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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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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뉴스】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6월 중순에 댓글:  조회:4093  추천:92  2006-05-10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6월 중순에 두만강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와 연변박물관에서 공동주최하는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가 다가올 6월 중순에 연변박물관전시청에서 성황리에 펼쳐지게 된다. 이는 5월 9일에 있은 두만강문인수석회와 연변박물관 해당 련석회의에서 결정된 최종 뉴스다. 두만강문인수석회는 수석에 취한 연변내 지성인들로 무어진 동아리로서 수석회 수석인들마다 저나름의 귀한 탐석수석을 소장하고있다. 수석의 주체가 이들만의 두만강수석들로서 어디에 내놓아도 엄지를 내들 수석들이 수두룩하다. 허나 연변에 수석전시회가 두어번 개최되였어도 전문 연변내 수석, 더우기 두만강수석을 전문으로 하는 수석전시회는 아니였다. 이에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에서는 연변박물관의 대거협력밑에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지고 두만강수석을 만세상에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5월 9일 저녁 두만강문인수석회의 회장, 부회장, 고문, 비서장들인 리흥국, 김학송, 김대현, 리함 등은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과 만찬을 가지고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날자결정과 더불어 수석전시회준비를 빈틈없이 짜고들기로 했다. 성황리에 펼쳐질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를 두손 모아 기대하여본다.
43    【탐석행】두만강 강역에서 대산까지 댓글:  조회:4293  추천:99  2006-05-03
【탐석행】 두만강 강역에서 대산까지 (2006년 5월 2일) 두 만 강 천리 두만강 중류의 한 구간인 룡정시 삼합진 강역촌으로부터 개산툰진 대산촌 구간에는 30~40리 사이에 7~8개 돌밭을 이루는 수석탐석지가 있다. 뻐스가 통하지 않아 웬간해서는 뛰지 못하는 구간이라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고문 김대현선생과 김봉세, 신철호, 리함 등 넷은 5월의 황금주에 택시편으로 강역~대산 구간 탐석에 나서 보기로 했다. 오전 7시 40분에 룡정을 떠난 택시는 반시간만에 39킬로메터밖의 삼합진 강역촌에 이르렀다. 강역 1~2대로부터 5대에 이르는 근 10리 구간에는 대형 돌밭이 두세곳으로 헤아려지나 평소 쉽게 찾아보는 구간이여서 지나버리기로 했다. 하긴 오늘따라 피여나기 시작한 변강의 양지쪽 진달래와 살구꽃이 이채를 띠여 음달을 좋아하는 진달래, 양지쪽을 즐기는 살구꽃을 두고 재미있는 이야기 판이 벌어졌다. 잠간새에 10리밖의 강역 6대 마지막 마을에 이르러서야 이야기가 동강났는데 큼직큼직한 돌들이 무드기 널린 강역 6대 구간은 첫 시작부터 진한 흥미를 자아냈다. 했으나 이 몇해사이 수석인들이 수차 거쳐간 구간이라 수석다운 수석이 쉽게 나질리가 만무했다. 스산한 것은 강역 6대 마을이다. 한 20세대의 조선족들이 오붓하게 모여살았다는 마을이 달랑 3세대 밖에 남지 않았고 많은 밭들에는 새로 심은 애어린 백양나무들 뿐이였다. 변강은 텅텅 비여가고있었다. 강역 6대부터 대산 4대 구간 20여리 구간은 마을이 없는 무인지경이다. 강역 6대를 벗어난 택시는 다시 한 구간을 달려 두만강가 하나의 탐석지를 찾았으나 새로운 돌밭을 이루지 못한 탐석지는 변화가 보여지지 않았다. 김봉세씨가 산수형 소품하나를 주었을 뿐이였다. 이곳 탐석지 아래 굽이돌이를 이룬 구간에는 두만강 강심에 길다란 섬 하나가 있다. 중국측 섬이고 희망을 둔 수석산지여서 김봉세씨와 필자는 목이 긴 장화까지 준비했으나 허사였다. 4월 19일~20일의 폭설이 녹아내리면서 두만강 물은 엄청 불어있어 건널 엄두를 내지 말아야 헀다. 섬가의 희망의 돌밭은 사품치는 두만강물에 잠기여 버리였다. 이제 바라볼 구간은 개산툰진 대산 4대 서남쪽 몇리밖 돌밭이다. 이 구간 돌밭은 폭은 좁아도 꽤나 길어 리상적인 탐석지로 알려진다. 이 구간서 수석한점 줏지 못하면 오늘 탐석은 빵점일수밖에 없는데 돌밭을 누비다시피해도 헛탕이기만 하다. 넷이 돌밭을 한바탕 훑어도 그 상이 장상이다. 어쩌다가 모양새와 석질이 좋은 구멍난 투석 한점을 주었는데 구멍이 왼쪽 변두리여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라던 탐석지에서 그대로 물러설수는 없었다. 돌밭을 따라 동으로 누비다가 돌따서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돌밭이 시작되는 서쪽가에서 어른 주먹보다 조금 커보이는 검스레한 돌 하나가 눈에 띄였다. 시선에 잡히는 것은 둥그런 돌 웃가락에 박힌 두개의 새끼 손가락만한 돌이다. 이는 홈이 졌다는것을 알리는 표징이기도 한데 뒤를 보니 앞면과 이어진 뒤에도 콩알보다 큰 알갱이돌 하나가 박혀있었다. 탐석경험으로 보아 십상팔구는 구멍난 돌이였다. 정신이 부쩍 들었다. 강가에 가서 씻으며 박힌 모래돌을 가시여내니 새끼손가락만큼의 돌 두개가 들리여났다. 홈은 아래로 깊이 패여져 있어 벌써부터 흥분이 감돈다. 뒤의 콩알모양의 알갱이돌도 빼여던지니 뛸데없는 구멍돌이다. 구멍은 또 아래로도 통해 있었다. 아래우로 구멍난 소품이였다.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하고 아래쪽에서 김대현선생이 점심시간이라고 식사하잔다. 탐석하다말고 모임장소로 향하는데 구멍난 자지색모양의 소품하나가 눈에 띄운다. 모래와 돌이 박히지 않은 구멍돌이다. 뜻하지 않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잠감새에 구멍소품 두개를 주어들었다. 일행은 구멍소품으로서는 제격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속에서 김봉세씨가 지닌 약주 두어모금이 절로 넘어간다. 김대현선생이 아침 시장에서 샀다는 곰취 또한 일품이다. 밥맛이 새롭기만 하다. 수석인들의 점심참은 들놀이의 밥참과 진배없다. 점심식사후 한동안의 탐석이 이어졌다. 신철호씨와 서쪽가로 걷다가 구멍소품 또 하나를 주어들었다. 신철호씨의 몫이였다. 소품이나마 제각기 하나씩 주어들었으니 5.1절 황금주의 탐석행은 신나기만 하다. 두만강가에 피여난 진달래꽃과 살구꽃도 우릴 축하하는듯 싶다. 음달이 진 길가마다 진달래꽃은 두만강을 물들이기라도 하듯 떨기떨기 피여났고 양지쪽 살구꽃은 선구자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금시 터지려는듯 망울이 진 상태다. 산굽이를 돌아 대산 4대 구간을 지나니 대산 2대 구간이다. 이 구간과 대산 1대 서북쪽 큰 돌밭에서 다시 수석을 주어들진 못했으나 2대의 한 남성분한테서 감감 잃어버린 대산 1대~4대 구역을 다시 알고 2대 서남쪽의 소소리 높은 산이 대맥산(大脉山)이란걸 안것은 성과라 하겠다. 산행인이기도 한 신철호씨와 둘은 대맥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겨서야 직성이 풀리였다. 택시는 다시 대산 1대 구간을 에돌아 개산툰행 산중턱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두만강가 강역에서 대산까지 이어진 탐석의 하루다. 룡정서 삼합으로, 삼합에서 개산툰으로, 개산툰에서 또 룡정으로 달려야 하는 5월의 황금주 탐석행은 즐겁기만 하다.
42    【탐석기】홀로 탐석도 즐거워 댓글:  조회:4051  추천:77  2006-05-03
【탐석기】 홀로 탐석도 즐거워 (2006년 4월 29일) 김 봉 세 4월 29일 아침 5시경 나는 예나 다름없이 연집하강뚝 아침시장을 거닐었다. 아침 날씨는 유난히 따스하였다. (허참 이런 날씨에 탐석하지 않고 언제 하겠나) 나는 아침시장을 거닐다말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배낭에 무릅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넣고 수상시장 정류소에서 6선뻐스를 잡아타고 연길역으로 갔다. 《도문으로 가는 표를 주십시요》 《몇시 차 말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매표구에서 매표원이 준 표를 상세히 보니 발차시간은 6시 48분 이였다. 플래트홈을 바라보니 기차는 이미 역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급기야 대합실승강기를 타고 검표구를 지나 공중다리를 날래게 달아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뿡ㅡ》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연길역을 떠났다. 기차는 약 50분만에 도문역에 이르렀다. 나는 도문역 광장 동쪽부근에서 3륜차를 타고 도문해관다리로 향하였다. 넓다란 아스팔트 길 량옆에 가즈런히 줄지어선 살구나무에는 흰꽃, 분홍꽃송이가 울긋불긋 피여 꽃향기가 그윽하였다. 과일나무는 왜 먼저 꽃이피고 후에 잎파리가 자라는지? 화초는 왜 잎파리가 먼저 자라고 후에 꽃이 피는지 도무지 알리가 없었다. 그래 녀성은 꽃이라면 남성은 잎파리란 말인가. 그렇다, 꽃은 영원히 아름답다. 먼저 핀꽃도 아름답고 후에 핀 꽃도 아름다울뿐만아니라 잎파리가 안받침한 꽃은 더욱 아름답다. 실로 지난 4월 19일, 20일 력사상 보기드문 폭설의 흔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정녕 이 대지에 봄이 찾아왔다. 봄, 봄마다 애석인들이 발목을 잡게하는 두만강 강변에도 따스한 봄, 백화가 만발하는 봄이 찾아왔다. 《오늘은 어느 돌밭으로 갑니까?》 해관다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택시운전사의 물음이였다. 그자리의 택시운전사들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마패 돌밭!》 《자 오르시요. 인차 떠나겠습니다.》 택시는 어느사이에 일광산기슭 언덕마루로 달리고있었다. 필자가 굽이쳐 흐르는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반달형 돌밭을 바라보는 순간 6년전 문자석, 별나라석에 남다른 정을 두고있는 석우 리함씨와 두만강수석산지를 개척하느라고 도보로 이 언덕을 넘나들던 그 옛일들, 리함씨가 이 반달돌밭에서 수자석 《三》자를 탐석했다고 흥이겨워 이야기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택시는 간평촌, 하평촌을 지나 마패에 대이였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하천뚝에 올라 두만강 쪽으로 발길을 재우쳤다. 두만강 제방뚝에 이른 나는 그만 아연실색하고말았다. 작년 가을만 해도 목짜른 장화를 신고서도 섬의 돌밭으로 들어 갈수 있었는데 제방을 하느라고 물골이 바뀌여서인지 도무지 건널수가 없었다. 두만강 제방뚝을 따라 한참 걷고나니 제방뚝우에 난데없는 오토바이가 세워져있었다. 사방을 일별하니 강기슭에서 고기를 낚고있는 낚시군의 오토바이였다. 아, 그렇다. 봄마다 서로 만나는 낚시군이로구나. 나는 낚시군 뒤를 가로찔러 두만강기슭에 이르렀다. 두만강기슭의 실버들에도 버들개지가 소담하게 피였고 나무가지 우에는 까치가 《까ㅡ까ㅡ》노래 부르고있었다. 백양나무 밑에 있던 한쌍이 들꿩이 인기척에 놀랐는지 《프드덕ㅡ프드덕ㅡ》 두만강을 자유로이 날아 조선측 산기슭에 자리잡았다. 실로 조류들은 국경선이 넘나보다. 돌밭에 이른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작년만 해도 이 돌밭에 검실검실하고 굵직굵직한 돌들이 많았는데 어디에다 《호구》를 올렸는지 돌구멍만 남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뿐이다. 아마도 별장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것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가시고 탐석에 몰두하였다. 그러는데 강건너 조선쪽에서 《이겨라! 이겨라! 우리 편이 이겨라!》라고 웨치는 응원소리, 호각소리, 확성기에서 울러오는 노래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아마도 봄철교내운동대회를 하는것만 같았다. 이쪽 돌밭머리에는 손잡이뜨락또르가 《우르릉ㅡ우르릉》 모래를 운반하느라고 분주히 오가고 저쪽 조선 연강철도에는 기차가 《뿡ㅡ》하고 기적을 울리며, 흰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고있다. 대자연의 바람소리, 산새소리, 동음소리, 기적소리, 어린이들 웨침소리, 노래소리ㅡ실로 이 모든것이 합류되여 나만의 이 애석인을 환영하며 좋은 돌을 탐석하라고 응원하는것만 같았다. 그래. 오늘 이 대자연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우리 애석인에 속한다. 필자는 오후에 주은 돌 몇점을 모래우에 놓고 연출하고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온 아까 낚시군이 벙긋이 웃으며 다가왔다. 《좋은 돌을 주었습니까》 나는 주먹만큼한 소품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것은 주봉이요, 이것은 부봉이요, 이것은 산기슭의 옹달샘이요, 밑자리가 반듯하고 뒤통수가 잘생겼다고 일일이 그에게 설명하여주었다. 《야, 그 쌍봉이 정말 멋이 있으꾸마》 낚시군은 모래우에 텁석 앉으며 나에게 담배한대 권한다. 나도 배낭을 헤쳐 작은 보온병에서 더운 물을 따라 그에게 주며 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서야 생각밖으로 운이 좋아 탐석된 립석 바위경(높이 36센치메터, 너비 12센치메터, 두께 9센치메터 좌우) 한점, 소품 쌍봉 한점, 《0》으로 된 문자석 한점, 문양석 한점을 배낭에 넣고 흐뭇한 마음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기차에 몸을 실은 나는 호주머니에서 문양석을 꺼내보았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필경 여우놈을 닮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는 뽀쪽하고 두앞발을 들어 싹싹비비며 애걸하는 형상이 검은 색바탕에 노란 석영으로 그려져 있었다. 실로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는 형상이다. 다만 꼬랑이가 범에게 물리웠는지 아니면 가두었는지 짤룩한것이 흠이라 할가. 이 세상엔 완전완미한것이 없다고 아마도 수석이 아름답고 슬픈것은 완성된 수석이 없기 때문인가 본다. 나는 완성보다 아름다운 미완성을 사랑한다.
