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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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일생
2012년 04월 02일 16시 45분  조회:4518  추천:19  작성자: 강순화

        1934년 겨울, 일제의 쇠사슬에 억매인 한반도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의 한 농가에선 그 며칠재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들 다섯 딸 셋으로 팔남매를 둔 강씨네 가문에서는 온 가정이 만주로 떠나려고 결정한 것이다. 일제의 핍박을 조금이라도 벗어날가, 농사지어 굶지 않고 공부나 할수 있을가 ... ... 듣자니 땅 넓고 토지가 비옥하다는 만주벌에 가서 열심히 논밭을 일구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 그 처절한 가난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가 싶어서 내린 할아버지 강만조의 결심이다. 이미 출가한 두 딸은 이사짐 실은 수레바퀴를 붙안고 뒹굴며 부모님과 오빠들의 만주행을 막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할아버지 호령 한마디에 무정히도 떠나 버리는 이사짐 수레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갈라져 버린 친 혈육의 리산은 장장 반세기를 넘겼다.

     1989년 남한 길이 열려 아버지 어머니가 홍콩을 에돌아 한반도 전남 장흥군의 고향에 찾아갔을 땐 그렇게 울부짖던 두 고모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나 버렸었다. 그러니 딱 55년 전 그때의 그 리별이 고모들의 말 그대로 진짜 생리별로 되었던 것이다. 팔남매 중 막내인 우리아빠는 1925년생으로 그때 아홉살의 맨발 소년이였다. 작은 회색두레마기에 헌 털모자를 꾹 눌러 쓰고 형님들 뒤를 부지런히 따라 걷는 시골아이, 세상물정은 아직 다 알수 없어도 만주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그 말에만은 귀가 솔깃하여 말없이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손발이 얼어 터져도, 걸을 맥이 없어도 감히 불만 한마디 했으랴. 얊은 겹바지에 집신만 신은 시골아이는 추위도 굶주림도 참고 견디며 용케도 따라 걸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속 길을 헤치며 몇날 며칠을 걷고 걸어 드디여 두만강변에 다달았다. 소수레는 돌려 보내고 등짐에 짐을 나누어 진채 저녘녁 어두움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섯아들 일가 10여명은 손에 손을 잡고 두만강 얼음판을 조심스레 건넜다. 어렵사리 만주땅에 들어서서 강변길을 따라 걷고 걷다가 요행 철길을 만나자 무작정 관내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단다. 며칠만에 다행히 한 기차역에서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짐차를 만났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이 사정사정하여 삭전을 얼마간 주고 짐짝처럼 실려 하루밤을 가고 나니 어슴프레 인가가 보였다. 바로 이곳이구나.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흰 두루마기, 흰 저고리치마 흩날리던 푸른 바다가의 고향 마을은 어느덧 상상할수도 없이 멀리멀리 사라져 버리고 머리태를 드리운 쪽두리 모자에 검은 솜바지 겹저고리들만 보이는 커다란 만주벌판에 들어선 것이다. 농사일은 물론 온갖 집안일까지 도맡기로 하고 한 중국집 마구간을 빌려서 행장을 풀고 자리를 잡았다. 곳은 바로 만주벌에서도 곡창인 길림성 서란현 소성진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 만주벌판은 소문 그대로 끝없이 넓었고 기름진 평안벌 옥토였다. 한평생 감농군으로 뼈를 굳혀 온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은 이렇게 이사짐을 풀어 놓은 그날부터 나무를 찍고 땅을 파고 집을 지었으며 논뚝을 만들고 강물을 끌어 들여 논밭을 일구고 고향에서 가져온 벼씨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살얼음이 끼는 이른 봄부터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1년 내내 허리 펼새 없이 일하여 벼단을 산더미만큼 무져 놓으면 반나마 중국집 주인들이 앗아가고 오형제에 자손들까지 10여명 식구들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아 갈 형편이였다.

