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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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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    하늘은 시간의 진리가 투사되는 진실의 장소이다... 댓글:  조회:3151  추천:0  2017-10-10
시, 사산된 꿈과 환멸의 수식 사이에 흐르는 죽음의 광시곡                                                             김석준 문학평론가   뜬금없이 광주와 아우슈비츠를 노래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시인이 보고 말하고 싶은 언어의 실재는 무엇이며 왜 환상의 언어를 죽음의 언어로 치환시켜 인간학적 실재를 응시하는가?  함기석의 시적 도정을 살펴볼 때, 죽음에 관한 몽상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이입 같은데, 그것은 어떤 언어의 운명인가? 여여한 시간 앞에 인간의 무상함을 느꼈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즉 죽음의 “익사체”(「오르간」중)에 심혼이 포획되었기 때문인가?  분명 함기석의 시말운동은 이제까지 진행된 것과는 전혀 다른 시적 차원으로 이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말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인가?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진리를 수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요원하다. 늘 말할 수 없는 잔여가 공리 앞에 매개되어 진리의 수식을 혼돈으로 이끈다. “말해질 수 없는 말들의 저 흰 거품”(「수직선 = 수평선」중)들이 진실을 포획하고 있는 한, 혹은 모든 수식이 “저승 시(市)”(「유령 슈뢰딩거」중)에서 소거되어 인간학을 불능으로 표기하는 한, 말―세계는 늘 분열의 표상만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게 된다. 따라서 꿈이 사산되고, 환상의 공식에 죽음이 대입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말들은 불길하고 낯설었으며, 꿈이 완벽하게 절멸한 곳에 언어를 위치시키게 된다. 특히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꿈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글픈 악령”(「광주에서」중)에 사로잡힌 환멸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죽음의 광시곡이 시말 내부에 산종된 채, 불길하게 언어의 횡단면을 종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수식은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되는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죽음을 수식의 연산작용으로 표현하고 증명할 방법은 존재하는가?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죽은 빛”, 즉 “빛의 사체”(「화가 난다」중) 어디쯤에서 발화되는 불길한 노래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의 본질과 상면하는 인간학적 운명 그 자체를 지시하는 존재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표현이 사산되고, 시간의 증명은 완벽하게 유산된다. 왜냐하면 너―나를 포획하는 시간의 정체가 “생의 늑골”을 지나 “0시의 바깥 세계”(「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중)로 탈주하는 주검의 노래만이 시의 진실을 정확하게 지시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으로 굴절되고, 공간은 시간의 표현법을 완수하지만, 인간학은 “무의 미궁”(「화가 난다」중)으로 침몰하여 “침묵”(「밤의 실내악」중)의 공간으로 사라지게 된다. “유산된 아기”의 “환청”(「종이비행기」중)이 “허공의 길”(「즉은 새를 위한 첼로 조곡」중) 위에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죽음의 광시곡으로 탄주하기에 이른다. 주검들이 널브러진 “고통의 땅”(「괴델 플라워」중) 위에 레퀴엠이 울려 퍼진다. 물론 시간의 흔적 전체가 “주검의 연속체”(「괴델 플라워」중)로 자신의 수식을 증명하겠지만, 함기석이 바라본 언어의 운명은 그리 밝은 것이 되지 못한다. “서로의 아픈 꿈”(「백령도」중)이 시말에 침전되고, 치유될 수 없는 존재의 “깊은 상처”(「미스 모닝과의 아침 식사」중)가 언어로 발화된다. 어쩌면 시인이라는 숙명과 마주선 시살이는 “죽음이 다니는 전용 도로”(「얼굴」중)에서 만난 미지의 기호들을 수식으로 환원시키는 숭고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언어가 죽음을 포획하고, 죽음은 “몸속 더 깊은 우주”(「훌라후프 돌리는 여자」중)의 신비와 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노래하는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저녁의 비행운(飛行雲」중)은 어떤 운명의 시간인가? 물론 함기석의 그것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단 한 사람”(「단 한 사람」중)의 환멸의 세계상을 시말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따라서 언어의 심연에 “고통에 살다 백골”(「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중)로 탄화된 원혼들의 노래가 저며져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늘의 문체”(「허공의 장례」중)가 직조한 인간학적인 현실에 다름 아니다. 환상이 사라지고, 인간학적인 실재가 선명하게 부조된다. 하늘은 시간의 진리가 투사되는 진실의 장소이다. 물론 함기석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가 “언어와 죽음”(「코흐 해안」중)이 서로 맞물려 있는 존재의 주름을 미지의 기호로 응결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바로 “태고의 시간”(「조약돌」중)으로 재귀하는 존재의 운명을 반복의 형식으로 술회한 것이라 하겠다. 흑조가 저 하늘을 난다. “아내의 아픈 속살”에 기입된 “울분”(「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중)이 매만져지고, 또 “생의 가파른 칼바위 능선”(「튜브」중)에 기입된 “차갑고 아픈 시”(「이타사(利他寺) 입구」중)의 운명선이 감지된다. 역시 흑조가 시간을 타고 온 세상을 배회한다. 말하자면 함기석이 형상화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언젠가 나도 가야 할 저 연기의 길”(「모래가 쏟아지는 하늘」중)을 언어의 수식으로 코드화한 진리의 전언임에 틀림없다. 시간의 저편으로 흑조가 사라진다. 불길하고 흉흉하다.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 소리 「부음(訃音)」일부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π」일부   사람의 속말은 자신조차 볼 수 없는 자기 생의 해구로 쓸쓸히 침몰하는 배다 관 뚜껑을 열어 마지막으로 흰 옷을 입고 잠든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듯 바람이 물과 빛으로 쓰는 모래의 백색유서를 읽고 있다 「코흐 해안」일부   누가 또 이유도 모른 채 참살된다. 「낯선 실내악」일부   빛과 어둠 사이에서, 말의 여백과 공포 사이에서 나의 육체는 파동이 되어 가고 「장지(葬地)에서」   생은 무엇이고, 또 죽음은 어떤 사태인가? 우리는 왜 언어의 순수한 도정을 생이 아닌 것으로 응결시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근원을 탐문하는가? 특히 함기석의 그것은 “비문”과 “법문” 사이를 배회하는 “우울한 짐승”을 알레고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론”과학(혹은 수학)과 종교 사이에서 생성된 죽음의 소리이다. 여기저기서 “부음(訃音)”이 들려온다. 이 세계는 타나토스로 향하는 비가역적인 공간이다. 말은 “성기”의 에로틱한 반복적인 운동이고, 진리는 미필적 고의로 가득 찬 “사고의 살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직조하는 저 반복의 운동만이 인간학을 증명하는 진실의 수식이자, 나―너를 포획하는 존재의 “파동”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세계의 표현법은 힐베르트나 슈뢰딩거 그리고 괴델이 만든 수학적 수식이 아니라, “발발이 π”에 응고된 확정 불가능한 잔여의 운동임에 틀림없다.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말하지 못한 채 “참살”되어 죽음에 포획된다. 까닭은 시간의 운동 전체가 “침몰하는 배”처럼 “백색유서”만을 남겨놓은 채, 생 전체를 “공중의 묘역”으로 가볍게 소거시켜 무(無)만이 진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난폭한 운동이 죽음의 “빈 배”를 끌고 와 레테의 강 언덕 어디쯤에 생 전체를 부려놓게 된다. 마치 “지름이 0보다 작은 마이너스 원”으로 생을 증명하는 미궁의 방식처럼, 인간학은 그저 아스라한 “빛의 환각”으로 소진되는 소멸의 운동일 따름이다. “마지막 숨”소리가 온 천하를 가득 채운다. “검은 새”가 “빛과 어둠” 사이를 가르며 날아다닌다. 불길하다. 음험하다. 생은 이미 선험적으로 불길한 징후들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함기석이 도달한 언어의 실재이다. “떠도는 꽃, 말, 눈동자”에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회한의 “눈물”이 서린다. 그렇다면 대저 어떤 생을 살아낼 때, 나라는 “( )”를 풍요롭게 채울 수 있는가? 생의 과정 전체가 무로 수렴한다고 할 때, 인간은 채우는 자가 아니라, 적멸에 순응하는 무위의 산책자가 아닌가? 오늘도 인간은 미지의 죽음에 포획된 채, 다만 “왜 과학도 종교도 시도 인간의 뿌리를 구원하진 못할까”(「살모사 방정식」중)라는 존재론적 회의만을 반복할 따름이다. “차고 흰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모골이 송연해진다. 시는 불길하고 말은 차갑다. 불연 듯 죽음이 온 세계를 포획하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뇌리를 스친다. 불길하고 낯설었으며, 마침내 “피를 연주”하는 죽음의 광시곡이 탄주된다. 점점 “육체”는 하나의 “파동”으로 변해 물질과 생명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만약 생의 변주곡이 그와 같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실 함기석의 시적 도정을 살펴볼 때, 죽음에의 탐구는 아주 낯선 것이거나 의외의 결과물인데, 그것은 어떤 의도를 함의하고 있는가? 분명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의 주조음이 힐베르트나 고양이가 아닌 제로에 있다 할 때, 제로가 도달하는 의미의 체계는 무엇인가? 여기저기서 “탄식과 울음”이 들려온다. 왜냐하면 생의 곡면에 위에 기입된 그 모든 변주곡들은 측량이 “불가해한 도형의 넓이”처럼 삶 전체를 아포리아에 구속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은 힐베르트와 고양이 사이에서 파생되는 미묘한 의미의 체계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포획되지 않은 제로와 영원히 해명이 불가능한 발발이π 사이에서 생성되는 미완의 기획인지 모른다. 그러나 생에의 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아니 역으로 모든 진실은 힐베르트와 고양이 알레고리에 침전된 그 무엇이 아니라, 제로와 발발이π에 들러붙어 생 전체를 미궁에 빠트리는 불온한 기획이다. 물론 여전히 생에의 운동이 “폐곡선” 위에서 표현되어 인간학 전체를 불모의 지대로 이끌어가겠지만, 따라서 생의 표현법이 고통과 비문 사이에서 자신의 수식을 완성해 가겠지만, 그것은 “먼지와 거품”처럼 허망한 것이거나 혹은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조야한 구성물에 다름 아니다. 생은 침몰의 운동이다. 생은 상승이 아닌 몰락의 운명이다.   정오다 까마득한 지평에서 탄환이 날아온다   정오다 바람은 없다 구름도 태양도 없다   정오다 도시는 없다 인간도 언어도 없다   정오다 정오는 정오에 정오로 영원히 사살된다   정오다 까마득한 허공에 흑조가 떨어진다 「흑조」전문   “비린 꿈 비린 울음”(「여름밤의 푸가」중)이 삶의 정오에 매개된다. “담배 ”을 피고 있는 “죽은 마야코프스키”(「리치빌라 404호」중)의 초상도 정오의 하늘 위를 우러르고 있다. 정오에 레퀴엠이 울린다. 정오는 죽음의 공간이다. 정오는 반어이자 역설의 시간이다. 말하자면 함기석에게 정오는 생의 역동성과 공명하는 초인의 시간이 아니다. 니체에게 정오가 진리를 교설하는 대망의 시간이라면, 함기석의 그것은 죽음을 욕망하는 소멸의 시간이다. 네크로필리아가 선호되고, “지옥 놀이”(「이륙」중)가 전개된다. 마치 “미친 시계”와 “죽은 시계”(「장기 놀이」중) 사이에 파시즘이 있고 아우슈비츠가 있었던 역사의 시간처럼, 시인에게 정오의 시간은 “생의 마지막 곡선”(「살모사 방정식」중) 위를 질주하는 “증발”(「無」중)의 시간이다. “인간도 언어도” 사라진다. 아울러 “태양”도 비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흑조조차 추락하여 더 이상 날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정오는 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상태이거나 모든 에너지가 완벽하게 소진 고갈된 무의 상태인지도 모른다. 아니 역으로 정오는 생성의 과정인 동시에 소멸의 순간이거나, 인간학적 진실이 응고된 가장 강렬한 죽음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흑조의 추락은 불길한 동시에 상서롭고, 한 세계의 몰락을 의미하는 동시에 신세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까닭은 인간에게 “내생”(「마지막 해변」중)이라는 마물이 시간의 곡면 위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생의 시간은 늘 이중성 위에 매개된 모순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네 시에 네가 없고 네 시에 사라진 빈 하늘 가득 아름답고 슬픈 노을이 번진다 「첫 데이트」일부   약지를 만지며 창가에서 캄캄한 밤하늘 통장을 바라본다 먹구름 뒤에서 천천히 이마를 내미는 달 잔고 제로를 가리키며 웃는 저 둥근 얼굴 「찡찡공주가 잠든 봄밤」일부   꽃은 피가 낭자한 식물의 광대뼈야 화인(火印)이야 유서야 죽고 나서야 난 알았어 하지만 넌 이 땅속의 메아리조차 듣지 못하겠지 디디, 미안해 이번 생일엔 갈 수가 없어 「할머니의 안부」일부   불안하게 반대편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검은 눈이 내리는 들판이 보인다 불길에 휩싸인 집들도 보인다 들판 위 공중으로 수많은 레일들이 깔려 있고 열차가 달린다 나를 태운 무수한 열차들이 달린다 폭풍 속으로 폭풍 속으로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일부   “육체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영혼의 모든 상처”(「약속」중)가 아물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죽음의 손가락”이 “배후의 배후”(「오래오래 레스토랑」중)를 지시할 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수식이나 정리는 삶을 증명하고, 죽음을 증거하는 최적의 장소인가? “관측 가능한 대상”(「함박눈 함수」중)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인간학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함기석은 스스로를 괄호로 간주하면서, 진실과 “거짓말”(「뱀장어」중) 사이의 관계를 심문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참된 과제인가? 더 나아가 이 세계를 표상하는 다양한 수식들은 그것의 합당한 근거를 완벽하게 제시하여 이 세계가 진리의 구현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미망에 포획된다. 사라진다. 죽음이 “아름답고 슬픈/노을”처럼 온 세상을 뒤덮는다. 세 시와 네 시 사이에서 설레던 “첫 테이트”의 안온한 몽상도, 혹은 향기로운 “라일락의 농담”에 화기애애했던 추억도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포획되어 소스라치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특히 함기석의 그것은 사라져 소멸하는 운명의 자리에 기입된 인간학적인 음영을 죽음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괴델이고 힐베르트이자, 존재가 형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수식이다. “찡찡공주”라고 명명되는 딸아이의 잠든 모습을 무량하게 바라다본다. 도대체 이 세계의 진실을 포획하고 있는 죽음의 정체는 무엇이고, 통장 “잔고 제로”에 침전된 “아내의 눈물”은 어떤 인간학적 진실을 지시하는가? 대저 죽음과 “지폐”와 환한 “봄밤” 사이에 매개된 저 존재의 알 수 없는 “깊이”는 오렌지 기하학 너머로 비약하여 우주의 심연을 응시할 수 있는가? 이 세계의 진실은 밝고 투명한 “아이의 웃음”에 투사된 희망의 체계인 동시에 “얼굴 잃은 해바라기”의 절망인데, 그것이 바로 시간에 기입된 시의 얼굴이다. 이 세계는 이중적이다. 이 세계는 역설의 표상이다. 힐베르트의 얼굴도, 모든 존재를 비문으로 이끄는 발바리π의 역동적인 운동도 미지의 제로에 접근하는 죽음의 통로이다. 마치 “할머니의 안부”가 생이 아닌 저승의 세계에서 발화되는 환상의 언어인 것처럼,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어둠”의 “집”으로 명명되는 “태반”에 응고된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는 비릿한 숙명의 노래라 하겠다. “폭풍”이 몰아치고, 마침내 죽음의 길에 승선하게 된다. 까닭은 인간에게 허여된 시간이 소진되어 완벽하게 제로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길은 외길이고 질주는 필연이다. 마치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미궁으로 소거되는 시간의 운동을 의미하듯이, 함기석의 그것은 “일곱의 아이”와 “아흔 살의 나” 사이에서 파동치는 시간의 문양을 시말 속에 응고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나를 바라보는 나”는 어떤 나인가? 대저 나는 어떤 운명을 살아낸 시간의 타자인가? 도대체 나는 어떤 시간의 단면도를 통과하는 숙명의 열차인가? 무량하고, 쓸쓸하였으며, 너와 나 사이의 모든 구분이 사라진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시간의 함몰과 함께 나는 나인 동시에 나 아닌 것으로 물화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로와 발바리π에 응고된 존재의 비문이다. 우리는 그저 시간의 선상을 질주하다가 미망의 덫에 포획된 채 침몰하는 것으로 한 생을 증명하게 된다.   첫 장을 열면 광활한 설원이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검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하늘엔 무늬 잃은 기린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낮달 지상엔 무더운 눈보라   끝 장을 덮으면 끝없는 우주가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유성이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어떤 시집」전문   인간에게 의미라고 간주되었던 기호들이 백년 후에 무의미로 소거되어 사라진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과연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의미의 잔여를 도발하는 영원의 기호로 고양될 수 있는 작품집인가? “죽은 자들의 꿈이 얇게 저미어져 쌓인/시집”(「도미노」중)에 “검은 새”가 날 때, 그것은 어떤 인간학적 진실을 고지하는가? “말할 수 없는 말들의 울음”(「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중)이 온 천하를 가득 채운다. 까닭은 “아픈 기억”(「그녀의 뒤뜰」중)이 언어의 심연에 침전되었기 때문이다. 참회의 말들을 사색해야 하고, “참회의 시”(「마지막 해변」중)를 써야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함기석에게 시란 참회의 기록이다. 마치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성찰하며 반추했던 윤동주의 그것처럼, 시인도 시간의 안과 밖에 기입된 비문을 존재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심도 있게 측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함기석에게 시란 무엇인가? 꿈이 사산되고, 환멸의 광시곡이 인간학을 주재할 때, 도대체 시가 말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시집”이 백년 후에 사라지는 것들로 명명될 때, 시가 지시하는 말들은 의미의 전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라짐과 정전 사이에 어떤 시집이 위치할 때, 그것은 “우주 저편 본색(本色)의 우주로 귀소(歸巢)”(「흑조가(黑鳥歌)」중)하는 절대 언어인가? 순백으로 표상되었던 “아이의 영혼”(「잃어버린 편지」중)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말하자면 어떤 시집의 “첫 장”과 “끝 장” 사이엔 사라지는 것들만이 포획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에 묘파된 말의 형상이다. “광활한 설원” 위에 무만이 매개된다. 아니 힐베르트의 수식은 진리를 정확하게 지시하지 못한 진실의 저편으로 소거되는 운명의 전언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수식이 곧 삶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식으로 이 세계를 설명해낼 수 있는 개연성은 있겠지만, 그것으로 말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말―사태는 힐베르트나 괴델의 그것과 달리 반어나 역설로 진실을 지시하는 절대 언어이다. “무더운 눈보라”가 내린다. 말이 어그러진다. 이를테면 “무더운”과 “눈보라” 사이에 전혀 매개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끝없는 우주”가 만든 비문, 즉 새로운 시말문법이다. 秘文이 非文이 되고, 飛文이 되어, 마침내 碑文으로 소거된다. 말하자면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행위의 주체인 힐베르트와 고양이에 의해 포획된 의미를 시말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변항을 창조하는 제로에 기입된 흔적을 추적하는 죽음의 비문이다. 죽음이 말하고, 변항에 의해 의미가 유예된다. 파동 친다. 마치 어떤 시집의 구성물들이 수식과 물리력과 인간학의 혼합물이듯이, 함기석의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문자의 운명을 죽음의 구성물로 재현한 슬픈 존재의 언어라 하겠다.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 풀이 노트는 백야의 시다 사막이다 핏덩어리 의문부호고 계단으로 떨어져 나간 죽은 자의 목뼈다   제로의 자취를 찾는다 「제로와 푸리에」일부   시는 불길하고, 나의 존재론적 태도는 음험하다. 나는 “나는 새”인 동시에 제로이고, “죽은 낙타”이다. 나는 가역과 비가역 사이에 위치한 문제의 중심이다. 나는 아포리아다. 나는 “∞”인 동시에 “원형 거울”이다. 나는 “푸리에”, 즉 “곡선 방정식”에 표현된 죽음의 자취이다. 나는 “죽은 자들의 목뼈”이고, “의문부호”이다. 나는 나의 정체를 말할 수 없다. 나는 불완전의 표상이다. 힐베리트, 괴델, 슈뢰딩거의 “수식 기호”와 상관없이, 나는 이 세계의 표현법을 실천하는 “허공”이다. 나는 “제로의 자취”이다. 따라서 나는 늘 미궁에 휩싸인 채 존재의 흔적만을 촉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에 묘파된 언어의 진실이다. 따라서 온갖 수식으로 장식된 “풀이 노트”엔 시간의 흔적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인간학적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변환”된다. 모든 것이 비가역적인 “탄젠트곡선”으로 변환되어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망각된 주검”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미지에 사로잡힌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생이 아닌 곳에서 발화되는 존재의 목소리, 즉 죽음의 형식을 부조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설령 그 모든 것이 제로의 자취를 추적하는 무위의 덫인 것만은 분명하지만,따라서 “말과 존재, 빛과 어둠” 사이에 “무수한 피살자들”이 남긴 생에의 흔적들이 풀리지 않는 채 남아있지만, 그 풀리지 않는 아포리아만이 시말이 압박하고 포획해야만 하는 숙명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제로에 포획된 채, 시를 쓰며 ( )를 채워간다. 죽음의 수인으로 갇힌다. 시간이 사라진다. “백야의 시”엔 “눈먼 까마귀”만이 날아다니며 죽음의 노래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휘발”된다. 적멸에 이르러 공간이 시간과 함께 공멸하게 된다. 무만이 욕망된다. 무만이 노래된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들의 숙명이다.   김석준 출생 : 충남 아산 약력 :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시집) ,,, (평론집) 2011년 미네르바 작품상(평론)수상    
769    "시계초침이 거꾸로 돌고 돈다"... 댓글:  조회:2991  추천:0  2017-10-09
-당신    /함기석   잘못 펼치셨습니다 그냥 넘기세요 당신은 잘못된 페이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사건현장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사체가 흰 천에 덮여 있는 골목입니다 당신은 접근금지구역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라는 무한히 갈라지는 무한골 목 내부에 있습니다    북쪽으로 검은 모자와 시계들이 둥둥 떠다닙니다 남쪽에선 이빨이 썩은 코스모스들이 악취를 풍기며 웃고 있습니다 서쪽에 선 죽은 고양이들의 교미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동쪽에서 아기울음소릴 내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해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당신은 빨간 노끈으로 차단된 살인현장입니다 당신이 흘리는 피와 시간이 흰 천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침묵하는 미궁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목격하며 당신에 갇힙니다 당신 사체 옆의 당신 사체 옆의 당신 사체 옆의 무한 사체들   잘못 펼치셨습니다 당신은 썩어가는 페이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악취로 파리와 쥐 떼를 부르는 기이한 골목입니다 당신은 음모와 발톱이 자라는 사건현장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접근금지구역입니다 당신은 무한히 갈라지는 무한개의 폐곡선입니다 찢어버리세요   -광주에서/함기석-     창밖은 고양이 눈이고 백지가 피를 흘린다 백지 속에서 흰 스피커가 흰 피를 흘린다   보이지 않는 피 보이지 않는 소리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골목이고 골목의 전선들이고 계엄령이고   암호다 광장에서 혹한이 흐느끼는 소리 들린다 꿈은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라이터 불을 대자   한 방울 한 방울 발등에 떨어진다 누군가의 참살된 피 누군가의 눈동자에 낭자한 피   고양이 발을 가진 밤이 등뼈를 휘어 옛집 지붕으로 점프한다 나의 손가락은 계속 피를 흘린다 그걸로 쓴다 언 창에 입김을 불고 우리라고 쓰자 우리는 고름이 되어 흘러내린다   피 칠된 5월처럼 광주에서 광주(狂酒)를 마시고 악몽을 꾸는 촛대들, 이곳에서 산 자는 모두 서글픈 악령이고 지문 없는 손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총상에 불구가 된 금남로 다리를 본다 그러나 는 보지 못하고 는 말하지 못한다 밤새도록 죽은 너의 잠에서 흘러내린 피가 베개를 적시며 울뿐   묘비들이 난다 망각은 벼랑에서 흰 뼈를 드러내고도 죽지 않는 나무 돌의 핏줄 속으로 입 없는 자들의 웃음이 밀주처럼 번지고 누가 핀셋으로 고양이 눈을 확장시키고 있다   -開眼手術執刀錄-執刀 28/함기석-     이 시는 첫 문장부터 곰팡이가 피어 있다 청주시다 산남동 법원 정문에 곰팡이 핀 노부부가 목발을 짚고 서 있다 눈도 코도 입도 모두 곰팡이 핀 어휘들이다 허공을 떠도는 찬 눈발처럼 이 시는 상징도 은유도 없다 청주시다 이 시에서 나는 말의 폐 허의 유적지를 떠도는 먼지이고 제거된 마침표다 소송을 소송하고 심판을 심판할 수 없는 검은 입술이다 도로엔 찢어진 법 전이 뒹굴고 힘없는 날벌레들의 주검만 자동차 바퀴자국에 짓눌려 있다 찢어진 하늘에 꽃눈이 흩날리고 뱀처럼 바닥을 사는 자들의 메마른 몸과 침묵들, 누가 또 불길한 징역을 선고 받고 말을 잃는다 곰팡이 핀 내 시의 음부처럼, 법원 울타리 따라 검은 울음들이 노란 개나리 꽃빛으로 은폐되고 있다 노부부의 울음이 4월의 눈발처럼 흩날리는 도시다 이 시는 마지막 문장 까지 곰팡이로 덮여 있다   -부음(訃音)/함기석-     첫눈이다 생선장수 트럭이 지나간 복대놀이터 골목 유모차에 내리는 흰 사과 꽃이다   아기가 살짝 맨발로 디디면 사과 향, 차고 흰 웃음이 간질간질 발가락을 타고 얼굴로 올라와 팔랑팔랑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소리   오늘밤 그 소리 뒤뜰에 차곡차곡 쌓인다   -미스 모닝과의 아침식사/함기석-     모닝양은 매일 다른 방향에서 나의 집을 찾아와 늘 다른 자세로 앉아 수프를 먹는다 지금 현관엔 그녀의 노란 비옷이 걸려 있다 간밤 내내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어젠 어디서 잤어요? 내가 묻자 그녀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말없이 웃는다 나는 늘 그녀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한데 그녀는 잔잔한 물결처럼 미소만 짓는다   그녀가 수프그릇이 놓인 식탁에 앉을 때 이마를 가린 머리칼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깊은 상처가 나 있다 피는 멈추었지만 파인 자국이 또렷하다   왜 그래요? 나는 얼른 약상자를 가져와 하얀 솜에 빨간 소독약을 적셔 이마에 대어준다 식사를 하면서 가만가만 그녀의 눈을 본다 불안하게 떨고 있다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는 점점 초조해하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포도주스가 든 컵을 내 바지에 엎지른다 괜찮아요! 내가 화장지를 뽑아 바지를 닦는데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나는 얼른 일어나 현관으로 간다 그녀의 체취가 스민 하얀 수건을 뺨에 대고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첫 데이트/함기석-     네 시를 생각한다 세 시에 네 시는 약속시간이고 라일락의 농담이고 네 시는 톡 쏘지만 향기롭다   편의점을 지나 나무간판이 아름다운 죽집을 지나 네 시에 도착하기 위해 은행나무 길을 지나 커브를 돌아   너의 촉촉한 입술 너의 웃는 코 너의 눈썹, 그 웃는 방파제를 떠올리며 네 시에 도착한다 네 시의 카페 섬에 앉아 기다린다 섬 밖으로 사람들이 게처럼 분주히 지나다닌다 그러나 너는 없고 빈 하늘에 빈 파도만 바람에 일렁인다   네 시의 시계를 뒤로 돌리고 다시 네 시를 기다린다 새들은 공중에서 그네를 타며 허공과 놀고 손이 찬 공기가 어린 나무들의 뺨을 쓸고 지나간다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섬에 앉아 네 시를 생각한다 다섯 시에 여전히 너는 오지 않고 저녁이 혼자 걸어온다 네 시에 네가 없고 네 시에 사라진 빈 하늘 가득 아름답고 아픈 노을이 번진다   -살모사 방정식/함기석-     왜 나는 굽은 뱀의 육체에서 삼차방정식 곡선을 보는가      왜 나도 꼽추의 굽은 울음처럼 뱀인가 죽음은 내 심장에 정박한 U보트 손끝으로 빠져나와 끝없이 늘어나는 붉은 철로   지금 내 몸은 지진 중인 밤의 대륙붕 부터 갈라지고 있는 흑해 까지 균열하고 있는 해저 혀 뽑힌 독뱀이 죽어가며 생의 마지막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불가해한 추상화 그것은 돌고 돌며 원(O)을 그리는 사실화 그것은 꿈틀꿈틀 시간을 뭉개버리는 액션페인팅 뱀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뱀인가 1사분면과 2사분면에 뱀은 제 주검을 이차곡선으로 뉘어놓고 내 눈에 맹독을 퍼트린다   그 사이 3사분면에서 4사분면에서 죽은 뱀과 나를 향해 다가오는 또 다른 두 마리 뱀 그들은 원점 (0, 0)에서 만나 아담과 이브처럼 최초의 교미를 다시 시작한다 내가 죽은 뱀의 마지막 숨, 그 원의 자취방정식을 찾는 사이   독이 퍼지는 눈, 독이 퍼지는 세계 알 수 없다 갑자기 눈먼 자의 울음에 젖는 서녘하늘에서 붉은 사과가 우수수 떨어지고 흑해를 돌아 먼 우주를 돌아, 내 아픈 몸으로 귀환하는 뱀눈 달린 어휘들   굽은 육체에 남은 뱀의 원(原/圓/怨)이 식물의 구근보다 깊은 밤이다 왜 과학도 종교도 시도 인간의 뿌리를 구원하진 못할까 뱀 껍질처럼 메마른 이 땅, 땅의 찬 살갗에 뺨을 대고 누가 뱀처럼 울고 있다   왜 나는 삼차방정식 곡선에서 죽지 않는 뱀의 혼령을 보는가 왜 나의 시도 뱀의 굽은 등뼈처럼 슬픈 꼽추인가 눈 뽑힌 어린 독뱀이 울면서 도망치고 있다 내 눈에서 네 눈으로   -힐베르트 고양이 원(圓)과 발발이 π/함기석-     수학과 이교수를 따라 원과 발발이 π가 캠퍼스를 걷고 있다 연못 중앙엔 가시연꽃, 잉어들은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폐곡선놀이에 빠져있고 나무는 한쪽 발이 없는 불구의 컴퍼스여서 원은 누구의 고통도 측정하기 싫은 우울한 짐승이다   좀 빨리 걸어라 발발아, 나의 말은 지름이 점점 커져서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비문이 되고 있다 교수님 말은 비문도 법문도 아니에요 걸어 다니는 성기에요 코를 킁킁거리며 π는 이교수가 뱉는 말을 핥는다 원은 각(角)의 나라로 망명하고 싶다   발발아, 인간은 누구나 비문이다 너는 먼지와 거품이고 난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바퀴고 체인이다 연못의 눈동자에 담긴 구름이 무한히 확장되어 없어지고 원은 자기의 생을 사고의 살인에 허비하고 있다   고로쇠나무가 흘리는 수액은 고로쇠나무의 피고 사상이고 가설이고 수식이다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원은 자신을 구성한 같은 거리의 점들을 회의한다   교수님, 어떤 이론은 대못이에요 눈동자에 박힌 달이 대낮에 예수처럼 울고 있다 교수님, 보세요 못에 박혀 붉은 녹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세계 말라죽은 오동나무 밑엔 검은 돌이 우는 흰 그늘 원은 구르며 보이지 않는 발발이의 꼬리 끝을 응시한다   무한한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시계초침이 거꾸로 돌고 돈다 3바퀴 2바퀴 1바퀴 0바퀴 -1바퀴....... 연못 중앙엔 폭탄처럼 터진 가시연꽃, 잉어들은 수영복을 찢고 폐곡선을 찢고 까마득한 공중으로 헤엄쳐 오르고 원의 중심 0에서 죽은 새들이 분수처럼 난다   -훌라후프 돌리는 여자/함기석-     훌라후프 속으로 푸른 하늘이 빨려든다 새들이 빨려든다 집들이 빨려들고 나무들이 빨려들고 계단들이 빨려들고 길들이 꼬리를 물고 빨려든다   배꼽을 드러내고 여자는 훌라후프를 돌린다 그녀의 배꼽은 고독한 입 우주의 블랙홀 훌라후프가 그리는 타원궤도를 따라 색깔들이 들어오고 소리들이 들어오고 계절들이 바퀴를 달고 들어온다   오토바이 탄 피자 배달부가 들어와 빙글빙글 돌다 명왕성 뒷골목으로 가고 비행기가 빨려 들어와 형체 없이 부서지고 슈퍼맨이 빨려 들어와 여자의 허리를 일곱 바퀴 반 돌고는 우주 끝으로 날아간다   여자는 웃으며 엉덩이를 돌린다 여자의 웃는 엉덩이 곡선을 따라 하하하 햇빛이 들어오고 호호호 바람과 그늘이 들어오고 구름과 글자들이 빨려 들어와 빙글빙글 돌다가 무채색 웃음을 흘리며 탯줄을 따라 그녀의 몸속 더 깊은 우주 속으로 흘러든다   -갈릴레오 할머니/함기석-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죽어서도 땅 속 하늘을 관찰하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리 할머니   할머니 무덤은 할머니 둥근 뒤통수 두 팔은 앞으로 뻗고 얼굴은 땅에 박고 밤에도 낮에도 지구 속을 관찰하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리 할머니   시간이 층층이 쌓인 주검의 지층들 뚫고 반대편 지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는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뒤집힌 도시의 뒤집힌 인간들 쳐다보시며 뒤집힌 빌딩 뒤의 뒤집힌 하늘 쳐다보시며 깔깔깔 배꼽잡고 웃으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리 할머니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시집 (세계사), (천년의 시작), (랜덤하우스),          (문학동네), (처음주니어), (비룡소), (형설아이).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2006), 박인환문학상(2009) 수상.    제10회 애지문학상 수상(2012),  제8회 이형기문학상 수상(2013).  
768    시창작에서나 시감상에서나 모두 고정관념 틀을 깨버리는것 댓글:  조회:2925  추천:0  2017-10-09
내가 잠들면                       - 함기석     사전은 책상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간다 소파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제 육체를 구성한 말들에 갇혀 죽어가는 자신을 반성하며 담배를 핀다 내가 잠들면   달력 속의 여자는 밤마다 외출을 한다 죽은 애인을 만나러 묘지로 나간다 무덤을 파헤친다 관뚜껑을 연다 달빛아래 밤늦도록 해골의 그와 함께 춤을 추다 새벽녘 울면서 돌아온다 내가 잠들면   시계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책상과 의자는 싸움을 시작한다 책상의 두개골이 깨지고 의자는 코피를 흘린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의 존재소멸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내가 잠들면   책들은 물고기가 되어 방안 가득 푸른 알을 낳고 양초는 밤새도록 자학하며 시를 쓴다 병든 제 육신을 불태워 춥고 어두운 나의 방을 밝혀준다 계단은 계단에서 고독과 추위에 떨며 아파하고 옥상의 옷들은 빈 껍데기뿐인 자신의 일생과 먼저 죽은 친구들의 생을 생각하며 불면에 시달린다 내가 잠들면   거울은 악몽을 꾼다 검은 모래 토해낸다 검은 꽃 검은 나비떼 토해내며 고통과 반란의 검은 시간 토해내며 악몽에 시달린다 내가 잠들면 거울은 피를 토하고 거울 속의 나는 거울을 빠져나와 지붕 위로 올라간다 굴뚝에 앉아 나팔을 분다 구름과 달과 초록별들이 쏟아져 나오는 나팔을 분다 머나먼 우주 암흑의 행성에 사는 어린 난쟁이들을 생각하며 쓸쓸히 나팔을 분다 내가 잠들면   창밖 상처입은 은행나무는 창문을 열고 들어와 내 곁에 눕는다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 어린 나무 왼팔이 잘려나간 그 착한 나무 떨고 있는 은행나무를 끌어안고 나도 고열에 시달린다 나 점점 지워지고 은행나무 따뜻한 꿈꾼다   아침에 깨어보면 사물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만 나는 안다 밤새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얼마나 방황했고 얼마나 고독했는지 나는 안다 그들도 살아있음을 치열하게 숨쉬고 번민하고 사랑하고 아파한다는  것을     * 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한양대 수학과 졸업. 1992년 에 "新고린도전서식 서울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며 문단데뷔.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 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등.      시창작 지도를 하다 보면 창의적 발상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면 마치 큰일 날 것처럼 기존을 붙들고 한 치도 안 떨어지려 바들바들 떠는 형국이랄까. 그러면 이런 고정관념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나.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자아분리 연습을 시켜보는 거다. 자신을 나와 내 자아 두 사람으로 분리해 각각 따로 행동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인용시 ‘내가 잠들면’은 나와 내 자아, 사물과 사물의 자아 이렇게 분리한 상황을 기본 바탕으로 한다. 내 자신은 방에 잠들어 있는데 내 자아는 잠깨어 있다. 방안의 사물들은 잠들어 있는데 사물들의 자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싸우기까지 한다. 하여 잠들지 않은 내 자아가 잠들지 않은 사물들의 자아에 관심을 갖고 이를 묘사하는 게 시의 주 내용이다.      인용시를 쓴 함기석 시인은 이처럼 활유적(活喩的) 어법의 시로 시단에서 주목을 받고 독특한 위치를 확보한다. 자신의 전공인 수학을 시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융합적 상상력의 시인이랄까.   ///김영남 시인   =========================== #나는 장소 I이다  살해될 수 없는 아이가 골목에서 살해되었다 토요일 밤 가로등이 켜진 앞의 문장에서 탄환이 발사된다 여형사 마이너스는 를 핀셋으로 집어 투명 비닐에 넣고 범인의 발자국이 묻은 문장의 벽을 살핀다 허공에 구멍이 발생한다 아이는 심장에 지름 7mm의 구멍이 뚫린 채 코스모스 아래 쓰러져 있다 여형사는 과  사이로 보이는 공터에서 탄피를 찾아낸다 꽃잎에 묻은 지문을 찾아낸다 범인이 흘린 음성기호들을 찾아낸다 밀폐된 비닐 속에서 가 로 부패해가는 동안 탄환은 정지한 채 계속 날아간다 여형사는 살인의 흔적을 역추적하기 위해 문장을 차단시켜 문장을 개방시키기 시작한다  달빛이 내린다 달빛은 괴델송충이 모습으로 여형사 얼굴에 붙어 기어다니고 탄환이 나를 관통한다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밤은 뇌 주름을 갖고 있고 어둠 속에서 아이의 눈꺼풀이 열린다 동공엔 응고된 하늘, 하늘에서 어두운 계단들이 쏟아져 쌓인다 마이너스는 계단을 밟고 문장 뒤편으로 간다 병원이 나타난다 옥상에 삼각뿔 달이 떠 있다  # 너는 장소 N이다  달이 제4면을 드러낼 때 형사 마이너스는 진찰실로 들어간다 진찰실은 사전 모양이고 낱말로 뒤덮여 있다 낱말들이 말미잘처럼 촉수를 움직여 형사를 더듬는다 탄환은 계속 수평으로 날아가고 진찰실이 말한다 난 당신을 초대한 적이 없소 그런데도 날 찾아온 걸 보면 당신은 분명 환자요 자 그럼 당신 방식대로 아이와 범인과 당신의 심리를 진찰하시오  마이너스는 진찰실을 음의 방향에서 진찰한다 그녀가 진찰실을 진찰하는 동안 탄환은 너를 관통하고 양의 방향에서 길고 검은 손이 창으로 들어와 시계를 역으로 돌린다 그녀가 사건의 해부를 위한 실마리를 찾는 동안 해부를 해부하는 검은 핀셋과 가위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형사는 창가로가 진찰실 밖 도시를 바라본다 장소 G의 허공에 나타나는 핏빛 구름의 문장들을 바라본다  # 그들은 장소 G다  범인은 사건 발생 시간과 장소와 정황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범인이 만약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범인은 분명 환자일 것이다 범인이 만약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거짓말한다면 범인은 범인이 아니라고 선언할 것이다 이곳은 장소 O다 위증의 법정이다 이렇게 누구든 거짓말을 해도 그것이 거짓임을 판정할 수 없는 이곳은  #... 장소 X다 살인 중인 세계다 당신은 선언한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형사도 선언한다 나도 살인자가 아니다 문장들도 선언한다 나도 살인자가 아니다 빌딩들도 권총들도 선언한다 나도 살인자가 아니다 나도 선언한다 나도 살인자가 아니다 탄환은 그들의 심장부를 관통해 계속 날아간다  [출처] ING 살인 사건 / 함기석 (::문학동네::) |작성자 라디비나     ============================== -수학자 누(Nu) 16/함기석-           제7인공수면실 Time Captives 나는 16940시간째 동면상태다 내 우측 수면캡슐엔 힌두우주인 마야(maya), 출입문의 붉은 눈이 빔을 뿜으며 빠르게 깜빡이자 투명체 유리캡슐들이 열린다     등에 파란 촉수가 달린 파동생물 카이가 들어온다 긴 혀로 내 얼굴과 마야의 눈을 핥는다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나는 깨어난다 긴 터널 같은 환몽에서 마야도 깨어난다 우린 키스한다     카이가 가늘고 긴 촌충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마야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간다 누가 실명한 신의 눈을 뜨고 응시한다 마야의 살이 파랗게 변한다 머리칼은 죽은 버드나무 줄기처럼 흐늘거리고     유방은 한 쌍의 흑조가 되어 북두의 하늘로 날아간다 내가 손을 뻗어 마야의 뺨을 어루만지자 그 녀의 눈 속에서 내 눈을 태울 듯 노려보는 카이의 눈, 내가 주춤주춤 물러서자 누가 나를 부른다     나는 무명(無名)인데 귀조차 녹아내려 없는데 누가 계속 내 멸실된 이름을 부른다 그때마다 수축 하는 잠 팽창하는 꿈, 마야의 눈 속에서 거대한 말미잘 촉수가 뻗어 나와 내 목을 휘감아 들어간다     순식간에 나는 마야 속에 갇힌다 꿈을 깬 육체 속에 남겨진 꿈처럼, 이곳은 망각된 시간의 외계 (外界)일까 누구의 삭제된 슬픔이고 누구의 망실된 기억일까 미친 눈썹들이 흩날리는 해저 같다     나를 흡입한 마야의 몸이 풍선처럼 부푼다 나는 수평파를 따라 종이배처럼 피 속을 떠내려간다 죽은 아기들의 울음이 울리는 에코의 방을 지난다 살 속은 전자회로망이 실핏줄처럼 깔려 있고     나는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거미줄 모양의 신경망을 지나 후두부로 간다 자율신경 계단을 오르자 주름진 방들이 보인다 마야의 뇌다 종양처럼 검은 꽃들이 피어 있다 망자처럼 떠도는 달     감금 이틀째, 척추 속이다 뼛속에 고인 구름을 따라 흉부로 간다 폐엔 파란 물이 고여 있다 죽은 자의 입술 닮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누가 음경(陰經)을 들고 태양에게서 불을 훔치고 있다     그것이 내 유실된 주검이라는 듯, 나는 척수를 타고 방광 쪽으로 방류된다 검은 음모로 뒤덮인 아 름다운 해안이 나타난다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누가 검은 해변에서 다섯 개를 풀어놓고 있다   나는 모래언덕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본다 내 실종된 귀가 돛단배처럼 떠다니는 바다, 내가 물속으 로 뛰어들자 내 몸은 시퍼런 핏물로 뒤덮이고 수평선 너머에서 밀항선처럼 검은 간이 떠온다   절벽에서 누가 외치고 있다 마야! 마야! 날 내보내줘! 나도 따라 소리친다 소리칠수록 우리의 몸은 밀랍처럼 녹고 사방에서 카이의 웃음만 싸늘히 커진다 내 모든 기연(其然)이 불연(不然)인 이곳   감금 나흘째, 나는 마침내 항문에 도착한다 괄약근이 꽃처럼 오므라져 있다 나는 온힘을 다해 그녀 의 몸을 빠져나간다 바깥은 이형의 외계다 지구로부터 108광년 떨어진 암흑우주 아이엠Iam   해마처럼 생긴 생물들이 반투명 액체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색색의 시간들이 기나긴 해초가 되 어 파동을 따라 출렁이고 있다 수면 위로 동면중인 내가 든 유리캡슐들이 무수히 떠오르고 있다           ========================= 자책한 과부가 부과한 책자       /함기석 ㅡ전대미문의 문미대전         회문(回文)국 국왕 론의 주검을 뒤집어 검시하자 굴이 발굴됐다 굴은 총길이 416m 창자, 기나긴 악몽의 해협이었다 야음에 비밀잠수함이 지나가는   론의 눈에서 독 묻은 탄환 나왔다 탄환은 웃으며 자기는 론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론의 찢긴 목구멍에선 푸른 가시벌레들이 계속 기어 나왔다 항문에선 죽은 흰개미들이 쏟아졌고   신하들은 국왕의 죽음을 미화할 전대미문의 문미대전을 대대적으로 작란하기 시작했다 굴에선 계속 흡혈박쥐들이 날아올랐고 왕국의 하늘은 황량한 노을로 뒤덮인 위조지도가 되어갔다   검시관이 론의 입에 손을 넣었을 때 처음 닿은 것은 물컹한 혀, 그것은 흑갈색 파도가 문신된 13cm 페니스였다 론의 성기는 죽어서도 웃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말뚝웃음 저편 까마득한 저승의 서해에서   몰살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밀물로 울려왔다 바로 그때 왕국의 수도 바위산 아래 론의 일가가 살던 푸른 기와의 궁궐이 보였다 궁은 나풀거리는 회문(回文)의 책자였고 13부로 되어 있었다   1부 건조할 조건 빨간 속눈썹 달린 개 두 마리가 거울 앞에 선 여왕의 궁둥이를 킁킁거리며 살살거렸다 호호 Madam I'm Adam 호호 밥그릇처럼 무덤만 즐비한 벌판을 바라보며 여왕은 독백했다 꽃도 염문도 법도 역사도-다들 잠들다   2부 위대한 대위 웃는 백치여왕 adada 목엔 두 개의 장식용 머리가 달려 있었다 여야처럼 좌우처럼 전쟁은 불길이 끝나지 않고 정치적 섹스는 계속되었다 오래전 아버지 론이 대공조사실에서 어린 열사들의 눈을 태워 빨강괴물 그림자놀이를 즐길 때처럼   3부 다 모호한 호모다 왕은 왕이어서 왕왕 Cooing과 Babbling 혼자만 놀았다 그리하여 라는 는 항문 가득 파리가 알을 슨 변사체 그리하여 역사는 발작 중인 회문(回文)의 회문(會文) 입과 꼬리가 뒤바뀐 하마처럼 뇌물 먹다 뇌에 물이 괸 코 없는 코끼리처럼 끼리끼리   핏기 없는 꿈들이 날마다 서해로 흘렀다 굴을 다시 뒤집자 론의 텅 빈 폐에 백야의 어둠이 가득했다 론의 사체에서 독재자 론(Lone)이 대를 이어 부활했고 회문(回文)국의 모든 음악과 춤과 시는 검은 감옥에 투옥되어   어두운 회문(回問)이 되어갔다 거리마다 죽은 아이를 안은 여자들이 실성한 버드나무처럼 거닐었다 그들은 모두 무덤을 빠져나온 핏덩어리 구름들 불구의 땅이 낳은 불구의 해와 달과 별   라는 는 눈알이 검게 썩어들었다 그리하여 아홉의 검시관은 전대미문의 시체사건을 최종 판결했다 대지엔 론의 기나긴 악행이 음담의 패설로 새겨졌고 땅의 곰팡이들이 빠르게 하늘로 번져갔다   곰팡이들의 미친 웃음소리 따라, 야사의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고 죽어서도 눈이 감기지 않는 아이들은 모두 물새가 되어 굴의 폐쇄된 해저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마침내 굴의 반대편이 나왔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촛불이 타는 반도였다 반도는 자책한 과부가 부과한 거대한 피의 책자였고 또 다른 전쟁으로 4부 5부 6부 이후의 모든 서사는 불타 있었다    / 2017년 4월호. ===============================   하나병원 장례식장 뒤편 소각장     함기석     불타고 있다 누군가 쓴 일기장 누군가 신던 기린 양말 누군가 선물 받은 아름다운 목도리 눈 속에서 불타고 있다 누군가 발이 되어준 지팡이 누군가 불면 속에서 쓰다듬던 장난감 펭귄 누군가 비운 빨간 약병 첫눈 속에서 모두 불타고 있다 누군가 잃어버린 벙어리장갑 누군가 아기를 안고 칸나처럼 웃던 창문 누군가 잃어버린 청춘 열쇠 없는 일요일 아침, 자물쇠 닮은 갑작스런 죽음 누군가 머물다 떠난 빈 벤치 누군가 죽은 숲 누군가 울면서 걸어간 눈길 모두 젖은 물고기처럼 불타고 있다   ...................................................................................................................................................................     말의 당연한 의미를 믿지 않고 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며 새로운 말과 논리를 꿈꾸는 사람이 시인이다. 언어 혹은 언어의 자율적 논리 자체를 중시하게 되면 명백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를 보조적 수단으로 동원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언어를 정교하게 조직하여 현실을 재배열하고 시간이 정지된 유희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따라서 이 계열의 작품들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인상이 강하고, 보편적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은데 함기석(49)은 드물게 자기 색깔을 인정받으며 이 계열을 대표해온 시인 중 한 명이다. 센스가 아니라 난센스, 2차원의 문장과 3차원의 현실을 뒤섞는 상상력, 기하학에서 대수학과 위상수학, 무한(∞)과 영(0) 등 수학의 다양한 개념과 공리를 시의 전위적 가능성으로 흡수하여 펼쳐내는 실험은 지금 한국 시단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고 그만큼 매력적이다.  그런 함기석의 시가 최근에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작품 곳곳에 ‘고통 받는 인간의 얼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영향에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인간적인 아픔이 짙다고 할까. 예심위원들은 이 변화에 주목했다. 어찌 보면 함기석은 그동안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학문제를 풀듯이 언어논리의 발명에 몰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언어의 자율성을 현실에 붙들어 맬 때, 장례식장의 소각장에서 사물들은 비통하게 불탄다.     박상수(문학평론가)   ◆함기석=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로 등단.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오렌지 기하학』 등. 박인환문학상 등.       ============================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 , 10월호     황홀한 아파니시스aphanisis를 위하여     시인에게 자의식은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병소이다. 시적 자의식의 출현 시기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보면 우문 일 수 있는 것이, 시의 출발은 인간의 자의식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인간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자의식이야말로 예술이 탄생하게 되는 기원이 아닌가 말이다. 영원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죽음을 의식하는 데서 시작되기 마련이므로, 이미지(예술)의 탄생은 소멸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에 맞닿은 자의식은 본질적으로 자기분석적이다. 그리고 라깡이 말했듯이, 자기분석의 종결은 주체의 소멸이다. 라깡에 있어서 소멸은 단순한 욕망의 소멸이 아니라,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주체에 빗금을 침으로써 주체란 근원적으로 균열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기도 했던 라깡이 자기분석의 최종단계로서 주체의 소멸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달리 생각하면, 라깡의 작업은 시적작업의 궁극과도 닿아 있는 셈이다. 시적 자의식은 결국 주체의 죽음을 불러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까이 말하는 주체의 소멸은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상징계의 붕괴를 의미함을 애써 환기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소멸의식은 구체적 이미지(육체의 죽음)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소멸과는 다른 차원을 지니는 것이다. 하여 죽음(소멸)을 향한 욕동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 육체를 끊임없이 해부할 것을 강요한다. 육체는 시인의 언어를 통해 해부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은 현대 시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함기석의 시 역시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이 뚜렷하다. 