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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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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시조와 수석(2)(신철호) 산에 취한 사람 돌에 빠진 사람 댓글:  조회:4287  추천:161  2008-07-22
   시조와 수석(2) /  신철호                                  산에 취한 사람  돌에 빠진 사람                                                       -  인민공원님 인상기     두만강수석회 성원중에는 산악인이 여럿이 있다. 우선 현임 사무장 한태익선생은 필자와 더불어 백두산문인산악회 성원이고 제2임 회장 리광인선생은 지금 절강월수외국어대에서 일변 강의를 하고 일변 절강연우산악회를 령도하느라 드바삐 보내고있다. 다들 산에 취한 사람이고 돌에 빠진 사람들이다.     과연 산과 돌을 떠나 그보다 더한 취미가 어데 따로 있으리오.                      술먹고 취한 후에 얼음에 찬 숭늉과                         새벽에 님 가려거든 고쳐 안고 잠든 맛과                         세간에 이 두 재미는 남이 알까 하노라     주색을 좋아하는 어떤 한량(閑良)의 넋두리인지 진담인지 알바가 아닌 옛시조이지만,  수석인들의 넋두리는 산과 돌이고, 진담도 산과 돌이다. 특히 산이나 강가에 가서 수석 한점을 얻은 날이면 안해를 멀리하고 그 수석을 고쳐 안고 잠든 맛이 과히 일품이라고 한다. 두만강수석회에서 산이고 돌이고 모두 아우러 “넋두리”의 일인자는 당연 인민공원님이다.    인민공원님은, 필자가 2007년 3월에  공부에 늦바람이 들어 한국에 류학을 온 후 두만강수석회에 참가하신 분이다. 연길시인민공원에 출근한다고 하여 아호가 인민공원님인데 조글로(ckywf)의 수석코너에 리광인선생이 “송화석과 화석류 소유자 - 인민공원님”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사진으로 인민공원님의 모습 및 부분적 송화석과 화석들을 소개한바 있어, 단지 인터넷을 통해 한두마디 문안이 오고갔을뿐 일면지교는 전혀 없었다. 두만강수석회 규약이 “딱딱”하기로 삼년 묵은 박달나무를 우습게 보는터인데  김대현고문님, 김봉세회장님, 리광인 전임회장님들께서 그 화강암같은 규약을 드텨서 인민공원님을 회원으로 받아들인데는 기필코 인민공원님께 남다른 우세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방학에 비로소 기회를 얻어 일년반만에 귀국하여 6월 29일 소하룡에 있는 박식 사장님의 한증막에서 수석회 회원들과 마주앉게 되면서  인민공원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어데서 금방 후치질을 끝내고 온 순수한 농사군같은 모습에 만나자마자 어쩔수 없이 푹 빠져들어가는데는 제동할 재간이 없었다.      인민공원님은 움직이는 지도였다. 연변산천의 골골을 머릿속에 질서정연하게 입력하고 도보로 주름잡고있는 사람이였다.      일년반만에 만나  그 동안의 회포들을 풀면서 점심상을 기다리는데 김봉세회장이 자연수정을 세덩이 내놓으면서 필자와 박식선생, 김대현고문께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훌렁 벗어진 이마에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아주 흥분하여 수정채취과정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단 흥분하면 첫마디에 언제나 “하, 글쎄”를 앞세우는데 그 흥분도가 일정한 정도를 넘으면 “하, 글쎄”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련발된다.   “하, 글쎄 연변에도 수정이 나온다는게 신기하지. 하 글쎄 저분(인민공원님)이 모르는데 없다니. 하 글쎄  처음에는 진흙덩이리가 나오니 마구 벼렸는데 하 글쎄 그 속에 수정이 들어있지. 하 글쎄 ….”     알고보니 인민공원님은 위만주국때 일본군들이 사용하던 낡은 지도 한 장을 언젠가 어데서 구하였는데  그 지도에 연변산천의 골골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어느 골에 무슨 광석이 난다는 것까지 낱낱이 표기되여있다고 한다.     “어쨌든 일본놈들이 못되기는 지독하게 못된 놈들이꾸마. 천보산에랑 가보면 일본놈들이 아주 배구그물처럼 산을 싹 파헤친 자리들이 있는데 그게 광맥을 찾은 자립지뭐.”     인민공원님은 그 보배같은 지도를 갖고 여러해 전부터 짝을 뭇거나 홀로 연변내의 크고 작은 산발들을 찾아 풍찬로숙하면서 지질탐사대마냥 골골이 답사를 하였는데 그 일이 지금도 진행중. 완전히 산에 취한 억센(硬骨頭) 산악인이다. 그 누렇게 색이 싹 날대로 난 지도에 연길시에서 별로 멀지 않은 어느 골안에 수정이 있다고 표기되여 있었고 그 표기가 한메터의 오차도 없어서 가자마자 감자를 파듯이 수정을 채취하였다는것이다. 물론 일본놈들이 다 해먹을대로 해먹은 자리를 뒤지기는 하였지만도.     인민공원님은 이미 앞에서 살짝 썼지만도 송화석(松花石)과 화석(化石)류에 각별한 애착을 가진 분이였다.     송화석이란 송화강에서 나는 돌이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인데 송화석으로 만든 벼루는 중국에서도 이름이 있다. 송화석은 연질이기에 변화가 다양하며 산수석으로 잘 알려져서 관상석(觀賞石)으로도 국내에서 이름이 있다.     “안도 량강에 가면 송화석이 많습꾸마. 산에 바위도 송화석이고 강바닥에 널린 것도 송화석인데 그곳은 길이 험해서 어지간해서는 가기 힘들꾸마. 한 20리 걸어들어가야 하는데.”     “왕청 라자구에 가면 묘하게 나무화석이 많이 나꾸마. 한 10년전에만두 별로 찾아 가는 사람이 없어서 잠잠했는데 지난해에 다시 가보니 그곳 한족들이 돈냄새를 크게 맡았는지 마당에다 무져놓고 값을 홍정합더구마.”     나도 왕청쪽에서 화석이 난다는 소문을 들을지 아주 오래고 또 직접 얻은 일도 있었다. 1998년도엔가 단위에서 봄철 야유회를 왕청배초구에서 조직하였는데 그 때 따라갔다가 강가에서 아주 오석(烏石)으로 되어버린 나무 화석 한점을 얻어본 일이 있었다. 신기하리만큼 무늬가 흰점들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술을 기껏 먹고 나니 어데다 떨구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 때는 수석에 대한 취미가 없었을 때이니 “그까지 것” 했지만 지금에 와 보면 맹랑하기를 이를 데 없는 짓거리였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에 후회막급이다.     인민공원님같은 선배들을 일찍 만나 문하생으로 있었더라면 이런 후회가 어찌 있을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것은 백두산문인산악회에 참가하여 김학송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수석에 진짜 취미를 붙였고 두만강수석회가 설립된후 김봉세선생과 리광인선생을 묻어다니면서 비로소 체계적인 탐석을 하게되었으니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정도-옳바른 수석인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야 할것이다.      두만강수석회의 규약이 화강석임을 이미 우에서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인민공원님같은 “천리마”들이 나타날 경우 드텨서 대문을 활짝 열어놓을것을 회장단에 간절하게 부탁하는바이다.  부기미(付驥尾)란 파리가 명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리길도 쉽게 갈수 있다는데서 생겨난 말이다. 나같은 어섯눈이 뜬 새내기에게 지당한 말이다.     “천리마”님들을 따라 산을 누비고 강을 누비며 수석을 찾아 떠도는 것이 이미 내 생애의 최고의 즐거움으로 되었으니 말이다.         (*)                                                                  - 2008. 07. 20.
163    한국 박사공부하는 신철호님 소식 댓글:  조회:3749  추천:110  2008-06-21
           한국 박사공부하는 신철호님 소식               (6월 17일, 두만강 한테로 온 님의 메일) 선생님:  신철호입네다. 그새 잘 지우셨죠? 여름방학에 연길로 오시죠? 저는 6월 22일에 연길에 도착합니다. 7월 15일에 다시 돌아서니 그 동안 또 함께 수석을 찾으러 나갑시다.  1년반 수석에 굶었습니다. 아주 죽도록 굶주렸습니다.   안녕!!!!!!!!!!!!!!!!!!                       신철호 상서
162    10년간 수석사랑에 심취된 김봉세씨 댓글:  조회:4265  추천:140  2008-05-29
          10년간 수석사랑에 심취된 김봉세씨                                  [연변인터넷방송 2008년 05월 29일 14시 31분 25초]    10년간 연변의 강과 계곡을 누비면서 수석사랑에 심취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연변두만강수석협회 회장 김봉세입니다.    1998년 <<연변일보>>에서 우연하게 <<평양수석전시관에 대한 소개>>를 보게 된 김봉세는 연변에도 좋은 돌이 많다고 인정하고 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수석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했기에 채집했다가 버린 돌만 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어깨가 벌겋게 부어오르면서 무거운 돌을 지고 6층 아빠트까지 올라와서는 다시 버려야 하는 곤욕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돌에 정을 붙인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김봉세는 두만강, 가야하, 왕청하를 비롯해 우리 주의 주요한 강과 하천 그리고 계곡을 누비면서 형태가 오묘하고 무늬가 있으며 색채가 아름다운 돌을 수집했습니다.     현재 김봉세씨 자택에는 산수경석, 물형석, 무늬석, 문자석을 비롯해 조선해석과 황하석 200점이 소장돼있습니다.     2006년에 있는 제1회 연변두만강전시회에서 김봉세씨는 <<세월>>, <<혜안>>, <<거북>>등 수석작품 24점을 선보였습니다. 김봉세는 지금 전국 수석전시회에 참가해 연변의 아름다운 돌을 전국에 자랑할 꿈을 무르익히고있습니다.                                                                            사진, 글: 연변인민방송국 리은파기자 
161    송화석과 화석류 소유자--인민공원님 댓글:  조회:4459  추천:153  2008-05-11
        송화석과 화석류 소유자--인민공원님     두만강수석회에는 새로 가입한 인민공원님이 있다. 지난 2008년 2월 1일 모아산에 올랐다가 연길시 철남에 자리잡은 인민공원님의 댁에 가 보았다.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인민공원님은  송화석과 숱한 화석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만의 비밀을 들으며 그가 다닌 현지를 지도에서 찾아보는 재미가 또 하나의 풍경선이였다.
160    문인수석인들 모아산에 올라(08.2.1) 댓글:  조회:3939  추천:142  2008-05-04
           문인수석인들 모아산에 올라(08.2.1)     오늘 두만강수석회 문인수석인들의 모아산 산행사진을 올리여 본다. 모아산 산행글은 올리였지만 인터네상의 문제로 그때 사진을 올릴수가 없었음을 부언하는 바이다.
159    소하룡에 모인 수석 동료들(08.1.28) 댓글:  조회:4237  추천:118  2008-04-26
             소하룡에 모인 수석 동료들
158    【두만강특집】(5) 문인 수석인들과 더불어 댓글:  조회:4383  추천:111  2008-04-18
【두만강특집】(5)                  문인 수석인들과 더불어
157    【두만강특집】(4) 나는 무엇일까요? 댓글:  조회:4131  추천:128  2008-04-15
【두만강특집】(4)                     나는 무엇일까요?
156    귀신과 도깨비를 그리기가 가장 쉽다 (신철호) 댓글:  조회:5984  추천:123  2008-04-12
               귀신과 도깨비를  그리기가 가장 쉽다                                                 신철호                                                      “귀신과 도깨비를 그리기가 가장 쉽다”를 사자성어로 귀매최이(鬼魅最易)라 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잘 모르니 그리기가 쉽다는 말이다.   옛날에 제(齊)나라 임금이 어떤 화공(畵工)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개나 말 같은 게 가장 어렵나이다.”   “그렇다면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무엇인고?”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이 가장 쉽나이다.  개나 말은 사람들이  잘 아는 것이고 아침저녁으로 눈앞에 보이므로 그와 똑같게 그릴 수가 없나이다.  그러나 귀신이나 도깨비는 형체가 없는 것이라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나이다. 그래서 그리기가 쉬운 것이옵니다.”   남방 사람들은 꿈에 낙타를 보지 않고 북방사람들은 꿈에 코끼리를 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교통수단이 낙후하여 험악한 산들과 장강이나 황하와 같은 천험들을 넘을 수가 없어 남북으로 왕래한다는 것이 두 곳 사람들에게는 다들 하늘에 오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남방사람들은 낙타를 모르고 북방사람들은 코끼리를 모를 수밖에 없고, 또한 보지도 못한 것들이니 꿈에 나타날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산해경』이라는 책을 보면 가히 귀신이나 도깨비의 선조가 아니면 친척들이 될 만한 해괴망측한 동물들이 많이 나온다. 꿈속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을 옛사람들은 확실히 존재한 것처럼  기상천외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글로 적어놓았다. 귀매최이니깐 돈을 팔지 않는 허풍 치기야 식은 죽 먹기지.     마르코 폴로 여행기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가로서 이탈리아 베니스의 한 상인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여행은 대대로 내려온  그의 집안 가풍이었다. 17살 되던 해에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중동을 거쳐 4년 만에 중국에 왔고 17년간이나 중국에서 살았다. 귀국한 후에 『마르코 폴로 여행기』(일명 「동방견문록」)를 썼는데 중국의 역사, 문화, 예술을 자세하게 묘사한 이 책은 당시 봉폐상태에 있던 유럽 사람들의 눈을 번쩍 띄어주었다. 서방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자기들이 모르는 지구의 저쪽 동방에 중국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있음을 알았다.     이 책에 깊이 매혹된 다 ․ 가마와 같은 모험가들은 부유한 동방세계를 찾으려고 배를 타고 세계항해의 길에 올랐다.  콜럼버스가 집요하게 새 항로 개척에 나서고 남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도 인도로 착각한 것은 순전히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좌우간 서방열강들이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문호를 손쉽게 열어놓은 근본 동기를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서 찾은 학자들도 있으니 그렇다고 보면 서방사람들이 중국이 있는 동방에 군침을 흘린 역사만도 500년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이 『마르코 폴로 여행기』가 500년 동안이나 서방사방사람들에게 대대손손 이어간 원대한 이상을 심어줄 수 있은 원인이 무엇일까?   다름이 아니다. 마르코 폴로도 귀매최이라는 이치를 후무려서 쓴 것이다. 중국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유럽 사람들에게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을, 한 일과 하지 않은 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들은 것과 상상한 것들을  아주 죽을 쑤듯이 마구 휘저어서 서술하였다.  그래서 후세사람들로부터 중국에 간 일이 없다는  전혀 없었다는 평가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 “신비하기 그지없던 이야기”들이 차츰차츰 사학자들에 의해 적잖게 사실로 증명되면서 중국에 왔다간 것만은 사실이라고  인정을 받기는 하지만 그 여행기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무성한 것만은 에누리 없는 진실이다.   이런 귀매최이를 최근에 필자는 신문들을 통해 실감하였다.   티베트 유학생   올 3월에 들어서서 중국 서장(西藏)자치구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겨나니 한국 내 신문들에서는 이 일을 아주 중요한 뉴스거리로 취급하면서 앞 다투어 연일 보도하였다. 그런데  종시 갈피를 잡지 못할 부분들이 있어서 애당초 귀인지 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오리무중에 들게 하였다.   3월 17일자 모 신문에서는 중국 내 소수민족 인구통계를 아래와 같이 실었다.   쫭(壯족)족 1700만, 만(滿)족 982만, 회(回)족 860만, 묘(苗)족 740만, 위구르족 721만, 이족 658만, 투쟈(土家)족 573만, 몽골(蒙古)족 481만, 장(藏)족 460만,  부이족 255만, 뚱족 250만, 조선족 193만.   그런데 이튿날인 3월 18일자 다른 한 신문에서는  수치가 다른 통계표를 실었다.   壯족 1717만, 回족이 981만, 苗족이 894만, 維吾爾족 839만, 土家족 802만, 蒙古족 581만, 藏족 541만, 조선족 192만, 카자흐 125만.   각각 어느 때 어디에서 만든 통계표를 인용했는지 투쟈족은 230만, 묘족은 154만, 회족은 120만, 위글족은 118만, 몽골족은 100만, 그리고 소위 티베트족이라 부르는 장족은 80만 등등으로  수치가 한심하게 파도를 쳤다.   더욱 “의미심장”한 통계가 있었다.   “……티베트인 900만으로 추정. 그중 98%인 884만 명이 중국에 모여살고 있다. 중국 전체 인구를 13억으로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0.67%에 해당……”   역시 3윌 18일 모 신문에 실린 통계수치이다.   현재 중국 관방의 통계에 따르면 장족은 459.3만 명이며 그중 284만 명이 서장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각각의 통계기준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차이가 심할까?   이쯤이면 약과라 하자. 더 해괴한 보도가 있다.    3월 19일자 모 신문의 제20면에 실린「티베트 유학생들 베이징서도 촛불시위」라는 기사이다. 유학생이라면 최저 여권이니 외국인등록증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 이 시위에 참가했다는 60명의 ‘유학생’들에게 그런 것들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있는  것 같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이니 신분증에 학생증이면 고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유학생’이라고 하니 이 이상한 신분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귀매최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귀신이나 도깨비를 제 마음대로 그리기가 가장 쉽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무리 외국이라 하여도  지금은 세월에 좋아져서 마음만 먹으면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가볼 수 있는 곳인데, 서슴없이 추정을 하거나 없는 신분을 만들어 주면서 귀매최이로 손쉽게 다루는 것은 암만해도 독자들을 우롱하는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2008. 03.21.      