    그래도 천선적으로 총명하고 령리한 막내(아빠)만은 공부시켜야 하기에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은 겨우내 가마니를 짜고 초신을 삶아 팔아 학잡비를 마련하여 아빠의 학업을 이어 갔다. 가난한 집 애들은 먼저 섬이 든다고 공책도 없이 모래판에 글을 써도 공부는 으뜸히도 잘하여 소학은 1학년, 3학년, 6학년의 절반하여 2년반에 서란현 신안구 룡두산소학을 다 졸업하고 당시 일본놈들이 운영하는 돈이 좀 적게 든다는 위만 길림사도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제의 철저한 사도교육 채찍하에 2년제 특수반을 졸업하고 1942년 12월 서란2소에 교원으로 분배받았다.

    취직하여 4년째되는 1946년1월, 아빠는 공산당 지하조직에 가담하여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입당할 땐 캄캄한 기차바구니 속에서 선서대회를 하였고 장춘 남호의 호수 가운데서 배를 타고 당지부회의를 하군 하였다고 아빠는 회억하셨다. 그후 당의 배양으로 길림성화전군정대학에 추천되여 학습하였고 3개월후에는 서란현민족동맹회소속 민족청년동맹회에 분배받아 전현 13개소의 조선족소학 소선대의 조직공작을 맡아하게 되었다. 그때 아빠는 스물한살의 열혈청년이였고 멋진 미남형의 혁명활동가였다. 낮에는 소학교 학생들의 교학을 맡아하고 밤이면 사회 청년들의 야학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채정숙이라는 예쁜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단다. 이듬해 딸애 하나를 낳았는데 얼마 안가서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워낙 극심한 가난에 영양실조였던지 아니면 아빠의 말대로 단칸방의 아기머리맡에서 학생교재를 만드느라 온밤을 망치로 두꺼운 책을 두드리는 소리에 갓난애의 작은 심장이 놀랐던 원인인지 여린 생명은 그만 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해방의 포소리가 은은히 울려 오는 1947년 11월, 늦가을 바람이 사릿문을 두드리는 새벽에 둘째딸인 나 순화를 낳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혁명밖에 몰랐던 아빠는 몇날 몇일이고 없이 밖에서 뛰여다니며 당에서 맡겨준 아동단을 묶어세우는 일과 야간학교 청년동맹사업에 온갖 심혈을 기울렸고 엄마는 혁명가의 안해답게 부녀조직을 이끌고 선전활동에 나섰다. 그러니 어린애는 차디찬 방에서 혼자 울고 있기가 일수였고 어떤날엔 불도 지피지 못해 꽛꽛이 언 기저귀를 깔고 버둥거리며 엄마를 찾아 울군했다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들은 종종 회억하시군 하였다.

    아빠는 워낙 진취심이 강한 분이라 글공부를 놓치 않았으며 결국 시험을 쳐서 우수한 성적으로 당시 흑룡강 가목사시에 있은 동북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길림성교육청교육과에 분배되여 갑급과원으로 사업하게 되었다. 워낙 허약한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가정의 중임을 한몸에 지니였으며 아이를 키우면서도 언제나 사회활동에 앞장서 나서군 하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성교육청의 지시로 연변조선족들의 한어교육사업을 위하여 아빠는 연변에 파견되였고 왕청현문교과 과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 아빠는 24세밖에 안된 혁명청년이였다. 워낙 강의한 성격에다 위만사도교육까지 받아서인지 아빠의 공작작풍은 과격하다시피 엄격하였고 원칙과 규률앞에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었다고 한다. 하여 그때 아빠의 별명은 [면도칼]이란다. 그 누구라도 학교 행사나 회의에 지각만 하면 아예 교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고 그때의 제자와 동료들은 말하군 한다.

