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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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의 체험을 통해 본 일본과 미국의 조선족 댓글:  조회:6120  추천:39  2011-04-1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5)                                                  나의 체험을 통해 본 일본과 미국의 조선족                                                                     전체 인구가200만명 미만인 중국의 조선족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전통적인 삶의 터전인 동북지역을 떠나 중국의 대도시나 연해지역, 그리고 해외로 이주하는 현상이 뚜렸하게 나타났다. 중국속에서 대도시나 연해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족이 수십만명이 되고 모국인 한국에 30여만명이 나가있다는 것이 통계자료로 확인된다. 그외에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 많이 나가있는데 각각 수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외의 다른 해외에서 조선족의 인구를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중국여권에 조선족이라는 민족명까지 표시하지 않기에 해외에 나가있는 조선족의 정확인 수자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추산에 의하면 일본과 미국에는 틀림없이 각각 수만명 정도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일본과 미국에서 체험한데 의하면, 일본의 상당히 많은  대학교나 일본어학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볼 수있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국적상으로는 중국인이지만 조선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민족집단의 존재를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일본사람들은 대체 알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본처럼 조선족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뉴욕과 LA의 코리아타운에 가보면 많은 조선족들이 미국에 정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 나가 있는 조선족들은 한국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고 조사와 연구가 진척되기에 비교적 실체가 파악되고 있다. 일본의 조선족에 대해서는 《조선족연구학회》가 설립되고 《천지협회》《쉼터》같은 조선족의 단체와 인터넷사이트가 있기에 대체적인 상황은 알 수 있다. 미국에서의 조선족은 이주의 역사가 짧고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았기에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행히 미국의 여러지역에서 조선족의 단체가 성립되고 있고, 《조선투데이》라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사이트가 있기에 이 사이트에 조선족의 활동소식이나 조선족의 인물정보,업소정보같은 것이 나와있어 어느 정도 미국의 조선족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나는 1988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에 21년간 거주하면서 수많은 조선족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도쿄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단체의 활동에 많이 참가했다. 그러기에 일본에서의 조선족의 활동에 대해서는 생생한 체험이 많다. 2009년 8월부터 미국에 와서 서부의 버클리와 동부의 보스턴에 각각 1년씩 거주하면서 미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과도 접촉을 가지게 되고《조선투데이》라는 인터넷사이트를 통하여 조선족의 활동을 관찰하고 뉴욕의 프러싱과 맨하탄의 코리아타운에 찾아가서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에도 들러봤다.   이 글에서 나는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자신의 실제체험과 관찰,해외에서의 조선족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속의  조선족나는 1988년 10월에 일본에 유학가서 처음 1년반을 도쿄외곽에 있는 쓰쿠바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지냈다. 그 때 쓰쿠바대학에는 4, 5명 정도의 조선족이 유학하고 있었는데 신기스럽게도 서로 누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재빨리 확인하게 되고 같이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해외에 나오게 되면 조선족 사이의 연대감이 강화되어 서로 모르던 사이에도 인츰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1990년4월부터 도쿄대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도쿄에 이주했는데 거기서 정말이지 많은 조선족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해 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학자모임이 결성되고 정기적으로 친목적인 활동을 하고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고 견학회도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후에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라고 명칭을 바꾸어 지금까지 활동을 해오고 있다. 나로 말하면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이 1990년 여름에 30여명이 같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모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아침녁에 부산항에 도착던 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대부분의 일행이 그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하고 모국체험을 깊이 했다. 그 때 같이 한모임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들중에서 중국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인구가 그리 많이 않은 조선족에 인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됐다. 나는 1998년부터 도쿄에서 설립된 조선족단체인 《천지클럽》(후에《천지협회》로 이름이 봐뀌었다)의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이 모임은 1995년에 도쿄의 중국 유학생숙사에서 서로 알게 된 조선족 유학생들이 동족모임으로 발족한 것인데 98년부터 조선족의 공식단체를 지향하면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교류, 협력, 공동발전>을 슬로건으로 하여  정기적으로 교류회, 포럼, 조선족체육대회, 송년회, 댄스파티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한동안《천지인문》이라는 잡지도 간행했다. 그리고 천지장학금을 설립하여 중국내의 조선족청소년지원사업을 진행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젋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대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 1999년에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중국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고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쉼터》를 비롯하여 조선족 인터넷사이트가 여러개 개설되고 조선족여성회, 조선족축구동호회 등 단체가 새로 많이 생겨났고, 조선족에 관한 중요한 행사를 할 때는 여러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내가 일본에서 20여년 사이에 관찰해본데 의하면, 일본에 중국 조선족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인데 초기에는 중국정부에서 파견하는 학자나 유학생, 주재원들이었고 수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90년대 부터 조선족 유학생, 학자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90년부 후반부터 일본어학원에 조선족 어학연수생이 많이 오게되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의 인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눈에 뛰게 보이는 변화가 일본내에서의 조선족의 정착이 가속화되고 영주권이나 일본시민권을 취득하는 조선족이 많이 늘어난 점이다. 90년대까지만도 일본의 조선족은 유학생, 학자가 중심이 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회사에 취직하고 자체로 사업하는 조선족이 아주 많아졌다. 도쿄에서 나와 같이 어울리던 조선족중에서 건축설계, IT, 무역업으로 사업에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쿄에는 조선족이 경영하는 식당도 이제는 적지 않고 그런 식당에 가면 조선족들이 모여서 회식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일본의 조선족들이 현재 비교적 많이 경영하는 사업이 미용원이거나 마사지업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조선족이 정착하기 쉬운 점은 수선 일본어의 언어습득이 빨라서 언어장애가 적기때문이다. 거기다 일본이 중국과 한국과 관계가 밀접하기에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가 다 통하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기에 일본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폭이 너르다. 그 때문에 일본의 조선족은 이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데도 정착을 빨리하고 있다. 미국에 이주한 중국의 조선족이 대체 재미한국인들과 교류가 많고 한인사회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은데 비하면 일본의 조선족은 일본사회에서의 자체적인 적응이 가능하기에 재일한국인들과의 교류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조선족나는 2009년8월에 미국에 와서도 여러 곳에서 조선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 1년간 UC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주변의 한국식당에 가니 주방에서 일하는 조선족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온지 10년 정도가 되고 중국에 있는 가족과 갈라져 있는 고생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미국에서 불법적인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어 마음놓고 사회에 나가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족을 만나러 중국에도 가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는 듯 했다. 중국에서는 좋은 직장에 다녔는데 미국에 와서 막노동으로 살아간다는 후회스러운 얘기도 했다. 그 분의 얘기에 의하면 주변에 한국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후 버클리의 한인교회에 나갔더니 거기에도 여러명의 조선족이 교회에 나오고 있었다. 한 조선족 가족은 부부가 중국에서 북경대학교의 박사,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다시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을 하여 버클리에 정착했던 것이다. 슬하에 딸애를 둘 키우고 있었는데 애들은 영어가 완벽하고 거의다 미국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부부는 버클리의 고급주택가에서 주택을 새로 구입하였는데 집이 비교적 크기에 한인교회의 교우들의 모임에는 그 집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교회의 교우들중에서  제일 큰 집에 살고 있다고 다들 부러워했다. 이 가족은 미국에서 영주권도 취득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10여년만에 이 정도로 정착을 이루었으니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특히 감탄한 것은 이 가족의 부부가 기독교를 독실하게 믿고 있는 점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장했는데도 이미 중국에서 기독교신자가 되고 미국에 와서도 빠짐없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뉴욕에 있을 때에는 차를 여러번 갈아타면서 교회에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 교회에는 재미한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한 조선족 여성도 있었는데 그 분은 한국에 유학갔다가 다시 미국에 어학연수와서 현재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교회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비교적 미국사회에 정착했고 교회활동을 통하여 한인사회와 관계를 깊게 맺고 있었다.   2010년 7월에 미국 서부의 버클리에서 동부의 보스턴에 옮겨오면서 여기서도 여러 조선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연구활동을 하게 된 관계로 자연히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자로 있는 조선족들과의 접촉이 이어졌다. 알고보니 하버드대학교에는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자들이 여러명 있었다. 그들과 같이 여러번 친목모임을 하면서 알아보니 중국에서 일본과 한국에 유학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연구로 왔던 것이다. 《조선투데이》라는 미국내의 조선족 사이트의 인물소개를 보아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지식인들을 대부분 이공계열이고 의학연구자가 특히 많다. 반면에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는 아주 드물다. 일본에서는 대학교 교수로 취직해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은데 미국에 와 보니 보통 포스터닥을 수년이상씩 하는 경우가 많고 정규교수직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미국에서 교수로 취직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나는《조선투데이》라는 미국내의 조선족 인터넷사이트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조선족의 정보를 자주 알아보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조선족의 인물소개, 업소소개, 단체활동소식이 꽤 나와있다. 인물소개에는 학자, 가수, 연주자, 목사, 사업가 등 소개가 보이는데 미군에 가입하여 2005년에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조선족 여성의 소개도 나와있어 놀라왔다. 미군에 가입했으면 이미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을 것이니 이런 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족과 다른 이민사회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한 조선족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업소소개를 보면 식당, 네일가게, 미용원, 싸우나, 철공소, 택시회사, 여행사, 한의원 등이 보이는데 서비스업종이 많고 대체 재미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영업을 하는 가게가 많다. 한의원을 경영하는 분이 중국 연변대학교에 기금을 낸 기사도 나왔는데 그만큼 사업에서 성공을 이루는 분들이 나오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내에는 조선족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에 《전미조선족동포회》《뉴욕조선족동포회》《가주조선족연합회》《펜실바니아조선족동포회》《워싱턴조선족총연합회》《싸이판조선족협회》《재미연변대학학우회》등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족들이 미국에 이주한 기간이 일본에 이주한 조선족들보다 짧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별로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는데는 더 열성스러워보인다. 이것은 언어의 장벽이 높고 사회관습이 많이 다른 사회에서 단체활동의 필요성이 그만큼 생기기 때문이고 이민사회인 미국에서는 각 민족별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경향이 강한 것과 관계이 있다. 금년 3월에 나는 뉴욕에서 조선족이 약 5천명이 모여산다고 하는 프러싱에 찾아가봤다. 프러싱은 70년대부터 한국에서 이민들이 많이 모여와서 미국내의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을 형성했던 곳인데 9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에서 이민들이 많이 몰려오면서 코리안타운이 차이나타운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한국인들의 상가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 주변의 코리아타운에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가게가 몰려있었는데 연변식식당, 꼬치구이집 등에는 조선족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프러싱에서 보면 조선족들은 코리아타운에서 일하거나 코리아타운에 가게를 차려놓은 경우가 많아 보이고 일부가 차우나타운에서 일하거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내의 조선족은 미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부터 해외한국인들의 네트워크를 많이 이용하고, 미국에 와서도 한국인들의 업소에서 일하거나 한국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중국에서 성장했고 중국어가 잘 통하기에 미국의 중국인사회와 접촉하고 활동반경을 넓혀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미국에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인 것 같고 아직 미국내에서의 기반이 아주 강한 것이 아닌 것 같다. 합법적인 신분이 없이 불법체류자로 있는 조선족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필경 미국은 이민이 많이 모여오는 사회이고 조선족의 해외진출의 의지가 강하기에 금후에도 미국에서 조선족의 수자는 계속 늘어날 것 같고, 미국에서의 조선족의 정착도 빨리 진행될 것 같다.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해보면서 조선족은 유난히 생명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디에 나가도 적응을 잘 하는편이고 뿌리를 잘 내린다. 미국같이 산설고 물설고 언어장애가 큰 사회에 와서 단기간에 정착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감탄하고 싶다. 캘리포니아의 어느 한국인 가게에서 중국의 조선족을 화제로 얘기를 했는데 가게주인이 중국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고보면 세상 어디에 가서 살 수 없겠는가 하면서 조선족의 생명력을 높이 평가했다. 잘 생각해보면 조선족은 진짜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2011년4월12일)
8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1) 댓글:  조회:3368  추천:38  2011-01-1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1)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1)     조국이면서 외국같은 중국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현재도 중국국적을 소유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20여년(일본에서 21년, 미국에서 2년) 거주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중국이 거의 외국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본인스스로 중국과 멀어지려는 것이 아니여도 생활환경이 중국과 떨어져있으니 자연히 중국실정에 어두워지고 가끔씩 귀국하여도 어떤 때는 오히려 외국에 온 것 같은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필경은 중국이 조국이고 형제와 친척들이 다 거기서 살기에 왕래가 끊어질 수는 없고 중국이 나한테 완전한 외국일 수도 없다. 그러다니 나의 의식속에서는 중국이 조국이면서도 외국같은 그런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나는 2009년 7월과 8월 사이에 학술회의차 중국에 가서 곤명, 북경, 연변에서 한달간 체류하였다. 남부의 도시인 곤명, 수도인 북경, 동북쪽 변방인 연변을 돌면서 변화해가는 오늘의 중국의 모습을 많이 관찰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미국에 왔다. 이 글에서는 그때 중국에서 보고 느낀 점, 일본에서 오래동안 관찰해본 중국의 변화, 그리고 미국에 와서 다시 되돌아보는 중국의 모습을 가미하면서 오늘의 중국의 실상에 접근해보려 한다.   곤명에서 열린 국제인류학・민족학대회 2009년7월27일, 나는 일본 니가타공항에서 대한항공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가서 거기서 다시 대한항공의 비행기를 바꾸어타고 중국의 남부도시인 곤명(昆明)으로 갔다. 내가 곤명을 방문한 것은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 제16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는 인류학과 민족학 분야의 최대의 국제학술조직으로 5년에 한번씩 국제대회를 개최하는데 중국에서는 2008년에 개최하기로 예정되었다가 그 해 3월에 티벳에서 대규모 소동이  발생하면서 연기됐다가 2009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운남성이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제일 많은 성이고 민족관계가 비교적 안정된 지역이라는 점이 곤명시가 이 국제대회의 개최지로 정해진 주요 이유인 것 같았다. 이 대회는 중국측에서 중국인류학・민족학연구회, 운남대학교, 운남민족대학교가 공동주최를 하고 중앙정부의 민족사무부서와 운남성정부가 전폭지원을 하면서 개최되었는데 참가하면서 놀라운 것은 주최측의 계획이 너무나 방대한 점이었다. 참가자 4000여명을 예상하고 200개의 분과회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방대한 국제학술회의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작 참가해보니 결석자가 속출하고 분과회도 200개가 다 제대로 열렸는지 의문스러웠다. 5일간의 학술대회기간에 중국과 외국의 저명학자들의 강연이 다수 예정됐는데 정작 기대를 품고 들으러가니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연자가 올 수 없다면서 직전에 취소되는 사례가 여러번 있었다. 그러면 왜서 겉모습은 방대하지만 내실이 부족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규모가 좀 작더라도 알차게 학술회의를 했었으면 좋았겠다. 곤명에서학술회의를 마치고나서 연변에 가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했는데 그 때도 발표예정자들이 직전에 참가를 취소하는 혼동이 적지 않았다. 일본과 미국에서 학술회의에 참가해보면 특별한 사연이 없는한 발표예정자가 참가를 취소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미국에서 대학교 연구소에 있다보면 여기서는 한학기에 한번씩 학술회의 일정을 학기초에 미리 공개하는데 수많은 학술발표가 일정대로 진행되고 취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회의 내실을 다져가는 면에서는 아직도 중국과 선진국들과의 차이를 크게 느끼게 된다. 이 대회가 규모가 큰 국제회의이었기에 운남성정부가 위신을 걸고 성공을 후원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곤명시내에는 마치 올림픽이라도 개최하듯이 이 대회를 홍보하는 선전물이 많이 보이고, 대회기간중에는 참가자들이 아이디카드를 보여주면 공공교통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고, 안내를 전담하는 경찰이 시내각지에 배치됐다. 