155    【두만강특집】(3) 물오리 봄물에 동동 뜨오 댓글:  조회:3950  추천:121  2008-04-11
【두만강특집】(3)                 물오리 봄물에 동동 뜨오
154    【탐석기】소순강이 나를 부른다 (2) 댓글:  조회:4128  추천:144  2008-03-29
【탐석기】                    소순강이 나를 부른다 (2)      또 금요일이다. 수업이 없는 날이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서성이는데 선참 떠오르는것이 소순강이다. 옳지, 오늘은 소순강탐석에 나서보는거다, 마음이 벌써부터 둥둥 뜬다. 력사의 강—소순강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경원아, 우리 밖에 나가 볼까?” “어디로?” “소순강에 가자.” “소순강?” 아들애는 일순 어정쩡하다가 순황묘 있는 곳이라고 하자 좋아서 어쩔바를 모른다. 우리는 배낭이요, 먹거리를 챙겨가지고 월수대 서대문가에서 106선 시내뻐스에 올랐지만 아차 할때는 이미 늦엇다. 우리는 동남방 30리밖 평수진까지 갔다가 다시 116선뻐스에 올라야 했다. 116선이나 136선 뻐스는 소흥에서 소흥현 평수를 지나 34킬로메터 떨어진 소흥현 왕단진까지 곧추 달리고 있었다. 중국력사속 삼황오제중의 한분이신 순황의 순황묘는 왕단진 경내에 자리잡았고 순황제의 발자취가 어린 소순강은 순황묘를 감돌아 흐른다. 우리 부자간은 왕단진에서 다시 소형뻐스를 잡아타고 5~6리 쯤 동남으로 달려서야 순황묘가의 소순강 돌밭에 이를수 있었다. 아들애는 소형뻐스가 왕단진을 벗어나자 벌써부터 흥분에 잠기더니 먼저 다녀간 날이 2007년 12월 8일이라고 찍어말한다. 어려서부터 “요일신동”으로 불리우리만치 수자와 기억에 남다른 아들애였다. 어언 근 넉달전의 일이다. 아들애가 말하는 12월8일에 나와 안해, 아들애 셋은 순황묘를 답사하다가 순황묘가를 흐르는 소순강에서 수석한점을 주어든적이 있었다. 그래서 소순강이 다시 나를 불러 2008년 새해 첫날 첫 탐석지로 소순강을 잡아보았는데 순황묘쪽이 아닌 왕단지 쪽 소순강 다리우 구간에서는 수석의 사촌도 잡아볼수 없었다. 그러던 오늘 순황제의 순으로 된 소순강은 나를 불렀지만 순황님은 다시 수석을 하사하지 않았다. 나는 아들애를 데리고 왕단쪽으로 소순강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날씨가 물쿠면서 아래우 내의를 벗어야 했다. 아들애는 돌밭을 걷기가 말째여서 자주 얼굴을 찡그린다. 그렇게 산구비를 돌고 또 하나의 희한한 돌밭을 만났지만 수석은 그림자도 없다. 수석산지가 아니였다. 정오를 넘어서는 시점이라 우린 갖고간 와하하 팔보죽과 과자류, 음료로 점심을 에때웠다. 쉬면서 보노라니 가까이 왕단진을 둘러싼 주위산들이 한폭 또 한폭의 풍경화를 방불케 한다. 그 모습에 취해 사진찍노라니 시간이 가는것도 모르겠다. 그때에야 나는 순황묘가 왜 왕단진 동남가 소순강 동쪽켠에 있겠는가를 알것 같았다. 순제의 “순”자로 된 소순강이 참 의미가 깊다고 느껴졌다. 봄꽃들이 다투어 피여나는 3월이 좋아 나는 소순강을 가로막은 소형땜우를 걸어보았다. 소순강가의 살구꽃이며 배꽃이며 유채꽃이며 대나무숲이며 물결치듯 안기여드는 멋이 좋았다. 그속에 시간은 오후 1시를 넘어서고 우리는 오후 5시반 생일행사로 귀로에 올라야 했다. 소순강을 따라 왕단진으로 몇리 걸어야 했지만 기분은 마냥 봄날에 젖어들었다.                                         (2008년 3월 28일)
153    【두만강특집】(2) 소순강이 나를 부른다 (1) 댓글:  조회:4090  추천:109  2008-03-29
【두만강특집】(2)                    소순강이 나를 부른다
152    【두만강특집】(1) 어험 ~수석인들 등장이오 댓글:  조회:3940  추천:106  2008-03-17
                  어험~ 수석인들 등장이오 한겨울 동장군도 꼬리 사르는 계절이요 봄아씨 사뿐사뿐 다가서는 호시절이라강추위에 움츠리던 수석인들어험~~흥이나 등장이오 진달래 꽃피는 4월이 오면 산 따라 강 따라 탐석행이지   두만강수석회도 이제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리오   여보소~~형제동아리들 힘찬 성원이나 해주소                                     (2006년 3월 14일)    
151    【수석소감】 수석 세점에 둥둥 뜨는 마음 댓글:  조회:4337  추천:116  2008-02-05
                                                   수석 세점에 둥둥 뜨는 마음      1월 28일은 나 수석사에서 의미있는 하루인것 같다. 이날 두만강수석회 새해맞이 오찬이 있은후 김봉세님과 같이 시안의 평양류경식당에 갔다가 조선의 수석 세점을 구입하였는데 기분이 그야말로 짱이다.     조선의 수석에 대해 다소 료해는 있지만 제손으로 골라 구입해 보기는 나 수석사에서 처음이다. 수석 세점을 볼라치면 한점은 바다돌ㅡ해석으로서 붉은 무늬가 박힌 문양석, 갓을 쓴 머리에 고개를 잔뜩 들고 배를 내밀고 걷는 모습은 신통히도 옛날의 옛문인을 방불케 한다.     해석외 두점은 투석이여서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한점은 코끼리 물형석의 투석이고 다른 한점은 립석형의 투석으로서 구멍이 인공으로 뚫린듯 그토록 매력적이다.     별나기도 하지, 새 수석 세점이 집안에 놓이니 집이 금시 환한것 같고 기분이 둥둥 뜨면서 휘파람이 저절로, 코노래 저절로. 이를 두고 수석인의 느낌, 수석인의 마음이라 할가.     나 수석의 력사는 탐석의 력사로 이어진다. 탐석을 시작하던 지난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보이는것이 다 수석같아 강따라 하루 나가면 한 주머니씩 메고 오기가 일쑤이다. 해종일 돌밭을 헤매이다가 한 주머니를 메고 오면 온 몸이 힘이 싹 빠지면서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거꾸러진다. 그렇게 신고스레 주어온 "수석"들은 한동안이 지나면 내다버려야 하는데 자동차로 두어번은 실어 날라야 할것이다.     이런 속에서 수석에 눈을 뜨며 수석인의 생애를 시작하여 온 나다. 그 동안 탐석이면 얼마고 수석공부면 얼마랴, 또 나 하나뿐이 아닌 허다한 수석인들의 출현에 연변의 수석이 고갈에 이른다. 큰물이 지면서 돌밭을 바꾸어놓지 않는한 수석다운 수석을 탐석하 기가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우리 연변만이 아닌것 같다. 한국서 박사공부하는 연변대 신철호님의 소식에 의하면 한국은 수석이 고갈된지 이슥하여 수석한점을 얻어쥐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수석교류가 흥해야 하는데 자기한테 없는 수석을 구입하는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조선 수석구입은 이러한 현실의 필연성이라고 할가, 세점의 구입이 나의 마음을 둥둥 뜨게 하고 나의 일상을 휘딱 바꾸어 놓는다. 종일가도 기분이 좋기만 하다. 사실은 나의 수석구입이 옳다는것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의 현실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줄기차게 탐석한다 해도 좋은 수석 세점을 손에 쥔다는것이 쉽지가 않다. 시간을 팔고 품을  팔고 돈을 팔아도 수석 세점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럴 때 수석 세점을 얻으니 기분이 이다지도 좋은걸가.  수석 세점에 내 마음 둥둥 뜬다. 그 속에서 집안이 빛나며 내 마음까지 빛난다. 수석에 받들린 희망찬 새 생활이 나를 부르고 또 부른다.                                                                                         2008년 1월 28일
150    두만강수석회 모아산에 올라 댓글:  조회:3822  추천:119  2008-02-05
                  두만강수석회 모아산에 올라    2월 1일 오전, 연변 두만강수석회에서는 모아산 산행을 조직하였다. 모아산 산행에 참가한 이들은 김봉세 회장과 박식 고문, 한태익, 인민공원님, 두만강 등 5명이다.     모아산 산아래 휘넓은 정차장에 이르자 산아래로부터 산의 정상에로 쭈욱 뻗은 나무등반길이 이들을 반기여 주었다. 모아산 정상에서 등반의 한때를 보낸 이들은 내 고향 연변 모아산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가지의 한 초두부집에서 오찬을 가진후 이들은 신참 인민공원님의 댁을 찾아 간고한 탐색으로 주어온 나무화석들과 송화석을 감상하였다. 인민공원님만의 탐석공부와 탐석취미는 회원들을 감동시키였다.                                                                                                  2008년 2월 1일 밤
149    수석에 취해 본 하루 댓글:  조회:3856  추천:99  2008-01-28
    수석에 취해 본 하루   오늘은 내 고향 연변 귀가후의 또 하루 기쁜 날인것 같다. 귀가 첫날 1월 25일 항일렬사유가족 상봉, 1월 26일 조글로 산악련맹 연우팀, 랑만팀, 명상팀과의 토요합동산행, 1월 27일 오후 또 한분의 렬사유가족 만남, 오늘 1월 28일은 문인들로 이루어진 두만강수석회 2007년 총화모임 가담이니깐. 두만강수석회 문인동료들이 그지없이 고맙기만 하다. 이 두만강을 위하여 총화모임을 오늘로 미루어왔고 연길시 소화룡 백두산음식점에서 뜻깊은 총화모임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구정--음력설을 앞둔 시각이라 여러 수석동료들은 외출에다 공유, 사유로 불참이였지만 김봉세회장, 한태익총무, 한국인 박식선생, 인민공원님, 유씨 녀사 님들은 어김없이 시간을 내여주었다. 김봉세회장의 총화보고에 따르면 두만강수석회는 2007년 한해 집단탐석 수차, 개별탐석 수차 진행하고 아리랑방송 특별생방송프로에 나서보고 조글로미디어 수석코너를 열심히 꾸리면서 수석활동과 홍보활동으로 2007년을 보람있게 걸어왔다. 상세한 총화보고와 한국인 박식선생 특집은 곧 따로 올리기로 하고 오늘의 의미있는 행사를 적어보려고 한다. 수석인은 서로의 만남에서나 한해 총화모임에서도 수석을 떠날수가 없는가부다. 소화룡 백두산한식관은 한국인 박식선생이 꾸리는 한국독자인데 박식선생은 일전에 시안의 평양류경식당에 갔다가 수석 한점을 샀다며 동료들에게 선을 보이였다. 총화오찬에 조선의 수석 한점이 자리를 같이하면서 내내 수석기분속에 빠져든 우리들이다. 총화모임이 끝나자 나는 김봉세회장을 따라 평양류경식당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류경식당의 김사장님을 만나 조선수석 50점을 감상한것은 그뒤의 일이다. 우리는 조선 수석과 연변 두만강수석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다가 김봉세회장은 산수석 쪽으로 세점을 골라쥐고 나는 해석 문양석 한점과 구멍이 보기좋게 통한 수석 두점을 골라쥐였다. 평소 탐석에서는 얻기 힘든, 마음에 드는 수석 세점인데가 값도 합리하여 기분이 류달리 좋았다. 그래서 나는 두만강수석회 한해총화모임에 이은 수석구입이여서 연변귀가후의 또 하루의 기쁜 날, 수석에 취해 본 뜻깊은 하루라고 자찬하여 본다. 아마도 탐석으로 보낸 수석 10년사에 자기 돈으로 수석을 구입하여 보기는 오늘이 처음인것 같다. 우리 두만강수석회 문인수석인들의 수석취미는 돈벌이 수석장사가 뜻이 아니다. 모두가 소장으로서 자기의 취미 생활을 풍요롭게 꾸며간다. 이런고로 한국에 박사공부간 동료--연변대 신철호교수는 이것이 두만강수석회 문인들의 돋보이는 점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2008년 1월 28일)    
148    시조와 수석(1) 수석 찬가 (신철호) 댓글:  조회:4283  추천:105  2008-01-19
