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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왕청에《천리마》가 많은데는《백락》이 있기에 댓글:  조회:7814  추천:4  2014-11-25
근년에 왕청현에서 김정일(현민정국 부국장으로 국가민정부 상 획득), 오기철(배초구진 봉림촌 촌주임, ), 최광일(왕청현공안국 교통경찰대대 도시구역중대지도원, 전국 ) 등 국가급 모범인물이 련속 나타나 이들을 따라 배우는 활동이 한창이다. 《빈곤현》으로 불리우는 편벽한 왕청현에서 륙속 《천리마》가 나타난다는것은 실로 대단한 일로 이는 왕청현에 《백락》이 있다는것을 말한다. 백락(伯樂)은 중국 춘추시대의 유명한 말 감정가로서 아무리 뛰여난 명마라고 해도 백락의 감정이 없으면 명마로 알려 질수 없었다. 어느 하루 한 축농이 백락을 찾아가 자기의 말이 팔리지 않는다며 한번만 봐 달라고 부탁했다. 백락이 그냥 지나다 다시 한번 그 말을 돌아보자 그 말의 값이 당장에서 10배로 뛰여 올랐다고 한다. 필자는 왕청현에 《천리마》가 많은데는 《천리마》의 기질을 발견한 기자, 《천리마》를 제때에 인정하고 따라 배우도록 사회에 호소한 왕청현 당정 지도자들이 《백락》이 됐기 때문이라 하겠다. 왕청현에서 조직한 김정일, 최광일 사적보고단에는 연변일보사 기자(부유)와 교통방송기자(송정정)가 보고팀 일원으로 있고 또 《나의 사적이 상급에 반영되지 않기때문에 나는 모범이나 선진인물과 인연이 없습니다. 당원으로서 명예를 따지는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들이 오기철은 충실한 사람이고 당원답다고 말한다면 만족입니다》하면서 10여년간 묵묵히 빈곤지원사업을 견지해온 오기철이다. 왕청현 당위 전임 서기 곽학이가 《오기철은 왕청현 200여개의 촌, 툰에서 가장 우수한 촌간부이다》고 평가하고 2012년 7월, 길림성 당위 손정재서기가 중공중앙 위원이며 중국장애자련합회 당조서기, 리사장인 왕신헌과의 담화에서 《오기철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덕 모범이다》고 소개했다. 당년11월 15일 왕청현당위에서 대회를 열고 오기철사적보고회를 조직, 오기철을 따라 배울데 관한 현당위,현정부의 결정을 발표했다. 지난세기 80년대 필자가 연변일보사 도문 주재기자로 있을 때 도문시교통국 도로관리단의 조선족로동자 고만길이 1986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사품치는 얼음강물에 뛰여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한 사적을 취재했다. 당시 40여일간 고만길이 걸어온 발자국을 따라 근 100여명의 목격자를 만나면서 고만길이 15년 사이에 4차례나 사경에 처한 사람을 구한 사실을 알게 되고 원래 《도문에 살아있는 라성교》라고 단 제목을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로 고쳐서 연변일보에 보도한바 있다. 그에 따라 도문시 당위, 시정부, 주당위, 주정부, 길림성교통청에서는 고만길에게 《자기를 잊고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 《뢰봉학습 우수로동자》등 칭호를 수여하고 고만길을 따라 배우는 열조를 이르켰다. 왕천현에 《천리마》가 많은것에 비춰 필자는 왕청현의 들이 모두 조선족으로 소수민족 《천리마》를 발견한 한족 기자들과 자기 주변의 선진인물을 제때에 발견하는 왕청현지도자들의 《신문열》에 탄복된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다》. 이는 당나라 팔대명시인 한유의 잡설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한유의 잡설 한 단락으로 이 글을 맺는다 이 세상에 백락이 나타난후 천리마가 있고 천리마는 흔하지만 백락은 쉽게 나타나지 않네 고로 명마는 있어도 마구간의 무명말과 같이 죽어가니 어찌 천리마라 불러지랴    
156    인정미가 풍기는 사람들 댓글:  조회:6661  추천:2  2014-11-04
올해에 필자는 도문시 석현진수남촌 신선툰(별명 신선더기)에 있는 약 1000평 가량되는 밭을 가꾸며 잊어지던 농촌생활을 체험하였다. 지난 80년대 말에 오늘과 같은 생각이 없이 우연간에 부인의 이름으로 신선툰의 허름한 초가집을 사놓았는데 집은 이미 허물어져 자취를 감췄고 지난해까지 그 집터를 내가 한번도 보지못한 외지 사람이 다루었다.  그런데도 남들은 오선생이 언녕부터 예견이 있었다며 부러워하는데서 앞으로의 희망성으로 진정 신난다.  하긴 이라는 호적에 언녕부터 입적한 우리 부부라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모습을 보고 지난 70년대 농촌의 제(새벽 3시 출근 저녁 7시 퇴근)를 한다며 탄복하였고 외국에 있는 아들딸들은 일에 미친 부모들이 일에 지칠가봐 걱정하였다. 말이다. 1, 가을걷이를 도와주는 장일천씨   필자는 지난 10월 12일까지 올해 농사일을 끝내고 를 가슴 깊이 느꼈다. 하긴 가 오염이 없는 깨끗한 물, 신선한 공기, 향기로운 풀냄새,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소리는 물론 후덕한 농민들의 인정미가 감미럽고 더욱 좋더라는 것이다. 신선툰의 별명으로 란 산허리에 있는 마을에 늘 시원한 바람이 일고 또한 태양빛이 따사롭다고 하여 붙혀진 별명인데 란 조금 높고 펑한 둔덕, 언덕을 뜻하는 말체이다. 그만큼 신선더기 사람들은 시원한 바람에 인품이 펄렁이고 따사로운 태양빛에 인정미가 무르녹았다. 이 마을에 집체농사때만 해도 근 20호가 살았는데 지금은 당년에 닭, 염소, 젖소사양과
155    추천할만한 일! 댓글:  조회:5887  추천:2  2014-10-27
지금 많은 농촌마을에 출국 및 도시진출로 주인이 없이 방치된 빈집들이 많다. 특히 나라의 새농촌건설지원혜택으로 많은 리향민들이 자기의 고향마을에 새집을 지어놓고도 회향하지 않은데서 새로 지은 집들이 수풀속에서 처량하게 서있기에 촌모, 툰모에 불미를 주고 있다. 이에 비춰 도문시석현진수남촌에서는 새농촌건설의 일환으로 방치되여있는 집들을 관리하고 리용하기 위하여  전면적인 촌민여론조사와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이런 세가지 조치를 제정하였다. 첫째; 당의 새농촌건설의 우혜정책으로 새집을 지운후 지금까지  4-5년간 새집을 비워놓고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집들을 촌에서 국가의 주택건설지원자금을 제한외 개인이 지출한 건축자금의 곱절가격으로 사들인다. 촌에서는 이렇게 사들인 집을 수남촌에 와서 수남촌의 건설에 적극 동참, 기여하려는 사람들에 팔수있다. 둘째: 새집을 비워놓고 아직도 2-3년사이에 돌아 올수 없을 경우 집주인은 매년 2000원을 촌에 상납하여야 햔다. 촌에서는 이금액을 통일적으로 관리하며 전문 빈집관리(정원, 도로, 주변미화, 수로 등 주변환경관리)에 사용한다. 세째: 일차 임대기한을 10년을으로 촌에서  빈집을 임대한다. 촌에서는 임대한 집들을 장식한후 도시 등 외지 사람들에게 으로 임대준다. 지금 수남촌에는 상기 범위에 해당되는 집들이 20여채나 된다. 수남촌의 이한 조치는 상급의 해당부문의 긍정과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0월 17일 석현진 김휘진장은  며  고 당장에서 표시하였다. 필자는 방치된 집들을 관리, 리용하는 수남촌의 작법을 새농촌건설의 일환과 새로운 발상으로 여타 촌에도  보급할수있는 가치있는 사업으로 적극 추천한다.
154    "촌민이 한 명이 있어도 안 된다!"니? 댓글:  조회:6467  추천:2  2014-09-16
당의 군중로선 교육이 한창일 때인 지난 9월 11일, 국가 부장급지도자가 왕청현 모 촌을 찾았다. 그의 이번 시찰은 그가 3년 전에 왔을 때 새농촌건설에 관한 몇가지 거론된 문제가 여실히 시달되였는가를 알아 보려는것이라고 촌민위원회주임이 필자한테 사전에 안민고시 했다. 필자가 근 1 년 만에 가보니 마을의 주거환경, 문화환경과 농업생산 시설이 놀랄 정도로 변했다. 특히 촌민들이 질적 삶을 추구하는 가치관념이 크게 변하였다. 촌민위원회주임의 자랑이다. 이 촌과는 구면이라는 그 지도자가 온다니 촌민들은 반가워서 서로 뒤질세라 명절옷단장을 하고 자체로 춤판을 벌리며 을 메고 오는 백성의 지도자를 마중나왔다.     이 촌의 최년상로인이 아들인양 정답게 지도자의 두손을 잡고 오가는 대화다. 필자는 인민의 공복과 백성간의 허물없는 만남과 주저없는 대화의 장면을 놓칠세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상상외의 일이 뒤따를 줄이야?! 필자가 촌민위원회주임의 이번 행사에 꼭 참가해 달라는 사전의 청탁을 받고 열심히 취재하는데 필자를 찾는 전화가 와서 찾아 갔더니 모 젊은 수행인원이 필자가 찍은 사진을 보자며 며 무릇 그 지도자의 신변에 촌민이 비낀사진은 몽땅 삭제하란다. 면서 말이다.  아무리 일철이라도 자기 집에 오는 손님을 마당까지 마중을 하는것은 최저의 례모인데도 말이다. 하물며 지금은 농한기인데.  (당의 군중로선교육에 지도자의 신변에 촌민이 한명이 있어도 안된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었다. 필자가 국가 부장금지도자와 촌 최년상어른의 다정한 만남을 담은 사진만은 남기겠다고 해도 안된다고, 지도자가 촌민위원회주임의 회보를 듣는 장면(그 장소에 수행한 주, 현의 간부외 촌민은 촌민위원회주임과 최년상로인 뿐임)까지 삭제해 버렸다. 필자는 기자의 신분으로 당지도자들을 찾아 고 질문하려고 하다가 그날의 기분을 고려하여 벙어리가 쓸개를 먹은 격으로 겨우 참았다. 볓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다. 기자를 찾은 그 수행인원을 놓고 말하면 이번 행사를 신문매체에 알리지 말라는 상급지시를 수행하는 그의 사업책임감은 장점으로 긍정되는 반면에 그가 기자들에게 상급의 정신에 비춰 보도에서 주의 할 점을 제시해 주면 될 것을 며 기자들이 남긴 가치있는 사진까지 삭제한(자체로 사진기를 다루며) 한 그의 사업방법은 그가 반성해야 할 단점이라 하겠다. 그래 군중이 없는 당의 군중로선교육이 존재할수 있는가?그래 지도자가 새농촌건설을 시찰하는데 촌민을 멀리한다면 무슨 시찰인가?
