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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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와의 상봉이야기
2024년 04월 11일 14시 01분  조회:782  추천:0  작성자: 강순화
 
                     이모와의 상봉이야기
                                                                                 글 / 강 순 화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더니 요즘따라 부쩍 옛 추억을 더듬음은 왜서일가? 몇해간 코로나 나날들의 지루한 일상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년륜에 따르는 인지상정일가? 아무튼 나에게 한분 밖에 없는 이모와의 상봉은 강산이 변해도 네번이 변해서야 겨우 이루어 질수 있었으니 나에겐 너무도 보귀한 하나의 인생추억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무정했었는지? 아니면 운명의 조화였던지? 세살도 안되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이모에게 업혀 자라던 이 조카딸은 그후 또 이모와도 갈라져 버려야 했다. 1950년대 초, 길림성 교육청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가 연변에 파견되여 왕청현 교육국 국장을 담임했었는데 3년 후엔 또 상급의 지시로 연변의 한어교육을 위해 <한어사범>을 설립할 임무를 안고 연길로 조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모는 왕청 기차역에서의 그 리별 순간이 수년 후에도 눈앞에 종종 떠오르며 늘 가슴이 아파났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새파랗게 젊은 25세 청년으로 군복외투에 세살난 딸애를 감싸 안고 들가방 하나를 달랑 든채 길을 떠났다. 아직 죽음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애기인 나는 아빠 품에서 엄마를 찾으며《병원 간 엄마는?》하고 졸라대자 《엄마는멀리갔다...》,《이모는?》,《이제 안녕!해야지 ... ...》아빠의 랭정한 대답이다. 철부지인 나는 고사리 손으로 아빠 입을 마구 막으며 이모도 함께 가자고 울며불며 떼를 썼다고 한다.

    그때 갈라져서 내가 다섯살 나던 해 이모는 한번 연길로 찾아오고는 오랜 세월 서로 연락도 없이 살았었다. 나의 머릿속엔 이모가 그때 우리집에 찾아와서 새언니 눈치를 보며 몰래 나를 둘처 업고는 밖에 나가서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마 일찍 죽은 언니가 너무 불쌍하고 또 어미 잃은 이 조카딸이 너무도 가여워서 슬프고 또 슬펏을 것이다.

    아빠와 내가 왕청을 떠날그때, 항창 중학에 다니고 있은 이모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생전의 부탁대로 반주임 댁에 기거하기로 했었단다. 함께 살았던 부모 같은 언니를 잃고 조카와 형부까지 눈물로 떠나보내고 나니 이모는 몇날몇일 가슴이 꽉 막혀서 숨도 바로 쉬기 힘들었다 한다. 반주임 선생님은 이모더러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야 가슴이 풀린다고 했다.마침 청명이 돌아와 이모는 선생님을 따라 그집 로인들의 산소에 갔었는데 곁사람들이 통곡하는 그 분위기에 이모도 덩달아 실컷 소리내여 울었단다. 그랬더니 과연 뭉쳐 있던 마음속 엉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더란다. 그 세월에 사람들은 가슴에 맺힌 한과 설음을 그저 그렇게 풀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세월은 흘러흘러 어느덧 20세기 90년대 초, 10년 강산이 네번이나 변한 어느 여름날, 이모는 어쩌다 또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동안 이모는 혼자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출가하여 딸 다섯을 키워왔단다. 이모부는 그해 병으로 돌아 가셨으며 딸들은 모두 커서 셋은 출가하고 둘은 중학에 다닌다고 했다. 이모는 큰 결심으로 먼 타성에서 길을 떠나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도 만나보시고 새 언니와 동생들도 만나면서 한 열흘 계시다가 가셨다.

