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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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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기동 두만강가에 웃음 넘친다 댓글:  조회:4775  추천:91  2005-10-06
신기동 두만강가에 웃음 넘친다 향 설 9월 16일, 이날따라 날씨는 흐리터분하여 탐석에 안성맞춤이였다. 두달나마 무더위에 탐석엄두도 못내던 두만강문인수석회 회원들은 오랜만에 신기동 북쪽구간의 두만강가 집단탐석에 다시 나섰다. 연변텔레비 《고향의 아침》 제작진이 동행한데서 이날 집단탐석은 자못 활기를 띠였다. 아침 7시 훈춘행뻐스로 연길을 떠난 두만강수석회 5명 회원들과 연변텔레비 《고향의 아침》 제작진 3명이 도문을 벗어나 동쪽의 신기동행 길어구에 내리자 도문의 세 녀사를 휘동하여 뒤미처 도착한 김학송 일행 넷이 합세하여 흥을 돋구었다. 두만강수석회 회원들로 말하면 두만강가 신기동 구간은 잊지 못할 탐석지였다. 천리 두만강이 연변수석의 제1번지이고 신기동구간이 주요탐석지라 할 때 지난해 7월 28일 고고성을 터친 두만강수석회는 며칠후 8월 1일 두만강가 신기동 남쪽구간에서 첫 집단탐석을 펼쳤었다. 스스로의 동아리—두만강문인수석회가 세워져 벌써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지만 신기동 첫 집단탐석행의 시각시각이 눈에 삼삼했다. 그날을 떠올리며 몇리 걸어 신기동 북쪽 탐석지에 이른 이들 일행은 배낭을 내려놓기 바쁘게 돌밭 여기저기 흩어져 수석찾기에 여념없었다. 그 모습이 기껍다며 《고향의 아침》 제작진 3명은 조일권연출의 지도하에 두대의 촬영기를 메고 두만강수석회 회원들을 좇으며 장면장면 촬영에 열성을 다했다. 여기저기서 즐거운 담소가 그침없다. 어느덧 점심시가이 되자 탐석일행은 한자리에 모이였다. 도시락을 푸니 풍성한 오찬이 차려졌다. 시가지 식당놀이 부럽잖은 오찬인데다가 도문의 허송절 등 세 녀사가 끼이여 신기동북안 두만강가는 내내 웃음으로 흘러 넘치였다. 사진촬영, 텔레비촬영속에 술잔이 오가고 우정이 오가며 대자연이 한없이 즐거웠다. 뒤미처 안바이지만 도문의 세 녀사중 허송절은 연변작가협회 회원이고 도문시 2소 글짓기 지도교원으로서 선후로 동시집, 수필집을 출판해 2003년 연변작가협회 작가상 등 다수 수상한 경력자이고 작문지도에서 해마다 풍성한 결실을 맺던 중 올해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와 연변교육학원에서 주최하고 5000여명이 참가한 제9회 조선족중소학교학생 백일장에서도 금상 하나, 은상 둘, 동상 하나, 장려상 하나를 따낸 성과자이기도 했다. 말띠생인 배순복은 연변예술학교 1977년 졸업생으로서 도문시 5중에서 음악교원으로 사업, 한국 3년생활을 거쳐 도문시 2소에서 3-4년간 무용교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 오영자는 도문시 기전(机电) 총공장에서 뛰다가 지금은 퇴직생활을 하고있었다. 이들 세 녀사는 수석인들 탐석행이 이리도 신나는줄 몰랐다며 점심자리를 빛내주었다. 오후 한동안의 탐석을 거쳐 탐석참가자일행은 언덕진 곳에서 수석합평회를 가지였다. 저마다 탐석한 수석을 내놓고 각자가 돌아가며 장원석으로부터 짚었다. 결과 연변대학 나젊은 교수 신철호선생의 형상석수석이 장원으로 뽑혀 박수소리와 함께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신기동 두만강가 북쪽구간에서의 탐석의 하루, 이날 집단탐석은 《고향의 아침》 제작진 동행에 도문시 허송절 등 세 녀사의 가세로 하여 전에 없이 활기로왔다. 웃음이 넘친 탐석의 하루, 텔레비 촬영의 하루였다.
13    두만강가탐석 "고향의 아침" 방영 댓글:  조회:4614  추천:104  2005-10-06
두만강가탐석 《고향의 아침》 방영 향 설 9월 25일,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고향의 아침》프로에서는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신기동 두만강가탐석을 특집프로를 찍어 일요일 《고향의 아침》프로에 방영하였다. 12분간이나 방영된 《고향의 아침》 프로는 우리 나라 관내나 내지도 아닌, 연변 두만강수석만의 독특한 향토석에 초점을 맞추어 두만강수석의 특이함과 월등함을 만방에 널리 알리였다.