41    카나다 운석 75만딸라에 팔려 댓글:  조회:3743  추천:79  2006-05-01
카나다 운석 75만딸라에 팔려 카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 거주하는 남자가 2000년에 주운 운석을 드디여 75만딸라로 현금화했다. 이 운석은 과학자들에게 생명의 기원에 대한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줄것으로 평가되고있다. 그러나 6년전 버터 두조각 크기의 조그만 돌덩어리를 발견해 랭동보관해온 짐브룩에게는 75만딸라를 가져다준 행운의 돌이기도 했다. 당시 200톤량의 바위덩어리는 지상 25~30킬로메터 지점에소 폭발하며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와 유콘 준주 접경에 불꽃처럼 흩어져 떨어졌다. 브룩이 발견한 운석은 얼어붙은 타기쉬호수우에 떨어진 수백개의 조각가운데 하나다. 850그람 크기의 이 운석은 폭발로 인한 화염에 휩싸여 지구로 떨어졌지만 얼음우에 떨어진탓인지 기적적으로 아주 원 상태로 남아있었다. 브룩은 폭발돼서 몇주후 얼어붙은 호수를 가로질러 차를 몰고 가다가 검은 돌덩이를 발견했다. 그는 맨손으로 운석을 만지면 오염된다는 과학지식을 갖고있었던 덕분에 돌덩이를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와 랭동보관했다. 연구자들은 이 운석이 화성과 목성사이에 소행성들로 구성된 두터운 띠로부터 유래한것이라고 판정했다. 미국 NASA 과학자들은 탄소를 함유한 이 구립운석(球粒陨石)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기물질이 포함돼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물방울모양의 탄화수소를 찾아냈는데 이는 태양계가 형성되기 훨씬전에 형성된것이며 완벽한 유기체의 초기형태라는것이다. 아리랑저널에서
40    【탐석기】오늘은 너와의 만남이로구나 댓글:  조회:3808  추천:93  2006-04-30
【탐 석 기】 오늘은 너와의 만남이로구나 김 봉 세 지난해 11월 11일 탐석을 마감으로 장장 5개월이나 탐석행에 나서지 못해 온몸이 쑤셔났다. 마음이 항상 돌밭으로 달리는 기다림과 설레임은 산모가 산아의 출생일을 기다리는 심정이라 할가, 드디여 청명직후인 4월 10일 석우 왕영창씨와 두만강 밀강 첫 탐석행에 나서보기로 약속을 가지였다. 약속한 날자의 전날 밤이다. 배낭과 모자, 면장갑, 비닐장갑, 쇠갈구리 등 모두를 준비하고 자명종시계를 아침 5시에 울리게 맞추어 놓고 잠을 청했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수석장식장 앞을 거닐면서 개개의 수석을 어루쓸며 분무기로 물을 뿌려 보아서야 직성이 조금 풀리였다. 다시 잠을 청해보았다. (더 좋은 수석을 탐석해야지, 더 좋은 수석을 탐석해야지.) 머리는 온통 기대가 가는 래일의 탐석이다. 어느결에 꿈나라에 빠져 들었는지 자명종 소리에 놀라 깨여나니 아침 5시였다. 창문을 열어보니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이고 가슴을 포근히 껴안아준다. 아침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안해가 정성스레 갖추어준 도시락을 배낭에 지니고 총총걸음으로 로잔(老站)에 이르니 정각 7시, 뒤미처 왕영창씨도 이르고 훈춘행 뻐스에 오르니 오전 7시반이다. 훈춘행 뻐스는 연길시가지를 벗어나 연길~도문 고속도로에서 달린다. 덜먹 총각이 숫처녀를 만나러가는 심정이라 할까,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이기만 한다. 석우 영창씨는 대자연이 인류에게 하사한 문양석의 기묘한 자태를 흥이 나 이야기하기도 하고 탐석은 끈질긴 의력과 심미안이 있어야 한다고 곱씹기도 한다. 필자도 지난 북경행에서 중국관상석협회의 도움으로 북경 제2차 기석전시회에 참가했던 경과와 감수를 터놓았다. 재미나는 석담속에서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어느덧 탐석지 밀강이라, 뻐스에서 내려 10분쯤 걸으니 밀강구간 두만강탐석지가 눈앞이다. 둘다 《야!》소리가 절로났다. 간밤에 내린 비로하여 돌밭은 금방 미역감은 처녀처럼 말쑥하고 깨끗한데 가마반지르르하고 굴곡진 문양석은 보다 선명해 보였다. 돌밭에서 탐석장비를 챙기고 습관적으로 심호흡 20차 좌우하니 《봄이 왔다고 제비들도…》노래가 저절로 튕겨나온다. 돌밭 저쪽에서는 흥얼흥얼 부르는 영창씨의 노래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필자가 청석, 오석의 산수경석, 물형석에 신경을 쏟을 때 영창씨는 문양석, 문자석에 골몰한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벌써 12시반, 한자리에 앉아 약주를 조금 마이기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서로 주운 돌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영창씨가 주은 인물형 문양석은 검은 색바탕에 하얀 문양이라 한 아이가 땅에 허리를 굽히고 다른 아이가 허리우로 뛰는 모습이라 어린시절 말타기유희를 련상시킨다. 또, 오후 탐석이 열을 올리였다. 한시간 가량 지나 먹장구름이 밀려오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바람마저 불어쳐 말이 아니다. 춥기도 하여 담배 한대 피우려는데 두어발짝 앞에 변화가 잘된 청석 한점이 댕그라니 누워 있질 않겠는가, 필자는 두손을 모아 코등에 가져가고 《하느님》께 기도한 후 조심스레 연출해보니 무게가 있는 립석 단바위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오묘한 동색 청석이다. 뽐으로 재이니 높이는 약 23센치, 너비 18센치, 두께가 약 17센치메터—상하비례, 좌우비례가 어울리는 수석임에랴. 필자는 속으로 (오늘은 너와의 만남이로구나!)하고 쾌재를 불렀다. 영창씨도 삐여난 문양점 몇점을 주어들고 다가왔다. 이때의 기쁨을 어찌 왕자와 공주의 태여남에 비길수 있을가! 다음의 탐석지를 두만강 수석의 주요산지인 도문아래 신기동으로 잡았다. 귀로에 오르면서도 머리는 온통 다음 탐석에서 어떠한 수석을 쥐게될가 하는 생각뿐이였다.
39    【스케치】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댓글:  조회:3971  추천:73  2006-04-29
【스케치】 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리 함 4월 28일은 셋째형 셍일이라 안해와 아들놈과 더불어 동북아뻐스부로 향하는데 연길 공신쪽으로 뻗은 길가 거리미화용 복숭아꽃이 피여나기 시작했다. 지구의 날 4월 22일엔 4월 20일의 폭설을 이겨낸 두세그루 복숭아나무잎이 파릇파릇 움트기 시작하더니만 4월 27일 뒤늦게 찾아든 따스한 봄볕에 힘입어 일제히 꽃으로 소담히 피여오르는 모양이다. 연변부유보건원 정원의 복숭아꽃도, 살구꽃도, 동북아뻐스부가 자리잡은 동서 거리량켠의 복숭아꽃도 일제히 다투어 피여난다. 오, 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이 계절을 가리켜 만물이 소생하는 봄, 종다리 우짖는 봄,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봄, 온 누리에 가득차 흐르는 봄, 나무잎이 푸르므레 움트는 봄이라 하거늘 드디여 연변대지에 봄이 찾아왔다. 4월 27일, 4월 28일에 이어 4월 29일 오늘도 꽃샘추위 이겨낸 화사한 봄날이니 대자연의 모든 것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때아닌 봄추위에, 폭설에, 진눈까비에 발뼘발뼘 다가서던 봄아씨가 오스스 움추러들더니 절기 한철은 늦어진것같다. 4월 중순과 하순사이면 연변 산야에 진달래꽃 만발하고 겨우내 억눌렸던 만물이 한껏 기지개를 켜며 소생하련만 어디라없이 살풍경이 밉살스러웠다. 그래도 오는 봄은 막을수가 없어서 흙냄새풍기는 훈훈한 봄바람에 소심스럽기만 하던 봄아씨가 언제 그랬느냐듯이 아장아장 걸어온다. 봄은 모아산 남쪽너머 세전이벌에도 찾아들었다. 2~3일전까지만도 한적하던 전야에 사람들 밭갈이와 씨붙임에 한창이다. 봄은 60리라 일컿는 평강벌에도 찾아들었다. 논갈이에 나선 농민들 이랴낄낄 소를 다독여가는 소리 정다웁고 갈아번진 검스런 흙냄새 풍년소식 예고한다. 봄은 평강벌 중부에 자리잡은 셋째형네 집에도 찾아들었다. 남향집 벽가 세멘트바닥 틈서리에 자라난 민들레 두떨기가 활짝 핀 노오란 꽃 한마당을 일제히 토해냈다. 전야에서는 아직 볼수없는 떨기떨기 민들레꽃이다. 봄은 겨우내 시가지 세멘트바닥에 찌든 수석인들 속에도 찾아들었다. 봄바람에 두만강수석회 수석인들 너나없이 배낭메고 쇠고랑이 들고 강따라 돌밭찾아 탐석행에 오른다. 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연길거리거리의 복숭아꽃, 살구꽃은 보다 탐스럽게 어여쁨을 자랑한다. 연변의 산과 들에 진달래도 다투어 피여난다. 그래, 봄이다. 온 누리에 완연한 봄이 가득차 흐른다. (2006년 4월 29일)
38    김철학님이 주은 고대벽화 댓글:  조회:3703  추천:100  2006-04-29
김철학님이 주은 고대벽화 석문주 (흐흐! 운수대통이야!) 수석 경력 2년째, 늘 부진을 면치 못하고 내놓을만한 돌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김철학님이 요즘 좋은 명석 한점을 줍고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린다. 구겨진 체면도 살리고 금년 6월달에 펼쳐질 수석전시회에 내놓을만한 좋은 작품을 구했으니 까만밤 하얗게 지새우며 내처 흥분했다는 말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암, 가구 말구요. (나 이 돌 10만원 아래엔 절대 안 팔아!)라고 하는 고집스런 말씀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암, 이게 고대벽화가 아닌가? 옳구 말구! 분명히 돈황석굴의 그 벽화를 닮았다. 오묘하기 짝이 없다. 대바람에 통운이 트고 석복이 터진 김철학회원님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리구 요즘 실없이 웃음이 많아진다는 그의 묘한 행복감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암, 가구 말구요. 그의 석복이 부럽기만 하다.