시조와 수석(1)                                                  수석 찬가        김광욱(金光旭. 1580~1656)은 조선 인조때에 병조판서(지금의 총참모장에 해당)로 있었던 사람이다. 자는 회이(悔而)로서 뭔가 깊은 의미가 있어보이는 반면에, 호는 죽소(竹所)로서  시적 감각을 불러 일으켜주기에 너무 족하다. 그의 문집으로는 《죽소집》이, 대표작으로는 련시조《률리유곡(栗里遺曲)》이 전해진다고 하나 나는 본 일이 없고 다만 《옛시조감상》이라는 책에 평시조 한수가 올라있는 것이 볼적마다 재미있어서 기억해두고 있는데 여기에 적어본다. 호가 죽소라 하였으니 올곧은 성격과 어울리게 참대를 무척 좋아했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대막대 너를 보니                                 대막대 너를  보니 有信하고 반갑고야                               내 아이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                               이제란 창 뒤에 섰다가 날 뒤세우고 다녀라       《아이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 …》를 보면 자꾸 고향생각이 난다.     화룡시에서 남쪽으로 70여리 가다보면 유명한 선경대(仙景臺)풍경구가 있고 이 선경대를 끼고있는 마을이 흥진(興進)이다. 흥진에서 그냥 남쪽으로 5리정도 가면 류동(柳洞)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 뒤켠 골짜기를 따라  3리가량 들어가면 지금은 싹  페촌이 된  동평(東坪)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우중충한 검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이  심심산골의 막치기 마을이 내 고향이다.      지금은 싹 말라서 흐르지도 않지만 어렸을 때는 마을을 감돌아 흐르던 내물(柳東河)이 제법  강 구실을 하면서 일년에 한축씩 범람하기도 하였다. 이 강을 따라  버드나무가 많아서 고장이름나 강이름이 다들 류동으로 되었다.  흔하디흔한것이 버들인지라 어렸을 때 타고다니며 놀음을 논것도 죄다 버드나무가지였다. 그러니 어린 시절 내 고향친구들을 죽마고우(竹馬故友)가 아니라 류마고우(柳馬故友)라고 함이 오히려 더욱 적절하다.     나는 이 고향에서 1975년 3월까지 만 13살까지 살았다. 《문화대혁명》이 한창 광기를 부리던 그 시절에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홍위병들의 집수색으로 심리적 타격을 엄청 받은 나는 오래동안 사람기피증을 앓았다. 굴쥐라는 별명을 달고 늘 집 뒤울안에서 혼자 놀았다. 먼곳에서 반가운 친척이 놀러와도 밥먹을 때 피뜩 보고는 그냥 낮에는 뒤울안에서,  밤에는 고방구석에서 혼자 놀았다. 집식구 이외에는 누구와도 만나는것이 딱 싫었다.     그렇다고 그냥 집에만 박혀있지도 않았다. 집에 누구도 없는 한낮이면 강변에 나가서도 혼자 잘 놀았다. 강변에는 괴상하게 생긴 나무뿌리들이 고사(枯死)하여 도처에 뒹굴고 있어 괜찮게 생긴것들을 골라 뒤울안에 가져와서는 이리 저리 놓으면서 감상하는것이 하나의 큰 재미였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크게 남아 서점에 가면 뿌리조각(根藝)에 관계되는 책들을 열심히 본다.     강변은 나에게 나무뿌리만 주지 않았다. 갈수기철에는 강변에 온통 돌밭이여서 멋있게 생긴 돌들을 줏는것도 상당한 재미거리였다. 그러니  수석인으로서의 나의 생애는 예닐곱살 어린 시절부터 계산해서 지금까지 무려 40년이라고 서류에 기입해야 할것이다.  입은 비뚤어도 말은 바른대로 하라고 력사는 언제나 실사구시하게 적어야 하지 않는가?  아무렴.     하여튼 고향마을은 작아도 주변에 돌밭은 많았다. 모두가 나의 놀이터였다. 지금에 보면 오석도 많았는데 수석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세월이라 그저 어설픈 어린 눈에 가지고 놀만한것이라 생각되는것이면 골라서 뒤울안에 가져다 줄느런히 늘여놓고는 혼자서 두고두고 감상하면서 가지고 놀았다. 산수석이라는것이 뭔지, 문양석이라는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소경이 단청 구경을 하듯 되는대로 갖고 놀았다. 나의 이런 취미는 물론 술소양이 다분한 아버지의 지도도 가끔 받았지만 생각밖에 어머니의 도움도 적지 않게 받았다.     농촌살림이라  겨우내 축내야 할 반찬이라는것이 김치뿐이라  어느 집에서나 할것 없이 김치굴이 큰만큼 김치도 많이 담갔다. 그러니  가을이면 김치독에 넣어둘 김치돌을 주어오는것이 집집의 어머니들의 하나의 필수적인 일과로 되였다.  김치돌은 대개 큰 허물이 없이 둥글둥글하게 생기기만 하면 되는것인데 말이야 그렇지만 김치돌을 줏는데도  알게 모르게 정성이 들어간다.  그 돌들이 김치맛을 내는데 한몫을 하는지는 몰라도 같은 값에 다홍치마라고 동네 어머니들은 될수록이면 잘 생긴 돌들을 주어서는 강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 똬리에 올려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버리지 않고 남겼다가 이듬해 가을이면 다시 쓰는 집이 많았다.     어머니의 일과라고 다르겠는가? 동네에서 김장을 담그는데 솜씨가 일품이였던 어머니는 김치돌을 줏는데 정성을 각별히 넣었다.  그래서 두개씩 이고 들고 오는 날이 푸술했는데 그중 하나는 무조건 모양이 김치돌로 쓰기에 아까운 특이하게 생긴 돌이였다.     《이 돌을 주을 때 보니 천연하게  쇠가 누워있는것 같아서 가져왔다.》     또 빨래하러 강변에 갔다가도 소랭이에 돌을 한두개 담아갖고 온적이 여러번 있었다.     《이것 봐라. 달걀처럼 동그랗게 생겼지 않고 뭐야.》     그때 수석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더라면  목수재간이 출중한데다가 그림을 잘 그리고 붓글씨를 잘 쓰시는 부친께서 오히려 앞장서서 탐석을 하고  탐석한 후에는 침식을 잊어가면서 밤새워 좌대를 만드셨을것이다. 그러나 가석하게 내가 정식으로 수석인의 행세를 시작한것은 이제 겨우 칠팔년이고 부친은 세상을 뜨신지 벌써 20년이 넘으니 생각할수록 가슴만 내려앉을뿐이다.     2000년 국경절련휴때인가 한번 연변TV방송국 동료들과 함께 고향에 갔더니 그 많던 돌밭들을 촌에서 여러해전에 불도젤로 싹 밀어서 방축을 만들어 놓은 통에 오석들은 아예 씨가 말랐고 그대신 아무런 수석적인 가치도 없는 막돌과 몽돌들만 별 볼모양이 없는 헐벗은 형체를 스산하게 드러내놓은채 잔뜩 강바닥을  덮고있었다.     《까욱~까욱~》     방맞게도 저승사자같은 까마귀 두마리가 우리의 머리우로 날아가면서 을씨년스럽게 울어대는 통에  허전했던 내 심사는 무거운 그 무엇에 지지 눌리운듯 울적해지기만 하였다.     그후부터 여가가 생기기만 하면 무작정 탐석에로 돌렸고 2002년에 연변대학 교원으로 자리를 옮긴후로는 김봉세, 김학송, 리광인과 같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탐석에 더더욱 열을 올렸다.  하도 수석에 심취해버리니 안해마저 뭔가 크게 끌리는것이 있는지  2005년도 봄에는 서점에 가서 2백원을 주고 《中華奇石鑒賞大觀》이라는 책을 사서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근묵자흑(近墨者黑)라고 옛말이 그른데 없음을 한번 실감한 값진 선물이였다.       이제는 두만강수석회 회원으로 된지도 두해가 넘어 되니 이렇게 훌륭한 조직을 떠나 어디에 가서  무슨 멋으로 어떻게 살랴.     우리의 조직 성원들을 일일이 소개하여 볼까?     현임 회장: 김봉세. 문체계통, 의료계통 당정일군으로 오래동안 근무하다가 퇴직했음. 키는 크지 않으나 축구선수답게 다부지고 날파람이 있게 생겼음. 두만강수석회 코너를 보면 그의 탐석사적이 계렬로 올라있음.     고문: 김대현. 유명한 고물수집가로서 언론계통 책임일군으로 오래동안 근무하다가 퇴직하였음.  키는 중키이나 뼈가 크고 체구가 우람하며  로지심처럼 근력이 좋음. 시, 수필 등을 잘 씀. 김봉세회장의 고중때 정치과임이였다고 함.     고문: 리흥국. 초대 회장. 현 연변주당위에서 상무위원, 선전부장으로 근무함. 스타일이 뛰여났고 붓글씨를 기가 막히게 씀. 촬영애호도 뛰어나고. 연변에서 수석을 가장 많이 소장한 사람중의 한 사람임.     회원: 리광인. 제2임 회장. 현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교수로 근무함. 어문학부 출신이나 오래동안 不務正業하면서 력사학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둬 중국조선족력사전문가로  되었음.  지금 절강일대의 수석《토벌》에 열성을 다 하고 있다고 함.     회원: 김철학. 김대현고문과 대학 동기라 함. 유명한 시인으로서 현 연변시조시사 사장임. 《우리는 중국조선족》이라는 노래의 작사자로 이름을 날렸음.      회원: 김학송. 초대 부회장. 유명한 시인임. 지금껏 17권의 시집을 출간했음. 연변의 수석원로라 할 수 있으며 중국 조선족으로 맨 첨 수석관련 교양서를  출간했음.     회원: 한태익. 한 대중신문의 사장을 오래동안 해온 언론인임. 시, 수필을 잘 씀. 한때 신통하게 메주처럼 생긴 수석을 얻어 소문을 놓았음.     회원: 석문주. 전업계통 직원. 시인.     회원: 송철남. 방송언론인으로서 수석회의 애송이임.        회원: 신철호. 이글의 필자임.     회원: 박  수. 의사.     … 특별회원: 박식. 한국인. 화가이고 칼럼니스트임. 연길 내고향음식점 사장.     …     이런 분들이다. 수석을 사랑하는 분들이여서 그런지 다들 진짜 《수석》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찌《수석》들과 어울려 수석을 즐기지 않으랴.    김광옥의 《대막대 너를 보니》를 개작하여 수석찬가나 한수 만들어보자.                    수석아 너를 보니 유신하고 반갑고야                  내 아이 적에 너를 품고 놀았더니                  이제란 강가에 섰다가 널 앞세우고 다니리.       회원 여러분,  옛 문인들은 꽃과 술과 달과 벗을 가리켜 사미구(四美具)라 했다는데  우리는 산, 강, 계곡, 술에  수석까지 하여서 오구미를 갖추며 즐겨 삽시다.                                                                        - 2008. 01. 13.                                                                                              
147    【신철호특집】(6) 하나마나 그 식이 장식(신철호) 댓글:  조회:3591  추천:83  2008-01-14
【탐석수필】     고문님 하나마나 그 식이 장식         차설 대개 “글쟁이”들이나 “말쟁이”들이 모인 장소면 약국의 감초같이 어김없이 끼여들어 담론좌석을 빛내여주는것이 있으니 그것인즉 다름아니라 육담이다.       우리의 두만강수석회의 멤버들을 쭉 훓어보면 거개가 언론, 예술 분야에서 저마끔의 실력을 과시했던 시인, 수필가, 또는 책임자들이여서 근본을 따져보면 “글쟁이”, “말쟁이”이며 누구의 간곡한 교시나 반짝 빛나는 가르침의 인도도 없이 자발적으로 취미생활을 해오다가 어쩌구려 다리부러진 노루같이 모인 “돌쟁이”들이다. 그러니 강산이 변한들 본성이야 변할손가. 매번 탐석때면 배낭에는 꼭 부인이 정성들여 마련해준 점심밥과 쇠갈구리, 솔, 장갑 같은것을 지참함과 동시에 머리속에서는 한두편 정도의 육담을 잘 가려 입력하여 와서는 쉴참에 “피로제거약”으로 무상공급하는것이 정관에 없는 규칙으로 되고있다. 그때면 아예 무존장아움이 되여 막둥이인 본인에게도 순서에 없는 언권이 돌아오기도 한다. “수호전”의 량산박에서 36명 천강성과 72명 지살성으로 108명의 장수들에게 별을 달아주듯, 현재 여러 사업단위들에서 고급이니 중급이니 초급이니 하며 직함평의를 하듯 우리의 다재다능한 멤버들에게도 별을 달아주거나 직함을 평의해준다면 별다를 의견이 없이 육담 최우승(고급)에 김대현고문님을 만장일치로 선거할것이다. 그 무슨 지표라는것도 없고 일절 “저리 비켯!”에 찾아가고. 김대현선생은 키는 중키이나 뼈가 굵고 몸집이 실팍하며 둥근 얼굴에 이마는 넓고 머리는 전통적인 하이칼라여서 어떻게 형용을 해본다면 어렸을 때 자주 보아왔던 조선영화들에 나오는 세포위원장 형상이다. 겉보기에 퍽 점잖고 위엄스러워 보이는분이 일단 돌밭에 들어서면 올 때 잘 가려온 육담들을 풀어놓는데 다 자상히 설명해놓으면 비밀루설죄에 지적재산침해죄까자 겹으로 걸려 본인이 수석회에서 축출당할 념려가 있는고로 여기서는 딱 하나만 공개하니 이입 저입으로 무상전파함을 절대 불허한다는것을 선포하는바이다. 옛날에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일따위를 할 때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하는 일을 목욕재계라 일컫는데 김대현선생은 이를 별나게 탐석갈 때면 지킨단다. 즉 탐석하러 가기 한주일전부터 “야간작업”을 중지하고 몸을 깨끗이 거두어야 명석을 발견하는 혜안을 갖춘다나. 그래서 돌밭에 가면 의례 하시는 말씀이 “나는 딱 한주일 굶었어. 자네들은 어제 도랑을 건넜지?”하는 의미심장한 물음이요 “소식을 늦게 받다보니 규례를 못지켰습니다.”하고 비서장 리광인선생을 방패로 내세우고 대답하는 이는 김봉세선생이다. “제일이 바쁘다나니 소식을 늦게 전했습니다.” 리광인선생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라 뉜들 한바탕 아니 웃어보랴. “저도 도랑을 건넜습니다.” 열흘에 한마디 하는 한태익선생의 자각적인 검토가 또한 가관중의 가관이다. “굶었다”느니 “도랑을 건너다”느니 “규례”느니 하는 말은 다들 김대현선생이 발명창조한 “야간작업”을 의미하는 말들이다. 올 4월 수석회에서 도문 신기동에 합동탐석을 갔을 때 김대현선생은 물개같이 생긴 물형석을 얻고 장원한 소감을 얘기할 대 아주 진리인듯 흥분해서 력설한 경험담이 곧바로 일주일간 “굶으면서” 심신을 깨끗이 거둬야 득도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르며 비로서 명석을 얻을수 있다는 이른바 목욕재계설이다. 김대현선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화룡의 어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김봉세선생을 가르쳤는데 김대현선생은 취미생활이 상당히 다양하고 풍부, 지금은 연변에서 둘도 없는 고서수집가인 동시에 민속품수집가이도 하다. 여기에 성차지 않아 근 10년간 수석수집에도 남다른 열과 성을 보여주었으니 2006년 6월 8일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가 있은후 인금이 대뜸 치솟아올라 “연변일보”에서 인츰 그의 사적을 대문짝만큼하게 대서특별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빙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그의 목욕재계는 보통 도로무공이다. 신체가 튼튼하여 70여근 되는 수석을 지고도 얼굴의 혈색을 바꾸지 않고 3~4리길을 거뜬하게 걷는지라 돌밭에 들어서서도 걸음이 황천왕동이를 가르칠 정도다. 