육체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의 시는 육체를 매개로 하여 주체의 소멸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해부는 곧 주체가 소멸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주체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욕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함기석의 시에서 새로운 점이 있다면, 육체의 소멸이 곧 주체의 소멸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주체의 소멸은 곧 실재계로의 진입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는 주체의 소멸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초월일지라도 뚜렷한 출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기타에 붙은 두 손이/흰 새가 되어/숲의 적막으로 무한히 날아간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육체를 매개로 한 초월의 감성은 육체와 주체를 지움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정신적 풍경인 것이다.   초월의 감성이야 그다지 새로운 시적 주체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에서 초월에 이르는 시적 형상화의 방법이 문제다. 함기석은 육체를 악기로 비유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동통을 무거운 음향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시각적 이미지로 변주해낸다. 그것과 대비되는 초월의 적막 역시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악기화한 육체의 소멸은 청각과 시각을 통해 매우 감각적으로 형상되고 있다. 죽음에서 초월에 이르는 육제(악기)의 연주가 이 시의 주체인 셈인데,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감각적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늙은 몸을 조율하"는 풍경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여자의 흉부에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이이 심장을 지나고 있다. 핏줄은 물론 기타줄이다. 늙은 몸을 조율하는 행위는 육체에 대한 자의식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것도 '팽팽한' 핏줄들이고 보면, 육체는 자의식의 긴장으로 인해 곧 터질 것만 같다. 여자는 팽팽한 핏줄의 육체를 '조율'하며 죽어갈 순간을 가늠한다. 그것은 육체의 소리를 듣는 동시에, 죽음의 깊은 음을 길어 올리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한다. 악사 여인은 늙은 몸을 조율하며, 그윽한 육체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첫번째 줄을 끊는 순간 "핏물이 저음으로 흐르"기 시작하며, 기억과 망각은 동맥과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텅 빈 자궁으로 흐른다."두번째 줄을 끊는 순간, "음의 물결 사이로/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돈다. 세 번째 줄, 네 번째 줄, 다섯 번째 줄에 이어 마지막 줄을 끊을 때, 여자의 몸은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이와 같은 비유는 주체의 소멸을 감각적으로 조형하는 데 성공한다. 육체가 악기라니, 그것도 기타줄이 심장을 지나는 핏줄이라니! 함기석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육체의 미세한 떨림을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핏)줄을 끊는 순간, 육체 사이로 비치는 허공의 이미지이다. (핏)줄이 끊어질 때마다, 새들이 날아오르거나(2연), 구름이 흘러나온다.(4연) 해체 되어가는 육체는 '무無'로 환원되어가며, 죽음에 대한 자의식은 시간의식을 필연적인 한 쌍으로 끌고 나온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 이 얼굴은 시인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이미 허공이 되어버린 악사 여인은 새로운 줄을 퉁기는 것이다. 여섯 줄을 다 끊고 난 뒤 발견하는 "0번 줄"! 거기서는 침묵이 흘러나온다. 이 침묵은 우리가 한번도 들은 바 없던, 들을 수도 없는 타자의 소리다. 0번 줄은 침묵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한다."기타에 붙은 두 손이/흰 새가 되어/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가"는 "0시의 바깥 세계"!   시인은 주체 너머 황홀한 적막의 세계를 꿈꾼다.그러나 꿈은 미적 형식에서나 가능할 뿐, 악사 시인은 여전히 "시간이 타버린" 몸을 조율할 뿐이다. 그 소리는 지금도 내 몸속에서 울린다. 심장을 지나가는 여섯 개의 붉은 현絃! 그렇다면, 내 몸은 초월을 꿈꾸는가. 꿈꿀 수 있는가. 시의 적막(초월) 끝에 남은 것은  비루한 현실의 육체 일 뿐이다. 초월과는 무관한 이 남루한 육체야말로 우리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초월은 언제나 그렇지만, 비참한 현실의 다른 얼굴이다. 그러니 악사 여인에게 애도를!        ============================== 멋쟁이 불독 점프가 높이뛰기 선수를 끌고  빈칸 놀이동산으로 산책을 나간다  밟으면 피아노 소리를 내는 펭귄 블록들  머리를 노랗게 볶은 물음표 소년 갸우뚱이 지나간다  한 손엔 솜사탕  한 손엔 포도 주스보다 맛있는 깔깔웃음 주스  안녕 점프  안녕 콩나물  어린 글자들이 지나간다  몸이 투명한 글자들이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지나간다  하늘엔 참 도도한 구름 Miss Cloud  감독님 전 언제 저 새침데기 여우구름을 넘죠?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점프에게 묻자  바이킹이 내려온다  점프가 탄다  소년이 탄다  글자들이 탄다  해도 타고 나무들도 타고 높이뛰기 선수도 탄다  나도 타고 행갈이도 타고 점용이도 타고  빈칸 사장님도 탄다  바이킹이 올라간다  바이킹이 뒤집힐 듯 뒤집힐 듯 가파르게 올라간다  글자들이 짜릿짜릿 소리친다  나무들 살랑살랑 초록 꼬릴 흔들어  피아노 선율 허공으로 퍼진다  하늘 이랑마다 아랑아랑 아름다운 잔물결  어 어 저기 자두나무에 자두 귀두나무에 귀두  글자들이 회전목마 타고 논다  글자들이 범퍼카를 타고 논다  글자들이 청룡열차 타고 논다  글자들이 번지점프 하며 비명을 지른다  글자들이 자이언트드롭 타며 비명을 지른다  모나리자 아랫배 닮은 토요일 오후다  전깃줄엔 고장난 참새  한 번만 더 고장나볼까 말까  폭포수 광장 점핑 놀이기구에서 아이들이 논다  허공과 논다  점프도 점프하며 공기들과 논다  높이뛰기 선수도 점프해 여우구름에게 꽃을 전하고  글자들도 논다  명사들은 돌고래 점프  동사들은 벼룩 점프  부사들은 방아깨비 점프  글자들이 야호 야호 신나게 점프하며 논다  하늘 높이 솟았다가 다이빙 선수처럼 공중회전하며 내려온다  그때마다 빈칸 밖 도시가 세계가 가볍게 뒤집힌다  말괄량이 소녀 하이픈이 지나간다  도레미파 사탕 가게로 들어가 맛있게 솔라시를 빤다  아 달다 아아 달다 알알이 달달 소리 사탕!  그 소녀 꼭 끓고 있는 물주전자 같아서  보리차를 넣을까  생강차를 넣을까  마늘차를 넣을까 하는데  돌고래들이 공연장 지붕을 뚫고 구름 위로 떠간다  바이킹이 끊어져 하늘 저편 우주로 Bye Bye 떠난다  반짝반짝 흔들흔들 빛의 꼬랑지들이 웃는다  말랑말랑 허공엔 피아노 발자국 투명 음각으로 남고  모나리자 아랫배 아래에서  아름다운 물들의 노랫소리 흘러나온다  -함기석, 랜덤시선37, 2008년 3월  너무너무 유쾌하고 매력적인 시집이었다. ... 사실 함기석은 언어주의자의 계보를 잇고 있는 시인이다. ...언어주의자들의 어떤 시들은 아주 투명하다. 군더더기나 찌꺼기가 없다.  시가 아니라 음악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민하의 시가 회화로 가고 있다면 함기석의 시는 음악으로 가고 있다.... 왜 시는 꼭 현실을 거느리고 있어야 할까. 함기석의 시에 현실에 대한  방점은 오히려 함기석이 추구하는 시의 방향을 왜곡해버리는 가속페달은 아닐까.  "의미있는 시가 하도 지겨워/ 의미 없는 방정식을 푼다/ 내가 기호들과 즐겁게 노는데/ 창가로 팡새가 날아와 앉는다"('파스칼 아저씨네 과자 가게')같은 부분을 보면 함기석의 시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의미 추구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 그의 시와 장난치고 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시인의 의도대로 시를 읽을 필요는 없지만 그의 시가 현실을 얼마나 비밀스럽게 반영하는가를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말 그대로 신나게 웃고 놀면 안 될까.(박상수)   
767    시인은 시를 천연덕스럽게 표현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3986  추천:0  2017-10-09
예쁜          예쁜 발톱  예쁜 이빨     입술 가득  예쁜 피를     바른  쥐가 고양이를     먹는다 심장을  시계가 예쁜 밤의  예쁜 불알 - 함기석, 「차분한 야식」        ‘예쁜’이라는 시어가 거듭 나타나는 위 시에서 함기석은 ‘예쁜’에 담긴 일상적 의미를 뒤집고 있다. 시인은 입술 가득 예쁜 피를 바른 쥐가 고양이를 먹는 장면에 ‘예쁘다’는 말을 붙이고 있다. 입술 가득 피를 바른 쥐는 예쁜가, 예쁘지 않은가? 그 쥐가 고양이를 먹는 장면은 예쁜가, 예쁘지 않은가? 시인은 사람들이 ‘예쁘다’에 부여한 의미의 바깥으로 나오고 있다. “예쁜 발톱”으로 쥐는 고양이를 잡고, “예쁜 이빨”로 쥐는 고양이를 먹는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시인은 천연덕스럽게 시로 표현한다. ‘예쁘다’라는 말에 새겨진 맥락을 놓으면 쥐가 ‘예쁘게’ 고양이를 먹는 세계가 상상 속에서 뻗어 나온다. ‘차분한 야식’이라는 제목을 참조한다면, 야식을 먹는 주체는 쥐와 시계이다. 쥐는 예쁜 이빨로 입술 가득 고양이를 먹고 있고, 시계는 심장을 먹고 있다.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이 시는 그러나 상상 속에서 표현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새로운 맥락으로 접근할 수 있다. 쥐가 고양이를 먹는 세계와 시계가 심장을 먹는 세계는 놀이 공간, 곧 상상 속 세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는다. 고양이를 먹는 쥐의 모습이 예쁘다면 쥐의 발톱과 이빨, 입술 가득 피를 바른 입술 역시 예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종의 시적 쾌감이고,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자가 느끼는 기쁨을 표현한다. 시계가 심장을 먹는 “예쁜 밤”도 “예쁜 불알”과 어울려 시간 속의 ‘흐름-생성’으로 변주되고 있지 않은가. 예쁜 밤에 펼쳐지는 예쁜 피의 세계는 이미지로만 구성되는 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기호들이 놀이하는 세계에서 함기석은 이미지를 통해 그 기호들의 놀이와 마주하고 있다.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 구태여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는 이미지로 넘쳐나는 세계이다. 그래서 그는 의미에 대한 지나친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곳을 향해 갈 수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는 시어를 갖고 논다. 타성에 젖은 언어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며 그는 언어의 바깥으로 끊임없이 탈주한다. 언어가 만든 규칙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쁘다’라는 말이 꼭 ‘예쁘다’라는 의미를 지닐 필요가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쥐가 고양이를 먹고 시계가 심장을 먹는 세계를 상상하며 시인은 의미에서 빗겨난 기호들의 놀이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 “예쁜 밤”에 이루어지는 상상은 시인을 무의식 세계로 이끌고 간다. 무의식은 언어로 미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가리킨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대상들은 무의식으로 흘러든다. 언어=의식은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산을 덮은 채 아슬아슬한 의미 놀이를 벌이고 있다. 의미의 놀이는 명확한 규칙에 기반하고 있다. 규칙을 벗어난 주체는 놀이에서도 추방된다. 놀이를 즐기려면 규칙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지켜야 한다. 함기석은 이러한 약속을 스스로 어김으로써 입술 가득 피를 바른 ‘예쁜’ 쥐와 마주한다. 예쁜 쥐는 상상 속에서 자기 증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시인은 다만 예쁜 쥐를 상상의 세계에 풀어 놓을 뿐이다. 상상이 또 다른 상상으로 이어지는 함기석의 시 세계는 이 때문에 기하학적 추상으로 곧잘 건너뛰기도 한다. 구체의 반대편에 추상이 있는 게 아니다. 구체가 곧 추상이 되는 세계에 시인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쥐가 고양이를 먹는 세계는 구체인가, 추상인가? “예쁜 불알”이 움직이는 시계는 구체인가, 추상인가? 구체와 추상의 경계를 나누는 지점이 과연 있기나 할까? 구체적인 사물을 줄이고 줄이다 보면 하나의 점으로 모인다. 이 점은 구체인가, 추상인가? 상상은 이 점을 구체로도, 추상으로도 만들 수 있다. 입술 가득 피를 묻힌 쥐를 예쁘게도, 예쁘지 않게도 만들 수 있다. 함기석은 모든 일이 가능한 그곳에서 열심히 웃고 울고 떠들고 있다. 그에게는 상상이 곧 시 쓰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출처] 예쁜 - 함기석 「차분한 야식」|작성자 오르페우스  
766    난해함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익숙해지기... 댓글:  조회:4418  추천:0  2017-10-09
유의미孃 실종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 / 함기석 『오렌지 기하학』, 함기석, 문학동네, 2012년, 62쪽 솔직히 이 시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래 다양한 시를 읽어 왔는데, 함기석 시인의 시는, 참 개념을 설명하기가 어렵고 모호합니다. 특히 이 시가 가장 그렇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시를 옮길 수가 없어 해당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립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분류'해야 합니까.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있겠지만, 저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어서 곤욕스럽습니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뿐입니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문학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저자는 예언자나 현인의 권위를 더 이상 누리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는 상호 텍스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자, 즉 다른 누군가의 텍스트를 끌어 모아 재분배하거나, 어디선가 비롯된 이미지와 경험을 취하는 – 레비 스트로스의 표현을 빌자면 – 브리콜뢰즈(bricoleur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용해서 만드는 사람)로서 기능할 뿐이다. 브랜든 테일러,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리얼리즘』 중에서 이 의미가 말하는 것은, ‘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다’일 것입니다. 다만 이 문장에서 말하는 '기존의 개념의 정의'가 지칭하는 것은 ‘모더니즘’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온통 혼돈으로 바뀝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개념이라는 것이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무엇인가를 지칭하지도 않습니다. 그림으로 치면, 피카소가 그린 괴상한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시대적 배경을 둘러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은 불행한 역사, 세계 대전과 함께합니다. 세계 제1차·제2차 대전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할 것 같았던 ‘기존 질서의 붕괴’입니다. 이 세계대전에서 일어난 끔찍한 학살, 무자비한 폭격, 타살은 인간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문화란 바로 ‘모더니즘’입니다. 모더니즘이 상징하는 것은 ‘근대화, 산업화’로서, 인류를 발전시켰다고 자부한 1·2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것은 궁극적으로, 진보가 아닌 '파멸'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목격한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을, 한나 아렌트는 ‘악의 진부성(보편성)’을 말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초현실주 작가입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예술가들이 기존의 보편을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세기적 불행이 예술적 영감과 자극으로 다가온 것입니까. … . 이렇게 접근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엄청난 곤란에 처합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면 포스트모더니즘(다다이즘 큐비즘등의 다양한 부속물들은)은 피를 먹고 자라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은 '결과론적인 시각'에 불과합니다. 함정으로 몰아넣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것과 같습니다. 이보다 불행을 인간의 날 눈으로 바라보고 ‘아포리아(Aporia)’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필연적(必然的) 의지로 바라보는 것이 적당합니다.  난해함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익숙해지기! '미분'과 '적분'적 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가 난해한 까닭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틀에 맞춘 詩이기 때문입니다. '미분'과 '적분'적의 난해함도 익숙해짐으로써 극복할 수 있지만, 이 시는 '익숙해질 필요가 없는 시'이기 때문에 ‘쭉~’ 난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하나하나의 실험까지 익숙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특히 효율성의 관점에서). 굳이 이 시를, 함기석 시인의 시를 읽지 않아도 무방하고, 또한 이와 같은 시들은 함기석 시인의 시 중에서도 한 부분(다수의 시는 언어에 충실합니다)에 불과합니다. 시를 전공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듯 시의 다양한 활용법이 있다는 것을 맛보기 하시고 '주류의 시'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주류란 '언어'에 충실한 것으로, 이 또한 수많은 갈래를 가지고 있기에 비록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순서로서 먼저입니다. [출처] 함기석 시인의 시 '유의미孃 실종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작성자 주영헌 =====================  
765    대추 한알속에 태풍 몇개, 천둥 몇개, 벼락 몇개... 댓글:  조회:4524  추천:0  2017-10-09
       시 모음 + 너의 작은 숨소리가  흔든다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흔든다 먼지가 앉은 나비 날개를 흔든다 나비가 앉은 꽃잎을 흔든다 꽃이 잠자는 화분을 흔든다 화분이 놓인 탁자를 흔든다 탁자가 놓인 바닥을 흔든다 바닥 아래 지하실을 흔든다 지하실 아래 대지를 흔든다 대지를 둘러싼 지구를 흔든다 지구를 둘러싼 허공을 흔든다 허공을 둘러싼 우주 전체를    (함기석·시인, 1966-) +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大地)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강이 흐른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구상·시인, 1919-2004) + 빗방울 빗방울 하나가 창틀에 터억 걸터앉는다 잠시 나의 집이 휘청-한다 (강은교·시인) + 우주를 보다  풀잎 위  이슬 한 방울쯤이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보다 크다  손가락에 적셔  가지고 놀려 했다  오늘 그것에  깔리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박창기·시인, 1946-) + 새 새 한 마리가 마당에 내려와 노래를 한다 지구 한 귀퉁이가 귀 기울인다 새 떼가 하늘을 날며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반짝인다. (박두순·아동문학가, 경북 봉화 출생) +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시인, 1954-) + 달팽이 한 마리가 겹벚꽃 그늘 아래서  달팽이 한 마리 더듬더듬  나무를 기어오른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등짐 진 그의 무게만큼 하늘은 자꾸만 기우뚱 내려앉는데 놀라워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지구를 끌고 가는 힘 (최춘희·시인) + 꽃씨를 심으며 희망은 작은 거다 처음엔 이렇게 작은 거다 가슴에 두 손을 곱게 포개고 따스한 눈길로 키워주지 않으면 구멍 난 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그렇게 쉽게 잃어버리는 거다 오늘 내가 심은 꽃씨 한 톨이 세상 한 켠 그늘을 지워준다면 내일이 행여 보이지 않더라도 오늘은 작게 시작하는 거다   (홍수희·시인) +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깃털 하나 거무스름한 깃털 하나 땅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들어보니 너무나 가볍다 들비둘기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라 한다 한때 이것은 숨을 쉴 때마다 발랑거리던 존재의 빨간 알몸을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깃털 하나의 무게로 가슴이 쿵쿵 뛴다.  (안도현·시인, 1961-) + 저런 게 하나 있으므로 해서 저런 게 하나 있으므로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지 아무 쓸모없는 듯 강폭 한가운데에 버티고 선 작은 돌섬 하나  있으므로 해서, 에돌아가는  새로운 물길 하나 생겨난 거지 (정세훈·시인, 1955-) +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간혹 가슴앓이가 오고 가지만 다른 얼굴을 한 축복일 뿐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여주리 (메리 R. 하트만) + 어느 하찮은 것들에 대하여   나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무엇무엇 따위의  하찮은 것들  그 가치가  보잘것이라고는 없기에  아무도  그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는  그런 것들을  나는 꾸준히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감사함의 표시로  한시도 날  떠나 있지 않는다.   (원태연·시인, 1971-) + 어린것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나희덕·시인, 1966-) + 제자리  급류(急流)에  돌멩이 하나 버티고 있다.  떼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안간힘 쓰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잎처럼  풀잎처럼  흐르는 물에 맡기면 그만일 텐데  어인 일로 굳이 생고집을 부리는지.  하늘의 흰 구름 우러러보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서 그런다 한다.  이제 보니 계곡의 그 수많은 자갈들도  각각 제 놓일 자리에 놓여있구나. 그러므로  일개 돌멩이라도  함부로 옮길 일이 아니다.  뒤집을 일도 아니다.  (오세영·시인, 1942-) + 한 걸음 한 걸음이 당신을  그리 멀리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걸어야 합니다. 한마디 말로 당신 자신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말해야 합니다. 한 인치가 당신을  크게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의 행동이 모든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행동해야 합니다. (복음의 수난시대에 살았던 무명의 그리스도인) + 작은 잎사귀들이 세상을 펼치고 있다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돋아있는 민들레 잎사귀들이 작은 실톱 같다 이제 막 시멘트 블록을 힘들게 톱질하고 나온 듯하다  무엇이 저렇듯 비좁은 공간을 굳이 떠밀고 나오게 했을까 저 여리고 푸른 톱날들을 하나도 부러뜨리지 않고  시멘트 블록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다 이제 꽃대를 올리면 금빛 꿈의 꽃망울이 허공에 반짝 피어나겠지 시멘트 불록과 불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작은 민들레 한 포기 푸르게 펼쳐놓은 세상을 본다 저 푸른 세상 속 그 무엇이 이렇듯 나를 잡아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짐짓 끌려가 또 한 세상 깜빡 빠져드는 것일까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실톱 같은 작은 잎사귀들이 푸르게 세상을 펼치고 있다  (이나명·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 + 그 한 사람을 생각함 살아 있는 시간마다 그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의 어제와 슬픔을 생각하고 오늘의 고난을 생각하고 내일의 허망을 생각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란 참 하찮은 것입니다 고사리를 볶아서 된장찌개를 끓여서 내 손맛의 소찬을 함께 먹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 참말이지 눈에 띄지도 않게 작은 것입니다 아무도 몰래 입춘 지난 어느 날 꽃샘추위 속에서 향기 머금어 핀 남매화 여린 꽃잎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의 환희와 남루와 고뇌 그 한 사람의 질병과 절망과 분노를 생각하는 일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의 전부를 생각하는 일이 인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김용옥·시인)
764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댓글:  조회:2793  추천:0  2017-10-09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작가세계」로 등단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공원』  동화『상상력 학교』  '제14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  2009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 함기석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 해!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 소리로 읽는다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 채 묻는다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되는 거예요?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 세운다 창 밖 잔디밭에서 새끼염소가 소리친다 국어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이 일렬로 염소 꼬리를 잡고 행진하는 동안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아이들은 깔깔대며 더욱 큰 소리로 외쳐댄다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봉대 염소는 손목시계를 풀어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왜 시계를 던지는 거야? 배추머리가 묻는다 저기 봐, 시간이 날아가는 게 보이지? 아이들은 일제히 시계를 벗어 공중으로 집어 던진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오전 10시는 오후 4시가 된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생이 씩씩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온다 그사이, 운동장은 하늘이 되고 시계는 새가 된다 바람은 의자가 되고 나무들은 자동차가 된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국어선생은 달팽이! 하늘엔 수십 개의 의자가 떠다니고 구름 위로 채칵채칵 새들이 날아오른다 구름은 아이들 눈 속으로도 흐르고 바람은 힘껏 국어책과 선생을 하늘 꼭대기로 날려보낸다.      마지막 해변/함기석- 하늘에서 누군가 물조리개로 빛을 뿌린다 해변은 땀에 젖은 흑인의 등처럼 반짝거린다 바다의 잇몸을 뚫고 수면으로 나온 흰 이빨 같은 섬들 물결따라 햇빛알갱이들 아름답게 너울거리고 바다는 한 꺼풀 한 꺼풀 하얀 속살을 벗겨 뭍으로 보낸다 해변에 한 노인이 서 있다 바다의 주름진 이마를 만지며 해저에 사는 눈 없는 물고기들의 일생을 생각한다 피었다 진 꽃자리처럼 노인의 눈은 쓸쓸하고 그늘이 깊다 바다의 유치원에서 어린 물고기들 뛰놀고 소녀가 나비 다라 방파제 꽃길을 뛰어간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모래밭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맨발을 바라본다 고독과 고통 속에서 보낸 수십 년의 시간과 진흙 길들이 스민 아픈 발을 바라본다 쉬지 않고 걷고 걸어 이 마지막 해변까지 데려다 준 상처투성이 착한 발을 미안하게 바라본다 보드랍게 발등을 어루만져 주는 바다의 하얀 손가락들 노인은 모래밭에 바다가 쓰는 참회의 시를 가슴으로 듣는다 부서지며 사라지는 물로 된 말들 말들이 만드는 무수한 모래구멍과 생의 아픈 물거품들 울분과 분노의 나날들, 증오 때문에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여인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뼈아픈 기억들 시린 하늘에서 내려온 전깃줄 같은 빛줄기가 노인의 목을 옥죈다 노인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방울 하나 발등으로 떨어진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본다 작은 배가 한 척 해안으로 밀려온다 삐거삐걱 노를 저으며 누군가 저음의 노래를 부른다 노인은 젖은 눈을 여미고 노 젖는 자의 얼굴을 본다 어부차림을 한 죽음이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만 이 배를 타고 가시지요? 배는 노인을 태우고 소리 없이 나아간다 천천히 자궁을 빠져나가듯 수평선 너머 내생으로 나아간다 배가 그리는 물결 파문들, 바다 저편 침묵으로 퍼져 방파제 끝에서 소녀가 손을 흔든다 첫 키스/함기석- 너의 입술에서 장미꽃이 피어난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새들이 날아가는 호수가 보인다 눈이 예쁜 물뱀 하나 뭍으로 올라온다 꽃밭을 지난다 앵두밭을 지난다 탱자나무 울타리 지나 내게로 온다 흰 벽돌담 넘어 내게로 온다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어린 뱀은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너의 혀 두근두근 내 입술에 살을 비빈다 나의 입술에서 빠알간 금붕어들이 쏟아진다 빠알간 코스모스 꽃잎들이 쏟아진다 아 가을이다 나는 손을 쭈욱 뻗어  구름을 따 네 눈에 넣어준다 해와 달을 따 네 입에 넣어준다 하늘 가득 아름다운 피아노소리 울려 퍼진다  실내악/함기석-  고양이 체셔가 웃으며 건반 위를 걷는다  연주가 시작되고  오르간 양쪽에 불이 켜진다  양초 대신 손이 꽂혀 타는 두 개의 촛대  오르간 앞엔 팔 없는 소년  ( )가 앉아 있다  괄호의 눈에서  푸른 쇠구슬이 반음 차로 떨어질 때마다  체셔는 체셔체로 걸음을 옮긴다  원 스텝 투 스텝, 반음 쉬고  흰건반 검은건반, 다시 반음 쉬고  점프해 발을 바꾸는데  음에 맞춰 혀를 날름거리는 사색가가 나타난다  꿈틀거리는 이 침묵은 붉은 줄무늬가 또렷한 뱀이다  고양이가 앞발로 톡톡 건드리자 뱀은  머리를 빳빳이 세우고  체셔의 웃음과  ( )의 사라진 팔을 번갈아 쳐다본다  체셔는 웃으며 다시 체셔체로 걷는다  건반 사이에서  날개 가득 ( )색 피를 묻힌 새가 날아올라  밤의 동공 속으로 날아간다   글자들이 타고 다니는 기차 / 함기석                                            밤은 두 눈이 파도치고 있었다  밤의 노란 링 귀고리가 살랑 흔들렸다  글자들이 힐끔힐끔 나를 읽고 있었다  글자들이 수군거렸다  저기 봐 이 기차에 처음으로 사람이 탔어  도대체 어딜 가는 길일까?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예쁜 글자 하나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자는 모두 조약돌로 되어 있었다  조약돌 구름과자  조약돌 기린과자  조약돌 토란과자  조약돌 포도를 꺼내 입에 넣자 입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슬픈 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고  꼭 다문 입술 뒤의 어두운 울림통을 생각했다  포도 속에 뿌리 내린 빛과 음의 실뿌리들을 생각했다 취한 달이 지나갔다  얼굴에 깊고 쓰린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차창 밖 세상으로 빈 술병을 휙 집어던졌다  낮에 먹은 상한 빛을 밤에 토하고 있었다    말했다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이 기차에 탈옥한 글자들이 탔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사람을 보면 죽일지도 몰라요  그래요? 그거 참 잘 됐네요  내 뒷자리에서 홀쭉한 침묵이 말했다    기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허공으로 부드럽고 착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포파 아저씨가 선물로 준 작은 상자엔  / 함기석     어항이 있었어요 어항은 아기의 발처럼 아주 아주 작았는데 잘 울고 수줍음을 많이 탔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젖을 물리고 햇빛을 듬뿍듬뿍 뿌려 주었더니 나팔꽃처럼 쑥쑥 자랐어요 어항은 조금 커져 어항 속에 연못을 하나 갖게 되었어요 어항은 점점 더 커져 포파 아저씨가 사는 마을과 숲 꽃밭과 초원과 과수원도 갖게 되었어요 포파 아저씨가 집에서 시를 쓰고 새들이 호수에서 낚시놀이를 하는 동안 어항은 점점 더 점점 더 커져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온세상을 갖게 되었어요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렀어요 어항은 늙어 어느새 수염이 하얗게 달렸어요 어항은 어항 속의 세상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어항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 바람 소리 계곡물소리 올빼미들의 멋진 기타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지만 어린 시절이 너무도 너무도 그리워 탁구공처럼 다시 작아졌어요   이제 아주 아주 작아진 어항 속에는 아주 아주 작아진 온세상이 들어있어요 온갖 동물 식물 별과 구름들이 모두모두 들어있어요 밤마다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래가 나와 바다 속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네가 기린을 상상하면 어항에선 기린이 목을 내밀고 웃고 비행기를 상상하면 비행기가 날아올라요   혼자 밤길을 가기가 무서울 땐 숟가락으로 어항을 탁탁 두드리며 상상해 보세요 그럼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착한 호랑이가 나와 어둠 속을 함께 걸어가 줄 거예요 그러나 조심해야 해요 어항은 쉽게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들이 몰래 훔쳐 갈 수도 있으니까요   네 눈썹 밑의 그 반짝거리는 마술 어항       뷰티샵 낱말과일들 / 함기석   토마토 유기산과 비타민 A, C가 풍부해 여드름 많은 문장과 지성피부를 가진 문장에 좋다.   수박 이뇨작용을 하여 과잉된 자의식의 부기를 확실히 빼준다. 속껍질 간 것을 냉장심장에 넣었다가 팩으로 사용하면 문장에 윤기가 생긴다. 냉찜질이 필요한 시에 좋다.    레몬 산도가 높으므로 물 빛 소리를 10대 3대 1의 비율로 섞어 사용하면 좋다. 문장들은 잠자는 동안에도 피지를 분비한다. 피지를 없애려면 문장의 피부온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레몬즙이 효과만점이다.   자두 각종 과일산이 풍부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행간의 모공수축으로 인한 긴장유발 및 문장의 각질제거효과도 있다. 여백은 낱말들을 통해 문장의 피부수분밀도를 조절한다. 날씬한 시를 원하는 뚱뚱녀에게 좋다.   키위 피부미백효과에 좋은 비타민 C가 다량으로 들어 있어 시 안면부에 퍼진 기미나 주근깨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탱탱한 볼 매끈한 코를 원한다면 스팀타월 냉타월 번갈아 3분씩.    오렌지 레몬보다 산도가 약해 몸 전체에 사용할 수 있다. 시의 엉덩이 가슴 성기 주변 등 어느 곳에나 사용 가능하다. 면역력이 약한 문장, 폐활량이 적은 문장의 코와 입 등 호흡기를 보호하는 데도 효과만점이다.   딸기 비타민 C와 젖산이 풍부해 문맥에 발랄한 봄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 시 전체에 퍼진 악취제거 및 낱말들의 사유세포활성화효과도 있다. 씨는 버리지 말고 마침표로 사용하면 된다.       하모니카 부는 참새 / 함기석   무더운 여름오후다 참새가 교무실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분다 유리창은 조용조용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물고기들은 빛으로 짠 예쁜 남방을 입고 살랑살랑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교무실을 유영한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선생들도 흘러내린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에 복도들 지나던 땀에 젖은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본다 수학선생도 사회선생도 국사선생도 보이지 않고 교무실은 온통 수영장이다       당신을 위한 수탉의 모닝콜                                함기석       갑자기 형사가 찾아오면  갑자기 나는 혐의자가 되고 용의자가 된다  갑자기 킁킁거리며 개가 다가오면  갑자기 나는 냄새나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갑자기 탄환이 날아오면 갑자기 목표물이 된다  곤충채집자가 나를 채집하면 난 이상한 곤충이 되고  벌레연구가가 나를 연구하면 난 이상한 벌레가 된다   내가 수염을 기르면 초승달이 수염을 기른다  내가 나팔을 불면 당나귀가 나팔을 분다  내가 수영을 하면 비행기가 수영을 한다  내가 속옷을 벗으면 가을 숲이 속옷을 벗고  내가 섹스를 하면 호텔이 수평선과 토마토 섹스를 한다  내가 세수를 하면 구름은 랄랄랄 면도를 하고  내가 외투를 걸치면 고양이는 호호호 화장을 한다  내가 외출을 하면 나무들은 하하하 담배를 피며 지나가고  가로등은 내 머리에 노란 우유를 쏟는다   내가 창공의 무지개를 둘둘 말아 허리에 두르고  눈썹 붙은 얌체 고양이 지지처럼  벤치에 앉아 시계를 보고 또 보며  시계 속으로 보이는 백만 년의 눈보라  백만 년의 바람소리 백만 년의 하늘을 보며 당신을 기다릴 때  갑자기 골목에서 방글방글 나타난다  갑자기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나타난 죽음이  퍽! 나의 생을 핸드백처럼 낚아채 빙글빙글 달아난다   그리하여 내가 죽으면 노랑머리 콩나물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붕어빵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고등어유령이 죽는다  어린 달걀들은 하늘을 맴돌고  당신을 위해 아침마다 모닝콜을 불러주던 나의 노래는  차디찬 물 속을 맴돌고  나의 피 나의 눈물 나의 숨결은 허공을 맴돈다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나무가 죽고 새가 죽고 도시가 죽고 문명이 죽고  천둥과 함께 백만 년이 흐르고  번개와 함께 다시 백만 년이 흘러도  빙글빙글 지구는 계속 돌고  뱅글뱅글 슬픔도 고독도 우리들 눈깔처럼 계속 돌고  뺑글뺑글 존재도 농담도 우리들 불알처럼 계속 돌고  돌다가 돌다가 완전히 돌 때까지  우주는 랄랄랄 계속 돌고  시간도 히히히 계속 돌고  죽음도 헤헤헤 계속 돌고   말들도 깔깔깔 계속 돌고     뽈랑공원  / 함기석   뽈랑공원의 아름다운 정문이 열린다 꽃밭에서 햇빛과 나비들 춤춘다 뽈랑색 벤치들이 보인다 뽈랑새 두 마리 자유로이 공원을 날고 있다 물푸레나무 아래 꽁치처럼 예쁜 여자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아기가 젖을 빨다 스르르 잠이 들자 여자는 하늘 한복판을 푸욱 찢어 아기의 어깨까지 살포시 덮어준다 찢어진 하늘에선 푸른 물고기들이 쏟아지고 여자는 유모차에서 책을 꺼낸다 아기를 위한 자장가 뽈랑송을 부르며 책장을 넘긴다 여자가 책을 보는 동안 아기는 꿈꾸고 물고기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헤엄쳐 다니다 책 속으로 사라진다 한 청소부가 후문에 나타난다 이상하게 생긴 뽈랑 빗자루로 공원을 쓴다 그러자 공원이 조금씩 조금씩 지워지면서 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꽃밭이 사라진다 벤치들이 사라진다 나무들이 사라진다 하늘이 새들이 빛이 시간이 차례로 빨려들어가고 여자가 사라지면서 손에 들려 있던 책이  청소부 발 아래로 떨어진다 청소부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을 주워들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말들이 피운다는 뽈랑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길게 연기를 내뿜으려 책을 펼친다 20페이지에 뽈랑공원이 나타난다 함기석이라는 휴지통이 보인다 여백이 되어버린 하늘이 보인다 유모차를 끌고 행간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사라진 새들은 사라진 빛을 향해 날아가고 여자가 머물던 물푸레나무 그늘 속에서 투명한 물고기들이 헤엄쳐나온다 샘물이 된 아기울음 흘러나온다     착란의 돌, 詩  함 기 석  빌딩숲에 절이 있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새소리가 흘러 나왔다 달콤했다 활짝 핀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알몸의 여자가 목욕하고 있었다 황홀했다 정원으로 들어갔다 아카시아 꽃향기로 여자의 머릴 감겨 주었다 햇빛으로 상처 난 가슴과 허리를 씻어 주었다 여자는 내 이마에 키스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신선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우린 불륜의 사랑을 나누었다 알몸으로 뒹굴며 꿈같은 몇 분을 보냈다 난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았다 10여 년이 지나 있었다 황급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사라졌고 사원은 거대한 새장으로 변해 있었다 어린 해바라기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말했다 넌 무당벌레 넌 칠면조 넌 뚜껑 없는 주전자 이 곳은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는 유형지야 이 바보야! 난 날개를 푸득이며 새장 밖으로 도망치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밖으로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안으로 안으로 갇혔다 나는 지쳐 갔다 새장 속에서 내 청춘은 길을 잃고 말라 갔다 참담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다 오랫동안 방황했다 나도 나의 삶도 안으로 안으로 썩어 들어갔다 많은 밤을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대웅전에 불을 질렀다 나는 해바라기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염소가 다가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가슴에 고인 썩은 바다를 혓바닥으로 핥아먹으며 금붕어처럼 웃어 주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나는 활짝 핀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로 간다 알몸으로 목욕을 한다 무서운 새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길을 찾는다 없는 길을 찾으며 나는 움직인다 내 주검이 누울 암흑의 그 자리를 맨손으로 파들어 가며 나는 쓰고 쓰고 또 쓴다 이 외롭고 잔인한 말의 사원에 갇혀      아픈 방                                  함기석       난 이 시 아픈 방이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소 어서 들어 오시오 왼쪽 벽에 스위치가 있소 누르지는 마시오 난 이대로 어둠 속에서 쉬고 싶소 불을 켜면 당신은 벽을 타고 흐르는 피, 의자 밑에 떨어진 떨어진 손을 보게 될 거요 난 그런걸 당신께 보이고 싶지 않소     가만히 서서 책상을 바라보시오 책상은 칡넝쿨로 뒤덮여 있소 책상 밑으로 흐르는 계곡이 보이오? 계곡은 당신이 서있는 벽을 타고 천장 밖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흐르고 있소 얼마 전까지 이 방엔 한 여자가 살고 있었소 그녀는 스스로 숨을 끊고 계곡을 따라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떠났소     0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창을 찾아 보시오 창은 말의 동공처럼 어둡게 깨져 있소 거기 서서 0시의 바깥세계를 바라보시오 밤의 잿빛 도시가 보이오? 도시의 강변 저편에 빌딩들이 보이고 아파트단지가 보일 게요 불 켜진 방이 하나 보일 게요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 보일 게요 누군지 아시겠소? 아픈 방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오     당신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시오 그 사람도 나처럼 아픈 방에서 홀로 아파하고 있을 게요 가서 그랑 술이라도 한 잔 하시오 미안하오 이제 난 약을 먹고 쉬고 싶소 그만 나가주시오 당신이 이 방을 나설 때 여자의 손이 당신을 따라 갈 것이오 그럼 좋은 밤 보내시오         2008 여름호      고유한 방화범                           함기석  나의 구두는 우주선  밤마다 내 두개골을 싣고 밤하늘을 유영한다 나의 구두는 잠수함 밤마다 황산으로 뒤덮힌 바다에 나를 내다버린다 구두는 나의 육체 나의 무덤인 언어 구두는 자신의 전생애를  구두라는 제 이름의 새장에 갇혀 병든 새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상처받는다 사물의 이름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감옥 인간이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놓은 무서운 질서 무서운 폭력, 나는 밤다다 검은 복면을 쓴 방화범이 되어 그 감옥 지하실에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지핀다 내 육체 속에서 번식하는 내 아비의 우상들을 죽이고 발 아래 침묵하는 대지를 살해한다 시인은 제 피와 뼛가루가 묻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교수대와 관을 만들어야 한다 치열하게 유희하듯 유희하듯 장미를 계속해서 장미라 불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백 마리 뱀들이 우글거리는 관(棺)인 그것을 나는 간단히 시체라 부른다 이제, 장미는 빠알간 나의 시체 나는 밤마다 나의 시체에 불을 지른다 시인은 모두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썩어가는 세계의 항문과 사타구니에 불을 지르는 고유한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함기석, 전문 출전: , 세계사, 1999, 67-8쪽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현대시》2008년 10월호     [감상]   가슴 밑의 갈비뼈를 가리키며 지난날 우리는 기타 치는 흉내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몸은 기타의 몸통이고 기타 줄(絃)은 갈비뼈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늙은 여자가 기타(몸)를 조율하는 방법으로 현(갈비뼈)을 죄거나 푸는 것이 아니라 핏줄로 조율합니다. 현의 탄력성을 조절하자면 줄감개로 해야 하는데 시인은 핏줄을 줄감개로 생각하나 봅니다. 줄감개였던 핏줄이 2연에서는 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끊는 것으로 현의 탄력을 극한으로 조절합니다. 주인공이 원하는 현의 탄력은 최고의 음을 만들 수 있는 그쯤이겠지요. 줄이 끊어진다는 건 핏줄이 끊어지는 것, 이런 흐름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줄이 끊어질 때 나오는 소리가 핏줄이 끊어지는 고통의 소리로 중첩되어 읽힙니다. 더구나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며] 樂士와 생체적인 모습을 한 번 더 복합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그런 분위기를 강화시킨 뒤 3연으로 와서 [기억은 동맥으로 / 망각은 정맥을 타고 / 심장 아래 /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며 기억과 피를 치환시키고 염통을 자궁으로 바꾸어 좋거나 나쁜 기억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연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연속성 때문에 첫 번째 줄을 끊는 것만으로 모든 기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두 번째 줄을 끊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음의 파장사이로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다 종래엔 많은 기억의 찌꺼기들이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를 화자는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이라 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나 둘 끊어 가다 보면 마지막 줄까지 다 끊어질 것이고 여자의 몸은 죽음 쪽으로 기울겠지요. 시인은 그 과정을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라든지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 핏물은 점점 / 소리 없는 음이 되어 /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라는 언술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匠人정신을 가지는 것이 사회의 미덕으로 인식되는 것이고 보면 이 시를 以上으로 끝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악사는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기겠지요. 그것은 바로 최고의 화음을 뜻하는 부존재의 줄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최고의 삶을 뜻하는 부존재의 理想일 수도 있겠습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하지 못하는 꿈일 수도 있겠네요. 시인은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라든지 [흰 새가 되어 /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라는 언술로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하지만,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 침묵이 흘러나온다 /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라는 등의 언술로 장인정신의 결과를 말합니다. 정신이 추구하는 끊임없는 열정이 함께 하고 있다면, 흉부가 기타로 변할 만큼 오랜 또는 격한 삶을 겪은 여자처럼 죽음이 육신을 어찌한다 해도 그 순간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황홀하지 않을까요? 더 좋은 삶에 대한 의지가 함께 하는 순간이라면, 좋은 시에 대한 열망이 함께 하는 순간이라면 말입니다.  --  여 백    
763    "우리 한글이야말로 시를 위한 최적의 언어입니다"... 댓글:  조회:3042  추천:0  2017-10-09
순우리말 시... “감칠맛 따라올 다른 언어가 없죠” (ZOGLO) 2017년10월9일  [동아일보] [9일 571돌 한글날]순한글 시 쓰기 30년 김두환 시인 “달짝지근하고, 쌉싸름한 맛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김두환 시인은 “한국어만큼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는 없을 것”이라며 “아직도 시에 담지 못한 아름다운 순우리말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함박웃음들 정담들 와글와글 넘친다/춤판 너울질 가락들 양양히 돌려댄다….’(시 ‘만발’) 꽃이 활짝 핀 길을 거닐며 느낀 소회를 표현한 김두환 시인(82)의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자어나 외래어를 찾기 힘들다. 이 시뿐 아니다. 땀직하다(말이나 행동이 속이 깊고 무게가 있다), 숫보기(순진하고 어리숙한 사람), 사리물다(힘주어 이를 꼭 물다) 등 그의 시 속에는 순우리말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는 30년간 순우리말로 시 쓰기를 고집하고 있다.  1987년 등단 이래 그가 발표한 시는 총 1837편. 이 중 1500여 편은 순우리말로 이뤄져 있다. 다양한 시구를 우리말로만 채우는 이유는 뭘까. “우리말만큼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어요. ‘푸르다’만 보더라도 ‘시퍼렇다, 짙퍼렇다, 푸르스름하다’ 등 수십 수백 가지로 표현할 수 있죠. 우리말이야말로 시를 위한 최적의 언어입니다.” 평생 우리말 시를 고집하면서 생긴 우여곡절도 많았다. 다소 낯선 그의 시를 보고 “어색하다” “생경하다”는 문단의 혹평이 이어졌다. 그러나 제2회 영랑문학상 본상, 제10회 허균문학상 본상, 제2회 한국신문학 대상 등을 수상하며 문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시가 ‘열외’ 취급을 당했죠. 하지만 나중에는 어디서 이런 시어를 배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한자어나 외래어를 써야 유식해 보인다고 여기는 생각이야말로 좋은 글을 쓰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그가 우리말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약대생 시절 우연히 시작하게 된 학보사 기자 경험 때문이다. “약학 원서가 너무 비싸던 시절이었어요. 학보사 사무실에서 복사를 공짜로 할 수 있다고 해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죠. 정확한 맞춤법을 알려고 찾아보기 시작한 국어사전에서 알지 못했던 우리말의 매력을 발견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업실 책꽂이 한가운데에는 ‘1991년 11월 28일’ 발행된 날짜가 찍힌 국어대사전이 테이프로 동여맨 채 꽂혀 있었다. 그는 졸업 후 종로에서 약국을 운영하면서도 틈틈이 사전을 살펴보고, 우리말 시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손님이 뜸한 오전이면 매일 사전에 나와 있는 특이한 형용사나 부사의 용례를 메모장에 적어 놓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죠.” 그는 올해 말 지금까지 발표한 1800여 편의 시 중 150편을 골라 시선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김 시인은 쓰지 않는 언어는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순우리말 시 창작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들 때 몇 번 친 떡과 100번을 친 떡은 맛이 달라요. 우리말도 다양하게 사용해야만 감칠맛 나는 값진 언어로 남을 수 있죠.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말 시를 쓸 겁니다.”  ///동아일보
