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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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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김부식선생을 환송 댓글:  조회:3702  추천:112  2006-06-30
김부식선생을 환송 리 함 6월 21일, 연변장애자련합회에서는 운남 곤명으로 떠나는 한국우호인사 김부식선생을 위해 전문 환송의식을 가지였다. 한국우호인사 김부식선생은 1992년 방문차 연변에 왔다가 연변장애자사업에 뜻을 두고 연변서 처음으로 연변장애인기술훈련센터를 꾸린 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변의 장애인기술훈련사업은 령이나 다름없었다. 십여년의 노력, 아낌없는 100여만원의 투자를 거쳐 연변의 장애인직업기술훈련사업은 전국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는 수준에로 올랐다. 이에 연변장애자련합회에서는 연변장애자 사업에 대한 그의 혁혁한 공로를 기리여 황수봉회장으로부터 모처럼 감사패를 증정하였다. 30대 중반에 연변으로 와서 연변서 십여년을 장애인직업기술훈련사업에 몰두한 50대초반의 김부식선생, 지금은 운남 곤명에 가서 장애인기술훈련원을 꾸린다지만 두번째 고향인 연변을 잊지 못한다는 김부식선생이다. < src=http://www.ckywf.com/ybywforum/up/mount/2006_06_30_18_01_48_60616026.jpg>두만강수석회의 리함씨와 김봉세씨 김부식선생과 기념사진을 남기다 김부식선생은 1996년도 초창기 “해란강여울소리”를 장장 7년이나 경제적으로 후원, 남희풍선생을 주필로 하는 “가사문학대전”도 경제적으로 후원, 또 독실한 수석인이여서 연길의 문인수석인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어왔다. 그 인연으로 6월 21일의 환송식에 리함, 김봉세, 한태익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사진제공에 김부식
73    오늘도 20여명 다녀가다 댓글:  조회:3965  추천:101  2006-06-30
오늘도 20여명 다녀가다 두 만 강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가 첫 전시를 가진지도 어언 20여일에 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침없다. 오늘도 20여명이 다녀가며 연변수석에 대한 짙은 흥미와 사랑을 보여주었다. 워낙 두만강수석회에서는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를 4~5일간으로 끊으려고 했다. 그러던 전시회가 연변박물관의 깊은 중시로 8월말까지 이어가기로 결정되였다가 지금은 진짜배기 수석관으로 장기화전시로 이어질 전망이다. 했으나 박물관 2층홀 동쪽 전시관은 벽을 두르지 않은 휘넓은 공간이여서 두만강수석회에서 륜류로 매일 직일을 서야 했다. 그간 연변박물관에서는 전문 조치를 대여 간벽을 두르고 이어진 미닫이문을 설치한데서 수석전시청은 명실공히 짜장 한다하는 수석관으로 떠오르면서 다음 주일부터 정식 연변박물관 전시운영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연변박물관의 전시운영체제를 앞두고 수석회 수석고문 김대현선생의 소장민속품들이 박물관의 배려로 수석전시관의 한면을 이루었다. 수석과 민속품의 어우름이다. 어제 김대현선생은 김봉세씨 등의 도움으로 소중히 간직했던 100여점의 민속품을 전시관으로 옮기고 필요한 전시를 마치였다. 일에 쫓기였던 필자는 3일간이나 자리를 비우다가 오늘에야 수석전시관을 찾아보았는데 오전시간에만도 선후 20여명이나 찾아드는데서 잠간 다녀오려던 전시관 미닫이문을 내내 잠글수가 없었다. 20여명 손님들가운데는 10명에 달하는 연변밖 한족관광객들이 있는가 하면 연변내에서 모여든 근 10명의 조선족단체객들도 있고 70대로 보이는 조선족로인내외분도 있었다.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매 하나의 수석을 일일이 감상하는데 30대로 보이는 한 조선족녀성이 인상적이다. 그는 동행한 두분의 남성분에게 여기 수석들이 참 눈에 익다고 하더니 수석인 김대현선생을 안다고 했다. 또 김부식선생도 가끔 떠올린다. 흥미있는 녀성이다. 필자가 김대현선생을 아는가고 묻자 연변방송국 주필이고 수석인이라고 하더니 자기는 또 김부식선생의 제자로서 10년간의 인연을 갖고있다고 한다. 그 이상 필자는 더 묻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무얼하며 경력담이며 말이다. 김대현선생을 알고 김부식선생을 알면 수석과 인연이 있는 녀성임은 틀림이 없는데이다. 오늘도 20여명 다녀갔다. 그것도 오전시간에만, 모두가 수석세계에 푹 잠기여본다. 하긴 “뭐, 볼것이 없구만”하고 힝 코방귀를 끼며 돌아서는 무지한 30대 남자도 없지 않다. 오직 이 남자 하나뿐, 그러는 남자를 두고 동행한 몇몇 남성분들은 “저 자식, 모르면 모른다고나 할것이지!” 하며 혀를 끌끌 차더니 연변만의 수석이 인기도가 높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2006년 6월 30일)
72    가야하는 또 골탕을 먹이다 댓글:  조회:4267  추천:110  2006-06-26
가야하는 또 골탕을 먹이다 두 만 강 가야하 만천성 땜아래 삼도구 구간은 이름난 수석산지여서 연길수석인들의 발길이 자주 가닿이는 고장이다. 일전에 이곳 집단탐석에 나섰다가 인공호수의 물을 터뜨린데서 탐석도 못하고 골탕을 먹었던 우리는 오늘 6월 26일 다시 가야하에서 골탕을 먹어야 했다. 오늘 탐석행은 김대현선생에 김봉세씨, 필자 셋만의 동행이다. 가야하의 붇고쪼는 허실을 알수 없은데서 셋만이 선발대로 나섰는데 여느때와 같이 뻐스타고, 택시타고 석현과 삼도구를 지나 근 200리밖의 수석산지에 이르니 가야하의 물은 평소보다 수량이 많다지만 탐석에는 별로 영향을 미칠것 같지 않았다. 헌데 택시에서 내려 가야하 물가에 나서니 사정이 달랐다. 돌밭인 강복판지대 두드러진 곳을 제외하곤 주위가 모두 물판이여서 흐르는 강물을 건너야 했다. 워낙 강곬이 아닌데다가 현재 흐르는 강물 또한 무릎팍을 넘을 정도여서 선참 바지를 걷어올리고 출렁출렁 건느다가 물속에 박힌 바위돌에 걸려 하마트면 넘어질뻔 했다. 게다가 바위돌가에 깊숙한 홈이 패인데서 물은 급속히 허리를 질러 졸지에 하반신이 물참봉이 돼버렸다. 뜻하지 않은 골탕에 바지가 후줄근히 젖어 말이 아닌데 혁띠에 걸었던 핸드폰까지 물의 세례를 받아 페물로 될줄이야. 하긴 여러해 쓰던 핸드폰이여서 바꿀때도 되였다지만 필경은 가야하에 당하는 두번째 골탕이였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셋이 두드러진 강복판 돌팥에서 금방 탐석을 벌리는데 김대현선생이 물이 붙는것 같다고 하였다. 이곳 지대 웃켠은 강폭이 넓은 잔잔한 지대여서 물이 붇는것이 알리지 않았다. 강가에 이르러서야 물이 눈이 뜨이게 붇고있다는것이 드러났다. 급기야 도로 물을 건너 서쪽의 강대안에 올랐지만 오늘 탐석행은 또 접어야만 했다. 먼저번과는 비길수는 없어도 수석산지는 전부가 물에 잠겨 버린 상태였다. 때는 정오와는 거리를 둔 시점이다. 그대로 귀가길에 오를수는 없었다. 다시 김봉세씨의 핸드폰으로 택시를 불러 60~70리밖의 도문아래 두만강반의 신기동에 갔어야 새로운 탐석에 나설수 있었다. 가야하에서 두만강에로, 수년간 탐석사에서 하루사이에 탐석지를 두강에로 이어간다는것은 처음 있은 일이다. 우리 수석인들을 부르는 가야하이고 가끔 수석다운 수석을 선사하던 가야하는 본의 아니게 선후 두번이나 우릴 곤경에 빠뜨려놓았다. 2006년 6월 26일
71    김부식씨 수석회를 찾다 댓글:  조회:4157  추천:104  2006-06-21
김부식씨 수석회를 찾다 두 만 강 한국인 수석가 김부식씨가 연변에 온지도 어언 14년이 된다. 연변에 와서 연길시에 연변장애인기술훈련센터를 꾸리며 장애인 기술훈련으로 뛰다가 지금은 운남 곤명시에 가서 장애인기술훈련원을 경영하고있다. 독실한 수석가이고 시인인 김부식씨는 연변행차에 연변의 문인석우들에 의해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가 열리였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연변박물관의 수석전시관을 수차 찾았다. 6월 16일에는 문인석우들과 더불어 가야하탐석행에 나서기도 하고 6월 21일에는 주장애자련합회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하였다. 아래 두만강문인수석회를 찾은 김부식씨의 사진 몇장을 두만강수석회의 수석코너에 올리는바이다.< src=http://www.ckywf.com/ybywforum/up/mount/2006_06_21_09_37_27_60612034.jpg width="800" height="600">수석전시관에서 왼쪽으로부터 리함, 김대현, 황상박, 최문섭, 김부식 제씨
70    【인터뷰】《중국백석흔상》에 오른 사람 댓글:  조회:3907  추천:97  2006-06-20
【인터뷰】 《중국백석흔상》에 오른 사람 두 만 강 연변에는 뜬다하는 수석인들이 적지 않은것 같다. 연길시수리국의 박성룡국장도 그런 수석인의 한분인데 오늘 연변박물관의 수석전시관에 들어서자 《중국백석(百石)흔상》한책을 내놓았다. 《두만강수석회에 드립니다.》 《예? 우리를 주는 겁니까?!》 정교하게 만들어진, 채색수석도편들로 묶어진 《죽국백석흔상》은 첫 인상부터 필자를 강하게 끌어당기였다. 책은 섬서인민출판사에서 올해 2006년 3월에 출판한, 신식채색도편 200여폭과 명수석가 109명의 애장석을 묶어 내놓은것인데 박성룡씨도 109명 명수석가의 한사람으로 인물사진과 함께 수석세점이 올랐고 수석가 소개에는 이렇게 밝혀져 있었다. 박성룡, 길림성 연길시사람, 1953년생. 현임 연길시수리국 국장, 연변수석협회 고문, 《중국백석흔상》편집위원. 1994년부터 수석을 소장하기 시작하고 국내외 수석전시회에 여러차례 참가하여 1등, 2등, 3등상을 획득… 소장석 1000여점. 《대단하십니다.》 《뭘요.》 박성룡씨는 연변두만강수석회의 신임고문답게 겸손한 자태가 그대로 얼굴에 씌여져 있었다. 얘기를 주고받으니 《중국백석흔상》의 편집위원으로, 109명 명수석가의 한사람으로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만큼 중국수석계에서는 중국관상석협회 리사이기도 한 박성룡씨를 알아주고있었다. 알고보면 박성룡씨의 수석사는 1994년으로 거스르고있다. 처음에 친구들한테서 수석이 여차여차하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차를 몰고다니며 장난하는데 그치였단다. 말그대로 운동삼아 다녀본것인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쑥 빠져버릴 줄이야, 수석하며 보니 몸단련에 좋고 마음이 유쾌한데 특이한 문화현상을 이루는 대자연의 소산물은 그토록 매력적이였다. 몇년후의 박성룡씨는 진짜배기 수석인이다. 2000년 5월에 연변국제무역청사와 함께 모아산의 민속촌에 연변의 첫 수석전시관인 《국제무역민속촌수석관》을 꾸리고 대소 100여점의 수석을 전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중 20%는 연변의 수석이였다. 그만큼 박성룡씨는 연변수석문화의 보급과 제고에서 큰 몫을 담당하여 나섰다. 《인젠 한다하는 수석가로 떠올랐군요.》 《아직도 수석이란 뭔지를 잘 모르고있습니다. 계속 배워야지요.》 역시 겸손한 스타일의 박성룡씨다. 《중국백석흔상》에 올랐어도 수석을 잘 모른다는 박성룡씨, 박성룡씨의 수석의 미래가 보다 휘황하고 밝으리라는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관련사진은 곧 올리게 됩니다.)