그러니 생밭을 뒤지기보다 김대현선생이 지나간 자리에서 이삭주이를 해도 좌우간 수확을 할수 있으니 그가 일주일간의 목욕재계로 키운다는 혜안의 강도가 심히 미심하다. 대신 “규례”를 아니 지키는 김봉세선생은 일단 돌밭에 들어서면 눈이 아주 투시경이 되어 아무곳에 가든 헛다리를 짚는 법이 없으며 매번 장원석의 십중팔구는 그의 눈에 걸리고 손에 쥐운다. 김봉세선생은 이미 7~8년전부터 어쩌구려 생판 리광인선생과 짝을 무어 가까이는 부르하통하, 멀리는 돈화의 목단강까지 탐석발자취를 력력히 남기면서 도보로 연변땅을 주름잡았다. 두분 다 하해한 자유의 몸들이라 마음만 먹으면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황차 리광인선생은 조문과출신인데 별스레 본업을 뿌리치고 곁자기학문인 우리 력사에 홀짝 반하여 돌아다니다보니 탐석이 현지답사를 많이 할 기회를 무상으로 안겨준셈이였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고 경험만으로도 탐석에서 타를 아득히 떨어드리는 투시경같은 혜안을 갖출수밖에 없다. “5.1”련휴때 모처럼 시간을 내여 삼합에서 도문구간의 두만강을  “토벌”했댔는데 동행한 김봉세선생은 산(山)자처럼 생긴 희구한 물형석을 얻고 리광인선생은 말짱 소품 관통석만 네댓개 얻었는데 목욕재계하고 왔다는 김대현선생은 혜안이 흐려졌는지 다리품만 잔뜩 팔았을뿐 성과는 전무했다. 지병으로 허리를 앓은 본인도 이날에는 몸이 말째여서 들놀이를 하고말았다. “올 때는 뭔가 괜찮은것을 얻자고 극구 도랑을 안건넜는데 도랑을 건넌 당신들보다 못하오.” “맑은 물에 고기가 아니 놉니다. 수석이란 원체 모래니 망돌이니 썩돌이니 하고 어울려 놀던 몸이라 가재는 게편인것처럼 선생님하고는 격을 두는것입니다.” 김대현선생의 실망에 리광인선생의 원리스런 해석이였다. 김대현선생은 그렇게도 목욕재계를 주장했으나 하나마나 그식이 장식이로 석복이 시종 잘 따라주질 않는다. 올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때 그이 새해석복을 빌며 또다른 “도랑”이야기를 기대해본다.   (2006년 10월 19일)                         
146    【신철호특집】(5) 사신과 악수할번 했었네(신철호) 댓글:  조회:4579  추천:106  2008-01-12
【탐석기】                         사신과 악수할번 했었네 신 철 호     2006년 6월 8일에 본인 소속의 두만강수석회에서는 연변박물관에서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졌다. 그때의 성황을 예쁜 강정숙기자가 능란한 필치로 9일지 “연변일보” 문화면에 “수석-령적인 ‘돌’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대문짝 같이 써서 올려놓았으니 또다시 뭐라고 구구히 혀를 팔락거리는것은 로반앞에서 도끼를 다루는것과 별다름이 없다. 그뒤 2~3일이 지나서 일찍 연변에 와서 장애인돕기 자선사업을 수년간 해온적이 있은 한국의 김부식선생이 어떻게 곤명에서 이 소식을 듣고 전위해서 늦은 걸음으로 찾아왔다. 그는 오른 다리가 심하게 불편한 몸이지만도 미술, 음악 등에 조예가 깊을뿐만아니라 시창작에서도 장끼가 있어 어떤 문학상을 탄 경력까지 있다. 더구나 수석에 대한 흥취가 극히 농후하여 연변에 있을 때 자가용을 끌고 연변의 산천을 샅샅이 누비며 수석문화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이곳에다 “이상야릇한’ 풍조를 파종해놓았으니 두만강수석회의 고문님인 김대현선생이나 초대회장 리흥국선생이나 후일 알고보니깐 다들 원체 수석에 취미가 있던차에 김부식선생과 서로 의기투합하여 그 수석소장이니 수석탐지니 하는 “이상야릇한” 풍조에 더욱 깊게 빨려들어갔던것이다. 김부식선생이 오니 공동언어가 더욱 풍푸해져 문안인사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탐석이야기가 쏟아져나왔고 계획도 바로 제정되였다. 날자는 6월 16일, 말 그대로 소뿔도 단김에 뽑으라 했으니 아무튼 시도 때도 없이 탐석이야기만 나오면 곧추 신들리는것이 수석회 성원들의 하나같은 “정서병”이다. 물론 이런 병명이 의학에서 사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정된 탐석지는 왕청현 배초구경내에 있는 만천성저수지 아래이다. 가야하는 연변에서 두만강 다음으로 큰 강인데 배초구에서 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땜을 쌓아 가야하를 막고 저수지를 만들어 단 이름이 곧 만천성이다. 탐석하려면 왕청쪽으로보다도 도문시의 석현진쪽으로 가는편이 지름길인데 연길에서 버스를 타면 석현까지 한시간 미달이며 석현진에서 택시 타고 삼도구촌의 뒤골짜기까지 25분정도 가면 목적지이다. 발전때문에 땜으로부터 10여리 더 되게 내쳐 산굴을 뚫고 물길을 돌려놓은통에 물이 줄어든 원 강곬에는 도처에 돌밭들이 드러나있었다. 두만강보다 오석의 질이 좋고 돌의 변화가 더 다양한것이 특징인데다가 아주 오지중의 오지라 처녀지나 진배없다. 흥분에 젖어들어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언뜻언뜻 보내는 사이에 목적지에 이르고보니 시침이 9시 반쪽에 다리를 드리우고있는중이였다. 김대현, 김봉세, 김부식, 김학송, 리광인, 석문주, 본인 등이 돌밭에 이르자 석신제같은것은 싹 망각하고 제마끔 배낭들에서 갈구리니 못뽑이니 쇠막대니 하는 가관의 도구들을 꺼내들고 분주히 탐석에 달라붙었다. 본인에게는 처음 발을 들여놔보는 돌밭인만큼 어구부터 벌써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수만원어치에 달하는 명석이 곧바로 한메터 눈앞에 묻혀있으면서 나의 발견만을 기다리고있는듯싶어 남이야 어찌하든지 곁눈도 아니 팔고 열심히 돌밭을 뒤지는데 10시부터 강옆길에서 체격이 그닥잖은 승용차가 을씨년스러운 싸이렌소리를 귀찮게 울려대며 자주 오르내리잖겠는가. 더위먹은 황소 달보고도 헐떡거린다고 괜히 호림방화검사차인줄로 오인하고 피우던 담뱃불만 자주 끄느라 아깝게도 여러 개비를 멋없이 랑비를 했다. 그 싸이렌소리는 실상 12시부터 수문을 여니 조심들 하라는 고시인데 시내사람들에게야 그런 소리가 소방차나 구급차 또는 경찰차, 군용차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으니 물을 뽑는다는 뜻을 온 사람들중에서 뉜들 알아들으랴. 황차 수석에 넋을 바친 상황이라 포탄이 터진다 해도 귀 기울일 사람이 있을것 같잖았다. 오전에는 수석이 웬만해서는 잘 현신하지 않는법이라 소품따위들을 둬개 줏고보니 점심때가 다되였다. 12시를 몇분 앞두고 갖추어온 음식들을 꺼내들고 빙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김부식선생과 리광인선생이 북면해 앉고 김대현선생과 김봉세선생이 서면해 앉고 김학송선생과 본인이 남면해 앉고 석문주선생이 동면해 앉아 김봉세선생이 갖고온 포도주를 돌려마셨다.  술이 금방 한순배 돌았는데 “쏴쏴”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강한 비린 냄새가 불시에 코를 자극해왔다. 북면해 앉은 김부식선생이 “물이야, 물……”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얼버무리는 소리를 내뱉았다. 돌아보니 20메터되나마한 뒤까지 강곬이 마구 시꺼멓다못해 흡사 먹물을 터쳐놓은듯 했다. “뛰여라, 뛰여” 란리판에 존경어가 먼저 머릿속에서 도망가버렸다. 리광인선생이 늘여놓은 밥그릇을 잽싸게 싸안고 4~5메터밖에 있는 기슭우로 뛰여오른후 다들 배낭이니 도구니 주은 돌들이니 닥치는대로 안고 저마끔 기슭우로 뛰여올랐는데 그 짧은 거리인데도 무릎아래 가랑이가 이미 다 젖어버렸다. 식사때 뒤에 기대고 앉았던 한키 높이의 집채같은 바위가 그뒤 10분도 못되여 서서히 물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홍수가 아니라 해일이야, 해일이야. 그저 물란리가 아니지. 허참 난생에 처음 당해봐.” 밑으로는 아름드리 돌들을 굴리고 우로는 뿌리채로 빠친 통나무들을 끌고 도도히 흐르는 감탕빛 강물을 보며 김대현선생이 혀를 차기만 했다. “허참 모짝 물귀신이 될번했구나.” 리광인선생도 담이 어지간히 떨어졌던 모양이였다. 흉흉하게 사품치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모두들 얼굴이 얼 나간듯 굳어져버렸다. 문자 그대로 망연자실이다. 본인도 어려서 큰물이 지는것을 한두번 겪은바가 아니다. 비록 어른들의 손목을 붙잡고 먼 발치에서 구경했었지만도 어른들이 예전에 불난 뒤끝은 있어도 물 난 뒤끝은 없다고 자주 하던 말뜻이 무슨 뜻인지 알만했다. 진정을 한후 다시 점심상을 차려보니 김대현선생이 모처럼 열심히 담궈온 약주 한병이 냄새도 못피워보고 수장되였고 사모님이 정성껏 갖춰보낸 고추장이 고스란히 통에 담긴채로 하백의 수라상으로 진상갔으매 본인의 밥곽덮개 두개가 리광인선생의 손에 미처 걸리지 못하고 물에 떠내려갔다. 그런대로 나머지 밥과 석문주선생이 갖고온 찰떡으로 뒤맛이 텁텁하기 그지없는 스산한 점심요기를 대충 끝냈다. 없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씻자고 물가에 와보니 글쎄 밥곽덮개 두개가 고스란히 딱 붙어서 풀대에 걸려 눈앞에서 하느작거리지 않겠는가. 그놈들도 아마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라는 공생동사의 원리를 터득한 모양이였다. 실은 급히 터진 물이라 가운데는 빠르고 기슭이 느린 관계로 둘이 손잡고 기어코 주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온것이였다. “석신제를 지냈어야 하는데……” “아침에 책상에다 축문을 두고왔지, 귀신은 경문에 막힌다했는데.” 대충 배를 불리니 “본질”들이 드러나 김학송선생과 리광인선생사이에서 한담들이 슬슬 풀려나왔다. 오후의 탐석계획이 약주와 고추장통을 따라간 바람에 한시가 되니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귀로에 오른수밖에 없었다. 오던길은 지름길이였으나 강너머로 멀거니 바라만 볼수밖에 없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한다는 말이 나같이 김빠진 사람에게 과연 적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귀로라고 찾아접어드니 촉나라로 가는 길이였다.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이나 다녔을법한 구불구불한 산중턱길인데 년전의 가랑잎들이 저들 령지인듯 거리낌없이 무릎치게 길을 덮었고 어떤 골짜기에는 눈들이 녹지 않은채 청석판처럼 누워있었다. 김부식선생은 원체 불편한 몸이라서 모두들 걱정하여 한마장쯤 가다다 다리쉼을 하곤 하다보니 본래 기껏 싫은 귀로가 처지지가만 했다. 앉아쉬는 모습들을 버릇없이 형용한다면 어김없는 락태한 고양이 상이였다. 그래도 마음들만 한창 커가는 가둑나무잎마냥 파랳다. “복수를 해야지.” “이 물도 벼루기 뜀이여, 한 사날 지나면 줄겠지 뭐.” “다음 토요일에 기어이 와봐야겠소.” 칠팔리 되나마나한 길을 산길로 걷다보니 십리나 더 되게 한시간반을 허비하면서 걸어서야 도문에서 왕청을 가는 포장도로로 나왔다. 그후 며칠 지나 김대현, 김봉세, 리광인 등 세분 선생이 복수의 일념들을 안고 왔다가 물이 한치도 줄지 않아 헛걸음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밸김에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도문의 신기동에 가서 하루해를 보냈단다나, 한강서 뺨맞고 서빙고서 눈 흘기기였다. 신기동은 돌밭이 꽤 크지만 소문 난지 오랜 산지라 연길과 도문에 있는 수석인들의 무차별 “련합토벌”을 당해 지금은 거의 고갈상태이다. 그럭저럭 여름이 자리를 털고 물러가고 학수고대한 “10.1”련휴가 드디여 속시원한 복수의 기회로 찾아왔다. 5일과 8일에 두번 거쳐 봉창에 정신들을 싹 빼앗겼던 보람으로 큰물 뒤에 면모가 일신한 돌밭에서 저마끔의 수확을 거뒀다. 언제나 돌밭에 들어서면 눈이 완전히 투시경으로 되고마는 김봉세선생이 꽤 값가는 산수석을 주었고 본인은 랑아산을 꼭 닮은 소품석 하나와 누워있는 짐승같은 물형석 하나를 얻었다. 물론 수수한 성과작들은 언급하지 않고 하는 말이다. 장마끝이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몸서리치는 일이다. 하지만 수석인들에게 있어서 장마끝은 노다지를 캐기에 가장 안성맞춤이다. 돌에 묻은 물때가 모짝 벗겨져 색상이나 형태를 구분하기가 딱 좋고 또 새 돌들이 나타나 수석자원을 무진하게 보충해주기때문이다. 그러니 매번 두만강이나 가야하에 탐석가서는 한다는 소리가 농민들에게 얻어맞기가 십상인 “한번 큰물이나 콱 져야 할텐데.” 또는 “소낙비가 사날 끊지 말고 퍼부었으면 속시원하겠는데.”하는 타령들이다. 하나님이시여, 이 불쌍한 “수석미치광이”들의 간절한 념원을 삼가 가슴 깊이 아로새기고 명년부터 민생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홍수를 해마다 세번씩만 터쳐줍시사, 돈수재배하나이다.                                                               (2006년 10월 16일)        
145    《수호전》과 수석(1) 수석과 새당예(신철호) 댓글:  조회:4180  추천:119  2008-01-10