12    수석에 정들어 댓글:  조회:4782  추천:87  2005-08-12
수석에 정들어 김 대 현 수석에 정이 들어 애석생활을 즐긴지도 어언 10년세월이 흘렀다. 지난 10년동안 나는 생활의 반려인 수석과 정을 나누며 수많은 대화를 했고 날이 갈수록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왔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말 못하는 돌에 정은 무슨 정이며 대화는 무슨 대화냐며 우습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수석에 취미를 붙인 사람들은 나의 말이 옳다고 이구동성으로 긍정할것이다. 한번 재미를 붙이면 떨어지지 못하는것이 수석취미임을 나만이 아닌 모든 수석인들이 느끼는바이다. 오죽하면 이제는 수석없는 인생을 생각조차할수 없다고 말하겠는가. 사실 잠을 자다가도 한 밤중에 일어나 수석을 살살 쓰다듬으며 감상할 때도 있으니 그 애석의 정도가 어느만큼 되리라는것을 가히 짐작하리라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옛날 제자식들을 키울 때는 철없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수석을 어루만지듯 애들을 자주 어루만져주지를 못했다. 그랬는데 수석에는 정이 드니 하루에도 열번, 스무번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주고있으니 수석의 매력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산이나 계곡, 강가에 가면 흔한것이 돌이다. 그러나 수석은 평범한 돌이 아니다. 돌은 돌이로되 수천수만개의 돌중에 하나가 있으나마나한 희귀하기 그지없는 돌이다. 수석은 자연이 빚은 조각품이다. 인공으로는 도저히 창조할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것이 수석이다. 수석에는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응축되여 있다. 유구한 세월 비바람에 깎이우고 풍화에 시달리고 물살에 씻기우면서 천태만상의 형태를 이루며 생긴것이 수석이다. 수석에는 산이 있고 바위가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다. 어떤 수석에는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 저 멀리 얌전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있고 어떤 수석에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풀피리 불며 고개마루를 넘어 오는 목동이 보인다. 리태백이 놀던 달이 비끼여 그윽한 정서를 풍기는 수석도 있다. 그리고 망망한 바다에서 사나운 격랑을 맞받아치며 우뚝 치솟는 바위를 방불케 하는 수석도 있다. 이처럼 자연의 천태만상 경관이나 경정 그리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수석을 감상하느라면 마음이 취하듯 황홀해지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한껏 느끼며 상상과 사색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고향산봉우리가 울멍줄멍 솟아있고 억새풀 나붓기는 호수가에 백학이 날아드는듯한 산수경석이나 시골의 초가집처마에 제비가 날아드는듯한 형상석을 보며 가만히 있을수가 있겠는가. 그럴진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생긴 명석을 감상하는 시인, 미술가, 조각가들의 들먹이는 심정이야 더 이를데 있으랴! 수석이란 바로 이런것이기때문에 10여년세월 휴식일이면 배낭을 등에 지고 탐석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 멀리 두만강기슭과 가야하기슭에 발자취를 남기며 수석을 찾아다닌 길 얼마였고 해란강, 구수하, 봉밀하, 부르하통하, 륙도하 기슭을 누비며 다닌 길은 또 얼마였던가. 어떤 때는 홀몸으로, 어떤 때는 석우들과 함께 흥흥 코노래 부르며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록수청산에 한몸을 맡기고 탐석의 즐거움을 맛보느라면 과연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줄도 모른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대자연속에서 만사를 잊고 마음을 비운채 오로지 탐석에만 열중하는 그 즐거움이란 말로 이루다 표현할수 없다.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면 가지고 간 도시락을 펼쳐놓고 술 한잔 넘기며 층암절벽에 뿌리 박고 너울너울 설레이는 소나무숲을 쳐다보노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면서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일거에 해소된다. 더군다나 마음에 드는 수석 하나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더 말할나위가 없다. 그럴 때면 산천이 떠나갈듯 막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다. 그 어떤 아름다운 형태를 가졌거나 상징적미감을 발산하는 수석을 발견해가지고 그것을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훑어보는 재미도 수석인만이 느낄수 있는 특유의 재미이다. 돌 하나에서 아름다움과 그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것이야말로 《발견의 미학》이 아닐수 없다. 탐석은 다름아닌 자연미의 발견이고 천연예술품의 발견이다. 수석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가장 가까이 할수 있게 하고 자연과 인간을 적절히 조화 시켜주는 대자연의 걸작이자 연분을 맺어주는 《오작교》이다 .수석은 변화하지 않고 묵직하며 말없이 산수의 정취나 각양각색의 형태를 나타내기에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고 아무리 자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바로 수석의 이런 불변성과 무언성에서 진실과 소박함을 배우게 되고 참고견디는 인내성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자연과 늘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마음의 평온과 안위를 얻게 된다. 수석의 매력과 미학적가치가 이렇기때문에 좋은 수석 몇점을 올려놓고 사는 집에 들어서면 대번에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보이는것도 사실이다. 어떤 수석인의 집에 가보면 형태나 문양, 색상이 기가 막힐 정도로 뛰여난 수석이 있다. 그런 수석을 이윽토록 바라볼 때면 이것이 과연 돌일가 하며 침을 흘리게 된다. 지어는 집에 돌아와서까지도 그것이 눈앞에 삼삼거려 진정할수 없다. 아무튼 수석에 정이 들어 10여년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의 생활에서 반려가 되고 정다운 벗이 되여 언제나 나와 함께 숨쉬는 수석! 그 수석을 찾아 올해도 초라한 행각으로 강따라 물따라 가고 가리라.
11    여가문화의 추구자 실천자 김대현 선생 댓글:  조회:5180  추천:108  2005-07-29