대회장으로 사용된 운남대학교 캠퍼스에는 각 출입구마다 경찰이 배치되어 신분증을 체크하고 회의장에 출입할 때 짐검사를 하면서 안전대책을 철저하게 강구했다. 내가 참가한 ‘human migration and diaspora’ 분과회에서도 7월30일에 회의를 마치고 주변에 있는 스탭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사복한 경찰이었다. 대회가 규모가 큰데다가 민족학이라는 주제와 관련있고, 중국 민족관계의 안정성을 어필하려는 의도에 2008년과 2009년에 티벳과 신강에서 민족문제로 소동이 일어나면서 보통학술회의와 달리 특히 안전대책에 신경을 쓰는 회의가 됐다. 대회기간에는 곤명주변의 소수민족촌, 곤명민족박물관, 곤명민족원(園) 투어도 개최되어 주최자측에서 중국의 안정된 민족관계를 보여주려는 고심을 엿볼수 있었다. 회의참가자들에게 소수민족촌투어가 특히 인기가 있어 예약권이 일찍히 매진되는 바람에 나도 참가하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대회 마지막 날 이 지역의 소수민족복장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꽃을 들고 나타나기에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해외에서 참가한 대회주석단 멤버들에게 꽃을 증정하기 위해서였다. 국제학술대회에서 꼭 이런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지, 왜서 소수민족이 이런 행사에 동원돼야 하는지, 이런면에서는 중국 소수민족의 한명인  나로서는 찹잡한 심정이었다.       봄의 도시 곤명의 이모저모 곤명은 중국 남부의 고원지대에 위치해있어 일년 사계절 봄같은 기후로 하여 봄의 도시(春城) 으로 불리우는데 소문그대로 1년중 제일 무더운 계절인 7월말에 방문했는데도 전혀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차로 시내를 달려봐도 건물의 벽에서 에어컨을 찾기가 어려웠다. 여기서는 여름에도 대체 에어컨을 쓰지 않는다고 들었다. 곤명은 봄의 도시, 꽃의 도시로서 중국에서 유명한데 거리에는 꽃으로 장식된 화단이 많았다. 그런데 도시의 명성에 비하면 시내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고 중국의 도시중에서도 발전이 빠르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운남성은 중국에서 내륙지역으로 분류되고 경제발전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지역이다. 곤명에서 들으니 운남성 경제에서  담배산업, 약재산업, 소수민족을 주제로 하는 관광산업의 비중이 아주 크다고 한다. 곤명이 중국에서 그렇게 발달된 도시는 아니었지만 시내를 다녀보면 중국경제의 활기띤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특히 인상깊은 것이 하루 24시간 현금을 자동적으로 입출금할 수 있는 ATM가 아주 많아 돈관리가 쉽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은행마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일본이 이런 면에서는 규제가 심해서 그런지 ATM도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돈흐름이 원활한만큰 중국의 경제활동이 왕성하다고 볼 수 있다. 곤명을 방문하여 제일 어려운 것이 음식이 잘 소화가 안 되는 것이었다. 중국 출신으로서 중국음식에 익숙한 편이었지만 곤명에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않고 잘 소화가 되지 않아 고생하다가 조선족이 경영하는 한식집을 찾아서 냉면을 먹었더니 그제야 몸이 정상상태로 되돌아왔다. 삼국지에 조조의 수십만 대군이 북방에서 남방으로 진군하다가 수토가 맞지 않아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적벽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대패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역시 전혀 다른 수토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곤명에서 학술회의차 5박을 하면서 숙박했던 호텔과 대회장인 운남대학교 캠퍼스 사이를 걸어다녔는데 하나의 역사적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 것인즉 근대중국의 유명한 사관학교인 운남육군강무당(講武堂) 이다. 1909년에 설립된 이 사관학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인 주덕(朱德), 엽검영(葉劍英)  등 저명한 군인들을 많이 배출했을 뿐만아니라 조선인민군 차수(次帥)칭호를 받았던 최용건장군, 베트남인민군 총사령관을 지낸 보 응웬 지압장군이 이 사관학교를 졸업했거나 관계가 있었다 한다. 그러기에 운남육군강무당 안내책자에 삼국의 최고군사지도자가 이 학교에서 나왔다고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었다. 나라가 크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영향력을 지니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곤명 시내 외곽에 중국 제 6대 담수호로 알려져 있는 전지(滇池)가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약 30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빼어났다. 그런데 남조(藍藻)가 너무 생겨 호수물이 짙은 쪽빛으로 물들고 조류(藻類)가 둥둥떠다니는데가 이상한 냄새까지  풍기여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전지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호수인데 80년대부터 주변에서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척되고 호수를 메우는 개발이 많이 추진되면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전지주변을 살펴보니 공업용 오수가 정화되지 않은채 악취를 풍기면서 방치돼 있는 것이 보였다. 전지는 곤명의 음료수원으로 활용돼왔는데 오염이 심하여 2007년부터 여기 물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한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환경오염의 그늘을 전지에서 목격하게 된 셈이다.           소수민족이 유난히 많은 지역 중국이 다민족국가로서 56개 민족이 있는데 운남성에만 26개 민족이 살고 있어 중국의 민족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중 15개 민족은 주요거주지가 운남성인 민족이다. 내가 참가한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의 국제대회도 이런 배경하에서 곤명에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대회의 여가시간을 타서 운남성의 소수민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곤명시에는 운남민족박물관이 있는데 소수민족을 특색으로한 박물관으로서 유명하다. 이 박물관에 가보니 이 지역 여러민족의 복장과 장식품, 소수민족언어로 쓰여진 문헌, 생활도구, 예술품들이 아주 소상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소수민족 복장 전시코너를 보니 복장이 다채다양한 것이 마치도 현대의 패션쇼에 내놓는 복장을 전시해놓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중국 소수민족의 복장은 대체로 다채다양하고 장식품을 많이 사용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봐도 패션성이 뛰어난다. 이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운남성에 왜 소수민족이 많을 까 생각해보왔는데 지형이 복잡하고 기후가 다양하며 역사상 오래동안 중국 중앙정권의 영향력이 그리 미치지 않아 각 민족들이 주류민족에 동화됨이 없이 독자적인 생활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운남민족박물관에서는 운남성 티벳족자치지역에 거주하는 티벳족 라마(活佛)를 만났는데 이 분이 자신이 창작한 탱화(佛畵)를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판매수입은 전액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들의 교육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탱화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이 분이 제자들과 3년에 걸쳐서 제작했다는 넓이 3미터, 길이 1000미터에 가까운 세계최대의 탱화인데 이 탱화를 한번 둘러보면 티벳불교의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에서는 막연하게 낙후한 지역으로 이해하는 티벳이 불교를 통해서 보면 그 풍부한 정신세계는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급속한 산업화와 물질적 풍요가 우선시되는 오늘의 중국에서 티벳불교는 인간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하나의 등불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됐다. 곤명에는 운남민족박물관과 가까운 곳에 운남민족원(園)이라고 하는 면적이 약 120헥타르에 이르는 대규모의 민족테마파크가 있었다. 여기를 다 둘러보는데 하루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운남성에 살고있는 26개 민족의 마을을 조성하여 주택, 생활도구, 종교시설들을 실물크기와 같게 전시하였기에 운남의 소수민족을 이해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었다. 여기서는 주로 소수민족이 안내를 하고 민속놀이가 상시적으로 열렸다. 그런데 나도 중국 소수민족이면서도 이 민족원을 견학하면서 한가지 중대한 오해를 하였다. 소수민족마을마다 전통주택이고, 소수민족안내자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있기에 아직도 운남성에서는 소수민족들이 저런 식으로 살고 있을 까 했는데 알고보니 이런 일은 민족테마파크에서나 있지 이제는 소수민족도 거의다 현대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운남 소수민족과의 만남은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석림(石林)에서도 이어졌다. 석림은 국제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관광지인데 이 지역이 운남성 최대의 소수민족인 이족(彝族)의 자치현에 위치해있어 석림관광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대부분 이족과 이족의 다른 갈래라고 하는 사니족들이었다. 평평한 고원지대에 불시에 땅속으로 꺼져들어간 협곡에 나타나는 석림의 자연경관은 더 말할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약 2억5천만년의 장구한 시간을 걸쳐 해저가 솟아오르면서 석회암의 고원을 만들고, 그 위에 화산폭팔에 의하여 쏟아진 현무암이 뒤덮이고, 빗물과 지표수, 지하수가 침식을 거듭해가면서 오늘의 석림이라는 자연걸작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예술가들이 모여서 석회암을 깍아만든들 이렇게 천만가지로 조화를 이룬 경관을 만들어낼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자연의 오묘함에 새삼 감탄했다. 석림을 구경하면서 이족 가이드와 대화를 나누어보니 이들에게도 소수민족으로서의 비애가 있었다. 이족에게는 분명히 자기의 언어와 문자가 있는데 그 언어와 문자가 잘 계승안되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소수자가 제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움은 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이었다. 곤명에서의 5일간은 나에게 운남성의 소수민족의 다양성과 소수민족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지니는 소중한 가치를 체험하는 여행이었다.                                              (2010년1월14일) 
7    생활속에서 체험하는 미국과 동아시아의 차이점 댓글:  조회:3562  추천:39  2011-01-13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0)                 생활속에서 체험하는 미국과 동아시아의 차이점미국문화의 뿌리가 된 기독교미국에서 2년째 체류하면서 아직 미국사회 전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가운데서도 동아시아와의 차이점을 많이 느끼게 된다. 미국에서 살면서 수선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이 여기가 기독교문화권이라는 점이다.  어느 도시나 시골마을을 가봐도 교회나 성당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나가다가 건물이 정교하게 지어졌거나 장중한 느낌을 주기에 잘 살펴보면 대체 교회나 성당이다. 기독교는 미국인들의 생활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교회나 성당이 신앙생활의 장소만이 아니라 공동체활동의 장소로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 뉴스를 보니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매사추세츠주 신임주지사의 취임식도 교회에서 열렸다. 미국인들의 가치관, 공공도덕, 사회부조 등 정신, 문화적인 거의 모든 측면은 기독교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미국의 기독교문화를 바라보면서 동아시아 사회는 어떤 종교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一神敎인 기독교와 달라 동아시아는 多神敎의 종교사회이다. 각 사회마다 전통적인 토착신앙을 바탕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神佛이 융합된 종교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경우 도교와 불교, 조선의 경우 巫俗으로 대표되는 토속신앙과 불교, 일본의 경우 신도와 불교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전통종교로서 자리잡고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서양에서 전해온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로 뿌리내렸다. 그 때문에 외견상으로는 동아시아의 종교가 다양하면서도 잡다해보이고 서양인들의 눈으로는 도대체 무슨 종교를 믿는지 헷갈릴 수 있다. 일본인들이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기원을 하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하고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하는 풍습이 동아시아인들의 다신교적인 정신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기독교와 동아시아의 전통종교의 외견상의 차이점이 하나 뚜렸하게 나타난다. 동아시아의 자연속에서는 허다한, 크고작은 종교시설이나 숭배물을 볼수 있는데 기독교문화권에서는 그런 것을 자연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명산대천을 찾아봐도 손쉽게 기원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     생활속에서 기독교문화와 관련을 제일 느끼는 것이  일요일이다. 일요일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기독교문화권의 굳은 관습이 되었기에 공공시설이나 규모가 큰 상업시설들을 제외하면 대체 일요일에는 휴업을 한다. 거기에 비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일요일에는 꼭 휴식을 취한다는 의식이 그리 강하지 못하여 일요일에도 아글타글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기에 일요일은 기독교문화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축복이라 할 수 있다.미국의 역사도시인 보스턴에서 살다보면 도시속에서 묘지를 자주 보게 되는데 유래가 깊은 묘지는 관광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묘지가 사람들의 거주지와 가까운데 있는 것은 역시 기독교와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서양의 전통사회에서는 교회가 묘지를 관리하고 대체 교회의 부지내에 묘소가 설치되었다. 그런관계로 묘지가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이런 점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비슷하다. 일본의 경우, 사람이 사망하면 화장하여 사찰의 묘지에 납골하는 것이 관습인데 사찰이 거주지에 많이 자리잡고 있다니 자연히 묘지가 살아있는 인간과 가까이 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묘지를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떨어진 곳에 쓰는 것과 많이 다른 현상이다. 죽으면 북망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다싶이 중국과 조선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일단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떠나는데 서양과 일본은 이면에서는 다른 것 같다. 애완견과 말하기 좋아하는 국민성  미국에 와서 또 하나 인상이 깊은 것이 애완견문화이다. 서양인들이 개를 많이 기르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완견의 품종이 너무나도 많아 별의별 모양의 개를 다 볼 수 있을 때는 사실 놀라웠다. 주택가의 거리나 공원에 가보면 산책하는 사람들이 개를 거느리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개가 귀엽게 생겨서 찬찬히 쳐다보거나 좋다는 말을 건네면 주인들도 아주 기뻐한다. 개를 위한 전용공원이 별도로 있고 직장에 개를 데리고 나오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런 애완견문화이다보면 동양에서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미국인들의 파티에 참가하거나 공공장소에 가보면 굉장히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느 민족이나 수다스러운 면이야 다 있겠지만 미국인들의 파티에 가보면 음식을 먹으러 간다고 보기보다 대화를 나누러 간다고 할 정도로 말을 많이 한다. 필자가 가끔 찾아가는 이발소에서도 종업원과 손님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여 머리를 깍는 사이에도 중얼중얼하는 말소리가 끊기질 않는다. 미국에서는 정치가들이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서 스피치능력과 대중에 대한 호소력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풍토가 이런 정치문화를 키우는 것으로 이해된다.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인들이 비교적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식사때도 말을 제일 많이 하는 것이 중국인들이다. 일본인들은 공공장소에서 말을 잘 안하는 편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명언이 일본에서 널리 통용되다싶이 일본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수다스럽지 않다. 지나치게 수다스러우면 분수가 없거나 남에게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아마 주변을 많이 의식하고 인내를 강조하는 문화속에서 생기는 행동패턴인 것 같다. 필자는 일본의 지방도시에 살면서 고속버스로 도쿄에 자주 다녔는데 버스가 수시간 이상 달리는 사이에도 승객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누가 수다를 떨면 환영을 받지 못한다. 조선인들은 성격이 활달한 편이지만 체면의식이 강하여 모르는 사람사이에서는 대화가 적은 편이다. 이런 차이점이 있다해도 미국인들과 비교해보면 동아시아인들은 전체적으로 말수가 적어보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준다. 공중욕장과 섬세함 감각미국에서 살다보면 공중욕장이나 사우나, 온천같은 곳을 찾기가 힘들다. 혹간 사우나가 있다해도 동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에 오픈 한 것이다. 그러기에 동아시아에서 이런 생활에 습관되다가 미국에 오면 상당히 불편한 감을 느끼게 된다. 왜서 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미국인들은 제몸씻는 행위를 남들과 공유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가치관에 의하여 욕장에서 몸씻는 행위를 오래동안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왔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근대초기에 일본을 방문하여 제일 야만스럽게 여긴것이 일본에서 남녀가 온천에서 거의 알몸으로 혼욕을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 문화가 남아있어서인지 공중욕장은 미국에서 발달하지 않았다.이런 미국의 환경에 있다보면 따분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 동아시아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술좌석을 즐기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우나에 가서 땀을 흠뻑 흘리는 그런 생활이 그립기도 하면서 또 그런 생활방식이 어딘가 속된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 서비스업종에 일하는 사람가운데 아시아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서비스분야에서 보면 백인이나 흑인들은 대체 감각이 그리 섬세하지 못하고 어딘가 좀 거칠어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아시아인들은 섬세하고 영리해보인다. 그리고 부지런함도 돋보인다. 아시아인들이 정교한 제품을 잘 만들어내고 현대 제조업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가는 것도 이런 국민성과 관계가 있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2011년1월11일)
