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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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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제1장 '8.15'광복의 의미 댓글:  조회:2461  추천:0  2016-03-02
 “모택동의 평가”정순주 장군의 서예 1945년에 들어서서 아마 조금이라도 정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을 얼마든지 판단할수있었을것이다. 당시 중국내에는 근 20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고있었다. 이들은 동북뿐만아니라 관내 화북, 화동지역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고 또한 무한, 중경, 상해를 비롯한 대도시에도 일부 조선인 시민이 살고있었다. 수십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 “망국노”의 신세로 살아오던 그들은 일본의 패망을 손꼽아 기다리고있었다. “쏘련군의 땅크가 막 들어왔고 일본놈들이 무기를 놓았습니다. 해방을 받은 우리는 밖으로 뛰여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함께 거리에 떨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쏘련군을 환영했습니다.” “프랑카드를 들고 쏘련군을 환영하였는데 코가 크고 키가 큰 쏘련군이 땅크를 앞세우고 줄을 서서 들어오는데 저 앞고개에서 이쪽 골짜기까지 쭉 늘어섰습니다.” 아마 어린시절 우리는 당시의 이러한 정경을 친히 목격하였거나 로인분들로부터 많이 전해 들었을것이다. 지금도 70, 80세 로인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군한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이라고 즐거워하던 그때에도 사람들은 저들의 앞에 놓인 운명을 몰랐을것이다. 구경 누가 이 땅의 주인이며 어떠한 정당이 어떠한 정부를 세울것이며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갈것인지? 당시 아무도 이를 명확히 몰랐다. 특히 중국내 조선인들은 자기의 운명이 어찌될지 더욱 몰랐으며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항복하고 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였다는 순간의 기쁨에 잠겨있었을뿐이다. 세계 반파쑈전쟁이 최후단계에 진입하던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따시에서 열린 “얄따회의”에서는 쏘련군의 동북출병이 결정되였다. 쏘련은 출병조건으로 동북의 대련과 려순에 대한 조차권을 요구했고 중장철도(中长铁路)와 외몽골의 현상유지라는 조건을 제기했다. 쏘련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타협으로 이 조건은 수락되였다. 한편 태평양전장에서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한 미국은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이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닥쳐왔다. 시기를 놓칠세라 쏘련군은 8월 8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9일 령시부터 동북의 일본관동군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150만 쏘련군이 일거에 국경방어선을 돌파해서 한주도 안되는 사이에 동북 전역을 석권하자 8월 15일 점심, 일본 히로히또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사람들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자유와 해방을 경축했다. 하지만, 평화는 그처럼 쉽게 실현되지 않았고 더우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남이 베풀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였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세인의 시선이 부유한 중국 동북에 집중되였다. 쏘련과 미국이라는 당시 세계 량대세력이 동북을 눈박아 보았고 중국내의 국공량당이 동북을 주시하고있었다. 대흥안령, 소흥안령, 장백산맥으로 둘러있는 드넓은 동북평원은 기름진 땅과 풍부한 광산자원을 가지고있었지만 위도가 높은 동토대였기에 량곡생산이 제한을 받았고 옛날에는 벼농사를 상상도 못했으며 광산개발도 잘 되지 않았다. 인류가 19세기에 들어 서서야 동북개척이 본격화되였다. 특히 조선인이 대거 동북에 이주함에 따라 동북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였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농민들은 저온지대인 중국동북에서 드디어 벼농사를 성공시켰으며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답으로 만들었다. 이때로부터 동북의 농업발전의 터전이 마련되였으며 동북은 유명한 곡창으로 변했다. 일찍부터 동북에 눈독을 들인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통해 동북을 강점하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큰 저항이 없이 130여만 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800만 인구를 가진 동북을 내버리고말았다.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청나라 말대황제인 부의(溥仪)를 괴뢰황제로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세웠으며 조선으로부터 더욱 많은 조선농민을 동북에 강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고 동북을 중국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철도부설과 광산개발을 진행했다. 일제가 패망할때 동북의 선탄생산량은 전국의 49%를 점했고 강철생산량은 전국의 90%이상을 차지했으며 14,000킬로메터의 철도선과 10만킬로메터의 도로가 있게 되였다. 당시 동북은 중국의 가장 큰 공업기지였으며 가장 큰 곡창이였다. 부유한 동북을 차지하기 위해 장개석은 웅식휘(熊式辉)를 동북행원(东北行辕) 주임으로 임명하여 쏘련군으로부터 행정권을 인계받으려했고 두률명(杜聿明)을 동북보안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쏘련과 적극 담판하면서 각종 권력을 인계받는 동시에 동북의 일본군 잔여세력과 괴뢰만주국 군인, 경찰 그리고 무장토비 20여만명을 규합했으며 먄마에서 훈련받은 신1군과 신6군을 포함한 정예부대 25만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국민당 주력군이 모두 중국 서남부에 집결되여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은 미국함대의 도움으로 국민당 정예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동북의 한간, 괴뢰군, 지주무장, 특무, 관료 그리고 마적과 류랑배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유지회(维持会)를 설치하였고 무장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공산당의 중앙주석인 모택동은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설립해야한다는 정치주장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금후의 투쟁은 어떤 나라를 세우는가 하는 투쟁이다. 무산계급이 령도하는 인민대중의 신민주주의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아니면 대지주, 대자산계급이 독재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투쟁일것이다. 지금 이 투쟁은 항전승리의 열매를 탈취하려는 장개석과 그 탈취를 반대하는 우리와의 투쟁으로 나타나고있다.” 항일전쟁승리의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공산당은 3만 간부와 10여만 팔로군, 신사군을 동북에 긴급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동북을 차지할것인가? 세계 반파쑈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1945년 하반기, 풍요로운 동북은 국공량당이 힘을 겨루는 주요한 쟁탈지로 되였고 또한 쏘련과 미국 량대 세력까지 눈독을 들이는 초점지역으로 변했다. 그리고 전반 중국인민앞에는 두가지 운명이 놓여지게 되였다. 장개석을 위수로한 국민당은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이 통치하는 독재정권을 수립하려했고 공산당은 력사적 조류에 순응하고 민주주의적인 련합정부 설립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하려했던것이다. 동북에 온 공산당 간부들은 각지에 공산당조직을 설립함과 동시에 광범한 인민을 단합시키기 위해 군중조직인 동북인민민주대동맹(东北人民民主大同盟)을 조직, 령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국민당의 이른바 유지회와 투쟁하였다. 그리고 동북경내 조선족 집거지들에도 모두 조선인민주대동맹 조직이 설립되였고 산하에 농민, 청년, 녀성분맹이 설치되여 활발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20    불멸의 발자취—련재를 마치면서 댓글:  조회:3470  추천:2  2016-02-19
중국 관내지역은 20세기 전반기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이 중국의 거창한 력사사변들속에서 진리를 찾고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던 력사의 현장이다. 조선 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은 신해혁명으로부터 북벌전쟁, 토지혁명, 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의 거세찬 물결속에서 만악의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중국의 군민과 어깨곁고 싸웠으며 중국 혁명과 항일전쟁승리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남겼다. 중국백성을 구하다 희생된 조선의용군 무명렬사 묘소를 지켜선 중국 백성들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중국혁명의 승리는 곧 조선혁명의 승리로 이어질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중국의 신해혁명과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국민당이 혁명을 배반하자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을 견지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과 무정, 리철부, 김산, 주문빈 등이 그 대표인물이다. 한편 김원봉과 윤세주, 김규광, 박건웅, 류자명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과 신정, 신채호, 김구를 대표로 한 독립지사들도 중국 관내에서 각자의 민족독립과 구국의 길을 찾으면서 일제와 싸워왔다. 이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다른 주장을 가지고 중국의 현대사를 함께 하면서 조선민족 반일투쟁사의 한페지를 엮어놓았다.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된후 일찍부터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가들은 의렬단을 중심으로 조선혁명가들의 대단합을 초보적으로 형성하고 1938년에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까지 국민당 통치구에서 싸우다가 그 주력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의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집결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태항산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여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까지 항쟁을 견지하였다. 죽음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온 이들의 항쟁의 발자취는 중국대륙의 방방곡곡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중국 관내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 답사는 장기간의 계획과 준비를 거쳐 2003년 가을부터 시작되였다. 일찍부터 중국 동북의 조선인 반일투쟁사를 다룬 ≪민족의 숨결≫, ≪눈보라 만리≫를 비롯한 본 방송국의 대형프로그람이 청취자들의 환영을 많이 받아왔기때문에 방송국 지도부에서는 중국 관내지역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 답사로 우리 민족의 반일투쟁을 다룬 대형프로그람을 계속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국내 조선족사학계에서는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조선 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줄곧 끈질긴 연구를 진행해왔고 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민족 력사와 전통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여러 민족 인민과 더불어 살아가고있는 중국 200만 조선족이 자신를 알고 자신의 전통을 알며 자신의 우수성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서 출발한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투쟁사는 많이 연구되였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투쟁사에 대한 연구는 분산적으로 진행되였으며 구체적인 정리작업도 따라가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했던 부분적인 혁명가들의 인물전이 약간 소개되였을뿐이다. 이러한 유감을 떨쳐버리고저 한것도 중국 관내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 답사의 주요목적의 하나였다. 답사는 2003년 가을에 시작되여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2005년에 마무리되였다. 관련 내용은 방송프로그람으로 제작되여 중앙인민방송국의 ≪오늘의 화제≫프로에 ≪불멸의 발자취≫라는 제목으로 2004년 하반기부터 주마다 1회씩 방송되였고 연변텔레비죤방송에도 대형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여 올해 9월에 17회로 집중방송되였다. 그리고 중국 관내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에 대한 전반 답사과정을 민족출판사에 의해 드디여 책으로 출판하게 되였다. 더우기 중국인민항일전쟁과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6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방송과 더불어 책의 출판이 이루어져 더없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답사팀은 2003년 9월부터 북경, 천진 지역과 상해, 남경 지역 그리고 광주로부터 무한까지, 중경에서 의창까지, 태항산으로부터 연안까지의 긴 답사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북경, 천진, 상해, 중경, 하북, 하남, 산서, 섬서, 광동, 강서, 호북, 절강, 강소를 비롯한 10여개 성과 직할시를 다니면서 선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왔다.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60주년 헌례작품인 ≪불멸의 발자취≫프로 답사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사와 중앙인민방송국 지도부의 깊은 중시를 받았다. 중앙인민방송국 지도부에서는 답사를 위해 인력, 물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방송운영 경비를 내여 력사고문과 중앙인민방송국 기자 그리고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기자로 무어진 답사팀을 구성하여 답사를 시작하였다. 답사는 중앙인민방송국 각 지방의 기자소와 각지의 선전부, 방송사, 당사연구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심량면으로 답사팀을 도와준 이들이 없었다면 답사가 한결 더 어려웠을것이다. 
119    제83회 서안과 락양 답사 댓글:  조회:3656  추천:1  2016-02-15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기 전인 1936년 12월 12일, 중국의 전면항일전의 시작을 직접 촉발한 중대한 사건이 서안에서 발생하였다. 중국국민당의 동북군 장령 장학량과 서북군 장령 양호성은 서안 교외의 화청지(華淸池)에서 무력으로 장개석을 억류함으로써 중외를 진감한 서안사변을 일으켰던것이다. 20세기 30년대 초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발동하여 중국은 심각한 민족위기를 겪게 되였다. 전국적으로 항일구국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있을 때 장개석은 되려 이른바 《외적을 물리치려면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6년 12월 4일 그는 직접 서안에 와서 홍군을 공격하도록 장학량과 양호성을 독촉하였다. 내전을 반대하는 장학량과 양호성은 장개석에게 수차 간하였지만 수락을 받지 못하자 드디어 병간(兵諫)을 시도하였다. 12월 12일 그들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화청지를 포위하고 장개석을 연금하였다. 화청지의 장개석을 체포하는 행동에는 조선혁명가 서휘도 참가하였다.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장학량의 동북군 학병련에서 근무하면서 지하투쟁을 진행하고있었다. 그는 기타 병사들과 함께 홀몸으로 도주하려던 장개석을 체포하였다. 장개석을 연금한 장학량과 양호성은 시국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 대표를 서안에 초청해 구국대계를 토의할것을 제의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주은래를 비롯한 대표단을 서안에 보냈다. 수차의 담판을 거쳐 장개석은 할수없이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 함께 공동으로 항일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서안의 장학량공관 전경 장학량공관의 동루   서안시 건국로(建國路) 69번지에는 서안사변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서안사변의 주인공이였던 장학량의 옛집을 보수하여 만들었다. 장학량공관(張學良公館)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왼편에는 단층 줄집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3층으로 된 서양식 건물 3채가 있었다. 벽돌과 나무로 만든 서양식 건물은 각기 동루(東樓), 서루(西樓), 중루(中樓)로 불리우고있다. 서루는 장학량이 서안에서 사무를 보고 거주하는 곳이다. 1935년 동북군을 거느리고 섬북의 홍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학량은 무한으로부터 서안에 와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 사변을 해결하기 위한 장학량과 양호성 그리고 국민당 당국과 공산당 3자사이의 평화담판이 바로 서루 2층 사무실에서 진행되였다. 동루는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머물렀던 곳이다. 장학량의 초청전보를 접한 공산당에서는 즉각 주은래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서안에 파견하였다. 장학량은 공산당 대표단의 안전을 돌보고 수시로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 이들을 가까이에 있는 동루에 배치하였다. 동루와 장학량이 거처하는 서루는 가운데 중루를 사이두고 있다. 중루는 군부대 사무실로 사용되였고 비서와 경위일군들이 있었다. 장학량 공관의 낮은 단층집은 전시실로 사용되고있었다. 공관을 나서면서 장학량과 양호성의 비극적 운명을 생각하게 되였다. 서안사변후 장학량은 장개석과 함께 서안을 떠나 남경에 갔다. 그때로부터 장학량은 반세기 넘도록 줄곧 장개석에게 연금되여 자유를 잃고 생활하였다. 그는 영영 중국의 력사무대에서 물러나게 되였으며 태평양의 호놀룰루에서 만년을 보내다 세상을 뜨게 되였다. 양호성은 더욱 비극적이였다. 그는 국민당 정보일군들에 의해 비밀리에 암살되고 말았다. 개인의 생사를 제쳐두고 진행한 장학량과 양호성의 과단한 조치가 있었기때문에 중국력사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드디어 전민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이룩되게 되였다. 서안사변과 국공합작은 다년간 중국내에서 격렬한 내부 분쟁에만 전념하던 조선혁명가들에게도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지사들이 좌우 합작을 주장하면서 전 조선민족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드디어 조선의용군의 창립을 이끌어내게 되였다. 답사팀은 서안에서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였기때문에 몇곳을 보고나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기차 시간을 알아보니 오후 2시에 락양으로 가는 기차편이 있었다. 오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우리는 서안의 명소 대안탑을 보기로 하였다. 시 중심에서 약 4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대자은사(大慈恩寺)라는 유명한 사원이 있다. 사원의 대안탑은 고도 서안의 상징인 불교명탑(佛敎名塔)이다. 탑은 기원 652년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인도에서 가져온 657부의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축조한 불경 수장 탑이다. 처음에는 60킬로메터의 5층탑으로 축조하였지만 후에 여러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탑은 더욱 높게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64킬로메터 높이에 7층으로 되여있다. 이곳은 서안을 찾는 관광자들이 꼭 찾아보는 관광명소로서 사원 앞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광장에는 철로 된 현장법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사원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장경각(藏經閣)을 지나니 대안탑이 한눈에 안겨왔다. 현장법사가 직접 설계한 정방형 모양의 이 탑에는 층마다 사리(舍利)가 있다고 한다. 탑을 대안탑이라고 한데는 재미나는 전설이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자은사의 스님들은 모두 삼정식(三淨食)을 하였다고 한다. 삼정식이란 기러기, 노루, 송아지 고기만 먹는것이다. 그런데 오래도록 이 세 가지 고기를 먹지 못한 스님들이 하루는 하늘의 기러기 떼를 보았다. 한 스님이 하늘의 기러기를 쳐다보면서 《부처님께서 우리 모두가 굶고있는것을 헤아려 기러기 고기를 보내 온것이 아닌가?》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늘의 기러기 한 마리가 그 스님의 품에 뚝 떨어져 죽고 말았다. 놀란 스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뿐이였다. 이때 다른 한 스님이 이는 분명 부처님의 화신일것이라고 하면서 기러기를 정중히 안장하고 탑을 만들어 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탑을 기러기 안(雁)자를 따서 안탑이라고 했는데 현장법사의 불경 수장탑을 높이 생각해 대안탑이라고 불렀다한다. 탑 뒤에는 또 정교하게 축조된 목제 건물인 현장삼장원(玄奘三藏院)이 있었다. 원에는 거폭의 목조와 한백옥 조각이 있었는데 모두가 현장법사의 공적을 소개하는 내용이였다. 이곳에는 현장법사의 두개골 사리가 수장되였다고 한다.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대자은사와 대안탑은 서안 력사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일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문화의 리정표로서 오늘도 수많은 관광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역 만리에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온 현장법사의 굳은 의지와 불후의 공적은 천추에 길이 빛나고 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피땀을 흘리며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항쟁해온 우리 혁명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업적도 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져야 할것이다. 현장삼장원 서안의 대자은사 일경 대자은사의 탑림 대안탑   서안에서 오후 2시 기차를 타고 하남성 락양에 도착한것은 10월 30일 새벽이였다. 락양에서도 오래 체류할 계획이 없기때문에 호텔을 잡지 않고 역시 기차역에 짐을 맡기고 저명한 황하 나루터인 맹진으로 향했다. 락양시 북쪽으로 1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니 황하가 나타났고 거대한 황하대교가 놓여있었다. 이곳이 바로 옛 맹진 나루터였다. 맹진은 황하의 중류와 하류를 나누는 분계점이기도 하다. 이곳으로부터 황하는 강폭이 훨씬 넓어지고 물도 비교적 맑았다.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를 흐르는 황하처럼 누런 흙물이 아니였다. 수천년전부터 맹진은 황하의 중요한 나루터로 유명했다. 중국 노예사회시기 주무왕이 맹진에서 800제후를 회합하여 상(商)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하기로 맹약(盟約)하였던 곳이다. 그후 주무왕은 제후들과 함께 5만 정예군사를 이끌고 목야(牧野)에서 상주왕의 70만 대군을 격파하고 드디어 상나라 폭정을 전복했다.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대는 바로 이 맹진 나루터를 거쳐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면 맹주(孟州)에 이른다. 이곳에서 산서성 남부에 진입하면 곧 태항산에 이르게 되고 쉽게 팔로군 본부가 위치한 마전에 갈 수 있다. 그리하여 팔로군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모두 락양에 모여 맹진을 통해 황하를 건널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1938년 10월 포화가 울부짖는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였지만 드디어 무한 함락을 맞게 되였다. 무한이 함락되자 의용대는 미래 전투방향을 두고 지도사상면의 혼잡을 겪게 되였다. 의용대 출신인 문정일 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당시 일부 사람들은 북상항일을 주장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남부로 가서 국민당과 손잡고 싸우자고 하였다.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나중에는 각기 자기 주장대로 북상할 사람은 북상하고 남하할 사람은 남하하였다한다. 무한 함락직후 리유민의 인솔하에 허정숙, 리근산, 리달, 김철 등이 무한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가장 먼저 연안으로 갔다. 그 뒤를 이어 최창익이 장지민, 오민성, 공량우을 비롯한 10여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갔다. 최창익은 화북을 지나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이들은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국민당 각 전구로 흩어져 싸웠다. 대본부는 김원봉의 인솔하에 국민당을 따라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제1구대는 박효삼의 인솔하에 호남성의 제9전구에서 활동하였고 제2구대는 리익성의 인솔하에 호북성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새로 편성된 제3구대는 하남의 국민당 제1전구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민당 각 부대에 흩어져 활동하였기때문에 통일적인 행동과 령도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1939년부터 1940년 사이 국민당 각 전구에 흩어졌던 의용대 대원들도 여럿이 뜻을 같이하여 북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각 구대는 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리익성이 거느린 제2지대와 부분적인 1지대, 3지대 대원들은 락양에 모였고 락양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일부는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본부와 1지대, 3지대 주력이 박효삼과 윤세주의 인솔하에 중경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팔로군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락양에 모였다. 김학무, 왕자인, 리익성, 김세광, 리춘암, 양민산, 최채를 비롯해 무려 80여명이 도강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박효삼은 제1전구의 사령인 위립황(衛立煌)을 찾아 교섭하였다. 위립황 역시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였지만 그때는 환남사변 직후였기때문에 의용대의 팔로군 지역 진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는 부분적으로 수차에 나누어 황하를 건넜다. 이들은 맹진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 근거지로 들어갔다. 황하의 맹진나루(지금은 큰 다리가 나루배를 대체했음) 동북진출을 압두고 모인 조선의용군 주요 간부들 락양에서 적후공작을 할때의 문정일   황하 기슭의 맹진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이따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멀리 황하대교를 지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화북대지와 중원을 이어주는 길목에 놓인 맹진 나루터는 옛날의 번창함이 사라지고 지금은 인적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맹진을 떠나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적들과 싸우려는 만강의 정열을 지니고 황하를 건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윤세주가 작사한 《최후의 혈전》을 부르며 팔로군을 찾아갔던것이다. (불멸의 발자취 련재 전부 끝)
118    제82회 한국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옛터 댓글:  조회:3187  추천:0  2016-02-09