69    【스케치】수석도 하나의 세계구만 댓글:  조회:3490  추천:105  2006-06-20
【스케치】 수석도 하나의 세계구만 리 함 거개가 연변수석으로 된 두만강수석전시회는 어언 열세번째 날을 맞이한다. 그간 연길을 망라하여 화룡, 룡정, 도문, 왕청, 훈춘 등지의 수백명 수석애호가들과 관련분들이 다녀갔다. 여러 날이 지나자 그 발길들이 점차 뜸해지는것 같더니 오늘은 30여명 사람들중 룡정서 온 로인 8명이 무척 인기를 모았다. 여느때와 같이 수석관직일에 나섰는데 때이른 오전시간에 벌써 로인 8명이 연변박물관 2층홀에 나타난다. 안로인 7명에 바깥로인 1명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새로 전시된 연변박물관의 《동북조선민족항일투쟁사전시》관을 찾더니 연변특산품 전시관도 찾는다. 그중의 바깥로인 한분이 참 눈에 익다. 알고보니 바깥로인은 10여일 사이만도 여기 여러 전시관을 수차 찾은분이였다. 바깥로인과 잠시 얘기를 나눠보았더니 로인의 성함은 최상화이고 올해 75살이란다. 최로인이나 동행한 안로인 7명은 모두 룡정시 사탕술회사의 당지부 로당원들로서 우리 력사로 된 항일투쟁사가 도편으로 전시되였다니 찾아온분들이였다. 항일투쟁사 도편 상당수가 룡정관련 투쟁사라며 짙은 흥미를 보이는 그네들이다. 이런 분들이 최상화로인의 안내하에 수석전시관에 들어서더니 또 짙은 흥미를 보여준다. 로인 1: 야, 돌에도 이런 볼거리가 있다니?! 로인 2: 이거, 손을 댄것이 아닌가? 로인3: 손을 대면 수석이라 하는가, 이런 수석들은 티끌하나 가미되지 않은 자연석들이오. 로인 4: 정말 대자연이 묘하구만, 연변에도 이런 《돌》들이 있다는것이 신기하기만 하오. 로인일동: 이 수석이 중국지도 아니오?! 옳구만, 중국지도요! 로인들은 중국지도 수석을 보고 또 본다. 그러는 로인들은 수석세계에 빠져들기만 한다. 《어떻소? 연변박물관에 와 볼만하지?》 《수석도 볼만한 하나의 세계구만!》 《그러게 말이오.》
68    가야하 물사태에 어정쩡 댓글:  조회:3998  추천:100  2006-06-17
가야하 물사태에 어정쩡 리 함 6월 16일은 금요일이요, 두만강문인수석회에서 두번쨰로 조직한 집단탐석일이다. 그러던 일행이 가야하 만천성 땜아래서 뜻밖의 물사태에 어정쩡해졌으니 생각할수록 웃음이 절로 난다. < src=http://www.ckywf.com/ybywforum/up/mount/2006_06_18_15_57_36_60614067.jpg width="700" height="700">김부식님과 김학송시인 가야하 물사태에 어정쩡했던 우리, 뜻밖의 물사태로 탐석행을 접어야만 했던 우리—올해 두번째로 이어진 집단탐석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갔다. 이상의 사진 촬영에 김부식 2006년 6월 17일
67    어디서 이런 돌 얻어옵니까 댓글:  조회:3781  추천:83  2006-06-13
어디서 이런 돌 얻어옵니까 리 함 오전시간이다. 수석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이 오늘따라 뜸해지는데 70대의 로인부부가 다가온다. 룡정에서 온다는 이들 로인부부는 금방 전시된 《동북조선민족항일투쟁사전시》를 보고서 연변박물관에 왔다가 수석관을 찾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연변에도 이런 “돌”들이 있는가고 연신 찬탄을 금치 못하다가 묘하다고 흥분에 둥둥 뜬다. 그러다가 수석 《오리》앞에서 하시는 말씀: —어디서 이런 묘한 “돌”들을 얻어옵니까 70대 로인내외간, 그들은 오늘도 수석관을 찾은 20~30명 가운데의 두분이시다. 2006년 6월 13일
66    【스케치】 문인들 수석관 찾았구려 댓글:  조회:4012  추천:94  2006-06-13
【스케치】 문인들 수석관 찾았구려 리 함 예로부터 수석이란 황제, 대신들이나 대부호들, 문인묵객들이 즐기고 문인묵객들의 필묵에 의해 생동하게 묘사된 대자연의 소산이요, 축소판이다. 헌데 우리 문인들에 의해 전시된 연변수석만의 첫 수석전시회가 여러 날 되도록 찾아드는 문인 한사람 볼수 없다. (연변의 문인들이 이다지도 수석문화에 숙맥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서운함이 한가슴 괴여오른다. 오늘은 수석전시 엿새가 되는 날이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던차 정오를 앞두고 룡정의 시인 황상박선생, 연변인민출판사의 시인 최문선선생, 한국인 김부식선생 등이 수석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을 찾은 문인들 첫 손님이라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그래 우리 문인들이 수석문화를 몰라줄수가 없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이라 흥분속에 잠기는데 마침 두만강수석회 고문 김대현선생이 뒤미처 나타났다. 《돌을 모르며 돌보러오는가?》 김대현선생은 문우들을 허물없이 대했다. 《오면 안되는가?》 최문섭선생 또한 허물없이 응해나섰다. 수석전시관 분위기는 대번에 활발해지고 황상박선생은 구수하에서 탐석한 《오리》를 가리키며 터값을 받아야겠다고 롱담을 걸어온다. 그러는 황상박선생은 《수석하는 사람이 많구나!》하며 감탄해마지않는다. 그때다. 최문섭선생은 전시관 첫머리에 놓인 남근석을 보더니 한국 수석전람에 남근석이 쭈욱 놓였더라면서 대자연이 묘하다는것을 한 5년전에 알았다고 소감을 내비친다. 알고보면 편심 최문섭선생은 1942년생으로서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전업을 졸업하고 교육, 선전, 출판 사업에 종사, 편집, 시인으로 활약하면서 《구름기차》, 《꽃동네》 등 허다한 동시집, 시집과 이야기집 《천지의 무지개》 등을 펴낸분이다. 그러던 선생은 약 5년전에 한국행에 나섰다가 목포시 수석관을 돌아본적이 있었단다. 수석과는 인연이 있었기에 수석을 통해 대자연이 기기묘묘하다는것을 보다 터득하였다는 선생이다. 최선생은 필자의 중국지도 수석한점을 보고 묘하다고 했다면 한태익의 메주 수석을 보고 또 묘하다고 련발한다. 황상박선생은 묘하기에 수석이 존재할것이 아니냐며 허허 웃는다. 룡정시 팔도행출신으로 신문, 도서 배달원, 기자, 편집으로 활약해오다가 정년퇴직하고 가사전문지 《해란강여울소리》주필을 맡아오며 시창작에도 왼심을 써오는 이름난 시인이기도 하다. 한국인 김부식선생은 언제부터인가 연변수석이 더는 밖으로 흐르지 말고 자체의 수석관을 가졌으면 하는것이 드팀없는 소원이였다고 내심을 토로한다. 1992년 7월에 연변에 와서 연길시에 《연변장애인기술훈련센터》를 꾸리고 운영해오다가 현재는 운남성 곤명에 가서 장애인기술훈련원을 꾸린다는 선생, 이 선생이 연변서 손수 탐석길에 나선것은 1995년이였다고 한다. 한다하는 명석도 척척 안겨지고 하면서 연변의 문인수석인들과 돈독한 우정을 맺어온 그다. 수석전시관은 문인들의 웃음소리, 말소리로 차고넘친다. 그속에 오후 시인회의를 앞둔 최문섭선생이 필자에게 금방 출판한 동시선집 《새싹은 햇병아리》를 증정한다. 문인들의 세계가, 서로 통하는 세계가 좋기만 하다.문인선배들 수석관 찾았구려! 2006년 6월 13일
65    수석전시관이 있어 좋아 댓글:  조회:3663  추천:106  2006-06-12
수석전시관이 있어 좋아 리 함 오늘은 수석전시 닷새가 되는 날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질 않는다. 수석이란 이 대자연의 천연예술품은 자석마냥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강한 힘을 갖고있는 모양이다. 오전이다. 연변박물관 해당참관에 나섰던 리퇴직교원 수십명중 적지 않은 교원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수석전시관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대자연의 아름다운 삼라만상이 그대로 수석에 표현되였다면서 신기함에 빠져본다. 오후이다. 력사답사길에 올랐던 룡정의 사진촬영가 리광평씨 등은 연변수석이 전시된 전시관을 돌아보고서야 시름을 놓는다. 연변만의 수석이 이리도 훌륭한 줄을 몰랐다는 리광평씨다. 그에 앞서 한국의 수석가이고 연길서 일보는 박식선생이 부부동반으로 전시관을 찾았다. 그는 6월 8일 수석전시회 개회식에 참가하여 테프를 끊고 돈까지 기부한 터이지만 이같이 훌륭한 수석세계를 어찌 혼자만이 감상하겠느냐며 안해와 동반하였다고 감상을 터놓았다. 연변수석문화의 질적제고와 보급에 고무된다는 박식선생은 서로간의 긴밀한 협력을 바랐다. 수석전시청을 찾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감수는 우리 자치주의 수부 연길시에도 대자연의 천연예술품인 연변수석만의 전시관이 있어 좋기만 하단다. 2006년 6월 12일