6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의 김 문학 댓글:  조회:5404  추천:37  2010-10-0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9)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5)                                       7.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의 김 문학     지금까지 4회에 걸친 연재를 통하여 김 문학 저서의 대체적인 내용과 그런 저서들의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였고, 그런 과정에서 김 문학의 인간적인을 모습을 불가피하게 많이 드러냈다. 또 김 문학에 대한 비판과 지지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는 점도 어느 정도 짚어봤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국경을 넘나들면서 문필활동하는 김 문학의 모습에서 관찰되는 조선족 사회와 관계되는 문제들을 분석해보고 싶다.   필자가 이 연재의 첫 시작에서 김 문학은 조선족의 국제화의 제일 상징적인 면도 보여주고 있다고 적었는데 이 점은 확실하다. 1991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대체 97년 경부터 일본에서 왕성한 문필활동을 하면서 일본, 한국, 중국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이 세나라에서 적지 않은 책들을 출판했다. 그런 문필활동 외에 어떤 사회적 공헌을 했는지 필자도 잘 모르나 문필활동을 통하여 동아시아 국경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었다는 것은 김 문학의 인간적인 재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고, 중한일 3개국어를 알고 있다는 점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것이다. 김 문학이 중일한 3개국어를 구사하면서 동아시아 삼국에서 문필활동을 한 것은 조선족 전체에 잠재하고 있는 언어적인 가능성,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 문학은 조선족이 동아시아의 국제사회에서 어떤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런 면에서의 김 문학의 선구적인 역할은 존중받아야 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점이다.   그리고 김 문학이 문필활동에서 보여주고 있는 장인정신, 또는 프로정신, 즉  본인이 얘기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글로서 승부한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그는 항상 글쓰기에 精進해왔고, 지금까지 다수의 저서를  동아시아 삼 국에서 출판했고, 내용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수량상에서는 조선족 지식인중에서 누구도 초과하기 힘들 정도의  수십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이 점에서는 김 문학이 필자도 포함하는 조선족 지식인, 특히는 문필활동을 하는 분들이 본받을 점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다. 김 문학의 문필활동에서의 장인정신 또는 프로정신은 일본문인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기도 한데 김 문학이 일본에 유학하면서 배운 점이라 생각하며 조선족 문인들도 이런 점은 일본에서 배우자고 말하고 싶다.     김 문학의 장점을 더 들어보면 이 연재의 「김 문학은 누구인가」의 장에서 이미 언급하다싶이《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 《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등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몇권은 동아시아 삼국에 대한 비교문화론이 상대적으로 적기에 특이한 존재로서 주목받는 면이 있고 일부 유명한 문화인들이 평가해주기도 한다.  꼭 엄밀한 의미의 학술저서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김 문학의 지금까지의 문필활동에서 긍적적인 평가를 받고 문화인으로 명성을 남길수 있는 것도 이런 부류의 책들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장점을 말하던 김에 한마디 더 하면 김 문학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책을 내면서 이런 나라들의 출판계와 두루 인연을 맺어왔고 상업성적, 또는 문화적인 저서들은 어떻게 출판을 기획하고 상품판매를 하는지 이런 노하우를 많이 익혔고, 동아시아 삼국의 출판계, 문화계를 이어놓을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은 김 문학의 인간적인 귀중한 재산이라 평가하고 싶다.    조선족 전체와 관련하여 김 문학에게서 어떤 점이 더 보이는가?   여러가지가 더 보이는데 수선 김 문학이 여지껏 제일 자랑하고 다닌 동아시아 삼국에 정통했다는 점에 오히려 맹점이 보이고 이것은 조선족 전체가 반성해보아야 할 점이다. 김 문학은 본인이 쓰는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또 기타 부류의 책들에서 중국, 한국, 일본의 문화는 거의 다 정통하다 싶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책들을 잘 살펴보면 김 문학이 오히려 일본외에는 한국과 중국을 제대로 모르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  《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조국비판》,《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등 책이 진짜 한국을 잘 알고 썼다고 보기 정말 힘들다. 책 속의 내용을 보아도 김 문학의 한국체험이란 입국심사때 불유쾌했다거나, 택시를 탔는데 대하는 태도가 거치르더라거나 하는 자기체험은 극히 제한된 것이고 그 다음은 일본속에서 한국꼬집기를 한 글이거나 한국내에서 한국의 이런 점을 고쳐야된다고 하는 글, 또는 어두운 면을 지적한 글 등을 모아서 한국비판서로서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조선족출신 작가 김 재국이 쓴 《한국은 없다》는 본인이 한국의 실제 체험에 근거하여 썼기에 리얼한 감이 있는데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는 그런 리얼한 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비판을 한다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뼈껴다 취합했구나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작 한국인들은 이런 책들을 보고 화도 나지만 조선족으로 한국을 너무 몰라서 그러는구나하여  진짜 한국인이 일본에서 이런 책을 쓰기보다 너그럽게 생각해주는 면이 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취합하기 전의 김 문학의 한국이해란 어떤 것일까? 이런 면에서는 동세대의 다수의 조선족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중국에서 태어나서 오래동안  한국과 직접 접촉한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자라면서 조선족으로서 인식하는 조선이해, 중국의 남조선인식, 북조선의 남조선인식에서 월등히 벗어난 것이 없고 일본에 가서는 일본속의 긍정적인 한국론보다 소위 嫌韓론이라 불리우는 부정적인 한국론을 한국에 대한 지 식으로서 더 많이 접했을 수 있다. 일본에 있으면서 최근에는 한국에 자주 다닐 수 있으나 한국비판서들을 쓸 무렵에는 한국에 갈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실제적인 한국체험이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비판서만이 아니라 한국문화론도 여기서 일일히 논거를 다 들 여유가 없는데 어떤 내용들을 보면 李 御寧선생의 한국문화론에서 차용한 것 같아 보인다. 상대적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독창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 중국문화론은 어떤가? 김 문학의 중국문화론은 내용상에서 중국문화의 부정적인 또는 어두운 면을 많이 다루고 있다.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 《훈 (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이라는 제목 에서 나타나다싶이 김 문학의 중국문화론에서는 중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안 생긴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超克」하는 방법》에서는 이미 이 연재의 「김 문학이 욕 먹는 이유」의 장에서 언급했지만,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性善論적 인식에 가깝게, 중국,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性惡論적 인식에 가깝게 비교했다. 간단히 구체 사례를 든다면, 김 문학의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超克」하는 방법》의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에서 「정직한 일본인과 사기적인 중국인,자기반성적인 일본인과 남의 탓만 하는 중국인,중국의 반문명의 전통적체질,(중국의)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국민성,대륙적 호전성,(중국의)內訌과 自害의 역사」등 분석을 보면 과연 김 문학이 중국문화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원래 사회의 어두움 면을 들어내기 좋아하니 그럴까 하기도 생각하나 일본에 대해서는 좋은 점만 많이 얘기하는 것을 보면 결국 그런 것도 아니다. 일본에서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중국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독자들을 상대로 책을 많이 파려는 商術적인 요소가 충분히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아무래도 중국문화의 깊이를 그리 잘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 같고 피상적인 면에서의 중국의 상대적으로 낙후한 모습을 중국문화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인식에서는 4000년의 찬란한 문화대국의 모습도 나오지 않고 현대중국의 생기발랄한 문화도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김 문학에게서 보이는 이런 점은 결국 우리 조선족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라 생각된다. 연변같은 지역에서 조선어로 교육받은 사람은 조선어는 잘하나 상대적으로 중국어가 약 할때가 많고 중국문화의 깊이를 그렇게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한족지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은 한어를 잘 하고 중국문화에 친숙하나 또 조선어를 잘 모르고 조선반도의 역사나 문화에 어두울 수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개혁개방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은 한국사회를 그리 잘 알지 못했다. 이러고 보면 조선어, 중국어를 다 알고 있어도, 조선반도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지 못하는 약점을 많은 조선족들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필자도 일본에서 대학교수를 한다지만 한국문화를 한국인 이상으로 안다고 자신하기 어렵고, 중국문화에는 아직도 모르는게 너무 많다. 이러고 보면 본인들이 상당히 노력하지 않으면 중국문화, 조선문화 어느 쪽도 반중건중으로 이해하고 말 가능성 이 있다. 조선족이 조선어, 중국어를 알고 일본어도 아는 사람이 많지만 중한일 삼국을 다 정통했다고 자만할 수만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는 두루 통하지만 각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는 주변인으로서의 인식에 머물러 심층까지 잘 모르고 지날 수 있다.    김 문학 본인은 항상 중일한 삼국문화를 정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객관적으로 볼 때는 삼국을 두루 아우르면서 비교하는것은 신선한 감이 있지만 깊이가 그리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남들의 글을 취합해놓은 것이 많구나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 바로 이런 약점에서 오는 것 같다. 이러기에 너무쉽게 동아시아 삼국을 다 안다고 하지 말고 허심하게 동아시아의 서로 다른 문화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필자도 한국이 자기의 모국이지만 찾아갈 때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 많다. 필자의 한국이해는 아마 한국에 수년이상씩 체류한 조선족들보다 못한 곳이 많다. 그러니 조선족한테는 사실 동아시아 삼국의 문화가 어느 쪽도 이문화라고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자세로 대하지 말하야 한다. 그 다음 김 문학을 조선족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김 문학이 잘 얘기하는 越境, 즉 국경넘기가 아직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통하니 동아시아 삼국의 어느나라도 제집처럼 드나들수 있는가 생각하면 그리 쉬운 것도 아니고 각 나라에서 인정받도 성공하자면 각 나라의 현실에 맞추어야 하거나 타협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이런 때 각자의 신념이나 지조가 튼튼하지 못하면 여기저기서 그 사회의 현실에만 영합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실리만 채우는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김 문학이 일본에서 한국과 중국 비판서를 많이 낸 것은 틀림없이 일본의 보수적이고 嫌韓, 嫌華 감정에 영합하여 책을 쉽게 내고 많이 팔자는데 기본동기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한국에서는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책, 중국에서는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책, 최근에는 중국에서 《新丑陋的日本人》이라는 책도 내는 것을 보면 김 문학은 실지는 동아시아 삼국의 어느 나라에도 충성심이 거의 없는 것 같고, 국경을 넘어다니면서 책이나 많이 내고 많 파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오히려 참모습같아 보인다. 이런 김 문학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도 그럼 나는 100% 그렇지 않는냐 하면 거기에는 말문이 막힌다. 필자에게도 잘 생각해보면 그런 면이 없을 수 없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조선반도에 모국이 있고 지리적으로도 가깝기에 혈연적, 문화적, 역사의식적인 연대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 중한수교이후에는 그 관계가 더 깊어지고 있고, 국적과는 별도로 의식속에서는 중국과 한국(조선도 포함하여)을 다 조국정도로 생각하는 조선족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일본과는 해방전에 36년간이나 식민통치를 받았기에 좋던 그르던 관계가 깊었고 중국의 개혁개방후에 수만명 정도의 조선족이 일본으로 유학하고 진출하면서 일본과 조선족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있다. 이러고 보면 중한(조)일 삼개국을 서로 비슷하게 모국정도로 생각하는 조선족도 확실히 늘아나고 있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진출하는 조선족도 많으니 이제는 조선족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어렵게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무리 국제화시대라해도 국가와 민족의 장벽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조선족은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아직은 소수집단이고 어디서도 주류사회를 흔들만한 영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더 현실과 타협을 해야 하고 그 사회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 힘들수 있다. 이러는 과정에서 각자의 신념이나 지조가 튼튼하지 못하면 지나치게 그 사회에 타협하려 하고 영합도 하려하는 과정에서 주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 조선족이 언어나 문화적인 면에서 동아시아 국경을 넘기 쉬운 반면에  의식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이런 주체성상실이 찾아올 수 있고, 이런 현상이 보편화되면 동아시아, 또는 더 너른 국제사회에서 조선족은 실리나 잘 챙기고 어느 나라에서도 충성심도 시민의식이 없는 집단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있다. 양날의 칼이라고 조선족이 월경하기 쉬운 면과 그 이면에 주체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면, 양 측면을 잘 이해하고 각자의 신념과 지조를 튼튼히 세울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알고 보면 김 문학의 소위 친일언행도 이런 문제와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원래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문화에 심취하는 것은 사실이나 일본의 철저한 우익적인 사상을 김 문학이 마음깊이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문필활동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내보려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중국문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책을 내고, 한국을 비판하는 책을 내니 일본의 보수적인 성향의 출판사에서 관심을 가진 것 같고 (혹은 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선을 나준것 같아 보인다) 그런 출판사와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한국비판서가 일본에서는 잘 나가고 반응이 좋고 그래서 속편도 만들어 낸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 연장선에서 중국비판서도 여러권 냈다고 할 수 있다. 비판이 과격하여 사회에서 화제를 모을 것을 고려하면서 그 정도까지 나가는 것은 솔직히 조선민족으로서도, 중국인으로서도 양심을 어기고 양측 민족의 질책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가볍게 생각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대담하게 나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김 문학도 무모한 사람은 아니니 중국비판이 적정수준을 넘기전에 일본국적을 취득한 것이 아닐 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문필활동을 좋아하고 저서를 많이 내는데 승부심이 강한 김 문학이 그런데 너무 집착하면서 일본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강해보이는 보수층에 영합해가고 그런 사람들의 지지, 후원속에 한국, 중국비판을 꺼리낌없이 해가고 종국에는 일본의 한국지배, 중국침략문제에서도 어찌 저런 발언이 김 문학한테서 나오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마구 나왔다. 어찌보면 책을 빨리내고 많이 내는데 너무 빠져버리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보니 본인이 걷고  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필자가 김 문학에 관한 연재를 하면서 올라온  댓글을 보니 「이 사람이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다. 필자의 이 연재가 김 문학에게 귀과 아프고 마음이 아픈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겠으나 그 때문에 김 문학이 자기를 성찰해보고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문필활동이 보다 성숙되고 긴 안목에서 보면 그런 성찰이 있었기에 김 문학 자신이 몇단계 업그레드 됐다고 생각한다면 필자도 공연히 김 문학에게 나쁜 짓만 안했다고 위안을 얻겠다.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 대해서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건의를 드리고 싶다. 조선족 지식인이면 거의 누구나 그의 친일발언의 소상한 내용을 알게되면 기분이 상하고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김 문학의 이런 발언들이 나온 배경을 보면 그가 일본의 우익사상가로도 보이지 않고, 단지 책을 많이 내고 많이 팔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아 보인다. 혹시 초기에 한국,중국에 대한 책들을 내면서 보수적인 출판사들과 관계를 잘 못 맺아 본인의 의사가 아닌데도 출판사나 주변의 보수적인 인사들의 권유, 또는 강압에 의해 단지 이름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그런 책들을 냈을 가능성도 100% 부정 못한다. 일본출판계에는 필요에 따라 代筆이라는 현상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면 그의 인간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은 비난받아 마땅하나 너무 무게있는 정치적기준으로 이 문제를 고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나와서 매도하는 것은 상책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각자의 역사관과 민족의식에 맞추어 개인적인 감정표시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필자로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조선족지식인 사회가 집단으로 나서서 이런 문제에 대응하면 국제화시대에 외부세계에서는 이상해 보이고 조선족 지식인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일파이요, 한간이요 하는 통상적인 개념도 본인이 일본국민이 되었을 때에는 의미가 없는 용어가 된다. 어디까지나 조선민족, 중국인일때 이런 개념도 성립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연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필자가 조선족 지식인 사이에서 진행된 김 문학논쟁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솔직하게 얘기드리겠다. 필자는 1986년에 중국의 동북사범대학 일본학과를 졸업했는데 일본어학과의 1년 선배가 김 문학이었다. 대학교 재학시 같은 외국어학부의 조선족학생들의 모임에서 몇번 정도 같이 참가했던 기억이 있고, 그외에 더 깊은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단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번 김 문학의 침실에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이 보이기에 아 소설읽기를 좋아하구나 생각했고, 한번은 학과의 게시판에서 김 문학이 조선어로 쓴 나무의 年輪을 보고 착상해서 쓴 짧고 아름다운 시가 보이기에 혹시 김문학이 장래 윤동주같은 시인이 되지 않을 까 생각해보았다. 서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연락도 없이 지냈것으로 기억하는데 1992년쯤인가 김 문학한테서 전화가 와서 일본교토에 유학왔다하고 연락와서 기회가 있을 때 서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아마 필자가 재일한국인교수 김 양기선생과 접촉이 있었고, 김 문학이 일본에 가기전에 김 양기선생의 책 한권을 중국에서 번역하면서 필자의 연락처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98년에 김 문학이 일본에서 한국에서도《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을 출판했다는 소문을 듣고나서  마침 동경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단체 「천지클럽」(후에 「천지협회」로 개명)에서 필자의 제안으로 중국조선족의 국제사회에서의 성공모델을 소개듣는 자리를 마련하여 그런 성공모델의 강사로서 김 문학과 중국에서 일본에 연구차 나와있던 다른 두명의 조선족 교수를 청하였다. 그러고나서 김 문학에게 갚음을 해주느라고 이틑날 동경시내관광을 안내해주었다. 그 후로는 연말이면 연하장을 주고받거나 김 문학한테서 전화로 연락이 올 때가 있었고, 어느 때인가 히로시마에서 동경에 왔다가 필자와의 관계로 재일연변대학학우회의 술모임에 잠깐 들렀다가 간적이 있었다. 그후 김 문학이 새로 낸 책 두권 정도를 출판사를 통하여 필자에게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쯤인것으로 생각되는데 김 문학이 일본에서 《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라는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여 잠깐 펼쳐보다가 전체적인 내용이 한국을 상당히 부정적인 것도 있었지만 일본식민지지배를 전면긍정하는 것 같은 내용이 들어있고, 특히 안 중근의 우상을 한국에서 해체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어봤을 때는 일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내용까지 쓰는가? 정말이지 서점에서 이 책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이미 그 이전에 《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도 읽어봤는데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한국의 허물을 캐내는 책이었기에 읽고서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 때부터 김 문학이한테서 연락이 와도 필자가 소극적으로 대하면서 점점 연락이 끊겨 이제 거의 10년은 만난 것 같지 않다.   조글로에서 김 문학의 옹호론을 열심히 펴는 사람이, 누가 김 문학을 비판하면 김 관웅교수던 필자인던 마구 공격에 나서는데, 이 사람이 김 관웅교수를 비판하는 글에 「애족자의 허울을 쓰고 자신이 눈에 거스리는 사람들을 전부 걸고 넘어지려드는 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필자가 일본에서 10여년을 살아왔는데도 안 중근을 우매한 인간으로 내리깍는 김 문학의 글을 읽고나서 분노를 느낀 것이 사실인 것을 보면 필부에게도 애족심은 있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다. 오늘 이때까지 김 문학의 친일언행이 수많이 조그로에서 공개됐는데도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는 한사코 외면하려하고 김 관웅교수나 필자한테 공격을 서슴치 않은 이 사람이 과연 한국이나 중국에서 살 필요가 있는 사람인지 의문마저 든다. 최저의 애족애국심도 없다면 그런 나라에 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허울로는 조선족이요, 한민족이요 하면서 말이다.       필자는 작년 11월경부터 조글로에 미국에서의 소감을 적은 글을 연재하면서 가끔 중국내의 조선족 소식도 체크해보고 다른 분들의 글도 읽어보고 있다. 그러다가 금년 3월부터 김 문학이 조글로에 등장하여 제일먼저 안 증근의사에 대하여 연재하고 그 다음 조선족에 관한 글과 100년전의 동아시아를 발견해보는 글을 연재했는데 안 중근에 대하여 아주 좋게 평가하는데 대하여 의아하여 일본에서는 안 중근을 내리깍던 사람이 이제는 180도 평가가 봐뀌는가하면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더이상 의견을 제출한 것도 아니고 가끔가다 김 문학의 글을 읽어봤는데 사실 조선족을 논하는 글은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구조선족,신조선족이라는 이런 개념이 왜서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가끔가다가 연변의 김문학비판자들에 대한 공격, 또는 비아냥이 새어나오고 자기자랑도 눈에 띄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거의 10년전에도《조선족대개조론》이라는 것을 내놓으면서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 찬반양론으로 불화를 조성하더니 이번에도 조짐은 좋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조선족대개조론》의 경우를 보면 본인이 처음부터 의식하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조선족 지식인 사회를 어느 정도 시끄럽게 만들고 분열도 조성하는 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족 사회에 대한 깊은 조사나 분석이 없이 생각을 마구 쏟아내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자세가 없기때문이다. 