153    인간과 동물을 련상시킨 도문의 소싸움 댓글:  조회:5743  추천:4  2014-09-03
《도문호남》은 말밥에 《오바마》는 불복 《연변패왕》은 110을 《인간과 동물》의 저자, 한국 저명한 동물행동학자 최재천박사는 《행복한 동물학자의 삶》이라는 글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자연에서 배운다, 알면 사랑한다.》 그렇다. 화친, 속결, 기권, 불복, 결투, 그리고 이변으로 마무리해 브라질 《월드컵》라고 불린 2014 두만강문화관광축제 도문 제8기《 이동컵》소싸움은 실로 《동물에서 배우고 알면 사랑한다》를 체험하는 소싸움이였다. 련속 6년간이나 도문소싸움을 사회한 《인기사회자》 장소군은 인간에 비춰가며 이번의 소싸움은 치렬한 《영예전》, 《생사전》, 《복수전》, 《금전전》이라며 매 전투에 슴배인 재미있는 사연들을 일일이 곁들면서 관중들의 귀맛에 맛소금을 뿌려줬다. 말밥에 오른 《도문호남》 도문시 월청진 집중촌 4조 손태산(孫太山)네 《도문호남》은 (6살, 체중 850킬로그람, 순번 9호) 손태산이 《도문군사(軍師)》라고 작명한것을 사회자 장소군이 황소의 외모에 따라 《豪男》이라 개명했다. 연변농학원에서 축목수의를 배운 필자의 시각으로 봐도 확실한 《황소호남》이다. 16강전에서 《도문호남》은 별로 힘을 빼지 않고 16강에 올랐다. 《도문호남》이 말밥에 오르게 된것은 싸움이 끝난후 투우장밖에서부터다. 자기집 소가 쉽게 16강에 들었다며 기뻐맞은 손태산의 아들이 자랑스럽게 한창 《호남》을 다독이는데 《호남》이 (그까짓 별것도 아닌데 대중들 앞에서…)라고 생각하는지 불시에 뿌리로 그의 등을 슬쩍 떠밀어 내는 통에 소동이 일어났다. 《보험을 했는가?》,《빨리 병원에 가라!》며 몰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손태산은 명실공히 태산마냥 듬직하게 《아들이 평소에 소와 소통을 하지 않더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냥 나서서 《도문호남》을 만지며 자랑을 했다. 힘에 벅친 《도문호남》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또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내뛰는데서 주인은 사람들이 다칠가봐 자전거를 타고 《9호》를 쫓더라고 목격자들이 말했다. 투우장 관중들의 말밥에 오른것은 8강을 뽑을 때 11호 《오발마(傲發瑪)》(이하 한어 발음으로 오바마로 칭함)와의 결투때다. 투우장 동쪽문으로 좀 먼저 입장한 《도문호남》이 출장준비로 투우장도우미들이 한창 소목바를 푸는데 서쪽문으로 입장한 《오바마》는 위엄으로 대방을 압도하려는듯이 입장하자 청청 하늘에 대고 대성 영각을 하더니 불시에 달려와 돌아선 《도문호남》의 엉덩이를 들이박아 아무런 준비가 없던 《도문호남》이 소고삐를 끌고 내빼는 바람에 진것으로 판정되였다. 《도문호남》은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비명소리를 내면서 우장을 빙빙 돌며 달아 다니다가는 또 분풀이를 맹세하는듯 한참 두 앞발을 바꿔가며 모래땅을 파헤쳤고 때로는 투우장주석단 앞에 가서 주석단을 마중하고 큰소리로 《오바마》의 규칙위반을 공소하며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였다. 《9호는 작년의 억울함까지 고소하느라고 퇴장을 안하고 시위를 합니다!》 붓는 불에 키질하듯 사회자의 설화가 끝나자 《도문호남》은 더욱 기승스럽게 투우장을 빙빙 달아다니며 계속하여 울분을 성토했다. 《투우장에 테러분자가 나타났습니다. 공안일군들이 출동하십시요!》, 《테러분자가 시간을 1시간이상 지체하고있습니다. 투우장은 잡기표현장이 아닙니다!》 빨리 퇴장을 시키라는 사회자의 재삼 되는 독촉에 여러 도우미들이 힘을 합쳐 눈에 쌍불을 켠 《도문호남》을 붙잡으려 했지만 죽기내기로 기승을 부리는 《도문호남》의 기승에 겁을 먹고 몇번이나 잡았던 소를 놓쳐버렸다. 사회자가 투우장을 나서는 《오바마》를 가르키며 《싸우지 않고 이긴 운수좋은 승자》라며 《도문호남》을 《싸담》으로 비기자 전장내는 응원과 격려의 박수소리가 두만강반 일광산에 울려퍼졌다. 불복하는 《오바마》 4강을 뽑는 《연변패왕(1호)》과 《오바마(11호)》의 결투다. 《오바마》(5살, 체중 750길로그람, 축주 장경량, 도문시 장안진 장안촌)는 축주가 《오커마》로 작명한것을 사회자가 또 《오바마》로 개명했다. 《연변패왕》(7살, 체중 900킬로그람)은 몇년간이나 련속 등수에 올랐고 지난해는 2등을 차지한 로장이다. 《연변패왕》이 접전을 하자마자 깜쪽같이 《오바마》를 격패시켰다. 그런데 너무나 순식간이라 실패에 불복하는 《오바마》는 퇴장을 안하고 한참은 선 자리에서 땅을 파헤쳤고 또 한참씩 처량한 소리를 길게 내빼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를 지켜보는 《연변패왕》은 (네딴에 끝까지 달려들어 보라!)는듯이 제자리에서 머리를 더욱 높이 추켜들고 한참씩 으스대다가 다가오는 《오바마》를 마중나가 한참 그의 낯을 핥으며 애무를 하는데 불시에 《오바마》가 또다시 달려드는것을 이번도 왼쪽뿔로 떠박으면서 가볍게 《오바마》를 재껴버렸다. 《1호 승!》,심판이 승패를 공포하고 관중들이 《연변패왕》에게 열찬 박수를 보내자 《오바마》는 또 불복이라는듯 주석단앞에 가서 한창 땅을 파헤치며 대성질호한다. 《오바마》의 불복적인 행위연장으로 간단했던 접전이 30여분이나 지연되였다. 도문소싸움 길림성의 브랜드 이번 소싸움은 볼거리, 얘기거리 결전이였다. 《연변황소는 싸울수록 맹렬하다!》는 주석단의 련속적인 응원방송에 사회자 장소군은 오바마, 싸담, 조선, 로씨야, 프랑스 등 세계적인 인물과 나라들의 전술을 곁들면서 투우장의 분위기를 웃음과 환성으로 들끓게 했다. 이번 결전에서 시간이 제일 빠른 쾌속전이 《무적금강》(8호)과 《화룡호》(15호)의 결전으로 5초간에 결속되였다. 이번 결전에서 시간이 제일 길고 격렬했던 싸움이 《연변일패(一覇)》(10호)와 《비단웅사(非丹雄師)》(13호)의 결전이였다. 둘은 서로 살기 띤 머리를 맞대고 다른 전술이 없이 20여분간이나 밀고밀리며 힘겨룸을 하기에 사회자가 주석단에 고성음악을 방송하라고 호소, 뒤따라 절주 빠른 고성음악을 방송하자 웬걸, 싸우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힘겨름을 하던 《연변1패》가 그만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 바람에 《올해에는 연변1패 주인이 특수코치를 청하여 연변1패에게 좌우측 진공전술을 훈련시켰답니다》. 한창 《연변1패(覇)》를 자랑하던 사회자가 아예 《연변1패(覇)》를 《연변1패(敗)》로 싸담이라고 말을 돌려 골려줬다. 왕청현 배초구의 《동북범》과 《비단웅사》의 싸움은 화친과 고향정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평화전이였다. 도우미들이 긴 대나무대로 아무리 《투사》들의 머리와 목을 밀며 싸우게끔 하여도 서로간 싸울 잡도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자는 《소들이 안 싸우면 축주들의 결투로 승패를 결정하자》고 건의를 한데세 관중들이 《옳소!!》리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흑선풍》(7호)과 《철군1호》(24호)의 결전에서 명실공히 《철군1호》의 《철군》으로 《흑선풍》이 싸우지 않고 이겼고 《연변패왕》(1호)과 《왕청1도(刀)》(5호)의 결전에서 또 명실공히 《왕청1도》의 칼에 찔린데서 사회자가 《110》을 불러 《연변패왕》이 현장치료를 받게 되였다. 이번 쏘싸움은 또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우선 사람들이 4자를 죽을 사(死)라며 4번을 꺼리듯이 이번에 순번 4자가 달린 황소들이 몽땅 패하였다. 4번: 5번 결전에서 4번이, 1번: 14번 결전에서 14번이 졌고 24번: 7번 결전에서 24번이 기권을 하였으니 말이다. 또 이번의 《4강》은 몽땅 순번호가 1호부터 8호 사이에서 산생되였기에 제비뽑기도 인연이나 운수가 따르는가는 생각이다. 이밖에도 이번 《이동컵》에서 뽑힌 《4강》들은 모두 신진들이 로장들의 자리를 몽땅 《이동》시킨 《이동컵》이였고 약팀이 강팀을 꺼꾸러뜨린 브라질 《월드컵》이였다. 월드컵이 세계인들이 함께 즐기는 대축제라면 도문의 소싸움 또한 도문을 세계에 알리는 두만강관광문화 대축제라 하겠다. 그래서 도문시 당위 김기덕서기가 기자와의 담화에서 《도문투우를 국가급, 세계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길림성 해당 부문의 책임자가 《도문소싸움은 길림성이 브랜드다.》고 밝힌것이 믿어진다. 길림신문