37    【수필】봄볕속 두만강행 마냥 좋아 댓글:  조회:3761  추천:73  2006-04-28
【수 필】 봄볕속 두만강행 마냥 좋아 리 함 1 4월의 폭설이후 처음으로 맞는 완연한 봄이다. 룡정서 출발한 삼합행택시는 씻은듯 구름한점 없는 4월의 푸르른 하늘아래로 달리는데 신화구간 부처골어구를 지나고 재박골에 접어드니 평소 얌전한 색시같이 조용히 흐르던 륙도하가 누런 감탕물이 되여 물사품을 이루며 세차게 흘러내린다. 《때아닌 봄날에 무슨 물이 이리도 많을가?》 《말도 마시오. 벌써 사흘째입니다. 눈석이물이지요.》 《눈석이물이 이다지도 붓는단 말입니까?》 《눈이 강산같이 내렸으니 그럴수밖에요. 첫 2일간은 물이 더 불었답니다.》 한족운전사와 필자사이 대화, 두만강탐석행에서 느낀 첫 놀라움이다. 택시는 벌써 륙도하를 거스르며 선바위를 지나고 명동을 지났다. 룡정과 두만강사이를 가로지른 소소리높은 오봉산—오랑캐령이 눈앞에 펼쳐진다. 필자는 또 한번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며칠전 폭설이 산발따라 대지를 덮고있었는데 주봉을 이룬 오봉산이 온통 희디흰 눈세계이니 말이다. 《연길쪽은 눈이 전부 녹아버렸는데 이 지대는 아직도 눈사태군요!》 《그렇지요. 오랑캐령은 눈만도 한메터 두께로 내렸답니다.》 《그랬어요?》 필자는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일전에 연변텔레비뉴스에서 룡정시 폭설이 40여센치메터를 이른다더니 오랑캐령은 한메터를 웃돌았단다. 그러니 산마다 눈세계일수밖에 없고 눈석이물이 물사태를 이룰수 밖에 없었다. 2 오늘 두만강 탐석행 동반자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귀재 김봉세씨. 둘은 대자연이 빚은 눈사태 걸작을 두고 운전사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지신구간을 지나고 지신록장쪽에 접어드니 길가 량켠은 밀어낸 눈무지들이 얼기설기 쌓여 있다. 폭설이 내려 사흘째 오후 3시에야 길이 통했다니 한메터나 되는 눈이 일조일석에 녹아버릴수가 없었다. 오랑캐령을 넘으니 또 세번째 놀라움에 빠져들어야 했다. 오랑캐령 북쪽지대가 아직도 두터운 눈의 세계일 때 오랑캐령 남쪽지대는 눈이란 볼래야 볼수조차 없었다. 10센치쯤 내렸다는 양지쪽 눈이 봄볕에 가신듯 사라지고 대신 폭설이 지나간 산천은 한껏 기지개를 켜며 구수한 흙냄새를 풍겨주었다. 산하나를 사이두고 남북지대는 이렇듯 판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산굽이, 산허리, 산코숭이마다에, 산벼랑마다에 소나무숲 우거진 오랑캐령 남쪽지대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산지대를 이루었다. 그런 속에서 치마주름처럼 잡힌 골짜기산발들이 하늘끝에 닿기라도 하듯 련련히 두만강가로 쭈욱 뻗어내려갔다. 높고높은 삼천리강산의 문경고개가 오르면서 70리, 내리면서 70리라더니 오랑캐령에서 두만강가로 이어진 굽이굽이 골짜기는 저그만치 25리를 이루고있었다. 택시는 반시간만에 우릴 두만강가에 내려놓았다. 드디여 따사로운 봄볕속의 둘만의 두만강탐석이 시작되였다. 탐석지는 삼합 동쪽구간 두만강가 휘트인 조개턱이다. 부근 룡정시 삼합진 승적촌의 사람들이 이같이 부르는데 벌써 수차나 다녀간 조개턱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상 싶다. 아스팔트길을 내리니 버드나무, 백양나무 우거진 고느적한 숲속인데 버들개지가 통통 살이 쪄 오르고 버들숲이 푸르무레 물이 올라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두만강이 크게 굽이를 도는 조개턱 구간은 아지랑이 아물거리며 쌍쌍이 물새들이 우짖는데 두만강강심속에 좁게 쭉 뻗은 모래부리엔 수십마리의 물오리떼가 여유작작 노닐고, 두만강 물우에도 한무리 물오리떼가 동동 떠있다. 3 말그대로 온 누리에 가득차 흐르는 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쏟아져내리는 봄볕이 좋아 두만강 탐석행은 첫걸음부터 신나기만 하다. 《바깥세상이 좋구나!》 《두만강가 만세!》 오랜만에 따스한 봄볕안은 김봉세씨와 둘은 아이들처럼 좋아 야단을 부려 보았다. 그속에서도 두만강 모래부리의 물오리떼는 인기척을 모르는지 해바라기에 빠져있다. 그런 물오리를 놀래우고싶지 않아 우린 제각기 강가 멀리를 에돌아 돌밭을 주름잡아 나아갔다. 3월 24일 올들어 첫 홀로의 가야하 석현아래 탐석행에서도 그러했다. 봄이 발뼘발뼘 다가서는 그날도 날씨는 따스하기만 했는데 잔잔한 가야하 물우에 30~40마리의 물오리떼가 자유로이 자맥질하고있었다. 그런 물오리떼를 놀래울라 탐석하다말고 강가를 멀리 에돌아 그 구간을 피해 주었었다. 그때를 생각하노라니 웃음이 피씩 터져 오른다. 그럴 때 갑자기 《왝-왝》하는 물오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결에 머리를 들고보니 수십마리 물오리떼가 약속이라도 하듯 자지러지게 울어대며 하늘하늘 날아오르고 있었다. 우리 측 소몰이군 몇이 강변에 나타났던것이다. 아쉽기만 했으나 물오리들은 소몰이군들을 원망하기라도 하듯 혹은 조선측으로, 혹은 우리 측으로 날아나 버리였다. 《미물인 물오리들은 국경도 없구만.》 가까이 다가온 김봉세씨가 유머를 터뜨린다. 그러는 유머가 별스레 가슴을 친다. 사람들도 날개가 있어 국경을 모르고 저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예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이런 마음을 알아맞추기라도 하듯 물이 고인 버들숲가에서 기름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봄을 맞아 처음 들어보는 기름개구리 울음소리다. 그에 걸맞게 물오리떼들은 다시 강심의 모래부리에 날아들어 봄날을 즐긴다. 4 점심참을 앞두고 목화송이같은 소담한 흰 구름이 서북쪽하늘에 떨기떨기 떠오른다. 그 시각 둘은 조개턱 돌밭속의 아늑한 백양나무아래서 점심참을 풀었다. 산놀이, 들놀이면 이보다 더 좋을가, 김봉세씨가 손수 마련한 약주를 두어잔 마이니 대자연속 봄놀이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이였다. 또 오후 한때의 탐석이 이어졌다. 행운스럽게도 김봉세씨는 천막모양의 수석한점 줏고 필자는 구멍이 숭숭한 자지색 수석 한점 주어들었다. 복판에 끼인 까아만 돌쪼각을 꺼내니 동그랗게 패인 구멍은 뒤벽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수석인들마다 즐기는 구멍난 투석 한점이였다. 수석다운 수석 한점을 얻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인양 쉬운 일이 아니지만 뭇생명을 소생시키는 대자연속 봄볕은 우리 수석인을 무시하지 않았다. 어느덧 4월의 따사로운 태양은 남쪽하늘을 지나 하루길로 통한 서산쪽을 뉘엿뉘엿 넘보기 시작하였다. 봄날의 하늘아래 해동갑하여 온 우린 아쉬운대로 후일을 기약하며 두만강가 조개턱을 떠나야 헀다. 룡정행 택시에 올라서도 마음은 두만강 돌밭에가 있는다. 그래서 봄볕속 두만강 탐석행 마냥 좋기만 하지. (2006년 4월 27일)
36    김봉세씨의 두차례 탐석 댓글:  조회:4152  추천:118  2006-04-24
김봉세씨의 두차례 탐석 두만강 김봉세씨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귀재로서 수석에 조예가 자못 깊다. 올들어 4월에만도 두차례 탐석행을 가지여 좋은 결과를 보았다. 첫 탐석행은 4월 11일이다. 이날 김봉세씨는 석우인 원 연변군분구 왕영창 부정위와 함께 두만강가 훈춘 밀강행 탐석에 나섰다. 리직한 왕영창부정위를 습관상 왕정위라고 부르는데 연변의 한족들중 왕정위처럼 수석에 빠진이는 보기 드물것이다. 그만큼 집안은 온통 수백점의 수석으로 꽉 차 희한의 절경을 이루고있다. 이런분과 동행하니 잔잔한 비바람속의 점심식사도 재미로 넘어간다. 두번째 탐석행은 4월 14일, 도문아래 신기동 북쪽구간이다. 바람이 으스스 불어치는 반갑지 않은 날이지만 탐석의 하루는 빨리도 흘러갔다. 이날 동행자도 친구와 같이 후덥고 스스럼없는 석우—왕영창부정위였다. 이틀에 걸친 두만강행 탐석은 헛되지 않았다. 김봉세씨가 첫날 너비 18센치, 높이 23센치, 두께 약 18센치메터의 청오석 립석바위를 줏고 다음날 너비 7센치, 높이 19.5센치, 두께 약 3센치메터의 모자정(母子情)문양석을 주었다면 왕정위는 수두룩한 문양석을 줏고는 흐뭇해 한다.