본인이 조선족사회에 던진 화제로 논쟁이 생기면 본인도 여러가지 설명을 해가면서 타협점을 찾아보도록 하기보다 던져준 화제를 가지고  조선족 사이에서 옥신각신하는 사이 정작 본인은 일본에서 다른 창작활동에 열중하면서 제 책내기에 바빴다. 그러면 찬반양론이 생기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다. 이번에도 조선족론을 펼치면서 정작 본인이 현재 어떤 국적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기본상황에 대해 설명하면 시작부터 정직해보이고 본인도 할말 안할 말 가려하겠는데 그런 절차가 없이 시작하니 내용이 헸갈릴 때가 많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필자는 미국에서 자기 공부가 바쁘니 조글로에 원고를 제때에 보내지 못하고, 조글로에 들어와 보지 않은 기간도 꽤 있었다. 그러다가 금년 8월부터 조글로에서 어느 사람이 김 문학에 대한 열띤 변 호를 자주 하기에 차차 그 변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심을 가지면서 김 관웅교수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김 문학비판을 하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일본에 오래동안 있었다하여 김 문학의 저술활동의 내용을 소 상하게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여서 사실말이지《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책이 2004년에 김 문학에 의하여 일본에서 출판된 사실도 처음으로 알았다. 생각을 바꾸어보면 이런 책들이 일본에서도 별로 화제를 모으지 못하여 필자도 전혀 들은봐가 없었던 것이다. 조글로에서 김 문학을 옹호하는 사람의 글이 빈번하게 올라오면서 차차  그런 글에 댓글형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특히 8월21일에 「김 문학 비판과 죽이기」라는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나서 분노가 치밀어 올았다, 김 문학이가 분명히 일본에서 욕먹을 책을 적지 않게 쓴 것으로 아는데 어찌 조선족사회에 나와서 이렇게도 당당하며, 그것도 조선족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 글을 마구 쏟아내고, 그런데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변호에 나오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 때문에 참지 못하여 그 사람의 글에 댓들도 달았다. 그 직전부터 이 사람의 김 문학옹호론에 반대의견을 표시하는 댓글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이런 형식으로는 서로 의견이 평행선만 달리겠다 생각하여 조선족 지식인들이 김 문학의 저술활동, 특히는 일본에서 하는 저술활동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고나서 서로 빗나가지 않고 초점에 맞춘 논쟁이 필요하겠다 생각하여 일본어판 아마존닷컴에서 찾아보니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는 대체 다 소개가 올라와 있었기에 그것을 년대별로 표제사진을 올리고 제목과,출판사, 출판년도 등을 번역하여 조글로의 필자의 미니홈형식으로 올렸다. 이렀게 함으로서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의 대체적인 상황은 알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댓글이 많이 올라오고 반응이 좋았지만 표제사진까지 올린 것이 저작권침해에 해당하지 않는지 하는 우려가 있었고, 아무래도 대학교 1년 선배되는 분의 찬반양론에 깊게 개입하는것이 좋을 것 같지 않아서 약간한 설명을 한후에 조글로에서 내렸다.   그랬더니 생각 외로 조글로에서 김 문학옹호론을 열심히 펴는 사람이 필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소신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글을 올리고 그 글을 미국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옮겨가서 거기서도 일시적으로 필자를 기회주의자다. 이게 학자양반들의 진모습이다, 자신이 없어서 그런다 하고 욕설도 꽤 퍼부었다. 김 문학 본인도 김 관웅선생을 비판하는 글에서 필자가 자라목을 움추러드리듯이 숨어들었다는 표현으로 비난했다. 필자가 김 문학에 대한 배려가 있어서 그만두었다고는 왜 생각못하는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도 김 문학을 둘러싼 논쟁이 좀처럼 사라지는 모양이 없이 조글로와 중국조선족문화통신, 그리고 정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국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끈질기게 지속됐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한 것이 조선족 지식인들이 할 일도 많은데 언제까지 김 문학논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반목해야 하는가? 이런 논쟁이 생기게 되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김 문학에게 있지 않는가? 처음부터 조선족 사회에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오고 자신을 과대포장한 이미지로 나타내지 않고, 겸허한 자세를 보여주었더라면 이렇게 부질없는 논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많이 생각해보다 필자가 일본에 오랜 생활해왔으니 일본의 상황에도 익숙하여 한번 마음먹고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 김 문학의 진실한 모습을 알려주자고 결심했다.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과대포장된  허상이 드러날수 있고 허물도 드러날 수 있으나 김 문학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잘 모르면서 마구 치켜세우거나 또 방향이 꼭 정확하지 않은 비판을 하면서 조선족 지식인 사회가 서로 시간을 소모하고 반목하기보다 더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준비를 거쳐 9월30일부터 김문학에 관한 연재를 조글로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연재를 해가면서 필자자신도 김 문학의 저술활동에 대하여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다수였다. 그전까지 일본에서 필자도 자기 사는 일에 바쁘다니 김 문학이 몇권 정도의 책을 쓴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이 쓴 것은 정말 몰랐고 욕 먹을 책이 이렇게 많은 것도 8월20일경에 일본어저서목록을 만들어보면서 처음 알았다. 김 문학이 일본에서 일본국적에 가입했다는 것도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니고 본인의 책표제에 나와 있기에 안 사실이다.  이 연재를 쓰면서 마음속으로는 쉽지 않았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을 그것도 면목을 아는 사람을 내가 무슨 정신에 이런 연재를 하는지 회의감이 자주 들었다. 특히 세번째회의 연재가 나가고나서 어느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의 댓글에 김 문학과 대학교 선후배같은데 그런 것도 언급없이 연재합니까? 하는 질문을 듣고서는 혹시나 김 문학씨 처가 아닐까 하면서 마음이 심하게 동요됐다. 또 조글로에 올라와 있는,서울에서 이광수 차녀와 같이 찍은 사진에 김 문학이 초췌한 모습으로 나오기에 김 문학이도 일본에서 쉬운 인생이 아니였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연재를 하는 자신이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아무래도 쓰던 연재를 도중에서 팽개칠수는 없고  그래서 이제 더는 김 문학의 사진을 보지말고 이 연재를 마치기로 했다.   필자가 김 문학에 대하여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다 알렸다. 바램은 이 연재가 계기가 되어 김 문학논쟁이 빨리 종결되고 각자가 서로 보다 중요하고 생산적인 일에 매진할수 있으면 좋겠다. 필자도 너무 시간이 바쁘고 할일이 많으니 김 문학의 이 연재를 마치고나서 김 문학논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 논쟁과 관해서 꼭 필요한 질문에는 대답하겠으나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새로운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마지작으로 조선족지식인들이 이제 김 문학에 대할 때 이런 自問을 먼저 해보았으면 한다. 나라면 김 문학처럼 많은 책을 동아시아 삼국에서 낼 수 있었겠는가? 또 김 문학처럼 여러 나라 국경을 넘나들면서 나도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남아있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필자도 이런 自問을 하면서 김 문학에게 대할 생각이다.                                                               (이상 연재를 마칩니다)                                             2010년10월8일    
5    황 우석과 김 문학 그리고 맹신 댓글:  조회:4880  추천:30  2010-10-0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8)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4)                                       6. 황 우석과 김 문학 그리고 맹신   한국의 수의학자이고, 생명공학자이며 원서울대학교 교수였던 황 우석과 김 문학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어떤 사회현상을 비교분석하는데는 더 없이 좋은 분석대상이다.  그럼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까? 황 우석은 수의학자로서 훌륭한 연구성과를 많이 내놓았고 동물복제분야에서는 세계에서도 제일 첨단을 달리는 권위자이다. 같은 의미로 김 문학을 보면 조선족 가운데서는 아직까지 누구도 따라잡지 못 할 정도로 다산작가이고  중한일 삼국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수십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고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분야에서는 여러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황 우석이 한 때 한국 최고의 과학자로 수많은 상을 받고 사회적으로 각광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김 문학도 조선족 사회에서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많은 저서를 출판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조선족 최고의 문화인 정도로 평가를 받은 것 같고, 조선족 문학상도 여러 개 받았다. 그러나 황 우석은 2005년 8월에  <사이언스> 잡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논문이 고의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그해 11월에 한국의 MBC PD수첩에  의해 폭로되면서 결과적으로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박탈당하고 한 때 자자하던 명성이 거의다 훼손되고 말았다. 김 문학에게는 물론 그런 스캔들같은 일은 없다. 그러나 김 문학의 일련의 사회비판서는 출판되는 당초부터 여러 사람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고, 특히 친일언행에 대해서는 분노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황 우석과 김 문학을 비교해보자는 것은 이 들이 사회에서 비판받을 때 지지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거의 맹신에 가깝고 열광적인 비판이 거꾸로 그런 비판자들에게 돌아가고 일시적으로 그런 비판자들이 상당한 수모를 당하게 되고, 별의별 욕설을 다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 우석 연구팀의 논문조작 의혹이 PD수첩에  의하여 폭로되어 결과적으로 황 우석이 서울대학교에서 해임되는 과정에서 황 우석지지자들이 황우석죽이기를 그만두라고 얼마나 한국사회를 소란하게 굴었는가? 오늘날 김 문학의 사회비판서중에 심각한 친일언행이 보이기에 연변대학교 김관웅교수가 비판에 나서니 김 문학죽이기를 그만두라고 맞아죽을 각오를 한다면서 조글로에 나와서 지금까지 대체 16번 정도나 김 문학옹호론 그리고 김 문학옹호를 위한 타인비판을 한 사람도 있다.   또 미국의 어느 조선족 사이트  운영자는 거기에 북치고 장구치면서 김관웅이 혼자서 벌이는 문화대혁명을 이제 그만두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이 두명만이 아니라도 앞에서 나서지는 않았지만 김 문학비판을 저들의 유명인콤플렉스의 발로라고 비판자를 비앙거리는 사람들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시적이라도 오히려 비판자가 초라해보이고 비판받는 대상이 더 당당해보인다. 황 우석도 좋고 김 문학도 좋고 분명히 비판받을 점이 있어서 비판하는데 일부 지지자들은 그것을 받아 들이려 안 한다. 물론 김 문학비판은 그에 대한 전면적인 비평보다 결점만 찾아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줄 소지도 있었다. 필자도 김 문학에 대하여 비평해보면서 알게 되는데 김 문학이 동아시아삼국을 넘나들면서 저술활동을 하기에 그의 책의 전모를 다 파악하고 책을 다 찾아서 비평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자연히 눈에 띄우는 책을 가지고 비평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고, 일본에서 출판된 책은 비평하는데 어느 정도 언어적인 장애도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황 우석과 김 문학 지지자들이 비판자들의 의견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면에는 자기들이 믿고 따르고 지지하던 대상에 대한 맹신이 생기여 그 대상의 심각한 문제점이 지적을 받아도 자기들의 맹신을 부정하지 못하여 그래서 오히려 일시적이라도 그런 비판자들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는 것 같다.   김 문학비판에 의해 생긴 지지자들의 움직임을 생동하게 분석하기 위하여 황 우석이 가짜 논문으로 한국에서 비판받는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보여 준 움직임을 먼저 소개해보겠다.   필자가 황 우석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05년 초 쯤으로 생각되는데 황 우석이 일본방문차 동경의 한국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취지의 강연을 한 것을 재일한국인 신문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때 과학자가 어찌 이렇게 말을 잘 하는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Newsweek誌 일본어판에 황 우석의 최첨단 생명공학연구가 소개되고 생명윤리라는 면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되었다. 그 때문에 필자도 황 우석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한 때 한국에서 대단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 분의 생명공학연구가 성공되면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의료분야의 원천기술을 가지게 되고, 거대한 국부가 창출된다는 설이 많았다. 그래서 여야를 불문하고 대통령후보자들도 황 우석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해 11월에  MBC의 PD수첩이 황 우석교수팀이 8월에  <사이언스> 잡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논문이 고의로 조작됐다는 보도가 나오고 그러면서 한동안 한국사회가 이 문제로 시끌벅적하였다. 필자도 상당히 관심이 있어서 이 문제의 추이를 인터넷을 통하여 많이 관찰했는데 초기에는 한국의 보수적인 주류미디어가 이 사건을 더 이상 터뜨리지 말고 조용히 덮어두고 가기를 바라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적인 미디어는 이 문제를 철저히 파헤치자 하고 젊은 과학자들이 가만 있지 않고 이 문제의 진상을 많이 폭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황 우석을 크게 믿고 따른던 사람들이 자연히 지지단체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MBC사옥앞이나 서울의 청계천광장에 나가서 초불시위 를 벌이면서 PD수첩이 황 우석연구팀에 관한 진상보도를 그만두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지지자들의 움직임은 그후 한동안은 점점 더 거세지여 한국사회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필자도 황 우석의 연구에 크게 기대했기에 황 우석이 그렇게 추락하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아리러브 황우석」이라는 지자자들의 사이트를 알게 되어 거기에 자주 드나들면서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봤고, 정말 황 우석이 무사하기를 기대했다. 그런 과정에서 지지자들의 극렬성도 보게 되었다. 그 극렬성이란 참으로 가관이었다. 지금 기억이 나는 대로 지지자들의 그 때 극렬한 언사들을 여기서 잠깐 재현해보겠다. 아무리 MBC사옥앞에 가서 황 우석연구팀에 관한 PD수첩의 폭로 보도를 멈추라고 지지자들이 초불시위를 벌여도 결과적으로 보도는 진행됐고, 그 보도의 결과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자체로 진상조사를 벌인 결과  <사이언스>잡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논문이 고의로 조작됐다는 점이 발표되고 황 우석이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그 때 지지자사이트에서는 그 발표를 했던 서울대학교 부총장을 얼마나 인신공격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연구능력으로는 황 우석 교수의 발바닥에도 못가는 인간이 개기름 번듯한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 저런 발표를 할 수 있는가? 황 우석교수의 연구수준을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이 서울대학교에 없다. 진정으로 검증하자면 국제검증단에 의뢰해야 한다 등 주장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지지자들이 서울대학교에 몰려가서 학교본부앞에서 매일 데모를 하고 대학교 관계자들이 나오면 욕설을 퍼부으면서 난리가 났다. 그들이 매일 하는 얘기가 황 우석교수 죽이기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황 우석교수 능력에 따라가느냐 하는 얘기가 항상 따랐다. 그러는 과정에서 황 우석을 변호하기 위한 소위 논리가 많이도  떠돌았다. 황 우석교수가 수의출신이여서 서울대 의대교수들이 질투를 하여 죽이기를 한다. 수의대가 의대보다 힘이 모자라서 황 우석교수를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새튼이라는 교수가 황 우석교수의 원천기술을 훔쳐가려 한다. 한국의 기독교계가 자기들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황 우석교수를 말살시키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황 우석의 논문 조작과 오류가 명백히 들어나고 소위 배아줄기세포라는 것을 세계최초로 배양해냈다는 것이 가짜라고 판명나는데도 문제가 되던 1번줄기세포는 한국국익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국정원의 어느 금고에 튼튼히 보관되고 있다고「아리러브 황우석」의 운영자가 지지자들에게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래서 황 우석교수팀이 연구해낸 원천기술을 미국이 절대 훔쳐가지 못한다는 설명이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황 우석교수팀이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이 조작됐다는 것이 부정할수 없게 되고 세계최초로 배양해냈다는 배아줄기세포도 없다는 것이 판명되니 이번에는 지지자들이 황 우석교수 수하의 연구자가 조작질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같이 협력한 병원원장이 사기를 쳤다 등등 너무나도 많은 설을 만들어 내고 결과적으로 황 우석은 하나도 나쁘지 않고 마치도 신적인 존재처럼 지켜려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 순신장군이 임진왜란때 백의종군을 마치고 나라의 부름에 따라 다시 수군통제사로 나설때 선조대왕에게 올린 狀啓에「臣에게는 아직 戰船 12척이 남아있습니다」( 이 순신장군은 그 12척의 戰船에 戰船1척을 보태여 戰船 133척의 일본수군을 대파하여 명량대첩을 이루었다)  라고 한말을 본따 황 우석지지자들이 「황 우석교수에게는 아직 대한민국의 원천기술이 남아있습니다」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고 다녔기에 이 순신장군 후손들이 주의까지 주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아무리 지지자들이 떠들어도 결국 황 우석은 서울대학교를 떠나게 되고, 그후 오랜기간의 재판과정을 걸쳐 작년에 법원에서 논문조작을 한 사실이 인정되고 징역 2년, 집행유예3년형이 선고되었다. 황 우석은 서울대학교를 떠난후에도 민간인사들의 후원으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생명공학분야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필자가 이 연재를 쓰면서 정말이지 5년만에 인터넷에서 「아이러브 황 우석」이라는 지지자사이트가 혹시 아직도 남아있는지 해서 찾아보았더니 확실히 그 사이트는 남아있었고, 지지자가 극소수로 줄었지만 「초심 그대로 변함없이 우리는 간다! 끝까지!」라는 구호를 사이트 대문짝에 걸어놓고 아직도 황 우석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감동이 다가오고 황 우석이 연구에 힘내여 이분들의 기대에 보답해드리기 바랐다. 지금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때「아이러브 황 우석」같은 지지자사이트에서 매일 같이 쏟아져나온 황 우석을 지키기 위한 갖은 변명, 소위 설들이 출처가 결국 황 우석 본인한테서 나온 것이 많았던 같다. 생명공학계의 사정, 또 연구내용까지 일반지지자들은 그런 것을 알 지식도 없었다. 그 당시의「아이러브 황 우석」사이트의 운영자는 미디어사업에 종사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황 우석의 홍보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안되는 생명공학연구자로서 홍보관을 달고 다니면서 자기 홍보를 하고, 문제가 터지니까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성원에 힘입어 거기서 빠져나가려 황 우석 자신이 교묘하게 지지자들을 상대로 언론플레이 한 것이다. 그래서 한 때는 황 우석비판만 하면 누구든지 욕을 먹게 되고 모욕까지 당했다. 한국 최고의 學府인 서울대학교가 한때 그런 열광적인 지지자들로 얼마나 시끄러웠는가? 그러고 보면 황 우석은 과학자로서 연구에서 엄중한 실수가 있은 것만 아니고 그 실수를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과실이 있었다. 그 때문에 지지자들이 더 황 우석을 맹신하고 열광적인 지지를 했던 것이다. 그런 반면 황 우석은 오히려 한국 과학계에서 더 차가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지지자들이 황 우석을 이토록 지지하고 법원의 재판결과가 나와도 그 신조를 굽히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필자도 한 때 심정적으로 황 우석지지자였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문지식의 부족과 그래서 오는 맹신이라고 판단된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정보가 넘쳐나기에 누가 아무리 사회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사회 각 분야마다 전문가를 필요한다. 사실 황 우석지지자들 중에 황 우석이 연구하는 생명공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척추마비나 파킨슨병 등 난치병환자나 가족들이 줄기세포 연구에 의하여 난치병을 치료할수 있다는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혹은 황 우석교수 연구팀이 연구한 한국의 원천기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애국주의자, 황 우석이 동물복제연구에서 세계최고권위자라는데 매혹된 사람, 황 우석교수의 단정한 외관과 재치있는 말재주에 끌리운 여성들, 지지자들은 다양했지만 생명공학에 대한 전문지식은 정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한번 황 우석에 대하여 맹신을 하기 시작하니 아무리 과학자들이 나서서 황 우석이 과학자로서 중대한 실수를 했다해도 귀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은 황 우석죽이기를 그만두라고 정말이지 처절한 몸부림을 부렸다.    