 200명좌우였는데 그중에는 녀성들도 있었다.    그 녀성들중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로는 허정숙(许贞淑)이였다.    허정숙은 당시 연안군정학교의 조직교육과 교육방면을 책임진 부과장이였다.    조선의 유명한 애국자 허현선생의 큰딸로 태여난 허정숙은 서울에서 소학과 중학을 마치고 일본에 가 대학문과를 공부하고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활약하였고 후엔 잡지《신녀성》을 편집하며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엔《서울녀자청년동맹》을 조직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1927년 5월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 종교단체와 통일전선조직 --《근우회(槿友会)》를 창립하고 서울의 녀자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때엔 리화녀자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각 녀학교의 학생시위를 지도한 것으로 하여 일제에게 체포되여 투옥되였다. 2년만에 석방된 그녀는 다시 혁명활동을 하다가 재차 체포되여 1936년에야 석방되였다.    출옥후 허정숙은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조직하여 선후로《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조선청년전지(战地)복무단》을 건립하였으며 활발한 혁명활동을 진행하다가 1939년 6월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에서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을 다녔고 졸업후에는 팔로군 120사에서 정치지도원 등 사업을 하다가 1944년 태항산조선혁명청년학교가 연안에 옮겨와 군정학교를 성립할 때 허정숙은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 임명되였고 직접 정치과목 강의도 맡아하였다. 그의 리론수양이 높은 강의는 언제나 생동하고 실제적이여서 학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8.15후 허정숙은 연안에서 나와 심양을 거쳐 조선에 귀국했으며 그후 수차 조선당정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고 조선대표로 국제부녀회의에 출석하기도 했다.    허정숙과 때를 전후하여 연안에 들어선 다른 한 녀성으로는 란영(김영숙)이였다.    조선 함경북도의 한 지주집 딸로 태여 난 그는 망명한 련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여 중경에 있을때엔 일어방송 아나운서까지 담당하였다.       후에 연안에 들어간 그녀는 태항산 129사에 배치되여 사업하였다. 당시 팔로군 115사가 산동성 량산에서 평형관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들을 포로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동경대학출신인 고급군의가 있었다.      팔로군전선총사령부에서는 그 고급군의를 태항산에 호송하여 란영에게 교육임무를 주었다. 란영이는 통역신분으로 그와 접촉하면서 공산주의사상을 주입하였다. 란영의 도움밑에 그 고급군의는 《일본인반전동맹》의 중요한 간부로 성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동지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창설할 때 란영이는 129사의 조선사람대표로 회의에 출석하였고 그후 조선혁명청년학교와 독립동맹의 도서관관리원 겸 무정장군의 비서로 있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활약적인 란영이는 문예에서도 장끼를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신입생환영식이나 기념일 문예연출에는 그가 당연히 주역이 되었으며 김창만 편극으로 된 대형화극《조국의 딸》의 녀주인공 역도 그녀가 맡았고 의용군이 화북에서 처음 겪은 호가장전투를 반영한 극《태항산우에서》의 녀병 역도 그녀가 맡았다.       1944년 음력설 직전 란영(김영숙)은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제발되였고 8.15후 조선에 귀국하여 무정동지와 결혼하였다. 조선전쟁이 끝난후 그녀는 북경대학 류학생으로 파견되여 전문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력사를 연구하였다 한다.       조명숙(赵英)은 현처량모형의 녀인으로서 비행사출신인 윤공흠(尹公钦)의 부인이다. 항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1941년 조선청년련합회 창립활동에 참가하였고 그후 줄곧 태항산에 있다가 1944년초에 연안에 들어가 독립동맹의 간부로 되었다.    8.15후에는 조선으로 귀국하여 어느 도의 당책임일군으로 있었다.       이 외에도 연안에 들어가 항일전쟁에 참가한 조선족녀성들이 적지 않았다.    미인으로 불리우던 석영(石英,조직교육과 주춘길과장의 부인), 그리고 1938년 10월10일 한구(汉口)에서 조선의용대의 유일한 녀성으로 참가했던 김위나(金威娜)는 중국영화계의 황제로 불리우는 김염동지의 누이동생이였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간부였던 최의(崔毅,연안군정학교 부교장이며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박일우의 부인)도 있었는데 8.15후 연변에 왔다가 남편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이 외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한 지도자인 한빈동지의 부인 문정원(文贞元), 민족주의자 김두봉선생의 딸 김귀숙(金贵淑, 녀성대대 부대장)과 김해엽(金海烨)이 있었고 태항산《3.1병원》에서 간호부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의과대학공부까지 한 당대 중국조선족녀걸 리화림 등 20여명의 조선족 녀성들이 있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선 겨레의 녀성들, 그 가열처절한 전쟁의 년대에 그들은 남성들과 어께곁고 국경을 넘나들며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녀들의 장거는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것이며 우리민족 인민들의 심령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하회 : 한 혁명가의 발자취                      -- 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련회 제1임주임 김찬해에 대하여)  
28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4 댓글:  조회:3506  추천:15  2013-11-09
                                     (6)   녀항일투사 김순희        항일의 봉화가 이 땅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30년대에 불요불굴의 의지로 놈들과 싸운 조선족 녀항일투사 김순희의 투쟁업적은 영웅적 서사시로 되어 항일투쟁력사의 한페지를 엮어놓았다.     1930년 김순희는 적위대에 참가하였다. 혁명전사로 된 자호감과 혁명의 중임을 짊어진 책임감으로 순희는 사업을 진지하고도 힘차게 벌려나갔다. 남성들에게 뒤질세라 선전삐라를 뿌리고 정보도 날랐으며 소년단조직사업도 열성스레 해나갔다. 투쟁의 전두에 나선 순희는 언제나 용감무쌍하였으며 슬기롭고 재치있게 임무를 수행하였다. 투쟁속에서 시련을 겪고 련마된 그는 재빨리 성장되여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어엿한 공산당원으로 성장된 김순희는 조국과 민족의 수요라면 자신의 일체를 아낌없이 바치리라 속다짐하였다.     당조직에서는 김순희를 약수동의 부녀위원으로 파견하였다. 9월《추수폭동》의 불길은 온 동만지역을 불태웠다. 약수동 군중들은 이 투쟁의 앞장에 섰다. 그들은 한결같이 떨쳐나와 지주놈들과 싸웠다.    《9.18사변》후 1932년 봄 간도지역에서는 규모가 보다 큰《보리고개》투쟁이 벌어졌다.    《지주놈의 식량을 빼앗아 보리고개 기근을 해결하자!》는 구호밑에 일제를 반대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을 쓸어엎는 반제반봉건투쟁은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날따라 세차게 타오른 동만지역 조선족인민들의 반일투쟁불길에 간담이 서늘해진 일제놈들은 위만군까지 동원하여《3광정책》을 실시하였다.     1932년 11월의 어느날 토벌대가 약수동에 박근해오고 있다는 정보가 왔다. 당조직에서는 희생을 적게 내고 력량을 보존하여 놈들을 더 많이 소멸하기 위해 적위대를 잠시 철거하라 명령하였다. 때는 바로 김순희가 해산을 앞둔 림박이였다. 그는 적위대장인 남편 손태익을 떠나보내면서 자기는 이런 몸으로 동지들게 부담될것이니 남아서 군중들을 보살피고 또 그들의 보살핌도 받을터이니 념려말라고 하였다. 남편은 근심가득히 대오를 거느리고 떠났다.     기실 적위대는 약수동 동남쪽 몇십리 떨어진 교통요도에 매복하여 있은것이다. 교활한 놈들은 적위대의 보초선을 에돌아 세린하쪽으로 기여들었다.      놈들은 미친개마냥 집집에 뛰여들어 부시고 마스며 닥치는대로 사람을 붙잡았다. 만삭이 된 김순희도 붙잡혀 나왔다. 놈들은 무고한 백성들에게 사정없이 채찍질했다. 붉은 피에 흠뻑 젖은 채찍이 마을사람들의 몸에 연신 감겨들어 살점을 뜯어냈다.     김순희는 더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나는 공산당원이다. 나는 마을사람들을 위해, 당의 사업을 위해 남았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많은 동지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나는 혁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     김순희는 선뜻이 나섰다.    《이 악마들아, 네놈들이 공산당원을 찾지않으냐?  내가 바로 공산당원이며 내가 바로 촌간부이다. 어서 채찍을 걷어라.》     그는 놈들 앞으로 걸어나갔다. 만삭이 된 나젊은 부녀의 당돌한 거동에 어안이 벙벙해진 살인백정들은 인츰 순희를 꽁꽁 묶어 놓고 잔인무도한 혹행을 가했다.    《적위대가 어데 갔느냐?  지하당원은 누구누구이냐?》     순희는 경멸에 찬 눈길로 놈들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당의 비밀이다. 살인백정인 네놈들에게 절대 알려줄수 없다!》     악에 바친 놈들은 김순희의 몸에 사정없이 매질했다. 놈들에게 추호의 실마리도 잡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김순희는 비장한 결의를 다지고 결연히 자기의 혀를 깨물어 끊어버렸다. 그는 온 힘을 다 모아 입안의 피와 혀끝을 놈의 낯반대기에 콱 내뱉었다. 놈들은 그의 강철같은 의지에 벌벌 떨었고 피로 저주를 퍼붓는 그의 증오의 눈길에 풀이 죽었다.     까무러쳤다가 정신이 든 김순희는 놈들의 마귀상이 어슴프레 보였다. 놈들은 또 종이장을 내놓으며 지하당원의 명단을 쓰라고 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김순희는 정신을 가다듬고 제 손가락을 물어 끊었다.     꼬물만한 단서도 얻지 못한 놈들은 철저한 실패를 보게되자 김순희 등 8명의 동지를 불더미속에 밀어넣고 기관총으로 소사했다. 인피를 쓴 야수들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김순희는 22세의 꽃나이로 당과 혁명,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보귀한 청춘을 바쳤다.                              (7) 《종달새소녀》 김금녀        김금녀는 1924년 왕청현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1년 연길현 복동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는데 총명하고 예쁘게 생긴 금녀는 남달리 노래를 잘 불러 마을사람들에게《종달새》라고 불리웠다.       1932년 봄 악독한 일본침략자들은 왕우구일대에 기여들어 골짜기와 마을을 쏘다니며《토벌》하였다. 이리떼같은 놈들은 북동마을에 들어서자 집에다 마구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다. 금녀의 부모와 동생 등 여섯식구가 모두 비참히 학살되였다. 부모형제를 잃고 고아로 된 금녀는 더 살아갈 용기마저 없어 눈물만 흘렸다.     선생님은 울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것, 그리고 부모의 원쑤를 갚기 위해서는 꼭 자신을 아동단원의 수준으로 제고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쳐 주었다. 금녀는 선생님의 지도로 나날이 각성이 높아갔고 마침내 아동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아동단에 가입하는 날 금녀는 단기앞에서《전세계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 ... 》라고 장엄히 선서하였으며《아동단조직에서 힘을 키워 원쑤를 갚고 왜놈들을 모조리 쳐죽이겠다》고 결심하였다.     금녀는 쏘베트정부의 따사로운 품에 안겨 공부를 더 열심히 하였고 아동단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특히 문예활동에 열정을 다하였으며 조직에서 맡겨준 선전고동사업에서 모범을 보여주었다.     1933년 가을, 요영구 항일유격근거지에서 20여명의 조선족아동들로 구성된 문예선전대가 창립되였다. 금녀도 이 선전대의 한 성원이였는데 이들은 노래와 춤으로 원쑤들과 싸우는 항일 꼬마전사들이였다.     놈들의《토벌》을 자주 받다나니 먹을것, 입을것이 곤난했거니와 악기, 무용복, 무대시설같은것도 얻을수 없었다. 금녀는 이렇게 어려운 환경속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무릅쓰고 이악스레 공연프로를 연습하였으며 유격대를 따라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받아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면서 진지를 찾아 위문공연을 하였다. 간고한 시련속에서 금녀는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나이는 제일 어렸어도 노래와 춤은 제일이였다.                               나어린 몸 홀로 두고                               아버지는 철창속에 갇혔네                               눈보라 치는 벌판에서                               어머니도 영리별                               어머니도 영리별                               놈들의 최후발악                               어찌하면 까부실가                               싸울 활을 만들어야                               살길이 있단다                               살길이 있단다     백설이 뒤덮힌 산발을 타고 멀리로 울려퍼지는 금녀의 노래소리가 어찌도 비장했던지 어떤 전사들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전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저 애들을 위해 싸우자! 원쑤를 쳐부수자!》하고 웨쳤다.     금녀는 자기 집 여섯식구가 몽땅 왜놈들에게 피살당한 비장한 사실을 가사로 지어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 금녀의 노래와 춤은 생동하고 진실했으며 비장하였다.     주보중장군은 그때 금녀의 생동한 공연을 보고 너무 감동되여《그 애의 공연이 어찌도 격조높히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지 전사들은 진심으로 감동되였으며 지어 눈물까지 흘렸지요.》라고 말하였다.     1935년 봄, 바로 금녀가 열두살 되던 해 왕청현 라자구유격근거지에 있었던 한차례의 전투에서 금녀는 불행하게도 왜놈들에게 붙잡혔다.     금녀는 룡정에 있는 일본총령사관으로 압송되였는데 놈들은 금녀를 어린 녀자애라고 얕보고 위협하거나 달래면 인차 굴복시킬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항일투쟁에 떨쳐나서 단련된 소녀의 강철같은 의지를 일제놈들이 어찌 알았으랴! 왜놈들이 물으면 금녀는 원한에 찬 두눈을 부릅뜨고《네 놈들과는 말하기도 싫다!》하고 소리쳤다.     왜놈들은 약에 올라 금녀를 혹독하게 때렸다. 그러나 금녀는 울지도 않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매서운 눈초리로 원쑤들을 쏘아보면서《우리집 식구들은 몽땅 네놈들 손에 죽었다. 멀지않아 항일전쟁의 거세찬 불길은 승냥이같은 네놈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일것이다.》하고 웨쳤다.     금녀는 책상을 뒤집어 엎으며 왜놈헌병대장놈에게 달려들어 결사적으로 대항하였다. 왜놈 한놈이 군도를 뽑아들고 금녀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소녀는 넘어지면서 소리높이 웨쳤다. 야수같은 왜놈들은 쓰러진 어린 소녀를 마구 차고 밟았다.     짧디짧은 한생을 혁명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종달새소녀》금녀는 앞길이 만리같은 열두살의 어린 나이에 선뜻이 자기의 목숨을 바치였다.                                       ( 하회: 항일련군의 《녀장군》허성숙,  연안시절의 조선족녀성들)  
27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3 댓글:  조회:3612  추천:16  2013-11-05
                                                        (4)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한석봉 (1543-1605)은 리조시기에 활동한 저명한 명필가였다. 명나라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성난 사자가 바위를 깍아내고 목마른 말이 내가로 달리는것 같이 힘찬 글씨》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한석봉이 이렇게 된데는 그의 피타는 노력도 있었지만 더욱이 그의 어머니의 엄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1559년 여름 어느날이였다. 이때 16살이였던 한석봉이 집을 떠난지 7년만에 개성밖에 있는 나직한 초가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9살 어린 나이에 글씨공부를 하기 위하여 홀어머니를 두고 떠났던 그가 어언간 장부가 되어 어머니를 뵙게 되니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높뛰였고 걸음은 더딘것만 같았 다.     워낙 그의 아버지는 한석봉을 명필가로 키우려고 있는 힘을 다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남편의 뜻을 이어 아들을 꼭 성공시키려고 작심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되지 않는 가산을 죄다 팔아 9살밖에 안되는 석봉에게 주면서 10년을 기한으로 먼곳으로 글배우려 떠나보냈던 것이다.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다하며 떡장사를 하여 아들의 글공부를 뒷받침해 주었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문앞에 당도하자 석봉은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 들어갔다. 허지만 석봉은 의하해졌다. 자기가 들어서기 바쁘게 끌어안고 울고 웃으며 어쩔줄 몰라할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랭랭한 기색으로 맞이할 줄은 천만 뜻밖이였던 것이다.    《이제 겨우 7년이 지났는데 왜 벌써 돌아온단 말이냐?》    《어머니, 스승은 저를 잘 배웠다 하면서 이젠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실로 석봉이는 7년간 스승을 모시고 이악스레 배우고 밤잠을 잊어가며 글씨련습을 하였던 것이다.    《그럼 넉넉히 배웠단 말이지? 그간 네가 익힌 글씨를 한번 보자꾸나.》     석봉이가 먹을 갈고 종이를 편 다음 붓을 들었다. 어머니도 함지우에 올려놓은 칼도마우에다 길게 빚은 떡을 올려놓고 칼을 들었다.    《석봉아, 우리 한번 겨루어볼가?》     어머니는 곧 불을 끄고 석봉이더러 글을 쓰라고는 떡을 썰기 시작하였다. 석봉이는 난생 처음으로 캄캄한데서 손더듬하며 글을 쓰게 되어 여간 막막하지 않았다. 호미난방으로 어머니와의 겨루기에 말려들어간 석봉은 땀방울을 떨구며 한자 한자 써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캄캄한 방안에 률동적으로 울리던 칼도마소리가 뚝 멎었다.    《나는 다 썰었다. 너도 다 썼으면 불을 켜거라.》     석봉은 마지막 글자를 다 쓰고나서 불을 켰다. 그는 어머니의 지시대로 먼저 어머니가 썰어놓은 떡을 하나하나 맞추어 보았는데 크기와 두터이가 심통히도 똑 같았다.     어머니는 광설불로 석봉이 써놓은 글을 비추었다. 순간 석봉의 얼굴은 화로를 뒤집어 쓴듯 화끈 달아올랐다 .    《이게 바로 넉넉하게 배운 글씨냐?》     어머니는 한숨을 쉬였다.     석봉이는 자기가 쓴 글을 내려다보았다. 실로 망측했다. 글씨인지 아니면 알지 못할 한폭의 묵화인지 분간조차 할수없을 정도였다. 자자구구가 고르롭지 못한데다가 어느 획 하나 제대로 된것이 없었다.    《제가 졌습니다.》    《느꼈으면 됐다. 오늘 당장 떠나거라. 3년을 마치고 돌아오너라.》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홀로 둔채 한석봉은 집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기어이 성취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안고 이번에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그 당시 명필가로 이름있던 병조참의 심희남을 찾았다.     그는 이때부터 심희남의 사랑방에 묵으면서 밤낮으로 온 정력을 바쳐 글씨를 배웠다. 그는 붓끝의 재주로 글씨를 익혀나가는 한편 불을 끄고도 글씨를 더 일매지게, 힘있게 쓸수 있도록 하는데 힘썻다.     이렇게 3년동안 글씨를 련마해 가는 사이에 서울장안에서는《한석봉의 글씨는 오묘하다》는 소문이 쫙 퍼지기 시작하였다.     고심한 연찬과 배움의 3년세월은 어느덧 지나갔다. 그는 개운한 심정으로 어머니를 찾았다. 석봉이 불을 끄고 시험해보라 하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의 소문을 다 들었다. 더 시험할 생각은 없다. 석봉아, 어떤 공부든지 손끝이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몸에 배도록 익혀야 성공하게 되는 법이다. 10년공부를 끝냈으니 이제는 과거시험에 나서서 세상사람들과 겨루어보아라.》    《예, 명심하겠어요!》     석봉이는 끝내 25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말았다.                                  (5)   의병장령의 부인       중국 료녕성 관전현 청산구향 은광자촌 석가골의 깊은 숲속에는 화강암으로 된 비석 두개가 나란히 우뚝 세워져 있다. 하나는 리진룡의병장령의《의렬비(义烈碑)》이고 다른 하나는《우씨지묘-禹氏之墓)》라 하였는데 이《우씨지묘-禹氏之墓)》가 바로 의병장령 리진룡의 부인인 우씨부인의 묘비이다.     리씨조선말기 명문 단양 우씨가문에서 훈련원 판관 우병렬씨의 맏딸로 태여난 우씨부인은 곧기가 송죽같고 기품이 추상처럼 매섭고 또한 도고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조용하고 정숙하기가 이를데 없어 녀중 선비로 이름이 높았다.     8세때부터 서당에서 독서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하고 령리하였으며 항시 소학과 렬녀전 같은 책을 애독하여 부덕을 닦았다.     1905년 조선이 일제에게 짓밟히자 서울에 올라가 벼슬을 하고있던 우씨부인의 부친 우병렬은 울분을 품고 고향에 돌아와 서당을 꾸리고 성실한 마음과 타고난 소질로 조상의 빛나는 얼을 되살리기 위하여 후대양성에 온갖 심혈을 몰부었다.     그때 제자들 중 남달리 총명하고 독서에 열중하며 성격이 강직하고 사내답게 씨원씨원한 리진룡이란 학생이 있었는데 우병렬씨는 그의 사람됨을 보아 마침내 그를 맏사위로 받아들였다.     리진룡과 가정을 이룬 우씨부인은 부도를 다해 남편을 섬기고 아들 철해까지 낳아 키우면서 현처량모로 칭찬을 받았다.      1907년 헤그사건으로 하여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조선군대가 해산되니 담대하고 용감한 리진룡은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무찌르는 치렬한 유격전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그때 조선 서해일대에서 리진룡은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였다.     