152    연길강변에 《건축패왕》이 서다니! 댓글:  조회:6805  추천:4  2014-08-30
연길강변에 세우고있는 《건축패왕》 요즘 연길장년개발회사에서 한창 시공중인 연길청년광장(원청년호)서쪽 《하경광장대천성(河景廣場大千城)》공사장이 말밥에 오르고있다. 《오선생이 연길강변에 고층집을 짓지 말자》는 글을 써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해당 부문에서 들어 주지 않는데…》 지난 8월 13일 《길림신문》 강동춘 특파기자가 대천성공사장을 가르키며 토하는 불만이다. 하긴 필자는 2010년과 2013년에 《연길시 해당 지도부에 건의 한다》, 《연길강변에 제발 를 세우지 말라》는 글을 발표, 글에서 중국도시발전연구회 주철진 부리사장이 국내외 여러 지역과 도시건설발전의 정, 반면의 경험에 따라 《도시 강변에 고층건물 를 세우지 말라》는 호소를 곁들었다. 《기자들이 애써서 기사를 썼지만 령도간부들이 조선글로 된 기사를 보지 않는다고 하꾸마. 다른 해결방법을 대봅소.》, 《지당한 말이다. 한국 서울서 한강변에 빌딩숲을 만든데서 후에 많은 인력, 물력을 소비했다. 남의 옛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개발상들의 눈앞 리익만 추구하지 말고 후대들에게 쾌적한 삶의 공간을 물려주는게 선대들의 책임이다.》, 《국가에 강변과 100메터 거리안에는 건축물을 짓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길시는 청년호를 없애고 집을 짓고있다. 연길시 정부에서 도대체 뭘하고있는지 모르겠다. 오선생의 글을 김서기나 강시장이 보았으면 좋겠다.》 이상은 지난해 11월 15일 《연길강변에 제발 를 세우지 말라》는 필자의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영이다. 영국 등 서방 발달나라에서는 집을 짓고 나무를 심었으면 임자들이 마음대로 허물거나 벨수 없도록 법적관리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대로 집을 마스고 나무를 베니 환경오염, 인력, 재력랑비가 엄중하다. 연길시는 아름다운 청년호도 메워버리고 지은지 얼마 안되는, 그것도 시설이 쾐찮은 청년호텔도 마사버리니 시민들이 떠드는것이 응당하다. 이미 《죽은 아이의 자지를 만지기》가 되였지만 그때 일부 사람들은 청년호텔을 마스니까 그 자리에 주덕해의 옛집을 기념물로 복구하는 줄로 알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뚱딴지 같은 하경광장이요, 대천성이요 이름을 가지고 청년광장을 《하경광장대천성》의 앞마당으로 만들고 도시시용을 흐리우게 하니 연길시 정부가 시민들의 말밥에 오르지 않을수 없다. 더욱 한심한것은 대천성공사장에 내붙인 《只爲一座樓王》 이라는 구호다. 이들의 눈은 안하무인으로 그들에게는 오직 《대천성》만 있고 오직 《대천성》만을 위해야 한다는 공개적인 《건축패왕》이라는것이다. 필자는 연길강변에 《고층바자》를 세우고 청년광장에 공개적으로 《只爲一座樓王》을 부르짓게 만든것은 연길시도시건설계획과 건설국의 문제라고 감히 말하며 세번째로 연길시 지도부에 《도시 강변에 고층건물를 세우지 말라》고 재차 건의하는 바이다. 길림신문 2014년 8월 29일자  
151    "청첩장이 없어서 좋다!" 유감(有感) 댓글:  조회:5253  추천:6  2014-08-11
당의 군중로선교육, 이 불구자들한테도 혜택이 왔다. 일전에 도문의 2급지체장애인 최원(녀)의 얘기다. 최원네는 목욕탕을 경영하는데 말이 경영이지 여러가지 투자로 30여만원의 빚을 지고 목욕탕의 파가이주를 기다리며 적자경영을 하는 빛 좋은 개살구 신세였다. 그런데 올해는 습근평주석의 치국정치덕분에 에 청첩장이 없어서 200원을 절약한것은 물론 청첩장을 받고나서 (갈가? 안갈가?)는 심산(心算)이 없은데서 마음이 평행된다며 기뻐하였다. 2급지체장애자의 기쁨에서 당의 군중로선교육, 이 결국은 나라와 민생을 위하는 교육이고 정돈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였다. 청첩(초청전화)이란 경사스러운 일에 남을 초청하는 내용을 적은 글(전화)을 말한다. 청첩문화는 딱히 문서화된 어떤 규정이나 규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부상조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간 근사하게 들고다니며 경사의 분위기를 돈독히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후론에 오르는것은 청첩문화속에 부조(축의금)라는 개념이 크게 내포된것으로 상당수의 단위나 개인들이 그 을 엿보고 청첩장을 는 말을 들을 정도로 렴치없이 산(란)발 하는것이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래왕이 없었는데도 빠질가봐 전화책을 놓고 전화를 했다니 말이다. 고로 청첩장을 받고나서 또 는 신조어가 있는가 하면 해마다의 생일이나 몇번째 되는 재혼에까지 부절히 오는 전화로 하여 는 제목의 신문기사까지 있었다. 더욱 억울한 것은 일부 단위들의 개업식후에 신문지에 오른 의 명단을 보면 협찬단위들의 명단만 있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비를 맞으며 춤노래로 축하한 학교들의 명단이 눈을 비벼대며 찾아봐도 없는것이다. 그러니까 신문지면을 차지한 를  가 아닌  로 보는것이 옳다고 해야겠다. 하긴 필자는 개인적 경사에 축의금은 근절하니 축하의 마음만 가지고 동무까지 데리고 오 라는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 조광훈총경리의 초청을 두번(외손녀생일과 환갑생일에)  받고 혹자들은 는데도 필자는 며 빈손으로 동무까지 데리고 참석하였다.  이 밖에 의 초청장을 곁든다면 한국 박근혜대통령의 국혼 (國婚)때 박정 모씨가 발급한 이 청첩장이 지금도 인상깊다.                                  청 첩 장                                                    신랑; 대한민국                                                    신부: 박근혜 위 두 당사자는 15년 전부터 열렬한 사랑을 하여 왔습니다. 드디여 국민들의 성원으로 20 13년 2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뜨거운 박수치며 축하합시다. 꼭 참 여 하여 영광을 함께 하십시요. 금세기 최대의 행사이며 상생의 시작이 될 웅장하고 근엄한 결혼식에 화환, 금품, 선물은 일절 사양하오며 다시한번 를 외치는 마음만 선물하세요.                        2012년 12월 20일. 박정모 박근혜결혼식진행위원회 필자는 요즘 결혼, 생일, 자녀승학 등 경사가 한창 많은데 비춰 건전한 청첩문화를 기대해본다.