    1951년에는 연변한어사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여 연길로 전근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상처하였었고 세살난 딸애 나를 군복외투에 싸안은 빈몸 뿐이였다. 아빠가 혁명사업으로 밖에서만 나돌때 엄마는 항미원조전쟁에서 페병을 얻고 돌아온 외삼촌을 집에서 시중하다가 결국 외삼촌도 죽고 엄마도 전염되였던 것이다. 그때는 페병이라면 불치의 병으로 여기는 시대였다. 조직에서는 관심하여 귀한 마이싱 베니싱을 날라다 줬지만 좁살죽도 바로 못먹고 세살애기가 떠주는 찬물만 마셨다니 어찌 약이 들며 병이 나으랴? 결국 엄마는 22세 꽃나이에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 죽음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살 어린것은 이불에 말아 방에서 들어 내오는 죽은 엄마가 병원에 갔다 다시 오시는 줄만 알았으니 말이다.
    집과 약간의 가장집물은 당시 왕청의 한 중등전업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모에게 몽땅 줘 버리고 아빠는 딸 순화만 안고 연길행 기차에 올랐다. 젊은 아빠가 안고 있는 반양머리의 귀여운 애기를 서로 어루만져 보며《엄마는 어데가고 아빠하고만 가느냐》하는 길손들의 물음에 아빠는 그만 목이 메였다한다. 그들이 어찌 이 젊은청년의 불행과 비통을 알수 있었으랴 ?!

    연길 하남 국수집 뒷방에서, 공원의 한 할머니집에서 1년간 기숙생활을 하면서 어떤 땐 애둘곳이 없어 학교에 데리고 가서는 학생들 옆에 앉혀 놓고 교학을 하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네살 딸애를 연길보육원 전탁에 맡끼고 아빠는 밤낮이 따로 없이 학교사업에만 몰두하였다.

    1952년 가을 직장동료의 소개로 아빠의 요구에 맞는 신체가 건강하고 딸애를 이뻐하는 한 소학교 교원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아빠와 반세기를 함께하여 온 김현숙녀사이다. 이듬해 가을 아들을 낳았는데 8월9일 새벽, 태양이 떠 오를 때 태여났다고 명욱이라고 이름지었고 1년반 만에 또 딸을 나았는데 4월8일 봄에 핀 꽃이라 춘화라 이름 지었다.

    온 집안의 가사는 결혼때부터 함께 산 외할머니가 총괄 하였고 큰딸인 내가 온갖 잔심부름은 도맡아 하였다. 아빠는 매달 신봉을 봉투채로 장모에게 맡겼다. 집에 들어서면 밥상이 앞에 차려질 때 까지 신문을 손에서 놓치 않았고 밥을 자시고는 곧바로 학교에 가는 외 집안일은 전혀 보지도 묻지도 않았다. 우리 어린마음에 아빠는 정녕 당과 인민의 충복이고 초유록같은 혁명가이며 교육가였다. 1957년에는 또 중앙교육학원에 가서 심리학, 교육학, 철학을 전공한 후 그 바쁜 령도사업 외에도 언제나 교학일선에서 강의까지 하시 군 하였다.

    1960년 7월 전국적으로 철학학습 고조가 일어날 무렵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그 시기를 뜻하여 철학철자로 강철이라 하였다. 그후 2년간 련속 닥쳐 온 전국적인 자연재해로 인하여 량식공급은 줄어들고 부식도 제한되는 바람에 아빠는 영양실조에다 과로로 이미 얻었던 결핵병이 도지게 되었다. 외할머니까지 일곱식구의 생활이란 대식품을 보태도 이어대기 힘들때이니 아빠의 영양보충은 할 방법이 없었다. 조직에서는 할수 없이 아빠를 향촌에 있는 한 료양원에 가서 치료받게 하였다. 그려구려 시간이 지나니 아빠의 결핵은 개화되고 다시 출근할수 있었다. 60년대초 흉년시기 여나무살된 내가 아빠와 함께 심산속에 찾아가서 피나무 껍질을 벗겨 오던 그 세월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둘째딸 춘화는 그때 대식품 떡을 먹고 뒤가 굳어 아우성을 쳤고 결국 꼬쟁이로 똥덩이를 뚜져내기까지 하였다. 막내딸 영화는 가을 달빛에 났다고 애명이 추월이다. 후에 언니들을 따라 영화로 고쳤다. 막내가 태여난 60년대 중반은 그래도 세월이 좀 나아져 밥은 먹을 수 있었고 얼음과자도 종종 사서 먹을수 있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다섯애들이 너도나도 하나뿐인 밥소래를 당겨가며 서로 뒤질세라 꼬량밥을 퍼 먹어대던 시절이 어제 같다.