우씨부인의 부친 우병렬씨는 중군장령으로서 의기를 떨치였으며 우씨부인은 후방에서 정성껏 부상자를 돌보아 주었고 의병들에게 량식, 의복 등을 날라다주었으며 정보를 제때에 수집하는 등 뒤바라지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때 병참보조라는 일본헌병 밀정이 우씨부인을 찾아와서《남편 리진룡을 설득하여 귀순케 하면 상을 후하게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이에 우씨부인은 그자와 얼굴을 맞대는것 조차 욕된다고 하며 문을 닫고 준렬히 꾸짖어 이르기를《내가 만약 남자였던들 이러한 때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쳤을 것이다. 다만 녀자이기에 가문을 지키고 있거늘 어찌 버러지만도 못한 너같은 것과 더러운 담론을 할것이냐.》하고 분노에차 질책하였다.     그후 왜놈에게 잡혀 평산경찰서에 가니 적들은 갖은 형구를 차려놓고 온갖 협박을 가하며 백방으로 리진룡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날뛰였다. 이때 우씨부인은 조금도 동요없이 정색하여 말하기를《남자란 어떤 일은 부녀자가 모르게 행하거늘 하물며 비밀인 행방에 있어서야 더 말할것이 있는가? 설사 내가 안다할지라도 어찌 원쑤에게 말하겠는가 ... ... ! 》    《당신들은 나를 위협하고저 온갖 방법을 다 쓰겠지만 여기에 설치한 형틀이나 족쇄, 도검, 갈고리, 끓는 기름가마 같은 것이 부녀자의 기를 죽이기엔 충분하나 절개있는 녀인에게는 오히려 소원이다.》하고 추상같이 웨쳤다.     적들도 대꾸할말을 못찾고 그 기품과 지조에 압복되여 우씨부인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리진룡 등 애국자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압록강을 건너오는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대규모적으로 기구를 확대하여 반일투쟁활동을 줄기차게 벌렸다. 일제놈들은 리진룡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체포령을 내렸으며 도처에 수색망을 늘이였다. 일제 주구 성가란 놈의 밀고로 리진룡과 우씨부인의 큰 남동생 우제경은 끝내 놈들에게 체포되였다.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였을 때 우씨부인은 피눈물을 씹어 삼키며 옥중 부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이 몸도 곧 목숨이 다할것인즉 그때에 랑군의 묘곁에서 뵈오리다.》라고 썼다.     일제놈들은 의병운동을 탄압하고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놈들은 의병들을 감추어주었거나 후원해주었다는 죄병을 들씌워 온 마을사람들을 도살해버리거나 온 마을을 소각해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백색테로속에서 숨가뿐 생활을 하고있던 우씨부인은 어느날 남편 리진룡이 살해되였다는 가슴이 터지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놈들이 멀지 않아 자기에게도 재화를 들씌울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우씨부인은 절대 놈들의 손에서 죽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어느날 밤 아들 철해가 잠이 든 틈을 타서 깨끗이 씻은 누더기옷을 착착 개여 철해의 베개머리 맡에 고이 놓고 자기는 헛간으로 나가 짚신 삼는 끈으로 자진하여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원쑤놈들에 대한 증오심과 우씨부인의 장렬한 순절에 감복된 중국 료녕성의 자루골 인민들은 손에 손을 모아 우씨부인이 생활했던 관전현 소아하의 나지막한 언덕에《렬녀비(烈女碑)》를 세웠다.     우씨부인의 나어린 아들 철해는 그후 부모님의 원쑤를 갚으려고 의병대를 찾아 떠났고 우씨네 가정식구들은 놈들의 추격을 피해 빈몸으로 자루골을 떠나 본계현, 신빈현 등의 깊은 산골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해오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하회: 녀항일투사 김순희, 《종달새소녀》 김금녀)             
26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2 댓글:  조회:3770  추천:18  2013-10-31
                             (2)   리순신장군의 어머니      리순신장군의 어머니 변씨부인은 각성이 높고 애국적 충성심이 강한 분이였다.    리순신장군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달리 뛰여나 예닐곱살 때 벌써 아이들과 놀적에 언제나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그럴 때마다 항상 대장이 되여 다른 아이들을 지휘하는것이 아주 그럴듯 하였다고 한다.    리순신장군이 처음 무예를 배울때만 하여도 힘에 있어서나 말타고 활쏘는데 있어서 친구들 중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한다. 또 인품이 고상하여 친구들은 리순신장군에 대해서는 롱담도 함부로 하지 않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질과 성품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 변씨부인의 올바른 교양의 힘이 컸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들중에서도 순신장군을 극히 사랑하였으며 그 이름대로 훌륭한 애국자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전쟁놀이며 무예학습을 도와 그에 필요한 책들도 구해주었으며 또 손수 군복을 지어 입혀보면서 름름한 아들의 차림에 대견해하기도 하였다.    리순신장군이 후에 수군통사로 있을 때 어머니는 항상 아들에게 친필로 글월을 보내여 나라와 인민앞에 떳떳이 공을 세우라고 고무하였다.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침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통분해하였다.    왜적이 조선을 침습할때는 반드시 바다를 통하여 들어오게 되므로 당시 수군절도사의 직무를 맡은 아들을 가진 어머니의 마음인들 얼마나 통분하겠는가. 그때 어머니는 이미 80세나 되는 늙은 몸이였으나 친필로 장군에게 아래와 같은 글월을 써 보냈다.   《순신아! 이 일이 웬일이냐? 우리나라가 천고에 흉악한 왜적들의 침노를 입어 흉흉한 마음으로 모두들 잠 못 이루고 있는바라 이러한 때 나라의 신하가 되어 어찌 싸우지 않으며 그 싸움에서 목숨을 아낄것이냐! 이 늙은 어미 너에게 부탁함은 바다싸움에 나가 목숨을 아끼지 말지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승전한 북소리 들려오기 바라며 네 전사했다할지라도 이 늙은 어미 눈물 흘리며 너희 승전을 더욱 기뻐하리라. 더욱 기뻐하리라! 》    임진란초기 적이 일시적 우세를 리용하여 령남지방을 거쳐 서울로 밀고 올라가고 있을때 적개심에 불탄 리순신장군은 용감한 수군을 거느리고 옥포, 로량, 당포, 한산도 등 해전에서 무수한 적의 함선을 침몰시킴으로써 왜놈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의 반침략전쟁력사에 불후의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하는자들의 흉계에 의하여 리순신장군은 뜻밖에도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아들이 해상으로 쳐들어오는 왜장 가동청정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을 거역했다는 거짓소문을 들은 어머니는 어느날 아들을 찾아 한산도로 왔다. 어머니는 80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어려서 전쟁놀이를 즐기던 일을 회상하며 한산도의 난고불락의 요새며 거북선 등을 감회깊이 바라보고 만족해 하였다. 그리고 다시 아들이 몇해째 밤낮으로 거처하며 여러 장수들과 군사문제를 토의하는 운주당에 올라 심심히 아들을 살펴보고는 궁금하던 문제를 내 놓았다.   《내 실은 너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 찾아왔다. 바다를 건너오는 왜장 가등청정을 나가 잡으라는 조정의 명이 계셨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 그런데 넌 왜 잡으러 나가지 않았느냐. 네 소견이 옳다기로서니 조정의 명을 거역할수 있단 말이냐? 무서운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나라와 인민의 운명을 념려하는 어머니의 말은 더없이 침통하였다.    허나 장군은 진정 나라와 인민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실행하지 못했다고 할뿐 더 해석하지 않았다.    얼마후 리순신 장군이 간신들의 흉계에 의하여 체포되여 갈 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랴만은 어머니는 오직 꿈으로 생각한다고 하며 아들이 떳떳이 갔다 떳떳이 돌아올줄 믿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만 한가지 섭섭한것은 그사이에 아들이 자기가 손수 지은 전복을 입고 싸움터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것이 가슴아프다고 하며 애통해 하였다. 그후 이것이 화가 되어 어머니는 리순신장군이 옥중에 있을때 아산에서 그만 세상을 뜨셨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리순신장군은 몹시 슬퍼하며《나는 평생에 충성과 효성에 전심하려 하였더니 지금에 와서 보면 두가지를 다 잃고 말았구나.》라고 하며 통절해 하였다.    그후 간신 원균의 흉계가 들어나고 모든 것이 해명되자 그는 옥에서 나와 다시 싸움터로 달려가는 길에 아산에 들려 성복을 하고 어머님께 맹세하였으며 그후 나라와 인민을 구원하기 위한 성전에서 왜적을 무찔러 크나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력사에 길이 빛나는 애국명장 리순신장군의 심장속에는 항상 그 어머니의 슬기로운 애국정신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3)   홍석주의 어머니 서씨부인       근세 조선의 대표적인 녀류시인이며 천문, 지리, 의학, 수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홍석주 어머니 서씨는 서형수의 딸이다.    서씨는 풍산사람 홍인모에게 시집가서 석주, 길주, 현주, 세 형제를 낳았다.    부인이 출생한 18세기는 조선의 봉건사회가 자체의 모순을 남김없이 들어내 놓은 시기이다.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모순들을 해결하고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며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려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조선문화사에서 거대한 역할을 한 학자들이 나오고 이들에 의하여 많은 업적들이 이루어졌다.    서씨는 일찍 가정에서 글을 배울때 중국의 유교서적에만 머물지 않고 천문학, 의학 등 여러면으로 널리 공부하였다. 특히 리성호, 홍대용, 박지원 등 실학가들이 쓴 책을 많이 읽고 아들들에게도 읽게 하였다. 어머니의 이러한 감화를 받았기에 둘째아들 길주는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热河日记)》와 같은 내용과 형식으로《수여방필(睡余放笔)》등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부인은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셋이 모두 그 재주가 뛰여나 하나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능히 리해하였다 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글공부에 해의해 질가봐 항상 엄격히 요구하였다. 매일아침 공부를 할때는 그 전날 배운것만 보지 않고 지금까지 배운것을 전부 암송하게 하고 중요한 곳은 해석하게 하였다. 어제 물은것을 오늘도 묻고 또 그 다음날도 계속 물었다. 그래서 그 대답이 처음과 꼭 같으면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였고 물을때마다 전날보다 발전이 있으면 한가지 문제를 항상 깊이 연구한 것으로 칭찬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실학자들가운데서도 일찌기 볼수 없었던 새 방법이였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이러한 교육에 의하여 그 우수한 천품을 남김없이 발전시켰으며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갔던 것이다.    부인은 아들들에게 학문을 위한 글공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항상 주의를 주었고 학문이란 실지로 써먹지 못하면 아무 의의가 없다고 타일렀다. 특히 부인은 중국의 고대의 유명한 시인이며 공명을 탐내지 않고 담박하기로 소문난 도연명(陶渊明)과 그의 시《귀거래사(归去来辞)를 사랑하였다. 그것은 그의 남편과 아들들이 평생동안 공명과 물욕에 담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데 좋은 영향을 주었다.    큰아들 석주는 17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중추라는 높은 벼슬까지 하였는데 항상 바른 말로 임금을 충고하고 부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싸웠다.    1815년에는 전국 4개도에 재해가 들어 기근민이 5백만을 넘었다. 그때 석주는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백성을 구원하고 또 지주들이 백성의 땅을 빼앗지 못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찬과 옹호를 받았다. 그가 이처럼 백성들의 질고를 해결하려 진지하게 노력하게 된 것은 모두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실학적인 교육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였다.    셋째아들 현주도 문과에 급제하고 부마(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은 아들들에게 학문이 자기 몸과 마음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되게 해야지 벼슬을 높이고 권세를 잡는데 목적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만 뜻을 두어 문장에 힘쓰고 일단 벼슬길에 나서면 자기의 인격을 높이기 위한 수양에는 전혀 힘쓰지 않는 사실에 비추어 아들들을 경계한 말이였다.    그때 마침 둘째아들 길주도 벼슬이 부러워 과거를 보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아들들을 모여놓고《우리 집이 이만하면 더 바랄것이 없다. 큰형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셋재 현주는 부마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이상 더 바랄것이 무었이겠느냐. 지금 이 형편에서 너희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오만해질수 있으니 나로서는 오히려 걱정이 된다. 그러니 길주는 과거를 보지 말고 공부에 열중하여 벼슬밖의 길에서 뜻을 이루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길주는 어머니 말대로 과거를 중지하고 벼슬도 사임하면서 수학연구에 힘써《기하신설》,《총비기》,《고각연필》등을 저술하여 홍대용의 학문을 계승하고 한층 더 발전시켰다.    어머니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아들에게 시를 써서《본시 남이 부러워하는 자리는 남이 질투를 느끼는 자리니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겸손하며 조심하라.》고 간곡히 충고하였다.                                                (하회: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의병장령의 부인)  
25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1 댓글:  조회:3717  추천:20  2013-10-26
                  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글 / 강 순 화          조선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그 전통문화유산 역시 력사가 유구하며 내용이 다채롭고 풍부하다. 하늘의 뭇별마냥 반짝이는 수많은 우리 민족 녀성들의 전통미담들은 세세대대로 전해내려 오면서 우리 민족의 고상한 정신풍모를 이룩하는데 훌륭한 자양분으로 되어 왔다.       우리 민족 녀성들은 옛적부터 부지런하고 지혜로우며 강한 의지와 자아희생정신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겸손하고 선량하며 근검하고 알뜰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지니고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 어머니들의《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자식을 공부》시키는 정신, 웃사람을 존경하며 례의를 지키는 미풍량속,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락천적인 성격 등은 그 어느 민족 녀성들과 비할 수 없는 독특한 특점과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자식을 엄하게 가르쳐 저명한 서예가로 되게 한 한석봉 어머니의 이야기, 동양의 리률곡과 같은 위대한 철학가를 키워낸 신사임당, 거북선으로 왜적을 무찔러 민족의 기개를 떨친 애국명장 리순신장군의 어머니, 세 아들을 모두 출중한 인재로 배양한 홍석주어머니의 이야기 등은 조선왕조시기부터 벌써 널리 전해왔는데 이런 력사미담은 우리 민족 어머니들의 참된 교육의식을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공무사하고 공명심이나 물욕이 없이 넓은 흉금으로 재해에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자기의 천금이란 거금을 내여 량곡을 구입해 나누어준 제주도의 대모 김만덕어머니의 감격적인 이야기 등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의연히 우리 민족의 전통적 미담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다.          가열처절한 전쟁년대에 우리 민족 녀성들은 남성들과 어깨겯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성스런 싸움에서 자신들의 힘과 지혜와 지어 생명까지 서슴없이 바쳤다. 그중에는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영용히 싸우다가 장렬히 순직한 의병장령의 부인 우씨. 잔인무도한 일제앞에 선뜻이 나서서 혀를 끊고 손가락을 물어 끊으면서 당의 비밀을 고수한 녀 공산당원 김순희, 항일의 포화속에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 다루듯이 휘두르며 적을 무리로 쓸어 눞힌 녀장군 허성숙, 나어린 몸으로 아동선전대에 참가하여 노래와 춤으로 전선에서 싸우던중 적들에게 체포되여 비참하게 살해된 열두살의《종달새 소녀》김금녀 등 무수한 녀성 영웅들의 빛나는 업적과 불굴의 혁명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다.       사회주의건설과 현대화의 길에서는 또 발명창조로 국내외에 이름을 떨친 과학일군과 고급지식인, 후대양성에 피땀을 흘린 인류령혼의 공정사들, 우리 민족예술의 화원을 더욱 아름답게 꽃피운 음악가와 무용가 그리고 세계급 체육의 금메달 리스트들이 용솟음쳐 나와 우리 민족 녀성의 매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이런 탁월한 녀성인물들은 모두 우리들의 본보기이며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빛나는 업적, 그리고 아름다운 품덕은 오늘날 우리들의 인성교육과 도덕교양에 훌륭한 교과서로 되고있다.       현시대의 우월한 사회환경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리상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광활한 천지와 훌륭한 조건을 마련해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훌륭한 어머니, 언니들을 본받아 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며 열심히 배우고 부단히 진보하며 힘과 지혜를 키워야 한다. 선배들처럼 리상과 포부를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 분투해야 할것이다.       전국교육과학《9.5》기간 국가교육위원회 중점과제로 편찬하여 길림성조선문교재로 사용하였던《조선족 전통미덕이야기》저서중 필자가 집필한《조선민족 녀성들의 미담》부분을 아래에 몇번으로 나누어 련재하려 한다.                            (1)   훌륭한 어머니 신사임당          률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1504년 10월 29일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태여났다. 그의 부친 신명화는 41세에 진사에 올라 벼슬을 굳이 사절하고 일생을 학문으로 보낸 청렴한 선비였다.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5형제를 두었는데 사임당은 그의 둘째딸로 태여난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색이 출중하고 총명이 과인하고 덕성이 높아 부모에게는 효녀요, 자식에게는 현모라고 할수 있는 리조시대의 전형적인 조선녀성이였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학문은 오직 남자의 과업이며 녀자는 베짜고 길쌈하며 가사를 배우는 것이 모두였다. 하지만 사임당은 부모의 영향밑에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열심히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널리 탐독하며 점차 뛰여난 학식을 지니게 되었다. 시와 글에서 비범한 재능을 보여주었을 뿐만아니라 특히 그림에 재주가 비상하여 리조시기의 명화가들인 김홍도, 안견 등과 어께를 겨루었다. 그의 그림은 색조가 명쾌하고 부드러워 보기만 해도 평온한 기분에 잠기며 생동한 실감을 느끼군 한다.      어느 한번 신사임당이 풀과 벌레를 그린《초충화첩》을 말리려고 마당에 펴놓았더니 닭들이 달려들어 그 벌레를 쪼았다고 한다. 아마 닭들의 눈에도 그 그림속의 벌레가 정말 살아있는것 같아 단숨에 쪼았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신라시기의 명화가 솔거가 황룡사벽에 그린 소나무에 새들이 날아와 앉다가 미끄러 떨어졌다는 이야기와 신통이도 흡사하다.      사임당은 19세되던 1522년에 감찰이라고 하는 벼슬에 있는 리원수라는 선비와 결혼하여 39세에 이르러서는 4남 3녀의 어머니로 되었다. 그는 7남매를 똑같이 가르치며 바르게 기르기에 힘썻다.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항상 우애있게 지내도록 당부하였다.     그가 애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는 이런것도 있었다.    《 옛날에 농사를 짓는 두 형제가 살았다. 그런데 추수할때가 되니까 형은〈동생은 새살림을 꾸리니 나보다 어렵겠지〉라고 생각하고 아우는〈나야 식구가 적어서 괜찮지만 형님은 아이들도 많으니 나보다 살기가 힘들거야〉하며 서로 걱정하였다. 형제는 밤중에 서로 몰래 각자의 벼단을 형은 아우집으로, 아우는 형집으로 날랐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벼단이 줄지를 않아 서로 이상하게 생각하던중 어느날 밤 열심히 벼단을 나르던 형제는 마주치게 되었다.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울고 말았다. 》      이러한 마음씨를 키워주었기에 이들 형제는 어려서도 우애있게 지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남달리 다정히 지냈다.      또한 사임당은 자녀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마다 공부는 우선 뜻을 품고 성실하게 해야지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를 성공하지 못한다고 늘 교양하였다. 하기에 맡아들 선은 루차 과거시험에 락방했어도 락심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데서 41세에 큰 뜻을 이루어 진사에 올랐으며 셋째아들 률곡은 8살에 벌써 훌륭한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13살에는 진사초라는 과거에 합격되여 임금이하 사관들과 모든 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당대의 으뜸가는 철학자로 되었고 벼슬은 판서에 올랐으며 또 임진왜란이 터질것을 미리 예견하고 10만군대를 양성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처할 방책을 들고나오는 등 유명한 정치가로 되었다. 이와같이 리률곡이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데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훌륭한 교양과 갈라놓을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재질에 있어서나 덕성에 있어서나 조선녀성의 지혜와 슬기가 넘치며 게다가 리률곡과 같은 동양의 석학을 낳아기른 훌륭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1551년 서울 삼청동에서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회 -- 리순신장군의 어머니,  홍석주의 어머니 서씨부인)