64    수석전시청 찾은 한가족들 댓글:  조회:3695  추천:87  2006-06-11
수석전시청 찾은 한가족들 리 함 수석전시 네번째 날, 오전에만도 30~40명 사람들이 다녀갔다. 보다 인상적인것은 수석전시청 찾은 한가족들, 해맑아 보이는 한가족끼리 단란한 모습이였다. 가족 세식구 오전 9시가 금방 지난 시점인데 두만강수석회 신철호씨가 들어섰다. 잇따라 한 녀성이 녀자애와 같이 다가오더니 신철호는 집사람이라며 인사를 시키는것이였다. 수인사를 나누고보니 수석가족 세식구만의 휴일동행이다. 신철호씨는 수석에 입문한지 오라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빨리 수석인이 된 사람이다. 워낙 연변텔레비에서 기자로 뛰다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교편을 잡았다지만 사람이 좋고 수석에 빠지여 수석회의 사랑을 무척이나 받는터였다. 그에 따라 석복이 따르니 지난 2~3년사이 괜찮은 수석 몇점을 줏기까지 하였다. 안해와 딸애도 수석에 짙은 관심을 몰붓는다나. 그러던 가족이 일요일시간을 타서 수석전시청에 나타난것이다. 올해 40대 초반인 안해 김영란, 올해 15살인 연길시 10중 1학년생 은설—단란한 세 식구는 수석감상에 여념이 없다. 신철호씨는 수석마다 설명을 깃들이며 성의를 보여준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슴에 와닿기만 한다. 안해되는 사람 새로 두만강수석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김봉세씨는 수석년한만도 6~7년에 나는 한다 하는 중견수석인이다. 마침 김봉세씨가 직일 서는 날이라 서로간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안해되는 사람 리분녀양이 나타났다. 이제 누군가의 부주의로 수석한점을 깨뜨렸다고 하여 가슴아파 찾아온것이였다. 돋보이는 소행이 아닐수 없다. 돋보이는 소행은 이뿐이 아니였다. 6월 7일은 서로가 집에 소장한 수석을 가져다가 진렬하는 날인데 점심참이라 밖에 나가 식사를 해야 했다. 헌데 누군가는 남아서 직일을 서야 하는데 일순 난감한 처지다. 이때 분녀양이 직일을 자청해 나섰다. 수석회사람들이 다같이 식사에 림하라는 배려의 처사였다. 이튿날 6월 8일은 수석전시회 개회날이라 또 여러 지도자, 래빈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였다. 이때도 리분녀양은 수석전시청을 지켜서며 수석회 일행 모두들 동행하게 하여 수석회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오늘은 또 수석한점이 살이 뜯겼다 하여 찾아왔다. 평소도 남편의 수석취미를 묵묵히 받들어주는 미더운 안해, 김봉세씨의 수석인 걸음걸음마다엔 안해의 안받침이 푹 배여 있다고 한다. 이에 못지 않게 수석에도 빠지여 수석인 못지 않은 조예가 깊은 녀성이기도 했다. 일행 네사람 오전시간의 한때 수석전시청에 30대후반으로 돼보이는 젊은 부부가 할머니와 《딸애》를 데리고 찾아왔다. 매 한점의 수석마다 돌아보며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이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할머니되는 분은 시어머니되는 분이십니까?》 《친정어머닙니다.》 필자의 물음에 시원히 답을 주는 녀성분이다. 할머니 춘추를 물으니 올해 76살이란다. 하나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보이고 걸음걸이도 온건하기만 하다. 어떻게 되여 찾아오셨는가고 물으니 연변텔레비를 보고 전문 수석보러 찾아왔다는 그네들이다. 한가족의 동행이 조련치 않다고 말하자 녀성분은 저 처녀애는 딸이 아닌 조카애인데 처음으로 전시되는 연변만의 수석이라서 꼭 보이고만싶어 알려서 같이 왔단다. 《그래요?》 필자의 놀람에 녀성분은 피식 웃는다. 처녀애와 몇마디 주고받으니 처녀애는 룡정에 집이 있고 룡정1중 2학년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재미있는 《한가족》—일행 네사람이다. 녀성분이 수석에 취미가 있는듯 부지런히 수석을 가리키는데 친정어머니—할머니는 돌에도 이런것들이 있느냐며 수석마다에 눈길을 박고 처녀애는 신기한 세계라며 수석을 즐긴다.
63    【속 보】두만강수석회 새 지도부 출범 댓글:  조회:3163  추천:104  2006-06-10
【속 보】 두만강수석회 새 지도부 출범 두 만 강 오늘 오후 동아리모임—연변두만강수석회는 리흥국회장의 사회하에 전문회의를 갖고 새로운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두만강수석회의 초대회장은 리흥국선생이였다. 2004년 7월 28일에 고고성을 터친이래 두만강수석회는 리회장의 지도하에 활발한 양상을 보이며 연변의 수석문화의 제고와 보급에 크나큰 기여를 하여왔다. 오늘 6월 8일에는 연변박물관과의 공동주최하에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개회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현재 주심계국 국장을 맡고있는 리흥국회장은 사업상 관계와 사단법인 정식출범의 요구와 비추어 볼때 자기가 계속 회장으로 뛴다는것은 현실적이 되지 못한다고 심경을 터놓았다.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개회가 있은후 리흥국회장은 연변박물관 2층홀에서 전문회의를 부르고 리함비서장을 제2임 회장으로, 김봉세를 부회장 겸 비서장으로 건의하였다. 전문회의에는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김봉세, 신철호, 석문주, 리함, 연변박물관 관장 맹철학 등이 참가하였는데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가결로 리흥국회장의 건의를 받아들이였다. 가결결과는 아래와 같다. 리함—제2임 회장 김봉세—부회장 겸 비서장 김학송—부회장 련임 전문회의는 또 일치한 가결로 명예회장과 고문단을 추대하였다. 추대결과는 아래와 같다. 리흥국—명예회장(주심계국 국장) 김대현—수석고문(원 연변방송국 부주필) 마경봉—고문(주정부 부비서장) 맹철학—고문(연변박물관 관장) 왕영창—고문(원 연변군분구 부정위) 박성룡—고문(연길시수리국 국장)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개회후 두만강수석회는 새 지도부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적당한 시기에 사단법인 수석절차를 밟게된다.
62    수석전시기간은 8월말까지 댓글:  조회:3953  추천:89  2006-06-10
수석전시기간은 8월말까지 수 석 회 오늘 연우미디어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1회 연변수석전시기간이 11일까지 4일간이라니 말입니다. 잘못 전해진, 누군가의 실언임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는 6월8일에 개회식을 가지고 8월 말까지 내내 전시하게 됩니다. 이는 이번 전시회의 주최측인 연변두만강수석회와 연변박물관의 공동결정임으로 특히 널리 알리는 바입니다.
61    전시회 두번째 날 댓글:  조회:3280  추천:109  2006-06-10
전시회 두번째 날 수 석 회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는 개회식을 마치였지만 그 열기는 여전한것 같다. 오늘 하루 수석전시청을 찾은 사람들은 50여명에 달한다. 오늘 연변박물관 수석전시청을 찾은 사람들중 어제 저녁 연변텔레비뉴스를 보고, 연변일보 문화면 기사를 읽고 찾아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패 또 한패의 사람들이 이어 섰는데 그들 가운데는 연변에 온 한국인들 8-9명이 있는가 하면 화룡에서 찾아왔다는 60대후반의 백발로인이 있고 훈춘에서 몸소 찾은 이름없는 수석인도 있다. 전시회 두번째 날, 연변수석만의 독특한 전시는 수석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모두가 연변수석은 희망이 보인다며 기쁨을 금치 못한다.