여가문화의 추구자 실천자 김대현선생 리 함1.서론 오늘날 경제의 신속한 발전에 따른 생활의 지속적인 향상과 생활조건의 크나큰 개선으로 하여 인류의 수명이 보편적으로 연장되면서 사람들의 년령구조는 재래의 인생 50~60년형에서 인생 80년형으로 바뀌여진다. 평생직장은 운운할수 없고 대신 그 자리를 채워가는것은 갈수록 늘어만 가는 여가생활이다. 이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속에서 생활의 풍요로움을 창조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여가문화가 조용히 깃을 펴고있다. 여가란 직업적인 일 혹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로부터 해탈된 결과로 생긴 자유시간, 혹은 개인이 구속없이 임의로 지배할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단마디로 말하면 우리 말로 겨를이나 틈인데 유럽의 서구나라들에서는 20세기 중반에 벌써 여가를 학문적인 경지에로 승화시키면서 여가문화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동양문화권인 한국의 경우에는 여가문화연구가 이미 발자국을 떼고 여가문화협회들이 활성화되고있는 현실이지만 우리 연변에서는 아직 여가문화란 개념조차 생소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현실이다. 이럴 때 여가문화의 열렬한 추구자, 실천자로 각광을 보이고있는 지성인들이 나타나고있는데 그 돌출한 대표인물들중의 한분이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의 원 부주필 김대현선생님이 아닌가싶다. 여가형태로 받아들여지고있는 여가문화에는 각종 놀이, 오락, 게임, 독서, 스포츠, 여행…등 넓은 범위의 생활여가들이 포괄되지만 김대현선생은 트럼프, 마작, 장기, 낚시 등 시간소일을 위한 놀이문화에 비해 보다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삶의 질적가치를 부여한 취미생활—장서, 수석수집, 옛 민속품수집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있다. 여가문화의 일익을 이루는 김대현선생님만의 독특한 삶의 추구라 해야겠다. 1944년 이른 봄날에 당년의 화룡현 서성구 이도촌에서 생의 계주봉을 넘겨받은 김대현선생은 1968년에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마치고 중학교교원을 거쳐 1975년부터 연변인민방송국 화룡주재기자, 방송국기자, 편집으로 삶의 코스를 바꾼다. 1984년 1월부터 방송국 부주필로 18년, 2001년 12월 방송국의 지도책임을 젊은이들에게 넘겨준 뒤에는 임의로 지배할수 있는 시간적여유가 늘어갔다. 이 같은 여가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하며 주어진 삶—여생을 충실히 하기 위해 김대현선생은 상기 취미생활에 보다 집요함을 보이며 여가문화의 새 편장을 엮어갔다.2.본론 여가문화의 추구에서 보여주고자 함은 삶의 질을 높여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것일것이다. 여가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기호가 그러하다.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영위하다가 흐르는 세월속에서 직장 1선에서 물러나고 보다 많은 여가생활이 주어질 때 이 생활의 여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자기의 경제생활과 취미에 맞는 스스로의 생활습관을 개발하는것은 여생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서 자못 중요하다고 보아진다. 경제의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질도 부단히 높아지고있다. 그러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여 꼭 삶의 질이 저절로 높아진다고 볼 수 없다. 아무리 생활수준이 높아져도 먹고 마시는데만 신경을 쓰거나 자기만을 위해 살거나 저급적인 취미에만 물젖어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삶의 질은 보잘것 없는것이다. 옳바른 취미기호추구, 여가문화의 풍요로운 창조는 그 사람의 인생포부와 인간다움을 말하는데 김대현선생은 자기의 취미기호를 여가문화속의 장서, 수석, 옛 민속품—세가지로 잡는다. 1)김대현선생의 첫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우리 글로 된 책들을 널리 수집하는 장서(藏書)이다. 김선생은 지난세기 50년대초에 부모님들이 조선 복구건설에 지원해나갔기에 어려서부터 초중을 졸업할 때까지 《연변의 미츄린》으로 불리운 외할아버지—최일선 댁에서 자라야 했다. 화룡시 쟈피거우어구에 자리잡은 선생의 외가집은 과일동산에 둘러싸인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였다. 동년의 그 시절에 김대현선생은 벌써 그림같은 과일동산의 대자연속에 묻히여 아무놀이도 모른채 책보기에만 열중하였다. 소시적의 취미라 하겠다. 선생의 어려서부터의 꿈은 기자나 작가가 되는것이였다. 그래서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다니던 60년대중반에 선생은 장서로 넘친 연변대 도서관에 파묻혀있다싶이 했다. 동년의 꿈과 대학시절의 책보기는 향후 이름난 장서가로 될 탄탄한 토대로, 밑거름으로 되였다. 뜻대로 기자의 생애를 시작한후 김대현선생은 글쓰기와 더불어 《사람들 기억속에 사라져가는 옛 물건—도서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후세에 넘겨주어야》겠다는 책임감, 사명감을 강렬히 느끼였다. 드디여 이는 선생의 소원으로 되여 지난세기 80년대중반부터 책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거리거리의 책 난전은 책수집의 주요무대였다. 이렇게 여러 해가 흐르니 수천권의 책이 모아졌다. 이런 수천권의 책들속에는 문학, 민속, 력사, 정치, 인물전기, 관광저서, 의서 등에 이르기까지 없는것이 없다. 보풀이 일고 누렇게 변색된 이런 책가운데는 연변서 1948년에 발행된 《문화》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말잡지도 있고 50년대초에 발행된 《연변문예》, 《아리랑》,《연변청년》 등 잡지들이 있는가 하면 지난 20~30년대 조선문예작품집들도 수두룩하고 광복후 조선서 출판한 장편서사시 《독로강》,《백두산》 등 시집만 해도 퍼그나 된다. 당년에 모스크바 외문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문서적들도 적지 않다. 또 1915년 중화민국시기 길림성기상자료집, 1956년 북경고적출판사에서 3000부만 출판한 《자치통감》(1권-10권)은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수 없다. 김대현선생의 장서를 보면 기준이 있는데 조선문도서는 지난 50~60년대가 위주이고 조선출판물은 지난 70년대 이전을 위주로 한다. 《현대문명의 충격과 출판부진, 조선족인구의 감소 등 원인으로 다시는 출판이 어려운 옛 책들, 그런 옛책에 사회발전의 력사가 기록되여있고 그 당시 인간들의 지혜와 슬기, 감정과 생활상이 그려져있다.》고 선생은 말한다. 하기에 선생은 《돈부자는 못되더라도 책부자는 되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책으로 메운 책시렁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고 보물고에서 산다는 기분으로 마음이 든든해진다고 한다. 책속에 만석의 곡식 들어있다는 김대현선생의 생활지조, 여가문화의 한 분야로 된 책수집—이런속에서 김대현선생은 청춘을 되찾은 기분이고 또 그로하여 더 없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간다. 2)김대현선생의 두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수석탐석과 수집이다. 수석은 가공을 허용하지 않는 대자연의 걸작으로서 크게 산수경석, 형상석, 문양석, 색채석 등 4개 분야로 나눈다. 자연을 사랑하고 산수를 즐기는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수석이란 말그대로 산수경석의 략칭이기도 한다. 하나의 돌덩이에서 아름다운 산수의 경치나 산수미의 세계를 여러 가지로 련상하고 맛보고 즐기게 되니 진짜 돌과 인간과의 만남은 뜻깊은 만남이라고 할수 있다. 김대현선생은 이런 수석세계에서 삶을 가꾸며 멋지게 살아간다. 수석이란 부름은 지난 80년대말, 90년대초부터 우리 조선족들의 말밥에 소리없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김대현선생은 1990년부터 수석에 강한 취미를 느껴 휴식날이면 어느 강변으로 탐석을 가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배낭을 지고 두만강, 가야하, 봉밀하, 구수하, 륙도하…돌밭을 찾아다니며 수석을 발견하는 그 재미가 별멋이고 시원한 강바람, 맑은물 출렁이는 우거진 숲, 새들의 지저귐소리는 그야말로 선경에 들어선 기분이란다. 참다운 수석인이 된다는것이 쉽지 않다면 참다운 탐석인이 된다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탐석을 즐기는 김대현선생은 연변지성인들의 동아리—연변두만강수석회의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강따라, 산따라 다니지 않는곳이 없다. 외지출장길에도 수수한 옷차림에 배낭을 지니고 다니며 고물시장이나 수석가게에 들려 마음에 드는것을 사서 등에 지고오는 선생이다. 