35    [수필]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댓글:  조회:4034  추천:92  2006-04-22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김학송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웃기는 제목이다. 혹자는 (이 사람 좀 돈거 아니야?) 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돌은 웃고 있다.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며 아주 호쾌히 웃고 있다. 얼마 전 두만강에서 탐석된 돌인데, 되게 잘 생겼다. 미륵보살을 닮았다. 벙글사 웃는 모양이 가관이다. 나는 돌님에게 (귀빈)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다. 비눗물로 샤워시키고 최고급 좌대에 앉혀 안방에 모시니 집안이 온통 신령한 빛으로 차고 넘친다. 수수 억년 속절없이 뒹굴던 예사로운 자연석이 마침내 목숨을 가진 돌, 즉 수석으로 태어난 게다. 찾아온 손님마다 눈독을 들인다. 한국서 온 K씨는 달러는 섭섭지 않게 줄 테니 팔라고 애걸복걸이다. 내 대답은 (노우)였다. 나와는 억겁의 인연으로 만난 귀한 돌인데 아예 당치도 않는 말씀. 어떤 친구는 한 사흘쯤만 보고 냉큼 돌려 줄 테니 빌려달라고 한다. 그 간청에도 내 대답은 인색했다. (될 수 없는 일, 혹시 와이프를 빌려달라면 몰라도...)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이제 나는 돌을 보며 또 다른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래서 돌의 진면모를 뒤늦게야 눈뜬 일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어찌 보면 나와 돌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열일곱 나이에 (문화대혁명 시기) 귀향청년으로 농촌에 갔을 때는 겨울마다 돌을 쪼아 제방이며 대채전을 만들었다. 그때 으깨진 손가락의 상처는 추운 계절의 추억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소중한 내 젊음을 밭이랑에 묻은 대가로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공농병학원에 입학했다. 미리 정해진 운명인지는 몰라도 그 학교는 이상하게도 돌을 연구하는 학교였다. 지질학이 전공이었으니 시간마다 돌을 만지는 건 당연지사. 연구실에 가도 돌, 실습 나가도 돌... 싫도록 돌만 만지다가 마침내 졸업을 하고 배치 받아간 곳 역시 돌을 파내는 광산이었다. 짓궂게도 내 운명을 쫓아오며 내 청춘을 괴롭히던 돌이었다. 그때는 돌이 얼마나 밉고 지겨웠는지 모른다.... 돌과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90년대 초에 한국나들이를 갔다가 뜻하지 않게 또 돌과 만났으니 역시 운명은 피할 수가 없는 것. 어느 시인의 안방에는 돌들이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진열장 안에 소담히 앉아 있었다. 예전에 신물 나게 보던 그런 막돌이 아니었다. 기기묘묘한 돌들이었는데, 수석이라고 했다. 그때에야 나는 세상에 수석이라는 게 있다는 것, 수석은 취미생활의 으뜸이라는 것, 더 나아가 수석은 동양문화의 꽃이라는 것도 대충 알게 되었다. 첫 눈에 반해버렸다. 그 후 한국의 수석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조금씩 수석사랑을 다져나갔다. 광주에서 원로 수석인을 만났던 일은 지금도 그림 같은 추억으로 내 가슴을 숭고함에 젖게 한다. 여가선용으로 수석을 선택한 경지 높은 수석인이었다. 그분은 고차원의 수석 한 점을 소장하고 계시는데, 너무 아끼는 돌이어서 웬만해선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다행히도 그 원로분과 교분이 두터운 B씨의 안내로 그 집의 높은 문턱을 간신히 넘을 수가 있었다. 정작 만나고 보니 선풍도골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학발의 노인이었다. 수인사를 나누고 찾아온 연유를 두루 여쭈었더니 노인은 어디론가 표연히 사라졌다. 응접실 소파에 몸을 묻고 한 시간 남짓 기다려서야 노인이 나타났다. 목욕재계하고 한복까지 정히 챙겨 입으신 노학자, 그의 두 손엔 흰 비단을 씌운 어떤 물건이 들려져있었다. 노인은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그 물건을 탁상 위에 내려놓더니 천천히 비단 천을 벗기였다. 순간 우리는 아연해 지고 말았다. 자연미의 극치를 자랑하는 예사롭지 않은 수석 한 점! 전율에 가까운 감동이 온 몸을 강타한다. 금강산을 닮은 명석의 운치도 대단했지만 그 돌을 아끼고 경외시하는 노학자의 그 깊은 마음이 크게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얼마나 수석을 사랑하면 목욕재계에 새 옷까지 갈아입고 깨끗한 심신으로 저 수석 앞에 마주앉는 것이랴... 그때 일은 나에게 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 수석이 있는 안방은 성역이야!...) 라고 하시던 노학자의 말씀이 늘 귀전에 맴돈다. 그렇다.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숭배하고 아껴야 하는 자연의 한 부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의 모태인 것이다. 수석은 동양사상에서 생겨난 자연사랑의 표현일진대 그것은 동양적인 정서와 정감의 발로요, 풍류이며 멋이다. 중국에서 발원하여 한국, 일본을 누비며 천년 세월을 풍미하다가 근년엔 동남아, 구라파... 전 세계로 파도쳐가는 도도한 수석문화의 물결, 이 아닌 장관인가! 돌은 말이 없다. 억년 풍우를 인내로 버티며 무언의 진리를 안으로만 다져왔다. 자연의 섭리에 대한 순응으로 고요히 침묵하는 돌들, 강물의 흐름 따라 모든 거품들은 춤을 추고 모든 껍데기는 껑충거려도 오직 돌들만은 주어진 자리에 안주한다. 거짓 없고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늘 겸손하다. 또한 착하다. 언제 봐도 변함이 없다. 이런 돌들 앞에서 나는 부끄럽다. 물욕을 쫓아 한없이 나붓거리는 오늘의 인류는 부끄럽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면 흔들리는 목숨들이 너무도 많다. 쌩쌩 불어오는 요상한 바람에 몸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더니 마침내는 시대의 거품이 되어 유행의 강물 따라 타국으로 타향으로 정처 없이 떠나가는 허허로운 욕망들... 문명의 탈을 많이 쓸수록 감정은 황폐화 되어가고, 배가 부를수록 인간성은 사라져 가는 게 현실이고 보면 우리 어찌 한 점 수석 앞에 부끄럽지 아니하랴. 돌은 말이 없지만 분명히 나의 스승이다. 돌은 날마다 신의 예술로 나를 즐겁게 하고, 자연의 철학으로 나를 눈 뜨게 한다. 백 년도 못 사는 나는 실제상 허망의 덩어리일 뿐, 한 점 수석에 비하면 너무나도 빈약하고 가냘픈 존재일 뿐, 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우월감이란 한갓 유치한 착각일 뿐...... 나는 때늦게야 그 허무를 알아본다. 그래서 나는 돌을 사랑하며 돌에게 경도하며 탐석여행을 즐긴다. 돌밭에 가면 엔도르핀 생산이 잘 되는 것은 물론이고 바이오세라믹의 작용으로 심신이 쨍하니 맑아진다. 하므로 애석행위는 정신수련과 건강도모에 그만이다. 더없이 좋은 영약이 아닐 수 없다. 물질의 범람과 지배 속에서 인간적인 정서와 가치가 파괴를 면치 못하는 카오스의 시대, 오직 순수한 정신만이 종국적으로 인간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행복의 발견은 자연으로 회귀하는데 있다고 세계적인 석학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좀 느리게 유유자적하며 적은 변화로 조화롭게 사는 인생이야말로 위대한 생존이 아니겠는가! 가난해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정신을 수석이 내게 가르친다. 빠른 속도에 의해 죽어가고 있는 그 귀중한 것들을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을 수석이 내게 열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존재와 생명의 깊은 본연에서 수석이 주는 무궁한 정신을 감탄한다.
34    김대현씨 강따라 계곡따라 수석찾아 15년 댓글:  조회:4399  추천:106  2006-04-18
수석가 김대현씨 강따라 계곡따라 수석찾아 15년 《수석엔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지요!》 수석(寿石)에 정이 들어 애석(愛石)생활을 즐긴지도 어언 15년 세월, 지난 15년 동안 초라한 행각으로 강 따라 계곡 따라 다닌 길 얼마인지 모른다는 김대현씨(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고문)는 수석과 정을 나누면서 날이 갈수록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고 한다. 이제 강물이 풀렸으니 올해에도 부지런히 탐석해야겠다면서 며칠전 두만강탐석길에서 주었다는 돌 하나를 내보이였다. 보자마자 《이건 군요!》했더니《그렇지요!》하고 미소를 띠운다. 한손우에 얹을만큼의 맞춤한 오석인데 신통하게도 앞부분에 《눈자리》가 두개 패여있고 《코구멍》까지 있었다. 더욱 묘한건 다른 석질로 된 《입》이였다. 온 몸이 몽땅 까마반지르르한 오석인데 어떻게 되여 주둥이에만 골라넣은듯 누른색 돌이 박혔을가. 볼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지난 토요일(4월 1일), 두만강수석회 동료 6명은 올해의 첫 탐석에 나섰다. 도문에서 10리쯤 내려가면 신기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앞 두만강자갈밭이 탐석지였다. 쌀쌀한 날씨지만 첫 탐석에 나선 동료들은 금덩이 줏는 심정으로 자갈밭에 눈길을 박았다. 그러나 해종일 헤매도 별로 신통한것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까만 《눈동자》하나가 김대현씨를 쏘아보고있었다. 그건 틀림없는《눈동자》였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살살 모래흙을 파헤쳤다. 다른 한《눈동자》까지 드러났다. 가슴이 후둑후둑해났다. 긴장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쇠갈구리를 깊숙이 박은후 돌을 흙속에서 후딱 빼냈다. 강아지새끼처럼 귀여운 돌이였다. 재빨리 두만강물에 헹구었다. 깨끗이 씻긴 돌은 찬란한 오색인데 얼핏 보기에도 틀림없는《물개》였다. 《돌줏기가 그래서 재밌다는겁니다. 면바로 좋은 돌 하나 주으면 둥둥 뜨는 기분이죠. 보십시오. 이 , , 이 얼마나 묘합니까. 이 돌은 우리 집에서 두번째로 좋은 돌입니다.》 《그럼 첫번째 돌은요?》 시렁에 얹힌 까마반지르한 돌 하나를 가리킨다. 주은지 꽤 오래지만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고있다고 하는 그 돌 역시 오석이였다. 빈틈없이 잘 수마된 돌은 단순하게 보이는것 같지만 굴곡이 있고 평범한것 같지만 신비한 운치가 배여있었다. 《1989년, 한국나들이를 하고 돌아온후부터 탐석에 흥취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의 수석생활이 맘에 들어서였지요. 그러니 본격적으로 돌을 줏기 시작한것은 1990년도부터입니다. 마수걸이가 참 좋았던것 같아요. 이 돌은 시작해 얼마 안되여 주은 돌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군침을 흘립니다. 이만큼한 돌 아마 흔치 않을겁니다.》 김대현씨는 돌자랑을 자식자랑처럼 늘여놓았다. 그날은 김부식 등 한국 애석가들과 함께 탐석길에 올랐다고 한다. 가야하와 부르하통하 합수목이 탐석장이였다. 홍수뒤끝이라 강변은 스산하기 그지없었지만 탐석자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유별나게 눈길을 빼앗는 까만 점에 흡인되여 무릎을 꿇게 되었는데 살살 파헤치며 보니 오석이였다. 가쁜 들리는 까만 돌을 강물에 씻으며 보니 밑바닥이 칼로 벤듯 반듯했다.《명석을 주었다!》 산천이 떠라라 소리를 지르니 저쪽으로부터 두 친구가 천방지축 달려왔다. 《연변에 이런 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 욕심나 죽겠네요.》돌을 받아쥐고 이리 훑고 저리 훑던 한국 친구들도 감탄의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일생 일석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이 돌하나 있는걸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어디 내놓아도 나무랄데 없는 명석이지요.》 김대현씨의 돌줏기이야기는 몇날며칠을 들어도 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야하반의 만천성에서 50킬로그람되는 커다란 돌을 주은후 길까지 200여메터 나무숲을 헤치며 메여내온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금도 김대현씨 저택에 곰처럼 도사리고있었다. 다가가 들어보니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 무거운걸 어떻게 길까지 냈을가. 《수석에 미치면 그렇게 됩니다. 이건 , 이건 , 이건 , 이건 ...》 김대현씨는 수장하고있는 수석들을 하나하나 내보이면서 설명해주었다. 보니 과연 《원숭이》는 원숭이요, 《오리》는 오리였다.또 산 산세의 굴곡과 변화를 보여주는《산》들은 꿈틀대는 듯 생동하고 우뚝우뚝하여 기백이 넘치는 것이 한폭의 산수화같기도 했다. 산이나 계곡, 강가에 가면 흔한 것이 돌이다. 그러나 수석은 평범한 돌이 아니다. 김대현씨의 말을 빈다면 《돌은 돌이로되 수천수만개의 돌중에 하나가 있으나마나한 희귀하기 그지없는 돌이다.》 때문에 수석은 인공으로는 도저히 창조할수 없는 아름움을 지니고 있다. 《수석엔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수석을 감상하느라면 마음이 취한 듯 황홀해지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한껏 느끼며 상상과 사색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집안에 앉아서도 나는 항상 자연속에서 살고있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독서도 하고 글도 쓰고있습니다. 더 좋은건 자연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고향과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생긴다는것입니다.》 수석이 바로 이런것이기에 김대현씨는 15성상 휴식일이면 배낭을 등에 지고 탐석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을것이다. 저 멀리 두만강기슭과 가야하기슭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수석을 찾아다닌 길 얼마였고 해란강, 구수하, 봉밀하, 부르하통하, 륙도하 기슭을 누비면서 다닌 길은 또 얼마였으랴. 어떤 때는 석우(石友)들과 함께 흥흥 코노래를 부르며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록수청산에 한몸을 맡기고 탐석의 즐거움을 맛보느라면 과연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줄도 모른다고 한다. 공기좋고 경치좋은 대자연속에서 만사를 잊고 마음을 비운채 오로지 탐석에만 열중하는 그 즐거움이란 말로 이루다 표현할수 없노란다.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면 가지고 간 도시락을 펼쳐놓고 술 한잔 넘기며 층암절벽에 뿌리 박고 너우너울 설레이는 소나무숲을 쳐다보노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면서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일소되기도 한다는것이다. 그러다가 멋진 돌 하나를 줏기까지 하면 그날은 명절이나 다를바 없어지는 것이다. 《돌 하나에서 그 아름다움과 그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것이야말로 이 아닐수 없습니다. 탐석은 다름 아닌 자연미의 발견이고 천연예술품의 발견입니다. 수석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가장 가까이 할수 있게 하고 자연과 이간을 적절히 조화시켜주는 대자연의 걸작이자 연분은 맺어주는 이지요.》 그러나 연변에 수석을 사랑하고 탐석의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너무 적어 섭섭하다는 것이 김대현씨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제 돌아오는 6월 연변박물관에서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회원들의 작품을 위주로 한 수석전시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그때에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들어 안계를 넓힐것을 바라고있었다. 《이제 파묻혀있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찾는 대오가 형성되여 고향의 강과 계곡을 누빌것입니다. 저도 그속의 일원으로 죽을 때까지 아름다움을 찾아 헤메겠지요.》 2006년 4월 7일 (B2) “연변일보” 김철호기자
33    수석의 신비한 매력 2 댓글:  조회:3909  추천:109  2006-04-13
수석의 신비한 매력 2 김학송 수십만년 전의 원시인류에게 돌은 무기였다. 그 후의 기나긴 세월을 거치면서 돌은 때로는 생활도구로, 장신구로, 때로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물질문화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는 예술적 감상의 대상, 즉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대중적인 생활취미로, 인생의 반려가 되었다. 이것이 수석이다. 수석을 가까이 하다보면 점차 그 속에 빠져들어 넋을 놓고 돌과 대화도 나누게 되는데 이를 가르켜 산수풍물시세계에 노닌다고 한다. 심신이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찾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수석이기에 역사적으로 보아도 시인묵객들이 더욱 관심을 보이고 이에 심취했음은 이해하고도 남을만한 대목이다. 도연명, 두보, 백거이, 소동파 등은 모두 유명한 애석인이였다. 그들이 남긴 돌에 대한 일화는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수석은 축경예술이며 자연의 시다. 두 손으로 들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자연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그걸 즐기는 상상놀이이다. 시의 감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수석은 시를 닮았다. 시와 수석은 쌍둥이인도 모른다. 대자연의 산물인 수석을 가까이 하면 맑은 시심이 솟아나게 된다. 생활에 대한 시들지 않는 열정의 샘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우주만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아름다운 눈이 생기게 된다. 시인은 아니더라도 한번쯤 사귀어 볼만한 친구가 수석이다. 2006, 4, 11연길에서
32    연변대서 전례없는 수석특강이 댓글:  조회:4000  추천:102  2006-04-11
연변대서 전례없는 수석특강이 두만강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수업과목에 미학이란 전문과목이 있다. 미학을 두고 이 학원 우상렬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워낙 미학을 하는 교수다. 미학의 기본범주의 하나인 자연미하면 그속에는 뭐니뭐니해도 기암괴석이 으뜸, 사실 이 기암괴석속에 수석도 포함되리라, 그래서 나는 신교수를 미학수석특강으로 모셨다.》 수석에 입문하기 시작한 우상렬교수의 수석리해다. 그래서 연변대 조선한국학학원에서는 전례없는 수석특강이 막을 열었다. 지난 3월 29일 오후, 연변대 조선한국학학원 신문전공의 학생들이 신철호교수를 모시고 첫 수석강의를 들었다. 4월 3일 오전에는 또 학원의 교육전공학생들이 수석특강의 수업행운을 지니였다. 우상렬교수에 의하면 신철호선생은 수석한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교단에 나섰고 그리도 생동하게 특강을 끌고나갔다고 한다. 신철호교수는 연변대선생이면서 또 사회로는 연변민속학회 부회장,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멤버이기도 하다. 그만큼 수석에 입문했고 조예 또한 깊으니 그의 생동한 수석특강이 학생들의 열찬을 받을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수석특강이 연변대 조선한국학학원 공동과강의로 떠오를 전망이다. 또, 실제 우상렬교수는 《신교수를 보고 전학교 공동과로 수석특강을 신청할것을 건의》한 실정이다. 수석의 공동과의 현실화를 기대해본다.