24    이모와의 상봉나날 이야기 댓글:  조회:4875  추천:14  2013-10-12
                                                                이모와의 상봉나날 이야기                                                                                                                                                                                                              글  /  강  순 화                나에게는 이모 한분이 계신다. 1934년생이시니 올해로 어느덧 79주세인 셈이다. 세월이 무정했었는지? 운명의 조화였던지?  이모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 조카딸은 세살에 엄마를 잃었고 그때 이모와 갈라져서 왕청에서 연길로 떠나왔었다. 내가 다섯살나던 해 이모가 한번 연길로 찾아오고는 오랜 세월동안 연락도 없이 서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았었다. 나의 머릿속엔 이모가 그때 우리집에 찾아와서 나를 둘처 업고는 밖에 나가 웬지 모르게 하염없이울기만 하던 기억만이 어렴풋하다.        이모는 왕청역에서의 그 리별이 수십년 지난 오늘에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려난다고 한다. 아빠품에 안긴 철없는 애기가 엄마 죽은줄도 모르고《엄마는?》하고 졸라대자《엄마는 갔다...》,《이모는?》,《이제 안녕!  해야지...》아빠의 말이다. 세 살난 나는 얼른 고사리 손으로 아빠입을 막으며 이모도 함께 가자고 울며 떼를 썼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25세 젊은 청년 나이로 상처를 하였었고 그후 왕청교육국에서 연변한어사범학교로 전근하게 되어 어린것을 안고 길을 떠난 것이였다.             그때 중학에 다니고 있는 이모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생전의 부탁대로 반주임댁에 기거하기로 했었다. 조카딸과 형부를 눈물로 떠나보내고 이모는 몇날 몇일 가슴이 꽉 막혀서 숨도 바로쉬기 힘들었단다.  반주임은 이모더러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야 가슴이 풀린다고 했다. 마침 청명이 돌아와 이모는 선생님을 따라 그집 로인들의 산소에 갔었는데 곁사람들이 통곡하는 그 분위기에 이모도 덩달아 실컷 소리내여 울었단다.  그랬더니 과연 마음속에 굳어 있던 엉어리가 조금은 풀리더라는 것이다. 그 세월 사람들은 가슴속에 맺힌 한과 설음을 그렇게 밖에 풀수 없었던것 같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20세기 90년대 초,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이나 변한 어느 여름날, 이모는 어쩌다 또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간 출가하여 딸 다섯을 키워왔고 이모부는 병으로 돌아 가셨으며 큰딸 도순화가 큰 병으로 료녕성 안산의 에 입원하여 앓고 있을 때였다. 그때 잠시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도 종종 만나보시고 새 엄마와 동생들도 만나면서 얼마동안 계시다 간 후 우리들의 왕래는 다시 시작되였다. 그번에 이불장에서 나의 낡은 첫날이불을 뜯어보고 그렇게 슬피 우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엄마나 이모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헌 솜을 주어모아 새색시 이불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시집갔을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결혼하던 그 70년대에는 첫날 옷감도 이불등도 마음대로 살수 없어서 남의 집에 수소문하여 빌려 샀었고 15원짜리 트렁크 하나에 어록책과 하향하여 입던 검은 고리둥 옷 한벌을 넣고 시집갔었는데 이모가 그 사연까지 다 알았으면 더욱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혈연의 끈끈한 정이 아닌가 싶다.         그후의 어느 가을날,  나도 시간을 내여 이모가 계시는 흑룡강 계동에 찾아가서 이모와 동생들도 만났고 또 선화 련화 은화 등 동생들도 우리 집에 놀러 오군 하였다. 금년에 어쩌다 련화가 또다시 연락이 와서 내가 다시 찾아가게 되였고 오래동안 보지못한 이모와 동생들도 다시 만나고 한주간 잘 지내고 왔다.  인젠 옛날같지 않게 모두가 생활이 피였고 이모도 새 아빠트에 들어서 편히 계시고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  다만 이모 다리가 너무 불편한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직 정신도 맑으시고 옛 이야기들도 잘하시며 몸에 큰병은 없는듯 한데 무엇이 문제인지 온기있고 펀펀한 다리가 전혀 움직일 수 없단다. 다리신경을 지배하는 소뇌에 고장이 생긴 모양이다.  년세가 많으시니 수술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고 계셨다.        같이 살고 있는 넷째딸 선화가 하도 알뜰히 챙겨드리고 잘 보살펴 드리니 식사도 잘하시고 텔레비도 잘 보시며 마음은 안정되고 계신듯 했다. 이젠 모든 고생이 다 옛말로 되고 좋은 세상 만나서 좋은 생활을 좀 더 오래 향수하셔야 할텐데 그저 멀리서 걱정뿐이다. 이번 걸음에 이모와 함께 일주간 있으면서 밤에 낮을 이어 들어 온 지난세월 이야기들이 너무도 소중하여 이렇게 하나하나 글로 엮어 본다.        그 옛날 우리 엄마가 꽃다운 스므살 나이로 살아 계실 때 이모는 여나므살 되는 소학생이 였단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가 1928년생이니 이모와는 여섯 살이나 차이가 있었다. 워낙 늦게 섬이 들어 만날 애보다 못하다고 꾸중을 들었다는 이모는 그때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한평생 농사로 뼈를 굳힌 외할아버지는 광복이 되는 해 왜놈들이 투항하여 도망가면서 동북 할빈지역에 퍼트려 놓은 그 무시무시한 731세균에 간염되여 몇일 밤낮으로 몸부림치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고 외할머니도 얼마 오래 계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모 위로 외삼촌이 한분 계셨는데 일찍 참군하여 동북해방 전쟁과 항미원조까지 참가하셨다가 전쟁터에서 폐병을 얻고 돌아왔었다. 부모님이 안계시니 하나밖에 없는 누나인 우리엄마 손에서 살뜰히 병시중을 받았으나 얼마를 못 견디고 젊은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한다.       의지가지 할 곳 없는 이모는 엄마가 결혼하여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았단다. 내가 태여나니 이모에게는 이 조카딸을 돌보는 일이 당연한 의무로 되었다. 늘 애기를 등에 업고 밭에나간 엄마를 찾아 젖을 먹이군 했다는데 이모 기억에 말못하는 애기인 내가 얼마나 령리했던지 업혀서 젖먹으로 가면서도 이모가 딴 생각에 팔려 길을 잘못가면 잔등에서 버득거리면서 손으로 앞을 가르켰다는 것이다.      첫돌 생일에는 상에다 쌀 한공기,  팟 한공기 그리고 이모가 쓰던 몽다리 연필 한대와 엄마 호주머니의 잔돈 몇장을 꺼내 놓았다는데 엄마와 이모가 얼른 무엇을 잡으라고 하니 글세 제일 먼저 그 꽁다리 연필을 쥐고 다음으로는 돈을 쥐였는데 한장이 방에 떨어지니 기어이 주어서 다시 쥐더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는지 평생 이날까지 공부하는 것은 나의 첫째가는 취미였고 또 지금까지의 인생을 걸어오면서 크게 돈 그리운 줄 모르고 산 것도 같다.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온 첫돌 생일상의 전통오락이 과연 그저 장난에만 그치는 일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던 1947년말, 그때는 아직 중화인민공화국탄생 직전인지라 지하혁명활동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뒤따라 나선 엄마는 임신 때에도 막달까지 밖에서 활동하였고 애기를 낳은 후에도 아이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한다. 당시 길림성 서란현 부녀 부주임(주임은 항일 녀간부인 한족녀성이였음)을 담임하고 있은 엄마는 당의 지시에 따라 전현부녀들을 동원하여 이불솜을 거두고 집집이 실을 짜서는 양발과 수갑을 손수떠서 해방군께 보내는 활동들을 하였단다.       련속되는 전선지원 활동들로 엄마는 각 지방을 돌며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니느라 애기 젖도 바로 못 먹였다. 어린 나는 항상 이모등에 업혀서 배고파 칭얼거렸다 한다. 한번은 이모가 이삭 주어온 감자를 부엌에 묻어 놓고 잠깐 소피보러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글쎄 방에서 놀던 두살 애기가 어느새 한길도 더 되는 부엌밑에 떨어져서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감자 익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 어떻게 굴러 내려간 모양인데 어데 다치지나 않았는지 이모는 너무도 기가막혀 그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무엇이 먹고 싶었으면 무서운 것도 모르고 그 깊은 부엌까지 떨어져 내려 갔을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여서 60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이모는 그때일만 생각하면 늘 놀라군 한단다.            1949년초 당의 파견으로 아버지가 동북군정대학에 가시고 집에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넷째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들려보니 녀자들만 살다나니 땔나무를 하지 못해 애기가 차디찬 방바닥에서 언 기저귀를 깔고 누워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서란현 부근에 있는 큰집들에서는 모여서 토론하고 우리 세 식구를 셋째 큰아버지 집에 위탁하여 살게 하였다.       그때 두살도 안된 애기인 나는 벌써 남의 집인것을 알고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한다. 혹시 빛다른 음식이 생기면 자기가 먼저 먹는것이 아니라 얼른 짚어서는 큰아버지한테 달려가 목을 그러안고는 큰아버지 입에 먼저 밀어 넣더라는 것이다. 큰아버지는 너무도 귀여워 항상《요 잰내비같은 영물을 봐라! 》하면서 수염이 가득난 볼로 애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며 이뻐서 안고는 방을 한바퀴 돌군 했다고 한다. 아직 세상물정도 알수 없는 그 어린 생명에게 벌써부터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하는 운명이 시작 되였던 것 같다.              엄마가 폐병에 걸린 외삼촌을 림종까지 붙안고 병시중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그 병에 전염되여 1년도 못되게 앓다가 22세의 꽃다운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셨다. 그후 이모는 중학교 반주임 집에서 초중을 마치고 반년 후에는 수리중등전업에 입학하였다. 군속이자 고아인 이모는 국가에서 주는 공비로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에는 흑룡강 밀산현 수리국에 분배되여 사업하게 되었다. 당시 그 현성에는 중등전업을 졸업한 지식인 녀성간부가 하나도 없었음으로 이모는 대단히 중용되였다고 한다. 현에서 큰 대회를 할때면 항상 현장 옆에 앉혔다고 하니 알만한 일이 아닌가.       그 직장에서 이모부를 만나 1남 1녀를 낳았댔는데 대약진때 아들애가 그만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단다. 이모는 너무도 상심하여 신병을 얻었고 그 타격으로 직장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후 또 아들을 바라고 딸 넷을 련이어 낳아 딸 다섯을 키워 왔다. 그래도 이 조카딸이 항상 그리워서 큰딸 이름을 아예 나와 똑같게 순화라고 짓고 항상 불러 보았지만 그 세월 그 곤난한 생활형편에 언제 숫한 애들을 버리고 조카딸을 찾아 떠날 겨를이 있었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이해할만도 한 일이다.       이모부는 원래 가정이 있는 전업군인이였는데 일찍 상처하였고 광복후 애들은 부모님들이 데리고 한반도에 있는 고향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모부 생전에 부모님 고향땅의 주소를 알았었지만 남한길이 막혀 있었던지라 수십년간 이산가족으로 서로 찾지 못하고 있다가 80년대 말에야 이모가 나서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그분들을 끝내 찾아내고 말았다. 그후 이모는 두차례나 한국에 초청되여 시집식구와 남편의 자녀들을 만나 뵈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목사로 일하는 시삼촌의 영향으로 이모는 다시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또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다 교회를 세곳이나 세우기도 했었다. 어찌나 헌신적으로 교회를 위해 일했던지 이모는 한국측의 신용을 얻어서 몇년간 많은 경제적 후원도 받았고 점차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또 계동판에서는 이름있는 권사로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한평생《주》를 믿고《주》에 혼신을 바쳤으니 인제는 정녕《하느님》의 딸인듯 싶다. 이번에 내가 가기 전날 이모는 꿈속에서《천당》에 가 보았단다. 그렇게 눈부시고 찬란한《천국》이였고 많은 성도들이 이모를 기다리고 있더란다. 인생 로년에 더욱더 깊이깊이 믿고 있는 그 신앙, 우리 유물론자들과는 달리《저세상에 또 다른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가 분명 있다》고 믿고 있으니 어찌보면 이모한테는 유일한 정신적 의탁이요, 마음의 마지막 안신처인듯 싶다.              어릴때 갈라진 이 조카딸이 혁명가、교육가의 자식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도 잘 키워 왔으며 크게 근심없이 살고 있으니 이모도 인젠 마음을 놓을 것이다. 나도 인젠 예순을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나간 세월 모두가 이 세상에 태여난 모두에게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였던 것 같다. 어릴때의 그 슬픔도 설음도, 커가면서의 그 억울함도 고달품도 모두가 한생의 잊혀가는 악몽이듯이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그 세월에 묻어두고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모와의 상봉 이야기》을 한단락 마무리 하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지했던 그 어린시절의 그 불행한 환경이 나를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잊혀가는 희노애락의 추억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그 격전의 나날, 조국해방의 포소리속에서 이 세상에 태여 난 한 갸날픈 생명이 이 나라가 걸어온 60여년과 동반하여 온갖 시련과 역경을 다 견디여 냈으며 자신의 신근한 노력과 분투로 후회없는 한생을 살아 왔으니 인제는 만족 할만도 한것 같다. 세 살에 엄마 잃은 그 불쌍한 아이, 그 여리고 순진한 눈물의 소녀, 그 천진랑만한 장미꽃 청춘이 어느덧 벌써 지천명(知天命)을 다 지났고 이순(耳順)길에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모든 것을 용서하며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오직 지나온 인생 경력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뜻깊은 삶에 최선을 다하며 제2의 인생길에서 끝까지 열심히,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희망이 아닌가 생각한다.                                                                                                                       2013년 10월에
23    쉼없는 도전은 젊음의 비결 댓글:  조회:3706  추천:23  2013-09-24
                             쉼없는 도전은 젊음의 비결                                                                                            글 / 김 성 화 (조글로 기자)        아름다운 삶을 부단히 창조하는 녀인      오늘날 복잡한 삶의 과정에서 심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따라서 상담활동은 개인의 일만이 아닌 사회의 문제를 치료하고 예방하는 홀시못할 하나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변생명열선, 녀성열선(273-9595, 296-1004)》은 바로 이러한 취지로 하여 1995년 연변대학 민족교육원에 개통되였고 녀성학 연구원인 강순화선생이 이 사업을 겸직으로 맡아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년간 이 상담열선은 사회 방방곳곳에서 걸려오는 수천통의 상담전화를 받아 왔다. 그 내용들을 보면 주요하게 청소년교육문제, 혼인가정문제, 법률상담문제, 취업문제, 정보교류와 성상담 등등 이였는데 래담자의 80% 이상이 녀성들이였다. 이만큼 녀성들의 문제가 절실한 것이 현실이다.     "녀성이 밝아야 사회가 밝다"고 하지 않는가? 녀성을 일컷는 "안해"란 말은 어쩌면 집안의 해(태양)라는 말인듯 싶다. 집안의 해가 빛나면 사회는 환히 밝아지지 않겠는가! 강순화소장이 이끄는 생명열선, 녀성열선은 언제나 따뜻한 품으로 안아 주는 어머니처럼, 항상 그모습 그대로 받아 주는 오랜 친구처럼 그 누구의 그 어떤 문제든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과 당신의 아픔을 나누려는 뜨거운 가슴으로》귀를 기울리고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상담원들의 따뜻한 목소리는 래담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주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정시하고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가질수 있게 하였다.     가정의 행복을 찾고 인간관계가 더 밝아지게 하는 일에 좀 더 전문적인 지식과 사랑을 불어 넣어 온 사회가 조화롭고 안정되게 함에 자신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저 하는 것이 강순화소장의 소망이라고 한다.     소리없이 빛나는 사회의 한 일각에서 자신의 정열과 마음을 몰부으면서 고민에 울고 상처에 아파하고 갈등에 신음하는 수많은 사회의 약자들을 도와 희망의 앞길을 밝혀주는 “열선전화” 상담소의 중심에는 언제나 강순화소장의 끈질긴 노력과 심열이 슴배여 있었다.     1995년 생명의전화가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에서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할때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 유용성과 효률성을 념려하였다. 무료자원봉사로 어떻게 그 일을 할수 있을까? 심리자문이나 면접전문가의 립장에서는 더더욱 긍정적인 시각만이 아니였다. 그러나 연변생명의전화, 녀성의 전화는 18년간 강순화소장을 중심으로 한 전체 상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사랑으로 오늘날까지 견지되여 왔고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연변대학에서는 "뛰어다니며 일하는 녀성"으로 불리는 강순화소장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휴식일이 따로없이 상담소 회원들을 조직하여 부단히 전문지식을 배우고 상담사례들을 연구하며 상담원들의 자질제고를 위해 힘쓰고 있다. 상담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사랑”임을 강조하는 강순화소장은 늘 래담자의 목소리를 내심히 경청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래담자와 고민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립장에 서서 그들의 아픔과 고통, 방황과 갈등을 함께 헤아리면서 그들 하나하나의 애로를 해결함에 늘 최선을 다해왔다.     어제는 일본땅에서 방황하는 조선족 류학생 친구와 고민을 나누었고 오늘은 마작판에서 세월을 보내는 젊은 애기엄마와 인생선배로서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했으며 련 몇일은 또 차마 말못할 성 침해의 악연으로 하루속히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한 청년의 기막힌 사연도 함께 헤아려 나가야 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들의 힘이 되고 그 말의 참뜻에서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하는 것이 이들 상담원의 지혜이고 기쁨이며 그것이 바로 강순화소장이 바라는 “아름다운 삶”이자 하나의 “작은소망”이라고 한다.      “소화룡촌 집체호”의 따뜻한 식구 -- 인간 강순화      매주 일요일 아침 여덟시반이면 하남시장 앞 뻐스역에서 어김없이 14선공공뻐스를 기다리는 강순화 소장과 “집체호” 성원들을 볼수 있다. 울긋불긋 산뜻한 려행복차림으로 맛있는 과일과 반찬들을 멜가방에 둘러메고 젊은이들처럼 신나게 웃고 떠드는 그녀들은 바로 “소하룡 집체호”로 향하는 상담소 멤버들이다. 뻐스에 올라 즐겁게 이야기꽃 피우며 달려가는 연길시교 동쪽 소하룡촌 그곳에는 십여명의 “집체호”식구들이 주일마다 친 자매마냥 모여서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따뜻한 대 가정을 이루고 있다.     "집체호를 꾸리게 된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집체호는 바로 저 산너머에 두고 온 우리들의 “청춘”이지요. 청춘...그 청춘을 지금 이 이순의 나이에 다시 즐기고 있는거랍니다. 철모르던 그 젊은시절의 청춘과는 다른, 년륜과 여유로움이 넘치는 로련한 “청춘”이지요. 그냥 “집체호”라는 이 이름자체가 젊음이고 즐거운 거지요. 특히 상담원들의 실천활동과 단련에는 최고의 환경이구요. 마음맞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도 재미나고 남다른 생활체험이지요. 봄이면 농민아저씨들의 지도를 받으며 기와집 앞뒤의 넓은 터밭에 채소와 옥수수를 심고 여름이면 불볓에서 땀흘리며 기음을 매고 가을이면 그 열매와 수확에 환희와 기쁨을 만끽하지요. 여가에는 뒷산에 올라 “야—호”를 부르며 등산도 하고 강변에 뛰여가 미나리도 캐고 … …  주일마다 복잡한 도시의 소음을 멀리 떠나 푸르른 산촌마을 오붓한 “집체호”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유쾌한 하루를 보낸다는 것에 특이한 쾌락을 느끼고 있는거죠." 강순화 소장의 신나는 대답이다.      1968년 가을, “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상부의 지시대로 강순화소장도 광활한 천지 -- 농촌으로 재교육 받으려 떠났었다. 당시 전국의66, 67, 68년급 3기의 초,고중졸업생 8천만 학생들은 이렇게 청춘의 아름다운 추억을 광활한 천지라는 “저 산너머”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고삼 학급의 공청단서기로 대학에도 추천되였고 학교에서 유일한 학생당원 발전대상이 되여 입당비준도 눈앞에 두었던 그 황홀한 시각, “문화대혁명”이라는 먹장구름은 그녀의 모든 희망과 꿈을 흔적없이 파묻어 버렸다. 선택도 농촌이요, 희망도 미래도 광활한 그 대지-- 농촌에 두어야 했다.      7년반이라는 기나긴 그 춘하추동을 함께 했었던 그 산간마을, 저 산너머에 아픔과 방황만 있었던 건 아닌것 같다고 그녀는 담담히 말한다.      “지식청년 회고록”에 담겨진 강순화소장의 글 한구절을 옮겨 본다.      “한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할것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당년의 지식청년답게 씩씩하고 후회없이 인생의 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40여년 전의 그 하향지식청년 집체호의 생활을 추억에 남기며 당년의 그 집체호 식구들이 이제 만년에 다시 모여서 밭에 나가 농사도 짓고 부엌에 불지핀 온돌구들에 모여 앉아 여러가지 학습자료로 공부의 시간도 가지면서 세상만사도 담론하고 생활의 지혜와 건강상식도 교류한다. 지나간 옛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내여 "아~ 그때는 정말 철이 없었지"하면서 솔직하게 친구들께 속내를 터놓는 그냥 그 녀자, 인간 강순화였다. 학술계에서나 녀성계에서의 그 리더쉽, 그 카리스마 넘치는 당찬 모습과는 달리 순진하면서 어리숙한 그냥 그 녀자였다.       밭에서 우리 손으로 농사지은 유기농이라면서 가지, 고추, 옥수수와 단호박을 한가방 챙겨주는 그냥 따듯한 친정 엄마같은 분, 김 매고 고추따고, 밥 푸고 … … 집체호에서의 강순화소장의 그 모습은 그냥 푸근하고 편안한 시골 이모같은 그 모습이였다.       금년이면 이 소하룡 “집체호”생활도 어느덧 삼년째라 인젠 식구들 모두 농사 경험도 쌓고 농촌 생활에도 잘 적응되여 간다면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배우며 집체호친구들 모두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램이였다.     “중국조선족문화와 녀성문제연구” 저자 강순화 이제는 숨쉬는 프리랜서로      얼마전에 프랑스에 류학한 한 한국 녀학생이 찾아왔었다. 한국학술정보(주)에서 펴낸 강순화교수님의 “중국 조선족 문화와 녀성문제 연구”라는 저서를 보고 자신의 “조선민족연구” 석사론문 집필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존경과 믿음의 마음으로 만리길을 멀다 않고 직접 만나 뵙고싶고 지도를 받으려고 찾아 온 것이다.      “문화대혁명” 광란의 시기를 거친 녀성들 중에서는 연구원, 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분이 많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특정된 환경이 그 시대의 녀성들을 피해자의 장본인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역경속에서도 강순화교수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성법관이 되는것이 꿈이였다는 그녀는 “배움에는 년령도 정해진 시기도 없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출산하고 두달도 되지 않는 몸으로 당년 로3계 (66,67,68년급) 학생들에게 어렵게 주어진 1978년의 대학입시에 응시할수 있었다. 시험장에서 산후로 인해 퉁퉁 부은 얼굴에 반나절이나 젖을 못먹여 터질듯 뿔어 오른 젖가슴으로 웃옷 앞섭이 몽땅 적셔 버리자 시험감독관 선생은 련속 수지를 날라주며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고 한다. 그런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뒤늦게나마 대학본과를 마치고 그후 30여년을 하루와 같이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드팀없이 사업할 수 있었고 맡은 바의 연구과제와 각종 학술활동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은 것이다.       1989년,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중심의 초창기부터 중국의 석학 정판룡교수를 보좌하면서 여려차례 한국학 국제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성황리에 개최하였을 뿐만아니라 “조선-한국학총서”, “간명한국백과전서”, “21세기와 중국조선족”,”정판룡 세계를 가다” 등 무게있는 학술저작과 기행문들을 편찬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억센 사나이”(중문 상,하), “중국조선족문화와 녀성문제연구” , “중국조선민족 민속연구”, “중국조선족 녀성연구” 등 저서들을 중국과 한국에서 출판하였으며 50여편의 무게있는 론문들을 국내외 각종 학술간물에 발표하였는데 “직업녀성의 이중 배역 충돌” 론문은 학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재직시 몰입했던 학술연구의 그 기분 그 열정 그대로 퇴직후에는 짬짬이 쓰고싶은 글들을 쓰면서 살아움직이는 프리랜서로 활약하고 있다.       “미국에 갔을 때, 우리 조선족들의 그 감명깊은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필을 들지 않을수가 없더구만. 밤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새벽이 될때까지 컴푸터 앞에 앉아 키버드를 두드렸지. 인물취재나 인터뷰를 마치고 글 한편을 마무리하면 마치 나에게 맡겨진 새로운 임무 하나를 완성한듯 가슴이 뿌듯하고 성취감에 도취되거든 … …”       이렇게 미국에 가면 미국에서, 연길에 있으면 또 일상생활과 삶의 주변에서의 인물실화들을 열심히 써서 수차 매체에 발표하였다. 에 실렸던 “미국 땅에서 만난 연길아줌마’, “로스안젤스 코리아타운의 마당발 녀인’”, 잡지와 , 등에 발표했던 “미국서부 기행”, “대학가에 피여난 사랑 이야기”,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대학가의 퇴직 녀성들” 등 문장들은 해내외 우리 동포들의 생활과 우리들의 일상속에서 걸러낸 아름다운 실화들이다.      강순화녀사와 같은 이런 정열에 넘치는 칼럼니스트들이 없었더라면 그같이 감명깊은 이국땅에서의 우리민족 이야기들과 우리 주변의 삶의 이야기들을 누가 우리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을까 하고 반문하게 된다.      그녀의 학구열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배움의 좋은 시기란 따로없다는 강순화교수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하면 된다”가 자신의 인생 좌우명이라고 하면서 오직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꿈”은 언제인가 꼭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인젠 출근족 행렬에서도 벗어 났으니 여유가 있어 나름대로 꾸준히 삶의 이야기들을 써볼 것이요… …" 하면서 넌지시 미소를 보이는 강순화교수의 알찬 계획은 언젠가 꼭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리라 믿는다.       마무리를 하면서       쉼없는 도전으로 아름다운 삶을 부단히 창조하는 녀인 강순화! 그 이름 앞에 따르는 수식어는 너무 많다. 녀성학 연구원, 녀성계의 리더이자 상담소 소장, 집체호의 코기러기, 퇴직처 당지부와 녀성탁구협회 책임일군, 그 어느 직책에서도 정열과 지혜를 몰붓는 그녀, 지금은 또 무명의 프리랜서로 뛰고 있다. 제2의 인생 길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삶을 충실히 가꾸고 있는 그녀를 두고 모두들 “젊음을 창조하는 우리의 녀성리더, 녀성활동가” 라고 자랑스레 부른다.  
22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마당발 녀인" 댓글:  조회:4692  추천:13  2013-01-31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마당발 녀인"                                                                                                     글 / 강 순 화      미국 서부의 관문도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동포들이 근 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 속에는 수년간《아메리카 꿈》을 안고 그땅을 찾아 간 우리 조선족동포들을 위하여 수많은 좋은 일을 해 온 한 인기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캘리포니아주 중국조선족동포회 자문봉사센터 소장이며 코리아타운의《마당발 녀인》으로 불리우는 김정화씨이다.     연변 로투구진 출신인 그녀는 아직 40대의 젊은 녀성이지만 그가 걸어 온 인생길은 그야말로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량식가공공장에서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와 페결핵 장기환자인 어머니 슬하에 딸 넷, 아들 하나로 빈한한 삶을 이어가는 가정에서 그녀는 셋째 딸로 자라났다. 두 언니가 시집간 후 얼마 안되여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 가시고 또 반년도 안되는 사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집에는 그녀와 오빠, 동생하여 세 고아만 남게 되었는데 오빠는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고 동생은 학비 때문에 연변일중에 입학한 것도 포기하고 돈이 적게드는 사범학교에 전학하였다. 워낙 승벽심이 강하고 남달리 총명한 그녀였지만 가정형편이 너무도 어려워 겨우 중학을 마치고는 자진하여 취직의 길에 들어섰다. 새벽에는 큰 공장의 보일러들을 찾아다니며 부엌에 땔 곡스를 주어왔으며 낮에는 복장점에 나가 무보수 로동으로 봉제기술을 배우고 밤이면 또 싸리나무 광주리를 틀어서 파는 부업을 하면서 풋돈을 모아 겨우 가정 살림을 이어갔다.    부모가 남긴 단칸짜리 낡은집이 그들 삼형제의 유일한 삶터였는데 동생은 학교 숙사에 나갔지만 오빠는 당장 결혼할 때가 됐으니 그녀는 빨리 집을 나가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녀도 임자를 찾아 시집가는 길이였다. 나이도 어느덧 스물다섯이 되었으니 사실 때이른 혼사도 아니였다. 그의 생각을 알게 된 친구는 그에게 키크고 이쁘장하게 생긴 한 총각을 소개해 주었는데 시어머니되실 분은 새 며느리감을 보더니 키도 작고 인물도 환하지 않다고 나무리였다.   《얼굴만 이쁘면 뭘합니까? 마음씨를 잘 써야지요. 두고 보세요, 제가 시부모님을 어떻게 모시는가를 ... ... 》새 애기의 야무지고 당돌한 대답에 시부모들은 너무도 기득하여 그만 동의하고 말았다 한다. 아니나 다를가 결혼 후 지금까지 근 20년간 그녀 같은 효녀는 따로 없었고 고부간의 관계도 친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서로가 지극정성이였다.    그런데 그 세월에 만난 그 실랑집도 그녀집 못지않게 가난하고 말끔한 가정이였다. 사실 결혼준비도 힘든 형편이였지만 량쪽이 다 비슷한 처지라 서로 리해해 주면서 이불한채에 첫날옷 한벌과 삼일옷 한벌 그리고 간단한 식사 한끼로 결혼은 무난히 마치였다. 허나 신혼생활은 첫 발짝 부터가 고생문이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볼가 생선을 넘겨 팔아도 랭장고에서 시장까지 가져다 내 놓으면 얼음이 다 녹으면서 별 리윤이 없었고 돼지고기 장사를 해 보아도 워낙 적성이 틀려서인지 밎져들어 가기만 하였다. 아예 복장가공이나 해 보자 마음먹고 그녀는 복장점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가공기술을 익혔다.    바지 한견지 수공에 2원5십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벌을 만들면 25원. 남들이야 밤새 마작판에서 놀건 말건 그녀만은 밤을 새며 하루도 쉬지 않고 악착스레 일했다. 하기에 집세도 물고 그럭저럭 생계는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연길시내로 일보러 왔다가 우연히 복장가공부에 들려보니 바지가공에 호주머니 하나 더 붙이고 수공은 배로 5원씩 받는 것이였다. 정신이 번쩍 돌았다. 내가 왜 로투구에서 남의 절반을 받고 일하지? 연길로 가자. 남이 하는 일을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그녀는 밤도아 이사짐을 꾸려 가지고 이튿날 곧바로 연길로 향했다. 키큰 실랑이 다리도 바로 펼수 없는 작은 셋방을 싸게 세맡고 매일 복장매대를 돌면서 일거리를 찾아서는 밤을 새며 가공하여 시장에 가져갔다. 하도 일솜씨가 재빠르고 신용도 잘 지키기에 그녀에게는 남의 몇배로 일거리가 생겼다.    어느덧 결혼 1년이 되자 그녀는 귀여운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하도 일욕심이 강한 며느리를 보아온 터이라 애가 돐이 되자 시어머니는 아예 손자를 자기집에 업어다가 키울테니 며느리더러 시름놓고 마음껏 일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갑자기 새끼를 떼여 버리는 엄마의 마음이라 가슴이 째질듯 아팟지만 그것도 시간이 약이 되여 오랜세월 아들애는 아예 시어머니가 도맡아 키우고 말았다.     항창 복장가공으로 신나게 일하고 있는 어느날 또 좋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연길시복장공장에서 기술공을 모집하여 미국령토인 싸이판에 보낸다는 것이다. 시간당 2.75딸라씩 준다고 하니 연길에서 아글타글 벌기만 퍽 나은 돈벌이가 아닌가? 워낙 복장업에서는 재간이 있는지라 실기면접에서 수백명 응시자를 제치고 선참으로 합격되였다. 인젠 출국길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첩첩강산에 갈수록 심산이라고 시련은 또 찾아왔다. 출국비용 2만6천원도 어떻게 갖출가 근심이 태산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련일째 배가 탈리는듯 아파나는 것이였다. 병원에 가보니 급성맹장이란다. 당장 수술해야할 형편이였다. 수술비 500원을 갖추라니 어데서 갑자기 이 돈을 구한단 말인가? 생각끝에 난생 도움을 청해 못본 사촌오빠를 찾아가서 아프다는 말은 못하고 출국비용 500원이 모자라니 먼저 꿔주라고 사정하였다. 하도 열심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 본 터이라 그 오빠는 선듯 돈을 내 놓았다. 그녀는 남편도 시부모도 알리지 않고 친구만 데리고 병원에 가서 수술대에 올랐다.    사후 소식을 알게 된 가족들은 기가막혀 할말을 잊었다. 어데 그뿐인가 수술 3일만에 병원을 뛰쳐나와 자기 혼자 집에서 점적주사를 맞았고 일주일 후에는 실을 빼야 하는데 병원가는 비용이 아까워 집에서 자기절로 가위를 불에 달구어 소독하고 실을 끊고는 집께로 그 실을 하나하나씩 뽑아 버리고 배를 단단히 동여매고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보통사람들로는 상상할수도 없는 그야말로《강심장》의 녀인이였다. 결국 맹장수술에 230원밖에 쓰지 않았고 그후에는 언니들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수술 보름만에 싸이판으로 향한 출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어데 상상이나 했던가? 싸이판에서의 나날은 완전히 일하는 노예들의 생활이였다. 아침 일곱시부터 밤 한,두시까지 근 20시간이나 되는 고된 로동은 그렇다손 치고라도 무시로 가해지는 사장과 지배인들의 저질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욕설과 행동은 참으로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자들은 이 로무일군들을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 지옥같은 하루하루가 참으로 삼추같이 길었지만 어떻게 하던지 꿔온 빚은 갚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는 매일 이를 악물고 귀를 막으며 참고 견디여 가면서 만 3년의 합동시간이 끝나자 곧바로 멕시코행을 신청하였다.    한국사장을 따라 낮설고 물선 지구 반대쪽 검은 피부의 나라 멕시코땅에 도착하니 제일 큰 곤난은 언어불통이였다.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우선 말을 알아야 이땅에서 살아남을 것이 아닌가? 빨리 말을 배워야 한다. 그녀는 또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달려들어 스페인어 사전을 보풀이 나게 번져가며 읽고 암기를 내였다. 일터에선 되던 안되던 손짓발짓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몇 달간 꾸준히 노력하니 차츰 멕시코인들이 지껄이는 소리들을 약간씩 알아듣기 시작하였다.   《하면 된다》는 그녀의 인생신조이다. 1년간 밤낮이 따로없이 극성스레 애쓰는 모습에 멕시코애들도 감동하여 적극 도와 나선데서 차츰 귀가 열리고 말문이 트이였으며 2년이 되니 의사소통은 문제없이 되었고 3년만에는 완전히 멕시코인들과 어울려 막힘없이 말하고 일할 수 있었다. 한국사장은 그녀의 놀라운 의력에 탐복하여기한이 차자 선참으로 그녀의 희망대로 미국행의 길을 열어 주었다.   《자유와 기회의 땅》아메리카에 왔다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생소한 이국에서의 생활은 또다시 고행길의 시작이였다. 거리에서 몇날몇일을 헤매다가 요행 옛 고향의 언니를 만나 그집에 얹혀 살면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식당 복무원도 해보고 사우나에서 때밀이도 하고 안마방의 지압도 하면서 차츰 그곳 생활에 적응하였다. 후에는 세집도 따로 잡고 일터 외 시간에 보건식품 사업도 하면서 점차 수입을 늘였다. 몇 년후 미국에서의 영주권을 쟁취하자 2009년에는 12년이나 갈라져 살며 서로 그리던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을 미국에 데려와서 다시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세식구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명년 8,15에는 시부모님을 뵈려 중국에 온다고 나와 약속하면서 마음은 지금부터 애들처럼 들뜨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지나온 길들을 돌이켜 보면 꿈을 안고 돈을 벌어 보려 가족과 갈라져서 외국에 나온 우리 조선족 형제자매들이 격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안다고 하면서 그 누가 집이 없이 거리에서 헤매면 우선 자기 집에 데려와서 안착시키고 일자리와 방을 구해주며 그 누가 말을 모르고 법을 몰라 불이익을 당하면 앞장서서 도와주는 등 이 몇 년간 그녀의 도움으로 미국땅에 정착한 우리동포들만도 5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넓은 인맥으로하여 친정집《큰 언니》로, 코리아타운의《마당발 녀인》으로 불리우며 뭇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을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           2010년에는 또 큰 종류수술까지 하여 무거운 일을 할수 없게 되자 그는 쯤쯤이 우리 동포들의 카드구입과 우편, 송금 등 일들을 도와주었고 또 열심히 자습하여 힘든《보험회사 자격증》도 땃으며 앞으로는 또《부동산중계 자격증》도 따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이 곤난하여 어릴때 공부를 다 못한 한을 가슴에 안고 명년에는 이곳 외국어학원의 대학본과과정에 입학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영어와 스페인어에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미국사회의 각종 인터넷 정보도 제때에 장악하여 지난해부터는 할리우드 영화촬영회사 회원으로 가입하여 여러가지 보조역까지도 맡아하는 등 외국에 나간 조선족녀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활동무대를 넓혀가고 있다.        항상 열정적이고 활달한 그녀는 지금도 우리 조선족 동포들의 일이라면 밤낮이 따로 없이 차를 운전하고 동분서주하면서 자기일처럼 해결해 주고 그 누가 중국에서 찾아오면 극력 시간을 짜내여 구경시키고 안내해 주는 등 그의 매일 일과는 항상 빈틈없이 꽉 차 있군 한다. 하기에 그곳에선 누구던지 무슨일이 생기면 일단 그녀를 찾았고 그녀와 연락되기만 하면 십중팔구는 해결을 가져오군 한다고 하였다. 그녀의 능력과 책임감은 참으로 보통이 아니였다.       최근에는 또 미국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을 더욱 뜻있고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동포회 성원들을 이끌어 월요일,화요일 영어학습반을 조직하고 그녀가 직접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다.  또  배구, 테니스 등 여러 가지 종목의 아침운동도 조직하였으며 명절에는 조선족동포회 주체로 각종 문예오락과 체육경색을 벌리는 등 유익한 활동들로 언제나 스케줄을 꽉 차게 하고 있었다. 요지음에는 또 한국코치가 조직한 배드민턴 클럽에 가담하여 매일아침 두시간씩 테니스를 치고 오전에는 영어학원의 공부를 하며 오후에는 일터에 나가는 등 날마다 뜻있는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지난 10월,《제39회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야말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만들어 낸 우리 조선족의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 평범한 시골뜨기 녀인이 오늘날 지구 반대쪽 백인세계에서 마음껏 활보하기까지 그 얼마의 천신만고를 격었으며 그 힘겨운 한걸음 한걸음이 그녀의 능력과 자존심을 키워주었고 그녀의 앞길을 찬란히 개척해 준 것이다. 지금《미국 캘리포니야주 중국조선족동포회》의 한 책임일군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그 직함에 손색이 없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 동포들을 위해 열심히 뛰고있으니 이 얼마나 장하고 멋진 인생인가?! 이런 고마운 분들이 있기에 가족을 그 머나먼 미국땅에 보낸 고향의 친지들도 조금이나마 안심하고 있을 것이며 그녀와 같은 해외의 우리동포지성인들께 항상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2012년 10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 2013년 제2기에 실렸음)    
21    달라지는 새 세대들의 출산관념 댓글:  조회:4188  추천:15  2012-08-16