항일전쟁시기 섬북 연안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투쟁 지휘중심이였고 중국혁명의 성지였다. 중국의 수많은 혁명자들이 이곳에 모여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한편 중국의 새로운 혁명을 위해 기능을 련마하였다.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연안에 모여 중국혁명에 투신하였고 기능을 련마하면서 미래 조국건설을 준비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또 여러 항일근거지로 파견되여 사업과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중국항일전쟁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연안의 보탑산과 연하수에 조선족 음악가 정률성이 남겨놓은 노래가 남아있고 라가평에 수백명 조선청년들이 모여 학습하고 훈련하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남아있다. 이는 중국항일전쟁에 대한 조선혁명자들의 기여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오늘까지 사람들을 부르고있다. 연안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한 후 답사팀은 10월 28일 저녁 10시 30분 기차로 연안을 떠나 섬서성 소재지 서안에 갔다. 서안과 락양 등지의 부분적 사적지들을 답사해야했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섬서성 소재지 서안에 도착한것은 10월 29일 새벽 5시였다. 날이 채 밝지 않은 서안 기차역은 사람들로 붐볐고 희미한 불빛사이로 여러 장사군들이 손님들을 붙잡고 뭐라고 열심히 흥정하는것이 보였다. 우리는 역을 나와 곧바로 짐 맡기는 데로 갔다. 택시 기사들이 달려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열심히 물었다. 우리는 그들을 제치고 보관소에 짐을 맡기면서 주인에게 장안현(長安縣) 두곡진(杜曲鎭)으로 가는 방법을 문의하였고 택시 가격을 물어보았다. 주인은 그곳을 자상히 알려주었을뿐만 아니라 만약 자기를 믿어주면 자기가 택시를 찾아 주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가격을 흥정하고 주인이 찾아주는 택시를 타고 서안시 남부 교외에 자리잡은 두곡진으로 향했다. 차는 불 밝은 서안시를 빠져나와 교외로 달렸다. 우리나라 7대 고도의 하나인 서안은 유명한 력사문화 도시이다. 서주(西周)로부터 시작해 12개 봉건왕조가 이곳에 수도를 정했기때문에 수많은 명승고적과 문화재가 있다. 봉건왕국으로 전국통일을 완수한 진시황의 릉원과 유명한 병마용(兵馬俑)이 서안 교외에 있고 한나라 때의 유명한 실크로드가 이곳에서 시작되였으며 당조(唐朝)의 불교문화를 설명해주는 대안탑(大雁塔)도 이곳에 있다. 중국 서북의 교통, 문화 중심도시인 서안시는 항일전쟁시기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일본침략군의 서북진출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동시에 각종 정치세력이 각축을 벌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중경에 있던 한국 림시정부에서도 광복군 부대를 이곳에 파견하였다. 우리가 찾아가는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는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가 있다.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 리범석의 거처 옛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 리범석의 거처 옛터 날이 희붐이 밝기 시작하여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 도착하였다. 길 량켠에 민가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길을 사이 두고 중학교와 마주한 량식 창고 하나가 있었다. 이곳이 바로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이다. 커다란 마당 주변에 단층 줄 집이 3면으로 늘어서 있었다. 벽은 모두 흰 회칠을 하였지만 낡은 건물 모습은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창립된 한국광복군은 각 전구에 대원을 투입하여 활발한 항일무장선전을 전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 김약산이 광복군 부총사령으로 임명되고 김약산의 령도한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였다. 그리고 원 광복군 각 지대는 제2지대로 개편되였다. 광복군 참모장이였던 리범석은 이때 제2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여 서안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는 바로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 위치한 이 량식창고에 설치했다. 서안은 화북과 린접해 있기때문에 화북전선으로 진출하기 편리한 곳으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하였다. 이곳에 지대부를 설치한 리범석은 산서성과 하남성에서 류랑하고있는 조선청년들을 쟁취함으로써 대오를 확대해 나갔다. 리범석은 1943년 세차에 거쳐 대원들을 적 강점구로 파견하였다. 대원들은 적정을 탐지하고 적후의 조선청년들을 쟁취하는 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또한 일제에게 체포되여 많은 희생을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국민당 부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5월, 리범석은 미국 정보일군의 도움으로 두곡진에서 이른바 《한미합작반(韓美合作班)》을 세웠다. 합작반은 제2지대 성원과 리범석이 중경에서 거느리고 온 대원 그리고 보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조선병사들을 집중하여 조직되였다. 그들은 주로 미군 교관에게서 첩보, 정보일군으로 훈련받았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대원들은 각지에 파견되여 정보활동에 종사했으며 일부는 상해에서 공습목표를 무전으로 미군항공대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리범석은 한미합작반 성원을 광복군 정예부대로 재편성하고 이들을 거느리고 1946년 봄에 조선남부로 나갔다. 지대부가 있던 량식창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두곡진 도계보(桃溪堡) 64번지는 리범석이 거주했던 집터이다. 지금 그곳에는 단층 벽돌집 한 채가 있었다. 집주인은 로봉주(盧鳳柱)였는데 부모들에게서 리범석에 관련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고 한다. 그의 회억에 의하면 리범석 지대장은 개를 무척 즐겼는데 그의 애완견이 죽자 관을 해 묻었다고 했다. 철기 리범석 철기(鐵騎) 리범석(1900-1972)은 서울사람으로서 1915년에 이미 려운형의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를 거쳐 운남에 간 그는 운남강무학당 기병과를 졸업하고 중국 동북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동북에서 리범석은 김좌진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고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1934년 리범석은 관내로 들어와 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관으로 있었고 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참모장으로 되였다. 항일전쟁시기 리범석은 서안에서 국민당과 적극 협조하면서 줄곧 광복군 제2지대를 지휘하였다. 8시가 가까워 날이 훤히 밝자 우리는 두곡진을 떠나 다시 서안으로 갔다. 거리에는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붐볐다. 길가의 해묵은 오동나무는 황금색으로 단풍들어 고도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 주고있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간편한 아침 식사를 하고 팔로군 서안 판사처로 찾아갔다. 서안시 북신가(北新街)의 칠현장(七賢莊)은 번화한 시중심에 위치한 조용한 정원이다. 검은 칠을 한 널 대문이나 줄지은 단층 건물은 너무나도 간소하여 평범한 농가와 흡사하였다. 다만 정문어귀에 공화국 원수 엽검영이 쓴 《팔로군 서안 판사처 기념관》이라는 몇 글자가 눈에 안겨 올 뿐이였다. 기념관 입구에는 섬서 주재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사무처, 섬서 주재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라고 쓴 옛 간판이 량쪽에 걸려있었다. 기념관은 정원과 여러 기념전시청으로 구성되여있었다. 1936년 봄 중국공산당은 칠현장의 한 곳을 빌려 비밀 련락소를 설치하였다. 이때로부터 1946년 팔로군 판사처가 서안에서 철수할때까지 10년간 칠현장은 항일통일전선을 수호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판사처는 팔로군에서 수요하는 물자를 구입해 보냈고 섬감녕 변구에 물적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국민당 통치구의 애국청년들과 국제인사들을 연안에 보냈다.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서안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공산당을 찾고 혁명 성지 연안으로 갈수있었다. 연안으로 들어간 조선혁명가들은 모두 이곳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독립동맹은 중경의 조선혁명자들과 련락을 취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이곳을 거쳐다녔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1, 소수민족작가학회 윤한윤 부회장, 단군문학상은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작가학회와 손잡고 명실공히 전국상으로 부상했다.   2. 연변당위 선전부 리호남 부부장, 중국조선족대표적 집거지인 연변은 단군문학상을 통해 문학창작과 번영의 새로운 비약을 실현해야한다고 강조      3. 소설부문 수상자 허련순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     4. 시부문 수상자 김영건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5. 산문부문 수상자 장정일 《세모의 설레임》  6. 실화문학부문 수상자 리혜선 《정률성평전》   7. 평론부문 수상자 장춘식 《일제시기 조선족이민작가연구》 8. 아동문학부문 수상자 김철호 《작은 하늘》   9. 한문문학부문 수상자 남영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전영선 《소화 18년》   10. 신인상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     11. 화려한 공연무대   12. 단군문학상리사회 신봉철리사장, 작가시인들은 시대에 부끄럽지 않고 력사에 부끄럽지 않으며 민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불후의 명작을 창작하기에 힘써야한다고 호소  
116    제81회 연안에서 맞이한 승리 댓글:  조회:6040  추천:0  2015-12-14
1945년 후반기에 들어서서 세계 반파쑈전선은 대 승리를 눈앞에 두고있었다. 막강한 동맹군 함대는 태평양섬으로부터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독일파쑈를 전승한 쏘련홍군도 중국동북으로의 파병을 준비하고있었다. 고립무원의 경지에 빠진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도 련속되는 타격을 받고있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8일에는 쏘련군이 대일선전을 하고 중국 동북으로 대거 출병하였다. 사면초가에 몰린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안에 있던 조선혁명가들은 방송을 통해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연설을 청취하였다. 최룡수 교수(왼쪽 첫사람)연안의 라가평마을에서 조선혁명군정대학 상황을 소개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가 열렸던 중앙대강당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전경(력사사진)   (최룡수 교수) “이 마을에 조선군정학교에 근 300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항산에서 3개월 걸어서 이곳에 왔고 또 바로 이곳에서 8.15광복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방송을 듣고 광복을 알고 홰불을 들고 대단히 경축했답니다.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부르고 아리랑을 부르며 밤을 새면서 경축했습니다.”   일본천황의 항복연설이 전파를 타고 세계에 울려퍼졌다. 항일전쟁의 승리는 너무나도 급작스레 전달되였다. 8년 피어린 항쟁을 해왔던 중국 전역에 기쁨의 환성이 터졌고 폭죽소리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홰불을 들고 거리에 떨쳐 나와 환성을 질렀다. 이날 연안성은 환호와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조선혁명자들은 조선의용군 행진곡과 아리랑을 부르며 즐거운 밤을 지새웠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쓰러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내였던가! 연안의 중국 군민들과 함께 즐거운 환성을 터치는 우리 조선혁명가들의 마음은 더욱 격동되였던 것이다. 망국의 수치를 안고 수십년간 일제의 철제밑에서 허덕이던 천백만 조선인민들이 드디어 허리를 펴고 살수있게 되었다. 자유를 찾은 기쁨과 환성속에서 그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렬처절했던 전투의 나날들을 회억하면서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전우들을 추모하였으며 이제 곧 진행하게 될 조선으로의 진격을 생각하였다. 해방 받은 조국과 인민이 독립과 해방을 위해 피흘려 싸운 씩씩한 전사들을 성대히 환영할것을 생각하니 모두가 가슴이 벅차기만 했던것이다.   (권립 교수) “1945년 8월 11일에 주덕은 조선의용군이 동북으로 진군하여 일제를 소멸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9월 3일에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교의 3백여명 학원들은 팔로군과 더불어 조선의용군과 더불어 연안을 떠나 동북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1945년 8월에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2천여명으로 확대됐습니다. 주덕의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떠난후 12월초에 심양에 도착했을때는 3천여명으로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1일, 연안의 팔로군 주덕 총사령이 제6호 작전명령을 내렸다. 《중국과 조선 경내로 출병해 작전하는 쏘련군에 배합하여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화북 현지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는 즉각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하여 일제와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해방의 과업을 완수하라. 총사령 주덕. 1945년 8월 11일 12시.》   이 명령에 따라 각지로부터 연안과 태항산으로 이동하던 조선의용군 각 부대는 발길을 돌려 동북으로 진출하게 되였고 연안과 태항산의 조선의용군도 동북진출을 준비하게 되었다. 중국 관내에서 가장 먼저 동북으로 진출한 부대는 주연이 이끄는 기동의 조선의용군 선견대 100여명이였다. 하북성 동부에서 장기간 항일 유격전을 전개해오던 이들은 일본의 항복소식을 접하고 즉각 동북으로 진격하게 되었던것이다. 하북은 동북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이들이 가장 먼저 행동하게 되었던것이다. 이들은 팔로군 기열료 부대를 따라 9월 중순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부대는 도중에서 하북지역에 산재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을 접수하여 그 수가 400명에 달했다. 이들은 미리 심양에 와 있던 신한청(愼韓靑)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세하여 조선의용군 선견종대(先遣縱隊)를 조직하였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 지대장은 신한청이 맡고 정치부 주임은 주연이 맡았다. 조선으로 진격하려는 열망을 안고있던 이 조선인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신의주까지 들어갔으나 쏘련군의 거부를 받아 다시 심양에 모였다. 한편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은 연안에서 각가지 경축행사에 참가하고 또 군력을 정비한 다음 1945년 9월부터 동북으로 향발하였다. 이들은 하북성 장가구에서 태항산으로부터 오는 부분적 대원까지 합쳐 400여명에 달했다. 부대는 중국 동북의 금주에서 태항산의 주력인 조선의용군 간부대대(幹部大隊) 300여명과 합친후 심양으로 진격하였다. 1945년 11월 초순, 심양시 근교에서 1000여명의 조선의용군이 모인 군인대회가 열렸다. 조선의용군 사령인 무정은 소수의 로혁명가들만이 조선으로 들어가고 의용군은 전투편대로 나뉘여 동북 각지 조선인 집거구로 들어가 계속 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대를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로 편성하였다. 한편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을 주석으로, 한빈과 최창익을 부주석으로 결정하고 동맹집행위원의 명의로 당면 정치주장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편협한 정당과 계급이 독점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것을 절대 반대할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동북 진출을 이룩한후 무정, 김두봉, 최창익, 한빈을 비롯한 소수 혁명가들이 조선 국내로 들어갔고 박일우, 박효삼, 왕신호(김웅), 리익성, 주덕해, 리상조 등은 조선의용군 각 지대를 이끌고 계속 동북에서 싸웠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는 조선인 집거구에서 많은 조선청년들을 혁명에로 이끌었으며 부대를 확대해 나갔다. 당시 중국 동북항일련군에는 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 부대는 중국공산당 부대와 함께 동북해방과 중국 전역해방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합방되면서 나라를 잃은 조선인민은 수십년간의 간고한 투쟁을 거쳐 드디어 일제의 패망을 보게 되였다. 중국 관내에서 피어린 항쟁을 하던 조선혁명가들은 연안의 라가평이라는 이 작은 마을에서 일제 패망의 희소식을 듣게 되였던것이다. 항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고 즐기던 조선혁명가들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우리는 라가평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를 떠났다. 라가평 마을을 나오면서 마을입구의 한 가옥에 《조선소채(朝鮮小菜)》를 판다는 작은 간판을 볼수있었다. 조선 짠지를 판다는 뜻이다. 《혹시 이곳에 아직까지 조선족이 살고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으로 급히 찾아보았다. 집 마당에는 작은 밀 차 한 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김치며 짠지 따위가 가득 하였다. 주인은 40대 녀인이였는데 만나고 보니 조선족이 아니였다. 반신아(潘新娥)라고 부르는 이 녀인은 신강의 조선족에게서 무침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면서 3년전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을입구에 조선혁명군정학교 비석이 있었기때문에 조선 짠지도 잘 팔릴것 같아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괜찮게 된다고 하였다. 현지인들은 조선족에 대해 생소하지 않았고 조선 짠지도 잘 사간다고 하였다. 라가평을 떠나는 우리의 마음에 아쉼움이 없지 않았다.   라가평에서 조선족 짠지를 파는 한족녀인 연안답사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고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   최룡수 교수는, 일본 포로를 감화시켜 반제투쟁에로 이끌던 연안의 일본 로동학교 옛터는 잘 보수되고 개방되고있지만 우리 민족의 군정학교 옛터는 관리가 따라 가지 못한다고 애탄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줄곧 현지정부의 중시를 받지 못하다가 항일전쟁 승리 50주년을 기념하던 1995년에야 고작 비석 하나를 만들었던것이다. 학교 교사 옛터나 의용군 대원들의 활동지가 분명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있는것이 안타깝지 않을수 없었다.
115    제80회 조선혁명가들의 연안 대 집합 댓글:  조회:4025  추천:1  2015-10-21
1944년에 들어서서 일본제국주의는 더욱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장에서의 주도권을 잃었고 동맹군은 막강한 공격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하나 수복하고있었다. 한편 일본과의 축심동맹을 맺었던 독일도 유럽전선에서 궁지에 몰려있었다. 동맹군과 쏘련홍군은 동서량측으로 독일을 협공하였고 독일 파쑈의 패망은 눈앞의 일로 다가서고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침략자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있었다. 이해 4월 일본침략군은 중국에서 대규모의 공격작전인 예상계전역을 벌였다. 일본침략군은 중국대륙의 중부지역을 거의 전부 석권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술적으로 남북 교통선을 관통하는 전과를 가져왔지만 전략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전선이 더없이 확장됨에 따라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따라서 전쟁물자도 많이 부족하였다. 광활한 적후항일근거지에서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계속 후방을 교란하고 교통선을 차단하면서 적들을 타격하고있었다. 이시기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의 대 집합장소였던 섬북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점차 하나의 전투적 보루를 형성해 나갔다. 미래 조국해방을 위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조선혁명가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군사훈련을 진행하였으며 혁명사상을 키웠다. 독일파쑈들의 멸망에 이어 일본파쑈들의 패망도 오라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은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권립 교수) “1943년 중공중앙은 김두봉, 최창익, 한빈, 박일우, 박효삼, 주덕해 등 로동지들을 조직하여 조선혁명군정대학 창건 준비사업을 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중공중앙의 지도하에 학교의 지점문제, 학생래원문제, 교사건축문제, 학교기구 인사배치문제를 둘러싸고 방안을 짜고 행동에 옮겨야했습니다.”   중국의 혁명성지인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해 미래 조국해방에 진력하기 위해 조선혁명가들은 학교창설에 나섰다. 그들은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간부들을 학원으로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각지로부터 조선 열혈청년들이 연안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용군 대원이였던 리화림이 회억한데 의하면 의용군과 독립동맹은 1944년에 와서 각지의 조선의용군 대원들을 비교적 안전한 연안에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정치학습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의 해방을 이룩하려면 자체의 부대가 있어야 하고 더욱 많은 간부가 필요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1944년 1월말 태항산의 의용대 대원들과 학원 근 200명이 연안으로 향발하였다. 그들은 박효삼의 인솔하에 2천여리를 행군하여 1944년 4월 7일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연안에 있던 조선혁명가들과 합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설립을 이룩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의용군 기동지대의 리대성이 30여명 대원을 거느리고 첩첩한 봉쇄를 뚫고 4개월간 행군하여 1945년 2월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여러 항일근거지에서 온 조선의용군 대원, 쏘련과 동북에서 연안에 온 주덕해, 주춘길, 방호산 그리고 최창익, 정률성, 리유민을 비롯한 조선독립동맹 섬감녕 분맹 맹원들이 합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조선혁명력량을 재정비하게 되였다. 포연탄우속에서 청춘을 불태우던 우리민족 청년들은 곧 설립하게 될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공부하게 된다는 기쁨과 희명을 안고 일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자력갱생한다는 혁명정신을 발양하여 스스로 학교건물을 짓고 토굴집을 팠다.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소개비 조선혁명군정학교 김두봉 교장이 거쳐했던 토굴집으로 추정하는 곳 연안의 토굴집   (권립 교수)“ '물레를 돌리며 손님을 접대하는 주덕총사령을 따라 배우자.' 이것이 그때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그들은 벽돌 기와 굽기를 조직하였습니다. 로신예술학원의 벽돌공장을 빌어 벽돌을 굽고 기와를 구웠습니다. 그들은 토굴집 건축조를 무었습니다. 먼저 야장간을 꾸려서 곡괭이나 삽을 만들고 토굴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7,8명으로 구성된 한 개 조가 하루에 토굴집 하나를 파내기 위해 분투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 개조를 무어 결사대의 정신으로 토굴집을 팠습니다. 그들은 또 황무지개간대를 조직하여 연안에서 70리나 떨어진 산중에 들어가 수백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44년 8월에 이르러 이곳에는 수백명 조선청년들이 모였다. 300여명이 앉을수 있는 식당과 강당이 있게 되었고 15개 토굴집이 생겨났다. 중국군민들과 함께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을 발양한 조선혁명가들은 자체로 학교 터를 정했고 벽돌을 구워 교사를 지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부지런한 조선혁명가들의 두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4년 10월 1일 드디여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이 성대한 개학식을 가지게 되었다. 팔로군 총사령인 주덕이 직접 개학식에 참가해 축하연설을 하였다. 처음 200여명 학원을 가진 이 학교에서는 군사과와 정치과를 배우는 한편 각가지 혁명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권립 교수)“조선용사들의 놀라운 건설속도는 연안 각계를 놀래웠습니다. 더욱이 이해 가을이 되자 조선용사들의 땀의 열매가 연안 각계 인사들과 연안인민의 찬탄을 자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화를 따서 실을 뽑고 실을 뽑아 천을 짜고 통일적인 군복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들은 두손으로 가꾼 채소로 로신예술학원을 지원했고 해방일보사를 지원했다. 엿공장을 만들었고 주덕해는 이를 최채를 통해 태원에서 팔았습니다. 이것으로 약과 건전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는 280여명 학원이 있었다.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의 편의를 위해 학원들은 4개 구대로 나누었다. 제1구대는 조렬광과 방호산이 책임지고 학원은 33명이였다. 왕자인이 구대장을 맡은 제2구대는 54명 대원을 가졌고 전우와 홍순관(洪順官)이 책임진 제3구대는 23명, 김극(金克)과 윤공흠이 책임진 제4구대는 29명 대원이 있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에는 김두봉이였고 박일우는 부교장 겸 서기를 맡았다. 그리고 박효삼은 부교장 겸 대장을 맡았고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는 주춘길, 허정숙, 정률성이 있었다. 그리고 259려단에서 사업하던 조선혁명가 주덕해는 이시기 조선혁명군정학교 총무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원들로는 허정숙, 한빈, 최창익 등이 있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김두봉(1889-1961)의 호는 백연이다. 그는 1889년 경상남도 동래군(東來郡) 기장면(機張面) 동부리(東部里)에서 태여났다. 17세에 서울에서 중앙고보(中央高普)의 전신인 기호학교(畿湖學校)와 배재학교(培才學校)에서 공부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후 배일사상과 애국사상에 들끓던 그는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였다가 체포되였다. 1913년 배재학교를 중퇴하고 최남선(崔南善)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가했고 또 조완구와 함께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이시기 그는 또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현대조선어 학습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1919년 김두봉은 한위건(리철부)과 함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4월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그는 신채호가 주필을 맡은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의 편집으로 일했고 후에는 김규식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였다. 1920년에 김두봉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상해에서 김두봉은 인성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조선어연구를 멈추지 않고 《정해조선어사전(精解朝鮮語辭典)》을 펴내기도 하였다. 1928년 12월, 고려공산당이 해체된후 그는 홍남표, 조완구와 함께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를 조직하였고 1935년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중앙 상무위원으로 되였다. 그는 조선의용대 창립시 주요간부로 활약하였고 1939년 조선혁명당과 함께 중경에 갔다. 1942년 4월, 김두봉은 중경으로부터 연안으로 갔다. 그해 그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으로 추대되였고 후에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되였다. 혁명의 성지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되여 조선혁명가들이 집중되였을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통제하고있던 각지 항일근거지에도 조선혁명군정학교 분교가 설립되여 부근의 조선혁명가들을 규합시키고 훈련과 교양을 진행하였다. 태항산의 조선혁명가들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주축으로 연안으로 떠난후에도 산서성 섭현 남장촌의 조선혁명군정학교는 계속 남아있었다. 무정과 조선의용군 주요간부들은 화북의 조선청년 모집과 교양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초에 이르러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수는 다시 293명에 달했다. 교장을 맡았던 무정은 하북성 섭현 남장에 있던 학교 학원들을 두 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무정이 대장을 맡고 한경과 리익성이 중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학교에는 93정의 소총과 3정의 경기관총외에 많은 수류탄과 지뢰를 가지고있었다. 1944년 10월 1일 산동에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가 설립되였다. 교장은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을 책임진 리명이 맡았는데 학원은 근 200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시기 신사군 통제하의 화중에도 100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항일군정대학 제5분교에 집중하여 교육을 받았다. 화중의 조선인 책임자는 왕신호(王信虎 원명 김웅)였다. 그리하여 항일전쟁 승리를 앞두고 중국 관내 조선혁명자들은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집결되고 재편성되였다. 이는 항일전쟁 승리후 중국 동북으로의 진출과 조선으로의 진격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간부양성과 군력 보강을 적극 시도한 노력이였던것이다.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 모였던 조선혁명자들은 이곳에서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게 되였던것이다. 