김 문학은 아직 황 우석같이 큰 틀내에서의 사회적 영향력은 없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는 좋던 그르던 분명히 인지도가 있고 10년 정도 긴 시간속에 조선족 지식인들이 알게 모르게 김 문학평가를 놓고 찬반양론을 펼쳐왔고 금년봄부터  김 문학이 조글로에 등장하여 두편의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김 문학이 글 가운데 연변의 비판자들을 자극하는 언어표현을 자주 사용했고, 거기에  자극받았는지 김 관웅교수가 금년 5월부터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 김 문학이 일본에서 출판한《친일파 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傳社, 2004)을 소개하면서 그의 친일언행에 대한 비판을 진행하였다.     필자는 이번에 조글로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김 문학의 글과 김 관웅교수의 글을 찾아보면서 도대체 누가 먼저 비판의 포문을 열었는가 찾아봤다. 생각밖으로 김 문학이 상대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먼저 열었다.   김 문학이 조글로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 금년 3월24일이고 첫 시작 글은 「131세 사상가 안 중근을 만나다」인데 3월30일까지 3회에 나누어 발표하고 나서 5월6일에《신조선족월경론》」이라는 연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연재의 제2회 글「포스트개조론」에서 김 문학은 김 문학비판자에 대하여 자극적인 언사를 던졌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서 인용하겠다.    「한국이나 조선족사회에서는 저자인 필자에게 조선족 '문화기수','신세대 지성의 대표주자', '문화선구자'로 예찬했는가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매국노', '총탄으로 저격해야 할 원쑤'라고 외친 극렬 '안티김문학' 지식인도 있었다. 유순호氏의 표현을 차용한다면 '장장 10년을 친일매국노'로 몰아부친것이다.  '개조론'의 발표는 조선족정신사의 일대 사건이며, 또한 이에 대한 센세이션에 따른 찬반의 논란 역시 일대 사건이였다.  그리고 유순호氏가 주도했던 2009년 '연변 6적'에 대한 비판은 '신조선족'의 월경하는 문화적 창조활동을 지극히 부정적 마이너스 의미로만 포착하면서 '매국역적', '반화분자'로 왜곡 중상한 일부 연변조선족의 민족주의자 (협애한 민족주의자?)에 대한 '신조선족'의 정면으로부터의 '반란'이였다.   물론 이것 역시 필자의 속단으로는 조선족 정신사의 일대 사건이며 특기할만한 한페지를 열었다고 추찰된다. (中略)   그러므로 유순호氏가 리드했던 작년의 반란은 '포스트 개조론'의 대사건으로서 조선족의 고루한 '1940년대 정풍시기'나 '전근대적 사고양식'과 '문화대혁명'의 유령으로 전신을 무장한 수구파(민족주의자?)에 대한 비판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중대하다. (中略)     유감인 것은 근대도 아닌 '후근대성'으로 칭해지고 있는 21세기의 지금에 와서도 다시 100년전 근대로 되돌아간듯한 일부 조선족의 고루한 양상을 다시 비판개조해야되는 아이러니, '포스트머더니즘의 아이러니'에 필자는 그만큼 가슴이 쓰리다.」    이상의 비판이 아주 점잖은 상대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제3자가 봐도 상대에 대해 도전장을 던져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최근에 시작된 김 관웅교수의 김 문학비판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서 찾아보니 5월18일이었다. 글의 제목은「日本軍國主義의 走狗 金 文學의 代表作 소개(1) 」였다. 제목을 봐도 과격한 언사가 들어있는 것은 분명하나 김 관웅 교수에 대표되는 김 문학비판자들에 대하여 최근에 먼저 포문을 연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봐도 김 문학이 확실하다. 그러면서부터 조글로에서 김 문학이 연재하는《신조선족월경론》에서 수시로 김 문학비판자들을 지칭하여 연변의 고루하고 도태되어야 할 구조선족이라 비꼬고 심지어 본인도 그 속의 일원으로 의식하는 신조선족을 「海鯨」,본인에 대한 비판을 하는 조선족 지식인들을 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鰍魚」라고 비꼬기도 했다.   사실 최근에 김 관웅교수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하는 김 문학비판은 주로《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傳社, 2004) 이라는 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책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만약 중국 주류미디어나 인터넷포털사이트에 이 책이 소개되었다면 가히 그 可恐할 후과를 연상할 수 있다. 13억의 중국인이라면 철이 못든 아이들은 제외하고 아마 10억은 격분할 만한 내용이다. 그러고 보면 김 관웅교수가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서, 또 학생들을 가르키는 대학교의 책임있는 교수로서 이 책에 대해 비판에 나선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다만 김 관웅교수의 비판글이 사고방식에 경직된 감이 있고, 거기다가 상대에 대한 과격적인 언사가 있어, 그런 것이 상대에 대한 인격적인 모욕에 해당할 수 있기에 이 점만 없었으면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호응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김 문학도 시종일관 점잖은 말로 상대비판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본인을 「海鯨」, 상대를 「鰍魚」로 비유하는 것도 상대에게 모욕감을 크게 주는 표현이다. 또 상대 비판은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한마디로 물리치는 표현을 여러번 쓴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김 관웅교수의 김 문학비판에는 실명을 공개하면서 지지하는 사람이 없는데 김 문학에 대해서는 조글로에서 실명을 공개하면서 맞아죽을 각오로 김 문학을 변명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열성도 대단하여 조글로에서 오늘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헤어보니 16번이나 (혹시 계산이 틀리면 이 분한테 미안하다) 김 문학에 대한 옹호론, 김 문학과 관련하여 김 관웅교수 그리고 필자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본인은 20번도 그런 옹호론을 쓸 생각이었다하니 아마 좀 더 대한민국 서울에서 쏘아올리는 문화미사일이 조글로사이트에 와서 작렬하면서 중국의 구조선족들의 귀청을 울려주고 포연을 자욱하게 날릴 것 같다. 이 사람이 조글로에서 김 문학을 언급한 것은 금년 5월7일에 발표한「누가 김 문학을 뜨게 했나?」라는 글에서부터이다.  5월6일에 김 문학이《신조선족월경론》」을 연재하기 시작한 그 이틑날부터 이미 이 사람의 김 문학옹호론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부터 정말이지 객관적이 입장에서 보기에도 집요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김 문학옹호론을 줄곧 벌이고 있다.     또 사정이 있어서 조글로에 실명을 올리면서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본인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연변의 중견문화인들 비판과 함께 그런 문화인들의 촌스러운 문화적인 역량을 단 한번에 공중분해시킬 怪力의 소유자로서 김 문학을 학술저서 58종의 국제대학자로 치켜세우더니 조글로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김 문학에 대한 찬반양론이 벌어지니 이 사람도 굉장히 바빠지고 양으로 음으로 역할을 많이 했다. 조글로에 공개적으로 나오지 않은 역할에 대해 구구히 언급할 필요는 없는데 정말 필자가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에서 김 문학의 친일언행이 불보듯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본인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부정못하지만 그 친일언행은 과거문제이고  현재는 김 문학이 인권탄압을 받고 있기에 그를 지지한다는 취지의 선언문을 대문짝에 올려 놓은 것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도 있는가? 사실말이지 현재 누가 김 문학이를 죽이고 있고, 김 문학이 누구한테서 인권탄압을 받고 있다는 말인가? 단지 욕먹을 글을 썼기에 욕을 먹고 있고, 때로는 그 욕이 너무 직설적이니 들으면 기분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선언문을 발표하는 그 당시도 김 문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욕한 것은 김 관웅교수뿐이었다.   김 문학과 몇 안되는 김 문학지지자들이 너무나 일부 고루한 조선족 지식인들이 「장장 10년 」이나 김 문학죽이기를 한다기에 필자도 그런 죽이기의 총본부라고 할 만한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 들어가서 찾아보니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이채,1999),《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 1999), 《조선족대개조론》(2001)를 출판했을 당시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열띤 비판이 있었던 것 같았고, 그후에는 극히 간헐적으로 일부 지식인들이 비판글을 어디에다 올린 정도가 아닌가 추측된다.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서 현재는 과거의 그런 글들을 찾아내기도 힘들다. 김 관웅교수가 그 사이트에서 최근에 김 문학비판을 시작한 것도 필자가 이미 객관사실을 검증해보았듯이 김 문학의 도발에 의해 나선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여기까지 쓰다보면 김 문학이 조글로에 나타나면서부터 몇명 지지자들이 그를 위한 변명을 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한국에서 황 우석 지지자들이  하던 행태와 비슷하다는 점에 다시 놀란다. 물론 황 우석의 과학논문조작과 김 문학의 문제점은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점이다. 그런데 황 우석지지자들이 황 우석의 과학자로서의 엄중한 실책에 대하여 한사코 외면하고 그런 실책을 비판하고 문책하는 사람들에 향하여 광기가 어린 저주를 퍼 붓듯이 조글로에 자주 김 문학옹호론을 발표하는 사람의 글에서는 김 문학에 대한 맹신, 김 관웅교수에 대한 너무 지나친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그 사람도 조글로에 나타나는 사람 이상으로 본인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아직도 김 문학변명의  구실을 만들어내고 친일언행에 대해서는 이제 더 변명을 못하겠으니 자기의 조국에 대하여 왜곡된 역사교 과서 비판을 하는 용기있는 김 문학을 정권에나 아부하는 너희들이 비판자격이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댓글에서 던진다 .그런 과정에서 누가 쓰는 글인지 일본의 중국침략은 침략이라는 명분이 있으나 문화대혁명은 그런 명분도 없는 일이고 일본의 세균무기보다 김 관웅의 문화대혁명의 유령이 더 나쁘다는 댓글이 사이트에 올라와 필자도 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리고 또 개발되는 구실이 저서 50여종을 출간한 김 문학에게 저서 고작 몇권밖에 안되는 학자들이 나서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얼핏 들어보면그럴듯 해 보인다. 황 우석논문조작문제를 서울대에서 조사할 때도 지지자들은 서울대는 조사할 능력도 없다고 했다. 황 우석은 동물복제연구, 생명공학연구의 세계최고의 권위자이니까 이 세상에 누가 황 우석을 조사할 능력이 있느냐 말이었다. 그래서 지자자들이 인정하는 외국의 최고의 생명공학학자들을 모셔다가 서울대 조사를 다시 재조사하라고 웨쳤다.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하단 말인가? 그래 김 문학비판은 중국의 余 秋雨, 한국의 李 御寧정도가 비판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결과적으로 황우석의 과학적 오류는, 과학자로서 성실하지 못한 자세는 한국의 소학생 정도여도 비판할 수 있고,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중국과 한국의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토록 집요하고 외고집스럽게 만드는가? 황 우석의 지지자들의 경우에서 이미 봤지만 한번 자기들이 맹신한 상대에 대하여 아무리 허물이 드러나도 자기들이 맹신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 하여 맹신에 맹신을 더해가는 것이 이들의 심리가 아닐까? 그리하여 누구나 분노할 만한 친일언행에도 될수록 외면하려하고 기껏 내놓는 소리가 다양한 사회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것이다. 결국 김 문학에 대한 진정어린 애정보다 자기들 자존심문제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황 우석의 지지자들은 그래도 순순한 동기가 대부분이었다. 그 위대한 우리민족의 과학자를 지켜주자는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현재까지 김 문학옹호에 열성을 부리는 사람들은 우리 조선족의 전무전후한 저술가이고 월경하는 문화인인 김 문학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만 그럴까? 객관적인 사실을 보아도 현재까지 김 문학비판에 실명을 공개하고 나서 사람은 김 관웅교수이고 그 다음 필자 정도이다. 조글로에서 댓글형식으로 김 문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 김 문학옹호론자나 필자의 글에 댓글을 다는 정도이지 그런 댓글에 죽어날 김 문학은 더구나 아니다. 또 김 문학을 비판하는 것도 김 문학의 욕을 먹을 점을 지적하는 것이지 무조건 김 문학의 저술활동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필자의 이 연재에서 알다싶이  김문학을 전면적으로 분석해보면 좋은 점도 많이 보이고 욕 먹을 점도 많이 보인다. 그래서 현재까지 과대포장되고 있는 김 문학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비판받을 점을 비판받을 점대로 나누어 보자는 것이 필자의 이 연재의 要諦 이다. 그러면 결국 죽이기는 아니지 않는가? 실상을 제대로 알고나서 김 문학에 옳바른 자세로 대하기가 무조건 올리치켜세우고 맹신하는 것보다 월등히 좋은 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왜서 이토록 집요하단 말인가? 너무나도 집요하니 이런 지지자들의 동기가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혹시 반대급부를 바라고 하는일, 같이 해외에 있다는 점에서의 연대감에 김 문학과의 제휴에 어떤 이상적인 기대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보는데 근거없는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그렇다쳐도 여기서 꼭 짚어볼 점이 있다. 황 우석지지자들이 생명공학에 전혀 전문지식이 없었기에 맹목적으로 황 우석을 지지하고 또는 황 우석과 지지자사이트 운영자의  교묘한 얼론풀레이에 놀아난 면이 강하다. 대다수 새명공학자가 황 우석이 분명히 논문조작을 했고 과학자로서 중대한 실책을 했다고 설명을 하고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도 그런 설명에 수긍이 가는데 극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런 설명이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무지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마침 아이러니 하게도 김 문학에 대한 비판을 하는 김 관웅선생, 그리고 필자는 중국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비교문화의 전문가들이고 비교문화의 책에 관해서는 그 진가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김 문학에 대한 평가를 한사코 말꼬리만 잡아서 깍아내리려 하고 필자의 글에서는 말꼬리도 잡을 것이 없으니 댓글에다 이런저런 욕설을 퍼붓으면서 이 연재를 중단하기를 은근히 촉구하고 있다.  마침 알고보니 김 문학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다 문화적인 일을 하고는 있으나 그렇게 많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소문을 어느 댓글에서 봤다. 그러면 본인들이 잘 모르는 분야도 있고 그런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인의 견해에도 귀를 기울이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그러기는커녕 학자님들의 그릇이 어떻소 하면서 본인들이 그런 정도의 학자도 되지 못한 어떤 저주같은 같은 것이 이 사람들의 언사에서 스며나오고 있다.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또 본인이 의식하지 못 할 수가 있어도 글 읽는 사람들은 그런 심리를 보아낼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은 조선족 가운데서 학자라고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질투심도 생기고 그런 학자들을 한꺼번에 다 날려보낼 怪力의 소유자인 다산작가이고 월경하는 문화인 김 문학한테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도 아닐까? 이들은 또 한편으로는 해외의 대도시에 있다는 점에서 연변땅에나 남아있는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우월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서로 모순되는 심리가 묘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무지에 의한 맹신이 어떻게 무서운지 김 문학에 관하여 한번 예를 들어보겠다.    김 문학에 대한 찬반양론이 심하게 전개될 때 조글로에는 북경에서 날아온 特報같은 「김 문학 학술,언론계 초청으로 북경방문」이라는 기사가 대문짝에 올라왔고 미국의 어느 사이트에서도 거의 리얼타임으로 대문짝에 내걸었다. 그러더니 조글로에 대뜸 그 내용을 봤느냐? 그것을 보고서도 김 문학비판이냐? 졻은 연변골짜기에서 너희들은 비판해도 북경,서울같은 대도시에는 김 문학이 이렇게 대환영을 받는다 이런 뉴앙스의 글이 올라왔다. 그러니 속담에 있다 싶이 되놈이 김 상헌을 안다더냐 하는 식의 어느 정도 추궁마저 하는 기세였다. 필자가 이 연재를 쓰면서 조글로에「김 문학 학술,언론계 초청으로 북경방문」이라는 기사가 올라온 시간을 보니 8월23일0시14분이고, 위에 언급한 사람이「김 문학은 친일매국노?」라는 글이 조글로에 올라온 것이 같은 날 14시35분 이었다. 그러니 그 기사를 보고나서 그날로 글을 써서 올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도 분명히 김 문학에 의한 어떤 의사가 존재하고 그 것을 맹신하는 모습도 분명했다. 필자도 처음에 이 기사를 보니 그럴듯해서 김 문학이 과연 대단하구나 했는데, 그 기사의 출처를 보니 중신출판사라고 김 문학의 책을 내준적이 있는 북경의 어느 출판사의, 그것도 조선족인 듯 보이는 직원이 쓴 기사였다. 그러고 아무리 다 사실이라고 해도 한 출판사의  광고였을수는 있으나 공인된 언론기관의 보도는 분명히 아니었다. 필자도 처음에 中信社 라고 나오니 중국신화사의 약칭으로 쓴 것인가 하여 과연 김 문학이 유명하구나, 신화사가 다 따라다니는구나 했는데 며칠 후 조글로에서 다시 보니 처음에 中信社라고 나오다가 다시 中信出版社라고 고쳐진 것 같아서 일순 허무맹랭해졌다. 언론사 기사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렇게 떠드는가? 그리고 그 기사내용을 보면 현재 확실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 어떤 시리즈의 책을 어디에서 낼 계획이라든가, 인민대학교에서 특별교수로 모실 의향이 있다든가, 언제 어떤 유명한 사람들과 책이 나올 것이라든가, 대체 이런 내용이 많이 들어있고 김 문학에 대한 칭찬이 많이 소개되었다. 또 어느 조선족으로 보이는 북경대학박사가 별장에서 초대하였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은데 친구나 고향후배로 보이는 어느 젊은 박사가 북경대학교 어느 연구소차원이 아니고 개인 입장에서 초대한 것으로 밖에 안보인다. 보통 대학교 세계에서는 박사라하면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나 아직 확실한 교수직을 가지고 못있는 젊은 학자를 부르기 좋게 누구누구 박사라고 불러준다. 이러면 이 기사가 무슨 그렇게 대단한 기사여서 거기에 따라 춤춰야 하는가?  한국의 李 御寧, 중국의 余 秋雨와도 이제 문명대화집을 낼 것이라 하니 지지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진것 같다. 그래서 더 김 문학이 하늘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도 김 문학에 관한 이 연재를 하면서 김 문학의 저서를 찾아보니 중국에서 李 御寧의 책을 두권 번역( 번역은 남한테 시키고 본인이 審稿했다) 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李 御寧이 김 문학이 한국에서 낸 책 여러권에 서문을 써주었구나 하고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대단한 유명인들도 알고보면 다같은 인간들이니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余 秋雨와 중국인민대학 교수이고 노신박물관 관장과 김 문학 사이에도 비슷한 주고 받음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김 문학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이 사람들의 책을 번역하는데 주선해준다는 등 말이다. 그러면 이 기사내용에 별로 놀랄 것도 없고 이 기사때문에 그것 가지고 김 문학비판자들을 비꼬는 행위가 너무 가벼운  소행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오히려 김 문학이 왜서 출판사를 통하여 조글로에 자기 홍보를 하고, 출판사관계로 귀주일보에 자기 홍보를 하는데 정작 중국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環球時報나 新京報의 인터뷰요청에는 완곡히 거절했다고 나오는지 필자에게도 의문이 남는 점이다. 개인홍보에는 이런 큰 신문들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 간단한 예를 들겠다. 어제 올라온 김 문학지지자의 글에서 김 문학이 중국에서 낸 《新丑陋的日本人》이 미국의 인류학자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1948)의 일본론 수준을 초과했다고 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런 판단은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지? 중국에서 나온 《新丑陋的日本人》의 표제에 선전문구로 그런 내용이 나와있기는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누구의 객관평가가 아니고 출판사나 김 문학 본인이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바라서 달아놓은 선전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余 秋雨나 李 御寧이 실명을 밝히면서 이 책이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을  초과했다고 하면 그 것은 객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화와 칼》이라 하면 중국독자들은 그리 잘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본 꽃집의 국화를 베는 식칼얘기인가 하고 믿는 중국사람도 많을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의 판매전략으로서는 「일본의 軍刀보다 더 예리하게 일본을 찔렀다」고 선전하는 것이  더 잘 됐을 것이다. 이 책의 일본어판 《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祥伝社,2007)의 선전문구에는 아예  Ruth Benedict의《국화와 칼》을 초과했다는 얘기가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니 무지에 의한 맹신이 무섭다고 한다. 옛적에 공자께서 「苛政猛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니라」했는데 인터넷이 발달하여 정보발신이 쉬워지고 누구나 손쉽게 마구 자기 의견을 쏟아내는 시대이니 식견과 자기절제능력이 강하지 못하면 무지에 의한 맹신에 의하여 상대공격도 서슴치 않기에 「무지한 맹신은 빈라덴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2010년10월6일                                              설명: 이 연재는 4회에 마치려 했는데 신중하게 논증을 하려 하고 여러 가지를 비교하여 설명하려 하니 생각외로 글이 길어져 5회까지 연재를 끌게 됐다. 필자로서도 김 문학연재를 한시라도 빨리 마치고 제 할 일을 하고 싶은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많고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다. 아무튼 제5회까지 인내성 있게 기다려주기 바란다.  