762    "글자들이 권총을 쏜다"... 댓글:  조회:2910  추천:0  2017-10-09
시말 : 표현의 한계를 말하다 김석준       ‘그는 선을 긋고 모든 것을 합산하며 또 다른 방정식을 세운다. 가장 덜 관습적이고 가장 정직한 정신의 대단한 민첩성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영혼의 시선』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예술 세계를 간명하게 정의한 언명인데, 이 말은 함기석이 행한 일련의 시정신과 절묘하게 맞닿아있음에 틀림없다. 금번 상재한 함기석의 『오렌지 기하학』을 읽는 내내 기존에 행했던 언어의 유희에 가까운 해체론적 사유를 넘어서 새로운 시의 방정식을 설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말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논리가 일거에 논파된다. 말이 기호와 결합하고 기호를 말과 이종교배 시킨 시말운동은 말의 논리를 철저하게 해체시킨다. 모든 것이 불연속적이고 말의 인과율이 잔혹하게 찢기고 파열하게 된다. 말과 세계 사이를 무한대로 발산시켜 표현의 한계를 극한으로 몰고 가다가 이내 그것을 한없이 수렴시켜 말이 곧 세계임을 증명하고 있다. “없다 ☞ 이것은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금 ☜ 이것은 사라진다”(「투명한 식사」중)로 탈바꿈하게 된다. 모든 것은 변이되고 발생과 소멸의 경계가 무너진다. 칸트의 인과율이 무너지고 초공간에서 벌어지는 고차원의 시문법이 발화된다. “상상”(「오렌지 기하학」중)의 극한을 내달리는 말은 불연속적으로 구현되는 세계 너머를 응시하고, 의미라고 지목되는 그 모든 양력과 부력이 치밀하게 반조된다. “뒤집힌 세상”(「몸시 절망한 남자의 몹시 이상한 보행법」중)을 재차 전도시켜 새로운 의미의 체계를 고도의 언어적 수사로 응결시킨다. 말이 새로운 말들 이끌고, 또 그 말이 말에 의해 질식하게 된다. 말의 묘법은 아르또의 잔혹극이다. “검은 피 검은 눈 검은 물”(「인드라 주행 코스」중)이 흥건하다. 물론 “말은 무색의 신경마취가스”(「고딕 계단을 공격하는 말개들」중)인 까닭에 그의 실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일단 말의 오묘한 마력에 중독이 되면 온몸이 만신창의가 된 채 죽음의 근방을 헤매게 된다. 말의 양력이 삶이라면, 그것의 부력은 죽음의 유혹이다. “말의 눈”(「어떤 市의 사물함」중)은 피히테의 새롭게 이식된 제3의 눈이거나 모든 인식을 전환시키기를 요구하는 “탈옥한 글자”(「탈옥수들」중)들은 “오류의 오류”(「어떤 市」중)를 응시한 채 말의 향연만을 탐닉하게 된다. 말의 심포지움, 그것이 바로 『오렌지 기하학』의 시적 정체이자, 말―사태가 현현시킨 시말의 극한값에 해당한다. 플라톤의 심포지움이 사랑의 외연과 내포를 총체적으로 논변했다면, 함기석의 그것은 말의 향연을 통해서 어떠한 말의 면모를 말―함수로 코드 변환시켰다고 할 수 있는가? 반복이 지배하는 프랙탈인가, 인간학의 새로운 방정식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이 세계 전체의 의미적 구조를 말의 가능적 함수로 치환시켰는가? 사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그것은 “불명료한 무한(∞)궤도”(「사과의 2차원 균등분할」중) 위를 질주하는 말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중차대한 사안이라 하겠다. 도대체 시인은 왜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 관한 의미 구조를 불연속과 해체라는 기이한 방정식을 통해서 말을 하고, 시말을 도발하는가?     코흐곡선 해안을 걷고 있다 벼랑 끝 하늘로 물고기들은 헤엄쳐 오르고 죽은 자들의 숨이고 육체였던 저 투명한 대기 속에서 빛이 제 눈을 검게 태우고 있다 제로(0)인 너와 제로(0)인 내가 만나 무한(∞)이 되었다가 더 큰 제로(0)로 되돌아가는 아름답고 비정한 원(Circle)의 우주 그것이 그대로 삶이고 죽음이고 사랑인 시 세계는 제로(0)와 무한(∞) 사이에서 녹고 있는 눈사람(8) 자신의 부재를 자신의 몸 전체로 목격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동자부터 녹아내리는 진행형 물질 우린, 죽음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시인의 말」전문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과 비견될 만큼 아름답고 심오한 함기석의 「시인의 말」은 『오렌지 기하학』이 펼쳐낸 조각난 퍼즐 같은 파편의 말들이 가닿을 수 있는 언어의 존재론적 심급이다. 말이 무한히 확산할 수 있는 원심력인 동시에 카오스로 향하는 말의 양력과 부력에 틀거리를 잡아주는 구심력이다. 말하자면 「시인의 말」은 시인의 담론적 사유가 총체적으로 함축된 일종의 메타담론에 다름 아니다. 코흐곡선, 즉 프랙털적인 반복이 지배하는 인간학적인 운명을 “제로”와 “무한” 사이에 위치시키면서, 말이 감당할 수 몫을 재귀시키고 수렴시킨다. “말의 현실”(「고딕 계단을 공격하는 말개들」중)은 세계의 현실이고, 인간학이 위치하는 존재의 현실이다. 마치 카프라가 이 세계를 새롭게 기술할 수 있는 물리학의 언어를 찾아 헤맸던 것처럼, 함기석은 「시인의 말」을 통해서 말과 존재의 양태를 기하학이라는 평면도형 위에 입체화시키고 있다.   차이를 도발했던 그 모든 것들이 반복으로 수렴한다. 차이의 차이도 반복이고, 오류의 오류도 반복으로 재귀한다. 우리는 진리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의 그것처럼 인간학의 기댓값을 완벽하게 고정시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등거리에 무수히 많은 안간학적 담론들이 점으로 존재한다. 양력도 같고, 부력도 같다. 말하자면, 제로와 무한 사이를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은 “코흐 곡선 해안”을 질주하는 동일한 운명이다. 차이를 도발했던 삶도, 차이를 지우기를 열망했던 깨달음도, 그 모든 함숫값이 동일한 폐루프(closed loop)로 닫혀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인의 말」은 차이를 욕망했던 『오렌지 기하학』의 재귀적 용법이자, 차이를 차이로 생산하고 기술하는 시말의 존재론적 근거이다. 존재의 呂律이 如如하게 연탄되기도 하고, “진행형 물질”인 “삶”과 “죽음”과 “사랑”이 시말을 도발하게 된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역전되고, 말이 말에 의해 말의 음가 전체를 동일성으로 치환시킨다. 모든 것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린다. 차이도 녹아내리고, 무를 욕망했던 그 무조차 여지없이 녹아내려 흔적조차 없어진다. 역으로 함기석이 시도했던 일련의 시말운동은 무의 운동인지도 모른다. 차이를 도발하고 표현의 한계를 넘어선 지대에 말과 낱말과 문장을 위치시키지만, 시말은 그 모든 차이를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치환시키게 된다. “예기치 못한 문장이 하나 우연히 태어나”(「행위4」중)지만, 이내 말은 “없는 말”(「없는 나라」중)이 되고, “피투성이 말”(「고고는 고고고 다다는 다다다」중)이 된다. 말이 감당했던 양력이나 부력 전체가, 차이를 욕망했던 말의 운동이, “같은 거리에 있는/점들의 집합”으로 “코흐곡선 해안”선을 무량하게 걷고만 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오렌지 기하학』이 펼쳐낸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이의 언어적 욕망들이 「시인의 말」 속에 내파한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제어되고 한계지어지게 된다. 만해의 「군말」이 『님의 침묵』 전체를 통어했던 것처럼, 함기석의 「시인의 말」은 모든 언어적 차이가 생성되는 말의 심급이자, 모든 차이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아름답고 비정한 원(Circle)의 우주”이다.     나는 텅 빈 우물 너는 망각을 담는 호수 나는 꿈꾸는 사과 너는 비의 발자국을 기록하는 음악 나는 사라지는 눈동자 너는 안개를 뿜는 바위 나는 이빨이 쏟아지는 하늘 너는 웃는 피, 뒤집힌 눈, 만개하는 만다라 나는 창녀 카오스의 유방 너는 돌고 도는 시간의 입, 웃는 틀니 「점2.空디스켓」전문     차이는 연기예요 우린 언제나 같은 우주에 있고 영겁 속에서 만물은 모두 평등하게 소멸해요 「벽에 비친 그림자 악사 빙」일부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 보일 게요 누군지 아시겠소? 아픈 방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오 「아픈 방」일부     P가 흐르고 눈이 내렸다 눈길에서 나는 눈과 길을 잃었다 나를 태우고 온 말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사방은 칠흑의 어둠이었다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숲」일부       “없는 당신”과 “없는 꿈길”과 “없는 삶”(「없는 나라」중)에 관하여 시말을 도발하게 될 때, 말은 어디에 당도하는가? 물론 함기석은 그 모든 것들이 “無無”를 기록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지만, 도대체 무가 겹쳐진 무무는 무엇을 지시하고, 또 나와 너 사이에서 어떤 삶―시간―세계의 진법을 설계하고 있는가? 표면적으로 볼 때 무무는 空의 다른 이름이거나 인간학 전체를 통어하는 시인만의 상징어인데, 그것은 어떤 운명의 “좌표”평면 위를 횡단하는 초공간의 언어인가? 우리는 시간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간 위에 활보하는 인간학적 운동이 어디로 재귀해 들어가는지 또한 정확하게 기술할 수 없다. 그저 “망각”이 최선이고 “돌고 도는 시간의 입”속으로 함몰하는 것이 차선이다. 우리는 말소되고 지워지는 “空디스켓”이자, “無無의 책”으로 존재하는 허무한 말의 운동이다. 우리는 안온한 몽상을 “꿈꾸는 사과”였다가 이내 “텅 빈 우물”이 되는 소진되는 적멸의 언어이다.   “최초의 말”(「고딕 계단을 공격하는 말개들」중)이 시공간 위에 발화된다. “식인 글자族”(「글자族이 사는 무인도」중)이 의미의 세계를 야금야금 잠식시켜 언어의 가능적 조건들을 질식시킨다. “문장의 벽”(「ING 살인 사건」중)에 걸려 넘어져 의미가 훼손되고 논리의 구조가 왜곡된다. 말하자면 함기석의 『오렌지 기하학』은 2차 평면 위를 질주하는 말―사태들을 고차원으로 입체화시켜 표현의 한계를 실험 중이다. 도상과 기호와 다양한 그림을 시말과 병치시키면서, 시인은 말의 구조 전체를 “영겁”이라는 시간 위에서 현동시키고 있다. “차이”의 삶이 “연기”로 승화되고 또 존재의 존재성이 응시된다. 존재란 “평등”이고 “소멸”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고, 존재를 기술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한, 우리는 공간화된 말을 통해서만 인간학적 의미를 붙잡아 맬 별다른 방법이 없다.   시인에게 말과의 상면은 진기하다 못해 극적이기까지 한데, 그것은 말의 위치가 세계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정하기 때문이다. 극한으로 치달아가는 인간학의 심연에 치유 불가능한 시라는 “아픈 방”이 존재한다. “꿈과 상처”(「방향표시판 혹은 스텔스 機」중)가 동시에 매만져진다. 함기석에 말의 양력과 부력이 고스란히 기입된 문장은 일종의 공포의 권력이다. 아브젝트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눈앞에 현시되고, 죽음이 욕망된다. 아프다. 이 세계가 아닌 곳으로 떠나 사라진다. “이 문장이 목을 조르”(「지난여름 파도에 떠밀려온 이 시는」중)고, “두개골이 깨진 문장”(「색채강박증 교사 소괄호의 바나나를 둘러싼 음모들」중)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홀로 아파 시를 쓴다. 당신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우리 모두는 “아픈 방”에 갇힌다. 마치 “죽은 말”(「컬러 킬러의 흑백 사체」중)들이 “문장의 뒤편”(「ING 살인 사건」중)으로 사라져 말이 아닌 곳에서 시말을 위치시키듯, 시인 함기석은 말의 극한값을 표현의 극한값으로 치환시켜 말해질 수 없는 말을 꼬드기고 있다.   “초원의 말”(「방향표시판 혹은 스텔스 機」중)들이 중구난방으로 뛰어다니고, “말장기 놀이”(「빨간 돼지를 잡아라」중)가 행해진다. 만약 말의 위치가 인간학의 존재론적 위치를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말과 세계 사이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나는 P이고, ∼P이고, P∧∼P이고, P∨∼P이다. 나는 배중률이면서 동일률이고, 나는 나 아닌 동시에 나이다. 나는 세계인 동시에 세계가 아닌 나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차이인 동시에 합이기도 하다. 나는 이 우주 공간을 떠도는 리좀이다. 나는 말에 붙들린 “글자”의 정령이자, 문자들을 질식시키는 “空中無色無受想行識”이라는 문자의 가능조건이다. 나는 ∼이고, ∧이고, ∨인 동시에 기타 등등의 도상이자 수식기호이다. 나는 일종의 연산기호로 존재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의 벡터로 표현되는 나의 정체이기도 하다.   사라진 말들의 조합 속에 내가 있고, 또 “꿈속도 꿈 밖도 아닌 점이지대”에 나라는 존재가 꿈틀거린다. 때론 “글자들이 날아다는 숲”에서 방황하며 말의 심급이 무엇인지 고뇌하기도 하면서, 때론 “숲 밖 먼 우주”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시인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존재의 여율을 문자에 응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저 거대한 무무의 의지가 보이고, 죽음 쪽으로 무한히 질주하는 말의 궁극적인 심급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치 아도르노가 형이상학이라는 마물을 구멍 틈으로 은밀하게 들여다본 것처럼, 시인 함기석도 나에 부과된 존재의 단층지대를 주밀하게 수식으로 표현하면서 인간학이 무엇인지를 무의 표상작용으로 기술해가고 있다.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면 그건 사랑이고 죽음일 거다 우리의 말과 수학기호, 기억의 불완전성을 우주는 시간의 불완전성 정리로 정리해 명료히 망각할 거다 「제로 행성―규락에게」일부     글자들이 권총을 쏜다 글자들이 권총을 쏘며 튀어나온다 「탈옥수들」일부     “언어는 날마다 거짓말만 하는 나라는 앵무새”(「언어는 무엇일까?」중)로 표상될 때, 우리는 말의 다양한 지층 내부에 무엇을 기입하는가? 영원이 추상되고, “찰나”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른다. 만약 이 세계가 “미지수 X”로 표상되는 불연속의 공간이라면, 끊임없이 “미분”계수로 분할되는 “무한의 빛”은 어디로 향하는가? “허수”이고 “복소수”이다. 우리는 “망각”으로 향하는 “사랑”이자 “죽음”이고, 궁극에는 “미궁”으로 향하는 적멸이다. 표현할 언어는 이 세계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은 주검의 그것으로 “탈골”된다. 헛된 말이 발화되고 의미가 사라지자, “박제된 문장”(「알몸으로 계단을 오르는 투명한 여자」중)만이 무의미한 의미의 지층을 형성할 따름이다.   모든 것이 어둠이고 아포리아로 재귀하는 운동이다. 스피노자의 그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정리(theorem)로 이 세계를 간명하게 설명할 수 없고, 그렇게 발음할 “낱말”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말은 있으나, 그 의미의 지대를 정확하게 표현할 언어가 없다. 말하자면 이 세계의 앞면에 “무한”이 존재하고, “망각”만이 인간학의 진리함수를 증명하는 한, 그 어떤 “공리계”로도 우리는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를 증명할 수 없다. 불확정성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불완전성이 이 세계를 증명한다. 우리는 실수이면서 허수이고, 복소평면 위를 질주하는 표현이 불가능한 하나의 허구이다. 캄캄하고, “어두운 육체”가 빛을 한없이 빨아들인다.   시인에게 말은 병이고, 분열이고, 불안이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해지게 만드는 패러독스다. 이를테면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백지병원”(「문장분열증 테스트」중)이라는 공간 위를 질주하는 탈주의 언어들의 자유분방한 향연인데, 그것은 이 세계가 발산하고 수렴하는 극한의 형식을 언어의 극한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 세계의 주체는 말이고, 문장이고, 글자들이다. 말해질 수 없는 말이 새로운 세계를 생산하고,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건설한다. 말이 심문되고, “죽음의 책”(「빨간 돼지를 잡아라」중) 위를 삶으로 질주한다. 말의 양력이 “탈옥한 글자”의 신기원이라면, 그것의 부력은 모든 의미의 체계를 산종시키고, 마침내는 그 모든 것을 의미 아닌 것으로 “사살”하게 된다. 조종이 울린다. “권총”이 의미로 지목되었던 “글자”들을 사살하고, 의미의 공간 전체를 “전복”시켜 인간학 전체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겹침 현상이라고 언명하고 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해서 말의 운동은 이미 예정된 인식의 수형도 위를 종주하는 체계의 언어가 아니라, 불연속적인 지층 위를 마구 내달리는 리좀이고, 탈주이다. 모든 것이 파열하고 해체된다. 나도 해체되고, 나를 말했던 말도 여지없이 주름지고 접혀 도주선 위를 질주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말해졌던 말들은 일종의 체계로부터의 일탈이자 탈옥인데, 그것은 말이 표현하고 존재했던 말―함수 전체를 표현의 한계 바깥으로 몰고 가는 행위라 하겠다. 모든 것은 의미를 발음하는 낱말이나 문장들의 화려한 제의가 아니라, 묵음을 발음하는 무의미한 “다다”이고, “고고”(「고고는 고고고 다다는 다다다」중)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행해졌던 그 모든 인간학적인 의미들은 정확하게 의미를 지목하기 못했거나, 의미 아닌 것으로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유폐는 기나긴 현기증이자 (허공을 떠도는) 시간의 돌   Z는 사라진다 Z의 육체와 (낱말들) Z의 그림자도 Z의 삶과 함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Z는 사라진다」일부     끝났다 시간의 왼손은 자신의 음부를 가린 오른손을 자른다 로 시작되어 시작된다 언어의 처형지에서 언어가 시작된다 …(중략)… 나의 시작은 시작 전후와 함께 소멸하고 흑백 꽃비가 내린다 당신의 시작에 의해 이제 최초의 문장이 세계가 호흡이 시작된다 「시작」일부       미지의 공간이, 미지의 어둠이, 미지의 절벽이 말 앞에 놓인다. “달리는 말” “춤추는 말” “꿈꾸는 말” “왼쪽의 말” “자궁의 말”(「방향표시판 혹은 스텔스 機」중)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미궁으로 질주하다 사라진다. “사라진다”가 말할 수 있는 의미의 전부이고, “들어온다”는 허구이고 절망이고 실패이다. 이 세계로 들어왔던 말들은 사라진다로 향하는 처연한 운명이다. 말해졌던 말들이 파열하여 찢기고 흔적으로만 남았다가, 끝내는 의미 아닌 것으로 소진된다. 역시 사라진다. 인간학이 꿈꾸었던 전체에 관한 담론적 욕망이 부분으로 소진되고 고갈된다. 이 또한 사라진다. 사라진다가 정답이고, 절멸은 또 다른 시작의 출구이기도 한데, 인간학을 포함한 이 세계 전체가 원순열로 얼기설기 엮여져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다는 들어온다로 역전되고 전복된다. 만약 삶―시간―세계가 차이의 다양한 구성체를 반복으로 증명하고, 그것의 궁극의 지점에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완벽하게 스스로를 증명하는 카오스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마치 함기석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이 무한과 제로 사이를 극한으로 벌려놓고, 이 양자 사이에서 표현의 한계를 돌파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학적 행위들은 동사 “들어온다”와 “사라진다” 사이를 영원히 배회하는 일종의 노마드에 다름 아니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미궁 속”에 빠진 채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리 잠자처럼, 우리는 미해결의 난제들로 중층 결정된 시간과 공간 위를 질주하며 파열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말을 꼬드겨도 인간학이 해체되고, 말의 침묵에 은거해도 삶은 언제나 짓이겨지고 파열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말의 처음과 끝을 붙잡아 매야 하는가? “말의 심장과 내장”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의 흰 뼈”가 탄화되어 끝내는 “말의 주검의 잔해”(「아프리카」중)들만 즐비한 이 세계를 우리는 어떤 태도로 건너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는 저 말의 세계를 응시하면서 “낱말들은 왜 계속해서 회귀하며 생멸하고 침묵하는가?”(「왼손잡이 상상책」중)라고 반복적으로 반문하고 읊조려야만 하는가? 함기석의 『오렌지 기하학』이 의미 있는 것은 말과 세계 사이에 놓인 간극을 헤집고, 재차 그것을 시말로 발화시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무수한 차이를 시말 속에 응고시켜 새로운 말의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 말조차 다시 시간과 공간에 유폐된 채, 재귀하고 순환하는 그 운명의 자리에 말이 있고, 낱말이 있고, 또 문장을 발화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끝의 자리에 영원한 시작이 존재한다. 해체와 파열의 자리에 건설이 있고, 신생이 존재한다. 마치 이 거대한 우주의 물리학적인 운동이 압축과 팽창이라는 두 이질적인 운동에 의해서 신생과 소멸을 반복하듯이, 우리는 끝과 시작이 상호 맞물려 있는 저 우로보로스의 원형적 신화 속을 위태위태하게 걸어가는 동일한 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모든 차이의 욕망도, 그 차이를 연기시키고 지연시킨 차연에의 갈망도 모든 앎에의 의지가 맞닥트린 시작이자 끝 지점에 존재하는 미궁이라 하겠다. “미완”이 세계의 끝자리에서 미소 짓고 유혹하는 한, 우리는 말에 매혹되고 유혹 당한다. “無의 백지” 같은 존재의 여백 위를 알발로 걸어가면서, 시인은 말의 처음을 몽상하고, 말의 끝자락에 자신이 위치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시작이 비로소 시작된 자리에 함기석의 시말이 존재하고, 『오렌지 기하학』의 언어적 열망이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론 무한의 저 광활한 심연을 무연히 응시하면서, 때론 말이 감내할 수 있는 표현의 한계를 총체적으로 심문하면서, 시인 함기석은 말해질 수 없는 것과 표현될 수 없는 것 사이를 다양한 언어적 층위로 이접시키고 연접시키면서 말의 한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표현의 한계를 심문하고 있다 하겠다.     출생 : 충남 아산 약력 :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시집) ,,, (평론집) 2011년.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평론)     //                           
761    문학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인간성을 써라... 댓글:  조회:3254  추천:0  2017-10-07
국경과 언어 넘어선 '인간성' 탐구… 이시구로의 문학세계 (ZOGLO) 2017년10월6일  가즈오 이시구로 [A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좋은 소설이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세계 전역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비전이 담긴, 그렇지만 상당히 단순한 소설이라고 나는 믿는다. 대륙을 넘나들지만 세계의 어느 후미진 구석에서도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는 인물들을 품고 있는 그런 소설 말이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의 말이다. 이시구로는 잊혀지고 왜곡된 기억을 복원해 보편적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가다. 실제 벌어진 사건들을 종종 등장시키지만, 역사에 직접적 개입을 자제한 채 철저히 인간성 자체에 초점을 둔다. SF소설의 형식을 차용하더라도 배경이나 소재에 무게를 지나치게 싣지는 않는다. 민족과 언어를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작가이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1954년 11월8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이시구로는 영국 국립해양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한 아버지를 따라 1960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켄트대에서 철학을, 이스트앵글리아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한 이시구로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기도 했고 사회복지사로 일한 경력이 있다. 이시구로는 1982년 발표한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이 주목받으면서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영국에 거주하는 일본 출신 중년 여인 에츠코의 시선을 통해 전후 일본의 황폐한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언급하긴 하지만 전쟁이나 폭격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다만 과거를 회상하고 싶지 않다며 딸에게 일본 이름을 붙이기 반대했던 에츠코의 기억을 파고든다. 이시구로는 이 소설로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수상했다. 이후 1980년대에 발표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 등 3편으로 동시대 영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제공] 1986년작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제국주의에 가담해 선동적 작품을 그렸던 늙은 화가 마스지 오노의 회고담이다. 딸의 결혼을 앞두고 과거의 인물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전범'이었던 옛 행적이 하나둘 드러난다. '남아 있는 나날'에선 영국의 한 저택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주인의 호의로 6일간의 생애 첫 여행을 떠나면서 과거가 복원된다. 그의 인생과 기억에도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 1930년대 유럽의 역사가 얽혀 있다. 영화화 되기도 한 '남아 있는 나날'로 1989년 부커상을 수상한 이시구로는 배경과 인물이 서로 다른 세 작품을 두고 "같은 책을 세 번 썼다"고 했다. 그의 작품에서 배경과 사건은 본질이 아니다. 그는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사는 인간을 통해 "한 개인이 불편한 기억과 어떻게 타협하는지" 그린다고 설명한다. 1995년작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서 이시구로는 새로운 실험에 나선다. 과거와 현재·미래가 없는 초현실적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유명 피아니스트가 성공을 위해 버려야 했던 가치들을 되살리려 하지만 실패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했다. 현대인의 쓸쓸한 자화상이기도 한 이 소설은 '카프카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첼튼햄상을 받았다. 이시구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인간은 틀릴 수도 있는 신념을 전력으로 붙잡고 자기 삶의 근거로 삼는다. 내 초기 작품들은 이런 인물들을 다룬다. 그 신념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환멸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건 그저 그 탐색이 어렵다는 걸 발견한 것뿐이고,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20년 전 부모의 실종사건을 파헤치는 한 사립탐정의 이야기인 '우리가 고아였을 때',(2000), 복제인간의 삶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성찰한 '나를 보내지 마'(2005), 최근작인 '파묻힌 거인'(2015)까지 이시구로의 작품 대부분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 '창백한 언덕 풍경'과 '부유하는 세상들의 화가' 등을 옮긴 김남주 번역가는 "서양문학을 번역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우리와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지식과 비판을 갖춘 독법이 필요한 남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을 잊는 순간이 있다. 이시구로의 작품은 이런 면에서 인간 공통의 보편성에 기초해 읽는 이를 무장해제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이시구로의 작품에 내재된 것은 문학적 계산이나 포석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히 분비되는 재능인 것 같다. 이런 미묘한 표현 방식을 지닌 작가가 있다는 것은, 해야 할 말보다 훨씬 많은 말이 넘치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이라고 덧붙였다.
760    올해 노벨문학상 주인 나타나다... 댓글:  조회:2920  추천:0  2017-10-07
노벨 문학상,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 (ZOGLO) 2017년10월5일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5일(현지시간)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 AFP=뉴스1 시상식은 12월 10일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올해 노벨 문학상은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5일(현지시간)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노벨상위원회는 이시구로는 "위대한 감정적(emotional)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우리의 환상적 감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으며 1960년 부친이 영국 국립해양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영국에서 살게 됐다.  이시구로는 케너베리 켄트대학을 졸업한 뒤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남아있는 나날'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이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이 수상했다. 순수 문학이 아닌 가수의 문학상 수상으로 일각에선 노벨위원회가 대중성에 치우진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기려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평화상 분야가 제정됐으며 경제학 부문은 1969년 새로 추가됐다.  노벨 재단은 전 세계 경제위기로 기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2012년부터 상금을 기존 1000만크로나(14억1000만원)에서 800만크로나(11억2800만원)로 대폭 줄였다가 올해부터 900만 크로나로 100만크로나(1억4080만원) 올렸다. 시상식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이 사망한 날인 12월 10일 열린다.
759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음악을 낳다... 댓글:  조회:2826  추천:0  2017-10-06
윤이상 100년, 분단을 넘어 그의 음악을 껴안을 때 [오마이뉴스 글:이채훈, 편집:홍현진]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을 아시는가? 독일에 머물던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고문 끝에 '동베를린 간첩단'으로 조작된 사람, 조국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은 비운의 음악가.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지만 우리는 아직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분단과 냉전의 기득권 체제가 그의 '인간'과 '음악'을 질식시키고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  윤이상, 그는 20세기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힌다 ⓒ 참여사회 그가 20세기의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힌다는 사실은 표면적인 찬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958년 다름슈타트(Darmstadt) 음악제에 참가, 음악인지 아닌지 모를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를 목격한 윤이상은 "산더미를 준다 해도 이런 짓을 하기는 싫다"고 했다. 그는 슈토크하우젠, 루이지 노노,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에 매료됐지만, "교묘한 형태의 현대식 고층건물" 같은 이런 작품들을 쓸 생각이 없다고 했다. 대신 그는 동양 음악의 '주요음(Hauptton)' 기법을 도입, 노자의 철학과 같은 환상의 세계를 그렸다. 서양음악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직선으로 이뤄진 도형이지만, 동양음악은 한 획으로 이뤄져 있으며 굵기가 계속 변한다.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발표한 과 1966년 도나우에싱엔(Donaueschingen) 음악제에서 선보인 은 '주요음' 기법을 사용한 걸작이다. 그는 궁지에 몰려 비틀거리던 서양음악에 동양의 혼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력을 창조했다.  지난 봄, 햇살 따뜻한 남쪽 통영의 푸른 바다에서 그를 느낀 게 기억난다. 그의 기념관에서 한참 선 채로 의 아득한 선율에 마음을 맡겼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 모티브였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39세 때 독일로 떠나서 7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국땅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아름다운 고향의 소리는 언제나 그의 마음에 사무쳤다. 이 통영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고, 생가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게 한 야만의 레드 콤플렉스, 그것이야말로 분단과 냉전이 낳은 가장 깊은 적폐 아니었을까.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만든 사람은 f..였다. 1964년, f..가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환영 행사에서 본(Bonn) 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을 연주했다. 이어진 커피 타임, 뤼프케 서독 대통령이 좌중에게 윤이상을 소개하자 f대통령은 아무 표정도 없이, 한마디 말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윤이상, f.., 뤼프케의 순서로 자리가 배치됐는데, 음악에 식견이 있던 뤼프케 대통령은 f..를 가운데 두고 윤이상을 향해 자꾸 에 대해 얘기했다. f..는 그 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f..는 윤이상과의 첫 만남을 불쾌하게 여긴 게 분명하다. 4·19혁명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 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은 5·16쿠데타의 주역 f... 두 사람은 아무래도 서로 좋아할 수 없었다.  불길한 첫 만남은 3년 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됐다. 19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렀는데,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자 f.. 정권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고문에 굴복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책상 위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강타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서 벽에 유언을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인류의 지성과 문화를 부정하는 한국 군부의 폭거에 세계의 음악가들이 팔을 걷어붙였고 f..는 윤이상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납치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 것" 등을 요구하고, 이를 무시할 경우 "적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협박한 뒤 윤이상을 한국에서 추방했다. 윤이상은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f..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  진정한 예술가는 당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며,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내적으로 성숙시켜 예술로 꽃피운다. 윤이상은 분단과 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을 기꺼이 바쳤다. 5·18의 참상을 듣고 몸부림치며 를 작곡했고, 1987년에는 남쪽 시인들의 노랫말로 칸타타 를 작곡, 북쪽 예술가들과 함께 평양에서 초연했다. 그는 고향 땅을 밟고 싶었고, 음악으로 민족을 하나 되게 만들고 싶었지만 q.. 군부정권은 그의 입국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j..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한국 정부의 인식 수준은 여전히 저열했다. 윤이상은 방한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는 편지를 대통령 앞으로 보냈는데, 총리는 "지난 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것, 앞으로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윤이상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내용이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 윤이상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는 꼴이었다. 이리하여 윤이상이 고향땅을 밟을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그는 이듬해, 1995년 11월 3일, 머나먼 이국 땅 베를린에서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이상의 영혼은 지금도 한반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너무 몰랐다. 무엇보다, 그를 분단의 감옥에 가뒀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여 금기시 한 것이야말로 적폐였다.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유배된 예술가, 분단의 벽에 머리를 짓이기고, 통한의 한반도를 끌어안은 채 음악으로 울부짖은 윤이상…. 그의 탄생 100년을 맞아 이제 온전한 마음으로, 자랑스런 마음으로 그의 음악을 받아들이자.   
758    [고향문단소식] - 룡정엔 문사 - 송몽규 고택과 유택이 있다... 댓글:  조회:2852  추천:0  2017-10-02
룡정윤동주연구회, 송몽규를 고택을 찾아 (ZOGLO) 2017년10월1일  송몽규의 고택을 찾아서 - 룡정.윤동주연구회 송몽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현지답사를 사단법인 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는 지난 9월 28일 청년문사이며 반일지사인 송몽규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자취가 어린 룡정지역을 답사하면서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인 송몽규의 넋을 기리였다. 작가, 교수, 교직원, 매체기자 등으로 무어진 답사팀은 명동촌의 송몽규의 고택, 그가 다녔던 명동학교 옛터, 달라자 학교 옛터, 은진중학 옛터, 대성중학 옛터 등 사적지들을 일일이 답사하였다. 답사팀은 복원된 고택 마당에서 송몽규의 작품인 시 “밤”, “하늘과 더불어”를 랑독하였고 현지인들로부터 송몽규의 고택과 그가 다닌 학교에 깃든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답사끝에 지난해 《윤동주 평전》의 련재에 이어 올해 《청년문사 송몽규 소전(小传)》의 집필을 마친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 회장이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라는 제명의 특강을 했다. 특강회 전경 김회장은 특강에서 민족사의 굵직한 사건과 대량의 귀중한 사진자료를 곁들어 송몽규의 일대기에 대해 강의, “송몽규는 한국의 황순원, 김동리, 서정주보다도 일찍 등단한 문학가이자 일제에 저항하다가 윤동주와 나란히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철저한 반일지사이다. 비록 윤동주의 후광에 가리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윤동주와 더불어 또 한분의 룡정이 낳은 걸출한 인걸에 대해 기억해야 한다”고 력점을 주어 말했다. 명동중학교 옛터 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 일찍 2016년 5월 15일에 지역사회에서는 맨 처음으로 송몽규를 기리는 뜻깊은 행사를 펼친바 있다.한편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에 룡정 지신향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에서 윤동주와 석달을 사이두고 태여났다. 1935년 은진중학교 재학시기에 쓴 소설 “숟가락”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당선작으로 선정되여 룡정을 크게 놀래웠다.그해 3월 말에는 중국 락양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군사지식을 습득했다.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였다가 석방되여 1937년 4월 룡정의 대성중학교(현 룡정중학)에 편입되였다. 그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고 1942년 4월 윤동주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교또제국대학에 입학, “반일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였다가 1945년 3월 7일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윤동주와 한달 간격으로 옥사했다. 유골은 룡정 지신향 장재촌에 묻혔다가 1990년 룡정 동산 윤동주 묘소의 곁으로 이장되였다. 사진/ 주금철, 김향자   ///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757    윤동주 = "병원"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댓글:  조회:3437  추천:0  2017-10-01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 '흰 그림자' 전문   윤동주의 '흰 그림자'로 살아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고 백영 정병욱(白影 鄭炳昱, 1922~1982)이다. 윤동주가 세상에 '시인'으로 알려지기까지에는 '흰 그림자(白影)' 정병욱 박사의 노력이 가히 절대적이었다. 영화 에는 등장하지 않아 그 이름 석자를 여기 한 줄 크레디트로 올리려 한다. 윤동주의 흰 그림자로 살아간 사람 ▲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249.정병욱의 선친이 양조장을 경영한 1920년대 점포 양식의 건축물인데다 윤동주의 시를 보관한 곳이다.ⓒ 신윤식 경남 하동 출신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국어국문학자다. 한국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에 출중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발행인 고 한창기 선생과 함께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 70년대 명창들의 완창을 그대로 채록하여 LP판을 발간하기도 했다. '대접받지 못한' 판소리를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당당히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정병욱은 하동에서 태어나 경남 남해와 전남 광양 망덕 포구에서 자란 적이 있다.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249번지에 단장된 빈 가옥 한 채. 이 집은 2007년도에 등록문화재 341호로 지정이 됐다. 일제 강점기 한글 사용이 금지된 시기에 민족시인 윤동주의 한글 유고를 보관한 공로(?)로 문화재가 된 것이다. 정병욱의 연희전문 학창시절 망덕 포구의 이 가옥은 그의 선친께서 당시 양조장을 경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연희전문 시절 선배 윤동주와 후배 정병욱은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했고, 기숙사를 나와서 하숙할 때도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 연전 졸업 무렵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내려고 18편을 추려 시집 머리에 쓸 내용도 첨부하여 3부를 필사한다. 이때 시집의 머리말로 준비한 내용이 이른바 '서시'다. 한 부는 연희전문 교수였던 이양하에게, 또 한 부는 본인이, 그리고 마지막 한 부는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안타깝게도 동주 본인의 시집도, 이양하 교수에게 맡긴 시집도 사라졌다. 다만 정병욱이 보관한 시편들만 이 등록문화재 431호에서 잘 보관되어 있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를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병욱은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징병으로 끌려가기 전 자신이 보관해오던 윤동주의 시 원고를 고향의 어머니께 부탁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새로 만들고(創氏), 이름을 바꾸고(改名), 모국어까지 사용 못하는 암울한 시기에 우리 글로 새겨진 원고를 보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접 쓴 필사본 세 부 중 한 부만 살아남았다... ...   ▲ 정병욱이 보관한 원고의 겉표지시집 제목 라고 적고, 다른 쪽은 정병욱 형앞에 윤동주 보낸다고(증) 적혀있다.ⓒ 정학성 책 머리에 실을 '서시' 외에 보관된 시 18편. 다시 적어 봐도 대단한 시편들이다.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 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 '별 헤는 밤'. 이 시들이 사라졌다면 우린 윤동주를 알고 있을까? 얼마나 중요한 시편들인지를 여러 통계들이 말해준다.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맞았던 2007년도에 문인 단체들은 시인들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우리 시 10편을 조사했다. 유일하게 윤동주만이 10위 안에 두 편의 시를 올렸는데, 바로 보관된 '서시'와 '별 헤는 밤'이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설문조사에서도 늘 앞뒤를 다투는 두 편의 시다. 1920년대 점포 주택이라는 건축적 특성도 감안했지만, 그런 시들을 안전하게 보관해준 가옥이기에 등록문화재 대접도 당연하지 않은가. 지워진 원래 제목 ▲ 빨간 원 안에 '병원(病院)'의 흔적정병욱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윤동주가 '병원'으로 적었다가 지웠다고 증언했다.ⓒ 오병종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시집 제목이다. 영화 마지막에 동주의 일본 유학시절 영문과 교수님 친구의 딸로 등장하는 쿠미와의 대화가 아직도 귓전에 남는다. 시 제목이 뭐냐는 질문에 동주가 대답한다.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침묵이 흐르다 한참 후에 발음되는) ...시!" 그 대화로 영화는 끝나고 바로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그 여운 탓인지 관객은 아무도 일어서지 않고 크레디트를 쳐다본다. 드문 일이다. 모든 자막들이 다 올라갈 때까지 나도 관객들 속에 앉아 있었다. '서시'에 등장하는 시어들. '하늘', '바람', '별'이다. 우주를 형성하는 상징들이다. 자연현상의 절대성을 갖는 경외의 대상으로 형성된 시어들이다. 우주의 상징들은 시집의 머릿말이 되었고, 자신의 시 18편이 그와 동격이라는 의미로 나란히 나열돼 마지막에 '시'라고 마침을 했다. 우주현상과 같이 취급하고자 한 그 만의 시집 명명법이었으리라. 윤동주가 첫 시집 이름에 최상의 자부심을 담은 셈이다. 그 의미를 안 이준익 감독은 그 대목에서 '시' 앞에 그렇게 큰 '쉼'을 연출했을 것이다. 고 정병욱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시집 제목이 이었다. 원고 표지에도 지웠다 쓴 흔적이 있다. 시 제목이기도 한 은 병든 우리사회를 상징하여 처음에는 그렇게 정한 듯 하다. 그러나 은 지워졌고, 당당하게 자신의 시를 우주현상들과 나란하다고 적었다. 부끄러워하며 '참회'하는 이미지로 가득한 동주가 그처럼 자부심 가득 담아 시집 제목을 다시 고쳐준 '반전'은 우리에겐 큰 행운인지 모른다. 독자로서 고급진 그의 명명이 고맙다. 또 다른 사람들 ▲ '서시' 원고시집의 제목이 된 시어들을 빨갛게 표시했다.ⓒ 정학성 정병욱과 윤동주의 관계는 여동생 덕희(1931~2015)와 아우 병완(88세)에게도 연결이 된다. 연희전문을 거쳐 서울대를 졸업한 정병욱은 서울대 교수가 되기 전 잠시 부산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마침 여동생 덕희는 그 곳 학생이었다. 정병욱은 여고생들에게 교과서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영롱한 언어로 된 동주의 시를 들려주었다. 후에 그는 여동생에게 사람을 만나러 가자고 하여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1927~1985,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소개해서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윤인석 교수(현 성균관대)가 있다. 학생 신분으로 유명을 달리한 동주에게는 후손이 없어 윤인석은 유족을 대표하는 일에 나설 뿐 아니라, 동주를 기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렇게 정병욱은 윤인석의 외삼촌이 됐다. 이제 아우 병완의 사정을 보자. 정병완은 국립도서관 사서였다. 1970년 10월 국립도서관에서 '시인 윤동주 유고전'을 열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은퇴하여 경기도 안성에 거주하는 정병완(88)씨의 얘기다. "당시 열람과장을 맡고 있을 때인데, 남산으로 옮기기 전 소공동에서 마지막 행사로 '윤동주 유고전'을 열었죠. 윤동주 서거 25주년, 국립도서관 25주년이 맞아떨어졌어요. 형님이 보관한 원고, 강처중씨가 보관하다 유족에게 맡긴 원고,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용정서 가져온 원고들을 모아서 함께 전시회를 했습니다. 형님 영향으로 모든 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기획이 가능했죠. 근데 당시 어떤 일이 있었냐면, 마침 일본 국회도서관 사서인 우지고쯔요시(宇治鄕毅)씨가 무슨 일로 우리 도서관을 방문했었는데, 내가 안내하여 전시내용을 상세히 보고 갔습니다. 윤동주 시에 깊은 관심을 갖더라구요. 윤동주가 독립운동 하다 잡혀 후쿠오카에서 옥사했다고 말했고, 일본 기록이 없다는 얘기도 했죠." 일본으로 간 우지고 쯔요시는 윤동주의 기록을 찾아나섰다. 문서 공개시점에 달하자 기밀 문서들이 나왔다. 영화의 주인공들인 윤동주와 송몽규의 법원 판결문을 찾아서 한국에 전해준 이가 바로 우지고 쯔요시다. 이를 윤일주가 번역하여 1977년 12월호에 "새로 발견된 자료, 순절의 시인 윤동주에 대한 일본 '특고경찰'의 비밀기록"으로 실어, 윤동주의 억울한 죽음의 실상을 처음으로 상세히 알렸다. 우지고와 정병완의 인연의 결과다. 둘은 공교롭게도 사서에서 후에 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각자 은퇴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일본 오끼나와에서 조용히 지내며 가끔 통화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듯 정병완과 병욱, 덕희, 세 남매는 윤동주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유족을 제외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강처중이나 여기 소개한 정병욱 가족들이야말로 윤동주 시를 다시 살려낸 특별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평생에 한 일 중 가장 자랑스런 일을 꼽으라면 "동주를 알린 일"이라고 말했다. 동주의 시 제목 '흰 그림자'를 의미하는 '백영(白影)'을 호로 사용한 국어국문학자. 영화 크레디트를 대신해 여기 한 줄 이름을 써둔다. 정.병.욱. ▲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와 정병욱정병욱이 2년 후배였지만 둘은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소설가 김송씨의 집에서 함께 하숙하기도 했다.ⓒ 윤동주기념사업회   ▲ 경향신문에 발표된 .