114    제79회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댓글:  조회:3986  추천:0  2015-09-18
섬서성 연안시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가면 연하기슭의 천주교회당과 수십개 돌로 만든 토굴집이 보인다. 교아구(橋兒溝)라고 하는 이곳이 바로 전국 중점문화재 보호단위인 로신예술학원 옛터이다. 항일전쟁시기 가렬처절한 포화를 뚫고 연안에 모인 혁명청년들을 규합시키고 이들 가운데서 미래 중국을 이끌어나갈 훌륭한 예술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로신예술학원을 특별히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민족이 키운 천재적인 예술가인 정률성도 대부분 시간을 이 학원에 몸을 담보 하나하나의 불후의 명작을 창작해 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포화의 시련을 받고있는 중국인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고 수많은 애국청년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교아구 천주교회당 연안 로신예술학원 기숙사들 연안 로신예술학교 밤자습하고있는 학생들   답사팀이 연안에 도착한 이튿날인 2003년 10월 28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하였다. 양가령의 중앙강당과 남관가에 위차한 동방각민족 반파쑈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사적지를 보고나서 정률성이 다닌 로신예술학원과 유명한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찾아갔다. 연안시 교아구에 도착하니 우선 정원에 우뚝 솟은 천주교회당이 눈앞에 띄였다. 1934년에 축조된 이 서양식 건물은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중앙당학교 강당으로 사용되였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는 로신예술학원 강당으로 사용되였다. 당시 이곳에서 여러차례 대회와 음악회가 있었다. 특히 1938년 9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중국공산당 제6기 6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여 더욱 주목된다. 대회에서 모택동은 항일전쟁 새 단계론을 발표하였다. 천주교회당 곁에 커다란 운동장과 돌로 만든 수십개 토굴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로신예술학원 교실이였다. 지금도 학생들이 공부하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툼한 솜옷을 입은 학원들은 난로를 피워놓고 조용히 앉아서 열심히 책을 보고있었다. 문학과 예술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연안의 로신예술학원은 1938년 4월 10일에 설립되였다. 초기에는 봉황산에 자리를 잡았다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교아구에 있었다. 섬북공학과 로신예술학원 1기를 졸업한 조선혁명가 정률성은 졸업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한동안 사업하다가 1939년 12월에 다시 로신예술학원에 조동되여 음악학부에서 성악을 가르쳤다. 그때로부터 정률성은 태항산 항일전선으로 나가기 전까지 줄곧 교아구 로신예술학원에서 교원사업을 하면서 많은 노래를 창작하였다.   (권립 교수) “정률성은 먼저 섬북공학에서 공부하다가 1938년 5월 연안 로신예술학원이 서자 거기에서 공부하면서 유명한 불멸의 가곡 연안송을 창작하였습니다. 1939년 1월에 연안항일대학에서 입당하고 이 대학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불후의 팔로군 대합창 8개 부분을 창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군가로 되었습니다.”   1939년 1월 10일,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시인 공목(公木)과 협조하여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창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팔로군행진곡(八路軍進行曲)》은 경쾌하고도 기백이 넘치는 선률로 팔로군의 영웅적 형상을 잘 부각하여 광범한 군민들이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공화국 창건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였다. 이시기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 녀학생대 대장으로 있던 정설송(丁雪松)을 알게 되고 그와 사랑하게 되였다. 1940년,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했던 조선혁명가 무정의 담보로 정률성은 정설송과 결혼을 하게 되였다. 1942년 정률성은 연안 문예좌담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의 연설을 직접 청취하였다. 그후 그는 더욱 훌륭한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 항일전쟁 최전선으로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이해 8월 그는 무정과 함께 태항산으로 갔다. 태항산에 간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주임을 맡으면서 조선의용군 전사들과 함께 적극적인 무장선전활동과 대생산운동을 진행하였다. 한편 음악창작을 늦추지 않고 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가로 된 조선의용군행진곡을 이 시기에 창작해 냈다. 1944년 4월 정률성은 명령에 따라 다시 연안에 왔다가 연안에서 항일전쟁 승리를 맞이하였다. 해방후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에서 작곡사업에 전념하던 정률성은 1976년 12월 7일 뇌일혈(腦溢血)로 세상 떴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연안송》, 《팔로군 대합창》(이 가운데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개명하고 공화국 군가로 확정), 《조선인민군행진곡》,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이 있다. 연안시 중심에서 2, 3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면 연하기슭의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연안시 보탑구 교구진(橋溝鎭) 라가평촌(羅家坪村)이다. 라가평마을 전경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의 기념비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의 소개글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의 옛집들(학교 교실로 사용되였던 건물로 추정)   로신예술학원을 보고난 답사팀은 그곳에서 다리를 건너 라가평촌으로 갔다. 라가평촌 마을 입구에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비석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우리가 찾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바로 이 마을에 있었던것이다. 관리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비석 아래에는 벽돌무지가 있었고 자전거 수리하는 사람이 거기에 낡은 자전거 바퀴 같은것을 걸어놓고 있었다. 우리는 촬영을 해야한다면서 자전거 수리하는 사람을 밀쳐 버렸다. 비석의 소개를 보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2년 11월, 화북 태항산구에서 설립되였다. 1944년 1월에 학교기관은 태항산구를 떠나 3개월의 행군을 거쳐 4월 7일 연안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천구촌(川口村)에 머물렀다가 9월에 이곳 새로 지은 학교 교사(校舍)에 옮겼다. 학교는 12월 10일 준공되였다. 1945년 2월 5일, 성대한 개교식이 있었다. 주덕, 림백거, 오옥장, 서특립(徐特立)이 개교식에 출석해 축하를 표했다. 학교 교장은 백연(白淵) 김두봉이고 부교장은 박일우였다. 학교는 간부양성과 조선민족의 해방을 취지로 하였다. 맑스주의철학과 정치경제학, 군사학, 일본문제, 조선문제를 비롯한 과목을 설치하였다. 박일우는 초청에 의해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에 렬석하였고 5월 21일 전체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하순 학교기관은 연안을 떠나 조선북부로 옮겨갔다. 지금 옛터에는 돌로 된 토굴집 4개와 부분적인 흙 요동이 남아있다. 비석은 1996년 7월 1일 연안지구문물관리위원회(延安地區文物管理委員會)에서 세웠다고 밝혀져 있었다. 라가평촌 입구로부터 비탈진 흙길을 따라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작은 골짜기에 오붓하게 모여 사는 마을이였다. 산비탈에는 아직도 토굴집이 많았지만 대부분 새로 지은 단층집이였고 간혹 2, 3층으로 된 새 벽돌집도 보였다. 비탈길을 따라 한동안 가노라니 학교 옛 건물이 나타났다. 벽돌로 만든 아치형 요동입구 6개가 있는 집이였다. 문앞에 쓰레기 무지가 있고 대부분 토굴집은 인가가 살고있지 않았다. 이곳이 바로 조선혁명군정학교 주 교사로 사용되던 곳이다. 교사 옛터로부터 조금 더 올라가면 바로 산밑에 이른다. 산 한가운데는 흙 요동 몇 개가 보였는데 지금도 인가가 살고있었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설명한데 의하면 이곳은 교장 김두봉과 서기 박일우가 생활하던 곳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최룡수 교수) “여기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입니다. 1944년에 완공한 라가평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입니다. 이 바로 이 마을에 저쪽에도 있고 우에도 군정학교 동굴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앞에 보이는 시냇물은 학교에서 쓰는 물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은 운동장입니다. 이 마을에 조선군정학교에 근 300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항산에서 3개월 걸어서 이곳에 왔고 또 바로 이곳에서 8.15광복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방송을 듣고 광복을 알고 홰불을 들고 대단히 경축했답니다.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부르고 아리랑을 부르며 밤을 새면서 경축했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문정일 로인이 한번 왔다갔다고 들었습니다. 문화대혁명 전이겠습니다. 그후 나는 95년에 항일전쟁승리 50주년 할때 이 마을에 와 보았습니다. 그때는 마을 입구에 군정학교 비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로인분도 만났는데 당시 일을 기억하고있었습니다. 맨 꼭대기에 가본 동굴엔 김두봉 대장과 박일우 서기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아직 고증은 못했습니다.”   산밑으로는 한줄기의 맑은 샘이 솟아 나고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물통을 가지고 와서 그 물을 긷고있었다. 일찍 조선의용군들이 이곳에서 생활할 때도 샘이 있어 늘 이 물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산밑으로 솟아나는 맑은 물, 그 물을 마시며 학습하고 생활했던 조선혁명가들을 그려보았다. 사실 조선혁명군정학교를 만들때는 이미 항일전쟁 승리를 앞둔 시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곧 패망할것이라고 확신하고있었다. 1910년 나라를 잃고 중국대지를 전전하면서 끝없는 항쟁을 진행해왔던 조선혁명가들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미래 조국건설을 그려보면서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사업했던것이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의 대 집합장소였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맞이하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싸우던 조선혁명가들이 조직적으로 연안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주요간부들을 비롯하여 드넓은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일제와 싸운던 조선혁명가들이 연안에 모여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재정비를 거치게 되었다.
113    김양, 항일명장 리홍광의 고향을 밝혀낸 사학자 댓글:  조회:3180  추천:3  2015-08-18
세인들이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쑈전쟁 승리 70주년을 성대히 맞이하고있는 요즘 “항일영웅 리홍광” 인물평전이 민족출판사에 의해 정식 출간되였다.    중국력사에서 조선족 항일렬사라고 명확히 규명되는 인물은 많지 않다. 그 가운데서 리홍광은 남만 항일유격대의 창시자이며 “동북항일련군의 걸출한 지도자이고 민족영웅인 양정우”의 친밀한 전우로 높이 평가받고있다. 그리고 2014년 9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가 리홍광에게 “항일영웅렬사” 영예칭호를 추수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리홍광의 빛나는 한생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진바가 적다. 특히 그의 출생에 대한 자상한 사료가 밝혀지지 않아 줄곧 중국내 조선족 사학자들의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출생 비밀이 밝혀지지 않으면 완정한 인물전을 구성하기 힘들며 영웅인물의 완정한 삶을 규명하기 힘들다는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올해 81세 고령인 료녕성 심양의 사학자 김양선생님이시다. 김양선생님은 지난세기60년대로부터 리홍광의 사료를 수집해오다가 1990년대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학자들과 함께 끝내 리홍광의 출생비밀을 밝혀내고 항일영웅 리홍광의 고향을 확인했을뿐만 아니라 고향방문과 답사를 마치고 드디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항일영웅 리홍광의 인물평전을 엮어내게 되였던 것이다.    일찍 1959년에 료녕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한 김양선생님은 학교에 남아 력사강의를 하시다가 “문화대학혁명”이 끝나던 1976년에 료녕민족출판사에 전근되여 그토록 하고싶었던 조선민족의 사학연구에 본격 돌입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 전에만 하여도 조선민족의 유명 인물들이거나 렬사들의 사적을 언급하면 곧잘 “민족주의자”라는 감투를 쓰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 학자들은 감히 이 령역을 섭렵하지 못하고있던 터였다. 하지만 김양선생님은 단연히 민족사학연구에 몰두하면서 우리민족의 자랑찬 력사는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발굴하며 연구해야한다고 주장하셨다.   김양선생님의 회억에 의하면 그는 일찍 대학시절에 벌써 학교에서 조직하는 “항일렬사”고찰단에 참가해 리홍광의 사적지들을 두루 답사해보았다. 그후 김양선생님은 각지 당안관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사료를 발굴, 정리하였으며 흑룡강, 북경, 상해 등지를 다니면서 많은 사학자들을 만나 확인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항일련군에 참가했던 많은 생존자들과 당사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소중한 증언을 남겼다. 리홍광은 1930년대에 항일유격대를 조직해 일제와 싸웠기 때문에 그의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던 생존자들은 지난세기 60년대, 70년대에 대부분 40대, 50대였고 부분적으로 나이가 많은 분도 60세거나 70세 정도여서 생동한 자료를 남길수있었다. 물론 당시는 물질조건이 극히 제한되였기 때문에 사료수집에 있어서 지금처럼 록음기, 카메라, 촬영기를 동원할수 없었다. 그러나 김양선생님은 취재노트에 부지런히 필을 날리면서 생존자들의 이야기와 추억을 낱낱이 적었다. 그리고 대량의 필기들을 론리에 맞게 제때에 잘 정리해 놓았다. 신빈과 환인, 관전 등지는 항일유격대가 활약하였던 곳이기에 골이 깊고 숲이 우거진 고장이다. 녀성의 몸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김양선생님은 이산저산 다니며 사적지들을 찾아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때로는 날이 깊어지면 장녀가 배동해 다녔고 때로는 현지 사학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김양선생님은 리홍광의 동료나 부하들은 대부분 남만에 있었다고한다. 하지만 남만의 리홍광을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으나 리홍광의 출생과 가족 상황에 대해 알수있는 증언이나 사료는 별로 없었다. 다만 중국 관변측에서 공식 인정하는 경기도 룡인군이라는 기록밖에 없었다. 그뒤 흑룡강성이나 연변의 많은 사학자들이 관련 연구를 해오면서 리홍광의 출생과 가족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어느 주장도 설득력이 없었고 확실하지 않았다.    근엄한 사학관을 가지고있는 김양선생님은 이 문제에서 절대 서둘러 판단하지 않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 관건적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는 리홍광에 대해 어떻다고 섣뿔리 이야기하는것은 모두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언젠가는 보다 유력한 증거가 나타날수있다고 생각했고 꼭 이 수수께끼를 몸소 풀겠다고 작심하였다.   1990년대에 이르어 세상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중한 수교가 이루어졌다. 김양선생님은 료녕성 민족사무위원회의 추천으로 한국방문 학자로 뽑혀가게 되였다. 당시 료녕성 민족사무위원회 처장으로 사업하시던 우철희 선생님이 극구 김양선생님을 한국 방문에 추천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김양선생님은 80여명 한국방문 조선족 학자중의 한명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고 한국의 사학자들과 직접 교류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리고 우철희 처장의 적극적인 소개와 홍보를 통해 김양선생님은 한국으로부터 의암(毅庵)학술대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였다. 의암은 우리민족의 유명한 의병투쟁의 지도자였던 류린석의 호이다. 그동안 남만에서 활동한 류린석장군에 대한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김양선생님의 로고를 치하해 한국에서 의암대상을 그에게 주었던것이다. 그는 “한국에 한번 가보는것만으로도 아주 기뻐했는데 그처럼 큰 상까지 받으니 꿈만 같았다”고 당시 감격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한국언론에 보도된 조선족 사학자 김양   그후 한국의 사학자들도 곧잘 김양선생님을 찾아와 문의하였고 관련 연구를 함께 진행하군 하였다. 그는 중국내 류린석의 의병투쟁에 대해 많이 알고있었기에 한국 사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연구들도 학국 학계의 도움을 받게 되였다. 특히 리홍광렬사의 출생지 비밀이 밝혀지게 되였다. 한국에는 족보체계가 아주 과학적으로 잘 되였기에 성씨와 본 그리고 조부 증조부 등 선조들의 명함만 알면 쉽게 자기의 족보를 찾을수 있는 시스템이 되여있다. 그리하여 룡인 리씨라는 근거를 가지고 한국에서 쉽게 리홍광의 고향을 찾을수 있게 되였고 이 소식을 접한 김양선생님은 만사 제체놓고 사비를 허비하면서 리홍광의 고향답사길에 올랐다.    그때만하여도 남편은 암으로 투병중이였기에 그는 시누이들을 찾아 간병을 부탁하고 답사길에 올랐다. 그번 한국행에서 그는 리홍광고향집으로 찾아가 리홍광의 어머니 묘소를 찾았고 리홍광 부인의 묘소도 찾았보았으며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보았다. 항일영웅 리홍광 일가는 리홍광이 희생되자 모두 한국의 고향집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뒤에 대부분 세상을 뜨고 지금은 리홍광의 유복녀 한명만이 남았을뿐이였다. 김양선생님과 만났을 때  87세 나이였다고 한다.    수십년간 기다리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한국답사를 마치고 귀국한뒤 두달후 남편도 병으로 세상을 뜨고말았다. 하지만 김양선생님은 유감이 없다고 하신다. 만약 이 수수께기를 풀지 못하면 사학자로서 마음의 가책을 받을것이고 항일영웅 리홍광의 빛나는 한생이 계속 완정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게 될것이라고하셨다.    “자랑스러운 조선민족의 투쟁력사를 쓰는 사학자가 되겠다”, “욕 안 먹는 사학자가 되겠다”   김양선생님은 이것이 사학자로 한생을 보낸 자기의 신념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요즘에도 김양선생님은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고있다. 그는 “우씨가족의 백년사”를 정리, 탈고 하였다고 했다. 김양선생님이 소개한데 의하면 우씨가족의 이민 1세대-우병렬은 류린석장군과 함께 조선에서 의병활동에 참가하였고 울라지보스또크를 거쳐 중국 관전현에 이주하여 청산구(青山沟) 반일투쟁의 기지 마련에 진력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우씨가족의 이민 2세대, 3세대는 모두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새중국 건설에서 훌륭한 지도간부로, 과학자로 성장하였다.    김양선생님은 민족사무위원회 처장으로 사업하시면서 많이 도와주셨던 우철희선생님의 부탁을 저버릴수 없었고 또 이 가족의 훌륭한 백년 력사에 매료되여 이 가족사 집필을 결심하게 되였다고 심경을 밝혔다.    우씨가족 백년사뿐만 아니라 김양선생님은 또 우리민족의 유명한 반일투사이며 혁명가인 김산의 사적을 정리해 평전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고 또 류린석장군의 사적지 답사기를 정리해볼 생각이라고하셨다. 그는 80고령을 넘었으니 이제 책 한두권 더 낼수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면서 자기는 죽어도 아쉬움이 없고 부끄럼이 없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는 이만큼 책을 냈으니 사학자로서 부끄럼이 없고 욕 안 먹는 사학자로서도 부끄럼이 없다고 이야기하셨다.    81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오늘까지도 건강하게 집필에 도전하고계시는 김양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경례를 올리고싶다.  편집진 (좌로부터 민족출판사 전춘매 부편심, 저자 김양, 조봉 변호사, 반도체전문가 우승희 공정사, 김성룡 기자, 민족출판사 우빈희 사장)     
112    제78회 연안의 사적지 댓글:  조회:4162  추천:1  2015-08-05
섬서성 북부의 중요도시 연안시는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공산당은 장정을 마친 홍군부대를 재편성하고 연안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개척해 나갔다. 중국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된후 연안은 각지 항일근거지를 령도하는 중국항일전쟁의 중요한 지휘중심의 하나로 되었다. 연안의 당중앙의 령도하에 여러 항일근거지의 군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배후에서 투쟁을 견지하였다. 팔로군과 신사군은 근거지의 인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적의 수송선을 공격하며 근거지를 확대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혁명성지를 찾은 조선혁명가들도 이 위대한 항쟁에 동참했고 연안에서 그리고 여러 항일근거지에서 두려움 없이 싸워왔다. 연안시 서북쪽으로 3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가령(楊家嶺)은 1938년 11월 20일부터 1947년 3월까지 중공중앙 소재지였다. 1935년 10월 모택동이 거느린 홍군 제1방면군과 중공중앙은 승리적으로 장정을 마치고 섬북의 오기진(吳起鎭 오늘의 吳旗縣)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기타 홍군부대도 선후로 섬북에 도착함으로써 2년간 지속된 홍군의 장정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섬북에서 중공중앙은 홍군을 재정비함과 동시에 새로운 력사시기를 맞이할 전략적 준비를 다그쳤다. 1935년 12월 섬북에 도착한 중공중앙은 자장현(子長縣) 와요보진(瓦窯堡鎭)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 정세와 당의 과업에 관한 중앙의 결정》을 채택하고 국내전쟁을 민족전쟁과 결부시켜 대일작전을 위해 홍군을 크게 확대할 군사방침을 확정하였다. 대회의 방침에 따라 1936년 2월 모택동은 먼저 섬북에 도착한 홍군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동정을 진행하였다.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1937년 8월에 중공중앙은 락천현(洛川縣) 풍가촌(馮家村)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 정세와 당의 과업에 관한 결정》과 《항일구국 10대 강령(抗日救國十大綱領)》을 채택하였다. 1937년 1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중공중앙은 보탑산과 이웃한 봉황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그후 적의 폭격을 피해 연안 시교의 양가령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공중앙과 주요 지도자들이 이곳에 거주하였고 중앙기관과 부서들도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다.   양가령, 모택동 거주지 옛집 당중앙 소재지 옛건물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개최지 강당   양가령 사적지는 지금 관광자들에게 개방되여있다. 넓은 정원에는 2층으로 된 건물이 보였는데 건물에는 중앙대례당(中央大禮堂)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곳에서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중앙대례당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산언덕에 오르면 동향으로 된 아담한 움집이 보인다. 세 개 요동으로 된 이 토굴집이 바로 모택동이 거처하던 곳이다. 가운데 방은 사무실이고 왼편의 방은 침실이였는데 두방은 서로 통했다. 그리고 다른 한 방은 사무일군의 거처로 사용되였다. 방에는 간소한 침대와 책상이 있었고 낡은 책장이 있었다. 모택동은 바로 이처럼 검소한 곳에서 항일전쟁의 승리와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냈던것이다. 양가령에서 모택동은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를 소집하였다. 1942년 5월 당중앙에서는 문예사업일군들을 모아 연안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모택동이 좌담회에서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을 발표하였다. 좌담회는 당의 사상을 바로 잡고 문예의 계급성을 거론하였으며 무산계급 문예관(文藝觀)을 수립하였다. 얼마후 모택동의 연설은 당풍, 학풍, 문풍을 바로잡는 성세호대한 정풍운동으로 확대되였고 연안뿐만 아니라 공산당이 통제하고있는 해방구와 항일근거지로 신속히 확대되였다. 간부에 대한 엄밀한 심사에서 부분적인 억울한 사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조선혁명가 김산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양가령에서 모택동과 당중앙은 생산자구운동(生産自救運動)을 전개하였다. 대규모적인 생산운동으로 하여 당중앙과 팔로군은 극심한 곤란을 극복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이룩할수 있는 튼튼한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였던것이다. 산언덕에 자리잡은 양가령 모택동의 옛집을 보고 다시 중앙대례당을 찾아보았다. 문을 들어서니 습기가 안겨오는 커다란 대청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 걸상들이 줄줄이 늘어선 대청 바른편에는 강당이 설치되여있었다. 정면무대는 《모택동의 기치 밑에 승리적으로 전진하자》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그 아래에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라는 프랑카드가 걸려있었다.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는 중국혁명사에서 아주 중요한 대회였다. 1945년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연안 양가령 중앙강당에서 소집된 이 대회는 모택동사상을 전당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하였다. 맑스레닌주의 리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을 통일한다는 사상이 바로 모택동 사상이다. 대회는 대중을 발동하여 인민의 력량을 장대하며 공산당의 령도하에 일본침략자를 타도하고 전국인민을 해방하며 신민주주의 중국을 건립한다는 정치로선을 제정하였다.   (최룡수 교수) “위대한 중국인민해방사업을 이끄는 제7차 대표대회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참석한 박일우 동지는 대회 연설에서 지난 력사를 회억하면서 백색지구에는 리철부 동지가 희생했고 쏘베트지역에서는 양림동지가 희생되였구 항일전쟁시기는 주문빈 동지가 희생되였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공산당 계열에서 조선족으로 가장 유명한 분은 바로 이 세분 리철부, 양림, 주문빈을 꼽을수 있습니다.”   조선혁명가 박일우(朴一禹)도 이 대회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지난 력사를 회억하면서 국민당 통치구에서 투쟁했던 리철부동지가 희생되고 쏘베트지역에서는 양림동지가 희생되였으며 항일전쟁시기에는 주문빈동지가 희생되였다고 하면서 이 세사람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한 가장 유명한 조선혁명가라고 말했다. 박일우(1904―?)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중국 동북으로 이주하였고 길림성 룡정에서 공부하였다. 룡정에서 교원으로 지내던 그는 중국 관내에 들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항일전쟁초기에는 진찰기변구 계현(薊縣), 평서현(平西縣) 현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0년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기관 일군들이 몸소 축조한 중앙강당 건물은 1942년에 준공되였다. 건물은 대청과 무도청, 휴계실 3부분으로 나뉘여졌다. 중앙강당 뒤편에는 3층으로 된 중앙판공청 건물이 있었다. 1층은 회의실과 작전연구실로 사용되였고 2층은 사무일군 집무실이였으며 3층은 정치국회의실이였다. 강당에 서있노라니 항일전쟁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신민주주의 새로운 중국의 창건을 기대하면서 벅찬 가슴으로 대회에 출석했던 수많은 대표들의 진지한 모습이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것만 같았다. 거기에는 우리 조선민족의 혁명가들도 있었다.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중국 대지에서 피흘려 싸운 전우들을 그리면서 그들은 조국을 찾고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려는 새로운 열의로 불타있었을것이다. 1937년 9월 연안에 섬감녕 변구(邊區) 정부가 설립되였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장정을 끝낸 후 섬서성 북부지역과 감숙, 녕하를 포괄한 섬감녕 지구를 통제하고 튼튼한 본거지를 만들어나갔다. 섬감녕지구는 서북으로 쏘련과 통할 수 있는 반면 남에는 황토고원이 있고 동쪽으로는 황하가 있기때문에 국민당 군대나 일본군을 방어하기 쉬운 등 지리적인 우세를 가지고있다.   동방 반파쑈 대회가 열렸던 연안 참의회 강당건물앞에서 최룡수 교수(좌)와 인터뷰  동방 각민족 반파쑈 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참의회 강당   연안에 도착한후 당중앙에서는 섬감녕 변구정부를 수립하고 연안에 참의원 대례당(大禮堂)을 축조하고 중요한 대회의 소집지로 하였다. 그리고 참의회(參議會) 소재지로 사용하였다. 강당건물은 1941년 10월에 축조되였는데 보수된 건물은 지금도 연안시 남관가(南關街)에 남아있다. 연안시 남관가에 위치한 대회개최지 연안대례당은 지금 재 보수를 진행하고있었다. 강당 건물은 1947년 해방전쟁시기 국민당에 의해 엄중히 파괴되였지만 1949년에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있다. 남향으로 된 강당은 1,200여명을 용납할 수 있다. (최룡수 교수) “1941년 10월 26일 연안에서 열린 동방 반파쑈대회가 여기서 열렸습니다. 한국 림시정부의 김구, 조선의용대 무정이 주석단 명단에 올랐습니다. 무정이 대회 페막사를 했습니다. 대회당건물은 보시다싶이 지금 수건중에 있습니다.”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참가했던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표대회(東方各民族反法西斯代表大會)가 바로 이 강당에서 소집되였다. 1941년 9월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연안의 각 민족 대표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서는 동방 여러 민족이 반파쑈 대동맹을 결성할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동방 각 민족 반파쑈 대표대회가 갖 축조된 섬감녕변구 참의회 강당에서 소집하게 되였다. 무정을 비롯해 연안에 체류하고있던 조선혁명가들은 윁남, 필리핀, 타이, 인도, 일본, 몽골, 회족, 장족 등 각국, 각민족 대표들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대회소집을 창도한 단체의 하나였고 조선의용대는 대회에 축전을 보냈다. 대회는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 지미뜨로브, 깐디, 장개석, 모택동, 주덕과 더불어 한국림시정부의 김구를 대회 명예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조선혁명가 무정이 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되였다. 대회에서는 반파쑈 대동맹을 결성하고 37명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 회장이였던 무정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고 후에는 집행위원회 13명 상무위원의 하나로 선거되였다. 무정은 28일에 대회 보고를 하였다. 그는 대회보고에서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민의 혁명투쟁을 이야기하면서 반일투쟁의 중요한 전략적 지위에 있는 조선은 조선인민의 조선으로 될것이라고 하였다. 30일 대회 페막사도 무정이 하였다. 대회에서는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동맹이 결성되였다. 동맹 본부는 연안에 두고 각지에 분맹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대회는 동방 각민족의 항일의용군종대(抗日義勇軍縱隊)를 조직하고 화북전선에 나가 항일투쟁에 참가할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동방 민족학원을 만들어 간부양성에 진력하기로 하였다. 주덕, 오옥장, 림백거, 채창, 파소화(巴素華), 무정, 초삼(肖三), 리연록(李延祿)이 동맹의 지도성원으로 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방 여러민족 반일력량을 전부 동원하여 결성된 동방 각민족 반파시스트 대동맹은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특히 중국에서 싸우고있는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에게 있어서 대동맹은 정치면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111    제77회 연안에 모인 조선혁명가들 댓글:  조회:5259  추천:0  2015-02-10
조선민족이 키운 천재적인 음악가 정률성은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 마음껏 자기의 재주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혁명의 격정으로 들끓는 연안의 학습과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큰 충격을 주었다. 연안은 일제의 강점구와 국민당 통치구에서는 전혀 볼수 없었던 새로운 기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1939년 봄, 정률성은 연안의 예술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로신예술학원이 설립되자 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는 늘 학우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노을 비낀 보탑산을 바라보면서 혁명과 예술을 담론하군 하였다. 망치를 들고 가는 로동자, 낫을 들고 가는 농민들, 무기를 들고 씩씩한 대렬로 행진하는 팔로군 전사들의 모습은 그에게 너무나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학우인 막야(莫耶)에게 가사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며칠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격정에 넘치는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해 냈다.   보탑산 산봉우에 노을 불타고 연하수 물결우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고 산과 산 금성철벽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승리의 노래 울리누나!   노래는 나래 돋힌 듯 신속히 퍼져 섬감녕 변구 인민들이 누구나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연안송》은 중국 8년 항일전쟁에서 정식 출판되지 않았지만 나래 돋힌 듯 연안으로부터 해방구로, 국민당 통치구로 전해졌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까지 퍼졌다. 노래에 감화된 더욱 많은 열혈 청년들이 수천리 길을 마다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노래는 중국항일전쟁시기에 창작된 불후의 명작중 하나로 되였다.   보탑산의 보탑   조선족 혁명가이며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인 정률성   (권립 교수) “팔로군에는 우리민족 용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세부류의 혁명가들로 구성됐는데 한부류는 2만 5천리 장정을 거쳐 연안에 온 로홍군지휘원과 전투원들이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양림, 무정, 최정무 등입니다.”   1930년대 중반, 섬북에 모인 조선인 혁명가들은 많지 않았다. 중앙홍군을 따라 섬북에 온 대표적인 조선혁명가로는 양림과 무정이다. 이때 홍군부대는 재편성을 거쳐 양림은 간부단 참모장으로부터 새로 편성된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고 무정은 홍군총부 작전과 과장으로 사업하였다. 1937년을 전후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대표로 장명(김산)이 연안에 도착하였고 적통치구공작회의 대표로 리철부가 연안에 왔다. 그리고 장학량의 동북군 학병련(學兵連)에 있던 지하당원 서휘(徐輝), 광동 중산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조직하던 진광화가 연안에 있었으며 국민당 통치구로부터 연안에 찾아온 혁명청년 정률성도 가장 일찍 연안에 도착한 조선혁명가의 한사람이였다. 홍군 장령이였던 양림과 무정은 홍군의 동정전역에 참가하였다. 황하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양림은 황하기슭의 적을 숙청하던중 장렬히 희생되였다. 홍군동정이후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으로 상승하였다. 당중앙에서는 홍군과 간부들을 새로운 정세변화에 신속히 적응시키기 위해 홍군대학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1일 림표를 교장으로 하고 모택동을 정위로 하며 라서경을 교육장으로 한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이 와요보에서 개교되였다. 장문천, 주은래, 모택동, 엽검영, 라영환(羅榮桓)을 비롯한 당과 홍군의 지도자들이 직접 교수를 맡았다. 조선혁명가 무정은 홍군대학 제1기 1과(科)에서 학습하였다. 홍군대학은 3개과로 나누었는데 1과는 고급간부과로서 홍군부대의 사급 이상 간부들이 학원으로 들어왔다. 1과의 36명 학원은 8년 이상의 혁명경력이 있고 전투에서 세번이상 부상을 입은 공헌자들로 선정되였다. 개교 한달후인 7월에 홍군대학은 적의 습격을 피해 보안현(保安縣 지금의 연안시 지단현志丹縣)으로 옮겼다. 보안현에 옮긴후 교명을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中國人民抗日軍政大學)으로 고치고 지금의 연안시 이도가(二道街)에 자리잡았다. 학교 원 건물은 언녕 사라졌고 1964년에 그 자리에 학교 전시관을 만들었으나 전시관건물도 문화대혁명기간 페쇄되였다가 지금은 백화상점의 창고로 사용되고있었다.   (권립 교수) “두번째 부류는 쏘련에서 연안으로 온 로간부들입니다. 주덕해와 주춘길 등 열명입니다. 이들은 1939년 모스크바를 떠나 하바롭스크를 거쳐 신강의 우룸치, 란주, 서안을 거쳐 연안에 도착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전국각지에서 연안에 모여든 청년혁명가들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적 점령구에서 온 정률성이나 정면전장에서 온 리유민, 김영숙 등입니다.”        주덕해 주덕해는 1930년 2월에 길림성 룡정시 지신진 성지촌에서 혁명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에 기입한 로 공산당원이였다. 그는 7년동안 지하투쟁을 견지하다고 1936년 6월에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가서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정치, 군사지식을 배웠고 2년의 학습을 마친후 연안에 왔다. 주덕해는 연안에서 팔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의 지도원 사업을 맡았다. 그는 부대와 함께 국민당 군대와의 전투에도 참가했고 대생산운동에도 뛰여들었다. 1943년후 주덕해는 당중앙의 결정에 따라 연안 조선혁명군정대학 조직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권립 교수) “정면전장에서 온 우리민족 혁명지사 대부분은 대학 특히는 각 군사학교에서 온 분들이였습니다. 례하면 북경의 문정일동지, 연변의 김학철, 황재연 그들은 모두 남경중앙군사학교에서 연안에 왔습니다. 그들의 일부분은 팔로군 각사에 배치되여 일제의 침략군과 싸웠습니다. 태항산근거지의 류백승사장과 등소평정위가 거느린 129사에도 조선족간부들이 있었습니다. 129사의 사부에 리유민, 정치부에 송기창 위생부에 김영숙이 있었습니다.”   리유민은 상해동제대학을 나왔고 로당원이며 상해에서 지하당사업에 종사한적이 있다. 조직의 명령에 따라 팔로군 129사에 편입된 리유민은 서향전 부사장을 도와 일본군 포로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였다. 중국항일전쟁이 대치단계에 들어서면서 팔로군은 많은 일본군을 포로하였다. 1940년 팔로군의 백퇀대전에서만 하여도 백여명 일본군 병사들을 포로하였다. 일본어를 할수있었던 리유민은 일본군 포로들을 설득하였다. 일본군 포로들은 팔로군에서 리유민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을 통해 일차적인 교육을 받은뒤 연안에 모였다. 이들은 연안에서 계속 일본반전조직의 교양을 받았다. 1941년 1월에 화북조선청년 련합회가 창립될자 리유민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는 주로 화북지구 조선인에 대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조선의용대 사업을 도왔다. 그후 조선독립동맹이 건립될 때 리유민은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이후 최창익을 위수로한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남 먼저 연안으로 왔다. 이들은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하반기에서 1939년 상반기 기간에 항일군정대학에 등교한 조선학생은 30여명에 달하였다. 1938년 제4기에는 화가인 장진광과 리명 등이 있었고 1939년 제5기에는 한청(韓靑), 리상조, 로민, 김영숙(金榮淑), 김웅(金雄), 서휘, 윤공흠, 리극, 리근산(李根山), 리유민, 한경(韓景), 한락산(韓樂山), 허금산(許金山), 홍림, 리철중(李鐵重)등이 있었다. 그후 1940년 동북간부훈련반에는 주덕해, 방호산(方虎山), 김창덕(金昌德), 리권무, 장복(張福), 전우(全宇), 주춘운(朱春雲), 리림(李林), 진반수(陳班秀) 등이 있었다. 1939년 7월 10일에 항일군정대학은 전장으로 이동하였는데 졸업한 학생들은 속속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진입해 투쟁하였다. 항일전쟁 승리를 앞두고 항일군정대학 본교는 다시 섬북에 옮겼다가 항일전쟁 승리후 동북으로 진출해 동북군정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학교는 북경으로 옮겨 중국인민해방군 군정대학으로 되였다.   답사팀은 보탑산을 보고 나서 바른편의 청량산에 올라가보았다. 산기슭에는 낡은 주민 가옥들이 있었고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였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차를 타고 청량산 뒤로부터 산에 올랐다. 산정에는 태화산도관(太和山道觀)이 있었다. 도관은 당나라 초기에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에서 비교적 유명한 도교성지의 하나이다. 도관의 중심 건물인 진무전(眞武殿) 주변에 비석과 크고 작은 절이 있었고 절에는 산신과 재물 신, 성인들을 각기 모셔놓고 있었다. 지금도 한해에 10만 이상의 관광자와 신도들이 이곳을 찾아온다고한다. 산에서 연안을 한눈에 굽어볼수있었다. 바른편에 보탑산이 우뚯 솟아있고 그 아래로 굽이굽이 흐르는 연하가 있었다.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가로세로 널찍한 도로가 뻗어있고 아담한 주민 아빠트가 즐비했으며 이따금 높은 빌딩도 보였다. 섬북 연안, 항일전쟁시기 이곳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던 혁명의 성지였고 수많은 혁명투사들을 양성한 혁명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중국 군민들과 어울려 이곳에서 학습하고 생활하였으며 수요에 따라 무기를 들고 전선으로 나갔던 것이다. 연안에서 활동한 조선혁명가들의 사적지는 지금까지도 남아 우리를 부르고있었다.
110    제76회 혁명성지 연안 댓글:  조회:5039  추천:1  2015-01-13
황하를 건너자 우리의 몸은 산서성을 떠나 이미 섬서성 경내에 와 있었다. 강 기슭 넓은 모래톱에서 우리는 멀리 벼랑가를 에돌아 황하에 흘러드는 무정하를 보았다. 강은 크지 않았지만 물살이 급했다. 바로 그곳에서 홍군선견대가 도하훈련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씩씩한 홍군전사들이 멸적의 기세로 총칼을 굳게 잡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와 물소리만 들려올뿐이였다.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은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에 위치한 작은 산간 마을이였다. 나루터에서 둔덕을 따라 마을에 올라오니 20여 세대가 오붓하게 살고있었다. 농가 마당에는 대추를 말리고 있었고 이따금 집을 나서던 사람들이 호기심 많은 눈길로 우리들을 지켜보군 하였다. 석루현 하가와촌에서 련락을 주었기때문에 마을 촌주임이 나루터에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추(鄒)씨 성을 가진 한 농가에서 물을 얻어 마시면서 잠시 쉬였다. 촌주임은 차는 준비했지만 네 사람이 탈수 없을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현성에서 온 승용차 한 대가 있는데 현성으로 가려다가 기자들이 온다기에 함께 가려고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외간이 승용차를 몰기때문에 세 사람 밖에 더 싣지 못한다고 하였다. 답사팀 일행은 넷이여서 곤난하게 되었다. 마을에는 청간현 소재지로 가는 려객 뻐스 한 대가 있다지만 저녁에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에야 도착한다고하였다. 장밤 뻐스에 시달려야하거니와 옹근 하루시간을 랑비할 것 같았다. 우리는 저녁엔 반드시 연안에 들어서야 했다. 우리가 호기로 확정하였던 《서정》계획은 황하를 건넌후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했던것이다. 여럿이 론의끝에 승용차에 그냥 비집고 가기로 하였다. 촌주임이 밖으로 나가더니 이윽고 승용차 한 대가 왔다. 상해에서 독일의 제조기술을 류치해 제조한 산타나(Santana)승용차였다. 차체가 비교적 널찍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네 사람이 모두 뒷좌석에 비집고 앉기로 하였다. 오후 3시쯤 차는 하구촌을 빠져나와 청간현 소재지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곳 지형은 황하 동안의 려량산구 보다는 험하지 않았다. 역시 울퉁불퉁한 흙 길에 크고 작은 구덩이도 많았지만 가파르지는 않았다. 셋이 앉는 뒷좌석에 대 남자 넷이 비집고 앉다보니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길이 엉망이여서 차가 몹시 흔들렸기때문에 더욱 불편하였다. 젊은 차 주인은 부인과 함께 하구촌 마을의 부모님을 보고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대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편함을 잊으려 애썼다. 두시간 정도 달려서 앞에 아스팔트 포장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터치면서 차를 세웠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저려나는 팔다리를 쭉 펴고 저마다 담배 한 대씩 피웠다. 담배를 끊었던 최룡수 교수마저도 담배를 한대 붙이면서 젊은 사람과 함께 다니니 혈기가 솟는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처럼 “혁명적 락관주의 정신”을 발휘한다면 극복 못할 곤난이 없다며 우리의 “서정”도 홍군의 동정 정신을 따라배우는것이라고 말했다. 하루나루 나룻배에서 바라본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 섬북의 민가들 담배쉼을 하고있는 취재팀(오른쪽으로부터 최룡수 교수, 서봉학 주임, 김성룡 기자, 박군 기자) 섬북에 도착한 로농홍군(동정을 앞두고 활영한 력사사진)   우리는 다시 차에 비집고 앉아 현성으로 달렸다. 한시간 정도 달려 현 소재지에 들어서니 날이 어둡기 시작하였다. 청간현 소재지에서 택시를 바꾸어 타고 우리는 편히 연안으로 가게 되였다. 연안은 현 소재지에서 92킬로메터 떨어져 있었다. 차는 평탄한 아스팔트길과 고속도로를 달렸기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다. 석루현으로부터 하가와촌, 다시 하구촌으로부터 청간현까지 오던 일을 생각하면 그냥 “신선 놀음”이나 다름없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여 우리는 저도 모르게 피곤한 눈을 붙이고 잠들어 버렸다. 긴 려행을 마치고 불빛 휘황한 연안시에 들어선것은 저녁 8시였다. 우리는 전력대주점(電力大酒店)에 자리를 정하고 밤거리에 나가 저녁식사를 하였다.  10월 28일 아침 6시에 일찍 일어나 우리는 유명한 보탑산(寶塔山)에 가 보았다. 섬서 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한 연안은 고대에는 부시(膚施)라고 불렀다. 연하(延河)와 남천하(南川河)가 이곳에서 합치고 보탑산, 봉황산(鳳凰山), 청량산(淸凉山)이 둘러있어 연안은 예로부터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하였다. 연안이라는 지명은 기원 607년 수조가 이곳에 연안군(延安郡)을 설치하면서 가진 이름이다. 1400여년간 섬북의 정치와 경제, 문화, 군사 중심이였던 연안은 중화민족의 발상지의 하나이다. 연안은 또한 중국혁명의 성지이다. 장정을 마친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은 이곳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해냈다. 지금 연안에는 32만 인구가 살고 있다. 즐비한 고층건물과 널찍한 거리는 도시의 현대적인 분위기를 짙게 보여준다. 최근년간 연안시는 혁명유적지들을 보수하고 기념관을 세움으로써 혁명관광을 적극 확보하고 있다. 특정된 시기에 혁명 전통교양을 받으며 성장했던 중국인들은 지금 생활이 유족해지자 어려서부터 동경하였던 혁명관광을 많이 선호하면서 연안관광을 최선으로 꼽고있다. 길에 나서니 멀리 보탑산과 바른편의 청량산이 보였다. 많은 중국인의 무한한 동경을 자아냈던 보탑산은 연안의 상징이다. 사진이나 영화, 텔레비죤 방송에서 연안이라면 늘 산언덕에 높이 솟은 보탑산과 그 앞을 흐르는 연하가 나오군 하였던것이다. 산에는 적성루(摘星樓)와 가령서원(嘉嶺書院), 봉화대(烽火臺), 마애석각(摩崖石刻)을 비롯한 고적이 있다. 산의 원명은 가령산(嘉嶺山)이였는데 보탑이 있기때문에 보탑산이라고도 한다. 당조시기에 벌써 보탑이 축조되였지만 수차 파괴를 받아 지금 볼 수 있는 탑은 명조시기 복원한 건물이다. 높이가 44m인 팔각 보탑은 모두 9층으로 되였다. 루각식 벽돌 건물이기때문에 탑안의 나무 계단을 따라 탑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탑 우에서 창으로 내다보면 연안시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항일전쟁시기 전국 각지의 수많은 열혈 청년들이 혁명의 성지 연안을 동경하였다. 그들은 연하 기슭에 우뚝 솟은 보탑산과 보탑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혁명의 길에 나섰고 갖은 어려움을 이기며 연안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조선혁명가이며 저명한 음악가인 정률성도 그 속의 한 사람이였다.   정률성(1918-1976)은 1918년 8월 13일, 조선 전라남도 광주시 양림동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명은 부은(富恩)이였다. 천성으로 맑은 목청과 예민한 청각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무척 즐겼다. 음악 선률에 많이 민감하였던 그는 음악으로 성공할 큰 뜻을 품고 사립 신흥중학교를 다닐 때 률성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던 정률성의 맏형 정효룡(鄭孝龍)과 둘째 형 정충룡(鄭忠龙)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투쟁을 계속하였다. 정효룡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중에서 일제의 갖은 혹형을 받다가 1934년에 병사하였다. 국민혁명군 중좌 참모였던 정충룡은 중국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대혁명시기에 희생되였다. 그리고 그의 셋째형인 정의은(鄭義恩)도 의렬단 단원이였다. 이처럼 형들로부터 애국사상과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률성은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왔다.    (권립교수) “정률성은 1933년에 남경에 가서 김약산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다니면서 지하활동도 하고 피아노도 배웟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음악가 신성해를 알게 되였습니다.”   1933년 중국에 온 정률성은 상해를 거쳐 남경에 가서 의렬단이 국민당정부의 도움을 받아 운영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그는 남경, 상해에서 음악을 배웠고 1935년에 남경의 진보적 문화단체인 《5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참가하여 리사로 활동하였다. 문예사 고문이며 간행물 《격류(激流)》의 주필이였던 라청(羅靑)은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이다. 그는 조선혁명가 김규광, 박건웅, 김산, 정률성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라청의 회억에 의하면 그때 정률성은 김규광, 박건웅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과 사귀게 되였고 김규광의 부인인 두군혜는 그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이시기 정률성의 누이 정봉은(鄭奉恩)은 조선혁명가 박건웅과 결혼하였다. 로숙한 이들 혁명가들의 영향으로 정률성은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고 반일투쟁 리론을 알게 되였다. 1937년 정률성은 라청을 찾아갔다가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 선성해(冼星海)를 알게 되였다. 연안시기 유명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으로 명성을 떨친 선성해는 음악적 천부를 가진 정률성을 무척 좋아하였고 두 사람은 깊이 있게 예술을 담론하였고 혁명을 이야기하였다. 《7.7사변》이 일어나자 정률성은 상해에서 대공전지복무단(大公戰地服務團) 선전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음악과 노래를 통해 항일구국 선전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부상병들을 위문하였다. 상해가 함락된 후 그는 다시 남경에 왔다. 그는 항일의 제일선에 나가 싸울 결의를 다지고 연안에 가려고 했다.    (권립교수) “1937년 지하당조직에서는 정률성을 연안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섬북공학에서 공부하다가 1938년 로신예술학원이 서자 그곳에서 공부하는 한편 불멸의 연안송을 창작했습니다.”  중국로농홍군 4개 방면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서 회사 연안의 청량산 연안의 보탑산  1937년 겨울 정률성은 남경, 상해지역의 진보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연안에 오게 되였다. 항일구국 운동의 지도자였던 중국인 리공박(李公仆)과 두군혜는 그를 지하당 조직에 소개하였고 려비를 마련해 주었다. 정률성은 소개신을 가지고 서안 팔로군 판사처의 림백거를 찾아가 연안으로 오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함께 첩첩한 적의 봉쇄를 뚫고 도보로 혁명의 성지 연안에 와서 섬북공학(陝北公學) 제1기 7대에 배치 받아 공부하였다. 섬북공학 예술훈련반(藝術訓練班)에 몸을 담은 정률성은 늘 대중 가창활동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고 또 천여명 대중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일요일이면 그는 거리나 밭에 나가 사람들에게 노래를 연주해 주군하였다.