60    【스케치】사천 성도서 온 손님 댓글:  조회:3809  추천:104  2006-06-10
【스케치】 사천 성도서 온 손님 리 함 오늘은 수석전시 세번째 날이자 김학송시인과 석문주시인 직일날이다. 일도 있고 하여 연변박물관 수석전시청으로 나갔더니 김대현고문과 김봉세부회장이 금시 출입구를 나서고있었다. 잠간 이야기를 나누고 2층의 전시청으로 올라갔더니 김학송시인과 석문주시인이 전시청을 지켜서고있었고 조금후 짧은 반바지차림의 중년 한족남자가 들어섰다. 《전시청을 돌아보아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필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참 례의에 밝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겨왔다. 그만큼 인물체격이나 스타일도 좋은 분이다. 이윽고 중년남자는 전시청의 수석들을 쭈욱 돌아보더니 또 말을 건네온다. 《사진찍어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역시 됩니다 대답이다. 김학송부회장과 필자의 허가에 중년남자는 느낌이 좋은 수석을 디지털사진기에 담는다. 그 소탈함이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안겨 들자 이번에는 필자가 먼저 말을 건네였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오시는지요?》 《녜, 사천 성도에서 옵니다.》 《볼일이 있어 왔나보죠?》 《녜, 처사할 일이 있어 연길에 왔습니다.》 《그럼 수석전시 소식은 어디서 알았지요?》 《호텔서 연변텔레비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시장소를 물으며 찾아왔지요.》 《그래요?!》 필자는 인차 동을 달았다. 《수석을 즐기나보죠?》 《녜, 수석애호가라 할수 있지요.》 알고보니 중년남자는 이름이 남걸이고 탐석경력 6~7년에 수석구매경력 20년쯤 된다는 독실한 수석인이였다. 그러는 그는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수석에 대해 박식한 리해와 지식을 갖고있었다. 연변자체의 수석을 말할 때 그는 몇점의 두만강수석을 가리키면서 석질이와 강도가 비길데없이 좋다고 극구 치하한다. 이에 대비해 우리 중국내지의 수석들은 비록 썩기는 잘 썩었지만 석회질이 다분하다고 평가하는 그다. 확실히 남걸씨는 수석을 알고 있는 수석인이였다. 이야기를 나누는사이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서로 련계전화와 신분을 알리고 서로간의 련계를 갖기로 약속을 보았다. 어찌하든 사천 성도서 온 손님 남걸씨—중년 남자는 수석전시청을 찾으리만치 수석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알려졌다. 열린 수석전시회의 스케치를 이루는, 수석을 통한 서로의 만남이였다. 2006년 6월 10일 점심
59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안내문 댓글:  조회:4129  추천:86  2006-06-08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안내문 김 대 현 수석이란 순수한 자연석에 삼라만상의 오묘한 형상과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축소되고 응축되여 사람들에게 예술적 감수나 사색을 줄수있는 돌을 가리킨다. 수석은 오랜세월 자연이 빚어낸 천연예술품으로서 석질이 좋고 특정한 모양이나 아름다운 색채를 갖고있기에 먼 옛날부터 많은 문인묵객들의 필묵에 의해 생동하게 묘사되였다. 수석문화는 문학과 철학, 광물학, 지질학, 암석학을 포함한 종합적인 문화로서 그것은 천인합일의 동양사상에 근원을 둔 문화적함량이 매우 높은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수석은 흔상가치, 경제가치, 소장가치가 있다. 연변은 량질의 수석산지라고 볼수 있는바 두만강, 가야하를 비롯한 여러 강이나 하천에서 좋은 수석이 많이 발견되고있다. 연변에도 10여년전부터 수석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애석가들이 점점 늘어나고있는 추세다. 2004년에 설립된 연변두만강수석회는 교원, 작가, 기자 등 문인들로 구성되였으며 현재 활발한 탐석활동을 벌리고있다. 협회의 전체회원들은 연변수석문화의 제고와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이번에 펼치는 제1회 수석전시회에 2년 남짓한 동안 회원여러분들이 수집한 연변의 향토석을 위주로 전시한다. 애석가 여러분들과 해내외 관광객 여러분들의 깊은 관심과 지지, 성원을 부탁드린다.
58    전시회 수놓은 시와 서예작품들 댓글:  조회:4569  추천:95  2006-06-08
전시회 수놓은 시와 서예작품들 리 함1. 서화작품: ㄱ. 一生一石 石寿万年 (일생일석) (석수만년) ※ 리철, 연변박물관 직원, 연길시서법가협회 부주석 ㄴ. 无言的诗 立体的画 (무언의 시 립체의 그림) ※ 리흥국, 연변두만강수석회 회장2. 시 ㄱ. 두만강 가야하에 기울인 일편단심 자연에 동화되여 티없이 맑았으니 어화라 이 멋이 좋아 젊어 지는 내 인생! ㅡ김대현, 연변두만강수석회 고문 ㄴ. 수석찬가 너의 눈은 미지이다 너의 입은 미지이다 大川이 그 품에 있고 명산이 그 속에 있고 너의 주소는 과거와 미래의 영원속에 있음을 알겠다 ㅡ김학송, 연변두만강수석회 부회장 ㄷ. 수석련가 억년聖 산이 안방에 놓였으매 온집안에 고요스레 仙風이 이는구려 ㅡ김학송, 연변두만강수석회 부회장
57    【뉴스】 연변 수석문화의 대잔치 댓글:  조회:3910  추천:97  2006-06-08
연변 수석문화의 대잔치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리 함 6월 8일, 연길시 진달래광장 서쪽가에 자리잡은 연변박물관은 100여명의 주인, 손님들로 흥성거리였다.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가 성황리에, 성공적으로 이곳에서 열리였다.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는 동아리모임인 연변두만강수석회와 연변박물관에서 공동주최하고 연변박물관에서 모든 후근준비와 장소제공을 담당한 연변수석문화의 대잔치. 이 대잔치를 위해 연변 주정협 손흥개부주석, 주정부 마경봉 부비서장, 주문화국 김영철국장, 연변방송텔레비죤국 부국장, 연변텔레비방송국 주필 리호남선생, 연변국제전시청 왕봉신주임,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 연길시 수리국 국장이고 수석가인 박성룡선생, 원 연변군분구 부정위이고 수석가인 왕영창선생, 원 연변방송국 김대현부주필, 한국수석가 박식선생 등 래빈들이 참가하여 축하하고 힘을 보태주었다. 수석전시회에는 또 두만강수석회와 연변박물관의 회원, 직장인들과 수석애호가, 보도매체 여러 기자들, 관심사로 되는 해당 인원들이 참가하여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는 첫 시작부터 자못 열기를 띠였다. 수석전시회개회식은 두만강수석회 리함비서장이 사회하고 리흥국회장이 개회사를 드리였다. 개회사에 이어 주정부 마경봉부비서장,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 한국 수석가 박식선생 등이 선후로 축사를 드리고 김학송부회장이 두만강수석회 회원들을 일일히 소개하였다.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의 클라이막스는 테프끊기였다. 손흥개부주석, 마경봉부비서장, 리흥국회장, 김영철국장, 왕봉신주임, 맹철학관장, 왕문빈명예회장, 왕영창 원 부정위, 리호남주필, 박식선생 등이 일제히 테프를 끊어 수석전시회의 정식개회를 널리 알리였다. 테프끊기가 끝난후 주인과 손님들은 수석전시청을 돌아보며 전시된 수석들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였다. 전시회에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회원들이 다년래 두만강, 가야하 등에서 손수 탐석한 연변의 수석 135점과 약간의 내지 수석이 전시되여 전시회참가자들의 주의를 무척 끄당기였다. 할아버지를 따라 전시청에 들어선 6~7살짜리 한족어린애는 수석이라는것이 이런것인가며 퐁퐁 뛰여다니다가 수석이 재미난다고 야단이다. 수석전시청에는 오후에도 내내 손님들이 그칠줄 몰랐다. 전시회 소식 듣고 훈춘에서 달려왔다는 리범화는 10점의 수석을 내놓으며 전시회에 출품할수 없는가고 청들었다. 이번 제1회 두만강 수석전시회—연변수석문화의 대잔치는 8월 말까지 계속 전시를 이어가게 된다. (2006년 6월 8일)
56    【뉴스】제1회 두만강수석전시 완료 댓글:  조회:4163  추천:101  2006-06-07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 완료 리 함 래일 6월 8일에 열리는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준비가 원만히, 깨끗이 완료되였다. 오늘 두만강문인수석회의 회원들은 저마다 소장한 수석을 갖고 연변박물관 2층홀에 모이였고 하루동안의 긴장한 준비를 거쳐 수석전시를 마무리했다. 어제 전시회장소정리와 준비에 있은 계속이였다. 도문에 주문한 30여개의 좌대와 수석도 전문차로 가져와 수석전시회의 순조로운 진행에 한몫을 했다. 연변박물관에서 수석전시회의 모든 후근준비를 맡아나섰다. 래일의 수석전시를 위해 박물관에서는 오늘 밤도 쉬지 않고 필요한 전시준비를 다그치고있는 중이다.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는 래일 6월 8일 오전 10시반에 연변박물관에서 원 계획대로 개막식을 갖게 된다. (2006년 6월 7일)
55    【탐석기】가야하에서 주은 산수수석 댓글:  조회:4138  추천:108  2006-06-04
