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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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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2    프랑스 시인 - 기욤 아폴리네르 댓글:  조회:3109  추천:0  2021-01-27
시리즈뜻밖의 미술교양   ●시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기욤 아폴리네르의 캘리그램   아트메신저빅쏘이소영 3만 팔로워 2018.03.13. 23:314,927 읽음         오늘은 시가 그림 같고, 그림이 시 같은 아리송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 의 ‘캘리그램[calligram] ’입니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와 친하게 교류하며 시가 회화와 같은 이미지로도 그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 회화, 음악의 세 가지를 요소를 표현을 결합시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18년 ‘그림 같은 시’인 ‘캘리그램’을 창조했습니다. 라틴어인 ‘아름답다’라는 뜻의 ‘Calli'와 글자 ’Gramme'을 결합해 ‘아름다운 상형 그림’이라는 장르를 만든 것이지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Apollinaire)의 사진 나 역시 화가이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남긴 말입니다. 그의 이런 도전은 정형적인 글줄 위주의 형태에서 자유시로의 이행을 시도하여 글자들을 이미지화합니다. ▶그림1 기욤 아폴리네르/ Il Pleut/ (It’s Raining) 1916년 ‘글자 비’입니다. 후드득 후드득 쏟아지는 글자들이 빗방울이 되어 종이 위에서 흩어집니다. 글자의 배열만으로도 쏟아지는 빗줄기가 이미지화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시에서 아폴리네르는 비가 내리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놀라운 만남이라고 말하며 빗방울 하나하나가 삶의 많은 순간과 인연임을 암시합니다. 사선으로 흘러가는 글자들의 모습이 비가 내리는 장면을 더욱 상상하게 해주면서 우리를 비 내리는 날 어느 한적한 거리로 순식간에 이동하게 합니다. ▶그림2 기욤 아폴리네르/ 에펠탑 나는 모든 것을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은 나의 최소의 봉사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프랑스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 태생이지만 파리로 이주해 살았죠. 늘 제2의 조국을 프랑스라고 생각한 그는 1916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 병으로 자원하여 출전한 후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1918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그린 에펠탑이 더 소중해 보이는 이유는 이미지와 글자에 그의 마음이 담겨서가 아닐까요?     시인이었지만, 그 어떤 화가보다 시각적인 것들을 사랑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말은 이미지를 보고, 읽고,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와닿게 합니다. 기욤 아폴리네르 /꽃 Fleurs/ 1916   ◆여러 화가들이 그린 기욤 아폴리네르의 초상 예술가 친구들이 많았던 기욤 아폴리네르는 감사하게도 그 예술가들이 남긴 초상화들이 많은 편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초상화로 만나면서 그는 여러 예술가들의 눈에 비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추측해보게 됩니다. ▶그림3 모리스 드 블라맹크/1904-05/기욤 아폴리네르의 초상/캔버스에 유채 야수파 화가인 블라맹크는 그의 담대한 화풍만큼 비교적 큰 터치로 과감하게 아폴리네르를 표현했습니다. 우리를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고독함이 느껴집니다. ▶그림4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의 초상화 습작/1905 기욤 아폴리네르를 그린 그림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드로잉이자 습작인데, 이 작품 속의 아폴리네르는 그 어떤 화가가 그린 초상화들보다 경쾌해 보입니다. 양손 가득 책을 안고, 우산을 들고 강아지를 끌며 그는 오늘도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 논할 예술가들을 찾아 거리를 나서고 있습니다. 훗날 아폴리네르는 사망 후 그가 사랑했던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무덤 위에는 피카소가 구상한 기념비가 지금도 서있습니다. 피카소가 그린 아폴리네르 풍자화 /1967 -디즈니 애니메이션 의 찻잔 모자가 떠오르네요. 피카소 눈에는 통통한 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주전자처럼 보였을까요? 위트가 가득한 크로키라 좋습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Apollinaire in Profile with Bandaged Head/1916/ graphite pencil and conté crayon on thick vellum paper/31.3 x 23.1 cm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피카소가 구상한 아폴리네르의 기념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아폴리네르의 연인, 화가 마리 로랑생    샤넬의 초상화를 그리고, 서정적인 화풍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1883-1956) 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5년간 뜨겁게 사랑했던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을 직감한 아폴리네르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한 그의 시 는 여전히 사랑을 대표하는 유명한 시입니다. 미라보 다리 끝에는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적은 기념비가 있습니다. 앙리 루소(Henri Rousseau)는 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습니다. ▶그림5 앙리 루소 The Muse Inspiring the Poet(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서로가 서로에게 딱 붙어있는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모습이 영원할 것 같지만, 둘은 헤어지고 로랑생은 다른 남자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가슴에 안고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슬픈 여인은 잊힌 여인이라고 말했던 마리 로랑생의 시가 떠오릅니다. 그녀의 염려와는 달리 아폴리네르에게 그녀는 영원히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림6 마리 로랑생/1908/초대받은 예술가들/캔버스에 유채 마리 로랑생이 1908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꽃을 들고 있는 여인이 마리 로랑생이고 눈이 약간 부엉이 같은 제일 왼쪽 청년이 피카소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청년이 그녀의 연인인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제일 오른쪽 여인이 피카소의 첫 애인이었던 올리비에입니다.  그림의 장소는 몽마르트에 있던 피카소의 하숙집 ‘세탁선’이었습니다. 화가 같은 시인이 되고자 했던 아폴리네르, 그런 아폴리네르를 사랑했던 친구들이 그린 초상화,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생과 함께 했던 시간…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들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예술가들의 꿈과 작품, 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뜨거워지다가, 먹먹해지다가를 반복합니다.  글자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글자가 되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캘리그램을 다시 바라봅니다. 올 한해 우리도 이렇게 지내면 좋겠어요. 무엇이든 연결될 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마리 로랑생과 기욤 아폴리네르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이 그린 기욤 아폴리네르에 대한 경의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아폴리네르에 대한 경의( Homage to Apollinaire)/ 1912-14 긴 얼굴의 독보적인 초상화를 남기고 떠난 모딜리아니가 기욤 그린 아폴리네르 모딜리아니가 그린 아폴리네르 프랑스 입체파 화가였던 장 매쳉체가 그린 기욤 아폴리네르 장 매쳉체(Jean Metzinger)/1911/ Etude pour le portrait de Guillaume Apollinaire, graphite on paper/48 × 31.2 cm,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2161    미국 시인 -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댓글:  조회:2142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Carlos Williams, 1883년~1963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평생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그는 2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었고 처방전에 시를 적기도 했다. 윌리엄스의 초기 시들은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후에 구어체 사용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미국 영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활용해 미국 시가 르네상스 시기부터 영국 시를 주도하고 있던 단장격(短長格) 형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노동자와 아이들, 그리고 도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애정 때문에 독자는 그의 시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 정물화와 같은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1923)는 일상적인 사물에서 흥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많은 게 놓여 있다 빨간 바퀴 손수레에 빗물에 젖어 빛나는데 그 곁에 흰 병아리들 윌리엄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시를 개발했다. 그에게 시는 스티븐스처럼 완벽한 예술품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고, 프로스트처럼 워즈워스적인 사건들을 조심스럽게 재창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윌리엄스에게 시는 포즈를 취하지 않고 찍은 스냅 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하는 것인데, 이 개념은 윌리엄스가 뉴욕 시의 스티글리츠 살롱 같은 갤러리에서 만난 사진가들과 예술가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시 〈젊은 주부(The Young Housewife)〉(1917)에서 보이듯이 그의 시는 종종 숨겨진 가능성이나 유혹 등을 스냅 사진처럼 포착해내고 있다. 오전 10시 젊은 주부가 남편의 집 나무 벽 뒤쪽으로 평상복을 입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내 차를 타고 쓸쓸히 지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얼음장수, 생선장수를 만나러 길모퉁이에 가서 수줍어하며 코르셋도 입지 않은 채로 흩어진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낙엽에 비유한다. 내 차의 소리 없는 바퀴들은 마른 잎사귀들 위로 바스락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내가 인사하고 미소 지으며 지나갈 때. 그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사물들의 중요성을 제시하는 자신의 작품을 '사물주의(objectivist)'라고 불렀다. 그의 작품은 경험의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포착하고 있으며, 1950년대 초반 '비트'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과 파운드처럼 윌리엄스 또한 서사시 형식에 도전했는데, 엘리엇과 파운드의 서사시가 문학적인 인유를 사용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소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반면, 윌리엄스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사시를 창작했다. 엘리엇이나 파운드와 달리 윌리엄스는 해외에서 수학했지만 미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시인이다. 그의 5권짜리 서정시집 《패터슨(Paterson)》(1946~58)은 자전적인 인물 패터슨 박사의 눈으로 바라본 그의 고향 뉴저지 주 패터슨을 찬미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윌리엄스는 서정적인 문구, 산문, 편지, 자서전, 신문 기사, 역사적 사실들을 병치시키고 있다. 그의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넓은 여백은 미국 문학에 나타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한 '열린 길'을 내포하며, 동시에 일요일 공원에 소풍 나온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는 새로운 장소의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휘트먼의 《풀잎》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패터슨 박사 또한 노동자들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인다. - 늦봄, 일요일 오후! - 벼랑으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간다 (숫자를 세며 : 증명)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 그들이 개와 발을 맞춰 오르다가 밟고 미끄러진 그 돌멩이를 이어 밟으며! 웃으며 서로에게 소리치며 - 기다려! (Ⅱ, i, 14-23) [네이버 지식백과]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년~1963년)  
2160    미국 시인 - 월러스 스티븐스 댓글:  조회:2140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1879년~1955년)     이미지 크게보기 월러스 스티븐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난 월러스 스티븐스는 하버드 대학과 뉴욕 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1904년부터 1916년까지 법률 활동을 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겸했다. 1916년 보험회사의 간부가 되기 위해 코네티컷의 하트퍼드로 이사를 가서도 시를 계속 창작했다. 그의 삶은 놀랍게도 시인으로서의 생활과 직장인으로서의 생활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는데, 보험회사 관계자들은 그가 당시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풍금(Harmonium)》(1931년 개정판), 《질서의 관념들(Ideas of Order)》(1935), 《세계의 부분들(Parts of a World)》(1942) 등과 같은 적절하게 이름 지어진 시집에서 보이듯이 평생 미학적인 질서에 대한 매우 복잡한 생각들을 개발하는 데 매진했다. 그의 유명한 시들 중에는 〈일요일 아침(Sunday Morning)〉, 〈건반 앞의 피터 퀸스(Peter Quince atthe Clavier)〉, 〈아이스크림의 황제(The Emperor of Ice-Cream)〉, 〈검은새를 보는 13가지 방법(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 〈키웨스트에서 질서의 관념(The Idea ofOrder at Key West)〉 등이 있다. 스티븐스의 시는 상상력, 미학적 형식의 필요성, 예술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와 호응해야 한다는 믿음 등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가 사용한 시어는 풍부하고 다양하다. 그는 울창한 열대 지방의 장면들뿐만 아니라, 유머 넘치고 아이러니한 삽화 같은 장면들 또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 일부는 대중문화를 다루고 있으며 어떤 시들은 복잡한 사회에 대해 조롱하거나 지나치게 지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이윽고 탬버린 같은 소음을 내며 / 그녀를 시중드는 비잔틴 사람들이 왔다(Soon, with a noise like tambourines / Came her attendantByzantines)"는 표현에서처럼 풍부한 언어 유희로 유명하다. 스티븐스의 작품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는 때로 다음의 〈10시의 환멸(Disillusionment of Ten O'Clock)〉(1931)이라는 시처럼 독자들에게 장난을 친다. 그 집들에는 흰색 잠옷들이 출몰한다. 어떤 것도 초록색이 아니다. 초록색 링이 달린 자주색도 노란색 링이 달린 초록색도 파란색 링이 달린 노란색도 아니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레이스와 작은 구슬 달린 띠가 있는 양말을 신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비비와 고둥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늙은 선원만이 술에 취해 장화를 신은 채 잠들어 호랑이를 잡는다, 붉은 날씨 속에서. 이 시는 상상력이 없는 삶(평범한 흰 잠옷)을 불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끝에서 재산에는 관심 없는 술 취한 선원이 비록 꿈에서지만 '호랑이를 잡는다'. 이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항상 창조적인 출구를 찾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년~1955년)  
2159    미국 시인 - 로버트 프로스트 댓글:  조회:2019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년~1963년)     이미지 크게보기 로버트 프로스트 로버트 리 프로스트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때까지 미국 북동부에 있는 농장에서 성장했다. 엘리엇과 파운드처럼 그도 영국으로 건너갔고 새로운 시운동에 이끌렸다. 카리스마적인 시 낭송가였던 그는 순회공연으로 명성을 날렸고,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때는 자작시를 낭송해, 시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쉽게 설명되는데, 전통적인 농장 생활에 관한 시를 씀으로써 옛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프로스트의 소재는 사과 따기, 돌담, 울타리, 시골길 등으로 보편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명쾌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창작했다. 그는 인유나 생략법 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각운(脚韻) 또한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로스트의 작품은 종종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거의 최면적인 각운을 지닌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1923)라는 시에서 배경이 되는 조용히 눈 내리는 저녁은 죽음에 대한 차분한 태도를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게 누구의 숲인지 알 듯하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멈춰 서서 자신의 숲에 눈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내 조랑말은 나를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근처에 농가라곤 하나 없는데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길을 멈추었으니. 말은 방울을 흔들어댄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밖의 소리는 오직 가볍게 스쳐가는 바람소리, 부드러운 눈송이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관련이미지 프로스트출처: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년~1963년)  
2158    미국 시인 - 엘리엇 댓글:  조회:2373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1888년~1965년)     이미지 크게보기 T. S. 엘리엇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 소르본 대학, 옥스퍼드 대학의 머튼 칼리지 등에서 공부한 그는 동시대 주요 미국 작가들 중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작가였다. 그가 공부했던 산스크리트 어와 동양 철학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파운드처럼 그도 일찍 영국으로 건너가 문학계에서 거대한 인물이 되었다. 당시 가장 존경받는 시인 중 한 명이었던 엘리엇의 모더니즘적이고 보기에 비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새로운 시들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또한 영향력 있는 수필과 희곡을 집필해 현대 시인들에게 문성을 역설했다. 비평가로서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을 공식화시킨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는 《신성한 숲(The Sacred Wood)》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무리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J. 앨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15)는 이런 접근법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 시에서 나이든 화자 프루프록은 스스로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쟀다'고 생각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단조로운 존재와 낭비된 인생의 반영으로 커피 스푼이라는 상관물이 사용되었다. 〈프루프록의 연가〉의 유명한 서두는 현대적인 삶처럼, 인생이 던지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천박한 골목길로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 자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수술대 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 있는 지금 우리 갑시다, 반쯤 인적 끊긴 어느 거리를 통해 싸구려 일박 여인숙에서의 불안한 밤이 중얼거리며 숨어드는 곳, 굴 껍질 흩어져 있는 톱밥 깔린 레스토랑을 지나 위압적인 질문으로 당신을 인도할 음흉한 의도의 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진 거리들을 지나 오, 묻지는 마세요, "무엇이냐?"라고. 일단 가서 방문해봅시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런던의 분주한 거리를 환기시키기 위해 단테의 지옥을 반영하는 《황무지》(1922)에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가득 배어 있다. 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런던 다리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음이 망쳤으리라고는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I, 60 - 63) 《황무지》의 비전은 궁극적으로 묵시록과 같은 보편성을 지닌 것이다. 보랏빛 허공 속에 있는 깨어짐 재건 그리고 다시 터짐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이 없는 (V, 373 - 377) 엘리엇의 다른 주요 작품 중에는 서구 사회의 노쇠함을 상징하기 위해 노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작은 노인〉(1920), 인간성 상실에 대한 감동적인 만가인 〈텅 빈 사람들(TheHollow Men)〉(1925),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영국 국교회로 마음을 돌리고 있는 《재의 수요일(Ash-Wednesday)》(1930), 시간과 자아의 본질, 영적인 각성 등 초월적인 주제에 대한 복잡하고 실험적인 명상시 《4개의 4중주(Four Quartets)》(1943) 등이 있다. 그의 시, 특히 과감하고 새로운 초기 작품들은 몇 세대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네이버 지식백과]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년~1965년) 
2157    미국 시인 - 에즈라 파운드 댓글:  조회:2264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년~1972년)     에즈라 파운드는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미국 시인 중 한 명이다. 파운드는 1908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거주하면서 많은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비서로 일했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자신이 과감하게 편집하고 수정했던 시 《황무지》의 시인 T. S.엘리엇이 있었다. 파운드는 미국과 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해리엇 먼로의 중요한 시카고 잡지 《포이트리》에서 공헌도 높은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또한 매우 시각적이고 명료한 표현을 옹호하는 '이미지즘'이라는 새로운 시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미지즘에 따라 다양한 시적 접근을 시도하던 파운드는 이탈리아로 가서 파시즘에 빠지게 되었다. 파운드는 편지, 수필, 시선집 등을 통해 이미지즘을 진전시켰다. 1915년 먼로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상투어나 관용구' 등을 피하며 현대적인 음성을 지닌 시각적 시를 옹호한다고 했다. 그는 〈이미지즘 시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A Few Don'ts of an Imagiste)〉 (1913)라는 글에서 이미지를 "순간에 지적이고 감성적인 복잡성을 전달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1914년 파운드가 시인 10인의 시를 모은 선집 《이미지즘 시인들(Des Imagistes)》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힐다 두리틀, 에이미 로웰 등을 비롯한 뛰어난 작가들의 이미지즘 실례를 수록하고 있다. 파운드의 관심과 독서는 세계적이었다. 그의 번안물과, 더러 틀린 점도 있지만 대체로 훌륭했던 번역물들은 다양한 문화로부터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미국의 현대 작가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역작은 《캔토스(The Cantos)》로, 눈을 감는 날까지 집필하고 출간했던 시들이다. 훌륭한 시구를 담고 있는 《캔토스》는 다양한 시대 및 문화로부터 온 문학과 예술 작품을 인유하고 있어 난해하다. 파운드의 시는 명백한 시각 이미지, 신선한 운율, 남성적이고 지적이며 평범하지 않은 글귀로 유명하다. 이러한 특성은 〈캔토 81〉에 나오는 "용의 세계에서 개미는 켄타우루스다"라는 표현과 다음의 〈지하철역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1916) 같은 일본 하이쿠로부터 영감을 받은 시들에 나타나 있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얼굴들 ; 축축한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 관련이미지 파운드출처: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년~1972년)  
2156    미국 시인 - 엘리자베스 비숍, 에이드리언 리치 댓글:  조회:2270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1911년~1979년)과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1929년~ )     엘리자베스 비숍 특이한 여성 시인들 중에는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언 리치가 최근 가장 많이 존경받고 있다. 비숍의 투명한 지성, 외진 풍경에 대한 관심, 여행과 관련한 은유들은 정확성과 섬세함으로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비숍은 자신의 정신적 선배인 메리앤 무어처럼 결혼하지 않았고, 철학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는 냉담하고 묘사적인 스타일로 멋진 시들을 창작했다. 〈어시장에서(At the Fishhouses)〉처럼 매우 추운 대서양 북부의 묘사는 비숍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지식이 그러했으면 하는 것들과 닮았다 / 검고, 짜고, 맑고, 움직이고, 완전히 자유로운." 플라스, 섹스턴, 에이드리언 리치 등의 '뜨거운' 시들과 비교해서, 비숍의 시는 무어의 시와 함께 에밀리 디킨스까지 족적을 찾아갈 수 있는 '차가운' 여성 시 전통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리치는 비록 전통적인 형식과 운율에 맞춰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작품들, 특히 그녀가 1960년대에 열렬한 페미니스트가 된 후에 쓴 작품들은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녀가 특히 재능을 보인 곳은 은유인데, 그녀의 뛰어난 작품 〈난파선으로 잠수하기(Diving Into theWreck)〉(1973)는 여성의 정체성 찾기를 난파선을 찾아 잠수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난파선은 여성의 자아 상실과 같은 것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이 지배하는 영역을 뚫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화자는 주장한다. 시인 드니즈 레버토프에게 바치는 리치의 시 〈루프워커(The Roofwalker)〉(1961)에서는 여성의 시 창작을 위험한 작업과 동일시하고 있다. 지붕을 만드는 남성들처럼 그녀는 "실제보다 크고, 노출되었으며 / 언제라도 목이 부러질" 것처럼 느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 1911년~1979년)과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1929년~ )  
2155    미국 시인 - 제임스 디키 댓글:  조회:2083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제임스 디키(James Dickey, 1923년~1997년)     이미지 크게보기 제임스 디키 시인이자 소설가, 수필가인 제임스 디키는 조지아 주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주제가 자아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해야만 하는 연속성에 대한 것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작품들 다수는 강과 산, 날씨 변화,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등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에 디키는 남성간 우정의 어두운 면을 다룬 소설 《석방(Deliverance)》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책이 출간되고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그의 최근 시집들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예리코 : 남부 관망(Jericho : The SouthBeheld)》(1974)에서는 남부의 풍경을, 《신의 이미지(God's Images)》(1977)에서는 성경의 영향 등을 보여주고 있다. 디키는 종종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필사적으로 이루고 / 요구 이상으로 해내며"라는 표현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임스 디키(James Dickey, 1923년~1997년)  
2154    미국 시인 - 필립 레빈 댓글:  조회:2155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필립 레빈(Philip Levine, 1928년~ )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필립 레빈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 고통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휴고와 마찬가지로 레빈도 도시 빈민 출신이다. 그는 산업 사회에 갇힌 외로운 사람들을 대변해왔다. 그의 시 다수가 우울하며, 정부 체제가 계속 유지될 것임을 아는 가운데 느끼는 무정부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시에서 레빈은 용기와 꾀로 사냥꾼들의 위험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여우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운율법을 사용하다가 후기로 가면서 더욱 자유롭고 형식에 개의치 않는 시를 창작했다. 또한 그는 현대 사회의 악에 대한 외로운 저항을 작품에 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필립 레빈(Philip Levine, 1928년~ )  
2153    미국 시인 - 리처드 휴고 댓글:  조회:1847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리처드 휴고(Richard Hugo, 1923년~1982년)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태어난 리처드 휴고는 시어도어 레트키의 문하생이다. 그는 비참한 도시 환경 속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며 미국 북서부를 배경으로 노동자들의 희망, 공포, 좌절 등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휴고는 과감하게 억양격을 활용해 미국 북서부의 허름하고 잊혀진 작은 마을에 대한 향수 어린 고백적 시를 창작했다. 그는 인간관계에서의 수치, 좌절, 배척 등을 다루었다. 또한 자세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디테일에 독자가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든다. 〈당신이 매우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미국적인 것이다(What Thou Lovest Well, Remains American)〉(1975)라는 시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기억을 음식인 것처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당신이 이상한 텅 빈 마을에서 길을 잃고 배고픈 연인들을 친구로 삼고 싶고 그들이 만든 길가 선술집에서 환영을 받고 싶다면··· [네이버 지식백과] 리처드 휴고(Richard Hugo, 1923년~1982년)  
2152    미국 시인 - 시어도어 레트키 댓글:  조회:2078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시어도어 레트키(Theodore Roethke,1908년~1963년)     온실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시어도어 레트키는 작은 벌레들과 보이지 않는 뿌리로 채워진 '온실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특별한 언어를 개발했다. "벌레야, 내 곁에 있어주렴 / 내가 아주 힘들거든." 《바람을 위한 말(Words for the Wind)》(1958)에 실린 그의 사랑시는 순수한 열정으로 아름다움과 욕망을 찬미하고 있다. 그의 시 하나는 "나는 바짝 말라 아름다운 여성을 알고 있는데 / 작은 새들이 한숨을 쉬면 그녀 또한 한숨으로 답했다"라고 시작한다. 때때로 그의 시는 자연에 관한 짧고 오래된 수수께끼 같다. "누가 먼지를 기절시켜 소리 지르게 만들었는가? / 두더지에게 물어보렴, 그가 알고 있으니."     [네이버 지식백과] 시어도어 레트키(Theodore Roethke, 1908년~1963년)  
2151    미국 시인 - 존 베리먼 댓글:  조회:2196  추천:0  2021-01-26
존 베리먼(John Berryman, 1914년~1972년)     존 베리먼의 삶은 로버트 로웰의 삶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베리먼은 북동부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와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프린스턴 대학교 연구원이 되었다. 전통적인 형식과 운율을 따랐던 그는 초기 미국 역사에 영감을 받았으며 《꿈 노래(Dream Songs)》(1969)를 통해 자기 비판적이고 고백적인 시들을 발표했다. 이 시집에서 베리먼은 헨리라는 괴이한 자전적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일상적인 교편 생활, 만성 알코올 중독, 야심 등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동시대 작가 시어도어 레트키처럼 베리먼은 민담, 동요, 상투어, 속어 등의 구문으로 활기를 더해 유연하고 쾌활하며 동시에 심오한 스타일을 개발했다. 베리먼은 헨리에 대해서 "그는 폐허를 바라보았다. 폐허가 대답하듯 그를 쳐다보았다"라고 적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런, 이런, 이런 / 무관심이 언제 올 것인가, 나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기뻐 소리친다네"라고 쓰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존 베리먼(John Berryman, 1914년~1972년)  
2150    미국 시인 - 앤 섹스턴 댓글:  조회:2226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앤 섹스턴(Anne Sexton, 1928년~1974년)     플라스처럼 앤 섹스턴도 미국에서 여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아내, 어머니, 시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려고 했던 열정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도 플라스처럼 정신 질환으로 고생했으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섹스턴의 고백시는 플라스의 시보다 더욱 자전적이며, 플라스의 초기 시가 가진 능숙함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섹스턴의 시는 강렬하게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 그녀의 시는 성, 죄의식, 자살 등 금기시되었던 소재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녀는 종종 여성의 관점에서 본 임신, 여성의 육체, 결혼 등의 여성적인 주제들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시 〈그녀의 종류(Her Kind)〉(1960)에서는 화형에 처해지는 마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나는 당신의 수레에 탄 적이 있어요, 마부여 내 벌거벗은 팔을 지나가는 동네사람에게 흔들면서 마지막 환한 길을 배우며, 생존자여 당신의 화염이 내 정강이를 아직도 물어뜯는 그리고 당신의 바퀴가 구를 때 내 갈비뼈에는 금이 가는 그곳을. 죽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여성. 나는 그녀와 한 종류였다오. 그녀의 작품집 제목을 보면 광기와 죽음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그녀의 작품집 중에는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일부(To Bedlam and Part Way Back)》(1960), 《살거나 아니면 죽거나(Live or Die)》(1966), 그리고 사후에 출간된 《하느님을 향한 서툰 배젓기(The Awful Rowing Toward God)》(1975)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앤 섹스턴(Anne Sexton, 1928년~1974년)  
2149    미국 시인 - 실비아 플라스 댓글:  조회:1945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년~1963년)     이미지 크게보기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는 스미스 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닌 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들어가는 등 외면적으로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녀는 카리스마적인 영국 시인 테드 휴즈를 만나고 그와 함께 아이 둘을 낳아 잉글랜드의 작은 시골집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 《유리 그릇(The Bell Jar)》(1963)에 나타나듯이 동화 같은 성공 뒤에는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인 문제들이 곪고 있었다. 그녀가 안고 있던 문제들 중 일부는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나머지는 여성에 대한 1950년대의 억압적인 풍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풍조 중에는, 여성은 분노를 표출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경력을 야심적으로 추구하지 말아야 하고, 대신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대부분 여성들 또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비아 플라스 같은 성공한 여성들은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살아야 했다. 플라스의 동화 같은 삶은 휴즈와의 별거로 무너졌고 그녀는 극도로 추운 겨울날 런던의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아프고 고립된 채 절망에 싸인 플라스는 부엌에서 가스로 자살하기 전까지 시 창작에 몰두했다. 이 시들은 그녀가 죽은 지 2년 후에 출간된 시집 《아리엘(Ariel)》(1965)에 수록되었다. 이 시집의 머리말을 쓴 로버트 로웰은 그녀와 앤 섹스턴이 1958년 자신의 시 수업을 듣던 때에 비해 플라스의 시가 급격하게 발전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플라스의 초기 시는 깔끔한 정통 시들이었지만, 후기 시는 대담성과 원형 페미니스트다운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원자(The Applicant)〉(1966)라는 시에서 플라스는 아내를 무생물인 '그것(it)'이라고 축소하며, 아내 역할의 공허함을 폭로하고 있다. 살아 있는 인형, 너는 어디서나 본다. 그것은 바느질하고, 요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말하고, 말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잘 한다,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너는 구멍이 있다, 그것은 땜질한 것이다. 너는 눈이 있다, 그것은 그냥 환상이다. 내 아이야, 그것은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과 결혼, 결혼, 결혼하겠니. 플라스는 동요적인 운율과 잔인할 정도로 직접적인 표현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그녀는 대중문화에서 나온 이미지들을 솜씨 있게 활용했다. 아기에 대해 그녀는 "사랑은 너를 뚱뚱한 금시계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시 〈아빠(Daddy)〉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영화에 나오는 드라큘라로 상상하고 있다. "당신의 기름진 검은 심장엔 말뚝이 박혔고 /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어요." [네이버 지식백과]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년~1963년)  
2148    미국 시인 - 칼 샌드버그 댓글:  조회:2307  추천:0  2021-01-26
두산백과 칼 샌드버그   [ Carl Sandburg ] 요약 미국 시인. 시카고라는 근대도시를 대담 솔직하게 다루었으며 부두 노동자나 트럭 운전사들이 쓰는 속어나 비어(卑語)까지도 시에 도입해 전통적인 시어(詩語)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사람》등이 있으며 퓰리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링컨 연구자로도 유명하다. 출생-사망 1878.1.6 ~ 1967.7.22 국적 미국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미국 일리노이주 주요수상 퓰리처상(1940, 1951) 주요작품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사람 Cornhuskers》(1918) 스웨덴계 이민의 아들로 일리노이주(州) 출생.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갖가지 노동에 종사하다가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에 종군하였다. 제대 후에는 고향에 있는 롬버드대학에서 고학으로 공부하였으며, 그 뒤 신문기자가 되어 정치운동에도 관여하는 한편, 시작(詩作)에도 손을 대었다. 1914년에 잡지 《포에트리 Poetry》에 《시카고 Chicago》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일약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는 시카고라는 근대도시를 대담 솔직하게 취급, 부두 노동자나 트럭 운전사들이 쓰는 속어나 비어(卑語)까지도 시에 도입, 전통적인 시어(詩語)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916년에 《시카고》를 포함하여 중서부 지방의 자연을 노래한 작품을 모아 《시카고 시집 Chicago Poems》을 출판, 뒤이어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사람 Cornhuskers》(1918) 《연기와 강철 Smoke and Steel》(1920) 《전(全)시집 Complete Poems》(1950, 퓰리처상 수상) 등을 간행하였다. 그는 또 링컨 연구자로도 유명하여 대작 《링컨, 대초원 시대 Abraham Lincoln:the Prairie Years》(2권, 1926) 《링컨, 남북전쟁 시대 Abraham Lincoln:the War Years》(4권, 1939, 퓰리처상 수상)를 썼고, 이 밖에 각지의 민요와 전설을 모은 《아메리카 민요집 The American Songbag》(1927), 자서전 《언제나 젊은 이방인들 Always the Young Strangers》(1953) 등을 남겼다. ===============================/// 미국의 문학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1878년~1967년)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칼 샌드버그에 대해 짧게 적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흑백사진 한 장으로 그랜드캐니언을 담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시인이자 역사가, 전기작가, 소설가, 음악가, 수필가이기도 했던 샌드버그는 철도 제철공의 아들로 태어나 수많은 일을 한 인물이다. 직업적으로는 저널리스트였던 그는 20세기 고전 작품 중 하나인 거대한 분량의 에이브러햄 링컨 전기를 집필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샌드버그는 범위가 넓고 기억을 상기시키는 도시적, 애국적 시들을 창작하며 단순하고 순수한 동요 및 민요 형식을 이용한 점에서 월트 휘트먼을 연상시킨다. 그는 자신의 시를 노래하는 듯 경쾌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낭송하고 녹음하기 위해서 돌아다녔다. 전국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우쭐해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감옥에 가지 않고, 제때에 밥을 먹으며, 내가 쓴 것을 출간하고, 가정과 미국 전역에서 자그마한 애정을 받으며, 날마다 노래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제와 휘트먼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시카고(Chicago)〉(1914)라는 시이다. 세상 사람들을 위한 돼지 도살자, 연장 제조자, 밀을 저장하는 자, 철도에서 일하는 자, 국가의 화물 취급자 ; 격렬하고, 튼튼하고, 요란한 큰 어깨들의 도시. [네이버 지식백과]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1878년~1967년)  
2147    시적 개성 목소리의 적임자 - 글릭; 노벨문학상 문턱 넘다... 댓글:  조회:2290  추천:0  2020-10-09
노벨문학상 美시인 루이즈 글릭… 개인 존재를 시적 목소리로 승화 2020년10월9일  한림원은 수상자로 루이즈 글릭을 발표하며 “개인의 존재를 보편화시키는 아름답고 분명한 시적 목소리를 내 온 작가”라고 평했다. 사진은 글릭(왼쪽)이 2016년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휴머니티 메달을 받는 장면. AP 뉴시스   시집 ‘야생 붓꽃’ 표지 미국의 녀성 시인 루이즈 글릭(77)이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8일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개인의 존재를 보편화하는, 분명한 시적 목소리를 내온 작가”라고 선정리유를 밝혔다.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117명 가운데 녀성작가로는 16번째 수상자이며 시인으로는 2011년 이후 처음이다. 루이즈 글릭은 19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롱아일랜드에서 자랐다. 1968년 ‘퍼스트본(Firstborn)’으로 데뷔했으며 이와 동시에 “미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중 한명”으로 호평받았다. 한림원은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신화와 고전적 모티브로부터 령감을 얻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12권의 시집과 다수의 수필집을 출판했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 작품 뿐만 아니라 신화, 력사, 자연을 바탕으로 현대적 삶을 관조하는 작품들을 써왔다. 가장 높이 평가되는 대표작 중 하나는 퓰리처상을 받은 시집 ‘야생 붓꽃’(The Wild Iris·1992년)이다. 수록작 ‘눈풀꽃’에서는 겨울이 지나면 돌아오는 삶의 신비로운 순환을 그려냈다.   시인 류시화는 해외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시집 ‘시로 랍치하다’(2018년)에서 글릭의 시 ‘애도’를 소개하며 시적 기교와 감수성이 풍부하고 고독과 죽음,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시인이라고 해설했다. 50대 초,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생사를 오갔던 글릭은 그때의 경험을 담아 이 시를 썼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만큼 운 좋은 일이 없고, 그 운 좋은 순간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애도를 받아 마땅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요기사   시집 ‘아베르노’(Averno·2006년)는 죽음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돼 페르세포네가 지옥으로 내려간 신화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뉴욕타임스는 “시작(詩作)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평했다. 최근 내놓은 ‘성실하고 덕망 있는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2014년)도 “눈부신 성취”라는 호평을 받았다.   시인의 작품 세계는 또한 ‘선명성’ ‘명쾌함을 위한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유년기와 가족생활, 부모, 형제자매와의 친밀한 관계는 작품세계의 중요한 주제로 꼽힌다. 현재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거주 중이며 예일대 영문학과 초빙교수이자 로젠크란츠 상주작가로 있다. 전미도서상, 전국도서평론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자국의 대표 시인임을 뜻하는 미국 계관시인에 2003∼2004년 선정됐다. 올해 노벨문학상측은 정치적 리념적으로 론난이 없는 비교적 ‘안전한 작가’를 선택할 것으로 점쳐졌다. 2017년 ‘미투’ 론난에 수상자 사전 류출 스캔들이 이어졌고 지난해 수상자 중 페터 한트케가 유고슬라비아내전 당시 인종청소를 자행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게 동조한 사실이 드러나 거센 비난을 받았기 때문. 글릭의 수상은 해외 언론이나 비평가, 베팅 사이트 나이서오즈 등의 유망 수상작가 목록에는 없던 깜짝 수상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돼 소개된 시집이 없다.   수상자는 1000만 크로나(약 13억 원)의 상금을 받는다. 매년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시상식은 올해 코로나19 영향으로 열리지 않는다. 그 대신 수상자들이 자국에서 상을 받는 장면이 중계될 예정이다. ○ 루이즈 글릭 년표… ―1943년 미국 뉴욕 출생 ―1963년 미국 컬럼비아대 입학후 1965년 중퇴 ―1968년 첫 시집 ‘Firstborn’ 발표 ―1985년 ‘The Triumph of Achilles’ 미국비평가협회상 수상 ―1990년 ‘Ararat’ 발표. 뉴욕타임스, “최근 25년 미국 시 력사상 가장 혹독하고 슬픈 작품” ―1993년 ‘The Wild Iris’ 퓰리처상 수상 ―2003-2004년 미국 계관시인 ―2004년 9·11테러에 관한 시 ‘October’ 발표 ―2008년 월러스스티븐스상 수상 ―2014년 ‘Faithful and Virtuous Night’ 전미 도서상 수상 ―2015년 내셔널휴머니티상 수상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 2020.10.08.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202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2016년 모습. 워싱턴/EPA 연합뉴스 2020년 노벨 문학상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77)에게 돌아갔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과 시상식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8일(현지시각) 의 작가 루이즈 글릭을 2020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림원은 “글릭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목소리로 개인의 실존을 보편적으로 나타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19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글릭은 현재 예일대 영문학과 교수다. 그는 1968년 시집 로 문단에 등단한 뒤 미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저명한 시인의 하나로 명성을 얻어왔다. 지금까지 12권의 시집과 시론을 출간했다. 한림원은 “그의 시는 명징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며 “어린 시절과 가정생활, 부모와 남매들과의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며 이번 수상으로 이어진 중심 주제를 설명했다. “고통스러운 가족관계를 잔인할 정도로 정면으로 다뤄, 시적인 장식이 없이 솔직하고 비타협적인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아울러 “그는 시 속에서 자신의 꿈과 환상에 스스로 귀를 기울이면서, 누구보다도 자신의 환상과 정면으로 대응해왔다”고 한림원은 논평했다. 글릭은 자전적 배경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고백적인 시인으로 평가되지 않는다고 한림원은 지적했다. 그가 보편성을 추구한 작품 세계는 신화와 고전작품들의 모티브에서 얻은 영감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표 시집의 하나인 (2006)는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의 신인 하데스에게 붙잡혀 그의 지옥으로 떨어진 페르세포네 신화에 대한 시각적 해석으로 유명하다. 최근 시집인 역시 시각적으로 장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93년 (The Wild Iris)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노벨 문학상은 2018년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지난해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58)를 2018년 수상자로,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페터 한트케(78)를 2019년 수상자로 선정한 바 있다. 2018년 5월 한림원의 지원을 받은 사진작가가 여성 18명을 성폭행했다는 폭로가 나온 뒤 종신위원들이 대거 사퇴했고, 한림원이 종신위원과 수상위원회를 새로 꾸리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수상자는 전년까지 900만크로나의 상금을 받았으나, 올해부터는 1000만크로나(약 12억9900만원)를 받는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평화상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들은 고국에서 메달과 상장을 받게 되며, 이 모습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될 예정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노벨문학상 수상 글릭, 퓰리처상·전미도서상 휩쓴 미 대표 시인 2020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  신화와 역사·고전 소재로  개인 경험과 상처 보편 문제로 확장 2020노벨 문학상 수상자 르이즈 글릭. 노벨 문학상이 여성과 시인, 미국 작가에게 야박했다는 평을 의식했던 것일까.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은 스웨덴 한림원이 자신들을 향한 여러 따가운 시선을 두루 고려한 선택처럼 보인다.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겠지만, 루이즈 글릭은 적어도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2003~2004년 미국 계관시인을 지냈으며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단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985)나 (1990) 같은 시집 제목에서 보다시피 그리스 신화와 성서를 비롯한 신화와 역사, 고전 등에서 소재를 취해 개인적 상실과 욕망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리고 그의 시에 동원된 개인적 경험과 상처는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되고는 한다. 글릭은 1943년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어릴 적부터 그리스 신화와 잔다르크 이야기 같은 고전들을 가르쳤고 그는 어린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고교 시절에 거식증을 앓았으며 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정신분석 요법을 통한 치료에 집중했다. 그는 세라로런스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의 시 창작반에 등록해 수업을 들었으며, 학교를 떠나서는 비서 업무로 생계를 해결했다. 글릭은 1968년에 첫 시집 를 출간했고 이 책은 몇몇 긍정적인 평을 듣기도 했지만, 글릭 자신은 그 뒤 한동안 집필 불능 상태에 빠졌다가 1971년 버몬트의 고더드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일을 맡으면서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1975년에 두번째 시집 를 펴냈고, 이 작품은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뚜렷한 목소리의 발견”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1992년에 낸 시집 으로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고, 2014년에 낸 시집 으로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2004년에는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다룬 장시 을 펴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동원해 트라우마와 고통의 양상들을 탐구했다. 이해에 그는 예일대 상주 작가로 임명되었다. 2016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전미 인문학 메달 수여식에 앞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수상자인 루이즈 글릭을 감싸안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글릭은 언어적 정확성과 엄정한 어조를 지닌 서정시를 쓰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거의 각운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반복과 구 걸치기(enjambment) 등의 기법으로 리듬을 확보한다. 그의 시는 자주 일인칭 화자를 동원하고 시인 자신의 개인사에서 촉발된 내면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자전적이며 고백적인 시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허구적 장치라는 해석도 만만찮다. 주제 측면에서 글릭의 시는 죽음과 상실, 거절, 관계의 실패 같은 아픔과 치유 및 회복을 향한 시도를 노래한다. 그와 함께 사랑과 관심, 통찰, 그리고 진실을 전달하는 능력을 향한 갈망 역시 표현한다. 그의 시는 또한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나게 드러내는데, 가령 시집 에서는 정원의 꽃들이 지능과 감정을 지닌 주체들로 등장하기도 한다. 양균원 대진대학교 교수는 2009년 가을호에 실은 논문 ‘자아의 부재에서 목소리를 내다―루이스 그릭’에서 “그릭(글릭)의 목소리는 가장 개인적인 고통의 순간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보다 포괄적인 인간의 문제에로 확장하도록 하는 언어에 의해 종래의 서정시에 새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평가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2146    고대 음유시인 - 호메로스 댓글:  조회:3604  추천:0  2020-03-09