150    왜 촌공인(公章)을 향진에서 관리하나? 댓글:  조회:7275  추천:4  2014-07-11
지난 6월 22일 《중국조선족 수남촌 장기초청한마당》때 있은 일이다. 페막식을 앞두고 수상자들에게 발급할 증서에 《수남촌촌민위원회》공인(公章)을 찍어야 하는데 공인을 진에서 보관하니 석현에 가 가져와야 한다 했다. 그날 따라 일요일이라 《공인보관원》을 찾지 못해 조직측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한동안 기다려야 했다. 필자가 왜 촌민위원회공인을 진에서 관리하는가고 물으니 수남촌고문(顾问)이 지금 촌의 《3자(자산, 자원, 자금)》을 향진에서 관리한다 했다. 기층 행정기구의 공인을 경영관리소에서 관리하다니? 촌민위원회를 시름 놓지 못해서? 촌법인대표(촌주임)를 믿지 못해서? 전혀 리해되지 않는 물음이 뒤따랐다. 《중화인민공화국 촌민위원회조직법》 제 2조에는 《촌민위원회는 촌민 스스로의 관리, 교육, 봉사의 기층 군중자치조직으로서 민주선거, 민주결정, 민주관리, 민주감독을 실행한다》. 제4조에는 《향, 민족향, 진의 인민정부는 촌민위원회의 사무에 대해 지도, 지원, 협조한다. 단 촌민자치의 범위에 속하는 사항에 대하여서는 관여할수 없다.》고 제정했다. 그렇다면 촌의 《3자》를 향진에서 관리하고 촌민위원회공인을 진에서 관리하는것이 향진 인민정부가 촌민위원회의 사무에 대해 지도, 지원, 협조하는것이냐 아니면 관여하는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7월 8일 필자는 원로촌장이고 성, 주 로력모범인 월청진 마패촌 최명우를 찾아 그의 관점을 물었다. 최명우의 대답이다. 상급문건에 따라 《촌장향관(村帳饗管)》하는데 나는 《촌장향관》이 틀린다고 생각한다. 《촌장향관》은 발전지역을 상대한 문건인것 같다. 발전지역의 일부 촌의 인구가 수만명에 달하고 한개 촌의 수익액이 수십억원에 달하니까 말이다. 촌업무가 번중하여 향진에서 촌사무를 돕느라고 제정한 정책이 아닌가고 생각된다. 우리와 같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또 소수민족지역에서 발전지역을 상대해 제정한 《문건》의 피해를 받는다는 느낌이다. 《촌장향관》은 마치 왕년에 농촌에서 산아제한정책을 시달할 때 죽은 사람에게는 토지를 주나 새로 태여난 아이에게는 토지를 주지 않던 정책과 같은 경우라 생각된다. 향진에서 촌공인을 보관하기에 촌민들의 경제적부담이 많다. 촌민들이 소개신을 떼려면 교통비를 팔면서 향진에 다녀와야 하니 말이다. 우리 촌은 해마다 두툼한 소개신 용지를 두권 이상 쓴다. 촌공인은 응당 촌에서 관리해야 한다. 촌민들의 민주선거로 당선된 촌주임이 자기 촌의 공인을 관리할 권리와 자격이 없으니 말이 안된다. 당과 정부에서 법률과 문건으로 촌민들의 자주권을 보호하고 촌민자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한데도 십수년이 된다. 촌민자치란 촌민들의 직접 선거로 구성된 촌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촌무(村務)를 진행하는 지방자치를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촌민위원회조직법》 28조는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와 현급 이상의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해당 행정구역내에서 본 법이 실행되도록 해야 하며 촌민들의 법적자치권리의 행사를 보장하여야 한다》고 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는 58만 9000개에 달하는 촌민위원회가 있다. 촌민위원회의 법적자치권리를 어떻게 행사하고 보장하는가는 우리 나라 농촌, 농업, 농민들의 합법적권익을 어떻게 보호하고 보장하는가는 대사이다. 필자는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와 현급 이상의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중화인민공화국 촌민위원회조직법》(28조)에 따라 촌민자치에 위배되는 모든 《문건》, 《규정》을 하루속히 그리고 철저히 청산하고 촌민들의 합법적자치권리를 보장해줄것을 촉구한다. 길림신문 2014-7-10
149    "수남촌건설을 위해 '소당원'이 됩시다!" 댓글:  조회:5520  추천:1  2014-07-09
도문시석현진수남촌당지부 활동 측기                       도문시석현진수남촌은 1920년 6월 7일에 중국 연변땅에서 반일의 총소리가 제일 먼저 울린 반일전투전적지(봉오동전투전적지)이며 도문에서 제일 먼저 당지부가 성립된 촌이다. 민국 16년(1927년)4월에 반일투사 오중화(吳仲和)가 수남촌남봉오동(원고려툰)에 도문지구제1공산주의단체(조선공산당지부)를 성립하고 4명의 당원을 발전시킨 뒤를 이어 민국19년(1930년)7월에 남봉오동의 8명 조선족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고려촌당지부를 성립하였다. 그만큼 수남촌은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그에 따르는 자랑거리가 많다.    7월 1일 필자는 수남촌당지부의 초청을 받고 수남촌에서 당의 93돐 생일을 쇠는 기쁨을만끽했다.    이날 기념활동에는 당원, 당학습열성분자, 생산대대장까지 20여명이 참가했다. 흥진툰의 김종철(지난 세기 80년대 흥진촌당지부서기)이 당지부활동에 당원 한사람도 빠져서는 안된다며 제때에 통지를 못 받은 신선툰의 장일천을 모시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한참후 늦게나마 도착한 장일천은 먼저 당지부조직위원을 찾아 당비부터 냈다.   김진섭(66) 당지부서기가 오늘의 모임의 뜻에 이어 며 동원 하면서 오늘 활동에 각 생산대대장들이 2,3백원을, 라철룡촌장이 개인으로 500원을 부조하였다면서 이에 전체당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수남촌건설에 더욱 노력할것이라고 표시했다.   김서기의 꾸밈없는 유모아적인 발언에 모두가 이 되자며 힘찬박수를 쳤다.  이어 김서기가 로당원들에게 발언을 부탁하였다.   오늘의 활동에 참가하고저 연길에서 왔다는 김용남(지난세기 60년대 수남대대단총지서기)이 실눈으로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이다. 조용남의 말에 라며 오늘 지부활동에 참가하고저 도문서 왔다는 유문빈(78)이 말한다. 발언을 사양하는 로당원들은 일전에 열린 을 곁들면서 수남자랑, 촌장자랑, 젊은이들 자랑으로 술잔을 멀리하며 주름진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화제는 젊은 당원 허민호에게로 돌아 졌다. 허만호는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8년간 청도에서 창업을 하다가 귀향하여 지금 수남촌식용균공장에서 버섯품종개발에 몰두하고 있단다. 오랜만에 수남촌당지부활동에 기자가 참가했다며 사람들 서로가 기자를 찾아 귀맛 좋은 얘기를 들려준다  지금은 표고버섯을 연구하고 있다는 허만호가 자기의 푸른꿈을 내비쳤다. 수남촌에서 고문으로 모셔온 서봉춘(장춘사람,63)의 얘기다.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의 얘기는 들을수록 흥이났다. 조직위원 허세호는 기자한테 법률관련 원고를 쓰겠다며 명함장을 요구했다.  당지부활동에 빠져서는 안된다며 끝내 장일천을 모셔오는 김종철, 뒤늦게 오자바람으로 당비부터 납부하는 장일천, 대도시에서 귀향하여 자기의 푸른꿈을 키워가는 허민호, 젊은이들을 부추키는 로당원들, 고향건설에 여생을 다 바치겠다는 장춘사람, 당원 모두가 이 되여 수남촌건설을 위해 묵묵히 힘을 내겠다는 당원들,,,, 바로 이런 분들이 있기에 수남촌의 래일은 밝기만 하다.
148    《극좌》가 걱정된다 댓글:  조회:6717  추천:11  2014-06-17
《좌를 범할지언정 절대 우를 범하지 않는다》(宁肯犯左 決不犯右). 이는 지난 세기 6, 70년대 《문화혁명》시기의 류행어다. 그때 인민해방군까지 《지좌불지우》(支左不支右)의 기치를 들고 지방《좌파》지지에 동원되였으니 말이다. 그때 《좌경》은 혁명성이 강한것으로 혁명성 여하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으나 《우경》은 무(약)혁명성으로 책임을 추궁했으니 말이다. 기실 좌경이든 우경이든 모두 혁명건설에 어긋나는 일인데도 말이다. 당년의 《좌》, 또는 《극좌》는 몽매하기로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오죽하면 혁명성의 표현으로 자기집 마당의 과일나무를 찍어버리고 아쉬워해야 할 대신 《자본주의 꼬리를 벴다》며 자랑 했겠는가. 필자가 오늘 지난날의 《범좌불범우(犯左不犯右)》를 반추함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습근평총서기를 위수로 하는 당중앙에서 실행하는 《8항 규정》,《4가지 기풍문제 척결》, 당의 군중로선교육활동 집행과정에서 백성들이 《언녕 이래야 한다》며 기뻐하는데 비춰 일부 지방과 단위의 구체적인 집행, 실시과정에서 나타나는 《좌》또는 《극좌》적인 행위가 걱정되여서이다. 모 시에서 로간부좌담회를 가지고 《상급정신》, 《4가지 기풍문제 척결》 등으로 효도적이고 례의적인 식사대접마저 금했다고 하며 로력모범좌담회후 농촌에서 온 로력모범들의 점심대접을 안한데서 《해도 너무하다. 습근평주석이 알면 비평할것이다》는 후론을 남겼다. 심지어 모 시 해당 부문에서는 몇달전에 준비했던 《장애자의 날》의 기념행사마저 《경비문제》때문에 행사를 취소했다 한다. 모시에 사는 김씨네는 명절때면 자기집 창문가에 국기를 걸어 놓는데 불법위성텔레비죤 수신장비를 철수하면서 집주인이 없는 사이에 외벽에 설치한 국기대마저 마구 뜯어갔다. 당중앙의 《8항 규정》, 《4가지 기풍문제 척결》, 군중로선교육활동은 부패현상, 형식주의, 떠벌려 랑비, 지도자, 공무원들의 기풍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자는데 있다. 정상적인 행사, 례의적이고 상식적인 식사대접마저 엄금하라는것이 결코 아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해당 부문, 상급의 지시, 규정을 집행함에 있어서 형식적이고 맹목적이 아닌 실제적이고 적극적이며 합리적인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접수하고 옹호할수 있는 집행과 실시를 하자는 바램이다. 길림신문 6월 16일자  
147    음식업의 사회적책임감이 기대된다 댓글:  조회:5291  추천:2  2014-06-09