    그번에 오셔서 이불장에 있는 나의 낡은 첫날이불을 뜯어보고는 그렇게 슬피 우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엄마나 이모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헌 솜을 주어모아 새색시 이불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시집 갔을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결혼하던 그 70년대에는 첫날 옷감도 이불등도 솜도 마음대로 살수 없어서 남의 집에 수소문하여 얻었고, 집의 낡은 솜으로 겨우 이불 한 채를 만들었었다. 새색시 짐이란 15원짜리 풍천트렁크 하나에 붉은 어록책 몇권과 집체호에서 나들이로 입던 검정 고리둥 옷 한벌을 개여 넣고 떠났던 것이다. 례단은 시어머니가 세수수건과 양발 등을 쎄트로 준비해 줘서 그나마 친척들께 인사선물로 내놓을 수 있었다. 이모가 그것까지 다 알았으면 더더욱 가슴이 저렸을 것이다. 

    몇년 후의 어느 가을날,나도 시간을 내여 이모가 계시는 흑룡강성 계동에 찾아갔었다. 오랜만에 이모와 동생들도 만났고 또 탄광마을의 특이한 생활도 체험하며 즐거운 상봉의 나날을 보내였다. 난생처음으로 철갑모를 쓰고 매제가 출근하는 계동탄광의 깊은 갱도에도 들어가 보고 또 호탕한 광부들과 함께 식사하며 많은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다.

    그런데 재밋는 것은 그쪽 풍습이라나? 식구들이 모여 놀다가 식사시간이 되였는데 이모와 딸들을 비롯한 녀인네들은 그냥 나를 배동해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세 사위쟁이들이 벌떡 일어서더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나가는 것이였다. 준비한 식자료들을 헤치고 화기애애하게 토론하더니 제법 여덟가지나 되게 맛있는 요리들을 척척 만들어 낸 것이였다. 삽시간에 밥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참으로 우리 연변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이다.

    인젠 옛날같지 않게 동생들 모두가 생활이 피였고 이모도 새 아빠트에 들어서 편히 계시고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 되였다.같이 살고 있는 넷째딸 내외가 하도 알뜰히 챙겨드리고 잘 보살펴 드리니 이모는 식사도 잘하시고 텔레비도 잘 보시며 마음은 안정되고 계신듯 했다. 이젠 모든 고생이 다 옛말로 되였으니 좋은 세상에 복받은 생활을 좀 더 오래 향수하셔야 할텐데 그저 멀리서 걱정 뿐이다. 이모와 함께 일주간 있으면서 밤에 낮을 이어 들어 온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어린 나로서는 기억조차 없었던 그옛날의 추억들이 너무도 소중하여 이렇게 필을 들어 본다.

    1930년대초, 일제의 탄압과 착취를 피하여 한반도에서 만주땅 평안벌에 이주해 온 외할아버지는 한평생 농사로 뼈를 굳힌 감농꾼이였단다. 그런데 광복이 되는 해 왜놈들이 도망가면서 터트려 놓은 그 지독한 731세균에 간염되여 몇날몇일 밤낮으로 몸부림치다가 그만 숨을 거두시고 말았고 외할머니도 시름시름 앓더니 얼마 계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 옛날 우리 엄마가 꽃다운 20대 나이로 살아 계실 때 이모는 여나므살 되는 중학생 이였단다. 엄마와 이모는 여섯 살 나이 차이라는데 워낙 늦게 섬이 들어서 맨날 애보다 못하다고 언니한테 꾸중을 들었다는 이모는 그때 진짜 철부지 어린아이였단다. 이모 위로 외삼촌이 한분 계셨는데 일찍 참군하여 동북해방 전쟁과 항미원조까지 참가하셨다가 전쟁터에서 폐병을 얻고 돌아왔었다. 부모님이 다 세상을 뜨셨으니 삼촌은 하나밖에 없는 누나한테 찾아 올수밖에 없었다. 누나손에서 정성껏 병시중을 받았으나 그 시대의 페병이란《불치병》이여서 얼마를 못 견디고 젊은 청춘에 그만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의지가지 없는 이모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았는데 내가 태여나니 이모에게는 이 조카딸을 돌보는 일이 당연한 의무로 되었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애기를 등에 업고 밖에 나간 엄마를 찾아 젖을 먹이군 했다는데 이모 기억에 말못하는 애기가 어찌나 령리했던지 업혀서 젖먹으로 가면서도 엄마가 늘 가시는 곳은 딱 기억해 가지고 이모가 혹시 잘못 가기나 하면 잔등에서 버득거리면서 손으로 그쪽 길을 가르켰다는 것이다.