【탐석기】 가야하에서 주은 산수수석 두만강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살아가노라면 여러가지 취미생활로 삶을 풍부히 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수석취미는 고상하고도 품위있고 멋진 취미여서 삶을 더 이채롭게 해주는것 같다.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김대현씨, 김봉세씨 등이 수석에 푹 젖어버린 수석인들이다. 수석을 떠나선 생활의 의의를 잃는다는 그네들은 5월 28일 여느떄와 같이 가야하탐석길에 올랐다. 물론 필자와의 동행길이다. 이날 따라 희스레한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때이르게 덮쳐든 무더위를 막아주어 탐석행이 좋았다. 연길에서 뻐스로 석현까지, 석현에서 택시로 삼도구에 이른 우린 삼도구 다리목에서 하루 탐석행의 첫걸음을 떼였다. 삼도구는 서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가야하와 왕청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치여 동남으로 빠진다 하여 생겨난 이름인데 이 구간 가야하물곬엔 신작로다리와 철교가 병행하여 나란히 뻗었다. 여기 웃 산지대에 만천성땜이 수축되고 발전(發電)의 수요로 물길이 산을 뚫고 하목단촌으로 빠지는데서 삼도구구간은 강물이 개울물 같아 탐석지로서는 리상적인 구간이 아닐수 없었다. 헌데 동으로 공로교를 지나 철교밑에 이르니 어디라 없이 큰물의 충격이 력력하다. 강에 고기발을 놓는 당지 로농과 물으니 바로 며칠전 소낙비로 신흥, 대감자 쪽으로 쏟아져내린 신흥골물이 물사태를 이루어 말이 아니였다고 한다. 삼도구로 보아 물피해는 눈에 띄이지 않는데 수석인들로 말하면 얻기 어려운 기회였다. 사품치는 강물이 돌밭을 휘딱 번져놓아야 파묻혀진 수석들이 새로 얼굴을 내밀기때문이다. 철교아래 합수목가에 과연 새로운 돌밭이 펼쳐졌다. 흥이나 강물을 철벅거리는데 오석류의 큼직한 돌하나가 소인을 기다리고있었다. 급기야 강돌을 번지고보니 괜찮게 《썩은》 오석이다. 썩었다는것은 물에 잘 수마되면서 기이하게 생겨났다는 말이 되는데 뒤따른 김봉세씨는 가야하에서 이런 류의 수석을 탐석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무거움을 지니고 탐석할수가 없어 강가 버드나무밑에 감추어놓으니 벌써부터 기분이 둥둥 뜬다. 그 기쁨을 안해한테 전화로 전하였다. 첫 구간 다리목지대를 떠나고 강구비를 도니 강따라 길게 뻗은 돌밭이 펼쳐진다. 이날 탐석의 목적지였다. 첫 지대 돌밭은 홍수에 잠긴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지만 돌밭이 바뀌지는 않았다. 김대현씨가 첫 지대 돌밭을 훓는사이 필자는 강물에 발을 잠그며 수중돌에 눈을 박았다. 판단은 적중하였다. 첫 지대 돌밭아래 물가는 큰물에 의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산》이 둘러박힌 평원석이 새로 발견되였다. 청석류에 석질 또한 좋아 나무랄데 없으나 보기 흉하게 금이 간것이 맘에 걸리였다. 물에 말끔히 씻어 이모저모로 연출해보다가 결국 아쉬운대로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기분만은 좋기만 하다. 큰물이 지나간 뒤에 뜻밖의 수석이 나타날수 있기때문이다. 남으로 길게 뻗은 돌밭은 그 아래바위구비에 이르러 동강나고 강물은 흐름을 서쪽으로 바꾼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와지는 시점이라 셋은 바위구비 물가에 점심도시락을 풀었다. 김대현선생이 곰취요, 드릅따위를 한구럭 꺼내놓으니 선생과 봉세씨가 내여놓은 약주가 저절로 넘어갔다. 그래서 나이들수록 토장에 산나물에 보다 집착한다고 하는걸가. 문인들의 시선에 강건너 절벽바위중턱에 피여난 진달래꽃이 비쳐온다. 가는 봄과 더불어 진달래꽃이 지나간 시절에 바위가의 소나무아래 소담히 피여난 진달래꽃이 그리도 정겨울수가 없다. 마치도 가야하 탐석행에 나선 우리를 보고서야 가겠다고 고집스레 마지막 고삐를 늦추는것만 같았다. 하목단촌구간은 오석이 가끔 출몰하는 지대다. 여기 돌밭은 새 아스팔트닦기에 들리여나가 탐석지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저 지나칠 곳은 아니였다. 아니나 다를가 큰물이 지나간 강가 몇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돌밭자리에서 잘 썩은 청석류의 수석 한점이 탐석되였다. 가야하물에 헹구어보니 가야하에서는 얻기 어려운 산수경석 수석이다. 앞뒤가 모두 잘 썩었다면 앞면은 벼랑형 산봉우리고 그 기슭가에 못까지 생겨나 제법 그럴사한 수석이다. 김봉세씨는 가야하에 이런 수석이 발견된다는것은 드문 일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 하루가 어떻게 흐른지도 모르겠다. 가야하탐석 수년만에 한다하는 수석 한점 주어들었으니 역시 올해 2006년은 석복이 따르는 수석의 해인것 같다. 김대현씨와 김봉세씨가 필자의 수석보다 나은 수석을 탐석하지 못해 못내 미안하여 으썩할수가 없었지만 둥둥 뜬 기분은 내내 가라앉지가 않는다.
54    【속심의 말】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댓글:  조회:3935  추천:109  2006-06-03
【속심의 말】 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두 만 강 벌써 5월도 막가고있습니다. 6월이 시작되면 한 여름의 땡볕이 열기로 번지여 그 열기를 그대로 토해내는 돌밭에서의 탐석은 사실상 불도가니 고역으로 되기에 연변에서의 탐석의 황금계절은 따스한 봄날과 서늘한 가을인줄로 압니다. 이 점을 너무도 잘알고있는 수석인들이기에 봄날의 탐석을 다그쳤더니 그에 못지 않게 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기회는 항상 준비되여있는 자에게 찾아든다고 석복도 마찬가지 도리겠지요. 지난해는 그대로 변화없는 돌밭이요, 고갈된 돌밭이라 수석다운 수석 몇점을 줏지 못하고 흘러보냈습니다. 새로운 탐석지를 찾음이 없이 다니고 다닌데를 또 찾으니 석복이 따르지 못할밖에요. 돌이켜보면 올해 봄이후 지금까지 신들메를 조이고 배낭지고 탐석에 나서본것은 다섯번인가 봅니다. 5일이라는 말이지요. 헌데 3월 24일 첫 탐석과 4월 하순의 탐석, 5월 2일의 탐석까지 망라하여 세차례에 걸치는 탐석 모두가 늘 다니는 왕청 가야하 구간이 아니면 두만강 삼합~개산툰 구간이여서 그럴만한 수석을 탐석할수가 없었습니다. 약간의 소품만 손에 쥐였을뿐이구요.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날을 잡으며 다닌들 시간과 체력과 돈만 팔게 되지요. 새 탐석지, 그것도 수석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데를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중 석복이 조용히 찾아들기 시작하더군요. 4월 6일 고구려 옛 장성의 동쪽구간 시발점을 찾아 연길시 청차관~성자산사이 답사에 나섰다가 성자산과 욕지산사이 동쪽어구 골안물가에서 우연히 조선족 버선모양의 수석 한점을 주어들게 되였습니다. 탐석행이 아닌 답사의 길에서 말입니다. 그때의 기쁨을 이루다 말하기 어렵군요. 올해 처음으로 주은 수석이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5월 3일에는 이진숙원장 등 여러분들과 함께 화룡시 남평 송전에 갔다가 운이 좋게도 바랄수도 없었던 중국지도—《신주대지》 문양석을, 5월 16일에는 연변텔레비 문예부기자들을 안내하여 연길시 서북쪽 평봉산 남쪽기슭에 진달래촬영을 갔다가 고대그리스의 비너스를 방불케 하는 원시조각형의 수석—산석 한점을 주었지요. 세번 모두가 탐석행이 아닌 력사답사길이나 려행길, 안내길에서 우연히 주어들게 된 석복이였습니다. 버선모양의 물형석을 제외한 중국지도나 고대비너스—원시 조각형은 진짜배기 명석이였지요. 석복이 터져도 크게 터졌습니다. 복은 쌍으로 온다고 연속성을 보여주었습니다. 5월 3일 남평 송전에 갔다가 새 탐석지를 발견한후 5월 17일과 5월 19일 련속 두번 김봉세씨, 김대현선생 등과 더불어 처녀지개발에 나섰더니 수석풍년이 들었습니다. 탐석행 5일에 답사려행길 3일—8일간에 엄청 크기의 구멍수석 두점과 버선목형 한점을 제외하고도 명석들인 중국지도, 고대비너스형 두점과 표준형 문양석 한점, 괜찮은 구멍수석 세점 등 6~7점을 주었으니 진짜 만풍년입니다. 우리 수석인들로 말할 때 한해 이쯤의 탐석수확이면 대단한 수확으로 보아야겠지요. 지난해는 한다 하는 수석한점 줏지 못했음을 대비할 때 더욱 그러한가 봅니다. 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올해 봄날과 초여름에 벌써 한해 탐석목표를 넘쳐완수했으니 진정 복 받은 올해의 수석인이겠지요. 깊은 감수라면 욕심을 버리고 느슨하게 림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처녀지를 탐색하며 부지런히 뛰고 또 뛰여야 한다는것입니다. 석복은 스스로 찾아들지 않습니다. 석복은 자기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지식으로 당겨와야 하지 않을가요!!! (2006년 5월 23일)
53    【명석소감 】뒤늦게 공개하는 희귀수석-신주대지 댓글:  조회:4714  추천:113  2006-06-02
【명석소감 】 뒤늦게 공개하는 희귀수석—신주대지 두만강 수석입문 6~7년사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뜰수 있는 명석 두점을 갖고있어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릅니다. 수석인이라는 놈한테 일생일석에 견줄 명석 한점 없다면야 어찌 뜬다하는 수석인이라 하오리오, 유감이라면 이 두점 명석이 두만강이 살짝 빠진 구수하가 아니면 륙도하 산지여서 그렇더니만 요즘은 두만강 명석하나가 더 늘어 흐뭇하기만 합니다. 생일달과 날에 따라 수자 《3》을 선호하는 나에게 한다하는 진짜 명석 세점이 생기였으니 나는 복받은 수석인 같습니다. 하다면 선호수자—《3》을 이루는 희귀수석은 무엇이고 언제 주었는가고요? 말하자면 참 한국인 이진숙녀사부터 떠올려야지요. 한국인으로 불리우는 이진숙녀사는 현재 연변대학 민족문화교육원 한국측원장에, 한연직업기술학교 리사장 겸 원장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중국에 온지도 15년이나 난다고 하는데 연변대 민족문화교육원도 사재 등을 털며 뜻 있는 여러 분들의 힘을 합쳐 인민페 수백만원으로 일떠세운것이라 합니다. 지난해 여름이후 인연이 닿았는데 지난 5월 13일에는 나와 집사람한테 중국조선족사회의 첫 중년부부 새 결혼식으로 되는 《무료결혼식》을 치러주기까지 했지요. 어때요, 이만하면 이진숙녀사의 형상이 어느 정도라도 떠오르나요? 이 짧은 글에는 스쳐지날수밖에 없음을 먼저 밝히는바입니다. 