31    点石成金-壽 石 댓글:  조회:3789  추천:94  2006-04-11
点石成金-壽 石 우상렬 나는 언젠가 우리 과의 신철호 선생을 참 우습게 보았었다. 사람이 참 별난 흥취도 다 있지, 하면서 말이다. 신선생은 워낙 돌덩어리를 좋아 했으니 말이다. 물론 내 눈에는 보잘 것 없는 돌덩어리겠지만 신선생의 눈에는 그것이 더 없이 귀중한 금덩어리였다. 같은 물건 하나 사이에 두고 나하고 신선생은 이렇게 천양지차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자기도 모르게 신선생의 그 별난 흥취에 빨려 들어갔다. 무엇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죽어라 거부하는 나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은 아마도 우연히 신선생 집에 놀러가서부터였을 것이다. 신선생 집에는 워낙 별라별 돌덩어리들이 많았다. 이런 것들을 美其名曰壽石이라 한단다. 창턱이고 어디고 놓을만한 곳에는 전부 이런 壽石들이 놓여 있었다. 사실 그가 일보는 사무실에도 이런 壽石들은 놓여 있다. 이런 壽石들만 보면 눈이 반짝이며 흥분하는 신선생. 그래서 순간적으로 壽石 교수로 둔갑하는 신선생. 자, 그래서 그의 강의는 시작되고, 나는 빨려 들어가고... 壽石은 뭐니 뭐니 해도 壽石이여야 한다. 오래 된 돌이여야 한다. 몇 억년의 풍상고초를 이기고 살아남은 돌. 그래서 장수할 壽의 壽石이란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 영원함의 상징-철학. 딱딱하고 차거운 돌이건만 자기도 모르게 우러러나는 숭배심. 백년도 못 사는 우리 인생, 정말 壽石이 되고 싶다. 壽石을 찾아 헤매고 줏는 순간 그것은 내 인생의 영원함을 끌어올리는 순간. 그래서 힘든 줄도 모르고 오늘도 이 산, 저 산, 이 강, 저 강을 探石으로 헤맨다는 신선생. 壽石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석 그대로여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가 빚은 人工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조물주의 선물. 그것은 鬼斧神工이 만든 자연의 신비. 그것은 풍상고초의 세례 속에 허구 많은 자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과 교감하는 壽石-원초자연의 생명의 신비를 말하는 듯한 남근석과 여근석, 그리고 새파란 처녀총각 모양에, 방금이라도 뛰어나올 듯한 아이들의 귀여운 모양에, 파파 늙은 호물딱 모양에, 그리고 날렵한 원숭이 모양에, 미련한 곰 모양에, 깜찍한 토끼 모양에, 그리고 삐죽삐죽 산 모양에, 굽이치는 강 모양에, 오곡백과 무르익는 들 모양에... 실로 一言難盡의 자연의 천태만상이 깃들어 있단다-예술. 그래서 빼어날 奇秀의 秀石으로만 이해한 나의 壽石觀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란다. 壽石은 빼어나도 뽐내지 않고 이 산 녘, 저 산 녘, 이 강 녘, 저 강 녘, 이 바다가, 저 바다가에 되어진 대로 조용히 누워있단다. 그는 知己를 기다린다. 일반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거저 돌일 뿐이다. 그런데 探石家들의 눈에 그것은 손으로 만지며 玩賞하기에 좋은 축소지향의 자연의 천태만상 그 자체. 묘한 느낌 그 자체. 그러나 壽石은 모든 探石家들을 자기의 知己로 하는 것은 아니란다. 자기만의 知己를 기다린다. 그래서 이 探石家에게는 시답지 않게 여겨지나 저 探石家에게는 如獲至寶로 여겨지는 괴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실 壽石은 말이 없으니 壽石의 知己경지는 智者見智, 仁者見仁. 여기에 재미나는 일화가 있단다. 시인 김학송은 워낙 시적 감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뛰어나 어지간한 돌은 모두 壽石으로 승화시킨단다. 다른 探石家들은 별론데 하다가도 김시인이 이것은 산이요, 이것은 강이요, 이것은 폭포요, 이것은 눈이요... 하며 한바탕 열변을 토하면 어지간한 探石家들은 그럴듯하다며 머리를 끄덕끄덕인단다. 그런데, 그래도 머리를 갸웃하는 探石家가 있으면 김시인은 그럼 좀 멀리서 봐봐- 아니, 그럼 몇 백배로 확대해서 봐봐- 눈을 지긋이 감고 아니, 눈을 반쯤 뜨고... 옳지, 옳지, 그렇지-하며 자기 나름의 壽石을 계속 밀어 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시인은 여하튼 가장 많은 壽石을 확보하고 있단다. 이렇게 놓고 볼 때 壽石과 그 探石家는 지극히 개성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壽石은 어디까지나 자연석 그 자체다. 그러나 자연만의 그것으로 둘 때 그것은 거칠다. 그래서 探石家들의 손이 가 닿아야 한다.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져야 한다. 죄진 사람들처럼 머리를 수걱하고 이 돌 저 돌 찾아 헤매다가 아, 하는 탄성과 더불어 壽石이 눈에 띄는 순간 探石家들은 산모가 갓난애기를 다루듯이 그 壽石을 다룬다. 털어내고 씻어내고 닦아낸다. 그리고 정중히 모신다. 무슨 座臺라는 것을 한다. 壽石을 돋보이게 하는 座臺. 이 座臺가 있고 없고가 천양지 차란다. 신교수가 지시해 보이는 개구리상壽石. 머리를 한껏 쳐들고 몸둥아리를 솟을가하는 개구리상, 정말 그럴듯하다. 발이 없는 것이 아쉽다면 좀 아쉬운 점.그런데 이 개구리상을 개구리 발모양을 한 座臺에 앉히니 당금 뛰어내릴 듯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가. 座臺의 중요성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壽石수집가들은 바로 이 座臺에 신경을 쓴다. 그렇다 해서 座臺를 요란하게 해서 壽石 본체인 자연석을 죽여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石爲本臺爲輔여야 한다는 것이다. 壽石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란다. 探石家들은 이렇게 느낀단다. 까만 오석은 만지면 만질 수록 반질반질 해지고 기름기 반지르르 흐른다. 생명의 교감이란다. 壽石을 보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 다 있게 되고 무릉도원과 같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단다. 壽石의 질, 모양, 선, 색... 점점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가는 신교수. 点石成金, 별 볼일 없는 돌을 척 짚어서 금덩이로 만드는 듯한 연금술사와 같은 신교수의 壽石특강, 내 혼자 듣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나는 워낙 미학을 하는 교수다. 미학의 기본 범주의 하나인 자연미하면 그 속에는 뭐니 뭐니 해도 기암괴석이 으뜸. 사실 이 기암괴석 속에 壽石도 포함되리라. 그래서 나는 신교수를 미학 壽石특강으로 모셨다. 무거운 壽石 한 짐을 지고 땀을 철철 흘리며 계단을 올라간 신교수의 헌신적인 모습은 학생들을 감동시키기에 족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돌덩어리의 신비한 내용과 신교수의 유모아가 넘치는 달변은 학생들을 감복시키기에 족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다. 우리 연변대학에서는 이런 강의를 좀 많이 했으면. 한 학기 내내 그 잘난 문학사의 누구누구는 몇 년도 태어나서 몇 년도 죽었소하는 것을 억지로 외우게 하는 것보다는 한 시간의 이런 壽石특강이 학생들의 감수성을 키우고 풍부한 상상력을 키우는데 효과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신교수를 보고 전 학교 공동과로 壽石특강을 신청할 것을 건의했다. 2006. 4. 5
30    [탐석만필] NO 장유유서 댓글:  조회:4090  추천:130  2006-04-10
[탐석만필] NO 장유유서 신철호 장유유서는 오륜의 하나로서 어른과 어린이사이에는 차례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에는 선배니 후배니 하면서 장유유서로 질서유지, 관계유지를 하고있다. 비록 합법적인 허가는 받지 않았지만 우리끼리 모여 멋스럽게 두만강수석회라고 이름을 단 수석동호인모임에는 김대현, 김학송, 리흥국, 김봉세, 리광인 등 수석수집의 력사가 10년쯤인 선배들이 있거니와 나나 한태익선생같이 석령(石齡), 즉 수석수립년한이 고작 3년뿐인 신참들도 있다. 선배님들의 집집을 줄줄이 돌면서 서재에 진렬한 수석들을 구경할 때의 그 황홀경이야말로 이루 형용할수 없어 나같은 신참은 두말할것도 없이 선배님, 스승님을 괴여올리면서 열심히 배우고 장유유서를 드팀없이 지키는것만이 유일한 출로일수밖에 없다. 그런데 딱 두분사이에만 이 장유유서가 탐석갈적마다 산산히 박살이 나서 우리에게 웃음보따리가 잘 차려진다. 《어이, 후배는 후배답게 선배님들의 돌배낭을 한 삼년 메여주면서 따라다녀야 하는데.》하고 롱을 거는 이는 김학송시인이요, 《옛, 알겠습니다. 젠장 쌍놈같으니라구.》하고 말대꾸를 잘하는 이는 김철학시인인데 김학송시인은 오십고개에 오른지 불과 몇년, 김철학시인은 김학송시인보다 십년넘어 년장이다. 김철학시인은 나와 같은 신참인데 우리와도 동이 뜨게 수석문외한이라 수석의 질, 색, 선, 자연미, 고태미 등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모르는 어른이지만도 열정만은 드높디드높아 큰일이 없으면 탐석에 어김없이 참가하고 참가해서는 또 김학송시인의《짓궂은》《괄시》를 감내하군 하였다. 두 시인은 실상 연변가무단 창작실에서 수십년을 코맞대고 일해온 줄기찬 경력이 있는지라 그 무람없는 관계가 자연스러울수밖에 없다. 똑마치《림꺽정》에서 스물을 갓 넘은 곽오주가 장가들고 상투얹었다고 감히 어른을 앞세우면서 자기보다 퍽 년상인 로총각 황천왕동이와 너나들이를 하는것처럼. 딱 탐석때만은 진짜 NO 장유유서이다. 지난해 8월 여름의 어느날 저녁에 김학송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별 할일이 없으면 탐석가지. 로투구우에 보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꽤 괜찮은 돌밭이 있어.》 