109    제75회 양림의 희생지 댓글:  조회:5070  추천:0  2014-11-20
삭막한 황토고원의 하구나루는 수천년간 수없이 많은 길손들을 건네주었다. 언제부터 마을이 생기고 나루가 생겼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명줄이나 다름없이 중요하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삭막한 고원에서 억척스레 살아가고있는 이 고장 사람들은 하구나루를 통해 서로 이어져있었던 것이다. 전자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까지도 하구나루는 예나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다. 성깔 사나운 황하를 건너 길손들은 오늘도 나룻배를 타고 오가면서 교류하고있었다. 답사팀은 누런 흙물이 사품치며 흐르는 황하기슭에 서서 하구촌으로부터 오는 나룻배를 기다렸다. 대안에서 발동기를 단 나룻배 한 척이 건너왔다. 우리는 이곳까지 열심히 안내해준 석루현 사업일군들과 작별하고 배에 몸을 실었다.   조선혁명가 양림 황토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황하   황하는 중국의 두 번째로 큰 하천이다. 중화문명이 황하기슭에서 탄생했기때문에 황하는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운다. 황하의 물은 말 그대로 누런 흙물이여서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10여분 뒤 대안에 도착했다. 대안은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이였다. 나루가 있는 대안은 터가 비교적 널찍했다. 하구마을은 그닥 높지 않은 산기슭에 오붓하게 있었다. 하구촌 남쪽으로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가 황하에 흘러들고있었다. 무정하는 남부의 큰 벼랑가를 굽이돌아 흘렀기때문에 벼랑과 하구촌 마을에 막혀 대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권립교수) “동정하려면 우선 황하를 건너가서 염석산이 산서성 황하동쪽에 구축한 또치까 방어진지부터 까부셔야 했습니다. 중앙군위에서는 이 무거운 과업을 양림의 부대에 맡겼습니다. 양림은 농민으로 가장하고 황하강변에 나가서 우선 도강지점을 확정하고 상세한 작전방안을 세웠습니다.” 하구나루터는 수십리 상류에 위치한 신관(辛關)나루터와 함께 예로부터 주요한 나루터였다. 1936년 2월, 홍군 만 2천명 동정부대가 황하기슭에 도착하였다. 홍군 제15군단은 하류의 하구 나루터로 도강할 준비를 하였고 제1군단은 상류의 신관 나루터로 도하할 태세를 취했다. 이해는 윤달이 들어 2월에 황하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크고 작은 얼음덩이가 물결에 흘러내려 도하에 어려움을 조성해 주었다. 양림은 제15군단 선견대를 거느리고 하구촌에 도착하였다. 75사 참모장인 양림은 사급(師級) 간부였지만 선견대인 75사 223퇀 제1영을 거느리고 이번 도하돌파임무를 맡았다. 그때 홍군은 상급 지휘자가 직접 부대에 내려와 전투를 지휘하는것이 관례였다. 양림은 하구촌 남쪽의 무정하에서 배를 마련하고 도하 훈련에 들어갔다. 큰 벼랑이 막혔기때문에 대안의 적은 홍군부대의 행동을 알지 못했다. 양림은 크고 작은 목선 5개를 확보하였는데 큰배에는 80명이 탈수있었고 작은 배에는 20여명이 탈수있었다. 한편 양림은 농민 차림을 하고 황하 기슭에서 적의 수비 상황을 자상히 정찰하였다. 염석산은 황하 천험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지만 천리 황하를 빈틈없이 수비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예로부터 군사요새이고 유명한 황하 나루터였던 하구를 수비하기 위해 놈들은 선진적인 무기를 갖춘 100여명 적을 일선에 배치하였고 하가와촌 부근에 수시로 지원할 수 있는 한 개 영의 병력을 포진했다. 적은 또한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산정에 크고 작은 보루를 쌓아 놓았다. 양림은 선견대에서 수영에 능한 40명 돌격대 대원을 선발하였다. 밤을 타서 40명 돌격대원을 먼저 도하시켜 적의 보루를 기습하기로 하였던것이다. 2월 20일 밤, 도하작전이 시작되였다. 돌격대 용사들은 팔에 흰 천을 두르고 등에도 흰 천을 댐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아군이 쉽게 알아보도록 하였다.   (권립교수) “1936년 2월 22일 밤, 양림은 선봉영을 거느리고 도하작전에 나섰습니다. 황하를 채 건너가지 못하고 우리의 배들이 적에게 발견되였다. 선봉영은 양림의 지휘하에 기관총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기관총 화력에 대처하면서 끝내 황하를 건넜고 하가와 서북에 등륙하였습니다.”   1936년 2월 22일 밤, 어둠이 깃들자 드디어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양림은 돌격대원들을 앞세우고 부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돌격대가 탄 배는 대안과 수십메터 거리를 둔 곳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황하기슭을 순라하던 적이 홍군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산정의 적 보루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토하였다. 양림은 전사들을 조직해 기관총으로 적의 화력을 제압하고 선견대 전원에게 강행도하 명령을 내렸다. 수백명 전사들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한편 앞장선 돌격대원들은 신속히 황하를 건너 산비탈을 타고 전진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적 보루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보루를 까부셨다. 두려움 모르는 홍군전사들은 적 수비진을 헤치고 순조롭게 강을 건너 하가와촌을 점령하였다. 후속으로 더욱 많은 홍군 부대가 강을 건너왔고 홍군 전사들은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부근의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선견대와 함께 도하한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하가와촌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전사들과 함께 길목의 적 보루를 제거하고 하가와촌을 수비하는 적 한 개 련을 소멸하였다. 부대는 계속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도하작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경위원과 함께 전장을 점검하면서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군에게 제거된 적 보루에 숨어있던 적 병사 한놈이 총을 쏘았다. 적탄은 양림의 복부에 명중되였다. 선견대 영장과 경위원이 달려와 그를 구호하였다. 전사들은 그를 부근의 요동에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권립교수) “그들은 상륙하자 포연탄우를 헤가르며 덮쳐드는 적을 물리침으로서 대부대의 도강을 엄호하게 되었습니다. 밤 열시 선봉영 전사들이 적의 종심으로 돌격해들어가고 있을 때 죄악의 적탄이 양림의 복부를 꿰뚫었습니다. 양림은 쓰러졌습니다.”   공화국 상장인 주사제는 회억록에서 홍군의 동정과 동정에서의 양림에 관련해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양림의 오랜 전우인 주사제는 당시 홍군 제15군단 참모장으로 전반 동정작전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주사제의 회억에 따르면 양림이 불행히 복부에 적탄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주사제는 급히 전선으로 달려갔다. 21일 오후 하가와촌에 이른 그는 마을에서 병치료하고있는 양림을 찾아보았다. 양림은 얼굴에 피기가 없었지만 주사제를 보자 전투상황부터 다잡아 물었다. 주사제는 지금 홍군 75사는 의첩진을 공격하고있고 78사와 군단부도 의첩진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튿날이면 석루현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택동도 이미 황하를 건너 전투를 지휘한다고 알려주었다. 양림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를 상관하지 말고 빨리 전선에 나가 싸우라고 주사제를 억지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양림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또 적시적인 치료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그는 38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리는 하구 나루터에서 다시 황하 대안을 되돌아보았다. 드넓은 황하가 거침없이 흐르고 천길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 한 가운데 있는 이름 없는 하가와촌, 그 편벽한 마을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혁명가 양림을 생각하니 마음은 격동되기만 하였다. 청산리 전투와 국민혁명군의 동정, 북벌전쟁, 2만 5천리 장정, 홍군의 동정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훌륭한 군사지휘자로 중국 력사무대에서 활약했던 양림은 끝내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러보지 못하고 이곳에 뼈를 묻었던것이다. 사랑하는 안해를 잃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자식을 잃은 그는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항쟁한 그였지만 희생된 후 묘소 하나도 명확히 남기지 못하였다. 두터운 황토가 깔린 무연한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그의 뼈가 묻혔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무정하게 흐르고 흐르는 강물뿐이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황토뿐이다. 그러나 양림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한 청산리 골짜기에 그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홍군대학의 조련장에 그의 호령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사강 천험인 교평 나루터에 그의 영웅적 위훈이 남아있고 황하 하구 나루터에 그의 혁혁한 전과가 남아있다. 그는 조선혁명의 승리를 중국혁명의 승리와 결부시켜 전반 약소민족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피어린 항쟁을 계속 해왔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으며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걸출한 군사가로서 마멸할 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그의 빛나는 항쟁의지와 헌신적인 국제주의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며 우리의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될것이다.
108    삼합진, 望江閣을 가다 댓글:  조회:5659  추천:7  2014-10-09
국경연휴를 이용해 고향인 연변을 방문하였다. 연변행차는 언제라도 눈물겹도록 정겹고 즐거운 일이다. 수많은 추억과 이야기들이 묻어있는 고향의 산과 물을 보면 늘 흥이 도도하다.  이번 연휴에는 지인의 안내로 용정시 삼합진을 가게 되였다. 그곳에 “망강각”이 새로 섰고 그곳으로는 조선땅을 한결 더 가까이에서 선명하게 볼 수있다고 한다.  사실 조선땅을 본다는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국사람들은 늘 “북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또 저들의 각가지 상상까지 보태면서 조선을 신비의 땅으로 각인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그곳을 엿보려는 엽기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냥 연변에서 자라서 두만강을 따라 삼합이나 훈춘, 도문을 통해 조선을 많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별로 신비롭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을 바라본다는 빌미로 아름다운 산천을 둘러보고 농촌의 가을정취를 한껏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였다.  용정을 떠난 SUV는 육도하를 거슬러 신나게 삼합진으로 향해 달렸다. 그 유명한 명동학교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었다던 명동촌을 지나 지신방향으로 달렸다. 선바위를 지나 “3.13”렬사묘비와 독립운동사에 유명했던 “15만원 탈취 사적비”도 있었다. 우리민족이 룡정에 터를 잡기 시작해서부터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다는 역사의 흔적들이다.   오랑캐령을 지나니 길은 한결 더 좁아졌고 길 량켠의 나무숲이 더 우거졌다. 산에는 알록달록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고 푸른 하늘에 떠도는 흰 구름은 보기만 하여도 시원하기만하였다. 늘 도시에만 박혀있던 우리의 머리를 식히고 혼탁한 마음을 시원히 적셔주기에는 더 좋은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삼합진은 눈에 띄이지 않을정도의 작은 진이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새 농가들이 줄지어서고 길 량켠에 단층집들이 비교적 집중되어 늘어선 곳이 진 소재지라고한다. 우리를 안내한 지인은 삼합진의 무장경찰부대 집무실을 지날 때 커다란 군용 망원경 하나를 들고 나왔다. 망강정에 가면 이것으로 조선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만강을 따라 좀 더 가다가 다시 산언덕으로 뻗은 길을 따라 산언덕 하나를 올라서니 비교적 넓은 산언덕 공지에 관광지가 개발되어있었고 3층 루각 하나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우리의 목적지 망강각이라고한다.  “관광지 입장료는 받는냐 안받느냐? 입장료는 얼마냐? 관광객이 많으냐?” 등등 일상적인 궁금증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수십명이나 몰려있는 전망대의 관광객들이 더 궁금했다. 뭘 그처럼 열심히 구경하고 있을까?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조선의 회령군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두만강 물줄기가 산밑으로 흐르고 그 건너편은 드넓은 평지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바로 조선의 회령이라고 한다. 화려한 고층빌딩은 없었지만 5,6층 정도의 낮은 층집들이 비교적 촘촘히 들어섰고 도시 가운데 산언덕은 공원으로 만들어져있었다. 그리고 두만강으로부터 조선측 세관을 지나 회령시로 통하는 도로가 길게 뻗어있었으며 두만강의 지류인듯한 하천에는 철교와 다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회령시는 아득히 멀리 보이는 산줄기까지 펼쳐져 있었다. 도시규모나 모습은 60~70년대 연길시와 비슷했지만 탁 트인 그 터는 연길시의 몇배 정도로 훨씬 컸다.   나는 급급히 100-400밀리 초장거리 렌즈를 바꾸어들고 회령시를 카메라에 잡아보려 했다. 두만강이나 다리, 도시들은 눈앞으로 많이 다가섰지만 난사광선으로하여 너무 선명하게는 안겨오지 않았다. 망강각에서 바라본 두만강과 멀리 회령벌 두만강기슭의 벌에서 농사짓는듯 회령벌에서 농사짓는 조선 농민들 외편 남색기와의 건물이 조선쪽 세관이라고 한다  너무나도 가깝지만 또 쉽게 갈수 없는 “먼 곳”이었다.   간단히 기념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망강각을 떠나 삼합진의 조선마을로 향했다. 두만강을 따라 굽이굽이 뻗은 길은 화룡을 거쳐 두만강의 발원지인 장백산까지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쪽으로는 그냥 두만강을 따라 개산툰, 도문을 지나 훈춘에 도달할수있다고한다. 그곳에서 두만강은 중국과 조선, 로씨야 3국 국경을 지나 바다로 흘러든다.   드높은 산언덕너머로 푸른 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졌고 키 높은 옥수수들이 끝없이 펼쳐져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른편은 두만강 량쪽으로 황금의 벼파도가 설레이는 논밭이 펼쳐졌다. 두만강기슭, 산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 달리니 지붕에 붉은 칠을 한 농가들이 나타났다. 아담진 정원과 황금의 벼파도에 포위된 붉은 지붕의 농가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농가마을 뒷동산에는 과일나무들이 많았다. 수확의 계절이라 과일나무에는 과일이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사람들은 과일을 따다 상자로 잘 포장해놓고 언젠가는 팔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올해 가물이 심해 농민들이 소득을 가장 많이 올리는 송이버섯은 거의 밀대를 놓았다고한다. 게다가 요즘 중앙의 규정이 심해 과일들도 가득 쌓였지만 판로를 찾지 못한다고했다. 이전 같으면 기관단위들이 모두 예약이 되여 과일을 포장하기 바쁘게 다 실어가버리군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안되는 형편이다. 단속이 너무 심해 어느 단위든지 감히 공금을 내고 사과배를 싸서 종업원이나 직원들에게 나누어줄 엄두를 못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공금이나 공짜로 사과배를 먹는데 습관 된 사람들이 돈을 내고 과일을 사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기대할 수 없는 일이였다. 농민들은 그냥 가득 쌓인 과일들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서 속을 태워야할뿐이다. 그렇다고 수송비용까지 부담하면서 멀리 도시로 실어다 팔수도 없는 일이였다. 이래저래 손해 보는 건 농민들일뿐이구나 하는 탄식이 나온다. 룡정시 삼합진의 농가 도로 삼합진 농가마을입구 어느 농가의 뜨락또르  두만강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강가에 별장처럼 반듯하게 잘 지은 농가들이 나타난다. 고풍의 돌담으로 잘 둘러져있는 오붓한 벽돌기와집들이였다. 마당에는 채소를 심을 터전이 있었고 또 과일나무도 싱싱하게 자라고있었다. 소개에 의하면 이 집들은 모두 정부에서 돈을 내 건설한 새농촌 새농가들이라고 한다. 변강지역이기 때문에 국가의 혜택도 잘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농가들도 대부분 빈집뿐이고 주민들은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농망기여서 모두 밭에 나갔는지 아니면 돈벌러 도시로 나갔는지 모를 일이다.  돌아오던 언덕길에서 두만강 건너편 회령군에 속하는 조선의 농촌 마을을 굽어보았다. 촘촘한 벽돌기와집과 숲처럼 밀집된 굴뚝들이 퍽 인상적이였다. 적어도 썰렁하고 빈 느낌이 없이 오붓하게 사람들이 모여사는 고장이고 깨끗한 고장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창 농망기인지라 차들이 없는 길에는 탈곡한 옥수수들을 말리고있었다. 이따금 그 사이로 행인이 걸어다니도 하였다. 텅빈 우리쪽 농촌마을과는 선명한 대조가 아닐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들이 오고다니는 모습이 정겹도록 반가웠다.   두만강가에는 이따금씩 낮은 변방초소도 보였다. 유심히 찾지 않으면 잘 발견하기 어렵다. 꼭 일제시대의 “또치까”와 같았다. 사사로이 두만강을 건너 월경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한 조치인 듯싶었다. 조선의 농가마을 거리에 낟알을 말리고 행인도 다니고 아담진 집들이 촘촘한 농가마을 두만강가 나무숲사이에 보이는 초소(강가 가로수 사이 오른쪽 3분의 1쯤)   두만강 기슭을 따라 눈앞의 가까우면서도 너무나도 멀고 낯선 땅을 바라보면서 생각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두만강, 두만강의 물줄기가 월경민족인 우리를 먹여 살린 생명의 강이요, 어머니 강이라고하지만 나의 인상에는 그것보다도 두만강은 그야말로 눈물에 흠뻑 젖은 강이요, 아픔의 강이요, 우리민족의 통한의 강이라고 생각되였다!  월강죄는 사형이라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 도적 농사를 짓다가 봉금령의 해제로 자유롭게 강을 건너 이 땅에 터전을 잡기 시작해서부터 “눈물 젖은 두만강”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오래동안 불리워졌다. 고향을 등지고 멀리 이국타향에 와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수밖에 없었던 실향민들의 정감을 잘 반영한 노래였던것이다. 그후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수많은 중조 량국 혁명가들이 어깨겪고 싸웠다. 중국에 공화국이 창건된후에도 엄연히 국적은 달랐지만 두만강은 우리민족의 혈연적 련계를 끊지 못했다.   대약진시기의 굶주림을 피해 많은 조선족 주민들이 조선으로 월강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우파”로 몰리거나 “조선특무”로 억울한 루명을 쓴 많은 간부들이 마음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몰래 두만강을 건너 “자기네 나라” 조선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어느 동료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조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수갔을때 글쎄 그곳에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 연변대학에서 우파로 몰렸던 로교수분을 만났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던 그 교수는 정치투쟁에 배겨내지 못하고 조선으로 갔다가 지금까지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처럼 빈곤과 가난에 굶주렸을 때 그리고 정치투쟁이 심각했을때 많은 우리민족이 이 강을 건너 다시 조선으로 나갔던 눈물의 이야기가 적지 않다.  중국에 개혁개방이 되여 좀 잘 살게 된 후 이번에는 세상이 뒤바뀌여 조선의 더 많은 굶주린 백성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인들은 이들을 “탈북자”로 부른다. “북한”의 정치체제를 버리고 “자유세상”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라고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이들의 피눈물의 이야기는 두만강물을 다 퍼부어도 씻을수 없을 만큼이나 많고도 많다.  오랫동안 봉페되여있기 때문에 조선의 정체에 대해 외부에서는 잘 모르고 있다. 설사 강 하나를 사이두고 이웃 마을을 내다보듯 가까운 삼합진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정체를 보아낼수 없다. 보일듯말듯한 베일에 가리워져 그 진실을 알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쁘게 생각하면 이 세상 더 없이 악착한 곳으로 부각되고 반대로 또 좋게 생각하면 더 없이 훌륭한 “사회주의 낙원”인듯도 하다. 아마도 이렇기 때문에 그 신비감을 더 해주고 있는 듯 싶다.  연변행을 마치면서 귀경할때 놀라운 소식이 터져나왔다. 조선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놀라는 기사였다. 중국 인터넷에서 터져나온 기사인데 글쎄 조선에 “정변”이 일어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구금되고 조선의 실세 인물들이 인천 아시아체육경기대회 페막식을 빌미로 한국을 돌연 방문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한국 방문의 목적은 단순히 페막식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따낸 조선선수단을 격려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체제 변혁을 한국과 서방세계에 통보한다는 숨은 뜻도 포함된 것이라고 분석되였다. 실로 놀라운 소식이 아닐수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거짓보도이고 허위기사였음이 곧 밝혀졌다.    사람들은 너무 일방적으로 조선의 체제가 무너지고 조선이 더 개방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허위 기사가 튀여나오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실로 믿으려하고있는것이다.    사실 세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조선과 한국간의 통일은 국가와 민족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 여러 정치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전초지이기 때문에 현황이 쉽게 개변될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지금의 균형이 쉽게 깨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균형이 깨지는 날이면 어찌보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를일이다.    정보화시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있는 오늘, 세상의 정치중심은 경제발전에 있고 최상의 정치리익은 경제와 안보로 구성된 세력유지와 확보에 있기 때문이다.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먼 곳, 건너편 산과 물, 너무나도 친숙한 농가 마을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가슴이 터질듯 한탄하고 울부짖어도 그 아픔의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수밖에 없는게 바로 두만강이라 하겠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눈물젖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모든것을 멀리 굽어보는 망강각이 원망스럽다!  망강각에서 굽어본 두만강  