756    불멸의 시인 - 윤동주와 불멸의 문사 - 송몽규의 판결문 댓글:  조회:3564  추천:0  2017-09-30
사면 도장 찍힌 윤동주 판결문(도쿄=연합뉴스) 일본 교토지검이 보관 중인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판결문. 판결문에는 윤동주 시인의 성이 '윤'이 아닌 '히라누마'(平沼)로 표기돼 있으며 성명 표기 바로 위에 "쇼와(昭和) 21년(1946년) 칙령 제511호 대사령에 의해 사면됐다"는 문구의 도장이 찍혀 있다. (곤타니 노부코 씨 제공) 1944년 3월과 4월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 판결    본적 조선 함경북도 청진부군 포경마을 76번지  주거 교토시 사쿄꾸 다나까다카하라쪼(京都市 左京區 田中高原町) 27번지 다케타 아파트내  사립 도지샤(同志社) 대학 문학부 선과학생 히라누마 도쵸(平沼東柱)[윤동주] 대정 7년(1918년) 12월 30일생    위 사람에 대해서 치안, 유지, 법위반 피고사건에 있어서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다카도(江島孝)가 관여하는 상부심리를 거치는 판결을 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이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에 있는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소화 17년(1942년) 3월 일본에 건너와서 일시적으로 동경 릿꾜(立敎)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며, 같은 해 10월 이후 교토 도지샤(同志社)대학 문학부 선과에 전과를 해서 현재에 이르는 사람으로, 유년 시절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며 교우에 감화 등에 의해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 사이에 소위 차별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원망의 생각을 가지고 일본의 조선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시키며,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 한다 라고해서, 그 결과 이에 따라서 조선민족을 해방시키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써 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키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선민족의 현시점에 있어서 실력 또는 과거에 있어서 독립운동 실패의 발자취를 살피며, 조선인의 능력과 민족성을 향상시키며 독립운동의 소질을 배양해야만 하고,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를 하기에 이르러, 대동아 전쟁의 발발에 직면해있는 과학력이 열세인일본의 패배를 몽상(夢想)하고 그 때가 조선의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고 얻을 수 있으며, 일본이 망한다고 하는 신념을 갖추었으며 신념을 굳게 하고자 목적달성을 위하여 도지샤(同志社) 대학의 전교한 후에 이와 같은 의도를 가지고 거주하고 있는 교토 제국 대학 문학부 학생인 송촌(宋村),몽규(夢奎)등과 자주 회합을 해서 상호의 독립의식의 양양을 고취시키는 것 외에 조선인 학생 마쯔바라 데루타다(松原輝忠),시라노키요히고(白野聖彦) 등에 대해서 그 민족의식유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있는 중      제1. 송촌(宋村) 몽규(夢奎)[송몽규]   (가) 소화 18년(1943년) 4월 중순경같은 사람의 하숙집으로부터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가와 히가시히라이쪼 60번지(京都市 左京區 北白川 東平井町) 시미즈 에이찌 댁에서 회합을 하고 같은 사람으로부터 조선, 만주 등에 있는 조선민족에 대하여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하면서 상호 교환을 하며 논난공격(論難攻擊-논쟁과 비난을 격렬히 함)을 하면서 함께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고 비판을 가하며 또 제도는 영구히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하여 일대 위력을 가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논단(論斷)했다.    (나) 같은 해 4월 하순경 교토 시외(京都市外) 야세(八瀨) 유원지에서 같은 사람과 같은 민족의식을 포회(抱懷) 하고 있는 릿꾜(立敎) 대학 학생 시로야마(白山仁俊)와 회합을 하였으며 조선의 징병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의 무기를 모르면서도 징병제도의 실시로부터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하는 것에 이르러서 장래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배에 봉착(逢着)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해 독립실현을 가능하게 한다 라는 뜻의 민족적 입장으로부터 갖춘 제도를 구가(謳歌)하고 혹은 조선 독립 후에 통치방식에 있어서 조선인의 당파 힘 및 의심하는 마음, 시기심을 강하므로 독립하는 날에 군인 출신자에 강력한 독재주의에 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런 통치는 곤란하다라고 하는 논정(論定) 끝에 독립실현에 공헌해야만 하는 각자 실력에 양성에 전념하는 것이 요지로서 강조를 했다.    (다) 같은 해 6월 하순경에 피고인의 거주지의 같은 시 같은 구 다나까 다카하라쪼(田中高原町)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위 사람과 찬도라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있어서 논의를 하고 조선은 일본에 정복을 당해 시간이 많이 지나가지 않았으나 일본은 세력을 강대해졌기 때문에 현재 바로 찬도라보스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는 것으로서 쉽게 접촉하는 상태에서도 한편 민족의식은 왕성하며 다른 일본의 전력 피폐해서 호기가 도래하는 날에는 위대한 인물의 출현은 불가피하고 각자 그 좋은 기회를 잡아 독립달성을 위하여 궐기를 해야만 한다고 서로 격려했다. 상호독립의식에 격발(激發)에 힘써야 한다.      제2. 마쯔바라 데루타다(松原輝忠)에 대하여    (가) 동년 2월 초순경 앞에서 서술한 같은 타케다 아파트에 있어서 조선내(朝鮮內) 학교에 조선어과목의 폐지 당했음을 논난(論難) 해서 조선의 연구를 권장하고 소위 일본과 조선일체(一體) 정책을 비방하며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독립달성의 필수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 동년 2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의 교육기관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과제를 착수하고 더욱이 일본과 조선 사이에 차별 압박이 있다고 지적을 하며 조선 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무가 된다고 역설했다.    (다) 동년 5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대동아 전쟁에 따라 이 전쟁은 항상 조선독립달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고찰하는 것을 요지로 하며 이것을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 가까운 장래에 있어서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결국 조선민족은 일본의 동화시켜야 하며 조선민족이라고 하는 자는 그 번영을 서기(庶幾) 하기 위하여 일본패전을 기회로 해서 자기의 견해를 계속 해서 피력했다.    (라) 동년 7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에 행복추구의 견지에 입각하여 상기의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에 같은 사람이 민족의식을 유발시킬 것을 부심했다.      제3. 시라노 키요히고(白野聖彦)[장성언] 에 대하여    (가) 소화 17년(1942년) 11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 있어서 조선총독부 조선어학회 대하여 검거를 논난(論難) 하고 나서 문화의 열망에 필경 민족의 궤멸(潰滅)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것을 역설하며 예의(銳意) 조선문화의 앙양에 노력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지시했다.    (나) 동년 12월 초순경 교토시 사쿄쿠 긴카쿠시(京都市 左京區 銀閣寺) 부근 거리에 있어서 개인주의의 사상을 배격지탄(排擊指彈)하고 조선민족이라고 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형벌피해를 피해서 민족전체의 번영을 초래해야만 한다는 명심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다) 소화 18년(1943년) 5월 초순경앞에서 상술한 같은 장소에 있어서 조선은 고전 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하고 문화적인 침대(沈擡)에 있어서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의 문화를 발양(發揚)하기 위하여 조선독립을 실현시키는 것 외에는 없다고 역설했다.    (라) 동년 6월 하순경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은 민족의 의식강화에 자력으로 자기의 소장하고 있는 [조선사개설(朝鮮史槪說)]을 대여하고 조선사 연구에 종어(慫漁)했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의 앙양(昻揚)에 힘쓰며 국채를 경혁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동으로 나타내어야 하며 증거를 보고 고려되는 것을 판단하고 보이는 사실은 피고인을 당 공정(公廷-공개 재판)에 있어서 판단하고 보여지는 같은 취지의 공술에 의하여 인정되며 법률에 있어서의 피고인의 판시소위(判示所爲)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소정의 형기 범위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며 형법 제21조 2항에 의거하여 미결 구류 일 수 중 120일을 본 형에 포함시킬 것.      위와 같은 주문에 의하여 판결함.    쇼와 19년(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 제2형사부 재판장 판사 이시이 히라오(石井) 판사 와타나베 쓰네조 판사 기와라타니 스에오   윤동주에게 내려진 판결문 전문 - 일본 교토 재판소     판결 본적 : 조선 함경북도 청진 부포항정 76번지 (일제 강점기 때 조부 윤하현을 호주로 한, 윤동주 일가의 호적상의 본적은 청진시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증조부 때인 1886년에 함북 종성군에서 북간도로 이주하여 계속 살았으니 청진과는 사실상 연고가 없다.)  주소 :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다카하라정 27번지 다케다 아파트 내 사립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 (일제 대 일본의 대학 학부에서는 당시의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를 거치지 않은, 전문학교 출신자는 동등한 입시를 거쳐 같은 강의를 받아도 선과로 구별했었다. 그러나 행정상의 구별일 뿐 실질적인 차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동주는 문학부 영문학과 학생이었다.)  윤동주, 12월 30일생 (1918년 다이쇼 7년 일제 강점기 때 호적에 윤동주는 1918년(다이쇼 7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1917년생이다. 입적 신고가 늦었었다.) 위 사람에 대한 치안 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 관여로 심리를 마치고 판결함이 아래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미결 구류 일수 중 120일을 위 본 형에 산입한다.     이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는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 태어나 그곳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쇼와 17년) 3월 내지에 도래한 후 한 때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나 동년 10월 이후 교토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에 옮겨 현재에 이른 자로서, 어릴 때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 서적 등을 탐독함과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하여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성장하여 내선 간의 소위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이 원차의 마음을 품는 한편 아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 문화를 절멸하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 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현시의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 전쟁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 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에 열세한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타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도시샤 대학에 전교한 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 있던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송몽규와 자주 회합하여 상호 독립의식의 앙양을 꾀한 외에 조선인 학생 마쓰바라 데루타다 창씨명인 마쓰바라 데루타다의 본명은 알 길이 없다. 장성언은 윤동주의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 2년 선배로서, 교토에 옮긴 후 알게 된 사이로 짐작되며 퍽 가까이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미국에 거주한다.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첫째 송몽규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고모의 아들)으로서 서로 동갑이며, 명동 소학교, 용정 은진중학교 하급반(송몽규의 출신 주학은 용정 대성중학교) , 연희전문 등에서 함께 공부했고, 교토 대학 사학과 재학 시절 윤동주와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2년 선고를 받고(공판일 1944년 4월 13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3월 10일 옥사했다. 그는 용정 은진중학 3학년 초(1935년) 에 남경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에 1년간 다녀와 그의 본적지인 웅기의 경찰서에 반년 가까이 구금된 일이 있다.  (가) 1943년(쇼와 18년) 중순경 동인의 하숙처인 교토시 사쿄구 기타시라카와히가시히라이정 60번지 시미즈사카에 일택에서 회합하고 동경으로부터 조선, 만주 등의 조선 민족에 대한 선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한 뒤, 서로 이를 논란 공수함과 동시에 조선의 징병 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한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한 일대 위력을 더할 것이라고 논단하고,  (나) 동년 4월 하순경 교토 시외 야세 유원지에서 동인 및 같은 조선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릿쿄 대학 학생 백인준 백인준은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급생이었으나 중도에 도쿄 릿쿄 대학으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의 일은 알 길이 없다. 위 여러 사람 중 이 사건으로 윤동주와 함께 구속 입건된 사람은 송몽규뿐이지만, 역시 모두 문초의 괴로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과 회합하고 서로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 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 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같고 군사 지식을 체득함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력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구가하고, 혹은 조선 독립 후 통합 방식에 관하여 조선인은 당파심 및 시기심이 강하므로 독립의 날에는 군인 출신자의 강력한 독재제에 의하지 않으면 이의 통치는 곤란할 것이라고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다) 동년 6월 하순경 피고인의 하숙처인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 다카하라 정 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동인과 찬드라 보즈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관하여 논의한 끝에, 조선은 일본에 정복되어 아직 일천하고 또한 일본은 세력 강대하기 때문에 현재 곧바로 동씨와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으려 해도 쉽게 이루 수 없는 상태나, 한편 민족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다른 날 일본의 전력 피폐하고 호기 도래의 날에는 동씨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도 필지하도록 각자 그 호기를 잡아 독립 달성을 위하여 궐기해야 한다는 뜻을 서로 격려하는 등, 상호 도립 의식의 격발에 힘쓰고,  둘째, 마스바라 데루타다에 대해서는,  (가) 동년 2월 초순경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 내 학교의 조선어 과목의 폐지됨을 논란하고 조선어의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 문화의 유지, 조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소이를 강조하고,  (나) 동년 10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의 교육 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더욱이 내선 간에 선별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 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 독립이 급무하다는 뜻을 역설하고,  (다) 동년 5월 하순 같은 장소에서 대동아 전쟁에 관하여 도오 전쟁은 항상 조선 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함을 요하며, 이의 호기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의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 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 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할 뜻의 자기의 견해를 누누이 피력하고,  (라) 동년 7월 중순경 같은 장소에서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의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의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동인의 민족의식의 유발에 애쓰고,  셋째, 장성언에 대하여는,  (가) 1942년(쇼와 17년) 11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의 궤멸이 틀림없는 소이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 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할 뜻을 지시하고  (나) 동년 12월 초순경 교토 시 사쿄 구 긴카쿠지 부근 길가에서 개인주의 사상을 배격 지탄한 뒤, 조선 민족인 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이해를 떠나 민족 전체의 번영을 초래하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다) 1943년(쇼와 18년) 5월 초순경 앞에 서술한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의 고전 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하여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 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소이를 역설하고,  (라) 동년 6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동인의 민족의식 강화에 자하기 위하여 자기가 소장한 을 대여하고 조선사의 연구를 종용하는 등 동인의 민족의식의 앙양에 힘쓰고, 그로써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증거로 살피건대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서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률에 비추어 보건대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그 소정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고 형법 제21조에 의하여 미결 구류 일수 중 120일을 본 형에 산입한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1944년(쇼와 19년)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 제2형사부  재판장 판사 이시이 히라오  판사 와타나베 쓰네조  판사 기와라타니 스에오    ============================   日 검찰청, 윤동주에 이어 송몽규 재판판결문 공개     2011년 08월 02일 (화) 이수경   [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 이수경 교수 지난 7월 22일(2011) 오전 10시, 교토지방검찰청이 시인 윤동주의 고종 사촌형으로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송몽규(북간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을 거쳐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유학 중 윤동주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당한 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1917년9월28일~1945년3월7일)의 재판 판결문 전문을 전격 공개했다.  일제 강점기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상범으로 취급된 사람들의 기록 공개가 이뤄지지 않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작년의 윤동주 재판 판결문 공개에 이어 이번 송몽규 재판 판결문 공개도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가 판결문을 몰래 베껴서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이 배경에는 윤동주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평화를 사랑한 정신을 기리며 국가나 민족을 초월한 인간적 교류를 알리려는 의도에서 윤동주가 교토에서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 장소인 우지강 주변에 시비를 건립하려는 윤동주 시비건립위원회(대표 安斎育郎)의 공로가 크다. 특히 곤다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은 윤동주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한 가정의 주부지만 침략전쟁을 자행한 일본에 태어난 시민의 양심으로서 결코 전쟁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윤동주 시비 건립 운동을 통하여 널리 알리는데 힘써 왔다. 그리고 윤동주 및 송몽규의 판결문과 자료 공개를 요청하였고, 다른 형태로 판결문 내용이 알려져 있는 터라 일본 검찰청도 공개에 응한 것이다.        ▲ 판결문 확인을 위해 교토 검찰청 앞에 모인 입회자들 필자는 1학기 수업이 끝난 7월 22일로 날짜를 조정하여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갔다. 오전 10시, 교토 검찰청 로비에는 작년의 윤동주 판결문 입회자인 곤다니 노부코 씨와 미즈노 나오키 교수(水野直樹,교토대학교)와 필자(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그리고 윤동주 시비건립위원회 안자이 이쿠로 대표의 바쁜 사정으로 대리 출석을 한 가토 히데노리 (加藤英範)변호사, 하사바 기요시(波佐場清) 전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이 판결문 확인을 하였다.  원래는 판결문과 취조 기록은 별도 보존을 하므로 취조 기록 내용은 먼저 폐기 처분을 하고, 이번 송몽규(지검 기록번호 19번)나 윤동주(지검 기록번호 15번) 등의 재판 판결문이 들어있는 『금고 이상 재판 원본(禁錮以上裁判原本)』 (1944년 1월—6월분)파일은 영구 보존을 하도록 되어있다고 기록과의 담당자인 야마모토 씨가 설명을 한다. 이번에는 작년의 윤동주 판결문 공개와는 달리 유족의 공개 요구 승낙위임장을 요구해서, 송몽규의 조카이자 역사학자로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였던 송우혜 씨의 승낙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  판결문을 보면 1944년 4월 13일에 선고를 받고 4월 17일에 확정이 되어있다. 송몽규의 본적은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422번지로 되어 있고, 주거지는 교토 사쿄쿠 키타시라가와 히가시 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 에이이치방 (京都市左京区北白川東平井町60番地 清水榮一方)이 되어있다.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선과학생인 송몽규를 치안 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있어서 교토 지방재판소 제1형사부 재판장 고니시 노부하루 판사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 관여 심리를 한 결과 징역 2년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송몽규의 주된 활동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있기에 알기 쉬운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종교적으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시를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으면서도(‘밤’, ‘하늘과 더불어’ 등의 시가 있다) 문학 보다는 독립 운동에 결여된 이론적 보완의 필요성을 느끼고 직접 운동에 뛰어들었고, 예리한 시대 상황을 분석하여 조선의 독립에 대처하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판결문 내용을 보면 우선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언어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 있고, 기존의 독립 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이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차별적 대우와 조선의 징병제도에 대한 현실 및 징병제도를 역으로 활용하여 국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발상,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도록 조선을 이끌 훌륭한 지도자 양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론 전개를 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송몽규의 행동은 당시 일본인이었다면 영웅적 운동가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조국의 독립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모순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송몽규의 조국 독립에 대한 갈망과 독립 운동의 이론적 학문적 필요성은 냉철한 현실 대처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고, 징병제도를 통해 무기에 대한 지식을 지닌 뒤, 그런 힘으로 일본의 패망의 시기에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독립 후의 시대를 이끌 지도자 등의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조선이 독립된 뒤의 사회적 운영에 대비한 이론까지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말대로 대동아전쟁이란 미명하에 일본은 곧 패망을 하게 되나, 그는 윤동주와 함께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로 옮겨지고, 매일 밤 이름 모를 주사를 맞다가 윤동주를 1945년 2월 16일에 잃은 뒤, 본인도 3월 7일에 절명을 하게 된다. 큐슈제국대학의 생체실험도 당시에 여러 형태로 행해졌기에 그들도 그러한 희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 27세의 청년은 조선 독립만 꿈꾸며 생애를 태웠지만 결국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지금은 중국 연변의 명동 고향땅 언덕위에 잠들고 있다.  2011년 7월 4일, 필자가 담당하는 인권 교육 수업에서 송몽규와 윤동주를 비롯한 일본 특별고등경찰의 폭압으로 희생이 된 한일 문학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설명과 강연, 낭송 등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송몽규와 윤동주는 유학을 통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갈구하였던 만큼, 전원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학생들에게 그들과 같은 20대의 삶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던 전쟁 폭압을 두 번 다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확인 한 셈이다.  용정의 언덕에는 청년 문사 송몽규의 묘가 윤동주 묘 옆에서 고즈넉이 세월의 풍화 속에 침묵하고 있으나, 진정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지혜를 모색했고 민족의 문화가 말살 당하는 안타까움에 가슴 아파하며 독립 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었음을 판결문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살고 있다는 감사와 더불어 그들이 못 다한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책임을 느끼며 다시금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풍화된 역사의 흐름이 있어도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 그 시대의 불행을 대신 짊어지고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들려고 하다가 희생된 조상이 있었음을 가르치는 교육을 하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도리가 아닐까?  필자의 학교에는 매년 조선족 출신의 응모자도 많이 입시에 응한다. 그들은 모두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그럴싸한 내용의 제목으로 응시를 한다. 그러나 면접을 하면서 참으로 실망할 때가 많다. 용정 출신이라기에 반가워서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등을 물어보면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이지만 중국 국적이고 어릴 때부터 중국에 대한 교육을 받을 테니 교육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 출신이라면 조선족이 왜 중국에 살게 되었는지, 왜 자신이 조선말을 포함한 다언어 사용자가 되었는지, 내가 해외에 나갔을 때 알릴 수 있는 고향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있는지, 적어도 길림 연변 출신의 해외 유학생이라면 문화 교류 차원에서라도 지식을 가져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다.  일본 시민들이 이토록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건만, 정작 그들의 고향에서 온 학생들은 그들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면 그들의 20대의 죽음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을까? 누구를 위한 삶이었던가? 그들의 활동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다 한 많은 삶을 살다가 희생이 된 것이다.  자신의 고향도 모르는 사람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회 문화 연구를 한다고 와도 그들이 과연 얼마만큼 연구 내용에 대해 접근하고 규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변부터 관심을 가지고 파고드는 자세, 그리고 전문적 지식을 배워서 사회 공헌에 앞장서는 진취적 발상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대학이기도 하기에, 송몽규나 윤동주와 같이 이국땅에서 공부를 하려는 학생이라면 사회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살다가 희생이 된 그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전문 오는 8월 2일에서 7일까지 교토의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에서 열리는 ‘제31회 평화를 위한 교토의 전쟁전’에서 송몽규 판결문과 윤동주 판결문이 자세히 공개되고, 기간 내에 곤다니 사무국장의 설명 안내 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8월 2일 오전에는 미즈노 나오키 교수의 ‘윤동주와 전쟁 말기의 치안 유지법—조선 독립운동의 검증’ 강연이 열린다.  여름 방학을 맞아서 각종 스펙 만들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듣지만, 교토 등의 해외 지역을 방문할 기회를 만들어서 한국 관련 역사 유적지를 조사도 해보고, 발로 뛰면서 지역 도서관이나 자료실을 방문하여 한일 관계사 자료나 지역 관련 사료 찾기 등을 해 보면서 우리가 걸어 온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전문 (번역 이수경) > 피고는 만주 간도성에 거주하는 조선 출신 학교 교사의 집에 태어나서 같은 땅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으나 어릴 때부터 중화민국인의 박해를 받고 민족적 비애를 체험하여 민족적 학교 교육 등의 영향으로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어, 1935년 4월경 선배의 권유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남경 소재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 일파의 아래에 들어가 운동에 참가하면서 점점 그 의식을 높였고, 나중에 같은 파 내부의 파벌 투쟁 등의 추악한 내부 실정을 알게 되어, 같은 해 11월경 제남(산동성)에 있는 조선 독립운동 단체 이웅 일파 산하에 들어가는 등의 활동에 종사하였기에 1936년 4월경부터 본적지 웅기 경찰서에 있어서 유치 취조를 받고, 같은 해 8월 말경에 석방된 경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 뒤, 간도성 용정 국민고등학교 경성 연희전문학교를 거쳐서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선과생으로서 입학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나 변함없이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특히 조선 국내의 각 학교에 있어서 조선어 교육과목의 폐지와 함께 언문에 의한 신문 잡지의 폐간 등의 사실을 알게 되어 제국 정부(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두고 필경 조선의 모든 특이성을 몰각시키고, 그 고유문화를 절멸시켜서 드디어 조선 민족의 멸망을 의도한다고 망단(멋대로 망상하고 판단)하여 깊이 그 시정을 원망한 결과, 여기에 조선 민족의 자유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 통치권으로부터 이탈시켜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실현을 위해서는 당면 조선인 일반 대중의 문화 수준을 앙양시켜서 그 민족적 자각을 유기(유발 상기)시켜서 점차 독립의 기운을 양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를 굳히기에 이르렀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첫장 제1. 1942년12월 초순경에 하숙집인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카와 히가시 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 에이이치 방에 있어서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제3 고등학교 생도인 고희욱(창씨한 다카시마 성으로 기재)에 대하여 종래의 조선 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므로 확고한 이론을 가지지 못했기에 단순히 충동적인 감정의 폭동으로서 실패했으므로, 앞으로 자신들이 독립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과거의 독립 운동을 비판하며 장래의 방책을 지시하며 동인(고희욱)의 독립 의식의 앙양을 기도했고,  제2. 1943년 4월 중순경 앞에 기록했던 하숙집에서 초등학교(소학교) 시절부터 친구로서 같이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던 도시샤 대학교 문학부 학생 윤동주(창씨한 히라누마의 성으로 기재) 에 대해서 피고인이 병 요양을 위해 약 4개월간 귀성 중에 견문했던 만주국 조선 등의 객관 정세에 대해서 최근 조선에 있어서는 총독부의 압박에 의해 소학생 중등학생은 거의 국어(일본어)를 사용하고 있고, 조선어 및 조선문은 점차 멸망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 혹은 만주국에 있어서 주요 식량의 배급에 관하여 조선인은 내지인(일본인)으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등을 알려서 이러한 것을 교대로 논란 공격한 것 외,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한 민족적 입장으로 상호 비판을 덧붙이고 해당 제도는 되레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더해야 하는 것이라고 논단(논하고 단정)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앙양에 노력하였고,  제3. 같은 해 4월 하순경, 교토시외 하츠세 유원지에서 윤동주 및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릿쿄대학교 학생 백인준(창씨한 시로야마 성을 기재)와 회합하여 교대로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몰랐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인하여 새로이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하기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틀림없이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서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민족적 입장에서 해당 제도를 구가하였고, 혹은 조선독립 후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 조선인은 당파심 및 청의심(정의감)이 강하므로 독립을 하게 되면 군인 출신자의 강력한 독재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통치는 곤란하게 될 거라고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해야 할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강화를 도모했다.  제4. 같은 해 6월 하순경 앞의 하숙집에서 고희욱에 대한 대동아 전쟁은 무력에 의한 해결이 곤란하므로 결국 강화조약에 의해 종결될 가능성이 크고, 해당 회의에는 버마(먄마), 필리핀 등은 독립국으로서 참가하려고 할 그 시기에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서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서 한꺼번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민족의식의 유발에 노력하였고,  제5. 같은 해 6월 하순경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가와 다케다 아파트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드라 보스( 인도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국가 주석)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태두(등장)에 대하여 논의한 뒤, 조선은 일본에 정복당하여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기 때문에 현재 즉시로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독립 운동 지도자를 얻으려고 해도 쉬이 얻어지지 않는 한편, 민족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언젠가(후일) 일본의 전력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는 날에는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도 반드시 필요하니 각자 그 좋은 때를 잡아서 독립 달성을 위해 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서로 격려하며 국체를 변혁하려는 목적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증거를 조사하여 판시(재판에서 제시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 있어서 판시 동 취지의 진술에 의해 이것을 인정하였다.  법률에 의거하여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소정의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기로 한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함.  1944년4월13일  교토지방 재판소 제1형사부  재판장 판사 고니시 노부하루(小西 宜治)  판사 후쿠시마 노보루(福島 昇)  판사 호시 도모타카 (星 智孝)  …………………………………………………………………………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전문      피고인는 만주국 간도성에 거주하는 조선 출신 학교 교사의 집에 태어나서 같은 땅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으나 어릴 때부터 중화민국인의 박해를 받고 민족적 비애를 체험하여 민족적 학교 교육 등의 영향으로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어, 1935년 4월경 선배의 권유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남경 소재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 일파의 아래에 들어가 운동에 참가하면서 점점 그 의식을 높였고, 나중에 같은 파 내부의 파벌 투쟁 등의 추악한 내부 실정을 알게 되어, 같은 해 11월경 제남(산동성)에 있는 조선 독립운동 단체 이웅 일파 산하에 들어가는 등의 활동에 종사하였기에 1936년 4월경부터 본적지 웅기 경찰서에 있어서 유치 취조를 받고, 같은 해 8월 말경에 석방된 경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 뒤, 간도성 용정 국민고등학교 경성 연희전문학교를 거쳐서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선과생으로서 입학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나 변함없이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특히 조선 국내의 각 학교에 있어서 조선어 교육과목의 폐지와 함께 언문에 의한 신문 잡지의 폐간 등의 사실을 알게 되어 제국 정부(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두고 필경 조선의 모든 특이성을 몰각시키고, 그 고유문화를 절멸시켜서 드디어 조선 민족의 멸망을 의도한다고 망단(멋대로 망상하고 판단)하여 깊이 그 시정을 원망한 결과, 여기에 조선 민족의 자유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 통치권으로부터 이탈시켜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실현을 위해서는 당면 조선인 일반 대중의 문화 수준을 앙양시켜서 그 민족적 자각을 유기(유발 상기)시켜서 점차 독립의 기운을 양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를 굳히기에 이르렀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첫장 제1. 1942년12월 초순경에 하숙집인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카와 히가시 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 에이이치 방에 있어서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제3 고등학교 생도인 고희욱(창씨한 다카시마 성으로 기재)에 대하여 종래의 조선 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므로 확고한 이론을 가지지 못했기에 단순히 충동적인 감정의 폭동으로서 실패했으므로, 앞으로 자신들이 독립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과거의 독립 운동을 비판하며 장래의 방책을 지시하며 동인(고희욱)의 독립 의식의 앙양을 기도했고,  제2. 1943년 4월 중순경 앞에 기록했던 하숙집에서 초등학교(소학교) 시절부터 친구로서 같이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던 도시샤 대학교 문학부 학생 윤동주(창씨한 히라누마의 성으로 기재) 에 대해서 피고인이 병 요양을 위해 약 4개월간 귀성 중에 견문했던 만주국 조선 등의 객관 정세에 대해서 최근 조선에 있어서는 총독부의 압박에 의해 소학생 중등학생은 거의 국어(일본어)를 사용하고 있고, 조선어 및 조선문은 점차 멸망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 혹은 만주국에 있어서 주요 식량의 배급에 관하여 조선인은 내지인(일본인)으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등을 알려서 이러한 것을 교대로 논란 공격한 것 외,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한 민족적 입장으로 상호 비판을 덧붙이고 해당 제도는 되레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더해야 하는 것이라고 논단(논하고 단정)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앙양에 노력하였고,  제3. 같은 해 4월 하순경, 교토시외 하츠세 유원지에서 윤동주 및 같은 민족의식을 품고 있던 릿쿄대학교 학생 백인준(창씨한 시로야마 성을 기재)와 회합하여 교대로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몰랐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인하여 새로이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하기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틀림없이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서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민족적 입장에서 해당 제도를 구가하였고, 혹은 조선독립 후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 조선인은 당파심 및 청의심(정의감)이 강하므로 독립을 하게 되면 군인 출신자의 강력한 독재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통치는 곤란하게 될 거라고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해야 할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는 등, 상호 독립 의식의 강화를 도모했다.  제4. 같은 해 6월 하순경 앞의 하숙집에서 고희욱에 대한 대동아 전쟁은 무력에 의한 해결이 곤란하므로 결국 강화조약에 의해 종결될 가능성이 크고, 해당 회의에는 버마(먄마), 필리핀 등은 독립국으로서 참가하려고 할 그 시기에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서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서 한꺼번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민족의식의 유발에 노력하였고,  제5. 같은 해 6월 하순경 교토시 사쿄쿠 기타시라가와 다케다 아파트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드라 보스( 인도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국가 주석)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태두(등장)에 대하여 논의한 뒤, 조선은 일본에 정복당하여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기 때문에 현재 즉시로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독립 운동 지도자를 얻으려고 해도 쉬이 얻어지지 않는 한편, 민족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언젠가(후일) 일본의 전력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는 날에는 체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도 반드시 필요하니 각자 그 좋은 때를 잡아서 독립 달성을 위해 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서로 격려하며 국체를 변혁하려는 목적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증거를 조사하여 판시(재판에서 제시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 있어서 판시 동 취지의 진술에 의해 이것을 인정하였다.  법률에 의거하여 피고인의 판시 소위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므로 소정의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기로 한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함.  1944년4월13일  교토지방 재판소 제1형사부  재판장 판사 고니시 노부하루(小西 宜治)  판사 후쿠시마 노보루(福島 昇)  판사 호시 도모타카 (星 智孝)   윤동주와 관련된 일제의 공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고경찰(특고)이 그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를 정리한 ‘취조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재판한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이다. 특고의 취조문서는 이 사건을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명명했는데, 사건 개요 설명이 “중심인물인 송몽규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읽어보면 실로 눈과 마음이 모두 시원할 정도다. 그 악명 드높았던 특고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송몽규나 윤동주 모두 의연하고 당당하기 그지없다. 특고를 상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과 소신을 가감 없이 쏟아놓았다. 취조문서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사건 관련자는 모두 7명이다. 그들 중에서 1943년 12월에 교토 검사국으로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명이었다. 그러나 특고의 수사관행으로 보아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특고에 잡혀가서 크게 고생한 뒤 석방되었을 것이다. 윤동주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보자. 1. 윤동주가 조선 독립을 원한 까닭 “…(윤동주는)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絶滅)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제국(일본제국)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으며…” 2. 조선 독립을 위한 방법론 “조선민족의 현재 실력 또는 과거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素地)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3. 현재 일본 상황에 대한 인식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이 열세한 일본의 패전(敗戰)을 몽상(夢想)하고 그 기회를 타서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망신(妄信)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4. 조선인 징병제 실시에 관한 생각 “조선에 있어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논단(論斷)하고”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의하여 새로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함에 이르게 되어 장래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을 가능케 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찬양하고…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하고” 5.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관한 인식 “조선 내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됨을 논난하고 조선어 연구를 권장한 뒤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이 필수인 까닭을 강조하고” 6. 일본과 조선 사이의 차별 압박 지적 “조선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포착하고 내선(內鮮) 간에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민족의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급한 일이라는 뜻을 역설하고” 7. 미일전쟁(=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대응자세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 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찰함을 요하며, 이 호기(好機)를 잃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조선민족은 일본에 동화되고 말 것이므로 조선민족인 자는 그 번영을 열망하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을 기해야 하며” 8. 조선독립의 당위성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를 논란한 뒤, 문화의 멸망은 필경 민족을 궤멸시키는 것임을 역설하고 예의 조선문화의 앙양에 힘써야 한다고 지시하고”, “조선의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한 뒤에 문화적으로 침체해 있는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그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역설하고”, “동인(장성언)의 민족의식 강화를 돕고자 자신이 소장한 을 대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도록 종용하고” 판결문에 드러난 윤동주의 모습과 자세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판결문에는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公廷=재판정)에 있어서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供述)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그가 재판정에서 판사들을 상대로도 위와 같은 발언을 했음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의 동료 송몽규의 경우 역시 윤동주와 똑같았음이 그에 대한 판결문으로 증명된다. 취조 시 발언과 재판정에서 발언 일치 윤동주가 가졌던 미일전쟁에 관한 의식과 대응자세를 당대 조선사회의 유명한 지도층 인사였던 J박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너무도 크게 대비된다. 그들이 재판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과 하루 차이였는데, J박사는 지인에게 미일해전에서 일본이 군함을 많이 잃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자신은 이미 황국신민화, …유언비어 운운”하면서 그런 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반면, 윤동주는 일본의 특고경찰과 검사와 판사들 앞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대동아전쟁(미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문학이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빛내고 있는 존재이듯,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존재는 참혹했던 일제 강점기 말의 한국독립운동사를 밝고 환하게 빛내고 있다.
755    윤동주네 기숙사에는 "팔도 사투리"가 욱실욱실하였다... 댓글:  조회:2693  추천:0  2017-09-30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가 기숙사 생활을 했던 연세대 핀슨홀 전경. 양회성 기자    언어의 역사는 얼마나 장구한가. 원시인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중세 언어인 라틴어나 한문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근대에 들어 민족어가 탄생하면서 개인은 비로소 단독자로서 자유를 얻는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후, 한글은 조선인에게 존재와 자유를 주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핀슨홀 3층 ‘천장 낮은 다락방’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브나로드 운동을 열심히 했던 강처중과 한방을 쓴다. 사실 그리 기분 좋은 시기만은 아니었다. 1938년 3월 총독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共學)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한다면서 조선어를 수의(隨意)과목, 곧 선택과목으로 만들었다. 조선어를 폐지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국어(일본어)를 쓰는 학생과 안 쓰는 학생을 구별하여 상벌을 주라는 훈시가 내렸다.  연세대 핀슨홀 건물 앞에 세워진 시비. 양회성 기자  조선어로 동시 쓰면 누가 읽겠어, 염려하는 친구 윤석중의 말에 “땅에 묻지”라고 박목월이 경주에서 말했던 해였다. 재일(在日)시인 김시종은 제주도에서 아잇적 조선어로 말했다가 선생님께 뺨을 맞았다. 이듬해 국민학교에 조선어 수업이 숫제 없어 시인 고은은 아잇적 머슴 대길이에게 가갸거겨를 배웠다(고은, ‘머슴 대길이’). 이때부터 일본어 친일시가 활발하게 발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가 한글로 글을 쓰면 손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윤동주는 좋아하던 최현배 교수의 두툼한 ‘우리말본’(1937년)을 읽었다. 최현배 교수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을 수강했고, 입학하고 한 달 후 5월 10일 동주는 검박한 언어로 ‘새로운 길’을 썼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새로운 길’   핀슨홀 내부에는 윤동주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양회성 기자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광화문에 현판으로도 걸렸고, 서대문구청에서 연북중학교 뒷면으로 이어진 ‘안산 자락길’ 산책로 왼편에 시비도 있어 친숙한 작품이다.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고개를 넘어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일 수 있다. 1연과 5연이 같은 수미상관이다. 2연과 4연은 묘하게 비틀린 대칭을 이룬다. 쉽게 오지 않을 희망을 그는 반복한다.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까닭은 가운데 3연에 나오듯,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보이는 ‘곁’이 있기 때문이다.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종시·終始’)는 기숙사 핀슨홀 생활이 즐겁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현배, 손진태, 이양하 등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 역사며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긍지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달뜬 기대를 표현한 시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한글로 썼다는 사실도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 이전에도 한글로만 쓴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기 시작한 배경을 생각하면, 조금 고집스러운 오기를 느낄 수 있다. 희망 없는 반복이 지겹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겠다는 풍성한 반복 의지가 엿보인다.   윤동주는 힘들 때 성찰할 때 산책을 즐겼다. 기타하라 하쿠슈의 동시 ‘이 길(この道)’을 동생들에게 자주 불러줬던 그는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는 구절도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특정 브랜드로 정하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침소봉대를 범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저항과 민족이라는 요소가 있지만, 그 범주로 윤동주를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저항과 실천은 미묘하게 숨어있다. 수수하게만 보이는 ‘새로운 길’에도 저항의 단초가 숨어 있다.  역사를 지키는 투쟁은 기관총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이야말로 지루한 투쟁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대학교 초년생의 한낱 달뜬 마음을 담은 소박한 소품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죽지 않는 저항의 씨앗이 담겨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시발로 금지된 언어로 계속 시를 쓰며 그는 금지된 시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자는 의지는 ‘아Q정전’(루쉰)의 정신승리법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금지된 언어로 19편의 시를 깁고 다듬어 시집을 내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하는 실천이었고,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이었다. ‘새로운 길’을 꿈꾸며 견디려 했던 그는 4학년에 오르면 급기야 ‘모가지를 드리우고 피를 흘리겠다’는 위험한 다짐까지 써 놓는다.    스승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제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스승 최현배와 제자 윤동주는 1940년대 지역은 다르지만 함께 감옥에 갇혔고 한글을 잊지 않았다. 최현배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에서 함께 배웠던, 윤동주의 2년 선배 박창해는 광복 후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로 유명한 ‘바둑이와 철수’를 만들어 국어교과서 독립선언을 완성한다. 최현배는 제자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신의 큰아들이 대표로 있는 정음사에서 가로쓰기로 낸다. 최현배는 여러 학자와 함께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시킨다.  무한한 성찰과 저항을 거쳐 조선어는 존재해 왔다. 보이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저항들이 모여, 거대한 언어의 역사와 단독자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 되는 윤동주는 130편의 시를 남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다 잘 아는 윤동주의 전문이다. 익숙한 시는 또 있다.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지난해 이맘때쯤 영화 가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마치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주곡 같다는 느낌이 든다. 는 흑백영화이면서 어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거나 역사적 장면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말과 글도, 성명조차도 우리 것으로 쓸 수 없었던 암울한 세상에 대한 분노도 표출하지 않는다. 꿈도, 희망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을 재단(裁斷)하지도 않는다. 그냥 윤동주가 남긴 시어들이 실오라기처럼 하나씩 풀어지면서 잔잔하게 몰입되도록 인도한다. 영화는 주인공과 대비되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형이자 평생 친구였던 송몽규이다.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명동소학, 은진중학, 연희전문을 같이 다녔다. 다만 중학교 고학년 즈음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광명중학을, 송몽규는 독립운동 언저리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와 대성중학을 졸업했다. 두 사람은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거의 같은 공간에 살면서 많은 것을 공유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신장이 훤칠하고 미남이어서 남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언어습관도 순후했다고 전한다. 필자는 송몽규의 약전(略傳)을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 5년 전에 윤동주의 생가를 방문한 후 그의 존재를 알았고, 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량이 많았고,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윤동주, 문익환과 더불어 선두그룹을 형성했는데 그 중에서 언제나 으뜸이었다. 어린이 잡지를 서울에서 주문해 와서 그것을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하였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연극을 연출하는 등 활동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다.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성격의 윤동주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중학교에서도 문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호를 ‘문해’라 지었다. 마침내 그는 ‘송한범’이라는 아명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1935년에 콩트 이 당선되었다. 약관에 못 미친 열여덟의 나이로 당당히 등단한 것은 그가 얼마나 문재가 뛰어났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송몽규의 빠른 문단 진입은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고, 이 무렵부터 윤동주는 그의 시작(詩作) 결과를 하나하나씩 쌓아두기 시작했다. 송몽규는 이처럼 정적인 성격의 윤동주에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견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은 연전 시절에도 같이 활동했다. 윤동주도 1939년에 소년지에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41년 6월부터 동인지 를 발간하였는데 적극적인 성격에다가 능변인 송몽규가 주도하였다. 이때 윤동주는 , 등을, 송몽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 동인지도 압력이 있었던지 문우회의 해산과 함께 단명으로 끝이 났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전력으로 ‘요시찰인물’로 낙인이 찍혔지만 학업에 충실하여 졸업할 때 성적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송몽규의 작품은 세 개가 전해진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나 등단 작품인 콩트와 연희전문 시절의 시 두 편이 그것이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 홀로 밤 헤아리는 이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다 휘파람을 분다.”, “……푸르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 오 하늘아/ 모든 것이/ 흘러 흘러갔단다.……” 두 사람은 1942년 이른 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18개월 후 일제의 ‘특별고등경찰’에 걸려들었다.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교토에서 한 번씩 만나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던 대화를 꼬투리로 삼은 것이다. 1945년 2월 16일에 윤동주가, 3월 7일에 송몽규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북간도에 무덤을 쓰면서, ‘시인윤동주지묘’, ‘청년문사송몽규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윤동주는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로 인해 별이 되었다. 오늘 72주기를 맞은 송몽규도 이제 함께 별이 되어 후학들의 가슴에 오래토록 쌍별로 빛날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754    불멸의 문사 - 송몽규를 재다시 알아보기... 댓글:  조회:3854  추천:0  2017-09-30