《누구랑 같이 갑니까?》 《후배 김철학선생과 같이 가보지.》 내 머리속에서는 둘사이의 재미있는 대화가 아주 상상의 나래를 쫙 펴고 장밤 드라마를 엮어갔다. 보원에는 작은 수력발전소가 있는데 부르하통하를 한구간 빼돌려 세운것이라 그 물이 마른 구간에는 다른 구간에 있을수 없는 정원석위주의 돌밭이 쭉 뻗어있었다. 단 셋뿐의 탐석이고 구애받을 일도 없는터라 돌밭어구부터 김학송시인에게는 장유유서가 헌신짝이 돼버렸다. 《장난꾸러기》 김학송선배 벼슬이나 명예같은것이 김학송시인에게는 죄다 헌신짝, 아예 념두에 아니둔지가 까마아득할듯. 다만 시쓰기나 수석수집이 생명의 거의 전부가 되였다. 별명이《장난꾸러기》인 김학송시인은 등산할 때 보면 육담에는 언제나 장원이요 겨울에 눈덮힌 산에 오르면 아예 사지를 쫙 벌리고 반듯이 눈우에 누워 된불맞은 곰의 고함소리같은 소리를 오장이 싹 빠지게 웨치기도 하고 산비탈을 내려올 때면 아예 앉아서 엉덩이썰매를 타기도 하는데 메고다니는 배낭은 하냥 쪼르로기가 제대로 채워져있지 않아 입을 잔뜩 벌리고 허공을 쳐다보는 처지이다. 그러니 산기슭에 내려와 보면 그의 배낭속에는 눈덩이나 가랑잎같은 불청객들이 곧잘 모셔져있다. 시를 쓰는 분이라 우리의 눈에 그닥잖아보이는 돌도 일단 손에 쥐기만 하면《이봐, 골짜기 있지? 물이 흐르지? 진달래도 피여있지?》하고 잔뜩 상상해서 장황한 설명을 하는데 언제나 꿈보다 해몽이 좋아서 년상의 후배인 김철학시인은《좋다, 좋아! 나를 다구.》하며 욕심을 부리는데《개암을 쓴다》는 면이 오히려 더욱 절절한듯. 《날강도》 김철학시인 현재 연변시조시사 사장을 맡고있는 김철학시인에게 격에 맞지 않게 달린 별명은《날강도》이다. 덜렁 열정 하나에 든든한 신체를 믿고 두만강수석회에 참가한 김철학시인은 일단 수석밭에 이르면 갑마를 탄 신행태보 대종이 된다. 보원에서도 마찬가지. 《어이, 후배, 걷는것부터 배우시죠.》하고 김학송시인이《핀잔》을 주면, 《알겠습니다, 선배님》 대답은 잘하지만 그상이 장상이였다. 그러니 원체 수석에 관한 기초지식조차 제로인 이 어른이 온 하루 돌밭을 돌아보았댔자 얻어온 돌은 모두 몸돌이 아니면 막돌이였다. 《미친개 풋나물 캤구만.》하고 김학송시인이 또《핀잔》을 주면 결국 마지막 드잡이가 나온다. 그때면 선후배관게는 싹 달아나고《무서운》《날강도》 의《본색》이 나오는데, 《임마, 오늘 네것을 싹 빼앗아갈터이다.》하고 김철학시인의 입에서 고음나팔소리가 터져나온다. 그《빼앗기》가 또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여서 되다시 장유유서를 들고 나와야 했다. 탐석하러 갈 때에는 누구나의 배낭에 부인들이 열심히 장많준 점심밥이 들어있고 또 한두사람은 자청해서 집에 있는 괜찮은 술도 넣어가지고오는데 그 짓궂은 장난이 점심식사때에 새로운 고조를 일으킨다. 《후배, 선배들께 한잔씩 부어올리지.》 《그렇구말구, 한잔 받으시오.》 나도 그 덕에 두번째로 잔을 받아보는데 《젊은 놈이 먼저 받는 법이 어데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받으십시오.》하고 사양을 하면 김학송시인이 《먼저 받으라니깐, 선배노릇 잘 해야 후배가 똑똑해지오.》하고 나이가 아주 동이 뜨게 어린 나를 먼저 마시게 한다. 한순배 돈후에는 질서가 잡혀서 좌상인 김철학시인에게 그냥 잔이 올라가는데 그러다가도 《이보세요, 후배. 받아마시지만 말고 되권하시오. 맞갖잖으면 아니 데려온다니깐요.》하고 김학송시인이 가담가담《선배틀》을 내여 한근술이 즐거운 기운속에서 제꺽 굽이 나고 점심식사도 끝난다. 이러구나서 또 온 오후 탐석을 하고 귀로에 오르는데 떼놓은 당상으로 당연 김학송시인의 수확이 큰 반면에 김철학시인은 헛탕이였다. 기껏 땀을 흘리고 빈손에 돌아서야 하는 마음이 오죽하랴. 《선배님, 거 폭 패인 돌을 주시오.》 《안돼. 개념도 모르면서 좋은것은 그래도 아네. 이것은 호수석인데 래일까지 5천원만 갖고오면 손해본셈 치고 주리다.》 《후배를 어여삐 여거 선사하십시오.》 《배낭이나 좀 메여주었더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공찾이는 원칙상 불허!》 이런 롱지거리로 뻐스정류소까지 이르는데 발차시간이 거의 됨직하면 《하도 손에 발까지 싹싹 비니 불쌍해서 선사하는데 매일 목욕재계하고 성심껏 모셔야 합니다.》하고 김학송시인은 장원석인 호수석을 선뜻 건내여주는데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품을 내리는것 같이 말투가 심히 정중하였다. 《쌍놈새끼, 아무튼 내건데 일찍 줬더면 메고오는 고생은 줄이지. 둔한 곰같으니라구.》 김철학시인은 《은혜》를 싹 망각하고 《날강도》의 《본성》을 내세우면서 《욕질》로 《성공》의 《희열》을 만끽한다. 일년에도 수차례 조직되는 합동탐석에서 두 시인은 그상이 장상으로 그날 장유유서를 자주 헝클어놓는데 결과는 그냥 이렇게 김철학시인의《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김학송시인은 그《압박》과《착취》에 시달려 가끔은 도로무공으로 귀가한다. 수천만년의 무심한 세월속에서 기이한 변화를 거듭하면서 조화의 오묘함을 갖춘 수석을 찾아 연변의 강들을 주름잡는 두만강수석회의 맴버들. 자연과 한몸이 되여 생의 즐거움을 창조하고 만끽할줄 아는 사람들. 인정이 있고 유머가 있고 예술이 있는 사람들. 이런속에 끼여 함께 다니는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랴. 그래서 자나깨나 기다려지기만 하는것이 탐석이요, 주어온 수석을 신주모시듯 벌려놓고 밤새워 감상하면서 더 훌륭한 수석을 꿈꿔보는것이 나의 인생의 락으로 되여버렸다.
29    올들어 첫 수석한점 주어 댓글:  조회:3726  추천:79  2006-04-09
올들어 첫 수석한점 주어 두만강 해 펴지기전의 아침 날씨는 오스스도 하더니만 한낮의 일기는 여름날씨처럼 따스했다. 4월 6일 이날의 일기상황인데 전날 청명절 오후의 옛 장성 유적답사에 이어 청차관~욕지산사이 력사유적답사에 나섰다가 우연히 올들어 첫 수석한점을 줏게 되였다. 오전 9시에 연길시 북부 청차관 동쪽구간으로부터 력사유적답사가 시작되였다. 정오 12시직후에 이르기까지 청차관과 성자산 북쪽 욕지산사이에서 선후 4개의 옛 봉화대를 새로 발견하고 옛 장성의 구간구간 이음을 찾아냈는데 옛 장성은 욕지산 북쪽 산등성이의 봉화대로 이어지고있었다. 욕지산 봉화대와 그 주변을 답사하고 동쪽으로 빠져버린 골짜기를 따라 답사한후 광흥골 골안물이 철길을 지나 해란강에 흘러드는 구간에서 휴식하게 되였는데 휴식장소는 골안물이 철교를 지나는 서쪽구간 욕지산아래 길목이였다. 시름없이 쉬면서 마반산, 하룡촌쪽을 보다가 성자산 북쪽기슭을 보기로 할 때였다. 광흥골안물이 흐르는 강바닥과 량안바닥엔 마반산으로 통하는 세멘트포장길을 닦고 내버린 돌들이 가득 널리여있어 서성거렸는데 길가 돌무지에 특히한 돌 하나가 시선에 잡히였다. 몇걸음 다가가 주어들고보니 돌로 볼것이 아닌 수석 한점이였다. 앞뒤로 아래우로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울리는, 사람발목을 방불케 하는 수석이였다. 뜻밖의 우연한 수석탐석이였다. 두세곳에 돌에 부딪친 흔적이 보이기도 했으나 석질도 좋고 모양새도 곱고 크기도 알맞춤한 표준형수석! 력사유적답사도 하고 수석한점도 주은 4월 6일, 이날은 참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유적 새발견이 련이으고 수석도 주은 잊을수 없는 하루인것 같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뀡 먹고 알 먹는 일거량득이라고 하는걸가!
28    탐석기: 두만강수석회 올해 첫 합동탐석 댓글:  조회:4656  추천:96  2006-04-08
[탐석기] 두만강수석회 올해 첫 합동탐석 - 장원에 김대현의 물개석이 당선 신 철 호 더웠다 추웠다 비왔다 눈왔다하며 하수상하기만 하고 기후속에서 봄은 올듯말듯하면서도 애석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겨울을 그예 끝내버렸다. 지난 4월 1일, 두만강수석회 리홍국, 김대현, 김학송, 김철학, 신철호, 송철남 등은 아침 7시반에 연길에서 도문으로 합동탐석을 떠났다. 탐석지는 도문시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신기동이라는 후미진 마을이였다. 신기동에서 두만강은 270°정도로 큰 굽이를 돌면서 하류를 이루는데 이곳에 남북으로 두개의 큰 돌밭이 있다. 수석회 성원들이 찾아간 곳은 마을앞 돌밭보다 더 큰 속칭 아래돌밭이였다. 이곳에는 수석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끄는 오석이 쫙 널려있었는데 10년이 넘어되는 시기에 숱한 수석들이 두만강수석회성원들같은 《백락》들을 만나 해볕을 보았고 지금도 또 《백락》들을 기다리고있어 말그대로 수석자원이 무궁무진한 산지이다. 《조직을 세우니 좋은점이 있구만. 이곳에 이런 돌밭이 있는것을 왜 몰랐을까?》 이미 10여년의 애석력사를 갖고있는 리흥국회장은 돌밭어구에서부터 흥분을 금치 못한다. 《일생일석이 오늘 실현될는지.》 《올적마다 기분이 항상 좋기만 하네.》 《오늘은 폭포석을 얻어봐야지.》 《저는 인상석을 얻어보겠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감동과 결심이 어떤 결실을 거둘지는 미지수였어도 배낭을 벗어놓자 저마끔 갈구리니, 못뽑이니 하는 도구들을 들고 수석줏기에 몰두하였다. 물론 정해진 규칙은 아니지만 오후에 수석이 잘 발견되는것이 통례인데 이날은 첫시작부터 저마끔 눈복이 터졌다. 평원석이니 산형석이니 물형석이니 인형석이니 호수석이니 하며 저마다 《감상가치》를 《잔뜩》부여한 돌들을 안아다가 한데 모여놓았는데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등은 다들 수석애호년한이 10년이 썩 넘어 수석을 줏는데 침착한 일면 나머지 셋은 신참들이여서 경험이 부족하고 《심미안》이 《협소》하여 번번이 《퇴짜감》만 주어왔다. 결과적으로 지난 일년간 수석줏기에서 《성과가 미미했던》김대현이 올해부터는 큰 운이 트려는지 물개같이 생긴 물형석을 주어 기타 《성과작》들을 쉽게 재끼고 단연 장원에 뽑혔다. 물개석은 길이가 30cm정도인 청오석인데 대칭되는 두눈과 특별하게 흰색으로 된 입부분이 합평회의에서 절찬을 받았다. 《뭐 훌륭한것을 찾겠다고 원대한 리상을 품을것이 없다니까. 욕심이 크면 눈이 어두워서 오히려 아무것도 찾지 못하지.》 장원이 된 소감을 김대현은 아주《진리》스럽게 토로했다. 이들의 희망은 이제 여름철 관광성수기에 열릴 제1회두만강수석문화축제에 보다 훌륭한 수석들을 출품하는것이란다.