107    제74회 하구나루 하가와촌 댓글:  조회:4601  추천:1  2014-10-09
1936년에 있었던 홍군의 동정은 이미 근 70년 세월이 지난 옛일로 되었다. 하지만 두터운 황토와 수천년 흘러흐르는 황하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사람들도 아득한 옛일을 더듬으면서 당시의 치렬했던 전투상황을 이야기하고 홍군 선견대의 도하작전을 지휘한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있다. 치렬한 전투가 있었던 산서성 전산향 하가와촌 전적지를 찾아가는 우리의 마음도 기대감으로 벅차있었다. 그곳에는 황하동안의 적군 보루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홍군이 리용하였던 하구나루터에도 지금 그냥 나룻배가 있어 길손을 건네주고있다. 홍군출신인 임협혜로인과 당사연구원 전보왕로인을 만나고 나서 우리는 석루현을 떠나 전산향 하가와촌으로 출발하였다. 시간은 9시 30분이였다. 찦차 두대가 답사팀 일행과 선전부 일군들을 나누어 싣고 떠났다.   황토고원의 깊은 협곡 험난한 산길 석루현 전산향인민정부 앞에서   현 소재지를 벗어나 차는 좁은 협곡을 따라 달려 얼마후 려량산을 지났다. 석루현은 려량산 서남부와 황토고원 동남변두리에 위치했다. 두시간 달려 의첩진(義牒鎭) 경내를 지나니 메마른 산들이 끝없이 펼쳐져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려량산을 벗어나 이미 황토고원에 들어섰던것이다. 하늘밑까지 가없이 펼쳐진 누런 황토를 보는 우리의 마음은 한결 벅찼다. 대자연의 위대함에 숨마저 가빠남을 느꼈다. 수 천년을 비바람에 씻기고 할퀴여 고원은 깊은 골짜기와 황막한 둔덕으로 얽혀있었던것이다. 대자연의 위엄과 지존의 힘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산등성에는 마른 잡초가 바람에 흔들리고 골짜기나 볕이 좋은 산기슭에 이따금 민가들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산에 굴을 파고 만든 요동에서 살았다. 차는 흙먼지를 일구며 좁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내처 달렸다. 길이라고 하지만 수레 길보다도 더 나빴다. 가파르고 굽이가 많았을 뿐만아니라 빗물이 고여서 생긴 웅뎅이가 많았다. 더욱이 산에서 굴러 내린 크고 작은 흙덩이를 피해가야 했다. 차는 가끔 벼랑 우를 달리기도 하였다. 량쪽이 모두 천길 낭떨어지여서 차창 밖으로는 밑도 없는 벼랑만 보일뿐 길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차는 외나무다리 우를 달리는것 같기도 하고 하늘을 달리는것 같기도 하였다. 참으로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운전기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12시가 넘어서 우리는 전산향정부에 도착하였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향정부에는 넓은 마당과 지붕이 평평한 단층 건물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온 몸이 쑤셔났다. 차체가 몹시 흔들렸기때문에 사지가 모두 아파 났던것이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일행은 려행감수를 이야기했다. 이때 텁텁한 사나이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이곳까지 오려면 현지 기사가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전산향인민정부 향장(鄕長)이였는데 성이 곽(郭)씨였다. 곽향장은 먼길을 오느라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은 길이 험하기때문에 타지방 운전기사들의 운전솜씨를 가지고는 여기까지 올수 없다고 장담하였다. 험한 길을 직접 달려온 우리는 일제히 운전기사에게 경탄의 눈길을 보냈다. 이날 점심 우리는 곽향장의 초대를 받았다. 그는 석루현 정부의 련락을 받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우리는 간단한 나무식탁에 모여앉았다. 일상가정에서 볶아먹는 료리 두개와 커다란 나무통에 하얀 밀가루 국수를 가득 담아내왔다. 우리는 제마끔 사발에 국수를 담고 양념장을 떠서 짜장면을 만들어 먹었다. 이곳 사람들의 소박함은 검소한 음식에서도 알아볼수있었다. 곽향장은 이곳 사람들은 요동에서 사는데 습관이 되였다한다. 요동은 겨울에 따스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때문에 새로 벽돌집을 지을 돈이 있어도 사람들은 벽돌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갈 길이 급했기때문에 우리는 전산향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하가와촌으로 향했다. 험난한 려행은 계속되였다. 차는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하가와촌에 이르렀다. 수백명 인구가 살고있는 작은 산간 마을이였다. 석루현에서 하가와촌까지 불과 100여리 길이였지만 우리는 4시간의 간고한 려행끝에 겨우 도착했던것이다. 하가와촌의 진준주(陳俊珠)서기가 산언덕까지 마중 나왔다. 안내일군들이 높은 산언덕을 가리키면서 거기에 염석산부대가 만들어놓았던 보루 유적이 남아있다고 하기에 우리는 산언덕에 올라갔다. 언덕에서 바라보니 시야가 탁 트였다. 멀리 누런 황하가 굽이쳐 흐르고있었다. 희뿌연 하늘과 멀리 지평선으로 황토고원이 아득히 펼쳐져있었고 발밑으로는 작은 하가와촌 마을이 보였고 굽이쳐 흐르는 황하가 보였다. 우리는 마치 하늘공중에 서서 세상을 굽어보는한 느낌을 받았다. 소개에 따르면 하가와촌 동남쪽 언덕에 돌무덤이 있었는데 옛날 적의 보루였다고한다. 자상히 보면 이쪽에 보루가 하나있고 저쪽에 또 작은 보루가 있어 모두 합쳐 5개가 있었다. 기재에 의하면 한 개 영의 염석산 부대가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적은 하가와촌의 주요 나루터를 방어하기 위해 여기에 주요한 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으로는 하가와촌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통제할 수 있고 또 황하쪽으로 나루터를 통제할수도 있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1935년 12월 25일에 정치국 회의를 열고 동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9월 4일 회의는 모택동이 직접 사회를 하고 황하 도하준비를 포치했으며 하구나루터 돌파작전을 제15군단 75사에 맡겼다. 현지인들이 소개하는 적 보루의 흔적은 지금 잡초가 무성한 산언덕에 작은 돌담을 형성해 놓고있었다. 허물어진 보루의 기초돌에 흙이 쌓여서 형성된 유적이였다. 이곳에 적은 서로 련결된 보루 5개를 축조하였는데 병력은 수십명 정도였다고 한다. 적의 보루 유적에서 내려다보니 황하기슭 하가와촌 마을과 마을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산길이 한눈에 보였다. 적은 이곳에서 황하 나루터와 하가와 마을을 통제하려했던것이 분명하였다.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다음 조선혁명가 양림은 경위원을 데리고 공격부대가 제거한 적 보루를 점검하던중 적탄을 맞았던 것이다. 홍군전사들이 까부신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점검하고있을 때 한쪽 구석에 숨어있던 적병사가 총을 쏘았던 것이다. 적 보루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산언덕을 내려 우리는 하가와촌에 들어섰다. 하가와촌은 대추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가을철이라 빨간 대추가 많이 열려있었고 또 나무 아래에도 많은 대추알들이 널려있었다. 이 고장의 대추는 3000년 전부터 유명해 중국 대추의 발원지라고 한다. 수조와 당조 시기에는 이곳 대추가 공물(貢物)로 황궁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해 따라 때맞지 않게 대추 채집을 앞두고 비가 왔기때문에 많은 손실을 보았다. 빗물에 젖으면 대추는 금방 썩게 되고 땅에 떨어져 버렸던것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대추나무 아래에 빨간 대추알들이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고있었다. 진준주 서기는 올해 대추농사가 잘 되지 못해 마을 농민들의 수입이 또 많이 줄어들것이라고 하면서 긴 한숨을 내 쉬였다. 땅에 널린 대추알과 수심에 찬 농민들의 모습을 보는 우리의 마음도 아파났다. 마을에서 우리는 84세인 고귀영(高貴英) 로인을 찾아갔다. 비교적 너른 마당을 가진 한 토굴집에서 살고있었다. 마당에는 대추를 말리고있었고 또 한켠에는 커다란 호박을 무져놓고있었다. 토굴집에 들어서니 광선이 충족하지 못해 앞이 어두웠다. 방안쪽으로 로인 한분이 앉아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고귀영 로인이였다. 로인은 홍군이 동정하던 1936년 2월에 하가와촌에 시집왔다고 하였다.  고귀영로인은 당시 16살이였는데 하가와촌으로 시집온지 얼마 안되였다고 한다. 그날 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은 마음을 조이고 감히 문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한다. 그리고 전투에서 많은 백비군(국민당군)이 죽고 홍군이 승리했다고 한다. 당시 신혼을 보내고있던 고귀영로인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무르익히고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뜻하지 않던 총소리를 듣고 자신의 운명을 념려하면서 불안의 장밤을 보냈다고 한다. 새삶의 희망과 불안을 안고 긴긴 장밤을 뜬눈으로 보낸 고귀영로인에게 있어서 도하작전이 있었던 그날은 근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가와촌을 나와 답사팀은 하구나루터로 향했다. 차는 벼랑길을 에돌아 황하기슭의 모래톱을 달렸다. 이윽고 대안의 산간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은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였다. 마을은 작은 산언덕에 위치했고 그 앞으로 누런 황하가 사품치며 흐르고 있었다. 강폭은 1,000여메터에 달했다.   하가와촌 어구 산언덕에 있는 보루자리 황토고원에서 바라본 황하 대추나무가 많은 하가와촌 하가와촌의 민가(전형적인 토굴집) 황하를 사이두고 하가와촌과 마주한 하구촌(섬서성)   산서성 전산향의 하가와촌과 섬서성 청간현의 하구촌은 황하를 사이두고 마주한 두 산간마을이다. 하가와촌이 위치한 황하 동안은 천길 벼랑이였지만 하구촌쪽은 비교적 낮은 산 언덕이였다. 하구나루터, 바로 이곳에서 홍군도하작전이 진행되였던 것이다. 나룻배를 기다리면서 강기슭에 서 있노라니 당시 전투정경이 머리에 떠올랐다. 홍군 75사 223퇀 제1영의 용감한 전사들이 선발대로 조직되여 저 멀리 대안으로부터 공격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고있었다. 사급 간부였던 양림창모장이 직접 도하작전을 지휘한다하였기에 전사들은 사기가 더 높았을것이다. 그들은 홍군장정시 금사강 나루터를 탈취하고 통안진을 습격하는 전투 지휘자인 양림참모장을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한편 홍군전사들은 양림의 지휘하에 당시 하구촌 곁으로 흐르는 무정하에서 엄격한 도하훈련을 진행했었다. 그들은 황하의 물살과 도하에 수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였고 선견대가 탈 나무배도 대기시켜 놓았던것이다. 만단의 준비를 마친 용사들은 공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있었다. 시계는 찰칵찰칵 출발의 시간으로 달려갔다. 깊은 밤장막이 드리워 주변은 먹물을 부은 듯 캄캄하였다. 오로지 바람소리와 물소리만 들릴뿐이였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숙엄한 표정으로 공격의 시간을 기다렸다.
106    제73회 홍군동정기념관 (하편) 댓글:  조회:4075  추천:0  2014-09-22
산서성의 오지에 자리잡은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에 조선혁명가 양림의 사적이 전시되여있다. 그리고 현지의 당사 연구일군들이 당시 홍군의 동정과 도강 작전을 지휘한 양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양림의 묘소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일이다. 중국혁명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홍군동정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혁명가 양림, 그는 희생된후 현지인과 홍군전사들에 의해 매장되였지만 지금 그 구체적인 위치를 알고있는 사람은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는 석루현 당사연구원 리명생과 류원(오른쪽 첫번째와 두번째)   홍군동정기념관에서 석루현 당사연구판공실 리명생(李明生)연구원과 류원(劉源)연구원이 우리에게 홍군동정과 양림에 관련해 이야기 해주었다. (리명생) “당사에서 홍군의 동정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있습니다. 홍군의 동정은 북상항일을 주장하였고 중국혁명사에서 큰 전환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동정을 통해 홍군은 크게 장대되였고 항일통일전선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황하의 하구나루터는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요새입니다. 편벽한 곳이기 때문에 도하작전후 쉽게 발을 붙이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때는 2월이였습니다. 황하에는 크고 작은 얼음이 흘러내렸습니다. 홍군의 도하장비를 본다면 현지인들이 만든 나무배였는데 큰 배에는 80명이 탈수있었고 작은 배는 20여명이 탈수있었습니다. 홍군 주력부대는 세 개 나루터를 리용해 도강했습니다. 양림이 소속된 15군단은 하류의 하구나루터로 도강했는데 전투가 가장 치렬하게 진행되였습니다.” (류원) “홍군은 2월 20일밤에 도하했습니다. 섭영진의 손목시계를 표준으로 작전을 개시했는데 밤사이에 도강을 끝냈습니다. 75사 223퇀 제1영이 선견대로 확정되였습니다. 양림은 수영을 잘하는 40명 용사들을 뽑아 5개의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필사적(양림)은 당시 사 참모장이였는데 제1영에 와서 40명 용사를 거느리고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상급 기관의 지도자가 일선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필사적은 선두부대로 가장 먼저 황하를 도하하고 또 선두부대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필사적은 치렬한 접전에서 희생된 것이 아니라 전투가 끝나 전장을 둘러볼 때 또치까안 숨어있던 적의 총에 맞아 희생되였습니다. 필사적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함이 유감입니다.” 석루현의 리명생연구원과 류원연구원은 동정 전투경과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가 있었지만 양림의 생애나 기타 투쟁경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다. 다만 양림이 지휘한 도하작전 경과에 대해서 자상히 알고있을뿐이였다. 그들은 양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연구와 자료가 있으면 기념관에 제공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홍군동정기념관을 참관한후 답사팀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에 모여 답사코스를 검토하였다. 석루현 선전부 일군과 태원의 리세박주임이 함께 현지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석루현에서 우리는 양림이 희생된 곳과 황하 도하작전 전적지를 답사해야 했다. 그곳은 석루현 전산향(前山鄕) 하가와촌(賀家窪村)에 있었다. 계획대로 한다면 하가와촌을 보고나서 곧추 섬북 연안으로 가야했다. 우리가 계획을 설명하자 선전부 일군들이 모두 난색을 표했다. 우선 하가와촌까지 가려면 100여킬로메터의 험한 산길을 가야했고 다음으로는 다리가 없기때문에 황하를 건너기 어렵다는것이다. 그리고 황하를 건넌 다음 나루터로부터 섬서성 청간현(淸澗縣)까지 역시 수백리 험한 산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차만 있으면 어떤 길이라도 다 갈수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가와에는 하구 나루터가 있으니 나룻배로 강을 건널수 있고 거기에서 다시 청간현을 거쳐 연안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단순하였다. 하가와촌까지 산길은 석루현으로 올 때보다 더욱 험하기때문에 승용차로는 도저히 갈수 없다고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전에 차가 망가져 버린다는것이다. 게다가 석루현 선전부 일군들은 하가와까지는 안내할수 있지만 섬서성 경내로 갈수 없기때문에 더 안내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강을 건넌 다음 하구촌(河口村)에서 청간현으로 가는 차를 구할수 있을는지도 문제되였다. 현지 상황을 듣고 나서 이번엔 우리가 입을 딱 벌리고 난색을 표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다고 답사를 그만 둘수도 없는 일이였다. 이때 리세박주임이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하가와촌까지는 석루현에서 차를 내여 안내하도록 하고 다시 석루현에 와서 좋은 길로 연안에 갈 방법을 생각하자는것이다. 선전부에서는 산길을 달릴수 있는 짚차(jeep) 한 대밖에 구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리세박주임은 자기가 가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석루현에 다시 와서 연안으로 가는 방도를 찾아보았지만 시간과 거리를 단축할만한 방법은 없었다. 곤난을 극복하고 원 계획대로 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였다. 다만 년로한 최룡수교수의 건강이 걱정되여 최교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뜻밖에 최교수도 하가와촌에서 연안으로 직접 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홍군은 일찍 적과 싸우면서 두 발로 동정을 했는데 차까지 있는 우리가 무엇때문에 연안까지 못가겠는가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찍 홍군이 동으로 황하를 건너 동정했다면 우리는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서정》한다며 호기를 보였다. 년세가 많은 분이 이렇게 나서자 모두가 동감을 표했다. 나는 선전부 일군과 함께 실행 가능성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황하는 나루배로 건너기로 하고 황하대안의 하구촌과 련락을 취해 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에게 청간현으로 가는 차도 미리 준비하도록 부탁해 줄것을 청했다. 우리가 원 계획을 고집하니 선전부 일군들도 들어줄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구촌과 련락을 달아 놓고 차를 준비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위대한 서정”계획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길이였는가는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밤늦게까지 검토를 마치고 자리에 들었다. 산간지대이기때문에 석루현의 가을은 추웠다. 의복을 더 껴입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10월 27일 아침 식사를 마치자 선전부에서 배치한 찦차 한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우리는 임석평부현장을 찾아가 그의 부친인 임협혜(任俠惠) 로인을 만나보았다. 임협혜로인은 일찍 홍군의 동정에 직접 참가한 경력을 가진 분이였다. 86세 고령인 로인은 풍을 약간 맞아 손을 떨고있었고 청각도 좋지 못했지만 머리는 명석하였다. 우리는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질문을 할수 있었다. 로인은 홍군부대가 황하를 건너 석루현에 오자 홍군부대에 입대하였다 한다. 그는 부대를 따라 진격할 때 부대의 고위 간부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삐스티에 대해 알게 되였다고 한다. 로인은 하가와촌에서 희생된 홍군 장령이 삐스티라고 하면서 그는 조선사람이라고 하였다. 임협혜로인에게서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그는 삐스티가 희생된후 홍군은 황하를 건너 그의 시신을 섬북근거지로 가져다 이장하였다 한다. 우리가 양림의 묘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거듭 물었지만 로인은 모른다고 했다. 다만 희생자들은 보다 안전한 섬북근거지로 옮겨가 장례를 치렀다고 할뿐이다. 석루현을 떠나면서 우리는 또 전보왕(田補旺)이라는 로인을 만나보았다. 전보왕로인은 당사연구일군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분이였다. 그는 양림의 시신을 멀리 수송하지 못하고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無定河) 기슭에 안장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치렬한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있었기때문에 멀리 수송할수 없어 부근 근거지의 안전한 마을에 안장했다는것이다.     석루현 로홍군 임협혜로인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오른쪽)와 로홍군 입협혜 로인   석루현 당사연구실 원 주임 전보왕(오른쪽 세번째)   양림의 시신은 하가와촌에 안장했다가 동정을 마친 홍군이 철수할 때 다시 황하대안의 하구촌에 이장하였다. 양림의 전우였던 주사제상장의 회억록을 많이 연구하였던 전보왕로인은 주사제는 양림을 혼자 적후에 둘수 없다고 하면서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인 하구촌에 이장하였다고 했다. 해방후 주사제상장은 양림의 묘소를 찾기 위해 이 고장을 찾아왔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기때문에 그 묘자리를 찾지 못했다 한다. 참 유감스러운 일이였다. 더 상세한 내용은 알길이 없었다. 중국공산당내 조선인으로서는 최고급 간부였고 또 훌륭한 군사 전문가였던 양림, 학계에서는 지금도 그의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의 묘소를 찾아 기념비라도 세워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우리의 심정은 마냥 서글펐다. 