인물세계사 호메로스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서사시를 지은 시인 [ Homeros ] 출생 - 사망 B.C. 800(?) ~ B.C. 750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고대 그리스의 작가이며, 서사시 와 의 저자이며, 일설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음유시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사실’이 아닌 ‘전설’이며, 그의 서사시만큼이나 오랜 세월 구전되어 온 이야기일 뿐이다. 호메로스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두 편의 서사시를 정말 그가 썼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는 호메로스라는 인물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호메로스에 관한 갖가지 전설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호메로스는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호메로스가 시각장애인으로 여겨진 까닭은 의 제8권에 등장해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데모도코스와 관련있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저자 호메로스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실제로 그 당시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기억력이 더욱 비상해진다고 생각했다. 그의 출신지 또한 정확하지 않아서, 이오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 일곱 군데가 저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임을 자처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와 에 나온 여러 지명들의 실제 위치를 두고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논의가 오간다.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이후 고전 문학사에서 ‘호메로스 문제’로 지칭되는 갖가지 질문과 답변을 낳았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논제는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냐 여러 사람이냐 여부에 집중된다. 일각에서는 양대 서사시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불일치를 지적하며 이것은 호메로스가 여러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그러면 또 일각에서는 이런저런 유사점을 지적하며 이것은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반박한다. 어느 고전학자의 지적처럼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감탄스러운 정도로 훌륭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하므로 서로 갑론을박 하는 와중에서 원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장점도 있었다. 호메로스에 대한 이해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양대 서사시가 문자로 정착되기 이전부터 구전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의 판소리 같은 경우에도 대본으로 정착되기 전에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시기가 있었고, 그 와중에 약간씩의 첨삭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양대 서사시의 저자 역시 그 이전의 수많은 서사시인들이 만들어 놓은 단편을 가져다가 하나의 일관적이고 커다란 직조물로 이어 붙였을 것이다. 이로써 호메로스가 여러 사람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힘을 잃었고, 양대 서사시의 창작자라기보다는 완성자, 또는 기록자인 한 사람의 호메로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대두했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답변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다만 대개는 전설의 주장처럼 “고대 그리스의 시각장애인 음유시인으로, 와 의 저자”가 있었다고 편의상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에 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류사에 남긴 가장 크고 또 가장 훌륭한 업적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 업적이란 바로 그의 양대 서사시를 말한다. 사상 최고의 서사시 와 호메로스와 길잡이 소년. 프랑스의 화가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의 1874년 작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서사시 와 는 서양 문학의 최초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기원전 8세기경에 구전으로 성립되고, 기원전 6세기경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므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수천 년 전의 작품이지만, 이 작품들이 지닌 감동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오래 되었다는 사실 하나에만 경탄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오래 된 작품이 그토록 짜임새 있는 구조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경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는 트로이와 그리스 간의 전쟁을 다룬 서사시다. 황금 사과에서 비롯된 세 여신의 불화와 ‘파리스의 선택’, 지상 최고의 미녀 헬레네의 납치와 도주로 시작돼‘트로이의 목마’로 끝난 이 전쟁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는 이 유명한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지는 않는다. 어느 고전학자는 어린 시절 번역본을 선물 받고 나서 그 책을 판매한 서점 주인이 사기를 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가 그 책에는 전혀 안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의 기원과 경과에 관한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시간 순서가 아니라 중간에 회고 방식으로 설명되며, 이것은 그리스 서사시의 특징인 동시에 그 영향을 받은 유럽 역대 서사시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대신 는 10년여에 달하는 트로이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이야기에 집중된다. 이 서사시의 실제 주인공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다. 서두에서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싸우고 나서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그리스 군은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 군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하며,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앞서의 맹세를 철회하고 전투에 복귀한 아킬레우스는 결국 헥토르를 죽여서 원수를 갚는다. 그 와중에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디오메네스, 헥토르, 아에네아스, 프리아모스 등 양편의 주요 영웅들의 용맹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전투를 감상하며 종종 여기저기 참견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는 흔히 의 속편으로 간주되지만, 역시 두 편의 내용이 곧바로 이어지진 않는다. 의 마지막 장면 이후,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아킬레우스는 ‘아킬레스 건’에 화살을 맞고 죽으며, 트로이는 ‘트로이의 목마’에 속아 무너진다. 승자들은 저마다 전리품을 잔뜩 챙겨 고향으로 향하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런저런 불운이 겹치며 10년 동안이나 더 바다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역시 처럼 이야기가 중간에서 시작되어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바다 요정 칼립소의 섬을 떠나 알키노스 왕의 궁전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모험을 회고하는 긴 이야기가 끝나면, 드디어 고향에 돌아간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집을 유린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아내와 재회하는 것으로 서사시는 마무리된다. 그 웅장함이며 긴박감에 있어서는 에 미치지 못하지만, 는 오랜 방랑 생활 동안 주인공이 맞닥트리는 갖가지 기이한 사건과 사물(대표적인 것이 감미로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오디세우스 일행을 가둬두고 한 명씩 잡아먹는 키클로페스(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파이아케스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를 구출해 준 나우시카 공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구혼자들을 속이기 위해 매일 베를 짜고 또 풀었던 페넬로페, 텔레마코스에게 부친을 찾아갈 방법을 조언하는 멘토르 등이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또 수많은 비유를 낳은 바 있다. 분량으로 따지면 쪽이 더 많지만, 내용의 풍부함으로 보면 가 단연 압권이다.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계속된다 미국의 저술가이며 독서 관련 에세이로 유명한 클리프턴 패디먼은 호메로스의 에 관한 글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우선 그는 100만 명의 병력과 6000여 척의 선박이 동원된, 20세기 중반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로 들면서, 그 작전의 최고지휘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읽어보아도 한 줌밖에 안 되는 청동기 시대 부족들 간의 전투를 기록한 만큼의 웅장함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건 결코 아이젠하워 장군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가 호메로스가 아니었을 뿐이다.” 패디먼의 이 말은 호메로스의 위대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탁월함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를 할 때에 더욱 두드러진다. 양대 서사시에는 수천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는 훌륭한 묘사가 수두룩하다. 가령 에는 분노의 창칼로 적을 도륙하는 영웅들의 무용담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의 불운도 묘사되어 있다. 창에 맞아 선지피를 내뿜으며 땅에 쓰러진 아무개의 아들 저무개가 고향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를 뒤로 하고 하데스(저승)로 떠났다는 참혹하고도 구구절절한 묘사 앞에서 독자는 새삼스레 전쟁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그런 면에서 는 사상 최초의 ‘전쟁문학’인 동시에 ‘반전문학’이기도 하다. 이처럼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에는 차마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상당히 ‘많은 것’이 들어 있다. 호메로스의 가장 우수한 후계자인 베르길리우스의 는 로마 시대인 1세기경에 나왔다. 에도 잠깐 등장했던 트로이의 영웅 아에네이스가 고향을 잃고 방랑하다가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훗날 로마의 시조가 된다는 일종의 건국신화를 담고 있는데, 전반부의 여섯 장은 의 모범을 따라 트로이에서 이탈리아까지의 여행을 설명하고, 후반부의 여섯 장은 의 모범을 따라 이탈리아의 토착 부족과 벌인 전쟁을 설명한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차이는 호메로스와 아이젠하워의 차이만큼이나 현격하다. 이 역시 베르길리우스가 못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호메로스가 너무나도 탁월한 것뿐이다. 호메로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시도는 현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1922)는 의 내용과 구조에 착안해서 20세기 더블린의 하루 사이 사건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며, 종종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추앙된다. 그런가 하면 199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데릭 월콧은 호메로스의 에스파냐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서사시 (1990)를 펴내 격찬을 받았다. 여기서는 아킬레우스, 헥토르, 헬레네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이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이며 월콧의 고국인 세인트루시아 토착민으로 묘사된다. 그 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의 제목과 내용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1984)의 주인공 소녀의 이름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가 없었으면 나올 수 없었으리라. 이것만 보아도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인명사전 호메로스     [ Homēros , Homer ] 국적 그리스 직업 서사시인 그리스의 서사시인(敍事詩人). 서구 문학의 조종(祖宗)이며 그리스 최대의 시성(詩聖)이다. 생애(生涯)에 관해서는 유명한 대서사시 《Ilias》와 《Odysseia》의 작자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일설에는 개인이 아니고 편력 시인(遍歴詩人)의 집단(集團)명, 또는 장님인 걸식(乞食) 시인이라고도 하고 또는 실재(實在)하지 않는 전설적(傳說的) 인물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크세로파네스ㆍ헤로도토스 등의 확실한 증거 및 근대의 역사학문, 고고학적(考古學的) 발견과 연구 및 언어학상(言語學上)의 조사 연구(調査研究)에 의하면 그는 실재(實在)의 인물로서 소아시아 이오니아 해변 스미르나의 출생으로, 태어난 연대는 B.C. 900~800년경이다. 그리하여 상기(上記) 2대 서사시가 그의 작품이라는 것이 타당(妥當)할 것이다. 장편 서사시 《일리아스》는 1만 5천 6백 93행(行)으로 제목이 《아킬레스의 저주하는 분노》로 되어 있음과 같이 트로이아 전쟁 중의 51일 간의 일어난 순정(純情)의 영웅 아킬레스를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기사(騎士)의 이야기다. 《오디세이아》는 1만 2천 1백 10행(行)으로 지혜로운 자로 유명한 이타카 섬의 오디세우스를 중심으로 한 트로이아 함락 후 10년 간의 이야기이다. 이 두 편은 완전한 예술적 구성으로, 당시 문화에 대한 지주적(支柱的) 존재였고, 후세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이름은 시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문예사적인 면에서 호메로스의 가치는 우선 스타일과 플롯의 완벽한 통일성과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와 모티브의 파악, 보편적인 견지에서 본 위대한 인물들의 개성화(個性化), 인생의 위엄과 쾌락과 비극을 그리면서 특히 죽음의 필연성도 묘사, 종교와 윤리를 훗날 서구 문명의 조류를 이룬 그리스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방대한 스케일을 건전한 모랄에 의해 하나의 세계관을 이룩하는 데 영원성이 있다고 하겠다. 《Ilias》와 《Odysseia》는 각각 24권으로 그리스 알파벳 순으로 나누어져 있다. 작품   [장편서사시] 일리아스 24권(Ilias) 오디세이아 24권(Odysseia) 참고자료   네이버캐스트: 호메로스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호메로스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호메로스 [Homēros, Homer] (인명사전, 인명사전편찬위원회)  
2145    프랑스 시인 - 폴 엘뤼아르 댓글:  조회:3504  추천:0  2020-03-01
두산백과 폴 엘뤼아르     요약 다다이즘 운동에 끼어들고, 이윽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약한 프랑스 시인.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 라고 한결같이 생각했다. 유명한 시 《자유》가 수록된 《시와 진실》,《독일군의 주둔지에서》는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졌다. 원어명 Paul Éluard 출생-사망 1895.12.14 ~ 1952.11.18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생드니 주요저서 《고통의 도시》(1926) 파리 교외의 생드니 출생. 젊었을 때 폐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1∼1913년 스위스에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제l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선에 종군하였으며, 그 경험에서 얻어진 평화주의적 사상이 최초의 시집 《의무와 불안 Le Devoir et l'Inquiétude》(1917)에 짙게 나타난다. 그후 J.폴랑, A.브르통, L.아라공, P.수포 등과 알게 되어 다다이즘 운동에 끼어들고, 이윽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에는 초현실주의의 원리가 된 꿈과 무의식의 세계나 자동기술법 등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물론 브르통과 공저(共著)로 《무원죄수태(無原罪受胎) L'Immaculée Conception》(1930)를 내어 정신착란이 펼쳐 보이는 새로운 시세계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걸작의 하나인 《고통의 도시 Capitale de la douleur》(1926)는 초현실주의자다운 언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우애를 시의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다. 이러한 경향은 1936년의 스페인 전쟁을 계기로 더욱 짙어지고, 이 때부터 그의 시는 사랑과 자유라는 두 가지 주제로 일관되었다. 시는 이미 신비로운 꿈을 통해서 밝고 조화된 세계를 계시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사랑으로 한몸이 되어 자유와 평화를 향해 굳세게 전진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날이 갈수록 투명하고 서정적이며 서민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1942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그의 시는 좌우익을 불문하고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시가 되었다. 또한 초현실주의로부터 출발한 모든 시인들 중에서 후대의 시인들에게 그만큼 큰 영향을 준 사람도 드물다. 그것은 '시는 실천적인 진실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로트레아몽의 말을 자신의 모토로 삼고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한결같이 생각해 온 그의 투철한 사명감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그 유명한 시 《자유》가 수록된 《시와 진실 Poésie et Vérité》(1942), 《독일군의 주둔지에서 Au rendez-vous allemand》(1944)는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졌으며, 전후에도 《교훈 Une leçon morale》(1949), 《불사조 Le Phénix》(1952)를 비롯한 많은 시집을 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폴 엘뤼아르 (두산백과)  
2144    한국 시인, 생명운동가 - 김지하 댓글:  조회:3292  추천:0  2020-01-23
두산백과 김지하   [ 金芝河 ] 요약 시인이자 생명운동가.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이다.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 등을 받았다. 출생-사망 1941.2.4 ~ 본명 영일 별칭 필명 형(灐), 반체제 저항시인 국적 한국 활동분야 문학(시) 출생지 전남 목포 주요수상 로터스상(1975), 세계시인대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1981), 정지용문학상(2002) 주요저서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별밭을 우러르며》 《이 가문 날의 비구름》, 산문집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옹치격》 《동학이야기》 《생명》 《대설, 남》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본명은 영일(英一)이며, 지하(芝河)는 필명으로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을 안고 있다. 1941년 2월 4일 전라남도 목포의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원주중학교 재학 중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池學淳) 주교와 인연을 맺은 뒤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가한 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학생 대표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수배를 피해 항만의 인부나 광부 등으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63년 3월 《목포문학》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저녁 이야기〉가 처음으로 활자화되었고, 같은 달 2년 동안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복학해 이듬해부터 전투적인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64년 6월 '서울대학교 6·3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4개월의 수감 끝에 풀려난 뒤, 1966년 8월 7년 6개월 만에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번역과 학생 연극에 참여하는 한편, 1969년 11월 시 전문지 《시인》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저항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담시 〈오적〉을 발표하면서 단숨에 박정희 군사 독재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 〈오적〉으로 인해 《사상계》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의 발행인·편집인이 연행되었고, 《사상계》는 정간되었다. 김지하는 이때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으나 국내외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희곡 《나폴레옹 꼬냑》, 김수영(金洙暎) 추도시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였고, 1970년 12월 첫시집 《황토》를 발간하였다. 1971년 이후에는 천주교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계속 저항시 발표 및 저항운동에 전념하면서 연행과 석방, 도피 생활을 거듭하던 중 1974년 4월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0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4년 사면 복권되고 저작들도 해금되면서 1970년대 저작들이 다시 간행되었고, 이 무렵을 전후해 최제우(崔濟愚)·최시형(崔時亨)·강일순(姜一淳) 등의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변혁운동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시집으로 《애린》 《검은 산 하얀 방》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담은 장시집 《이 가문 날에 비구름》,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 등이 있다. 1990년대에는 1970년대의 활기에 찬 저항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축약과 절제, 관조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일산 시첩》이 대표적인 예이다. 1992년 그 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하였고, 1994년 《대설, 남》과 시집 《중심의 괴로움》을 간행한 뒤, 1998년에는 율려학회를 발족해 율려사상과 신인간운동을 주창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민족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사면과 석방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로, 복역 중이던 1975년에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고, 1981년에 세계시인대회로부터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위의 저서 외에 시집으로 《꽃과 그늘》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생명》 《율려란 무엇인가》 《예감에 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지하 [金芝河] (두산백과) ================================/// 시인 김지하에 대해       김지하(金芝河, 본명 김영일(金英一), 1941년 2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박경리의 사위이다.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으며, 종교는 본래 개신교였으나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1964년 한일정상회담 반대 시위에 가담하여 구속되었다.   1970년 부패된 정권을 비판한 〈오적(五賊)〉이라는 시를 써서 《사상계》 5월호에 실었는데, 이것이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실리면서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0일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7월 9일 결심 공판에서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 위반, 그리고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받았다가 석방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오적 새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등이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의 석좌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1941년 전남 목포(木浦) 출생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8년여 투옥 생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 1969년 「황톳길」 등 시 5편을 『시인 詩人』지에 발표 1970년 5월, 담시 『오적(五賊)』 필화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받음, 7월 무기징역 감형 1975년 2월 출옥후 옥중기 「고행―1974」 발표, 재차 투옥됨 1975년 특별상 수상, 노벨문학상 후보 추대됨 1981년 과 수상 1999년 율려학회 창립     김지하 본인이 말하는 필명이 만들어진 사연             5. 16 군사 쿠데타 뒤니까, 아마도 스물두 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에서 곧 나의 시화전(詩畵展)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그때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을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 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筆名)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가지고 거기서 나와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비틀거리며 종로길을 갈지 자로 걸어오던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그 글자만은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검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맣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 저기도 ‘지하’ 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김지하의 작품             첫 시집 『황토(黃土)』(1970) 이후,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1982), 『검은 산 하얀 방』(1986), 『애린』(1986),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6), 『별밭을 우러르며』(1989), 담시집 『오적』(1993), 『중심의 괴로움』(1994) 등의 시집이 있다. 이밖에도 대설(大說) 『南』(전5권, 1994년 완간)을 비롯해, 산문집 『나의 어머니』(1988), 『밥』(1984),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84), 『남녘땅 뱃노래』(1985), 『살림』(1987), 장시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1991), 대담집 『생명과 자치』(1994),『사상기행』(전2권, 1999), 『예감에 가득찬 숲그늘』(1999), 강연 모음집 『율려란 무엇인가』(1999) 등의 다수의 저서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루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2143    한국 최초 시집... 댓글:  조회:3619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시집 단행본으로 나온 첫 창작시집, 김억 「해파리의 노래」   요약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은 1921년 안서 김억이 펴낸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우리나라 첫 단행본 창작시집은 1923년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 판형은 사륙판, 총 162면에 83편의 창작시가 수록됨. 3·1운동 이후, 이민족에게 짓밟히는 조국에서 김억은 시집을 통해 좌절과 허무의 분위기를 토해냄.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해파리의 노래"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해파리의 노래 우리 나라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은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펴낸 「오뇌의 무도」다. 1921년의 일이었다. 다음으로 나온 시집은 「기탄자리」. 이 역시 안서가 펴낸 것이다. 이 시집들은 모두 번역시를 수록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뇌의 무도」는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이자 번역시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인으로 자신이 창작한 시를 맨 먼저 시집으로 엮어 발표한 사람은 누구일까? 또 그 시집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는 역시 안서 김억을 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의 시집은 「해파리의 노래」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은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사륙판 총 162면에 83편의 창작시를 수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첫 창작시집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이미 출간된 시집은 번역시집 두 종류뿐이었고, 창작시집도, 번역시집도 모두 안서의 이름으로 발간된 것이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한국 근대시 형성에 김억이 끼친 영향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억은 1893년생으로 평북 정주 출신이다. 같은 고향 출신인 김소월을 문단에 소개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는 의 동인으로 있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처음으로 소개한 일은 유명하다. 「해파리의 노래」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192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종합잡지 월간 을 통해 발표한 것들이었다. 이전의 시들은 시집 맨 뒤에 '부록'이라 하여 실어놓았다. 30대 초반인데 1년 남짓한 시간에 한 권 분량의 시를 썼다는 것은 대단한 창작의욕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활동했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그런 창작의욕은 그자체로 뭔가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4년. 조국은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을 때였다. 감수성 예민한 한 지식인이 그런 시절에 토해낸 시구는 좌절과 허무, 실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런 분위기는 시인 자신이 직접 쓴 이 시집의 권두언에서부터 나타난다. "같은 동무가 다같이 생의 환락에 도취되는 4월의 초순 때가 되면은 뼈도 없는 고깃덩이밖에 안 되는 내 몸에도 즐거움은 와서 한 끝도 없는 넓은 바다 위에 떠돌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나의 이 몸은 물결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하염없이 떴다 잠겼다 할 뿐입니다. 볶이는 가슴의, 내 맘의 설움과 기쁨을 같은 동무들과 함께 노래하려면 나면서부터 말도 모르고 리듬도 없는 이 몸은 가이없게도 내 몸을 내가 비틀며 한갓 떴다 잠겼다 하며 볶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내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내 노래는 섧고도 곱습니다." 당시의 철자로는 '다같이'가 '다갓치', '하염없이'가 '하욤업시'로 되어 있다. 권두언을 보면 시인이 시집의 제목을 왜 「해파리의 노래」라고 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그것은 곧 좌절의 시대를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 시인의 노래인 것이다. 시집에서 무심코 한 편을 읽어보아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피리'라는 작품이다. "빈 들을 휩쓸어 돌으며 / 때도 아닌 낙엽을 재촉하는 / 부는 바람에 쫓기어 / 내 청춘은 내 희망을 버리고 갔어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위에 / 소리도 없이 달이 오를 때 / 이러한 때에 나는 고요히 혼자서 / 옛 곡조의 피리를 불고 있노라." 안서는 국내에 에스페란토 어를 처음 소개하고 연구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에 에스페란토 지상 강의실을 열어 보급하는 한편 번역에도 인용했다. 그가 번역시를 쓸 때 참고했다는 외국어 중에는 '세계어·영어·일어·불어' 등이 있었는데, 이중 세계어가 바로 에스페란토 어였다. 한국 시의 발전적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던 첫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 그 시인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아직도 인명사전의 생몰년에는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은 채로 있다. 관련이미지 5                               이미지 이전 해파리의 노래 / 김억1923년 간행한 김억의 시집. 시집의 속표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최초 시집 - 단행본으로 나온 첫 창작시집, 김억 「해파리의 노래」 (한국 최초 101장면)  
2142    조선 후기 시인 - 김택영 댓글:  조회:3473  추천:0  2019-12-06
한국문학 김택영   [ 金澤榮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인.국내의 문인으로는 시에서는 신위(申緯), 산문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는 바, 신위와 박지원이 시와 산문 분야에서 각기 조선 제1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데는 김택영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신위시집≫과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抄≫등을 편찬하여 한국 한문학의 진수를 중국에 알리는데 공헌하였으며, 지기인 이건창과 황현의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망국의 한을 노래한 다수의 시편을 남겼다. 김택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고려 유민(遺民)의식이다. 이는 조선 5백년 동안 외면 당해온 개성인의 의식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출생 - 사망 1850년 ~ 1927년 이명 자 : 우림(于霖) 호 : 창강(滄江) 이칭 : 소호당(韶濩堂) 본관 화개(花開) 시대 철종1 가족관계 아버지 : 김익복(金益福)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韶濩堂). 개성 출신으로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익복(益福)의 둘 째 아들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장에서 이름을 떨쳤고 17세에 성균초시(城均初試)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개성인을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과 무반 가계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20대 초반에 서울에 와서 이건창(李建昌)과 교유하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황현(黃玹)과 더불어 신헌(申櫶)의 아들인 신정희(申正熙)의 식객 노릇을 하며 지냈다. 1883년 김윤식(金允植)의 소개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인 장건(張騫)을 알게 되었는데 장건은 뒷날 김택영의 중국 망명을 주선하게 된다. 1891년 여론의 압력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가문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그 뒤 갑오경장으로 벼슬길이 열려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1903년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으로 임명되어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5년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장건의 주선으로 남통(南通)에 있는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하였다. 김택영은 시와 문이 모두 대가의 반열에 드는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중국에 망명한 뒤에도 국내의 문단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한문학 분야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망명지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한문학을 중국에 소개하는데 진력하는 한편 그와 교유한 남방의 문인들로부터 양계초(梁啓超)에 필적하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김택영은 청나라의 시인 왕사정(王士禎)에게 깊이 경도하여 그의 신운설(神韻設)을 자신의 문학론으로 소화하여 시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또한 산문에서는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을 모범으로 삼고 자신의 독자적 문체를 개발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국내의 문인으로는 시에서는 신위(申緯), 산문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는 바, 신위와 박지원이 시와 산문 분야에서 각기 조선 제1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데는 김택영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신위시집≫과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抄≫등을 편찬하여 한국 한문학의 진수를 중국에 알리는데 공헌하였으며, 지기인 이건창과 황현의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망국의 한을 노래한 다수의 시편을 남겼다. 김택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고려 유민(遺民)의식이다. 이는 조선 5백년 동안 외면 당해온 개성인의 의식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택영은 중국인들에게 한국 역사를 소개할 목적으로 ≪한사경 韓史綮≫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이성계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여 국내에서 많은 물의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개성 출신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숭양기구전 崧陽耆舊傳≫을 집필한 것도 이 고려 유민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한국소사 韓國小史≫, ≪한사경 韓史綮≫, ≪교정삼국사기 校正三國史記≫가 있고 시문집으로는 ≪창강고 滄江稿≫와 ≪소호당집 韶濩堂集≫이 있다. 경력사항 성균초시(城均初試)에 합격 1891년 ~ 진사시에 급제 1894년 ~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1903년 ~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으로 임명되어 통정대부에 오름 1905년 ~ 학부 편집위원 작품목록 숭양기구전 여한십가문초 오호부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김택영(1850-1927)1850(철종 1)-1927. 조선 말기의 학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김택영 [金澤榮] (네이버고전문학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택영   [ 金澤榮 ] 1850(철종 1)-1927. 조선 말기의 학자. 이칭별칭 자 우림(于霖), 호 창강(滄江)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50년(철종 1) ~ 1927년 성격 학자, 시인 출신지 개성 성별 남 본관 화개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조선후기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창강고(滄江稿)』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는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김익복(金益福)이고,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소년시절부터 고문과 한시를 공부해서 1866년(고종 3) 17세의 나이로 성균초시(成均初試)에 합격했다. 20대 전후에 이건창(李建昌)과 교유를 가지면서 문명(文名)을 얻기 시작했다. 34세인 1883년(고종 20) 김윤식(金允植)의 추천으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첸[張騫]과 알게 되었다. 장첸은 그의 시문을 격찬했다. 1891년(고종 28)에 42세로 진사가 되고, 1894년(고종 31)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고종 32) 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지내고 이듬해 낙향했다. 1903(광무 7)년 다시 홍문관 찬집소(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속찬위원(續撰委員)으로 있으면서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5년(광무 9)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이 해 겨울에 사직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5년(광무 9)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양쯔강[揚子江] 하류 난퉁[南通]에서 장첸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창작활동과 병행해서 한문학에 대한 정리·평가와 역사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승만(李承晩) 등과 관계가 있어 중화민국정부에 우리나라 독립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썼다.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장핑린[章炳麟]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김택영은 한문학사의 종막을 장식하는 대가로서 시에서의 황현(黃玹)과 문(文)에서의 이건창과 병칭된다. 그는 고문가(古文家)로서 문장일도(文章一道)를 주장하였으며,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이것이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화려하여 신운(神韻)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중국 망명 이후에는 주로 우국적인 시작품을 많이 썼다. 특히, 망국의 한을 작품 속에 담아 내어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 하였다. 「오호부(嗚呼賦)」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문은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과 박지원(朴趾源)의 문장을 좋아하여 웅혼한 기상이 있다. 저서로는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창강고(滄江稿)』와 『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김택영전 연구」(이상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창강 김택영론」(오윤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영재 이건창과 창강 김택영의 고문관」(김도련,『한국학논총』3, 국민대학교, 1980) 「개화기의 한문학」(민병수,『국어국문학』68·69, 1975) 「근한한문학에 대한 일고찰」(권오돈,『인문과학』5, 1960)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한사경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詩有聲先而意隨者。如明月松間照。若就明字。易以皎字或寒字。可能有天然之意乎。亦有意先而聲隨者。如愁思看春不當春。若將一春字。作椿字讀。則雖利口。必不能諧律矣。 시에는 먼저 소리가 있고 뜻이 따라가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명월송간조(밝은 달이 소나무 사이를 비춘다)”에서 明자를 皎나 寒으로 바꾼다면 천연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마는 그것은 또한 뜻이 먼저요 소리가 따르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추사간춘부당춘(시름겨운 생각에 봄을 보아도 봄인 것 같지 않다)”에서 만약 春 한 글자를 가져다가 椿으로 하여 읽으면 비록 발음에는 이롭겠지만 반드시 음률에는 맞지 않는다.   吾邦盖在上古之世。只有方言而無文字。其有文字自箕子始。則吾邦字音。卽箕子之所授也。而今其字音。與中國大異而小同者何。吾嘗思之。盖始同而後變耳。安徽王饒生聞余讀書曰。某字某字。是中國之古音。夫中音有古今之變。則東音何獨不然。故今之不同者。卽互失其本音故也。惟吾邦入聲字音。似與中國絶異。然徐而尋之。特其音太猛而已。亦未甞絶異也。 우리나라는 대개 상고때에 단지 방언만 있고 문자는 없었다. 문자가 있게 된 것은 기자로부터 시작하니 우리나라 글자의 음은 기자에게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글자의 음이 중국과 매우 다르고 같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생각해 보니 대개 처음에는 같다가 나중에 변했을 뿐이다. 안휘의 왕요생이 내가 글 읽는 것을 듣더니 말하기를 “무슨 무슨 글자는 중국의 고음입니다.”하였다. 무릇 중국의 음이 고금의 변화가 있었으니 우리나라 음이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는가? 서로 그 본음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오직 우리나라의 입성 글자의 음은 중국과 완전히 다르지만, 천천히 찾아보면 특별히 그 음이 매우 사나울 뿐이지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2141    토속적, 향토적, 민족적 시인 - 백석 댓글:  조회:5371  추천:0  2019-11-18
      나는 문학이다 백석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 白石 ] 출생 - 사망 1912년 ~ 1996년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목차 잊혀진 민족시인 토속성과 모더니티 잊혀진 민족시인 국토 분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앗아간다. 분단이야말로 한반도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상처이며, 비극의 원체험이다. 온갖 상실과 망각, 이산의 고통으로 덧나고, 다시 아물고, 덧난 상처의 자리다. 남북 분단은 대륙으로 나가는 길을 끊어놓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의 삶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협소하고 남루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부여·발해·여진과 같은 나라 이름이며, 흥안령·아무르·송화강 같은 땅과 강 이름…… 이런 것은 모두 저 바깥에 있다. 대륙과 단절된 반도는 말 그대로 밖으로 열린 길이 끊긴 섬이다. 나는 그 섬에서 잊힌 한 시인의 이름을 떠올린다. 백석(白石)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었다. 본명이 기행(夔行)인 백석은 오산고보를 다니는데, 학과목 중에서 특히 문학과 영어에 관심과 소질을 보인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오고서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그러다가 1929년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 사범학과에 들어간다.  1930년 그는 열아홉 나이로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되는데, 이 등단작은 시가 아니라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단편소설이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백석은 귀국하고 바로 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비롯해 번역 산문 「임종 체홉의 6월」,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 1935년 에 단편 「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한다. 백석의 초기 단편들은 노쇠한 부부, 죽음 등 삶의 어두운 부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부문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런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다. 백석이 구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보다 감정을 웬만큼 은폐할 수 있는 시로 전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창작 이외의 문단 활동은 일절 꺼린다거나, 집에 돌아와서는 병균을 염려해 늘 손과 얼굴을 씻는1) 그의 유난스런 폐쇄성이며 결벽증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는 뜻이다. 그는 1935년 《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산지」, 「주막」, 「나와 지렝이」, 「비」, 「여우 난 곬족(族)」, 「흰 밤」 등을 발표한다. 백석이 1936년 조광인쇄주식회사를 통해 펴낸 첫 시집 『사슴』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시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사슴』은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발간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1937년 겨울, 백석은 두 해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함경도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이 밖에도 같은 해 백석은 와 《조광》, 《시와 소설》에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 「황일(黃日)」 등을, 1937년 《조광》에 「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탸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1938. 3.) 백석은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서 「함주시초」를 비롯한 여러 시편을 쓰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 허전한 느낌이 든다. 두 해 전에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잠깐 본 이화여고 학생 ‘란(蘭)’, 지난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 만난 ‘자야(子夜)’, 그리고 영생고보 학내 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 지나간다. 1938년 백석은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이 무렵 백석은 동료 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찾게 된다. 란을 보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혈관은 펄떡거린다. 백석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통영 출신의 처녀 란에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랑 고백은 차치하고 재입사한 지 열 달 만에 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린다. 그는 떠나면서 친구들인 소설가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 오리라.”고 말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 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그만둘 때까지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이런 일로 북만주 두메산골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려고 시작에 몰입한다.  1939년 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백석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뒷날 백석의 명편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을 실은 잡지 《학풍(學風)》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고 백석을 극찬한다.2) 같은 해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사》에서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강화되면서 백석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산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3)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 없이 떠도는”것이다.4)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시집』에 싣는다. 해방 뒤 귀국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가서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는다. 북한에서 「뿌슈킨 선집 - 시편」을 번역하기도 하고, 꾸준히 시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하는 백석은 199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토속성과 모더니티 이 시기 ‘구인회’를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서구적 취향과 달리 백석은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면서도 또 다른 향토 시인 김소월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 속에 북녘 지방의 토속 방언들을 꽉꽉 채워 넣는다. 마가리, 개니빠디, 잠풍, 몽둥발이, 벌배, 열배, 매감탕, 토방돌, 아릇간, 홍게등, 텅납새, 무이징게국, 가즈랑집, 깽제미,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 광살구, 모랭이, 노나리꾼, 청밀, 냅일눈, 곱새담, 앙궁, 고뿔, 갑피기, 게사니, 울파주, 나주볕, 땃불, 밭최뚝, 마토ㅌ, 양지귀…… 고조곤히, 지중지중, 쇠리쇠리하야, 씨굴씨굴, 째듯하니, 자즈러붙어, 벅작궁, 고아내고, 너들씨는데, 오구작작, 살틀하던, 임내내는, 이즈막하야, 깨웃듬이, 홰즛하니…… 이처럼 이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힘든 북방 언어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 세계는 한국인의 얼과 넋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낸다. 백석은 이미 표준어가 정착한 시기에 창작 활동을 한 문학인이다. 신문사의 편집 일을 맡기도 한 그는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잘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굳이 방언을 고집한 것은 작품 세계의 심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가 구사한 방언은 용례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한국어의 질량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백석 시의 방언 구사는 아이의 시각과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베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며 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곬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으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 // 이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인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래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을 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 난 곬족」 전문, 《조광》(1935. 12.)- 시집 『사슴』(1936)에 재수록 이 시의 화자는 명절날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할머니 집에 가서 지낸 경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래의 아이들과 놀다가 잠이 드는 광경, 명절날의 분위기와 풍속 등에서 유년의 태도와 시각과 목소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방언은 고향의 언어이고 유년 시절에 습득한 언어다. 따라서 방언으로 표출되는 고향 마을의 풍물과 정취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며, 유년의 목소리에 실린 방언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감을 준다. 백석의 시 속에 나오는 평안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어느 한구석에서 쓰이던 토속어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꿈결인 듯 이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시인의 노래는 때로 영어나 불어 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보다 귀에 익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그는 몇 작품을 제외한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는 극도의 절제를 발휘한다. 바로 이런 것이 백석을 모더니즘적 시인으로 불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별하게 하는 원인이다. 반도시(反都市), 산촌(山村) 성격은 백석의 시를 더욱 독특하게 보이도록 한다. 시집 『사슴』에는 총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도시 문명 또는 도시 감각에 바탕을 둔 시는 한 편도 없다. 흔히 백석 시에 나오는 시골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안온하고 풍요로운 전원으로 비친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삭이려는 시인의 힘겨운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백석 시의 시적 공간은 현실에서 유년 시절 시골의 농가나 토방으로, 그리고 할머니와 무당의 옛날이야기에 실려 동화나 전설, 때로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주술적 공간으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동경이나 몽상 또는 신비 세계에 대한 집착은 현실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일어나곤 하는 현상이다. 백석의 시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의 고통과 번민을 초월하려는, 시인 나름의 진지한 모색이라는 점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이처럼 절제된 감정으로 토속성과 개성 있는 모더니티를 추구한 백석은 1940년 만주에 있을 때 이역에서 사는 비겁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독감이 너무도 절실해 감정을 더 감출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무렵에 쓰인 백석의 시에서 우리는 바로 얼마 전까지 토방에 앉아 신화를 꿈꾸던 아이 대신 갑작스레 늙어버린 시인과 마주치게 된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遙)를 금(金)을 /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 …… // 나는 그때 /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백석, 「북방에서」 부분, 《문장》(1940. 7.) 이처럼 ‘북방에서’ 나라를 버린 수치심과 고독에 떨던 시인은 절망스럽고 슬픈 현실을 거부하기보다 차츰 하늘이 정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껴안는 자기긍정에 도달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게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문장》(1940. 4.)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백석 이미지 갤러리 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백석 [白石] -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나는 문학이다)     ////////////////////////////////////////////////////////////////////////////=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언어영역 백석     교과단원 국어(상), Ⅵ. 노래의 아름다움, Ⅵ-심화 여승 목차 1. 교과서 속 주개념 백석의 생애 2. 확장 개념 백석의 작품 세계 3. 관련 지식 근대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4. 관련 작품 여우난곬족 1. 교과서 속 주개념 백석의 생애 백석(白石 ; 1912∼?)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백기행이지만 아호였던 백석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그 후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 여성사, 왕문사 등에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후 조선일보 후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에서 공부하게 된다. 조선일보사와 계열사인 〈여성〉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단편 소설 〈마을의 유화〉와 〈닭을 채인 이야기〉, 수필 〈이설 귀고리〉를 발표하였다. 이 밖에 〈임종 체흡의 6월〉이라는 서간문을 번역 소개하거나, 〈죠이스와 애란문학〉이라는 티 에스 마르키스의 논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 후 1935년 첫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6년 1월 33편의 시로 이루어진 시집 〈사슴〉을 출간하였다. 이때부터 1940년까지의 기간 동안 활발히 활동하며 집중적으로 시를 지었다. 시집을 낸 직후 함흥의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부임했다가, 곧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다.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일하기도 하고, 북만주 산간 오지를 여행하며 측량보조원, 소작인, 세관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해방 후에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그 후 계속 북한에 남아있었으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2. 확장 개념 백석의 작품 세계 백석은 당대의 어떤 문단이나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편안하고 일상적인 언어와 평북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는 백석의 시는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체험을 조직하는 데 있어 매우 탁월하고 모더니즘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초기 백석의 시에서 두드러지는데 고향의 풍물과 민속,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묘사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 매우 객관적으로 절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시집 〈사슴〉을 발표한 이후에는 묘사 이외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담하게 직접 표현하는 방식으로 시가 변화하게 된다. 백석은 38년 이후의 시에서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시작 태도를 보이면서, 공간성보다도 시간성과 역사성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 땅의 역사에서도, 시인 개인으로서도 힘들었던 이 시기에 백석의 시는 원초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역사성과 깊은 인식을 보여준다. 백석은 앞서 말했듯이 고향의 자연과 풍속,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이 소재들은 단순히 하나의 풍물을 제시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고향의 삶과 역사에 깊이 관련을 맺는 것들이었다. 백석의 시에서 고향은 〈모닥불〉에서 보이듯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정겹게 하나 되는 곳으로, 〈여우난곬족〉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자연, 귀신과 사람까지도 화해롭게 공존하는 제의적이고 풍요로운 공동체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주인공은 고향과 공동체의 품에 안겨 있지만, 현실의 자신은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 속에서 따뜻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마음과 이와 상반되는 현실의 상황이 백석 시에 의미와 생명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3. 관련 지식 근대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근대시에 나타나는 고향은 대체로 ‘잃어버린 곳’ 또는 ‘떠나온 곳’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고향에 대한 상실과 그리움, 이와 대비되는 처참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고향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정지용과 백석의 시에서 이러한 고향의 이미지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세계를 재현시키고자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오장환이나 이용악의 시에서는 실향 의식을 주제로 하여 유랑민의 비애와 고독의 정서가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윤동주는 이러한 실향 의식을 자아의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 심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4. 관련 작품 여우난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던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가 나고 끼니 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 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발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 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 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 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가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난곬족〉은 백석이 1935년 12월 잡지 [조광]에 발표한 작품이다. 명절날 ‘여우난골’에 있는 큰집으로 간 시적화자의 눈에 담긴 친척들의 모습, 명절 음식상에 오른 다양한 전통음식들,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게 즐기던 놀이 등이 토속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언어와 표현을 통해 질박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1930년대 당대에도 낯설었던 다양한 방언을 구사하여 토속적 세계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별자국이 솜솜 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등의 표현들에서는 다양한 감각을 살려 다채로운 이미지를 선사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인이었던 백석의 시적 경향을 잘 느낄 수 있는 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석   [ 白石 ]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백기행(白夔行) 유형 인물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출생 - 사망 1912년 7월 1일 ~ 1996년 성격 시인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성별 남 관련사건 문학예술총동맹, 조선작가대회, 아동문학논쟁 저서(작품) 사슴, 집게네 네 형제 대표관직(경력) 조선일보 기자, 함흥 영생고보 교사,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해방 이후 「집게네 네 형제」·「석양」·「고향」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일 때 조만식, 홍명희가 교장으로 부임한 적이 있고, 6년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즐겨 읽었고,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하였고, 허준, 신현중 등과 자주 어울렸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8월 30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주막」, 「여우난골족」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6년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해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함흥에서 소설가 한설야, 시인 김동명을 만났고,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야」, 「통영」, 「남행시초(연작)」 등을 발표하였다. 