하여 선생의 집에는 가야하의 명석을 망라한 오묘한 수석만도 수십점에 달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황홀케 한다. 수석세계는 살아숨쉬는 대자연의 축소판이여서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작은것에서 큰 경치를 보아내고 한점의 수석에서 대자연의 여러가지 신비로움을 련상하면서 그 찡한 진미를 맛보고 즐기는것이 진짜 수석인들이다. 《집안에 들어서면 돌을 어루만져 주고 물을 먹여주고 자식처럼 귀여워한다.》며 김대현선생은 수석에 푹 빠져버렸다. 취미생활에서도 으뜸가는 취미는 수석문화라는 김대현선생은 수석을 떠나서는 생활이 멋적을것 같다며 수석 하나에서 자연의 숨결, 자연의 정취와 신비로움, 조화로움과 천태만상의 예술적감흥,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삶을 풍요롭게 가꿔가는 분이다. 여가문화속의 또 하나의 멋진 세계라 하겠다.3) 김대현선생의 세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옛 민속품 수집이다. 민속은 한 민족의 지나온 력사를 여실하게 담는 거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태여나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식생활을 떠날수가 없다고 할 때 식생활의 발달과 더불어 식기와 부엌용구들이 발달하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조선민족의 숟가락과 식기의 발달은 놀라울 정도이다. 숟가락과 놋그릇을 례로 들어도 숟가락의 사용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오른다면 놋식기, 놋수절을 중심으로 한 놋그릇은 벌써 통일신라시대때부터 상당한 발전을 보이였다. 그만큼 조선민족의 생활세태를 보여주는 갖가지 옛 민속용품들은 다종다양하여 겨레의 전통적인 민속풍습으로 줄곧 꾸준히 지난 80~90년대까지 전하여내려왔다. 허나 현시대 생활의 급격한 향상과 더불어 유구한 력사를 가진 이런 옛 민속품들이 급격히 소실되여가는 현실이다. 소실은 단절을 의미한다. 우리 이 세대에 와서 민속의 맥이 끊어져서는 안된다. 사명감에 부푼 김대현선생은 책수집, 수석탐석과 함께 지난 90년대초반부터 취미생활의 한 분야로 겨레의 옛 민속품수집에 정진하였다. 선생의 집안에 들어서면 남쪽베란다와 북쪽베란다 모두가 가지수가 다양한 옛 민속품세계이다. 실로 갖가지 옛날 사발, 종류가 다양한 놋그릇과 10여종에 다하는 다리미로부터 인두, 돌절구, 동고리, 다듬이돌, 방망이, 가마니용 바디, 떡메, 떡구유, 함지, 쌀함박, 물동이, 각종 질그릇, 오지단지, 로인식사용 소반, 표주박, 나무바가지, 옛 자물쇠, 오강, 화로, 매돌, 광주리, 기와 등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구전한 옛 민속품들이다. 보라, 100여년의 세월을 거치였다는 대짜옹이항아리, 옛날 우리 어머님들의 손때묻은 싸리광주리, 옛날 아낙네들이 시부모님들에게 진지상 받쳐올렸던 소반상, 옛날 가마니 짤 때 쓰던 바디, 가내용 작은 돌절구, 조선녀인들이 시집갈 때 바느실을 담았던 옛 동고리, 까마반지르르한 물동이들, 윤택이 나는 크고작은 10여개의 옛 오지단지, 다양한 다리미 등이 자리를 메운다. 그중 놋식기, 놋숟가락, 놋쟁반, 놋저가락, 놋밥주걱 등 놋그릇만 해도 가지각색이여서 감탄이 절로 나며 탄복하지 않을수 없다. 어찌보면 지난날 농가의 뒤울안에서 이저리 뒹굴다가 녹쓸고 썩어버리고 쓸모없다고 쓰레기로 버리고 불아궁이에 넣어버리고 이사할 때마다 버리고 버린 《천한 물건》들이다. 이런 물건들이 김대현선생한테는 보석같이 빛나면서 하나같이 귀중한 겨레의 옛 민속용품으로 안겨들었다. 하기에 김대현선생은 이렇게 말한다.《우리의 생활과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는것들, 비록 나무나 쇠붙이, 흙으로 만들어지고 투박한것들이나 그것들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가 슴배여있고 조상들의 삶의 모습이 어려있고 해당 사회의 력사가 기록되여있는 소중한것들이다.》소중함의 미학을 알리는, 머리가 수그러지는 찡한 말씀이다. 김대현선생은 이같이 옛 물건들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애지중지 소장하고있다. 여가문화속의 한 분야를 이룬 이 자체가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사랑이고 후세인들에게 세세대대로 전하여주고 보여주려는 참된 마음의 발로이다. 삶의 승화된 경지, 민속의 맥락을 이으며 참신한 경지에 선 김대현선생의 모습을 볼 때 존경이 가지 않을수 없다.3. 결론 우에서 김대현선생의 여가문화속의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생활—책수집, 수석탐석, 옛 민속품수집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 모든것을 경제적으로 환산하면 꽤나 많은 돈으로 번져질수가 있다. 하나 김대현선생이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것은 돈이 아니였다. 소형적이나마 하나의 민속전시관이나 박물관을 꾸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겨레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게 하며 민속의 맥과 우리 삶의 현장을 후세에 그대로 길이 전하여 주겠다는것이 소망이고 노력방향, 그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삶의 질을 높여가는 김대현선생이다. 김대현선생은 인젠 60대초반에 이른 분이다. 선생은, 인간은 45살전후부터 뇌의 용적이 점차 줄어들며 뇌에 위축이 오기에 나이가 들면서 아무런 삶의 추구나 목표없이 덧없이 살아가면 신경이 무디여지고 바보스러워진다는 도리, 대신 로령이 되여 뇌에 적당한 자극이 가해지면 뇌의 활동기능을 제고시킬수 있다는 도리를 너무나 잘알고있다. 그래서 두뇌에 활력을 불어넣는 활성화조치가 바로 취미생활이다. 인생 여생기에 취미, 그것도 건전하고 고상한 취미를 갖는것이 뇌의 생리적로화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조치가 아닐가. 이면에서 김대현선생은 본보기를 보여주는데 선생은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생활로 삶에 신선한 활력을 주입하고 삶의 질을 한층 높이면서 건강하고 즐겁고 보람있는 로후생활을 창조하고있다. 김대현선생은 실로 값진 인생살이로 평가되는 장서, 수석, 옛 민속품 등 취미생활로 조선족여가문화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참된 인간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여가문화속에서 삶의 질을 승화시키면서 민족의 력사와 전통, 문화를 고이 간직하며 후세인들에게 세세대대로 전하여주고 보여주려는것이 김대현선생의 삶의 추구이며 참된 마음이다.
10    이채띤 김대현선생 "문집" 출판기념 및 작품세미나 댓글:  조회:4550  추천:109  2005-07-29
이채띤 김대현선생 "문집" 출판기념 및 작품세미나 리 함 7월 29일 오전, 연길시 모아산기슭에 자리잡은 연변휴일호텔 13층 강당에서 김대현선생 "문집" 출판기념 및 작품세미나가 자못 이채를 띠였다. 오늘의 출판기념 및 작품세미나는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작가협회, 연변로교수협회, "예술세계" 잡지사에서 주최하고 중공연변주위 선전부 부부장 채영춘을 비롯한 해당 지도자들과 언론계, 문학계, 문화계 등 분야의 지성인들 50여명이 참가하여 열기가 화끈했다. 오늘 모임은 연변인민방송국 국장 김동한, 연변작가협회 주석 김학천, 연변로교수협회 류은종교수 "예술세계" 주필 차순복 등이 모임에 축사를 드리고 이어 해당 론문발표자들인 작가 김응룡, 연변일보사 원 주필 오태호, 연변대 남희풍교수, 전국권교수,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리함, 이름난 작곡가 김남호 등이 김대현선생의 생애와 성과, 문학, 시, 가사, 가사와 작곡, 취미생활 등을 가지고 진지한 탐구를 하였다. 김대현선생은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의 원 부주필이고 연변두만강수석회 고문으로서 방송보도와 연구, 시, 가사, 시조, 소설, 수필 등 문학면에서 출중한 성과는 올린 분이다. 더우기 취미생활인 책수집, 수석수집, 옛민속품수집은 지성인 김대현선생만의 독특한 삶의 추구였다. 아래 김대현선생의 취미생활을 보여주는 "여가문화의 추구자 실천자 김대현선생"을 연우포럼에 올리니 흥미있는 분들의 왕림을 기대한다.