                                          달라지는 새 세대들의 출산관념                                                                                                                           글 / 강순화       개혁개방과 시장경제가 몰고 오는 물질의욕의 팽창, 가치관념의 변화와 생활방식의 개변은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경제적지위, 사회적지위와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하지 않을수 없게 하고있다. 특히 80년대와  90년대 이후에 태여난 새 세대들은 대부분 격변기에 성장과정을 마친 독신자녀들로서 그들은 자기중심적 관념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자연히 그 어느 세대보다도 높은 자아가치 실현의 욕구를 파생시키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선후 새 세대들은 륙속 결혼과 출산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부모세대들과 달리《자녀가 많으면 복하다(多子多福)》거나《후대를 이어야 한다》는 등의 전통적 생육관념을  "무시"하고 새로운 생육관념을 고집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세대의 성공과  향락을 첫 자리에 놓고 있으며 아이를 낳지 않거나 혹시 낳더라도 하나 이상 더 키우려 하지 않는다. 하나라도 잘 키우면서 자기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가장 리상적인 삶이라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최근에는 아예 생육을 거부하는 소위 딩크족도 쉽게 찾아볼수 있을 정도로 새 세대들은 생육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홀시할수 없는 엄중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20세기 60,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우리 조선족의 출산률은 비교적 높았다.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그 어려운 세월속에서도 자식 여럿을 낳아 키워온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점차 하강선을 긋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생육거부사상은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만연되여 우리 조선족인구는 이미 20세기 90년대초부터 20여년간 줄곧 마이나스장성을 이룬 상태이다. 현재 조선족집거구인 연변만 보아도 조선족인구는 전 자치주 인구의 36.57%(2010년 연변통계년감) 밖에 안된다. 조선족 인구가  이 상태로 계속 내려간다면 멀지 않아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자치주란 의미도 상실하지 않을가가 우려된다.       조선족 외자식 가정 출산념원 조사보고에 의하면 1,626세대중 두번째 아이를 낳겠다는 가정이 겨우 41세대로 2.52%밖에 안되였고 돈을 주면 두번째 아이를 낳겠다고 표시한 가정이 121세대로서 7.4%밖에 안되였다. 이외 90%이상 가정에서 남자애건 녀자애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해도 두번째 아이는 절대 낳지 않겠다고 표시하였다. 그중 가정경제가 어렵고 생활수준이 높지 못하여 두번째 아이를 낳지 못하겠다는 가정이 45.5%였고 교육비용을 감당할수 없어 두번째아이를 낳지 못하겠다는 가정이 35.6%를 차지하였다. 총체적으로 경제적원인이 80%이상을 차지하였다.       지금의 젊은 부부들은 아빠트도 사야 하고 사업에서 성과도 따내야 하기에 아이를 낳으면 생활비용과 양육비용을 감당할수 없다고 말하고있다.《청년연구》에서 상해시 서회구의 자녀양육비용을 조사한데 의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출산전 진단검사비용 1,000원좌우, 임신 9개월까지 영양품비용 3,000원좌우, 복사방지옷비용 400원, 영아용품비용 3,000원, 임산부양성비용 1,000원, 기타 3,100원. 이처럼 임신기간에만 하여도 도합 만 1,500원 좌우의 돈이 든다. 다음 출산할 때의 입원비용과 출산비용(순산했을때)이 3,000원 좌우, 출산후부터 유치원에 가기전까지의 보모고용비, 기저귀, 분유, 영양품, 유아도서, 신체검사, 진료비용 등이 약 4만5,000원 좌우 든다. 그다음, 유치원단계비용으로는 학비, 식사비, 도서, 완구구매비, 영화관람비 등 도합 6만 5,700원좌우, 소학교단계비용으로는 학교선택비, 학잡비, 책값, 학원비, 식사비, 교통비, 위생보건비, 사회실천활동비, 특장보도반비 등 도합 10만 4,000원 좌우, 중학교단계비용으로는 학교선택비, 학비, 학잡비, 책값, 보충수업비 혹은 가정교사고용비, 식사비, 위생보건비, 사회실천활동비, 교복비, 학습용품비, 용돈과 기타 지출 등 도합 16만 6,000원 좌우, 대학단계비용으로는 학비, 학잡비, 책값, 용돈, 관광, 실습비용, 식사비 등 도합 9만 5,000원 좌우 든다. 이 모든 비용을 합치면 약 49만원 정도가 드는 셈이다.       물론 상해 같은 대도시의 양육비용과 기타 중소도시의 양육비용은 다를 수 있으며 또 지방에 따라 그 차이도 크다고 본다. 우에서 렬거한 비용대로 계산한다 하여도 25세를 기준으로 한 아이가 출생부터 대학까지 졸업하는데약 50만원 좌우의 돈은 든다. 이는 월 평균 1600원좌우인 셈이다. 도시의 출근족들은 그나마 열심히 일하고 계획적으로 생활하면 이만한 경제지출을 능히 담당할 수 있지만 수입이 적은 농민들은 어려울 것이다.      부부가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는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경제적인 측면만 따지면 아이를 양육하는것이 쉽지 않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식이란 바로 한 가정의 귀중한 존재이고 부부사랑을 유지하는 뉴대이며 행복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우리 말에 "돈 놓고는 못 웃어도 아이 놓고는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부부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그속에서 힘을 얻고 삶의 용기와 희망을 가지게 된다.      중국정부에서는 일찍 우리 200만 조선족을 비롯한 인구 1,000만명 이하의 소수민족들에게 아이를 둘씩 낳을 수 있다고 허용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소수민족정책의 훌륭한 체현이다. 그런데 한때 우리는 산아제한정책을《좌》적으로 집행하는 바람에 오늘에 이르러 민족의 량적감소라는 엄중한 후과를 빚어내게 되였다. 만일 이 현상이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56개 민족가운데서 약소민족으로 전락되여 사회적지위는 물론 조선족자치주라는 독립적군체의 존재마저도 상실하지 않을가 우려된다.      사실상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으려는 생육관념은 급작스레 들이닥친 시장경제속에서 엄청난 소비지출과 낮은 수입간의 모순격차로 하여 경제부담이 과중해진데서 생겨난것이다. 정부에서는 이 문제의 엄중성을 감안하여 계획출산지도소조를 내오고 계획출산목표를 제정하였다. 즉 조선족인구장성을 고무하기 위해 여러가지 실제적인 우대조치를 취하였다. 그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부부 쌍방이 모두 농민이고 변경 향진에 거주하며 두 아이가 모두 딸애일 때: (2)재혼부부가 재혼 전 각기 아이 하나가 있을 때: (3)재혼부부가 재혼 전 일방만 두 아이가 있고 다른 일방은 25주세가 넘었지만 아이가 없을 때: (4)두 아이 중 하나가 비유전성 질병이 있어 정상적인 로동력으로 성장할수 없을 때. 이상의 조건에 부합되는 조선족부부는 다시 아이를 가질수 있다. 이외에 이미《독신자녀부모광영증》을 냇지만 다시 출산할 경우에도 원래 받은 장례금을 반환하지 않으며 두 번째 아이의 출생으로부터 16세까지 탁아비 ,입학금, 치료비 등을 독신자녀와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고 규정하였다.      나라의 민족정책과 산아제한정책이 이렇듯 소수민족의 출산을 부추겨주고있지만 우리 민족의 출산관념은 아직도 쉽게 개변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인것만은 아니다. 물론 아직도 여러가지 애로가 있지만 물질적 토대가 탄탄해지고 사회적조치가 따라가면 사람들의 관념과 인식이 조금씩 바뀌여질것이며 많은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거나 또 아이를 하나 더 낳으려할 것이다. 이미 행동에 옮긴 가정들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최근 몇 년간 필자가 근무하는 연변대학의 여러학원의 젊은 녀성교원들은 매년 륙속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이미 그 수가 60여명에 이르고 있다.     사회에서의 각종 우대정책은 물론 직장에서도 부모에게 장례금을 주고 긴 휴가도 주면서 봉금은 그대로 발급하며 학교에서는 둘째가 있는 젊은 부부의 소학생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내 주는 등 조선족의 두 번째 아이 출산은 환영과 지지를 받고 있다. 이렇게 점차 출산관념을 바꾸어 간다면 우리민족 인구증장의 미래는 밝아지지 않을가도 생각해 본다.      행위문화로서의 혼인, 가정은 물질문화 제도문화 그리고 정신문화의 복잡한 역동관계 속에서 부단히 변해왔음을 볼수 있다. 력사의 부단한 발전에 따라 세상만물도 천변만화하듯이 젊은이들의 생육관념도 부단히 움직이고 변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발달한 선진국처럼 국가의 복지가 매 가정에 락실될 때면 지어 육아도 더는 가정의 부담으로 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인생의 향수가 되어 부부마다 쟁취하고 그 복을 누리는 사랑의 열매로 될 것이다. 우리들은 보다 넓고 멀리보는 개방된 심리상태로 생육과 양육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해나아가야  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2012년 7월 제7기 잡지에 게재되였음)
20    연변인민방송국---<희망클럽21> 기자와의 인터뷰 댓글:  조회:4172  추천:12  2012-06-29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돐기념특별프로 (3)                                                                --- 정판룡교수편      기자: 선생님은 연변대학 조선한국연구중심에서 연구원으로 전직에 계실 때 정판룡교수님과 함께 사업해오신줄로 알고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위인이라고 할수 있는 정판룡교수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습니까?              강: 예, 운명의 안배였을가요? 나는 행운스럽게도 12년간이나 저명하신 민족의 대가 정판룡교수님을 보좌하여 그 슬하에서 함께 사업할 수 있는 인복을 지니였습니다.    1989년말, 연변대학 한어학부에서 사업하던 내가 정판룡교수님의 부름으로 성립주비중인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에 전근했을 때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부총장이면서 또 우리 연구중심의 주임을 겸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벌써 선견지명을 가지시고 연변대학의 민족적 학과적 특성을 살려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에 조선한국연구중심을 창립하심으로서 연변대학이 중국내에서의 조선한국학의 위상을 정립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이룩하셨습니다.    그 이후 북경대학, 중앙민족대학, 상해복단대학, 산동대학, 절강대학 등등 전국의 50여개 대학에서 선후로 한국학연구중심을 설립하여 전국의 대학학계 방방곳곳에 한국학연구의 새로운 고조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해마다 북경, 상해, 연변, 제남, 항주 등지의 주요 대학에서 륙속 한국학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판룡선생님이 연변대학에서 지피신 한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되어 전국의 대학가에서 타오르게 된 것이지요.       어데 그뿐입니까? 민족문화의 거목이셨던 선생님은 저명한 학자로서 수많은 젊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으며 우리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열과 지혜를 몰부은 훌륭한 문화지성인이시고 우리민족의 거두였습니다. 한 위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짧은 70세의 인생로정에서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교육과 문화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많고 많은 업적을 쌓아 오셨습니다. 그 숭고한 정신, 그 드넓은 흉금, 그 자애로운 얼굴, 그 우렁진 목소리는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가슴속에 아로 새겨져 무시로 우리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과 12년을 함께 사업해오면서 그분에 대해 료해도 적지 않을줄로 압니다. 선생님의 인상속에 남아있는 정판룡교수님은 어떤분이였습니까?     강: 그 누구도 그러하였듯이 처음 교수님을 대할 땐 무척 존경하면서도 또 접촉하기 어려운 분으로 여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의 그 후더운 성격과 너그러운 인품은 언제나 친 부모와 같은 뜨거운 정을 느끼게 하였으며 령도이자 스승으로서의 아낌없는 지도와 친절한 가르침은 나로하여금 항상 신심 가득히 사업에 몰두할수 있게 하였습니다.        학부사무실에서 교무공작을 하다가 과학연구부문으로 옮겨오니 처음엔 어떻게 학술연구를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나에게 주저없이 임무를 맡기고 과감히 실천해 보도록 고무격려해 주셨습니다.  기억에도 새로운 1990년 10월 한국의 한 사회학회에서 우리 연구중심과 함께《중국조선족사회연구》학술토론회를 가졌는데 10여가지 연구항목중《중국조선족녀성의 사회적지위》라는 종목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이 문제는 강동무가 맡아해야 하겠소. 녀성문제가 아니요?》라고 하시며 대담히 연구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고무와 격려에 힘을 얻은 나는 열심히 뛰여다니며 사회조사를 하고 자료들을 찾고 정력을 몰부어 연구분석하고 집필한 끝에 훌륭한 론문 한편을 써낼 수 있었고 그번 학술회발표에서 국내외학자들의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이것이 나의 첫 론문이 되어 그후 수년간 많은 연구과제를 완성해 나갈 수 있었으며 이러한 실천 과정에서 학문의 법칙과 규범을 모색하고 연구방법을 찾아내여 몇년간 30여편의 중국조선족연구와 녀성연구 론문들을 국내외 학술간물에 발표함으로서 1997년 1월에는 파격적으로 부연구원(부교수급)이라는 고급직함까지 평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참다운 가르침과 지도가 오늘의 나를 이끌어주시고 키워주셨음을 저는 언제나 잊지 않고 있으며 조금만 밀어 주면 얼마든지 커갈수 있는 그 젊은 시절에 정판룡교수님 같은 참 스승을 만난 평생의 행운으로 하여 항상 자랑을 느끼군 합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흠모를 받으며 력사가 기리는 조선족의 우수한 인물로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는데요. 교수님의 략력에 대해 먼저 소개를 주시겠습니까?    강: 예, 정판룡교수님은 1931년 10월 2일, 한국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면 향교리에서 죽세공(竹细工)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습니다.    1938년 7세때 부모형제와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여 흑룡강성 상지현 하동촌에 정착하였고 1949년 3월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195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다가 1955년 9월 구쏘련 모스크바대학 어문학부 쏘련문학강좌 연구생으로 입학하여 1960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그곳에서 레닌사범대학의 중국류학생 왕유녀사와 결혼하였습니다.    1960년 5월, 우리민족의 교육발전을 위하여 북경이나 상해의 사회과학연구부분에 얼마든지 남을수 있는 기회도 포기하고 연변대학으로 돌아와 어문학부 당총지서기 겸 부학부장으로 사업했으며 1962년부터 평론과 창작을 시작하였습니다. 문화혁명기간 , , 등등 루명을 쓰고 투쟁받고 격리당했으며 로동개조도 하였었습니다. 1968년 9월 그 모든가 해소되여 중문학부 학부장으로 임명되였고 1979년 9월에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그해 12월 교수로 승급했으며 1980년 7월 연변대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1983년 여름, 중국조선문학연구회를 성립하여 리사장으로 당선되였고 1986년 9월 국무원학위위원회에서 조선어문학박사생 지도교사로 임명되였습니다. 1988년 4월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9기인민대표대회 대표로, 1990년에는 연변주문련 부주석, 길림성문련 부주석으로 임명되였고, 1993년 1월에는 길림성영재(英才)훈장까지 수상하였습니다         1997년 3월에는 한국 KBS해외동포상 학술상을 수상하여 그 수상금중 10만원을 기부하여 를 설립하였고 그 장학금이 10여년래 국내외 지성인들과 제자들의 후원으로 30여만원까지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여명의 품질과 학업이 우수하지만 생활이 곤난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였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을 평가할 때 우리는 제일먼저 우수한 교육자의 한분이라고 얘기하는데 교육자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어떤분이였습니까?    강: 정판룡교수님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학자이며 교육가이시고 또 문학평론가이십니다. 그는 장장 40여년간의 학술 및 문필생애에서 실로 많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중국조선족 지성인 사회에서는 정판룡교수님을 민족을 위한 학자, 쉴줄모르는 문필가. 전략가적인 교육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학자적인 삶을 생명의 선택으로 간주하였기에 번중한 행정직무를 떠멘 나날에도 학술연구와 문필활동을 한시도 놓치 않았고 지도직에서 나온 뒤에는 더욱더 왕성한 정력으로 학술연구와 문필활동에 전념하셨습니다. , , 등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반영한 장편회고록과 학술저서들은 이미 우리민족 력사를 견증하는 소중한 문헌으로 되고 있으며 길이 전해갈 귀중한 자료로 되고있습니다.    정판룡교수님은 연변대학의 첫 박사생지도교수로서 수십명의 문학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내여 중국의 조선문학연구와 외국문학연구의 기반을 이룩하였으며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일떠세우는데 거대한 기여를 해 오셨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우수한 교육자이자 또한 학문을 연찬해온 학자였습니다. 학자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어떤 학문연구들을 해왔고 자랑할만한 학술성과들을 거두었습니까?    강: 정판룡교수님은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학자이고 교육자였습니다. 일찍 국비류학생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판룡교수님은 을 받들어 모교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장장 40여년간 외국문학연구가로서 우수한 업적을 남기였습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업적이 외국문학연구에서의 의 탈피를 꼽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정판룡교수님은 시대선행적인 학술적 안목으로 일찍 60년대초부터 외국문학연구에 있어서의 의 편향을 지적하였고 동서방문학을 아우르는 중문판 (총4권)을 편찬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였고 중국학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대학에 조선한국연구중심을 설립하고 조선한국학연구의 학제적연구를 추진하여 중국의 한국학연구를 선도하는 연구기관으로 성장시켰으며 중국 최초의 를 편찬, 출판하여 우리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문헌적으로 규명함으로서 교수님의 뛰여난 학술적 안목과 리더십을 훌륭히 보여주셨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20세기 중국 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학자, 교육자일뿐만아니라 또한 우수한 작가, 평론가로도 널리 알려져왔습니다. 교수님이 남긴 작품들도 적지 않은줄로 알고있는데요?    강: 정판룡교수님은 걸출한 학자, 교육자일뿐만아니라 또한 우수한 작가, 평론가였습니다. 그는 풍부한 인생경력과 탁월한 식견으로 수백만자의 기행문, 회고록, 수필, 평론 등 주옥같은 글들을 남겼습니다. 우리민족의 우수한 지성인으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시종 민족의 현황과 미래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개혁개방이후의 격변기에 있어서 민족의 운명에 대한 깊은 사고와 통찰을 실천하였는바 그이께서 제기한 론은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성격을 규명하는 명쾌한 론리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사색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기자: 의 정립은 조선족문단에서 대서특필할 사건이라고 지적하는분들도 있는데요. 정판룡문학비는 어떻게 세워지게 된겁니까?    강: 2004년 10월7일, 정판룡교수님의 서거 3주기를 기념하면서 교수님의 제자와 중국조선족문화단체의 유지인사들이 성의껏 후원한 3만여원의 헌금으로 연변대학 북쪽 와룡산 기슭에 를 세웠습니다. 문학비에는 정판룡교수가 장편회고록 에 쓰셨던 글 한 단락을 새겨 넣었는데 그 글에서 정교수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초 연길에 살구꽃, 배꽃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려 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렬차에 앉았다》라고 하셨는데    이 글귀의 마디마디에서 우리는 정교수님의 우리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민족교육에 대한 철저한 사명감, 우수한 학자로서의 유족한 삶을 버리고 자신을 키워준 조선족 동포와 연변대학에 대한 사랑을 안고 이 변강땅에 달려 온 교수님의 인격적 매력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한 대목이라 할수 있습니다.     는 연변대학캠퍼스에 영원히 뿌리밖고 후손만대에게 민족의 얼과 혼을 길이길이 전할 것입니다.    그날 또 하나의 주요행사로 을 거행하여 6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시상하였습니다. 타계하시기 직전까지도 병상에서 손수 장학금을 발급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떠 올라 모두들 숙연한 마음으로 문학비를 향해 경의를 드렸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원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임직해오면서 현대대학경영의 리념과 체계를 본격적으로 연변대학에 접목시켜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일떠세우고 연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열과 빛, 슬기와 지혜를 다 바쳐온 우리 민족의 걸출한 교육자이자 행정가라고 할수 있는데요. 연변대학교의 성장과 발전에서 교수님은 어떤 실제적인 일들을 해오셨습니까?    강: 교육가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현대대학의 정신과 사명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 등 대학의 역할을 확실하게 추진한 우리 대학의 우수한 교육행정인이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연변대학에서 학장, 부총장으로 일하면서 정판룡교수님은 으로하는 건학리념을 명확히 추진하였고 연변대학의 특성과 우세를 확립하기에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개인적 영향력을 충분히 활용하여 연변대학의 국제화를 실현하는데 크나큰 공적을 이룩하였습니다.    교수님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여 일찍 석사학위, 박사학위 수여권을 쟁취하고 20여명의 박사들을 친히 배양했으며 연변대학의 조선언어문학학과를 국가급중점학과로 육성하는데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외사를 주관하는 부총장으로 미국, 한국, 일본 등 나라의 정계와 학계의 거물들과 손잡고 김병민, 리암, 김관웅, 김호웅, 채미화 등등 40여명의 젊은학자들을 선진국의 대학들에 보내여 학문을 연찬하게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정판룡 선생님은 연변대학이 산해관을 끼고 세계로 나갈수 있는 큰 문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이 외에도 학교의 실험대로, 구락부 등 여러 건물을 짓는데도 친히 국외의 자금을 들여오고 끝까지 일을 성사하는데 큰 공헌을 하여오신 연변대학의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선생님은 소탈한 성품에 드넓은 흉금을 지니셨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뛰여난 창의력을 소유함과 동시에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감을 가진 천재적인 지성인이였습니다. 교수님은 평생의 교육실천, 학문연구, 사회활동을 통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전과 창달에 크나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이께서 이러한 업적을 이룩할수 있는데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 열렬한 인도주의 정신, 학문과 진리에 대한 끈질긴 추구 등이 핵심적인 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또 사회적인 직무도 많이 동반하면서 사회활동가로도 활약해오셨는데 사회활동가로의 교수님에 대해서도 말씀 주시겠습니까?    