4    김문학이 욕먹는 이유 (김광림) 댓글:  조회:5400  추천:46  2010-10-04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7)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3)                                         5. 김 문학이 욕먹는 이유     김 문학이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삼국을 넘나들면서 책을 수십권 이상 출판하면서 조선족출신가운데서 제일 다산작가라고 불리우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한테서 욕을 얻어먹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런 욕들이 김 문학에 대한 소위 「유명콤플렉스」, 또는 시기심이라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김 문학죽이기를 한다고 억울해한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인간이고 보면 필자를 포함하여 자기도 의식하지 않는 사이 그런 심리가 작동할 수도 있지만 그 것이 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바로 김 문학의 인간으로서 아름답지 않은 모습에 있고, 그 것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원인이라 단언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김 문학하면 극우적인 친일언행을 먼저 떠올리고 그 것에 격분하고 있다. 사실 필자도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는 상당한 분노와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도 잘 살펴보면 김문학의 극우적인 사상때문에 생긴다기보다 오히려 인간적인 됨됨이의 문제에서 생기는 측면이 휠씬 더 강하다.   그러면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김 문학의 인간적인으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가? 필자는 결코 김 문학의 생활모습에서 스캔들을 찾아내자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의 저술활동에 그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고, 그가 발표하는 글에 그런 문제가 보인다고 판단한다.   김 문학의 수십개의 저서를 분류해보면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중국소개서, 일본소개서 등이 있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필자가 사회비판서라고 분류한 소위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인데 이런 책들이 수량도 적지 않거니와 김 문학이가 문필가로서 잘 팔리는 책을 써내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적인 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존재한다.     여기서 한국비판서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김 문학의 대표적인 한국비판서이란  일본에서 출간한 책들은 (1)책 제목:《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   저자: 김 문학, 김 명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2,4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12) (2) 책 제목:《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   저자: 김 문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2(초판2002) (3) 책 제목:《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    저자: 이토 테리,류 희준,김 문학 공저   출판사: 실업의 일본사    출판년도:2002,6    한국에서 출판한 책은 (1)《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1999)     중국에서 출판한 책은 (2)《丑陋的韓國人》(山东人民出版社, 大地出版社, 2005)( 이책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도 출판한 것 같다) 들이다.  이런 책 제목만 나열해놓아도 이해력이 있는 분들은 문제점을 대뜸 보아낼 수 있다. 어떻게 김 문학이가 분명히 제 조상의 나라이고 모국인 한국에 대하여 이렇게 일본과 중국에서 험담들을 늘여놓을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먼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의문을 의식하여 김 문학은 그런 책들이 한국에 대한 험담이 아니고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기에 들이대는 비판의 매이고 중국의 문호 노신과 같은 비판정신의 발로라고 변명하는 것 같다. 진정으로 그런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진정으로 제 조상의 나라, 모국을 사랑한다면 그런 책은 한국에서만 내고 누가 일본에서, 중국에서 번역출판하겠다고 하여도 저자로서 거부할 권한을 행사하여 내지 말아야 한다. 이런 책들이 가령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사람들에게 비판의식으로 받아들일수도 있지만 분명히 일본과 중국에서는 그런 책을 읽고나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오해하고, 욕질하고 근거없이 깔보게 되는 것이다. 김 문학의《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을 읽어본 감상이 일본의 아마존닷컴에 올라와 있는데 이런 감상을 읽어보아도 김 문학의 책이 분명히 일본과 중국에서 소위 嫌韓감정을 불러읽으킬 수는 있어도 한국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일본어아마존닷컴에 올라와 있는 이 책을 읽은 감상문을 다시 한번 적어보겠다.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코멘트:   「일본인을 찬양하고 한국인을 죽도록 내리깍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상에도 있지만 어떤 냄새를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진실의 한국민족의 특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본인에게도 결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앞에서는 누구도 성인군자처럼 보입니다. 그처럼  문제투성이 민족입니다. 허영심, 거짓말, 이기적, 질투심, 우줄렁거림, 감정을 억지하지 못하는, 폭력적…. 오늘의 일상적인 반일폭동은 그들의 민족적 특성의 발로입니다.」 이 감상문을 읽어보면 일본인의 시각으로도 일본을 찬양하고 한국을 죽도록 내리깍았다는 것을 알수 있고, 너무 일본을 간지럽게 찬양하고 대신 한국을 죽도록 내리깍아서 그래서 이게 진실한 소리일가?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고 오히려 무언가 냄새가 난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한국에 대하여 대단한 오해, 그리고 일본인으로서의 근거없는 우월감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것도 이 감상문에서 읽어낼 수 있다.  아마 중국에서 출판한 《丑陋的韓國人》을 읽어본 중국의 독자들도 비슷한 嫌韓감정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한국이 발전했다고 우러러 보려했더니 알고보니 여전히 옛날 조선인들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원래 번역이라는 것은 내용도 제목도 거의 원저작대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인데 만약 김 문학이한국에서 출판한 《한국인이여  상놈이돼라》(우석,1999)를 일본에서《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한국계 중국인 의 통곡의 조국비판》(1999), 중국에서《丑陋的韓國人》(2005)이라고 번역하여 출판한 사실이 옳다면, 번역된 제목 자체가 정직하게 번역된 것이 아니고 일본과 중국의 독자들의 충동심이나 자극하여 책 한권이라도 더 팔자는 타산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럼 김 문학이가 왜서 이런 한국비판서를 출판하게 됐는가 살펴보자. 김 문학이가 중국에서 198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1991년에 일본에 가기전까지 사회에 내 놓은 책은 재일한국인학자 김 량기선생의 일한문화비교에 관한 번역서 한권(1989년) 이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자신의 산문집을 중국에서 한어로 한권( 1993년) 냈다 한다. 그러다가 김 문학이가 1997년부터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했는데 초기의《벌거숭이3국지》(창사,1997, 이 책은 1998년에 일본어로도 번역출판),《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 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 1997) ,《중국의 에로스 문화》(우석,1998) 등으로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소개서 유형으로서 처음부터 마구 비판서를 쏟아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다가 김 문학의 저술활동에서 비판서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99년에 한국에서《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 이책은중국문화론이라 분류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비판서이다)을 내면서부터이다. 이런 비판서들을 한국에서 내게 된 계기가 물론 화제를 끌어모으고 그래서 잘 팔리는 책을 내자는 동기에서 출발했겠지만 그런 충동이 생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한국의 전 여옥의《일본은 없다1,2》(지식공작소, 1994, 1995)와 조선족작가 김 재국의《한국은 없다》(민예당,1996)에서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전 여옥의 일본비판서《일본은 없다1,2》는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면서 한 때 화제를 많이 끌어모았고, 이 책에서 이름을 본딴 것으로 보이는 김 재국의《한국은 없다》도 조선족이 한국에서 낸 책치고는 일시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특히 김 재국은 김 문학과 같은 조선족으로서 김 재국의《한국은 없다》가 주목받는 것을 보고서 역시 조용한 내용의 책보다 제목이 자극적이고 험담이 많이 들어간 책이 잘 팔린 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필자의 억측일 수 있으나 김 문학의 저서들의 출판과정을 보면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시작한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가 일본에서는《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1999),《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초판2000) 등의 더 충격적인 제목으로 바뀌어 출판되고 한발 더 나가서《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 (2002)를 출판하면서 한국비판의 톤을 높여갔고 그러는 과정에서 단지 현재의 한국비판만이 아니라 일제식민지지배에 대한 긍정론에까지 발전해나가고, 중국비판도 점점열을 올리는 과정에서 일본의 중국침략까지 긍정하는 듯한 발언을 마구 쏟아내게 되었다. 조선족작가 김 재국이《한국은 없다》를 쓴 것은 작가본인의 한국체험을 바탕으로 썼고 실지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차가운 대접을 받은 것을 한국인들도 이해하기에 이 책을 가지고 한국인들이나 중국조선족 지식인들이 너무 혹평을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그러나 김 문학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한국의 실제체험이 아주 제한 된 사람이 마구 한국을 비판하고 그 것도 일본에서는 그런 비판의 강도를 높여갔고 그런 한국비판서를 누가 번역한 것도 아니고 김 문학 본인이 스스로 일본에서 출판했으니 출판동기를 아니꼽게 볼 수 밖에 없다. 이런 격렬한 한국비판서가 한국에 대한 애정때문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너무 박약하다. 진짜 애정이 넘쳐서 하는 비판이라면 그 책을 한국에서만 출판하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더 자극적인 제목으로 번역출판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었지 않았는가? 결과적으로 그렇지는 않았고, 일본에서 한국비판의 강도를 더 높여간 것이 사실이다. 이러고 보면 비판서가 화제를 모으고 책이 좀 더 잘 팔린다는데 출판동기가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고, 조상의 나라이고 분명한 모국을 일본과 중국에서 마구 비판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기 어렵고 정말이지 욕설을 퍼붓고 싶은 일이다. 이런 책의 출판을 잘 했다고 박수를 쳐줄 조선족이 과연 얼마나 있을 까?    그 다음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들을 살펴보자.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들에는   한국에서 (1)《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 이 책은 중국문화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중국비판서이다)   일본에서 (2)《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통분의 조국비판》(NONBOOKBUSINEES,2000, 祥伝社(黄金文庫),   2005 (이 책은 한국에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  책의 한국어판인 것 같다) (3)《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 ( 이 책은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는 제목으로 바뀌어 祥伝社(黄金文庫) 에서 2006년에 재판) (4)《역검정 중국역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이자와 모토히코, 김 문학 공저,祥伝社,2005, 祥伝社 (黄金文庫) 에서 2008년에 문고본으로재판)     (5)《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   (이 책은 기본적으로 중국비판서이면서 한국비판도 했고 또 도처에 일본예찬을 한 성격이 복잡한 책이다),    등이 있다. 이런 비판서들을 아직 중국에서 출판했다는 정보는 없고,  한국에서는 한권뿐이고 나머지는 다 일본에서 출판한 것이다. 이런 비판서를 통해서도 사상적인 문제이전에 오히려 저자의 인간적인 문제를 짚어보고 싶다. 중국인으로서 중국비판을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래도 진정으로 애정어리고 건설적인 비판이면 중국에서도 꼭 출판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다.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의 제1탄은 한국에서 나왔는데《반문화지향의 중국인》(1999)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이듬해인 2000년에 《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2005년에는 출판사를 바꾸어 재판되었다. 이 책이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에서는 극히 제한된 범위내였겠지만 일본인들이 중국을 막연하게 문명대국으로 보는 이미지를 바꾸어 놓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제목에서 이미 중국의 문화적으로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그런 성격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듭하여 말하면 이런 책을 꼭 중국어권에서 내자면 중국대륙이 불가능하다면 홍콩이나 대만에서도 내는 방법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김 문학이 중국어권에서 내려고 노력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손쉽게 한국과 일본에서 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가령 홍콩이나 대만에서 냈다고 하여도 중국문명비판서로서 독창성이나 신선미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을 것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 특히 일본에서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중국문화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일본에서 낸 《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 , ) ( 이 책은《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는 제목으로 바뀌어 祥伝社(黄金文庫) 에서 2006년에 재판)이라는 책이 초판이 나오고 제목이 바뀌면서 재판이 나오는 과정에서 책 설명문에 「중국에서 출판을 거부 받은 문제의 책」「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 」라는 선전문구가 들어있었다. 아마 이 것은 김 문학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출판사가 책을 더 팔기 위하여 행하는 상술이라 볼 수 있지만 이런 방식은 분명히 저자의 출신국인 중국의 체면을 깍아내리는 것이다. 진짜 김 문학이 이 책을 중국에서 출판하려 시도했는데 그 것이 거부를 받았다하더라도 마음가짐을 제대로 가졌으면 이런 식으로 상술에 쓰지 말아야 하고 출판사의 아이디어라고 해도 저자가 거부할 권한은 분명히 있다고 본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의 책 설명문에도 「중국외교부가 제일 주목하는 책」이라는 선전문구가 달려 있는데 일본의 일개 출판사가 책도 나가기전에 중국외교부가 주목하는지 안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국외교부가 주목해도 주목한다고 선전하고 다니겠는가? 그러니 결국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책을 더 팔자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고 이런 의도에는 분명히 김 문학의 의사가 개재했을 것이다.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에서 또 하나 마음에 꺼리는 일이 그가 중국인으로서 중국을 비판한다고 책 제목이나 표제의 선전문구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김 문학은《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祥伝社,2007)에서 공개하다싶이 일본에 이미 귀화했고 이미 법적으로 일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김 문학이 일본에 귀화한 시기인데 위의 책이 출판 될 무렵에 귀화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옛날같으면 틀림없이 반혁명에 몰릴 정도의 중국비판서를 2004년 경부터 아주 대담하게 일본에서 출판한 것을 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일본에 귀화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귀화한 다음에 내는 중국비판서에는 손쉽게 「痛憤의 조국비판」「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꼭 사용할 필요가 있으면 일본에 귀화한 원중국인이라고 하면 그래도 진정성이 보인다.      여기서 김 문학의 일본비판서도 좀 언급하겠다. 김 문학의 일본비판서는 지금까지    (1)《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祥伝社,2007) ( 이 책은 중국에서 《新丑陋的日本人》(译者汪培伦, 金城, 2008)으로 번역출판되었다.)  한권이다. 이 책이 어느 정도로 일본을 비판한 것인지 필자도 구체적으로 읽어보지 못하여 잘 알지 못하겠는데 아마존닷컴에 올라와있는 독자의 감상문을 보면 약 20% 정도가 외국인이기에 볼 수 있는 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약 80%는 좀 우익적인 관점에서 옛적의 일본이 좋다고 하면서 현재의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꼬집은 내용같다. 이런 식의 일본비판은 일본의 보수적인 지식인들도 꽤 잘하는 비판이다. 참고로 아마존닷컴에 올라와 있는 감상문을 다시 한번 올린다.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 「중국에서 한국계3세로서 태어나 최근 일본인으로서 귀화한 저자만이 쓸 수 있는 일본을 사랑하는「독설일본론」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옛적의 좋은 시대를 실제 체험하고, 또 일본의 전통문학도 자주 읽어보고 있습니다.제가 읽어본 감상으로서는 원외국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객관적인 시야에 감동한 점이 20%정도, 옛적의 일본을 사랑하는 좀 우익적인 의견이 80% 정도로서 당당치 못한 일본인보다 일본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 수 있습니다.」(이하 내용이 길기에 생략)  이 책이 중국에서《新丑陋的日本人》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된 것을 보고 사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일본어저서를 보니 이제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국민으로 살기로 결심했는데 아무리 일본에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있다고 하여도 새로운 조국인 일본에 대하여 중국에서 이런 식의 제목으로 책을 출판해야 하는가 말이다. 분명 번역본이고 보면 정직하게 원 제목대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 중국의 독자들도 이 책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필자는 또 한번 김 문학에게 실망했고 은근히 근심도 든다. 이제는 한생을 살아가야 할 일본에 대하여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 책을 번역하여 출판하면 여지껏 일본에서 후원해주던 보수적인 인사들이 실망하고 진짜 화를 내지 않을 지? 부질없는 杞憂이기를 바란다.    이런 문제에서 마지막으로 중국조선족론에 대하여도 한마디 해야 겠다. 김 문학의 조선족론은 2000년에 한국에서 출판한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 2001년에 중국에서 발표한 《조선족대개조론》, 현재 조글로 사이트에서 발표하고 있는《신조선족월경론》이 있다.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은 한국에서 조선족을 망신준 책이라는 평판이 있으나 필자가 전혀 읽어본적이 없고, 이 책의 목록도 본적이 없기에 평가를 삼가하겠다. 《조선족대개조론》은 일본에서 오래전에 어느 일본인이 《장백산》잡지에 연재된 것을 필자에게 복사본을 보내주어 대충 읽어보았는데 수선 충격을 받은 것이 김 문학이가 이렇게 독설을 쏟아놓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조선족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 동기에서 썼겠다고 생각했지만 잔뜩이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대에 이렇게 조선족 사회에 대하여 마구 험담을  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 그때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한국에서 중국비판, 일본에서 한국과 중국 비판으로 물오른 기량을 발휘하여 조선족 사회에도 거침없이 메스를 들이대보려는 시도였는 것 같은데 그런 큰 파장을 일으키고 나서 김 문학이가 그 후과에 대하여 책임지고 조선족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해결에 발벗고 나섰다는 행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던져놓은 파장인지 단지 조선족 사회에서 화제몰이로 책 한권이라도 더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현재 조글로에서 연재하고 있는  《신조선족월경론》도 본인이 노력하는 수고는 이해할만 하지만 구조선족, 신조선족이란 생소한 개념으로 조선족 사회의 불화나 조성하고, 조선족의 전통거주지를 떠나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나가는 것을 문명화의 방향으로 간주한다면 이 것은 결과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나 기타 조선족공동체의 붕괴에 부채질하는 언설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미 일본에 귀화한 신분이고 보면 그런 사실을 밝히고나서 조선족론을 전개했으면 본인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자연히 구분되고 사람들도 진정성이 들어있는 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상 김 문학이 일본, 한국, 중국에서 책들을 출판하고 글을 연재하는 과정을 관찰해보면 아무리 좋게보자고 해도 김 문학에게 쓴소리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상의 문제와도 관계가 되는데 김 문학은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들에서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와 중국침략문제에 관하여 코리언들과   중국인들이 정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언도 적지 않게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문제는 자칫하면 김 문학이가 친일파나 한간으로 몰리고 크게 명예훼손이 되기에 필자로서도 조심스레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분명이 있는 사실을 덮어두고 지날 수는 없다. 필자가 이런 언급을 안 해도 이미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어지간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선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와 관련되는 김 문학의 글 내용들을 확인하겠다.