27    수석의 신비한 매력 댓글:  조회:4395  추천:93  2006-03-31
수석의 신비한 매력 김학송 천공(天工)이 수억년의 노력으로 빛어낸 천연예술품을 수석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시인묵객이나 제왕장상들의 전유물이였다. 그런 수석이 현대에 와선 마침내 소수의 권귀계층(權貴階層)이나 문인아사(文人雅士)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대중문화로 발 빠르게 확산돼 가고 있음은 참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수천년 전부터 사람들은 안방에 수석을 모셔놓고 그것을 감상하는 재미에 흠뻑 빠졌을가? 한마디로 말하면 수석에 신비한 매력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강이나 바다가나 가면 종종 돌밭을 만나게 된다. 수없이 많은 돌속에는 예술적으로 생긴 돌이 숨어 있다. 이런 돌을 가르켜 수석이라고 한다. 수석에는 해와 달, 산과 물, 꽃, 나무, 사람, 동물, 문자...등 천태만상의 다채로운 그림과 기기묘묘한 형상이 응축돼 있는데 그 내용의 풍부함과 다양함은 인간이 창조한 모든 예술을 릉가한다.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이 빚어낸 그 무궁한 신비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킨다. 그래서 누구나 그 매력에 빠지게 된다. 수석은 무언의 시(詩)이며 립체적인 그림이며 응고된 세월이기도 하다. 작은 자연석 안에 우주의 삼라만상과 그 신비경이 응축돼 있으니 어찌 보배롭지 않겠는가? 수석을 소장하는것은 자연골동을 소장하는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술을 소장하고 세월을 소장하고 우정을 소장하고 문명과 지식과 대자연의 선물을 소장한다는 내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수석과 가까이 하고 수석을 배우게 되면 정신상에 기탁이 있게 되고 심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감수하게 된다는점이 수석의 가장 중요한 매력일 것이다. 그밖에도 건강도모에 유리하고 이심전심의 좋은 친구도 사귈 수 있다는점과 그리고 수석이 가지는 보물적인 가치도 홀시할 수 없는 매력이다. 이런 수석이야말로 건강하고 고상하고 즐거운 취미가 아닐 수 없다.
26    수준급의 수석전시회 전주곡 댓글:  조회:4101  추천:111  2006-03-31
수준급의 수석전시회 전주곡 두 만 강 화창한 봄이 각일각 다가선다. 이에 못지않게 문인수석인들도 움쭉움쭉 일어선다. 3월 30일 저녁 두만강문인수석회 수석인들은 《고향에 봄》에 모여 2006년 이해의 탐석, 교류 활동, 수준급의 수석전시회 준비사업을 짜고들었다. 두만강수석회는 뜬다하는 기자, 작가, 학자 등으로 무어진 연변 주안의 유일한 문인수석회이다. 새해 처음 가지는 모임에는 두만강수석회의 고문 김대현, 회장 리흥국, 부회장 김학송 그리고 김철학, 신철호, 한태익, 리함 등 수석인들, 신임회원 송철남, 김승원 등이 참가하여 지나간 한해를 돌이켜보고 새해를 내다보면서 열띤 토론을 가지였다. 토론의 주제는 수준급의 수석전시회 준비사업이였다. 두만강수석회에서 주최하는 수석전시회는 오는 6~7월사이에 연변박물관의 전시청에서 펼쳐지게 된다. 거의가 두만강수석으로 펼쳐지는 수석전시회는 연변서 처음 가지는 연변수석의 전시로서 연변의 수석문화발전에 거대한 추진역할을 놀게 될것이다. 어제 모임은 수준급의 수석전시회 전주곡으로서 리흥국회장이 사회하고 연변 제2병원 (원 하남병원) 김승원원장이 후원을 맡아나섰다. 래일 4월 1일 주말에 두만강문인수석회의 2006년 첫 집단탐석활동이 도문시 동쪽의 두만강가 신기동에서 펼쳐지게 된다.
25    대상--"우리는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4266  추천:92  2006-03-27
대상-《우리는 중국조선족》 두 만 강 일전에 가진 《2006년 연변텔레비음력설문예야회 우수프로시상식》에서 두만강문인수석회 회원인 김철학시인의 노래 《우리는 중국조선족》이 대상의 월계관을 썼다. 지난해 가을이후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새해 음력설문예야회 응모활동을 펼치였는데 김철학시인이 작사하고 연변텔레비 문예부 박광춘이 작곡한 노래《우리는 중국조선족》이 2006년 연변텔레비음력설문예야회 우수프로 대상으로 떠올랐다. 연변텔레비《2006년 음력설문예야회 우수프로시상식》은 지난 3월 4일 저녁 7시-9시 황금시간에 첫 방송되고 18일 저녁에 재방송되였다. 김철학시인은 연변가무단의 국가1급작가이고 연변시조시사 현임사장이다. 사단법인 연변시조시사는 1992년 8월에 고고성을 터져 14년의 년륜을 아로 새기고있는데 김철학시인이 제3대 사장으로 활약하고있다. 그는 또 2004년 7월에 조직된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멤버로서 수석에도 짙은 애호를 가지며 두각을 드러내고있다.
24    탐석기: 춘3월의 탐석 즐거웠습니다 댓글:  조회:4292  추천:88  2006-03-24
탐석기 춘3월의 탐석 즐거웠습니다 두 만 강 3월 18일 주말산행차 도문시 경내의 초모정자산행을 끝내고 귀가길에 오르는데 석현 남쪽 철교아래 가야하 두 기슭에 쭈욱 깔린 돌들이 유난히도 시선을 잡았다. 겨우내 접어야만 했던 탐석행이 오는 봄과 함께 태동하는데 얼음이 풀린 가야하가 그토록 매력적이다. (날씨도 부드러워가니 탐석행을 시도해 봄도 바람직하지 않을가?!) 종내는 2006년 첫 탐석지를 가야하로 잡고 홀로 시험탐석을 해보기로 했다. 3월 24일, 두번이나 뻐스를 바꿔타면서 석현 동쪽 가야하에 이르니 오전 9시다. 겨울이 줄행랑을 놓은 가야하는 얼씨구나 출렁이며 흐르는데 봄과 함께 물이 대폭 줄어드니 얼음속에 깔리고 물속에 가리웠던 돌들이 기지개를 켜며 제 모양을 드러냈다. 한 여름에 볼수 없었던 대면적의 경관이다. 가야하 동쪽구간에서 어성이는데 호수형 수석 한점이 선참 걸려들었다. 석질이나 색채, 생김새 모두가 만점이다. 벼랑바위에 박힌 《호수》가 정상의 중심부를 떠나 한켠에 쏠린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윽토록 연출을 해보다가 버리기로 했다. 그러노라니 5~6년전 수석에 입문하던 시절이 어제런듯 하다. 모든것은 과정이 필요한 법인듯싶다. 수석에 빵점이던 철모르는 그 시절엔 조금만 빛달라도 수석으로 보이였다. 그래서 탐석에 나서면 번마다 한 배낭씩, 한 주머니씩. 집에만 들어서면 딩둥 나가 넘어지고 밥술 놓기 바쁘게 쓰러져 쿨쿨 잤으니. 며칠 지나면 메고 오던 열정이 식으면서 수석이랍시고 동그렇게 산더미를 이루군 하였다. 돌을 줏는지 돈을 줏는지 안해의 푸념속에서 던져버린 “수석”들이 짐차 몇개 몴은 잘 될것이니 몸단련으로 땡쳤다고나 할가. 버릴줄을 아는 수석의 수련과정임을 썩 후에야 알았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의 수석인이 되였다. 쉽지 않은 수석인의 수련이렸다. 뒤돌아보는 어제날인데 꽃잎모양이 점점이 박힌 수석 한점이 또 눈에 띄운다. 마음에 들긴 하나 그보다 더 좋은 꽃잎모양 수석이 몇점 있어 또 버려야 했다. 지금같이 고갈되다싶이 한 수석 한점 줏는다는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속에 시간도 흐르고 가야하 서쪽켠 돌밭으로 건너갔다. 고기잡이용 긴장화를 갖고간것이 다행이였다. 몇년전에 사두고 한번도 신어보지 못한 필수품인데 처음 의무수행에 나선 고무장화는 그리도 편리할수가 없다. 무릎을 넘어서는 물도 아이들장난이다. 돌밭 따라 벌써 여러 번 가야하를 넘나들었다. 지난 몇년간 수없이 다녀간 가야하 구간이여서 수석다운 수석을 찾을수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겨울내내 속이 쑤시기만 하더니 코노래가 절로 난다. 도시생활에 찌든 정서를 대자연속에서 정화시키니 기분은 맑기만 하다. 동북쪽 저멀리 초모정자가 굽어보는 구간이여서 더욱 그러한가부다. 그럴 때 잔잔한 물우에서 노닐던 물오리떼가 인기척에 놀라 푸르르 하늘로 날아오른다. 와, 30~40마리는 잘되는것 같다. 두무리중 한무리의 물오리떼만도 20마리를 넘어섰다. 하늘로 오른 물오리들은 유유히 날아예며 여기저기 방향을 바꾸다가 저 아래 물우에 사뿐 내려앉는다. 봄소식을 알리는 물오리떼다. 그런 물오리떼를 놀래우지 않으려고 기슭에 오르는데 제일 먼저 살아나는 쑥들이 파릇파릇 반겨준다. 실오리같은 달래들도 빠금 머리를 내밀어 봄물결에 끼이려 한다. 몇오리를 캐여 입안에 넣으니 첫싹이라 달착지근한 달래맛 제격이다. 올들어 처음 맛보는 들달래가 그리도 정겨울수가 없다. 어언 4~5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문양석 한점 갖고 귀로에 올라서는 마음 상쾌하기만 하다. 정말이지 즐겁기만 한 춘3월의 탐석행이다.
23    어험~수석인들 등장이오 댓글:  조회:4170  추천:83  2006-03-14
한겨울 동장군도꼬리 사르는 계절이요봄아씨 사뿐사뿐다가서는 호시절이라강추위에 움추리던 수석인들어험~ 흥이나 등장이오진달래 꽃피는 4월이 오면산 따라 강 따라 탐석행이지두만강수석회도 이제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리오여보소, 형제동아리들힘찬 성원이나 해주소
22    (단상) 수석이 밥상화제로 떠오른다 댓글:  조회:4015  추천:87  2006-03-13
수석이 밥상화제로 떠오른다 두만강 3월 11일은 주말 토요일이다. 이날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연변대학 민족교육문화원 4층회의실에서 사이버문학아카데미개강식을 갖고 시안의 한 음식점에 둘러앉았다. 서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석이 화제로 떠올랐는데 이윽토록 그칠줄 모른다. 화제의 주인공들은 연변대 우상렬교수와 신철호선생, 중견시인 김학송인데 옆에서 내색없이 듣노라니 그렇게 감미로울수가 없다. 수석인들만이 아닌 점심밥상에서 수석이 화제로 떠오른다는것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렸다. 그만큼 수석이 지성인들속에 자리잡아가고있다는 말이기도 한데 우상렬교수를 두만강수석회의 수석평론가로 추대하련다니 수석화제가 점점 동그라져간다. 재미나는것은 우상렬교수다. 내가 교수로는 선배여도 수석으로는 신철호선생이 선배중의 선배라고 극찬할 때 신철호선생은 그럼, 우교수가 수석에 입문하려면 저그만치 3년후에 다시 오시란다. 이런 화제가 우스워 웃고 떠들며 끝이 없는데 두만강수석회 부회장으로 지내는 김학송시인은 수석이 어떻고, 어떻고 잔뜩 열을 올린다. 그 열김에 연변대 김호웅교수도 어렵사리 말려든다. 수석의 화제풀이, 참으로 감미롭기만 하다. 지난 90년대초전후 수석이란 부름이 소리없이 연변땅에 등륙하고 2004년 7월 28일에 문인들의 수석동아리——두만강수석회가 고고성을 터치더니 인젠 제법 문인들의 자리에도 화제로 떠오른다. 기꺼운 모습이다. 문인들이 책과 글과 씨름하며 제나름의 책장을 꾸며가듯 책장 못지않게 수석의 장석을 꾸며가는 문인들 수석의 시대를 기대해본다. 책장이, 장석이 벽모퉁이를 채워갈 때 그런 모습의 문인생활 그 얼마나 풍요로울가!