1937년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 등과 자주 어울렸으며, 「함주시초」, 「바다」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함경도 성천강 상류 산간지역을 여행하였고, 함흥의 교원직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산중음(연작)」, 「석양」, 「고향」, 「절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물닭의 소리(연작)」 등 22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9년 자야와 동거하면서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경(神京, 지금의 장춘(長春))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만에 그만두었다. 6월부터 만주 체험이 담긴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0월 중순 자신이 번역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보러 경성에 다녀갔다. 「목구」,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허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41년 「귀농」,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발표하였다. 1942년 만주의 안둥[安東] 세관에서 일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0월에 조만식을 따라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 등과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참석해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허준이 백석이 해방 전에 쓴 시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말부터 1948년 가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실었다. 1948년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하였다. 남쪽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였다. 1949년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1953년 전국작가예술가대회 이후 외국문학 분과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번역에 집중하였다. 1956년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 「집게네 네 형제」를 발표하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나의 항의, 나의 제의」 등의 산문을 발표하였다. 10월에 열린 제2차 조선작가대회 이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정현웅의 삽화를 넣어 간행하였고, 동시 「멧돼지」, 「강가루」, 「기린」, 「산양」을 발표한 뒤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6월에 「큰 문제, 작은 고찰」과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면서 아동문학 논쟁이 본격화되었고, 9월 아동문학토론회에서 자아비판을 하였다. 1958년 시 「제3인공위성」을 발표하였고, 9월의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문학적 활동이 대부분 중단되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았다.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면서 농촌 체험을 담은 시 「이른 봄」, 「공무여인숙」, 「갓나물」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0년 1월 평양의 『문학신문』 주최 ‘현지 파견 작가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시 「눈」, 「전별」 등과 동시 「오리들이 운다」, 「앞산 꿩, 뒷산 꿩」 등을 발표하였다. 1961년 「탑이 서는 거리」, 「손벽을 침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2년 시 「조국의 바다여」, 「나루터」 등을 마지막으로 발표하였다. 10월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활동을 일절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하였다. 백석은 소월과 만해, 지용이 다져놓은 현대시의 기틀 위에서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움으로써 한국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시인이다.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 또한 우리말의 구문이 품고 있는 의미 자질을 적절히 활용하여 경험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하였다. 백석의 시는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정제된 운율이 있는 전통적인 서정시 형식 대신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지향적인 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 ‘이야기 구조’는 서사양식처럼 사건의 서사적 진행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장면 묘사와 서술에 의미의 중심이 놓여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주 짤막한 형태로 이루어진 시들은 대상의 미감을 가장 압축된 형태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또한 시각 외에 청각과 후각, 촉각, 미각 등 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표현해냈다. 구체적인 생활 현장에서 벌어지는 삶의 면면들을 그려낸 시들은 풍속을 시로 재현해냄으로써 풍속사적인 의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백석의 시 중에서 1인칭 화자의 주관적 독백을 표출하는 전형적인 서정시들은 특별한 수사나 기교 없이 평명한 언어로써 차분하게 내면을 성찰하고 있다. 참고문헌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 『백석시전집』(송준 편, 학영사, 2004) 『(증보판) 백석 전집』(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2003) 『백석시전집』(이동순 편, 창작과비평사, 1987) 『다시 읽는 백석 시』(현대시비평연구회 편저, 소명출판, 2014) 『백석평전』(안도현, 다산책방, 2014)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白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향(故鄕)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북관 : 함경남도 - 관공 :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     『 삼천리 문학』 2호, 1938년 4월 발표           작품 해설   ▶ 성격 : 서정적, 서사적 ▶ 심상 : 감각(시각, 촉각)적 심상 ▶ 어조 : 친근하고 다정다감한 어조 ▶ 구성       제1연 : 의원을 만나봄       제2연 : 의원이 고향을 물어봄       제3연 : 아무개 씨와 막역지간이라는 의원       제4연 : 아버지의 친구인 의원       제5연 : 의원의 손길에서 느끼는 육친과 고향에의 그리움 ▶ 주제 : 육친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鄕愁)       이 시는  백석 특유의 고향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백석의 시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원초적인 고향 개념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토속적 사투리와 현대적 가족 제도, 풍물의 세계는 단순한 풍물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이 개입된 풍물로, 그는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 정서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일제 치하에서 더욱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항상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침잠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시인의 현실적 세계와 대립됨으로써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이 시가 환기시키는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정이다. 에서는 고향을 무대로 그 곳에서 벌어지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모습을 서사적 구조를 통해 고향 정서를 보여 준 데 반해, 이 시는 인물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전 17행의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타향인 '북관'에서 병을 앓아 '의원'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 단락인 1·2행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으로, 외로운 타향살이를 하는 화자가 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해진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 둘째 단락은 3·4행으로 화자가 의원을 찾아가 첫 대면한 '의원'의 풍모와 인상을 시각적 묘사로 표출하고 있다. 5행부터 15행까지의 셋째 단락은 '의원'이 화자인 '나'를 진맥하는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서술은 화자의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채,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표정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의원'과의 극적이고 생생한 대화를 통해 전개시키고 있다. 넷째 단락은 16·17행으로 화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 주는 독백 부분이다. '의원'에게서 부드럽고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된 화자가 마침내 그에게서 고향과 아버지를 느끼게 되었다는 감정의 토로는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는 평범한 서술로 나타나 있다. 화자의 이 같은 직접적인 감정 토로는 특별한 시적 수사 없이도 절실한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것은 셋째 단락에서 화자를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그러한 정서가 충분히 환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녯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출전 (1941.4)        시어ㆍ시구 풀이  김치가재미-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양지귀-햇살 바른 가장자리 은댕이-가장자리 예대가리밭-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분틀-국수 뽑아내는 틀이라 한다. 큰마니-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집등색이-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자채기-재치기 댕추가루-고추가루 탄수-석탄수 삿방-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아르궅-아랫목 고담(枯淡)-(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백석(白石) 시인     본명은 백기행(夔行)이며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통영(統營)               백석 [白石, 1912.7.1 ~ 1995]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삼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며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당 : 고장. 아개미 : 아가미. 호루기 : 쭈꾸미와 비슷하게 생긴 해산물. 황화장사 : 온갖 잡살뱅이의 물건을 지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 오구작작 : 여러 사람이 두섞여 떠드는 수선스런 모양. 녕 : 이엉.         ​ ​    월간 『朝光』 1935년 12월호 발표             평안도 출신 백석, 왜 통영까지 내려왔을까 백석의 시 '통영'에 담긴 아픈 첫사랑 이야기         예향(藝鄕)의 도시 통영엔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 전혁림 등 통영이 낳은 문화예술인들의 자취를 따라 걷는 '역사문화기행코스'가 있다. 명정동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 충렬사 건너편 공원에 긴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가 눈에 띄었다. 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이채롭게도 통영 출신이 아닌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시인 백석((1912~1996)의 시였다.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중략)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우리 모국어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 있는지, 시어로 재탄생한 고어나 토착어, 생소한 사투리에서 신비한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백석의 시를 뜻밖에 통영에서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에 천천히 읽어 보았다. 제목도 그렇고 그저 통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겠거니 했는데, 후반부에 연이어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그이, 여인, 내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게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백석의 나이 스물넷에 만난 애끓는 첫사랑이었다. 시인의 애끓는 첫사랑, 통영 사는 천희 '난'   ▲  멋쟁이 모던보이 백석 시인과 통영에 있는 그의 시비     시인 백석의 사랑으로 익히 알려진 연인은 그의 시 속 나타샤의 모델로 알려진 고(故) 김영한 여사다. 백석 시인은 기생이었던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였다. 후일 '자야'는 밀실정치의 요람이었던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는데, 이곳이 현재 서울 성북동의 명소 길상사라는 사찰이 돼 더 유명해졌다. 18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의 아들'로 등단해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영문학)까지 다녀온 후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해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단한 수려한 외모의 촉망받는 '모던 보이' 백석. 그에게도 열병처럼 아프게 앓은 첫사랑이 있었다. 통영에 사는 아가씨 '난'이 그 주인공으로, 백석이 써내려간 통영에 대한 시엔 그녀가 그립게 그려져 있다. 그가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이리라. 한 여인을 간절히 그리는 를 읽다보면 가수 윤도현의 와 어찌나 비슷한지, 애타는 심정을 잘 전하지 못해 서툴고 안타까웠던 내 청춘의 사랑도 함께 떠올라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은은한 달빛 따라 너의 모습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골목길엔 수줍은 내 마음만 ♬ - 윤도현의 가운데 1936년 1월 백석은 통영 출신의 '천희' 중 하나인 '난'을 다시 만나기 위해 두번째로 통영을 방문한다. 경상도 말로 처녀를 '천희' 혹은 '처니'라고 부른단다. 하지만 통영 천희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 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린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충렬사 건너편 시비의 로, 난이 살던 마을, 명정골까지 찾아가 그 애틋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 백석은 그해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서글픈 마음으로 쓴 시. 이라며 사랑하는 여인의 고장까지 아름답게 그리는 마음에 공감이 간다. 학창시절 사귀었던 여친과 함께 난생 처음 그녀의 고향인 전주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소박한 전주천이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질박한 남문시장이 얼마나 정답고 포근하게 느껴지던지··· 그래서인가, 시인의 첫 번째시 이 유월에 김냄새가 나고 저녁비가 내리는 쓸쓸한 풍경이라면, 두번째 는 북소리가 들리고 뱃고동이 들리는 활기찬 통영 풍경이 펼쳐진다. 말없고 수줍었던 백석과 난의 사랑 처음 백석이 난을 만난 건 1935년. 당시 시인이자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서울의 이화고교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본명 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 산문 가운데 난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친구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에 발표된 이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남녘 끝 항구도시에 사는 옛 여인의 사랑은 미역오리같이 마르고 굴껍지처럼 말없고 투박했나보다. 벅찬 마음에 그 먼 길을 단걸음에 찾아간 그이지만 막상 그녀와의 만남은 수줍고 담백하다. 말없이 앉아있는 여인과 먼 길을 달려온 무뚝뚝한 사내가 오랜 객줏집 마루방에서 설렘을 마음속에 품고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스라이 떠오르는 시다. 사랑과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   ▲  통영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엇갈린 사랑의 안타까움을 써내려간 백석.     이후 두 번 더 통영을 찾아가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서로 엇갈려 못 만나게 되고 백석은 상실감속에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두번째 시 를 남기게 된다. 이 두번째 '통영' 시는 백석이 통영을 다녀왔다는 증거처럼 자신이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를 했다. 서울에서 그 공개구혼 같은 시를 읽었던 통영여자 '난'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1936년 12월 마침내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또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당시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을 배반한 절친했던 친구,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까지··· 너무나 애절했던 첫사랑을 잃은 백석은 이런 시를 남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 백석의 시 중에서       오마이뉴스 - 2014.01.20 14:30                          백석 [白石, 1912.7.1 ~ 1995] 시인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본명은 백기행(夔行). 오산학교를 거쳐 동경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사슴』이 있음. 1995년 사망. [출처] 통영(統營) / 백석 - 백석의 아픈, 그 애끓는, 첫사랑 이야기 (시詩 시사랑 시인의 숨비소리) =================================///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 그는 누구인가?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 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 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 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 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 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 데 국문학사는 물론,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 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 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 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산고교에는 매우 훌륭한 선생들이 많았으나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과 그리고 이광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백석이 재학시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 선생으로 있었는데 백석은 그의 집서 하숙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다른 소질을 보이고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같이 훌륭했던 스승들과 선배들의 밑에서 공부했던 이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 하고 집에서 쉬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설을 써서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제2회 『신년현 상문예 공모』에 응모하여 『그 母와 아들이 』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신년현상문 예 』라고 함은 오늘날에 신춘문예를 의미한다.   『신년현상문예』소설이 당선되며 사실상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정주에서 금광으로 크게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후원을 받아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청산학원로 유학가서 1930년부터 4년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산학교 시절에는 반친구들 40명 중에 10등을 할 만큼 공부에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에 상당한 실력 을 보였다고 한다.영어회화에도 능통하여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해서  직장생 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서적 번역에만 몰두했다.그의 영어 실력은 훗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당시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소설에도 시작에도 크게 관심을 안보이고 외국서적 번역에 날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홉 등이 쓴 러시아의 소설과 산문들을 번역하였으나 시릉 번역하기 시작하며 번역하는일을 점차 줄이고 창작시에 전념했고 조선일보에 「定州城」이란 자신의 창작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탁월한 시의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로 그가 남긴 소설로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 편의 단편소설이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의 전문 -       위의 시를 발표한 뒤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행했던 「朝光(조광)」이란 잡지에  햔토색 이 짙은 ’統營(통영)' 등의 서정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절에 그는 그 당시 문단 을 이끌었던 임화,박용철 등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모두가 백석의 시에 관 심을 보였고 이때부터 백석은 시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으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가 시인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은 그의 첫시집 『사슴』을 발간한 뒤였다.조 선일보사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더욱 많은 시를 써서 발표했고 점점 더욱 많은 문인 들과 사귀었다. 그때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문인들은 신석정과 함대훈 등이었다.   그 시기는 '향수'의 정지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이 첫시집을 내던 때 였다.사실,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바쁘게 보냈지만, 문학에만 전념함으로서 그에게 있 어서는 그의 문학이  참으로 내실을 기한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   그리고 시집 '사슴' 발표이후 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문단에서 조명받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사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접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호 직장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영어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게다가 소설가요, 시인으로  학생들과 다른 선생들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외국어나 문학보다 연극,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더욱 관심을 보 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연극반과 축구부의 학생들과 친구처럼 절친하게 지낼 만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생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며 자긍심을 느낀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바쁜 교직생활에도 시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시를 썼다.   사실 시집 『사슴』에 발표된 시들은 거의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함흥에서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을 주체로 한 내면세계를 강조하 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셰계에 변화가 생긴 무렵으로 그의 연보(年譜)를 보아 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함흥에서 2년동안 교사로 재직시에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생 자야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이때 백석의 나이가 26살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 그녀는 191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그녀 의 집안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자 16살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서 기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악계(正樂界)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던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어 창과 가무를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게녀의 생활을 하면서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여 인텔리 기생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그곳을 자주 찿던 조선어학회의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신윤국은 1894년(고종 31년) 황해도의 연백(延白)에서 태어나서 1917년 미국으로 건너 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회원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한 이후,도 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興士團) 활동했던 인물이다.   뜻한 바가 있어 귀국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온 그는 1932년  『국사강의록(國史 講義錄)』을 간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에도 참가해 항일운동과 더불 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다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으로 활약 했다. 그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으로 섬기던 신윤국이 동우회사건(同友 會事件)과 관련해 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했다.   함흥경찰서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였으나 사상범(思想犯)의 이유로 면회가 안되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 다고 결심하고 함흥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함흥에서 기생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찿아오는 사람중에 법조 인이 오면 그에게 부탁해서 신윤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면회의 허락이 안되 만나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선생들의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백석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그녀의 하숙방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사이는 사실상의 부부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자야라고 하는 이름은 백석이 그녀에 붙여준 이름이다.어느날 그녀가 서점에 들러 '당 시선집(唐詩選集)을 사왔는데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다가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나면서 백석과 그녀는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둘은 서로 보고 싶어  하루속히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날,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조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발탁되어 그들을 서울로 인솔 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선수들은 여관에 투숙시킨 다음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집에 가서 둘만의 사랑을 불태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서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사임을 강요했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 에 백석은 사표를 제출하고 상경했다. 그는 결국 청진동 그녀의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에 들어갔다.   다시 지금의 서울인 경성으로 되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그는 거기서 조선일 보 계열사인 「여성」誌의 편집일을 맡았는데 이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문학에 관련 된 일이라서 모든 일이 익숙했다. 그들은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며 서로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살 것첨럼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 려고 아들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토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혼인했다. 마지못해 혼인은 했지만 백석은 그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 은 채 도망치듯 고향집을 빠져나와 자야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느닷없이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長春(장 춘)이란 곳으로 홀연이 떠나갔다.    신경으로 떠나갈 때 그녀에게 함께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들간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 났다. 시인 백석과 그녀가  격였을 이별의 고통 이 짐작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고 1995년 출간한 ‘내 사랑 백석’(문 학동네)에서 그렇게 회고했다.   백석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해 그의 그런 심경을 담아 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全文      짐작컨데 그다지 많지 않은 이십대의 시절을 떠돌이로 생활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백석의 결혼관에 대해 부모들의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부모와의 마찰을 빚은 것도 하나 의 이유가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벌인 남경대학살 등의 아시아 전역에서 침략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유학생들까지 학도병의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던 시기라서 인테리의 입장에서 나라없는 설움까지 격으면서 남모 르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북만주의 신경서도 여전히 시를 써서  『문장』등의 문예지를 통해 오늘날에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 랑받고 있는 「북방에서」와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의 「북방에서」는 일제말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함과  무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주체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 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이 함께 격는 역사적 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백석이 만주북방을 떠돌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죄채감을 느끼 면서 쓴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시인 의 의지와 동시에 무력함에 대해 자책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전문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역시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격고 있는 자신의 심중을 조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 즉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 슬픔 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전반에서 비록 현실은 슬프지만 자신이 격고 있는 고독과 슬픔을 이겨 내려하는 그의 삶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전문     그는 이와 같이 시를 쓰면서도 한편으로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 」등의 여러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여 「朝光」에 발표하며 중국서도 그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그곳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북만주에 건너가서 신경시의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관청에 근무했던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직장을 다시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는데 측량기사 보조 등의 일과 만주 안둥[安東]으 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던 신경이란 곳이 그 옛날 북만주 일대까지  호령했던 고구려의 영토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기고 조선마저 일본에게 빼앗겨서 자신이 나라없는 백성 이란 사실에 자신이 태어난 조선과 유학생활을 위해 지낸 일본과 지인들을 멀리하 고 그곳 중국땅까지 떠돌면서 느꼈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감회가 소설가와 시인이 란 입장에서 특별히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그에게 있어서 형별이요,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만주 등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자처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고 저 항했던 그의 소신있는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마침내,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사람치고 기뻐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백석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즉시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을 찿지도 않고 거처를 신의주로 옮겼을까? 그것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을 강요했던 부모와의 불화와 자야와의 원치 않던 이별이 못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는 시의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학풍)』誌에 발표했다.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마을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에 살면서 쓴 시로 짐작된 다.   고향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의주서 살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이다.해방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서 탄압과 감시 속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가 해방을 했는데도 자신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연의 갈매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 성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서양문물 유입으로 가족이 뭉쳐 살던 대가족 중심의 우 리나라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점점 붕괴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로도 평가된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쓰는 작품마다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고향인 평안남도 정주를 사투리를 넣어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썼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全文     백석은 신의주에 살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 그는 곧장 정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갔다.미물인 짐승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처럼 백석 자신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한시 라도 잊지 않고 살았었던 그였기에 귀향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의 그의 행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해방되던 그해 12 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에는 미국이, 이북에는 쏘련의 통치하여 남한에는민족주의 정부가 그리고 북한에는 사회주 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쏘련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가리 워져 있다' 라고 말한 그의 연설처럼 쏘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쏘련의 통치를 받게된 뒤부터 백석은 남쪽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   고향에서 계속 글을 썼다고는 하나,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조선문학』 에만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이전에는 동인 등의 형식으로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모더니즘 성향의 토속적인 서정시를 주로 쓰며 탈정치와 탈이념적인 시세계를 펼쳤던 그가 북한에 머물 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을 표방했다.   그가 타계하기 이전까지 그는 매월 『조선문학』에 자신의 작품을 실었는데 아동문학 평론, 창작시와, 수필, 번역시를 소개했다.    그는 아동문학작품과  관련해서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문학의 발전 을 위하여」와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평론을 실었는데 여기서도 백석은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 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961년까지 그는 시나 수필 등에서도 자신이  번역한 외국의 작품에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 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 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 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 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 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 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 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 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 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백석 시인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5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데 국문학사는 물,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모닥불」전문    이 시의 첫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 그는 누구인가?     우원호(도서출판 정인문학 主幹)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 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 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 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 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 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 데 국문학사는 물론,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 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 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 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산고교에는 매우 훌륭한 선생들이 많았으나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과 그리고 이광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백석이 재학시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 선생으로 있었는데 백석은 그의 집서 하숙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다른 소질을 보이고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같이 훌륭했던 스승들과 선배들의 밑에서 공부했던 이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 하고 집에서 쉬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설을 써서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제2회 『신년현 상문예 공모』에 응모하여 『그 母와 아들이 』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신년현상문 예 』라고 함은 오늘날에 신춘문예를 의미한다. 『신년현상문예』소설이 당선되며 사실상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정주에서 금광으로 크게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후원을 받아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청산학원로 유학가서 1930년부터 4년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산 학교 시절에는 반친구들 40명 중에 10등을 할 만큼 공부에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에 상당한 실력 을 보였다고 한다.영어회화에도 능통하여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해서  직장생 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서적 번역에만 몰두했다.그의 영어 실력은 훗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당시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소설에도 시작에도 크게 관심을 안보이고 외국서적 번역에 날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홉 등이 쓴 러시아의 소설과 산문들을 번역하였으나 시릉 번역하기 시작하며 번역하는일을 점차 줄이고 창작시에 전념했고 조선일보에 「定州城」이란 자신의 창작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탁월한 시의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로 그가 남긴 소설로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 편의 단편소설이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의 전문 -     위의 시를 발표한 뒤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행했던 「朝光(조광)」이란 잡지에  햔토색 이 짙은 ’統營(통영)' 등의 서정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절에 그는 그 당시 문단 을 이끌었던 임화,박용철 등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모두가 백석의 시에 관 심을 보였고 이때부터 백석은 시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으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가 시인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은 그의 첫시집 『사슴』을 발간한 뒤였다.조 선일보사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더욱 많은 시를 써서 발표했고 점점 더욱 많은 문인 들과 사귀었다. 그때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문인들은 신석정과 함대훈 등이었다. 그 시기는 '향수'의 정지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이 첫시집을 내던 때 였다.사실,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바쁘게 보냈지만, 문학에만 전념함으로서 그에게 있 어서는 그의 문학이  참으로 내실을 기한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 그리고 시집 '사슴' 발표이후 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문단에서 조명받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사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접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호 직장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영어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게다가 소설가요, 시인으로  학생들과 다른 선생들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외국어나 문학보다 연극,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더욱 관심을 보 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연극반과 축구부의 학생들과 친구처럼 절친하게 지낼 만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생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며 자긍심을 느낀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바쁜 교직생활에도 시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시를 썼다. 사실 시집 『사슴』에 발표된 시들은 거의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함흥에서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을 주체로 한 내면세계를 강조하 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셰계에 변화가 생긴 무렵으로 그의 연보(年譜)를 보아 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함흥에서 2년동안 교사로 재직시에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생 자야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이때 백석의 나이가 26살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 그녀는 191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그녀 의 집안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자 16살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서 기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악계(正樂界)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던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어 창과 가무를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게녀의 생활을 하면서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여 인텔리 기생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그곳을 자주 찿던 조선어학회의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신윤국은 1894년(고종 31년) 황해도의 연백(延白)에서 태어나서 1917년 미국으로 건너 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회원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한 이후,도 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興士團) 활동했던 인물이다. 뜻한 바가 있어 귀국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온 그는 1932년  『국사강의록(國史 講義錄)』을 간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에도 참가해 항일운동과 더불 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다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으로 활약 했다. 그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으로 섬기던 신윤국이 동우회사건(同友 會事件)과 관련해 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했다. 함흥경찰서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였으나 사상범(思想犯)의 이유로 면회가 안되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 다고 결심하고 함흥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함흥에서 기생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찿아오는 사람중에 법조 인이 오면 그에게 부탁해서 신윤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면회의 허락이 안되 만나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선생들의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백석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그녀의 하숙방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사이는 사실상의 부부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자야라고 하는 이름은 백석이 그녀에 붙여준 이름이다.어느날 그녀가 서점에 들러 '당 시선집(唐詩選集)을 사왔는데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다가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나면서 백석과 그녀는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둘은 서로 보고 싶어  하루속히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날,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조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발탁되어 그들을 서울로 인솔 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선수들은 여관에 투숙시킨 다음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집에 가서 둘만의 사랑을 불태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서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사임을 강요했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 에 백석은 사표를 제출하고 상경했다. 그는 결국 청진동 그녀의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에 들어갔다. 다시 지금의 서울인 경성으로 되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그는 거기서 조선일 보 계열사인 「여성」誌의 편집일을 맡았는데 이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문학에 관련 된 일이라서 모든 일이 익숙했다. 그들은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며 서로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살 것첨럼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 려고 아들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토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혼인했다. 마지못해 혼인은 했지만 백석은 그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 은 채 도망치듯 고향집을 빠져나와 자야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느닷없이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長春(장 춘)이란 곳으로 홀연이 떠나갔다.  신경으로 떠나갈 때 그녀에게 함께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들간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 났다. 시인 백석과 그녀가  격였을 이별의 고통 이 짐작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고 1995년 출간한 ‘내 사랑 백석’(문 학동네)에서 그렇게 회고했다. 백석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해 그의 그런 심경을 담아 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全文      짐작컨데 그다지 많지 않은 이십대의 시절을 떠돌이로 생활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백석의 결혼관에 대해 부모들의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부모와의 마찰을 빚은 것도 하나 의 이유가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벌인 남경대학살 등의 아시아 전역에서 침략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유학생들까지 학도병의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던 시기라서 인테리의 입장에서 나라없는 설움까지 격으면서 남모 르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북만주의 신경서도 여전히 시를 써서  『문장』등의 문예지를 통해 오늘날에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 랑받고 있는 「북방에서」와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의 「북방에서」는 일제말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함과  무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주체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 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이 함께 격는 역사적 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백석이 만주북방을 떠돌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죄채감을 느끼 면서 쓴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시인 의 의지와 동시에 무력함에 대해 자책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전문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역시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격고 있는 자신의 심중을 조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 즉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 슬픔 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전반에서 비록 현실은 슬프지만 자신이 격고 있는 고독과 슬픔을 이겨 내려하는 그의 삶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전문   그는 이와 같이 시를 쓰면서도 한편으로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 」등의 여러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여 「朝光」에 발표하며 중국서도 그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그곳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북만주에 건너가서 신경시의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관청에 근무했던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직장을 다시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는데 측량기사 보조 등의 일과 만주 안둥[安東]으 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던 신경이란 곳이 그 옛날 북만주 일대까지  호령했던 고구려의 영토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기고 조선마저 일본에게 빼앗겨서 자신이 나라없는 백성 이란 사실에 자신이 태어난 조선과 유학생활을 위해 지낸 일본과 지인들을 멀리하 고 그곳 중국땅까지 떠돌면서 느꼈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감회가 소설가와 시인이 란 입장에서 특별히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그에게 있어서 형별이요,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만주 등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자처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고 저 항했던 그의 소신있는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마침내,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사람치고 기뻐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백석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즉시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을 찿지도 않고 거처를 신의주로 옮겼을까? 그것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을 강요했던 부모와의 불화와 자야와의 원치 않던 이별이 못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는 시의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학풍)』誌에 발표했다.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마을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에 살면서 쓴 시로 짐작된 다. 고향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의주서 살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이다.해방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서 탄압과 감시 속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가 해방을 했는데도 자신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연의 갈매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 성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서양문물 유입으로 가족이 뭉쳐 살던 대가족 중심의 우 리나라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점점 붕괴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로도 평가된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쓰는 작품마다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고향인 평안남도 정주를 사투리를 넣어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썼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全文   백석은 신의주에 살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 그는 곧장 정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갔다.미물인 짐승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처럼 백석 자신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한시 라도 잊지 않고 살았었던 그였기에 귀향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의 그의 행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해방되던 그해 12 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에는 미국이, 이북에는 쏘련의 통치하여 남한에는민족주의 정부가 그리고 북한에는 사회주 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쏘련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가리 워져 있다' 라고 말한 그의 연설처럼 쏘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쏘련의 통치를 받게된 뒤부터 백석은 남쪽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 고향에서 계속 글을 썼다고는 하나,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조선문학』 에만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이전에는 동인 등의 형식으로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모더니즘 성향의 토속적인 서정시를 주로 쓰며 탈정치와 탈이념적인 시세계를 펼쳤던 그가 북한에 머물 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을 표방했다. 그가 타계하기 이전까지 그는 매월 『조선문학』에 자신의 작품을 실었는데 아동문학 평론, 창작시와, 수필, 번역시를 소개했다.  그는 아동문학작품과  관련해서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문학의 발전 을 위하여」와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평론을 실었는데 여기서도 백석은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 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961년까지 그는 시나 수필 등에서도 자신이  번역한 외국의 작품에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 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 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 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 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 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 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 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 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 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  백석의 시를 만났다. 아니 백석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 옳다. 시는 바로 그 사람이니까. 