9    대자연의 기이한 돌세계 댓글:  조회:5099  추천:99  2005-06-30
대자연의 기이한 돌세계 리 함세상을 두루 돌아보느라면 흔히 부딪치게 되는것이 돌이다. 돌들가운데는 들쑹날쑹한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바위산이 있는가 하면 강물과 파도의 세례를 받으며 오랜기간 곱게 씻기여 다듬어진 조약돌과 기석들이 있으며 물을 뿜거나 소리를 내거나 사람을 죽이는 등 기이한 돌들도 있다.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여기서 소개하고픈것은 기이한 속성을 가진 괴상야릇한 돌들이다. 물을 뿜는 돌아일랜드의 아름다운 해변가에는 물을 뿜는 괴짜돌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 괴석은 조수가 밀려들 때마다 물을 뿜군하는데 25센치메터나 되는 폭의 물줄기가 30메터 높이에까지 치닫는다. 그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다. 이는 무엇때문일가? 알고보니 괴석의 꼭대기에는 직경이 25센치메터에 달하는 구멍이 있었다. 이 구멍은 바다로 이어진 동굴과 통해있었는데 조수가 밀려들 때면 바다물이 인차 압력을 이루어 구멍으로 물을 내뿜었던것이다. 밟으면 소리나는 돌독자들은 밟으면 소리가 나는 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이 괴상한 돌은 절강성 룡유현 오촌향 축가촌부근의 산속에 있는데 밟기만 하면 산이 무너지는듯한 굉음이 울린다. 이상한것은 밟는 사람은 굉음을 들을수 있으나 밟지 않은 사람은 아무런 소리도 들을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을 죽이는 돌어느날 아프리카 말리지질탐사대의 6명 탐사대원은 한 산속에서 아래 웃부분이 금황색과 남색이고 닭알모양으로 된 커다란 돌을 발견하고 트럭에 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트럭이 움직인뒤 6명 탐사대원들은 사지가 뻣뻣해나면서 눈앞이 흐려왔다. 그들은 방사성기체감염으로 하여 한달후에 모두 병원에서 죽어나갔다. 움직이는 돌17세기 초에 오늘의 구쏘련 프레쎄에 호수가 동북쪽에서 지름이 1.5메터에 달하는 돌이 발견되였다. 이 돌은 알렉쎄이산아래의 한 진흙구덩이에 있었는데 1788년 겨울에 사람들이 운반도중 프레쎄에호수에 떨군것이였다. 1840년말에 이 돌은 괴이하게도 어느때에 호수에서 나왔는지 호수밖의 언제우에 놓여있다. 1840년말부터 1912년까지의 사이에는 이미 호수에서 17메터 되는곳까지 움직이였다. 그후 이 돌은 수십년사이에 또 10여메터 옮겨앉았다. 사람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움직임이였다. 무게가 변하는 돌라대영은 귀주성 혜수현 아양향 간박촌민조의 사람인데 그의 집에는 무게가 변하는 타원형의 돌이 있다. 이 돌은 체적은 변하지 않으나 무게가 2킬로그람이나 늘어나거나 줄어드는데서 괴상한 돌이라고 불리웠다. 돌은 고등색이고 그 표면에는 천산갑의 껍질같은 도안과 손바닥모양의 크고작은 도안 7개가 서로 대칭되여있었다. 이는 1988년 9월이후의 뉴스이다. 후에 이돌은 조가비류화석이라는것이 밝혀졌다. 글자가 나타나는 돌내몽골동부의 커르친초원에는 물을 치면 글자가 나타나는 기이한 돌이 있다. 이 돌은 초원의 한 돌산에 있는데 당지 사람들은 이 산을 《비치커타이하다》라고 부른다. 《글자가 있는 산》이라는 뜻이였다. 산기슭의 맑은 내물을 떠다가 돌에 치면 괴이한 글들이 나타난다. 몽골문같기도 하고 장족문같기도 하였는데 가로세로 씌여진 《글자》들은 붓으로 쓴것만 같았다. 그런데 물이 마르면 글자도 소리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8    조선 평양의 수석전시관 댓글:  조회:4769  추천:94  2005-06-30
조선 평양의 수석전시관 리 함우리 연변의 수석인들 가운데는 적지않은 수석인들이 조선에서는 수석붐이 별로 일지 않은것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조선”화보 2003년 12호에 의하면 조선의 수도 평양시 만경대구 광복거리에는 수백점의 수석을 자랑하는 평양수석전시관이 세인의 주의를 끌고있다. 이 글은 리주엽(李朱葉)의 서명으로 되였는데 수석관의 수석거개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등 조선의 명산과 대동강, 청천강 등 큰 강들에서 탐석되였다고 한다. 수석의 생김새와 문양은 특이한바 오석이나 청오석이 주체를 이룬 모양이다. 조선의 수석은 국외에서 인기도가 높아 국제수석전시회에서 수차 영예를 떨치였다. 김창룡관장은 수년전에 조선의 수석이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국제수석전시회에서 평판이 좋았다고 말하였다. 그만큼 조선의 수석은 세계 수석인들의 마음을 끄당기고있다.