강: 민족문화의 태두이셨던 선생님은 저명한 학자로서 수많은 젊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으며 우리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열과 지혜를 몰부은 훌륭한 문화지성인이시고 우리민족의 수령같은 인물이였습니다. 한 위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짧은 70세의 인생 로정에서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교육과 문화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많고 많은 업적을 쌓아 오셨습니다. 그 숭고한 정신, 그 드넓은 흉금, 그 자애로운 얼굴, 그 우렁진 목소리는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마음속에 아로 새겨지고 우리의 귀전을 종종 울리군 합니다.    선생님은 민족의 전당인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뛰여난 행정력을 과시함과 동시에《연변대학의 특색은 조선한국학연구》라고 하시면서 반드시 이 유리한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고 발전 제고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친히 연구중심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내의 각 사회학과 연구기구들을 단합하여 20여차의 국제학술회와 국내외 학술활동들을 활발히 조직 지도함으로써 수많은 학술성과로 연변대학을 정상에로 끌어 올렸습니다.        1999년 5월, 청천벽력으로 불치병 진단을 받으신 후에도 선생님은 의연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완강한 의력과 투지로 병마와 싸우셨고 한두번도 견디여 내기 어렵다는 항암화료를 열두차례나 기적같이 견디여 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죽지 못하는가 보오》라고 하시며 조금만 정신이 들면 필을 들어 글을 쓰시군 셨습니다. 아마도 생명에 대한 굳은 신념, 불타는 삶의 정열이 선생님을 그렇게도 용히 버티게 하였는가 싶습니다.        2년 반이라는 기나긴 투병생활, 전후 무려 열네차례나 병원에 입원하시면서도 선생님은 항상 후학들에게 조선족사회 문제들을 피력하셨고 또《내가 알고 있는 일들은 내가 죽으면 다 파뭍혀 버리게 되니 살아 있을때 내가 다 써 놓아야하오.》라고 하시면서 우리문단의 우수한 작가, 평론가들의 일화 30여편을 매일 만여자씩 쓰시여《장백산》잡지에 련재해 주시면서 인생철리가 빛발치는 감격적인 글들로 많은 문화인들과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어데 그뿐입니까? 중국 조선족의 문화교육사업을 자신의 평생사명으로 간주하시고 투병중에도 그 힘든 몸으로 사회의 각종 지성인활동에 참가하시여 보귀한 지도와 연설을 하셨고 또 친히 한국 우리은행 비지니스클럽의 자금을 쟁취하여《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를 설립하시여 금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10년간이나 이 기금으로 만여명의 실학아동을 구하고 극빈학생들을 도와 공부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셨습니다.       학자와 교수를 떠나 한 사회활동가로서의 교수님의 공적은 실로 몇마디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우리민족문화의 태두였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의 생애와 해온 일들에 대해 얘기 나눠봤는데요. 선생님은 교수님과 함께 사업해오던 시절 기억에 남는 일들은 없었습니까?    강: 기억에 남는 일들이 너무도 많지요. 1992년의 어느하루 학교 교장직을 마치시고 연구중심 주임으로 돌아 오실때 선생님은 교장실 책장의 책을 한아름 안고 웃으시며 우리 사무실에 들어오셨습니다. 나는 얼른 책을 받아 안으면서 선생님의 자리를 어데다할가 고민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소탈하게 웃으시면서 아무자리도 괜찮으니 책상하나만 놓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일개 대학의 총장이 보통 교직원과 스스럼없이 한 사무실에서 어울리려는 그 모습을 볼때 나는 저도모르게 코등이 찡해 났습니다. 그일에 너무도 감동되여 교수님이 더 존경스러웠고 더욱더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권리라도 가지면 곧바로 거들먹거리는 현실의 일부 인간들에 비해 선생님은 정녕 어른이시고 거인이였습니다.    선생님은 또 매년 3.8절을 꼭 기억하시고 연구실 선생님들의 가족들까지 일일이 불러서 장미꽃을 선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서 대접하며 서로의 마음을 교류할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여 우리 연구원들로하여금 저마다 조직의 관심과 따사로움을 친히 느끼게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선생님이 일일이 건네주시던 향기 그윽한 장미꽃 한송이와 그 자애로운 모습이 무시로 눈앞에서 얼른 거립니다.    제일 가슴 아팠던 일은 1999년 봄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때 일입니다. 청천병력이라 우리는 너무도 놀랍고 황당하여 연구실에 있는 돈을 다 긁어서 만원의 현금을 모아 병원에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인차 그 돈을 봉투채로 돌리면서 선생님들의 편집 원고비도 아직 주지 못했는데 내가 이 돈을 쓰면 절때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일주일 전에도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곤난한 학생들을 념려하시면서 병상에서 6명의 학생들에게《정판룡교육기금 장학금》을 친히 내주셨습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려운 생의 마지막 시각에도 선생님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장학생들의 손을 일일이 굳게 잡아 주시던 그 모습은 차마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감동의 화면이였습니다.    더욱더 사람들을 경탄케 하는것은 선생님의 유언이였습니다. 평시 장학금의 운영을 걱정하시더니 세상을 떠나시면서 안해인 왕유교수님께 부탁하여 당신이 치료비로 남은 돈을 몽땅 장학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왕유교수님은 학교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글을 올려 정교수님의 유지대로 집에 남은 11만원의 저금통장을 몽땅《정판룡교육기금장학회》에 바쳤습니다. 참으로 후세에 길이 빛날 거동이요, 이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천사의 마음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또 당신이 수십년간 수장하시고 아껴 보시던 도서 2000여권을 몽땅 연구중심에 기증하시여 학자들의 연구사업에 쓰이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 댁의 서가에서 한권 한권의 책들을 뽑아 등기하고 정리하면서 우리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을 그렸습니다.   《아, 가물가물 꺼져 가면서도 유난히 밝게만 빛나던 한대의 굴직한 초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몽땅 불태우던 그 맑은 령혼, 추호의 사심도 없이 민족교육사업에 혼신을 바쳐온 거룩한 그 모습 그 덕성에 만민은 우러러 보며 높은 산도 머리숙였습니다.》                       (당년 정판룡교수님 추모문에서--강순화)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어떤 삶의 신조를 가지고 살아온분이였다고 할수 있을가요? 교수님의 인생철학과 인간적인 모습은요?    강: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교육가, 문학가, 사회활동가로 정평이 난 교수님이지만 그의 인간적인 모습인 소탈한 미소와 걸걸한 목소리, 정녕 산이면서도, 우람한 산이면서도 한뉘 민초들과 이웃하여 내물처럼 살으신 교수님의 인생철학에는 그의 신념과 사상, 사랑과 지혜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판룡교수님을 회억하고 그분이 남기신 막대한 정신적 유산을 되새겨 볼때, 우리는 한 위인의 빛발치는 인생진리를 느낄수 있습니다.    타계하기 닷새전 정판룡교수님은 우리에게《사람은 살아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여야 하오. 나의 제자들도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할수 있기를 바라오.》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이 짧은 말씀에는 타인을 위하여, 연변대학을 위하여, 지역사회를 위하여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수많은《좋은 일》을 하신 정판룡교수님의 인생체험이 녹아있는바 가히 득도와 달관의 경지에 이른, 거인이 남긴 금언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고인은 갔어도 넋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그 넋은 영원히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로 될것입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생전에 우리에게 많은것을 남겨놓고 가신분입니다. 정판룡장학기금도 그중의 한가지라고 할수 있는데요. 기금을 세우고 운영해오기 위해 교수님은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신줄로 알고있습니다. 정판룡장학기금은 지금도 그 맥을 이어가고있겠지요?    강: 예, 선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1997년 3월, 한국 서울에서 학술상으로 탄 기금중 10만원을 기초로 을 설립하고 해마다 6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였는데 2001년 서거 후 정판룡교수님 부인 왕유교수는 교수님 치료금액의 여액 11만원을 몽땅 기금회에 지원하였고 또 10여년간 해내외 유지인사들과 제자들의 후원으로 30여만원이 모여져서 이미 100여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지불되였고 지금도 계속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는 연구중심이 아닌 학교기금회에서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며 전교사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발급하고 있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자신의 평생 교육실천, 학문연구, 사회활동을 통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전과 창달에 큰 기여를 해왔고 또한 자신의 인생가치를 빛내였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우수한 별인 고 정판룡선생님을 기리며 그의 생애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눠봤는데요. 정판룡교수님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말씀 주시겠습니까?    강: 마지막으로 2001년 8월 31일《정판룡 문학편》출간기념모임에서 발표했던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한석윤 선생님의 시를 재삼 읊어 보면서 정판룡교수님에 대한 추모의 글을 마치려 합니다. 한석윤선생님의 이 시는 정판룡교수님이 서거하기 일개월 전, 선생님의 저작 출판기념회에서 읊으셨고 선생님은 그 저작을 병상에서 받으셨습니다. 저는 이 시가 정교수님을 너무도 정확히 그렸고 또 우리문화인들의 마음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였다고 생각하며 항시 다시 읊어보군 합니다. 한석윤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이 자리에서 읊어 보겠습니다.                                                                                                                                                                   스승님께 올리는 시                                                                      한 석 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였습니다                         하얀 구름 서리서리 허리에 감고                         하늘을 떠받치고 선         아아한 산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보면 내물이였습니다                         키작은 풀들과 눈맞춤하며                          도란도란 정다운 이야기 끝이 없는                         살가운 내물이였습니다.                                                          민족문화산맥의 제일봉에 오르시여                         세기의 아침해 남먼저 마중하며                         민족의 앞날에 채운을 뿌려주시면서도                          만인의 입에 도인으로 칭송받으면서도                         언제나 언제나                          맨발바람으로 고학의 길 떠나시던                         그날 그 농부의 아들로 살아오신 스승님       스승님의 그 거룩한 모습에서 저희는                         잘 익은 이삭일수록 머리 숙이고                         물이 찬 병일수록 소리가 작다는                         참인간의 정도를 깨칠 수 있었고       스승님의 그 거룩한 행실에서 저희는                          싱싱하게 피여야 할 우리 민족의 길에                         내가 설 자리, 내가 해야 할 일                         불씨로 받아 가슴에 피울 수 있었으니                                                           아, 정녕 산이면서도, 우람한 산이면서도                         한뉘 민초들과 이웃하여 내물처럼 살으신 스승님                          스승님은 언제나                         민족의 산으로 우뚝 솟아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좌표로 영원할 것입니다.                                                                                                                                               (연변인민방송국 2012.6.24,                                                        3차례방송)                                                                              
19    아빠의 일생 댓글:  조회:4519  추천:19  2012-04-02
        1934년 겨울, 일제의 쇠사슬에 억매인 한반도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의 한 농가에선 그 며칠재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들 다섯 딸 셋으로 팔남매를 둔 강씨네 가문에서는 온 가정이 만주로 떠나려고 결정한 것이다. 일제의 핍박을 조금이라도 벗어날가, 농사지어 굶지 않고 공부나 할수 있을가 ... ... 듣자니 땅 넓고 토지가 비옥하다는 만주벌에 가서 열심히 논밭을 일구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 그 처절한 가난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가 싶어서 내린 할아버지 강만조의 결심이다. 이미 출가한 두 딸은 이사짐 실은 수레바퀴를 붙안고 뒹굴며 부모님과 오빠들의 만주행을 막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할아버지 호령 한마디에 무정히도 떠나 버리는 이사짐 수레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갈라져 버린 친 혈육의 리산은 장장 반세기를 넘겼다.      1989년 남한 길이 열려 아버지 어머니가 홍콩을 에돌아 한반도 전남 장흥군의 고향에 찾아갔을 땐 그렇게 울부짖던 두 고모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나 버렸었다. 그러니 딱 55년 전 그때의 그 리별이 고모들의 말 그대로 진짜 생리별로 되었던 것이다. 팔남매 중 막내인 우리아빠는 1925년생으로 그때 아홉살의 맨발 소년이였다. 작은 회색두레마기에 헌 털모자를 꾹 눌러 쓰고 형님들 뒤를 부지런히 따라 걷는 시골아이, 세상물정은 아직 다 알수 없어도 만주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그 말에만은 귀가 솔깃하여 말없이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손발이 얼어 터져도, 걸을 맥이 없어도 감히 불만 한마디 했으랴. 얊은 겹바지에 집신만 신은 시골아이는 추위도 굶주림도 참고 견디며 용케도 따라 걸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속 길을 헤치며 몇날 며칠을 걷고 걸어 드디여 두만강변에 다달았다. 소수레는 돌려 보내고 등짐에 짐을 나누어 진채 저녘녁 어두움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섯아들 일가 10여명은 손에 손을 잡고 두만강 얼음판을 조심스레 건넜다. 어렵사리 만주땅에 들어서서 강변길을 따라 걷고 걷다가 요행 철길을 만나자 무작정 관내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단다. 며칠만에 다행히 한 기차역에서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짐차를 만났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이 사정사정하여 삭전을 얼마간 주고 짐짝처럼 실려 하루밤을 가고 나니 어슴프레 인가가 보였다. 바로 이곳이구나.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흰 두루마기, 흰 저고리치마 흩날리던 푸른 바다가의 고향 마을은 어느덧 상상할수도 없이 멀리멀리 사라져 버리고 머리태를 드리운 쪽두리 모자에 검은 솜바지 겹저고리들만 보이는 커다란 만주벌판에 들어선 것이다. 농사일은 물론 온갖 집안일까지 도맡기로 하고 한 중국집 마구간을 빌려서 행장을 풀고 자리를 잡았다. 곳은 바로 만주벌에서도 곡창인 길림성 서란현 소성진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 만주벌판은 소문 그대로 끝없이 넓었고 기름진 평안벌 옥토였다. 한평생 감농군으로 뼈를 굳혀 온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은 이렇게 이사짐을 풀어 놓은 그날부터 나무를 찍고 땅을 파고 집을 지었으며 논뚝을 만들고 강물을 끌어 들여 논밭을 일구고 고향에서 가져온 벼씨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살얼음이 끼는 이른 봄부터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1년 내내 허리 펼새 없이 일하여 벼단을 산더미만큼 무져 놓으면 반나마 중국집 주인들이 앗아가고 오형제에 자손들까지 10여명 식구들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아 갈 형편이였다.     그래도 천선적으로 총명하고 령리한 막내(아빠)만은 공부시켜야 하기에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은 겨우내 가마니를 짜고 초신을 삶아 팔아 학잡비를 마련하여 아빠의 학업을 이어 갔다. 가난한 집 애들은 먼저 섬이 든다고 공책도 없이 모래판에 글을 써도 공부는 으뜸히도 잘하여 소학은 1학년, 3학년, 6학년의 절반하여 2년반에 서란현 신안구 룡두산소학을 다 졸업하고 당시 일본놈들이 운영하는 돈이 좀 적게 든다는 위만 길림사도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제의 철저한 사도교육 채찍하에 2년제 특수반을 졸업하고 1942년 12월 서란2소에 교원으로 분배받았다.     취직하여 4년째되는 1946년1월, 아빠는 공산당 지하조직에 가담하여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입당할 땐 캄캄한 기차바구니 속에서 선서대회를 하였고 장춘 남호의 호수 가운데서 배를 타고 당지부회의를 하군 하였다고 아빠는 회억하셨다. 그후 당의 배양으로 길림성화전군정대학에 추천되여 학습하였고 3개월후에는 서란현민족동맹회소속 민족청년동맹회에 분배받아 전현 13개소의 조선족소학 소선대의 조직공작을 맡아하게 되었다. 그때 아빠는 스물한살의 열혈청년이였고 멋진 미남형의 혁명활동가였다. 낮에는 소학교 학생들의 교학을 맡아하고 밤이면 사회 청년들의 야학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채정숙이라는 예쁜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단다. 이듬해 딸애 하나를 낳았는데 얼마 안가서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워낙 극심한 가난에 영양실조였던지 아니면 아빠의 말대로 단칸방의 아기머리맡에서 학생교재를 만드느라 온밤을 망치로 두꺼운 책을 두드리는 소리에 갓난애의 작은 심장이 놀랐던 원인인지 여린 생명은 그만 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해방의 포소리가 은은히 울려 오는 1947년 11월, 늦가을 바람이 사릿문을 두드리는 새벽에 둘째딸인 나 순화를 낳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혁명밖에 몰랐던 아빠는 몇날 몇일이고 없이 밖에서 뛰여다니며 당에서 맡겨준 아동단을 묶어세우는 일과 야간학교 청년동맹사업에 온갖 심혈을 기울렸고 엄마는 혁명가의 안해답게 부녀조직을 이끌고 선전활동에 나섰다. 그러니 어린애는 차디찬 방에서 혼자 울고 있기가 일수였고 어떤날엔 불도 지피지 못해 꽛꽛이 언 기저귀를 깔고 버둥거리며 엄마를 찾아 울군했다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들은 종종 회억하시군 하였다.     아빠는 워낙 진취심이 강한 분이라 글공부를 놓치 않았으며 결국 시험을 쳐서 우수한 성적으로 당시 흑룡강 가목사시에 있은 동북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길림성교육청교육과에 분배되여 갑급과원으로 사업하게 되었다. 워낙 허약한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가정의 중임을 한몸에 지니였으며 아이를 키우면서도 언제나 사회활동에 앞장서 나서군 하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성교육청의 지시로 연변조선족들의 한어교육사업을 위하여 아빠는 연변에 파견되였고 왕청현문교과 과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 아빠는 24세밖에 안된 혁명청년이였다. 워낙 강의한 성격에다 위만사도교육까지 받아서인지 아빠의 공작작풍은 과격하다시피 엄격하였고 원칙과 규률앞에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었다고 한다. 하여 그때 아빠의 별명은 [면도칼]이란다. 그 누구라도 학교 행사나 회의에 지각만 하면 아예 교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고 그때의 제자와 동료들은 말하군 한다.     1951년에는 연변한어사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여 연길로 전근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상처하였었고 세살난 딸애 나를 군복외투에 싸안은 빈몸 뿐이였다. 아빠가 혁명사업으로 밖에서만 나돌때 엄마는 항미원조전쟁에서 페병을 얻고 돌아온 외삼촌을 집에서 시중하다가 결국 외삼촌도 죽고 엄마도 전염되였던 것이다. 그때는 페병이라면 불치의 병으로 여기는 시대였다. 조직에서는 관심하여 귀한 마이싱 베니싱을 날라다 줬지만 좁살죽도 바로 못먹고 세살애기가 떠주는 찬물만 마셨다니 어찌 약이 들며 병이 나으랴? 결국 엄마는 22세 꽃나이에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 죽음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살 어린것은 이불에 말아 방에서 들어 내오는 죽은 엄마가 병원에 갔다 다시 오시는 줄만 알았으니 말이다.     