표지에서 그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참 특이하다. 그 옛날에 이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그의 감각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반갑기 그지없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격조였다. 그의 시는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격조를 느끼게 했다.  신경림 시인은 백석의 시집 을 읽은 저녁, 밥도 반 사발밖에 못 먹고 밤을 꼬박 새웠노라고 고백했다. 신경림 시인처럼 백석의 시 한 편이, 아니 시 한 연, 한 행이 주는 전율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그 전율이 주는 행복을 누리면서 나 역시 밤을 밝혔다. 백석의 시는 시어가 순수한 우리 고유어로 되어있는데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읽으면 가슴에 깊은 떨림으로 남았다. 문학의 위대한 힘을 나는 알고 있다. 시 한 편 때문에 삶을 다시 찾은 사람들, 책 한 권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의 힘을 웅변으로 말해주었다. 백석의 이름 앞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백석의 천재성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노리다께 가스오라는 일본 시인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15년 정도를 당시 조선에서 보내 한국 문인친구들을 많이 두었던 그는 일본 후꾸이현 최고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시 에서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라고 백석을 노래하고 있다. 노리다께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덕이 있어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화가 이중섭은 그의 도움으로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어를 정주 사투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투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쓰지 않아 묻혀있는 우리 고유 언어에 낯선 우리에게 백석의 시는 각주를 보면서 읽어야 하지만 토속적인 시어로 전혀 어렵지 않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눈앞에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바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멍멍이 짓는 소리도 들리고 구름이 둥둥 떠 있기도 하고, 시냇물이 흐르기도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는 만날 수 없었지만 2004년, 수능 언어영역에서 사상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했던 이라는 시를 통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의 연보를 보면 1957년 46세까지의 활동이 나와 있고 1963년 52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을 추모하는 시를 발표했다고 하는데 실제 사망은 1995년 84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1963년에서 1995년까지 32년이라는 그 긴 세월동안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동안 빛나는 시들을 얼마나 많이 쏟아냈을까. 그 시들은 어디 있을까?  북한은 계관시인 칭호제도가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남북이산가족 첫상봉 때 북쪽의 계관시인이었던 오영재 시인이 가족을 찾아 내려왔지만 등 그의 시 몇 편을 보면 토속적이거나 서정성은 기대만큼 높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그토록 격조 높은 시를 썼던 천재시인 백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찾아보니 30대에 연금중인 고당 조만식 선생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해방 후에는 우익문인으로 활동하다가 상당한 곤란을 겪어 나중에는 북한의 문인인명록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수십 권에 이르는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고 창작 집필은 금지당할 정도로 북한문단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한다. 천재시인에게 창작금지는 얼마나 잔혹한 형벌인가.  고 이응로 화백은 감옥에서 끌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창작 욕구를 식사때 나오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아껴놓았다가 간장이나 밥알로 풀어냈었다. 불타오르는 자신의 창작력을 지켜내려 몸부림쳤던 그 흔적들을 보면서 인간이 육신은 가두어도 영혼은 가두지 못함을 보았었다. 백석은 그 고통의 기나긴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어내다 눈을 감았을까.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남아있는 시들이 더욱 더 소중하게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는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하다. 전반부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가는데 후반부에서는 시인 자신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어떻게 이런 시상을 떠올려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천재시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마치 누군가 읊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과 평론가 등 문인 120명으로부터 2년 연속 '지난 1년 가장 좋은 시'로 뽑힌 시를 쓴 문태준 시인은 그 시를 쓴 뒤 탈진할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백석도 그렇게 힘들게 시를 썼을까. 아니면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한 번에 완성했을까.   (앞부분 생략) -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런 시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챈 일본의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 앞에서 자신은 무명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이름도 몰랐던 시인 백석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야라고 불렀던 그의 연인 김영한 때문이었다. 김영한은 1996년,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부지 7,000평)을 법정 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여인이다. 사찰은 일 년 뒤 완성되었고, 그녀는 시주하고 3년 뒤인 1999년 83세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대원각은 기부 당시 재산가치가 1000억 원대였다고 한다. 백석은 북에서 1995년 사망했으니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 그들은 영적으로 무언가 연결이 되어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서 지낼 때 겨울이 너무 추워 미국에 있는 사찰에 머물면서 책을 번역하고 설법을 하며 지냈는데 그때 김영한 보살을 만나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대로 조건 없이 시주했고 사찰은 완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얼마나 깊은 불심인지 그녀를 보면서 감탄했었다. 또한 그녀로 하여금 이런 깊은 불심을 자아내게 만든 법정스님의 그릇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이런 진정어린 신뢰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길상사는 올해로 개원 12주년을 맞았는데 법정스님은 해마다 12월 14일 개원일에 가까운 일요일에 봉행되는 개원법회에 참석해 대중법문을 해왔으나 올해는 불참했다고 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법정스님은 폐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는 와병중으로 제주도의 한 신도 집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한 말이었다. 기부한 1000억이 아깝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그 사람, 그는 바로 백석이었다. 김영한, 그녀는 최고의 천재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연인, 자야였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길목에서 20대에 만난 그들은 비련의 연인들이었다. 백석은 그녀를 위해 란 시를 썼다. 시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지만 3년 동안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그들은 남과 북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자야는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저서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전한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여사에게 기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었더니 영국쯤에나 태어나서 문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시를 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를, 사람을 온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백석이 사랑한 자야를 노래한 시처럼 하얀 겨울에.  백석의 약력을 보면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다.  백석이 자야라 불렀던 연인 김영한은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는데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냉정해서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갈등한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이것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다.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는데 1997년 10월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해 첫 시행은 1999년에 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하는데 제1회는 이상국·황지우 시인이 수상했으며, 올해는 안도현 시인이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달에 수상했다.  언어는 그 민족의 혼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일제는 우리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시에는 정주 토속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 향토색이 물씬 풍긴다. 언어유희도 없이 담백하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평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닌데도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모두 금지도서가 되어 우리 세대는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분단의 비극이 개인사뿐만 아니라 민족문학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잊혀졌던 비련과 비운의 천재 시인이었다. 1987년 해금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면서 이동순 교수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시선집'을 펴내자 자야 여사가 연락해와 그들의 슬픈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을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평생을 간직하며 살다가 죽기 전에 세상에는 천억 원이 넘는 대사찰을, 연인에게는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릴 수 있는 백석문학상을 남겨주고 간 아름다운 여인, 김영한. 그들의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은 남북분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남북분단이 그의 문학 또한 막을 수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시문학이 얼마나 더 성큼 발전했을까. 생각할수록 분단의 비극이 곳곳에 남긴 손실과 상흔의 슬픔에 가슴이 아파온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던 백석은 자신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남겨졌다. 그의 시와 비련의 사랑, 그리고 그의 연인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줄 것이다.     (차례대로) 길상사의 극락전, 법정 스님의 유골이 뿌려진 공간, 4층 돌의 정원에서 만나는 민불, 길상사의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길상사 범종각_문일식 촬영     서울 성북동 길상사 무소유의 삶을 기억하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법정 스님은 글을 통해 많은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선사한 분이다. , 등 저서 20여 권을 남긴 법정 스님. 그는 2010년 입적했지만, 그의 맑고 향기로운 흔적이 성북동 길상사에 남아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를 읽고 감명받은 김영한의 시주로 탄생한 절집이다. 창건 역사는 20년 남짓하지만, 천년 고찰 못지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 길상사의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대원각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에 있는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입적한 곳인데 시인 백석과 그가 사랑한 자야(김영한)와의 스토리도 유명하다.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요정으로 군사독재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영한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000억원에 달하는 대원각 재산을 법정 스님이 소속된 송광사에 시주, 2년동안의 개보수를 거쳐 길상사가 탄생했다.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성북동 길상사. 한국관광공사 제공 백석은 김영한에게 아호 자야를 지어줄 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백석이 만주로 떠나면서 결국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김영한이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눈을 감았는데 뒤편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새겨져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죽기전까지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이 시처럼 “내가 죽거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2140    한국 최초의 서사시 시인 - 김동환 댓글:  조회:3291  추천:0  2019-10-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동환   [ 金東煥 ] 이미지 크게보기 1901∼? 시인. 동아일보사 제공. 이칭별칭 파인(巴人), 취공(鷲公), 김파인(金巴人), 파인생(巴人生), 초병정(草兵丁, 창랑객(滄浪客)), 시로야마 세이쥬(白山淸樹)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1년 9월 27일 ~ 미상 성격 시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지 함경북도 경성 성별 남 본관 강릉(江陵) 저서(작품) 국경의 밤, 북청 물장수, 우리들은 7인, 오호 태평양 상의 군신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1901∼?. 시인·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90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파인(巴人)이다. 아버지 김석구(金錫龜), 어머니는 마윤옥(馬允玉)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필명으로는 강북인(江北人), 초병정(草兵丁), 창랑객(滄浪客), 백산청수(白山淸樹) 등을 썼다. 아명은 삼룡(三龍)으로, 1926년 10월 동환(東煥)으로 개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공립 경성보통학교(鏡城普通學校)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6년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10월 중동중학교 4학년 재학 당시 고학생 갈돕회 현상모집에서 그가 쓴 시 「이성규(異性叫)와 미(美)」가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1등에 당선되어 『학생계』에 실렸다. 1921년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나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4년 5월 『금성』에 시「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로 문단에 등단했다. 같은 해 9월부터 10월 함경북도 나남에 있는 북선일일보사(北鮮日日報社) 조선문판 기자로 복무했고,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어 1925년 5월까지 근무했다. 1925년 3월 첫 시집인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1925년 6월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1925년 8월부터 카프(KAR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외일보』 사회부기자,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일보』 사회부 차창을 지냈다.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운영하며 종합 잡지 『삼천리(三千里)』를 간행했다.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조선가요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삼천리』의 자매지로 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했다. 1939년 3월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의 실해위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참여해 간사를 맡았다. 1940년 5월 『애국대연설집』을 편집·발간했다. 1941년 1월 도쿄의 모던일본사가 주관하는 제1회 조선문학상의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같은 달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이 되었다. 8월에는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상무간사,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경기도 준비위원, 임전대책협력회 준비위원과 상임위원을 맡았으며,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가 되었다. 1942년 2월 국민총력 경성부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이 공동 주관한 ‘저축강조 전진 대강연회’의 강사로 선출되어 경성부에서 순회강연을 했고, 5월 『삼천리』를 『대동아(大東亞)』로 개명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위원과 참사로 활동했고, 1943년 8월 징병제가 시행되자 『매일신보』에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발표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1944년 7월 『조선동포에게 고함』을 편찬·간행했으며, 같은 해 9월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6월 대화동맹의 자매당인 대의당(大義黨)의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2월 조만식이 이끈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8월 여러 기행문을 엮은 『삼천리강산』을 편찬해 발간했다. 1948년 5월 삼천리사를 재차 창립하고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자수했고,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문단활동으로는 1925년 제1시집 『국경의 밤』과 제2시집 『승천(昇天)하는 청춘(靑春)』을 간행했고, 1929년 주요한(朱耀翰)·이광수(李光洙)와 함께 제3시집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을 펴냈다. 이어 1942년 제4시집 『해당화(海棠花)』를 발간했다. 납북된 후 1962년 최정희(崔貞姬)가 그의 유고를 모아 제5시집 『돌아온 날개』를 펴냈다. 저작물로는 1932년 『삼천리』에 실린 논설들을 모은 산문집 『평화(平和)와 자유(自由)』, 1936년 시·소설·평론을 함께 묶은 『조선명작선집(朝鮮名作選集)』, 1941년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半島山河)』, 1952년 수필집 『꽃피는 한반도(韓半島)』 등이 있다. 김동환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78∼35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문학론』(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 2002) 『파인 김동환 탄생 100주년 기념집』(김여익, 선인, 2002) 『아버지 파인(巴人) 김동환』(김영식, 국학자료원, 1994) 『한국근대문인대사전』(권영민, 아세아문화사, 1991) 『친일파군상』(민족정경문화연구소 편, 1948) 「일제 강점 말기 지원병제와 김동환의 시국 대응」(김승구, 『현대문학의 연구』39, 2009) 관련이미지 5                               이미지 이전 승천하는 청춘 / 김동환김동환의 서사시집. A6판. 180면. 작자의 제2시집으로 1925년 시문학사에서 간행되었다. 전 7부 61절로 짜여진 이 시집은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서사시로만 엮어져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김동환 [金東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139    한국 순수시 시인 - 김영랑 댓글:  조회:5144  추천:0  2019-09-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영랑   [ 金永郎 ] 이미지 크게보기 1903-1950. 시인.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아일보사 제공. 이칭별칭 호 영랑(永郞)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3년 ~ 1950년 성격 시인 출신지 전라남도 강진 성별 남 본관 김해(金海) 저서(작품)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바다로 가자, 천리를 올라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일제강점기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독을 차고」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의 5남매 중 장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이 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李承萬)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렬(朴烈), 시인 박용철(朴龍喆)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하였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후 『문학』·『여성』·『문장』·『조광(朝光)』·『인문평론(人文評論)』·『백민(白民)』·『조선일보』 등에 80여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평문(評文)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초기시는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의 역정(逆情)·회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비애의식은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져 정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그의 초기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 시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그 시대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민족항일기 말기에 발표된 「거문고」·「독(毒)을 차고」·「망각(忘却)」·「묘비명(墓碑銘)」 등 일련의 후기시에서는 그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광복 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천리를 올라온다」 등에서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족항일기에서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학적 충동인 회의와 죽음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의욕으로 충만된 것이 광복 후의 시편들에 나타난 주제의식이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 참고문헌 『모란이 피기까지는』(김학동 편, 문학세계사, 1981) 『전형기의 한국문예비평』(김용직, 열화당, 1979) 『한국현대시인연구』(김학동, 민음사, 1977)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 국민서관, 1973) 「조밀한 서정의 탄주: 김영랑론」(정한모, 『문학춘추』, 1964.2.) 「시와 감상: 영랑과 그의 시」(정지용, 『여성』, 1938.9·10.)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랑 [金永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는 문학이다 김영랑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에 헌신한 시인 [ 金永郞 ] 출생 - 사망 1903년 1월 16일 ~ 1950년 9월 29일 목차 『영랑시집』 김영랑의 연보 『영랑시집』 1903년 1월 전라남도 강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랑(金永郞, 1903.1.16~1950.9.29)의 본명은 윤식이다. 그는 강진보통학교를 나오고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상급학교 진학이 막힐 뻔하였으나 어렵사리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1916년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익힌다. 1917년 휘문의숙(현재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선배인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와 후배로 들어온 정지용, 이태준 등과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학창시절을 보낸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열여섯 살이던 그는 구두 속에 선언문을 감추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갔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결국 재학 중이던 휘문의숙을 졸업하지 못한 채 1920년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학원(현재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중등부에 입학한다. 1950년 4월1일 서울 근교에서 이 무렵 김영랑은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되는 박용철을 만난다. 박용철은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한다.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는 등 음악에 남달리 관심 많던 그는 도쿄에서 성악을 전공하려고 했으나, 음악 공부를 하면 절대로 학비를 대줄 수 없다는 아버지 때문에 영문과로 적을 옮긴다. 그러나 이 또한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중도에서 포기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을 오가며 작가 최승일과 교유하게 된다. 최승일의 집을 드나들던 그는 숙명여고에 다니던 최승일의 누이동생이자 해방 후 월북한 당대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와 사귀며 문단에 염문을 뿌린다. 1930년 3월 김영랑은 창간호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후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제목이 바뀜)’, ‘언덕에 바로 누워’, ‘4행 소곡 7수’ 같은 시편을 발표함으로써 정식으로 등단한다. 신진 시인 김영랑은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던 문단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시로 빛을 발한다. 이렇게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시가 지닌 매력과 독자성에서 말미암지만, 발간을 주도한 친구 박용철의 도움도 적지 않다. 박용철은 일찍이 김영랑의 시적인 자질을 간파해 유학시절부터 시 쓰기를 권유하고, 을 발간하는 동안 꾸준히 김영랑의 시를 부각시킨다. 박용철은 김영랑의 시를 거의 다 외울 정도로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이러한 사실은 박용철이 자신의 시집은 내지 않으면서도 1935년 11월 에서 [영랑시집]을 펴낸 것으로도 입증된다. 김영랑의 생애는 대체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김영랑의 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시대의 암울한 그림자가 깃들여 있으리라는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그의 시 세계에서는 흔히 경험의 구체적 상(像)들이 생략된 채 막연한 슬픔과 한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김영랑의 시 세계를 뒤덮는 슬픔과 한, 상실과 좌절의 어두운 그림자는 사회적 자아를 실현할 계기를 봉쇄한 일제 식민지 지배 체제의 억압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증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은 오직 가을 하늘에 떠도는 구름 다만 후젓하고 줄 데 없는 마음만 예나 이제나 외론 밤 바람슷긴 찬별을 보았습니다 두 시편에서는 무엇보다 외로운 혼의 비애와 방황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운명의 주체가 되어 당당하게 삶을 개척, 창조해나갈 수 없는 사람의 실의와 공허감으로 얼룩진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운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작게는 밖으로부터의 구속과 억압을 극복하지 못하고 노예화된 개인의 비극을 보여주며, 크게는 주권을 상실한 민족 전체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김영랑의 의식을 오랫동안 간섭하고 짓누른 주제이기도 한데, 아쉽게도 체험과 현실의 구체성에서 우러나온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아 작품들이 감동을 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지는 못한 느낌이다. 김영랑의 시 세계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구절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찬란(燦爛)’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영롱하고 현란함’, ‘광채가 번쩍번쩍하고 환함’이다. ‘슬픔’은 ‘슬픈 느낌, 또는 그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슬프다고 할 때 이는 무슨 일에 낙심하여 눈물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또는 불쌍하고 원통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찬란한’이라는 말이 품은 눈부시게 환한 빛과 ‘슬픔’이라는 말이 품은 무겁고 칙칙한 어둠은 잇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순된 가치의 표상이다. 이는 마치 ‘밝은 어둠’이라는 말과 같다. 이 모순되고 양의적(兩義的)인 세계가 동전의 앞뒤처럼 결합하여 ‘봄’을 수식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서름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1934, 4)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영랑생가. 앞에는 모란꽃이 피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떠받친 시적 구조는 모란을 중심으로 한 기대·기다림, 상실·소멸, 기대·기다림의 구조다. 이는 김영랑의 순환론적 세계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한 평론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구조가 죽음과 재생의 순환, 완성과 파괴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모란의 피어남에 대한 시적 자아의 기대·기다림은 봄에 대한 기대·기다림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모란의 떨어짐은 봄의 상실·소멸을 뜻한다. 봄의 상실은 시적 자아의 뻗쳐오르던 보람의 좌절을 가져오고, 이는 상심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봄을 여읜 설움과 섭섭함 속에서 다시 모란이 피어나기를 고대한다. 모란의 피어남에 대한 기대의 이면에는 “찬란한 슬픔의 봄”에 대한 동경과 지향이 숨어 있다. 모란이 해마다 피어난다는 것, 그리하여 떨어져 버린 지난해의 모란이 다시 피어나기까지 ‘나’의 보람은 새롭게 뻗쳐오른다는 것,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의 기대·기다림의 시간은 찬란하다. 그러나 모란은 오래도록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모란은 피어나고서 이내 시들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모란을 매개로 하는 찬란한 봄의 누림도 끝난다는 것, 이 때문에 ‘나’는 슬프다. 모란을 통하여 절정·완성의 순간에서 곧바로 쇠퇴·파괴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순환 속에 놓여 있는 삶의 의미를 투시하는 시인의 눈은 날카롭다. 모란의 피고 짐, 봄의 오고 감, 찬란함 슬픔, 밝은 어둠의 영원한 순환 속에 갇힌 인간의 숙명에 대한 긍정은 김영랑 시 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내 가슴 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용히 지는 제 먼 산허리에서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읜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철석 갯물이 놓이듯 얼컥 이는 훗근한 내음 아! 훗근한 내음 내키다마는 서어한 가슴에 그늘이 도나니 수심뜨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랏빛 - 김영랑, ‘가늘한 내음’, (1930, 5) 1949년 12월 14일 서울 경회루에서의 김영랑 시인 그러나 김영랑의 많은 시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찬란함 밝음보다는 슬픔 어둠 쪽이다. 이러한 슬픔 어둠은 불행한 넋에서 솟구치는 심정의 등가물이다. 이는 ‘가늘한 내음’, ‘물 보면 흐르고’, ‘낮의 소란 소리’, ‘땅거미’, ‘두견’, ‘망각’ 등의 시편에서 “수심 뜬 보랏빛”,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 “밤의 검은 발짓”, “고되인 넋”, “흰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 “원한과 슬픔”, “불행의 넋”, “서럽고 쓰라림”, “비운의 겨레” 등의 표현을 얻어 구체화한다. ‘가늘한 내음’에 나오는 보랏빛은 상실의 슬픔에서 연유한 어둠의 빛깔이다. 이 보랏빛은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라는 구절에 암시되어 있듯이 모란의 떨어짐과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모란의 떨어짐으로 생긴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의 빛깔이다. 모란의 찬란함은 곧 생명의 찬란함이다. 이것이 없는 삶은 텅 빈, 무의미한 삶이다. 왜냐하면 모란은 의미 있는 세계의 지평에서 피어난 생명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떨어져 사라져버린 모란을 찾으려고 헛되이 현실 속에서 허덕이기도 한다. 왜 ‘헛되이’인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 세계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꿈결처럼 지나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란, 찬란한 슬픔의 봄을 상징하는 꽃, 밝은 어둠 속의 꽃, 모란은 이 모순어법 위에 서 있는 것, 부정 속의 긍정, 무의미 속의 의미, 비진정성의 세계에 둘러싸인 진정성의 삶이다. 이를 향한 동경과 이를 손에 잡지 못하는 슬픔이 뒤섞여 김영랑의 시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영랑시집]을 펴내고 그는 잠깐 공백기를 가진다. 이 시기에 그는 단점으로 지적된 극단적 형식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애쓴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공백기 이후 1939년 에 발표한 ‘독을 차고’,  1호에 발표한 ‘전신주’, 1940년 에 발표한 ‘한줌 흙’, 1948년 8월에 발표한 ‘발짓’, 1950년 6월에 발표한 ‘오월 한’ 등에서는 다소 사회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해방 이후 그는 고향인 강진으로 가서 우익 운동에 참여하고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며 시절의 순수 문학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인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서 은거하던 중, 9·28 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김영랑은 길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둔다. 김영랑의 연보   연도 내용 1903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남.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5남매 중 장남. 본명은 윤식(允植), 영랑은 아호. 1909 강진보통학교 입학 1916 결혼(1년 만에 사별).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익힘. 1917 휘문의숙(현재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 선배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와 후배 정지용, 이태준등을 만남. 1919 3.1운동 당시 선언문을 감추고 강진으로 내려갔다가 발각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름. 1920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학원 중등부에 입학. 박용철을 만남. 1921 성악을 전공하려 하나 아버지의 반대로 일시 귀국 1922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로 적을 옮김 1923 관동대지진 때 일시 귀국 후 김귀련(金貴蓮)과 두 번째 결혼. 1926 장녀 김애로 출생. 1928 장남 김현욱 출생. 1930 창간호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후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제목이 바뀜)’ 등의 시 30여 편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등단 1932 차남 김현국 출생. 1934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을 발표. 1935 박용철의 후원으로 [영랑시집] 간행(시문학사). 3남 김현철 출생. 1938 4남 김현호 출생. 1939 에 시 ‘독을 차고’, 에 시 ‘전신주’ 발표. 1940 에 ‘한줌 흙’ 발표, 5남 김현도 출생. 1944 차녀 김애란 출생. 1945 해방 후 강진에서 우익 운동에 참여 1949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냄. [영랑시선] 간행. 1950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은거하던 중, 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포탄 파편에 맞고 중상을 입어 29일 운명. 이태원 남산 기슭에 가매장. 1954 망우리에 이장. 1981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문학세계사) 간행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랑 [金永郞] -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에 헌신한 시인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장석주, 전라남도 강진군청) ==================================///   두산백과 김영랑   [ 金永郞 ] 요약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며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발표하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영랑 김윤식 시비 출생-사망 1903.1.16 ~ 1950 본명 윤식(允植)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전남 강진(康津) 주요저서 《영랑시집(永郞詩集)》(1935) 주요작품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본명은 윤식(允植)이다.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결혼하였으나 1년 반 만에 사별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며, 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크리스티나 로세티, 존 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그러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귀국하여 고향에 머물며 은거하였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 연보 출생 1903.1.16~ 사망 1950 1903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김윤식. 1909 강진보통학교에 입학. 1916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사별함. 1917 휘문의숙에 입학. 1919 3ㆍ1운동 당시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 치름. 1920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에 입학. 1923 김귀련과 재혼. 1930 창간호에 시 , , 등 30편 발표. 1934 창간호에 시 등 발표. 1935 첫 시집 《영랑시집》 발간. 1939 에 시 , 에 시 발표. 1945 해방 후 우익 운동에 참여. 1949 《영랑시선》 간행. 1950 한국전쟁 당시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 이태원 남산 기슭에 가매장. 1954 망우리에 이장. 1981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 간행. ===========================================/// 김영랑 시인의 작품 경향= ​ ♣김영랑의 시의 세계 영랑은 1930년대 시문학파의 대표적 시인으로, 계몽 문학과 목적주의적 경향파의 문학에 반발하여 문학 자체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시인이다. 그는 시의 음악성을 강조하고 순수 서정시, 세련된 언어 감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월 이후 우리말 구사에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칭송될 정도로 섬세하고 깨끗한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때로는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 세계에만 빠져 역사 의식을 상실, 시어의 조탁에만 열중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우리 시를 언어나 형식면에서 한 차원 올려놓은 것은 그의 공적이기도 하다.   1) 영랑 시의 출발은 바로 순결성에 있다. 이러한 특징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내 마음을 아실 이, 오매 단풍 들것네 등   2)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에 대한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한다. [예] 모란이 피기까지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독을 차고 등 ​
2138    [시인과 시대] - 문둥이 시인 댓글:  조회:3785  추천:0  2019-08-07
한하운   [ 韓何雲 ]   1919-1975. 시인. 이칭별칭 기타 태영(泰永) 유형 인물 시대 현대 출생 - 사망 1919년 ~ 1975년 성격 시인 출신지 함경남도 함주 성별 남 저서(작품) 전라도길, 한하운시초, 보리피리, 나의 슬픈 반생기, 황톳길 대표관직(경력)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1919∼1975. 시인. 개설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 종규(鍾奎)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2년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1937년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동경 세이케이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 2년을 수료하였다. 그 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 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자신의 투병 생활과 함께 1950년성혜원(成蹊園), 1952년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 활동은, 1949년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新天地)』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를, 1956년에는 『한하운시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定本)한하운시집』(1966)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 현암사, 1984) 『한하운시감상』(박거영 해설, 인간사, 1959) 『나의 슬픈 반생기』(한하운, 인간사, 1957) =======================================/// 한하운     요약 대한민국의 시인.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전염병인 한센병1)에 걸렸으며, 자신이 겪은 병과 고통을 서정적2)으로 표현한 시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한센병 환자들의 대표로 활동하며, 그들과 함께 닭 키우는 사업을 펼치는 등 한센병 환자들이 스스로 잘 살 수 있도록 힘썼다. 이미지 크게보기   이름 한태영 출생 - 사망 1919 ~ 1975년 국적 대한민국 직업 시인 주요 저서 , , 목차 문학 소년, 한센병에 걸리다 한센병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다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다 병을 이겨내고 ‘문둥이 시인’ 된 한하운 다재다능한 소년을 덮친 한센병 한센병의 고통을 노래한 시 한센병 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노력 문학 소년, 한센병에 걸리다 한센병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다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다 병을 이겨내고 ‘문둥이 시인’ 된 한하운 다재다능한 소년을 덮친 한센병 한하운은 1919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어. 부잣집 선비 집안의 장남이었지. 그는 어릴 적 공부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도 재능을 보였어. 고등학교 땐 장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지. 그런데 18세에 갑자기 온 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병원에 갔다가 한센병에 걸린 걸 알게 되었지. 병이 좀 나아져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까지 할 수 있었지만, 평범한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 눈썹이 빠지고 코가 막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한센병이 악화됐거든. 그는 약을 구하러 헤매다 남쪽까지 내려오게 됐어. 하지만 먹고 살길이 막막해 밤에는 쓰레기통 옆에서 자고, 낮에는 깡통을 들고 구걸하러 다녔대. 한센병의 고통을 노래한 시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시 중에서 겨울이 되자 추위와 싸워 이겨야 하는 상황이 닥쳤어. 어떻게든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어 한하운은 자신이 쓴 시를 팔기 시작했고, ‘시를 파는 거지’로 유명해졌어. 1949년, 시인들의 도움으로 한 문학 잡지에 시가 실렸어. 학생 때부터 창작 활동을 한 것을 생각하면 시인이 된 것은 좀 늦은 편이었지. 병으로 겪은 고통과 슬픔을 담담하게 노래한 그의 시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어. 또 그의 시는 민요적 가락을 바탕으로 쓰여 읽을 때 리듬감이 느껴져. 시인 ‘고은3)’은 중학교 시절 길에서 우연히 한하운 시집을 주웠는데 그의 시를 읽으며 밤새 울었대. 고은은 그날 이후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해. 한센병 환자들의 자립4)을 위한 노력 1959년, ‘문둥이 시인’으로 살던 한하운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 고칠 수 없을 줄만 알았던 한센병이 완치된 거야. 그가 꿈꾸던 정상인이 되는 순간이었지. 하지만 그는 한센병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했어.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농장을 운영하며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지. 요양소가 있던 인천에서 유통되는 계란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될 정도였어. 그 밖에도 한센병 환자들의 2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세우는 등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센병 환자들을 대표하는 사회 활동을 했단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하운 ===========================///   한하운   [ 韓何雲 ] 요약 나병에 걸려 화제가 되었던 시인.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주요 작품으로 《황토길》, 《보리피리》 등이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한하운시비 출생-사망 1920.3.20 ~ 1975.2.28 본명 태영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함남 함주 주요저서 《나의 슬픈 반생기》 주요작품 《황토길》(1960) 《보리피리》 본명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생. 중국 베이징[北京]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 함남 ·경기 도청 등에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고,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하운 [韓何雲] (두산백과) ===================================///     글의 제목을 '문둥이 시인' 이라 하였다. " 냉수는 마시는 물이고 찬물은 발 씻는 물이다" 란 우스개 말이 있듯이 같은 의미라도, 한센병(영어)이나 나병(한자어)보다 문둥이(한글)는 마치 비속어같은 느낌이 든다. 아래에 있는 그의 시 에서 문둥이란 단어를 한센인이나 나병환자으로 바꾼다면 얼마나 웃길까?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냥 문둥이 시인이라 하였다.   작년 여름 조선 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이 묻힌 김포장릉을 답사가던 중 라는 작은 안내판을 보고 반사적으로 차를 세웠다.   를 쓴 문둥이 시인 ! 한하운 장애아들을 키우는 나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돌려 먼저 그의 묘로 향하였다. 그날 한하운의 묘와 김포장릉을 오가다보니,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왕이 된 이도 있었고 문둥이라는 천형을 받고 살았던 이도 있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였다.      한하운(韓何雲, 1919-1975)    그의 시 '전라도길'에서의 싯구처럼 '걷다가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없어졌다'는 표현처럼 천형(天刑)의 병을 가진 한하운 시인. 인터넷에서 그의 사진을 구해보았지만 겨우 조그만 아래사진만 건질수 있었다. 《한하운시초》에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내고부터 그의 주위에는 펜들의 격려 편지가 쉴 새 없이 답지하지만 그는 군중 속의 인간 고독을 더 뼈저리게 느껴 거리를 울며 떠돌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우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한하운시초》의 「파랑새」      
2137    일본 시인 - 미야자와겐지 댓글:  조회:4061  추천:0  2018-12-18
  출생 1896. 8. 27, 일본 이와테 현[岩手縣] 하나마키[花卷] 사망 1933. 9. 21, 하나마키 국적 일본 요약 미야자와겐지 / 일본 시인·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Miyazawa Kenji) ⓒ MChew/wikipedia | Public Domain 일본문학사상 중앙문단과 거의 관계가 없었던 이색적인 작가로, 시·동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1918년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지질 토양비료 연구에 종사했다. 특히 히에누키 군[稗貫郡]의 토성(土性) 조사는 뒤에 그의 활동에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한편 생가는 열렬한 정토진종(淨土眞宗) 집안으로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불교 경전을 접해왔는데, 중학시절 법화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1920년 니치렌종[日蓮宗]의 신앙단체로서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가 주재하는 고쿠추카이[國柱會]에 가입했다. 종교의 차이로 부모와의 대립은 깊어만 갔으며 1921년 무단 상경해 문필이나 교정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농림학교 재학시절부터 단카[短歌]를 짓고 산문 습작을 하기도 했으며, 졸업 후에는 동화도 몇 편 썼다. 1921년 12월 히에누키 농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이듬해 11월 사랑하는 여동생 도시의 죽음을 겪었으며, 1926년 3월까지 계속 이 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반기는 그의 문학이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였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시집 〈봄과 수라 春と修羅〉(1924)와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리집 注文の多い料理店〉(1924)에 실린 작품들이다. 농학교 교사시절 후반부터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에 직면하게 된 그는 1926년 3월 하나마키로 돌아갔다. 거기서 젊은 농민들에게 농학이나 예술론을 강의하는 한편, 벼농사 지도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그러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자신의 농업기술로는 농민들을 가난에서 구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절망, 농민들의 도회지인에 대한 반감 등에 부딪혀 좌절감은 더욱 깊어만 갔다. 1933년 급성폐렴으로 37세에 요절했다. 만년에 나온 동화로는 걸작 〈은하철도의 밤 銀河鐵道の夜〉·〈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グスコ-ブドリの 傳記〉 등이 있다.
2136    "쓰레기 아저씨" = "환경미화원 시인" 댓글:  조회:3619  추천:0  2018-11-15
  환경미화원 시인 김두기씨 세번째 시집 '새벽에…' 펴내 거리에서 길어올린 詩想         ‘환경미화원 시인’ 김두기(45)씨가 세번째 시집 ‘새벽에 껍질을 위로한다’를 펴냈다.  이번 시집에 실린 ‘껍질을 위로한다’, ‘매립장 가는 길’, ‘미화원’ 등의 작품은 거리 청소를 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시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가전제품 회사 도장공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1996년부터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할 때까지도 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를 공부한 적이 없는 그가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아들의 초등학교 학예전에 참석했다가 아들의 친구들이 자신을 보고 ‘쓰레기 아저씨다’라고 놀리는 말을 듣고 아들의 자부심을 키워주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  2000년 인터넷을 통해 한 소설가를 만나 조언을 받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으면서 습작에 나선 김씨는 2002년 현대시문학 가을호에 ‘촛불’이라는 작품을 발표해 마침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는 그동안 인터넷 문학상과 사람과 환경 등단 작가 우수상을 받는 등 빼어난 글솜씨를 인정받고 있다. 새벽 3시 도로 청소로 하루를 시작하는 김씨는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힘들고 어려운 현장업무를 하지만 평소 생활을 하면서 스쳐가는 시상을 틈나는 대로 다듬어 한편의 시로 탄생시키는 창작력이 뛰어난 시인이다. 시상이 떠오르는데 운율이 막힐 때가 가장 힘들다는 그는“체험을 바탕으로 좀 더 좋은 시를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  
213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고추밭 댓글:  조회:4061  추천:0  2018-08-20
고추밭                                            윤동주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 놓고, 고추는 방년芳年된 아가씬양 땍볕에 자꾸 익어 간다.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1938년 10월 26일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고추밭' 시가 쓰여진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2017.5.10   유태희 행복도시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 윤동주음악회 총감독 ================== 나는 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면 생텍쥐페리의 가 생각난다. 윤동주와 어린 왕자, 둘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윤동주는 어린 왕자처럼 지혜롭고 순결했다. 어린 왕자가 우편 배낭을 싣고 마지막 비행을 한 것처럼 윤동주는 아름다운 시편들을 우리에게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윤동주의 시는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가슴 깊이 파고드는 강력한 힘과 울림을 가졌다. 영혼의 외침이 들려서일까. ‘서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사느라 애쓰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된다. 근본으로 돌아가 삶을 재정비하게 된다. 내가 오랫동안 윤동주를 가슴에 두고 살았던 이유일 것이다.   작곡자 안효은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그가 작곡한 악보를 본 순간 파드닥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랬다. 윤동주는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행복한 마음으로 음악회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윤동주음악회를 기획해오는 동안 단 하루도 고단함을 느끼지 못했다. 윤동주가 매일같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여줬기 때문이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윤동주 생가 복원 건물. 중국의 이른바 문화혁명 때 윤동주의 명동 집이 헐린 뒤로 옛 모습을 살려내어 그 집을 복원하려 했으나, 집채가 뒤집히는 실수를 남겼다. '윤동주 시 깊이 읽기'(권오만 지음 | 소명출판 펴냄) 중. 윤동주의 생가와 묘지는 비록 만주 용정에 있지만, 정작 시인 자신은 그곳을 고향으로 여긴 적이 없다. ‘헌 짚신짝 끌고 두만강을 건너 쓸쓸한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예 윤동주에게 언제나 고향은 ‘따뜻한 남쪽’, 바로 한반도다.   우리는 윤동주의 동시(童詩) ‘고향집’을 낭송하며 음악회에 대한 열정이 더욱 뜨겁게 용솟음치는 것을 경험했다. 중국 정부는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으로 국한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 도시 세종이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 윤동주를 현양하는데 앞장서자는 세종포스트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고 있어 다행스럽다. 음악회 ‘세종에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윤동주’의 지휘는 군산시향 백정현 상임 지휘자가 맡는다. 그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 각각의 학사와 석사과정을 모두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생 중 최고 학생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그라츠 국립음대 대학원장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첫 무대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으로 정했다. 윤동주의 혼을 불러내는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윤동주의 시는 아니지만, 우리 음악회의 타이틀 ‘세종에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윤동주’를 전개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역시 안효은의 곡이다. 이어 ‘서시’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별 헤는 밤’ ‘흐르는 거리’를 바리톤과 소프라노가 체임버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들려줄 예정이다. ‘조개껍질’ ‘고추밭’ ‘기왓장내외’ ‘편지’ ‘햇빛바람’ ‘오줌싸게 지도’ ‘참새’ 같은 동시들은 어린이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호흡을 맞춘다. 연극적 요소를 위해 무용가, 연극배우, 성우 등이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음악회에 앞서 세종포스트가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시민 인문학 아카데미를 무료로 마련하고 수강생을 모집 중이다. 많은 시민이 아카데미에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아카데미 참여를 희망하는 시민은 이메일(yibido@hanmail.net)로 이름과 연락받을 휴대전화를 보내면 된다. 아카데미는 8월 16일부터 9월 13일까지 이승하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이숭원 서울여대 국문학과 교수, 권오만 전 서울시립대 교수 등 국내 저명한 윤동주 연구가들이 강사로 출연한다. 마지막 주에는 세계적 뮤지션인 ZINO PARK(지노 박)의 미니콘서트도 준비했다. 윤동주를 ‘한글 도시’ 세종의 시인으로 새로이 받들고, 더 나아가 문화 아이콘으로 육성해 나가자는 세종포스트의 취지에 공감하며, 시민들의 많은 응원과 참여를 당부드린다.   /유태희  ======================오도되여 나도는 윤동주 시 "고추밭"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 놓고  고추는 방년(芳年)된 아가씬 양  땡볕에 자꼬 익어간다 ========================역시 오도되여 나도는 윤동주 시 "고추밭" 。윤동주 - 고추밭。  ☆헌 짚신짝 끄을고★  ★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집☆ 
2134    동시의 생명선은 어디에 있는가... 댓글:  조회:3294  추천:2  2018-07-09