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김 문학, 김 명학공저,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 재판祥伝社黄金文庫)에서 2002)의 제5장의 내용을 다시 한번 올려본다.     제5장 21세기판 한국인개조계획   -지금이야말로 북안적역사관을 세우자   일한병합을 둘러싼 세계의 상식   구미의 학자의 이론을 알았을 때 받은 충격   일한병합은 과연 피할 수 있었는가   일본통치의 35년간을 4기에 나누어 검증한다 한국국민의 역사관개조론   한국에서 허용되는 역사관은 하나밖에 없다   한국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일본의 교과서사정   항일캠페인으로 하여 한국이 얻는 것은 역사에 말살된 소리없는 민중들   식민지체험자의 소리를 발굴하는 귀중한 사업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있은 양호한 관계   자료가 증명하는 식민지시대 역사의 진실 지금 경청해야하는 박정희의 국민개조론   박대통령의 근대화는 식민지정책의 재활용이었다   개조해야 할 점으로서 올린 한국인의 악덕   박대통령과 매국노 이광수의 불가사의한 일치  안중근의 신화를 넘어서    안중근이 일한합병을 결정하게 한 역사의 아이러니    일로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쾌재를 부른 안중근    왜서 병합반대론자인 이토히로부미를 쐈는가    사형을 앞둔 안중근의 최후의 말     안중근이라는 우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미래로 향하자 (대체 이상의 뜻)     이 책의 제5장의 제목만 보아도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대하여  긍적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했다는 것을 쉽게 읽어 낼 수 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나면 김 문학에게 질문하고 싶은 문제가 여러가지 생긴다. 「항일캠페인으로 하여 한국이 잃은 것이 무엇인가? 그래 자기 나라에 대한 지배에 대하여 반항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식민지체험자의 소리를 발굴하는 귀중한 사업이란 무엇인가? 그런 귀중한 사업을 하여 일본의 식민지지배하에서 행복하게 산 조선인이 다수였다는 것을 증명하여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식민지시대 역사의 진실을 증명하는 자료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러면 광복후 조선반도의 남북양측이 일제시대의 진실한 역사를 숨기고 살아왔다는 말인가?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는 일본식민지 정책의 재활용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안 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했기에 일한합병이 결정됐다는 근거는 또 어디에 있는가?  한국에서 안 중근의 우상을 해체할 필요는 왜 생기는가? 안 중근우상을 해체하지 않으면 한일관계가 미래로 향하지 못하는가?」 사실말이지  이런 질문의 하나하나가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문제의 본질과 관계되기에 말꼬리잡기를 한다거나, 질문자가 지나친 민족주의 성향때문에 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一笑에 부치지 말고 자료근거가 충분하고 소신있게 한 발언이면 한번 조글로에서 이상의 질문에 상세한 대답을 해주었으면 한다.   필자는 대체 2002년경에 일본의 서점에서 이 책의 제5장에서 김 문학이 안 중근이 할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무지에 의한 소행이고 무의미한 행위로 폄하한 것을 읽고나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분노를 느낀 적이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개인적으로 김 문학을 정말 곱게 안보게 된 것이 바로 이 책의 제5장을 읽어보고나서이다. 분명 안 중근은 조국이 독립한후 본인의 유해를 조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며도 불구하고  7000만이나 되는 후손들이 그 유해도 찾아내여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인데 조선족출신이 어찌 이런 발언을 꺼리낌없이 한단 말인가?   김 문학은《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祥伝社黄金文庫, 2006,12)의 제2장 「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의 「일본의 전쟁에 자긍심을 가지라」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예를 들면 일한의 근대사에서 안 중근과 이토히로부미입니다만, 안은 한국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항일투사이고 민족영웅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테로리스트입니다. 당시의 국제법에 근거해도 안은 테로리스트입니다. 이토도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메이지)유신의 元勳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만, 한국인의 눈에서는 적의 두목이겠지요.」(동서의 제114페이지)라고 언급했는데 당시의 국제법에 근거해도 안 증근은 테로리스트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이 점도 해명을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신중국의 씨를 뿌린 일본」의 「무산된 이토히로부미수상초청계획」이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이토는 조선총독을 할 때도 온화하고 동정적인 태도로 나섰고 조선병합에 반대한 인물이었습니다」(동서 224페이지) 이라는 것도 이해가 쉽게 가는 내용이 아니다. 김 문학은《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의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의 「이토히로부미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을 병합하기보다 잠시 관리하여 약소국가를 근대국가로 발전하게끔 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에 의하여 역사의 본질이 보입니다」(동서224~225페이지)라고 발언했는데 이런 관점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으면 좋겠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에서 김 문학이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하여서도 발언한 내용이 확인된다. 이 책의 제3장「일중비교우렬론」의「한국은 왜서 반일을 하는가」의 제목의 「대일폭력과 어리광의 이중카드」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일본한테만 책임을 지우는 불모함.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진정한 어리광은 크게 말하면 對韓지원요청이며, 작은 것은 「위안부」 노친네들에 대한 보상요구입니다. 한국의 미디어는 그 것을 크로즈업하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확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노친네들은 그것에 응하여 악동처럼 떠들고, 아우성칩니다.  「위안부」가 가령 사실이었다하더라도 조금의 방어능력도 없는 무력한 노친네들의 드러내지 않은 상처를 고의적으로 자극하여 드러내고 새로운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폭력」적이 아니겠는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정부가 정말 노친네들의 고통을 이해하여 국민을 사랑한다면 오히려 정부가 솔선하여 충분한 보상을 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에 보상을 조르는 행위인즉 「폭력」이고 거기다 「어리광」에 의한 사탕얻어먹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국민조차 지키지 못한 국가의 책임을 통렬하게 느낀다면 그리고 다른 나라에 대하여 비난하는 정력이 있다면 그 나라가 보상하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동서 196~196페이지, 이하 위안부문제와 직접 관계가 없기에 생략).       이상의 내용을 확인해보면 국경을 뛰어넘어 활동하는 경계인이라는 김 문학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다 날아가는 것 같고, 인권의식에 너무나 어두운 일본의 극우인사라는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   김 문학이는《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 의 「제7장 일본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가련한 나라」에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철저한 반한친일언행을 하고 다니고, 그래서 한국에서 신친일파로 낙인이 찍혀져 있는 오선화에 대하여 선구자로 치켜세우고 그녀를 매국노라고 하는 한국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그만닥치라》에서《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한국과 일본에서 내고 한국국회에 나가서 김 구선생을 테로리스트로 인정해야 한다는 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다가 기소를 당하고 책이 한국 교육당국으로부터 유해도서로 인정된 김 완섭에 대하여서도  독불장군의 반란이라고 긍적적으로 평가했다. 본인의 친일언행도 문제인데 한국에서 널리 친일파로 낙인이 찍힌 오 선화, 김 완섭마저 변호하고 나섰으니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너그럽게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김 문학이 공동저자로 나와있는 《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 의 소제목에 「일본경제부활을 위하여 「38度線」쓸모가 있다!」가 들어있어 이 책이 출판된 당시 한국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 책이 손에 없기에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누가 이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공동저자로서의 김 문학이 이 문제에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의 「제1장 유연한 일본문화력」의 「일본은 왜서 언제나 不死身의 행운이 넘치는가」하는 제목의 「조선전쟁의 特需」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일본에는 조선전쟁이라는 새로운 행운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발언하였는데 사실이야 그렇더라도 보수적인 일본인들도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를 꺼려하는 내용을 조선족출신이 마구 얘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런 발언을 하면서 수많은 동족이 죽어간 사실은 떠오르지 않았는지? 그럼 김 문학이는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해서는 어떤 발언들이 있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서도 문제가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중국침략을 변명하는 듯한 내용은  (1)《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 ( 이 책은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는 제목으로 바뀌어 祥伝社   (黄金文庫) 에서 2006년에 재판)  (2)《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    이상의 두책에 주로 나와있는데 그런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일일히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 두책의 상세한 목록은 필자가 이미 조글로에 올린「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1)」에 나와있다.                     현재 필자가 손에 들고 있는《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祥伝社(黄金文庫)  ,2006년)를 펼쳐보면서 김 문학에게 질문하고 싶은 사항이 수두룩하게 생긴다.  「일본의 중국침략시의 남경공방전의 책임은 중국에 있다고 하는데 그 의도는 무었인지? 일본이 공격을 하지 않으면 공방전도 없은 것이 아닌가? 침략자를 비난하기 전에 왜서 중국측의 장군의 강경항전을 문제삼아야 하는가? 남경대학살 30만설의 허구를 밝히려 하고 중국인에게는 애국적인 관점에서 수자를 뻥튀기하는 문화가 있다고 판단하는데 수자문제 이전에 이 참극의 엄중성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주국은 낙원이었다, 일본점령구는 낙원이었다. 三光정책은 중국의 전통, 일중전쟁의 8년은 일본인에 의한 1년 전쟁이고 7년 경제건설이라 하는데 그런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상의 문제들은 어느 하나도 중국인들에게는 지극히 무거운 문제이고 국민감정을 크게 건드리는 문제이다. 그러니 결코 가볍게 발언 할 문제가 아닌데 김 문학의 상기의 책을 읽어보면 강연문을 묶어서 만든 책같은 내용에 이런 중대한 문제에 인용이나 주해가 별로 없이 발언들이 가볍게 나온 것들이다. 가령 인용이 있다쳐도 그런 인용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는 관점인지, 어떤 극단적인 사람들의 편견정도인지 구분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 문학의 책에서는 이런 엄밀한 학문적 절차도 없고, 중대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없이 발언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과연 그 후과를 생각하고 한 발언인지 회의감마저 든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도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중국비판서이면서 한국비판도 했고 또 도처에 일본예찬을 한 성격이 복잡한 책이다. 필자가 이 책을 접하고나서 김문학의 중일한삼국의 국민성비교론에 일종의 위험성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중국, 한국의 국민성은 거의 性惡說관점에 가깝게 논하고 일본의 국민성을 또 거의 性善說관점에 가깝게 논했다. 결과적으로 중일한삼국의 국민성비교를 한 결과 일본인종이 우월하다는 결과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이 책 목록의 이런 내용의 일부를 여기서 다시 열거한다.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  일중국민성의 우렬비교 일중국민성의 비교로 미래를 점친다 중국은 과연 「잠자는 사자」인가 유연한 일본인과 경직된 중국인 혁신적인 일본인과 보수적인 중국인 정직한 일본인과 사기적인 중국인 단결심이 강한 일본인과 內訌력이 강한 중국 높은 소질의 일본인과 낮은 소질의 중국인 차분한 일본인과 떠들어대는 중국인 내향적인 일본인과 외향적인 중국인 자기반성적인 일본인과 남의 탓만 하는 중국인 《僞惡醜일본인》과 《추한 중국인》의 백년의 격차 공적정의감의 일본인과 사적정의감의 중국인 백년에도 변하지 않는 중국의 국민성 결점 중국의 반문명의 전통적 체질 반문화지향의 중국사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국민성 대륙적 호전성 內訌과 自害의 역사 백년전의 반일투쟁과 「일중관계신사고」 「반일」은 중국, 한국의 발전을 저지하는 두터운 장벽 일본을 이용하는 중국 한국인은 왜서 「반일」을 하는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환상  해외동포에 대한 비인도적 차별과 학대  국민85%가 체벌에 찬성  내셔널리즘적폭력주의+대일폭력  한국의 감정적비민주주의  「아시아의 내홍」의 위험성  일본에 대한 질투와 콤플렉스  대국 일본에 어리광부리는 한국인의 약체성  대일폭력과 어리광의 이중카드 깔보임당하는 일본과 일본인  바보가 돼버리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속임당하기 쉬운 국민  자기선전을 잘 못하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평화에 취해있고 우울증적인 일본인  내향적이고 외교를 잘 못하는 일본인  조화로움의 마이너스적 장벽  「반일」은 즉 일본인의 마음속의 벽이기도 하다 중국, 한국의 역사왜곡  역사관, 역사교육의 일중한의 차이  중국, 한국의 역사교육에 있어서의 왜곡, 날조의 실태  중국에 있어서 역사는 정책의 이용도구  「僞造田中上奏文」도 중국에서는 사실이 된다  일본점령구와 해방구의 실태비교  점령구는 문화도 경제도 번영했었다  「三光政策」의 문제  한국의 역사교육의 실태  일본식민지지배과 근대화  伊藤博文의 전정한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대일순응역사의 중요성     결국 이런 식의 국민성비교는 어느 민족이 우수하고 어느 민족이 열근성을 가졌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인종우월주의 시대의 유령같기도 하고 문화상대주의가 중요시되는 시대정신에도 위배된다. 이러하니 김 문학이 쩍하면 얘기하는 한국인개조론, 중국인개조론, 조선족대개조론이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성 있게 다가올 수 있겠는가?   김 문학은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하여 대체 긍정하는 듯한 글을 쓰고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하여서도 대체 긍정하는 듯한 글들을 썼다. 그 가운데서도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하여 기본인권을 무시하는 발언, 안 중근 의사를 테로리스트로, 그리고 무의미한 행동을 했다고 폄하하는 발언, 만주국을 만족국이라 부르는 발언, 남경대학살마저 공방전은 중국측 책임이라는 발언은 코리언과 중국인의 민족적 감정을 크게 건드리는 발언들이다. 이미 일본에 귀화하여 인본인으로서 한 발언이라치더라도 원조선족출신인 점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유감스러운 발언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김 문학이 한국에서《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 1999), 중국에서  《조선족대개조론》(2001)를 냈을 때 연변대학의 김 관웅선생에 대표되는 조선족 지식인들이 이런 책들의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조선족 사회에 대한 몰이해와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우려 등을 고려하여 비판에 나섰던 것으로 아는데 이 분들의 언사가 직설적이고, 오래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아온 관계로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여 일부 정치적 색채가 나는 모자를 김 문학에게 씌운 면이 있었더라도  이 분들의 비판은 그 방향은 지극히 옳았다고 본다. 그 때 김 문학이가 그런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가 나아가는 길에 문제가 있다고 자각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일본의 극우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코리언과 중국인들의 국민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언행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오늘 이때까지도 변명이나 하고 이런 발언을 비판하는 김 관웅선생같은 분들을 무지하고 고리타분하고 도태되어야 할 연변의 구조선족이라고 대응한 점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감표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 조선족 사회에서 김 문학이가 계속 자기자랑이나 하고 신조선족의 선구자처럼 자처할 최저의 자격이 있는가?   김 문학이 욕을 먹는 문제의 본질은 책을 많이 내고 많이 팔고 그래서 돈도 벌고 명예도 쌓자고 하는데 있는 것 같다. 지극히 상업작가의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서 지조나 도덕문제는 뒤전에 돌리고 책만 내고 잘 팔릴 수 있다면 어떤 위험한 과제에도 도전했다고 볼 수있다.지금까지 요령좋게 동아시아 삼국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책도 많이 내고 조선족의 이름도 많이 알린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족의 명예에도 손상을 준 것이 너무 자명한 일이다.   필자는 김 문학이가 분명히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에 도취된 것이 사실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극우적이고 친일적인 발언들이 꼭 김 문학의 사상적 신조에서 우러러나온 발언같지는 않다. 이런 발언을 함으로서 일본의 보수화 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책을 잘 내고 책을 잘 팔고 도처에 불리워다니면서 강연을 하면서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는것이 주요한 동기라고 보고 싶다. 문필가로서, 책장사꾼으로서의 진면모가 그런데 있다고 판단하고 싶다.    그러기에 필자로서는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 조선족 지식인 사회가 너무 과잉대응을 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라고 본다. 이제는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사실 김 문학이가 일본에서 그런 발언을 하여도 중국이나 한국은 끄떡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그런 발언에 현혹당하여 중국과 한국을 제대로 이해못하는 일본의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이 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각자가 분노를 느끼더라도 말그대로 혁명적인 방식으로 김 문학과 상대하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조선족 사회가 김 문학과 같은 사람들이 더는 속출하지 않도록 각성할 필요가 있다.       설명: 이제 「황 우석과 김 문학 그리고 맹신」, 「우리모두의 문제로서의 김 문학」으로 4번째회에서 이 연재를 마칠 예정이다. 김 문학씨도 이 글을 보고서 성내기 이전에 한번 자기를 자성할 기회가 되었으면 고맙겠다.                                                                                    2010년10월4일  