7    김대현 수석시조 3수 댓글:  조회:4988  추천:97  2005-06-17
◈이런줄 알아주소◈탐석행 가는길에 미녀가 기다려도눈 한번 팔지 않고 갈길만 재촉하니수석에 깃든 애정이 이런줄 알아주소◈취미생활◈수석에 정이 드니 안해가 멀어지고 수석에 매혹되니 목란꽃 미워지네참으로 알고도 모를 인간의 취미생활◈일생일석(一生一石)◈돌아닌 수석이야 어드메 있을손가흔하게 돌이래도 수석은 흔치않아일생에 일석인줄 잊지를 말아주소
6    수필 - 수석 "선바위"와의 만남 댓글:  조회:4933  추천:78  2005-06-10
수 필 수석 “선바위”와의 만남 리 함 이 가을에 잡아들어 룡정향토순례차로 룡정땅 륙도하반의 명동일대에 자주 다니게 된다. 명동에 드나들려면 꼭 선바위를 지나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감 수가 새롭다. 이런 감수에 힘 입어서인지 선바위골 어구 강가와 부근에서 대자연의 걸작인 선바위 수석몇점을 탐석한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산과 들에 신록이 짙어가던 지난해 초여름의 어느날, 나는 유서깊은 선바위를 사진렌즈에 담을겸 탐석행으로 선바위골로 갔다. 선바위골이란 나만의 호칭인데 실상은 선바위앞에서 륙도하에 흘러드는 신동골 강물을 말한다. 말이 강이지 우기를 제외한 평소는 얌전한 색시마냥 조용히 흐르는 한낱 시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름난 수석산지여서 가끔 명석이 탐석되군 한다. 그만큼 수석인들이 발길이 가닿는 강이기도 하다. 신동골은 수풀이 무성한 골안, 서남쪽으로 한 30리 올리뻗었다고 한다. 인가가 희소한 깊은골이여서 나는 고작 가보았대야 10여리 길뿐인데 지난해 그날만은 어쩐지 둥둥 뜨는 기분이였다. 아마도 선바위에서 미쳐오는 미지의 무언의 힘 같았다. 꽤나 넓어보이는 신동골어구의 돌밭이 나를 반겨맞았다. 돌밭 두세곳을 지났을가, 저 앞은 벌써 강폭, 골안폭이 좁아지기 시작한다. 하긴 수석산지가 여전한데다가 수풀이 우거지고 강물이 맑아 기분이 비할데 없이 좋았다. 물장구치려고 강물에 들어서는데 뭔가 오석같은 수석한점이 강가에 댕그라니 누워있질 않겠는가, 심장이 툭 튀는것만 같아 무작정 눈을 감아버렸다. (오, 대자연 선바위어른님, 저희에게 당신을 닮은 꼬마 수석한점 하사하는거옵니까?) 높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숨을 조절하다가 한참만에 눈을 떠보니 에누리없는 수석한점이다. 얼마전만 해도 수량이 많아 물에 잠겨있던것인데 물이 줄자 수면이 내려가면서 드러났던 모양이다. 꿈만 같았다. 그래도 덥석 잡을념을 못했다. 진짜 수석을 앞에 두고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것이 수석인의 마음인가보다. 한겻이 지나서야 나는 수석을 안아들고 이리저리 어루쓸다가 그 자리에 내려놓고 련속 샤따를 눌렀다. 기념을 남기고싶었다. 이렇게 찍은것이 이글에 올리는 강가수석이다. 재수좋은 날, 나는 탐석을 더 하다말고 그 수석을 배낭에 지고 만세소리속에서 귀로에 올랐다. 그때로부터 나한테는 귀한 수석한점이 더 늘어났다. 좌대를 깍는 사람이 마땅치 않아 수반에 놓았는데 그래도 좋았다. 어쩌면 달리는 준마의 말사등같기도 하고 어쩌면 작은 화분속에 축소시킨 대자연의 아름다운 산수같기도 하였다. 헌데 여러 수석친구들이 집에 다녀가며 괜찮다고는 해도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늘 맘에 걸리였으나 그 원인이 수석의 기본상식으로 되는 날세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데 있다는것에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수석세계에서는 수석의 날세우기를 연출이라고도 하는데 날세우기든 연출이든 같은 개념으로서 한 수석이 갖고있는 장점을 찾아내여 그것을 최고로 살리는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듯 중요한 날세우기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말사등같은 하나의 산수로만 보고 가로 눕혀만 놓았으니 남들의 눈길을 끌리가 만무했다. 같은 수석이라 해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수석개념이 다르고 수석을 즐기는 심미관이 다르다. 우리 중국에서 수석을 기석(奇石)이라고 할때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수석(壽石)이라고 하는것이 그 리치이다. 말이 없는 돌에도 스스로의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돌에도 생명이 있다며 목숨 수(壽)자를 칭하는 한국인들의 진지한 태도에 탄복이 간다. 그네들은 중국인들이 돌에 그려진 자연의 회화라고 흔히 문양석을 선호할 때 자기들은 수석은 산수경석의 략칭이라면서 산수석에 짙은 흥미를 가진다. 산수석은 한국인들의 수석관이라 해도 무방할것 같다. 한국의 수석인들은 한점의 수석에서도 대자연의 멋을 여러가지 경치로 련상하면서 그 찡한 진미를 맛보고 즐기는데 나는 이런 특유의 심미관마저 갖추지 못했다. 말하자면 여러가지 종합지식을 요하는 수석에 입문하지도 못한 아마츄어에 불과했다. 참다운 수석인이 된다는것이 쉽지 않다면 참다운 탐석인이 된다는것도 쉬운일이 아니다. 탐석을 즐기는 수석인들은 흔히 연변의 수석탐석은 두만강에서 시작되여 두만강에서 끝을 본다고들 했다. 우리 고장의 수석산지는 무엇무엇해도 두만강이 으뜸이라는 말이 된다. 헌데 기이하게도 남들이 알아주는, 나에게서 손꼽히는 명석은 두만강이 아닌 륙도하로 통하고있으니 유서깊은 자연의 섭리라 할가.어언 한해가 흘러갔다. 또 몇달이 더 흐른 이 가을 따라 선바위에 빠지고 명동의 유적지들에 빠져 들락날락하니 명동골어구의 유서깊은 선바위가 전에없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던 차 오늘 아침, 뭔가 뇌리를 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오랜만에 선바위골 수석을 이저리 모양새를 바꾸며 연출해보았다. 