얼마전에 모 시 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한적이 있다. 술이 거의 끝나고 주식을 주문할때 자리를 같이한 변호사사무소의 L주임이 옥수수국수를 작은 그릇으로 주문했다. 그런데 얼마후 복무원이 들고온 국수그릇을 보고 저마다의 눈이 동전잎처럼 둥그래졌다. 《이 많은 량을 어떻게 다 먹느냐?》,《여기는 쑈완(작은 사발)이 없는가?》고 물었는데 외마디 대답 "없다"로 말문을 막았다.  자리를 뜰 때 L주임이 복무원더러 나머지 국수를 싸달라(打包)는것이였다. 동석한 손님들이 블어버린 국수를 다시 먹을수 없다며 말려도 L주임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음식랑비때문이다》《나머지로 두 때는 넉넉히 먹을수 있습니다》며 그냥 《따보(打包)》를 했다. 필자는 책임자를 불러 다른 식당에는 《작은 그릇》이 있는데 여기는 왜 없냐며 옥수수국수값을 물으니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한그릇에 15원입니다》고 했다. 이에 손님들 모두가 다른 식당에는 작은 그릇으로 8원을 한다며 돈벌이를 위해 《따완》만 판다고 음식점의 상도를 지적했다. 일전, 중공중앙선전부, 국가발전개혁위원회에서는 근검절약 미덕양성 전민 절약행동을 전개할데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통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근검절약은 중화민족의 전통적미덕으로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의 중요한 내용이다. 근검절약 미덕양성 전민행동을 전개하는것은 전 사회가 분투목표를 실현하는 강대한 힘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현실적 의의가 있다》. 《감독을 잘 틀어쥐고 떠벌려 랑비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폭로하며 체면을 따지고 허세를 부리는 등 불량한 기풍을 바로 잡도록 강한 여론압력을 형성하며 절약은 영광스럽고 랑비는 수치스럽다는 방향인도를 강화해야 한다.》 필자는 랑비를 수치라며 체면도 허세도 부리지 않고 먹다남은 옥수수국수를 끝내 싸가지고 가는 L주임의 행동에 머리가 숙여진다. 한편 음식업종들에서 혀끝랑비를 줄이기 위하여 《반인분 료리》, 《간이 료리》등 메뉴로 자기 식사량에 따라 료리를 주문할수 있도록 음식업에서 앞장서 《접시비우기》사회기풍을 선도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말하자면 음식업들이 고도로 되는 사회적책임감으로 식당내에 표어, 벽보, 영상자료, 주문제시 등 여러가지 내용과 형식으로 소비자들의 리성소비 습관과 분위기를 하루속히 조성토록 인도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길림신문 6월 9일자  
146    연변축구팬, "쾐찮아!" "잘했다!" 웨쳐보자 댓글:  조회:5698  추천:4  2014-06-06
  지난 5월 24일 《길림신문》 3면에 《화제 》로 《연변축구팬 뽈 볼줄 몰라, 너무 실망이야!》란 제목의 한종훈의 글을 실었다. 필자 역시 《옳구나!》이다. 한종훈의 《연변축구팬, 실망이야!》의 부분 내용이다.     —하긴 무슨 《연변축구팬이 수준이 있소》, 《뽈 볼줄 아오》한다는데 볼줄 안다는게 앉으면 《말새》만 할줄 알았지… —시작할 때 좀 응원을 하는것 같고 꼴이 나니 좀 소리를 지르는것 갔던데 그 다음에는 응원이 어디 갔는지 답답하다. —이게 어디 응원인가? 이건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을 감시하고 숙제검사를 하는 교원같다. 그러니 홈장에서 선수들이 더 긴장할수밖에…   확실히 그랬다. 필자가 본 연변팀 홈장경기장은 악대응원소리외에 거의 번번히 《헤이쏘우!》(黑哨), 《쌰커!》(下课),《 환런!》(换人)이란 세마디 웨침뿐이다. 필자는 《연변축구팬이 수준이 있소》,《뽈 볼줄 아오》를 연변사람들이 재판수준이 있다로, 어느 선수의 규칙위반여부를 볼줄안다로 인식했다. 그래서 《연변축구관중들이 축구규칙을 잘 알기에 재판들이 연길경기장에 오기를 로 리해했다》.   이밖에 《쌰커!》, 《환런!》웨침은 응원이 아닌 감독과 선수를 주눅이들게 하는 괴성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쌰커!》나 《환런!》이라 웨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감독을 해봐라》, 《당신이 들어가 차바라》고 한다. 연변축구팀은 연변의 명함장이고 연변팀 선수들은 연변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선수들은 잘 차도 연변의 아들이고 못차도 연변의 아들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쓸때까지 연변팀은2승 2무 8패 8점, 15위이다. 안타깝고 조급하고 미안해 하는것이 그래도 축구팬이나 관중들이 아닌 연변팀 감독과 연변팀의 선수들일것이다. 언젠가 한국 KBS 아침마당프로에서 천호식품 김영식회장이 자신의 성공사례로 《가족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힘있다》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김회장은 1994년 부산에서 현금보유량이 가장 많은 100등안에 들었다. 그런데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들이 파산되여 3년만에는 또 부산에서 빚이 많기로100등안에 들었다. 온갖 노력으로 10년만에 다시 년매출 500억원대 회사로 재생시킨 김회장을 지켜준 사람들은 가족이였다. 1998년 설날에 아버지는 넘어질줄 모르는 《오뚜기》를 선물로 아들의 재생을 확신했고 안해는 《당신은 할수 있다. 분명히 해낼것이다. 꼭 해야 한다》며 남편에게 화이팅만을 불러줬다 《어려울 때는 피로회복제보다 가슴에서 울어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 어려울수록 똘똘뭉쳐 가족끼리 화이팅을 해야 한다. 가족사랑의 힘으로 무슨 일이든 할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 있는것이 가족사랑이다》. 이는 김영식회장이 역경에서 성공을 이뤄내고 절감한 느낌이다. 이에 비춰 우리가 지금 해야 할 몫이란 바로 연변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이 있는 가족사랑을 몰붓는것이다. 장안순서기, 전임 리룡희 주장이 연변팀에 《오뚜기》를 주면서 《아들의 재생을 확신》하고 온 연변주민들이 똘똘 뭉쳐 《연변팀은 할수 있다, 분명 해낼것이다》며 《연변팀 화이팅!!》을 불러야 할것이다. 할빈의등팀의 8련패를 멈춰 세운것이 할빈축구팬들의 열혈응원이였다고 한다.   필자는 축구애호가도 아니고 축구팬도 아니다. 그러나 연변주민으로 연변팀을 위한 사랑과 책임은 지켜왔다. 례하면 국가축구협회에서 연변축구협회에 공개사과를 했던 1998년 6월 2일에 《연변일보》기자신분으로 주용기총리에게 등록우편으로 편지를 써올린적이 있다. 연길경기장에서의 《검은 호르래기》 상황을 반영, 《푸른잔디에 민족기시가 존재한다》고 했고 2003년 연변팀의 봄철 한국훈련 때 필자의 련줄로 경상남도 고성군 초등학교 이정찬교장이 연변팀의 숙박, 교통, 훈련장 배치를 전담하게 했는데 당시 5000만원을 썼다 한다. 늦었다고 할 때가 바로 시작할 때다. 우리 모두 연변축구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있는 가족사랑을 주자. 《쌰커!》나 《환런!》이 아닌 《괜찮아!》, 《잘했다!》, 《힘내라!》, 《연변팀 화이팅!》을 웨치면서 말이다 . 길림신문 6월 6일자
145    조선족이라면 조선어를 알아야 댓글:  조회:7459  추천:17  2014-05-22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4기 인대상무워원회 9차 회의에서 9월 2일을 《조선어문자의 날》로 결정지었다. 결의는 《조선어문자의 날》을 제정함은 《사회적으로 자치민족언어습관을 존중하고 조선어발전의 량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민족단결사업을 추진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특색경제를 발전시키고 조선어 문자사업을 번영 발전시키기 위함이다》고 썼다. 연변에서 《조선어문자의 날》을 제정한것은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라 하겠다. 《조선어문자의 날》제정은 한편으로 우리 민족이 자기민족의 문자를 홀시하고 잃어 버림에 대한 하나의 법적 조치임을 말해준다. 최근 필자는 연변에서 조선족 법관, 교원, 의무일군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세분 모두가 아무런 꺼리낌 없이 《나는 조선글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당신은 잔페인이구만!》라고 당장에서 지적해도 모두가 무감각이였다. 언젠가 모 시 법원에서 조선족법관을 초빙했는데 초빙후에 알고보니 그 법관은 조선족문맹이였다. 그래서 할수 없이 그더러 사업터를 뜨게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그 《조선족문맹》이 부시장으로 승급했다니 말이 아니다. 조선족으로 조선어문자를 모르니 그것도 사회적으로 일정한 직위와 권리가 있는 조선족들이 조선글과 조선말을 모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도문시방화안전위원회에서 조한문으로 된 《도문시공민방화공약》을 한장에 15전씩 받으며 집집이 나누어주었다. 조선문으로 된 방화공약을 읽고나서 너무 실망했고 분노에까지 이르렀다. 700자 좌우밖에 안되는 공약에 틀린 글자가 51개나 되였다. 공약이 콩약, 곰약, 말것이 말멱, 그리고 전염기, 폭숙… 교정이 틀렸는지 번역이 틀렸는지 무슨 말인지를 모를 단어가 수두룩했다. 얼마전에 장춘가스(도문)유한회사에서 도문시 옥림1구에서 홍보활동을 벌였는데 그들이 발행한 조문전단지는 더 말이 아니였다. 《존경하는 사용자 안녕하세요. 장춘가스 현경영 가스灶具, 가스 膠管, 품질을 보증, 안전이다. 가게 당신 안심을 우리는 저렴한 가격 열정적인 태도 를 보 지성껏 당신을 위해 서비스다》.인사말까지 4줄 되는 글을 마지막까지 읽자니 분하기 짝이 없었다.(아래 사진) 5월 13일 필자는 해당 책임자(한족)를 찾아서 《당신네 전단지가 조선민족문화를 희롱한다》고 하니《그래도 그 글을 조선족이 번역한 것이다》며 당장에서 진렬했던 전단지를 몽땅 거둬들이는 것이였다. 이를 지켜보던 한족분이 《조선족이 번역한 것이라고 해서 정확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 술공장의 술을 어느 조선족 어른이 으로 번역해 고객들이 며 놀려주기에 망신을 당했다.》고 했다. 필자는 특수환경을 제외하고 조선족이 조선말을 모르고 조선글을 모르는 것은 완전히 부모들의 문제라고 감히 지적한다.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이며 감동중국 걸출조선족 리광남은 부모들이 자기를 군대에 보내며 《조선말을 잊지 말라, 군대에 갔다 와서 조선말을 안하는 사람을 동네서 덜된 사람이라고 한다》던 말씀을 명기하고 40여년간의 군생활을 하면서 《덜된 사람》 이 안되기 위하여 조선말을 잊지 않고 지금도 농촌토배기대장마냥 조선말을 술술한다 했다. 그리고 그는 두 딸을 참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도록 강요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기사에 《외래어를 사용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전제조건을 단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다. 공동한 언어문자는 그 민족의 얼이 살아숨쉬는 기본조건으로 그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계승의 둘도 없는 도구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며 밑천이다. 과거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를 쓰지 않은 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 중국 전역에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 밖에 없다 한다. 지금은 글로벌시대다.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자주성과 우수성을 고수해야 한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조차 모르고 어찌 민족군체, 민족자질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글로벌시대에 불어치는 《한국붐》이 다행히도 우리 민족의 밑천을 지킴에 보탬을 한다고 생각한다. 도문시 신화가 신흥사회구역판공실에는 조선족을 접대하는 창구가 따로 있는가 하면 한족간부들이 조선글을 배우는 흑판과 조선어학습시간표가 뚜렷히 걸려 있어 기분이 좋았다. 필자는 다가오는 《조선어문자의 날》을 맞으며 《조선족문맹》,《조선족문맹족》들이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는 붐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맹퇴치는 빠르면 빠를 수록 좋고 우리 민족에게 유익하니 말이다.  길림신문