집과 약간의 가장집물은 당시 왕청의 한 중등전업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모에게 몽땅 줘 버리고 아빠는 딸 순화만 안고 연길행 기차에 올랐다. 젊은 아빠가 안고 있는 반양머리의 귀여운 애기를 서로 어루만져 보며《엄마는 어데가고 아빠하고만 가느냐》하는 길손들의 물음에 아빠는 그만 목이 메였다한다. 그들이 어찌 이 젊은청년의 불행과 비통을 알수 있었으랴 ?!     연길 하남 국수집 뒷방에서, 공원의 한 할머니집에서 1년간 기숙생활을 하면서 어떤 땐 애둘곳이 없어 학교에 데리고 가서는 학생들 옆에 앉혀 놓고 교학을 하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네살 딸애를 연길보육원 전탁에 맡끼고 아빠는 밤낮이 따로 없이 학교사업에만 몰두하였다.     1952년 가을 직장동료의 소개로 아빠의 요구에 맞는 신체가 건강하고 딸애를 이뻐하는 한 소학교 교원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아빠와 반세기를 함께하여 온 김현숙녀사이다. 이듬해 가을 아들을 낳았는데 8월9일 새벽, 태양이 떠 오를 때 태여났다고 명욱이라고 이름지었고 1년반 만에 또 딸을 나았는데 4월8일 봄에 핀 꽃이라 춘화라 이름 지었다.     온 집안의 가사는 결혼때부터 함께 산 외할머니가 총괄 하였고 큰딸인 내가 온갖 잔심부름은 도맡아 하였다. 아빠는 매달 신봉을 봉투채로 장모에게 맡겼다. 집에 들어서면 밥상이 앞에 차려질 때 까지 신문을 손에서 놓치 않았고 밥을 자시고는 곧바로 학교에 가는 외 집안일은 전혀 보지도 묻지도 않았다. 우리 어린마음에 아빠는 정녕 당과 인민의 충복이고 초유록같은 혁명가이며 교육가였다. 1957년에는 또 중앙교육학원에 가서 심리학, 교육학, 철학을 전공한 후 그 바쁜 령도사업 외에도 언제나 교학일선에서 강의까지 하시 군 하였다.     1960년 7월 전국적으로 철학학습 고조가 일어날 무렵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그 시기를 뜻하여 철학철자로 강철이라 하였다. 그후 2년간 련속 닥쳐 온 전국적인 자연재해로 인하여 량식공급은 줄어들고 부식도 제한되는 바람에 아빠는 영양실조에다 과로로 이미 얻었던 결핵병이 도지게 되었다. 외할머니까지 일곱식구의 생활이란 대식품을 보태도 이어대기 힘들때이니 아빠의 영양보충은 할 방법이 없었다. 조직에서는 할수 없이 아빠를 향촌에 있는 한 료양원에 가서 치료받게 하였다. 그려구려 시간이 지나니 아빠의 결핵은 개화되고 다시 출근할수 있었다. 60년대초 흉년시기 여나무살된 내가 아빠와 함께 심산속에 찾아가서 피나무 껍질을 벗겨 오던 그 세월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둘째딸 춘화는 그때 대식품 떡을 먹고 뒤가 굳어 아우성을 쳤고 결국 꼬쟁이로 똥덩이를 뚜져내기까지 하였다. 막내딸 영화는 가을 달빛에 났다고 애명이 추월이다. 후에 언니들을 따라 영화로 고쳤다. 막내가 태여난 60년대 중반은 그래도 세월이 좀 나아져 밥은 먹을 수 있었고 얼음과자도 종종 사서 먹을수 있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다섯애들이 너도나도 하나뿐인 밥소래를 당겨가며 서로 뒤질세라 꼬량밥을 퍼 먹어대던 시절이 어제 같다.     1966년 설상가상으로《문화대혁명》이 터져 20년간 공산당서기, 교장을 맡아 온 아빠는  하루아침에《자본주의 길로 가는 집권파》로, 투쟁대상으로 전락되었다. 당시 연변한어사범은 도문시에 하방하여 내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이 학교가 최고학부이니 시장이나 시위서기 보다도 더 먼저 학교주요령도인 아빠가 투쟁대상으로 된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아들 따님으로 남들의 부렴을 한몸에 지니고 사랑받았던 5형제는 하루아침에 서리맞은 병아리 신세로 되었다. 소위《검은5류》(지주, 부농, 반혁명, 특무, 당권파)자녀로 몰려 홍위병에도 못 가입하고 남들이 다 가는 북경의 홍위병련계(北京串联)대렬에도 가담할수 없었다. 결국은 개별적으로 뒤따라가기는 했었지만 ... ... .    처음으로 아빠《강일우를 타도한다!》는 커다란 대자보가 우리집 문앞에 붙었을때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넋을 잃은 사람마냥 정신이 아찔해 났다. 세상에《제국주의를 타도 한다》던가 《장개석을 타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어떻게 우리아빠 같이 철저한 혁명가를 타도한다는 말이 다 있는가?!  그날  아빠는 저녘에 가정회를 열고 피어린 가족사를 회억했으며 아빠는 결코 혁명가이지 반혁명이 아님을 호소하였다. 놀란 애들은 얼마나 위축당하고 억울했으면《우리 아빠는 왜 보통 로동자나 농민이 아니고 령도간부가 되어 이렇게 당권파로 몰리는가》하고 원망까지 했으랴?!     당시 연변한어사범《반란파》들이 17년간의 학교 계획보고서와 총결보고문을 몽땅 뒤져서 뽑아낸 강일우의 소위 54조 수정주의교육로선 죄행은 아빠가 그당시 홍위병들에게 하나하나 밝혀 놓다시피 아빠가 만들어 낸 말은 한마디도 없고 모두가 그시기 당중앙의 후설인《인민일보》와《붉은기》잡지의 사설문 문구들이였다.  2년 남짓이 수백차의 비판투쟁을 해 봤자 아빠는 오직 평생 혁명에 충성했음이 철저히 밝혀지자 도문시에서는 아빠가 또 제일 처음으로《혁명령도간부》로 해방되였고《3결합》(혁명간부, 공인대표, 학생대표)으로 구성된 당시 최고 권력기구인《학교혁명위원회》주임으로 임명되었다.     항상 낡은 회색 간부복을 입고 목에《자본주의 길로 가는 당권파》라는 패말을 걸고 400여차의 투쟁을 받았던 아빠가 학교혁명위원회《붉은 인감》을 손에 들고  다시 정권을 잡았음을 과시하며 다른 혁명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천여명 사생행렬의 앞장에 서서 위풍당당히 도문시 거리를 시위할 때 우리 가족들은 기쁨과 희열이 아닌 그 어떤 허무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착찹한 심정으로하여 비오듯 눈물만 흘렸다.     문화혁명 10년의 동란이 우리 아빠에게 준 정신타격과 우리 온 가정에 들씌운 불행은 정녕 몇마디 말로 표연할수 없는 한 시대의 비극였다. 허나 그 비극의 주인공이 다시 우뚝 일떠섰고 그 비극 속 불행아들이 역경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다섯형제 모두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올바르고 곧게 자라서 시대의 행운아로, 나라의 인재들로 되었으니 인젠 아빠에 대한 그때 그 원망이 감은(感恩)의 마음으로 바뀌여 지금은 이렇게 우리 다섯 형제들을 훌륭히 키워 준 존경하는 아빠한테 항상 깊이 깊이 감사할 뿐이다.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아빠의 학교는 연길에서 도문으로 도문에서 세린하로 세린하에서 또다시 연길로 수차 이사를 다녔지만 아빠는 그 어느 곳에서나 수년을 하루와 같이 조선족의 한어전문인재양성을 위하여 온갖 심열을 다 바쳤으며 모든 일에서 의신작칙하고 자신의 모범적 역할로 군중을 감화시켜 교원과 학생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다. 아빠는 평생 령도사업을 하면서도 교학도 겸임하였고 학생들과 함께 농장에 내려가 고락을 함께 하고 체육활동에도 교원들과 함께 참가하여 당시 청년들도 따기 힘든《로위제 2급》까지 쟁취하였다. 그 로위제 시험을 치느라 도문에서 석현까지 왕복 60리 장거리를 달려 오고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집에 와서 쓰러지던 모습이며 축구를 하다 넘어져서 무릎을 다 벗겨버려 피투성이 된채 집에 오셨던 일들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한번은 학생들과 함께 두만강에 나가 수영을 했는데 한 녀학생이 깊은 물에 빠져 누구도 감히 뛰여들지 못할때 아빠는 선뜻 강물에 뛰여들어 그 녀학생을 구해냈다. 이를 목격한 사생들은 강교장은 우리의 교장선생님일 뿐 아니라 친부모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냈다. 아침이면 늘 학교 교실을 한바퀴 돌아보았고 점심이면 학생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하고 저녘이면 학생숙소를 돌아보며 학생들의 학습생활을 료해하였다. 지도일군의 이런 공작작풍은 광범한 교원과 학생들에게 커다란 고무를 주었다.     1978년 아빠는 길림성인사청에서 발급한 교육전업 고급강사 직함을 가졌고 1985년 12월 정년퇴직때까지 수차 성로력모범, 주우수공산당원, 주민족단결모범, 우수교장 등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 안았다. 아빠의 일생을 돌아 보면 참으로 어린시절은 고난의 일생이였고 청춘시절은 투쟁의 일생이였으며 중년과 로년시기는 정녕 사회활동가, 민족교육가의 일생이였다.     1985년 말 정년리직 후에야 아빠는 비로소 가정의 소중함을 한층 느끼고 있는 듯 싶었다. 집에서 엄마의 일손도 잘 도왔고 엄마와 함께 자식들 집도 종종 돌아보고 친척방문도 잘 다녔으며 한국, 북경 등지의 유람도 즐기셨다. 평시에는 로간부처의 후대양성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자전거를 타고는 소화룡촌 해란강변에 찾아가서 종일 고기낚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때는 소화룡촌에 뻐스도 없었는지라 왕복 60리를 자전거로 오르내리고는 힘져서 휘청거리며 앓아 눞기도 하였다. 그래도 혈압약과 보건약만은 명심해 드시면서 80까지는 문제없이 산다고 장담하시군 하던 아빠였다.     그런데 인간의 운명이란 가늠할 수 없는 것, 장수하시겠다던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것이였다. 바로 전날 엄마와 함께 두 딸집에 찾아가서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막내딸 새집에서 목욕도 깨끗이 하시고 매우 기뻐 하셨는데 이튿날 (1997년 12월 29일) 아침, 사범학교에서 년말총결대회를 한다고 하면서 참가하여 술은 안마시니까 녀선생들과 화토나 재밋게 노시겠다고 하시던 아빠는 갑자기 뇌중추 대출혈로 한시간 반의 구급치료도 못 받으시고 그만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청천병력이였다. 남들은 복하게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자식들의 마음에는 어데 될 말인가? 병시중 하루도 못해드리고 갑자기 그렇게 가시니 가슴은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졌다. 아빠가 싸늘한 시체로 되여 연변병원 뒤뜰안의 태평방에 들어 갈 때 우리 자식들은 금시 숨이 막혀 버렸고 정신없이 절규하고 오열하였다.       그래도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가 로년에 크게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었고 또 엄마가 대신 13년 더 앉으셔서 좋은세상 더 보시고 자식들의 효도도 받으셨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아빠의 72년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우리민족의 력사 그 자체였다. 나라를 일떠세우는 항일운동가로부터 신중국 건설의 중견 일군으로, 로 교육가로서의 일생은 우리민족 교육력사에 한페지를 기록할만한 분이시다. 아빠 생전에도 그러했듯이 우리는 훌륭한 아빠의 자식들임에 항상 자랑을 느꼈고 행복했었다. 엄격하고 근면하고 간고소박한 아빠의 기질을 본받아 다섯형제 모두 성실히 잘 살고 있으니 하늘나라에 가신 아빠도 또 이미 고인이 되신 엄마(2010년 2월 21일 서거) 도 안심은 하시리라 생각한다.     1930년대 한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너와 장장 반세기를 이땅의 혁명과 건설에 몸바쳐 온 아빠는 해방전쟁시기에는 우리민족 2세의 선각자이며 투사였고 혁명가였다. 사회주의 건설시기 아빠는 교육가로 사회활동가로 민족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굳히셨고 그 험난한《문화대혁명》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떠선 용사같은 분이셨다. 개혁개방 후 교육개혁과 발전에도 불후의 공적을 남긴 우수한 교장이요, 우수한 공산당원이다. 연변의 한어교육이 제 괴도에 오르고 우리민족교육이 13억의 앞장에 서게 된 데는 아빠의 평생 노력도 얼마간 깃들어 있는 듯 싶다. 길림성 교육계통과 연변의 교육계는 아빠를 잊지 않고 있으며 온 세상 방방 곳곳에서 꽃피고 열매 맺는 수천수만의 제자들은 아빠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아빠는 가치있는 인생을 살았고 태산보다 무거운 삶을 살았다. 이제 우리 자식들이 그 뒤를 이어 빛을 뿌리고 더 큰 열매를 맺으리라. 아빠의 대를 이은 자식과 손군들이 이미 20명에 이르러 화목하게 훌륭하게 살고 있으니 하늘나라에 계신 아빠께서도 만족하고 계시리라. 존경하는 아빠여 부디 안심하시라!                                                                                                                            2012년 청명에 즈음하여        (  [注] :   아빠 ---  연변제1사범학교 전임 교장  강일우,     필자 ---  강일우  선생의  큰딸  강순화 )
18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댓글:  조회:4833  추천:28  2011-10-02
      “추억의 길목” 응모작품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글 / 강 순 화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더니 늙었다 하기엔 아직 이른것 같은데도 젊은시절의 추억만 떠올리면 어쩐지 가슴부터 울렁거린다. 6-70년대의 중학생이였다면 거의다 겪어 온 일이겠지만 새파란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온 그 광활한 대지에 사랑과 련민이 남아서일가? 아니면 그 시절에 얼키고 설키였던 아픔과 방황, 정열과 랑만 때문일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바래지고 잊혀진 그 흑백의 인생드라마들이 갑자기 오색찬연한 칼라로 바뀌여 주마등마냥 눈앞을 스친다.     무지개 같은 희망에만 부풀어있던 19살 중학생이《지식청년》이란 신식 모자를 쓰고 일곱 년륜의 춘하추동을 저 산너머에서《재교육》을 받아왔다. 소를 몰고 두엄을 끄고 모를 심고 기움을 매던 그 고달픈 기억들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더우기 그 향촌학교의 교직생활, 시골애들과 뛰놀며 글을 가르치고 노래를 배워주던 그 젊음의 추억들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청춘의 멜로디였다.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으로           1968년 가을,《인민일보》첫면에《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하여 66, 67, 68년급, 3기의 초,고중 졸업생들은 모두다 광활한 천지 - 농촌으로 재교육 받으러 가야했다. 남부러워하는 교육자의 가정에서 태여나 문학가의 꿈을 키워오던 천진랑만한 장미꽃소녀는 하루아침에《문화대혁명》의 된서리를 맞고《당권파》딸로,《검은5류》자녀로 전락되였다. 대학에 추천되고 입당도 눈앞에 두었었는데 그 금빛찬란한 희망은 휘몰아쳐오는 폭풍취우에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오직《모든것은 모주석의 지시대로》해야만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지고무상의 정치요, 항변할수 없는 철칙이며 그 세대 8천만 중학생들에게 락인된 특이한 이력서였다.         붉은기가 휘날리고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환송소리 속에서 우리는 어록책을 손에 들고 이불짐을 등에 멘채 커다란 해방패 트럭에 빼곡이 실려 아무런 주저도, 두렴도 없이 용감하게 도시를 떠났다. 얼마를 살고 돌아올지 말지도 모르는 삶의 불모지를 향해 근심어린 부모님들의 얼굴을 뒤에 남긴채 우리는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룡정을 벗어나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계곡을 꿰질러 그리 넓지 않은 흙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고 달려 당도한 곳은 바로 변강산촌 백금향이였다. 또다시 두만강기슭을 따라 20여리 길을 더 내려가서야 우리의 종착지인 심포마을에 도착하였다. 열 다섯호의 인가들이 하얀벽의 한옥차림으로 산비탈에 옹기종기자리 잡고 있었는데 마을 동쪽 언덕우에 번듯이 지어놓은《집체호》붉은 벽돌집은 그야말로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았다. 김대장과 마을사람의 열정적인 안내로 우리는 행장들을 풀어놓고는 우선 서넛씩 사원들의 집에 나누어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인가가 드믄 그 시골에서는 마치 무슨 경사나 난듯이 집집이 두부를 앗고 시루떡을 쪄서 도시에서 온《지식청년》을 환대하였다. 반나절이나 트럭에서 부대낀 우리는 처음으로 농촌의 순두부며 떡이며 구수한 된장국을 마주하게 되자 너나없이 계눈감추듯 퍼 먹어댔다. 참으로 진주성찬이 따로 없었다.       저녘을 먹고 밖에 나가 보니 마을 앞에는 푸르른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가 보였다.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는 이웃나라 조선의 인가들이 어슴프레 보이고 있어 참으로 신기한 변강산촌 이였다. 도시의 온갖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우리들은 시골마을 산등성에 조용히 불타오르는 저녁노을이며, 푸르른 논밭과 앞마당의 각가지 남새 그리고 뒷산의 울긋불긋한 과수나무들이 그렇게 신비롭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열네명의 애숭이《지식청년》들은 이렇게《집체호》라는 특이한 대가정의 호주가 되여 함께 살게 된것이다.                                                햇내기들의 농사일 배우기       새 환경의 새 기분도 잠간, 농촌의 생활과 로동이란 그렇게 랑만적인 것만은 아니였다.《일년 농사는 봄에 달렸다》하여 아직 겨울철 찬 기운이 감도는 이른 봄부터 밭에 나서면 음력설을 쇨 때까지 사시장철 들판에서 헤매야 했다. 녀자애들이 자랑해야 할 예쁜 얼굴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꽃치마 한번 입어 볼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기운 광목바지와 초록색 군복웃옷에 약진패 머리수건을 접어쓰면 그것이 류행이고 시체멋이였다. 간고소박이 미덕이니 색부치나 꽃무늬 옷들은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엄금했었으니 말이다. 허나 그 두만강기슭에서의 하많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채색드라마로 되여 오늘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농촌이란 새 천지에 당도하여 제일 처음으로 닥친 일은 가을걷이와 싣걱질이였다. 서투른 솜씨로 낫에 손을 베여가며 벼가을을 끝내자 또 논밭에 무져 놓은 벼단들을 하루바삐 탈곡장에 실어 들여야 했다. 도시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소수레를 몰아야 하는데 아무리 겁모르고 덤벼든다 하여도 햇내기들이라 그 천근무게의 육중한 소발에 밟혀 아우성치며 쩔뚝거리기가 일수였고 벼단을 쌓아 실은 수례를 논뚝에서 번져버리는 등 실수 또한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가을 싣걱질이 끝나면 또 탈곡을 해야 하는데 그때 어데 지금과 같은 현대화기계가 있었는가? 생산대에 두대 밖에 없는 반자동 탈곡기로 코구멍이 까맣게 되어가지고 몇날씩 밤도와 벼를 탈곡해야 했다. 싸늘한 늦가을의 탈곡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할라치면 판들판들하던 깜장눈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벼낟가리에 처박히기가 십상이였다. 음력설 후부터는 또 새해 농사에 쓸 비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소똥, 돼지똥들을 꺼서는 밭에 실어내야 했다. 곡괭이질이 서툰 우리는 온 얼굴에 두엄을 들쓰기가 일수였고 가끔은 입안에까지 튀겨 넣어 저마다 고양이 락태상이 되군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한여름 불볕에서 조이밭 두벌기음을 매는 일이였다. 두만강기슭의 밭고랑들은 어찌나 사래가 긴지 아예 점심 도시락을 허리춤에 차고 시작해야 했다. 밭고랑 중간까지 매고나면 어느덧 해가 구중천에 떠올라 그 자리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잠간 허리 쉼을 하고는 또다시 다그쳐 김을 매서야 저녁해를 등지고 돌아 올수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검실검실 타들었고 야들야들한 손바닥에는 줄줄이 장알들이 박혔다. 허나《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당년의《지식청년》들은 누구 하나 뺑소니를 치지 않았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단련된다더니 우리들이야 말로 농촌이라는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서 일하고 배우며 튼튼한 실농군으로 되어갔다.                                                   산골과 집체호의 이야기        두메산골 백금향 심포마을의 생활형편이란 말 그대로 가난하고 말끔하였다. 집집마다 장롱에 이불을 얹어놓으면 그것이 전부였고 좀 살림이 괜찮다는 집은 정주간에 큰 식장을 갖춰놓고 그 우에 커다란 꽃 대야들을 두개씩 엎어서 몇쌍 올려 놓으면 그것이 바로 부의 상징이였다. 온 마을에 기철이네 딱 한 집에 17촌짜리 흑백텔레비가 있어서 저녁 후이면 마을 남녀로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모여앉아 연변뉴스와 당시 류행했던 일본드라마를 보군 하였다.       가난한 시골이지만 인품만은 더없이 좋았다. 아직 남새가 나지 않는 초봄에는 집집이 밥에다 간장만 찍어먹을 형편이지만 청명이 되면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일인당 한두근씩 똑같이 나누었고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떡이나 두부 같은 색다른 음식도 온 동네가 똑같이 만들어 먹었다.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집체호에 찾아와서 김치도 담가주고 산나물과 터밭의 남새들도 뜯어다 주었다.     그때만 해도 도시는 배급제였지만 농촌에 오니 그래도 밥만은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그런데 부식이란 뒷산의 돌배와 퍼런 복숭아 뿐인지라 그저 하루 세끼 밥이 죽어났다. 1인당 800근씩 주는 1년 식량은 항상 부족해서 년말이면 또 생산대에 손을 내밀군 하였다. 어데 그뿐인가 콩가을 때면 밭머리에 둘러앉아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지피고는 입이 새까맣게 콩서리를 했고 강변 모래밭에 락화생을 심으라고 종자를 나눠주면 한 절반은 우선 자기 입에다 심어버리고 마니 밭에 나는 싹은 가물에 콩이 나듯 아예 솎아버릴 념려가 없게 되였다. 사원들은 억이 막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는 이《재교육대상》들 때문에 농민들도 여간만 애먹지 않은 것 같다.                                                 지식청년의 향촌 교직생활          범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시골에는 대학생은 고사하고 나같은 고중졸업생이면 최고학력자였다. 1년후 나는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민반교원으로 되였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심포학교에는 전교 학생이라야 50명도 안되지만 소학 1학년부터 중학 3학년까지의 반급들이 다 있었다. 교원은 모두 4명이였는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반급은 두 학급 학생을 한 교실에 갈라 앉히고 흑판가운데 줄을 그어 놓고는 복식강의를 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이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올라 겨울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교실의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였다. 모든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은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다. 일곱살 난 소학교 1학년생으로부터 열여섯살 초중 3학년생까지 크고작은 애들이 하학 종소리만 울리면 함께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치고 닥치고 하면서 즐겁게 뛰놀군 하였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오붓한 시골학교의 특이한 풍경이요, 변강산촌의 푸르른 희망이였다.                                                      시대의 불행아가 행운아로           1975년 봄,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갈수 있다는 당중앙의 정책에 따라 우리는 모두 기를 나누어 성시로 돌아왔다. 그 험난한 시골도 어느덧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떠나올 땐 마을의 어른, 아이들과 눈물로 헤어져야만 했다. 연길시에 돌아 온 이튿날로 나는 연변대학인쇄공장에 찾아갔다. 대학을 갈망하던 마음으로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대학교재를 만드는 일이면 최고인듯 싶었다. 과연 공장령도에서는 교원출신인 나를 선뜻이 받아주었다. 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여 해마다 학교의 선진공작자로 되군했다.      취직하여 2년이 되던 1977년 10월, 국무원에서는 교육부의《1977년 대학교모집사업에 관한 의견》을 비준하고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하였다. 이는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우리들에게 다시금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희망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때는 우리 66년급 고중생들로 말하면 모두 30대 나이였고 거의 다 결혼을 하였었지만 대학공부를 해 보려는 꿈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들애를 해산한지 두달도 안되는 몸이였지만 다시 얻을수 없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어 퉁퉁 부은 얼굴을 해 가지고 10여년간 놓아버린 고중교재들을 다시 복습하며 대학입시준비에 밤을 지새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같은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졸업의 영예를 받아 안고 대학교의 연구기관에서 훌륭하게 사업할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연변대학이란 이 신성한 직장에 내발로 찾아와서 일하며 배우고 진보하면서 한 인쇄공으로부터 대학학부의 교학비서로, 나아가서는 연구소의 부교수급 연구원으로 성장하여 오늘날 정년에 이르기까지 33년간을 일하여 온 것이다.     《추억의 길목》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 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히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 특수 년대의 열혈청춘들이 이제는 지천명(知天命)을 지나고 이순(耳順)에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본문은 2011년 9월1일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와                                               중공연변주위 잡지사에서 공동 주최한                                              《추억의 길목》응모에서--- [우수상]을 획득하였음.)                                                                                                                             