윤동주의 소울메이트 송몽규  [ 길림신문 ]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윤동주에게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소울메이트-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그 죽이 잘 맞았던 친구가 바로 송몽규이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명동촌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네 큰딸 신영이가 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에 또 아들애를 보았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자랐다. 이런 혈연때문이였던지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같았던 두 사람이다. 송몽규는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성정미의 윤동주와는 대조적이였다. 소년시절부터 문학소년이면서도 활동적인 성격을 갖고있어 동료간에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나 학기말에 이르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연출하는 등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어릴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그들 둘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시절이였다. 4학년때 동주와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은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여 고향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자기의 문호를 《문해》-《문학의 바다》라 지으며 문학적소망을 드러냈던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영향하에 결연히 직접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로 나간다. 송몽규는 은진중학을 중퇴하고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한국림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하는 학교였다. 청년문사라는 그에 대한 별칭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련마하면서도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1936년 4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 주재 일본 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그는 이제 일제의 경찰들의 검은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부터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것이 그후 일본 류학시기 교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것이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여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있었다. 겨우 석달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것이다. 1937년 4월,송몽규는 룡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 그는 문학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고있었다.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있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남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문우》지에 《하늘과 더불어》라는 시를 발표했다. 우리 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 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서울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두 사람은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 남의 나라, 적국이였지만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이것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무가내한 선택이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송몽규는 교도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이케부쿠로에 있는 릿교대학에 들어간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후 윤동주는 학교를 바꾸어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 다시 송몽규와 재회한다. 늘 머리를 맞대고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시하는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송몽규 묘소를 찾은 필자 마침내 두 사람은 일본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교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도 시모가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된다.일제 경찰의 감시하에 있던 송몽규가 그 사정권에 들었던것이다. 죄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이라는것이였다. 1944년 봄, 두 사람에 대한 결심공판이 있었다. 재판시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조선독립운동)》으로 그 죄목이 정해졌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도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7매로 된 재판판결문에는 송몽규의 주된 활동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여있었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특히 언어문화를 말살하는 사회상황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있고 기존의 독립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 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방법론도 전개하고있다. 형이 확정된 그들은 후꾸오까형무소로 이송되였다. 머리를 깎고 또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색 죄수복을 입었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치고있었다. 마구 잡아들인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방법을 생각하고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꾸오까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었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였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으로 캄캄했을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다. 젊은이의 사색이 잘 옹글었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하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집에서 태여났고 같은 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 그의 문학적재질을 인정받으면서도 시대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까지 사랑받고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때문이다.   /김혁     ㅁ꿈별(송몽규의 필명)-밤,하늘과 더부러,술가락     하늘과 더부러 꿈별(송몽규의 필명)   하늘 ー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ー 하늘아 ー  모ー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반추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향수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ー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기원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기원하련다.   ----------------------- 송몽규의 알려지지 않은 '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 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맘은 험한 山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조선일보' 1938년 9월20일치'). 연희전문 1학년때 쓴 작품 '밤'이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으로 캄캄했을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다. 젊은이의 사색이 잘 옹글었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보는 듯하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벗 가운데서도 으뜸 벗이었다. 북간도 명동촌의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송몽규가 1917년 9월28일, 윤동주가 12월30일이다. 둘은 고종사촌 사이였다.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가 윤동주의 고모부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일했다. 이런 혈연뿐만 아니라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 같았던 두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1938년 봄 연희전문 진학도 함께했다. 처음 기숙사도 한 방을 써다. 서울 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섬나라 경도 유학을 함께 떠났다. 거기서 왜로(倭虜)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고 비슷한 시기에 영면했다. 지금 용정 동산에 위 아래에 가까이 묻혀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다. 둘 다 미혼이었다. 차이가 난다면 송몽규는 윤동주에 견주어 외향적이었다. 문단 진출도 빨랐다. 1935년 열여덟 어린 나이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학업을 그만두고 김구 선생 밑에 들어가 낙양군관학교에서 항왜활동을 위한 비밀 훈련을 마쳤다. 이 일로 1936년 왜로 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로 송몽규는 '요시찰인'으로 감시망의 대상이었다. 1942년 봄 경도에 들어간 송몽규와 윤동주는 "줄곧 조선 독립을 궁극의 목표로 삼아" 서로"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경도에 있는 조선인 학생들을 충동"('재경도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개요')했다. 그러다 송몽규는 1943년 7월10일, 윤동주는 14일 왜로'특고경찰"에게 체포됐다. 그 뒤 2년 징역을 선고받고 갇힌 채 숱한 고문과 생체실험까지 겪은 두 사람이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윤동주가 절명한 날이 1945년 2월16일이다. 송몽규도 3월10일 그 뒤를 따랐다. 둘 다 스물일곱 나이였다.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옥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했을 것이다. 윤동주가 겨례 시인으로 되살아난 일은 천행이엇다. 송몽규는 이름조차 없다. 오늘 북방 용정 동산에는 두 젊은이의 무덤이 여름 햇살 아래 따가울 것이다. 문득 찾아낸 송몽규의 시 한편으로 이저런 감회가 깊다. 박태일 시인. 경남대 교수  송몽규의 알려지지 않은 '밤'은 국제신문 7월25일 자에서 옮겼습니다. 안타까운, 그러나 차라리 '윤동주님이 옆에 있어 그의 이름은 더욱 알려지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 술가락  송몽규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망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外國)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동아일보 1935년1월1일자에 게재된 신춘문예 콩트 부문 당선작인 송몽규의 「술가락」 전문. 아명인 송한범(宋韓範)으로 게재.1934년 무렵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그는 '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큼직한 사각도장을 마련해서 자기의 책을 분류,정히하는데 썼다.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속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남아 있다. 밤 - 송몽규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             ====================               학생시절부터 반일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던 청년문사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있는 외가집- 윤동주집에서 당시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송창희)선생과 윤동주의 고모이며 기독교신자인 (윤신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한범이 었다. 소학교시절 ▶ 1925년 4월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김정우,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활동력이 강한 그는 공부를 잘 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어서 친구들중에서 언제나 으뜸였다. 윤동주 등의 적극적인 활동과 수선하에서 그의 학급은 문학소년반과 다름없는 그런 길로 나아갔다.소학교 4학년시절, 그는 (어린이)잡지를 서울에서 주문해다 읽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빌려주어 돌려보게 하였다. 5학년때 그의 주도로 교내문예지를 만들려고 했으나, 문예지 이름을 무엇이라고 짓기가 신통치않아 담임선생 (한준명)선생님을 찾았다 .애들의 장한 모습에 감동된 선생님은 기특한 나머지 (새명동)이라 하면 어떻냐 하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하고 (새명동)잡지를 몇차례나 꾸려나갔다. 소학교시절의 송몽규는 이처럼 독서에 취미가 깊고 문학에 흥미를 가졌을뿐만 아니라 성탄절이나 학기말에 이르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연출하는 등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이기도 야무진 소년이었다. 중학교시절 ▶ 1931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명동촌에서 10리 떨어진 달라즈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고 1934년 4월에는 룡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소학교시절부터 문학을 각별히 즐기던 송몽규는 중학교에 가면서도 더욱 문학을 열심히하였다. 그는 끝내 조선 동아일보 신춘문예현상모임에서 콩트(숟가락)을 송한범이라는 아명으로 발표하였다. 1934년 은진중학교 3학년 시절 송몽규는 자기의 문호를 (문해)라 지었다. 그러나, 문학적염원은 드러냈던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도양사와 국사 그리고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영향하에 결연히 직접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걸로 나갔다. 송몽규는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은진중학을 중퇴한 후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중국국민당정부의 주석인 장재석의 지원하에 한국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운영하는 학교였다. ▶ 송몽규가 반일독립운동의 길로 결연히 나선데에는 아버지인 (송창희)선생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품이 엄하고 풍채가 름름한 송창희선생은 한때는 대립자에서 촌장이기도 했다. 당시 수업마저 일본어로 하는 세월에도 그는 일본어를 배우지 않고 그만은 늘 경찰서장과 사이가 나빴다. 그는 서장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홧김에 술을 마시면서 자실들에게 우리 송씨 집안에서는 단 한사람이라도 총, 칼차는 사람이 나오면 않된다고 훈시를 하곤 했다. 이런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송몽규가 은진학교에 가서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반일사상영향을 받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이광수)의 소설(흙)의 주인공처럼 리상촌건설에 나서는 풍조가 유행이 되다싶이 하였다. 명희조선생은 학생들에게 (국가가 성립되려면, 국토, 국민, 주권)3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권이 없는 노예상태이다, 주권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지금 너희들이 하려고 하는 리상운동 역시 그렇다. 그런 일을 개인적인 운동만으로는 도저히 이룰수 없다, 리상촌운동의 목적이 무엇이냐,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을 찾자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거주나 생활환경이 조금 나아졌다해도 그 처한 상태가 주권을 빼앗긴 노예의 처지 그대로라면 그게 무슨 인간다운 삶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참된 이상촌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보다 먼저 우선되어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독립이다)리고 설교하였다. ▶ 이광수의 계몽문학이 제시하는 사이비 이상주의에 도취했던 젊은 제자들에게 역사를 옯바른 시각과 대의를 서리발같이 일깨워주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춘추필범의 엄정함과 위엄을 지니고 있어 송몽규와 같은 애국청년들을 단연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락양군관학교)에 간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연마하면서도 학생들을 조직하여 잡지를 제작하는 주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자기보다 좀 늦게 입학한 은진중학 학생 (라사행)등에게 원고를 써내라고 하고는 등사판을 사다가 등사로 인쇄하여 두툼한 책을 만들었다. 김구선생은 이 책을 보고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실로 청년문사라는 그에 대한 별칭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더하였다. 송몽규는 민족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에 남경을 떠나 산동성 제남에 있는 조선독립단체를 찾아갔다. ▶ 1936년 4월 10일 송몽규는 영문도 모르게 제남주재 일본령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분적지인 웅기경찰서로 곧장 압송되었다. 그는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부터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1937년 4월, 송몽규는 룡정대성중학 4학년으로 편입하여 2년간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그는 문학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졸업싸인에디 영어로(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을 남겼다. 1938년 2월 대성중학을 졸업한 송몽규는 아버지의 승낙을 받고 당시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와 함께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 1941년 6월 5일, 송몽규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 문우회의 잡지(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당시 문우회의 회장이었다. 그러나 (문우)도 당시 일어를 (국어)로 엄격히 상용하던 때였기에 창간호때는 우리말이었으나, 문우회의 해산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문학도로서의 송몽규 ▶ 송몽규는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문우)에 (하늘과 더불어)하는 시를 발표했다.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당숙(송창근)목사도 송몽규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하여 졸업식에 참가하였다. ▶ 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식이 송몽규는 졸업성적이 우수하여 2등으로 우등상을 받았다.나중에 우등상 상품을 펼쳐보니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이었다. 송몽규는 `에이, 그런 영감, 차라지 주지나 말지, 상이라면서 이따위것들을 준다`라고 성을 내며 집어던져버렸다.  남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송몽규는 (요시찰 인물)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는송몽규가 그 따위의 책을 애지중지 여길리 있겠는가?. 일본유학시절 ▶ 1943년 3월, 윤동주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간 송몽규는 경도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그는 늘 윤동주 등 벗들과 함게 일경이 그를 감사하는 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니 (민족독립)이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내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그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헤서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1943년 7월 10일 일본당국은 송몽규를 (재경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의 주모자로 단정하고 체포, 1944년 4월 13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2년 징역을 언도했다. 1945년 4월 18일 송몽규는 일제의 생체실험대상으로 시달리다가 오매에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비명으로 조졸하였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지니고 분전했던 청년문사 송몽규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비참하에 옥사하였다. 한줌의 재가 된 청년문사 송몽규는 그가 나서 자란 고향 지신 장재촌 북산(윤동주가 묻힌 곳)에 함게 안장되었다. ...두편의 유작을 남긴 이름없이 사라진 송몽규의 원혼은 오늘까지 소쩍새의 울음속에서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귀향한 송몽규와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윗줄 오른쪽이 윤동주. 윤동주의 왼쪽은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 송몽규의 왼쪽은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이자 몽규, 동주와는 학우였던 윤영선이며, 오른쪽은 그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1. 소개2. 생애 2.1. 출생2.2. 학업2.3. 독립군 투신2.4. 학업 재개2.5. 체포와 사망 3. 사후4. 송몽규 전집5. 대중문화   1. 소개[편집]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조선족 자치구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윤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쳐진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윤동주가 약관의 나이에 쓴 시가 사망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윤동주가 열등 의식을 가졌던 당시 송몽규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 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 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3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5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2.2. 학업[편집]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 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묵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김신묵 장로는 문익환목사의 어머니이다. 1929년 봄,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썻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 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2.3. 독립군 투신[편집]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본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경북도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본 경찰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본 경찰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 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2.4. 학업 재개[편집]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교에 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2]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 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3]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까지, 도시샤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2.5. 체포와 사망[편집]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옥사에는 생체실험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4]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3. 사후[편집]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4. 송몽규 전집[편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학교에 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5]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5. 대중문화[편집]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송몽규,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벗 강처중(1916-?) 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의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둘을 추모하였다. (전략)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2016년작 한국 영화 에서는 박정민이 송몽규 역으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주연으로 열연했다. 이 작품으로 그해 다수의 주요 영화제에서 신인 남우상을 차지했을 정도.   [1]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서, 민족주의자였다.[2]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3] 출처[4] 동주(영화)에서도 송몽규(박정민 분)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 앞에서 '형무소에서 이상한 주사를 맞고 있는 바람에 동주는 먼저 죽었고 자신도 얼마 안 남았으니 고향에 묻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5] 아내 =================== 송몽규 옛집(지금 헐리워서 없고 새로 복원됐음)
753    일본 포스트모던 시인 - 테라야마 슈우시 댓글:  조회:2788  추천:0  2017-09-27
열차의 기억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             내 시의 한복판을 언제나 열차가 달려간다     그 열차에는 아마 네가 타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열차를 탈 수가 없다     시인은 언제나 그 차창 밖에서 떠나가는 열차를 바라본다.       테라야마 슈우시의 엉터리 같은 시와 괴짜배기 인생을 소개한다. ‘엉터리 같다’라는 말을‘absurd, 부조리하다’라는 용어로 철학자들은 고상하게 번안한다.  테라야마 슈우시 그는 터무니없는 부조리주의자absurdist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순 엉터리 바보가 아니었다.  엉터리같이 엉망으로 사고했고 괴짜같이 살았으며 엉터리 같은 시를 쓰다가 죽었으나 그는 부조리한 세계를 향해 몸부림치다가 부조리의 실상을 폭로하고 증언했을 뿐,  바보는 아니었다. 그가 원본(original) 없는 세상에서 원본에 천착,  복제해낸 복사본(simulacre)의 가치는 그러므로 사실상 원본에 접근한 작품으로써,  이데아를 코앞에 바짝 끌어당긴 경이로운 것들이다.   우리는 왜 열차를 타지 못할까. 그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생이라는 가상공간(cyber space)안에서 진짜로 열차를 타고 달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그 열차는 언제나 테라야마 슈우시의 시의 행간 한복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나의 이솝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           1. 초상화 속에 그만 실수로 수염을 그려 넣어버렸으므로 할 수 없이 수염을 기르기로 했다.     문지기를 고용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문을 짜 달기로 했다.     일생은 모두가 뒤죽박죽이다 내가 들어갈 묘혈(墓穴) 파기가 끝나면 조금 당겨서라도 죽을 작정이다.     정부가 생기고 나서야 정사를 익히고 수영복을 사고나면 여름이 갑자기 다가온다. 어릴 때부터 늘 이 모양이다.     한데 때로는 슬퍼하고 있는데도 슬픈 일이 생기지 않고 불종을 쳤는데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개혁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바지 멜빵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은 인간이 만드는 가장 작은 바다이다.       개가 되어 버렸다. 법정에서 들개사냥꾼이 증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개가 되어 버렸을까? 개가 되기 전에 당신은 나의 아는 사람 중의 누구였습니까? 크로스워드 퍼즐광인 교환처(交換妻) 선원조합 말단회계원인 부친 언제나 계산자를 갖고 다니는 여동생의 약혼자 수의(獸醫)가 못 되고만 수음상습자 숙부 하지만 누구든 모두들 옛날 그대로 건재하다. 그러면 개가 되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세계는 한 사람의 개백정쯤 없어도 가득 찰 수 있지만 여분인 한 마리의 개가 없어도 동그랗게 구멍이 뚫리는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러 갔다가 한 덩이 빵을 사서 돌아왔다.         4. 고양이……다모증(多母症)의 명상가 고양이……장화를 신지 않고는 아이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 동물 고양이……먹을 수 없는 포유류 고양이……잘 안 써지는 탐정소설가 고양이……베를리오즈 교향악을 듣는 것 같은 귀를 갖고 있다 고양이……재산 없는 쾌락주의자 고양이……유일한 정치적 가금(家禽)         5. 중년인 세일즈맨은 갑자기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다. 마다카스칼語보다 부드럽고 셀벅로찌어語보다도 씩씩하고 꿀벌의 댄스 언어보다 음성적이며 의미는 없는 것 같고 표기는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고 새들에게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새로운 언어다.       라고 세일즈맨은 그 언어로 말을 하고 나는 해석하여 감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년인 세일즈맨은 가방을 든 채 벤치에서 죽고 친척도 없이 신분증명서만이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나는 그가 발견한 새로운 언어로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말을 걸어 봤으나 아이들은 웃으며 도망치고 일꾼들은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빵집에서는 빵도 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 새로운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인지 새로운 언어가 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말을 거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새로운 언어가 통할 때까지 지나가는 그들 사물의 folklore 가라앉는 석양을 향해     나는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6. 불행이란 이름의 고양이가 있다. 언제나 나에게 바싹 붙어 있다.       7. 도포이송한 와우여 한도포이송 여와우 송도포이한 우여와 포송이한도 우와여   여우와 한 송이 포도를 종이에 쓰고 한 자씩 가위로 잘라 흐트렸다간 다시 아무렇게나 나열해 봅니다. 말하기 연습은 적적할 때의 놀이입니다.                                            *박현서 역(1931년 김해 출생. 시집  1958년 간행)           수영복을 사고나면 여름이 갑자기 다가온다는데,‘눈물은/인간이 만드는 가장 작은 바다’임을 왜 몰랐던가. 그렇다고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행동이 달라지지는 않는 게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개혁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바지 멜빵만/올렸다 내렸다’할 뿐 인간의 한계를 도무지 극복할 길이 없다. 이렇듯 부조리의 안개가 시야를 덮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개가 되어 짖어야하는 걸까. 개가 되어버린다는 것, 이미 개가 돼버린 연후에도 ‘그러나 도대체 누가 개가 되어 버렸을까?/개가 되기 전에 당신은 나의 아는 사람 중의 누구였습니까?’를 묻는 사람들은 차라리 깨어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인(神)이 알아듣고 개목걸이를 느슨하게 풀어주든 말든 세상을 향해 의식적으로 짖는 자들이다. 그런데 정작 개가 되어버린 사람은 누구이고 한 사람의 개백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는 또 누구인가. 시인인 그는 를 향해 말을 건다. 새로운 세계란 . 말이 통할 수 있으리라는 가설이 가능한 곳이다. 그 세계에서라면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래서 그는 절규하듯 외친다. 나는 말을 건다/말을 건다 . 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말. 그 말parol은 말의 문법 랑그lague가 되어 석양을 행해 울려 퍼진다. 사물의 folklore, 문법이 뒤집힌 언어의 비극을 담고.     도포이송한 와우여 한도포이송 여와우 송도포이한 우여와 포송이한도 우와여       ‘여우와 한 송이의 포도’ 이 포도 한 송이는 목마른 시인에게 갈증을 풀어줄 것인가. 이솝 우화의 포도는 지독한 신맛, 식용 불가능한 포도이거나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매달린 과일이어서 시도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는 의문을 털어내지 못한 채 그러나 시인은 새로운 언어로 말을 거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부조리한 행위일지라도 방백을 입속에 중얼거릴 자유만은 시인에게 주어진 특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 이 세상에 없는 언어로 독백을 내뱉는 것이다.       * * *   테라야마 슈우시 저(著)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김성기 옮김, 이마고) 중에는, 눅눅한 서민아파트에서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와 함께 살고 있는 사내가 있다. 그는 알파 로메오나 마제라티 같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이 사내의 경제적 능력으로만 미루어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언밸런스한 생활이다. 마제라티에 휘발유를 넣을 돈으로 옷을 한 벌 사든가 조금 쾌적한 아파트로 옮겨 살 수도 있을 텐데 그에게는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사내를 일점호화주의자라 일컫는다. 일점호화주의(一點豪華主義) 즉 다수빈약주의의 반대는 밸런스주의다. 밸런스주의자는 수입과 지출을 잘 조절하여 일정한 돈을 저축하며 절대로 무리하지 않게 건실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언밸런스주자는 아무런 계획 없이 되는대로 산다. 필경 마제라티는커녕 마스다 쿠페조차 사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다. P.236       여기서 그는 쾌락이란 그것을 얻은 자에게는 하나의 재산이라고만 간단히 말한다.   퇴원하고 나서 나는 신주쿠로 거처를 옮긴 뒤 바텐더나 장사치들과 어울려 술집을 전전했다. 테이블 위의 황야를 사랑했으며 도박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책들을 헌책방에 팔아치우고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가부키초의 어느 술집에서 일하는 후미라는 아가씨와 동거하게 되었다. 그녀의 권유로 넬슨 올그런(Nelson Algren)의 《더 이상 아침은 오지 않는다》(Never Come Morning)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읽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뒤, 시를 쓰는 대신 경마장이나 권투장에서 메모를 하고 그곳에서 참회하게 되었다. 혼자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들 때는‘내게 타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차츰 독백 형식의 시보다는 대화 형식의 희곡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P.333       그래서 시인 테라야마 슈우시는 첫 장편희곡 《피는 선 채로 잠자고 있다》를 쓴 이후 이른 바 상황극에 빠져 시를 뒤로 하고 실험영화와 연극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 * *   테라야마 슈우시의 시가 엉터리 같다면 그의 사생활은 더욱 더 괴팍스럽고 엉망이었다. 그는 문법이 통하지 않는 시를 쓰고 상식을 뒤엎는 상상력을 시의 행간에 몰아넣는다. 다분히 전위적인 그의 시를 어리석은 대중이 이해하고 좋아했을 리가 없다. 그가 죽고 난 뒤 훨씬 뒤인 2000년대에 이르러 그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기리자는 행사가 최근 일본열도 전역에 번진 모양이다. 운 좋게도 나는 그의 시를 그가 죽은 바로 다음 해인 1984년에 읽었다. 찾아가 술이라도 한 잔 나누기에 한 발짝 늦은 것이다. 1935년 아오모리 현에 태어난 그는 47세의 아까운 나이에 간경변이 악화돼 객사하듯이 요절했다. 그의 괴팍한 생각을 일별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여기 소개한다. 예의 책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에 수록된 것으로써 17세 여고생이 쓴 이 시를 그는 책의 초반부에 엮어 끼어 넣었다.             내가 창녀가 되면       ―오카모토 아미               내가 창녀가 되면 가장 첫번째 손님은 오카모토에서 온 다로라네 내가 창녀가 되면 이제까지 사 모은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치우고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비누를 사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하나 가득 짊어지고 온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다로의 체취가 남은 내 방은 언제나 깨끗이 청소해놓고 미안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며 빨래를 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안드로메다로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주문을 외우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누구도 범하지 못하는 소녀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견뎌낸 자비로운 마리아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오월의 바람을 가르쳐 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재즈를 배우려네 외로울 때는 침대에 누워 다로의 체취를 느끼고 기쁠 때는 창가에 서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조용히 기다리며 공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면 침대에 들어가 숨죽이고 머나먼 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네       *일본의 실험극 연출가이자 포스트모더니스트 시인,  테라야마 슈우시의 저서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에 수록된 시.  오카모토 아미는 1980년대 당시 약관의 나이 17세 여고생이었다.           *김성기 번역                                                                                                                                                                                                                                                                                         寺山修司 (테라야마 슈우지)     1935년 아오모리현[靑森]縣 출생. 중학교 때부터 시로 인정을 받았으며 와세다(早稻田) 대학 문학부에 재학 시절에는 천재적인 시조가로 알려져 있었다. 1959년경부터는 라디오 드라마, 희극 시나리오를 쓰며 실험 영화도 만들었고, 1967년에는 연극 실험실 '천정 관람석'을 만들어 언더그라운드 연극의 선구자가 되었다. 1971년 그 연극의 영화판인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서자」로 본격적인 극영화로 진출, 계속하여 「전원에 죽다」(1974), 「복서」(1977), 그리고 「안녕 방주」(1982)가 있다. 16밀리 실험영화로는 「토마토 케찹 황제」(1970)가 대표작이다. 시대를 초월해 현재도 계속 질주 하고 있는 천재 극시인 테라야마 슈우지. 그가 남긴 언어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연극, 단가, 시, 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사후에도 그의 작품들은 계속 상연되고 있으며 여러 사람들에 읽혀지고 있다.             =============================================================================================         김영찬 시인     충남 연기에서 출생. 외국어대 프랑스語과 졸업. 2002년 《문학마당》과 2003년 《정신과 표현》에 작품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와 『투투섬에 안 간 이유』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     나의 이솝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             1. 초상화 속에 그만 실수로 수염을 그려 넣어버렸으므로 할 수 없이 수염을 기르기로 했다.     문지기를 고용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문을 짜 달기로 했다.     일생은 모두가 뒤죽박죽이다 내가 들어갈 묘혈(墓穴) 파기가 끝나면 조금 당겨서라도 죽을 작정이다.     정부가 생기고 나서야 정사를 익히고 수영복을 사고나면 여름이 갑자기 다가온다. 어릴 때부터 늘 이 모양이다.     한데 때로는 슬퍼하고 있는데도 슬픈 일이 생기지 않고 불종을 쳤는데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개혁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바지 멜빵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은 인간이 만드는 가장 작은 바다이다.     개가 되어 버렸다. 법정에서 들개사냥꾼이 증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개가 되어 버렸을까? 개가 되기 전에 당신은 나의 아는 사람 중의 누구였습니까? 크로스워드 퍼즐 광인 교환처(交換妻) 선원조합 말단회계원인 부친 언제나 계산자를 갖고 다니는 여동생의 약혼자 수의(獸醫)가 못되고 만 수음상습자 숙부 하지만 누구든 모두들 옛날 그대로 건재하다. 그러면 개가 되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세계는 한 사람의 개 백정쯤 없어도 가득 찰 수 있지만 여분인 한 마리의 개가 없어도 동그랗게 구멍이 뚫리는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러 갔다가 한 덩이 빵을 사서 돌아왔다.       4. 고양이 ......다모증(多母症)의 명상가 고양이 ......장화를 신지 않고는 아이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 동물 고양이 ......먹을 수 없는 포유류 고양이 ......잘 안 써지는 탐정소설가 고양이 ......베를리오즈 교향악을 듣는 것 같은 귀를 갖고 있다 고양이 ......재산 없는 쾌락주의자 고양이 ......유일한 정치적 가금(家禽)       5. 중년인 세일즈맨은 갑자기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다. 마다가스칼語보다 부드럽고 셀벅로찌어語보다도 씩씩하고 꿀벌의 댄스 언어보다 음성적이며 의미는 없는 것 같고 표기는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고 새들에게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새로운 언어다.     라고 세일즈맨은 그 언어로 말을 하고 나는 해석하여 감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년인 세일즈맨은 가방을 든 채 벤치에서 죽고 친척도 없이 신분증명서만이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나는 그가 발견한 새로운 언어로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말을 걸어 봤으나 아이들은 웃으며 도망치고 일꾼들은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빵집에서는 빵도 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 새로운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인지 새로운 언어가 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말을 거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새로운 언어가 통할 때까지 지나가는 그들 사물의 folklore 가라앉는 석양을 향해 나는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6. 불행이란 이름의 고양이가 있다. 언제나 나에게 바싹 붙어 있다.       7. 도포이송한 와우여 한도포이송 여와우 송도포이한 우여와 포송이한도 우와여       여우와 한 송이 포도를 종이에 쓰고 한 자씩 가위로 잘라 흩뜨렸다가 다시 아무렇게나 나열해 봅니다. 말하기 연습은 적적할 때의 놀이입니다.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 일본의 혁신적인 포스트모던 시인. 그만의 언어에 의한 성스러운 사원을 완성하였다. 영화감독, 소설가,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며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 1935년 일본 아오모리 현에서 출생. 1952년 아오모리 고등학교 문학부를 거쳐 1954년 와세다대학 교육학부에 입학, 2년 뒤 지병으로 중퇴. 1959년 라디오 드라마 '나키무라 이치로'로 민간방송제 대상 수상 이후 많은 저서와 영화, 연극을 발표하며 전세계에 극작가 연출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 수필형식으로 쓴 그의 잡문,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를 영화로 제작하였다. 18편의 독립영화, 7편의 장편영화, 20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1983년 47세로 절명. 그가 죽은 후 그의 시는 다시 한 번 몰아친 대폭풍처럼 나태하던 일본문단을 뒤흔들었다.     내가 그를 만난 건 서울역 근처의 한 헌책방(지금은 없어진)에서 우연히 찾아낸 이라는 번역서(그 당시 망하기 바로 직전인 출판사 ‘고려원’간행 1984년)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놀라움과 행운을 동시에 선물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김영찬)       피아니스트를 쏘아라       1.  소녀는  천문학을 편애했다 스스로 눈을 감으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눈을 뜨면 하늘에 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2.  3.  소녀에게 지껄이는 것을 가르쳐준 것은  복화술사 도도였다. 도도는 친절했지만 귀찮은 사람이었다. 도도가 가르쳐준 것은 라는 말이었다. 에디오피아語도 아닙니다. 프랑스語도 아닙니다. 스페인語도 아닙니다. 그리스語도 아닙니다. 제발 거꾸로 읽어보십시오. 5. 피아니스트를 쏘아라! 소녀의 모친이 바람에 날라가버렸을 때도 저 곡이 들려왔다. 소녀의 부친이 강물에 빠져죽던 날도 저 곡이 들려왔다. 소녀가 학교에서 펠리컨의 생태에 관한 숙제를 잊어버려 야단을 맞던 날도 저 곡이 들려왔다. 소녀가 소년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활짝 웃어보이던 날도 저 곡이 들려왔다. 소녀는 피아니스트를 쏘라고 중얼거리며 자기의 귀에 권총을 들이댄다. 6.  탕! 7. 아버지의 탐정은 당나귀를 미행해간 후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는 하루종일 연필로 지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8.  한 사람의 조각가가 벽에 라고 썼다. 소녀가 헤아려보니 자수가 꼭 일곱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라고 썼다. 이번에는 헤아려보니 한 자가 모자랐다. 모자라는 한 자만이 소녀의 슬픔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9. 소녀는 어디에나 능숙하게 비행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 비행선에 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든 이 비행선에 꼭 타고 싶다.) 라고 하루종일 번민하였지만 결국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말았다. 10. 바보였다. 그 비행선에 함께 타고 있는 자신을 그려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11. 꿈 속에서 큰 돌고래를 낚아 꿈에서 깨자 바다에 돌려보내주려고 했는데  돌고래가 보이지 않는다. 한 번 더 돌고래를 낚으러 가고 싶지만 소녀에게는  그 꿈의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12. 이 이야기를 물에 적시지 말 것! 뜻밖의 사수가 부출인쇄(浮出印刷)로 숨어 있음.         테라야마 슈우시 詩         **  이 나이가 되면 더 이상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 말을 한 사람이 하고   싶다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의 시선에 있다. 약간 미쳤다는 말을 들을   것을 감내한다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 이렇게 글을 써서는 죽는 날까지 아무   에게도 읽히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쓴다면 그 원고는 죽고 난 후에도 서랍   장 안에 박혀 있을 것이다. 약간 미쳤다는 말을 들을 것을 감내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어디로도 가지 못해 방구석에 박혀 있기보다는 어디로도 가지   못해 전국을 싸돌아다니는 편이 낫다.   테라야마 슈우시의 작품은 조리에 맞는 세상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피아니스트는 소녀의 분신이고 소녀의 분신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그것   들이다. '스스로 눈을 감으면 별들이 반짝이고' 자기를 발견하는 지점이다. 사수   가 별을 쏜다. 소녀는 소경이 된다. 소경이 된 소녀는 감은 눈으로 보고 싶은 별   들을 잠들고 난 후일지라도 내내 볼 수 있다.   말을 가르쳐준 사람은 복화술사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입을 움직이고 혀를 움직   이고 머리를 움직이고 영혼을 움직이는 활동 전반을 아우른다. 이곳에서는 말이   홍수처럼 범람한다. 입을 움직이지 않고 혀를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움직이지 않   고 영혼을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도도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고 그 부조리한 상   태를 탓하지 않고 소녀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 말하는 법을 안 소녀는 입과   혀와 머리와 영혼을 향하여 말한다. 제발 거꾸로,를 부탁받는다. 소녀의 슬픔을   모든 사람들이 안다고 가정한다. 소녀의 슬픔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지고 분해된   소녀의 슬픔은 세상 곳곳에 박힌다. 슬픔을 나누거나 보탠다. 소녀가 기뻐하겠는   가?  현실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해서 슬퍼하지 말자. 슬픔의 계곡에 몸을 던지기   보단 손발이 문드러질 때까지 현실의 암벽을 타보도록 하자. 테라야마는 분명히   경고했다. 물에 적시지 말라고. 이야기를 물에 적시고 한참을 기다려봐도 사수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실망한 소년은 마을을 향해 걷는다. 마을 입구에 다다라 물에   젖어 팔랑거리던 이야기는 어느새 바삭거린다. 그제야 등장하는 사수. 소년은 이   야기 속의 소녀를 물에서 건져낸다. 다시 물 속으로 인도한다. 사수와 소년과 소   녀와 피아니스트와 도도와 별과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바보의 공존.   수수께끼를 즐기는 이들이 있다. 수수께끼의 답에는 관심이 없고 수수께끼를 내는   소녀의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만 궁금했을 따름인데 다행이다. 테라야마를   만나서.  
752    [이런저런] -마광수님, 인젠 님과의 인터뷰를 지옥에가 할가ㅠ 댓글:  조회:2785  추천:0  2017-09-26
  마광수 교수 인터뷰 (2009. 1. 한국의사협회신문) [ 20대 청년 마광수는 ‘천재’로 통했다. 연세대에서 1978년 로 문학박사 학위를 따고 28살에 교수로 임용됐다. 이른 성공이었다. 하지만 승승장구는 거기까지였다. 대법원은 1995년 그의 소설 를 음란물로 확정판결하고 검찰은 교수 신분임에도 영장 없이 그를 구속했다. 교수직을 잃었다. 40대에 그는 천재에서 변태가 됐다.   연세대에 복직했지만 2000년 동료 교수들이 그의 재임용 탈락을 건의하고 나섰다.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자진휴직을 신청했다. 문제가 된 것은 그가 교수의 품위를 해쳤다는 것. 한해 3~4편의 왕성한 창작활동과 논문발표를 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품위’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세상과 등지고 학교와 문단과는 단절했다. 스스로 고립됐다. 정신병원을 드나들었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검열기관은 틈만 나면 그를 괴롭혔다. 출판하는 책마다 ‘19금’ 딱지가 붙었다. 시대가 변했으니 괜찮을 거란 생각에 개인 홈페이지에 를 올렸다가 2006년 다시 입건됐다. 50대에 그는 전과 2범이 됐다.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폈다. 유일한 낙이라서 금연은 생각도 안 한다고 말했다. 연신 “펴. 한번 펴봐”하며 담배를 권했다. 가뜩이나 마른 몸이 위궤양과 불면증, 외로움이란 삼중고로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하지만 섹스와 성에 대한 욕망은 여전하고 그것이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 최 -- 작품을 보면 위선적인 태도(성이 됐던 아니면 그 외의 것에도)를 태생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마 -- 내가 전과 2범이야. 로 작년에 또 걸렸어. 이제는 괜찮겠지 싶어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문제가 된 거지. 불구속 기소에 200만원 벌금. 야한 소설 쓰는 사람이 나만 있나. 애들은 야동에 절어 사는데. 홈페이지에 댓글이 얼마나 달렸는지. 거의 욕이야. 대부분 내 책 한 번 안 본 사람들이지. 그런데 나를 욕하는 사람들은 포르노 안보냐. 우리나라는 집단적 이중성의 나라야. 밤 문화가 이렇게 발달한 나라가 없어. 퇴폐이발소에 안마시술소, 대딸방에… 모든 성문화가 음성화 됐어 20년간 양성화하자고 내가 싸우고 있는 거야. 최 -- 성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를 버리고 욕구를 인정하는 것부터가 마 교수의 생각을 이해하는 출발점일 것 같습니다. 마 -- 다들 섹스 좋아하지 않나. 우리나라에서 성 담론이란 것을 처음으로 끌어냈어. 중앙일보는 해방 이후 한국의 패러다임을 바꾼 책으로 , , 를 꼽았더라고. 내 책을 좋게 평가한 거지. 하지만 더 이상 젊은 애들은 야한 책을 안 써. 내가 한창 창작할 때는 야한 비디오도 없었어. 오로지 야한 생각과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 요즘은 야한 자료가 널려있는데도 안 써. 문단과 사회로부터 왕따당할까봐 그러는 것 같아. 요즘은 내 책을 랩으로 싸서 진열도 못하게 해. 그러다보니 안 팔려. 진짜 안 야한 책인데 이게 뭐야. 짜증나. 책을 35권이나 썼는데도 알아주는 놈이 없어. 최 -- 성은 한국 사람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코드라서 즐겨 사용하시는 것 같아요. 마 -- 문화선진국과 후진국은 그것으로 구분해. 프랑스, 북구라파, 스웨덴은 작가를 구속하는 이런 상황을 이해 못 할 거야. 일본 신문에도 내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어. 그 덕에 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지. 정부가 문화도 산업이라고 매일 떠들면 뭐해. 경쟁력을 가지려면 표현의 자유를 먼저 인정해야 해. 선진국이 성적 담론과 창작물에 개방적이라고 성이 문란한가. 일본의 성 범죄 발생률이 한국의 7분의 1이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우리가 더 음습해. 제발 성담론을 양지로 끌어 올려야 해. 이제 그 얘기하는 것도 지쳤어.  최 -- 가끔 마 교수의 창작의 힘이 분노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  마 -- 울화야. 카타르시스지. 대리배설, 대리만족. 사실 난 성을 즐길만한 입장이 못돼. 그저 너도 즐기고 나도 즐기자 뭐 이런 주의지.  최 -- 마광수 교수의 인생에서 성과 사랑, 관능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마 -- 섹스는 모든 만물의 기초야. 2대 본능이 식욕과 성욕이잖아. 하나는 개체보존, 다른 하나는 종족보존의 본능이지. 섹스는 중요해. 섹스를 해야 만물이 만들어지거든. 소가 섹스를 해야 송아지가 생기고 쌀도 섹스를 해야 맺혀. 모든 열매는 섹스의 결과야.  최 -- 사랑에서 관능이 다라면 필연적으로 사랑에는 권태가 따를 수 밖에 없지 않나요.  마 -- 현실이 그래. 그래서 소설 를 썼어. 내 생각은 사랑을 하기 전에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고 봐. 정말 결혼은 지옥이었어. 딱 6개월 재미있더라고. 난 결혼제도에 부정적이야. 친구들 보면 자식보고 산다고 그러는데. 과연 자식이 그 맘 알아줄까. 기러기 아빠들을 이해 못하겠어.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면 보내야겠지만 마누라는 왜 보내. 재밌는 것은 그런 현상이 가족이란 집단을 중시 여기는 집단주의적 사고면서 동시에 대단히 이기적이라는 거지. 내 새끼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이잖아. 교회나 절이 돈 어떻게 벌어. 합격기도회 같은 거 막 하잖아. 장사 잘된다. 내 새끼 붙여주고 딴 새끼 떨어뜨리라는 기도는 예수님, 부처님 생각에 위배되는 거야.  최 -- 허무한데요. 그럼 결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참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거네요.  마 -- 궁극적으로는 그렇지만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될 수도 있어. 관능적인 욕망을 위해 다채로운 시도를 해보는 거지. 난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적 시도들 다 해. 서양 부부들 보면 페티시즘을 이용하기도 해. 밍크코트, 하이힐 등은 좋은 대상이야. 항문섹스를 시도해 볼 수도 있어. 물론 우리나라는 항문섹스에 대해 부정적인 것 같아. 하여간 내 소설은 죄다 이런 상상들을 기반으로 해. 누구는 너무 자극적이라 그러는데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극을 주지 못한다면 무능한 작가야.  최 -- 방식에 대한 시도와 함께 대상에 대한 전환도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네요.  마 -- 에서 스와핑이란 개념을 먼저 제시했어. 부부라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 늘 공부해야 하지. 노력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오르가즘 느끼는 것은 불가능해. 오늘도 설렁탕, 내일도 설렁탕일 수는 없잖아. 대상을 전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최 -- 1부1처제에 대한 전복인가요.  마 -- 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야. 하지만 굳이 하려면 우정으로 해야지 사랑으로 하면 안 된다고 봐. 이상적인 결혼은 성이 아닌 동지적인 결합이야. 늙으면 외로워. 동지가 필요해. 내가 요즘 그래. 사르트르처럼 동거하고 싶어. 각자 연애할 자유를 보장하고 받는 거지.  최 -- 재판받고 고생하면 다음 작품 낼 때 아무래도 자기 검열 할 것 같아요. 이거 걸리지 않을까 하면서. 독창성이 자꾸 옅어지지 않을까요.  마 -- 자기검열 당연히 하게 돼. 출판사도 종용하고. 나도 출판사도 겁나는 거야. 고소당해서 고생 무지했거든. 진짜 야하게 쓰면 지금까지 쓴 소설보다 더 야할 수 있어.  최 -- 재판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마 교수를 지지했었죠?  마 -- 란 책도 나왔어. 난 소수지만 지지자와 마니아가 많아. 딴 작가들과 달리 위선적이지 않아서 좋대.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 책과 강의를 한번이라도 읽거나 듣고 뭐라 했으면 좋겠어. 이건 그냥 어디서 뭐라고 한 것만 읽고 무작정 욕하는 거야.  독자들은 책을 통해 교훈과 지식을 얻고 그걸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내 독자들은 안 그래. 뭐 전권을 읽었다고 그런 말하잖아. 난 그거 몇 권 읽다 말았어. 재미가 없더라고.  최 -- 마 교수님처럼 작가 장정일도 곤혹을 치뤘잖아요. 그러고 나서는 절대 야한 책 안 쓰고 에세이로 를 냈죠. 그러고 보니 제목이 노골적인 교양서적인데요. 마 -- 장정일씨는 감방에서 한 달 살고 난 두 달 살았어. 내가 먼저 갔지. 영화는 아무리 야해도 절대 안 걸려. 영화는 오락이다. 이런 전제가 있는 거지. 그렇지만 문학은 다르다는 거야. 교양적이어야 한다는 거지. 에세이는 또 좀 다른 것 같아. 는 뭐라 말하지 못하더라고.  최 -- 그럼 에세이 위주로 쓰시면 되겠네요. 아니면 교수 역할에 집중하면 되지 않을까요.  마 -- 에세이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이 아파. 원래 난 문학가야. 변절 안 하려고. 시·소설이 쓰고 싶어. 하지만 두 번 구속되니깐 무서워. 한국에서 태어난 죄로 상상을 마음대로 못하고 위험부담을 안고 써야 해. 가슴도 졸여야하고. 출판하기 위한 벽도 높아. 짜증나. 난 지명도에 비해 힘이 없어. 교수는 호구지책이야. 먹고 살려고 하는 거지. 내 정체성은 작가야.  최 -- 재판받을 때 아이가 있다면 아이한테 보여주겠냐고 검사가 물었다면서요.  마 -- 그게 정말 답답해. 애들 다 섹스하잖아. 부모만 모르나봐. 결혼하기 전에 섹스 해봐야지. 난 당당하게 섹스하라고 학생들한테 얘기해. 미성년자 같은 개념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조선시대 이팔청춘 되면 장가가서 할 거 다 했잖아. 요즘은 대학을 나와도 보호대상이야. 애들이야. 그런데 신세대도 보수적이더라고. 특히 교회 열심히 나가는 애들. 너무 보수적이야.  최 -- 30~40대보다 20대가 더 보수적이라는 말이 있어요.  마 -- 맞아. 더 보수화됐어. 검열도 더 심해졌어. 1991년 가 판금됐어. 그런데 지난해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또 잡혔어. 16년 뒤에 또 잡은 거지. 16년 동안 세상이 엄청 변했어. 애들도 닳고 달았고. 그런데 검열은 변한 게 없어. 1980년대는 올림픽 준비와 개최로 활기가 넘치던 시대였어. 지금보다 훨씬 덜 보수적이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보수적이야. 그러다보니 이중성도 심해졌어. 젊은 애들이 그러는데 보수적인 척 안하면 왕따 당한대.  난 69학번이야. 한해 전에 구라파의 68혁명이 있었고 1970년대는 섹스의 시대였어. 청년문화를 즐겼지. 엄청 놀았어. 요즘 애들은 놀지를 않아. 한심하다 못해 불쌍해. 음악도 그때를 능가하는 뮤지션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 요즘 대학가요제 보면 한심해. 명동에서 주로 놀았는데 차림새도 전위적인 친구도 있었고 대마초도 거의 다 폈어. 쉽게 말해 공부 안 했어. 날마다 여관가고 그랬지.  최 -- 자유연애사상이 들어온 근대 이전까지 결혼은 한 번도 사랑의 결실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마 -- 자유연애 사상은 1920년대 들어서 시작됐지. 그 전에는 무작정 가는 거였어. 서양도 똑같았지. 집안과 가문 유지의 방편이었지. 지금도 재벌들은 가문끼리 결혼하잖아. 그게 인신매매지. 난 결혼 전에 반드시 동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 한 3년 살아보고 결혼하던지. 아니면 평생 계약동거만 하는 거지. 요즘 이혼율이 35%라며. 여대생 중 결혼하겠다는 애가 반이 안 돼. 물론 다들 가긴 가는데 변한거지. 옛날에는 당연히 가야한다고 생각했거든.  최 -- 변태란 없다. 오직 각자의 취향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다른 사람의 취향을 변태로 몰지 마라.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라.  마 -- 착취하지 않고 합의가 됐다면 모든 게 사랑이야. 변태가 아니야. 이건 인권에 관한 문제잖아. 예전부터 최고의 변태는 동성애였지. 서양도 중세에는 동성애자를 사형시키고 그랬어. 동성애가 가장 신기한 변태 아니겠어. 하지만 이제는 미국처럼 보수적인 나라도 동성애를 병으로 안 봐. 정신이상도 아니고. 우리도 커밍아웃하고 하리수도 나오고 호적도 바꿔주고 하지만 진정한 인정은 아직 멀었어. 연세대에 동성애자 모임이 만들어졌더니 게시판에 욕이 빗발쳐. 난 모두가 변태가 됐으면 좋겠어. 서로가 변태라면 모두가 변태가 아니잖아.  최 --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보수화된 것은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있었지만 68혁명과 같은 생활에서의 진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 -- 진보는 성해방을 따라서 오는 거야. 그런데 우리 진보는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사회주의야. 가짜 진보지. 386들이 정치운동만 했지 정작 중요한 문화운동은 안 했어. 한참 피어오르던 청년문화가 꺾인 게 아쉬워. 총학생회장하다 국회의원되고 뭐 이런 식이었잖아. 당시 386들이 나를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을 돕는 첨병이라고 욕하고 그랬어. 아니 그러면 프랑스는 섹스가 자유로운 나라니깐 독재국가야? 진보가 국민적 호응을 못 받고 있는 이유라고봐. 가짜 진보였지. 68혁명 때 데모 구호가 뭐였는지 알아 “상상력에 권력을 달라”였어. 멋진 말이잖아. 는 다 상상이야. 현실에서 그랬다면 잡혀가야지. 그런데 현실에서의 성추행은 두면서 는 처벌하는 거야. 상상력을 죽이지 마 제발. 그리고 폭력소설은 왜 그냥 둬. 성은 안되고 폭력은 괜찮다는 말인가. 이런 거 진보가 얘기해야 해.  최 -- 도덕은 절대적인 것 같지만 사실 언제나 상대주의적이었습니다. 서구도 빅토리아 시대에는 보수적 경향이 강했죠.  마 -- 절대 도덕은 없어. 우린 조선 양반 프락치들이 남아서 아직도 난리야. 조선 때만 그랬어. 고려 때만 해도 달라. 혼전섹스도 가능했고 왕이 과부에게displayObj(' id=formkstistorycom7654137 codeBase=http://f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version=8,0,0,0 height="100%" width="100%"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 첫 장가를 가기도 했어. 조선에서 완전히 눌렸어. 삼국시대로 가면 더해. 그런데 요즘 우리를 보면 단군 이래 조선 윤리뿐이었던 것 같이 굴어. 로 구속됐을 때 유림은 나를 체제 전복적인 인물이라고까지 그러더라고. 요즘 한국에는 극단적인 청교도적 가치관이 횡행하는 것 같아. 기독교단체들은 뭐하면 항상 고소해. 순결운동하고 그런 사람들 있잖아. 현실에서 굉장히 벗어난 행동이지. 빅토리아 시대에는 모든 피아노의 다리를 천으로 감싸야 했어. 여자 다리를 연상시킨다는 거야. 정말 황당한 건. 즐거운 사라 재판 때 검찰 측 증인이 150년 전 빅토리아 시대를 예로 들며 내 작품이 음란하다는 거야. 미쳤나 싶었어. 지금이 어느 땐데 빅토리아 시대 윤리를 들먹여.  최 -- 마 교수는 손톱에 대한 페티시가 있고 사디즘, 마조히즘적인 경향도 있으신 것 같아요. ‘즐거운 복종’이란 표현도 잘 쓰시잖아요.  마 -- 페티시 예찬론자지. 외모가 별로인 사람도 어딘가는 괜찮은 데가 있을 거 아냐. 그래서 페티시가 널리 퍼지면 외모를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우리 사회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부분의 미로 전체 미를 압도하자. 내 생각은 그래. 누가 날 변태라고 그러는데 그런 면에서 난 변태야. 난 성기 중심의 성애에서 전신적 성애로 가야 한다고 봐. 학생들한테는 오랄섹스를 권장해. 오랄섹스에 재미를 붙여봐라. 난 오랄섹스만 했어. 임신시킬까봐.  최 -- 프로이트와는 반대로 가시네요. 프로이드는 항문기, 구강기를 넘어 성인이 되면서 성기 중심의 섹스를 하게 된다고 했잖아요.  마 -- 프로이트는 밥맛이야. 무지 보수적인 사람이지. 성기로 하는 섹스만 중요하게 생각했어. 100년도 넘은 그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심지어 정조관념 때문에 클리토리스적인 쾌감도 부정했어. 질로 쾌감을 느껴야 정상이라는 거지. 그의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성이 고민에 빠졌겠어. 어떻게 질로 쾌감을 느껴, 클리토리스로 느끼지.  최 --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마 -- 없어.  최 -- 인기 있지 않나요. 새로운 상대를 구하셔야죠.  마 -- 머리가 빠져서 안 돼. 내가 부러워하는 연예인이 안성기야. 나랑 동갑인데 머리가 가발이 아니야. 아무리 봐도 진짜 머리야. 여성지가 주선해서 얼마 전에 조영남과 대담을 했어. 조영남도 나보다 7살 많은데 건강미 넘치고 머리숱도 많고 부럽더라. 40살 이후로 계속 빠지더니 이렇게 됐어. 가발도 써 봤는데 무지 더워. 모자도 덥고. 연애는 포기했어.  최 -- 안타까운데요. 마 교수께서 창작의 원천인 연애를 포기하셨다니.  마 -- 재작년에 37살 먹은 여자를 꼬셔봤는데 너무 늙어서 싫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남 보기 그렇다나. 우리나라는 남을 너무 의식해. 미국 애들 봐. 엘리자베스 테일러 한참 연하랑 연애하고 결혼했잖아. 최 -- 하여간 포기는 하지 말아야죠. 옛 기억만으로 책을 쓰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마 -- 그러니깐 상상을 해. 대리만족이야. 최근 낸 소설 에는 내가 직접 나와서 연세대생과 섹스도 하고 그래. 그런데 출판이 어려워. 출판사는 잡혀갈 수 있고, 진열판매도 못하니깐 팔리지 않을 것 같고 나서지 않는 거야. 뭐 내가 많은 독자가 있는 작가도 아니고. 야한 시집도 한 번 내봤는데. 랩으로 꽁꽁 싸서 진열도 못하게 해서 망했어. 더럽고 치사해서 자비출판을 생각 중이야. 독자들이 이외수나 공지영 같은 교양주의적 작가만 선호해.  최 -- 책이 안 팔리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더 이상 텍스트로 성적 감동을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요즘 누가 야한 소설 읽나요. 그냥 돌아다니는 야동 다운받아 보죠.  마 -- 아니야. 소설의 장점이 있어. 예를 들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텍스트기 때문에 독자가 스스로 상상을 펼친 공간이 있는 거야. 난 책이 안 팔리는 이유가 독자들이 책은 가르침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어서 그런 거라고 봐. 도덕과 교훈이 많은 소설들은 잘 팔리잖아. 책은 배움의 도구도 될 수 있지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도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최 -- 8, 90년대 학번들은 마 교수 강의 도강하러 가는게 일이었던 적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 학생들도 도강하러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여전히 인기가 있다는 말 아닌가요.  마 -- 요새는 컴퓨터로 선착순이니깐. 도강이 힘들지. 소속도 다 체크되니깐. 수강신청에 실패해서 도강하는 학생들은 요즘도 있긴 해. 옛날에는 강의실이 좁아서 대강당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어. 성 담론이 없던 시대에 모두들 관심이 많았지. 최 -- 그때가 그리운가요?  마 -- 로 구속되기 전까지 좋았어. 그 후로는 계속 우울증에 시달려.  최 -- 이상적인 여인상이나 연애론이 있다면  마 -- 변태가 좋아. 소위 정상관계라 할 수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여성이었으면 해. 차갑지 않고 성관념이 진부하지 않은 야한 여자. 얼굴은 크게 상관없어. 속궁합이 중요해. 뭐 성기 크기 같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성 취향을 얘기하는 거야. 거리낌 없이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좋아하는 그런 여성. 아주 드물지.  최 -- 애착이 가는 작품이나 스스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게 있다면  마 -- 소설은 . 어쨌든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잖아. 혈기왕성하던 시기였지. 시집은 굉장한 화제이자 필화사건이었던 , 에세이는 최근에 낸 .  최 -- 약해 보이는 마 교수가 어떻게 두 번의 소송과, 문단과 사회의 왕따를 견뎌 냈을까 궁금해요.  마 --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야. 2000년에는 왕따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어. 한 몇 년 정신병원에 입원했었어. 지금도 불면증에 시달려. 그래도 내가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텼어. 거침없이 써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 국민을 어린애로 보고 관리하려는 국가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야. 아직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나쁜 관례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 작가들이 한 목소리로 문제를 제기해야 해. 잔소리도 엄청 하는데 도통 나서질 않아. 너무 이상해. 왜 작가들이 분노하지 않는 걸까. 열정이 없어. 너무 빨리 조로해. 난 선동가가 될 거야.  최 -- 그냥, 대한민국 대부분의 교수들처럼 적당히 수위를 조절하며 살았으면 어땠을까요?  마 -- 를 썼다고 한 학기 정직 먹었어. 문과대 교수들이 들고 일어나서 징계를 요청했지. 죄목은 교수가 품위를 해쳤다나. 품위주의란 말 그때 만들었지. 작가한테 품위는 무슨 품위인지. 작가는 야. 무슨놈의 품위가 필요해? 교수는 지식장사꾼이지. 젠장, 그런데 무슨 품위야. 페미니스트들, 여성을 상품화한다고 난리지. 자본주의는 모든 걸 상품화하는 거야. 지식도 산업이라고 그러지 않냐말야. 상품화한다는 비난은 너무 모호하고 광범위하지. 그런 말로 걸자면 나만 걸리나, 이 세상에서 안 걸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최 -- 대중들은 성의 틀로만 작품을 해석하려 한다며 마 교수의 글쓰기 방식에 문제를 삼는 것 같아요. 좀 불편해 하는 것인지?  마 -- 다양성이란 관점에서 보자는 거지. 나에게 성은 중요한 해석의 틀이야. 그래서 난 그렇게 해. 남이 나와는 다른 틀로 해석했다고 욕하지 않아. 그건 그거고 난 나만의 해석이 있는 거야. 일본 문학을 봐. 굉장히 다양해. 추리소설도 있고 에로물도 있어. 우린 너무 획일화돼 있지. 교양과 정보라는 획일화. 그 틀을 깨고 싶어. 난 성 얘기 할 테니 넌 밥 얘기해라. 난 성에 가장 관심이 있고 잘 쓸 수 있어. 넌 네가 잘하는 분야를 파라. 일본처럼 우리도 분업주의라는 것을 생각해야지. 우린 작가 한 명이 역사소설도 쓰고, 정치소설도 쓰고. 우리 작가들도 전문분야를 갖고 세분화될 때 우리 문학도 다양해질 수 있어요.  최 --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방식이 다양화를 오히려 해치는 것 같아요. 오히려 신춘문예용 소설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마 -- 문학도들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해. 심사위원들의 기호가 어떤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글을 쓰는 게 싫은 거지. 메시지를 줘야하고 교훈이 들어가야 하고. 이런 걸 ‘문단권력’이 강제하는 것 같아. 몇 사람이 문단권력을 독점하고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소설을 쓰도록 하는 거지. 요즘 많은 작가들이 역사소설 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소설이 역사를 망쳐. 역사적 사실하고 다르니깐. 정사 삼국지와 나관중이 쓴 삼국지는 달라. 도원결의나 삼고초려 같은 에피소드 없어.  최 -- 역사소설하면 작가 이문열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마 -- 난 이문열이 제일 싫어. 내 책을 보고 구역질이 난다고 썼더라고.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유통을 막으라고까지 그러더라고. 감옥에 있어서 참았지. 지금 같으면 다 고소감이야. 그는 전형적인 교양주의자야. 게다가 보수적이기가 못 말릴 정도지. 까지는 좋았지만 〈선택〉은 황당무계 했지. 는 졸라 어렵더라. 옛날로 돌아가자는 건가. 도 도 썼는데 역사소설로 역사를 배워서는 안 돼. 김훈의 , , 이인화의 . 이거 좀 이상해. 소설이고 픽션인데 역사를 슬쩍 껴넣으면 소위 시장에서 잘 먹힌다. 세계문학 전집을 살펴 봐.역사소설은 한권도 없어.  최 --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나요?  마 -- 나한테 배운 분들이 많이 유명해졌어. 떠오르는 별들이야. 공지영, 성석제, 한강, 김영하, 김별아 모두 학부든 대학원이든 연세대를 거쳐 간 분들이지. 그런데 모두 너무 도덕적이야. 불만이야. 왜들 패기가 없을까. 떠는 거지. 잡혀가는 것보다 천하다고 왕따 당할까봐. 제2의 마광수는 없어. 장정일은 에세이 내고 까지 냈잖아. 이제는 야한 소설 안 쓰겠대. 제목부터 야. 아마 잘 팔릴 거야. 교양주의에 딱 맞잖아.  예전에는 교수 재임용제도 없었잖아. 요즘은 모두 계약직이야. 교사만큼도 못 돼. 철밥통이었는데 이제는 교수하기도 힘들어. 내가 두 번 잘려봤잖아. 통탄할 노릇은 젊은 작가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검열제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나 하나 밖에 없어.  최 -- 작가 김훈은 어떤가요?  마 -- 문장이 너무 어려워 싫어. 도대체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어. 난 쉽게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심지어 내 논문집을 읽은 사람들이 논문까지도 쉽다 그래. 술술 넘어가는 거지. 김훈은 문장을 배배꼬고. 읽다가 던졌어. 박경리의 도 안 읽었어. 문장이 왜 그렇게 뻑뻑한지.  최 -- 개인적으로 김훈 소설을 재밌게 봤습니다. 문장이 전 좋던데요.  마 -- 내 취향이 아니야. 기자 생활할 때 김훈은 “문장으로 독자를 고문하겠다.”고 했어. 난 쉽게 쓰는 것이 좋아. 술술 읽히잖아. 에 이어 쓴 도 술술 읽혀. 이외수도 싫어. 너무 교양주의, 교훈주의 범벅이야. 박경리도 그래. 솔직히 가 재밌나. 또 다 읽은 사람 별로 못 봤어. 시인 고은도 마찬가지지. 낭송되는 시가 하나도 없는데 국민 시인이야. 고은 시 누가 아나. 문단 권력이야. 관(官)이 만든 문단권력. 최 -- 문단권력이 왜 생기는 것 같나요.  마 -- 문단이든 정치든 기본적으로 조폭문화야. 내가 싫어하는 패거리주의지. 진정한 개인주의가 정착돼야 해. 독자들은 매체가 막 띄어주면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가. 관도 문단권력 만드는 것 좋아해. 그러다보니 문단도 관의 비유를 잘 맞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스타가 고은 아닌가. 그들이 이끄는 제자들이나 팬들도 엄청나. 마치 정치집단 같다. 여름방학 때 모이기도 하면서 관리도 하는 것 같아.  최 -- 그들은 모두 안정된 소비시장이기도 하니까요.  마 -- 완성도 면에서는 김영하가 제일 잘 쓰는 것 같아. 연세대 출신이지. 야한 건 절대 안 써서 섭섭하지만. 은희경도 문장력이 탄탄한 게 마음에 들어.  최 -- 교양주의에 오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은 교양이나 교훈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시죠.  마 -- 교양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교양주의가 모든 문학적 가치를 독점하는 것이 문제야. 그리고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게 나뻐. 교양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문학은 좁은 교양주의의 틀 속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어. 일본에서 한국 문학은 쪽도 못 써. 일본 문학은 일단 재미야.  최-- 마 교수께서 소설 쓸 수 있는 여건이 점점 안 좋아 지는 것 같아요.  마 -- 그보다 더해도 계속 쓸 거야. 내일 모래가 환갑인데도 계속 야동틱한 소설을 쓰고 있어. 책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애들의 생리를 잘 아냐고 그러는데 학생들한테 정보를 수집해. 야한 소설을 쓸 수 있는 힘은 학습과 공부의 결과야. 젊은 제자들이 많이 도와줘. 은 처음에 작가가 자비로 500부를 찍은 게 시작이었어. 영국에서는 법으로 걸리니깐 제재 없는 이태리에서 찍었지. 나중에 문제가 됐지만 구속은 안됐어. 내가 역사상 최초로 구속된 작가야.  최 --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하시죠.  마 -- 늙어보니깐 알겠어. 젊었을 때 실컷 놀고 할 것 다해봐. 거칠 게 뭐가 있어? 남자는 나이 40이 피크야. 그 다음에는 내리막이야.  ///글·의협신문 최승원 기자
751    글을 개성적으로 쉽게 쓰는데 목표를 두고 열심히 습작하기... 댓글:  조회:2732  추천:0  2017-09-26
1. 독서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은 마광수 교수님도 공감하실테고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고 있는데 독서란 꼭 어릴때부터 습관이 되어야 하는지 혹은 지금이라도 읽으면 늦지 않았는지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 어릴 때 독서를 안 했다고 해도 지금 시작하면 됩니다. 사실 어린시절에 읽는 책들은 현실에 맞지 않은 게 많아서 사춘기 이후의 독서가 제일 중요해요. 2. 교수님은 연세대 4년 장학생에 굉장히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얻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는데 혹시 공부 비결이라도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 공부의 비결은 '독학'에 있어요. 학원에 나가보았자 멍청하게 남의 강의만 듣다가 끝나지요. 고교시절이든 대학시절이든 학교 수업에 충실하면서 혼자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게 최고죠. 3. 에로티시즘 문학의 선구자로서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에 대한 인식 혹은 성에 대한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 한국사람들은 성문제에 위선적으로 행동하고 이중적 처신을 하지요. 내가 보면 예술, 남이 보면 외설이 되는 식이죠. 낮에는 신사, 숙녀고, 밤에는 야수, 창녀입니다. 하루속히 표현의 자유가 이루어져, 포르노와 매매춘이 합법화 되어야 합니다. 집창촌은 없애면서 고급 룸살롱의 매매춘은 봐주는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성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야 해요. 4. 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는데 많은 문학가들 중에서 윤동주 시인을 연구하신 이유가 있으신지. 그리고 윤동주 시인 외에도 높이 평가하는 문학가가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 윤동주는 최고의 시인인데 별로 분석된 게 없어서 내가 처음으로 전 작품을 분석해 세상에 알렸습니다. 윤동주 이외에 한용운, 김소월, 이육사, 유치환, 김영랑 등도 우수한 시인입니다. 이상의 시는 개소리에요. 5. 황석영, 고은 같은 문학가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문학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한국 문학에 대한 평가를 해주신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교수님의 케이스를 보고서는 아직 다양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문학은 다양성도 없고 획일적이어서 일본문학에도 못 미칩니다. 그리고 교훈주의 일변도구요. 성문학, 추리문학, 에스에프 문학 등 장르 소설도 순문학으로 인정해주어야 해요. 6. 1992년 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판금이 되고 그 이후에도 에로티시즘 작품을 쓰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을텐데 혹시 지금이라도 계속 에로티시즘 작품을 쓸 계획이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에로티시즘 문학에 관심이 많은 학생으로서 계속 써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요샌 검열이 더 심해져서 성문학 작품을 써도 출판 자체가 힘들어요. 애는 쓰지만 주위 여건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7.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글이란? ---- 좋은 글은 우선 문장이 술술 읽히는 글입니다. 한국 작가들의 문장은 어렵고 현학적이지요. 그리고 내용이 개성적이어야 해요. 8. 마지막으로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쉬운 글을 쓰는 데 목표를 두고 열심히 습작하세요. @@ 한 고교생과 마광수교수와의 대담.      