이런 이진숙녀사님—원장님이 5월 2일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5월 3일 두만강가 남평의 송전으로 가는데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이 사람은 만사불구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두만강가 화룡시 남평진 송전마을에는 몇해전에 지은 이진숙녀사의 별장—조선족귀틀집과 땅마지기가 있습니다. 가고보니 송전마을인데 자가용 두대에 7~8명이 탄것 같습니다. 송전에 이르니 점심시간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나는 사례의 말씀 올리고 다짜고짜 두만강가로 나가보았지요. 아니, 나는 놀랐지요. 놀라도 크게 놀랐답니다. 송전마을앞 두만강가에는 대면적의 돌밭이 펼쳐져있었으니 말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별반없는 시점이라 말 타고 꽃구경식으로 부랴부랴 돌아쳐야 했습니다. 헌데 이 시간에 비하면 돌밭은 엄청이나 컸습니다. 돌들은 수석으로 말하면 쓸모가 적은 희스레한 돌이고 화산곰보돌이 가끔 섞이여 수석산출이 명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돌밭이 아닙니까, 연길수석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숫처녀지지요. 나는 구두를 신고말고 길고긴 돌밭을 휙 돌아보았습니다. 처음에 들어선 돌밭어구에 이르러 어딘가 떠나기가 아쉬워 주밋주밋하는데 글쎄 중국지도모양으로 된 수석한점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지 않겠습니까. 숨을 가다듬고 바로 두손을 가슴에 모아 의 은총에 천배백배 사례하고 주어드니 희귀수석 중국지도였습니다. 희스레한 돌에 초록색으로 된 문양석 수석이였지요. 두만강물에 씻어보니 무늬를 이룬 초록색은 반짝반짝 빛나고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나에게 수석 3을 이뤄주는 두만강 수석—중국지도 명석을 줏게 되였습니다. 별장에 돌아와 손님들에게 보였더니 이구동성이 중국지도,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보여도 중국지도, 글쓰기에 나선 10여명 초중생들에게 물어도 첫마디가 중국지도, 문인수석회의 동호인들에게 보여도 역시 중국지도—명실공히 금닭을 상징하는 중국지도, 내가 알건대 중국에 몇점뿐인 중국지도형 수석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두만강문인수석회의 리흥국회장은 중국지도이니 《신주대지》라 이름지으면 좋겠다며 6월에 전시되는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의 간판수석으로, 그것도 공화국 오성붉은기와 같이 출품하자고 했습니다. 오늘이나마 뒤늦게 공개하는 두만강 희귀수석—신주대지, 하늘의 은총에 감사하고 두만강에 감사하고 이진숙녀사님께 감사하고 여러 수석인들께 감사합니다. 나는 복받은 수석인입니다.
52    【명석소감】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 한점 줏고서 댓글:  조회:4018  추천:109  2006-06-01
【명석소감】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 한점 줏고서 리 함 이 세상 수석인들에게는 석복이란것이 있고 사람에 따라 석복이 다르다고도 하지만 나란 놈은 수석과 천생연분이 있는것 같다. 석복이 따른다는 말인데 생각지도 않고 탐석행도 아닌 평봉산아래 옛 유적지에서 고대희랍, 즉 그리스로 통하는 비너스형 수석 한점을 주었으니 석복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이달 5월 16일은 몽골 동부지역과 화북지역 열파의 영향으로 온 연변이 때이르게 찾아든 무더위로 시달리던 두번째 날이다. 무더위가 싫어 두문불출하고 글이나 쓰려는데 오전 8시반경에 석우 김학송씨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봉산 아래 있다는 진달래밭으로 가보지 않겠느냐는 청탁전화였다. 글이나 쓰련다고 잘라버렸더니 한참후 다시 전화벨소리가 들리였다. 역시 김학송씨의 전화이고 연변텔레비 문예부의 요긴한 사항이라고 한다. 《아 참 들볶는다니깐. 별수 없지.》 《언녕 그래야지!》 둘은 허물없이 찧고 받았다. 같은 문인인데다가 하나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부회장이요, 하나는 사무국장인 석우관계이니 서로 간격이 필요없었다. 결국 뒤따른 기자취재차에 앉아 연길시 의란진 대암촌 서남쪽에 펼쳐진 평봉산아래 진달래밭으로 출발하고말았다. 취재차에서 수인사를 나누고보니 취재팀일행은 연변텔레비 문예부의 주금파씨와 리상호씨 그리고 텔레비 얼굴인 아나운서 김춘희씨였다. 일전에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에서 펼쳐진 진달래축제를 축으로 진달래축제전문프로를 준비중인데 무언가 모자라는것 같아 우리 조선족시인이 진달래밭에서 시를 읇으며 아나운서와 주고받는 장면 30초짜리를 찍는다는 그들이였다. 시인으로 뽑힌것이 김학송석우요, 시인이다. 알고보면 일은 묘하게만 돌아간다. 지난 겨울에 연우산악회 평봉산산행시 고구려 옛 장성 돌성벽을 발견한후 평봉산과 대암일대를 수없이 다녀왔다. 샅샅이 답사했다는 말이 되겠다. 와중에 소택지에 바위돌로 덮힌 옛 물동자리를 발견했는데 연변의 새로운 풍경구여서 5월 7일 5월의 황금주기간에 가족여행을 나서보았다 워낙 연변 1중에서 공부하는 쌍둥이 딸 생일날인 5월 4일에 떠나려다가 겹쳐드는 행사로 5월 7일에야 겨우 시간을 냈는데 이날 상상외로 평봉산 남쪽아래 구간에서 보기 드문 대면적의 야외진달래동산을 발견하게 되였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평봉산에 다니는 10년 경력의 산행인들도 모르는 진달래동산이여서 산행인이고 석우들인 두만강문인수석회의 중견 인물들과 터놓았더니 가보자고 야단들이다. 그중에서도 원 연변방송텔레비 총국국장이고 현임 자치주 심계국국장,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회장인 리흥국씨가 더욱 극성이다. 그래서 5월 11일, 리흥국씨의 알선으로 리흥국, 김대현(원 연변방송국 부주필), 김철학(시인, 연변시조시사 사장), 필자 등 넷은 리흥국씨의 전용차에 앉아 대암 서남쪽의 진달래동산을 돌아보았다. 사진촬영에 조예가 깊은 리흥국씨는 숱한 진달래사진을 찍어냈다. 5월 15일에 다시 진달래동산의 안내자로 나섰다. 그러던 5월 16일에는 또 김학송시인한테 붙들려 텔레비기자들과 동행하게 된것이다. 생각밖으로 기자취재차는 울퉁불퉁한 구릉길을 들추며 평봉산 남쪽 말 무덤산 아래에까지 갈수 있었다. 정차지에서 동북쪽 따라 조금 내려가면 진달래밭인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초원 방목지에는 화산체 옛 막돌들이 가득 널리였다. 어느 찰나 나의 시선에는 땅에 박힌 우묵한 돌하나가 비껴들었다. 수석인의 눈길은 속일수 없었다. 파내고보니 고대그리스 조각품—비너스를 방불케 하는 수석 한점이다. 보라, 사람의 웃몸형 물형석인데 가슴부위가 움푹 패워들었다면 두팔이 떨어져나가고 머리가 잘라져버린 인체가 아닌가! 비너스수석을 원지에 두고 텔레비기자들을 안내하여 진달래밭에 갔지만 메새가 수풀을 그리워하듯이 나의 마음은 온통 비너스수석에 쏠린다. 귀로에서 김학송시인한테 자랑했더니 어서 가보잔다. 김학송씨도 보더니 괜찮은 수석이라며 언젠가 평봉산일대서 원 연변일보사 부주필 장정일씨가 줏고 애지중지하는 산석보다 낫다고 한다. 그 평이 감사하지만 학송씨는 이 수석이 고대원시 조각품형수석이라는것은 미처 보아내지 못한것 같았다.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한점은 이렇게 우연한 구릉지에서 우연한 기회에 필자의 손에 쥐여졌다. 귀가후 말끔히 씻어보아도 천여년의 풍상속에서 굳어져버린 흙먼지를 지워버릴수는 없었다. 그래도 비너스형 수석임은 틀림이 없어 수반에 올려놓으니 그리스 옛 비너스로 안겨든다. 고대그리스 비너스란 무엇일가? 다행히 나라는 사람은 취미가 다양하여 인류의 라체예술사에 짙은 흥미를 가지고 20여년이나 지궂게 자료를 수집해온데서 이만한 라체예술지식은 갖추고있는터였다. 고대유럽을 망라한 국가들, 회화와 조각에 종사하거나 중시하는 국가들에서는 적라라한 인체가 예술의 중심제재를 이루고있었다. 회화의 극성시기에 라체류의 라상(裸像)은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받들렸으니 실상 헤아리고보면 라상은 고대그리스인들이 기원(서기)전 5세기에 창조한 일종 예술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라체예술사에 눈길을 돌리면 고대그리스에 앞서 원시조각품들이 쏟아져나왔었다. 조잡해보이고 정예하지 못하기는 하나 원시조각품으로 알려지는 동산취여신상(东山咀女神像)이 그러하고 고대인도 원시조각품인 하라파남자조각상이 대표적 일례들이다. 의미있는것은 이 두 원시 조각품들은 각기 남녀상이기는 하나 머리가 없고 두팔이 없는것이라 하겠다. 아니 그뿐인가, 아니지. 고대그리스 력사속에 들어가보면 기원전 5세기의 에이스큐린비너스 녀신상에 두팔이 없고 고대그리스의 생육의 어머니 비너스도 머리가 없고 두팔이 없다. 고대그리스 로마시기 삼미신(三美神)도 머리가 없지 않으면 두팔이 없다. 이런 고대조각품들은 근근히 실례들뿐인데 고대그리스나 고대인도의 허다한 조각품들이 두팔과 머리가 없는것으로 나타난다. 고대인도 조각품인 나무신 약차녀는 두팔과 머리가 없을뿐만아니라 두 젖무덤마저도 패우며 잘리여나갔다. 인류라체예술사로 보는 고대조각품 사례들이다. 인류문명의 발원지인 고대그리스나 인도가 그러할진대 동방의 강국으로 불리운 고구려가 례외일가, 나는 필자의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을 근 2000년전의 고구려 옥저시기로 소급해보면서 인간의 가공이 미친 수석이 아닐가도 느껴본다. 그만큼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은 고대 옛 라체예술조각품을 똑 떼여닮았다. 보면 볼수록 신통하기만 하다. 이런 시공간을 뛰여넘는 환상과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 있기에 수석인은 수석에 울고 수석에 웃는걸가. 우연속에 필연이 있다고 우연과 필연의 결합물인 나의 수석—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 한점, 수석덕에 나는 오늘도 평봉산의 옛 수석을 감상하며 머나먼 원시사회에로까지 거스르는 인류의 라체예술사를 더듬어본다.