《수호전》과 수석(1)                                  수석과 새당예                                                           신  철  호                                               《수호전》에 금창수(金槍手) 서녕(徐寧)이라는 장수가 있다. 동경 전수부(殿帥府) 금창반의 교두로서 한자루의 구렴창(鉤鐮槍)을 아주 출중하게 다루는데  그 구렴창법은 그 집안에서만 대대로 익히고 전수하여 서녕에게까지 내려온 세상에 둘도 없는 무술이다. 지금 같으면 무형문화재로 될만한 비법(秘法)이다.      서녕에게는 또 조상으로부터 4대에 걸쳐 물려받아온 세상에 둘도 없는 가보(家寶)가 있는데 기러기 깃털로 테두리를 엮어 만든 새당예(賽唐猊)라는 갑옷이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기에 입으면 몸에 딱 맞고 가벼운데다가 견고하기를 이를데 없었다. 서녕은 이 갑옷을 목숨같이 애지중지하여 평소 누가 보자고 하여도 쉽사리 내놓지 않았으며 매양 붉은 양가죽주머니에 정히 넣어서는 침실의 중간대들보에 높직이 걸어두었다. 말하자면 자나깨나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면서 신주 모시듯 하였다. 일찍 송휘종의 매부되는 왕태위(王太尉)가 3만관(貫)에 팔라는데도 그예 팔지 않았으니 어찌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랴.  3만관이면  금창반의 교두고 뭐고 싹싹 때려치우고 여생을 편안하게 살만한  어마어마한 돈인데 말이다.     이 면에서 서녕은 청면수(靑面獸) 양지(楊志)보다 퍽 어른다워 우리 수석인들이 정신적으로 높이 숭앙해야 할 인물이다. 수석인들은 수석(壽石)을 생명처럼 여기니깐.     양지는 왼쪽 얼굴에 퍼런 큰 기미가 있어서 별명이 청면수이다. 오후 양령공의 손자라고 하는데 오후(五侯) 양령공(楊令公)이면 저 유명한 《양가장(楊家將)》의 양업(楊業)이다. 대대로 장군가문이라 양지도 무예가 출중하고 사람이 소상해서 전사제사관(殿司制使官) 이라는 벼슬을 하였는데 그가 어데 가나 성씨와 이름을 속이지 않고 제사관으로 있었던 과거를 약국의 감초처럼 언급하는것을 보면 그가 후에 북경대명부에서 하였던 제할관(提轄官)벼슬에 비해 훨씬 높은 벼슬이였을것이다.     양지가 제사관으로 있을 때 동료 아홉명과 함께 수석으로 유명한 태호에 가서 궁궐을 짓는데 쓸 관상석(花石綱)을 실어오던 중 그만이 신수 사납게 황하에서 풍랑을 만나 배를 번지고 말았다. 동경에 돌아오면 십중팔구 목이 뎅겅할것이라 그 자리로 도망길에 올라 여러 해를 이곳저곳 떠돌며 숨어살았다.     그러다가 사면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간 밑천을 마련한 후 동경에 돌아왔다. 원래의 직무를 회복하려고 있는 밑천을 다 팔아 추밀원과 전수부로 다니면서 물밑사업을 벌렸다. 끝내 고태위를 만나게 되었으나 밑천을 말아먹은 보람이 꼬물만큼도 없이 고태위로부터 된욕만 얻어먹고 쫓겨나고 말았다.     살길이 막막한 양지는 별 수 없이 조상적부터 물려내려온 보도(寶刀)를 천관(千貫)에 팔게 되였는데 이 칼은 쇠를 찍어도 날이 무디지 않고  날우에 머리카락을 놓고 훅 불면  끊어지며 사람 목을 쳐도 칼날에 피가 묻지 않는다는 예리하기 짝이 없는 보도중의 보도였다.     양령공의 후대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을  양지는 살기 어렵다고 내다 팔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림충(林冲)같은 백락을 못 만나고 호랑이라 불리우는 망나니 우이(牛二)를 생뚱같이 만나 시비끝에 죽여버리고 말았다. 결국 살인죄로 사람은 정배 가고  칼은 몰수되였으니 말그대로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은 셈이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제사관 시절의 친구들을 찾아도 배는 아니 곯겠는데 그는 그러지 않고 가문의 최후의 표징인 칼을 내다 팔았으니(결국 못 팔았다) 이는 어찌 보면 가문을 배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수석인이 양지가 칼을 팔듯이 수석을 팔 때에는 이미 수석인이 아니라 장사꾼이다.  더구나 먹고살기 위해 수석을 판다면 그는 진작 수석인으로서의 자격과 인격을 상실한 사람이다. 물론 끊임없이 탐석해서 들여오니 소장 공간이 제한되여 차요한것들을 팔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경영활동과 차원이 다르다.     수석인은 팔기보다 교류와 증여로 마음의 풍요를 만끽하는 사람들이다.     수석은 문화인들이 즐기는 고급스런 여가활동이다. 우리의 회원들을 보면 부장, 주필, 사장으로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맡은 직무가 천차만별하고 공무원, 편집, 시인, 학자, 교수, 수필가로 종사하는 주직업과 부직업이 다종다양하다. 그리고 환갑이 넘은 백발부터 서른을 갓 넘은 홍안에 이르기까지 나이의 락차도 아주 계획적으로 배치되었다.     참으로 수석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라고 어느 명인이 말했듯이 수석인은  바로 그런 선물을 찾고 받아보는 사람들이다. 그 선물에 천관이니 3만관이니 값을 매기고 짚을 꽂아두는것은 어불성설이다. 지난 2006년 6월에 열린 제1회두만강수석전시회 때에 우리의 두만강수석회 회원들은 수석을 단 한점도 팔지 않았다. 수백점이나 되는 수석들을 정성껏 진렬하여 방방곡곡에서 온 해내외 관광객들에게 두만강 수석의 매력을 자랑하였다가 전시회가 끝난 후에는 고스란히 집에 가져가서 다시 신주 모시듯 하였다.     두만강수석회 회원들에게 있어서 수석은 그저 멋있게만 생긴 돌이 아니다. 새당예이다.       《수석은 내 인생이다.》     《수석과 더불어 한생을 살리라.》     《수석에 울고 수석에 웃으리.》     《부모, 형제, 처자, 수석은 나의 혈육이다.》     《영원히 사랑하노라 수석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돌이여.》     《수석은 나의 최고의 애인이다.》     《안해가 없이는 살아도 수석이 없이는 못 살리라.》      …     이것이 우리 두만강수석회 회원님들이 저저마다 평소 탐석을 가서나 정기총화모임에서 편지의 문안처럼 꼭꼭 외우고 드팀없이 그대로 실행하는 어록이다. 웨침이다. 행동지침이다. 삶의 목표이다.     진짜로 부모, 형제, 처자, 수석은 나의 영원한 혈육이다.     고종명은 수, 부, 강녕, 유호덕과 더불어 오복(五福)이다. 수석까지 넣어서 육복을 만들어야 하겠다. 그리고  이제 50년후(?) 이 세상에서의 소풍이 끝나는 날이 오면 수석을 안고 수석을 베고 조용히 귀천을 하리라.                                                             2008년 1월 9일                                                                                             
144    【탐석기】탐석으로 가는 해를 보내다 댓글:  조회:3958  추천:105  2007-12-31
【탐석기】                        탐석으로 가는 해를 보내다       요사이 내 고향 연변이나 조선반도 쪽이 강설이 내리고 강추위가 몰킨다더니 남방땅 여기도 련일 비를 내리며 기온이 떨어진다. 어쩌다 어제오늘 해맑은 날이라지만 찬바람이 불어치는 바깥은 겨울옷을 입고도 오싹해 난다. 2007년도 저물어가는 12월 31일 이날이해를 탐석으로 마무리고 싶어 나는 배낭을 달랑 짊어지고 찬기운속 겨울탐석에 나서보았다. 말이 겨울이지, 우리 연변에 비하면야 마가을 오스스에 불과할가. 절강 소흥 월수외국어대 서대문가에서 시내 116선 뻐스에 오르니 남으로 종착점이 산구에 위치한 60여리 밖 소흥현 왕단진이다. 지난 12월 8일 토요일날 력사속 순왕묘 답사차 왕단쪽으로 다녀오며 소순강 돌밭을 점찍어 두었던지라 나는 곧추 왕단진쪽으로 향하였다. 116선 뻐스가 왕단진에 이르자 나는 순왕묘쪽이 아닌 소순강거스름을 택했다. 소순강을 거스르면 소흥방향이고 돌밭들이 가담가담 펼쳐지지만 다리우 강가는 대나무밭이 아니면 어수선한 풀밭들이여서 꿰고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돌 또한 수석인들에게 머저리돌로 불리여지는 희뿌연 막돌들이여서 나는 첫 시작에 벌써 흥취를 잃었다. 그런속에서도 흥미로운것은 산그림자에 해볕이 가리여진 음지쪽 강변 고인물에 살얼음이 살짝 건너간 것이라 할까. 10여일전 비가 내리기전에 이미 첫서리가 내렸다더니만 어제와 오늘 해맑은 날씨, 찬기운에 된서리가 내리지 않을수 없다. 된서리가 내림은 살얼름이 질때도 되였다는 알림이니 절강에 와서 처음 살얼음을 보는, 그것도 소흥 60여리밖 산구에 와서 본다는것이 희한하기만 하다. 소순강 따라 첫 구비를 도니 새로운 돌밭이 펼쳐지는데 강건너편 산아래 외딴집에서 문지기 개들이 별스레 짖어대며 요동을 부려 돌밭구간을 피해 가지 않을수 없다. 아스팔트길에 오르니 아스팔트길은 산과산사이 협곡지대로 뻗어가고 또 하나의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아래가 돌밭이여도 역시 희스레 막돌들 뿐이다. 순왕묘쪽과는 달리 이 구간 소순강은 수석산지가 아님이 단적으로 알려진다. 벌써 몇리 길을 거슬러 오른 같다. 펀펀한 돌우에 앉아 다리쉼을 하는데 그때에야 보는 주위 산천경개 그림처럼 아름답다. 파아란 물이 바위를 때리는 곳, 대나무 우거진 강변, 12월에도 무성한 여린 풀숲, 강 량안을 덮은 푸르른 산들—아까 본 길가 광고대들에 씌여진 “시와 그림같은 왕단”의 뜻이 뭔가를 알것 같았다. 나는 12월도 막가는 절강의 소순강에 취해 버렸다. 소순강이란 순자는 중국력사상 삼황오제중의 순제를 뜻함이니 순제의 거룩한 발자취가 소순강에 어렸다질 않는가, 그 력사의 복판에 앉아있는 내가 꿈속을 헤매인다. 그속에 시간은 좋이 반시간은 흐른다. 력사속, 소순강 량안 풍취에서 헤여나와 다시 아스팔트길에 올라 협곡사이 구비를 도니 또 하나의 다리, 다리를 돌아 강건너편 돌밭을 샅샅이 뒤지여도 수석다운 수석이 나질리가 만무하다. 이번은 다리우 왼쪽구간이다. 이 구간은 수메터 수직높이로 돌벽을 쌓아 올리고 그 아래로 강물이 흘러 돌벽우로 걸어야 하는데 돌벽우나 돌벽안이나 전부가 가시밭과 엉켜진 풀밭이여서 한걸음을 내딛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 들어섰지만 돌아서기는 싫었다. 그러다가 엉킨 풀에 걸려넘어져 바닥에 대인 왼쪽 손바닥이 온통 가시가 박혀 신경질이 난다. 가까스로 가시밭구간을 돌파하니 왼쪽구간 돌밭은 결단난 자리, 강건너쪽이 꽤나 넓은 돌밭이 아닌가. 아래를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또 풍덩 앉아 다리쉼이다. 두손을 물에 적시여보니 내 고향 12월 강물처럼 뼈를 에일 정도는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강물을 건너고 볼판이다. 신을 벗고 바지를 걸어올리고 물에 첨벙 들어서니 못견딜 정도는 아니다. 아쉬운것은 그렇게 건너간 돌밭도 막돌의 세계일 뿐. 인젠 두세시간이 훌쩍 지나고 탐석을 그만 둘때도 된가부다. 대자연이 쉬라고 알려주는 계시가 아닌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5~6리 정도는 거스러 오른것 같다. 강변 아스팔트 길쪽에 다가서니 길가던 아낙네가 농군차림의 나그네가 미심쩍던지 강변에서 뭘하는가고 말을 건넨다. 아낙네야 내가 6000리 밖 길림 연변에서 온 수석인임을 어찌 알리오, 놀고있다고 하니 더 물어오지 못한다. 마침 강아래 쪽에서 뻐스가 달려온다. 오늘의 남방탐석은 이로써 끝난 셈이지, 수석 한점 손에 쥐지 못해도 2007년 이해 마지막 하루를 력사의 강—절강 소순강에서 탐석으로 보냈으니 기분하나는 좋다마다. 탐석으로 가는해를 보내는 나 수석인은 수석인가부다.                                        (2007년 12월 31일, 절강 소흥에서)      
143    【신철호특집】(4) 한국서 온 신철호님 소식 댓글:  조회:3956  추천:125  2007-12-28
           한국서 온 신철호님 소식 수석선배님 안녕하셨습니까?       목마르게 찾았는데 끝내 인터넷으로  만났습니다. 올리신 글과 사진과 글을 통한 여러 분들의 모습, 그 모습같이  정이 흐르는 수석들을 보니 당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고 공부에 집중이 아니됩니다. 연구실에 나와서 컴퓨터를 켜고보면 자연히 수석을 찾게 되니깐요.       이곳 광주(光州)-빛고을에도 수석애호가들 많고 많습니다. 연길에 노래방이 많은거나 이곳에 수석원(壽石苑) 이 많은거나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젠 수석자원이 싹 고갈되여 중국의 수석을 많이 구입하고 있으며 돌아보면 별로 확 마음을 끄는 수석이 없습니다. 우리의 것을 모여놓으면 아마 보고 기절할 겁니다.       여름에 지리산에 가서 한번 물에 빠져 죽을번 할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탐석을 하였댔는데 석질이 두만강 오석에 비할 나위가 없고 모양이 다들 둥글만두라  자원고갈이 무엇인지 실감했었습니다. 여하튼 제시간에 공부를 끝마치고 돌아가서 진짜로 탐석에 빠지고  수석에 미치려고 합니다. 죽을 때 안해의 무릎을 베고 죽는 것이 아주 표준적인 행복한 고종명이라 하겠지만 저는  수석은 안고 수석을 베고 죽는 것이  원입니다.         여하튼 선배님께서 잘 보내십시오. 그리고 건강하시고.  수석(壽石)을 하려면  우선 수(壽)해야 하니깐요.       새해가  선배님께 사업이 뜻있는 좋은 한 해, 좋은 수석이 찾아드는 희망찬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7 .12.26. 석학(石學)후배 신철호 올립니다.  