    첫돌 생일에는 상에다 쌀 한공기,팟 한공기 그리고 이모가 쓰던 몽다리 연필 한대와 엄마 호주머니의 잔돈 몇장을 꺼내 놓았다는데 이모가 얼른 무엇을 잡으라고 하니 글세 제일 먼저 그 꽁다리 연필을 쥐고 다음으로는 돈을 쥐였는데 한장이 땅에 떨어지니 기어이 주어서 다시 쥐더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을가? 평생 이날까지 공부하는 것은 나의 첫째가는 취미였고 살아 오면서 친정에서나 시집에서나 돈고생은 크게 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온 첫돌 생일상의 그 전통오락이 과연 그저 장난에만 그치는 일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던 때는 아직 건국 초기라 아빠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지하당 활동에 종사하였다. 야학에서 아빠를 만나 결혼한 엄마는 역시 혁명가의 안해로 사회에 나섰단다. 임신 때에도 막달까지 밖에서 활동하였고 해산 후에도 아이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한다. 당시 길림성 서란현 부녀 부주임(주임은 항일 녀간부인 한족녀성이였음)을 담임하고 있은 엄마는 당의 지시에 따라 전현 부녀들을 동원하여 이불솜을 거두고 집집이 물레나 팽이로 실을 짜서는 밤에 낮을 이어 양발과 수갑들을 떠서 전선에서 싸우는 해방군께 보내는 지원활동들을 하였다 한다.

    엄마는 각 지방을 돌며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 다니느라 젖도 바로 못 먹였기에 어린 나는 항상 이모등에 업혀서 배고파 칭얼거렸다고 한다. 한번은 이모가 이삭으로 주어온 감자를 부엌에 묻어 놓고 잠깐 소피보러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니 글쎄 방에서 놀던 두살 애기가 어느새 한길 되는 부엌밑에 떨어져서 울고 있더라는 것이였다. 감자 익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 어떻게 굴러 내려간 모양인데 어데 다치지나 않았는지 너무도 겁나고 기가막혀 이모는 그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무엇이 먹고 싶었으면 무서운 것도 모르고 그 한길되는 부엌까지 떨어져 내려 갔을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여서 그땐 언니에게도 말 못하고 수년이 지나간 후에도 그 일만 생각하면 늘 놀라군 했단다.

    1949년초 당의 파견으로 아빠가 동북군정대학에 가시고 집에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넷째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들려서 보니 녀자들만 사는 집이라 땔나무도 하지 못해 애기가 차디찬 방바닥에서 언 기저귀를 깔고 누워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서란 부근의 큰집들에서는 모여서 토론하고 우리 세 식구를 셋째 큰아버지 집에 가서 함께 살게 하였다.

    그때 두살배기 애기인 나는 벌써 남의 집인 것을 알고 무척 눈치를 보더란다. 혹시 빛다른 음식이 생기면 자기가 먹는 것이 아니라 얼른 들고서는 큰아버지한테 달려가 목을 그러안고는 어른신 입에 밀어 넣더라는 것이다. 큰아버지는 너무도 귀여워《요 잰내비같은 영물을 봐라!》하면서 수염 가득한 볼로 애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군 했다고 한다. 아직 세상물정도 알수 없는 그 어린 생명에게 벌써부터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하는 운명이 시작 되였던 것 같다.