    1966년 설상가상으로《문화대혁명》이 터져 20년간 공산당서기, 교장을 맡아 온 아빠는  하루아침에《자본주의 길로 가는 집권파》로, 투쟁대상으로 전락되었다. 당시 연변한어사범은 도문시에 하방하여 내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이 학교가 최고학부이니 시장이나 시위서기 보다도 더 먼저 학교주요령도인 아빠가 투쟁대상으로 된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아들 따님으로 남들의 부렴을 한몸에 지니고 사랑받았던 5형제는 하루아침에 서리맞은 병아리 신세로 되었다. 소위《검은5류》(지주, 부농, 반혁명, 특무, 당권파)자녀로 몰려 홍위병에도 못 가입하고 남들이 다 가는 북경의 홍위병련계(北京串联)대렬에도 가담할수 없었다. 결국은 개별적으로 뒤따라가기는 했었지만 ... ... .

   처음으로 아빠《강일우를 타도한다!》는 커다란 대자보가 우리집 문앞에 붙었을때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넋을 잃은 사람마냥 정신이 아찔해 났다. 세상에《제국주의를 타도 한다》던가 《장개석을 타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어떻게 우리아빠 같이 철저한 혁명가를 타도한다는 말이 다 있는가?!  그날  아빠는 저녘에 가정회를 열고 피어린 가족사를 회억했으며 아빠는 결코 혁명가이지 반혁명이 아님을 호소하였다. 놀란 애들은 얼마나 위축당하고 억울했으면《우리 아빠는 왜 보통 로동자나 농민이 아니고 령도간부가 되어 이렇게 당권파로 몰리는가》하고 원망까지 했으랴?!

    당시 연변한어사범《반란파》들이 17년간의 학교 계획보고서와 총결보고문을 몽땅 뒤져서 뽑아낸 강일우의 소위 54조 수정주의교육로선 죄행은 아빠가 그당시 홍위병들에게 하나하나 밝혀 놓다시피 아빠가 만들어 낸 말은 한마디도 없고 모두가 그시기 당중앙의 후설인《인민일보》와《붉은기》잡지의 사설문 문구들이였다.  2년 남짓이 수백차의 비판투쟁을 해 봤자 아빠는 오직 평생 혁명에 충성했음이 철저히 밝혀지자 도문시에서는 아빠가 또 제일 처음으로《혁명령도간부》로 해방되였고《3결합》(혁명간부, 공인대표, 학생대표)으로 구성된 당시 최고 권력기구인《학교혁명위원회》주임으로 임명되었다.

    항상 낡은 회색 간부복을 입고 목에《자본주의 길로 가는 당권파》라는 패말을 걸고 400여차의 투쟁을 받았던 아빠가 학교혁명위원회《붉은 인감》을 손에 들고  다시 정권을 잡았음을 과시하며 다른 혁명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천여명 사생행렬의 앞장에 서서 위풍당당히 도문시 거리를 시위할 때 우리 가족들은 기쁨과 희열이 아닌 그 어떤 허무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착찹한 심정으로하여 비오듯 눈물만 흘렸다.