142    두만강 가족~~성탄인사 드립니다 댓글:  조회:4197  추천:98  2007-12-24
          두만강 가족~~성탄인사 드립니다      수석과 수석세계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삼가 성탄인사 드리옵니다. 좋은 크리스마스 되세요 !!!
141    성탄을 축복합니다 (운남 김부식) 댓글:  조회:4253  추천:102  2007-12-24
    올해도 성탄의 은혜가 중국 온 땅에 임하길 원합니다. 올 한해도 진심으로 저희들을 사랑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복되고 행복한 성탄절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Merry Christmas~!!   중국 운남 초록빛 남방에서 김부식 원장이 올립니다.  
140    【신철호특집】(3) 수석수필--NO 장유유서(신철호) 댓글:  조회:2968  추천:91  2007-12-22
           NO 장유유서                          신 철 호       장유유서는 오륜의 하나로서 어른과 어린이사이에는 차례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에는 선배니 후배니 하면서 장유유서로 질서유지, 관계유지를 하고있다.     비록 합법적인 허가는 받지 않았지만 우리끼리 모여 멋스럽게 두만강수석회라고 이름을 단 수석동호인모임에는 김대현, 김학송, 리흥국, 김봉세, 리광인 등 수석수집의 력사가 10년쯤인 선배들이 있거니와 나나 한태익선생같이 석령(石齡), 즉 수석수립년한이 고작 3년뿐인 신참들도 있다.     선배님들의 집집을 줄줄이 돌면서 서재에 진렬한 수석들을 구경할 때의 그 황홀경이야말로 이루 형용할수 없어 나같은 신참은 두말할것도 없이 선배님, 스승님을 괴여올리면서 열심히 배우고 장유유서를 드팀없이 지키는것만이 유일한 출로일수밖에 없다.    그런데 딱 두분사이에만 이 장유유서가 탐석갈적마다 산산히 박살이 나서 우리에게 웃음보따리가 잘 차려진다.    “어이, 후배는 후배답게 선배님들의 돌배낭을 한 삼년 메여주면서 따라다녀야 하는데.” 하고 롱을 거는 이는 김학송시인이요,    “옛, 알겠습니다. 젠장 쌍놈같으니라구.” 하고 말대꾸를 잘하는 이는 김철학시인인데 김학송시인은 오십고개에 오른지 불과 몇년, 김철학시인은 김학송시인보다 십년넘어 년장이다.     김철학시인은 나와 같은 신참인데 우리와도 동이 뜨게 수석문외한이라 수석의 질, 색, 선, 자연미, 고태미 등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모르는 어른이지만도 열정만은 드높디드높아 큰일이 없으면 탐석에 어김없이 참가하고 참가해서는 또 김학송시인의  “짓궂은” “괄시”를 감내하군 하였다.     두 시인은 실상 연변가무단 창작실에서 수십년을 코맞대고 일해온 줄기찬 경력이 있는지라 그 무람없는 관계가 자연스러울수밖에 없다. 똑마치 “림꺽정”에서 스물을 갓 넘은 곽오주가 장가들고 상투얹었다고 감히 어른을 앞세우면서 자기보다 퍽 년상인 로총각 황천왕동이와 너나들이를 하는것처럼.     딱 탐석때만은 진짜 NO 장유유서이다.     지난해 8월 여름의 어느날 저녁에 김학송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별 할일이 없으면 탐석가지. 로투구우에 보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꽤 괜찮은 돌밭이 있어.”    “누구랑 같이 갑니까?”    “후배 김철학선생과 같이 가보지.”     내 머리속에서는 둘사이의 재미있는 대화가 아주 상상의 나래를 쫙 펴고 장밤 드라마를 엮어갔다.     보원에는 작은 수력발전소가 있는데 부르하통하를 한구간 빼돌려 세운것이라 그 물이 마른 구간에는 다른 구간에 있을수 없는 정원석위주의 돌밭이 쭉 뻗어있었다.     단 셋뿐의 탐석이고 구애받을 일도 없는터라 돌밭어구부터 김학송시인에게는 장유유서가 헌신짝이 돼버렸다.     “장난꾸러기” 김학송선배     벼슬이나 명예같은것이 김학송시인에게는 죄다 헌신짝, 아예 념두에 아니둔지가 까마아득할듯. 다만 시쓰기나 수석수집이 생명의 거의 전부가 되였다.     별명이 “장난꾸러기”인 김학송시인은 등산할 때 보면 육담에는 언제나 장원이요 겨울에 눈덮힌 산에 오르면 아예 사지를 쫙 벌리고 반듯이 눈우에 누워 된불맞은 곰의 고함소리같은 소리를 오장이 싹 빠지게 웨치기도 하고 산비탈을 내려올 때면 아예 앉아서 엉덩이썰매를 타기도 하는데 메고다니는 배낭은 하냥 쪼르로기가 제대로 채워져있지 않아 입을 잔뜩 벌리고 허공을 쳐다보는 처지이다. 그러니 산기슭에 내려와 보면 그의 배낭속에는 눈덩이나 가랑잎같은 불청객들이 곧잘 모셔져있다.     시를 쓰는 분이라 우리의 눈에 그닥잖아보이는 돌도 일단 손에 쥐기만 하면 “이봐, 골짜기 있지? 물이 흐르지? 진달래도 피여있지?” 하고 잔뜩 상상해서 장황한 설명을 하는데 언제나 꿈보다 해몽이 좋아서 년상의 후배인 김철학시인은 “좋다, 좋아! 나를 다구.” 하며 욕심을 부리는데 “개암을 쓴다”는 면이 오히려 더욱 절절한듯.   “날강도” 김철학시인       현재 연변시조시사 사장을 맡고있는 김철학시인에게 격에 맞지 않게 달린 별명은 “날강도”이다. 덜렁 열정 하나에 든든한 신체를 믿고 두만강수석회에 참가한 김철학시인은 일단 수석밭에 이르면 갑마를 탄 신행태보 대종이 된다. 보원에서도 마찬가지.    “어이, 후배, 걷는것부터 배우시죠.” 하고 김학송시인이 “핀잔”을 주면,    “알겠습니다, 선배님” 대답은 잘하지만 그상이 장상이였다.     그러니 원체 수석에 관한 기초지식조차 제로인 이 어른이 온 하루 돌밭을 돌아보았댔자 얻어온 돌은 모두 몸돌이 아니면 막돌이였다.    “미친개 풋나물 캤구만.” 하고 김학송시인이 또 “핀잔”을 주면 결국 마지막 드잡이가 나온다. 그때면 선후배관게는 싹 달아나고 “무서운” “날강도” 의 “본색”이 나오는데,    “임마, 오늘 네것을 싹 빼앗아갈터이다.”하고 김철학시인의 입에서 고음나팔소리가 터져나온다.     그 “빼앗기”가 또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여서 되다시 장유유서를 들고 나와야 했다.     탐석하러 갈 때에는 누구나의 배낭에 부인들이 열심히 챙겨준 점심밥이 들어있고 또 한두사람은 자청해서 집에 있는 괜찮은 술도 넣어가지고오는데 그 짓궂은 장난이 점심식사때에 새로운 고조를 일으킨다.     “후배, 선배들께 한잔씩 부어올리지.”     “그렇구말구, 한잔 받으시오.”      나도 그 덕에 두번째로 잔을 받아보는데     “젊은 놈이 먼저 받는 법이 어데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받으십시오.” 하고 사양을 하면 김학송시인이      “먼저 받으라니깐, 선배노릇 잘 해야 후배가 똑똑해지오.” 하고 나이가 아주 동이 뜨게 어린 나를 먼저 마시게 한다.     한순배 돈후에는 질서가 잡혀서 좌상인 김철학시인에게 그냥 잔이 올라가는데 그러다가도     “이보세요, 후배. 받아마시지만 말고 되권하시오. 맞갖잖으면 아니 데려온다니깐요.” 하고 김학송시인이 가담가담 “선배틀”을 내여 한근술이 즐거운 기운속에서 제꺽 굽이 나고 점심식사도 끝난다.     이러구나서 또 온 오후 탐석을 하고 귀로에 오르는데 떼놓은 당상으로 당연 김학송시인의 수확이 큰 반면에 김철학시인은 헛탕이였다.     기껏 땀을 흘리고 빈손에 돌아서야 하는 마음이 오죽하랴.     “선배님, 거 폭 패인 돌을 주시오.”     “안돼. 개념도 모르면서 좋은것은 그래도 아네. 이것은 호수석인데 래일까지 5천원만 갖고오면 손해본셈 치고 주리다.”     “후배를 어여삐 여거 선사하십시오.”     “배낭이나 좀 메여주었더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공찾이는 원칙상 불허!”      이런 롱지거리로 뻐스정류소까지 이르는데 발차시간이 거의 됨직하면     “하도 손에 발까지 싹싹 비니 불쌍해서 선사하는데 매일 목욕재계하고 성심껏 모셔야 합니다.” 하고 김학송시인은 장원석인 호수석을 선뜻 건내여주는데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품을 내리는것 같이 말투가 심히 정중하였다.     “쌍놈새끼, 아무튼 내건데 일찍 줬더면 메고오는 고생은 줄이지. 둔한 곰같으니라구.”     김철학시인은 “은혜”를 싹 망각하고 “날강도”의 “본성”을 내세우면서 “욕질”로 “성공”의 “희열”을 만끽한다. 일년에도 수차례 조직되는 합동탐석에서 두 시인은 그상이 장상으로 그날 장유유서를 자주 헝클어놓는데 결과는 그냥 이렇게 김철학시인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김학송시인은 그 “압박”과 “착취”에 시달려 가끔은 도로무공으로 귀가한다. 수천만년의 무심한 세월속에서 기이한 변화를 거듭하면서 조화의 오묘함을 갖춘 수석을 찾아 연변의 강들을 주름잡는 두만강수석회의 맴버들. 자연과 한몸이 되여 생의 즐거움을 창조하고 만끽할줄 아는 사람들. 인정이 있고 유머가 있고 예술이 있는 사람들. 이런속에 끼여 함께 다니는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랴. 그래서 자나깨나 기다려지기만 하는것이 탐석이요, 주어온 수석을 신주모시듯 벌려놓고 밤새워 감상하면서 더 훌륭한 수석을 꿈꿔보는것이 나의 인생의 락으로 되여버렸다.                                                 (2006년 4월 10일)        
139    【신철호특집】(2) 탐석기-- 올해 첫 합동탐석 댓글:  조회:3877  추천:100  2007-12-21
        탐석기-- 올해 첫 합동탐석                                        신철호  더웠다 추웠다 비왔다 눈왔다하며 하수상하기만 하고 기후속에서 봄은 올듯말듯하면서도 애석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겨울을 그예 끝내버렸다. 지난 4월 1일, 두만강수석회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김철학, 신철호, 송철남 등은 아침 7시반에 연길에서 도문으로 합동탐석을 떠났다. 탐석지는 도문시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신기동이라는 후미진 마을이였다. 신기동에서 두만강은 270정도로 큰 굽이를 돌면서 하류를 이루는데 이곳에 남북으로 두개의 큰 돌밭이 있다. 수석회 성원들이 찾아간 곳은 마을앞 돌밭보다 더 큰 속칭 아래돌밭이였다. 이곳에는 수석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끄는 오석이 쫙 널려있었는데 10년이 넘어되는 시기에 숱한 수석들이 두만강수석회성원들같은 “백락”들을 만나 해볕을 보았고 지금도 또 “백락”들을 기다리고있어 말그대로 수석자원이 무궁무진한 산지이다. “조직을 세우니 좋은점이 있구만. 이곳에 이런 돌밭이 있는것을 왜 몰랐을까?” 이미 10여년의 애석력사를 갖고있는 리흥국회장은 돌밭어구에서부터 흥분을 금치 못한다. “일생일석이 오늘 실현될는지.” “올적마다 기분이 항상 좋기만 하네.” “오늘은 폭포석을 얻어봐야지.” “저는 인상석을 얻어보겠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감동과 결심이 어떤 결실을 거둘지는 미지수였어도 배낭을 벗어놓자 저마끔 갈구리니, 못뽑이니 하는 도구들을 들고 수석줏기에 몰두하였다. 물론 정해진 규칙은 아니지만 오후에 수석이 잘 발견되는것이 통례인데 이날은 첫시작부터 저마끔 눈복이 터졌다. 평원석이니 산형석이니 물형석이니 인형석이니 호수석이니 하며 저마다 감상가치를 잔뜩 부여한 돌들을 안아다가 한데 모여놓았는데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등은 다들 수석애호년한이 10년이 썩 넘어 수석을 줏는데 침착한 일면 나머지 셋은 신참들이여서 경험이 부족하고 “심미안”이 협소하여 번번이 퇴짜감만 주어왔다. 결과적으로 지난 일년간 수석줏기에서 성과가 미미했던 김대현이 올해부터는 큰 운이 트려는지 물개같이 생긴 물형석을 주어 기타 성과작들을 쉽게 재끼고 단연 장원에 뽑혔다. 물개석은 길이가 30센치미터 정도인 청오석인데 대칭되는 두눈과 특별하게 흰색으로 된 입부분이 합평회의에서 절찬을 받았다. “뭐 훌륭한것을 찾겠다고 원대한 리상을 품을것이 없다니까. 욕심이 크면 눈이 어두워서 오히려 아무것도 찾지 못하지.” 장원이 된 소감을 김대현은 아주 “진리”스럽게 토로했다. 이들의 희망은 이제 여름철 관광성수기에 열릴 제1회두만강수석문화축제에 보다 훌륭한 수석들을 출품하는것이란다.   (2006년 4월 1일)                                                  
138    【신철호특집】(1) 교수 신철호와 그의 부분 수석 댓글:  조회:4243  추천:113  2007-12-21
【신철호특집】(1)                     교수 신철호와 그의 부분 수석        연변대학 석사교수--신철호선생은 연변텔레비 기자출신의 교수로서 산악인이기도 하고 수석인이기도 하며 다재다능한 분, 지금 한국에 가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철호선생의 휘황한 앞날을 축복하면서 오늘부터 몇기에 나누어 "신철호특집"을 꾸려 본다.