51    두만강수석전시회준비 빈틈없이 댓글:  조회:4032  추천:91  2006-05-31
두만강수석전시회준비 빈틈없이 두 만 강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에서는 제1회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준비를 빈틈없이 짜고들고있다. 수석전시회의 관건적인 절차는 수석출품석 확정과 수반, 좌대 준비로 알려진다. 수석은 수반이나 나무로 깍아만든 좌대우에 연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두만강수석회는 이미의 수반, 좌대 토대에서 새로 연출하고저 5월 27일 오전에 연길시 해당 전문판매점에 가서 크고 작은 수반 수십개를 새로 사서 회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5월 28일 두만강문인수석회 부회장 김학송과 리함은 전문차로 도문에 가서 수석에 취미를 갖고 좌대만들기에 조예가 있는 분한테 31점의 수석을 맡기여 두만강수석전시회의 순조로운 전시에 순응해나섰다
50    6월 8일--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댓글:  조회:3801  추천:80  2006-05-31
6월 8일--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두 만 강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를 6월 8일에 연변박물관 2층홀에서 가지기고 합의를 보았다. 이는 5월 26일 저녁, 두만강문인수석회와 연변박물관의 관장들이 모인 모임에서 결정된 수석뉴스이다. 두만강문인수석회는 연변의 조선족지성인들로 무어진 동아리모임으로서 올해 만 2년철을 잡는다. 이날 저녁 모임에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시인, 작가, 학자들인 김대현, 김학송, 김봉세, 김철학, 신철호, 석문주, 리함 등과 연변박물관의 맹철학관장, 한광운부관장이 참가하였다. 연변박물관에서는 두만강문인수석회와의 공동주최로 되는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를 올해 박물관 전문전시회의 하나의 대사로 삼고 틀어쥐고있으며 문건형식으로 주당위선전부와 해당 부문에 널리 알리였다. 제1회수석전시회의 모든 전시준비와 후근사업도 의사일정에 올려놓고 밀고나가고있다. 이번 제1회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는 6월 8일에 개막식을 가지고 6월, 7월, 8월, 9월 몇달간 계속 연변박물관내에 전시하게 된다.
49    【탐석기】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2) 댓글:  조회:4490  추천:97  2006-05-24
【탐석기】 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2) 리 함 두만강 남평구간 첫날 탐석행에서 송전과 류신구간 세개 돌밭에 미처 이를수 없었다. 그래서 5월 17일에 이어 5월 19일에 남평구간 두만강가를 다시 찾았다. 5월 19일 탐석행은 필자와 김봉세씨만이 아닌 김대현선생과의 3인행이였다. 김대현선생은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고문이고 원 연변방송국의 부주필로서 지난 1990년부터 수석에 남다른 짙은 취미를 느끼고 배낭을 지난채 강 따라 산 따라 연변의 산천을 누비며 다니지 않은곳이 없는 분이다. 고향이 당년의 화룡현 서성구 이도촌이고 어린시절을 연변의 미츄린으로 불리운 최일선외할아버지댁—명암촌 과수원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낸 김대현선생은 뻐스가 오늘의 서성진 명암촌구간을 지나칠 때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을 보이였다. 화룡태생인 필자와 그의 제자 김봉세씨는 명상에 잠긴 의미를 쉽사리 읽어낼수 있었다. 화룡뻐스부에 이르러 우린 남평행 택시를 바꿔탔다. 이틀전 탐석행에서 택시운전사 야씨를 알게 되고 사전에 련계를 취한데서 택시는 이미 뻐스부에서 대기하고있었다. 또, 택시는 반시간만에 남평진 류신촌구간 두만강가에 이르러 200여리밖에서도 오전 9시 지나 탐석에 몰두할수 있었다. 화룡시 남평진 류신촌은 남평진에서 동북쪽으로 10여리 떨어진 두만강가의 한 마을로서 이 구간 두만강가에는 송전마을앞에 못지 않은 꽤나 큰 돌밭이 있다. 송전령을 넘는 산중턱길에서 볼 때는 보통 정도의 돌밭으로 보이지만 버들숲사이사이 돌밭까지 이어놓으면 역시 굉장한 돌밭이였다. 셋은 제각기 자리를 잡아나가며 돌밭을 참빗질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첫 시작에 벌써 주먹만큼의 깊은 홈이 패인 수석 한점을 주어들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말랑말랑한 정도 두께로 구멍이 완전 뚫리지 않은 상태였다. 손에 쥐이는 돌로 뒤면을 때리니 닭알모양의 구멍이 펑 뚫리였다. 수석은 가공을 허용하지 않는 대자연의 걸작이라고 하지만 인위적부분을 잘 연마하면 집에 두고 감상하기는 무관한 흥미로운 수석감이였다. 실상 이 정도 크기의 구멍수석을 탐석한다는것은 그리 쉽지 않다고 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한식경이 지나 김대현선생이나 김봉세씨도 화산폭발의 산물인 구멍수석 한점씩 주어들었다. 하긴 이 구간 돌밭은 수마(水磨)가 잘되고 검푸른색의 돌들도 가끔 나타났지만 색다른 수석 한점을 탐석한다는것은 여간 쉽지 않았다. 정신과 체력의 소모였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우린 탐석지를 류신촌에서 10리가량 떨어진 동쪽구간의 룡연촌에 옮기였다. 택시를 세내니 10리쯤 거리는 잠간이였다. 룡연촌을 앞두고 두만강 제방뚝이 마을밖으로 크게 에돌아 있어 그리로 택시가 들어섰더니 갈수록 심산이라고 풀과 애어린 나무들이 자라있어 되돌아서야 했다. 할수없이 룡연촌구간을 포기하고 그 아래마을 룡연 6대에 이르러서야 탐석에 림할수 있었다. 그곳도 돌밭은 괜찮았겠으나 두만강 모래밭에서 철분을 채집하느라 어수선한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말이 아니였다. 그래도 수석과는 천생연분이 있는지 괜찮은 구멍수석 한점을 주어 명분이 서게 되였다. 김대현선생도 물이 고일수 있는 수석 한점을 주어들고 싱글벙글한다. 택시는 다시 한때 이름이 뜨르르했던 원 용화향 상화촌 구간을 달리였다. 역시 룡연에서 10리쯤 되는 거리라 잠간새에 이르렀는데 두만강가에 돌밭이라 할수 있는 곳이 두어곳 되지만 수석과는 거리가 먼 대자연속의 한낱 돌밭에 불과했다. 상화 5~6대인가 마을 동쪽아래 크게 후미진 절벽구간과 그 굽이돌이는 거리상, 시간상 갈수 없는 구간이라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부지런히 하루길을 달리기만 하던 해님은 어느덧 오후 종심에로 육박한다. 두만강구간의 더 이상의 새 탐석지는 무리였다. 택시는 우리의 뜻에 따라 워낙 스케줄로 잡혔던 상화⇒ 고령⇒화룡행 귀가길을 버리고 방향을 돌려 다시 두만강가 류신구간에 들어섰다. 거의 오전내내 탐석하던 곳이라 새 수석이 나질리가 만무했다. 인젠 하루 탐석일지를 접을 때도 된것 같았다. (2006년 5월 23일)
48    【탐석기】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1) 댓글:  조회:4383  추천:100  2006-05-24