144    《그 마작판이 제 에미보다 더 중할가?》 댓글:  조회:5731  추천:6  2014-04-18
일전에 도문—연길 행 택시를 탔던 70대 할머니의 넉두리다. 10일, 도문에 계시는 할머니가 오전 9시 반경에 도문—연길 택시를 탔는데 동행한 60대 남성이 운전사와 잘 아는 사이인지라 그들간에 오가는 얘기란다. 손님: 연길에 가서 한 20분을 기다려 주오, 내가 일을 보고 인츰 돌아 설테니… 운전사: 어머니를 보러 간다면서 어찌 인츰 돌아섭니까? 손님: 한 20분이면 되지, 엄마가 내가 가면 손을 잡고 울면서 놓치 않소. 남 보기가 민망스러워서… 운전사: 그게 부몹지. 손님: 11시전에 돌아가서 마작을 놀아야 한다이, 좀 기다려 주오. 어떤 날에는 한 2000원씩 나드오. 알고보니 이날 그 손님이 해바라기를 사들고 엄마를 보러가는 행차였다. 《지금은 별난 세월이오. 자기를 낳아준 에미도 모르니. 그 마작판이 제 에미보다 더 중할가?》, 《보고싶은 아들의 손을 잡고 우는 제 에미가 그렇게 민망한가?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70대 할머니의 말이다.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 그 말에 《글쎄…》하며 얼른 답이 따르지 않는다. 언젠가 필자가 도문—연길 행 뻐스에서 목격한 일이다. 40대 녀성(한족)이 뻐스에서 늙은 로인의 다리와 손발을 꽁꽁 주물러 드린다. 《로인님을 모시고 병원에 갑니까?》,《아니요, 연길구경을 가는데 그만 옷을 얇게 입으셔서 추워하실가봐 안마해드려요》. 정말 효성합니다는 말에 《어머니 년세가 80세인데 이 좋은 세월에 오래 사셔야 하지요. 아버지가 50세에 암으로 돌아 가시다나니 어머니가 우리 여섯자매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왕씨라는 그녀는 여섯자매가 서로 어머니를 모시며 효성을 다하기에 어머니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며 효성은 공부를 하고 못하고와 관계 없다고 말한다. —부모를 멀리 떠난 자식들이 부모에게 늘 전화를 하는 자식들이 별로 많지 않다 한다. 부모가 돌아간다 해도 눈물이나 흘리겠는지…》. —《한국에 가 돈벌이를 하는 조선족 자식들은 부모들한테 자주 전화하는지…》. 세종대왕은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이라는 친필로 《충과 효를 가문에 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정신을 대대로 지키라》고 하였다. 하남성 창담현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승진할수 있다》는《효도규정》을 신설하고 간부를 고찰할 때 친척, 동료들을 찾아 고찰대상의 효도여부를 묻는다 한다. 효는 인간의 백행지원이다. 효도는 덕을 근본으로 하는 실천이고 불효한 교육은 무효이다. 지난 로인절에 어느 교원의 한 말이 생각난다. 《효도하는 아들이 내 아들이다》. 길림신문 4월 18일자
143    "조선어문자의 날"과 우리의 자세 댓글:  조회:5931  추천:6  2014-04-18
 일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 14기 인대상무워원회 9차회의에서 9월 2일을 로 결정했다.  중국에서(중국조선족을 대상함) 을 제정한것은 실로 참 경하할 일이라 하겠다.  제정은 한편으로 우리 민족이 자기민족의 문자를 홀시하고 잃어 버림에 대상한 하나의 법(조례)적 조치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인대상무위원회 결의는 을 제정함은 고 밝혔다. 최근 필자는 사업적으로 조선족 법관, 교원, 의무일군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세분 모두가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고 하였다. 이에 필자가 당장에서 라고 경멸했는데도 모두가 무감각이였다.  언젠가 모 시 법원에서 조선족법관을 초빙했는데 초빙후에 알고보니 그 법관은 조선족문맹이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더러 사업터를 뜨게 했는데 운이 좋게도 그 이 부시장으로 승급하였다. 아니, 조선족의 비례를 차지한 그 시장이 집권기간에 시켰으면 얼마를 시켰겠는가?  필자는 이처럼 한심한 실정에 비춰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특별히 을 제정했는가 본다.  언젠가 도문시방화안전위원회에서 조한문으로 된 을 한장에 15전씩 받으며 집집에 발부하였는데 필자가 조선문을 읽고서 분개와 실망을 어쩔수 없었다. 글쎄 모두 700자 좌우 밖에 안되는 공약에 틀린글자가 51개(공약이 콩약, 곰약… 으로), 전혀 모를 구절이(난로곁을 떠나지 말멱, 쉼게 불이 달리거나 등) 여섯, 무슨 말인지를 모를(전염기, 폭숙… 등)곳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필자는 특수환경을 제외 하고 조선족으로 조선말을 모르고 조선글을 모르는 것은 완전히 부모들의 문제라고 말한다.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 감동중국걸출조선족 리광남은 부모님들이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 는 말을 명기하고 40여 년의 군생활을 하면서 이 안 되기 위하여 지금까지 농촌대장이 못지않게 토배기말로 조선말을 하고 두 딸로 참된사람으로 키우려고 어릴때부터 조선말을 하도록 강요했단다. 그리고 자기를 취재하는 조선족기자에게 기사에 는 전제조건을 내 놓는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다.  공동한 언어문자는 그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는 기본조건으로 그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계승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공구이다. 과거 날에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본민족의 언어를 쓰지 않은 데서 만어가 소멸되여 지금 중국전역에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 명밖에 없다는 조사가 있었다.  지금은 글로벌(세계화)시대다.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자주성을 고수해야 한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조차 모르고 어찌 민족군체며 민족자질이며를  운운할수 있겠는가!  우리의 말과 글은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으로서 우리 민족의 밑천이다. 글로벌시대에 이 우리를 도와 사섰다. 유네스코(국제련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통계에 따르면2005년도에 벌써 세계적으로 7200만명이 조선어를 배우고 중국의 150개 대학, 세계 650개 대학에서 조선어 교육을 실시하고있다고 밝혔다.  일전에 도문시신화가 신흥사회구역사무실을 찾았더니 조선족을 접대하는 창구가 따로 있는가 하면 한족간부들이 조선글을 배우기위한 흑판이 걸려있고 조선어학습시간표까지 있어 너무도 기분이 좋다.  필자는 다가 오는 을 마중하며 이나 들이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는 붐을 이르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맹퇴치는 빠르면 빠를수록 자기에게 유익하니 말이다.  
142    《공무원이 멋이 없다》에 대해 댓글:  조회:4881  추천:3  2014-04-14
필자는 《공무원이 멋이 없다》는 최근의 화제에 비춰 1990년 심수개방 10주년 때 심수시 정부판공실 주임이 하던 얘기가 떠오른다. 《사람들의 가치관념이 많이 바뀌였습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며 공부를 잘하라고 합니다. 지금 심수서 교통경찰을 모집하려면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힘듭니다》. 그때 우리는 누가 정부기관에 들어가면 큰 벼슬을 한것처럼 부러워했는데 《공부를 못하면 정부기관에 간다》니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다. 24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서 그 말이 《공부를 잘해야만 자기의 능력으로 생계를 개척할수 있고 아니면 앉아서 주는 돈이나 받아 써야 한다》는 뜻임을 대략 알게 되였다. 필자는 당중앙 《8항규정》,《4가지 기풍》실시 이후 특히 설명절을 계기로 화제에 오른 《공무원이 멋이 없다》를 이런 세가지 원인으로 분석해 본다. 첫째는 젊은 공무원들의 로임이 적은 것, 둘째는 공무원기강확립과 반부패강화로 숨겨진 부가수입(공짜, 뢰물)이 없어진 것, 셋째는 공무원사업작풍과 조직규률이 째워진것이다. 올해 공무원시험응시자가 줄어든것 역시 《공무원이 멋이 없다》를 말해준다. 자료에 따르면 중국공무원시험의 경쟁률은 1994년의 9 :1 로부터 근년의 1000 : 1 까지 치솟은 추세였는데 올해의 공무뭔시험에서 북경이 1만 7000명 줄고 절강성이 30%, 천진시가 5000명이 줄어 공무원시험응시자가 4년만에 처음 줄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려는것은 공무원의 밥통이 철밥통, 황금밥통이라는것, 거기에 경기불안정과 미래불투명으로 모험과 도전보다는 안정성이 있는 직업이기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된다면 나라가 경쟁력을 잃고 정체부진하게 된다. 몇해전 희랍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의 경제위기의 원인이 바로 방대한 공무원대오와 게을러진 공무원탓이였다는 분석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려고 애쓰는 나라는 비전이 없다. 편안하다는것이 자랑이 아니다》고 말하는 한국의 동화그림작가 강우현은 적자경영이던 남이섬을 도맡고 5년만에 남이섬을 한국의 《환상의 나라》, 세계의《동화의 나라》로 부상시켜 유명 CEO와 한국의 《유태인》으로 불린다. 강우현사장은 《마음상상》경영으로 남이섬의 원래의 55세 퇴직년령을 페지하고 《80종신직원제》(80세가 넘으면 일을 안해도 무조건 80만원 월급을 받는 종신직원제)를 실시하여 회사의 분위기를 살리고 직원들의 열성을 끓게 하였다. 지난 1월 재한 중국교민협회총회 한성호 총회장을 인터뷰할 때 한총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듣자니 중국서 공무원들이 매우 긴장하게 일을 한다는데 이는 아주 잘 된것이다. 공무원들이 긴장하게 사업을 하면 나라가 강하게 발전하지 않을수 없다.》 길림신문 4월 14일자  