동시의 생명선ㅡ진실성 2018년 07월 09일 작성자: 최균선                                                     동시의 생명선ㅡ진실성                                           김견작가의 동시집《기러기가족》을 두고       동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는것은 동심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려는것만큼이나 무모한 짓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정의되고 있는바 보통 동시란 어린이들의 생활에서 포착한 어린이다운 심리와 감정을 제재로 하여 어른이 어린이를 위하여 쓴 시를 이른다. 어린이가 쓴 동시와 성인이 목적, 의도적으로 지은 동시를 다 동시의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여기서는 어른이 쓴 어린이들을 위해 쓴 동시에 초점을 맞춘다.     동심세계란 무엇인가?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인간 원형질적인 어린이들 특유의 세계이다. 이런 연유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동심세계를 제대로 투시해야 동시다운 동시를 지을수 있음이 자명해진다. 물론 생동한 동심적 예술경지에 이르려면 상상의 날개를 펼쳐야 함은 두말할것 없다. 시인은 리성적론리를 초월하는 상상력으로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고 정서를 발현시킨다. 여기서 새로운 현상을 만든다는것은 대상에 생명을 부여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 낸다는 뜻이다.     그 경우, 시인은 흔히 련상의 힘을 입어 재생적 상상력이나 어떤 련상의 질서에도 기대지 않는 생산적 상상력을 토대로 경이로운 새로움을 창조한다. 동시가 참신하고 기특한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서술과 입말체 대화조의 서술에 의하여 아이들의 심리세계를 표방할 때, 시적 긴장이나 함축미를 상실하고 시적진실마저 외면하게 된다. 결국 동시의 성인화는 동시의 속성마저 색바래게 하고 동시의 리념화는 동시의 본체마저 잃게 만든다.     아무리 어린이를 위한 시이고 어린이가 쉽게 리해할수 있는 글이라고 다 동시가 되는것은 아니다. 그리고 동시가 비록 소재나 제재, 배경, 언어 등이 단순하고 쉬운 용어를 사용했다 할지라도 시속에 어린이만의 정서와 사상이 비틀어져 있다면 동시가 못된다. 동시창작에서 어린이를 생각하며 어린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만이 느낄수 있는 상상세계를 동심적인 언어를 구사하는것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무릇 동시의 1차적인 생명은 어린이들이 알고있고 사용하고 있는 핍진한 아동언어의 구사에 있다. 시의 언어는 고도로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만을 사용한다. 동시도 사물, 현상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가능한 정도로 합목적인 상징과 은유 등의 기법을 총동원하여 이미지를 창조할뿐이다. 그런만큼 동시의 언어는 마음속에 심상 즉 그림을 만들어낸다. 동시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그림은 어린이의 감각에 호소하여 직접적인 이미지와 간접적인 이미지를 창조한다.     시인이 어떠한 사물을 여러 감각기관을 통해 리해하도록 묘사할 때 이러한 이미지를 직접적이라고 한다. 모든 문학장치를 뛰여넘어 시는 어떤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바 "맞아, 바로 그거야!' 라고 찬탄하게 하면서 경이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하다면 좋은 동시란 어떤 동시를 기준할가?     필자는 동시의 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를 시에서 시사되고 있는 진실성에 둔다. 동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이 때 그림의 소재가 되는것은 사실적인 풍경일수도 있고 생활의 양상일 수도 있으며 마음에 떠오른 심상일수도 있겠다. 눈과 마음을 통해 다가온 감흥을 시인은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그려낸다. 이 때 그 그림을 은유적이면서도 진실하게 잘 그려낸 동시를 나는 좋은 동시라 단정한다.     기성된 문학리론에서 시란 고도로 함축되고 선택된 언어로 소리와 이미지의 감동을 노래하는 경이로운 문학의 장르라고 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동시를 정의하면 ‘동시란 고도의 함축되고 선택된 언어로, 소리와 이미지의 감동을 노래하는 어린이를 위한 문학의 독특한 장르이다.     그러한 정의 속에 보편적으로 강조되고 있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시의 진실성이다. 동시란 원초적으로 철저히 동심에 바탕을 둔 시이다. 발상의 동심성과 표현의 단순성, 간명성은 동시의 요체라고 한다면 진실성은 동시의 생명선이라 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적 발상이나 관념적 진술에서 해탈되지 못하면 동시다운 동시로 되지 못할것은 물론이다. 시대가 달라지고 생활양상이 달라지는만큼 아이들의 정신세계, 동심세계도 확연히 달라지기에 그런 문화현상을 진실하게 파악하고 동시로 형상화 하는 일은 현시대 동시 시인들의 새로운 과제로 되여졌다. 아래에 김 견작가의 동시 “암 걸린 아빠, 엄마”를 읽어보자.                           암 걸린 아빠, 엄마                           몇해 전만 해도                        우리 집 왕이였는데…                                              엄마 아빠 모두                        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놈이 나타난 뒤로                        보릿자루신세 돼버린 나                           내가 뭐라 하면 건성건성                        들었는지 말았는지 하다가도                          그놈 보채는 소리만 들리면                        허겁겁, 키득키득, 하하호호…                          휴~대책없는 아빠 엄마!                        폰암 걸린 아빠 엄마!!       전통적인 동시들에 서정은 농경문화시대의 서정이 중심이였다면 오늘 이 시대에 들어서서 어린이들은 새로운,것 변화된것에 대한 서정이 중심이 되여있으므로  어른들이 쓰는 시와 어린이들의 생활감정이 많이 근접되고있다. 현대에 와서 어린이를 위한 시에도 현대문명현상에서 발생된 소재를 다루는 시인들이 더러 있지만 김견 작가의 동시 “암 걸린아빠, 엄마”는 부모자식간은 물론 부부사이에 교감마저 뒤로 밀어버리고만 스마폰시대의 병페를 꼬집고 있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발견이라 아니할수 없다. 로봇트,컴퓨터 스마폰 등 다양한 오락을 비롯해서 어린이들이 새 감각, 새 이미지의 충격을 찾아 날로 그 유혹에 코를 꿰여 자기를 잃는 현실임에랴     좋은 동시들은 대개 단순성에서 오는 힘을 가지고있다. 그것들은 몇개의 언어들을 가지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을 보여준다. 이처럼 좋게 느껴지는 동시들의 시어는 대부분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직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기때문에 그 이미지가 그리는 형상은 아주 선명하다. 요란한 언어를 동원했는데 그림이 안 그려진다면 그건 언어를 랑비한것과 같다. 김견작가의 “얄미운 거미”를 음미해 보자.                                   “얄미운 거미”                               엄마 아빠 얼굴엔                             거미 한 마리                             숨어있대요                               내가 애먹일 때마다                             거미줄 가득 쳐놓고                             살금 사라지기에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예쁜 짓만 했더니                               아이고,                             이를 어떡해?!                               활짝 웃으시는                             엄마 아빠 얼굴에                               더 많은 거미줄 쳐놓고                             살금 사라지는                             얄미운 거미!!       이 동시를 보면서 느끼게 된것은 시가 생동한 그림을 대신할만큼 회화적이라는것이다. 삽화에서 쉽게 련상되지만 또 다른 의미의 그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것은 이 시에 쓰인 시어가 놀랄만큼 회화적이기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아주 단순한 몇마디 시어로 부모가 늙어가는 정경을 걱정하고 있다. 소박한 시어는 아이가 재치있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련에서 엄마, 아빠가 활짝 웃어도 거미줄같은 주름살이 얼기설기 얽힌다는 진술은 어린이답지만 탁월한 발견이다. 그것을 독자들이 모르는것은 아 니다. 그저 례사롭게 넘기고 눈여겨보지 않았던것일뿐이다. 시인이 그걸 발견한것인데 그걸 진술하는 시어는 아주 단순한 말로 되여있다. 이 동시에는 화려한 수사가 없지만 서정적주인공의 아름다운 심경이 진실하게 펼쳐진다.                                   달                             내 동생은                           못 말리는 먹보                             조각달 보면                           바나나 먹겠다                             반달이 뜨면                           멜론 내놓으라                           생떼질                             보름달 보면                           피자 먹겠다                           성화래요.        김견작가의 동시 “달”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아이들의 본성에 맞게 씌여진 시다. 이 시는 억지스러운 착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며 시어도 진실하게 구사되고있다. 이 시는 아이들 생활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시라기보다 아이들 마음속에 떠오를수 있는 심상을 그린 시라고 할수 있는데 시인은 지어낸 관념에 의탁하고 있다는 의혹을 주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에서 가히 그려질수 있는 그림으로 다가온다. 동시 “감기”도 동심에서만 생길수 있는 심리현상을 잘 포착하였다고 할수 있다.     그림이 구체적이라는것은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것이고 그것은 또한 독자들의 눈길을 붙잡아 둘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겸하여 말하건대 이 시에는 자연스러운 률동감이 느껴지는바 긴장 (들숨)과 이완(날숨)이 적절히 반복되고 있다. 구체적인 그림과 자연스러운 리듬의 어울림은 이 시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한 식구로 어울려 사는 목숨들간의 조화를 노래하고 있는데, 그것이 또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동생과 누나(형님)사이에 진행되는 아름다운 교감을 노래하고 있다.     어른이 동시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른이 도로 아이가 될수 없고 어른이 인지한 동심세계가 곧 아이들의 동심과 등호로 될수 없기때문이다. 그 어려움은 아 이들의 마음, 생각, 꿈이 곧 나의 꿈이 될 때에만 잘 풀린다     주제적인 면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인간과 자연속에 숨어있는 새로운 현상과 진리를 발견하게 하고 유익한 계발을 받게 하며 독자 수용적인 면으로는 아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인간적 정서를 풍부하게 길러주는 것이 동시의 속성이다. 더 부연한다면 동시다운 동시는 아이들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감동을 받게 되며 인간적인 정서를 함양하고 흥미있는 경험을 쌓게 하는데 시의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자면 아이들의 상상력이 미치는 진실한 동심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흥미진진하게 시속에 담겨진 의미를 발굴하고 사색하게 한다.     동시짓기의 전제는 어디까지나 동시인만큼 단순성과 명쾌성이다. 동시에는 어린이들에게 있을수 있는 사실적인 생활내용이나 경험이 들어있어야 한다. 동심적인 상상력이 나래치는 무한한 세계를 펼쳐보이려 해도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드러나야 하는바 그것은 동심적인 표현으로서만 구현될수 있다.     김견의 동시들중에서 “기러기 가족”을 우선 례로 들고싶다.                             기럭기럭 저기러기야                         왜 그렇게 슬피 우니                           기약없는 기다림에                         목만 점점 길어졌네                           외기러기 아빠 엄마                         우린 언제 같이 사니                           하염없이 기다리다                         기러기잠 들고 마네                “기러기 가족”전문        이 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처하고 있는 가정현실에서 종자를 잡았는데 사실 출국붐이 일면서 우리 조선족 가정들에 거의 보편적이다싶이 된 출국붐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조부모 혹은 친척들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가? 부모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심리세계에 주제는 “그리움”,“기다림”,“눈물”이라 해도 틀린말은 아닐것이다. 기러기아빠, 기러기엄마, 그리고 부당하게 설음을 짓씹으며 커야 하는 새끼기러기들의 공통된 심리가 아닌가!     시인은 시상전개에서 많은 아이들에게 존재하는 리별의 아픔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그러면서 수수께끼같이 까다롭지 않게 인간정서의 보편적인 뉴앙스를 시사한다. 이 동시는 현실생활에 존재하는 사실과 진리를 담고있으며 다시 한번 아이들의 아픈 마음을 형상적으로 보여주기에 동시의 생명선ㅡ진실성으로 하여 매력적이 된것이다. 동시는 이처럼 자연과 인간생활속에 숨겨진 진실을 말하면서도 교육성을 넘어 인간생활의 밝고 어두운 면을 직시하면서 자시의 인생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졸문의 주제와 조금 탈절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다. 말하자면 동시에서의 음악성이다. 다 알다싶이 시는 음악성을 추구하는 문학이다. 시에서는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처럼 규칙적인 말의 가락이 느껴진다.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말의 가락을 운률이라고 하는데, 이런 음악적인 요소는 시의 의미와 련결되어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김견작가의 동시는 비록 정형률을 추구하지 않고 있지만 시의 리듬, 음악성에 많이 류의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시냇물                        시냇물은 왜                      돌~돌~돌~                      흐르는 걸까?                        돌~돌~                      돌밭 위를                      걷기 때문이지                        돌밭 위를                      걷다보면                      발이 아플텐데…                        피해 갈 수                      없을 바에야                        돌~돌~                      노래하며                      흐르는게 낫지                          보다싶이 언어의 규칙적인 배렬이 아닌 시적정서의 내적흐름에 의해 형성된 운률미를 다분히 느끼게 된다. 동시는 어떤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것이 아니라 생명현상 그대로 보여주어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노래가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동시는 노래하는 아이들의 그림이요 그림을 그리는 동심의 음악인것이다. 시는 물론 특히 동시는 시어에 선명한 선이 있고 색채가 있는 언어야 하며 리듬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긴 분석을 접고 화제를 돌리려 한다. 문학평론을 문학비평이라고도 한다. 문학비병이라면 호평으로 그칠것이 아니라 작품의 부족점도 지적하여 작가의 금후 창작에 유조케 하는것도 마땅하리라 사료된다. 50수의 동시들을 읽고 좋은 감수를 받았지만 허심탄회하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고 까밝히고 싶다.     이를테면 많은 동시작가들이 시종 피할 길 없는 난제인데 즉 동심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성인화이다. 김견작가의 수작들속에서도 성인화경향이 잘 극복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례하면 “고국지도”,“죽겠다”, “1등미인”등 몇수의 시들에서 시인의 리념화, 성인화경향이 엿보인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좀더 류의해야 할 몇가지도 짚고 넘어가려 한다.  “기러기 가족”에서 “기약없는”, “백두의 겨울”에서 “일진한풍”, “봄그림”에서 “뜸들이다”, “겨울나무”에서 “오캐스트라 연주”, “검정나비”에서 “까만 연미복”등 시어들은 아이들에게 생경하게 느껴질 것이다.     일언이페지하고, 작자가 서문에서 토로했듯이 소설가, 번역가로 활약하던 그가 불혹의 나이에 생뚱같이 “동심에로의 회귀”를 표방하여 첫동시집을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다. 갓마흔에 첫보선이랄가, 마흔에 만득자라고 할가, 작자의 말처럼 동심으로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쉽게 살고 싶은 마음이라도 동시습작품 치고는 결코 기름떡을 구워내듯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쉬운 일이 아니래도 이미 동심에 깊숙히 빠져든 이상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어린이들의 언어로 보다 진실하게 동심세계를 재현시키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그래서 충심으로부터 응원을 보내는 바이다.                               2018년 7월 7일
2133    인도 시인 - 나이두(윤동주 흠모한 시인) 댓글:  조회:4107  추천:0  2018-07-09
  출생 인도 히데라바드, 1879. 2. 13 사망 1949. 3. 2, 러크나우 국적 인도 요약 나이두, 인도의 정치가·페미니스트·시인·저술가. 결혼 전 성은 Chattopadhyay.   인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인도 국민회의 의장을 맡았고 최초의 여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벵골의 브라만 아고레나트 차토파디아이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히데라바드에 있는 니잠대학 학장이었다. 12세에 마드라스대학에 들어갔고,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1895~98)와 케임브리지대학 거턴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운동에 참여해 약간의 경험을 쌓은 뒤, 인도의 국민회의 운동과 마하트마 간디의 비협력 운동에 가담했다. 1924년 아프리카 동부와 남아프리카 연방에 사는 인도인들을 위해 아프리카를 여행했고, 이듬해 인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인도 국민회의의 첫번째 여성의장은 그보다 8년 전에 의장이 된 영국의 페미니스트인 애니 베전트였다). 1928~29년 북아메리카를 순회하면서 국민회의 운동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고 인도로 돌아온 뒤, 영국에 반대하는 활동으로 여러 번(1930, 1932, 1942~43) 감옥에 갇혔다. 1931년 인도와 영국 사이의 협력문제를 논의하는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간디와 함께 영국으로 갔지만 인도 자치에 대해서는 아무 결론도 얻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국민회의파의 정책을 지지했다. 국민회의파는 처음에는 연합국의 명분에 냉담했고 이어 연합국을 공공연히 방해했다. 1947년 연합주(오늘날의 우타르프라데시) 장관이 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인도의 나이팅게일'로 불린 나이두는 활동적인 작가이기도 하여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 있던 그녀의 유명한 살롱에는 인도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시집 〈황금대문 The Golden Threshold〉(1905)·〈시간의 새 The Bird of Time〉(1912)를 펴냈고 1914년에는 왕립문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영어로 쓴 시들은 〈왕위에 오른 플루트 The Sceptred Flute〉(1928)·〈새벽의 깃 The Feather of the Dawn〉(1961)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사로지니 나이두(Sarojini Naidu.1879.2.13∼1949.3.2)  
2132    저항시인, 민족시인, "제2의 윤동주" - 심련수 댓글:  조회:4716  추천:0  2018-05-28
심련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심련수 심련수(沈連洙, 1918년 5월 20일 ~ 1945년 8월 8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교육자이며 조선인 반일(反日) 저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니혼 대학졸업 후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1945년 룡정으로 귀향하던 길에 불심검문을 받던 중 살해되었다. 본관은 삼척으로, 아호는 청송(靑松)이다.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사후 2평가 3작품 3.1작품성 3.2세계관 4가족 관계 5 6각주 7관련 서적 8 생애[편집] 청송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삼척 심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심운택(沈雲澤)과 어머니 최정배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심대규(沈大奎)는 명주군의 유학자였고, 그의 숙부 심우택(沈友澤)은 홍범도 등과 함께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소작농으로 생계를 영위했고, 자투라기 땅은 척박하여 소작료를 내고 나면 생계를 영위하기에는 부족하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모와 모친은 밤낮으로 길쌈을 하였다. 조부는 1925년 가족을 이끌고 로씨야 울라지보스토크로 이주했고, 숙부 심우택은 이때 홍범도 등과 함께 항일 의병에 가담하였다. 1931년 로씨야 원수 이오시프 스탈린은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집행하면서 조선인들을 먼 내지로 집단 이주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은 9.18사건을 전후하여 다시 만주로 내려와 중국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 공제촌(共濟村)으로 이주하였다.[1] 신안진에 2년 반 남짓 있을 때 심련수는 사회주의 이념을 접하고 당시 북만지구 조선인협회 회장이며 항일투사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김수산(金洙山)의 문하생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받았다. 그 후 심씨 일가는 다시 길림성 룡정시(당시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경화촌 길안툰)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룡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 12월 6일에 졸업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그는 문학에서 그 재능을 보여 문예반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여창의 밤”등 5편의 시-소설을 게재했다. 동흥중학 재학시 학교 교무주임인 장하일(張河一)의 부인이며 "인간문제"를 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 강경애(姜敬愛)와 교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련수는“나는 문인이 부럽다. 문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랴.”라고 일기문에 적으면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소설과 시, 그리고 잡지와 영화를 무척 즐기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졸업후 심련수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여 생업이 곤란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심련수를 도일시켜 유학하게 했다. 부친 심운택은 굶어죽는한이 있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시키겠으니 걱정 말고 일본으로 가서 청운의 뜻을 펴라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동생들도 자기네가 뒤를 섬길테니 꼭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고 형님의 등을 떠밀었다. 가족의 후원으로 심련수는 1941년에 일본 유학의 길에 올라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1943년 심련수는 서둘러 룡정으로 귀향했다. 원래는 3년제였던 예술대를 태평양 전쟁 시국과 동원령 때문에 학제를 2년 6개월로 줄여서 조기 졸업하게 되었다. 1943년 학도병 징집령이 떨어지자 그는 징집을 피해 은신하며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동 기간 중 그는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소학교 교사를 지냈다.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을 지내던 시기 학생들에게 반일 사상을 깨우쳐 준 것이 죄가 되어 두 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석방 후 1945년 2월 고향에 돌아왔다가 집안의 주선으로 백보배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돌아갔다. 7월 경 그는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패전 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다섯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도보로 국경을 넘어 룡정으로 되돌아가다 8월 8일 왕청현(汪淸縣) 춘양역(春陽鎭) 근처에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을 받던 중 피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피살 소식을 접한 심련수의 아버지가 달구지를 몰고 현장에 가자 그는 트렁크 가방 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한다. 트렁크가방과 시체를 같이 싣고 와 트렁크 가방을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고 한다.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있던 트렁크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것들이라고 한다. 사후[편집] 1946년 3월 시인의 시신이 수습되어 룡정 외곽의 토기동 선영에 매장되었다. 심련수가 요절한뒤 얼마 안 되어 유복자 심상룡(相龍)이 태어났다. 심상룡은 1966년 문화대혁명때 조선으로 이주, 현재 교포총국에서 중국 교포를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동생 심학수(學洙)는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김일성의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해져 후에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큰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고 막내동생 해수(海洙)는 해방 후 연변에서 문인으로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무렵 그의 가족은 일본특무에 부역한 가정으로 치부되어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 무렵 동생 심호수는 반란파들에게 물매를 당하면서도 비닐에 꽁꽁싸서 항아리속에 넣은후 땅속 깊이 파묻은 형의 귀중한 옥고를 내놓지 않았다. 그가 영면한 후 55년이 지난 뒤, 2000년 그의 동생 심호수가 항아리 속에 간직해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던 심련수의 시와 작품 편지 등의 유작을 공개했다. 평가[편집] 이렇게 어렵사리 보존해온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력사적 격변과 부담감이 주는 충격을 미학적인 위안으로 치유해”낸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연변과 한국의 학계는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 송몽규 등과 함께 저항시인의 한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연변에서는 “심련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작품[편집] 시적으로는 시인 이은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심련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가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작품성[편집] “룡정이 낳은 또 한명의 시인 심련수, 그의 이름과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주옥같은 시편들은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중앙대학교 교수 이명재는 그의 작품들은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으로서 “그 시대 민족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이라 평가하였다. 관동대학교 교수 엄창섭은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하였다. 세계관[편집] 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그는 조선총독부 치하의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해방)을 기다리는 의지를 은유했으며 “고집”에서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풍자를 가하기도 했다. 가족 관계[편집] 할아버지 : 심대규(沈大奎) 숙부 : 심우택(沈友澤) 아버지 : 심운택(沈雲澤) 어머니 : 최정배 남동생 : 심학수(沈學洙) 제수 : 항일투사 박관순[2]의 처제, 남동생 : 심해수(沈海洙, 문인·작가, 연변작가협회 회원) 부인 : 백보배 아들 : 심상룡(沈相龍, 1945년 - , 북한 교포총국 근무)       각주[편집] 이동↑ 당시 신안진에는 2만여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농업전문학교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집단부락을 시행하면서 공제촌을 6부락으로 개칭하였다. 이동↑ 김일성의 이종사촌이며 강돈욱의 외손 관련 서적[편집] 엄창섭, 《심련수의 시문학 탐색》 (제이콤씨, 2009)[쪽 번호 필요] ============================================   일제암흑기 혜성처럼 살다간 시인   “제2의 윤동주”- 심련수        뒤미처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레지스탕스 시인, 민족시인, 제2의 윤동주… 하지만 사후 55년만에야 유족에 의해 다량의 유고(遺稿)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심련수는 알려지기 시작했다.  심련수 시인이 유가족과 연변의 지성인들에 의해 발굴된지 10여년 그 조명작업은 그냥 이어지고 있다. 8월 7일 한국 강릉생가터에 심련수 흉상이 경립되고 8일 “2009 심련수 문학제”가 강릉에서 열리고 12일, 제9차 심련수 학술세미나가 중국 연길시에서 열리는 등 다채로운 학술, 문화행사가 이어지고있다.  필자는 몇해전 당시 룡정시 길흥촌 8대에 거취하고있던 심련수시인의 동생 심호수씨를 여러번 만나 가족의 증언으로 심련수시인에 대한 취재를 한적 있다. 오늘 유관자료와 가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심련수의 생애를 정리하여 다시 게재함으로써 새롭게 불붙고있는 심련수 조명작업에 보탬이 고자 한다.   - 편집자       청송(靑松)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삼척 심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심운택(沈雲澤)과 어머니 최정배씨 사이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여났다.  심련수의 할아버지 심대규(沈大奎)는 강릉일대에서 인끔높은 유학자였다. 삼촌 심우택은 홍범도 등과 어울려 반일활동에 나섰던 인물이였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심씨 가족은 어려운 소작인의 삶을 살고있었다. 자투라기 땅은 척박하여 소작료를 물고 나면 일곱 식구가 먹을 식량이 부족한 형편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모와 모친은 밤낮으로 길쌈을 하였다. 이 같은 현실 상황에서 조부는1925년 가족을 이끌고 로씨야 울라지보스토크로 이했다. 당시 동행한 심련수 시인의 삼촌 沈友澤은 그 곳에서 반일 단체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1년 로씨야 정부는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집행하면서 조선인들을 먼 내지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 강경책에 의해 심씨 일가는 9,18사건을 전후하여  중국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 공제촌(共濟村)으로 이주하였다.당시 신안진에는 2만여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농업전문학교까지 있었다. 그후 일제는 집단부락을 시행하면서 공제촌을 6부락으로 개칭하였다. 심련수는 2년 반 남짓 신안진에 체류하는 기간 당시 북만지구 조선인협회 회장이며 항일투사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김수산(金洙山)의 문하생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일면을 교육받았다.   그후 심씨 일가는 다시 길림성 룡정시(당시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경화촌 길안툰)으로 옮겨 정착했다.       동흥중학 시절의 심련수 (뒤줄 첫번째)     룡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소학교를 다닌 심련수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12월 6일에 졸업하였다. 이 시기 문학에서 그 재능을 보여 문예반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여창의 밤”등 5편의 시-소설을 게재했다. 동흥중학 재학시 학교 교무주임인 장하일(張河一)의 부인이며 "인간문제"를 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 강경애(姜敬愛)와 교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련수는“나는 문인이 부럽다. 문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랴.”라고 일기문에 적으면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소설과 시, 그리고 잡지와 영화를 무척 즐기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고 열정을 다져 갔다.   졸업후 심련수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심련수를 도일시켜 류학하게 했다. 부친 심운택은 굶어죽는한이 있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시키겠으니 걱정 말고 일본으로 가서 청운의 뜻을 펴라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동생들도 자기네가 뒤를 섬길테니 꼭 일본으로 류학을 가라고 형님의 등을 떠밀었다.   가족의 사랑을 안고 심련수는 1941년에 일본 류학의 길에 올라 일본대학 예술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되였다.   1943년 심련수는 서둘러 룡정으로 귀향했다. 원래는 3년제였던 예술대를 전쟁시국때문에 2년 6개월만에 졸업한것이였다.       일본류학시절 하숙생들과 함께 한 심련수 (앞줄)   그때 일본학도병징병이 터지자 몸을 피해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을 지내던 시기 학생들에게 반일사상을 깨우쳐준것이 죄가 되여 두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심련수와 부인 박보배 (약혼사진)   1945년2월, 고향에 돌아와 백보배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돌아갔다.   몇달후 일본 패망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다섯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도보로 룡정으로 돌아가다8월 8일 왕청현汪淸縣) 춘양역(春陽鎭)역에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으로 피살되여 비극적 생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일곱이였다.   비보를 접한 심련수의 아버지가 달구지를 몰고 현장에 이르니 아들은 트렁크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트렁크를 시체와 같이 싣고 와 트렁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고한다.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있던 트렁크에서 발견된것들이라고 한다.   1946년 3월, 시인의 시신이 수습되여 룡정 선영에 매장되였다.     한복을 입은 심련수   그가 시인 윤동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걸출한 민족작가인 사실이 알려지기 까지 력사는 반세기를 넘게 기다려야 했다. 고인이 영면한지 55년이 지난 2000년에야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항아리 속에 간직해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던 고인의 유작을 공개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심씨 가족은 일본특무 가정으로 치부되여 큰 곤혹을 치르기도했지만 심호수는 반란파들에게 물매를 당하면서도 비닐에 꽁꽁싸서 항아리속에 넣은후 땅속 깊이 파묻은 형님의 귀중한 옥고를 내놓지 않았다.       동생 심호수가 필사적으로 감추었다가 반세기만에 공개한 심련수의 시고와 일기   이렇게 어렵사리 보존해온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력사적 격변과 부담감이 주는 충격을 미학적인 위안으로 치유해”낸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이였던것이다. 오늘날 연변과 한국의 학계는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와 같은 반렬에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연변에서는 “심련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불붙기 시작했다.   심련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가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그의 시편들에는 일제치하의 설음,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력력하게 드러나고있다 남다르다고 할만큼 강렬한 민족정신을 가진 심련수였기에 당시 민족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조선말 작품을 발행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그의 저항성은 시와 일기 곳곳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해방)을 기다리는 의지를 은유했으며 “고집”에서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메스를 가하기도 했다.   “룡정이 낳은 또 한명의 시인 심련수, 그의 이름과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주옥같은 시편들은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것”(연변 학계)인바 그의 작품들은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한국 (중앙대 리명재교수)으로서 “그 시대 민족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되고있으며,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관동대 엄창섭교수)는평을 받고있다.   우리 말 글사용을 금지당하고 친일문학가가 득세하는 등 일제암흑기 우리민족의 문학상황은 그동안 “문학의 공백기”로 남아있기에 한국 학계에서는 심련수의 뒤늦은 등장은 1941~1945년 한국문학사의 암흑기를 규명하는 키가 될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있다. 또 당시 룡정을 중심으로 지금의 연변지역에서 조선족문학연구의 밑그림을 그리는 기초 작업으로도 될것이며 중국조선족의 위용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는 계기가 될것이다.   조선족문학 내지 한국문학사에 있어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확인되기에 충분한 물적 사료가 확보되여뒤늦게 실체를 드러낸 심련수, 27년의 짧은 생애를 초 쟏르적으로 활동하며 민족혼을 불사른 심련수는 민족문단의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2009년 8월 7일 한국 강릉 난곡동 율곡병원 뒤 생가터에 심련수 시인의 흉상이 경립되였다.     부록:   심련수 시인의 가족관계를 보면- 심련수가 요절한뒤 얼마안되여 유복자 심상룡(相龍)이 태여났다. 심상룡은1966년 문화대혁명때 조선으로 이주, 현재 교포총국에서 중국 교포를 담당하고 있는것으로 전한다.    시인의 첫째 남동생 심학수(學洙)는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김일성의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해져 후에 동서지간이 되였으며 큰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고 막내동생 해수(海洙)는 해방후 연변에서 문인으로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9/8/17         [출처] “제2의 윤동주”- 심련수 |작성자 김 혁 ====================================== [언어철학연구] 발굴자료 민족시인 심련수 시해설 * 이 내용은 중국조선족문화예술인후원회 도움을 받아 중국연변 조선족자치구 조선문학가협회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조선족문학전집 제1권 심련수시인 편을 참조한 것입니다. 일제 암흑기 윤동주시인과 동시대인이면서 윤동주시인보다 먼저 시인이 된 심련수시인의 비극적 짧은 일생을 우리 후손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민족시인 심련수선생 아들이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으며 지금은 화교담당관이기에 북한 로동신문을 통해 발표된바 있음을 밝힙니다.  ...................................................................  민족시인 심연수의 대표시 해설  - 일제 암흑기와 심연수 문학의 개요 -  이 재 호(한국언어철학연구회장)  l. 심연수 시인을 중심으로  1936년 일본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앞세워 이라는 통치방침을 표방한다. 보다 철저한 우리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는데 면 단위마다 신사 설치를 하게 하고 l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할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강령에 따라 한국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과 만주의 교육령을 개정, 학교의 명칭, 교육 내용을 일본 학교와 동일하게 했다.  일제는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l939년, 창씨개명 제도를 실시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 전쟁터와 탄광 등지로 끌고 갔다.  l940년부터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말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강제 해산시켜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했다.  심연수 시인은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 우리의 정신인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흥중학을 2l살의 나이에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발굴된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의 작품들은 l939년부터 l943년까지 5년 동안의 미발표작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일제는 l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만들었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했으며 l94l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 언제라도 감금이 가능한 체체를 갖추였으며, l942년 학도동원체제, 국민근무체체 등 징용의 강제력을 비상수단화했다. l943년과 l944년에는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심연수 선생이 l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용정에 돌아오면서부터 일제의 학도병 강제소집을 피해 신안진으로 가 초등학교에서의 교원생활을 통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고취한 사실과 이로 인해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갇힌 것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사실을 먼저 알고 해방의 기쁨을 맞기 위해 신안진에서 용정까지 걸어서 오던 중 l945년 8월8일 일본군에 의해 마침내 확인 사살된 근거가 일본의 학병제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고 당시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묵살된 바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필자는 l944년 일제가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 하여금 전쟁 지속을 위해 비협조적인 한국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과 탄압과 검거에 이어 1945년부터 징집을 피해 다니는 한국인들을 발견 즉시 확인사살을 명령한 바 있음을 문제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l944년 8월 여자정신대 근로령과 l945년 애국반, 경방단 등의 조직적인 한국인 통제가 주 원인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계속된 만행임을 심연수 시인의 발굴 과정에서 밝혀냄으로 민족 시인의 자리매김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한편 일제의 만행에 의한 심련수선생의 죽음에 대해서 일부 도적들에 의한 것일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있지만 이는 심련수선생을 모독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치하는 사실이며 일본 경찰은 이들 도적의 무리들 까지도 일제의 압잡이로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심연수 시문학의 특징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어휘력은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시적 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언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무슨 애련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감각적 시풍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서 문학혼을 불태우고 삶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또한 강인하고 비타협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정의와 신념, 그리고 남성적 삶의 지조를 견지하는 서정적 자아의 지사의식과 주의시적(主意詩的) 기법이 모던하고 비장하다.  심연수 시인의 시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현상은 약소 민족에 의한 현실적 고민을 문학을 통해 초월하는 진실과 자유와 생명력의 서정적 자아의지 극복이라 할 것이다. 이는 적극적 정서의 측면이 강렬한 만큼 선생의 시가 르포르타주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리적 리얼리즘을 시의 한 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문학을 통한 투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적 언어의 리얼한 비유와 은유의 씀씀이가 모던하게 내면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한계의식에 의한 초월조건을 차용하는 것인데 아러한 정신적인 힘이나 시적 경향은 내적 관조보다는 능동적인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거창성과 모호성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연수 시인의 시적 자아가 비교적 직설적이며 작품이 생경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감칠맛이 덜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 배합을 보면 단순미와 함께 절대생활용 어미의 변용을 보편적인 일상용어로 다스려나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내적 의지를 본질로 하는 순수함이나 긴요한 정직성과 그 독창적인 시작법은 시적 공감에 따른 윤리적 교훈뿐 아니라 고귀한 의지의 언어 경험을 감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한 근대정신이라 할 휴머니즘의 시적 주제의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연수 시인의 문학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나 그 의식구조가 인간 중심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중심성을 실현코자 하는 시적 휴머니티가 돋보인다.  시대적 피지배 현상에 따른 합리적 휴머니스트로 민족 구성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음을 선생의 문학은 웅변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전집에 수록된 선생의 시와 시조가 보고 읽는 이에 따라 다소 편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그 이유를 큰 관점에서 볼 때 심연수 문학의 초기시와 후기시의 영향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또한 일본 유학 시기와 유학 후에 창작된 시편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것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한 문학의 정보 역량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학에의 변화는 일본에서 친구 이기형(생존) 선생과 함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나서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심연수 시인의 지사적 열정이 때로는 강인한 신념에 의한 시적 체험으로 다소 엇갈리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문학적 정의가 아름다운 것은 심연수 시인이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발굴되어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다는 것이다.  3. 심연수 시인의 시적 언어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은 시의 종결어미에 있어 남다른 언어 씀씀이를 보이고 있다.  들으라, 부르라, 보라 할꼬. 배였구나, 설레인다, 가누나, 가버린다, 주려무나, 스며든다, 찾더라오, 어찌한담, 왠일인고, 나이다, 주었소, 으리니, 오리다, 얻노라, 쉬다니, 소이다, 오지요, 자란다, 큰다, 굶어라, 네것이다, 로다, 납소, 소서, 는고, 세라, 으리라, 더이다, 졌구나, 일이냐, 맞노라, 스럽다, 것이다, 봐라, 하여라, 들이다, 었다, 알리라, 다녔다, 하구나, 였구나, 싶구나, 좋겠소, 하나니, 이냐, 하라, 한다, 간다, 썼다, 란다  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시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시적 용어임을 알 수가 있다. 선구자적 언어의 배열을 몸에 익힌 듯한 이 종결어미의 사용은 심연수 시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주의시적 시관을 통해 역사적 격변과 충격을 시적 위안으로 삼았는지 그 심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관조일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적 대상으로 민족의 생활양식을 가장 먼저 꼽고 있다. 우리 민족이 늘 꿈꾸는 지평선이며, 대지며, 나무며, 들이며, 바다와 강, 그리고 아침과 낮과 밤이며, 새벽을 주제로 노래했다. ‘나와 너’와 ‘우리들’과 ‘나그네’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한편 ‘소년’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민족해방 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심연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징은 시의 직설적 표현 기법을 쓰고 있음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풍이 주의시적 경향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시어의 선택이란 목적시의 유형을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블구하고 서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그 문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선생의 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등을 내용으로 한 시적 언어 구성은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데 있어 바로미터가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l943년 당시 일제의 탄압과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의한 검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연수 선생의 시 대부분이 직설적이며 주의시적(主意詩的)임으로 목숨을 건 시작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이 위대한 민족시인을 일본이 몰랐다는 것은 이해 밖의 일이었다. 일제의 확인된 학살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민족시인들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심연수 시인에 대한 애착은 시인이 자신의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문학이라는 정신적인 무장으로 일본에 저항한 그 숭고함 때문이다.  4. 대표시의 감상과 이해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까이에 왔다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였다  전지는 남의 것이 되었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 게다  가산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갔지만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 보아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  서투른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울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를 명심하자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시가 별로 없었던 시기에 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윤동주시인과 동시대인이면서도 윤동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학을 보여준 것으로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불태운 청년 심연수 시인의 짧고 위대한 영혼이 문학을 통해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시인이었음도 그의 시 도처에서 밝혀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아부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선택받아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을 일제로부터 저항의 탈출구로 삼았던 심연수 선생은 오히려 일본을 알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한편, 선생의 수많은 유작 가운데 와 , , 등 이미 앞에서 열거한 시작들이 가장 극명하게 선생의 저항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년과 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시구 풀이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리얼하게 암묵적 은유기법을 이용하여 명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봄은 가까이에 왔다(=일제로부터 민족 해방)”는 전제를 통해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는다고 예견하는 자연의 이치를 시적 바탕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그 이미지의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너의 조상은 농부”였고, “너의 아버지도 농부”라 말하는 시적 언어 속성에서 보듯이, 일제에 강점당한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비유할 뿐 아니라 농부가 뜻하는 경작의 형상화를 교훈조로 통찰케 한다.  제5행에 이르러 시인은 봄과 소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은유하면서 직관을 차용한 극복의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농사를 지을 “전지(땅)는 남의 것(=일제에 빼앗김)이 되었으나 / 씨앗(=민족해방을 위한 국권 회복)은 / 너의 집에 있을” 것이라며 예언자적 저항성을 표현하고 있음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 시에서 백미를 장식하는 6행에서 16행까지의 시적 긴장감은 투사적 언어 씀씀이가 그 위대성을 발휘하고 있다.  “가산은 팔렸으나 /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에서 가산과 나무의 역할 분담을 이중화시킨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목숨을 내건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 갔”다는 시적 진술은 선생 자신의 고백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끌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민족의 구성원은 빼앗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구나) /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보아라(=여기에서 화덕과 숯의 역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뿐 아니라 3·l 독립 징신을 시적 내용의 화두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너의 집이 가난해도 /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이 지사적 통찰력은 민족 해방의 깨달음을 염두에 둔 선생 특유의 시적 기법으로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서툰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선생의 시적 정서와 의지적 언어관은 보편적 민족성을 획득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딘 연장이란 우리 문화적 역사성과 민족성을 은유하고 있다.모국어에 담겨 있는 문학의 전통성을 선생께서 후세에까지 교감케 한 그 민족적 체취는 경건한 것이기도 하다) / 너는 농부의 아들 / … / 겨울은 가고야 만다(= 일제 시대는 겨울과 같아서 패망할 것이다) / 계절의 순차를 명심하자 /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자연의 이치를 이 시 속에 도입한 선생의 내적 고백성은 역동성을 갖기에 더욱 선명하다. 선생의 내적 의지의 발현 또한 민족의 자아를 찾는 데 목숨 건 비장함을 동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비타협적이며 시적 생명의 의지를 민족애 하나로 견지하다 일본 헌병의 조준된 흉탄에 젊은 청춘을 버린 민족시인의 숭고한 시정신을 우리는 다시 찾아 기려야 할 일이다.(설혹 일제의 조준 확인 사살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일제는 우리 지식인 즉 심련수시인과 같은 민족의 지도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민족시인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전망한다. 심연수 시인이 이육사 선생과 이상화 시인과 같은 분들에 비해 한치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이 작품 이외에도 선생께서 남기신 수많은 유작들이 증명하고 있다.  고집  고집을 써라 끝까지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고  타고난 엇장을 굽히지 말라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우기고 뻗치다 꺾어지건 통쾌해도  뉘게다 굽석거리는 꼴은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쟁의 의도는 지조와 절개와 같은 것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시 이 뜻하는 민족정신의 뚜렷한 목적이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고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 것을 강변하면서, 우리의 “타고난 엇장(비분, 기개, 고집불통, 비타협)”과 같은 절개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절망을 희망이라 하고)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일제의 거짓말을 비유하고 있음)”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선생은 이라는 이 시에서 그 저항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즉 사랑이 썩어 냄새난다고 뻗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뻗치다의 말뜻이 갖는 시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지조와 절개의 정신과 맥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 차라리 꺾어질지라도 타협하거나 일제에 순종하지 말 것을 고집이라는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뉘게다(누구에게) 굽석(굽신)거리는 꼴은 /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하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턴넬  길다란 턴넬  감캄한 굴 속  자연이 가진 신비를  뚫어놓은 미약한 힘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찾아도  밟히우는 송장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아, 빛이 없어 죽었나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레루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또 어찌하리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  우를 우러러도  아래를 굽어보아도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시의 본성, 곧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예술인가? 시는 어떤 언어인가? 시는 어떤 역사와 사회적 문화 현상인가? 시는 어떤 심혼의 소산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제의 흉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된 과제였을 터이다.  시가 당시의 현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던 선생으로서는 민족문학을 위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43년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오던 해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진 시 은 선생의 문학적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 시를 읽지 않으면 심연수 선생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터넬과 선생의 시 터넬이 뜻하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길다란 턴넬(=일제의 오랜 억압) / 캄캄한 굴 속(=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생활) / 자연이 가진 신비를 / 뚫어 놓은 미약한 힘(=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 눈을 감고 걸어도 / 눈을 뜨고 걸어도 / 밟히우는 송장(=일제 식민 치하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 /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 아, 빛이 없어 죽었나 / 빛이 싫어 죽었나(=자포자기한 상태의 암울한 현실을 비유) /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 레루(레일)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 또 어찌하리”  일제는 그들의 야욕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으나 철로에 놓인 침목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은 이 시는 확실한 증언처럼 증명하고 있음이다.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 울부짖는 소리”  선생께서 턴넬을 바라볼 때마다 일제가 학살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목숨들과 그 영혼의 처절한 울음 소리를 귀에 쟁쟁 듣지 않았으랴.  “우를 우러러도 / 아래를 굽어보아도 /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이 시의 자아의지가 턴넬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턴넬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적극적인 의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문학은세계를 지성적으로 갈파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의 뜻  읽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보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더이다  ─ 원문(당시 사용되는 언어)  읽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보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고 있습니다  ─ 수정(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봄을 뜻으로 풀이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전체 6행의 시적 언어 의미가 ‘알았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을 읽고 알았다는 것은 님이라고 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님은 봄이 뜻하는 개화와 해방의 님인 것이다.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싯구는 “글자마다 살”아 있다는 것과 그 “구절마다 마음이 뛰고 있”더라고 하는 내적 의미의 완결성이다.  봄의 뜻이 담고 있는 독창성은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의 주제의식이 참신해야 한다. 따라서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이원성은 봄이라고 하는 의미를 뜻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이 작품의 독창성과 함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   민족시인 심련수의 대표시 해설  - 일제 암흑기와 심련수 문학의 개요 - 이 재 호(시인 . 한국언어철학연구회장)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 제1권으로 심련수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일제 시대를 조명할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 할수 있을 것이다.  비록 뒤늦긴 했지만 국내에서도 주요 일간지와 방송 등에 소개된 암흑기의 시인 심련수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정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가혹하기만 했던 일제의 폭압은 친일문학을 양산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친일 문학은 문학이라 할수 없을만큼 질량적으로 함량미달이었다. 