【탐석기】 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1) 리 함 5월 15일과 16일 이틀간 온 연변은 때이르게 찾아든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했으나 그에 앞서 화룡시 남평진 송전구간 두만강 돌밭에서 우연히 신주대지— 중국지도 문양석 한점을 주은 필자는 진정할수 없었다. 5월 17일, 떄이른 무더위 사흩날에 필자는 석우 김봉세씨와 더불어 두만강 남평구간 처녀지 탐석행에 나서보았다. 해란강이 심장지대를 흐르는 연변의 곡창지대 룡정 세전이벌과 화룡 60리라 평강벌은 벼모내기가 금방 시작된 참이라 전야는 들끊는, 약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있었다. 연길-화룡행은 76킬로메터라지만 중형뻐스는 세전이벌, 평강벌을 누비며 빨리도 달리여 한시간만에 우릴 화룡뻐스부에다 부리웠다. 오전 8시 남평행뻐스가 이미 떠난데서 택시를 잡아타야 했는데 남평까지 근 100리길 택시비는 일인당 15원에 불과했다. 화룡은 우리 둘의 고향이라 내 고향으로 달리는 두만강 첫 탐석행은 신나기만 했다. 택시가 화룡시가지를 벗어나고 우심령을 넘어서자 김봉세씨는 벌써부터 흥분에 젖어있었다. 알고보니 봉세씨는 1990년에 화룡을 떠난후 16년만에 우심령을 다시 넘어보는데 우심령너머 차장자는 그가 한때 소학시절을 보낸 잊지 못할 고장이였다. 택시가 우심령 서쪽기슭 고산촌을 지나고 차창자구내에 들어서자 김봉세는 이런 얘기를 터놓았다. 김봉세씨는 아버지가 현림업계통에서 사업하다가 차창림산작업소 업무소장으로 전근한데서 가족과 함께 화룡현성을 떠나 차창자로 이사하게 되였다. 지난 60년대초라고 하니 봉세씨는 소학교 저급학년시기를 차창소학교에서 보내게 되였는데 그때까지만도 차창자일대는 말짱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아담한 고장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차창자는 온통 한족들뿐이라며 개탄해마지않았다. 그것도 산동 등지에서 모여든 한족이주민들이 꼬드개로 넘친 초원지대를 개간하고 오늘의 마을을 일떠세우고 밭들을 개간했으니 그 개척정신이 우러러 보인다고 동을 달았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사이 택시는 숭선과의 갈림길과 신흥동, 선경대풍경구를 지나고 흥진, 류동, 추전, 류신촌 구내, 송전령을 너머 송전구간 두만강가에 이르렀다. 송전촌은 남평진의 한개 행정촌으로서 남평서 동으로 10리쯤 떨어진 고장인데 20여세대가 오붓이 모여살던 마을이 지금은 3세대쯤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 두만강가에는 크나큰 돌밭이 생겨나 리상적인 탐석지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그것도 5월 3일 남평송전행에서 발견했으니 연길의 수석인들로 말하면 그야말로 황금의 처녀지와 진배없었다. 수석인들의 눈길은 무서운가 본다. 5월 3일 행에서 두루 한바퀴 돌아보았는데 두번 다시 수석다운 수석을 손에 쥘수 없었다. 점심을 이곳 돌밭에서 거르고나도 옹근 오후시간이 남아 우린 송전 동쪽아래 바위구비로 탐석지를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바위구비로 두만강물이 출렁이며 흐르는데서 산등성이를 타야 했지만 나무숲 우거지고 진달래꽃 가담가담 피여있는 산등성이 길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었다. 연길이나 화룡의 산들은 이자 푸른 옷을 갓 입기 시작하는데 산들로 막히여 기후가 따뜻한 두만강반은 온통 완연한 푸른단장이다. 야산 같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에돌아내리고 벼랑바위구간을 지나 두만강가로 나아가니 눈이 뒤집혀질 지경이다. 송전마을앞 돌밭이 크다했는데 여기 바위구비구간은 그 몇배나 클것 같았다. 둘은 신바람 났다. 쨍쩅 내리쬐이는 땡볕도 우릴 나무그늘로 이끌지 못했다. 두어시간사이 필자는 표준형 문양석 한점과 구멍난 화산분출돌 몇점을 주었다. 그중 구멍수석 두점만 보아도 한점은 구멍이 닭알만큼이나 통쾌하게 뚫린 수석, 집에 두고 감상하기는 흥나는 수석이였다. 김봉세씨도 구멍수석 한점과 아라비야수자 《1》자가 박힌 보기 좋은 수석 한점을 주어들었다. 희스레한 돌밭천지에서 괜찮은 수석 몇점을 주었다는것은 일대 기문이 아닐수 없었다. 처녀지는 처녀지였다. 오후 시간이 흐르며 비구름이 몰키고 비방울이 떨어졌지만 우리 두 수석인은 처녀지를 떠날줄 몰랐다. 늦어서야 핸드폰으로 택시운전사 야씨와 련계하니 운이 좋게도 택시는 숭선갔다가 남평으로 돌아오는중이였다. 남평에서 화룡까지 택시비 일인당 10원, 250리쯤의 왕복 전체 로비는 120원—참으로 해볼만한 두만강 남평구간 처녀지 첫 탐석행이였다. (2006년 5월 22일)
47    【시】 수석을 주었습니다 댓글:  조회:4237  추천:89  2006-05-11
수석을 주었습니다 김 철 학 —2006년 4월 27일 오전 10시 무렵에 김학송, 석문주 시인과 함께 도문시 석현진 가야하강변에서 《고구려벽화》한폭을 방불케하는 기묘한 수석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수석을 《고구려벽화》라고 이름을 지었다.더 이상 평범할수 없는 고향의 강가에서신비로운 대자연만이 만들어 놓을수 있는 수석이라 불리우는 당신을 주웠습니다.순간, 당신의 억만년이 내 가슴을 진동합니다. 이 세상을 본후 처음 당하는 황홀경이 아닙니까.어쩌면 《고구려벽화》가 이리도 생동합니까. 동방제국 고구려의 장한 기백이 요동칩니다. 더할나위 없이 행운스럽게도 내 혼령은 당신과 더불어 억만년을 꿈결같이 보낼겁니다. 아닙니다, 인간들이 수자로 기록해 놓은 만년, 억만년하는 세월따위가당신과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그저 이 한가지만을 고집하고 싶습니다. 신비로운 대자연만이 만들어 놓을수 있는 수석이라 불리우는 당신을 주었습니다.우주와 함께 영원할 《고구려 벽화》입니다. 이제부터 당신과 소리없는 대화를 나누며핵폭발같은 엄청난 흥분과 감동을평생을 두고 고이 잠재우렵니다.
46    【인물스케치】김철학님 하마트면 쓰러질뻔 댓글:  조회:3563  추천:96  2006-05-11
【인물스케치】 김철학님 하마트면 쓰러질뻔 두 만 강 어제 5월 10일 오전이다. 시인이고 수석인인 김철학님은 두만강수석회의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리함 등과 더불어 수석전시회 전시청 보러 연변박물관에 갔다가 금방 주운 문양석 수석소품 한점을 내보였다. 서로 돌려가며 보다가 리흥국회장이 부주의로 딴딴한 콩크리트 바닥에 떨구게 되는 찰나 김철학님은 낯색이 하얗게 질리며 하마트면 쓰러질뻔 했다. 그럴만한 김철학님이였다. 다가온 봄과 함께 지난 4월 27일 오전에 김철학님은 김학송, 석문주 시인과 더불어 도문시 석현진 구간 가야하에 갔다가 《고구려벽화》 한폭을 방불케하는 그럴듯한 문양석 수석소품 한점을 줏게 되였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고구려 벽화를 똑 떼여 닮았다. 수석경력 2년째에 내놓을만한 수석한점 바로 줏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김철학님은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그날밤은 잠못 이루는 밤이였다. 석문주시인의 묘사를 빈다면 《까만밤 하얗게 지새우며 내처 흥분했다.》는 김철학님이다. 그래서 요즘 실없이 웃음이 많아진다는 김철학님은 《나 이돌 10만원 아래엔 절대 안팔아!》하며 흥분하기에 이르렀다. 김철학—수석경력 2년째에 늘 부진을 면치 못하고 고스란히 후배역에 충실해야 했던 님이라 십분 리해가 간다. 오죽했으면 《천마를 메운 전차를 탄 장수가 위풍스레 돌진하니 질겁한 룡이 긴 꼬리를 하늘높이 꾸불떡거리며 도망치려 하고있을뿐만아니라 그앞에 섰던 하늘나라 개도 혼비백산하여 빳빳히 꼬리를 추켜들고 덩달아 줄행랑을 놓으려 하고있다.》고 고대벽화 내용설명서까지 정리하고 《수석을 주었습니다.》서정시까지 써냈을가. 그래서 요즘 내처 흥분하고 실없이 웃음이 많아진다는 김철학님인데 애지중지하는 《고대벽화》가 콩크리트바닥에 떨어지니 어찌 낯색이 변하며 가슴이 철렁하지 않겠는가, 그러는 김철학님을 두고 일행은 박장대소했다. 김학송님과 필자는 배를 그러안고 웃어대며 빙글뱅글 돌아갔다. 다행히 《고대벽화》는 명이 질기여 티끌하나 손실보지 않았다. 아니면 김철학님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일어나지 못했을것이다. 한점의 수석 《고대벽화》로 웃음주머니 흔들흔들하는 김철학님—올해 수석 대운이 트소서!
45    【뉴스】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수석 알려지다 댓글:  조회:3976  추천:102  2006-05-10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수석 알려지다 두만강 5월 10일 오전, 두만강문인수석회의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리함, 김철학 등은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의 안내하에 연변박물관에 모여 전시청을 돌아보고 회원들의 댁을 방문하여 전시수석품을 최종점검, 전시수석품이 드디여 알려지게 되였다. 오전내내 잔잔한 비가 내렸지만 일행은 내내 흥분속에 잠기였다. 비속에서 이들은 리흥국회장댁, 김학송부회장댁, 리함비서장댁, 김대현고문댁을 순회하면서 100여점의 연변내 특색있는 수석을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에 전시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수석이 내부로 알려졌다. 세상과의 만남도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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