105    “9.3”단상-용서와 사죄 댓글:  조회:4358  추천:1  2014-09-04
9월 3일은 중국의 항일전쟁승리 기념일이다. 올해는 항전승리 69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날 전국각지가 성대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세계 많은 나라들도 요즘 항일전쟁과 반파쇼전쟁 승리의 날을 기념하고있다.    지난 9월 1일 뽈스까가 2차대전 발발 75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가졌다. 놀라운것은 이 기념행사에 독일 대통령도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뽈스까 코모로프스키 대통령과 독일 가우크 대통령이 함께 뽈스까 2차 세계대전 용사기념비에 꽃다발을 진정했다. 75년전인 1939년 9월 1일에 독일 나치스는 뽈스까의 군수품 창고였던 이곳을 포격하면서 2차대전이 발발했다. 이때로부터 5년여시간이 흘러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희생되였다.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2차 세계대전은 무수한 가정과 많은 국가에 비극을 조성해주었고 백만을 헤아리는 생명을 빼앗아가고 또 민족 대학살을 일으켜 상상할수없는 불행과 고통을 빚어냈다고말했다. 그는, 우리는 력사와 아픔속에서 교훈을 섭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가우크 대통령은 연설에서, 히틀러는 한 나라를 훼멸시키고 또 이 나라의 우수한 인재와 백성을 모두 살해하려했다면서 뽈스까는 인종 말살의 실험장으로 되였다는 진상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말했다. 그는, 타국의 영토에 대한 미련은 침략자들의 야심을 키워준다는것은 역사의 비극으로부터 섭취해야할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2차대전의 가장 큰 피해국의 하나인 뽈스까가 원흉인 독일의 대통령을 기념행사에 초청하기까지 력대 독일 정치가들의 노력이 기울려져있다. 특히 1971년에 무릅꿇고 진정으로 사죄한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행동에서 뽈스까와 세계인민이 독일의 진정성을 읽었던것이다.    1971년 뽈스까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2차대전 희생자 비석앞에 무릅꿇었다. 당시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이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못했고 이어 곧 사내답고 씩씩한 독일 총리의 행동에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은 큰 눈이 내린뒤의 아주 추운 하루였다. 체코와 뽈스까를 국가방문한뒤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유태인 희생자 기념비앞에 도착했다. 공식 일정대로 기념비에 꽃다발을 진정한후 조난자들의 형상을 새겨놓은 조각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돌연 기념비앞 대리석에 무릅을 꿇고말았다. 그는,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아픔을 겪는 모든 영혼이 안녕을 찾기 바랍니다!”하고 기도했다.  빌리 브란트 독일총리의 이 행동은 2차대전에서 무고하게 학살된 유태인들에 대한 침통한 애도일뿐만 아니라 나치스 독일과 관련한 진정한 사죄이고 속죄였다. 이슬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공식적인 례의를 벗어난 이 돌발행동은 천백만 뽈스까인을 감동시켰고 현장의 세계 각지 외교관과 기자들을 감동시켰다. 긴 말이 필요없이 무릎꿇고 사죄한 행동만으로도 모든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뽈스까는 2차대전기간 3백여만 유태인을 포함해 6백만인구가 피살되였다. 하지만 뽈스까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2차대전 피해국들은 모두 평정한 마음으로 오늘의 독일을 대하고있다. 함께 경제건설을 도모하고 문화교류를 징행하면서 호혜상생하고있다. 각국이 모두 너그러운 마음으로 독일을 용서하고 독일을 새롭게 대하고있는것이다. 물론 그만큼 독일이 진정성있게 각 피해국에 사죄하고 량해를 빌었으며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다.    전쟁후 독일은 국내에서는 나치스의 영향을 철저히 제거하고 대외적으로는 나치스의 죄행과 관련해 진정성 있게 사죄했다. 때문에 수십년간의 진정성 있는 노력을 통해 독일은 각국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수있었다. 사람들은 전쟁전의 독일 나치스와 오늘의 독일을 분별해서 대할수있게 되였던것이다.    독일은 과거를 회피하지 않았고 책임적인 자세로 선인들의 잘못과 관련해 사죄했다. 이는 더 없는 용기가 아닐수없다. 정감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리지적이며 철같은 규률과 투철한 철학정신으로 다져진 독일인들의 의식구조에서만이 비롯되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방의 이러한 자세와 달리 아시아권에서는 아직까지도 2차대전의 아픔에서 허덕이며 그 아픔과 상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있는것 같다. 참 힘든 로정을 걷고있는것이다. 가령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기념행사거나 한국의 광복절 행사에 일본 정계의 주요 인사가 동참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 미친생각이라고할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라고할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생각은 굳어져있고 현실 또한 엄청 굳어져있는것이다.     아시아권에서는 과거 일본의 만행이 용서를 받지 못하고있다. 그 주되는 원인은 일본이 지금까지도 저들의 침략역사를 승인하지 않고 아시아 각국 피해국에 진정성있는 사죄를 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각국과의 섬분쟁을 구실로 자국 헌법까지 뜯어고치며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 하고있다.     용서와 사죄는 모순통일체로서 사죄가 있어야만 용서가 있게 된다. 또 한걸음 물러서서 먼저 용서를 했으면 따라서 사죄도 해야하는법이다. 하지만 아시아권의 이런 상식을 벗어나 일본은 일방적으로 저들의 주장만 고집하고있다. 저들의 전쟁은 서방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며 아시아의 “공영”을 위한 전쟁이라고 고집하고있다.따라서 2차대전 갑급 전범의 위패를 봉양하는 야스꾸니신쟈를 계속 참배하고있다.  사전의 의도가 어찌되였건 결과가 재앙으로 돌아왔다면 그 행동은 모두 잘못된 재앙일수밖에 없는 일이다. 의도가 어찌하든 일본이 2차대전기간 아시아에서 발동한 전쟁은 곧 침략전쟁이였고 아시아 각국인민에게 침중한 아픔과 고통, 재앙을 들씌운 전쟁이였다는 사실만은 부인할수없는 일이다. 진정 일본이 문명하고 우수한 민족이라면  독일처럼 과감히 역사를 반성할줄 알아야하고 사죄할줄 알아야한다. 진정성있는 반성과 사죄가 없다면 그것은 곧 죄행을 다시 범한다는것과 같은 말이 된다. 그럴진대 수많은 나라에 전쟁의 재앙을 가져다주고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재앙의 재발을 누군들 허용할수있겠는가? 그러니 일본은 용서받지 못하는것이다!
104    “8.15”, 항일 렬사들과 어르신들을 추억하며 댓글:  조회:4027  추천:5  2014-08-15
“8.15” 는 일제로부터 해방 받은 조선민족의 광복의 날로서 자못 의미 깊은 날이다. 때문에 해마다 남북 모두가 이날을 성대히 기념하고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승리의 공식 기념일이 9월 3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념행사들이 없다. 오직 조선족이 집거해 살고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만이 이날을 “광복”이요, “해방”이요, “항전승리”와 관계없이 민족전통의 어르신들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로인절로 지내고있다. 물론 마음 깊은 사람들은 이날을 로인절로 기념하면서도 이날의 진정한 의미도 망각하지 않을것이다. 늘 “8.15”를 지내왔지만 올해만은 각별히 감회가 남다르다. 늘 그러했듯이 집안 어르신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곁들어 명절의 인사를 전하며 조그마한 성의로 용돈을 얼마간 보내드리면 그만이였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방송사업일군인만큼 우리방송을 애청하고 계시는 연변이거나 장춘의 어르신들에게 문안전화도 하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웬지 여러 가지 의미가 한데 뒤엉켜 마슴이 무겁기만 하다. 그도그럴것이 내가 알고있는 너무 많은 어르신분들이 이미 돌아가셨다. 내가 방송국 기자로 취재하면서 만났던 많은 로인들 특히 혁명에 참가하셨던 분들은 최근 몇년사이에 련속 돌아가셨다. 조선혁명군정대학을 나왔고 해방전쟁시기 동북대지를 석권하면서 피어린 항쟁을 직접 겪으셨던 심양의 원로 최강 선생님, 서영화 선생님, 길림성 반석의 김응삼 선생님, 길림성 연길의 김병욱 로인, 최명세 로인.......뿐만 아니라 우리방송을 애청해 듣던 잊지 못할 로인분들도 돌아가셨거나 또 병에 시달리고 계신다. 특히 방송을 들으시면서 늘 나를 고무격려해주셨을뿐만 아니라 방송 애청자 소조까지 조직해 주신 연변방송애청자협회의 문태경 회장님께서 중병에 걸려 이제는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비보를 박철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에 심정이 더 무거운감을 느끼고있다. 20여년간의 방송기자로 사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많은 일을 겪어보았지만 그래도 문태경 회장님을 비롯한 방송 애청자분들을 만났던 일이 가장 기억이 새록새록하고 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문태경 방송애청자협회 회장  문태경 선생님은 아주 정열에 넘치는 분이셨다. 70세 고령이 넘었지만 점잖고 말수적으며 또 가끔씩 유머도 곧잘 하시군 했다. 또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억찌도 곧잘 부리시군 하셨다. 물론 부인이 안 계시기에 곁에 돌봐주는 사람이 크게 없었던것 만큼 술이나 담배를 자제하지 못하셨다. 게다가 나 역시 깐깐한 성격이 아니였기에 만나면 늘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술과 담배를 걸지 않았다. 문태경 선생님과의 인연은 2004년 하반기부터였을것이다. 당시 내가 맡았던 대형 력사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가 본격 방송되던 때였다. 물론 한주에 한회정도 방송하니 그처럼 큰 영향력을 과시하지 못했다. 대신 오래도록 길게 청취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것도 사실이다. 그때 방송이 끝날때면 늘 방송된 내용에서 찾아보는 퀴즈문제를 내주고 전화나 편지로 퀴즈를 맞추는 분들에게는 관련 도서거나 반도체를 비롯한 기념품을 증정했다. 너무 간단한 이벤트였지만 그래도 청취자들의 호응이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퀴즈를 맞추던 한 애청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잘 청취하고 있는데 이 좋은 자료를 책으로 정리해 출판하지 않겠는가고 건의해왔다. 그리고 자기도 자그마한 인쇄공장을 가지고있으니 도움을 주겠다는 내용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책 출판이 꿈이였 던 나는 곧 이 좋은 건의를 제기한 청취자를 기억하게 되었다. 편지마지막에 “문태경(文泰景)”이라고 한자로 밝혀져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부터 문선생님은 사실 방송 애청자소조를 조직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얼마후 문선생님으로부터, 방송에서 호명되는 애청자들의 련락주소를 제공할것을 요구하는 전화가 왔다. 그래서 명함과 통신력락처(주로 고정전화번호)를 정리해 보내주었다. 문선생님은 명함에 따라 애청자분들과 일일이 통화하면서, 방송애청자 소조를 건립해 자주 모임을 가지고 서로 방송청취 소감을 이야기하며 또 뜻 깊은 행사도 조직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셨다. 그리하여 방송애청자분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2005년에 민족출판사에 의해 “불멸의 발자취”가 출판되였다. 비용은 좀 할인 받았지만 그래도 모든 비용은 자부담으로 해결했다. 책이 출판되자 나는 가장 먼저 이 소중한 도서들을 방송 애청자들에게 선물하고싶었다. 그래 스스로 우편료를 부담하면서 먼저 연변의 문태경 선생에게 부쳐 보냈다. 방송프로그램 퀴즈답변에 적극 참가한 애청자분들에게 선물로 증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장춘의 애청자분들은 그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권을 직접 가져다 드릴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 연변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비행기를 마다하고 기차편으로 장춘을 들러 가기로했다. 책은 생각보다 아주 무거웠다. 같은 체적의 무게가 돌덩이보다 더 무거운것 같았다. 나는 책을 가득 담은 트렁트를 끌고 장춘역에 내리니 장춘의 방송 애청자 윤영학 선생님께서 마중나오셨다. 윤영학선생님도 그때 장춘의 방송 애청자들을 조직하고 계셨는데 나의 부탁을 아주 기꺼이 들어주셨다. 그리고 나를 댁에 초대해 사모님이 직접 만든 맛나는 음식까지 대접해 주셨다. 그야말로 제집 식구를 맞아주는 격이였다. 장춘에 잠깐 머문 다음 연변에 가서 일을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때 연길 출장 목적이 무엇이였던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태경 선생님과 애청자들을 만나던 정경만은 기억이 뚜렷하다. 우리는 함께 간단한 좌담을 가졌고 애청자분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방송을 청취한 소감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소중한 책을 선물해주어서 너무나도 감사하다고했다. 그런데 이때 문태경 선생님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셨다. “이왕 이렇게 모였던바에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방송 애청자소조를 건립하자”는것이였다. 물론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기꺼이 승낙했고 만장일치로 문태경 선생님을 책임자로 추대했다. 문선생님은 이 자리를 위해 미리 도서 “불멸의 발자취”를 이분들에게 다 나누어 드리면서 여러사람들의 의향을 다 파악했던것이다. 그리하여 방송 애청자 소조 설립회의가 소박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 생각지 못한 일이 또 생겼다. 한 애청자가 책을 들고 나에게 다가오더니 싸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 글자를 잘 못 쓰는데요”하고 겸손을 떨면서 한국식대로 “아무아무에게 드리니 혜존”하고 써 드렸다. 그러자 다른 애청자분들도 모두 와서 줄을 서서 싸인을 기다리는것이였다. 방송애청자 소조 설립좌담회가 도서 출판 싸인회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모인 십여명에게 다 싸인해주고 방송애청자소조의 설립을 축하해드렸다. 모두가 첫 대면이였지만 문태경 선생님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옛날 주덕해가 연변에서 서기로 사업할 때 연길시 정부의 한 부문에게 공무원으로 심부름을 했던 분이였다. 정확한 직함과 단위는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그후 문태경 선생님과 나는 자주 통화했고 나는 연변에 출장 나갈 기회만 있으면 되도록 시간을 쪼개서 문태경 선생님과 애청자분들을 만나 보군했다. 선생님은 애청자분들을 조직해 주덕해 기념비를 찾아가 추모행사를 했고 렬사릉원을 찾아 렬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도 조직했으며 또 환경미화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뜻깊은 일들을 많이 하셨다. 뜻깊은 일을 하시고는 늘 우리 애청자분들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나에게 전해주면서 “사업회보한다”고 말씀하셨다. 롱을 잘하는 분인줄 알기 때문에 나는 전해 들은 내용을 정리하여 방송프로에서 방송하군했다. 그러자 애청자소조의 영향력도 날로 커졌다. 특히 연변의 애청자소조와 장춘의 애청자소조간의 련락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르신들은 서로 문안을 했고 방송을 듣고 연변에서 혹은 장춘에서 뜻깊은 일을 했다는것을 서로 알았다면서 기꺼워하셨다. 그리하여 후에 연변과 장춘의 애청자 대표들이 함께 길림시의 화피창 렬사릉원을 공동 참배하는 행사도 하게 되었던것이다. 방송애청자소조가 자발적으로 설립된후 이듬해 2006년에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개시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방송을 듣고 조선의용군이 싸웠던 중국 관내지역 태항산에 가 보고싶었 던 애청자분들이 이를 계기로 태항산 견학을 하자는 건의가 들어왔다. 물론 역시 문태경선생님의 좋은 아이디어였다. 련락을 받고 나는 고민했다. 대부분 로인분들이기 때문에 건강상황이 문제가 될것 같았다. 그리고 로인분들이 다 돈을 아껴쓰시는 분들인데 어찌 아무 후원도 없이 견학비용을 부담시키겠는가가 걱정되였다.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자 문태경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지금 생활이 좋아졌고 자녀분들이 대도시나 외국나가 돈을 잘 벌고있으니 어지간한 비용은 부담할수있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조선 렬사들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타향에 묻힌것도 서러운데 우리 연변의 조선족도 찾아가 참배하지 않으면 이분들을 알아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고 하셨다. 2006년 “8.15”가 지난후 얼마 안되여 연변의 애청자와 장춘의 애청자 윤영학 선생님을 비롯해 태항산 견학단 9명이 북경에 모이게 되었다. 이분들은 먼저 중앙방송국 5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다. 문태경 선생님은 기념대회에서 연변에서부터 가지고온 금기(錦旗, 작은 기발에 글을 써서 치하하는 것으로 지금의 감사패와 같음)를 방송국 주임에게 드렸다. 금기에는 “백두의 높은 정기는, 조선민족의 숨결일세”라고 씌여졌다. 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애청자분들을 초대하고 이분들을 잘 안내하라고 나에게 임무를 주었다. 물론 미리 준비를 다 해놓았던 나는 려행사를 통해 기차표, 관광뻐스, 숙박 등을 까근히 배치해놓았다. 그리하여 기념대회가 있은 이튿날 일행은 기차로 한단에 가서 먼저 한단 렬사릉원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조선의용군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묘소가 있었다. 일행은 묘소를 찾아 연변식으로 참배했다. 간단한 과일과 마른 음식을 차려놓은 다음 한분씩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이때 누군가가 “제사상에 조선의 마른 명태가 있고 한국산 소주가 있으니 남북이 통일 된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렬사들도 안식할수있게네......”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빙그레 웃었지만 마음만은 그처럼 경쾌하지는 않았다. 남북 분렬은 지금까지 가셔지지 않는 우리민족의 아픔이니 말이다. 희생된 렬사인들 지하에게 어찌 마음 펴할수있겠는가?! 한단에서 우리 일행은 관광뻐스를 타고 하북성 섭현으로 가서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이 머물렀던 집,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머물렀던 절당, 조선의용군과 현지 백성들이 군민문예야회를 했던 마을의 무대 그리고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를 둘러보았다. 이어 일행은 태항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마전의 팔로군 전적사령부 옛터를 비롯한 많은 사적지와 전적지들을 참관했다. 특히 태항산기슭에 새로 축조된 “조선의용군 렬사 기념관”과 좌권장군과 함께 희생되였던 진광화, 윤세주 렬사의 묘소자리를 찾아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좌권 장군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공산당의 가장 높은 간부였다. 그런데 조선의용군의 렬사인 진광화와 윤세주렬사는 좌권장군과 함께 태항산기슭에 나란히 묻혔던 것이다. 그후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고 많은 한국 유가족들이 다녀감에 따라 한국에서 투자해 섭현 정부와 공동으로 이곳에 조선의용군 렬사 기념관을 세웠던 것이다. 애청자분들이 모두 년세가 많은 분들이기 때문에 사적지들을 다 다닐 수 없어 일정을 조금 줄였다. 그리하여 저녁녘에 섭현의 명소 왜황궁을 참관하고나서 빈관으로 돌아왔다. 저녁상에 둘러앉은 애청자분들은 마음속 깊이 솟구치는 감흥을 달랠수 없었다. 방송을 들으면서 받았던 감수, 그리고 아주 먼 옛날 어린시절 조선의용군으로부터 “최후의 결전”, “조선의용군 행진곡” 등 가곡을 배우며 성장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또 이번에 조선의용군들이 학습하고 싸웠던 사적지들을 직접 목격한 감격이야 무엇으로 헤아리겠는가? 어느 한분이 먼저 축배의 노래를 부르자 자리의 모인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끼를 보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시를 읊는 사람 모두가 흥에 겨워 밤가는 줄 몰랐다. 한단 렬사릉원에서 방송애청자견학단 렬사들에게 술을 올리는 방송애창자 진광화,윤세주 렬사묘소를 찾아   “8.15”, 우리민족이 해방된 날이고 광복을 맞이한 날이지만 지금까지도 남북분단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요즘에 와서 일본 우익세력이 더욱 기세를 부리고 군국주의를 회생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어 중국,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과 아시아 린국에 큰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 래년이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근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강권과 폭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인류는 아직까지도 진정한 평화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바티카노의 교황님이 한국을 찾아 성대한 평화기도식을 가진다고한다. 교황님의 평화기도가 진정 우리 마음속의 아픔을 달래주고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하도록 사람들을 편달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실현해야만이 “8.15”가 “광복”이요 “항전승리”요, “일본패망”이요 등등의 기념일이 아닌 진정 로인들의 건강과 장수만을 빌고 축복하는 로인의 명절, 건강의 명절로만 될수 있는 것이다!   삼가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문태경 선생님과 모든 어르신님들의 건강을 빈다!  