우리 국내와는 다르게 비교적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던 당시 간도지역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순수한 한글 문학 세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 언어연구에 있어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심련수는 재학중 문예반장이었다는 것이고 그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 만선일보에 이러한 작품을 발표한다.   시 : 대지의 봄 봄을 잊은듯하던 이 땅에도/소생의 봄이 찾아오고/  녹음을 버린듯이 얼었던 강에도/얼음장 내리는 봄이 왔대요.  눈 위의 마른풀 뜯던/불쌍한 양의 무리/새 풀 먹을 즐거운 날/  멀지 않았네/넓은 황무지에단/신기루 궁을 짓고/  새로 오신 봄님 맞이/잔치놀이 한다옵네  옛 봄이 가신 곳/내 일 바빠 못 왔길레/  올해 오신 이 봄님은/ 누구더러 보라 할꼬    시 : 여창의 밤 길손이 잠못 이루는/이 한밤/  호창의 희미한 등불/더욱이나 서글퍼요  갈자리 튼 눈에는/뭇손의 여진이 절어 있고/  칼자리 난 목침에는/여수가 몇천번 베어졌댔나  지난 손 홧김에/ 애꿎이 태운 담배 꽁다리/  구석에 타고 있어/마음 더욱 설레인다  어두운 이 밤길에 달리는 여차/왈그럭 덜그럭/  호마의 발굽과 무거운 바퀴/이 마음 밟고 넘어 가누나   여기 이 시를 발표한 만선일보란 우리 민족의 서러운 역사가 스며있던 치욕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신문은 원래 용정에서 나왔고 간도일보와 신경에서 나왔던 만몽일보를 합쳐 중국어와 한국어로 낸 신문이었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1907년 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 1931년 만주사변을 유발 시키고 괴뢰 만주국을 세워  꼭두각시 부의를 황제로 삼아 길림성 장춘을 수도로 정해 신경이라 개칭한 것이다.  이때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민족어로 된 신문을 일제 기관지로 내게 되는데 이것이 한글판 만선일보였다.  모든 실권을 일본놈이 잡았으며 신문사 고문에는 최남선,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  사회 학예부장에 시인 박팔양 등이 몸담기도 했다. 후일 해방이 되고 작가 안수길,홍양명,이갑기,손소희 등 여러 문인들이 인연을 맺은 신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국내보다 이곳 문학이 더 왕성하고 자유로웠다 할수도 있다.  이것은 심련수문학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확인되지 못하였을 것이다.(자료:연세대학 도서관)  심련수의 조부 심대규는 강릉 일대 호남으로 술을 즐긴 의리파였다고 한다.  삼촌 심우택은 독립운동가로 이동휘 등과 함께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련수 아버지는 심운택이며 심련수시인의 남동생 심학수는 당시 흑롱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북한 김일성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하면서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큰 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으며 심련수시인 막내 동생 심해수는 해방 후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문학활동을 한 것도 밝혀졌다.  심련수가 동흥중학 재학시 여류작가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동흥중학 교무주임이었다는 것도,  또 심련수시인과 가까웠다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심련수의 일기는 1년분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소중한 자료는 수학여행 일정과 당시 풍물을 담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기행시 뿐 아니라  용정에서 도문-원산-금강산-서울-개성-평양-신의주-봉천-대련-신경-하얼빈-목단강 등을 돌아본  수학여행 일정 등 조국순례 대행진을 할 수 있는 민족애를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 가운데 윤동주는 무엇을 했느냐이다.  윤동주 동생 윤광주와 심련수 동생 심해수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자료에 따르면 윤동주 동생은 심해수에게 윤동주가 보고 읽었던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라  여겨지는 자료들을 전해 주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 속에는 윤동주가 스스로 스크랩해서 만든 일제 당시 우리 국내주요 일간지에 실린  각종 문학기사와 저명한 문인들의 글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윤동주 스스로가 부농의 아들이었기에 문학을 하는 가난한 심련수를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멀리했다는 것이 자료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이다. 윤동주는 당시 용정 광명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연희전문(현 연세대학)을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면서 1942년 일본으로 가서 릿교대와 동지사대를 다녔다.  일본에서도 윤동주와 심련수는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들은 단 한번도 만났다고 하는 기록이 없는지  필자로서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던 것이다.   l. 심련수 시인을 중심으로   1936년 일본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앞세워 이라는 통치방침을 표방한다. 보다 철저한 우리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는데 면 단위마다 신사 설치를 하게 하고 l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할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강령에 따라  한국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과 만주의 교육령을 개정, 학교의 명칭, 교육 내용을 일본 학교와 동일하게 했다.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l939년, 창씨개명 제도를 실시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 전쟁터와 탄광 등지로 끌고 갔다.  l940년부터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말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강제 해산시켜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했다. 심련수 시인은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 우리의 정신인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흥중학을 2l살의 나이에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발굴된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의 작품들은 l939년부터 l943년까지 5년 동안의 미발표작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일제는 l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만들었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했으며 l94l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  언제라도 감금이 가능한 체체를 갖추였으며, l942년 학도동원체제, 국민근무체체 등 징용의 강제력을 비상수단화했다.  l943년과 l944년에는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심련수 선생이 l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용정에 돌아오면서부터 일제의 학도병 강제소집을 피해 신안진으로 가  초등학교에서의 교원생활을 통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고취한 사실과 이로 인해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갇힌 것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사실을 알고 신안지에서 용정까지 걸어서 오던 중 l945년 8월8일 일본군에 의해 마침내 확인 사살된 근거가 학병제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고 당시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묵살된 바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따라서 필자는 l944년 일제가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 하여금 전쟁 지속을 위해 비협조적인 한국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과 탄압과 검거에 이어 1945년부터 발견 즉시 확인사살을 명령한 바 있음을 문제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l944년 8월 여자정신대 근로령과 l945년 애국반, 경방단 등의 조직적인 한국인 통제가 주 원인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계속된 만행임을 심연수 시인의 발굴 과정에서 밝혀냄으로 민족 시인의 자리매김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2. 심련수 시문학의 특징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어휘력은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시적 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언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무슨 애련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감각적 시풍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서 문학혼을 불태울 삶의 결연한 사실주의적 경향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또한 강인하고 비타협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정의와 신념, 그리고 남성적 삶의 지조를 견지하는 서정적 자아의 지사의식과 주의시적(主意詩的) 기법이 모던하고 비장하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현상은 약소 민족에 의한 현실적 고민을 문학을 통해 초월하는 진실과 자유와 생명력의 서정적 자아의지 극복이라 할 것이다. 이는 적극적 정서의 측면이 강렬한 만큼 선생의 시가 르포르타주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리적 리얼리즘을 시의 한 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문학을 통한 투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적 언어의 리얼한 비유와 은유의 씀씀이가 모던하게 내면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한계의식에 의한 초월조건을 차용하는 것인데 아러한 정신적인 힘이나 시적 경향은 내적 관조보다는 능동적인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거창성과 모호성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자아가 비교적 직설적이며 작품이 생경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감칠맛이 덜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 배합을 보면 단순미와 함께 절대생활용 어미의 변용을 보편적인 일상용어로 다스려나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내적 의지를 본질로 하는 순수함이나 긴요한 정직성과 그 독창적인 시작법은 시적 공감에 따른 윤리적 교훈뿐 아니라 고귀한 의지의 언어 경험을 감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한 근대정신이라 할 휴머니즘의 시적 주제의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련수 시인의 문학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나  그 의식구조가 인간 중심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중심성을 실현코자 하는 시적 휴머니티가 돋보인다. 시대적 피지배 현상에 따른 합리적 휴머니스트로 민족 구성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음을 선생의 문학은 웅변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전집에 수록된 선생의 시와 시조가 보고 읽는 이에 따라 다소 편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유를 큰 관점에서 볼 때 심련수 문학의 초기시와 후기시의 영향 때문이리라.   또한 일본 유학 시기와 유학 후에 창작된 시편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것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한 문학의 정보 역량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학에의 변화는 일본에서 친구 이기형(생존) 선생과 함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나서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심연수 시인의 지사적 열정이 때로는 강인한 신념에 의한 시적 체험으로 다소 엇갈리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문학적 정의가 아름다운 것은 심연수 시인이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발굴되어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다는 것이다. 3. 심련수 시인의 시적 언어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은 시의 종결어미에 있어 남다른 언어 씀씀이를 보이고 있다. 들으라, 부르라, 보라 할꼬. 배였구나, 설레인다, 가누나, 가버린다, 주려무나, 스며든다, 찾더라오,  어찌한담, 왠일인고, 나이다, 주었소, 으리니, 오리다, 얻노라, 쉬다니, 소이다, 오지요, 자란다, 큰다, 굶어라, 네것이다, 로다, 납소, 소서, 는고, 세라, 으리라, 더이다, 졌구나, 일이냐, 맞노라, 스럽다, 것이다, 봐라, 하여라, 들이다, 었다, 알리라, 다녔다, 하구나, 였구나, 싶구나, 좋겠소, 하나니, 이냐, 하라, 한다, 간다, 썼다, 란다   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시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시적 용어임을 알 수가 있다.  선구자적 언어의 배열을 몸에 익힌 듯한 이 종결어미의 사용은 심연수 시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주의시적 시관을 통해 역사적 격변과 충격을 시적 위안으로 삼았는지 그 심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관조일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적 대상으로 민족의 생활양식을 가장 먼저 꼽고 있다. 우리 민족이 늘 꿈꾸는 지평선이며, 대지며,  나무며, 들이며, 바다와 강, 그리고 아침과 낮과 밤이며, 새벽을 주제로 노래했다.  ‘나와 너’와 ‘우리들’과 ‘나그네’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한편  ‘소년’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민족해방 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심련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징은 시의 직설적 표현 기법을 쓰고 있음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풍이  주의시적 경향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시어의 선택이란 목적시의 유형을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블구하고 서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그 문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선생의 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등을 내용으로 한 시적 언어 구성은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데 있어 바로미터가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l943년 당시 일제의 탄압과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의한 검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연수 선생의 시 대부분이 직설적이며 주의시적(主意詩的)임으로 목숨을 건 시작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이 위대한  민족시인을 일본이 몰랐다는 것은 이해 밖의 일이었다. 일제의 확인된 학살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민족시인들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심연수 시인에 대한 애착은 시인이  자신의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문학이라는 정신적인 무장으로 일본에 저항한 그 숭고함 때문이다. 4. 대표시의 감상과 이해 주의시적 표상과 끈질긴 서장적 자아   ..........이 재 호시인 선정 심련수 대표작............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까이에 왔다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였다  전지는 남의 것이 되었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 게다  가산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갔지만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 보아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  서투른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울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를 명심하자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시가 별로 없었던 시기에 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불태운 청년 심련수 시인의 짧고 위대한 영혼이 문학을 통해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시인이었음도 그의 시 도처에서 밝혀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아부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선택받아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학을 일제로부터 저항의 탈출구로 삼았던 심련수 선생은 오히려 일본을 알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한편, 선생의 수많은 유작 가운데 와 , , 등 이미 앞에서 열거한 시작들이 가장 극명하게 선생의 저항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년과 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시구 풀이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리얼하게 암묵적  은유기법을 이용하여 명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봄은 가까이에 왔다(=일제로부터 민족 해방)”는 전제를 통해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는다고 예견하는 자연의  이치를 시적 바탕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그 이미지의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너의 조상은 농부”였고,  “너의 아버지도 농부”라 말하는 시적 언어 속성에서 보듯이, 일제에 강점당한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비유할 뿐 아니라  농부가 뜻하는 경작의 형상화를 교훈조로 통찰케 한다. 제5행에 이르러 시인은 봄과 소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은유하면서 직관을 차용한 극복의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농사를 지을 “전지(땅)는 남의 것(=일제에 빼앗김)이 되었으나 / 씨앗(=민족해방을 위한 국권 회복)은 / 너의 집에 있을” 것이라며 예언자적 저항성을 표현하고 있음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 시에서 백미를 장식하는 6행에서 16행까지의 시적 긴장감은 투사적 언어 씀씀이가 그 위대성을 발휘하고 있다.  “가산은 팔렸으나 /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에서 가산과 나무의 역할 분담을 이중화시킨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목숨을 내건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 갔다"는 시적 진술은 선생 자신의 고백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민족의 구성원은 빼앗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구나) /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보아라(=여기에서 화덕과 숯의 역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뿐 아니라  3·l 독립 징신을 시적 내용의 화두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너의 집이 가난해도 /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이 지사적 통찰력은 민족 해방의 깨달음을 염두에 둔 선생  특유의 시적 기법으로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서툰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선생의 시적 정서와 의지적 언어관은 보편적 민족성을 획득하고 있다. 모국어에 담겨 있는 문학의 전통성을  선생께서 후세에까지 교감케 한 그 민족적 체취는 경건한 것이기도 하다) / 너는 농부의 아들 / … / 겨울은 가고야 만다 (= 일제 시대는 겨울과 같아서 패망할 것이다) / 계절의 순차를 명심하자 /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자연의 이치를 이 시 속에 도입한 선생의 내적 고백성은 역동성을 갖기에 더욱 선명하다. 선생의 내적 의지의 발현 또한 민족의 자아를 찾는 데 목숨 건 비장함을 동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비타협적이며 시적 생명의 의지를 민족애 하나로 견지하다 일본 헌병의 조준된 흉탄에  젊은 청춘을 버린 민족시인의 숭고한 시정신을 우리는 다시 찾아 기려야 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민족시인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전망한다.  심련수 시인이 이육사 선생과 이상화 시인과 같은 분들에 비해 한치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이 작품 이외에도 선생께서 남기신 수많은 유작들이 증명하고 있다.   고집   고집을 써라 끝까지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고  타고난 엇장을 굽히지 말라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우기고 뻗치다 꺾어지건 통쾌해도  뉘게다 굽석거리는 꼴은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쟁의 의도는 절개와 같은 것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시 이 뜻하는 민족정신의 뚜렷한 목적이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고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 것을 강변하면서, 우리의 “타고난 엇장(비분, 기개, 고집불통, 비타협)”과 같은 절개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절망을 희망이라 하고)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일제의 거짓말을 비유하고 있음)”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선생은 이라는 이 시에서 그 저항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즉 사랑이 썩어 냄새난다고 뻗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뻗치다의 말뜻이 갖는 시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절개의 정신과 맥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 차라리 꺾어질지라도 타협하거나 일제에 순종하지 말 것을 고집이라는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뉘게다(누구에게) 굽석(굽신)거리는 꼴은 /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하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턴넬   길다란 턴넬  감캄한 굴 속  자연이 가진 신비를  뚫어놓은 미약한 힘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찾아도  밟히우는 송장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아, 빛이 없어 죽었나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레루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또 어찌하리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  우를 우러러도  아래를 굽어보아도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시의 본성, 곧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예술인가? 시는 어떤 언어인가? 시는 어떤 역사와 사회적 문화 현상인가? 시는 어떤 심혼의 소산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제의 흉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된 과제였을 터이다.  시가 당시의 현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던 선생으로서는 민족문학을 위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43년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오던 해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진 시 은 선생의 문학적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 시를 읽지 않으면 심연수 선생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터넬과 선생의 시 터넬이 뜻하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길다란 턴넬(=일제의 오랜 억압) / 캄캄한 굴 속(=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생활) / 자연이 가진 신비를 / 뚫어 놓은 미약한 힘(=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 눈을 감고 걸어도 / 눈을 뜨고 걸어도 / 밟히우는 송장(=일제 식민 치하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 /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 아, 빛이 없어 죽었나 / 빛이 싫어 죽었나(=자포자기한 상태의 암울한 현실을 비유) /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 레루(레일)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 또 어찌하리”   일제는 그들의 야욕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으나 철로에 놓인 침목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은  이 시는 확실한 증언처럼 증명하고 있음이다.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 울부짖는 소리”  선생께서 턴넬을 바라볼 때마다 일제가 학살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목숨들과 그 영혼의 처절한 울음 소리를 귀에 쟁쟁 듣지 않았으랴. “우를 우러러도 / 아래를 굽어보아도 /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이 시의 자아의지가 턴넬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턴넬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적극적인 의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문학은세계를 지성적으로 갈파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의 뜻   읽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보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더이다 ─ 원문(당시 사용되는 언어) 읽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보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고 있습니다 ─ 수정(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봄을 뜻으로 풀이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전체 6행의 시적 언어 의미가 ‘알았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을 읽고 알았다는 것은 님이라고 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님은 봄이 뜻하는 개화와 해방의 님인 것이다.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싯구는 “글자마다 살”아 있다는 것과 그 “구절마다 마음이 뛰고 있”더라고 하는 내적 의미의 완결성이다.  봄의 뜻이 담고 있는 독창성은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의 주제의식이 참신해야 한다. 따라서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이원성은 봄이라고 하는 의미를 뜻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이 작품의 독창성과 함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짧은 시이긴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 또한 충족하고 있다. 봄의 뜻이 말하고자 하는 심미성, 대중성, 상징성이 시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서 살아 있는 정서를 경험케 한다.  따라서 원문과 수정된 시를 함께 싣는 것은 1940년대 당시에 사용된 우리말의 씀씀이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참고되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새벽   미명의 광야를  달리는 자 누구냐  동 터올 새벽을 기뻐 맞을 젊은이냐  짧아진 희대에 활활 붙는 불  새빨간 불길이 춤을 춘다  푹푹 우그러든 자국마다  땀이 고였고  대기를 몰입한 듯한 호흡의 율동  지심을 놀랠 만한 그 무보(武步)는  피 묻은 싸움의 여세(餘勞)의 연장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승리자여,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그의 얼굴을  그의 몸을 비치리니  속으로 웃어 마음에 간직하라  잡고 있는 횃불 아래  따라오는 무리의 갈 길을  가르쳐주라  해 돋는 동쪽 하늘가  넓고 넓은 그곳으로 심련수 시인의 일반적인 시들의 주제가 주의시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두운 시대에 대한 고뇌와 자아 성찰이 비교적  쉽고 상징적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회의와 번민, 처절한 고독 속에서의 희망을 잃지 않는 새벽을 꿈꾸는 자세는 예언자적 미명을 기다리고 있다.  지성의 면모를 보는 듯하지 않는가? 시대의 현실을 통찰하는 이 역사적 자아의 승화는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벽이라는 이 시의 주제의식은 우리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간절함을 비유와 은유기법을 이용해서 작품화했다.  시인의 시적 소재는 실제의 사건과 그 일어날 것에 대한 개연성과 필연성을 동시에 갖는다.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보편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성이란 우리 민족의 미명인 해방이라는 현실적인 명제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 가능성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 승리자여, /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비칠 것이니, 이때 마음 속으로 웃고 그 섭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심연수 시인의 시적 의지가 불가능을 가능한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의 가능성은 믿을 수 없지만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이 있음을 필자는 믿고 있다.  심연수 시인의 시 은 민족의 숙원인 해방을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의 새벽으로 본 것이라는  점에서 예지적인 시인의 통찰력을 놓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다. 등불   존엄의 거룩한 등불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다가  한줄기 폭풍에 꺼져버렸습니다  그 옛날 조상께서  처음 켠 그 불이  그동안 한 번도 꺼짐이 없이  이 안을 밝혀 왔습니다.  그들은 그 빛을 보면서  옛일을 생각하였고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는 이 있으니  또 다시 밝아질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그 등잔에는 기름도 많이 있고  심지도 퍽으나 기오니  다시 불만 켜진다면  이 집은 오래 오래 밝아질 것입니다.   이 시의 시적 언어의 특성은 함축적인 의미의 서정을 예언자적 목소리로 표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정적  자아는 민족의 역사적 숨결을 느끼게 한다. 등불을 일컬어 ‘존엄’이라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민족애의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줄기 폭풍’에  비유되는 일제치하를 시인은 집 안의 촛불이 꺼진 것으로 바라볼 만큼 비범하기까지 하다.  내면의 토로가 이러할 만큼 내적 의지의 시적 구현이 분노보다 저항보다 더 이상적이다.  배경지식 없이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 같지는 않다. 들불   임자 모를 불  거침없이 타는 천리 저쪽 녘  누가 놓은 블씨이기에  저토록 꺼짐 없이  밤하늘을 붉히느뇨  사정없이 타오르는  불길! 불길! 불길!  끌래야 끌 수 없는 위대한 작탄!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아 있을지  어두운 저녁 혼자 보는 들불  그 불똥이 이 가슴에 튀어오기를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말없이 숭엄히 바라보노라.   l945년 2월 16일, 이 날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날이다.  1945년 8월 8일, 이 날은 심연수 시인이 학살된 날이다.  여기에서 윤동주와 심연수라는 두 시인 가운데 왜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졌으며 심연수 시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이토록 뒤늦게 발굴되어야 했는지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윤동주 시인은 비록 고향이 중국 용정이라 하더라도 당시  서울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심연수 시인은 고향이 강릉일지라도  중국 용정 동흥중학을 마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일제가 패망한 후 심연수 시인을 알고 있는  문학인이나 연고자가 안타깝게도 서울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의 동생과 심연수의 동생은 서로 친구 사이였고 그렇다면 윤동주의 집안에서라도  심연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윤동주의 집안으로 하여금 심연수라는 시인의 이야기가 50년이란 세월 동안 묻혀 있도록 했을까?  시 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의문들을 생각해보자. 지사적 시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 보이는 이 이라는 시에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사상과 시적 호흡의 긴장감이다.  민족의 들불, 조국 해방을 위한 들불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위대한 작탄(炸彈)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그 불길을 가슴에 안고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숭엄하게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은 이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분노인 것이다.   ============================ 젊은 혈기가 왕성했던 심련수는  닥치는대로 배우고자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먼저 시와 시조, 소설, 평론, 수필(서간문,기행문,일기)  그리고 희곡 등 무려 300여편에 이르는 초장르적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는 40여편의 시작이 남아 있을 뿐이다.  윤동주는 프랑시스 잠, 장 꼭도를 좋아했지만  심련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투르게네프,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등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심련수에게 영향을 준 국내 시인들은  김기림,정지용,이육사,한용운,백석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문학에 대한 선행 작업으로 시인이었지만  소설과 잡지 영화를 통해 문학에 대한 꿈을 다양하게 키웠다.  이러한 폭넓은 예술적 취향은 심련수의 시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젊은 넋이 안고 있는 회의와 처절한 고독과 번민속에서  조국광복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새벽을 꿈 꾸는 그의 시정신으로 나타나는  시적 의지야말로 올곧은 그의 성품이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시대를 통찰했다.  일컬어 심련수는 그의 역사적 자아를  정신적 지향점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심련수가 일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게 된 배경도  우리는 다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동서양 문학공간을 뛰어 넘으면서 알고자 했고  영향받았던 수많은 작품 설렵에서도 나타난다.  밤을 밝혀가면서 탐독했던문학과 사상과 철학의 폭넓은 세계는  심층적이었다. 이것은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인간 심련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것에 대한 자아인식의 추구가 얼마나 깊고 애절했다면  도 우리 민족에 대한 조국광복 의지가 얼마나 투철했다면  일제 저항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기를 갈망했단 말인가?  윤동주와 틀린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윤동주는 부농의 아들로 일제 징병을 피해 일본 유학을 선택하지만  가난하기만 했던 심련수는 일제 징병을 피한 유학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앞당기기 위해 치열한 저항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일제의 탄압은 구체화 되기에 이르고  이 저항정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심련수의 준엄하고 비장한 저항성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각오해야 하는  인간미 넘치는 우리 민족의 서정성과 같았다.  여기에서 윤동주의 시 빨래와 심련수의 시 빨래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빨래줄에 두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 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말린다/  .................윤동주 빨래 전문.......... 빨래를 생명으로 아는  조선의 엄마 누나야  아들 오빠 땀젖은 옷  깨끗하게 빨아 주소  그들의 마음 가운데  불의의 때가 묻거든  사정없는 빨래방망이로  두드려 씻어 주소서  .....................심련수 빨래 전문............  다음에는 윤동주의 편지라고 하는 시 전문과  심련수의 편지라는 시 전문을 감상해 보자.  누나/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숙하게 그대로/  편지를 붙일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편지 전문............  새로 뜯은 봉투에서 떨어지는  글자 없는 편지  아아 그것은 간절한 사연  설움에 반죽된 눈물의 지문  떨리던 그 쪽 마을  여기에 씌어졌구나  ..............심련수 편지 전문...............  두 시인의 예시를 의도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시의 현대성과 우수성,  그리고 비중을 가름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두 시에서 보이고 있는 이미지의 형상화, 시적 관념성,  시적 처리에 따른 기법, 일제 치하에서 느끼는 시인의  시적인식의 세계에 대한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삼가 심련수시인의 민족애 앞에 우리는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이다.    =============================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있는 심련수의 시선집 《비명(碑铭)에 찾는 이름》출간기념회가 일전 연길에서 펼쳐졌다.  시선집은 심련수시인의 최종본으로 확정된 250여편가운데 《대지의 봄》, 《소년아 봄은 오려니》, 《비명에 찾는 이름》, 《환마》 등 그의 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면서도 작품성이 뛰여난 작품 70편을 선정해 묶었다. 또한 작품에는 그의 생애와 시세계에 대한 평문을 첨부해 심련수시인과 그의 시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 인하대학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이며 이 책의 편저자인 황규수는 심련수의 생애 및 작품에 대한 정보가 미흡한 상태에서 연구가 진행되다보니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적고찰은 어려웠다고 밝히면서 책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심련수의 생애 및 시작품 원전에 대해 좀 더 실증적으로 고찰한 내용을 토대로, 그의 전기적사실과 관련하여 시세계를 구체적으로 살폈다고 결어에서 쓰고있다. 또한 1943년부터 피살될때까지, 창작시가 없는 점으로부터 미루어보아 심련수 작품에 대한 발굴사업도 지속되여야 한다고 적으며 이 책의 간행이 올해(2010년 8월) 65주기를 맞이하는 시인의 유가족들에게 작으나마 기쁨과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   “청송 심련수 시조집” 출간   일제감정기 혜성처럼 살다간 시인 심련수의 작품집-”청송(青松) 심련수시조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원 연변사회과학연구원 문학예술연구소 연구원이며 평론가인 김룡운과 룡정출신의 문인 박용일의 편저로 된 시조집은 144쪽에 도합 15만자, 시조, 시조평, 새로 정리된 심련수 략력, 후기  등 5개 내용으로 구성되였다. 시조집에는 특별히 새로 발굴된 심련수의 시조 6수를 보충하여 실었다.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한국 강릉에서 출생, 1930년 중국(당시 만주국)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1936년 룡정으로 이주하였다. 1940년경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려창의 밤” 등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1943년 7월 일본류학을 마치고 일제의 학병 강제징집을 피하여 룡정으로 귀환하였다. 영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45년 8월 8일 귀향 도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일제에 의해 피살되였다.   2000년 7월 룡정시 길흥촌에 거주하는 동생 심호수에 의해 55년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되어 오던 육필 유고가 공개되면서 마침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였다. 현재 심련수의 문학과 삶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시인은 윤동주에 버금가는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시조집에  “청송 심련수와 그의 시조문학”이란 평론문장를 곁들어 실은 편저자 김룡운은 “심련수의 시조를 읽으면 해방의 기운을 기다리는 신념과 함께 시대의 어둠을 뚫는 융융한 남성적의지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강하게 나타남을 느낄수 있다”고 말했다.   심련수에 대한 연구론문 등 저서들이 해내외에서 적지않게 발간되기는 하였지만 단독 시조쟝르로 묶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혁 기자   =================================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 출간 2010-09-10  일제강점의 암흑기 민족문학의 불씨가 사그라져 가던때 연변땅에서 민족문학을 지켜 “제2의 윤동주”로 지칭되고있는 심련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어지고있는 가운데 전국권 평론가의 저서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가 한국학술정보에 의해 출간되였다. 평론집 “민족시인 심련수 시작연구”는 “심련수 시작의 의미와 그 문학사적 위상 “,“심련수시인의 특징적 시어 의미 풀이”, “심련수 시: 민족의 정과 대륙정의 융합체” 등 10개의 장절로 세분하여 심련수의 삶과 문학을 다각적인 시야로 다루고있다.  전국권 평론가는1940년 2월 화룡현에서 출생, 1963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조선언어문학과 졸업 후 선후로 북경 중공중앙 외사기관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 정책연구사업에 종사하다가 1973년 연변대학 조문학부로 전근, 대학가에서 문예리론강좌 강좌장, 연변대학학보 주필등직을 맡아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연변 작가협회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등 직을 력임했다.  저서로는 “시창작과 감상”, “민족문학연구”, “민족문학의 지평”,   “글쓰기학”, “시창작 예술연구” 등 다부가 있다.   퇴임후에도 문필활동과 연구생활을 계속하면서 문인된 보람을 찾고 있는 전국권 평론가는 현재 연변로교수협회 회장 및 음악문학연구 총편집을 맡고있다.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은 서문에서 “민족문학사의 새 지평으로 떠오른 심련수는 항일민족시인으로 제대로 자리매김을 해줘야 한다. 그의 민족문학사적 위치설정은 삼천리반도 남북문학은 물로 또한 중국조선족문학사 연구가들의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이 저서의 출간은 자못 의미가 깊은 일로서 민족문학사연구에 큰 보탬이되리라 믿는다”고 저서의 학술적 가치를 평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08-21  ===================================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399번지에서 삼척심씨 심은택의 셋째자식(맏아들)으로 태여났다. 심련수의 할아버지 심대규는 강릉일대에서 유명짜한 유학자였고 성격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였으며 삼촌 심우택은 반일단체에 가담했으며 남일, 홍범도, 리동위 등과 어울렸다.    1924년, 심씨일가는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로 이사했으며 1931년에 중국 밀산에 건너온후 신안진을 거쳐 1935년에 룡정 길안툰으로 이주했다.  룡정소학교에 다닌 심련수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후 한시기 고민하다가 《큰일 하려면 공부 좀 해야잖겠는가》고 부모님께 속마음을 터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 공부시켜주마!》 하고 씨원하게 대답했다. 하여 련수는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다니게 되였다.    1943년 류학을 마치고 귀향하였다. 그때 일본학도병징병이 터지자 몸을 피해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 가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으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반일사상과 조선독립의 도리를 깨우쳐준 것이 죄가 되여 두차례나 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고향에 돌아와 백보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갔다가 몇 달후 광복을 며칠 앞두고 귀향길에서 그만 27세 꽃나이로 왕청현 춘양역에서 일본병사들에 의해 피살되여 망향의 혼으로 요절했다.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달구를 몰고 현장에 이르니 아들은 트렁크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트렁크를 시체와 같이 싣고 와 트렁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    심련수의 300여수의 시, 3편의 소설, 200여통의 편지, 300여편의 일기, 1편의 평론, 1편의 기행문을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었다.  일찍 《만선일보》에 다섯수의 시를 발표했던 심련수는 어릴적부터 책벌레여서 아버지한테 엉뎅이를 채우기도 했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그때 쓴 시들이 빼앗긴 조국과 망국의 설음,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간정을 담담한 빛갈로 잔잔히 여울치게 쓰면서 언덕이나 시내물, 실향민의 설음과 자연을 감상적이고 애상적으로 썼다면 일본류학시절부터 사망직전까지에 씌여진 시들은 완전히 탈바꿈했다.  시적구조가 보다 복잡해지고 사유공간이 넓어지고 시적포섭량이 많아졌으며 시적시각이 상승시각으로 이전 되였다. 특히 인간적성숙과 예술적성숙을 보여주면서 호방성, 거창성, 모호성 등이 획득된다. 후반기에 보여준 시는 우주의 질서가 잘못되였으니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는 그런 세계적인 눈높이의 시적차원으로 오른다.     룡정이 낳은 또 한분의 시인-심련수는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시로 하여 영원히 우리 민족의 문단에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 민족시인 심련수선생은 윤동주시인 보다 나이는 한살 더 어렸지만  학년이 한학년 높았다.  그리고 윤동주시인은 1945년 2월16일 지병으로 일제 감옥에서 죽었지만  심련수시인은 1945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총격을 받아 죽었다.  윤동주 시인과 심련수시인에 대한 같은 점과 다른 점; 같은 점..................................  심련수와 윤동주는 소년기를 만주에서 보냄. 습작품이 많았음.  유작을 남기고 죽었음.  8.15전에 죽었음.  두분 다 현재 민족의식을 형상화 했다고 하고 있음.  틀린 점................................  윤동주는 부농의 아들이었음.  심련수는 소작농의 가난한 아들이었음.  윤동주는 용정 출생이지만  심련수는 강릉 출생임.  윤동주는 서정시,  심련수는 주의시적 의지의 모더니즘,르뽀르타쥬한  리얼리티가 강한 서정시  윤동주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심련수는 무종교  윤동주는 여성적 섬세,  심련수는 대륙적 대담성 등  ===============================/// 민족시인 심련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여 (ZOGLO) 2018년6월19일  민족시인 심련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여     6월 16일,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는 룡정이 낳은 또 한 분의 민족시인 심련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여 추모답사활동을 가졌다.   연구회 20여명의 임원들은 10여리 길을 강행군하여 룡정시 태평촌 토기동의 심씨릉원을 찾았다.  시인의 묘비앞에서 제주를 올리고 심련수의 대표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 "추억의 해란강" 등을 랑송하였고 시인의 생애를 반추해 보았다.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 회장은 심련수의 짧으나 굴곡진 생애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심련수의 문학은 해방전 연변지역 문학인들의 문학활동을 대중적으로 조명해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심련수는 윤동주와 같은 시간대에 룡정에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를 서정적인 언어로 위무한데에 그 위상과 문학의 류사성이 있다”고 력설하였다.   한편 "제2의 윤동주"라 지칭되는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강릉시 경포면 난곡리에서 심운택과 최정배 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여나 가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1930년 중국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1936년 룡정으로 이주해 왔다.     1937년 룡정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본격 습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22세때 에 ‘대지의 봄’, ‘려창의 밤’ 등을 발표하였으며,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학부 창작과를 졸업했다.   룡정으로 귀환한후 학병을 피하여 녕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8일 녕안현에서 룡정으로 오던 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2000년 7월 룡정시 길흥8대에 거주하는 동생 심호수에 의해 55년 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되여 오던 육필 유고가 제1집 심련수문학편에 수록됨으로써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였다.   "소년아 봄은 오려니", "추억의 해란강" 등 300여수(편)의 시와 기행문,서한이 있다.     한편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룡정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룡정지역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와 승계를 취지로 한 사단법인 단체로서 몇년동안 꾸준히 민족의 인걸들의 생몰일 기념, 문화총서 발간, 인물전 집필, 문학기념행사조직 등 일련의 사업들을 알차고 활발하게 펼쳐나가 지역사회의 명망있는 문화단체로 부상하고 있다. ///조글로미디어  
2131    페르시아 시인 - 잘랄 앗 딘 알 루미 댓글:  조회:5254  추천:0  2018-05-04
잘랄 앗 딘 알 루미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 Jalāl ad-Dīn Muhammad Rūm, 잘랄 앗딘 무함마드 발히, Jalāl ad-Dīn Muhammad BalkhīJalal ad-Din ar-Rumi     출생 1207경. 9. 30, 구르 발흐 사망 1273. 12. 17 국적 페르시아 요약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시인. Mawlānā라고도 함.   서정시와 이슬람 신비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훈서사시〈영적인 2행 연구 Masnavῑ-ye Ma⁽navῑ〉가 유명하다(수피즘). 잘랄 앗 딘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서방에서는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들'로 불리는 마울라위야 교단을 조직했다. 잘랄 앗 딘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작가이며 선생이었다. 몽골인들의 위협이 주요원인이 되어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1218년경 고향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서사시인 파리드 앗 딘 아타르를 만났으며 그가 어린 잘랄 앗 딘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메카 순례와 중동지역을 여행한 다음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룸, 여기에서 루미라는 별칭이 나왔음)에 도착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 통치하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라란나(카라만)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잘랄 앗 딘의 어머니가 죽고 첫아들이 태어났으며 1228년 그들은 수도인 코니아로 초청되었다.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이곳에 있는 많은 마드라사(madrasah : 종교학교) 중 한 곳에서 강의했으며, 123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1년 후 바하 앗 딘의 제자로 있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잘랄 앗 딘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었다. 잘랄 앗 딘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부르한 앗 딘은 1240년경 코니아를 떠났다. 그가 시리아 수피 교단들과 접촉한 것이 그의 가족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시리아로 1, 2차례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에서 지도적인 이슬람 신지론자(神智論者)인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났던 것 같다. 잘랄 앗 딘은 코니아에서 이븐 알 아라비의 통역자이자 의붓아들인 사르드 앗 딘 알 쿠나위와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1244년 11월 30일은 잘랄 앗 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했던 성인인 떠돌이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이라는 뜻)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만났다. 샴스 앗 딘은 어떠한 전통적 신비주의 형제단과 결부시켜 생각될 수 없지만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잘랄 앗 딘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주었다. 수개월 간 이 두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지냈는데, 잘랄 앗 딘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하는 것에 분개한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추방했다. 잘랄 앗 딘이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가 결국 샴스를 시리아에서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잘랄 앗 딘의 친분관계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었으며,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된 것이었고 잘랄 앗 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 그를 급히 매장했음이 최근에야 입증되었다. 잘랄 앗 딘은 이와 같은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신비한 시들, 약 3만 행의 시구와 상당수의 로바이야트(robā⁽ῑyāt : 4행 연구)는 그의 아들이 "그는 샴스가 자신에게서 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것같이 그의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동일시를 보여주었다. 〈샴스의 명시선집 Dῑvān-e Shams〉은 그의 경험들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는 언어가 고답적인 정신세계나 모호한 사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강한 리듬으로 나아가는 신선한 언어는 때로 대중적인 시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이 이 시의 대부분이 피리나 북소리, 대장간의 망치소리 또는 자연을 즐기려고 제자들과 늘 찾아가기도 했던 메람에 있는 물레방아 소리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는 무아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자연 안에서 종교의 태양이 발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꽃과 새들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눈다고 느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 샴스 앗 딘이 죽은 지 몇 년 후 잘랄 앗 딘은 문맹자인 대장장이 살라흐 앗 딘 자르쿠브와 친분을 나누면서 비슷한 황홀감을 경험했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가게 앞에서 망치소리를 듣고 있던 잘랄 앗 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잘랄 앗 딘과 가장 친숙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의 딸은 후에 잘랄 앗 딘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이때의 사랑이 다시 잘랄 앗 딘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죽은뒤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 잘랄 앗 딘의 주요작품 〈영적인 2행 연구〉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다. 후삼 앗 딘은 일화·우화·이야기·격언·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자와 잘랄 앗 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잘랄 앗 딘은 후삼 앗 딘의 충고에 따라서 수년 동안 〈영적인 2행 연구〉의 거의 2만 6,000행에 달하는 2행 연구를 지었다. 그는 후삼 앗 딘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수피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마스나위는 독자를 자유로운 영상으로 도취시켜 작가의 생애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랑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잘랄 앗 딘에게는 살라흐 앗 딘과 후삼 앗 딘이 모두 모든 것을 포옹하는 빛인 샴스 앗 딘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삼 앗 딘을 디야 알 하크('진리의 빛')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디야(ḍiyā⁾)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잘랄 앗 딘은 〈영적인 2행 연구〉를 완성한 뒤 죽었고 그후 코니아 사회에서 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사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그의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었고, 후삼 앗 딘의 뒤를 이어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으며, 그는 잘랄 앗 딘의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야 교단으로 통합·조직했다. 이 교단은 그들의 주요의식을 구성하는 신비적인 춤 때문에 서양에서 '빙글빙글 데르비시들'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술탄 왈라드의 시 작품은 잘랄 앗 딘의 영적인 성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시 이외에도 잘랄 앗 딘은 동료들이 기록한 작은 일상 담화집을 남겼다. 모음집 〈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Fῑhi mā fῑhi〉에는 그가 쓴 시의 주된 사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또한 여러 층의 인물들 앞으로 보낸 서간문도 있다. 때때로 서로 모순되고 상징물들을 바꾸어 곧잘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는 신비적인 경험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계로의 열광적인 비행으로부터 일상생활의 사실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투르크 문화 생활에 끼친 잘랄 앗 딘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오늘날 코니아의 박물관과 푸르고 둥근 천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루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루미의 동상 마울라나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페르시아어: مَولانَا جَلال الدِین مُحَمَّد رُومِی, 1207년 ~ 1273년)는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이다. 발흐에서 출생하여 소아시아(룸)에서 생애의 태반을 보냈기 때문에 루미라는 호(號)로 불렸다. 유년기에 몽고족의 내습을 우려한 부친에게 이끌려 서남아시아를 편력한 후 룸 셀주크의 도읍 코니아에 정주하였다. 부친이 사망한 후에 신비주의의 수업에 진력하여 한 파(派)를 창설하였다. 37세경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불후의 명작 《정신적 마스나비》를 완성하였다. 이 전 6권으로 된 방대한 신비주의 시집은 '페르시아어의 코란'이라고도 평가되며 그의 사상적 성전(聖典)이라 하겠다. 몇 가지의 비유·우화·전설의 형식으로 읊은 시로 외면상은 이야기시와 같으나 그 배후에는 절대적인 신의 사랑과 그것을 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 감미로운 서정시 〈샴세 타브리즈 시집〉, 산문작품 〈강화집〉(講話集) 〈서간집〉이 있다. 그는 중세의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여인숙   - 잘랄 앗 딘 알 루미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라.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한 번은 기쁨, 한 번은 좌절, 한 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들을 맞아 즐거이 모시라.    그것이 그대의 집안을    장롱 하나 남김없이 휩쓸어 가버리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 내면을 비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 들이라.    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리니.      