3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4) 댓글:  조회:3632  추천:41  2010-09-10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4)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4)   미국의 노후한 철도   7월29일, 낮에 시카고 시내관광을 잘 하고나서 저녁켠에 숙박한 호텔에 돌아가 짐을 정리하여 시카고중앙역에 갔다. 시카고중앙역은 건물외관이 유럽의 궁전같이 장엄하였는데 역구내에 들어가보니 의외로 시설이 단조롭고 승객들로 붐비었다. 기차가 떠날시간이 되면 승객들이 길게 줄을 쳐서 기다리고 또 대합실이 붐비는 모양을 보니 마치도 후진국의 기차역같았다. 실은 Emeryville역에서 시카고까지  3일간 기차로 오면서 보니 미국의 기차들은 차내시설이 비교적 노후하고, 기차안에서 세수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고 기차속도가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다. 좋은 점을 찾아보면 좌석이 널찍하고 Emeryville역에서 시카고까지 오는 기차는 승객들이 차창밖을 잘 내다볼 수 있게 사방벽을 유리로 만든 전망차량을 별도 설치하였다.   듣자니 미국인들은 자동차나 비행기를 많이 이용하다니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아 철도회사가 적자가 많이 생기고 그 때문에 철도의 시설개량에 그리 투자를 못하고 있다 한다. 이러다니 동아시아의 기차들보다 시설이 많이 노후해보이고 속도도 그리 빠르지 못한 것 같다. 승객들은 생활형편이 그리 유족하지 못한 사람들이거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기차좌석도 절반이상이 비어있었다.   동부의 평야와 산맥    29일 저녁 9시반경에 기차가 보스턴, 뉴욕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보스턴과 뉴욕을 가는 기차가 일정구간까지 같이 가다가 도중에서 서로 분리되어 각각의 종점으로 향하는 운행방식이었다. 기차는 시카고를 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Indiana주 경내를 통과하였지만 밤중이라 차창밖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바뀌어 30일 새벽 두시반 경에 기차가 Ohio주 경내의 Toledo역에 잠시 정차하였다. 그 후부터 기차안에서 쪽잠을 잤는데 내가 자는 사이 기차는Ohio주, Pennsylvania주 경내를 다 통과하여 아침 7시경에 일어나보니 이미 뉴욕주 경내에 들어왔었다. 밤사이에 Indiana, Ohio, Pennsylvania 세 주를 지나면서 도대체 어떤 자연경관인지 살펴보지도 못한 것이 아쉬웠다. 특히 잠자는 사이 기차는 5대호중의 하나인 Lake Erie라는 호수연안을 줄곧 달렸는데 호수 풍경을 조금도 보지 못하고 지난 것이 후회되었다.       30일 아침 7시경에 깨어나보니 밖은 여전히 평야인데 중부의 대평야에 비하면 수목이 더 많고 도시나 산업시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중부에서 보던 것 같은 끝없이 펼쳐지는 강냉이밭, 콩밭같은 풍경은 보이지 않고 수림속에 강냉이밭, 콩밭이나 목초지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오전 9시경에 Buffalo-Depew역에 들어섰는데 여기부터 뉴욕주 경내였다. 기차는 계속 평야를 달렸다. 오전 10시경에 뉴욕주의 Rochester역을 지나면서부터 소택지가 많이 보였다. 오후 1시경에 뉴욕주의 Utica역을 지나면서부터 산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수목이 꽉차게 자라고 있었다. 오후 2시 40분경에 기차는 Albany-Rensselaer역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뉴욕과 보스턴에 가는 차량이 서로 분리되었다.  이 역을 지나면서부터 수목이 더 농밀해지고 산이 높아졌다. 동부의 대산맥인 Apparachian산맥의 중심부를 기차가 통과하고 있었다. 큰 산맥인데도 기차가 통과하는 지점은 산이 대단히 높지 않아 해발 약 1000m 정도가 돼 보였다. 지도를 보면Apparachian산맥은 미국 동부의 제일 큰 산맥이고 남북으로 긴데 북부지역은 산이 그리 높지 않다. 기차가 산림지역을 통과하는 중에 자그마한 소택이 여기저기 자주 보이고 산속의 분지에는 강냉이밭이나 기타 밭, 목초지가 꽤 보였다. 동부의 산을 보면 수목들이 서부나 중부와도 다른 것 같고 수목의 밀도가 높았다. 보스턴에 도착한 후 주변의 수림을 보니 떡갈나무, 단풍나무 등 동아시아의 북부지역에서 많이 보는 수종이 이 지역에 많았다. 그런 면에서 자연 경관은 나에게 더 친숙감을 주었다. 가끔 계곡이 나타나는데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경관이 참말로 아름다웠다.   오후 4시반경에 Pittsfield역을 통과했는데 이 역부터 기차가 Massachusetts 주 경내에 들어섰다. 여지껏 오랜 노정을 여유를 가지고 달려왔는데 기차가 정작 Massachusetts주에 들어서니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최종목적지 보스턴은 과연 어떤 도시인지? 나는 거기서 1년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겠는지? 내가 과연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자들속에 제대로 끼여나 들겠는지? 하는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일종의 중압감이 밀려왔다. 그러다니 여유가 없어지고 자꾸 시계를 보면서 종점역에 도착하는 시간을 의식했다. 기차는 오후6시가 지나서 Worcester역을 지났는데 여기부터 산맥이 보이지 않았다. 오후 1시부터 산림지역에 들어섰는데 오후 6시경까지 줄곧 산림지역을 기차가 달렸으니 동부의 Apparachian산맥도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도 8시 직전에 Framingham역에 도착하기까지 평야지역에도 수풀이 울창하여 외관으로는 산림지역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Framingham역을 지나면서부터 기차는 보스턴 외곽에 들어선 것 같았다. 오후 8시40분에 기차는 예정시간보다 약 30분 앞당겨 보스턴 남부역에 도착했다.  25일 오전에 캘리포니아의 Emeryville역을 출발하여 30일 밤에 보스턴에 토착하기까지 6일간의 시간이 걸렸고 기차를 탄 시간만 정확하게 76시간이 된다. 정말 멀고도 먼 여정을 달려왔다. 매일 매일 보는 풍경이 새 것이니 지치는 줄 모르고 그런 풍경을 보면서 달려왔다. 여정을 마치고나니 미국에 대한 자신감이 들었다. 미국의 서부부터 중부, 동부까지 대충 봤으니 이제는 미국의 어디에 가도 자신있게 다닐 것 같고, 동아시아에 돌아가서도 미국 얘기하면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스턴남부역에서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연구를 하고 있는 같은 조선족 출신 김 만수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보스턴에 옮겨오면서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던 터에 조글로사이트에서 김 만수박사가 칼럼을 발표하던 일이 생각나서 연락처를 찾아서 메일 보냈더니 대뜸 전화를 해주고 보스턴에서 집찾는 일을 발벗고 도와나섰다. 덕분에 마음드는 집을 찾았고 김 만수박사가 기차역까지 마중해주었다. 미국의 한국인들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한국에서 미국에 이민 오는 경우 공항에서 마중한 사람이 어떤 직업인가에 따라 이민자의 직업이 결정된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중국에서 대학교를 마치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와서 하버드대에서 수년간 포스터닥을 하고 있는 김 만수박사가 기차역에서 나를 마중해주었으니 나도 보스턴에서 운수가 형통할 것 같아서 기뻤다.    이번에 기차로 미국횡단여행을 하면서 미국의 풍경가운데 동아시아와 현저히 다름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인즉 어디에 가도 담장이나 울타리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다. 도중의 어느 도시나 마을에서도, 기차역에서도 담장이나 울타리가 아주 드물었다. 대체 기차역은 개찰구도 없고 승객들이 제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드는 그런 구조였다. 미국의 도시에서 실지 생활해보아도 그런 점을 느끼는데 대체 개인 집은 담장도 없거니와 울타리조차 아주 적다. 대학교들도 담장을 보기 힘들고 정문이라는 개념도 별로 없다. 중국, 한국이나 조선, 일본을 가보면 담장이나 울타리가 없는 집이나 공공시설을 찾기 힘들다. 대체 벽돌이나 돌, 흙으로 담장을 두르거나 나무가지로 울타리를 치게 된다. 공공시설들도 그런 담장이나 울타리에 둘러쌓이고 정문이 꼭 있기 마련이다. 왜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역시 정착을 특색으로 하는 농경문화와 이동을 특색으로 하는 유목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현상이 아닐까?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몽골같은 유목민족사회에서는 사람사는 건물에는 담장이나 울타리를 보기 힘들다. 담장이나 울타리문화의 극치가 바로 중국의 만리장성이 아닐까?  동아시아의 사회에서는 현재도 사람들의 관념속에 개인집은 울타리 정도는 있어야 안정감이 있고 아담지다는 느낌이 든다. 완전히 울타리마저 없앤다면 허전한 감이 드는 것이 아닐까? 반면 미국에서는 개인집이 너무 담장이나 울타리로 둘러쌓이면 오히려 답답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버드대의 도서관과 도토리나무 보스턴에 도착한 다음 날,  즉 7월31일에 하버드대학교 캠퍼스를 구경나갔다. 내가 버클리에서 멀고 먼 여정을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온 최종목적지가 바로 여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먼저 캠퍼스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하버드대학교 캠퍼스에서 제일 가까운 역인 하버드광장역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붐비고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보스턴지역에 종합대학, 단과대학 합쳐서 60개가 넘어되고 그 때문에 인구중에 젊은층이 특히 많다고 한다. 역에서 나가니 하버드대학교 캠퍼스가 바로 그 옆이었다. 사람들이 보통 찾아가는 하버드대학교 캠퍼스는 Harvard Yard라고 불리우는 하버드대내에서도 제일 오래된 자그마한 마당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벽돌로 탄탄하게 지어진 붉은 색 건물들이 이 마당을 둘러싸고 마당안에는 넓은 잔디밭과 오래된 수목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그 이상 더 특별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천하의 하버드대 캠퍼스가 결국 이런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지 처음부터 관광지를 생각하여 캠퍼스를 만든 것이 아닐테지 하고 이해가 갔다. 놀라운 것은 하버드대 캠퍼스에 관광객이 거의 넘치다 싶이 하는 것이었다. 단체관광객들은 길게 줄을 지어서 가이드를 따라다니고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온 관광객도 아주 많았다. 관광객의 얼굴들을 보면 보통의 미국인이나 서양인들이 많았지만 아시아인들도 꽤 많았다. 얼굴을 잘 살펴보고 대화를 들어보면 중국대륙, 대만, 홍콩, 한국, 인도인들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일본인이 적었다. 아시아인들은 가족끼리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좋은 자극받게 하기위하여 찾아오는 것 같았다. 하버드대 캠퍼스에서도 교육열이 높은 아시아인들의 모습이 그래로 드러난다. 중국인, 한국인, 인도인 세계에서 교육열이 제일 높은 민족들이 하버드대 캠퍼스를 제일 찾는 것 같았다. 과연 말로만 많이 듣던 하버드대였다. 내가 1년간 체류하던 UC 버클리도 미국의 명문대학교이고 연구분야에서는 국제적인 평가가 대단히 높은 대학교이다. UC 버클리 캠퍼스도 아주 아름답고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구경하러 많이 찾아온다. 그런데 하버드대 캠퍼스는 단지 학생들만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부모, 소문만 듣고오는 일반 관광객들로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고, 마치도 학력숭배의 성지를 찾아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일등이 되라고 하고, 일등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의 의식속에도 이런 일등지상주의, 또는 일등콤플렉스가 있었기에 하버드대까지 찾아온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일등만 바라보는 것이 과연 옳은 지 하는 회의감이 들고 일등만 찾아가는 모습이 좀 안되기도 했지만 아시아에서 온 젊은이들이 하버드대 캠퍼스에서 동경과 의욕의 눈빛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일등주의도 하나의 좋은 자극과 발전의 동력이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은 하버드대를 찾아보고 이 대학교의 외관상의 다른 점이 두가지가 느껴졌다. 캠퍼스지도를 보면 도서관이 아주 많다. 하버드대 전체에 90개 이상의 도서관이 있다하는데 대학교에 도서관이 이렇게 많은 대학을 나도 처음 본다. 총장서가 1530만책이라 하고 세계에서도 네번째로 장서량이 많다고 한다. 물론 대학교의 장서량치고는 세계 제1위는 의심할 바가 없다. 역시 책이 많은 대학교가 좋은 대학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버드대학교에서 주로 공부하게 될 얜칭도서관은 동아시아전문도서관인데 이 도서관을 잘 이용하면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어느 나라에 있기보다 동아시아연구를 하기 쉽다고 한다. 나도 그후에 얜칭도서관에 자주 가봤는데 웬간한 대학교의 중앙도서관보다 크고 동아시아의 도서들이 정말 많이 들어있는데다 귀중도서도 많았다. 그래서 동아시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 도서관을 선호한다. 이만큼 대학교의 진정한 힘은 우선은 책에서 나오는 법이다.   또 하나 하버드대 켐퍼스에 많은 것이 떡갈나무이다. 수령 수백년이 되는 떡갈나무가 여기저기 서있는데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거기서 와르르 떨어져 내린다. 떡갈나무는 보스턴 지역의 산야에 제일 많은 나무 같고 도시의 가로수도 떡갈나무가 제일 많다. 떡갈나무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어떤 인상일가? 보통은 도토리나무라고 불리우는데 산림속의 어디에도 제일 흔하게 보이는 나무이다. 나무가 수질이 튼튼하고 도토리 열매를 많이 맺고 땔나무로서 잘 사용되는데 사람들은 보통 관상수목으로서는 누구도 도토리나무를  떠올리지 않는다. 너무 흔하게 보아서 그럴까? 아니면 외관이 수수해서 일까? 아무튼 동아시아에서는 도토리나무가 시내의 가로수가 되거나 대학교 캠퍼스를 장식하는 관상수목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런 도토리나무를 하버드대에서 많이 보게 되니 남다른 감개가 떠올랐다.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일본의 문호 나츠메 소세키가 일찍히 지적하다싶이 내발적인 것이 아니고 외발적인 요소, 서구의 문명적인 충격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 때문에 근대화과정은 실질적으로 서구화의 과정이었고 그런 과정에서 오래동안 서구적인 것이 숭배되고 토착적인 것이 경시되었다. 오늘의 현실에서도 동아시아의 학문연구의 현주소, 특히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분야를 보면 서양에서 일어나는 학문의 유행을 따라다니기에 급하고 독자적인 학문체계가 잘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버드대의 캠퍼스에서 자라는 토착적인 도토리나무를 바라보면서 내발적인 발전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드대도 영국의 명문대학교들을 따라만 다녔다면 오늘의 하버드대의 명성이 있었겠는가?  보스턴의 자연속에 제일 많이 자라고 있고, 그런 토착수종을 대학교 캠퍼스의 여기저기 심어놓은, 또는 원래 있던 그대로 자라게 하는 하버드의 모습에 이런 것이 하버드대의 명성을 뒤받침하는 진정한 동력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토리나무는 분명 튼튼하고 허식이 없고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이다.                          (2010년9월9일, 미국횡단기차여행기 이상마침)      
2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3) 댓글:  조회:3927  추천:40  2010-09-0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3)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3)   중부의 곡창지대   7월27일 오전 6시반경에 기차에서 깨어나서 차창밖을 내다보니 양측에 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강냉이밭과 콩밭이 펼쳐지고 가끔 가다가 마을과 도시, 곡물가공소가 보인다. 서부에서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중부의 풍경이 파노라처럼 펼쳐졌다. 서부와 중부사이에는 시차도 2시간이나 났다. 나는 기차를 타고 미국 중부의 풍경을 직접 보기전에는 중부지역도 건조하고 땅이 메마른 가운데 강냉이나 밀같은 곡물을 재배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지 제 눈으로 본 풍경은 상상해보던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완전히 녹색으로 뒤덮인 대평원이었다. 실은 전날 저녁에 도착한 콜로라도 주의 주도 Denver를 지나면서부터 Great Plains라고 불리우는 미국 최대의 대평원지대인데 밤중에 지나다니 그 사이 기차가 통과한 콜로라도주와Nebraska주의 대평원은 거의다 보지 못했다. 아침에 깨어나서 처음 본 중부 대평야의 풍경은Nebraska의 주도인 Lincoln을 지난 직후인 것 같았다. 오전 7시반경에 Nebraska주의 최대의 도시 Omaha에 기차가 도착하였다. 인구 40만 정도된다는 Omaha시는 내가 중부에서 처음 본 큰 도시였는데 벽돌건물이 많은 것이 서부지역의 도시들과 외관이 달랐다. 서부지역의 도시들에서는 벽돌로 지은 건물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오전  10시경에 아이오와주 경내에 있는 Creston이라는 역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부터 주가 바뀌어 아이오아주 경내를 기차가 달리고 있다. 창밖의 풍경은 아침에 일어나서 본 것 같이 대평야에 줄곧 강냉이와 콩밭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고 그런 밭들사이에 수목이 우거지고 가끔 자그마한 구릉이나 소택지가 보이며 또 간간히 마을과 도시, 목장이 나타난다. 말로 이루 다 형언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대곡창지대이었다. 오후 1시경에 큰 강이 나타나고 소택지가 많이 보였는데 Mississippi강 지류같았다. 3시경에 아이오와주의 Burlington역을 지나자 아주 큰 강이 나타나고 기차가 철교로 강을 통과하였다. 지도를 보면Mississippi강이 틀림없었다. 한여름의 우기여서 그런지 강물이 많이 불어나 제방뚝 정상까지 물이 거의 차 올랐다. 미국 중부의 곡창지대는 바로 Mississippi강이나 Missouri강 같은 큰 강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 같다. 대평야에 습윤한 기후, 그리고 수원이 보장되기에 곡창지대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기차는 오후 3시40분경에 일리노이주의 Galesburg역에 도착했다. 이 역에 도착하기 직전부터 기차가 일리노이주 경내를 달리고 있었다. 일리노이주에 들어서도 가도가도 끝없는 대평야이고 곡창지대가 줄곧 이어졌다. 오후 6시20분경에 일리노이주의 Naperville라는 역을 지나면서부터 시카고의 도시권에 들어서 밭들이 보이지 않고 시카고 외곽의 도시들이 이어졌다. 오후 7시 직전에 끊내 종점역인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기차가 예정시간보다 약 한시간 반이나 늦게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25일 오전 10시경에 캘리포니아의 Emeryville역을 출발하여 27일 저녁에 시카고에 도착하기까지 약 53시간이 걸렸다. 26일 저녁 9기경에 콜로라도주의 주도 Denver를 통과하여서부터 종점인 시카고까지  중부의 대평야를 기차가 달린 시간을 계산해보니  약  22시간이었다. 대단히 큰 평야이고 거기가 거의다 곡창지대이니 미국 농업의 저력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내가 이번 기차로 미국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제일 인상이 남은 구간도 중부의 대평야이다. 가도가도 끊없이 강냉이와 콩밭이 보이고 기타작물이나 목초지가 보였다. 내가 특히 중국 연변의 농촌출신이기에 이런 곡창지대에 관심이 컸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식량문제는 인류의 제일 중요한 관심거리이고 이만한 거대한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저력을 장래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2006년 7월에 할빈에서 장춘까지 차로 달리면서 동북대평야를 본적이 있는데 그 때도 가는데마다 강냉이밭이었다. 미국 중부지역의 자연환경이나 풍경이 그 때 본 중국 동북지역과 비슷했다. 자세히 보면 미국 중부지역이 습윤하고 수원이 더 풍부한 것 같고, 중국보다 인구밀도가 적으니 대평야가 더 유족해보인다. 대평야를 지나면서 보니 이 지역 농촌의 풍요로움이 눈에 띄었다. 어디가도 마을들이 녹음으로 둘러쌓이고 농민들이 여유있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시카고대학방문 7월28일, 하루 동안 시카고대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내가 작년에 UC 버클리의 동아시아연구소에 방문학자로 오는 과정에서 추천을 해주신 시카고대학교 최 경희교수 (한국문학전공) 을 만나보고, 겸사하여 시카고대학교를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시카고대학교는 전세계 대학평가에서도 항상 7위정도에 들어가는 세계적인 명문대학교이니 시카고를 거친던 김에 꼭 들러보고 싶었다. 시카고대학교 출신중에서 노벨상 받은 사람만도  80여명 이라 하고 경제학분야에서는 항상 세계1위로 평가받고 있다. 28일 오전, 시카고시내의 숙박한 호텔을 나와 전차를 타고 시카고대학교에 찾아가서  최경희교수를 반갑게 만나고, 최교수가 대학 구내의 지하에 있는 미로처럼 복잡하고 큰 서점을 안내해주면서 이 서점이 시카고대학교의 명물중의 하나라고 설명해주었다. 역시 대학교와 책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대체 큰 대학교들은 다 자체의 서점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시카고대학교의 동양학연구소 부설박물관을 안내해주었는데 주로 이집트, 중동지 역의 문물이 소장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대학교박물관인데도 미이라가 7구나 전시되어 있었다. 시카고대학교는 이집트, 중동의 고대사 연구에서  세계적인 선도적인 지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교회관에서 최교수의 주선으로 중국출신의 교수, 미국인 중국학 교수와 점심을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약간한 학문적인 대화를 영어, 중국어,한국어를 섞어가면서 나누었다. 오후에는 시카고대학교 캠퍼스를 구경하였다. 시카고시내의 남부에 위치한  캠퍼스는 기복이 없는 평평한 대지위에 있었는데 건물들이 아주 멋지고 건물들 사이에는 수목이 우거지고 캠퍼스전체가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주요건물들은 19세기 후기에 지어졌는데 서양 중세의 고딕건축양식을 복고풍으로 지은 Gotic Revival 건물이 많았다. 이런 건물들은 벽을 석회암으로 짓고 조각물이 많이 달려있으며 지붕도 뾰족하게 치솟아 전체적으로 장중한 감을 준다. 영국의 옥스포드대학교, 켐브리지대학교의 건물양식을 본받아 지은 것이라 하는데  내가 서부의 대학교 캠퍼스들에서 거의 보지 못하던  풍경이었다. 역시 서부지역은 미국에서도 좀 특이한 지역이고 중부에 들어서니 시내건물도, 대학교 건물도 여기가 서양같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미국의 도시들은 일반적으로 그리 잘 정돈된 것이 아니고 어지러울 때도 있는데 대학교캠퍼스들은 완전히 별다른 세계이다. 보통 어디나 잘 정돈되고 공원같이 깨끗하다. 오후에 캠퍼스를 구경하고 시간이 남아서 도서관에 들러 장서들을 구경하고 몇시간 열람실에서 공부를 했다. 주로 동야학에 관계되는 장서들을 둘러봤는데  장서가 많은 것도 놀랍거니와 동양학 도서들은 다 한 곳에  모아놓고 있어 책 찾고 보는데 아주 편리하다. 미국의 도서관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의 책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동양학도서관이 있거나 전문도서관이 없어도 보통 한 곳에 모아놓는다. 때문에 미국의 명문대학교에 오면 오히려 중국,한국, 일본보다 동양학 도서들을 찾아보는데 더 편리할 때가 많다.  동아시아의 대학교들에서는 동양학에 관한 책들을 한 곳에 모아놓지 않다니 책 찾는데 품이 많이 든다. 저녁에는 최교수의 초청으로 한국 연세대학교에서 방문연구 온 연구원과 같이 최교수의 자택을 방문하여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재미있게 나누었다.   시카고시내구경 29일에는 낮에 혼자서 시카고시내 구경을 하였다. 수선 유람선을 타고 시카고 시내를 흐르는 강과 Michigan호 관광을 하였다. 시카고 시내는 가까이에서 보면 복잡하고 비좁아 보이는데 유람선을 타고 Michigan호에서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멋지다. 시카고는 세계적으로 고층건물이 많은 도시, 그래서 고층건물의 갤러리라고도 불리우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도시모습이 아름답고 고층건물들이 한데 어울러져 이루는 건축라인이 종합예술품같기도 하다. Michigan호는 호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커서 끝이 거의 안보이고 파도가 바다처럼 크게 일어난다. 시카고주변에 있는 5대호의 면적만도 미국의 주 두개 정도의 크기에 맞먹는 것 같다. 유람선 여행을 마치고나서 이번에는 시카고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Willis Tower를 구경하였다. 이 건물의 높이는 442m (첨단부분까지 합치면527.3m) 이고 한때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라 불리웠다 하는데 현재는 초고층 건물이 하도 많이 지어지니 세계최고층 순위에서 많이 밀린 것 같다. 그래도 전망대에 올라서니 시카고 시내만이 아니라 중부지역의 대평야가 멀리까지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시카고 시내구경으로 마지막에 들른 것이 시카고미술관이었다. 미국의3대 미술관중의 하나로 꼽히는 미술관인만큼 볼만한 전시품이 많았다. 중국의 청동기나 도자기중 일부는 중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국보급의 제품이 진렬되어 있었다. 이집트나 중동지역의 문물들도 볼만했다. 특히 관람객이 많아 모이고 나도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이 유럽근대미술 전시실이었다. 말로 많이 들어왔고 간혹 일본에서 유럽미술전시회에서 일부작품을 본적이 있는데 시카고미술관에서는 이런  유럽의 근대미술작품을 한번에 대량으로 볼수 있었다. 고흐의 작품도 여러 폭 있고, 프랑스의 인상파 작품은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보는데 많은 시간과 정력이 필요하였다. 그 외에도 미국현대미술전시관에는 대량의 현대미술작품이 있어 미국 현대미술의 흐름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왜 이름있는 도시들은 대체 유명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는가? 결국 이런 미술관들이 그런 도시의 정신적인 GNP를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카고 시내를 하루 둘러보면서 관찰하니 전철, 지하철 같은 도시 인프라기반이 노후해보였다. 미국의 전성기에는 다 좋아보였겠으나 이제는 동아시아 나라들의 발전이 너무나 빠르니 도시만 보면 미국의 우월한 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급한 사람은 그래서 이제 미국은 정말 볼 것이 없다는 글도 쓸 수 있는데 기차로 미국을 횡단해보면서 풍요로운 대지를 많이 본 나에게는 미국의 저력은 그런 도시만이 아니라 드넓은 대지속에서 찾아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2010년9월8일)
1    김광림 프로필 댓글:  조회:4480  추천:80  2009-11-22
김광림 일본 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중국연변출신. 중국에서 1986년에 동북사범대학 외국어학부 일본어전공을 졸업하고 연변대학교에서 2년간 일본어강사로 있다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 일본 도쿄대학교 비교문학비교문화전공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1998년부터  일본의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  2000년4월부터 니가타산업대학교(Niigata Sangyo University) 에서 조교수, 교수로 재직. 석사학위논문: 고려신사연구 박사학위논문: 일선동조론-그 실체와 역사적 전개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외국인연구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하고,  2009년 9월부터 2년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UC버클리) 동아시아연구소,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스쿨(SOAS)에서 방문학자로 체류. 주요 연구과제: 동아시아 문화사, 동아시아의  성씨・족보에 대한 연구. 이상의 연구과제외에도 세계속의 코리언의 생존전력과 문화발전에 관심이 크고, 한류, 조선족의 만주로의 이민사, 조선족의 일본, 미국 등 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하여 논문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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