    엄마는 폐병환자 외삼촌을 림종까지 붙안고 병시중하다가 결국은 자기까지 그 병에 전염되고 말았다. 동생이 사망한 후 엄마는 늘 누워서 앓았다는데 당조직에서 정기적으로 귀한 마이싱, 베니싱을 가져다 주었지만 좁쌀죽도 못 넘기니 어찌 약이 들며 병이 나으랴? 결국 엄마는 지병이 들어 반년도 못 넘기고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왕청에서 우리와 갈라진 이모는 중학교 반주임 집에서 초중을 마치고 반년 후에는 왕청현 수리중등전업에 입학하였단다. 군속이자 고아인 이모는 국가에서 주는 공비로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에는 흑룡강 밀산현 수리국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었다. 당시 그 현성에는 전문대를 졸업한 지식인 녀성간부가 처음인지라 이모는 대단히 중용되였다고 한다. 현에서 큰 대회를 할때면 항상 현장 옆에 자리를 정해 주었다고 하니 알만한 일이 아닌가.

    그 직장에서 이모부를 만나 1남 1녀를 낳았댔는데 대약진때 아들애가 그만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모는 너무도 상심하여 신병을 얻었고 그 타격으로 직장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후 또 아들을 바라고 딸 넷을 련이어 낳아 딸 다섯을 키워 왔다. 그래도 이 조카딸이 항상 그리워서 큰딸 이름을 아예 나와 똑같게 《순화》라고 짓고 항상 불러 보았지만 그 세월 그 곤난한 생활형편에 숫한 애들을 버리고 언제 타성의 조카딸을 찾아 길을 떠날 겨를이 있었겠는가?!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리해 할만도 한 일이다.
   
    이모부는 원래 가정이 있는 전업 군인이였는데 일찍 상처하였고 광복후 전처 애들은 시부모님들이 데리고 한국에 있는 고향에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모부 생전에 고향땅의 주소는 알았지만 남한길이 막혔던지라 수십년간 이산가족이 되여 서로 찾지 못하고 있었다. 80년대 말에야 이모가 나서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분들을 끝내 찾아내고 말았다. 그후 이모와 이모부는 초청되여 한국의 시집식구와 형제들을 만나 뵈였다고 한다.

    어릴때 눈물로 헤여진 이 조카딸이 혁명가이고 교육가인 형부 손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직장에서 사업하며 또 믿음직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도 잘 키워 왔으니 이모도 인젠 마음이 놓인단다. 어느덧 이 조카도 인생의 저녁노을을 맞게 되니 지난세월 모두가 그 세상에서 태여 난 모든 이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였던 것 같다.

    조국해방의 포소리 속에서 한쌍의 청년혁명가 부부에 의해 세상에 태여 난 이 가여운 생명은 새중국의 탄생과 더불어 오성붉은기 아래에서 견건하게 성장하였다. 당의 배양과 자신의 신근한 노력 분투로 후회 없는 한생을 살아 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 인제는 만족 할만도 한것 같다.

    철없는 나이에 엄마의 사랑도 없이 고달프게 자란 그 슬픔도 아픔도 ... ... , 그 흑백전도의 특수년대에 로혁명가, 교육가의 딸이 하루밤새 《자본주의 길로 가는 당권파》의 딸로 둔갑되여 애들이 다 신나하는 홍위병완장도 못끼고  왕따되고 억압받은 그 억울함도 설음도 이제는 모두가 그 생애의 악몽이듯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그 세월에 묻어두기로 작정했다.

    이모와의 상봉도 어느덧 또 하나의 10년 강산으로 변해간다. 아마 그 기나긴 리별의 아픔을 보상이라도 해 주시려는지? 존경하는 나의 이모께서 아직은 건강하시니 참으로 대견하시고 감사한 일이다.

    이글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지했던 그 시절의 그 불행한 환경이 나를 키우지 않았다면, 천변만화한 이 나라의 풍파와 시련이 나를 불태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진정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잊혀져 가는 희노애락의 추억을 정녕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불러오지 못할 것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모든 것을 용서하며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지난날의 그 흑백 인생드라마가 오늘따라 아름다운 칼라 드라마로 변하며 마음을 울린다. 이제 또 무슨 바램이 있겠는가?! 오직 살아온 경력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석양빛 찬연한 여생길에서 끝까지 열심히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희망이 아닌가 생각한다.

                                                           2024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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