17    민족문화의 거목 정판룡교수님을 기리며 댓글:  조회:4186  추천:24  2011-09-26
                                        금년 10월 7일은 우리 조선민족의 걸출한 교육가이시며 문학가이시고 사회활동가이신 연변대학교 전임 부총장 정판룡교수님의 서거 10주기 기념일입니다. 민족문화의 거목이셨던 선생님은 저명한 학자로서 수많은 젊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으며 우리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열과 지혜를 몰부은 훌륭한 문화지성인이시고 우리민족의 거두였습니다. 한 위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짧은 70세의 인생 로정에서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교육과 문화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많고 많은 업적을 쌓아 오셨습니다. 그 숭고한 정신, 그 드넓은 흉금, 그 자애로운 얼굴, 그 우렁진 목소리는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가슴속에 아로 새겨져 무시로 우리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운명의 안배였을가요? 나는 행운스럽게도 12년간이나 이렇게 저명하신 민족의 대가 정판룡교수님 슬하에서 함께 사업할 수 있는 인복을 지니였습니다.     1989년말, 연변대학 한어학부에서 사업하던 내가 선생님의 부름으로 성립주비중인 조선한국연구중심에 전근했을 때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부총장이면서 또 우리 연구중심의 주임을 겸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벌써 선견지명을 가지시고 연변대학의 민족적 학과적 특성을 살려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에 조선한국연구중심을 창립하심으로서 연변대학이 중국내에서의 조선한국학의 위상을 정립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이룩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러하였듯이 처음 교수님을 대할 땐 무척 존경하면서도 또 접촉하기 어려운 분으로 여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의 그 후더운 성격과 너그러운 인품은 언제나 친 부모와 같은 뜨거운 정을 느끼게 하였으며 령도이자 스승으로서의 아낌없는 지도와 친절한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항상 신심 가득히 사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학부사무실에서 교무공작을 하다가 과학연구부문으로 옮겨오니 처음엔 어떻게 학술연구를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나에게 주저없이 임무를 맡기고 과감히 실천해 보도록 고무격려해 주셨습니다.     기억에도 새로운 1990년 10월 한국의 한 사회학회에서 우리 연구중심과 함께《중국조선족사회연구》학술토론회를 가졌는데 10여가지 연구항목중《녀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종목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이 문제는 강동무가 맡아해야 하겠소. 녀성문제가 아니요?》라고 하시며 대담히 연구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고무와 격려에 힘을 얻은 나는 열심히 사회조사를 하고 자료를 찾고 정력을 몰부어 연구하고 집필한 끝에 학술회에서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은 한편의 훌륭한 론문을 써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첫 론문이 되어 그후 수년간 많은 연구과제를 완성해 나갈 수 있었으며 이러한 실천 과정에서 학문의 법칙과 규범을 모색하고 연구방법을 찾아내여 몇년간 30여편의 중국조선족연구와 녀성연구 론문들을 국내외 학술간물에 발표함으로서 1997년 1월에는 파격적으로 부연구원이라는 고급직함까지 평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참다운 가르침과 지도가 오늘의 나를 이끌어주시고 키워주셨음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으며 조금만 밀어 주면 얼마든지 커갈수 있는 그 젊은 시절에 정판룡교수님 같은 참 스승을 만난 평생의 행운으로 하여 항상 자랑을 느끼군 합니다.     선생님은 민족의 전당인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뛰여난 행정력을 과시함과 동시에《연변대학의 특색은 조선한국학연구》라고 하시면서 반드시 이 유리한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고 발전 제고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친히 연구중심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내의 각 사회학과 연구기구들을 단합하여 20여차의 국제학술회와 국내외 학술활동들을 활발히 조직 지도함으로써 수많은 학술성과로 연변대학을 정상에로 끌어 올렸습니다.     1999년 5월, 청천벽력으로 불치병 진단을 받으신 후에도 선생님은 의연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완강한 의력과 투지로 병마와 싸우셨고 한 두번도 견디여 내기 어렵다는 항암화료를 열두차례나 기적같이 견디여 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죽지 못하는가 보오》라고 하시며 조금만 정신이 들면 필을 들어 글을 쓰시군 하셨습니다. 아마 생명에 대한 굳은 신념, 불타는 삶의 정열이 선생님을 그렇게도 용히 버티게 하였는가 싶습니다.     2년 반이라는 기나긴 투병생활, 전후 무려 열네차례나 병원에 입원하시면서도 선생님은 항상 후학들에게 조선족사회 문제들을 피력하셨고 또《내가 알고 있는 일들은 내가 죽으면 다 파뭍혀 버리게 되니 살아 있을때 내가 다 써 놓아야하오.》라고 하시면서 우리문단의 우수한 작가, 평론가들의 일화 30여편을 매일 만여자씩 쓰시여《장백산》잡지에 련재해 주시면서 인생철리가 빛발치는 감격적인 글들로 독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어데 그뿐입니까? 중국 조선족의 문화교육사업을 자신의 평생사명으로 간주하시고 투병중에도 그 힘든 몸으로 사회의 각종 지성인활동에 참가하시여 보귀한 지도와 연설을 하셨고 또 친히 한국 우리은행 비지니스클럽의 자금을 쟁취하여《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를 설립하시여 금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9년간이나 이 기금으로 만여명의 실학아동을 구하고 극빈학생들을 도와 공부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일주일 전에도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곤난한 학생들을 념려하시면서 병상에서 6명의 학생들에게《정판룡교육기금장학금》을 친히 내주셨습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려운 생의 마지막 시각에도 선생님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장학생들의 손을 일일이 굳게 잡아 주시던 그 모습은 차마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감동의 화면이였습니다.     더욱더 사람들을 경탄케 하는것은 선생님의 유언이였습니다. 평시 장학금의 운영을 걱정하시더니 떠나시면서 안해 왕유선생님께 치료하고 남은 돈을 몽땅 장학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왕유선생님은 학교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글을 올려 정선생님의 유지대로 집에 남은 11만원의 저금통장을 몽땅《정판룡교육기금장학회》에 바쳤습니다. 참으로 후세에 길이 빛날 거동이요 천사의 마음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또 당신이 수십년간 수장하시고 아껴 보시던 도서 2000여권을 몽땅 연구중심에 기중하시여 학자들의 연구사업에 쓰이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서가에서 한권 한권의 책들을 뽑아 등기하고 정리하면서 우리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을 그렸습니다.     아, 가물가물 꺼져 가면서도 유난히 밝게만 빛나던 한대의 굴직한 초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몽땅 불태우던 그 맑은 령혼, 추호의 사심도 없이 민족교육사업에 혼신을 바쳐온 거룩한 그 모습 그 덕성에 만민은 우러러 보며 높은 산도 머리숙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무도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일찍 훌륭한 스승님을 잃었습니다. 선생님이 키워 주고 이끌어 주신 수많은 제자들은 영원히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으며 오늘도 선생님을 한없이 그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70주년 생일날에 제자들에게《사람은 살아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여야 하오.》라고 진지하게 부탁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우리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너무도 많이 하셨는데 그렇게도 일찍 떠나가시니 그 슬픔에 하늘도 울부짖었고 땅도 통곡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서거 10주기를 추모하면서 우리는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꼭 훌륭히 사업해 나갈것이며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모든 정력과 지혜를 다 바칠것입니다.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하늘나라에서라도 항상 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에《정판룡 문학편》출간기념모임에서 발표했던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한석윤 선생님의 시를 재삼 읊어 보면서 정판룡교수님에 대한 추모의 글을 마칩니다.                                                                                                                                                                                     2011. 9. 26                          스승님께 올리는 시                                                           한 석 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였습니다                    하얀 구름 서리서리 허리에 감고                    하늘을 떠받치고 선                    아아한 산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보면 내물이였습니다                    키작은 풀들과 눈맞춤하며                    도란도란 정다운 이야기 끝이 없는                    살가운 내물이였습니다.                    민족문화산맥의 제일봉에 오르시여                    세기의 아침해 남먼저 마중하며                    민족의 앞날에 채운을 뿌려주시면서도                    만인의 입에 도인으로 칭송받으면서도                    언제나 언제나                    맨발바람으로 고학의 길 떠나시던                    그날 그 농부의 아들로 살아오신 스승님                    스승님의 그 거룩한 모습에서 저희는                    잘 익은 이삭일수록 머리 숙이고                    물이 찬 병일수록 소리가 작다는                    참인간의 정도를 깨칠 수 있었고                    스승님의 그 거룩한 행실에서 저희는                    싱싱하게 피여야 할 우리 민족의 길에                    내가 설 자리, 내가 해야 할 일                    불씨로 받아 가슴에 피울 수 있었으니                    아, 정녕 산이면서도, 우람한 산이면서도                    한뉘 민초들과 이웃하여 내물처럼 살으신 스승님                    스승님은 언제나                    민족의 산으로 우뚝 솟아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좌표로 영원할 것입니다.                                                                                                   2001년 8월 31일                      
16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대학가의 퇴직 녀성들 댓글:  조회:4680  추천:17  2011-08-05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대학가의 퇴직 녀성들                                                                                       글 / 강 순 화   《참 요즘 로인들은 나이에 비해 젊으셨구나》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60 이 청춘이라는 말이 이제는 공연한 치하의 말이 아니다. 70, 80 이 되어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례가 많고 90세이상 로인들을 만나는것도 예전처럼 신기하고 흥분되는 경험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고령화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해주는 현실이다.    여기에서 나는 현시대 로인들의 모범이 될수 있는 연변대학 로간부처의 녀성탁구조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들은 모두가 연변대학에서 30-40년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한 60-70대 녀성들이다. 재직때에는 모두가 의사요, 교수요, 처장이요, 과장이요, 주임이요 하던 녀성강자들이였는데 퇴직 후에는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제2의 인생을 함께 가꾸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코기러기가 있으니 그는 바로 강철의 녀인으로 불리는 김문희 의사이다.    원 연변대학병원의 부주임의사였던 김문희선생을 두고 모두들 강철의 녀인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의 남다른 경력과 굳센의지 때문이리라. 34년간 대학교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무수한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건강과 기쁨을 가져다 준 모범의사였지만 자신의 아들애에게는 예방주사 한대도 제때에 놓아주지 못하여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리게 만든 가슴에 한이 맺힌 녀인이다. 허나 그는 불행을 힘으로 바꾸어 그 눈물겨운 역경을 억세게도 이겨냈으니 참으로 강철의 녀인임에 손색이 없다.    젊은 시절에는 병원의 출근시간 외에도 아픈 아들애를 등에 업고 약가방을 들고 학교내 교직공들은 물론 그 가족과 학생들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해 주고 환자의 마지막 길까지 지켜주던 모범 의사였고 불구자로 된 아들애에게는 항상《너는 다리가 아파도 총명한 머리와 튼튼한 두손이 있으니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고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 주어 그 아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여 끝내는 인재로 성장되게 한 훌륭한 교육자였다.    그 불구자 아들은 지금 할빈공업대학 계산기응용분야의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은 어엿한 연변대학계산기계의 교수이며 주임이다. 같은 학과의 훌륭한 녀성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데 그 딸 최경화학생은 몇해전에 벌써 전주 4천명이 참가한 백일장 경연에서 최고상인《장원상》까지 취득한 신동이다. 올해에는 연변1중을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도전하여 666점의 우수한 성적으로 중국의 명문대학인 절강대학에 입학하였다.    원 연변대학 물리계 교수이며 주임이였던 김문희의사의 남편은 일찍 뇌혈전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지만 김문희 의사는 10여년간 남편을 정성들여 시중하면서도 의연히 연변대학퇴직녀성탁구조의 조장직을 맡고 비가오나 눈이 오나 수년을 하루와 같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퇴직녀사들을 이끌어 왔다.   그는 매일 아침 남편에게 점적 주사를 놓고 모든 시중을 끝낸 후 오전 한시간씩 테니스를 치고 오후에는 또 퇴직반의 탁구조에 와서 생전 탁구채도 잡아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손에 손잡고 일일이 가르쳐 주면서 훈련시킨 훌륭한 교련이였다. 재직때엔 병원에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켜줬다면 퇴직 후에는 운동으로 여러분들의 예방치료를 멋지게 해 주어 만년의 건강과 행복을 만들어 주는 백의 천사이다.     이렇게 하는 데는 그의 운동소질에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소유한 남을 위하는 고귀한 품성,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열정적인 지지와 솔선수범하는 행동은 여러사람들을 고무격려하고 있다. 하여 이 탁구조 10여명의 우수한 탁구운동원들은 60-70세의 나이에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날랜 솜씨로 치고 박으며 뛰는가 하면 80 에 가까운 황정원, 박영숙등 녀사들의 탁구치는 모습은 참으로 경탄할만한 일이다.   《집에 있으면 맥이 없다가도 학교에 나와 탁구만 치면 힘이 솟는다》고 오애순 녀사는 말한다. 그들의 흥취와 쾌락은 바로 그들만이 느낄수 있는 작은 탁구공의 무궁한 매력이 주는 것이다. 이 따뜻한《사랑의 집체》성원들은 1년 사시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매일 학교에 나와 운동 뿐 아니라 배움에도 게으르지 않으며 노래도 배우고 춤도 추고 태극권도 배우고 등산도 여행도 조직하면서 즐겁고 아름다운 만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금시대는 50-60은 중년이고 70-80 이 되어야 로년이라고 한다. 관념의 부동은 생산적활동, 건강장수, 그리고 안정된 삶의 유지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떵떵거리고 살았어도 60 이 넘어 실버시대에 이르러 병들고 궁색스럽게 살게 된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삶이요, 반면에 젊은 나이에 고생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고달픈 나날을 살았어도 60 이 넘어서부터 건강하고 안정되고 인간다운 삶을 산다면 그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연변대학 퇴직반 녀성탁구조의 교실에서는 경쾌한 노래소리가 울려 퍼진다.             다정한 벗들아 탁구를 칩시다        작디작은 탁구공이 우리를 부른다          오고 가는 탁구공 웃음꽃 피우고    격렬한 공방전에 박수갈채 드높다          아아 벗들아 다정한 벗들아           남은 인생 건강 위해 즐겁게 탁구치자             다정한 벗들아 탁구를 칩시다        작디작은 탁구공이 우리를 부른다          소중한 우정으로 가슴을 덥히고     자랑찬 이야기로 웃음꽃 피우자          아아 벗들아 다정한 벗들아           남은 인생 건강 위해 즐겁게 탁구치자    강철의 녀인 김문희선생이 이끄는 연변대학퇴직반 녀성탁구조 성원들은 오늘도 래일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탁구를 치고 있다. 이 아니 황혼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아닌가?!                                                                                             2011년 로인절을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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