137    【김대현특집】(5) 여가문화의 추구자 실천자 김대현선생 댓글:  조회:2300  추천:76  2007-12-20
                여가문화의 추구자 실천자 김대현선생    리   함         1. 서론   오늘날 경제의 신속한 발전에 따른 생활의 지속적인 향상과 생활조건의 크나큰 개선으로 하여 인류의 수명이 보편적으로 연장되면서 사람들의 년령구조는 재래의 인생 50~60년형에서 인생 80년형으로 바뀌여진다. 평생직장은 운운할수 없고 대신 그 자리를 채워가는것은 갈수록 늘어만 가는 여가생활이다. 이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속에서 생활의 풍요로움을 창조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여가문화가 조용히 깃을 펴고있다.   여가란 직업적인 일 혹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로부터 해탈된 결과로 생긴 자유시간, 혹은 개인이 구속없이 임의로 지배할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단마디로 말하면 우리 말로 겨를이나 틈인데 유럽의 서구나라들에서는 20세기 중반에 벌써 여가를 학문적인 경지에로 승화시키면서 여가문화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동양문화권인 한국의 경우에는 여가문화연구가 이미 발자국을 떼고 여가문화협회들이 활성화되고있는 현실이지만 우리 연변에서는 아직 여가문화란 개념조차 생소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현실이다. 이럴 때 여가문화의 열렬한 추구자, 실천자로 각광을 보이고있는 지성인들이 나타나고있는데 그 돌출한 대표인물들중의 한분이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의 원 부주필 김대현선생님이 아닌가싶다.   여가형태로 받아들여지고있는 여가문화에는 각종 놀이, 오락, 게임, 독서, 스포츠, 여행…등 넓은 범위의 생활여가들이 포괄되지만 김대현선생은 트럼프, 마작, 장기, 낚시 등  시간소일을 위한 놀이문화에 비해 보다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삶의 질적가치를 부여한 취미생활—장서, 수석수집, 옛 민속품수집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있다. 여가문화의 일익을 이루는 김대현선생님만의 독특한 삶의 추구라 해야겠다.   1944년 이른 봄날에 당년의 화룡현 서성구 이도촌에서 생의 계주봉을 넘겨받은 김대현선생은 1968년에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마치고 중학교교원을 거쳐 1975년부터 연변인민방송국 화룡주재기자, 방송국기자, 편집으로 삶의 코스를 바꾼다. 1984년 1월부터 방송국 부주필로 18년, 2001년 12월 방송국의 지도책임을 젊은이들에게 넘겨준 뒤에는 임의로 지배할수 있는 시간적여유가 늘어갔다. 이 같은 여가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하며 주어진 삶—여생을 충실히 하기 위해 김대현선생은 상기 취미생활에 보다 집요함을 보이며 여가문화의 새 편장을 엮어갔다.    2. 본론   여가문화의 추구에서 보여주고자 함은 삶의 질을 높여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것일것이다. 여가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기호가 그러하다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영위하다가 흐르는 세월속에서 직장 1선에서 물러나고 보다 많은 여가생활이 주어질 때 이 생활의 여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자기의 경제생활과 취미에 맞는 스스로의 생활습관을 개발하는것은 여생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서 자못 중요하다고 보아진다.  경제의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질도 부단히 높아지고있다그러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여 꼭 삶의 질이 저절로 높아진다고 볼 수 없다. 아무리 생활수준이 높아져도 먹고 마시는데만 신경을 쓰거나 자기만을 위해 살거나 저급적인 취미에만 물젖어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삶의 질은 보잘것 없는것이다. 옳바른 취미기호추구, 여가문화의 풍요로운 창조는 그 사람의 인생포부와 인간다움을 말하는데 김대현선생은 자기의 취미기호를 여가문화속의 장서, 수석, 옛 민속품—세가지로 잡는다. 1)김대현선생의 첫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우리 글로 된 책들을 널리 수집하는 장서(藏書)이다.   김선생은 지난세기 50년대초에 부모님들이 조선 복구건설에 지원해나갔기에 어려서부터 초중을 졸업할 때까지 “연변의 미츄린”으로 불리운 외할아버지—최일선 댁에서 자라야 했다. 화룡시 쟈피거우어구에 자리잡은 선생의 외가집은 과일동산에 둘러싸인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였다. 동년의 그 시절에 김대현선생은 벌써 그림같은 과일동산의 대자연속에 묻히여 아무놀이도 모른채 책보기에만 열중하였다. 소시적의  취미라 하겠다. 선생의 어려서부터의 꿈은 기자나 작가가 되는것이였다. 그래서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다니던 60년대중반에 선생은 장서로 넘친 연변대 도서관에 파묻혀있다싶이 했다. 동년의 꿈과 대학시절의 책보기는 향후 이름난 장서가로 될 탄탄한 토대로, 밑거름으로 되였다.   뜻대로 기자의 생애를 시작한후 김대현선생은 글쓰기와 더불어 “사람들 기억속에 사라져가는 옛 물건—도서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후세에 넘겨주어야”겠다는 책임감, 사명감을 강렬히 느끼였다. 드디여 이는 선생의 소원으로 되여 지난세기 80년대중반부터 책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거리거리의 책 난전은 책수집의 주요무대였다. 이렇게 여러 해가 흐르니 수천권의 책이 모아졌다.    이런 수천권의 책들속에는 문학, 민속, 력사, 정치, 인물전기, 관광저서, 의서 등에 이르기까지 없는것이 없다. 보풀이 일고 누렇게 변색된 이런 책가운데는 연변서 1948년에 발행된 《문화》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말잡지도 있고 50년대초에 발행된 《연변문예》, 《아리랑》,《연변청년》 등 잡지들이 있는가 하면 지난 20~30년대 조선문예작품집들도 수두룩하고 광복후 조선서 출판한 장편서사시 《독로강》,《백두산》 등 시집만 해도 퍼그나 된다. 당년에 모스크바 외문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문서적들도 적지 않다. 또 1915년 중화민국시기 길림성기상자료집, 1956년 북경고적출판사에서 3000부만 출판한 《자치통감》(1권-10권)은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수 없다.   김대현선생의 장서를 보면 기준이 있는데 조선문도서는 지난 50~60년대가 위주이고 조선출판물은 지난 70년대 이전을 위주로 한다. “현대문명의 충격과 출판부진, 조선족인구의 감소 등 원인으로 다시는 출판이 어려운 옛 책들, 그런 옛책에 사회발전의 력사가 기록되여있고 그 당시 인간들의 지혜와 슬기, 감정과 생활상이 그려져있다.”고 선생은 말한다. 하기에 선생은 “돈부자는 못되더라도 책부자는 되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책으로 메운 책시렁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고 보물고에서 산다는 기분으로 마음이 든든해진다고 한다.   책속에 만석의 곡식 들어있다는 김대현선생의 생활지조, 여가문화의 한 분야로 된 책수집—이런속에서 김대현선생은 청춘을 되찾은 기분이고 또 그로하여 더 없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간다. 2) 김대현선생의 두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수석탐석과 수집이다.   수석은 가공을 허용하지 않는 대자연의 걸작으로서 크게 산수경석, 형상석, 문양석, 색채석 등 4개 분야로 나눈다. 자연을 사랑하고 산수를 즐기는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수석이란 말그대로 산수경석의 략칭이기도 한다. 하나의 돌덩이에서 아름다운 산수의 경치나 산수미의 세계를 여러 가지로 련상하고 맛보고 즐기게 되니 진짜 돌과 인간과의 만남은 뜻깊은 만남이라고 할수 있다. 김대현선생은 이런 수석세계에서 삶을 가꾸며 멋지게 살아간다.   수석이란 부름은 지난 80년대말, 90년대초부터 우리 조선족들의 말밥에 소리없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김대현선생은 1990년부터 수석에 강한 취미를 느껴 휴식날이면 어느 강변으로 탐석을 가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배낭을 지고 두만강, 가야하, 봉밀하, 구수하, 륙도하…돌밭을 찾아다니며 수석을 발견하는 그 재미가 별멋이고 시원한 강바람, 맑은물 출렁이는 우거진 숲, 새들의 지저귐소리는 그야말로 선경에 들어선 기분이란다.   참다운 수석인이 된다는것이 쉽지 않다면 참다운 탐석인이 된다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탐석을 즐기는 김대현선생은 연변지성인들의 동아리—연변두만강수석회의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강따라, 산따라 다니지 않는곳이 없다. 외지출장길에도 수수한 옷차림에 배낭을 지니고 다니며 고물시장이나 수석가게에 들려 마음에 드는것을 사서 등에 지고오는 선생이다. 하여 선생의 집에는 가야하의 명석을 망라한 오묘한 수석만도 수십점에 달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황홀케 한다.   수석세계는 살아숨쉬는 대자연의 축소판이여서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작은것에서 큰 경치를 보아내고 한점의 수석에서 대자연의 여러가지 신비로움을 련상하면서 그 찡한 진미를 맛보고 즐기는것이 진짜 수석인들이다. “집안에 들어서면 돌을 어루만져 주고 물을 먹여주고 자식처럼 귀여워한다.”며 김대현선생은 수석에 푹 빠져버렸다.   취미생활에서도 으뜸가는 취미는 수석문화라는 김대현선생은 수석을 떠나서는 생활이 멋적을것 같다며 수석 하나에서 자연의 숨결, 자연의 정취와 신비로움, 조화로움과 천태만상의 예술적감흥,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삶을 풍요롭게 가꿔가는 분이다. 여가문화속의 또 하나의 멋진 세계라 하겠다.3) 김대현선생의 세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옛 민속품 수집이다.   민속은 한 민족의 지나온 력사를 여실하게 담는 거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태여나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식생활을 떠날수가 없다고 할 때 식생활의 발달과 더불어 식기와 부엌용구들이 발달하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조선민족의 숟가락과 식기의 발달은 놀라울 정도이다. 숟가락과 놋그릇을 례로 들어도 숟가락의 사용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오른다면 놋식기, 놋수절을 중심으로 한 놋그릇은 벌써 통일신라시대때부터 상당한 발전을 보이였다. 그만큼 조선민족의 생활세태를 보여주는 갖가지 옛 민속용품들은 다종다양하여 겨레의 전통적인 민속풍습으로 줄곧 꾸준히 지난 80~90년대까지 전하여내려왔다.   허나 현시대 생활의 급격한 향상과 더불어 유구한 력사를 가진 이런 옛 민속품들이 급격히 소실되여가는 현실이다. 소실은 단절을 의미한다. 우리 이  세대에 와서 민속의 맥이 끊어져서는 안된다. 사명감에 부푼 김대현선생은 책수집, 수석탐석과 함께 지난 90년대초반부터 취미생활의 한 분야로 겨레의 옛 민속품수집에 정진하였다. 선생의 집안에 들어서면 남쪽베란다와 북쪽베란다 모두가 가지수가 다양한 옛 민속품세계이다. 실로 갖가지 옛날 사발, 종류가 다양한 놋그릇과 10여종에 다하는 다리미로부터 인두, 돌절구, 동고리, 다듬이돌, 방망이, 가마니용 바디, 떡메, 떡구유, 함지, 쌀함박, 물동이, 각종 질그릇, 오지단지, 로인식사용 소반, 표주박, 나무바가지, 옛 자물쇠, 오강, 화로, 매돌, 광주리, 기와 등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구전한 옛 민속품들이다.   보라, 100여년의 세월을 거치였다는 대짜옹이항아리, 옛날 우리 어머님들의 손때묻은 싸리광주리, 옛날 아낙네들이 시부모님들에게 진지상 받쳐올렸던 소반상, 옛날 가마니 짤 때 쓰던 바디, 가내용 작은 돌절구, 조선녀인들이 시집갈 때 바느실을 담았던 옛 동고리, 까마반지르르한 물동이들, 윤택이 나는 크고작은 10여개의 옛 오지단지, 다양한 다리미 등이 자리를 메운다. 그중 놋식기, 놋숟가락, 놋쟁반, 놋저가락, 놋밥주걱 등 놋그릇만 해도 가지각색이여서 감탄이 절로 나며 탄복하지 않을수 없다.   어찌보면 지난날 농가의 뒤울안에서 이저리 뒹굴다가 녹쓸고 썩어버리고 쓸모없다고 쓰레기로 버리고 불아궁이에 넣어버리고 이사할 때마다 버리고 버린 “천한 물건”들이다. 이런 물건들이 김대현선생한테는 보석같이 빛나면서 하나같이 귀중한 겨레의 옛 민속용품으로 안겨들었다. 하기에 김대현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생활과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는것들, 비록 나무나 쇠붙이, 흙으로 만들어지고 투박한것들이나 그것들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가 슴배여있고 조상들의 삶의 모습이 어려있고 해당 사회의 력사가 기록되여있는 소중한것들이다.” 소중함의 미학을 알리는, 머리가 수그러지는 찡한 말씀이다. 김대현선생은 이같이 옛 물건들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애지중지 소장하고있다. 여가문화속의 한 분야를 이룬 이 자체가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사랑이고 후세인들에게 세세대대로 전하여주고 보여주려는 참된 마음의 발로이다. 삶의 승화된 경지, 민속의 맥락을 이으며 참신한  경지에 선 김대현선생의 모습을 볼 때 존경이 가지 않을수 없다.3. 결론   우에서 김대현선생의 여가문화속의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생활—책수집, 수석탐석,옛 민속품수집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 모든것을 경제적으로 환산하면 꽤나 많은 돈으로 번져질수가 있다. 하나 김대현선생이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것은 돈이 아니였다. 소형적이나마 하나의 민속전시관이나 박물관을 꾸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겨레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게 하며 민속의 맥과 우리 삶의 현장을  후세에 그대로 길이 전하여 주겠다는것이 소망이고 노력방향, 그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삶의 질을 높여가는 김대현선생이다.   김대현선생은 인젠 60대초반에 이른 분이다. 선생은, 인간은 45살전후부터 뇌의 용적이 점차 줄어들며 뇌에 위축이 오기에 나이가 들면서 아무런 삶의 추구나 목표없이 덧없이 살아가면 신경이 무디여지고 바보스러워진다는 도리, 대신 로령이 되여 뇌에 적당한 자극이 가해지면 뇌의 활동기능을 제고시킬수 있다는 도리를 너무나 잘알고있다. 그래서 두뇌에 활력을 불어넣는 활성화조치가 바로 취미생활이다. 인생 여생기에 취미, 그것도 건전하고 고상한 취미를 갖는것이 뇌의 생리적로화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조치가 아닐가. 이면에서 김대현선생은 본보기를 보여주는데 선생은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생활로 삶에 신선한 활력을 주입하고 삶의 질을 한층 높이면서 건강하고 즐겁고 보람있는 로후생활을 창조하고있다.    김대현선생은 실로 값진 인생살이로 평가되는 장서, 수석, 옛 민속품 등 취미생활로 조선족여가문화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참된 인간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여가문화속에서 삶의 질을 승화시키면서 민족의 력사와 전통, 문화를  고이 간직하며 후세인들에게 세세대대로 전하여주고 보여주려는것이 김대현선생의 삶의 추구이며 참된 마음이다                                                     (2005년 7월 29일)            
136    【김대현특집】(4) 배낭메고 강따라 계곡따라 15년( 김철호) 댓글:  조회:3307  추천:76  2007-12-19