750    마광수님의 "윤동주연구" = 한국 최초 "윤동주 시 장편논문" 댓글:  조회:2682  추천:0  2017-09-26
홍익대 재직 중에 나는 드디어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다. 요즘에는 박사학위가 교수  자격증 같이 되어가지고, 이른 나이 (대략 30세 후) 에 박사학위를 받는 일이 흔하다. 대 학원 박사학위 과정은 3년인데, 그래서 4, 5년 만에 학위를 받는 이들이 꽤 많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학위를 줄 때 꼭 '나이'를 따졌다. 적어도  35세는 넘겨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나이로 인정했고, 보통은 40세를 넘겨야 학위를  주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의 박사학위는 요즘의 '명예박사'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었 던 것이다. 또 꼭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어야만 학위를 주었다.  그 대신에 당시에는 박사학위가 없더라도 대학의 전임교수가 될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는 석사 이상이었고, 내가 홍익대 전임교수가 될 때는 박사과정 수료 이상이었다. '수료' 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다 이수하고 소정의 시험을 통과한 후, 학위논 문 제출만 남겨놓은 상태를 말한다.  나는 박사과정을 막 수료한 상태에서 홍익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교수가 되자마자 박 사학위 논문을 집필했다.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피교육자 신세를 면하고, 박사학위  논문심사의 중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1979년 말에 나는 학위논문을 다 써가지고 연세대 대학원에 제출했는데, 국문학 과 교수회의에서는 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논문심사 자체를 보류시키기로 결정해 버렸다. 그때 내가 몹시 분노로 치를 떨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실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도 그 과정이 상당히 힘들었다. 나는연세대 국문과 대학 원 '신제(新制)' 박사과정의 현대문학 전공 첫번째 입학자였다. 그 이전까지는 '구제(舊 制)' 박사학위라고 해서, 대학교수로 10년 이상 재직한 경력이 있는 학자에게만 학위를  주었고 (그런 이들에게는 학점 이수가 요구되지 않고 단지 논문만 가지고 심사했다), 학 점을 이수하는 '신제' 박사과정은 아예 없었다. 그러다가 신제 학위과정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입학시험을 너무 까다롭게 내서, 합격자 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또 내가 들어갈 당시에는 박사과정 신입생을 1년에 1명  정도로 제한했었다.  그때 내가 제출했던 학위논문은 『상징시학』이었다. 이 논문은 지금 단행본으로 나와 있 는데, 내가 출간한 문학이론서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것이라서 내가 제일 만족스러워하는  논문이다.  그러나 내가 몇년 있다가 다시 학위논문을 제출할 때는 그 논문은 접수가 안되었다. 일반  문학이론이지 국문학 논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된 까닭은 애초의 논문 지도 교수가 은퇴하고 새 지도교수를 만나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새로 『윤동 주 연구』라는 논문을 썼는데, 쓸 때는 두 번 노동하는 게 무척이나 속이 상하고 억울했지 만, 결과적으로는 학술서적을 두 권 출간하게 되는 소득이 있었다.  『윤동주 연구』는 윤동주의 시에 대한 한국 최초의 장편논문으로서, 지금까지도 계속 판 (版)을 거듭하며 윤동주 연구자들에게 단골로 인용되고 있다. 내가 그 논문을 쓸 당시만  해도 윤동주의 인기는 그저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 윤동주의 시는 국민 누구나가 좋아하 는 최고로 인기 있는 시가 되었다.  그때는 검퓨터가 없어 원고를 일일이 손으로 써야 했다 (하긴 지금도 나는 원고를 200자  원고지에다 손으로 쓰지만). 그리고 활판으로 인쇄를 해서 최종적으로 제출해야 하기 때 문에 돈이 많이 들었다. 활판인쇄란 인쇄소의 식자공들이 납으로 된 활자를 한 자 한 자  골라내어 제판(製版)해서 찍는 인쇄를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정보는 절차가 무척이 나 복잡했다.  어쨌든 나는 초고를 지저분한 필체로 다 썼고, 그것을 다시 원고지에 또박또박 손으로 정 서(淨書)하는 일이 남았다. 그걸 심사위원들에게 제출하여 일일이 지적을 받은 다음 비로 소 활자로 옮겨 인쇄하는 순서였다.  그래서 나는 200자 원고지 1000매 분량의 초고 정서교정보기(뒤는 삭제함...) ㅡ마광수ㅡ
749    동시를 "하이퍼"로 써도 됨둥... 아니 됨둥(ㄹ)... 댓글:  조회:2664  추천:0  2017-09-24
하이퍼동시집   나비 돛배와 잠자리 십자가. 4 (61 ~80)   ///최룡관     61   새 엇박자     새들 포릉 포르릉   새물결 넘실넘실       새들 하늘에 날아   새 그물 펼치네     새 빛이  눈 시리여   새 마을  눈앞에 아른아른      2017.6.18.           62   물오리 마을       잠수함이   물속에서 쫑쫑 날아다니네        별빛 날아내리는데       바람이 발가락으로 퐁퐁   나무가지 구르며 널뛰기하네   2017.6.18       63    파도       발딱 일어나며 푸른 가슴 보이다가   와르르 구슬로 부서지네       갈매기 호르릉   파도 동굴로 빠지네   부리엔 고기 한마리       태양이 맞아서   바다에 빠졌네   네 다리 버둑거리네   2017.6.18.          64   열두층도 모자라   첫층은 짐승방 범 곰 사자 노루 늑대 ... 둘째 층은 화혜단지 장미 진달래 봉선화 맨드라미 ... 세번째 층은 곤충방 나비 메뚜기 풍덩이 반디불 등에 ... 네번째 층은 하늘방 해 달 노을 안개 번개 구름... ............................. 열두층도 모자라는 하이퍼동시아파트 2017.7.7.       65   암초가       하얀 머리카락 날린다 암초가   거먼 귀신으로 살아있다 암초가   쇠라도 뚝   베여먹을 이빨이      어뢰정도 뚱   빧아버릴 이마     태양도 퉁   차버릴 발이          바람이 와르르   보석 사태 쏟는다               2017.6.18.       66   일송정       옛말 두룽두룽 달려   종소리 울린다       날아가려고   날개를 활짝 편 푸른 새       눈보라 뽀얀데   파란 우산 폈네        2017.6.18.       67   해란강       잘칵잘칵   옥색 비단 짜는 직포기       아롱다롱   칠색무지개 느리는 달인       자장자장   비바람 잠재우는 침대       불쑥불쑥 별 낳는 마리아   2017.6.27.           68   선경대     신선 샘물 노는 산   캥캥 노루의 울음소리       경마장 넓은 뜰로   바람들  갈기 날린다       대피리 소리에   소나무 룡 구불거린다          2017.7.20.       69      망부석       사람을 꽁꽁 얽어맨   포승줄       령혼을 꽁꽁 가두는   감옥       밤 가르는 류성이   쨍 울었지       홀로 선 바위일 뿐이야        2017.6.18.         70      노래 짓는 시내물       돌꼭두에 앉은 물새   촐삭촐삭    니 노래에 부채질하고       갑옷 입은 물벌레   자갈에 붙어     니 노래 먹고       파란 샛잎 붓되여   간들간들   니 노래 적는다 2017.6.18         71   동시언어.1     (1)   낱말이 모여서   기차놀이 한다   레루장이 없는데   절로 왔다 갔다   역전이 없는데   바곤들은 아무때나   서로 바뀐다     (2)   낱말이 모여서   바람 일으킨다   방향 없는 바람이   제멋대로 왔다 갔다   강을 만나면 떼목   물결따라 천리 가고   산을 만나면 수리개   구름과 지그재그       72   빨간 토마토       푸른 나무에   빨간 야구뽈 주렁져       원숭이 홍문에   빨간 불이 켜졌다       비행기 홍문에   빨간 사과 끼웠다       사과  과원에   빨간 별떼 깜박깜박       2017.6.18.       73    언덕의 필림       개나리꽃 한송이   빨간 불 켠다     꿀벌들 윙윙윙   기차놀이 한다     바람이 소리 몰고   숲을 누빈다      2017.6.18.       74      클락새       클락새 딱딱   못 박느라 딱딱       클락새 딱딱   별 파내느라 딱딱       클락새 딱딱   꽃 피우느라 딱딱       클락새 딱딱   집 짓느라 딱딱     2917.6.18.           75    종달이 자르릉     하늘로 오르며 자르릉   땅에 떨어지며 자르릉       적설 켜느라 자르릉       손풍금 타는 소리 삐리리   꽃나팔 부는 소리 삐리리       3월 무대  삐리리          2017.6.18.           76     까치       까치까치 목수까치   깍까각 자귀질 한다        까치까치 꽃까치   꽃이 피라  부채질       까치까치 해까치   동글 돌배 키운다         2017.6.18.           77   약초       도라지꽃 도리도리   머리머리 도리도리       씀바퀴 씀벅씀벅   세눈네눈 씀벅씀벅     백감초 초록초록   손톱발톱 초록초록       뽕나무 뿅뿅뿅   방기방귀 뿅뿅뿅   2017.6.18   생당쑥 쑥닥쑥닥 열두 입이 쑥닥쑥        78명   함장 내밀기       해님이 명함장 내밀며ㅡ   내 명함은 돌이야       돌이 명함장 내밀며ㅡ   내 명함은 꽃계야       꽃계가 명한장 내밀며ㅡ   내 명함은 사슴이야       사슴이 명함장 내밀며ㅡ   내 명함은 기러기야       기러기 명함장 내밀며ㅡ   내 명함은 해님이야   2017.6.18.           78   우리집 음악회       우르룽 쏘프라도 세탁기   따다따따 빠빠빠   스릉사릉 녀가수 흡진기   꽁아 맹아 다 먹어줄게   볼롱볼롱 장단 치는 쿠쿠   흥 나서  싸싸          2017.6.18         79   함박눈       누가 하늘 잔등 긁어주나봐   은빛 비늘들 떨어집니다       누가 별지각질 하나봐   은빛 별껍질 쏟아집니다       누가 달을 빻나봐   은빛 달부수러기 우수수               2017.6.19.       80     첫비     은빛 방울들 내려옵니다   바람이 딸랑딸랑 방울 울립니다       비 방울 젖 방울 비 방울 숨 방울         나비 한마리 쫑   하늘로 솟구칩니다  
748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요"?!... 댓글:  조회:2653  추천:0  2017-09-22
  -ㄹ          /성기완      도르레 가리비 너러바위 라르고 괜스레 나란히 부리나케 사르고 너스레 가랑잎 대구지리 쓰리고   콘트랄토 리비도 아무르 아름다운 알레그로 이리도 쿠랑트 사라방드 살어리 어리랏다 리랏다 이러쳐 우렁남친 뎌러쳐   어강됴리 비취오시라 다롱디리 드리오리다 동동다리 뿌리오리다   시리잇고 욜세라 아랫꽃섬 녀러신 흘리오리다 꼭그렇진않 얄라리얄라 어름우희댓닙자리 구름나라로맨티카   더듸새오시라 졸라마시리라 러둥셩 링디리   두어렁셩 괴시란대 아즐가 도란도란 크레이지 날라리 노래불러 우러곰 사랑살이 잠깐새리 주물러라 다리좀 딩아돌아 더러둥셩 떼끼에로 알러뷰 래일이또 업스랴   민들레 도라지 바리바리 드리고 발그레 다랑어 부리부리 슈르고 물푸레 미란다 소리소리 지르고   말랑말랑 발랑발랑 찰랑찰랑 살랑살랑   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렌토보다 더느리게 리드미컬 멜로디컬 이렁구러 아련했 년뫼랄 거로리 아련했 아련했 사랑 사랑 리을 ㄹ                 한편의 시 속에 ‘ㄹ’이 소나기처럼 많이 등장하네요. ‘ㄹ'이 주인공인 시입니다. 빗소리처럼 아련한 리을…….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한다니까요 사랑해줘요 사랑밖에 난 몰라요! 울고 웃는 리을의 목소리. 리을의 음악. 리을의 다르마(法). 허공에 슝슝 날아다니는 리을의 빨주노초파남보. 리을들의 사랑과 이별. 리을들의 청춘과 노쇠. 리을들의 맥박과 부정맥. 리을들의 당뇨병과 티눈. 티눈조차도 당신을 사랑해요. 중독된 사랑의 황홀과 쓸쓸함. 리을을 따라 달리는 리을의 욕망이 울다 지친 음악으로 거리에 흘러요. 당신은 리을을 만났나요. 사랑이…… 그렇게…… 당신을 관통했나요. 사랑 따위라고요? 사랑에…… 관통당해 본 적 없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라고, 리을이 묻네요, 리을의 이미지들이 낄낄거리네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정말로 듣고 싶은 게 시이기도 하거든요. 가끔은 이렇게 놀아줘야 자음과 모음들이 신선해지거든요.   -김선우(시인)     //                       
747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댓글:  조회:2498  추천:0  2017-09-22
-박남희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동화-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아에 중점이 주어지는데 반해, 투사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예시:박남희/투사-최문자)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746    러시아 시인 - 네크라소프 댓글:  조회:4259  추천:0  2017-09-22
  출생 1821. 12. 10(구력 11. 28), 러시아 우크라이나 네미로프 사망 1878. 1. 8(구력 1877. 12. 27),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민요를 개작하고 동시를 쓰면서 농민생활 특유의 매력과 생명력을 표현했으나 주된 주제는 고통받는 러시아 농민에 대한 연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아버지로부터 도움이 끊기자 어린 나이에 닥치는 대로 문단과 연극 분야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1840년 첫 시집을 펴냈다. 사업에도 재주가 있었던 그는 자신의 문집을 편집, 출판했다. 침체 상태에 빠진 잡지 를 인수하여, 끊임없이 검열에 시달리면서도 주요 문학잡지이자 수지가 맞는 사업으로 올려놓았다. 1868년 미하일 살티코프와 함께 잡지 를 인수하여 죽을 때까지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의 작품은 숙련미 및 세련미가 부족한 느낌을 주며 주제를 감상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어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평도 있지만 대표시들은 지속적인 깊은 감동을 주며 독창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네크라소프(Nikolay Alekseyevich Nekrasov) 러시아의 시인·평론가·출판자이다. 민요를 개작하고 동시를 쓰면서 농민생활 특유의 매력과 생명력을 표현했으나 주된 주제는 고통받는 러시아 농민에 대한 연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아버지로부터 도움이 끊기자 어린 나이에 닥치는 대로 문단과 연극 분야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1840년 첫 시집을 펴냈다. 사업에도 재주가 있었던 그는 자신의 문집을 편집·출판했다. 1846년 창간자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죽은 뒤 침체 상태에 빠진 잡지 〈소브레멘니크 Sovremennik〉를 표트르 플료트뇨프에게서 인수하여, 끊임없이 검열에 시달리면서도 주요 문학잡지이자 수지가 맞는 사업으로 올려놓았다.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도 여기에 초기작품들을 발표했으나, 1856년부터 부편집장이던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영향으로 호전적이고 급진주의적인 기관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첫번째 암살시도가 있은 뒤인 1866년 폐간당했다. 1868년 미하일 살티코프(시체드린)와 함께 잡지 〈조국일지 Otechestvenniye zapiski〉를 인수하여 죽을 때까지 편집·발행인으로 일했다. 그의 작품은 숙련미·세련미가 부족한 느낌을 주며 주제를 감상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어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평도 있지만 대표시들은 지속적인 깊은 감동을 주며 독창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코가 빨개지는 추위 Moroz krasny-nos〉(1863)는 용감하고 인정 많은 농부의 아내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으며, 대서사시 〈러시아는 누구에게 살기 좋은가? Komu na Rusi zhit khorosho?〉(1879)는 강렬한 사실적 풍자에 뛰어난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나는 내 자신을 깊이 경멸하노라                      /니콜라이 네크라소프(1821∼1878)     나는 내 자신을 깊이 경멸하노라 하루 또 하루를 쓸모없이 허랑하게 살기에 어떤 일에서도 힘을 시험해보지 않고 나 스스로를 무자비하게 단죄하였기에 ‘나는 보잘 것 없는 자, 약한 자’하고 게으르게 곱씹으며 평생을 노예처럼 굴었기에 이럭저럭 서른 번째 봄까지 살아오면서 이렇다 하게 돈도 모으지 못하였기에 어리석은 자들이 내 앞에 굽실거리고 약한 자들이 부러워하게끔 살지 못하였기에! 나는 내 자신을 깊이 경멸하노라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일생을 보냈기에 사랑하고 싶으면서…온 세상을 사랑하면서 의지할 곳 없이 사람들을 등지고 헤매이기에 가슴에 맺힌 악의가 크고 사나움에도 칼을 들면 손에서 맥이 풀리기에!       ‘간다 신음한다 녹색의 수런거림/녹색의 수런거림 봄의 수런거림/마치 우유라도 잔뜩 뒤집어쓴 것 같은/벚꽃 뜰이 늘어서 서/조용히 조용히 수런거린다/하느님의 부드럽고 따사로운 손길에/소나무 숲도 쾌활하게 수런거린다/그 곁에서 신록의/새 로운 노래를 서툴게 속삭이는/엷게 물든 보리수도.’(시 ‘녹색의 수런거림’)   간결하고 쉬운 시어로 이토록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봄의 색조와 리듬을 길어낸 러시아 시인 네크라소프를 기억하는 독자에 게 한층 아린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럭저럭 서른 번째 봄까지 살아오면서/이렇다 하게 돈도 모으지 못하였기에//어리석 은 자들이 내 앞에서 굽실거리고/약한 자들이 부러워하게끔 살지 못하였기에!’ 그래, 시인도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지. 서른 살이 넘으면 제 사는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누추한 단칸방이 부끄러 워지고, 앞으로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문득 세속적인 잣대를 갖고 사는 ‘어리석은 자, 약한 자’ 들에게 받은 모멸감이 물밀 듯 몰려오고, 제가 잘못 살아온 듯한 자책감이 마음을 괴롭힌다. 그렇게 살았으니 애인도 없지! ‘나는 내 자신을 깊이 경멸하노라/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었기에’ 하, 겨우 서른에 ‘일생을’ 보냈단다! 이십대를 지난 이들이 크게 공감할 시다. 죽도록 자책하는 것만으로 면죄부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갱신하게 되는 것도 아닐 테다. -황인숙(시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 詩 모음           Nikolai Alkseevich Nekrasov(1821~1878)    차 례 * 내가 확신에 찬 말로써 * 나는 내 자신을 경멸하노라 * 신문 열람실 * 祈禱    내가 확신에 찬 말로써   내가 확신에 찬 뜨거운 말로써 방황의 어둠으로부터 타락한 영혼을 구했을 때, 넌 크나큰 고통에 빠져 있었고 손을 비틀며, 널 휘감고 있는 결함을 저주했지. 잊혀진 양심을 회상으로 징벌하면서 넌 나를 만나기 전까지 있었던 모든 얘기를 내게 전했지. 그리고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치욕과 공포에 휩싸여 마침내 눈물를 흘렸어. 분개하고 떨며....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ㅁ 다음 검색에서       나는 내 자신을 경멸하노라   나는 내 자신을 경멸하노라, 하루 또 하루를 소용없이 헛되이 살기에.   어떤 일에서도 힘을 시험해 보지 않고 제 스스로를 무자비하게 단죄하였기에,   "나는 보잘것없는 자, 약한 자"하고 게을리 곱씹으면서 평생을 곤손히 노예같이 굴었기에,   이럭저럭 서른 번째 봄까지 살아오면서 이렇다 하게 돈도 모으지 못하였기에,   어리석은 자들이 내 앞에 굽실거리고 약은 자들도 때로 부러워하게 살지 못하였기에!   나는 내 자신을 깊이 경멸하노라.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일생을 보냈기에,   사랑하고 싶으면서... 온 세상을 사랑하면서 의지할 곳도 없이 사람들을 등지고 헤매이기에,   가슴에 맺힌 악의가 크고 사나움에도 칼을 들면 손엔 맥이 풀리기에! ㅁ 구글 검색에서         신문 열람실         도입부     안개가 지독한 거리   서정적 자아가 신문 열람실로 뛰어 들어간다.     신선한 공기, 양탄자, 촛불, 신문과 책이 가득한 책상들.     - 프랑스 문학만을 높이 평가하고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상황을 비난하고,     사상의 자유와 방화, 강도, 살인의 범죄를 같이 취급하는 현세를 한탄함   - 러시아 사람들이 유럽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럽 소설이 밝기 때문임   - 예로부터 러시아의 자연과 러시아 사람들의 본성은 어둡고 우울했으며,      그것을 러시아의 뮤즈가 재생해낸 것뿐임       잡지 더미, 졸고 있는 사람들. 그 중 음산한 홀 하나.   (중략 - 검열과정에 대한 묘사)     높으신 분의 말 한 마디는 한 세기가 끝날 때까지 잊어서는 아니 된다.   눈썹 하나 까닥하면 날벼락이 떨어지고,   말 한 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오락가락한다.   사람들은 높으신 분 말 한 마디에 알아서 몸을 낮추고는   풍자시를 달콤한 아부로 고쳐버린다.   그러나 우리 노래의 선율이 서글픈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노래를 다 고치지 못하고   우리는 그대로 나두기로 했다 . 우리의 뮤즈와 타협하라.   나는 다른 선율을 알지 못한다.   슬픔과 분노없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오래 전부터 2명만이 신문 열람실에 계속 앉아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75살.   비록 늙었지만 몸이 곧고, 시선도 똑바르다.   그는 탐욕스럽고, 구두쇠에다 애들도 싫어한다.   이 노인에 관한 소문들...   집에 있는 초가 아까워서 이곳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그가 쓰는 서류의 내용은   "노예에게 가장 좋은 약은 채찍이다"라는 것.   그는 생모를 감옥에 넣고, 돈의 뒷거래를 하고,   심지어는 부인의 다이아몬드까지도 훔쳤다한다.   다들 이 노인을 싫어하지만,   카드놀이 파트너는 항상 끊기지 않는다.   "카드놀이는 정직하게 잘 하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또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늙고 여위고 창백한 그는   공포에 떨고 있다.   손에는 빨간 펜, 코에는 안경.   오랜 세월 검열을 해 온 그는   습관적으로 자신이 검열한 모든 자료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가 (검열로) 문장을 고쳤버렸기 때문에   작가의 색채가 모두 바래 버렸다.   쥐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연필을 쥐고 일에 임한다.   "뭐 하시고 계십니까?"   "잡지를 읽자니 끔찍하네요.   문제가 없는 줄이 하나 없군요.   (,,,)   자유, 자치, 정보공개!   모두 정부에게는 위험하고 참혹한 것들이지요.    관등, 자유, 뇌물에 관한 말 한 마디   **?관등   나는 인쇄를 허용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새 체제로 바뀌면서   의장님이 나에게 사직서를 내리셨지요.   감히 불평을 할 수는 없지요.   (그럴 슨 없지요.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왜 내가 이제 쓸모없어 졌는지   만약 내가 알게 된다면, 나를 죽이세요 . 일이 내 모든 인생을 다 삼켜버렸지요.   때로는 너무 깊이 일에 몰두한 나머지   꿈에서도 문득 문구가 떠올라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줄을 긋고 또 그었지요.   비밀스러운 목적을 위해서   작문의 키 포인트를 조금 조작하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가서 신에게 기도하고   또 다시 세 번 읽어보았습니다.   단어 하나하나 생각하고 또 이해했습니다.   글을 쓴 자들은 내 앞에서 두려워했지요.   촛불 아래의 파리처럼 빙빙 돌다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지요"       (...)   "7년간 이 일을 하면서   내가 봉급을 괜히 받은 건 아닙니다.   (,,,)   난 불쌍한 작가들을 소중히 했습니다.   나는 페이지와 줄을 남겨놨었지요.   단지 해로운 사상을 지웠을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주가 민중에게 냉담하게 했다'라고 썼다면,   나는 단지 세 문자만 지울 뿐이지요.   '냄담하게'라고 말이죠.   그럼 어떻습니까? 기껏해야 세 문자만이란 말입니다.   또 만약에 '귀족영지에 거지가 매 해 늘어나고 있다.'라는 글이 있으면   '이건 이탈리아의 영지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덧붙이는 겁니다.   그럼 그 글은 통과가 되는 거죠.   또 만약에 '아마색 곱슬머리의 이반이   정열적인 리자를 유혹한다'라는 글이 있으면   '피자를 유혹했다'라고 고치는 겁니다.   그러면 몇 권이나 되는 소설 전체를 구할 수 있는 겁니다.   눈에 띄지 않는 이런 수정이   사상과 어구를 바꿔서   나중에 바늘을 갉아먹지 못하게 하는 거지요.   네, 그럼요, 나는 작가들을 아낍니다.   나 스스로 가난하고 힘든 집에서 태어났고,   나에게도 아이들이 있습니다. 난 짐승이 아니구요.   아~ 아이들! 아이들!"   {노인은 슬퍼진다)     하루는 아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왜 화를 내는 거냐? 왜 기이한 행동을 하는 거냔 말이다.   니힐리스트라도 된다는 거냐?"   "니힐리스트 -- 참 슬픈 단어군요.   만약 아버지가 이상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고   열심히 진실을 추구하는   올바른 사람으로 이해했다면 그 단어가 맞습니다.   아무런 이익없이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쓸모없는 자의 면전에 휘바람 불어 야유하고   기쁠 때 처부술 수 있는 자라면   그렇다고 하지요,"   나는 내 아들이 공부를 계속해서   관직에 종사했으면 하고 바랬지요 . 그런데 아들은 말합니다.   "무슨 관직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거긴 바보들만 앉혀 놓는 곳이잖아요,   그들 말은 들을 가치도 없어요.   거기에서는 시간만 낭비할 뿐이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거기서 사람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겠죠.   '네가 바로 사형 집행인의 아들이구나'라고요."   그래서 난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만해! 이 멍청한 자식아."   난 아들에게 소리질렀습니다.   "난 일에 있어서 날 비하하지는 않는다!   양심껏 내 임무를 완수했을 뿐이다."   "양심이라고요? 좋은 단어죠"   아들은 반박했습니다. "그 단어는 때때로..."   (아들과 싸우는 이야기...)   "만약 교정원 일을 하시면서   자식들에게 그것을 숨겼다면 좋았을까요?"   나는 동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검열이없었다면 아드님은 기사를 많이 읽었을까요?"   "읽을 수 있을 만큼 읽었겠죠..."   그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노인은 다시 신문을 손에 들었다. (1863년말에서 1865년 사이에) ㅁ 다음 검색에서         祈 禱   춥고 배고픈 우리 마을 구슬픈 아침 축축한 안개 속 멀리서 종이 운다 교회가 신도를 부르는 엄숙하고 거센 위압이 둔중한 종소리에 어려있다   나는 흐린 아침나절을 교회에서 보내며 이젠 그것을 잊지 않으리   온 마을 사람들 이 처절한 기간이 멎도록 모두 한결같이 엎드렸노라   마을 사람들 속에서 이처럼 굳게 마음 한 곳을 본 적이 아직 없노라   주여 그들과 그들의 친구를 보살피소서 나는 중얼거렸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러나온 기도를 들어 주소서 그들에 봉사한 사람들 유배당한 사람들 옥중에 묶여 간 사람들   오랜 싸움에 견디었고 투쟁에 굴하지 않은 사람들 노예의 최후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 일을   주여 우리 당신에게 비나이다 [출처] 1351 * 니콜라이 A. 네크라소프 詩 모음 *        
745    마광수님, "창조적 불복종"때문에 저세상 길 택했을가... 댓글:  조회:3103  추천:0  2017-09-21
  창조적 불복종 ............................................................ 마광수 나는 ‘창조적 불복종’이라는 말을 일종의 화두로 삼고서 지금까지 여러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란 반드시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항과 불복종에 서 나온다는 뜻이다. 문화사적(文化史的)으로 보면 새로운 창조를 시도한 사람들은 기존 의 진리나 윤리 등에 대해 ‘삐딱한 눈길’을 보낸 사람들이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 케 하리라”라고 말했지만, 나는 거꾸로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라고 말하고 싶다. 고정불변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유연성 있는 사고방식을 갖고서 모든 것들을 대할 수 있어야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니, 고정불변의 ‘진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과학발달의 역사를 주의깊게 관찰해 보 면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권테는 변태를 낳고 변태는 창조를 낳는다”는 말도 내가 늘상 되뇌이는 말이다. 내 첫 번째 장편소설 제목이『권태』였을 만큼, 나는 권태가 모든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된 다고 생각했다. ‘권태’를 단지 ‘게으름’에 따른 ‘심심함’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지 않고 ‘새 로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패러다임에 ‘반항’하면서 ‘권태’ 를 느낄 수 있을 때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왔다는 얘기다. 역사상 많은 ‘반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진리나 윤리, 또는 학설에 권태를 느낀 사람들이었다. 문학으로 보면 ‘사디즘’이란 말을 낳게 한 변태 작가 사드가 있었고, 과학 으로 보면 천동설에 반항하여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나, 신의 창조설에 반항하여 진 화론을 주장한 다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대에 호된 비난과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 단죄되기도 했다. 노예제도에 반기를 든 스파르타쿠스도 ‘불복종’을 한 사람이었고, 고루한 성도덕에 반기 를 든 프르이트도 ‘불복종’을 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구체적 행동이나 학설로 반기를 든 것은 단지 심통맞은 ‘뗑깡’을 부린 게 아니라, 스스로의 확고한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 ‘창조적 불복종자’들이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는 진보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도 힌두교에 반기를 든 반항인이었고 예수도 유대교에 반기를 든 반항인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창조’가 있었기에 종교사 역시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 특히 예수의 반항 과 불복종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갈 정도의 심한 처벌을 받았다. 보통 용기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는 반항이었다. 그런 확고한 불복종과 반항은 어떤 정신에서 가능했을까? 나는 그것이 ‘야한 정신’, 곧 ‘야인(野人)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내가 평생 지껄여댄 ‘야하다’라는 말은 바로 그런 ‘야인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야하다’의 어원이 ‘野하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약명(?) 높은「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시를 발표한 게 28살 때인 1979년이 다. 발표한 문학잡지는 계간지 이었다. 나는 그때 그 제목 (또는 말)이 나 중에 가서 그토록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정말 몰랐었다. 그 시는 지금도 인터넷의 바다 속을 떠나니며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대가 바뀌어도 그 말은 항상 새로 운 패러다임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시 한 편만 갖고서 긴 평론을 쓴 비평가들도 많다. 발표되고 나서 한동안 잠자고 있던 그 작품이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건 1989년 1월 에 낸 내 첫 에세이집『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때문이었다. 잡다한 에세이들을 주워 담 아 책 한 권을 묶고 나서, 제목을 붙이려고 이리저리 고심하다가 불쑥 생각이 나 에세이 집 제목으로 채택된 게 바로 그 시의 제목이었다. 그 수필집을 낸 뒤, 나는 내가 근무하고 있던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들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는 죄목으로 징계까지 받았고, 『마 광수의 야한 여자론(論) 비판』이란 제목의 단행본까지 나왔다. 그 뒤로 내가 줄곧 주장해온 ‘야한 정신’이란, ‘과거보다 미래에, 도덕보다, 본능에, 질서 보다 자유에, 정신보다 육체에, 전체보다 개인에, 절제보다 쾌락에’ 가치를 매기는 정신 을 말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야한 여자 소동’ 이후로도 나는 많이 두들겨 맞았다. 1992년 10월에는 내가 써서 출간한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이라는 이유도 구속영장도 없이 ‘긴급 체포’를 당해 감옥소 로 갔고, 대법원까지 간 긴 재판을 통해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로 나는 연 세대 교수직에서 해임되어 실업자 백수가 되었다. 『즐거운 사라』는 한참 후에 또 한 번 두들겨 맞았는데, 2007년 4월에 그 소설을 어느 독자가 내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부 올 리는 바람에, 불구속 기소가 되어 또 다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과 2 범(犯)’이 되었고, 정년퇴임 이후에도 연금을 못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라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또 나를 디립다 까는 책이 한 권 나왔는데, 책 제목은 『사 라는 결코 즐겁지 않았다』였다. 그 책에 대한 반박문을 쓰라는 원고청탁을 월간지 에서 해와, 나는 『그래도 사라는 즐겁다』는 제목으로 장문의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줄여 말해서 ‘야한’ ‘사라’가 나를 되게 골탕 먹인 셈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꼭 한편의 코미디같이 느껴진다. 나는 내가 문학에서 새로운 ‘창조’를 해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겪은 일련 의 사건들은 오직 ‘한국’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건들이었다. 유럽이나 일본 같으면 아 무런 화젯거리도 못 될 작품이 한국에서만은 그토록 큰 풍파를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억울해하고 있다. 내가 ‘한국적 상황’에서 새롭 게 창조해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문학’에 대한 이론과 창작을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그리고 장편소설 『권태』가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그 이후로 20 여 년이 지나도록 ‘젊은 마광수’, 다시 말해서 ‘제2의 마광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가 새로 소설이나 시집을 내면 거의 모두가 이 된다. 그러니 출판사 들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 문단에서 ‘왕따’이기 때문에 빽줄도 없다. 학계에서도 마찬가 지다. 2000년도에는 1998년에 어렵게 복권이 되어 연세대에 복직한 지 2년 만에 학과 동 료 교수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해 ‘재임용 탈락’이 될 뻔 했고 (다행이 학교 본부에서 나를 봐주는 바람에 살아났다), 그 여파로 격심한 배신감에 의한 지독한 우울증에 걸려 2년 반이나 휴직해야 했다. 별 볼일 없는 ‘창조’를 한 것 때문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 으니 그건 참 억울한 일이다. 지금(2011) 내 나이 60. 인생의 종반기. 아닌 종반기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더 비약적이 고 기발한 ‘변태’를 ‘창조’해내고 나서 죽어야만 여한이 없을 터인데, 한국이라는 사회 여 건이 그걸 허락하지 않으니 억울하고 안타까워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문학은 국가 별 언어라는 장벽이 있어 쉽게 국제화가 될 수 없다. 미술이나 음악은 세계가 공통 언어 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여건을 조금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40살 때 첫 미 술전시회를 가진 이후로 지금까지 8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역시 아마추어 대접밖에 못 받고 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할 때 국문과가 아니라 미술대학에 진학했더라면 어땠을 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해보게 된다. 쓰다 보니까 내 신세타령을 너무 많이 늘어놔 가지고 ‘창조’라는 거창한 제목과는 좀 동 떨어진 글이 되고 만 것 같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 다. 내가 나이를 더 먹더라도 절대로 ‘나이값’만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만은 언제까지나 ‘야한 정신’을 유지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일단 ‘나이값’을 하게 되면 새로운 모색과 실험과 창조와는 담을 쌓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글쟁이들은 특히나 더 빨리 늙는다. 쉽게 변절하고 쉽게 타협한다. 오죽하면 내 가 “한국에서는 요절하지 않으면 변절한다”라는 말을 자주 떠들어댔겠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 시인인 윤동주조차도, 그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추하게 변절하지 않았 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니까 말이다. (2011) (마광수 지음 중에서)              
744    마광수님, 력사앞에서 님의 "문단유사" 알아보기 댓글:  조회:3204  추천:0  2017-09-21
5일 자살한 논쟁적 작가 마광수(66)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소년 출세’한 시인이었다. 윤동주의 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79년 불과 스물 여덟살 때 홍익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고, 1984년부터 모교인 연세대 강단에 섰다.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로 ‘외설 논란’이 시작됐지만, 법(法)이 그에게 수갑을 채운 것은 ‘즐거운 사라’(1991)가 출간된 이듬해인 1992년이었다. ‘사건의 출연자’는 화려했다. 당시 수사를 지시한 건 현승종 국무총리, 담당 검사는 서울지검 특수2부 김진태 검사(검찰총장 역임)였다. 마씨의 변론은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가 맡았고, 음란성을 판단한 감정인으로 쟁쟁한 이름들이 나왔다. 92년 1심 법원은 마 교수에게 음란한 문서 제조 혐의로 실형을 선고했다. 마씨는 항소했지만, 2심·3심에서 번번히 기각되면서 유죄가 최종 확정됐다.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이었다.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그는 교단과 문단에서 ‘유랑’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대중은 ‘정말 그 책이 그렇게 문제가 있었나’ ‘음란물의 잣대는 무엇이었나’ 같은 의문을 품으며 20여년 전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다. #내로남불? 재조명되는 안경환 감정서 이 궁금증 때문에 ‘추억 강제 소환’된 사람이 재판 감정인 중 한 명이었던 안경환 서울대 교수다. 안씨는 ‘법과 문학’ 강좌를 담당하는 서울대 법대 교수 자격으로 2심 재판에서 “즐거운 사라는 음란물이 맞다”는 감정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마광수 교수 사건 2심 감정인들의 의견. 안씨는 감정서에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사회적 가치가 없는 ‘법적 폐기물’에 불과하다”고 마씨 소설을 평가했다. 이태동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도 “(마씨에 대한) 인간적 비애와 연민을 느낀다”며 “(감정서를 내기까지) 말할 수 없는 인간적인 고뇌를 겪었다”고 서술한 뒤, “마씨가 작품의 주제를 성 해방과 인간의 자아탐색이라고 하는 건 불량상품을 과대포장하기 위한 ‘어거지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감정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안경환 교수의 감정서가 주목받는 것은 시간이 흘러 안 교수가 20여년 전 마광수 교수와 비슷하게 ‘책’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법무부장관 후보에 올랐던 안씨는 지난해 출간한 책 ‘남자란 무엇인가’에서 여성 비하적 표현을 써 ‘성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자유 의지를 가진 여성(사라) 관점에서 성과 인간의 해방을 다룬 ‘즐거운 사라’와는 달리, ‘남자란 무엇인가’는 “남자로 태어나 엄청난 특권을 누린 세대이지만 남자답게 사는게 너무 힘들었다”고 하는 남성(안 교수)의 관점에서 풀어나간 책이다. “모든 남성은 강간범이 될 수 있다” “난교는 남자의 생래적 특징이다” “젊은 여자는 정신병자만 아니라면 거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구걸하느니 당당하게 매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위 세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다. 술자리에는 반드시 여자가 있어야 한다. 정 없으면 장모라도 곁에 있어야 한다”…. 일부 표현이 논란이 되자 안씨는 “종합적인 내용을 읽어본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며 “시대착오적인 남성들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성 사회의 대변혁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기술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책 논란에 이어 안 교수는 과거 상대 여성의 의사에 반해 도장을 위조, ‘강제 혼인 신고’를 했다가 ‘혼인 무효 소송’까지 당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자진 사퇴하고 말았다. 안 교수는 혼인 신고 문제에 대해선 “20대 중반에 벌어졌던 일로 당시 나만의 이기심에 눈이 멀어 사랑했던 사람과 가족에 어처구니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위였다”고 사과했다. 은 1994년 안경환 교수가 법원에 제출한 감정서를 입수, 감정 내용 전문을 공개한다. 안 교수가 감정서에 인용한 ‘즐거운 사라’의 성묘사도 일부 실었다. 성 표현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안경환의 '남자란 무엇인가'. /조선일보DB #감정내용 문1. 이 작품 중 성에 관한 묘사와 서술이 그 정도와 수법에 있어서 노골적이고 상세한가? 감정결론: 그렇다. 작품의 말미에 부기한 에서 피고인은 이 작품의 저술 목적을 ‘작가의 당위론적 세계관의 개입을 배제한’ 성의 사실적 묘사를 통한 리얼리즘의 추구에 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작가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택한 성에 관한 묘사는 성을 주제로 하는 통상적인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묘사보다 그 정도와 수법에 있어서 상세하고 노골적이라고 판단됩니다.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사라는 최소한 여섯 사람의 이름이 밝혀진 특정 남성과 성행위를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1대1의 남녀간의 성행위 뿐만 아니라 여성과의 동성애 장면, 남 1대 여2의 혼음, 그리고 자위행위의 장면도 등장합니다. 성행위의 태양도 오랄섹스, 항문섹스, 카섹스 등 다양합니다. 어느 경우에나 성행위의 묘사와 서술은 노골적이고 상세합니다. 예를 들어 오랄섹스의 장면 묘사를 보자면 『(중략) 나도 팬티를 벗어 던지고 치마를 위로 젓힌 다음 그에게 핥아달라고 했다.…그의 흐물흐물한 혀끝이 내 사타구니 사이를 미끌미끌 스치고 지나갔다.…김승태가 오로지 의무감에 넘쳐 내 ○○○○○를 혀끝으로 힘겹게 찾아 헤매는 게 안쓰러워 보이고 또 감질만 나서, 나는 손으로 그의 입술을 밀어버리고 다시금 ○○○를 향해 입을 벌리고서 엎어졌다. 혓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한참 핥아주고 나니까, 그제서야 드디어 쨀쨀쨀 정액이 흘러 나온다. 생각보다는 수압(水壓)이 별로였다. 나는 그것을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받아 마셨다. 별로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171-172면)』 『나는 왠지 신경질이 나서 김승태의 윗도리까지 홀라당 다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혓바닥에 잔뜩 힘을 주어 그의 배꼽에서부터 젖꼭지까지, 그리고 젖꼭지에서 모가지 언저리까지 날름날름 핥아 나갔다.…결국 그는 나를 발딱 젖혀 놓더니, 빳빳하게 선 ○○○를 앞장세우고 씨근씨근 돌진해왔다. (편집과정서 생략)… (176-177면) 』 『그는 미칠 듯이 핥아대다가 내 몸에 침을 뱉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몸 전체에 술을 붓고 핥아 먹기도 했다. (편집과정서 생략)… (293면) 』 이 밖에도 신원이 특정하지 않은 남자와의 성교 장면을 회상하거나 막연히 성행위를 상상하는 장면도 지극히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기철이의 ○○○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그 아래 매달린 ○○속의 방울 두 개를 내 손바닥 안에 넣고 살살 비벼본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톡톡 건드려도 본다.…어느새 그놈이 성을 낸다.…그 녀석은 몸 안의 살덩이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좁은 터널 속을 이리저리 종횡무진으로 휩쓸고 다닌다. (33면) 』 주인공이 자위를 하는 장면의 묘사 또한 노골적이고 상세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나는 땅콩 서너 알을 질 속에다 집어넣고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보았다.…나는 불두덩 근처가 차츰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시금 한 주먹의 땅콩을 ○ 속에다가 쑤셔 넣어본다. 꽉 찬 만복감, 아니 만질감(滿膣感) 같은 느낌이 항문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올라오는 것이 거 참 기분이 상당히 괜찮다. 근사하다. 나는 다시 ○ 속에 꼭꼭 숨어있는 땅콩 알갱이들을 뾰족한 손톱 끝으로 한알 한알 빼내어 입에다 넣고 먹어본다. 처음에는 빼내기가 쉬웠지만 나중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깊숙이 박혀 있는 땅콩 알갱이를 빼내려고 손가락들을 집어넣고 휘저어 대다보니 정말로 저릿저릿 하면서도 그윽한 쾌감이 뼈 속 깊숙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손가락 동작을 아주 천천히 하여 ○ 속의 땅콩을 우아한 방법으로 수색해내기 시작했다. 얼근한 취기와 함께, 남자의 ○○○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싱거운 오르가즘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지속적인 오르가즘이 찾아왔다. (30면) 』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성행위에 대한 묘사는 비록 성을 주제로한 문학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불필요하게 상세하고 노골적이라고 판단됩니다. 문2. 그러한 묘사와 서술이 이 사건 작품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어떠한가? ‘비중’의 의미를 계량적인 측면과 주제의 전개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이 작품에서 성행위의 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히 계량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면 이 작품은 전체 본문 300면 정도(백지 간지 제외)의 분량 중 최소한 절반 이상을 성행위의 묘사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행위의 묘사는 저술의 특정 부분에 편중되어 있지 않고 전반에 걸쳐 시종일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행위의 묘사를 제외한 나머지의 이야기의 전개는 본 감정인의 판단으로는 단지 성행위와 성행위 사이를 연결하는 접속어에 불과합니다.  또한 작가 스스로가 천명하듯 이 작품은 ‘성’에 관한 것이고 문학적 기법에 있어 사실주의를 표방한다고 내세우는 만큼 성행위의 묘사가 작품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문3. 그러한 묘사와 서술이 이 사건 작품 전체의 내용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 작품에 표현된 사상 내지는 주제와 소설의 구성상 필연적인 관련성이 있는가? 만약 이 작품을 예술적 가치를 보유한 문학작품으로 인정한다면 (달리 평가하는 감정인의 사견에 관해서는 후술하는 3. 감정인의 사견 참조) 이 작품의 주제는 성의 해방과 인간의 자아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 자신도 이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의 해방을 주제로 다루는 작품이기 때문에 성행위를 상세하고 노골적으로 묘사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작가는 ‘사실적 기법’을 중시한다는 이유로 마치 성을 주제로 한 리얼리즘 작품은 필연적으로 성행위의 노골적이고도 상세한 묘사가 포함되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실주의라고 번역되는 리얼리즘의 본질은 작가가 주장하는 듯한 현실의 복사 내지는 모사를 통해 당대의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소재 선택과 기법, 문제 등을 지칭하기는 하나 반드시 이러한 의미에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정확한 필력에 의해서도 현실의 정확한 모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의 리얼리즘의 논의는 이러한 기계적인 현실 모사보다는 ‘현실의 전체 내지는 핵심’의 뜻으로 이해하여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성에 관한 현실의 전체 내지는 핵심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성행위에 관한 적나라한 묘사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피고인의 주장대로 성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성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하더라도 성을 다루는 문학작품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묘사의 기법이 통속성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이 점이 다른 주제를 다루는 작품과의 차이점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실험과 달리 성에 관한 실험은 엄격한 의미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성의 존재나 이에 관한 실험 자체는 인류사에 끊임없이 전개되어 온 것으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실험을 어떻게 공표하는가의 문제가 시대에 따라 제기되어 왔을 따름입니다. 성에 관한 사실적 묘사가 예술이 되느냐 아니면 음란물이 되느냐는 묘사의 기법이 통속성을 극복했느냐 여부(흔히 외국의 판결이 문제삼는 ‘승화시켰느냐’ 여부)에 의해 일응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에서의 성의 묘사는 이러한 통속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감정인의 판단입니다. 문4. 그러한 묘사와 서술에서 만약 자극이 유발된다면 이 작품에서 의도된 작가의 사상성과 작품의 예술성에 의해 어느 정도 완화된다고 평가하는가? 감정인의 소견으로는 음란성과 예술성은 법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상호 배척되는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예술적 가치가 없는 음란물이라고 판정하기에 이 문항에 대한 답변을 생략합니다. 문5. 이 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즉 작품 전체의 내용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의도된 작가의 사상성 내지는 주제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이 객관적으로 독자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상성 내지는 주제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이 객관적으로 독자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상성 내지는 주제와 다르다면 그것도 또한 무엇인가? 질문의 전반은 문항 3과 관련하여 답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되풀이하자면 성과 인간의 해방이 작가가 의도한 사상성 내지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의 후반에 관련하여 답하자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품의 음란성에 주목할 것입니다. 이 작품은 ‘사실적 묘사’라는 명분 아래 성행위의 노골적인 묘사가 이어져 있고 독자는 작가가 의도했다고 표방하는 성과 인간의 해방이라는 사회적 내지는 철학적 주제보다는 성행위 그 자체의 사실적 묘사에 주목할 것입니다.  작품의 군데군데 주인공의 가벼운 일상적 갈등이나 인간적 고뇌, 또는 사회적 이슈에 관한 서술과 묘사가 등장하나 이러한 서술과 묘사는 작품 전체에 걸쳐 이어지는 성행위의 묘사를 위한 최소한의 스토리 내지는 본 주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삽화에 불과한 정도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자신이 밝힌대로 “일체의 도덕적 코멘트나 이른바 ‘전망의 제시’같은 것을 무시하고 헷갈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아이덴티티 identity를 확립해 나가려고 애쓰는 한 여대생의 시각을 통해 전환기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치관의 문제를 조감해 보려”했다고 할지라도 통상적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가치관의 문제보다는 대상과 태양을 바꾸어가며 행하는 각양각색의 성행위의 묘사에 더욱 주목할 것이 분명합니다. 문6. 이 작품은 독자에게 성적 충동적 모방심을 자극시키고 성범죄를 유발하는 등 사회적 현실로서 위험을 가져 올 우려가 있는가? 답: 그럴 위험은 없다고 본다. 보편적인 윤리의식과 충동적인 행동의 자제력을 보유한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성범죄에의 충동을 느끼고 이를 실행에 옮길 위험은 전혀 없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이 작품에 묘사된 성행위로서 현행법상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는 단 한건 뿐, 배우자가 있는 김승태와의 성행위뿐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현행법상 간통죄에 해당할 수 있지만 이러한 혼외정사는 모든 문학작품에서 지극히 일반적으로 다루는 이야기이며 통상적인 의미의 성범죄의 분류에 속하지 아니합니다. 둘째, 이 작품은 성의 해방을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 간의 자유의사에 기한 합의에 의한 성행위만을 미화시킵니다. 폭력이나 기망 등 부자연스런 수단에 의한 성행위를 고무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혐오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사라는 일체의 성행위를 자신의 자유의사에 기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주도 아래 행합니다. ‘학습의 실천’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면서, 작가 스스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의 해방, 그 중에서도 여성의 성적 해방은 여성이 자유로운 인격의 주체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고 충동적인 모방심리에 의해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의 행위를 현실적인 행동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인물이 될지는 모르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7. 결론적으로 현재의 우리 사회를 기준으로 하여 그 작품 자체로서 통상적인 성인 독자로 하여금 성욕을 자극하여 흥분케 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건전한 성 풍속이나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한다고 보는가? ‘통상적인 성인’ 독자의 개념은 지극히 모호합니다. 법이 규정하는 성인의 범위는 지극히 광범합니다. 연령만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성적 능력이 지극히 왕성한 갓 성년이 된 사람에서부터 육체적으로 성행위의 능력을 상실한 국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성별, 성경험, 종교적 성향 등에 따라 더욱 세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통념의 기준이 되는 ‘통상적인 성인’이란 실제로 특정할 수 없는 하나의 이념형입니다. 음란성에 관한 외국 법원의 판결도 불법행위에 있어서의 주의 의무의 기준이 되는 ‘합리적인 인간’ 등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감정의 전제조건 (6), (7)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감정인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기초로 판단해 볼 때, 감정인이 예상할 수 있는 통상적인 성인 독자로 하여금 저급의 성욕을 자극하며, 성적 수치심 내지는 불쾌감을 조성한다고 판단합니다. #감정인의_사견 (안경환 교수는 감정서에 사견을 따로 넣었다.) 감정인은 법리의 구성상 음란성과 예술성은 상호 배척되는 개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특정 출판물이 ‘음란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라는 일반의 인식은 우리 법상의 법리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반의 인식을 법리로 수용하자면 개념상의 혼란이 초래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헌법 제 22조 제 1항은 명백히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음란물을 예술적 작품으로 인정한다면 이에 대해서도 헌법적 차원의 보호를 부여해야 되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음란물은 헌법이 보호할 만한 예술적 가치가 결여된, 이를테면 법적 폐기물인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노골적이고 상세한 성행위의 묘사가 바로 음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음란성’이라는 개념은 사실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실판단의 결과 도출된 ‘법적’인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헌법이 보호하는 예술 작품은 법적으로 음란하지 않는 작품에 한정됩니다. 특정 작품이 법적으로 음란하느냐의 여부는 법리상 아래의 세 가지 기준에 의해 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전체로 해당 출판물의 주체와 묘사가 작품을 접하는 동시대의 사회의 평균성인의 저속(低俗)한 성적 충동을 자극하고, 둘째, 성행위가 통상인에게 도의적 수치심과 불쾌감을 유발하는 방법에 의해 묘사되고 있고, 셋째, 작품이 전체적으로 보아 심각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또는 사회적 가치를 결여한다면 음란물에 해당한다고 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의 심사기준은 언론, 출판, 학문, 예술의 자유가 잘 보장되어 있는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오랜 시일에 걸쳐 정립한 기준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판결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러한 법리를 적용하여 특정 출판물의 음란성 여부를 판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여 본 건 출판물 『즐거운 사라』를 판정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 작품에 나타난 성행위의 묘사는 성에 관한 예술적인 묘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 작품으로부터 예술적 가치를 얻고 싶어 하는 독자는 끝까지 읽는 무익한 노력을 기꺼이 포기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성은 도시생활에서의 수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도시의 생활에 식용수와 세척용 상수도가 필수적인 만큼 상수도에서 효용을 다한 폐기수와 배설물을 처리할 하수도 또한 필요악입니다. 인간의 생활에도 후손의 창출과 사랑의 표현이라는 숭고한 기능의 성이 있듯이, 인간의 저급한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성 또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양자는 무대가 다르고 영역이 달라야 합니다. 도시계획의 요체는 상수도와 하수도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서로 혼화(混和)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듯이 성을 묘사하는 출판물도 각기 지정된 활동 영역 내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성에 관한 출판물도 그 형태와 내용에 따라 문학작품과 문학작품이 아닌 단순한 음란물들은 무대가 엄격히 구분되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문제를 법적으로 먼저 경험한 많은 나라에서 ‘성인서적’ 또는 ‘포르노그라피’ 등속의 이름으로 분류하고 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개설하는 등 예술작품과 음란물의 유통경로를 엄격히 분리합니다. 이를테면 성적 묘사에 관한 공식적인 하수도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의 상수도와 하수도를 법적 구분을 하지 않고 공적으로는 하수도를 전면적으로 폐쇄하고 금지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출판매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황색주간지’가 한 에입니다. 이러한 매체에 실린 글은 일반적으로 심각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독자는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매체를 선택한 독자는 스스로 ‘문학작품’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성에 관한 묘사도 주로 저속한 성적 충동을 자극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소설 『즐거운 사라』에 나타난 성의 묘사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판단됩니다. 위의 비유에 입각하면 『즐거운 사라』는 하수도의 무대에 머물러 있어야 함이 마땅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수도의 무대에서 막이 잘못 오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 작품에서 성행위 및 이와 관련된 대화의 묘사는 통상인에게 도덕적 수치감과 불쾌감을 유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정본문 (1)에서 예시한 묘사는 정상적인 성인 독자의 건전한 성감정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행위와 관련하여 군데군데 등장하는 “네 멘스를 받아서 거기에 밥을 말아 먹고 싶다.” (293면) 등속의 표현은 아이디어의 신규성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감정인의 견해로는 이 작품은 적어도 현재의 기준으로는 법이 창작물로 보호해야 할 정도의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또는 사회적 가치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작품이 성을 노골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출판 시에는 시대에 뒤진 법의 제재를 받았으나 후일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에 비유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에밀 졸라의 『나나』, D.H. 로렌스의 『무지개』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또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도 출판 당시에는 법의 규제를 받았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이 작품에 대한 평가도 예술에 무지하고 시대에 뒤진 사람들의 우매한 고집이라고 매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성에 대한 비통념적인 묘사라는 지엽적인 문제 때문에 법의 제재를 받은 것일 뿐, 작품의 문학적 가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음란물로 법의 제재를 받은 출판물의 절대다수는 후세에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법이 보호하는 문학적 가치가 있는 성의 묘사와 음란물에 불과한 성의 묘사와의 차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즐거운 사라』는 후세인들에 의해 선구적인 문학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음란물에 불과하며, 혹시 다시 보는 독자가 있다면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 때문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법적 심사기준에 입각하여 본 감정인은 피고인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헌법이 보호하는 문학작품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단순한 ‘음란물’에 해당한다고 판정하는 바입니다. 1994년 2월 3일 사건 93노446의 감정인 안경환 서울 형사지방법원 항소1부 귀중 ///조선일보  ======================= //////////////////////////////////////////////// =======================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김수정 기자]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 사망으로 그를 나락에 빠뜨린 작품 ‘즐거운 사라’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마광수 전 교수의 ‘즐거운 사라’는 음란문서 제작 배포란 이유로 판매금지됐고, 마광수 전 교수도 유죄를 받고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에 의해 사면 복권됐다.   ‘즐거운 사라’를 담당한 검사는 김진태 전 검찰총장. ‘즐거운 사라’가 논란이 되자 당시 서울지검 수뇌부는 고심 끝에 특수2부 소속이던 김진태 당시 검사에게 수사를 지시했다. 김진태 검사가 1만여 권의 장서를 탐독할 정도로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김진태 검사는 처음에는 이 사건을 주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보수적인 성향이 짙었던 그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이건 문학이 아니다"며 사건을 맡았고 출판사 사장까지 구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이미 한 차례 제재를 받은 책을 출판해 처벌이 불가피하다’라는 강경론을 펴기까지 했다고. 무엇보다 여성관에 대한 논란 등 공직자 검증 무대에 올랐던 안경환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즐거운 사라’에 대해선 엄격한 검증의 잣대를 들이댔다. 그는 1994년 2월 '즐거운 사라'에 대한 음란물 제조 혐의 항소심에서 재판부에 "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문학작품의 수준에 미달하는 음란물"이라는 감정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성을 표현한 작품이라도 숭고한 문학작품이 상수도라면 인간의 저급한 본능만 충족시키는 음란물을 하수도에 비유할 수 있는데, '즐거운 사라'는 하수도의 무대에 머물러야 마땅한 작품”이라 힐난했다. 한편 ‘즐거운 사라’로 고난을 겪은 마광수 전 교수는 2011년 ‘돌아온 사라’를 펴냈다. 그를 '광수 아저씨'라 부르는 여대생과의 질펀한 육체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당시 마광수 전 교수는 “부디 단순한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이중적으로 점잔 빼는 한국 사회에 던지는 나의 화두는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다. 여기서 ‘자유’와 ‘방종’의 억지스런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콘텐츠   Recommended by  