늦게나마 날세우기에 들어간것이다. 내가 한창 잔모래를 담은 깊숙한 수반에 척 세워놓고 수석의 새모습감상에 여념없는데 안해가 불쑥 대자연의 장엄한 립석이라며 찬탄을 련발했다. (립석?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벌떠덕 일어났다. 그야말로 대자연이 하사한 그림같은 선바위였다. 산수미의 장엄한 세계가 저산이 아닌 내 집안에 펼쳐졌다. 대자연의 산수를 바로 눈앞에 두고 즐기는 내마음은 진짜 수석인이 된 기분이였다. 작은것에 큰 경치가 있다고 나는 때늦게야 선바위골수석한테 수석 선바위란 최고의 위치를 살려주었다. 그대로 두면 산수석이요, 엎지르면 수문석이요, 세워놓으면 선바위라 진짜 돌과 인간과의 만남, 아니, 수석과 나와의 만남이였다. 선바위라는 수석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즐기는 애장석에 이름을 부치는것은 사랑하는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것과 같은 리치로서 그야말로 뜻깊고 재미있는 일이렸다. 그런 뜻에서 우리 두만강수석회 신철호선생은 수석을 의인화하면서 《부모, 형제, 처자, 수석은 나의 혈육》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이름을 부치니 수석의 품위가 한결 높아지고 련상의 폭이 보다 넓어진다. 이때에야 나는 수석의 이름은 말그대로 단 그 수석만의것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살아난다는것을 절감하게 되였다. 산천경개가 삐여나고 유구한 문화를 자랑하는곳에 수석이 난다더니 조금도 그른데없는것 같다. 선바위골에서 선바위수석을 탐석한 뒤 나는 선바위북쪽 륙도하에서 차도가 있긴 하나 또 두점의 선바위를 탐석했다. 그중 내가 꼬마선바위라고 부르는 수석은 먼저의 어른 선바위처럼 가로 놓으면 망망한 바다가 바위산이요, 세로 세우면 하늘을 떠이는 립석(立石)—선바위이고 다른 한점은 말없이 명동골어구 선바위를 또옥 떼여닮은 장엄하고도 웅장한 옹근 바위산—선바위였다. 하기에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륙도하 수석 선바위 세점을 친자식인양 지극히 아끼며 사랑을 몰붓는다. 집안에 앉아 축소된 대자연의 산수경치를 감상하는 재미는 수석인이 아니고는 느낄수 없는 나만이 즐거움이다. 누군가는 돌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간직한 지구우의 형성체라고 했다. 천연의 소산인 수석 한점의 형성이 수천수백만년, 그것이 미적대상인 하많은 돌중의 행운아 수석으로 이루어지는 나와의 만남과 대화, 참으로 신기하고도 멋진 일이다. (2004년 가을)
5    두만강수석회 첫 탐석활동 댓글:  조회:4722  추천:81  2005-06-10
두만강수석회 첫 탐석활동 향 설 8월 1일은 금방 고고성을 터친 연변두만강수석회의 첫 탐석활동일이다. 말짱 뜬다하는 수석동호인들로 무어진 이 두만강수석회는 지난 7월 28일 스스로의 수석동아리를 무었는데 첫 집단탐석지는 도문시아래 구간 신기동 두만강변이였다. 연변의 수석산지를 말할라치면 선참 손꼽는것이 어머니강—두만강이다. 두만강에서도 손꼽는 산지는 신기동으로 불리우는 도문시 월청진 안산촌 제2촌민소조 앞 구간이 아닌가싶다. 이곳의 두만강물은 동으로 흐르다가 조선쪽의 산들에 막혀 북으로 굽이를 틀고 다시 산에 막혀 서쪽으로 흐름을 시작하는데 큰 굽이 반도모양을 이룬 이곳 두만강변에는 곳곳이 돌밭이요, 곳곳이 수석산지로 이름이 높다. 첫 집단탐석활동에 나선 이들로는 원 연변인민 방송국 주필 김대현과 연변가무단 전직창작원이고 시인들인 김철학과 김학송(두만강수석회 부회장), 원 연변병원당위 조직부장 김봉세, 연변대학조문학부 교수 신철호, 그리고 필자 도합 6명이였다. 도문시의 몇몇 수석동호인들이 합세한데서 탐석활동은 전에 없이 생기를 띠였다. 오전 9시에 집단탐석이 시작되였는데 10여명 수석동호인들은 돌밭을 참빚질하며 수석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헌데 점심때가 되도록 누구하나 수석다운 수석을 줏지 못하여 해나른한 기분이였다. 어찌하든 강가 백양나무 수림속에 풍성한 오찬이 마련되고 1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앉았다. 그때에야 연길의 수석동호인들은 8월 1일 이날이 김학송부회장의 생일날이라는걸 알았다. 탐석의 오찬은 생일오찬으로 되여 대번에 흥성과 생기를 몰아왔다. 너도나도 생일을 탐석지에서 쇤다는것은 뜻있고 재미나는 일로서 수석인들만이 행할수 있는 소행이라고 열을 올리였다. 오후 탐석은 “반도”를 에도는 탐석으로 이어졌다. 생일의 여흥이 도도한 속에 어디선가 “하나 했다!”하는 소리가 들리였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젊은 신철호 선생이 수석한점을 들고 기쁨에 넘치고있었다. 우르르 모여가보니 전시회에 내놓을만한 보기좋은 수석인데 정면에는 오리모양의 문양이 박히고 우에는 제법 못까지 있어 산정의 못가에서 노니는 오리를 방불케 하였다. 모두의 얼굴들에는 기쁨과 웃음이 피여 올랐다. 사기가 난다고 떠들석인데 이번에는 김봉세의 웨침이다. “하나 했다!” 하나 했다—이 소리만큼 반가운 소식은 없는가부다. 서로 자기일처럼 모여 기뻐하며 축복해주는데 선바위를 방불케하는 바위단석은 이손에서 저손으로 오갔다. 신나는 오후시간은 빨리도 흐르기만 하였다. 오후 6시가 되여오는데도 누구하나 강가를 떠날념을 안했다. 귀로를 앞두고 수석합평회가 열리였는데 신철호의 “산정의 못”과 김봉세의 “바위단석”이 으뜸으로 떠올랐다. 그외에도 여럿의 산수석, 문양석, 구멍돌 등이 제나름대로 선을 보여 두만강가는 이윽토록 말소리, 웃음소리 그칠줄 몰랐다. 집단탐석으로 재미난 문인수석인들의 하루였다.