2130    이탈리아 시인 - 에우제니오 몬탈레 댓글:  조회:5075  추천:0  2018-04-26
  출생 1896. 10. 12, 이탈리아 제노바 사망 1981. 9. 12, 밀라노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시인·산문작가·편집자·번역가.   197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30~40년대에 몬탈레는 신비로움이 넘치는 시를 많이 썼다. 주세페 웅가레티, 살바토레 콰시모도와 더불어 말라르메·랭보·발레리와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말의 정서적 암시성과 주관적인 의미를 갖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기에서는 생각을 좀더 직접적이고 단순한 언어로 표현했다.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시들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 후에는 파시즘에 반대했는데, 그무렵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문학지 〈프리모 템포 Primo tempo〉의 창간을 도왔으며 1927~28년에는 출판업자 벰포라드를 위해 일했다. 1929~38년 피렌체에 있는 '가비네토 뷰소 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 1938~48년 '문학박람회'(La Fiera letteraria)의 시부문 비평가로 활동했고, 1948년 밀라노의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 Corriere della sera〉의 문학부 편집자로, 후에는 음악부 편집자로 일했다. 첫 시집 〈오징어의 뼈 Ossia di seppia〉(1925)는 전후(戰後)에 만연한 쓰디쓴 비관주의를 그리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황폐하고 바위투성이인 리구리아 해안을 상징적으로 활용했다. 이어 〈세관원의 집 외(外) La casa dei doganieri e altre poesie〉(1932)·〈기회 Le occasioni〉(1939)·〈땅의 끝 Finisterre〉(1943)을 썼는데, 이들은 점차 더욱 내향적이며 모호해지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마르초토상 수상작 〈폭풍우 외(外) La bufera e altro〉(1956)를 필두로, 후기 작품들은 초기에는 없던 능숙한 기교와 인간적인 따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의 시집으로는 〈포화(飽和) Satura〉(1962)·〈조화와 파스텔 Accordi e pastelli〉(1962)·〈범죄자 Il colpevole〉(1966)·〈제니아 Xenia〉(1966) 등이 있는데, 〈제니아〉는 1963년에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고요하고 회상적인 연시집이다. 1973년에는 〈1971년과 1972년 일지 Diario de '71 e '72〉를 발표했고 1948, 1949, 1957년에 〈시 Poesie〉라는 3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자신이 쓴 시들을 직접 번역했을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 T. S. 엘리엇,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와 허먼 멜빌, 유진 오닐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산문도 번역했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실렸던 단편과 스케치들을 모아 〈디나르드의 나비 La farfalla di Dinard〉(1956)라 하여 출판했다. =======================   에우제니오 몬탈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우제니오 몬탈레 에우제니오 몬탈레(이탈리아어: Eugenio Montale, 1896년 10월 12일 ~ 1981년 9월 12일)는 주세페 운가레티·콰시모도와 함께 이탈리아의 현대 3대 시인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제노바에서 태어나 처음엔 음악가가 되는 수업을 받았으나 22세에 문학 잡지 지의 편집을 시작하면서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현대적 구조, 자유스런 리듬, 그리고 혁신적 언어의 조화와 융합을 위한 운동의 하나인 에르메티즘(Ermetism)의 주역이 되어 파시즘의 언론과 표현에 대한 자유의 제한에 저항했다. 50년이 넘는 저작활동 중에 《기회》(1939년), 《오징어 뼈》(1925년), 《폭풍과 기타》(1956년), 그리고 《71년과 72년의 일기》 등 몇 편을 출판했을 뿐이다. 197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환상 - 에우제니오 몬탈레 날이 밝아온다. 닳아진 은(銀)같이새하얀 여명, 내 그것을벽에다 걸어두면닫힌 창문에 빛살이 내려앉는다.태양의 일상은 돌아오는데산만한 목소리며 귀에 익은큰 소리는 전해 오지 않는다.왜일까? 난 매혹적인 하루를 생각한다.너무 똑같은 시차로 도는 회전목마에서벗어나고, 오래 전부터 나, 이 무의식적인 마술사를가득 채웠던 힘, 그 힘이 넘치리라.이제 난 얼굴을 내밀어높다란 집과 벌거벋은 길을 마주하리라.카페의 무늬 진 눈 풍경처럼 즐겁고새하얀 눈의 날 내 만나보리니,솜털 가득한 하늘에서 때늦은 광선이 미끄러지고,보이지 않는 빛으로 숲과 언덕을 가득 채우며나에게 들려주리라, 즐거운 귀향의 찬사를.천하의 근본인 알파벳처럼백색 위에 나뭇가지들이 쓴검은 기호를, 나 기꺼이 읽으리.지난 과거 모두가 내 앞에한 점으로 나타나고그 어떤 소리도 이 한적한즐거움을 방해하지 않으리라.삼월의 수탉이공중으로 날거나말뚝 위에 내리리라.     정오 / 에우제니오 몬탈레 길게 늘어진 정오의 영광 나무들은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주위 형상이 과다한 빛으로 점점 더 황갈색 빛을 띤다. 저 높은 곳의 태양,  그리고 메마른 강바닥. 나의 하루는 지나지 않았다. 제일 아름다운 시간은  땅거미 속에 잠긴 희미한 담 저 너머에 있다. 주위엔 건조한 무더위.  낚시꾼 물총새가 살아 있는 유물 위로 선회한다. 은혜의 단비는 황량함 저 너머에 있으니, 더더욱 뿌듯한 기쁨은 기다림 속에 있다.                       서시                                             에우제니오 몬탈레                                             과수원으로 불어오는 바람                     생명의 물결 실어오면 즐거운 일                     죽은 자 하나                     헝클어진 기억을 묻는 곳                     여기는 밭이 아니라 성골 상자라오.                       그대 듣고 있는 윙윙 나래 소리는                     비상이 아니라 영원한 태내(胎內)의 감동.                     이 고적한 변두리 지역이                     시련을 겪으며 변하고 있다오.                       분노는 깎아지른 절벽에서 이리 오고 있다오.                     그대 만일 앞으로 나아간다면                     아마 그댈 구해주는 요정과 만나리라.                     먼 훗날 장난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행위며 이야기가 이뤄지리라.                       우릴 옭아매는 그물에서 뜯어진 올을 찾아                     밖으로 튀어 나가 달아나시라!                     자! 그대 위해 빌었다오, 갈증일랑                     이제 가벼이 풀리고, 앙금은 가시리라…….                             ㅡ 에우제니오 몬탈레 시선(詩選),  한형곤 역,『오징어 뼈』,  (민음사, 2003) 중에서    
2129    프랑스 시인 - 보들레르 댓글:  조회:6505  추천:0  2018-04-19
  출생 1821. 4. 9, 파리 사망 1867. 8. 31,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보들레르, 프랑스의 시인.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 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목차 보들레르의 초기생애 보들레르의 중기생애 보들레르의 후기생애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Charles(-Pierre) Baudelaire)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의 저자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1855년) 에드거 앨런 포의 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했고, 죽은 지 오래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 속에서 타락과 악덕의 존재로 동일시되는 보들레르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듯 여겨질 만큼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현대 문명에 가까이 접근한 시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 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생명의 모든 징후(한 송이 꽃의 빛깔, 창녀의 찡그린 얼굴)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현대 세계의 인간 조건에 호소하고 있으며, 주제 선택의 제약을 거부하고 상징의 시적 힘을 강력히 주장한 점에서도 역시 현대적이다. 보들레르의 초기생애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 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 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 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 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 소령(général Aupick) 샤를 보들레르의 의붓 아버지 오피크는 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 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 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 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 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 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 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 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 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 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 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 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 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 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 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 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악의 꽃(Les Fleurs du mal) 초판과 작가의 메모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 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 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 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 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 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 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 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 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들레르의 중기생애 보들레르의 원숙기는 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 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 미국의 작가·시인·편집자·문학평론가 〈기담(奇談)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 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é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 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 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 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 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 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 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르뷔 데 되 몽드지 (Revue des Deux Mondes) 프랑스 월간 잡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정기 간행물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 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 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검열).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 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 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Épaves〉이라는 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 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 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보들레르의 후기생애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 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 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äuser à 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éene〉(1861)에,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 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 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 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 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 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 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 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 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 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 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 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 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출생 1821년 04월 09일 사망 1867년 08월 31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 《악의 꽃》, 《파리의 우울》 등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퇴폐적이고 우울한 정서와 날카로운 필치가 특징이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시인으로, 그로부터 프랑스 현대시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악덕과 죄악감, 육체적 욕망을 외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우울과 실존적 권태 등을 표현한 그는 당대 프랑스 문화계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도 '퇴폐의 시인'으로 불리지만, 한편으로 19세기 파리 및 모더니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낭만주의 미술과 현대성을 새롭게 정립한 미술 비평가이기도 하며, 당대 시와 소설 비평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문학의 현대성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1821년 4월 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제프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환속한 사제로, 그가 태어났을 때 62세의 고령이었다. 어머니 카롤린느 뒤파이스는 조제프의 두 번째 부인으로 당시 28세였다. 아버지 조제프 프랑스는 신부 출신이었음에도 자유주의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할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조제프는 보들레르가 6세 때 죽었으나 그의 이런 기질과 취향은 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보들레르는 후일 몇몇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 할아버지처럼 온화했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사제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미술 평론을 하게 된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샤를 보들레르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다른 방향에서 보들레르의 성격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1828년에 어머니는 직업군인인 오픽 소령과 재혼하는데, 그는 엄격하고 권위적인 인물로 반항기 많고 예민했던 사춘기의 보들레르와는 잘 맞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고통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지독한 중학 시절'을 보내게 했다고 표현하면서 의붓아버지를 증오했으며, 패배감과 상실, 우울함에 젖어 자라났다. 1832년에는 오픽이 리옹으로 부임함에 따라 가족이 모두 이주했다. 보들레르는 리옹 왕립 중등학교에서 공부한 뒤 파리로 올라가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에 진학했으나 18세 때 품행 문제로 퇴학당했다. 중등학교 시절부터 보들레르는 시인이 되고자 마음먹고 계속 시를 썼다. 그럼에도 성적은 좋았지만, 우등생은 아니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보들레르는 규율에 복종하기를 싫어하는 반항심 많은 학생이던 것이다. 퇴학당한 해 8월, 보들레르는 대학 입학자격고사에 합격했으며, 의붓아버지 오픽의 의견에 따라 파리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고 문학가들과 어울리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매춘부에게 다니면서 성병에 걸리고, 빚까지 지게 된다. 결국 이복형 알퐁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족들은 그를 파리의 퇴폐적인 생활에서 떨어뜨려 놓고자 인도행 배에 태워 여행을 보냈다. 그는 모리스 섬을 거쳐 레위니옹 섬에 몇 달간 머무르면서 이국적 정취를 느끼고 시를 지으면서 보냈으나 나머지 여정을 거부하고 7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1842년, 21세가 된 보들레르는 성년에 이르자마자 후견인인 의붓아버지가 관리하던 친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돌려받았다. 그는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2년도 지나지 않아 유산의 약 절반을 써 버렸는데, 결국 놀란 가족들이 금치산 선고를 신청하여 이후부터 법정 후견인의 관리 아래 매월 돈을 타 쓰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큰 굴욕감과 패배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매달 받는 돈을 항상 며칠 만에 다 써 버리고 돈 문제로 후견인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가족, 특히 의붓아버지 오픽에 대한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1846년에는 자신의 재산 전부를 애인인 잔느 뒤발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 소동을 벌였고, 1848년 2월 혁명 당시에는 소총을 손에 들고 "오픽 장군을 총살하러 가자!"라고 외치며 돌아다니기까지 했다고 한다. 보들레르가 사랑한 잔느 뒤발 1845년, 보들레르는 친하게 지내던 문인들의 격려 속에 미술 비평을 시작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음을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곤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던 듯하다. 그해 미술전에 출품된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실은 《1845년 미전평》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듬해 《1846년 미전평》에서 낭만주의, 색채 등에 대한 그만의 시학과 미론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 비평과 영어 소설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작업도 했다. 무기력과 권태를 다룬 중편소설 〈라 팡파를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유일한 소설이다. 한편 사람의 감각을 고양시키는 방편을 여럿 연구했는데, 그러면서 술에 빠져들고 마리화나를 접하기도 했던 듯하다. 후일 신경흥분제로서의 포도주와 마리화나의 효능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한다. 1847년, 보들레르는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접한다. 그는 〈검은 고양이〉를 읽고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고, 포를 '자신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 칭할 정도로 완전히 매료되었다. 보들레르는 이듬해부터 약 13년간에 걸쳐 포의 단편 대부분을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한다. 미국에서 다소 낮은 평가를 받던 포는 보들레르의 번역과 비평으로 프랑스에서 높게 평가되었고, 이후 낭만주의 및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1857년, 근대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게 될 문제작 《악의 꽃》을 출간했다. 이 책은 보들레르가 남긴 유일한 시집으로, 그는 이 시집으로 후일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1851년경부터 다양한 제명으로 몇 편씩 발표했던 것으로, 대부분 그 무렵에 쓴 것이다. 서시 〈독자〉 및 〈우울과 이상〉, 〈악의 꽃〉, 〈반항〉, 〈술〉, 〈죽음〉의 5부 100여 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19세기 현대 도시화된 파리의 우울, 인간 소외, 권태와 환멸, 혼란 등을 분열적인 시각으로 그려 내고 있다. 보들레르는 그 어떤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며, 당대 유행하던 낭만주의의 지나친 감상성과 무절제, 비이성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한편, 미(美)를 극도로 찬양했다. 그의 시들은 낭만주의의 정신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가 비판했던 낭만주의의 결함을 뛰어넘으면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독일의 문예학자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라는 말은 보들레르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라고 표현했으며,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보들레르는 '새로운 전율'을 만들어 냈다."라고 극찬했다. 보들레르의 메모가 담겨 있는 《악의 꽃》 속표지 그러나 몇몇 문학가의 극찬을 받았음에도 그는 당대인 대부분에게 외설적인 필화 사건을 일으킨 시인 정도로 여겨졌다. 《악의 꽃》은 출간 즉시 풍기문란하고 비도덕적이라며 비난받았고, 결국 보들레르는 경범재판소에 기소되어 벌금형 및 6편의 시를 삭제 출간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1861년에 32편의 신작 시를 증보하여 《악의 꽃》 재판을 간행하고, 1866년에는 삭제된 6편을 비롯해 새로운 시들을 추가한 재판을 간행했다. 보들레르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파리 생활에 환멸을 느꼈으며, 경제적 궁핍과 매독 재발로 고통을 겪었다. 1864년, 그는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원하던 문학적 명성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고 아편에 빠져들었다. 벨기에로 간 지 2년 만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생 루 성당에 갔다가 뇌연화증으로 쓰러졌다. 이후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채로 파리의 요양원에서 지내다 이듬해인 1867년 8월 31일 사망했다. 보들레르의 또 다른 대표 시집 《파리의 우울》은 보들레르가 여러 잡지에 발표한 산문시를 사후에 묶어 출간한 것이다. 작가 본인이 일관된 구성에 맞추어 고르고 재구성한 시집이 아닌 탓에 각 시들은 독립적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이 발표한 산문시를 '리듬과 각운이 없어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서정적인 영혼의 움직임, 물결치는 상념, 의식의 경련이 유연하면서도 거칠게 표현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후일 베를렌, 말라르메 등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에 그 문학적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2128    윤동주가 숭배했던 시인 백석 댓글:  조회:4912  추천:0  2018-04-05
  백석(白石) 작가 탄생 1912년 7월 1일 (음력 5월 17일) 사망 1996년 1월 출신지 일본제국령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최종학력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어사범과 학사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1. 오산학교 시절[편집] 1924년 그는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보[4][5]로 진학한다. 어릴 적 장난꾸러기 같던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오산학교 재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영감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이라는 잡지 에 소월의 습작 를 지면에 싣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담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 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6] 이에 백석도 예외는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동기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학과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생들을 속된 학생들로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백석은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7]  독립운동가 조만식도 당시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8] 백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후략)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의전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한동안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방응모 응?! 의 지원을 받아 사범대학 대신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 등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는 아오야마가쿠인의 전문부 영어사범과에 진학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9] 2.2. 아오야마 가쿠인 졸업 이후[편집]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서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2배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고. 그때 쌀 가마 가격이 13원, 고급 양복이 30-40원이었으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경성문화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내어, 나중에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시인 신경림 씨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게 되었을 때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몇 번이고 읽고 다녔고 [10] 윤동주의 경우 아무리 찾아봐도 시집을 구할 수 없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적고 다녔다고. 고향이었던 평북지역 방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2.3. 여생[편집]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북한에서는 주로 아동문학에 천착하였으나, 1958년 무렵 '부르조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삼수군[11] 의 협동농장 축산반으로 쫒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 그 후 1996년[12] 타계하기까지의 반평생에 대해서는 남한에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1996년이라면 하필 고난의 행군 때라 노령에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여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13] 기사 북한에서 쓴 글을 보면 북한 공산당(정확한 명칭은 조선노동당)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이 많다.에 수록되어 있다.">[14] 그런데 별로 충격일 것도 없는게, 북한 정권 아래에서 쓸 수 있는 글이 뭐가 있겠는가. 정권 단위로 압박하면 개인이 그걸 견뎌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다만 그의 사상까지 정권에 굴복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건 우리 소견은 아니다. 참고로, 그런 체제 찬양시들을 읽어보면 이게 문장은 백석 시인이 맞긴 맞는데, 백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퀼리티가 낮다. 서정성을 나타내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시에서도 결국은 당이 어떻고 하는 구절을 집어넣어버렸다. 역시 강요로 작품을 뽑아낼 수는 없는 듯. 링크 아동문학 평론에서는 '사상'만이 아니라 문학성 자체에 대해서도 중점을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정황상 바로 그 직후에 정권 산하 문인단에서 숙청[15]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3. 문학[편집]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은 서사시다.">[16]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백석의 시 를 읽고 나서 국수가 땡겨서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음식' '고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가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며 공동체적 유대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공간이다.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고향의 풍물, 세시 풍속, 생활 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우난 곬족이다. 4. 대표작[편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우난 곬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고독 여승 수라 고향 국수 모닥불 팔원 개구리네 한솥밥 : 한국전쟁 이후 아동문학에 천착하면서 쓴 동화시 중 하나.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5. 여담[편집] 당시 백석이 살던 동네는 집성촌이었는데 백인제 다름아닌 의사양반(...), 백낙준과 친척이었다.[17] 당시 말 한 필이 5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2원 정도였다고 한다.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그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18].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자.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통영을 아주 좋아했던 시인. 통영에 사랑하는 여인인 란이 살았기 때문이다. [19] (상략)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20]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하략) 통영(統營) - 백석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던 어학의 천재라고 한다. 월북 이후 번역국에서 일하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등 다양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여 북한에 소개했다.   여성관계를 찾아보자면 대표작 중의 하나인 가 거론된다. 이 시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견이 많은 편이다. 일단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작품[21]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이다. 문제는 그 나타샤로 누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냐는 것. 또는 '나타샤'가 일반적인 러시아의 여성들을 일컬는 이름-우리나라의 '영희' '주희' 등과 같이-이므로 특정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백석의 연애 상대로 김진세(백석의 제자)의 누이, 란(蘭), 자야(子夜)라고 불렸던 기생 출신 김진향 씨가 있다. 본명이 김영한으로 진향은 기명(기생의 호칭). 자야 여사가 호기심에 함흥 시내 번화가로 나들이 갔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라다 백화점 책방에서 문예춘추, 여원, 자야오가라는 책을 사가지고 와서 백석 시인에게 보였는데 그때 지어준 이름으로 자야는 백석 시인과 김진향 여사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여담으로 자야는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서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나.'라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시인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 바로 백석 평전이다.   배우 신성록이 백석을 닮았다. 해당 사진은 별에서 온 그대의 이재경. 더 많은 사진 트와이스 다현도 백석을 닮은 것 같기도 박효신도 좀 닮은듯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면 다음 사이트들을 참조할 것.사이트1사이트2 사진자료는 여기에서 참조할 것.   2011년 근대서지학회에서 발간하는 근대서지 2호에 백석의 미발표 번역시 167편이 발표되었다. 백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찾아보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다. 저런 머리를 하고도 잘생기다니 역시 헤완얼 키도 큰 편이라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게다가 이 분은 근 100년전 사람인데 지금 기준에서도 잘 생긴 편에 속한다! 키도 185cm으로 현재 기준으로도 상당한 장신. 황순원, 윤동주와 함께 현대문학 3대 얼짱이라 카더라           [1] 뒤에 보면 영어가 필기체로 작성되어 있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 교사들은 필기체로 수업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중학교에서 ABC를 처음 배우던 시절에도 필기체 연습부터 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잘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지금은 중학교 영어시간에 잠깐 배우는 것 말고는 필기체 자체가 교실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2]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야 여사와 함께 지내던 청진동으로 시골에서 부쳐 오던 편지의 겉봉에 백기연(白基衍)이라 씌여 있었다(내사랑 백석 P. 113~114).[3] 아래 생애에 나오지만 엄밀히 말하면 월북이 아니다.[4] 이전 편집 버젼의 오산중학이라는 명칭은 오산고보가 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난 뒤의 명칭이다. 백석 재학 당시 교명은 ‘오산고보’였다.[5] 참고로 화가 이중섭은 백석의 후배이다. 물론 1929년에 입학했기 때문에 서로 알았을 리 없었겠지만.[6] 김소월 시인이 백석의 선배였다. 백석보다 6년 앞서 오산고보에서 재학했던 김소월을 김억이 교사로 지도했었는데, 1939년 소월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백석이 김억을 직접 찾아가 그의 습작노트를 받아왔다고. 나중에 백석은 이라는 잡지 에 소월의 습작 를 지면에 싣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담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 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7]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 답게 일본어교육에 신경쓰지 않아 일본어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이로써 체조에는 소질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제외하면 15과목 모두 우(75점~100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평균성적이 아닌 ‘우, 양, 가’로 등수를 매기다 보니 평균점수가 높았음에도 전교 등수가 낮아 선생님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인원이 50명 내외였는데 이 중 10등 안에 들면 중상위권이었기 때문.[8] 1915년 백석의 입학 당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장을 맡게 되었다[9] 방응모는 평북 정주 사람으로 백석과 동향이다.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방응모와 백석의 밀접한 관계는 시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10] 안타깝게도 나중에 박정희 정권 치하 집이 압수수색 당했을 때 책 40권을 압수당했는데 그 중에 《사슴》이 있었다고 한다..[11]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수갑산은 김소월의 시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무척 외진 곳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중죄인의 유배지로도 유명했기 때문. 실제로도 산으로 둘러싸여 무척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12] 1963년 사망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하여 1996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13] 참고로 그와 청산학원(일본 유학) 당시 동기였던 아시히 시로는 아직도 생존해 있다. 지못미.[14] 남한에서 구할 수 있었던 글들이 에 수록되어 있다.[15] 꼭 죽이는 것만은 아니고 1970년대 이후 사상문제로 협동농장으로 보내지는 것도 포함한다. 장성택 읽어보면 알기 쉬울지도. 물론 그는 말년에 정말 죽음으로 숙청당했지만.[16] 당대에 이야기시를 구사한 시인으로는 임화 , 이용악 , 백석이 있었다. 단편서사시라고 하기도 한다. 김동환 의 은 서사시다.[17] 항렬로는 백석에게 백인제가 조카 뻘, 백낙준이 손자 뻘이다.[18] 어떤 의미에서는 표절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윤동주의 시들 중 상당수는 습작시이고 윤동주는 자신의 시를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가 죽은 다음에 전에 써놓았던 시들을 긁어모아서 출판한 것이라서 습작들도 모조리 섞여 있다.[19] 그러나 란은 1937년 4월 7일에 백석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과 결혼하게 된다.[20] 현 통영시 명정동[21] 백야-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라고 함 ======================== 덤으로 더...   백석의 '사슴'   백석의 '사슴'   1936년 시인 백석 자신이 펴낸 시집이다. 총 33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1부 ‘얼럭소 새끼의 영각’에는 《고야(古夜)》 《가즈랑 집》 《여우난 곬 족(族)》 《모닥불》 등 6편이 있고, 2부 ‘돌덜구의 물’에는 《성외(城外)》 《초동일(初冬日)》 《주막》 등 9편이 있다. 3부 ‘노루’에는 《쓸쓸한 길》 《머루밤》 《노루》 등 9편이 있고, 4부 ‘국수당 너머’에는 《절간의 소 이야기》 《오금덩이라는 곳》 《통영(統營)》 등 9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미 말의 타락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을 때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살려내고 보존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시집이다.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방언을 그대로 사용하여 향토적·민속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등 구체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고향 마을의 역사와 그들의 순박하면서도 어두운 삶의 현장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투철한 그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일방적인 서구시의 도입과 추종으로 특징지어지던 시기에 지나친 서구 지향을 거부하면서 민족에 대한 주체적인 각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 민요시와 비견되는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지니고 있다.    최고의 시집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한국현대시 100년사에서 우리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 백석(白石.1912~1995)의 ‘사슴’(1936)에 수록된 시 ‘정주성’의 일부다. 일본 유학 후 그는 고향 정주(定州)와 가까운 함흥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첫시집 ‘사슴’도 향토적 서정이 강하다. 계간 ‘시인세계’가 현재 활동중인 원로.중진에서 젊은 시인 156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대시 100년사 최고의 시집으로 ‘사슴’을 꼽았다. 이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서정주의 ‘화사집’ 순으로 추천됐다. 이른바 ‘현대시 100년사 5권의 시집’이다. ▲다시 백석으로. 부모의 강권으로 세 번이나 결혼한 그에게는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 자야(子夜). 생활고로 조선의 권번으로 들어가 예인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 백석과의 만남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시작되고,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 1995년에 와서야 전기형식의 ‘내사랑 백석’을 출간해 사랑 얘기를 전했다. 본명은 김영한. 지난 15일 부처님 오신날, 김수환 추기경이 음악회에 참석해 화제가 됐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법정스님에게 아무 조건없이 시주했던 사람이 그녀다. 길상사는 최고급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 자리에 김여사가 7천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의 부동산을 내놓아 세워진 사찰. 길상사측은 이날 자선음악회 수익금을 천주교가 운영하는 입양시설에 기부해 종교의 벽을 넘어선 사랑과 화합을 연출했다. 백석은 이날 최고의 시집으로 선정되는 영예와 함께 길상사에서 자야와의 비련의 사랑을 확인했을 것이다.       '사슴'은 백석 자신에 의한 유일한 시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사슴' 속의 시 33편은 1936년 1월 이후 백석의 창작 활동에 지대한 영향과 관련성을 가집니다.  이는 백석의 마지막 시로 평가받는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과 일종의 수미쌍관 구조를가지지만, 그 자체로도 순환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순환 구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가지 리듬과 멜로디를 들려주는 변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주제를 하나 정하라면 '여우난곬족(族)' 내지 '바다'가 될 것입니다.      
2127    일본 동요시인 巨星 - 가네코 미스즈 댓글:  조회:5016  추천:0  2018-03-31
가네코 미스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네코 미스즈 金子 みすゞ 출생 1903년 4월 11일 일본 야마구치현 사망 1930년 3월 10일 (26세) 필명 본명: 가네코 데루(金子 テル) 직업 시인 장르 동요 가네코 미스즈(金子 みすゞ)는 다이쇼 시대 말기 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일본의 동요시인이다. 본명은 가네코 데루(金子 テル).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26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500여편 정도의 시를 썼다고 한다. 한때 젊은 동요 시인 중 거성(若き童謡詩人の中の巨星)이라 칭송 받았다.   | 나가토시가 낳은 천재 동요시인 ‘가네코 미스즈’를 만나다. 센자키역 인근에는 나가토시가 낳은 천재 동요시인 ‘가네코미스즈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20대에 요절한 천재 동요시인 가네코 미스즈(金子みすゞ.1903~1930)에 관한 자료와 영상을 볼 수 있다. 1903년에 태어난 가네코 미스즈는 살아생전 불행한 삶을 살며 6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시인으로 활동한 일본의 대표적인 여류 동요작가다. 생전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그녀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동요시인 ‘야사키 세쓰오’의 노력으로 유고집이 발간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방탕한 남편과 생활하면서 동요를 쓰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미스즈는 숨지기 직전 5~6년 동안 500여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28세의 아까운 나이에 사망한다. ‘가네코미스즈기념관’은 그녀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며 2003년 처음 세워졌다.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기념관이 미스즈 집안이 경영했던 ‘가네코분에이도(金子文英堂)’라는 서점으로 미스즈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장소이다. 본관 건물에는 미스즈의 유고집과 기모노 등의 유품을 전시한 상설 전시실, PC를 이용할 수 있는 자료 검색실, 미스즈의 시의 세계를 소리와 빛으로 체감할 수 있는 미스즈 갤러리 등을 갖추고 있어 미스즈의 생애와 살아온 시대를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1996년부터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출판되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풍어’, ‘물고기’, ’장례식날‘, ‘봄날 아침’ 등이 있다.   ▲셍자키역 인근 건물에 모자이크해서 만든 가네코 미스즈. ▲양 끝에서 보면 서로 다른 미스즈의 얼굴이 보인다.   ▲삼각형의 나무를 붙여 가네코 미스즈의 얼굴을 만들었다.  ▲또 다른 곳에 있는 가네코 미스즈의 영상관. 이 그림은 아래의 개인 사진들을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미스즈의 얼굴은 이렇게 만들었다는...마츠오카상의 사진도 있다고 알려준다.  ▲가네코 미스즈의 초상화. ▲영상관 내부.   ▲가네코미스즈기념관으로 가는 길. ▲가네코 미스즈 기념관.   ▲미스즈의 방을 재현해 놓았다.   ▲유지 마츠오카.             [출처] [일본] 가네코 미스즈|작성자 리키   공감댓 ▲ 센자키역 승강장 '마루마루노하나시'호가 정차하는 JR 센자키 역 ⓒ 서규호   일본 서해안 야마구치현의 나가토시에 위치한 센자키 역은 JR 서일본의 산인혼센 센자키 지선의 시 종착 역입니다. 이런 시골역은 참 찾아가기 힘든 곳입니다만 나름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 철도 마니아들이 방문을 합니다.  산인혼센은 야마구치현 JR 하타부 역에서 교토부의 JR 교토 역까지 이르는 673.8Km에 이르는 노선입니다. 야마구치, 시마네, 돗토리, 효고를 지나 교토까지 이어지죠. 그 거리도 거리이지만 해안을 따라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노선입니다. 그 중에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역에서 센자키 역에 이르는 센자키 지선인 2.2Km의 센자키 지선의 종착역인 이곳 JR센자키 역은 1면 1선식의 지상 역입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 같은 이 작은 역은 관광열차로 소개해 드린 '마루마루노하나시' 호도 정차를 합니다. 열차에서 내리면 승강장엔 삼각형 모양의 '마루마루노하나시호'의 사진이 보입니다. 보통 이곳의 열차는 미네센을 경유해 JR 아사 역까지 운행을 하는 완만키가 운행을 합니다. ▲ 가네코 미스즈 모자이크 JR 센자키 역 내부의 "가네코 미스즈" 모자이크 ⓒ 서규호   센자키 역에 내려 대합실로 들어서는 순간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모자이크 모양의 '가네코 미스즈(金子みすゞ)'가 보입니다. 모자이크 하나하나에 개개인의 소중한 소망들이 써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가네코 미스즈" 얼굴이 보입니다. 가네코 미스즈는 조금 있다가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역 내부 무인 역 안에는 '센자키친'으로 가는 안내도가 보이는데 '센자키친'은 야마구치현 내의 최대규모의 교류시설입니다. 식당도 있고 이곳 센자키의 최대 관광지인 오미지마행 유람선도 이곳에서 출발 합니다. ▲ 센자키 역 외관 JR 센자키 역 외관의 모습 ⓒ 서규호   이제 역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가면 '가네코미스즈기념관'을 만나게 됩니다. 가네코미스즈는 1903년 이곳 센자키 출생, 1930년 자살한 천재 동요 시인 작가입니다. 마을 구석구석에 그녀의 작품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합니다. 약 500여 편의 동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풍어"는 참 짠한 동시 입니다.  특히 이곳 '가네코미스즈기념관'은 그녀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그녀가 살던 시대의 물건들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천재는 요절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오미지마로 가는 길에 '가네코미스즈묘'도 보이는데 일본은 전부 화장을 해서 매장을 합니다. 동네 안에 이런 묘지가 있는 것도 신기해 잠시 들러 볼 수 있습니다. ▲ 오미지마 공원 오미지마 공원에서 내려다본 센자키 시내와 오미대교 ⓒ 서규호   천천히 센자키 시내를 거닐다 보면 큰 다리 하나가 나오는데 바로 센자키 시내가 보이는 오미지마로 넘어가는 오미대교를 만납니다. 오미지마는 일본 서해안의 절경지대로 기타 나가토 국정공원 내에 위치하고 멋진 해안이 일품입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오지야마 공원에서 센자키 시내를 조망해 봅니다. 좁은 해협을 지나 오미지마 공원 정상에 오르면 센자키 시내가 보입니다. 봄에 벚꽃이 피면 너무나 아름다울 이곳! 꼭 올 봄에 다녀오세요! 찾아가는 법 : JR 시모노세키 역에서 열차로 JR나가토시 역이용 센자키 지선으로 환승. ///오마이뉴스 / 서규호 시민기자
2126    영국 시인 - 월리엄 블레이크 댓글:  조회:3068  추천:0  2018-03-22
  순수의 예감               월리엄 블레이크   한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월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영국 시인이며, 양말공장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성경은 매우 열심히 읽었지만 교회에는 전혀 나가지 않았고, 오히려, 거꾸로 종교와 교회를 비판했다고 한다.  그의 [순수의 예감]은 매우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이며, 그만큼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시라고 할 수가 있다. “한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 모래알(원자)이라는 것을 뜻하고, “한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는 것은 한송이 들꽃이 천국의 아름다움과도 똑같다는 것을 말한다. 모래알과 모래알의 결합에 의해서 이 세계가 태어나고, 모래알과 모래알의 분리에 의해서 이 세계가 해체된다. 한송이 들꽃은 천국의 아름다움이며, 이 아름다운 들꽃 속에서, 모든 시간은 무한으로 확대된다.모래알과 모래알의 결합도 순간이고, 들꽃과 들꽃의 피고 짐도 순간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순간의 아름다움이 자아를 망각한 황홀함의 시간이 되고, 이 황홀함의 시간 속에서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순수는 때묻지 않은 시간이고, 더없이 아름다운 시간이며, 영원불멸의 시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순수의 예감]은 스티브 잡스가 가장 사랑했던 시이며, 스티브 잡스는 그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이 시를 암송하며, 마침내, 드디어 ‘스마트폰으로 여는 세상’을 창출해내게 되었던 것이다. 21세기는 ‘스마트폰의 세상’이며, IT업계의 거장인 스티브 잡스의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스티브 잡스의 스승은 상징주의 시인인 월리엄 블레이크이며, 상징이란 새로운 세상의 표지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둥과 벼락의 화신인 제우스 신전, 아테네의 수호신인 팔라스 아테네의 신전, 빛과 진리와 예언의 신인 아폴로 신전, 브라만, 비쉬누, 시바의 신전 등----, 모든 신전과 성상들은 순수의 상징이며, 그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간다.    한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는 자, 한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보는 자, 자기 자신의 손바닥으로 무한을 움켜쥘 수 있는 자만이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고,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오오, 순수여!    오오, 영원한 순수여!      