743    마광수님, 오늘도 이 시지기-죽림은 님땜에 잠을 설칩니다... 댓글:  조회:2585  추천:0  2017-09-21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장석주   출판사 고려원에서 두 해 조금 넘게 일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직장생활이 갑갑했고,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니체전집’을 새로 출간하는 것이다. 고려원에서 나올 때 받은 퇴직금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이의 회고록 원고를 윤문하고 받은 돈을 보태 초기 창업자금을 만들었다. 치밀한 계획도 없이 종로 3가의 건물 옥탑방을 사무실로 얻고 출판사를 시작했다. 후배 한 명이 출판사가 자리잡을 때까지 무보수로 돕겠다고 나섰다. 출판사를 시작한지 1년 뒤 펴낸 헤르만 헤세 잠언록 『괴로움을 꿈꾸는 너희들이여』가 뜻밖에도 그해 비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나는 출판사를 열세해 동안 운영했다. 내 30대를 통째로 바쳐 일했고, 운이 좋아 베스트셀러도 몇 권 내놨다. 강남 한복판에 사옥을 짓고, 출판사 직원이 서른 명이 넘어설 정도로 규모도 커졌다. 책을 6백여 종이나 내놓고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큼 성공했지만 그즈음 슬슬 출판사 경영에 대한 회의가 싹트고 있었다. 1992년 당시 연세대학교인 마광수의 장편 『즐거운 사라』를 펴내면서 이 소설이 표현의 자유와 외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로 인해 1992년 문화계가 소란스러웠다. 그해 10월 29일 새벽, 나는 서울 대치동의 집으로 찾아온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서울 지검 특수2부로 연행됐다. 서울 지검 특수2부에 속한 김진태 검사의 방에 마광수 교수도 끌려와 있었다. 당시 이 필화사건을 맡았던 김진태 검사는 승승장구해서 검찰총장을 지내고 검찰을 떠났다. 그날 저녁 8시에 마교수와 나는 검찰 청사를 떠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은 당시 신문과 방송 등 매체에 크게 보도되었다. 문단 일각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공청회를 여는 등 여론전을 펴느라 분주하고, 소설가 하일지와 시인 민용태 씨 등이 나서서 『즐거운 사라』 는 외설이 아니라고 검찰의 논리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감정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들만으로 우리의 구속 수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즐거운 사라』를 두고 “반인륜적, 반도덕적 소설”로 그 안에 나오는 다양한 “변태와 엽기”적인 내용들에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법원에 『즐거운 사라』를 ‘외설물’이라는 감정서를 제출한 당시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 안경환 씨가 대표적인 예다. 『즐거운 사라』가 상식을 뛰어넘는 다양한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작가는 온갖 허구적 상상을 다하고 그것을 창작품으로 빚어내는 사람이다. 사회가 금기하는 반인륜적이고 반도덕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그것을 기어코 쓰는 사람이다. 검찰 조사가 끝난 뒤 구속이 결정된 찰나 나는 의외로 담담해졌다. 출판은 사회적 행위이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 내놓는 모든 출판물들에 대해 나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  『즐거운 사라』 출판에 따른 사회적 비난과 법적 책임이 생긴다면 그것은 당연히 내가 감당할 몫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누구나 자기 행위로 인해 항상 유죄선고의 가능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신체 구속’은 나와 사고체계가 다른 사람들이 헌법을 다르게 달리 내릴 수 있는 수많은 유죄선고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내 몸은 의심할 바 없이 내 것이지만 이것이 사회 속에 있을 때 “몸들을 위한 공간, 몸들이 남긴 궤적,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만남과 우발적 사고들, 노동 환경에서 그들이 취하는 자리와 자세, ‘공동 조건’의 교환 및 무한한 변용”의 대상이다. 내 몸이 사회화될 때 이것은 사적 소유의 범주를 훌쩍 벗어난다. 나는 서울구치소의 입감 절차를 거쳐 한 사동에 수감되었다. 내 몸은 갇힌 몸이 되었다. 마교수와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61일을 보냈다. 그동안 법원을 오가며 검찰과 우리 사건의 변론을 맡은 한승헌 변호사 사이에 오가는 법리 논쟁을 지켜봤다. 법원은 검찰 쪽 손을 들어주었다. 그해 12월 30일, 마교수와 나는 똑같이 1심 재판부의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진 뒤에서 서울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2017년 9월 5일 오후 2시경, 출판도시 안 한 카페에서 원고를 쓰고 있던 중 문득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이는 한국일보 문화부의 이윤주 기자였다. 몇 해 전 신작시집을 내고 인터뷰를 한 계기로 안면을 트고 지낸 기자였는데, 마광수 교수가 자택인 아파트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간 아득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하는 느낌. 이제는 아물어 딱지가 앉은 옛 상처 자리가 헤집어지면서 생살이 드러나는 것만큼 날카로운 아픔이 스쳐갔다. 인생이 큰 커브를 그리면서 방향을 트는 변곡점이 되었던 스물다섯 해 전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이다. 이윤주 기자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잇달아 두 신문사 문화부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두 기자 통화를 끝내자 또 다른 낯선 번호들이 잇달아 떴지만 받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연락이 왔는데, 나는 휴대전화를 아예 꺼버리고 황망한 가운데 복잡해진 감정을 추스르려고 작업을 멈춘 채 출판도시 안을 오래 산책했다. 내 인생의 변곡점의 계기였던 마광수 교수와의 만남과 『즐거운 사라』 출판을 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반추했다. 마광수 교수는 자택에서 목에 스카프를 매고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중앙일보 문화부 신준봉 차장의 요청으로 「한 솔직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죽음 앞에 ―고 마광수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추도사를 썼다. 추도사는 오후 2시에 청탁을 받고 집에 들어가 신문사 마감시간인 오후 6시에 맞춰 끝냈다. 추도사를 신문사로 보낸 뒤 저녁 식사를 하고, 밤 10시쯤 택시를 불러 아내 박연준 시인과 서울 한남동의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에 차려진 마광수 교수의 빈소를 찾았다. 빈소에 도착한 것은 11시쯤이었다. 언론 매체에서는 빈소를 찾는 이가 없다고 했는데, 의외로 문상객들이 북적거렸다. 둘러보았지만 아는 문인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정과리 연세대 교수, 권성우,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연세대 출신으로 시인 기형도의 친구인 소설가 김태연 씨가 그나마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맥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면서 권성우 교수와 김태연 씨 등과 얘기를 나누다가 자정 무렵쯤 일어나 택시를 불러 파주로 돌아왔다.  
742    "시계란 시계는 다 오후 다섯시였다"... 댓글:  조회:2618  추천:0  2017-09-20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오후 다섯 시에 정각 오후 다섯 시에 한 소년이 참회자의 흰옷을 샀다 오후 다섯시에 한 바구니의 석회는 이미 준비되여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 나머지는 죽음 그리고 죽음 뿐이다    오후 다섯 시에 바람은 목화를 흩날린다 오후 다섯 시에 수정와 니켈의 산화물이 뿌려졌다 오후 다섯 시에 이미 표범과 비들기가 싸우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 시에 황폐한 뿔에 받힌 근육 오후 다섯 시에 오후 다섯 시에 낮은 음악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오후 다섯 시에 砒素(비소)의 종과 연기 오후 다섯 시에 길 모퉁이마다엔 침묵이 산더미, 오후 다섯 시에 아! 투우사만이 홀로 가슴을 높이 쳐들고 있다. 오후 다섯 시에 눈같이 창백한 땀방울이 도착했을 때, 오후 다섯 시에 광장이 요드로 뒤덮였을 때 오후 다섯 시에 죽음은 상처 속에 싸앗을 뿌렸다. 오후 다섯 시에 정각 오후 다섯 시에. 오후 다섯 시에는 바퀴 달린 관이 침대로 변했다. 오후 다섯시에 뼈와 피리가 그의 귀에 울렸다. 오후 다섯 시에 투우가 이미 그의 이마 근처에서 울부짓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 방에는 고뇌의 무지개가 떠 있있다. 오후 다섯 시에 멀리에서 이미 썩은 냄새가 밀려온다. 오후 다섯 시에 초록빛 천과 백합의 나팔소리 오후 다섯 시에 상처는 태양과 같이 불타고 있다. 오후 다섯 시에 군중이 창문을 부수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 오후 다섯 시에 아, 얼마나 끔찍한 오후 다섯 시인가! 시계란 시계는 다 다섯 시였다. 어스름한 오후 다섯 시였다.    ==   7)    인류가 자신의 그림자와 화해하는 방식으로 개발한 문화 중에 하나 바로 '스페인'의 '투우 축제'이다. 스페인 투우가 진정 야만인가?  나도 야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의 진정한 본질은 "야만을 갖춘 예술"이란 것이다.  투우의 행위는 "끔찍한 충격"을 선사하지만, 그러한 "충격"만이 전해줄 수 있는 본질적인 "아름다움"또한 분명히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투우 경기에서 오직 '소'만이 희생양으로 쓰인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투우 경기의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되는 소는 내게도 안쓰럽다.  하지만 그것이 그 소의 운명이고, 그 운명과 싸우는 것은 소와 함께 투우사, 사람이다.  8)  사족이지만 인간은 포우류에 속한 생물군중에서, 생식기가 유독 큰 편에 속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인류의 조상, - 더 정확히는 같은 조상을 가진 - 영장류들도 신체에 비해서 꽤 큰 성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들이 본래 난교를 하면서 번식을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은 그런 본능을 제어하는 쪽으로 발전해 오고 있지만 - 사실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  우리의 신체는 아직도 과거의 그런 본능들과 완전히 단절된 것또한 결코 아니다.    오해하지는 말아달라. 내가 난교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하여 개발된  '당위'와 규범의 논리가 매우 설득력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그만큼 작위적이란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  
741    동시를 "하이퍼"로 써도 됨둥... 아니 됨둥(ㄷ)... 댓글:  조회:3007  추천:0  2017-09-19
하이퍼동시집   나비 돛배와 잠자리 십자가. 3 ( 41 ~60) 최룡관   41 호케이     호랑이와 곰들   별따기 한다   관람석이 후르르   하늘 날아오르고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2017.6.17.   42 나무의 조화   아롱다롱 꽃비단으로   코트를 지어 산에 입힌다     태양의 딸   불의 엄마   푸르른 분수   푸른 살이 올라   산이   피둥피둥 살진다   앙상한 가시 되여   산을   하얀 고습도치 만든다      2017.7.10.     43 락수물소리     콩콩콩   구멍파기   뚜두두   지통 터치기   통통통   북 두드리기   2017.6.17.     44 라이타     라이라크 꽃이 뽕뽕 핀다   이우가 흐엉흐엉   타일 돌돌   꽃들이 울긋불긋   타자기 톡톡     콩새무리 후르르             2017.6.17.   45 원주필     배속에 글자들이   가득 차있다.     종이와 만나면   말도 많다     고속 도로 씨잉   산굽이 돈다      2017.6.17.     46 호박꽃     호박꽃은 노란 금덩이   왕벌이 금캐러 온다   호박꽃은 트럼베   아앙앵 소리 없는   울음 운다   호박꽃은 엄마   애기 호박 젖 먹인다.                    2017.6.17.     47 사전     정말 크고 큰 집이지   쪽배가 살고   구름이 살고   별들이 살고   노루가 살고   풍덩이 살고   .........           2017.6.17.     48 구름다리     구름 다리 건넘 어디지   손오공네 집이야   구름다리위로 가면 어디지   해님 뜨락이야   구름다리서 내리면 어디지   박쥐네 동굴이야       2017.6.17     49 배낭     등에서 잠만 자는 아기   배 고프면 해 먹고   배 부르면 달 눈다     배를 뱅뱅 깍아라   손바닥에 하얀 달이 뜨고   사라에서 따발사탕 큰다     별들 웃음소리 배낭에 넘친다           2017.6.17     50 오십번째 동시       오십번째 동시는   쥐와 고양이가 가지런히 누워   가릉가릉 코 고는 가마목   오십번째 동시는   산이 되였다 구름 되였다   산과 구름이 안고 뒹구는 땅   오십번째 동시는   뽈과 해가 끌어안고 돌아가며   해가 되였다 뽈이 되였다 하는 하늘              2017.6.17.     51 홍학의 전설     소금무지에서 나서   엄마의 빨간 젖 먹으며 일어선다   만리경주 선수들   달리고 달리며 자라는 하늘 새   담수호로 달려가서   만리 나는 비행기 된다   붉은 물 들이여   목에선 해 뜨고   등에선 달 뜬다                  2017.6.17.     52 화산     빨간 꽃 피우는 꽃봉오리     까만 머리채 날리는 소녀     풍풍 포탄을 쏘는 포아구리     콸콸 철물 쏟아내는 용광로     쩍쩍 산도 베여내는 신선칼     53 평균새     등에다   검은 외투를 입고 다닌다   눈보라 코트자락 날리면   새까만 지도 그린다   바다에선 쪽배   뭍에선 오또기     54  해님     날마다 하늘 재이는 둥근 자       시간 알리는 목탁 소리       드르릉 세탁기   검은 구름 하얗게 빤다       장미꽃 넘쳐나는 꽃바구니       2017.6.17.       55  보름달       동그란 사과    시간이 야금야금 먹는다   동그란 북   바람이 동동 두드린다   동그란 노대   무수한 별방울 튕긴다   2017.6.17.       56. 별       하늘엔 학교 많나봐   빨간 벨 단추 총총 하구나       하늘 사과밭에 풍년 들었나봐   빨간 사과들 주렁지었네       하늘 쪼무래기들 밤샘 하나봐   빨간  초불 가득 켰구나            20017.6.17.       57 작은 늪 풍경       잉어는 꼬리 휘저어   금싸락  튕긴다       조약돌 입에서   이빨들 반짝거린다       물새들 날개 펴   적을 소(小)자 쓴다       58 그림자       그림자에 송송 구멍 났다       잠자리 구멍 나들며   그림자 구멍 꿰맨다       그림자 나무 초리 물고   나무 늘군다       야금야금 산을 먹다가   저도 몰래 제까지 먹어버린다           2017.6.17.            59 거미줄       앵앵 사이렌 울리는 모기야   거미줄 널 얽어 콩죽 쓰려한단다       쪽배 돛아 나비야   거미줄이 돛으로 이팝 지으려한단다       칠성별 입은 딱장벌레야   거미줄 널 묶어 튀기를 튀우련단다                  2017.6.18          60 단풍   빨간 별무리 노란 별무리 산에 산에 연지곤지     빨강 새 노랑 새 화르르 날아난다   빨강 게 노랑 게 강가에서 어정어정 2017.8.  
740    마광수님, 사라는 "사라"땜에 님께서 등천길 가신걸 알가ㅠ... 댓글:  조회:3316  추천:0  2017-09-19
고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사라. 서울 신촌의 한 대학에 재학중인 미대 3학년생이다. 키 168㎝. 하얀 피부에 코는 작지만 적당한 높이. 대학입시 합격 후 쌍꺼풀 수술을 해서 마치 ‘튀기’같은 외모다. ‘내 몸을 캔버스 삼아 그림 그리는 기분으로 화장하고 옷 입고 액세서리를 걸치는’ 덕에 학교 안에서도 ‘야하기로’ 소문났다. 광고나 영화출연 제의도 받아봤지만 카메라 테스트에서 번번히 실패했다. 사라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순결을 잃었다. 아니, ‘첫 경험’을 했다. 화실에서 입시미술을 가르쳐주던 대학생 기철과 함께. 대학생이 된 사라는 아버지의 미국 발령으로 가족들이 모두 해외로 떠난 뒤 한국에 홀로 남아 대학교수, 50대 남성, 고등학교 동창 등과 ‘자유분방한’ 관계를 즐겼다. 그리고 이름을 세상에 알린 지 2년 만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의 이야기인 ‘즐거운 사라’가 판매금지됐기 때문이다. ‘사라라는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 연세대 재직 당시 마광수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홀연히 나타났다 조용히 사라진 사라. 그에 대해 말하려면 지난 5일 세상을 뜬 사라의 ‘창조주’인 고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빼 놓을 수 없다. 사라를 창조하기 전부터 마 교수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1977년 은사인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이 됐고 이듬해 27세 젊은 나이에 홍익대 조교수로 임용된 ‘천재 교수’ 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 교수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성에 대한 솔직한 표현을 주창하고 그 때문에 ‘금지’되고 ‘정지’ 당하면서였다. 그는 연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라는 에세이집을 발간한 뒤 그 해 2학기 강의제한 조치를 받았다. 이듬해 출판한 그의 첫 소설 ‘광마일기’ 역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경고를 받았다. ‘소설은 필자의 여성편력과 함께 문란한 성행위, 두 부부의 부도덕한 혼음 등 불륜행위를 아무 비판없이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1992년 불교방송의 청소년 프로그램 ‘밤의 창가에서’에 출연해 혼전순결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가 방송위원회로부터 3개월 출연 정지도 당했다. 1991년 세상에 내놓은 사라의 즐거운 생활이 죄가 되면서 마 교수는 그의 말대로 ‘사라라는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 그는 1992년 음란문서 제조 및 판매 혐의로 연대 강의 도중 긴급체포돼 구속기소됐고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교수 지위를 잃은 것은 물론이고 사라를 영영 어두운 곳에 가둬야 했다. 1992년 음란문서 제조 및 판매 혐의로 구속된 마광수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라가 끝까지 반성을 안 한다’ ‘사라’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검찰의 기소 이유는 이렇다. “변태성행위ㆍ혼음ㆍ동성연애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 건전한 사회도덕과 미풍양속을 현저하게 해쳤다고 판단된다.” 검찰은 1969년 외설시비에 휘말렸지만 무죄 판결을 받은 염재만의 소설 ‘반노’를 예로 들며 사라의 죄를 부연했다. “’반노’는 남녀간의 맹목적 성행위 뒤에 오는 권태와 허무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내용으로 주제나 표현의 음란성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즐거운 사라’는 전편에 걸쳐 노골적이고 퇴폐적인 성행위 묘사로 일관한다.” 결국 사라와 ‘반노’ 의 차이는 주인공의 자아성찰 여부였다. 2심 재판 때 사라의 음란성을 감정한 이태동 전 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감정서에 “사라가 끝까지 반성을 안 한다”라고 지적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두환 정권이 스크린ㆍ스포츠ㆍ섹스 등 3S를 강조한 우민화 정책으로 사라만큼 ‘야한’ 여성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지만 대부분 결말에서 죽거나 몰락하는 등 작품 속에서 알아서 ‘교화’됐다. 1985년 영화 ‘어우동’에서 성적 매력을 이용해 양반들을 사로잡은 어우동이 자결로 생을 끝낸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반성없는 사라’는 남성적 시각에서 바라본 문제적 캐릭터였다. 번역가 오진영은 “1990년대 마광수가 구속되고 대학에서 쫓겨난 결정적인 이유는 여자 주인공이 자유로운 성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주인공인 사라가 남자였다면 세간에서 사라의 도덕성 시비와 마 교수에 대한 질타 수준이 사뭇 달랐을 지도 모른다는 지적이다. 1992년 11월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 앞에서 문인 및 화가, 연세대 국문과 학생 등 50여명이 모여 마광수 당시 연세대 국문과 교수 구속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손용석 기자. ‘현실에서 사라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처벌할 수 없는데...’ ‘건전한 사회통념과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한’ 사라. 결국 사라의 자유분방한 성생활, 마 교수가 이를 솔직하게 표현한 것은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 1심부터 상고심까지 법원의 일관된 판단이었다. 주목할 점은 앞서 소개한 이태동 교수를 포함해 음란성 여부 감정에 참여한 5명의 감정위원 전원이 ‘즐거운 사라가 성범죄를 유발할 우려가 없다’는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특히 법학자로 참여한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사라’가 음란물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품을 읽고 충동적 모방심리에 의해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의 행위를 현실적 행동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인물이 될지는 모르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 그렇다면 결국 위험한 것은 소설이 아니라 사라인 것일까. 마 교수는 1994년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재판은 작중인물의 행위를 단죄하고 있는 것인가, 현실에서 사라와 같은 성의 행각(작품 속의 사라는 성범죄를 범한 일이 없다)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처벌할 수 없는 데 작중인물의 행위에 대해서는 작가를 처벌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속 주인공이 살인을 저질러도 작가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는데, 사라는 비도덕적일 뿐 범죄자도 아니라는 것이 그와 동료들의 논리였다. 권명아 동아대 국문과 교수는 “사라 사건의 핵심은 작품의 문학성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의 풍속을 통제하려 하는 것” 이라고 밝혔다. ‘즐거운 사라’를 읽는 것, 사라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덕의 영역이자 개인의 사생활이지만 국가가 법전 어디에도 없는 ‘사회통념’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이를 처벌하고 금지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 비춰보면 마 교수 사건 이후 연극 ‘미란다’와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비롯해 수많은 작품이 외설 시비에 휘말려 법적 처분을 받고, 최근 육군이 동성애 장병을 색출해 처벌한 것까지 모두 형태만 다를 뿐 같은 맥락의 사적 개입인 셈이다. 그림 5 고 마광수 교수가 1994년 발표한 에세이집 ‘사라를 위한 변명’. 한국일보 자료사진. 25년 동안 자취를 감춘 사라는 마 교수 사망 이후 중고 서점에 다시 등장하며 크게 몸값이 뛰고 있다. 이미 50대 황혼의 나이가 됐을 사라. 그가 이후에도 수많은 애인을 만났을지, 지금껏 즐거웠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사라가 계속 이 사회에 살았다면 마 교수만큼이나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혜정 기자 
739    시가 언어이지만 시인은 그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줄 알아야... 댓글:  조회:3312  추천:0  2017-09-19
강하게 말하기와 약하게 말하기  황정산 (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시는 분명 언어이지만 그냥 언어는 아니다. 말이면서 말을 부정하고 말이 아니면서 진정한 말이 되기도 한다. 상투적인 언어들의 허위와 허망함을 사물의 본래적 생생함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바로 이런 시적 언어의 기능이기도 하다. 이런 시어를 통해 시인들은 가려진 진실을 보기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신의 영역을 훔쳐보기도 한다. 시가 말이면서 말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시는 말의 의미로 말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 교의나 정치적 신념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말의 방식이다. 시는 말하는 방식을 통해 말을 거부하고 또 말을 만든다. 최근 발표된 시 중에 이런 말하기 방식이 특별한 몇 작품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흔히 시인들은 말을 넘어서기 위해 말을 증폭한다. 사소한 것들을 과장 해서 대단한 것으로 만들고 남들이 쉽게 느끼지 못하는 아픔을 비명으로 내질러 고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금니 세 개가 빠졌다    앞니가 1㎜쯤 벌어졌다    금강교 아랜 꽃잎 그득 흐를까    개골산 쪽으로 갔다는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지나간 다음에야 알았다 뿌리까지 캐낼 듯  휘감는 모습을 몽타주로도 그려낼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달려들지  도대체가 묘연한 얼굴들,    경사진 쪽으로만 불었다 골바람처럼 매서웠다 바람을 겨누던 발암發癌이  바람으로 읽히었다 투신자살을 시도하려던 발자국들이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곪아터진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선명히 잡혔다    씹히는 바람마다 이빨사이에 끼이고    여전히 마무리 중,    어디에도 기록되기를 원치 않는다                       - 박정원,「 디카에 잡힌 바람」(《우리詩》2010년 6월호)    ‘디카’는 디지털카메라의 약자이다. 대개 그것은 디지털카메라 중에서도 아주 조작하기 간편한 콤팩트형 카메라를 일컫는 데 쓰는 용어이다. 그래 서 그것을 흔히‘똑딱이’라 말하기도 한다. 시인은 그런 카메라에 잡히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에 잡히는 풍경이란 아주 사소한 것이다. 큰맘을 먹고 작품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불러 세워놓고 기념촬영을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지나가는 길에 문득 보이는 한 장면과 한순간의 흔적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인은 그 흔적에서 참으로 많을 것을 본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사진 속에서 바람을 본다. 사진에 찍힌 대상과 배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치고 있는 바람을 보고 있다. 흔히 바람을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없는 것이 기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바람의 모습을 증폭해서 우리에게 낯설게 보여준다. 디카에 잡힌 풍경이 바람을 강조하듯이 시인의 언어가 바람의 느낌을 강렬한 경험으로 과장하고 극대화한다. “어금니가 세 개가 빠”지고“앞니가 1㎜쯤 벌어”진 것은 결국 바람 때문이다. 세상의 풍파가 시인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바람이 그런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 디카에 잡힌 바람에는 “곪아터진 흔적”과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를 늙게 만들고 곪아터지게 만들지만 어디에도 기록되기를 싫어하는 바람은 결국 우리의 욕망이기도 하고 또한 자유이기도 하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고통 속에 우리를 던지고 우리를 휘감고 달려드는 삶의 억압을 견디고 있다.    사내는 몸속에서 울음을 꺼냈다 울음은 우는 화살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울음의 변방에 빗살무늬를 장치한 구름이 빗발쳤다    과녁을 향해 당겨지는 화살은 빗줄기의 연대, 피할 도리가 없으므로 그  가 사랑한 사슴과 말과 여자는 붉은 비애, 피가 홍건했다    광대처럼 광대싸리나무 속에 울음을 가둔 그는 온몸이 화살통인 사내,  핏발 선 눈으로 뼈를 날려 보내는    사랑이 과역이라면, 흉노의 피를 지닌 그를 사랑하련다. 오랑캐, 오랑캐  하고 부르면 말편자처럼 닳아 돌아오는 그를,    구멍 뚫린 염통에서 붉은 울음 꺼이꺼이 토해내는 서녘을 밟고 일몰의  태양이 멀어진다 입시울소리처럼 오래전에 잃어버린 일촉즉발의 활시위가  팽팽해진다    배를 갈라 울음을 꺼낸 단발명중은 살부림의 효시   북방중원의 무덤 속인 듯 오후 6시의 과녁이 운다 몸이 떨리고 목젖이  운다 과녁을 삼킨 나의 화살은 그렇게 흐느낀다                               - 강영은,「 우는화살」(《시안》2010년 여름호)    이 시는 자극적인 언어로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고 있는 작품이다. “몸속에서 울음을 꺼냈다”는 것은 화살을 꺼내는 행위를 두고 한 말이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울음을 꺼낸다는 표현은 아주 처연하게 느껴진다. 온몸으로 자신의 고통을 하나씩 꺼내는 한 사람의 모습이 생생한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살기 위해 벌이를 하고 사랑하고 또 그것들 속에서 상처를 입는 일들은 일상 속에서 아주 흔한 일들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그런 것들의 의미 없는 연속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은 이 상투적인 일상사를 흉노족 사내의 활쏘는 모습으로 바꿈으로써 그 상투성 속에 있는 삶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그 일상의 일들이 사실은 항상 피를 흥건히 준비하고 있는 팽팽한 긴장의 연속임을 시인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역설하기 위해 시인은 “붉은 울음”과 도 같은 강력한 언어로 일상에 함몰된 우리의 무딘 감각을 다시 깨우고 있다.    다음 작품은 좀 더 재밌는 방식으로 언어에 힘을 부여한다.  늦동이 하나 낳으면 잉여라고 이름 짓겠다  떨어지지 않는 애물단지  과분하게도 가치창출의 꽃이라네  널출넌출, 홍냥홍냥  이 가지 저 가지 앵겨붙는  귀룽열매 눈망울 순한, 햇빛 좋은 날 소풍 같은 아이야  사랑이 밑밥인 밥통잉여가 엄마의 업이다  월척의 꿈 놓아건지는 낚시다  너는 전승의 꽃가지를 확, 불질러 버리거라  장벽이나 구획 따위에 물리지 않는  잉여, 물색 다른 그님은  한 생이 붕어해도, 잉어해도 해갈 안되는 물고기  우리는  소시랑게 눈흘김 얄랑얄랑 너름새 넣어  노들강변 한허리 감아 도는 잉어이고 싶었다  한 목숨 수족관 잉여로 치부되는 순간이란다  저인망 논리가 바다까지 털기 전에  절체절명이여,  그 아리아리한 효율 토란 알토란 낳기를!                          - 이인주,「 잉여」(《애지》2010년 여름호)    잉여는 남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남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늦동이 아이처럼 또는 과분한 선물 같이 아름답고 또한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 남는 것으로부터 기인하는지 모른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예술이 되고 당장에 먹고사는 일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이것을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착취하여 가치창출의 수단으로 만들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업신여긴다. 시인은 바로 이런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전복을 시도한다. 경제학적인 용어로 흔히 사용되는 잉여라는 말을 예쁜 늦동이 아이의 이름으로 갖다 앉히기도 하고 잉여를 잉어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잉여라는 말과 그 말에 들어 있는 사회적 함의를 뒤집어 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허위의식을 꼬집는다. 언어의 전복이 생각의 전복을 만들고 그러한 전복의 힘이 우리의 의식에 확 불을 지르고 있다.하지만 강하게 말하여 과장하고 자극적으로 감각에 호소하는 것만이 시적 말하기의 방식은 아니다. 최근 강하게 말하기 방식이 시단의 주류를 형성하여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지는 하드고어적 언어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약하게 말하는 방식이 훨씬 더 큰 시적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 더미에 한쪽 다리를 묻은 소녀가 이쪽을 쳐다본다.    그날 밤, 엄지발가락이 이상하게 욱신대더니 통풍痛風이란다.    바깥으로 빠져나가야 할 게 안으로 쌓였다니    안팎으로 통通하지 못한 잘못을 따끔하게 찔린 통痛이다.    통풍에 잘 듣는다는 노간주나무를 찾았다.    노간주나무의 몸통을 아래로 바짝 휘게 해서 한쪽 발로 누르고 열매를  땄다.    파랗게 여문 햇것도 검게 익은 묵은 것도 가리지 않고 마구 그러담다가  가시에 찔리고야 나무를 놓아주었다.    접힌 허리가 다 펴지지 않아 반쯤 올라가고 반쯤 누운 나무가 그제야 눈에  뜨인다.    평생을 불임과 요통으로 고생할 노간주나무, 그를 슬퍼하듯 곡소리를 내는  바람이 사무친다.    미안하다, 자신을 건사하려고 이렇게 주위를 아프게 하다니.    부기가 덧난 발가락을 꼬무락꼬무락한다.    통증은 통通하려는 마음을 부르는지 동상에 걸린 노간주나무의 부러진  가지가,    없는 다리를 긁을 소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 이동훈,「 아이티소녀의눈물」(《우리詩》2010년6월호)    아이티는 최근 지진 피해를 당해 참혹함을 겪은 나라이다. 그곳에서 발견된 한 소녀를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비참함과 삶의 고통과 남겨진 자의 비애가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것이 당연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은 아주 담담한 어조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지진 피해의 참상을 직접 그리지도 않고 피해를 당해 다친 몸으로 살아 남았을 소녀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대변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시인은 아주 뜬금없이 노간주나무와 자신의 통풍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노간주나무의 부러진 가지와 소녀의 잘려진 다리 그리고 통풍으로 아픈 자신의 다리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것을 통해 아주 먼 나라의 한 아이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고 지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의 아픔임을 아주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약하고 낮은 목소리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 역시 시의 오래된 말하기 방식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한발 물러나 생각을 하게 만들고 또한 목소리 높은 모든 주의주장들의 허위를 꿰뚫어 보게 하기도 한다.  땡볕 아래 납작하게 눌린  갈대가 모래를 건너간다  평평한 모래밭을 기어오른다  사방을 움켜쥔 갈퀴손  한 번씩 쉴 때마다 단단하게 뿌리를 박아둔다  그것은 모래를 다잡는 유일한 방법  촉지의 어금니를 디디며  한발 한발 모래밭을 기어오른다  어디서 물 냄새가 난다  고도 제로, 수평의 정상에 물이 있을 것이다  아직 멀었다 몇 번 비가 오고 비가 그치고 바람은 그 다음의 일  흔들리는 것은 그 다음의 일  근친들이 불어터진 발목을 담그고 서 있는  그 곳  뼈만 남은 나룻배 하나                               - 정병근,「 갈대」(《통》2010년봄호)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고 있다. 애써 나지막하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느낌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냥 사물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다. 그것도 아주 자세를 낮추고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성질을 포착해내고 있다. 그런 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갈대는 모래밭을 기어서 건너고 있다. 갈대가 모래밭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번져가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 라. 흔들리는 갈대라는 상투적인 말을 시인은 “그 다음의 일”이라는 점잖은 표현으로 부정해 버린다. 그럴 때 비로소 갈대의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불어터진 발목을 담그”는 삶의 진창을 함께 하면서 모여 서로의 생명을 확장해가는 갈대의 강인함을 시인은 발견한다.  이렇듯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신념과 격정을 가라앉히며 사물 그 자체에 낮은 자세로 육박해 들어갈 때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약하게 말하는 것이 결국 큰 언어적 힘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이다.    이 점에서 다음 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묵중한 눈꺼풀 사이로 소리와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어린 나는 마을 어귀 나무평상에 앉아 일하러 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  는다. 조석으로 내 앞을 지나 들로 나가는 여러 종류의 마을 가축들을 만난  다. 각기 다른 발굽 소리와 특유의 냄새가 목에 달린 종소리와 나 사이에서 보초를 선곤 했다.    페스Fez의 골목, 나귀가 경쾌한 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간다. 비킬 사이  도 없이 오줌을 확 갈긴다. 그때 목에 달린 종소리가 도덕 같은 안전장치는  될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으로 그놈이 날렵하게 다시 걸어갈 때  크고 묵직한 소리를 내는데 흙길에서조차 원초적인 것, 영원해 보이는 것을  향해 기꺼이 다가가는 나의 발자국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 윤향기,「 나귀들의시간」(《시로여는세상》2010년봄호)    시 안에서 이미 시적화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 “ 어린 나”로 시적화자를 설정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아직 갖지 못한 인물로 자신을 대신하고 있다. 바로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나는 세상의 한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시인은 그것을 “영원해 보이는 것을 향해 기꺼이 다가가는 나의 발자국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너나 없이 안달이다. 목소리 높여 말하고 무엇인가를 큰 목소리로 주장해야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면 고통스러운 비명이라도 내질러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시의 시인은 자신을 먼 외국을 여행하는 어린 아이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을 지우고 있다. 그럴 때 바로 세상 사람들과 나 아닌 모든 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말들이 꽉 차 서로를 주장하는 이 시대에 이렇게 나직하고 약하게 말하는 시들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738    시는 메마르고 거친 세상을 뛰여넘는 행위예술이다.. 댓글:  조회:2701  추천:0  2017-09-19
  내가 생각하는 시 혹은 그 고민들   신용목(시인)    시는 우리를 둘러싼 메마르고 거친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것입니다.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현실을 통과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늘 ‘예쁜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말, 문득 깨닫게 된 어떤 것들에 대해 쓰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시들은, 우리를 현실 너머로 안내하기보다는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아름답습니다. 질문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시는 어떻게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가? 이것은 얼핏 너무 빤해서 무의미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질문들이 빤해 보이는 것은 빤한 해답이 이미 있어서가 아니라 해답 없는 질문이 숱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색하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어떤 시가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합리적 인식은 고통을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의사의 청진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이해와 표현이 오로지 예술에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축적된 고통의 기억”입니다. 그는 예술이 고통을 잊어버릴 것이라면 차라리 예술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편이 낫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시는 고통만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스탕달은 예술을 “행복에의 약속”이라 했습니다. 행복이 지금-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예술은 허위입니다. 우리는 언제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 속에 두 개의 모래알이 똑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가 같은 삶을 살아야 하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코가 되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시는 바로 그 폭력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되새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쁜 시, 깨달은 시는 현실의 고통을 긍정적 사고를 통해 그냥 견디라고 이야기하는 마취제와도 같습니다. 그런 시들은 아름다움이 현실 속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고통스런 현실이 지속되게 만듭니다. 그런 시를 쓰기는 쉽습니다. 남들이 살라는 대로, 남들이 생각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고 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들은 대체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너무 쉽게 다 안다고 말해버리거나, 그들의 고통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포장합니다. 내가 말한 ‘예쁜 시’나 ‘깨달은 시’는 그렇게 씌어진 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 고통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시를 사이비 종교에서나 가능한 설교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시는 세상의 이치나 처세술을 가르치는 장르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고 말 순간을 정지시키고 그 순간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 시는 우리 모두의 얼굴을, 이 우주의 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유일무이한 장르입니다. 물론, 시에도 아름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먼 바깥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미지에 있다고 말하는 것―그것이 시가 가진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신고 가는 물의 신발과 물 위에 찍힌 물의 발자국, 물에 업힌 물과 물에 안긴 물 물의 바닥인 붉은 포장과 물의 바깥인 포장 아래서 국수를 만다    허기가 허연 김의 몸을 입고 피어오르는 사발 속에는 빗물의 흰머리인 국수발, 젓가락마다 어떤 노동이 매달리는가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저편을 기다리는,  궁동의 버스종점    비가 내린다, 목숨의 감옥에서 그리움이 긁어내리는 허공의 손톱자국! 비가 고인다,    궁동의 버스종점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이편을 말아먹는,    추억이 허연 면의 가닥으로 감겨오르는 사발 속에는 마음의 흰머리인 빗발들,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이 건져지는가    국수를 만다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굴에 잠긴 얼굴과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들 얼굴의 바닥인 마음과 얼굴의 바깥인 기억 속에서 ―신용목,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    이 시는, 저기 부천 가는 길에 있는 궁동이라는 곳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말아먹는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쓴 시입니다. 만약, 이 시가 외국인노동자들의 아픔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서술을 했다면, 읽는 이에게 순간적인 감흥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감흥 그 이상을 선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감동은 시에서 필요한 덕목 중 하나일 뿐 전체일 수 없습니다. 시는 특유의 느낌을 통해 우리가 현실 속에서 짚어내지 못하는 먼 곳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국수를 마는 일시적인 한 순간을 영원한 한 순간으로 바꾸어놓았을 때, 우리는 슬픔의 복판에서 우리 모두가 가진 삶의 얼굴을 온전하게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생활은 언젠가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쉽게 그들의 아픔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행복이 먼 미래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미지의 영역을 시 속에 불러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동안 시를 통해서, 문학을 통해서 함께 영혼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문학은 오랫동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고 또 고독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학은 비로소 우리를 뜨겁게 살아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신용목, 「새들의 페루」    시는 절대로 한 발만 걸치는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바로, 흠뻑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을 던져 자신이 명중시키고픈 자신의 시―그 과녁이 도대체 무엇이고 또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위해 때로 비를 맞고 흠뻑 젖은 채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있더라도, 사지가 잘린 뿔처럼 단 하나의 몸둥어리로 나아가는 것―그때, 우리는 하늘의 급소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기꺼이 우리는 저 안락과 안일의 지붕을 걷어내고, 고통과 고독과 슬픔과 서러움의 별빛 아래 반짝이고 있을 것입니다. 어줍잖게, 또 쑥스럽게도 제 시를 예로 들며 이야기를 이어가 보았습니다. 이 자리는 시에 대한 제 고민을 이야기하는 자리이면서 제 시에 대해 여러분들게 수줍게 고백하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 시 2편을 첨부하는 것으로 짧은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시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늘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737    음유시인은 그 누구도 길들일수 없는 짐승이며 악마라고?!... 댓글:  조회:2766  추천:0  2017-09-17
음유시인(吟遊詩人)은 원래 중세 유럽에서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읊었던 시인을 말합니다 클로팽 (Clopin).  프랑스 음유시인 그가 집필하고 상연했던《Desputaison de la Sainte Eglise et de la synagogue》은 탈무드에 담긴 내용들을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회적인 논란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논란은 1240년 파리의 공개적 탈무드 소각으로 이어졌다. 클로팽은 이 작품에서 잘 조직된 유대인들을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살인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클로팽의 작품 외에도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다룬 중세 예수 수난극(Medieval Passion Play)들은 많았다. 유대인들이 악마의 하수인들로 등장하는 프랑스의 《The Chaumont Christmas Play》, 유대인을 철저한 이중인격자들로 묘사한 《Le Mystere de la Passion》, 독일의 《The Frankfurt Passion Play》, 유대인들의 유아 제식살해와 기타 신성모독 행위들을 다룬 작품으로 중세유럽 전역에서 자주 상연되었던 《The Play of the Sacrament》와 유대인을 사악한 천재로 묘사한 《The Theophilus Legend》 등이 대표적이다 쟝 프루아사르 (Jean Froissart).  프랑스 역사가 중세시대 프랑스의 각종 일화와 모험담을 수록한 프로사르의《Chronicles》은 후세의 문인과 극작가들에게 많은 소재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문헌에는 또한 당시 유대인들의 비행과 이들이 프랑스에 거주함으로 발생하는 사회악들에 대해 개탄하는 대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는 기독교도 유아 제식살해는 실질적인 증거들이 뒷받침해주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죠프레이 초서 (Geoffrey Chaucer).  잉글랜드 시인 “우리의 가장 큰 적인 용, 사탄...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둥지를 트고 있네... 고리대금과 갖은 악행으로 빼앗은 재물로 군주의 마음을 빼앗고... 기독교도를 증오하는 저주받은 민족이여!... 도대체 그 마음속에서 그 어떤 불의를 꾸미고 있는가?... 피는 저주받은 너희들의 악행에 울부짖는다... 저주받은 유대인들이 링컨셔의 휴를 죽인 것처럼... 나약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The Prioresses Tayle, The Canturbury Tayles)   초서는 《The Canterbury Tales》에서 1255년에 일어났던 링컨셔의 휴 살해사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당시 기록들은 당국이 찾아낸 증거들에 근거하여 흑마술을 신봉하는 일부 유대인들이 이와같은 일을 실제로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링컨셔 지방의 고적으로 손꼽히는 링컨성당에서 휴의 사당이 제거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지오반지 피오렌티노 (Giovanni Fiorentino).  이탈리아 시인 그의 작품 《Il Pecorone》에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와 1파운드의 살점을 베어내는 잔혹스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 영감을 받은 셰익스피어에 의해 이 인물은 《Merchant of Venice》에서 샤일록으로 부활한다. (The First Novel, Fourth Day)   라파엘 홀린쉐드 (Raphael Holinshead).  잉글랜드 역사가 그가 저술한 《Chronicle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는 동시대의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후세의 많은 문인들이 애용하고 즐겨 참고했던 16세기 말엽의 역사서였다. 이 책에서 홀린쉐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르만왕의 정복이 앵글로색슨의 수난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복군을 따라 들어온 유대인들 때문이었다.”   미구엘 세르반테스 (Miguel Cervantes).  스페인 문호 “오, 파괴적인 족속이여! 오, 극악무도한 자들이여! 오, 더러운 민족이여! 너희들의 허황된 꿈과 정신나간 우행(愚行)과 그 유례가 없는 억지와 가슴속의 걍팍함과 모든 진리와 이성에 대한 무지가 이 세상에 가져온 불운을 보라.” (La gran sultana dona Catalina de Oviedo)   크리스토퍼 말로우 (Christopher Marlowe).  잉글랜드 극작가 “내 얘기를 하자면 이렇다네, 난 밤거리를 휘젖고 다니며 담벼락 아래서 신음하는 병자들을 죽였다네. 때에 따라서는 우물에 독약을 풀기도 했지. 기독교도 도둑놈들을 키워내는데는 돈 몇푼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어. 저들이 나의 본을 따르는 것을 보고 낙으로 삼았다네. 소시적 나는 독약을 만드는 법을 배워서 이탈리아 놈들에게 제일 먼저 시험해 보았지.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시체들로 신부와 장의사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고 장례식의 종소리를 울리는 일과 무덤파는 일로 묘지기의 손을 바쁘게 했다네. 그 다음에 나는 책략가였어.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동안 나는 찰스 5세를 돕는다는 명분아래 나의 묘수를 써서 동지나 적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네. 그 다음에 나는 고리대금업자였어. 속임수와 중개업의 비의를 동원하여 갈취하고 압류했지. 얼마지나지 않아 난 파산자들로 감옥을 채웠고 부모잃은 아이들로 고아원을 채웠고 보름달이 뜰 때마다 몇놈을 미치게 만들었지. 가끔가다 어떤이는 불운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달기도 했어. 그들의 가슴에 나의 저주를 파묻고는, ‘아 놈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했지. 하지만 내가 저들을 괴롭히고 얻은 축복을 보게나. 내겐 마을 하나는 통체로 살 수 있는 돈이 있다네. 자, 이보게, 자네는 자네의 인생을 어떻게 써먹었는가?” (The Jew of Malta)   토마스 데커 (Thomas Dekker).  잉글랜드 희곡작가 희곡《Newes From Hell》의 주인공은 죽은 뒤에도 고리대금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한 유대인이다. 《The Honest Whore》에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옮기기 힘들 정도의 극렬한 반유대적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잉글랜드 문호 “나는 그 이가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증오하오. 하지만 그 얘긴 나중에 하고. 그는 돈을 빌려주면서 낮은 이자를 받아 여기 베니스의 이자율을 끌어내리죠. 나 한테 한번 걸리기만하면 난 나의 그 태고적 원한을 놈에게 배로 갚아 줄것이오.” (Shylock in Merchant of Venice)   “분명 유대인은 악마의 화신이지.” (Launcelot, Ibid.)   희곡의 역사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캐릭터 중에 하나로 꼽히는 샤일록에 대해 유대인들은 마땅히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유대계 작가들은 희곡《베니스의 상인》에 내포된 잠재적 반유대주의를 신약성경과 《시온의정서》의 그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1936년 미국의 저명한 유대인단체 반-비방연맹(Anti-Defamation League)은 〈B'nai B'rith Sounds Call to Arms〉란 제목의 공식성명을 발표하여 “250여개 도시의 각급 학교에서 《베니스의 상인》의 상연을 근절시키도록 총력을 다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작품 외에도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Two Gentlemen of Verona》, 《Much Ado About Nothing》, 《Love's Labour Lost》, 《A Midsummer Night's Dream》, 《Henry IV》, 그리고 《Macbeth》이다.  에밀 졸라 .  프랑스 작가 그는 유명한《J'accuse(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해 드레퓌스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그가 제기한 몇가지 주장이 문제가 되어 그는 1898년 2월 명예훼손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친(親)유대적 작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는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할 만한 대목들이 적지않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1882년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도산한 카톨릭 계열의 금융회사 Union Generale 사태에 기초한 1891년작《L'Argent》에는 유대계 국제금융의 막후 책략과 술수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샤를 모라스   프랑스 우익지도자 “루소는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짐승이었고 그 어떤 힘도 억제할 수 없는 악마였다. 그는 200년 동안 붕괴와 해체의 요기(妖氣)가 그득했던 음습한 세상이 잉태한 마귀였다. 세상에 그 꼴을 드러낼 때까지 시집도 못간 추녀의 레옹 도데 프랑스 작가, 우익지도자 알퐁소 도데의 아들인 그는 에두아르 드루몽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부패와 정쟁으로 찌든 제3공화국과 허구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유명한 그는《Au Temps de Judas》를 통해 유대인의 금권(金權)정치가 프랑스 사회에 끼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강조했다. 드루몽의 사후, 그는 모라스와 함께〈악시옹 프랑세즈〉운동을 이끌었다...