4    연변서 불고있는 수석바람 댓글:  조회:4695  추천:68  2005-06-10
연변서 불고있는 수석바람 향 설 그대들은 작은 돌 하나에 거대한 자연이나 삼라만상이 담겨있다면 믿을수 있겠는가? 혹자는 머리를 가로 흔들다가도 수석가게나 기석관에 가서 진실로 거대한 자연을 담아낸 산수경석이나 돌덩이들에 나타난 온갖 그림, 신화에서나 나타날수 있는 령물들이 돌속에서 살아숨쉬듯 생동감있게 펼쳐진 현실을 정시하노라면 너무도 신기해서 대자연의 위대함에 저도 몰래 고개를 숙일것이다. 이것이 대자연이 빚은 수석의 힘이다. 수석은 크게 산수경석, 형상석, 문양석, 색채석 등 4개 분야로 나뉘여지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산수를 즐기는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수석이란 말그대로 산수경석의 략칭이기도 하다. 하나의 돌덩이에서 아름다운 산수의 경치나 산수미의 세계을 여러가지로 련상하고 맛보고 즐기게 되니 그럴수밖에 없는것 같다. 돌과 인간과의 뜻깊은 만남인것이다. 돌이켜보면 돌과 인간과의 만남은 태고의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진짜 대중적 애석, 소장석, 관상석붐이 우리 나라에서 일기 시작한것은 개혁개방이 실시된후인 20세기 80년대로부터이다. 특히 최근 10여년래 수석바람은 세차게 불어치면서 대중들속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국영, 집체, 개체의 관상석회사나 기석관, 기석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수석바람의 한갈래는 농촌에서 나타난 기석전문호나 전문촌들이라 하겠다. 경제장성에 힘입은 한국의 경우 수석붐은 우리 나라보다 좀 더 이른 모양이다. 자료에 따르면 수석인구가 200만으로 헤아려진다. 이는 우리 나라 수석인구의 10배를 넘어선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은 산수경석을 즐기는데 우리 나라에서 흔히 기석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 수석(水石)으로 부를 때 그네들은 돌에다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수석(壽石)이라고 부른다. 수석이란 부름은 지난 90년대초로부터 우리 연변조선족들의 말밥에 소리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한국나들이가 시작되면서 부분적사람들에 의해 탐석행이 주어지고 수석동호인들이 늘어가면서 주와 여러 현, 시들에 수석인협회나 동호인모임이 나타나고 수석활동이 활발해졌다. 한때 한파의 영향으로 수석활동이 서리를 맞기도 했으나 2002년부터 주안의 여러 분야의 문인들을 선두로 다양한 탐석, 교류활동이 행해지면서 연변의 수석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있다. 현재 연길시에만 해도 수십명의 수석동호인들이 탐석이나 소장, 수석교류에 나서고있다. 그중에서도 왕성한 탐석활동을 보이며 수석문화의 일익을 담당한것은 여러 보도매체나 대학, 문화분야의 수석문인동호인들이다. 이들을 토대로 지난 7월 28일에는 연변두만강수석회가 고고성을 터치였다. 말짱 한다하는 문인수석인들로서 8월 1일에는 도문아래 신기동 두만강가에서 첫 집단탐석활동을 가지기도 하였다. 문인수석인들을 선두로 은은히 밀려드는 연변의 수석바람, 그야말로 기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는 주위에서 불고있는 수석붐이 연변수석문화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리라 믿으면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석공간마련에 너도나도 나서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3    탐석활동에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 댓글:  조회:4544  추천:99  2005-06-10
탐석활동에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 한 태 익 1) 천연기념물 등으로 지정된 보호지역에서의 탐석을 금할것. 2) 강줄기가 바뀔 정도의 큰것은 건드리거나 깨지말며 산속의 수목을 함부로 헤쳐 뿌리를 상하도록 하지 말것. 3) 공공기물인 돌이나 남의 집 돌담 등에 손을 대지 말것. 4) 무리한 집단행동으로 지역 주민들을 자극하지 말고 사전에 량해나 허락을 받을것. 5) 버릴 돌은 되도록 제자리에 놓아두고 배낭에 넣어 부담없이 가져올 정도로 할 것 등이다.
2    탐석행의 기쁨과 재미 댓글:  조회:4476  추천:119  2005-06-10
탐석행의 기쁨과 재미 김 봉 세 등산애호가들이 산을 즐기듯이 수석인들은 탐석을 즐긴다. 탐석이란 자기 스스로 수석산지를 찾아 수석이 될만한 돌들을 줏는것을 말한다. 명석품이 될만한 수석 한점을 주을 때의 그 기쁨은 한량없는것이다. 수석애호가들에 의하면 탐석행의 기쁨과 재미는 크게 아래의 몇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지 않을가 한다. 첫째는 탐석은 말그대로 려행이다. 수석은 흔히 산수가 삐여난 곳에서 나타나기가 마련인데 혼자나 여럿이 도시락을 싸들고 수석을 찾아 산좋고 물좋고 경치좋고 공기좋은 곳으로 가는 그 멋이 별멋이다. 수석애호가들에게 있어서 번마다의 탐석행은 번마다의 려행과 같다. 둘째는 신체건강이다. 등산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살까기가 되고 위병 등 여러가지 병이 나아진다는 말을 들을수 있듯이 탐석행에 자주 나서노라면 위병 등이 소리없이 물러가고 몸이 튼튼해진다. 위병으로 식사때 통증을 느끼여 식사를 별반 못하던 사람도 탐석행에 나서면 편안한대로 식미가 무척 당기고 잠이 잘 온다. 게다가 산수가 삐여난 곳에서 대자연이 베푸는 청신한 공기를 맘껏 마시니 건강에 리롭지 않을수 없다. 셋째는 온갖 잡념이 가신듯 사라진다. 탐석에 몰두하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하루해가 눈깜빡할새에 기울어진다. 넷째는 짭잘한 수입이다. 좋은 수석을 줏기는 품이 드는 일이나 진짜 명석이라할 때 그 가치는 몇백원, 몇천원, 몇만원, 몇십만으로 웃돈다. 소품이라도 몇십원, 100원좌우로 하니 탐석은 진짜 해볼만한 일이다. 그러나 문인수석인들에게 있어서 탐석은 매매가 목적이 아니라 소장을 주요목적으로 한다. 그들에게는 수석만큼 좋은 취미생활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수석은 마지막 취미생활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탐석은 그 자체의 기쁨과 재미를 갖고있다. 진정 탐석행에 나서서 수석을 줏는 자만이 탐석행의 그 진미를 맘껏 느낄수 있을것이다.
1    두만강수석회 프로필 댓글:  조회:4427  추천:83  2005-06-10
♨ 두만강수석회 프로필 연변두만강수석회는 수석을 사랑하는 연길시 문인수석동호인들로 무어진 동아리모임으로서 지난해 7월 28일 연길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두만강수석회는 설립된 근 1년래 줄기찬 탐석활동과 교류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제나름의 수석세계를 구축하여 왔다. 현임 고문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원 부주필 김대현 선생이고 현임 제1임 회장에 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국장 리흥국(현임 주심계국 국장)이고 부회장에 연변가무단 전직창작원이고 시인인 김학송, 비서장에 소인 리함이다. 아래 수석동아리를 무은 날의 일부 명구를 그대로 적어본다. ◈ 수석은 나의 영원한 동반자여라! (김대현) ◈ 수석에 미치고 수석회사람들에 미쳐 나도 수석에 미치겠노라! (김철학) ◈ 수석은 인생이다. (김봉세) ◈ 수석은 내 시정(詩情)의 자궁! (김학송) ◈ 내 애인(수석) 찾아 강따라 바다로 간다. (한태익) ◈ 부모, 형제, 처자, 수석은 나의 혈육이다. (신철호) ◈ 수석은 나의 마지막 취미생활 (리함) 두만강수석회 련계전화: 0433-2532598 2715689 13039092389 e-mail: guangren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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