141    “문화혁명”도 기념비를 세우자 댓글:  조회:7236  추천:31  2014-03-26
필자는 “중국혁명”하면 신해혁명, 토지혁명, 문화혁명을 떠올린다. 그에 따라 “혁명”하면 떠오르는것이 혁명령수와 혁명에서 희생된 선렬(렬사)들이다. 그래서 “신해혁명”하면 중국에서 제일 처음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기치를 추켜든 혁명의 령수 손중산을 떠올리고 “토지혁명”하면 농민을 땅의 주인으로 만든 새중국의 령수 모택동을 떠 올리며 “문화혁명”하면 무산계급독재하에서 계속혁명을 한다는 미명하에 억울한 루명을 쓰고 희생된 로간부, 지식분자, “현행반혁명분자”,”계급이색”분자를 떠올리게 된다. 혁명이 끝나면 규례적으로 그 혁명을 기리하기 위한 혁명기념비(혁명의 령수, 혁명렬사)를 세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국에 손중산, 모택동 기념관(릉원),동상(석상)이나 수많은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까지 중국의 혁명과 건설을 기로에로 몰아넣은 “문화혁명 기념비”, 또는 “문화혁명”의 렬사로 추인받은 “혁명렬사기념비”가 없는것으로 알고있다. “문화혁명”에서 그 많은 로간부, 로지식분자, “현행반혁명분자”, “계급이색분자”들이 한을 품고 목숨을 잃었는데도 말이다. “문화혁명”때 당과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야심가, 음모가들로 목숨을 잃은 많은 로간부, 로혁명가, 무산계급전정하에서 계속혁명한다는 미명하에 목숨을 잃은 “반혁명분자”, “계급이색분자”, 파벌성과 타인위락(打人爲樂)을 일삼은 미쳐 날뛴 놈들에게 목숨을 잃은, 원을 품고 타살, 자살한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필자의 백부도 “조선특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미친놈들한테 맞아서 당일에 원을 품고 세상을 떴다. 필자는 “문화혁명”때 가장 억울하게 희생된 “현행반혁명분자”는 그래도 장지신(張志新)이라고 생각된다.  장지신(1930-1975, 한족, 당원)의 아버지(张玉藻)는 신해혁명에 참가하였으며 장지신은 조선전쟁이 폭발하자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부대의 급번역(急飜譯)수요로 중국인민대학에 보송(保送)되여 로어를 전공, 1955년에 입당, 료녕성당위선전부에서 선전간사로 사업하다가1968년 8월에 모택동을 비평하고 림표를 적발하고 류소기와 로간부들의 억울한 원한을 곁든 것으로 “4인무리”들의 눈에 걸려 1969년 9월 24일에 “현행반혁명분자”로투옥되여 7년간 비인간적인 고문 받다가 사형, 사형할때 그가 군중들 앞에서 “반혁명구호”를 부를까봐 후두를 잘리우고 잔혹하게 사형당했다. 1979년 3월 1일 료녕성중급인민법원에서는 장지신을 무죄로 선포하고 그의 모든 루명을 벗겨주고 3월 31일 료녕성당위에서는 장지신을 평판하는 대회를 열고 그를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 기념비”란 그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않고 후대들의 마음에 간직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을 망친 “문화혁명”을 중국혁명력사의 반면교재로, 장지신처럼 억울하게 희생된 “문화혁명렬사”들을 정면교재로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문화혁명기념비”가 아니면 장지신기념비나 장시신동상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기활
140    투우절과 연변황소 그리고 도문투우 댓글:  조회:5256  추천:1  2014-03-25
《지금까지 전문투우장이 있는 곳은 길림성치고 도문밖에 없습니다. 투우장도 두만강관광코스인 도문-개산툰길 옆에 있다보니 도문투우는 연변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널리 홍보되여 전국에, 세계에 알려지고있습니다. 성 해당 책임자에 따르면 도문투우는 길림성의 브랜드라고 합니다.》 도문시문화관광봉사중심 조동범주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도문투우에 대해 열망어린 소개를 들려주었다. 2006년 10월 3일에 시작된 연변투우민속대회는 8년간 꾸준히 견지되여오면서 질적인 제고를 가져와 인제는 《연변투우절》을 내올만큼 기틀을 잡았다. 2007년 7월 제1회두만강문화관광 《분복컵》투우대회(연변제2회민속투우대회)가 열렸고 그 이듬해는 안도현에서 《금사백춘생컵》투우대회(동북3성의 소들이 참전)가, 잇달아 《연변황소명명 및 제 1차 룡정황소투우절》, 중국조선족민속투우절, 《화룡 건현 100돐 제1회 연변황소선발대회》 《연변의 여름》두만강문화관광절투우대회가 연변에서 선후로 11차 조직되였다. 그사이 도문시에서 7차나 투우대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는데 인지도가 높아져 매차의 투우절때마다 취재진만도 수십명씩 모여왔다. 도문투우가 연변에서 인기종목으로 인정받게 된것은 해당 부문의 조직력이 우선 구비된 때문이라고 볼수 있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도문의 황소질이 전 성의 앞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도문시축목국 리위문(李伟文)부국장이 말한다.그는 도문투우대회를 주도해온 장본인의 한사람이였다. 지금 연변의 소사양호들이나 전문가들은 연변황소를 화제에 올리면 《연변황소는 그래도 장안진!》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연변황소는 75% 연변소혈통에 25% 외국산 고기소(肉牛)혈통으로 개량한 소를 말한다. 도문시 장안진은 연변소개량을 시작한지 이미 3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다. 장안진의 소사양호들은 황소개량에 대한 인식과 자각성이 대단히 높다. 하기에 장안진의 소는 전 주 앞자리를 차지한다. 암소선발(選美母牛)이나 투우조직에서 장안소들이 거의 모든 상들을  싹쓸이를 해간다. 첫 투우대회에는 외지 소들이 60여마리나 참가하였었는데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몇년간의 투우대회를 치르면서 장안진의 소 값이 상당히 올랐다. 1년에 마리당 소값이 2000원이상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장안진의 소사양호들은 《 한국 가서 고생스럽게 돈벌이를 하기보다 제집에서 소 20마리를 기르는것이 낫다.》고 말한다. 장안진 소사양호들의 수입이 그만큼 짭짤하다는 표현이라 하겠다. 몇년전에 연변황소가 아닌 기타 잡종 소들도 도문투우대회에 참가하였는데 흰소, 검은소, 얼룩소들이 모두 장안소들한테 혼나고나서 지금은 감히 참가조차 못한다고 한다. 도문시는 재력이 긴장한 상황에서도 지난해 60여만원을 투자해 성내의 첫 전문투우장을 건설했다. 아직은 시설이 미숙하지만 앞으로는 투우장시설을 완미하게 보완하고 해내외의 관광객을 대상하여 경상적으로 도문투우대회를 조직하면서 상규관광상품으로 개발, 발전시킬 예정이다. 또한 투우, 관광, 교역이 접목된 도문시의 브랜드로, 길림성의 명품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는것이 도문투우의 전망으로 되고있다.  길림신문 3월 24일자
139    "기녀추도식" 단상 댓글:  조회:6680  추천:16  2014-03-18
  이는 우리나라 감숙성의 한 농촌소학교에서 발생한 일이다 빈곤지역인 이 농촌소학교의 시설은 헐망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어느 날 바람이 불어쳐 학교시설이 망가진데서 교장이 현교육국국장을 찾아가 자금지원을 요구하니 국장이 하는 말이 그 학교의 모 녀교원(21살, 민반교원)을 보내란다.  주변서 미녀로 불리는 이 처녀는 고중을 졸업한후 다른 녀자애들처럼 남방으로 돈벌를 떠난것이 아니라 빈곤농촌의 소학생교육을 위해 무상으로 민반교원을 하다가 시험에 합격되여 정식민반교원으로 초빙된 마음 착한 처녀다. 교장의 말에 그녀는 학교를 위해 두려운 마음을 앞세우고 처음으로 현성에 가서 교장이 시키는대로 하였다.    미녀에  미친 교육국장은 대뜸 성욕을 채운 뒤 그녀의 몸값으로 학교에 얼마간의 자금을 하달하였다.   한번이 있으면 두번이 있기가 마련이다. 국장은 그 교원을 자기의 성욕을 채우는 로 학교에 야금씩 돈을 주었다. 그녀는 모든 수입을 그대로 흑판, 책걸상 등 학교시설개선에 돌려졌다. 그녀는 새학교를 지으려는 꿈을 품고 계속하여  외지서 유권자(유전자)들의 첩(二奶)이 되여 자금을 모으다가 나중에 3명 외국인들의 성폭행으로 목숨을 잃었다. 녀교원이 죽은 후 교장은 학교에서 계양한 국기까지 절반을 내리우고 그 교원의 추도식을 열고 추도식에서는 그 녀의 일기를 랑독하였다.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은 빈곤학교운영을 위해 생명을 바친 그 녀를 그리며 슬픔의 눈물을 그칠줄 몰랐다… 실로 눈물이 없이는 읽을수 없는 기사였다. 필자는 을 화제로 나름대로 교장, 녀교원, 교육국국장을 평한다. 수선 학교를 위해 상급에 찾아 다니며 애걸복걸한 순결한 농촌소학교 교장이 을 조직하고 대담하게 녀교원의 일기를 랑독한 것이  부패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그 교장에게 기공표창(記功表彰)을 하고 싶다 다음 학교운영을 위해 보귀한 정조와 목숨까지 바친 녀교원을 기리기 위해 학교에서 추모를 위한 기념물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기념물을 세운다면 그것이 반부패의 산교육장으로 될것이니 말이다.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등소평의 검은고양이 흰고양이론)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한다. 100원짜리 돈에는 몸으로 번것과 머리로 번것이 따로 찍혀있지 않다. 는 자기 몸으로 번 돈을 모두 실학학생을 구하고 희망학교를 만구하는데  바쳤으니 그녀가 쓴 돈은 예술의 돈이며 향기나는 돈이라 하겠다.   그 다음 인민이 준 권력과 국가돈으로 자기의 야욕(성욕)을 채운 짐승보다도 못한 그 교육국국장은 그 학교에서 다가 만인공노하는 공소대회를 열고 법적판결을 받게해야 한다.  필자는 4년전에  쓴 글(렴정- 영원한 주제)의 한 단락으로 이 글을 맺는다. …어느 술상에서 부패를 화제로  다루던 얘기이다. -   -  - 반부패력량의 근본은 민중에 있다. 지난해 주규률검사위원회는 도합 572건의 부패고발사건을 접수, 327건을 조사처리하였다.      