21    병술년 새해를 맞으며 댓글:  조회:5091  추천:91  2006-01-06
병술년 새해를 맞으며 리흥국 수석을 형상화한 두만강문인수석회 리흥국회장의 명언 무언의 시 립체의 그림 (无言的诗 立体的画) 2005년 12월 29일
20    두만강수석회 뜬다 댓글:  조회:4314  추천:101  2005-12-31
두만강수석회 뜬다 리 함 연길시에는 지성인들로 이루어진 자발적 모임단체—두만강문인수석회가 있다. 원 연변라지오텔레비죤 총국 국장이고 현임 주 심계국 국장 리흥국을 회장으로 하는 이 두만강문인수석회는 올 한해도 줄기찬 활동을 벌리면서 문인들속에서 뜬다하는 수석회모임으로 발돋움했다. 2005년 이해를 곧 마감지으면서 지나온 한해를 도리켜보면 그 활약상이 기꺼웁기만 하다. 천리 두만강으로부터 수백리 가야하에 이르기까지 가지 않은곳이 없었으니 대소 집단탐석과 합평회만도 근 20차에 달한다. 한데서 연변텔레비 《고향의 아침》에서는 9월 16일 해당기자 셋을 파견하여 도문아래 두만강 신기동구간 탐석에 동행시키면서 전문프로를 제작하여 9월 25일에 방영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중국조선족연우미디어에도 동호인코너 《두만강수석회》를 만들어 사회와 네티즌들속에 수석문화이미지를 부각시키였다. 두만강수석회는 떴다. 두만강문인수석회에는 작가들도 있고 기자들도 있고 학자들도 있고 사회활동가들도 있다. 12월 29일 저녁 두만강문인수석회에서는 연길시에서 2005년 총화모임을 가지였다. 한해의 열띤 로고를 회고하고 걸어가야 할 래일을 내다보노라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선차적인것은 수석문화의 지성인들다운 수석전시회를 열면서 국내외교류를 활발히 하는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19    수석에 대하여 한마디 댓글:  조회:4522  추천:101  2005-12-28
수석에 대하여 한마디 김효란 연변에도 수석바람이 슬슬 불어오고 수석이 정신문화의 새 주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신이 만들어낸 수석은 복제나 재생산이 불가능하기에 그 진귀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흔히 수석을 가르켜 취미생활의 으뜸, 동양문화의 꽃이라고 표현한다. 수석의 좋은 점: 1: 탐석으로 건강을 증진한다. 2: 상대가 없이도 자기 혼자 즐길 수 있다. 3: 지질변동과 우주변천의 신비를 알게 된다. 4: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5: 주머니가 가난해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6: 감동의 극치를 경험한다. 7: 새로운 수석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마음이 늙지 않는다. 8: 인간수양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9: 수석미를 감상하며 자연의 오묘를 알게 된다. 10: 몸과 마음이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11: 심신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 12: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13: 원하는 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즐길 수 있다. 14: 실내장식품으로 최적이다. 15: 정서함양과 삶의 질의 향상에 유조하다. 외국의 한 수석 대가는 이처럼 좋은 수석 취미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무엇인가 안타깝고 불쌍하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18    석복이 따르는 사람 댓글:  조회:4628  추천:106  2005-11-12
석복이 따르는 사람 향 설 11월 8일, 이날따라 온하루 찬바람이 불어치며 날씨가 류달리 추웠다. 하건말건 석복이 따르는 사람이라 불리우는 두만강문인수석회 신철호회원은 여느때와 같이 수석선배인 김봉세 등과 더불어 룡정시 개산툰진 애민 1대 구간 두만강탐석행에 올랐다. 돌에 정이 들어야 석복이 따른다는 말이 있듯이 신철호회원은 돌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석복이 따라서 올해 탐석에서 선배회원들이 빈손으로 귀가할 때가 많아도 그만은 뜬다 하는 수석 두세점을 주어 평판이 좋은 편이다. 이날도 례외가 아니다. 애민 1대 구간 돌밭에서 돌들을 까근히 훑으며 번지더니 두만강 물가에서 앞뒤로 아기주먹같은 홈이 패운 수석 한점을 주어들었다. 어디를 보아도 맘에 드는 수석이였다. 애민 1대 구간은 천리두만강에서도 크게 원형으로 굽이를 도는 구간이여서 돌밭이 굉장이 크다. 수석은 흔히 이같이 산수가 그림같고 원형으로 구비도는 구간 돌밭에서 나타나기가 일쑤인데 이곳 돌밭탐석에 처음 나서는 신철호회원은 첫시작에 벌써 수석 한점을 주어 운이 텄다. 그는 두만강에 이런 크나큰 돌밭, 석질이 좋고 종류가 다양한 돌밭은 처음 본다며 소감을 감추지 못했다. 점심식사후 날씨는 조롱이라도 하듯 무척 떨어졌다. 그래도 탐석이 흥난다는 수석인들 앞에서 때아닌 추위도 맥을 추지 못하였다. 석복이 따르는 신철호회원은 의연히 계속 수석을 찾아 돌밭을 누비며 나아갔다.
17    흥나는 초겨울의 탐석 댓글:  조회:4746  추천:121  2005-11-02
흥나는 초겨울의 탐석 리 함 아침 저녁으로 한산하기만 한 초겨울이라지만 11월 1일의 한낮은 무더운 여름날에 못지않게 따뜻하기만 하다. 룡정서 택시를 잡아타고 남으로 40여킬로메터 달려 한식경만에 두만강에 이른 두만강문인수석회의 6명 문인회원들은 삼합의 강역구간에서 흥나는 초겨울의 탐석활동을 가지였다. 두만강 강역구간은 10리에 걸쳐 꽤나 큰 돌밭 3개를 가진 리상적인 탐석지로 소문난 구간이다. 벌써 여러해에 걸쳐 수차 다녀간 구간이라지만 가끔 수석다운 수석이 나타나 수석인들을 끄당기기엔 족하다. 오전 9시반에 강역 6대 첫 탐석지에서 흩어진 6명 회원들은 제나름의 방식대로 수석찾기에 여념이 없다. 수석회고문 김대현선생은 때떄로 우스개를 터뜨리며 젊은이들에 못지않게 돌밭을 누빈다. 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부주필이였던 이 선생은 지난번에 두만강 백룡구간에서 구멍이 난 수석 한점을 줏더니 오늘도 열성이 극진하다. 《생활안내》주필 한태익은 여느때와 같이 조용한 기분속에서 탐석에 림한다. 석복이 따르지 못하여 이해에 뜬다하는 수석을 잡지 못하였지만 수석활동에는 번마다 드팀이 없다. 연변방송국 청소년부 부주임 송철남은 젊음의 패기 그대로 넘쳐난다. 강역 6대 아래구간을 다녀오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큼직한 《수석》 두점을 옷자락에 메고 왔다. 두점 다가 빵점을 맞았지만 미래를 수놓아갈 수석가는 벌씬 웃기만 한다. 원 연변병원 당위 조직부 구성원인 김봉세는 언제보나 수석선배답게 까끈하다. 물깡치가 덮히였다고 스치고 지나는 두만강가 물가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석다운 수석은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물가에서 흔히 배출되니깐 말이다. 연변대 조문학부(지금은 학원)젊은 교수 신철호는 탐석자세가 교수다운 스타일이다. 소품 한점도 흘러보내지 않은 그로 말하면 석복도 곧잘 따라준다. 삐딱모를 쓴다하여 미국 서부사나이로 불리우는 수석회 교수님이다. 오전시간이 흐르는 속에 소품 몇개가 《점심상》사이에 끼이였다. 주어도 좋고 못주어도 좋다는 수석인들은 산수가 그림같은 아늑한 두만강가에서 술한잔 나누며 식사하는 그 멋이 별멋이란다. 탐석행이 곧 관광행이라는 그들은 언제보나 소탈한 성미들이다. 수석은 흔히 산수가 삐여난 고장에서 산출된다고 하지 않는가. 점심식사후 탐석지는 강역마을 가까이 두만강가로 이어진다. 오후 느지막한 때 필자가 이곳 탐석지물가에서 백두산천지를 방불케 하는 산수석, 즉 호수석을 줏자 서로서로가 다가와 축복해준다. 이해는 별스레 석복이 따르지 못하여 거개가 헛탕이더니 늦가을을 마감한 초겨울날씨에 강역구간 두만강은 대자연의 은총을 내려 뜬다하는 호수석 한점을 하사하였다. 흥나는 초겨울의 탐석이다. 짧은 하루길을 숨가쁘게 달린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으려고 서둘러도 해종일 돌밭을 누비는 문인회원들은 여느 누구도 떠날념을 않는다.
16    늦가을의 탐석풍경 댓글:  조회:4853  추천:103  2005-10-15
스케치 늦가을의 탐석풍경 가을이 무르익은 천고마비의 10월이다. 이 10월의 14일에 필자와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김대현, 김봉세 셋은 두만강 백룡구간 탐석행에 나섰다가 늦가을의 탐석풍경을 그리였다. 그저께, 바로 그전날 13일까지도 우리 일행은 두만강 백룡구간을 늦가을의 탐석최적지로 잡았지만 심산이 가지 않았다. 이 가을에 잡아들어 수차 탐석행에 나섰지만 번마다 빈손으로 귀가길에 올라야 했으니 말이다. 지난 10월 1일 국경절날 왕청 가야하 삼도구구간 탐석행도 례외일수 없었다. 허나 산책삼아 나선 탐석행이, 올해 마지막 탐석일로 잡은 늦가을의 탐석행이 풍요로운 탐석풍경을 그리리라곤 전혀 상상밖이였다. 연길을 출발한 중형뻐스는 한시간만에 우리를 개산툰~도문 교차로에 서게 했다. 마침 룡정~도문행 뻐스가 뒤미처 달려와 우리 일행은 어렵사리 20리길을 동강내고 도문시 월청진 백룡 1대에 닿을수 있었다. 백룡1대 구간은 두만강 중류 주요탐석지의 하나인데 최근 이태간에 도문~룡정 세멘트도로건설로 두만강 돌밭을 들어낸데서 탐석지가 엄청 줄어든 상태였다. 그런데 두만강가 바위 절벽아래에 이르기도 바쁘게 탐석에 미립이 튼 김봉세가 첫 구간 돌밭을 깐깐히 훑더니 소품도 아닌 그럴듯한 수석한점—거부기를 주어냈다. 잇따라 셋의 감정이 열을 올리였는데 보고 또 보아도 물형석(형상석이라고도 함)거부기는 두만강에서 흔치않은 명석이였다. 필자가 소유한 소품거부기에 비기면 진짜배기 거부기라 할수 있었다. 석질도 만점이였다. 사기가 부쩍 올랐다. 점심식사후 한때 김대현선생도 첫 구간 아래 구간 두만강가 돌밭무지에서 산수형의 구멍수석 한점을 주어 들었다. 역시 두만강에서 흔치않은 제 규모의 구멍수석이라 필자와 김봉세는 진정어린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서로 간 축하하고 같이 기뻐하는것은 수석인들의 마음이였다. 늦가을의 탐석풍경이 두만강가에서 펼쳐졌다. 필자의 칼라 문양석한점에 김봉세선생이 석복이 따라 보기좋게 움푹패인 호수형 수석한점을 더 주으니 대박이 터졌다. 늦가을의 탐석풍경이 그리도 풍요로울수가 없었다. 하루 수확이 대단했다. 올해 마지막으로 잡으려던 탐석행은 이제 더 2차, 3차로 이어져야 했다. 늦가을 짧아진 날씨에 뻐스관계로 도문으로 에돌며 근 300리 탐석길을 이어가야 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도문~심양행 렬차에서 다시 수석을 꺼내 드니 기쁨이 동동 떠올랐다. 렬차는 연길로, 연길로 달린다. 김대현선생이 오랜만에, 적절히 말해 20년만에 도문에서 렬차에 올라본다하여 웃음판이 터지였다. 늦가을의 탐석풍경이 어우러진 수석인들의 호함진 웃음이다.
15    김대현 김학송 《진달래 문예상》 수상 댓글:  조회:4311  추천:83  2005-10-15
김대현 김학송 《진달래 문예상》 수상 향 설 9월 29일, 자치주 제5회 《진달래문예상》 시상식 《진달래 피는 고향》 문예야회가 연길시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중공연변주위선전부와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주최한 이번 진달래문예상시상식에서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김대현 고문과 김학송 부회장이 진달래문예상을 수상한 영예를 지니였다. 여러 분야를 망라해 공훈상은 본 직장 30년사업년한을 가지고 전국성 상을 수상한 사람들가운데서 뽑기로 되였는데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원 부주필 김대현이 제5회 진달래문예상 20명 예술공훈상수상자 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김학송은 이번 시상식에서 드물게도 동시에 2개의 진달래문예상을 받아안은 영광을 지니였다. 시집 《20세기 마지막 밤》으로 시부문 진달래문예상을, 노래작사 《연변아리랑》으로 음악부문 진달래문예상을 수상. 김대현, 김학송은 제5회 진달래문예상시상식을 통해 문인이면서도 수석인이기도 한 두만강문인수석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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