수석가 김대현씨 배낭메고 강따라 계곡따라 15년                                            김철호 기자       “수석엔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식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지요!”   수석(寿石)에 정이 들어 애석(愛石)생활을 즐긴지도 어언 15년세월, 지난 15년동안 초라한 행각으로 강따라 계곡따라 다닌 길 얼마인지 모른다는 김대현씨(연변두만강수석학회 고문)는 수석과 정을 나누면서 날이 갈수록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고 한다. 이제 강물이 풀렸으니 올해에도 부지런히 탐석해야겠다면서 며칠전 두만강탐석길에서 주었다는 돌 하나를 내보이였다. 보자마마자 “이건 <물개>군요!” 했더니 “그렇지요!”하고 미소를 떨군다. 한손우에 얹을만큼의 마춤한 오석인데 심통하게도 앞부분에 “눈자리”가 두 개 패여있고 “코구멍”까지 있었다. 더욱 묘한건 다른 석질로 된 “입”이였다. 온 몸이 몽땅 까마반지르한 오석인데 어떻게 되어 주둥이에만 골라넣은듯 누른색 돌이 박혔을가. 볼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지난 토요일(4월 1일), 두만강수석회 동료 6명은 올해의 첫 탐석에 나섰다. 도문에서 10리쯤 내려가면 신기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앞 두만강자갈밭이 탐석지였다. 쌀쌀한 날씨지만 첫 탐석에 나선 동료들은 금덩이 줏는 심정으로 자갈밭에 눈길을 박았다. 그러나 해종일 헤매도 별로 신통한것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까만 “눈동자” 하나가 김대현씨를 쏘아보고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눈동자”였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살살 모래흙을 파헤쳤다. 다른 한 “눈동자”까지 드러났다. 가슴이 후둑후둑해났다. 긴장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쇠갈구리를 깊숙히 박은후 돌을 흙속에서 후딱 빼냈다. 강아지새끼처럼 귀여운 돌이였다. 재빨리 두만강물에 헹구었다. 깨끗이 씻긴 돌은 찬란한 오색인데 얼핏 보기에도 틀림없는 “물개”였다. “돌줏기가 그래서 재밌다는겁니다. 면바로 좋은 돌 하나 주으면 둥둥 뜨는 기분이죠. 보십시오. 이 ‘눈’, ‘코’, ‘입’이 얼마나 묘합니까. 이 돌은 우리 집에서 두 번째로 좋은 돌입니다.” “그럼 첫 번째 돌은요?” 시렁에 얹힌 까마반지르한 돌 하나를 가리킨다. 주은지 꽤 오래지만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고있다고 하는 그 돌 역시 오석이였다. 빈틈없이 잘 수마된 돌은 단순하게 보이는것 같지만 굴곡이 있고 평범한것 같지만 신비한 운치가 배여있었다. “1989년, 한국나들이를 하고 돌아온후부터 탐석에 흥취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의 수석생활이 맘에 들어서였지요. 그러니 본격적으로 돌을 줏기 시작한것은 1990년도부터입니다. 마수걸이가 참 좋았던것 같아요. 이 돌은 시작해 얼마 안되여 주은 돌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군침을 흘립니다. 이만큼한 돌 아마 흔치 않을겁니다.” 김대현씨는 돌자랑을 자식자랑처럼 늘여놓았다. 그날은 김부식 등 한국 애석가들과 함께 탐석길에 올랐다고 한다. 가야하와 부르하통하 합수목이 탐석장이였다. 홍수뒤끝이라 강변은 스산하기 그지없었지만 탐석자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유별나게 눈길을 빼앗는 까만 점에 흡인되여 무릎을 꿇게 되었는데 살살 파헤치며 보니 오석이였다. 가쁜 들리는 까만 돌을 강물에 씻으며 보니 밑바닥이 칼로 벤 듯 반듯했다. “명석을 주었다!” 산천이 떠라라 소리를 지르니 저쪽으로부터 두 친구가 천방지축 달려왔다.  “연변에 이런 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 욕심나 죽겠네요.” 돌을 받아쥐고 이리 훑고 저리 훑던 한국 친구들도 감탄의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일생 일석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이 돌 하나 있는걸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어디 내놓아도 나무랄데 없는 명석이지요.” 김대현씨의 돌줏기이야기는 몇날며칠을 들어도 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야하반의 만천성에서 50킬로그람되는 커다란 돌을 주은후 길까지 200여메터 나무숲을 헤치며 메여내온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금도 김대현씨 저택에 곰처럼 도사리고있었다. 다가가 들어보니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 무거운걸 어떻게 길까지 냈을가. ”수석에 미치면 그렇게 됩니다. 이건 ‘첩첩련봉’, 이건 ‘오리석’, 이건 ‘초모자’, 이건 ‘원숭이’...…” 김대현씨는 수장하고있는 수석들을 하나하나 내보이면서 설명해주었다. 보니 과연 “원숭이”는 원숭이요, “오리”는 오리였다.또 산 산세의 굴곡과 변화를 보여주는 “산”들은 꿈틀대는 듯 생동하고 우뚝우뚝하여 기백이 넘치는 것이 한폭의 산수화같기도 했다. 산이나 계곡, 강가에 가면 흔한 것이 돌이다. 그러나 수석은 평범한 돌이 아니다. 김대현씨의 말을 빈다면 “돌은 돌이로되 수천수만개의 돌중에 하나가 있으나마나한 희귀하기 그지없는 돌이다.” 때문에 수석은 인공으로는 도저히 창조할수 없는 아름움을 지니고 있다. “수석엔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수석을 감상하느라면 마음이 취한 듯 황홀해지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한껏 느끼며 상상과 사색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집안에 앉아서도 나는 항상 자연속에서 살고있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독서도 하고 글도 쓰고있습니다. 더 좋은건 자연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고향과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생긴다는것입니다.” 수석이 바로 이런것이기에 김대현씨는 15성상 휴식일이면 배낭을 등에 지고 탐석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멀리 두만강기슭과 가야하기슭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수석을 찾아다닌 길 얼마였고 해란강, 구수하, 봉밀하, 부르하통하, 륙도하 기슭을 누비면서 다닌 길은 또 얼마였으랴. 어떤 때는 석우(石友)들과 함께 흥흥 코노래를 부르며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록수청산에 한몸을 맡기고 탐석의 즐거움을 맛보느라면 과연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줄도 모른다고 한다. 공기좋고 경치좋은 대자연속에서 만사를 잊고 마음을 비운채 오로지 탐석에만 열중하는 그 즐거움이란 말로 이루다 표현할수 없노란다.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면 가지고 간 도시락을 펼쳐놓고 술 한잔 넘기며 층암절벽에 뿌리 박고 너우너울 설레이는 소나무숲을 쳐다보노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면서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일소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멋진 돌 하나를 줏기까지 하면 그날은 명절이나 다를바 없어지는 것이다. ”돌 하나에서 그 아름다움과 그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것이야말로 ‘발견의 미학’이 아닐수 없습니다. 탐석은 다름 아닌 자연미의 발견이고 천연예술품의 발견입니다. 수석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가장 가까이 할수 있게 하고 자연과 이간을 적절히 조화시켜주는 대자연의 걸작이자 연분은 맺어주는 ‘오작교’이지요.” 그러나 연변에 수석을 사랑하고 탐석의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너무 적어 섭섭하다는 것이 김대현씨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제 돌아오는 6월 연변박물관에서 연변두만강수석회 회원들의 작품을 위주로 한 수석전람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그때에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들어 안계를 넓힐 것을 바라고있었다. “이제 파묻혀있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찾는 대오가 형성되여 고향의 강과 계곡을 누빌것입니다. 저도 그속의 일원으로 죽을 때까지 아름다움을 찾아 헤메겠지요.”                                                                          [연변일보, 2006년 4월 7일 (B2) ]          
135    【김대현특집】(3) 김대현선생의 수석시조와 수필 댓글:  조회:3812  추천:94  2007-12-18
       김대현 수석시조 3수     이런 줄 알아 주소   탐석행 가는 길에 미녀가 기다려도 눈 한 번 팔지 않고 갈 길만 재촉하니 수석에 깃든 애정이 이런 줄 알아주소   취미생활   수석에 정이 드니 아내가 멀어지고 수석에 매혹되니 목란꽃 미워지네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인간의 취미생활   일생일석   돌아닌 수석이야 어드메 있을 손가 흔하게 돌이래도 수석은 흔치 않아 일생에 일석인 줄 잊지를 말아 주소                          (2005년 6월 15일)                                                             수석에 정들어      수석에 정이 들어 애석생활을 즐긴지도 어언 10년세월이 흘렀다. 지난 10년동안 나는 생활의 반려인 수석과 정을 나누며 수많은 대화를 했고 날이 갈수록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왔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말 못하는 돌에 정은 무슨 정이며 대화는 무슨 대화냐며 우습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수석에 취미를 붙인 사람들은 나의 말이 옳다고 이구동성으로 긍정할것이다. 한번 재미를 붙이면 떨어지지 못하는것이 수석취미임을 나만이 아닌 모든 수석인들이 느끼는바이다. 오죽하면 이제는 수석없는 인생을 생각조차할수 없다고 말하겠는가. 사실 잠을 자다가도 한 밤중에 일어나 수석을 살살 쓰다듬으며 감상할 때도 있으니 그 애석의 정도가 어느만큼 되리라는것을 가히 짐작하리라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옛날 제자식들을 키울 때는 철없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수석을 어루만지듯 애들을 자주 어루만져주지를 못했다. 그랬는데 수석에는 정이 드니 하루에도 열번, 스무번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주고있으니 수석의 매력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산이나 계곡, 강가에 가면 흔한것이 돌이다. 그러나 수석은 평범한 돌이 아니다. 돌은 돌이로되 수천수만개의 돌중에 하나가 있으나마나한 희귀하기 그지없는 돌이다. 수석은 자연이 빚은 조각품이다. 인공으로는 도저히 창조할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것이 수석이다. 수석에는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응축되여 있다. 유구한 세월 비바람에 깎이우고 풍화에 시달리고 물살에 씻기우면서 천태만상의 형태를 이루며 생긴것이 수석이다. 수석에는 산이 있고 바위가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다. 어떤 수석에는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 저 멀리 얌전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있고 어떤 수석에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풀피리 불며 고개마루를 넘어 오는 목동이 보인다. 리태백이 놀던 달이 비끼여 그윽한 정서를 풍기는 수석도 있다. 그리고 망망한 바다에서 사나운 격랑을 맞받아치며 우뚝 치솟는 바위를 방불케 하는 수석도 있다. 이처럼 자연의 천태만상 경관이나 경정 그리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수석을 감상하느라면 마음이 취하듯 황홀해지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한껏 느끼며 상상과 사색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고향산봉우리가 울멍줄멍 솟아있고 억새풀 나붓기는 호수가에 백학이 날아드는듯한 산수경석이나 시골의 초가집처마에 제비가 날아드는듯한 형상석을 보며 가만히 있을수가 있겠는가. 그럴진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생긴 명석을 감상하는 시인, 미술가, 조각가들의 들먹이는 심정이야 더 이를데 있으랴! 수석이란 바로 이런것이기때문에 10여년세월 휴식일이면 배낭을 등에 지고 탐석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 멀리 두만강기슭과 가야하기슭에 발자취를 남기며 수석을 찾아다닌 길 얼마였고 해란강, 구수하, 봉밀하, 부르하통하, 륙도하 기슭을 누비며 다닌 길은 또 얼마였던가. 어떤 때는 홀몸으로, 어떤 때는 석우들과 함께 흥흥 코노래 부르며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록수청산에 한몸을 맡기고 탐석의 즐거움을 맛보느라면 과연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줄도 모른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대자연속에서 만사를 잊고 마음을 비운채 오로지 탐석에만 열중하는 그 즐거움이란 말로 이루다 표현할수 없다.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면 가지고 간 도시락을 펼쳐놓고 술 한잔 넘기며 층암절벽에 뿌리 박고 너울너울 설레이는 소나무숲을 쳐다보노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면서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일거에 해소된다. 더군다나 마음에 드는 수석 하나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더 말할나위가 없다. 그럴 때면 산천이 떠나갈듯 막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다. 그 어떤 아름다운 형태를 가졌거나 상징적미감을 발산하는 수석을 발견해가지고 그것을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훑어보는 재미도 수석인만이 느낄수 있는 특유의 재미이다. 돌 하나에서 아름다움과 그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것이야말로 “발견의 미학”이 아닐수 없다. 탐석은 다름아닌 자연미의 발견이고 천연예술품의 발견이다. 수석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가장 가까이 할수 있게 하고 자연과 인간을 적절히 조화 시켜주는 대자연의 걸작이자 연분을 맺어주는 “오작교”이다. 수석은 변화하지 않고 묵직하며 말없이 산수의 정취나 각양각색의 형태를 나타내기에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고 아무리 자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바로 수석의 이런 불변성과 무언성에서 진실과 소박함을 배우게 되고 참고견디는 인내성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자연과 늘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마음의 평온과 안위를 얻게 된다. 수석의 매력과 미학적가치가 이렇기때문에 좋은 수석 몇점을 올려놓고 사는 집에 들어서면  대번에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보이는것도 사실이다. 어떤 수석인의 집에 가보면 형태나 문양, 색상이 기가 막힐 정도로 뛰여난 수석이 있다. 그런 수석을 이윽토록 바라볼 때면 이것이 과연 돌일가 하며 침을 흘리게 된다. 지어는 집에 돌아와서까지도 그것이 눈앞에 삼삼거려 진정할수 없다. 아무튼 수석에 정이 들어 10여년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의 생활에서 반려가 되고 정다운 벗이 되여 언제나 나와 함께 숨쉬는 수석! 그 수석을 찾아 올해도 초라한 행각으로 강따라 물따라 가고 가리라.   (2005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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