138    어머님 생각...자애의 손 사랑의 눈 자비의 마음 댓글:  조회:6364  추천:6  2014-02-28
어머니 생각 오기활 올해의 첫눈은 11월 17일에 내린 30년 만에 처음 내린 대설이란다.8일 아침, 이날도 필자는 장애자 최원네를 돕느라고 도문원샘목욕탕의 눈치기를 하는데 핸드폰소리가 울렸다.                                누님의 말이 어제(음력 10월 15일)는 엄마의 제사날인데 엄마가가 세상을 뜬 후 65년간 해마다 제사날에 눈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님이 한국에 갔을 때 한국사람들이 중국에 언제 눈이 내리는가는 물음에 고 장담을 했단다. (나이와 동반하는 설음일가? ) 나는 언제부턴가 생각에 종종 눈물을 흘리군 한다.이 날도 마찬가지였다누님의 전화를 받고 나서 방금까지 부담으로만 느껴지던 눈마당이 볼수록 어머니생각으로 설레이는 마음을 달랠수 없었다. (어머니가 해마다 어김없이 눈이불을 하사하다니?) 이런 생각으로 더는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서 눈치기를 접고 누님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누님의 얼굴도 그림자가 비꼈다. 6살에 어머니를 잃은 셋째누님(71)이 하는 얘기가 기껏해서 이뿐이다.  (어머님이 해마다 자식들에게 눈꽃을 하사 하는 것을 보아 꼭 무슨 뜻이 있겠는데…)이런 생각에서 필자는 이번을 기회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의 글을 쓰겠다고 작심했다. 큰 누님(계옥,79)이 치매에 걸렸으니 찾을 수 없고 왕청에 있는 둘째누님(순옥,76)한테 전화를 걸어 어머니에 대한 남는 기억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둘째누님 역시 어머니의 제사날엔 해마다 눈이 내린다며 하는 얘기다. (모두 3녀 3남을 낳았는데 우로 2남이 요절) 누님에 따르면 엄마가 계실 때 금자는 너무 울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돼지굴에 들어갔고(그 때 아이가 울면 돼지굴에 넣는다고 위협하며 달랬다) 오래비(기활)는 자주 앓다 보니 생진 후에도 혼자서 앉지 못하여 이불이나 포대기를 둘러놓아야 앉았다는것이다. 그런데 별일이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부터 울음보였다는 금자의 병과 오래비의 병이 기적같이 떨어 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머가 저세상으로 가면서 자식들의 병을 함께 챙겨갔는지 말이다.  엄마는 마음이 너그럽기로 한량이 없단다.  혹시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언쟁을 하면 일에 지친 몸이라 싸울맥이 없으니 하며 언쟁을 피했단다. 그때 우리 집은 아버지가 병으로 일을 못하고 엄마가 혼자서 일하다 보니 생활이 궁핍하기로 말이 아니였었다. 둘째 누님의 기억에 여름에 엄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못 봤다고 한다. 한번은 약을 다리려고 동네에서 풍로(風爐)를 빌려 왔는데 땔 것이 없어서 어머니가 마른 소똥을 주어서 풍로에 때더란다. 그 때 우리 집은 로동력이 없다 보니 늘 친척들이 동원해서 일손을 도왔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뜨던 해(1949년)에도 동네서 제일 마지막으로 탈곡을 끝내고 그날에 어머니가 촉한(땀이 난후 불시에 찬바람을 맞으면 걸리는 병)에 걸려 일주일만에 32살 나이에 하늘나라에 갔단다. 어머니는 림종전에 혀가 움직이지 않아서 겨우 겨우 이런 말을 하였단다. 물남(곡수)에서 시아버님이 이 둘째며느리를 오라고 부른다.(그때 할아버지는 이미 타계했음) 큰형님(필자의 백모)이 저 도깝들을 거둘라니 얼마나 고생 하겠습둥…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다!(그 날 마을에서 오민준의 참군환송을 하느라 누님들이 필자를 데리고 갔다고 함)    둘째누님은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지금까지 한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더라며 목이 메여 말을 있지 못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철없는 누님들은 늘 아버지와 라고 투정을 하면 아버지도 라며 긴 한숨을 쉬더란다. 그런데 아버지의 운명도 기구하여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8년 만에 이외의 사고로 40살 나이에 세상을 하직할 줄이야!나는 지금까지 엄마를 본 기억이 없으니 를 불러본 기억은 더욱 없다. 아버지가 한동안 계모를 맞았을 때 나는 늘 계모를 라고 불러서 아버지가 그저 라고 부르라고 시키던 일이 기억된다. 나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기로 장모님을 이라고 불러 장인, 장모의 오해까지 받았다.그런데 어머니는 이 아들과 정녕 그 무슨 인연이 있는듯 하였다. 1973년 내가 연변농학원에서 입당할 때다.내가 입당지원서를 쓸 때 그만 어머니 이름을 몰라서(그때 집안의 친척들도 몰랐음) 한창동안 망서리다가 (간대로 조직에서 몇 십년전에 사망한 사람의 이름을 조사하겠는가?)는 생각으로 어머니 이름을 이라고 작명했다.  그후 1976년이라고 기억되는데 내가 사업차로 훈춘에 갔다가 훈춘에 계신다는 어머니의 언니를 끝내 찾아서 처음 큰이모 한테서 어머니 얘기를 나누었다. 큰이모가 하는 말이 하루는 동네놀이를 갔다가 집으로 오는데 퇴비장부근에서 애기가 우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두 다리를 바둥거리며 우는 아기가 바로 너의 에미여서 안고 들어 왔단다. 알고 보니 그때 집이 하도 구차하여서 남들이 아기를 주어가라고 포대기에 잘 싸서 따뜻한 재무지우에 내놓은 것을 큰딸이 보고서 안아 왔다는 것이다.    큰이모는 고 하였다.그때 나는 무슨 생각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물었더니 전정숙이라고 해서 나는 귀를 의심하였다. 내가 엄마 이름을 작명했다는 과정을 들은 큰이모도 세상에서 이렇게도 희한한 일이 있는가 하며 아마도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너에게 알려준 것 같단다. 나는 노래부르기를 비교적 즐긴다. 그것도 술상에서 한 세대 한 세대를 이어 가면서 당년에 류행되던 노래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50년대에 누님들한테서 배웠던 이 노래만은 지금도 끝까지 못 부른다. 아무리 끝까지 부르려고 해도 눈물이 앞서기에 부를수가 없었다. 노래가사다        1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 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니 찾아 와서 안아 주세요.             2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 눈에서 피가 흐른다 오늘 저녁 우리 함께 꿈나라에서 사랑하는 엄마 품에 안겨 보자야 원래 2절 가사의 마지막 두 줄은 엄마품에 안겨보려는 생각에서 내가 고쳤다.어머니는 철부지 자식들만 남겨놓고 가을바람의 가랑잎마냥 홀로서 저세상으로 떠나간 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불효하기로 어머니에 대한 면목이나 추억이 전부다. 부모없는 자식이라는 세상살이의 비난과 어설픈 동정에 유년시절부터 익숙해 진 나, 비난이나 동정이 부모에 대한 갈증을 가슴에서 몰아 낸 나다.그래서 어머니란 의미를 알수 없었고 모르는척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모성애는 나는 안해의 자식사랑에서 감수할수 있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명언이다. 아버지의 책임을 늦게나마 알게 된 나는 그 후부터 언젠가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로운 모성애에 대한 글을 쓰려고 잡도리를 하였다. 바로 이런 준비로 망설이던 나날에 셋째누님이 를 듣고서 마음을 다잡고 서투나마 이렇게 필을 들었다.  어머니의 모성애를 좀처럼 모르는 나는 내 딸 염희가 어머니 60회갑생일에 올린 로 이 글을 마감 한다. 둘도 없는 나의 어머님과 세상의 모든 어머님들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신은 인간에게 어머니의 가슴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은 자애의 손이요 어머니의 눈은 사랑의 눈이며 어머니의 마음은 자비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요? 정답게 자녀를 바라보고는 어머니의 맑은 눈동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눈물겨운 광경이 무엇인가요? 일편단심으로 자녀를 위하여 헌신하는 어머니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여났습니다. 어머니의 육체는 우리형제 존재의 고향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얻은 스승님은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입을 맞춘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가장 겁나고 가장 기쁘고 감격했을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무릎은 우리의 학교요, 어머니의 가슴은 우리의 교실이며 어머니의 얼굴은 우리의 스승이고 어머니의 입은 우리의 교과서였습니다.  율곡의 뛰여난 인격의 배후에는 신사임당이 있었고 맹자의 름름한 정신 뒤에는 맹모의 가르침이 있었고 에디손의 뒤에는 어머니의 격려가 있었답니다. 위인을 만드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녀성은 약하나 모성은 강합니다. 녀자는 어머니가 될 때 자녀의 생명에 대한 강한 책임을 느끼고 자식을 위한 한량 없는 사랑이 생기고 자녀를 위한 씩씩한 용기가 솟구치며 아들 딸을 위한 뜨거운 헌신이 발동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무엇을 배울가요?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희생하는 것을 배우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고 인내하는 것을 배우고 수고하는 것을 배우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감사하는 것을 배운답니다.  인간이 가지는 낱말 중에서 가장 위대한 말은 어머니라는 말이랍니다. 이 말 속에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아름다운 것, 착한 것, 참된 것, 고귀한 것 모두랍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사람이 되였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비춰주는 태양이요 우리를 지켜주는 마음속 기둥이며 우리를 감싸주는 안식처랍니다. 이 딸은 목청껏 불러봅니다 존경하는 어머니란 사랑노래를, 사랑합니다 어머니, 존경합니다 우리의 모든 어머니들을. 존경하는 어머니, 부디 건강 장수하세요! 어머니의 사랑하는 딸 오염희 올림,  2011년 음력 5월 9 일 … … … 감은절인 오늘 이 밤에 필자는 천국의 기별인 어머니가 하사하는 눈꽃의 참뜻이 뭔가를 나름대로 풀이하며 이 밤을 지새운다. 한편으로 이 시각에 재더미에 버려졌던 나의 "예비엄마"를 재생시킨 큰 이모님께 생전에 효도를 못한 이 철부지를 후회와 반성의 불도가니속에 처넣는 마음이랄가.  2013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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