    문화혁명 10년의 동란이 우리 아빠에게 준 정신타격과 우리 온 가정에 들씌운 불행은 정녕 몇마디 말로 표연할수 없는 한 시대의 비극였다. 허나 그 비극의 주인공이 다시 우뚝 일떠섰고 그 비극 속 불행아들이 역경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다섯형제 모두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올바르고 곧게 자라서 시대의 행운아로, 나라의 인재들로 되었으니 인젠 아빠에 대한 그때 그 원망이 감은(感恩)의 마음으로 바뀌여 지금은 이렇게 우리 다섯 형제들을 훌륭히 키워 준 존경하는 아빠한테 항상 깊이 깊이 감사할 뿐이다.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아빠의 학교는 연길에서 도문으로 도문에서 세린하로 세린하에서 또다시 연길로 수차 이사를 다녔지만 아빠는 그 어느 곳에서나 수년을 하루와 같이 조선족의 한어전문인재양성을 위하여 온갖 심열을 다 바쳤으며 모든 일에서 의신작칙하고 자신의 모범적 역할로 군중을 감화시켜 교원과 학생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다. 아빠는 평생 령도사업을 하면서도 교학도 겸임하였고 학생들과 함께 농장에 내려가 고락을 함께 하고 체육활동에도 교원들과 함께 참가하여 당시 청년들도 따기 힘든《로위제 2급》까지 쟁취하였다. 그 로위제 시험을 치느라 도문에서 석현까지 왕복 60리 장거리를 달려 오고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집에 와서 쓰러지던 모습이며 축구를 하다 넘어져서 무릎을 다 벗겨버려 피투성이 된채 집에 오셨던 일들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한번은 학생들과 함께 두만강에 나가 수영을 했는데 한 녀학생이 깊은 물에 빠져 누구도 감히 뛰여들지 못할때 아빠는 선뜻 강물에 뛰여들어 그 녀학생을 구해냈다. 이를 목격한 사생들은 강교장은 우리의 교장선생님일 뿐 아니라 친부모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냈다. 아침이면 늘 학교 교실을 한바퀴 돌아보았고 점심이면 학생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하고 저녘이면 학생숙소를 돌아보며 학생들의 학습생활을 료해하였다. 지도일군의 이런 공작작풍은 광범한 교원과 학생들에게 커다란 고무를 주었다.

    1978년 아빠는 길림성인사청에서 발급한 교육전업 고급강사 직함을 가졌고 1985년 12월 정년퇴직때까지 수차 성로력모범, 주우수공산당원, 주민족단결모범, 우수교장 등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 안았다. 아빠의 일생을 돌아 보면 참으로 어린시절은 고난의 일생이였고 청춘시절은 투쟁의 일생이였으며 중년과 로년시기는 정녕 사회활동가, 민족교육가의 일생이였다.

    1985년 말 정년리직 후에야 아빠는 비로소 가정의 소중함을 한층 느끼고 있는 듯 싶었다. 집에서 엄마의 일손도 잘 도왔고 엄마와 함께 자식들 집도 종종 돌아보고 친척방문도 잘 다녔으며 한국, 북경 등지의 유람도 즐기셨다. 평시에는 로간부처의 후대양성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자전거를 타고는 소화룡촌 해란강변에 찾아가서 종일 고기낚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때는 소화룡촌에 뻐스도 없었는지라 왕복 60리를 자전거로 오르내리고는 힘져서 휘청거리며 앓아 눞기도 하였다. 그래도 혈압약과 보건약만은 명심해 드시면서 80까지는 문제없이 산다고 장담하시군 하던 아빠였다.

    그런데 인간의 운명이란 가늠할 수 없는 것, 장수하시겠다던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것이였다. 바로 전날 엄마와 함께 두 딸집에 찾아가서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막내딸 새집에서 목욕도 깨끗이 하시고 매우 기뻐 하셨는데 이튿날 (1997년 12월 29일) 아침, 사범학교에서 년말총결대회를 한다고 하면서 참가하여 술은 안마시니까 녀선생들과 화토나 재밋게 노시겠다고 하시던 아빠는 갑자기 뇌중추 대출혈로 한시간 반의 구급치료도 못 받으시고 그만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청천병력이였다. 남들은 복하게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자식들의 마음에는 어데 될 말인가? 병시중 하루도 못해드리고 갑자기 그렇게 가시니 가슴은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졌다. 아빠가 싸늘한 시체로 되여 연변병원 뒤뜰안의 태평방에 들어 갈 때 우리 자식들은 금시 숨이 막혀 버렸고 정신없이 절규하고 오열하였다.  