736    프랑스 음유시인 - 조르주 무스타키 댓글:  조회:2828  추천:0  2017-09-17
샹송의 음유시인, 조르주 무스타키               프랑스 대중음악(샹송)계에서 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 1934~2013)처럼 특이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본명은 조제프 무스타키로, 덥수룩한 장발머리와 긴 수염으로 덮인 그의 표정과 우수 어린 눈동자는 온갖 시련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조용한 역정마저 드리워져 있다. 고독을 노래하는 가수, 오선지의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무스타키의 대표적인 노래 나의 고독(Ma Solitude)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최초의 일은 FM 방송의 광고음악을 통해서였다. 허스키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절제된 감정과 유럽풍의 낭만적 이미지가 잘 어우러진 그의 노래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까닭 모를 우수에 젖어들게 만든다. 조르주 무스타키가 Ma Solitude를 처음 노래한 건 1968년이었으니 벌써 49년 전이다. "그토록 숱한 밤을 함께 했기에 고독은 나의 친구며, 달콤한 습관이 되었다네, 고독은 충실한 그림자처럼 한 발짝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아 이 세상 어디든 날 따라다녔다네." 이집트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건너가 이방인들 틈에서 외롭게 살아온 그였기에 고독과 함께라면 결코 외롭지 않다며 현대인들의 고독감을 달래준 덕에 작사 작곡에 전념하던 그는 결국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됐다. 무스타키는 분명 샹송을 노래하고 있지만 정작 출생지는 프랑스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이다. 유태계였던 그의 부친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프랑스 서적을 취급하는 큰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서점이 가지는 문화적 분위기나 그곳을 드나드는 손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문학적 교양과 예술적 기질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조르주 무스타키는 사랑하는 연인 에디뜨 삐아프를 위해 '미롤르'와 '에덴 블루스'를 만들어 주었다. 이브 몽탕과의 이별로 실의의 시간을 보내던 삐아프에게 있어 무스타키는 음악적 동반자요 삶의 위로로 다가왔다. 무스타키는 그녀를 지탱해 주던 고마운 존재였다.     1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기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기타를 마스터했고, 이 무렵에는 부친의 수입 덕에 비교적 화려하고 자유 분망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던 그가 13세 때에 처음 접한 프랑스 여행의 기억을 버리지 못하고 프랑스 대학 1차 시험에 합격, 두 번째로 프랑스를 방문하고 이집트로 돌아온 후 아들이 훌륭한 건축가로 성장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자신의 누나가 결혼해 살고 있는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프랑스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넓히면서 샹송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다가 한 고급 카바레에서 저명한 가수인 조르주 브라상(Georges Brassens)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자신의 작곡스타일을 전면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53년 당시 신인이었던 자크 드와이앙에게 노래를 주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워 싸구려 호텔 바텐더 등으로 일하다 20세에 한 결혼도 곧 실패하고 말았다. 타고난 방랑벽으로 인해 작가 친구를 따라 벨기에의 브뤼셀로 떠나 프랑스로 돌아올 여비도 없이 기타를 들고 술집을 전전하다 간신히 술집 한 곳과 계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무스타키가 샹송가수로 나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관조적 노래에 실린 시적 의미와 내용이 공감을 얻어 그의 작품이 점차 알려지게 되면서 샹송계의 디바 에디뜨 삐아프도 만나게 되었고, 무스타키가 만든 에덴 블루스와 밀로르를 삐아프가 노래해 큰 인기를 얻자 샹송계에서 무스타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7년 여성가수 피아 콜롬보에게 준 Le Meteque(이방인)이 히트하고, 자신이 부른 그 노래도 2년이 넘도록 히트차트를 누비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발표한 Il Est Trop Tard(너무 늦었어요), Le Temps De Vivre(자유로운 삶을 향하여) 등을 비롯한 감성적 우수가 깃든 여러 곡의 노래들이 그때마다 히트하는 행운이 뒤따랐다. 젊은 시절 경험했던 불우하고도 어려웠던 시간들 속에서 얻어진 인간적 고독과 연민을 잘 추슬러 시적인 샹송으로 승화시키는 인물로 사랑받고 있는 그는 지난 80년대 내한공연을 가져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래들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브 몽탕과 이별한 뒤 쓸쓸함을 달래던 피아프는 무스타키를 기타 반주자와 백코러스 가수로 영입했고, 둘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무스타키는 에디뜨 피아프를 위해 곡을 만들었는데 58년 히트곡 밀로르(Milord)가 그것이다. 샹송의 전설 에디뜨 삐아프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가졌던 첫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조르주 무스타키는 황금빛 물결 일렁이는 세느강변 저택에서 시와 음악으로 인생의 황혼을 노래하며 보내다 지난 2013년 끝내 폐기종을 이기지 못한 그는 79세의 나이로 그가 사랑했던 세느강의 붉은 황혼 속으로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조르주 무스타키의 장례식 (2013년). 그가 세상을 떠난 이제와 생각하니 나는 나이를 먹고 변해가고 있었지만, 그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 욕심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작곡한 노래는 300여 곡에 이르며, 브리지트 폰테인, 이브 몽탕, 줄리엣 그레코 등 프랑스의 유명가수들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그리스, 아랍권 등 여러 나라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고 85년 이후 세 차례 내한공연도 가졌다. 사랑을 속삭이려면 불어로 하라고 했던가? 샹송은 파워풀한 고음을 내지르기 보다는 읊조리고 속삭이는 노래가 주를 이룬다. 세르주 갱즈부르, 이브 몽탕, 달리다나 쟈끄 브렐처럼, 조르주 무스타키도 그렇게 조용조용 연인의 귓가에 속삭이듯 음유시인 같은 노래를 들려주던 매우 독특한 가수였다.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세느강변에 위치한 그의 집을 방문하면 손수 끓여서 만든 커피를 내오던 그가 늙지도 않고 우리 곁에 머무르며 오늘도, 또 내일도 영원한 시인의 노래를 들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제와 생각하니 나는 나이를 먹고 변해가고 있었지만, 그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 욕심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과,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병이 들고 언젠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왜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까? 비록 늙고 병들어도 아직은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멋진 샹송의 아우라로 충만했던 프랑스. 그가 떠나고 없는 프랑스에 다시 간다면 텅 빈 파리의 하늘만이 나를 반겨줄 것 같은 허전함마저 느껴지는 시간이다.  앞으로 나의 연민과 고독은 누가 대신 노래해 줄까 모르겠다.   그가 없는 세상이 왠지 고독한 이유다.           (성지인/팝칼럼니스트)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시계바늘은 돌고 말았어요. 어린 시절은 훨씬 멀고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어요. 시간은 자꾸 지나가고,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 사랑은 내 손을 떠나가고 내가 노래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사랑했던 자유는 사슬에 묶이고 말았지요. 예전에 내가 거기 있었던 어린 시절을 위해 가끔 기타를 치지요. 내가 노래하고 있던 동안, 내가 꿈꾸던 동안, 그때는 아직 시간이 있었는데,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어요. 너무 늦어버렸어요. (Il Est Trop Tard 中)          Il Est Trop Tard / 너무 늦었어요.     Pendant que je dormais 빵당 끄쥬 도르메   내가 잠자던 동안  Pendant que je rêvais 빵당 끄쥬 레베  내가 꿈꾸던 동안  Les aiguilles on t tourné 레 제기유 종 뚜르네   시계 바늘은 돌아갔지 Il est trop tard 일레 트로 따르  이젠 너무 늦었어. Mon enfance est si loin 모 낭팡스 에 씨 루욍   내 어린 시절은 아득히 멀리 있고  Il est déjà demain 일 레 데자 드맹   이제는 벌써 내일이야   Passe passe le temps 빠스 빠스 르 땅   시간은 흘러 흘러 가고 il n’ y en a plus pour très longtemps. 일 리어나 쁠뤼 뿌르 트레 롱땅 아주 오랫동안이라는 것은 더 이상 없어.    Pendant que je t’ aimais 빵당 끄쥬 떼메 내가 너를 사랑하던 동안  Pendant que je t’ avais 빵당 끄쥬 떼메 내가 너를 사랑하던 동안  L’amour s’en est allé 라무르 싸네 딸레  사랑은 가버렸지  Il est trop tard 일레 트로 따르  이젠 너무 늦었어. Tu étais si jolie  뛰 에떼 씨 죨리  너는 무척이나 예뻤지       Je suis seul dans mon lit  즈 쉬 쇨 당 몽 리 나는 홀로 내 침대속에 있네  Passe passe le temps 빠스 빠스 르 땅  시간은 흘러 흘러가고 il n’ y en a plus pour très longtemps   일 리어나 쁠뤼 뿌르 트레 롱땅  아주 오랫동안이라는 것은 더 이상 없어.   Pendant que je chantais 빵당 끄쥬 샹떼 내가 노래하던 동안    Ma chère liberté 마 쉐르 리베르떼  나의 소중한 자유를  D’ autres l’ on t enchaînée 도트르 롱 앙샹떼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슬로 묶어버렸지 Il est trop tard  일레 트로 따르  이젠 너무 늦었어. Certains se sont battus 세르뗑 스 송 바뛰  어떤 사람들은 투쟁했어       Moi, je n’ ai jamais su 무아 주네 자메 쉬 나, 나는 전혀 몰랐지 Passe passe le temps 빠스 빠스 르 땅  시간은 흘러 흘러 가고 il n’ y en a plus pour très longtemps 일 리어나 쁠뤼 뿌르 트레 롱땅  아주 오랫동안이라는 것은 더 이상 없어.    Pourtant je vis toujours  빵당 쥬 비 뚜즈르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어       Pourtant je fais l’ amour 빵당 쥬 페 라무르  그렇지만, 나는 사랑을 나누고        M’ arrive même de chanter 마리브 멤므 드 샹떼  노래를 부르는 일조차 있지    Sur ma guitare 쉬르 마 기타르  내 기타를 치며.   Pour l’ enfant que j’ étais 뿌르 랑팡 끄 줴떼  지난 날 내 어린 시절을 위해  Pour l’ enfant que j’ ai fait 뿌르 랑팡 끄 줴 페  내 아이를 위해  Passe passe le temps 빠스 빠스 르땅 시간은 흘러 흘러가고  il n’ y en a plus pour très longtemps  일리 어나 쁠뤼 뿌르 트레 롱땅 아주 오랫동안이라는 것은 더 이상 없어.   Pendant que je chantais 빵당 끄 즈 샹떼 내가 노래하던 동안  Pendant que je t'aimais 빵당 끄 즈 떼메 내가 너를 사랑하던 동안   Pendant que je rêvais 빵당 끄 즈 레베   내가 꿈꾸던 동안은 Il était encore temps 일레떼 앙꼬르 땅....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735    반전을 노래한 음유시인- '밥 딜런' 대표곡 댓글:  조회:3824  추천:0  2017-09-17
   얼마나 세월이 더 가야 전쟁터에서 무고한 어린이들이 참혹하게 희생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인가 ?  무지한 정치꾼들의 철면피하고 막무가내인 욕망 노출이 언제나 끝이 날것인가 ??  얼마나 더 참아야 "민생" "민주" "안전" "국민"을 입으로만 줄곧 외치는 꾼들의 "사기행각"이 안보이는 세상이 될까 ?  얼마나 더 참아야 정치꾼들의 이전투구가 사라지고, 생산적 결론이 나오는 토의가 가능하게 노력하는 국회를 볼 수 있을 것인가 ?   반전을 노래한 음유시인, 2016 노벨문학상수상자 '밥 딜런' 대표곡             반전을 노래한 음유시인 2016 노벨문학상수상자 '밥 딜런' 대표곡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시인이나 극작가, 소설가가 아닌 미국의 포크록가수 '밥 딜런'이었습니다. 노벨상을 선정한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로 그의 음악을 '귀를 위한 시'라고 표한하며 그의 노래는 듣는 것 뿐 아니라 시로 즐기기에도 완벽하다, 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요. 그의 시상을 두고 문학가도 아닌 이에게 수상하는 것이 다소 당황스럽다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그는 1990년대 말부터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습니다. 그의 가사가 기존 포크록가수들처럼 사랑이나 이별을 노래한 것이 아닌 반전, 평화, 자유, 저항정신을 시처럼 은유하여 표현했기 때문이며 그 문학성이 뛰어났기 때문이죠.   그의 대표곡들을 정리해봅니다.             Blowing In The Wind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Before you call him a man?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Yes, 'n'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가야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영원히 포탄사용이 금지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The Times They Are A-Changin   Come gather 'round people wherever you roam 사람들아 모여라, 어디를 다니든지간에. And admit that the waters around you have grown 그리고 변화의 물결이 다가옴을 보여주자. And accept it that soon you'll be drenched to the bone. 그 물결이 뼛속 시리게 젖어들 것임을 받아들이자. If your time to you is worth savin' 그대의 세월이 당신 자신에게 소중하다면 Then you better start swimmin' or you'll sink like a stone 흐름에 발 맞추자. 아니면 돌처럼 가라앉을지니. For the times they are a-changin'.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Come writers and critics who prophesize with your pen 펜으로 예언을 말하는 작가와 논자들이여 오라 And keep your eyes wide, the chance won't come again 눈을 크게 뜨라, 변화의 순간은 다시 다가오지 않으니. And don't speak too soon for the wheel's still in spin 수레바퀴는 아직 돌고있으니 섣불리 논하지 말고, And there's no tellin' who that it's namin'. 갓 싹튼 변화를 섣불리 규정하지 말지어다. For the loser now will be later to win 지금의 패자들은 훗날 승자가 되리니. For the times they are a-changin'.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knockin' on heaven's door     Momma take this badge off me 엄마, 나에게서 뱃지를 떼어줘요.​   I can't use it any more 난 더이상 그걸 쓸 수 없어요.​   It's getting dark, too dark to see  점점 어두워져요. 너무 어두워서 어둠밖에 볼 수 없어요.   I'm knockin' on heaven's door 내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기분이에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Momma put my guns in the ground 엄마, 내 총을 땅에 버려요.   I can't shoot them any more 난 더이상 이걸 쏠 수 없어요.​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g down 길고 검은 구름이 다가와 무너져 내려요.​   Feel I'm knocking on heaven's door 내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걸 느껴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리고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734    [시문학소사전] - "음유시가"란?... 댓글:  조회:4134  추천:0  2017-09-17
음유시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음유시가(吟遊詩歌, Bard)는 원래 고대로부터 중세 유럽에 이르기까지 직업적으로 자작시를 노래로 부르던 음악적 장르이다. 음유시인(吟遊詩人)은 음유시가를 음악적으로 즐기던 사람을 의미하며, 트루바두르 및 민스트럴도 음유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비에트 연방[편집] 러시아의 음유시가는 195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자신들이 쓴 서정적인 가사나 정치적인 주제를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불렀다. 반체제적인 노랫말 때문에 많은 노래들이 음반으로 발매되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서 녹음되어 전파되었다.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는 음유시가의 개척자 불라트 오쿠자바(Bulat Okudzhava)와 대중화에 공헌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 등이며 한국계 율리 김(Yuliy Kim)도 있다. 특히 절규하듯 노래하는 특이한 창법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는 영화 백야(White Nights)에 삽입된 야생마(Fastidious Steeds)라는 노래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 본래 음유시인(troubadour, 吟遊詩人)은 중세 유럽에서 봉건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을 가리켰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세요. 12세기 초엽부터 남프랑스에서는 봉건 대제후(大諸侯)들 사이에서 궁정의 귀녀(貴女)를 중심으로 하는 좁지만 화려한 사회가 이루어져, 귀녀숭배와 궁정풍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애의 이념이 생겨났다. 기사(騎士)인 시인은 그러한 환경과 이념 속에서 사랑하는 마음속의 귀녀에게 영원한 사모를 바쳐 그것을 때로는 난삽할 만큼 정교한 시형으로 다듬어 작곡하여 그것을 성(城)에서 성으로, 궁정·귀녀를 찾아다니면서 노래불렀다. 이러한 시인·기사가 트루바두르, 즉 음유시인이다. 400여 명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봐도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 그 내용은 일정하며, 결코 보답을 받을 수 없는 귀녀에의 사랑의 탄원과 봉사의 맹세이다. 또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마에 키스를 받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콩솔라멘테'라는 키스의 영예를 간직하기 위해 더한층 정성을 바친다. 그리스도교의 마리아 숭배를 세속적인 사랑에 대체한 것이며, 또한 봉건제의 주종(主從) 관계를 연애 관계로 꾸며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 보는 견지에 따라서는 여성 이외의 전쟁과 종교가 그들의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음유시인들의 이 서정시야말로 근세 유럽의 시의 원조가 되었다. 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가 그 원조이지만, 브라유의 성주(城主) 조프레 뤼델,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 등이 잘 알려진 음유시인이다. 이 새로운 시의 경향은 북으로 옮아가서 북프랑스에도 퍼지게 되어, 이른바 '트루베르(trouvère)'라고 일컬어지며 음유시인들을 낳게 했으며, 그것들은 더욱 북으로 퍼져, 독일에도 파급되어 많은 미네(Minne:사랑)의 시인을 배출하는 기연(機緣)이 되었다. 독일의 음유시인은 미네젱거(Minnesänger)라고 했다. 또한 남방의 이탈리아에서는 '트로바토레(trovatore)'의 활약이 매우 컸으며, 기타 영국·에스파냐 등의 근대 서정시의 발생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자료 출처 : 두산백과) ========================= 음유시가(吟遊詩歌, Bard)는 원래 고대로부터 중세 유럽에 이르기까지 직업적으로 자작시를 노래로 부르던 음악적 장르이다. 음유시인(吟遊詩人)은 음유시가를 음악적으로 즐기던 사람을 의미하며, 트루바두르 및 민스트럴도 음유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     -13~14세기에 걸쳐 서양의 오락을 제공한 예능인, 또는 각국을 순유(巡遊)한 시인입니다. -또한 음유시인은 하프나 작은북 연주에 뛰어나고, 노래를 부르며 로맨스를 낭송하고 연극을 공연하면서 한 고장에서 다른 고장으로, 한 성(城)에서 다음 성으로 뉴스를 전하는 일도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왕후(王侯) 전용의 악사(樂事)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배우이고 음악가이며 시인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이기도 하였다. 15세기에 들어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술이 보급됨에 따라 문자를 읽는 사람이 증가하여 이와 함께 음유시인도 사라져 갔다. 출처(국어국문학자료사전:음유시인) ==========================   고대 혹은 중세유럽에서 시와 노래를 짓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활동한 지역, 시대, 신분 등 다양한 분류에 따라 트루바드루, 트루베르, 민네징거, 마이스터징거 등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이외에도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이들은 주로 기사계급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후대로 갈수록 다양한 신분배경을 지닌 이들이 음유시인이 되었고 상공업자 중에서도 음유시인이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괴테 이전 독일 최고의 문호로 불리는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이다.  바드를 음유시인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서는 가객과 함께 읊조리듯 노래하거나 잔잔한 미성으로 노래하는 가수들에게 주로 붙는다. 대표적인 가수로 김현식과 김광석이 있다. 밥 딜런은 그가 지은 노래 가사의 문학성을 인정받아 2016년 노벨문학상까지 수여받았으니 현대적 의미의 음유시인으로 공식(?) 인정받은 셈.  
733    섬과 파도 댓글:  조회:2762  추천:0  2017-09-17
       
732    미국 시인, 환경운동가 - 게리 스나이더 댓글:  조회:3255  추천:0  2017-09-17
  게리 스나이더        Gary Snyder   게리 스나이더는 미국의 시인이며 선불교도이며, 산악인, 환경운동가이며, 심층생태철학자이며, 비트운동의 설립회원이다. 미국의 계관시인인 로버트 하스(Robert Haas)는 스나이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나 도겐처럼 문학으로 윤리적 삶을 외치는 신성한 목소리‘라고 했다. ’시인의 임무는 숲을 지키는 것‘이라 한 말에서도 소로우와 스나이더의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게리 스나이더는 비트 운동의 소로우에 해당된다. 소로우와 마찬가지로 스나이더는 자신의 삶에 여유를 원했고, 인간이 욕심을 버리는 정도에 따라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소로우와 스나이더는 둘 다 야생 또는 야성(wilderness)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야성은 때묻지않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로우가 '야성이 세상을 보존한다'고 생각했다면 스나이더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야성은 세상 자체'라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자연은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 위험에 처한 것은 야성이다. 야성은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야성을 볼수없게 될지도 모른다.“   스나이더는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산이 많은 워싱턴 주에서 자라났던 그는 산을 사랑하여 17세에 이미 미국에서 높다는 산봉우리는 다 섭렵한 후였다. 오레곤 주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에서 문학, 인류학을 전공한 그는 인디애나 대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공부했고, 데이비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동양언어학을 공부했다. 삼림경비원, 벌목원, 선원으로도 일했다. 마테호른 봉을 잭 케루액과 오르기도 했는데 이때 경험을 살려 케루액의 소설 ‘다르마를 찾는 백수(Dharma Bum)'에 스나이더가 신비한 시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1956년 일본으로 가 임제종의 선불교 공부를 하고, 경전과 불교서적을 연구 번역하였다. 10여년 동안 불교와 가까이 있었지만 그러나 출가는 하지 않았다. 1969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평화와 환경운동에 헌신하며, 동양철학과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또한 환경보호자들과 인디언 그룹과 어울려 야성의 삶을 실천하며 생태공동체를 주도하고 있다. 선시(禪詩)로 불리는 그의 시는 동양과 미국 인디언의 신화를 인간과 자연의 상생에 연결시킨 열린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스나이더가 일본의 선원에서 다년간을 보내며 의미있는 삶의 모델을 찾아본 동기는 동양을 탐욕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내면의 힘에 집중하는 의지를 교육하는 현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게리 스나이더 Gary Snyder는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시인이자, 생태주의운동가입니다.  그는 문학과 인류학, 동양학을 전공하고, 50년대에 전후세대의 Beat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으며 산악인으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습니다.  1956년부터 10여 년 동안 외국을 여행하며 특히 일본에서 禪佛敎 修行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을 체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선 뿐만아니라 인도사상 등을 집중 연구하였습니다. 1969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네바다 구릉지에서 살며, 젊은 시절부터 일관되게 추구해온 평화와 환경운동에 앞장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환경보호자들과 토착민 그룹과 어울려 몸소 야성의 삶을 실천하며 생태공동체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1985년부터 UC Davis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그의 주요 저서로는 16권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습니다. 1974년에 시집 'Turtle Island'로 Pulitzer(퓰리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Mountains And Rivers Without End'로 미국 시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Bollingen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시집 '無性 No Nature'은 1992년 National Book Award의 수상작으로 추천받았습니다. Gary Snyder의 시는 영미시로서는 드물게 禪詩(Zen Poetry)로 불리우며, 많은 Rock Artist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간에게 유용한 가치만을 생태계에서 찾고 살리는 얕은 생태학과는 대조적으로 심층생태학은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본연의 내재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1982년 4월 로스앤젤레스 선원에서는 세계 최초의 심층생태학 국제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를 주관한 것은 선불교도이며 생물학자인 마이클 소울(Michael Soule)이고, 이를 도운 것이 로버트 아잇켄 선사와 게리 스나이더였다. 그가 퓰리처 상을 수상한 시집 ‘거북섬(Turtle Island)'에 실린 ’헌신의 맹세‘ 중 한 귀절을 보자.   “모든 존재에게 .... 나는 헌신을 맹세하네 거북섬의 흙에게 나는 헌신을 맹세하네 그곳에 거하는 생명들에게 그리고 태양아래서 상의상존성 속에 서로를 관통하는 다양하지만 그러나 하나인 생태계에도 나는 헌신을 맹세하네.“   스나이더는 또한 시인이며 환경운동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와도 가까운 친구이다. 두 시인은 지역과 마을이 인간에게 아주 귀중하다는 가치관을 공유한다.   “땅을 되살리기위해서는 사람이 그 지역에서 일을 해야 한다. 지역은 존중심을 가지고 다가온다면 누구나 다 환영한다. 한 지역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 정을 붙이는 것이다. 한 지역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지역사회를 이루고, 머지않아 문화를 키운다. 야성을 회복하는 것은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스나이더는 한산을 미국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또 2000년 9월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도 하고 또 법련사에서 생태와 불교에 대한 강연도 하였다. 스나이더의 '생명공동체' 회복 운동에 따르면, 생명은 생태계의 거대한 테두리 속에 식물, 동물, 미생물 등과 함께 생존해나가는 하나의 유기적 존재이다. 생태계는 하나의 거대 고리로 형성된 소우주이며, '상호의존'이라는 공동체 인식을 바탕으로 한 통합적 체계이다. 따라서 생명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자신의 존재 장소에서 다른 생물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의 시낭송회에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가 시낭송회를 할 때는 선시 해설을 하기도 하고 또 꼭 근처의 절이나 선원에 들려 미국과 아시아의 선에 대해 말하곤 한다.  단순한 자연에의 귀의가 아닌 인간 본연에의 복귀로서 구도정신을 지향하는 시인인 스나이더는 '생활이 곧 시고 시가 곧 선(禪)인 시인'으로 불린다. 그는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반야심경과 다라니를 독송한다. 특히 불교의 명상은 자신의 시세계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독특한 자세와 호흡법, 그리고 마음을 다루는 법이 있는 명상은 아주 특수한 수행임을 강조한다. 그는 또 붇다의 가르침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뿐 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도 나름의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의 여름 / 게리 스나이더     네모난 낡은 집 서쪽, 연못 팔 때 생긴 둔덕 위, 우리 한때 집 밖에서 잔 곳, 트램플린 놓였던 곳,   땅의 영이여 제발 노하지 마시길 시멘트 트럭 부르릉대더라도 식물의 영들이여 잠시만 기다려다오 제발 돌아와 웃음 지어 주길   시궁창, 배선과 배수관 거푸집과 타설하기 위해 숨겨진 문들 집짓기가 시작된다!   에너지에는 태양을 벽널에는 삼나무를 프레임에는 갓 껍질 벗긴 기둥 자박길 위한 자갈돌 돈 대는 볼링겐*!   다니엘은 껍질 벗기고 모스는 노래하고 매트는 큰망치질 하고 브루스는 사색하고 척은 수도관 공사 데이빗은 벽 말리고 착색하고, 색깔 짙기 조절한다; 스튜는 배수로 바위 놓고 커트는 뜨거운 와이어 작업 게리는 시원한 맥주 마시고 캐롤은 유쾌한 너털 웃음 그녀 떠난다 일꾼들 슬퍼한다, 겐은 페인트칠 모든 유리창틀 겐-색깔로 다시 붉다   점심에는 정원의 오이. 신선한 토마토 와삭와삭.   토르는 실내 채색과 히죽 웃음 테드는 지붕 기와 티르종이 말리고 톱밥 휘날린다 트럭은 실어 나르고 큰 깡통은 소각용 낡은 침실들 사라진다   야생 터키들 구경하고 사슴은 경멸하는 눈초리 황소개구리 개굴거리고,   데이빗 파민터는 마루용 떡갈나무 밤 늦게 가져온다, 그의 제재소 불 났으나, 변함없이 가져온다.   산드라는 샤워실 타일 벽에 만자니타 무늬 더듬어 본다. 미닫이 문 위에서도 매끄러운 새 마루바닥에서도-   낡은 집 이제 고대광실 창고만큼 큼직하니 큰 술잔 식탁 위에 꽝 내리쳐도 문제없다 로빈은 시 쓸 방 가졌고, 한밤중에 뒷일 보러 집밖 나갈 필요 없다,   캐롤은 드디어 집으로 오고 그녀 많은 방 들여다본다. 떡갈나무 소나무 하릴없이 쳐다보고 낡은 킷킷디즈의 집 이제 새 건물 가졌다-   그리하여 우리 한잔 술 따라 노래하리- 천국만큼이나 즐거웠으니, 97년의 여름이었다.   *볼링겐 재단이 1948년 처음으로 제장한 시 부분에서 가장 정평이 나 있는 미국의 문학상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옥중에 있던 에즈라 파운드가 제1회 수상자였다.  게리 스나이더는 1997년에 이 상을 수상하였다.     이 현재의 순간 / 게리 스나이더     이 현재의 순간,   오래 살아,   먼 옛날   된다.       /게리 스나이더 시선집 서강목 번역.     =================== 위대한 가족에게 드리는 기도문 - 게리 스나이더 (인디언 기도문식으로)   밤과 낮을 쉬지 않고 항해하는 어머니 지구에게 다른 별에는 없는 온갖 거름을 지닌 부드러운 흙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해를 향하고 서서 빛을 변화시키는 이파리들과 머리카락처럼 섬세한 뿌리를 지닌 식물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은 비바람 속에 묵묵히 서서 작은 열매들을 매달고 물결처럼 춤을 춥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쏘는 칼새와 새벽의 말 없는 올빼미의 날개를 지탱해 주는 공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노래의 호흡이 되어 주고 맑은 정신을 가져다 주는 바람에게.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우리의 형제 자매인 야생 동물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연의 비밀과 자유와 여러 길들을 보여 주고 그들의 젖을 우리에게 나눠 줍니다. 그들은 스스로 완전하며 용감하고 늘 깨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물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구름과 호수와 강과 얼음산에게. 그들은 머물렀다가는 또 여행하면서 우리 모두의 몸을 지나 소금의 바다로 흘러갑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눈부신 빛으로 나무 둥치들과 안개를 통과해 곰과 뱀들이 잠자는 동굴을 덥혀 주고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태양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수억의 별들,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별들을 담고 모든 힘과 생각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또한 우리 안에 있기도 한 위대한 하늘, 할아버지인 우주 공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731    시를 쓰는데는 음악과 그림이 아주 많이 도움이 된다... 댓글:  조회:2553  추천:0  2017-09-16
  시(詩),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 김참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해야만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듣는 여러 가지 소리들도 음악이 된다. 시도 마찬가지리라. 글로 써야만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시가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나무도, 그 나무 아래를 걸어가는 사람도, 그의 구둣발 소리도 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글로 표현되지 않아도 시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가 사는 세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시가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혼란스런 모습을 띄고 있어서 그 실체를 쉽게 그려내기 어렵다. 지구 위에는 인간 외에도 다양한 동식물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강과 바다를 헤엄치며 산다. 사람이 느끼는 세계는 물고기나 새들이 느끼는 세계와는 다르며, 나무와 풀, 돼지나 고양이들이 느끼는 세계와 다르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박쥐들에게는 박쥐들의 세계가 있고, 풍뎅이에게는 풍뎅이들의 세계가 있다. 우리가 새와 물고기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듯, 새나 물고기도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무당벌레와 심해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 나의 시가 세계를 그려내는 작업이라면 이 작업은 끝이 없는 여행이며 모험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미로 속을 헤매지만 나는 나의 여행을 사랑한다. 음악과 그림이 시 쓰기에 도움을 줄 때가 많다. 특히 음악을 들으면 시상이 잘 떠오르는 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는 음악을 틀어 놓는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시를 쓸 때는, 음악을 틀어 놓지 않았을 때보다 시가 잘 써진다. 시 쓰기에 몰입하다 보면 음반 몇 장 듣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그림을 보면 느닷없이 시상이 떠오를 때도 있다. 첫 시집에 수록된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는 고대인들의 그림을,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너의 눈」은 샤갈의 그림을 보고 쓴 시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시집에는 그림이나 그림 속 인물, 그림 그리는 사람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 그림도 시가 되고 음악도 시가 된다. 모든 것이 시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고향 마을을 보곤 한다. 내가 살던 마을의 산 아래에는 저수지가 두 개 있었다. 나는 가끔 꿈에서 그 저수지들을 본다. 내가 꿈에서 보는 고향도 그렇지만, 내 꿈에 나타난 저수지 역시 고향에 있는 저수지와는 다르다. 나는 저수지 주위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꿈속에서 나는 그들과 잘 안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전에 내가 알았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저수지에는 아주 거대한 물고기들이 산다. 그놈들이 수면을 박차고 오르면 나는 개미만큼 작아진다. 나는 언젠가 저수지와 저수지에 사는 거대한 물고기에 대한 시를 써보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물고기가 나오는 시를 쓴 적은 있지만 시를 고치는 과정에서 거대한 물고기는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에 나는 저수지를 찾아가는 시 한 편을 썼다. 비가 그치면 새들이 날아 나오는 숲을 알고 있다. 그 숲은 이 세계에도 있지만, 꿈의 세계에도 있다. 숲 뒤에는 산이 있고 비가 그치면 구름이 산 너머로 천천히 움직인다. 가끔 비에 젖은 날개를 끌고 가던 거무튀튀한 나방이 양철 지붕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다. 그 양철 지붕 아래 네모난 창문이 있고, 창문 안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바다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도라지밭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을 본다. 바람이 불 때 뒷산 삼나무가 몸 흔드는 것을 보기도 한다. 덜컹거리는 완행열차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는 잠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는 내가 되기도 한다. 잠에서 깨어나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무를 다듬고 있다. 나는 작은 아이가 되어 할머니 드엥 업혀 있다. 할머니는 다듬은 무를 한쪽으로 치워 놓고 집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 풀밭 위를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개구리를 바라보거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새들이 바람에 휘청거리는 것을 보기도 한다. 비가 온 뒤라 풀들은 젖어 있었고 도랑엔 흙탕물이 흐르고 있다. 할머니는 말없이 도랑을 바라보았고, 말 못하는 나도 할머니 등에 업혀 흙탕물 흐르는 도랑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니 할머니와 내가 서 있는 땅이 쏜살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어지러워 고개를 들었다. 산자락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구름과, 구름을 밀어 올리는 바람이 산자락의 나무들을 마구 흔들고 있다. 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갔던 동네 처녀들이 바구니를 들고 돌담 옆을 지나간다. 돌담 앞에 늘어선 오리나무 뒤에서 푸른 눈의 고양이가 슬그머니 걸어 나온다. 소나기가 지나간 마을은 너무 조용하다. 아무 소리도 없다. 마을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올 때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 날아다니는 나비를 본다. 흰 날개 펄럭이며 훨훨 날아가는 나비를 본다. 도라지 하얀 꽃 파도 위를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본다. 도라지밭 지나 해바라기 노란 꽃 위에 내려앉는 나비, 내 눈 가득 들어오는 나비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비가 그치자 굴뚝과 이어진 벽을 타고 개미들이 열을 지어 기어 다닌다. 개미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개미 눈에는 내가 보이는 걸까? 개미들은 왜 걸어다니지 않고 기어 다니는 걸까? 개미는 왜 끝도 없이 먹이를 나르는 걸까? 나는 왜 종일 방에 처박혀 잠을 잤을까? 잠자지 않을 때는 왜 깨어 있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을 자거나 깨어 있어야 하는 걸까? 잠을 자지도 깨어 있지도 않는 것은 죽은 것들밖에 없는가? 잠을 자거나 깨어 있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나는 날마다 이런 생각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다. 새들은 어스름을 타고 숲으로 돌아간다. 회색 구름도 점점 검은색으로 변한다. 개미들은 양철 지붕 아래 떨어진 나방을 끌고 그루터기 뒤로 기어갈 것이다. 짙은 치자 향기를 싣고 온 바람이 뜰에 서 있는 삼나무를 타고 방으로 들어온다. 나는 책상 위에 펜을 내려놓고 마지막 완행열차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는 그 무렵 완행열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완행열차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멀어지는 것도 자주 보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그가 태어나기 몇 해 전에 철로는 폐쇄되었고 완행열차는 물론 특급열차도 그 마을을 지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완행열차의 기적 소리를 들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언덕 위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천천히 지나가는 완행열차를 본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생각을 멈추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가 쓰는 시에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싼 공간이 제시된다. 그러니까 그의 시에서는 대부분 시에 등장하는 사람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때때로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라진다. 그는 그가 쓴 시 속으로 들어가 여행을 시작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바깥 세계로 여행을 한다. 가끔, 그도 그가 쓰는 시 속의 인물이 되어 여행을 떠난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모험이다. 그는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자주 길을 잃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집을 찾으려고 미로 속을 헤매기도 한다. 때로는 길을 잃고 그는 이상한 사람들이 사는 이상한 세계로 들어간다. 언젠가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 세상에 갑자기 태어나 영문도 모르고 한세상 살아가는 나를 닮았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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