103    독일이 우승할수 밖에 없는 이유 댓글:  조회:3716  추천:2  2014-07-16
 연일 밤을 패면서 즐겼던 2014년 브라질 월드컵대회가 드디어 끝났다. 예상대로 독일이 결승전에서 남아메리카의 다른 한 강호 아르헨티나를 1대 0으로 이기고 우승 트로피를 받아 안았다. 결승전은 골 하나밖에 터지지 않았지만 연장전까지 내내 팬들의 신경을 긴장시켰다. 두 팀 모두가 강한 스피드와 빠른 절주로 상대를 압박해나가면서 팽팽히 맞섰다. 독일은 유창한 패스와 원활한 전술 운영으로 장시간 계속 공을 발밑에 통제하면서 상대를 서서히 유인해 내온 뒤 깊숙이 수비진을 파고들면서 골문을 위협했고 아르헨티나는 10번 메시 선수를 중심으로 빼어난 개인기를 앞세우고 밀착수비를 구상하면서 날카로운 반격을 조직했다. 때론 이쪽 골문에서 위험천만의 순간이 연속되다가 조금 뒤에는 또 상대편 골문주변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이 연출되어 팬들의 가슴을 조이게 하였다. 90분 경기가 득점 없이 마무리되고 연장전으로 들어갔지만 팽팽한 국면은 여전히 타개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장전 후반에 독일의 제1공격수 클로제를 교체해 투입된 신진 로미오 괴체 선수가 신속히 상대 수비진을 파고들면서 질주하던 중 왼쪽으로부터 날아오는 센터링을 재치있게 가슴으로 받아낸 뒤 그대로 오른발 슈팅을 날려 상대 골키퍼의 왼쪽으로 공을 골문에 차넣었다. 독일은 이 천금같은 한골로 강적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우승 트로피를 받아 안게 되었 던 것이다.   본대회에서 독일은 조직력과 단합력으로 축구의 힘과 용기의 미감(美感)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독일구단은 본대회 가장 완벽한 구단이었다고 평할수 있다. 월드컵을 보면서도 마냥 중국축구를 생각하게 되고 연변축구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중국이라는 이 큰 나라에서 한쪽 구석을 차지한 작고 촌스러운 시골축구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한때는 전국 우승까지 한 휘황한 성과가 있었고 줄곧 중국 국가대표팀에 수명정도의 조선족 선수를 보내주었고 또 중국 프로축구 1부리그에서 활약상을 보이기도했던 연변축구였다. 더욱히 축구를 열광하는 많은 조선족 축구팬들이 있어 “축구의 고향”으로까지 불리우는 연변이다. 연변축구가 중국 1부리그에서 탈락된 후로 거의 축구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던 터라 간만에 브라질월드컵대회 생중계를 시청하면서 다시 옛날 축구의 재미를 되새겨보게 되였다. 1990년 이딸리아 월드컵대회서 마테우스를 주장으로하는 독일이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한 아르헨티나를 전승하고 우승을 차지할 때부터 나는 줄곧 독일의 열혈 팬이었다. 그리고 독일이 우승할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늘 그들의 막강한 조직력을 이야기했고 더불어 독일은 대단한 민족이라는 좀 아리숭하고 애매한 이유를 말하군 했었다. 브라질대회에서 독일이 우승할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어차피 독일이라는 이 민족의 우수성을 논해야할것이다. 한나라 한민족의 우수성은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논해야할것이다. 그들이 대표하고있는 문화적 우수성과 그 문화적 우수성이 전반 인류문명에 대한 기여도로 설명해야할것같다. 문명이라면 개념을 정리하기 퍽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그냥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이 가장 우수한것을 문명이라고 행각하고있다. 한시대 인류의 가장 우수한 물질적 생산조건과 정신적인 힘을 말하는것이 문명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럴진대 월드컵에서 보여지는 독일은 가장 과학적이고 론리적인 플레어를 연출하면서 또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한 개개 선수들의 힘과 기술을 잘 발휘시키고있다. 이것이 문명의 집대성한 결과이고 선진적인 문명의 힘이 아닌가 생각된다. 브라질대회 분조경기가 시작할 때이다. 네델란드의 판 페르시와 로벤이 멋진 득점을 완수하면서 네델란드가 뽀루뚜갈에 대승을 거두고 독일이 뮐러, 클로제의 득점으로 지난대회 우승자 스페인을 대파하는 쾌거를 보면서 모두가 열광하기 시작하였다. 축구열을 놓고보면 아마 세계적으로 중국만큼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한일 월드컵대회때 한국축구팬들이 “붉은 악마”군단을 형성하면서 축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국대표단을 응원했고 이들의 응원에 힘입은 한국대표팀은 사상 첫 월드컵대회 4강이라는 신화를 창조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축구열은 이것이 아니다. 아마 중국식 축구열광이라고나해야 할까?! 중국인들은 자기 축구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축구에 열광하고 남미축구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자아중심에서 철저히 해탈해서 순수한 축구 자체만을 즐길줄 안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하다. 자기 나라 선수면 어떻고 남의 니리선수면 어떻고 일단 축구만 잘하면 환호를 보내고 영웅으로 우상화하면 되는것이다. 때문에 우승한 독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아쉽게 실패한 아르헨티나의 메시 선수를 더욱 동정하고 눈물을 흘렸다. 왜 이러한 국면이 형성되였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중국축구가 줄곧 부진을 보이면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의 지도적 작용이라고 할수 있다. 중국에서는 중국대표단 선수들이거나 이른바 좀 유명했던 축구선수들은 흔히 코미디 프로나 재담프로에서 조롱거리로 되고있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스스로 중국 축구를 비하하는 심리가 있다. 중국축구가 줄곧 부진한 상황임은 구차하게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것 같다. 과거 사람들은 중국축구의 부진에 대해 중국사람은 체질적으로 약골이기 때문에 축구같은건 잘 할수없다고 생각했다. 축구처럼 강한 힘이 필요한 경기 보다는 기교와 술법에 능한 탁구 종목이 중국인의 체질과 정신적 기질에 더 적성이라는 견해였다. 다소 일리가 있는듯 하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거쳐 중국사람들도 먹고 입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물질적 조건이 많이 풍요로와지기 시작했고 특히 80년대, 90년대 출생한 아이들은 충족한 영양소를 흡수했기 때문에 키나 체중, 체질면에서 서구인들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 키와 힘만 보아도 중국인 새세대들은 한국이나 일본에 조금도 뒤지지 않으며 도리여 아시아에서는 체질이 가장 뛰여나다고 볼수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다른 체육종목은 모두 큰 진보와 발전을 가져와 올림픽대회에서도 금메달을 수두룩히 따내지만 축구만은 여전히 부진한것 일가? 바로 축구계 관리에 문제가 생겨 중국 프로축구가 실패의 충격과 미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축구계에 부정거래가 판을 치고 승부조작이 난무하며 사람마다 축구도박에 혈안이 되던 때였다. 축구 선수들의 프로의식이 바닥에 떨어졌고 모두가 돈에 눈이 어두웠으며 허영심에 들떠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축구시장의 전망이 밝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개혁개방초에 가장 먼저 시장화를 실시한것이 바로 프로축구분야였다. 비록 돈을 내고 보는 축구경기였지만 사람들의 축구열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경기장마다 관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였으며 TV화면에는 축구팬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진풍경을 이루었다. 당시 축구에 관련한 전문적인 신문만하여도 두세가지가 새로 나타나 큰 인기를 누리기도했다. 프로축구초기의 이 훌륭한 시장은 얼마가지 못하고 깊은 나락으로 추락했다. 언론의 급물살을 타고 선수들이 급작스레 스타가 되였고 따라서 그들의 몸값도 천문학적으로 불어났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유명해지고 너무나 쉽게 돈을 번 선수들은 허영에 들떴으며 제대로 된 축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내가 스타이기 때문에 자연히 어디가나 환호를 받아야하며 보수도 많이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구장에서 어떻게 훌륭한 기력을 보여야하며 체육인으로서의 훌륭한 정신력을 보여주어야한다는 최저의 요구도 깨끗히 망각하게 되였던것이다. 게다가 프로축구 시장에 눈독을 들인 상인들이 거액을 퍼부으면서 구단에 투자했고 구단을 운영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국내 많은 부동산업체들이 련속 중국 프로축구에 투자하면서 중국 프로축구 시장화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중국의 프로축구는 곧 변질되기 시작했다. 축구도박이라는 것이 암종이 생겨났던 것이다. 배후의 검은돈들이 심판, 선수들을 매수하면서 승부를 조작했고 축구관원들도 뒷돈을 받고 마냥 눈을 감아주었기 때문에 축구도박의 흥행과 함께 중국 프로축구는 깊은 나락에 추락하기 시작했던것이다. 뒷심이 되어줄 아무런 배경이 없고 돈도 없었던 연변축구팀도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당했는지 모른다. 재판들은 공공연히 한쪽을 편들었고 축구관원들도 편들어서 그릇된 판정도 한사코 정확한 판정이라고 우겼다. 모두가 돈으로 조작되는 판국이었다. 경기장에서 선수들은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했고 재판들은 짐짓 속구구를 하면서 그릇된 판정을 일 삶았으며 경기 승부는 돈을 많이 낸 막후조종자들의 소원대로 되었다. 어두운 이면을 모르고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는것을 후에야 깨달은 구단 후원자들도 후회막급이었다. 하지만 거액의 자금은 이미 들어갔기 때문에 도저히 몸을 뺄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아남을 길은 단 하나, 어두운 길에서 남보다 더 어둡고 남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입하는 길이었다. 중국 축구계의 상황을 신속히 파악한 이들은 곧 자기들도 가방에 현금을 가득 담아가지고 뒷돈을 주고 승부를 조작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젠 불쌍한건 중국의 축구팬들뿐이였다. 거짓을 모르고 모든 것을 진실로 믿고 구장에서 선수들이 연기하는것을 진실한 경기인줄 알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고 이미 조작된 승부인줄도 모르고 자기가 선호하는 구단의 승리에 환호했고 실패에 생가슴을 앓아야했다. 이런 형국에서 어찌 좋은 축구가 있겠는 가? 2009년말부터 중국축구계는 축구도박과 축구경기 승부조작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중국축구협회 회장, 서기를 포함해 고위 관원들이 전격 수사를 받았고 회뢰를 받은 심판, 감독, 선수들이 덜미를 잡혔으며 승부를 조작한 장본인들이 모조리 형사추궁을 받았다. 축구계의 혼탁한 물은 다소 청소되었지만 전반 중국축구는 치명타를 받았다.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사라졌고 축구 꿈나무들이 언녕 축구의 꿈을 접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만의 축구팬들은 TV를 통해 이딸리아의 프로축구, 잉글랜드 슈퍼 리그, 독일의 분데스리그 그리고 요즘에는 스페인의 프로리그까지 남김없이 시청하고있다. 그것도 야밤에 생중계로 보면서 축구에 대한 열망을 식히지 않고있다. 세계적으로도 남의 축구를 자기 축구보다도 더 열광하는 사람들은 중국을 내놓고는 더 없을것이다. 개혁개방을 통해 겨우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한 중국인들에게는 아직 프로의식에 눈을 뜨고 신사적 풍격을 갖추며 특히 양보라는 인간의 가장 우수한 매력을 보여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문명하지 못하다는 말이 되겠다. 아직도 자기의 털끝만치의 실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체면이고 정의로움이고 옳고 그름이 다 필요없고 오로지 실리를 확실하게 챙겨 자기 배부터 불려야한다는 원초적인 욕망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아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이 이런 곤경을 겪고 있을 때 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의 축구는 한일월드컵대회에서의 맹활약에 힘입어 끈질기게 좋은 경기력을 과시하면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축구라는 운동은 인류의 수많은 체육종목 중 가장 대표적인 운동으로 꼽힌다. 그리고 월드컵대회를 사람들은 쉽게 지구촌 잔치로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온 인류의 시선이 집중되는 종목이다. 축구운동은 집단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축구운동을 통해서 한 나라와 한 민족의 문명정도, 문화를 읽을 수 있다. 문명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개념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우수한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구비한 생활생산방식이 한개 문명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한시기 가장 우수한 물질생산조건과 정신력을 갖추었다면 그 민족이나 그 사회가 가장 우수한 문명을 대표한다고 할수 있다. 물질과 정신적으로 다 인류 최고의 문화를 겸비한 우수한 문명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독일이 이러한 문명을 갖추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두 차의 세계대전의 아픔을 딛고 전쟁의 페허속에서 우뚝 선나라이고 민족이다. 물질생산면에서 신속한 경제발전과 최첨단 기술의 제품생산이 눈에 띄인다.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가장 우수한 카메라와 렌즈를 만들어내는 나라이다. 대표적으로 벤츠 자동자와 레이카 카메라를 들수 있다. 지금 디지털 카메라 시장보급을 보면 모두 일본제품이지만 사실 일본제품보다 어 비싸고 더 우수한 제품들은 독일제 카메라들이다. 이러한 첨단기술과 정성이 슴배인 최고의 제품을 생산해내기까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기술력과 근로자들의 엄청난 피땀이 슴배여 있는 것이다. 한 제품을 완수하기 위해 한세대 또 한세대 기술일군들이 주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고 티끌만한 흠이라도있다면 한 세대 한 세대 근로자들이 정성과 열정을 들여 하나하나 그 티를 제거하고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훌륭한 제품이 이루어지기 까지 이러한 노력이 없이는 안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반면 중국은 어떠한가? 염가의 저질제품만이 판을 친다. 이러한것이 일정한 경제성장을 가져올수 있겠지만 구경 장원한 길이겠는가? 검토해 보지 않을수 없다. 최고의 정신력을 갖춘 민족이라는 면에서도 독일은 자랑거리가 많다. 종교적으로도 남먼저 개혁을 이끌었던 것이 독일 사람들이였고 철학자들을 많이 탄생시킨 민족 역시 독일의 게르만인들이였다. 현대에 들어와 맑스-엥겔스를 포함해 최고의 철학자들이 거개가 독일인들이다. 이처럼 근대 세계최고의 물질과 정신적인 문화와 재부를 집대성한 나라이고 민족이기 때문에 최고의 문명을 가진 나라이고 민족이라 하겠다. 때문에 힘과 용기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를 얼마든지 구상할수 있는 것이다. 20여년의 노력을 거쳐 드디어 독일이 축구왕국 브라질을 본 때 있게 전승하고 남아메리카의 다른 한 강호 아르헨띠나마저 따돌리고 기적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월드컵 트로피를 받아 안은 첫 유럽국가로 될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전 청도에 출장 나간적이 있다. 그때 거리에서 해물 안주에 청도 생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청도라는 곳은 가장 먼저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가 다시 일본 침략자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또 후에는 국민당의 통치를 받다가 해방된 고장이다. 하지만 이 고장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가장 우수한 것을 남겨준 것은 독일사람들이 남긴 문명이라고하겠다. 일매지게 깨끗이 정돈된 거리,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건물들 시원한 독일 맥주와 맥주문화…… 그들이 만들어 낸 맥주는 지금도 청도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그리고 장개석이 머물렀다는 석재로 만든 정교한 괴테식 건물인 “화석루”역시 독일인들의 걸작이라고 한다. 브라질 월드컵 대회에서 보여주었다싶이 중국 축구가 쇠퇴하고 한일 축구실력이 퇴보하는 반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의 축구들이 본격적인 진보를 보여주었다. 꼬스타리까, 꾸알라룸뿌르, 알제리 등 별로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들의 축구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 나라의 물질생산과 정신력도 마찬가지로 예사롭지 않다는것을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문명과 문명의 전파법칙이 이러할진대 독일이 월드컵대회 우승을 하는 데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102    제72회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 (상편) 댓글:  조회:5682  추천:1  2014-07-14
조선민족의 자랑찬 아들이며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고위 군사간부였던 양림은 1935년 10월에 홍군 주력부대와 함께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홍군간부퇀 참모장으로 장정에 참가한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그는 홍색간부퇀 전사들을 거느리고 금사강의 천험을 돌파하였고 직접 돌격대를 거느리고 적의 요새인 통안주를 점령하였다. 홍군의 위대한 2만 5천리 장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양림은 섬북에 도착한후 새로운 임무를 맡고 홍군의 동정전투에 참가하였던것이다. 답사팀이 5시간의 긴긴 로정을 거쳐 석루현 소재지에 도착한 것은 2003년 10월 26일 오후였다. 석루현의 홍군동정기념관 홍군동정기념관 정면 기념관앞 꼬마나팔수 동상   석루지구는 옛날 굴지(屈地)라고 했다. 편벽하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신석기시대에 벌써 이곳에 인류가 자취를 남겼다. 노예사회인 상조(商朝)와 춘추시기, 이곳에 비교적 큰 도시가 형성되였고 수나라이후부터 석루현으로 불리웠다. 현지 당사일군들은 이곳이 강태공(姜太公)이 출생한 곳이라고 했다. 《강태공의 낚시》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긴 강태공이 바로 중국력사에 나오는 유명한 군사가, 정치가로서 주무왕을 도와 상주왕(商紂王)의 폭정을 뒤엎은 자아(子牙) 강상(姜尙)이다. 기재에는 출생지가 동해 해빈(海濱)이라고 하지만 수천년전의 일이기때문에 강상의 출생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석루현이 강상의 출생지라는 여러가지 근거도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증거도 유력하지 못하다. 다만 이곳은 상조로부터 주조로 바뀌는 중국력사 격변기의 주요무대였다는것만은 출토된 문화재와 여러 기재로부터 증명되고있다. 석루현 소재지로 굴산하(屈産河)라는 작은 강이 흐르고있었다. 강은 이곳으로부터 50킬로메터떨어져있는 황하에 흘러든다고 한다. 부근 산중에 굴담천(屈潭泉)이라는 유명한 샘이 있어 현성의 수원을 보충하고있다. 그리고 석루현은 음료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수도물을 쓰지만 향과 촌에서는 아직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쓴다. 빈곤현인 석루현은 인구 당 한해 수입이 인민페로 1,000원도 안된다 한다. 현 소재지라고하지만 거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고 난전이 질서 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액세사리와 야채를 팔고 사고하였다. 그러나 흙먼지가 많아 모든것이 어지러워 보였다. 우리는 현정부 부근의 현빈관(縣賓館)에 짐을 풀고 부근 음식점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시간을 리용해 홍군동정기념관에 가보기로 하였다.   (권립교수) “1935년 10월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 양림동지는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넉달이 지나 홍군은 항일최전선에 나가 화북의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동정할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동정하려면 우선 황하를 건너가서 염석산이 산서성 황하동쪽에 구축한 또치까 방어진지부터 까부셔야했습니다. 중앙군위에서는 이 무거운 과업을 양림의 부대에 맡겼습니다.”   1935년 12월, 홍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후 중공중앙은 와요보에서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금후의 작전방침을 연구, 포치하였다. 당시 국민당군은 세면으로 섬북을 포위하고있었다. 남부와 서부는 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이 있었고 염선산이 동부 산서에 둥지를 틀고있었다. 그리고 진성이 거느린 장개석의 직계부대 3개 군이 락양부근에 포진하고 수시로 섬북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있었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동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성에서 무장선전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광범한 인민들에게 항일구국 강령을 전파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홍군은 항일사상을 가진 장학량과 양호성 부대와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하면서 협조적으로 지냈기때문에 남부와 서부를 공격할 리유가 없었다. 그리고 락양쪽으로 장개석의 직계부대를 공격하면 기회를 빌어 섬북지역에 더욱 많은 직계부대를 파견할 구실을 장개석에게 주게 된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산서에 둥지를 틀고있는 염석산을 공격하는것이 홍군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이였다. 중화문화의 발상지인 황하는 내몽골 경내에서 큰 굽이를 돌아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섬서성과 산서성을 량분한다. 황하 동안은 염석산의 천하였다. 북벌전쟁시기부터 염석산은 산서를 자기의 사유지로 간주하고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산서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북벌전쟁후 장개석, 풍옥상과 수차 큰 충돌을 일으켰다. 중원대전이 있은후 염석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굴복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있어 장개석도 산서성을 호락호락 넘보지 못하고있는 상황이였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소식을 접한 염석산은 홍군을 막기 위해 황하와 황하기슭 려량산의 지세를 리용하여 보루를 만들고 10만 병력을 모아 수비진을 쳤다. 1936년 2월, 홍군 제1방면군 주력부대가 황하기슭에 도착하였다. 이때 황하의 얼음은 벌써 녹기 시작하여 크고작은 얼음쪼각이 물에 떠내리고있었다. 그리하여 배를 리용해 도하하려는 홍군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던 조선혁명가 양림은 직접 도하 선견대를 거느리고 하구(河口) 나루터에서 황하를 건넜다. 황하를 건너 계속 적과 싸우던 양림은 복부에 적탄을 맞고 황하 기슭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던것이다. 2월 20일, 도하를 시작한 홍군 제1군단과 제15군단은 적의 수비진을 헤치고 신속히 진격하여 23일에는 석루현을 포위하였다. 이틀간의 전투를 거쳐 홍군은 석루현을 점령하고 많은 적을 소멸하였으며 1,200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3월 하순 홍군 각 부대는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려량산 내지로 진격하였다. 염석산의 잔여부대를 소멸한 홍군은 지주와 토호를 타도하고 빈곤한 백성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면서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1936년 4월, 장개석은 직계부대를 산서에 파견해 남부로 공격하였고 태원의 염석산도 주력부대를 파견해 북으로부터 공격해 왔다. 이 시기 장학량과 양호성, 염석산은 모두 대표를 파견해 중국공산당 대표와 비밀리에 접촉하고있었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항일 민족통일전선 주장은 장학량과 양호성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항일에 뜻을 둔 그들은 섬북을 전력으로 공격하려하지 않았다. 염석산도 홍군의 동정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산서 경내에 들어온 장개석 직계부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홍군이 철수하면 장개석 직계부대를 산서에서 축출할수있다고 생각한 그는 홍군과 타협하려하였다. 이를 감안한 모택동은 홍군에게 포로된 염석산부대 곽등영(郭登瀛)퇀장을 직접 만나보았다. 그는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하자》는 내용의 비밀서한을 곽등영에게 주면서 염석산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5월 5일까지 다시 황하를 건너 섬북으로 개선하였다. 75일간 지속된 홍군의 동정은 비록 예기한 목적을 전부 실현하지 못했지만 정치와 군사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홍군은 국민당군 7개 퇀을 소멸하고 4,000여명을 포로했으며 실전에서 홍군부대의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산서 수비에 급급한 염석산이 섬북으로 진출한 부대를 철수했기때문에 섬북근거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수 있었다. 홍군은 동정에서 8,000여명의 병사를 새로 흡수하고 30여만원의 군비를 확보함으로써 홍군과 근거지의 력량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선서성 20여개 현에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의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고 일부 항일유격대와 유격구를 창설하였다. 이는 그후 려량산 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밑걸음으로 되였다. 하북성 석루현의 사학자들의 노력과 현정부의 유력한 지지로 홍군동정기념관이 축조되였다. 석루현 소재지가 위치한 곳에서 굴산하 하곡(河谷)을 지나면 산비탈에 축조된 하얀 신식 건물이 보인다. 흰 벽과 록색 기와로 된 그 건물이 바로 새로 지은 홍군동정기념관이다. 가릴것 없이 황토를 드러낸 산은 거칠고 조잡하게 느껴졌다. 기념관 주변에 푸른 솔을 심었지만 전반 산의 황막한 분위기를 지울수 없었다. 건물 기와를 록색으로 한것도 리해가 되였다. 나무가 적은 산에 조금이라도 생기를 보태주려는 의도였을것이다. 홍군동정기념관은 1936년 모택동이 홍군 제1방면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로 진격한 력사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축조된 성급 기념관이다. 건축면적은 11,000평방메터, 주건물의 면적은 1,100평방메터였다. 전시청과 기념비 두 부분으로 나뉘여진 기념관 건물은 조형이 우아했고 전시청 뒤에는 화단과 기념비가 있었다. 돛 모양으로 된, 높이 솟은 하얀 대리석 기념비는 멀리서 바라보면 만경창파를 헤치며 달리는 돛배 같았다. 기념비 높이는 19.36메터 인데 홍군동정 시간인 1936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임석평부현장을 비롯한 석루현 사업일군들과 함께 흙 길을 따라 하곡을 건너 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 정면에는 공격의 나팔을 부는 꼬마 홍군전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기념관에 들어서니 커다란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에는 붉은 깃발과 홍군 동정의 노래 악보가 있었으며 동정에 나선 홍군 부대의 조직 편성표가 있었다. 해설원이 첫 전시청으로부터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홍군동정의 노래 악보 홍군 15군단 편성표, 75사 참모장으로 필사제가 바로 양림이다 기념관의 양림 약력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중앙홍군 전시청에는 75건의 유물과 70여부의 문서자료, 190여장의 력사 사진들이 전시되여있었다. 그중에는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한 전문소개도 있었는데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양림 사진과 약력이 있었다. 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여있었다. 《삐스티 소전. 삐스티(1898-1936)는 양녕, 양림이라고도 하며 조선인이다. 1919년 중국에 망명했고 길림 주하(珠河 지금의 흑룡강성 상지현 尙志縣)에 있었다. 1921년 운남강무당 제16기 포병과에 입학하고 졸업한뒤 황포군관학교 구대장으로 있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해 11월에 엽정 독립퇀의 제3영 영장으로 임명되였다.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9.18사변후 중공만주성 군위서기를 맡았다. 1932년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사업하다가 장정할 때 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있었다. 섬북 쏘베트구역에 도착하여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다. 1936년 2월 21일 동정 도하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나이가 38세였다.》 전시청에는 또 홍군 동정부대 편제를 도표로 작성되여있었다. 홍군 제15군단 군단장은 서해동(徐海東)이였고 산하에 81사, 75사, 78사를 두었다. 15군단의 주력인 75사 사장은 장소동(張紹東)이고 참모장은 삐스티였다. 제15군단은 장국도의 제4방면군 부분적 부대를 토대로 신병을 확충해 편성한 부대였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부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또 신병을 훈련시켜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해야했다. 이때 모택동과 주은래는 믿음직하고 신병훈련 경험이 풍부한 양림을 이 부대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줄곧 주은래의 신뢰를 받아온 양림은 군관학교 출신일뿐만 아니라 홍군대학 총교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고 서금의 중앙쏘베트지역에서도 많은 훌륭한 간부를 양성해 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15군단의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석루현 임석평 부현장(오른쪽) 석루현 당사연구일군들(가운데와 오른쪽) 석루현에 홍군동정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적극 진력해왔고 또 이면의 연구를 했던 임석평 부현장도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해 높이 평가해주었다. (임석평) “1936년 홍군이 동정할 때 홍군 15군단의 75사 참모장으로 있던 필사적은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홍군의 선견부대를 거느리고 황하 천험을 돌파하여 산서 경내로 진격해왔습니다. 홍군은 동정에서 5천만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았고 8천명 산서성 자녀들이 홍군에 참가해 홍군부대가 크게 확대되였습니다. 때문에 동정은 우리 당과 우리 군의 력사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집니다. 조선인 양림은 홍군 도하작전을 완수한후 장렬히 희생되여 나젊은 생명을 바쳤습니다. 중국인민은, 현지 인민은 그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기념관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웅 양림을 전시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제자를 써주었습니다. 조선인 양림은 중국혁명에 아주 큰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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