    그래도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가 로년에 크게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었고 또 엄마가 대신 13년 더 앉으셔서 좋은세상 더 보시고 자식들의 효도도 받으셨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아빠의 72년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우리민족의 력사 그 자체였다. 나라를 일떠세우는 항일운동가로부터 신중국 건설의 중견 일군으로, 로 교육가로서의 일생은 우리민족 교육력사에 한페지를 기록할만한 분이시다. 아빠 생전에도 그러했듯이 우리는 훌륭한 아빠의 자식들임에 항상 자랑을 느꼈고 행복했었다. 엄격하고 근면하고 간고소박한 아빠의 기질을 본받아 다섯형제 모두 성실히 잘 살고 있으니 하늘나라에 가신 아빠도 또 이미 고인이 되신 엄마(2010년 2월 21일 서거) 도 안심은 하시리라 생각한다.

    1930년대 한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너와 장장 반세기를 이땅의 혁명과 건설에 몸바쳐 온 아빠는 해방전쟁시기에는 우리민족 2세의 선각자이며 투사였고 혁명가였다. 사회주의 건설시기 아빠는 교육가로 사회활동가로 민족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굳히셨고 그 험난한《문화대혁명》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떠선 용사같은 분이셨다. 개혁개방 후 교육개혁과 발전에도 불후의 공적을 남긴 우수한 교장이요, 우수한 공산당원이다. 연변의 한어교육이 제 괴도에 오르고 우리민족교육이 13억의 앞장에 서게 된 데는 아빠의 평생 노력도 얼마간 깃들어 있는 듯 싶다. 길림성 교육계통과 연변의 교육계는 아빠를 잊지 않고 있으며 온 세상 방방 곳곳에서 꽃피고 열매 맺는 수천수만의 제자들은 아빠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아빠는 가치있는 인생을 살았고 태산보다 무거운 삶을 살았다. 이제 우리 자식들이 그 뒤를 이어 빛을 뿌리고 더 큰 열매를 맺으리라. 아빠의 대를 이은 자식과 손군들이 이미 20명에 이르러 화목하게 훌륭하게 살고 있으니 하늘나라에 계신 아빠께서도 만족하고 계시리라. 존경하는 아빠여 부디 안심하시라! 
                                                         
                                                                2012년 청명에 즈음하여

  
    (  [注] :   아빠 ---  연변제1사범학교 전임 교장  강일우,    
필자 ---  강일우  선생의  큰딸  강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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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설야
날자:2013-10-12 16:16:13
글을 다 읽고나니 감회와 감탄의 소용돌이속에서 좀처럼 헤어나올 수가 없네요. 정말 진정 인간답고 사나이다운 인생을 살다가신 멋진 량반임에 틀림없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내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박식하고 강직하고 견정불이한 신념을 지니시어 후회없는 인생을 살다가신 분!
이런 아빠의 슬하에서 자란 그 자식들 역시 차이나면 얼마나 날까요? 강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점을 내내 감지했습니다.글을 통해 강선생님도 역시 박식하고 따뜻하시며 그 아버지에 그자식이라고...역시 아빠 똑떼닮은 신조굳은 녀사임을, 학자임을 절감하게 됩니다.따라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구경 참된 인생이란 어떤것인가를 한층 더 깊게 깨닫게 되였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2   작성자 : 강순화
날자:2012-04-16 10:30:52
로선생님:
감사합니다.
1   작성자 : 로웅선
날자:2012-04-09 08:35:52
강순화 선생님 저는 선생 부친의 명복을 빌고 빕니다
선생님 계속 건필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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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마당발 녀인" 2013-01-31 13 4692
21 달라지는 새 세대들의 출산관념 2012-08-16 15 4187
20 연변인민방송국---<희망클럽21> 기자와의 인터뷰 2012-06-29 12 4170
19 아빠의 일생 2012-04-02 19 4518
18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2011-10-02 28 4832
17 민족문화의 거목 정판룡교수님을 기리며 2011-09-26 24 4180
16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대학가의 퇴직 녀성들 2011-08-05 17 4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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