2125    오스트리아 시인 - 잉게보르크 바하만 댓글:  조회:4230  추천:0  2018-03-06
잉게보르크 바하만 [Ingeborg Bachmann 1926∼1973]           오스트리아 시인, 작가. 1926년 오스트리아 남부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나 빈, 그라츠, 인스부르크 등 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1950년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관한 연구 - - 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3년 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1973년 10월 로마에서 객사하기까지 바하만은 서정시인이자 소설가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브레멘 시 문학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시집 《유예된 시간(1953)》, 방송극 《여치들(1954)》 《맨해튼의 선신(善神, 1958)》, 단편집 《서른살(1961)》, 장편 《말리나(1971)》, 단편집 《동시에(1972)》 등이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의 강연 등이 유명하며, 1968년 오스트리아 문학부문 국가대상을 수상하였다. 전통적 시의 정신이 풍부하면서도 새로운 순수한 언어로 진실의 세계를 추구하는 작품세계는 가치를 상실한 시대의 인간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어 새로운 전후문학의 도래로서 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인생을 투시하는 철학적인 사고와 새로운 언어로 짜여져 있는 바하만의 작품들은 현대의 고전으로서 전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독일문학에 있어서의 '전환의 순간' -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출현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옌스는 여류 시인 바하만의 출현을 가리켜 독일문학에 있어서의 "전환의 순간"이란 찬사를 보낸바 있다. 그만큼 바하만의 첫 시집 의 출현은 독일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바하만의 시가 지닌 독특한 음색은 괴리되고 맥빠진 사물들을 한데 모아 재구성하는 시인 특유의 사유의 응집력에서 비롯된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다분히 차갑고 냉정하며, 사상과 관념의 두께에 짓눌려 어떤 의미에서는 '비서정적'이기까지 하다. 축축한 서정적 감정의 과잉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철학적인 사색과 지적인 통제를 통해 시를 드라이하게 조탁하는 솜씨, 이것이 바로 바하만의 장기이다. 평론가들이 그녀에게 '사색하는 서정시인(denkende Dichterin)'이란 꼬리표를 달아 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과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은 바하만 시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는 양대 산맥이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는 침묵의 미학을, 하이데거에서는 실존적 언어 철학을 수혈 받았다. 다시 말해, 전자에게서는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부정의 정신을 전수 받았다면, 후자에게서는 언어의 존재론적 심연을 후벼파는 날선 삽을 훔쳐 온 셈이다. 그의 시세계에서는 "침묵의 현을/피의 파도 위에 팽팽히 당기고", "나의 침묵의 웅덩이 속에/하나의 단어를 넣고", "입에 여운(餘韻)을 물고/전진하며 침묵함이 옳다"와 같은 시구들이 보여주듯, 언어가 갖는 표현의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줄곧 침묵의 미학과 맞물려 돌아간다. 또한 하이데거에게 언어란 '존재의 집(Haus des Seins)'이였듯, 바하만에게도 언어는 세계와 자아의 이해를 위한 결정적인 존재 형식으로 규정된다. 예컨대, "내가 집으로 여기는/나를 둘러싼 구름인/독일어와 더불어 나는/모든 언어를 편력한다."란 시구를 보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는 단어 속에 살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목소리가 겹쳐 울리지 않는가. 이처럼 언어에 대한 부정과 긍정 사이의 경계에서 펼치는 아슬아슬한 지적 곡예가 바하만 시가 움직이는 주요 동선이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생리적 비애, 이것이 바로 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에게 내려진 천형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하만에게 진리의 땅이란 우리가 닻을 내리자마자 다시 출항해야만 하는, 어쩌면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있는 침묵의 땅으로 감지된다. 그녀의 대표작인 '영국과의 이별'이란 시에는 이러한 그녀의 유목민적 정서가 잘 스며들어 있다. "나는 그대의 땅/침묵의 땅을 밟고, 돌 하나를 건드리자마자/나는 그대의 하늘에 의해 그토록 높이 올려졌고/구름 속 안개와 저 먼 곳으로 끌려가 있었기에/정박(碇泊)하자마자 벌써/나는 그대를 이미 떠나야 했다." (류신/문학평론가)   Stargazers / Lucy Rawlinson       유희는 끝났다       사랑하는 나의 오빠, 언제 우리는 뗏목을 만들어 하늘을 따라 내려갈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나의 오빠, 곧 우리의 짐이 너무 커져서 우리는 침몰하고 말 거예요. 사랑하는 나의 오빠, 우리 종이 위에다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철로를 그려요. 조심하세요, 여기 검은 선(線)들 앞에서 연필심과 함께 훌쩍 날아가지 않게요. 사랑하는 나의 오빠, 만약 그러면 나는 말뚝에 묶인 채 마구 소리를 지를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어느새 말에 올라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와, 우리 둘은 함께 도망치고 있군요. 집시들의 숙영지에서, 황야의 천막에서 깨어 있어야 해요, 우리의 머리카락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는군요. 오빠와 나의 나이 그리고 세계의 나이는 해로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교활한 까마귀나 끈끈한 거미의 손 그리고 덤불 속의 깃털에 속아넘어가지 마세요. 또 게으름뱅이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지 마세요, 그 곳의 남비와 항아리에선 거짓 거품이 일거든요. 홍옥요정을 위한 황금다리에 이르러  그 말을 알고 있던 자만이 승리를 거두었지요. 오빠한테 말해야겠어요, 그 말은 지난 번 눈과 함께 정원에서 녹아서 사라져버렸다고 말이에요. 많고 많은 돌들 때문에 우리 발에 이렇게 상처가 났어요. 발 하나가 나으면, 우리는 그 발로 펄쩍 뛸 거예요, 아이들의 왕은 그의 왕국에 이르는 열쇠를 입에 물고 우리를 마중하고,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를 거예요: 지금은 대추야자 씨가 싹트는 아름다운 시절! 추락하는 이들마다 날개가 달렸네요. 가난한 이들의 수의에 장식단을 달아준 것은 빨간 골무, 그리고 오빠의 떡잎이 나의 봉인 위로 떨어지네요. 우리는 자러 가야 해요, 사랑하는 이여, 놀이는 끝났어요. 발꿈치를 들고. 하얀 잠옷들이 부풀어오르네요. 아버지 어머니가 그러는데요, 우리가 숨결을 나누면,  이 집안에서는 유령이 나온대요.   Man with red flag / Lucy Rawlinson     유예된 시간       보다 혹독한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판결의 파기로 유예된 시간이 지평선에 보이게 되리라.  이제 곧 그대는 구두끈을 조여 매고 개들을 늪지로 쫓아버려야 한다.  물고기의 내장들은 바람을 맞아 차갑게 식어버렸으니  초라하게 루우핀의 빛이 타오르고 있다.  그대의 시선이 안개 속에 궤적을 남기니,  판결의 파기로 유예된 시간이 지평선에 보이게 되리라.  저편에서 그대의 연인이 모래에 묻혀 가라앉고 있다.  모래는 그녀의 나부끼는 머리칼까지 솟아오르고,  모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아 침묵하라고 명령한다.  모래는 그녀가 죽어가고 있음을,  모든 포옹 후 기꺼이 이별을 감수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뒤돌아보지 말라.  그대의 구두끈을 조여 매라.  개들을 쫓아 보내라.  물고기를 바다 속에 던져 버려라.  루우핀의 빛을 꺼버려라!  보다 혹독한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The Woods / Lucy Rawlinson       하얀 날들   요즘 들어 나는 자작나무와 함께 기상하여 얼음으로 만든 거울 앞에 서서 밀 같은 머리칼을 이마에서 빗질해 넘긴다. 나의 숨결과 섞이면, 우유가 눈송이 모양이 된다. 이런 새벽이면 우유는 쉽게 거품을 낸다. 그리고 창문에 입김을 불면, 거기 어린애 같은 손가락으로 쓴, 너의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순결함이여!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요즈음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내가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사랑한다. 하얀 불꽃이 될 때까지 나는 사랑하며 천사의 인사법으로 감사한다. 나는 그 인사법을 빠르게 익혔다. 요즈음 나는 알바트로스를 생각한다, 나를 등에 태우고 날아올라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땅으로 훌쩍 건너온 그 새를. 수평선에서 나는 어렴풋이 느낀다. 찬란하게 침몰하면서, 저 건너편의 동화와 같은 나의 대륙을, 내게 수의를 입혀 자유를 준 그 대륙을. 나는 살아, 멀리서 대륙이 부르는 백조의 노래를 듣는다.     St. James Park / Lucy Rawlinson     광고   그러나 날이 저물고 추워지면  걱정마세요 걱정말아요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걱정말아요  그러나  음악과 더불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즐겁게 그리고 음악과 더불어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즐겁게  종말에 직면하여  음악과 더불어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져가야 하나  가장 멋진 일은  우리의 문제들과 모든 세월의 두려움을  꿈의 세탁장으로 오시는 것 걱정 근심 다 버리고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가장 멋진 일은  죽음 같은 정적이  찾아들면  ============================== 잉게보르크 바하만 「설명해 줘요 내게, 사랑」        당신 모자가 조금 느슨하군요, 인사를 하고, 바람에 들썩이는군요.    당신의 벗겨진 머리는 구름을 걸치고 있고    당신의 가슴은 어딘가 다른 곳과 맺어져 있으며    당신의 입은 새로운 언어와 한몸을 이룹니다.    시골의 방울풀이 곳곳에 무성하고    여름은 아스터꽃을 불어 일으키고 또 불어서 없앱니다.    꽃송이에 날려 당신은 눈감은 채 얼굴을 드는군요,    당신은 웃고 당신은 울고 당신 자신 때문에 지칩니다.    무슨 일이 생겨야 하는 것인지…      설명해 줘요 내게, 사랑!     공작이 화려한 놀라움의 몸짓으로 깃을 텁니다.    비둘기는 털깃을 높이 올리고    가득찬 노마(駑馬)들 가운데서 공기는 팽창되구요.    야생 벌꿀로부터 받아들여요.    온 마을이 사람 가득 앉은 정원에서도    모든 금빛 꽃가루가 화단마다 술을 붙이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홍조를 띄우며, 무리를 앞질러 가면서    동굴을 지나 산호밭으로 넘어지고    전갈이 수줍게 은모래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딱정벌레가 멀리서 가장 근사한 냄새를 풍깁니다.      내가 그저 그 감각기관(感覺器官)을 가졌다면, 나는 또    날개가 그 갑옷 아래에서 번득이는 것을 느낄 텐데요.    그리고 먼 딸기 덩굴로 가는 길을 취할 텐데요.      설명해 줘요 내게, 사랑!      물은 이야기를 할 줄 알지요,    물결은 물결끼리 손을 잡고    포도밭 산에서는 포도덩굴 부풀어 가고, 튀어나오고, 떨어집니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달팽이가 집에서 나오는군요!      하나의 돌은 다른 돌을 부드럽게 할 줄 안답니다!      설명해 줘요. 내게, 사랑이여,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소름끼치는 짧은 시간을    그저 상념(想念)들과 교제를 해야 하고 오직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사랑이 아닌 것을 해야 할까요?    사랑은 생각이란 걸 해야 합니까? 그런 게 없이 되는 상태는 없나요?      당신은 말하는군요; 다른 정신이 있을 수도 있지……    아무것도 설명하지 마세요. 온갖 종류의    불들을 통해서 나는 도롱뇽이 걸어가는 것을 봅니다.    어떤 구경꾼도 놈을 사냥하지 못하죠, 놈을 아프게도 하지 못하구요.   (김주연 역)   ■ 시_ 잉게보르크 바하만 – 시인, 소설가, 방송극 작가, 에세이스트. 1926년 오스트리아 캐른텐 지방 클라겐푸르트에서 출생. 빈의 방송국에서 3년간 라디오 방송을 위한 수많은 각색을 했으며, 1952년 그룹 낭독회에서 작품이 처음으로 낭독되었다. 1953년 처녀시집 『유예된 시간』으로 '47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이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 독일비평가협회상 수상작인 『삼십세』, 그리고 『대웅좌의 부름』, 『말리나』 등이 있다. 브레멘 시 문학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등을 수상함.    ■ 낭송_ 성경선 – 배우. , 등에 출연.    ■ 출전_ 『장미의 벼락 속에서』(열음사)    ■ 음악_ 최창국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온 우주는 사랑의 섭리로 이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사랑이 아닌 것을 권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밟지요. 그래서 바하만은 이렇게 절규합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사랑이 아닌 것을 해야 할까요? /사랑은 생각이란 걸 해야 합니까? 그런 게 없이 되는 상태는 없나요? ” 그리고 이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말’것을 청합니다. 사랑은 사람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을.    “당신의 가슴은 어딘가 다른 곳과 맺어져 있으며 /당신의 입은 새로운 언어와 한몸을” 이루고 있다는 이 매혹적인 시를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모든 이에게, 아니 사계절이 사랑의 계절인 모든 이에게 권해보는 바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당신 가슴이 어딘가 다른 곳과 맺어져 있지 않고/ 당신 입에서 새로운 언어가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랑이 떠난 화석의 사람이란 것을 경고하는 시이기도 하니 권태는 껍질을 벗고 사랑이라는 생살의 쓰라림을 택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렇게 권유하는 듯합니다.    “하나의 돌은 다른 돌을 부드럽게 할 줄 안답니다! 하나의 돌은 다른 돌을 부드럽게 할 줄 안답니다! 하나의 돌은 다른 돌을 부드럽게 할 줄 안답니다!……” 이러한 메아리를 가슴에 두르고 살아가려면 이러한 시를 가슴에 두르고 살아야지요. ///장석남 시집배원
2124    미국 시인 - 아치볼드 매클리시 댓글:  조회:4811  추천:0  2018-02-22
-시법(詩法)/아치볼드 매클리시-   시는 감촉이 있고 묵묵(默默)해야 한다 둥근 과일처럼 엄지 손가락에 닿는 오래된 메달처럼  말 없고 이끼 낀 창(窓) 턱의 소맷자락에 닳은  돌처럼 고요하고 새가 날듯이 시는 무언(無言)해야 한다 시는 달이 떠오르듯 시시각각 움직임이 보이지않아야 한다 어둠에 얽힌 나무를 한 가지 한 가지씩 달이 놓아 주듯 겨울철 나뭇잎에 가리운 달처럼 하나씩 추억을 간직하면서 마음에서 떠나가야 한다 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사실이 아니라 슬픔의 긴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를 사랑을 위해서는 비스듬히 기댄 풀잎들과 바다 위 두개의 별빛을 시는 의미(意味)할 것이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     ============================ 시학/아치볼드 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한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또오를 때처럼 시는 비둥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되며 존재해야 한다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 1892. 5. 7, 미국 일리노이 글랜코-1982. 4. 20, 보스턴. 미국의 시인·극작가·교사·공무원. 그의 유명한 서정시들은 대개 개인적인 성향에 머물고 있지만, 많은 작품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예일대학에서 공부했고, 보스턴에서 3년간 변호사로 일한 뒤, 1923년 완숙한 시작법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고국을 떠난 몇 년 사이에 펴낸 〈행복한 결혼 The Happy Marriage〉(1924)·〈흙으로 빚은 항아리 The Pot of Earth〉(1925)·〈달빛에 비친 거리 Streets in the Moon〉(1926)·〈A. 매클리시의 햄릿 The Hamlet of A. MacLeish〉(1928) 등의 시집에서는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의 영향이 보인다. 선집에 자주 수록되는 시 〈시작법 Ars Poetica〉(1926)을 쓴 것도 이 시기이다. 1928년 미국에 돌아온 뒤, 〈신대륙 New Found Land〉(1930)을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인 소박한 서정적 웅변이 돋보이며, 대표시로 꼽히는 〈그대, 앤드루 마블 You, Andrew Marvell〉도 여기에 실려 있다. 매클리시는 1930년대에 들어와 파시즘의 위협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멕시코 정복과 착취를 주제로 한 〈정복자 Conquistador〉(1932)는 그가 쓴 최초의 대중시이다. 이밖에도 시집 〈록펠러 씨의 도시를 위한 프레스코 벽화 Frescoes for Mr. Rockefeller's City〉(1933)·〈대중연설 Public Speech〉(1936)·〈아메리카는 약속이었다 America Was Promises〉(1939)에 많은 시들이 수록되었다. 라디오 운문극으로는 〈도시의 몰락 The Fall of the City〉(1937)·〈공습 Air Raid〉(1938)·〈위대한 미국의 7월 4일 행진 The Great American Fourth of July Parade〉(1975) 등이 있다. 의회도서관장(1939~44)과 국무차관(1944~45)을 지냈고 정부기관에서 여러 직책을 거친 후 194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보일스턴 교수가 되어 1962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52년 〈시선집 1917~1952 Collected Poems:1917~1952〉를 내놓았고 1976년에는 〈New and Collected Poems:1917~1976〉을 발표했다. 성서의 욥 이야기를 토대로 한 극시 〈제이 비 J. B.〉는 1958년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었다. 이밖에 수필집 〈땅의 기수들 Riders on the Earth〉(1978)이 있다.             ======================== Art Poetica              詩 作法                        Archibald MacLeish                               아치볼드 매클리시   A poem should be palpable and mute 손에 만져지면서도 말이 없어야 한다 As a globed fruit. 둥글둥글한 과일처럼   Dumb 묵묵해야 한다 As old medallions to the thumb.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래된 메달처럼.   Silent as the sleeve – worn stone 소매에 닳아버린 돌처럼 조용해야한다 Of casemant ledges where the moss has grown 이끼 자라난 창턱의     A poem should be wordless 말이 없어야 한다 As the flight of birds. 새들이 날아가듯 .     A poem should be motionless in time 시간 속에 움직임이 없어야 하나 As the moon climbs, 달이 떠으르 듯,     Leaving, as the moon releases 달이 얽힌 나무 가지로부터 Twig by twig the night-entangled trees, 가지 하나하나를 풀어 놓듯,     Leaving, as the moon behind the winter leaves, 겨울 잎새 뒤에 있는 달이 Memory by memory the mind— 마음에서 기억 하나하나 풀어놓듯,     A poem should be motionless in time 시간 속에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As the moon climbs. 달이 떠오르듯.   A poem should be equal to: 시는 동등해야한다: Not true. 사실이 아니다. (시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걸 맞는다는 뜻) For all the history of grief 비통한 역사에서는 An empty doorway and a maple leaf. 빈 문간과 하나의 단풍 잎(이어야 한다)     For love 사랑에는 The leaning grasses and two lights above the sea— 누워있는 풀잎과 바다위의 두 개의 불빛     A poem should not mean 시는 의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But be. 존재해야 한다. (시는 이미지를 통해 의경을 나타내야 한다는 뜻)         아치볼드 매클리시 Archibald MacLeash (1892~1982)미국 시인 위의 詩는 로마 시인 호러스가 詩作法에 쓴 ‘Ars Poetica’를 읽고, 나름대로 해석하여 쓴 시이다.  요약하면 시는 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     ============================= ▲ 아치볼드 매클리시  Ars Poetica  (Archibald MacLeish (1892~1982))  A poem should be palpable and mute  As a globed fruit,  Dumb  As old medallions to the thumb,(…)  A poem should be wordless  As the flight of birds. (…)  A poem should be equal to  Not true.  For all the history of grief  An empty doorway and a maple leaf  For love  The leaning grasses and two lights above the sea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  시법(詩法)  (아치볼드 매클리시)  시는 둥그런 과일처럼  만질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래된 메달들처럼  딱딱하고(…)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시는 구체적인 것이지  진실된 것이 아니다.  슬픔의 긴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을 위해서는  기우는 풀잎들과 바다 위 두 개 불빛  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단지 존재할 뿐이다. (부분)  詩를 쓰고 싶다면… 그의 눈동자를 떠올리세요  시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시입니다. 시란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것, 즉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구구절절이 설명하기보다는 ‘과일’과 ‘오래된 메달’ ‘새의 비상’처럼 독자가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슬픔을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독자가 시인의 슬픔을 연상할 수 있도록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시입니다. 사랑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서로 기대어 한 방향으로 기우는 풀잎들, 깜깜한 바다 위에서 함께 반짝이는 두 개의 불빛만 보여주면 됩니다.  여러분이 시인이라면 사랑을 위해서 어떤 이미지를 사용하시겠습니까?  Archiblad MacLeish   1892년 5월 7일 제 9대 의회 도서관장, 아치볼드 매클리시 출생 여러분은 미국의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의회 도서관에 소장된 각종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의회 도서관에 소장된 자료는 방대합니다. 이 자료를 통해 역사의 각 시점과 인물에 대해 배울 수 있고,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선언서 초고 등의 자료를 실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데 대해 감사해야 할 사람 중에는 아치볼드 매클리시가 있습니다.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1892년 5월 7일 일리노이의 글렌코(Glencoe)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인, 극작가, 변호사, 공직자,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아치볼드는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의회 도서관장으로 일했습니다. 매클리시는 의회 도서관장으로 일하는 동안 도서관을 재편하고 ‘독자들이 도서관의 자료를 더욱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매클리시는 독립선언서 같은 중요한 자료를 녹스 요새(Fort Knox)로 보내어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의회 도서관을 미군 정보 부대에 24시간 개방하기도 했습니다. 매클리시는 다른 중요한 업적도 남겼습니다. 매클리시는 젊어서 3년 간 변호사 생활을 한 뒤, 가족과 함께 파리로 가서 시를 써서 시집을 여러 권 냈습니다. 미국에 돌아와서는,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에 관한 장편 서사시 를 썼습니다. 이 작품으로 매클리시는 1933년에 시 부문 퓰리처 상을 수상했습니다. (퓰리처 상은 시인과 작가, 또 음악 및 언론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매년 상을 수여합니다.) 의회 도서관장 임기가 끝난 후에는 국무부 부장관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시를 더 쓰고 성서의 욥 이야기를 토대로 극시인 도 썼습니다. 이 극시로 매클리시는 1959년 희곡 부문 퓰리처 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치볼드 매클리시를 다양한 관심사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르네상스 인이라 부를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여러분도 르네상스 인일지도 모르죠? 여러분의 관심사와 재능은 무엇인가요? ======================================== 시법(詩法) 【시】-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 시는 둥근 과일처럼 만져지고 묵묵해야 한다.   엄지에 닿는 낡은 메달처럼 소리 없고   이끼 자라난 소매에 닳은 창시렁의 돌처럼 조용해야 한다.   시는 새들의 비약처럼 말이 없어야 한다.   시는 달이 떠오르듯이 시간 속에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달이 밤에 얽힌 나무로부터 가지를 하나하나 풀어 놓듯이   겨울 잎새 뒤에 있는 달이 마음에서 기억을 하나하나 풀어 놓듯이   시는 달이 떠오르듯이 시간 속에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시는 사실이 아니라 동등해야 한다.   슬픔의 모든 내력으로는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를   사랑의 경우 기울어진 풀잎과 바다 위에 뜬 두 불빛을-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 【개관】 ▶작자 :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서정적. 주지적 ▶어조 : 시의 당위를 강조하는 설득적 목소리 ▶심상 : 비유적. 상징적 ▶제재 : 시(詩) ▶주제 : 의미(意味)에 앞서는 시의 존재성(存在性) ▶발표 : 1926년 【구성】 ▶제1연∼4연 : 시의 묵묵함 ▶제5연∼8연 : 시의 정물감 ▶제9연∼12연 : 상징을 통해 드러나는 시의 존재 【시어 풀이】 : 말이 없음. 잠잠함 : 물건을 얹기 위해 건너지른 두 개의 장나무 : 높이 뛰어오름 : 어떤 사물이 지나온 유래 : 시를 둥근 과일에 비유하고 있다. 둥근 과일은 그 자체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그것을 만질 때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시는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 그 자체이다. : 슬픔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로 온갖 슬픔의 사연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텅 빈 문간에 단풍잎 하나면 된다는 뜻이다. 즉 인적이 끊어진 어느 슬픈 집안의 쓸쓸한 분위기를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해 주면 된다. :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로 사랑을 과학적·일상적 어법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시에서는 이처럼 설명의 방식을 택해서는 안 된다. 시에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울어진 풀잎과 바다 위의 두 불빛을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객관적으로 제시해 주면 그만이다. : 시란 어떤 주장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생명과 자기 충족적인 미를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매클리시 시론을 압축시켜 제시한 구절이다. 【감상】 이 시는 제목이 환기시키듯 시로 쓴 '시론(詩論)'이라고 할 수 있다. '시론'에 대해서는 여러 시 이론가와 평론가들이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시인들도 시로써 시론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시로써 시론을 쓸 경우에는 추상적인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서 구상화시켜 독자들에게 정서적으로 체험하도록 함으로써 시의 이론을 한결 실감나게 이해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효과가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갖가지 비유를 통해 시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이 시의 핵심은, 시란 직접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시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생명과 자기 충족적인 미(美)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의 제일 마지막 구절인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란 대목은, 바로 이러한 시인의 시론을 압축적으로 제시한 명구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매클리시 : 시 |작성자 재봉틀
2123    조숙한 동성련애자 천재 시인 - 랭보 댓글:  조회:7338  추천:0  2017-12-27
  출생 1854. 10. 20, 프랑스 샤를빌 사망 1891. 11. 10, 마르세유 국적 프랑스 요약 조숙한 천재 시인으로 근대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산문시집 은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개요 어린시절 반항과 시적 환상 여행가와 무역상 평가 랭보((Jean-Nicolas-)Arthur Rimbaud) 프랑스의 시인이다. 개요 한때 폴 베를렌과 깊은 관계(동성련애자)를 맺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린시절 랭보는 프랑스 북동부의 아르덴 지방에서 육군 대위와 그 지방 농부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살 위였고, 여동생은 2명이었다. 1860년 랭보 대위는 아내와 헤어졌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키우게 되었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적 능력을 보인 아르튀르는 8세 때부터 타고난 글재주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샤를빌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특히 라틴어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70년 8월에는 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시로 1등상을 받았다. 그가 처음 발표한 시는 1870년 1월 〈르뷔 푸르 투스 La Revue pour Tous〉에 실렸다. 187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전쟁 때문에 그의 정식 교육은 막을 내렸다. 8월에 그는 파리로 달아났지만, 차표 없이 여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옛날 은사가 벌금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두에로 보냈다. 두에에서 그는 국민군에 들어갔다. 10월에 그는 다시 사라져, 침략군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두에에 도착하여 2주일 동안 자유와 굶주림과 거친 생활 속에서 쓴 시들을 다듬었다. 삶과 자유 속에서 느끼는 천진난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들은 그가 처음으로 쓴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어머니의 고발로 그는 다시 경찰에 잡혔지만, 1871년 2월 그는 손목시계를 팔아 다시 파리로 가서 2주일 동안 거의 굶다시피하며 보냈다. 반항과 시적 환상 3월초에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에 쓴 시들을 가짜라고 내팽개치고, 삶에 대한 혐오감과 순진무구한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선과 악의 투쟁의식을 표현한 거칠고 불경스러운 시를 썼다. 그의 행동도 그가 쓴 시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그는 종교와 도덕 및 온갖 종류의 규율에 대한 의식적인 반항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동시에 그는 신비주의 철학과 밀교(密敎) 및 마술과 연금술에 대한 책을 읽었고, 2통의 편지(1871. 5. 13, 15)에 표현된 새로운 미학을 형성했다. 특히 2번째 편지는 〈견자(見者)의 편지 Lettres du voyant〉라고 불리는데, 이 제목은 시인이란 무릇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볼 수 있고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모든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영원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즉 '견자'(voyant)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71년 8월말 랭보는 샤를빌의 한 문우의 충고에 따라 시인인 폴 베를렌에게 그의 새로운 시를 몇 편 보냈다. 그중에는 각 모음에다 다른 색깔을 부여한 소네트 〈모음 Voyelles〉도 들어 있었다. 베를렌은 이 시들의 탁월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랭보에게 여비를 보내어 파리로 초대했다. 갑자기 폭발한 자신감 속에서 랭보는 〈취한 배 Le Bateau ivre〉를 썼다. 이 시는 전통적인 작시법을 따르고 있지만, 깊은 정서적·영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서 언어구사의 기교가 놀랍고 상징과 은유의 선택이 대담하기 짝이 없다. 이 걸작에서 랭보는 그의 예술의 가장 높은 정점들 중 하나에 도달했다. 187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랭보는 3개월 동안 베를렌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을 거의 다 만났지만, 거만하고 버릇없는 태도와 음탕함으로 베를렌만 제외하고 그들 모두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떠나라는 요구를 받자 술을 퍼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를 맺어 추문을 일으켰다. 1872년 3월 그는 베를렌이 아내와 화해할 수 있도록 샤를빌로 돌아갔지만, 5월에 다시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이제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맹세했다. 이 시기에(1871. 9~1872. 7) 랭보는 운문으로 된 마지막 시를 썼는데, 이 작품은 기법의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에서 뚜렷한 진보를 보이고 있다. 이때 그는 베를렌이 걸작이라고 격찬한 〈영혼의 사냥 La Chasse spirituelle〉이라는 작품도 썼지만 이 작품의 원고는 베를렌과 랭보가 영국에 갔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부 비평가들은 초월적인 산문시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도 이 창조적인 시기에 쓴 작품으로 보고 있지만, 랭보 자신은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어떤 시에도 날짜를 적지 않았다. 1872년 7월 베를렌은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쳐 소호에서 살았다. 랭보는 이곳에서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1873년 1월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랭보의 동정을 사기 위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연극을 했다. 4월에 랭보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머물고 있는 샤를빌 근처의 로슈에 있는 농장으로 가서 스스로 "이교도의 책, 또는 흑인의 책"이라고 부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이라는 작품이 되었다. 1개월 뒤, 그 근처에 머물고 있던 베를렌은 랭보를 설득하여 함께 런던으로 갔다. 랭보는 베를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거기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고, 이 죄의식 때문에 베를렌을 가학적일 만큼 잔인하게 다루다가도 금방 그것을 뉘우치고 다정하게 대하곤 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7월초 베를렌은 랭보와 다툰 뒤 그를 버리고 벨기에로 가버렸다. 그러나 아내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랭보를 불러온 다음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래도 랭보가 떠나려고 하자 베를렌은 랭보에게 총을 쏘아 손목에 상처를 입히고, 다시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베를렌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나중에 재판에서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랭보는 곧 로슈로 돌아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정신이 지옥에 떨어지고 예술과 사랑에서 실패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1873년 가을 벨기에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파리에서 호평을 받지 못한 데다 인쇄업자에게 돈을 줄 수도 없게 되자, 그는 인쇄된 책을 모두 포기하고 원고와 서류들을 샤를빌에서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책을 여러 권 묶은 꾸러미가 1901년에 벨기에의 장서가인 레옹 로소에게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 사실을 1915년에야 공표했다. 1874년 2월 랭보는 난폭하고 자유분방한 시인 제르맹 누보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잡역을 하여 번 쥐꼬리만한 돈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랭보는 이때에도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보는 6월에 파리로 돌아갔고, 랭보는 병에 걸렸거나 가난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7월말에 그는 버크셔 주 레딩에 있는 합승마차 매표소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집으로 간 뒤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랭보는 1875년초에 베를렌을 마지막으로 만났고, 이 만남도 역시 격렬한 말다툼으로 끝났다. 랭보가 베를렌에게 〈일뤼미나시옹〉 원고를 준 것은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여행가와 무역상 1875~76년에 랭보는 독일어·아랍어·힌두스타니어·러시아어를 배우고 세상을 구경하러 떠났다. 1879년 6월까지 그는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서인도 제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했고, 독일 서커스단과 함께 스칸디나비아로 갔고, 이집트를 방문했으며, 키프로스 섬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매번 병에 걸리거나 다른 어려움을 만나 고통을 겪었다. 1879년 겨울 내내 장티푸스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랑생활을 그만두고 장래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봄에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 그는 건축업자의 현장감독으로 취직했지만, 곧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아덴에서 커피 무역상에게 고용되어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에 들어갔다. 이 탐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프랑스 지리학회 회보(1884. 2)에 실려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885년 10월 랭보는 저금을 털어 셰와(에티오피아의 일부)의 왕인 메넬리크 2세에게 무기를 팔기 위한 원정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메넬리크 2세는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인 요한네스 4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88년 중엽에야 겨우 기반을 잡는 데 성공했고, 요한네스 4세가 이듬해 3월에 살해당하고 메넬리크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에는 총포 밀수로 얻는 수입이 계속 줄어들었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 그는 가장 가난한 원주민만큼 소박하게 살면서, 언젠가는 은퇴하여 느긋하게 살 수 있는 돈을 모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남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너그러웠고, 그가 원주민 여인과 함께 살던 작은 집은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럽인들의 집합 장소가 되었다. 그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타고난 재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정직성과 성실함으로 추장들의 신뢰까지 얻었으며, 특히 메넬리크의 조카인 하레르 총독은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애정과 지적인 친구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1891년 봄 그는 신부감을 찾기 위해 고국에 가서 휴가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서 살고 있던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에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ètes maudits〉(1884)에서 그에 대해 썼고, 그의 시를 발췌하여 발표했다. 이 시들은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지만 랭보한테서는 소식이 없었다. 랭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에게서 답장도 받지 못한 베를렌은 1886년 상징파의 정기간행물인 〈보그 La Vogue〉에 〈일뤼미나시옹〉이라는 제목의 산문시와 여러 편의 운문시를 '고(故) 아르튀르 랭보'의 작품으로 발표했다. 랭보가 이런 발표에 대해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저주받은 시인들〉이 출판된 뒤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1885년 8월에 그는 학교 동창생인 폴 부르드한테서 편지 1통을 받았는데, 부르드는 전위파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특히 소네트인 〈모음〉)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890년 7월에 한 평론지가 보낸 편지(프랑스로 돌아와 새로운 문학운동을 이끌어보라고 권유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가 그의 서류 틈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가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답장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다. 1891년 2월 오른쪽 무릎에 종양이 생겨, 4월초에 하레르를 떠날 때는 해안까지 1주일 걸리는 길을 줄곧 들것에 실려 가야만 했다. 아덴에서 받은 치료는 실패했고 그는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직후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거의 위안이 되지 못했고, 그는 여동생 이자벨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좌절감과 절망을 쏟아놓았다. 7월에 로슈로 돌아갔을 때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이자벨이었다. 그는 여전히 결혼하여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질 뿐이었다. 1891년 8월 그는 마르세유로 악몽 같은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를 따라간 이자벨은 오빠의 병이 나을 가망이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랭보는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뎌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이자벨은 그를 설득하여 신부에게 고해를 하게 했다. 신부와 나눈 이 대화는 그에게 새로운 평화를 가져다 주고, 소년 시절의 시적인 상상력을 다시 일깨워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견자'가 되어, 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일뤼미나시옹〉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보다 훨씬 더 깊이있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근거는 여동생 이자벨의 말일 뿐이고, 이자벨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히 랭보가 에티오피아에서 쓴 편지를 몇 군데 교정했다는 점에서 이미 믿을 수 없는 증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가 랭보보다 더 열렬한 연구대상이 되거나 근대 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도 드물다. 그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작품은 산문시 〈일뤼미나시옹〉인데, 이 시의 형식은 그의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선배 시인들과는 달리 산문시에서 일화를 이야기하고 서술하는 내용이나 심지어는 묘사적인 내용까지도 모조리 제거해버렸고, 낱말에서 사전적 의미나 논리적 내용을 박탈함으로써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에타 담'(état d'âme:영혼의 상태)이라는 정신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거의 마술적인 힘을 시에 부여했다. 그는 또한 잠재의식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감각 속에 얼마나 풍부한 시의 재료가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문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 자체에 대한 오늘날의 반감과 혐오감을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 =====================================덤으로 더...   아르튀르 랭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출생 1854년 10월 20일 프랑스, 샤르빌 사망 1891년 11월 10일 (37세) 프랑스, 마르세유 직업 시인 언어 프랑스어 국적 프랑스 사조 상징주의 영향 받은 분야·인물[보이기] 영향을 준 분야·인물[보이기]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프랑스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프랑스어 발음: [aʁtyʁ ʁɛ̃bo] ( 듣기), 1854년 10월 20일 – 1891년11월 10일)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저서 2.1지옥에서 보낸 한 철 2.2일뤼미나시옹 3관련 사진 4대중 문화 5외부 링크   생애[편집] 아르덴 주의 샤를빌(지금의 샤를빌메지에르)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일찍 집을 버리고 나갔고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학창시절에는 뛰어난 모범생이었으나, 차차 반항적으로 되었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방랑도 하게 되어 16세로 학업을 포기한다. 이 전후에 쓴 여러 시에는 그의 그리스도교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과격한 혐오감이 가득 차 있다. 랭보는 시인은 우주의 모든 것을 투시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871년 5월에 유명한 '견자'(voyant 부아양[*]=천리안이라는 뜻)의 설(說)을 제창하여 이 새로운 문학적 실험에 들어갔다. 얼마 뒤 100행의 장시 《취한 배》를 쓰고서는 베를렌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오고,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가 된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아 여러 곳을 방랑하면서 파멸적인 생활을 보내다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랭보를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으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이 2년간의 이상한 체험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훌륭하게 정착되어 있다. 이때부터 그는 문학의 열의가 차츰 식어 실제적인 직업을 구하고자 분주하게 다닌 한편 환상적인 《일뤼미나시옹》의 산문은 대부분 이 시기에 썼다고 추정된다. 이 산문 시집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함께 프랑스 산문시의 최고봉을 이룬다고 하지만, 후자는 거친 그림자를 숨기고 그의 상상력에 의하여 해체된 현실이 보다 높은 차원의 시적 현실에 다시 구축되고 있다. 이미지의 풍요로움과 신선함은 다른 시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1875년 문학을 단념하고 유럽 각지를 유랑하다가 1880년경 아프리카로 건너가더니 상인·대상들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다리의 종기가 덧나 프랑스 마르세유 병원에서 한쪽 다리를 자르고 몇 달 후 숨졌다. 조숙한 천재 시인 랭보의 영향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뚫어서 현대시에도 파급하여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저서[편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입니다. 랭보가 1873년에 출판한 시집이다. 폴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였다가 베를렌이 브뤼셸에서 랭보를 저격하여 이별한 이후 완성되었다. 랭보 그 자신에 의해 출판된 유일한 책이며, 초현실주의자를 포함하여 후대의 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일뤼미나시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일뤼미나시옹입니다. 1886년 5월과 6월에 파리의 문학 평론지인 《라 보그》(La Vogue)에서 부분적으로 처음 출판된, 랭보의 미완성 산문 시집이다. 1886년 10월에 레 퓌블리카시옹 드 라 보그(Les publications de La Vogue)가 랭보의 전 애인인 폴 베를렌이 제안한 《레 일뤼미나시옹》(Les Illuminations)라는 제목을 붙여 책의 형태로 재출판하였다. 관련 사진[편집] 샤를빌메지에르에 있는 랭보 박물관   샤를빌메지에르에 있는 랭보 생가   샤를빌메지에르에 있는 랭보 무덤 ========================================================== 문학 랭보의 절절한 편지 (부제: 베를렌, 제발 돌아와줘...) 사뿐사뿐 2017.11.25 18:25     요즘 백수다.  그래서 예전에 영화 토탈이클립스로 인해 관심을 갖게 된 랭보옵빠의 책을 찾아 읽었다. 사실 랭보에 빠져든 이유는, 영화에서 랭보역을 넘나 잘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옵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일생에 흥미를 갖고 써치해보면서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어린나이부터 자기는 시인이 될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 그런 포부를 뱉어놓고 실제로 고군분투한 것, 당대 잘나가던 시인한테 제발 자기 작품좀 읽어달라고 여러번 편지를 보낸 것, 자기가 쓴 시에 대해서 엄청 자신있던 것, 등등 또라이 같은 짓을 많이 해도 밉지 않았던 것은, 그 나름대로 계속 노력을 해서가 아니었을까.   또 어린나이에 (10대에) 시를 쓰기 시작해서 20대초반 (정확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약 5년동안 시를 가열차게 쓰고 미련없이 관둔 것도 신기하다. 그 후로 바람구두를 신고 여기저기 싸돌아 다닌 것도...    나무위키를 읽다가 알게된 건데, 랭보의 유명 국내빠돌이로 타블로랑 하현우가 있다고 한다. 타블로는 '막을 올리며' 라는 곡에서 '난 숨만 쉬어도 랭보' 라고 작사했으며, 하현우는 랭보관련해서 팔에 문신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랭보가 살았던 샤를빌? 샤를르빌? 을 방문하는 전세계적 빠순 빠돌이들도 많다고 하니..  정말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건 분명하다.   아무튼, 회사에 쩌들어서 매일 집->회사->집->회사의 루틴만 반복하느라  나의 감수성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흑.   쨌든, 오랜만에 감수성에 푹 빠져보자.   도서관에서 빌릴 수가 없게 되어있어서 ㅡㅡ 관심이 가는 부분을 사진 찍어왔다. (불법은 아니겠지?) 좀 있다 밑에서 한 땀 한 땀 타이핑해가며 음미할 예정♡   시는 몇개 읽다가 도저히 무슨 말인지 (한글로도 어려운데 영어라서 더 멘붕) 모르겠어서 흥미로운 편지들부터 읽어보았다. 그 중에 제일 임팩트 강렬했던 거 ㅋㅋ  랭보를 버리고 떠난 베를렌느에게 제발 다시 오라며 보낸 편지.      영화 토탈이클립스 中, 배를 타고 떠나버린 베를렌느를 보며 우는 랭보 ㅠ ... 후회해도 소용 없는 각 ...      RIMBAUD TO VERLAINE    London Firday afternoon [July 4, 1873]   Come back, come back, my dear, my only friend, come back. (아 첫 줄부터... 절절하다. 제발 도라와죠....!!!)   I swear to you I'll be good. If I was mad at you, it was a joke I carried too far, and I'm sorry for it, more than I can say. (맹세할게, 너한테 잘할게...! 내가 너한테 화난거였다면, 그건 죠크였어.. 내가 너무 심했어. 암쏘쏘리...ㅠㅠ)   Come back, we'll forget the whole thing. It's awful that you should have taken that joke seriously. (도라와죠.. 다 잊자. 내가 그냥 생각없이 날린 죠크를 진지충처럼 받아드린거가 틀림없어.. 유감이야.. 잠깐만, 돌아와달라고 설득하는 중 마즘?;;;)   I haven't stopped crying for two days. Come back. Be brave, dear friend; nothing is lost. All you have to do is make the trip again. (나.. 이틀동안 계속 울었쪙... 돌아와!!!! 용감해지자. 잃을건 없쟈나. 너는 그냥 우리가 했던 여행을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거쟈나. 점점 번역이 이상해지고 있는 느낌적 느낌. 그치만 괜찮아 내가 읽을라고 하는 거니까 ㅎ)   We'll live here again very bravely and very patiently. Oh! I beg you, it's for your own good, really. (우린 여기 다시 같이 살거야.. 매우 용감하고 인내심있게?? 왜 자꾸 brave란 단어를 썼을까.. 동성애라? 베를렌느가 마누라 버리고 같이 여행중인거라?)   Come back, you'll find all your things here.  (도라와죠.. 니 물건 여기 다 있쟈나...)   I hope you realize now that there was nothing serious in our discussion. What a horrible moment! (우리가 했던 대화...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심각한건 아닌거 같지? 응? 정말 끔찍했던 순간이었어 ㅠㅠ. 내맘대로 번역중 ㅋㅋㅋ)   And that time when I waved at you to get off the boat, why didn't you? (그리구 내가 너보고 배에서 내리라고 눈물 콧물 짜면서 난리쳤을 때.. 왜 안내린거야..? 갑자기 책망하기 시작하는 랭보ㅋㅋ)   We've lived together for two years, and this is what it's come to! What are you going to do? (우리 2년동안 같이 살았는데, 우리의 끝이 겨우 이거인거야?? 베를렌.. 너 앞으로 뭐할 건데?)   If you won't come back here, do you want me to come meet you where you are? (너가 여기로 오지 않겠다면, 내가 니가 있는 곳으로 갈까? 응? 번역하다보니 점점 랭보에 빙의잼)   Yes, I'm the one who was wrong. Oh! Oh! You won't forget me, tell me you won't. No, you can't forget me. I have you always with me. (그래. 내가 호로자식이었어. 오! 오! 너 .. 나 잊지 않을 거지? 잊지 않겠다고 말해! 아냐, 넌 날 잊을 수 없어. 난 너랑 항상 함께 였는 걸. 아... 진짜 너무 짠하다. ㅠ 베를렌이 그렇게 떠나버린게 좀 많이 충격이었나보다)   Tell me, answer your friend, aren't we ever going to live together again? Be brave. Write me an answer right away. (말해줘, 우리 같이 다시 안 살거야??? 용감해줘... 또 용감이라 썼다... 읽씹하지 말고 당장 답장줘)   I can't stay here anymore. Don't listen to anything except your heart. Quick, tell me if I should come to meet you. (나 여기 더 못있어. 니 심장이 하는 소리만 듣고 판단해줘.. 빨리, 내가 너한테 가길 원하는지 말해줘)   Yours for the rest of my life. (뭔 표현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무튼 애정듬뿍 담긴게 느껴진다. 넌 내 남은생의 전부야??)   Answer right away; I can't stay here beyond Monday evening. I haven't got a penny left; I can't even mail this. (바로 답장줘. 나 여기 월요일 저녁이후로 더 못있어. 왜냐면.. 떙전한푼 없거든 ㅎ 너한테 이 편지를 보낼 돈도 없어 ㅎ)   I've left your books and manuscripts with Vermesch. (네 책이랑 원고들을 Vermesch와 함께 남겨뒀어. Vermesch가 뭔가염..)   If I can't see you again, I'll joing the navy or the army. (만약 내가 널 다시 못 만나는 날엔, 나 걍 군입대 해버릴거야.......!! 랭보..대박...)   Oh, come back, I Keep crying all the time. Tell me to come to meet you, I'll come. (오 제발 돌아와. 나 매일 울고있느라 넘 힘들어.. 널 만나러 오라고 말해, 내가 갈게!)   Tell me; send me a telegram. I must leave Monday night.  (말해줘, 아님 나한테 전보쳐. 나 월요일 밤에는 여길 떠나야만 해... 카톡이 없던 그 시절.. 연락이 바로 안되서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웠을까ㅠ)   Where are you going? What are you going to do? (너 어디로 가고 있는거야? 앞으로 뭐할건데? 응?)      .........여기까지 감명깊게 읽은 랭보의 편지였다. 물론 이 책도 French -> English라 그 당시 랭보가 썼던 뉘앙스의 100%를 담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소설보다도 더 재미있는 느낌ㅎ  남의 편지를 훔쳐읽는 그런 관음적인 느낌ㅎ   나중에 불어배워서 불어 원본그대로 또 읽어보고 싶다. 그땐 또 느낌이 다를수도...? 근데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듯싶다.   아 갑자기 토탈이클립스가 떙기는 밤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들리는 음울한 배경음악 들으러 꼬고♪ //////////////////////////////////////////     도시 위에 가볍게 비 내리네                                   내 마음은 울고 있다네 도시 위에 비 내리듯 ;   이 우수는 무엇일까, 내 마음에 파고드는 이 우수는     오 부드러운 비의 소리여 땅 위에 지붕 위에   내 지겨운 마음을 위해 오 비의 노래여!     이유 없이 우는구나, 이 역겨워진 마음은.   뭐라고! 배반은 없다고?... 이 슬픔은 이유가 없구나.     가장 나쁜 고통이구나, 이유를 모르는 것은   사랑도 없이 증오도 없이 내 마음은 그토록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구나!       나의 방랑 생활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나는 하늘 아래 나아갔고, 시의 여신이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꿈꾸었는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었지. -꿈꾸는 엄지동자인지라, 운행 중에 각운들을 하나씩 떨어뜨렸지.    주막은 큰곰자리에 있었고. -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하여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의 살랑거림에 귀기울였지,   그 멋진 구월 저녁나절에, 이슬 방울을 원기 돋구는 술처럼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한발을 가슴 가까이 올린 채, 터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면서!     감각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 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 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모음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들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터질 듯한 파리들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灣); E, 기선과 천막의 순백(純白), 창 모양의 당당한 빙하들;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살랑거림.   I, 자주조개들, 토한 피, 분노나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     U, 순환주기들, 초록 바다의 신성한 물결침,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글술사의 커다란 학구적인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한 금속성 소리로 가득찬 최후의 나팔,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는 침묵, 오, 오메가여, 그녀 눈의 보랏빛 테두리여!     취한 배     유유한 강물을 타고 내려올 적에, 더 이상 수부들에게 이끌리는 느낌은 아니었어   홍피족들 요란스레 그들을 공격했었지, 색색의 기중에 발가벗겨 묶어 놓고서     플랑드르 밀과 영국 솜을 져 나르는 선원들이야 내 알 바 아니었어,   배를 끄는 수부들과 함께 그 북새통이 끝났을 때 나 가고 싶은 데로 물살에 실려 내려왔으니,     격하게 출렁이는 조수에 휘말린 지난 겨울, 난, 노아보다 더 넉넉한 골을 싸잡고   헤쳐 나갔지! 떠내려간 이베리아 반도도 그처럼 의기양양한 혼돈을 겪지는 못했을 거야,     격랑은 내가 항행에 눈뜬 것을 축복해 주었어, 코르크 마개보다 더 가벼이 나는 춤추었지,   끊임없이 제물을 말아먹는다는 물결 위에서, 열흘 밤을, 뱃초롱의 흐리멍텅한 눈빛을 드리지도 않으며!     셔츠를 짓찢을 듯 모진 겨울바람에,       지옥에서 보낸 한 철                               1.서시     옛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들이 흘러다니는 하나의 축제였다.       어느날 저녁 나는 美를 내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보니 지독한 치였다- 그래서 욕을 퍼부어 주었다.     나는 정의에 항거하여 무장을 단단히 했다.   나는 도망했다. 오 마녀여, 오 불행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을 나는 너희들에게 의탁했다.   나는 내 정신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희망을 사라지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 희망의 목을 비트는데 즐거움을 느껴,   나는 잔인한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나는 죽어가면서 그들의 총자루를 물어 뜯으려고   사형집행인을 불렀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 속에 팍 쓸어졌다. 나는 죄의 바람에 몸을 말렸다.   나는 광대를 잘 속여 넘겼다.     봄은 나를 향해 백치처럼 무시무시한 웃음을 웃었다.   그런데, 요즘 마지막 껄떡 소리를 낼 찰라에,     나는 옛날의 축제를 다시 열어줄 열쇠를 찾으려 했다.   그러면 아마도 욕망을 되찾을지 모른다.     자애(慈愛)가 그 열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내가 전에 꿈을 꾸었나보다.   "너는 잔인한 놈으로 남으리라....." 따위의 말을,     그토록 멋진 양귀비 꽃을 나에게 씌어준 악마가 다시 소리친다.   "네, 모든 욕망과 이기주의와   모든 너의 죄종(罪宗)을 짊어지고 죽으라"       오! 내 그런 것은 실컷 받아드렸다. 하지만, 사탄이여,   정말 간청하노니, 화를 덜 내시라!     그리고 하찮은 몇 가지 뒤늦은 비겁한 짓을 기다리며,   글쟁이에게서 교훈적이며 묘사적인 능력의 결핍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 나의 저주받은 자의 수첩에서 보기흉한 몇 장을 발췌해 준다.       *죄종(罪宗)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7개의 주된 죄                교만, 탐욕, 사음(邪淫), 질투, 탐심, 분노, 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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